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여름 호 통권 109호
우리 아이 함께 키우기, 더불어 사는 세상 만들기
차례
여는 글
기획
004 아이들은 다 다르다 | 박혜란
공동육아 졸업생 이야기, 그 두 번째
010 스스로 선택해서 사는 삶, 공동육아에서 배우다 | 이야기 마당 038 공동육아, 기억의 공동체 | 이부미 044 산집에서 자라 산골 아이들을 품다 | 조담 051 내 이야기를 만들며 즐겁게 살아간다 | 김지원
열린 창문 세상 이야기
056 딸아이의 머리를 빗겨 주는 시간 | 신순화 060 어린이집 운영을 교육이 아니라 사업으로 보다니 | 이주영 063 밀양 할머니의 눈물, 대안은 없는가? | 하승수
표지의 ‘공동육아’ 글씨는 신영복 선생님이 1996년에 썼습니다. 표지 그림 ⓒ 현덕 글 | 김환영 그림 | 나비를 잡는 아버지 | 길벗어린이 공동육아를 졸업하고 세상 속으로 걸어 나간 청년들을 보면서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나 성장통 을 앓는《나비를 잡는 아버지》 의 주인공 바우를 생각했습니다.
교육 나눔
068 싹이 자라고 열매가 자라고 아이가 자란다 | 김용환
옛이야기 날적이
086 모시 짜는 여자, 소쿠리 짜는 남자 | 이송희 098 다른 관계에서는 어떤 모습을 보일까 궁금해집니다 서울 우리어린이집
지역 공동체 학교 이야기 마을 공동체 이야기
106 선생님, 일루 와요! | 성태숙 113 ‘우리’라는 담장을 넘어서 더 큰 ‘우리’와 마주하기 | 정혜령
독서 일기
124 명랑한 할머니의 따뜻한 가슴을 느끼며 | 김혜정
탈핵 이야기
129 핵 발전소! 지금 멈추어야 합니다 | 박흥렬, 탈핵에너지교수모임
함께 읽는 책
132 숲이라서 할 수 있는 것들 | 김미자
그림책 이야기
138 심심해서 그랬어 외 | 김미자
두레박의 작은 우주 097 | 시로 쓰는 세상 122 | 놀래놀래 140 | 터전 주소록 142
2013년 여름 호, 통권 109호 | 펴낸곳 (사)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 | 펴낸이 박혜란 | 편집위원 이송지, 윤우경, 정영화, 조현제 | 편집 이송희 | 디자인 봄밤에별은 | 인쇄 한학문화 | 주소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481-2 태복빌딩 201호 (서울시 마포구 동교로 114 201호) | 전화 02-323-0520 | 전송 02-323-1695 | 전자우편 gongdong @ gongdong .or.kr
누리집 http://gongdong .or.kr | 독자 커뮤니티 http://journal .gongdong .or.kr
004
어느 한가한 오전, 습관처럼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기이한 사람들의 이야기 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에서 우연히 여덟 살짜리 한 소년을 만났다. 소년은 1분 안에 가위로 종이를 오려 온갖 동물을 만들어 냈다.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종이를 썩썩 오리기만 했는데 금방 똑같은 동물이 태어 났다. 생선 가게에 가서는 비린내 나는 생선을 주무르면서 유심히 생김새를 파 악하더니 처음 본 생선인데도 가위로 뚝딱 오려 냈다. 춤 잘 추고 노래 잘하는 아이들이 넘쳐 나는 세상이지만 이렇게 눈썰미와 손재주가 뛰어난 아이는 내 경험상 처음이었다. 소년은 학교에 갔다 오면 몇 시간씩이고 A4 용지와 씨름 을 한다고 했다. 가위질을 할 때 집중력이 얼마나 강한지 그 에너지가 화면 바 깥의 내게까지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그야말로 포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같은 또래 손자가 둘이나 있는 할머니로서 저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솜씨에만 놀란 건 아니다. 다른 아이들은 이런 거 안 하는데 넌 왜 이런 걸 하느냐고 제작진이 묻자, 소년은 “사람은 다 다르니까요” 하고 지극히 담담하 게 대답했다. 아니, 그 대답에 앞서 소년은 “사람은 다 같은가요?” 하는, 허를 찌르는 반문으로 “아니”라는 제작진의 대답을 끌어내어 어리석은 어른의 말 문을 막아 버렸다. 우문에 현답도 이 정도면 가히 달인의 경지라 할 만하다.
여는 글
아이들은 다 다르다 박혜란 (사)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 이사장
여는 글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에게 종이로 오린 동물을 선물해서 인기가 높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다 다르다
는 시간이 적다고 걱정을 내비쳤지만 내가 보기에는 소년의 사회성은 아무런
005
젊은 부모는 소년이 자랑스러우면서도 또래 소년들처럼 밖에 나가서 뛰노
‘사람은 다 다르다.’ 여덟 살짜리 소년이 이미 깨닫고 있는 이 사실(또는 진실)을 모든 부모들이 솔 직히 인정만 한다면 아이를 키우는 일이 지금처럼 힘들고 괴롭지는 않을 거라 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괴로움은 내 아이가 다른 아이와 다른 존재라는 사실 을 부인한 채 내 아이를 다른 아이와 무작정 비교하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이 다. 그 다른 아이는 대개 아이와 가장 친한 친구, 옆집 아이, 친구네 아이, 친척 네 아이처럼 평소 부모가 잘 아는 아이들이다. 어렸을 때부터 다른 아이가 먹는 것, 입는 것, 노는 것과 똑같이 먹고 입고 놀지 않으면 불안해하다가 조금 자라서는 다른 아이가 배우는 것은 다 배워야 마음이 편하다는 부모들이 너무 많다. 다른 아이가 축구 교실을 다니면 내 아 이도 다녀야 하고, 피아노 학원을 다니면 내 아이도 다녀야 한다. 그냥 다니기만 해서도 만족하지 못한다. 다른 아이만큼 공을
모든 아이에게는 무언가 그 아이만의 특별한 것이 있다. 아이들을 한 줄로 세워 놓고 ‘너는 특별한 애’ ‘너는 보통 애’ ‘너는 모자란 애’라고 평가하는 짓은 폭력이기 전에 무지다. 공동육아 통권 109호
006
멀리 차야 하고, 다른 아이가 치는 만큼 피아노를 쳐야 한다. 아니 솔직히 다른 아이보다 더 멀리 공을 찰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아이보다 피아노 진도가 더 빨 라야 한다. 내 아이가 공차기보다 달리기를 더 좋아하고 피아노보다 북치기를 더 좋아 한다는 사실은 아예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네가 뭐가 부족해서 다른 아 이가 하는 걸 못 하냐, 부모가 힘닿는 데까지 뒷바라지할 테니 넌 시키는 대로 만 하면 된다’고 비장한 자세로 아이의 등을 떠밀 뿐이다. 그런 부모가 자기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뒤처지는 꼴을 도저히 이해할 수 도, 용서할 수도 없는 건 당연지사다. 아이가 공차기나 피아노를 다른 아이보 다 잘 못 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많은 부모들이 모든 아이는 다 ‘비슷하므로’ 능력도 ‘거기서 거기까지’ 라는 착각에 빠져 사는 것 같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서도 부모의 착각은 바뀌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아이 가 자랄수록 착각은 더욱 심해진다. 내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성적이 뒤처지 는 까닭은 아이가 ‘게으르거나’ ‘딴 데다 정신을 팔거나’ 심지어는 ‘부모를 골 탕 먹이려는’ 짓으로 해석된다. 화가 난 부모가 내세운 나름의 해결책은 간단 하다. 아이를 더욱 더 가열 차게 닦달하는 것. 물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모는 과연 짐작이나 할까. 공부를 잘하고 싶은 욕심은 있지만 잠 안 자고 열심히 하는데도 성적이 안 올라서 스스로 기가 죽은 아이의 마음을. 또는 공 부보다는 다른 것을 하고 싶어도 부모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말도 꺼내지 못 하고 끙끙 앓는 착한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뒤처져서 괴로워하는 부모들은 저 여덟 살짜리 소년 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내 아이는 다른 아이에게 ‘뒤처지는’ 게 아니 라 다만 ‘다를’ 뿐이다. 모든 아이들은 다르다. 모든 아이에게는 무언가 그 아
여는 글
이만의 특별한 것이 있다. 아이들을 한 줄로 세워 놓고 ‘너는 특별한 애’ ‘너는
007
보통 애’ ‘너는 모자란 애’라고 평가하는 짓은 폭력이기 전에 무지다. 여덟 살
아이들은 다 다르다
짜리 소년도 아는 걸 아이를 잘 키우고 싶다는 어른들이 모른다면 그게 바로 무지가 아니고 뭔가. 손주들을 봐도 그렇다. 여섯 명이 어쩌면 달라도 그렇게 다른지 신기하다. 가끔 어떤 손주가 제일 예쁘냐는 쓸데없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도대체 ‘제 일’이라니, 이처럼 어리석은 질문도 없을 게다. 얘는 이래서 예쁘고, 쟤는 저래 서 예쁘고, 걔는 그래서 예쁜데, 어떻게 제일 예쁜 손주가 따로 있을까. 그런데 도 사람들은 집요하게 묻는다. “그래도 제일 어린 손주가 제일 예쁘지요?” 나 는 대답한다. “제일 어린 손주는 제일 어려서 예쁘고, 제일 큰 손주는 제일 커 서 예쁘고……….” 아이들은 다 다르다. 다 다르니까 다 귀하고 예쁘다. 어른들이 아이들은 다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모든 아이들을 귀하게 대접한다면 부모와 자녀 관계도 좋아질뿐더러 아이들 세계의 왕따 문제는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닉 부이치치, 팔다리가 없이 태어났음에도 행복 전도 사로 세계를 누비고 있는 그의 인터뷰 기사에서 어렸을 때 다른 아이들의 놀 림 때문에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는 이야기를 읽고 두 가지 생각 때문에 한참이나 가슴이 먹먹했다. 한 가지는 만약 그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자신과 다르게 생겼어도 똑같이 귀한 존재라고 가르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고, 또 하나는 그런 데도 부이치치의 부모가 아이를 끝까지 밀어 주고 믿어 주었기 때문에 아이가 딛고 일어설 수 있었구나 하는 존경심이었다. 내 아이는 다르게 생겼을 뿐이지 모자란 존재가 아니란 그 믿음. 요즘 부모 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바로 그 믿음이 아닐까.
공동육아 통권 109호
기획
008
공동육아 졸업생 이야기, 그 두 번째
지난 2009년에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다닌 졸업생 이야기를 들어 보았습니다. 그에 이어 이번 호에서는 ‘공동육아 졸업생 이야기, 그 두 번째’로 공동육아 어린이집과 방과후 학교를 졸업한 아이들과 이들과 함께한 교사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습니다. 아이들은 벌써 20대 청년이 되었으며, 세상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공동육아가 청년들의 삶에 남긴 발자국은 무엇이며, 이들은 다시 어떤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가고 있는지 그 이야기를 들어 봅니다.
공동육아
009 졸업생 이야기, 그 두 번째
공동육아 통권 109호
기획
010
공동육아 졸업생 이야기, 그 두 번째
스스로 선택해서 사는 삶, 공동육아에서 배우다
정리 | 이송희
어떻게 더 즐겁게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김지원
사회 김지원 목수
안녕하세요, 사회를 맡은 김
지원입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한발(한발먼저딛는아이들)방과
이야기 나누는 사람
후를 졸업하고 분당 이우중・고등학
강병오 까마귀, 과천 무지개학교 교사
교를 나온 다음에 군대를 다녀와서
이상원 학생 최윤지 학생 최인영 학생
때 2013년 3월 9일 오후 1시30분~2시30분 곳
서울시 소방학교 강당 (창의1관)
목공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대학 은 가지 않았고요. 지금 스물세 살이 고, 어떻게 하면 대학을 가지 않고 더 즐겁게 살 수 있을지 고민도 하고 공
공동육아
011 졸업생 이야기, 그 두 번째
부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차례대로 소개를 할 텐데 잘 들어 주세요.
다니기도 했고요. 중학교 3학년 때는 한발방과후 도보 여행 들살이에 자 원봉사로 참여했고, 대학생 때도 까 마귀랑 무지개초등학교 아이들 지리 산 종주하는 데 자원봉사로 참여했
후 졸업생 이상원입니다. 스물다섯
습니다. 저는 분당 이우고등학교를
살이고, 방과후에는 초등 4학년 때
나왔고, 일반대학을 졸업했습니다.
부터 6학년 때까지 3년 간 다녔고요.
전역하고 나서 어떤 큰일을 하기 위해
방과후 다니면서 까마귀랑 같이 종
서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강 여행도 가고 지리산 종주도 하고
어 편입을 해서 지금 신소재공학과
자전거 전국 일주도 했습니다. 방과
에 첫 학기를 다니고 있고요.
후 졸업 후에도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요즘 아무래도 새로운 환경이다 보
는 방과후가 좋아서 들살이를 따라
니까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가 가장
스스로 선택해서 사는 삶, 공동육아에서 배우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발방과
이상원
공동육아 통권 109호
기획
012
큰 관심사고요. 저는 태양에너지 연
고요, 열리는어린이집은 네 살에서
구를 많이 해서 대체에너지 발전 전
열 살까지 그리고 튼튼어린이집이랑
반에 기여하여 화석 에너지 패러다
한발방과후를 2학년부터 5학년까지
임을 친환경 에너지 패러다임으로
다녔어요. 5학년 때 미국으로 2년 동
바꾸는 것이 꿈입니다.
안 유학을 갔다 와서 일반 중학교와 외고를 거쳐 지금은 영어영문학과 3
최인영
안녕하세요. 최인영입니다.
저는 열리는어린이집 1기 졸업생이
학년에 재학 중입니다. 제 이름은 최 윤지입니다.
고요, 그다음에 튼튼방과후에 가서
요즘 대만에 교환학생으로 가게
지내다가 한발방과후까지 갔어요.
되어서 그 준비와 중국어 공부를 하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일반 초등학
느라 약간 바쁜 상태예요. 한발방과
교에 가서 일반 중학교, 일반 고등학
후에서 풍물이랑 연극을 엄청 좋아
교를 나와 현재는 대학에서 간호학
했는데, 그것이 인연이 돼가지고 고
을 전공하고 있어요. 저는 몸에 관심
등학교와 대학교에서도 연극 동아리
이 많고 간호학이 저에게 맞는다고
를 하고, 요즘은 대학로에서 연극 보
생각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고요,
는 것이 취미입니다. 반갑습니다.
삼성병원에서 봉사도 하고 있어요. 대학에서 밴드 동아리에 들면서 밴
강병오
반갑습니다. 저는 공동육아
드에 관심이 많아졌고, 저를 표현하
에서 까마귀라고 불렸고, 현재 무지
는 시간을 가지면서 앞으로 어떻게
개학교에서도 까마귀입니다. 오늘 강
살아갈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갑
병오라는 이름은 한 20년 만에 처음
습니다.
읽어 보는 것 같은데요………. 1993년도에 정병호 교수님 만나서
안녕하세요. 저도 인영이와
공동육아에 첫발을 내디뎠고요, 한
같이 열리는어린이집 1기를 졸업했
2000년까지 한발먼저딛는아이들방
최윤지
공동육아
재 과천 초등 무지개학교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지난해는 안식년이었고, 올해 휴직을 해서 지금은 일식집에
김지원
이제 질문을 할 텐데요. 저희
서 열심히 설거지를 하고 있습니다.
가 학부모님들이 좀 궁금해할 만한
올해 나이는 마흔두 살입니다.
것을 정리해 봤어요. 지난 1999년에
아이들과 지내는 게 정말 행복했
졸업생과 이야기 나눈 시간을 토대
기 때문에 다른 일 다 제쳐 놓고 어린
로 해서 세 개 정도 준비했는데요. 첫
이집부터 방과후, 무지개학교까지
번째는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다니면
오게 되었습니다. 지난날 행복했고,
서 재미있었고, 기억에 남는 에피소
지금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게 정말
드가 있다면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
행복하다는 걸 알고 있고요.
에요. 저는 자전거 여행이나 지리산 종
에 땅을 보고 다니는데, 그곳에 1999
주, 풍물 전수 이런 큼직큼직한 일이
년에 한 번 진행했던 공동체 틀을 일
좋은 기억으로 남더라고요. 그중에
궈 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서도 초등학교 때 풍물 전수에 가서
과천 초등 무지개학교 경우는 장애
처음으로 막걸리를 먹고 많은 큰 실
아동들과 통합 교육을 하고 있기 때
수를 한 것, 이런 것이 기억에 많이 남
문에 그 지역에서 영국이나 독일에서
네요. 인영이는 어땠는지…….
진행되고 있는, 공동주택도 있고 함 께 살 수 있는 공동체 마을을 한번 만
최인영
저도 지원 오빠랑 같이 풍물
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
전수를 갔다 왔는데, 그게 많이 기억
중에 그 공간을 만드는 데 댓돌이 되
에 남아요. 풍물 전수 갔을 때도 정말
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미있었지만, 그 전에 들판에서 돌
스스로 선택해서 사는 삶, 공동육아에서 배우다
현재 관심은 제가 4년 전부터 지방
졸업생 이야기, 그 두 번째
들과 함께 무지개학교를 설립해서 현
새로운 관계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방법을 배우다
013
과후를 만들고, 2003년도에 과천 분
공동육아 통권 109호
기획
014
아다니면서 장구랑 북을 쳤던 게 기
준비가 힘들어서이기도 하지만, 저희
억에 많이 남거든요. 그렇게 풍물 연
가 12박 정도 다녀올 때 모든 식사 메
습도 하고, 뛰어다니면서 얼음땡도
뉴나 정보 같은 걸 스스로 짰거든요.
했던 게 정말 재미있었고요. 또 일상
준비하면서 회의도 하고, 가서 텐트
생활에서 들살이를 가면, 산에 무덤
도 치고 음식도 만들었는데, 부모님
가 있잖아요, 무덤가에서 얼음땡도
을 떠나 자율로 할 수 있었다는 데서
하고 놀았어요. 다른 아이들은 무덤
자주심도 길러지고, 그런 힘든 경험
가에서 뛰어놀기가 쉽지 않잖아요.
이 다 추억이 되어서 좋았습니다.
그런 기억이 저한테 많이 남았고요. 흙바닥에다 그림을 그려서 오징어발
이상원
제 경우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놀이랑 땅따먹기 같은 거 했던 것도
까마귀랑 같이 지리산 종주 했던 게
대개 기억에 남아요. 그다음에 자전
기억에 굉장히 남는데요. 옷도 다 싸
거 여행을 갔다 왔는데요, 저희가 처
서 가고 코펠하고 텐트, 음식 같은 거
음으로 엄마, 아빠를 떠나서 12박 정
다 싸서 가서 비박까지 하면서 음식
도를 다녀왔어요. 그 전에 준비를 오
도 만들어 먹고, 비오는 날에 산행도
랜 기간 했거든요. 서울대공원에서
하고, 야간 산행도 하고, 일출도 보고
자전거 연습도 많이 하고, 그렇게 갔
이랬던 것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다 와서 기억에 많이 남는데요. 그때 제가 허방을 디뎌서 자전거를 못 타
김지원
그러면 그런 기억들이 우리가
게 됐을 때 예민해져 친구들하고 싸
졸업을 하고 나서 살아가는 동안 무
운 게 힘들었지만 지금은 좋은 추억
언가 도움이 됐다거나, 어떤 의미로
으로 많이 남습니다.
다가왔다거나 이런 게 있으면 이야기 를 해 주면 좋겠는데요.
최윤지
저도 인영이처럼 자전거 여행
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요. 그 과정과
이상원
저는 공동육아 방과후에서
공동육아
보낸 일들이 굉장히 따뜻하고 소중
이가 있습니다. 여섯 살이었는데, 아
015
한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때 기
침마다 엄마를 깨워 도시락 두 개를
억이 많이 도움이 되었고요. 지금까
싸 들고는 일곱 시가 되면 제가 보러
지 살면서 에너지를 많이 쓰고 기력
나가는 길에 늘 서 있습니다. 그리고
도 많이 썼는데 그럴 때 아주 중요한
어린이집에 나왔다가 다시 제가 다른
졸업생 이야기, 그 두 번째
원천이 그때 추억이나 기억이 아니었
애들 태우러 갈 때 그 차에 타서 도시
나 생각합니다.
락 두 개를 나란히 펼칩니다. 아침에 밥도 못 먹고 운전하는 까마귀 힘들
김지원
그럼 까마귀도 저희랑 같이
지내면서 즐거웠던 기억이나 특별히
까 봐 그랬던 겁니다. 그게 가장 큰 기 억 가운데 하나고요.
기억에 남는 거, 꼭 즐겁지 않더라도
두 번째는 진달래 선생님하고 약
그런 일이 있나요? 아니면 그런 일을
여섯 달 준비해서 어린아이들 데리고
겪으면서 어떤 의미를 느꼈는지 말씀
22일 동안 전국을 돌며 자전거 여행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을 한 겁니다. 오로지 텐트 쳐서 야영 하고 밥을 지어 먹으면서 하루에 100 킬로, 또는 60킬로 넘게 다녔습니다.
여기서 몇 박 며칠을 이야기해도 아
단순히 그냥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마 다 말씀드리지 못할 겁니다. 지금
여행이 아니라 많은 것을 함께 쌓았
이렇게 청년이 된 이 아이들과 함께
습니다. 많은 추억을 남긴 여행이었
한 시간이 너무도 고맙거든요. 많은
지요. 그리고 두 번째 이 친구들하고
일 가운데 몇 가지만 정리해 보겠습
12일 동안 여행을 했고요.
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추억 하나가, 지
어린이집 시절 가장 큰 기억으로
금 저기 청년이 된 상원이라는 친구
는, 홍콩에 가서 이제 얼마나 큰 청년
가 6학년 때, 어느 날 예쁜 언니들 사
이 됐는지 모르지만, 재형이라는 아
진이 박힌 명함만 한 전단지를 길거
스스로 선택해서 사는 삶, 공동육아에서 배우다
살아 온 시간이 있기 때문에
강병오
공동육아 통권 109호
기획
016
리에서 주워 왔더라고요. 그러면서
야 될지 그날 진땀이 났는데, 저 친구
도대체 이게 뭐냐고. 아, 저도 놀랬지
만 불러 놓고 조용히 얘기했지요. 이
만, 요즘도 아마 현장에서 성교육 고
건 굉장히 중요하고, 너만 알고 있으
민을 많이 하실 겁니다, 걔가 이제 6
라고. 그래가지고 아주 진한 성적 이
학년이 돼서 알 만한 나이가 됐는데
야기를 저 친구하고 나눴더니 그 옆
이 전단지 사진을 어떻게 설명해야
에 있던 5학년 여자애가 깔깔거리고
될지, 하나 설명을 시작하면 많은 것
웃더라고요, 별거 아니듯이. 그래서
을 열어 주기 시작할 건데 그걸 열어
아, 이걸 너무 어렵게 접근해서는 안
주는 순간 거기에 너무 관심이 가서
되겠구나. 어차피 바깥세상 나가면
혹시 다른 길을 가지 않을까 생각도
많은 것들이 보일 텐데 그걸 물어볼
했지만, 상원이를 붙잡고 진지하게
때 좀 더 편안하게 이야기해 주는 게
얘기했지요. 이 언니들 사진이 어떤
우리한테 가장 맞겠구나 하고 생각했
사진이고, 어떤 내용인지. 그러고 나
지요. 그날 그 육구는 지난번 술자리
서 어느 날, 제 말을 수긍하는지 전단
에서 다시 이야기해서 굉장히 재미있
지를 갖다 버리고 가더라고요.
는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그 옆에 안경 낀 친구(김지원)는 어 느 날 학교 갔다 오더니 대뜸, 이것도
김지원
여전히 상원이 형과 저는 여
좀 성적인 내용입니다, “까마귀, 육
자를 많이 좋아합니다, 하하, 그때 잘
구가 뭐야?” 하더라고요. “야, 육구
배워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
는 어디서 봤길래?” “어떤 언니들 사
게요.
진 보니까 ‘육구 가능함’ 이렇게 적어
공동육아는 기존 유치원이나 방
놨는데, 이게 뭐냐”고. 아, 그날 좀 충
과후와 좀 다르게 사교육이나 공교육
격이었습니다. 이 초등학생들한테
보다는 아이들이 건강하고 재미있게
육구라는 걸, 상당히 성인물에서 나
뛰놀면서 즐겁게 자라는 것을 중요하
올 법한 행동들인데, 어떻게 설명해
게 생각하는데, 이런 공동육아의 경
공동육아
험이나 환경이 졸업을 하고 나서 살
고 그랬는데요. 저는 그렇게 1년 정
017
아가는 데 어려움이 되지 않았나 하
도 공부를 하지 않고 지내다 전학을
는 질문이에요. 예를 들자면 학업 성
가게 됐어요.
졸업생 이야기, 그 두 번째
적과 관련한 어려움이라든가 아니면
이사를 가서 일반 초등학교에 다
교우 관계와 관련한 어려움 이런 것
니는데, 다른 친구들은 어릴 때부터
들이요.
영어, 수학 학원에 다니면서 공부를
저는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사
많이 해 왔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중
고뭉치로 좀 유명했고요. 그래서 워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데 좀 어려움
낙 공부 같은 것과 인연이 별로 없었
이 있었던 건 사실이에요. 기초도 되
던 처지에 딱히 충돌이라고 할 만한
어 있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많
게 없었는지도 모르겠는데, 사고뭉
이 고민했어요. 그러다 학교 선배들
치였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공동육
따라서 학원을 다니게 됐는데, 학원
아에서 너무 자유로웠던 저의 성격과
에서 아, 여기 받아 줄 수 없다고, 너
학교가 가진 틀 사이의 충돌이라고
는 기초가 안 되어 있다고, 그래서 쫓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겨난 거예요. 그 학원 이름도 기억해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보면
요, 최고학원이라고. 그래서 조그만
좋을 것 같은데, 인영이는 어땠는지
동네 학원에 다니면서 학교 공부를
얘기를 좀 해 주세요.
따라가기 시작했어요. 중학교 처음 들어갔을 때 5백 명 중에 3백 등 정도 했어요. 잘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
제 사촌 동생들도 영어 유치원 다니
게 시작했다가 학원에서 친구들하고
고 공부를 열심히 하더라고요. 그런
경쟁이 시작된 거예요. 그게 나쁜 경
데 지금도 그렇고, 우리 때도 그렇고
쟁이 아니라 ‘아, 쟤 잘하네!’ 이러면
공동육아는 공부를 시킨다기보다는
서 스스로 재미를 붙이는 경쟁을 해
스스로 하고 거의 산과 들에서 뛰놀
서 수학 공부를 했고, 중학교 3학년
스스로 선택해서 사는 삶, 공동육아에서 배우다
저희 때와 요즘은 많이 달라
최인영
공동육아 통권 109호
기획
018
졸업할 때는 30등까지 올라갔어요.
모자란 지식을 가지고 시작할 수도
지금 부모님들이 걱정을 많이 하
있어요. 하지만 공동육아에서 그런
시는데 진짜 공부에 재미를 붙이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길러 주고,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찾아서 하는 것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인지
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저희 어
할 수 있게 해 준다고 생각해요. 그래
머니도 지금까지 공부를 강요하지 않
서 학업 면은 저와 동무들도 많이 걱
고, 그게 저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정했지만, 그렇게 많이 걱정 안 하셔 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상원
저도 인영이 경우랑 비슷한데
요. 제가 방과후 졸업하고 중학교에
최윤지
처음 올라갔을 때 시험 본 게 평균이
돌이 없었는데요. 제 동생이 열리는
50점이 나왔어요. 전교생이 5백 명
어린이집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올
이었는데 그중에 4백몇 등을 했거든
라갔는데 한글을 하나도 못 했어요.
요. 그때 저도 부모님도 충격을 많이
첫 3월 달에 “햇볕은 따뜻한”이라는
받고 ‘아, 이제 공부를 해야겠구나!’
그런 어려운 받아쓰기 시험을 봤는
생각해서 그때부터 공부를 해서 3학
데, 동생이 빵점을 맞은 거예요. 가
년 때는 평균 한 90점까지 나왔던 기
족들이 다 충격을 받고서 이제 애를
억이 있고요. 또 그 뒤에도 앞으로 제
좀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하고 시작했
가 뭘 하기 위해서는 기초가 되고 실
는데, 좀 오래 걸렸지만 그래도 그렇
력이 있어야겠구나 생각해서 편입을
게 공부를 하면서 점점 나아지고 이
결심해서 성공한 경험이 있고…….
제는 학교에서도 좀 잘하는 정도가
공동육아 방과후에서 학교 과목,
저는 제 자신한테는 그런 충
되었어요.
수학이나 영어 지식을 가르치지는 않
그렇게 처음 시작은 다를지 몰라
기 때문에 방과후 졸업 후에 다른 아
도 점점 더 맞춰 가는 힘이 생기는 거
이들보다 좀 더 낮은 위치에서 또는
같아요, 공동육아를 다니면.
공동육아
윤지는 공동육아에 다닐 때
대 출신들이지요. 서울대 출신인 데
019
부터 늘 책을 들고 다녔어요. 그래서
다 서울대를 자랑하지만 그 사람들
공부를 너무 잘해서 충돌을 안 한 경
이 가진 건 다 획일화되고, 같은 것이
우고, 저는 공부를 안 해서 충돌이 없
지요. 교육이, 삶이 추구해야 하는
었던 경우고요. 저 같은 경우 다른 충
건 행복일 텐데, 부모들은 자기 아이
졸업생 이야기, 그 두 번째
돌이 있었다면 이우학교에 가서 아이
를 경쟁에 뒤처지지 않게 하려고 본
들과 뭘 하고 놀까 고민하다가 땅에
질을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지원
오징어발놀이 판을 그려서 같이 하
우리 삶에서 오로지 행복해 본 적,
자고 했는데, 아무도 그걸 모르는 거
모든 걸 쏟아 넣어서 행복하게 살아
지요. 우리만의 놀이 문화 같은 거니
본 적이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해 본 적
까, 공동육아 안에서. 처음에는 제가
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시절
힘이 많이 들었나 봐요. 놀이문화를
그 추억 속에서 정말 행복했다, 그리
같이 공유할 수 없다는 게.
고 그걸 바탕으로 해서 앞으로 더 행
그런데 그런 문제들은 시간이 오
복할 수 있는 또 다른 설렘을 만들어
래 걸리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지나
내고 내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다 보면 새로운 관계 속에서 새로운
생각한다면 내가 추구하는 것, 내가
방법을 찾아가는 거고, 그 방법을 찾
만들어 가는 것을 더 자신 있게 해 나
아갈 때 좀 더 잘 해낼 수 있는 힘을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공동육아에서 얻지 않았나, 이런 생
까마귀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얘기 를 듣고 싶어요.
에서 자아라는 걸 발견하지도 못하 고, 과연 내가 뭘 위해서 쫓아가고 있 는지도 모른 채 어른이 되어서 또 다 른 길을 찾으려고 고민하는 분들이
제가 서울대 후문 쪽에서 일
굉장히 많지요. 지금까지 내 걸 가져
하고 있습니다. 손님 대부분이 서울
본 적이 없고, 모두가 똑같이 가야 할
강병오
스스로 선택해서 사는 삶, 공동육아에서 배우다
각을 좀 하고 있고요.
모두가 똑같이 이야기하고, 그 속
공동육아 통권 109호
기획
020
곳이 있고, 그 길 위에 내가 서 있다
을 누리고, 그 행복이 바탕이 되어야
는 것도 모른 채 오로지 경쟁에 살아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
남기 위해서 교육이라는 걸 받습니
각해 봅니다.
다. 한 친구가 영어를 하면 모든 친구 가 영어를 합니다. 결국 그 영어를 하 면서도 또 다른 뭔가를 해야 살아남 고, 또 그걸 뛰어넘기 위해서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을 제쳐 내고, 그렇게 한
마음이 열리고, 삶에 당당해지며, 앞길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되다
것을 자랑합니다. 교육에서 가장 추구해야 할 것은
김지원
마지막으로 공동육아에서 보
우리가 지금 행복한가 하는 질문이
낸 기억이나, 거기서 알게 모르게 배
라고 생각하거든요. 이 행복을 어떻
운 것이 이후의 삶에 영향을 미친 게
게 만들어 내고, 그걸 바탕으로 아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하는 질문
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어떻게 더
이에요. 윤지부터 말해 보지요.
행복한 삶을 찾아갈 수 있게 할 것인 가? 어쩌면 가장 행복해야만 좀 더
최윤지
나은 삶을, 자기 둘레를 돌아보는 삶
이 저를 더 마음이 열리고, 귀가 열리
을 만들어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고 그리고 자주적인 사람이 되게 했
어린 시절, 그 시절만은 진정한 행복
다고 생각해요. 어릴 때 공동육아에
최윤지
저는 공동육아에서 보낸 삶
공동육아
서 도롱뇽 알도 모으고 감자도 캐고
어요. 엄마가 이혼을 하고 혼자 저를
021
이러면서 보통의 도시 아이들과는 다
키웠는데,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
르게 자연과 함께 살면서 좀 더 많은
이 저를 편견을 가지고 바라본다면
경험을 해서 더 열린 마음을 갖게 된
어린 나이에 상처를 받고, 또 남자 앞
것 같아요. 또 예전에 방과후에서 모
에 나갔을 때 주눅이 들 수도 있다,
졸업생 이야기, 그 두 번째
이면 까마귀가 설교를 많이 해가지
이렇게 생각해서 방과후에 보냈어
고 다들 지루해서 몸을 배배 꼬꼬,
요. 방과후 부모님들은 저를 딸처럼
회의나 토론만 하면 무슨 말을 해야
생각해 주고, 내가 뭔가 다른 사람이
할까 고민을 많이 했지만, 그런 경험
다, 이런 시선을 갖지 않았어요. 그래
을 해서 지금 자주적으로 생각하고,
서 방과후를 좀 일찍 나왔지만, 그 다
남의 말을 잘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된
음에도 제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
것 같아서 좋아요. 자전거 여행이나
었고, 그게 방과후를 하면서 얻은 가
지리산 종주도 힘들었지만, 그 힘으
장 큰 경험이에요.
로 나중에 더 힘든 일을 겪을 때 내가 그때 그 일도 이겨 냈는데 지금 힘든
이상원
저는 아까 계속 말씀드린 것
것도 이겨 낼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
처럼, 공동육아에서 겪은 일이나 추
게 된 거 같아서 정말 좋습니다.
억이 제가 살아가면서 생활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의 큰 부분이에요. 공
최인영
저는 한 부모 가정에서 살았
동육아에서 배운 삶의 태도, 예를 들 스스로 선택해서 사는 삶, 공동육아에서 배우다
공동육아에서 보낸 삶이 저를 더 마음이 열리고, 귀가 열리고 그리고 자주적인 사람이 되게 했다고 생각해요.
공동육아 통권 109호
기획
022
면 같이 회의를 하면서 힘들어도 집
김지원
저도 공동육아가 우리 삶에
중해서 다른 사람들 말을 듣고, 간식
어떤 영향을 미쳤나, 아니면 단순히
도 건강한 걸 먹고, 주마다 여행이나
공동육아에서 얼마나 즐거웠나 하
들살이 갔을 때 메뉴나 이런 것도 스
는 것만 가지고도 며칠 밤을 새서 이
스로 선택하고 했던 자주적인 삶의
야기해도 끊이지 않을 만큼 기억이
태도가 지금 많이 남아 있고요. 어떤
많은데, 상원이 형이 말한 것처럼 저
것을 받아들일 때 스스로 판단해서
한테도 이런 기억이나, 은연중에 들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어요.
었던 까마귀 잔소리 같은 것이 계속
또 한 가지 크게 생각되는 게, 그때
해서 삶에서 힘든 순간에 힘이 돼요.
는 부모님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제가 대학을 가지 않고 목공소에
있었는지 잘 몰랐지만, 은연중에 우
서 일도 하고 인문학 네트워크 같은
리 앞길을 우리가 선택할 수 있게 해
데를 찾아다니면서 공부하기로 결정
주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한 거나, 결정하고 나서 실천하면서
다른 사람들처럼 초등학교 중학교 고
살아가는 거, 이런 삶에 대한 거부감
등학교 대학교 졸업하고 취직, 이런
도 공동육아를 다녔기 때문에 덜할
길만 있는 게 아니라 내 앞길을 내가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도 들어요. 이
선택할 수 있다, 이런 것을 은연중에
렇게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알게 되어 그런 부분이 제 삶에 큰 영
더 크게 만족할 수 있는 게 결국에는
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다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
한 부모 가정에서 살아서 어머니가 공동육아에 보냈는데, 부모님들이 딸처럼 생각해 주고, 내가 뭔가 다른 사람이다, 이런 시선을 갖지 않았어요. 그래서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었어요.
공동육아
는데요.
수요가 크게 있습니다.
졸업생 이야기, 그 두 번째
까마귀도 한 말씀 해 주시면 좋겠
구 7만 도시여도 대안 쪽을 바라보는
023
을 저는 하고 있습니다.
공동육아의 시작은, 가장 큰 핵심 은 함께 사는 게 아니었나 생각합니
공동육아나 무지개학교 교사
다. 함께 키우고, 함께 사는 것. 우리
로 살면서 굉장히 강성으로 살아왔
한테 가장 중심이 된 것은 좋은 터전,
습니다. 반골 느낌이 나지요? 타협 잘
좋은 교사, 좋은 교육 내용입니다. 이
안 하고 앞만 보고 달리고, 어쩌면 정
것이 우리 아이들을 키우는 데 가장
말 융통성 없이 살아가는 사람처럼
중심이 되는 순간, 이제 고개가 한쪽
되도록 큰 변화는 바라지 않고 처음
으로 돌아가게 되는 건 당연한 순리
을 어떻게 살려 낼 것인가? 어쩌면 그
라고 생각합니다. 일반 어린이집이나
걸 살려 내기 위해서 더 반골이 되고
유치원, 그 닫힌 문화에서 우리 아이
강성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가 어떤 음식을 먹고, 교사와 하루 종
강병오
3년 전에 교사로 출발하면서 한 어
일 어떻게 보내는지 전혀 모르는 상
린이집에 학교 설명회를 간 적이 있습
태에서 그것이 기폭제가 되어 교육의
니다. 과천에는 대안학교가 세 곳 있
전환을 꾀한 게 공동육아 어린이집
고, 공동육아 어린이집이 네 곳 있었
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지요. 그리고 발도로프 유치원도 몇
제는 이곳에서 자란 아이들이 감성
군데 있고요. 과천은 좁은 도시, 인
을 충분히 유지한 채 조기교육도 받 스스로 선택해서 사는 삶, 공동육아에서 배우다 공동육아 통권 109호
최인영
기획
024
아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 바라는 부
속에서 키운 느낌과 감성이 음악을
모들이 점 점 점 늘어나고 있지 않나
하는 데 가장 큰 중심이 되고 있지 않
생각합니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나, 하는 겁니다.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를 갖
공동육아 어린이집은 많이 늘어났
고 다른 것까지 더 가지면 큰 무기를
고, 보육 조건도 현재 일반 어린이집
가지게 되는 거지요.
보다 아주 좋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 독일에 가서 바이올린을 하
재정 상태가 안 좋은 공간이 있겠지
는 친구가 있는데, 스물다섯 살쯤 됐
만요. 그렇다면 좋은 교사, 좋은 환경
습니다. 바이올린을 하기에는 아주
을 갖추고 나서는 무엇을 추구할 건
늦은 나이죠. 이미 더 어릴 때부터 했
가? 이것을 생각할 때 3년 전 학교 설
어야 하는데. 그 친구의 가장 큰 이야
명회를 갔다 와서 놀란 게 있습니다.
기가, 하루 종일 공동육아 친구들과
현장에서는 어떻게 고민하고 있는지
어울려 다녔던 시간, 어쩌면 그 시간
모르지만요.
에 내가 바이올린을 했으면 기교는
과천 지역 대안학교는 공동육아
더 늘어났겠지만 감성은 못 가졌을
를 바탕으로 해서 진행되었다고 해도
거라는 겁니다. 온종일 자연에서 누
과언이 아닐 겁니다. 튼튼어린이집을
리고, 학원에서 연습하는 시간을 다
졸업하고 일반 학교에 가는 아이들에
빼고 친구들과 12시부터 7시까지 자
게 학원 생활이 아닌 다른 생활을 경
연에서 뛰놀면서 함께 누린 시간, 그
험하게 해 주고 싶어서 처음 두 친구
이상원
공동육아
를 데리고 방과후 학교를 시작했지
민을 조금 덜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
025
요. 그 아이들이 30명, 40명이 되고,
각이 들었습니다.
졸업생 이야기, 그 두 번째
다시 3학년이 지나서 4학년이 되자
저희 학교 같은 경우도 시간이 지
그럼 큰아이들은 또 어떻게 할 건가,
나면 교육 소비자들이 늘 거란 생각
그러면서 큰아이 방과후를 만들었고
이 듭니다. 과연 어떤 교사들이 있는
요. 저는 방과후가 과천 지역에서 청
가, 어떤 여건을 갖추고 있는가, 그걸
소년 센터로 좀 더 나아갔으면 하는
바라보면서 내 아이가 지낼 만한 특
바람이 있었지만 좌절되어 학교로 옮
별한 공간이 있는가를 생각하겠지
겨 가게 되었어요.
요.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늘어난 만
설명회 나갔을 때 현재 공동육아
큼 선택하는 방법도 더 다양해졌다
부모들에게 대안학교는 운동이 아니
생각합니다. 좀 더 재정 여건이 좋은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여러분
데, 좀 더 교사 조건이 좋은 데, 좀 더
한테 운동을 지향하라고 강요할 수
환경이 좋은 데를 찾겠지요.
는 없겠지요. 하지만 대안학교가 단
그런데 현장이 있고 그곳에 일이
순히 내 아이가 어떻게 하면 좋은 학
있는 게 아니라, 그곳에 사람들이 모
교, 좋은 조건을 따라 갈 건가 하는
여서 일을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공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현재
동육아 어린이집을 시작한 지 20년
내가 이 집단 안에서 어떤 생각으로
이 다 되어 갑니다. 공동육아 어린이
어떻게 뜻을 펼쳐 나갈 건가 하는 고
집이 다른 어린이집, 일반 사립 유치 스스로 선택해서 사는 삶, 공동육아에서 배우다
다른 사람들처럼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졸업하고 취직, 이런 길만 있는 게 아니라 내 앞길을 내가 선택할 수 있다, 이런 것을 알게 되었어요.
공동육아 통권 1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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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
원 변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세상은 변한 게 없습니다. 바깥세상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20년이
은 그대로 경쟁 속에서 살고 있고, 아
다 되어 가는 이 집단이 앞으로 무엇
직까지도 개인이 가진 능력보다는 학
을 해 나가야 할지, 내용과 철학을 좀
벌을 따지려 하고 있습니다. 19년 가
더 많이 고민해야 할 시간이 아닌가
까이 성장해서 사회에 나왔는데 세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한 번 시작하
상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아
고 더 성장할 건가, 아니면 주저앉을
이들한테 큰 좌절을 가져다줄 수 있
건가. 우리가 처음에 했던 게 뭔지,
습니다.
그걸 그대로 유지할 수는 없지만 현
공동육아든 다른 대안학교든 이
재 시점에서 앞으로 우리 아이들을
대한민국 안에서 하려고 했던 일은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사회는 변
다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조
하지 않는데, 우리 공간에서 그냥 달
건에서 이 아이들이 자유롭고 행복
콤한 시간을 보내고 바깥에 내보내
하게 자라고, 자기 꿈을 펼칠 수 있
는 게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자라고
고,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정말 훌륭하
있는 이곳에서 자연은 어떻게 변하고
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있으며, 또한 그것을 어떻게 유지해
삶이 경쟁이 아니라면 우리는 현재
나갈 건지, 그것을 부모님들과 함께
여기서 뭘 해 나갈 건지, 어떻게 해 나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갈 건지, 이걸 바탕으로 해서 앞으로
그때 애들이 청년으로 자랐지만
이 아이들을 생각할 때 부모로서 어
아이들이 청년으로 자랐지만 세상은 변한 게 없습니다. 19년 가까이 성장해서 사회에 나왔는데 세상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아이들한테 큰 좌절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공동육아
떻게 살아 나갈 건지, 그런 것을 함께
건가를 고민하고, 인생에서 가장 중
027
고민해야 할 시간이 아닌가 하는 생
요한 어린이집이라는 공간에서 그 꿈
각이 들었습니다.
의 싹이 터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
졸업생 이야기, 그 두 번째
저희가 학교 설명회를 다시 나가지
다. 굉장히 중요한 노릇을 여기 있는
않기로 한 건, 공동육아는 대안학교
부모님이나 선생님 들이 하고 있다는
를, 좋은 학교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생각이 들거든요. 그 때문에 단순히
그 대안을 바탕으로 어떻게 학교를
교육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나의 현
만들어 갈 것인가를 이웃과 함께 나
장, 우리가 함께 나갈 길이 어떤 건지
누어야 할 시간이 되지 않았나 하는
좀 더 고민하고, 함께 틀을 넓혀 가야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공동육아는 대안학교의 큰 모태 가 된 게 맞습니다. 별개가 아닙니다.
김지원
저희가 오랜만에 만났거든
공동육아가 있었기 때문에 대안학교
요. 저도 그렇고 상원이 형도 그렇고,
가 있었고, 공동육아가 있었기 때문
전역하고 처음으로 만났고요. 그런
에 아이들이 꿈을 가지고 자라고 있
데 이번에 만나서 몇 번 얘기하다 보
습니다. 단순히 어린이집에서 좋은
니까 저도 그렇고 다들 즐겁고 행복
양육 조건, 질 좋은 조건을 제공하는
하게 살고 있었어요. 그런 모습들이
문제가 아니라 그 아이들이 시간이
결국에는 이런 말보다 설명을 더 잘
지나서 청년이 될 때 어떻게 살아갈
해 주고 있지 않을까, 저는 그런 생각 스스로 선택해서 사는 삶, 공동육아에서 배우다 공동육아 통권 109호
강병오
기획
028
을 많이 했고요. 공동육아에 대해서
입장이라거나 그런 것을 깊게 생각할
또 다시 한 번 정리해 볼 수 있어서 저
만한 나이나 환경은 아닌 것 같아요.
한테도, 우리한테도 아주 좋은 시간
스무 살이 지나고 이것저것 많은
이었고요.
생각을 하게 되는데, 부모님의 정치
저희가 준비해 온 이야기는 여기까
적 의견이 아이들한테 주로 많이 반
지고요. 이제는 질문을 받는 걸로 하
영되지 않나,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
겠습니다.
요. 스무 살이 지나면 투표도 하게 되지만, 자기가 어떤 문제를 느끼고 그것을 해결하고 싶어서 투표를 하
질문과 대답
고 이런 정도는 아니잖아요? 부모님 이 누굴 뽑으니까 나도 누굴 뽑아야
생뚱맞은 질문일 수도 있습
지 이런 식이거나, 친구들이 누굴 좋
니다. 우리 젊은 친구들은 정치적으
아하니까 누굴 뽑아야지 이런 식인
로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묻고
데……. 저도 투표와 관련해서는 엄
싶습니다. 저는 이 사회가 바뀌기 위
마 아빠의 의견을 따랐다고 할까요?
해서는 진보적인 생각을 해야 한다고
공동육아를 하셨던 분들이니까, 어
생각하는데, 공동육아를 거친 사람
쨌든 세상을 바꾸기 위해 좀 진보적
들이 지금 20대를 살아가는데, 과연
인 선택을 하시는 분들이니까…….
질문
어떤 정치적인 입장을 갖고 있는지
꼭 투표가 아니더라도 저 같은 경
궁금해요.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될
우에는 얼마 전에도 밀양 송전탑 운
지 모르니까……. 알려 주시면 좋겠
동하는 곳에도 다녀왔거든요. 그러
습니다.
니까 공동육아가 정치적으로 어떤 생각을 가지게 하는 것보다 사회 문
아주 중요한 질문이라 생각합
제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노릇을 하
니다. 그런데 아직 우리가 정치적인
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공
김지원
공동육아
동육아 자체도 어떻게 보면 정치적으
교를 다녔어도 ‘아, 그때 생각해 보면
029
로 교육에 대한 어떤 생각을, 입장을
참 젊고 재미있었고 좋았지’ 하는 것
가지고 있는 집단이잖아요? 그런 것
처럼 새삼 편견이 있기도 한데, 혹시
들이 결국에는 아이들이 다른 사회
그런 것이 작용하는 건 아닌지 하는
문제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생각도 들어서 밝은 면뿐만 아니라
졸업생 이야기, 그 두 번째
주지 않았는가? 어떤 색깔이라기보
힘들었던 일도 이야기해 주면 고맙겠
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습니다.
질문
네 분이 모두 공동육아 어린
이상원
저는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를
넘어갈 때 아이가 그렇게 심하게 어
을 대표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
떤 체제에 대해서 반발하거나, 이건
요. 아마 여러분은 이런 자리에 나와
아닌 거 같다며 선생님한테 말할 만
도 떳떳하고 만족하기 때문에 나올
한 나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요.
수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
제가 이우학교를 나왔기 때문에 그
고요. 여러분이 아는 친구든 선배든
체제에서 대학 체제로 넘어갈 때 그
후배든 공동육아 어린이집이나 방과
에 대한 사례를 몇 개 알고 있는데,
후를 다니고 다시 주류 교육 시스템
아무래도 연극이나 예술 쪽으로 가
으로 들어가면서 아주 힘들게 몸살
는 아이들이 많이 힘들어하더라고
을 앓았던 친구도 있을 거라는 생각
요. 저희 고등학교나 공동육아 쪽은
도 들거든요. 그런 친구들은 어떤 생
선후배 관계가 서로 평등하고, 강압
각을 하고, 또 지금 그 지나온 날을
으로 맺어지지 않는데 대학 문화, 더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런 것이 궁금
구나 예체능 쪽 계열은 그런 게 심하
하고요.
니까 많이 힘들어하고 학교를 자퇴하
그리고 한편으로는 제가 선생님들
거나 외국으로 나가는 경우도 많이
이 학생을 때리는 시절에 맞으면서 학
있었어요.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사
스스로 선택해서 사는 삶, 공동육아에서 배우다
이집과 방과후 학교를 다닌 친구들
공동육아 통권 109호
기획
030
이에서 힘들어하는 아이는 아직 보
어울리고, 함께 먹고, 함께 지냈죠,
지 못했습니다.
학교 안에서. 그런데 요즘은 나눠진 다는 겁니다. 중학교에 올라가는 순
오랜 시간 동안 아이들이 갈
간 공부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
등했던 경우는 한 명도 없었다고 생
로 분류돼서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
각합니다. 늘 그 아이를 키우는 부모
은 나쁜 아이로 분류되는 아이들과
님이 갈등하지요. 이건 자신 있게 말
관심을 가장 못 받는 처지가 되지요.
강병오
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이는 학교, 학
우리 어른들이 어릴 때는 함께 자
원 가기 싫고 오로지 방과후 친구들
라고 그 속에서 친구들 때문에 아주
하고 뛰놀고 싶은데 늘 부모 손에 끌
행복했지만 요즘은 극단으로 나뉘기
려가기 때문에 갈등하는 거지요. 방
때문에 아주 상처받고 힘들어하고,
과후 나온 아이들과 자주 만날 때는
해마다 많은 친구들이 학교를 떠나
1년에 네 번쯤 만나는데, 오늘 모임
게 되는 겁니다. 이미 문화가 단절되
한다고 열다섯 명 정도가 다시 연락
어 있고 문화 자체가 없다는 거지요,
이 되었거든요. 지금 다 어른이 되었
공부 외에. 컴퓨터는 쉽게 버튼만 누
는데, 모두 지금 하고 싶은 일을 다 하
르면 되는데 밖에서 뛰놀 친구, 공을
고 있어요.
차기 위해서 열한 명이 모여야 하고,
기본으로 학교 체제에 있는 아이
스물두 명이 모여야 하고, 농구를 하
들은 학교에 다니면서 아주 힘들어합
기 위해서 그 숫자가 모이기에는 이
니다. 지금 자녀들이 아주 어릴 텐데,
제 대한민국에서 쉽지 않다는 거지
학교 안의 문화, 공교육 안의 문화가
요. 놀이 문화가 완전히 달라지고 인
어떤 건지 들여다보시면 분명 그 안
터넷 아니면 공부, 그 밖에는 청년들
에 장단점이 있고, 좋고 나쁜 것이 있
한테, 자라는 애들한테 특별한 문화
습니다. 하지만 우리 어른들이 학교
가 전혀 없거든요. 그것들이 주말 학
에 다녔던 시절에는 친구들과 함께
교가 되고 기획 행사의 체험 학습이
공동육아
되는 게 현재 대한민국이라는 생각
고 불안하지만 결국은 내 삶의 경계
031
이 들거든요. 일상을 누리는 골목 안
점, 내가 경험했던 것을 뛰어넘어서
에서 마을 아이들 놀이가 모두 달라
내 아이가 더 나아가야 합니다. 하지
지고, 모든 게 돈과 행사와 기획으로
만 어른들은 모두 자신이 경험한 것
만 시스템이 되고 있다는 거지요.
을 불안해하면서 아이가 자기 울타
졸업생 이야기, 그 두 번째
지금 여기 있는 분들도 편안하게
리를 뛰어넘지 못하게 합니다. 그걸
앉아 있지만 개인으로 보면 삶이 많
넘는 순간 아이는 문제아가 됩니다.
이 폭발하고 있을 겁니다. 자라는 친
아이들에게는 부모가 창조한 울타리
구들이 갈등하고 산다는 건 굉장히
를 뛰어넘게끔 해 줘야 합니다. 그 울
잘 자라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고요
타리를 뛰어넘을 때 부모님하고 충돌
하게 지내다 어느 날 갑자기 사고를
하겠지만, 충돌하면서 자율성이 회
치는 게 아니라, 어릴 때 사고 칠 거
복되고 또 다른 것을 만들어 갈 수 있
다 쳐 보고 경험해 볼 거 다 경험해 보
지 않나 생각합니다. 제가 공동육아에서도 지냈지만,
다. 모든 감정을 꾹꾹 누르고 다스리
일반 학교를 다닌 아이들도 만났는데
면서 자라다 어느 날 자아가 폭발해
지금 서른 살쯤 되었어요. 청년이 되
서 난리가 나는 것보다는 많이 충돌
어서 결혼한 아이들도 있고, 다들 일
하면서 자라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듭
을 하고 있는데, 그 아이들도 행복합
니다. 그만큼 여건이 맞아야 되는 거
니다. 이제 서른 살 밑쪽 아이들인데,
고요.
그 아이들은 일반 학교를 다녔지만
내 경험이 아이들 삶을 옥죄는 울
너무나 행복하게 지냈고, 이 아이들
타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은 공동육아를 다녔기 때문에 행복
들거든요. 나를 뛰어넘는 그 울타리
했고요. 그 행복을 자기 공간에서 어
를 어떻게 넓혀 줄 건가? 그렇게 하는
떻게 찾을까 하는 문제지, 이 공간은
것이 부모로서는 굉장히 가슴 조이
행복하고, 저 공간은 불행하다고 견
스스로 선택해서 사는 삶, 공동육아에서 배우다
면서 자기 삶을 창조해 나가는 겁니
공동육아 통권 109호
기획
032
주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좋고 나쁜
교 가면 1등 해야 하는 게 너무 싫고,
게 아니라 그 속에서 우리가 어떤 것
학원 가기 너무 싫고 이렇대요. 그리
을 추구하고 만들어 갈 건가 하는 문
고 다른 애들도 만나서 보면 컴퓨터
제를 더 깊이 고민해야 되지 않나 생
로 게임하고 있고. 이런 게 저는 안 좋
각합니다. 흑백이 아니라 함께 사는
더라고요.
공간에서 공동육아는 공동육아만
저는 공동육아를 꼭 보내고 싶은
의 특별한 색깔로 지금 살고 있는 겁
생각이에요. 그래서 제가 살아 왔듯
니다. 그 색깔 자체를 과연 어떻게 하
이 들살이나 자전거 여행 같은 거 많
나 되게 할 건가 하는 문제입니다, 차
이 보내고 싶어요. 제가 어릴 때 다리
이가 아니라. 이 아이들이 자라서 사
에 상처가 많이 났거든요, 놀고 다니
회에 나가서 사회구성원이 될 겁니
면서. 여자로서 다리에 상처가 나서
다. 공동육아는 좀 더 나은, 그리고
조금 안 좋기는 하지만 딸이 생기면
함께 살려는 생각을 키워 내는 공간
상처가 나도 나가서 놀라고 하고 싶
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요. 그런 기억들이 힘이 되어서 아 직 자식 계획은 없지만 그렇게 하고
질문
오늘 나온 청년들이 짧게는 5
싶어요.
년, 길게는 10년 후에 2세를 가질 결 혼 적령기가 될 거 같은데, 2세가 생
최윤지
저도 인영이와 같이 제 아이
기면 공동육아 방과후 이런 쪽에 보
들이 만약 생긴다면 공동육아에 보
낼 의향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내고 싶은 마음이 있고요. 제가 아까 말했듯이 공동육아에
그때는 그냥 생각 없이 듣곤
서 보낸 추억이 나중에 삶에서도 큰
했는데, 이번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되
기억으로 남고 자랑거리가 되거든
는데요. 초등학교 2학년인가 하는
요. 제가 수시로 대학에 들어가서 자
아이가 학교 공부가 너무 싫대요. 학
기 소개서를 쓰는데, 다른 아이들은
최인영
공동육아
쓸 말이 없는 거예요, 거기에. 다 똑
가서 청소해야 하고, 회의해야 하고,
033
같은 삶을 살아서 딱히 자신이 남들
애들하고 놀 시간이 없다, 얼굴 볼 시
보다 다른 게 없고, 뭔가 추억이 될 만
간도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분들
한 게 없어서 쓰지를 못하고 그냥 만
이 꽤 많거든요. 지금 자라서 부모님
들어서 써 내는데, 저는 제가 경험한
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때 부모
졸업생 이야기, 그 두 번째
것을 떠올리면서 ‘아, 이게 이런 교훈
님들은 어땠는지, 이런 것이 인상에
이 있고, 이런 것이 생활에 도움이 되
남아 있는지, 부모님이 지금은 어떻
는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내가 공
게 변한 것 같은지 이런 것들이 궁금
동육아를 안 다녔더라면 다른 아이
합니다.
들과 똑같이 학력은 좀 더 나아졌을 지 몰라도 이렇게 생각을 더 많이 할
최인영
아까 말씀드렸듯이, 어머니
수 있고, 추억이 많은 사람이 될 수가
가 저를 혼자 키워서 생활이 많이 힘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
들었어요. 일하느라 저를 많이 돌봐
요, 그때. 그런 기억도 있고, 좋은 점
줄 시간이 없었고, 공동육아 보내고
들이 있어서 저는 공동육아에 보내
거의 1년 반 만에 터전에 나와서 청
고 싶습니다.
소도 하고, 회의도 했을 거예요. 저 는 그런 기억이 없어요. 엄마가 늘 일 하고 바빠가지고 저를 생각하지 않았
아서 이렇게 우리한테 증언해 주어서
나,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너무 고마워요. 공동육아 처음 하는
와서 이야기해 보면 그때 어떤 생각
분들 다 겪었겠지만, 특히 이사장이
이 있어서 저를 공동육아에 보냈다
나 이사진 일을 1년 정도 하는 분들
는 걸 알 수 있어요. 지금도 제가 무
항상 하는 말이 있어요. 우리는 공동
슨 상황에 닥쳐서 이걸 어떻게 해야
육아 하려고 왔는데 아이는 볼 시간
할까, 이럴 때 어머니가 조언을 해 주
이 없다. 회사 일 해야 하고, 터전 나
면 지난날 엄마가 마련해 준 환경에
스스로 선택해서 사는 삶, 공동육아에서 배우다
좋은 이야기 잘 들었고요, 살
질문
공동육아 통권 109호
기획
034
서 내가 어떻게 살았겠구나, 하는 걸
김지원
저도 생각해 보면 정말로 엄
느껴요. 어머니가 노력한 건 기억이
마 아빠에 대한 기억이 데려다주고
잘 안 나지만, 지금은 잘 지내요.
데리러 오고, 약간 이런 거? 그러면 서도 한편으로 드는 생각이 아마라
저도 어렸을 때 전혀 몰랐는
고 하나요? 부모님들이 와서 청소도
데 어머니와 감정으로 갈등을 좀 했
해 주고 밥도 해 주면 옆에서 같이 장
나 봐요. 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제
난도 치고 이랬어요. 또 저희 같은 경
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께 “어,
우는 회의할 때 어른들이 술도 마시
왜 키워 줄 것도 아니면서 왜 낳았
고 치킨도 먹고 이러니까 거기 가서
어?” 그렇게 말했던가 봐요. 어머니
은근히 끼어가지고 먹고 그런 기억이
가 제가 어렸을 때 바빠가지고 네 살
나요. 어떻게 보면, 여기 있는 까마귀
까지는 할머니 집에서 자랐거든요.
도 그렇지만, 우리 엄마만 내 엄마가
그리고 그 뒤에 어린이집에서는 일곱
아니라 거기 우리와 같이 생활한 선
시인가에 집에 가야 하는데 엄마가
생님들이나, 친구들의 부모님들이
늦게 와서 기다린 적도 많고 해서 마
결국은 다 우리 엄마고, 친구들끼리
음속에 앙금이 좀 있었나 봐요. 그런
다 형제고 이런 느낌이었지 않나, 이
데 그때는 정말 그랬을는지 몰라도
런 생각이 있어요.
최윤지
자라서 기억을 되돌려 보면 어머니가 학부모 상담을 하면 ‘아이와
제가 혼자 집에 있게 하지 않으려고
강병오
많이 노력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보낸 시간이 많은데 우리 애가 왜 엄
동생이 있기는 하지만 원래 아주 내
마가 없다고 이야기하는가?’ 물어
성적이었는데 여러 아이들과 놀아서
요. 직장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한 공
좀 나아졌어요. 그런 좋은 점이 많이
간에 같이 있지만 엄마가 밥 준비하
있어가지고 지금은 어머니한테 많이
고 설거지하는 사이에 아이는 다른
고마워하고 친하게 지내고 있어요.
걸 합니다. 그 공간에 같이 있을 뿐
공동육아
소통은 없는 겁니다. 물론 아이는 엄
다주세요. 그리고 친구들하고 놀고
035
마와 함께 있기 때문에 편안할지 모
있을 테니까 언제쯤 와서 데려가 주
르지만 같은 공간에 존재할 뿐이지
세요’ 하는 걸 아이가 선택했다는 생
실제로는 소통 없는 삶을 살거든요,
각이 들거든요. 그 선택을 아주 잘했
바쁘기 때문에. 아이가 부모에게서
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너무 같이
졸업생 이야기, 그 두 번째
받는 그 낯선 외로움은 아이한테 아
있어도 서로 피폐해질 수 있으니까
주 안 좋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냥 그렇게 생각하시면 될 거 같습
집에서 아이들하고 며칠 있으면
니다. 부모님들은 부모님들끼리 밤에
어디 좀 보내고 싶지요? ‘나도 내 생
술 한잔 하면서 고기 구워 놓고 행복
활이 있고 누군가 좀 만나고 싶은
하게 이야기 나누면 충분하고요, 부
데…….’ ‘날씨가 정말 좋은데…….’
모님들이 고기 구워 먹는 사이에 애
‘아, 토요일 어린이집 안 하나, 토요
들끼리 열심히 뛰놀면 함께 성장하고
일도 좀 보내 놓고 나도 누리고 싶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데…….’ 이게 가장 기본이라는 생각 이 듭니다. 나쁜 게 아니라 부모도 부
질문
저는 재미난방과후 학교에 아
모 개인의 삶이 있고 아이들도 아이
이를 보내고 있는 엄마입니다.
개인의 삶이 있는데 단절된 공간에
저희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인데,
함께 있으면 상처가 많이 나지요. 잔
저는 아이가 방과후 문화에 잘 적응
소리하고 서로 싸우게 되고.
해 나가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런데 아이는 학교 아이들이 다들 휴대폰
직장에서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
가지고 있고, 오락하고, 엄마 아빠가
면 그 영향이 애들한테 분명히 갈 거
학원에도 데려다주고 하니까 제가 원
라 생각합니다. ‘우리 엄마는 정말 열
하지 않는 이런 문화에 호기심을 가
심히 살고 있어. 나는 친구들하고 열
지면서 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더
심히 놀면 되고. 그냥 편안하게 데려
라고요. 작게는 휴대폰이지만 중・고
스스로 선택해서 사는 삶, 공동육아에서 배우다
부모님들은 그냥 공동육아에서,
공동육아 통권 109호
기획
036
등학생이 되면 여러 유혹이 많잖아
후에서 더 재미있게 놀았으니까.
요? 저희 애가 남자니까 두 선배님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제가 아까
은 그런 경험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도 잠깐 사고뭉치라고 이야기했지만,
어떻게 극복했는지 듣고 싶습니다.
저도 피시방에 엄청나게 갔어요. 한 3년 동안 거의 날마다 다녔을 거예
저 같은 경우 초등학교 때 방
요. 어떻게 보면 더 억압(?)하니까 더
과후를 다니지 않았다면 당연히 그
하게 되었을 수도 있고요. 아니면 너
랬을 거예요. 초등학교라는 공간에
무나 자연스럽잖아요. 친구들이 학
서 우리가 보내는 시간도 적지 않잖
교 끝나면 모두 자연스럽게 피시방으
아요. 친구들도 거기서 많이 사귀고,
로 몰려가는데 나만 거기 빠져서 집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에 나도 끼고
으로 가는 게 중학교 1, 2학년한테
싶고……. 그런 느낌이 아직도 저는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엄마가 아무
기억이 나요. 그 친구들이 게임 얘기
리 그걸 싫어한다고 하더라도…….
김지원
같은 거 하면 나도 하고 싶은데, 학교
그런 일들을 말린다고 해서, 억제
끝나면 방과후 가고 방과후 끝나고
한다고 해서 안 하게 되는 건 아니거
집에 가면 엄마가 게임 잘 못 하게 했
든요. 어찌 보면 억제하면 억제할수
으니까 소외감이 없었던 건 아니었어
록 더 그렇게 될 수도 있는 거라고 생
요. 그런데 그게 상처로 받아들여지
각하고, 그런 것도 다 경험이라고 생
지는 않았어요. 우리 나름대로 방과
각해요. 안 해 보고 아는 게 아니라
피시방 가고 하는 그런 일들을 말린다고 해서, 억제한다고 해서 안 하게 되는 건 아니거든요. 그런 것도 다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과정을 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공동육아
경험이 필요한 거잖아요. 공동육아
더 좋으니까 이 문화를 더 누려, 이렇
037
도 마찬가지지만, 다 해 봤으니까 결
게 말하지 않았어요. 이 문화도 즐길
국 알고 배운 거잖아요.
수 있고, 저 문화도 즐길 수 있게 해
졸업생 이야기, 그 두 번째
분명 부모님이 걱정을 할 거고, 저 도 그런 것 때문에 엄마와 많이 갈등
주었어요. 이거 하지 마, 하지 마, 이 런 말씀 많이 안 하셨어요.
했지만, 말릴 수 있는 거고, 말려도 갈 수 있는 거고, 가면 혼낼 수 있는
최인영
방과후에 보내는 건 자기 생
거고, 그런 과정을 좀 자연스럽게 받
각을 가지고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찾
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아나가게 하기 위해서잖아요. 요즘
하게 됩니다.
은 핸드폰이나 이런 거밖에 없기 때 문에 애들은 할 일이 없어서 그걸 하
제 경우는 딱히 문화 충돌이
고 놀거든요. 방과후에서는 밖에서
있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초등학
노니까 그것도 알려지고, 산에서 노
교에 가서는 초등학교 내내 잘 놀고,
는 것도 알려지고, 게임도 알려질 수
중・고등학교에 가서도 잘 놀고, 방과
있고, 이런 여러 가지가 다 알려질 수
후에서도 방과후끼리 잘 놀고 그랬어
있다는 게 좋아요. 그중에서 아이가
요. 저희 부모님은 걱정을 하기보다
선택하는 거는 선택의 문제지 그걸
는 중학교 문화나 방과후 문화는 다
억압하는 건 공동육아가 아니라고
를 게 없다고 했어요. 딱히 방과후가
생각해요.
이상원
스스로 선택해서 사는 삶, 공동육아에서 배우다 공동육아 통권 109호
김지원
기획
038
공동육아 졸업생 이야기, 그 두 번째
공동육아, 기억의 공동체
내년이면 공동육아가 신촌 ‘우리’어린이집을 시작으로 뿌리 내린 지 20년이 된다. 지난 20년 세월 동안 공동육아는 많이 성장했다. 아이들 이 컸고, 교사와 부모들이 함께 성장했다. 공동육아의 집단 적 성장에는 긍정적인 면, 부정적인 면이 공존한다고 할 수 있다. 세상이 달라지고, 공동육아도 달라진 세상에 적응하 면서 잘 견디고 있지만, 오늘의 공동육아는 20년 전 초기의 공동육아와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 는지 아직 치밀하게 연구된 적은 없지만, 우리의 변화가 건강 한 건지, 아니면 우리 안에 퇴색되어 가는 불안한 변화는 없 는지 우리 모두 궁금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의 이러한 궁 이부미 복숭아. (사)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 이사, 경기대학교 유아교육학과 교수
금함은 결국 우리 스스로 풀어야 할 문제지만, 가까이에 이 궁금함을 물어볼 수 있는 소중한 사람들이 생겼다. 공동육 아에서 자란 사람들이다. 물론 그들이 공동육아의 변화를
공동육아
039 졸업생 이야기, 그 두 번째
우리는 청년들에게 많은 지식을 가르치지 않았지만 그들은 공동육아에서 배울 것을 충분히 배웠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그들이 배운 것을 우리가 다시 배울 차례인 것 같다.
다 설명해 줄 수는 없다. 하지만 공동육아에서 ‘사람이 성장한다는 것이 무엇 인지’를 이야기해 줄 수는 있다고 본다. 올해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 정기총회에서 만난 청년들은 우연히도 내가 약 15년 전, 논문 자료 수집을 위해 들어간 지역 어린이집 또는 방과후를 다녔 던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날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어떤 부분은 또렷하게, 어 떤 부분은 어렴풋하게 나는 그들의 유년기를 기억하고 있다. 공동육아의 ‘공동’에는 어린이를 통해 어른이 함께 성장한다는 의미가 담 겨 있다. 공동육아에서 성장한 청년들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의미를 몇 가지 짚어 본다.
이 청년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자신이 삶의 주인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고맙
공동육아, 기억의 공동체
청년들의 삶 들여다보기
공동육아 통권 109호
기획
040
게도 그들은 공동육아의 경험과 현재 자신의 삶이 연결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마음이 열리고 자주적인 사람, 스스로에게 당당한 사람, 스스로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에 공동육아의 경험이 녹아 있다 고 했다. 대학을 가지 않고도 행복한 삶을 사는 것에 대해 고민하면서 공부하고 있 는 청년이 있는가 하면, 대학에서 공부를 하는 세 명의 청년 역시 자신이 선택 한 전공에 대해 비교적 구체적인 관심과 취향을 갖고 있다. 이들의 공부는 무 언가 그들의 삶과 맞닿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나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 르치고 있는데, 요즘 학생들에게서 보이는 일반적인 모습 중의 하나가 자발적 선택의지와 능력의 결핍이다. 그러다 보니 공부는 직업을 위한 선행 학습이고 자아는 직업의 안정성에 휘둘리는 상황이다. 공동육아의 첫 출발점에 경쟁 중심의 획일적인 교육 풍토에 대한 비판과 대 안 제시의 성격이 분명하게 존재하다는 점을 떠올리면, 공동육아에서 성장한 친구들의 이러한 모습은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지만, “살아서 이렇게 우리 한테 증언해 주어서 너무 고”맙다는 어느 부모님의 말씀처럼 감사한 일이다. 이 청년들이 기억하는 공동육아의 경험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일상적 이고 소소한 놀이들이다. 무덤가에서 놀고, 감자 캐고, 도롱뇽 잡고…… 따 위. 두 번째는 방과후의 경험인데, 장기 자전거 여행처럼 삶의 총체성이 담금 질되는 그런 압축된 경험들이다. 그들은 이 두 가지 종류의 기억들이 어려움 에 부딪힐 때마다 자신들의 삶의 순간순간에 힘이 된다고 했다. 청년들의 공동육아의 경험은 구체적으로 기억되지 않았지만, 결정적인 삶 의 순간순간에 살아 있다고 해석된다. 나는 이 의미를 알 것 같다. 나도 살면서 가끔 힘들 때, 어떤 꼬마가 힘들 때 나를 보고 싶어 했다는 기억이 나기 때문이 다. 15년 전, 까마귀가 방과후 아이들과 처음으로 자전거 여행을 떠났을 때 일 이다. 어느 날 아침, 까마귀한테서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아이들과 자전거
공동육아
여행 중 힘들게 고갯마루를 넘고 있는데 혜인이가 복숭아(내 별명)가 보고 싶다
041
고 해서 전화를 했노라고……. 아이들이 자전거 여행을 간 줄도 모르고 있던
졸업생 이야기, 그 두 번째
나는 너무 놀라고 흥분해서 혜인이와 통화를 했다. 이렇게 공동육아의 경험 은 개인으로, 집단으로 축적되어 가면서 기억은 우리의 공동체를 이루는 중요 한 의미 작용이 되어 가고 있다.
청년들에게 배우기 청년들이 준비한 이야기 주제 중에 공동육아의 경험이나 환경이 졸업 후 삶에 어려움이 된 것은 없었는지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이 내용은 부모들의 질문 에서도 나왔다. 아마도 이 질문은 공동육아 내부인(특히 부모들)뿐만 아니라 외부인들도 가 장 궁금해하는 것 중의 하나일 테다. 즉 공동육아와 같은 특별한 경험을 한 아 이들이 이후에 일반 학교, 더 크게는 사회에 잘 적응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청년들이 아직은 사회에 완전히 적응할 시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들의 초 등 이후의 학교 경험만을 놓고 본다면, 어려움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공부하는 어려움은 있었지만 나름대로 극복해 나 갔다. 거의 꼴찌 수준도 경험했지만 그 상황에서 스스로 공부의 필요성을 느 끼고 공부할 수 있는 힘을 교과 지식 대신 공동육아에서 받았으니 이 부분은 크게 걱정을 안 해도 될 것 같다고 한다. 그래도 걱정할 사람은 한다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공부 그 자체보다 문화의 차이인 것 같다. 즉 공동육아의 놀
이 공동육아를 벗어나 성장하면서 다른 놀이 문화, 학습 문화를 만날 수밖에 없다. 이런 다른 문화를 부모의 힘으로, 공동육아의 힘으로 차단할 수가 없
공동육아, 기억의 공동체
이 문화, 청소년의 피시방 게임 문화, 권위적인 문화(대학 동아리)……. 아이들
공동육아 통권 109호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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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로 인한 걱정과 우려에 대해 청년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 일들을 말린다고 해서, 억제한다고 해서 안 하게 되는 건 아니거든요. 어찌 보면 억제하면 억제할수록 더 그렇게 될 수도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그런 것도 다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안 해 보고 아는 게 아니라 경험이 필요한 거잖아요. 공 동육아도 마찬가지지만, 다 해 봤으니까 결국 알고 배운 거잖아요.” “이 문화도 즐길 수 있고, 저 문화도 즐길 수 있게 해 주었어요.” “선택의 문제지 그걸 억압하는 건 공동육아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 청년들에게는 다른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우리보다 덜 하고, 이분법적 인 선 가르기도 분명해 보이지 않는다. 문화의 차이에 대해 우리보다 말랑말 랑한 사고와 태도를 갖고 있는데 그것을 그들은 공동육아에서 배운 삶의 태 도라고 말한다. 우리는 청년들에게 많은 지식을 가르치지 않았지만 그들은 공 동육아에서 배울 것을 충분히 배웠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그들이 배운 것을 우리가 다시 배울 차례인 것 같다.
그런데도…… 우리가 청년들한테서 배울 것이 있다는 기쁨이 있는데도 까마귀 선생님의 이 야기는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아이들이 19년 가까이 성장해서 사회에 나왔는데, 세상이 변화되지 않았다는 사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교육 소비자가 되어 ‘좋은 학교 만들기’에만 노력 을 다 한 것은 아닌지…… 20년이 다 되어 가는 이 집단이 앞으로 무엇을 해 나가
공동육아
동육아를 거쳐 간 많은 친구들을 대표하지는 못한다고, 그리고 기억은 과거 를 아름답게 채색하는 특성이 있다고……. 맞는 말이다. 공동육아에서 성장
졸업생 이야기, 그 두 번째
어떤 부모님은 이런 질문을 했다. 그날 이야기 손님으로 나온 친구들이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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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할지, 내용과 철학을 좀 더 많이 고민해야 할 시간이 아닌가…….”
한 많은 친구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는 일, 우리의 집단 경험을 객관적으로 정리하는 일 그리고 다시금 공동육아의 철학과 실천을 처음부터 되짚어 되새 김질하는 일 들이 필요하다. 청년들의 이야기는 그러한 많은 일들을 시작할 수 있는 출발선이 아닌가 생 각한다. 그런데도 소나무에 쌓인 눈을 보고 “아프겠다, 눈이 소나무 때문에 따갑겠다”고 말했던 일곱 살배기 꼬마가 스물세 살 청년이 되었고, 그런 청년 들과 만나 공동육아의 삶을 함께 나눈 시간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쉽게 조우 할 수 없는 짜릿한 행운이 아니겠는가!
공동육아, 기억의 공동체 공동육아 통권 109호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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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육아 졸업생 이야기, 그 두 번째
산집에서 자라 산골 아이들을 품다
아토피가 심한 세 자매가 있습니다. 몸에서 진물이 날 정도로 심한데도 젊은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과자를 사 주고, 집에 늦게 들어가거나 안 들어가기 도 합니다. 저는 하모니에서 아이들이 모두 돌아가고 나면 날마다 둘째와 막 내를 씻기고 아토피 로션을 발라 줍니다. 일곱 살 막내는 아토피가 굉장히 심 해서, 물이 닿기만 해도 따가워서 웁니다. 씻기는 준비부터 달래기까지, 하루 하루가 전쟁입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사는 아이들, 엄마는 지적장애인이고 아빠는 알코올 중독인 집안의 아이들, 엄마는 집을 나가고 피시방에서 살다시피 하는 아이 들…… 이런 아이들이 바로 제가 지금 하모니에서 돌보고 있는 아이들입니다. 사람들과 눈을 못 맞추고 자폐처럼 소통도 잘 안 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조담 여섯 살부터 아홉 살까지, 유년기 대부분을 부천 공동육아 산어린이집(산집) 에서 보냈으며 첫 번째 졸업생입 니다. 열 살 때 부모님에 이끌려 산집 친구 영주네와 경북 봉화로 귀농했습니다. 중학교를 마치고 5년 동안 서울에 서 놀 만큼 놀다가 다시 봉화로 내려와, 2012년 설립된 지역 최초 민간 비영리단체인 교육복지문화공동체 하모니 에서 돌봄 교사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낮에는 아이들을 돌보며 틈틈이 업무를 보고 청소년 사진 수업을 이끌면서, 밤에는 사이버로 아동 보육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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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한쪽에 혼자 멍하니 있던 일곱 살 아이입니다. 알 고 보니 엄마가 우울증이 굉장히 깊고 자살 시도까지 몇 번 한, 그래서 엄마에 게서 완전히 방치된 채 자란 아이였습니다. 주로 중 3인 형이 돌보고 어린이집 도 데리고 다녔지요. 그런 아이인데도 저에게는 너무 예뻤고, 끊임없이 관심을 주고 안아 주었더니 아이가 어느 날 말을 하고, 그림도 그리고, 글자도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겨우 5개월 만의 일입니다. 사람이 사람한테 주는 사랑이 이렇게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구나, 하모니는 산골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공간이구나 하는 걸 새록새록 느낍니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들과 잘 지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했습니다. 하지 만 막상 함께 지내 보니 아이들 하나하나가 안쓰럽고 얼마나 예쁜지, 이렇게 깊은 관계가 될 줄 몰랐습니다. 1년 가까이 아이들과 이렇게 진하게 만나고 나니 표정 없던 아이들 얼굴이
산집에서 자라 산골 아이들을 품다
작년 5월, 하모니에 처음 왔을 때는 단순히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는 거
공동육아 통권 109호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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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해졌습니다. 엄마에게 버림받고 할머니 손에 자라 자기 존재에 대해 불안해 하던 아이, 엄마에게 칼을 든 아빠를 온몸으로 막아 선, 어른을 신뢰하지 않 고 자립심이 지나치게 강하던 아이에게 안정감이 생기고 표정이 부드러워졌 을 때 큰 보람을 느꼈고 많이 행복했습니다.
이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데 산집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과 뭘 하면 좋을까’ 하고 생각할 때 자연스럽게 나들이가 떠오릅니다. 어렸을 때 나들이 가서 악어약수터, 여우놀이터라 이름 지으며 즐겁게 놀던 추억도 자주 생각납니다. 하모니에서도 틈만 나면 나들이를 갑니다. 간식 시 간 전 짧게라도 모둠도 합니다. 우리 아이들도 저처럼 지금의 생활이 나중에 어른이 되었을 때 소중한 추억으로 기억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제가 일하는 곳, 하모니는 공동육아 조합원 출신 아줌마(우리 엄마, 영주 엄마) 두 명이 설립한 단체입니다. 그 덕에 자연스럽게 공동육아에서 많은 것을 가져 오게 되었는데, 그중에서 별명은 아이들에게도, 지역 어른들에게도 색다르고 재미있는 것입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사는 주영이라는 아이가 있습니다. 한번은 주영이 할 아버지가 손주를 데리러 오셨는데, 한 번밖에 뵌 적이 없어 얼굴을 잘 기억하 지 못했습니다. “누구~시죠?” 하고 여쭸더니, 할아버지께서 온화하게 웃으 시며 “토끼샘이시죠?” 하셔서 깜짝 놀랐지요. ‘주영이 선생님’이 아닌 ‘토끼 샘’으로 불리는 순간 평소 어렵게 느껴졌던 어르신들과 한결 편안하고 가까운 관계가 된 것 같습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저는 아이들을 돌보는 일만 했습니다. 월급도 받았고요. 규모가 큰 지원을 받았기에 그럴 수 있었습니다. ‘보육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보육 사업’이라는 프로젝트였는데, 올해부터 돌봄 대상을 7세 이하로 제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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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 졸업생 이야기, 그 두 번째
사람이 사람한테 주는 사랑이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하모니에서 느끼고 있다.
라, 차량 운행은 하지 말고 가까이 사는 아이들만 받아라, 하며 산골이라는 이 지역 특성에 맞지 않는 조건을 내밀어서 지원을 더 받지 않고 우리 힘으로 꾸려 가기로 했습니다. 지원이 없어져서 활동비는 확! 줄었는데 일은 엄~청 늘었습니다. 아동 청소년 사업뿐 아니라 지역 주민 사업까지 확대했기 때문입 니다. 하모니는 지금 활동가 네 명이 돌봄은 물론이고 마을 카페, 장날 후원 밥 집, 한 달에 한 번 시 낭송회를 하며 1인 3, 4역을 해야 하는, 정말 쉴 틈 없이 굴러 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계획에 없던 일을 시작하고서 1년 사이에 제가 몸담고 있는 하모니는 참 많이 변했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변화를 겪어서인지 지난 1년이 5년쯤 흐른 것같이 느껴집니다.
왔을까 원망스러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는 시골에 살았지 만 도시에 어울리는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밭일 도와주러 나갈 때는 꼭 선크 림을 꼼꼼히 바르고, 챙 넓은 모자를 쓰고, 긴 옷을 입었습니다. 밭에서 일하 다 말고 앉아서 책을 읽거나 수학 문제를 풀기도 했습니다.
산집에서 자라 산골 아이들을 품다
사실 5년 전의 저는 엄마, 아빠가 왜 귀농을 했을까, 왜 이런 산골짜기로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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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두 번 다니는 버스 정류장 이 있는 마을까지 무려 4킬로미터나 걸어서 나가야 하는, 너무 깊은 산골 로 귀농했던 터라 동네 친구라고는 함께 귀농한 옆집 영주네 밖에 없었 습니다. 그나마 좋았던 건 비나 눈이 많이 오면 학교에 갈 수 없었다는 것 입니다. 당시 사춘기였던 저는 제가 사는 곳이 많이 답답하게 느껴졌고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그렇게 바라 던 서울에 올라갔습니다. 학교 밖 공 간에서 이런저런 경험도 많이 했고, 열여덟 살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스스로 벌었습니다. 그런데 서울에서 지내며 막상 마주친 현실은 제 상상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사람들 은 너무 바빴고, 거리는 참으로 지저분했습니다. 부모님에게 받은 돈을 아무 거리낌 없이 쓰며 소비문화에 젖어 있는 제 또래 친구들을 보며 적잖이 놀랐습 니다. 이런 생활을 하면서 초등학교 5학년 때 시골에서 가족과 함께 흙집을 짓던 일, 여름이면 계곡에서 물놀이하고 겨울이면 눈 쌓인 산에서 눈썰매를 타던 소박한, 자연과 함께 하는 생활이 문득문득 떠올랐습니다. 도시에 나와서 살 아 보니 제가 살던 곳의 소중함을 깨달았죠. 그래서였을까요? 지난해, 콜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하모니에서 함 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고민도 많이 했지만 뭔가에 홀린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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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봉화, 춘양, 이 산골짜기 하모니로 오게 되었고, 뭔가에 홀린 듯 보육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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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공부를 하게 되었고, 또 뭔가에 홀린 듯 하모니에서 계속 일하고 있습니다.
졸업생 이야기, 그 두 번째
하모니에서 일하면서 공동육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곳 은 학교나 일반 사교육 기관에서는 배려받지 못했을 법한 아이들이 많은데, 이 아이들이 유독 저에게 마음을 잘 열어 주는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산집 에서 선생님을 별명으로 부르며 친구처럼 지냈던 경험이 지금 제가 아이들 말 에 먼저 귀 기울이고, 제 말과 행동이 아이들에게 어떻게 느껴질지 늘 생각하 는 데 많은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하모니에서 일하면서 ‘나도 그런 선생님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지난해에는 하모니의 교사들이 돌아가며 산집으로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제가 졸업한 어린이집이지요. 코뿔소와는 여섯 살 때 산집에서 사제지간(?)으 로 처음 만났습니다. 산집을 졸업하고 나서는 졸업생 들살이 때 본 게 마지막 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봄, 하모니 교사 교육에서 코뿔소를 만났고, 산집 으로 연수를 갔을 때 다시 만났습니다. 사실 얼떨떨하고 부끄럽기도 했지만, 흔히 볼 수 없는 관계를 이어 나가고 있다는 것이 뿌듯하고 자랑스럽습니다. 얼마 전부터 저는 과로(?)가 쌓여 지루성피부염이 생기고 급속히 심해져서 한의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최근 하모니 소식지를 한의사 선생님께 전해 드렸 는데, 한참을 훑어보시더니 “국가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구먼!” 하시며 어떤 아이들을 돌보는지, 필요한 후원은 무엇인지 이것저것 질문하셨습니다. 다른 쪽으로는 농민회, 전교조 같은 지역의 크고 작은 단체들이 모여 만든 봉화 지
저는 그저 세 자매의 아토피가 빨리 나았으면 좋겠고, 상처투성이인 어린 마음들이 활짝 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만나 왔습니다. 그런데 제 가 하고 있는 일이 이처럼 사회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크다니, 놀랍기도 하고 자부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산집에서 자라 산골 아이들을 품다
역 공동체 포럼에서 하모니의 활동을 지지하고 응원한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공동육아 통권 1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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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하고 있는 일이 힘들 때도 있고,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생태 나이는 스물두 살이지만 체감 나이는 서른두 살인 것 같습니 다. 그럴 땐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지, 나는 좀 더 다양한 것을 겪어 보고 친구 들도 만나고 내 나이에 맞게 재미있게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기도 합니다. 지난해 이 산골짜기에 올 때 그랬던 것처럼 무언가에 홀리 듯 또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겠지요. 저는 아직 스물두 살이고, 해 보고 싶은 것도 궁금한 것도 많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하모니의 상황이나, 저를 엄마라고 부 르는 아이들, 저를 보자마자 “토끼쨈!” 하며 달려와 안기는 아이들을 보면 저 는 아직은 하모니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모니를 응원해 주세요! 글 쓰는 재주도 없고 요즘 바쁜 시기라 망설이다가 하모니를 더 알리고, 많은 사람들이 응원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쓰게 되었습니다. 각별한 애정과 관심이 필요한 우리 아이들에게 따뜻한 마음 보내 주세요. 교육복지문화공동체 하모니
http://cafe.daum.net /harmony333 후원 계좌: 농협 355 -0021-9710 -63 (교육복지문화공동체 하모니)
공동육아 졸업생 이야기, 그 두 번째
내 이야기를 만들며 즐겁게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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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육아 졸업생 이야기, 그 두 번째
10년 전 이야기에서 어떤 결과를
꺼낼 수 있을까
가끔 빡빡한 일정과 여유롭지 못한 마음, 급히 먹 는 밥과 조급하게 읽어야 하는 책들 앞에서 나는 힘들게 올라갔던 언덕을, 자전거 여행을 떠올린다. 지리산에서 내가 잠든 사이에 형들이 발가락 사이 에 휴지를 돌돌 말아서 끼워 넣고 라이터로 불을 붙여서 소리를 지르며 깼던 내 모습을 상상하기도 한다. 옹기종기 모여 까먹던 삶은 감자가 생각나기
장에서 하던 축구, 들살이를 가면 늘 까마귀가 해 주던 무서운 이야기들, “워!” 하며 놀래키던 소리 로 끝나던 수많은 무서운 이야기들이 생각나기도 김지원 목수
한다. 그럴 때면 나는 늘 웃음 짓게 된다.
산집에서 자라 산골 아이들을 품다
도 하고, 오징어 달구지, 과천 체육공원 게이트볼
공동육아 통권 1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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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육아를 다니며 배운 것이 무엇이냐, 삶이 변화한 것은 무엇이냐, 하는 질문은 내가 자주 듣는 질문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난 언제나 그러한 질문이 불편하고, 지금 그러한 것을 알 수 있다면 나는 이미 다 산 것이라고 생각한다. 설사 그것에 답을 내릴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성급한 판단이거나, 끼워 맞 추기 또는 오만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공동육아 총회에서 졸업생 이야기 진행을 맡았을 때도 사실은 그러한 고민을 많이 했다. 내가 뭔가를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 10년 전의 이야기에 서 어떤 결과를 꺼내는 것이 과연 맞는 일일까. 그래서 그때는 말을 아끼려 노 력했고, 지금은 내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내가 무엇을 배웠고, 얻었는지는 오 히려 내 삶을 보고 판단할 능력이 있는 다른 사람들의 몫인지도 모른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며 나는 공동육아를 졸업하고 이우학교(경기도 분당에 있는 대안학교)에 입학했다. 학교에서 늘 사고뭉치, 말썽꾸러기, 문제아(?)로 지냈다. 하지 말라는 온갖 행 동은 다 하고 다녔다. 담배 피고, 술 마시고, 학교 빠지고 놀러가고, 다른 학교 아이들과 싸움질하고……. 늘 나쁜 짓의 선두에는 내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고뭉치가 조금씩 활동 영역을 줄이고, 잠잠해지게 된 것은 아마 어울려 다니던 친구들과 음악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인 것 같다. 우리는 밴드를 만들 었고, 공연을 준비했다. 그간 쏟아 낼 곳이 없었던 열정, 또는 나쁜 짓에 쏟아 부었던 에너지를 음악을 하는 곳에 쏟아붓게 되었다. 그리고 몇 달, 공연을 하 면서 우린 인정받을 수 있었다. 사고 치는 것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떳떳하게. 고등학교로 가게 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음악을 전공해서 대학을 가야겠 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음악을 하면서 역시 공부는 내 체질이 아닌 것 같다는
공동육아
생각에 확신을 가졌고, 무엇보다 음악이 너무 재미있었다. 학교와 연습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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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다 갔다 하며 지낸 것이 3년, 나는 어느새 고 3이 되어 있었고, 그리고 스무
졸업생 이야기, 그 두 번째
살이 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난 대학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중・고등학교 5년을 베 이스 치며 보냈고, 잘 쳤다. 대회에 나가 상을 탄 것도 여러 번, 내 실력을 의심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대학에 대한 걱정이 없었다. 그런데 대학에서 떨 어진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고민을 시작했다. 대 학을 다시 준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니 나는 대학을 가고 싶었다기 보다는 별 생각이 없었다. 남들이 다 가니까 나도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 했고,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난 대학을 가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생각 없이 대학을 가는 것보다 나 스스로 살아 보는 것이 더 큰 경험이 고, 공부일 거라고 생각했다. 군대 갈 계획을 세우고, 그 전에 학생이라 해 보지 못한 것들을 내 힘으로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부모에게 받는 용돈을 끊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혼자서 여행을 기획하고, 전문적이지 않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공연을 만들고, 책을 읽고 세미나를 했다. 그렇게 나는 졸업 후 약 10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입 대했다. 군대에서 나는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했고, 무엇 이든 하고 싶다는 생각과 힘을 키웠다. 그리고 어느 정도 삶을 정리하는 시간 이 되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무엇을 해야 하는
전역을 하고 나는 목공소에 취직했다. 공동육아 덕에 목공에 친숙했던 이 유도 있었고, 손재주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다. 무엇보다 재미있을 것 같았다. 취직 제안을 덥석 물고 보니 목공소 둘레에 너무 좋은 환경이 갖춰져 있었다. 인문학 네트워크 문탁, 마을 작업장 월든. 고등학교 때는 그렇게 하기 싫던 공
내 이야기를 만들며 즐겁게 살아간다
가보다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더 중요한 질문으로 자리 잡았다.
공동육아 통권 109호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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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가, 이제는 삶에 필요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물론 고등학교 때 하던 공부 와 다른 것이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공부하지 않으면 즐겁게 살 수 없겠다는 생각이 자리하기 시작한 탓이 가장 클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부 가 재미있었다. 그리고 1년, 나는 여전히 목공소에서 일을 한다. 이제는 장비들이 손에 익 기 시작했고, 여전히 공부를 계속하고, 공부만으로 부족해 공부를 삶으로 실 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사람들을 모아 일을 꾸미는 집단을 만들고, 사람들 을 만나고, 여전히 즐겁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민하며 살아가고 있 다. 욕심이 많아지면서 더욱 바빠지기 시작했고, 바빠지는 만큼 힘들지만, 나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들이라 지치지는 않는다.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며 삶은 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끝났다 싶으면 시작되고, 시작이다 싶으면 끝이 고, 알겠다 싶으면 더 모르겠고,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느 순간 보이기 도 하고. 그러한 과정의 연속에서 내가 무엇을 배웠고 얻었다고 이야기하는 것 이 스스로를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의 귀에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조심하는 이유는 내 삶의 형태 가 공동육아를 원인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과, 공동육아를 다니고 있고, 다 녔던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들과는 전혀 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한 가지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이것 또한 주관적인 것이겠지만) 놀면 서 배울 수 있다는 것, 책상에 앉아서 하는 공부만이 공부가 아니고, 그러한 배움보다 삶의 실천으로서, 앎의 행동으로서 나는 더 많은 배움을 얻었다는 것이다. 아는 것이 없는 어린 시절 나에게는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공부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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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 졸업생 이야기, 그 두 번째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 줄 아는 것이 사람에게 필요한 삶의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학교에서, 집에서, 학원에서, 학습지에서 선생님들 에게, 엄마에게, 책에게 배우기보다 자연에게, 친구들에게, 친구처럼 가까운 공동육아 선생님들과 함께 배운 것이 더 풍부한 과정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또한 순간순간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확신하는 것은 그러한 배움이 진정한 배 움, 삶에 유용하게 쓰이고 필요한 배움이라는 것이다. 난 이러한 배움이 자신의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이 야기를 만들 줄 아는 것이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삶의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는 길이며, 또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공동육아는 나에게 그런 것을 주었다. 나는 지금 힘들고 빡빡하게 살고 있지만,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며 즐겁게 살 아가고 있다.
내 이야기를 만들며 즐겁게 살아간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고, 스스로의 삶에 만족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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