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서 얼굴 좀 보자는 연락이 왔다. 2달 만이었다. 오늘은 일이 있다고 했다. 그녀는 그녀 답지않게 물었다. 몇 시? 저녁때 회사에 일이 있어. 뭉그적거리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덧붙였다. 부장님 생신이어서. 그녀는 “그래.....”하고 대꾸한 뒤 꾸물대다 물 었다. 그럼 점심때는 어때? 나가서 입을 옷을 뒤지기 위해 옷장 문을 오랜만에 열었다. 7월 인데도 비는 오지 않고 밖은 몹시 더웠다. 서랍 속의 옷들을 뒤집 어엎었다. 겨울옷은 밑에 넣어놓고 여름옷을 위쪽으로 넣을 생각 이었다. 옷의 크기는 제각각이었다. 체중이 자주 왔다 갔다 해서였 다. 가장 말랐을 때와 지금의 차이는 10키로 안팎. 5달 전 여자친 구와 헤어지고 스트레스로 몸이 급속도로 불었다. 한동안 쉴 때는 침대에 누워 핸드폰만 했다. 옆에는 과자들을 쌓아두고 웹서핑을 하거나, 게임을 하는 식이었다. 그녀는 다른 누군가에게 내 소식을 전해 듣고 연락한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해어진 후 그녀가 나에게 갑작스레 연락을 다시 취할 이유가 없었다. 작년에는 많은 옷을 샀다. 계절별로, 유행따라. 그만한 경제력이 있었고, 새삼 옷 입는 즐거움을 발견해서였다. 옷 사면 사람 만나야 하고, 사람 만 나면 서로 소통하고, 소통하다 보면 실수하고, 실수하면 후회한다 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런 패턴조차 내가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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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한 안락감을 주 었다. 그리고 그땐 내 몸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보다 몸무게가 더 나갔던 건 고2 때밖에 없었다. 어느 날 라면을 3봉지를 끓여 먹고 있던 나에게, 컴퓨터를 하던 아버지는 갑자기 소리친 적이 있으셨다. “작작 좀 쳐먹어!” 평소에 꽤나 화기애애한 집안이라 어머니와 나,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점잖고 순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그전에도 그 뒤에도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들어본 적 은 없었다. 그러니까 살면서 아버지가 내게 했던 일갈 중 제일 종 류가 달랐던 그 말은 ‘작작 좀 쳐먹어’가 된 셈이다. 반면 엄마는 내가 뭘 먹든 격려해주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에는 친척들 앞에서 “쟤는 아침에 일어나면 물부터 먹지 않고 빵부터 먹어요.”라고 심심할 때마다 말했던 사람. 내가 50키로든 80키로 든 지금이 딱 좋다고 얘기하는 ‘엄마 ’ 말이다. 나는 부모님의 반 응에 덤덤한 태도를 보여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내 살이 젖살 인 줄 알고 있었다. 여름옷은 기대만큼 멋있지 않았다. 보자마자 흥분해서 산 것인데 이상했다. 유행이란 건 왜 이리 빨리 낡아 버리는가. 약간 시간이 지났을 뿐이거늘 쭈글쭈글 너저분하게 쌓인 옷더미가 내 남루한 취향과 구매의 이력같이 느껴져 우울해졌다. 지난해 내가 우쭐해 하며 입고 다녔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고, 어쨌든 부장님 생신에 입고갈 옷도 고르긴 해야 한다. 와이셔츠와 남방 사이에 고민하다 와이셔츠 쪽을 선택했다. 다행히 아직 옷을 크리닝에 맡기지 않아 서, 이 정도면 젠틀한 느낌도 나고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사실 각 잡힌 옷이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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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처음으로 나와 같이 영화관에 간 사람이었다. 블록버스터 가 뭔지, 로맨스 영화가 얼만 재밌는지, 한여름의 공포영화가 얼마 나 재밌는지 알려준 사람. 어느 집단에나 있는 친절하고 인기 많 은 여자 말이다. 난 지금까지 그녀만큼 나에게 잘 대해줬던 여자 를 본 적이 없다. 흠모도 하고, 말벗도 하고, 괜찮다면 평생 같이 있고 싶은 사람. 혹시 이상한 취미가 있다 해도,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만 난 당신에게 복종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눈 딱 감 고 따라가고픈 그런 사람이었다. 당시 나는 여자들에 대한 편견에 휩싸여 있었다. 여자란 생물도 그저 성별이라는 것만 다를 뿐 남 자와 같다. 그들에게는 매력이 없다. 그들 또한 이기적이고, 물어 뜯기 좋아하는 야만적인 족속들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나 스 스로를 그렇게 믿게 만들었다. 그랬던 내게 그녀는 착하면서도 내 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이성과도 같이 느껴졌다. 면면의 시원찮음과는 별개로 다른 여자들은 죄다 여자로도 취급 안 하며, 스스로 깨달았다 자부하는 고교생의 미숙한 오만도 한몫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첫 동아리 시간이 끝난 후 환영회 시간이었 다. 그때 나는 너무 많은 사람. 나쁜 공기, 수많은 소음들 사이에 서 어지러워하던 중이었다. 물론 처음 들어온 후배들의 풋풋한 느 낌은 여태까지 동급생 남자들과만 지내왔던 나의 가슴을 떨리게 하기는 충분했다. 지금도 나는 서로가 만날 때 어떠한 미증유의 힘이 작용해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편 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던 나란 사람조차 그 어지러운 환경 속에서도 즐거워 할 순 없는 일이었다. 아직 덜 익은 젊음이 내뿜는 에너지는 상당히 밝고 노골적이고 그 동시에 싱그러웠다. 나는 18살을 이 부에서 맞는 것이 좋았다. 우리 부 사람들의 눈빛과 말투, 안색에조차 도 호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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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웃는 그 한복판에서도 그 나이에는 당연한 듯 무언가 즐거움 가운데에서 알 수 없는 공허함을 느꼈고, 내 그 공허함이 마음에 들었으며, 심지어는 누군가 그걸 알아차리길 바랬다. 환영식날 그 곳에서 슬쩍 빠져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가 거기 없단걸 통 해, 내가 그곳에 있단 사실을 알리고 픈 마음. 나는 모임에서 이탈 한 주제에 집에도 기어들어가지 않고 주변에서 서성거리고 있었 다. 스스로 고고한 척 하는 것이 무언가 못마땅했지만, 숨은 그림 찾듯이 그런 나를 누군가 발견하고, 내 이마에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려주길 마음속으로는 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 어두운 복 도에 그녀가 있었다. 목도 끝 굽이진 곳에 흐린 실루엣으로. 어딜 갔다온건지 확인할 순 없었다. 중요한건 그녀는 날 알아봤다는 점 이었다. “선배, 명훈이죠? 하 명훈.” “응? 어 맞아.” 나는 그녀가 내 이름을 안다는 사실에 놀랐다. 동시에 슬그머니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살이 쪄서 눈에 띄었나 싶었다. “선배도 원학중 출신이라며요, 저도 거기 나와서 기억했어요.” “아 그래?” “왜 혼자 있어요?” “그냥....... 좀 답답해서.” 형편없는 핑계 탓이었는지 그녀는 조그맣게 웃었다. “없어서 찾아 봤어요. 이따가 봐요.” 나는 그녀의 인사를 대충 받아 놓고 그녀와는 반대방향으로 걸아 갔다. 딱히 목적지는 없었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녀는 방으로 가다 몇발짝 안가 돌아서서 나에게 한마디 했다. “선배 말할 사람 없으면 제가 말동무라도 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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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래서 였을 거다. 훗날 누군가 나에게 사랑이 무엇이냐 물 었을 때, ‘나의 외로움을 알아주는 사람’ 이라 답한 것은. 말동무....말동무라......., 친해지고 싶은 건지, 애써 상대의 위 아 래를 없애고 싶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녀는 곧잘 나를 따랐다. 그 녀가 나를 바라보고 와서 같이 떠들자고 했었을 때는 나조차도 그 녀에게 함박웃음을 짓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예나는 그날 자기도 모르는 새 중요한 일을 하나 한 것이었다. 내 머리에 동그라미를 그려준 거였다. 약속장소는 꽤 멀었다. 나프탈렌 냄새 밴 여름옷을 세탁기에 널어 돌리고, 밥에 김치에 간단히 먹은 후 일찌감치 짐을 나섰다. 지하 철에선 벌써 에어컨이 작동하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의 외출. 유리 창 안으로 새파란 초록색 풍경과 햇빛이 쏟아졌다. 눈을 감고 숨 을 깊게 들쉬었다. 유리창을 뚫고 피톤치트 입자가 내 피부 속에 스며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좋았던 거구나...이거...요즘 공기...’ 숨을 내뱉자 바로 허리에 부담이 왔다. 아까부터 배에 힘을 주고 있었던 터라 속이 더부룩했다. 예전에도 소개팅자리에서 꽉 끼는 옷을 입었다가 상대 앞에서 신트림을 한 적이 있었다. 오전엔 전화를 받고 처음에는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내 근 황을 그녀에게 보이기 싫었고, 예전보다 더 못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내가 제일 멋졌을 때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녀를 막 좋아할 무렵부터 살을 빼, 대학 1학기가 겨우끝날 때 쯤에야 몸이 잡혔다. 그녀가 혹 내 얼굴에서 낙오자 의 안색을 발견한다면 어쩔까 조바심도 났다. 광합성을 하는 사람 에게는 광합성의 빛이, 전자파를 먹고 사는 이에겐 전자파의 빛이 얼굴에 드러나는 법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도와줘요.’라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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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에 마음이 흔들렸다. 폐 끼치기 싫어하는 그녀 성격에 오죽 했음 내게 연락했을까 싶었다. 한편으론 그녀가 힘들 때 날 찾아 줘서 고맙고 기뻤다. -어디 쯤이에요? 휴대폰 진동음에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가고 있어. 2시전에는 도착할 듯해. -로비에서 전화줘요. 와줘서 고마워요. 나는‘고맙다’라는 글자를 검지손가락으로 가만히 훑었다. 그리고는 가만히 창밖을 내다보며 웃음지었다. 그녀도 알았을까? 내가 그녀를 오랫동안 바라봤다는 걸. 후배였지 만 동경했고 좋아도 했었다는 걸.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사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그녀에게는 이미 남자친구가 있었으 니까. 나는 그들이 쌓은 시간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남자였지만, 분명 나보다도 나은 사람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무렴, 그녀가 고른 여자였는데 그렇고말고. 기분 같아 선 그 남자마저도 사랑해 줄 수 있을 마음이었다. 처음에는 나도 욕심은 없었다. 내게 예나라는 귀여운 후배, 그리고 친구가 생겼다 는 것에 감사했다. 살면서 진심으로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기란 힘든 일이니까. 다만, Tv도 없고 컴퓨터도 없는 작은 방 안에서 부모님이 돌아오시길 기다리며 이따금 확인하는 그녀의 문자가 정 말 반가웠던 기억은 난다. 한방 중 메시지 도착을 알리는 조그만 불빛에 따라 내 마음도 그 불빛처럼 깜빡였다는 그 사실을. 어찌 보면 유치해보일수도 있는 그 문장의 조합들에 내가 퍽이나 의지 했었다는 그 사실을 말이다. 그녀는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줬다. 쉽 게 판단하거나 충고하지 않았고, 산뜻한 농담도 잘 해주었다. 언제였을까 중간고사가 끝나고, 나는 시험스트레스 때문에 퍽이 나 몸이 안 좋았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시절 나는 몸이 아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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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턱대고 긴 잠을 자는 버릇이 있었다. 어느 때처럼 기면증 환자 같이 다음날까지 곯아떨어지기도 했다. 그날 역시 눈을 떴을 땐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그녀가 나에게 추천한 어느 곡을 mp3에서 재생했다.‘merry christmas mr lawrence’가 내 작은 방 안에 잔잔히 퍼져갔다. 그러자 문뜩 그녀에게
말을
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저기, 나랑 로맨스영화 보러갈래, 아무거나. 반응이 없어 포기하고 있을 즈음 그녀에게서 문자가 왔다. -왜요? 나는 그때 핸드폰을 잡고 침대 위에서 엎드려 방긋 웃었다. -그냥.그냥 가보고 싶어. 곧이어 메시지 도착을 알리는 진동음이 들렸다. -선배는 영화관이 그냥 가는 덴줄 알아요? -그럼? 얼마 후 그녀의 그 나이답지 않은 의젓한 대꾸. -영화관은 사람의 인생을 보여주는 도서관이에요. 나는‘아!’하고 감탄했다. 그건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반하는 순간 심장에서 울리는 효과음이었다. 그렇게 몇 번 쓸데없는 문자 를 주고받다 나는 그녀와 영화관에 갈 약속을 잡았다. 나는 엄마 에게 친구와 놀러간다며 그동안 모아두었던 돈과 합쳐 옷이란걸 처음으로 사봤다. 지금 생각하면 참 촌스러운 옷이지만, 그때당시 의 나는 그 바지를 몰래 몰래 훔쳐보며 쳐다봤던 기억이 난다. 그 렇게 토요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롯데시네마에 도착했을 때, 그 녀는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지만, 나는 가끔 그 상냥함이 야속했 다. 하지만 그녀가 진심으로 좋아진 계기는 따로 있었다. 그녀가 날 알아보듯 나도 그녀를 알아본 순간이었다. 그녀는 고2, 난 고3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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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써 학교에서 야자를 하던 그 해 여름 밤. 전국적으로 유래 없는 열대야가 지속되던 때 나는 런닝차림으로 문제를 풀며 헐떡거리고 있었다. 선풍기를 틀어놨지만 눅눅하고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와 도리어 숨이 막히는 그런 밤이었다. 욕실로 씻으러 뛰쳐들어가 샤 워를 하고 나와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10시쯤 집에서 뛰쳐나왔다. 시원한거나 마시고 이 더위를 잠시나마 피할 요량이었다. 요 앞의 슈퍼마켓은 약간 특이했다. 한국의 음료수들도 팔지만 세계각지의 신기한 맛의 음료수들도 많이 팔았다. 그중에서도 나는 체리맛이 나는 콜라를 정말 좋아했다. 그래서 조금 집이 멀더라도 특이한 음료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들 여기서 음료를 사가곤 했다. 지 금 가면 아직 문은 닫지 않았을 테고,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선풍 기를 쐰다면 조금은 쾌적하게 공부를 할 듯 싶었다. 온몸의 땀이 콜라의 기포에 씻겨내려가는 상상을 하자 설래기까지 시작했다. 그런데 거기에 누가 있었다. 기다랗고 흐린 윤곽. 내가 아는 실루 엣이었다. 그녀는 근처의 벤치에서 포도맛 사이다를 마시며 앉아 있었다. 이윽고 나를 눈치 챈 그녀는 내 쪽을 돌아보며 조금은 지 친듯한 눈빛으로 인사했다. “어? 선배 웬일이에요?” “너야말로 이 시간에는 웬일이냐?” “제가 먼저 물었으니 선배가 먼저 답하시죠?” 나는 망설이다 솔직히 답했다. “더워서 나왔어. 공부도 안 되고. 너는?” 그녀는 목덜미를 만지며 쑥스러운 듯 말했다. “저도 좀 더워서 몰래 나왔어요.” 그녀에게서 조금 좋은 냄새가 났다. “근데 선배 여기 모기 있어요. 그 대신 시원하긴 하지만요. 그녀는 팔 언저리를 긁었다. 모기한테 몇 방 쏘인 듯한 눈치였다. 나는 조금 밖에서 음료수를 마시고 들어가겠다며 그녀 옆의 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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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몸을 돌렸다. 그녀는 ‘그럼 저도’라고 말하며 잽싸게 내 옆으로 와 앉았다. 내게서 2뼘 남짓한 거리였다. 벤치 주변은 약간 가로 등이 닿지 않아 꽤 어두웠다. 나는 핸드폰을 붙잡고 게임을 하고 있었고, 그녀는 이어폰을 꽃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한쪽 들어봐도 되?”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꽤 오래된 듯한 이어폰의 한쪽을 내게 주었다. 그녀의 이어폰에서는 언젠가 내가 우울하다 했을 때 그녀 가 나에게 추천했던 그 곡 ‘merry christmas mr lawrence’가 흘 러나오고 있었다. 분위기는 한결 편해졌다. “신기하단 말이지? 어떤 음악을 들으면 말이야. 그 곡을 나한테 알려준 사람이 떠올라. 그와 동시에 그에 대한 모든게 동시에 떠 올라. 처음 그 사람이랑 가본 길, 처음 그가 나에게 말한 책 모두 말이야. 세상에 그런 것이 있단 걸 알려준 사람이 떠오른다고 할 까. 이런 말이 있지? 김춘수의 꽃에서 말이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라 는 구절이 있지? 거기에서처럼 내가 그 곡을 모르고 그 길을 모르 고 했을 때 그건 나한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지만말이야, 내가 그 사람에 의해서 그 곡을 알게 되고 그 거리를 알게 됨으로써 그 것에는 그 사람이라는 무언가가 생각나게 하는 어떤 힘이 있는거 같다..고 생각해.” 나는 ‘어? 내가 이렇게 멋진말도 할 수 있단 말이야? 대단하잖아 나.’ 하고 혼자 감탄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더욱 걸작이었다. “마치..신과 같이 말이죠? 우리가 그를 모를땐 그는 존재하지도 않는 그저 무형 무상의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 였지만, 우리가 그 를 신이라 부르고 칭송함으로써 그에 대한 새로운 의미가 생긴 다.... 뭐 이런거겠죠? 선배가 나한테 한 이야기는?” 내
속에서
한번
더
‘아!’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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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성소리가
울려퍼졌다.
내친 김에 나는 그녀에게 무언가를 더 말하고 싶어졌다. “저기 우리 환영회 때..... 니가 나 안보여서 찾았다고 했을 때 말 11
이야...그 때 좀 고마웠다.” 그녀는 잠깐 고개를 갸웃 하더니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아 그때 그거요? 그거 부장 선배가 선배 찾아오라고 시켜서 그 런거에요.” 나는 그때 부장놈 멱살을 잡으며 ‘평화정책 다 족까라 그래!’ 를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참을 내가 뚱한 표정으로 앉아 있자, 그녀는 나에게 다가오며 자신의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선배, 이거 좀 봐봐요.” 나는 앉아 있고 그녀는 허리를 굽힌 채 서 있는 모양새였다. 캄캄 한 밤하늘 아래, 두 사람의 얼굴 위로 핸드폰 액정의 미약한 불빛 이 비쳤다. 그녀는 자신의 핸드폰 위에 떠있는 사진을 가리켰다. 언제 찍었는지 모를 우리 환영회 때의 사진들이었다. 액정 위로 느릿느릿하게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와 나는 각자 친한 사람들이 보일 때마다 품평을 하고 낄낄 거렸다. 그러다 내 사진이 나왔다. 복도에 가만히 서 있던 그 때, 나 홀로 누군가가 날 찾아주길 바라던 그 때, 그녀는 나를 그녀의 핸드폰 속에 담아두었던 것이었다. “좋네요 이 사진.” 그녀가 사진을 넘기는 것을 멈추고 나에게 말했다. “난 싫어 이거.” “왜요?” “쓸쓸해 보이잖아. 뭔가 괜히 고독해보이고 싶어 하지만, 실제로 는 누구를 기다리며 다른 사람의 눈길을 원하는 놈 같아 보여.” 나는 그 때 당시의 내 진심을 매도하며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내 심 그녀가 그게 아니라고 내 말에 반박해주길 난 바라고 있었었 다. “전 그 쓸쓸한 느낌 때문에 이 사진이 좋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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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액정 화면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에? 어째서?” 그녀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 사람을 알 수 있게 하니까...” 나는 푸른 불빛에 비친 그녀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 고 나는 이제부터 이 사람을 본격적으로 좋아해야 겠다고 다짐했 다. 세상에 내 사진을 보며 이렇게 이야기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을 까 풍문에 그녀는 그녀가 들어가고 싶었 다던 방송국에 취직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때 당시 나는 그녀 를 보고 축하한다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았 다. 그녀에게 이런 날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때 당시 취준생 이던 나는 백수상태나 다름없었고, 패배자의 인생을 걷고 있었기 에, 날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던 그녀가 나를 보고 실망 할 것 같 아 그녀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오늘 그녀가 나에게 전 화를 했다. 제일 먼저 든 감정은 반가움이었다. 그녀가 방송국에 얼마나 들어가고 싶어 했는지 알고 있어서였다. 그녀는 내게 어떻 게 지내는지, 아직도 그곳에 사는지 자잘한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는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의 소식을 전하고 엉뚱한 이야기들만 늘 어놓았다.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목소리였다. 그러곤 대화가 끊기 자, 그녀는 머뭇대며 나에게 물었다. “명훈선배, 오늘 시간 있어요?” 얘기인 즉 자신이 밭은 프로그램에 잠깐 출연해 줄 순 없냐는 것 이었다. 누군가 펑크를 냈는데 그걸 자신이 메꿔야 하는 상황이라, 일반인 중에 구해야 하는데 아는 사람이 없다고, 입사한지 얼마 안돼서 애를먹고 있다고 했다. “너 피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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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이디에요.” “아 그래? 근데 예나야 정말 미안한데...” “그냥 배경 같은 거야 선배. 카메라에 잡히지도 않고 그냥 엑스 트라라 생각하면 돼요. 안돼요?” 그녀는 계속 난처해했다. 그러고는 하루아르바이트 치곤 출연료 가 나쁘지 않다는 것을 덧붙여 말했다. “미안 무리야. 창피하기도 하고...” “그래 그럴 수 도 있죠....”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참다못해 말을 꺼낸 건 내 쪽이었다. “앉아만 있을게.” 그녀는 지나치게 반색하며 말했다. “응? 그럼 그럼. 금방 끝나요 선배.” 이내 후회가 밀려들어왔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뭐 게임도 하고 그러는데 이상한 건 아니에요. 금방 끝나요. 고 마워요 선배. 정말 고마워요.” ‘뭐? 게임?’ 마음속 다급한 외침이 전해지기 전에 그녀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한 때 내 별명이 ‘게임브레이커’ 라는 사 실을 밝히지 못했다. 말이 길어져도 아마 못했을거다. 그러기엔 그 녀는 너무 기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로비에 나오지 않았다. 대신 작가라는 여자가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앳된 인상의, 입사한지 얼마 안되 보이는 여자였다. 출입증을 받아 방송국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지금 정신없이 바 빠서 못 온다고 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저기 이거 뭐하는 프로그램이에요?” “그건 조금 이따 선배가 설명해 드릴거에요.” 그녀는 나를 방송국 내에서도 많이 후미진 곳에 속하는 일반인 대 기실로 날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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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세요.” “아뇨 여기 있을게요.” 나는 복도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낯선 공간에 모르는 사람들과 같이 있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실래요? 조감독님 곧 오실거에요. 박선배가 되게 고마워하 던데. 아침부터 깨지고 혼나고 있었거든요. 오늘 좀 도와주세요.” 그녀는 중요한 정보를 말하듯 속삭였다. “저희 피디가 좀 미친놈이라서요.” 그러곤 촬영장 쪽으로 급하게 이동했다. “저기 잠시만요. 프로그램 이름은 뭐에요?” 그녀는 한심하단 눈빛으로 대꾸했다. “금성인 박테리아요.” 스튜디오 안은 생각보다 어수선했다. 무대를 제외하곤 주변은 온 갖 잡동사니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주위에서 퀴퀴한 냄새가 났다. 하루에도 몇 번 씩 세트를 세웠다 부쉈다 하니 그럴 법 하긴 했 다. 녹화장으로 몰래 들어갔다. 입구에선 뜬금없이 방치된 신전 기 둥이 보였다. 저 기둥 너머로 수 백개의 조명이 비치는 곳에 청바 지에 대본을 구겨 넣은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꿈을 이룬 그녀의 모습은 정말로 근사해보였다. 무대에선 대충 동선과 조명, 음행 등의 큐를 맞춘 ‘드라이리허설’ 이 막 끝난 참이었다. 내가 있을 자리엔 보조 작가가 서 있었다. 낯은 익지만 잘 생각나지 않는 개그맨도 보였다. 피디라는 사람은 의자에 앉아 대본을 확인하고 있었다. 미친놈이라기엔 생긴 것도 멀쩡했다. 입이 걸어 툭하면 욕을 난사한다던가. 그런 걸 할 사람 으론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남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대뜸 소리부터 질렀다. “야! 쟤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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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흠칫 놀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는 나 대신 변명을 했 다. “오늘 빵꾸 난 출연자 대타입니다. 바로 준비시키겠습니다.” 그녀는 날 잠시 외진 곳으로 데려갔다. 조금 전 세트장보다 훨씬 음침한 장소였다. 우리는 조그마한 인공 연못이 그려진 가짜 배경 앞에 섰다. 멀리서 본다면 우리가 대화하는 장면이 영화의 한 장 면 같아 보일 것 같았다. 그녀는 나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선배. 미안. 선배한테 말 못한 이야기가 있어요.” 온몸이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갈까 싶 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안돼. 못해.” “명훈선배...” “안해 나.” 분장실을 빠르게 걸어 나왔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날 쫒아왔다. “잠깐만요..” 그녀가 다급히 내 팔뚝을 잡았다.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히 젖어 있었다. “안보이도록 최대한 편집할게. 그렇게 눈에 안뛸꺼야.” 그녀는 손에 힘을 풀었다. 그 대신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나는 당 황하며 그녀의 눈가를 손으로 닦아 주었다. “울지마..참가는 해줄게.. 그런데 또 뭘 먹어야 된다며...?” 그녀는 울다 말고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오늘 주인공이 푸드파이터라 그래요. 많이 먹기 대회우승자? 다 른 사람들은 양껏 조금만 먹으면 되요. 명훈선배 진짜 부탁할게 요.. 저 이거 펑크나면.........정말 미안해요 선배. 한번만. 단 한번 만 도와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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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장 위 환풍기가 시끄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원망하듯 그녀를 빤 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 녀가 찬 헤드셋에서 희미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야이 새끼야, 빨리 안와?” 푸드파이터는 뜻밖에 장신의 남성이었다. 게다가 잘생기기까지 했다. 그 남자는 보디빌더들이나 입는 옷에 잘생긴 남자들만 입는 스키니진을 입고 있었다. 그 남자를 보자 그녀가 날 왜 불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간절하게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주 위에 뚱뚱한 사람을 세워둬 그 남자를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였 다. ‘이렇게 마른 남자가 비만인 사람들보다 더 잘 먹는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 순간 내가 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지 못하는가 고민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녀를 돕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녀를 도우면서, 그녀가 하자는 대로 하면서, 그녀를 벌주 고 싶었다. 부모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자해하는 청소년과도 같이. “자 한 번에 가자고!” 순식간에 정신이 멍해질 정도로 환한 조명이 시아를 가렸다. 카메 라 렌즈는 낯설었고, 사람들은 밝음을 가장한 이상한 파티를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큐카드를 든 개그맨이 주인공을 소개했다. 세계 햄버거 먹기 대회의 우승자이며, 잘생긴 얼굴의 재미교포 남 성인 ‘대니스 한’ 이라고 했다. 화려한 조명 아래 불꽃과 함께 그 남자가 등장했다. 서구적인 얼굴의 남자였다. 그 남자의 얼굴엔 묘 한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나는 왼쪽 끄트머리에 엉거주춤
서 있
었다. 한명은 남자 역도선수, 나머지 둘은 하나는 남자 씨름선수, 하나는 여자 유도선수였다. 나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소개 됐다. 사 회자는 얼마동안은 대니스와 시시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주위 반 응은 어떤가 식사량은 어떤가 등의 이야기였다. 많이 먹기 게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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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촬영이 불가능하므로 실수가 있어선 안됐다. 스태프들은 미리 정해진 약속과 규칙에 따라 신중히 움직였다. 곧이어 소품팀이 탁 자를 들고 왔는데 그 위에는 보기만 해도 토가 나올 정도의 엄청 난 양의 햄버거가 쌓여있었다. 승자는 이미 정해져있었으나 보조 출연자들의 체구도 만만치 않아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받기에는 충 분했다. 공이 울리자, 운동선수들이 허겁지겁 햄버거를 먹기 시작했다. 그 렇게 먹어야 시청자들이 즐거워한다는 듯. 그렇게 먹기 위해 이 자리에 존재한다는 듯. 반면 대니스는 여유가 있었다. 그도 폭식도 기술이다라는 듯 노련하지만 빠르게 핫도그를 먹어치우고 있었다. 잘생긴 남자가 음식을 탐식하며 먹는 모습은 어찌 보면 CF에서나 볼 법한 멋지지만, 색정적인 모습 또한 갖추고 있었다. 반면 보조 출연자들은 두서없고 어리석어보였다. 역도선수가 대니스의 방법 을 보고 따라했지만, 그를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고개 를 숙인 채 햄버거를 우물거렸다. 그림이 안좋았는지 피디가 뭐라 소리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헤드셋을 만지며 이쪽으로 뛰어 왔다. 나는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 열심히 햄버거를 먹었다. 되도 록 카메라에, 그녀에게 내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스캐치북을 가지고 와 무언가를 길게 썼다. 그러고는 내 쪽으로 와 종이를 흔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내 과식하는 모습을 보이는게 창피해서 더욱 머리를 수그렸다. 그녀는 안절부절 못해 하는 눈치였다. 얼마 뒤 물을 마시려는 그 순간, 그녀가 들고 있는 도화지 속의 글자가 내 눈에 들어왔다. -고개 좀 들어요 선배. “........” 순간 머리가 멍해지며 미식거림이 올라왔다. 나는 햄버거를 든 채 로 그대로 가만히 서있었다. 양손 아래로 끈적끈적한 캐쳡 소스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무엇이었을까, 나는 이곳에서 그녀에게 뭘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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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려 한 것일까. 내게 영화를 보러가자 하던 그녀, 그 밤 나와 음악을 들으며 사진을 보던 그녀, 환영회 때 날 찾으러 와줬던 그 녀, 그녀의 모습이 전부 내 망막 사이로 겹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에게 있어서, 뭐였을까. 그녀와 내가 아무 사이가 아니란 건 이미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런 그녀에 매 어서 왜 이다지도 한심한 모습으로 그녀와의 재회를 한 것일까. 조금 더 멋진 그런 모습이 아닌, 이다지도 추한, 살은 찔 대로 찌 고, 내 두 손에 묻은 캐쳡과, 얼굴에는 가득한 패배자의 낯빛을 가 지고 나는 그녀와 이다지도 추한 만남을 이곳에서 가지게 된 것일 까. 토악질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모든 추억이 부서져 내린다. 내 망막 사이로 창백한 그녀의 얼굴과 나를 보며 웃어주었던 그녀의 얼굴이 스쳐지나간다. 그 모습이 겹치며 내 세계 안에 또 다른 파 멸이 일어나가 시작했다. “욱! 우우욱.....!”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다시 도화지에 뭐라 열심히 썼다. 그리고 울것 같은 표정으로, 구조 신호를 보내듯 종이를 번쩍 들어올렸다. -선배, 고개 좀 들어요! 고개 좀 들어줘요! 제발! "우우욱......우웨에에에에에에에엑!!!” 토악질이 쏟아져 나왔다. 내 입에서 햄버거의 잔해물과 내가 가지 고 있던 그녀에 대한 감정, 추억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고 있 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소리죽여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스튜디 오는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저 멀리서 그녀가 피디에게 무언가 혼나는 듯한 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아아, 난 또다시 그녀에게 이런 모습을 보였던 거구나. 눈물이 흘러나왔다. 계속해서 그와 동 시에 마음속에 담겨 있던 그녀에 대한 내 감정이, 몇 년을 고여 있었던 그 감정들이 내 눈물을 타고 흘러나와, 내 추접한 본모습 과도 같은 토사물 위에 한 방울, 한 방울, 그렇게 쏟아져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출연자들도 당황한 눈치였다. 대니스는 이게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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슨 일이냐며 짜증을 내고 있었고, 씨름선수 남자와 유도선수 여자 는 나를 싸늘한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었다. 오직 역도선수 남자만 이 날 외면한 채 먹고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 대니스 또한 음식 을 집어 먹기 시작했고, 나머지 사람들도 나란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이 음식을 잡어 먹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저 멀리서 얼굴을 한 손으로 잡고 절망하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나는 그녀를 잠깐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돌려 음식으로 손을 가져 갔다. 녹화를 어떻게 마쳤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도망치듯 촬영장 을 빠져나왔다. 허둥지둥 여벌의 옷을 갈아입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녀에겐 인사 없이 갈 생각이었다. 출입증을 반납하고 방송 국에서 나왔을 때 주위는 이미 어둑해 진 상태였다. 주머니 속 휴 대전화가 쉴새없이 울렸다. 나는 주머니 속 진동은 무시하고 걸었 다. 온몸이 매 맞은 듯이 후들거리며 세상이 번지듯이 보였다. 이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나는 절대적으로 혼자라는 고립감을 느꼈 다. 그곳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데 지하철 역 횡 단보도 앞에 섰을 때, 누군가 내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났 다. “명훈선배.”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선배” 신호등 불빛이 바뀌었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잠깐만요.” 그녀가 손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땀을 뻘뻘 흘리며 헐떡이고 있었 다. “나 간다.” 손을 뿌리치자 그녀가 나를 더욱 완강하게 잡았다. 손 위로 2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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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의 한 여자의 여린 손이 느껴졌다. “대기실 가봤는데, 이미 가고 없길레.....” 그녀는 여전히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오늘 고생하셨어요. 선배. 피곤하 실텐데 좀 쉬시고요. 참 부장 님 생신이라고 했나요? 미안해요 선배 오늘 저 때문에 늦었죠? 선 배, 고마워요 정말. 그리고 참 선배 편 할때요.....” 나는 물끄러미 땅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말을 기다 렸다. “문자로 계좌번호 좀 넣어줘요. 주민번호랑........” 정처 없이 길을 걸었다. 그저 머리가 멍했다. 길가에는 나와는 관 련 없는 사람들이 지나가고 세상은 내가 이렇게 힘들어도 빠르게, 바쁘게 잘만, 시계바늘은 달리기를 재촉하고 있었다. 언젠가 들어 본 이야기가 있었다. 세상은 아름답다. 그렇기에 아름답지 않다고, TV였을 까 언젠가 본 책의 한 구절이었을까 그 구절이 내 머릿속 을 스쳐 지나갔다. 내 머리 위에는 가로등이 그날과도 같이 어두 운 불빛을 내며 날 비추고 있었다. 나는 왜 이다지도 아픈 걸까.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아픔을 딧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 아픔 속에서도, 이토록 진한 아픔은 처음이었다. 심장을 칼로 도려내는 것 같은 기분. 내 젊은 시절을 송두리째로 누군가가 앗아간 듯 한 느낌. 머리는 텅 비어버렸지만, 중력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점점 어머니 대지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갑자기 목이 턱하니 막히며 오른손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손에는 아무런 상처 도 없다. 그러나 아까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녀가 잡은 손이 이 손이었구나 라는 것이 느껴졌다. 내 손바닥으로 그녀의 손의 부드러움과도 축축한 그 느낌이 떠올랐다. 그리고 어느 무덥던 그 여름 날 어느 가로등 아래서 ‘이 남자를 알수 있게 해준다’며 사진 을 보고 웃어주던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도, 환영식 날 날 찾아 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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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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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름답던 그 모습들도......그러자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내 눈가 에 흐르기 시작했다. 살면서 내가 모르는 그 곳, 그 때, 그 순간 누군가가 나 모르게 아파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 막에서 만난 폭우와도 같은 난대 없는 감정이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나도 모르는 누군가가 나 때문에 아팠을 거라는 느낌이, 이렇게도 쉬운 생각이었는지 당혹스러웠다. 그와 동시에 내 손은 점점 더 아려오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하지만
눈물은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나와 버렸다. 나는 결국은 두 손으 로 얼굴을 가리고 쓰러지듯이 길거리에 주저앉아, 그날과도 같은 가로등 아래에서 쓸쓸히 울음을 터트렸다. 그 사람도 지금의 나처 럼 많이 아팟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 점점 더 서러워지고 있었 다. 머리 위 가로등은 어두운 빛을 내다 말고 꺼질듯이 깜빡이고 있었다. 아직 더러운 옷을 벗지 못한 채 울고 있는 나를, 곧 없어 질 듯이 점멸하는 가로등만이 무심히, 그리고 오랫동안 날 굽어보 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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