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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선택하다 일제의 심장에 비수를 꽂지 못하는 나, 식민지 지식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모든 명예와 공리는 비열과 모멸이므로 농촌으로 은둔하거나 도시의 생활인이 된다. 실패를 선택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1930년대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 이마동 그림, ≪동아일보≫, 1934


인텔리겐치아 2171호, 2014년 8월 14일 발행

광복 전후의 기억 4. 박연옥이 엮은 ≪초판본 이익상 작품집≫

나는 ‘테로리스트’가 되지 못하엿다. 그러한 모험할 성격이 업는 것은 큰 유감이다. 명예 와 공리만을 위하야 인간의 참생활에서 거리 가 너무나 머른 단적(端的) 문제만에 구니(拘

泥)하는 이매망량(魑魅魍魎)과는 언제지 든지 길을 가티할 수 업다. 나는 그러한 비열 (卑劣)한 생활 수단을 취하야 사회뎍으로 성

공자가 되는 것보다 차라리 자긔 량심을 속이


지 안코 진실(眞實)한 내면(內面)의 요구에 응(應)하기 위(爲)하야는 사회뎍으로 실패자 (失敗者)가 됨을 도리혀 깃버한다. -<흙의 세례>, ≪이익상 작품집≫, 이익상 지음, 박연옥 엮음, 69~70쪽

‘나’는 누구인가? 주인공 명호다. 사회에 불만이지만 ‘테로리 스트’가 되지 못해 유감이다. 언제 일인가? 일제 강점기다. 테러리스트가 되지 못한 명호의 다음 선택은 무엇인가? 명예와 공리만을 위해 ‘참생활과 거리가 먼


문제’를 내세우지 않기로 한다. 차라리 사회 적으로 실패한 자가 되어 스스로의 내면세계 에서 진실을 찾는다. 어떻게 진실을 찾는가? 귀농한다. 아내 혜정과 함께 시골로 떠났다. 귀농의 목적이 무엇인가? 번잡스러운 도회 생활을 정리하고 자연 친화 적 삶을 살기 위해서다. 현실 도피인가? 그렇다. 부부는 농사일에 능숙지 못하다. 봄 이 다 가도록 밭을 갈지 못한다.


농사에 서툰 농부의 농사는 어떻게 되는가? 삯일꾼을 구하지 못했다고 아내가 발을 구른 다. 명호는 자기가 밭을 갈겠다고 들로 나선 다. 생애 처음으로 밭을 간다. 일을 했다는 사 실에 고무되어 몸은 고단하지만 마음은 뿌듯 했다. 부부는 시골 생활에 성공하는가? 농사일로 얻은 위안은 잠깐에 불과했다. 친 구 부부의 사회적 성공을 알리는 신문 기사를 읽게 된다. 명호와 혜정은 몸과 마음이 한가 지로 피로해짐을 느낀다. 귀농하는 지식인에 대한 작가의 관점은 무엇 인가? 생활을 새롭게 타개하기 위해 귀농하는 지


식인을 ‘실패자’, ‘낙오자’라 호명한다. 작가 이익상은 감상적인 귀농과 전원생활은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위에 인용한 단편 <흙의 세례>에서도 귀농의 자기모순과 한 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농촌 생활은 ‘손이 하얀’ 지식인에게 적합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지식인은 어떤 처지였나? 식민지 시대 민족 수난과 함께 사상 투쟁의 어지러움에 시달렸다. 사상 투쟁은 누구와 누구의 투쟁인가?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간의 지리멸렬한 투쟁이었다.


이익상의 인물은 어느 편인가? 사상 투쟁에 염증을 느끼고 그들과 단절하려 했다. 진보 좌파 진영의 현실감 없는 강경 노 선에 반감을 느꼈다. 명호는 번민 끝에 차라 리 ‘실패자’가 되더라도 그들과 같은 길을 가 지 않겠다고 결의한다. 그래서 농촌에 은둔 한다. 도시에 남은 지식인은 무엇이 되었나? 생활인이 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이 작품집 에 실린 또 다른 단편 <그믐날>에 잘 묘사 된다. 생활인이 된 지식인은 어떤 모습인가? 신문사에 근무하는 주인공 성호는 월급이 밀


려 생활고를 겪는다. 하지만 정작 월급이 나 오자 사치성 소비재를 충동 구매한다. 소비 자본주의에 포획되어 타협한다. 이익상은 귀농 지식인인가? <그믐날>의 성호에 가깝다. 이 단편은 언 론인 출신인 이익상의 자전적 작품이다. 그는 어떤 길을 걸었나? 1918년에서 1922년 사이 일본에서 유학하 다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를 접했다. 일본 의 프롤레타리아 작가 나카니시 이노스케로 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귀국 후 동인지 <폐 허>에 참여했으며 1925년에는 본격 프롤레 타리아 예술을 목적으로 했던 <조선 프롤레


타리아 예술가 동맹(카프)>에 참여했다. 하 지만 이듬해 돌연 탈퇴한다. 이후 작가, 언론 인, 문화운동가로 활동했다. <카프> 탈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테러리스트와 은둔자 사이에서 갈등하고 번 민했던 모습이 드러난다. 성격상 사회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투사도 될 수 없었고, 귀농 도 탈출구가 아니었다. 그의 소설은 누구의 이야기인가? 이익상은 스스로의 고민을 작품 속에 담았 다. 하지만 지식인에 국한하지는 않았다. 번 뇌의 밤을 보내는 식민지민들, 즉 하층민, 조 혼 여성, 기생 같은 다채로운 인간 군상을 작


품에 묘사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박연옥이다. 문학비평가다.


실패를 선택하다 일제의 심장에 비수를 꽂지 못하는 나, 식민지 지식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모든 명예와 공리는 비열과 모멸이므로 농촌으로 은둔하거나 도시의 생활인이 된다. 실패를 선택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1930년대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 이마동 그림, ≪동아일보≫, 1934


초판본 이익상 작품집 이익상 지음 박연옥 엮음 한국 소설 2010년 3월 15일 출간 사륙판(128*188) 무선 제본, 180쪽 16,000원


작품 속으로

이익상 작품집


<번뇌(煩惱)의 밤>, 학지광, 1921. 6


흙의 세례(洗禮)


一 明浩의 안해 蕙貞은 압마루에서 아침을 먹은 뒤에 설거질

을 하다가 손을 멈추고 방 안을 행하야 “저 좀 보서요.” 하고 자긔 남편을 불럿다.

明浩는 담배를 픠어물고 압해다 신문을 노코 그리고

안저서 듸려다보다가 蕙貞의 부르는 소리에 자미스린 게 보 던 흥미를 일허바린 것가티 얼골에 조금 불쾌한 비치 나타나 보이엇다. 그리하야 그는 허리를 굽혀 압미다지를 소리가 나 게 열고는 조곰 툭명스러운 소리로 “웨 그리우?” 하엿다.

이와가티 不快한 이 석기어 들니는 “웨 그리우?” 하는

대답에 蕙貞은 어느듯 그 다음에 하랴든 말의 흥미를 절반 이상이나 일허바리고 말앗다. 그리하야 “저보서요.” 라 부 르기만 하여두고 한참 동안이나 남편의 얼골을 바라다 보앗

다. 그러고 蕙貞은 남편이  무슨 생각에 열중한 것을 짐작 하엿다. 明浩는 엇더한 생각에 熱中할 때에는 아모리 불너

도 대답을 할 줄도 모르고 는 대답을 한다 하여도 툭명스 러운 소리가 나오든 것이엇다. 이와 가튼 툭명스러운 대답

이 이 마을로 이사 온 뒤로는 더욱 만하여진 것은 明浩가 무 슨 생각에 熱中하는 期會가 만타는 것을 意味한 것이엇다.

그리고 한 이러한 생각하는 期會가 부러젓다는 것이 蕙貞 47 흙의 세례


에게 對하야는 不快한 생각을 늣기는 가 더부럿다는 것 이엇다. 그들의 이전 생활도 그대지 긴장한 생활이라 할 수 업섯스나 이러한 시골로 내려오게 된 것은 조곰 長悠한 時 日을 보내어 보자는 것이 動機가 되엇섯다. 그러나 悠長과

흐리무텅한 것은 이 明浩에게서 거의 區別할 수 업는 形容 詞가 되고 말엇다.

“이걸 어더케 하면 조화요? 오늘은 밧을 좀 갈어야 할 것 이 아니에요. 압집 칠봉아범을 하루 동안만 삭군으로 어더 볼가요?”

蕙貞은 얼골에 수심스러운 비츨 워가지고 이리케 말

하엿다. 그런데 이 칠봉 아범이란 것은 明浩부부가 이 洞里 로 이사 오든 그날부터 서로 친하게 상종하는 다맛 하나의

이웃사람이엇다. 집안에 조곰 하기 어려운 일이 생길 이 면 흔히 칠봉아범에게 부탁하게 되엿다. 그는 젊은 明浩夫 婦를 爲하야는 自己집 볼일이 잇서도 그것을 제처노코 明 浩의 일을 보살필 만큼 忠實한 이웃사람이엇다. 그럼으로

오날에도 밧가를 일이 급한 것을 걱정하는 蕙貞이 칠봉아범 을 삭군으로 엇자고 한 것은 自然한 일이엇다. “글세… 엇더케든지 해보아야 하지….” 明浩는 겨우 이만한 대답을 하고는 미다지 밧갓흐로 담

배연기를 내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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蕙貞은 이러한 흐리무텅한 대답에 조곰 역정이 낫다. 그

리하야 그의 말소리는 자연히 조금 놉핫다. “글세 글세라 말만 하면 됨닛가? 엇더케딘지 일을 시작 하도록 하시야지오. 그러면 제가 가서 칠봉아범을 불너올가 요?”

明浩도 아침에 일어날 부터 밧을 가러야 하겟다는 생

각이 물론 업섯든 것은 아니로되 매양 무슨 일에던지 생각 만 하고 바로 착수하지 못하는 것이 거의 病的으로 버릇이 되고 마른 그가 안해에게 재촉을 다시 당하면서도 속이 시 원하도록 대답 한마듸조차 오히려 하지 못한 것은 엇던 특 별한 理由가 잇슴즉도 하엿다. 그러나 勿論 안해에게 對한 感情으로 나온 것은 아니엇다. 그 밧갓헤도 별다른 理由가

잇는 것은 아니엇다. 큰 疑問으로 잇는 것은 이러케 생활을 하여야만 할 必要가 어데 잇슬가라 생각하는 것이엇다.

明浩는 한참 잇다가 압마루로 나오며 겨우 입을 어 말

하엿다. “글세 그러면 불너오구려!” 하고 그는 다시 두 활개를 벌 리고 기지개를 켯다. 소리를 놉히여 하폄을 크게 하엿다. 蕙貞은 기지개켜며 하폄하는 남편의 얼골을 유심히 흙

게보고는18) 숨을 한번 크게 내쉬엇다. 이 숨은 그 刹那의 그 의 感情을 가리움 업시 表示한 것이엇다. 그리고는 아모 말 49 흙의 세례


업시 압토방을 도라 부억으로 드러갓다. “한숨은 웨 쉬오?” 명호는 부억으로 드러가는 안해의 뒤를 바라보며 조곰 불쾌한 말로 이러케 무럿다.

“생각해보서요. 한숨이 아니 나올가−엇저면 모든 것을

그러케 흐리뭉텅하게 하심닛가?”

蕙貞은 부억에서 자숫물통19)에 물을 부면서 이러케

대답하엿다. “무엇이 흐리뭉텅하다우? 속 모르는 말은 이담부터는 하 지도 마오.” 하고 명호는 마루에서 마당으로 내려왓다. 이

에 蕙貞은 자수ㅅ물그릇을 들고 다시 부억에서 압마루로 나왓다. “좀 생각해보서요. 지금이 언제인지 알으심닛가. 벌서 사월이 갓가워 왓담니다. 다른 사람들의 농사짓고 사는 것 을 좀 보시지오. 지금까지 아즉도 밧을 그대로 둔 집이 어대 잇는가…. 이왕에 이러한 생활을 하신다면은 이것이나마 좀 意義잇게 하여야 할 것이 아니에요?” 明浩는 가만히 듯고만 섯섯다. 그에게 대답할 말이 업섯

18) 흙게보고는: 흘겨보고는. 19) 자숫물통: 개수물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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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蕙貞은 남편의 대답을 기다리다가 失望한 드시 다시 입 을 열엇다.

“그러메 어케 그리 모든 일에 等閒하서요. 밧 가러야

할 것을 말슴한지가 언제인지 알으심닛가. 벌서 일주일이나 되엇서요. 저는 農事가 엇더한 것인지 자서히 알 수도 업지 마는 를 일흐면 안 된다는 것은 알앗서요. 다른 사람들의

밧에는 벌서 싹이 나지 안햇서요? 그런데 우리 밧은 야즉 괭

이 맛도 보지 못하엿지요. 어케 되겟슴닛가. 밧이 잘 되고 못 되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남이 붓그럽지 안해요.” 蕙貞은 이러케 숨도 쉬지 안코 한참 동안을 짓거리다가

숨이 차올나와 겨우 말을 그치엇다.

그러나 다시 明浩에게는 對答할 말이 업섯다. 대답할

만한 무엇이 잇다 하면 그것은 말할 것도 업시 엇더한 暴君

이 忠實한 臣下의 諫하는 말을 들을 에 取하는 粗暴20)한 態度나 言辭가튼 것이엇슬 것이다. 蕙貞은 다시 말을 내엇다. 이번에는 애원하드시 말하엿

다. “저보세요. 이러한 農村에서 무엇을 하랴고 고생할 必要

가 잇서요. 이런 생활−不徹底한 생활은 그만두고 우리에

20) 조폭: 성질이나 하는 짓이 무지막지함.

51 흙의 세례


게 適當한 都會로 가는 것이 엇대요? 손발이 희고 고흔 사 람에게는 이러한 生活을 하겟다는 것이 벌서 틀닌 수작이라 고 함니다. 암만해도 당신 성격에는 農村살님은 適當치 못 해요….” 이것은 明浩에게는 참을 수 업는 失望과 悲哀를 주는 말 이엇다. “여보! 그런 쓸데업는 말은 구만허구려! 지금에 와서 이 러한 말을 하면 무슨 소용이 잇소? 구만 두려거던 당신이나 그만 두고 이전처럼 가서 다시 지내구려!” 蕙貞은 이러한 最后의 말에는 무엇이라 對答할 수 업섯

다. 明浩 夫婦는 이러한 말다툼이 닐어날 에 두 편이 다 가티 흥분한 태도를 가지는 일은 이전부터 업섯다. 그리하 야 어대지든지 자긔들 主張함이 自己를 生活에 얼마만한

影響을 줄는지 그것을 그들은 알엇슴으로 한 편이 激昻 

에는 한편은 눅우러저바렷섯다. 이것이 가장 그들로 하여금 오날까지의 結婚生活을 破滅로 引導치 안흔 큰 原因의 하

나이엇다. 말하자면 이 夫婦의 새이를 러지지 안토록  붓게 한 거말못21)이엇다.

21) 거말못: 거멀못. 나무 그릇 따위의 터지거나 벌어진 곳이나 벌어질 염려가 있는 곳에 거멀장처럼 겹쳐서 박는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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