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MMY #1

DU MMY #1

four stories about 28th ggul press

contents 서(書) : 자라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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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희의 : 이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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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tle things : 2월의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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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 2월 28일, 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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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적은 것* : 몽유병 소녀와 이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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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얼룩 : Pro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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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이 스물 여덟 날밖에 안 되는 2월입니다. 이번 달은 각자 28일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번 호에는 소규모 창작물을 작가의 긴 숨으로 소개*하는 지면과

반려견과의 이별을 천천히 받아들이며 회복해가는 과정을 덤덤하게 풀어낸 배작가님의 연재만화 <다정한 얼룩>을 내보입니다.

이번 호에 작업물을 보내주신 정혜원 작가님 감사드립니다. 더미는 네 명의 작가가 함께 만들어가는 웹진입니다. 홈페이지(gg-ul.com)의 피드백 게시판에 의견을 남겨주시면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종종 안부를 남겨주셔도 좋습니다.

Mari Kim

자라나서(書)

원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파리로 가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원래라는 말은 수명이 긴 것들에만 붙일 수 있는 수식인 줄도 모르고 ‘원

래’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후 3-4년간 그렇게 하기로 되어있었음을 반복해 말하고 다녀야 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참으로 창피한 일이다. 나는 아버지

를 믿었고, 아버지 또한 나를 믿었을 거다. 그러지 않았다면 문제가 생겨날 수도 없었겠지. 발단은 고등학교 졸업이었다. 나중에서야 안 일이지만 거듭

되는 부적응속에 어머니는 대안학교들을 알아보셨다고 나는 그냥, 부적응이 라기보다는 단지 가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심각 할 건 아니었다. 내가 만들

어 놓은걸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버린 부모님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 던 그런 종류의 문제였다. 그 때 알았어도 어쩔 수 없었겠지만. 부모님은 내

가 스스로 걱정하지 않는 미래를 위해 졸업장을 꼭 쥐어주고 싶으셨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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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 여름, 아버지와 졸업을 걸고 한 거래가 그것이었다. 내 마음 에 원래 그러기로 되어있던 것,

“파리에 가서 3년 정도 사는 것, 그 후로도 머물고 싶으면 생계유지는 알아 서 할 것.”

흔쾌히 거래를 받아들이고 남은 출석일수를 계산해가며 학교를 다니던 중 고

3 겨울 무렵 아버지는 ‘수능을 볼 것’이라는 조건을 하나 더 추가했고 아 그 쯤이야. 하고 수능을 봤다. 두 살 터울의 언니와 수능을 함께 보고 파리에

갈 꿈에 부풀어 있던 나는 이미 도착한 후 3개월 정도의 계획을 세워놓은 상 태였고 아르바이트를 한 돈으로 불어학원을 등록했다. 겨울 아침에 일어나 일주일에 세 번, 학원을 가는 길이 그렇게 즐거웠다.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을

듣고 익히는 것엔 재능이 없는 타입인데 꽤 잘 배워나갔다. 짧은 기간이라 그

랬는지도 모르지만. 학교 친구가 졸업식에 올 거냐는 문자를 보내온 것을 졸 업식이 이틀이 지나서 확인했고, 졸업앨범 어딘가에 있을 내 사진을 생각하

니 끔찍했다. ‘도대체 그런 걸 왜 사는 거야?’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기 그 지없다. 같은 옷을 입은 애들이 줄 맞춘 네모 상자 안에 들어가 있는 모양이

라니. 싫어하는 애 얼굴에 낙서를 하거나 눈알을 파내거나 그런 용도로나 쓰 고 쳐박아 두겠지.

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했는데(나와는 전혀 다른 삶의 방

향성을 가진 사람이다. 좋은 의미로.) 대학 졸업장이 있는 다른 직원과 차별

을 받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고 번 돈으로 학원을 다녀 수능을 다시 봤다. 나 는 돕고 싶은 마음에, 수능을 준비하고 또 수능이 끝나고서도 언니 곁에 주로 붙어 다녔고 떨어져야 할 시기를 놓쳐버렸다.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시간은

봄에 와있었고 나는 파리의 장기체류자가 아닌 대학생이 되어 있더라. 원서

를 넣는 기간에 언니 옆에서 얼쩡거리질 말거나 만약 대학에 간다면 어떤 과 에 가고싶냐는 질문에 쉬이 대답해 버리는 게 아니었다. 언니와 아버지의 작

당이 분명 있었을 거라는 것도 한참이 지나서야 생각했다. ‘나는 원래 파리 로 가게 되어있었고, 그러지 못하게 되자 온 세상을 끌어안고 좌절한 상태’ 에 오래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대학에 가서는 41번 학생이 돌연 입학을 취소해 42번이었던 내가 앞 번호 라

는 이유로 임시 반대표를 맡게 되었고, (그런 자리라면 질색을 하는 타입이었 는데 잠깐 호랑이감투를 쓰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그냥 나인채

로 있으면 넘실대는 암울함을 떨치질 못했을 테니까) 결국 임시였던 것이 고 정직이 되어버렸다.‘잡일을 떠맡은 인간’으로의 한 학기를 보내면서도 파리 에 대한 꿈을 꿨고 일 년을 겨우 채우고는 결국 휴학계를 냈다.(지금 생각해 보면 일 년을 채운 것도 신기할 지경이다.) 집에 돌아와 사실을 알게 된 부모

님께 호되게 혼이 났고 나는 나름 준비한 반론을 이야기 하던 와중에 스스로

의 화를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 한 달 동안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니가 지금 장학금 받고 잘 해도 보내줄까 말깐데 너도 진짜 철도 없다.” 하고 친구가 나

무랄 때도‘사기당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을 만큼 철이 참 많이도 없었다.

알고자 하는 것을 스스로 구해 알아가는 것이 가장 즐거운 배움이었기 때문

에, 배우는 일은 혼자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궁금한 내용들은 부모

님이나 지인들의 대화로 생각을 나누거나 하다보면 자연히 풀어지는 종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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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들 이었다. 아니면 직접 부딫혀 경험하거나. 후에 혼자 곱씹어보고 되짚는

시간이 오래 필요하긴 했지만. 자유롭게 질문하지도 못하는 수업이며 강의도

싫었고 정작 알고자 하는 내용과 다른 것들만을 ‘듣고 있다.’는 기분도 싫 었다. 대학은 그나마 조금 나았다. 혼자 그냥 조용히 좋아하며 지켜보던 친구

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쓰는 글을 무척 좋아했다. 창작 수업 때나 읽어 볼 수

있었지만, 가끔 학교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면 언제나 그 친구가 생 각났다. 그렇지만 더는 오랜 감상에 젖어있을 수가 없었다. 뛰쳐나온 채로 아 무것도 하지 않을 순 없었으니까. ‘파리에 가기 위해 돈을 벌자.’ 학교 밖에서 내가 했던 최선의 선택이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벌고 있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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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에게 돈을 빌리는 상황이 몇 번 발생하고 나서야 내가 돈을 잘 모으는 타 입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참다못한 아버지가 다시 학교로 돌아가

라고 윽박을 지르셨을 때 즈음해서는 나도 나 자신을 참지 못할 지경이었다.

차라리 잘 됐다는 마음으로 돌아간 학교에서 혼자 좋아했던 친구와 재회했고 (친구가 반삭을 하고 나타나 알아보지 못 할 수가 없었다. 그냥 한 번 해보고

싶어서 그랬다는 말을 듣고 다른 사정을 묻진 않았다. 그럴 용기도 없었고)

그 친구 또한 한 학기 휴학을 하고 복학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싼 등록

금을 보며 치받는 분노로(이 시기 에도 이 돈이면 파리에 가겠어! 라는 화가 강했다.) 매일같이 학과창고에서 원고지를 무더기로 들고 집에 귀가했고 할 수 있는 게 고작 그런 것 밖에 없음에 다시 분개했다.

여느 애들처럼 욕을 하면서 그 힘으로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학교

를 다님에 대한 의미의 부재를 또 견디지 못하고 반 학기를 같이하며 조금은 친해진 친구 사물함에 ‘그래도 학교에 다니면서 네 글을 읽을 수 있었던 게 유일한 즐거움이었어.’라는 쪽지를 남기고 다시 휴학을 했다. 여태 휴학 중 이고, 돌아갈 마음은 없다. 친구는 연극배우가 돼서 열심히 공연을 하고 있 고, 나는 어디인지 모를 곳을 여전히 부유하고 있다.

무엇이 되거나 되지 않거나, 스스로 인정 할 수 있는 졸업이, 내 인생에도 찾

아올까. 그냥 있는 나를 나인채로 용인하고 사는 것에도 어려움을 느끼는데,

차피 대수롭지 않은 삶이다. 취업이 인생의 목표가 아닌 삶은 대부분 그런 대

접을 받는다. 치열함이 너무 익숙해져서 다들 뭔가 인간병기 같은 느낌이 들 고, 만나서 하는 이야기 속에 꿈은 사라지고 목표만이, 오로지 목표만이 존재 한다. 그래도 혼자, 묵묵히 원하는 방식의 삶을 가꾸다가, 누구나처럼 좌절하

고 외로운 날들을 보내던 어느 날 꿈꾸는 삶의 장면을 어설프게나마 설명 할 수 있게 되었고 삶의 한 부분을 졸업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방식을 졸업 이라 말해도 될까. ‘원래’ 라는 말에서 떠나온 졸업, 원하는 자리에 오르면

스스로의 힘으로 파리에 가자는 다짐으로 또 한 번 졸업. 보이는 것에 쫓기지 말자, 시기하지 말자는 마음의 졸업도 언젠가는 가능하겠지.

철없던 날들, 철없던 마음, 지나치게 푸르고 노란빛이라 그만큼 이제는 귀

여운 것들. 졸업할 필요가 없었던 상태. 모두가, 연연하지 않고. “이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조금씩은 즐겨가면서. 누군가의 졸업앨범에 끼워 진 얼굴은 잊고

“머물고 싶으면 생계유지는 알아서 할 것.”

Mari Kim / dearnoe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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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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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달력을 보니 입춘이 있다. 봄이 오는 걸까?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춥다. 추울 때도 그렇지만 특히 햇빛이 부족할 때 나는

광합성 하는 식물인양 ‘봄이 왔으면 좋겠다.’ 생각한다.

2월이 스물여덟 날밖에 없는 것은 그런 마음에서 온 게 아닐까.

어서 봄을 맞이하고 싶은 마음에 이틀이란 날짜를 먹어버린 거야. 짧은 날짜의 달력을 보며 ‘새해는 참 바쁘게 지나가는구나,’한다. 이 한 달만큼 한 해도 금방 지나가겠지.

2월이 스물여덟 날밖에 없는 것은 이걸 알려주기 위함이 아닐까. 바쁜 한 해를 보내라고 이틀이란 날짜를 먹어버린 거야.

Kowa / koasou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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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e Hyunjung

Bae Hyunjung / fouroclock.net

Shin Mor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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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 Morae / acrossthecircle.com

small and few

몽유병소녀와 이불 이야기

그날 본, 횡단보도를 조금 벗어난 도로에 그려져 있던 그 선은 얼마 전까지 는 없던 선이었다. 같이 있던 일행에게 없던 선이 생겼다고 조금 부들부들 떨

면서 말했던 것 같다. 사고가 난 후 그려진 흰 선들은 그 동세가 명확하면 명 확할수록 나를 오돌오돌 떨게 했다. 그런 나를 알았을 리 없지만, 함께 있던

일행은 “꼭 이불같네.” 했다. 사실 나는 그 말을 듣고도 그 모양이 선뜻 이불

로 보이지는 않아서 무서움이 가시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니까 갑자 기 좀 귀여워 보이지. 그러니 심각하게 생각하지마.’ 하는 그의 말투는 나를

어르고 달래고 있었기에 같이 웃어 넘겼다. 그리고 일행과 나는 그‘다음’ 횡 단보도에서 헤어졌다. 방금 집으로 돌아와 이 글을 쓰는 나는 오늘도 그 ‘다

음’횡단보도를 지났고 내가 본 그 횡단보도에는 별 다른 선이 생겨 있지 않 았다.

이 만남이 있던 날 이후. 그 날엔 이불로 보이지 않던 그 선이 자려고 이불 속에 들어가 생각하니까, 혹은 혼자 그 횡단보도를 몇 번 더 건너게 되니까,

그때서는 이불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넘어진 이불을 일으켜 세우고 무릎 을 탁탁 털렸다. 자, 너는 지금 발견되었어. 너는 왜 이 바깥까지 뛰어 나왔

을까. 이불이 여기까지 나올 일이 뭐가 있어. 그래서 집에는 무사히 잘 갔니.

“손 쓸 수가 없었어. 손이 없었거든. 잡지 못해서 뒤나 앞에 서 있고 위에 있 거나 밑에 있을 수만 있었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가 한 것 만큼이 전부였어.

그게 내가 좋아한 그 애를 대하는 나의 방식이었어. 나는 있지, 그 아이를 안

고 그 아이를 보고 그 아이를 쫓아갔어. 졸졸졸. 아마 걔가 그 순간들을 기억

한다면 날더러 넌 참 좋은 이불이라고 해주었을거야. 나와 잘 수 있어서 좋았

다고 하면서 내 이마에 볼을 부벼주었을지도. 하지만 그 아이는 몽유병을 앓 았어. 언제나처럼 그 시간이 찾아오면 나의 존재를 눈치채지도 기억하지도 못 했지. 내가 누구인지 보려고 하지도 않았어. 한 침대에 누워 잠이 들고나면 언

젠가 도로 일어나 다음 날이면 기억도 못할 일을 그 애는 반복했지. 아침이 오

면 나는 가지고 있는 기억을 걔는 가지고 있지 않게 되는거야. 그런 것에 상관

없이 나는 그 애의 뒤를 따라 다녔고 그러다 여기에 이렇게─ 그렇게 된거야. 내 마음 속엔 언제나 유서 같은 봉투가 하나 있었어. 거기에 든 종이에는 이런 말들이 적혀 있었지. ‘언제라도 그 순간은 올 것이고 나는 손이 없다. 언제

라도 나는 사라져야 할 것이고 그때 나는 벌써 이 아이에게 소용이 없어져있 다.’ 이런 순간이 올 거란 건 알았어. 우리는 쌍방의 관계가 아니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서로 중복되는 지점이 없었어. 같은 꿈을 꾸기 어려웠지. 하지

만 그런 건 내가 그 애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을 이유가 되지 못했어. 어쩌다가 몽유병에 걸리게 되었을까, 나도 잘 모르지만 몽유병을 앓지 않을 때의 그 애 의 모습도 나는 아니까. 처음 그 애와 맞이한 아침을 기억해. 해가 선명하게

방에 들던 시간 쯤에 눈 뜬 그 애가 나를 허리춤까지만 두르고 방금 자란 대 나무처럼 곧게 등을 펴 기지개를 켜는 것을 보았지. 아침 햇살을 받은 그 애

의 허리는 너무 희고 아름다워서 나는 불안해졌어. 이런 날들이 얼마나 지속 될까. 그게 좋아한다는 말의 다른 의미인 걸 나는 알아. 그 애가 학교에 가고

나면 나는 침대에 혼자 남아 학교에서의 그 애를 상상했어. 학교에 있는 그 모

든 것들이 부러웠어. 하지만 의자는 모르는 그 애의 흰 등을 나는 알고 있으

니까 괜찮다고 생각했지. 책상은 알기 어려운 그 애의 부드러운 뒷목을 나는 알고 있으니까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나와는 너무 달라서 오히려 난 그 애를 믿었지. 뭔가 발화점 같은 썩은 속이 있을 거라고. 처음엔 궁금했지. 그 애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아무 것도 책망하지 않는 것을 해내기로 했어. 그만한 사정이야 말하지는 못했지만 분 명히 있을 거라고 믿었지. 나는 그 애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기로 한거야.

있지, 지금 내가 하는 말들은 그 애에게 비밀이야. 어쩌면 그 애도 알고 있을

테지만 그냥 혼자만의 생각일지도 모른다는 여지를 남겨두고 싶어. 내가 이 걸 확실하게 말해버린 걸 알면 그 애는 자책하고 슬퍼할거야. 아닌가, 이제는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우리는 이제 헤어졌거든. 나는 이제 그 애랑 같은

침대에서 자지도 않고 그 애가 기억 못할 순간까지 열심히 쫓아다니지도 않 아. 다만, 여기에 이렇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 있다보니 몇 가지 소식

은 보이네. 하지만 이제는 따라가지도 않고 따라갈 수도 없지. 이제 그 애에 겐 새 이불이 생겼어. 그 애 엄마가 선물해 주었어. 그건 내가 그 애 곁을 떠

나던 날의 일이기도 하고, 어쩌면 그게 내가 그 애를 떠나야 했던 이유이기 도 해. 걔네 엄마가 밉지 않냐고 묻겠지만, 새 이불이 밉지 않냐고 하겠지만, 난 그렇지 않아.

사람이 이 빌어먹을 고운 이불과 같아지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소리 내어 누군가의 이불이 된 순간을 호명하지 않는다. 이불처럼 함구하고 살아가 는 누군가들의 이야기. 그들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

런 일이 그들이 아꼈던 상대방에게 대신 일어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몽유

병 소녀와 이불 이야기]에서 이불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책을 보시면 아시겠 지만 그와 상관 없이 당신에게도 이러한 때가 온다면 당신도 부디 당신의 방 법으로 행복했으면 좋겠다. 우리는 어쩌면 어느 시에서처럼 한 번 만나 영원 히 헤어지는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일지도. 그래서 화내지 않고 보 채지 않고 그냥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런 목소리, 조심스러운 발걸음

을 구현해내고 싶었다. 그것이 원래는 길어질 뻔 했던 텍스트를 다 지워내고

최대한 목소리를 덜어낸 이유이자 사실은 이렇게 더 보태고 싶었던 이야기를 책에는 싣지 않은 이유이다.

제작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 책을 만드는 것은 많은 말을 하지 않는 것 그 자체이기도 하고 그러한 태도를 옮겨오는 작업이기도 했다. 그리고 혼자

수심을 모르는 물에 작대기를 빠트릴까 조심하면서 집어 넣어보는 일이기도 했다. 이따금 한 번에 꽤나 긴 길이를 물에 넣어야 할 때는 괜히 큰 소리로 이

거 괜찮은거야? 하고 외쳐보는 심정으로 SNS에 SOS를 보내면서.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이렇게 느리게 그려내고 펴내는 일은 흥미롭게도 느리게 빠졌다

가 빠르게 차오르는 바다의(그런 바다가 있을 리 만무하지만) 썰물과 밀물 같 다. 입을 다물었던 동안 멀찍이 떨어져 있던 주변이 빠르게 나에게 귀속되는 것을 느끼고 있다. 지금 이렇게 이 페이지에 글을 쓸 수 있듯이. 여러분이 길

바닥에 엎어진 나를 일으켜 세우고 무릎을 털어주고 머리에 붙은 지푸라기를 떼어주고 튀어나온 솜을 꾹꾹 다시 밀어 넣어주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마 이불에게는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침대에 누워 이불이 따라갔을 어딘가를 상상해보기도 한다. 이제는 아니지만.

어찌되었거나, 그 애는 아무 선도 그려져 있지 않은 다음 횡단보도까지 무사 히 잘 가야해. 나는 걔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어. 아마 내가 바라지 않아

도 그 애는 그렇게 되겠지만 말이야. 난 슬프지 않아. 아마 그 애는 지금쯤 길

을 건너고 모퉁이를 돌아 반갑게 누군가와 기억할 만한 순간을 만들어 내고 있겠지만. 난 정말 슬프지 않아.

이렇게 목소리를 내어보았다.

너의 꿈에는 내가 없었겠지만 니가 꿈을 꾸러 가는 걸 나는 지켜봤지. 그리고 나의 꿈에서 수도 없이 너를 보았다. 아, 이제 다음 횡단보도다. 잘 지내, 안녕.

정혜원

1989년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자전거를 혼자 배웠다. 주로 혼자 지 낸다. 남산 일대에 살고 있다. [몽유병 소녀와 이불 이야기]가 첫 작품이지

만 블로그에 그림과 글을 간헐적으로 게시하고 있다(굴러다니는 동그라미 myblueO.egloos.com).

- 정혜원 작가가 만든 <몽유병 소녀와 이불 이야기는> 몽유병을 앓는 소녀

와 그 소녀를 지키는 이불이 어느 날 밤에 겪게 되는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 이다. 66페이지. 1도. 6,000원.

- 구매는 작가의 이메일(mybluecircle@naver.com)로 문의하면 안내를 받을 수 있다. 현재 입고처는 없으나, 당장 구매가 어렵거나 구매하기 전에 한 번

읽어보고 싶다면 홍대 ‘한잔의 룰루랄라’에 들러 그 곳에 비치되어 있는 책을 찾아보시길 권한다.

*작고 적은 것에 작업물을 소개하고 싶은 분은 ggul_press@naver.com으로 문의

다정한 얼룩은 연재만화입니다. 3월 호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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