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탐방
노이즈 음악이란 무엇인가? 홍철기(아스트로 노이즈, 노이즈 뮤지션)
노이즈와 음악.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노이즈와 음악은 상호배타적인 범 주로 받아들여진다. 음악의 영역으로 노이즈가 범람한 경우에도 그것은‘너 무나 음악적’이다. 여기서도 다음과 같은 생각은 여전히 질긴 생명력을 유지 하고 있다. 즉‘음악’이란 무엇보다도 노이즈, 소음, 잡음, 의미 없는 소리—혹 은 나아가 보다 일반적인 서술에 의하면‘메시지의 의미작용(signifying)을 방 해하는 요소’— 등을 배제한 어떤 것이라는 생각. 그런데 소음은 단지 음악의 영역에만 침범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층위에서는 우리가 듣는 소리 일반의 영역 대부분을 소음이 차지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속해 있는 감 각의 역사적 조건의 문제—혹은 그 조건의 변화의 문제—다. 역사적으로 앞선 어느 시대에도 음향 경험의 영역은 이 정도의 노이즈의 범람을 겪지는 않았 다. 존 케이지(John Cage)는 도시의 소음 때문에 잠을 설칠 것을 걱정하였으 나, 거리의 노이즈를 나름대로 해석하고 이를 자신의 꿈과 연결시키면서 수면 을 방해받지 않을 수 있었다. 아마도 이러한 일화는 소음이라는 인공적인 자 연과 인간의 해석 체계로서의 음악 사이에 주관적인 관계를 확립함으로써 노 이즈와 음악의 이분법을 무력화시키는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 지만 우선은 논의를 위해, 그리고 보다 중요한 이유에서 우리가 노이즈와 음 악이라는 두 단어의 조합이 일종의 형용모순으로 느끼게 되는 현실에서 출발 해보자. 우리가 근대 철학적인 이분법의 정당성을 곧이곧대로 믿는 시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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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벗어나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이분법 비판 자체가 이미 식상한 내용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하나의 이분법, 특히 음악에 있어서의 소음(騷音)과 악음(樂音)을 구분할 것을 요구하는 문화가 어떤 방식 으로든 그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의 시각에서 보자면 노이즈 음악, 혹은 노이즈 아트(Art of Noises)는 음악(예술)이 아닌 것, 혹은 예술이 될 수 없는 것으로 음악을 하려 한다는 불가능한 목표에 매달리 고 있는 성과가 없는 작업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모 순에만 집착하는 것, 그리고 어느 한 쪽에 서서 다른 쪽을 비판하고 제거하려 고 하는 것—마찬가지로 양쪽이 손쉽게 화해될 것이라는 생각—으로는 이러 한 이분법을 창조적으로 극복하지 못한다. 반드시‘극복’이 목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쨌든 생산적인 결과를 낳는 것이 중요하다면, 오히려 노이즈 음악 이라는 어려운 결합을 통해 음악이 처한 일종의‘위기’를 인식하는 것이 더 절 실해 보인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음악이라는 영역이 포괄하고 있는 규칙과 그에 따른 행위들의 의미가 결코 당연시될 수 없다는 상황 인식이 필요하다. 사실 우리가 소리를 경험하는 방식을 규정하는 소음의 증가, 혹은 보다 정확 하게 말하면 소음의‘총체화’라고 표현해야할 경향은 우리로 하여금 음악뿐 만 아니라 소리 자체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이러한 경향의 현실성은 앞서 서술한‘이분법’에 대한 극복이라는 목표설정 자체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도록 만들며, 심지어는‘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보이게 한 다. 우리는 소리를 단지‘음악의 소리(Sound of Music)’라는 좁은 범위 안에서 만 경험할 수 있었던 역사적 조건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와있다고 말할 수 있 다—따라서 기존의 음악적 문법에 대한 충실함은 개인적인 선호나 취향 이상 의 것이 되기 힘들다. 과거에는 분명 음악—전통 음악이든 고전 음악이든, 혹 은 종교 음악이든 간에—을 연주하거나 사람들이 모여서 떠들고 노래를 부르 는 상황이 아니면 소리를 만들고 듣게 되는 인위적 사건 자체가 매우 간헐적 으로 존재했다. 비록 우리가 도시의 소음에서 물리적으로 벗어나면 이와 비슷 한 상황 속으로 진입할 수는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상황이 우리가 겪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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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즈 음악이란 무엇인가? 231
음향 감각의 조건을 규정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이제는 반대로, 단순한 이 분법적 구도를 재생산하지 않는 한에서, 노이즈 없이 음악, 혹은 최소한 지각 가능한 소리를 만들고 들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바 로 이런 이유에서 단순히 노이즈를 재료로 삼아서 만드는‘음악’이라는 선택 지는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물리학자 가버(Dennis Gaber)와 현대음악 작곡가 인 크제나키스(Iannis Xenakis)가 각각 1947년과 1958년에 제안한‘음향 양자 (quantum of sound)’라는 실체는 우리의 음향경험의 조건이 얼마나 변화했는 지를 보여주는 발견/발명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물리학에서의 양자와 마찬 가지로 선형적 시간의 진행에 종속되지 않는 소리감각의 최소단위를 의미하 는 음향 양자는 수ms(밀리세컨드)에서 수십ms에 달하는 시간 동안 지속하는 음향적 사건의 등가물인 실제적인 소리의 입자이며, 이 입자가 이러한 단위 이하로 작아질 때에는 더 이상 청각적인 입자가 아니게 된다. 음향 양자는 그 자체로는 결코 음악적이지도 않으며 그렇게 이해될 수도 없지만 이것 없이는 유의미한 음악적 구조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자체에는 의미를 부여하 는 것이 불가능하면서도 의미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최소한 논리적으 로도, 그리고 소리의 경우에는 특히 감각적으로도— 전제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이‘입자’인 것이다. 모든 음악(과 소리)이 전기를 이용해서만 녹음/재생되고, 나아가 정보화된 과정을 통해서 생산되고 저장/복제(재생산)될 수 있게 되면서 원리상으로나 실제로나 모든 음악과 소리는 노이즈를 전제로 하여, 노이즈를 그 구성요소로 삼아서만 만들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마사미 아키타(Masami Akita)가 말했 듯이 녹음/재생 기술의 발전과 혁신은‘원음에 더욱 가까운 완벽한 재현’의 가능성보다는‘더 많은 노이즈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마그네틱 테입에 소 리를 녹음하는 기계적 과정은 인식론적으로나 미학적인 의미의 재현/표상 (representation)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겠지만, 그것을 매우 기능적인 것으로 전환시키는 동시에 전기신호로 전환된 공기의 진동에 따라서 자성물질의 배 치를 바꾸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음악을 녹음하는 행위는 전혀 음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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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 않은 소리-물질을 재배치하는 과정이며, 결국 노이즈를 음악이 되도록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이는 음악을 생산하는 과정 전체에 적용될 수 있고, 그 런 의미에서 우리가 듣는 대중음악이란 그것이 음악으로 들리도록, 즉 음악으 로 들리도록 만드는 메시지의 요소와 내용을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전 달되도록 그 기능이 제한된 동시에 최적화된 노이즈라고 할 수 있다. 가장 강 력한 전달력을 발휘하는 노이즈이자 소비를 목적으로 하는‘프로파간다 (propaganda).’메시지의 전달에 방해가 되는 다른 소음들에도 불구하고 (그 리고 이러한 소음들을 무력화시키면서) 가장 효과적으로 멜로디와 박자, 가사 라는 메시지의 형식과 내용을 전달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이러한 대중음 악일 것이기 때문이다. 마사미 아키타의 메르쯔바우(Merzbow)는 노이즈로서 의 대중음악에 대항하는 일종의 노이즈 프로파간다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스스로도 일본의 대중문화가 만들어내는 소음을‘잠재우기 위해’자신의 노이즈를 사용한다고 말한다.“아마도 그것은 소리를 사용하는 파시스트적 1
방식일 것이다.” 따라서 노이즈는 단지 우리가 음악의 소리로부터 제거해야할 바람직하지 않은, 혹은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잔여물로 환원될 수 없다. 소음을 그러한 잔 여물로 정의하는 한 오히려 음악이야말로 노이즈의 일종의 부정적 잔여물, 혹 은 잉여물이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된다(음악의 부정신학?).‘음악에서 노 이즈를 완전하게 제거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보라. 그러면 음악은 온데간데없 고, 침묵 혹은 무음(無音)의 상태만 남을 것이다.’게다가 노이즈는 음악이 되 기 이전인, 그러나 예술가의 손을 거쳐서 질서가 부여됨으로써 음악이 되어야 하는 카오스나 활성화되지 않은 질료도 아니다. 노이즈는 이미 너무나 시끄럽 게 발생하고 있으며, 우리가‘음악의 소리’라고 이해하는 영역은 바로 이러한 노이즈가 배치된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즉 더 이상 음악은 구조화된 것을, 그 리고 노이즈는 구조화되지 않은 어떤 것을 지칭하지 않는다. 1)“The Beauty of Noise : An interview with Masami Akita of Merzbow”by Chad Hensley (Http://www.esoterra.org/merbow.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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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즈 음악이란 무엇인가? 233
노이즈 음악이 가장 흔히 직면하게 되는 반대 중 하나는 의도된 음악과 의도 되지 않은 소리(소음, 잡음, 노이즈)를 어떻게 동등하게 대할 수 있느냐하는 것 이다. 혹은 최소한 둘 사이에 질적인 차이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작곡자 와 연주자가 엄청난 노동시간을 퍼부어서 음악을 만들고 연주한다면 연주회 장을 찾은 관객은 극히 우연하게 많은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옷 부스럭거리는 소리나 기침 소리를 낸다. 혹은 길을 걸어가는 행인은 자신의 의도와는 크게 상관없이 발자국 소리를 내고 웃고 떠든다. 어떻게 의식적으로 치밀하게 계획 된 의도된 행위와 그렇지 않은 우연한 결과를 동일시 할 수 있을까? 사실 누구 도 그것을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일단 질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양자를 정도의 차이(혹은 양적인 차이)의 문제로 보기 시작하면 이미‘음악’의 시각 에 서 있는 사람은 둘을 동일시한 것이 아니냐는 혐의를 둔다. 길을 걷고 옷을 부스럭거리고 기침하는 행위는 누가 봐도 인위적 행위이자 조작이다—비록 의식적이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런 점에서, 즉 인간의 행위라는 측면에서는 고도로 숙련된 피아니스트의 연주와 이들 행위 간에는 질적인 차 이가 없다. 아마도 행위의 복잡성의 정도의 차이만 존재할 것이다. 사실 길거 리를 걸어가는 행인과 그 옆을 지나쳐가는 트럭 등의 길거리의 배치 전체가 만들어내는 소음의 앙상블은 어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교향곡만큼이나 혹 은 그보다도 훨씬 더 인위적이고 복잡한 형태로 산출된다—이에 투여되는 노 동시간도 결코 만만치 않다. 물론 길거리 소음의 앙상블은 교향곡이 음악이라 고 말할 때의 그런 의미에서만 보면 결코 음악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길거리 소음의 앙상블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예를 들어 44.1kHz로 소리를 샘 플링을 하는 CD에 소리를 녹음하여 재생해야 할 것이다. CD는 악보에 비교한 다면 훨씬 더 복잡하고 정교한 대량의 정보를 기록하고 전달할 수 있는 매체 이다. 작곡을 특정한 음악적 규칙을 만들고 연주자에게 전달할 정보를 확정하 는 과정이라고 본다면 (이는 고전음악이든 대중음악이든, 혹은 노이즈 음악이 든 모든 음악에 해당할 텐데) 소음의 앙상블을 녹음하는 행위야말로 복잡성의 정도가 보다 높은 일종의 작곡 행위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연주도 다른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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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한 인간 행위들에 대해 손쉽게 미학적 우월성을 주장할 수 없다. 존 케이지가 “공장 옆을 지나가는 트럭과 음악 학교 옆을 지나가는 트럭 중에 어느 것이 더 음악적인가?”라고 물었다면, 이를 패러디해서“사람이 길을 제대로 걷을 때 나 는 소리와 사람이 넘어질 때 나는 소리 중 어느 것이 더 음악적인가?”라고 물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소리는 모두 소리이며 녹음이 되고 재생된다. 그렇다면 이제 연주는 녹음된 소리를 재생하는 과정에 대한 단순한 모방의 지위로 전락하게 되는 것일까? 오히려 우리는 작곡에 종속되지 않는 순수한 연주 행위로서의‘즉흥연주(improvisation)’를 노이즈 음악 안에서 보다 진지 하게 고려할 수 있게 될지 모른다. 즉흥연주의 발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기 타리스트 데릭 베일리(Derek Bailey)는 즉흥과 작곡을 나누면서 다시 즉흥연 주를 두 가지로 분류하였는데, 하나는 그가“관용적 즉흥연주(idiomatic improvisation)”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자유로운 즉흥연주(non2
idiomatic improvisation)”이다. 양자 사이에는 역시 일종의 정도의 차이와 질 적인 차이가 모두 존재하는데, 전자는 이미 확립된 음악적 문법의 영역들 안 에서 이 문법들에 의거하는 동시에 이들을 변화시키는 즉흥연주라면 후자는 그러한 기존의 음악적 문법들을 전제하지 않고, 혹은 이러한 문법들에 대하여 새로운 음악적 문법과 규칙을 만드는 행위에 보다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따 라서 순수한 즉흥연주는 작곡 행위 자체를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오히려 작 곡을 연주로부터 배제하는 것은 작곡이 전제된 (즉흥)연주라고 할 수 있다. 순 수한 작곡자가 음악을 만들기 위해 가상적으로 무한에 가까운 시간과 자유도 를 갖고 있다면 즉흥연주자는 작곡을 위해서 연주가 지속되는 한에서의 시간 3
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때그때의 인위적 행위(특히 연주와 듣기)가 정보화 되어 기록되고, 그러한 매체를 통해 듣는 사람이 전달받은 정보를 변용/변주 할 수 있게 되면서 연주와 청취행위로부터 작곡은 그 시차가 점차적으로 줄어 들게 되며, 연주와 작곡은 청취를 매개로 보다 순수한 즉흥연주로 수렴된다. 2) Derek Bailey, Improvisation: Its Nature and Practice in Music (Da Capo Press, 1993). 3) Ibid. p.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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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즈 음악이란 무엇인가? 235
좌담
소리의 물질성과 즉흥 협연 - 노이즈 뮤지션과의 만남
일 시 2006년 12월 7일 장 소 홍대 앞 모처 대담자 김곡, 박승준, 류한길, 이행준, 최준용, 홍철기 정 리 홍철기
엠비언트 연구자이자 문화다양성 연구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박승 준은‘플리커 비긴즈(Flicker Begins)’등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노이즈 뮤지션이다. 류한길은 인디밴드의 건반주자로 음악 활동을 시작하였고 ‘데이트리퍼(Daytripper)’라는 이름으로 이미 두 장의 음반(<수집가 (2001)>, <Brown Paper(2003)>)을 발표한 바 있다. 2005년부터 시작된 정기적인 즉흥전자음악 연주회인‘릴레이(Relay; http://www.themanual.co.kr/relay)’의 기획자이며 그 자신이 즉흥전자음악 연주자이기도 하 다. 최근에는‘매뉴얼(http://www.themanual.co.kr)’이라는 이름하에 음반을 포함한 다양한 매체의 출판을 기획하고 있다. 최준용은 홍철기 와 함께 97년에‘아스트로노이즈(Astronoise)’를 결성하여 지금까지 노 이즈 음악을 만들고 있다. 또한 2000년부터 시작한 자주 제작 레이블 ‘벌룬앤니들(Balloon and Needle; http://www.balloonnneedle.com)’의 운영자이다. 홍철기는 97년 이래로 노이즈 음악과 즉흥연주를 해왔으며 지금은 대학원에서 정치이론과 정치사상을 전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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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철기
우선 각자 자기소개를 겸해서 어떤 관심사를 갖고 있고, 어떤 작업
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해봤으면 한다. 우리가 전반적으로 기존의 장르 구분이나 어법에 대해서 불만을 공유하고 있으니까 보다 구체적인 내용 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린다. 류한길
실은 2007년 1월1일 새벽에“올해는‘이빨마담’이 되는 자리는 피
하리라”고 다짐했는데 오늘도 이런 자리에 오게 된 걸보면 운명 내지는 팔자 인 것 같다. 일단 내 얘기를 하자면, 점점 더 전업 작가의 처지에 놓이게 되고 있고, 출판에 더욱 더 관심을 갖고 있다. 홍철기
자신의 음악 작업에 대해서도 좀 소개를 해줬으면 한다.
류한길
음악에 관해서는 점점 더 할 말이 없어지고 있기는 한데. 나는 일
단 팝음악을 만들다가 이쪽으로 흘러들어온 경우고. 지금도 고민이 되는 문제 지만, 단순하게 말하면 소리를 듣고 다루면서, 연주하고 협연하는 것의 재미 를 봐버렸다고나 할까. 하지만 단지 재미만의 문제는 아니고 이런 활동에 대 한 가치를 느끼게 되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지금도 잘 만든 팝음악을 좋아하 지만, 그 기준이 점점 더 소리를 다루는‘근성’,혹은 소리에‘각’이 살아 있는 팝 뮤지션 쪽으로 옮겨간다. 내 경험을 말해보면, 원래 팝음악을 하다가 샘플 러 같은 기계를 다루고, 마이크를 이용해 소리를 잡아내면서‘소리 자체’에 집 중을 하게 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각각의 소리들이 담고 있는 맥락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당시에 자연스럽게 이 친구들 [최준용과 홍철기]이 하던 아스트로노이즈의 연주를 보면서‘이런 것도 성립 이 되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매우 좋았다. 그리고 그런 경험들이 지금까지 쌓여서 릴레이로 이어지는 것 같다. 박승준
내 경우에는 어떨 결에 초창기 홍대 씬에 오게 되었고, <십 만원
영화제> 같은 행사에 드나들게 되면서 영향을 받았다. 그때 아스트로노이즈 의 공연을 보게 되었고, 게다가 마침‘나다’에서 했던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의 회고전을 보게 되었다.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문화적 충격들이 었다. 펑크밴드를 하면서 나 자신의 언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불만들이
좌담
소리의 물질성과 즉흥 협연 237
아스트로노이즈가 보면서 비언어적 개입에 대한 고민으로 바뀌었고, 혼자 노 이즈를 만들기 시작했다. 김곡
실험 영화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주로 어디서 그런 영화들을 접했
나? 박승준 ‘어둠의 경로’와 시네마테크에서 그런 종류의 영화들을 많이 접 하게 되었다. 고다르 등이 했던 영화-음향적 실험들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결과물로서의 영화”가 아니라“영화를 생산하는 행위 자체”, 혹은 그 “과정 자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에서“소리 자체”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최준용
영화 쪽에서 많이 영향을 받고 그쪽에 계속 관심이 많은데 영상 작
업도 하고 있나? 박승준
영상 작업을 혼자서 하고 있는데 계속 고민이 되는 점이 있다. 미
셸 시옹(Michel Chion)이라는 영화학자의『오디오 비젼(Audio-Vision)』이라는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비주얼과 소리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는 내용과도 관련 이 되는데, 특히 사운드와 영상의 결합이 반드시 필연적이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계속 생각을 하고 있다. 감각의 치환이라는 점에서 시도는 하고 있는데 쉽게 공개는 못하겠더라. 홍철기
나는 사운드트랙이 없는 실험영화들에 관심이 많이 가던데. 여하
튼 내 얘기를 하면 사실 나는 준용이와 같이 작업을 하면서 이런 활동을 시작 하게 되었다. 최준용
우선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음악 외의 다른 장르에서 우리를 규정
할 때 쓰는 말인‘사운드 아트’에 대해서 몇 마디하고 싶다. 이런 규정에 대해 서 일정 정도의 거부감이 있는데 왜냐하면 스스로를 소리로 된 어떤 작품을 만드는 작가라기보다는 연주 자체에 보다 강조점을 두고 있는 연주자로 보기 때문이다. 홍철기
그래도 확실히 초창기에는 소리를 어떻게 만들까하는데 더 초점
이 맞춰져 있었던 것 같기는 하다. 최준용
최근에 점점 더 연주에 신경을 쓰다 보니 사운드 아트적인 측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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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역시 주어진 시간과 공간 안에서의 연주에 훨씬 중점을 두게 되었다. 홍철기
당시나 지금이나
소리 자체에 관심이 있기는 한 데 이펙트나 사운드 프로세싱 이 더 이상 작업의 중심이 아 니라는 점이 가장 큰 변화인 것 같다. 이러한 변화에는 역 시 협연이 매우 결정적인 계기 로 작용했다. 무엇보다도 어떤 소리를 만드느냐에 더 초점이 맞춰졌던 예전의 작업과 지금 의 작업은 시간성의 측면에서 크게 다르다. 예전에는 소리를
마틴과 타쿠 우나미 (2006년 7월)
미리 만들어놓고 연주회장에서 그대로 재생을 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는 데, 지금은 즉각적으로 소리를 만드는 과정 자체로서의 연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연주의 결과물은 CD로 녹음하긴 하 지만. 류한길
나에게도 역시 협연의 경험이 중요한 계기였다. 즉흥협연을 할 경
우에도 일반 연주처럼 미리‘연습’을 할 때가 있다. 그런데 그 연습을 했다고 해서 그것을 실제 연주에서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고 그렇게 하는 것은 의미 도 없다. 오히려 일종에 서로 간의‘호흡’을 경험하는 것이다.‘호흡’이라는 말로만 말하기에는 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여하튼 협연에서는 다른 사람 들의 소리에 대해 반응하면서 소리를 덧붙이는 재미가 상당하다. 최준용
예전에 밴드를 할 때와 비교를 해보면, 그때는 지루하게 합주도 해
야 하고나서 막상 연주에서 재미를 못 느끼게 되는데, 즉흥협연은 다른 것 같
좌담
소리의 물질성과 즉흥 협연 239
다. 사실 사운드 샘플을 준비해 와서 그때그때 플레이를 하면서 즉흥협연에 참여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걸 잘 하는 것도 연주자의 능력이다. 단지 나는 그런 연주 방법이 재미가 없을 뿐이다. 일단 연주자 자신의 재미가 중요하기 1
때문에. 그래도 작년 7월에 있던 릴레이 연주회에서 마틴(Mattin) 은 노래 한곡 전체를 자신의 노트북 컴퓨터로 플레이했었는데 그게 오히려 정형화된 즉흥 연주에 일침을 가하는‘신선한 연주’가 아닐까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김곡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작업이 소리 자체에서 즉흥협연으로 넘어오게
된 것 같아 보이는데, 소리 자체에 접근하기 위해 즉흥협연을 하게 되는 건지, 아니면 즉흥협연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소리 자체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인 지? 홍철기
우리가 말하는 예전에 더 관심을 가졌던‘소리 자체’에 대한 접근
법에서는 과정에 있어서의 모종의 분리가 있다. 왜냐하면 원하는 소리는 오랜 시간을 들여서 어디선가 만들어 와서도 공연장에서 녹음해온 소리를 재생하 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즉흥협연으로 넘어오면 연주하는 곳에서 소리를 만들 어서 연주한다는 것에 가장 충실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소리를 만들기 위해 미리 준비하는 과정과 함께 이른바‘현장성’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가 모두 고 려되고 포함될 수밖에 없다. 즉‘지금 여기서 내가, 혹은 우리가 연주한다’는 명제에 가장 충실한 방법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의 전자즉흥연주자 (Electro-Acoustic Improvisor)에게는‘공연장의 음향시스템도 연주자의 악기 의 일부분이다’고 흔히들 말하는데 그런 종류의 현장성이 연주의 중요한 요소 로 포함이 된다고 본다. 영화에 경우에는 즉흥협연과 같은 어떤 집단성이 가 능한가? 그러한 시도들이 있다면 소개해줬으면 한다. 1) 바스크 출신의 젊은 노이즈 즉흥연주자. 영국과 독일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2006년 7 월에는 릴레이의 초청으로 일본인 컴퓨터 연주자 타쿠 우나미(Taku Unami)와 서울에서 공 연을 하였다. 노이즈와 즉흥연주, 오픈소스 운동 등의 급진적인 시도들에 관심을 갖고 있으 다. 최근에는 타쿠 우나미의 레이블인‘히바리 뮤직(hibari music)’에서 <노이즈의 프롤레 타리아(Proletarian of Noise)>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URL을 참 조. http://www.matti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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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곡
영화는 일단 결과물이 필름으로 나오기 때문에 필름에 상이 맺히기
위한 물리적·시간적 제약이 있다. 그래서 음악에서와 같은 동시적인 협연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홍철기
어차피 음악에서의 즉흥협연의 경우에도 결과물은 CD로 나온다
는 점에서 영화하고 조건이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은데? 박승준
고다르와 장 피에르 고랭(Jean-Pierre Gorin)의 시도가 그런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고다르와 고랭은 노동자들에게 카메라를 주고 이미지 를 찍게 한 다음에 이러한 이미지들을 수집해서 작업을 했다. 류한길
그러나 역시 영화에서의 협연은 현장에서 직접적으로 벌어지기
보다는 과정에서의 협연이라고 할 수 있나? 김곡 이행준
그런 것 같다. 실험영화의 영역에 있어서도 즉흥협현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다
양한 시도들이 존재한다. 일종의 퍼포먼스와 설치가 결합되어 있는 형태인데 작가와 퍼포머가 동일한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주로 영국이 나 프랑스 등의 유럽지역에서 이런 작업이 활발하다고 알고 있다. 10대가 넘 는 프로젝터를 사용하여 전혀 다른 화면의 형태를 만들어 내거나, 네 명의 퍼 포머—연주자라는 용어가 더 적절하겠지만—가 즉흥적으로 협연하는 형태도 있다. 이들은 영사기 포맷을 여러 가지로 준비해서 영사기 자체를 하나의 음 악적 도구로 사용한다. 이외에 35mm 슬라이드를 가지고 다양한 형태의 퍼포 2
먼스를 오랫동안 해오고 있는 프랑스 MTK 의 경우나 캐나다에서 이러한 형태 의 슬라이드 퍼포먼스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김곡
좀 다른 방식이지만 푸티지(footage) 작업도 영화에서의 집단적 작
업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최준용
영화하시는 분들도 자기 작업에 대한 소개를 해주셨으면 한다.
이행준
나는 영화의 물질성에 반한 이미지와 사운드의 관계에 관심을 갖
고 있다. 기존의 영화에서의 사운드는 매우 매끈한 이미지에 의해서 결정된 2) http://metamkine.free.fr/metamchoix.htm
좌담
소리의 물질성과 즉흥 협연 241
다. 옵티컬 트랙 녹음이라는 것 을 거쳐서 이미지 트랙 옆에 사 운드 트랙이 입혀지는데 실제 로 매우 매끈하고 추상적인 이 미지로 결정이 된다. 그건 35mm 필름의 경우도 마찬가 지여서 이미지 상으로 매우 정 돈이 잘 되어 있고, 현상이 잘 되어야 만 사운드가 잘 나온다. 전에도 사운드가 현상을 통해 서 결정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 지만 암실에서 작업을 하면서 최준용의 CD플레이어 연주
이미지가 뭉개지면서 사운드 트랙 쪽으로 넘어가더라. 그런
필름을 나중에 영사기에서 틀 때 사운드를 켜보니까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내가 여기 있는 분들이나 다른 연주자들의 노이즈 연주를 보고 느꼈 3
던 것은 소리의 질이나 협연의 문제라기보다는 CD플레이어를 대하는 모습,
거기서 나올 수 있는 다양한 지대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탐구한다는 것 자 체가 굉장히 매력적이었다는 거다. 홍철기 사실 협연도 우리한테는 바로 그런 연주의 집합체라는 점에서만 오히려 의미가 있다. 류한길
우리가 악기라고 다루는 사물들, 매체들을 접근하는 방식이 행준
3) 최준용은 홍철기 등과 함께 CD플레이어만을 이용한 연주를 선보였었고, 이후 지속적으로 이 방법론을 실험하고 있다. CD플레이어가 CD의 표면을 읽을 때에 작용하는 우연성을 극 대화시킴으로써 즉흥 연주의 악기로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크리스찬 마클레이 (Christian Marclay), 오토모 요시히데(Otomo Yoshihide) 등의 턴테이블리즘(turntablism)이나 오발(Oval), 야스나오 토네(Yasunao Tone)등이 시도한 CD플레이어의 오작동을 이용한 작 곡/연주 방법에서 영향을 받아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42 나방 1호
씨가 이야기하는 방식과 공통점이 많은 것 같다. 이행준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보면 영화 쪽에서 많이 이야기하는 고다
르나 미셀 시옹의 책에서는 사운드 트랙 이미지, 즉 우리가 근본적으로 동의 하고 있는 부분인 사운드의 물질성에 관한 논의는 없는 것 같다. 우리가 그것 을 물질로 대하면서 기존의 음악과 영상 자체에 대해서 다른 가치관을 갖게 되고 태도로 변화하게 되는 지점이 구체적인 우리의 작업 상황에서는 가장 절 실한 부분이다. 홍철기
사실 소리와 영상이라는 것의 구분은 어떻게 보면 결과적인 것 같
다—인간의 감각기관의 특성을 제외하면. 사실 작업을 해놓고 특정 매체를 통 과시키니까 영상으로 나오고 소리로 나오는 것이지 만드는 과정에서는 실제 로 차이가 없지 않나? 수단과 도구에 접근하는 방식의‘다름’이라는 문제도 얘기해볼만한 주제인 것 같다. 나는 이 문제가 기존의 음악의 문법으로 뭔가 를 만들 때 아까 승준이가 이야기한‘내언어로 이야기하는 것 같지 않다’고 느 끼는 것과 관련된다고 본다. 또한 기존의 방식으로는 납득할만한 설명이 제시 되지 않는데도 실제로는 내가, 혹은 우리가 뭔가 의미 있는 작업을 한다는 것 의 간극도 있는 것 같다. 최준용
그 사이에 나하고 철기형은 곡사의 영상에 음향작업을 하는 일을
여러 번 했지만, 두 사람[이행준과 홍철기]의 최근의 합작[cracked share]은 매 우 좋았다. 홍철기
행준씨와 같이 작업을 하게 되면서 느끼는 것인데 나는 오직 즉흥
연주자와만 협연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아까 이야기했 던 접근법이나 태도의 공통점에서 더 좋은 동기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재료 의 수준에서의, 물리·화학적인 접근법이라고 할까. 이행준
비슷한 생각이다.
최준용
릴레이에서도 소리와 영상을 결합한 시도들을 해왔는데, 사실 별
로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너무 즉흥으로 양쪽을 연결시키려 하기보다는 접근 하는 방식에서 오히려 공통점을 찾는 것이 더 재밌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
좌담
소리의 물질성과 즉흥 협연 243
을 것 같다. 특히 앞으로의 릴레이에서도 그런 것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질감’이라는 측면에서도 더 만족스러울 것 같고. 류한길
결국‘태도’와‘질감’에서의 합의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행준
그렇다면 연주를 하거나 소리를 만들 때 어떤 소리는 취하고 어떤
소리는 버리는 데에 판단 기준이라는 것이 있을 것 같은데, 어떤 것인지 이야 기를 해줬으면 한다. 자기가 생각하는‘음악’의 기준도 함께. 홍철기
내 생각에는 일단 한번은‘모든 것이 소리다’라는 굉장히 근본적
인 수준의 밑바닥을 경험해봐야 한다. 존 케이지(John Cage)가 보여주듯이 기 존의 음악이라는 것의 미학적 특권을 소리의 수준에서 한번은 완전히 무시해 야 하지 않을까 한다. 아까 이야기했던 접근방식의 측면에서 보자면‘소리는 음악이기 위해 아름다워야 한다’가 아니라‘소리는 진동이다’,혹은‘소리는 전기다’라는 수준에서 음악을 완전히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본다. 예를 들 어 행준씨 작업은 어떤 형상화를 우선적인 목표로 한다기보다는 우선 화학약 품 수준으로 영화를 끌어내리는 것이지 않은가? 이행준
최근에 하고 있는 작업은 컬러 필름의 이멀젼 위에 결합되어 있는
은입자와 커플러가 현상되면서 만들어 지는 염료를 화학적으로 반응시키는 걸 하고 있는데, 사실 내 경우에도 작업을 하다 보면 중요해지는 것은 ph값이 다. 염료의 색이 너무나 쉽게 변하기 때문에 작업할 때 계속 필름에다가 약품 을 뿌려보고 리트머스 종이를 대본다. 류한길
바닥에 내려가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거기서부터 각자가 무언가
를 쌓아 올려할 것이다. 홍철기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서 그 바닥으로 내려가는 것이어야 한다. 여
기서 음악에 대한 나름의 판단기준의 문제로 돌아와 보면 나는 가장 기초적인 수준에서는 사람들이 내 음악을 듣고“고장난 라디오 소리 아냐?”라는 반응 나오지 않게 하려고 한다. 나는 내 음악이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그러한 경험 으로의 통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이 길로 가보면 재밌다’는 사실을 어쨌거 나 보여주어야 한다고 본다. 그 기준이 무엇인지는 쉽게 설명이 안 되지만.
244 나방 1호
최준용
연주하다가‘삑사리’를 내도 관객들이 모르게 하는 것이 ...
홍철기
아니면‘삑사리’를 냈는데‘이거 나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는
일종의 작업 틀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류한길
그렇게 되면‘삑사리’가‘삑사리’가 아닌 것이 될 것이다.
최준용
결과적으로‘삑사리’가 괜찮은 경우도 있고 예전에는‘삑사리’라
고 생각했던 것들이 지금은 아닌 경우도 있다. 류한길 ‘삑사리’에도 뭔가 시대적인 것이 ... 김곡 ‘삑사리’의 계보학! 이행준
그러면 궁금해지는 점이 있는데, 밑으로 내려갔다가 올라가는 방
법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기존의 방법을 탈피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은데, 어 떻게들 하는지? 김곡
그래도 올라오기만 하면 못 올라오는 사람들보다 낫다. 그런데 이런
오해도 피하고 싶은데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실험 영화에 대해서‘매체에 대한 실험’이라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접근방법이라는 것 이 예컨대‘카메라의 몸체’로 오해하면 안 된다고 본다. 류한길
미디어 아트 쪽을 보면 이러한 접근방법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
하기보다는 굉장히 피상적으로 접근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내 문제의식과도 비슷한 이야기이다. 김곡
색다른 사용법을 한 번 시도해보는 것으로 실험영화의 의미가 충족
된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 반대다. 최준용
음악에서는 그래서 실험적인 작업을 그냥‘이펙터 장난’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홍철기 김곡
사실 그런 시도는 누군가 한번만 해보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실험영화를 상영할 때 흔히 영화학과 교수들이 학생들을 데
리고 와서 하는 이야기가‘저건 이미 누가 한 번 했던 것’이라는 거다. 이는 실 험영화 내부와 외부의 공범관계에 의해서 가능한 것인데, 실험영화를 하는 사 람들이 실험영화를 그런 식으로 자기 정의를 하다 보니 밖에서도 마찬가지 방
좌담
소리의 물질성과 즉흥 협연 245
식으로 비난하는 것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내부자에게 더 책임 있다 고 생각한다. 홍철기
결국 우리 같은 사람들의‘공분’을 불러일으키는 주제가 나왔다.
류한길
사실 문제는 그러한 실험들에 대한 실체하는 경험이 없다는 거다.
‘그건 다 누군가 예전에 해본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 시도가 구체적으로 어 떤 것이었는가에 대한 정보나 경험이 전혀 쌓여있지 않다. 그 점에서 행준씨 의 작업의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김곡
사실 문제는 꼭 그런 실험을 손수 해보려고 생각도 안 해본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한다는 거다. 푸티지 작업도 자세히 보면 각각의 작품들의 차이 가 눈에 보이는데, 보통‘그런 사람’들은 다 같은 푸티지 작업이라고 치부한 다. 홍철기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편협한 유사성에 기대서 비
난을 하는 것이라고 본다. 물론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런 반응이 안 나 오도록 신경을 써야 하는 측면도 있겠지만. 류한길
요새 공과대학 쪽에서 예술과 붙어서 뭔가를 해보려는 학과가 많
이 생겨나고 있는데 거기서 하는 애기를 들어보면 다 이런 것이다. 예를 들어 새로운 카메라가 나왔는데 셔터 스피드가 너무 빨라서 그 카메라로 찍은 현상 자체가 너무 대단하다는 것. 미처 우리 눈으로 포착할 수 없는 순간을 잡아내 는 것이니까. 그래서 그걸로 작업을 한 작가가 있는데, 그 사람은 그 기술에만 의존해서 본 효과, 그리고 자기 아이디어만 보여준다. 근데 그 작업은 더 빠른 셔터스피드의 카메라를 이용한 다른 작업에 의해 추월을 당한다. 김곡 류한길
올림픽 기록갱신 같이 되는 건데. 공학과 미학이 연결되어서 하는 예술이라는 것이 바로 이러한 상
황이다. 누가 더 빨리 선취해서 해먹는가. 사실 나는 공과대학에서 드러내는 관점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경험/제도/시스템의 문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 한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 참여하는 작가라는 사람들이 그런 논리에 대해서 차별성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예술 쪽에서 해결해줄 수 있는
246 나방 1호
부분을 전혀 해결을 못해주 고 그저 같이 논다는 게 문 제다. 김곡
남들이 안 해본 시
도를 해본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하는 것이라고 본다. 류한길
릴레이를 해야
겠다고 마음먹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이런 경험 들, 남들이 흔히 외국에서 이미 했던 시도들이라고 말 해버리는 것들의 경험적 실 체에 접근하고 싶었다는 것
데릭 베일리 (1991)
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런 사소한 정보들의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것 이 필요했는데, 그 지점에서 이야기가 너무 딱딱하게 갈 수 있으니까. 사실 생 각해보면 우리가 이런 것을 하게 된 것은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어서 바로 그 재미를 드러내 보이고 싶었다. 노는 것을 보여주고 같이 놀자는 설득을 하고 싶은 의도가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 결국 설득력에 측면에서 비주얼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듣기 훈련, 내지는 경험 자체가 너무 단순해지고 있어서 영상이 더 효과적이지 않은가하는 생각을 한다. 홍철기
4
그‘재미’란 무엇일까? 데릭 베일리(Derek Bailey; 1930-2005) 를
인용해서 말하자면 즉흥연주는 두 가지로 구분이 된다. 하나는‘관용적 즉흥 연주(idiomatic improvisation)’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는 이미 확립된 음악 관 습, 혹은 전통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의 변주를 말한다. 물론 이러한 4) 영국의 대표적인 즉흥연주자이자 기타리스트. 솔로와 협연 등, 상당한 수의 음반을 남겼고 『즉흥연주: 음악에 있어서의 본성과 실제(Improvisation: Its Nature and Practice in Music)』라 는 제목의 책을 1980년에 출간하기도 하였다.
좌담
소리의 물질성과 즉흥 협연 247
변주를 통해 전통이 변화될 여지가 있다. 둘째로는 그와 구분되는‘비관용적, 혹은 자유로운 즉흥연주(non-idiomatic improvisation)’의 범주가 있는데, 우리 가 재미를 느끼는 부분은 바로 여기인 것 같다. 이는 기존의 문법 안에서의 즉 흥연주가 아닌 즉흥연주를 말한다. 류한길
그러니까 우리가 즉흥연주에서 느끼는 재미가 바로 그 차이에서
오는 것 같다. 우리는 재즈에서 말하는 즉흥연주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홍철기
사실 우리는 소리나 악기를 재료의 수준으로 내려가서 다루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것은 결코 이미 확립된 어법 안에서의 즉흥연주일 수는 없다. 물론 악기가 아닌 깡통을 두들겨서 음계를 연주할 수도 있고 녹음 된 소음의 피치를 바꿔서 음악적 어법을 부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걸 하려는 것은 아니다. 여하튼 내 생각에는 즉흥연주, 특히 즉흥협연은 관객 의 문제와도 결부되어 있는 것 같다. 류한길
내가 주로 연주회에서 관객의 반응을 듣게 되는 편인데, 내가 긍정
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측면이 있다. 특히 관객들이 반복해서 연주를 보고 재 미를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 감지가 될 때 그렇다. 사실 관객들을 누가 가르친 것도 아니고 나도 누구에게 배운 것은 아니지만 일단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는 사실에 주목을 하게 된다. 듣기 경험과 재미의 문제가 이런 지점에서 드러 나는 게 아닐까. 홍철기
연주를 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말해볼만한 것도 있다. 예전에 기
타와 드럼을 녹음해서 음반을 만들었던 예전의 시도들과 비교를 해보면 지금 의 즉흥작업이 협연의 경우에도 나 자신의 연주라는 느낌을 훨씬 강하게 준 다. 김곡
물론‘나 자신의’라는 소유격은 좀 더 복잡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홍철기
동감한다.
류한길
나는 요즘 시계태엽을 가지고 즉흥연주를 하는 경험이 그 전부터
해오던 키보드 연주에도 영향을 준다는 느낌을 받는다. 최준용
보통 연주를 하거나 다른 사람의 연주를 듣고 나서 좋았다고 느끼
248 나방 1호
는 경우는 극단적으로 두 가지인 것 같은데, 먼저 내가 예측한대로 연주가 되 었기 때문에 좋은 경우가 있고 반대로 전혀 예측하지 못했음에도 좋은 경우가 있다. 이는 작곡과 즉흥의 관계에 대한 내 고민과 관련되는데, 특히 협연을 할 때에는 같이 연주하는 연주자가 내가 원하지 않는 소리를 내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나, 그런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점점 재밌어 진 다. 류한길
나는 우리가 발견한 재미있는 지점을 더 넓게 공유했으면 하고, 이
런 지점에 대해 스스로의 의미부여가 조금씩 되고 있다는 걸 느낀다. 우리가 처한 상황을 보면 소리나 영상이나 모두 휙 지나가버리기 때문에 이런 경험들 을 단순화시켜버리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런 경험의 과정을 축적하고 제시하 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편협한 유사성이나 단순화가 아니라 오히려 이 런 것들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다. 이런 일은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필요하 다고 생각한다. 이런 일종의 시스템 구축과 구체적인 경험의 축적을 통해‘그 건 누가 이미 했어’라고 말할 때, 실제로 제시해줄 수 있는 예로 기능하도록 하고 싶다. 그래서 요즘 더 퍼블리싱에 관심을 갖고 있기도 하고. 얼마 전에 공 연 때문에 일본에 다녀왔을 때, 그곳 연주자들의 소개로 타코시(Tacoche)라는 가게를 찾아간 일이 있었다. 굉장히 조그만 가게였는데 오로지 자주출판된 것 들만 취급하고 있었다. 그렇게 작은 가게에 온갖 종류의 소량으로 제작된 서 적, 음반, 사적인 작업물들이 가득했고 그나마 조금 남아있는 벽에는 정말로 쥐꼬리만한 규모의‘전시’도 진행 중이었다. 얇은 복사지에 중철로 제작된 소 책자들에서 거론되는 내용들의 다양함에도 놀랐고 이런 비상업적인 작업들이 그런 식으로 유통되고 소개된다는 사실에서 적지 않은 놀라움을 느꼈다. 심지 어 포장지조차도 그곳에 납품을 하는 자주 출판가 또는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만들어져 있었던 데다가 그렇게 많은 작품들의 내용에 대해 점주가 거의 모든 것들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점도 놀라웠다. 그 가게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인 예술품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일반에게 접근하는 사회적인 발언들, 문화적이 고 민감한 발언들이 이 가게 안에서 모두 실제로 존재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좌담
소리의 물질성과 즉흥 협연 249
개방된 것 같지만 실은 어떤 의미에서는 철저하게 폐쇄된 박물관이나 갤러리 보다도 더 분명하게 미적으로 기능한다고 생각했다. 박물관이나 갤러리 시스 템 구축에 대한 이야기들은 많지만 이런 분야에 대한 시스템 구축은 아무도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런 매장들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 로 제시할 수 있는 사례들이 풍부해지는 게 아닐까. 그런 경험이 계기가 되서 퍼블리싱이라는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홍철기
아까 하던 이야기로 돌아와서 여전히 non-idiomatic 이라는 말처
럼 우리는 무엇이 아닌 것의 형태로 이야기하는 버릇이 있어서 여기서 이야기 하는 즉흥연주를 보다 적극적으로 정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 기 위해서 내 생각에는 두 개의 전선을 동시에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한편으로 예술가는 전통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을 은폐하곤 한다. 여기서 작곡과 연주가 분리된다. 다른 한편으로‘예술은 자유다’는 오해의 파생물인 ‘즉흥은 자유다’라는 오해와도 싸워야 한다. 사실 내가 보기에 후자는 전적으 로 전자에 대한 오해다. 그런 오해를 낳는 원인 중 하나가 제적과정을 은폐하 고 따라서 결과적으로는 신비화하는데 있다고 본다. 결국 우리가 실행하려는 즉흥연주의 본질은 강도 높은 작곡의 과정을 연주에 결합시키는데 있다고 생 각한다. 이행준 김곡
영화는 물리적 조건 때문에 그렇게 하기 힘들 것 같다. 무언가 다른 방식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정리하자면 결국
즉흥연주는 연주 뒤에 숨겨진 작곡을 단순히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작곡 자체 를 연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 홍철기
그렇다. 작곡을 하고 왜 그것을 따라서 연주해야하는가? 원래 작
곡이란 규칙을 정하고 악보를 통해 연주자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 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은 필요한 모든 정보가 CD같은 매체에 훨씬 더 복 잡하게 기록되지 않는가? 그렇게 볼 때 연주를 녹음한 CD를 듣는 것보다 라이 브에서의 연주를 듣는 상황이 더 문제시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성급한 일 반화일 수도 있지만 라이브를 잘하는 밴드나 연주자에 대한 칭찬은‘정말 CD
250 나방 1호
와 똑같다’든지 아니면‘CD보다 더 진짜 같다’는 것 아니가? 김곡
라이브는 오히려 같이 모여서 논다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나? 연주
자체를 들으러 밴드의 라이브를 보러가지는 않는 것 같다. 홍철기
물론 그렇긴 하다. 나도 그런 측면이 오히려 더 중요하다는데 동
의한다. 그러나 연주행위 자체의 의미를 좀 더 생각해보자는 거다. 사람들이 나한테 왜 노이즈를 하느냐, 혹은 왜 즉흥연주를 하느냐고 묻는데, 나는 오히 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되묻고 싶다는 거다. 테크노가 결국 작곡과 연주의 구 분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지 않았나? 스튜디오에서, 혹은 방에서 음악을‘제 조’하는 행위와 클럽에서의 연주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어진 것 아닌 가? 특히 소리를 합성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할 수 있게 되면서. 이런 이야기 를 하는 이유는 즉흥연주의 경우 연주의 의미가 확장되고 바뀌면서 그것을 보 러 오는 관객과의 관계가 더 중요해진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꼭 이렇 게 표현하고 싶지는 않지만‘일회적인’즉흥협연을 보러 옴으로써 관객들이 일종의‘참여’를 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류한길
나는 그걸‘공기’라는 말로 밖에 표현할 수가 없는데, 연주를 해보
면 관객들이 형성하는 협조적인 분위기가 연주의 사운드의 질과 내용에 영향 을 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전체적인 저항과 환경의 문제라고 할 수 있 다. 김곡
그렇다면 공연장에서 내가 옷 부스럭 거리는 소리를 만들면 그것도
참여인가? 박승준
거기부터 경계가 애매해지는 것 같다. 실제 공연에서도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홍철기
그 얘기를 들으니 타쿠 스기모토(Taku Sugimoto)와 라듀 말파티 5
(Radu Malfati)의 음반 에서 두 번째 CD에 들어 있는 라이브 녹음이 생각난다. 그 녹음을 들어보면 연주—작곡이 전제된 연주이긴 할텐데—는 매우 간헐적 5) 기타리스트 타쿠 스기모토와 트럼본주자 라듀 말파티의 듀오 음반. Raku Sugifati, <Fatatsu> (2CD), Improvised Music from Japan, 2003 (IMJ-508/9).
좌담
소리의 물질성과 즉흥 협연 251
으로 하거나 거의 안한 다고 할 수 있는데, 나 머지 시간은 관객들이 웅성거리거나 들고나 는 소리, 혹은 심지어 연주회장 밖을 지나가 는 자동차 소리가 녹음 되어서 들린다. 그런데 이런 시도에 대해서는 가장 비판적으로는 존 케이지의 <4분33초>를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지적이 있는 것으로 안다. 내 생각에 관객들이 소리를 통해‘참여’한다는 것의 극단적인 경우를 보여주는 것이 <4분33초>가 아닌가 한다. 악기나 음악의 모든 소리를 비워버림으로써‘여기 사람들의 소 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니까. 이행준
미국의 실험영화 작가인 데이빗 개튼(David Gatten)의 <바다가
말하는 것(What the Water Said, Nos. 1-3)>이라는 시리즈가 생각난다. 비슷한 태도에서 비롯된 시도라고 생각하는데, 사운드 필름을 조개껍데기에 넣어 놓 고 바다물이 들어오거나 틈새로 햇빛이 들어 온 것이 필름에 어떤 식으로든 기록이 되도록 한 작품이다. 일종의 카메라 없이 하는 필름 작업(camera-less filmmaking)인데 작가와, 바다 그리고 소라 껍데기 사이의 공동작업인 셈이다. 1997년 10월과 1월에 각각 3일간, 1998년 8월에 하루 동안 이루어졌다. 노광되 지 않은 생필름은 가장 기본적인 자연 보호장치 속에서 바닷물과 주변 환경에 의해 직접 이미지와 사운드가 기록된다. 또 다른 작품 중에 영국 실험영화(런 던 영화작가 조합) 초창기 10년간을 정리한 전 세계 투어 프로그램인 <슛 슛 슛 Shoot Shoot Shoot> 프로그램 중 더블 스크린 필름들 중에 상영되었던 크리 스 웰스비(Chris Welsby)의 <풍향기(Wind Vane)>와 같은 작품도 있다. 카메라 를 풍향기처럼 설치해서 바람의 미세한 변화에 따라서 카메라가 움직이도록 해서 촬영한 경우도 있다. 서로 다른 두 지점사이의 시간이 흐름의 속도, 바람
252 나방 1호
의 속도, 무풍 등 다양한 사건 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경우다. 사람이 직접 참여는 아니지만 일종의 흥미로운 은유라고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외 에 사운드 트랙을 필름에 직접 그리는 작가도 있었다. 홍철기
내 생각에 존 케이지의 패러다임에서 참여란 여전히 우연적이고
소극적이다. 최준용 ‘즉흥은 자유’라고 오해하고 아무 소리나 만들면 참여할 수 있다 고 생각하는 그런 식의 태도는 문제다. 류한길
어쨌든 타쿠 스기모토에게서 재미있었던 것은 결과물보다는 관
점·태도의 측면이었다. 홍철기
그 점에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거
기까지’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사실 그렇지 않으리라 믿지만. 결국 음악을 듣고 경험할 때, 그 경험을 바탕으로 변주를 하게 된다. 나는 그 측면이 중요하다고 보는데, 타쿠 스기모토의 음악의 경우에는 그것이 불가능 하지 않은가? 그래서 참여의 문제는 좀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박승준
나는 참여의 문제에 대해서는 결국‘모종의 동의’를 전제로 모인 6
관객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릴레이나 불가사리 를 보러오는 관객들은 계 층적으로는 다양하지만 쉽게 설명하기 힘든 동의를 하면서 모인 사람들이라 고 본다. 예를 들어 야외 공연과 비교하면 그 경우에는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 동의를 하도록 유도되고 강제되지만 릴레이 등의 경우에는 물론 연주회를 하게 되는 장소의 성격이나 접근성의 문제를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앞서의 경우와 달리 일종의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환경에 대한 동의를 보다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6)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 아방가르드/싸이키델릭 기타리스트 사토 유키에(Sato Yukie)와 독일 출신의 즉흥음악 색소폰 연주자인 알프레드 하르트(Alfred Harth) 등에 의해 시작된 정 기 즉흥음악 연주회. 2002년에‘스컴 인 서울(SCUM in Seoul)’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여 불 가사리로 이름을 바꿔서 현재까지 매달 한번 씩 연주회를 갖고 있다. 사토 유키에는 그 동 안 루인즈(Ruins), I.S.O., 조조 히로시게(Jojo Hiroshige; 非常階段) 등의 일본의 노이즈/아방 가르드 음악가들을 국내에 초청하여 수차례의 공연을 기획하기도 했다.
좌담
소리의 물질성과 즉흥 협연 253
홍철기
사실 우리가 계속해
서 참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이러한 연주를 보러 오는 관객이 많지 않기 때문이 다. 그런데 우리에게 연주란 현 장성이나 집단성을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나간다. 우리는 그리 고 이것이 재미있다고 사람들에 게 보여주려 한다. 결국 누구에 게 어떻게 보여줄 것이냐는 문 제인 것 같다. 류한길 오토모 요시히데
오토모 요시히데 7
(Otomo Yoshihide) 씨가 했던
이야기 중에 자신은 어떤 씬(scene)이 성공한 다음에 쇠퇴기를 겪게 될 때, 그 런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남는가하는 문제에 관심이 있다고 한 적이 있는데,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홍철기 김곡
실험영화는 어떻게 관객을 모으고 있는지? 일종의 집단적인 교육이 필요하다. 무언가를 가르친다기보다는 경
험을 공유하는 방식으로서의 교육이랄까. 이행준
가장 큰 문제는 필름을 다루는 근본적인 태도와 관련된 작업이 어
떤 형태가 제도권 내의 교육에서는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미 결정된 서사구조를 가장 잘 표현하는 방법론과 잘 정돈된 그리고 상영과 유포 의 행위의 의미에 있어 적극적인 수단으로서의 매체 가르치는 것이 제도권 영 화교육의 전부가 아닌가 한다. 홍철기
음악도 상황이 다른 것 같지 않다.
7) 일본의 노이즈 뮤지션. 기타리스트이자 턴테이블연주자이며 영화음악 작곡가로서도 왕성 한 활동을 하고 있다.
254 나방 1호
류한길
미대에서도 비슷하다. 강의 이름에는‘미디어’가 들어가는데 수
업 내용은 그냥 판화인 경우를 봤다. 유행을 따르느라‘미디어’라는 말은 쓰 지만 실질적으로는 아무 내용이 없다. 이행준
외국의 어느 교육기관을 보니‘트랜스미디어’라고 해서 필름, 사
진, 비디오가 교육과정에 한꺼번에 포함되어 있더라. 조각, 회화, 설치 등 정통 미술대학에서 다루는 매체가 거의 대부분 포함되어 있는 경우도 있고 물론 통 칭은 다르지만 대부분의 과정이 그런 것 같다. 류한길
수업제목에‘미디어’라는 말을 넣었으면 판화에서의 접근방식을
가지고 필름 다루는 수업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드는데, 절 대로 그렇게는 안하더라. 최준용
영화 쪽은 영화제를 통해서 영화를 발표하는데, 실험영화에 대해
서도 이러한 영화제들이 일종의 플랫폼 역할을 하는가? 김곡
실험영화에 대해서는 거의 역할을 못한다고 봐야한다. 그나마 독립
영화 쪽이 호의적이기는 하나 여전히 구체적인 사회·정치적 참여를 더 선호 한다. 홍철기 김곡
그건 오히려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실험이 줄어듦으로써 영화의 문법이 고갈되기
시작하면 그건 문제다. 류한길
그런 문제에 관해서는 현실적인 궁금증이 있는데 그런 영화제는
어떻게 운영이 되는 건지? 김곡
확실히 음악보다 영화 쪽은 공적자금이나 대기업 돈이 많이 돈다.
그래서 그런 돈으로 운영되는 측면이 크다. 류한길 김곡 이행준
그러면 개인적으로는 생활을 어떻게 유지하나? 아르바이트나 부모님 도움, 그리고 영화 계약금 등. 보통 유료 워크샵이나 편집 일, 강사일을 한다. 얼마 전에 미술 하
는 분을 만나서 이야기를 했는데 그 분 말씀이 왜 지원을 해주면서 먹고 사는 문제는 모른 척 하느냐는 것이었다. 영화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지원을 해
좌담
소리의 물질성과 즉흥 협연 255
줘도 인건비나 운영비 그리고 작업실 운영비 같은 경우는 전혀 포함이 되어 있지 않아서 문제제기가 필요한 것 같다. 류한길
현실적으로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가 이런 예술에서 훨씬 더 중요
한 것 같다. 이런 부문이 발전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하다. 홍철기
많은 사람들이 로파이(lo-fi)로 음악을 했던 것도 그런 사회경제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사실“예술은 자유”라고 떠드는 사람들과 상종하기 힘 든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 같다. 예술을 하는 행위와 사회경제적인 문제가 절 대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류한길
자칭이든 아니든‘예술가’라고 불리는 사람들 보면서 드는 생각
도 비슷하다. 그런데 한국의 맥락에서 그런 사람들만 진정한 예술가로 분류되 고 나 같은 사람은 전혀 그렇지 않게 보는데다가 요즘은 툭하면 내가‘탈장르’ 란다. 박승준
언젠가부터 다원예술, 탈장르라는 범주가 그런 용도로 쓰이는 것
같다. 류한길
나는 작업을 하기 위해서 절대로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다. 오히려
작업을 위해 자유를 포기해야만 했던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이행준
지금까지 논의에서 빠졌던 레코딩에 관해서 이제 이야기를 해봤
으면 좋겠다. 클래식 연주자이긴 하지만 글렌 굴드(Glenn Gould)의 일화가 재 밌었다. 굴드가 녹음을 여러 개를 해서 엔지니어하고 상의를 하는데,‘어떤 것 이 좋냐’고 이야기를 했던 엔지니어가 첫 번째 녹음은 앞에 부분이 좋고, 두 번째 녹음은 어떤 부분이 좋고 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고. 그래서 그걸 이 어 붙여서 음반을 만들면서 일종의 레코드의 미학을 새로 발견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는데, 결국 레코딩은 원음에 최대한 가까운 어떤 것이 아닌 다른 것이라는 이야기다. 각자의 녹음의 방법론에 대해서 좀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 류한길
나는 예전에는 즉흥연주는 편집이나 더빙을 해서는 안 되는 것 인
256 나방 1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조금 씩 다 하더라. 특히 요즘 들어 서 그런 문제가 표면화되는 것 같다. 최준용
그걸 즉흥연주의
순수성의 문제로 보는 시각이 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앞뒤 부분을 잘라서 중간 부분을 사 용하는데, 흔히 얘기하는 포스 트프로덕션(post-production)
크리스찬 마클레이 <커버 없는 레코드>
은 하지 않는 편이다. 크리스찬 마클레이 <커버 없는 레코드>홍철기: 편집을 윤리적으로 반대하 지는 않는데 개인적으로는 귀찮아하는 편이다. 물론 즉흥연주에서도 포스트 프로덕션을 창조적으로 이용한 경우들이 있다. 아니면 크리스찬 마클레이 8
(Christian Marclay)의 <커버 없는 레코드(Record without a Cover)> 처럼 음반 이라는 결과물 자체가 우연성에 노출되게 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이행준
음반을 만들면 유통이나 판매는 어떻게 하는가?
홍철기
주로 레코드 샵에 판매대행을 위탁한다. 일본에 공연을 가서 팔기
도 하고. 다른 외국의 유명 연주자들도 대부분 투어를 하면서 공연장에서 많 이 판매를 하는 것 같다. 류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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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운영하는 레이블의 경우에는 애프터 아워즈(after hours) 라
는 레코드 샵에서 유통을 해주고 있다. 이런 예술에 적합한 제작과 판매, 유통 의 새로운 모델이 필요한 것 같다. 많은 매장에 가져다 놓을 것이 아니라 당장 8) 비주얼 아티스트이자 음악가, 턴테이블 연주자인 크리스찬 마클레이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레코드를 보호하는 커버 없이 음반을 유통/판매하게 함으로써 그러한 과정상에서 생긴 흠 집이 재생에 반영되도록 하였다. 9) http://www.afterhours.co.kr
좌담
소리의 물질성과 즉흥 협연 257
은 힘이 들더라도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찾아오게 만드는 과정을 고심하고 있다. 공연장에서 판매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스로 찾아오고 관심을 가질 수 있게끔 끊임없이 이벤트를 만들어 나가야 하기도 할 테고. 직접적인 제작 정보의 공유의 필요성도 느껴서 레이블의 웹사이트를 통해 앨범의 제작견적 이나 패키지 디자인 견적, 소스 등을 모두 공개하고 있다. 총체적인 차원에서 의 문화적 포장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 아닐까 라고 생각하고 있다. 홍철기
오늘 여러 가지 중요한 이야기들이 나왔는데, 시간관계 상 여기에
서 마쳐야 할 것 같다. 대담에 참여한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258 나방 1호
Vol. 01 (Dec. 2006) 발행일┃2006년 12월 29일 발행인┃박동현 발행처┃다이애고날 필름 아카이브 (121-842)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475-13 원천빌딩 6층 다이애고날 필름 아카이브 TEL/ 02-3141-1841 FAX/02-3141-1842 www.diagonal.or.kr 제작·공급┃평사리(Common Life books) TEL/ 02-706-1970 FAX/02-706-1971 ISSN 1975-9959 (61) 가격 1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