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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자점이더냐? 임경업은 충신, 김자점은 간신이다. 나라를 지키려다 죽임을 당했고 자신을 지키려고 죽임을 꾀했다. 소설 낭독을 듣던 한 사람이 담배 써는 칼을 들어 낭독자를 베어 죽이며 외쳤다. 네가 자점이더냐!

‹임경업 장군›,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인텔리겐치아 2210호, 2014년 9월 11일 발행

아시아 고전 특집 1. 이복규가현대어로옮긴≪임장군전≫

“나는 조선국 장수 임경업이러니, 대국에 사 신으로 왔다가 청병대장(請兵大將)으로 왔 거니와, 너희 아직 무지(無知)한 말을 말고 승부를 결(決)하라.” 하니 가달이 대로(大怒) 왈, “너보다 십 배나 더한 장수도 오히려 죽으 며 항복했거늘, 무명(無名) 소장(小將)이 감 히 큰 말을 하느냐?”


하고 모든 장수가 일시에 달려들거늘, 경 업이 맞아 싸워 수 합(合)이 못 되어 선봉장 둘을 베고 진을 깨뜨려 들어가며 사면 복병 (伏兵)이 일시에 내달아 깨뜨리니, 가달의 장 수 죽채가 두 장수의 죽음을 보고 장창(長槍) 을 들어 경업을 에워싸고 치니, 경업이 혹전 혹후(或前或後)하여 도적을 유인하여 산곡 중으로 들어가니, 문득 일성(一聲) 포향(砲 響)에 사면 복병이 내달아 시살(弑殺)하니, 적장이 황겁하여 진을 거두고자 하나 난군 (亂軍) 중에 헤어져 대병(大兵)에 죽은 바 되 어 주검이 뫼 같은지라. -≪임장군전≫, 작자 미상, 이복규 옮김, 41∼42쪽


가달이 누구인가? 오랑캐의 한 종족이다. 가달과 조선의 전쟁인가? 아니다. 가달이 호국에 쳐들어왔다. 호국은 명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마땅한 장수가 없던 명나라는 이시백을 따라 중국에 들어와 있던 임경업을 청병대장으로 보낸다. 임경업은 어떻게 이기는가? 임 대장의 기세에 가달은 혼비백산한다. 가 달의 잔병은 도망조차 가지 못하고 목숨을 구 걸한다. 임 대장은 그들을 본국으로 돌려보 낸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호국이 은덕을 잊고 용골대를 선봉으로 세워 조선을 침략한다. 조선은 대책이 있는가? 임경업을 의주부윤 겸 방어사에 앉힌다. 용 골대는 그를 피해 함경도를 거쳐 도성으로 들 어온다. 왕대비와 세자 대군을 볼모로 잡고 조선의 항복을 받는다. 임경업이 소식을 듣 고 회군하는 적을 공격하려 했으나 세자 대군 의 만류로 그만둔다. 그는 분기충천하여 복 수를 다짐한다. 호왕은 그의 강직함을 보고 탄복하며 세자와 대군을 풀어 주며 그를 부마 로 삼으려 한다.


호왕의 다음 행보는 어디인가? 호국은 여러 나라의 항복을 받고 기세등등해 졌다. 곧 명나라와의 전쟁을 계획한다. 조선 에 청병하여 임경업을 대장으로 보낼 것을 요 구했다. 조선의 대답은 무엇이었나? 간신 김자점의 주청으로 조선 조정에서는 임 경업을 호국에 보냈다. 복수는 물 건너간 것인가? 아니다. 명나라와 내통하고 호왕에게 거짓 항 서를 올리도록 했다. 거짓 항서는 호국 장수 를 거쳐 호왕의 손에 들어가고, 임경업은 조 선으로 돌아왔다. 호왕은 그것이 거짓 항서임


을 눈치채고 그를 다시 불러들이려 했다. 이번에는 어떻게 대응하는가? 충청도 속리산에 숨어들어 중이 되었으나 그 곳에서 만난 승려 독보의 배신으로 호국에 잡 혀간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도 목숨을 구걸 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는 그의 충절에 호왕 은 감복한다. 부마 제안을 받지만 조강지처 를 생각해 거절하고 조선으로 돌아온다. 임경업이 조선으로 돌아오자 무슨 일이 벌어 지는가? 김자점은 왕명을 사칭해 그를 잡아 가둔다. 왕이 사실을 알고 풀어 주었지만 김자점은 그 를 죽이려 한다.


죽는가? 그렇다. 이야기는 끝난 것인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왕의 꿈에 나타나 억울한 죽음을 이야기한다. 왕은 날이 밝자 마자 김자점을 국문하고 삼족을 능지처참할 것을 명한다. 임경업의 자손에게는 벼슬을 내리고, 그를 따라 죽은 처 이씨를 기려 열녀 비를 세워 준다. 이런 일이 역사에 있는가?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것을 제외하면 여러 면에서 실제와 차이가 있다.


무엇이 다른가? 임경업의 생애, 김자점과의 관계다. 무엇이 허구인가? 첫째, 부친을 여읜 시점이다. 실제로는 39세 의 일이지만, 소설에는 어려서 일을 당한 뒤 홀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모셨으며 어린 동생들을 보살폈다고 나온다. 둘째, 농업 종 사 여부다. 농사를 지었다는 기록이 없지만 소설은 농업에 힘썼다고 썼다. 셋째, 업적이 다. 남경동지사를 수행하고 호국 청병대장 으로 출전해 가달과 싸워 항복을 받고 돌아오 는 대목과, 그 덕분에 호국에 끌려간 세자가 조선으로 돌아오는 것도 허구다.


김자점과의 관계는 실제로 어떠했나? 병자호란 이전 둘의 관계는 아주 우호적이었 다. 소설에서는 김자점이 역심을 품었으나 임경업이 두려워 숨겼다고 서술했다. 또한 임경업의 죽음으로 김자점이 제주도로 귀양 을 가고, 임경업의 가족이 김자점에게 복수 한다는 내용도 사실과 다르다. 이 이야기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임경업을 민중의 영웅으로 형상화하고, 능 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죽음을 당한 데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간신 김자점을 허구로나마 응징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독자의 반응은 어땠는가? 집필 시기로 추정되는 18세기부터 대단한 인 기를 누렸다. 연암 박지원이 청나라에 갔을 때 관운장을 모시는 사당에서 ≪수호전≫을 시끌벅적 읽는 중국인들을 보았는데, 그 모 습이 우리나라 시장 거리에서 ≪임장군전≫ 을 외는 것과 같았다고 한 대목이 ≪열하일 기≫에 나온다. 심지어 낭독 현장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소설을 읽다가 살인이 일어난 연유는 무엇인가? 조선 후기의 문신 심노숭의 자서전에 자세한 경위가 나온다. “촌에서 소위 ≪임장군전≫ 이라는 언문 소설을 덕삼이가 가지고 왔으나 그는 치통 때문에 제대로 낭독하지 못했다.


(…) 이것은 서울 담배 가게와 밥집의 불량배 들이 낭독하는 언문 소설로 예전에 어떤 이가 이를 듣다가 김자점이 장군에게 없는 죄를 씌 워 죽이는 데 이르러 분기가 솟아올라 담배 써는 큰 칼을 잡고 미친 듯이 낭독자를 베면 서 ‘네가 자점이더냐?’라 하니 같이 듣던 시장 사람들이 놀라 달아났다.” 이 작품이 우리 문학사에서 차지한 자리는 어 디쯤인가? <임진록>, <박씨전>과 함께 대표 역사 군담소설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 일어난 민중의 각성, 지배 층에 대한 불신과 비판 의식을 허구의 형식으 로 표현하되, 역사적 인물을 등장시킴으로


써 설득력과 감동력을 높였다. 특히 임경업 의 자손이 김자점의 간을 꺼내어 씹는 장면은 우리 소설에서는 드문 복수담으로 후대 다른 소설에 영향을 끼쳤다. 당신은 어떤 판본을 어떻게 옮겼는가? 가장 널리 읽힌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경판 27장본을 주 대본으로 삼았다. 띄어쓰기를 했고 문장부호를 사용했으며 대화와 지문을 구분했다. 아래아나 겹자음, 받침 등의 표기 는 현대어 맞춤법에 맞게 고치되, 고전의 맛 을 살리기 위해 가능한 한 원전 그대로 싣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복규다. 서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다.


네가 자점이더냐? 임경업은 충신, 김자점은 간신이다. 나라를 지키려다 죽임을 당했고 자신을 지키려고 죽임을 꾀했다. 소설 낭독을 듣던 한 사람이 담배 써는 칼을 들어 낭독자를 베어 죽이며 외쳤다. 네가 자점이더냐!

‹임경업 장군›,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임장군전 작자 미상 이복규 옮김 한국고전문학 2009년 3월 15일 출간 사륙판(128*188) 무선 제본, 106쪽 12,000원


작품 속으로

임장군전


큰 뜻을 품은 임경업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가다

화설1) 대명2) 숭정3) 말에 조선국 충청도 충주 달천4) 땅에 한 사람이 있으니, 성은 임이요 이름은 경업이라. 어려서부 터 학업에 힘쓰더니 일찍 부친을 여의고 자모5)를 지효(至 孝)로 섬기고 형제 우애하며 농업에 힘쓰니 종족6) 향당7)이

칭찬하더라. 경업의 위인이 관후(寬厚)하여 사람을 사랑하고 매양 이 르되, “남자가 세상에 나매 마땅히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1) 화설(話說): 고전소설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때 쓰는 말. 2) 대명(大明): 중국 명나라가 자기 나라를 스스로 높여 이르던 말. 3) 숭정(崇禎): 중국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 때의연호(1628∼1644). 명나라가 망한 뒤에도 조선은 청나라 연호를 쓰기 싫어 이 연호를 사용했음. 4) 달천(達川):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 부근에서 발원하여 괴산군을 지나 충 주시 서쪽에서남한강에 합류되는 하천. 남한강 수계의 최남부에있는 지류. 5) 자모(慈母): 자식에 대한 사랑이 깊다는 뜻으로 ‘어머니를 ’ 이르는 말. 6) 종족(宗族): 성(姓)과 본(本)이 같은 겨레붙이. 7) 향당(鄕黨): 자기가 태어났거나 사는 시골 마을. 또는 그 마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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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을 섬겨 이름을 죽백8)에 드리울지니,9) 어찌 초목(草 木)같이 썩으리오?”

하더라. 이러구러 십여 세 되매 밤이면 병서(兵書)를 읽고, 낮이 면 무예와 말달리기를 일삼더니, 무오년에 이르러 나이 십 팔 세라. 과거 기별을 듣고 경사10)에 올라와 무과 장원하여 즉시 전옥11) 주부12)를 출륙13)하니, 어사14)하신 계화15) 청 삼16)에 안마추종17)을 거느려 대로(大路) 상으로 행하니, 도

8) 죽백(竹帛): 서적(書籍). 특히 역사를 기록한 책을 이르는 말. 종이가 발명 되기 전에 대쪽이나 헝겊에 글을 써서 기록한 데서 생긴 말. 9) 드리울지니: 이름이나 공적 따위를 널리 전하여 후세에 자취를 남길지니. 10) 경사(京師): 한 나라의 중앙정부가 있는 곳. 여기에서는 ‘서울을 ’ 가리킴. 11) 전옥(典獄): 전옥서(典獄署). 조선시대에 죄수를 관장하던 관서. 서울 중 부 서린방(瑞麟坊: 현재 종로구 세종로 1가 부근) 의금부 옆에 있었음. 태조 가 조선을 건국하고 관제를 정할 때 고려의 전옥서를 답습하여 관원을 정했 음. 죄수를 관장하는 곳으로 오늘의 교도소와 같으며, 그 상부 기관인 형조 는 매월 월령낭관을 교대로 파견하여 날마다 전옥서에 수감되어 있는 죄수 를 살펴보았음. 12) 주부(主簿): 종6품의 실무 벼슬. 13) 출륙(出六): 조선시대에 참하(參下)에서 육품으로 승급하던 일. 14) 어사(御賜): 임금이 내려줌. 15) 계화(桂花): 계수나무 꽃. 16) 청삼(靑衫): 관원이 조정에 나아가 하례할 때 입던 예복인 조복(朝服)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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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道路) 관광자18)가 그 위풍(威風)을 칭찬 않을 이가 없더 라. 삼일(三日) 유가19)를 마친 뒤에 조정의 말미20)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 모친을 뵈오니, 모친이 옛일을 추감21)하여 일희일비(一喜一悲)하더라. 경업이 인리22) 친척을 모아 즐

에 받쳐 입던 옷. 남색 바탕에 검은 빛깔로 가를 꾸미고 큰 소매를 달았음. 17) 안마추종(鞍馬騶從): 안장을 갖춘 말과 윗사람을 따라다니는 종. 18) 관광자(觀光者): 구경하는 사람. 19) 유가(遊街): 조선시대에 문과·무과의 최종 합격자들이 했던 시가행진. 대개 합격자 발표를 한 뒤 3일 동안 했음. 합격자들은 왕과 문무백관이 참 석한 가운데 근정전에서 창방의(唱榜儀)라는 의식을 치른 뒤, 의정부나 예 조에서 행하는 축하연인 은영연(恩榮宴)을 받음. 은영연이 끝난 다음 날에 는 문무급제자들이 모두 문과 장원급제자의 집에 모였다가 함께 대궐에 나 아가 왕에게 사은례(謝恩禮)를 드림. 다음 날에는 급제자가 함께 무과 장원 급제자의 집에 모였다가 함께 문묘(文廟)에 나아가 알성례를 치렀음. 친 척·친지를 불러 잔치를 여는 문희연(聞喜宴), 선배의 집을 찾아다니며 감 사를 드리는 회문연(回門宴), 자기를 뽑아준 시관을 초대하여 은문연(恩門 宴)을 열기도 했음. 대과·소과를 막론하고 새로 급제한 사람에게는 3∼5

일 동안 유가가 허락되었음. 이것은 일종의 시가행진으로 말을 타고 어사화 를 꽂은 급제자들이 천동(天童)을 앞세워 길을 가는데, 이때 악대가 음악을 연주하고 광대가 춤을 추며 재인(才人)이 잡희(雜戱)를 부렸음. 20) 말미: 일정한 직업이나 일 따위에 매인 사람이 다른 일로 말미암아 얻는 겨 를. 휴가. 21) 추감(追感): 추억하여 느낌. 22) 인리(隣里): 이웃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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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후에 모친께 하직하고 직사23)에 나아갔더니, 삼 년 만에 백마강 만호를 하여 임소(任所)에 도임(到任)한 후로 백성 을 사랑하여 농업을 권하며 무예를 가르치니 이로부터 백마 강 선치(善治)하는 소문이 조정에 미치었더라. 차시(此時) 우의정 원두표24)가 탑전25)에 주 왈,26) “신이 듣자온즉 천마산성은 방어(防禦) 중지27)라. 성 첩28)이 퇴락29)하여 형용(形容)이 없다 하오니 재조30) 있는 사람을 보내어 수보31)함이 마땅할까 하나이다.” 상(上)이 왈(曰),

23) 직사(職司): 직무에 따라 책임지고 맡아서 하는 사무. 24) 원두표(元斗杓): 1593(선조 26년)∼1664(현종 5년).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건(子建), 호는 탄수(灘叟)·탄옹(灘翁). 첨지 중추부사 송수(松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수군절도사 호(豪)이며, 아 버지는 지중추부사 유남(裕男)이다. 박지계(朴知誡)의 문인임.

25) 탑전(榻前): 왕의 자리 앞. 26) 주 왈(奏曰): 아뢰어 말함. 27) 중지(重地): 매우 중요한 땅. 28) 성첩(城堞): 성가퀴.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 하거나 공격하거나 함. 29) 퇴락(頹落): 낡아서 무너지고 떨어짐. 30) 재조: ‘재주의 ’ 원래 말. 31) 수보(修補): 허름한 데를 고치고 덜 갖춘 곳을 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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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을 경이 천거하라.” 우의정이 다시 주(奏)하되, “백마강 만호 임경업이 족히 그 소임을 당하리로소이다.” 상이 즉시 경업으로 천마산성 중군32)을 제수(除授)하시 니, 경업이 유지33)를 받잡고 진졸34)을 호궤35)할새, 모든 토 졸36)이 각각 주찬37)을 갖추어 드리는지라. 경업이 친히 잔을 잡고 왈, “내 너희에게 은혜 끼친 바 없거늘, 너희 등이 나를 이같 이 위로하니 내 한잔 술로 정을 표하노라.” 하고 잔을 들어 권하니, 모든 진졸이 잔을 받고 사례 왈, “소졸38) 등이 부모 같은 장수를 일조(一朝)에 원별(遠 別)을 당하오니 적자39)가 자모를 잃음과 같소이다.” 32) 중군(中軍): 조선시대에 각 군영(軍營)에서 대장이나 절도사, 통제사 등의 밑에서 군대를 통할하던 장수. 33) 유지(有旨): 조선시대 승정원의 담당 승지를 통하여 명령을 받는 이에게 전달되는 왕명서(王命書). 34) 진졸(鎭卒): 각 진영(鎭營)에 속한 병졸.

35) 호궤(犒饋): 군사들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함. 36) 토졸(土卒): 토박이 병졸. 37) 주찬(酒饌): 술과 안주. 38) 소졸(小卒): 병졸이 상관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말. 39) 적자(赤子): 갓난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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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멀리 나와 하직하더라. 경업이 경성에 올라와 이조판서를 보건대, 판서 왈, “그대의 아름다운 말이 조정에 들리매, 내 우상40)과 의논 하여 탑전에 아뢴 바라.” 하거늘 경업이 배사41) 왈, “소인 같은 용재42)를 나라에 천거(薦擧)하여 높은 벼슬 을 하게 하시니 황감무지43)하여이다.” 하고 인하여 입궐 사은(謝恩)한 후에 우의정을 보건대, 우 상 왈, “들은즉 그대 재조가 만호에 오래 둠이 아까운 고로 조정 에 천거한 바니 바삐 내려가 성역(城役)을 사속히44) 성공하 라.” 하거늘 경업이 배사 왈, “소인 같은 인사(人士)로 중임을 능히 감당치 못할까 하 나이다.”

40) 우상(右相): 우의정. 41) 배사(拜謝): 절하며 감사함. 42) 용재(庸才): 평범하고 졸렬한 재주. 43) 황감무지(惶感無至): 황송하고 감격스럽기가 그지없음. 44) 사속히: 아주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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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인하여 하직하고, 천마산성에 도임한 후에 성첩을 돌 아보니 졸연히 수축(修築)하기 어려운지라. 즉시 장계(狀 啓)하여 장정군(壯丁軍)을 발(拔)하여 성역함을 청한대, 상

이 즉시 병조에 하교하사 건장한 군사를 택출(擇出)하여 보 내시니라. 이때 경업이 군사와 백성을 거느려 성역을 할새, 소를 잡

고 술을 빚어 매일 호궤(犒饋)하며 친히 잔을 권하여 왈,

“내 나라 명(命)을 받자와 성역을 시작하니 너희는 힘을 다하여 부지런히 하라.” 하고 백마를 잡아 피를 마셔 맹세하고 다시 잔을 잡아 왈, “나는 여등(汝等)의 힘을 빌려 나라 은혜를 갚고자 하노 라.” 하고 춥고 더우며 괴롭고 기쁨을 극진히 염려하니, 모든 군 졸이 불승감격45)하여 제 일같이 진심(盡心)하는지라. 일일(一日)은 중군이 친히 돌을 지고 군사 중에 섞여 올 새, 역군(役軍) 등이 쉬거늘 중군 또한 쉬니 한 역군이 이르 되, “우리 그만 쉬고 어서 가자. 중군이 알새라.”

45) 불승감격(不勝感激): 감격을 이기지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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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거늘 중군이 소(笑) 왈, “임 중군도 쉬니 관계하랴.” 하니 역군 등이 그 소리를 듣고 일시에 놀라 돌아보며 더욱 감격하여, “어서 가자. 바삐 가자.” 하거늘 중군이 그 말을 듣고, “더 쉬어가자.” 한즉 역군 등이 일시에 일어 가니라. 차후로 이렇듯 진심하 매 불일성지46)하여 일 년 만에 필역(畢役)하되, 한 곳도 허 수함이 없는지라. 군사를 호궤하고 상급(賞給)하여 이르되, “너희 힘을 입어 나랏일을 무사(無事) 필역하니 못내 기 꺼워하노라.” 하니 역군 등이 배사 왈, “소인 등이 부모 같은 장군님 덕택으로 일 명도 상한 군 사가 없사옵고, 또 상급이 후하시니 돌아가오나 그 은덕을 오매불망(寤寐不忘)이로소이다.” 하더라. 중군이 즉시 필역 장계를 올리니, 상이 장계를 보시 고 기특히 여기사 가자47)를 돋우시고 그 재조를 못내 칭찬

46) 불일성지(不日成之): 며칠 안 걸려서 이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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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더라. 차시는 갑자년 팔월이라.

47) 가자(加資): 조선시대 관원들의 임기가 찼거나 근무 성적이 좋은 경우 품 계를 올려주던 일. 또는 그 올린 품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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