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의 순환 삶법
김모야 저는기획 : 인터뷰 #1
김씨의 순환 삶법
0. 용담리 르네상스인
김씨. 그를 부르는 칭호는 다양하다. 상쇠 어르신, 김과장, 단장님, 국악인, 진상, 사부, 우주정신. 그가 살고 있는 집을 부르는 이름도 여럿이다. 용담 게스트하우스, 용담종묘, 용담논농사아카데미, 용담문화센터. 김씨가 하는 일을 간단하게 요약해 보면 3일은 김과장, 3일은 국악인,한 3일은 농사꾼이 다. 다르게 말하면 그는 경기도 양수리에 살며, 프로그래머로서 서울에 출 퇴근을 하고, 논밭 600여평을 농사짓고, ‘유랑농악단’이라는 풍물패 활동을 한다. 그를 처음 만난 사람들은 심하게 말이 없는 사람이자 수줍음이 많은 사람, 대화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쉽다. 다른이와 눈도 제대로 못 마주 치고 목소리도 작고, 먼저 말을 하는 법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일 화로 한 동네 아저씨는 어떤 일 때문에 그와 같이 트럭을 타고 서울에 가는 동안 그가 한마디도 안 해서 벙어린 줄 알고 차에서 내릴 때 말로 안하고 손 짓을 했다 한다. 나도 8년전 그를 직장에서 처음 만났을 때 “김씨, 저랑 이 야기 하기 싫으세요? 무슨 문제 있어요?” 라고 다그치기까지 할 정도였고. 연애를 시작할 당시 내 룸메이트는 “김씨에게 내가 뭔가 잘못했냐. 내가 인 사할때마다 무시한다.”고 조심스럽게 물어볼 정도였다. 그는 인사를 한다. 작은 몸짓이나 목소리가 내 눈에만 보인다는게 문제다. 그래서 꼰대 같은 어르신에게 걸리면 ‘아는척 안하는 싸가지 없는 놈’으로 뒷담화를 듣기도한 다. 그런데 그런 그가 꽹과리를 들고 유랑농악활동을 할 때, 사람들은 놀란 다. 그가 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재담꾼’으로 그가 ‘변신’하기 때문이
다. 조용하던 사람이 가장 시끄러운 악기를 두드리며 우스운 이야기도 하고 노래도 한다. 이럴때 그는 유랑농악 단장, 혹은 상쇠 어르신으로 불린다. 술 자리에서는 어떠한가. 매번 그런 것은 아니지만, 흥이 오르면 심청가의 한 가락을 부르기도하고, 소리 형식으로 그 자리를 묘사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잔을 줄세워 소맥을 마는 기술을 회사에서 배워와 그런것 모르고 살 아온 친구들에게 시현하기도 하며 여느 회사의 회식자리를 풍자하듯 소극 을 벌이기도 한다. 이때 그는 김과장 혹은 진상이라고 불린다. 또 농사에 관 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 친구들의 질문이 들어오면 상세한 설명을 A-Z까 지 친절하게 해낸다. 말이 많아진다. 두물머리에서 4대강 반대 활동을 할때 는 친구들에게 ‘우주정신’이라고도 불렸다. 어디 나서서 큰소리로 이야기하 거나 의견을 제시하거나 리더쉽을 발휘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언제나 모든 일의 배후에 그의 그림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용하게 다가가서 그 사람만 들을수 있는 소리로 일을 제안하거나 지시한다고 해서 어디에나 있는 ‘우주 정신’이라나. 이런 사람인가 싶으면 저기서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김씨. 그 는 동시에 여러가지 연극을 하는 사람같다.
1. 국악인 : 숨막혀서 못 있을 것 같았어요. 그 판 속에서
국악인이라는 칭호는 친구들이 농으로 붙인 것이다. 왜냐하면 취미라고 보 기에는 상당한 시간을 판소리를 배우고, 풍물을 가르치고, 풍물패를 운영하 는데 할애하기 때문이다. 또 때로는 소고춤이니 태평소니 하는 것을 새로 배우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고, 땅끝 해남 까지 대보름 굿을 보러 가기를 몇 해째니 국악인이라고 친구들이 부르게 된 것이다. 김씨가 풍물-농악을 시작한 것은 대학 때였다. 특별히 뜻이 있어서라기 보 다 대학에서 어떤 시작들이 흔히 그렇듯 선배가 닭갈비를 사준다고 해서 갔 다가 재미가 있어서 계속하게 되었다. “풍물이 중요하게 생각하는건 공동체성이었던것 같아요. 사람 사이의 관계, 공동체성을 중시했죠. 그런게 재미있었어요. 대보름때 학교 앞에서 지신밟
기같은걸 하면 진짜로 뭘하는 것 같고, 어떤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 같고. 예 전에 마을에서 그런걸 했었다는데 그런걸 도시-학교 앞-지역사회에서 중 요한 역할을 할수도 있는것이구나 나중에 생각도 하게 되고.” 김씨는 졸업을 해서도 대학에서 그랬듯 풍물을 계속 치고 싶었다. 그런데 소위 사회패라고 불리는 풍물패나, 전문 풍물패에 들어갈 생각은 들지 않았 다. 왜냐하면 기존 풍물판에서 그가 느낀 모순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가 접 한 문화계 혹은 풍물계는 위계속에 있었다. 선후배 질서가 강했다. 그런것 은 그가 매력을 느꼈던 풍물과 모순된다 느껴졌다. 풍물판 안에서 각각이 자유롭게 놀아야 진짜다 하면서도, 선후배 위계가 있어서 선배들은 주로 이 끌고 후배들은 따라가고 하는것이 문제였다. 후배들이 하는 양을 보면 생기 없어보였다. 그것을 깨보려고 노력해보았지만, 십수년의 질서였고, 풍물패 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학문화였으니까 그게 맘대로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 렇게 깨자고 하는것도 이미 고학번이 된 그가 말하니 선배로서의 생각으로 후배들에게 전해질 뿐이었다. 그러니 졸업하고 이미 기존에 있는 풍물패에 들어갈 생각이 들지 않았다. “숨막혀서 못 있을 것 같았어요. 그 판 속에서.” 하지만 그는 풍물을 계속 하고 싶다는 생각을 놓지 않았고. 스스로 <유랑농 악단>이라는 풍물패를 만들게 된다. “기존 장,질서가 힘들었기 때문에 그것 밖에서 뭔가를 구축하기 시작했어 야 했죠. 소수자-인권-생태운동 커뮤니티들을 만나게 되면서 이런 커뮤니 티 안에서 풍물패가 하나 있으면 좋겠다 싶더라구요. 그래야지만 될거 같았 어요.” 유랑농악단. 유랑은 로망의 표현이었다. 새로운, 우연한 시공간을 만나면서 돌아다니면서 해보면 좋겠다는. 시작은 해남에서 농사지으며 살던 친구랑 풍물 전수(합숙 훈련 같은 것이다)를 기획하면서 였다. 풍물패를 만들려고 한게 아니라 일단 농한기에 새로 풍물을 배우고 훈련을 할 친구들을 모은것
이다. 그친구들은 대체로 농사를 짓고 있었다. 제주에서 , 해남에서, 두물머 리에서. 그래서 프로젝트는 ‘농한기 유랑 풍물 전수 투어’라고 이름 붙여졌 다. 그것을 줄여 나중에 유랑농악단이된것이란다. 풍물패가 아니라 농악단 이라는 이름을 선택한것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우리에게 ‘농사’와 ‘풍물’이 주요 키워드였고 줄였으면 좋겠다 싶어서 단순 히 농악단이 된거죠. 그리고 농사짓는 사람들이나 하는 음악이라는 것으로 일제가 폄하 했다고 하는데 왜 그게 폄하인가도 모르겠고. 우리는 실제로 농사를 짓고, 그래서 농악단이 적당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유랑농악단은 유랑을 한다. 조금 특별한 장소들에서 농악을 한다. 저항하는 곳, 농사짓는 곳에 간다. 4대강 개발 반대 투쟁을 하던 두물머리, 강정 해군끼지 반대 농성장, 길거리에 나 앉게 된 카페 그, 중국집 신신원, 일자리 빼앗긴 기타 노동자들의 농성장.. 처음 굿판을 벌인것은 두물머리였 다. 정월 대보름 굿.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열두시간을 2월의 엄동설 한에 작은 마을안 모든 하우스를 돌아다니며 지신을 밟고 서로의 마음을 위 로 했다. 나는 대보름굿이라는 것을 처음 경험했는데, 그냥 쫒아 다니는 것 만으로 엄청난 체력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추위에 벌겉게 곱은 손으 로 쩍쩍 얼어 붙을 것 같은 쇠(꽹과리)를 들고, 얇은 치복(악기를 치는 사람 을 치배, 옷을 치복이라부른다)을 입고, 짚신 닮은 미투리라는 것을 신고 뛰 는 모습이 놀라웠다. 그런 열기는 투쟁의 일상화에 지치고 움츠러든 사람들 의 마음을 돋우고 서로를 돌아보게 했다. 어떤 사랑이라고 부를 만한 힘들 을 가지고 옆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유지하고 있는 복잡하고 귀한 관계 들을 기억나게 했다. “두물머리가 제일 신났죠. 긴시간을 함께 해서 터트린것이기 때문에. 다른 곳은 유랑이라고 해도 길어봤자 2-3일 가있는 것이라 한계가 있어요. 그래 도 유랑 농악단원들이 관심을 갖고 평소에 연대해오던 현장들이기때문에 그곳에서 유랑농악단이 제일 잘하죠. 현장에 기존의 다른 패들이 잘 오지 도 않고... 우리는 특화 되어있는거죠(웃음). 그리고 그런 곳에서 가장 빛나
는 것 같아요. 풍물계에서 정통계승, 창작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현장의 이 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잖아요. 풍물은 그런 이야기들을 잘 . 적절하 게 풀어 낼 수 있죠. 덕담같은것을 하더라도 “옛말에 이르기를 .... “하면서 풀어내는데 우린 이런걸 할 수 있고. “맑스가 이르기를...” 이런식으로. 또 밀양에 가서는 한전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강정에 가서도 막혀 있으니까 문굿 같은 것을 할 수 있죠. 각색해서. 큰 노력 드리지 않고 소곤소곤 하게. 구애 받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할 수 있어요. 퀄러티에 상관 없이..풍물은 타악이어서 이야기, 표현의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을때 판소리에 매력을 느 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판소리가 너무 어렵고 고급문화고 슬떼 없이 고퀄 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반면 풍물은 요소들을 녹여낼 수 있어서 ... 연극, 노 래, 말, 다 들어 갈 수 있고. 고퀄이 아니라서도 오히려 자유도가 높다는 생 각이들어요. “ 이야기. 이야기를 풀어낼수 있다는 말이 반짝인다. 그들의 공연을 보면 , 공 연이라고 표현하는게 맞을까 싶은데 보는 사람이 있다기 보다 함께 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들은 판을 만들어준다. 사람들이 놀수 있도록. 이야기 를 풀어내도록. 그는 평소에는 말이 없는 사람이라 속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종종 돌변하여 ‘이야기’를 한다. 그에게 이야기란 무엇일까? 풍물이라 는 것을 별로 접하지 않은 나로서는 뭐라 부르는지 알수 없지만 처음에 굿 을 하면서 뭐라뭐라 빠르게 덕담 같은 것을 재치있게 상황에 맞게 술술 끄 집어내 운율을 맞추는 그를 보면 그의 재능인지 누구나 하는지 궁금해진다. “사설. 덕담이라고 하기도하고. 텍스트가 맞는 것 같아요. 그런게 내가 한다 기 보다는 질서가 있죠. 대학교때 고민처럼. 예를 들면 내가 상쇠(제일 우두 머리에서 꽹과리를 치는 사람을 일컫는다. 지휘자 같은 역할)를 하지만 누 가 정한게 아니라 꽹과리 치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처음에 그렇게 된거 고. 근데 사실 상쇠의 권위가 없지 않기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생기는... 그런 것들이 관계가 생기고 그런게 어렵고. 그래서 내가 주기적으로 진상짓도 하 는거고(웃음) , 나를 쉽게 가볍게 생각하도록 ... 자꾸 권위가 생기니까. “
권위가 생길까 진상짓을 한다는 그, 당연히 대학때도 상쇠였을것 같지만 그 렇지 않다. 상쇠뽑기에서는 떨어졌었고, 선배들은 너는 악기 치지 말고 잡 색을 하라 했다고 한다. 이만하면 상당히 권위 없는 상쇠다.
2. 김과장: 내 인생은 핸드폰 만들면서 살아야 하나하다가...
이런 그는 앞서 이야기한대로 주 3일은 또 컴퓨터 앞에 앉아 프로그래밍을 한다. 언듯 보기에는 상당히 다른 일인데 그 안에서는 어떻게 이어져 있는 지 궁금해진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전공이 컴퓨터니까 열심히 데모하다가도 졸업하 면 삼성에 갔어요. 그때 많이 뽑았는지 삼성에 많이 가더라고. 당시에는 가 면 하는 일이 핸드폰 만드는 것이었는데. 내 인생은 핸드폰 만들면서 살아 야 하나. 당시에는 그런 생각이 있었어요. 삶의 목표나 비전을 세우기보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가 중요했죠. 당시에 잘은 몰라도 적어도 핸드폰 만드는 삶보다는 사회운동을 하는데 전공, 기술을 쓰는게 유의미하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진보넷에 들어갔죠” 그는 전공을 살려 사회 운동 단체에 들어가 활동가가 되었다. 그리고 요즘은 한 3일 프로그램을 하기 위해 일반 회사에 출근을 한다. 거 기서는 김과장이다. 애초에 왜 컴퓨터공학을 전공할 생각을 했냐 했더니다 역시 싱거운 대답이 돌아온다. 집에 컴퓨터가 있었고, 아버지 전공이 그랬 고 그냥 자연스러웠다고. 그의 동생도 같은 일을 하니 가업인셈이다. 학교 다닐때는 웹프로그래밍보다는 코어, 시스템쪽을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러 다 숨겨진 쪽도 중요하지만 웹프로그램은 사람들의 관계를 만들고 소통시 켜준다는 점에서 매력을 느끼게 되고 진보넷에 들어가게 되면서 웹프로그 래밍 일에 집중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출근하는 것은 돈벌이이면서 배우는게 많고 배우면 재미있고 해서 하는거에요. 대규모 프로젝트가 돌아가는 방식이라던가. 프로그램도 규모
가 크고. 지금은 좀 재미가 덜해서 곧 그만할 건데. 가지고 있는 기술이고 필요로 하는 경우 가 있는 경우 사회운동에서 이용되면 좋은것이라 가끔해 요. 나중에도 계속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 그에게 스피노자에게 렌즈 세공 술이 그랬듯, 프로그래밍도 그런 기술이냐 물었다.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두물머리에서 기술자로서 플랫폼만 만드는것이 아니라 컨텐츠 까지 가지고 기획을 같이 하는 편이 더 재미있었단다. 앞으로도 그런 식으로 기술을 사 용하고 싶다고 한다. 물론 기능적으로 사회운동이나 저항 현장에 기여할 수 있는 정도도 의미가 있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내가 보기엔 엄청난 개인주의자에, 최고의 my way 타입인 그가 “관계”며 “ 공동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게 어색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프로그 래밍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고, 컨텐츠와 플랫 폼의 관계를 만드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 한다.
3. 농사꾼 : 돌아온게 아니라 도래한것이죠. 도래
그렇담 농사는 왜 짓게 되었을까? “처음에는 돈이 되는 줄 알았죠.(웃음) 실은 적성에 맞아요. 농사가 한편으 론 꼼꼼해야 하는 데 한편으론 거칠어야 하거든요. 내가 그래요. 재미있어 요.” 귀농한건가 물었더니 이상한 답을 한다. “돌아온게 아니라 도래한것이죠. 도래.” 도래? 그 뜻을 물어보니 사전 조사를 했어야 한다고 본인의 블로그를 알려 준다.(이 얼마나 말 없는 동거인이란 말인가) 3년전에 귀농고민 시리즈라 는 글을 쓴것이 있었는데 그 생각에서 나온 축약적인 답이었다. 그의 글에 따르면 그는 귀농이라는 말이 원래 있던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기에, 돌아 가는 것도 아니지만, 돌아간다는 것은 뭔가 있던 것에 편입되는 느낌이라서
싫다고 한다. 또 요즘은 관에서도 귀농 부흥회를 엄청하고 있기 때문에 지 속불가능한 농업/농촌의 구조에 무언가 땜빵을 해대려고 노력하는 느낌이 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생각한 말은 도래다. ‘도래하는 자’는 어떤 사람일까? ‘도래’한다는 것은, 그 장소에 어떤 사건으 로 발생한다는 것.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장소의 지축이 흔들린다는 것! 생각해봤는데, 그는 농촌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농촌을 ‘도시화’하 는 사람이다. 우리는 시골에 살고 싶기도 하지만, 도시에 살고 싶기도 하잖 아. 도시의 가장 큰 장점은, 총망총망한 인간들의 바다가 끊임없이 펼쳐져 있다는 것. 그 바다는 늘 새로운 관계, 새로운 커뮤니티, 새로운 공명의 가 능성이다. 우리가 서울을 섣불리 떠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고. 근데 그것 이 바로 시골에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 김씨 블로그에서 인용 그래서 그는 농사를 함께 따로 짓는 법을 실험중이다. 기계를 쓰지 않고 농 사를 짓기 위해서는 협업이 중요하다. 특히 논이 그렇다. 그러나 공동으로 농사를 지으면 땅과 개인의 관계에 섬세하게 집중할수 없는 문제들도 생긴 다. 모든 공동의 일이 그렇듯. 각각이 작물과 땅에 집중하고 고유의 관계를 만들수 있어야 하면 그게 농사의 큰 기쁨이라고 여기는 그는 현재 밭과 논 을 모두 개방한 상태이지만 여러가지 이야기를 통해 룰을 만들기도 했다. 논은 “논농사 아카데미”라는 이름으로 몇몇 친구들과 모임을 만들어 논농 사의 여러 자연 재배법을 실험하고 있다. 이를 테면 논을 4구역으로 나누어 각자 해보고 싶은 방법을 공부하고 발제해 실험해 보는것이다. 1구역은 호 밀로 제초/경운을 하고 직파를 하고 2구역은 호밀과 클로버로 제초를 하고 모내기를 한다던가. 어디는 보리로 제초를하고 ..등등. 밭의 경우는 유랑농 악단원들을 대상으로하여 매주 오는 김에 공동으로 감자농사를 짓되 각각 은 작은 구역을 가지고 텃밭을 꾸밀수 있도록 신청을 받았다.
4. 개인과 공동체의 균형: 우리방에 이사오는게 기가 빨렸어요
김씨는 개인과 공동체의 균형을 맞추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거 형태
도 지속적으로 변화를 해왔다. 처음에 독립했을때는 해방촌에 빈집 정신에 공감해 자신과 친구가 살집도 근처에 구해 빈집으로 살았다.(해방촌 빈집은 6년이상 지속되고 있는 도심형 주거공동체 운동? 실험에 하나로 소개할수 있다. 한마디로 여러사람이 집을 공유하는것이다. 어느정도 공산적으로.) 2 년 빈집에서 살고, 두물머리로 이사오면서 애인인 나를 포함한 3명의 친구 들과 함께 2년을 살고, 또 최근에는 1년을 나와 다른 친구 1명 셋이서 살았 다. 하지만 셋이 살아도 빈집에서 살때랑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집에는 하루 가 멀다하고 명절같이 사람이 북적였다. 어떤 활동을 하든 베이스 캠프가 되었다. 이제는 용담 게스트 하우스, 혹은 용담 민박으로 불린다. 그러다 최 근 몇개월 나와 둘이서만 살고 있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은 아직 여전하 다. 수요일엔 요가, 토요일엔 유랑농악단연습, 주말농장. 이제 사람들은 우 리집을 “용담문화센터”라 부른다. “빈집을 할때는 어떤 한 마을 속에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면 좋겠다 싶 었었다. 다만, 기존의 있던 집- 보통은 3-4인 가족에 적합한 구조의 집을 임대해서 다른 방식의 구성원들이 사는 것이라서 적합하지 않았던것 같아 요. 만약에 다른 구조를 생각해볼수도 있었을거 같다. 우리는 집에 끼워 맞 춰 산것이라 어려움이 많았다고 생각해요. 제일 어려웠던 것은 새로운 사 람들이 갑자기 너무 가까이 오는것이었죠. 옆집에 이사오면 좋은데 우리방 에 이사오는게 기가 빨렸어요. 그게 가장 메이저 어려움. 그다음은 살림. 공 평한게 좋은것인지 모르겠지만 서로가 만족하는 것을 찾는다는게 어려웠어 요. 삶의 조건과 양태가 달라서. 집안일의 절대량이 달랐죠. 그것을 적절하 게 나누고 맞춰가기가 어려웠고. 하나의 룰로 할수 없고. 어떻게 보면 방이 사적인 공간이고 부엌이 공적인 공간이면 좋을것 같다고 생각할수 있겠지 만, 거꾸로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적인 부엌이 있고 공적인 방이 있는게 나 을것 같아요. 요즘에도 집에 내가 들여놓은 도구들.. 아끼는 것들을 사용법 을 모르고 함부로 쓴다거나 하면 속터져요. 말도 못하고.” 내가 소유욕이 문제인가 싶어질때가 있다고 하니, 그는 관계와 언어의 문제 라 한다.
“소유가 아니라 적합한 언어를 찾으면 될거 같아요. 내가 집을 소유하고 살 고 있는데 도로가 난다거나 재개발 된다 할때 싸울때 소유권이 아니라 주거 권을 지키자고 하잖아요. 애정과 관계권을 .. 소유로만 표현 할수 없는 ... 우 리가 언어를 갖지 못해서 그런게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신체적으로 어떤 균형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죠. 빈집의 경우 공동생활에 극단으로 방점이 있 었던거고.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고, 지금도 밭을 같이 하지만 따로 또 같이 할수 있도록 규칙을 찾고 있고.” 그는 굿을 통해 사람과의 관계에 관심이 생겼고, 또 세계와의 관계도 알아 나가는 희열을 맛보게 된것 같다. 그런 생각들 여러가지 면으로 연결되어 그의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는 채식을 하는것도 관계가 중요해서 라했다. “세계와의 관계. 어떤 효과들.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그런 관게 맺 는 방식, 농사도 그런 관계 맺는 방식을 만든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웹프로 그래밍도 마찬가지고. 순환을 형성. 결국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나에 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것이죠. 그래서 농사에 대해 서 기계와 비닐을 안쓰려고 하고. 자연농이라 일컬어 지는 방식들이 나에게 적합한것 같아요. 나에게 좋은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것” 스스로 몸을 치료하고 관리할수 있는 기술을 배우고 싶어서 요즘은 침과 뜸 을 배우고 있는 그. 친구들은 이제 그를 “김의원”이라고도 부른다. 앞으로 어떤 관계를 만들고 어떤 것을 체득하고 실험할지, 김씨는 또 조용히 말줄 임표 하다 어떤 이름으로 나타날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