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창간특별호 MOBILE

Page 1

월간 no.10

001.2013.10.별리.창간특별호

ilyoung.noh@gmail.com


PROLOGUE

죽어버린 그 이름을 부른다.

시야에 가둬 두고자 했던 모든 시간은 동공을 떠난 순간 지워져 갔다. 지워진 모든 순간을 다시 더듬고자 그리움이 서린 무딘 혀로 기억을 새긴다. 바람에 새겨둔 계절을 만지는 것은 내가 널 그리는 방법. 망각의 미로를 흐르는 활자의 맛을 흝으며 지나간 시선을 읊는다. 조금도 성장하지 않은 작은 눈동자로 많은 시차를 담아 두기엔 가질 수 없는 것이 더 많았기에 버릴 수 있는 모든 찰나를 여기 묻기로 한다. 흔들리는 모든 서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휘청이는 그 표정을 언젠가는 만져 보기 위함이다. 나의 시는 죽은 이름의 묘비를 묻는 묘지이다. 여기 첫 번째 무덤의 미로를 쌓는다.

2013년 노일영 i


1


.AVI

노일영

사랑해에 사랑해 랑해에 사랑해 사랑해 사랑ㅎ

몇 번을 돌려봐도 한결같은 내사랑 나도 너무너무 사랑해에 조금도 늙지 않았어 너는 여전히 어리고 사랑스러워 변치 않는 내애기 사랑해 작은 픽셀 하나까지 영원히이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3


검은 물이 찬 밤

노일영

그 얼룩의 눈동자에 날 쏟아낸다.
 내 사정은 동공의 서정으로 달리던 개와 같아서
 인정이 없다.
 불길한 예감은 늘 귓가로 먼저 흐른다.
 네 하얀 귓가에 내뱉은 내 짙은 숨결에
 섬뜩한 어둠이 흩어지던 서늘한 여름밤
 헤매이던 그 날 길 잃은 내가 본 먼 별이 운다.
 얼룩진 눈가로 쏟아지던
 묽은 강가에는 눈이 가득했지.
 검게 타던 여름의 볼에 내 못난 볕을 새겨넣은 탓인지,
 가쁜 가슴에 서린 젖은 봄에 내 못된 빚을 묻어놓은 탓인지, 오늘도 밤은 까맣기만 하다.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4


고열 -부루펜

노일영

시야에 새겨진 미로로 마른 물이 찬다 아마도 하얗고 조그마한 얼굴 어쩌면 뽀얗게 젖어있을 표정 일어나렴 너의 잠자리가 아니니 가쁜 침대 위로 분홍 노을이 흐른다 동공에 묻어놓은 상상이 드디어 식은 구름이 식도로 스민다 이리 오렴 아가야 일어나렴 아가야 아이들은 쉽게 뜨거워진다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5


꽃을 꽃으로

노일영

꽃을 꽃으로 사랑하는 일은 나무를 나무로, 바위를 바위로 사랑하는 일보다 어렵다 꽃은 꽃 이후에 무엇도 아니고 꽃은 꽃 이외에 무엇도 아니기 때문이다 기다림은 늘 고되기만 하다 먼 개화를 기약하지 않아도 늘 내 입술에 닿아있는 널 사랑하는 건 그래서 꽃을 사랑하는 일보다 행복하다 너를 너로서 사랑하는 일은 네 향기를 네 향기로 사랑하는 일 너는 너 이외에 무엇도 아니며 너는 너 이후에 무엇도 아님을 우리가 사랑하는 일은 우리를 우리로서 사랑하는 일 우리가 우리 이외에 무엇도 아니며 사랑이 사랑 이후에 무엇도 아님을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6


나와 -그 시절 그 시린 그 설움

노일영

잠을 잘 때, 밥을 지을 때 이른 아침이 두려워 늦은 밤이 괴로울 때 문득 사는 게 죽을 만큼 외로울 때 그대여 내게 오게 난 여전히 우리 시절의 소년이니 그대는 꽃으로 내게 오게 그대는 내게 와 꽃이 되게 수저 한 짝 필요 없으니 그대 그대로 내게 오게 고운 화장 아끼는 치마 다 두고서 그대 그만 내게 오게 여기 나와 잠들어 여기 나와 숨 쉬게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7


너의 눈을 보여줘

노일영

어지러운 창에는 내가 머물 점이 없어 넌 늘 복잡한 무늬로 날 그리잖아

너의 정교한 표정에 비친 미세한 중력에 바치는 나의 희미한 세레나데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8


눈물의 논리

노일영

그리움은 항상 오래된 기억과 함께 온다. 오래된 기억은 언제나 흑백이다. 흔들린 사진을 우리는 추억이라 부른다. 추억은 그러므로 흔들린 흑백이다. 추억과 온 그리움은 거짓이고 아니, 그리움이 오래된 기억과 온다기보단 흑백에서 시작된다고 하는 것이 더 좋겠다. 흔들린 기억이 오래된 추억이 되고, 거짓된 추억이 불러오는 그리움은 그러므로 거짓된 것이다.

내 그리움은 거짓이야. 내 기억이 거짓이니까.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9


느린 걸음으로 부는 미로

노일영

잠긴 눈에 흐릿하게 비치던 그늘의 점멸 아마도 많이 더웠는지 꼭 쥔 손에 흐르던 긴장 어쩌면 너무 추웠던지 불편하게 떨리던 석양 기억은 그날의 눈빛만큼 흐리고 흔들려 믿을 수 없어 추억은 마지막 걸음처럼 느려서 이제야 조금씩 떠올라 손끝에 새겨진 향기가 아직 아물지 않았어 작은 무늬로 혀에 그려진 네가 자꾸 말을 걸어와 귀를 닫고 눈을 똑바로 떠 난 말을 믿지 않으니 너의 숨을 보여다오 한번쯤안고싶었지만참았어한번쯤입을맞추고싶었지만참았어 아마너도많이참고있을테니까아마나도너무많은걸참고있었나 봐돌아오는길엔왠지오줌이마려웠어나는소변이보고싶었어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10


단추의 안부

노일영

내 말투가 찬 것은 저승의 온기를 옮겨 적는 탓이야 별의 숨결이 읽히지 않는 것은 악몽의 꼬리가 긴 까닭이야 사막에서는 동그란 겨울이 늘 그리웠어 멀리 서늘한 바다 너머로 시가 달게 타던 밤 좁은 주머니로 무릎을 당겨 울던 뱀 구름에 주름을 접던 단추의 안부를 묻는 법 똑똑똑똑딱똑딱 전생의 어머니가 성장판을 닫으며 죽는 소리를 들었어 겨울의 달은 길고 뜨겁고 날카로운 이빨을 가졌다고 누구도 말하지 않는 것은 이 별의 누구도 가져보지 못 한 한파가 아직 온전히 내게 박혀 작동하는 뜨거움 때문이야 겨울은 늘 가장 따듯한 계절이라 가장 포근한 날갯짓으로 속삭이던 갈매기가 죽은 숲에는 접힌 무릎의 미지근한 산통이 흐르곤 했어 눈이 오면 나는 잊혀질 것이라 오려붙인 달에 부쳐 내 틈의 모래를 흘리곤 했어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11


동공에 갇힌 시야에 얼룩이 진다

노일영

하얀 네 귓가에 불길한 눈이 서리기 전에 고요한 네 숨결에 깊은 핏줄이 비치기 전에 너의 푸른 입술에 먼 사막이 자라기 전에 나는 나의 낡은 눈길로 널 바라보리라 마른 손길로 굽은 통증을 안아주리라 내 무딘 품으로 너의 시린 볼을 가려주리라 맥박을 따라 흐르던 시선이 이제 하얀 동공에 고인다 가뭄을 걷던 숨을 여기 고요한 공동에 쉰다 너의 푸른 중력에 내 짙은 여정을 푼다 시간이 남은 뿌리를 내린다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12


마른 물이 비친다

노일영

숨결에 묻어나는 미로로 없는 말이 흐른다 수가 된 말이 잊혀진 여름 눈 내리는 사막을 걷는다 시간을 새어나온 수는 흐린 상처로 스민다 79140745741 잃어버린 말이 마른 물이 되어 비친다 나는 잠시 말을 잃는다 잃어버린 말은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오늘은 꿈을 꾸는 꿈을 꾼다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13


멘큐의 호텔

노일영

모든 것을 버리고자 하는 이에게는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법이라 쓰레기통이 필요한 밤마다 내 한켠을 비워 팔고는 했다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장사는 장사가 끝나도 끝이 없는 법이라

창에 묻은 얼룩을 지우려거든 손톱을 세워야 했다 눈알을 긁는 달빛이 따듯한 것은 사막이 그리워 외로워지기로 결심한 까마귀의 장사가 아직 끝나지 않은 탓이라 바람이 많이 부는 밤이면 헹궈둔 편지를 꺼내 말리곤 했다 수익의 결과는 늘 매미의 사정으로 끝나는 법이라 시간을 잘라 팔면 흐린 베갯잇이 남곤 했다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14


뱀이 우는 밤

노일영

뱀의 머리를 문 망령의 하수로 내리는 피가 선하다 흐린 미소를 붉게 머금은 희미한 비가 묽게 흐르는 여전히 유난히 포근한 유령의 품에 한참을 울다 뜨겁게 뛰는 여름의 뒤로 찬 무릎이 따갑게 끓는다 죽은 온기는 무딘 뱀의 머리로 센다 묵은 혈기는 무른 밤의 마디로 문다 지붕이 좁은 방의 안부를 묻는다 유령을 부른 아침엔 늘 식은 비가 내린다 내 뱀의 머리를 물은 유령의 호수에 비친 비열한 피를 묻는다 왜?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15


별리

노일영

어제는 별이 지는 날이었고 나는 멀리 사막에 누워 강 너머 은하를 헤아리며 앓았다 모든 예언이 빗나갔으니 나는 다시는 예언을 믿지 않기로 결심했고 죽어버린 예언자는 책임지지 않기로 결심한 듯 말이 없다

어제는 그제만큼 더운 날이었고 나는 마침 눈이 불편해 축복을 피해 이방인으로 울었다 기대만큼 시원하지 않았으니 나는 다시는 수음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고 어제는 별이 진 날이지만 그제만큼 더운 날이었고

나는 이미 알지만 더 앓아야겠다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16


분열

노일영

그곳의 눈물은 너무 맑아서 갈증을 풀지 못 했어 쉬지 않고 핥았지만 뒤틀린 혀는 자꾸만 갈라져 이젠 얼마나 자랐는지 알 수 없어 마른 시야를 흝을 때 얇은 눈물을 만졌어 너의 순결한 시선을 더듬던 순간 나도 모르게 착한 눈물에 나쁜 무늬를 새겨 넣었어

다리가 하나 뿐인 착한 엉덩이는 이제 잘 걷지 못 할지도 몰라 눈이 네 개가 된 내 엉덩이는 이제 훨씬 잘 보게 될 거야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17


숨 쉬는 법을 잊은 눈에 그림이 만져진다

노일영

어쩐지 날카로운 무늬가 들려 가까이 보니 빈 향기가 새겨져 있다 더딘 손끝으로 무딘 파편을 만진다 식은 입술로 조용히 더듬는 아마도 마지막이었을 처음의 너 아마도 처음이었을 마지막의 널 향기로 기록해 두었다 단어에 그려진 없는 안부가 왠지 눈에 선하다 잊혀진 말로 잃어버린 표정을 그린다 오늘은 괜히 눈끝이 저리다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18


여린 강이 속삭이는 밤

노일영

내 나약한 가지를 나누던 어린 강이 말했어 난 너의 다리로 걸어왔어 나 혼자 걷는 법은 잊었어 네 다리를 그러니 나눠줘 넌 날 영원히 마실 수 있어

내 강아 강아 가엾은 강아 넌 걷는 법을 몰라 흐르는 물아 넌 한 번도 걸은 적이 없는 흘러간 눈아 넌 날 사랑한 적이 없는 야윈 물아 내 고약한 다리를 빌려 간 어린 강은 어리석었어

내 슬픈 강이 잠들기를 기다려 난 크고 튼튼한 가시를 묻어 두었어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19


오라 -카페카모메

노일영

나는 죽어도 좋으니 너는 내게로 와 불라 더는 견딜 수 없으니 너는 내게로 밀려오라 다신 너 없인 안 되니 너는 오늘 내게로 타오르라

나는 네 안에 흔들리며 살리라 기꺼이 네게 잠겨 숨죽이리 나는 애타게 너에게 녹아내려 네 품에 스며 잠들리라

나는 널 놓지 않을 테니 이제 너는 내게로 오라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20


자취

노일영

책장에 내린 먼지를 벽에 핀 곰팡이를 바닥에 숨은 머리카락을

오래 묵은 습관, 있었는지 없었는지 몰래 핀 흉터, 알았는지 몰랐는지 흩어진 숨결, 여기인지 저기인지

그 이름을 털어내고 그 향기를 닦아내고 그 손길을 골라내고

혈관을 서성이는 더운 침을 뱉어본다 맥박이 밤을 따라 운다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21


정박 -곧게만 걸었는데 돌아본 내 걸음은 굽이굽이 늘 위태로웠네

노일영

어린 동생과 마주 수저를 들던 젊은 어머니의 어깨 처음 고백할 때부터 마지막 고할 때까지 꼭 안고 놓지 않던 첫사랑의 팔, 그 선명한 핏줄 야윈 면사포 안 하얀 아내의 가슴 종일 숨바꼭질하던 아이들의 등 많은 이름이 꼿꼿이 쌓인 이마 무른 나는 굽은 허리에 얹히어 굳어만 가네. 쉬지 않고 달린 긴 항해 궤적 위로 점멸하는 붉은 등 아래 몰아 쉬던 거친 숨 고된 주름을 나눠준 손때묻은 어린 지팡이 주머니에 접어둔 흐릿한 흉터 가쁘게 흔들리던 가슴, 그 비린 눈빛의 그녀 발간 아이의 볼이 또 아른하네. 이제는 좀 나른하네.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22


지워진 계절의 숨을 고른다

노일영

계절을 지워내는 인내는 계절을 새기는 정성보다 더디다 조금 더 찬란했을 새벽의 여름을 묻어버린 죄로 거울에 그려진 겨울을 더듬으며 지나간 여름을 기다린다 시야에 돋아난 얼룩을 따라 미로를 지운다 봄꽃이 자라는 입술을 읽으며 나는 혀끝에 새겨진 자취로 계절의 숨을 고른다 없는 무늬가 되어버린 여름이 무덤이 되어 떠오른다 더딘 손길로 지워내는 계절은 늘 뜨겁다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23


참 오랜만이야 낯선 그 이름

노일영

가시 돋힌 얼굴 에 피어난 그 붉은 입술 이 뱉어낸 그 하얀 숨결 이 머무는 그 뽀얀 볼 위 흐르는 그 분홍 눈물 이 맺히 는 그 흐린 이름 참 오랜만이라 낯선 그이 름 한 번도 그 이름이 없는 세상을 살아보지 못 했어 그이름은한숨쉬듯쉬는쉬운그이름은안개에안겨울고웃는그이 름은하늘흐린하루홀로그이름은바람바라보듯바란그이름은이 젠왠지외진우주그이름은 참 오랜만이야 낯선 그리움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24


추락

노일영

꿈속의 신부보다 더 아름다운 그의 처음으로 끝난 처음이니 끝없는 끝이 되리 하얀 꿈이 추락하는 싱그런 꿈의 시작은 싱긋 박제된 하루의 주머니로 돌아선 길을 물어 뜯는 작은 이빨은 구석이 자꾸 간지러운 건 아직 열지 못 한 초코맛 딸기 달콤한 빛이 눈에 시린 건 그 학년의 디스 한 모금 찾고 찾아 찾아낸 차가운 시신에 머문 시선의 찰나 오랜만이야 반가운 그 이름이 반가운 오랜 그 여름의 어느 나절 모든 여름은 뜨겁고 하얗고 뿌옇고 아프기만 하다고 말하여진 모든 것에 대하여 모두가 모르는 말로 한 숨을 쉬는 건 따라 걷던 길 위의 모래 한 알까지 마저 걷던 바쁜 교무실로 사 라진 가난한 엄마의 일당 무엇도 두렵지 않다고 말하던 혀를 따라 달리던 말은 소리는 전화선을 타고 남은 재가 돋은 붉은 혈관의 문에 난 눈이 크던 물고기 어린 마음을 담궈둔 어린 몸은 오래 쉬었으니 이제 다 쉬었어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25


쉬어버린 마음에 올라탄 쉰 몸은 아무리 싫어도 실은 신이 될 수 없으니 돌아가는 길을 묻는 동그라미의 발자욱은 망자의 독기 어린 시절 의 눈동자를 가르는 도끼의 나이테 떨어지는 별똥별을 잡는 손길이 따듯하던 하얀 이마 기다리지 않는 길다란 꼬리가 사라지기 전에는 이렇게 더러워졌는데 여전히 하얗구나 여전히 더러운데 아직도 하얗구나 아직도 더러운데 이렇게 하얗구나 하얀 아이야 가장 가난한 시절 나타난 가장 하얀 별똥별 하향하는 하얀 하양의 하혈을 기다리는 허영은 사실 흔한 분홍이라는 걸 알면서 어두운 골목길 홀로 앉아 멍하니 듣던 새어나온 비명의 잔영 버려진 꽃다발로 녹아버린 담배맛 사탕이 뱉어낸 별이 타는 밤 흑백으로 소설을 날던 잠자리의 라디오 혹은 카세트의 볼륨이 애 타던 시에 드리운 더러운 투영 깨지 않던 꿈의 끝에서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쓴 연기에 쓴 이름 그 때는 천원이면 디스를 살 수 있었지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26


2010년 4월 7일. 오늘 날씨 몽유

노일영

커피 한잔을 벌써 다 마셨다 커피를 많이 마시면 잠을 잘 수 없지만 수면제를 먹으면 잘 수 있어 수면제가 몸에 좋지 않 다는 건 다 거짓말이야 잠을 못 자면 졸음운전을 하게 돼 그 럼 분명 몸에 좋지 않을 거야 난 이렇게 건강하잖아 키도 크 고 잠을 잘 못 자 수면제 덕분에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어 그러니까 운전하기 전에는 커피를 꼭 한잔 마셔야 되는 거 야 자고 싶지 않을 땐 수면제가 필요 없지만 그럴 땐 커피를 마시지 하지만 커피를 마시면 잠이 안 온단 말이야 어쩔 수 없지 수면제를 두 알쯤 더 털어 먹어야지 어라 이건 뭐 이렇 게 생겼지 칼로리가 많은 커피를 많이 마시면 살이 찔지도 모르니까 나는 살찌고 싶지 않으니까 칼로리가 적은 커피를 많이 마셔야지 너에게 다가가려 해 보이지 않는 날까지 이 런 노래는 이제 싫어 하지만 들리는 걸 어쩔 수 없지 듣기도 싫은 노래를 왜 틀어 놓은 거야 난 이런 노래가 싫어 이왕이 면 이어폰을 끼고 들어줘 난 정말 아무 소리도 듣기가 싫단 말이야 싫으면 이어폰을 나에게 줘 내가 혼자 들을래 혼자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27


자는 게 너무 싫어 네가 있었으면 좋겠지만 아마 지금은 자 고 있겠지 아무 소리 없이 누워있는 건 자고 있는 거겠지 숨 소리가 들리는구나 아무 소리가 없는 게 아니니까 자는 게 아니구나 분명히 내가 전화해도 모를 거야 그러니까 나중에 전화해야겠어 혹시라도 지금 전화해서 받지 않으면 난 실망 할 테니까 실망하면 잠들어 버릴 거야 잠들면 실망할 거야 자지 않고 참아볼게 넌 벌써 실망해서 잠이 들었나 보다 나 는 잠이 들어서 실망한 건 아닐 테니까 담배를 한 대 더 물 었어 담배를 피우면 니가 실망 하겠지 그럼 잠을 자 버릴 거 야 너를 끊는 것보다 담배를 끊는 게 더 어려우니까 담배를 끊었다고 말할게 그러니까 실망하지 마 담배 하나 피워도 될까 한 번만 봐주라 그건 니 사정이고 난 담배를 피울래 니 가 알아서 해 미안해 이제 안 피울게 담배를 끊을게 재털이 가 꽉 찼네 니가 좀 비워달라고 말 안 할게 벌써 치웠어 해 는 거기나 여기나 그때나 지금이나 어딘가 비추고 있을 테 니까 해가 떠있는 곳은 공기에 떠다니는 먼지가 크게 잘 보 이곤 하지 먼지 따위 신경 쓰지 않어 나는 그 정도야 뭐 그 냥 숨을 참아버리지 숨을 참는 건 정말 쉬워 그냥 안 쉬면 되는 거지 숨 쉬는 게 더 어려워 귀찮게 숨을 쉬는 일 따위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28


안 하고 싶은데 자꾸 하게 돼 역시 세 살 버릇은 여든까지 가나 봐 어른들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어 습관이 무서운 거 라는데 어서 습관을 고쳐야겠어 숨을 참는 버릇을 들여야겠 어 그래야 숨을 쉬지 않고 살 수 있을 테니까 새벽녘 유리창 이 뿌옇게 밝아온다 유리창은 원래 투명해야 하는 건데 해 가 유리창까지 먼지로 덮어버렸나 보다 차라리 어두울 땐 유리창에 먼지는 보이지 않으니까 숨을 참아버려 이제 잠들 시간 안경이 언제 이렇게 뿌옇게 됐지 안경을 벗는다 세상 이 두 개로 보이네 술이 취했나 보다 술을 깨야 하는데 술을 깨려면 커피를 마셔야지 제길 한 잔을 타고 싶었는데 손이 두 개에 커피가 두 잔이네 망할 술이 내 손을 두 개로 늘려 버렸어 커피를 두 잔이나 마시면 분명 잠을 자기 힘들 거야 널 안고 있으면 정말 잘 잘 수 있을 텐데 따듯할 거야 이불 이 없어도 잘 잘 수 있을 거야 난 시원한 게 좋은데 더우면 잠을 못 잔단 말이야 제길 자는 건 포기하고 커피나 한잔 더 마셔야지 커피에 수면제를 타서 마시면 학교에 가야겠다 책 가방을 꾸리는데 니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가방을 쏟아 책 도 연필도 다 비우고 나니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아 널 넣 으려는데 어디다 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저번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29


에 그 책에 끼워 놨던 것 같은데 그 책을 저번에 세수할 때 씻어 버린 것 같다 망할 책부터 찾아야 하는데 넌 어디에 있 는 거야 니가 있어야 책을 찾을 수 있단 말이야 학교부터 가 야겠어 그래야 잠을 잘 수 있겠어 학교 갔다 올 테니까 이리 와서 같이 자자 꼭 안아줄게 이리와 거봐 숨 막힌다니까 왜 이상한 소리를 내는 거야 안아달라더니 시끄러워 이어폰 내 놔 아무 소리도 듣고 싶지 않으니까 넌 잘 때 숨소리가 참 이뻐 듣기 싫어 그만해 소리 내지마 숨을 참으면 아무 소리 도 나지 않어 숨을 참고 자봐 그럼 정말 조용하게 잘 수 있 어 잘 자 내가 숨 막히게 꼭 안아줄게 너도 날 안아줘야지 그래야 공평한 거야 그래 꼭 안아봐 숨 막히잖아 조용히 해 숨 쉬지 않고 자는 버릇을 들이자 넌 숨소리가 참 이뻐 조용 히 이렇게 널 안고 자는 게 가장 행복해 시끄럽게 심장이 뛰 잖아 조용히 안고 싶은데 노래해 줄게 넌 내가 노래해 주는 걸 좋아하니까 조용히 아무 소리 없이 노래하는 법을 배웠 어 들려 들려 아무 소리 없이 노래하고 있어 들리지 시끄럽 지 않으니까 좋아 그래 이렇게 조용히 나는 노래하고 널 안 고 있어 넌 아무 것도 입지 마 그게 더 이쁘니까 달라붙는 청바지가 너한테 잘 어울려 왜 넌 이렇게 부드럽지 난 부드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30


럽지 않은데 안고 있으니까 좋다 그 팔 풀지 말고 그냥 쭈욱 안고 있어 힘들면 놓아도 좋아 놔버려 안아줘 안아달란 말 이야 안아줘 니가 내 품에 안겨있는 게 좋아 힘들지 이제 그 만해 이제 우리 자자 학교 가야겠다 학교를 가야겠어 잘자 너도 학교 갈 시간이야 이제 일어나야지 시리얼만 먹으면 몸에 안 좋을 거 같아 영양소가 부족하지 않을까 우유를 많 이 먹으면 몸에 좋은 건가 자기 전에 우유를 먹으면 잠이 잘 온다던데 학교 가기 전에 우유를 먹으면 안 되는 거야 아침 에는 우유를 먹지 마 잘 자야 되니까 잘 자 스파게티 먹고 싶었는데 니가 양파를 볶아 난 담배 피우고 올게 담배냄새 가 그렇게 싫으면 날 꼭 안아줘 주방엔 사람이 너무 많어 널 안고 있기 쑥스럽잖아 이리와 꼭 안아줄게 자장 자장 우리 애기 노래해 줄게 아무 소리 없이 노래하니까 조용하네 우 리 둘뿐이야 이제 담배 피우고 올게 넌 잘 자고 있겠지 난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시고 수면제를 먹고 올게 조용하네 노래는 언제 끝나는 걸까 잘 자 이제 일어날 시간이야 남자 보다 여자들은 독하다던데 너도 참 독하다 난 포도주가 싫 지만 넌 마티니를 참 좋아해 포도 주스를 섞어 마시지 마티 니를 준비할게 이제 너만 찾아와 보드카를 마실 거면 넌 피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31


자를 참 좋아해 나도 이제 피자가 좋아 스파게티를 먹어 볼 게 니가 해주는 건 다 맛있어 니가 준 담배는 맛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어 그 담배를 피워본 일이 없어서 모르는 건 지 안 피워봐서 모르는 건지 담배도 다 담배마다 맛이 다르 단 말이야 난 아무 거나 다 피워 맛있는 담배가 좋아 그래서 난 아무 거나 다 피우지 아 몰라 이제 잘 거야 학교에 갈 시 간이야 일어나야지 벌써 시간이 이리와 우리 꼭 안고 같이 자자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32


2

산문


등장하지 않는 등장인물

노일영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 파주, 부천, 강원 고성, 인천, 경기 안양, 시흥 등을 거치며 자랐다. 서울에서의 기억은 전 혀 남아있지 않다.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파주, 문산 지역에서 살았다. 그곳을 생각하면 가난한 부모님과 많은 친척들, 친절하고 상냥한 유치원 선생님, 언덕 높은 곳에 있 던 집 등 몇몇 단편적이고 날카로운 장면들이 떠오른다. 나 는 굉장한 개구쟁이였다. 매일같이 어른들이 기겁할 장난을 쳐서 많이 혼나기도 했고 유치원에서는 꽤 돋보이게 공부를 잘해서 칭찬을 많이 받기도 했다. 칭찬을 받는 일이 유익한 일이라는 걸, 공부를 잘하는 착한 어린이가 되면 편리한 일 이 많이 생긴다는 걸 사실 그때부터 이미 배워 알고 있었다. 유치원생 사이에도 역학 관계가 있고 알력다툼이 있다. 그 시절 난 평소에 칭찬받는 아이가 결국 승자가 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강자와 더 가까운 자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34


가 강자가 된다는 걸 배웠다. 그땐 유치원 선생님, 동네 아 주머니들이 강자였고 난 그들과 거래하는 법을 배웠다. 그 래서 난 늘 승자였다. 간사하게도 선생님과 어른들 앞에서 는 애교를 부렸고 그들이 좋아하는 일을 그들이 보는 앞에 서 하는 법을 알았다. 그들이 보지 못 하는 곳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그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보 다 나이도 많고 키도 컸지만 늘 내 말을 잘 듣던 친구도 있 었다. 처음에는 날 괴롭히려고 그리고 날 자기 부하인양 여 기려 했지만, 그 친구는 내가 아닌 선생님과 어른들과 싸워 야 했고 결국 내가 이겼다. 그렇게 난 어린 나이에 이기는 법과 간사해지는 법, 위장하는 법을 익혔다. 그렇다고는 해 도 결국 아이는 아이였다. 소풍 날 좋아하는 친구와 짝꿍을 지어달라고 울며 떼쓰기도 했고 매일 아침 하얀색 스타킹을 신어야 한다는 걸 끔찍하게도 싫어했다. 춤추는 건 싫어했 지만, 학예회에서 사회를 볼 때는 주목받는 기분에 우쭐해 하기도 했다. 얼굴이 동그란 친구를 좋아했고 그 친구와 손 잡고 놀이를 할 때가 좋았다. 날 좋아해 주던 눈이 길던 친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35


구는 선생님 몰래 내 볼에 뽀뽀를 하고는 했다. 그게 어떤 의미인 줄은 몰랐지만 그걸 싫어하거나 선생님께 이르지는 않았다. 가끔은 나도 한 번씩 해줬던 것 같다. 아직도 그 친 구들의 얼굴이 기억난다. 지금쯤 어딘가에서 살아있거나 죽 어있겠지. 살았거나 죽었거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내 등장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더이상 등장하지 않는 등장인물이 될 수도 있고, 아직 등장하지 않은 등장인물이 될 수도 있을, 실은 의미마저 희미한 인물들이다. 작가는 의미 없는 인물 을 등장시키지 않고 등장한 인물은 의미 없이 사라지지 않 는다. 그 의미의 무늬를 천천히 읽는 것은 내 결을 남겨둔 나무들에게 바치는 은유이다. 나와 그들이 의미를 주고 받 는 것은 몽유이거나 역류일지도 모르겠다. 너는 내게 얼마 나 예리한 미로를 남겼는지, 나는 네게 얼마나 깊은 사막을 키웠는지, 밤은 늘 불공정한 법이라, 나는 늘 불경한 죄인이 된다.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36


나는 참 잘 기는 어른이 되었다

노일영

초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경기도 부천으로 이사했다. 부모 님은 시골의 작은 학교에서 큰 학교로 옮겨서도 내가 공부 를 계속 잘할 수 있을지 염려했다. 다행인지 학교가 달라져 도 성적은 늘 좋았고 늘 1등이거나 가끔 2등이었다. 부모님 은 두 분 모두 대학을 다닐 형편이 아니었기에 어린 내가 공 부를 잘하자 좋은 대학에 보내는 꿈을 꾼 것 같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열심히 살았기 때문일까, 집이 계속 바 뀌었다. 처음 부천에서는 다세대주택의 1층에 살았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건물의 뒤편으로 돌아가야 찾을 수 있는 집 이었다. 그 집은 해가 들지 않았지만 따듯한 물이 잘 나왔 다. 언덕 높은 곳에 있던 이전의 집보다 훨씬 세련된 집이었 고 동네에 사람이 더 많았고 방이 하나였다. 그 집에 살면서 나는 팽이와 딱지, 비석차기 등을 하며 놀았다. 나는 놀이에 는 별로 소질이 없었던지 늘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 집의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37


3층에 살던 아저씨는 어린 내게 술이나 담배 심부름을 시키 고는 했다. 좋아하는 일이 아니었지만, 어른이 시키는 일은 무조건 해야 한다고 배웠다. 가끔 무거운 술병을 들고 3층 까지 계단을 오르다 떨어뜨리곤 했는데, 그럴 때면 일단 울 어야 했다. 그래야 덜 혼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아버지 는 퇴근하면 늘 안마를 시키곤 했다. 동생과 양쪽으로 나뉘 어 팔과 다리와 발과 목을 주무르거나 허리를 밟고는 했다. 나는 그렇게 매일 같이 아버지에게 안마를 해주는 것이 별 로 좋지 않았다. 가끔 늙은 아버지를 뵐 때면 아버지는 그 시절이 떠오르는지 안마를 해달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별로 좋아하는 일이 아니다. 아버지는 아마 정말 열심히 일했던 것 같다. 집에서는 꼼짝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이 힘들었던지 아주 작고 사소한 일도 동생과 나에게 시키고는 했다. 아직 도 아버지는 그 시절이 떠오르는지 심부름을 시키고는 하지 만 역시 나도 그 시절이 떠올라 썩 좋지는 않다. 작고 어두 웠던 다세대주택의 1층에서 근처의 아파트로 집이 바뀌었 다. 1층이었는지 2층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쯤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38


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방이 두 개였던 것 같다, 아닐 수도 있고. 거기서는 얼마나 살았는지도 잘 모르겠다. 대신 그다 음 집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어느 날은 빌라의 3층으로 집 이 바뀌었다. 그리곤 언젠가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게 '진짜 우리 집'이라고 내게 반쯤 울먹이며 기쁘게 자랑하던 기억 이 난다. 그게 무슨 말인지 실은 잘 몰랐지만 부모님이 좋아 하던 것과 방이 세 개가 되어서 나도 좋아했던 걸 확실히 기 억한다. 동생과 서로 어떤 방을 쓸지를 놓고 얘기했던 것도 기억이 난다. 새로 생긴 '진짜 우리 집'에는 친척들이 종종 찾아오곤 했다. 그전에는 친척들이 오지 않았었다. 집이 커 지면 집에 친척들이 찾아온다는 걸 알았다. 어느날 친척 형 이 한 명 집에 놀러 온 이후로 방이 하나 줄었다. 만화가가 꿈이라던 그 형은 동생이 쓰던 방을 차지했고 동생과 나에 게 과자 심부름을 자주 시키고는 했다. 가끔은 천 원짜리를 주면서 유행하던 춤을 추라고도 했다. 나는 천원이 좋아서 시키는 대로 했다. 집이 바뀌었고 같이 사는 사람이 바뀌었 다. 집에서 학교로 가는 길이 계속 바뀌었고 학년이 바뀌며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39


친구가 바뀌었다. 다만 언제나 내가 심부름을 해야 한다는 점만은 그대로였다. 나는 심부름을 하는 게 너무 싫었지만, 어른의 말은 그냥 들어야 한다고 배웠다. 심부름을 하지 않 는 유일한 방법이 어른이 말을 못 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걸 배운 것은 고등학교 때의 일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이미 아 버지와 같이 살지 않았다. 집에는 착한 어머니와 동생밖에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때쯤 나는 반항아로 자라있었다. 비겁한 선생님들은 내게 어떤 심부름도 시키지 않았다. 대 신 착하고 말 잘 듣는 친구들을 괴롭히고는 했다. 집에는 내 게 심부름을 시킬 사람이 없었고, 학교에는 나보다 착하고 말 잘 듣는 친구들이 많았고, 친척들은 작아진 집에 찾아오 지 않았다. 웃기게도 그렇게 되자 나는 심부름을 시키는 사 람이 되었다. 동생보다 내가 더 어른이라는 생각에 동생에 게 심부름을 시켰고 학교에서는 나보다 착한 친구들에게 심 부름을 시키기도 했다. 아무도 내게 심부름을 시키지 않았 고 나는 심부름을 시키는 어른이 되어있었다. 심부름을 시 키는 법만 알았고 심부름을 하는 법을 잊었다. 그러다 군대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40


에 갔을 때, 수많은 사람의 심부름을 해야만 했다. 차라리 나이라도 많은 어른의 심부름은 괜찮았지만, 나보다 어른도 아닌 사람들의 심부름을 하는 일은 정말이지 고역이었다. 하지만 간사한 나는 곧 계급이 높으면 형이고 어른이고, 계 급이 낮으면 동생이고 어리다고 생각하는 법을 익혔다. 어 쨌든 그렇게 군대에서 누군가의 심부름을 하는 일이 정말 싫은 일이라는 걸 다시 알게 됐다. 그 후로는 누구에게도 심 부름을 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더 어른이 되었지만, 아 직도 내게 심부름을 시키는 더 어른들이 있다. 귀찮아서인 지 너무 고단하고 힘들어서인지 제 품위에 걸맞지 않아서인 지 늘 누군가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어른들이 있다. 내 주변 에는 그런 어른들이 참 많아서 나는 자연스레 그들의 특징 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누구에게 심부름을 시켜 야 할지 늘 탐색한다는 점이다. 누가 자신의 말을 잘 들어줄 지를 판단하기 위해 끊임없이 탐색하고 시도한다는 점이다. 혹은 자신의 말을 듣게 만들기 위한 수단을 갖추기도 한다. 비겁한 선생님들이 그랬고 비열한 교수님들이 그랬고 돈 많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41


은 척하는 사장님들이 그랬다. 내가 만난 비겁하거나 비열 한 어른들은 다들 비슷하다. 어떻게든 우위를 정하고 자신 이 위에 서고 싶어한다. 못 배우고 돈도 없고 권력도 없어 더는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그들은 그 비열함으 로 말미암아 나이나 심지어 성별을 들먹이면서까지 어떻게 든 우열을 나누고자 노력한다. 물론 세상에는 비겁하거나 비열한 어른도 있고 비겁하지도 비열하지도 않은 어른도 있 기는 하다. 나는 비열하건 그렇지 않건 모든 어른의 말은 무 조건 잘 들어야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내가 아이를 가르친 다면 이왕이면 비겁하거나 비열한 어른의 말을 더 잘 들으 라고 가르치고 싶다. 그들은 앙심을 품거나 앙갚음을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나는 이제 그들이 더 비열해지기 전에 알아서 기는 법을 배웠다. 나는 참 잘 기는 어른이 되었다.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42


3

단편


미안해요 아침

노일영

아침은 늘 그렇듯 금새 찾아왔다. 그녀는 어제 아침에도 울 던 알람에 잠에서 깼다. 아무 생각 없이 핸드폰을 챙기고는 습관적으로 욕실로 향했다. 치약을 칫솔에 짜고는 변기에 앉았다. 칫솔을 입 안에 넣자 치약의 아린 향에 조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손은 이미 칫솔질을 시작했지만 그녀는 아 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오늘 출근길은 어떨지, 출근하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점심 메뉴는 뭐가 될지, 퇴근 시간 은 어떨지, 평소라면 아침마다 늘 하는 생각이지만 오늘 그 녀는 그런 것들은 전혀 신경 쓸 수 없었다. 한참을 이를 닦 고 일어나 치약을 뱉으며 문득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입 냄 새가 났던 건 아닐까? 입을 맞출 때 신경을 쓰지 못 했던 건 아닐까? 그녀는 다시 이를 닦기 시작했다. 잇몸이 아파 더이 상 칫솔질을 할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그녀의 양치질이 끝 났다. 오늘 그녀는 세안을 두 번 했고 샴푸를 두 번, 린스를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44


두 번 했으며 바디샴푸를 세 번 하고서야 욕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침대에 핸드폰을 던지려다 왠지 손에 쥐고선 옷장 서랍을 열었다. 서랍에서 속옷을 꺼내 입으며 문득 생각했 다. 그녀는 어머니가 사온 검은색 팬티를 입고 막 베이지색 브라를 차고 있었다. 내 가슴은 너무 볼품없이 작아. 하나도 섹시하지 않아. 그래 이러니 내가 여자로 보이기나 하겠어? 흰 나시티를 입고 거울을 보다 또 생각했다. 내가 속옷을 맞 춰 입지 않아서 촌스러워 보였나? 흰 나시티 안으로 옅게 비 치는 베이지색 브라와 검은 팬티가 왠지 어색하고 촌스러워 보였다. 결국 나시티를 벗고 속옷을 모두 갈아입기로 했다. 다시 서랍을 열고 속옷을 고르며 자신의 속옷이 모두 섹시 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속옷을 직접 골라 산 적 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사다주는 것만 입어 봤지 한 번도 이쁜 속옷을 사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 다. 이제와 제 속옷이 얼마나 촌스럽고 섹시하지 않을지 누 가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다. 오늘 퇴근하 면 정말 이쁘고 섹시한 속옷을 사야겠어. 한참을 서랍을 뒤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45


적여 속옷을 꺼내 맞춰보다 결국 베이지색 위아래를 골랐 다. 다시 나시티를 입고 화장대에 앉아 붉게 충혈된 눈에 힘 들게 렌즈를 꼈다. 렌즈를 끼면서는 볼품없이 부은 눈두덩 을 보며 한숨 쉬었다. 오늘따라 유독 더 부은 눈이 형편없이 못나 보였다. 토너와 로션을 바르고 거울을 보자 코 옆에 살 짝 붉어진 부분이 보였다. 왼쪽 눈 아래에는 작은 여드름 자 국이 희미하게 보였다. 입가에는 옅지만 주름이 생긴 것 같 았고 왠지 밝지 않은 얼굴빛이 신경쓰였다. 눈 밑은 어두웠 고 피부에는 탄력이 없었다. 역시 내 피부가 너무 안 좋은게 확실해. 그녀는 자신의 피부가 좋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확 신했다. 한참을 거울에 비친 못난 얼굴을 보던 그녀는 핸드 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고 나서야 화장을 시작했다. 평소 엔 자기 전에만 쓰던 비싼 수분크림을 꼼꼼히 바르며 더 좋 은 화장품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좀 더 비싼 걸로 바꿔 봐야 겠어. 비비크림을 바르고 파운데이션을 바르자 얼굴이 더 밋밋해 보였다. 컨실러로 여드름 자국과 트러블을 꼼꼼 하게 칠했지만 여전히 얼굴은 밋밋하고 칙칙해 보였다. 내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46


코가 너무 못 생긴 것 같아. 그래 그게 문제인 거야. 자신의 못난 코를 탓하며 파우더를 칠했다. 눈썹을 그리던 그녀는 또 생각했다. 내 눈썹은 너무 흐리고 못 생겼어. 속눈썹을 올리고 마스카라를 하면서 속눈썹의 숱이 적고 짧다는 생각 에 그녀는 또 기분이 상했다. 눈썹을 붙일 수도 없고 더 좋 은 마스카라가 있었으면 좋겠어. 아이라이너를 그리려 다시 거울에 다가간 그녀는 문득 자신의 눈동자가 너무 작아 보 였다. 요즘엔 다들 써클렌즈를 껴서 이뻐 보이는데 나도 써 클렌즈를 껴야 하나? 그동안 너무 맹 해 보였을려나? 아이라 이너가 잘 그려지지 않았다. 평소라면 한 번에 끝냈을 텐데, 오늘따라 잘 되지 않았다. 자꾸만 미끄러지고 번지는 탓에 벌써 몇 번을 지웠는지 모르겠다. 내 눈이 너무 쳐져서 그 래.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힘들게 올려 그리지 않아도 될 텐데. 면봉으로 잘못 그려진 아이라인을 지우며 그녀는 자 신의 눈이 흉하게 쳐졌기 때문에 이 모든 귀찮은 일이 생겼 다고 생각했다. 몇 번을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한 끝에 겨우 눈 화장을 마쳤다. 눈 뿐이 아니야, 볼도 쳐졌고 살찐 환자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47


같아 보여. 밝은 복숭아색 볼터치를 하며 생각했다. 볼터치 를 마치고 파운데이션으로 희미해진 입술에 그가 선물한 화 사한 핑크색 립스틱을 발랐다. 평소에 이 색을 자주 바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촌스러울 정도로 밝은 이 립스틱 을 그는 이쁜 모델이 발랐다는 이유로 사왔다. 그 마음은 이 해하지만 왠지 어색해보여 자주 바르지 않았는데 어쩌면 그 가 실망했을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 모 델만큼 이뻐지기를 기대했을까? 내가 그 모델만큼 이쁘다고 생각한 걸까? 난 그렇게 이쁘지 않은데. 난 그럴 수 없는데. 겨우 화장을 마치고 옷을 고르는데 핑크색 립스틱을 바른 모델이 자꾸 떠올랐다. 맑고 투명한 피부에 눈, 코, 입 어느 하나 이쁘지 않은 곳이 없는 그 모델이 자꾸 떠올랐다. 걔는 몸매도 날씬하지. 평소에 잘 입던 풍성한 크림색 블라우스 를 입고 거울을 보니 왠지 부해보였다. 평범한 출근복장인 데 오늘은 왠지 나이들어 보이고 여성스럽지도 않은 괴상한 느낌이 들었다. 좀 더 좋은 핏이 필요한 걸까? 내가 더 날씬 해지면 되는 걸까? 어쨌든 이제 정말 다이어트를 해야겠어.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48


아직은 조금 더운 날씨지만 오늘은 날씬해 보이는 검은색 스타킹을 신고 검은색 치마를 입었다. 오늘따라 치마가 잘 올라가지 않는다. 내 허벅지는 너무 두꺼워. 또 엉덩이는 너 무 커서 치마 입기도 힘드네. 내가 그 모델처럼 날씬하면 이 런 불편함은 없을텐데. 내 허벅지와 엉덩이를 이쁘다고 한 건 날 위로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한 게 틀림없어. 분명 그 모델처럼 날씬한 여자를 좋아할 거야. 그러니까 그 모델이 쓴 립스틱을 사줬겠지. 겨우 치마를 올리고 돌려 잠그고는 화장대에 앉았다. 에센스를 바르고 머리를 말리는데 머리결 이 너무 좋지 않았다. 머리 끝은 다 갈라졌고 엉킨 머리는 빗질을 해도 잘 풀리지 않았다. 겨우 머리를 다 말리고 검은 머리카락을 보는데 머리스타일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번 주말에는 밝은 갈색으로 염색을 해야겠어. 파마도 해 볼까? 이런 무거워 보이는 검은 생머리 촌스럽기만 하고 누 가 좋아하겠어? 말린 머리를 몇 번을 묶어보고 풀어보고 한 참을 만지던 그녀는 결국 모든 걸 포기하고 빗질을 한 번 더 하는 것으로 스타일링을 마무리했다. 갈색 핸드백을 들고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49


방문을 열던 그녀는 잠시 멈춰 서 가방을 바라봤다. 이 가방 을 누가 이쁘다고 한 적이 있었던가? 요즘 사람들은 어떤 가 방을 들지? 이 브랜드가 좋은 브랜드였던가? 현관으로 가면 서 이번 주말에는 새 가방을 사러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 고는 어제 벗어놓은 구두를 신었다. 현관문을 열기 전 신발 장에 붙은 전신거울을 바라보며 그녀는 자신이 총체적 난국 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검고 긴 생머리는 촌스러웠고 크림 색 블라우스는 뚱뚱해 보였으며 검은치마는 나이들어 보였 고 스타킹은 답답해 보였다. 갈색 가방과 뭉툭한 갈색 구두 는 유행에 뒤쳐진 것 같았다. 피부에는 생기가 없었고 부은 눈과 못생긴 코는 흉측해 보였다. 핑크색으로 칠한 입술만 밋밋한 얼굴 위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어, 일단은 출근해야 하잖아. 미안해요. “다녀오겠습니다.” 작게 소리를 낸 그녀는 자꾸만 번지는 아이라인과 마스카라 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현관을 나섰다. 침대에서 욕실로 다 시 방으로 또 현관으로 나서는 동안 한 번도 손에서 놓지 않 았던 핸드폰이 조용히 그녀의 손에 들려있었다. 월간 no.10 001호 2013년 10월 별리

50


EPILOGUE

한 번도 성실한 이들처럼 빠르게 달려본 적이 없다. 쉬고 싶을 땐 쉬고 걷고 싶을 땐 걸었으며 걸음의 질감과 호흡의 결을 느끼려 애썼다. 별빛이 내리는 소리와 나비가 지저귀는 냄새를 맡고 싶었다. 이상하게도 눈이 점멸할 때마다 부지런한 바퀴들은 이미 멀리 굴러가고 있었다. 모난 돌은 차라리 폐허가 되고 자 했고 기꺼이 묘석이 되고 싶었다. 함께 계절을 통과한 나무들과 시선을 나 눈 모든 찰나를 온전히 새기고 싶었다. 나는 아마도 멀리 오지 않았을 것이다. 추락하는 석양에 닿을 때까지 늘 더딜 것이고 끝내 뒤처질 것임을 의심하지 않 는다. 실패의 기록으로 남을 운명이 두렵지 않은 것은 모래로 남아 사막을 쌓 는 몰락만큼의 행운이 남았기 때문이다. 나는 좀처럼 나아가지 않는 레코드판 으로, 먼 나라의 나침반으로 남을 것이다.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만큼만. 오늘은 첫걸음이 깊어 두렵다.

첫걸음을 딛고 노일영 li


Turn static files into dynamic content formats.

Create a flipbook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