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과 해방세대의 회억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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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주제

해방정국 전남지방 학생운동 좌우갈등 -전국학생총연맹 전남도연맹의 결성 임 선 화(광주교육대 강사)

1. 머리말

3. 전국학생총연맹

2. 반탁학생총연맹

4. 맺음말

1. 머리말 해방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의 의미를 남겼다. 특히 근대 이후 시민사회로의 전환을 겪지 못 하고 식민지배를 받은 이들에게 해방은 주도적이고 자주적으로 정치 참여를 할 수 있는 기회 가 주어졌다는 데에서 큰 의미를 가졌다. 해방 이후 사회·정치 단체가 많이 출현하였던 것은 이러한 이유이었다. 그것은 기성 세대 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해방 직후 청년학생들도 자주국가 수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자 하였고, 이러한 노력은 학 생단체의 결성을 통해서 나타난다. 전남지방도 마찬가지였다. 해방 이후 자주독립국가 수립을 위한 열망은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열망은 학생 단체의 결성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단체의 조직은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익이 빠른 편이었다. 그것은 해방 직후 좌익이 주도권 을 잡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렇듯 주도권을 쥐었던 좌익은 결국 정부 수립을 할 무 렵 조직이 붕괴되었거나 지하화되었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우익이었다. 이것은 학생 단체도 마찬가지였다. 이 연구에서는 우익 학생단체의 조직과 결성을 통하여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조건을 살펴보 고자 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해방 직후 좌익이 정국의 주도권을 쥐었는데, 어떻게 3년이 지 나 우익이 주도권을 쥐어 정부를 수립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우익 학생단체를 통하여 조금이나 마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해방 이후 중앙에서 조직된 여러 청년 학생 단체의 조직과 활동 은 몇몇 연구를 통해서 드러났다.1) 하지만 우파 단체, 특히 학생단체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 1) 김행선, 해방정국 청년운동과 민족통일전선운동 연구; (1945.8.15~1949.10), 이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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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 86주년 기념 특별학술회의

루어지지 않고 있다. 당시 우파 학생단체를 이끌었던 이철승과 전국학련 관련 단체에 의해 발 간된 책이 전할 뿐이다.2) 이 책은 미군정기 우익 학생단체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서가 아닌 경 험담을 소개한 것이다. 그리고 이재오의 책은 해방 이후 학생운동이 좌와 우를 구분하지 않고, 주로 좌익 학생들의 활동을 간략하게 소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파 학생 단체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 발표 이후 탁치 정국의 좌우 대립이 시작된 1946 년에 나타났다. 반탁학생총연맹을 시작으로 우파 학생 단체가 조직,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들 이 해방 정국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무슨 활동을 했는지 밝히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 각한다. 좌우가 첨예하게 대립되었던 시기에 우파 학생단체들은 어떠한 의미를 지녔는지를 살 펴봄으로서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과정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해방 이후 주도권을 쥐었 던 좌파 정치·사회 단체에서 우파 정치·사회 단체로의 변환을 학생단체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반탁학련 전남도연맹과 그 이후 조직된 전국학생총연맹 전남도연맹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3) 전남도연맹을 통해서 전남지역에서 우파 단체들이 어떻게 주도권을 쥐는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2장에서는 전국학련의 전신인 반탁학련을 서술할 것이다. 3장에서 는 전국학련에 관한 서술을 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 글은 자료의 한계로 인하여 구체적인 활 동을 세세하게 그리고 의미있게 파악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미리 지적한 다. 그러므로 이 글은 반탁학련 전남도연맹과 전국학련 전남도연맹의 조직을 파악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2. 반탁학생총연맹 모스크바3상회의 결과 발표 이후 우익 학생단체가 출현하였다. 반탁전국학생총연맹(이후 반 탁학련으로 줄임)이 그것이었다. 반탁학련은 1946년 1월 7일 결성되었다. 반탁학련 위원장은 이철승이었다. 당시 학교는 좌익이 주도하고 있었는데, 보성전문대는 상황이 달랐다. 바로 이 철승에 의하여 학생회가 장악되었다. 이후 이철승은 모스크바3상회의 결과 발표 이후 적극적 인 반탁운동을 모색하였다. 이에 반탁전국학생총연맹이 탄생하였다.4) 당시 반탁학련을 이끌어가는 중추세력은 보성전문대학, 연희전문대학, 세브란스의학전문대학 등 3개 학교였다. 특히 보성전문대학 학생회는 1945년 12월 29일 ‘보전반탁학생연맹’을 조직 함으로써 타학교에도 반탁집회를 개최하도록 촉구한 선도적인 주도세력이었다. 보성전문대학 김행선, 해방정국 청년운동사, 선인, 2004. 2) 이철승, 『전국학련』중앙일보사, 1976, 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편, 한국학생건국운동사, 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출판국, 선우기성, 韓國靑年運動史, 금문사, 1973. 이재오, 해방 후 한국학생운동사, 형성사, 1984. 3) 기존의 자료에는 반탁학련과 전국학련 각 지방조직에 대한 통일적인 명칭이 없었다. 당시 신문자료나 이철승 의 회고나 한국학생건국운동사 등에서 일관적인 명칭이 쓰인 것은 아니었다. 본고에서는 편의상 도단위는 도연맹으로 기술하고 이후 부·군단위의 조직은 ○○학련으로 표기하고자 한다. 이러한 표기는 당시 가장 일반 적인 것이기도 하다. 4) 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편, 한국학생건국운동사, 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출판국, 125~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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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 전남지방 학생운동 좌우갈등

반탁학생연맹은 처음부터 한국민주당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활동을 전개했다.5) 반탁학련의 활 동은 다음과 같다. 첫째, 반탁학련은 반탁집회를 추진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반탁집회 뒤에는 폭력사태가 발생 하였다. 반탁학련은 집회 이후 인민보사, 인민당본부, 인민위원회 사무실을 습격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반탁학련의 반탁집회와 좌익측의 사무실 습격 사건에는 각 학교의 우익측 인사가 함께 하였다.6) 둘째, 반탁학련의 활동은 좌익학생 조직들과의 물리적 충돌로 이어졌다. 미군정에 연행되어 가는 반탁학련 간부의 입에서 “이래뵈도 우리는 독립투사다. 내 발로 떳떳이 걸어내릴 터이니 끌어내리지 마라”7)고 한 것으로 보아 반탁학련은 반탁과 독립을 동일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반탁학련은 반탁운동=독립전쟁이라는 관점으로 당시 탁치정국을 바라보았다. 셋째, 반탁학련은 대북 공작대를 꾸려 월북을 하였다. 이러한 월북활동은 백범 김구가 적극 지원을 하기도 했다.8) 넷째, 반탁학련은 자주 반탁을 주제로 하는 거리 웅변대회를 개최했으며, 종종 반탁강좌를 위해 사회명망가를 초청하고, 대중을 상대로 하여 직접적인 반탁강좌를 진행하기도 했다. . 다섯째, 반탁학련은 반탁운동을 널리 알리기 위해 선전물을 제작하고 기관지를 발간했다.9) 전남지방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우익진영의 학생단체는 광주애국학도동지회이었다. 이들은 좌익의 화랑단(花郞團)에 대항할 것을 결의하며 결성되었다.10) 결성 당시 숫자는 아주 적었다. 그러나 이들은 반탁학련 광주지부의 모체가 되었다. 전남지방에서 반탁학련은 1946년 2월 26 일 광주중앙초등학교 강당에서 광주반탁학련의 이름으로 결성되었다. 광주반탁학련은 반탁학 련의 지방조직으로서는 최초의 것이었다. 광주지부의 조직을 이끈 지도적 위치에 있던 간부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1) <표 1> - 광주반탁학련 조직 주요간부 변화 학교

참가자 명단 제1대

2대

3대

4대

위원장

이은택→임인택→심상익→ 김순경→안홍순→박상기→박선기→원주호

감찰부장

차영후

조재철

임병준,

김문환

그리고 광주지부를 주도하였던 이들을 학교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표 2 - 광주지역 학교별 반탁학련 명단 5) 김행선, 해방정국 청년운동사, 선인, 2004, 202~203쪽. 6) 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편, 위의 책, 139~140쪽. 7) 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편, 위의 책, 144쪽. 8)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다음의 연구에서 계속하겠다. 9) 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편, 위의 책, 150~160쪽. 10) 화랑단을 좌익 단체로 규정한 것은 애국학도동지회 조직 결성에서 나온 표현을 필자가 인용하였다. 한국반 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편, 위의 책, 402쪽. 11) 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편, 위의 책, 404~4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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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주요 참가자 명단

장충식, 심상익, 이은택, 방명래, 김문수, 김순경, 정하택, 장경석, 이순희, 장강석, 조식, 윤재건, 임종호, 노일섭, 박철, 정진권, 김성중, 장태석, 최준, 고두석, 오인제, 오남옥, 조석종, 정길수, 백관호, 정균채, 김동준, 이귀영, 광주서중 원주호, 최동춘, 임강호, 서남원, 김의수, 임관수, 이강재, 전천수, 박현채, 안재순, 김일, 허방원, 장영식, 심상준, 김상준, 배양태, 전철, 정현성, 정광 호, 유하영, 양익종, 임인택 광주농업

차영후, 정근, 김은걸, 박종달, 곽재옥, 명태식, 손여종, 김맹곤, 오경, 차영 남, 정병하, 최윤재, 양각춘, 공영준, 하인옥

박선기, 정민환, 김승걸, 김종환, 조동욱, 최병춘, 박승원, 조길성, 박종만, 광주사범 김석중, 김상순, 기원희, 김민환, 임종성, 박호남, 손동환, 조규진, 김순걸, 문익석, 정화춘, 김선옥, 차우영, 최영석, 장문환, 나승호, 이명수 광주상업 김정태, 최명섭, 정화면, 오현, 김맹호, 박명규, 오장환, 허문득, 정영환 광주동중

임병우, 한상호, 문형주, 양승미, 하건철, 홍연석, 이선기, 최원섭, 김연균, 김선중, 오시현, 김영옥, 박두남, 염동헌, 주두석, 김렬

전남 농잠

정봉호, 정재필, 박동흔, 나기주, 송성현, 김오년, 박희곤, 정해성, 김경률, 황길주, 정화영

광주 공업 최길성, 김정수, 오택수, 강용희, 최길남, 조태홍 광주의대 장정식, 김용철, 김상우 숭일중

장병우, 김영석, 한덕선, 김지호

광주여중 장정숙, 양매종 조대부중 이종만, 임권택, 송길정 전남여중

조옥순, 김미경, 백점옥, 차영임, 유종순, 김길순, 장은숙, 조춘자, 김정자, 조봉현, 차영진, 서귀진, 장은철

수피아여중 차영자, 민난식, 이의안, 윤순정, 김정숙, 김현자

이들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장정식(광주의대), 장충식(서중), 장영식 (서중)은 당시 한민당 전남도당에서 활동하였던 장병상의 아들이었다. 장병상은 당시 광주역장 으로 재임하고 있었는데, 반탁학련의 아지트로서 역관사가 많이 쓰였다고 한다.12) 이를 통해 지방에서도 한민당과 반탁학련과의 관계는 밀접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한 활동은 중앙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북파는 지역적인 특성으로 월남 학생들이 많이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해당사항이 없었다. 그 외의 반탁집회 참석과 좌익 학생과의 충돌은 광주지역에서도 볼 수 있는 내용이었다.13) 아울러 이들은 김구나 한독당 세 력보다는 한민당과 더 밀접했음을 위의 장병상의 아들의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3. 전국학생총연맹 12) 김석학·임종명, 『광복30년』1, 전남일보사, 1975, 88쪽. 13) 이철승, 전국학련, 중앙일보 동양방송, 1976, 191~194쪽. 이 책은 전국학련이나 전남의 전국학련 활동 소개는 시기상 반탁학련의 이름으로 활동하였던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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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 전남지방 학생운동 좌우갈등

전국학생총연맹(전국학련)은 반탁투쟁을 통하여 조직화되고 강화된 우익 학생 진영의 단결 을 모색하고자 발족되었다. 이에 따라 통합하게 된 단체는 반탁학련, 경성대학 동지회, 독립학 생전선, 서북학생원호회, 유학생동맹 등이었다.14) 이러한 즈음 우익 학생 단체들은 반탁 뿐 아 니라 좌익과의 대립 속에서 강하게 싸움을 전개하고, 주도권을 잡기위해 통합된 조직을 필요 로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46년 7월 31일 전국학련 결성대회를 가졌다.15) 대회장에 는 이승만과 김성수, 정인보, 미군정청 문교부장 대리 정준모 등이 참석하였다.16) 이들의 참석 을 통해 전국학련과 정치지도자와의 친밀도 및 관계 등을 파악할 수 있다. 즉 전국학련은 반 탁학련 때부터 계속된 친이승만, 친한민당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전국학련의 조직을 가동하는데 필요한 자금의 출처도 예상해 볼 수 있다. 이들의 주임무는 반탁운동과 좌익 학생들을 학원에서 몰아내는 일이었다. 반탁집회를 학련 명의로 개최하기도 하였으나 좌익측의 찬탁집회를 저지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하였다. 또 한 민전본부를 습격하기도 하였다.17) 하지만 이러한 좌익 단체들에 대한 반대는 좌익계와 직 접 충돌을 겪었고, 이러한 충돌은 인명살상에까지 이르기도 하였다. 학생운동은 탁치문제 뿐만 아니라 국립대학설치안(국대안)을 두고 좌와 우가 극심하게 나뉘 어져 갈등을 벌이고 있었다. 국대안은 1946년 7월 13일 유억겸 문교부장이 발표한 ‘국립 서 울종합대학안’으로 경성대학과, 서울 및 그 근교에 있는 9개 전문학교18)를 통합하여 하나의 종합대학교로 설립하고자 한 안이었다. 국대안은 발표와 함께 관련학교 및 일반 사회단체에서 국대안의 현실 부적합성, 시기상조, 비민주성 및 반민족성 등을 주장하면서 반대하였다. 이후 국대안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시 기에 따라 몇 단계로 구분된다. 국대안반대운동의 초기단계인 1946년 7월부터 8월까지는, 국 대안에 내포된 여러 가지 모순점과 한계들이 지적되면서 국대안에 관련된 학교뿐만 아니라 일 반교육·사회·정치단체 등에서 국대안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 시기이다. 이후 9월부터 1947년 1 월까지는 비판적인 문제제기 수준을 넘어서서 구체적인 집단행동을 취하는 맹휴기로 특징지운 다. 세 번째는 1947년 2월로 국대안 반대운동이 전국적으로 파급되고, 국대안반대운동이 좌우 익 정치세력에게 중요한 정치적 쟁점으로 대두되던 시기이다.19) 이 시기 국대안을 둘러싼 반 대운동은 이전 시기와 비교해볼 때 정치적 성향을 강하게 띠었다. 그러면서 좌·우익 학생세력 이 보다 날카롭게 대립하게 되었다.20) 좌익학생들의 국대안 반대 맹휴는 1946년 9월 개학과 더불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맹휴 반대와 맹휴 저지를 하는 학련 조직도 맹렬하였다. 학련 명의의 성명서, 경고문 등이 신 문에 실렸으며, 좌익 학생과의 끊임없는 크고 작은 충돌이 일어났는데 이러한 충돌은 폭력적 인 양상을 띠었다. 또한 미등록 학생이나 등교를 하지 않은 학생들에게 등교를 ‘강력히 종용’ 14) 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편, 위의 책, 187쪽. 15) 동아일보 1946. 8. 2. <전국학생총연맹조직> 16) 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편, 위의 책, 189쪽. 17) 이철승, 『전국학련』중앙일보사, 1976, 190~194쪽. 18) 9개의 전문경성법학전문학교는 다음과 같다. 관립인 경성법학전문학교,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공업전문학교, 경성광산전문학교, 경성경제전문학교, 수원고등농림학교, 경성고등상업학교, 경성사범학교, 경성여자사범학교 와 사립인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이다.(내무부 치안국, 미군정 법령집, 병학사, 1956, 176쪽. 19) 최혜월, 「미군정기 국대안반대운동의 성격」, 역사비평 통권3호, 1988, 21쪽. 20) 최혜월, 앞의 논문,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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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21) 이러한 시기에 전국학련은 국대안반대운동을 전개하였던 맹휴투쟁에 반대를 하며 국대안반 대자들과 대립을 하였다. 당시 국대안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던 이들은 대부분 좌익 학생과 좌 익 단체들이었기 때문에 여기에서도 좌익과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전국학련 전남도연맹은 1947년 8월에 결성되었다. 전국학련 중앙의 결성과는 1년여의 차이 가 있다. 이는 전남지방에 학련이 아예 없었다는 것이 아니었다. 각 부·군 지구가 있었으나 전 남도연맹을 결성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광주지역에서 국대안 반대가 치열하였고, 이런 상 황에서 전남도연맹의 결성이 늦어졌다. 도연맹은 기존의 반탁학련 도연맹과 큰 차이가 없었다. 도연맹은 광주지구 연맹과 같은 사 무실을 공동으로 사용하였으며, 인적 구성과 활동 상황도 광주지구연맹과 거의 동일하였다. 다 만 간부직이 중학생으로부터 대학생으로 바뀌었다. 도 연맹의 조직은 다음과 같다.22) <표 3> 전남학련 조직의 구성 직 책 위 원 장

주요 참가자 명단 심영택 이후 안홍순, 박흥렬, 김용철(광주의대)의 순으로

부위원장

장정식(광주의대) 이후 김순경, 박경환, 정태진의 순으로

감찰부장

장정식 이후 차영후, 조재철, 임병준의 순으로

광주학련이 관장하는 지역은 광산, 고흥, 담양, 화순, 나주, 영산포, 장흥, 보성, 영광, 학다 리, 장성 등이었다. 이 지역들은 대부분 1946년 10월부터 1947년 8월 사이에 조직된 지부들 이었다.

21) 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편, 위의 책, 279쪽. 22) 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편, 위의 책, 4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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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 전남지방 학생운동 좌우갈등

<표 4> 전남학련 각 지부 추이 지역

지부장

부지부장

광산23)

주도 학생 조병현, 김덕기, 이재정, 김명호, 김도수

고흥

목원필, 이은래, 김기채

담양

정군채, 전천수, 전철

화순

박일도, 채정준

강진

김식, 김재홍, 양희남, 정경섭, 노남식, 김평식, 김 병상, 정철주 박종석, 방규환, 정용태, 문동근, 박조련, 박소자, 강복두, 김영식, 봉영웅, 임종흠, 김종목, 강우대, 김재일

장흥 보성

안재순

영광

박동을, 김순섭, 강세원, 박동흔, 박동삼

함평

김병기, 김석구, 김경천, 강양배, 김순옥, 강봉규, 손옥권, 김활용, 이은행, 이재건, 김재중, 곽인희, 백옥련, 모순옥, 모종양

학다리

정화춘, 주일도, 김환 김재명, 변강연, 김영석, 고판주, 나희주, 신희철, 이길수, 공영준, 이중석, 정갑수, 송길정

장성 보성24)

김용해

나주25)

이강교

송정리26)

박준철

박경재 양병섭, 손동환, 김형준, 김성환

영암27) 영산포28)

현병기

능주29)

박일파

완도30)

김중길

남평31)

서인규 (조대)

최남수, 박승구, 강신봉, 김덕만 오준흠 신귀남, 김정수

전국학련 조직이 각 부·군·면단위에까지 결성되는 동안에도 국대안 반대운동은 전남지방에서 도 전개되었다. 전남지방에서는 1947년 2월 21일 광주사범, 광주농업의 맹휴를 시작으로 22 일 서중과 의대가 맹휴에 들어갔다.32) 이른바 2차 맹휴이다. 이들의 주장은 공통적으로 국대 23) 광산에서부터 장성지부까지는 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편, 위의 책, 408~409쪽 참조. 24)『동광신문』1947. 6. 11. <전국학생총연맹 보성군지부결성> 25) 나주의 경우 한국학생건국운동사에 서술이 된 것과 동광신문이 차이가 있으나, 이는 시간적인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국학생건국운동사는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학생 이름만 언급이 되어 있고 지부장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다. 그래서 지부장 이름으로 언급이 되어 있는 것은 동광신문의 기록이다. 이는 아래의 영산포와 보성도 마찬가지이다. 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편, 위의 책, 407쪽.;『동광신문』1947. 7. 27 26)『동광신문』1947. 7. 29. <학련지부결성> 27)『동광신문』1947. 8. 24. <학련지부결성>결성기사만 나왔음. 28)『동광신문』1947. 10. 16. <영산포읍에서 학련지부결성> 29)『동광신문』1947. 11. 28. <학련능주지부결성> 30)『동광신문』1947. 12. 6. <학련완도지부> 31)『동광신문』1948. 1. 8. <학련남평연맹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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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 86주년 기념 특별학술회의

안 반대였다. 이러한 맹휴에 전남학련은 맹휴 반대활동을 전개하였다. 1차 맹휴는 국대안이 발 표되었던 1946년 7월 이후에 있었고, 2차 맹휴는 1947년 2월에 전개되었다. 이 맹휴가 언제 끝났는지는 자세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3차 맹휴는 3월 24일 다시 시작되었고, 서민호 전남 도지사는 3월 29일 학교폐쇄를 결정하였다. 이러한 학교 폐쇄는 비민주적인 방법이었고, 학교 폐쇄가 학생의 수업권을 뺐는다는 여론이 강해 미군정을 비난하였다.33) 그러자 전국학련은 복 교를 주장하였고, 우익 측 사회단체가 전국학련을 지지하였다.34) 그리하여 복교가 추진되었다. 이 무렵 서중학교에 방화사건이 있었다.35) 서중방화를 두고 좌와 우는 서로가 상대측이 범 인이라고 지목하였으나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이 방화사건은 지금까지도 범인을 찾지 못하였 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서중 방화사건으로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서중이 보관하였던 여러 학사관련 자료들이 소실되어, 당시 서중과 관련된 연구를 하기 매우 어렵다 는 것이다. 이후 전남학련은 서중부흥촉진 성명을 발표하였다. 광주학련은 서중부흥촉진회를 결성하였다.36) 이 방화사건에 대하여 우익 단체들은 일방적으로 좌익에 의한 범죄로 매도하였다. 물론 이 러한 매도를 통하여 좌익흠집내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기는 하였으나 이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어 일방적인 매도라고 할 수 있다. 더하여 이러한 좌익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협박마저 공공연하게 하였다.37) 결국 서중방화사건 이후 서중내의 좌익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고, 서중 은 학련조직이 주도권을 쥐었다. 우익에게 주도권이 넘어갔음을 알 수 있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서중생 약 3백 여명이 광주의대에 들어가 광주의대 학생들에게 요구문을 발표하였다. 요구문의 내용은 학원 내 불순분자 숙청을 요구하는 것이었다.38) 해방 이후 광주의대는 좌익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 다. 이러한 이유로 이철승은 서중방화범도 광주의대 좌익학생이라 추측하였다.39) 이는 광주시 내의 우익 학생들의 생각이었을 것이고, 서중의 우익학생들에게 광주의대는 좌익의 온상이었 다. 이러한 인식하에 서중의 학생들이 이러한 요구문을 보냈다. 일반적인 생각으로 광주의대생 보다 더 어린 서중생들이 대학생에게 집단행동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조직의 힘에 자신이 있 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그만큼 광주학련의 조직이 컸고, 힘이 셌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도권을 잡아가는 과정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싶으나 자료의 한계를 절감한 다. 다음의 표를 보면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이다.

32) 동광신문 1947. 2. 23. <광주에도 맹휴 광사 광농 양교에서> 33) 이러한 분위기는 전남도지사 서민호가 신문에 발표한 내용을 통해서도 읽을 수 있다. 동광신문 1947. 6. 20. <학도제위에게 도지사 서민호> 34) 동광신문 1947. 5. 27. <학원재건위해, 전국학련활동>;동광신문 1947. 5. 31. <맹휴에 대한 학련의 건 의 적극 성원 독촉국민회지부담화>;동광신문 1947. 6. 1. <맹휴교대책에 대한 학련건의지지 광복청년광주 지부> 35) 『동광신문』1947. 7. 22. <서중화재에 학련서 성명> 36) 동광신문 1947. 7. 24. <학련전남연맹 서중부흥촉진> 37) 『동광신문』1947. 8. 6. <테로와 서중방화에 서청, 학련 성명> 38) 『동광신문』1947. 12. 6. <서중생, 의대에 쇄도 불순분자숙청요구> 39) 이철승, 앞의 책, 321~3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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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 전남지방 학생운동 좌우갈등

<표 5> 광주지역 학교에서의 공산당세력 분포 학교 의학대학 서중학교 광주사범학교 광주상업학교 광주농업학교 숭일중학교 광주공업중학교 전남여고 광주여고 수피아여고 동중학교

총학생수 183 1000 739 580 500 139 200 600 200 200 365

좌익수 74 305 355 350 142 40 25 62 59 58 74

분포 비율(%) 40.44 30.5 48.04 60.35 28.4 28.78 12.5 10.33 29.5 29 20.27

다만 1947년 G-2보고서에 광주지역 학원내 공산당 학생수를 검거된 학생을 통해 조사하였 다. 대부분의 학교가 40%미만이었다.40) 이전 시기 공산당 학생수가 조사되어 있지 않으니 이전과 비교할 수 없지만, 이는 해방 직후보다는 훨씬 줄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이는 맹휴 투쟁과 학교폐쇄, 복교 과정에서 좌익 학생들이 복교하기가 어려웠고, 탁치 정국과 국대안 반대운동을 전개하면서 좌익 학생들이 구속, 검거되면서 숫자가 줄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듯 1947년 여름을 고비로 국대안반대투쟁이 수그러져갔고, 이는 전국학련이 학원 내에 서 주도권을 잡았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남학련의 활동에 가장 큰 지원은 한민당 전남도당 뿐만 아니라 도지사 서민호이었 다. 그는 신문에 맹휴반대에 관한 성명을 내는 등 적극적으로 맹휴반대의사를 개진하였다.41) 이는 서민호와 전국학련이 맹휴에 관한 공통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이는 우익 측도 마찬가 지이었다. 이는 서민호와 전남학련과의 관계가 서로 우호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우호 적인 관계를 엿볼 수 있는 것이 서민호지사의 강원도지사 발령이었다.42) 이때 전남학련은 성 명서를 내서 서민호의 이동을 강력하게 반대하였다.43) 반공주의를 강력하게 실시하였던 서민 호와 우익 학생단체가 서로 우호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학련이 전개하였던 활동은 반탁관련 웅변대회나 음악회를 개최하였다.44) 각 군 별로 특성에 맞는 활동도 전개하였으니 보성지역의 경우 추수철을 맞아 근로봉사를 하기도 하 였다.45) 또한 계몽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는데 주로 한글강습소를 설치하여 문맹퇴치를 전개 하였다.46) 문맹퇴치운동은 1948년 들어서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는데 이는 단독선거실시 와도 관련이 있다. 선거실시를 위해서는 등록부터 투표에 이르기까지 문자를 해독할 수 있어 야 했기 때문에 문맹퇴치는 단선을 위하여 꼭 필요한 부분이었다. 40) 광주 학교의 공산당세력 분포(USAFIK, USAFIK G-2 PERIODIC REPORT(이하 G-2P로 약칭). No. 648. 1947. 10. 2.(한림대학교 아세아문화연구소)) 41) 42) 43) 44) 45) 46)

동광신문 경향신문 동광신문 동광신문 동광신문 동광신문

1947. 1947. 1947. 1947. 1947. 1948.

2. 23. <맹휴학생에 고함 전라남도지사 서민호씨담> 6. 28. <공보부, 각도 지사 및 인사이동 발표> 7. 6. <인사이동문제에 학련지부성명> 9. 18. <학련학생웅변 19일 오후 1시>;동광신문 1947. 12. 18. <학련주최웅변대회> 11. 4. <보성학생연맹원 추수에 근로봉사> 1. 8. <한글강습소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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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 86주년 기념 특별학술회의

4. 맺음말 반탁학련과 전국학련은 반탁운동을 전개하였고, 학원내 좌익을 극복하고 주도권을 잡기 위 하여 조직되었다. 그리고 이 조직은 전국적으로 건설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미군정과 한 민당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하였고, 활동하였다. 이러한 우익 학생단체는 우익 청년단체와 함 께 우익 단체의 행동대원으로서 역할을 충실하게 하였다. 전국학련 전남도연맹은 이러한 역할에 충실하여 학원내 좌익 세력이 국대안 맹휴투쟁을 전 개하는 동안 맹휴반대운동을 전개하며 무력충돌을 통하여 좌익 학생들을 제거하였다. 전국적 으로 맹휴기간 학교폐쇄를 결정하는 곳이 많았고, 이는 여론으로부터 부정적인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사회분위기에서 전국학련은 복교 성명을 내는 등 학교폐쇄에 부정적인 여론을 반등시 키려는 노력을 하며 학원내에서 점점 주도권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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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주제

해방전후 전남지방 재야운동 형성과정 안 종 철(前 국가인권위원회 기획조정관)

1. 해방과 정치단체의 결성과 변화

4. 신탁통치를 전후한 단체간의 갈등

2. 미군의 전남진주와 변화

5. 정부수립과 여순사건

3. 전남지역 정치사회단체 결성과 활동

6. 한국전쟁과 전남지방의 변화

머리말 1945년 8월 15일 정오에 중대방송 예정소식이 전남도청 직원들에게 알려졌다. 도청 회의실 에는 한인 직원, 일본인 직원들과 함께 부동자세로 서서 라디오를 경청했다. 히로히토 천황의 무조건 항복방속이 흘러나왔다. 도지사 야기(八木)의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일본 천황 히로히토의 항복방송을 기점으로 조선은 해방되었다. 오랜 강압적 식민통치에 신음하고 있던 한민족에게 815해방은 그 무엇과도 바꿀 없는 감격 이었다. 일제에 협력하면서 자신의 부귀와 명예를 유지하고 있던 일부 극렬 친일파를 제외한 절대다수의 국민들에게 해방은 그야말로 환희였고 인간다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 문이다. 이러한 기분은 해방을 갈망하던 누구에게나 공통적인 것이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해방 전까지 무려 200만에 가까운 조선의 청년학 생들을 군인, 군속 등의 전투요원으로 강제징집 동원하여 총알받이로 삼았다. 해방 전까지 80 여만명의 노동자를 징용하였으며, 국내에서도 460여만에 달하는 사람을 노력동원에 내몰았다. 이들은 상당수가 현지의 노동현장에서 사고로 죽거나 병과 극도의 기아로 시달리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쳤기 때문에 한국민에게 징병과 징용은 공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해방 3년간의 시간적 공간은 주체적인 민족국가를 설립할 수 있는 기회였다. 많은 사람들 이 정치사회활동을 시작하였고 서로간의 이념적 동질성에 따라 이합집산했을 뿐만아니라 경제 적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뭉치고 헤어지는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본 글에서는 전남광주지방의 해방 3년의 과정을 통해 어떤 정치사회 단체들이 형성되고 변 천과정에서 재야세력이 형성되는 과정을 탐색해 보기 위해 준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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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 86주년 기념 특별학술회의

Ⅰ. 해방과 정치단체의 결성과 변화 일제로부터의 해방은 한국민의 억압된 정치활동의 족쇄를 풀어줌으로써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앙에서의 정치활동은 물론이고 농촌지방에서도 정치활동이 왕성하게 전개되었다. 농촌사회 의 특징인 지리적 분산성, 고립성, 폐쇄성은 농민의 정치세력화를 억제하는 주된 요인이었지만 해방으로 정치참여의 공간이 열린 것이다. 전남지방에 건준 조직이 등장한 것은 다른 지방에서와 마찬가지로 8월 16일부터 8월말까지 였다. 8월 17일 국기열의 주도적 활동을 통해 조직된 전남도 건준은 명망가와 활동가들이 연 합한 통일전선적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당시 위원장에 최홍종 목사, 부위원장에 김시 중, 강해석, 총무부장에 국기열, 치안부장에 이덕우, 재무부장에 고광표, 선전부장에 최인식, 학무부장에 신순언, 산업부장에 한길상, 조직부장에 김범수, 청년부장에 주봉식이 선출되었고 58명의 건준위원이 선출되었다. 초기의 이러한 전남 건군의 조직적 구성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익진영의 보수적 성향이 직접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하고 미군 진주에 따른 진보진영의 적극적 대응자세에 의해 분열되 기 시작함으로써 초기 건준 상태를 유지할 수 없었음으로 개편이 불가피했다. 이런 가운데 1945년 9월 이후 조직개편 과정에서 일부 우익세력이 빠져나가자, 전남건준은 박준규를 위원 장으로 한 2차 조직체계가 등장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중앙 건준의 간부진 구성에서와 마찬가 지로 초기 조직이 후기 조직으로 개편되면서 통일전선적 성격이 점차 옅어지고, 좌파세력 중 심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전남지방의 시․군 건준도 도건준 조직 상황과 비슷하게 해방과 동시에 외부의 영향보다는 자발적 활동과 요구에 의해 등장했지만 일부분은 일반 군민들이 직접 참여하여 조직하는 절차 를 거치지는 않았다. 각 지방의 주민들이 인정하고 있던 명망가와 활동가들이 모여 건준을 조 직하자는 의견을 제기하고 그것에 동의함으로써, 각자의 능력에 따라 조직 부서를 담당하는 형식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군민대회나 해방기념 대회와 같은 대중 집회를 통해 추인을 받음 으로써 일반 군민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광주에서는 특이하게, 다른 지방보다 늦은 8월 말에 시민들이 직접 투표를 실시하여 건준위원들을 선출하였고, 완도에서는 군민들이 역시 투 표를 하여 위원장, 부위원장을 결정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진도에서는 정확한 절차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군민대회에서 직접 조직되는 형식이었다.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기 직전 중앙 건준이 해체되고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전남지방의 도 건준과 시․군 건준 조직도 변화되었다. 도건준은 이미 우익세력의 탈락으로 개편된 2차 조직의 구성원 가운데 큰 변화 없이 인민위원회로 그대로 연결되었다. 다만 인민위원회의 업무를 총 괄적으로 담당할 서기국이 창설되었다. 시․군 건준 조직도 9월말에서 10월초까지 개별적으로 일부 지방에서는 인민위원회로 개편되기도 하고 일부 지방에서는 건준과는 독립적으로 인민위 원회로가 새로 창설되기도 하였다. 건준이 좌우세력의 연합적 조직이었다면 인민위원회는 건준 조직에서 우익세력이 미군정의 등장과 정세의 변화에 의해서 이탈한, 좌익세력만의 조직이었다. 인민위원회 조직은 좌익 세력 을 지도하고 대변하고 있던 조선공산당 등의 좌익정당과 일정한 연대를 형성하고 있었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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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후 전남지방 재야운동 형성과정

그것의 외곽세력이었던 노동조합 전국평의회(전평) 지방조직과 전국농민조합(전농) 지방조직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건준, 인민위원회는 해방 직후의, 일제식민통치가 종식된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기 쉬 운 혼란상황을 막고, 사회를 관리, 유지하기 위해 치안대, 보안대라는 치안유지 기구를 두어 각 지방별로 치안유지 업무를 담당하였다. 또 일본 독점자본 진출의 잔재로 일본인들이 남기 고 간 재산을 일부 약탈자들이 불법점거하려는 것을 막고, 이를 관리함으로써 새로운 국가 건 설의 물적 토대를 갖추었다. 특히 전남지방 인민위원회는 농민조합 구성원들과 중첩되기도 하 면서 활동을 전개해 나갔던 점을 뚜렷이 발견할 수 있었다. 전남지방의 건준과 인민위원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3․1운동, 신간회 등의 1920년대 민족운동, 광주학생운동, 1930년대의 소작쟁의, 농민운동 등의 민족해방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이와 같은 건준, 인민위원회의 정치활동은 미군이 1945년 9월 8일 인천에 상륙하고 전남 각 지역에 점령군을 파견, 주둔시키면서 점령정책을 시행함으로써 마찰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미군정은 인민위원회를 점령 정책과 대립되는 세력으로 간주하여 억압, 탄압하는 한편 정책을 시행하는 데 협조할 수 있는 우익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미군정은 자신에 우호 적인 사람이 지방인민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경우, 이들을 군수와 경찰서장에 임명함으로써 인민위원회 세력을 흡수하여 인민위원회를 일정 부분 인정하기도 했지만 미군정의 점령정책에 비우호적이었던 대부분의 지방에서는 미군과 미군정의 대리세력인 한국인 경찰을 동원하여 무 력으로 탄압하여, 인민위원회와 치안대, 보안대원들을 체포, 감금함으로써 인민위원회를 해체 시켰다. 이때 체포, 감금의 이유로 적산관리 위반, 불법 테러 행위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건준, 인민위원회에 참여한 인사들의 진보적 성향은 미군정의 점령정책과 배치되고, 미군정 의 보수적 반공정권을 세우려는 기본적 의도와 반대되는 세력이 됨으로써 미군정기와 그 이후 의 정치사에서 배제되고 소외되는 상황으로 발전하였다. 이는 건준과 인민위원회 세력이 정치 권력을 형성해가는 과정에 제동을 걸었던 미국이라는 외부적 요인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전남 지방에서는 사회주의 정당의 주도 세력이었던 박헌영 세력과 동일한 정책과 노선 을 지향하면서도 인맥관계가 다르게 형성된 반박헌영 세력의 분포가 다른 지방보다 강했기 때 문에 건준, 인민위원회의 존재와 활동도 집약적으로 탄탄하게 나타나지 못했다. 이러한 현상은 단독정부가 수립된 과정, 분단이 고착화된 과정에서 통일 독립정부의 건설을 바라는 기층 민 중의 요구를 일관되게 수렴해내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이라는 강대 한 세력, 그것과 일정한 연대를 형성하고 있던 우익의 권력 장악 과정에서 이에 반발하여 좌 익세력은 비합법 투쟁 또는 무장 투쟁을 전개하여 일반 민중과의 연대를 단절시키는 오류를 범했다. 따라서 그 이후 나타난 신탁통치에 관한 좌우대립, 10월 대구사건, 제주4․3사건, 여순 사건,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면서 분단국가를 형성하는 한국현대사의 큰 흐름에 골격을 만들어 준 최초의 매듭이 해방 직후의 건준, 인민위원회에 잠재해 있었고 그에 대한 대응과정에서, 또 그런 요인들이 현실에서 나타난 전개과정에서 한민족의 비극이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 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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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 86주년 기념 특별학술회의

Ⅱ. 미군의 전남진주와 변화 8․15 해방과 더불어 남한 각지에 대한 미군의 진주와 군정의 확대는 보통 3단계로 이루어 졌다. 첫 단계는 시찰단의 잠정적 파견, 다음에는 전술부대에 의한 전술적 점령, 그리고 마지 막으로 군정요원의 파견과 군정실시의 순서를 밟았다. 전남지역에 최초로 시찰단 성격의 미군 이 들어온 것은 해방된 지 26일째인 1945년 9월 10일이었다. 9월 10일 오후 2시, 야전복 차 림으로 광주의 전남도청에 나타난 미육군 소령(확인되지 않음)은 치안유지를 담당하고 있던 청년단으로부터 그들이 사용하고 있던 도청 승용차와 통역을 지원받아 도청과 한국은행, 종연 방직회사, 광주시청의 출납을 일체 중지시켰다. 2단계인 전술부대에 의한 점령은 그로부터 13일 후인 9월 23일, 길버트 소령을 책임자로 하는 20여 명의 제40사단의 전술군부대가 기차편으로 광주에 도착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들 의 첫 임무는 전남지역의 지역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행정권 장악을 위한 정지작업을 수 행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하여 이 지역에서 영어에 능통했던 상류층 인사, 즉 미국유학을 다녀 온 의사 최영욱, 그의 부인 김필례, 서민호, 최성준 등과 주로 접촉하면서 광주의 상황을 대강 파악하기 시작했다. 제3단계는, 동남아에서 일본군과 직접 전투경험이 있는 6사단의 제20보병연대가 이미 진주 하였다. 10월 20일 33중대, 10월 21일에는 53중대, 55중대, 61중대, 69중대가 도착했으며, 최종적으로 11월 9일과 11월 22일에는 59중대와 45중대가 도착했다. 맨처음 도착한 33중대는 101군정대와 통합되어 전남지역의 전반적 군정을 담당하기 위해 광주에 위치한 전남도청에 본부를 설치하였다. 10월 23일 아침 도착한 101군정대는 두 명의 해군대위를 포함하여 소령에서 중위에 이르기까지 8명의 장교와 과반수가 하사관인 18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초대 군정지사를 맡은 제20보병연대장 펩크(D.R. Pepke)대령은 10월 25일 일본인 지사 야기와 경찰서장 카사키를 파면하고, 10월 27일 오전 10시 제주도를 포함한 도내 일원에 군 정실시를 선포하고 최영욱을 한국인 지사로 발령했다. 미군정이 전남지역에서 정치적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취한 조치는 다음 3가지 형태로 나타 났다. 첫째로, 당시 전남지역의 모든 시, 군, 면에서 치안업무 등의 행정업무를 수행하고 있던 인민위원회를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미군정에서는 인민위원회를 대부분의 자본주의사회에서 나타나는 하향조직으로 판단하고, 따라서 각 군․면의 인민위원회가 도인민위원회의 통제하에 있다고 보고, 가장 먼저 도인민위원회를 무력화시키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러나 인민위원회는 하향조직이 아닌 상향조직이었다. 따라서 도인민위원회가 소멸되거나 무력화되더라도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고 각 지역조직들은 그대로 일정 기간 동안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둘째, 인민위원회를 무력화시킨 다음 그 자리에 군정지사의 고문회를 설치하여, 한국민의 요구와 불 만을 일정 부분 수용하고 누그러뜨리는 작업을 했다. 셋째, 정당의 등록요구였다. 1945년 11 월 19일 내려진 정당등록 지시는 중앙의 정당등록법이 공포된 1946년 2월 23일보다 훨씬 이 전에 내려졌다. 101군정대가 1945년 10월 23일 광주에 진주한 이후에 군정관리들과 인민위원회 간부들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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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후 전남지방 재야운동 형성과정

에 협상이 시작되었다. 미군정의 대표로 나온 스노우 대위는 인민위원회 간부들에 우호적이었 기 때문에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과의 협약은 10월말 경에 인민위원회에 우호적이었던 스노우 대위가 다른 곳으로 전출되고 군정지사가 경질됨으로써 사실상 파기되고 말았다. 이는, 스노우 대위가 미국 의 점령정책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듯 하기도 하고, 또 언론인 출신으로서 미국식 민주주의 를 그대로 한국에서도 적용하려 했던 것이 군정 당국자와 마찰을 일으킨 것 같다. 새로 부임 해온 군정지사는 전임자와는 달리 인민위원회의 무조건 해산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인민위원회측은 이미 합의된 문서를 제시하며 항의하였다. 하지만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 고, 오히려 군정의 본격적인 인민위원회 파괴공작이 시작되었다. 10월 28일, 미군은 치안대장 김석을 포고령위반 혐의로 체포했고, 10월 31일 미군과 한일 경찰관 수십 명이 도인민위원회 치안부를 습격하여 여러 명의 치안대원들을 체포하였다. 미군정은 지속적으로 인민위원회 간 부들을 적산관리위반이라는 혐의로 검거령을 내려 공개 활동을 억압했다. 도인민위원회가 이 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무력해졌음에 반해 미군정은 각 지역의 군단위 인민위원회를 해체시키 는 과정에서 직접적 무력을 동원하여 각군의 인민위원회와 치안대 조직을 해체시켰다. 미군의 힘으로는 부족할 때는 한인경찰들과 합동작전을 펼쳐, 재래식 방어 무기만을 소유하고 있던 치안대를 무력화하고, 그들을 체포하여 각 경찰서에 감금하였다.

Ⅲ. 전남지역 정치·사회단체의 결성과 활동 1. 사회단체의 결성 해방후 전남지역에서 가장 먼저 조직된 청년단체는 전남도청 조선인 청년단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오후 1시 전남도청에 근무하던 한국인 직원 3백여 명은 도청 회의실에서 일본 천황 의 항복방송을 청취한 후 즉시 ‘전남도청 조선인 청년단’을 결성한 것이다. 이들은 단장에 김 창선, 부단장에 양보승을 선출하고, 미군이 진주하고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도청을 조선인들만 으로 지키기로 결의했는데, 이는 광주전남지역 사회조직의 시발이었다. 8월 18일 오전 10시에는 광주시내의 청년들 중 활동력이 있는 인사들이 거의 규합된 광주 청년단 결성식이 광주극장에서 개최되었다. 총단장에 김석, 부단장에 주봉식, 동부대장에 문인 걸, 서부대장에 정성태, 지도부장에 백학기가 각각 선출되었다. 광주청년단은 실질적인 조직력과 행동력을 갖추고 해방정국의 혼란을 어느 정도 수습하면 서 치안확보와 적산관리에 주력했다. 45년 9월 초순경 광주청년단과 건준치안대는 민족정서를 고취하기 위하여 광주서중학교 운동장에서 광주청년단 주최로 해방기념 축하 운동회를 개최했 는데 운동회가 끝난 석양 무렵 교문을 빠져나오던 학생들과 광주시민들은 인근에서 서성거리 던 일제 때의 고등계 경사 강모를 발견하고 집단 구타해 현장에서 즉사시키기도 했다. 당시는 화랑단이나 광주청년단이나 조직의 목적이 비슷했으며, 조직의 구성원도 겹치는 경우가 많았 다. 청년단 조직들은 다른 어떤 조직들보다 해방이 되자마자 신속한 조직력을 과시한 기민성 을 보였다. 이들은 그 후 건준 치안대와 관계를 형성하면서 점차 치안대 조직으로 발전해나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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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또한 청년단체의 조직과 더불어 1945년 12월 2일 공화극장에서 청년동맹 전남총연맹이 결 성되어 의장에 장재성이 선출되었다. 이 청년동맹은 1946년 4월 21일 민주청년동맹이 결성됨 으로써 해산을 선언하고 민주청년동맹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또한 광주공원 구 신사광장에 1 천여 명의 광주지역 청년들이 모여 광주 민주청년동맹을 모태로 1946년 5월 31일 민주청년동 맹 도지부가 결성되었다. 또 1946년 1월 20일 광주부녀동맹이 탄생하였고 2월 10일 광주극 장에서 전남 도지부가 결성되었다. 위원장에 김홍은, 부위원장에 천귀례, 홍태옥, 그리고 집행 위원 19명이 선출되었다. 이상과 같은 청년․여성조직 외에 직능별 조직들도 점차 등장했다. 1945년 12월 14일에는 신순언을 회장으로 한 변호사협회가 조직되었고, 1946년 2월 7일에 초등교육자연맹과 전남교 육자연맹이 결성되었다. 김남중이 이사장이 된 광주 기자단도 1946년 1월 23일 조직되었다. 광주지역에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보다 체계적인 조직은 1945년 12월 16일 공화극장 에서 결성된 전국노동조합 광주평의회이다. 이 조직은 광주지역과 목포지역으로 구분되었는데 윤석원을 의장으로 선출했다. 또한 이것과 성격이 상반되는 대한노총 광주지부는 6개월 후인 1946년 6월 16일 결성되어 광주지부장에 전영배가 선출되고, 조직 부서로 총무․재무․조직․선전․ 문교․사업․조사․후생․청년부를 두었다.

2. 정당조직의 결성 전남지역에서 조선공산당 전남도당 조직이 결성된 것은 1945년 9월이었다.47) 해방 이전부 터 조직을 계속 보존해온 좌익세력은 해방 이전의 지하조직을 기반으로 신속하게 당을 재조직 하였다. 해방 3년 전부터 광주의 백운동 벽돌공장에 은거했던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좌익세력 은 일제 때부터 노동자들이 많이 포진되어 있었던 화순탄광, 종연방직, 목포의 항만노조에 조 직원을 상당수 가지고 있었다. 9월 15일의 도당결성대회는 각 군․면 단위에서 선출된 대의원들이 참석한 대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이었지만, 12월 25일 목포의 공화극장에서 열린 도당결성대회는 각 군당 대의원 1백 명 정도가 참석한 정식대회로서 9월 15일 구성된 당조직을 인준했다. 이때 작은 군에서는 2~3명의 대표, 큰 군에서는 5~6명의 대표가 참석했다. 이 대회에서 유혁이 70%의 지지를 얻어 도당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그 이외 부서의 간부는 대부분 9월 15일 선출된 사 람들이 그대로 인준되는 형식을 거쳤다. 조선공산당 전남도당조직과 병행하여, 1945년 12월 15일 조선인민당 전남조직을 결성하 기 위한 준비모임이 조선은행 광주지점 2층에서 있었다. 이 모임은 조선인민당 광주지부를 결 성하기 위한 준비모임으로 계획되었으나, 전남도당 조직을 위한 준비모임으로 그 성격이 확대 되었다. 준비위원은 김철, 신순언, 오평기, 김문일, 박석진, 최윤주, 최상배, 최종윤, 박홍수, 김 희용, 양장주, 선태섭, 김용준, 이익우, 신종허 등 이였으며, 박헌영을 3년간이나 숨겨주었던 백운동 벽돌공장 주인이었던 이득균이 도당위원장을 맡았다. 47) 이하 사회주의 정당에 관한 사실은 당시 당원이었던 이익우의 증언을 정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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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는 시기적으로 늦은 1946년 6월 9일, 남조선신민당 광주본부 결성대회가 광주극장 에서 개최되었다. 집행부의 선거에서 위원장에 김철, 부위원장에 조병철, 박노길, 조직부장 정 민영, 선전부장 박노길, 서무부장 조병철이 선출되었다. 남조선신민당은 다른 좌익정당 지부조 직과는 다르게 자체의 강령을 채택하고 있었다. 미군정의 대대적이고 조직적인 탄압과 파괴에 대해 사회주의 진영에서도 보다 적극적으로 대항해야 한다는 요구들이 하부 당조직으로부터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즉 분산적으로 존립하 고 있던 3당이 합당해서 보다 조직적으로 미군정에 대항해야 한다는 요구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3당 합당의 요구가 아래로부터 이미 1946년 8월 초부터 제기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좌익세력은 통일전선조직을 결성하기 위해 1946년 12월 29일 무안지역 에서 비밀집회를 개최하여 남조선노동당 전남도당을 결성하였다. 남노당 광주시당위원회는 중 앙의 정세와 연계하여 1947년 2월 25일 광주극장에서 결성대회를 개최하였다. 건준 참여 인사들 중 우익세력은 한민당을 조직하였는데, 시당위원장에 고광표, 시당간부에 김요환, 서우석, 양병일, 조재규, 장병상, 장병준, 장홍염, 홍종휘 등이 간부진을 구성했다. 광 주시당 결성을 계기로 순천의 김양수, 목포의 천진철, 여수의 김문평, 해남의 송봉해, 벌교의 서민호, 장흥의 고영완, 영광의 조영규 등이 군당을 조직하고 1945년 11월초에 건준사무실로 사용했던 창평사회에서 한민당 전남도당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도당위원장은 초기 전남 건 준의 부위원장이었던 김시중이, 부위원장에는 도건준 재무부장을 지냈던 고광표와 일제 때 신 간회 목포지부장을 지냈던 장병준이 담당했다. 사무국장은 금융조합 서기 출신의 이병두, 재무 부장은 윤추섭이 담당했고, 그 외 선전부․조직부 등의 부서가 있었다. 이 부서들은, 대부분 한 민당 광주시당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담당함으로써 전남도당은 광주시당을 기반으로해서 확충 된 조직이라 볼 수 있다. 전남지역에서의 한독당 전남도당 결성은 당시 변호사였던 신순언과 국민당을 결성했던 정 두범의 노력으로 1946년 10월 12일에야 가능했다. 해방 초기에 도건준의 조직부장을 지낸 신 순언은 인민위원회로 개편되면서 정치활동을 중지하고 있던 중에 한독당 건설에 뛰어든 것이 다. 그는 이미 1945년 11월말에 국민당 광주지부를 조직하였던 기독교 지도자 정두범과 함께 해방 전부터 광양지역에 내려와 살고 있던 이은상을 추대하여 한독당을 결성하였다. 이외에 여자국민당 광주지부가 1946년 5월 22일에 현덕신, 김정현, 김숙배 등에 의해 조 직되어 5월 31일부터 6월 1일, 이틀간에 있은 전국대회에 광주대표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3. 우익세력의 결집과 활동 미군정은 도인민위원회의 명목상의 해산이 아닌 실질적인 무력화를 위해 인민위원회의 대 체세력을 형성하기 위해, 각개의 지명인사들을 지사의 고문으로 임명하여 고문회를 구성했다. 1945년 11월부터 1946년 3월까지 존속한 지사 고문회의 설치목적은 각 지역의 민의를 파악 하고 민주적인 대의정부의 수립에 대비한다는 것이었다. 고문회의 직접적인 기능은, 도내 각급 기관에 충원될 인사를 추천하는 일이었지만 전남 지사 고문회는 대다수를 보수인사들이 차지 함으로써 원래 주장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을 띠었다. 10명으로 된 전남의 도고문회는 최흥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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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 기독교 목사) 등 김양수(순천, 한민당 지부장), 김시중(한민당 지부장), 장용태(조흥은행 지배인), 강신태(서중교장), 여철현(변호사), 김종필(지주, 실업가), 최종섭(독촉 지부장), 이은상 (호남신문 사장), 박준규(도인민위원장)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남에서 경찰이 재조직되기 시작한 것은 1945년 9월 25일 도경찰부 회의실에서 개최된 전남경찰관 대회로부터였다. 경찰행정 위원장에 노주봉, 위원에 노주학, 김정택, 김의택, 홍용 구, 조희인 등을 뽑았다. 이렇게 부활된 경찰조직을 미군정에서 수용함으로서 경찰은 막강한 힘을 얻게 되었다. 경찰조직이 부활함으로서 기존의 청년단과 갈등관계가 심해지자 결국은 경 찰재건위원장인 노주봉이 청년단에 의해 9월 9일 피살되는 상황으로까지 발전되었다. 이 사건 으로 인하여 광주청년단장인 김철과 부단장인 주봉식이 미군정에 포고령 위반협의로 구속되었 지만 김구 등의 탄원으로 풀려나왔다. 결국 이 사건은 청년단이 해산되는데 결정적인 기회로 이용되었으며 미군정청은 고문회의 추천을 받아 박명제를 경찰국장으로 임명하였으며 총무과 정 주태규, 감찰과장 김의택, 수사과장 박몽실, 보안과장 김광섭, 기동대장 장홍염을 임명하고 이들을 앞세워 각 군에서 활동하고 있던 인민위원회와 치안대, 청년단들이 해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4.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의 결성 민전은 지역위원회의 조직 요강에 따라 도·시·군·읍·면에 민전위원회를 설치하도록 했다. 이 에 따라 각 지역별로 지역 결성대회를 거친 다음 지역위원회를 두고 그 아래에 상임집행위원 회와 전문위원회를 설치하여 조직부, 선전부 등의 부서와 경제대책위원회, 토지문제위원회 등 을 조직토록 하였다. 전남의 경우 민전의 공식적 출발은 3월 9일이었고 이에 참여한 집행부 인원은 36명이었다. 전라남도 민전의 결성식이 개최된 이틀 후인 3월 11일 도민전의 연계조직으로 광주시 민 전이 결성되었다. 광주시내의 17개 단체의 대표들 81명이 참가하여 선언, 강령, 규약을 이미 준비한 대로 통과시킨 다음 위원장에 김용기, 부위원장에 김유성을 선출하고 선동기, 국기열 등 위원 33명을 선거하여 선출하였다. 이어 계속된 토의에서 경찰이 철저히 불편부당한 민주 주의를 실시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Ⅳ. 신탁통치를 전후한 단체의 갈등 1. 전남지역 신탁통치와 그 여파 광주지역에 신탁통치문제가 처음 알려진 것은 1945년 12월 30일 전남신보를 통해서였다. 공식적으로는 해체되었지만 비공식으로 활동을 계속하고 있던 인민위원회 측에서는 광주지역 의 신문을 통해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적극 표명하였다. 모스크바 결정 절대지 지라는 입장을 취했던 좌익세력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독서회란 조직을 결성하여 세력을 확산 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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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후 전남지방 재야운동 형성과정

한편 우익진영에서는 1946년 1월 4일 광주서중 교정에서 반탁 시민궐기대회를 열었다. 이 날 아침부터 시내 곳곳에는 신탁통치 반대라는 플래카드와 전단이 나붙기 시작하였다. 서중에 서 열린 반탁대회가 진행되면서 반탁 결의문이 채택될 즈음 갑자기 반탁문구의 플래카드가 찢 겨지고 여기저기서 웅성거림과 함께 『모스크바결정 절대지지』라는 구호가 터져 나오면서 대 회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 대회를 기점으로 해서 광주지역의 좌우익간의 갈등이 시작되었고 증폭되었다. 당시의 분위기는 좌익이 압도적이었고 모스크바결정 지지라는 구호가 더욱 확산되는 상황이었다. 광주지역에서 좌우익 세력간에 직접적인 갈등은 1월 4일 서중학교 교정에서 있었던 반탁 시민궐기대회에서 불상사를 기점으로 증폭되기 시작하였고 3·1절 기념식에서 충돌은 더욱 악 화되었다. 신탁통치문제를 둘러싸고 광주지역에 좌우익간에 갈등이 첨예화되고 있을 때 1946 년 6월 2일 이승만이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게 되 자 광주지역의 좌우익 세력간에는 더욱 갈등이 가열되기 시작하였다.

2. 국대안을 둘러싼 전남지역의 갈등 이상과 같이 각종 폭력사건이 일어나는 가운데 미군정청이 국립 종합대학교안(국대안)을 발표하자 광주지역의 좌우익학생들은 다시 한번 폭발하게 되었다. 국대안 반대 시위가 연일 격화되면서 좌익계열 학생들은 동맹휴학에 들어가고 이에 반발하여 등교하는 반탁학련 학생들 에게 좌익학생들이 등교를 막는 과정에서 다시 테러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광주지역에서 1947년 3·1절 기념식을 전후로 좌우익 세력들간에 갈등이 커져가고 있을 때 이승만은 미군정의 좌우합작과정에서 자신의 위상이 축소되기 시작하자 직접 미국으 로 건너가 한국문제에 관한 담판을 짓기 시작했다. 결국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돌아왔지 만 광주지역에서는 전국학련 광주지부 주최로 이박사의 도미외교가 성공했다는 것을 축하하기 위한 학생대회를 개최하였다.

3. 해방 1주년 기념식 충돌 1946년 8월 15일 해방 1주년 기념식을 위한 준비모임이 광주시내의 주요 정당 간부들 사 이에 개최되었다. 이들은 해방 1주년 기념식을 연합하여 개최하고 이를 좌우 합작운동으로 연 결시켜 성사시키기 위해 비공식적 집회를 계속해왔다. 처음에는 좌우 양세력이 모두 이 계획 에 동의하여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그 후의 집회에서 우익은 좌익이 집회를 좌지우지 하려 한다고 주장함으로서 7월 20일 연합회의는 무산되었다. 양 진영은 이제 8·15기념식을 따로따 로 개최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이렇게 국민통합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각 세력들은 8·15해방 기념식을 각기 따로 개최하는 상황이 되었다. 각 세력들이 해방과 더불어 해방 이후 신국가건설에 어떤 입장으로 참여했느냐의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광주부에서는 광주공원에서 기념식을 민전에서는 현재의 전남의대 병원 자리에서 따로따로 해방 1주년 기념식을 치뤘다. 전남의대 병원 자리에서 치뤄진 민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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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 86주년 기념 특별학술회의

기념식은 미군정의 탄압으로 화순탄광 노동자 등 여러 명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발생함으로서 민족분열의 직접적인 대결이 시작되었다.

4. 미곡수집파동과 추수봉기 해방 당시의 1945년은 풍작을 이루었고 또 일제 때도 한 해 500만석이라는 쌀을 일본에 수 출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쌀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갑작스런 귀환동포의 증가가 큰 원인으로 작용되기도 하였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미군정의 경제정책의 실패로 인 해 투기꾼들과 모리배들의 매점매석이 근본 원인이었다. 이에 따라 쌀값은 폭등하기 시작하여 쌀 한말이 150원이라는 높은 가격으로 거래된 것이다. 미군정청은 1945년 12월 19일 미곡소 매 최고가격을 결정하는 일반고시 제6호로 미곡통제를 실시하였고 1946년 1월 16일에는 식 량난의 해결을 위한 농촌 쌀 강제징수 방침을 수립하였으며 1월 25일에는 법령 제 45호로 미 곡수집령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미곡수집 정책은 국민들의 호응도가 낮아 기대했던 효과를 거 둘 수가 없었다. 미군정에서는 쌀 부족 상태를 한국인들이 쌀을 술이나 엿, 떡으로 많이 낭비 했기 때문에 나타났다고 하면서 쌀 부족 문제는 조선인들의 애국심에 문제가 있다고 까지 발 언하기도 했다. 미곡수집으로 인한 미군정과 농민들간의 갈등은 결국 1946년 11월의 추수봉기로 이어지게 되었다. 추수봉기는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작되어 12월 중순에 이르기까지 남한의 전 지역에 걸쳐 파급되었는데 광주 전남지역에서는 11월에 발생했다. 10월에 발생한 대구사건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 휴회된 후 미군정이 추진한 좌익세력 배제정책과 박헌영세력이 채택한 신전술이 정면으로 충돌한 결과 발생한 것으로서 해방정국의 분수령을 이룬 비극적 사 건의 하나였다. 1946년 가을 대구항쟁에 이어 전국적으로 가장 큰 항쟁은 광주 전남지역에서 발생하였다. 광주 전남의 항쟁은 미군정과 경찰이 대규모적이고 조직적으로 진압작전을 전개했으나 역부족 이었다. 노동자, 농민, 학생들에 의한 경찰서와 지서 등에 대한 불시의 공격은 지역에 따라 거 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경찰은 타지역의 경우를 거울 삼아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음에도 불구 하고 강력하게 저지했으며 미전술군과 전남도경 그리고 타지역 경찰의 신속한 지원을 받아 진 압에 나섰다. 당시 항쟁의 주도세력은 중앙당과 조직적으로 연결된 지역당의 주도하에 민전과 노동조합, 농민조합의 조직원이 관계했고 최전선의 선봉대 역할은 민청이 도맡았으며 마을의 청장년들이 동원되었다. 광주 전남지역의 10월 항쟁의 여파는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 경계는 대략 11월 7일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전기에 해당되는 지역은 화순,무안,목포,광주,광주,함평,영광 나주 등이고 후기에 해당하는 지역은 보성, 벌교,장흥,강진,장성,담양,영암 등이었다. 이 가운데 항쟁이 가장 치열했던 곳은 화순을 시발로 하여 나주와 해남, 목포 등지였다. 그것은 노동자, 농민이 가장 광범하게 형성되어 있기도 했지만 그만큼 농민들의 갈등이 컸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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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후 전남지방 재야운동 형성과정

Ⅴ. 정부수립과 여순사건 1. 정부수립과 반민특위 전남의 제헌 국회의원에 입후보자를 살펴보면 한민당이 31명으로 가장 많고 무소속이 29 명, 대한독립촉성회가 18명, 기타가 14명이었다. 광주에서는 정광호가 한민당 대표로 출마하 여 무투표 당선되었다. 중앙정부의 조각이 완료된 이후 전남도지사에는 박건원이 임명되었으 나 여순사건이 발생한 후인 1948년 10월 18일 이남규로 발령되었다. 이남규는 일제 때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등 항일운동을 한 기독교인으로서 해방후 과도입법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으 며 510선거 때 목포에서 제헌의원으로 당선되어 활약하던 중 도지사로 발탁된 것이다. 광주부 윤으로 정광호가 임명되었으나 제헌의원에 무투표 당선됨으로서 민병기가 발령되었으나 정부 수립과 동시에 초대 부윤으로 윤영선이 12월 24일자로 발령되었다. 정부수립 1년후인 1949년 8월 15일 지방자치법이 공포됨에 따라 광주부가 광주시로 승격되었다. 반민특위 전남위원장에는 최종섭이 임명되었고 조사관에 신용근, 김동근, 그리고 서기관에 이원호, 최병한, 특별경찰대원으로 정길영, 김귀현 등이 채용되었다. 사무실은 금남로 3가 광 주지방법원 청사 2층을 사용하였고 도내 각 경찰서와 지서에 투서함을 만들어 반민족행위자를 신코케 하였다. 전남에서 1호로 체포된 사람은 일제 때 고동계 형사로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많은 학생들을 투옥 고문했던 문종중이었다. 전남 특위에서는 20명을 구속, 송치하고 18명을 불구속으로 취조하는 등 모두 38명을 처리하였다. 이중에는 일경출신이 20명이나 되었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구속송치자: 정병조, 성정수, 박순기(광주경방단), 이문환, 김동만(친일기독교신자), 정병칠 (일경출신), 소세준(경찰), 신원영(공출책임자), 문종중(경찰), 이영배(경찰), 선경수(경찰), 김희 규(경찰), 손필호(경찰), 정영수(경찰), 김동만(갈모대장), 최병규(헌병보조원), 임석환(헌병보조 원) 불구속 ; 이종순,조태환,현준호,김철진,차남진,윤정현,김상형,강제호,윤석원,김인봉,문재철,김원 조,서승렬,김문용,황원석,김승한,공인수

2. 전남동부지역과 14연대 해방이후 전남 동부지역에서도 군중들의 소요는 일어나고 있었다. 사건이 발생한 대부분 의 지역에서는 군중들의 습격목표는 경찰지서, 대동청년단, 민족청년단, 민주학생연맹 소속의 학생이었으며 그외 지역관리와 지방유지, 한민당원, 미곡창고에 대한 습격, 테러사건도 빈번하 였다. 1948년 전반기의 정치투쟁과정에서 여수지역은 전남도내 다른 지역에 비해 온건 좌익 및 동조세력이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남노당의 영향력이 미약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여수지역의 온건좌익 및 그 동조세력은 5.10선거 후 남노당의 이른바 지하선 거, 9월 이후 본격화되기 시작한 이른바 인공기 게양투쟁과 양군철수 주장을 통해 어느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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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 86주년 기념 특별학술회의

급진화 되었던 것 같다.

3. 여순사건의 발발과 전개 국방경비대는 경찰예비대라는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경찰도 군대도 아닌 애매한 성격의 것이었다. 경찰은 국방경비대를 자신들의 예하기구로 보고 멸시하는 측면이 있었다. 1948년 전반기의 여수지역은 전남도내 다른 지역에 비해 온건좌익 및 그 동조세력이 광범하게 존재하 고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남노당의 영향력이 미약한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1948년 5월 초에 광주의 4연대 1개 대대를 근간으로 하여 여수에 14연대가 창설되었다. 여수에 주둔 하고 있던 당시 14연대에는 남노당 세력의 침투가 상당히 이루어진 상태에서 제주사건의 진압 을 위해 차출명령을 받자 동족을 살해할 수 없다는 명분으로 지창수상사 등 좌익 지도부는 14 연대 소속의 좌익계 장교와 사병들을 규합하여 봉기를 일으키고 이에 저항하는 우익계 장교와 사병들을 살해하면서 20일 새벽 반란을 일으켰다. 20일 새벽 1시경 여수의 전화교환원으로부터 14연대의 반란 소식을 들은 순천경 찰은 한 편으로 비상경계 태세에 들어가 지서원 전원을 소집하고 인접 군인 벌교,보성,고흥,장흥,광양, 구례,곡성 경찰병력의 지원을 받아 약 500명의 경찰 병력으로 반란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진압군이 10월 25일 순천을 27일에 여수를 탈환함으로서 반란은 종식되었다. 한편 경찰은 보성, 벌교, 고흥, 광양, 구례를 탈환하여 업무를 재개하였고 이 과정에서 살해된 인명은 경찰 관, 우익요인 및 그 가족을 포함하여 1,300여명이 넘었다. 여수와 순천이 탈환되었다고 해서 여순사건이 완전히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진압부대에 의해 읍소재지 및 그 주변지역은 탈환되었지만 폭동, 반란군은 그 주력 및 중요간부들이 주변 산악지대로 도주해서 지속적인 유격전을 전개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좌익세력의 이승만정권의 체제전복을 위한 폭력적, 정치적 도전은 역으로 이승 만 정권으로 하여금 더욱 극심한 반공주의를 내건 국가로 공고화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 러한 사정 속에서 우익 정치인사들로 구성된 국회와 행정부는 반공노선을 더욱 강화하게 되었 고 1948년 12월의 국가보안법 제정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Ⅵ. 한국전쟁과 전남지역의 변화 1. 보도연맹사건 정부는 여순사건 이후 대대적인 좌익색출로 형무소에 사상범이 넘쳐나자 이들을 무조건 수 감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전향시키기 위해 이들을 관리 통제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보도연 맹을 1949년 6월 5일 결성하였다. 전남지역에 보도연맹 지부가 조직된 것은 1949년 후반기였다. 전남지부의 간사장은 해방직 후 건준 부위원장을 담당했던 국기열이 임명되었다. 그렇지만 당시 국기열은 고령의 인사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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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후 전남지방 재야운동 형성과정

때문에 실질적인 역할은 심사과장이었던 영암출신 김준식이 맡았다. 심사과장 김준식은 가입 자들을 갑, 을, 병으로 분류하는 작업을 담당했으며 경찰과 협력하여 보도연맹의 여러 가지 활 동을 거의 도맡았다. 보도연맹은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교육, 반공시위 등 외에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는 않았지만 전쟁이 발발하게 되자 떼죽음을 당하게 된다. 전남북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이 과정이 늦게 전개되었다. 일부지역에서는 7월 7일~10일경,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7월 14일~16일경 1차 희생이 발생하였고, 후퇴하기 직전 시기인 7월 20일~24일경 2차 희생이 있었다. 1차 희생의 대상자는 갑(A)급으로서 이들은 구금장소와 멀 리 떨어진 산골짜기 등지에서 사살되었고, 선별・석방대상자들은 후퇴하기 직전 구금장소 인근 에서 희생되었다. 완도・진도・해남・여수・목포 등 남해안지역 보도연맹원들도 두 차례에 걸쳐 바다에 수장되거나 사살되는데, 인민군의 진입이 늦은 섬지역에서 보도연맹원들은 8월까지 사 살되거나 수장되었다. 광주에서도 7월 초 인민군이 광주에 진격해 온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우익세력들의 테러로부 터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보도연맹원들을 광주경찰서, 상무관, 형무소 등으로 소집하여 대 촌방면, 비아방면, 증심사 계곡으로 끌고 간 뒤 집단적으로 사살되었다. 광주형무소는 광주시 동명동에 위치하였고 전쟁발발 당시 1,700여명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전황이 악화되면서 다른 형무소에서 이송되어온 재소자와 전시사범의 증가로 수용인원이 3,000명을 넘겼다. 보도연맹원들은 1950년 7월경 광산군 산동교 인근 야산 등지에서 제20연 대 헌병대 5중대 소속 군인에게 희생되었다.

2. 한국전쟁기 전남지방 상황 군경부대가 광주를 퇴각하자 인민군들은 7월 23일 낮 12시께 인민군 6사단의 선발대가 탱 크를 앞세우고 광주에 입성하였다. 광주에 들이닥친 인민군은 서석국교, 수피아여고 등에 벙영 을 설치하고 일부의 병력으로 광주를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광주를 장악한 인민군 병력은 곧 바로 광주의 치안에 나서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300여명의 좌익죄수들과 일반죄수들을 석방하고 치안담당부서로 내무부를 설치 우익인사의 색출에 나섰다. 전남지역이 전쟁 발발 1개월 만에 북한군이 진입해오자 그동안 지하에서 활동을 하던 좌익 세력이 부상하여 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를 수립하고 각지역에는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어 활동 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한국전쟁 발발 한 달전에 영광을 통해 잠입해온 김백동은 전쟁이 발발 하자마자 도인민위원회와 산하 각 시·군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도인민위원장에는 형무소에 서 출옥한 국기열이 임명되었고 시인민위원장에는 강석봉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북한군과 함 께 들어온 김영재는 이들이 해방직후부터 종파주의 활동과 분파주의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4 일만에 해임하고 말았다. 그것은 이들의 다수가 이승만정부에 의해 자의반 타의반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기 때문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남로당과 북로당의 노선차이로 인해 그러한 결과가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인민위원회의 복구와 함께 민청, 민애청, 부녀동맹 등 옛 남로당조직이 복원되면서 소년단, 조국보위후원회 등의 여러 단체들이 결성되었다. 이와 같은 행정조직과 치안조직, 외곽조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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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비되자 인민위원회는 각 관공서 직원 및 일반인에게 자수와 원래 근무지로의 원대복귀를 지 시하였다. 광주가 인민군에 의해 장악되자 인민위원회는 신문발행을 서둘러 인민보, 노동신문 을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신문들은 기존의 언론에 종사하던 인사들에 의해 발행되었는 데 한글전용 타블로이드판 4면짜리였다. 통치기구가 어느정도 완비되자 우익인사에 대한 겸거령이 내려졌다. 그 대상에는 낙오된 군 경이나 우익정당 및 단체의 임원, 재산가 등이었다. 광주에서는 초대 전남지사를 지낸 최영욱 을 비롯 호남은행장 현준호, 최태근, 박인천, 홍용구, 김삼수 등이 체포되어 광주형무소에 수감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각 지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어서 8월 중순에는 광주형무소에 수감되 어 있던 인원만도 2,000여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들은 유엔군이 광주를 수복할 때까지 감옥생 활을 했는데 그 중 500여명이 인민군 후퇴시 살해당했다고 한다. 광주에서의 시민들은 통치기 구의 변모 이외에는 큰 변화가 없이 일상생활을 했음에 반해 전남의 각 지역에서는 많은 살상 이 벌어졌다. 장성이나 영광, 함평, 나주와 같은 일제 때부터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계급적 갈 등이 많았던 곳에서는 이러한 갈등이 전쟁을 계기로 폭발하면서 큰 피해를 당하게 된 것이다. 경찰부대는 광주에 10월 3일에야 진주할 수 있었다. 심형택 도경국장이 지휘하는 경찰 150 여명과 미군 1개 소대가 남원을 거쳐 담양쪽에서 오후 6시 30분쯤 광주로 진주해 들어왔다. 그렇지만 미처 광주를 빠져나가지 못한 좌익계들은 광주 인근의 무등산, 불갑산, 지리산, 백아 산, 백운산 등으로 입산하여 계속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10월 중순까지도 광주시내까지 출 몰하여 군경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달아나는 등 끊임없는 저항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10월 15일 국군 11사단 제 20연대가 광주에 진주해옴으로서 광주의 치안은 어느정도 안정되기 시작하였다. 광주의 인근 산으로 도피한 좌익인사들은 한때 인민군, 치안대, 내무서 원, 유격대를 포함하여 5만 7천명에 달했다고 한다. 북한인민군이 퇴각함에 따라 전남경찰과 국군은 이들을 소탕하기 위한 작전을 계속 실시하 였지만 이들은 산악지역으로 몰려가 인근 산촌과 농촌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히면서 계속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국군은 11사단으로 하여금 10월 10일부터 이른바 호남지구 공비토벌작전을 실시하게 되었다. 북한으로 퇴각하지 못하고 잔류하고 있던 인민군 일부 병력과 지역 빨치산들은 주로 산악지 대에 아지트를 형성하고 계속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지리산, 영광의 불갑산, 장흥 유 치일대의 산악지역, 화순의 백아산, 담양의 용추봉이 중심이 되었고 시기에 따라 옮겨다니며 활동하였다. 이들 빨치산들의 총사령부는 지리산에 있었다. 지리산의 빨치산 사령관 이현상은 조선인민 유격대 남부군단이라는 유격대 사령부를 조직하여 남한의 각 지역의 빨치산활동을 총지휘하고 있었다. 빨치산들은 군경의 보급로 차단, 식량약탈, 지서습격, 차량기습, 통신방해는 물론 군경 에 협조한 우익인사에 대한 살인, 방화 등을 자행하였다.

3. 한국전쟁의 피해 전남지역은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가장 많은 희생사건이 발생한 지역으로 인민군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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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후 전남지방 재야운동 형성과정

기와 후퇴기에 우익인사들이 각 지역의 분주소나 내무서 등지로 끌려간 뒤 인민재판 등으로 희생당하거나, 인민군 후퇴기에 특정 장소에 구금되어 있던 수감자들이 집단으로 희생당하는 사건들이 발생하였다. 인민군 후퇴 이후 빨치산 활동기에는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사건들이 많 이 발생하였다. 제20연대는 10월 14일 광주에 진주하였는데 작전지역은 광주를 중심으로 한 전남과 전북 일부 지역이었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피해사건들이 가장 많이 발생한 지역은 전남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 히 인민군이 퇴각한 이후에 발생한 사건들이 많았다. 각 지역마다 수복 상황이 달랐고 수복 이후의 치안상태도 여전히 불안하여 전남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좌익이나 빨치산에 의한 사건 들이 발생하였다.

나오는 말 민족에게 환희를 가져다준 해방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예고했다. 광주시내의 충장로 금남 로를 비롯한 중심상가의 철시는 물론이고, 동네의 작은 구멍가게까지 문을 닫고 해방의 기쁨 을 만끽한 것이다. 일제말기의 혹심한 전쟁을 치루는 동안 일반 국민들의 생필품은 바닥난 상 태였기 때문에 상점들은 개점 휴업상태였다. 일부 문을 열고 있던 물자배급소나 개인 상점들 도 해방으로 문을 닫았으며 해방 직후 얼마동안 광주의 민간 거래는 완전히 중단되었다. 특히 광주 상거래의 70~80%를 장악하고 있던 일본인 상점들은 문을 굳게 닫고 몸을 감추고 주위 상황을 살피기에 급급해 있었다. 미군정이 진주하기 전까지의 해방 상황에서 민족간의 갈등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건준 조직과 같은 경우 해방 이후 새로운 민족국가를 설립하겠다는 강렬한 의지로 우익세력이나 좌 익세력 할 것 없이 모두가 혼연 일체가 되어 민족국가 수립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해방의 감격적인 분위기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누그러지면서 또 미군의 점령 정책이 시작되면서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들이 등장하고 그들이 이해관계가 반영되면 서 민족의 대동단결에 균열이 발생하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정치세력들은 각자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조직을 정비하기 시작하였고 일부 세력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보호막을 찾기에 급급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일반 시 민들은 분단국가가 아닌 통일국가 설립을 열망하는 요구가 너무 컷기 때문에 정치세력들간에 통합을 시도하려는 노력이 나타나기도 했다. 결국 1948년 8월 15일 남한정부, 9월 9일 북한 정부가 수립되면서 분단국가가 설립됨에 따 라 분단국가 수립을 지지했던 일부 세력들은 정치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고 이를 인정하지 않았던 세력들은 재야세력이 되어 정치권력에 대항하는 정치투쟁을 계속 전개해나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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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주제

미군정기 신문들에 투영된 광주학생운동 윤 선 자(전남대 교수)

머리말 2. 광주학생운동 기억 3. 광주학생운동 기념 1.

차 4. 5.

완전자주독립의 토대 맺음말

1. 머리말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연합국에 패망함으로써 한국은 일제로부터 독립하였다. 일제의 항복과 동시에 발족한 朝鮮建國準備委員會는 그해 9월 6일 朝鮮人民共和國 수립을 발표하였다. 조선건국 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 세력들이 한반도 정치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일제 패망 약 한 달 전부터 소련군이 한반도의 북쪽 지역에 진주하고, 9월 8일에는 미국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한반도에 대한 통치가 이루어지자 한국인들은 크게 혼란스러워 하였다. 일제의 패망이 한국의 완 전한 독립으로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9월 9일 미 극동사령부는 “북위 38도선 이남의 한국영 토와 한국인민에 대한 통치의 모든 권한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 아래 시행된다”는 포고령 제1호를 공포하였다. 38도선 이남에 미군정이 실시된다는 것이었다. 10월 10일에는 “38선 이남의 한국에 는 오직 미군정부가 있을 뿐이다.…자칭 ‘조선인민공화국’이라든가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은 권위와 세력과 실재가 전혀 없다”라는 미군정장관 아놀드(Archibold V. Arnold)의 성명이 발표되었다.48) 해방 이후 한국인들의 최고이자 긴급한 관심은 완전한 독립국가 수립이었다. 그리고 완전한 독 립국가 수립을 위한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典型은 일제강점기에 추진한 독립운동이었다. 國亡 이후 국내외에서 끊임없이 전개된 독립운동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19년의 3․1운동과 1926년의 6․10 만세운동, 그리고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이었다. 8월 15일에 해방되었으므로 3․1운동과 6․10만세 운동 기념일은 날짜가 지났고,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 기념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따라서 광주학 생운동 기념일이 해방 이후 가장 먼저 독립운동 기념일로 대두되었다. 광주학생운동은 1929년 10월부터 1930년 3월까지 계속되었다. 광주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 산되었고, 중국․러시아․일본․미주 지역의 반제학생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동안 광주학생운동에 48) 송건호, 「미군정하의 언론」,『한국언론 바로보기 100년』, 다섯수레, 2012,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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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 86주년 기념 특별학술회의

대해서는 발발원인, 전개과정, 결과, 한국독립운동사에서의 위치 등 여러 측면에서 많은 연구업적 이 축적되었다. 「판결문」과 당시의 신문기사들이 연구의 가장 기초적인 자료로 활용되었다. 그런 데 광주학생운동은 해방 이후에도 한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60년의 4월 혁명, 1980년 의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주역도 학생들이었는데, 불의에 항거하는 학생들의 행동은 1929년 일제 식민교육에 저항하였던 학생들과 같은 의미로 해석되고 연결되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광주학생운동이 한국인들에게 어떠한 의미로 어떻게 인식되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신문기사를 분석하는 것이다. 일제의 언론탄압으로 해방 당시 신문은 조선총독 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 그리고 일본인과 소수의 친일 지식인들을 위한 12개가 있었다. 해방 이후 1945년 말까지 40종 이상의 신문들이 창간되었다.49) 미군정청의 『조사월보』에 의 하면 1946년 9월 현재는50) 일간신문 57, 주간신문 49, 월간․격월간 등의 각종 잡지 154개 등 총 260개의 언론매체가 있었다.51) 그리고 1947년에는 일간 85, 주간 68, 격월간 12, 월간 154개 등 총 319개의 신문잡지를 기록하였다.52) 신문의 발행부수는 1947년 11월 현재 서울 주요 신문의 경우 465,000여부였다.53) 본고는 미군정기 일간 신문에 수록된 광주학생운동 기사를 분석하고자 한다. 일간 신문의 기사 들이 급박하게 전개되었던 해방공간의 상황을 정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미군정기에 간행되었 던 80여 개의 일간 신문 중 광주학생운동에 관한 기사를 수록한 신문은 그다지 많지 않다. 대부분 의 신문들이 영세하였고, 휴간(休刊)과 정간(停刊)이 빈번한 때문이었다. 본고에서 분석한 신문은 다음과 같다. 신문을 확보할 수 없어 북위 38도선 이남에서 발간된 신문만을 분석대상으로 하였다 는 아쉬움이 있다. <표 1> 미군정기 광주학생운동 기사를 수록한 신문들

신문명 민중일보 매일신보 신조선보 자유신문 대중일보 중앙신문 대한독립신문

창간일 1945. 9.22 1945. 9.24 1945.10. 5 1945.10. 5 1945.10. 7 1945.11. 1 1945.11. 3

경향 우익 우익 좌익 좌익 좌익 우익

신문명 조선일보 대동신문 동아일보 한성일보 독립신보 우리신문 조선중앙일보

창간일 1945.11.23. 속간 1945.11.25 1945.12. 1. 속간 1946. 2.26 1946. 5. 1 1947. 2.10 1947. 7. 1.

경향 우익 우익 우익 우익 좌익 좌익 좌익

2. 광주학생운동 기억 49) 김복수, 「미군정하 언론에 대란 연구:신문을 중심으로」,『정신문화연구』11-2, 한국학중앙연구원, 1988, 176. 50) 미군정은 1945년 10월 30일 신문 발행을 등기제로 규정(군정법령 제19호 ‘신문 기타 출판물의 등기’)하였다 가 1946년 5월 29일 허가제로 변경(군정법령 제88호 ‘신문 급 기타 정기간행물 허가에 관한 건’)하였다.(정진 석, 『한국신문역사』, 커뮤니케이션북스, 2013, 90-91) 51) 윤임술, 『한국신문백년지』, 한국언론연구원, 1983, 451. 이 책의 451-644쪽에 8.15해방 이후 정부수립 때까지 간행된 신문 107개가 소개되어 있다. 52) 김영희,「미군정 시대의 신문 연구」, 『저널리즘 연구』5, 이화여자대학교 언론홍보영상학부, 1975, 28. 53) 조선사정협회, 1947 ; 최 준, 『한국신문사』, 일조각, 1970, 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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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기 신문들에 투영된 광주학생운동

해방 후 신문들은 광주학생운동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정리하였다.54) 언론 통제 때문에 광주 학생운동이 전개되었던 당시에는 진상이 올바르게 보도되지 못하였고, 그 상태로 시간이 흘렀기에 항쟁의 전모를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55) 1929년 10월 30일 전남 나주에서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여학생을 희롱한 일본인 광주중학생을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이 구타하였는데, 이 사건이 민족감정에 불을 붙여 광주중학교와 광주고등 보통학교의 싸움으로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당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한국 전체의 의사 를 대표하여 싸웠다고 하였다.56) 보다 구체적으로는 일제의 식민지노예교육제도,57) ‘일제의 야만 적 노예교육’,58) ‘일제의 억압정책’,59) ‘일제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억압정책’,60) ‘식민지노예교육 반대, 일제타도’61)를 광주학생운동의 발발 원인이라 설명하였다. 문자에 이출입이 있고 표현방식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광주학생운동 발발의 원인을 일제의 식민지배, 더 구체적으로는 식민교육 제도였다는 것이다. 일본어 신문 『京城日報』 ‘학원의 자유와 학문연구의 자유’를 요구하며 일제 에 항거했다고 하였다.62) 그런데 朝鮮學徒隊가 1945년 10월 30일에 작성하여 한국인들에게 배포 한 「광주학생사건의 경위」라는 제목의 삐라를 보면, 광주학생운동이 1917년 11월 러시아혁명과 관련이 있다고 되어 있다.63) 즉 러시아혁명이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쳤는데 한국도 그 영향을 받았 는데 광주학생운동이 그렇다는 것이었다. 이어 광주학생운동의 전개에 대해서는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과 광주중학교의 일본인 학생간의 다툼이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중학교, 나아가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농업학교․전남사범학교․광주 고등여자보통학교와 광주중학교 및 일제경찰․관리들과의 분쟁으로 이어졌다고 하였다. 그런데 1945년의 신문들에서는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농업학교․전남사범학교․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의 2천 여 학생들이 “노예교육 철폐, 언론집회결사의 자유, 학생자치권 요구, 일본인 중학교 폐쇄’ 등의 깃 발 아래 의식적․조직적으로 반제투쟁을 하였다고 했는데, 1946년의 신문들에서는 광주여자고등보 통학교가 빠지고 3개 학교만을 언급하였다.64) 그리고 전국에서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여 194개교(초등 54, 중등 136, 전문 4) 5만 5천여 명 이 참여하였고, 수천명의 학생들이 희생되었다고 하였다. 76명 부상, 46명 검속, 200여 명 투옥이 라고,65) 4만여 명이 감금당하였고 2천여 명이 투옥되었다고,66) 체포되어 수감생활을 한 학생이 54)「조선학도대, 학생의 날 기념행사 개최」, 『매일신보』1945.11.2. ; 「광주사건기념일로 학생의 날 제정」, 『신조선보』1945.11.2. 55)「상기하라 17년 전 광주학생사건 전말. 민족적 모멸에서 발단, 전국적으로 과감한 투쟁을 전개」, 『중앙신 문』1945.11.4. 56)「조선학도대, 학생의 날 기념행사 개최」, 『매일신보』1945.11.2. 57)「11월 3일 果敢, 청년학도의 투쟁, 광주학생사건 기념 ‘학생의 날’」,『중앙신문』1945.11.2. ; 「기억 새로 운 광주사건, 금일 뜻깊은 ‘학생의 날’, 해방운동에 불멸할 역사 살리라」, 『자유신문』1945.11.3. 58)「사설:광주학생사건 기념일에」, 『독립신보』1946.11.3. 59)「광주학생사건 17주년」, 『조선일보』1946.10.20. 60)「史上에 燦然 ‘학생의 날’, 광주학생사건 17주년 기념」,『독립신보』1946.10.19. 61)「오늘 학생의 날, 상기하라 광주사건」, 『자유신문』1947.11.3. 62)「광주사건을 생각한다. 열과 힘을 굳게 한 학생일. 기념식전과 강연회 성황」, 『京城日報』1945.11.3. 63) 김현식․정선태 편저, 『‘삐라’로 듣는 해방 직후의 목소리』, 소명출판, 2011, 104. 64) 18년 전 광주학생봉기의 혁명에 희생된 영령 추도. 아아 영원히 기념할 역사적 투쟁일을 상기하라」,『대중 일보』1946.11.3. ; 「민족해방사에 빛나는, 오늘 광주학생사건 기념일, 불사조의 우리 학생혼」, 『독립신 보』1946.11.3. ; 「기억도 새로운 광주학생사건」,『한성일보』1946.11.3 65)「광주사건기념일로 학생의 날 제정」, 『신조선보』1945.11.2. 66)「역사의 날 절규하는 조선학도 불멸의 함성, 투쟁 고조된 광주사건 기념식전」, 『자유신문』194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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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 86주년 기념 특별학술회의

기만명이라고 신문들은 언급하였다.67) 당시는 아직 광주학생운동에 관한 자료조사도 되어 있지 않 고 따라서 연구도 진행되지 못하여 이렇게 다른 숫자들이 언급되었다. 그러나 각기 해방공간의 열 악한 정보와 조건 아래서 그들이 입수할 수 있는 자료에 근거하여 이러한 숫자를 제공하였을 것이 라는 것은 분명하다. 광주학생운동으로 체포되어 퇴학, 정학 등의 처벌을 받은 학생은 2,905명이 었다.68) 한편 광주학생운동의 희생자로 당시 광주고보 2학년 崔双乙의 이름이 거론되었는데69) 왜 그를 언급하였는지, 그리고 그가 누군지는 알 수 없다. 광주학생운동 참여자를 박해한 이들도 일제 경찰과 소방서원, 재항군인들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70) 또한 조선공산당의 사촉으로 광주 학생운동이 일어났다며 일제가 한국인들의 광주학생운동 참여를 경고했다고 하였다.71) 결국 젊은 학생들이 일본제국주의의 폭악한 힘에 용감히 도전한 것이고, 1919년 3월 1일의 독 립만세운동과 함께 특기할 역사적인 날이다. 몇몇 학생들의 사건이 아니고 전 민족적 공감과 지지 아래 전개되었고 그 규모가 전국으로 확대되어 5만여 명의 학생이 참가하였으므로 전 민족적이요 전 사회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72) 한편 광주학생운동에 직접 참여하여 재판을 받고 수감되었던 吳快一은 1945년 제1회 학생의 날 에「광주학생사건의 진상과 의의」라는 제목의 강연을 준비하였다가 중지당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인 1946년 광주학생운동의 전말을 알리고 의미를 부여하는 기사를 신문에 투고하였다.73) ‘광주학 생의 투쟁’이라 광주학생운동을 지칭한 오쾌일은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원인과 경과를 다음과 같 이 설명하였다. 즉 3․1운동 이후 앙양된 민족 내부의 혁명의욕이 성숙하고, 일제의 반동공세가 최 고조에 달하여 결정적 단계에 이르자 혁명적 학생․청년․근로자들이 투쟁하였다. 객관적 조건으로는 경제공황에 처한 자본주의일본의 한민족 분열정책 때문, 주체적 역량으로는 혁명적인 노동자․농민, 청년, 양심적 인테리겐차의 주동부대인 학생의 조직운동이 치열해졌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식민지 의 제반 차별에 각 학교와 학급을 토대로 사회과학연구회․독서회 등을 조직하여 맹휴, 수업거부, 사보타주, 가두데모 등으로 투쟁하였다.74) 공산주의자를 주축으로 혁명세력이 학생반제투쟁을 대 중화 즉 노동자․농민․소시민층과 결부 발전할 주체적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하여 조선학생운동 사상 처음으로, 3․1운동 이후 처음으로 성공적 투쟁성과를 거두었다. 광주학생의 투쟁은 전국의 학 생투쟁으로, 근로인민의 투쟁으로 발전하였고, 만주 5․30사건75)의 遠因이 되었고, 일본 도쿄[東京] 에서는 근로대중의 함성을 울렸고, 중국와 필리핀에서는 학생운동이 일어났고, 모스크바에서는 코 민테른 의제에 올려져 전세계 피압박민족의 환호를 샀다.76) 67)「사설 : 학생의 날」, 『민중일보』1945.11.4. 68) 한규무, 『광주학생운동』,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236. 69)「상기하라 17년 전 광주학생사건 전말. 민족적 侮蔑에서 발단, 전국적으로 과감한 투쟁을 전개」,『중앙신 문』1945.11.4. ; 「민족해방사에 빛나는 오늘 광주학생사건 기념일, 불사조의 우리 학생혼」, 『독립신보』 1946.11.3. 70)「18년 전 광주학생봉기의 혁명에 희생된 영령 추도. 아아 영원히 기념할 역사적 투쟁일을 상기하라」,『대중 일보』1946.11.3. 71)「민족해방사에 빛나는, 오늘 광주학생사건 기념일, 불사조의 우리 학생혼」, 『독립신보』1946.11.3. 72)「18년 전 광주학생봉기 혁명에 희생된 영령 추도, 아아 영원히 기억할 역사적 투쟁일을 상기하라」, 『대중 일보』1946.11.3. 73) 吳快一,「조선학생투쟁의 전통, -광주학생사건 기념일에-(下)」,『독립신보』1946.11.5. 74) 吳快一,「조선학생투쟁의 전통, -광주학생사건 기념일에-(上)」,『독립신보』1946.11.3. 75) 간도에서 1930년에 일어난 5.30사건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성환, 「시데하라(幣原) 외교와 간도 5ㆍ30 사건 : 시데하라(幣原)의 간도구상을 중심으로」, 『일본문화연구』16, 2006 ; 황민호, 「일제하 간도봉기의 전개와 한인사회의 대응」, 『한국민족운동사연구』65, 20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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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기 신문들에 투영된 광주학생운동

광주학생운동은 이후 세계사적 반동기의 내습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없지만 민족적 자존의식은 대중적으로 고도화되어 갔다고도 평가하였다.77) 광주학생운동이 성공했 는가 아닌가는 광주학생운동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와 연결된다. 광주학생운동 당시 광주학생운동에 서 요구하였던 사항들을 관철해내지 못하였다는 측면에서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하였던 학생들을 비롯하여 노동자․농민들은 독립운동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 였다. 그리고 계속 할 수 있는 용기와 동기는 광주학생운동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니 긍정적인 평 가가 가능하다. 그래서 오쾌일은 광주학생운동이 한민족 내부의 혁명운동의욕 성숙, 일제의 최고조 반동공세가 조건으로 이루어지자 혁명적 학생․청년․노동자․농민이 일제의 식민지배에 항거한 것이었다고 하였 다. 그리고 그 항거가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혁명운동세력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하였다. 광주 학생운동의 민족사적, 그리고 세계사적 의미를 규정한 것이다.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많은 신문들이 광주학생운동을 3․1운동과 비교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은 3․1운동 이후 6․10만세운동을 거쳐 의식적․조직적으로 결집된 한국청년들의 정열과 투지가 폭발한 것이라 설명되었다. 3․1운동 이후 처음보는 큰 사건,78) 3․1운동 이후 두 번째의 독 립대운동,79) 3․1운동 이후 처음보는 대중운동,80) 3․1운동 다음가는 민족해방운동,81) 3․1운동 이후 10년만에 일어난 민족투쟁이라고82) 규정하였다. 그리고 3․1운동과 광주학생운동을 다음과 같이 비 교하였다. 즉 학생들이 민족운동의 선두에서 전위적 역할을 한 것은 3․1운동과 광주학생운동이 같 은데 운동의 방향과 성질은 차이가 있다. 즉 투쟁의 정치적 강령과 조직형성에 대한 확고한 과학 적 의식이 침투해 있는데 그것은 3․1운동 이후 10년 동안의 성장 결과라는 것이었다.83) 한편 ‘11.3학생운동’84)이라 광주학생운동을 지칭한 임미란도 3․1운동과 광주학생운동을 비교하 였다. 3․1운동은 민족자본에 의하여, 광주학생운동은 무산계급에 의하여 주도되었는데, 3․1운동 이 후 민족자본은 대부분 일제에 완전 투항하고 일제침략자본의 예속자본으로 변질되어 한국노동자들 을 핍박하고 착취하는 주구가 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농민은 막스 레닌주의로 무장되고 그 전위당 이 되어 반제반봉건의 가장 견고한 혁명역량으로 반제투쟁을 전개하였는데 광주학생운동이 그러한 조직으로서 일어났다고 평가하였다.85) 중국의 5․4운동과 광주학생운동을 비교하기도 하였다.86) 즉 일제의 21개조 요구에 항거하고 친 76) 일본․중국․러시아에서의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반향은 김성민, 『광주학생운동연구』, 456-462 참조. 77)「사설 : 광주학생사건의 회고」, 『자유신문』1945.11.3. 78)「기억 새로운 광주사건, 금일 뜻깊은 ‘학생의 날’, 해방운동에 불멸할 역사 살리라」, 『자유신문』 1945.11.3. 79)「사설 : 학생의 날」, 『민중일보』1945.11.4. 80)「상기하라 17년 전 광주학생사건 전말, 민족적 모멸에서 발단, 전국적으로 과감한 투쟁을 전개」, 『중앙신 문』1945.11.4. 81)「18년 전 광주학생봉기 혁명에 희생된 영령 추도, 아아 영원히 기억할 역사적 투쟁일을 상기하라」, 『대중 일보』1946.11.3. ; 「사설:19년 전 이 날의 정신으로 상호 상애 학업에 맹진하자」, 『대중일보』1947.11.4. 82)「전국 학원에 뻗친 독립항쟁의 날」, 『대동신문』1947.11.2. 83)「사설 : 지도자여 반성하라, 광주학생사건 기념에 際하야」, 『독립신보』1947.11.2. 84) ‘11.3학생운동’이 ‘광주학생운동’이라는 명칭보다 낫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고(한규무, 『광주학생운동』, 5) ‘11.3학생독립운동’이라는 명칭이 더 낫다고 하는 연구자도 있다.(박찬승, 「11.3학생독립운동과 나주」, 『광주학생독립운동과 나주』, 경인문화사, 2001) 85) 임미란, 「11.3일 학생의 날의 의의」,『우리신문』1947.11.4. 86)「사설 : 광주학생사건의 회고」, 『자유신문』194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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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 86주년 기념 특별학술회의

일파 처단을 주장한 베이징[北京]의 학생운동이 일본의 21개조 요구전국으로 확산되었던 중국의 5․4운동처럼 광주에서 시작된 광주학생운동이 일제의 식민노예교육에 항거하며 전국으로 확산되었 다는 것이었다.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용어는 다양하다. 광주고보사건,87) 광주학생사건으로 지칭되었는데 이는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 신문들과 일제의 판결문 등에서 사용한 용어들이다. 일제강점 기라는 현실에서 광주학생운동을 일개 사건으로 폄하하려는 일제의 태도가 강력하게 반영된 용어 들이다. 역사적 용어이지만 해방 이후이니 이 용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했다. 그러나 해방 공간의 혼란상은 그러한 고민을 진지하게 할 수 있는 시간도 여건도 허락하지 않았기에 이 용어는 그 이후에도 상당 기간 사용되었다.88) 광주학생봉기,89) 11․3학생운동이라 지칭하기도 하였는데90) 광주학생봉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반면 ‘11․3학생운동’이라는 용어는 1930년에 이미 언급되었던 것으로91) 광주에서 시작되었지만 광주학생봉기라고 하였을 때 광주라는 지역에 한정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또는 광주에서 시작은 되었지만 전국으로 확산되었기 때문에 운동 이 처음 시작된 된다 날짜를 사용한 것이라 생각된다. 3․1운동과 6․10만세운동을 지칭할 때 각각의 운동이 시작된 첫 날을 용어로 사용한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광주학생운동이라 지칭되기 도92) 하였는데 같은 신문에서 이후에도 광주학생사건이라고 지칭한 것으로 보아 두 용어를 구분한 것은 아니다. 광주학생운동을 어떻게 지칭하는가는 광주학생운동을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하는가 하는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그러나 해방 공간 신문들에서 사용된 용어는 일제강점기 식민지 배를 받았을 때와 마찬가지의 용어가 주로 사용되었다. 그것은 아직 독자적인, 한국․한국인을 중심 으로 하는 독립운동사로서의 광주학생운동을 객관적으로․논리적으로 이해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보 여준다.

87) 일제강점기에 이 용어를 사용한 기사는 다음과 같다. 기사 제목에 사용한 것은, 「광주고보사건, 4명 집행유 예」,『중외일보』1928.11.10 / 「폭행생도 送局 광주고보사건」,『매일신보』1929.4.13 / 「긁어부스럼, 광 주고보사건」,『동아일보』1929.11.11. 등이고 기사 내용에서 이 명칭을 언급한 것은, 「학생사건 주모자 처 분 각 교를 통하야 총 280명을」,『매일신보』1930.1.8. / 「신의주고보생, 9일부터 등교, 다섯 명 퇴학생 내 고 如常히 수업개시」, 『중외일보』1930.1.12. / 「신의주 경계」, 『중외일보』1930.1.22.이다. 88) 이에 대해서는 한규무, 「광주학생운동' 관련명칭의 용례와 의미」, 『한국독립운동사연구』34, 2009 참조. 89) 吳快一,「조선학생투쟁의 전통, -광주학생사건 기념일에-(下)」,『독립신보』1946.11.5. 90) 임미란, 「11.3일 학생의 날의 의의」,『우리신문』1947.11.4. 91) 留韓國勞動者同盟, 「11·3운동 1주년 기념에 즈음하여 국내혁명군 중에 檄함」;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朝 報秘 제1517호 불온격문우송에 관한 건」 , 1930.11.17, 일본외무성 외교사료관 소장. 92)「상기하라 17년 전 광주학생사건 전말, 민족적 모멸에서 발단, 전국적으로 과감한 투쟁을 전개」, 『중앙신 문』194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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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기 신문들에 투영된 광주학생운동

3. 광주학생운동 기념 8․15 해방 후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기억은 기념으로 연결되어 ‘학생의 날’93) 創定으로 구체화되 었다. 조선학도대를 비롯하여 27개의 청년단체가 광주학생운동을 회고하고, 청년의 의지를 굳게 하고 정열을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집중하기 위해 광주학생운동이 시작된 날을 학생의 날을 결정하 였다. 더불어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위하여 학생들의 총력을 바치기로 하였다. 학생의 날을 ‘새 명 절’이라 지칭하기도 하였다.94) 1945년 학생의 날을 전후하여 11월 2일부터 5일까지 기념 강연, 기념식, 기념 운동경기를 기념 행사로 계획하였다. 즉 경성에서는 11월 2일 기념 강연은 남녀 중등학교별, 남녀 전문학교 지역별 로, 11월 3일 9-11시에 明治座에서 기념식, 오후 2시부터 경기중학교와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강 당에서 일반 강연, 오후 6시부터는 각 극장을 개방하여 학도대원과 청년단체원의 강연, 11월 4․5일 오전 9시부터 경성운동장에서 운동경기를 한다는 것이었다.95) ‘광주학생사건기념투쟁위원회’에서 준비한 광주학생운동 기념 강연의 제목과 연사는 다음과 같았다. <표 2> 제1회 학생의 날 기념 강연회

경기중학교 강당 광주학생사건의 진상과 의의 : 중앙신문 오쾌일 현정세와 학생의 임무: 학도대 김홍태(金虹泰) 현단계의 여성문제: 健婦 고명자(高明子) 객관적 정세와 조선독립: 朝靑 태재기(太戴基) 조선민족의 해방과 청년의 임무: 共靑 배원필(裵元弼)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강당 광주학생사건의 진상과 의의: 서울시민위원 이신연) 현정세와 학생의 임무: 학도대 장석두(張錫斗) 제목 미정: 건국부녀동맹 정온(鄭溫) 제목 미정: 조선해방청년동맹 이호제(李昊濟) 제목 미정: 조선소년동맹 김원식(金元植)

출전 : 「기념투쟁위원회 대강연」, 『자유신문』1945.11.3. 강연 제목을 보면 ‘광주학생사건의 진상과 의의’와 ‘현정세와 학생의 의무’는 두 학교에서 같다. 특히 ‘현정세와 학생의 임무’ 강연은 두 학교 모두 조선학도대에서 맡았다. 그런데 경기중학교의 강연 제목과 강사들이 정해진 것과 달리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에서 행해질 강연은 강연 제목이 정 해지지 않고 강연자만 언급되었다. 그러나 경기중학교에서 건국부녀동맹, 조선건국청년회의 회원이 강연을 맡았고,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에서의 강연도 같은 단체에서 맡았으니 비슷한 제목과 내용 으로 강연이 계획되었으리라 여겨진다. 강연을 맡게 될 강사들과 단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오쾌일은 광주학생운동 당시 나주에서 통학하던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으로 독서회의 핵심적인 활동가였다. 4종의 선전 전단 4,000부를 93) 1953년 10월 30일 국무회의에서 ‘학생의 날’로 결정하였고, 1973년 3월 24일 유신국무회의에서 학생의 날 을 기념일에서 제외하였고, 1982년 10월 29일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제정되었다.(윤선자, 「광주학생독립운 동 기념사업 평가와 향후 과제」, 『호남문화연구』43, 2008, 266-267, 94)「새 명절 ‘학새의 날’, 광주학생사건 기념식 엄숙」, 『신조선보』1945.11.4. 95)「조선학도대,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결정」,『매일신보』1945.10.29. ;「학도들의 투혼」, 『자유신문』 1945.10.29. ;「광주사건기념일로 학생의 날 제정」,『신조선보』1945.11.2. ; 「학생의 날 기념행사 안내」, 『자유신문』1945.11.2. ;「상기하자! 광주사건 明 3일은 ‘학생의 날’」,『자유신문』194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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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 86주년 기념 특별학술회의

광주고보와 농업학교 학생들에게 배부하는 등 광주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체포되어 대구복 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96) 그러므로 ‘광주학생운동의 진상’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설 명해 줄 수 있는 적합한 인물이었다. 건국부녀동맹은 1945년 8월 17일 黃信德․劉英俊 등이 발기하여 17세 이상의 유지로서 구성되었 다.97) 여성운동에 대한 입장이나 일제강점기의 행적에 관계없이 여성운동가들이 총망라되어 있었 는데 결성 한 달도 못되어 좌우익 여성운동으로 분열되어 9월 10일 한국애국부인회가 결성되고 조선여자국민당이 창당되었다.98) 조선건국청년회는 1945년 9월 29일 결성되었고,99) 조선공산주의 청년동맹은 1945년 8월 18일 조직되었다.100) 강연 장소인 京城女子醫學專門學校는 1928년 9월 朝鮮女子醫學講習所로 개강되었고101), 1938 년 4월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로 인가되었으며,102) 1938년 11월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의 새 교사 가 경성부 명륜동에 신축 준공되었다.103) 경기중학교는 서울 종로구 花洞에 위치하였다.104) 두 학 교는 창덕궁․창경궁․종묘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위치하였다. 두 학교를 강연 장소로 정한 것은 거리 를 고려한 것이고, 남․여 학교를 고려한 것이라 생각된다. 11월 3일 제1회 학생의 날 기념식은 조선학도대가 주최하였다. 명치좌에서 태재기의 사회로 애 국가 합창,105) 오기옥의 개회사, 묵상, 위원장 인사, 강연(광주학생사건의 진상 의의 : 이신연), 학 생의 날 제정 취지 설명(조선학도대 정상유), 허 헌․중앙인민위원 대표 서중석․조선공산당 대표 하 필원의 축사, 각 학교대표의 궐기의 말, 김종설의 광주고보생에게 보내는 메시지, 프로음악동맹의 독창, 조선학도대의 만세 삼창으로 기념식은 이어졌다. 광주학생운동 희생자들에게 조의를 표하며, 국운 타계를 위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라는 내용의 인민공화국에서 보낸 메시지로 읽혀졌 다.106) 한편 축사를 했던 허 헌은 ‘광주학생운동 투사이자 당시[1945년] 중앙인민위원회 위원’,107) 당 시 신간회 위원,108) 광주학생운동과 관련있는 민중대회사건 희생자109)라고 세 개의 신문이 그의 대한 설명을 달리 하였다. 세 신문 모두 허 헌이 광주학생운동과 관련이 크다는 것은 알았지만, 신 간회 위원, 민중대회사건 희생자라고 지칭함으로써 신간회 및 민중대회사건이 광주학생운동 어떤 관계인지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혼란을 줄 수도 있었다.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임을 강조한 것 은 중앙인민위원회가 광주학생운동의 순수하고 민족운동에 투신한 자랑스러운 인물들이 참여한 것 임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96)「판결문」(1931.6.13. : 대구복심법원) ; 「판결문」(1930.10.18. : 광주지방법원 형사부). 97) 김행선, 『해방정국 청년운동사』, 선인, 2004, 45. 98) 양동숙, 「해방 후 우익여성단체의 조직과 활동 연구:1945-1950」, 한양대 박사학위논문, 2010, 26, 30. 99)「조선건국청년회 결성」,『매일신보』1945.9.29. 100) 한림대학 아시아문화연구소 편, 『조선공산당문건자료집』, 한림대학교 출판부, 1993, 7-9. 101)「조선여자의학강습소 개강, 구월부터 강습회를 열어」, 『동아일보』1928.7.11. ; 김상덕, 「여자의학갑습소 -1938년에서 1938년까지-」, 『의사학』2-1, 1993, 81. 102)「백화난만의 佳節 맞어 금일 여의전 遂 認可 5월에 개교 만반을 준비」, 『동아일보』1938.4.10. 103)「여의전 新校舍 준공, 明倫町 새 교사에서 수업개시」,『동아일보』1938.12.2. 104)「경기중학교 동창회, 『매일신보』1942.11.4. 105)「역사의 날 절규하는 조선학도 불멸의 함성, 투쟁 고조된 광주사건 기념식전」, 『자유신문』1945.11.4. 106)「새 명절 ‘학생의 날’ 광주학생사건 기념식 엄숙」, 『신조선보』1945.11.4. 107)「새 명절 ‘학생의 날’ 광주학생사건 기념식 엄숙」, 『신조선보』1945.11.4. 108)「흥분과 분노의 坩堝, 광주학생사건 기념대회 대성황」, 『중앙신문』1945.11.4. 109)「역사의 날 절규하는 조선하도 불멸의 함성, 투쟁 고조된 광주사건 기념식전」, 『자유신문』194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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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기 신문들에 투영된 광주학생운동

그러나 많은 청년단체들이 준비한 강연회는 중지되었다. ‘부득이한 사정’ 때문이라고 하였는 데110)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았다. 11월 4일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운동경기에서는, 광주학생운동

이 일어났을 때 서대문감옥에 있었던 여운형이 축사를 하였다. 학생들은 ‘여운형 선생 절대지지 만 세’와 ‘공화국 만세’를 부르면서 운동장을 시위행진하였고 정오부터 육상, 농구, 축구 등의 경기를 시작하였다. 운동경기는 광주사건기념투쟁위원회에서 기념행사로 이루어졌다.111) 광주학생운동의 진원지 광주에서는 광주시민들이 종합기념행사를 하고, 조선학생운동사112)를 편찬하여 선배들을 기념하기로 하였다.113) 학생의 날 창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조선학도대는, 1945년 8월 16일 건국치안대 산하조직으 로 조직된 ‘건국학도대’와 분리되어 “정치적 색채를 떠나서”라는 표어 아래 전문․대학 학생들이 1945년 8월 25일 조직하였다. 이들은 치안유지운동에 진력하였는데 곧 정치색채를 떠난 치안이 일종의 기만적인 표어라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열흘 후인 9월 25일 “학생은 총의에 의하여 자주 적 입장에서 신국가 건설에 매진한다”는 새로운 강령을 채택하고 운동 방향을 전환하였고, ‘인공 지지’를 결의하였다.114) 조선학도대와 함께 학생의 날 창정에 참여한 27개의 청년단체가 어떤 것들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학생의 날 창정 약 일주일 전인 1945년 10월 23일 서울시내 26개 청년단체 대표 100여 명 이 만나 ‘전국청년단체대표자회’를 결성하였는데 이들 단체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 단체들은 강남 청년동맹, 건국부녀동맹청년부, 건청회, 경서청년동맹, 낙산청년동맹, 동아청년회, 북악청년동맹, 실 업청년동맹, 인왕청년동맹, 전농청년대, 조선건국청년회, 조선군인동맹, 조선근로청년동맹, 조선청 년단, 조선청년동맹건청대, 조선학도대, 조선학병동맹, 조선해방청년동맹, 청년돌격대, 청년연학회, 출판노조청년회, 해방청년단, 혁신청년동맹 등이다.115) 기념식이 거행될 명치좌는 명동에 위치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극장이었다. 일본인 이 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가 일본인을 대상으로 건설하여116) 1936년 10월에 준공한 영화와 연극 전용극장이었다.117) 1946년 1월 1일부터 國際劇場,118) 1947년 11월 30일부터 市公館으로119) 명 칭이 변경되었다. 강연을 위한 장소로 각 극장을 학생에게 개방하라고 하였는데, 해방 당시 남한에 는 97개, 북한 지역에는 90여 개의 극장이 있었다.120) 기념 운동경기가 열릴 경성운동장은 1925년 10월 15일 개장되었는데121) 한국 최초의 종합운동 장이었으며, 2만 5천 8백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국제적인 규모의 경기장이었다. 육상경기장, 야구 110)「흥분과 분노의 坩堝, 광주학생사건 기념대회 대성황」, 『중앙신문』1945.11.4. 111)「약동하는 청춘군상, 광주사건 기념 경기대회 대성황」, 『중앙신문』1945.11.5. 112) 그로부터 약 30년의 시간이 지난 1974년 광주학생독립운동동지회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사』(국제문화 사)를 간행하였다. 113)「기억 새로운 광주사건. 금일 뜻깊은 ‘학생의 날’, 해방운동에 불멸할 역사 살리라」, 『자유신문』 1945.11.3. 114) 건국청년운동협의회, 『대한민국건국청년운동사』, 1989, 262 : 김행선, 『해방정국 청년운동사』, 71. 115) 여기에 언급된 단체는 23개이다. 김행선, 『해방정국 청년운동사』, 109. 116) 유민영, 『한국근대극장 변천사』, 태학사, 1998, 180. 117) 이근혜, 「일제강점기 근대문화공간 표현 특성에 관한 연구」, 경원대학교 일반대학원, 2008, 89-93. 118)「명치좌를 국제극장으로」, 『동아일보』1946.11.7. 119)「국제극장을 시공관으로」, 『조선중앙일보』1947.12.13. 120) 이명자, 「미․소 군정기(1945~1948) 서울과 평양의 극장연구」, 『통일과 평화』1-2, 서울대학교 평화연구 원, 2009, 203. 121)「만민환호리에 장엄성황을 呈한 경성운동장 개장식」, 『매일신보』1925.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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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 86주년 기념 특별학술회의

장, 정구장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민족감정 표출의 장, 체육을 통한 군국주의 체화의 장, 행사를 통 한 체제 과시의 장, 세계와 조우의 장, 경성의 일상적 상징물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122) 1946년 학생의 날 기념식은 광주학생사건기념행사준비위원회에서 서울학생통일촉성회123)의 후 원을 얻어 11월 2․3일 서울운동장에서 운동경기, 11월 3일 기념학생대회를 개최할 예정이었다.124) 그러나 기념학생대회의 내용이 무엇인가는 제시하지 않아 알 수 없다. 특히 1945년의 광주학생운 동 기념일이자 제1회 학생의날에 중지당한 강연회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한편 남조선 9개 정당(인민당, 독립노동당, 공산당, 신민당, 사회민주당, 한국민주당, 청우당, 한 독당, 신진당) 청년부에서 광주학생운동 기념일을 민족적 투쟁의 날이라며, 10월 27일부터 10월 31일까지 토의를 거쳐 광주학생사건 공동행사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9개 정당 공동주최로 11월 5 일 천도교회장에서 웅변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125) 남조선만 언급한 것은 이미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이 분리되어 있던 현실 때문이었다. 기념행사를 준비하기에는 시간적으로 촉박하여 웅변대 회를 준비하였는데, 1946년의 웅변대회도 당국의 불허가로 중지당하였다.126) 1945년 강연회가 중지된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던 것처럼 1946년 웅변대회가 중지당한 이유도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11월 3일 광주의 각 학교 학생들이 광주학생운동 연합기념식과 각종 행사 를 거행하려 했는데 중지당하자 2천여 명의127) 학생들이 시위행렬을 하였고 경관대와 충돌하여 경관대의 발포로 학생 3명이 중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그리고 광주학생운동 기념식이 중 지된 것은 미군정의 식량정책에 반대하고 경찰의 편파적 좌익단체 탄압 때문에 일어난 전남지방의 소요사건 때문이라고 보도하였다.128) 송정리에서 천여명의 시위군중이 경관대와 미군의 출동으로 해산하였고,129) 광주학생운동의 발단학교인 광주고보 당시 서중학교가 휴교를 당하였다는 소식도 수록하였다.130) 1946년 9월 23일 부산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을 시작으로 11월까지 남한의 거의 전지역에서 노 동자․농민․학생들의 봉기가 계속되었다. 조공의 신전술과 미군정의 박헌영 체포령 등이 총파업의 직 접적인 계기였는데, 열악한 노동조건과 절대빈곤에 시달리던 노동자․농민들의 현실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웅변․연설․강연은 미군정기 문맹률과 매체보급률, 커뮤니케이션 체계의 미흡으로 인해 매우 중요 122) 유근필,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기사를 통해 본 경성운동장의 장소성」, 『기초조형학연구』15-2, 한국기 초조형학회, 2014 참조. 123) 1946년 2월 중순 서울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김행선, 『해방정국 청년운동사』, 223) 124)「史上에 燦然 ‘학생의 날’, 광주학생사건 17주년 기념」,『독립신보』1946.10.19. ; 「광주사건 기념, 학생 대회를 준비」, 『자유신문』1946.10.19. ; 「광주학생사건 17주년, 11월 3일 기념행사 거행」, 『조선일보』 1945.10.20. 125)「광주학생사건, 9정당서 학생웅변회 개최」, 『독립신보』1946.11.3. ; 「기억도 새롭다. 오늘 광주학생 기 념일」, 『동아일보』1946.11.3. ; 「광주학생사건 기념식을 거행」,『조선일보』1946.11.3. 126)「광주학생사건 학생웅변대회 중지」, 『동아일보』1946.11.5. ; 「광주사건 강연 중지」, 『자유신문』 1946.11.5. 127) 조선일보는 1500여 명이라 하였고 전남군정장관의 명령으로 경찰과 미군이 삼엄한 경게를 한다고 하였다. (「광주학생사건 기념일에 광주의 중등학생들 시위행진」, 『조선일보』1946.11.7. 128)「광주충돌사건. 경찰지서 면사무소 충화(衝火)」,『대중일보』1946.11.6. ; 「전남소요 재연」, 『대한독립 신문』1946.11.6. ;「광주서 학생시위, 기념행사 중지로 경찰과 충돌」, 『독립신보』1946.11.6. ; 「광주서 학생의 날 시위」, 『자유신문』1946.11.6. 129)「송정리서 시위」, 『자유신문』1946.11.7. 130)「광주서중 휴교」, 『대한독립신문』1946.11.6. ; 「西中學 휴학」, 『독립신보』1946.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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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기 신문들에 투영된 광주학생운동

한 의미를 지니는 대중선동수단이었다.131) 일제의 1944년 조사에 의하면, 남한의 1천 7백만 인구 중 약 41.4%인 7백 3만 3천명이 비문해자였다.132) 1945년 12월 15일 미군정청 학무국의 통계에 의하면, 38도선 이남의 6-18세 학령아동은 약 567만 8,139명이었고 그중 30%인 171만 3,247명 이 취학 중이었다.133) 정확한 정보가 부재하고 매체들을 접할 수 있는 조건이 매우 열악한 상황에서 웅변이나 강연은 많은 이들에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정간과 휴간, 폐간 등이 빈번한 가운데도 신문을 접할 수 있었던 사람들, 신문을 읽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미군정기의 혼란스러움을 이해하기 쉬었다. 그러 나 신문을 접하고 읽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따라서 강연자․웅변자로부터 강연 현장에 서 필요한 내용을 듣고, 의문이 가는 것은 물어볼 수도, 그곳에 함께 모인 이들과 토론을 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여론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러므로 미군정 당국은 여론이 조성될 수 있는 강연과 웅변의 장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군정기 광주학생운동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한 행사들은 1945년 제1회 학생의 날 기념행사 부터 차질을 빚었다. 광주학생운동 참여자, 청년단체들에서 준비한 강연회는 중지당하였고, 기념식 과 운동경기만이 이루어졌다. 1946년에도 준비하였던 웅변대회는 중지당하였고, 기념식만 가능하 였다. 1947년에는 기념식조차도 어려웠다. 광주학생운동 기념일에 기념행사를 거행한다는 것은 해 방 이후 완성할 새로운 모습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토대를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에서 찾는다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광주학생운동은 조국을 향한 학생들의 희망과 열정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국 가에 그들을 기여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기의 혼란한 정치 현실, 그리고 한국인 들이 온전하게 갖지 못하였던 한국 주권의 부재 현실은 그러한 것들을 어렵게 만들었다.

4. 완전자주독립의 토대 신문들은 광주학생운동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 민족사적 위치를 정립하기 위해 노력한 모습을 보였다. 광주학생운동은 초등․중등․전문 학교 294개교 5만 4천명이 참여한, 3․1운동 이후 가장 대 중적․조직적인 민족투쟁으로 평가하였다.134) 학생의 투쟁에서 시민․노동자의 투쟁으로, 지방의 투쟁 에서 전국의 투쟁으로 확산되었고 민족해방 일제반대투쟁으로 전개되었다고 하였다.135) 몇몇 학생 들의 사건이 아니고 전 민족적 공감과 지지 아래 전개되었고 그 규모가 전국으로 확대되어 5만여 명의 학생이 참가하였으므로 전 민족적이요 전 사회적이라고 하였다.136) 광주중학교와 광주고보의 싸움이 일본인학생과 조선인학생의 싸움으로 되어 광주고보․광주사범․광주농업의 3교 학생이 봉기 하여 일제경찰․소방서원․재향군인들의 박해를 받으며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광주 에서의 항쟁소식이 서울로 전파되고 각지로 알려져 전국 각지에서 남녀학생들이 호응한 민족해방 운동이었다고 하였다.137)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투쟁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일본․소련․런던의 131)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2권』, 인물과 사상사, 2004, 288-297. 132) 이희수, 「미군정기 농민정치교육소사:공보부의 활동을 중심으로」, 『한국교육사학』19, 1997, 299. 133)「군정청 학무국, 38도 이남의 학생수 발표」, 『동아일보』1946.2.6. 134)「학도들의 투혼」, 『자유신문』1945.10.29. 135)「상기하라 17년 전 광주학생사건 전말. 민족적 모멸에서 발단, 전국적으로 과감한 투쟁을 전개」, 『중앙신 문』1945.11.4. 136)「조선학도대, 학생의 날 기념행사 개최」, 『매일신보』194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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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 86주년 기념 특별학술회의

신문들에도 그 소식이 실렸다. 그러므로 광주학생운동 참여학생들은 한국민족해방운동의 전위역할 을 하였다고 평가하였다.138) 학생들이 일제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억압정책에 항거하여 조국해방 투쟁의 전위적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었다.139) 그리고 광주학생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학생을 전위로 청년, 근로인민이 일제에 항거하였는데 일제의 잔인무도한 탄압으로 최후의 승리를 얻지는 못하였으나 한국민족해방투쟁사에서 특기할만한 항쟁이라고 평가하였다.140) 광주학생운동은 민족해방투쟁의 일익이라 평가되었다. 학생들이 사화과학 연구결과를 노동자․농 민에게 침투시킴으로써 학생운동이 피압박민족해방운동, 계급투쟁의 전술적 역할을 하였다고 하였 다. 그러나 광주학생운동의 희생 대가는 크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첫째로 학생조직운동이 전국적 으로 수립되지 못하였고, 둘째로 학술적 역할을 할 수 있는 학생들의 운동을 민족해방운동 내지 계급투쟁으로 연결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한편 당시의 과제는 민족통일전선이라고 하 였고, 학생운동은 청년운동에 중요한 주체(主體)를 형성한다고 학생운동과 청년운동의 관계를 규정 하였다.141) 이러한 평가와 서술을 한 후 신문들의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서술은 당시 한국이 안고 있던 현실적인 문제로 연결되었다. 광주학생운동 내지 광주학생운동의 주역이었던 학생과 청년들 에게 한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해 진력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은 해방 공간에서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토대로 강조되었다. 광주학생운동 기 념일을 학생의 날로 창설한 것은 “모든 불의와 속박에 싸우기 위해”,142) 완전독립을 위해서였 다.143) 학생들과 청년들의 의지를 견고하게 하고 정열을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집중하자고 하였 다.144) 1945년 11월 3일 거행된 학생의 날 기념식에서는 인민공화국 지지와 민족반역자 친일파를 소탕하여 한국 독립에 총역량을 결집하여 투쟁하기를 맹세하자고 하였다.145) 같은 날 광주학생사 건기념계획위원회에서 광주고보생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광주학생운동이 사회적으로 큰 충동을 주 고 세계적으로도 여론을 환기했다면서, 청년과 학생들이 새로운 한국의 완전독립과 계급해방에 적 극 나서줄 것을 촉구하였다.146) 학생운동은 불의나 권세에 아부해서는 안되고 당면 과제인 민주건국에 주력해야 한다고 하였 다.147)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한 때문에 출학, 감시, 금고 등을 당하여 일생을 버린 이도 있고, 조국 광복과 민족해방을 위해 계속 싸운 이들도 있는데 전국의 모든 학생들은 다시 결집하여 미묘한 국 제정세 아래 조국의 운명을 생각하고 선배들 못지 않은 업적을 이루라고 하였다.148) 연합국의 승리로 일제에서 해방되었으니 학생들은 조국의 완전해방에 큰 일꾼이 되어야 하는데, 137)「18년 전 광주학생봉기의 혁명에 희생된 영령 추도. 아아 영원히 기념할 역사적 투쟁일을 상기하라」,『대 중일보』1946.11.3. 138) 김현식․정선태 편저, 『‘삐라’로 듣는 해방 직후의 목소리』, 소명출판, 2011, 104. 139)「史上에 燦然 ‘학생의 날’, 광주학생사건 17주년 기념」,『독립신보』1946.10.19. 140)「상기하라! 광주학생사건, 학원의 불상사 없애고 새로운 불사조되라! 정의와 진리 추구는 학도의 사명」, 『독립신보』1947.11.2. 141)「논설 : 광주학생사건의 교훈」, 『중앙신문』1945.11.4. 142)「광주사건기념일로 학생의 날 제정」, 『신조선보』1945.11.2.. 143)「상기하자! 광주사건 明 3일은 ‘학생의 날’」, 『자유신문』1945.11.2. 144)「조선학도대,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결정」, 『매일신보』1945.10.29. 145)「새 명절 ‘학생의 날’ 광주학생사건 기념식 엄숙」, 『신조선보』1945.11.4. 146)「영웅적 투쟁에 경의, 광주학생에게 보내는 메시지」, 『중앙신문』1945.11.4. 147) 吳快一,「조선학생투쟁의 전통, -광주학생사건 기념일에-(下)」,『독립신보』1946.11.5. 148)「전국 학원에 뻗친 독립항쟁의 날」,『대동신문』1947.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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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기 신문들에 투영된 광주학생운동

일부 학생은 선배의 피(업적/희생)를 더럽힌다고 비판하였다. 동족상잔은 국가를 멸망하게 하니 조 국의 자주독립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하였다.149) 연합국의 승리로 해방을 맞았으니 학생들은 무엇 을 생각하며 기념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하며, 새로운 맹세로 광주학생운동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150) 일제의 야만적 노예교육에 항거한 것을 시작으로 모든 한국학생, 근로자들이 반일제 투쟁을 전 개한 날이광주학생운동이니 그러한 전통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은 새로운 한국 건설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151) 광주학생운동이 해방공간의 정치정세에 주는 교훈은 광주학생운동에서 발휘된 과학적 지도방법 과 통일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일제의 지배는 끝났지만, 민족의 자주독립은 미완성인데 국제정세의 긴박한 추이는 통일독립에 큰 암영을 던지고 있으니, 청년학생들은 애국적 전통을 확보하라고 요 구하였다. 그리하여 민주건국을 위한 활동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152) 1947년 광주학생운동을 기념하여 조선민주학생연맹153)이 발표한 성명은 1946년 말 내지 1947 년 초까지 미․소 양군을 철군시키고 조선인민의 자력으로 자주정부를 수립하며, 단정 수립을 음모 하는 이들에게는 적극 투쟁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민족해방과 민주학원건설을 위해 희생 적으로 투쟁한 광주선배들에게 보답하는 길이라는 것이었다.154) 겨우 얻은 해방이 친일파들의 조량의 터전이 되어 조국과 민족이 독립과 예속의 기로에 섰으니 3․1운동, 6․10만세, 광주학생운동의 전통을 계승하여 조국의 완전자주독립 전취에 뭉치자고 하였 다.155) 그리고 학통156)과 민주학생연맹의 11월 3일자 담화와 성명서를 수록하였다.157) 학통의 담 화는, 애국학생을 검거, 학살, 밀고하던 친일파들이 해방 후에도 민주독립과 민주학원건설을 계속 방해하고 있다며,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미․소 양군이 동시에 철수하고 한국인들에게 정부수 립을 일임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더불어 단정 음모를 철저히 분쇄할 것이라 선언하였다. 민주학 생연맹의 성명서는, 미․소 양군을 철군시키고 한국인들의 자력으로 자주정부를 수립하며, 단정 수 립을 계획하는 이들에게는 적극 투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민족해방과 민주학원건설을 위 해 희생적으로 투쟁한 광주선배들에게 보답하는 길이라는 의미였다. 광주학생운동의 투지를 계승 하여 건국에 전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158) 미군정기 신문들에서 언급한 광주학생운동은 조국의 새로운 건설, 완전한 자주독립에 헌신하라 는 것이었다. 그것이 일제의 식민교육에 항거하였던 일제의 식민지배에 저항하였던 광주학생운동 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149)「상기하라! 광주학생사건, 학원의 불상사 없애고 새로운 불사조되라! 정의와 진리 추구는 학도의 사명」, 『독립신보』1947.11.2. 150)「오늘 학생의 날, 상기하라 광주사건」, 『자유신문』1947.11.3. 151)「사설 : 광주학생사건 기념일에」, 『독립신보』1946.11.3. 152)「사설 : 지도자여 반성하라, 광주학생사건 기념에 際하야」, 『독립신보』1947.11.2. 153) 1947년 6월 17일 시천교당에서 결성식이 거행되었다.(「민주학생연맹 발족」, 『독립신보』1947.6.18.) 좌 익으로 분류된다.(김행선, 『해방정국 청년운동사』, 380) 154)「맹세를 새로이, 民主學聯 성명」, 『독립신보』1947.11.2. 155)「해방 후 세 번째 맞이하는 광주학생사건 기념일. 훌륭한 전통으로 戰取하자」, 『조선중앙일보』 1947.11.2. 156) 좌익학생운동연합체.(이재오, 『해방 후 한국학생운동사』, 형성사, 1984, 80) 157)「당시의 친일파 아직도 跳梁」, 『조선중앙일보』1947.11.2. 158)「독립을 절규한 광주학생의 날」, 『중앙신문』1947.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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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 86주년 기념 특별학술회의

5. 맺음말 남북이 분단되어 있었던 미군정기, 38선 이남의 한국인들은 미군의 통제를 받아야 했다. 좌익과 우익으로 이념이 나누어져 각자 자신들의 신념이 옳다고 주장하고 행동했던 것은 일제의 식민지배 에서 벗어난 조국을 새롭게 건설하고 완전한 독립국가로 만들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래서 해방 된 조국의 새로운 모습을 형성하는데 토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독립운동이었다. 광주학생운동은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 한국인들이 맞이한, 일제강점기의 중요한 민족 운동이었다. 일제의 탄압 아래 일제강점기에는 사실 조차 제대로 알릴 수 없었기 때문에 신문들이 관심을 둔 것은 광주학생운동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광주학생 운동에 관한 정확한 자료 수집이 어려웠으므로 광주학생운동으로 고통 당한 이들의 증언이나 부정 확하지만 당시의 신문기사들을 토대로 기억하고 정리하였다. 그리하여 광주에서 시작하여 전국으 로 세계적으로 확산되었고, 학생에게서 시작하여 노동자․농민․시민들에게 확산되었음을 강조하였다. 기억은 기념으로 연결되었다. 기념식, 기념 강연, 기념 웅변대회, 기념 운동경기 등이 광주학생운 동 기념행사로 계획되었다. 강연과 웅변은 많은 이들에게 광주학생운동의 진상을 알리고 그 의의 를 정의내리며 광주학생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토론하는 장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강연도 웅변대회도 용납하지 낳았다. 한국인들이 그들의 힘으로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겠 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방 후 세 번째의 광주학생운동 기념일은 기념식 조차도 불가하였다. 미군정기 신문들은 광주학생운동의 사건 전말을 정리하고, 기념하고, 그리고 민족통일운동의 전 위였던 광주학생운동의 전통을 이어받아 해방된 한국의 완전한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헌신해야 한 다고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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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주제

일제말기 사상통제와 항일세대의 균열 -해방직전 항일세대의 균열과 갈등의 기원-

김 홍 길(전남대학교)*159)

1. 문제제기

4. 전시체험과 식민지청년의 대응방식

2. 일제말기 전시동원체제하 사상통제

5. 요약과 결론

3. 일제의 항일세대 포섭과 친일전향

1. 문제제기 해방은 오랜 염원의 언어였지만, 현실이 되었을 때 그것은 전혀 낯선 세계였다. 1945년 여름, 한반도에 일제의 지배가 종식되고 해방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일제강점기의 항일세대 들은 일제 말기와 해방의 거리에서 대체 무엇을 보고 겪었을까? 러일전쟁(1904년)과 국권강 탈기(1910년)를 전후로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청년기를 보낸 세대에게 극일(克日)은 큰 숙제 였다. 일제강점기는 통상 전기와 후기로 구분된다. 전기에는 통감정치 및 1910년대 무단통치시 대, 1920년대 문화통치기가 포함되며, 후기는 1930년부터 1945년에 이르는 15년이다. 그 중에서 일제말기는 1937년 중일전쟁부터 1945년까지 약 8~9년간 지속된 전시동원체제로 볼 수 있다. 1931년 만주사변이후 15년전쟁이 시작되면서, 한반도는 일제의 병참기지로 전 락했다. 전시체제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강요된 파시즘체제는 식민지공간에 대한 ‘억압적 국 가기구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조선총독부를 중심으로 한 식민지 지배엘리트들은 충성경쟁을 통해 일본정치내에서 정치적 우위를 확보하고자 했다. 이러한 일환으로 황국신민 프로젝트를 주도적으로 개발하고, 내선일체에 기초한 조선민족말살정책을 추진했다. 일본 전역이 동남아 와 태평양일대로 확대되자 일제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기만적인 허상의 유토피아를 설정해 조선인의 적극적 희생과 헌신을 통한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요했다. 따라서 외연상 항일 기풍이 크게 줄고, 친일적 행적이 세상을 압도했다. 기존의 조선귀족 과 관료 중심의 舊친일파들에 이어 일제말기에 ‘병영국가형 국가주의’와 황국신민사관에 심 취한 새로운 친일파(新친일파)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서로 경쟁하듯이 ‘극일(克日)’을 접고, * 김 홍 길, 전남대학교 학생독립운동연구소 연구실장 ** 이 논문은 2014년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4S1A5B50704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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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 86주년 기념 특별학술회의

제국의 영예라는 허울 뿐인 침략전쟁의 도구와 선전가로 전락했다. 이 시기에도 일제는 항일 에서 이탈한 청년과 지식인을 하나의 정치동원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저항을 무력화시키고자 했다.1) 단말마(斷末魔)같은 고통스런 죽음의 공포와 일상적 억압이 지배하던 일제말기의 사 상통제는 ‘적극적 항일’보다는 ‘체념과 굴종’의 문화 속에서 조용히 침묵한 채 앞날을 대비하 는 청년군상을 만들었다. 일제 말기의 극심한 변화는 ‘항일’을 매개로 하는 세대간 동질감을 해체시키고, 해방공간 에서도 극심한 사회갈등과 내적 균열을 자극시켰다. 일제말기의 ‘항일’과 ‘체념’, ‘현실타협’과 같은 일종의 선택은 신념(信念)과 ‘시국 인식’이 중첩되어 나타났다. 전시동원체제는 조선인 의 일본인화 뿐만 아니라 ‘항일의 세대’를 점차 정치적으로 무력화시키고 ‘해체 및 격리’시키 는 과정이었다. 일제는 구체적 항일행동을 하기 직전 단계인 ‘항일의 마음’을 품는 행위마저 탄압의 대상으로 간주했다. 폭압적인 위력 앞에서 항일세대들은 숨죽이며 기회를 엿보게 되 었다. 항일세대들의 친일로의 훼절현상은 천태만상의 풍경을 자아냈다. 끝없는 항일의 과정에서 희생된 청년들이 있는가 하면, 친일파귀족, 관료, 지식인들은 ‘출세와 욕망’에 심취했다. 이 들에게 ‘항일경력’은 제국적 출세를 막는 걸림돌에 불과했다.2) ‘어제의 항일투사’가 ‘오늘은 황국신민의 정예’로 낯짝을 들고 다니면서, ‘전향과 변절에 따른 초기의 부끄러움’에 대한 감 정은 제국의 영예’로 두둔되었다. 이러한 친일행위의 선동 속에, 별다른 대응수단이 없던 조 선의 젊은이들은 구조적 폭력에 노출되어 수백만명이 강제노역과 강제동원에 희생되었다. 이 연구는 일제 말기 전시동원파시즘 체제를 경험한 항일세대가 어떻게 적응과 저항을 했 는지를 살펴봄으로써, 항일세대가 억압적 권력구조와 식민지 일상세계에서 직면했던 척박한 생존환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일제말기의 극단적 상황이 초래한 항일세대의 균열 이 해방공간에서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한 일 측면을 검토할 것이다. 이 연구를 통해 항일세 대들이 체험한 일제말기의 시대상황에 대한 엿보기는 기존의 항일운동 참여문제에만 집중된 단편적 이해를 넘어, 당대의 실상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3)

2. 일제말기 전시동원체제와 사상통제 1) 차별과 동화: 전시파시즘체제의 등장 일제말기 사상통제는 천황을 정점으로 한 군국주의질서에 대한 강압적 동화전략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당시 일제는 반제운동이나 평등주의를 표방한 사회주의운동과 같은 사상단체에 대해서 강력한 탄압을 진행했다. 일제는 치안유지법을 비롯해 보안법, 육군 형법(군사적 억 압장치)을 광범위하게 적용해 항일세력을 억압했다. 이런 가운데 항일의 전력을 가진 사상범 1) 木村直惠, 「靑年の 誕生」新曜社 1998, 2) 권명아, “청년담론의 역사화와 파시즘적 주체화의 문제”, 「오늘의 문예비평」, 2004, 60-61 3) 이 연구는 시간적 범위를 일제말기와 해방초기로 설정함으로써, 항일세대들이 겪었던 해방이후 한국전쟁을 거 치며 겪었던 정치적 혼란과 다양한 형태의 비극적 희생에 관한 구술기록 및 개별기록에 대해서는 생략할 것 이며, 이는 별도의 연구기회를 통해 다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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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말기 사상통제와 항일세대의 균열

들에 대한 집단수용시설을 만들어 강제노역과 예방구금을 통해 신체 구속을 수시로 자행했 다. 특히 항일성향의 인물들에 대한 가택수색과 가족압박과 회유를 비롯해 사상전향을 강요 하며, 종종 미결상태에서의 장기간의 구금 등을 통해 무력화시키려 했다. 1920년대 ‘항일분 자’에 대한 처벌의 강도는 일제말기(1936-1945) 들어 훨씬 강해져, 식민지 일상공간에서의 ‘사소한 잘못’으로도 막대한 불이익과 처벌 및 희생을 가져왔다. 일제는 태평양전쟁 말기에 이르러 파국적 상황인식 속에서 작은 파열음을 내는 저항을 식민지 파괴책동으로 인식해 강 력히 쇠사슬을 조였다. 따라서 일제말기의 국내를 비롯해 일본, 만주 등지에서의 항일은 극 도로 사소하고 예민한 ‘일상적인 저항’의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때로는 적극적인 항일을 위 해서는 청년들이 훨씬 은밀하게 항일담론을 형성하는 변화를 겪게 된다. 일제의 조선식민지담론은 두 개의 방향에서 발전했는데 하나는 일본본토의 이익이 대만, 조선, 만주 등에 걸쳐 사활적인 이익으로 전환됨에 따라 이 지역에서의 피지배민족에 대한 통합적 차원의 융화와 동화를 담는 대동화주의 담론이고4), 다른 하나는 한일관계의 오래된 특수성에 기초하여 한반도를 일본 본토와의 관계에서 재설정하는 데에 기초한 통합담론이었 다.5) 일제는 청일전쟁을 거쳐 대만을 식민지로 삼고, 러일전쟁이후 영미의 협조를 받아 조선 을 강압적으로 병합한 이래, 소위 문명개화의 시각에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 고자 했다. 일제는 식민지(植民地)라는 용어를 쓰기보다는 내지(內地)와 외지(外地) 개념을 사용하고 침략대신 진출이라는 표현으로 자신들의 목적을 은폐했다. 일제강점 초기에 일본의 동화주의는 차별주의를 표방하면서, 기만적 동화를 추구하는 논리 를 기초로 등장했다.6) 초대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은 무단정책을 기초로 조선지배를 안정 화사키고자 했다. 내지-외지간 차별은 불가피하며, 동화는 많은 시일이 필요하다고 간주했 다. 이것은 동화의 지연과 차별문제의 원인을 조선인 탓으로 돌리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7) 1919년 3.1운동 때 총칼을 휘두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총독도 강압적 동화(무단 통치)의 실패를 인정하고, 수천년의 역사와 전통을 지닌 조선에 대한 점진적 동화전략을 표 방했다.8) 그러나 조선총독부 산하 중추원을 의결기관으로 전환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근본적 으로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9) 따라서 당시 일제의 동화전략은 조선인들이 식민 지배체제에 저항하지 않고 순응하는 것에 다를 바 없었다. 일본은 1920년대에 문화정치를 통한 조선인의 융화(融和)와 포섭(包攝)을 지향했지만 본 심으로는 일본인들이 조선인들과 의무나 권리에 있어 동격의 위상을 가지는 것에 대해서 일 정한 반발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1920년대 후반까지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조선통치담론 4) 木畑洋一, 「イギリス帝國と帝國主義-比較と關係の視座-」 有志舍, 2008, 松田利彦・浅野豊美 編, 「植民地 帝国日本{の法的構造」 信山社, 2004, 山室信一, 「思想課題としてのアジア 基軸・連鎖・投企」 岩波書店, 2001, 山本{有造, 「帝國の硏究-原理・類型・關係」, 名古屋大學出版會, 2003, 駒込武, 「植民地帝國日本の文 化統合」 岩波書店, 1996, 5) 竝木真人, “植民地期朝鮮人の政治参加について”, 「朝鮮史研究会論文集」 31 緑蔭書房, 1993. 竝木真人, “朝 鮮における‘植民地近代性’・‘植民地公共性’・対日協力-植民地政治史・社会史研究のための予備的考察”, 「国際交 流研究(フェリス女学院大, 国際交流学部紀要) 5, 2003. 6) 정연태, “조선총독 寺內正毅의 한국관과 식민통치-점진적 민족동화론과 민족차별 폭압장치의 이중성”, 「한국 사연구」 124, 2004 7) 靑柳綱太郞, 「總督政治史論」 京城新聞社 1929, 251~252 8) “騷擾先後策私見”, “長谷川總督の事務引繼意見書”, 現代史資料 제25권 みすず書房, 1966, 495~496 9) 김동명,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체제의 개편”, 「한일관계사연구」 제9권, 1998. 246-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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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 86주년 기념 특별학술회의

을 생산하면서, 조선지배에 있어 특수사정(特殊事情)을 강조하고, 조선인들의 일본화는 수긍 하면서도 내지-조선간 전면적 결합은 일정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따라서 자치론 (自治論)이나, 한일민족간 차별문제가 대두할 때마다 이것은 조선총독부가 지향한 시책(施策) 이 아니라 ‘시세(時勢)의 민도(民度)’에 따라 변화될 일시적 조치라고 강변했다.10) 이처럼 일본은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조선에 대한 지배와, 조선인의 일본문화에 대한 동화 를 추진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전환시키는 동화전략은 추진하지 못했 다.11) 게다가 조선인의 일본인화는 일본사회 내부의 저항 세력과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에 게도 적잖은 혼란을 초래했다. 이 같은 혼란은 일제말기에 일본의 황국신민화정책과 군국주 의적 전시동원체제의 형성과정에서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에 대한 선별적 동화와 선별적 포섭 과정에서 변수로 작동했다. 2) 내선일체와 황국신민론의 대두 광주학생운동은 식민지공간에서 일본인들이 추구해왔던 광범위한 차별과 산발적인 포섭이 라는 이중적인 형태의 차별-동화주의전략이 실패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광주학생운동을 겪은 이후 일본은 조선인들에 대한 선별적 차별과 포섭이라는 이중전략을 강화시켰다. 특히 일본정부의 치안당국, 외무성 해외영사국, 조선총독부 경무국과 학무국 등은 항일그룹을 민 족주의그룹, 무정부그룹, 공산주의자그룹 등으로 시각화시켜 분리하여 일본인 반제운동과 사 회주의진영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한편으로 온건한 민족주의 성향의 인물들이 총독부 시책에 적극 반대하지 않으면, 이들 중 일부 인텔리겐차들에 대한 포섭과 회유공작을 전개하여 활동 기회를 제공하는 '선별적 포섭'을 병행하였다. (1) 우까키(宇垣一成) 총독의 내선일체(內鮮一體)와 적극적 포섭책 일본은 한반도 강점 20년 만인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상해사변을 거쳐 1937년 중일 전쟁을 개전하며 침략국가의 본색을 드러냈다. 만주사변 이전까지 조선인을 차등화하던 일본 은 조선을 새로운 식민지개척을 위한 각종 인적·물적 자원의 공급기지로 활용하려 했다. 당 시 1930년대 초반 조선총독부 지배엘리트들은 조선을 제국(내지)의 연장의 한 축으로 설정 하고, 제국팽창에 있어 일종의 전진캠프로서 조선에 대한 식민시책의 변화를 추진한다. 1931년 조선총독을 맡은 우까기(宇垣一成)는 광주학생운동을 겪은 이후에 조선인들이 느끼 는 일본인들에 대한 차별과 반발을 ‘포섭하는 논리’의 하나로 민족통합 논리로서 내선일체 (內鮮一體)를 표방하고,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줄이고, 적극적 포섭을 통한 일본인화를 추진 한다.12) 특히 기존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 일선융화(日鮮融和) 개념을 확장시키고, 조선 청 년지식인의 식민지 하층권력(지방권력, 관료권력)에 대한 문호를 확대했다. 우카끼 총독은 조 10) 정준영, “식민지교육정책의 원점: 이자와 슈지의 동화주의와 청각적 근대성”, 「정신문화연구」, 제34권 2호, 2011, 156 11) 13세기 초반 몽골이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의 부족을 통합한 방식은 공포적 차원의 약탈과 복속체계였다. 17 세기 초반 여진족도 청국을 세운 뒤 몽골, 거란을 만주족으로 복속-편입시켰다. 식민지시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위력에 대한 동화전략은 한국인의 저항을 받으면서 실패했고, 알제는 전시동원체제로 강제하고자 했다. 12) 小熊英二, 「‘日本人の境界」, 新曜社,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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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말기 사상통제와 항일세대의 균열

선일보, 동아일보 등을 중심으로 조선인 민족주의자들이 추진한 브나로드운동을 수용하여, 대공황이후 피폐해진 조선식민지 경제환경을 개조하고, 식민지배의 물적 토대를 갖추기 위해 농촌진흥운동을 활용했다. 또한 조선에 대한 농공병진(農工竝進)을 추진하고, 조선통치의 특 수사정을 부각시켰다. (2) 일본정치에서의 천황중심주의 국가론의 대두 만주사변 이후 일본사회는 1930년대 중반 군국주의 파벌 등이 득세하면서, 강력하게 조선 인을 식민지적 강제에 결속시키고, 조선을 제2의 본토로 만들고자 했다. 당시 일본육군 내 파벌 중 하나였던 황도파는 천황의 친정과 특권계급의 타파를 내걸고 소화유신(昭和維新)을 구상했다. 이들은 고도국방국가 수립을 지향한 고급장교중심의 통제파(統制派)와 파벌경쟁을 벌이게 된다. 1936년 2월 26일 황도파그룹의 22명의 청년장교들은 1400명의 사병을 이끌 고, 천황의 친정체제와 군사정부수립을 획책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2.26쿠데타는 하루만에 진압되었으나 역설적으로 군부 내 통제파의 영향력 확대를 가져왔다. 1937년 중일전쟁을 주 도했던 이들은 국방국가구상을 표방했고, 1941년 통제파 출신의 도조 히데끼가 내각수반을 장악해 전시군국주의는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일본 군부에서 수행한 조선인들의 회유와 포 섭은 기본적으로 내지인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한 군사적 방편에서 기획된 것이었다. (3) 시오바라 도키사부로(鹽原時三郞)의 황국신민론 이러한 배경은 중일전쟁이후의 대륙전쟁이 장기화되고, 일본 내 주전파그룹간의 충성경쟁 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조선총독부의 지배엘리트들은 식민지공간의 확장에 따라 만주로 지평 이 확대된 가운데 조선을 내지연장선을 넘어 확대된 일제의 중추로 재편하려는 야망을 가지 게 된다. 미나미 지로(南次郞)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주도적으로 내선일체, 황국신민화정책 을 정립하여 조선인을 반도동포로 간주하고, 일본정신의 함양을 통한 국민주의 혹은 국가주 의체제로 포섭하고자 했다.13) 당시 황국신민화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한 인물은 총독부 학무국장 시오바라 도키사부로 (鹽原時三郞)였다. 그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조선총독부의 독창적 지배론으로 활용했다.14) 황국신민은 일본인과 조선인들이 모두 일본천왕의 통치를 받는 신 민이라는데서 비롯된 것으로, 조선인을 포섭하고 동원하기 위한 일환이었다. 조선총독부는 황국신민론을 구체적으로 적용하기 위해 1938년 소학교규정을 개정해, 일본 본토주민들에게 강요된 것보다 훨씬 강화된 황민화교육을 전개했다. 3) 전시동원과 억압적 식민지 국가기구의 파시즘화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의 일본화 과정에 대해 ‘전시동원체제’적 특성을 감안하여, 조선인들 에게 강도 높은 자기 부정과 ‘진짜 일본인화’라는 교묘한 사명을 부과했다. 이를 위해 등장

13) 鹽原時太郞, 「皇國臣民敎育の原理と實踐」, 朝鮮公民敎育會,1938. 14) 金順楨・田村榮章, “日本の修身敎科書硏究-學務局長鹽原時三郞と皇民化敎育政策”, 「日本語文學」 19,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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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 86주년 기념 특별학술회의

한 것이 조선인 연성론이다. 류승렬(2004)에 따르면 연성론은 1936년 고노에 후미마루(近衛 文麿) 내각 산하 교육심의회가 고안해 낸 국민학교안 중에서 <황민(皇民)의 연성(練成)>이라 는 말에서 유래되었다.15) 즉 천황중심의 황국체제를 위한 신민 만들기 프로젝트였다. 1937 년 10월 조선총독부는 황국신민의 서사(誓詞), 황국신민 제송(齊誦), 황국신민체조(皇國臣民 體操)를 보급했다. 이는 본토보다 먼저 시작되며, 조선총독부 엘리트들의 전시군국주의적 충 성경쟁에서 비롯된 작품이었다. 1938년 이후 조선에서는 일본 본토보다 훨씬 강력한 형태의 전시동원체제와 식민지구조 라는 이중적인 억압구조 속에서 교육의 파쇼화가 촉진되었다.16) 일본군은 전선의 확대와 막 대한 사망과 부상 속출이 잇따르자 조선청년을 일본군으로 적극 편입해 활용하고자 했다. 이 런 가운데 일본은 전국적 차원에서 전시동원체제를 작동시키고, 청년들에게 적극적인 희생을 요구했다. 이런 가운데 친일파를 중심으로 결성된 국민정신총동원연맹 등은 청년을 부추기 고, 제국의 선두에 서서 희생하길 요구했다.17) 조선총독부는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 전쟁시국에 대한 협력과 조선민중에 대한 강력한 통 제, 후방활동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국민정신총력동원운동을 전개하며 1940년 10월 국민총 력조선연맹(총력연맹)을 결성하였다. 이 조직은 황국신민화운동에 집중하면서, 각종 좌담회, 강연회, 방송프로그램을 통해 황민사상을 고취했다, 또한 각 지역단위나 직장단위까지 조직 을 결성해 공출, 징병, 징용, 파병을 선전하는 단체로 활동한다. 이 조직은 조선국민의용대로 조직되었다가 해방과 함께 사라졌다.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황국신민론은 일본 본토로 역유입되어 일본의 전시파시즘화를 촉진 한다. 1941년 일본 문부성은 「신민의도(臣民の道)」에 “천황을 따르고 받드는 황국신민의 도야말로 황운부익(皇運扶翼)의 도(道)”라면서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서의 수련(修練)>이란 항목이 실천방안으로 제시되기에 이른 것이다. 1942년 조선총독부 정보과장 구라시마 이타 루(倉島至)는 황국신민화를 고대 이래 혈통적 차원의 야마토민족의 복고라는 의미로 대환론 (大還論)을 내세웠다.18) 그는 일만일체(日滿一體), 일화일체(日華一體)가 협동이나 제휴의 수 준이라면 내선일체는 대동아공영권의 지도적 위치에 있다고 보았다.19) 당시 조선총독부는 식민지조선에서의 가장 성공적인 시책중 하나로 이를 강조하기도 했 다.20) 일제는 대동아전쟁에서 막대한 희생자가 속출하고, 확대된 전역에서의 부족한 병력자 원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조선청년들을 징병하는 도리 밖에 없었다. 일본의 징병제담론은 조 선총독부를 이끌던 미나미 총독이 주도했던 구상이었고, 이는 조선통치세력들의 일본정치 내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미나미 총독은 조선에서의 징병제실시를 위한 기본조건으로 의무교육제의 시행을 최소한 전제하거나 병행해야 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이 15) 류승렬, “일제하 조선통치세력의 지배이데올로기 조작과 강제”,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4권」, 2004 16) 宮田節子, 「朝鮮民衆과 ‘皇民化’ 政策」 일조각, 1997 117~118, 방기중, 일제하 지식인의 파시즘체제 인식 과 대응, 혜안 2005. 17) 조병상, “半島の의靑年の 進路-常に 社會の先頭に 立て”, 「총동원」, 1939년 7월 19 18) 倉島至(朝鮮總督府 情報課長), “前進する朝鮮”, 朝鮮單式印刷株式會社, 1942, 21 19) 倉島至(朝鮮總督府 情報課長), “前進する朝鮮”, 朝鮮單式印刷株式會社, 1942, 9 20) 信原聖(總督官房 文書課長), “朝鮮に於ける國民精神總動員運動の特異性”, 「朝鮮行政」 7, 194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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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말기 사상통제와 항일세대의 균열

와 달리 일본 군부는 조선인징병제 문제에 다른 동기를 가지고 접근했다. 1941년 태평양전 쟁이 발발함에 따라 일본육군은 일본 내 국력의 소모를 줄이기 위해서 외지 민족을 활용하 기 위해, 징병제 시행을 급선무로 제기했기 때문이다.21)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 실시는 형식 상으로는 조선인이 법률상 제국신민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조선에 대해 수행된 징병제는 조선인들의 권리를 배제하고, 투철한 희생과 일방적 의무를 강요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 대규모 집합적 강제동원 1940년 이후 전시동원체제와 천황제 중심 군국파시즘체제는 ‘식민지 일상세계’를 ‘전쟁용 어’로 뒤덮었다. 총독부의 기관지인 <每日申報>나 <朝鮮の 光>, <新世界>와 같은 친일잡지 와 일본신문만이 남고, 조선인 신문들은 폐간되었다.

압적 식민지 국가권력은 가족, 마을,

학교, 공장, 감옥 등에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폭압적 국가권력의 침투현상으로 학교는 전쟁 선동의 장이나 노력동원의 장으로 전락했고, 수백만명의 식민지인들이 도로, 항만, 방공호, 비행장, 군수공장, 연료채굴과 같은 다양한 시설에 징용되고, 무참하게 끌려가서 강제노역을 당했다. 1942년 조선총독 고이소 구니아기(小磯國昭)는 학도병제도를 실시하였으며, 조선인 전체 를 상대로 하는 징병제 실시를 앞두고 임시방편으로 조선청년특별연성령을 공포했다. 이런 가운데 초등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조선인들을 국체관념 배양과 일본어습득을 위한 단기교 육 후에 전쟁터로 몰아넣는 비상식적인 현상이 반복되었다. 결국은 내선일체에 기초한 권리 와 의무를 동질하게 부여하지 않으면서 조선인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일제의 전시동원체제 하에 강제징병제도가 전개되었던 것이다.22) 일본은 강제징용의 의미를 왜곡하기 위한 방법으로 지원병(志願兵)이라는 명칭을 사용했 다.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에 이르러 일본은 조선인들의 수많은 희생을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여길 뿐만 아니라 더 많은 희생과 헌신을 강요하고 이를 순국(殉國)이라고 미화하게 된다.23) 1944년 고이소 조선총독은 “내선혼연의 일체로서 2천 4백만 동포가 1억 황민의 중요분자로 서 대동아의 지도적 국민으로서 영예를 파악하는 훌륭한 운명 앞에서 결전체제를 위한 국가 의 전시요구에 신념을 바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24)

히 조선총독부와

친일파세력들은 조선청년들이 일본 내지인들보다 적극적인 희생을 치러야만, 즉 흥아유신(興 亞維新)을 추동하는 일원으로서 역할을 맡아야, 내국인과 동등하게 시국을 말하고 희노애락 을 나누어가질 자격이 있다고 선동하며, 철두철미한 혼신의 지성을 발휘할 것을 강요하였 다.25)

21) 22) 23) 24) 25)

宮田節子(李熒娘 역), 「朝鮮民衆과 ‘皇民化’ 政策」 일조각, 1997. 131~133 高宮太平, “皇民鍊成の基礎構築”, 「小磯統理の展望 第二輯」 京城日報社, 1944, 120~122 “社說少國民に盛上る殉}國の氣風”, 「朝鮮公論」 4월호, 6~7, 1944 高宮太平, “聖明の信倚に對へ奉らん”, 「小磯統理の展望 第二輯」 京城日報社, 1944, 131 “大義奉行團結盟趣旨書(草案)”, 「內鮮一體」 9월호, 7~8,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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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일제의 항일세대의 포섭과 친일전향 1) 항일세대의 청년표본들의 ‘항일이탈과 친일전향’ (1) 차재정의 항일의 기억과 친일전향의 논리 광주학생독립운동과 관련해 가장 적극적인 친일전향을 한 인물은 차재정이다. 그는 1902 년 논산출신으로 신발공장을 한 부친과 형 덕분에 부유하게 성장했다. 그는 강경보통학교를 나온 뒤 인천상업학교를 졸업했고, 전주농공은행에서 1918년부터 1922년까지 근무했다. 1922년 일본유학을 떠나 동경정칙학교를 거쳐 명치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그는 동경유학중 에 도서관에서 사회과학연구에 심취했고, 1926년 3월에 귀국해 청년운동에 참여했다. 1926 년 서울청년회에 가담했으며, 1927년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과 신간회원이 되었다. 그는 1927년 1월 정관진, 이학종, 김태래를 중심으로 조선학생혁명당을 조직하도록 했으나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1929년 4월 4일 차재정은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중앙 집행위원 간담회를 경성부 견지동의 영해루(英海樓)와 청년총동맹회관에서 열었는데, 이때 신치녕, 황대용, 부병준(부건), 이항발, 곽양훈 등과 공산청년협의회(조선공산청년회)를 결성 했다. 그 후 5월 초순에 임윤재(任允宰)를 추가하여, 차재정이 책임자를 맡고 출파부 이항발, 학생부 부병준. 선전부 임윤재, 조사부 곽양훈으로 하고, 지역책으로 전라도 장석천, 경상도 황대용, 충청도 임윤재, 경기도 심치녕을 정했다.26)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발생하자 조선청년총동맹은 부병준과 박일(朴日)을 조사단원 으로 광주에 파견했다. 차재정은 11월 10일경 상경한 강영석을 경성부 청진동 화흥여관(華 興旅館)에서 이항발, 황대용 등과 만나 광주학생사건에 대한 대책을 상의했다.27) 그뒤 장석 천이 11월 14일 상경하자 화흥여관에서 차재정은 황대용과 함께 학생운동 전국화계획을 모 색한다.28) 이를 위해 광주학생사건을 알리는 격문살포와 대시위운동이 추진된다. 격문작성은 중앙청년동맹 조직부장 곽양훈이 맡았으며, 12월 초순 격문 살포는 대성공이었다. 반면 시위 운동 전환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었다. 차재정은 1929년 12월 경성부에 있던 학생들에게 광주 학생운동을 알리고 시위운동을 조직하는 배후활동의 혐의로 체포되었다. 조선학생혁명당 사 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으로 당시 122명이 체포되고 그 중에서 40여명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29) 차재정은 이 사건으로 1931년 4월 9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26) 여기서는 황대용의 신문조서(1930년 1월 10일)의 진술을 더 적합하게 인식한다. 차재정은 1차신문, 2차신문, 3차신문에서 조선공산청년회에 대한 답변이 모호하고 이를 부인한다. 차재정 신문조서(1930.7.15) 27) 종로경찰서, 차재정 1차신문조서(1930.1.10) 28) 당시 경찰진술을 보면 차재정은 말을 정확하게 하기 보다는 회피하거나 틀리게 진술하는 경향이 있고, 황대용은 직설적이 고 논리정연하게 말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황대용신문조서(1930년 1월 10일)

29) 중앙청년총동맹의 차재정(車載貞)은 서울지역 학생운동 전개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당시 조선학생전위동 맹 고학당 김태래(金泰來), 한경석(韓慶錫), 중앙고보 4학년 김순희(金淳熙)를 비롯해서 양정고보 4학년 송건호 (宋健鎬), 경신학교의 정종근(鄭種根), 중앙청년동맹의 곽양훈(郭良勳), 경신학교의 권유근(權遺根), 중외일보 기 자 황대용(黃大用), 경신학교 유축운(柳丑運), 중동학교 김인배(金仁培), 고학당의 이능종(李能鍾), 중동학교의 윤 영순(尹暎淳), 중동학교의 신용우(申用雨), 제일고보 이석(李錫), 중동학교의 곽이형(郭二炯), 중동학교의 이일신 (李一信), 중앙학교의 강대성(姜大成), 중앙학교의 심홍택(沈弘澤), 중앙학교의 박용칠(朴容七), 제일고보 노응호 (盧應昊), 박진갑(朴鎭甲), 제이고보 권태동(權泰東) 등이 서울학생운동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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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말기 사상통제와 항일세대의 균열

징역2년을 받았다. 그는 1935년 8월 지하운동조직에 참여했다가 또 다시 체포되었다. 수차 례의 옥중투쟁을 거치면서 심신이 지쳐갔으며, 1936년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친일파로 돌변 한다. 차재정은 1936년 8월 친일단체 대동민우회에 참가해 9월에 이사로 선출되었다. 그는 1938년 대동민우회 간부들과 함께 조선총독을 만났다. 1939년 7월 12일 배영동지회 평의원 으로 선임되고 1941년 10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1945년 6월 조선언론보국회 평의원으 로 각각 선임되었다. 대동민우회와 조선총독부 학무국,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등이 주최한 각종 강연회와 좌담회에서 내선일체와 일본중심의 동아시아 신질서와 황국신민화를 옹호하 는 글을 ‘삼천리’에 기고하였다. 그는 패망직전 일본이 언론인의 궐기와 반공태세 확립을 위 해 1945년 6월 8일 조선언론보국회를 결성하자 평의원으로 참여했다.30) 그는 1945년 7월 20일 ‘본토결전과 국민의용대 강연회’에 참가했다. 차재정은 해방 후에 변절자로 낙인찍혀 냉대를 받았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발표한 친일파명단에 포함되었으나 당 시 반민특위활동이 미미해지면서 체포되지 않았다. (2) 박명련(박순천)의 항일과 친일의 갈림길 박명련은 동래출신으로 1914년 일신여학교에 입학해 의신여학교 교사가 되었다. 남편 변 희용도 2.8운동에서 4.19혁명에 참여한 항일운동가였다. 박명련은 마산3.1운동의 실질적인 주동자였다. 이갑성의 연락을 받고 마산 창신학교와 의신학교 교사와 학생들과 연계해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그후 가석방상태에서 일경의 추적을 받자 일본으로 밀항했다. 그 후 신분을 속이고 1920년 동경 요시오카(吉岡) 여자의학전문에 입학해 일본인 하숙집 에 기거하면서 동경의전 재학 중인 유학생학우회 총무 변희용(卞熙瑢)을 만나 교제했다.31) 그녀는 1920년 1월 여자학흥회를 최진상(崔眞相), 한연순(韓連順), 최영상(崔英相), 김양(金 良) 등과 창립해 총무를 맡았다. 학비가 박명련이라는 이름으로 송금되면서 3.1운동 참가사 실이 발각되어 체포된 뒤 1920년 4월 보안법위반으로 우씨고매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 후 국내로 압송되어 마산감옥에서 1년 6개월을 복역했다. 그녀는 1921년 6월 다시 일본에 갔 다가 유영준(劉英俊), 김선(金善) 등과 여자유학생강연단을 조직해 귀국했다.32) 1922년 일본 여자대학 사회학부 여공보전과에 입학했다. 그는 1925년 12월 24일 무교동 태화관에서 변 희용과 결혼했다. 그러나 마땅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자 시댁인 경북 고령으로 내려가 농촌 계몽운동을 전개하며, 마을의 산부인과와 대서소를 운영하고 야학을 경영하면서 자녀를 양육 하는데 13년을 보냈다. 1937년 중일전쟁 직후에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압박을 피해 서울로 이사했다. 그 후 경성 방직, 조선공예, 금강전구 등에서 여자직공감을 맡아 활동했다. 그녀는 1940년 10월 황신덕, 박승호 등과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경성가정여숙을 세우고 교감을 맡았다. 태평양전쟁 후 그 녀의 친일행적은 점차 강화되었다. 1940년 친일단체 황도학회 발기인에 가담했고, 1941년 30) 당시 명예회원에는 안재홍, 홍명희, 최남선, 송진우, 장덕수, 유억겸, 여운형 이종린 등이 들어있다. 임종국, 친일문학론, 평화 출판사, 1966, 175. 일부 인사들은 참여의사와 무관하게 일부러 끼워 넣는 경우도 있었다.

31) 박순천, “나의 교우반세기”, 「신동아」, 1971 32) 동아일보 1921년 8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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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 86주년 기념 특별학술회의

12월 27일 부민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조선임전보국단 결전부인대회에 임효정, 최정희, 임숙 재, 허하백, 모윤숙과 참석했다.33) 그녀는 경성중앙방송을 통해 태평양전쟁 참여를 독려하 고, “국방가정”, “전황뉴스를 듣고서” 등의 강연으로 태평양전쟁에서 참여를 독려했다.34) 해 방 후 건국부녀동맹을 조직했고,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안에 대한 반대운동에 앞장섰 다. 1947년 독립촉성애국부인회 회장, 학교법인 추계학원 이사가 되었다. 1948년 제헌선거 에 낙선한 뒤 대한부인회 회장과, 부인신문을 창간했다. 1949년 국민회 중앙총본부 부위원 장과 대한여자청년단 단장을 지냈다. 박순천은 1950년 2대 국회의원이 된다. 그 후 자유당 의 독재에 반발해 1955년 김성수, 윤보선, 신익희, 장면, 조병옥 등과 함께 민주당을 창당하 고 중앙위원회 부의장을 거쳐, 1956년 민주당 최고위원이 되었다. 1956년과 1960년 부산과 서울에서 출마해 당선되었고, 4.19혁명으로 제3공화국 민주당 총재를 역임했다. 그녀는 5.16 정변에 반발해 국회의원을 사퇴했다. 1963년 2월에 해금된 뒤 장면, 오위영, 현석호, 조재 천, 김도연 등과 민주당을 재건했다. 장면이 병상에 늘자 민주당 총재가 되었다. 또한 야당 지도자로 1963년 3월 22일 윤보선, 변영태 등과 함께 군정연장에 반발해 민주구국대회를 개최하는 등 반독재투쟁을 전개했다. 2) 문화예술분야에서 항일세대들의 ‘항일’과 ‘전향’ (1) 김용준, 윤희순, 정현웅의 친일과 항일의 이중경계 3.1운동을 겪으면서 성장했던 민족문예운동은 어느 정도 저항의식이 잠재해 있었다. 조선 총독부가 주도해서 창설한 조선미술전람회는 문화정치의 일환으로 고안된 것이지만, 종종 문 예작품은 저항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1930년대 초반까지도 많은 조선미술인들은 은유적인 방식이든 직접적 방식이든 항일의 기풍을 어느 정도 작품에 반영했다. 그런데 중일전쟁 이후 일제가 내선일체 강화와 황국신민화정책을 강화하면서 많은 문화예 술인들은 식민지시책의 협력자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프로예술동맹에 참여했던 박영희를 비 롯해, 안석주, 심형구를 비롯해 춘원 이광수 등은 1940년대 황도학회에 참가해 적극적인 친 일부역자로서 활동했던 것이다. 총독부가 전시동원체제로 만든 조선총력조선연맹 산하 문화 부위원회 이상범, 심형구 등이 참여했고, 이 산하기관에 경성미술가협회는 대동아전쟁을 지 원하는 후방기지화의 일환으로 종사했다. 일제말기의 항일예술은 국군파시즘에 일변저항하고 일면 순응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 고 있다. 김용준은 1931년 동경미술학교 졸업 작품으로 ‘달리는 기차가 전복되는 장면’을 출 품했다. 그러나 일제는 이 그림에 사상의 낙인을 찍어 압수했다.35) 1931년 윤희순은 조선미 술전람회에 <휴식>이라는 작품을 출품했다. 이 작품은 학생스트라이크를 뜻하는 작품으로, 묵상하는 혼을 표현한 문제작이었다. 윤희순은 당대 미술이 조선의 생활상을 외면하고 있다 고 질타하고, 농민과 노동자, 화전민, 방랑하는 백의, 민족생활을 표현하고, 악한 관료와 인 색한 부자를 폭로하며, 조선청년의 현실과 에너지를 그려야 한다고 주장했다.36) 선우담은 음 33) 매일신보 1941년 12월 24일 34) 「친일파군상」, 민족정경문화연구소, 1948 35) 이재현, 「역대미술작가편람」(증보판), 문화예술종합출판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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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말기 사상통제와 항일세대의 균열

산한 기운의 그림을 통해 암흑의 시대를 담았다. 선우담은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1929 년 12월 해주공립고등보통학교 교사가 되며, 해주고보 동맹휴학을 직접 목격한다. 1933년 제12회 조선미전에 선우담이 제출한 <2인>이라는 작품은 “고민하는 청년이 침통한 맛”을 드러내며, 날카로운 빛을 감추고, 암흑가를 버티고 서 있는 거인의 기풍을 드러내고 있다.37) 이것이 당대의 암흑과도 같은 시대에 대한 은유였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친일미술부여과 항일독립미술을 겸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했다. 윤희순은 매일신보 사 기자로 근무했고, 정현웅은 1940년대 <신시대>와 <반도의 빛>등이 잡지에서 대동아전쟁 을 찬양하는 삽화를 그렸다. 김만형은 단광회에 참여해 <조선징병제 실시>라는 작품을 일본 군대에 헌납했다. 다른 한편으로 정현웅은 1937년 <아코디온 악사>를 통해, 식민지시대의 초라한 지식인의 모습을 담았고, 1940년 <대합실의 한구석>이라는 유채화를 통해 ‘유랑민의 처량한 모습을 통한 식민지의 암흑상‘을 로 우울한 색채를 통해 담았다.38) 김만형도 1944년 <보를 쓴 여인>을 발표했는데, 일제에 의해 불온그림으로 전람회에서 전시를 정지당했다. (2) 박영희의 적극적 친일전향 1930년대 문예운동에서 극심한 변화를 보인 단체는 카프(KAPF)였다. 이 단체는 1924년 박영희, 최승일, 이호, 박용태, 김기 등에 의해 프롤레타리아 예술연구를 위한 지식인 사교단 체로 출발했으며, 동경에서 <제3戰士>를 발간했다. 그후 박영희, 윤기정, 이기영, 조중곤, 홍 순준 최학송, 안석주, 김복진 등은 1925년 기관지 <예술운동>을 발간해 활발히 활동했다. 이들은 1927년 9월 1일 항일문예의 중심을 부르조아 예술을 배격하고 맑스주의에 기초하여 노동계급운동에서 찾고자 했으며,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중앙집행위원회를 설치해 박영 희, 윤기정, 한병도, 김복진, 최학송, 조명희, 홍순준, 이복만, 홍양명, 조중곤, 한식, 박용태, 이상화를 위원으로 선발했다. 1928년 8월 25일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체포되면서 현실 참여형 청년운동과의 연계를 중시한 카프의 대중노선은 위축되기 시작한다. 1930년 4월 박 영희, 윤기정, 이기영 등은 예술동맹회관에서 모여 기존 동맹을 카프로 약정하고 윤기정을 영화부, 박영희는 문예부, 김복진을 연극부 책임자로 정한다. 1931년 제1차 프로연맹 검거사 건과 1934년 제2차 프로연맹 검거사건으로 각각 수십명 이상이 검거되면서 와해된다.39) 한편 박영희는 1933년 10월 돌연 카프를 탈퇴했고 1934년에 사상전향을 선언한다. 박영 희(창씨명 芳村香道)의 변신은 1930년대 항일운동세대가 직면한 ‘제국적 지식인의 포섭과 좌절’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1934년 그는 <최근 문예이론의 신전개와 경향>40)을 통해 전 향의 길을 걷는다. 박영희는 1934년 카프 2차 사건으로 검거되었으며, 1936년 2월 19일 집 행유예로 출옥했다.41) 그는 1936년 11월 공포되고 시행된 사상보호관찰법에 따라 경성사상 범보호관찰소에 150여명과 함께 수용되었다. 1938년 박영희는 국민정신총동원기관으로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에 참여한다. 1938년 36) 37) 38) 39) 40) 41)

윤희순, “조선미술계의 당면문제”, 「신동아」, 1932년 6월호 권구현, “조선미전 단평”, 「동아일보」, 1933년 5월 25일-6월 8일 「조선미술사」,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7, 284 1934년 출옥한 김복진은 카프의 대중노선을 회복하는데 실패했고, 靑年朝鮮을 창간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동아일보 1934년 1월 2일-11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1936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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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경성보호관찰소 회의실에서 전향자들의 대표로 박영희와 권충일과 함께 대표로 선출된 다. 그는 1938년 6월 20일 도쿄에서 열린 전향자전국위원회격인 시국대응전국위원회에 참 석한다. 이로써 박영희는 공개적인 친일행위를 시작한다. 귀국 후 박영희를 비롯한 참석자를 중심으로 시국대응전선위원회를 조직하고, 1938년 7월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을 결성한 다. 이 연맹은 관찰대상자의 취직 알선 및 비전향자 포섭에 노력하고, 장병 위문과 물품 헌 납, 유가족 방문활동을 진행했다. 1939년 11월 출범한 조선문인협회는 명예총재에 총독부 학무국장 시오와라(鹽原時三郞)를 위촉하고 회장 이광수 밑에 12명의 간사(한국인 7명, 일본 인 5명)를 두었는데 박영희는 이중 한명이었다. 그 후 박영희는 1941년 8월 조선문인협회 간사장이 된다.42) (3) 유치진의 친일 연극과 현제명의 친일음악 유치진은 1905년 통영출신으로 입교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1931년 귀국해 극예술연구 회를 결성하고, <문예월간>에 토막을 연재하면서 사실주의적 작품을 발표하며 극작가로 활 동했다. 그는 1935년까지 카프문인과 비슷한 경향파적 특성을 보이며, 평론집 노동자구락부 극에 대한 고찰(1932)을 비롯해 “버드나무 선 동리 풍경”(1933), “비민가”(1935), “소”(1935)등을 발표했다. 유치진은 1930년대 중반이후 점차 진보적 민족의식에서 이탈하며 새로운 연극을 추구하 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친일연극의 출현으로 이어지고 말았다.43) 1940년 초에 이르 면서 그는 친일행각을 뚜렷하게 나타냈다. 유치진은 대표적 친일단체인 조선연극협회, 조선 문인협회 간부를 지냈고, 조선문인보국회의 소설희곡부 회장을 맡기도 했다. 특히 이정숙 (2009)의 연구를 통해, 북진대의 내용을 알려주는 팜플렛의 출현으로 그 친일적인 실상이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다. 북진대는 러일전쟁때 일본군에 협력한 시천교의 이용구의 친일이야 기를 극화한 것이다. 1942년 <大東亞> 7월호에 실린 “북진대” 기사는, 한일합병에 참여한 일진회의 활동을 통해 한일병합에 참여한 초기 친일파의 업적을 강조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44) <북진대>의 음악 연출을 맡은 현제명은 일제중반까지 민족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 말기에 조선총독부 강력한 지도를 받는 친일단체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대화숙 주최의 군가강연의 밤 등에서 일본정신과 일본정서로 만들어진 군가와 일본국가를 부르는 등 친일행적을 보였 던 인물이다.45) 고향생각으로 유명한 현재명은 1902년 대구출신으로 대구계성중학교를 거쳐 1923년 평양숭실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그후 전주신흥학교 음악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1925 년 미국유학을 갔으며, 무디성경학교를 거쳐 건음악학교에서 성악과 작곡을 공부한 뒤, 42) 박영희는 친일기록인 “전쟁과 조선문학”(1939. 10, 인문평론), “국민문학의 건설”(1940. 1. 1, 매일신보), “문 장보국의 의의”(1940. 4. 25), “문학운동의 전시체제”(1940. 7. 6, 매일신보), “포연 속의 문학”(1940. 8. 15-20, 매일신보), [신체제를 맞는 문학](1940. 11. 6-7), [국가이상의 문학](1941. 1. 1), [문학의 새로운 과 제](1941. 4. 11-15), [국민적 신문화의 제안](1941. 7. 6), [대동아문학자대회 출석을 앞두고](1942. 10. 29), 그리고 “임전체제하의 문학과 문학의 임전체제”(1941. 11. 국민문학) 등이 친일기록을 남겼다. 43) 유치진, “신극수립의 전망”(3), 동아일보, 1934.1.11. 유치진, “朝鮮劇壇의 現勢와 今後活動의 多樣性”,  조선일보, 1935.7.7 44) 이정숙, “연극 북진대와 유치진의 친일극”, 「한국극예술연구」 제30집, 2009, 219-245 45) 노동은, “현제명 : 일제말 친일음악계의 대부”, 친일파 99인�3, 돌베개, 1990,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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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연희전문학교 주임교수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고 학업을 중단하고 1929년 석사학 위를 받고 귀국했다. 그는 연희전문학교를 중심으로 음악강습회를 실시하고, 그는 1929년 2 월 27일 첫 번째 성악가로 데뷔하는 독창회를 개최했으며, 1932년부터 1944년 전국남녀중 학교음악콩쿠르를 개최했다. 그는 1930년 홍남파, 채동선, 김영환, 윤성덕 등과 조선음악가 협회를 결성해 이사장이 되었다. 한편 1937년 미국으로 가서 자연발성법이라는 논문으로 음 악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939년 이후 조선문예회에 참여하여 친일활동을 전개하며 대동 민우회,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조선음악협회, 경성후생실내악단 등 친일단체에서 활동 했다. 특히 조선음악협회의 음악회에서 친일적인 내용의 성악곡 〈후지산을 바라보며〉를 발 표하고 대화숙 주최 ‘국민음악의 밤’과 같은 친일 행사에 참가해 독창을 하거나 국민총력조 선연맹의 전국 순회 가창지도대에 참가했다. (4) 이원수와 김소운의 적극적 친일선동 이원수는 1911년 양산출신으로 마산공립보통학교와 마산공립상업학교를 나왔다. 1926년 방정환이 주재하는 어린이 동요에 고향의 봄을 발표하며 등단했으며, 윤석중과 함께 기쁨사 동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1930년 함안금융조합에서 근무했고, 1937년 함안독서회사건으로 치안유지법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그러나 일제말기에 그는 친일작품인 <지원병을 보내며>를 통해 “우리도 자라서, 어서 자라서, 소원의 군인이 되겠습니다. 굿센 일본 병정이 되겠습니 다”라는 내용의 노래를 통해 지원병을 선동하고 있다. 그는 낙하산(1942.8, 半島の光, 조선 금융연합조합회), 보리빗헤서-젊은농부의 노래(1943,5 半島の光), 전시 하 농촌아동과 아동 문화(1943.1 半島の光)등에 친일성향의 글을 남기고 있다. 김소운은 본명은 김교중(창씨명 鐵甚平)이다. 그는 1907년 부산출신으로 1915년 진해공립 보통학교와 1916년 절영도 사립옥성학교 편입학해 1919년 절영도 옥성학교 소년단장을 지 냈으나 학년으로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21년 동경 가이세이중학교 야간부에 입학했 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그후 1924년 제국통신 경성지자에 입 사했다. 1925년 조선일보 부산통신원을 지냈다. 1927년 조선의 농민가요를 일본으로 번역한 <지상낙원>으로 이름을 날렸고, 민요, 동요, 동화, 현대시, 시화 등에 능했다. 특히 조선구전 민요집(1933), 조선동요선(1933), 조선민요집(1941)을 출간했다. 그는 1929년 매일신보 학 예부원을 지냈다. 그는 1943년 조선문인협회 발기인을 지냈으며, 매일신보 등에 각종 친일 작품을 남겼다. 그는 1943년 11월 21일 <매일신보>에 “부조의 오명을 일소”라는 제목으로 학도지원병제도의 실시에 따라 학도지원병을 모집하자, 역사의 부채로서 조선민족의 배후에 떠나지 않는 부채를 제군의 손으로 청산하기 바란다면서, 일제에 대한 충성을 강요했다. (5) 설송 정인섭의 민족아동작가에서 친일행적 설송 정인섭(창씨명 東原寅燮)은 1905년 울주 출신의 대표적인 아동작가였다. 그는 1922 년 와세다대학 제1고등학원을 다닐 때, 윤극영, 마해송, 방정환과 함께 색동회 발기인으로 활동했으며, 동인지 <어린이>에 동시를 발표했다. 그는 1926년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들어가 김진섭, 이하윤 등과 해외문학연구회를 결성하고 이듬해 기관이 <해외문학>을 창간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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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한국 전래동화를 중심으로 하는 온돌야화를 일본어로 편찬했고, 해외문학파의 입장에서 번역예술의 직능(1927),

1929년 귀국하여 연희전문 교수가 되었고, 1931년 극예술연구회

동인으로 신극운동에 참여했다. 조선문단에 소함(1931) 등을 통해 한국문단을 민족문학파, 프로문학파, 해외문학파로 나누고, 프로문학과 민족문학파의 반성을 지적했다. 그는 한글학 회 회원, 한국민속학회 회원, 국제언어학자대회 한국대표를 지냈다. 그런데 그는 1939년 조 선문인협회 간사, 1942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을 지냈다. 그는 1940년 1월부터 1942 년 1월까지 매일신보, 국민문학 등에 친일작품을 계속 올렸으며, 특히 1940년 12월에는 조 선문인협회 주최로 김동환, 박영희, 유진오와 더불어문예보국강연회를 개최했다. 그후 1941 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인문인협회 주최로 1941년 12월 13일 개전을 기 념하며, 부민관대강당에서 <영미문화를 격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4. 전시체험과 식민지청년의 대응방식 일제말기 급박한 전시상황에서 청년들은 심각한 생존의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친일’과 ‘항일’의 경계는 모호한 중간영역이 존재했고, 이곳에는 ‘현실적 타협을 둘러싼 경계설정의 복잡성이 존재했다. 당시 청년세대들이 직면한 다양한 개별적 처지와 내적 갈등, 외적 상황 에 대한 사례 축적은 두말할 필요 없이 중요하다. 당시 전시파시즘적 환경에서 조선청년들의 항일/친일은 양자택일적인 문제만은 아니었다. ‘체면과 출세, 체념, 분노’와 같은 복합감정은 이들을 수없이 흔들었다. 청년들이 당시 선택했던 저항과 타협방식을 ①체념형, ②은둔형, ③의분형, ④지사형, ⑤투사형 등으로 유형화할 수 있다.

1) 식민지 청년들의 파편적 전시체험과 대응방식 (1) 광주학생 참여자들의 희생과 고통 ① 광주사범학교 김기주의 죽음과 희생 광주학생운동 참여자 김기주는 1908년 장성 삼서면 출신으로 어릴 때 3.1운동을 목격했 고, 농민운동과 소비조합운동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1926년 전남공립사범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광주사범학교는 3년제 학교였다. 6.10만세운동을 거치면서, 전남사범학교에서도 항일의 기풍이 예외 없이 파고들었다. 이보다 앞서 1926년 11월 광주지역에는 광주고보, 광주농업 학교 재학생중심의 비밀결사 성진회가 출현했다. 광주사범학교에서도 비밀연구모임이 출현했 다. 이 조직은 강해석과 지용수 등 전남청년동맹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사범학교는 1927년 신학기 초에 교사배척운동을 3학년생 하의철, 이동선, 정귀석, 박무길 등이 주도했으 나, 큰 피해 없이 무마되었다. 이 사건 이후 연구모임에는 2학년생 김기주, 최상호, 강달모, 임종근이 가세했다. 1928년 3월 이동선, 하의철, 정귀석, 박무길등은 졸업과 동시에 봉안공 보, 서창공보, 승주공보, 창평공보 교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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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주는 1926년 여름부터 김시중, 나승규 등 신간회 장성지회와 장성청년회 주최하는 야 학회에 참여해 야학교사로 활동했다. 광주사범생들은 암암리에 모임을 지속했지만, 큰 변화 없이 졸업하게 된다. 1929년 3월 경 사범학교생들은 광주 서문통(西門通) 중화요리 연빈루 (宴賓樓)에 모여 임종근, 김기주, 김필재, 임종대, 노근후. 최상호 등 6명의 졸업축하연을 빙 자해서 송동식, 강문범, 황상남, 신명철, 신휴근, 이춘수, 김종화, 홍귀주 등이 모인 가운데 졸업생과 재학생의 단결을 촉구하고, 사회과학연구모임을 활성화시켰다. 그 결과 이 모임에 합류한 학생들의 규모가 20여명에 달하게 되었다. 이후 김기주는 장성공보, 임종대(林鍾大) 는 포항공보, 김종선(金鍾善)은 남산공보46), 임종근(林鍾根)은 비금보통학교, 김태영(金泰泳) 은 곡성공보, 노근후(魯根厚)는 마산공보 교사가 되었다. 1929년 3월 임종근, 김종선 등은 전남청년동맹원으로 각급 교원연락책을 맡았다. 이런 가 운데 1929년 6월 독서회중앙부가 결성되고, 7월 재학생중심의 광주사범학교가 출범하자, 졸 업생들은 후배들과 연락을 취해 활동했다. 그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1929년 11월 13 일 장재성이 체포되었고, 후쿠모토 다께이(福本武能)를 수사관으로 한 일경은 장재성빵집의 천장에서 짐차 1대분의 자료가 수거되었다.47) 이 사건으로 김기주를 비롯해, 임종대, 임종 근, 김태영, 김종선, 노근후 등 사범학교 졸업생이자 현직 교사들이 연행되어 체포되었다. 당 시 김기주는 장성보통학교에서 체포되었으며,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받았고, 1931년 대구복심법원에서 1년을 받은 뒤 7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석방되었다. 그후 김기주 는 석방후 일본유학을 갔으나 전협(全協)계열의 사회운동에 관여하다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체 포되어 1935년 12월 10알 동경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았다. 그후 귀국했으나 건강악 화로 1940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32세로 사망했다. ② 광주고보 김몽길(金夢吉)의 비극 김몽길은 1907년 보성군 웅치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조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12 살 때인 1919년 4월 18일 웅치면 서당학생이 주도한 만세운동을 목격했다. 그는 1925년 4 월 광주고보에 입학했고, 틈틈이 고향에 내려가 야학강습소에서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1926년 6월 조부 김풍식을 따라 순종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6.10만세를 목격했다. 1928년 6월 이경채사건을 계기로 맹휴가 발발했을 당시 김시성과 김몽길, 김기권 등은 광주 고보 동맹휴학을 주도한 책임 학생간부 중 한명이었다. 1928년 맹휴를 통해 성진회 창립회 원 임주홍, 최규창, 정우채를 비롯해 김기권, 송성수(宋聖秀), 윤승현(尹昇鉉), 김영찬(金泳 燦), 최규성(崔圭星) 등이 퇴학당했다. 1928년 10월 하순에는 김시성의 하숙집인 부동정 현준호(玄俊鎬) 집에서 김몽길, 김상환, 김보섭, 여도현(呂道鉉), 김시성 등이 모여 광주지역 고보생 규합을 통한 사회과학연구를 결 의한다. 이들은 배일운동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할 것을 결의하며 매주 1회 회합할 것

46) 김종선은 장흥 남산면 출신으로 남산공보교사 겸 전남청년동맹원이었다. 그는 광주학생사건의 배후인 독서회 참여혐의로 조사를 받았다가 1930년 7월 17일 예심종결로 면소되었다. 그러나 김종선은 1930년 10월 12일 성진회 독서회관련 재판이 열릴 때 재판부가 방청을 제한하자 김백동(金白東). 유희성(柳羲星)과 항의하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47) 佐堀伸三(사호리 신소), 문승이 역, 젊은 항일의 군상, 2000,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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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 86주년 기념 특별학술회의

을 결의한다. 이처럼 맹휴를 거쳐 성장한 학생모임은 1929년 독서회중앙부의 모태가 되었 다. 1929년 3월 22일 종업식 직전 시라이(白井)교장은 일부 학생의 퇴교조치를 검토했다. 이 소식에 김몽길은 하길담(河吉淡), 여도현, 김경술, 문두재 등과 운동장에서 교장을 성토했다. 이들은 교장을 규탄하고 교내에 격문을 살포하고, 교장실 밖에서 항의했다. 이후 일경에 체 포되어 퇴학당했고, 1929년 4월 24일 출판법 및 폭력행위처벌법 위반 혐의로 광주지방법원 에서 징역 6월을 언도받았다. 그뒤 5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 집행유예 4년을 받 았다. 김몽길은 집행유예 기간 중 1929년 11월 26일 귀향해. 고향인 보성 웅치에서 보성청년 동맹을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광주로 압송되었으며, 김몽길은 치안유지 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구금되었다가 1930년 10월 2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그 후 항소하여 1931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후 일경 의 감시와 탄압으로 국내운동이 불가능하자 목포에서 상해로 밀항 도중에 적발되어 검거되 었다. 김몽길은 1930년대 말 보성군 웅치면장을 지냈다. 면장 재직시절 500여석의 양곡이 태풍 피해를 입자 군청과 담판을 짓고, 자신의 사재를 담보로 농민들에게 양곡을 무상으로 배급했 다. 해방 후 그는 박태규, 정해룡, 정해진, 강한균 등과 보성군 건준을 결성했다. 보성군 건 준은 군정과 치안유지를 위해 지역유지들로 구성되었는데,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1945년 9월 말 건준이 인민위원회로 재편될 때 김몽길은 박기원, 장재경 등 과 함께 보성군 대표가 되어, 서울 천도교강당에서 열린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 대회에 참석 했다.48) 그러나 항일의 경력도, 일제말기와 해방초의 면장 경력도, 건준위원의 경력도 해방 공간의 틈바구니에서 김몽길을 지켜주지 못했다. 결국 김몽길은 여순사건이 일어나면서 좌익 에게도 당하고, 우익 경찰에게 붙잡힌 뒤 재판없이 처형되는 비극적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③ 제주출신 유학생 김시성(金時成)의 죽음 1928년 광주고보 맹휴과정에는 맹휴중앙동맹을 이끈 몇 명의 주요 학생들이 있었다. 김시 성은 1910년 제주 조천출신으로 조실부모한 탓에 중부 김인호의 도움으로 자랐다. 그는 1925년 신좌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광주고보에 입학했다. 그는 일본유학을 했던 김시학 (金時學)과 친척으로, 집안간 왕래가 있었던 부동정의 현준호의 집에서 하숙했다. 김시성은 1927년 10월 김광용, 임주홍, 정우채, 최규창, 김몽길(金夢吉), 여도현(呂道鉉) 등과 함께 광 주고보 성진회 후계그룹에 참여했다. 이듬해인 1928년 5월 김시성을 비롯한 광주고보 4학년 들은 만주 봉천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왔고, 유리걸식하고 북만주로 이동하는 농민들의 현실과 시설을 잘 갖춘 일본인학교에 달리 차별당하는 조선인학교의 현실을 목격했다.

48)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발생하면서 1948년 10월 웅치면은 지방좌익에게 장악된다. 1948년 10월 23일 좌익 은 김몽길에게 면민대회 연설을 강요했다. 그 뒤 1948년 11월 보성-화순 우익의 좌익 토벌작전이 시작되자, 이 번에는 11월 30일 경 면민대회 참가한 사실로 인해 보성경찰서에 수감했다. 당시 경찰은 주민을 마을회관에 소 집시키고, 김몽길의 집을 전소시켰다. 김몽길은 1948년 12월 12일(음력 11월 12일) 보성급 대하리에서 집단 처형을 당했다. 웅치향토사편찬위원회, 「웅치면지」, 2000, 32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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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광주고보의 동맹휴학은 김기권, 김시성, 김영찬과 같은 4, 5학년 급장들이 진정서 제출을 계기로 촉발된 것이었다. 학교당국은 김시성을 포함해 27명의 학생들을 퇴학처분시 켰다. 당시 학생들은 정동화, 김영찬, 김종호, 임주홍, 최규창, 정우채, 김시성, 서재호 등을 중심으로 맹휴중앙본부를 결성했다. 그 후 김시성은 퇴학을 당했지만 맹휴가 끝날 때까지 항 의운동을 지속하며 복교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복교가 불가능하자 1928년 겨울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영어학교에 입학했다. 한편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면서 1929년 11월 13일 장재성이 체포된 후 11월 20일 장재 성빵집 천장에서 성진회원 명단이 발각되면서, 김시성은 학생비밀조직 성진회계열로 분류되 어 오사카에 출동한 전남경찰부 소속 형사에게 체포되었다. 김시성의 체포이유는 1927년 해 체한 성진회 재건그룹에 참여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1930년 10월 2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받고, 항소한 뒤 1931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 원에서 징역 1년을 받았다. 김시성은 1931년 6월 대구에서 동지들과 출옥했지만 고문후유증 으로 고향에서 병치레를 하다가 3년만에 사망했다. 게다가 오사카에서 재일조선인노동운동 에 종사했던 친형 김시균(金時均)의 사망에 연이은 형제들의 안타까운 죽음이었다.49) ④ 김재룡의 항일투쟁과 희생 김재룡은 1907년 곡성 옥과 출신으로 어릴 때 정동화, 허진환 등과 어울려 죽림서당을 다 녔다. 그는 옥과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26년 4월 광주농업학교에 입학했다.50) 그는 광주농 업학교 2학년에 재학중이던 1927년 10월 문승수의 권유로 사회과학연구회에 참여했으며 김 태호(金台鎬) 집에서 김만복(金福萬), 유상걸(柳上杰), 주당석(朱唐錫), 유치오(兪致五), 정동 수(鄭東秀), 문승수(文升洙) 등과 성진회 재건 방안을 협의했다.51) 그는 1928년 광주농업학 교 3학년생을 중심으로 일본인 교사배척운동과 동맹휴학을 전개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회 원 12명과 함께 퇴학당했지만, 광주농업학교 맹휴중앙본부의 모계부원이 되어 연락책으로 활동했다. 그는 동맹휴학과정에서 노예교육 철폐를 주장하는 격문을 작성해 광주시내와 농 업학교에 배포했다가 체포되어 광주지방법원에서 1928년 9월 18일 징역 6월을 받았다. 김재룡은 1929년 2월 석방된 후 정동화(鄭東華)와 함께 전남청년동맹과 옥과청년회에 가 입했으며 농민야학운동을 전개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면서 1929년 12월 에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구속되었다. 그는 1930년 10월 27일 광주법원에서 성진회독서회 사건으로 징역 2년을 받았고 1931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았다.52) 그는 1932년 1월 곡성군 옥과면에서 조선청년총동맹 전남도연맹 위원장 정동화(鄭東華), 옥과청년회 한명덕(韓明德)과 농민단체 옥과노동회(玉果勞動會)를 조직해 조합원 1,900명의 거대조직으로 발전시켰다.53) 1932년 김재룡은 김호선(金好善), 김재동(金載棟), 정동화(鄭東 華), 안종익(安鍾翊), 임종대(林鍾大), 박만춘(朴晩春), 김영재(金永才=金永錫), 정시환(鄭時 49) 김찬흡, 편저, 「20세기 제주인명사전」, 제주문화원, 2000, 김찬흡은 김시성의 사망시기를 죽암(竹岩) 고순 흠이 지은 비문을 근거로 1935년에 사망했다는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50) 전남노농협의회 송치의견서(1932.7.25) 51) 광주지방법원판결문(1930년 10월 27일) 52) 대구복심법원판결문(1931년 6월 13일) 53) 광주지방법원 판결문(1934.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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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 86주년 기념 특별학술회의

煥), 김백동(金百東), 이병식(李炳植), 윤승현(尹昇鉉), 송성수(宋聖秀), 최창진(崔昌鎭), 최차 도(崔次道), 조기원(趙琦元), 고재휴(高在烋), 지영렬(池英烈), 선태섭(宣太燮), 정은찬(鄭恩燦), 강환진(姜桓珍), 구오현(具五鉉), 박기원(朴基源), 이정윤(李廷允), 한덕명(韓德明)과 함께 전 남노농협의회를 결성해 활동했다.54) 이 사건으로 김재룡과 한덕명, 정동화는 2년간 미결수 로 700일 이상 투옥되었다. 1934년 11월 2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이 진행되었으며,

55)

당시 김재룡은 장기간의 옥고로 허약해진 상태에서 1935년 1월 3일 28세의 나이로 사망했 다. ⑤ 안종익의 희생과 잊혀진 행적들 안종익은 1904년 광주군 서방면 용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7세까지 서당을 다녔고, 광 주청년학관을 거쳐 1922년 4월 광주고보에 입학했다. 그는 왕재일이나 장재성보다 약간 나 이가 많았지만 동급생으로 우정을 맺고 있었다. 그는 광주토박이로 일찍부터 청년운동가들과 도 인연을 맺었다. 하숙집의 알선에는 안종익의 인맥이 동원되기도 했다. 안종익은 광주농업 학교 학생들의 윤독모임과 더불어, 1년간의 준비 끝에 1926년 10월 말 왕재일이 박인생, 정 남균, 문승수의 집에서 모임을 가지며 부동정 최규창의 집에서 성진회 창립식을 개최하는 데 에 참여했다. 그러나 성진회는 창립 5개월만에 위장해체되었다. 이후 안종익과 박인생, 장재 성은 일본유학을 떠났다. 재동경광산학우회 서기로 최동문, 장재성, 최장진(崔昌鎭)과 어울렸 다. 왕재일은 종남방직공장 수위로 취직했고, 정남균은 완도 약산공립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사건이 발생하자 안종익도 성진회원으로 11개월간 수감되었다가 1930년 10월 18일 면소처분되어 석방되었다. 안종익은 1931년 9월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에 서 활동하던 권대형, 이응규, 김기선 등의 영향을 받으며 광주적색농민조합을 결성하고 1931년 10월 사회운동연구회의 세포조직원으로 비밀결사 독서회를 만들기 위해 광주군 서 방면 태봉산에서 김재동(金載棟), 고재휴(高在烋)와 함께 반제동맹을 조직했다.56) 안종익은 1931년 가을부터 김호선(金好善), 윤승현(尹昇鉉), 김재동(金載棟), 김부득(金富得), 김재룡 (金在龍), 임종대(林鍾大) 등과 농민조합과 노동야학을 개설했다. 또한 1931년 12월 안종익 은 장적우(張赤友 본명 이응규)의 지도를 받으며, 고재휴와 함께 광주군 천면 주월산에서 회 합하여 광주적색노동조합을 결성했다. 그 후 안종익은 광주군 본촌면에 사는 구제일(具齊一) 의 집에서 본촌 적색농민조합을 조직하고 구제일, 노제영 등과 함께 노동야학을 운영했다. 또한 유명무실한 지산공립보통학교 동창회를 부활시키기로 하였다. 광주적색노동조합과 안종익이 만든 광주비밀독서회는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목표로 한 조직인 전남노농협의회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후 1932년 3월경 김호선, 김백동(金 栢東), 고재휴(高在烋), 김재룡(金在龍), 조기원(趙基源), 최차도(崔次道), 강환진(姜桓珍), 선 태섭(宣泰燮), 이정윤(李廷允)

등이 연달아 체포되면서 전남노농협의회는 조직이 와해되었

54) 전남노농협의회 판결문(1934.11.27) 55) 김재룡, 김재동, 안종익, 임종대, 정시환, 김백동, 이병식, 김호선, 윤승현, 송성수, 최차도, 고재휴, 지영렬, 선태섭, 정은찬, 정동화, 이정윤은 미결구류기간이 730일이 적용되었다. 56) 그 후 성과가 나타나지 않자 고재휴는 1931년 11월 비밀결사 무산소년회를 조직하였다가 해체하고 12월에 최희원(崔熙 源)을 지도하여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고 이를 1932년 2월 이 조직을 무산소년획득동맹으로 정해 활동하며 그 조직의 책임자로 활동했다. 전남노농협의회 의견송치서(1932년 7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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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말기 사상통제와 항일세대의 균열

다. 이때 안종익은 1932년 7월 구속되었으며 체포된지 1년 4개월 만인 1933년 11월 18일 예심종결 판정을 받았다. 이후 미결구류상태로 거의 700일 가까이 구속되었다가 김호선, 안 종익, 최창진, 고재걸, 정은찬, 최차도, 조기원, 정시환, 이병식, 지영열, 김영재, 김백동, 강항 진, 구오현, 박기원, 임종대, 박만춘, 정동수, 송종갑, 윤승현, 송성수, 선태섭, 김재용, 한덕 명, 이정윤, 김준수 등과 함께 11월 1일 재판을 받기 시작하여 1934년 11월 27일 치안유지 법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았다. 그 후의 안종익의 행적은 분명치 않다. (2) 전시체험과 식민지 항일의 파편적 기억 ① 강수원의 일제말기의 체험과 기억 강수원은 1916년 고창출신으로 1931년 고창고보에 입학해 당시 농촌계몽운동에 참여해 활동했다. 그는 고창고보를 졸업한 후 동경전수학교에 입학했으며, 조선경제참상에 눈을 뜨 고 경제학연구를 핑계로 농촌을 조사하러 다녔다.57) 당시 일제는 중일전쟁 직후, 외방지역의 확대 속에 조선과 만주등에서 반제항일을 방지하려고 대동아공영권의 틀 속에서 조선을 자 치독립시킨다며 독립운동세력을 회유하는 한편, 소위 항일분자를 ‘불령선인’으로 삼아 예방 구금, 및 협박, 감금 폭행을 비롯해 강제노력을 일삼았다. 특히 1940년 조선사상보국동맹 등 을 통해 좌익운동 및 민족운동 참여로 수형되었던 다수의 청년들을 강제노역 등에 동원했다.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회유와 협박은 여러 방면에서 진행되었다. 당시 동아연맹은 동경 유학생들에게 조선인학생연맹 좌담회에 참여를 강요했다. 강수원은 광주고보 출신 박석우(朴 錫祐), 제주농업학교 출신 김창옥, 고창고보의 홍영기와 두 차례 참여했다가 항일학생을 색 출하는 음모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자 나가지 않았다. 이들은 항일비밀결사 <우리들>을 결성하여 동경제대 부속 식물원이나 담양 창평의 박석우의 집 등에서 회합하여, 진로를 모색 하면서, 일본이 패망을 할 것을 대비한 지도역량을 갖추기로 결의하였다. 1943년 9월 무역 상을 하고 있던 김창옥이 있는 시모노세키에서 모였다가 시모노세키 부두를 폭파하고 청도 를 거쳐 광복군에 합류할 것을 결의한다. 그러나 이들이 현지 부두노동자들과 접촉하자, 감 시중이던 특고경찰들에 의해 50여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후 강수원, 김창옥 등은 야마구치 구치소에서 미결상태로 있다가 1944년 6월 각각 징역 3년을 받았다. 그러나 김창옥은 옥사 했고, 히로시마형무소로 이감되었던 강수원, 박석우 등은 원자폭탄 속에서 살아남나 10월 석 방되었다. ②황수영의 식민지 말기의 회고 한국불교미술사의 선구자인 황수영 회고록은 녹록치 않았던 해방 직전의 고뇌에 찬 일제 말기의 파편적 기억을 담고 있다.58) 그는 1918년 서울출신으로 제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이고보를 다니다가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일본 동경에 있는 마쓰야마(松山)고등학교로 편입했다. 그 후 1939년에 동경제대 경제학부에 입학했다. 그는 남대문에서 상업과 인삼포

57) 강수원, 「망국민의 통한」, 좋은친구, 2000, 16. 58) 황수영, "선사의 길을 따라", 「한국사시민강좌」 11집, 1992, 160-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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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작을 했던 조부덕분에 큰 어려움이 없이 자랐고, 일본유학을 했던 식민지 조선인청년이었 다. 그는 당시 동경제대에 재학중 경제학부 장병찬, 법학부학생 최윤모, 염세열, 김경택, 이 하영, 이한기, 이호, 신도성 등의 조선인학생들과 교류했다. 당시 동경제대는 극소수 조선학 생을 선발했으나 당시에는 예외적으로 10여명이 넘는 조선인이 입학했다. 그의 유학생활은 4년간 하숙집을 중심으로 거의 하숙방-도서관-강의실로 이어진 틀에서 반복되었다. 그는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조기졸업 했으며, 연말에 학술출판사 岩波書店에 취 업했다. 그후 1943년 패전의 기색이 짙어진 가운데 징용이 시작되자 1944년 봄에 출판사를 그만두고 귀국했다. 그러나 직장을 구할 수 없고, 징용대상자가 되면서 방황하던 중에 스승 고유섭의 장례를 치르고, 직장이 없을 경우 언제 징용되지 모르는 상황에서 1944년 8월 만 몽산업주식회사에 입사했고, 개성과 하얼빈으로 옮겨 가족을 데리고 만주국정부로부터 개척 용지를 얻어 이민농지를 개척하는 일에 종사했다. 1년후 그는 북만주에서 8.15 해방을 맞이 했고, 소련군에 점령된 만주를 넘어오면서, 일본군의 해체과정을 목격하였다. ③ 교실에서의 항일낙서와 선동으로 처벌당한 강신홍 강신홍은 1923년 전북 진안출신으로 1938년 전주농림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입학 후에 일본인교사 산본(山本)이 일본사 수업시간에 한일병합을 강변하며 조선민족의 무능함을 비꼬 자, 민족적 모멸감과 분노를 느꼈다. 그는 1940년 3학년 신학기 초에 일본인 교사 미산(尾 山)이 조선학생을 모멸하고 구타하자, 일제에 대한 강한 분노를 갖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1940년 4월 말에 전주농업학교 탈의실에서 동급생 영덕명홍(德永明弘)을 비롯한 40명과 함 께 옷을 갈아입던 중에 돌연 “조선동포여! 각성하자”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 후 1940년 5월 에는 운동장에서 동급생 삼전장치(三田長治)를 비롯한 10명의 학생들과 놀다가, 이들 앞에서 조선어로 “내지인들을 이 땅에서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동급생 평본영건(平本永健)을 포함해 총 13명이 보는 앞에서 3학년생 교실 흑판에 백묵으로 ‘조선만세’를 크게 쓰기도 했 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는 정치에 관한 불온 및 태업을 통해 치안방해 혐의로 체포 되었고, 치안유지법에 의해 기소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전주지법에서 징역 4월을 받았으나 항소를 했더니 대구복심법원에서 오히려 형기가 늘어나 1941년 6월 25일 징역 10월을 받았 다. 이는 당시의 일제가 학생들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얼마나 일상적인 차원에 대한 폭력으 로 이어졌는지를 보여준다. ④ 덕수상고 김용창의 항일저항 김용창은 1926년 수원태생으로 소학교를 마치고 가난하여 16세 때 서울로 올라가 고학생 활을 했다. 1942년 4월 덕수상업학교 야간반에 입학했다. 그는 생활비 조달을 위해 고민하 던 중 경성제대 교수의 소개로 1942년 10월부터 1943년 6월까지 경성제대 법문학부 사환 으로 일했고, 1943년 여름철엔 체신국 경성보험관리소 직원으로도 근무했다. 그는 덕수상고 2학년 때 일본인들이 겉으론 내선일체를 내세우면서도 조선인을 괄시하고 차별하고 있음에 분노하면서, 내선일체로 두 민족의 융합은 불가능하며 독립없이는 행복이 없다고 인식했다. 그는 1944년 4월 학교친구 김익설(金益卨)에게 조선총독부의 강제징집과 민족차별정책을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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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말기 사상통제와 항일세대의 균열

력하게 비난했다. 또한 동급생 송본무(松本茂)에게 경성보험관리소 일본인 계장은 조선인을 차별한다며, 내선일체를 비판했다. 그는 5월경 보험사무실에서 동료 직원에게 해외 각지에서 조선인이 독립운동을 하고 있으며, 조만간 독립하면 일본인을 내쫒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그는 관리소 징수과 사무실에 근무하는 정목청(正木淸)이 아버지가 조선인이지만 어 머니가 일본인이므로, 어머니 적으로 옮기고 싶다고 말하자 이를 만류하고, 조선인이 일본인 보다 우수하고 조선이 독립하면 일본인은 쫓겨날 것이라며 만류했다. 그는 덕수상고 야간반 학생들에게 일제의 침략전쟁을 반대하며 반제운동과 조선청년들의 강제징용에 대한 반대운 동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1944년 5월 자신이 일하는 보험회사 화장실에 "반도 2천 6백만 동포여! 자 일어서라! 조선 독립의 때가 왔다. 지금 와서 지원병이니 징병이니 하고 있다. 아 아! 가련하도다"라는 글을 썼다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구속되었다.59) 결국 1944년 12월 14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되었다. 당 시 일제는 김용창의 행적을 의심해 고문과 취조를 했고, 결국 그는 1945년 4월 3일 스무 살 에 옥사하였다. ⑤ 강제징집자의 ‘체념’과 ‘분노’-최학규의 사례 1943년 겨울 이후 일제는 태평양전쟁의 상황이 악화되자 학도지원병을 모집했다. 지원이 라고는 했지만 태반은 강제징용이었다. 이들은 단기 훈련을 거쳐 중국, 인도차이나(버마)등의 남방지역으로 파견되었다. 1944년 1월 20일 경성법학전문학교 출신의 최학규를 비롯한 수 백명의 학병들이 경성역 광장에 모였다. 당시 경성역은 일본인들과 가족을 보내기 위해 나온 조선인들이 거리를 가득 메운 가운데, ‘축(祝) 출정(出征)’, ‘성전완수(聖戰完遂)’, ‘축원(祝願) 무운장구(武運長久)’ 등의 수백 개의 깃발이 가득했다. 이들은 대구로 이동하여 일본육군 제 24부대에 입영했으며 짧은 훈련을 받은후 북행열차를 타고 평양을 지나, 압록강을 넘어 중 국북부로 이동했다. 북지파견군 일부에 속했던 최학규는 산동성 제남과 청도 중간에 있는 장 점(張店)에 있는 제 41대대 제3중대에 배속되었다. 이들에게 맡겨진 업무는 제남과 청도 중 간에 있는 철도를 지키고, 제남일대의 항일세력을 토벌하는 일이었다. 그는 일본군이 부족해 지자 박산훈련대에서 교육훈련을 담당했으며,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박산군인휴식소(博山軍人 休息所)에서 전남출신의 조선인여성을 목격하며, 강제로 끌려온 비극적 현실을 겪게된다..60)

2) 식민지 청년들의 집합적 대응방식 (1) 부산상업학교 학생 이세기의 경험한 일제말기의 저항 이세기는 1923년 하동출신으로 1937년 부산제이상업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일제는 극도 의 민족말살정책을 펼치고 있었고, 후방전력증강사업의 일환으로 각종 전력물자의 수탈, 생 필품

공출을 전개하는 한편 1939년 국민징용령을 발표하고 강제동원을 전개했다. 1938년

교련수업을 실시하며 학생들을 전쟁터로 징발할 계획도 세우기 시작했다. 1943년 학도지원 59) 소화 19년 형공 제3111호 경성지방법원판결문(1944.12.14) 60) 1.20동지회, 『1.20 학병사기』 제4권, 1998, 328-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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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제도가 실시되기 직전까지 학생들은 학교의 병영화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4학년 무렵인 1940년 11월 23일 이세기는 부산공설운동장에서는 열린 소위 경남학도전력증강국방경기대 회(慶南學徒戰力增强國防競技大會)에 전교생과 함께 동원되었다. 이날 대회는 부산상고, 동래 상고를 비롯해 경남지역의 중등학교 이상의 한일중학생들이 대거 참여했고, 조선학생들이 압 도적으로 많았다. 육상경기, 제식훈련 등에서 부산상고나 동래상고 학생들이 1, 2등을 차지 했으나, 일본심판은 부당한 이유를 달아 실격시켜 부정판정을 일삼았다. 결국 경기마다 두 각을 드러낸 조선학생들과 달리 일본인 학교가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날 오후 하강식 이 시작되자 동래중학교 5학년생과 부산제이상업학교 5학년생들이 배낭과 모자를 던지며, 전력증강대회 심판장 일본군 대좌 노다이(乃台兼治)를 규탄하는 시위를 전개했다. 이들은 ‘노 다이를 죽여라’라고 외치면서 운동장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에 이때 경남여고(港女高) 학생 들도 남학생들을 응원했다. 일본중학생들은 도망쳤고 심판들도 모두 담장을 넘어 도망쳤다. 당시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시내로 진출했다. 부산제이상업학교 5학년생 이인희(李仁 熙), 홍병희(洪秉熹), 이병도(李秉燾)와 4학년생 김선갑, 이정세, 김유근, 이세기, 어태영이 중 심이 되어 시위운동을 주도했다. 부산제이상업학교와 동래중학생 1천명이 시가행진을 하면 서 금지곡이었던 ‘황성옛터’, ‘아리랑’, ‘도라지’, ‘양산도타령’, ‘쾌지나칭칭’ 등의 민요를 부르 고 ‘조선독립만세’, ‘무엇이 내선일체냐’면서 ‘일본으로 돌아가라’, ‘일본놈을 죽이자’ 등의 구 호를 외치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일경과 헌병들은 압도적인 학생들의 궐기에 겁을 먹고 방관하거나 도망을 쳤다. 부산상업학생과 동래중학생은 부용동(芙蓉洞)다리를 넘어 보 수동(寶水洞) 사거리에서 대열을 나누어, 상업학생들은 대청동, 중앙동으로 행진했고, 동래중 학생들은 광복동, 중앙동으로 행진했다. 이들중 상급생들은 오후 8시경 부산일보 뒤편에서 대열을 정비한 후 부산 터널입구 우편에 있던 노다이(乃台兼治)의 관사를 습격했다. 11월 23일 이후 검거선풍이 시작되면서 이들은 200명의 학생들이 체포되었으며, 부산제이상업학 교는 21명을 퇴학시키고, 30명을 정학 및 견책했다. 핵심 주동자 15명은 1개월간 부산경찰 서 유치장에 있다가 부산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상업학교는 홍병희, 이병도, 이인 희, 4학년생 이세기, 김선갑, 3학년 김종배 등 6명이 체포되고, 동래중학교는 5학년 김인규, 김영희, 김명수, 이달희, 이도윤, 안장원, 정두열, 추우복, 3학년 김재한 등 8명이 체포되었 다. 그중 이선갑은 체포후 2주만에 옥사하고 말았다. 당시 이세기도 징역 8월을 받고 1년간 투옥되었다.

61)

(2) 전주북중 항일결사와 학생들의 파국인식 ① 항일교사 노환웅의 파국인식과 지하결사 노환웅은 1916년생으로 전주고보를 졸업 후 1938년 3월 경성사범학교 연습과를 졸업했 고, 1940년 경성약학전문에 입학해 약제사 시험에 합격했다. 그뒤 전주도립병원 약제사를 하다가 1942년 3월 전주북중 화학교사가 되었다.62) 그는 후배이자 제자들에게 수업시간을

61) 부상80년사, 부산상업고등학교, 1975, 129-134, 정세현, 항일학생민족운동사연구, 일조각, 1975, 488-492 62) 전주고는 노환웅을 전주북중 물리교사 노환(盧桓)으로 적고 있다. 전주고보 80년사, 19995.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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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해서 대동아전쟁을 일으킨 일제의 몰락을 예견하고 학생들이 민족의식과 조선의 역사, 조선의 혼으로 무장하고 독립의 호기를 맞아 적극적으로 준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또한 학 생들에게 조선민족의 행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민족의 독립만이 유일한 수단이라고 보고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모색했다. 노환웅은 전주고보의 제자들에게 일제가 대동아전쟁으로 경 제가 파탄되고 장기적으로 전쟁이 이어지면 필패할 수 밖에 없으므로 이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고 학생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그의 제자들 중에 최순기, 박윤하, 김태기, 김병순 등은 비밀결사를 결성했다. 한편 노환웅 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국세가 특히 경제가 파탄이 나서 조만간 패전이 불가피하다 고 보고 조선독립을 위한 호기가 도래하였으므로 일제가 몰락하기 전에 이를 실천하기 위한 실천운동을 전개하자고 하면서 학교 수업시간 등을 이용하여 학생들에게 주지시켰다. 그는 1942년 11월경에 전주북중 화학교실에서 학교에서 가르치는 수신교과서는 모두가 허구로 내선일체를 가르치는 교육은 현실적으로 내선차별을 가르치고 있다고 비판했다. 노환웅은 3학년 15명에게 너희들은 현재의 시국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아느냐, 오늘 의 시국은 큰 관심을 가지고 조선청년들도 크게 분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활동은 20 여차례 이상 진행되었다. 노응호는 1943년 5월 물자배급을 받는 조선의 현실을 규탄했고, 6 월 9일에는 내선일체와 징병제도 문제점을 폭로했다. 이러한 활동이 적발되면서 그는 1943 년 8월 치안유지법 위반과 육군형법위반으로 기소되었고, 1944년 6월 12일 징역 5년을 받 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3) 광주서중 학생들의 항일기풍과 무등회사건 광주서중은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이후 항일운동의 영웅들을 찬미하는 풍조가 교풍처 럼 이어졌다. 광주서중 유도부 주장 5학년 송흥호는 1937년 2월경 광주서중 4학년 유복렬, 광주농업학교생 최석두, 최동섭, 최규원, 광주여고보 김인순, 수피아여학생 안○○ 등과 ‘독 서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일본물품불매운동과 문맹타파운동을 진행했는데 누군가의 밀고로 50여명이 독서회 사건으로 검거되었고, 홍승호는 구속되면서 퇴학당했으나 기소유예를 받고 석방되었다. ① 나금주의 회고록에 나타난 무등회 사건 나금주 회고록은 일제말기 광주학생운동과 당국의 태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63) 기 환도, 나금주, 주하준, 주만우, 남정준, 강한수, 윤봉현 윤재춘, 기원흥은 1936년 광주고보에 입학한 학생들이었다. 1938년 광주고보는 광주서중으로 교명이 바뀐다. 송흥호의 유도부 후 배들인 주하준(朱夏俊), 나금주(羅今柱), 기환도, 남정준 등은 의기투합하여 1938년 5월 광주 북정에 있는 기환도의 방에서 3학년생중심으로 서중독서회를 결성했는데 이들 외에도 주만 우(朱萬尤), 유기춘, 유몽룡, 노익환, 김원선, 윤재구, 강한수(姜漢秀) 등이 참여했다. 1939년 5월 기환도는 광주부 서정 자택에서 4학년 기환도, 주하준, 나금주와 3학년 유몽 63) 나금주, 「무등회회고록」(자필회고록),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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룡(劉夢龍), 남정준이 모인 가운데 기존의 서중독서회 비밀지하조직으로 전환시켰다. 이들은 수시로 모여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한 옛선배들의 영웅담, 임시정부활동을 나누며 반일감정과 독립의식을 고취했다. 그해 광주에서는 장재성이 일본에서 옥고를 치른 뒤 귀국해, 비아 부 근에 양조장을 차렸을 때임으로 무등회원과 모종의 연락이 있었다고 사실이 부분적으로 전 해진다. 광주서중은 1941년 3월 졸업을 앞둔 학생들에게 자유토론대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는 졸 업을 앞둔 청년학도의 상태와 사상기풍을 조사할 목적이 다분했다. 당시 토론대회에는 전남 도청 학무국 시학관(視學官)도 참여하고 있었다. 학생과장은 평소와 달리 다소간의 비판적인 언사도 문제 삼지 않겠다고 말했고, 전남도청 시학관도 ‘오늘 이 시간은 앞으로 조선반도의 교육의 방향과 정책에 참조하고자 일부러 마련되었으니 내용이 지나치더라도 학생신분이니 면책된다’고 말해 활발한 토론을 권했다. 그 날 발언들은 서중 5학년과 학교간부급들과 급장, 운동부 주역들이 토론을 이끌었다. 학 생들은 처음에는 눈치를 보더니 점차 식민지 차별교육철폐, 조선어 또는 역사, 한문교육실시, 조선인교사증원, 내선일체나 동조동근론을 말하기 전에 차별정책 철폐, 창씨개명은 조선 5천 년 역사의 말살 아닌가, 우리 조선민족에게 자유가 있는가 등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64) 학교당국은 광주서중의 조선인학생들의 황국신민 교육이 성공했다고 자부하였는데 90여명의 학생들은 3시간 가까이 평소에 품었던 공분을 앞다투어 쏟아내었다. 그러나 이들은 1년 뒤 제1차 무등회사건이 발생하자 대부분 불려가서 혹독한 취조를 당했다. ② 남정준의 시국인식과 항일인식 일제의 감시는 매일 지속되는 일기장이나 과제물, 심지어 가택조사를 통해서 지속되었다. 남정준은 1940년 5월 수학여행감상문의 불온문제로 무기정학처분을 받고 학업을 중단당했 다가 1941년 3월 복교했으나 1942년 1차 무등회사건 때 치안유지법위반으로 검거되면서 퇴학처분을 받았다. 그 뒤 불기소처분을 받고 그해 연말에 석방된 뒤 1943년 만주로 가서 만주 복 무역회사에 고용되었다. 남정준은 히틀러와 무솔리니 등에 감화를 받아 조선도립을 희구하면서, 언론통제, 국어상용, 창씨제도, 지원병제도 등이 조선민족을 멸하고 일본의 기만 정책이라고 보았다. 한일병합이후 조선인이 제국의 압박에 굴해 있지만 피압박민족으로서의 의식이 한꺼번에 폭발하여 독립을 볼 것이라 인식했다. ③ 유몽룡(창씨명 中川原助)의 시국인식 유몽룡은 1936년 3월 서석보통학교를 졸업하고 4월에 광주서중학교에 입학했다. 1938년 3학년때 불온기록으로 퇴학을 당했다. 그는 주만우와 1941년 9월과 11월 광주시내에서 모 임을 갖고 현재의 한일관계는 극심한 차별이 있어 이를 없앨 방법은 조선의 독립뿐이라고 강조하고 이를 위해 민족단결을 통한 독립을 고양할 것을 결의하는 한편 1941년 10월 남정 준(사정 116번지)의 집에서 모여 최소한 독립이 불가능하더라도 자치령을 획득해야 한다고

64) 기환도(奇桓度), 나금주(羅金柱), 주하준(朱夏埈), 유기춘(柳基春), 최송백(崔松栢), 노익환(盧翼煥), 천경성(千慶 成), 정호식(鄭昊植), 남궁영(南宮暎), 최주현(崔柱鉉), 박용우(朴用雨), 고길현(高吉鉉) 이 토론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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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했다. 또한 그는 12월 중순 이덕영강(伊德英剛)과 산책을 하면서, 광주부 북정 142번지 자신의 집에서 강한수(창씨명 神農漢秀)에게 각각 대동아전쟁이 발발한 것은 조선독립의 절 호의 기회임으로 우리민족이 단결하여 조선독립을 시키니 않으면 안된다. 그런 노력이 없고 서는 자치령을 달성하기도 어렵다. 이를 위해 민족단결과 조선인의 문화수준을 높여 일본인 과 동등한 수준에 이르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활동으로 주만우 등과 함 께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 및 형법 제53조 위반으로 기소되어 1942년 12월 26일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65) ⑤ 주만우(창씨명 朱本正夫)의 시국인식 주만우(창씨명 朱本正夫)는 1941년 3월 광주서중을 졸업하고 그해 10월 전남 담양군 무 정면 무정공립보통학교 교원이 되었으나 6개월만인 1942년 1월 21일 퇴직했다. 주만우와 유몽룡은 평소 강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조선인과 일본인간의 차별이 극심하여, 내 선일체는 기만술이기 때문에 이러한 차별을 극복하려면 조선을 일제로부터 독립시키지 않으 면 안된다고 인식하였다. 주만우는 광부부 북정 203번지 자신의 집에서 친구 강한수와 만나 서 한일차별을 극복하려면 조선인의 단결과 문화수준을 높여야 하며, 민족의식을 양양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후 무정공립보통학교 교원이 된 뒤에도 민족의식을 고취하다 일본인교사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그후 이러한 활동으로 치안유지법 위반 및 형법 제53조 위반으로 기소되어 1942년 12월 2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게 되었다. ⑥ 기원흥의 항일인식 기원흥(창씨명 幸山源興)은 역시 1936년 광주서중에 입학했으며 3학년 재학당시 동급생 남정준의 영향으로 1929년 광주학생사건의 활약상을 득고 민족의식이 양양되자, 조선독립을 희구하였고, 대동아전쟁때 일본의 패전을 기회로 궐기하면 독립이 가능하다는 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1941년 3월 졸업후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했으나 학자금 부 족으로 1941년 12월 중도퇴학하고 귀국했다. 그후 1943년 6월 만주국 봉천성 심양현 소가 둔에 있는 남만주 방적주식회사의 고용원이 되었다. 제1차 무등회사건 1941년 3월 초 기환도, 나금주, 기원흥 등은 졸업을 앞두고 항일의지를 다졌으며, 기영도, 신균우, 나승정, 박화진, 손의석, 윤봉현, 윤재춘(윤장), 고길현, 배종국, 박하주, 이민수, 남연 준, 오복렬 등을 광주서중의 비밀독서회 ‘무등회(無等會)’를 재정비했다. 1941년 기환도는 보 성전문학교로 진학했고, 주만우는 담양 무정보통학교 교사가 되었지만, 후배들과의 연락을 지 속하며, 독립운동을 고취하는 활동도 지속했다. 유몽룡은 1941년 12월 5일 광주 북정 126번 지에서 기존 선배중심의 독서회는 사실상 해체하고, 재학생조직에 관리는 기영도에게 맡겼다. 당시 재학생과 졸업생을 연결하는 가교는 남정준이지만 실제 역할은 유몽룡이 맡았다. 1941년 12월 연말과 1942년 1월 초 담양 무정보통학교에서 근무하던 주만우가 동료교직원 65) 광주지방법원판결문(1942년 1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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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다가 일본인교사의 밀고로 검거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무등회 졸업 생조직이 드러나면서 유몽룡과 강한수, 남정준, 윤봉현, 윤재춘, 김동수 등이 연달아 검거되었 다. 이것이 소위 1차 무등회 사건이다. 당시 주만우, 강한수, 유몽룡 남정준, 윤재춘(윤장)를 비롯해 만주에 있던 윤봉현이 체포되어 광주로 연행되었다. 이들을 포함해 총 21명의 학생들이 체포되었다. 나머지 기환도는 일본 동 경으로, 기원흥(奇源興)은 만주로 피했다.66) 이 사건으로 1942년 12월에 열린 재판에서 유기 룡이 징역 1년 6월, 주만우가 징역 1년을 받았으며, 나금주는 비롯한 19명은 미결상태에서 옥 고를 치렀으나 12월 26일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⑦ 학병반대운동과 기영도의 시국인식과 항일의 인식 1939년 광주서중에 입학한 기영도는 기환도의 친동생으로 1942년 1차 무등회사건이 발발 한 뒤 최대한 학교당국의 이목을 피해 조심스럽게 활동을 이어졌다. 당시 기영도는 동급생인 금전박창(金田博彰)의 하숙집인 광주부 남정 송도전기회사에서 모여 평산문웅(平山文雄), 나 승만(羅承滿), 강촌성전(姜村聲), 박화진(창씨명 新井武勳)과 모임을 갖고 조선인교사 국본(國 本)선생은 일본교사에 비해 훨씬 적은 월급을 받고 있다며 이러한 차별을 극복하는 것은 민 족의 독립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한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통해 패망을 할 것이고 국력이 기울어가고 있으니 전조선의 중 등학교 3학년 이상의 교련을 받은 학생만 동원해도 35-36만 명에 달한다. 이들을 군대화시 키면 충분히 항일전쟁이 가능하다. 또한 그는 독립을 획득하는 방법으로 해외에서 활동하는 망명중인 선배들을 통해 임시정부의 지원을 받거나, 김일성을 통해 소련의 원조를 받고, 국 내에서 호응하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았다.67) 1942년 5월 광주부 금정 이민수(李敏洙)의 집에서 기영도, 신균우(申均雨), 박화진(朴和 珍), 배종국, 최태석(崔太錫) 등과 모여 무등회를 재건했다. 이들은 20여명으로 학병거부, 조 선어사용, 친일학생 응징, 기회가 되면 항일운동을 위해 국외로 나간다는 계획 등을 세우고 전국적인 학생거사를 도모했다. 1942년 10월 기영도는 건강상의 이유로 서중 4학년 당시 중도에 휴학하고, 1942년 연말 에 일본으로 건너가 신주꾸 예비고등학교에 등록했으나 두달만에 중단했고, 1943년 1월에는 하얼빈에 있는 기원흥을 찾아갔다. 그 후 임정특파원인 장세정의 소개장을 들고 북경을 방문했다. 그후 만주를 거쳐 귀국하며 오산중학교의 박무식(朴茂植), 안주중학교 신길모(申吉模), 전주북중의 김병순(金炳淳) 등과 만나 전국적인 거사를 계획했다. 그뒤 기영도는 신균우를 동지로 획득하여 민족의식을 양양 할 독립의 방도를 모색했다. 기영도는 대동아전쟁은 일본의 패전이 예견되기 때문에 조선독 립의 호기라고 인식했다. 또한 조선인과 일본인은 선조가 다르고 차별대우가 있는데도 내선 일체를 내세우는 것은 기만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66) 전남경찰부, "무등회사건 수사보고서"(조선총독부 경무국), 1942 67) 광주지방법원판결문(1942년 1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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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신균우의 유학시험과 무등화 재건 신균우(申均雨)는 1925년 전남 고흥 포두 출신으로 1939년 광주서중에 입학했다. 그는 1940년 7월 기환도, 유몽룡 등의 선배의 영향으로 항일민족의식을 품게 되었다. 1941년 3 월 광주 북정 142번지 유몽룡의 집에서 기영도, 주만우가 주도한 서중독서회에 참여했다.68) 특히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독립의 기회로 삼아 대응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1941년 11월 중순 광주서중 3학년 교실에서 수학교사 담임 하야(河野)에게 민족발언을 하다가 내선 일체에 대해 비뚤어진 생각을 녀석이라 힐책을 당하자, 이는 본질적으로 내선일체가 조선인 을 침략전쟁에 이용해먹으려는 일본인의 멸시와 차별에 따른 술책일 뿐, 민족의 생존은 오로 지 독립이라고 자각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틈나는 데로 모임을 지속했다. 신균우는 1차 무등회사건 후 재학생중심의 무등회를 재건했다. 1942년 4, 5월경에 신균 우, 기영도, 박화진, 배종국, 이민우, 오복렬, 조병대, 박하주 등 재학생 20여명은 무등회(無 等會)를 재건했다. 신균우는 1943년 3월 봄방학기간을 이용해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입시차 일본을 다녀왔다. 당시 일본은 전쟁물자 부족과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으로 각지에서 징병이 진행되어, 보통학생, 중등학생을 비롯해 대학생들도 입대를 재촉하면서 많은 학도병들이 전 장터로 동원되어 학교들이 태반이 텅 빈 상태였다. 그는 수호고등학교에서 필기시험을 치른 뒤 합격했지만 면접시험때 면접관이 “조센진이 학교는 뭐하러 다니냐며 면박을 주며, 불합격을 시켰다” 이런 경험을 통해 일제나 내세운 내 선일체라는 논리가 얼마나 부질없으며, 패전을 앞둔 일본의 허세를 보며, 패전을 앞둔 일제 에 맞서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국내외적 호응을 절감하게 되었다. ⑨ 박화진(창씨명 新井和郞)과 항일의 경험 박화진은 1939년 광주서중에 입학했으며, 1943년 5학년 재학당시 항일시위운동으로 검거 되어 퇴학당했다. 그는 입학후 졸업생 유기춘과 중천원조와 교우관계를 맺고 민족의식을 품 었고, 1943년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입학시험을 치렀으나 사가(佐賀)고등학교 입시와 수호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한 뒤 조선인들에 대한 일본의 입시에 차별이 있다고 강하게 반발하면 서, 신균우와 밀접하게 친분을 유지했다. 그는 대동아전쟁에서 일본의 패전은 필연적이며, 이때야말로 조선독립의 호기이고, 미영의 원조를 받을 수 있으니, 지원병제도를 역이용하여 조선인학도로 교련을 받은 자들을 지도하 여 전민중을 일거에 봉기를 준비하되, 무등회의 당면임무는 서중학교 학생들을 독립투사로 만들기 위한 독립의식 주입이라고 주장했다.69) 이들은 틈나는 대로 학교와 교외장소에서 민 족의식을 고양하는 한편, 학병거부, 조선어운동, 국외항일투쟁세력과의 연계에 동참할 계획 을 세우고 뜻에 동조하는 학생들을 회원으로 가입시켰다.70) 박하주는 1939년 4월 광주서중에 입학한 직후부터 기영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1943 년 9월 퇴학당했다. 천천홍은 중류농가에서 태어나 1939년 4월 광주서중에 입학했고, 1942 68) 신창호 증언(2010.11.3), 신균우 직계가족 증언녹취록(2010, 10,30-2013.4.30) 69) 광주학생독립운동동지회, “제2차광주학생독립운동사건판결문”, 「광주학생독립운동사」, 국제문화사, 1974, 249-250. 70) 전남경찰부, "무등회사건 수사보고서"(조선총독부 경무국),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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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 86주년 기념 특별학술회의

년 5월 광주서중 4학년때 작성한 징병제도 실시에 대한 감상문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퇴학당 했다. 그는 1944년 9월 18일 치안유지법 위반 및 상해죄로 징역 1년 6월을 밥고 집행유예 5년을 받아 출감했다. 광주서중 제2차 광주학생운동: 항일의 재응집 일본유학시험을 실패한 신균우, 일본을 거쳐 만주, 북경을 거쳐 독립운동의 방책을 찾다가 돌아온 기영도는 결국 1943년 4월 광주서중에 복학했다. 1943년 4월부터 신균우, 박화진, 오 복렬, 배종국, 박하주, 조병대, 이민수 등은 본격적인 교풍쇄신운동(校風刷新運動)을 표방하며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하급생교실을 순회하면서 항일의 필요성과 조선어 사용을 강조했다. 이런 가운데 4학년 하급생의 밀고로 주동자 몇사람이 교장실에 끌려가 체벌을 당하 자 혐의가 있는 하급생 7-8명을 무도장 뒤편에 집합시켜 호되게 질책하고 응징했다. 1943년 신학기 일본은 학교에 나니는 조선인학병을 대대적으로 징병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 다. 광주서중 학생들은 학병지원제도 전면화에 따른 반대운동을 암암리 기획했다. 기영도는 이 민수(李敏洙)등과 함께 1943년 5월 8일 ‘일본이 미국에게 밀리고 있는 이때 대일항쟁에 나서 자’는 내용의 격문을 작성했다. 당시 이 과정에서 수피아여고와 욱고녀의 학생운동지도부와도 연락하여 호응키로 하였다. 다음날인 5월 9일 광주서중의 교장이 운동장에서 훈화를 마치자마자, 학생들이 궐기하고, 교련수업을 위해 설치된 무기고에서 장총과 공포탄을 탈취했다. 이들은 ‘한일병합 무효, 내선 일체 반대, 학병제도 반대, 창씨개명, 일어사용 반대, 일본상품 불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누문동에서 경양방죽까지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기영도는 그날 오후 나금주와 사후 대책을 상 의하다 헤어진 뒤 검거되었다. 이 날 학생시위운동으로 80여명의 학생들이 체포되었다. 1차 시위운동이후 5월 21일 광주 서중 300여명의 학생들은 학병지원반대, 창씨개명반대, 일어상용반대, 징병제도 반대를 외치며 맹휴를 전개했다. 그 뒤 5월 21일 학병모집 반대를 위해 2차 시위운동이 진행되었다. 당시 이 날 시위에는 광주서중 재학생 350명이 참여해 대부분 검거되었다. 그 중에서 일제는 열성분자 183명을 가려내 취조하고 또 다시 80명을 가려서 광주지방법원으로 송국했다. 신균우와 기영 도와 배종국 등은 2차광주학생운동을 이끈 주역으로 지목되었고, 이들의 배후에는 졸업한 1기 무등회원들이 지목되어 고초를 겪게 되었다.71) 기영도가 체포된 지 얼마후 친형 기환도도 수배를 피해 서울에서 체포되었고, 만주봉천에 있던 윤봉현도 체포되어 광주로 연행되었다.72) 이들은 온갖 구타와 고문을 받았으며, 이들은 미결상태로 가족들의 면회도 차단된 상태였다. 특히 가혹한 고문과 구타로 기환도는 늑골이 부러졌으나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면서 1944년 3월 옥사했고, 이후 강한수, 윤봉현, 주만우가 4월부터 6월 사이에 연달아 옥사했다. 남정준은 옥중후유증으로 앓다가 해방을 맞았으나 해방 후 3년만인 1948년 사망하고 말았다.

71) 광주학생독립운동동지회, 「광주학생독립운동사」, 국제문화사, 1974, 88 72) 광주지방법원 판결문(1944년 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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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말기 사상통제와 항일세대의 균열

5. 요약과 결론 이상에서 해방직전 일제말기의 전시동원체제형 사회환경과 항일세대의 동요를 살펴보았다. 해방은 반세기 이상 한반도를 짓누르던 19세기형 제국주의 침략시대의 종언을 의미했다. 그 러나 해방은 잃어버린 시공간의 회복을 의미하진 않았다. 해방은 나라를 잃었던 상실의 시대 에 누적된 각종 모순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대규모 격변의 시작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항일세 대가 해방을 앞두고 직면했던 전시파시즘적 사회환경은 해방공간에 많은 후유증과 생채기를 낳았다. 해방공간은 지역권력의 변화와 세대교체를 동시에 수반했다. 1900년에서 1915년 사 이에 출생한 광주학생독립운동세대는 광주학생운동 이후 16년만인 1945년 공통의 숙원인 독립과 해방을 만끽했다. 이들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거치면서 ‘항일의 세대’라는 동질적인 경험을 갖춘 ’증언자이자, 체험자‘로서 동질적 고유성을 갖게 되었다. 항일세대는 일제 말기에서 해방정국까지 약 4차례 ‘중대한 전환과 단절적 국면’을 경험한 다. 첫째, 전시파시즘체제 강화(1937-1943), 둘째, 파국적 상황에 따른 식민지 동요 (1943-1945), 셋째, 일제패망에 따른 ‘해방초기 정치지형’, 넷째, 분단정치(분단-냉전 단층 선)의 현실화와 미소대립에 기초한 사상통제체제의 부활과 ‘좁혀진 통로에 기초한 정치지형’ 이 해당된다. 일제말기의 사상통제와 의도적인 ‘항일분자 갈라놓기’ 구상은 해방직후 형성된 정치갈등과 정에서 항일세대의 통합보다는, 좌우갈등기의 ‘이념적 벽쌓기’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좌우익 세력이 혼란의 정체성을 보이는 시기에 그 틈바구니를 타고 친일세략은 교묘하게 부활했다. 당시 30-40대의 연령층이 된 학생독립운동세대들은 연대와 동질감을 확인할 기회도 없이 정신없이 해방공간에서 속도 붙은 정치운동에 휘말렸다. 이들은 각종 청년운동단체나 사회운 동조직으로, 일부는 한민당이나 한독당, 조선공산당, 인민당 등으로 편입되어갔다. 따라서 이 들은 집합적인 ‘항일세대’의 응집력을 통해 ‘해방공간’에서의 역량을 전혀 펼치지 못했다. 전시동원체제형 사상통제를 통한 항일운동세력에 대한 무력화과정과 해방 후 미군정을 중 심으로 하는 좌우익균열 속에서, 1947년 이후 확대된 사상통제에 대한 억압구조가 항일운동 세대의 무력화를 촉진했는지는 분명하게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일제말기에 일부 살아남았거나, 해방직후에 다른 형태로 재형성된 ‘기존의 항일운동 사상단체’들이 계파나 운 동적 요인에 의해 훨씬 심한 균열을 겪었던 것은 분명하다. 전남지방의 경우에는 일제말기의 균열과 격리가 분명 일정한 장애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 지만, 해방 직후 1945년 8월-9월까지도 항일세대의 재응집은 비교적 빠르게 진행되었다. 전 남지방의 경우에는 해외에서 활동했던 한 두명의 명망가들의 출현으로 ‘지역엘리트’사회가 재편될 정도로 허술하지 않았고, ‘집합적 항일세대’의 지역 정서가 훨씬 지배적인 위치에 있 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46년 이후 전남지방의 지역엘리트로 자리잡기 시작한 항일운 동세대들은 점차, 정치적 이해에 따라 균열을 보이게 된다. 특히 신탁통치갈등을 거쳐, 좌우 갈등이 강화되고, 명망가들인 이승만, 김구, 김규식, 여운형 등을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간의 이합집산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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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 86주년 기념 특별학술회의

한편 해방공간에서는 분명 엄격한 친일청산의 문제가 쉽지 않았다.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미세한 경계의 지점들이 존재했다. 해방공간 초기에 전남지방에서는 특정한 이념적 정파를 가진 정치세력이 그 누구도 장기적인 형태의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했다. 그것이 개인적 성향 때문인지, 집합적인 특성때문인지, 미군정기의 독특한 정치지형에 따른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전남지방에서 행정권을 장악한 그룹들은 미군정과 접촉이 수월했던 미국인유학생들이 었지,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아니었다. 미군관료들에게 일제말기의 지방조선인들의 과거행태에 대한 고려나 항일운동세대의 경력이나 경험이 전혀 지방엘리트들과의 제휴과정에서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반면에 지역사회에서 시민공론장에서 일제말기의 친일경력에 대한 사회적 강제력 이 작동된 시기는 극히 짧았다. 시민사회에서 친일행위에 대한 판단은 크게 1945년 8월에서 10월까지 미군정에 의한 전남통치가 시작되기 직전까지의 해방공간, 1948년 10월에서 1949년 6월까지 반민특위활동시기에 잠시 부각되었을 뿐이다. 1950년 7월에서 9월 2달간 의 북한군의 점령기에도 전남 내 인사들에 대한 친일/항일에 따른 단죄는 진행되지 않았다. 항일세대는 일제말기의 균열을 극복하는 치유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또 다시 해방공간 에서 분출된 정치적 갈등과 분열에 휘말리며 몇 차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분단과 단독정부 수립, 여순사건을 거치는 과정에서 광주학생운동 참여세대들은 적지 않은 희생을 치렀다. 지역권력의 분열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이들 세대들의 집합적 응집은 점차 한계에 직 면했다. 1953년 이후 국회에는 광주학생운동세대들의 정치적 진출이 이어졌다. 한편 일제강 점기의 중등학교를 다닌 이들 세대들은 지역사회의 중심적인 커뮤니티의 주요 멤버를 형성 했다. 광주고보, 광주농업, 광주사범, 광주여고보, 수피아여학교 등은 지역사회에 있어 중요 한 지역-학연을 중심의 지역커뮤니티를 형성했다. 1953년 이후 1957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대한 역사적 정립이 진행되고, 1957년 광주학생독립운동 30주년이 되었을 때 비로소 이들은 상징적으로 역사적 블럭(histori bloc)으로서, 상징화되기 시작했고, 이후 지역주의의 부침 속 에서 역사적 기억과 가치를 공유한 집단으로서의 가치를 재구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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