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대 문예창작학과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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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웹진 Vol . 1

거북아 거북아 학과장님 격려사 한 그루의 어린 나무를 심으며

문예창작학과 소식 3학년 최보비 시인 등단 동화작가 한정기 현대문예학과 석사과정 입학

문예창작학과 작품



동의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웹진 Vol . 1

거북아 거북아 학과장님 격려사 한 그루의 어린 나무를 심으며

문예창작학과 소식 3학년 최보비 시인 등단 동화작가 한정기 석사과정 입학

문예창작학과 작품 시 소설 희곡 수필 평론


동의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웹진 Vol . 1

“『거북아,거북아』는 여러분의 앞날에 건필과 문운이 함께하길 바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동의대학교 상징동물 :거북이 고대가요「구지가」의 머릿구절을 따옴 임금이 오기를 기대하는 원작의 의미에서 문에창작학과의 미래에 훌륭한 작품과 인물이 탄생하기를 바라는 의미를 담음

끈기있는 도전과 무궁한 발전을 기원함


동의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웹진 Vol . 1- 학과장님 격려사

동의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설립된 지도 어느덧 10년이 다 되었다. 모든 것이 중앙으로 집중된 현실에서 지역대학에서 문학 분야의 인재들을 양성하는 일이란 너무도 힘겨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로지 문학을 사랑하고 문학을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지난 10년을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척박한 토양 위에서 스스로 생명을 틔운 자리는 그만큼 질기고 강한 생명력을 지닌다. 동의대 문예창작학과의 지난 10년은 아마도 튼튼한 생명의 자리를 만들어 가는 작은 고통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문예창작학과장 하상일

학생들의 창작품을 모아 웹진을 창간한다고 하니 지도교수로서 설레고 기쁘고 마음 든든하다.아직은 설익은 습작품들이 대부분이지만,모든 것이 문화로 수렴되는 시대에 그래도 문학을 붙들고 있는 학생들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 따뜻하고 고맙고 감동적이다. 모든 일이 그러하겠지만,특히 문학은 열정의 산물이다. 진정으로 사랑해야 그 결실을 거둘 수 있는 것이 문학이다. 이번 웹진 창간이 동의대 문예창작학과 학생들 모두에게 문학에 대한 사랑을 진지하게 다시 성찰하는 소중한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이제 동의대 문예창작학과는 한 그루의 어린 나무를 심었다.비와 바람과 눈을 맞으며, 나무는 울고 웃으면서 스스로 잘 자랄 것이다.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무는 우리들의 따뜻한 사랑을 먹으며 자라고 싶을 것이다.아침저녁으로 나무에게 물을 주고 따뜻한 손길을 보내는 그 마음을 기대할 것이다.우리가 심은 나무와 더불어 학생들 모두의 문학이 매일매일 아름다운 결실을 거둘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문예창작학과장

하상일 교수


동의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웹진 Vol . 1- 문예창작학과 소식

동의대학교 문예창작학과 3학년 최보비 학생이 시 전문 계간지인 ‘시와사상’ 신인상에 당선되어 시인으로 등단했다. 당선작은 ‘돌무덤’ 외 10편으로 시와사상 2010 년 봄호에 수록될 예정이다.

문예창작학과 최보비

대학에 진학해서 본격적인 시 습작을 시작했다는 최보비 학생은 “항상 글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새로운 시어를 재건하는 일이 이제는 숙명처럼 느껴진다”고 앞으로의 각오를 말하며 “나의 시에 날개를 달아준 교수님들과 혼자 걷던

내게 동행의 손을 뻗어준 심사위원에 감사드린다”고 소감을 밝혔다. 최보비 학생의 작품에 대해 심사위원들은 “전체적으로 작품 수준이 고르고,시적 정서와 이미지가 서사적 상상력의 확장을 이루고 있어 상당히 개성적이다”고 평했다. ‘시와사상’ 은 1991년 창간되어 현재까지 통권 65호를 발간한 한국 문단의 대표적인 시 전문 잡지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 문예지로 등록되어 있다.


동의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웹진 Vol . 1- 문예창작학과 소식

돌무덤

동의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최보비

한 때는 열 가구가 살았다는 그 곳을 다시 찾아갔을 때 감나무에 열리던 이야기들은 하나 둘 떨어져 있었지.누더기 바람 한 폭 매어진 앞마당, 누군가가 쌓아올린 돌무덤만이 홀로 남아있었네.꿈틀거리는 화석 속 이야기가 연기처럼 피어오르자 휘파람을 닮은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렸어.장독대 뒤로 술래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시간들은 점점 먹빛으로 변해가고 어둠 속 나는 내 몸집보다 큰 항아리에 한참이나 머리를 처박은 채 울고 있었지.울음이 커질 적마다 잃어버린 얼굴들이 하나둘 꼬리를 물며 기어 나오고.나는 무덤 같은 시간 속에서 영원히 자라지 못하는 나를 보았네.녹슨 대문처럼 컴컴하게 갇혀 있던 어린 손들은 하나같이 나를 향해 뻗어 있었어.목구멍까지 채워진 차갑고 단단한 돌의 파편들로 무덤을 깨부수는 꿈 속,그들은 매일 밤 내 안에 뿌리내린 돌무덤들을 와르르 무너뜨리고.불쑥불쑥 뭉툭하게 잘려나간 기억의 살점들이 미처 잠에서 깨지 못한 나를 칠적마다 미끄덩거리는 탯줄에 칭칭 감긴 채 나는 알 수 없는 무덤 속으로 자꾸만 기어들어 가고 싶었네.


동의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웹진 Vol . 1- 문예창작학과 소식

부산문화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동화작가 한정기

장편동화 <큰아버지의 봄>-한겨레아이들,2006년 장편추리동화 <플루토 비밀결사대 1.다섯 아이들이 모이다>-비룡소,2005년 징편추리동화 <플루토 비밀결사대 2.팔색조의 비밀>-비룡소,2006년 장편추리동화 <플루토 비밀 결사대 3.안개속을 달리다 >-비룡소,2009년 장편동화 <멧돼지를 잡아라>-다섯수레,2004년 그림동화 <남극에서 온 편지 ( 우리 삼촌은 세종 기지에 있어요) >-비룡소, 2008년 청소년소설 <나는 브라질로 간다>-비룡소, 2008년 등 그 외 다수. .


동의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웹진 Vol . 1- 작품

시 허수행 김민선 최민호 장유진 이승미 원혜진 김경희

여백의 풍경화 외 5편 맛있는 스테이크 조리법 외 5편 네온사인 외 4편 장맛비에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 외 4편 웅덩이 외 4편 핸드폰 외 4편 폐경 외 4편

소설 윤성준 문영국 고인수 최상희 박민숙 이소라 김주아

희곡

이승현 박아람 김보슬

1 한 푼 검은 목걸이 사랑 히키코모리 보균자 선택의 자유 홀수의 여자

비 콰이어트 싱글은 아름답다 거울

수필 박문혁

자리,그리고 다른 자리 외 1편

평론 김윤정

달의 기원에 담긴 초월적 생명력 - 김선우론


허수행

여백의풍경화 외 5편 여백의풍경화 손을 조금 떨었나 보다 마을은 비어 있는 캔버스 위에 작은 강이 흐르고 나무와 들풀로 지붕을 올린 소박한 집들과 다듬어지지 않은 낮은 울타리들이 늘어선,빨래하는 아낙과 물 긷는 아낙과 수다 떠는 아낙과,뛰노는 아이와 그의 흙땅에 소꿉 짓는 아이와 멱 감는 아이와,오솔길이 뻗어 있는 마을은 어디선가 보았던 마을인지도 모른다 그 마을은 알고 있는 마을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 마을은 이 시대의 것인지도 모른다 그 마을은 이 시대의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마을은 마을이 아니어도 관계없다 그 오솔길에 서 있다 그 오솔길을 따라 걷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붓을 내려놓았을 때,작은 강이 지워지고 소박한 집들과 투박한 울타리가 지워지고 빨래하는 아낙과 물 긷는 아낙과 뛰노는 아이와 소꿉 노는 아이와 오솔길과 거기에 선 그가 마지막으로 지워 진다 캔버스가 온통 여백으로 가득 찼을 때 이제 비어 있는 캔버스가 그에게 무어라고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구름이 둥둥 폴짝 폴짝 뛰놀다 보니 그림자가 바닥을 기어가는데 고개 들어 하늘 보니 아!도로위에도 새까만 구름이 둥둥 울 아빠 트럭타고 붕붕 달리면 창원에서 포항사이 구미에서 울산사이 트럭이 덜컹덜컹 고개 내밀어 바닥을 보니 아!여기에도 새까만 구름이 둥둥 필시 짐들이 무거워 통통 튀기만 했겠죠 엘리베이터도 삐~소리가 나면 올라가지 못하잖아요 바닥을 기는 새까만 구름은 내가 좇아가 올라 탈 수 있지요 올라만 타면 손오공처럼 휙휙 날아다닐 수 있겠죠 어젠 t v 에 성룡이 나왔어요 오늘이 설날이래요 성룡은 맨날 설날마다 t v 에 나온대요 아빠도 나처럼 성룡을 좋아해요 그래서 걸음도 비틀비틀 걸어요 자빠질 듯 자빠질 듯 자빠지지 않아요!아빠도 성룡처럼 술을 마시면 힘이 세지나봐요 훨훨 날고 싶대요 아빠도 나처럼 휙휙 날아가고 싶대요 아빠는 드래곤볼을 안봤어요 아빠는 모르죠 구름에 훌쩍 올라타면 손오공처럼 휙휙 날아다닐 수 있죠 앗!새까만 구름이 벽을 타고 올라가네요 비틀 비틀 하는 아빠를 끌고 옥상에 올라갔어요 이쿠,벌써 구름은 다시 내려갔어요 지금 재빨리 뛰어가면 올라 탈 수 있어요 아빠!빨리 뛰어요!올라 탈 수 있어요! 에이,쿵 소리만 요란하더니 아빠는 술 취해 쿨쿨 구름은 저기 둥둥


비너스 겨드랑이에 달린 게 종양 이라나 혹 이라나 엄마가 입원했다 수술하고 요양한데도 체 일주일도 걸리지 않는다니 중병 아닌 건 확실한데 문병이라고 갔더니 엄마가 날 보고 실실 웃는다 글씨 보험금이 수술비보다 남는대나,여그까정 만다 왔디,하며 실실 웃는다 엄마 요양한대서 집에 설거지도 빨래도 청소도 했는데,아부지 아침 챙겨드린다고 새벽부터 솥에 밥도 했는데,아따 엄마는 실실 웃고 누웠다 비너스 같은 짝사랑한테 문자나 한 통 보내려 엄마를 등지고 앉았다 옆에 티비도 있는데 엄마는 벽 같은 내 등만 보고 누웠다 수행중인 스님마냥 벽 같은 내 등만 보고 멍하니 누웠다 엄마는 가리비처럼 침대위에 꼼짝도 않고 나는 비너스 같은 여자아이를 생각한다 엄마는 딱 나흘 만에 돌아왔다 그래도 수술인데 나흘은 좀 심했다 싶다가도 엄마가 주는 밥상에 고개를 박는다 숟가락 들어 올리는 엄마 팔뚝 사이로 겨드랑이가 보인다 비너스 같은 흉터만 보인다.


바람이 차가워 몸이 떨리는 줄 알았다 야훼의 배변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얼마나 오랜 변비에 시달렸는지, 제 속에 우주를 토해놓고, 배설이 불러온 서늘함에,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별들이 자전과 공전을 시작한 것은 그 때문이다. 배설물이라고 배설하지 않으랴, 지구는 모든 배설물을 제 속에 토해놓고 또, 부르르, 맨틀이 떨리면 바람이 일고, 체온이 떨어지면 화산을 터트리기도 한다. 맨틀이 토해놓은 바람은 또 오랜 묵힌 덩어리를 쏟아낸다. 바람이 차가워 몸이 떨리는 줄 알았다. 바람의 배설에 나무가 흔들리듯 사람은 떨었다. 신의 유전자가 사람의 생김새와 시달리는 변비를 남겼겠지만, 사람의 배변이 우주를 토하지는 못하는 거다. 하릴없이, 부르르 핸드폰만 떨린다 그 바람에 부르르 내 몸이 떨린다 부르르!그 바람에 다시 핸드폰 떨린다


흙길에 눈이 내리다 잉크로 발자국을 찍으려 했다 밟고 나서야,눈이 얼마나 적게 내렸나 눈치 챈 것이라 이제껏 흰 눈이 땅을 덮은 줄만 알았다 눈길을 밟은 것이 비인 발바닥 이었어도 눈은 녹아 땅에 스미고 그 자리를 거뭇한 흙이 메워 발자국은 얼룩으로 찍히는 것 삼겹살을 뒤집는 불판에 그을음이 눌리고 그을음은 다시 돼지고기의 살점에 새겨진다 제 몸에서 나온 얼룩인데 한번 씹어 보지도 않고 눈발 같은 아가씨들은 얼룩진 삼겹살을 옆으로 제쳐두는데 소주잔에 파문을 위장하는 기름방울도 입술에서 묻어나 술 위에 뜬 것 일 텐데 그걸 홀랑 다시 또 마시는 걸 보니 발자국의 얼룩도 흙에서 올라온 것이 아니라 분명히 반쯤은 발바닥에서 흘러내린 게다


달 쿵떡쿵떡 거기엔 이미 토끼 한 새끼가 내 것 아닌 심장소리로 절구를 찧고 있었다 그 모양에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떡 고물에 뭘 넣었는지 밤 꽃 냄새 여기까지 풀풀 나는데 아,달밤도 밝다. 씨발


김민선

맛있는 스테이크 조리법 외 5편 맛있는스테이크 조리법 어쩌다 한 번이예요. 이런 맛 좋은 요리를 먹는 건.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조심해야 해요. 입술을 물릴지도 모르거든요! 있잖아요.아빠 이번 고기는 어떤 맛이 나나요? 지난번에 먹은 것과 맛이 똑같은 건 아니겠죠? 난 그럼 먹지 않을 거예요. 그 여자는 너무 질겼단 말이 예요. 있잖아요,아빠 그녀의 가슴은 맛있었나요? 나를 내다 버릴 정도로? 나는 생각보다 힘이 세요. 그러니 자루에 담아 버리지 말아주세요. 때릴거면 얼굴은 빼고 때려 주시구요.


맛 좋은 스테이크 두들기면 두들길수록 맛이 좋아져요. 언제나 그렇듯이 먹을 때는 입을 조심해야해요. 누런 이를 으르렁 거리며 훈제 향 나는 담배를 꼬나물고 뽀족 구두를 신은 그녀는 두들기면 두들길수록 맛좋아 진다는 것도 모른 체 오늘도 이불 속으로 몸을 뉘여요. 있잖아요 아빠. 이젠 스테이크 말고 다른 걸 먹었으면 해요.


다리미 고문법 1. 다리미로 다리 지져 봤어요? 안 해봤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 처음엔 아픈지도 몰라요,순식간이거든요. 조금 있다 보면,살갗이 검붉게 변해요 그리곤 맛있는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죠. 걱정 마세요 그렇게 아프지 않아요. 2. 그저 보고 싶었을 뿐인데, 뺨을 때리다뇨! 손톱 살점이 뜯기고 피가 났어요. 아줌마 바세린 좀 발라주세요. 흉 지겠어요. 여자는 얼굴이 생명이라면서요. 3. 죽은 것들의 밑에서 맑은 고름이 한가득 고여 탱탱한 여자 가슴처럼 되면 고름을 빼야 해요. 바늘에 머릿기름을 잔득 바르고 제일 탱탱한 부분을 쿡 찌르는 거죠. 빠져나오는 고름이 침을 찍 뱉으면 손으로 있는 힘껏 짜는 거예요. 하지만 너무 빨리 짜진 마세요.고통이 덜하잖아요! 4. 15년 이예요. 어째서 애정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하는 거죠?


5. 지금이에요. 손가락으로 살살 죽은 가죽을 벗기는 거예요. 벗기고 또 벗기다 발갛게 피고름을 터트릴 때 쯤, 소금을 한가득 뿌리고,다시 다리미로 지지는 거죠. 반복반복! ( 언제나 반복학습이 중요해요! ) 잠깐,바세린은 바르면 안돼요 동정하지 마세요! 그러면 엄마는 또 달려들어요. 6. 어디서 돈 많은 늙은이 하나 물어서는,


둘, 둘, 셋 설탕 세 스푼을 커피에 넣으며 인생은 둘,둘,셋의 연속이 아닐까 생각했어. 하나보단 둘이,둘 보단 셋이 나은,그렇기 때문에 설탕은 마지막 세 스푼이어야 한다는 거지. 어제는 테이블에 커피를 쏟았어.놀라서 휴지를 들었는데,커피향이 어찌나 좋은지 테이블도 먹고 싶겠단 생각이 들더라고.그래서 커피가 눌러 붙어 지워지지 않을 때까지 그대로 놔뒀어.결국 야단을 맞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해.벽이 심심할까봐 라디오를 켜놓고 나간 사람처럼,언제나 커피향만 맡고 있을 테이블에게 커피를 양보한 내가 자랑스럽다고. 둘,둘,셋 설탕을 커피에 넣으며 입구를 쪽 찢어 타먹는 커피믹스를 생각했어.여름용 아이스커피를 뜨거운 물에 타 먹으면 더 부드럽다고 느꼈던 작년 여름을.그거 알아?난 언제나 당신을 그리워해.눈을 감고 입을 씰룩대면 젖을 빨 수 있을 것만 같고,코를 벌름거리면 젖내가 날것만 같아.당신,모르겠지만 우리 꽤 가까운데 사는 거 알아?엎어지면 코 닿을 만한 동네잖아 여긴.그런데 당신 좋은 아파트에 살더라?웃기지도 않게 딸 쌍둥이도 낳고,결국 아들은 못 낳았다며? 테이블은 커피를 좋아해. 바닥도 커피를 좋아해. 한마디로,가끔씩 목이 마를 테니깐 이렇게 쏟아주는 것도 예의라는 거지. 하지만 나에겐 아무도 예의를 차리지 않아. 이렇게 목이 타는데, 이렇게 바짝 말랐는데, 참.좋은 소식하나 알려줄까? 아빠한테 또 다른 애인이 생겼어. 1)정동균시인의 시 인용


그저 허물만 벗으면 될 것을 스물다섯겹의 허물을 벗고 나면 엄마 뱃속으로 들어가 고추를 달고 나겠어요 그저 허물만 벗으면 될 것을, 나서는 한 껏 어리광도 부리겠고요, 공갈젖꼭지 말고 젖이 꽉 찬 당신의 젖을 있는 힘껏 빨겠어요. 가슴에 안겨 심장소리를 들으며 낮잠도 자겠고요,입에든 음식도 받아먹겠어요. 눈이 티가 들어가 칭얼거리면 당신은 혀로 빼주겠죠. 장난감 총도,멋진 레고도 사달라고 하면 다 사주겠죠. 학교에도 올 거고요,맛있는 도시락도 싸주겠죠. 그럼 내가 반장을 할지도 몰라요. 내 새끼 내 새끼, 얼굴이 침 범벅이 될 정도로 뽀뽈 해주겠죠. 언젠가, 스물다섯겹의 허물을 벗고 엄마뱃속에 들어간다면, 그땐 나를 죽여주세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요. 꿈에 삼신할매가 고모 집으로 들어갔다면서요. 조금 더 우기지 그랬어요 아버지. 그랬다면,그랬다면,


습관적 그리움 아무렇지 않은 척 담배를 피웠어요 그러면 마음이 정리가 되니까요 어차피 당신이 집을 나간 게 한 두 번이 아니잖아요 이젠 그러려니 해요 처음엔 울고불고 매달렸었죠 하지만 그것도 오래하면 약발 떨어진다는 거 당신도 잘 알잖아요.그 남자는 누구냐고 묻지 않겠어요 밤새 당신의 침대위에 나뒹구는 사람이 어디 그 사람뿐이었나요 뭐 이젠 익숙한걸요 돈이나 좀 주면 그 사람들마저 예뻐 보일 텐데,이번 남자는 입 냄새만 고약하네요. 나를 그런 눈으로 보지마세요 구역질이나요.썩어빠진 당신의 눈에선 진물이 흐르고 번진 화장사이로 싸구려 향수냄새가 나요 가슴이 훤히 보이는 옷을 입고 시뻘건 루즈를 바르고,그러고 나가면 지나가는 남자들이 침이라도 흘려줄까요? 어제 왔던 남자는 내 엉덩일 쓰다듬었고,그제 온 남자는 내 엉덩일 핥았어요.내 것이 아닌 엉덩이가 들썩거렸고요,머리가 삐쭉 설만큼 기분이 좋았어요. 당신의 침대가 마를 날 없이 축축한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겠죠. 아무렇지 않은 척 담배를 피워요 당신이 없어도 내 이불 사이로 발을 들이미는 남자와,습관처럼 엉덩일 내줘요. 팔팔하게 살아있다고, 죽지 않았다고,자꾸만 빠져나오는 정액들만이 습관처럼 당신의 기억을 끄집어내요.


바람 바람이 부니 마음이 어지러워 다리를 벌렸다 떨어지는 꽃잎 사이로 터져 나오는 슬픈 비명들 오늘 밤 이불속으로 불쑥 들어온 당신의 발에 농락당하고 싶다. 똑똑똑 이 밤,소리 없는 방문객이 마음을 흔들고, 똑똑똑 벌어진 틈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고양이 한 마리 칼날 같은 발톱에 찢겨져 나간 기억들 흐르는 붉은 선혈에 마음을 뺏기고, 떨리는 손에 쥐어진 칼로 당신을 난자하고, 그렇게 돌고 돌다보면 어느 새 술잔은 차 들어가고. 총 만 있으면 쏴버리겠어. 네 머리통을 날려버리겠어. 이 개자식. 술만 마시면 터져 나오는 기억들에 벌어진 다리사이로 오르락 거리는 고양이 한 마리.


최민호

네온사인 외 4편 네온사인 무수히 많은 생각 속에 나는 길을 만든다. 마물들이 모여 있는 어지러운 길을 만들고 그 속을 헤엄치고 날아간다. 그 속에서 무리들은 어제와 같은 공간 속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섹스를 한다. 처음 만난 사람과 서로 손을 마주 잡고 처음 만난 사람과 키스를 한다. 처음 만난 사람의 가슴을 애무하고 처음 만난 사람과 서로 몸을 더듬으며 부둥켜 끌어 앉고 질내에 삽입한다. 퍼져가는 환각 속에서 천천히 신음하며 빠르게 걸어간다.뛰어간다. 상상한다.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터널 속에서 현란한 네온사인이 돌아가고 끝없이 이어지는 아지랑이 같이 피어오르는 무한한 오르가즘 그러다 긴 욕망에서 빠져 나오면 커지는 것은 거친 숨소리뿐 발정 후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중요한 것은 정액을 얼마나 사정 했느냐 그뿐이다.


남자는 여자의 그 곳으로 여자는 남자의 그 것으로 얼마나 많은 만족을 누렸느냐 그뿐 헤어지고 나면 잊혀지고 사라지고, 새로운 길을 만들고 정적을 깨고 인적이 드문 동그라미 속으로 나만의 긴 터널을 뚫는다. 번져가는 네온사인 붉은 불빛 속으로…….


미궁. . 꿈이 현실이고 현실이 곧 꿈이야 이 세계 밖에 너의 육신은 온전하게 남아 있지만 이곳에서 네가 죽어 버리면 꿈 속 밖에 있는 너의 원래 육신도 또한 상처 입고 죽게 돼서 영원히 돌아가지 못하게 되니까 조심해야 해.


등대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난 바보입니다 당신 앞에서 그저 웃기만 하는 난. 아무것도 모른 채 말없이 한곳만 바라보며 한마디 소리 없이 부서져 버리는 그대 쓸쓸하게 흘리는 눈물입니다. 낮이 되면 언제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하루를 시작하죠. 밤이 되면 사방을 밝히는 길 잃은 외톨이가 됩니다. 그런 다음 한잔의 술잔 앞에 기대 길을 물어봅니다.


집으로 돌아가던 길 당신이 흘린 눈물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한숨 속에 돌아보는 눈가에 맺힌 투명한 물방울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그대를 바라보는 난 너무 힘듭니다. 웃게 해주기는 쉬운데 함께 있어주기는 쉬운데 그대의 아픈 마음을 만져주기에는 너무 어렵습니다. 오늘도 나는 밤이 되면 잃어버린 길을 찾아 마음에게 물어봅니다.


시뮬레이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시뮬레이션 게임의 세계 싸워서 쟁취하느냐 혹은 빼앗기느냐 이겨서 사느냐 혹은. . 져서 죽느냐 상대방의 마음을 얻느냐 아니면 차이느냐 훈남,훈녀가 되느냐 혹은 폭탄이 되느냐 인기를 끄느냐 혹은 망신살을 뻗치느냐 배웠느냐 혹은 배우지 못하였느냐 교육이 잘 되었느냐 혹은 교육이 잘못 되었느냐 교양이 있거나 혹은 교양이 없거나 품격이 있거나 혹은 품격이 없거나


선택하느냐 혹은 선택하지 못하느냐 길러지느냐 혹은 못 길러지느냐 있는 자와 권력을 가진 자 혹은 못 가지고 밑바닥을 기는 자 승자 또는 패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시뮬레이션 게임의 세계 판타지 롤플레잉 전략 시뮬레이션 아케이드 액션 스포츠 연애 시뮬레이션 육성 시뮬레이션 카지노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시뮬레이션 게임의 세계.


아닌데. . . 뭔가 대꾸를 하려 해도 하질 못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손이 떨려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아닌데. .그게 아닌데 나는 그러려고 한 게 아닌데 그 사람이 나에 대한 오해 그런데도 아니라고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 괜히 말을 꺼내면 내가 이상해지고 변명하는 것으로 들릴까봐. 심장이 아파 손으로 부여잡았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다니 그런 적, 처음이었다. 아니라고 하고 싶어도 입술이 새파랗게 질린 채 그냥 말없이 눈물만 흘러 내렸다. 대화가 끝난 우리 두 사람의 공간 속에는 무거운 공기로 채워져 있었고 나의 시야는 어지러움으로 인하여 뿌연 안개 속으로 가려졌다. 나는 탁자 위에 엎드린 채로 가만히 있었다. 생각이 없이. 잠시 뒤 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먼저 걸어 나갔고 나도 허리를 숙여 풀려 있던 신발 끈을 묶고는 방을 나섰다. 그런 일이 있었던 이후 늘 함께였던 우리의 방향은 어색함 속에서 두개의 갈래로 나뉘어 졌다.


장유진

장맛비에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 외 4편 장맛비 라디오 소리 탁 탁 타닥 타다다닥 장맛비들은 파르스름한 공기를 휘저으며 지상에 발자국을 찍고 그 발자국은 어느새 하얀 소리 꽃이 되어 통통통 사방에 퍼지다가 내 창문 틈까지 찾아왔다 언제 왔던 걸까 그들은 다시 오겠다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오래전부터 그들을 맞이할 우산과 장화를 발아래 준비해놓고 기다렸다 마음의 진동수가 많아지게 만드는 장맛비는 지붕 위 안테나들을 일제히 차렷 자세로 파르르 떨게 하고 신록의 나뭇잎들은 일제히 사사삭 달아나기 바쁘다 늙은 소나무 가지는 낡은 스틱처럼 탁탁 부러지고 부엌에서 이런 광경을 숨어보던 냉장고는 연신 호각 나발을 불어댄다


그 순간 내 앞에는 단조로운 협곡이 펼쳐졌고 내 심장 박동은 약한 헤르츠가 되어 한동안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삶을 나만의 주파수로 들려주고 있었다 .


막쥔 손금 손금은 사람이 살아가는 길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새겨놓은 흔적이다. 본래 타고 난다는 왼손금과 살면서 바뀐다는 오른 손금 내 두 손에는 숙명과 운명이 함께 존재한다. 난 그 길들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넓은 길과 좁은 길 그 사이사이에는 조그마한 골목길도 나있고 대나무처럼 쭉 뻗은 길과 구불구불한 고갯길도 나 있다. 닮은 듯 하지만 다른 내 양손은 오른 손바닥에는 내 천( 川) 자가 왼 손바닥에는 사람 인( 人) 자가 쓰여 있다. 사람 인( 人) 자가 써진 왼 손을 서서히 접어가면 일 년에 한번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오작교가 만들어진다. 내 손에는 보이는 견우와 직녀의 만남은 강렬하고 깊다.


자신이 원하는 백가지를 얻는다 하여 백악손금이라 불리는 막쥔손금 이 백 가지 소원이 내 손안에 있다.


이름의 소리 봄의 소리는 졸졸 여름의 소리는 푹푹 가을의 소리는 선들 겨울의 소리는 수북 아침의 소리는 동동 점심의 소리는 아함 저녁의 소리는 쉿 바람의 소리는 아이스께끼 꽃의 소리는 톡톡 산의 소리는 빽빽 태양의 소리는 이글 구름의 소리는 대롱 무지개의 소리는 아롱 비오는 소리는 욱신 창문의 소리는 와작 베개의 소리는 푹 아랫목의 소리는 노골노골 의자의 소리는 달달달 볼펜의 소리는 딸꾹 거울의 소리는 까꿍 방석의 소리는 반질 1등의 소리는 똑똑


2등의 소리는 뚝뚝 주머니 속 동전소리는 탈탈 미니스커트의 소리는 아찔 게임의 소리는 가위바위보 남자의 소리는 까칠 여자의 소리는 간들 콩깍지 소리는 띠용 고백의 소리는 설레설레 포옹의 소리는 쏘옥 키스의 소리는 메롱 사내연애 소리는 살금 변심의 소리는 싹 이별의 소리는 덜컹 나이의 소리는 헉 젊음의 소리는 가뿐 늙음의 소리는 가물 시간의 소리는 슉슉 좌절의 소리는 와르르 설움의 소리는 왈칵 유진이의 귀 소리는 팔랑팔랑 유진이의 머리소리는 깜빡깜빡 유진이의 마음소리는 갈팡질팡


유진이의 과거소리는 어둑어둑 유진이의 현재소리는 글썽글썽 유진이의 미래소리는 알쏭달쏭 언제 배웠지? 어디서 왔을까? 누가 알려줬지? 이름의 소리.


“ 이봐,내가 보여?” 어느 날 거리에서 홀로 서있는 유령을 본적이 있다 사람들은 유령을 배경삼아 지나갔고 투명한 막에 갇힌 유령은 한낱 가랑잎처럼 힘없이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구석에 서 있었다 그때 막 속에서 멍하니 있는 유령에서 한 여자가 다가가 고독에 대해 물었다 카페모카 커피처럼 달콤 씁쓸한 이런 고독 어떠니? 덜 익은 감귤처럼 시고 달달한 이런 고독은 어때? 치즈 케이크처럼 부드러우면서 젖어있는 고독은 어때? 비오는 날 혼자 카페에서 듣는 조용한 음악처럼 가슴 짙게 파고드는 고독은? 아니면 사월 도시의 가로수 벚꽃처럼 허공에 피었다 지는 고독은? 그러자 유령이 말했다 “ 이봐,내가 보여?”


반딧불 산들의 어깨가 내려가는 마을 숲에는 몇 시간 전까지는 볼 수 없던 세상이 생성된다 철없는 개구리들의 높은음 대결이 펼쳐지고 외출을 한 어미거미가 여차 여차 줄을 뽑아대고 잠에 빠져든 자작나무 할아버지의 숨 고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그 곳에는 걷어차인 돌멩이처럼 내동댕이쳐진 내가 있고 이런 나를 연약한 빛으로 비춰주는 반딧불이 있다 반딧불은 금방이라도 꺼져 버릴 듯한 등( ‘ )대신 애써 살아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뱅글뱅글 날갯짓을 한다 반딧불을 두 손에 감싸 점괘를 보듯 눈을 갖다 대니 막 뜬 달이 노랗게 질려 있다 감싼 손을 살며시 포개니 미온이 커져갔고 어느덧 푸른 물이 진하게 들어갔다 그리고 조심스레 입술을 내밀었다 반딧불아 ( 반딧불이 뱅글뱅글 돈다) 그냥 네가 내 옆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어


이승미

웅덩이 외 4편 웅덩이 첫 한발 내딛으면 작은 고리 또 한발자국에 작은 고리와 또 다른 고리 뱀처럼 휘감는 쇠고리인지 마주잡은 인연의 고리인지 계속해서 고리는 생겨나고 고리와 고리가 만나 얽히고설키고 고리가 있었다는 흔적만이 남을 때 문득, 흔적은 수면 밑으로 가라앉고 큰 고리 하나


방황 개미 한마리가 내 옆 과자 부스러기를 들고 힘들게 자신의 집을 향하여 가는데 괜히 심술 나서 연필로 행로를 쫒다가 어느새 자신의 길을 잃고 연필만 따라 다닌다 개미는 길을 잃은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길을 바꾼 것일까? 개미는 계속해서 연필이 그은 줄을 따라가고 나는 신이라도 되는 듯 개미에게 길을 일러준다 “ 개미야 넌 날 어떻게 믿고 따라 오는 거니?”


개나리 산책하던 길목이 오늘따라 유난히 시끄럽다 담장 넘어 어미 따라 쪼로록 따라갔다 쪼르륵 미끄럼 탄다 하나,둘,셋,넷, 하나인 듯 줄 맞추어 물공을 튀기도 하고 휘리릭 바람을 느끼기도 한다 한참을 놀다 그제야 노란 부리의 입을 벌리고 " 배고파요"


단풍 늘 보는 손짓이었다 한번은 따스함 또 한 번은 눈물의 일렁임

뿌리 속에 열정의 피가 타오르고 심장을 지나 동맥과 줄기 속 격류는 넘쳐서 피를 쏟고 그것들이 응고되고 쌓이고 그렇게 내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붉은 함박꽃 양손 한가득 들린 핏덩이 가지가지마다 뭉글뭉글 그것들이 살아 있다는 몸짓만큼이나 피가 흘러내리고 양손 가득 양분을 위해 흐린 시야 속에서도 계속해서 피를 흘린다 멈출 수도 멈추어서도 안되는 출혈 속에 손 가득 새로운 생명을 받아들고 다시 땅에 묻는다


원혜진

핸드폰 외 4편 핸드폰 불이 들어오면 요리가 시작된다 상자 속에는 여우신령님이 살아서 오늘은 부드러운 흰 살코기가 좋겠어 양념은 맵지 않게 하고 한 입 크기로 부탁해 내게 만족을 주면 별의 금화를 주지 꽃밥은 가득한데 토끼는 어디로 갔나 밤새 사라진 것들을 찾으니 우리 신령님 상자를 들썩거리며 앞발에 묻은 털을 정리하고 고기는 네 손에도 있지 오동동 오동동 두 개의 엄지로 요리되는 상자 속 여우신령님 불빛이 깜박거리고 물이 팔팔 끓기 시작하자 「 배고파요.밥 주세요」


병아리 상점으로 오세요 언제 어디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입구에서 병아리 발자국이 당신을 안내하고 문을 찾기만 하면 다 된 밥입니다 고슬고슬 지어진 밥을 주걱으로 뒤집듯이 문을 열면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문 바로 안쪽에는 무지개 동산이 모형으로 자리하고 한 발 들어서면 버터향 가득한 설탕 과자가 진열되어 있어요 모형을 만져 보고 과자 하나 맛을 볼 때 숨소리 빨아 먹는 바보상자가 환영의 메시지를 노래합니다 소리에 이끌려 좀 더 들어오면 당신이 원하던 바로 그것 그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낸 순간 당신은 행복해지고 행복을 느낀 순간 건강해지고 건강한 몸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느낀 바로 그때! 닫힌 문 너머의 다비드,비너스,불로새,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한 마리 병아리가 될 것입니다 어서오세요


앨리스의 토끼 우리 아빠 열네 살에 어린아이 성폭행해도 정신적인 문제입니다 한 마디에 오케이 TV를 켜면 SEX컴퓨터를 켜도 SEX 신문 광고에도 SEX길 가에도 SEX 온통 SEX가 넘쳐났던 거예요 토끼가 말해요 네게 엄마가 없는 것은 아빠가 잡아먹었기 때문이야 너도 잡아먹히고 싶은 건 아니지? 그럼 내 말에 따르렴 목뼈를 부러뜨려 척추를 뽑아들고 가랑이 사이로 밀어 넣고 손뼉을 쳐 사람들에게 말하는 거야 안 되는 건지 몰랐어요 쏟아지는 플래시와 왕왕대는 소음사이로 토끼의 목소리만 들려요 언제까지 이런 곳에 갇혀있을 거야 머리를 써 어른은 한 가지를 두고 하루에도 수십 번 결정을 반복하지 더 나은 결과와 더 좋은 이득을 위해서란다 그러니 앨리스 나의 귀여운 앨리스 너는 똑똑한 아이잖니 얼빵하고 도움도 되지 않는 의사를 엿먹여주렴 혼자가 되었을 때 다시 나를 찾아 원더랜드,너를 위한 나라에서 척추로드를 든 여왕으로 만들어줄게


고양이의 외출 한참을 뒹굴며 햇볕을 쬐던 고양이가 슬그머니 일어나 발 도장을 찍는다 그 뒤를 금방이라도 훅 뛰어나올 것 같은 날렵한 유선형의 그림자가 따른다 바짝 올린 꼬리 아래 휙휙 내두르는 꼬리 하나 두 갈래,세 갈래 갈라져 프로펠러가 되고 바다 속을 유영하는 잠수정이 되어 여행을 한다 팔짝 뛰어오르는 순간 새우,플랑크톤이 함께 높이뛰기를 한다 슬쩍 돌아보는 고양이 입가에는 새우 다리,생선 비늘이 수염으로 자라있다


서른한 번째 츄파춥스 딸기 같은 날은 촘촘히 박아오는 잔소리에 날 벼린 포크를 들어 중앙을 관통하고 수박 같은 날은 속에 박힌 유선형 가식 웃음에 입을 오물거리며 침을 퉤 뱉고 포도 같은 날은 옹알옹알 깊은 곳에만 틀어박힌 기피에 혀를 굴려 온 몸을 애무하고 레몬 같은 날은 달싹 몸을 떨면서도 다시 또 찾게 하는 그리움에 울고 또 울고 콜라 같은 날은 탁탁 쏘는 도도함에 콧날을 붙잡아 살냄새를 음미하고 메론 같은 날은 혀를 느믈거리게 녹여버리는 말발에 썽둥썽둥 이를 세워 입술을 씹고 초콜렛 같은 날은 까고 또 까게 만드는 유혹에 못 이겨 피부 하나만 남겨 깊이 맛을 보고 하루,이틀,삼십일 지나도록


한 시도 똑같지 않은 너의 행동에 몸은 달아올라 정신이 혼미하고 마지막 하루는 최고의 만찬으로 내 살을 회치고 츄파춥스 하나씩 뽑아먹는 것처럼 한 입 크기로 포장한 나를 먹어주면 좋겠고


김경희

폐경 외 4편 폐경 가락동 시장에서 딸기 한 봉지를 샀다 가랑이 벌려 오수에 빠져든 아주머니의 월경혈이 봉지 안에 담겨져 왔다 검은 봉지 속 딸기들은 연방 땀을 흘리고 동글동글 뭉개진 얼굴로 짜증을 내고 있었다 수돗물을 틀자 혈흔처럼 묽게 퍼진 딸기들이 동동거렸다 딸기 한 입 베물다 아삭아삭한 나를 베어 버린 새빨간 거짓말 손톱에 스며든 붉은 기억이 아스라히 뭉개진다 아 무덥고 맹맹한


순찰 반지하에 기우( – 寓) 하고 있을 때 청춘 내내 우기였다 문을 열면 곰팡이 꽃이 세상으로 만개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통로로 빠져나가지 못한 곰팡이는 꽃씨를 터트려 벽화를 만들고 부엌 쪽문을 타고 올라간 장마진 여름은 푸르스름한 바다로 출렁이고 있었다 오래된 벽지를 타고 내려오고 있는 습기는 가끔씩 달팽이들에게 포위당하기도 했다 어느 날 달팽이는 젖은 신발을 벗지 못하는 나를 걱정스럽게 불렀다 물이 새고 있어서 점검 중이라고 나는 나의 안녕을 묻는 그들이 고마워 푸른 쌈짓돈 몰래 쥐어주었다


3 1. 김양은 산부인과 문을 힘겹게 열었다 이번이 중절수술 3번째다 아이 아빠를 큐렛으로 찢어내는 상상을 한다 고래를 잡은 사춘기 소년처럼 세상 속으로 걸어간다 2. 김양의 아버지는 3년 전 부인을 잃었다 김양의 언니는 남편의 외도로 3년을 살고 이혼을 했다 김양의 오빠는 3년째 무직 상태다 김양의 아랫집 총각은 3년째 암컷의 정기를 받지 못해 날마다 같은 체위로 수음을 했다 김양의 주인집 아주머니는 시어머니 똥 기저귀를 3년 동안 수발중이다 김양의 친구는 아이 셋 낳고 돈 나가는 것 투성이라며 징징거렸다 김양의 가랑이 사이로 그들의 사정이 뿌옇게 녹아내린다 3. 양동이에 버려진 생선대가리마냥 바트에 내동댕이쳐진 死산아는 매번 사후처리 때마다 어린 간호사들을 동동거리게 만든다 바트 안에서 손가락이 꼼지락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


프레시 피쉬 걸즈 ( Fr es hf i s hgi r l s ) 그들은 언제나 떼지어 다니는 6년생 물고기들이다 그러지 못해 자살하는 얼음 물고기도 있다 이들은 환경· 온도에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요즘엔 대세에 따라야 한다 붉은 주둥이로 담배를 꼬나물고 비늘에 노란 염색이라도 좀 해줘야 있어 보인다 아가미로 존나,씨발,니좆쯤 뻐끔거려야 싱싱한 놈으로 취급받는다 지느러미 팔랑거릴 때 행여나 스치기라도 할라치면 피식거리는 썩은 미소 한방 날려주시고 백치의 주둥이로 우격다짐한다 강태공도 두손두발 다 들었다 그들은 낚시 바늘보다 더 무서운 애완용 핸드폰을 1대씩 보유중이다 가출이나 유서도 잘 먹히는 무기다 오늘도 정의의 포식자들은 무리지어 초고속 인터넷보다 빠르게 이동한다 도시의 수심은 얕아지고 그들은 계속해서 산란중이다


택리지 -서울기행 무덥고 습한 6월이었다.서울역광장에는 겨울 안개 같은 시간이 뿌옇게 내리고 있었다.장충동 약수동 옥수동 압구정을 이중환처럼 걸어다녔고 지하철을 타고 대교를 겅중겅중 오르고 그곳의 기록들을 메모하였다.어느 할인점에서 산 냉동만두를 먹고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쓰레기 만두였단다.나는 쓰레기처럼 주소가 없었다 서울은 날마다 사건이 터졌고 지상으로 기록되었다 옆방에서 밤마다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한 집에 사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손에 닿지도 않는 창문을 열면 등 돌린 벽이 나와 마주했다 장마로 얼룩진 기운은 벽을 타고 곰팡이 꽃을 새록새록 피워냈다 주인아저씨는 자신의 방처럼 빈방에 들어와 곰팡이 꽃을 꺾어갔다.유행가 가사처럼 비 오는 명동을 걸어보았지만 그대나 고향 따윈 그립지 않았다 서울은 겨울처럼 단단했고 나는 슬렁슬렁해서 서울 시민이 되지 못했다 내 등에서 세간이 덜거덕거리며 지방 소도시까지 엉겨 붙었다.뿌리는 자리를 찾지 못하고 엉뚱하게 몸을 휘어 감고 살을 파고들었다 냉장고도 열리고 책상도 열리고 식탁도 열리고 화장대도 열리고 옷장도 열렸지만 뿌리는 어디에도 닿지 못했다 무거웠다 하지만 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소설

1 1 안녕하십니까.9시 뉴스 속보입니다.ABC심리교육센터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세계적으로 유명한 심리학 박사이자 심술사라는 별명을 가진 한태준 박사가 숨을 거뒀습니다.현재 검찰에서는 자살인지 타살인지에 대한 조사를 하고 있는 가운데 이미 부검을 신청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범죄는 기억에서 시작된다.자신은 기억이 없는듯하나 그것은 단지 커다란 창고,뇌 속에 기억을 숨기고 있을 뿐이다. “ 조두순씨.지금부터 제가 하는 질문에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답변 하시면 됩니다. 아시겠죠?” “ 네……. ” “ 자 그럼 눈을 감으시고 머리 속에서 이미지를 떠올리며 제 질문을 들어주세요.제 말이 있기 전까진 절대 먼저 눈을 떠서는 안됩니다. 조두순씨는 지금 아침 출근길 버스 안에 있습니다.그런데 갑자기 조두순씨 앞에 있던 여자가 도둑이야!하고 크게 외쳤습니다.그리고는 범인으로 당신을 지목합니다.하지만 범인은 다른 사람으로 밝혀졌고,여자는 당신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하고 가버립니다.지금 기분이 어떠세요?” “ 화납니다.지금 그 여자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 “ 따라가서 어쩔 생각이시죠? “ 죽일 겁니다. ” “ 어떤 방법으로요?” “ 엘리베이터를 탑니다.여자와 함께 탑니다.여자는 11층을 눌렀습니다.저는 10 층을 누릅니다.10층에 문이 열리면 비상계단으로 뛰어갑니다. ” ” “ 왜요?” “ 여자보다 빨리 11층에 도착해야 하니까요.11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길 기다립니다.문이 열리는 순간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


소설 “ 자자 눈을 뜨세요.조두순씨 방금 전 이미지는 모두 지워버리세요.조금 쉬고 다른 얘기를 해보도록 하죠. ” 사이코패스 테스트 사이코패스는 인격적 결함의 일종으로 반사회적 인격장애 중의 하나이다.원인은 뇌의 전두엽의 이상이 오는 것 때문으로 알려져 있으며,이 증상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사이코패스라 부른다.사이코패스들은 감정을 관여하는 전두엽이 일반인들처럼 활성화되지 않기 때문에 감정을 느끼는 데 매우 미숙하다.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해 이기적이며,대단히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행동을 한다. 대부분의 사이코패스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연쇄살인마가 되는 것이 아니라 폭행이나 상습 절도,강도 같은 범죄를 우발적으로,연속적으로 일으켜서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경우가 많다.거짓말에 매우 능하고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나도 눈 하나 꼼짝하지 않으며 곧바로 다른 거짓말을 생각해내기도 한다.뻔뻔하게 어떤 말이든지 아무렇지 않게 내뱉기 때문에,매우 무식한 사람이라도 아주 박식하고 매력적이며 유능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사이코패스는 주어진 환경적에 따라 다양하게 발현한다.이들은 계산적인 행동과 표정과 말투로 사회에서 능숙히 섞여 지내고 환경에 따라 발현되는 정도가 달라 범죄를 했을 때만 사이코패스를 일반인과 구분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진다.그래서 보통 사이코패스를 ' 반사회적 인격장애'라 부르기도 한다. 심리학을 연구한지 20년이 다되어 간다.하지만 최근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범죄자들의 범죄심리 대한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 이번 연구의 목적이다. 결과적으론 조두순은 사이코패스가 유력하다. “ 조두순씨 차 한 잔 드릴까요?” “ …………” “ 조두순씨 차 한 잔 드시면서 천천히 얘기를 좀 더 해봅시다.조두순씨의 어린 시절을 어땠나요?아무 얘기든 상관 없습니다.떠오르는 생각을 얘기하면 됩니다. ” “ 저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가 없었습니다.유치원에 처음 간 날 이었죠.선생님이 저에게 아빠가 무슨 일을 하냐고 물었는데,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주위에서는 수근 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저는 집에 울면서 들어갔지만 어머니는 저에게 무관심했고 그 뒤로 저도 모든 것에 무관심하게 되었죠.그래서 어린 시절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 ”


소설 의식( 意識) “ 선생님 수업 끝날 시간인데요. ” 어떤 학생이 수업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불쑥 내뱉은 말이다. “ 벌써 그렇게 시간이 되었나. . .오늘 수업은 이걸로 마친다. ” 여기 저기 환호성이 터지고 매번 수업은 그렇게 끝난다. “ 있잖아…… 두순아 같이 학원 마치고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갈래?” 그리 싫지만은 않다. “ 그래” 식당에는 사람들이 참 많다.그래서 어디선가 속닥거리는 소리가 자꾸 귀에 거슬린다.뭐라고 속닥거리는 걸까?내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무슨 얘기를 하는 거지?나를 아는 사람들인가?도저히 밥을 먹을 수가 없다. “ 두순아.왜 그래?맛없어?” “ 어디서 자꾸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아서 신경 쓰여. ” “ 다른 데로 갈까?” “ 아니.괜찮아.그냥 먹자. ” 사람들은 누구나 어떤 위기감을 느끼면 의식이란 걸 하게 된다.뚱뚱한 사람은 만원인 버스를 타면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자기 때문에 비좁음을 느낄 것이라 의식하기도 하고,운동 경기 중 실수를 한 사람은 팀이 지게 되면 자신의 실수 때문에 팀이 져서 모두가 욕하고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있다.막상 주변 사람들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데 말이다.이상하지 않은가?같은 장소 같은 상황에서 서로 다른 생각과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것 말이다.지나친 의식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조두순처럼 말이다. “ 학창시절엔 어떤 학생이었나요?” “ 저는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학교에서 공부를 잘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못하는 편도 아니었죠.주로 혼자 집에서 게임 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그저 그렇게 평범했죠. ” “ 친구들을 만나 놀지는 않았나요?” “ 누군가를 만나서 놀기보단 게임에서 친구를 만들고,같이 게임을 즐겼습니다. 게임에서는 어떤 일이든 인정이 되고,가능합니다.불가능이 없죠.사냥을 하고, 싫어하는 친구를 죽이고……거기서 어떤 쾌감을 얻었죠. ” “ 맞아요 바로 그거죠!게임을 많이 좋아하셨나 보군요.그런 기분 저도 잘 알 것 같습니다.하하.차를 다 마시셨네요.차 한 잔 더 하시면서 얘기를 계속 해보죠.김 비서 여기 차 한 잔만 더 줘”


소설 중독( 쾌감) 중독!독물이 체내에서 작용하여 기능장애를 일으키는 경우를 일컫는 용어이며 급성 중독과 만성 중독이 있다.약물 중독,독극물 중독,가스 중독,세균 중독 등의 종류가 있다.하지만 최근에 들어와 새롭게 게임 중독이라는 말이 나타났다.이는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게임을 하면서 보낼 정도로 게임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일상적인 활동이 현저하게 줄어들며,게임을 하지 못하면 초조하고 불안해지는 상태를 말한다.인터넷 중에는 특히 게임은 사용자들의 중독 비율이 가장 높은 부문이다.게임 중독의 원인으로는 크게 게임자체의 특성에 따른 원인,게이머의 심리적인 부분에 따른 원인으로 볼 수 있다.조두순은 게임중독이다.게임중독이 심해지면 현실환경과 게임환경을 구분 못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그래서 게임중독이 조두순의 범죄심리에 영향력을 미쳤을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말이다. “ 조두순씨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요?” “ 없습니다. ” “ 그럼 좋아했던 사람은 있었겠죠?” “ 잘 모르겠습니다. ” “ 제가 듣기론 조두순씨와 1년 넘게 사귄 여자친구가 있었다고 하던데,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변화 대학교에 들어오면 TV프로그램에서 보던 그런 대학생활을 꿈꿨다.하지만 막상 현실은 달랐다. “ 성수야.대학교 들어오니깐 어떠냐?” “ 솔직히 처음엔 TV에서 보고 듣던 거랑은 많이 달라 실망했는데,시간이 지날수록 재미있어. ” ” “ 칫.뭐가 재밌냐. ” “ 네가 애들이랑 어울리지 않으니깐 그런 거지.그러지 말고 이번에 MT가는데 너도 가자.가보면 너도 확 달라질 거야. ” 이 단순한 사건이 내게 불러올 변화를 그땐 알지 못했다. “ 다들 술 잔 들어 올리시고.우리들의 즐거운 대학 생활을 위하여” “ 위하여” 술을 처음 먹어 본 것은 아니었지만,술을 그렇게 많이 마셔본 일은 처음이었다. 정신이 몽롱하고,머리가 자꾸 흔들렸다.다리는 흐물흐물 힘이 안 생겼고,온 몸이 뜨거웠다. “ 두순아 술 많이 먹었어?바람 좀 쐬러 갔다 올까?”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여자 아이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소설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여자 아이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겨울이라 차가운 바람이 불었지만 그 바람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숨을 깊이 들어 마시고 내 쉬기를 반복적으로 하고 나니 정신이 조금씩 돌아왔다.옆을 보니 떨고 있는 여자 아이가 있었고,처음으로 먼저 얘기를 꺼냈다. “ 춥지?이제 그만 들어가자. ” “ 아니 괜찮아.조금 걸을래?” 여자 아이와 한참을 걷다가 눈 앞에 트럭이 나타났다.트럭에선 뜨끈한 오뎅을 팔고 있었다.나는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손을 넣고 끄적거려 보니 대략 5~6백원 정도의 동전이 있는 것 같았다. “ 오뎅 좋아해?먹을래?” “ 응.좋아해.좋아해. ” 오뎅꼬치를 하나 집어 들고 여자 아이에게 건네자 여자 아이는 나는 오뎅을 왜 안 먹느냐고 물어왔다.나는 혹여 내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까 국물을 후르륵 마시며 아직 속이 안 좋다고 말했다. 습관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핸드폰에서 문자소리가 울렸다. “ 두순아.우리 한 번 사귀어 볼래?” 그 여자 아이에게 온 문자였다.잠시 멍했다. 그렇게 나의 첫 연애가 시작되었고,내 생활의 변화가 몰려 오기 시작했다. 매일 학교 가기 전 집 앞에 데리러 가기,먹고 싶은 거 같이 먹으러 가주기,사고 싶은 거 같이 보러 다니기,재미있는 얘기 해주기,집에 데려다 주기,잠 올 때까지 통화해주기.이 것이 나의 하루 일과가 되었고,이 중에 하나라도 빠뜨릴 때면 항상 싸우고,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게 반복되어 습관이 돼버렸다. 분노 “ 여보세요.미정아.나야.고참이 생일이라고 전화시켜줘서 전화했어.요즘은 전화를 해도 안받아서 무슨 일 있나 걱정했었는데,별일 없는 거지?” “ ……응.별일 없어.그런데 이제 네 생각이 안나. ” “ 그그 그게 무슨 말이야?” “ 미안해……” 그렇게 전화는 끊어졌고,첫 정기휴가를 얻어서 나간 날 친구녀석에게 여자친구가 선배랑 바람이 났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그래서…… 사람은 태어나서 세 단계로 변화한다.엄마와 아빠를 보면서 한 번 변하고, 학교에서 친구들을 만나 두 번 변한다.그리고 세 번 변할 때가 연애를 시작하면서이다.조두순도 세 번의 변화를 거쳐왔지만,이 과정을 주목해 볼


소설 있다.어쩌면 조두순은 현대사회가 만든 대표적인 인물일지도 모른다.이혼의 급증으로 인한 가족의 붕괴,사이버화 된 놀이문화로 인한 건강한 청소년 놀이문화 파괴,가벼운 사랑으로 인한 성 상품화,혼전 임신과 낙태 등등이 현대사회의 현 주소가 된 것이다. “ 좋습니다.좋습니다.전 충분히 조두순씨를 이해 할 수 있습니다.저는 보통 사람들과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거든요. ” “ 선생님 얘기도 듣고 싶네요. ” “ 어떤 얘기 말이시죠?” “ 그냥 아무 얘기나……” “ 네.그럼 그러죠.저만 너무 편했던 것 같으니.특별히 제가 어떤 사람인지 얘기해드리겠습니다. ” 사람들은 제 이름은 잘 알지 못합니다.저는 제법 유명한 사람인데도 말이에요. 저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181c m 몸무게 72kg탄탄한 가슴근육과 단단한 복근을 가졌으며 굵직하고 탱탱한 허벅다리를 가지고 있죠.얼굴 생김새를 보자면 얼굴이 아주 작고 쌍꺼풀 없이 살짝 쳐진 눈에서 나오는 눈웃음이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전 솔직한 성격이라 배배 꼬아서 말하기 보단 직선적으로 말하는 것을 즐깁니다. 요즘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설픈 칭찬이 아니라 충격적인 충고가 필요하죠.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저를 심술사라 부르더군요. “ 딩동댕동 동댕딩동” “ 어이.다들 모여.사오리,칸.이리와.뭐야 브라이언!넌 또 어디가! ” “ 미. 미 미안.나 또 도시락을 나두고 왔어 얼른 다녀올게.조금만 기다려. ” 이 곳은 아이큐 50이하만 온다는 다국적특수목적학교이다.이 학교의 전교생은 나를 포함해 4명이다.하지만 브라이언 때문에 우리 학교는 언제나 정신 없다. 브라이언은 19살,우리 학교에서 유일하게 나와 동갑내기로 자꾸 깜빡깜빡하는 희귀 병에 걸린 정신병자이다. 브라이언은 오늘 아침에도 학교에 도착하자 집에 가방을 나두고 왔다며 집으로 다시 돌아간다. “ 사오리!저기 브라이언 등짝에 덜렁거리는 거 가방 아니야?등껍질이야?” “ 맞는 것 같은 데……가방……” “ 역시…… 정신병자! ”


소설 아침부터 그런 맹활약을 하고도,점심시간이 되니 역시 또 실망시키지 않는 브라이언이었다. “ 브라이언 도시락은 확실히 가져온 거야?” “ 응.일부로 손에 쥐고 왔어.안 까먹으려고.어?어?어디 갔지. ” “ 멍청한 놈.너 같은 놈은 정신이 들 때까지 두들겨 맞아야 돼! ” “ 미. 미 미안.정말 내가 잘못했어.한 번만……” “ 넌 정말 음식물 쓰레기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이야! ” “ 준!그만해.얼른 밥 먹자.브라이언.오늘은 내 도시락 같이 먹자. ” “ 응.고마워. ” 항상 밥을 먹은 후엔 생각에 잠긴다.매번 같은 생각을 하지만 그 답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왜 이런 학교에 와야 한 것일까?”이런 생각에 빠진 것은 어느 정도 이유가 있었다.바로 이 이상한 녀석들이 의문의 시작점이다. 먼저 브라이언은 19살이며 이곳에 온지 6년이 지났다고 한다.브라이언은 미국인인데 내가 보기엔 말더듬이에다 기억력이 안 좋아서 매번 깜빡깜빡하는 정신병자가 분명하다.그런데 내가 놀란 것은 수학시간이었다.수학 선생은 브라이언에게 유독 어려운 암산문제를 자주 물어보곤 했다.그런데 브라이언은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답변을 했고,옆에서 계산기를 두드려서 확인해본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 브라이언!8388628x3은 뭐지?” “ 이천오백십육만오천팔백팔십사 입니다. ” “ 하하 칸!계산기 줘봐.저 정신병자가 마음대로 답을 말하고 있잖아. ” “ 준이 형 칸 형은 암산의 천재예요. ” “ 흥.말이 되는 소릴…………말도 안돼! ” 우리 학교에서 유일한 여자 사오리는 일본인이다.사오리는 매우 침착하면서 냉정한 친구다.사오리를 처음 본 것은 전학 오는 날 신호등 앞에서였다.전학 첫 날부터 늦잠을 자서 뛰어오다 신호등에 걸려 기다리는데,그때 내 옆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던 한 여자애가 바로 사오리였다.얼핏 봐도 초등학생 몸에 웃음기 없는 앳된 얼굴이었다. “ 저기 애야.지금 몇 시냐?” “ 7시 19분 27초” “ 아니 시계도 보지 않고 어떻게 시간을 말해.장난하는 거야?” 신호가 바뀌자 여자애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뛰어갔다.나 역시 바쁜 상황이라 내 갈 길을 가야 했다.믿기 어렵겠지만 알고 보니 사오리는 시계가 없어도 시간을


소설 알 수 있는 특수한 뇌 능력을 가진 아이였다. 마지막으로 우리 학교의 막내 칸은 몽고에서 온 9살 소년으로 엄청난 시력을 가지고 있다.자신의 말로는 100미터 뒤에 있는 바늘을 볼 수 있고,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 세 명과는 달리 난 그저 평범한 인간이다.내 이름은 태준이다.한태준.여기 인간들은 모두 날 준이라고 부른다.저 세 명처럼 특이한 능력이 내게는 없다.단지 저들과 다른 게 있다면 난 내 감정에 충실하다는것이다. “ 헤이 준.오오늘 오후 야구 시합 티켓이 생겼어 가가같이 갈래?” 브라이언이 웬일로 마음에 드는 짓을 하려나 보다. “ 뭐?왜?같이 보러 가준다는 사람이 없나 보지?흠 좋아 특별히 같이 가주지. ” “ 헤헤 미안해.땡큐 고고마워. ” 브라이언 내 이름은 브라이언.나는 야구를 좋아한다.미국에 있을 때부터 야구선수였던 아버지처럼 멋진 야구 선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그리고 언젠가 꼭 그 꿈을 이루겠다고 생각해왔다.하지만 이곳에 와서 그 꿈과는 점점 멀어져 갔다.이 학교에서는 야구를 할 수가 없다.나를 포함해 전교생이 4명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거기다 한 명은 여자 아이고 한 명은 나이가 어려서 같이 캐치 볼 조차 즐길 수 없다.그러다 얼마 전 한 명이 전학을 왔다.그 애는 16살로 나와 동갑이었고,온순해 보이는 눈매가 인상적이었다.아주 잠시였지만 말이다. “ 안녕.내 이름은 브라이언이야.네 이름은 뭐니?앞으로 친하게 지내자.알았지? 난 네가 맘에 들어” “ 아주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하는 구만.꺼져.고!홈!양키! ” “ 미. 미 미안해……” 그때부터였을까.내가 준을 만나면 습관처럼 말을 더듬기 시작한 게 말이다.3년이 지나 19살이 된 지금도 난 여전히 준 앞에서 말을 더듬는다. 준은 학교 내에서 심술사라고 불린다.뭐 학교 내라고 해 봤자 사오리와 칸이 전부지만 말이다. 준의 생일 날이었다.사오리는 준의 선물로 종이학 1000마리를 접어서 예쁜 유리병에 담아 선물했고,칸은 정성껏 쓴 편지와 직접 쿠키를 구워서 선물했다. 그때 준은 선물을 받고 이런 말을 내 뱉었다. “ 사오리!정말 고맙다.나도 네 생일날 똑같이 색종이 1000장을 주면 되겠구나. 그리고 칸!이 맛없는 쿠키를 만들 돈으로 차라리 수퍼에서 쿠키를 사오지 그랬냐.


소설 이 멍청아! ” 이러고는 내가 선물한 야구 글러브와 공을 들고 나가버렸다. 그때까지도 난 사실 준을 왜 심술사라고 부르는지 이해가 안되었다.하긴 내가 너무 무신경해서 일지도 모르겠다. 사오리 준을 처음 만난 건 학교 가는 길 신호등 앞에서였다.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고 있는데 한 남자 아이가 내 옆에 서 있었다.얼굴이 아주 작고 곱상하게 생긴 얼굴에서 기괴한 무서움이 느껴졌다.그때 내게 말을 걸어왔다. “ 저기 애야.지금 몇 시니?” “ 7시 19분 27초” 순간 너무 떨려서 7시 19분 27초라는 말만 했다.그러자 그 남자가 뭐라 뭐라 말을 했는데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신호가 바뀌자 나는 얼른 이 상황을 피하고 싶어서 냅다 학교로 뛰었다.그 후 3년간 준과 함께 학교를 다녔다. 준에겐 브라이언이나 칸처럼 눈에 보이는 특별한 능력은 없었지만,사람의 얼굴표정, 말투만을 보고도 상대의 심리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하지만 그런 능력을 가지고도 남에게 상처 주는 말들을 망설이지 않고 내뱉었다.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심술사이다. “ 전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그런 학교에 다녔어요.당신과는 조금 다른 경험을 했죠. 그때 생겨난 별명이 왜 지금도 불리고 있는지 전 잘 모르겠어요.하지만 재미난 별명임에는 틀림없습니다. ” “ 그렇네요……제가 비록 범죄자이긴 하나 선생님 이야기는 밖에 있을 때 많이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선생님은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있으신가요?” “ 질문의 의도를 잘 모르겠군요. ” “ 선생님도 알다시피 전 살인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첫 살인이 군대 제대 후 바람 난 여자친구를 죽인 일이었습니다.여자친구를 죽이려는 찰나에 여자친구는 저에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 잘못했어.내가 정말 잘못했어.사. 살 살려줘. ” “ 네네.알겠습니다.흥분을 가라 앉히시고,화제를 바꿔볼까요?” “ 선생님도 선생님께서 하신 첫 살인을 기억하고 계신가요?” “ 안타깝게도 전 살인을 해본 기억이 없습니다.자자 다른 이야기를 해봅시다. ” “ 아아 그렇겠군요.수백 명을 죽인 선생님에게 첫 살인이 기억 날리는 없겠군요. ” “ 마치 제가 살인하는 것을 직접 본 사람처럼 말씀을 하시네요. ” “ 네.직접 보았지요.당신의 그 잘난 입 방정 때문에 동생이 제 눈 앞에서 죽은 것을


소설 보았지요. ” ” “ 그게 무슨 말 입니까.동생이 죽다니요. ” “ 선생님께선 인터넷 사이트에서 온라인 심리상담을 무료로 해주시고 계시더군요. 한 날은 제 여동생이 남자친구와 헤어진 다음 날 선생님께서 운영 하시는 온라인 심리 상담란에 질문을 올렸더군요.질문은 이랬습니다.“ 선생님 저 우울증인 것 같습니다.죽고 싶은 심정입니다.어떻게 해야 하죠?정말 죽고 싶어요! ” 선생님께선 이런 답변을 남기셨더군요.“ 정말 죽고 싶으세요?그럼 죽으세요.죽을 용기나 있습니까!사람이 죽는 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세수 한 번하고 정신 바짝 차리세요. ” ”그걸 보고 동생은 자살 했습니다. 심술사다운 아주 좋은 답변입니다.손 끝 하나 까딱해서 사람의 심리를 이용하여 수백 명의 목숨도 앗아갈 수 있는 선생님이야 말로 이 시대를 대표하는 희대의 살인마 아닙니까. 크크크큭큭” “ 그만.거기까지만 하시죠.오늘은 이것으로 상담을 마치겠습니다.김 비서! 최형사님 불러주게. ” “ 박사님 수고하셨습니다.연구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조금 건지셨습니까. ” “ 네.조금……최형사님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 “ 전 괜찮습니다.박사님 안색이 안 좋으신데 혹시 안에서 무슨 일이라도. ” “ 아닙니다.괜찮습니다. ” “ 네.그럼 이만.아!조두순의 다음 상담은 못할 것 같습니다.그 날 마지막 재판 판결이 있습니다.아마도 무기징역이나 사형선고를 받겠지요. ” “ 그렇군요.알겠습니다.조심해서 가십시오. ” “ 선생님!오늘 즐거웠습니다.그리고 영광입니다.희대의 ……. . 살인마 크크 큭큭큭” “ 무슨 헛소리야.얼른 차에 타!박사님 가보겠습니다. ” 피고 조씨는 살인 및 사체손괴,사체유기,사체은닝,공무원자격 사칭 미성년자 강간 상해 등 9가지 죄명으로 기소된데다 최근에는 서울서부지법에서 재판 중이던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절도 협의가 병함돼 10가지 죄명으로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 규정을 적용해 협의한 결과 징역 30년을 선고합니다. 탕! 탕! 탕! “ 브라이언 뉴스 할 시간이야 야구 그만 보고 뉴스 좀 틀어봐. ” “ 벌써?시간이…… 사오리.뉴스 끝나면 다시 불러줘.난 뉴스 안 봐. ” 안녕하십니까.뉴스 속보입니다.희대의 살인마 조씨가 오늘 마지막 재판에서 징역 30년이라는 비교적 작은 형벌을 받았습니다.최소 무기징역이나 사형을 선고 받을 것으로 알려진 사실과는 다르게 30년 이라는 형벌에 벌써부터 온라인 상에서


소설 네티즌들은 크게 광분하고 있습니다.자세한 이야기는 현장에 나가 있는 김영희 리포터를 통해 알아보겠습니다.김영희 리포터 나와주세요. 다음 소식입니다.최근 ABC심리교육센터에서 발생한 고 한태준박사의 죽음은 자살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검찰에선 현장에서 발견된 유언장에 남겨진 필체와 한태준 박사의 필체가 일치했고,부검 결과 독약성분인 스트리크닌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이에 국민들은 한태준 박사의 유언장을 공개하라 주장하고 있지만,검찰에선 사적인 개인의 유언장을 사회에 알릴 수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사람이 살고 죽는 다는 게 참 쉬워졌구나.지금 사회에는 모든 사람들의 손에 칼과 총이 들려있다.최근 끊임없이 나오는 연예인 자살 사건.아동성범죄 사건,끔찍한 살인 사건들이 왜 이렇게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사회가 만들어내고 있는 괴물들 때문일 것이다.사이코패스? 우리는 흔히 이상한 짓을 하고 남들과 달리 혼자 튀는 사람을 돌아이,사이코라고 부른다.사이코패스는 이들의 진화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사람들은 알아야 한다. 사람의 순간적인 심리가 괴물로 진화할 수 있다는 것을…… 가끔은 거울을 보라. “ 내가 괴물인 것을……” 한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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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푼 한푼 오래 삶긴 나물은 씹히는 맛이 부족했다.콩조림은 이가 아플 정도로 딱딱했고 국으로 나온 미소된장은 얇게 썰린 무맛만,김치는 맥없이 싱거웠다.날씨가 더운 탓에 물배가 차 있었다.때문에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오후 작업을 위해 밥을 삼키고 있었다.노가다장에서 쓸 힘이라면 맛있는 음식이 아니어도 좋다. “ 아,씨발… 거참 더럽게 맛없네.그자?이래 큰 조선소에 식당밥이 이게 뭐고?” 급식소를 나오던 최씨아저씨가 담배를 물고 내 옆에 섰다.라이터를 찾기 위해 한참 주머니를 쑤시던 아저씨는 구겨진 천원짜리 지폐한장을 내밀었다. “ 커피한잔 묵자” 커피를 뽑아오니 아저씨의 주름진 손에 있는 담배는 벌써 반이나 타 없어져 있었다. 왜소한 몸이었지만 까무잡잡한 피부와 솟은 핏줄이 그의 이력이 되어주고 있었다. 아저씨는 판넬위에 앉아 다리를 쫙 벌리고 뽑아온 커피를 받았다.곧 담배가 만들어낸 누런 가래를 땅에 뱉더니 커피를 입에 대며 나를 쳐다봤다. “ 니는 학생이제?” “ 네.지금 대학교 다니고 있어요. ” “ 무슨과?” “ 법 공부하고 있는데 여긴 그냥 용돈 벌려고 왔어요.알바에요.알바. ” 한동안 나를 골똘히 보던 그는 다 탄 담배를 던지고 판넬 위에 드러누웠다.나도 같이 옆 판넬에서 점심시간이 끝날때까지 누울 요량이었지만 조선소 하청 소장이 다가오고 있었다.나는 엉거주춤하게 일어나 소장을 바라보았다.소장의 얼굴은 심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나는 아저씨의 다리를 조금 흔들어 깨웠다.상체를 일으킨 아저씨는 소장과 눈이 마주쳤다. “ 당신 그 판넬 망가지면 다 물어낼꺼요.당장 내려와요. ” 거친 말을 한 뒤,소장은 다른 작업장으로 발을 옮겼다.최씨아저씨는 소장이 갈때까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리고 벌떡 일어나 완성되지 않은 배의 간판 위로 올라갔다.번화가 고층건물보다 큰 배 안으로 아저씨의 모습이 사라졌다.나도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에 나름대로 쉴 곳을 찾아야 했다. 여름방학은 내게 더 이상 바다의 계절이 아니었다.인터넷 신문에서는 친구, 연인들과 피서를 가는 인파가 해운대로 몰려든다고 떠들었다.해변에는 사람들이 넘쳐났고 매일 밤 축제가 벌어졌다.밤새 먹은 술병들이 관광지를 망치고 있다며 관광객의 주의를 요구하는 기사도 있었다.하지만 내가 이제부터 들어갈 사이트는 민박펜션사이트도 아니었고 관광지 길찾기 프로그램 사이트도 아니었다.취업의 새 시대를 열어간다는 아르바이트 사이트였다.언제부터 새로운 시대의 취업이 아르바이트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물론 작은 회사의 정규직보다 아르바이트로 얻는 수입이 좋기 때문에 그렇게 보아도 무리가 없을지 모른다.인기가 좋은 아르바이트자리를 얻는 것은 취업만큼이나 어렵기도 하다.그래서일까.나는 사이트에서 얻은 정보로 열 곳이 넘는 곳에 이력서를 냈지만 연락 오는 곳이 없었다. 달랑 4평짜리인 편의점에서 경력과 좋아하는 것,어떤 공부를 주로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도 성실히 답했다.사장이 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곳에선 30분동안 서있기도 했고 12시간동안 근무하기를 요구하는 PC방 사장이 컴퓨터를 사용하면 안된다는 말을 했을 때에도 당당하게 ‘ 예스’ 라고 대답했다. 인간 마루타가 되어보겠다는 생각에 제약회사 생동성 실험 참가에도 이력서를 아끼지 않았다. 이토록 학생인 내가 일에 집착하는 이유는 집에 돈이 없기 때문이다.남들처럼 내 용돈,내가 벌어서 쓰려고 일을 한다면 편할지도 모른다.하지만 나는 이제 몇 학기 남지 않는 대학의 등록금을 마련해야 했다.그런데 아무에게도 연락이 오지 않는 것이다.결국 나는 새벽 4시에 일어나 군대에서 쓰던 전투화를 챙기고 무릎이 터진 면바지와 후줄근한 남방을 가방에 쑤셔놓고 인력사무소를 찾아가게 되었다. “ 김씨,이번에 조선소쪽으로 가야겠는데. ” “ 아 소장님.전 이제 그쪽으로 안갑니다. ” “ 그럼 박씨…… 이번에 한번 갈래. ” “ 저도 안갑니다. ” “ 그럼 정근아.니가 한번 갔다와라. ” “ 저 하루만 쉬면 안됩니까?” “ 왜?니가 몇일 일했다고 쉬노?” “ 쉬고싶어예…… 그리고 그 조선소 반쯤 지어놔가지고 통로도 좁고 일거리도 많고……. ” 소장이라는 사람은 정기적으로 출근하는 사람에게 일거리를 주려고 했으나 이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었다.사장은 인부들과 눈이 맞을 때마다 실패하더니 결국 나에게 송신장을 건냈다.


소설 “ 자,일단 니가 가고.나머지 한명더.한명더 없소?…… 아니 인력에 선수들이 이렇게 많은데 용병을 불러야하나?어이… 거기 최씨.이번 한번만 더 가주소.프로 아니요?” “ 소장이 가라면 가야지. ” 최씨라는 아저씨는 소장의 말에 거드름을 피우며 일어섰다.그렇게 최씨아저씨와 같은 작업장에 투입되게 되었다.하지만 판넬에서 내려오라는 소장의 말에 화가 단단히 났는지 아저씨의 모습은 없어져 있었다.최씨아저씨는 어깨를 떨며 다른 용역사람들과 소장을 헐뜯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 아따,형씨 왜 그렇게 화났소?저번에 몸 주고 돈 준다는 가시나가 욕이라도 했소?” “ 이 놈의 소장이라는 놈이 합판에 좀 앉았다고 막말 안하나.내가 앉을만 하면 앉는거지!그거 앉는다고 찌그러지나!내가 지보다 노가다 경력은 더 된다 이거다. 내가 얼마나 자존심이 쎈데.여자가 매달려도 내한테 실수 한번이면 클나는건데. ” “ 그러게 그때 그 돈 많은 여자 잡아가지고 조용히 살지,왜 이 고생입니까?” “ 그런거 없다.내 마음에 안들면 끝인거지. ” 아저씨들의 이야기는 크레인이 물건을 싣고 올 때까지 계속 되었다.한명이 기수가 되어 화물이 착지할 곳을 표시했다.화물은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지만 무거워 보였다.누군가 머리를 부딪치거나 몸이 깔릴 수도 있었다.화물이 흔들리지 않게 두 명의 인원이 달라붙었다.도중에 화물이 최씨아저씨의 머리 위를 근접하게 지나가자 아저씨는 다시 화를 내기 시작했다. “ 우리는 하이바 안주나?하이바?” “ 조금만 기다리소.좀 있으면 갔다 준다니까. ”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하청업체 직원이 짜증난 목소리로 답했다.하지만 자신들은 하이바에 발목 보호대,토시까지 착용하고 있었다.그러한 모습이 보이는지 최씨아저씨는 바닥에 침을 뱉어냈다.나무와 비닐로 고정된 포장을 뜯고 안에 있는 물건을 날랐다.다른 용역에서 온 아저씨 두 명이 물건을 같이 들어 나르기 시작했다.하지만 한명이 하나씩 들어라는 하청업체 직원의 말에 모두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 까짓것 해보지.해본다.해봐. ” 최씨아저씨는 일그러진 얼굴표정을 하고선 낑낑대며 두꺼운 합판을 날랐다.나 또한 혼자 힘으로 합판을 날라야했다.두 손에 쥐어진 것들이 무겁기도 했지만 구름이 걷힌 오후는 무더웠기에 두 세번 옮긴 것으로도 온몸에 땀이 났다.어디선가 땜질을 하는지 날려 온 철가루가 목에 달라붙었다.장갑을 벗어 목을 닦으니 구정물처럼 변한 땀이 점심으로 먹은 된장국 같았다. ‘ 영양가가 없으니 목으로 바로 빠져 나오는건가. ’


소설 먹은 것도 없으니 조금 쉬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자리에 앉으려 했다.하지만 곧 소장이 오는 바람에 장갑을 다시 껴야했다.먹은것도 없는데. 일을 마치고 소장을 찾아가 일당을 요구했다.하지만 소장은 내일 주겠다라는 말과 함께 짐을 챙겨 사무실을 나가려 했다. “ 아니,누가 내일 또 온답니까?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데 뭘 내일 준단 말입니까? 일당쟁이들 일당을 그날 챙기주야지.돈도 없으면서 사람 불렀는교?” “ 아니,누가 막말하래.우리가 당신네 인력이랑 하루 이틀 거래한것도 아니고. 조선소 업체가 그런 푼돈도 못주겠소? 그렇다고 저 만들어논 배 버리고 도망가는것도 아니고.내일 오면 내일 주겠다는데 그게 뭐 어때서 그럽니까! ” 싸움 끝에 인력사무소 소장에게 전화가 왔고 내일 소장 통장으로 돈을 넣어준다는 말을 듣고서야 최씨아저씨와 나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 자,오늘은 8명 가야하는데… 누가 갈까?” 나는 어제 돈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금 조선소에 갈 수밖에 없었다.소장에게 다른 곳으로 보내달라던 아저씨들도 모두 조선소에 송출되었다.작업복을 갈아입고 일을 시작하려는데 저녁 늦도록 움직이던 크레인이 배 갑판위에 무엇인가를 잔뜩 쌓아놓은 것이 보였다. 일이 시작되고 여기저기서 기계음이 들렸다. 그때 최씨아저씨는 소장에게 가서 말도 안된다는 표정과 과장된 행동으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설명중이었다.다른 아저씨들은 오늘 무슨 일을 할지 걱정스런 눈빛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그때 하청업자 직원이 나타나 우리에게 작업 지시를 했다. “ 아저씨들,자 이제 담배 끄고.오늘 할 일은 여기있는 목재를 들고 계단을 타고 올라가서,또 위로 올려서… 저기 있는 통로 보이지요.저 안으로 들어가서 창문안쪽에 쌓아 두면 됩니다.아시겠지요?” 아저씨들은 멍한 표정이 되었고 나는 목재를 한번 들어보았다.길이 3m가 넘는 목재는 50kg정도 나갈것 같았다.워낙 큰 배라 계단이 높고 가파랐다.통로는 좁아서 목재를 나를 때 누군가 밑에서 받아줘야 하는데 이정도 무게라면 사람이 다칠 위험도 컸다. “ 아니,이 목재를 어떻게 사람이 옮기노?우리가 소 돼지도 아니고.여기서 크레인 가지고 옮겨서 저짝으로 옮기면 된다니까. ” “ 아제요,저기는 길이가 안나온다니까.크레인 흔들려서 옆에 기계 맞으면요?저 옆에 있는 기계들 천만원도 넘는 물건입니더. ” “ 아 흔들려도 잡으면 되지.이걸 어떻게 사람이 옮기냐 이말이다.옮길만한걸 줘야지. ”


소설 소장과 이야기를 하고 있던 최씨아저씨는 이제 직원에게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아제,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면 되지.무슨 말이 그렇게 많습니까?” 그 말을 한 뒤 직원은 목재 하나를 들어 비틀거리며 계단을 올랐다.그 모습은 대단히 위험해 보였고 우리들은 작업복을 벗어던지고 사무실로 돌아왔다.인력사무소 소장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돈이 급하다는 핑계를 댔다.결국 어제 일당만을 챙긴 후 인력 사무소를 빠져나왔다.이틀동안 번 돈은 6만원.등록금은 280 만원이었다. 6만원은 다른 곳에 쓰여졌다.토익강좌를 듣기위해 5만5천원을 입금하고 나니 또 다시 빈털터리가 되어버렸다.그리고 없는 살림인걸 알면서도 부모님께 내밀어야 하는 맨질맨질한 내 손바닥. 어머니는 된장찌개를 자주 끓이신다.우리가족이 된장찌개를 좋아하기 때문인 이유도 있지만 두부,호박,감자,된장이면 완성되는 재료의 가격도 한 몫하고 있었다.낮은 재료 가격에도 높은 맛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정성 때문일 것이다.색깔보고 맛보고,적당한 때에 재료 넣고… 어머니는 냄비 안을 바라보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를 때까지 된장을 끓이셨다.그런 어머니표 된장찌개를 먹으면 온몸이 뜨거워지곤 했다.하지만 꼭 된장을 끓이실때만 열이 나는 건 아니다. “ 생활비를 가져다 주는거가.이게 돈이가?이거가지고는 밥만 먹어도 못산다. ” “ 그럼 어떻게 할까.방법이 없는데. ” “ 방법이 왜 없노.술 끊고 담배 끊으면 되지. ” “ 미치겠네.왜 나한테 시비를 거노?” 부모님의 싸움은 언제나 나를 방황하게 한다.아버지에게 돌아가는 화살이 아침에 벌린 내 손바닥 때문이었을까.나는 집을 나섰다.친구를 불러내 술이라도 한잔 하고 싶었지만 함부로 돈을 쓸 수는 없었다.어두워지자 거리의 빌딩들이 불을 켜기 시작했다.안에는 사람들이 일한 뒤의 피로를 풀고 있을 것이다.혹은 일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하염없이 걸을 뿐이었다.그때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 8월 11일 ( 수)생동성 신체검사 참가자는 답장주세요 이번 차 45만원’ ‘ 참가합니다’ ‘ 11시까지 개금병원 나진관 5층 세미나 실로 오세요’


소설 병원 세미나실에는 생동성 피험체가 되기 위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주로 20대 초중반의 사람들이었는데 간혹 20대 후반이나 30대로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불이 꺼지고 컴퓨터가 켜지자 정장차림의 남자 안내자가 앞에 나와 브리핑을 시작했다. 이미 나와있는 약품이 특허기간이 끝나게 되면 다른 회사에서 같은 성분으로 판매를 시작할 수 있는데 그것을 임상실험 하는 것이라 설명했다.기존에 판매되고 있던 약과 성분이 같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안심할 수 있고 기간 동안 시간을 잘 지키고 술, 담배만 자제할 수 있다면 힘든 것이 아니라는 설명이었다. “ 이번 실험은 타 실험에 비해 액수가 좀 됩니다.물론 보상비가 많을 때는 80만원이 될 때도 있지만,그래도 보통은 25만원 30만원 받는데 이번에는 45만원입니다. 대신 피 뽑는 횟수가 조금 늘어나구요.자는 시간도 좀 줄어듭니다. ” 사람들은 45만원이라는 말에 표정이 밝아졌다가 채혈 횟수가 늘어난다는 말에 입술을 다물었다.설명이 끝나고 신체검사를 시작했다.키,몸무게,시력,병적사항, 피검사,소변검사를 마치고 최종 피험체로 합격하게 되었다.부모님에게 물려받은 것은 정상인데 내가 대학까지 다니면서 해놓은 일이라곤 제대로 아르바이트도 못하는 경력사항이었다. 함부로 외박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모님께는 창원에 있는 공장에 일하러 간다고 했다. ‘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몸을 이용해서 돈을 벌러 갑니다. ’ 차려진 밥상을 뒤로하고 병원에 도착했다. 잠은 병실에서,채혈은 세미나실에서 이루어진다.오늘은 저녁을 먹고 병실에서 잠을 자고 채혈은 내일부터라고 했다.아직 담당자가 오지 않았는지 세미나실은 조용했다.안에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3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모인 사람들은 들어오는 내 발소리를 듣고 일제히 불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나는 조용히 무리 안으로 들어갔다. 담당자가 들어와서 특이사항을 설명했다.병원을 벗어나서는 안되며 담배를 피어서도 안된다.아침에 일어나서 물을 마시면 안되고 아침밥은 지급되지 않는다. 잠자는 시각은 10시이며 이후 행동은 제한된다.6시에 일어나서 7시까지 모두 세미나실에 모인다.그 이후 세미나실에서 벗어나지 않는다.채혈시간 도중 잠이 들면 제대로 된 실험결과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잠을 자지 않는다.설명을 한 후에는 지키지 않을 시 지급되는 돈이 3만원씩 차감된다는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그리고 번호가 적혀있는 티셔츠를 나눠주며 입으라고 했다.내 티셔츠에는 B7번이란 글이


소설 있었다.담당자는 그것이 자신의 고유번호라고 했다.이제는 이름을 부르지 않고 B1,B2번으로 부르겠다고 했다.나는 이제 2박3일동안 피험체 B7번이 되어야 한다. “ 먼저 식사부터 하겠습니다.주문되어있는 음식과 공기밥 한 그릇 추가까지 허용하겠습니다.저녁은 된장찌개입니다. ” 담당자는 실험을 위해 먹는 양까지 조절하고 있었다.하지만 부족하진 않겠다는 생각에 모두 불평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대신 된장찌개가 맛이 없었다.우리는 환자가 아니기 때문에 병원식이 아닌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된장찌개 4천5백원.4 천5백원짜리 맛이 아니었다.물을 많이 탔는지 된장이 묽었다.하지만 끝까지 먹었다.내일 피를 뽑아내기 위해서.까짓것,피가 음식 맛대로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모두 숙소에 들어가서 짐을 풀었다.30인용 단체 병실이었다.정확하게 말하면 보통보다 큰 병실에 침대를 30개 넣은 침실이었다.신발을 신으려면 다른 사람의 침대를 밟고 넘어가야 될 만큼 개인공간이 부족했다.하루만 참으면 돼.나는 그렇게 생각했다.하지만 잠시 후,한쪽에서 고스톱 판이 벌어졌다.A12,A13,A14번이 동전을 수북하게 쌓아두고 깔깔대면서 판을 벌이는 것이다.친구사이로 보이는 그 사람들은 실험에 참여해본 경험이 있는 것 같았다.남들보다 여유로워 보였고 어떤 것을 가져와야 시간 때우기 좋은지 아는 사람들이었다.다른 곳에 있는 B6번은 큰 가방을 열어 만화책을 쏟아냈다.그는 서른권이 넘는 만화책을 빌려와 순서대로 정렬했다.그 옆에 나이가 많아 보이는 B13번은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다른 피험체 대부분은 노트북을 들고 와서 웹 강좌를 보거나 토익책을 꺼내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그중 A2번은 쉬지 않고 두리번거리며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나도 다른 피험체들에게 저런 대상으로 보일 것 같아 가져온 경찰시험 책을 꺼내 공부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었다.고스톱을 치는 무리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기 때문이다.사람들은 방해가 된다고 느꼈지만 혼자 참가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고스톱 무리에게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있었다.그때 나이가 많아 보이는 B13번이 잠에서 깼다. “ 거 좀 조용히 합시다.좀 심한 거 아닙니까. ” 일순간 주위가 조용해 졌다. 고스톱을 치던 사람들도 자신들이 지나치게 소란스러웠다는 것을 알았는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모든 것은 좋게 끝나는 줄 알고 다시 자신이 하던 일로 돌아가려고 했다.그때 B13이 소리를 쳤다. “ 거 참으려고 하니까 말이야!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 고스톱 치던 무리들은 한번 더 죄송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나는 좋게 끝날 수 있는 일을 B13이 너무 크게 만든다고 생각했다.나는 제발 그의 화가 여기에서 끝내길 바랐다.


소설 “ 여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어!공동생활을 하는 곳인데 말이야.거기서 모여서 고스톱 칠꺼면 조용히 하면서 쳐야지.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니야.어! ” 자신이 완벽하게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B13의 목소리는 커지고 있었다. “ 여기 공부하는 사람들도 많고 잠자는 사람도 있고… 또 뭐야.아무튼 사람들 이렇게 많은데 소리 지르고 말이야.예의도 없게 시끄럽게 하고.그게 말이 되는거야?어! ” “ 지금 아저씨가 제일 시끄럽잖아요.그냥 말해도 되는데 먼데 소리 지르는 건데요?” 계속되는 훈계에 A12,13,14는 참지 못하겠는지 B13의 침상으로 다가가고 있었다.사람들은 싸움을 말렸고 B13은 이불을 머리까지 눌러서 새우잠을 잤다. 고스톱도 중단 되었다. 새벽6시가 되자 불이 켜졌다.사람들은 눈을 비비고 일어나 씻고,준비가 되면 세미나실로 모였다.목이 말랐지만 물을 마시다 들키면 3만원이 차감될 수 있었다. 잠시 후 담당자가 알약 하나와 물 한 컵을 줬다.약은 우울증 치료제.어쩌면 요즘에 꼭 먹어야 할 약인지도 몰랐다.약 복용 후 한 시간 동안은 소변을 볼 수 없고 점심을 먹기 전까지는 물을 마실 수 없다고 했다.나는 약을 삼키고 피험체로서 사인을 한 뒤 돌아가려고 했다.그때 담당자가 나에게 입을 벌려보라는 사인을 했다.입안에 약이 목안으로 들어갔다는 확인을 받은 뒤 나는 채혈만을 기다렸다.4명의 간호사가 시간이 되면 내 몸의 피를 뽑아갔다.팔에 플라스틱 바늘을 꼽고 시간이 되면 거기에 다른 바늘을 꼽아 피를 뽑았다.매번 주사기를 새로 꼽을 필요가 없어 간호사나 환자에게 간편한 것이었다.시간이 되면 내피는 20ml 씩 뽑혀나갔다.어젯밤 두리번거리며 잠을 설치던 A2는 긴장했는지 주사기를 꼽자마자 경련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걱정스런 눈빛으로 A2를,그리고 자신의 팔에 꽂힌 주사기를 바라보았다.약이 잘못되진 않았나 배를 문질러보는 이도 있었다. “ 먹고살기 참 힘들죠. ” 담당자는 A2를 부축해서 침대에 눕혔다.하지만 진정이 되자 20분 뒤 주사기를 다시 꽂았다.그에 비해 나는 주사기를 꼽으면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어제 저녁에 먹은 음식이 묽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간호사들이 A12번을 부르는 횟수가 많았다.채혈순서는 A1번부터 순서대로 가는 것인데 A12번은 자신의 시간이 되어도 항상 간호사가 불러야 왔다.나는 채혈을 끝내고 화장실로 가기 위해 문밖으로 나가려 했다.그때 출구 옆에 있는 엠프실에서 웃음소리가 나기에 들여다보니 A12,13,14번이 고스톱 판을 벌이고 있었다. “ 야 잃은 것 생각하면 고스톱 못치는거야.임마. ” 다른 피험체들에게는 동전이 꽤 많았는데 A13번은 동전을 많이 잃은 것 같았다. 나는 화장실을 다녀온 뒤 경찰시험책을 들여다보았다.20ml 는 헌혈에 비하면 많은


소설 아니었지만 아침부터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기 때문에 잠이 쏟아졌다.눈꺼풀이 감기려했다. “ B7번,잠자지 마세요! ” ‘ 아차,내 돈 3만원. ’ 나는 머리를 흔들고 정신을 차리려 했다.허리를 펴보기도 하고 스트레칭도 했지만 내가 가진 경찰시험책으로는 잠을 피할 수 없었다.나는 앞자리에서 만화책을 읽고 있는 B6번에게 다가갔다. “ 저기,만화책좀 같이 볼 수 있을까요?” B6번은 잠깐 갈등하것처럼 보였지만 곧 냉정하게 부탁을 거절했다.나는 더 말하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자리에 앉아야했다. 나는 세수라도 할 요량으로 화장실로 가고 있었다.그런데 인부들이 병원 안에서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의논하고 있었다.그중에는 최씨아저씨도 있었는데 페인트와 시멘가루가 묻은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최씨아저씨는 병원 안을 둘러보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반가운 얼굴을 하고 아저씨는 내게 다가왔다. “ 니 무슨 일이고?어디 아프나?” “ 아픈건 아니구요……” 내가 말끝을 흐르며 팔을 가렸지만 꽂혀있는 주사기가 안보일리 없었다.아저씨는 혀끝을 차더니 커피한잔 하자고 했다.나는 커피를 마실 수 없었기 때문에 빈손으로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 이거 그… 마루타 시험 아니가?약먹고 피뽑는거.돈 벌기 쉽다고 아무거나 다 하는건 안좋은그다.인력사무소에 다시 나오지 와. ” “ 그런것 보다,돈이 급해서 왔습니다.이게 돈이 꽤 되더라구요. ” “ 그래도……” 아저씨는 짐짓 심각한 표정이 되어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그리고는 무엇인가 생각난다는 듯 한숨을 쉬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 내가 내 옛날이야기 잠깐 해주자면……. ” 허풍인지도 몰랐다.자신이 먹고 살았던 일은 부잣집 부인 꼬드기기였다고 한다. 서울에서 지방으로 내려온 아줌마들이 남자를 구하면 달려가서 기쁘게 해주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물론 아저씨의 왜소한 체격과 피부에서 땟물이 흐를것 같은 지금의 모습에서는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 일단 마음만 뺏을 수 있으면 그것들한테는 돈이,돈이 아니거든.그럼 집사주고 차 사주고… 와 못 믿겠나.그래도 오히려 이런 결점있는 인간이 더 여자마음 뺏기 쉬운거야.그래도 내.그 일 딱 그만뒀다.왜냐하면 내가 여자 무는 놈 같지만 결국


소설 물리는건 내거든.세상에 내가 덥석 물리는기라.내가 없어지는 기라. ” 아저씨는 말을 뱉고 난 뒤 멋쩍은 듯 손사래를 치더니 고개를 저었다.이제 곧 서로의 일터로 나갈 시간이었다. 최씨아저씨는 철거작업을 하기 위해 나는 인간 마루타가 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건조오징어처럼 말라붙은 그의 등이 넓지는 않았다.하지만 묘한 자부심이 있어 보였다.나는 세미나실로 들어가 다시 경찰시험책을 펼쳐보고 있었다.간간히 고스톱치는 패의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대체로 조용한 공간이었다. 30명의 피험체가 뿜어내는 숨이 방안을 덥히고 있었다.조용하고 따뜻하고.자꾸 눈이 감기려 할 때마다 만화책을 가져와야했다고 나 자신을 자책했다. “ 에잇,이건 사기야.나 이제 고스톱 안해.노!네버! ” 고스톱 패에서 누군가가 큰소리를 내며 엠프실 밖으로 나왔다.계속 돈을 잃고 있던 A13번이었다.A13은 막상 패거리를 벗어나니 할 일이 없었는지 세미나실 안을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그러다 내 앞에 있는 B6번에게로 가더니. “ 저기 만화책좀 같이 보면 안될까요?” “ 안됩니다. ” 예상대로 B6번은 만화책을 빌려주지 않았다.너무 냉정하게 말한것이 문제였는지 A13번의 얼굴 표정이 좋지 않았다. “ 만화책 닳는것도 아니고,좀 보고 준다는데 그렇게 기분 나쁘게 말 할 필요 있습니까?” A13번이 기분이 상했다는 투로 이야기를 했지만 B6번은 오히려 밖에 꺼내놓았던 만화책을 큰 가방 안으로 집어넣고 있었다.B6번의 행동으로 A13번은 단단히 화가 났는지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 그거 뭐 대단한 거라고 그렇게 꽁꽁 숨깁니까?이런데 오면 빌려온 만화책 다 같이 보고 그래야 되는거 아닙니까?” “ 이봐요,내가 내 돈 주고 만화책 빌려와서 왜 공유를 해야 합니까?당신들은 읽은 만화책을 다시 주면 끝이니까 간단한 일이겠지만 나는 책이 없어지지 않을까 계속 신경을 써야한단 말이에요.왜 제가 돈까지 쓰고 신경까지 써야합니까?또 한명 빌려주면 계속 빌려줘야 된단 말이에요. ” “ 아 쪼잔한 새끼!그걸 뭘 신경을 쓰지?” 서로의 목소리가 커지자 담당자가 다가와 싸움을 중지 시켰다.그리고 서로의 번호를 체크했다. “ B6번,A13번 3만원씩 차감입니다. ”


소설 B6번은 자신이 피해자라며 해명하기 시작했다.A13번은 기분 나쁘다는 듯 세미나실 밖으로 나가버렸다.담당자는 자리로 돌아갔고 B6은 울상이 되었다. 하지만 잠시 후 부턴 만화책에 정신이 팔려 킥킥대기 시작했다. A13번은 고스톱패에도 가지 않고 무엇인가 생각하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잠시 후 화장실에 다녀 온 담당자가 앞에서 사람들의 손 냄새를 맡았다. “ 지금부터 일체 움직이지 않습니다.누군가가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웠습니다.누가 피웠습니까?분명히 피면 안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여러분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이 실험은 제약회사에서 수천만원을 들여서 저희 병원에 의뢰한 것입니다.여러분들이 담배를 피면 실험 결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저희와 다른 피험체들에게 피해를 주게 되는 겁니다.앞에서부터 손 검사를 할 테니 모두 자리에 앉으세요. ” 담당자는 한사람씩 손의 냄새를 맡았다.그러자 A13번은 자신이 피웠다고 자백을 했다.기분이 좋지 않아서 담배를 피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지만 역시 3만원이 차감 되었다.6만원,두 번의 실수로 인력으로 벌 수 있는 하루 일당이 차감되었다. 사람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각자의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차감된 금액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모두들 더 이상 A13번이 차감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A13번 역시 더 이상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얌전히 있는 그에게 늙은이,B13번이 다가왔다. “ 내가 어제 좀 심하게 한 것은 맞지만… 그래도 내가 한 다섯 살은 많아 보이는데 그렇게 까지 해야 했었냐?” B13번은 차분하게 말했지만 조금씩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어젯밤 일을 단단히 마음쓰고 있었음이 분명했다.A13번은 화가 난 얼굴이었지만 더 이상의 차감은 줄여보려 했는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A13번이 가만히 있자 B13번은 또 추궁을 하기 시작했다. “ 어!너희들은 위아래도 없냐.어!그렇게 잘나서 생동성실험하고 있냐!가진것 없으면 사람을 공경하는 마음이라도 있어야 되는거 아니야?어! ” A13번은 더 이상 참지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B13번을 노려봤다.싸움이 날 것을 안 A12번과 A14번도 고스톱을 멈추고 A13번 옆으로 왔다.하지만 이번에는 B13 번이 물러서지 않고 계속 악담을 퍼붓기 시작했다.담당자가 피험자 기록부를 들고 그들 가운데로 들어왔다. “ A13번,B13번.자리로 돌아가세요.그리고 3만원씩 차감입니다. ” A13번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B13번은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 B13번 그만하세요.3만원… 6만원… 9만원……. ” B13번이 통제에 따르지 않자 담당자도 화가 난 듯 보였다. “ 내가 이 더러운 생동성,이 인간 마루타들아.내가 이거 안한다!어!안해!어! ”


소설 “ 하기 싫으시면 안해도 됩니다.저희들이 억지로 시키는 것 아니잖아요? 실험 도중에도 여러분의 의사에 따라 채혈을 중단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저런식으로 나가면 저희가 의료기관에 자료를 올리거든요.이제 저 사람은 어떤 병원에서도 실험 참여 못합니다. ” 담당자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있었다.간호사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피험자들의 팔에 피를 뽑아냈다.뽑힌 피는 작은 병에 담겨졌다.그리고 채혈 바늘 안에서 피가 굳지 못하도록 특수한 약을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잠시 후 어디선가 남자한명이 나타나 담당자의 설명을 듣고 B13번 티셔츠를 입었다. 채혈이 힘든 사람이 있었다.대표적으로 A2번은 벌써 8번째 혈관에 채혈 바늘을 넣고 있었다.다른 몇 명도 채혈 시간만 되면 부담스러워 하기도 했다.하지만 나는 주사기만 넣으면 피가 쏟아져 나왔기 때문에 별 부담없이 채혈을 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피가 한방울도 나오지 않았다.아직 점심을 먹지 않았고 오전에는 취수가 금지였던 것이 그 이유라 생각되었다.먹은게 없는데 피가 안나오는것이 당연했다.내 몸속에 흐르던 묽은 것들은 벌써 다 빠져나갔다.이제 밖으로 배출할 것이 없었다.간호사는 플라스틱으로 된 채혈 바늘을 까닥이기도 하고 살짝 뽑아서 혈관 안으로 다시 집어넣기도 했다.그냥 주사기를 넣을 때보다 훨씬 큰 고통이 나를 짓눌렀다. “ 이제까진 피가 잘 나왔거든요.갑자기 피가 안나오는건 핏줄보다 채혈 바늘에 이상이 있는 것 같으니까 바늘을 바꾸겠습니다. ” 고통이 채 가시지 않은 부위에 새로운 바늘이 파고들었다.3c m정도 되는 주사 바늘이 팔안에 끝까지 들어왔다.하지만 이번에도 피가 나오지 않았다. “ 자 주먹에 힘을 꽉 줘보세요. ” 피가 조금 삐져나왔다. “ 자,힘을 꽉 주세요.더,더,주먹 세게 쥐세요.자리에서 잠시 일어나보시겠어요. 팔은 내리시고…… 잠깐 일어서 계세요. ” 떨리는 팔에 쑤셔져 있는 채혈기 안으로 피가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소설

검은 목걸이 검은 목걸이 새삼스러운 밤이었다.영인은 무표정하게 베란다 창밖을 바라보았다.거리의 네온사인 불빛들이 창을 넘어서 희미하게 영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낮보다 밝은 도로나 도로 위로 흐름을 타는 자동차들,웃음을 짓는 사람들이나,사람들이 몰려가며 생기는 소리들 중 변한 것이라곤 없었다.오늘도 영인은 날짜에 맞추어서 달력에 붉은 펜으로 가위표를 그렸고 작은 상에 밥과 물을 떠서 안방에 가져다 놓았다.향 피우는 일도 잊지 않았다.향은 은은하게 타올라서 안방 구석구석까지 흠뻑 스며들었다. 향냄새가 머물러 있는 동안 영인은 음악을 듣거나 낙서를 하기도 했다.책을 읽다가 이따금 생각난 듯 팔굽혀펴기를 하고 지쳐 쓰러지기도 했다.누워있는 동안 시간은 더디게 흘렀고 시계바늘이 짤각거리는 소리 외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영인은 그렇게 한참을 누워 있다가 향냄새를 맡고는 잠에서 갑자기 깬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청소를 하곤 했다.집에는 장식품이 많았다.어머니가 소소하게 모은 것들이었다. 베란다 문을 활짝 열고 젖은 걸레로 먼지들을 훑은 다음 진공청소기를 돌렸다.혼자서 옮길 수 있는 가구들은 들어낸 뒤에 묵은 먼지들을 청소기로 빨아들였다.유달리 많은 장식품들도 묵묵히 닦았다. 청소가 끝날 때쯤이면 향냄새는 사라졌고 날은 저물어가고 있었다. 향냄새에 이끌려 처음 청소를 시작했던 날 영인은 아파트가 크다고 그리고 커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걸레를 쥐고 묵묵히 집 안을 돌아다니다보면 시간은 알아챌 수 없을 만큼 빠르게 흘러서 향냄새가 사라진 것을 깨닫지 못할 때도 있었다.청소가 끝난 집 안은 노을로 가득했다.영인은 붉게 물들어가는 바닥과 차츰 어두워져가는 집 안의 그늘들이 부러웠다.노을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부드럽게 바닥을 물들여갔다. 물에 잉크를 풀어 놓는 것이 아니라 물이 잉크로 변하는 것처럼 노을은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덮었다.그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어두워진 다음이었다.시간은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느리다고 생각하면 어느 틈엔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지나쳐버려서 잡기엔 이미 늦어 있었다.그럴 때면 영인은 세상 어느 것에나 되감기 버튼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손가락으로 꾹 누르면 원하는 만큼 되돌릴 수 있는


소설 버튼.그런 버튼이 있다면 날짜마다 달력에 가위표를 그려 넣을 이유도,매일 밥과 물을 차릴 이유도,향을 피울 이유도,청소를 할 이유도 없었다.되돌릴 수 있다면 아무 필요 없을 일들이었다.하지만 영인은 그런 버튼 따위는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실감하고 있었다.시간은 강물 같은 것이니까.사람은 강물에 떠내려가는 종이배 같은 것이니까.막을 수도 알아차릴 수도 없는 것.시간은 노을과 닮아있었다.시간도 노을도 사람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젖은 종이배를 말려도 젖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듯이 되감기 버튼을 아무리 눌러봐야 교통사고로 으깨진 핏덩이를 사람으로 환원시킬 수는 없었다.영인이 매일 하는 일들 또한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되감기 버튼이 있다고 해도 결국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되감았을 뿐이니까.영인은 피할 수 없는 것을 피하는 재주는 사람에게 없다고 생각했다.좀 더 상황을 즐겨야했다.되감기 버튼을 바라기보다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현실을 응시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다.그런 확신 속에서 향이 꺼진 집 안 가득히 차오르는 노을과 어둠을 바라보는 것이 지난 일주일간의 일과였다. 현관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영인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현관까지는 창밖의 불빛이 닿지 않았다.벨소리는 밤으로 검게 칠해진 거실너머에서 높게 울렸다. 아득히 먼 바다에서 들려오는 뱃고동 같은 소리가 현관과 영인 사이를 멀어지게 했다.초인종이 다시 울렸다.처음에는 천천히 그리고 점점 빠르고 거칠게 울리는 소리가 낯설게 느껴졌다.영인은 머뭇머뭇 형광등을 켜고 문을 열었다.문 밖에는 현관 불빛을 핀 조명으로 받고 있는 여자가 팔짱을 끼고 서있었다.자연스러운 올림머리.30대 중후반의 얼굴과 주름.자기 기분에 따라서 털이 곤두설 것 같은 하얀 모피 코트를 입고 있었다.여자가 신경질적으로 영인을 밀고 현관으로 들어섰다.여자는 하이힐도 벗지 않은 채 그대로 소파까지 걸어가서 다리를 꼬고 앉은 다음에야 영인을 돌아보았다. “ 네가 아들이구나?나 누군지 알겠어?” 영인은 모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 고모야.그러니까 너희 아빠의 동생.낳아준 엄마는 다르지만” 영인의 몸이 꿈틀하고 경련했다.목이 뻐근해져왔다.영인의 아버지는 고아였다.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자신을 낳으면서 돌아가셨다고 했다.그것이 아버지가 말한 전부였다. 집 정리 잘하고,주변에 폐 끼치지 말고 어릴 때부터 쭉 혼자였던 아버지는 매사에 신중하고 부지런했다.남편으로서도 부족함이 없었고 직장에서도 성실했다.그러나 부지런한 모습은 말썽을 일으켜서 부모가 누군지 같은 말 따위를 듣지 않기 위한 아버지 나름의 의태였다.


소설 조용하고 성실해서 눈에 거의 띄지 않는 사람.영인은 솔선수범으로 과거를 감추려는 사람만이 주변에 폐를 끼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아버지이기 때문에 어머니와의 결혼을 망설이지 않았다고 믿었다.세상엔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 많았다.하지만 영인은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도 아버지를 향한 거리감을 지울 수 없었다.철저하게 가려진 성실의 가면 사이로 보이는 아버지의 맨얼굴에는 덧칠되지 않은 광기의 색이 남아 있었다. “ 뉴스에서 봤어.사고 난 거” 보닛이 아코디언 주름처럼 접힌 승용차나 도로에 흥건한 피는 영인도 알고 있었다. 가해 차량의 기사와 경찰에게서 수없이 경위를 들은 다음이었다.내리막길에서 버스의 과도한 추월시도.45인승 버스와 정면충돌의 결과 영인은 매일 상을 차리고 향을 피우고 청소를 하고 있었다. “ 다른 사람도 없고,장례는?” “ 상조 회사요.화장했어요. ” 영인의 목소리가 조금 쉬어 있었다.영인은 여자의 태도가 혼란스러웠다.어머니가 다른 자식끼리는 아버지의 존재 이외에 그 둘을 이어줄 근거가 없었다.영인의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영인의 아버지도 죽었다.영인에게 아버지의 배다른 동생은 타인이었다.그런데도 자신이 이 여자를 내심 고모로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영인은 여자의 얼굴을 응시했다.곧고 오뚝한 콧날.눈이 크고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한 얼굴.여자는 미인이었지만 아버지와 닮은 부분이 없었다.영인에게 여자는 고모가 아니라 손님에 가까웠다. 주변에 폐 끼치지 말고……. 아버지에겐 동생이지만 아들에게는 남인, 죽은 사람에게는 가족이지만 산 사람에게는 손님인 사람.영인은 여자를 대하기가 불편했다. “ 교통사고였으니까 당연히 보험금도 있겠지?두 명이면 최소 4억은 넘겠네.유산도 있겠고.내가 관리해줄게.어차피 넌 그만한 돈 다루기도 벅차잖아?내가 유용하게 쓰는 법 가르쳐 줄게. ” 영인의 목이 뻣뻣하게 굳어졌다.여자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마치 당연히 그렇게 될 일을 다시 확인하는 어투였다.아버지와는 다른 고압적이고 타인 위에 군림하려는 태도.영인은 강한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감정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여자는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찾아온 손님이었다. “ 생각해 봐야겠는데요. ” 여자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예상했던 반응이라는 의미일까.여자가 소파에 일어났다.여자는 검은색 명함 한 장을 영인에게 건넸다. “ 그러는 게 여러모로 좋을 거야.그럼 생각한 후에 연락해. ”


소설 여자는 말을 남기고는 들어왔을 때처럼 망설임 없이 현관 밖으로 나갔다.거실 바닥에 여자의 하이힐이 만든 발자국이 선명했다. 다음날 영인은 쌀을 씻으면서 여자의 말을 떠올렸다.유용하게 쓴다는 말이 자신을 위한 것인지 여자를 위한 것인지 혼란스러웠다.받은 명함에는 금색 글씨로 여자의 소유인 듯한 클럽의 이름과 위치가 인쇄되어있었다.<MOONL I GHTBUTTERFL Y>. 흔하고 퇴폐적이면서도 고급스러운 디자인.하지만 그것 외에는 여자의 이름조차 알 수 없었다.영인은 유흥업소의 사장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고모이기 때문인지 영인이 받은 보험금 때문인지 의심스러웠다.영인은 조카에게 클럽 명함을 주는 고모를 상상할 수 없었다.부모님이외에 가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모습 역시 상상할 수 없었다. 안방은 어제 그대로였다.향로에는 일주일간의 재가 하얗게 쌓여 있었다.작은 상에 밥과 물을 반대로 놓고 향을 피웠다.빨갛게 달아오른 향 끝에서 연기가 길게 피어올랐다.망자들은 연기를 보고 찾아온다고 했다.영인은 매일 향을 피우면서 부모님께 말을 걸었다.이제 자신도 고아가 되었다고,이제 당신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창밖의 세상이 왜 변하지 않는지,시계바늘 소리는 얼마나 큰지.아버지가 왜 밖으로 나가지 않았는지,어머니가 왜 장식품 수집에 몰두했는지.국을 올리고 싶지만 아직도 국은 못 끓이겠다고.향냄새가 짙게 몸을 감아왔다. “ 아버지.고모가 있었어요?그 여자가 진짜 고모예요?” 향 끝이 작게 깜빡거렸다. 영인은 여자가 진짜 고모인지 의심스러웠다.영인에게 여자는 차라리 아버지의 애인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덜 놀랄 일이었다.가족들 모르게 유흥업소에 드나들었고 그렇게 애인이 생긴 거라면,그래서 애인이 보험금을 노린 거라면 영인은 쉽게 현실을 받아들였을 터였다.클럽 사장에 미인이니 조건은 충분했다.그런데 고모라니.영인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부모 이외에 가족이라 부를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도 아버지와 같은 고아였다.그리고 이제 영인도 고아가 되었다.더 이상 의지할 곳은 없다고 생각했다.고모라니.주제넘은 꿈같았다. 영인은 청소를 끝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또 여자가 찾아올지 몰랐다.여자가 찾아오면 영인은 당신이 정말로 고모냐고,진짜라면 증거를 보여 달라고 말할 생각이었다.하지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영인은 망설여졌다.만약 여자가 진짜 고모라고 대답한다면 영인은 여전히 여자를 믿지 못하고 의심할 것이었다.고모가 아니라고 하면 또 어떨까.영인은 절망에 빠질지도 몰랐다.여자의 목적은 아무래도 보험금인 것 같았다.영인은 안심할 수 없었다.여자를 기다리고만 있다가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영인은 명함을 꺼내들었다.명함에 적혀 있는 주소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소설 8일 만에 나와 보는 밖이었다.거리는 베란다에 서서 바라보는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자동차 경적 소리는 집 안을 맴돌던 시계바늘 소리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크고 시끄러웠다.거리에 가득한 사람들이 곁으로 스칠 때마다 영인은 움츠러들었다.처음 물건을 훔친 도둑처럼 건물과 사람들이 어색했다. 거리는 혼자 걷기엔 좁았고 숨기엔 지나치게 넓었다.목적지에 다가갈수록 사람들이 늘어났다.걷기 불편할 정도로 북적이는 사람들을 헤치면서 영인은 무수한 네온사인 사이에서 여자의 가게를 찾았다.명함과 똑같은 금색 알파벳이 5층 건물 입구에서 빛나고 있었다.건물은 전체가 검은 유리벽이었고 입구도 클럽답지 않는 평범한 문이었다.여자의 명함처럼 깔끔한 건물은 주변에 넘치는 화려한 색과 비교되어 더욱 눈에 띄었다.영인은 천천히 검은 건물로 걸어 들어갔다. 카운터에 명함을 보여주자 영인은 사무실로 안내되었다. 여자는 검은색 미니드레스를 입고 있었다.허벅지와 어깨가 다 드러나는 모습에 영인은 여자를 똑바로 바라보기 힘들었다.사무실은 책상과 소파,테이블 정도만 있는 작은 방이었다.가구가 대부분 검은 색이어서 방이 밝은데도 어두운 기운이 맴돌았다. 영인은 여자의 명함에서부터 건물,사무실에 옷까지 검다는 것이 놀라웠다.처음 영인을 찾아왔을 때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인상이었다.영인은 자신이 실수를 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무슨 일?” 여자가 소파에서 다리를 꼬며 물었다.영인은 쭈뼛거리며 여자를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 정말로 아버지의 여동생인가요?” 여자는 쿡하고 웃으면서 테이블 위에서 담배를 집어 불을 붙였다.여자가 여유롭게 담배를 피우는 동안 영인은 속이 잿빛으로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여자의 입에서 담배연기가 한숨처럼 흘러나왔다. 처럼 흘러나왔다. “ 의심하는거야?내 말을?” “ 아버진 고아였으니까요” 고아라는 말이 영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 나도 알아.우리 엄마가 호적에서 파버렸거든” 영인의 눈이 커졌다.처음 듣는 소리였다.아버지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 거의 이야기 해주지 않았다.영인이 알고 있는 것도 아버지가 힘들게 유년을 보냈다는 말뿐이었다. “ 어렸을 때는 잠시 같이 살았었지. 내가 초등학생이었고 너희 아빠가 고등학생정도였나?그러다가 너희 아빠가 가출했어.그 길로 끝. ”


소설 “ 그럼 할아버지,할머니는?” “ 아빠는 5년 전에 돌아가셨지.딱 이맘때.우리 엄마도 돌아가셨고.그것 말곤 나도 몰라. ” “ 아버지는 왜 가출했어요?” 여자가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끄며 말했다. “ 날 강간했거든” 여자의 말을 듣는 순간 영인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여자는 태연하게 두 번째 담배를 입에 물면서 영인을 바라보았다.옅은 미소가 여자의 입가에 퍼졌다. 영인의 눈에는 이미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여자가 왜 명함에서 건물까지 검은색으로 선택했는지 알 것 같았다.그리고 왜 굳이 하얀 옷을 입고 영인을 찾아왔었는지도. 여자는 아버지의 아들이 무척 궁금했을 것이다.아버지가 죽자마자 영인에게 상주차림으로 찾아와 아버지의 실체를 밝히는 일은 여자에게 있어 하나의 여흥거리였다.영인은 온 몸에서 피가 요동치는 느낌이었다.어지러웠다.하지만 주저앉을 수 없었다.영인의 머리가 점점 맑아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거의 외출을 하지 않았다.방에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일이 아버지의 유일한 취미였다.밖에서도 아버지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실수로라도 남의 발을 밟으면 먼저 사과했고 발을 밟혀도 먼저 사과했다.영인이 친구들과 싸우고 돌아오면 직접 집으로 찾아가 고개를 숙였다.그러면서도 친구 셋을 두들겨 패버린 영인을 야단치지 않았다.그리고 칭찬하지도 않았다.그 때 영인은 처음으로 아버지의 가면을 벗겨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코뼈가 주저앉고 늑골에 금이 갈 정도의 폭력은 아버지에게 있어 발을 밟힌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그 셋을 죽여 버렸다면 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했다.깨끗한 가면에 가는 금 한줄기라도 그을 수 있었을지.영인은 아버지의 의태 너머에 있던 광기의 색을 알고 싶었다.하지만 영인의 존재는 아버지에게 타인이었다.아버지는 누구에게도 진심을 드러내지 않았다.그런 태도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친절로 보였겠지만 영인에게는 불쾌감으로 남을 뿐이었다.혈육에게도 보여주지 못하는 원색의 광기.미소 짓고 있는 가면 뒤의 맨얼굴.아버지는 무엇을 숨기기 위해서 그렇게 살았던 걸까.누구를 위한 의태였던가.영인은 아버지에게 화가 났다.꽉 쥐고 있던 주먹 위로 손가락 뼈마디가 발톱처럼 뾰족하게 솟았다. “ 하지만……. ” 영인은 말을 멈추었다.더 이상 변명할 필요가 없었다.아버지는 이미 죽었다.여자가 진짜 고모인지,아버지가 여자를 강간했는지,영인은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부정할 수도 없었다.영인은 점점 여자가 멀게 느껴졌다.여자는 우연하고 반갑게 찾아온 고모도,예의 바르게 대해야할 손님도 아닌 그저 순수한 타인이었다.설령


소설 고모가 아니라고 해도 무엇이 달라질까.그 사실이 이상하게 즐거웠다.영인은 이제 혼자였다. “ 놀랐어?뭐 세상은 다 그런 거니까.너도 알잖아.절망이 뭔지” 하지만 아직 의문은 남아있었다. “ 왜 굳이 가르쳐준다고 한 거죠?” “ 재밌잖아.믿은 거야?” 여자는 킥킥거리면서 말했다.영인은 여자가 자신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얼마나 즐거워했을지 상상이 되었다.혈육 하나 없이 혼자가 된 사람에게 가짜 희망을 던지는 일. 여자는 아버지의 죽음이 아니라 영인의 삶을 조롱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가 여자의 노림수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 그럼 아버지가 어머니와 함께 그렇게 멀리 나간 것도……. ” “ 내가 연락했지.장례식인데 어떠냐고,염치없게 온다더라?그걸 또 믿다니.하나도 안변했지 뭐야.강간해놓고 지가 나가질 않나.도망가면 어쩌라는 거야.돌아가는 길에 콱 죽어버리라고 했더니 정말 죽어서 신기했지.좀 괴롭히려고 했더니 또 혼자 도망가 버리고 말이야.염치없게.그러고 보면 그게 집안 내력인가 봐?평생 죄인처럼 빌빌거리더니.잘됐지 뭐야. ” 여자는 깔깔거리면서 담배로 영인을 가리켰다.영인은 그대로 클럽을 뛰쳐나왔다. 여자의 웃음소리가 영인의 귓가에서 길게 울려 퍼졌다. 영인은 한참을 달리다가 겨우 멈춰 섰다.숨이 찼다.가슴이 뜨거웠다.영인은 오늘 밤이 다른 날보다 깊다고 생각했다.더 어둡고 더 깊게 피어오르는 밤이 지칠 줄 모르는 거리의 불빛들을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었다. 영인은 가로등 빛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그림자가 더 길어져있음을 느꼈다.꿈틀대는 밤에 맞추어 그림자도 한껏 몸을 부풀리고 있었다.그림자가 서서히 자라날수록 한기가 느껴졌다. 얇은 냉기가 땅에서부터 그림자를 타고 영인의 발목에 고였다.발이 차가워질수록 영인의 가슴은 달아올랐다.달군 쇠처럼 붉은 열기가 느껴졌다.영인은 마음속으로 망치를 들어 열기를 내려치기 시작했다.열기가 일그러지면서 더욱 작고 단단하게 뭉쳐질 때까지 영인은 쉬지 않고 마음속을 망치질 했다.영인의 몸이 휘청거렸다. 기둥 빠진 집처럼 기울던 영인은 넘어지기 직전에 가로등을 잡고 자세를 유지했다. 손에 느껴지는 가로등의 질감이 영인을 현실로 끌어내렸다.그림자가 서서히 줄어들었다.영인은 풀려버린 다리를 추스르며 가로등 아래를 벗어났다.그대로 더 서 있다간 주저앉아버릴 것 같았다.영인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많은 것이 스쳐갔지만 영인은 언제나 하나의 풍경 속에 머물고 있었다.거친 걸음으로 사람들 사이를 거스르는 영인은 숲 속을 질주하는 맹수의 모습이었다. 어떤 확신도 없이 그저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으로 걷기


소설 시작해놓고 보니 어느 곳에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있어서는 안 될 곳에 버려진 것 같은,재활용 쓰레기들 틈에 낀 음식 쓰레기 같다고 영인은 생각했다.영인은 쓰레기라는 단어와 버려졌다는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깊은 밤에 무단 투기를 당해버린 꼴이 아닌가.밤은 깊었고 세상은 밝고 또 떠들썩했다.정처 없이 걷고 있던 영인의 다리가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몸이 비닐처럼 얇아진 기분이었다.바람이 불면 쓰러져 뒹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영인은 벽을 짚었다.벽이 따뜻했다.영인은 자신의 손이 이미 벽보다 차갑게 식어있음을 알지 못했다.영인이 느낄 수 있는 것은 가슴 속에 타다 남은 불씨와 하얀 재뿐이었다.가슴 속에서 불씨가 다시 빛을 내기 시작했다.영인은 갑작스런 열기에 몸부림쳤다.가슴 깊은 곳이 온통 불타오르는 느낌이었다.참을 수 없는 갈증이 몰려왔다.그런데도 아무것도 삼킬 자신이 나지 않았다.물을 마셔야 한다는 생각과는 반대로 영인의 위는 격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시큼한 위액이 식도를 타고 역류할 때마다 영인은 구역질을 하며 발밑으로 먹은 것을 토해내었다.채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들이 덩어리째 떨어져 뒹굴었다.더 토해낼 것이 남지 않았는데도 영인은 계속 구역질을 했다.뭉쳐진 열기가 가슴 속에 그대로 박혀있었다.영인은 열기를 뱉어내고 싶었지만 열기는 몸의 일부인 듯 떨쳐지지 않았다.영인이 토해낼 수 있었던 것은 불타버린 내부의 재뿐이었다.화장 후에 남은 뼛가루처럼 하얀 재가 영인의 몸 밖으로 사라졌다.가슴 속에는 단단하게 뭉쳐진 열기만 남아있었다.속을 긁어내는 듯한 헛구역질을 마지막으로 영인은 구토를 끝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별이 보이지 않았다.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었다. 멀리서 새벽이 어렴풋이 다가올 무렵에야 영인은 정신이 들었다.영인은 더 이상 뜰 수 없어 게슴츠레해진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영인은 벤치에 엎드려있었다.벤치 뒤로는 빌딩이었고 앞은 턱이 높은 대리석 화단이었다.화단에는 키 작은 향나무가 심어져 있어서 밖에서는 벤치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영인은 색이 조금 바란 향나무 잎을 보고서야 자신이 어제 어떻게 정신을 잃었는지 기억해내었다.감당할 수 없는 무언가가 아직도 속에서 날뛰고 있었다.가슴이 뜨겁고 목안이 쇳가루를 삼킨 것처럼 버석거려서 불쾌했다.정신은 들었지만 머리가 지끈거렸고 관절은 녹이 슨 것 마냥 삐걱거렸다.눈앞의 풍경들도 불쾌했다.사람이 지은 건물,그 속에 넘치는 사람, 넘쳐서 흘러내리는 사람,흘러내리는 사람 속의 사람과 사람이 영인을 한없이 불쾌하게 만들었다.영인은 불쾌감의 근원을 어렴풋이 깨달았다.충동적이면서도 선명한 적의.마술사의 손안에서 재도 남기지 않고 순간적으로 타오르는 불꽃같은 살의였다.한순간 스치듯이 떠오르는 살의는 화살처럼 빠르고 날카로웠다.그 여자뿐 아니라 창밖으로 바라보았던 사람과 자동차,건물들까지 산산조각으로 부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파괴의 흔적조차 남기고 싶지 않다는 철저한 분노가 영인을


소설 뒤덮었다.손에 닿는 것을 철저하게 짓밟고 싶은 욕망이 가슴 가득 넘쳐 올랐을 때 영인이 떠올린 사람은 아버지였다. 영인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자 낯선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검은 개였다.갓 만든 숯같이 짙고 검은 털의 개가 어제 밤 영인이 토해 내버린 음식물들을 먹고 있었다. 토트백정도의 크기에 굵은 다리와 어울리지 않게 가늘어서 날카롭다는 인상이 드는 꼬리까지 온통 까만,먹물을 먹고 자라지 않았을까 의심되는 모습이었다.그러나 혀만은 붉은 색이어서 날름거릴 때마다 유달리 눈길을 끌었다.개는 허기져보였다. 토사물을 허겁지겁 먹어치운 개가 시선을 느끼고 영인을 바라보았다.금속 같은 이질감이 느껴지는 개의 눈이 새벽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거렸다.한밤중의 아득한 바다같이 깊은 눈이 흔들리는 일도 없이 똑바로 영인을 마주하고 있었다.영인은 마른 침을 삼켰다.개의 눈은 마치 빛이 닿지 않는 틈새처럼 탁했다.불편하면서도 눈을 뗄 수 없는 모습은 영인이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불길함을 띄고 있었다.영인을 바라보던 개가 천천히 다가와서 작게 냄새를 맡았다.검은 개는 무언가를 확인하듯 킁킁거리며 영인의 주위를 몇 바퀴 돌아보더니 벤치로 뛰어올라서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다.영인은 개에게 채워진 목걸이를 발견했다.검은색 가죽으로 된 튼튼하고 질겨 보이는 목걸이였다.목걸이가 있다면 주인이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개는 혼자가 아니라는 의미였다.영인은 검은 목걸이를 보면서 개의 주인은 개를 무척 아꼈거나 반대로 극도로 증오했으리라고 생각했다.목걸이는 털색과는 구분되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또 검은 목걸이는 그리 흔하지 않았다.일부러 검은색으로 채웠다는 것은 개의 털색과 맞추기 위함이었을 것이다.그러나 저렇게 튼튼한 목걸이도 많지 않았다.그만큼 개를 구속하고 싶었거나 도망치지 못하게 할 요량으로 채운 목걸이였다.개에게는 우스운 일이었다.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구속구라니,그 이중성을 숨기지 않는 주인이라니.실로 잘 어울리는 사이였다. 영인은 개를 쓰다듬었다.어젯밤이 생각났다.속까지 온통 검은색이던 여자였다. 영인은 다시 개를 바라보았다.검은색 목걸이.영인은 한 손으로 개의 주둥이를 잡고 나머지 손으로는 몸을 누른 뒤 비틀었다.뼈 꺾이는 소리가 손끝으로 선명하게 느껴졌다.개는 머리가 뒤로 돌아간 채 움직이지 않았다.영인은 목걸이를 벗겨낸 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죽어버린 개를 들어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쓰레기통이 쿵하고 울렸다. 사람들이 부스스 일어나기 시작했을 쯤 영인은 아파트 입구에 들어섰다.손을 씻고 밥을 지었다.안방에 상을 올린 다음에야 영인은 자신이 먹을 밥을 준비했다.청소 이외에는 다른 할 일이 없는 하루하루였지만 오늘은 할 일이 있었다.영인은 밥을 두둑하게 먹고 모자란 잠을 보충했다.점심때 잠에서 깬 영인은 청소를 시작했다. 영인은 일일이 장식품을 정리하고 닦았다.장식품들은 아버지의 거짓말과 침묵 같은


소설 어머니가 만든 의태였다.어른 팔뚝만한 크기의 청동을 힘겹게 들고 오면서도 어머니는 웃고 있었다.어머니가 유독 조각상에 집착한 이유는 조각상이 주는 존재감 때문이었다.여러 사람과 동물 형상들이 주는 존재감 속에서 어머니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갔다.영인은 청동으로 만든 독수리 상을 들고 바라보았다. 날개를 접고 앉아서 사냥할 목표물을 찾는 모습이었다.독수리의 부리가 유난히 길어보였다.영인은 독수리 상을 현관 옆 신발장 위로 옮겨놓았다.다른 장식품들도 위치를 조금 바꾸었다.지금까지는 다른 것에 손대지 않고 그저 깨끗하게 청소만 해놓으려 했다.하지만 영인은 장식품을 옮길 필요를 느꼈다.가구의 위치도 조금 바꾸었다.소파가 베란다를 바라보게 돌렸다.아버지의 구두를 현관에 꺼내 놓았다. 평소보다 늦게 시작했는데도 청소는 일찍 끝났다.영인은 청소가 점점 익숙해져가는 것이 기분 좋았다.이제 국만 제대로 끓일 줄 알게 되면 혼자 생활하는 데 어려움은 없어보였다.영인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보험금을 신청했을 때를 떠올렸다.8 억이라는 액수가 정말로 통장으로 입금되자 헛웃음이 나왔다.부모님은 죽어서 숫자가 되어 돌아오셨던가.영인은 소파에 앉아서 저물어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다시 찾아올 것이 분명했다.자신을 가지고 놀 정도로 여유가 있었으니 보험금을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영인은 창밖 가득한 노을을 바라보며 새벽에 죽인 개를 떠올렸다.개는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목이 꺾이기 전까지 자기가 무슨 일을 당하는지도 몰랐을 것이다.개의 불행이라면 주인을 잃어버리고 자신을 만났기 때문.그리고 털이 검었기 때문이었다.쓰레기통에 버려진 개를 본다고 해도 놀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쓰레기통을 잘 들여다보지 않는다. 쓰레기통에 들어가 있는 것은 쓰레기니까.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영인에게 남은 감정은 분리수거를 하지 않았다는 미안함뿐이었다.청소하시는 분이 화를 내시겠지만 영인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개는 이미 죽었다.집안에서 향냄새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창밖에서 네온사인들이 하나 둘 밝혀지기 시작했다.영인은 눈을 감고 여자를 그려보았다.오늘은 검은색일까 하얀색일까.어두워진 현관에서 탈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영인은 현관에 놓아두었던 아버지의 구두를 신었다.딱 맞았다.아직도 탈칵거리는 현관을 열자 여자와 남자 둘이 서 있었다.남자 한 명은 검은 정장차림의 덩치였고 다른 한 명은 열쇠수리공인지 주머니가 많은 작업용 조끼를 입고 있었다. 여자는 검정색 미니스커트에 블라우스 차림이었다.목에서 진주목걸이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하이힐도 검고 세련되어보였다.세 사람은 영인이 안에서 문을 열고 나오자 놀란 눈치였다.여자가 얼른 미소 지었다. “ 안에 있었네?아저씨 이제 됐어요.열렸네요. ” 수리공은 여자가 건네는 돈을 받고는 주섬주섬 사라졌다.덩치 큰 남자가 험악한


소설 눈으로 영인을 노려보았다.탁해 보이는 눈.키가 영인보다 조금 크고 어깨가 넓었다.업소의 누군가겠지.예상한 일이었다.영인이 약간 비켜서자 여자는 망설임 없이 어두운 집으로 들어섰다.남자는 영인을 노려보다가 여자 뒤를 따랐다.영인은 남자가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다음 문을 닫고 잠갔다. 여자가 소파로 다가가면서 말했다. “ 야경 좋네.평소엔 이렇게 불을 끄고 사는 거야?” 영인은 대답하지 않았다.남자는 등을 돌리고 있었다.영인은 현관의 자동조명이 꺼지기 전에 옆에 놓인 독수리 상을 들고 남자의 머리에 찍었다.청동으로 만든 독수리의 부리가 남자의 뒤통수에 박혔다.남자가 쓰러졌다.영인은 그대로 오른발을 들어서 쓰러진 남자의 머리를 구두로 짓뭉갰다.독수리 부리가 부러지고 청동 장식이 뒹굴었다.피가 흘러서 남자의 옷을 적셨다. “ 너 지금 무슨! ” 영인은 그대로 여자에게 다가갔다. 반항하려는 여자의 종아리를 걷어찼다. 하이힐을 신은 여자의 다리가 휘청거렸다.오른손으로 목을 잡고 끌어당기듯 감아서 쓰러뜨렸다.숨이 막혀서 괴로워하는 여자의 가슴 위로 올라타서 두 팔을 무릎으로 잡아 눌렀다.여자는 남은 힘을 다해서 다리를 버둥거렸다.영인은 천천히 양손으로 여자의 머리를 잡고 바닥에 찧었다.한 번.또 한 번.현관의 등이 꺼지고 쿵쿵거리는 소리가 어두워진 집 안에 울려 퍼졌다.여자가 축 늘어졌다.긴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어졌다.영인은 일어나서 테이프로 여자를 묶었다.입에도 테이프를 길게 붙였다. 그리고 형광등을 켠 뒤 남자를 확인했다.경동맥이 뛰지 않았다.사람은 얼마나 물렁물렁한지 팔뚝만한 청동에도 머리가 깨져버렸다.영인은 남자의 옷을 벗겨서 피를 닦고 화장실 욕조에 던져 넣었다.남자는 끌어서 머리만 화장실 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부리가 부러진 독수리 상이 뒹굴고 있었다.영인은 독수리 상을 다시 현관 옆에 가져다 놓고 구두를 벗었다.여자는 눈이 반쯤 풀려있었다.여자를 들어서 소파에 앉혀 놓았다. 여자의 목에 걸린 진주목걸이가 반짝거렸다. 영인은 진주목걸이를 풀면서 말했다. “ 올 줄 알았어.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까. ” 여자는 알아듣지 못할 신음소리를 내면서 힘겹게 영인을 바라보았다.영인은 웃으면서 목걸이를 풀고 여자 옆에 앉았다. “ 저건 걱정하지 마.이젠 청소가 익숙해졌거든.그리고 내가 아니었어도 어차피 죽었을 거야.세상은 다 그런 거니까. ” 영인은 몸만 보이는 남자를 슬쩍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 아버지일은 미안해.대신 사과하지.아버지도 나름 반성하고 살았어.죽기 전까지 나한테 폐 끼치지 말라고 할 정도였어.그래서 나도 조심조심 살았고.봐서 알잖아?


소설 처음 보는 사람이 신발을 신고 집에 들어와도 뭐라고 못하는 사람이었다니까? 순진하게 가르쳐 준다는 말까지 그대로 믿고 말이야. ” 영인은 일어나서 창밖을 바라보았다.거리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변한 것은 자신이었다.세상은 자신 이외에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더 이상 향냄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 그래서 앞으로 조금 이기적으로 살아보려고 해.괜찮지?” 여자는 영인의 말을 어렴풋이 알아듣고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영인은 주머니에서 개목걸이를 꺼내었다. “ 검은색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준비해봤어. ” 영인은 여자의 목에 검은 목걸이를 채우면서 속삭였다. “ 그러니까 우리 같이 살자.고모. ”


소설

사랑 사랑 ‘ 아이들이 보고 싶어요. ’ 시립자제원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내게 그 여자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떠올리게 했다.아이들,그녀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아이들의 안부를 물었다.전에 없이 금방이라도 울 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 신원 확인을 좀 해주시면 좋겠는데요.전 부인되시는 분이 맞는지. . . . . . . ’ “ 나는 모르는 일이외다.그런 일로 바쁜 사람을 오라 가라 해서야 되겠소?”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자,전화를 받는 내내 격하게 뛰던 심장이 그제 서야 고요해지는 것을 느꼈다.나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창가로 걸어갔다.12월이었다. 세월은 화살과도 같다더니,어느 새 창틀에는 초저녁부터 내린 진눈깨비가 가득 쌓여 있었다.창문을 조금 열자 방 안이 금세 차가운 공기로 가득 찬다.나는 형용할 수 없는 시린 감정으로 그 차가운 공기를 폐 속 깊숙한 곳까지 들이마시고 또 들이마셨다. ★★★ “ 이봐 우영이,자네 이번에도 또 독립 운동가의 변호를 맡았다면서?” 산처럼 쌓인 서류 더미 속에서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자 어릴 적부터 죽마고우였던 이준석이 서 있었다.준석은 연분홍 비단을 덧댄 챙 모자에 얇은 줄무늬가 그려진 회색 수트를 맵시 있게 차려입은 모습이었다.역시 경성 제일의 멋쟁이라고 소문이 자자할 만한 차림새였다. “ 도대체 그런 소식은 어디서 다 듣는 겐가?사설탐정이라도 하나 고용한 건가?” “ 이 사람,그런 시덥잖은 소식 몇 개 알아내자고 피 같은 내 돈을 낭비할 것 같은가. 지금 태화관이고 모짜르뜨고 할 것 없이 다들 모이기만 하면 그 이야기뿐이라네. 자네가 변호하게 될 상대가 그 여자라면서?몇 년 전에 자네한테 일방적으로 파혼


소설 선언 했었던. . . . . . . ” 준석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배여 있었다.맞아,이 친구는 나와 함께 동경대학 법학부를 졸업했었지.나는 부끄러운 지난 일이 들춰진 데에 대한 무안함에 괜스레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쥐고 있던 서류를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 . . . . . . . 그녀는 그 때 아직 학생이었어.공부를 좀 더 하고 싶었던 게지. ” “ 이거 자네답지 않게 왜 이러나.우리가 법학과를 다닐 무렵,동경 유학생들 사이에서 나혜석을 모르는 사람도 있었던가?총독부에까지 연줄이 닿아있는 재력가 집안 출신에 영리하고 그림에도 조예가 깊은데다 미인이기까지. . . . . . . 그녀는 우리 조선 유학생 모두의 자랑거리였어.안 그래?그래도 우영이 자네 정도 되니까 그 나혜석과 혼담이라도 오고간 게 아니냔 말이야.그녀가 동경 유학시절에 춘원 이광수며 염상섭을 비롯한 많은 문인,예술가들과 불타는 자유연애를 했다는 걸 설마 부정하지는 않겠지?” 준석은 이제 아예 작정하고 나를 놀려먹기로 마음을 먹은 듯 싱글싱글 웃으며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때 마침 비서가 커피를 타서 내오자 그는 비서를 향해 불어로 몇 마디 농을 걸었다.준석은 법학부를 졸업한 후 몇 년동안 파리에 머물렀었다.그는 언제나 자신이 불어를 능숙하게 할 줄 안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자랑스러워했다. “ 천성적으로 피가 뜨거운 여자야.자네가 그녀를 제대로 감당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군. ” 준석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설 듯 모자를 집어 들었다.나는 묵묵히 커피를 마셨다.뜨거운 커피향이 목구멍을 화끈거리게 만들었다. “ 미안하지만 나는 댁과 결혼할 마음이 조금도 없어요. ” 내가 처음,나혜석,그녀를 만나게 된 것은 동경대학 법학부의 졸업을 앞두고 있던 그 해 봄이었다.집안끼리 혼담이 결정되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유학생들 사이에서도 이미 소문이 자자하던 그녀였기에,그런 여인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다는 것에 어느 정도 들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갑작스런 연락을 받고 나간 찻집에서 만난 혜석은 열여덟 살의 아가씨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미인이었고,또 훨씬 어려 보였다. “ 며칠 전에 오라버니가 동경에 왔어요.무조건 당신과 결혼해야한다고 하더군요. 있을 수 없는 일이예요.내가 결혼할 사람은 내가 고르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혜석은 젖살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얼굴에 홍조까지 띄며 나에게 역설했다.할 말이 있으면 어디 한 번 해보라는 식이었다.나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혜석 역시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좋은 집안에서 좋은 교육을 받으며 자란 여인 특유의


소설 자신감과 긍지,그러면서도 어둡고 지저분한 것이라고는 전혀 알지 못하는 순진함이 묘하게 뒤섞인 눈빛이었다.문득 그녀가 입고 있는 복숭아빛 원피스가 그녀에게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 . . . . 그럼 혜석 양은,어떤 사람을 결혼상대로 고르고 싶습니까?” 뜬금없는 나의 물음에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씩씩대던 그녀는 멍하니 입을 딱 벌렸다.이런 멍청한 질문은 처음 받아본다는 표정이었다.그러더니 이내 다시금 새침한 얼굴이 되어 대답하는 것이었다. “ 그야 물론,사랑이지요.결혼이란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서 하는 것이 아니던가요?” 사랑,그녀가 아무 거리낌 없이 입에 담은 사랑이라는 단어는 이제껏 어느 책,어느 글귀에서 읽은 것보다도,어느 여인의 입술에서 들은 것보다도 더 낭만적인 울림으로 내 귓속을 파고들었다.그녀의 순진함이 귀엽게 느껴져 짐짓 웃음이 나왔다.혜석은 웃음을 참기 위해 넌지시 입술을 깨무는 나를 무척이나 불쾌하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그래,어쩌면 그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나는 그 때 이미 눈앞에 앉아 있는 이 새침한 소녀를 평생 곁에 두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혜석은 내 쪽으로 일방적인 파혼 의사를 전달해왔고, 경성의 부모님을 비롯한 친지들은 모두 그녀의 일방적인 파혼 선언에 대해 망신살이 뻗친 것에 분개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는 그녀에게 잘 알겠다는 짧은 답신만을 보낸 후 이 일에 대해 함구했다.곧 동경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혜석이 미술학교를 졸업하자말자 그 오라비에 의해 강제로 경성에 끌려가다시피 돌아갔다는 소문이 퍼졌다. 파혼 직후,나는 법학부를 졸업하고 경성으로 돌아와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대외적으로는 정계나 재계의 일을 전담한다고 간판을 내걸고 있었지만 주로 하는 일은 독립 운동을 하다가 붙잡힌 이들의 변호를 하는 일이었다.같은 경성에 있으면서도 혜석을 만나는 것은 좀처럼 어려운 일이었다.그녀가 뛰어난 그림 실력과 요란한 스캔들로 연일 잡지나 신문에 오르내리며 매스컴의 주목을 받는 덕에 소식이 끊기지 않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한편으로 혜석은 여성 운동에도 상당한 열을 올렸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조선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지금보다 더 높아져야하며 여성들도 남성들처럼 동등한 입장에서 배우고 누릴 권리가 있음을 주장했다. 소위 전통과 관습의 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는 지식인들조차 그런 그녀의 파격적인 언동에는 냉소적인 시선을 숨기지 않았고, 예술계에서 그녀는 이미 그 자체로 이단적인 존재였다.


소설 나는 집안 어른들의 성화를 견디다 못해 결국 한 여인과 결혼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전형적인 조선 여성으로 문학이니 사상이니 하는 것은 일절 알지도 못하는 보수적인 여인이었다.그녀는 불행히도 몸이 약해 딸아이를 하나 낳고 산욕열로 숨을 거두었다.나는 아내가 죽고 난 후에도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그 후로도 줄곧 독립 운동가들의 변호에 힘을 쏟았다.집안에서는 아내가 죽은 후부터 계속 재혼할 것을 독촉하고 있었다. 혜석이 의열단 사람들과 함께 독립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나는 서둘러 그녀를 위해 변호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리고 그 무렵부터는 혜석과 나 사이에 어떤 알 수 없는 인연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 혜석이 감옥에서 풀려난 지 두어 달 뒤의 일이었다.그녀에게서 감사의 의미로 태화관에서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그녀와의 약속을 위해 몇 벌의 옷을 닥치는 대로 꺼내 갈아입고 어울리는 모자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나는 마치 처음으로 남 몰래 연애편지를 쓰는 사춘기 소년처럼 가슴 설레여 하고 있었다. “ 지난번에는 감사했어요.잘 지내셨죠?” 태화관에 마련된 별실에서 만난 혜석이 나른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마치 절친했던 이들이 오랜만에 서로의 안부를 묻듯이.카네이션이 장식된 보랏빛 양장을 입은 그녀는 이제 젖살이 통통하게 오른 소녀가 아닌 어엿한 아가씨였다.혜석은 인사말을 건넨 후,별달리 할 말을 찾지 못한 듯 바닥에 내려놓은 보랏빛 핸드백을 만지작거렸다. “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더라면 못 알아볼 뻔 했습니다. ” 내가 넌지시 그렇게 말하자,혜석은 무슨 뜻이냐는 듯 눈길을 들어 나를 향했다. “ 혜석 양의 미모가 한층 더 고와졌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예전에 동경에서 만났을 때는 귀여운 소녀 같았는데,지금은 누가 봐도 어엿한 모던 걸이라고 하겠어요. ” 그러자 그녀는 훗,하고 짧은 웃음소리를 흘렸다.나는 그 짧은 웃음 하나에도 가슴이 방망이질치는 것을 느꼈다. “ 참,부인 일은. . . . . . . 몰랐어요.늦었지만 유감이에요. ” “ 아닙니다.살아서 남한테 죄지은 일 없는 사람이니까 좋은 곳으로 갔을 겁니다. 어쩌면 제 곁에 있는 것보다 더 좋을지도 모르지요. 부끄럽지만 무심한 남편이었거든요. ”


소설 나는 그렇게 황급히 죽은 아내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았다.혜석은 내 변명같은 대답에도 잠자코 입을 다문 채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고작이었다.말없이 식사를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가 내게 뭔가 할 말이 있는데 망설인다는 게 느껴졌다.한참동안 생선 구이를 젓가락으로 깨작거리던 혜석이 이윽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 . . . . . . 괜찮으시면,주말에 한 번 더 뵙고 싶은데요. ” “ . . . . . . . 저를 말입니까?”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말에 나는 멍청해 보일 정도로 입이 딱 벌어져 그렇게 되묻고 말았다.아뿔싸,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아,나란 사내는 이토록 바보였던가. “ 제가 아는 분이 이 근처에서 전시회를 연다고 하셔서요. 혹시 서양화 좋아하시나요?” 혜석은 그렇게 물은 다음,차분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그 뒤에 내가 그녀에게 뭐라고 대답했는지 사실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기억나는 것이라고는 혹시 그녀가 마음을 바꾸기라도 할까 불안하여 서양화를 참 좋아한다는 말만 미친 사람처럼 몇 번이나 되풀이했던 나의 바보같은 모습 뿐이었다. ★★★ 혜석과 나의 혼담이 다시 오가기 시작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몇 번의 식사와 티타임을 함께 했고,연극이나 전시회를 관람하면서 담소를 나누었다.나는 예술에 대해 무지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녀만큼 미술 쪽에 조예가 깊지 못했다.혜석은 곧 그것을 간파한 듯 미술 이야기보다는 주로 정치나 경제 쪽의 화제를 자주 언급해 내가 당황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그런 그녀의 배려는 나를 감동시켰고,재치 있는 말투와 간간히 보여주는 애교 섞인 행동은 나를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 나와 결혼합시다.결혼해서 함께 행복하게 사십시다. ” 여느 때처럼 연극을 관람하고,자주 가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친 후 나는 혜석에게 그렇게 프로포즈하며 미리 준비해둔 반지를 내밀었다.혜석은 아주 잠깐 눈을 치떴지만,이미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던 듯 깜짝 놀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 . . . . . . . 좋아요.하지만 몇 가지 조건이 있어요.만약 당신이 그 조건을 모두 수락하신다면 나 또한 기꺼이 이 반지를 끼고 당신의 아내가 되겠어요. ” 혜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내가 내민 반지를 살짝 내 쪽으로 다시 밀었다.


소설 “ 그 조건이라는 게 뭐요?” “ 모두 세 가지예요.첫째,일생을 두고 나만을 사랑해주길 바라요.둘째,결혼하고 나서도 예술 활동을 그만두고 싶지 않아요.그림 그리는 일을 계속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세요.셋째,내가 당신과 결혼하고 나면 시어머니 될 분과 전처소생의 딸과는 따로 살도록 해주세요.그들과 함께 살고 싶지 않아요.이 모든 조건을 들어주신다면 결혼하겠어요. ” 혜석의 요구한 세 가지 조건은 일생을 두고 사랑해달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파격적인 것들이었다.하지만 고작 그런 것들 때문에 겨우 내 곁에 있게 된 그녀를 놓칠 수는 없었다.나는 모든 조건을 들어주겠다고 혜석에게 약속했고,우리는 비로소 결혼할 수 있었다. 혜석은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내게 신혼여행을 갈 것을 제안했다.신혼여행이라는 말 자체가 아직 조선에서는 익숙치 않은 때였다.하지만 여행을 하면서 함께 둘만의 추억을 만들어가자는 그녀의 말에 나는 두말도 않고 신혼여행이라는 것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문제는 다름 아닌 그녀가 신혼여행지로 선택한 곳에 있었다.그 곳은 바로 혜석의 옛 연인인 최 승구의 무덤이 있는 어느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 승구 씨는 불쌍한 사람이었어요.누구보다도 열정적인 문학도였고 투철한 독립 운동가였는데 저주받을 폐병이 그를 이렇게 만든 거예요.그가 품었던 아름다운 꿈들도 이젠 다 물거품이 되어버렸어요.가족들과 떨어져 홀로 외로웠던 동경 유학시절 이 사람만이 나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는데. . . . . . . 내게 얼마나 잘해주었는지 몰라요.그런데 지금 이이는 이렇게 차가운 흙 속에 묻혀 있고,나는 살아서 고동치는 심장을 갖고 당신 곁에 있네요. ” 혜석은 그렇게 말하며 아련한 눈길로 최 승구의 무덤을 내려다보았다. 최 승구와 나 혜석의 연애담은 당시 온 동경을 떠들썩하게 만들만큼 요란한 것이었다.춘원 이광수와 그 약혼녀 사이를 갈라놓았다는 염문설에 휘말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젊은 유학생 최 승구와 스캔들이 난 혜석에 대해 아무리 자유연애가 만연한 시대라지만 너무하다는 비난의 소리도 있었다.하지만 혜석은 그런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열정적으로 최 승구를 사랑했고,3년 후 그가 폐결핵으로 죽을 때까지 그들의 사랑은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다.혜석은 최 승구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눈물로 그의 곁을 지켰다고 했다.그 소문을 들었을 당시의 나는, 복숭아빛 원피스를 입고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 사랑을 역설하던 소녀를 떠올리며 과연 그녀에게 어울리는 사랑이라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었다.


소설 죽어서까지도 그녀에게 애틋한 시선을 받는 그에게 격렬한 질투심을 느꼈지만,나는 그런 것은 전혀 내색하지 않은 채 오히려 그녀가 최 승구를 위한 비석을 무덤 앞에 세워달라는 말에 흔쾌히 그러겠노라 약속했다.혜석은 그런 나의 관대함에 무척 감동한 듯 보였다. 둘만의 추억을 만들자던 그녀의 말처럼 신혼여행이라는 것은 우리 부부의 유대감을 더욱 깊고도 견고하게 만들어 주었다.나는 혜석이 결혼 생활에 별로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그림이나 그리며 살 것이라 예상했고,또 그렇게 해도 전혀 상관없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런 나의 예상을 깨고 아내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냈다.혜석은 실로 완벽한 아내였다.공식적인 장소에서는 우아하고 세련된 파트너였고,집에서는 지혜롭고 사랑스러운 연인이었다.그림에 있어서도 결혼 전보다 더 정성을 쏟아 이듬해에는 유화 개인전을 성황리에 치러내기도 했다. 처음에는 혜석의 화려했던 과거를 들먹이며 우리의 결혼이 오래가지 못할 거라 수군대던 사람들도 차츰 그녀에게 매료되어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주위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커플이 되었다.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이따금 그녀가 침울한 얼굴로 작업실 앞 툇마루에 앉아 있곤 하는 일이었는데,혜석은 작품 구상이 잘 되지 않을 때면 으레 그렇다며 나를 안심시켰다.게다가 그렇게 한 동안 우울해하다가도 돌아서면 금방 기분이 좋아보였기 때문에 점점 그 일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나는 꿈에서도 바라던 아내와 함께 보내는 하루하루를 만끽하고 있었다. ★★★ “ 하지만 이 아이는 분명 딸인걸요. ” 첫 아이의 출산을 앞둔 때였다.첫 번째 결혼에서도 딸밖에 얻지 못했었기 때문에 집안 어른들은 내심 혜석이 아들을 낳아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나 역시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책임감에 그런 생각을 넌지시 그녀에게 전했던 것이었다.그러자 혜석은 당치도 않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이 아이는 딸이예요,난 분명히 알 수 있어요,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사랑스럽다는 듯이 잔뜩 부른 배를 쓰다듬었다. “ 난 이 아이가 태어나면 다른 부모들이 가르치지 않는 많은 것들을 가르쳐줄 거예요.봄날의 진달래 꿀은 꿈처럼 달콤하고,한여름의 바닷물은 눈물보다 더 짠맛이 난다는 걸 알려주겠어요.가을 하늘의 구름은 솜사탕처럼 허무하고, 한겨울의 첫눈에서는 차갑고 깨끗한 맛이 난다는 것도요.아이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면 맨발로 흙을 밟게 해줄 것이고 조금 더 자라면 바람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 가르쳐주겠어요.우리 아이는 누구보다도 자연을 사랑하는 맑고 깨끗한 아이로 자라날 거예요. ”


소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귀여운 딸을 얻었고,그 후에는 바라던 아들까지 얻었다.아이를 품에 안고 젖을 먹일 때면 혜석의 얼굴은 세상에서 가장 자애로운 어머니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아이들이 태어난 후로는 침울하게 있는 일도 없었고, 그녀는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자연 속에서 아이들을 키우려 애썼다.여권 신장에 열을 올리고 현모양처론을 신랄하게 비판하던 처녀 시절 혜석의 모습은 조금씩 자취를 감추어가고 있었다. 혜석과 결혼하고 아이들이 태어난 후로 변호사 사무실 일을 뒤로 한 채 출세를 위해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된 내게 혜석은 독립 운동가들을 돕는 변호사 일을 그만둔 것에 대해 불만을 내비쳤다.때로는 앞에 나서 만세 삼창을 부르는 일보다도 선진 문물을 배우고 익힌 일본의 관료가 되어 독립투사들에게 은밀히 도움을 주는 일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더 중요할 수 있다는 나의 말에 그녀는 내켜하지는 않았지만 수긍하는 눈치였다.만주로 가게 된 것도 바로 그 때였다.그녀와 아이들을 떼놓고 혼자서 만주로 가는 것을 주저하던 나에게 혜석은 자신도 나와 함께 만주로 가겠다고 나섰다.그녀는 일본 유학 시절처럼 다시 외국에 나갈 수 있다는 사실에 뛸듯이 기뻐하며 나보다도 훨씬 더 만주행을 서둘렀다.아이들을 키우며 잠시 접어두었던 뜨거운 피가 만주행으로 인해 다시금 고개를 쳐든 듯 했다.만주에서 혜석은 독립 운동가들을 은밀히 후원했고,나 역시 외교관의 업무를 보는 한편으로 그녀를 도와 독립 운동에 이바지했다.만주에서의 외교 활동을 끝마치고 곧바로 아이들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던 나와는 달리,혜석은 좀 더 넓은 세상을 직접 보고 겪고 싶다는 뜻을 꺾지 않았다.할 수 없이 그녀의 뜻에 따라 우리 부부는 뉴욕으로 향했고,그 곳에서 혜석은 미국의 선진 문화에 크게 감명을 받은 듯 했다. “ 놀라운 곳이예요!어딜 가도 놀라운 것들 뿐이예요.이곳에 비하면 조선은 얼마나 작고 좁은 땅덩어리인지. . . . . . . 서양은 정말 멋진 곳이로군요. ” 혜석은 그렇게 말하며 미국 여기저기를 돌아다녔고, 개방적인 사고방식의 서양인들과도 금새 친해져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그들은 혜석의 그림과 그녀의 예술적 안목을 칭찬했다.혜석은 그들에게 둘러싸여 서양의 상류사회에 대한 예찬을 늘어놓으며 설레여했지만,나는 우리 부부에게 쏟아진 관심과 혜택들이 모두 외교관으로서의 나의 위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선진 문화의 토양 위에도 어둡고 추악한 부분은 그림자처럼 존재하기 마련이다.하지만 타국에서 온 외교관 부부에게 그런 부분을 보이려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하지만 혜석은 그런 것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외교관 부인으로서의 위치를 만끽하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그녀가 새로운 환경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면 충족시킬수록 고국에 대한 향수가 짙어지고 있었다.아이들은 아직 작고 어려서 무엇보다도 엄마의


소설 손길이 필요한 때였다.하지만 마치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는 혜석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차마 고국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뉴욕에 있는 내게 총독부에서의 전갈이 왔다. 불란서로 떠나라는 지시였다.소식을 전해들은 혜석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이미 그 즈음의 그녀는 뉴욕 생활에도 슬슬 싫증을 내고 있던 터였다.그녀의 서양에 대한 동경은 이미 도를 지나치는 수준의 것이였고,총독부에서의 지시를 거스를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나는 다시 불란서를 향해 떠날 수밖에 없었다. 불란서에 도착한 이후 나는 어떻게든 빨리 아이들에게 돌아가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바쁘게 일을 처리했다. .혜석은 불란서에서도 뉴욕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림을 그리고 예술가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불란서로 유학와있던 조선인들과의 친분을 쌓았다.예술의 도시 속에서 그녀는 마치 그 곳이 진정한 자신의 고향인양 생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정신없이 일에만 매달린 덕인지 불란서에 도착한지 1년 만에 마침내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도 좋다는 총독부의 허락이 떨어졌다. “ 난 가지 않겠어요. ” 혜석은 그렇게 말하며 고집을 부렸다.굳이 돌아가야 한다면 자신은 여기 혼자 남을 테니 나 혼자서 돌아가라는 말까지 서슴치 않았다.남편도 없이 홀홀단신으로 외국에 머무르겠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처음에는 좋은 말로 그녀를 타이르던 나도 나중에는 자신밖에 모르는 아내에게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 좋아!그럼 나 혼자 돌아가겠어.당신은 여기 남아서 당신 좋을 대로 지내도록 해. 그림을 그리든 친구를 사귀든 마음대로 하란 말이야.하지만 아이들에게 당신이 결코 좋은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꼭 기억해 둬! ” 혜석은 화가 나서 돌아서는 나에게도 묵묵부답으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나는 그 길로 곧장 그녀를 불란서에 놔둔 채 귀국했다.몇 년의 외국 생활 끝에 다시 만난 아이들은 몰라볼 정도로 껑충 자라 있었다.처음에는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를 어색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반가워하는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나는 비로소 집으로 돌아왔다는 생각에 안도할 수 있었다. ★★★ “ 자네 부인이 돌아왔다면서?” 오랜만에 술이나 한 잔 하자는 준석의 제안에 태화관 별실에서 술잔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준석은 넌지시 혜석이 귀국한 이야기를 꺼냈다.


소설 그랬다.몇 년의 시간을 불란서에서 보낸 혜석은 어느 날 불현듯 돌아왔다.아직 그녀에 대한 노여움이 채 풀리지 않은 나였지만,그래도 돌아온 아내를 보니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때문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아이들과 함께 돌아온 그녀를 환영해주었다. 불란서에서 돌아온 이후,혜석은 이따금 먼 곳을 바라보는 버릇이 생겨있었다. 해질녘,얼굴 위로 타는 듯한 주홍빛이 쏟아지노라면 그녀는 툇마루 위에 걸터앉은 채 한숨을 내쉬곤 했다.너무 애달파 차라리 달콤해 보이는 그런 한숨이었다.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는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반짝였고 희고 고운 손가락들은 그녀의 머리카락과 턱을 타고 하나의 선을 그렸다.그리고 그럴 때면 나는 그녀에게 감히 말조차 붙이지 못하였다. “ 응,돌아왔다네.이제 외국 구경은 질릴 만큼 했나 봐. ” 웃음기어린 나의 대답에 준석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혀를 찼다. “ 자네 아주 태평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군 그래.지금 세간에 어떤 소문이 떠도는지 모르고 있는겐가?” “ 무슨 소린가?소문이라니?” 준석의 말에 의아해진 내가 되묻자,준석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으로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그러더니 술을 직접 따라서 쭉 들이키더니 나를 향해 한숨을 크게 한 번 또 내쉬는 것이였다. “ 이 사람,답답하군.무슨 일인지 어서 말을 해보아. ” “ . . . . . . . 최 린이 나를 찾아왔었다네. ” 최 린은 천도교의 교주인 사내였다. 불란서에서 외교관으로 있던 시절에 우연히 함께 불란서에 머무르고 있던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젊은 나이에 손병희의 총애를 받아 천도교를 이끌어나가게 된 인물이었는데 나는 그를 비범한 구석이 있는 남자답고 호탕한 사내로 기억하고 있었다. “ 최 린이라면,불란서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네.자네가 그 자와 친분이 있었던가?” 그리고 그 후에 준석에게서 불란서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소상히 전해들은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에 사로잡혀 만류하는 준석을 뿌리친 채 한 걸음에 집으로 달려갔다.


소설 ★★★ “ 이게 무슨 짓이예요! ” 느닷없이 안채에 들어선 나에 의해 강제로 마당으로 쫓겨내려간 혜석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나에게 화를 내었다.나는 그녀의 화난 얼굴을 본 척도 하지 않은 채 안채로 다시 들어가 그녀의 옷가지 몇 벌과 그녀가 아끼던 물건 몇 개를 마당에 죄 집어던졌다. “ 지금 당장 내 집에서 나가길 권하는 바,속히 내 눈앞에서 사라져주었으면 하오. ” “ 당신 도대체 왜 이러는거예요?” 혜석은 황망함으로 인해 붉어진 얼굴로 내게 소리쳤다.소란스러운 소리에 유모의 손에 이끌려 마당에 나온 아이들은 전에 없이 화가 난 아비의 모습에 겁에 질려 있었다.나는 유모에게 손짓해 아이들을 데려가라 이른 뒤,다시 한 번 혜석을 향해 낮게 말했다. “ 지금 이 순간부터 당신은 우리 집안의 며느리이자 내 아내,그리고 아이들의 어미가 아니오.내일 아침 해가 뜨는 즉시 우리는 정식으로 이혼하게 될거요. ” “ 뭐라고요?난 무슨 소린지 도통 알아들 수가 없어요.이혼이라니! ” 나는 차가운 눈길로 혜석을 향해 그녀가 불란서에서 최 린과 벌였던 낯뜨거운 애정사에 대해 낱낱이 추궁했다.혜석은 새파래진 얼굴로 서둘러 내 팔을 잡으려 했지만 뿌리쳐졌다. “ 내 말을 좀 들어봐요,여보 그건. . . . . . ” “ 미안하지만,듣고 싶지가 않군.그것보다 어서 나가주었으면 좋겠는데. ” “ 이건 부당해요!아무 준비 없이 당장 나가라뇨?당신은 레이디에 대한 예의도 없나요?” 혜석의 비명에 나는 안면 가득 조소를 금치 못했다. “ 레이디에 대한 예의!그래,당신은 퍽이나 고매하신 레이디라서 지아비가 아닌 다른 사내와 정을 통하셨나?그것도 온 불란서가 시끌시끌하도록?그것 참 대단한 에티켓이군! ” “ 비꼬지 말아요!내 의도는 순수했어요.그리고 그건 그 또한 마찬가지예요.우리는 죄짓지 않았다고요.우린 그저 서로 사랑한 것 뿐이예요.내가 그와 사랑했다고 해서 왜 우리의 결혼생활이 깨어져야하죠?불란서에서는 부부가 상대 외에 다른 연인을 만들어도 전혀 문제될 게 없어요.바야흐로 자유연애 시대 아니던가요?게다가 당신,당신도 몇 번이나 태화관의 기생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잖아요! ” 혜석의 눈물섞인 변명에 나는 간신히 참았던 분노가 폭팔하는 것을 느꼈다.부정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그것을 뉘우치기는커녕 사랑을 들먹이며 되려 나를 비난하는


소설 그녀의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나는 진정 이런 여인을 운명의 상대라 믿고 일평생 마음을 다 바쳤던가. “ . . . . . . 나의 명예를 위해,그리고 그녀들의 명예를 위해 밝혀두는데 맹세코 나는 그녀들을 사랑한 적이 없소.그리고 그건 그녀들도 마찬가지야.당신의 그 철없고 낯부끄러운 불륜과 술자리를 동일시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군! ” “ 의도가 어찌되었든 마찬가지 아닌가요?나는 그 일로 당신을 원망한 적이 없는데, 당신은 어째서 나를 이토록 몰아세우는지 모르겠어요.당신이라면 이해해줄줄 알았는데. ” “ 정신나간 소리 좀 작작해!세상에 어떤 남편이 부정을 저지른 아내를 이해해? 아이들을 내팽개치고 몇 년씩이나 외국에 있는 여자를 어떻게,무슨 수로 이해해? 당신이 처녀 시절 그토록 부르짖었던 여권 신장이라는 건 남편 몰래 바람이나 피우는 거였나?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선 불륜이 필수불가분의 조건이였어?응? 그런 거였냐고! ” 피를 토하는 듯한 나의 외침에 혜석은 말을 잃고 그 자리에 서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이 순간조차도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보니 새삼스레 마음이 아파왔다. 하지만 이제는 되돌릴 수 없다.그녀는 나의 믿음을 배신했다.나의 믿음,나의 사랑. 그래,그녀는 나의 사랑을 짓밟고 모욕했다.그녀가 수없이 입에 올렸던 사랑,감히 입 밖에 내는 것조차 망설이고 또 망설였던 나의 사랑을.나는 두 번 다시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 집에서 쫓겨난 뒤로 친정으로 돌아가려 했던 혜석은 결국 그녀의 친정에서조차 버림받았다는 소문이었다.사람들은 모두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비난하고 나를 위로했다.여론에서조차 외교관 부인인 여류 화가의 이혼을 대서특필하면서 최 린과 혜석의 불륜사건은 온 조선 팔도에 모르는 이가 없게 되었고,혜석은 사회적 죄인으로 낙인찍혔다.나는 그 비난의 홍수 속에서 그녀에 대해 아무런 코멘트도 하지 않은 채 침묵했다. 혜석은 끝까지 예술에 대한 끈을 놓지 않은 채 어떻게든 재기하려고 애썼지만 이미 그녀를 배척하려고 작정한 사람들의 눈에 그녀의 그림따위는 들어오지도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그녀의 괴롭고 억울한 심정을 쏟아부은 글 몇 편만이 세간의 관심을 얻어 판매부수를 올려보려는 잡지에 실렸을 뿐이었다.그녀는 너무나 빠른 속도로 또 너무나 처참하게 추락해갔다.


소설 “ . . . . . . . 아버지,제 말 안 들리세요?” 불현듯 나를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딸아이가 방문께에 서 있었다.나를 향해 은은하게 미소짓는 딸아이의 얼굴이 불현듯 젊은 날의 혜석과 너무나 닮아 한 순간 눈이 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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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키코모리 보균자 히키코모리 보균자 “ 축하드립니다.임신입니다. ” 그녀는 붉은 착상혈로 자신의 재탄생을 내게 알려왔다.누구도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녀가 다시 내 몸에 잉태되었음을 나만은 느낄 수 있었다.병원을 나오면서 한참동안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그에게 연락을 해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에는 연락하지 못했다.그래,성급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마음을 진정시키고 좀 더 차분히 생각하기로 했다.

눈을 뜨니 하얀 천장이 보였다.정신이 들자 상체와 하체가 분리 될 듯 허리와 배가 아파왔다.몸을 동그랗게 말고 이불속을 비집고 들어가는 순간 비릿한 피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순간 집이 아닌 회사에서 쓰러졌던 기억이 떠올랐다.혹시나 하는 마음에 침대시트를 더듬어 축축한 곳이 없는지를 찾았다.다행히 침대시트는 더렵혀지지 않았지만 이미 내 팬티 속은 축축했다.그 축축한 팬티는 내 바지를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어쩔 수 없이 컴퓨터 앞에 있던 보건간호사에게 현재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다.보건간호사는 내 옷을 가져다 주기위해 보건실을 나섰고,나는 그동안 불편해 했던 유니폼에 감사해했다.최근 3개월간 생리가 없어 방심하고 있던 사이 생리가 나를 덮친 것이다.고통스러운 시간이 사라졌다고 좋아했던 시간은 잠시 뿐이었다.언제부턴가 고3때도 없었던 지독한 생리통이 한 달에 한번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한 달에 삼일을 꼬박 괴롭혔다.그 통증은 마치,팔팔 끓는 물속에 집어넣은 플라스틱 요구르트병 마냥 내 자궁이 오그라드는 감각이었다.그 감각을 잊은지 3개월이 지나서 이렇게 느끼게 될 줄이야.이불을 뒤집어쓰고 통증을 감내하고 있던 사이 보건간호사는 나의 옷과 편의점에서 산 팬티를 가져다주었다.그리고 생리대와 진통제를 주었다.진통제를 급히 삼키고 커튼을 치고 옷을 갈아입었다.


소설 하얀색 팬티에 빨간 새겨져있었다.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토기가 올라 올 것 같았다. “ 세상 참 무서워요.또 토막살인 사건이 났어요. ” 보건간호사는 편의점에 갔을 때 잠시 보았던 뉴스 이야기를 내게 해주었다. 경기도에서 또 토막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다.이런 뉴스는 몇 년에 한 번씩 잊을만하면 흘러나와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 피의자가 말하길 피해자가 돈을 주고 사주를 했다네요. 자신을 토막살인 내달랬다고.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예요.아무리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그 고통을 어떻게 견디겠어요.정말 세상 무섭다니까요. ” 보건간호사는 이름도 모르는 죽은 자를 위해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고 있는 듯했다. 보건간호사의 말을 듣고 있으니 그녀가 떠올렸다.제이를 토막내봐.3년 전 그녀는 내게 자주 그런 부탁을 했었다. 진통제로 근근이 하루의 일정을 마감하고 집으로 돌아왔다.휴대폰을 보니 세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낯선 번호였다.누구일까.또 대출이거나 보험 상품 따위를 팔려는 자들의 번호일거란 생각에 다시 전화를 하지 않았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번호로 휴대폰은 울어댔다. “ 예,여보세요. ” “ 안녕하십니까.가희씨 휴대폰 맞습니까?” “ 예,맞는데요.무슨 일로 전화 주셨나요?” “ 경기지방경찰청입니다. 정인씨의 사건으로 연락드리게 되었습니다. 참고인 자격으로 나와 주셨으면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 “ 예?”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머릿속이 멍해지고 ‘ 왜’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형사는 의아해 하는 나에게 말했다. “ 피의자가 계속해서 가희씨가 진실을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이건 또 무슨 말인가.더욱 알 수 없는 소리였다.아랫배와 허리가 더욱 질끈거리며 아파왔다. 담배를 필 때마다 왜 립스틱을 발라요? 그녀는 담배를 필 때면 언제나 빨간색 립스틱을 발랐다.처음 봤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다.그녀가 담배를 피기 위해 립스틱을 바른다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어느 순간인가 그녀가 담배를 피기 위해 립스틱을 바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왜 불편하게 매번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담배를 피는 걸까.처녀가 되어 섹스하는 기분이거든.세 하얀 담배필터에 붉게 묻어나는 자국이 마치 처녀혈 같지 않아?희뿌옇고 매캐한 연기가 내 목구멍을 타고


소설 넘어가 폐까지 도달하는 기분.다시 내뿜어지는 기분.딱 섹스와 닮았잖아?무슨 말인지 이해 할 수 없었다.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온몸의 솜털들이 수치심에 파르르 떠는 듯했다.그녀는 언제나 내게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함께 생활한지 3개월이 넘었지만 그녀의 취향에 좀체 적응되지 않았다.그녀는 지나칠 정도로 빨간색과 하얀색을 좋아했다.아니 집착했다.그녀의 속옷과 구두는 온통 빨간색이었다.반면 벽지와 가구,속옷을 제외한 모든 옷은 하얀색이었다.때로는 이 공간이 무서워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나로서는 그저 꾹 참고 견디는 수 밖에 없었다.의자에 앉아 좋아하는 게임을 하는 것만으로도 짭짭한 수입이 생긴다는 것도 이 집을 떠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었다.어쨌든 그녀는 나의 안식처를 제공해준 사람이었다.나는 스무 살 되고 겨우 월세방 하나 얻을 만큼의 돈을 받고 보육원으로부터 독립했다.혼자 힘으로 겨우 구한 월세방도 다단계로 날리고 피시방을 전전하다가 그녀와 함께 살게 되었다.그녀는 내가 자주 하던 게임의 길드장이었다.게임 속에서 친해져 나의 사정을 알게 된 그녀가 숙식을 제공한 일자리를 준 것이다.하루에 열 두 시간 이상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을 하는 것만으로 이백만원에 가까운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은 고졸인 나에게 운 좋은 일자리였다. 물론 그녀와 생활하면서 컴퓨터 게임만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히키코모리인 그녀를 대신해서 그녀가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나가서 사오는 일도 내 몫이었다.나와 함께 살기 전,그녀는 모든 물건들을 인터넷으로 구매했다고 했다.생필품에서부터 식료품까지 모두다 말이다.그렇게 말도 안 되는 생활을 그녀는 7년이나 했다고 말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발장에는 새빨간 구두가 열 켤레나 넘게 있었다. 경기지방경찰청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지 이틀이 지나고서 나는 참고인 자격으로 형사와 마주 앉게 되었다.형사는 그녀와 피의자에 관한 질문을 했다.그녀에 대한 답변은 3년 전의 이야기가 다였고,피의자에 대한 답변은 피의자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제대로 답변을 할 수 없었다.형사는 피의자와 대면을 해보겠냐고 제의 했지만 괜한 두려움에 제의를 거절했다.형사 곁에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도 있었는데 그는 그녀의 동생이었다.남매라지만 그는 그녀와 많이 닮아 보였다.하얀 피부,홀꺼풀의 가느다란 눈매,갸름한 턱선,가느다랗고 긴 손가락.그녀를 닮은 홀꺼풀의 눈매가 매서웠지만 우수가 깃들어 보였다.조금은 마른 듯 한 몸매에 볼 살이 없어 더 샤프해 보이는 얼굴이 매력적이었다.차가워 보이는 얼굴에 조금은 음울한 눈빛이 그녀와 똑같았다.내 시선은 흘깃 흘깃 그를 훑었지만 서로가 낯설고 불편한 사이였기 때문에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생리통도 모자라 생각지도 못했던 살인사건에 휘말려 3일이 짜증과 피곤의 연속이었다.경찰청으로 또 불려가는 일이 없기를 바랐지만 집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또 경찰청에서 전화가 왔다.


소설 피의자가 나와 꼭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 한 것이다.나는 피의자가 내게 앙심을 품을 만한 발언을 하지도 않았고 딱히 피해를 줄만한 말도 하지 않았는데, 상대를 알지도 못하는데 만나야 된다는 것이 불편했다.하지만 형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를 계속 설득했고 난 통화시간이 길어지는 게 싫어 결국 승낙하고 말았다. 경찰청을 갔다 온지 하루도 안지나 또 경찰청으로 가는 것이 짜증났지만 3일 내내 있던 생리통이 사라져 전날보다 몸이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경찰청에 도착하니 어제 그 형사가 피의자가 있는 곳으로 나를 안내했다.그녀를 살해한 피의자는 생각보다 어리고 순해보였다.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남자는 초췌하고 절망적인 표정으로 나를 맞이했다. “ 고맙습니다.가희씨,정인씨가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도와 줄 거라 그랬어요. 증인이 되어 줄 거라 말했어요.저 모르겠어요?3년전 길드 정모에서 만났잖아요.저 일부러,정인씨에게 악의가 있어서 죽이거나 그런거 아니예요.자신을 토막내주면 대학학비를 주겠다고 그랬어요.오천만원 현금다발을 눈앞에 던져놓고 자기를 토막내고 죽이고 나서 가져가면 괜찮다고 했어요.그러니까 저 좀 살려주세요.저 좀 풀어 주세요.저 그 돈도 하나도 안 썼어요.미안해요.잘못했어요. ” 피의자는 나를 보자마자 울면서 용서를 구하기 시작했다.내게는 용서를 할 자격도 없는데.당황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그저 안절부절하며 피의자를 바라 볼 뿐이었다.답답한 마음에 나는 형사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냈고 형사는 나를 그 방으로부터 꺼내주었다. “ 피의자와 아는 사이입니까?” “ 아뇨,기억이 잘 안 나는데요…” “ 사실은…저 피의자가 다른 살인자와 달라서. . . 저희들도 어떻게 해야 할 지 난감합니다.일단 정신과 상담을 받고는 있는데,매일 같이 가희씨가 모든 걸 이야기 해줄 거라는 식으로만 말을 해서,저희도 꽤 골치가 아픕니다.사실 처음에는 가희씨가 공범이라 생각했는데,그건 아니라고 저 놈이 이야기하더라고요.증거나 정황도 가희씨가 공범이라는 것도 없고.그런데도 매번 저렇게 이야기 하니.한번은 만나게 해야드려야 할 것 같아서 또 번거롭게 해드렸어요. ” 경찰청을 나서면서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누구지? 나를 어떻게 아는거지? 3년 전 길드 정모라…혹시 정인이 언니를 좋아한다며 찬양했던 녀석인가.설마…그럴 리가.어떻게….3년 전 길드에서 만난 남자는 얼굴을 본적도 없는 그녀를 좋아한다며 떠들어 댔었다.온라인 정모 때도 채팅창으로 매번 ‘ 비쥬 누나 사랑합니다. ’ 라고 외쳐댔다.남자는 오직 온라인 게임 속 그녀와의 대화만으로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이었다.


소설 아,짜증나.생리는 왜 매달 꼬박 꼬박 빠지지도 않고 잘 터지는거야.매달 찾아오는 불쾌감은 언제나 짜증으로 표출 되었다.생리통이 심한 친구들처럼 배를 싸매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언제나 생리는 짜증스러운 감정을 만들어 냈다.언니,언니는 생리 안 해요?같이 사는 동안 언니 생리하는 거 못 봤네.혹시 생리 불순? 그녀는 게임에 집중해서인지 무언의 긍정인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병원에 가봐야 되는거 아니예요? 달달이 생리하는게 짜증나긴 하지만 나중을 생각하면 미리 몸 챙기시는게 좋을 텐데.사랑하는 남편이랑 사랑스러운 아이랑 알콩 달콩 살려면 미리 미리 몸 챙겨야되요.이참에 7년만에 외출도 한번 해보시고.병원에 가보세요.그녀는 내 오지랖에 짜증이 났는지 싸늘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사랑? 그런거 믿지마.아가페든 에로스든 플라토닉이든 상관없어.어떤 사랑이든 믿지마. 사랑이란게 생각보다 얄팍한 것이라서 쉽게 부서져. 부모자식간의 사랑도 부서지는데 남녀 간의 사랑이라고 안 부서지겠어?잘 살던 부부도 로또 당첨 되서 이혼하는 기사 못 봤어?돈 때문에 친구를 살해하는 기사는?아무리 사랑타령해도 세상은 결국 혼자야.그러니까 누구도 쉽게 믿지마.나도 믿지 말고 너 자신도 믿지마.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니라서 그래요.언니,언닌 너무 부정적인 생각만해요.물론 우리 부모님도 저를 버렸지만…자식 버리는 사람보다 자식이랑 알콩달콩 잘 사는 사람이 더 많다구요.좋게 좋게 생각하자구요.비쥬러브씨가 언니 말을 들으면 울겠어요. 그녀의 말이 1 00% 틀리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하지만 세상은 좋은 일과 나쁜 일이 항상 같이 있는 곳이다.항상 좋은 일만 생각하고 사는 것도 멍청한 일이지만 나쁜 일만 생각하고 사는 것은 더 어리석은 일이다.그래서 나는 모든 사랑이 부서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나를 향한 부모님의 사랑이 부서져 사라졌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과의 사랑들도 부서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언제나 내 편이 되어서 울어주고 웃어주는 친구들을 통해서 나는 진정한 사랑을 배웠다.나의 친구들은 언제나 내가 긍정적인 생각을 하길 바랐다.우울한 내 과거를 떨쳐버리고 앞으로 나아가기 바랐다.우울은 나 뿐 아니라 내 주위 사람의 삶까지 좀 먹게 할 수 있다 말했다.항상 같이 어울려 다니는 친구들 중 하나가 생리를 시작하면,어느새 모두가 생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처음에는 각기 다른 생리주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생리주기가 이삼일 밖에 차이가 안 날만큼 비슷해진다. 우울도 이와 같은 것이다.세균이나 바이러스를 가지지 않았지만 생리나 우울은 전염된다.때로 우울은 외로움 저 아래 잠복하고 있다가 외로움을 견딜 수 없게 되면 이때다 하고 발병할 때가 있다.그럴 때 사랑이라는 처방이 필요한 것이다. 이때 우울을 잠재우지 못하고 내버려두면 점점 더 빠져나올 수 없는 나락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비록 현실 속의 사랑이 항상 아름답지 않지만 우리는 살기 위해 사랑의 환상을 품고 사는 것이다.언니,언니는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아요?


소설 사람들도 만나고 사랑도 하고 연애도 하고 싶지 않아요?왜 굳이 히키코모리가 되려 하는 거예요.제가 나가면 언니는 또 혼자잖아요.아플 때도 슬플 때도 아무도 곁에 있어주지 않잖아요.그녀는 오른쪽 입술 꼬리를 살짝 들어올리며 ‘ 픽’ 하고 웃었다. 너,히키코모리의 정확한 정의를 아니?집밖을 나가지 않는 사람들을 말하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지,정확하게는 6개월 이상 집 밖을 나가지 않은 채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너 아기는 엄마 자궁 속에서 몇 개월을 사는 줄 알아?9 개월이요.그래,9개월을 세상과 격리된 채 엄마 자궁 속에서 살지.엄마의 자궁 속이 가장 안전하니까.아기가 히키코모리 같지 않아?그녀는 이해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했다.그녀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들이 살고 있는 것일까.내게 이 집은 엄마 자궁과 똑같아.내가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집안에서 생활하는 것뿐인데 문제 될 건 없잖아?언니가 사람들과 안 만나고 단절 된 생활을 하니 부정적인 생각만 하잖아요.사람과 사람사이가 항상 좋을 수는 없지만 언니가 생각하는 만큼 비관적이지도 않아요.아직은 세상에 사랑이 존재하고 있다구요. 그녀는 음울한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내가 기회만 된다면 너에게 꼭,사랑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는 건지 직접 보여줄게.그 왠지 등 뒤로 서늘함이 느껴졌다. 그녀는 정말 내게 사랑이 쉽게 부서지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스스로 토막살인을 부탁했을까.왠지 그녀라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자신의 생각을 증명하기위해서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몬 것인지도 몰랐다.고작 오천만원 때문에 사랑하던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게 사랑이라고 그녀가 내 귓가에 속삭이는 듯했다. 머리를 절래 절래 흔들며 생각을 떨쳐 내려했다.걸음 속도를 높였다.오늘 이후로 다시는 경찰청에 갈 일이 없기를 바라며. 집에 도착하자마자 욕실로 들어가 샤워부터 했다.3일 동안의 피로가 싸악 씻겨지는 기분이었다.커피 한 잔을 들고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오랜만에 예전에 하던 게임에 접속해 보았다.내 아이디로 접속했다가 그녀의 아이디로 접속해보았다. 내가 알고 있는 그녀의 게임 아이디는 총 세 개였는데 세 개다 모두 쉽게 기억해냈다. 처음으로 접속한 캐릭터는 그녀가 주로 사용했던 비쥬였다.길드장 캐릭턱였고 서버 내에서 손꼽히는 고레벨 캐릭터였다.비쥬라 닉네임은 아직도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올라있었다.두 번째로 접속한 캐릭터는 토막살인이라는 닉네임이었다.게임에 접속하고 닉네임을 보는 순간 등이 싸해지는 느낌이었다.비쥬는 내가 자주 접속해서 사용했던 캐릭터인데 비해 토막살인은 몇 번 접속하지 않은 캐릭터였다. 주로 그녀가 새벽에 접속했던 캐릭터였다.PK캐릭터로 명성을 날렸던 캐릭터였다. 하지만 비쥬와 토막살인 같은 유저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나뿐이었다.세 번 째 캐릭터는 제이였는데 그녀의 캐릭터 중에서 유일하게 남성인 캐릭터다.


소설 제이는 비쥬나 토막살인에 비해 레벨이 낮은 캐릭터였다.그녀는 가끔씩 제이의 캐릭터로 접속해 나에게 제이를 죽이라고 하기도 했다.처음 몇 번은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으나 PK를 싫어해 얼마가지 않아 더 이상 제이를 죽이지 않았다.그러자 그녀는 두 대의 컴퓨터로 자신이 토막살인과 제이의 캐릭터로 접속해 제이 죽이기를 반복했다. 생각해보니 토막살인이 PK 캐릭터로 유명하긴 했지만 절대 여성캐릭터는 죽이지 않았었다.그녀에게는 남자에게서 씻지 못할 상처를 받은 적이 있는 것일까.지난날을 생각해보며 그녀는 남자를 싫어했었던 것 같다.한참을 상념에 잠겨 있는데 벨소리가 울렸다.내 휴대폰에 등록되어 있지 않는 번호였다. 전화를 받지 않으려다 끈질긴 벨소리에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 안녕하세요.가희씨 휴대폰 맞습니까. ” “ 예,맞습니다만…” “ 저는 이정인 동생 되는 사람입니다. ” 생각지도 못한 전화였다.무슨 일로 전화가 온 걸까.혹시 내가 피의자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나.머리 아픈 일은 그만 두고 싶은데 자꾸 일이 꼬이네.그의 전화에 괜스레 걱정부터 앞섰다.한편으론 왠지 모르게 설레기도 했다. “ 다름이 아니라.시간되시면 한번 만나 뵙고 싶어서 연락 드렸습니다. ” “ 예?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건지…” “ 직접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러는데,부탁드리겠습니다. ” 오랜만이다.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이 설레는 것은.이 사실을 그나 혹은 죽은 그녀가 안다면 어떻게 생각할까.오해할 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런 설렘은 아니다. 그를 만나고 오래된 감정들을 씻어내면 생리통이 깨끗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나의 생리통은 그녀가 나를 떠나가면서 시작되었다.혹시 금단의 감정으로 그녀를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통증일까봐 겁이 났었다.그때의 나에게는 그녀가 유일한 버팀목이었고 안식처였다.그래서 사랑하게 됐을까봐 겁이 났었다.이제껏 애써 외면한 사실을 지금에서야 인정하는 것은 이제 해결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다.떠나간 그녀가 백골로 돌아온 지금,마음 속 저 깊은 곳에 있는 이 감정의 찌꺼기들을 버려야 했다. 그녀와 함께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와 나의 관계도 친밀해지기 시작했다.그녀는 나에게 술 마시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나는 그녀의 가르침에 따라 홀짝 홀짝 술을 잘도 마셨다.같이 술을 마시는 횟수가 잦아질수록 그녀와 나 사이에는 묘한 기운이 감돌았다.어느 날 부턴가 그녀의 손끝이 왜인지 야하게 내 몸을 더듬어 왔다. 처음에는 장난이려니 하고 넘겼지만 날이 지날수록 스킨십은 더 심해져만 갔다. 문제는 그것이 온전히 싫지만은 않은 것이었다.겁이 났다.하지만 그녀와 나의


소설 살갗이 농밀하게 접촉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두려움 보다 호기심이 더 일었다. 그녀의 품은 거부하기에는 너무 따뜻했다.그날은 그녀와 나 모두 평소보다 더 많은 술을 마셨다.그녀는 나의 몸을 발가벗긴 채 애무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상의만 벗은 채 내 몸을 탐했다.그녀는 나보다 내 몸을 더 잘 알았다.젖가슴을 아기처럼 빨거나 아프게 깨물면서도 그녀의 손은 내 골반과 허벅지를 쓸었다.골반과 허벅지를 입술과 혓바닥로 쓸 때면 손으로 가슴을 만졌다.이마에서 발끝까지 입술과 손과 혓바닥으로 쓸고 이로 감질 맛나게 깨물었다.등허리는 침 범벅이 될 만큼 핥아댔다. 나는 그녀의 입술에 매달려 그녀의 바지를 벗기려했다.하지만 그녀는 내 손길을 거부했다.그리고는 내 가랑이사이에 머리를 박고 혓바닥을 날름거렸다.자궁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차라리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어.그녀는 가랑이 사이에서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여전히 이해하지 못할 말을 했다. 다음날 그녀가 사라졌다.7년 만의 외출이라며 새빨간 애니멜 구두를 신고 새빨간 속옷이 비치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채 나갔던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그 이후로부터 없던 생리통이 나를 괴롭혔다. 약속 장소에 그가 먼저 나와 있었다.그는 가까운 바로 나를 안내했다.검은색 간판 오른쪽 아래에 은빛 글씨로 나비라고 적혀 있는 바였다.가게 안은 조용했다.둘이서 조용히 이야기 나누기에 괜찮은 곳이었다.검은 간판과 은빛 글씨와 마찬가지로 가게 안은 검은색과 은빛으로 디자인해 세련되지만 차분한 이미지를 풍겼다. 스탠드에는 남자 하나가 바텐더와 이야기 하고 있었고 몇 안 되는 테이블은 두 테이블을 제외하고 비어있었다.우리는 되도록 구석으로 들어가 앉았다.자리에 앉고도 서로는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눈이 마주치면 어색한 눈웃음만 흘렸다. 보드카가 들어간 칵테일을 세잔 째 주문했을 때 그가 내게 물었다. “ 3년 전 우리 형은 어떻게 지냈습니까?” “ 예?형이라니요?” 그는 알 수 없는 질문을 해왔다. “ 동거 하신 거 아니셨나요?” “ 예,정인씨와는 3~4개월 정도 같이 살았어요.형이라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그는 하얀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듯했다.하던 말을 멈춘 채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형이라니….아!순간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들이 순식간에 스쳐지나갔다.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 한 것은 아니었지만 함께 지내는 동안 한 번도 생리를 하지 않은 그녀.혹시 그녀는 그녀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그녀에게는 탱글하고 어여쁜 가슴이 있었다.물론 여자치고는 큰 키였지만 요즘에는 키 큰 여자들이 많다.서로 앞에서 옷을 아무렇지 않게 갈아입던 사이였지만,그녀는


소설 내 앞에서 한번도 바지를 갈아입은 적이 없었던 것 같다.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얼키기 시작했다.나는 답을 낼 수가 없었다. “ 저기,무슨 말인지 상세하게 말씀해 주실 수는 없나요. ” “ …형은,아니 그러니까 이정인은…” 그가 정인을 형이라고 말하는 순간 복잡한 생각에 확신이 생겼다 이네 다시 혼란스러워졌다.내가 알고 있는 그녀는 남자가 되기에는 너무 여자다웠다.이해 할 수 없는 말들을 자주 하기는 했지만 그녀는 누가봐도 딱 여자였다.호리호리한 몸에 하얀 피부.풍성한 가슴과 엉덩이 그리고 잘록한 허리.냉정하고 싸늘한 말을 하기도 하지만 조근 조근한 말투의 여성스러운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여자였다.하지만 그녀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던 비밀스러움은 그녀를 여자가 아닌 남자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 이정인은 원래 남자입니다. ” 그녀와 같이 냉정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그는 말했다.가느다래서 매서워 보이는 눈매에 차가움이 더해져 눈빛이 살을 찌를 것 같았다.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슬픔이 담겨있는 듯 보였다.그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천천히 하나둘씩 풀어내기 시작했다.내가 몰랐던 그녀에 대해서. 그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본래 건장한 남자였다. 그것도 사람을 좋아하고 적극적이고 활발했던 사람이었다.성실하고 유능해서 장래를 촉망받는 사람이었다. 주위 사람으로부터 신뢰를 받는 사람,화목한 가정에서 사랑받던 장남이었다.그가 말하는 그녀는 나에게 너무나도 생소한 사람이었다.그녀는 7년이나 은둔생활을 했던 히키코모리였고, 사람을 불신하는 인간 혐오자였다. 그녀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알게 되면서 모든 것을 잃었다.어떤 일이 있어도 이해해주고 감싸 주리라 믿었던 가족의 경멸에 그녀는 숨을 곳을 찾아 다녔고,사랑했던 사람의 배신에 그녀는 세상을 등졌다.그녀가 받은 사랑 속에는 이해가 부족했고,이해가 결핍됨으로 자연스레 사랑은 식어갔고 식어버린 사랑은 그녀의 가슴을 찔렀던 것이다. “ 형을 도와주지 못했어요.그렇게 강하던 형이 혼자 우는 모습을 봤는데,위로 한마디 못했어요……그때는…왜 그랬을까요.돌아와서 나를 용서해주길 바랬는데, 난 이제 형을 이해 할 수 있다고,아니 받아 드릴 수 있다고,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내 형이라고……말하고 싶었는데……” 그의 목소리가 격해졌다.이야기를 하는 동안 몇 잔의 보드카를 마셨는지 나도 그도 취기가 올랐다.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가 안쓰럽고 그녀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한편으로는 안심됐다.내가 사랑했을지 모를 그녀가 여자가 아닌 남자라는 것에.


소설 눈을 뜨니 낯선 풍경이었다.머리는 쿵쾅 거렸고 뱃속은 울렁거렸다.하지만 그의 품속은 따뜻했다.얼마나 많은 술을 마셨나 생각하다 빨리 여기를 나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씻지도 않고 따뜻한 그의 품을 뒤로 한 채 급하게 모텔을 빠져나왔다.이후로 나는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고,그도 나에게 연락을 주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나는 평범한 나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생리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생리를 하는 듯이 약간의 복부 통증과 피가 비쳐 놀란 마음에 산부인과로 향했다. “ 축하드립니다.임신입니다. ” 살갑게 웃는 여의사의 말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담담하게 의사를 바라보았다.당장 어떠한 결론을 내리지도 못하고 급히 임신 확인만 하고 병원을 나섰다.난 그녀의 우울에 전염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오히려 내가 그녀를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까지 생각했다.그녀가 떠나고 고통스러운 생리통이 생기기 전까지.그런데 백골이 되어 돌아온 그녀는,그녀와 닮은 우울을 내 자궁 속에 심어주었다.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하나.그에게 사실을 알려야 할까.호주머니 속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거리를 걸으며 한참을 생각하다 난 결국 그에게 전화를 하지 못했다.조금 더 생각의 시간을 가진 후에 그에게 전화를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소설

선택의 자유 선택의 자유 귀가 따가울 정도로 여기저기서 벨소리가 울려댄다.진우의 움직임도 날카로워지고 있다.까탈스런 표정의 여자가 재떨이를 가져다 달라며 손짓한다.물을 엎지른 손님은 걸레를 달라며 보챈다.대충 대답하고 새로 들어온 주문부터 받는다.주방에다 주문서를 밀어 넣고 재떨이와 걸레를 낚아채어 여자에게 달려간다.이렇게 바쁠 때는 모두가 말이 없어진다.나 역시 맡은 일조차 해내기 버겁다.오늘은 하필이면 아침부터 비가 쏟아진 뒤여서 오후가 되자 가게 바닥이 흙탕물과 발자국으로 얼룩져 엉망이 되었다.하지만 바닥을 닦고 있을 여유가 없다.거품이 적당히 담긴 생맥주를 양손에 각각 두 잔씩 들고 테이블을 향해 뛰듯이 걷는다.아차,싶은 마음이 들 때는 이미 늦다.일을 하면서 닳고 닳은 운동화 밑창이 물기 어린 바닥과 만나면서 결국 사고가 나고 만다.꼬리뼈에서부터 올라오는 찡한 얼얼함이 정수리에 닿는다.몸이 움츠러든다.근처에서 주문을 받고 있던 진우가 단걸음에 달려와 나를 일으켜 세운다. 그의 상체가 내 등 뒤에 밀착된다.눅눅하고 미지근한 느낌이 거북스러워 밀쳐내고 싶다.바닥에 흩어져 있는 맥주잔의 파편들을 보고 있자니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그의 부축을 받으며 가파르고 좁은 계단을 겨우 올라 옥상에 도착한다.맥주와 소주 박스가 쌓여 있고 직원용 화장실이 있다.이곳은 가게 직원들만 출입할 수 있다. 눅눅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이 볼에 닿았다 내려앉는다.숨을 깊게 들이마시자 여름 냄새가 뱃속 깊이까지 들어온다.일 년 전 여고 건물 뒤편의 숲에서 맡았던 풀 냄새와는 다르다.졸업을 한 후 가게에서 일을 시작하고부터는 몇 달 동안이나 밤마다 잠을 설쳤다.그러다 겨우 지쳐 잠이 들면 꿈속에 수연이가 보였다.수연은 항상 난간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그곳은 꽤 높았다.밑을 내려다보면 안개 같은 것이 아득히 요동치고 있었다.나는 꿈속에서도 꿈 밖에서도 바람에 휘날리는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 뒤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껴 울었다.그러나 그녀는 지체 없이 뛰어내렸다.수연은 마치 사람이 아니라 종잇조각처럼 힘없이 날리고 있었다.투명한 공간 속으로 던져진 그녀의 몸은 흔적도 없이 무색으로 흩어졌다.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그녀가 흩어진 그곳의 바람이 짙은 녹즙 냄새를 풍기며 내 콧속으로 스며


소설 스며 들어왔다. 그해 여름 나는 입시를 앞둔 수험생치고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학교를 다녔다. 고삼이라는 호칭이 이름보다 익숙했던 여름이었다.친구들은 초조함에 손톱을 깨물어 허구한 날 울상을 지으며 손톱깎이를 찾았다.소문난 변비약을 구해다가 한입에 털어 넣고는 휴지 한 롤을 들고서 교실을 뛰쳐나가기도 했다.나는 그 모습들을 남의 일처럼 덤덤히 바라봤다.모의고사가 시작되는 종이 울리면 무심히 자리에 앉았다.그리곤 아무 망설임 없이 차근히 문제를 풀어나갔다.머리는 맑았고 긴장감은 적당했다.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모의 수능이라 할 수 있는 6월 시험에서도 마찬가지였다.그날따라 옆 책상에 앉은 변비는 평소보다 훨씬 더 심하게 다리를 떨었다.그녀의 책상이 교실바닥을 끄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렸지만 나는 그것마저 그러려니 했다.변비는 두 번째 수리영역 시험이 끝나자 그대로 책상에 엎드렸다.시험 마침 종이 울리면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이었다.언젠가 슬쩍 변비에게 다가가서 수학은 네가 우리 반에서 제일 잘하지 않느냐고 말한 적이 있었다.그녀가 다른 시험 때보다 더 가라앉아 보였기 때문이었다.그러자 변비가 눈을 내리깔고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힘없이 대답했다.쉽게 풀어내던 문제도 시험 종이 울리는 순간부터 낯설게 느껴진다고. 변비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시험지 위에 온 집중을 쏟아 부어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과는 달리 자꾸만 내일 당장 받아 볼 성적표,대학, 앞으로의 미래가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다고 했다.그런 푸념들이 오갈 때면 나는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맘때쯤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물었다.꼭 뭔가를 원하고 얻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지…….나는 어떠한 일에 관해서건 의무적으로 대했다.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해야 하기 때문에 했다.삶에 대한 의욕이란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아이러니하게도 그 무기력이 시험지 위 다섯 개의 보기 중 정답을 고를 수 있게 했다.시험 시작종이 울리고 문제를 들여다보면 출제자의 의도와 하나의 답이 눈에 들어왔다.어떤 요소도 문제 푸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이런 속을 모르는 친구들은 나를 부러워했다. 과학탐구 영역 문제집을 뒤적이던 변비는 ‘ 네 머릿속엔 공부할 때 느끼는 스트레스 저장기관이 없는 게 분명해’ 라고 웃으며 얘기한 적이 있다.그 말이 맞는지도 몰랐다. 스트레스란 단어는 미래를 기대하는 친구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말이었다.오직 수연만이 이런 나를 알고 있었다. 어느덧 3교시 외국어 영역 시작종이 울렸다.교실은 정적에 휩싸였다.지난달 보다 문제 난의도가 조금 더 높았다.끊임없이 다리를 떨던 변비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화장실로 뛰어갔다.그녀는 아침에 먹었던 소고깃국을 모두 겨워 낸 후에야 다시


소설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여느 날처럼 모의고사가 끝나고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다.눈 밑이 한층 더 어두워진 친구들이 창가 맨 앞의 내 책상으로 몰려왔다.여기저기서 익숙한 하소연이 터져 나왔다.상기된 얼굴에 찢어진 눈매의 친구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내 볼을 감싼 채 어떻게 지수 로그 문제를 틀리느냐며 푸념했다.그러자 옆 책상에 걸터앉아 있던 다른 친구가 그 말이 들려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 나도’ 라며 우는소리로 찢어진 눈매와 손을 맞잡고 울상을 지었다.나는 겉으로 맏언니가 된 듯 너그럽게 푸념을 받아주고 있었지만 속은 그렇지 못했다.그래서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성가셔.그때 유난히 까만 생머리에 창백한 얼굴색을 가진 수연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는지 교복 치마를 아무렇게나 손으로 뭉쳐 잡고는 내 무릎에 살며시 앉더니 나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안았다.수연이 등장하자 주위의 친구들은 불편한 어른을 마주친 듯 슬며시 옆 책상으로 등을 돌렸다.교실 안은 뭉그러진 여고생들의 목소리로 어지러울 정도였다.수연은 내 목덜미를 감싼 채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꼭 네가 해줬으면 좋겠어.부탁이야. 그 한마디를 남기고는 웅성거리는 친구들 사이로 빠져나갔다.수연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비치는 창백한 목덜미가 그날따라 더욱 가냘파 보였다.그녀가 빠져나간 교실 뒷문을 멍하니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뱃속이 뒤틀리면서 조금씩 초조해지는 것을 느꼈다.수연이 내 곁에 없는 것을 발견한 찢어진 눈매는 재빨리 다가와 배가 고프다며 손을 잡아끌었다.나는 약간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팔을 빼고는 일 학년들이 사용하던 붉은 벽돌로 된 건물로 향했다.순전히 느낌이었지만 내가 교실을 빠져나갈 때 아이들이 나와 수연이에 대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삼 학년 건물을 빠져나오자 여름의 습한 기운이 피부에 들러붙었다.그 느낌은 내가 사계절 중 여름을 가장 싫어하게 된 요인이기도 했다.거기다 머리가 어질해질 정도로 더운 소리를 내며 울어대는 매미는 내 정신을 성가시게 하는 데 단단히 한몫을 했다.학교 담과 일 학년 건물 사이에는 선생님과 학생들이 쉴 수 있도록 작은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사실 숲이라고 하기에는 볼품없고 초라한 곳이었던 것 같다. 그곳은 누구나 한 번쯤 거들떠보긴 하지만 머무를 생각은 하지 않는 그저 그런 곳이었다.손바닥처럼 생긴 이파리가 뒤덮인 커다란 나무 몇 그루가 우거져 있었고 그 주위로 나뭇가지를 세워놓은 듯 자잘한 나무들과 아무렇게나 돋은 풀들이 흩어져 있었다.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그곳은 말하자면 수연이와 나만의 공간,우리들의 아지트였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진우가 쌍꺼풀 없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어깨를 두드리고


소설 있다.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이지 않으려 그를 향해 찡긋 웃어 보인다.그의 시선이 내 몸 이곳저곳을 살핀다.걱정스러운 눈빛이다.나는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괜스레 허리를 짚어본다.다행히 허리 통증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그는 허공에 시선을 둔 채 뭔가 생각하는 것 같다.그러더니 혼잣말로 그래,라고 말한다.진우는 잠시만 기다려보라며 가게 쪽으로 뛰어 내려간다.그의 발소리가 점차 멀어져 간다.아마 내가 엎질러 놓은 맥주와 깨진 유리조각들을 치우러 갔을 것이다.그가 앉아 있던 자리가 횅하다.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고 있다.얼마쯤 지났을까.저편에서 인기척이 들려온다.고개를 돌려 계단 쪽을 바라본다.진우가 소매를 걷어 올린 채 뭔가 들고 있다.둥근 은색 접시 같은 것이다.그가 숨을 몰아쉬며 옆에 앉자 내 시선은 온통 그의 둥근 접시에 쏠린다.그는 꼬인 이어폰 줄을 풀더니 한쪽 이어폰을 내 귀에 꽂아준다.그의 손이 내 귓가에 닿는다.웬일인지 뿌리치고 싶지 않다.이미 온몸에 힘이 빠져버린 탓도 있겠지만 어떤 음악이 흘러나올까 하는 호기심이 더 큰지도 모른다.그가 나를 스치고 지나갈 때면 향수도 아니고 로션 냄새도 아닌 묘한 체취가 공기 중에 남아 한동안 나를 멈춰 서게 만들었다.그러나 내 육체와 정신이 온통 그 옅은 입자에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처음 가게에 들어섰을 때였다.키 큰 여자가 유니폼을 고쳐 입으며 나를 힐끗 봤다. 계산대에서는 얼굴색이 창백한 남자가 허리에 손을 짚은 채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문 앞에 선 나는 가게 안이 새로운 사람에 대한 호감과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로 들떠 있는 것을 느꼈다.그러나 호기심은 곧 사라졌다.그들은 나와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고 싶어 했지만 내 반응은 무심했다.그렇게 서로 점차 멀어져 갔다.일을 할 때는 함께 호흡을 맞추며 움직였지만,그 외에는 섞이지 못했다.먼 곳에서라도 항상 나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은 진우가 유일했다.나는 직감적으로 그의 관심을 느꼈다.그렇게 느낄 뿐 그도 나도 서로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방금 미끄러졌을 때 진우가 달려와 준 것까지는 이해가 된다.하지만 갑작스레 이어폰을 내 귀에 꽂고 CD 플레이어의 전원 버튼을 누른 것은 의외의 행동이다.그의 CD가 재생되기 시작한다.약간의 잡음과 기계음이 들리더니 이내 한 남자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온다.가라앉은 내 기분을 위로해주려고 평소에 좋아하는 노래를 재생시킨 것이라 짐작한다.나는 귓속에 온 정신을 집중한 채 무심한 듯 도로변을 내려다본다.그때 이어폰 속 남자가 허밍으로 묘한 음을 흘리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반주도 없는 허공에 가느다랗고 여린 그의 목소리만이 퍼져 나간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다.꼭 다물고 있던 내 입술도 어느새 반복되는 그 노래의 가사를 흥얼거리고 있다.문득 옆을 바라본다.뭔가에 얻어맞은 듯 얼얼한


소설 기분이 든다.진우가 이어폰 속 남자와 같은 호흡으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소리 없는 노래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평소 일을 할 때 진우의 모습이 아니다.마치 그의 가장 큰 비밀이라도 알게 된 듯 묘한 기분을 느낀다.순간 옆에 앉은 진우가 너무 여려 보여 함부로 만질 수도 없을 것 같다.네온사인이 소리를 질러대는 도시 한복판.오직 귓속의 작은 이어폰과 진우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느새 퇴근할 시간이 되었다.유니폼을 벗어 두고 탈의실에서 나왔다.진우가 슬며시 앞을 가로막는다.그는 마치 예전부터 우리가 함께 가게를 나섰던 사이인 것처럼 행동한다.그의 눈빛이 예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느낀다.그가 보기에 나는 어떨지 궁금하다.집이 어디냐고 묻는다.이전 같으면 대충 얼버무렸을 테지만 어느새 입에서 내가 사는 동네 이름이 흘러나온다.그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우리가 같은 동네에 사는 줄 여태껏 몰랐다며 빙그레 웃는다.그가 웃는 모습이 싫지 않다. 동네는 가게에서 버스로 두 정거장 정도 되는 거리에 있다. 우리는 새벽 두 시가 풍기는 시큰한 공기를 마시며 천천히 걷고 있다.오랜만에 느껴보는 낯선 기분이다.그를 힐끗 쳐다보다 이내 앞을 바라본다.왠지 모르게 마음이 들뜬다.많은 말을 주고받는 것은 아니지만 졸업한 이후 이렇게 누군가와 단둘이 걸어 본 기억이 없다.여고 시절에는 가끔 책상 위에 편지나 과자를 두고 가는 이름 모를 후배들도 있었다.나는 그때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막지 않는다는 식이었다.나를 좋아해 주면 나도 잘해줬고 함께 있자 하면 그들과 어울려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냈다.그러나 지금 그 친구들과는 모조리 연락이 끊겼다.그 중 나를 유독 좋아했던 찢어진 눈매는 일 년간 종종 전화를 걸어왔지만 그전 같지 않은 무심한 태도에 마음이 상했는지 그 후로는 연락이 오지 않는다.이 모든 일이 수연이와 연관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모든 여고생이 교실에서 시험 얘기를 하고 있었을 때 우리는 그곳에 없었다.그녀와 나만의 작고 푸른 숲.그곳을 바라보던 공허한 눈동자.그 여름을 잊을 수 없다. 붉은 벽돌로 된 일 학년 건물 주변을 거닐던 때가 생각난다.학교를 벗어나면 어떤 일들을 겪게 될까.차라리 열아홉에 머물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여린 감성, 그나마 남은 생기가 열아홉을 넘기고 나면 전부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그런 내 앞에 어느 날 수연이가 나타났다. 그녀는 여느 친구들처럼 사소한 일상을 늘어놓으며 울거나 웃지 않았다.언젠가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우리가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지금보단 행복하지 않았을까.덜 외롭지 않았을까.대답하지 않았다.나는 알고 있었다.우리가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도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소설 이따금 그런 생각에 마음이 텅 빈 듯했지만 함께 있는 동안만큼은 언제나 행복했다. 나와 수연이,우리는 스스로 세상의 흐름과 규칙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때 수연이를 알아보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그랬다면 나는 여전히 여름을 싫어하고 그 작은 숲을 무심히 잊었을지도 모른다.숲은 우리가 학교 안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풀어놓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곳은 일 학년 건물 뒤편을 돌아 감싸고 있었다.수연이는 스스로 감정을 주체하기 버거워질 때면 그곳으로 나를 불러내곤 했다.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보통의 여고생들과는 달랐다.그 내면은 접근할 수 없는 미지의 공간처럼 느껴졌다.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듯 버거워 보일 때가 많았다.그녀의 이런 내면을 알아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수연은 자신을 굳이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디에도 얽매여 있지 않은 듯 먼 곳을 바라보는 습관이 있었다. 여학생 세 명이 손을 맞잡고 둘레를 돌아도 될 만큼 커다란 나무 옆에는 그에 뒤지지 않을 만큼 커다랗고 우직한 바위가 하나 있었다.그녀는 항상 그 바위에 기대어 주저앉은 채 나를 기다렸다.교복 치마 따위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축축한 흙과 짙은 녹색의 물을 머금은 풀 위로 아무렇게나 앉아 있었다.그맘때쯤 친구들이 그녀를 피했던 이유가 어쩌면 그 교복 치마의 엉덩이 부분에 짙게 배인 녹즙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내가 몇 번이나 치마에 흙물과 녹즙이 배였다고 말해도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도리어 그녀는 그 짙은 녹즙을 마치 안정제 주사를 맞는 환자처럼 꽤 달갑게 받아들이는 듯 보였다.그런 그녀의 옆에 덩달아 주저앉아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면 빛의 부스러기가 청록의 잎사귀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그날도 나는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질퍽한 풀들을 밟고서 세 명 둘레의 나무 곁으로 다가갔다.그녀는 그곳에 없었다.나는 뒤돌아서서 숲을 그늘지게 하고 있는 일 학년 건물을 살폈다.일요일이었기에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자 흰색 파스텔을 문지른 듯한 구름이 떠가고 있었다.천천히,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구름을 따라가고 있자니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나른해졌다.그때 공중 어딘가에서 까만 물체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그것이 수연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단숨에 일 학년 건물로 뛰어 들어갔다.계단을 오르는 동안 상상하기 싫은 장면들이 빠르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머릿속이 온통 핏빛의 이미지가 뒤섞인 영상들로 얼룩졌다.숨이 가빠졌다.옥상까지는 여섯 층.건물은 작년 신축 공사 후 세 층 더 높아져 있었다.지금 생각해보면 그리 높은 건물이 아니지만,무엇에든 예민하던 그때는 굉장히 높게 느껴졌다.6층에 도착했지만 옥상으로 통하는 사다리를 찾는 데 또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학생들이 오를 수


소설 없도록 만들어진 험하고 짙은 녹색의 사다리에 발을 디디고 온몸에 힘을 주었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기를 쓰고 어딘가를 향해 달려들어 본 기억이 없다.옥상의 천장 문을 밀어젖히자 녹슨 시멘트 가루가 떨어졌다.조금 전 밑에서 맡았던 끈적끈적한 여름 냄새와는 다른 신선한 풀내음이 날려 왔다.무슨 이유인지 몰랐지만 싱싱한 풀내음을 맡으면 수연이의 교복 치마가 떠올랐다. 옥상 저편에 누군가가 보였다.어깨에 닿는 까만 머리카락이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조용히 발끝을 떼며 벽을 따라 걷는 모습에 순간 안도했다.여린 어깨에 희고 가느다란 다리.수연이는 교실에서 신는 슬리퍼가 아닌 하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운동화였다.수연아.부르고 싶었지만,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계속해서 벽 주변을 서성이던 수연이는 옥상 한 귀퉁이에서 멈춰 섰다.까만 머리카락이 이따금 바람에 날렸다.그녀는 멈춰 선 그대로 가만히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가쁜 숨을 누르며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교실 문을 빠져나가는 수연의 뒷모습이 떠올랐다.그때 붙잡았어야 했다. 바람이 불어와 귓가를 스쳤다.이상하게도 한기가 느껴지며 몸이 조금씩 떨려왔다. 내 앞에 서 있는 수연이가 낯설었다. 너한테 난 뭐니.이런 기분 질색이야.아니 사실 처음이야.날 좀 봐,보라구.내가 지금,무슨 말을 해야 되는지,말해봐 수연아……. 그녀와 함께 있을 때면 나는 마치 커다란 의식 세계 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물고기가 된 것 같았다.언제나 들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온갖 얘기들을 늘어놓았다.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그늘지고 어두운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그녀는 내 말들에 대해 평가하거나 다그치지 않았다.그저 조용히 웅크리고 앉아 긴 속눈썹을 천천히 깜빡이며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했다.가끔 바위 옆에 난 연둣빛 잡초들을 손바닥으로 쓰다듬곤 했다. 그녀는 학교에서 나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먼저 다가가지 않았다.처음 수연이가 내게 말을 걸어왔을 때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은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기운 때문이었다.그녀는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오히려 많은 친구에게 둘러싸여 있는 나보다 편안하고 행복해 보였다.우리가 함께 복도를 지날 때면 녹즙이 밴 수연이의 교복 치마를 보고 아이들이 수군대는 듯했다.나는 수연이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녀는 빙긋 웃고 말 뿐이었다. 우리의 종착점은 항상 건물 뒤 녹색 숲이었다.습한 여름 공기를 천천히 들이마시는 수연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내 마음마저 평온해져 왔다.그녀와 말없이 함께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친구들과 어울려 놀 때는 텅 비어 있던 무언가가 가득 채워지는 기분이었다.먼저 다가온 것은 수연이었지만 그 후 그녀를 지켜보게 된 쪽은 나였다.그녀에게서 풍겨오는 짙은 풀내음이 좋았다.


소설 진우는 이따금 콧노래를 흥얼거린다.낯익은 멜로디다.우리가 사는 동네로 향하는 길은 낡은 철도를 따라 이어져 있다.철도 밑의 자갈 밟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온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우리는 오랜 시간을 두고 알아 온 사이가 아니다.슬며시 그를 바라본다.큰 키에 남색 티셔츠를 입고 있다.그러고 보니 그의 머리카락,생김새,자주 걸치는 옷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이 없다.스치며 본 적은 있지만 친밀한 거리에서 단둘이 있는 것은 처음이다.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괜스레 머쓱해진다.그가 궁금하다.그의 노래에 대해서든 그에 대해서든.무슨 말이든 건네 보고 싶다.사람에 대한 기대감은 정말 오랜만에 느껴본다.그가 문득 멈춰 서더니 나를 내려다본다. 그때 들려줬던 그거 말이야.지금 좀 더 손을 보고 있거든.반주 소리를 어떤 걸로 할지 생각하고 있어.음…….많이 어설프지,그 소리…….녹음할 때 같이 있던 형이랑 너,딱 두 명한테만 들려 준거야.아직은.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릿속의 생활상식들을 뒤지고 또 뒤진다.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판단도 없이 느끼는 그대로를 말한다는 것은 위험하다.뭔가 보편적이면서도 적당한 말을 해주고 싶다.그런데 결국 엉뚱한 말만 입에서 흘러나온다. 좀 위험한 것 같아요.그 소리,말이에요.많은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은 욕심은 빨리 버리는 게 좋을 거예요.건방지게 들릴지도 모르지만…….화가가 그린 그림 속에는 그의 모든 것이 담겨 있어요.작가의 글 속에도 마찬가지고,노래 속에는 그 사람이 전부 녹아 있죠.그것들은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는데,특히 음악은 더 한 것 같아요. 누군가가 만들어 낸 노래 속에 흐르는 그 영혼의 색과 향이 말이에요,그걸 알아보는 사람의 귀에 들어가 버리면 마치 벌거벗겨진 것처럼 그 색과 향을 훤히 들켜버리고 말죠.저는,그러니까…….저한테는 그 노래가 악영향을 미치지 않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아닐 것 같아서요.아니,확실히 그러면 안돼요.아,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그치만 소리는 좋았어요. 그가 멈춰 서서 나를 가만히 들여다본다.나도 그의 눈길을 피하지 않는다.마음속 어딘가가 울렁인다.우리가 서 있는 어둑한 육교 밑으로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비춰든다.그는 내 눈 속을 들여다보며 무엇인가 확인하려 드는 것 같다.나를 둘러 감싸는 그의 묘한 기운에 못 이겨 결국 눈을 피한다.순간 정신이 든다.나는 그의 가족 관계가 어떻게 되고,관계는 화목한지,학교 성적이 어떤지,어떤 동아리에 가입되어 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그런 그에게 분신과도 같을 그 노래에 대해 마치 다 안다는 듯 떠들어 댄 것이다.나는 어쩌면 당연하게 찾아온 침묵 앞에서 땅만 보며 머쓱하게 섰다.고개를 숙이고 철도 밑 자갈을 괜스레 발끝으로 밀어낸다.그가 내게서 시선을 떼는 것이 느껴진다.그는 시간의 정지캡슐 속에서 막 깨어난 듯


소설 개운한 목소리로 스치듯 말한다. 그래서 너한테 들려준 거야…….하,내 느낌이 틀리지 않아서 다행이네.그 노래, 바깥으로 내보인 게 나한테는 꽤 큰 결심이었거든.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홀에 들어서니 진우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수십 개의 테이블 사이를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고 있다.그가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는 긴 눈꼬리로 빙긋 웃어 보인다.전에 없던 행동이다.잠시 망설이다가 살짝 손을 들어 인사한다. 그는 가게에서 일을 시작한 지 2년 가까이 되어가는 직원이다.점장은 그에게 중요한 업무를 맡기거나 새로운 메뉴에 대한 의견을 묻기도 한다.그는 아침 청소를 할 때면 어디선가 들어봤음 직한 댄스 가요를 흥얼거렸다.그 리듬에 맞춰 춤을 곁들이기도 했다.나에게 들려주었던 노래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사람들은 그의 익살스러운 몸짓에 즐거워했다.그럴 때면 옥상에서 봤던 그의 반쯤 풀린 눈동자도 허밍으로 퍼져 나가던 여린 목소리도 전혀 다른 사람의 것처럼 느껴졌다. 함께 걷던 철도 위의 새벽 공기가 떠오른다.마음은 들떠 있었고 누군가가 그리웠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진우가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있다.그는 유리창을 닦기 위해 세정제를 가지러 가는 중이다.점장이 지나가며 그에게 어제 매출을 점검하라고 지시한다.그는 큰 목소리로 대답한다.뭔가 내게 할 말이 있는 듯 보인다.그러나 아무 말 없이 빙그레 웃기만 한다.가게 안 스피커에서 잡음이 나더니 빠른 비트의 댄스 가요가 울려 퍼진다.누군가 멀리서 장난스럽게 노래를 따라 부른다.그는 내 어깨를 살며시 잡는다.상체를 내 쪽으로 기울이며 귓가에 스치듯 뭔가 속삭인다. 익숙한 멜로디다.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어느새 가게 앞 전면 유리창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그의 체취가 공기 중에 남아있다.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다.옅은 형체들이 어둠에 둘러싸인 채 냉장고의 소음만이 간간이 흐르고 있다.일을 하고 있을 때는 느껴지지 않던 근육의 통증이 한꺼번에 몰려온다.졸업한 이후 대학도 가지 않은 채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살아있는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서다.그러나 한계라는 것을 느낀다.지쳐가는 부모님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다.최근 호주로 떠나 공부할 계획을 세웠다.아직 구체적이진 않다.그저 먼 곳으로 떠나면 이곳에서의 일들은 꿈처럼 느껴질 것이라는 무기력한 기대 때문이다.가게 일도 다음 해 여름까지만 하기로 사장과 약속이 돼 있다. 발바닥이 욱신거리고 허벅지의 안과 밖이 마구잡이로 저려온다.예민한 어머니를 의식해서 숨소리마저 낮춰가며 욕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나는 칠판처럼 생긴 직사각형의 커다란 거울 앞에서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차렷 자세로 섰다.몇


소설 시간 전 어머니가 샤워를 했는지 옅은 풀냄새와 무른 물 냄새가 욕실 바닥을 떠다닌다.살굿빛이 도는 욕실의 조명 아래에서 거울 한복판에 덩그러니 자리를 잡고 섰다.붉은빛이 돌던 입술색은 흐리고 탁해져서 마치 멍이 든 것처럼 푸르스름하다.까맣고 질기던 머리카락은 햇볕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탓인지 색이 빠져 연갈색 빛으로 변해있다.내 몸 구석구석을 눈동자로 훑어나가며 살아 있는 사람의 생기를 찾으려 애쓴다.습한 공기가 살갗에 와 닿는다.천천히 고개를 들어 거울 속의 내 눈을 응시한다.거울 속의 몸뚱이를 이고서 한여름 여고 주위의 아스팔트 길 위를 하릴없이 걷기도 했고,책상에 앉아 누군가 내게 건네 준 쪽지를 읽기도 했으며,누군가의 사유를 공유하려 몸부림치기도 했었다.내 눈과 코와 입술이 점차 수연이의 것으로 변하기 시작한다.옅고 긴 속눈썹,작지만 오뚝한 코, 갈매기 모양의 도톰한 윗입술이 나를 향해 살며시 웃는다.그녀는 여전히 넓은 품 같은 따뜻한 향을 풍기며 웃고 있다.나는 어느새 그녀 앞에서 흐느끼기 시작한다. 배와 가슴이 흐느낌에 들썩이자 점차 온몸이 들썩인다.잠옷 원피스를 벗고서 다시 거울 속 그녀를 응시한다.그녀는 브래지어의 호크를 풀고 그것을 벗은 후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천천히 팬티를 벗는다.목덜미만큼이나 여리고 가는 그녀의 허리가 천천히 굽혀지다가 펴진다.그녀의 나체와 마주한 채 나는 소리 없이 흐느낀다. 네가 죽은 건지 내가 죽은 건지 구분이 안 가…….우습지 않아?이렇게 살고 있는 내 모습이 말이야.네가 했던 말,하나도 틀린 거 없어.나 결국 이렇게 잘살고 있잖아……. 가쁜 호흡을 뱉어내며 주저앉는다.교실을 빠져나가는 수연이의 창백한 목덜미가 보인다.그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내가 보인다.내가 교실을 빠져나가자 여고생들이 한데 엉겨 수군거린다. 쟤네 무슨 사이야 도대체,언제부터 저렇게 친했어? 설마,그런 사이? 뭘,그런 사이야.쟤는 왜 자꾸 정수연이랑 어울려 다니는지 모르겠어. 욕실 바닥의 찬 기운이 손바닥과 엉덩이를 지나 정수리까지 잔인하게 타고 흘러든다.서서히 몸이 움츠러든다. 가게에 들어섰다.못 보던 남학생이 양손에 휴지통을 든 채로 인기척을 느꼈는지 나를 본다.평소대로라면 진우가 하던 일이다.그는 내가 들어서면 항상 테이블마다 배치된 플라스틱 휴지통을 거둬서 비우고 있었다.곧장 계산대를 향해 다가간다. 매출을 점검하고 있는 점장에게 왜 진우가 나오지 않았느냐고 묻는다.평소 나와 진우는 가게 안에서 가까이 붙어 다니는 사이가 아니다.점장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소설 눈썹을 세워 보인다.잠시 정적이 흐른 후 점장은 그가 말도 없이 결근을 했다며 미간을 찌푸린다.핸드폰으로는 이미 연락을 해봤을 것이다.나는 다짜고짜 그의 집 주소를 가르쳐 달라며 점장의 눈동자를 바라본다.점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력서가 담긴 파일을 뒤진다.반사적으로 떨리고 있는 오른쪽 다리에 신경이 쓰인다.초조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해보지만 쉽지 않다.이런 초조함은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해 겨울,11월은 유난히 차가웠다.시험고사장은 추위에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여고생들로 북적였다.시험관이 들어와서 차분하게 시험 요령을 알려주고는 종소리가 시작됨과 동시에 시험지를 나눠주었다.나는 커다란 회색 종이를 차근히 살펴나갔다.다들 긴장했기 때문인지 평소에 다리를 심하게 떨던 변비마저 아무 기척이 없었다.문제를 읽어야 했다.읽고서 지문을 살핀 후 알맞은 답에 동그라미를 쳐야 했다.그러나 아무리 정신을 가다듬어보아도 자꾸만 머릿속이 뿌옇게 흐려졌다.초조해지기 시작했다.제대로 읽지 못한 지문들을 굵은 연필로 진하게 그어가며 빠른 속도로 문제를 훑어나갔다.그때 누군가 내 어깨에 살며시 손을 올리는 것이 느껴졌다.고개를 살짝 들었다.뾰족한 턱 선에 뿔테를 쓴 시험관이 입술은 꼭 다문 채 손가락으로 내 다리를 가리켰다.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두 손을 교차시켰다.그제야 내가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갈수록 복잡해지는 좁은 골목길을 수도 없이 헤매고 있다.마침내 지은 지 꽤 오래된 오피스텔 한 채가 보인다.빗물이 흘러내린 자국이 그대로 남아 더욱 허름해 보이는 오 층 높이의 건물이다.그의 집은 405호다.잠시 망설이다가 초인종을 눌러본다.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심장이 목구멍에서 뛰는 듯 초조하다.현관문 앞에 멍하니 섰다.빠르게 머리를 굴린다.내가 그와 어느 정도 친밀한 관계인가, 이렇게까지 할 자격이 있는가.이성적 사고가 머릿속을 메워나간다.결국,그것이 내 직관적 초조함을 이기지는 못한다.조심스레 은빛 손잡이를 잡아 돌린다.시릴 정도로 차갑다.무엇도 걸려 있지 않아 열리는 느낌이 든다.철컥 소리와 함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한다.현관에 발을 디딘다.하얀 벽지가 빛이 바래 누렇게 얼룩져 있다.얼핏 작은 화장실과 방 한 칸이 보인다.싱크대가 있는지 바닥이 무슨 색인지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방은 하나가 전부다.문을 슬며시 민다.방안을 온통 메우고 있던 그의 체취가 내 전신에 흡수된다.다행히도 그는 없다.그가 꽂아주었던 이어폰의 감촉과 그것을 타고 흐르던 노래를 들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에 휩싸인다.그리 크지 않은 방 안에 공책을 찢어 낸 듯 종이들이 바닥에 수없이 흩어져 있다.발로 걷어내야 할 만큼


소설 바닥의 모든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미술을 할 때 쓰는 4B 연필로 음표들이 어지럽게 그려져 있는 것 같다.시선을 옮기자 짙은 고동색의 낡은 책상이 보인다.지우개 가루들과 쌓아 놓은 CD 몇 장,은빛 CD플레이어,구겨진 휴지조각을 비롯해 약국에서 받아 온 듯 종이봉투와 하얀 불투명의 플라스틱 통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책상 위에 있는 것이라고는 이것들이 전부다.흔한 책 한 권 보이지 않고,컴퓨터나 라디오조차 없다.문득 그 위 벽면을 무심코 살펴보다가 눈을 멈춘다.누렇게 바랜 벽면 위에 깨알 같은 글씨들이 규칙 없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그것들은 책상 위를 벗어나 탄력 잃은 침대 위 벽면에도 수없이 박혀 있다. 그가 들려주었던 노래와 흡사한 문장들로 된 글귀도 있다.책상을 마주한 곳에는 벽면의 반을 넘게 차지하는 커다란 창문이 있다.그러나 짙은 자줏빛의 융단 같은 것이 커튼을 대신해 아무렇게나 못으로 박혀 있어서 방안으로 빛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다.학교 강당에나 걸려 있을 법한 것이다.그 위로 희뿌연 먼지가 잔뜩 내려앉아 있다.어느새 뒷걸음질로 방을 빠져나오고 있다.왜 그런지 모르지만 수연이가 떠오른다. 그녀는 옥상 모서리의 담 위로 천천히 올라갔다.바람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날리면서 흰 목덜미가 드러났다.담을 짚은 손 또한 창백하리만큼 하얗고 여렸다. 공중을 향해 뻗은 그녀의 다리가 바람과 함께 흔들렸다.6층 건물을 뛰어올라 녹슨 사다리를 오른 지 한참이 지난 후였지만 여전히 숨이 고르지 못했다.조금 더 가까이 그녀에게 다가갔다.언제부터인가 그녀가 내 곁으로 오면 샴푸 향 대신 여리고 짙은 체취가 깊이 스며들었다.그것은 어떠한 변명으로도 거부할 수 없이 강렬했다. 체취는 향이고 향은 후각으로 느껴지는 것이 당연했다.그러나 나에게 그녀의 체취는 묘한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예술적 장치와도 같았다.마치 나와 그녀를 이어주는 감성적 통로의 매개체처럼 느껴졌다.그녀가 옆에 가만히 앉아 있을 때면 나도 모르게 어느샌가 그 짙고 가는 눈썹,작고 오뚝한 코,도톰한 윗입술을 지그시 바라보게 되었다.그 표정과 눈빛 속에서 그녀를 읽어내려 애썼다.그녀의 텅 빈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자면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언젠가 홀연히 사라져버릴 듯 머무르지 않는 시선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말없이 그녀를 따라 담 위로 올라가 앉았다.위에서 내려다본 우리의 아지트, 작은 숲은 더욱 짙고 푸르렀다.멀리서부터 매미 우는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나뭇잎들이 서로 부딪히며 낮은 바람 소리를 냈다.수연이의 숨소리가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에 뒤섞여 들려왔다.그녀를 따라 크게 숨을 쉬어보았다.나는 여고를 둘러싼 풍경이 좋았다.숲 너머 학교 울타리 밖에도 작은 산들이 짙은 녹 빛으로 물들어 신선한 공기가 날려 왔다.그 설익은 듯 싱싱한 풀냄새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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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수연이의 교복 치마와 녹색 풍경이 하나가 되어 눈에 들어왔다.나는 그녀에게 조금 더 다가갔다.너와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내가 살아 숨 쉬는 걸 느낀다고 말하고 싶었다.고개를 돌려 그녀의 표정 없는 얼굴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봤다.수연이의 흰 얼굴이 여느 날보다 더욱 창백해 보였다.그녀의 눈동자는 유난히 옅은 고동색을 띠고 있었다.그 희미하고 투명한 눈동자는 그녀와 잘 어울렸다.내 시선을 느끼면서도 수연이는 미동조차 없었다.순간 마음이 툭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그녀의 하얀 손이 내 손 위로 슬며시 올려져 있었다.여름 공기에도 그녀의 손은 냉랭했다.수연이는 여전히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문득 바람결에 흔들리는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세상에서,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을 통틀어서 말이야.이런 부탁을 들어줄 사람은 너밖에 없어…….길을 걷다가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신기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다들 자신이 원해서 태어난 건 아니잖아.그런데도 공부하며 일하며 그렇게 열심히들 살잖아.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이야.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 때문인지,어쩔 수 없이 그럭저럭 살다 보니 어느새 적응해버린 건지…….우리 반 친구들만 해도 그래.저 애들은 궁금할 거야.앞으로 어떤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게 될지,끊임없이 기대하고 꿈꾸겠지……. 나는 그녀의 말을 단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눈동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 말은,너라면 내 부탁 들어줄 것 같다는 거야.내가 이런 말 한 적 없지. 너랑 함께 지내면서 처음으로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그런데 말이야. 이기적이게도 나,지금 그걸 이용하려는 건지도 몰라.용서해.난 너처럼 자유로울 수가 없어,이곳에서는…….난 틀렸어.학교 울타리 안에서는 그나마 이렇게 지낼 수 있겠지만 더는 자신 없어.견디는 것도 이제 한계야…….너도 같은 생각이라고 말하고 싶겠지?그치만 넌 아니야.넌 얼마든지 행복해 질 수 있어.이렇게 단정 지어 내 멋대로 얘기하는 게 기분 나쁘다 해도 이건 진실이야.넌 곧 대학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게 될 거고 그러다 좋은 남자를 만나게 되면……. 네가 하려는 그 부탁,나 못해. 나는 온몸에서 일어나는 알레르기 같은 거부반응에 치를 떨며 그녀의 말을 잘라버렸다. 도와주기만 하면 돼.직접 해달라고는 안 해.너 아니면 안 돼,제발 너여야만 해…….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멈춘 듯 고요했다.더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그녀가 이미 내 손을 떠났음을 느꼈다.수연이를 알기 시작하고부터 어렴풋이 그려왔던 순간이었다.그런 순간이 오게 되리라는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한꺼번에 몰려올 공허함을 받아들일 준비도 해왔었다.그러나 막상 닥친 현실 앞에서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갔다.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내


소설 떨리는 손끝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쳤다.수연이의 눈동자는 학교 건물 너머 짙은 청록의 숲에 머물러 있었다. 어느새 나는 그의 집 욕실 앞에 서 있다.머릿속이 온통 울렁이고 벌겋게 달아오른 귀가 욱신거린다.문을 열자 그는 보이지 않는다.그러나 숨을 들이마신 채 꼼짝도 할 수 없다.건조하게 마른 욕실 공기가 싸늘하게 피부에 와 닿는다.바닥이 보인다. 하얀 도자기 빛의 매끄러워 보이는 욕실 바닥의 틈과 틈 사이사이로 검붉은 피가 흘러 하수구 구멍 군데군데 엉겨 붙어 굳어 있다.변기 주위에 굳어 있는 핏줄기와 으스러진 수많은 핏방울에서 기분 나쁜 냄새가 피어오른다.헛구역질을 하며 욕실 앞의 바닥을 더듬는다.엎어진 채로 다시 그의 방으로 기어들어간다.머릿속에서는 그의 노래가 끊임없이 들려온다.더위를 먹은 것처럼 힘이 빠지면서 온몸이 가늘게 떨린다.뭔가가 떠오른다.나는 어느새 그의 책상으로 기어가서 그 위를 더듬는다. 둥근 은빛 CD플레이어가 손에 잡힌다. 여기는 녹음실이야.드디어 노래가 완성됐거든.네 말대로 이 노래는 너한테만 들려주기로 했어.어차피 이 노래를 음반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곳도 없을 거고……. 빨리 이 CD를 너한테 들려주고 싶은 마음뿐이야.음,어디서부터,어떤 것부터 얘기해야 할지.그러니까…….내 속을 타고 흐르는 태생적 우울함이 수면제나 안정제 몇 알로는 소용이 없다는 걸 알게 된 지는 이미 오래됐어.그래도 나, 가게에서는 꽤 잘 버티지 않았어?그게 내 마지막 발버둥이었거든.이를 악물고 벗어나고 싶었지.평범하게 살고 싶었어,남들처럼.일상에서 재미를 느끼면서 챙길 건 챙기고 버릴 건 버리면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그치만 아무리 그 속으로 파고들려 노력해 봐도 난 언제나 다른 곳에 있었어. 그 고독감과 더불어 무기력해지는 내 예술적 사유들…….넌 내 노래 속에서 그런 걸 읽어냈던 거야. 그렇지?사실 몇 달 동안 너를 지켜보면서 나와 비슷한 뭔가를 느꼈지만 다가갈 수 없었어.더는 이 지긋지긋한 세상과의 끈을 늘리고 싶지 않았거든.그치만 결국 어떤 이끌림 때문이었는지 어느새 너한테 내 노래를 들려주고 있더라.드디어 만났구나 싶었어.그치만 그뿐이었어.더 이상은,오래 못 버틸 거라 짐작하고 있지만……. 그래서 미리 용서를 구한다.내 노래를 벌거벗겨진 듯 알아보던 너라면 나를 이해해줄 거라 믿어.행복하게,정말 행복하게 살길 바랄게,너는. 제출서류,안경케이스…….가방 속을 더듬은 끝에 둥근 모양의 은빛 CD 플레이어를 집어 든다.빈 좌석에 앉아 숨을 한 번 내쉬고는 전원버튼을 누른다.


소설 이어폰의 진동판을 타고서 내 귓속에 녹음실이 생겨난다.그 녹음실에서는 여러 종류의 악기가 제자리에서 소리를 내고 있다.통기타의 줄이 튕겨진다.탄력 있고도 부드러운 감촉이 귓가를 튕긴다.이윽고 티끌 하나 없는 정적이 흐른 후 한 남자의 숨소리에 섞여 실 같은 소리의 가닥들이 흘러나온다.선율이 따뜻하고 평화롭다. 남자의 목소리는 여리고 가냘프다.나는 통기타의 선율과 그 감촉 그리고 숨소리를 닮은 그의 목소리를 쪼개고 또 쪼갠다.보이지 않는,형체가 없는 그 소리들을 조각 조각내어 이가 부서지도록 잘게 곱씹어 본다.그 속에는 쓰러져 소리 없는 울음을 토해내는 내가 있고,하얀 도자기 빛의 욕실 바닥과 흩어진 검붉은 핏방울이 있다. 나의 신경은 점차 청각에서 시각으로 옮아간다.감은 눈꺼풀 속의 공간은 암흑이 아니다.눈꺼풀 속에는 또 하나의 공간이 생겨난다.한 여자가 나타난다.여자의 몸체는 투명해서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그 속에는 심장도 폐도 자궁도 없다.나는 충동적으로 그녀의 가녀린 손목을 잡는다.내 주먹이 그녀의 투명한 손목 안에 그대로 드러난다.숨을 들이켜며 눈을 뜬다.마을버스 안이다.오른쪽 손바닥에는 네 개의 손톱자국이 진하게 남아있다. 눈을 떠보니 마을버스는 어느샌가 익숙한 곳을 지나고 있다.CD플레이어를 급하게 챙기고 서둘러 벨을 누른다.늦게 다시 시작한 공부 때문에 깨알 같은 글씨를 읽자니 눈이 많이 나빠졌다.가방을 뒤져서 안경을 집어쓴다.그러자 아까 전만 해도 수채화처럼 흩어져 있던 색들이 선명하게 도드라진다.교문을 지나 운동장 너머로 익숙한 풍경이 눈 속으로 흡수된다.눈앞에 무심히 서 있는 삼 학년 건물과 붉은 벽돌 건물은 내 마음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던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나는 건물을 눈동자로 더듬으며 우리가 함께했던 공간을 찾으려 애쓴다.교실 뒤쪽 창문 틈 사이로 내 머리가 올라왔다 사라진다.그 주위에는 찢어진 눈매와 변비를 비롯한 체크무늬 교복 조끼들이 옹기종기 모여 떠들고 있다.천천히 교실 앞 창문을 주시한다.벽의 모서리 쪽 녹색 커튼 사이로 수연이가 보였다가 사라진다.내 입에서 가늘게 그 이름이 흘러나온다.그러나 그뿐이다.큰 소리로 그녀를 부르고 싶은 충동은 내 속에서 여러 번 걸러져 잠잠해져 버린다. 습한 공기와 뒤섞여 더운 바람이 불어온다.여름이 풍기는 특유의 풀냄새가 학교 안을 온통 메우고 있다.언젠가 그랬듯이 질퍽한 풀색 잡초들을 밟으며 하늘을 올려다본다.그러나 하늘은 보이지 않고 녹색의 이파리들이 온통 뒤덮여 간간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마음이 아늑해져 온다.나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정장 치마를 아무렇게나 구겨 잡고는 바위에 기대어 앉아 깊이 숨을 들이마신다.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다.지금의 나는 여전히 흑백 필름 속의 나를 탓할 수 없다. 귓속에서는 여전히 진우가 여리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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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수의 여자 홀수의 여자 어제부터 내린 겨울비가 점심을 지나서야 그쳤다.비가 그친 후에도 하늘에는 무거운 먹구름이 깔려있었다.아직 오후 5시도 되지 않았는데 밖이 상당히 어두웠다.학생의 집을 나서는데 금방 비가 다시 쏟아질 것 같았다.따뜻한 코트를 입었는데도 한기가 들어 몸이 떨렸다.서둘러 집으로 향했다.하늘을 메운 짙은 구름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도시 외곽의 아파트로 향하는 길은 쓸쓸하고 적막했다.아파트 진입도로 앞에서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다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내가 사는 아파트를 올려 보았다.뒤편의 산은 어둠에 묻히고 희뿌연 안개에 쌓인 아파트가 층층이 서 있었다.이렇게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아파트를 올려다보는 장면,전에도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데자뷰인가.혼자 중얼거리며 자세를 고쳐 앉는 순간 신호가 바뀌었다.어둠을 뚫고 아파트로 올라갔다.자욱한 안개는 몇 년을 살아온 내 집조차 낯설어 보이게 했다. 빨리 집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엘리베이터를 탈까 하다가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오래된 엘리베이터에서 나는 기분 나쁜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거친 숨을 몰아쉬며 5층까지 올라왔다.계단에서 5층 복도로 들어서는데 멀리 희뿌연 무언가가 보였다.바람에 일렁일렁 날리는 것 같기도 했다.우리 집 근처에 있는 듯한 미확인 물체를 주시하며 천천히 걸었다.점차 선명해진 그것은 난간을 잡고 서 있는 여자였다.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옆모습에 불안감이 덮쳐들었다.이내 그녀는 난간을 잡은 팔에 힘을 주고 가볍게 뛰어올랐다.그녀는 아랫배를 난간에 걸치고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공중에 뜬 몸을 지탱하는 그녀의 팔이 부르르 떨렸다. 상반신은 점점 앞으로 숙여졌고 다리가 들려 올라갔다.그녀의 몸은 뿌연 안개에 휘감겨 천천히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서둘러 그녀를 잡고 싶었지만 내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그녀에게 다가갈수록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호흡을 고르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옮겼다.말을 걸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잡았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하얀 얼굴이 젖어 있는 것 같았다.낯설지 않은 그녀의 여린 눈빛이 내 안으로 파고들었다.그녀는


소설 복도로 툭 떨어졌다.나는 여전히 떨렸고 무서웠다.그녀를 복도 안쪽으로 끌어 벽에 기대게 했다.그녀는 가벼운 홈웨어 차림에 얇은 롱가디건을 걸치고 있었다.오늘 같은 날씨에는 추운 차림이었다.긴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은 그녀는 목이 훤히 드러나 있어 더욱 추워보였다.집에 있다가 잠깐 나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살며시 그녀에게서 떨어져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그녀의 입에서 토해진 한숨은 하얀 연기로 흩어졌다.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그녀가 위태로워 보였다.내 눈 앞에서 그녀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불안함에 그녀의 팔을 다시 잡았다.그녀는 내 손을 떼어놓고 돌아서 가려했다. “ 저기,잠깐 들어왔다 가세요. ” 불쑥 던진 내 말에 그녀는 답이 없었다.그녀를 그대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그녀를 붙잡으며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나는 그녀를 세워두고 현관문을 열었다. “ 들어오세요. ” 천천히 그녀가 움직였다.집안으로 들어와 나는 차를 끓일 물부터 가스렌지에 올렸다.거실로 들어온 그녀는 앉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우리 집은 방이 두 개지만 나는 거실에서 주로 생활을 했다.방문은 굳게 닫아둔 채 가구를 모두 거실에 두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그녀가 어디에 앉아야 할지 찾고 있는 것 같아 책상의자에 있던 방석을 바닥에 놓아주었다.나는 코트를 벗어 행거에 걸었다.옷을 걸고 돌아서니 그녀는 여전히 서있었다.괜찮아요,앉으세요.그녀는 행거 옆에 있는 전신 거울 앞으로 다가섰다.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안쓰러운 듯 보았다.나는 그녀를 가볍게 감싸며 말했다.따뜻한 차를 드릴게요.그녀를 앉히고 나는 부엌으로 가서 차를 준비했다.몸도 마음도 조금 쉴 수 있기를 바라면서 허브티를 꺼냈다. 나는 카모마일 허브티가 담긴 머그잔을 들고 그녀 곁으로 갔다.작은 일인용 테이블 앞에 그녀는 얌전히 앉아있었다.머그잔을 내려놓으며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어딘가 낯익은 그녀의 표정은 내 마음을 서늘하게 했다.그녀를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아 붙잡기는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왜 그런 행동을 한 것인지를 물어보기도 어려웠다.그만큼 견디기 어려운 일이 있었을 것이었다.그녀의 입술이 조금 들썩이다 말았다.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 했다.내 집 앞에서 일어날 뻔한 사건에 대한 고백이 이어질 것이었다.그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나에게도 나름의 준비가 필요했다.상대의 짐을 나눌 수 있을만한 마음의 준비.나는 그저 뜨거운 연기를 내뿜는 허브티만 바라보았다. 저 때문에 놀라셨을 텐데….그녀는 말끝을 흐렸다.그녀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그녀는 나의 시선을 피했다.이거 카모마일이에요. 나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카모마일은 심신의 안정을 도와준다고 들었다.그녀에게도 말해주었다.아무 말 하지 않아도 되니까 잠시 쉬었다 가라고 했다.나는 아직


소설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안 된 것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감사하다며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따뜻한 머그잔을 양손으로 감싸든 그녀는 눈으로 거실을 훑었다.그녀의 시선은 침대 근처에서 멈추었다.침대 옆에 쌓인 직소퍼즐이었다. 나는 퍼즐을 좋아해서 꽤 많은 종류의 퍼즐을 가지고 있다.간단히 할 수 있는 100 피스짜리부터 꽤 시간이 걸리는 3000피스짜리까지 다양했다.퍼즐에 집중하고 있으면 문밖의 세상과 구분된 나만의 세상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그녀에게 퍼즐을 하나 해보겠냐고 물었다.해보고 싶다는 대답에 큰 성이 그려진 500피스짜리 퍼즐을 건네주었다.조금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내가 좋아하는 그림의 퍼즐이라 골랐다.그녀는 상자를 들고 그림을 보았다.그림 속에 빨려들어 갈 듯이 집중한 모습이었다.멋진 성이네요.짧게 한 마디를 뱉은 후에도 꼼꼼하게 그림을 살펴보았다.그런데 쓸쓸해 보이는 성이군요.한참 료들어고개를 들고 이렇권림을 살펴보았 역시 그렇권림생각 살펴보웅장하고 멋진 성이지만 뾰족한 성 꼭대기 어딘가에 불쌍한 공주가 외로이 갇혀있을 것 같은 그림이었다.성의 창는 성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창밖을 내다보며 턱을 괴고 앉아 있는 공주의 모습이 보이는 착각도 들었다.차가운 바람이 부는 듯한 쓸쓸한 성의 느낌이 나는 좋았다.그녀는 상자를 헴 성테이블 위에 퍼즐을 조심스레 쏟았다.그녀는 아무 조각이았 하나| 그어 들고 상자의 그림을 보며 만지작거렸다.그녀의 손에 있는 것은 성 부분의 갈색 조각이었다.퍼즐을 맞출 때는 색깔별로 조각을 분류한 다L 성가장자리부터 놓고 그림을 맞춰가는 것이 좋다.성 그림은 크권림세 가지 색의 조각으로 분류할 수 있다.하늘과 성과 산.대략 색을 나눠 조각을 분류하고 위쪽성가장자리 조각을 몇 헴쯤깔별로 조각을 부드각을 하늘색 조각들이었다.그녀도 하늘색 조각을 찾아 가장자리부터 맞추기 시작했다.퍼즐의 전체 크기성테이블의 크기 있비슷해서 그녀 있내 머그잔을 거실때는 색깔내려놓았다.그녀는 한 손에 상자를 들고 퍼즐 조각과 그림을 비교해가며 신중하권림맞췄깔별로 조각을녀의 옆모습을 가만히 보았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앞머리며 옆선에서 부드러운 분위기가 풍겼다.하얀 그녀의 뺨을 감싸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 여기 집중하고 있으니 차분해지네요. ” 정적을 깨고 그녀가 말했다.내가 퍼즐을 좋아하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퍼즐을 맞추고 있으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둥실 떠올랐던 내 안의 무언가도 잠잠해졌다.한동안은 집안에서 퍼즐만 맞추며 지낸 적도 있었다.그녀는 천천히 퍼즐을 이어갔다.차가울 것 같은 그녀의 손끝에서 푸르른 하늘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들고 있던 퍼즐 상자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놀라게 했다면 미안해요. 그녀는 나를 보았다.나는 머릿속으로 할 말을 찾아 헤맸다.놀라기는 했지만 사과 받을 일은 아닌 듯 했다.그녀는 무릎을 세워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소설 “ 비오는 밤,깊고 깊은 산 속에 혼자 남겨진 느낌이에요. ” 그녀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그 목소리를 타고 쏴하는 빗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비오는 산 속을 생각하자 가슴 속이 먹먹해져왔다.비오는 밤,깊고 깊은 산 속. 그녀의 말을 천천히 곱씹어보았다.곧 내 주위에도 울창한 나무가 우거진 숲이 생겼다.차가운 빗방울이 내 몸에 닿자 몸이 떨렸다.그 느낌을 알 것 같아 나도 마찬가지인 듯 하다고 대답했다.그녀는 나를 보았다.그녀의 눈동자에 깊은 숲 속의 어둠이 담겨있었다.그 눈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깊은 산 속에 홀로 남겨진 그녀는 두려움을 안고 빗속에서 떨고 있었다.나는 침대에 걸쳐 있던 얇은 담요를 끌어다 그녀에게 주었다.그녀는 담요로 온 몸을 감쌌다. 그녀는 주섬주섬 이야기를 시작했다.그 사람이라 칭하는 그녀의 어떤 사람에 대해서였다.그 사람과의 일을 모두 이야기할 셈인지도 몰랐다.나는 가만히 그녀를 보며 이야기를 들었다.그녀는 한숨 섞인 말을 느릿하게 이어갔다.그 사람,그녀의 가장 소중한 그 사람은 지난 여름 이별을 통보했다.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그 사람의 마지막 인사.그녀는 일방적으로 버려졌다.버림받은 그녀의 주위에는 울창한 나무들이 자라났다.빽빽한 나무숲에 가려져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윽고 그녀를 때리는 강한 빗줄기.비는 그녀가 다시 일어설 힘마저 휩쓸고 갔다.그녀는 줄곧 비오는 산 속에 혼자 갇혀 있었다.그곳에서 여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어서 그를 벗어나 잊는 것이 좋을 거라 생각했다.사람은 결국 혼자 살아가야 하는 것이었다.장대비든 보슬비든 혼자 맞아 내면서. “ 짐작했겠지만 나 여기서 떨어지려고 했어요. ” 그녀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보았다.자신도 이 아파트에 산다고 밝힌 그녀는 삶을 마칠 장소로 우리 집인 103동 507호 앞을 택했다.7층짜리 아파트에서 옥상도 7층도 아닌 5층을 택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더 높은 곳에서 떨어졌을 경우 바닥에 부딪혀 흉측하게 부서지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그녀는 2년 전 이 아파트에서 자살 현장을 목격했다.5층에서 떨어진 사람은 생각보다 심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 일을 생각해내고 아파트 5층을 선택했다.문제는 아파트 아래의 화단과 주차장이었다.5층의 다른 곳에서 내려다본 아래에는 화단의 나무가 있거나 주차된 차들이 있어서 떨어진 자신을 건져낼 것 같았다.세 개동의 5층을 전부 돌아본 그녀는 우리 집 아래의 화단에 나무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아무래도 뛰어내렸을 때 나무 위로 떨어지거나 남의 집 차 위로 떨어지면 곤란할 것이다.우리 집 앞에서 내려다보이는 화단에는 나무가 없었다.약간 안쪽으로는 제법 큰 돌덩이도 박혀있어 그쪽으로 부딪히면 아무래도 살아날 수 없을 것 같았다.죽으려는 사람이 자신의 사망한 모습을 생각하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어디에서든 떨어져서 죽을 정도라면


소설 분명 끔찍한 모습일 것이다.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확인할 그 사람에게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그녀는 그 사람과 둘이 살았다.함께 살았다기보다 그녀가 사는 집에 그 사람의 흔적이 있었다.그녀에게 사고가 생기면 뒷수습은 그 사람이 해야 할지도 몰랐다.그녀는 감싸 안은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그 사람 없이는…,그 사람 없이는…,하며 중얼거렸다. “ 그래도 죽을 생각을 하면 안 되죠. ” 그녀의 행동을 책망할 생각은 없었지만 안타까움을 담아 말했다.내가 이상하죠? 그녀는 힘없이 물었다.나는 대답 대신 탁자 위의 퍼즐 조각을 집어 들었다.그녀는 나에게 죽고 싶었던 적이 없냐고 물었다.죽는 게 나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은 있었다.하지만 진심으로 죽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그녀는 혼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오래 전부터 나는 혼자였다.혼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전에 이미 혼자였다.혼자 살아가는 법을 터득해야 했고 충분히 잘 해왔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는 나머지라는 존재를 가르쳐주었다.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나머지.나는 수업시간에 나눗셈을 하다 시시한 이야기를 하나 떠올렸다.이 세상은 홀수로 이루어져있는데 필연적으로 모든 것에는 짝이 있도록 만들어져있다.그래서 어쩔 수 없는 나머지 1이 생기는데 그게 바로 나라는 생각이었다.나는 내가 혼자여야 하는 필연성을 자신에게 부여했다.내가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가 나머지 1이어야 했다.나는 세상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었다.묘한 책임감 같은 것도 생겼다. 내가 가르치는 학습지 학생 중에 일곱 살짜리 정은이는 나머지가 불쌍하다고 했다. 정은이는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영리하고 착한 아이였다.일찌감치 초등학교 선행학습을 시작한 정은이에게 나누기를 설명하며 예를 들어 주었다. 정은아,아빠랑 엄마랑 정은이랑 세 명이잖아.그런데 사과가 두 개밖에 없어. 그래서 아빠랑 정은이가 하나씩 먹기로 했는데,그러면 엄마가 먹을 사과가 없잖아? 이럴 때 엄마는 나머지 1이 되는 거야.세 사람이 사과 두 개를 먹으려고 할 때 한 사람이 남는 것처럼 3을 2로 나누면 1이 남는 거지. 그러자 정은이는 이렇게 말했다.엄마가 불쌍하잖아요.정은이 사과를 엄마랑 같이 먹을래요.아,아빠도 나눠주실 거예요.나는 정은이의 사과를 빼앗고 싶었다.그 작은 손에 쥔 빠알간 사과를 매섭게 노려보았다.그러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보자, 하며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른 예를 들었다.정은이가 좋아하는 강아지가 있어. 강아지 두 마리가 들어갈 수 있는 집이 두 개가 있는데 강아지는 다섯 마리가 있네. 강아지를 두 집에 각각 두 마리씩 넣고 나머지 한 마리가 남은 거야.이번에는 혼자 남은 강아지가 불쌍하다고 했다.나머지들은 불쌍해요,라는 일곱 살짜리의 측은지심에 짜증이 일었다.마치 나에게 불쌍하다고 말하는 듯했다.세상이란 곳은


소설 나머지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을 어린 정은이는 아직 몰랐고,나는 빨리 알았다. 나머지의 존재를 자신에게 연결한 그 무렵부터 나는 혼자 살아가는 것을 준비했다. 한순간도 내 역할을 잊은 적이 없었다.줄곧 나머지로 살아왔다.혼자로 충분했다. 고운 얼굴 가득 절망을 지고 있는 그녀에게 앞으로도 충분히 혼자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 그 사람이 여기 살라고 했을 때,난 같이 사는 건 줄 알았어요.하지만…. ” 그녀는 말을 잇지 못 하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그 사람과의 관계를 이어온 지 삼 년. 학교를 졸업하고 오 년을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그 사람을 따라 나섰다고 했다.단지 그 사람과 함께 있기 위해 모든 것을 뒤로하고 온 것이었다.하지만 그 사람은 가정이 있는 사람이었다.그녀가 생각했던 것만큼 함께 있을 수 없었다.가정이 있는 그는 그녀를 드러낼 수 없었다.그녀는 그 사람에게만 보이는 투명인간이었다.불안한 관계를 이어온 그녀와 그 사람이었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었다.그는 자신의 꼬리가 잡히는 걸 두려워했다.결국 가정을 핑계로 그녀를 떠났다.그녀는 그에게만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그가 없어진 것이었다. 그녀가 말을 멈추자 무거운 침묵이 우리를 감쌌다.무슨 말이라도 꺼낼까 했지만 그녀를 둘러싼 침묵을 깨고 싶지 않았다. “ 그 사람은 내가 있어서 숨을 쉴 수 있다고 했어요. ” 그 사람의 어떤 거짓말도 그녀에게는 신앙과 같은 약속이었다.조만간 부인과 헤어지고 그녀 곁에만 머물겠다고 몇 번이나 말해주었다.그녀라고 그 사람이 결국 가정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그래도 자신에게 올지 모른다는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그녀를 속인 건 그 사람만이 아니었다. 그녀 자신도,그녀를 속이고 있었다.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녀는 밤마다 잠을 깨었다.그 사람을 꽁꽁 묶어 자신의 집으로 끌고 오는 꿈을 꾸기도 했다.그럴 때마다 당장 그의 집으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하지만 자신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그가 찾아올까봐 나갈 수가 없었다.그렇게 두 달을 집에만 있었다. 그녀는 그 사람이 자신에게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그래도 살면서 마음이 바뀌면,언젠가는….그녀는 기다리고 싶었다.그 사람이 아파트에서 계속 살아도 된다고 한 것도 다시 돌아올 때를 생각해서 그런 것이리라 믿고 싶었다.그녀는 그 사람의 자리를 남겨두기 위해 이 아파트에서 살기로 했다. “ 그 사람이 다시 올지도 모르잖아요. ” 그녀는 쓸쓸하게 말했다.그 사람은 오지 않을 것 같았다.이미 그녀도 알고 있을 것이었다.애초부터 그 사람과 늘 함께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아파트를 구해 준 후 자주 오기는 했지만 1~2주씩 오지 않은 적도 많았다.주말은 항상 혼자 보냈다.그 사람은 가족들과 함께 자상한 남편으로,아버지로 즐거운 주말을 보냈을 것이었다.


소설 그녀는 이별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문밖에서 발자국 소리만 나도 숨을 죽이고 현관문을 바라보았다.철컥철컥 문소리가 울리고 금방이라도 그 사람이 들어올 것만 같았다.점점 그녀는 말라갔다.어떻게 살아야 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눈은 자꾸만 문을 향했고, 손은 휴대폰을 놓지 않았다. 마음은 문밖을 넘어 그 사람에게로,그 사람에게로만 향했다.아주 가끔이라도 좋으니까 다시 오겠다는 말을 해주길 기다렸다.매일 대답 없는 전화를 했다.그 사람의 집에도 전화를 했다. 떨리는 손으로 몇 번을 전화해서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끊었다.말없이 끊는 전화가 자신인 걸 알았을 것이었다.그녀는 그 사람에게 미움 받는 것이 두려워 전화하는 것을 그만두었다.일 년에 한 번이라도,아니 더 가끔이라도 좋으니 와달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답이 올 리가 없었다.겨우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 전화번호가 바뀐 걸 알았다.매일 그 사람에게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집안으로 자신을 몰아넣었다.전화하지 못하는 대신 어디에든 그 사람의 전화번호를 썼다. 메모지에,달력에,거울에.수없이 되풀이해서 쓰고 또 썼다. 시간이 갈수록 진짜,영원히,그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그녀는 천천히 한 마디씩 끊어서 말했다.그녀의 목소리가 끊어질 때마다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다른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든지,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는 흔한 위로의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그 흔한 말을 빼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녀는 언젠가 이별을 맞이하게 된다면 말없이 그 사람을 보내고 싶었다.그 사람이 있어야 할 곳을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미래가 없는 선택을 한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외로움에 익숙하니까 괜찮을 거라 생각했어요,다시 혼자가 되어도.그녀는 뒤늦은 후회를 했다.이미 그 사람으로 인해 변해버린 그녀였다.그 사람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그 사람을 찾아갔다.얼굴만 보고 올 생각이었지만 그 사람을 보자 돌아올 수가 없었다.그 사람의 아파트 앞에서 회사로,회사 앞에서 식당으로, 거래처로,피트니스 클럽으로 다시 아파트로.그 사람이 가는 곳마다 따라갔다. 밤에는 그 사람의 아파트가 보이는 길가에 앉아 있었다.그 사람의 집에 불이 꺼지면 그녀도 집으로 돌아왔다.집에 오자마자 쓰러져 잠든 그녀는 새벽이 되면 다시 일어나 홀린 듯 그 사람에게로 갔다.아파트 입구에서 그 사람의 집을 올려다보며 기다렸다.혹은 그 사람의 회사 근처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아 그의 차가 지나기를 기다렸다.그 사람이 회사에 있는 동안은 회사 맞은편 건물 3층에 있는 커피숍에서 그 사람이 있는 5층을 바라보며 그를 생각했다.그 사람이 있는 빌딩 유리에 파아란 하늘이 남색으로 비치고 잿빛 구름이 흘렀다.하늘이 비친 그 유리 너머로 그녀의 하늘이 있었다.어디선가 몰려온 구름이 그녀의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그 사람을 사라지게 하려는 구름 따위를 모두 밀어낼만한 강풍이 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설 설사 그 강풍에 그녀 자신이 쓰러지더라도. 그녀는 종일 그림자처럼 그 사람을 따라다녔다.그 사람에게만 보였던 그녀는 이제 그 사람에게도 보이지 않는 듯 했다.그녀의 시선을 그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 했다. 그녀는 종일 그 사람을 바라보며 그에 대해 더욱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그 사람이 항상 주차하는 자리.업무와 관련된 전화는 늘 왼손으로 받는다는 것.통화 중 화가 나거나 대화가 잘 되지 않으면 오른손을 허리에 올린다는 것.회사 입구에서 항상 점심을 먹으러 가는 식당까지는 삼분이 걸린다는 것.그녀는 그 사람의 세세한 모습을 쫓다보니 그의 걸음걸이가 좋아졌다.그녀는 그 사람과 함께 나란히 걷고 싶었다.생각해보니 그 사람과 함께 거리를 걸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두 사람의 만남은 대개 차 안이었다.그래서 그녀는 그 사람의 운전하는 모습을 좋아하게 되었다.그 사람이 아파트를 마련해 준 후로는 집에서 만났다.그녀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누운 그 사람의 옆모습을 좋아하게 되었다.그 사람의 걸음을 따라 걷던 그녀는 지쳐갔다. 그녀의 이야기는 내 안에 깊이 가라앉아 있던 서러움을 파헤쳐냈다.오랫동안 잊고 지낸 감정들을 일깨웠다.나는 다시 퍼즐을 집었다.퍼즐에만 집중하려고 했다. 서둘러 퍼즐 속의 갈색 성을 완성하고 싶었다.성 안에 갇힌 공주처럼 내 마음을 다시 꼭꼭 가둬두고 싶었다.성 그림은 내가 쉽게 완성할 수 있는 퍼즐이었다.하지만 퍼즐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작은 조각들을 여러 개 집어 들고 이곳저곳으로 옮기며 자리를 확인했다.그러다 이내 모두 내려놓고야 말았다.나는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지친 표정을 한 그녀는 덮고 있던 담요를 몸 위로 더 끌어올렸다. “ 내가 여기서 떨어지면 그때야 날 보러 올 것 같아요.내 얘길 들으면 그 사람…,와 줄까요?” 그녀가 우리 집 앞에 선 이유였다.사고가 난 후라면 그 사람이 온다고 해도 그녀는 만날 수 없다.그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난간에 오르려 했다.가슴 속에서 무언가 치밀었다.차마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작은 새가 떨고 있는 것 같았다.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그녀의 어깨를 감싸줄 수도 없었고 해줄 말도 없었다.그녀의 뺨에는 맑은 물방울이 또르르 굴렀다.작은 각티슈를 그녀 옆으로 밀어주었다. 오랜만에 눈물을 보았다. 나는 울지 않았다.할머니가 엄마,아빠의 사진 앞에서 내 등을 쓰다듬으며 울어라, 울어라 할 때도 나는 울지 않았다.그 날 엄마,아빠는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면 내 친구가 될 강아지를 데리고 오겠다고 했다.강아지를 갖고 싶다고 며칠을 졸랐던 기억이 있다.집을 나서던 엄마,아빠는 아무에게도 문을 열어주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금방 올 테니 조금만 참으라고 나를 달랬다.금방 오겠다던 부모님은


소설 밖이 어두워지도록 돌아오지 않았다.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었을 때 할머니가 나를 깨웠다.할머니는 거칠게 나를 일으켜 끌고 나갔다.어떤 아저씨의 차를 함께 타고 가는 동안 할머니는 울기만 했다.나는 할머니에게 붙들린 손이 아팠지만 말없이 앉아 있었다.우리를 데려가는 낯선 아저씨는 무서운 표정으로 빠르게 차를 달렸다. 머지않아 할머니는 나를 하얀 국화꽃으로 쌓인 엄마,아빠의 사진 앞에 세워놓았다. 쓰러지듯 주저앉은 할머니는 내 머리며 얼굴을 마구 쓰다듬었다.나를 끌어안고 흔들기도 했다.할머니의 그런 모습이 낯설었다.아빠가 데려온다던 내 친구는 어디 있는 걸까.주위를 두리번거렸다.이 불쌍한 것,불쌍한 것.멀뚱멀뚱 서있는 내 주위에서 끊임없이 불쌍한 것이라는 소리가 들렸다.그 때 나는 다섯 살이었다.그 이후로 나는 울지 않았다. 밖으로 넘치지 못한 물들은 내 안에 가득히 차올라 일렁거렸다.그 물에 밀려 나는 이리 저리 떠 다녔다.사춘기 소녀의 작은 꿈도 그 물에 잠겨 깊이 가라앉았다.어느 책에선가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샘을 품고 있다고 했다.그 샘에서 솟은 물은 가끔 세상으로 나와야 하는 것이었다.밖으로 나와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야 했다. 사람들의 샘은 가만히 고여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로 끊임없이 흘렀다. 나는 누구에게도 샘의 물을 흘려보내지 않았다.다른 사람의 물이 흘러들어오게 하지도 않았다.그만큼 사람들과 이어지는 길이 없었다.내 안에 물이 고여 있는 만큼 겉은 메말라 갔다.자연스레 나는 혼자가 되었다.엄마,아빠뿐 아니라 모두가 나를 떠났다.혼자인 것은 아무렇지 않았다. 그녀가 안쓰러웠다.나는 그녀처럼 누군가를 향한 사랑을 담아 샘의 물을 흘려 본 적이 없었다.나머지인 내가 짝이 있는 다른 이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저 눈물을 그 사람과 나누고 싶겠지.붉어진 그녀의 뺨이 미세하게 떨렸다. 앙다문 그녀의 입술이 조금씩 실룩거렸다.울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조여 왔다.그녀의 샘은 펑펑 넘쳐흘렀다.나는 퍼즐 조각을 집어 들었다.그녀를 대신해 퍼즐을 맞추었다.조심스럽게 초록색 조각들을 가려내고 성을 둘러싼 산을 만들어갔다. 울음을 그친 그녀는 자리에게 일어나 베란다 창문으로 다가갔다.그녀는 하얗게 쳐진 커튼을 걷었다.큰 창을 열고 마치 유령처럼 스르륵 밖으로 나갔다.그녀가 나가자 창문 밖에 있던 차가운 공기들이 쏟아져 들어왔다.그녀는 창을 닫고 베란다 난간 앞에 섰다.거기서 갑자기 뛰어 내릴지도 모를 일이었다.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나도 베란다 창문 앞으로 갔다.그녀의 뒷모습이 불안해 보였다.내 안의 미세한 두근거림은 그녀를 걱정하는 것인지,내 집에서 불의의 사고가 일어나는 것을 염려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았다.그녀가 맞선 어둠 너머로 층층이 켜진 불빛들이 반짝였다.나는 늘 커튼을 치고 있어서 베란다에서 바깥 풍경을 내다보는 일이


소설 드물었다.주변의 다른 동에는 집집마다 따스한 빛이 켜져 있었다.그 불빛을 향해 살며시 손을 뻗었다.손바닥에 조그마한 온기가 와 닿았다.내 손이 그녀의 어깨를 넘어 뻗어갈 때 그녀가 돌아보았다.나는 머쓱하게 쳐든 손을 내려 베란다 문을 열었다. “ 찬바람이 마음속까지 스미는 것 같아요. ” “ 그만 들어오는 게 좋겠어요. ” 그녀는 말끔해진 얼굴로 입꼬리만 살짝 올려 건조한 미소를 보였다.차가운 공기 속에서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안으로 들어왔다.각자의 자리에 돌아와 앉아서 나란히 퍼즐에 시선을 두었다.적갈색의 뾰족한 성 지붕이 조금 드러났을 뿐 하얗게 비어있는 성의 왼편으로 초록빛 산이 모습을 드러냈다.여기 한 조각이 없어요. 그녀는 오른쪽 하늘 부분에 비어있는 한 자리를 가리켰다.나는 하늘색 퍼즐이 있던 곳을 살폈다.다른 퍼즐 조각들도 뒤적였다.하늘색 퍼즐 조각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그녀에게는 어딘가에 섞여 있을 거라 말했다.항상 잊어버리지 않게 신경 써서 챙겨두었기 때줸 않퍼즐 조각이 모자좄각은은 없었다.얼마 후 다른 색의 퍼즐 더미 속에서 하늘색 한 조각을 찾아냈다.퍼즐은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았다.이미 완성된 그림을 조각내어 다시 맞추는 것이므로 때줸하나 필요 없는 조각이 없었다. 몇 피스짜리든 모두각은은 자리 다.한 조각도 빠짐 피스있어다.나의 그림이 완성되는 것이었다.나 역시 이 세상이라는 퍼즐에 필요한 어느 한 조각이길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퍼즐은 한 조각이 사라지면 티가 나지만 세상에서는 나 하나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거라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하지만 실제로 사라지는 게 무서웠다.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 하는 것이,나에 대한 아무 흔적도 남지 않을 거라는 것이 오히려 나를 살게 했다.그 사람은… 그녀를 기억해 줄까. 그녀와 나는 다시 퍼즐을 이어갔다.그녀 역시 초록색 조각을 들고 성 주변의 산을 만들었다.가운데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성의 자리는 여전히 비어있었다.성 위로 펼쳐진 하늘과 아래쪽에 자리한 산이 조각조각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저녁…,같이 드실래요?” 천천히 퍼즐을 이어가고 있던 그녀에게 말했다.그녀는 부엌 쪽을 힐끗 보더니 그러겠다고 했다.그녀의 행동에 나는 아차 싶었다.서둘러 밥솥을 열어보니 다행히 아침에 한 밥이 두 사람 몫은 되는 것 같았다.반찬이 변변찮겠지만 이미 말해버린 이상 어쩔 수 없었다.혼자 살다보니 먹는 것이 부실했다.요리를 즐겨하는 편이 아니라 그럴 것이다.퇴근 시간이 늦어 보통 밖에서 간단히 먹는 것이 전부이고 집에서는 주말에도 거의 간단히 때우기 때문에 제대로 먹을 만한 게 없다.나는 어디서든 대개 혼자 밥을 먹었다.집에서는 물론이고 밖에서도 혼자 학생들의 집을 돌아다니니 밥을 같이 먹을 사람이 없었다.나는 혼자 밥을 먹는 게 싫었다.하지만


소설 혼자가 되기로 했으니 그것도 감당해야하는 것이었다. 그녀도 혼자 밥 먹는 것을 싫어한다고 했다.그 사람이 떠나고 나서는 식탁에 제대로 상을 차려 먹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조촐한 저녁상이 식탁에 차려졌다.얼마 남지 않은 김치찌개를 데우고 마른 반찬 두세 가지를 내놓았다.부끄러울 정도로 간소한 식단이었다.입맛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먹어두라고 말하며 그녀를 식탁 앞에 앉혔다.그녀와 식탁에 마주 앉아 있는 느낌이 어색했다.내 앞에만 옹기종기 모여 있던 반찬 그릇들이 식탁 중간쯤으로 멀어졌다.반찬과의 묘한 거리감을 느끼면서 숟가락을 만지작거렸다.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이 정말 오랜만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내 앞에만 있던 반찬을 상대방에게 가까이 놓아주는 것.다른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내 것을 상대방 쪽으로 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겠지. 오랜만에 내가 한 배려가 조금 어색했다.그녀와 나는 천천히 밥을 떴다.가능한 서로를 보지 않으면서 묵묵히 밥을 먹었다. “ 라디오 들으세요?” 거의 다 먹어갈 무렵 그녀가 물었다.집안에 흐르는 적막을 의식한 듯 했다.나는 잠시 사이를 두고 짧게 대답했다.안 들어요.내 대답에 그녀는 할 말이 없었는지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사실 어릴 때부터 라디오를 좋아해서 늘 들었지만 작년 즈음부터 안 듣게 되었다.그런 걸 구구절절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 전에 라디오에서 들었는데요,보통 사람들은 혼자 있을 때 음악을 듣는데 혼자 사는 사람은 라디오를 듣는대요.왜 그런지 아세요?” 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말하고 싶지 않았다.모르겠다고 대답하자 그녀는 무표정하게 말했다.사람 목소리가 그리워서 그런 거래요. 나도 라디오에서 그 말을 들었다.그 때 나는 라디오를 꺼버렸다.그 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나는 그 말을 들은 이후 일부러 라디오를 켜지 않았다.그래서 라디오를 안 듣게 된 것이었다.사람이 그립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워할 만큼 내 안에 인상적으로 남아있는 사람도 없었다.사람 목소리가 그리워서 라디오를 듣는다는 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최근 라디오를 다시 듣게 되었다고 했다.라디오가 아니면 그녀의 집은 무거운 고요 속에 침잠할 것이었다.그녀는 그 말을 인정했다.그 사람을 만나기 전에는 혼자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그녀는 얕은 한숨이 스민 목소리로 말했다. “ 사람 목소리가 그리운가 봐요.네,그리워요. ” 그녀는 무표정했지만 하얀 뺨 위로 또 다시 눈물이 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 그 사람…,이젠 안 오겠죠?” 내가 식탁을 정리하는 동안 멍하니 앉아 있던 그녀가 불쑥 물었다.그럴 것 같아요.


소설 조금은 건성으로 대답했다.여기 있으면 언젠가는 그가 올 것 같은데…,이사라도 가야할까요.그녀는 깊이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었다.그러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그녀와 마주 앉으며 말했다.이사를 가는 것도 괜찮겠네요.혼자 살기에 이 아파트는 큰 편이었다.그 사람이 없는 집에 혼자 있으면 집이 더 크고 허전하게 느껴질 것이었다.하지만 그녀가 이사를 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그녀는 다시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퍼즐을 계속 할 참이었다.나도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신중하게 퍼즐 조각을 고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그녀가 그 사람을 벗어날 수 있을까. 불현 듯 눈이 떠졌다.어느 틈엔가 침대에 기대 잠이 들어있었다.그녀가 덮었던 담요가 내 몸에 덮여 있었다.앞에 놓인 일인용 테이블 위에는 큰 성 그림의 퍼즐이 반듯하게 맞춰져 있었다.그녀가 완성한 걸까.주위를 돌아보니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거실 바닥에는 내 머그컵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그녀의 컵이… 없다. 고개를 빼고 부엌을 넘겨보니 우리가 밥을 먹은 흔적도 없었다.아무 데도 그녀의 흔적이 없었다.그러고 보니 퍼즐의 그림이 내 앞으로 향해 있었다.나는 퍼즐의 왼쪽에 앉아 있었다.화려하지만 쓸쓸한,멋지지만 살고 싶지 않은 성의 그림이 나를 향해 있었다.성을 내려다보는 내 눈에 작은 창문 안으로 비에 젖은 작은 새처럼 웅크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희곡

비 콰이어트 비 콰이어트 기획의도 교육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는 가운데,어른들은 학생들에게 진정 참다운 교육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교사 생활을 하다가 학원을 차려 자신이 근무하던 학교의 시험문제를 빼돌리는 학원선생이라던가,특목고의 시험유출 등 이것과 비슷한 사건들은 우리 주위에 비일비재하고 있다.이 모든 것은 학부모들의 무서운 교육열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이러한 상황을 희극적으로 풀어보고 싶었다. 등장인물 김미향 ( 여, 33살,다방주인) 잘나가는 술집여자였다가 임신을 하고 한적한 시골에서 다방을 차려 살아가는 인물.딸아이를 끔찍이 아끼며 딸이 언젠가 성공하여 지긋지긋한 자신의 인생을 바꿔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만복 ( 남,55살,졸부) 아이들 모두 일류대학에 보내라는 부인의 말로 17살 딸의 내신을 위해 일부러 11살 된 아들과 함께 시골로 이사를 함.졸부가 된 바람에 허세가 심하고 돈이 최고라고 여기지만,누구보다 소심하고 겁이 많다. 노민철 ( 남,45살,농부) 집안 대대로 농사만 하여서 공부와는 거리가 먼 인물.못 배운 것이 한이 되어 아들에게 공부만이 살길이라고 공부를 시키지만,학원 한 번 보내준 적 없다.우유부단하고,부인인 박말순의 말에는 순종한다. 박말순 ( 여,45살,노민철의 아내) 가난한 집안을 일으키고자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인물.항상 노민철에게 바가지를 긁는다.하지만,연락 끊긴 도련님에게 돈을 부쳐줄 만큼 속이 깊은 인물. 권명( 남,68 살,학교 소사) 초등학교 소사로 10살된 손녀와 함께산다.점잖은 노인으로 마을에서 정신적인 지주역할을 한다.하지만 영어열풍으로 이내 무식한 사람으로 낙인되고만다. 안찰남 ( 남,54살,순경) -마을의 순경으로 다른 일에는 무관심하지만,자식 교육에 만큼은 누구보다 열정적인 인물.


희곡 김연지 ( 여,10살,김미향의 외동딸) 최강우 ( 남,10살,최만복의 둘째아들) 노수호(남,10살,노민철의 외동 아들) 권은실 (여,10살,권 명의 손녀) 아이들은 목소리로만 출연

줄거리 한적한 시골마을에 초등학교 성적 또한 대학입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발언과 영어가 제 2모국어로 채택된다는 소문이 떠돈다.학부모들은 골목길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모두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 공부를 시키는데 여념이 없다.소문이 사실임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교육을 위해 일상생활에서도 쓰자는데 동의한다. 처음에는 버릇없다고 느끼던 서구문화도 점점 사람들은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중간고사 후,학원과 과외로는 만족스런 성적을 얻지 못하자 학부모들은 시험지를 훔치러 교무실로 들어간다.처음으로 들어간 최만복이 소사에게 들킬 뻔하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노민철 부부가 학교로 들어가는 것을 본다.뒤이어 미향 역시 학교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만복 역시 학교로 다시 들어간다.교무실 앞에서 소사에게 어쩔 줄 몰라 하는 노민철 부부를 보면서 만복과 미향은 서둘러 도망간다.다음날 다시 시험지를 훔치러간 4사람은 각자 다른 과목의 시험지를 들고 서로 협상안을 내어 놓지만,협상이 이루어 지지 않는다.이들의 모습을 본 권 명은 경찰서에 신고한다. 4명이 계속 시험지를 놓고 다투는 동안 경찰이 들이 닥친다.모든 상황을 파악한 경찰은 우선 증거물인 시험지를 내어 놓으라고 한다.처음에는 거부하던 4명은 구속시킨다는 말에 한명씩 시험지를 건넨다. 그 후,경찰의 아들이 전교 1등을 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고,이들은 또 다시 시험지를 훔칠 계획을 세운다.


희곡 시간:현대 장소:잘살면 되리 ( 시골마을) 등장인물: 김미향 ( 여, 33살,다방주인) 최만복 ( 남,55살,졸부) 노민철 ( 남,45살,농부) 박말순 ( 여,45살,노민철의 아내) 권명( 남,68살,학교 소사) 김연지 ( 여,10살,김미향의 외동딸) 최강우 ( 남,10살,최만복의 둘째아들) 노수호(남,10살,노민철의 외동 아들) 권은실 (여,10살,권 명의 손녀) ※아이들은 출연하지 않는다.필요하다면 목소리로만 등장.

무대 조명 들어온다. 평상에 노민철이 앉은 채 밀짚모자로 부채질한다. 노민철:아유,더워 죽겠네.아직 한여름도 아닌데,올해는 이렇게 더우니,일하기도 배로 힘드네,힘들어.그나저나,이번은 수확 좀 좋아야 할 것인데.( 입맛을 다시며) 이럴 땐 김 마담이 타준 그 얼음 동동 띄운 시원한 커피나 한잔 쭉 들이키면서 더위를 식혀야 하는데 말이야.하아,그 생각 하니 더 덥다 더워. 최만복:( 요란하게 손 부채질을 하며 등장)하이고,덥다.더워.( 평상에 앉아있는 노민철을 발견 하고는 뒷짐을 진채 거드름을 피면서)으흠.더워서 쉬고 있는 것인가? 노민철:( 최만복의 소리를 듣지 못한 채 계속 밀짚모자로 부채질만 한다. ) 최만복:이보게 노씨.더워서 귀까지 먹은 것인가?혼자 중얼중얼 거리면서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있었나?


희곡 노민철:아이고,형님 오셨어요?더운데 좀 앉으세요. 최만복:그래.덥기는 무진장 덥구먼.내가 이 동네 온지 2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그 형님소리는 버릇이 안돼서 듣기 좀 거북하구만. 노민철:예? 최만복:내가 도시에서 살 때는 사장님 소리만 듣다가 여기 와서는 님 자는 님 자인데 형님이라는 소리만 들으니 말이야.영 듣기가 불편하다 말일세.뭐,그렇다고 이제 와서 사장님으로 불러달라는 건 아니고.에헴. 노민철:아 예( 머쓱하게 웃는다)아. . 형. . 아. . . 사. . . 님. . . ( 우물쭈물한다)지금 덥지 않으십니까?우리 김 마담 표 얼음커피 한잔 어떠십니까? 최만복:얼음커피가 아니고 이 사람아.( 아이스커피를 발음할 때는 아주 느끼하게) 아이스커피라고 하는 걸세. ( 미소를 띠며)김마담표 커피라 고거 좋지.( 전화를 건다)어어,김마담?나야 나.여기 은행나무 앞인데 아이스커피 2잔만 들고 오라고. 노민철:역시 형님은 아니 사장님은?하하하,어쨌든 참으로 통이 크십니다. 최만복:하하하하,겨우 커피 3잔가지고 뭘.그래,요즘 농사는 어때? 날씨가 이렇게나 더운데,흉작이야 풍년이야?난 농사꾼 체질이 아닌가봐.2년을 살았어도 감이 있어야지 뭐. 노민철:그런걸 알면 신이죠 신.글쎄요.비만 와도 흉년이고,이렇게 더워도 흉년이죠.적당한 게 최고죠.최고.허허허. 최만복:내가 우리 마누라 유언만 아니었어도,시원한 휴양지 가서 피서나 즐기고 있을 군번인데 말이야. ( 벌떡 서서) 여보~송울대~송울대~송울대! ! ! ! ! ! ! ! ! ( 몸서리친다) 노민철:아하,그 교육타령 제가 알죠.그놈의 송울대.저도 지긋지긋 합니다. 최만복:( 의아스럽다는 듯이)자네가?


희곡 노민철:저희 집 안사람도 돌아가신 형수님 못지않게 교육열이 장난이 아닙니다. 어쩔 때는 제 나이 때에 뛰어노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도. . . . . .안쓰러울 뿐이죠. 김미향 등장.한손에는 보자기에 싼 보온병과 컵을 들고서 밝게 걸어온다. 조금 더 두 사람에 가까워지면 얼굴표정을 보고 밝게 걸어오는 걸음을 늦춘다. 김미향:어머나? ( 최만복을 빤히 보며)더위라도 먹은 거예요? 표정들이 다들 왜이래요? 최만복:더위는 무슨,왜 이리 늦게 왔어?저번처럼 또 다른 곳 배달하고 온 거 아냐? 김미향:어머머,날 뭘 로 보고요!( 보온병에 담긴 커피를 컵에 따르며)이것 봐요. 얼음 하나도 안 녹았죠?응?표정들이 왜 그랬어요?뭐 마을에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어요? 노민철:( 김미향이 커피를 다 따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 번에 마신다)캬~시원하다 ( 얼음을 씹어 먹으며)김마담,얼음 더 없어요? 최만복:저. . . . 저. . . . 젊은 사람이 무드 없기는 말이야.요즘 누가 커피를 원샷을 하나! 응?( 컵을 우아하게 들면서 커피를 한 모금 홀짝 마신다)이렇게 음미하면서 천천히 마셔야지,김마담이 타온 정성도 있는데 말이야. 김미향:호호호.역시 센스 쟁이!맞아요,배달한다고 힘들어 죽는 줄 알았는데,1 초도 안되어서 다 마셔버리다니 너무 한 것 아녜요? 노민철:아아,미안해요.날씨도 덥고,짜증나는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나도 모르게 김미향:짜증나는 이야기요?( 미소를 지으며)요즘 세상에 짜증 안 나는 이야기가 어디 있어요?다 짜증나는 이야기 투성이죠. 최만복: ( 커피를 한 번 더 홀짝 마시며)김마담은 몰라도 돼.미인들이 그런 이야기 듣고 주름살 하나 더 생기면 오빠 마음이 아파요.


희곡 김미향:( 노민철의 팔짱을 끼며)뭔데요?궁금하게 말해줘요.네?네?

박말순 등장.머리에는 새참을 이고 걸어 나온다. 처음에는 천천히 걸어 나오다가 김미향이 노민철의 팔짱을 낀 것을 보고는 급히 달려온다. 박말순:수호아빠!지금 뭐 하는 거고? 노민철과 김미향 화들짝 놀란다. 박말순:지금 장난치나?니 하라는 고추모종은 다 심고 이라나?나는 이 땡볕에 고생한다고 시원한 막걸리 가지고 왔는데,너는 지금 김 씨랑 히히거리면서 커피나 마시고 있어?그것도 마을 입구서? 노민철:그. . 그게 아니라. . 일하다가 너무 더워서 쉰다고. . . 김미향:그래요,언니.그게 아니에요.( 횡설수설하면서)얘기하다가,그게.이렇게 저렇게 하다보니까.진짜 사심은 없었다고요. 박말순:됐다,고마 시끄릅다! 쩔쩔매는 노민철과 흥분한 박말순을 보며 최만복이 일어난다. 최만복:마산댁,너무 그러지 말게나.이 땡볕에 일하기에 힘들어 보여서 내가 커피나 한잔 하고 일하라고 불렀네. 박말순:아제가요?( 노민철을 쏘아보며)진짜가? 노민철:응,응.진짜지,언제 형. . . . 아니. . . 사. . . . 자. . . . 님이 거짓말 하는 거 봤나?


희곡 박말순:( 혼잣말처럼 궁시랑 대면서)거짓말한 거 본 게 한 두 번이 었어야지.( 다시 노민철을 보며)알았다.내 한 번 믿어보마.( 새참그릇을 가지고 나온다)자,다들 시원한 막걸리나 한 잔 하소.내 넉넉히 가지고 왔습니더.동상,니도 와서 한 잔 해라. 김미향:됐어요.무슨 대낮부터 술이 예요? 노민철:( 막걸리를 그릇에 부으면서)이거 우리 안사람이 담근 거라서,사먹는 것이랑은 차원이 달라.한 번 먹어봐.형님도 한 번 드셔보세요. 최만복:흐음,그럼 한 잔 먹어볼까?김마담도 내려와서 한 잔 해.이야,때깔 곱다. ( 막걸리를 한 모금 들이켠 후)캬~맛나다.맛나.역시 막걸리는 집에서 담는 것이 최고구나.아이스 커피는 김마담 표가 최고라면,이 막걸리는 마산댁 표가 최고지. 암 암.한 잔 더 줘보게나. 김미향:( 최만복이 맛있게 막걸리 먹는 모습을 보면서 입맛을 다신다)맛있어요? ( 관심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럼 저도 한 잔 주시던가요. 박말순:자,여기.한 잔 쭉 해봐.그냥 갈증이 절로 나간다 나가.( 노민철을 치면서) 아!맞다!내가 막걸리나 먹이자고 달려온 건 아니다.이놈의 내 정신 좀 봐라.수호아빠,세상에 건너편에 을수엄마가 그라는데,이제 영어가 제2모국어로 된 다카더라.이제 우리말처럼 유창하게 영어 못하면 바보 소리 듣는 시대가 올꺼라 카더라. 모두:( 화들짝 놀라며)응?진짜? 박말순: 맞다. 그 을수엄마는 교육계의 확실한 정보통으로 통하는데, 오늘 전화하면서 내한테 말해주더라.이제 국어는 1모국어고,영어가 외국어가 아니고 2 모국어로 되가지고,영어 몬하면 한국에서 살기도 힘들다 카던데. 김미향:언니,그 말이 사실이 예요?확실한 정보통인거에요?에이,설마 그러기야 하겠어요?그냥 헛소문이겠죠.왜 우리 때도 중국어가 이제 세계어로 된다면서 시끌 벅적하곤 했잖아요.


희곡 최만복:그래,마산댁.아무리 그래도 대통령이 미치지 않고서야.세종대왕님께서 창조하신 한글을 그래 버려버리겠나. 박말순:버리는 게 아니라,한글이랑 동등하게 사용하겠다는 거 아니겠습니꺼. 노민철:그거나 그거나 뭐가 달라?한글은 다 쓸 줄 알고,영어 못 쓰는 사람이 훨씬 많아지니까 이제 영어열풍이 더 불겠네 불겠어. 모두들 잠시 생각을 하면서 멍하게 있다. 김미향:( 갑자기 정신을 차리면서 )전 이제 가봐야겠어요.다른 손님들도 받아야죠. 여기서만 있으면 안 되잖아요.저 먼저 가 볼께 요.

김미향 퇴장.

최만복:그. . . 그래.나도 이제 슬슬 일어나봐야지.일들 잘하고,마산댁 막걸리 잘 마셨어. 박말순:예,뭘요.가이소.

최만복 퇴장.

박말순:어짜노,우리 수호 불쌍해서.보니까 영어도 잘 못 따라 하던데.속상해 죽겄다.그렇다고 내가 유식해서 가르쳐 줄 수 도 없고. 노민철:소문이겠지.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새참바구니나 챙겨.우리도 슬슬 일하러 가야지. 노민철과 박말순 퇴장.


희곡 조명이 꺼지고,아이들이 동요를 부르는 소리. 노래소리 작아지지만,배경음으로 약하게 들린다 김미향 목소리:연지야,당장 들어와서 영어 공부해!지금 노래 부르고 있을 상황이니?얘가 똥오줌 못 가리는 소리나 하고 있어! 노래 소리 다시 커지다가 다시 약해진다. 최만복 목소리: 초등학생이라고 신경 안 썼다가는 너희 엄마 귀신 되어서 나타나겠다.당장 들어와서 공부해. 노래 소리 다시 커지다가 다시 약해진다. 박말순:수호야,니 지금 뭐 하노!여기서 이러다가는 나중에 벙어리 취급받는다! 영어공부해라,얼른! 조명이 들어오면,노민철이 평상에 앉아 있다. 박말순:( 노민철 쪽으로 걸어 나오면서)하이고~오늘은 덥지도 않고 바람도 안 부니께,모내기 하기 좋은 날씨네.모판에 모들은 어떻더노? 노민철:잘 자랐더라.오늘 심자. 박말순:그랴,이번에는 좀 잘 되야 할 텐데.그래야 우리 수호 읍내에 있는 학원도 보내고 그라는데.그 소문이 사실이면 우리 아는 가난한 부모 때문에 무슨 고생이래. 에휴. 노민철:잘 되겠지.공부야 노력하면 되지만,우리 수호는 심성이 곱잖아.안 그래? 게다가 날씨도 이렇게 좋은데 괜한 얘기는 그만 하고 일이나 하러갑시다.열심히 일하면 우리 아들녀석 읍내에 있는 학원 보내줄 돈은 나오겠지. 박말순:날씨만 좋네,날씨만 좋아.( 노민철의 눈치를 보며) 당신,요즘에도 도련님이랑 연락이 안 되나?


희곡 노민철:아직,안 되지. 박말순:그래도 통장에 돈 넣어주면 꼬박꼬박 챙겨가는 건 같고? 노민철:그런 것 같더라.돈은 꼬박꼬박 빠져나가는 것 같은데. . . . . . . 에휴,못난 녀석. 형수님 이렇게 고생하는 줄 알면서 돈 잘 받았다는 전화 한통이 없네.없어. 박말순:내가 뭐 그런 거 바랬나.됐다.말해봤자 뭐하노.가자.( 일어나면서)일이나 하러 갑시다. 노민철:( 뒤돌아서 가는 박말순을 보면서)그래도 우리 마누라뿐이네. 노민철이 일어서는데,뒤쪽에서 김미향 등장. 김미향:언니~오빠! 노민철:어?김마담이 여긴 웬일이야? 김미향:언니랑 오빠 보고 싶어서 왔죠. 박말순:( 혼잣말 하듯이)저 가시나는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즈그 언니 오빠재? 노민철:( 박말순을 말리며)그만해,김마담 듣잖아. 박말순:(노민철의 손을 뿌리치며)놔라,내 입인데 내가 말도 못하나!지금 저 가시나 눈치 보는 기가?

김미향:( 팔짱을 끼면서)언니라고 하지 그럼 아줌마라고 해요?아니면 여사님? 박말순 여사님~이렇게라도 불러야 해요?좋은게 좋은거지 트집 잡고 싶어서 괜히 그러는 거예요?


희곡 박말순:뭐?질투?김마담 니가 몰라서 그러는데,우리 수호 아빠는 니 같은 불여시 백트럭은 갔다줘도 눈하나 깜짝 안한다!니는 저기 돈지랄 하는 최 영감쟁이한테 가서 꼬리나 흔들지 그라노?그라믄 돈이라도 좀 떨어지지 않나? 김미향: 뭐? 불여시? 이 아줌마가 말 다했어? 언니 같지도 않는데 언니 대접해주니까 눈에 뵈는 게 없지?민철씨는 뭐 엉덩이 펑퍼짐 한 댁 같은 사람 좋아하는 줄 아나 봐요? 박말순:뭐라꼬?민철씨?민철씨라고 했나?지금?수상하다,수상하다 싶었다.니 오늘 잘 걸렸다.( 소매를 걷으며)니 죽고 내 살자~! !( 김미향에게 달려들며)이 년아 이리 안 오나~ 김미향:무서운 줄 알고?나도 산전수전 다 겪고 여기 온 거라고,한번 해볼래? 참는데도 한계가 있는 거야!( 박말순에게 달려든다) 박말순 김미향이 슬로우 모션으로 달려들고,주먹을 서로의 얼굴에 날리는 순간 노민철의 얼굴에 맞는다. 노민철:으어어억,그만!그만들 하라고!매일 만나면 티격태격 이야,그만들 좀 해. 박말순:가시나,니는 운 좋은 줄 알아라. 김미향:누가 할 소린데! 노민철:그만 안해! 박말순:( 김미향에게 속삭이며)아이고야,영감탱이 화내니까 무섭네. 김미향:저런 모습이 있었어요? 박말순:내가 저런 와일드한 모습에 내가 반했다 아이가. 김미향:어머 뭐예요.오빠가 꽉 잡혀 사는 줄 알았더니,후훗. 박말순:작은 일은 잡혀주고,가끔 저렇게 귀엽게 소리 지른다.


희곡 노민철:( 두 여자가 자신 때문에 겁먹은 줄 알고 으쓱해 하면서)으흠,내가 좀 심했지?미안해. 박말순:아입니더,크크크. 김미향: ( 박말순의 사투리를 따라하며) 아이기는예, 지는 무서워 죽는지 알았습니더,크크크. 노민철:이거 무서워서 겁먹은 줄 알았더니,아니였어? 모두 크게 웃는다. 이장:아~아~안녕하십니까?이장입니다.다들 더운데 농사일은 잘 하고 계십니까? 이번에는 더 더워진다고 하니,건강에 유의하시고요.다름이 아니오라,더우니까 오늘 모일 예정이었던 마을 회의를 저녁으로 미루겠습니다.저녁 8시에 식사 다 하시고,마을 회관으로 모이십시오.다시 한 번 알리겠습니다.오늘 저녁(점점 음향 작아진다) 노민철:벌써 마을 회의 하는 날인가? 박말순:맨날 최씨 아재 돈자랑이나 듣고,나는 안 갈란다. 김미향:돈자랑해도 우리 마을에 좋은건 데요 뭐.돈 모으고 그러는 것 보다야 쾌척하는 모습이 시원시원해 보이잖아요? 박말순:쾌척?돈지랄이지 돈지랄.농촌에서 돈 쓸 곳이 없으니까 그러는 거지 뭐. 노민철:흐음!여보,( 조곤조곤하게)돈지랄이 뭐예요.그런 말은 좋지 않아요. 박말순:서방님,죄송하옵니다. 김미향:저는 이만 가볼래요. 박말순:그래,잘 가그라.


희곡 노민철:김마담은 오늘 얼굴 보러 온 거였어?잘 들어가. 김미향:아!내 정신봐.사실은 저번에 막걸 리가 너무 맛있어서 말해 주는 건데요 박말순:응?뭔데? 김미향:그때 언니가 영어가 이제 제2 모국어가 된다고 했잖아요.그 말이 사실이래요. 박말순:진짜? 김미향:거기다가 초등학교 내신까지 대학 입시며,취업이며 다 반영한다고 확실해 졌데요. 노민철:김마담,그 말이 사실이야? 김미향:네,그래서 저도 우리 연지 읍내에 있는 학원에 등록하고 왔어요.우리 마을이 너무 시골이라서 버스까지 어휴,정말 돈이 만만치 않겠더라구요. 박말순:학원비가 얼만데?버스비까지 하면 많이 비싸나? 김미향:영어,수학,국어은 기본이고 그 외 과목까지 전과목해서 ( 박말순의 귀에 대고 작게 말한다) 박말순:세상에나 그게 한 달 회비야?설마? 김미향:네,그래서 저도 커피 값 올리려고요.에휴. 박말순:세상에나,말세다.말세. 김미향:어쩌겠어요,전 한 잔이라도 더 팔러 가요. 김미향 퇴장. 노민철이 어깨가 축 처진 박말순의 손을 잡는다.


희곡 암전. 조명 들어온다. 마을 회관 안 이장:자자,여러분.다들 모이셨습니까?날씨가 너무 더워서 밤늦게 모이자고 한 것에 대해 양해바랍니다. 최만복:됐소,집에 가서 드라마 봐야 하니까 회의나 빨리 합시다. 이장: 특별한 것은 없고요. 3번 전봇대에 전깃줄 잘라간 사람 누굽니까? 자수합시다. 모두들 웅성댄다. 안순경 등장. 안순경:늦어서 미안합니다.아직 회의 안 끝났지요?왜 이리 시끄러워요? 이장:자,자 조용히 하세요.아 안순경님 안녕하십니까?지각하셨네요?하하. 안순경:죄송합니다.여러분. 이장:개인적 이득 챙기자고 그런 짓 할 사람 우리 마을에는 없을 것이 라고 생각하고 넘어가겠습니다.마을에 특별한 수익이 없어서 전깃줄 잘린 거에 대한 돈은 이번에는 김씨댁이 내는 차례입니다. 김씨댁:뭐요?나는 자르지도 않았는데,돈을 왜 내?배째요,배째. 안순경:김씨댁,마을 사람들이 다 돌아가면서 하는 것 인데 왜 그래요.그냥 내세요. 시간 끌지 말고,어차피 낼 수밖에 없잖아요. 최만복:김씨댁,내가 내줄께요.이장님 그냥 전깃줄 그거 얼마 한다고 이제부터 제가 전깃줄에 대한 자금을 내겠습니다.


희곡 이장:(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우리 마을에서 최 선생이 없었으면 어쩔 뻔 했어요. 고마워요.여러분 박수 한 번 줍시다. 최만복:( 일어서서 목례한다)아,제가 건의할 것이 있습니다.해도 괜찮겠습니까? 이장:네,말씀하세요. 최만복:으흠,다름이 아니고,이제 우리 마을도 세계화 시대에 발 맞춰서 영어를 쓰는 것이 어떤가 싶어서요. 김미향:영어요? 최만복:예수리에서는 이미 영어를 생활화해서 아이들의 교육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데 우리 마을은 학원도 너무 멀고,학원에 보낼 형편이 안 되는 집들도 있으니까 예수리처럼 하는 것 어떻습니까? 박말순:영어를 일상생활에서도 쓰자 이 말이네예? 최만복:예,그렇죠.생활에서 영어를 써야 느는 것 아니겠습니까?우리 아이들이 어디 가서 무시당한다면 안 되죠! 박말순:그거 괜찮은 생각이네예,우리 부부는 찬성 입니더! 김미향:저도 괜찮은 것 같아요. 안순경:영어로만 대화가 가능하다고 봅니까?에이,나는 좀 불가능 하다고 보지만, 마을사람들이 그렇게 하자면 하는 거 지 뭐.나도 찬성. 이장:그럼 모두들 동의하는 것으로 알고,내일부터 영어로 말하기입니다!오케이? 암전. 조명이 들어온다.


희곡 노민철 집. 박말순:허니~웨어 아 유? 노민철:여기!아,히어,히어,

박말순:아무도 없는데 영어 좀 잠시 쓰지 말자. 노민철:그래그래.이건 뭐 벙어리가 된 기분이야. 박말순:수호가 영어로 씨부리는데 뭐라고 하는지 알아 들으야지. 노민철:내 말이.우리 수호가 다른 어르신들에게 미스터 최,미스터 누구 이러면서 이름부르면 어찌나 민망한지 말야. 박말순:지도 어찌나 민망한지 모르겠습니더.그래도 어쩌겠으요,그게 서양 말 본새라는 데,그렇게 하기로 했으니까 그래야지 뭐.그래도 동방예의지국인 한국에서는 영 걸리긴 하네. 노민철:내말이 그 말이야. 최만복 등장 최만복:미세스 박,히어? 박말순:예스. 최만복:오케이. 박말순:아제요.우리끼리 있을 때는 고마 우리말 합시다. 최만복:그래,그래,마산댁.내가 죽겄네.


희곡 박말순:와예? 노민철:형님,무슨 일 있으십니까? 최만복:강우 그 조그마한 놈이 이 아비 이름을 막 부르는데 내가 화가 치밀어서 말이야. 박말순:아제도요?우리 아도 반말이나 찍찍 해사코.내가 천불이 나서 죽겄어요. 최만복:내말이 그 말일세. 김미향 등장. 김미향:미세스 박!미세스 박! 박말순:됐다!한국말해라. 김미향:언니집 오면 살만하네요.영어 쓴다고 하니까 죽겠어요.짧은 지식으로 영어 쓰려니 이거 환장하겠어요. 박말순:우리도 그 얘기 하고 있었다. 최만복:연지도 김마담한테 이름 부르고 그러나? 김미향:이름이면 다행이죠.이건 명령조로 말하는데,맹랑한 계집애 같으니라고. 자기세상 만났어요. 노민철:이게 좋은 것인지,나쁜 것인지. 박말순:좋은거지!이렇게 해서라도 우리 수호 똑똑해 지야 할 끄 아이가.돈 없어서 변변한 학원도 못보내 주는데. 최만복:하이고,우리 강우 이제 과외 마칠 시간이네.나는 가봐야겠네.수고들 하게.


희곡 김미향:저도 우리 연지 학원 마칠 시간이니까 가볼께요. 노민철:그래요,조심히들 가세요. 박말순:누군 좋겠네,애들 학원도 보내고. 노민철: . . . . . . . . . 박말순:( 노민철을 한 번 보고)뭐 그리 풀죽어 있노!돈이나 벌자,가자! 박말순 퇴장. 노민철:여보,미안해.나도 우리 수호 읍내에 있는 학원도 보내주고 싶고,능력만 더 된다면 비싼 개인과외도 시켜주고 싶지.하지만,고작 쌀팔고 밭농사해서 많은 돈을 벌기에는 힘이 드네.미안해.여보.미안해.수호야. 암전. 조명 들어온다. 마을 입구 최만복이 평상에 앉아있다. 김미향 커피를 들고 등장한다. 김미향:( 풀죽은 목소리로)최사장님~ 최만복 종이를 보며 한숨을 쉬고 있다. 김미향:최사장님~뭐보세요? 최만복:우리 아들 성적표.에휴. 김미향:강우는 잘 나왔어요?과외까지 했잖아요.


희곡 최만복:나 닮았으면 똑똑 할 텐데,이 성적표는 아니야!뭔가 착오가 있어.암,암. 김미향:제 말이요.읍내에 있는 학원까지 보냈는데 이번 성적은 최악이라고요, 최악! 최만복:연지도 망했어? 김미향:네,그래서 속상해 죽겠어요.학원을 바꿀까 봐요. 최만복:그런다고 되겠어? 김미향:왜요? 최만복:이번에 은실이가 1등 했잖아. 김미향:진짜요?은실이라면 그 학교 소사 손녀?걔가 어떻게 1등을 해요?학원도 안다니고,과외도 안한다고 들었는데. 최만복: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지. 김미향:이상하다고요? 최만복:이상하지,우리는 이렇게 과외니,학원이니 보내도.어떻게 아무것도 안다니고 무식한 소사 밑에 있는 손녀딸이 1등을 하냐고. 김미향:듣고 보니 그러네요. 최만복:혹시 말이야,에이.아니다.설마 그 영감이 그러셨을라고. 김미향:왜요?뭔가 수상쩍은게 있어요? 최만복:사실 학교에서 제일 늦게 나가는 사람이 누구야?그 영감쟁이잖아. 김미향:그렇죠.소사잖아요.


희곡 최만복:제일 늦게 나오니까,학교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아무도 모르잖아. 김미향:그렇다면? 최만복:이제야 말이 통하네,그래!시험지를 빼돌린거야! 김미향:시험지? 박말순 등장. 박말순:시험지?무슨 시험지 얘긴교? 김미향:그게,혹시 소사할아버지가? 최만복: ( 황급히 김미향의 말을 가로챈다)아무것도 아냐.마산댁은 웬일이야? 박말순:밭메다가 더워서 좀 쉴 라고 왔지예. 김미향:언니도 커피 좀 드세요.넉넉히 싸왔어요. 박말순:이거 돈 받는거 아니재? 김미향:공짜에요.드세요. 박말순:히히,잘 마실게.김마담. 최만복:그나저나,수호는 성적 어떻게 나왔어? 박말순:에휴,말도 마세요. 김미향:수호도 못 나왔어요? 박말순:응,부모 잘 못 만난 탓이지 뭐.김마담이야 딸내미 학원 보내,아제야 비싼 과외 시켜 우리 수호만 아무것도 못하고 독학이죠 뭐.이런 시대에


희곡 김미향:언니 그런 말 하지 마요.최사장님이랑 저랑 그 얘기 때문에 속상해 죽겠어요. 박말순:왜?연지는 성적 잘 안 나왔어? 김미향:연지 얘기는 하지도 마요. 최만복:이번에 시험이 영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아? 박말순:왜요? 최만복:은실이가 1등을 했다네? 박말순:은실이가요?아이고,고녀석 똘똘하게 생겼드만,잘됐네요. 최만복:학원도 안다니고,과외도 안한 애가? 박말순:그게 어때서요?그러면 우리 수호가 1등해도 뒤에서 말들 나오면 알아서 해요. 최만복:그거랑 다르지. 박말순:뭐가 달라요?지금 가난하다고 무시했잖아요. 김미향:(박말순이 흥분한 것을 보고 )언니 너무 흥분하지 마요.그런 뜻으로 얘기 한 거 아니에요.( 박말순에게 귓속말을 한다) 박말순:아!그런 거야?그거 진짜? 김미향,최만복:쉿!소문나면 큰일이라고요! 암전.


희곡 교무실 앞. 최만복 등장. 최만복:왜 이리 캄캄해.어디가 어딘지 알아야지.이럴 줄 알았으면 자주자주 와 보는 거였는데. 최만복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긴다. 최만복:어딨는거야,시험지는. 계속해서 교무실 책상을 뒤지며 시험지를 찾는다. 박말순과 노민철 등장. 박말순:수호아빠!빨리빨리.빨리 찾고 가야지. 노민철:어두워서 보여야지. 박말순:여기가 교무실이네,들어가보자. 최만복:마산댁?이런!( 책상밑으로 숨는다) 권명 등장. 후레시를 노민철 부부에게 비추면서 권 명:거 누구요? 노민철:헉!( 박말순 뒤에 숨는다) 박말순:. . . . . . . . 권 명:거 누구요?사람이요 귀신이요?


희곡 박말순:귀, , , , , 귀신입니더. 권 명:귀신이라고?하이고,뭐가 그리 급해서 학교까지 왔을꼬,집에서 기다려도 될 것인데.저승사자님 저는 아직 우리 손녀딸 더 자라는 거 보고 죽어야 합니다. 조금만 더 있다가 절 데려가세요.( 벌벌 떤다) 박말순:아제요,접니더.마산댁. 권 명:마산댁? 마산댁이 이 시간에 웬일이야? ( 박말순 뒤에 있는 노민철을 발견하고)마산댁 뒤에. . . . . 귀. . . . 귀, . . . . 신. . . . . . . . 노민철이 박말순 뒤에서 나온다. 노민철:저예요. 권 명:하이고,놀래라.이 사람들이 늦은 시각에 귀신놀이라도 하러 학교 왔어?십년 감수 했네. 박말순:그게 아니고요. 권 명:그러면 여기에 늦은 시간에 무슨 볼 일이고? 틈을 타서 최만복이 조용히 도망친다. 박말순: . . . . . . . . . 노민철:아. . 그게요. . . 그게. . . . 박말순:아!수호가 학교에 뭐 잊아묵고 왔다고 해서요. 권 명:아,수호가? 박말순:네,네.우리 아가 맨날 잊어버리고 다녀서요.죄송합니더.저희는 이만 가 볼께예.


희곡 노민철과 박말순 황급히 뛰어나간다. 권 명:마산댁! 노민철과 박말순 갑자기 멈춘다. 권 명:마산댁,거기는 문이 잠겼네,중앙 현관으로 나가야지.허허허. 박말순:하하,고맙십니더.저희도 무서버 가지고 그랬는가 봐예.수고하세예. 박말순과 노민철 퇴장. 최만복 무대 왼쪽이나 오른 쪽 편에 서있다. 최만복:하이고,놀래라.아니 마산댁 부부는 왜 이 늦은 시간에,혹시?이런 내가 말해주는게 아녔어. 김미향 엉덩이를 최만복 쪽으로 하고 주위를 살피며 등장. 최만복:김마담~김마담~ 김미향:으악! 최만복:나야 나.최사장. 김미향:( 당황해 하면서)어머 사장님,이 야심한 시간에 학교 운동장에서 뭐하세요? 최만복:( 웃으면서)나야 운동나왔지.그러는 김마담은 뭐하러 나왔어? 옷도 검은색으로 다 빼입고?운동하러 나온 것 같지는 않은데? 김미향:네?아,그냥 집에 가는 길에 잠시.아,어지러워라.전 집에 가서 좀 쉬어야 겠어요. 최사장님 내일 뵈요.저 먼저 가요.


희곡 최만복:이거이거,쉽지 않겠는걸? 암전. 조명이 들어온다. 붉거나 푸른 계열의 조명. 노민철,박말순,김미향,최만복이 각자의 손에 시험지를 들고있다. 최만복:내가 시험지 한 개당 40만원씩 줄게.나한테 넘겨 응? 박말순:40만원요?400만원 드릴 테니까 시험지 달라고 하면 줄 껍니꺼? 김미향:언니가 400만원이 어딨어요?그 돈 있었으면 진작에 수호 학원 보냈겠지! 박말순:예민한건 알겠는데,너무한그 아니가? 김미향:자자,제 말 좀 들어봐요.제가 평생 무료 커피시음권 드릴 테니까 그 시험지 넘기세요.우리 다방 커피 맛있는거 알잖아요?웬만한 도시에서 먹는 별벌레다방 커피랑 맛이 똑같다니까요. 박말순:하!웃기고 있네,겨우 커피 나부랭이로?그렇게 치면 나는 평생 막걸리 줄테니까 시험지 내놓을래?니 커피 팔면서 막걸리까지 팔면 수입이 배로 늘지 않긋나?그걸로 또 학원 보내라. 최만복:50만원!더 이상은 안 되! 박말순:400만원 밑으로는 안 됩니더.우리는 2과목이나 가지고 있으니까 현금으로 800가지고 오소. 최만복:마산댁,미션 임파서블이잖아!


희곡 박말순:이제야 이해 하십니꺼?지는 그럴 생각이 눈꼽만치도 없었습니더. 노민철:그냥,이렇게 하나씩 가지고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김미향:이봐,지금 장난쳐?너희는 부부니까 2과목이나 가져가잖아!서방 없어서 서러워서 살겠나 원. 최만복:그러게,마누라 죽은게 이렇게 한이 될 수가 없네 그래! 김미향:그러게요,정말 너무들 하네요! 박말순:뭐라꼬?뭐가 너무해? 노민철:그냥 이렇게 가져가요,마을 사람들끼리 의만 상하고 이게 뭐예요. 김미향:그럼 오빠꺼 나한테 넘겨요.그러고 집에 가시면 저랑은 의 안 상하는 거예요. 박말순:야이,불여시야.니랑 의 안 상할라고 아들 인생 말아묵나?하여튼 생각하는 거 하고는. . . . 쯧쯔. . . . . 최만복:우리가 이래봤자,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은 서로가 알고 있잖아. 협상하고 이만 집에들 가자고 응? 박말순:나한테 협상은 모든 시험지를 나에게 주는 거에요?불여시랑 아제는 돈도 있으니까 과외고 학원이고 보낼 수 있잖아요! 우리는 찢어지게 가난해서 이렇게라도 살아야 해요. 김미향:돈?돈은 최사장이 많지.나 돈 없어요,학원?그거 대출받아서 보내는 거에요.그렇게 보내면 뭐해요?기집애 머리가 나뻐서 도루묵인데. 최만복:돈만 많으면 뭘 해?우리 강우도 돌대가리라서 걱정인데,난 우리 강우 송울대 못들어가면 우리 마누라가 귀신되서 쫓아다닐지도 몰라.자네들은 내가 귀신 때문에 정신병원 갔으면 좋겠어?응?그러니까 나한테 넘겨.


희곡 김미향:죽어도 못줘요! 박말순:저희도 마찬가지에요! 이 때 안순경 등장. 안순경:소사 할아버지가 교무실에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신고를 해서 왔습니다. 누구 계십니까? 모두:. . . . . . . 조명이 더 밝아진다. 안순경:여기서 다들 뭐하십니까? 최만복:그게. . 그게. . . 김미향:하하,안순경님. 박말순:오래 간만이네예.이런데서 다 뵙고. 안순경:네네,오랜만입니다.그런데 네 분이서 불 꺼진 교무실에는 어쩐 일로?( 4 명의 손에 든 흰 종이 뭉치를 발견)그 다들 손에 든 것은 뭡니까? 노민철:아,아무것도 아닙니다.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박말순:예,안녕히들 계시소. 안순경:거기 있으세요.손에 든 거 뭐예요? 김미향:아무것도 아닌데요? 최만복:더워서 부채야 부채.


희곡 안순경:그게 뭐냐에 따라서 여러분들은 도둑이 될 수도 있고 그냥 집에 가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최만복:시험지!시험지야. 김미향:최사장님! 최만복:구속이라잖아,감옥은 무서운 곳이라고 김마담. 박말순:진짜로 소문대로 겁쟁이 네예,죽은 마누라 때문에 이 시골에 들어온 것도 다 사실인가보네예. 최만복:뭐?겁쟁이?마산댁!말을 좀 삼가지!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박말순:뭐라고예? 김미향:맞는 말이네요! 박말순:지금 말 다했습니꺼?너무한거 아인교! 안순경:다들 어서 그 시험지 주세요.안 그러면 일이 더 커져서 진짜로 감옥 갑니다. 제가 여러분들이 이럴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아니까 이번만큼은 넘어가겠습니다. 같은 부모 입장에서 충분히 이럴 수 있습니다.감옥에 잡아넣지는 않을 테니 어서 시험지를 주십시오.증거물 확보로 제가 가져가야겠습니다. 최만복:진짜로 감옥 안가도 되는거죠? 박말순:진짜 주기 싫은데,지는 감옥가도 이건 우리 수호 줄랍니더. 김미향:바보 아냐?댁이 감옥가면 수호인생은 끝이라고! 박말순:그리 되는기가?


희곡 노민철:( 모두의 시험지를 걷어서 안순경에게 건네준다)여기 있습니다.오늘 밤 일은 비밀로 해주세요. 안순경:알겠습니다.훈방조치로 넘어 갈 테니까 다음번에는 이런 짓 하지 마십시오. 부모가 모범을 보여야지 않겠습니까? 그깟 성적이 뭐가 중요합니까.사람이 사람다워야죠.안 그렇습니까? 저는 여러분들에게 사람이 될 기회를 한 번 더 드리겠습니다.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박말순 주저 앉는다. 모두들 허탈해 한다. 암전. 노민철 집. 노민철:수호는 공부하고 있어? 박말순:예,지 방에서 수학문제 풀고 있던데예. 노민철:그래,공부는 지 힘으로 해야 하는 기라. 박말순:공부 열심히 하는 모습 보니까,좋네예.기특한 놈.홍시나 간식으로 갔다주고 올께예. 김미향과 최만복 등장. 김미향:언니,오빠. 최만복:이보게,이보게. 노민철:좋은 소식이라도 있습니까? 최만복:좋은 소식은 무슨!


희곡 김미향:완전 충격적인 소식이죠!세상에나,이번에 1등이! 최만복:이번에 1등이! 박말순:( 황급히 뛰어나오며)누군데예? 최만복 김미향:안순경 아들! 박말순:뭐라고예? 최만복:안순경 아들이 말이나 되?그 무식하기로 소문난 그 아들이? 김미향:그 때,알고 봤더니 할아버지는 시끄럽다고 경찰서에 신고도 안했데요. 노민철:그러면,안순경님도. 최만복:그래,그 늙은 너구리 같은 놈이 정의로운 척 하면서,우리의 시험지를 다 빼앗아 간거라고! 박말순:뭐 이런 경우가. . . . 김미향:그래서 이렇게 달려왔죠!너무 어이없지 않아요? 최만복:어쩐지 도둑질을 훈방 시킨다는게 앞뒤가 안 맞았어. 김미향:제일 먼저 무서워서 시험지 준게 누군데요! 최만복:흐음!여튼!우린 속았다고.역시 우리가 뭉쳤어야 했어. 박말순:그러면. . . . ? 김미향:우리 다시 가요.


희곡 노민철:다시? 최만복:우리 함께 가서 훔치자고. 박말순:동맹을 맺자고예? 김미향:그거죠,다시 안순경이 와도 뺏기지 않도록 힘을 합치자고요. 최만복 :이 모든 일은 . . . 알지? 모두:비 콰이어트! 암전.


희곡

싱글은 아름답다 싱글은 아름답다 등장인물 박사강( 女,30대 중반,고등학교 교사) 이소영( 女,30대 중반,비디오 대여점 주인) 카페주인 ( —,20대 후반,카페주인) 원 진( —,30대 후반,드라마작가 지망생) 원진아내 ( 女,30대 후반,가정주부)

무대설명 무대는 일반 카페처럼 꾸미면 된다.무대 왼쪽과 오른쪽에 테이블이 하나씩 있고, 오른쪽 테이블 옆쪽에 카운터가 있다.


희곡 1장 무대 밝아지면 각 테이블에 사강과 소영이 앉아있고,카운터에 카페주인이 서있다. 사강,검정색 뿔테 안경을 쓰고 목까지 단추를 채운 흰 남방을 입고 있다.딱 붙는 스커트의 트임 사이로 늘씬한 다리를 드러내며 시험지 채점을 한다.소영,자다가 일어난 듯 부스스한 머리에 노란 추리닝을 입고 있다.만화책을 보면서 연신 낄낄거린다.카운터에 서서 커피 잔을 닦고 있던 카페주인,관객들 앞에 다가서면 무대 어두워지고 카페주인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된다. 카페주인 ( 손을 비비적거리며)자,오늘은 커플이 몇 분이나 오셨을까.( 관객석에 앉아있는 커플들의 수를 센다. ) 오늘은 커플들이 많이 오셨네. ( 무대 위를 어슬렁거리며)여러분들은 이 카페에 오실 때 손을 꼭 붙잡으면서 알콩달콩 사랑스런 이야기를 나누셨겠죠.하지만 여기!혼자여서 외로운 솔로들이 있습니다. 사강과 소영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켜진다.카페주인,사강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다가간다. 카페주인 여기 이 여성이 보이십니까?쭉 빠진 다리에 ( 이 때 사강,무심한척 시험지 채점을 하면서 한쪽 다리를 쓱 내민다)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가 참 매력적인 여성이군요.( 사강,에로틱하게 머리를 한번 쓸어 올린다)하지만 이 여성은 삼십대 중반에 시집도 못 간 노처녀라는 사실~ 박사강 (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아니,이것 보세요.노처녀라뇨.( 무대 앞으로 걸어가며)요즘 같은 시대에 저 정도면 이제 막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여성이라고 해야죠.하긴,어쩌면 당신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최근에 오랜만에 고향엘 내려갔더니 글쎄,부모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시더군요.결국 제 결혼 문제를 들먹이시며 다 큰 딸이 시집도 못가고 혼자 사는 꼴을 보자니 밤에 두 다리를 뻗고 잘 수가 없다고 말이죠.전 누누이 말씀 드리지만 시집을 못 간 게 아니라 안 간 거라구요.아무튼 부모님 성화에 못 이겨 선을 보러 나갔습니다.그런데 머리가 훌러덩 벗겨진 남자가 떡하니 앉아 있는 게 아니겠어요?그리고 그 치는 날 보며 ' 나이는 어떻게 되느냐,결혼하면 애는 얼마나 낳을 생각이냐,학교는 계속 다닐 거냐. '하면서 꼬치꼬치 캐묻는 거예요.( 테이블로 가서 시험지를 들고 와 보이며) 마치 이렇게 채점을 하듯이 말이죠.참,어이가 없어서.그래도 뭐,전 최소한 마이너스는 아니에요.저기 저 부스스한 머리에 노란색 추리닝 입은 애 보이시죠? 마이너스라면 쟤가 진정한 마이너스죠.


희곡 소영,사강의 말에 신경이 쓰인 듯 머리 정돈을 하다가 스포트라이트 집중 되자 당황한 듯,잠시 눈치를 살피다가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 소 영 마이너스라니? 아니,내가 왜 마이너스라는 거야.그리고 이 옷이 어쨌다는 거야.( 사강의 스커트를 가리키며)그런 꽉 끼는 스커트보다 ( 자신의 바지를 손가락으로 잡고 쭉 잡아당기며)스판기 100%를 자랑하는 이 추리닝이 활동하기에 도 훨씬 편하다구!뭐,자유로운 영혼이라고나 할까? 박 사 강 자유로운 영혼? 웃긴다,얘.그 노란 추리닝이 자유로운 영혼의 상징이라도 되니?뭐야 그게.그래서 네가 마이너스라는 거야.여자라면 이까짓 것 쯤 참아야지. 이 소 영 참는다고?흥,불편하긴 한가 보구나? 사강과 소영,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티격태격 다툰다. 카페주인 자자,다들 진정하시고.( 소영의 옆에 서며)이 여성은 일명 박순희들이 ( 호들갑을 떨며)오빠~오빠~하며 들고 다닌다는 야광봉 같은 추리닝을 입고서도 자신이 멀쩡하다고 말하고 있군요.그도 그럴 것이 저희 가게에 온 첫 날부터 이랬거든요.여기 온지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원체 다른 옷을 입은걸 본 적이 없어요. 카페주인,무대 중앙으로 간다. 카페주인 아!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 난 저 여성들이 대체 어떤 사이냐구요?보기엔 철천지원수 같아 보여도 사실,알고 보면 저 둘은 절친입니다.절.친.( 관객 하나를 콕 찝어서)에이~거기.절친이 뭔지도 몰라?베스트 프렌드말야.베스트 프렌드. ( 헛기침을 하며)흠흠.절친한 친구사이가 어쩌다 저렇게 됐냐구요? 카페주인,손가락으로 딱.하는 소리를 내면 테이프 되감는 효과음과 함께 사강과 소영,마치 되감기 하듯 과장스럽게 뒷걸음질 치며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가 다시 사이좋게 한 테이블에 가 앉는다.카페주인 역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카운터로 돌아가 커피 잔을 닦는다. 박 사 강 한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힘드냐? 이 소 영 그러게.


희곡 이 소 영 참,요즘 신학기라 힘들지. 박 사 강 응.애들 얼굴도 익혀야 하고 그러니까. 이 소 영 너도 참 피곤하겠다.매년마다 애들이 바뀌니까.그래도 지겹지는 않겠다. 얘. 박 사 강 지겹지는 않다니?뭐가? 이 소 영 매년 마다 파릇파릇한 애들이 오잖아?( 음흉하게)프레쉬한 남자애들 말이야.얘는~ 박사강 ( 당황한 듯)어머,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이 소 영 기집애,순진한 척 하기는.됐어~ 박 사 강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나서)여하튼 요즘 애들은 말이야.갈수록 참 가관이야,수업시간에 문자 보내는 건 예사고… 이 소 영 요즘 애들이 다 그렇지 뭐. 박 사 강 글쎄,오늘 아침에는 복도를 지나가는데 건너편에서 남자애랑 여자애가 손을 꼭 붙잡고 오는 거야.그러고는 나한테 '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는데 무슨 어머니한테 인사하는 부부같이……. 이 소 영 요즘 애들은 애정 표현에 익숙하니까 어른들 눈치 같은 건 안보잖아. 박 사 강 그래도 그렇지.신성한 학교에서 말이야. 이 소 영 그나저나 너도 고생이구나.선생님이라고 하면 마냥 편한 줄만 알았는데. 박 사 강 어디 하루 이틀이니.그런데 요즘 너희 가게는 어때? 이 소 영 뭐,똑같지.그런데 요즘 보면 말이야. 박 사 강 응. 이 소 영 사람들이 잘나가는 최신 영화만 빌려가는 것 같아.예전에는 고전영화도 꾸준히 빌려가곤 했는데 이제 다들 새 거만 찾아.새 거만.그래서 고전영화 코너를 구석으로 짱 박아놨어.사람들이 고전영화의 참맛을 모르니…… 뭐든지 묵은 게 제일인데. 박 사 강 우리처럼 말이니? 이 소 영 뭐,장맛도 묵으면 묵을수록 좋다고 하잖아?그런데 며칠 전에는 글쎄,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애가 카운터에 최신영화를 턱하니 내려놓고는 날 뚫어지게 쳐다보는 거야. 박 사 강 어머,왜?너한테 관심 있대? 이 소 영 아니,아니.그런 게 아니라 이리저리 훑어보는 눈이 마치 날 홀라당 벗겨놓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코드로 찍으면서 ' 여기도 고물,저기도 고물. ' 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 박 사 강 에이 설마.


희곡 이 소 영 아니야,진짜라니까? 사강과 소영,씁쓸한 듯 말없이 커피를 마신다.카페주인,커피 한 잔을 들고 무대 중앙으로 나온다. 카페주인 (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이 커피 한번 대개 씁쓸하네요.마치 두 노처녀의 대화처럼 말입니다. 카페주인,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 무대 암전된다.

2장 무대 밝아지면 사강의 교실.사강,앞에서 책을 들고 열심히 설명하고 있고 책상( 테이블) 에 소영이 앉아있다.소영,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사강에게 들킨다. 박사강 ( 소영에게 다가가며)이 신성한 수업시간에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게 뭡니까?이리 주세요. 소영,휴대폰을 들고 머뭇거린다. 박 사 강 이리 달라니까요? 소영,마지못해 사강에게 휴대폰을 건넨다.마침 수업 마치는 종소리 들린다.소영, 휴대폰에 미련이 남는 듯 자꾸 뒤를 돌아보며 무대 뒤로 나간다. 박 사 강 ( 소영이 나간 쪽을 보며)아니,책을 들고 있어도 모자랄 판에 어디 휴대폰을 들고 있대?참나,내가 학교 다닐 땐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야. 카페주인 ( 손톱을 손질하며)그렇겠지.그땐 휴대폰이 없었을 때니까. 사강,소영이 앉아있던 책상에 가 앉는다.책상 모퉁이에 휴대폰을 놔두고 들고 있던 책을 펼쳐 보지만 앞에 있는 휴대폰이 신경 쓰이는 듯,계속 힐끔거린다.사강,주변 눈치를 살피더니 슬쩍 휴대폰을 집어 들고서는 조심스럽게 폴더를 연다.문자 내용을 몰래 확인하려는 듯,이어서 문자내용을 그대로 읽는다.


희곡 박사강 ( 애교 있는 말투로)자기는 뭐해염?지대 지루해염. 박사강,고개를 갸우뚱하고는 다른 문자를 읽는다. 박 사 강 우리 담탱이도 열라 안습이예염.이따가 생파나 가염.뭐야,이거.안습? 생파? 카페주인,사강을 보며 배를 잡고 웃는다.사강,계속해서 휴대폰을 보고 있는데 인기척이 들린다.사강,놀라서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인기척이 사라지자 다시 휴대폰을 꺼낸다. 박 사 강 생파가 뭐지? 사강,휴대폰 액정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무대 왼쪽에서 아이들 웃음소리 들린다. 박사강 ( 소리가 나는 쪽을 보며 큰소리로)얘,생파가 뭔지 아니? 사강,아이들의 대답이 없자 결국 무대 왼편으로 뛰어 나가며 물어 본다.카페주인, 무대 중앙으로 온다. 카페주인 보시다시피 이 여성의 낙은 학생들의 휴대폰이나 빼앗아 몰래 문자 내용이나 훔쳐보는 것이었습니다.남의 사생활이나 들여다보며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라고 할까요?( 손을 비비적 거리며)자,그럼.우리도 다른 노처녀의 하루를 몰래 들여다볼까요? 카페주인,무대 구석으로 가면 노래 <킹조의 쿵푸>와 함께 소영이 쌍절곤을 휘두르며 등장한다. 이 소 영 아뵤오~


희곡 소영,관객들을 향해 위협적으로 쌍절곤을 휘두른다.관객들 움찔하면 보란 듯이 쌍절곤을 더욱 더 현란하게 휘두른다.그리고 기술을 가르쳐 주겠다며 관객 하나를 무대 위로 데리고 나온다.잘못 맞으면 꽤나 아플 것 같은 기술들을 보여주며 따라 하라고 관객에게 쌍절곤을 건넨다.( 이 때 쌍절곤은 따로 준비해 놓은 가짜 쌍절곤으로 할 것)관객이 가짜 쌍절곤에 안심하고 겁 없이 휘두르면 소영,쌍절곤을 빼앗아서 무릎으로 두 동강 내며 어이없어 한다.소영,관객을 다시 자리에 보내고 무대 중앙에 선다. 이 소 영 키 174c m.몸무게 65kg.작은 체구에 마치 조각해 놓은 듯 한 탄탄한 복근!흘러넘치는 카리스마!강렬한 눈빛!정말 정신이 아찔할 정도예요.아~이게 누구냐구요?( 이소룡 포즈를 취하며)아뵤~이소룡이잖아요,이소룡.맹룡과강에서 척 노리스도, 사망유희에서 카림 압둘 자바도, 용쟁호투에서 홍금보도 나가떨어지게 만든 고양이 같은 민첩한 발동작의 소유자요. 소영,심취한 듯 자신의 두 손을 맞잡는다. 이 소 영 그를 처음 만난 건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어요.그날은 학교에서 짝꿍한테 얻어맞고 울면서 집으로 돌아오던,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어느 날이었어요.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와 보니 티비 속에서 이소룡 오빠가 자기보다 덩치가 두 배나 큰 악의 무리를 쓰러뜨리고 환한 미소를 짓는 게 아니겠어요?저는 그 날 빛을 보았답니다.아아~그날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어요. 소영,이소룡 예찬에 한창 빠져있는 데 카페주인,무대 중앙으로 나온다.심취해 있는 소영의 눈앞에 손을 휘휘 저어보지만 소영은 이미 심취해 있다.카페주인, 소영을 보며 안됐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으며 관객들 앞에 선다. 카페주인 이 여성은 이소룡에 빠져서 쌍절곤이나 휘두르며 이렇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그리고 밤만 되면 저희 카페에 와서 수다나 떨고 말이죠.그렇게 하루는 가고 나이는 한 살,두 살 먹어가고.이렇게 무료하기 짝이 없는 여성들 앞에 드디어 문제의 남자가 등장하게 됩니다. 카페주인,자기 세계에 빠져있는 소영을 질질 끌고 가다시피 하며 무대 밖으로 나간다.무대 암전.


희곡 3장 카페주인,카운터에 서서 찻잔을 닦고 있고 왼쪽 테이블에 소영과 사강이 앉아서 수다를 떨고 있다.그 때 무대 오른편에서 원진이 등장한다.한 손에는 노트북을 들고서 오른쪽 테이블에 가 앉는다.사강과 소영 그를 유심히 본다. 이 소 영 어머,얘.저기 저 남자 잘생겼다.그치? 박 사 강 응,뭐……. 이 소 영 처음 보는 얼굴인데?우리 동네 사람인가?우리 동네 사람들은 내가 다 아는데……. 박 사 강 네가 통장이라도 되니.동네 사람들을 다 알아보게. 이 소 영 뭐 그런가?근데,저 남자 뭘 대개 열심히 보네. 박 사 강 응,그러네.회사원인가? 이 소 영 그런 것 같진 않은데.한번 가서 말이나 걸어볼까? 박 사 강 얘,무슨 소리니.아서라,처음 본 사람한테. 이 소 영 야,우리가 무슨 사춘기 소녀도 아니고.그냥 가서 ' 뭐하시는 분이세요? 혹시 시간 되시면 차나 한잔?'하는 거지. 박사강 ( 싫지는 않은 듯)에이 몰라~너 알아서 해. 소영,옆 테이블에 앉아 컴퓨터 모니터를 뚫어지게 보는 원진에게 다가간다.소영, 원진과 몇 마디 나누더니 함께 사강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온다. 이소영 ( 사강에게)이분은 우리 동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신 분인데 이름이 원진씨래,( 원진에게)이 친구 이름은 박사강이구요.저희는 중학교 동창이에요. 원 진 네,처음 뵙겠습니다. 박사강 ( 수줍은 듯)안녕하세요? 이 소 영 자,자 다들 서서 이러지 말고 앉으시죠. 소영과 사강,원진이 테이블에 둘러앉는다. 이소영 원 진 박사강 원 진 이소영

그런데 저기서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계셨어요? 아,네.요즘 글을 쓰느라고.미리 썼던 걸 다시 보고 있었어요. 글이요? 네,작가거든요. 작가요?무슨 작가요?소설작가요?아니면 드라마 작가?


희곡 원 진 드라마 작가입니다. 박 사 강 정말요?혹시 저희가 알만한 드라마라도……. 원 진 음,남편의 유혹이라고……. 이 소 영 네?남편의 유혹요?그거 정말 재미있게 봤었는데?와~웬일이야.정말 대단하시네요. 원 진 하하.별거 아닙니다. 박 사 강 그럼 지금은 새 드라마 구상 중인가 봐요? 원 진 네,그렇습니다. 이 소 영 요즘은 어떤 드라마를 쓰고 계세요? 원 진 아,네.불륜을 소재로 한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박 사 강 불륜이요? 원 진 네.한 남자와 그 주변에 있는 세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박 사 강 두 명도 아니고 세 명이나요? 원 진 네,요즘은 막장 드라마가 대세잖아요. 박 사 강 그,그렇긴 하죠. …….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원 진 그런데 소영씨는 어떤 일을 하세요? 이 소 영 아,네.저는 저기 저 앞에서 비디오 가게를 운영하고 있어요. 원 진 비디오 가게요?저 영화 보는 거 정말 좋아하는데. 이 소 영 어머,그럼 자주 놀러오세요.저희 가게는 세 번 빌릴 때 마다 500원짜리 쿠폰도 주거든요.( 주머니를 뒤적거리며)말 나온 김에 쿠폰 하나 드릴까요? 원 진 아,아뇨. 이 소 영 그럼 뭐~( 쿠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 원 진 ( 사강을 보며)저기,저.사강씨라고 했죠? 박사강 ( 수줍은 듯)네. 원 진 사강씨는 어떤 일을 하고 계세죠? 박 사 강 네,저는 고등학교 선생님……. 원 진 ( 사강의 말 끝나기가 무섭게)아~어쩐지……. 박 사 강 네? 원 진 아,아뇨,한 눈에 봤을 때부터 딱 저희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생각나더라구요.얼굴에 이따만한 뿔테 안경을 끼고 머리는 이대팔로 쫙 갈라가지고 매일 아침마다 잔소리를 해대는데 어찌나 무섭던지 별명이 미친개였다니까요?


희곡 박사강 ( 당황해서)네? 원 진 아,아뇨.사강씨가 미친개라는 게 아니라……. 박 사 강 ……. 이 소 영 자,자.분위기가 왜 이렇죠~ 원 진 아,죄송해요.괜히 저 때문에. 이 소 영 아,아니에요.그렇지,강아? 박 사 강 으,응. 원 진 그럼 대신에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 드릴까요? 이 소 영 네.뭔데요? 원 진 혹시 벙어리가 슈퍼에 가서 칫솔을 달라고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세요? 이소영 ( 이 닦는 시늉을 한다)이렇게 하면 되죠. 원 진 그럼 장님이 슈퍼에 가서 지팡이를 달라고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이소영 ( 지팡이를 짚는 척 한다)이렇게 하면 되죠. 원 진 아하하하!아니죠.장님은 말할 수 있잖아요.그리고 슈퍼에서는 지팡이를 안 팔아요.아하하.( 소영의 흉내를 내며)지팡이 하나 주세요~이렇게?아하하하~ 원진,재미있다고 깔깔댄다.소영과 사강,뭐가 그리 좋은지 따라서 깔깔거리며 웃는다.카페주인,커피 잔을 닦다말고 세 사람을 어이없다는 듯 쳐다본다. 원 진 박사강 이소영 원 진

( 정신없이 웃다가 손목시계를 보고)아니,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 손목시계를 보며)어머,정말이네요. 그럼 이만 갈까요? 네,그럴까요?그럼 다음을 기약하죠.찻값은 제가 낼게요.

원진,오른쪽 카운터로 가서 지갑을 꺼내든다. 원

진 ( 카페 주인을 보며)얼마면 됩니까?얼마면 되겠어요?

사강과 소영,원진을 보며 멋있다는 듯 서로 손을 마주 잡고 호들갑을 떤다. 카페주인 ( 황당하다는 듯)만 오천 원인데요. 원 진 음,저기…….카드도 되죠?


희곡 계산을 마치면 원진과 소영,사강 무대 밖으로 나간다.카페주인,카운터에서 나와 무대 중앙으로 간다. 카페주인 ( 원빈 흉내를 내며)얼마면 되겠니?얼마면 되겠어?오노~이게 언제 적 유행어입니까.손을 마주잡고 호들갑을 떠는 저 여자들도 좀 보십시오.쯧쯧,아무튼 이날을 계기로 두 여자 사이에 금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무대 암전.

4장 무대 밝아지면 사강과 원진,나란히 앉아 다정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다. 원 진 학교에서 애들 가르치는 거,그것도 만만치 않겠어요. 박 사 강 네,뭐 그렇죠. 원 진 그래도 사강씨는 학교라는 곳에서 인재 양성을 하고 계시는 거니까…… 한마디로 국위선양하시는 거죠! 박 사 강 호호,그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기분은 좋네요.참,드라마 작업은 잘 되가고 있어요? 원 진 아,네.뭐 그럭저럭. 박 사 강 내용 좀 물어봐도 되요? 원 진 궁금해요? 박 사 강 네. 원 진 이 이야기는 네 명의 남녀가 얽히고설킨 심리 드라마라고 할 수 있죠.여기 세 명의 여자가 등장을 합니다.한 여자는 남자의 아내이구요.나머지 두 여자는 서로 고등학교 때 동창입니다.이 두 여자가 아내가 있는 남자를 만나게 되면서 사랑에 빠지게 되고,결국 남자는 세 명의 여자 사이에서 고뇌하고 갈등을 하게 된다는 심오한 내용입니다.' 죽느냐,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하고 고민했던 햄릿과도 같다고나 할까요. 박 사 강 어머,이야기가 왠지 낯설지가 않아요……. 원 진 네? 박 사 강 아,아니에요.그래서 결국 남자는 누구를 택하나요? 원 진 ( 심각한 고민에 빠진 듯한 표정으로)글쎄요,아직 고르는 중이라…….


희곡 박 사 강 네? 원 진 아,아무것도 아닙니다. 조명 잠시 암전되었다가 다시 켜지면 사강이 앉아있던 자리에 이번엔 소영이 앉아있다. 원 진 요즘 가게는 어때요?불경기라 사람들이 비디오 볼 여유도 없을 것 같아요. 이 소 영 생각보단 그렇지 않아요.불경기라 백수들이 많잖아요.그래서 손님들이 뜸하거나 그렇진 않답니다.백수들의 낙이 뭐겠어요.누워서 드라마나 보고 만화책이나 보고 그런 거 아니겠어요. 원 진 ( 불편한 듯 잠시 뒤척이다가)그런데 소영 씨는 어떤 영화를 좋아하세요? 비디오 대여점을 하시니까 영화도 많이 보실 것 같은데……. 이 소 영 네,전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잘 보는 편이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최고를 뽑으라면 아마 소룡님의 영화가 아닐까 싶어요.( 일어서면서 관객석 앞으로 다가간다.또 다시 심취한 듯)그의 발차기는 그 자체로 가슴이 벅차요.그가 쌍절곤을 집어 들 때면 저도 모르게 감격스러웠어요.그가 오하라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할 때 그 표정은…… 정말 카리스마 그 자체였답니다.( 이소룡 포즈를 취하며)아됴~ 원진,소영을 보며 웃는다. 원 진 이소영 원 진 이소영 원 진

너 참,재밌는 녀석이구나. ( 자리에 와 앉으며)원진씨,저희 가게에 가서 영화나 같이 보실래요? 영화요? 네,꼭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네,그럼 가시죠.

소영과 원진,무대 밖으로 나간다.무대 잠시 암전 된다.무대 밝아지면 무대 중앙에 원진을 기점으로 왼편에 사강,오른편에 소영이 서있다.원진,왼편으로 가서 사강의 손을 잡는다.그리고 다시 오른편으로 가서 소영의 손을 잡는다.이번에는 사강에게 가서 포옹을 하고,소영에게도 똑같이 포옹을 한다.마지막으로 사강에게 입을 맞추고 다시 소영에게 똑같이 입을 맞춘다.( 이 때,원진은 최대한 능글능글한 표정을 짓도록 한다)무대 다시 어두워졌다 밝아지면 카페주인만 무대 중앙에 서 있다.


희곡 카페주인 아,이 무슨 조화랍니까.두 노처녀가 양다리의 희생양이 되었군요. 이 때,사강과 소영 무대로 들어온다.함께 왼쪽 테이블에 가 앉는다.카페 주인, 카운터로 간다. 박 사 강 요즘 어떻게 지내니?바쁜가봐?연락도 잘 안하고. 어색한 침묵.이 때 카페주인,사강과 소영의 테이블에 커피 두 잔을 올려놓고 다시 제자리로 간다. 이소영 (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알바생도 그만두고 해서 요즘 조금 바쁘네. 박 사 강 그렇구나,난 네가 하도 연락이 없길래 혹시 남자친구라도 생겼나했어. 이 소 영 응,뭐……. 박사강 ( 커피를 마시다가 놀라서 켁켁 거린다)어머,진짠가 보네?남자친구 생겼어? 이 소 영 응,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박 사 강 정말?그러고 보니 너,추리닝도 안 입고 있네?그건 그렇고,언제부터 만난 사이야?내가 아는 사람이야? 이 소 영 어?어.얼마 안됐어.나중에 소개 시켜줄게.미안,괜히 연락도 안하고 그래서. 박 사 강 아냐,뭐. 이 소 영 넌 만나는 사람 없니? 박 사 강 아냐,그런 거 없어. 이 소 영 아,그래?그렇구나. …….아무튼 언제한번 다 같이 만나자. 무대 암전.

5장 무대 밝아지면 사강과 원진,팔짱을 끼고 걷고 있다.그 때 맞은편에서 소영이 걸어온다.사강과 소영,원진,세 사람이 딱 마주친다. 이 소 영 어?원진씨?


희곡 원진,사강의 손을 슬며시 떼어낸다. 이 소 영 강이 너 지금 뭐야.왜 원진씨랑 팔짱을 끼고 있어? 박 사 강 ……. 이 소 영 뭐야,너?원진씨,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원 진 ……. 이 소 영 아니 둘 다 왜 말이 없는 거야? 원 진 아니,그게……. 이 소 영 원진씨,강이랑도 만나고 있었던 거예요? 원 진 아니,그게 아니라……. 박 사 강 뭐?강이랑도?원진씨,대체 이게 무슨 말이에요? 원 진 ( 소영과 사강 밀어 붙이자 당황한 듯)아니,잠시만. 박 사 강 그럼 네가 전에 말한 남자가 원진씨야?이게 지금 어떻게 된 거야?응? ( 선생님 톤으로)이소영!누가?언제?어디서?무엇을?어떻게?왜?육하원칙에 따라 논리정연하게 설명해봐! 이 소 영 야!내가 네 학생이니?훈계 하듯이 하지 마,너. 박 사 강 내가 어디 틀린 소리했니?혹시…… 네가 먼저 원진씨한테 ( 이소룡 포즈를 취하며)" 원진씨~저희 가게에 가서 이소룡 영화나 같이 보실래요?"하면서 꼬신 거 아냐? 원진,눈치 없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이 소 영 야야,그러는 넌?( 몸을 베베 꼬며 콧소리를 낸다)" 저희 학교 뒷산이 너무너무 좋은데 언제 한번 등산이나 같이 가실까요?"하면서 꼬리 쳤을 거 아냐? 원진,이번에는 아니라는 듯 손 사례를 치면, 이소영 ( 당황한 듯)아,아니야?어,어쨌든!너도 잘한 거 하나 없잖아.괜히 고상한 척.우아한 척.하면서 뒤에서 호박씨나 까고,계집애. 박 사 강 뭐?계집애?너 지금 말 다했니? 사강과 소영,서로 덤벼들 기세로 노려본다.원진,두 여자 앞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남 일 보듯 구경한다.


희곡 원진,사강의 손을 슬며시 떼어낸다. 이 소 영 강이 너 지금 뭐야.왜 원진씨랑 팔짱을 끼고 있어? 박 사 강 ……. 이 소 영 뭐야,너?원진씨,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원 진 ……. 이 소 영 아니 둘 다 왜 말이 없는 거야? 원 진 아니,그게……. 이 소 영 원진씨,강이랑도 만나고 있었던 거예요? 원 진 아니,그게 아니라……. 박 사 강 뭐?강이랑도?원진씨,대체 이게 무슨 말이에요? 원 진 ( 소영과 사강 밀어 붙이자 당황한 듯)아니,잠시만. 박 사 강 그럼 네가 전에 말한 남자가 원진씨야?이게 지금 어떻게 된 거야?응? ( 선생님 톤으로)이소영!누가?언제?어디서?무엇을?어떻게?왜?육하원칙에 따라 논리정연하게 설명해봐! 이 소 영 야!내가 네 학생이니?훈계 하듯이 하지 마,너. 박 사 강 내가 어디 틀린 소리했니?혹시…… 네가 먼저 원진씨한테 ( 이소룡 포즈를 취하며)" 원진씨~저희 가게에 가서 이소룡 영화나 같이 보실래요?"하면서 꼬신 거 아냐? 원진,눈치 없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이 소 영 야야,그러는 넌?( 몸을 베베 꼬며 콧소리를 낸다)" 저희 학교 뒷산이 너무너무 좋은데 언제 한번 등산이나 같이 가실까요?"하면서 꼬리 쳤을 거 아냐? 원진,이번에는 아니라는 듯 손 사례를 치면, 이소영 ( 당황한 듯)아,아니야?어,어쨌든!너도 잘한 거 하나 없잖아.괜히 고상한 척.우아한 척.하면서 뒤에서 호박씨나 까고,계집애. 박 사 강 뭐?계집애?너 지금 말 다했니? 사강과 소영,서로 덤벼들 기세로 노려본다.원진,두 여자 앞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남 일 보듯 구경한다.


희곡 이 소 영 야,네가 그럴 줄은 몰랐다? 박 사 강 야,나도 마찬가지야.이게 무슨 허접한 짓이니? 이 소 영 난 영화 속에서나 이런 일이 일어나는 줄 알았네.( 이승철의 노래를 부른다)그 뭐더라?아!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친구의 친구를~ 소영,계속해서 노래를 부르면 사강,소영에게 가서 소심하게 머리끄덩이를 잡는다. 원진,관객마냥 박수를 치며 우우~야유를 보낸다. 이 소 영 어?이게 뭐하는 짓이야?야,이거 안 놔? 소영,사강을 향해 팔을 허우적댄다. 이 소 영 야,좋은 말로 할 때 이거 놔라. 박사강 (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싫어. 이 소 영 이렇게 나오겠단 거지. 소영,사강에게 머리끄덩이가 잡힌 상태로 입고 있던 코트를 벗는다.코트를 벗자 안에 입고 있던 노란 추리닝이 드러난다.소영,엉거주춤 상태에서 권법자세를 취한다.소영,사강의 손을 철썩 철썩 때린다. 박사강 이소영 박사강 이소영

아.아파.야!그만해. 싫어.그럼 너부터 놔. 싫어.너부터 놔. 그럼 됐어.

사강,소영의 머리 끄덩이를 계속 잡고 있다.소영,머리를 잡힌 상태에서 허우적거리며 사강의 손을 때린다.그 때 무대 오른쪽에서 한 여자가 등장한다. 원진의 아내다. 원진아내 ( 원진을 보며)이 인간아.너 여기 앉아서 뭐하는 거야. 원진,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난다. 원진아내 ( 사강과 소영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얘들은 또 뭐야?


희곡 사강,소영의 머리끄덩이를 놓는다.소영,까치 머리를 한 채 코트를 챙겨 입는다. 사강과 소영,나란히 서서 원진과 그의 아내를 쳐다본다. 원진아내 ( 카드 영수증을 들어 보이며)이게 뭐야?집에서 드라마나 보고 뒹굴 거리더니 이제 카페까지 진출했냐.회사 잘리고 돈 한 푼 못 벌면서 밥값보다 비싼 커피나 마시고.네가 그 유명하다는 된장녀야? 원 진 여보,된장녀가 아니라 된장놈. 원진아내 뭐?나 참,어이가 없어서.그래,네가 그 유명하다는 된장놈이구나. 원진,자랑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 거린다.사강,원진 아내에게 다가간다. 박 사 강 저기 그런데 아주머니는 누구세요? 원진아내 나?이 인간 와이프 되는 사람인데? 사강,소영 ( 깜짝 놀란 듯)네?? 소영,원진아내에게 다가간다. 이소영 ( 원진아내의 팔을 붙잡으며)정말 원진씨 아내예요? 원진아내 ( 소영의 몰골을 보고 깜짝 놀라며)네.그런데요. 이 소 영 뭐야.저 인간.유,유부남이었어? 박 사 강 그,그러게. 이 소 영 얘가 지금 이 상황에서 그,그러게 라는 말이 나오니? 소영,성큼성큼 원진에게 다가간다.원진,슬금슬금 아내의 뒤에 가서 숨는다. 원진아내 아가씨들도 이 인간한테 당한거야?이번엔 또 뭐라고 했어요?시인? 아님 영화감독? 박 사 강 아뇨,드라마 작가요.남자의 유혹을 썼다고……. 원진아내 ( 원진을 보며)뭐,남자의 유혹?이 인간아.이제 드라마까지 진출했냐? 어떻게 입만 열었다하면 거짓말이야? 이참에 나랑 같이 남자의 유혹 2편이나 찍을까?어?2편의 제목은 뭘로 할까?그래,남자의 유혈 어때?응? 원진의 아내,원진의 귀를 잡고 끌고 가려고 하는데


희곡 이 소 영 잠깐! 원진과 그의 아내 뒤돌아서면 소영,코트를 벗어 사강에게 넘긴다.사강과 소영, 둘이 서로 마주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는다.소영,원진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간다.권법자세를 잡고는 원진의 배를 가격한다. 이 소 영 아뵤오~ 원 진 아이고,배야. 원진아내 ( 원진의 귀를 잡고)아프냐?나도 아프다!으이그~이 인간아 이리와. 원진의 아내,다시 원진을 끌고 무대에서 퇴장한다. 이소영 ( 손을 탈탈 털면서)짜식이,감히 누굴 건드려. 사강과 소영,서로 눈이 마주치면 어색한 침묵. 박사강 이소영 박사강 이소영 해놓고. 박사강 이소영 박사강

그,그러게.왜 거짓말을 하니? 내가 뭘. 좋아하는 사람이 말이야,원진씨라고 했으면 좋았잖아? 괜히 너한테 미안해서 그랬지.그,그러는 넌.만나는 사람도 없다고 그,그건……. 됐어,셈셈이라 치면 되지. 그래.셈셈이네.

다시 어색한 침묵.사강,어색함을 깨기 위해 원진이 나간 곳을 향해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발길질에 주먹질을 해댄다. 박 사 강 저 놈이 아주 그냥 나쁜 놈이라니까.정말 못됐어. 이 소 영 너.지금 말이야.완전 어색한 거 아니? 박 사 강 그,그래?근데 말이야,사실 너도 아까 너무 웃겼어.이소룡 영화만 보더니 아주 그냥 제대로던데?이렇게 했었나?( 어색한 포즈로)아뵤~


희곡 이소영 ( 사강의 자세를 고쳐주며)아니,손을 이렇게 해서.아뵤~ 박 사 강 이렇게?( 자세를 바로 잡으며)아뵤~ 이 소 영 그래!잘했어.그렇게 하는 거야. 사강,소영 ( 동시에 이소룡 포즈를 취하며)아뵤오~ 사강과 소영,마주 보고 웃는다. 박사강 이소영 박사강 이소영 박사강 이소영 박사강

그런데 한편으로는 질질 끌려가는 모습이 조금 안돼 보이기도 해. 너도 그랬니?실은 나도. 그렇지? 응,알고 보면 싱글이 편한 것 같아. 응,그래. 알고 보면 싱글이 아름답다니까. 응,싱글이 아름다워.

사강과 소영,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웃는다.그리고 함께 외친다.싱글은 아름답다! 이 소 영 싱글은 아름답다!아뵤~ 박사강 ( 어설프게)싱글은…… 싱글은 아름답다!아뵤~ 이소영 ( 사강을 보며)왜 이래,아마추어 같이. 사강과 소영,어깨동무를 하고 깔깔거리면서 무대 밖으로 퇴장한다. 카페주인,무대 중앙으로 나온다. 카페주인 ( 사강과 소영이 나간 무대를 가리키며)방금 저 두 여성은 싱글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그런데 만약,그녀들이 만났던 남자가 유부남이 아닌 미혼 남성이었다면 저렇게 웃으면서 화해를 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싱글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실은,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손뼉을 치며)자자, 이건 각자 집으로 가면서 찬찬~히 생각해보시고!이제 저희 카페 영업시간도 끝났습니다.안녕히 가십시오.아!찻값은 카드로 긁으시면 안 됩니다? 카페주인,허허 웃으며 퇴장한다.무대 암전된다.


희곡

거울 거울 등장인물 그녀 1( 20대 초반) 그녀 2( 그녀1과 같은 인물이다) 거울 속 여자 ( 20대 초반) 먼지 -남자가 분장한다( 아빠 역 1인 2역)어두운 극에서 재미를 더해주는 생뚱맞은 인물,이야기의 내용과는 상관없는 인물이다.극에서 계속 혼자 놀기.그녀 옆에서 그녀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 그녀가 털어내는 방향대로 요리조리 움직인다.정적인 분위기에 생동감을 주기 위한 인물. 그녀의 엄마,아빠,여고생1,여고생2,언니 -엄마와 여고생1은 동일 인물이라도 무관.거울 속 여자와 여고생2동일 인물이라도 무관

무대배경 방,학교,길거리를 다양하게 나타낼 수 있는 무대.무대 전면은 길거리로,우측은 방, 좌측은 으슥한 공터 정도로 구분한다.무대 중앙에 커다란 전신 거울을 둔다.무대 뒤편에는 큰 시계가 놓여있다.시계의 시간은 11시로 둔다.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로 만든다.


희곡 #1.그녀의 방 어두운 무대 위,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거울 속 여자 :( 목소리만)어둠,어둠,너무 어두워.너무 답답해.너무 무서워. 이제 그만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제발,제발 누가 날 좀 구해줘. 죽을 것만 같아.( 사이)숨막혀.살려줘.

#2.그녀의 방 스위치 올리는 소리가 나며 무대가 밝아진다.무대는 대체로 어두운 조명을 사용한다.방은 정돈되지 않고 먼지가 가득하다.뒤이어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들어온다.그녀는 야사시한 옷을 걸치고 진한 화장을 하고 있다.그녀는 가지고 있던 가방을 한 쪽에 내려놓고 거울 앞에 섰다.( 그녀1과 그녀2는 동일 인물이다.한 사람이 거울을 보며 얘기하는 것이다)옆에 먼지 분장을 한 남자가 앉아 있다.( 이 남자를 먼지라고 명한다) 그녀1:( 거울을 보며)다녀왔어.혼자 잘 있었어? 그녀2:응~ 그녀1:너무 보고 싶었어.학교에 있는 내내 네 생각뿐이었어. 그녀2:나두.네가 언제 올까 기다렸어~오늘 괜찮았니? 그녀1:오늘도 진상 손님 때문에 죽을 뻔 했어~진상도 그런 진상이 없어. 남자들은 왜 다 그 모양인지.지들 욕구만 채우면 그만인 동물이야~동물. 그녀2:그랬군~요새 진상 안 걸리더니~운 나빴다 생각해~ 그녀1:그래야 할 것 같아~내일은 괜찮아지겠지~보영이 알지?소꿉친구. 폰 번홀 어찌 알았는지 전화왔었어~만나자고 하는데 바쁘다고 했어~ 담에 다시 연락하겠대~만나보고 싶기도 하구 만나지 말았으면 싶기도 해. 그녀2:한번 봐~어찌 지내는지. 그녀1:두려워~ 그 때랑 너무 달라졌으니깐~ 너만 있음 돼~ 그냥.음,지금처럼 이렇게.우리 둘 아무 탈 없이 살던 것처럼. 그녀2:너만 있음 돼~그냥.음 지금처럼 이렇게.어느 때처럼 이렇게.


희곡 그녀는 거울에 손을 가져다 댄다.자신의 모습이 비친 거울에서 눈 주변을 엄지손가락으로 닦는다.옷을 털어 옆에 두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는다.옷을 털자 먼지가 일어나서 요리조리 왔다갔다 거린다.그리고 번진 화장을 클렌징크림으로 지운다.지우고 거울 앞에 선다. 그녀2:어떻게든 되겠지~ 그녀1:그렇겠지?고마워~믿을 사람은 나뿐~아니 너뿐이야.아~참. 할 말이 있어.그 사람알지?있지~( 웃으며)그 사람 아이를 가졌어.생리를 안 해서 이상하다 이상하다 생각했는데~혹시 해서 병원에 갔었는데~ ( 자신의 배를 만지며)이 안에 생명이 있어.이제 혼자가 아냐. 그녀는 신나하며 배를 만지고 방 주위를 빙글빙글 돈다.그러다 멈춰 서서 거울 쪽으로 간다.거울 쪽에 앉아 있는 먼지를 털어내자 먼지 그녀를 한 번 째려보고 또 요리조리 움직인다. 그녀1:혹시.혹시 있잖아.삐진거 아니지?나한텐 그래두 네가 젤 소중해. 그러니깐 화내지 마.응?화내지 않기야.우리 다 같이 행복하게 사는 거야. 그 사람,아기,나,너.이렇게 넷이서~ 그 때,핸드폰 진동이 온다.그녀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꺼낸다.그리고 핸드폰의 문자 메시지를 확인한다.갑자기 그녀 허둥댄다. 그녀1:그 사람이 곧 집 앞으로 온대~아이참.화장도 다 지웠는데~ 새로 해야겠네. 시간이 없어.옷도~뭘 입지?참~뭐부터 해야.일단 옷부터~아니 화장.아~몰라. 일단 씻던거 마저 씻고 오자.( 거울을 보며)나씻으러 갔다올게.오늘도 혼자둬 미안~곧 함께일테니 조금만 참아~미안~

그녀는 거울을 한 번 만지며 퇴장한다.씻는 물소리 들린다.먼지는 무대 뒤에서 아기들이 타는 말을 가지고 와서 온 무대를 휘젓고 다닌다.무대 어두워지고,조명이 무대 중앙에 있는 거울을 비춘다.먼지는 거울 옆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고 있다. 거울 속 여자 목소리가 들리면 깜짝 놀라면서 무대 퇴장한다.


희곡 거울 속 여자 목소리 :저는 거울에 사는 사람이예요.그녀가 매일 옆에 끼고 있는 거울 속에 살죠.그녀는 오늘도 나에게 말을 건네는 군요. 아차,아니죠.내가 아니라 그녀가 그녀에게 말 거는 거죠.그녀는 존재조차 모르고 있을 테니까요.난 혼자 이 어둠 속에 사는데도.그녀는 그래도 자유로우니깐.그래도 나보단 낫죠. 그래요.나아요.훨씬.이곳은 너무 답답해요. ( 사이)그녀가 무슨 일을 하는지 옷차림만 봐도 알 수 있겠죠?눈치 있는 분들이라 알거라고 믿어요~그녀는 자기만의 거울 속에 살아요.어둠을 어둠으로 덮어버리죠. 자신의 불행한 현재를 자신만의 거울 속에서 풀어 던져요.처음부터 그랬냐구요? 아무리 그래도 응애응애 울기 전부터 이런 더러운 운명을 타고 났을리 있어요~아니 어쩌면 뱃속에서부터 정해진 운명이었을 수도~ 적어도 그년 아니 예요~그녀의 어릴적은 그냥저냥 행복했으니까. 무대 암전. #3.그녀의 어릴 적 회상( 어린 시절 거실) 무대 밝아진다.밝은 분위기의 무대.어린 그녀가 방에 앉아 있다.( 분장으로 그녀를 최대한 초등학생 같이)무대 중앙에는 탁자가 놓여있다.탁자 위에는 컵이 하나 놓여있다.그녀가 컵에 물을 따라 먹으려다가 컵을 떨어뜨린다.컵이 깨졌다.놀란 어린 그녀는 울음을 터뜨린다.그 때 그녀의 엄마와 아빠가 놀란 눈으로 등장한다. 그녀의 엄마 :진희야~괜찮아~울지마~엄마 여깄어~ 어린 그녀 :엄마~ 그녀의 엄마 :어디보자~발 다쳤네~여보~구급상자 저 쪽 방에 있어요~ 그것 좀 갖다 줄래요? 그녀의 아빠 :알았어~ 그녀의 아빠 퇴장한다.그녀의 엄마는 아이를 진정시킨다. 그녀의 아빠 목소리 :여보~어디있다구? 그녀의 엄마 :옷장 젤 밑 칸에 있어요~ 그녀의 아빠 목소리 :어디말하는건지 모르겠어~몇 번 째 옷장 말야~아~여깄다. 우리 딸 잠시 기다려~


희곡 그녀의 아빠 등장한다.아빠는 구급상자 안에 있는 소독약을 꺼내 어린 그녀의 발을 소독한다.그리고 옆에 있던 반창고를 가져다 그녀의 발에 붙여준다.어린 그녀는 훌쩍 훌쩍 거리며 아빠 품에 안긴다. 그녀의 엄마 :휴~깜짝 놀랬네~우리 딸 많이 안 다쳐서 다행이다~ 조금 있음 괜찮을 거야~여보~진희 좀 안고 있어요~난 유리 좀 치워야겠어~ 그녀의 아빠 :걱정말구 어서 치워줘~진희 또 다칠까 걱정된다~우리 진희 많이 놀랬지? 그녀의 아빠는 어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진정시킨다.어린 그녀는 잠이 든다.무대 어두워지고 뒤에 있던 거울에 조명이 집중된다. 거울 속 여자 목소리 :이렇게 행복할 때가 있었다구요~그녀한테도.나한테도. 무대 암전.

#4.그녀의 방 무대 밝아지면서 그녀 등장.먼지는 식탁에 걸터앉아서 귀이개로 귀를 후비고 있다. 그녀1:( 애써 밝은 목소리로)다녀왔어.너무 금방 왔지?왜 일찍 왔냐구?있지~ 그 사람 바쁘데.뭐 그럴 수도 있지.요새 바쁘잖아.일하는게 얼마나 바쁘 겠어~ 그럴 수도 있지 뭐~ 맞아~ 그럴 수도 있어.( 풀 죽은 목소리)근데 그 사람이랑 더 있고 싶었어.조금 더 있고 싶었는데.밥만 먹고 헤어졌어. 그 사람 품에서 잠들고 싶었는데~( 사이.들뜬 목소리로)그래두 임신 소식 들으면 그 사람 좋아하겠지?그럴꺼야~언제 말할까.언제가 좋을까. ( 사이)아~참,내 생일이 얼마 안 남았지~그 때 그 때가 좋겠어.서프라 이즈~선물. 그 사람 나한테 좋은데 데려가준다고 하더라~ 어딜지 궁금해~ 좋은 곳에서 좋은 사람이랑 이제 행복한 꿈을 꾸는 일만 남았어~


희곡 무대 어두워지고 거울로 조명 집중한다.거울 속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그녀는 거울 속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거울 속 여자가 얘기할 때,그녀는 혼자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거리며 웃고 있다.먼지도 같이 실실거리며 웃는다. 거울 속 여자 목소리 :과연 그럴까요?그 남자가 기뻐할까요?그녀는 자기 분수를 망각한 거 같애요.그 남자가 그 남자란 거.그녀한테 얘기하고 싶지만 그녀는 내 얘기가 들리자 않나 봐요.답답해요.이곳은 너무 어두워요.갑갑해요.가끔 이상한 소리도 들려요.살려달라는 비명 소리,차라리 죽는게 나아하는 소리,어디서 나는지도 모를 소리들 천지예요.이러다가 미쳐버릴 수도 있어요.이곳을 벗어나고 싶어요.제발,내 목소리 들린다면 이곳에서 좀 구해줘요.제발. . . 무대 암전. #5.그녀의 방 무대 밝아지며 그녀 터벅터벅 걸어 들어온다.그녀가 걸어오는 방향대로 먼지도 걸어온다.( 먼지는 최대한 날리는 것 같이 유연하게 움직인다)다른 때보다 수수한 표정의 그녀는 들어서자마자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는다.먼지도 함께 풀썩 주저앉자 그녀는 ‘ 켁켁’ 거린다.그러다 그녀는 멍하니 주변을 두리번거린다.이내 흐느끼기 시작한다. 그녀1:( 조용한 목소리로)난 그저.혼자가. . .혼자가 싫었을 뿐인데. . . 그녀 앉은 상태에서 거울 쪽으로 몸을 끌고 간다. 그녀1:그 사람한테 말했어. . . ( 사이)그 사람 있지. . .내 생일인줄 모르더라~ 난 생일이라 좋은데 데려가나 했더니~다방이더라~다른 다방이었어~지금 있는 곳보다 더 좋은 대우 해주겠대. 그 사람 처음 만났을 때 어땠는 줄 알지?날 찾아오는 다른 남자들이랑 달랐어~다른 남자들은 이차에선 항상 나를 알려고 하지 않았어~내 몸을 알고 싶어했지~그런 생활에 익숙해서 나도 날 잊었어~ 잃어버렸지~ 정말 그 남잔 달랐어.그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지~그랬어.처음보고 내 몸을 알려하지 않았어.그냥 얘기만 해요.일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 얘기,친구들 얘기.그리고 내 얘기에 귀기울여줬어~


희곡 처음으로.일주일에 두 번씩 날 찾아와서 얘기했어~ 우린 하루 종일 얘기했어~ 그러다 우린 가까워졌어~ 그건 그 순간 나의 착각이었나봐~ 처음으로 사랑한 남자였는데~ 그 남잔 아니었나봐~ 아니었나봐~ 정말 혼자가 싫었을 뿐인데~ 오랜만에 느껴본 감정이었는데~너무 오래되서 까먹고 있던걸 조금씩 알아가던 중 이었는데~ 무대 잠시 어두워진다.침묵을 깨는 흥얼거림과 함께 무대 밝아진다.그녀는 흥얼거리면서 거울을 깨끗이 닦고 있다.그녀가 흥얼거리는 곡은 ‘ 메기의 추억’ 이다. 그녀는 ‘ 메기의 추억’ 을 흥얼거리며 웃다가 소리 없이 흐느낀다. 그녀1:( 노래 소리 점점 작아지며)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메기. . . . . 무대 암전.

#6.그녀의 어릴 적 회상( 공원) 무대 밝아지고 중학생 그녀와 그녀의 엄마,아빠가 등장한다.아빠의 손에는 도시락과 과자 등이 든 가방이 있고,엄마의 손에는 음료수가 있다.교복을 입은 그녀가 엄마의 손을 잡고 있다.그녀의 가족들은 밝게 웃고 있다.아빠는 가지고 온 돗자리를 펴고,엄마는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내 펼친다.모두 싸온 도시락을 맛있게 먹는다.먹여주기도 하면서. 그녀의 엄마 :날씨 정말 좋네~이런 날 나와야 한다니까~ 집에 박혀 있는 건 용납 못 할 일~ 그녀의 아빠 :그치~아~근데 맛나네~당신,왠일로 이리 맛나게 만들었대? 그녀의 엄마 :당신~( 아빠의 팔을 꼬집으며)자꾸 이럴래요? 담부턴 안 만들어준다~ 그녀의 아빠 :아야~그렇다고 하늘같은 남편을 말야~ 그녀의 엄마 :하늘같은 남편님~ 그래서 김밥 싸는데 하나도 안도와 주고선 이리 큰소리? 그녀의 아빠 :전~엔 도와줬잖아~


희곡 그녀의 엄마 :언젯적 얘기를~ 중학생 그녀 :엄마,아빠~이런 날 꼭 싸워야겠어?사랑싸움은 집에 가서~ 그녀의 아빠 :그래그래~이러고 있지 말구 준비한 거 꺼내봐~ 중학생 그녀 :뭐?뭐? 그녀의 아빠 :진희 엄마~ 그녀의 엄마 :( 케이크를 꺼내며)짜잔~우리 진희 해피벌스데이~오늘은 사랑스런 우리 딸 생일~아침부터 미역국도 안 끓여줘서 섭했지~ 다 지금을 위한 깜짝 쇼였지~ 아빠는 케이크에 불을 붙인다.그녀의 부모님은 ‘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을 부른다.그녀는 케이크의 불을 끈다.모두 ‘ 짝짝’박수를 친다.아빠는 바구니에 있는 작은 선물을 꺼내 그녀에게 내민다. 중학생 그녀 :이게 뭐야? 그녀의 아빠 :뜯어봐~ 더 좋은 거 해주고 싶은데 우리 집 사정상 미안해 우리 딸~담엔 더 좋은 거 해줄게~ 중학생 그녀 :( 선물을 뜯어보며)와~신발이네? 그녀의 엄마 :우리 딸 신발보니까 난리났더만~사달라고 하지~ 중학생 그녀 :아냐~아직 신을 수 있는건데 뭐~이런거 안 사줘도 되는데~참~ 그녀의 아빠 :그리 좋은거 아냐~예쁘게 신고 댕겨~ 중학생 그녀 :고마워~엄마,아빠.내가 대신 지금 딱 맞는 곡 불러줄게~알아? 그 뭐더라 제목이~전에 음악시간에 배웠는데~옛날에 금잔디동산에 메기~요거~ 그녀의 엄마 :메기의 추억~ 중학생 그녀 :맞다 맞아~메기의 추억이다~ 그녀와 엄마는 메기의 추억을 함께 부른다.아빠는 잘 모르는지 버벅거리며 한 박자 느리게 따라부른다.이 모습을 보며 엄마는 아빠에게 이것도 모르냐며 얘기하면서 무대 암전.‘ 메기의 추억’ 노래가 잔잔하게 깔린다. 무대 암전.


희곡 #7.그녀의 어릴 적 회상( 공터) ‘ 메기의 추억’ 노래 위로 비명소리가 난 후 침묵.무대 밝아지고 여고생 세 명이 있다. 여고생 두 명은 서있고,한 명은 엎어져 있다.엎어진 한 명은 고등학생 그녀다.두 명에게 맞은 모습이다. 여고생1:야~눈 깔라고 할 때 깔았음 좀 좋냐~왜 말귀를 못 알아 쳐 먹냐~ 죽을라고~고아아가씨~까불지 마.불쌍해서 같이 놀아줬더니 어디서 감히 남의 남잘~ ( 그녀의 머리를 끌어당기며)이게~ 어디서~ 앞으로 이 따우로 행동하면 재미없을 줄 알아라~알아 쳐 먹었냐? 여고생1먼저 퇴장한다.여고생2,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는다. 여고생2:네 년 인생도 불쌍타 불쌍해.아빠 돌아가시고 새 아빠란 사람은 술만 먹으면 미친놈 돼서 애새끼 죽도록 패고, 엄마란 사람은 그걸 못 참아 도망치고~네 년 인생도 더럽다 추잡해~( 한숨)그러게 왜 혜경일 건드 리냐~ 썹이가 따라댕겼어도 같이 있는걸 걸리지 말았어야지~이 년아~ 여고생2퇴장한다.고등학생 그녀는 신음소리를 내며 쪼그리고 누워있다.그 때, 주변을 살피며 한 여자 등장.( 그 여자는 언니라고 명명한다. )언니는 그녀에게 다가간다. 언니 :( 그녀를 흔들며)얘~얘~좀 일어나봐~얘~어쩜 좋지~( 계속 흔들며)얘~ 정신 좀 차려봐~ 그녀의 친구,여러 번 그녀를 흔들어 깨운다.어느 정도 지난 후 그녀 힘겹게 일어난다. 고등학생 그녀 :아~아~ 언니 :얘~괜찮니?정신이 좀 들어? 고등학생 그녀 :아~물 좀.


희곡 언니 :( 과자 봉지에서 물을 꺼내며)자~아~가만가만~따줄게~( 사이)자~마셔~ 고등학생 그녀 :( 얼마마시지 못 하고)여기~ 언니 :이제 정신 좀 드니? 이제야 여자를 똑바로 쳐다본다.힘겨운 듯 입을 뗀다. 고등학생 그녀 :누구? 언니 :어머~얘 좀 봐~나보다 어려뵈는데 자꾸 반말할래? 고등학생 그녀 :당신은 머야~ 언니 :지지베~깡패나셨네~지 구해준 생명의 은인한테~뭐 어쨌든~반갑다~ 보아하니 고딩같은데 왜 여자애가 쌈박질이냐~걱정하실라~어여 집에 가~ 고등학생 그녀 :네가 뭔 상관이야~내가 집엘 들어가든 말든~ 언니 :또 또~언니라고 해봐~언.니.보아하니 갈 데 없구만~ 고등학생 그녀 :갈 데 없든 말든 뭔 상관이냐고~ 언니 :그럼 나랑 같이 갈래?먹여주고 재워주고 우리 같은 팔자 더러운 년들이 갈 만한데~ 가봤자 어디 가겠냐~ 너 같은 년들 많이 봐서 잘 알아~ 생각 있음 연락해~ 언니,명함 한 장을 주고 퇴장한다. 고등학생 그녀 :그린다방?그 놈의 거지같은 집구석엔 절대 못 들어가~절대! 재워주고 먹여준다고 했겠다~인생 뭐 있나.잠시,잠시만 기다려~ 고등학생 그녀,빠른 걸음으로 퇴장한다. 무대 암전.


희곡 #8.사창가 -길을 잃는 그녀 무대 위에 붉은 조명과 함께 여자 세 명이 앉아 있다.그녀도 함께 앉아 있다.아무런 표정 없는 그녀.두 명의 여자와 그녀는 야사시한 옷과 진한 화장을 했다.그녀들 앞에는 한 아주머니가 호객행위를 하고 있다.아주머니는 지나가는 남자 한 명을 끌어다가 한 명을 고르게 한다.그 남자는 처음엔 쭈삣쭈삣하게 오더니만 이내 고개를 끌려온다.그리곤 그녀를 지목한다.그녀의 손에 끌려 남자와 그녀 함께 퇴장한다. 무대 암전. #9.그녀의 방 -거울 속 여자 목소리 무대 밝아지고 그녀는 ‘ 메기의 추억’ 을 흐느끼며 부르고 있다.그녀의 화장은 엉망이고 머리도 헝클어져있다.먼지도 울었는지 시커먼 얼굴이 엉망이다.거울 속 여자의 목소리에는 그녀1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으로 설정한다.거울 속 여자의 목소리가 말할 때는 전체적으로 어두운 무대에 거울에 조명 집중.먼지는 아기 말을 타고 무대를 휘젓고 다닌다. 그녀1:( 노래)물레방아 소리 들린다.메기야 내 희미한 옛 생각.( 사이)내 희미한 옛 생각.기억들.지금은 조각나서 어느게 내 기억인지 알지도 못하는데.비참한 생각들.너무 비참해. 거울 속 여자 목소리 :봐~ 내가 남자 믿을거 못 된다고 했잖아~ 왜 내 말을 못 들어서~이 꼴 나니 어때?이 꼴,저 꼴,별 꼴. 그녀1:행복했던 순간이 많았잖아~그 땐 말야~행복했던 시간,엄마,아빠. 왜 희미해지지~ 얼굴이 생각이 안 나.엄마도,아빠도.어째서 생각하고 싶은데 생각이 안 나는 거냐구~


희곡 거울 속 여자 목소리 :웃겨~ 혼자야.혼자.아무도 널 보러오지 않아.아무도 널 사랑하지 않아.행복했던 시간이라,과연 그런 시간이 존재했을까? 의문인데? 지독한 패배자. 그녀1:내 이름이 뭐였지~뭐였더라~이 년?저 년?야,너,거기,아가씨. ( 사이)이 진 희.지하 금고에 숨겨뒀던 이름.너무 오래되고 낡아 부스러질 것 같은 이름.까맣게 잊을 수밖에 없었던 이름.허~나한테도 이름이란게 있다니 허~ 이름이 있다니. 거울 속 여자 목소리 :넌 그냥 야고,너고,이 년이고,저 년일 뿐이야.이진희? 그게 어울릴거라고 생각해?잘 봐~똑똑히 좀 보라구~ 그녀1:왜 하필~다른 사람도 많은데 말야~불행은 왜 날 건너지 못 하지? 건너지도 못 할 만큼 무거운 거라면 다른 사람한테 덜어내고 와도 되잖아. 잠시만 건너줄 수 있잖아.신은 공평하단 엄마 말 틀린거야? 정말 그런거냐구~혼자가 두려워~날 누르는 거대한 어둠 덩어리, 이 어둠의 무덤에서 벗어날 수 없는거야?정말 벗어날 수 없는거냐구~ 거울 속 여자 목소리 :신이 공평하다면 왜 널 혼자두겠어~이 정도 어둠에 노예가 되다니~ 날 봐~ 날 좀 보라구~ 이 갑갑한 곳에서 아무도 알아줄 이 없는 곳에서 투명인간이 된 걸 보라구~그나마 넌나아~낫다구 그녀,거울을 들여다본다.초췌하고 엉망인 자신의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비명을 지른다.먼지는 그녀의 비명 소리에 놀라 타고 있던 말에서 떨어진다. 엉덩이가 아프다며 징징대기 시작한다.( 먼지의 소리는 아무도 듣지 못 한다) 그녀1:싫어~ 그녀는 얼굴을 감싸며 엎어진다. 무대 암전.


희곡 #10.그녀의 방 -그녀와 거울 속 여자 거울 깨지는 ‘ 쨍그랑’소리와 함께 무대 밝아진다.무대 중앙에는 거울 틀만이 서있다.거울 틀 밑으로는 거울 파편들이 널브러져 있다.그녀는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거울 틀 뒤로 한 여자가 서 있다.( 이 여자는 거울 속 여자다)먼지는 거울 속 여자에게 붙어 있다.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거울 속 여자와 눈이 마주친다.그녀는 그 여자 쪽을 몸을 일으켜 걸어간다. 그녀1:당신. .당신 뭐야~( 무대 뒤편을 살피며)문 잠근걸루 걸로 아는데~머냐고 당신~ 거울 속 여자 :그저. .당신 거울 속에 살던 그저 그런 사람이야. 그녀1:거울 속에 사는 여자?웃기고 있네 허, ,말도 안돼.당신 대체 누구야? 어떻게 들어온 거야? 거울 속 여자 :말했잖아.그저 당신 거울 속에 살던 사람이라구.저 거울이 깨지면서 나왔어.두려움,불안,어둠이 만들어 낸 비명 때문에 살아난거지~잠시지만. . . 그녀1: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허. . .당장 나가. 거울 속 여자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가.아직은~ 거울 속 여자가 자신의 몸에 먼지가 붙어있는 것을 알고 털어낸다.먼지는 거울 틀 옆에서 장난을 친다.거울 속 여자는 밑에 떨어진 거울 조각을 집어서 요리조리 살펴본다.거울 속 여자는 시종일관 냉소적으로 말하고 웃고 행동한다. 그녀1:이봐.당신 진짜 누구야.왜 여기 있는건데~ 거울 속 여자 :( 그녀를 보며)임신까지 시킨 남자는 등쳐먹는 사기꾼에,( 거울 조 각을 들여다보며)새 아빠는 죽도록 패대기치고 그것도 모자라 성폭행까지 일삼고 ( 그녀를 보며) 성매매 업소에서 하루 두 탕도 거뜬하게 뛰는 ( 거울 조각을 들여다보며)인생 더럽게 불쌍한 여자.( 그녀를 본다)


희곡 그녀1:( 놀람과 두려움으로)이봐.당신 진짜 머야.머냐구~ 거울 속 여자 :아까 말했잖아.당신 거울 속에 살던 사람이라구.이렇게 얘기해서 기뻐.눈물 콧물 쏟게 기뻐. 그녀1:( 거울 속 여자에게서 조금씩 멀어지며)세상에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거울 속 여자 :세상에 말이 되는 일만 일어나는 건 아니지 않나?설마 말이 되는 일만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네가 말했잖아~네 그 질기고모진 운명은 말이 된다고 생각해?죽지도 않지~길가다가 맘에 안 들어 사람 죽이는 건 말이 된다고 생각해?아,참 참 시험 못 쳤다고 자기 목숨 끊는 건 그건 말이 좀 되나?사람들이 그리도 많이 목격했다던 귀신나부랭인 말이 되는건가?그런거야?네 머리론 이 게 말이 돼?그럼 말 좀 해봐~말이나 한 번 만들어 보자구~ 그녀1:말 같잖은 소리하지마~ 거울 속 여자 :( 거울 조각을 요리 조리 보며)말이 된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고 안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거.지금,그것도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데. . .이것만큼 말이 되는게 어딨어~이게 확실한 증거아냐?보고도 못 믿어? 그녀1:. . . 거울 속 여자 :보는 대로 숨 쉬기 운동 잘 되고,말캉말캉한 사람이란 생물체야~ 그리구 저기~저 놈의 답답한 거울 속에 사는 사람 맞. 아. 그녀1:( 자기 뺨을 때리며)꿈이야~이건 분명.꿈이지 않고서야~ 거울 속 여자 :( 그녀 1의 뺨을 때리며)꿈? 그녀1:아야~뭐야~분명 이건 꿈인데~ 거울 속 여자 :여기 사는거 힘들지? 그녀1:( 거울 속 여자에게 등을 돌리며)아니. . .안. . . . .힘들어. . . .


희곡 거울 속 여자 :힘들잖아~다 알아~힘든 거 투성이잖아~ 그녀1:네깟게 뭘 안다고 힘들다 마다야~ 거울 속 여자 :모든 걸 다 알아~ 지금 입은 속옷 색 검정 레이스잖아~ 속속들이 알지~뼈속까지 속속들이~ 그녀1:닥쳐~ 거울 속 여자는 무대 뒤편에 있는 시계를 본다.시계는 11시 40분을 가리킨다. 시계로 조명 한 번 훑는다. 거울 속 여자 :( 약간의 다급한 목소리로 혼잣말)시간이 얼마 없어.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이대론 안돼~거울 거울 어딨지~ 거울 속 여자,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그녀도 거울 속 여자를 보더니 함께 두리번거린다.먼지도 두리번거리면서 무대 곳곳을 뒤진다. 그녀1:머야~왜 이리 두리번거려?또 무슨 꿍꿍이야~ 거울 속 여자 :거울 좀 가져와~ 그녀1:갑자기 뭔 쌩뚱맞게 거울이야~헛소리 말고 나가~ 거울 속 여자 :어서 거울~어서~ 그녀1:너나 어서 나가~ 거울 속 여자 :( 혼잣말)나가고 싶어도 지금은 안돼~ 그녀1:뭐?혼자 뭐라고 궁시렁대~ 거울 속 여자 :어서 거울~거울 어디있는거야~


희곡 그녀1:내가 왜~ 거울 속 여자 :바보냐?분명 아까 말했잖아~거울 속에서 사는 사람이라구~ 거울이 있어야 돌아갈 수 있어~같이 살길 바라는거야? 그녀1:뭐?있어봐~ 그녀는 퇴장한다.거울 속 여자는 깨진 거울 조각들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거울 속 여자 :어쩌지.다시 이 속에 들어가면 난. . .난 죽을지도 몰라~ 이제 더 이상은 안돼.어떻게 하지.한 번뿐인 기횔 놓칠 수 없어~시간이 없어~시간이. . . 거울 속 여자,뭔가 생각난 듯 묘하게 웃는다.거울 속 여자는 퇴장한다.어두운 무대 위에 붉은 조명이 깔린다.그녀는 전신거울 하나를 들고 온다. 그녀1:왜 이런 짓까지 해야 하느냐고.왜. . .( 사이)뭐야.어디 간거야.이 봐,이 봐. ( 사이)허,그럴 줄 알았어.믿은 내가 바보천치지~거울 속 에 살아?웃기고 있네. 좀 도둑이지.좀 도둑이야. ( 사이)근데 대체 어디로 들어온거지~언제~그리구 어디로 나간거야~창문도 없는 집에~ 아무튼 ( 깨진 거울을 보며)거울아~미안.이제 너랑도 헤어져야겠어.잘가~ 그녀는 옆에 놓다 둔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지고 깨진 거울 조각들을 쓸어 담는다. 거울 틀을 밀어두고 새로 가져온 전신 거울을 그 자리에 둔다. 그녀1:이제,네가 나랑 함께 하는 거야.( 거울을 만지며)이제 내 곁을 떠나면 안 돼.이제 정말 너뿐이야.알잖아~( 자신의 배를 만지며)내일 병원에 갈꺼야~이제 예전으로 돌아가는 거야.예전으로. . .너와 함께 했던 전으로~ 무대가 어두워졌다 밝아졌다가를 반복한다.무서운 분위기 연출.그녀는 겁에 질린 듯 주변을 두리번거린다.거울 속 여자가 그녀 뒤에 서 있다.무대 어두운 조명을 지속한다.


희곡 그녀1:뭐지~뭐야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아~깜짝이야~너 또 뭐야~ 거울 속 여자 :뭐긴,나야. 그녀1:또 어떻게 들어온거야~대체 너. . . 거울 속 여자 :어떻게라. . .아까부터 계속 방에 있었어~ 쓸고 닦고 할 때부터 말 야~예쁜 거울이야~아늑하겠어~ 그녀1:그래~네가 진짜 거울에 산다면 이제 돌아가~어서 내 앞에서 사라져~ 거울 속 여자 :왜 그래~내가 그리 싫나~ 그녀1:싫어~ 싫어~ 너 따위~ 제대로 알지도 못 하면서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거 역겨워~어서 가~어디로든 내 눈앞에서 사라져~ 거울 속 여자 :같이 가~ 그녀1:웃기지마~내가 왜 너 따위랑~ 거울 속 여자 :그럼 너만 가~ 그녀1:뭐? 거울 속 여자 :너만 가라구~나 말구 너~ 그녀1:그만 하구 어서 사라져~ 거울 속 여자는 팔에 차고 있던 시계를 본다.그리고 조소적 웃음을 띠며 그녀에게 다가간다.


희곡 거울 속 여자 :나랑 바꿔 살아~지금보다 훨씬 더 편할거야. 그녀1:( 거울을 가리키며)나보고 저 좁은 곳에서 살란 말야?편해?편하긴 개뿔~ 말 같잖은 소리.제발 이제 내 눈에서 좀 사라져~ 거울 속 여자 :( 점점 그녀1에게 다가간다)매일 말 걸었잖아~말 걸어줄게.밥 먹을 때,머리빗을 때도~옷 입을 때도~매일매일 말 걸어줄게~그럼 되잖아~ 그녀1:( 뒤로 물러서며)그건. . .난. . .난 너한테 말 건 적 없어.단지. . .단지 ( 사이) 거울에 비친 나한테 말 걸었을 뿐이야~알아? 거울 속 여자 :알아~ 다 알아~ 네가 누구한테 말 걸었는지~ 다 알아~ 혼자만의 세상을 만든 거~거기 갇혀 더 이상 나올 생각도 안 하는 거~그거 다 알아~내가 누구보다 더 잘 알아~널. 그녀1:. . . 거울 속 여자 :한 번도 친구 데려온 적도 없잖아~ 친구 없었으니깐~ 딴 사람 처 럼 친구랑 쇼핑가고 이런 저런 얘기하고 그런 거 무지 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단 거 알아~거울이랑 친구가 되디? 친구가 되냐구~ 그녀1:네가 알바 아니잖아~ 갑자기 ‘ 땡,땡’ 자명종 소리가 열두 번 울린다.시계가 열두시를 가리킨다. 거울 속 여자 :안녕~ 거울 속 여자가 그녀를 전신거울 쪽으로 민다.그녀의 비명 소리와 함께 무대 암전.

#11.그녀의 방 -거울 속 그녀,그녀 뒤바뀐 운명


희곡 무대 밝아지고 거울 속 여자는 그녀의 방에 서 있다.거울 속 여자는 뭔가 행복해 보이는 표정이다.먼지는 쓸쓸한 표정으로 거울 앞에 앉아 있다. 거울 속 여자 :드디어. . .드디어 자유야~그렇게 원하던 자유~어둡고 쾌쾌하고 좁 은 그 곳에서 탈출한거야.드디어 자유를 되찾은거야~ ( 볼을 꼬집으며)아파~ 아프다구~ 거울 속 여자,전신 거울 쪽으로 걸어간다.그리고 거울을 쳐다보며 얘기한다. 거울 속 여자 :어때?그 안이.좁고 어둡고 쾌쾌한 그 곳이.난 말 걸어주는 일 따 위하지 않을 거야~ 밖에 나가 사람들이랑 맛난거도 먹고 농담도 하고 아~ 멋진 남자도 만날거야~나만 사랑해줄 그런 사람 ( 사이)그 런 사람만나서 연애도 하고~ 어딜 가보지? 결혼 전까진 모텔같은데 발도 안 들여놔~절대.그냥 손잡고 맛있는 거 먹고 영화도 보구~해보고 싶던거 다 해볼거야~ 도시락도 싸서 같이 소풍도 가고~ 그렇게말야~ 알아? 그렇게말야~ ( 눈가를 훔치며)그렇게 살거야~바보 같이 너처럼은 안 될거라구~바보. 거울 속 여자는 즐거워하며 무대를 퇴장한다.먼지는 바닥에 누워 꿈틀대고 있다. 거울 속 여자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무대로 뛰어 들어온다.무대를 한 번 휩싸고 돌더니 거울 쪽으로 간다.( 휩싸고 돌 때 먼지와 함께 손을 잡고 돈다)그리고 비명을 지른다. 거울 속 여자 :뭐야. . .뭐냐구.이건 뭐냔 말야.왜.왜.나가야 해.나가야 한다구. 나가야 한단 말야.나가서. .나가서 이때껏 해보고 싶었던 거 다 해봐야 해.그리구 얘기하고 싶단 말야.나도. . .그러고 싶다구.왜 안되는거야~ 왜 나한텐 허락지 않는거냐구~이게 뭐냔말야~제발. . . . 거울 속 여자는 털썩 주저앉는다.그리고 천장을 보며 울먹이며 중얼댄다.그 때 먼지는 거울 속 여자 등에 찰싹 붙어있다. 거울 속 여자 :말도 안돼.이건 아니야.그럴 리 없어.그럴 리가.아니야.아니란 말이야.제발,날 내보내 줘.꺼내줘~ ( 거울 쪽으로 몸을 이끌고 가 서 거울 을 붙잡고)내 말 들리지~이건 뭔가 잘 못 된거야~ 그러니 그러니 대답해.대답하란 말야!


희곡 무대 암전. 12.진짜 세상 N그녀의 방 -또 다른 거울 무대가 밝아진다.거울이 중앙에 놓여 있고,그녀가 웃으며 거울을 보고 있다. 그녀1 :이제 자유야.자유.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렸는데.순진하긴~ 내가 바보라고? 바보는 너야.그 좁은 공간에서 얼마나 힘들었는데. 내 연기력에 넘어가다니~ 딱해~ 네 얘기잖아~ 바보 같은 얘기~ 여기든 거기든 상관없잖아. 상관없으니 맘 편하게 살아.답답하지만 뭐 상관없잖아?마음대로 너만의 세상을 만드는거야~신나지 않아? 항상 혼자,혼자 하더니 정말 혼자가 되는거야~편하게 맘껏~그곳이 더 편할 수도 있어~조금만 조금만 더 자유롭게 지내지~마음먹기에 다른데~ 힘들다 힘들다 하더니 이젠 안 힘들겠지? 고마워~ 네발로 자유롭게 풀어줘서~이 날을 위해 참고 견디길 잘 했어~언젠간 날 찾아올 줄 알았으니까~넌 어차피 거울 속을 선택했어. 거울 속 이 아닌 현실에서조차.어디든 상관없지? 어차피 모두 거울 속인걸 뭐~ 지금 후회하면 뭐해~ 후회해봐야 다시 돌이킬 수 없으니~절대 돌이킬 수 없어~이제 더 이상. . .더 이상은 말이야.왜냐면 ( 거울을 깨부순다)더 이상 널 볼일은 없으니깐. 그녀는 웃으며 퇴장한다.깨진 거울에 조명을 비춘 후 무대 암전. 무대에 ‘ 메기의 추억’ 노래 흘러나온다. 거울 속 여자의 목소리 :상처 속으로 파고 들어가 더는 나오려 하지 않았다.거울 앞에서 매일 내면 깊은 곳에 숨겨둔 나와 대화했다.잊고 싶었다.현재 내 모습을. 숨겨두고 싶었다. ( 사이)그래서 아무에게도 진짜 나를 보여주지 않았다.그러면서 나의 집은 거울 속이 되었다.나도 모르는 사이에. ( 사이) 이제 그만 그 곳을 나오고 싶다 생각했는데.정말 갇혀버렸다.조금만 더 빨리 알았다면 그랬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 사이)지금은 그저 먼지 낀 거울 속에 살 뿐. 먼지를 걷어내고 나의 거울 속에서 나올 수 있게 될까?


수필

자리,그리고 다른 자리 외 1편 자리,그리고 다른 자리 가만히 앉아서 무엇을 하기보다는 어떻게든 살아 숨 쉬고 싶었다.단지 ' 경찰’ 이란 생활이 궁금했다.궁금증에 대해서는 몸으로 느끼는 것이 그것을 해결하는 나의 방식이었다.그렇게 나는 ‘ 의무경찰’ 이란 이름을 가슴속에 새기고 숨 쉬고 있다. 음악 소리가 잔잔히 흘러나오는 새벽.모두가 곤히 잠들어 있는 생활실. 갑자기 청사 내에 대원들은 ‘ 기동복으로 입고…’거기까지만 들린다.스피커에서는 출동을 알리고 있다.또 올 것이 왔구나.선임병들은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투덜대고, 후임병들은 기동복으로 황급히 갈아입고 출동 나갈 준비를 한다.다들 분주하기만 한데 바깥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아무런 일이 없는 것처럼 조용하게만 보인다. 버스에 진열되어 있는 진압복을 껴입고,방패와 봉을 들고 내려선다.허리에는 소화기를 차고…. 집회 장소에 도착했다.진압용 헬멧을 쓴 우리는 어두운 탓에 앞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멀리서 사람들이 운집하여 서성이는 모습만 보일뿐.하나 둘씩 횃불이 보인다.추위와 엄습해 오는 긴장감은 더할 나위 없이 커져만 간다.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기에 피부에 와 닿는 두려움은 더욱 컸던 것이다.우리는 가슴 앞에 방패로 진입을 막는 자세로 그들이 오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한밤중에 일어나는 기자 회견.주위의 기자들도 긴장하기 마찬가지다.도로 위의 그들 옆에 오가는 차량들도 속수무책이다.차량 한 대가 그들 사이로 멋모른 채 선다. 바닥에는 기름이 깔려 있다.한 시위자가 운전자와 실랑이를 벌인다.어디선가 불똥이 떨어진다.순식간에 시위자 몸에 불이 붙는다.불길은 하늘위로 치솟는다.눈앞에서 사람이 타 죽어 가는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소화기를 들고 무작정 그 속으로 들어간다.불은 다행히 꺼졌다.돌아오는 동료들을 그들이 막는다.방패를 들고 진입을 막아서던 우리는 ‘ 앞으로’ 하고 함성을 외치며 동료를 구하러 달려간다.봉과 방패가 그들의 파이프와 작대기에 부딪힌다.동료를 구한 채 돌아오는 우리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아침이 올 때까지 대립할 뿐이다.마음을 사그린 채 그들은 내일을


수필 기약하며 돌아간다. 그렇게 보내 놓고 잠든 우리의 귓가에 들리는 텔레비전 소리.한 순간에 우리는 폭력경찰이 되었다.불붙은 시위자는 세상의 부정에 맞선 채 자살 분신을 한 영웅이 되었다. 지금껏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생생한 장면.본분에 충실했는데도 손가락질 받는 이 잔혹한 인생의 한 부분을 누가 씻어줄 것인가? 얼마 전의 일이었다.학교 내 동아리에서 졸업한 선배들과 재학생들이 모여 야구를 하는 날이었다.방학이 끝나 개강을 하고,군대에 가는 후배를 축하( ?) 하는 자리로 마련된 것이다.선배들이 정성껏 준비한 음식과 그것에 웃음을 띠며 어울리는 모습에,학교 뒤로 등산객이 오가면서 보는 시선은 하나같이 부러운 눈치였다.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고 서로간의 이야기도 꽃피워 갈 무렵이다. “ 음료수가 부족하네…” “ 문혁아,오토바이 타고 학교 밑 마트에 가서 좀 사온나. ”건네는 키를 받는 나는 기분 좋게 달렸다. 일요일이었던지라 학교는 조용했고,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마음은 상쾌하기까지 했다. 학교 정문을 지나 내려가는데 경찰복을 입은 세 명의 의경이 보였다. “ 큰일났다. ” 머리에는 오토바이 헬멧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머릿속에서는 면허증도 안가지고 있고 스티커 끊기면 2만원에…. 온갖 상념이 떠올랐다. 어김없이 의경은 나를 도로 측면에 세우라고 손짓을 하였다. “ 수고하십니다.면허증 좀 제시해 주세요. ” 순간적으로 나의 시선은 이름표를 향하고 있었다. ‘ 0576069721 ’ " 면허증 지금 운동하고 오는 거라 안가지고 있는데,한번만 봐 주세요“ 나이도 나보다 어린것 같은데 하는 생각도 할 겨를 없이 존댓말부터 나왔다. 경찰을 대신해 내 앞에서 권리를 행사하고 있는 것이기에. “ 우선 알겠으니 주민등록번호 불러주세요” 어정쩡한 미소를 지으며, “ 저도 의경 출신인데 한번만 봐주면 안됩니까?” “ 예. . .일단 불러주세요” 면허증은 누구한테도 자랑할 수 있을 만큼 대형· 1 종· 2종 보통 면허를 다가지고


수필 있는데 하나마나지. 면허조회를 하더니 “ 면허증 가지고 계시네요.조심히 타세요” 하고 그냥 보내주는 거였다 안심이 되는 듯 웃음을 띄우며 “ 이거 무슨 단속하는 거에요?” “ 무면허 단속입니다” 허탈했다.‘ 살아가면서 절대로 비굴하지 않고,당당하게 자존심 하나로 힘든 세상 버텨 낼 거다’ 하고 살아왔건만.단속이 어떤 것인지도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만,나도 이렇게 변하는 구나.하는 쓰디쓰고도 복잡한 생각을 했다. 지나간 2년이라는 시간에 나도 단속을 해보면서 나 같은 심정을 느끼면서도 얼굴 표정은 2만원,3만원에 세상을 잃을 것만 같은 표정을 짓는 모습에 쓴웃음을 지었는데 하며 머릿속을 스치듯 생각이 지나갔다. 이 세상은 옷 하나 걸쳐 입는 이유 하나로 그에 합당한 권리를 행사하고,그것을 당연히 수용해야 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불가분의 현실이다. 1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씩 생각한다.부패와 고통을 경험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과 대립할 수밖에 없어 울고 웃었던 과거의 자신과 마음.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당당한 모습을 내보이면서도,속으로는 비굴해질 수밖에 없었던 나 자신을 뒤돌아본다.전경과 시위자 관계,교통 위반자와 검문 경찰의 관계 정립을 바라봤을 때 사람이란 그때그때의 상황에 대처할 수밖에 없는 힘이 없고,한없이 약한 존재일지도 모르겠다.자리,그 자리에 대립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자리,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참된 삶일까.


수필

대학 시험에 대한 외침 손을 뻗으면 잡힐 듯이 잡히지 않는 하얀 기체들이 나의 온몸을 둘러싸고 있다. 잎사귀에는 이슬들이 맺혀 아침을 알려주고 있다.숨을 크게 마셔본다.가슴속에 들어오는 시원함이 온몸으로 전해진다.나는 대학생이다.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왜 다녀야 하는지 목적을 잃은 채 학교에 다니고 있는 듯하다.대학생은 고등학생과 달리 수업을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골라서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자신이 자신 있어 하는 분야를 알고 그것에 탐구하고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나에게는 많은 부담을 덜어주고 있었다. 이 험난하면서도 좁게만 보이는 대학이라는 문에 한 발짝 다가서기 위해 오늘은 선생님이 아닌 교수님이라는 나를 지도해주시는 분들을 뵙는 자리였다.이곳에 오기 위해 나와 경쟁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긴장을 안고 있는 듯하다. 문득 나의 시선은 강의실 벽면을 향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① 하나의 방법은 문학을 인쇄된 모든 것이라고 정의하는 것이다.② 문학을 정의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정말 문학이 뭐지?하는 의문점이 아니라 대학생들 시험 칠 때 커닝 하는구나.하는 부정적인 생각부터 다가왔다. 이것이 몇 십 년이 될지도 모르는 나의 인생에 있어 대학이라는 작은 삶의 첫 인상이었던 것이다. 남자가 되기 위해 2년이라는 시간동안 많은 고뇌와 육체적인 고통으로 ‘ 전역증’ 이라는 자격증을 안고 학교로 돌아왔다.나는 몸 건강히 무사히 귀환한 복학생이자 순식간에 아저씨가 되어버린 예비역이다.마음을 가다듬고 내가 하고자 했던 공부와 쓰고 싶어 했던 글들을 마음껏 써서 이름을 빛내리라는 부푼 포부를 안고 돌아왔다.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는 보이지 않는 허풍 같은 자신감 하나로 공부에 매진하기로 했다.사실 나는 희곡,소설은 분량이 많아 읽는 것에는 지장이 없으나 쓰는 것에는 두려움이 너무나 컸다.하지만 난 이미 누군가 건드리면 바로 달려들 법한 사자의 눈을 가진 예비역이었다.무작정 읽고 또 읽었다.그러한 마음으로 나는 시험이라는 관문에 다가섰다.여지껏 이해수준에 머물러 단답형에 답안을 찍는.자신의 생각에 있어서 보고 느꼈던 것을 서술하는 공부 방식에서 첫 글자를 따서 문장을 만들어 리듬에 따라 외우는 암기공부에


수필 불타는 열의는 누가 봐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그런데 그러한 열의에 소화기를 꺼내고 저 멀리서 누군가가 불을 끄려는 듯 서 있었다.머릿속에는 두 글자가 스쳐 지나갔다.‘ 커닝’ . 오히려 화가 더욱 치밀어 오른다.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만 잘하면 된다고. ” 그 말은 틀렸다.이건 경쟁이다.불공정한 대결이고 그 사람은 지금 반칙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신입생들을 통솔하며,학과에 대한 소개와 대학생활에 대한 궁금증을 조금이라도 더 해소시켜 주고자 다가섰던 게 얼마 전인 것 같다.아무리 답답해도 어찌할 수가 없는 부분은 그저 경험함으로써 알게 되기를 오히려 바랐는지 모르겠다. 대학 시험.4학년이라는 단계를 거쳐 가면서도 왜 치르는지? 이것이 어떠한 과정인지 현실에 대해 아쉬운 부분이 많다.학생은 학교에서 배울게 없다고 한다. 교수가 제대로 안 가르쳐 준다고 한다.교수는 학생들이 공부를 안한다고 말한다. 지금의 학생입장에서 어떤 것이 맞다고 할 수는 없다.평소에는 자신의 전공에 대해 궁금증과 배움을 미룬 채 시험 기간이면 도서관이 새벽에 자리싸움으로 치열하고, 비어 있는 강의실이 짬뽕과 자장면 냄새와 수다로 이야기꽃을 활짝 피우는 학생들. 자신의 학과에 맞는 폭넓은 지식을 쌓고,많은 것을 경험 할 수 있도록 자율적인 공부가 행해져야 하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달랑 종이 한 장 놓여진 곳에 암기한 부분을 옮겨 적어야 하는 똑같은 순간을 우리는 반복한다.단지 시험을 위해 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는 그러한 모습들.시험을 치를 때면 마음을 가다듬기도 전에 자리에 앉아 열심히 책상위에 필기하는 우리 선후배님들.시험지를 받고선,여지껏 세상에 어떠한 눈치에도 굴복하지 않았건만 감독관의 움직임 하나하나 감지해 가며,눈치를 보는 학생들이 있는 반면에 그러한 미세한 움직임을 감지하면서도 시험지 하나에 모든 결과를 내릴 줄 아시는.성적을 적게 주면 자신의 수업이 없어 질까봐 두려워하고,성적을 많이 주면 시험에 대한 판단이 흐려지게 될까봐 앞선 걱정부터 하시는 일부 교수님들. 그러한 자신의 행동은 모두 잊은 채 성적 결과에 연연해서 자신의 자존심 다 버려가며,매달리는 모습들을 보면서 정말 이 같은 시간들을 왜 내가 겪어야 하며, 참고 견뎌야 하는지 모르겠다.누구를 탓하기 전에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서로 인식하고,정말 대학이라는 목적에 안이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바꿔야 할 문제는 아닐까 생각한다. 이렇게 부정적인 면이 뚜렷하게 보이는 대학에서의 시험이라는 제도가 어떤 역할로서 바뀌어 이어져야 하는 것인가?대학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자신이 전공한 분야에 있어서 생각한 것에 대해 피력할 줄 아는 그러한 배움이 있어야


수필 한다고 본다.강의에 대해 무조건 외워서 종이 한 장에 옮겨 적는 그러한 교육이 아니라 교수가 어떠한 문제제기를 한다면 학생들은 그에 맞는 토론이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대학을 다니면서 도서관이 시험공부를 하는 곳이 아닌 각 학과마다의 전공서적이 넘쳐나고,하나의 작은 소재만으로도 책을 읽고,얘기되어 질 수 있는 그러한 모습들이 지금 가장 필요한 방향은 아닐까?


평론

<달의 기원에 담긴 초월적 생명력> ―김선우론 <달의 기원에 담긴 초월적 생명력> ―김선우론 남성적 시각에서 벗어나기 여성들은 90년대 이후 급격하게 무너진 이념과 가치관의 혼란으로 기존의 이분법적인 사고나 가부장적인 제도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함으로써 새로운 가치관의 형성과 대안적 삶을 모색해왔다.남성중심적 가치관이 만들어낸 여성의 모습은 대체로 성적인 대상으로 묘사되거나 주로 사적인 영역,즉 가사에 책임을 지닌 인물에 국한되었고,여성은 남성에 비해 약하거나 열등하게 그려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따라서 남성은 사회· 역사적 맥락안에서 ‘ 보는 존재’로서의 시각적 특권을 누리는 반면에 여성은 ‘ 보여지는 존재’ 로 사물화 되어 남성위주의 시선 속에서 1) 만들어지는 존재로 표상되어왔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여성들은 이제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던 사회, 역사적 이데올로기의 성차별이나 여성으로서 감내해왔던 고통을 풀어놓기 시작하였다.즉 남성적 시선이 아닌 여성적 관점에서 사물과 세계를 인식함으로써 여성적 서정성을 서정시의 전통방식으로 담론화하기 시작한 것이다.남성 중심적 가치관에 의해 위축되었던 여성의 역할이 점차 커지면서 여성이 지닌 잠재력을 발산하게 되면서 여성은 생명을 잉태하고 어머니로서의 모성을 드러내면서 암울한 현실을 넓은 포용력으로 감싸 안는 거대한 생명력으로 자리매김한다.남성에게서 느낄 수 없었던 여성적언어로 쓰인 시들은 여성시단을 풍요롭게 했다.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성에 대한 담론도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수동적이었던 여성의 성적 욕망은 비로소 여성의 입을 통해 거침없이 발화된다. 여성의 몸,고통,사랑 등 내면의 상처를 남성중심적 억압이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넘어 인간적 가치 사유와 생명력으로 품어내려는 여성시인들의 세계가 더욱 심화되는 시기도 바로 이때부터이다.


평론 1996년 『 창작과비평』겨울호에 「 대관령 옛길」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김선우는 첫 시집 『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창비, 2000) 』 을 시작으로 『 도화 아래 잠들다( 창비, 2003) 』 ,『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문학과지성사, 2007) 』세권의 시집을 통해 여성과 모성,생명의 세 가지 연결고리를 보여주었다. 여성성의 차원을 넘어 좀 더 숭고한 의미로서의 여성,그리고 인간으로 나아간다. 여성이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지극히 여성적인 시각으로 발랄하고 자유로운 어투로 이야기를 하고자했다.가령 ‘ ~했다네’ ,‘ ~인 거라’ 처럼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의식의 흐름을 따라 이야기를 전달하는 의식은 이러한 의도에서 비롯된 양식이다.김선우는 여성이 지닌 모성과 자연이 가진 생명력은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데,이러한 사상은 1970년대 후반에 등장한 생태여성주의와 그 명맥이 닿는다.자연생태계와 인간을 하나로 보고 생명의 가치,평등한 삶의 가치를 실현하려는 생태여성주의는 남성중심· 서구중심· 이성중심의 가치로 황폐해진 사회질서 속에서 남성과 문명을 타도의 대상이 아닌 남성과 여성,자연과 문명은 처음부터 하나였다고 인식하며 이들의 어울림과 균형을 통해 모든 생명체의 통합을 3) 강조하는 것이다.

설화( 說話) 로 풀어내는 여성의 주체성 -지모신( 地母神) 설화 김선우는 통합된 생명력과 여성의 주체성을 신화적 여신( 女神) 들에게서 찾아내고 있다.인류초창기 여성 중심 사회,모계사회의 전통을 회복하고 있는데,이것은 지모신( 地母神) 설화와 맞닿아있다.인간은 모든 것을 생산해 내고,만물을 자라게 하는 대지를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생각하고 신으로 숭배했는데,이러한 신을 대지모신( ” 地母神)또는 지모신( 地母神) 이라고 했다.지모신( 地母神) 은 남신( —神 ) 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인 존재로 의존적이지 않은 주체적인 여성의 참모습을 보여준다.김선우의 시에는 유독 남성이 등장하지 않고 오로지 여성만이 등장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미木의 자살2」 에서 잠깐 언급되는 아버지의 모습을 제외하면,남성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김선우는 여성으로서 감내해야하는 현실의 문제를 오로지 여성으로,여성의 몸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으로서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시집에서 자주 언급되는 여성의 음부나 자궁,생리 등 성에 관한 이야기가 거리낌 없이 서술되는 것만으로도 여성독자들에게 은밀한 공감대를 형성한다.참여적이고 선동적인 구호 하나 없이도 여성의 공감을 얻어내는 그녀는 자신과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소소한 이야기로 그려낸다.어머니 또한 어머니이기 이전에 같은 여성으로 자아와의 동질감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자신의 태생적인


평론 체험에서 비롯되고,거기에 강원도라는 문학적 공간과 더해져 확장된 의미를 양산한다.때문에 그녀는 시에는 어머니가 많이 등장한다.시에서 등장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생명을 품는 ‘ 자궁’ 으로 묘사되고 이것은 여성의 생명력을 넘어 우주적,더 나아가 초월적 자연의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자애로운 ‘ 어미木’ 에 대한 기억은 여러 줄기로 갈라져있지만 그 뿌리는 생명으로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시집올 때 가져온 구닥다리 자개장 엄마만큼 늙고 병들었지만 금조개 껍데기를 썰어낸 자개들이 닥지닥지 붙어 있는 늙은 몸 위에서 학이 날고 거북이 구름 속을 슬슬 기어가더군요 소나무 타고 내려온 달이 물속에서 첨벙,밝아지는 몽유록 첫장을 펼치면 학이며 소나무가 물의 자궁 속에 둥글게 박혀 있었습니다 바다가 오래 매만져온 금조개 껍데기에 스며든 바닷물 소리가 갈피갈피 접혀 있었구요 물풀 위로 산란되던 무수한 내가 그렁그렁 떠올라왔습니다 엄마 혼례 때 따라온 자개장 속에서 엄마랑 내가 흠씬 젖은 가을 오후였습니다 -「 가을 구름 물속을 간다」부분 「 가을 구름 물속을 간다」 에서는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자개장에 그려진 학과 거북이가 어머니의 늙은 몸 위에서 뛰논다.이것은 영원히 죽지 않거나 오래 사는 것으로 여겼던 10가지 해, 산, 물, 돌, 구름, 소나무, 불로초, 거북이, 학, 사슴을 그려 넣은 ‘ 십장생도’ 이다.불로장생물 10가지를 그린 십장생도는 일월오악도와 함께 궁중 장식화를 대표하는 그림이며,도가 사상을 바탕으로 한 가장 한국적인 그림이기도 하다.음양과 오행의 화합에 의하여 운행되는 우주 만물의 모습을 그림 한 장에서 감상할 수 있고 꿈과 환상의 신비로운 세계를 느낄 수도 있는 것이 한국의 십장생도이다.도가사상의 ‘ 자연으로 돌아감’ 은 김선우의 여성성모성성생명력으로


평론 이어지는 연결고리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여성의 몸,어머니의 자궁으로 만물을 거대한 우주로써 품어내는 김선우는 우리의 어머니를 우리의 신화로 우리 것으로 가장 한국적으로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대부분의 시에 등장하는 어머니는 개인적인 의미의 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들이 살았던 시대적 아픔과 고난에 대한 역사적 모습과 함께 순환하는 생명이 꿈틀댄다.그것은 ‘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들의 이야기( 「 물로 빚어진 사람」 ) ’ 로 진솔하게 드러난다.어머니는 영원한 사랑의 대상이자 영원한 애증의 대상이다.어머니의 몸에는 여성의 삶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여성으로서 함께 아픔을 느끼고 동질감으로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간다.‘ 무 숭숭 썰어 고등어찌개를 끓이고 물김치 한 보시기 가득 떠놓( 「 둥근 기억들의 저녁」 ) ’ 은 밥상을 내어놓는 기억 속의 어머니는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각별하다.어머니에 대한 각별함은 그녀의 시를 읽어 내는데 있어 중요한 화두로 자리하게 된다.어머니란 나의 생명의 본질이며,근원이고 내가 세상에 있게 만들어 준 존재이다.즉 나를 있게 해준 것은 자연이며 어머니이다.나의 어머니조차 자연이 만들어낸 것이고 나 또한 자연이 빚어낸 결과물이며,자연의 일부인 것이다. 김선우는 단순히 여성주의가 아닌 고차원적인 자연주의로 다가간다.그녀의 시들은 우리의 원초적인 건강과 생명의 명맥과 일치한다.남 녀의 성차별을 떠나서 우리는 어머니의 물큰한 태안에서 출발하였다.어떠한 차별적 대우도 억압도 존재하지 않는 가장 근원적인 공간인 ‘ 자궁’ 을 통해 김선우는 기존 여성들이 주로 다루어왔던 가부장제에 대한 억압이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억압된 여성의 구원의식 -바리설화 김선우의 시는 ‘ 지모신( 地母神) 설화’ 외에도 ‘ 바리설화’ 를 통해 시적 세계관과 독자의 이해의 폭을 넓힌다.‘ 바리설화’ 는 바리데기설화로 부모에게 버림을 받은 공주가 자기를 버린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먼 길을 떠나게 되고,약값이 없는 바리공주는 나무를 3년 해주고,불을 3년 떼 주고,물을 3년 길어 주고,무장승과 결혼하여 아들 일곱을 낳아 주고 힘겹게 약을 구해 아버지를 살린다. 그랬지 저 눈동자,허공을 발라내어 아직 따뜻한 살점 당신 숟가락에 얹어주고 싶었지만 바리,내 어머니,죽음은 한 쌍으로 날아들더라 저승을 헤매어 구해온 영약은 기진한 그네의 희보얀 젖줄기가 아니었을까 바리,피곤에 지쳐,불어터진 젖을 아비에게 물리고 한잠 곤히 든 저 겨울나무의 쐐기풀 같은 육신이 아니었을까 생이라는 이름의 죽음이 더 지독하더라.거듭거듭 제 죄로 죽을병에 걸려 알아눕는 아버지,이제 그만 죽어주세요.달같이 벗은 자작나무 온몸에 열꽃이 돋아 꽃잎을,


평론 강물처럼 쏟아내는 밤이 오고 있었는데 「 어미木의 자살2」부분 4) 바리설화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억압된 여성 의식의 산물이라 볼 수 있다. 기존 질서의 상징인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았으나 도리어 그를 살려내기 위해 고단하고 긴 여행을 떠난 여자,아버지를 살릴 약을 구하기 위해 9년 동안 마음에도 없는 남편의 수발을 들고 일곱 명의 아들까지 낳아야 했던 여자,마침내 이승에서는 병을 고치는 무당으로 남고 저승 세계에서는 저승,죽음을 관장하는 신이자 죽은 사람들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여자,‘ 버림’ 받은 바리.김선우는 바리설화에서 모성과 함께 가부장적인 면모를 읽어낸다.‘ 피 흘리는 엄마들( 「 어미木의 자살1」 ) ’ 사이에서 피곤에 지친 몸으로 나를 버린 아버지에게 나의 불어터진 ‘ 희보얀 젖줄기( 「 어미木의 자살2」 ) ’ 가 나오는 젖을 물린다.이러한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통해 가부장제에 대한 모순을 드러낸다.나의 어머니이기도 하고 시인 자신이며 나의 모습이기도한 바리가 목숨을 걸고 저승에서 구해 온 약은 다름 아닌 ‘ 그네의 희보얀 젖줄기’ 이다.이처럼 여성의 상징이자 어린 아이를 키워내는 동그마한 젖으로 죽어가는 아버지를 살리고 억눌린 여성의 상처를 치유한다.시인은 또 「 물속의 여자들」 에서 바리공주와 함께 ' 이승을 혼자 거닐다 온'시루떡 찌고 있는 명성황후,축문을 쓰는 황진이,어린 남매를 위해 소지를 사르는 허난설헌 등을 한데 불러 모은다.물속에서 질펀하게 벌어지는 잔치는 같은 여성으로서 신화속의 그녀들과 공감대를 나누려한다.설화나 동양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글쓰기 이외에도 스물아홉에 출가한 언니가 불교에 입문해 있거나( 「 선운사,그 똥낭구」 ) ,오빠가 죽은 해 아버지가 심은 복숭아나무를 보면서( 「 다디단 진물」 )흘러나오는 진물 같은 상처, 어린 시절 풋사랑에게서 났던 ‘ 마른 솔잎 냄새’ 와 함께 ‘ 맵싸한 연기에 목울대가’ 아파오는( 「 간이역」 ) 자신의 가족사 이야기에서 시의 진정성이 묻어난다.과잉되지 않은 감정과 그녀의 관념이 탄탄한 내실을 구성해내고 있는 것이다.

육탈한 혼처럼 천지사방 나부껴오는 바람 속에 오래도록 알몸의 유목을 꿈꾸던 빗장뼈가 열렸다 환해진 젖꽃판 위로 구름족의 아이들 몇이 내려와 어리고 착한 입술을 내밀었고 인적 드문 초겨울 마른 억새밭 한기 속에 아랫도리마저 벗어던진 채 구름족의 아이들을 양팔로 안고


평론 억새밭 공중정원을 걸었다 몇번의 생이 무심히 바람을 몰고 지나갔고 가벼워라 마른 억새꽃 반짝이는 살비늘이 첫눈처럼 몸속으로 떨어졌다 바람의 혀가 아찔한 허리 아래를 지나 깊은 계곡을 핥으며 억새풀 홀씨를 물어 올린다 몸속에서 바람과 관계할 수 있다니! 몸을 눕혀 저마다 다른 체위로 관계하는 겨울풀들 풀뿌리에 매달려 둥지를 튼 벌레집과 햇살과 그 모든 관계하는 것들의 알몸이 바람 속에서 환했다 더러 상처를 모신 바람도 불어왔으므로 햇살의 산통은 천년 전처럼 그늘 쪽으로 다리를 벌린 채였다 세상이 처음 있을 적 신께서 관계하신 알 수 없는 무엇인가도 내 허벅지 위의 햇살처럼 알몸이었음을 알겠다 무성한 억새 줄기를 헤치며 민둥한 등뼈를 따라 알몸의 그대가 나부껴 온다 그대를 맞는 내 몸이 오늘 신전이다 -「 민둥산」부분 남성으로서는 경험할 수 없는 신전의 몸을 지닌 화자는 자연과 함께 운우지정( 雲雨 之情) 을 나눈다.‘ 수직은 존재하지 않고’오로지 수평만이 존재하는 산 정상에서 바람과 관계하는 이 야릇한 성적 상상력은 강렬하면서도 범우주적이다.바람이 억새를 슬며시 눕히자 억새는 윗도리와 아랫도리를 벗어던진 채 알몸으로 바람을 맞이한다.화자는 여기서 ‘ 즐거이 자기 몸을 빌려( 「 빌려줄 몸 한 채」 ) ’ 주며 자연과 하나가 된다.이제 여성으로서의 생명력은 자연의 거대한 생명력으로 자신의 ‘ 치마폭에 감싸 안( 「 입춘」 ) ’ 아 여성이기 때문에 쓸 수 있고,여성이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꺼낸다.시편에 낭자하게 뚝뚝 흐르는 생리혈이 그 단적인 증거이다.‘ 생리통의 밤이면/ 지글지글 방바닥에 살 붙이고 싶( 「 포구의 방」 ) ’ 고,파도와 놀다가 파도의 젖을 빨고 파도에게 내 젖을 물리다가 불현듯 뜨거워져 살 좀 섞는 게 뭐 그리 흉이냐고 도리어 묻는 이런 관능적 표현이란!‘ 양수,자궁, 월경,생리혈,젖’등을 통해 자신이 여자임을 한시도 잊지 않고 가장 솔직하게 발현해낸다.도발적이고 풍성한 감수성으로 드러내는 여성의 욕망이 ‘ 흉되지 않으려니 싶어지더라( 「 포구의 방」 ) ’ .늘어놓는 수다 속에서 여성적 삶의 비애를


평론 그려내고,모순된 사회적 관습의 고리를 끊는 일련의 작업을 끝없이 이뤄내고 있다.

달의 기원 -순환에서 완경( 完經) 으로 달이 차고 기움에 따라 변화하는 여성의 몸은 이처럼 순환으로써의 여성성으로 드러난다.일찍이 동양에서 대보름은 여성성으로써의 상징적 의미를 강하게 드러낸다.달을 여성으로 여긴 것은 오랫동안 전해온 지모신( 地母神) 의 생산력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농경사회와 무관하지 않은 역사적 배경과 함께 달은 전통사회에서 중요한 의미로 자리잡아왔다.이처럼 여성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동시에 지모신( 地母神) 의 생산력을 의미할 만큼 ‘ 풍요’ 를 상징한다.모든 생명을 잉태하고 낳아서 제 몸에 품어 기르는 어머니의 구실을 한다.따라서 달의 상징적 구조를 풀어 보면 달여신대지로 표상되며,여신은 만물을 낳는 지모신( 地母神 ) 으로서의 생산력을 가지는 것이다.달은 여성성의 상징으로 지혜와 자애와 포용력을 의미하고 치유,정화의 힘이 있다고 여겼다.이러한 여성의 치유와 정화의 힘은 존재하는 내상과 흘러내리는 상처의 진물을 치유한다.역사나 문화,풍습, 체험의 반복성으로 되풀이 되는 원형적 상징으로써 점차 차오르는 달은 여성성으로 차오른 달은 자궁의 생식력으로 나타난다.또한 ‘ 완경( 完經) ’ 으로 전해지는 순환성의 원리는 보름달의 완전함,완성,성취를 뜻하는 원( 圓) 의 상징적 의미를 반영한다.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방이 무덤처럼 둥글게 부풀어 오르더니만 사방이 69천지인 거라.방구들과 천장의 69,전등과 전등갓의 69,문틀과 문의 69,한 시와 두 시의 69,이불과 요의 69,자음과 모음의 69,모서리와 벽의 69,두 시와 세 시의 69, 얼룩들의 69,얼룩이 얼룩을 낳고 얼룩이 얼룩 속에 제 몸을 비벼넣으면서,쥐오줌과 곰팡이꽃의 69,숟가락과 국그릇의 69,주춧돌과 두꺼비집의 69,옛날 옛적 산이었던 이 터와 지붕 얹힌 것들의 69,죽은 것과 산 것들의 69,어머니 태 속의 나와 어머니의 69 -「 69삼신할미가 노는 방」부분 음식물 찌꺼기며 설거지 물까지 버릴 것 없이 모아둔 큰 독 속에서 한때 빛나던 것들이 제 힘으로 다시 빛날 때 발효한 이 먹이를 돼지가 먹고 돼지의 배설물은 보리밭 거름으로 이쁜 보리들을 길렀다는데요 그래도 이 짐승의 주식이 사람의 똥이었던 것은 생명은 생명에게 공양되는 법이라 행여 남아 있을 산 것들의 온기가 더럽고 하찮은 것으로 취급될까 두려운 때문이 아니었는지 몰라 나라의 높은 분이


평론 보기에 미개하여 시멘트 네 포대씩 무상지급한 때가 있었다는데요 문명국의 지표인 변소를 개량하라 다그쳤다는데요 흔적이나마 통시가 아직 남아 내 몸 속의 방을 향해 손 내밀어 주는 것은,똥누고 먹는 일이 한가지로 행해지는 그곳을 신이 거주하는 장소라 여긴 하늘 가까운 섬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신( 神) 의 방」부분 결코 녹록치 않은 문제를 다루고 있는 김선우 시의 순환원리는 이제 ‘ 69’ 라는 숫자를 전면으로 내세운다.돌고 도는 숫자 6과 9,마치 ‘ 거꾸로 가는 생’ 처럼 뒤집어도 같은 숫자인 69를 통해 여성과 자연의 우주적 순환을 그려낸다.「 69삼신할미가 노는 방」 에서는 쌔근쌔근 늙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교접을 보여줌으로써 은밀한 성적 코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섹슈얼리티로써의 강렬하고 에로스적인 이미지와 함께 ‘ 삼신할미’ 라는 신화적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신( 神) 의 방」 에서는 제주도의 ‘ 통시’ 로 점차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는 전통을 되살리면서 그 안에 담겨있는 선조들의 깊은 생각을 엿볼 수 있다.통시는 우리 몸속에 들어온 음식물이 처음으로 돌아가는 곳이자 자연의 자양분이 다시 생성되는 곳,마지막 처리의 과정이자 또 다른 생명으로 환원되는 곳이기도 하다.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배설 행위에서 자연의 순환적 원리를 찾아낸다.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와 행위들을 가지고 독자와의 공감을 시도하는 그녀는 자칫 관념에 빠지기 쉬운 문제 속에서도 상당한 공감과 감동을 불러일으킨다.완경의 상태로 나아가는 시편들은 ‘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 낙화,첫사랑」 ) ’깨닫는다. ‘ 사랑이 아니라면 오늘이 어떻게 목숨의 벽을 넘겠( 「 아욱국」 ) ’ 냐는 그녀의 대답은 생과 사를 넘어 초월적인 사랑을 꿈꾼다.첫 시집 『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창비, 2000) 』 에서 보여준 다소 공격성을 띤 어조는 달이 차오르듯 풍요롭게 변모한다.세 번째 시집『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문학과지성사, 2007) 』 에 와서는 여성과 자연이 자연스럽게 화해하면서 생명을 포용하는 모성으로써의 사랑을 노래한다.말랑말랑한 언어로 부드럽고 여유롭게 우리의 등을 토닥여주는 것이다.시집에서 보여주는 화해는 부처가 보여주는 자비로운 미소에서 느껴지는 편안함과 ‘ 이 뭣꼬! /부처를 범했더니 거기( 「 벌집 속의 달마」 ) ’ 에 결국 내가 서있다. 이것은 우주가 곧 나이고,내가 우주인 불교의 ‘ 반야의 지혜’ 이다.작은 미물하나도 함부로 살생하지 않고( 「 할머니의 뜰」 ) 한없이 열린 사랑을 실천하는 나는 비로소 완경인,완성된 인간이자 완전한 여자가 된다.세 번째 시집에서는 그동안 김선우가 보여 왔던 여성과 자연,사람과 죽음이 일렬로 나란히 병치되어 나타나는데,비로소 자연과 인간이 서로를 굽어보며 자연스럽게 조응해간다.


평론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이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전문 세 번째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는 더 이상 ‘ 나’ ,‘ 너’ 로 구별되어 인식되기를 원치 않는다.처음부터 너와 나는 ‘ 우리’ 로 하나이다.‘ 나 아닌 것들이 나를 빚어/ 그대 아닌 것들로 빚어진 그대를 사랑( 「 에밀레종 소리 듣다, 일식을 보다」 ) ’ 하게 되는 것이다.그동안 개인적인 굴레에 갇혀 있던 시인은 타자를 인식하게 되면서 밖으로 알을 깨고 나온다.나와 너의 사랑이 아닌 우리의 사랑으로 사랑의 진폭은 그야말로 무한대로 나아간다.이 사랑은 ‘ 마하( Maha) ’ 의 세계이다. ‘ 마하’ 는 단순히 눈으로 감지할 수 있는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한계나 제한이 없는 무한대의 크기를 의미한다.다시 말해서 김선우의 시세계는 시· 공간을 초월한다.공간적으로 무한하고 시간적으로도 영원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영원한 시간성은 무시간성의 개념으로 의식을 초월해나간다.때문에 시인은 서정적 시간인 5) ‘ 영원한 현재’ 에서 ‘ 아무도 사랑하지 못해 아프기보다’지금 누군가를 ‘ 열렬히 사랑하다 버림받게 되기를( 「 목포항」 ) ’ 소망하는 것이다. 세계의 바깥이 아니라 안쪽을 선택한 아기에게 축복의 말을 주는 듯했네 알 속의 그가 선택한 탄생 이전이 그것대로 완전한 생임을 알고 있는 눈치였네…… 자기가 선택한 세계 속에서 온몸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보얀 알과 멧비둘기 부부의 극진한 고요 앞에 합장했네 지상의 새들이 날 수 있다는 건 자기 선택에 대한 최선일 뿐 모든 새가 날아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자고 일어나면 배 밑에 가시풀 같은 깃털이 묻어 있는 열아흐레였네


평론 「 얼룩 서사( 敍事) 」부분 시인은 ‘ 지긋지긋해 아주 이따금밖에 읽지 않는 신문을 보다가’이 중국 설화가 문득문득 떠오른다. 지혜로운 아들에게 허락된 어머니의 무릎은 ‘ 찌르고 싶은/ 난도질하고 싶은/ 겹겹의 오만한 중심을/ 불어 날리고픈’눌어붙은 구들장 아래의 욱신거리는 얼룩들로 남는다.한없이 열린 관대한 사랑 앞에서도 얼룩진 현실의 문제들은 여기저기서 화자를 욱신거리게 만든다.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현실의 상처들은 시인이 타자를 인식하면서 더욱 농밀하게 다가선다.우리역사에서 여성으로서 가장 치욕스럽고 가장 뼈저리게 아파야했던 위안부문제를 다룬 「 열네 살 舞子」 ,새만금 간척 사업문제를 얘기하는 「 뻘에 울다」 등 멍울진 문제들을 메나리토리조로 구슬프게 노래한다.발화되는 문제들은 시종일관 서정성을 잃지 않고 노래한다.그녀가 선택하고 있는 시어들이 ‘ 여자의 몸에서 흘러나온 수천 마리( 「 대포항」 ) ’ 의 건강한 은빛 방어들처럼 살아 숨 쉬며 시결을 풍부하게 만든다.그렇기 때문에 시인의 말처럼,메나리토리조답게 느리게 곱씹어 볼수록 매우 슬프게 들린다.이처럼 찌르고 난도질하고 불어 날리고픈 문제들에 대해 김선우는 ‘ Ev er y bodys hal lwel ov e?’ 로 화해를 시도한다.‘ 그러니 우리,사랑할래요?’ 라고 화해를 요청해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얼룩지고 멍울진 상처를 따뜻한 모성으로 감싸 안으려는 시도이다.이러한 시도는 현생을 넘어 내생을 향한 희망의 메시지가 아닐까. 여성적 서정의 미학 김선우가 보여주는 체험의 강렬함이나 ‘ 기억의 단층들이 피워 올리는/ 각양각색의( 「 대관령 옛길」 ) ’시어는 지극히도 여성적이고 지극히도 서정적이다.우리말을 우리말답게 부려 쓸 줄 알기 때문에 그녀의 말들은 생명력이 가득하다.현재 우리 여성시의 모습에는 미처 다듬어지지 않은 채 여성의 욕망을 드러내기에 급급하거나 과도하게 관념화시킨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여성들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관념과 실험적이거나 해체적으로 난해한 언어는 남성적 언어에 대한 반동과 우리 언어에 대한 파괴로 존재할 뿐이다.새로움에 목말라 늘어놓는 광기어린 이미지와 언어해체는 지양해야한다.굳이 ‘ 여성’ 과‘ 생명’ 을 운운하지 않아도 시 자체로 생명력 넘치는 김선우의 시는 구체적이고 확고한 몸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젊은 시인들이 보여주는 흐릿한 면모와는 대비된다. 시의 본질은 서정이다.변하지 않아야할 본질은 영원불변으로 남아야 한다.그러나 최근 시들은 일그러진 채 왜곡되어 나타남에 따라 서정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평론 가리켜 ‘ 시인은 많으나 시가 없으며 시는 있어도 시정신이 고갈된 시대’ 라고 한다. 서정은 겉멋이 든 번지르르한 말들과 장황하고 추상적인 상징들에 가려 그 모습이 보이질 않고 있다.전통의 질서는 무시한 채 오직 새로움에 목숨을 건 젊은 시인들은 전통과 서정을 낡고 진부한 것으로 간주하고 자신들이 서정의 미래라고 주장하고 있다.소통하기 어려운 그들만의 언어세계,낯선 방식과 지나친 주관화와 독백, 그들만의 이야기로 ‘ 그들만의 미래’ 를 구축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이처럼 서정이 벼랑 끝에 내몰린 시점에서 우리는 서정의 미래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새로움으로 똘똘 뭉친 시세계와 서정의 ‘ 전통적 기원’ 마저 배제하는 젊은 ‘ 미래파’ 시인들로 인해 전통은 무너지고 서정은 위협받고 있다. 시는 언어예술이며, 따라서 언어에 열려있는 가능성이야말로 시의 영원한 미래다.시는 전적으로 언어의 묘미를 살려 독자를 감동시켜야 하는 문학의 장르이며,또한 언어와 끊임없이 대결하여야 한다.그 결과 언어로써 독자에게 다가가는 길을 열어야 하는 것이다.서정시,서사시 또는 순수시, 민중시 모두 시인의 서정을 바탕으로 한다.서정이란 인간의 순수한 감정이다. 이러한 감정은 한순간 솟구쳐 올라 시를 쓰게 하는 기폭제가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시 자체가 될 수는 없다.자신의 솟구쳐 오르는 감정을 써내는 형식으로 서정의 형식만을 빌리는 것은 지양해야 할 일이다.단순히 사적인 감정을 읊는 것은 정서적 반응을 일으키지 못한다.자신의 감정에 빠져 시를 객관화시키기가 힘들기 때문이다.감정은 구조화하여 높은 차원의 예술로 승화시켜야 한다.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시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정을 냉정하게 다스리고 작품과의 거리가 필요하다.인간은 왜 시를 쓰는가?시는 인간의 표현에 대한 욕구를 대변한 것이며,이 표현의 욕구는 인간의 정신적 갈증을 해결하려는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다.시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가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은,시인이 시의 창작활동을 통하여 그 정신을 전달하는 방법으로 삼을 수 있다는 말이 될 수 있다. 문학은 작가와 독자의 소통이 이뤄져야 하고,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때문에 일방적이고 자의적인 문학이 되어서는 안 된다.김선우는 현재 소통을 차단하고 낯설고 모호함으로 똘똘 뭉친 우리 시단의 흐름 속에서 자신만의 시어로 감성적 소통을 가능케 하는 여성적 서정성의 세계를 심화해가고 있다.시편으로 서정의 힘을 유감없이 보여준다.현대시의 진정한 새로움은 전통의 부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통의 쇄신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끝>-


평론 1)로라 멀비( L.Mul ve y) ,「시각과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 Vi s ualPl e as ur eandNar r at i ve Ci ne ma) 」,변재란, 『페미니즘 영화 여성』,( 여성사,1993) ,pp.50-66 2)김윤식, 『한국현대문학사』,( 현대문학,200305) ,pp.615-616 3)김해옥, 『생태문학론』,( 새미,2005) ,pp.155-181 4) 김재희, 『깨어나는 여신 ( 에코페미니즘과 생태문명의 비전) 』,( 정신세계사,2000) , pp.42-47 5)김준오, 『詩論』,( 삼지원,2007) ,p.130 6)김준오, 『 『詩論』, ( 삼지원,2007)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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