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이슈를 공부하는 기독학부모
짝수 달은 신은정 기독학부모 객원연구원과 함께 교육 현안들을 살펴보며, 함께 생각하고, 묵상하고, 기도하며, 행동하는 지면으로 할애하려고 합니다. 제 108호(2022년 8월호)
두 가지 시선
2022년 8월 3일
청탁금지법: 건강한 학부모가 만드는 청렴사회 지난 2018년, 충북 괴산의 전교생 28명인 송면중학교에서 교사들이 받은
이제 촌지는 형식상 학교에서는 완전히 사라졌다. 선생님에 대한 감사의
스승의날 꽃다발이 화제가 되었다. 필자도 신문기사를 통해서 보았는데,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 부모와 학생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나 청탁금지법
학부모들이 ‘0’원짜리 꽃다발을 준비했다. 학부모들은 새벽부터 고들빼기,
으로 인해 비밀스럽게 전달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교사도 학부
애기똥풀, 붓꽃, 오미자줄기, 둥글레, 매발톱 등 집 마당이나 들판에서 흔
모도 만남에 있어 걸리는 바가 없으니 편하고, 1년에 두 번 있는 공식 상담
히 볼 수 있는 야생화 꽃들과 쓰고 남은 빈 유리병과 재활용 종이봉투로 스
주간에 별 거리낌 없이 학교를 갈 수 있게 되었다.
승의 날 감사선물을 준비한 것이다. 이는 일명 김영란 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의 영향과 연관된다. 이 청탁금지법은 2015년
물론 일부 부모들이 카*오 톡 선물하기 등 SNS를 활용하여 ‘촌지’의 형태를
3월 27일 제정되었고, 1년 6개월의 유예기간을 거쳐 2016년 9월 28일부
빌어 부정직한 청탁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깨끗하고 공정하는 학교
터 시행되었다. 이 법안은 당초 공직자의 부정한 금품 수수를 막겠다는 취
가 되도록 건강하게 학부모의 역할을 할 때 우리 사회가 청렴사회가 되며,
지로 제안되었지만 입법되는 과정에서 언론인, 사립학교 교직원 등으로 적
우리자녀들이 청렴사회의 일원으로 바르게 살아갈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
용대상이 확대되었다.
다.
간혹 부모님들을 만나보면, 상담주간에 가정통신문에는 음료하나 가지고
국민권익위원회는 ‘청탁금지법’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대상과 선생님과 학
오지 말라고 하지만 정말 아무도 안가지고 가는지, 자기만 안가지고 가서
생·학부모에게 제공되는 선물과 학교 후원과 관련한 여러 영역에 대해 상
우리 아이에게 불이익은 없는지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다. 아무래도 촌지라
세하게 공지해두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에 뭔가를 해줄 것이라는 불신이 팽배한 연유일 것이다.
발행처 기독교학교교육연구소 발행인 박상진 편집기자 도혜연, 신은정, 박미향 디자이너 채혜진 주소 서울시 광진구 아차산로78길 44 크레스코 308호 연락처 02.6458.3456 / 010.4898.3454
보시는 것은 무엇인가요? 누군가는 주둥이가 긴 오리를 발견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귀기 긴 토끼를 발견하 기도 합니 다. 우리가 보는 그림은 동일하지만, 우리는 같은 그 림 속에서 두 개의 형상을 발견합니다. 우리 삶에서 자녀와 함께 마주하는 생활도 비슷합니다. 자녀의 삶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의 현상은 하 나이지만, 자녀의 입장이나 부모의 입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기도 합니다. 문제가 보이는 현상은 하나인데, 보고 해석하는 게 다르다니 그게 가능한가 싶지만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할 말 씀 속에서도 하나의 현상을 다르게 진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 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회당장 의 집에 함께 가서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 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서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 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막 5:35-42)
* 말씀 속에서 야이로의 딸이 어떻게 되었나요? * 야이로의 딸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사람들의 결론은 무엇인가요? * 예수님은 그 일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계시나요?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도 하나의 사건이 등장합니다. 바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게 생긴 것입니다. 야이 로는 예수님께 직접 찾아와서 자신의 딸을 살려달라고 간청합니다. 그 딸에게 가는 도중에 여러 일들이 생깁니 다. 수많은 인파가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어서 속도가 나지도 않았을뿐더러 엎친데 덮친 격으로 혈루병 앓는 여 인이 예수님께 치유를 받는 사건까지 겹치면서 한시라도 빨리 가야 하는 예수님의 발걸음이 늦어졌습니다. 내
고 하면 교사를 떠올릴 정도로 오래된 폐습이었으니 학교의 공지는 명목 상일 뿐이고, 치맛바람이 강한 부모나 혹은 학부모 임원들은 학교와 교사
기독 학부모 신문
하나의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 속에서 여러분이
※ 국민권익위원회 www.acrc.go.kr
딸이 죽게 생겼다고 예수님게 분명히 말씀을 드렸는데, 예수님은 이 수많은 인파가, 또 혈루병 앓는 여인도 치유 해 주면서 왜 내 딸의 생명은 치유해주지 않으시나 하는 원망과 혹여나 그 사이에 딸의 상태가 악화되는 것은 아 닐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서 일까, 사람들은 야이로에게 다가와 당신의 딸이 죽었다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그렇게 결론을 지었습니다. ‘이것은 죽음이며, 끝이
단언컨대, 불법 찬조금은 절대로 주어서도 안 되며 교사는 받아서도 안 된
며 희망이 없는 상태’라고 단정 짓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같은 현상에 대해 다르게 평가합니다. 딸이 죽었다는
다. 청탁금지법으로 제한하는 것도 분명하지만, 사실 찬조금은 ‘물질로 마
사실에 두려웠을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라 당부하시며, 딸은 죽은 게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
음을 사려는 이기적인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불법 촌지를 주어서라
십니다. 일어난 현상은 같지만, 결론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이것은 죽음이 아니다라고 결론지으신 것입니다. 예
도 ‘내 아이’만을 생각하는 그릇된 욕망임이 분명한 것이다. 필자도 어린 시
수님의 결론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한가요? 성경은 사람들이 비웃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절, 부모님이 학교에 잘 오시지 않았다. 학교생활에 관심은 있으셨으나 딸
죽은 것인데 그것을 잔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이 이해가 되지 않았나봅니다. 이 문제의 결론은 당연히 ‘죽음’
이 전달하는 정보로 그저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으로 만족하셨다. 그러나 육성회장인 내 친구의 부모님은 학교에 자주
인데, 예수님은 끝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늘 눈에 보이는 현상을 보고 결론을 내립니다. 부모인 우 리는 자녀의 삶에 어떤 문제가 드러나거나 힘들어하면 우리는 재빨리 결론을 짓고, 부모로서 어떤 도움을
오셨고, 그 부모님이 오시면 내 친구는 부모님과 나란히 교장실에 있다가
줄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자녀 문제에 대한 견적을 빨리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선은 다릅
왔고, 뭔가 석연치 않은 상을 타곤 했다. 분명 그 아이의 성적도, 실력도 그
니다. 예수님은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은 다른 해법을 내심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자
상을 받을 만하지 않았는데 상을 타니 친구들과 함께 나도 아버지가 육성
녀를 키운다는 것은 자녀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며, 하나님이 주신 고유한 소명을 발견하게 해주
회장이라 받는 상이라 여기면서 불편해 했다.
며, 자녀의 속도와 은사대로 빛을 발하도록 도와주는 여정입니다. 그 길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때로는 길고도 지루한 여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에게 ‘빠르게, 단번에’ 해결 하는 방법들이 있다고 제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고군분투하며 걸어가는 기독학부 모들의 여정을 보며 때로는 비웃기도 합니다. 그러나 확신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방법대 로 자녀를 양육하겠다고 결단한 우리에게 예수님은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하고 말씀하 십니다. 죽어서 해결되지 못할 것 같은 산적한 문제들이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선포하십니다. * 최근 우리 가정, 또는 자녀의 삶에서 마주한 문제 또는 어려움이 있나요? * 그 문제(어려움)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 결론을 짓나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결론을 내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