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 심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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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한경대학교 디자인학과 시각프로젝트 졸업연구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통해 바라본) 사회적 광학 Social Optics (through The Lens of Visual Communication Design) 아포칼립스 심포니(Apocalypse Symphony) 달과 6펜스 ‘권수진 이혜윤 장영진 조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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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 심포니

정보들을 접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복잡한 장치가 아닌

Apocalypse Symphony

시각과 청각의 구성이 이 전시의 형식이 되었다. 전시에 초대된 사람들은 교향곡을 들을 수 있는

1791년 영국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실현시켜줄 수 있는 모델로 제시한 것이

큐브 안으로 들어간다. 1 – 2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큐브

파놉티콘이다. 파놉티콘은 ‘모든 것을 한눈에 파악하는

텔레스크린에서는 각 1, 2, 3, 4악장의 연주가 시작된다.

능력’을 의미한다. 소수 교도관이 자신을 드러내지

우리는 시각, 청각을 동원한 공감각적 경험을 통해 보다

않고 모든 죄수를 감시하는 원형감옥을 설계하면서 이

가까워진 종말을 체험할 수 있게 한다. 뿐만 아니라

말을 창안했다. 근대적 감옥의 이상적 모델로 제시된

아포칼립스 심포니를 경험하는 모든 과정이 작은

파놉티콘은 그 구상이 태어난지 거의 200년 만에

감시카메라를 통하여 녹화되고 있다. 그 과정을 통해

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에 의해 재탄생한다. 푸코는

디지털 파놉티콘이 더 이상 하나의 퍼포먼스가 아닌

‘감시와 처벌’에서 파놉티콘이라는 원형건물에 구현된

우리를 메우고 있는 현실임을 마주한다.

감시 원리가 현대사회 전반으로 스며들면서 규율사회 기본원리인 감시 메커니즘을 낳았다고 보았다. 이 메커니즘은 교도소만이 아니라 위계적 질서가 강한 군대·학교·공장 등 다양한 조직을 포함한다. 파놉티콘 감시원리가 사회 곳곳에 자동규율장치로 확대돼 통제의 내면화를 일반화했다는 것이다. 디지털 사회에서의 파놉티콘은 일방적 감시가 아닌 상호감시가 가능한

‘시놉티콘(synopticon)’으로 발전했다. 과거처럼 소수만이 권력과 언론을 독점하고 다수 일반시민을 통제하는 체제가 아니라 일반시민 역시 그들을 감시하고 통제한다. 양방향 감시가 가능한 시놉티콘은 인터넷 발전과 궤적을 같이한다. 포괄적 디지털 기록은 원형감옥보다 훨씬 심각하다. 디지털 사회에서는 우리의 모든 언행(言行)이 기록 · 저장된다. 우리가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는지, 그 모든 것이 기록되고 관찰된다. CCTV는 물론이고 인터넷과 스마트폰 · 신용카드 등 디지털 기기나 매체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디지털 파놉티콘이 형성된다. 원형감옥이 사람의 심리적 공간을 압박한다면 디지털 기록은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면서 사람 마음을 통제 · 압박할 수 있다. 디지털 사회는 우리에게 편리함을 줬지만, 그 안에서 우리의 모든 것은 감시된다. 아포칼립스 심포니는 디지털 파놉티콘으로 인한 지구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언하는 교향곡이다. 인터넷이 선도하는 디지털 경제에 살고 있는 우리는 빠르게 진전되는 디지털 환경으로 인해 무감각해졌다. 이렇게 무감각해진 사람들에게 여러가지 감각과 간접적 경험을 통해 경각심을 주고자 하였다. 빠르게 많은

안에는 미리 준비된 텔레스크린이 설치되어 있다.







Process ‒1 Project Timeline Research 밀레니얼 세대, 감시와 처벌, 멋진 신세계 및 1984,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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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cess ‒ 2 Planning Work Proc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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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Explore 달과 6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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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roject 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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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 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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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얼세대(Millenials Generation)

1980년대 초(1980 – 1982년)부터 2000년대 초(2000 – 2004년)까지 출생한 세대를 일컫는다. 미국 세대전문가인 닐 하우와 윌리엄 스트라우스가 1991년 펴낸 책 ‘세대들, 미국 미래의 역사(Generations: The History of America’s Future)’에서 처음 언급했다. 밀레니얼 세대는 기존 질서와 연계해 정의하기 어렵다는 의미에서 이름 붙여진

‘X세대(1960년대 중반 – 1970년대말 출생)’의 뒤를 잇는다. 밀레니얼세대는 X세대 다음 세대라고 해서 Y세대로 불리거나 컴퓨터 등 정보기술(IT)에 친숙하다는 이유로 테크세대라는 별명을 갖고도 있다. 또한 타임지에서는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들 세대를 가리켜 ‘미 제너레이션’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닐 하우와 윌리엄 스트라우스는 함께 펴낸 ‹새천년 세대의 부상 Millennnials rising›이라는 책에서, 새천년 세대는 앞 세대들보다 덜 반항적이며, 더 실용적인 생각을 갖고 개인의 가치보다는 집단의 가치를, 권리보다는 의무를, 감정보다는 명예를, 말보다는 행동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특징지었다. 이들은 메이저리그보다 스케이트보드대회에 열광하고, 비틀즈보다 스파이스 걸스를 좋아하며, 코카콜라 대신 마운틴 듀를 마시고, 정치참여보다는 자원봉사를 미덕으로 여긴다.

‘통신세대’ 혹은 ‘디지털세대’로 불리는 ‘Y세대’ Y세대라고도 불림 / 1980 – 2000년대 초 태어난 세대 이전 다른 시대는 이전 문화 바탕위에 디지털 문화를 수용한 세대인 방면 밀레니엄 세대는 뼈속까지 디지털이 스며든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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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 ‹새천년 세대의 부상 Millennnials rising› 닐 하우&윌리엄 스트라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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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RE Share economy 공유경제 Healthy 내 건강은 내가 지킨다 Amazing single life 결혼은 천천히 Rent a house 집은 필수가 아니다 E-commerce 인터넷을 통한 소비 27


관심을 가지고 있다.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 탐구하는데 큰 가치를 부여하기도 한다.

과제까지 한다. 멀티태스킹에 능하다는

의미다. 건강과 식생활에 투자를 아끼지

않으며 이전 세대와 달리 소유보다는 공유를

두고 잔다는 통계가 나오기도 했다.

미루는 특징이 있다.

결정한다. 스마트폰 사용 시, 대부분의 시간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할애하고 있다.

등 다양한 사람들과 의견을 공유하고 의사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자신을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이 세대를

컨텐츠를 공유하고, ‘좋아요’, ‘댓글’을 달면서

SNS 상에서 공유, 좋아요, 댓글, 리트윗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발휘하고 있다. 인터넷상에서 디지털

소셜네트워크 서비스, 공유

않았고 개성을 극대화하는 부문에서 씀씀이가

목돈이 들지 않는 품목에서는 소비를 줄이지

하지만 이들은 맥주나 커피 식품 등

이끄는 밀레니엄 세대는 현재 연간 미국

중 9명이 잠자리에 들기 전 스마트폰을 옆에

궁핍해 결혼과 내집 마련을 포기하거나

시장에서 5000억 달러 규모의 영향력을

가치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모바일 시장을

관심이 높으며 개인의 가치보다 집단의

아동보호, 환경문제, 교육문제 등 사회문제에

정치보단 자원봉사에 더 큰 의미부여

두려워 한다.

성장과 발전 기회 없이 정체되는 것을 가장

적극적으로 업무에 임하는 세대로 전문적인

들으며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 느껴야

패드, 스마트워치 등)와 함께 한다. 특히 10명

항상 인터넷에 연결된 기기(스마트폰,

건설적인 비판도 적극 수용 꾸준히 진가를 인정받고, 참여하고 피드백을

사회생활을 시작해 다른 세대보다 물질적으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4시 온라인 모드

때문에 개인의 기호에 맞는 틈새 주제에

온라인 쇼핑을 즐기고 게임을 하면서

추구한다.

패션과 음식, 음악, 여가생활에 이르기까지, 여러방면의 개별적인 체험을 하며 성장했기

사용하며 자기표현 욕구가 강하다. 이들은

틈새 주제에 관심

개인의 기호에 맞는 세밀하게 구분된

간략적 특징 [2]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등을 능숙하게

이들 밀레니얼 세대는 대학 진학률이 높고

간략적 특징 [1]

Process – 1 Research


2-1. Research - Millenials Generation

X세대와 Y세대 비교 » 한국의 X세대론은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 Y세대는 X세대의 특성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고 있지만 생활양식 면에서는 차이를 보였다. X세대는

열광적인 인기를 업고 떠올라 1993 – 1994년에 홍수를

대중문화에 열광하며, 튀는 패션을 선호하고, 자기주장도

이뤘으며, 특히 소비와 유행의 첨단 계층으로 떠오른

강하며, 다소 충격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구매력 있는 일부 소비자

세대이다. 그에 비해 Y세대는 대부분 컴퓨터를 보유하고

계층을 실제 대상으로 했다. 1998년에 한국에서

있으며, 서구식 사고나 생활방식에 거부감이 없고

대두된 Y세대론은 과거 X세대론의 특성을 거의 그대로

쇼핑을 즐기는 세대라는, X세대와는 조금 다른 특성을

수용하고 있으나, 양 계층 간 최대의 차이점은 X세대론이

지녔다. 또한 Y세대는 유행에 민감한 소비일변도의

일부 튀는 청소년들의 극히 예외적인 현상을 말한

세대이기 때문에, 기업이 마케팅전략 차원에서

것임에 비해, Y세대론은 대다수의 청소년들이 가지고

X세대라는 말을 버리고 Y세대라는 새로운 이름을

있는 태도와 가치관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다.

사용했다고 보는 이도 있다.

» X세대가 대중 소비시장의 떠오르는 세대였다면 Y세대는 주력계층이 되었으며, X세대가 호출기의

» 세대는 비록 개성이 강하고 목표의식이 뚜렷하지만 ‘우리’보다는 ‘나’만 아는 세대였던 데

세대였다면 Y세대는 컴퓨터문화가 일반화된 첫 세대다.

비해, 야구 모자를 쓰고 정장을 한 Y세대는 그 이전

무인도에 한 가지만 갖고 가라면 컴퓨터와 이를 연결할

세대와는 달리 밝은 가치관과 공동체의식을 갖고 있다는

전화선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Y세대인 것이다. Y세대는

연구결과도 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사회의 각종

첨단기기와 서구식 대중문화의 집중 세례를 받으며

범죄를 의식해 도피적인 집안생활을 즐기고 있는 것으로

자녀수가 1 – 2명인 소가족에서 경제적 뒷받침과 함께

분석되기도 했다. X세대가 소수의 특징을 부각시킨

자기중심적으로 키워졌다는 일반적인 특징을 갖는다.

용어였던 반면, Y세대라는 명칭은 다수의 공통된 흐름을 보여주었다.

» 이와 함께, Y세대는 어릴 때부터 컴퓨터를 이용해 각종 정보를 수집하거나 교환하며 오락을 즐기는

» Y세대는 서구 대중문화의 집중적인 세례를 받고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왔다는 특성도 지니고 있다. 또한

자라면서 개인주의와 개방주의 등의 서구적인 가치관을

이들은 컴퓨터 세대라고 불리는 만큼 정보통신기기의

내면화시킨 세대이다. 이들은 컴퓨터를 생활 속에서

구매를 결정하는 소비주체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최초의 세대로 특징지어진다.

패션이나 팬시용품 시장까지 주도하였으며, 20대 이상의

또한 패션, 팬시 시장을 주도해 20대 이상의 X세대에게

X세대에게 거꾸로 유행을 전파시키며 대중소비의

유행을 거꾸로 전파시키는 등 대중소비의 주역으로

주역으로 떠올랐다는 특성을 가지기도 한다.

활약하기도 했다. Y세대는 외출했다 돌아오면 PC부터 켜고 전자우편이 왔는지 확인한다.

» 모르는 것은 사전을 찾기보다 통신을

이처럼 Y세대가 인터넷을 통해 선호하는 제품을

활용하고, 글로 쓰는 것보다는 워드프로세서가 편하며,

언제든지 쉽게 고를 수 있다 보니 순식간에 유행이

취미활동이나 이성교제도 통신상에서 이루어진다.

바뀌기도 했다. 그래서 전자업계가 이들에게 초점을

X세대의 경우에는 “나는 남과 다르다.”고 말하며 자신을 의식적으로 내세웠지만, Y세대는 “나는 나다.”라고

맞춰 인터넷을 통한 광고홍보 전략을 펼칠 정도로,

28 말하면서 ‘나라는 존재 자체가 남과 다르게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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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세대는 유행과 소비를 선도했던 세대로 특징지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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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얼세대의 성격

» 어떤 소비를 하고 어떤 생각을 가질까 «

Research

기업은 이 점을 착안해 광고를 할 때 귀엽고 특색 있는 이모티콘을 활용하거나 신조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우선 이들은 부모 밑에서 비교적 긍정적인 영향력을 받고 자랐고, 대학 진학률이 높다. 모바일 및 소셜네트워크서비스 이용에 능숙하다. 미래에 대한 목표를 설정하기 보다는 당장 코 앞에 닥친, 현재의 삶에 더 충실하려고 한다. 틀에 박힌 생활보다는 탄력적인 생활을 좋아한다. 고로 안정적인 직장보다는 자유롭고 유동적인 일자리를 선호하는 편이다. 고가와 저가의 물건을 다 좋아하지만, 저렴한 물건을 합리적으로 사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에 온라인 쇼핑을 즐긴다. 다른 인종과 집단에 호의적인 편이라 타지에 가도 적응이 빠르고, 누구라도 쉽게 친해질 수 있다. 능률은 떨어지지만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행하는 습관이 있어서 게임을 하면서 동시에 TV 보는 게 가능하다. 물론 이들이 무조건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건 아니다. 30대 밀레니얼 세대는 청소년기에 IMF 외환위기를 겪었고, 20대 밀레니얼 세대는 장기적인 경기 침체로 인해 연애와 결혼은 물론 취업, 내집 마련도 어려운 상태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소유보다는 공유를 추구한다. 즉, 소유하되 나만이 독점하지 않으려고 한다.

sns가 반가운 것도 이런 정신적 영향이 크다. 유명인이 나오는 광고를 맹신해 물건을 구매하지도 않는다. 대신 친구나 지인들이 하는 말, 댓글 등을 참고해 구매한다.

» 소유보다는 공유를 원하는 세대 « 이들의 소비 패턴을 좀 더 세세히 살펴보면, 자신을 가꾸는 데에는 소홀히 하지 않기 때문에 외모, 건강, 환경 등에 매우 관심이 높다. 친환경 재배 농산물이나 고급커피, 주스를 좋아한다. 자동차보다는 자전거와 스케이트, 킥보드 등 새로운 이동수단을 이용한다. 비용도 적게 들고 환경적인데다 건강도 챙길 수 있기때문이다. 이러한 이동수단은 스마트 모빌리티라고 불리는데, 출퇴근은 물론이고 레저 겸용으로 인기가 높다. sns를 통해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 이모티콘을 구입하고 문법에 맞지 않는 어휘도 서슴없이 사용한다.

‹소유의 종말› 제러미 리프킨


2-1. Research - Millenials Generation

리서치 1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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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Research Surveiller et pun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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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Research - Surveiller et pun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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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veiller et punir 감시와 처벌, 미셸 푸코 » 미셸 푸코(M. Foucault) 프랑스 출신의 현대 사상가인 푸코는 무의식적인 심적구조, 사회구조, 그리고 언어구조가 일체를 결정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주체로서의 인간과 자아라고 하는 관념을 허구적인 것으로 보았다. 푸코의 사상은 크게 정상 · 비정상, 동일자 · 타자, 내부 · 외부, 이성 · 비이성 사이에 만들어진 경계를 밝히고, 이를 허무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나아가 이러한 경계를 만들고 유지시키는 ‘지식-권력(savoir – pouvoir)’의 존재를 추적하고 그것이 미치는 효과에 대해 분석하였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말과 사물’ ‘앎(지식)의 고고학’ ‘광기의 역사’ ‘담론의 질서’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등이 있다. » 감시와 처벌 이 책은 감옥을 정점으로 하는 감시처벌의 기구(가정, 학교, 병원, 공장 등)를 분석하고 있다. 감옥, 죄수복, 쇠사슬, 처형장 등의 물질적인 형태뿐 아니라 범죄, 형벌, 재판, 법률 등의 비물질적이고 추상적인 문제까지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 푸코는 단순하게 감옥의 역사를 서술한 것이 아니라, 감옥과 감시의 체제를 통한 권력의 정체와 전략을 파헤쳤다. 즉, 권력이 인간과 신체를 어떻게 처벌하고 감시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근대적 인간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또한 근대사회를 감금사회, 관리사회, 처벌사회, 감시사회로 이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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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 감시사회의 이론적 뿌리 일반적으로 감시사회라고 이야기 할때 가장 먼저 이야기 되는 것은 영국의 공리주의자인 제레미 벤담(Bentham)의 원형감옥인 판옵티콘과 소설가 조지 오웰 (Orwell, 2003)의 ‹1984›이다. 먼저, 판옵티콘은 18세기말 영국의 철학자이자 법학자인 벤담이 설계한 근대적인 감옥을 지칭한다. 원래는 죄수를 감시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감옥은 중앙에 간수가 감시할 수 있는 어두운 중앙 탑이 있고 그 주변에 죄수들의 방을 동그랗게 위치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판옵티콘이란 감옥은 중앙에서는 주변을 볼 수 있지만 주변에서는 중앙을 볼 수 없는 ‘시선의 비대칭’을 통해 죄수들이 언제나 감시당하고 있다고 감시를 내면화하도록 만들고 있다(강상현,

2006: 134). 이렇게 되면 안에 있는 죄수들은 비록 감시자가 없더라도 자신들이 늘 감시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고, 결국은 죄수들이 규율과 감시를 스스로 내면화해서 자기를 감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판옵티콘은 벤담이 설계한 뒤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프랑스의 철학자 푸코(Foucault, 2003)가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 Discipline and Punish›에서 감옥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판옵티콘의 감시체계 원리가 사회 전반으로 파고들어 규범사회의 기본 원리인 판옵티시즘(panopticism)으로 바뀌었음을 지적한다. 그는 감시처벌의 기구를 근대사회의 감금 및 관리 감시사회로 이해한다. 그는 현대사회를 거대한 감옥에 다름아닌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사실 이 오래된 근대의 개념이 현대적 관점으로 전환되게 된 것은 파놉티콘을 중점적으로 다룬 푸코의 그 책이 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푸코 이전에 실상 그의 발상의 토대가 된 철학적 배경들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즉, 근대 서양의 한 철학자가 제안한 파놉티콘 메커니즘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현대의 정보적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으로 이어질 수 있으려면 먼저 그 발상이 기원한 서양철학의 특징을 자세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판옵티콘을 전자적인 형태로 제시한 정보 판옵티콘의 저자 홍성욱은 이 부분에 대해 서양의 과학과 철학에서 줄곧 시각은 특히 다른 나머지 감각보다도 특권을 누려왔다고 지적하면서, 궁극적으로 시각에서 유래된 서양과학철학의 발자취를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부터 데카르트나 아이작 뉴턴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사례를 언급하고 있다. 결국 이로써 서구의 근대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지성과 이해의 잣대로서 시각을 가장 두드러지게 쓰고 있었다는 근거를 토대로 현대판 파놉티콘의 미시적 메커니즘을 설명키 위한 재료를 마련한 것이다. 산업혁명 직후에 수많은 노동자를 관리하기 위해 공장 건물의 구조와 기계의 메커니즘도 필연적으로 규율과 감시의 패러다임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물질과 이를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최대의 가치로 여겨졌던 본격적인 산업화 시대에서, 감시를 내면화하여 견고한 규율을 만들어 내는 것이 궁극목적인 파놉티시즘의 필요는 어쩌면 당연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파놉티콘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공장의 기계들이었다. 원래 기계의 발명 자체가 인간의 동작을 시뮬레이션하거나 확장하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면, 최초의 인간의 동작에 대한 통제 역시 다시 기계에 의해 피드백되기에 결국 일부 기계의 발명은 파놉티시즘의 충실한 구현을 위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그 후, 눈으로 보는 감시와 작업 그 자체 조차 점점 기계장치에 위임되고 작업자체에 관한 정보는 물론, 작업자에 대한 정보를 점점 더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2-2. Research - Surveiller et punir

방법이 발달하게 되었는데, 이것으로 정보에 대해서도 파놉티콘의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현대 정보화 사회가 도래함을 예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현재의 이른바 탈산업화 시대에서도 파놉티콘은 다른 양상으로 여전히, 혹은 더 강력하게 내재하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산업화 시대로부터 탈산업화를 이끌었던 일들이 물질을 다루는 기계에서 정보를 다루는 기계로의 탈바꿈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파놉티콘의 메커니즘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영역에서 비판해야 한다. 현대 사회는 당연한 말이지만, 컴퓨터로 대표되는 정보처리기기를 빼놓고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다. 더불어 기계나 장치가 한 사회를 설명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장치들에 대해 단지 기술적인 관점으로만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현대는 인간과 인간의 행위에 관련한 거의 모든 카테고리들이 정보기술의 영역안에 밀접하게 걸쳐있다. 범죄자를 식별하는 데에 가장 우선해 사용되는 주민등록번호는 역설적이게도

그 국가의 시민이 자신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 이른바 인간정체성까지도 정보기기에 위임해 버린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휴대폰, 신용카드는 당연하거니와 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제출한 대부분의 사적인 정보가 매우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수단으로 관리되고 있는데, 그 역할의 대부분을 미리 프로그래밍된 정보적 장치가 담당하는 것이다. 홍성욱은 사람에 대한 정보 수집, 직접적 통제와 규율이 하나로 합쳐지고, 정보는 벤담의 판옵티콘에서의 시선을 대신하여 규율과 통제의 기제로 작동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벤담의 판옵티콘에 갇힌 죄수가 자신이 감시를 당하는지 아닌지를 모르듯이, 전자 판옵티콘의 정보망에 노출된 사람들 또한 자신의 행동이 국가나 직장의 상관에게 열람될지 않을지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이나 작업에 주의를 기울이는 감시구조를 만들게 된다고 지적한다.

또 다른 네트워크 감시사회 논의는 조지 오웰의 1984이다. 그는 1949년 이 책을 발간하면서 전체주의라는 거대한 지배 시스템 앞에 놓인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 한 개인의 저항을 보여준다. 주목할만한 것은 빅 브라더(big brother)라는 인물이 독재유지를 위해 ‘텔레스크린’이라는 장치를 이용한다는 점이다. 텔레스크린은 선동 도구인 동시에 감시 도구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텔레스크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집 밖의 장소를 이용하거나

사각지대를 찾는 등 나름대로 노력하지만, 결국 감시망을 피할 수 없었다. 텔레스크린과 마이크로폰을 통해 경찰들은 시민을 감시하며, 사람들은 오랜 세월동안 세뇌되어간다. 물론 이런 상황은 오웰이 작품을 썼을 때는 가능하지 않았지만 네트워크 사회에는 이미 진행형이다. 46

현대의 감시사회 전통적인 벤담과 푸코, 오웰의 감시사회에 대한 논의와 함께 ICTs가 발전함에 따라 형성된 감시사회론자는 정보사회학자 갠디(Gandy, 1989: 61 - 63)이다. 그는 정보 네트워크 사회를 산업사회가 감시사회화 되어가는 것을 은폐하는 명칭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ICTs가 새로운 감시기술의 주된 원동력이며, 그러한 기술을 통해 생산, 저장, 유통되는 정보가 점차 정치,경제 부문의 관료적 통제를 위한 핵심적인 자원이 되고 있음을 비판한다. 그의 논의에 따르면, 현대 네트워크 사회에서의 ICTs는 일반 시민들을 부지불식간에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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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 ‹파놉티콘 Panopticon› 제러미 벤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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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


2-2. Research - Surveiller et punir

원격감지 환경에서 감시와 통제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고 보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ICTs를 활용하고 있는 와중에 감시당한다는 점이다. 즉 제도나 기술의 적용을 통한 효과에 대한 인식이 없을 경우 그것이 다른 문제점으로 인한 파생현상이 발생하는데 그러한 것이 바로 감시사회에서 발생한다. 이러한 전자적인 감시 장치는 사회적으로 강화되면서 인터넷을 감시의 공간이나 정보수집과 해킹의 공간, 쿠키를 통한 정보유출이 가능함에 주목한다.

네트워크 사회에서 시민권 침해와 감시사회 논의는 ICTs의 효율적인 이용의 가능함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오래전부터 경고한 바다. 즉 식견있는 시민과 국가가 대처하지 못했을 경우 ICTs의 장점과 기능은 제한되고 감시와 통제가 강화될 것을 경고한다. 아무리 수평적인 네트워크가 형성되어도 권력에 의한 네트워크 차단이 가능하다. 이러한 대표적인 인터넷 네트워크 탄압사례가 중국이다. 중국은 인터넷 만리장성(Great Firewall)이란 차단장치를 통해 반정부적인 웹사이트나 블로그 등의 접근을 차단하거나 정치적 내용을 담지 않은 인터넷 내용에까지 검열을 강화하고 있다(International Herald Tribune, 2008년 2월 5일). 이런 네트워크의 차단에 대해 골드스미스와 우(Goldsmith & Wu, 2006)는 정부에 의한 네트워크 통제로 분석하고 국가에 의한 새로운 인터넷 네트워크의 지배라고 주장한다. 감시사회론에 대한 논의는 올리히 벡의 위험사회와 함께 최근에도 계승되고 있다. 마티선(Mathiesen, 1997)은 한발 더 나아가 현대사회를 서로 바라보는 사회라고 명명하여 상호 감시하는 사회의 무서움을 지적한다. 즉, 현대 네트워크의 발전은 과거에 소수가 다수를 바라보는 형태의 감시에서 다수가 소수를 바라보는 감시인 시놉티콘(synopticon)도 가능하게 한다(강상현, 2006: 134 - 5). 채드윅(Chadwick, 2006: 257 - 258)도 네트워크로 인한 새로운 사회의 장점을 인정하지만 이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문제에 대한 대안도 같이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 한다. 즉, 감시와 프라이버시 등의 문제로 네트워크사회에 있어 다른 형태의 시민 기본권 위축을 우려하기도 했다. 그런 차원에서 레식(Lessig, 2000)이 강조한 새로운 인터넷 아키텍처, 새로운 코드(CODE)는 통제의 근본적인 도구가 되어 전통적인 국가 권력 형태에 의해 규제와 경찰력 행사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감시사회의 가능성을 예견한 학자이다(Benkler, 2006). 이처럼 기존 연구는 각각 네트워크화와 ICTs의 발전에 따른 편익과 함께 부지불식간에 발생하는 감시의 문제를 다양한 시각에서 분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네트워크사회의 낙관론은 네트워크화로 인한 참여적이고 민주적인 요소가 확대될 것을 강조한 반면 48

감시사회론은 새로운 위험요인의 등장을 경계한다. 이러한 감시사회에 대한 논의의 저변을 분석하면 ICTs의 발전의 이중성을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 측면은 효율성과 신속성, 상호작용성을 통한 새로운 네트워크 사회로의 진전을 통한 지식기반의 새로운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그렇지만 반대로 ICTs 자체를 하나의 감시기술화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위험성을 경고한다. 예컨대,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이 기술을 통해 감시대상에 대해 더 정확하고 많이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정보사회학자인 카스텔(2001)이 인터넷은 정부가 시민을 감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시민이 정부를 감시하기 위하여 사용될 수 있음을 경고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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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이미 감시사회는 가속화되고 있다. 휴대폰의 전원을 켜놓은 동안에는 다른 사람이 위치를 파악할 수도 있고,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우리의 신상정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흘러들어갈 수도 있다. ICTs이 발전함에 따라 사회환경은 새로운 정치경제적 기회구조를 만들고 있다. 디지털 컨버전스(digital convergence)로 일컬어지는 디바이스의 융합,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융합, 커뮤니케이션 방식의 융합 등 다층적인 현상이 새롭게 대두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한편으로는 긍정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그렇다면 ICTs발전은 필 연적으로 감시사회로 직결되는가? 감시사회에서 이득을 보는 집단(세력)은 누구인가?

* ICTs — 정보통신기술(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technology)


2-3. Research 1984&Brave New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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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


2-3. Research - 1984   & Brave New World

1984 Nineteen Eighty-Four, 조지 오웰 ‹1984 Nineteen Eighty-Four›는 1949년 출판된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1984년을 전체주의가 극도화된 사회로 상정하고 쓴 미래 소설인 작품 속에서 세계는 거대한 초국가들로 분화되어 있고 이들은 영구적인 전쟁 상태이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곳은 영국으로 소설 속에선 “제1공대”(第一空帶, Airstrip One)로 불리며 오세아니아에 포함되어 있다. 오세아니아는 전체주의 정치 이데올로기인 영사(英社, Ingsoc)의 지배를 받으며 최고위 지배자는 대형(大兄,

Big Brother)이다. 소설 속 국가는 기록을 조작하고, 개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며, 언어와 사고를 통제하여 영구적인 집권을 기획한다. 소설은 이러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기록조작을

담당하던 주인공이 전체주의와 갈등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1984년›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의 ‹우리들›과 더불어 디스토피아를 다룬 소설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히며, 이후 많은 예술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소설의 영향으로 사회나 국가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하고 전체주의, 권위주의와 같은 비민주적 정치체제에 반기를 드는 사람을 오웰족(Orwellian)이라고 부른는 경우도 있다.

1989년 집계 당시 ‹1984년›은 65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이는 조사 당시 다른 어떤 영국 소설 보다 많은 숫자이다. 작품의 제목인 1984는 작가가 작품을 탈고한 1948년의 뒷자리 년도를 뒤집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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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 ‹1984 Nineteen Eighty-Four› 조지 오웰


2-3. Research - 1984   & Brave New World Big brother is watching you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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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 brother is watching you 포스터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그림의 눈과 시선이 마주치도록 설계되었으며 이러한 특징은 포스터를 보는 사람에게 감시로부터 빠져나갈수 없음을 경고한다.

오웰리언’(Orwellian)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 빅 브라더 국가의 감시의 영원한 아이콘,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 소설 1984에 등장하는 가공의 나라 오세아니아의 최고권력자


2-3. Research - 1984   & Brave New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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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스크린 오세아니아를 지배하는 당(黨)이 당원들을 감시하기 위해 그들의 모든 가정에 설치한 장비, 작중 묘사로 볼 때 그 형태는 TV와 유사한 것 같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1984년›에서는 벽걸이 TV와 비슷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일단 현실의 TV와 비슷한 기능도 수행하지만, 쌍방향으로 음성과 영상이 전송된다는 것이 결정적인 차이. 텔레스크린의 소리를 줄일 순 있지만 기본적으로 끌 순 없다. 그러나 완전한 쌍방이라고도 볼 수 없는게 일반인들은 텔레스크린에 자신의 일상을 감시당하고, 당에서 방영하는 선전 영상외에는 볼 수 없는 반면, 당에서는 텔레스크린에 비치는 모든것을 감시할 수 있고, 자신들이 선전하고자 하는 것들만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상 판옵티콘이나 다름없다.

Research


2-3. Research - 1984   & Brave New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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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Research - 1984   & Brave New World

오웰의 1984년 을 통해서 본 ‘사회공학’의 의미

작업을 담당해왔고, 처벌은 다리를 잘라내는 작업을

그리스 신화에 보면, 영웅 테세우스는 그의 아버지인

실행해온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프랑스 철학자

아테네 왕 아이게우스를 찾아가는 길에서 많은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1926 – 1984)가 지칠 줄

악당들과 괴물들을 만나 퇴치했다. 그 중 하나가 ‘잡아

모르는 열정으로 고발한 ‘근대적 이성의 양면성’과 그를

늘이는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프로크루스테스이다.

이용하는 ‘권력의 음모’인 것이다.

이유인즉, 그는 쇠로 만든 침대를 하나 갖고 있다가 그의

푸코는 그의 저서 『광기의 역사』 (1961), 『병원의

집에 들어온 여행자들을 그 위에 결박하여 키가 침대

탄생』 (1963), 그리고 『감시와 처벌』 (1975) 등에서

길이보다 짧은 경우에는 잡아 늘여 침대에 맞도록 하고,

병원, 학교, 감옥 등 사회의 미시적 영역에서 일어나고

반대로 침대보다 긴 경우에는 다리를 잘라내어 역시

있는 규격화, 조직화, 표준화에 의한 획일화와 그것을

침대에 맞도록 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었다고 한다.

위한 체제적인 폭력을 고발하는 연구를 수행했다.

그러나 테세우스에게도 역시 똑같은 짓을 하려 했다가,

테세우스의 영웅적인 퇴치로도 결코 사라지지 않고

고약한 악당은 결국 죽임을 당했다.

다시 부활한 근대적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그는

이러한 이유에서, 사람들은 이렇듯 나름대로 어떤

‘규율권력(disciplinary power)’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한 가지 기준을 가지고 모든 것을 그것에다 맞추려는

고발한 것이다. 푸코가 보기에는 근대적 병원, 학교,

사람을 프로쿠르스테스라고 하고, 그런 획일화 작업에

감옥이란 정상성, 정당성, 합리성이라는 개념에 의한

사용되는 폭력적 도구를 일컬어 ‘프로크루스테스의

비정상성, 비정당성, 비합리성, 곧 병자, 범죄자, 변태자

침대’라는 말을 사용한다. 학자들은 흔히 지난 200여

들을 규정하여 만들어 내는 감금과 감시의 프로그램, 곧

년간 사회 각 분야에서 획일화 작업을 해온 ‘근대인’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일 뿐이다.

프로쿠르스테스로, 그리고 그런 획일화 작업에

그런데 푸코보다 한발 앞서 이 같은 일을

사용되어온 ‘근대적 이성’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문학에서 수행한 사람이 조지 오웰(George Orwell,

비유하기도 한다.

1903 – 1950)이라는 영국 작가이다. 사회문제에 대한 열렬한 관심 때문에 작가가 된 그는 『동물농장』 (1945)과

같은 맥락에서 보면, 이상사회를 만들려는 사회공학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 좋은

『1984년』 (1949)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 갖고 있기 마련이다.

되었다. 오웰은 부르주아 집안 출신이었지만 확고한

최초의 사회공학 저서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의 『국가』가

사회주의자였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해 프랑코의

보여주듯, 사회공학에는 이상적인 사회 형태를 설계하고

파시스트들과 맞서 싸웠으며, 런던 빈민가로 이주하여

60 확정하는 작업과 그것에 맞게 인간을 길들이는 작업이

호텔 접시닦이로 일하기도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연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헉슬리의

특별한 동정심을 보였다. 자신의 『동물농장』이나

『멋진 신세계』를 통해서 본 ‘인간공학’의 의미」에서 보았듯이,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는 인간

『1984년』 같은 작품들을 사회주의의 본질에 대한

길들이기를 처음부터 권력에 의한 것이며, 정치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비판으로 오해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되지는 못했다. 사회주의적 유토피아가 아무리 바람직하다고 하더라도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에서 슬로터다이크는

그것이 억압과 폭력에 의한 전체주의 사회로 변질될

독서(내지 휴머니즘)가 이 길들이기를 담당해왔다고

경우 그것은 우리가 진정 원하는 유토피아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교육’과 ‘처벌’이라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한때 모스크바로부터

두 가지 메커니즘이 오랜 세월 동안 ‘프로크루스테스의

‘숙청’ 대상으로 지목될 정도로 그 시대의 전체주의인

침대’ 역할을 맡아왔다. 사실인즉 교육은 키를 늘이는

파시즘과 공산주의에 대해 강력하게 대항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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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각으로는 인간의 자유, 존엄성, 사랑 등이 상실된

Research

전체주의 사회는 결코 유토피아일 수 없다는 것이다.

『1984년』을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유행어가 된 “빅브라더(Big Brother)”는 이 사회의 모든 것을

오웰은 1950년 1월 21일, 46세로 세상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보이지 않는 기관이다. 이 용어는

떴는데, 그 몇 달 전 병마와 싸우며 혼신의 힘을 다해

본래 유인원이나 폭력배 집단의 ‘우두머리’라는 뜻을

쓴 『1984년』이 출간되었다. 그는 이 책을 통해서

가진 속어였지만, 이 작품 이후에는 전 세계적으로

전체주의라는 체제적 폭력으로 새롭게 부활한

유명해져서 아무도 모르게 모두를 지켜보는 불쾌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인간과 인간성을 어떻게

‘감시자’, 모든 이들을 불안하게 하는 비열한 ‘고발자’,

파괴시키는가를 극렬하게 고발다. 『1984년』을 보자.

언제든 고문실이나 감옥으로 보내는 비밀스런 ‘정부 관리’의 상징으로 쓰인다.

101호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나

『1984년』의 주인공인 윈스턴 스미스는 진리성에서

발표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특히 1983년에서

뉴스를 조작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는 중간 관리이다.

84년으로 넘어가는 문턱에서는 제목이 가져온 특수를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오래전부터 자기가 하는 왜곡

맞아 미국에서만 200만 부가 넘게 팔린 『1984년』은

행위에 대한 불만과 저항의식이 꿈틀대고 있었다.

당시로는 먼 미래인 1984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그래서 처음에는 망설이지만 결국 비밀저항조직과

시작한다. 원래 제목은 “유럽의 마지막 인간”이었는데

접촉을 하고 줄리아라는 여성을 만나 동지이자 연인이

출판사가 반대하자, 오웰이 “1984년”을 제목으로

된다. 하지만 그들은 곧 고발당해 사상경찰에게

선택했다. 소설 속의 1984년은 매우 암울하다. 세계는

넘겨지고 애정성(愛情省)에 끌려가 소위 ‘재교육’을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이스트아시아의 세 불록으로

받게 된다. 애정성에서도 가장 잔혹한 곳이 101호실이다.

나뉘어 전쟁 중이고, 그 가운데 영국 런던은 유라시아 제1공대(Airstrip One)에 속한다. 정부에는 전쟁을 담당하는 평화성(平和省),

이 국가에서 모두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텔레스크린을 끌 수 있는 소수의 인물 가운데 하나인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에게 다음같이 말한다.

억압적인 법과 질서를 담당하는 애정성(愛情省),

“자네가 언젠가 내게 물었지. 101호에서 무슨

피폐한 경제를 담당하는 풍부성(豊富省), 뉴스와

일이 벌어지냐고 말이야. 그때 나는 자네도 이미

오락 그리고 예술을 담당하는 진리성(眞理省) 이렇게

알고 있으리라고 말해주었지. 누구나 그것을 알고

네 부서가 있다. 정부는 사상경찰들을 통해 시민들을

있거든. 101호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일이

항상 감시하고, 진실을 조작하며 역사를 왜곡하는 일을

기다리고 있다네.”

한다. 특히 모든 공공장소, 사무실, 구내식당, 심지어는

오웰은 101호실로 끌려가는 한 죄수의 입을 통해

집안에까지 ‘텔레스크린’이라는 감시카메라를 설치하여

그 끔찍한 일에 대한 공포를 이렇게 묘사했다. “몇 주일

시민들의 행동과 대화를 감시한다.

동안이나 나를 굶겼지? 이제 그만하고 죽여, 총살을 하란

모든 사람들은 언어, 역사, 사상에 대해 국가의

말이야. 목을 매! 25년 징역을 내리라구. 내가 또 불어댈

지도와 통제를 받으며, 통제에 거부하는 일체 행위는

사람이 있나? 누구든지 상관없어.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즉각 처벌된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하든지 알게 뭐야. 마누라도 있고 자식도 셋이나 있어.

힘”이라는 슬로건이 암시하듯, 전쟁에 의해 내부 불만을

맨 위 놈이 여섯 살도 안 됐어. 그 애를 잡아다 내 앞에서

해소하고 단결을 도모하며, 개인의 자유의 불필요성을

목을 따더라도 참고 보겠어. 하지만 제발 101호실만은.”

강조하고, 무지는 힘이라고 세뇌시킨다. 또한 거리에는

윈스턴은 처음에는 줄리아가 받을 고통을

“빅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Bigbrother is

생각하며 ‘내가 두 배의 고통을 받아 줄리아를

watching you,!)”라고 적힌 포스터가 곳곳에 붙어있다.

구할 수 있다면, 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물론


2-3. Research - 1984   & Brave New World

그렇게 해야지.’라고 생각한다. 또한 “빅브라더를

다 기계에 걸려든다. 뿐만 아니라 그가 이 금속판의

사랑하느냐?”라고 묻는 오브라이언에게 “나는

시계(視界) 안에 들어있는 한,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빅브라더를 증오합니다.”라고도 대답한다.

다 들리고 보인다. 그러나 언제 감시를 받는지는 알 수

하지만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고문에 의해

없다.” 이 말 안에 ‘일망감시시설’의 특징이 잘 나타나

육체적 정신적으로 완전히 망가진 윈스턴은 101호실로 끌려가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쥐에게 뜯어 먹히는

있다. 일망감시시설이란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레미

고문을 받게 되자 결국 줄리아를 배반한다. 그가

벤담(Jeremy Bentham, 1748 – 1832)이 설계하고

간직했던 마지막 인간성마저 버린 것이다. 그러고

‘팬옵티콘(Panopticon)’이라고 이름 붙인 감옥시설

나서야 재교육이 끝나고 ‘완치된 자’로 판정받고

이다. 영어로 ‘팬옵티콘’이라고 부르는 그리스어

석방된다. 작가는 주인공이 도달한 이 비참한 결말을

‘파놉티콘’은 본래 ‘다 본다(all seeing)’라는 뜻을 갖고

“애정성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용서받고, 그 영혼을

있다.

눈처럼 깨끗하게 했다.”라고 표현했다.

벤담의 설계에 따르면 팬옵티콘은 원형으로 된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2+2=5’, ‘신은 권력’과 같은 명백한 오류를 진리로 인정하게끔

있고 중앙에 죄수들을 감시하는 원형의 중앙감시탑이

철저하게 세뇌된 윈스턴은 빅브라더의 커다란 얼굴을

있다. 죄수들의 방과 중앙감시탑의 사이에는 창이

올려다보며, 지난 40년 동안이나 그의 존재와 사랑을

있고 죄수들의 방은 언제나 밝았기 때문에 죄수들의

의심하고 오해했던 것을 후회하며 눈물을 흘린다.

일거수일투족이 간수에 보인다. 하지만 중앙감시탑은

소설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난다. “모든 것은

내부가 항상 어두워 간수를 보기는커녕 간수가 자신을

잘되었다. 싸움이 끝난 것이다.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감시하고 있는지조차 알 길이 없다. 그럼으로써 벤담

승리한 것이다. 그는 빅브라더를 사랑했다.”

자신이 강조한 대로 “죄수들이 항상 감시받고 있다고

오웰은 『1984년』을 통해 그 시대의 전체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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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감옥인데, 바깥쪽으로는 죄수들을 가두는 방이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팬옵티콘의 핵심 구조이다.

곧 파시즘과 공산주의 사회가 지닌 악몽이 얼마나

이러한 곳에서 죄수들이 갖는 “감시의 환영”에 대해

가공할 만한 것인가를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오웰은 『1984년』에 이렇게 표현했다.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언제라도 그런 상황이 닥칠 수

“사상경찰이 한 개인에 대한 감시를 어떤

있다.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두지 말라. 그것은

계통으로, 또 얼마나 자주 행하는지는 그저 추측할

그대들에게 달려있는 문제다.”라고 경고도 했다.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들을 언제나 감시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아무튼 그들이 하고 싶으면

빅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언제라도 감시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입 밖에

오웰이 남긴 경고를 크게 ‘감시사회’의 문제와

내는 소리는 모두 들리고 캄캄할 때를 제외하고는

전체주의의 문제, 이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자신의 모든 동작이 감시받고 있을 거라는

있다. 우선, ‘감시사회’의 문제이다. 『1984년』에

생각을 하며 살아가야 했고 또 그것이 본능처럼

등장하는 사회는 전체가 텔레스크린이라는

습관화되어버렸다.”

감시 시스템이 완벽하게 가동되고 있는 거대한

푸코는 1975년 출간되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일망감시시설(一望監視施設)’이다. 그 누구도 그

된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오웰이 말하는 본능처럼

무엇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된 “습관화”를 규율권력의 “내면화”라고 표현했다.

“텔레스크린은 송신과 수신을 동시에 하고

그가 말하는 규율권력(disciplinary power)이란 사람

있었다. 윈스턴이 내는 소리는 아무리 낮은 소리라 해도 63

개개인의 몸을 정해진 규율을 통해 길들여서 효율적이고


Process – 1

Research

경제적인 통제시스템을 운용하는 권력을 말한다.

불기 시작한 정보화에 의해 컴퓨터 데이터베이스,

푸코가 보기에, 팬옵티콘에 수감된 죄수는 보이지

폐쇄카메라(CCTV), 각종 전자카드에 의한 전자결제

않는 곳에서 항상 자신을 감시하고 있을 시선 때문에

등을 이용한 다양한 감시와 통제 방법들이 개발되고

처음에는 규율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 못하다가,

사용됨에 따라, 사람들이 점점 민감해졌다. 오웰의

점차 이 규율권력을 “내면화”하여 스스로 자신을

『1984년』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된 이유도 사실은 여기에

감시하게 된다. “요컨대 감금된 자가 스스로 그 유지자가

있다.

되는 어떤 권력적 상황 속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

같은 말을 오웰은 “자신의 모든 동작이 감시받고 있을

1925 – 1995)는 그의 저서 『통제사회에 대하여』에서

거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야 했고 또 그것이 본능처럼

푸코가 파악한 “규율사회(Disciplinary Society)”는

습관화되어버렸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증기기관과 공장이 지배하고 요란한 구호에 의해

그런데 푸코가 주목한 것은 근대사회에서는

통제되는 18, 19세기 사회이기 때문에, 컴퓨터와 기업이

이러한 “습관화” 내지 규율권력의 “내면화”가 단지

지배하고 숫자와 코드에 의해 통제되는 오늘날의

감옥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군대, 병원, 공장,

사회는 그와 다르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이 새로운

학교에서까지 똑같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형태의 감시사회를 “통제사회(control society)”라고

그는 “감옥이 공장이나 학교, 군대나 병원과 흡사하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푸코가 말하는 규율사회가

이러한 모든 기관이 다시 감옥과 닮았다고 해서 무엇이

팬옵티콘이라면, 들뢰즈가 언급한 통제사회는 전자

놀랍겠는가?”라고 물었다. 그가 염려하고 고발한 것은

팬옵티콘이다.

바로 근대사회 전반의 팬옵티콘화였던 것이다. 벤담이

둘 모두 ‘감시사회’이자 ‘처벌사회’라는 점에서는

단지 효율적인 감옥시설을 위해 고안했던 팬옵티콘을

같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감시와 통제가 더 일반적이고

푸코는 규율권력이 사회 곳곳에서 ‘프로크루스테스의

보편적이며 더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침대’로 작동하는 근대사회의 상징으로 분석한 것이다.

사는 통제사회에서는 컴퓨터 데이터베이스, 폐쇄카메라,

푸코가 보기에 인간은 규율권력에 의해

전자결제 등에 의해서 비단 군대, 병원, 공장,

‘제조’된다. 이 근대적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사람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서나,

우선 학생시절에는 학교에서 ‘학생’이라는 신분에

언제나, 그리고 더욱 철저하게 감시 통제되고 있다. 마치

알맞게, 학교를 졸업하면 공장에서 ‘노동자’라는 신분에

오웰의 『1984년』에서처럼.

걸맞게 사람들을 – 잡아 늘리거나 다리를 잘라내어 –

실제로 우리는 폐쇄카메라가 이미 거의 모든

제조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간혹 이 규율에 저항하거나

공공장소와 거리, 심지어는 사적공간에까지도 침투하고

벗어나면 곧바로 감옥으로 보내져서 ‘죄수’라는

있고, 첩보 위성은 이미 극히 작은 물체들의 세밀한

신분에 적합하게 다시 제조되고, 만일 여기에서마저

움직임까지도 추적하고 있으며, 각종 도청장치나

적응하지 못하면, 정신병원으로 보내져 ‘근대적 이성’을

심지어는 핸드폰까지도 감시체제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되찾는 프로그램을 밟게 된다. 비록 극화되긴 했지만,

사회에 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각종 전자결제는 신용,

『1984년』에서 주인공 윈스턴이 밟았던 길이 바로 이

건강, 학력, 직업, 취미, 소비 취향, 가족 관계 등을

길이었다.

노출시키고, 인터넷 브라우저를 통해 웹페이지로

18, 19세기의 근대사회에 대한 푸코의 이러한

전송되는 쿠리파일들은 인터넷 쇼핑이나 웹페이지의

분석이 20세기의 후반에 와 지식인들뿐 아니라

방문수를 알려주며, 사내 중앙컴퓨터에 연결되어 있는

대중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 이유는 급속히

PC는 업무 시간, 작업 과정, 작업량, 성과 등을 상관에게

진행된 정보화와 관련이 있다. 20세기 말부터

전해주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럼으로써 타의에 의해


2-3. Research - 1984   & Brave New World

없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러한 말들의 뜻을 전혀

또는 자발적으로 감시받고 통제되고 있다.

이해하지 못하는 윈스턴은 “나는 내가 존재하고 있다고

들뢰즈는 바로 이러한 사회를 통제사회라고 불렀는데, 언제나 어디서나 “텔레스크린은 송신과

생각해요.”라고 대답함으로써, 결국 ‘당은 지구가

수신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라고 오웰이 『1984년』에

평평하다고 말한다.’, ‘당은 얼음이 물보다 무겁다고

그린 사회가 바로 그렇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감시와

말한다.’와 같은 명제들을 무조건 인정하게끔 하는 소위

처벌의 사회에는 전체주의라는 또 다른 문제가 도사리고

‘죄중단 훈련’을 받게 된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 – 1975)는

있다는 것이 오웰이 남긴 경고이다. 감시와 처벌이 전체주의 사회를 구축하는 중요한 골격이기 때문이다.

그의 책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전체주의의 본질은

알고 보면 전체주의란 이상사회 건설을 빌미로 국가가

이렇듯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완전히 약탈하고 전체만이

감시와 처벌을 극단적으로 행사하는 사회공학이다.

있을 뿐 개인은 쓸모없다는 것을 우선적으로 증명하여 개인들이 스스로 “소모되어도 좋다는 감정(the feeling

64

전체주의에 감춰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df being expandable)”을 갖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전체주의(Totalitarianism)라는 용어의 사용은 1925년

희생을 이끌어내는 데에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러한

6월 22일에 행해진 연설에서 무솔리니가 “강력한 전체주의적 의지”라는 말을 처음 함으로써 시작되었다고

비인간적인 마술을 걸기란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다. 그는 이 연설에서 “국가 안에 모두가 있고 국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고 할 수 있는 세뇌작업도

밖에는 아무도 없으며, 국가에 반대하는 자는 존재하지

교육과 처벌이라는 두 가지 길들이기 작업으로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웰의 『1984년』에서는

이루어졌다.

극단적인 세뇌작업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전체주의적

같은 말이 윈스턴을 가혹하게 고문하고 세뇌시키는

우선, 전체주의 체제에서는 어떤 유토피아를

오브라이언의 입을 통해 수없이 반복된다. 윈스턴과

정하고, 그것을 교육시키며 대중매체를 통해 대대적으로

오브라이언이 애정성 고문실에서 나눈 대화가 그 단적인

선전한다. 여기에 우상숭배라는 – 우스꽝스럽지만

예이다.

매우 효과적인 – 연극놀이도 동원한다. 예를 들면,

“빅브라더는 정말 존재합니까?”

파괴광인 히틀러는 세계의 번영과 평화를 이끌 새로운

“물론이지. 그 분은 존재하고 있네. 당도 존재하지.

독일의 건설자로, 겁쟁이인데다 허풍선이인 무솔리니는

빅브라더는 당의 화신이야.”

용감하고 남자다운 인간의 상징으로, 야심 찬 음모꾼인

“그 분은 내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스탈린은 민족을 사랑하는 아버지로 분장하고 마치

존재합니까?”

배우들처럼 제스처를 쓰며 등장함으로써 항상 자신이

“자네는 존재하지 않아.”

무력하고 쓸모없다고 느끼는 개인들을 그가 복종하고

이 대화에서 오브라이언의 말은 전체주의의 본질,

숭배하는 지도자, 국가, 조국에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곧 국가가 개인보다 우월하며, 개인의 의미는 국가

다 바치라는 가르침에 쉽게 열광하게 했다. 프롬이

안에서 부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지적했듯이 “개인은 자유로부터 새로운 우상숭배로

세계의 의미도 역시 국가에서 부여한다. 오브라이언은

도피”한 것이다. 이것이 전체주의적 ‘프로크루스테스의

이 말을 “우리가 못 할 건 없어. 눈에 보이지 않게 할

침대’에 의한 ‘잡아 늘리기 작업’이다.

수도, 공중에 날게도 할 수 있어. 당이 원치 않으니까

이러한 세뇌교육을 바탕으로 전체를 위한

내가 안 할 뿐이지. 지구의 나이는 우리와 같아. 더

개인의 복종과 희생이라는 극히 부자연스러운 행위가

오래되지 않았어. 어떻게 더 오래될 수가 있어?

자연스레 진행된다. 개인은 체제에 대한 봉사와 희생이

인간의 의식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곧 진리와 유토피아의 구현이고 궁극적으로는 자신 65


Process – 1

Research

자신의 실현과 자신이 속한 집단에게 이익이 된다고

있지? 그것을 뒤집어서 생각해본 적이 있나?

굳게 믿게된다. 전체주의자들은 스스로 날조한 진리와

예속은 자유라고. 혼자는, 즉 자유로운 인간은 늘

유토피아를 그들이 실행하고 있는 전체주의 체제의 관변

패배하지. 모든 인간은 죽기 마련이고, 죽음은 바로

이데올로기로서 내세우고 선전 교육함으로써, 그들이

가장 커다란 패배니까. 그러나 인간이 철저하게

행하는 개인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한다.

완전히 복종을 할 때, 그리하여 자신의 존재를

예를 들어 히틀러는 그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독일의 세계 지배는 … 세계를 보다 높은 문화에

버리고 스스로 당이 될 만큼 당의 일에 발 벗고

봉사시키는 과중한 짐을 진 국민의 승리의 칼에 의해

거야.”

세워진 평화로 이끌어 갔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기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가미카제 특공대를

나서게 되면 그는 불멸의 전능한 존재가 되는

목표는 다만 독일의 번영뿐만이 아니라 인류문명

교육시키며 누구보다도 자주 사용했으리라고 생각되는

전반에 걸쳐 최선의 이익에 봉사하려는 것이라고

이 말에 대해 윈스턴은 “당신이 지금 이야기한 그런

위장하여 선동했다. 때문에 나치체제의 독일 국민들은

세계는 만들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것은 하나의 꿈에

자신들이 인류역사 가운데 가장 끔찍한 전쟁에 이용되고

지나지 않아요. 불가능합니다. 문명을 공포와 증오와

희생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인류번영에 이바지한다고

잔인성 위에 세운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건

믿으며 죽어갔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소련과 그

결코 오래 가지 않을 거예요.”라고 반박한다. 그래서

위성국가들의 국민들은 공산주의적 유토피아에 대한

오브라이언은 할 수 없이 다음 단계의 세뇌작업으로

이상을 위해 목숨을 버렸고,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은

넘어간 것이다.

강력한 세계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민족주의를 이상으로 갖고 자기를 희생했던 것이다. 오웰의 『1984년』에서도 그런 이상과 세뇌작업이

전체주의적 세뇌작업의 두 번째 단계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의한 다리 잘라내기, 곧 고통스런 고문에 의한 세뇌이다. 오브라이언은

존재한다.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에게 그들이 꿈꾸는

윈스턴에게 자기가 행하는 고문의 목적에 대해 이렇게

이상사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자네는 우리가

말한다.

어떤 세계를 창조하려는지 이제 좀 알겠나? 그것은

“아니야! 자백을 받아내려는 것도, 벌을 주려는

옛날의 개혁자들이 상상했던 어리석은 쾌락주의적

것도 아니야. 우리가 왜 자네를 이곳으로

유토피아와는 정반대되는 거지. 공포와 배신과 고통의

데려왔는지를 알려줄까? 치료해주기 위해서야!

세계, 짓밟고 짓밟히는 세계, 바로 그것이야. 우리가

온전한 정신을 되찾아 주기 위해서야! 윈스턴,

창조하는 세계에서의 진전은 고통을 향한 진전이야.

여기에 들어온 사람은 누구나 완치되지 않고 떠난

옛날에는 문명이 사랑과 정의 위에 세워졌다고

자가 없다는 걸 이해할 수 있겠나? 우리는 자네가

주장했지. 하지만 우리의 문명은 증오 위에 세워져 있어.

저지른 그런 어리석은 범죄에는 관심이 없네. 당은

우리의 세계에는 공포와 분노의 승리, 그리고 자기 비하

겉으로 드러난 행위에는 관심이 없어. 우리가

등의 감정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게 될

다루는 것은 정신뿐이야. 우리는 적을 분쇄할 뿐만

거야. 그 나머지는 몽땅 우리가 때려 부술 거야. 몽땅.”

아니라 그들을 개조시키고 있어. 내 말이 의미하는

물론 다음과 같은 세뇌교육도 반드시 병행한다. 오브라이언의 세뇌교육은 그 내용이나 스타일에

바를 알겠나?” 전체주의에는 한 가지 미스터리가 따라다닌다.

있어, 만일 전체주의 교범이 있다면 반드시 실릴 만큼

전체주의는 단적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집단이기주의

전형적이다.

체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집단이기주의

“자네는 ‘자유는 예속’이라는 당의 슬로건을 알고

체제는 – 그것이 민중주의든, 보수주의든, 또는


2-3. Research - 1984   & Brave New World

인종주의든 민족주의든 간에 – 그 집단에 속한 개인들의

여기에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가 당면한 문제,

이익을 보호하고 그 집단 이외의 대상에 대하여

곧 무엇보다도 심각하지만 자칫 잊기 쉬운 문제가

대항한다. 그런데 전체주의는 그 집단 이외의 대상에

드러난다. 그것은 유토피아란 그 이상에 있어서뿐만

앞서 그 집단에 속한 개인들의 희생을 우선적으로

아니라 그 실현 방법에 있어서도 인간적이어야

요구하고 폭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하다.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이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이 전체주의 제일의 미스터리인데,

실현방법에 있어서 인간성을 말살하는 유토피아는

오브라이언의 말이 이 미스터리를 잘 해명하고 있다.

디스토피아에 불과하며, 진정한 유토피아는 그 이상뿐만

전체주의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복종이나

아니라 실현방법에 있어서까지도 인간의 자유, 존엄성,

봉사가 아니라 전체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수

사랑과 같은 인류 보편적 가치들이 존중되어야만

있는 정신으로의 개조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 곧

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20세기 역사를 통해

자신을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고 전체만을 값어치 있는

배웠고,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그리고 오웰이

것으로 인정하는 일은 인간의 이기적 본성 때문에 오직

『1984년』에서 제시한 사회공학의 제1강령인 것이다.

폭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바로 이것이 전체주의가 폭력을 필요로 하는 심리학적 정당성이다. 오브라이언은

인간은 인간이 인간적임을 잊을 수 있는가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우리가 서두에 스스로 던진 문제에 대답할

“그래, 타인을 고통스럽게 함으로써야. 복종으로는

차례이다. 어떻게 하면 윈스턴이 겪은 것 같은 악몽이

불충분해. 만약 고통스럽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에게 닥치지 않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아렌트가 이미 지적했듯이, 전체주의는

그가 자기 의사가 아닌 내 의사에 복종한다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권력은 고통과 모욕을

66

어떤 이유에서든 대중 스스로의 극단적

가하는 데에 있는 거야. 권력은 인간의 마음을

“자기포기(self – abandonment)”와 함께 강력한

갈기갈기 찢어서 우리가 원하는 새로운 형태로

정치조직을 열망하게 된 곳에서만 가능해지는 현상이다.

다시 짜맞추는 데 있는 거야.”

그래서 에리히 프롬(E. Fromm, 1900 – 1980)은 그의

고통을 통한 인간성 말살과 전체를 위해

저서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전체주의의 메커니즘을

스스로를 희생하는 인간의 창조, 이것이 전체주의

사디즘(sadism)과 마조히즘(masochism)이라는

세뇌교육의 수단이자 목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 바로

병리적 현상으로 파악했다. 사디즘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의미에서 – 아렌트는 전체주의를 이데올로기가

파괴적이고 무제한적인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쾌감을

아니라 테러가 지배하는 정치형태로 규정하는 것이다.

느끼는 병리이고, 반면 마조히즘은 자기 자신을

아렌트에 의하면, 전체주의란 “개개인의 모든 생활

강한 권력 속에 용해시킴으로써 그런 힘과 영광에

영역에 대한 영구적 지배”를 목적으로, 이념이 아니라

참여함으로써 쾌감을 느끼는 질환이다. 이 두 병리적

테러가 그 국가형태의 본질을 이루고, 정당이나 군대가

경향은 외견상으로는 서로 반대지만, 내면적으로는 자기

아니라 비밀경찰이 정치권력의 수행자요 집행자이며,

자신에 대한 무력감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수용소가 전체적 지배의 실험실이 되는 정치체제일

극복하기 위해 공생관계를 맺고 있는데, 바로 이것이

뿐이다. “테러의 궁극적인 목적은 여러 사람의 복지나

전체주의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프롬은 “인간의 정신이 수용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이익이 아니라 인류제조(fabrication of

mankind)로서, 종(種)을 위하여 개인을 제거하는 것이며 ‘전체(whole)’를 위하여 ‘부분들’을 희생시키는

가장 강력한 신념, 즉 삶과 진리에 대한 신념 그리고

것”이라는 것이다.

자유에 대한 신념을 모든 사람에게 고취시킬 수 있을 67

개인적 자아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실현으로서의


Process – 1

때에만” 비로소 전체주의로 향하는 허무주의의 힘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아렌트의

Research

바로 이점에서 사회과학자들과 전혀 다른 것이다. 이들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들이 소설에서

경고와 프롬의 충고를 받아들인다면, 감시사회와

제시하는 다양한 인공적) 수단들로 인간 본성의 힘과

전체주의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는 유토피아를 향한

치열성을 오히려 강조한다. 자미아틴의 『우리』에서는

우리의 사회공학이 나아갈 총체적인 방향이 어느 정도

인간 본성에서 인간적 욕구를 제거하기 위해 뇌엽

드러난다. 그것은 모든 유토피아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절제와 같은 뇌수술이 필요해진다. 헉슬리의 『멋진

침대’에 의한 ‘잡아 늘리기’와 ‘다리 잘라내기’에

신세계』에서는 인공적 인간의 생산과 ‘소마’라는

기초해서가 아니라, 개인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실현을

환각제의 투약이 필요해지며, 오웰의 『1984년』에서는

기반으로 설계되고 추진되어야 한다.

그것이 고문과 세뇌의 무제한적 사용이 된다. 이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는 인공적

세 작가는 그 누구도 인간 내부의 인간성 파괴가

과학기술에 의한 인간생산과 강압적 교육을 통해,

용이하다는 생각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오웰의 『1984년』에서는 감시와 통제, 고문과 세뇌를

모두는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데 오늘날 공동의 수단이

통해 이상사회를 건설하거나 유지하려고 시도한다.

된 지식과 기술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인간적 수단에 의한 유토피아는

『1984년』의 세계가 이 지구상에서 지배적인 삶의

단지 디스토피아임을 작가들은 고발하고 있다. 프롬은

형태로 전개된다면, 그것은 미친 사람들의 세계이며,

「『984년과 부정적 유토피아에 대해서」에서 아래와 같이

인간이 살 수 있는 세계가 못 된다. 나는 오웰도 헉슬리나

쓰고 있다. 조금 길지만 충분히 참고 읽어 볼만하다.

자미아틴도 이런 정신 이상의 세계가 닥쳐오리라고

“자미아틴(E. Zamyatin)의 소설 『우리』와

주장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그와 반대로

헉슬리(A. Huxley)의 『멋진 신세계』 그리고 조지

그들의 의도는 분명히, 우리가 서방 문화의 바른 뿌리가

오웰(G. Orwell)의 『1984년』은 여러 면에서 차이가

되는 휴머니즘과 인간 존엄성의 정신을 부활시키지

있다. 그러나 이들 세 부정적 유토피아 소설에는 공통된

못한다면 어디로 향할 것인가를 보여줌으로써, 하나의

한 가지 질문이 있다. 그것은 철학적, 인류학적 그리고

경고를 울리는 데 있을 것이다. 오웰은 다른 두 작가와

심리학적 또한 아마도 종교적인 것이다. 그것은 이렇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인간처럼 행동하는 기계를 만들고,

인간의 자유, 존엄성, 성실, 사랑에의 갈망을 잊어버릴

그 다음 기계처럼 행동하는 사람으로 전락하는 새로운

정도로 인간이 변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하자면 인간은

형태의 관리 산업주의가 인간을 사물로 변모시키고

인간이 인간적임을 잊을 수 있는가? 혹은 이러한 근원적

생산 · 소비 과정의 부속물로 만드는 비인간화와 완벽한

욕구의 강탈을 통해 인간적 사회를 비인간적 사회로

인간 소외의 시대로 내몬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을

만들 역동성을 인간 본성은 갖고 있는가?

뿐이다.”

여기에서 세 작가들은 오늘날 많은 사회

이 글은 결국 우리가 진정 원하는 유토피아는

과학자들이 견지하고 있는 심리적 상대주의라는 단순한

‘인간이 인간으로서 인간적으로 살 수 있는 사회’이어야

입장을 취하지 않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세 작가들은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이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본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간에게

인간성 자체를 변형시키거나 파괴함으로써 만들어질

본질적 자질 같은 것은 없다는, 그래서 인간은 주어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헉슬리가 『멋진

어떤 사회에서라도 교범적으로 맞추어 살 수 있는

신세계』에서 도달한 결론과도 일치한다.

흰 종이와 같은 것에 불과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지

그렇다면 이상사회를 향한 어떤 사회공학도

않는다. 이들은 인간은 사랑과 정의, 진리와 연대성을

설계도를 미리 확정하고, 인간을 그것에 맞추려 해서는

향한 치열한 정열을 지니고 있다고 전제하고 있는데,

안된다. 그럴 경우 어떤 식으로라도 ‘프로크루스테스의


2-3. Research - 1984   & Brave New World

침대’가 등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회공학은 오히려 우리가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획득하고 지켜온 인간성, 곧 자유, 평등, 사랑, 존엄성, 고통과 폭력의 감소와 같은 인간적 갈망에 합당한 설계도를 만들고 추진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하지 않을까? 어떤가? 그럴 것 같지 않은가? 아니면 보다 나은 다른 방법이 있는가? “언제라도 그런 상황이 닥칠 수 있다.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두지 말라. 그것은 그대들에게 달려있는 문제다.”라는 오웰의 경고를 떠올리면서 한번 생각해보자.

68

69


Research Process – 1

“인류는 과학과 예술을 창조할 지혜를 갖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인간은 정의의 세계, 형제애의 세계, 평화의 세계는 이룩하지 못하는가?” 레온 불룸


2-3. Research - 1984   & Brave New World

멋진 신세계 Brave New World,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는 올더스 헉슬리가 1931년에 쓰고 1932년에 출판된 디스토피아 SF 소설이다. 소설의 제목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 의 한 구절에서 따왔다. 멋진 신세계는 헨리 포드가 태어난 해인 1863년을 인류의 새 기원으로 삼은 가상의 미래 세계를 다루고 있다. 작품 속의 배경은 포드 기원 632년(서기 2496년)의 영국이다. 소설 속의 세계는 하나의 통일된 정부의 통제하에 있으며 모든 것이 포드주의에 따라 자동 생산된다. 심지어 사람도 컨베이어 시스템에 실려 수정되고 길러져 병 속에서 제조되고 태어난다. 멋진 신세계는 극도로 발전한 기계 문명이 철저히 통제하는 계급 사회를 그린다. 헉슬리는 기계 문명의 발달을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대두한 전체주의와 연결시켜 비인간적 기계 문명이 가져올 지옥을 경고하였다.

“멋진 신세계”라는 말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 제5막 1장 가운데 미란다의 대사에서 따왔다.

O wonder! How many goodly creatures are there here! How beauteous mankind is! O brave new world, That has such people in’t. William Shakespeare, The Tempest, Act V, Scene I, ll. 203–206[5]

오 놀라워라! 이 많은 훌륭한 피조물이라니! 인간은 참으로 아름다워라! 오 멋진 신세계, 70

이런 사람들이 사는 곳. 윌리엄 셰익스피어, 템페스트, 제5막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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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 ‹멋진 신세계 Brave New World› 올더스 헉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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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를 통해서 본 ‘인간공학’의 의미

이번에는 “인간 길들이기”로서의 휴머니즘문화의

20세기가 끝나고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하기 직전인

종말을 고하고 나섰다.

1999년 여름, 독일은 뜨거웠다. 알프스 산맥 북쪽에 위치한 독일 바이에른 주(州)의 가르미쉬에 있는 옛 성

슬로터다이크의 충격적인 주장에 의하면

엘마우(Schloss Elmau)는 더욱 그랬다. 이 아름다운

인간문화, 곧 모든 휴머니즘문화는 동물로서의 인간을 “길들이기” 위한 “사육”이었다. 이러한 일은 일찍이

성에서는 그해 7월 16일부터 20일까지 닷새 동안

동물로서의 적응에 실패한 인간이 집을 만들어

「존재의 저편, 하이데거 이후의 철학」이라는 제목으로

가축과 함께 살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즉, 동물들을

국제학술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스라엘, 프랑스,

길들이는 동물의 “가축화”와 동물로서의 인간들을

아르헨티나, 미국 그리고 독일 각 처에서 온 철학자와

길들이는 인간의 “인간화”가 함께 시작되었다는

신학자들이 참가해 날마다 열기를 더해가고 있었다.

것이다. 슬로터다이크는 자신의 또 다른 스승인

그런데 그곳에 갑자기 머리를 길게 늘어트리고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한 말을

콧수염을 기른 중세풍의 한 철학자가 나와 「인간농장을

상기시키며, 인류는 “늑대를 개로 만들고, 인간 자체를

위한 규칙; 하이데거의 휴머니즘에 관한 서한에 대한

인간에게 최선의 가축으로” 만들어 왔다고 주장한다.

답신」이라는 제목으로 ‘인간사육’에 관한 논문을

흥미로운 발상이지 않은가?

발표함으로써 그 열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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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자가 널리 퍼져 보편화됨으로써

차가웠지만 그것이 유전공학이라는 시대적 논란에

이러한 인간사육이 비로소 본격적으로 가능해졌다고

불을 당길 휘발유라는 것이 드러난 것은 조금 후의

슬로터다이크는 파악한다. 곧 쓰기와 읽기의 문화가

일이었다. 막 50대에 들어선 예술가 타입의 이 철학자는

발달됨으로써 인간들을 길들여 사회적 통합을 이루는

현재 독일 칼스루에 조형대학의 총장이자 교수로 있는

일이 광범위하게 행해질 수 있었다. “올바른 독서는

페터 슬로터다이크였다. 그는 1983년에 무려 954쪽에

길들인다.” 한마디로 인간의 야만성을 독서를 통해

달하는 『냉소적 이성 비판』(Kritik der zynischen

길들이려는 것이 서구 휴머니즘의 이상이었다. 그런데

Vernunft)이라는 책을 내면서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우리는 계몽되었고, 우리는

문제는 이제는 그것이 실패로서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감각해졌다.”라면서 계몽주의가 냉소주의 (Zynismus)를 퍼트렸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아테네

밀렸던 것처럼, 각종 새로운 미디어가 끊임없이

시장 사람들 앞에서 방귀를 뀌고 똥을 누고 오줌을

제공하는 “핏빛놀이로 가득 찬 오락산업”의 노예로

싸며, 대로에서 자위행위를 하고 명성을 경멸하고

사로잡혀 있는 현대인들에게 문자가 더 이상 주된

건축물에 대해 입을 삐쭉대고 경의를 거절하고 신과

역할을 하지 못하고 주변으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역사를 패러디하고 날고기와 생야채를 먹고, 태양

그럼으로써 지금 인간의 “야만화”가 진행되고 있다.

아래 누워 창녀들과 히히덕거리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햇빛을 가리지 말아 달라.”고 하던 고대의

여기에 슬로터다이크의 위기의식이 있다. 그것은 “전쟁과 제국주의처럼 직접적인 야만일 수도 있고,

견유주의자(Kynismus. 인간이 인위적으로 정한 사회의

우리의 자제력을 잃게 만드는 미디어를 통한 인간의

관습, 전통, 도덕, 법률, 제도 따위를 부정하고, 인간의

일상적 야수화일 수도 있다.”라고 그는 진단한다.

이유인즉, 마치 로마에서 책이 원형경기장에

그런데 문제는 오히려 그 다음에 있다. 이러한

본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생활할 것을 주장하는 태도나 사상을 말함=편집자주) 디오게네스를 선호하며 기꺼이

비관적 전망을 바탕으로 슬로터다이크는 인간이 다른

그 뒤를 따릅니다. 마치 그 옛날 플라톤을 비웃던

새로운 길들이기 수단을 선택하고 있고 또한 해야

디오게네스처럼 냉소적인 웃음을 엘마우 성에 뿌리면서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바로 이 점에서 “슬로터다이크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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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또는 “슬로터다이크 – 하버마스 스캔들”이라고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고독이나 불안, 절망 같은

불리는 논란에 불을 지폈다. 왜냐하면 슬로터다이크는

정신적 고통까지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인간의 야만성을 잠재우고 길들이기 위해 인간을

부족함 없이 소비하며 누구와도 섹스를 즐길 수 있기에

유전학적으로 선별(Selektion)하고 사육(Zhmung)할

이곳에서는 모두가 행복하다.

수 있도록 하는 유전공학을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뉴앙스를 짙게 풍겼기 때문이다. 그러자 우선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 ‹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곳은 무한한 물질적 풍요와 끝없는 쾌락이 어떠한 수고나 노력의 대가 없이도 주어지는 이상향 “코케인(Cockaygne)”이나

차이트›, ‹데어 쉬피겔› 같은 독일의 주요언론을

과학기술의 발달과 그에 의한 물질적 풍요를 기반으로

중심으로 날마다 열화와 같은 논쟁들이 터져나왔다.

한 이상사회인 베이컨의 “신 아들란티스”를 모델로 한

기사의 제목부터 매우 도전적이었다. “철학자

유토피아이다. 그런데 그런 세상이 어떻게 가능한가?

페터 슬로터다이크, 초인의 사육을 옹호하는가?”,

만일 그런 곳이 있다면 누구든지 그곳에서 살고 싶어 할

“인간농장의 사육자: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반

것이다? 과연 그럴까? 이에 대한 대답을 하기 전에 우선,

휴머니즘적 이성의 서광”, “초인의 사육자”, 또는

그런 세계가 어떻게 가능한지부터 알아보자.

“무명씨의 반란” 등으로. 철학계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먼저

신세계에서 사람들은 – 슬로터다이크의 말처럼 –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유전학적으로

하버마스의 제자로 알려진 아쓰호이어가

선별(Selektion)되어 만들어진다. 그리고 길러지는

슬로터다이크의 논문을 “차라투스트라 프로젝트”라고

것이 아니라 사육(Zhmung)된다. 선별과 사육, 이

비난하고 나섰고, 뒤이어 하버마스도 “악령으로부터의

두 가지가 기적적인 신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두

편지”라는 글을, 투겐트하트는 “도덕적 유전자는

기둥인데, 소설은 이러한 일이 실행되고 있는 「런던

없다.”를, 슈페만이 “길러질 뿐 만들어지지 않는다”를,

중앙 인공부화 조건반사 센터」를 소개하는 문장으로

폴하르트는 “인간 사육은 불가능하다” 등의 글들을 각각

시작한다.

발표했다. 물론 슬로터다이크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열띤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소식들을 들으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 하나 있다. “무엇이 새로운가? 도대체 무엇

“겨우 34층밖에 되지 않는 나지막한 회색 빌딩, 중앙현관 위에는 「런던 중앙 인공부화 조건반사 양육소」라는 간판이 붙어 있고 방패모양의 현판에는

때문에 그리 야단법석을 떨 필요가 있는가? 이런 문제는

「공유, 균등, 안정」이라는 세계국가의 표어가 보인다.” 바로 이 “나지막한” 건물 1층에 있는

이미 1932년에 출간된 헉슬리(A. Huxley)의 『멋진

수정실(受精室)에서 아기들이 인공수정에 의해 마치

신세계』에서 모두 예고되고 경고된 문제가 아니던가?

공산품처럼 다량으로 생산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그런데 왜들 그렇게 호들갑인가?” 하는 것이다. 혹시

신세계에는 당연히 임신이나 부모라는 개념이 없고,

몰랐는가? 그럼, 먼저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보자.

형제자매, 남편, 아내, 애인, 일부일처제라는 것이 없다. 이것이 누구하고도 섹스를 즐길 수 있는 사회적

유토피아를 만드는 학문 (1) – 우생학 셰익스피어의 희극 『템페스트』에서 그 제목을 따왔다고

조건이기도 하다. 아기들은 체제의 통제 아래 태아 때부터 알파,

하는 올더스 헉슬리(A. Huxley, 1894 – 1963)의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 등 다섯 가지 계급으로

『멋진 신세계』에는 발달한 과학문명에 의해 만들어진

나뉘어 위로는 최고지도자에서 아래로는 하수도

말 그대로 멋진 세계가 등장한다. 이곳에서는 어느

청소부까지 맞춤형으로 제작된다. 지도계층에 속하는

누구도 불행하지 않다. 질병, 전쟁, 굶주림, 헐벗음 같은

알파와 베타 계급은 난자 하나에서 태아 하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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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시키지만, 그 외의 생산계층에 속하는 계급들은

하버드 대학의 윌슨(E. Wilson) 교수에 의해 제창된

사회생물학(Sociobiology)이, 그리고 21세기에는 ‘보카노프스키법’이라는 난자 분열법에 의해 한번에 96명의 쌍둥이를 생산한다. 그럼으로써 신세계 사람들은 유전공학이 바로 이 생물학적 결정론을 바탕으로 하고 체격, 성격, 지능, 체질 등 모든 자연적 운명이 조작됨은 물론이거니와 직업, 취미, 적성과 같은 사회적 운명까지 인공적으로 미리 정해진다. 예를 들어 장래에 열대지방에서 노동자로 일하게

있다. 영국에서는 헉슬리가 태어나기 직전인

1890년부터 장애자나 정신병자, 또는 극빈자들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부적자’로 단정하고 그들은 아이를

될 태아에게는 티푸스와 수면병에 대한 면역력을

낳지 못하게 만드는 ‘단종법(sterilization Law)’을

키워주고, 광부나 철강공으로 결정된 태아들은 열기에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흑인과

익숙하게 조작되는 식이다. 지도계층에 속하게 될

아시아인들을 이등 시민으로 분류하는 ‘짐 크로우법’과,

태아들은 지적인 취미와 적성을 갖게 하고, 생산계급에

이들이 이민 오는 것을 막는 ‘이민 쿼터법’이 제정되었다.

속하게 될 태아는 육체노동에 적합한 취미와 적성을

사회적으로 부적합한 열성인자를 가진 유색인종이

갖도록 말이다.

미국에 새롭게 들어오는 것을 막겠다는 뜻이었다. 또한

유전공학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살았던 헉슬리는 이러한 기발한 아이디어를 당시 유행하던 우생학에서 얻었다고 한다. 우생학(Eugenics)은 다윈의

1907년 인디아나주를 시작으로 하여, 1915년에는 미국 12개 주가 실제로 단종법을 실시하였다. 헉슬리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태어나 자랐다.

진화론과 멘델의 유전법칙이라는 두 가지의 뿌리에서

게다가 그의 할아버지는 진화론 옹호로 유명한 토마스

태어난 학문인데, 그 개요는 이렇다.

헨리 헉슬리(T. H. Huxley, 1825 – 1895)였고, 그의 형

인간은 사회라는 환경에 적응하면서 진화하는

줄리언 헉슬리(J. Huxley) 역시 우생학에 밝았던 저명한

동물이다. 때문에 인간 가운데는 사회에 잘 적응하는

생물학자였다. 그래서 헉슬리는 전문가 수준의 생물학과

‘적자’(適者, the fit)와 잘 적응하지 못하는

의학지식은 물론이고 사람들의 사회적 본성을 출생

‘부적자’(不適者, the unfit)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전에 이미 생물학적으로 결정해서 태어나게 조정할 수

76 그것은 유전적 형질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 따라서

있으며, 그럼으로써 행복한 개인들이 사는 유토피아를

우생학의 목적은 ‘적자’를 키우고 ‘부적자’를 제한 및

만들 수 있다는 당시 우생학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제거함으로써 사회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당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듣기에 따라 그럴듯한 이 주장에는 생물학적 결정론(Biological Determinism)이라는 특별한 생각이

유토피아를 만드는 학문 (2) – 행동주의 심리학

깔려있다. 생물학적 결정론이란 I.Q., 성격, 재능 같은

헉슬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인간의 사회적 능력이 성별이나 호르몬 또는 유전형질과

신세계에서는 출생 이전뿐 아니라 출생 이후의

같은 생물학적 요소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물질적 심리적 행복문제까지도 정부가 관리해주는

주장하는 이론이다. 따라서 개인의 생물학적 요소들을

것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신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안정,

개선함으로써 사회의 발전을 이룰 수 있다.

동일, 공유라는 표어 아래 누구나 동일한 시간에 자신의

예를 들어 질병, 장애, 가난, 불평불만 등 각종

적성에 맞는 일을 수행하고, 물질은 필요에 따라 충분히

사회문제들을 출생이전에 유전형질을 조정하거나

공급받습니다. 또 모두가 전자기구들에 의한 편리한

출생이후에 특정한 수술을 감행함으로써 줄이거나

생활과 자유로운 성생활을 공유한다. “만인은 만인의

아예 없앨 수 있다. 19세기에는 영국의 갈튼(F. Galton,

공유물이다.”라는 격언이 이 사회를 상징한다. 따라서

1822 – 1911)에 의해서 체계화된 우생학이, 20세기에는

육체적 고통이나 물질적 걱정, 근심, 불만이 있을 수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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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

심지어는 전기충격)을 주는 ‘부정적 강화’를 준다면

없다. 문제는 심리적인 행복인데, 이것을 위해서는

흔히 “천성적”이라고 부르는 행동들을 놀라울 정도로

여러 가지 특별한 방법들이 동원된다. 우선 「런던

완벽하게 조종할 수 있다. 그의 신조는 인간에게 타고난

중앙 인공부화 조건반사 양육소」의 5층에 있는

본성은 없다. 따라서 인간은 고무찰흙처럼 주무르는

「육아보육실 신 파블로프식 조건반사 양육실」에서는

대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유아들에게 조건반사를 통한 교육을 시킨다. 예를 들어

왓슨은 다음 같은 호언장담까지 했다. “나에게

유아들에게 책과 장미를 보여준 다음, 전기충격을

열두 명의 건강한 아이를 주고 내가 직접 하나하나

가하는 일을 반복함으로써 그들이 평생 독서나

꾸민 세계에서 그 아이들을 키우게 한다면, 장담하건대

꽃을 혐오하게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필요한 지식이

나는 모든 아이들을 그의 재능, 취미, 성향, 능력, 소질,

외부로부터 주입되는 이 사회에서 독서나 꽃을 보러

조상들의 경력과 무관하게 내가 선택한 유형의 사람 즉,

소풍을 나가는 것은 시간낭비일 뿐이기 때문이다.

의사, 변호사, 예술가, 상인, 심지어는 도둑으로도 길러낼

그리고 14층에서는 아기들이 잠잘 때 사오십 번씩

수 있다.”라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왓슨과 그의 후계자인

“나는 베타계급이 된 것을 진심으로 다행으로 여기고

스키너에게는 그들이 갓난아이들에게 ‘전기충격을

있어요.”라는 식으로 계급의식을 주입시키는 내용의

가하는 아기상자’를 고안하여 강화실험을 하였다는

방송을 들려주는 수면학습법도 실행한다.

스캔들까지 따라다니기도 한다.

이렇게 자라난 아이들에게는 성인이 되어서도

이처럼 인간의 본성은 아무것도 써 있지 않은

행복한 감정을 유발시키는 인공합성 음악을 듣고,

‘빈 서판(tabu la rasa)’과 같아 오직 자라난 환경에

밤마다 “오늘날은 모두가 행복하다.”라고 최면을 걸거나 “사회의 지주는 철학자가 아니라 정밀세공 기술자나

의해서 결정된다는 주장을 환경결정론(environmental

인지세금 징수자이다”라는 식으로 지성인보다는

출생 이후의 교육과 사회제도와 같은 환경개선을

전문인의 가치를 존중하는 가치관 역시 수면학습법을

통해서만 우리는 이상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통해 주입된다. 그럼으로써 심리적 안정과 행복감을

주장한다. 생물학적 결정론자과는 대립하는 주장인데

갖게 하는 것이다. 그러고도 문제가 있을까 봐 행복한

신세계에서는 이 이론도 그대로 받아들였다.

감정을 유지시키는 ‘소마(soma)’라는 알약도 공급한다. 헉슬리가 “신 파블로프식 조건반사”라고

determinism)이라고 한다. 따라서 환경결정론자들은

결국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두 가지 대립하는 결정론 위에 건설된 유토피아인 것이다. 생물학적

이름붙인 이론을 오늘날에는 행동주의 심리학이라고

결정론을 근거로 한 우생학과 환경결정론을 바탕으로

부른다. 행동주의 심리학은 구소련의 심리학자

한 행동심리학으로 설계된 사회제도에 의해 만들어진

이반 파블로프(Ivan Petrovich, 1849 – 1936)의

결정론적 사회라는 것이다. 슬로터다이크가 「인간농장을

조건반사이론을 발달시킨 존 브로더스 왓슨(J. B.

위한 규칙」에서 사용한 용어를 빌려 표현하면, 우생학적

Watson)에 의해 1920년대 창시되었다. 왓슨은 인간의 모든 행동을 주어진 조건반사 곧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선별”과 행동주의 심리학적 “사육”이 정부에 의해

보았던 사람이다. 때문에 자극들을 적절하게 조절하기만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회이다.

한다면 인간의 행동은 얼마든지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이상사회이다. 그럼으로써 모든 그렇다면 도대체 문제될 것이 무엇일까요? 답부터 먼저 밝히자면, 문제는 결정론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를 들어, 아이가 어떤 일을 했을 때 그에

이렇게 자신의 선택과 희망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인에

상당하는 보상(칭찬이나 선물)을 주는 소위 ‘긍정적

의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행복과 안정이 과연 우리가

강화’를 한다든지, 어떤 일에 대해서는 벌(꾸중이나 체벌

진정 원하냐는 것이다. 그런 유토피아에 살고 싶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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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이다. 슬로터다이크가 말하는 쓰기와 읽기를 통해 국가,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 멋진 신세계

길들이는 계급에 의한 주민들의 선별과 사육이 상세히

슬로터다이크의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은

적혀 있는 셈이다. 『정치가』도 마찬가지다.

“인간농장”이니 “동물원”, “사육”, “길들이기”와

의해 갈라진 통치계급과 생산계급의 차이, 즉 동물원

세인들의 눈길을 끌기에는 성공했지만 우리에게 상당한

관리자와 동물원 주민의 구분이다. “플라톤의

심리적 거부감을 자아낸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심리적

동물원과 그의 시설과 관련하여 말하자면, 세계에서

부담을 조금 덜어내고 들여다보면, 그 내용은 사실인즉

어느 것보다도 그(플라톤)에게 중요한 것은 주민과

그리 새롭거나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 표현에서 냉소와

관리자 사이에는 단지 정도의 차이만 있는지 아니면

자극을 걷어내고 들어보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특수한 차이가 있는 것인지를 알아내는 것”이라면서,

인간은 동굴에서 나와 집을 짓고 정착해 살

“거짓동물원관리자” 곧 사이비 정치가들은 그 차이를

때부터 이미 짝짓기 상대를 선택하는 일과 어린

무시하려고 하지만, “진정한 사육자” 곧 올바른

것들을 길들이는 일을 나름대로 해왔다. 암암리에

정치가들은 그 차이를 분명히 할 것이다.

스스로를 “선별”하고 “사육”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플라톤은 그 차이를 보존하기 위해

이런 일들을 슬로터다이크는 동물로서의 인간의

“동계교배”를 통해 생식하며, 잡종교배가 일어나는

“인간화”라 표현했고, 이런 일들이 행해지는 장소를 “인간농장”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인간은, 그들이

것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그럼으로써 “원형에 가까운 인간표본들을 체계적으로 새롭게 사육”하여 각각의

어디에서 살든 간에, 자신의 주위에 농장이라는 공간을

특성에 따라 날줄(통치계급)과 씨줄(생산계급)을

만들어 스스로 양육하고 스스로 보호하는 존재”라고

이용하여 직물을 짜듯이 국가를 산출하는 것이 플라톤이

규정했다.

설계한 “인간농장에 관한 규칙”이다.

인간이 사회를 만들어 살기 시작하고 그 이상적인 78

그런데 슬로터다이크가 주목하는 것은 문자문명에

같은 냉소적이면서도 자극적인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하지만 슬로터다이크에 따르면 플라톤의 동물원

형태인 유토피아를 구상하는데 있어서도 이 문제는

내지 인간농장은 “유일하고 완전한 휴머니스트”,

여전히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고대로부터 정치는 우수한

“왕의 목자 기술을 가진 지배자”, 즉 플라톤이 말하는

국민을 생산하고 길러내는 선별과 사육에 초점을 맞추어

“철인왕”에 의해 구현되는데, 이제는 “신들뿐 아니라

왔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슬로터다이크는 “농장

현자들도 물러나” 그런 사육자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또는 도시에서 인간관리는 이때부터 일종의 동물원

그래서 그는 묻는다. “휴머니즘이 인간 길들이기의

정치의 과제로 보인다. 정치에 관한 현실로 제시되는

학파로서 실패했다면 무엇이 인간을 길들이는가?”라고.

것은 사실 인간농장 경영을 위한 규칙들의 토대에

그리고 대답을 대신하여 “장기적 발전이 또한

관한 반성이다.”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종적 특성들의 유전학적 개혁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

예로 플라톤의 『정치가』와 『국가』에 나오는 “규칙”들을

미래의 인간공학(Anthropotechnologie)은 명백한

들었다.

형질계획으로까지 밀고 나갈 것인가? 인류가 종

슬로터다이크와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플라톤의

전체에 걸쳐서 탄생운명론에서 선택적 탄생 및 탄생

『국가』는 실제로 가장 오래된, 또한 완벽한 “인간농장에 관한 규칙”이라 할 수 있다. 그 안에는 통치계급(통치자,

이전의 선택으로 방향전환을 실행할 수 있는가?”라는

군인), 생산계급(시민, 노예)에 대한 구분과 그들이

한마디로 이제는 유전공학을 통한 인간의 선별과 사육이

질문이 우리 앞에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라고 선포한다.

지켜야 할 덕성들이 열거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대안이 되지 않겠냐는 말이다. 그래서 헉슬리가 쓴

교육과정에 대한 상세한 언급들로 구성되어 있기

『멋진 신세계』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헉슬리가 구상한 79


Process – 1

Research

신세계야말로 슬로터다이크가 구상하는 “우리 앞에

『리어왕』, 『템페스트』 같은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의

나타나기 시작할” 새로운 인간농장에 관한 규칙에

대사들을 인용하여 사고하고 또 말한다. 레니나는 존과

가장 적합한 형태의 농장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 린다를 신세계에 데려온다.

이미 살펴본 것 같이, 신세계에서는 선별과 사육이

그러나 존과 신세계 주민들 사이에는 상호이해가

플라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완벽하게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존이 『로미오와 줄리엣』 가운데

그리고 슬로터다이크가 기대하고 암시한 바로 그대로

한 대목을 읽어주자, 신세계 주민인 헬름홀츠는 눈물이

이루어진다.

나도록 웃고 또 웃는다. “부모가 딸이 원하지도 않는

우선, 선별문제에서는 우생학을 통해 인간을

어떤 남자와 결혼을 강요하다니!(이건 정말 기괴한

생산하기 때문에 플라톤이 염려하는 각 계급 사이의

음담패설이다) 또 자기가 더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고

잡종교배가 일어날 수 없다. 그리고 사육문제에서도

말하지 못하는 백치 같은 딸!(이것은 모순투성이인

교육이나 독서와 같은 소극적 방법이 아니라

희극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수면학습법이나 전기충격 그리고 약물요법 같은 적극적

사는 신세계가 존의 눈에는 ‘멋진 세계’가 아니라

방법으로 길들이기 때문에 슬로터다이크가 염려하는

‘미친 세계’로만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반란을

“핏빛놀이로 가득 찬 오락산업”에 의한 “야만화”가

일으키지요.

일어날 수가 없다. 플라톤이 염려하던 선별의 문제와

소설의 마지막에서, 존은 신세계의 지도자인 총통

슬로터다이크가 걱정하는 사육의 문제가 완벽하게

무스타파 몬드에게 “나는 안락을 원하지 않습니다.

해결된 것이다.

나는 신을 원하고 문학도 원한다. 진정한 위험과

때문에 우리는 『멋진 신세계』를 통해 엘마우

자유와 선을 원한다. 나는 죄도 원한다.”라고 외치지요.

성에서 슬로터다이크가 제시한 문제, 곧 “휴머니즘이

총통은 “그러니까 자네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군

인간 길들이기의 학파로서 실패했다면 무엇이 인간을

그래.”라고 단정한다. 존은 “그렇게 말씀하셔도

길들이는가?” 내지 “미래의 인간공학은 명백한

좋습니다.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 그러자 다시

형질계획으로까지 밀고 나갈 것인가?”라는 문제에

총통이 “그렇다면 늙고 추하고 생식불능이 되는 권리는

대한 답을 찾아 볼 수 있다. 헉슬리는 슬로터다이크의

말할 것도 없고, 성병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질문들을 모두 예상하고 대답이나 하는 듯이 이야기를

없거나 이들이 들끓을 권리, 내일 자신에게 어떤 일이

전개해 나간다.

닥칠지 몰라 불안에 떨 권리,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 온갖 표현할 수 없는 고민에 시달릴 권리도 원한다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

말인가?”라고 묻지요. 이 때 존은 오랜 침묵 후에

소설의 여주인공인 레니나는 버나드 마르크스라는

대답한다. “네. 난 그 모든 권리를 원해요.”라고!

청년에 의해 금지구역인 ‘인디언보호구역’으로

이 장면을 통해 헉슬리가 하고 싶은 말은

들어가게 됩니다. 고압전류가 흐르는 울타리로

분명합니다. 인간에게는 행복과 안정보다 더 중요한 것이

둘러싸인 ‘인디언보호구역’에서 레니나는 ‘야만인’ 존

자유라는 거지요. 설사 불행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새비지(John Savage)를 알게 됩니다. 존은 그의 어머니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실행할 권리를 인간은 원한다.

린다가 20년 전 야만인 보호구역에 왔다가 머물러 살며

모든 전체주의 체제가 그렇듯 멋진 신세계에는 행복과

신세계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원시적인 방법”으로

안정을 강압적인 방법으로 실현함으로써 인간의 자유를

임신 출산해 그곳에서 자란 청년이지요. 때문에

박탈하는 문제가 있다.

수면학습법이나 전기충격요법보다는 독서, 정확히는 셰익스피어를 읽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셀로』,

그럼으로써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과학에 의한 욕망의 충족을 통해 이룩하려는 자유주의적


2-3. Research - 1984   & Brave New World

유토피아의 경우 설사 그 목적이 훌륭히 달성된다고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휴머니즘은 인간의 야만성을

하더라도 만일 그것이 강압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우리가

길들이는데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각종 미디어들이

꿈꾸는 유토피아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제공하는 “핏빛놀이로 가득 찬 오락산업”에도

일찍부터 유전공학에 관심을 두었던 윤리학자 한스

불구하고 셰익스피어는 계속 읽힐 것이라고, 그리고

요나스(H. Jonas, 1903 – 1993)는 1987년 출간된 그의

그 어떤 미래에도 인간공학은 유전자 선별과 사육에

‹기술, 의학, 윤리›에서 유전자를 선별하여 종의 개선을

의한 형질계획으로 밀고나가서는 안 된다고. 그것은

시도하려는 “적극적 우생학(Positive Eugenik)”에 대해

인간에게서 자기 자신의 길을 찾아가며,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놀라워할 수 있는 인간의 권리와 자유를 빼앗는 거라고!

“인간을 사육하려는 시도는 오만불손할 뿐 아니라,

이제 우리가 스스로 던진 질문에 대해 답해야 할

우매하고 무책임한 짓이다. 따라서 그러한 시도는 기껏

차례이다. 자기 스스로 선택하고 희망한 미래가 없는 곳,

웃음거리가 되거나, 잘못될 경우 큰 불행을 초래하게

자기 고유의 길을 찾아가며, 자기 자신에게 놀라워할

된다. (…) 오만한 기술의 광기어린 지식 때문에 인격적인

수 있는 권리와 자유가 없는 그곳에 살고 싶을까? 자,

사랑에 의한 선택을 포기해버리는, 행복한 무지에서

여러분이 한번 대답해보자. 참고로, 존 새비지는 소설의

비롯되는 이 무모한 행위는 가장 어리석고 용납될 수

마지막에서 자발적으로 신세계를 떠났다.

없는 범죄행위로서, 오늘과 내일의 세계는 반드시 그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요나스가 이렇듯 유전공학에 대해 반대하는 이유는 자유를 생명체의 본질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유전공학에 의한 선별과 사육, 특히 인간복제에 대해 반대하며 인간이 가진 “무지에 대한 권리(Recht

auf Unwissen)”를 주장한다. 인간은 자신의 미래에 80 대해 모를 권리를 자신의 자유로서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요나스는 이 권리는 전통 윤리학에서 한번도 다루어진 적이 없는 “새로운 윤리 이론”임을 강조하며 다음같이 말한다.

“현대 권력지평에서 본 도덕적 계명은, …무지에의 권리를 박탈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자기 고유의 길을 찾아가며, 자기 자신에게 놀라워할 수 있는 인간적 삶의 권리를 존중하라는 것이다.” 요나스가 말하는 바로 이 권리에 대해 『멋진 신세계』에서 총통은 마지막으로 존 새비지에게 장황하게 물은 것이고, 존은 오랫동안 생각한 다음 “네. 난 그 모든 권리를 원해요.”라고 대답한 것이다. 아마 존은 슬로터다이크의 물음, 곧 휴머니즘이 인간 길들이기의 학파로서 실패했다면 무엇이 인간을 길들이는가, 미래의 인간공학을 명백한 형질계획으로까지 밀고 나갈 것인가에 대해서도 81


Research Process – 1

“인간에게서 미래를 박탈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범죄행위로서 단 한번이라도 저질러져서는 안 된다.” 한스 요나스


2-3. Research - 1984   & Brave New World 1984와 멋진신세계 비교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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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cess – 1

Research

1984와 같은 디스토피아 소설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두 소설이 그리는 디스토피아가 현격하게 다르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닐 포스트먼에 따르면, 오웰이 그리는 디스토피아는 공포와 기만이 지배하는 세계이며, 올더스 헉슬리가 그리는 디스토피아는 욕망과 말초적인 자극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오웰이 책을 금지할 자들을 두려워했다면, 올더스 헉슬리는 아무도 책을 읽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굳이 책을 금지할 필요조차 없어질 것을 두려워했다고 할 수 있겠다. 오웰과 헉슬리의 관점을 1984와 멋진 신세계로 비교한 만화가 있다. 재미있고 짧으니 관심 있는 사람은 보도록 하자. 다만 이 만화는 옳고 그름에 대해 한쪽으로 치우쳐서 판단한 경향이 있다. 또, 미래를 얼마나 잘 예측했는지로 SF소설의 우위를 결정하는 시각은 곤란하다.

‘멋진 신세계’ 의 미래 예측이 ‘1984’의 예측보다 더 정확하다는 분석은 냉전이 종식된 90년대 말 – 21세기 이후 기준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양대 진영이 극단적인 대립을 벌이던 냉전 시기만 해도 ‘1984’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 역시 충분히 예언적이었다. 이는 결국, 소위 ‘이성의 시대’의 끝자락이던 1930년대에 쓰여진 ‘멋진 신세계’가 기술의 발전이 곧 인간의 행복에 기여하리라던 이전 시대의 믿음에 대해 의문을 던진 작품인 데 비해, 1949년에 쓰여진 ‘1984’는 당장 눈 앞에서 시작되고 있는 극단적인 적의와 광기, 감시의 시대를 고발하는 다큐멘터리적 특성 역시 가진 작품이라는 차이를 통해 접근할 문제이지, 한 작품이 다른 작품보다 더 우월하다고 볼 문제가 아니다.


2-4.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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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cess – 1

Research

밀레니얼세대, ‘디지털 네이티브’ 성향…모바일 통한 인터넷 이용 하루 4.4시간 밀레니얼 세대는 SNS 이용에서도 기존 세대와는 다른 성향을 보였다. 과거 싸이월드 시대의 SNS가 개인의 일상 관심사 공유, 지인과 친목을 다지는 네트워킹의 공간이었다면 최근에는 정보탐색, 지식 및 뉴스 등의 공유를 위한 공간으로 더욱 활발히 이용되고 있다고 트렌드픽은 전했다. 밀레니얼 세대의 48.2%는 하루에도 여러 번 SNS에 접속하며, 51.5%는

‘정보탐색 및 지식공유’를, 44.6%는 ‘개인의 일상/관심사 공유’를 그리고 39.9%는 ‘네트워킹’을 위해 SNS를 이용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밀레니얼 세대가 ‘나’를 중시하고 혼밥, 혼술과 같이

‘나의 행복’에 집중하기 위해 오프라인에서 자발적 혼자되기를 즐기지만 디지털 기기 사용에 능숙한 이들은 SNS를 통해 끊임없이 연결되어 정보를 교환하고 소통한다. 혼밥을 하면서도

1인 방송 중 먹방을 즐겨 보며, 직접 요리한 음식 사진을 SNS에 올린다. 혼자 먹고, 혼자 즐기고, 혼자 여행을 하지만 디지털 세상 속 페친님, 인친님들에게 지지를 갈망하는 것이 밀레니얼 세대의 또다른 디지털 네이티브 성향이다라고 트렌드픽은 전한다.

[정보화 사회의 ‘감시와 처벌’: (1)컴판옵티콘의 도래] 편리함 뒤에 가려진 감시의 그림자 - 원격 민주주의·편의성 추구 속 노출된 프라이버시… ‘알아서 가는’사회 온다 홍성태, 문화평론가, 미디어밸리 연구원 후기산업사회라 일컬어지고 있는 오늘날 감시의 체계는 컴퓨터 문명이라는 미명하에 더욱 공고화되어 가고 있다. 자신에 대한 정보가 모두 데이터베이스화 되어 있어 스크린상에서 마우스놀림 하나로 자신의 프라이버시는 침탈당하고 만다. 디지털 파놉티콘: 사용자가 만들어가는 감시사회 여기서 이야기하는 디지털 감시 시스템은 서울 강남 골목골목에 설치된 수많은 CCTV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과 내가 나누는 휴대전화 통화 내용을 그 누군가가 녹음하고 있거나 엿듣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삭제한 이메일마저도 그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어서 수사기관이 원한다면 모든 이메일이 압수대상으로 쉽게 전락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기 검색어 순위가 법적 근거없이 모 포털사업자에 의해 조정되고 있다는 개연성은 매우 높으나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는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다. 점차 대중화되고 있는 스마트폰이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 등 일렬의 서비스를 만나면서 새로운 디지털 감시세계가 알을 깨고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트위터, 페이스북, 유튜브 등 ‘인터넷 구름(Cloud)’의 구석구석에 올리고 공유하는 것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2-4. Article 스마트폰에 사로잡힌 포스트 밀레니얼 세대 | ㅍㅍㅅㅅ

“사람들을 직접 만나는 것보다 폰을 보는 데 쓴 시간이 더 많아요. 대개 침대에 누워서 폰을 하다 보니 침대에는 제가 누운 모양 그대로 자국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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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제가 올린 사진이 특별히 ‘좋아요’를 많이 못 받으면 어디가 문제였을까 자꾸 생각하게 돼요.” “저도 그러면 안 좋은 거 알죠. 그런데 멈출 수가 없어요.” “잘 때 폰을 가까이 두고 자면 어딘가 모를 편안함이 느껴져요.” 87


Process – 1

Research

한국에서의 감시사회 “일상화된 감시와 검열, 파놉티콘의 사회” 언론감시 시민단체 프리덤하우스가 발표하는 언론자유 지수에서 우리나라는 올해 196개국 가운데 70위를 차지했다. 우리나라는 부분적 자유국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평가를 받게 됐다. 프리덤하우스는 “최근 몇년간 온라인상에서 친북 또는 반정부 시각의 글이 삭제됐고, 정부가 대형 방송사의 경영에 개입해 왔다”면서 “검열과 함께 언론 매체의 뉴스와 정보 콘텐츠에 대한 정부 영향력의 개입이 확대된 데 따른 것”이라고 강등 사유를 밝힌 바 있다. 대한민국은 감시사회다. 일상적으로 검열이 이뤄지고 있으며 처벌이 뒤따른다. 정부 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도 많다. 주류 언론이 정치 · 자본 권력에 종속돼 있는 가운데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감시 장치가 상시 작동하고 있다. 헌법에 보장된 집회와 시위의 자유,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파업할 권리 등이 부정되는 경우도 흔하다. 정부의 여론 감시와 통제는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경우도 많은데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낙하산 인사로 방송을 장악하고 방통심의위를 앞세워 노골적으로 보도 통제를 해 왔다. 종합편성채널을 대거 허용하면서 신문 시장의 자본 종속도 더욱 가속화할 전망이다. 냉전 이데올로기의 유물인 국가보안법과 시대착오적인 선거법과 인터넷 실명제, 포괄적인 인터넷 심의 규제 등은 정치적 의사 표현을 가로막고 자유로운 여론 형성을 억압해 왔다. 감시사회, 파놉티콘 시스템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이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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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세대이자 밀레니얼 세대의 우리는 디지털을 이용하고 있는 것인가 디지털에게 이용당해지고 있는 것인가? 디지털로 변화된 새로운 시대의 선구자 라고 불리는 밀레니얼 세대이지만 정말 그 변화된 시대의 선구자가 맞을까? 그저 디지털 세대의 추종자가 되버린 것은 아닐까? 이런 고민에서 진정한 밀레니얼 세대의 주체가 되어보자고 우리는 결론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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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lan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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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cess – 2

Planning


1. Plan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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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cess – 2

Planning


1. Planning

가상의 세계, 우리는 파놉티콘이란것을 알아챔, 구조를 알고 인식/현실에 빗댄다. 디지털 기계들로 설계도를 만들고, (휴대폰 부품을 가져와서) 가상&현실, 단서를 하나씩 찾는다. 96

계몽, 디지털 파놉티콘 시대에 소음을 위한 환상교향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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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cess – 2

Planning

감시자는 있지만 알 수 없다, 그 감시자는 알고보니 우리였다. 환상교향곡 우리는 지금 파놉티콘 안에 있다. 전시+음악회 형태


1. Planning

1차 기획: 밀레니얼 파놉티콘(가제) 우리는 지금 파놉티콘 안에 있다. 소개 우리는 지금 디지털 파놉티콘 안에 있다. 2017년을 살아가고 있는 밀레니얼 세대, 우리는 독립된 주체로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정신은 디지털 파놉티콘 안에 갇힌 채 감시당하고 있다. 우리는 현실 속에서 파놉티콘 안에 있다는 단서를 찾고 설계도를 보여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우리가 지금 파놉티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시켜주기 위해 계몽운동을 시작한다.

내가 뚫고 들어가서 생각을 하나 심었지. 모든 것을 뒤바꿀 단순하고 작은 생각을 그녀의 세상이 진짜가 아니란 생각. 영화 인셉션 98

설명 파놉티콘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모두’를 뜻하는 ‘pan’과 ‘본다’를 뜻하는 ‘opticon’을 합성한 것으로 벤담이 소수의 감시자가 모든 수용자를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감시할 수 있는 형태의 감옥을 말한다. 우리는 밀레니얼 판옵티콘의 감시자인지 알았지만 죄수였다. 우리의 정신은 판옵티콘 안에 갇힌 채 감시당하고 있다. 판옵티콘 안에 있는 죄수들은 자신이 판옵티콘 안에 있는 지 모른다. 그 죄수들에게 의심을 가지게 해 판옵티콘을 함께 부시도록 한다. 계몽적인 성격의 기획으로 판옵티콘 안에 사람들에게 메세지를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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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cess – 2

Planning


1. Planning

❶ 어떻게? 디지털 파놉티콘 + 종말 + 교향곡 = 종말을 향한 디지털 교향곡

❷ 무슨 메세지? 계몽보다는 경고의 메세지, 일상생활에서 경각심을 가질 수 있는 환경 묵시록적 메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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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cess – 2

Planning


1. Planning

❸ 교향곡이라면 어떤식의 음악과 장비에 초점을 맞출것인지? – 교향곡(오케스트라) – 전자음악 – 교향곡 + 전자음악 ❹ ‘교향곡’에 대해 더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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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cess – 2

Planning


1. Plan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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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cess – 2

Planning


1. Plan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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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cess – 2

Planning

Symphony는 소리의 조화 혹은 성악 또는 기악곡 연주회를 뜻하는 그리스어 ‘쉼포니아(μ)’, 그리고 조화로운을 뜻하는 ‘쉼포노스(μ)’에서 나온 낱말

“함께 소리를 낸다”


1. Planning

인터넷이 선도하는 디지털 경제에 살고 있는 우리는 빠르게 진전되는 디지털 환경으로 인해 무감각해졌다. 이렇게 무감각해진 사람들에게 여러가지 감각과 공감각적 경험을 통해 경각심을 주고자 하였으며, 빠르게 또 많은 정보들을 접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복잡한 장치가 아닌 단순하게 경각심을 주고자 시각과 청각의 구성이 이 전시의 형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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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cess – 2

Planning

Apocalypse Symphony 디지털 파놉티콘으로 인한 지구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언하는 교향곡

파놉티콘 시대의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가지자는 최종적인 뜻을 내포하며 무감각 속에서 인류는 결국 종말을 향해 갈 것이라는 묵시록적 경고가 담겨있다. 전시에 초대된 사람들은 교향곡을 들을 수 있는 큐브 안으로 들어간다. 1 – 2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큐브 안에는 미리 준비된 텔레스크린이 설치되어 있다. 텔레스크린에서는 각 1,2,3,4악장의 연주가 시작된다. 우리는 시각, 청각을 동원한 공감각적 경험을 통해 보다 가까워진 종말을 체험할 수 있게 한다. 뿐만 아니라 아포칼립스 심포니를 경험하는 모든 과정이 작은 감시카메라를 통하여 녹화되고 있다. 그 과정을 통해 디지털 파놉티콘이 더 이상 하나의 퍼포먼스가 아닌 우리를 메우고 있는 현실임을 마주한다.


1. Plan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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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cess – 2

Plan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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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각적 경험

CCTV의 설치로 인한

간접적 경험

시각 악장마다의 메세지가 담긴 그래픽

Apocalypse Symphony

종말을 내포하는 소리

청각 1. Planning


Process – 2

Planning

❶ 교향곡(청각) “This is just a symphony” 라는 메시지를 반복하며 우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단순히 경고일 뿐을 암시한다.

❷ 웹(시각) 1 악장; ID number 2악장; Digital Coma 3악장; Big Brother 4악장; Singularity 전시공간은 총 4개의 악장으로 구성되고 각 악장은 하나하나 장면(scene)으로 펼쳐진다. 이러한 악장의 구성은 웹의 형태로 보인다.

Apocalypse Symphony의 웹은 정보의 공유, 개방형 플랫폼 구축, 집단지성 강화와 실행이 일상이 되어가는 21세기의 디지털 특징을 띈다. 이러한 메시지를 단순히 텍스트로서의 전달이 아닌 사용자가 악장을 클릭하며 하나의 장면(scene)을 선택할 수 있으며 보고 듣는 것으로 경각심을 주고자 여러 가지 감각 중 시각과 청각의 구성이 이 웹 형식의 구성의 토대가 되었다.

❸ 텔레스크린(큐브) 큐브는 1984의 나온 텔레스크린과 같은 역할을 한다. 1984의 텔레스크린은 1차적으로 감시카메라이며 좀 더 나아가 인공위성이나 서로의 정보를 얽어매는 핸드폰, 네트워크를 의미한다. 관념적으로 생각하면 주변의 시선, 사람들의 편견 또한 텔레스크린의 역할을 수행한다. 1984속에는 텔레스크린을 통해 메세지를 전달하고 지속적으로 감시를 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텔레스트린 큐브를 제작하였다. 텔레스크린 큐브는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에게 악장을 통해 메세지를 전달하며 그 안에서 또 감시당하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큐브는 1200*1200*2200 크기의 하나의 방과 같은 전시 공간으로

만들어져 있다. 큐브 안에는 모니터가 놓여져 있으며 모니터 안에서 4악장으로 구성된 심포니를 들을 수 있다. 이 공간은 악장으로부터 메세지 전달이 효과적으로 전달 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검은색으로 둘러쌓인 공간은 외부와는 독립되어 있는 느낌을 주며 나무로 만들어져 소리의 울림이 더욱 강하게 들린다. 또한 내부에는 cctv가 설치되어 사람들이 화면을 보고있는 모습이 외부에 화면에서 볼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장치 또한 영상의 메세지 뿐만 아니라 또 색다른 경각심을 주기 위한 장치로 설계되었다.


1. Planning

❹ 컨셉북 아포칼립스 심포니를 들으러 온 사람들을 위한 약간은 불친절한 설명서.

¶ Apocalyse Symphony ¶¶ 텔레스크린 ¶¶¶ 각 악장을 듣는 방법 ¶¶¶¶ 연주가 끝난 후에 이 순서로 아포칼립스 심포니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다. 이미지 위주의 설명서이지만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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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메인 메세지는 크게 들어간다. 설명서이자 예언서의 성격을 보이기에 A1(594 *841)사이즈의 큰 판형으로 보는 사람들이 위압감을 느낄 수 있도록 작업하였다. 마지막 장에서 ‘NOT THE END’ ‘WHAT IS YOUR CHOICE’ 라는 아포칼립스 심포니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너의 선택만이 남았다는 메세지를 던져주면서 전시를 관람한 관객들이

디지털 파놉티콘에 대해 다시 돌아볼 수 있는 여운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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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cess – 2

Planning




2. Work Process ❶ 교향곡(청각) “This is just a symphony” 라는 메시지를 반복하며 우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단순히 경고일 뿐을 암시한다.

BGM Philip Glass - 05 - Vessels 00:0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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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cess – 2

Work Process


2. Work Process

❷ 웹(시각) 1 악장 ID number 2악장 Digital Coma 3악장 Big Brother 4악장 Singularity 디지털 시대에 있어 인간을 가장 경제적이고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개인 식별 번호

인간을 통제하기 위한 권력의 지배는 신체의 고통을 가하는 방식으로 행해오다가 감옥과 같은 감금의 방식으로 바뀌어 왔다. 이런 형식의 변화 자체는 인간적 처우를 개선하겠다는 인식의 변화가 아닌 지배의 기술 자체가 근대화된 것이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산출하는 경제적인 통제 방법인 것이다. 그런 방법의 일환으로 ID와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개인 식별 번호는 큰 어려움 없이 개인들을 고유의 형식으로 지정을 하게 되어 그들이 사용하는 인터넷은 기본이며 위치, 개인 118

정보, 사생활까지 엿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 또한 개인들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가입이라는 행위를 통해 접근함으로 이성적인 접근마저 합리화를 시킬 수 있었다. 자발적 행위를 통해 우리는 디지털 시대에 접속을 하였고 스스로를 점점 디지털 코마 상태에 빠지게 하였다. 감시와 처벌 인간을 통제하기 위한 권력의 지배는 신체의 고통을 가하는 방식으로 행해오다가 감옥과 같은 감금의 방식으로 바뀌어 왔다. 이런 형식의 변화 자체는 인간적 처우를 개선하겠다는 인식의 변화가 아닌 지배의 기술 자체가 근대화된 것이다. 결국 인간에 대한 권력의 ‘부드러운’ 지배의 방법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산출하는 경제적인 통제 방법인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서 해석되는 것이 근대적 감옥의 ‘파놉티콘’이다. ‘파놉티콘’은 중앙의 감시자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모든 죄수를 감시하는 구조로 만들어진 원형 감옥이다. 감옥 안에서 이러한 감시자와 죄수들 사이의 관계는 감옥 밖의 사회에서 권력과 인간 사이의 관계와 동일한 구조를 갖는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온갖 시험의 장치 속에서 규제되고 기록되는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규율에 길들여지고 순응한다. 군대나 회사들도 규율과 통제의 장치 속에서 군인과 노동자들이 예속화되는 현상도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규율을 내면화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디지털 시대에 있어 큰 특징은 사람들이 스스로 감시 구조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점이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서비스라는 점을 내세워 사람들은 감시라는 점에 무의식한 상태로 서비스를 경험하고 이용한다고 생각한다. 디지털 시대에 있어 권력, 감시의 주체들은 더욱더 경제적이고 효율적으로 관리할 방법을 필요로 하는 점에 있어 사람들의 자발적 참여는 경제성과 효율성의 밑바탕이 된다.

소유의 종말 – 접속의 시대 또한 디지털 시대는 ‘소유’의 개념이 아닌 ‘접속’의 시대에 들어섰다. 빠르게 변화하고 혁신하는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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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 Process

시대에서 모든 것들이 ‘접속’이라는 형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감시의 주체들은 서비스나 다른 영역의 접속에 대한 권리를 내세우면서 사용자의 시간을 장악해간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서비스화함으로써 사용자들은 더욱 서비스에 길들여지게 되며 서비스에 대한 권리를

‘접속’이란 형태로 지속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시간의 차원이 훨씬 중요하다. 장소와 물건을 상품화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시간이나 식견에 접속할 권리를 확보하고 빌리는 형태를 띄게된다. 타인의 시간, 배려, 애정, 공감, 관심 등을 돈으로 매개를 하면서 서비스에 대한 감시를 스스로 받게되는 형태를 가지게 된다. 이렇게 디지털 시대에 있어 모든 것들이 경험 영역에 접속하는 데 바탕을 둔 체제로 변하게 되면서 소비 형태들 자체도 디지털 시대의 감시 구조의 적합하게 맞춰져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디지털 시대의 접속과 참여의 방식으로 ID와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개인 식별 번호가 사용이 된다. 사용자 스스로가 큰 어려움 없이 자신들을 고유의 형식으로 지정을 하게 되어 그들이 사용하는 인터넷은 기본이며 위치, 개인 정보, 사생활까지 엿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 또한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가입이라는 행위를 통해 접근, 접속함으로 이성적인 접근마저 합리화를 시킬 수 있었다.


2. Work Process

신체형은 하나의 기술이며 그것은 법이 없는 극도의 광폭 성과 동일시되어서는 안된다. 사형이 하나의 신체형인 것은, 사형이 단지 생존권의 박탈이 아니라 120

계산될 수 있는 고통의 점진적 증가의 기회와 종결이라는 점에서이다. 감시와 처벌 ― 미셸 푸코 충분한 빛과 감시자의 시선이, 결국 보호의 구실을 하던 어둠의 상태보다 훨씬 수월하게 상대를 포착할 수 있다. 가시성의 상태가 바로 함정인 것이다. 감시와 처벌 ― 미셸 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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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 Process

온갖 종류의 관계가 우리의 생활의 한가운데로 온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나는 접속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새로운 명제로 바뀌었다. 제레미 리프킨 ― 소유의 종말, 접속의 시대 경계선이 모호해지고 활동이 연결되는 네트워크와 상품화된 관계로 이루어진 이런 탈근대 세계에서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의식은 서서히 시대에 뒤진 것으로 낙인찍힌다. 그 자리를 대신 차지 하는 것은 무수히 연결된 관계망 안에 있는 하나의 접속점처럼 행동하는 새로운 개인이다. 제레미 리프킨 ― 소유의종말, 접속의 시대


2. Work Process

작업의도

스캔

1. 공중요격에서 지시된 구역을 수색하여 모든 접촉을 보고하는 것을 뜻하는 용어 2. 방사지향성 전파로 정기적으로 추적 조사하는 경로 1악장에 쓰인 스캔은 인간이 디지털화가 되어가는 과정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였다. 스캔을 통해 디지털 파놉티콘 세계에서 모든 추적과 접촉을 보고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휴대폰 속 메세지 ① 122

THIS IS JUST A SYMPHONY 심포니에서 말하고자 하는 묵시적인 메세지를 악장에 담아서 전달하고자 하였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휴대폰을 통해 디지털를 접하기에 휴대폰이라는 화면 안에 메세지를 띄어 메세지를 보라는 의미를 담았다. 스캔이 진행되면서 Typewriter Font(Analogue)에서 Pixel Font(Digital)로 전환이 된다. 이는 타자기가 키보드로 발전하면서 우리에게 편리함을 준 것을 표현하였다. 더 나아가 우리가 결국 디지털에 무감감해져버린 상황을 표현하였고 ‘디지털 사회’는 ‘우리에게 편리함을 줬지만, 그 안에서 우리의 모든 것은 감시된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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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 속 메세지 ②

YOU ARE JUST A BARCODE 결국 바코드와 같이 디지털화가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메세지. 일정한 규칙으로 제작된 알파벳 규칙으로 문장들의 위치와 빈 공간이 정해졌다. 문장의 알파벳 순서에 맞게 각 화면들이 재생된다. 개인정보 실제 제작자의 정보들을 담은 매체들(여권, 신분증, 사진, 통장, 보안카드 등)을 통해 인터넷을 통해 유출되는 정보들의 매체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하였다. 모든 정보들을 아무렇지 않게 인터넷 상에 남기고 그 정보들을 데이터화 하는 디지털 공간을 말하고자 하였다. 돈 사람들이 이렇게 바코드화 된 가장 큰 이유는 경제성이다. 그런 경제성에 대표되는 돈을 스캔하면서 사람이 사람으로서 취급받지 못하고 돈과 같은 목표로 바코드화 된 상황을 표현하였다.


2. Work Proc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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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Work Process

❷ 웹(시각) 1 악장 ID number 2악장 Digital Coma 3악장 Big Brother 4악장 Singularity 21세기의 디지털 파놉티콘 주민들은 서로 열심히 소통하고 자발적으로 자신들을 노출(전시)시키면서 자신들이 “자유롭다는 착각”속에 살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트위터, 페이스북, 유튜브등에 올리고 공유하는 것이 빠르게 퍼지고 있다. SNS가 발전하면서 개개인은 자신을 노출하기 바라며, 많은 사람으로부터 감시 당하기를, 누군가가 나의 포스팅을 보고 나의 작은 삶 일부분까지도 관심 가져주기를 128

바란다. ‘좋아요’를 받기 위하여 사람들은 더욱 자극적이며 많은 사람의 공감과 부러움을 받을 수 있는 콘텐츠를 찾아 헤매고 업데이트한다. 이런 과정에서 ‘좋아요’를 받기 위한 삶이 정말 개인의 삶이 되어버린다. 개개인의 사유보다는 많은 이들의 공감, 대중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현상이 발생한다. 디지털 파놉티콘은 자발적인 자기 조명과 자기 노출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사람들은 자발적인 노출을 통해 자신의 내면, 비밀, 낯섦, 이질성을 없앤다. 우리는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을 통해 자유로운 의사를 개진하면서도 그 내용이 공유되고 개방된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인지한 채 우리는 글을 쓴다. 그러면서도 멈추지 못한다. 이러한 우리의 모든 행위는 빅데이터에 의해 낱낱이 기록되고 정리된다. 그러나 우리는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게 더 편리하기 때문이다. 자발적으로 선택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디지털 사회에서의 주체성 상실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조차 깨닫기 어렵다.

바로 이렇게 우리는 디지털 코마 상태에 빠지게 되고, 우리의 자발적 행위를 통해 빅 브라더(Big Brother)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전시사회

SNS가 발전하면서 개개인은 자신을 노출하기 바라며, 많은 사람 으로부터 감시당하기를, 누군가가 나의 포스팅을 보고 나의 작은 삶 일부분까지도 관심 가져주기를 바란다. ‘좋아요’를 받기 위하여 사람들은 더욱 자극적이며 많은 사람의 공감과 부러움을 받을 수 있는 콘텐츠를 찾아 헤매고 업데이트한다.

오늘날 세계 전체가 하나의 파놉티콘으로 발전한다. 파놉티콘의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의 공간을 자처하는 구글과 소셜 네트워크는 파놉티콘적 형태를 취해간다. 오늘날 감시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에 대한 공격’이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 스스로 자발적으로 파놉티콘적 시선에 자기를 내맡긴다. 사람들은 자기를 노출하고 전시함으로써 열렬히 디지털 파놉티콘 건설에 동참한다. 자유는 곧 통제가 된다. 전시되는 사회에서는 모든 주체가 스스로 광고의 대상으로 삼는다. 모든 것이 전시가치로 측정된다. 전시되는 사회는 포르노적 사회이다. 모든 것이 겉으로 나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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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 Process

벗겨지고, 노출된다. 과도한 전시의 결과로 모든 것이 “어떤 비밀도 없이 즉각적인 소비에 내맡겨진” 상품으로 전락한다. 자본주의 경제는 모든 것을 전시의 강제 아래 복속시킨다. 오직 전시적 연출만이 가치를 생성한다. 사물의 고유한 형태는 폐기된다. 사물들은 어둠 속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과도한 조명 속으로 사라진다. 투명사회, 한병철 투명사회 한병철은 긍정의 과잉으로 인해 모든 부정성이 사라지고, 깔끔하게 다듬어질 때, 그리하여 통제할 수 있는 과정에 종속될 때, 혹은 사물의 개별성이 사라지고 가치가 가격표로 전락할 때 투명성을 사회 곳곳에 스며들게 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획일화된 사회를 표현하고자

‘투명’이라는 단어를 가져왔다. 투명이란 개념은 보드리야르부터 시작된다. 보드리야르는 ‹악의 투명성›, ‹무관심의 절정›, ‹사라짐에 대해서›이란 저서에서 투명성을 경고한다. 그는 투명성의 대안으로 레비나스의 얼굴 철학을 언급했다. 타자의 초월성이 현현되는 얼굴의 제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보고 투명성의 반대 현상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제의적 가치를 지닌 인간의 얼굴이 전시 가치로 전락했을 때 상품 형태를 취한 얼굴로 전락했을 때 그 얼굴은 투명해진다고 말한다. 이때 투명해진 얼굴이란 얼굴의 가치가 은폐되어 전시 가치로서만 작용하는 얼굴을 말한다. 포토샵이나 미적 기술로 더욱 아름답게 표현되는 얼굴은 레비나스가 생각했던 얼굴보다 투명하다.

SNS의 발전으로 인하여 사회가 점점 투명해지고(여기서 말하는 투명은 개인의 사생활에 블라인드가 전혀 없이 마치 유리 속을 보는 것처럼 쉽게 개인정보를 접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개인의 사생활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지는 것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문제들과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당연시하며, 스스로 거리낌 없이 노출하는 행위들이 과연 옳은 것인가? 자발적인 노출을 통해 자신의 내면, 비밀, 낯섦, 이질성을 없앤 우리는 자발적으로 선택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디지털 사회에서의 주체성 상실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조차 깨닫기 어렵다. 스스로 내면이 강한 페터 한트케는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 나는 그것으로 살아간다.’ 라고 했다. 주체성이 상실된 이 사회에서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주체성에 대해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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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들은 어둠 속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과도한 조명 속으로 사라진다. 138

한병철 일반적으로 볼 때, 가시적인 사물들은 어둠이나 침묵 속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가시적인 것보다 더 가시적인 것, 즉 외설적인 것 속에 휘발되어버린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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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m dem, was die anderen nicht von mir wissen, lebe ich.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 나는 그것으로 살아간다. 페터 한트케(Peter Hand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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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의도

SNS가 발전하면서 개개인은 자신을 노출하기 바라며, 많은 사람으로부터 감시당하기를, 누군가가 나의 포스팅을 보고 나의 작은 삶 일부분까지도 관심 가져주기를 바란다. ‘좋아요’를 받기 위하여 사람들은 더욱 자극적이며 많은 사람의 공감과 부러움을 받을 수 있는 콘텐츠를 140

찾아 헤매고 업데이트한다.

2악장은 SNS에 포스팅하는 일상사진들로 가득찬 공간으로 시작한다. 이는 [21세기의 디지털 파놉티콘 주민들은 서로 열심히 소통하고 자발적으로 자신들을 노출(전시)시키면서 자신들이 “자유롭다는 착각”속에 살고 있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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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악장은 3가지의 문구를 바탕으로 진행된다. 사물들은 어둠 속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과도한 조명 속으로 사라진다.

한병철 일반적으로 볼 때, 가시적인 사물들은 어둠이나 침묵 속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가시적인 것보다 더 가시적인 것, 즉 외설적인 것 속에 휘발되어버린다.

장 보드리야르 Jean Baudrillard

vom dem, was die anderen nicht von mir wissen, lebe ich.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 나는 그것으로 살아간다.

페터 한트케 Peter Handke 디지털 파놉티콘 사회에서 자발적인 노출을 통해 자신의 내면, 비밀, 낯섦, 이질성을 없앤 우리는 자발적으로 선택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디지털 사회에서의 주체성 상실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조차 깨닫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에 ‘다른사람들이 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 나는 그것으로 살아간다.’ 라는 문구와 함께 주체성이 상실된 이 사회에서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주체성에 대해 고민해봐야 할 것이라는 메세지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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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Work Process

❷ 웹(시각) 1 악장 ID number 2악장 Digital Coma 3악장 Big Brother 4악장 Singul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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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도 빅 브라더! (DOWN WITH BIG BROTHER)

빅 브라더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 나오는 가공의 인물로, 전체주의 국가 오세아니아를 통치하는 정체 모를 수수께끼의 독재자다. 또한 빅 브라더는 텔레스크린이나 도청장치를 써 대중에게 이데올로기를 강요한다. 거대화한 독재권력이 도달하는 마지막 모습이라 할 수 있다.

21세기가 되면서 공산주의는 몰락하고 전체주의 성향을 띠던 나라들은 민주주의 성향을 띠며 특수한 몇 개의 나라를 제외하고는 “한 명의 빅브라더”는 사라졌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로 돌입하면서 구체적 형상의 빅브라더가 아닌 모호한 형상의 빅브라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로 ‘구글’, ‘페이스북’, ‘애플’, ‘아마존 같은 기업이다. 현대의 정보 독점으로 사회를 통제하는 관리 권력, 또는 이런 사회체계를 비유하는 단어로 자주 언급된다. 텔레스크린을 통해 사회 곳곳을 끊임없이 감시한다는 소설 내용이 현실화되었다. 우리는 무감각한 상태에서 감시당한다. 다양한 거대 인터넷 플랫폼은 겉보기에 사회를 돌보는 보호적 감시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사회를 옥죄고 감시하는 강력한 수단으로 활용한다. 중요한 것은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세상을 거부할 수 없다는 점이다. 개인도, 기업도, 국가도 다가오는 소름끼치는 빅 브라더의 세상에서 살아남는 생존법을 고민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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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대의 고민으로 3악장은 연주를 시작한다. 소설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의 외침에서 시작된다. 2017년 밀레니얼 시대는 윈스턴이 외치는 문장을 반영하며, 현재 시대의 문제점을 보여준다.

0세기 이전까지 이른바 ‘빅 브라더’로 상징되었던 감시의 중앙 집권화가 주변으로 확대되어, 중앙의 감시 능력을 주변에서 나누어 가지면서 더 일반적이고 보편적으로 감시가 이루어지고 있다. 말하자면, 예전에는 감시 기능을 국가 기관에서 일괄 관리했다면, 이제는 시민 누구나 감시자가 되어, 감시자와 피 감시자의 경계가 모호해졌다는 말이다. 물론 이런 변화가 중앙의 감시 능력이 약화했다는 걸 의미하는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일반 시민들까지 감시 행위에 ‘동원’되는 측면이 크다. 시대가 변화하면서 빅 브라더의 성격도 바뀌어 갔다. 단순한 통치의 시대에서 우리의 시대는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획일적인 시대는 아직도 실재하고 있는 북한과 같은 한 명의 통치자로 국가가 운영되는 시대이다, 이러한 전체주의 사상은 개인주의, 좀 더 넓게는 자유주의 등과 반대되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였다. 아돌프 히틀러 휘하의 나치 독일의 나치즘과 이오시프 스탈린 치하의 소련의 스탈린주의 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사상은 소설 속의 문장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빅 브라더의 시대는 앞에서의 설명과 같이 정부의 감시 카메라 설치나 개인 정보 사용 관련 등과 같은 현재 시대의 “빅브라더”와 연결되는 부분이다. 이러한 시대의 대표적인 예로 “국정원 댓글”사건이다. 2009년부터 2012년 대선 때까지 당시 정부가 대선 승리 등을 목적으로 국가정보원과 사이버사령부를 이용하여 주도적, 조직적으로 여론을 조작한 사건인데, 국가 주도로 조작하며 여론을 조작하며 선동한 모습은 1984의 전체주의 국가, 빅브라더를 떠오르게 한다. 마지막 문장 이중 사고의 시대는 3악장에선 의도적으로 말을 바꾸어 앞에서 나온 전체적인 문제를 포괄하는 “디지털 파놉티콘”의 시대로 보여준다. 시대를 파놉티콘 시대의 문제로 보여주며 전체적인 문제를 포괄한다. 마지막에 외치는 “축복이 있기를”이라는 문장은 시대에 대한 고민과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관객들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있는 디지털 파놉티콘 시대에서 빅 브라더를 타도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우리는 어떤 시대로 나아가고 있는가. 우리에게 남은시대는 단 한 걸음만이 남았다. 우리는 특이점의 시대를 맞아들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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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Work Process

To the future or to the past, to a time 148

when thought is free, when men are different from one another and do not live alone ―  to a time when truth exists and what is done cannot be undone From the age of uniformity, from the age of solitude, from the age of Big Brother, from the age of digital Panopticon ―  greetings! George Orwell ―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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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향해, 과거를 향해, 사고가 자유롭고 저마다의 개성이 다를 수 있으며 혼자 고독하게 살지 않는 시대를 향해, 진실이 존재하고 일단 이루어진 것은 없어질 수 없는 시대를 향해.획일적인 시대로부터, 고독의 시대로부터, 빅 브라더의 시대로부터, 이중사고의 시대로부터 ― 축 복이 있기를! 조지오웰 ―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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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Work Process

작업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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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악장의 전체적인 배경은 소설1984의 “빅 브라더”의 관한 내용이다. 앞에서 언급된 1984의 소설의 배경 빅 브라더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 나오는 가공의 인물로, 전체주의 국가 오세아니아를 통치하는 정체 모를 수수께끼의 독재자다. 소설상에서는 구체적인 인물상이 나오기보다는 절대권력으로 인민들이 끊임없이 탄압, 감시받는 전체주의 체제의 아이콘으로 묘사한다. 또한 빅 브라더는 텔레스크린이나 도청장치를 써 대중에게 이데올로기를 강요한다. 거대화한 독재권력이 도달하는 마지막 모습이라 할 수 있다. 21세기가 되면서 공산주의는 몰락하고 전체주의 성향을 띠던 나라들은 민주주의 성향을 띠며 특수한 몇 개의 나라를 제외하고는 “한 명의 빅브라더”는 사라졌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로 돌입하면서 구체적 형상의 빅브라더가 아닌 모호한 형상의 빅브라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흔히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1984의 모습은 우리가 살고있는 밀레니얼 시대 21세기와 닮아있다고 말이다. 우리는 “뉴 빅브라더”시대에 살고있다. 특히 현재 대한민국은 감시사회다. 일상적으로 검열이 이뤄지고 있으며 처벌이 뒤따른다. 정부 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도 많다. 주류 언론이 정치 · 자본 권력에 종속돼 있는 가운데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감시 장치가 상시 작동하고 있다. 헌법에 보장된 집회와 시위의 자유,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파업할 권리 등이 부정되는 경우도 흔하다. 정부의 여론 감시와 통제는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경우도 많은데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우리가 이걸 타파할 방법은 무엇인가.

3악장에선 답을 주지 않는다. 단순히 시대의 변화에 대해서 애기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단편적으로 보여줄뿐이다. 그리고 디스토피아적 시대에서 축복을 바랄뿐이다. 악장이 끝난후 특이점을 맞이하기전 스스로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어떠한 시대에 살고있는가?” bgm_seo tai ji 8th Atom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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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악장 ID number 2악장 Digital Coma 3악장 Big Brother 4악장 Singularity 세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파놉티콘이 된 지금, 무엇이 우리를 멈출 수 없게 만들었는가.

시간이 지날수록 디지털 파놉티콘은 더 커지고 더 치밀해지고 있다. 2017년 우리는 “세계 전체가 하나의 파놉티콘”이 된 세상에 살고 있다. 디지털 파놉티콘에서의 감시는 ‘자유에 대한 공격’이라는 형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정보를 노출하고 과시한다. 그럼으로써 디지털 파놉티콘의 건설에 자발적으로 동참한다. 스코트와 아이라는 이런 상태를 ‘퍼블리커시(publicacy)’라고 불렀다. 퍼블리커시 상태에서 자유는 곧 통제 된다. 통제권을 쥔 주체는 구글이다.

“세계 전체가 하나의 파놉티콘”이 된 세상이 위험한 또 다른 이유는 그 위험성을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는 데 있다. 2악장에서 이야기하듯이 디지털 파놉티콘은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벽”이 없다. 이는 곧 시스템의 내부에 문제를 제기할 어떤 외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구글이 만든 규칙이 비판 없이 사회에 통용될 것이다. 그리하여 현대의 자유주의 체제 하 권력은 매우 스마트해졌다. “나한테 강요하는 권력이 아니라 유혹하는 권력이다.” 내가 스스로 무언가를 하게끔 유혹하는 권력, 내가 물건을 사고

내가 알아서 '좋아요' 버튼을 누르도록 지배되는 상태. 즉 우리는 하고 싶은 걸 하는 상태에서 지배받는다. 지금도 당신은 유혹하는 권력에 의해 아포칼립스 심포니를 감상하고 이 글을

읽고 있는 것이다. 이 보이지 않는 권력은 매우 효율적이다. 권력이 없는 게 아니다. 권력이 보이지 않아야 지배하는 것이 용이해지기 때문에, 권력이 유혹으로 바뀐다. 스스로 자유롭다고 느끼며 자기착취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게끔 하는 것이야말로 효율성이 극대화된 지배다. 미국의 개념미술가 제니 홀저는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달라”라는 메시지를 전한 바 있다. 산업시대 인간의 활동은 배기가스를 남겼다. 디지털시대 인간의 흔적은 데이터를 남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우리는 매 순간, 어디서나 데이터를 남긴다. 모든 것이 기록되고 영구히 저장된다. 지금도 이 순간에도 모든 것이 기록되고 영구히 저장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데이터를 누가 어떻게 수집하고 이용하는지 모르고, 그 데이터를 삭제할 권한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2017년의 우리는 여전히 더 크고 더 치밀한 디지털 파놉티콘을 향해 자발적으로 걸어가고 있다. 특이점은 서서히 다가오지 않는다. 특이점의 시대가 언제 시작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절대 멈출 수 없을 것이며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갈 것이다. 이 선 위에서 걷고 있는 한

우리는 반드시 그 선을 넘어가는 블랙홀의 중심, 사건의 지평선에 서게 될 것이다. 지평선에 선 순간 우리는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다. 무엇이 우리의 두 눈을 가려버린 것일까. 많은 것들을 보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도 볼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무엇이 우리를 멈출 수 없게 만들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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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여러분의 기대가 충족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호기심은 만족스럽게 채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어떠한 불꽃도 우리로부터 여러분에게 전달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긴장 때문에 그럴 여유도 없을 것입니다. 이 화면이 바로 세상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이 화면은 단지 교향곡일뿐입니다. 이 화면은 우리가 그 위에 서는 것을 도와줍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세계입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울타리 밖 구경꾼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주제입니다. 여러분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우리 언어의 중심입니다. 관객모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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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아직 들어 본 적 없는 것은 여기서도 듣지 못할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직 본 적 없는 것은 여기서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곳 파놉티콘에 오면 늘 보았던 것을 여기서는 전혀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곳 음악회에 오면 늘 들었던 것을 여기서는 전혀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관객모독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요한계시록 22장 13절 운명은 이와 같이 문을 두드린다. 쉰들러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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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의도

싱귤래러티, 특이점이란 현재 인간이 알고 있는 물리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지점. 즉, 특이점이란 미래학에서 문명의 미래 발전에 가상 지점을 뜻하는 용어로서, 미래에 기술 변화의 속도가 급속히 변함으로써 그 영향이 넓어져 인간의 생활이 되돌릴 수 없도록 변화되는 기점을 뜻한다. 미래연구에 있어서 인류의 기술 개발 역사로부터 추측하여 얻을 수 있는 미래 모델의 정확하고도 신뢰할 수 있는 한계인 사상의 지평선을 가리킨다.

4악장은 요한계시록 22장 13절에 나오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라는 메세지로 시작한다. 그리스 문자의 최초의 문자 (알파)와 마지막 문자

Ω(오메가)를 늘어놓아 최초와 최후, 즉 “모두” “영원”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즉, 지금 우리의 최초와 최후가 되어버린 디지털 파놉티콘을 암시한다.

디지털 세계에서 특이점이란 모든 것이 적용되지 않는 지점에서 필요한 것은 오류 메세지라고 생각했다. 오류 메세지는 예측하지 못한 조건이 일어날 때 보여 주는 메세지로, 일반적으로 컴퓨터나 기타 장치에서 나타난다. 오류 메세지에 나오는 메세지는 페터 한트케의

‹관객모독› 중 일부를 가져와 수정하였다. 블루스크린 메세지

여러분이 아직 들어 본 적 없는 것은 여기서도 듣지 못할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직 본 적 없는 것은 여기서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곳 파놉티콘에 오면 늘 보았던 것을 여기서는 전혀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곳 파놉티콘에 오면 늘 들었던 것을 여기서는 전혀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여러분의 기대가 충족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호기심은 만족스럽게 채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어떠한 불꽃도 우리로부터 여러분에게 전달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긴장 때문에 그럴 여유도 없을 것입니다. 이 화면이 바로 세상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이 화면은 파놉티콘에 속합니다. 이 화면은 우리가 그 위에 서는 것을 도와줍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세계입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울타리 밖 구경꾼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주제입니다. 여러분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우리 언어의 중심입니다. 아무것도 여러분을 속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흔들리는 벽을 전혀 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자물쇠가 잠기는 소리도 듣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소파가 삐꺽거리는 소리도 듣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현상도 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환영도 보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형태도 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암시도 들을 수 없습니다. 이 오류 메세지는 이미 무감각해진 관객들을 기만하면서 불친절하게 메세지를 전달한다. ‹여러분은 어떤 숨겨진 모습도 볼 수 없습니다.› 라는 메세지를 반복적으로 전달하는 화면과는 다르게 영상의 음성은 ‹Do you see the panopticon?›이라는 메세지를 보내면서 시각과 청각의 메세지가 충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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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와 오메가 Α,Ω 전거 신약 성서의 요한의 묵시록 (1:8, 21:6, 22:13)에, 주의 말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다”(코이네 그리스어:ω; 영어: I am the Alpha and the Omega)로서 나타난다.

요한계시록 22장 13절 :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그리스 문자의 최초의 문자 Α(알파)와 마지막 문자 Ω(오메가)를 늘어놓아 최초와 최후, 즉 “모두” “영원”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오류메세지 오류 메시지는 예측하지 못한 조건이 일어날 때 보여 주는 메시지로, 일반적으로 컴퓨터나 기타 장치에서 나타난다. 오류 메시지는 가끔 대화 상자를 사용하여 표시한다. 오류 메시지는 사용자 중재가 필요할 때 사용하는데 이는 원하는 동작이 실패했거나 하드 디스크 공간 부족과 같은 매우 중요한 경고를 제공함을 가리킨다. 오류 메시지는 컴퓨터 환경 가운데에서 보편적이며 모든 운영 체제나 컴퓨터 하드웨어 장치의 일부가 되어 있다. 오류 메시지를 알맞게 설계하는 것은 사용성과 인간과 컴퓨터 상호 작용의 다른 분야들에 중대한 화제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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❸ 텔레스크린(큐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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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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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pilogue

1월달에 함께 프로젝트를 한다고 모였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끝이 났다. ‘안파로’(늘

이혜윤

배우는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만나 ‘달과 6펜스’(현실과

공유하며 그래픽 작업을 해보자는 뜻으로 모였던 우리는

이상)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함께 타이포그라피도

그때 지었던 ‘달과 6펜스’라는 이름으로 졸업전시까지

공부하고 취향을 공유하면서 그래픽 작업을 해오다가

함께 하게 되었다.

권수진

졸업전시까지 이렇게 함께 하게 되었다. 처음 사회적 광학이라는 주제를 받았을 때는 어떤 주제로 해야지 4명이 모두 재미있고 멋있고 의미

함께 프로젝트를 한다고 모였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1개월이란 기간이 흘렀다. 서로의 취향을

처음 주제를 잡을 때 우리의 공통관심사, 마지막까지 즐겁고 멋있게 작업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한 고민들로 어려움이 있었다. 여러가지 주제 중에

있는 작업을 할 수 있을까 많이 고민했었다. 우리가

모두 관심이 있었던 주제는 우리 모두가 해당되는

공통적으로 관심 있는 주제는 우리 모두 해당하는

‘밀레니얼 세대’였다. 밀레니얼 세대라는 큰 주제

‘밀레니얼 세대’가 겪고 있는 문제들이라는 결론을

안에서 우리는 무심코 매일 겪고 있지만 잘 인지하지

내리게 되었고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못하고 있는 ‘디지털 파놉티콘’를 소주제로 삼았다.

문제를 생각해보았다. 학생의 신분으로서 하는 마지막

디지털 파놉티콘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은 과거,

프로젝트이기에 더 욕심나고 잘 해내고 싶었다. 그래서

현재 그리고 미래 모두에 해당하는 사회적 문제라고

우리는 수많은 발산과 수렴의 과정을 통해 주제를

생각했다. 하지만 리서치를 하던 중에 디지털

정하고 주제를 확장해나갔다. 그중 우리는 우리가 매일

파놉티콘이란 주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뤘던

겪고 있지만 인지하지 못하는 ‘디지털 파놉티콘’ 을

주제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 다른

프로젝트의 주제로 삼았다. 우리가 많이 경험하고 있는

시각으로 바라보기 위해 수많은 리서치와 회의를 통해

만큼 ‘파놉티콘’이라는 주제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

‹아포칼립스 심포니›라는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되었다.

다루어졌던 주제였다. 우리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파놉티콘’을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모두 다뤄보지 않은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작업하였다. 누군가의 강요가

바라보고자 ‹아포칼립스 심포니›가 나오게 되었다.

아니라 우리 스스로 주저하지 않고 공부하며 영상, 음악,

사실 ‹아포칼립스 심포니›가 나오게 된 이런저런

웹 등을 작업했기 때문에 그 과정이 즐겁고, 결과물을

이유가 있지만, 우리가 제일 하고 싶어서 했다. 하고

봤을 때도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싶은 프로젝트를 하다 보니 하는 과정 내내 재미있었고

물론 우리 모두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하면서 지치고

팀으로 하다 보니 누군가 지칠 땐 누군가가 힘을 내주고

힘들었지만, 그 과정에 항상 함께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 그 누군가가 지치면 그 다른 사람이 힘을 내주어서

의견 충돌로 서로 마음이 상하기도 했을텐데, 누구

순탄하게 성공적으로 흘러올 수 있었다. 혼자였다면

하나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서로 맞춰가며 노력한

절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함께 해준 팀원들에게 너무

팀원들의 모습이 멋있었고, 그런 팀원들에게 고맙다.

고맙다. 실제 전시를 며칠 앞두고 후기를 쓰고 있는 지금 달과 6펜스와 함께했던 수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후기를 쓰다보니 그동안 달과 6펜스와 함께 한 수많은 일들로 아련해진다.. 달과 6펜스 ing....!!

스쳐 지나간다. 졸전이 끝나고 졸업을 하고 나면 각자 서로 다른 곳으로 흩어지겠지만 달과 6펜스는

장영진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빨리 전시장에서 감동스러운

감사하다. 1월부터 시작된 우리 팀이 우연히 시각

일단 함께하게 된 달과 6펜스 팀원들에게

‹아포칼립스 심포니›를 보고 싶다.

프로젝트도 팀으로 되어 즐겁게 작업할 수 있었다, 주제를 선정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처음엔 많은


Epilogue

달과 육펜스

의견이 나왔고 어떤 주제는 흥미롭기도 하고 정말

조태연

관심이 안 가는 주제들도 있었다. 사회적 문제를

말들 하지만 이번 팀 작업만큼은 정말 돌이켜봐도

주제로 하다 보니 팀원들의 특성상 무거운 주제들이

정말 길고 긴 여정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막바지에

후보로 나왔고 이걸 시각적으로 풀어내는 데에도 고민이

다다라 그렇게 후기까지 작성하려 하니 그동안 잘해준

많았다.

내 자신과 팀원들에게 고맙다. 물론 막바지라고 해서

파놉티콘이란 주제는 특별한 주제는 아니라고

정말 돌이켜보면 시간이 금방 간다고 보통

아직도 할게 많이 남아 있지만 그런데도 마지막을 향해

생각한다. 다른 졸업전시를 볼 때 흔하게 하나쯤은

달려간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우리 팀 4명이 어떻게

있을법한 주제였다. 워딩 자체도 멋있고, 그 안에서 풀 수

보면 참 다르기도 다르고 닮기도 닮았다. 주제 선정부터

있는 자료나 시각요소도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점이

정말 많은 회의와 이견조율이 있었고 작업 하나하나

매우 고민됐다. 어떻게 하면 더 새롭게 풀어낼 수 있을까

진행하는 것에 있어서도 빠르게 진전되기보다는

고민했고 그 고민의 답은 “종말”과”교향곡”이라는

차근차근 하나씩 진행해 나간 것 같다. 그러기에 더욱

키워드였다. 메시지는 종말로 가되, 교향곡이란 키워드를

자주 만나고 더 많이 해보고 더 많이 생각한 작업이고

적용해 1–4악장까지 원하는 메시지를 제작했다.

그렇기에 더욱 값지게 생각한다.

평소에 한 번도 영상 도구를 써보지 않다가

친했던 4명이 작업을 했기에 분명 장단점이

갑자기 모든 팀원이 영상 도구를 썼고 처음부터

있었지만 그래도 서로에게 많은 시너지를 주었다고

배워야 했다. 음악도 새로 제작해야 했고, 평소에

생각한다. 그래서 좋은 결과물도 나왔다고 생각이 든다.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접근 방식을 졸전 앞두고 하려니

작업 후기라고 하기에 작업물이나 과정에

다 밤을 새워가며 열심히 제작했고 그 영상을

관해 써야 하나 생각해 보았는데 그건 이미 우리의

제대로 된 큐브 안에서 틀었을 때는 큰 쾌감을

결과물이나 프로세스 앞단에 상세히 나와 있다고

느꼈다. 평소의 작업 방식과는 매우 달랐지만 다른

생각이 들어 우리 팀원들에 대한 얘기를 더 하고 싶었다.

방식의 접근 때문에 오히려 더 신선하고 재밌는

완벽한 팀이 아닐 수는 있지만 아니 완벽한 팀은

작업물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또한, 평소에 하고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 서로들 노력하고 맞춰가고 했던

싶었던 다른 접근 방법이어서 신선하면서 흥미롭기도

모습들이 작업물보다 더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물론 내가

했다. 연구부터 시작한 우리는 많은 글을 읽어보고

팀에서 말 한마디 따뜻하게 못 하고 분위기를 차갑게

나무도 직접 사서 2m가 넘는 큐브를 제작하고

만드는 주범이었지만 이 기회로 삼아 팀원들에게 정말

칠했다. 이러한 과정은 학교를 떠나서는 다시는 못해

고마웠다는 말과 더불어 팀을 해줘서 또 고맙다는 말을

볼 경험이었다 팀원이 이렇게 열정적인 경우는 드문

남기고 싶다. 매우 오글거리지만 이런 기회로 삼아 다들

기회라고 생각한다. 의견을 피력할 때는 근거없는 의견

인.간.적.으로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다.

제시가 아니어서 소통에 더 원활했다. 이런 작업이 졸전에서 끝나는 게 아닌 더 다른 작업까지 함께 이어지길 고대한다. 그러면 달과 6펜스는 디자인에 대한 현실과 이상을 계속해서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The moon and sixpence-Greeting! 영진 191



달과 6펜스는 “디자인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자신들에게 던졌고, “디자인을 통해 철학을 할

수도 있으며, 세계를 보는 방식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사회적 디자인 라는 이념으로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12월 5일, 프로젝트가 끝이 나겠지만 달과 6펜스는 끝나지 않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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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oon and sixpence―Gree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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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향신문]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이지영 자음과모음 논술연구소 연구원 2007.11.27 우리는 “인터넷 감시사회”로 가고 있는가?: 열린 네트워크와 닫힌 사회 송경재 (경희대 인류사회재건연구원 학술연구교수)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를 통해서 본 ‘인간공학’의 의미 김용규 오웰의 1984년 을 통해서 본 ‘사회공학’의 의미 김용규

[세상 읽기] ‘감시사회’에서 살아남는 길 김창엽 디지털 감시시대의 ‘불편한 진실’-머니투데이 뉴스 감시와 처벌, 미셀푸코 투명사회, 한병철

http://www.huffingtonpost.kr/jonghoon-choi/story_b_5980912.html http://weekly.pusan.ac.kr/news/articleView.html?idxno=4224 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593973.html http://act.jinbo.net/wp/8121/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33006.html#csidxe5ec65471b909e0a1e74ddf336360d3 http://news.mt.co.kr/mtview.php?no=2014110309152934082&outlink=1&ref=https%3A%2F%2Fwww. google.co.kr https://goo.gl/vqDrNN https://goo.gl/VjV3Wt https://goo.gl/A5LsaM https://goo.gl/GBMN96 https://goo.gl/2wCZ7q https://goo.gl/sZNJgG https://goo.gl/A5LsaM https://goo.gl/1EBwNX



Apocalypse Symphony Process Book

초판

1쇄 인쇄 2017년 10월 22일 발행

2017년 11월 25일

지도교수 김나무

편집 이혜윤

디자인 이혜윤

이메일

hyeyun7299@gmail.com 인쇄 인덱스 Index 02-2264-4644

용지 표지 · 두성종이 크로마룩스 215g/㎡ 내지 · 두성종이 탑코트매트 82g/㎡

조판

Adobe InDesign CC 2015(11.3.0.34) 한국어판

© 2017, Kwon Su-Zin, Lee Hye-Yun, Jang Yong-Jin, Cho Tae-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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