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군유리 마을의 위치와 명칭 유래 공음면 군유리는 삼한시대에는 마한 땅으로 모로비리국에 속하였으며 삼국 시대에는 백제국의 상로현에 속하였고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6년(757년)에 개명된 장사현의 속지였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조 태종 16년(1416)에 이 르기까지에는 그대로 이어져 왔다. 그후 태종 17년에 서해 연변의 방위체제 구축을 위해 무송현과 장사현을 무장현으로 통합할 때 이 곳은 무장현 와공 면(瓦孔面)지역으로 되었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4월1일 조선 총독부령 제111호에 의거 본래 무장군 공음면의 용산리(龍山里)와 응암리(鷹岩里)가 병합되어 군유리(群儒里)가 되었다. 마을의 형성유래를 마을주민 원로(정강렬씨,81세)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추 론해 보면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전(1400)에 달성배씨(達成裵氏)가 터를 잡 고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달성배씨는 한 사람도 살지 않고 있다. 그후 1580년대에 진주 정씨가 입촌하여 자손이 번 창하니 자연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지형상으로 볼 때 군유리는 전체적으 로 평지이며 마을 앞 중앙에 얕은 산의 형태인 道林峰(일명 돌音峰)이 있고 남서쪽에는 대산천이 흐르고 북서쪽으로는 선동천이 흐르고 있으며 수리 관 개시설로는 해대마을 서쪽에 비석제(碑石堤)가 있다. 공음면 소재지를 기준 으로 볼 때는 공음면 남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군유리 마을을 중심으로 북 쪽은 上下面, 동쪽은 茂長面, 남쪽은 大山面 그리고 서쪽으로는 전라남도 영 광군과 인접해 있다. 마을 구성은 상군(上群), 하군(下群), 비석(碑石)의 3개 마을로 행정 분리되 었으며 각기 마을 이장(里長)이 마을 일을 돌보고 있으나 법정리는 군유리 (群儒里 )로 되어 있다. 옛날부터 전해 불리어 온 마을의 명칭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제일 먼저 불렀던 이름은 마을 앞에 시냇가에 버드나무가 많이 있어가지고 사람들이 버드나무가 많은 마을이라는 뜻에서 “유촌(柳村)”이라 고 불러 왔다고 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다른 지역보다도 군유리 마을에는 선비들이 많이 배출되어서 버드나무 유(柳)자 대신에 선비 유(儒)자를 써 선 비들이 많은 마을 이라는 뜻으로 “유촌(儒村)”이라고 불러오게 되었다고 한 다. 그런데 유촌(儒村)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듣기가 좋지 않다고 하여 선비유(儒)자에 마을 촌(村)자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서 다시 마을 村 자 대신에 고을 동(洞)자를 써서 “선비들이 많은 고을”이라는 의미로 유동 (儒洞)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군유리 마을에서 사는 여자 들이 타 지역으로 시집을 가게 되면 儒洞 이라는 마을 이름을 이용해 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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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온 아낙네를 부를 때는 儒洞宅(유동댁, 남자는 유동양반: 필자의 고모가 평산으로 시집을 갔는데 마을에서 “유동댁”이라고 불렀다)이라고 불러 왔다 고 마을 어른들이 이야기 해주었다. 그 뒤 이렇게 군유리 마을 이름을 불러 오다가 임진왜란 후에는 선비가 많다는 뜻을 더 강하게 나타내고자 선비들 이 무리를 지어 다닐 정도로 많다고 하여 무리 群 자를 써서 “선비들이 무 리를 지어 다닐 정도로 많다고 하여 군유(群儒里)라고 사용되어 오며 일본 강점기 시대에는 확실하게 群儒里로 사용되어 지금까지 群儒里 로 불러 오 고 있다. 그런데 속설에 의하면 마을의 모습이 鶴 형국이라해서 群鶴을 比喩 하여 학은 선비를 상징하기도 해 群儒로 부른다는 說도 있다(고창의 마을 유 래. p.107, 고창문화원,2003) 지금까지 마을의 명칭이 다르게 사용되어 온 것을 종합 정리해 보면 버드나무가 많다는 마을의 뜻인 柳村에서 선비가 많 다는 儒村으로 다시 선비가 많은 고을이라는 뜻인 儒洞으로 또 다시 선비들 이 무리를 지어 다닐 정도로 많다는 의미의 群儒로 개명되어 사용되어 오다 가 법정리인 群儒里로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정강열씨 증언,81세)
2.진주 정씨 사우 도봉사(晉州 鄭氏 祠宇 道峯祠 ) 1) 도봉사 입구 표지석 군유리 마을(상군) 입구에 도봉사를 안내하는 도봉사 입구 표지석이 있다. 공음에서 대산으로 가는 도로변에 위치한 도봉사 입구 표지석은 가로 50cm 세로(높이) 140cm 크기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표지석으로 정재정씨가 운영 하는 점방 앞 길 건너편에 담쪽으로 세워져 있다. 옛날에 인근 각처에서 도 봉사를 찾는 사람들을 위하여 설치되었으며 지나가는 손님들도 이 표지석을 보고 약 200m 정도 마을 안쪽으로 걸어 들어와서 도봉사 참배도 하고 도봉 사 시제때는 많은 사람들에게 편리함을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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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마비(下馬碑) 공음면 군유리(상군)에 있는 하마비는 조선시대의 비석으로 도봉사 입구에 서 도봉사 표지석을 따라 약 200m 정도 마을 안으로 들오오면 도봉사 주차 장 한 켠에 세워져 있다. 원래는 이 자리에 군유리 마을 전체 사람들이 사용 하는 큰 샘(우물)이 있었다. 이 우물가에 하마비가 세워져 있어 도봉사를 찾 는 사람들이 말을 타고 가다가 이 하마비(下馬碑) 앞에서 말에서 내려 도봉 사로 들어가곤 했다고 한다. 비신의 모양은 네모진 모양으로 크기는 70 × 50 × 50 cm 정도이며 비신의 전면에 하마(下馬)로 새겨져 있으며 도봉사 앞을 지나갈 때는 누구를 막론하고 말을 탄 사람은 말에서 내리도록 표시한 비(碑)이다. 3) 도봉사 개요 도봉사는 고창군 공음면 군유리 상군 마을에 있으며 공음면 소재지에서 대 산 방면으로 4km 지점에 도봉사 표지석을 따라 마을 안 길로 약 100m정도 걸어가면 외삼문이 있고 안으로 들어서면 終慕齋 講堂이 있다. 마당에는 단 기 4339년 4월(서기 2006년4월)에 세운 용두석에 거북좌대를 한 道峯祠廟 庭碑가 있고 종모재 강당 뒤로 내삼문을 들어서면 祠宇인 道峯祠가 자리잡 고 있으며 前學後廟의 배치구성을 보여준다. 講學領域과 祠廟領域은 담장으 로 구분되어 있으며 도봉사 우측(동쪽)에는 孝子贈童蒙敎官鄭熙周之閭의 旌 閭閣이 있다. 도봉사는 조선시대 純祖 27년 (서기 1827년)에 창건했으며 그 후 잘 보존되어 오다가 1868년에 철폐되어 다시 1929년에 재 건립되었다 (모양의 얼, p. 510,고창군) 도봉사의 건물형태는 3간 건물로 팔작지붕이고 홑처마로 지어졌으며 내삼문 1동, 강당 4간, 외삼문 1동 그리고 마당에 있는 廟庭碑 옆에 창고 1동이 있으며 2012년 현재 도봉사 관리는 진주 정씨 종 묘재공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도봉사에 모시고 있는 인물은 진주 鄭氏 終 慕齋 鄭熙周를 주벽으로 野隱 鄭敏相, 松隱 鄭有相, 恒思齋 鄭聚奎 네분이다. 종모재 정희주의 “孝子贈童蒙敎官鄭熙周之閭”의 현판은 조선시대 高宗 6년 에 恒思齋 鄭聚奎가 임금님께 찾아가 알현하지 못하고 대궐 밖에서 旌閭를 내려 달라고 글을 열 번이나 올려서 마침내 고종 6년(1869년)에 명정(命旌) 이 내려 1870년 3월에 정려각이 세워졌으며 제사일은 음력 8월 20일 완정 일로 현재 향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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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배향 사위 효도내용(配享 四位 孝道內容) (1) 종모재 정희주(終慕齋 鄭熙周);(1633 - 1704) 종모재 정희주는 조선시대 수군절제사 종순(종순)의 玄孫 정기현(정기현)의 아들로 1633년(인조11년) 고창군 공음면 군유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종모재, 조선 중기의 효자이다. 종모재 희주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 하였으며 글 읽기를 매우 좋아하여 小學과 孝經을 통달하여 항상 배 움을 몸소 덕행으로 실천함이 평생토록 하여 조선 중기의 孝子로 소문이 났 다. 종모재 희주의 효성은 남달랐다. 부모님이 병석에 누워 거동이 불편해 대소변을 가리기 어려웠을대도 지극정성으로 모셧고 부모님의 병을 낫게 하 기위해서 깊은 산골에 있는 온갖 약초를 캐러 갔다가 뱀에 물려 여러 날 고 생을 하기도 했으며 눈이 하얗게 내린 겨울에 부모님이 꿩고기를 먹고 싶다 고 하시어 눈밭에 꿩을 잡으러 산에 갈수도 없고해서 한탄만 하고 있는데 석양에 어디선가 날아가는 꿩 한 마리가 부엌으로 날아 들어와 부모님께 꿩 고기를 해드렸다는 효성이 지극한 덕분에 하늘이 도와 준 것이다. 또한 부모 님의 대소변을 손수 맛을 보며 임종이 다가옴을 예견하고 밤낮으로 하늘에 빌어 부모님의 목숨을 연명하기도 했으며 급기야는 부모님의 목숨이 위급해 지자 사람의 생피를 먹으면 살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자기의 손가락을 째 서 피를 마시게 하는 열지주혈(裂指注血)로 인근 고을에 소문이 났었다고 한 다. 이처럼 종모재 정희주의 부모님에 대한 지극효성은 하늘이 탄복하여 어 머니는 16년을 아버지는 6일을 연명케 하였다. 그리고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는살아계실 때 잘 모시지 못함을 후회하며 3년 동안이나 된 밥을 먹지 않 고 죽을 먹고 살았으며 부모님 묘소 옆에 초막을 짓고 엄동설한을 다 이겨 내며 조석으로
호곡하며 시묘살이를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듯이 3년
동안이나 시묘살이 할 때는 천지가 감동했는지 아니면 하늘이 도와 주었는 지 밤에는 호랑이가 찾아와 초막 옆에서 호위를 해 주었고 여름 철에 비가 오지않고 큰 가뭄이 올 때에 샘이 저절로 솟아나 맑은 시원한 물을 마실 수 잇게 하고, 부모님 묘소 주위에 있는 소나무에 송충이가 번성하자 내가 효성 이 부족하여 저런 미물들이 찾아온다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자 날아가는 까 마귀들이 벌레를 다 잡아먹어 소나무가 무성하게 자랐다고 한다.(전북향교원 자대관, P.360-362,전라북도향교재단발행,1994) (2)야은 정민상 (野隱 鄭敏相):(1661 -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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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상의 호는 야은이요 자는 훈거(燻擧)이며 종모재 정희주의 아들로 조선 현종 2년(1661년) 고창군 공음면 군유리에서 출생했다. 옛말에 왕대밭에서 왕대가 난다는 말처럼 대효자 가문에 효자가 생겨난 것이다. 정민상은 가훈 을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글 일기를 좋아하여 학문이 깊고 아우 송은(松隱)과 함게 행실이 바르고 착하며 마을의 대소사 어려운 일에 항상 솔선수범으로 덕행을 실천한 孝子였다. 아버지가 나이가 들어 白首의 몸으로 조부모님 묘 에서 시묘살이 하는 모습을 보고 차마 아들로서 날씨가 추워도 온돌방에서 거쳐할 수가 없다고 하여 뒷 산 언덕에 토굴을 파고 살았다고 한다. 부모님 이 돌아가셨을 때는
살아 계실 때 잘 모시지 못함을 후회하며 전후 6년간
이나 죽만 먹고 살았다고 한다. 또한 아버지이신 종모재 정희주는 하늘이 내 려준 大孝임에도 임금님으로부터 旌閭의 은전을 받지 못함을 한탄하며 살았 고 동생 송은 정유상과 함께 형제가 과거에 응시하지 아니하고 어머님에 대 한 그리움을 담은 思母曲을 지어 노래 부르며 슬픔을 달래니 주위 사람들로 부터 평생 효성과 덕행실천의 선비로 추안을 받으며 살다가 만년에는 道林 峯에 초당을 짖고 거문고 악기에 시를 노래하며 학문과 후학 양성에 여생을 보냈다(전북향교원자대관, P.360-362, 전라북도향교재단발행,1994) (3) 송은 정유상(松隱 鄭有相, 1670-1730) 정유상은 조선 중기의 효자로 字는 遠擧요 號는 松隱이다. 효자 종모재 정 희주의 아들로 野隱 정민상과 兄弟之間이며 조선 현종 11년(1670년) 고창군 공음면 군유리에서 출생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집안이 매우 가난하였 다. 그런데도 부모님 봉양과 형제간의 우애는 매우 돈독하엿으며 항상 형인 민상의 뜻에 어긋난 일은 하지 않았다고 전해지며 禮에 조금도 어그러짐이 없어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아버지인 종모재 鄭熙周가 하늘이 내려준 大孝 임에도 旌閭가 내리지 않음을 평생의 恨으로 여기며 살았다. 형 민상과 함께 주위 친척과 마을 어른들이 과거에 응시하여 벼슬에 오르는 것이 부모님을 위한 길이라고 권장을 했지만 끝내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평생을 독서로 自 樂하며 여생을 보내고 부모상을 당하여 묘소 옆에 조그만 초막을 짓고 6년 을 시묘살이 하였다. (4) 항사재 정취규(恒思齋 鄭聚奎 1782 - 1834) 정취규는 조선 중기의 孝子로서 字는 乃謙이요 號는 恒思齋로 敏相의 曾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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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정조 6년(1782년) 고창군 공음면 군유리에서 출생하였다. 항사재는 어 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았으며 14세때 어머니 의 병환이 위급하게 되었다. 어린 마음에도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빌면 어머 님의 병환이 나을 거라는 믿음으로 조석으로 하늘에 지극정성으로 빌었으며 급기야는 손가락을 째고 피를 나게하여 어머니의 입에 흘리게하여 여러날을 목숨을 연명하는 裂指注血의 孝行을 보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묘소 옆에 초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先世의 望北軒 鄭忔 敬慕齋
鄭基顯
終慕齋 鄭熙周 野隱 鄭敏相 등 네분의 忠孝에 대한 임금님의 旌閭가 내리지 않음을 痛恨하며임금님 大闕 문 밖에 엎드려 글을 올리기를 열 번을 하였다. 임금님이 마침내 感動하여 旌門을 내려주어 인근 고을에 孝子로 소문이 자 자했다. 恒]思齋 鄭聚奎는 어려서부터 家訓을 이어받아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에 조예가 깊고 항상 언행이 독실하였다. 그리고 횽경래난이 일어났을 때 우국충정의 애국심으로 의병을 모아 난리를 평정하고 귀향하여 부모님과 함께 여생을 보냈다. < 도봉사 현판> <도봉사 입구 외삼문> <도봉사 종모재> <도봉사 내삼문>
<도봉사>
<종모재 현판> <도봉사 정희주 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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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주 정려현판>
<정희주 정려현판> <도봉사 창고> <도봉사 화장실> 5) 도봉사 묘정비(道峰祠 廟庭碑) 도봉사 앞 마당 동쪽으로
2006년 4월에 세운 묘정비가 있다. 묘정비에
기록된 네분에 대한 행적과 후손들에게 선조들의 효행과 업적을 기리도록 종중의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우게 되었는데 그 비문을 후손들이 읽어 볼 수 있도록 원문을 한글로 이해하기 쉽게 기록해 본다. ( 묘정비 비문) 이곳 군유리에 도봉있어 도봉사가 세워지니 종모재 선생을 주향(主享)으로 아드님 야은 선생과 송은선생과 야은선생의 현손 항사재(恒思齋) 선생을 배 향한 사우(祠宇)이다. 향선생을 추모하여 조두(俎豆)받들어 향사(享祀)함은 고예(古禮)라 본사의 창건은 순조 27년 정해(丁亥)이고 고종 무진(戊辰)에 조령으로 대동회철(大同毁撤)되었다가 지난 계사(癸巳)에 유론(儒論)이 재발 (齋發)하여 복설(復設)되면서 야은, 송은, 항사재 삼선생을 종향(從享)했다. 삼가 사(四)선생의 행적을 살피면 종모재 선생의 휘(諱)는 희주요 자는 허여 (嘷汝)이니 진주 망족(望族)으로 충장공 휘황의 십일세 손이요, 임란에 창의 한 망북헌 휘 흘(忔)의 손이며 창의(倡義)사경(士敬) 외재 휘 기현(期顯)의 아드님이다. 충효가에 수미한 자질을 타고나 칠 팔세에 효경, 소학을 배워 자신의 일처럼 외웠고 사친에 성경을다하여 봉친에 힘써 감지(甘旨)받들고 병화에 상분축천(嘗糞祝天)했으며 운명함에 이르러서는 단지를 하여 소생케 했으며 아버님은 16년 연수하고 어머님은 6일 연명했다. 상을 당해서는 전 후 6년을 시묘했는데 범이 와서 호위하고 벼락쳐서 묘 곁에 원천수가 솟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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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며 송충을 오작이 쪼아 없앴다. 탈상하고는 애통시를 지어 종신토록 유모 하면서 공명을 멀리하고 성리학에 잠심하니 자사(刺使)는 그 행의를 천하고 수의(繡衣)는 계달(啓達)하여 효종때 복호(復戶)가 내렸으나 사양했으니 사실 이 예부와 여람에 올랐다. 야은 선생의 휘는 민상이요 자는 훈거(燻擧)이다. 아우 송은선생과 함께 지효로 사친하여 오치의 정성을 다했는데 아버님이 출천한 효로 몽정(蒙旌) 못함을 평생의 한으로 여겨 사친곡을 지어 사모하면 서 학문에 정진하여 위연(嶎然)히 호남의 유종이 되었다. 숙종때 본도 감진 어사 홍공석보가 선생의 행의를 듣고 찾아와 크게 경탄하여 형제분의 효를 특천하여 복호를 내렸으나 영문에 글을 올려 아버님의 의행으로 대신할 것 을 간청하고 형제분이 상경하여 진청하려다가 중도에 홀언 하세하니 사우가 개탄했다. 송은 선생의 휘는 유상이요 자는 원거이다. 효우가에 선열이어 여 묘 정절이 아버님과 한결 같았고 학문깊고 지절 높아 호유가 경망하여 송은 처사라 칭했으나 임창계기 송암과 의례를 문답하고 권공이 진안공 세징이 본 졸로 와서 포의교를 했으며 도백이공광덕은 기절과 문장으로 세상의 사 표가 된다했으니 사실이 예조여지충효록에 실렸다. 항사재 선생의 휘는 취규 요 자는 내겸이다. 효를 타고나 친환에 축천혈지하고 거상에 철죽(啜粥)여묘 했으며 위선에 특성을 보여 선세 의적(懿蹟)이 혹 묻힐세라 부궐복주하기 십 차에 마침내 조두(俎豆)의 은전을 무릅섰다. 또한 후생 계도를 사명으로 과 정을 엄히 세워 소학을 우선하고 사서를 뒤로하여 수기치인의 도와 존양성 찰(存養省察)의 공이 모두 여기 있다하였다. 정조가 승하하매 설위하여 북망 통곡하고 홍경래난에 창의 부난했다. 삼가 살피어 이곳 군유는 사선생이 생 장한 곳으로 군유가 배출하여 지칭한 동명이라하며 동전에 소도 있어 관죽 전이고 십리장천에 관해전(官蟹箭)있어 예조에서 허급했으니 이는 고례에 없 는 이수였다. 무릇 효는 백행의 근원이라 미루어 사군하면 충이요 수신하면 현이며 육영하면 사표가 되니 그래서 지행있으면 조가에서 포양(褒揚)하고 사림은 존향하는데 향사만이 능사리요 선현의 의행(懿行)을 알고 본받아야하 기에 국한혼용으로 묘정비 세우는 소이가 여기 있으니 본사에 출입하는 후 생들은 마음 경건히 살피어 퇴패한 인기(人記)를 부식(扶植)하기 기망하면서 삼가 가사(歌詞)를 더하여 명(銘)에 가름한다. 진주정씨
충장공파
천출한호
계시어서
부모섬겨
성효하여
종신토록
사모하니
선생의호
종모재는
사우간의
경칭이요
학문깊고
행의높아
향현사에
존향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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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咸陽
야은송은
두아드님
아버님을
본받아서
사생사사
정성다해
오치의효
다하였고
여력으로
학문하여
호남유종
되셨으니
감진어사
천을하고
수령들은
존문했네
야은현손
항사재는
충효가에
독생하며
효를하고
충을하여
위선사에
성근하여
선덕들쳐
복궐하고
행록모아
상재하니
재재다사
송모하여
조두의예
올린다네
朴東洙 謹 撰, 同宗 定黙 謹書, 齋長 朴東爀, 都有司 檀紀
4339년
丙戌
四月
在元
日 )
( 도봉사 묘정비 사진)
6) 진주정씨 삼강각(晉州 鄭氏
三綱閣)
진주 정씨 삼강각은 조선시대 1958년에 건립되었으며 공음면 소재지에서 대 산 방면으로 약 4km 가다보면 군유리 상군 마을 도로변 비석 중화길 1호에 자리 잡고 있으며
진주 정씨 유동파 종중에서 선조들의 忠, 孝, 烈 의 열
세분을 기리는 정문으로 현재 진주 정씨 유동파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열 세분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忠에는 鄭忔이요 孝에는 鄭根日과 鄭根琇 이며 孝婦에는 천안 全氏와 신평 宋氏 그리고 烈婦에는 청송 沈氏와 여주 李氏, 창녕 成氏, 함평 李氏, 능성 具氏, 청도 金氏 등 여섯분이며 孝烈에는 김해 金氏, 장흥 高氏 두분으로 모두 열세분의 忠 孝 烈을 기리고 있다. 그 러면 삼강각에 모시고 있는 열 세분의 살아 생전에 국가와 부모님께 행한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忠 : 鄭忔은 조선시대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대 창의하여 도백이 城을 맡 기자 목숨이 다할 때까지 전력을 다해 끝까지 城 을 고수해 냈다. (2) 孝 : 鄭根日은 號는 松圃로서 부모님 전후상에 6년을 여묘하는 孝行을 보였고 鄭根琇는 號가 廣齋로서 생시에 온 정성을 다해 부모님을 모시었으 며 종신토록 사모하는 孝로 이름이 주변 고을 까지 널리 알려졌다. (3) 孝婦 : 천안 全氏는 鄭義源의 妻로 영조 4년(1728년) 이인좌의 난에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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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의 와중에 시아버지를 업고 피난하여 생명을 보존케하는 孝婦였고, 신평 宋氏는 鄭東瓚의 妻로 영조 4년(1728년) 이인좌의 난에 시조부를 업고 피난 다니다가 불행하게도 함께 세상을 떠났다. (4) 烈婦 : 청송 沈氏는 鄭曦哲의 妻로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그리워하며 슬 픔을 가누지 못하고 남편 곁에 가서 함께 있고 싶어 물에 빠져 세상을 하종 했고, 여주 李氏는 鄭桂天의 妻로 貞夫人으로 불렀으며 남편을 항상 禮로 도 와 壼節의 의표가 되게하여 드디어 남편이 이조 참판에 오르도록 하였다. 창 녕 成氏는 鄭洛源의 妻로 남편을 하늘보다 더 높게 항상 모시고 살았으며 남편이 병이 들자 남편의 병을 낫게 하고 싶은 애정으로 손가락을 째고 피 를 내어 남편의 입에 흘려주어 목숨을 연명하게 하였고, 함평 李氏는 鄭根碩 의 妻로 남편이 병석에 오래토록 누워 있는데 남편의 목숨이 갑자기 위급해 지자 손가락을 째서 피를 입에 흘려주어 목숨을 연명하게 하였고, 능성 具氏 는 鄭根哲의 妻로 남편이 병을 낫게 하려고 자기의 허벅지의 살을 칼로 베 어 구환하고 또한 시아버지 병에 裂指注血 하였다. 그리고 청도 金氏는 鄭根 琇의 妻로 남편의 병을 간호하는데 10년을 대소변을 맛보아 가며 병세를 가 늠하였으며 남편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밤낮으로 하늘에 빌었다. (5) 孝烈 : 김해 金氏는 鄭桂斗의 妻로
淑夫人으로 불렀으며 부모 봉양에
극진히 하였고 상을 당하여는 禮에 어긋남이 없이 하여 고을 사람들의 귀감 이 되었으며 장흥 高氏는 鄭金黙의 妻로 남편이 수년동안 병석에 있으면서 도 지극 정성으로 병을 간호하였고 남편의 병을 낫게 하고자 裂指注血하여 남편의 목숨을 수일 동안 연명하는 효열을 하였다.
<삼강각 현판> < 삼강각 전경>
<삼강각 안에 있는 효열비>
<삼강각 망북헌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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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각 효열비 현판>
6)진주 정씨 열행비(烈行碑) 군유리 마을 입구 도로변에 진주 정씨 열행비가 있다. 열행비의 후손은 지 금 현재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정운재씨의 고조모(高祖母)인 부안 김씨(金 氏)와 증조모(曾祖母)인 영광 정씨(丁氏) 두 분의 열행을 기리 후손에게 알리 고 만인의 귀감이 되고자 정운재씨 집안에서 세운 열행비이다. 부안 김씨는 정종암(鄭鍾巖 30世孫) 처(妻)로 효행은 남편이 괴질병에 걸려 온갖 정성으 로 병 간호는 물론이요 남편의 목숨이 위급해지자 자기의 손가락을 칼로 째 서 피를 흘리게하여 남편의 입속에 핏방울을 넣어 주어 남편의 목숨을 연명 하게 하는 열행을 했고 영광정씨(丁 氏)는 정용수(鄭龍洙 31世孫, 鄭守中의 5대손)의 처(妻)로 효행(孝行)은 남편이 죽고 임신한 유복자(有 腹子)인 상태 로 친정에 갔다. 친정에서 재혼 할것을 친정 부모님들로부터 간절히 원했지 만 강력히 뿌리치고 밤에 부모님 몰래 칼을 품은듯이 독한 마음으로 시댁에 돌아와 임신했던 아이를 낳아 잘 길렀다고 하는 효행이다. 비문은 “恭人扶安 金氏 烈行碑, 孺人靈光丁氏烈行碑”라고 기록되었다. < 진주 정씨 열행비 사진> 7) 진주 정씨 유동파(儒洞派) 종친회(宗親會) 연혁 - 2001년 1월 20일 유동파 종중 회장제 창립 - 2001년 1월 20일 유동파 종중 종약 제정 공포 시행 - 2001년 1월 20일 유동파 종중 제1대 회장 정기동님 선출 재임기간 : 2001. 1. 20 ∼ 2003. 1. 19 - 2003년 1월 20일 유동파 종중 제2대 회장 정재원님 선출 재임기간 : 2003. 1. 20
∼ 2005. 1. 19
- 2005년 1월 20일 유동파 종중 제3대 회장 정재원님 연임 재임기간 : 2005. 1. 20
∼ 2007. 1. 19
- 2006년 4월 도봉사 내 묘정비 건립 - 2007년 1월 20일 유동파 종중 제4대 회장 정재백님 선출 재임기간 : 2007. 1. 20
∼ 2009. 1. 19
- 2007년 6월 도봉사내 강당 및 문간 지붕개량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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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6월 도봉사 제실 지붕 보수 및 용왕제 지붕기와 보수공사 - 2009년 1월 20일 유동파 종중 제5대 회장 정일송님 선출 재임기간 : 2009. 1. 20
∼ 2011. 1. 19
- 2009년 3월 송은(유상) 묘역 정비 - 2009년 8월 용왕재 표지석 설치 및 도봉사 주차장 설치 - 2011년 1월 20일 유동파 종중 제6대 회장 정재인님 선출 재임기간 : 2011. 1. 20
∼ 2013. 1. 19
- 2011년 10월 용왕재 4대 봉산 묘역 주변정비 및 잔디작업 실시
3. 전통 巫歌와 時調唱 名人 1) 전통 巫歌 당골에미 배성녀 군유리에 전통 巫歌辭說에 이름난 당골에미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배성녀 (裵成女)이다. 출생한 곳은 고창군 해리면 금평리이며 조상 대대로 세습되어 온 배씨 무(巫)계 가정에서 태어나 해리에 사는 정씨(鄭氏) 무계(巫系)로 출 가하여 세습 무(巫)로서의 전형적인 당골 에미이었다. 배성녀는 고창지역의 전통적인 무(巫) 제의(祭儀)에 밝고 또한 무가사설(巫歌辭說)에 정통하여 고 창지방에
마지막으로
남아있었던
정통
세습무가
당골이었다.
배성녀는
149cm 정도의 작은 키에 얼굴이 좁고 이마가 잘룩졌으며 말이 많은 편이었 고 교육수준은 무학(無學)으로 한글을 터득한 정도였다. 그의 무(巫) 학습과 정을 살펴보면 단골 무(巫)인 어머니 임(任)씨와 아버지 배인석(裵仁石) 사이 에서 태어난 무남독녀로 그의 어머니가 19세 때 낳았다. 가족이 장수한 집 안으로 어머니는 89세 아버지는 85세에 사망하였다. 배성녀는 12살때부터 어머니에게 무가(巫歌)를 배웠다. 무가의 학습방법은 무가사설(巫歌辭說)이 적힌 책을 보고 외우는 것이었다. 그녀는 매우 총명하여 무가사설을 한 번 배우면 하룻밤에 다 외웠다고 한다. 배성녀는 17세때 약혼하여 이듬해인 18 세 때 음력 4월 29일날 17세인 정태임(鄭泰任)과 결혼하였다. 남편 정씨도 세습무계의 북을 치는 고인(鼓人)이었다. 그녀의 시어머니는 그녀가 시집가 서 음력 정월 15일부터 시어머니의 뒤를 이어 굿을 하러 다녔다. 시어머니 가 없기 때문에 시 백모를 따라 다니며 굿을 배웠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배 성녀는 시집 가기 전에 그의 어머니로부터 무가사설을 배우고 출가하여 시 집 쪽의 시 백모에게서 굿의 의례(儀禮)를 배워 정씨가 단골 무계(巫系)를 계승하게 되었다. 그녀가 하는 제의(祭儀)는 가내의 제액초복(擠厄招福)을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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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재수(財數) 굿인 성주굿과 망인(亡 人)의 영혼을 락지(樂地)로 천도시켜 주는 씨금굿 그리고 선주(船主)가 해상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연신굿을 하였다. 배성녀의 가족관계를 살펴보면 정태임 무계 가정으로 출가하여 칠 남매를 낳아 그 중에서 장자 정근석과 차자 정년근 말자 정정일이 정씨 가 정의 단골 무계를 계승하고 딸들도 무계혼으로 출가하였다. 배씨의 당골 무 계에서는 배성녀의 조부인 배의근이 명창 광대였으며 그 밑으로 그의 아버 지인 배인식이 역시 명창 광대로 전북 일원에서 배광대(裵廣大)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김경식 저,고창의 전통과 생활사,p.63.고창군 편) 배 성녀가 소유한 단골판은 군유리 200호 예전부락200호, 신평부락60호, 응암 부락20호, 율천부락20호 모두 500호 정도였다. 그녀의 수입원은 씨낌굿 한 번 하는데 보통 10만원 정도 받는데 이 중에서 제수를 장만하고 피리, 젓대, 해금 등의 고인들의 일당을 주고 나면 당골에게 돌아오는 수입은 아주 적으 며 유일한 수입은 단골판에서 춘, 추로 거두워 들이는 곡식이다. 배성녀는 그녀가 관장하고 있는 마을의 가정마다 1년간 돌봐주고 있는 신사(神事)의 댓가로 곡식을 받았으며 과거에는 중류급 이상의 부자 부럽지않게 살았다고 한다. 군유리에서는 아낙네들이 아기를 분만할 때면 반드시 당골에미를 불러 서 안전 분만의 기원을 부탁하고 산파역할도 해 주었으며 아기의 생일을 기 억하지 못하는 집에서는 당골에미에게 물어보면 기억력이 아주 좋아서 잘 가르쳐 주기도 했다. 필자의 기억으로 조실부모하여 생일을 알 수 없었는데 큰 고모댁에서 당골에미한테 물어서 필자의 생일을 알아냈다고 한다. 필자가 1974년도에 공음초등학교 사택에서 살고 있을 때 어른들이 6.25때 돌아가 신 분들을 위해서는 그 분들이 억울하게 죽었으므로 그 영혼들을 달래주어 극락세계로 가는 굿을 해 주어야한다고 해서 배성녀 당골에미를 초청하여 거액을 들여서 굿을 했는데 그 때 배성녀가 신(神)내림을 받았을 때는 방바 닥에서 공중으로 펄떡펄떡 뛰는 모습을 보았는데 나이가 든 할머니의 몸으 로 평상시는 지팡이를 짚고 걸어다니는 사람이 신(神)을 받은 순간만은 상상 을 초월한 인간이 되어 굿을 하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2) 마을 민요(지경 다지는 민요) 어럴럴 상사뒤야
높이 들어서 쾅쾅
어럴럴 상사뒤야
여기도 다구고 저기도 다구고
어럴럴 상사뒤야
고루고루 잘 다궈 보세
어럴럴 상사뒤야
이 집터를 잘 다궈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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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세
어럴럴 상사뒤야
초가 삼간의 집을 잘 지어서
어럴럴 상사뒤야
부귀영화를 이룰적에
어럴럴 상사뒤야
아들을 낳으면 효자를 낳고
어럴럴 상사뒤야
딸을 낳으면 열녀가 되고
어럴럴 상사뒤야
마를 키우면 용천마가 되고
어럴럴 상사뒤야
닭을 키우면 봉황이 되네
(이 민요는 군유리 이봉수씨 남, 60세. 고창의 전통과 생활사, p 122) 3) 時調名唱 林泉 정재선 선생 군유리 마을에서 시조 인생으로 50여년간 살아가고 있는 시조 명창 임천 정재선 선생은 고창시조협회 사범으로 후진 양성에 노력하고 있는 이 시대 의 불멸의 가객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으로부터 55년전 우연한 기회에 고창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 방학을 맞이하여 마을에 강당에 심부름을 갔다가 마 을 유림들이 시조를 노래하는 것을 듣고 시조 가락에 매료되어 그때부터 시 조에 관심을 갖고 마을 어른들로부터 시조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 하여 영무장 시조에 훌륭하신 분들 중 우리 고장의 이도삼, 김춘경, 고민순 유연태 선생님들을 찾아가 사사를 받았으며 시조에 본격적인 공부를 하기 시작한 것은 석암 정경태 선생을 만나면서 시조에 대한 체계적인 공부를 하 게 되었다고 임천 정재선 선생은 지금도 석암 선생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지방공무원으로 임용되어 공직생활을 하면서도 꾸준히 시조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공부를 계속하여 왔으며 1975 년도에는 전국시조경창대회에 출전하여 평시조와 사설시조부에서 1등을 수 상한 것을 비롯하여 1989년 6월22일에 대전광역시에서 주관한 경창대회에 특부 1등상수상, 1998년 9월 23일 전국 시조진흥원 주최 경창대회에서 명 창부 1등상 수상, 1999년 10월 1일 문화관광부 주최 경창대회에서 대상부 1등 수상, 2001년 8월 9일 전국시조경창대회에서 대상부에서 1등을 하여 국무총리 대상을 받았으며 개인적으로 시조창 발표회를 금년까지 7회째 개 최하여 우리나라 시조창 발전에 공헌하고 있다. 2000년부터는 교도, 사범과 심사자격 위촉 중앙회 이사장을 맡으면서 전국대회인 임방울, 대사습, 종로 국악제 심사위원장 등 350여회의 전국대회 및 지역 경창대회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1976년부터는 부안, 정읍, 고창, 영광 등지에 지도연구를 시 작하여 현재는 전국일원을 상대로 경창대회 심사위원과 지도위원으로 활동 하고 있으며 시조창의 저변확대를 위하여 2007년도에는 고창고등학교의 요 청으로 방과후활동 시간에 시조반을 지도하여 청소년들로 하여금 시조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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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관심을 갖게하고 청소년 시조 경창대회에 출전시켜 입상하게 하는 등 우 리고장의 시조창 저변 확대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또한 전국적으로 시조창 확대를 위해서 2006년에 CD와 테이프 1집과 2집을 각각 3000매씩 제작하 여 전국에 무상으로 배포하여 임천 정재선 선생의 독특한 창법인 던음청(이 중창과 겹소리)을 전국의 시조창 동호인들에게 홍보하여 지금 현재 경기, 충 청, 호남, 경상, 제주 강원도에서 까지 개인적으로 던음청 창법을 배우고 있 다. 2009년 12월 6일자로 세계문화 예술대상 수상(시조분야)에 외통등록 27 호로 등재되었으며 전라북도 문화관광과에 인간문화재 시조분야로 신청을 하기도 했으며 언젠가는 임천 선생의 우리고장 인간문화재의 꿈을 이루고 우리나라 시조의 발전과 시조 저변 확대를 위해 꾸준히 자기 연찬과 시조 사범으로서 후진양성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 시조창 발표회 사진 > 4. 마을의 전통 민속과 설화 1) 마을 당산제 군유리 마을은 상군과 하군에 당산(堂山)이 있었다. 당산은 옛날의 신역(神 域)과 같은 솟대와 같이 마을의 수호신으로 마을 뒷등에 당산수를 설치하고 매년 정월에 부락민들이 제사를 지냄으로서 온 부락민들이 마을에 닥치는 돌림병 같은 재앙을 물리치고 풍년을 가져 온다는 부락제의 대상으로 설치 하였다. 군유리 상군 마을의 할아버지 당산은 마을의 액살을 막고 맹수와 도 적과 질병 등 침해까지 막아 육축이 번성하고 농작이 풍성하여 마을의 안녕 과 복록을 얻게 한다는 믿음이 강했다. 이러한 것은 민속 신앙으로서 오랜 전통속에서 삶의 정신적 안정을 추구하는 신앙적 존재로 계속되어 오다가 19세기말 서구사상의 전래와 더불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우리 나라 는 새마을 운동의 여파로 무속은 미신의 일종으로 간주하여 단절되고 말았 다. 당산나무에 지내는 당산제(堂山祭)인 부락제는 대개 음력 정월 보름에 지냈다. 당산제는 마을에서 당산제 지낼 무렵에는 사람이나 가축이 죽거나 출산이 있어도 부정하다하여 다음 달로 연기하기도 한다. 당산제의 경비는 고정적인 재원이 없어 정초에 걸립(乞粒)이라는 명목으로 마을 주민들이 농 악을 구성하여 집집마다 방문하여 그 집의 액을 없애고 일 년 동안 운수 대 통케 한다는 뜻으로 그 집의 부엌, 장광 등 집안을 돌며 한 바탕 굿을 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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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주인이 내 놓는 쌀과 돈을 거두어 당산제의 경비에 충당하였다. 당산제의 제주(祭主)와 제수(祭需) 등을 주관하는 유사(有事)는 마을에서 제일 정결한 자(者)로 선정한다. 그리하여 일단 선정된 자는 당산제가 있을 때까지 일정 기간 부부간의 동침을 해서도 안되며 매일 목욕재계하여 몸의 정결성을 지 녀야한다. 만일 부정한 일이 있으면 당신(堂神)의 노여움을 사 마을에 흉년 과 재앙을 불러온다고 믿었다. 군유리 마을 당산에는 상군마을 뒷 잔등에 할 아버지 당산이 있고 하군 마을 뒷등에 할머니 당산이 있어 이는 남성과 여 성의 음양을 병립하는 것이다. 여기에 제사를 지낼 때는 온 마을 사람들이 동원하여 남녀별 가족별로 일 년 신수의 대길(大吉), 대통(大通)을 비는 소지 축원(燒紙祝願)도 했다. 또한 마을 집집마다 짚 다발을 거두어서 긴 줄다리 기용 받줄을 만들었는데 이 줄은 세 가닥씩 세 줄씩 아홉 가닥의 줄을 만들 었다. 이 줄을 가지고 낮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줄을 어깨에 메고 마 을을 돌아다니고 밤에는 남녀가 패를 갈라 농악놀이와 함께 줄다리기로써 승부를 가리는 중에 풍년을 기원한다. 줄다리기에서 여자 편이 이겨야 풍년 이 든다고 해서 짐짓 남자 편에서 저주는 것이 통례이다. 제전이 끝나면 줄 을 당산나무에 빙빙 감아 두는 풍습으로 군유리에는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 니 당산을 모시고 오랫동안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전통이 있었다. 상군 마을의 할아버지 당산은 현재 죽은 나무가 서 있으며 오랫동안 풍습으 로 전해 내려온 당산제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 당산제 나무 사진) 2) 미륵불상 군유리 비석 마을 정성진씨 집 마당 좌측에 돌로 된 미륵불상이 하나 있 다. 아주 오래 된 불상으로 비 바람에 마모되었지만 불상의 모습은 지금도 가까이에서 보면 확실하게 나타난다. 이 미륵불상이 여기에 있다는 것은 이 근처에 절(寺)이 있었다는 이야기 가 전해 오고 있다. 이 미륵불상을 현재는 정성진씨가 관리해 오고 있으며 마을 주민(나병채, 66세)의 말에 의하면 어 렸을 때부터 들어 온 이야기로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들이 와서 백일 기 도를 받치면 반드시 아기를 낳는다는 소문이 멀리까지 퍼져서 정월 보름 날 이면 밤에 미륵불상 앞에 촛불을 켜 놓고 소원성취 기원하는 여인들이 많았 다고 하며 마을에서는 마을에 돌림병이 돌고 있을 때면 이 미륵불상 앞에 음식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내면 돌림병이 마을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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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마을의 수호신으로 보호해 왔다고 한다.
3) 마을의 칠(七) 괴담(怪談) 군유리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1400년대 초에 달성배씨(達成裵氏)가 터를 잡 고 살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온 마을의 역사가 꽤 긴 역사성을 지 니고 있다. 이 마을에 옛날부터 전해 오는 기이한 일곱 개의 이야기가 있다 (정강열씨 증언, 81세) 지금까지 전해 오는 일곱가지의 전설을 마을 사람들 은 <군유리 칠괴담(七怪談)>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괴담들을 열거해 보면 영군바위(領郡岩), 마동(馬洞), 주결(舟結), 돌음봉(突音峯), 말바위, 해대(海 垈), 맥무덤 등의 일곱 개의 전설이다. 이들의 전설을 간략하게 마을 어른들 의 증언을 토대로 기술해 본다.(군유리 정강열, 81세) (1) 영군바위(領群岩) 이야기 이 바위는 군유리 오거리에서 대산면 칠거리 쪽을 향해 약 1.5km 정도 걸 어가면 도로가 있는 야산 능선에 있다. 이 지역 주위에는 크고 작은 여러 개 의 바위들이 산재해 있었는데 지금은 개간하면서 땅에 묻히거나 치워진 상 태이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바위가 현재 위엄을 들어내고 있는 영군바위(領 群岩)이다. 영군바위란 “옛날에 어떤 장군이 이 바위 위에서 군사를 거느리 고 통솔했다는 전설 ”에서 이름이 유래 한다. 혹자는 이 바위를 장군바위(將 軍岩)이라고도 한다. 이 바위 전설이 군인들을 통솔하고 지휘하는 장군(將軍) 과 관련이 있어서 그렇게 불러졌다고 한다.(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전에는 장 군바위로 기록되었음). 군유리에 현재 거주하고 있는 가장 원로이신 정강열 씨(81세)의 증언에 의하면 옛날에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다니면서 이 바 위에서 군사를 통솔하고 진두 지휘하며 국가의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 왔다 는 전설로 보아서 <영군바위>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이 영군바위에 관한 전해오고 있는 이야기를 기술해 본다. 영군바위라고 부르는 이야기는 우리 조선시대 역사에서 1811년에 홍경래(洪景來)난이 있었다. 그 때 당시 동원부장인 정치규가 순무중군 유효원(柳孝源)<1751-1813>의 명을 받아 군 유리 마을 근처 야산에서 병사들을 훈련시켰다는 역사적인 사건을 계기로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훈련하였기에 혹자는 영군바위(領群岩)이라고 했다 는 것이다(한국향토문화 전자대전). 필자가 선동초등학교에 다닐 때 그러니 까 지금으로부터 50여년전에 이 바위 옆 길로 학교에 가기도 했다.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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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학교에서 일찍 올때는 집에 오는 도중에 친구들과 이 바위위에 올라가서 놀기도 하고 함성을 지르기도 하고 바위 밑 부분을 돌멩이로 두들기면 딱딱 한 돌멩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니라 가죽으로 만든 방구를 두드리 면 나는 소리와 같았다. 그러면서 바위 속에 텅 비어 있는 방이 있다고 전해 들은 기억이 있었다. 영군바위에 관한 전설은 대략 이렇게 전해진다. 옛날 어느 무더운 여름 날 영군바위 근처에 있는 늙은 소나무 아래서 지나가는 한 도승(道僧)이 더위를 피해 잠시 쉬고 있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도승(道 僧)은 잠간 잠이 든 사이에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어디선가 기골이 장대하 고 건장한 체구의 장군 한 명이 흰 말을 타고 달려와 큰 바위의 문을 열고 바위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꿈 속에서 놀란 도승(道僧)은 정신을 차리 고 주위를 살펴보니 바로 눈 앞에 큰 바위가 있었다. 그래서 도승(道僧)은 바위 옆으로 다가 가서 바위 주위를 돌며 살펴보니 바위 위에 방금 지나간 듯한 말 발굽 자국이 나 있었고 큰 바위 앞 쪽에 사각형 모양의 큰 문틀과 문 틈이 나 있었다. 하도 궁금해서 도승(道僧)은 문을 열어보고 싶어서 아무 리 애를 써 보았지만 문은 열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도승(道僧)은 꿈속에서 보았던 흰말을 타고 달려온 기골이 장대한 장군의 모습과 바위의 말 발자국 에 대한 궁금증을 풀지 못하고 마을로 내려와 마을 촌노(村老)들에게 이 기 이한 사실을 알려주고 어디론가 떠나 갔다는 이야기이다. 그 후 군유리 마을 사람들은 영군바위를 주의 깊게 살펴보곤 했는데 세상이 어지럽고 시끄러워 질 때면 바위 속에서 군대를 호령하고 훈련하는 소리가 역력히 들려오곤 했 다고 전한다. 그 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 속에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 있고 웅장한 병영과 정예군을 거느리고 있는 훌륭한 장군이 있을 것이라고 믿어 왔으며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겨 왔던 것이다.
또한 이 바위를 “영금바
위”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옛날에 정월 초에 바위 앞에 촛불을 켜고 소원을 빌면 소원성취가 영금스럽게도 잘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 영군바위에 관련해 서 예전리 중예 마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 가 있다(정강열씨 증언, 81세) 어 느날 중(도사)이 시주를 받으러 다니는데 몇 년 동안 흉년이 들어서
마을
사람들이 예전처럼 시주를 잘해주지 않았다. 도사는 군유리 영금바위를 가리 키며 바위에 살이 붙어서 이 마을에 흉년이 드니 바위가 보이지 않도록 바 위 앞에 나무를 심어서 가려 주면 해를 막을 수 있다고 해서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바위가 보이는 쪽에 나무를 심어 그 뒤부터는 매년 풍년이 들고 마을에 재앙이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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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군바위 사진) (2) 마동(馬洞) 이야기 군유리에 마동(馬洞)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있다. 마동은 한자를 해석해 보면 말이 있는 고을이란 뜻인데 이 지명은 말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져 오 고 있다. 마동은 현재 군유리 마을 뒷 잔등에서 북쪽으로 약 500m 정도의 거리에 있는 지점인데 일명 “구부동”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구불구불 한 길 로 가는 마을 이라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마동에는 옛날에 마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며 지금은 마을의 자취도 없고 전설적으로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마을 앞에는 냇물이 흐르고 있어 영군바위 전설과도 연관되어 있다. 영군바위 쪽에서 보면 남쪽으로 마동 마을이 있고 그 앞에 시냇물이 흐르고 있어서 영군바위에서 장군이 군사 훈련을 하고 쉬는 사이에 말들이 갈마구수(渴馬求水)를 해결하려고 마동까지 내려와서 물을 먹고 간다는 것이 었다. 그래서 말이 물을 먹으러 다니는 마을이라고 해서 마동(馬洞)이란 지 명이 유래했다고 한다(정강열씨 증언,81세) (3) 주결(舟結)이야기 주결(舟結)이란 말은 바다나 강가에 배를 묶어 둔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현재 부두(埠頭)나 선창(船艙)을 말한다. 군유리에 옛날부터 주결(舟結) 이란 말이 전해 오고 있다는 것은 언어학에서 말하는 일물일명설(一物一名 說)에 비추어 볼때 마을 어딘가에 배를 묶어 두는 곳이 있음을 암시해 준다. 마을에 살고 있는 어른들은 군유리 마을 앞에는 바다이었다고 한다. 배가 물 건을 싣고 나갈 때는 주결까지만 와서 물건을 내려 놓곤 했으며 그것을 뒷 받침해 주는 근거로 마을 앞에 흐르는 내(川)를 팔 적에 배 돛대가 여러개 발견되었고 조개껍질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이러한 전해 오는 이야기를 주 의깊게 생각해 보면 군유리 마을은 아주 오래 된 시기에는 바닷물이 드나드 는 어촌마을 이었을지도 모른다. 배를 매 두는 곳에 집터가 있었는데 이 집 터가 명당 터라고 해서 군유리 마을에 사는 이학춘씨 어머니가 이 집터를 비싸게 사서 자기가 죽으면 묻어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 주결에 관한 이야기는 비석 마을이 바닷가에 자리잡고 있어서 해대(海垈)라고 부르 는 것과 일맥 상관이 있다고 본다. (4) 말바위(馬巖)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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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유리 마을 앞 들녘 냇가 안쪽으로 말바위가 있다. 일설에는 영군바위를 마주보고 있다고 해서 맞바우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오랜 세월동안 맞 바우라고 부르던 것이 바위의 형상이 지금은 바위의 일부가 땅속에 파묻혀 있는데 말(馬)의 형상과 닮은 데가 있다고 해서 말바위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고 아니면 맞바위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말바위라고 부르는 것이 사람들이 발음하기에는 말바위가 더 부드럽고 상대방도 잘 알아 들을 수가 있어서 그 렇게 되었다고 말하는 마을 어른들도 있다. 어찌되었든지 간에 지금은 군유 리 마을 사람들은 말바위라고 부르고 있다. 이 바위에 관한 전설이 있는데 도깨비가 바위에서 나오면 반드시 비가 온다는 전설과 또 하나는 비가 많이 와서 냇물이 범람하여 홍수가 마을로 밀려오지 않게 막아 준다는 전설이 있 다. 지금은 바위의 일부가 흙에 묻혀 있는 상태로 있다. (말바위 사진)
(5) 돌음봉 이야기 군유리 마을 하군 마을 앞 들판에 조그만 봉우리로 된 산이 하나 있다. 이 봉우리를 도림봉(道林峯)이라고도 한다. 돌음봉이라고 부르는 것은 마을에서 큰 소리로 이 봉우리를 향하여 말을 하면 그 소리가 봉우리에 갔다가 다시 돌아 온다는 뜻에서 “돌음봉”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 돌음봉에 관하여 전해 오는 이야기가 있다. 돌음봉에 어떤 부자가 명당이라고 해서 묘 를 썼다. 어느날 부자는 태몽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하얀 옷을 입은 도사 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아기를 낳으면 3년 동안 소문을 내지 말라고 당부하 며 이 아이는 반드시 커서 나라에 큰 일을 할 인물이 될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묘를 쓰고난지 3년 만에 아기를 낳았는데 아기가 태어나 면서 이빨이 4개가 나 있었다고 한다. 이 아기는 분명 큰 인물이 될 것이라 는 예감이 들어 그 부자는 집안 식구들에게 소문을 내지 않도록 신신 당부 를 했다. 그런데
그 부자의 집안 식구들은 소문을 내지 않고 얼마동안의 시
일이 지났는데 그 때 아기 출산 할 때 아기를 받은 여인네가 우물에 가서 빨래하면서 동네 아낙네들에게 말을 해 버렸다. 그리하여 그 아기의 이빨이 사흘만에 모두 빠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부자는 집안에 큰 인물이 날 것을 내심 기대했는데 크게 실망하여 밤이면 돌음봉을 쳐다보며 한탄하 는 소리가 집안까지 들려 왔다고 한다(정강열씨 증언, 8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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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음봉 사진) (6) 해대(海垈) 이야기 해대란 말은 바닷가에 터를 잡고 있었다라는 말이다. 군유리 비석마을 해대 (海垈)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말은 군유리 앞이 옛날에는 바다였다는 것이 다. 그것은 주결(舟結)이야기와도 상관된다. 일설에는 비석이 많이 있어서 비 석등이라고 했다는 말도 있다. 이 마을은 해대라는 이름보다는 비석등이라는 이름이 더 잘 알려진 마을이다. 군유리 마을을 들녘 건너 금구마을에서 멀리 쳐다보면 바닷가에 있는 지금의 전형적인 어촌 마을처럼 보인다. (7) 맥무덤 이야기 군유리 마을에 맥무덤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맥 무덤이란 말은 맥을 흙 으로 묻어 버렸다는 이야기이다. 군유리 마을의 형상이 상군과 하군을 한 눈 으로 멀리서 바라보면 거북이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어느 날 마을을 지나가는 도승(道僧)이 마을 촌로에게 이르기를 이 마을은 거북이가 거북등 에 보물을 지고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니 가지 못하게 흙으로 거북이를 묻 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마을 뒷 잔등에 흙을 돋우고 거기에 당산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당산이 상군 마을 에는 할아버지 당산이고 하군에 있는 당산이 할머니 당산이다. 거북이 가슴에 “만 석궁 집터”와 “천석궁 집터”가 있다고 하는데 지금 현재위치는 만석궁 집터 는 정재을씨가 살고 있는 곳이고 천석궁 집터는 정강열씨가 살고 있는 집터 가 바로 거북이 가슴부분이라고 한다.(정강열씨증언,81세) 임진왜란때 의병 들이 이 집터에서 기거하면서 의병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영광 에 가서 의병들의 거처를 밀고했다. 그리하여 일본군들이 찾아와서 집에 불 을 질러 없애버렸는데 이 집터를 파면 불에 타버린 빨간 흙돌이 나왔다고 한다. 5. 6.25동란 때 적대세력의 가족몰살 사건 1) 사건개요 1950년 6.25동란때 고창군 공음면 군유리에서 남로당 출신이요 인민위원 들이 4가족 몰살 사건이 있었다. 그 당시에 고창군 공음면에서는 마을에는 정보원이 배치되어 있었고 공음면 단위에는 “공음면 분주소”라는 관리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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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 마을의 정보원이 정보를 수집하여 공음면 분주소에 정보를 제공하면 “반동분자”라는 죄명으로 양민을 학살시키곤 했었다. 사건의 내용은 그 당시 상황을 목격했던 사람(정종환: 주민등록번호 301224-1538315, 인천 직할시 개양구 효성1동 현대아파트 201동302호)의 증언에 의하면 공음면 군유리 마을에 사는 정보원 “김재섭과 김재남” 두 사람이 평소 감정이 좋지않았던 4인(정고봉, 정근기, 정재화, 정삼용)을 “반동분자”라고 공음분주소에 밀고하 여 1950년 9월 28일 오후 10시 공음면 용수리 사갓봉에서 4명을 살해하여 구덩이를 파고 매장하였다. 그 후 대한민국 국군의 정세가 우세하여지자 4명 을 학살한 남로당원 공음 분주소 직원과 마을 정보원인 “김재섭과 김재남” 은 신변의 위험과 후환을 두려워하여 생존한 4명의 가족들 모두를 몰살하기 로 계획을 세우고 1950년 10월 20일 오전 12시경에 마을 주민을 한 곳에 모이게 하고 인민재판을 하여 생존한 4집 식구들(어린아이는 제외함)을 군유 리 산 23번지에 구덩이를 파고 대창으로 찔러 죽여 함께 매장하였다. 이 사 건과 관련하여 정고봉, 정재화, 정근기, 정삼용 4집안 가족이 몰살 당하였 다>9증언자 : 정종환 tel 032-548-4378, 010-3127-4378) 2)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진실규명 신청 (1) 신청자 용수리 사갓봉에서 정고봉 정재화 정근기 정삼용의 후손 중에서 고창에서 살고 있는 정재윤과 익산시에서 살고 있는 정진택 그리고 광주에서 살고 있 는 정영백 세 사람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6.25 집단희생 사건유형으로 진실규명신청서를 2006년 11월23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 제20조 및 같은 법 시행령 제3조의 규정에 의하여 정재윤은 부 모님(정고봉, 박복남)과 조부(정동옥)의 진실규명 신청서를 제출했고, 정진택 은 정재화 강판순 정준묵 이평전 4사람의 진실규명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2) 신청의 취지 6.25동란 때 인민위원(남로당원)들이 불법적으로 자행한 민간인 집단 희생사 건 중 한 마을에서 4가족 식구가 몰살 당한 희생자의 자손으로서 국가적 차 원에서 사건의 진실을 규명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되어 신청하였다. (3) 진실규명이 필요한 이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진실규명을 해달라고 신청할 때는 거기에는 필요한 이유가 있었다. 필요한 이유로 첫째는 우리 부모는 농사 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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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사는 선량한 농민으로 동네 사람들이 말하기를 덕망이 있고 인심이 좋은 집안이었는데 왜 죽였을까? 둘째는 인민위원들은 왜 한 마을에서 4집 가족 식구들 모두 몰살시켜야만 했던가? 셋째 6.25때 집단 학살 당한 가족의 자 녀들은 국가보훈처에서 보훈자녀 혜택을 주었는데 우리는 그러한 혜택을 받 지 못했을까? 등의 세가지 필요한 이유가 궁금해서 진실규명을 신청했던 것 이다. 3)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결정 통지서 고창지역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사건으로 정고봉 외 2인이 지방좌익에게 희 생당한 사건과 정재화 외 3인이 지방 좌익에게 희생당한 사건의 진실규명 신청사건의 조사결과를 다음과 결정해서 통지해 왔다. < 귀하께서 신청하신 진실규명신청사건의 조사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창지역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사건은 사건 발생 시기를 기준으로 ① 인민 군 점령 직전에 일어난 희생사건 ② 인민군 점령 기간과 후퇴 기간에 일어 난 희생사건 ③ 군, 경 수복 이후이나 치안이 부재한 시기에 일어난 희생사 건 ④ 군, 경의 완전한 수복이후 일어난 희생사건 등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 됩니다. 인민군 점령 직전과 점령 직후에 발생한 희생사건의 경우 희생자들 은 주로 총살되었고 인민군 후퇴기간에는 총살된 희생자도 있었으나 죽창 등으로 희생된 경우도 많았습니다. 한 편 인민군이 후퇴한 이후 치안이 부재 한 시기에 희생된 피해자들은 대부분 죽창에 의해 희생되었습니다. 또한 인 민군 점령전, 인민군 점령기간, 군, 경 수복이후의 기간에는 개별적이고 선별 적인 희생사건이 주로 발생했던 것에 반해 인민군 후퇴시기와 후퇴 이후 치 안 부재 시기에는 가족단위의 대규모 희생이 많이 발생했습니다. 피해자들은 모두 고창지역 (구) 빨치산, 내무서원, 분주소원 및 지방좌익, (신)빨치산 등 적대세력에 의해 희생되었습니다. 피해자들은 좌익 인사들과 관계가 좋지 않 았거나 대한 청년단 활동 등 우익활동을 하였거나 면장, 경찰, 군인 등 공직 에 있었거나 마을 이장 등을 역임한 사람이었거나 그들의 가족이었습니다. 고창지역에서 적대세력에 의해 희생된 희생자 수는 진실규명 대상자 135명 과 미신청 피해자 18명 등 총 153명입니다. 이를 면단위로 구분하면 공음면 에서 가장 많은 63명이 희생되었고 대산면에서 23명 무장면에서 18명, 해리 면에서 9명, 성내면에서 8명, 부안면에서 7명, 아산면에서 3명이 희생되었으 며, 고창읍, 성송면, 심원면에서 각각 2명이 희생되었습니다. 무장면에서는 희생사건 이외에도 폭행사건 역시 발생하였습니다. 이외에도 각종 문헌자료 에서 희생자 명단이 확인되었으므로 실제 희생규모는 153명보다 더 많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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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추정됩니다. 이상과 같이 진실규명 대상자 135명과 미신청 피해자 18명 등 총 153명이 1950년 5월 ∼ 1953년 2월 사이에 고창지역에서 적대세력에 의해 희생되 었으며 진실규명 대상자 1명이 폭행당한 사실을 참고인 진술과 문헌자료를 통해 확인하였으므로 본 사건은 진실규명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 제28조의 규정에 의하여 위와 같이 결정되었음을 통지합니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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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통지 받은 내용에 이의가 있는 경우 통지를 받은 날부터 60일 이내에 위원회에 서면으로 이의신청을 할 수 있습 니다. 문의할 곳
담당자 : 조사관
손민정
전화 : 02) 3406 - 2689 )
6. 마을의 현황과 생활상 1) 마을의 세대별 성씨 현황(공음면 전화번호부 참조)
성 씨 상 군 하 군 비 석 합 계
정 김 박 이 구 천 최 배 강 류 오 마 신 유 윤 류 황 나 양 임 조 한 계 1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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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을 이장과 노인정 회장 구 분
마을
노인
전화번호
부녀회장
562-7082
회장 이 시 원
562-7165
김용자
신 용 욱
563-4505
이 삼 원
562-7027
나 병 채
562-7211
이 시 원
562-7165
상 군
이장 정 재 을
하 군 비 석
전화번호
정순자
3) 마을의 주요 시설 (1) 마을 회관 마을에 마을 회관이 있다. 회관은 마을 노인정과 함께 있으며 마을 사람 들의 주요 친목과 마을의 중요한 사항을 의결해야 할 문제가 있을 때 꼭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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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회합장소이다. 농촌에서는 농번기에는 농사일에 바빠서 마을 회관을 이 용하는 사람들이 비교적 많지 않으나 겨울에는 참 편리한 장소이다. 다행이 도 지방자치가 실시되면서부터 겨울에는 군청으로부터 난방비 보조를 받게 되어 마을 부녀자들은 점심정도는 공동으로 취사하는 편리함도 있다. 농촌의 인심은 자기집에 회갑이나 생일잔치 같은 경사가 있을 때 집에서 장만한 음 식을 가지고 와서 마을 사람들이 나누어 먹는 아름다운 모습은 도회지에서 느낄 수 없는 정감 있는 농촌의 삶의 넉넉한 인심이다. <하군 마을회관과 상군 마을회관 사진>
2) 모정 군유리 마을에 모정이 3개가 있다. 상군, 하군, 비석 각 마을에 모정이 있 는데 비석 마을과 상군 마을의 모정은 주민들이 잘 사용하고 있다. 여름철에 는 모정이 바람이 잘 통하고 전망이 비교적 좋은 곳이어서 낮에는 일을 하 고나서 쉴 때는 모정에 와서 낮잠을 자고 오후에 일터로 가는가 하면 옛날 부터 지나가는 나그네도 한 더위를 잊기 위해서 쉬고 가기도 했으며 전해오 는 이야기로는 지나가는 도사가 모정에 들러 쉬면서 마을의 풍수지리에 설 명하며 마을에 만석궁과 천석궁의 집터를 알려주는가 하면 장차 마을에 큰 사람이 나올 거라는 예견도 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모정은 마을의 전방 에 위치하고 마을 앞 넓은 들녘을 바라볼수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어 낮에 는 농부들이 일하는 모습과 벼 농사가 잘 되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담소를 나누며 편안하게 오수를 즐기는 장소에 세워졌다. 3) 게이트볼 장 상군 마을에 마을 주민들의 건강과 체력 단련을 위해서 지방 자치단체에서 시설해 준 게이트 볼 경기장이 있다. 우천시에나 겨울에도 할수있도록 실내 경기장을 만들었다. 게이트 볼 경기는 몇 개의 게이트를 만들어 놓고 스틱으 로 공을 쳐서 집어 넣는 노인들에게 아주 적합한 스포츠 경기의 일종이다. 농촌에서 남 녀 노인들이 할 수 있는 스포츠로서는 심신 단련에 적합한 운 동으로서 군유리 마을 게이트 볼을 즐기는 회원들은 2010년 4월 12일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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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회 고창병원장기 게이트 볼 대회에 출전하여 남자부는 2위를 하였고 여자 부는 우승을 하였으며 2010년 5월 28일 경기에 출전해서는 남자부가 우승 을 하였고 여자부는 3위를 한 실력이 우수한 마을로 고창군에서는 잘 알려 진 게이트 볼 회원들이다. 게이트 볼 실내경기장 안에는 그동안 각종 경기에 출전하여 상을 타 온 우승컵이 많이 진열되어 있다. < 게이트볼 경기 대회에 출전한 선수들과 우승 트로피>
5) 교회(기독교 한국침례회 주님의 교회) 군유리 상군 마을에 도로변에서 가까운 지점에 기독교 한국침례회 주님의 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1988년 3월 24일에 창립되었으며 24년간 마을 주 민들의 영적 활동을 맡아오고 있으며 현재 담임목사로 이요한 목사님이 교 회를 운영하고 있다.교회의 주소는 “전북 고창군 공음면 군유리 비석 334번 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전화 : 063-563-4525)시골의 작은 교회이지만 신 도들의 신앙심이 아주 좋고 목사님의 헌신적인 사목활동으로 교회를 유지 발전시켜 가고 있다. < 주님의 교회 건물>
도움을 주신분 정강열(81세, 군유리 상군) 정재인(69세, 군유리 상군) 나병채(66세, 군유리 비석, 마을이장) 정종환(82세, 인천시 개양구 효성1동) 참고문헌 고창군지, 고창군지편찬위원회, 고창군, 2009 고창의 마을 유래, 고창문화원,도서출판 청동, 2003. 고창문화 21집, 고창문화원, 2008. 고창문화유적 분포지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유산 연구소, 2005. 전북전례지명총람, 유재영, 민음사, 1999. 김경식 저, 고창의 전통과 생활사, 고창군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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