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반 마을 이형성
1. 마을의 위치와 지명유래 해리면(海里面) 용반(龍盤) 마을은 고창읍에서 지방도 703호선을 따라 해리 면 소재지를 지나 22번도로 상하면(上下面) 방향으로 가다가 지로분기점에서 우회전하여 농어촌 도로 나성선을 따라 2km쯤 가면 마을이 있으며, 마을로 들어가기 전 삼거리에는 마을명이 새겨져 있는 자연석이 있다. 1980년 이전까지만 해도 행정분리명으로 용반 마을은 용반(龍盤)․반곡(盤 谷)․난정(蘭亭)․송암(松巖)․신흥(新興)․대동(大洞)․양곡(良谷) 등으로 이 루어졌다. 각 자연마을의 위치를 보면, 용반․반곡․난정은 나성선에서 용반으 로 들어가 장천(長川) 교각을 지나 용반저수지 안쪽에 있다. 신흥은 용반저수 지 바로 앞에서 오른쪽에 위치하였다. 대동은 용반으로 들어가기 전 왼쪽 산 기슭에 자리하였고, 양곡은 안복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그리고 그 입구에서 송 암으로 가기 위해 돌아가는 모퉁이의 한샘밑까지 포함하고 있다. 송암은 양곡 을 지나 나성농어촌 길을 따라 가면 월천재를 넘어가기 전 새터골에서 원당산 (원당뫼) 아래에 걸쳐 있는 마을을 말한다. 현재 용반은 법정분리로는 왕촌리(旺村里)에 속한다. 왕촌리는 왕거(旺巨)․ 화산(花山)․지로(芝老)․용반(龍盤)․안복(安福)으로 이루어진 마을 이름이다. 용반은 행정분리명이다. 현재 용반의 자연마을로는 용반(龍盤)․반곡(盤谷)․ 난정(蘭亭)․송암(松巖)․신흥(新興) 등이 있다. 송암에서 나성리(羅星里) 대정 동(大井洞)으로 넘어가는 재가 월청(月淸)재이고, 반곡에서 어룡(魚龍)으로 넘 어가는 재가 어룡(魚龍)재이다. 용반(龍盤)이란 지명 유래는 앞산 즉 반곡과 난정 뒷산에 용(龍)이 또아리를 틀고 쉬었다가 승천하였는데, 그후 또아리를 틀고 앉은 용의 모습으로 변하였 다고 하여 ‘용반(龍盤)’이라 불렀다 한다. ‘반곡(盤谷)’은 용반 바로 앞에 위치 한 마을로, 그 유래는 용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옆에 마을이 조성되었기에 붙 여진 이름이다. ‘난정(蘭亭)’은 정자 앞에 난초가 곱게 피어 “매화낙지(梅花落 地)”라는 묘혈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송암(松岩)’은 새터골 샘터에서
- 1 -
원당뫼 마을까지 이어진 마을로, 그 유래는 마을 주위에 우람한 소나무가 무 성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신흥(新興)’은 용반 인근 주민들이 점차 많아지자 새로운 터를 마련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용반마을표지
용반마을
- 2 -
반곡마을
난정마을
- 3 -
송암마을표지
2. 마을연혁과 인구현황 용반 마을의 연혁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마을 일대의 야트막한 야산 밭에는 기왓장이나 도자기 파편들이 발견되는 것을 보면 일찍이 고려시대에 조성된 듯하나 그 지명에 대한 것은 알 수 없다. 조선 중․후기에 함평이씨(咸平李氏)와 함평노씨(咸平魯氏)가 마을을 마련하 여 거주하면서 그 마을 명칭을 ‘용반(龍盤)’이라고 하였다. 마을의 인구가 점 점 번성하자 새로운 터를 마련하여 ‘반곡’․‘난정’․‘송암’에 터를 마련하여 이 주하였다. 나주오씨(羅州吳氏)가 송암 원당뫼 아래쪽에 천장(遷葬)하면서 마을 을 마련하고 거주하였다. 함평이씨의 가구수가 증가하자 자연마을 ‘대동’․‘양 곡’․‘신흥’을 조성하여 퍼져 나갔다. 20세기 초 함평이씨는 점점 그 수가 증가한 반면 함평노씨와 나주오씨는 그 수가 줄어들었다. 또한 1980년 이후 주민들이 외지로 많이 떠나게 되어 마을이 없어진 경우도 있으니, 자연마을 대동․양곡 등이 그런 마을이다. 양곡 은 가옥이 안복으로 편입되었고, 대동 마을은 주민들이 외지로 떠나면서 마을 이 자연 소멸하고 그 터만 남게 되었다. 행정분리명 용반은 자연마을 용반․반곡․난정․송암․신흥 등으로 조성되 었다. 주요 성씨는 함평이씨가 대부분이나, 함평노씨․전주이씨․김해김씨 등 도 거주하고 있다. 해리면사무소 2011년 9월 자료에 의거하면, 총 33세대에 71명으로, 남자는 31명이고 여자는 40명이다.1) 여자가 남자보다 9명이 더 많 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주민현황을 보면, 용반은 11명(남자 4, 여자 7), 반곡 은 9명(남자 3, 여자 6), 난정은 7명(남자 1, 여자 6), 송암은 9명(남자 3, 여 자 6), 신흥은 18명(남자, 8, 여자 10) 등으로 총 54명이다. 연령별로 보면, 10대는 4명, 20대는 3명, 30대는 2명, 40대는 7명, 50대는 4명, 60대는 7명, 70대는 15명, 80대는 10명, 90대는 2명 등이다.
1)
왕촌리 24통(용반) 연령별 인구황을 보면, 10대는 2명, 20대는 12명, 30대는 4명, 40대 는 9명, 50대는 10명, 60대는 11명, 70대는 19명, 80대는 3명, 90대는 1명 등이다.
- 4 -
3. 마을의 자연환경 용반마을 바로 앞쪽의 산은 그 이름이 없는 야트막한 야산이다. 풍수적으로 말하면 용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가 승천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한다. 이 또아리 를 틀고 있는 무명산(無名山)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대성산(大城山)이 있고, 이 산은 신흥 마을 뒤편에 있다. 대성산 뒤편에는 조시산(造矢山)이 있는 데 이 산은 1900년 초에는 선종산(仙鐘山)이라 일컫기도 하였다. 남쪽에는 장사산(長沙山)의 줄기인 왕치(旺峙)가 있다. 왕치는 안복 뒷산인 데 주민들은 이 왕치를 왕재라고 부른다. 동쪽에는 지산(芝山)이 있으며, 서쪽 에는 원당산(元堂山)이 있다. 용반과 안복 논사이로 흐르는 장천(長川)이 있 다. 이 장천은 송암 새태골에서 흘러 지로지 앞을 거쳐 안산 뒤쪽 궁산저수지 로 흐른다. 용반 마을로 들어가는 삼거리 입구에는 마을명이 새겨 있는 자연석이 있는 데 앞쪽에는 한자로 그 뒤쪽에는 한글로 쓰였다. 그 반대편 옛 대동마을 쪽에 는 ‘함평이씨세장비(咸平李氏世葬碑)’가 세워져 있고, 그 삼거리에서 다시 나 성선을 따라 송암마을에 이르면 오른쪽에 송암마을 표지판이 있으며, 그 반대 편 새터골에는 우물샘이 있다. 송암마을에서 원당뫼로 약간 걸어가면 ‘나주오 씨세장비(羅州吳氏世葬碑)’가 있고, 모퉁이를 돌아 약간 걸어가면 집 한 채가 있으며, 그 뒤편에는 조 만간 완공할 나주오씨 사당이 있다. 용반마을에서 남쪽 그리고 난정 마을 앞 쪽에는 용반저수지가 있다. 용반의 각 자연 마을의 길은 콘 크리트로 포장되어 경운기․트랙타․콤바인 등이 이동하기가 용이하다. 용반마을표지석 한자
- 5 -
장천 물줄기
함평이씨세장비
나주오씨세장비
- 6 -
용반저수지
4. 마을의 인물과 행의 1) 입향조와 성씨 (1) 입향조 용반마을 최초 입향조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함평이씨와 함평노씨가 살았다. 함평이씨는 나성리(羅星里) 성산(星山)으로 이거한 이복(李馥)의 아들 이종신(李宗新)이다. 함평노씨의 세거는 그 시대와 그 인물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이종신은 정해년(丁亥年)에 태어나 정묘년(丁卯年)에 몰하였다고 하였으나 그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자는 동환(東煥)이고 가선대부(嘉善大夫)와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었다.2)
(2) 현재의 성씨 현재는 함평이씨 31가호, 함평노씨 2가호, 전주이씨 3가호, 김해김씨 1가호 가 거주하고 있다.
2)
1982년 12월 20일 발행한 모양성의 얼에서 “임진왜란 때 함평이씨 14조(이광수)가 터 를잡고 마을을 이루었다”라고 하고, 고창문화원에서 2003년 발간한 고창의 마을유래에는 “1592년 임진왜란 때 함평이씨 광수라는 사람이 설기( )한 마을이다”고 한 이후, 모든 서적에서 ‘이광수’ 를 말하고 있다. 다만 본 글에서는 무장읍지( ) 자료 및 영모재중건기( ) 에 의거하여 수정하였음을 밝힌다.
設基 茂長邑誌
- 7 -
永慕齋重建記
2) 역사적 인물과 행의(行誼) (1) 이경헌(李卿憲, 1850∼1936) : 이경헌의 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자순(子順), 호는 향산(香山)으로, 현령(縣令) 이주(李稠)의 후손이다. 일 찍이 부친(父親: 李敦秀)을 여의고 모친 김해김씨(金海金氏)의 훈도로 효 행이 극진하였다. 족형 오감재(五感齋) 이제헌(李齊憲: 1832~1899)에게 배웠다. 스승 이제헌은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 1811~1876)의 문인이 다. 이경헌은 학문을 이루어 경사자집(經史子集)에 두루 통하였고, 무장현 (茂長縣)의 초빙 몽학교수(蒙學敎授)로 있으면서, 신흥마을에 있는 영모재 (永慕齋)에서 인근의 자제들을 가르치다가, 만년에 정사(精舍)를 건립하고 편액을 향산정(香山亭)이라 하고 이곳에서 은거하며 강학하니 배우기를 청 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는 사제의 예를 엄격히 세우고 재주에 따라 교도 (敎導)하였고 마을 풍속의 잘못된 것을 올바르게 바로잡으니 고을의 기강 과 세속적 기호(嗜好)들이 크게 변화하였다. 문집(文集) 여러 권이 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2) 이사헌(李士憲, 1865∼1948) : 이사헌의 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경수(卿修), 호는 석우(石愚), 현령(縣令) 이주(李稠)의 후손이다. 일찍이 족형 오감재(五感齋) 이제헌(李齊憲)에게 배우다가, 10세 무렵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일찍이 학문의 요의(要義)를 알고 경학(經學)에 잠심(潛心)하여 깊은 뜻을 탐구하였다. 무장현(茂長縣) 의 몽학교수(蒙學敎授)로 있으면서, 향리의 자제들이 배우기를 청하면 배 움의 과정을 엄히 세우고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구용잠(九容 箴)」, 「구사잠(九思箴)」, 「경재잠(敬齋箴)」 등을 좌우의 벽면에 걸어놓고 몸 삼가는 공부의 요체로 삼았다. 이사헌은 박학하고 견식이 고매하여 석 우거사(石愚居士)라 일컬기도 하고, 또 사람들이 학문에 의심나는 것과 어 려운 것이 있으면 그에게 나아가 질정하니 세인들은 그를 ‘서고(書庫)’라
- 8 -
일컬었다. 그의 여러 제자들이 있으나 현존 제자로는 동강(東岡) 김용태 (金湧泰: 93세)가 있다.
(3) 이재헌(李栽憲, 1873~1944) : 이재헌의 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인배(仁培), 호는 하전(下田), 현령(縣令) 이주(李稠)의 후손이자, 이돈복 (李敦福)의 장남이다. 그는 해리면 왕촌리 용반 신흥마을에서 태어나 경학 (經學)을 배웠다. 그는 13세 때 상하면(上下面) 장호리(長湖里) 동학접주 표종길(表宗吉)의 사위가 되면서 동학에 입도하고, 오리동면(五里洞面)과 청해면(靑海面) 일대의 접주로 활약하였다. 1894년 3월 20일 갑오농민혁 명의 무장기포 때 21세의 나이로, 장인이자 중위장(中衛將) 표종길의 부장 (部將)으로 출진하고, 장인의 동학접인들의 연락을 도맡으면서 모병(募兵) 하는 데 크게 활약하였다. 4월 28일 전주(全州) 입성전투에도 참여하여 공 격의 역할을 맡았다. 9월 2차 봉기에 재차 가담하였다가 부상을 입고 부안 군 변산(邊山)에 은거하였고, 그후 일본군의 토벌 작전 때 부상을 당하자, 용반 대성산(大城山)에 자리한 함평이씨 재실 영모재(永慕齋)에서 후학을 양성하다가 7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후손 가운데 증손자 이재곤 (李載坤)은 심원면(心元面) 진주마을에 거주하고 있다.
(4) 이성범(李成範, 1916~1998) : 이성범의 본관은 함평(咸平), 호는 금곡(琴谷), 현령(縣令) 이주(李稠)의 후손이자, 이경헌(李卿憲)의 손자이 다. 그는 해리면 왕촌리(旺村里) 용반(龍盤)에서 태어났다. 줄포공립보통 학교(현
부안군
줄포초등학교)를
서정주(徐廷柱)와
함께
졸업하였다.
1929년 중앙고등보통학교(현 서울시 중앙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당시 김성 수(金性洙: 1891~1955), 이윤재(李允宰: 1888~1943), 변영태(卞榮泰: 1892~1969), 박창하(朴昌夏) 선생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영어에 소질 이 많아 5학년 때 연희전문학교에서 주최하는 전국 중학생 영어웅변대회에 학교 대표로 참가하여 입상을 하기도 하였다.
- 9 -
1934년 이성범은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34년 보성전문학교 상 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학교에 다니며 남달리 생(生)의 가치나 목적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다가, 학교를 그만두고 고창군 선운사(禪雲寺)가 있는 도솔산(兜 率山)으로 들어가 ‘참다운 인생’에 대한 화두를 가지고 묵묵히 암자생활을 하 였다. 그는 삶의 지표에 무엇인가 잡은 듯 입산한 지 3개월만에 다시 속세로 돌아왔다. 당시 그의 나이 19세였다. 1935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다시 입학하였다가, 그 이듬해 영문과로 재입 학하였다. 학창 시절 서양의 문학을 탐닉하다가, 어느 날 일본의 철학자 서전 기태랑(西田幾太郞: 1870~1945)의 논문에서 양자역학(量子力學)이라는 현대 과학을
수립한
물리학자이자
철학자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1901~1976)의 글을 접한 뒤 물리학에 관계된 서적도 두루 읽었다. 1936년 가을, 이성범은 당대의 여러 시인 김달진(金達鎭: 1907~1989), 김 동리(金東里: 1913~1995), 성야(星野) 여상현(呂尙玄: 1914~?),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1915~2000), 동주(東洲) 이용희(李用熙: 1917~1997), 성벽 (城壁) 오장환(吳章煥: 1918~1951), 함형수(咸亨洙: 1916~1946) 등과 함께 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하여 시(詩)를 지으며 작품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1939년 연희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후, 1939년 경성방직에 입사, 해방 과 동시에 퇴사하였다. 1947년 대한방직협회 사무국장으로 선임되어 3년 동 안 재직하였으며, 1950년 3월부터는 정부 이사관으로 임명된 후, 전쟁 중에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그것은 미국정부가 지원하는 원조자금으로 물자를 구입 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이성범은 구매사절단 부단장이었다. 그후 5년간 주 미대사관 상무관이었으나 재무담당관의 임무까지 겸직하였다. 1955년 귀국한 이후, 대한방직협회 고문으로 취임하였다. 1958년 이성범은 경제발전이 국민과 국가를 위하는 길이라고 믿고 ‘인화단 결’․‘창의개발’․‘사회봉사’ 등을 경영이념으로 (주)범양사를 설립하여 무역상사 업무를 시작하였다. 1963년 미국의 세라니즈 코퍼레이션사와 합작으로 국내 최초의 민간 외국 합작법인인 범양공업을 설립하였다. 그후 1970년 12월 미 국의 IMTT사와 합작으로 국제탱크터미날을 설립한 후, 국제상공회의소 한국 위원회 부회장, 한국․멕시코 경제협력위원회, 한국․인도 경제협력위원회 한국측 위원장 등을 엮임하였다. 1976년 무렵 모든 사업을 동생에게 물려주고, 서양의 물리학과 동양사상에
- 10 -
지대한 관심을 가지며 수많은 서책을 탐독하였다. 이성범은 범양사 내에 출판 부를 두어 1978년 9월 카프라의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을 시작으로 신과학 총서 등 80여권과 문화예술도서를 50여권 출판하였다. 이성범의 신과학총서 에 대한 출간은 과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1992년 과 학사상이 창간될 때 ‘과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혔 다. 과학문명의 시대임이 분명하건만 우리나라가 과학기술의 후진국을 면치 못하고 있는 형편인 것도 분명하다. 과학기술의 역사적 전통이 짧고 빈약한데다 구미제국이나 일본 등에 비하여 우리 과학교육의 양적 질적 수준이 낮고 연구시설 및 이들에 대한 사회적 지원도 미 비하다. 그러나 최근과학기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져 가고 있고 앞으로도 더욱 높아 질 것으로 기대된다. 따라서 우리의 과학기술 수준도 머지않아 획기적인 발전을 이룰 것으 로 보인다. 그러나 모든 과학기술 발전이 무차별하게 인간과 사회에 선(善)하고 유익한 것 은 아니다. 근년에 과학기술을 비난하는 소리가 일부에서 들려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과 학기술이 비난을 받는 주된 이유는 그것이 대량살상무기의 주범노릇을 해왔고 생태계파괴 또는 환경오염과 연관되어 왔다는 데 있다. (……) 우리는 과학기술을 꾸준히 발전시키는 데 전력을 다하되, 그것이 인간과 사회에 선을 위하여 사용될 수 있는 선택적인 것이어야 한다. 또한 물질과 과학이 오랫동안 유물주의 사상을 부추겨왔다면 이제 과학은 정신과 물질을 통 합한 인간윤리를 수립하는 데 적극 참여해서, 더 이상의 생태계 파괴를 막고 나아가 현대사 회의 병리현상인 정신의 가치와 물질 가치의 불균형을 바로 잡아서 물심의 조화를 달성할 수 있는 건강한 사회를 이룩하는 데 기여해야 할 것이다. 현재와 같은 우리사회의 변동기에 과학의 전진과 사회의 건전한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슬기로운 생각들이 과학사상을 통하여 활기 있게 논의되기를 바라면서 사회 각계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도를 기원한다.
이성범이 말년에 20세기 물리학의 새로운 세계관에 대한 관심을 가진 것도 과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위하는 것이었다. 그가 번역한 프리초프 카프라의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The Tao of Physics)(1979년, 김용정 공역)․새로 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The Turning Point)(1985년, 구윤서 공역), 데이비 드 아텐보로의 지구 위의 생물(Life on Earth)(1982년), 다니엘 부어스틴의 발견자들(Discovers)(1987년) 등의 책들도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이러한 역서들은 현재까지 많은 독자들의 대단한 반향(反響)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성범은 1982년 범양그룹 명예회장에 추대된 이후, 1985년부터는 구상․김 광균․김중업․김태길․민영규․백선기․송지영․이용희․이주홍․이한기․정비석․차주환․최호 진․황순원 등과 함께 동인지 회귀(回歸)를 창간하여 잠시 중단했던 문학활
- 11 -
동을 재개하기도 하였다. 이성범은 기금을 출연하여 1991년 1월 향산재단(이성범 사후 금곡재단으로 변경)을 설립하였다. 재단은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의 면학(勉學)을 장려하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더욱이 재단은 1992년 3월부터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연결고리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간지 과학사상을 창간 하여 과학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진작되도록 크게 후원하였다. 이성범은 바둑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주미대사관 상무관 시절 미국 바 둑계의 최고수라는 일본인을 꺾었다는 일화도 있다. 당시 조남철(趙南哲: 1923~) 국수와 같이 최고단인 초단을 인정받았는데 일본인 국수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한다. 그의 저서로 시와 과학의 길목에서(1986년)가 있고, 유 집으로 금곡 이성범 문집(2002년)이 있다.
(5) 이성범(李成範)의 금곡재단 ‘금곡(琴谷)’은 이성범(1916~1998) 범양사 회장의 자호이다. 금곡재단은 1991년 1월에 설립한 향산재단의 명칭을 변경한 것이다. 재단 명칭의 변경은 이성범 사후, 1999년 11월 13일이다. 처음 ‘향산’이라고 재단명을 붙인 것은 해리면 용반마을 향산정(香山亭)에서 후학을 양성했던 조부 이경헌(李卿憲:
∼
1850 1936)이 교육을 통해 인재양성을 도모했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함일 것이다. 이성범은 평소 자신의 소신이 “올바른 교육을 통한 성실한 인재 양성 그리 고 과학과 학술의 연구지원을 통하여 국가의 발전 및 국민복지사회 건설에 일 익을 담당하고자 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그는 이 소신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 의 기금을 출연하여 재단을 설립하였다. 이성범은 8년 동안 향산재단을 이끌며 전국의 고등학생과 대학생들 가운데 주로 학업성적이 우수하고 품행이 단정하며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 학금을 지원하였다. 또한 학술연구 지원과 계간지 과학사상 발간에도 적극 지원하였다. 학술지 과학사상은 매호마다 당대 이슈를 특집으로 하여 발간 하였다. 제1호에서 제50호에 이르는 과학사상은 당시 지성인들에게 화두를 던지면서 한 시대를 반추(反芻)하도록 함과 아울러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만남 을 통해 우리의 지성계를 이끌었다. 재단의 이러한 지원들은 훌륭한 인재를
- 12 -
육성하고 과학과 그 사상의 진흥과 발전에 크게 기여한 면이 많았다. 이성범 사후, 금곡재단은 그 유지를 받들어 성실한 인재 양성 그리고 과학 과 학술 연구에 지원하다가, 현재 재정이 뒷받침되지 못해 학술연구 지원과 과학사상 발간 지원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학술지 과학사상은 2005 년 50호가 나온 뒤로 휴간되었으나, 성실한 인재 양성을 위한 전국의 고등학 생과 대학생들에게 지원하는 장학금은 계속 이어가고 있다.
3) 효행 및 효열
∼
(1) 이돈행(李敦行): 1768(정조 10) 1857(철종 8) 이돈행의 자는 인백(仁伯), 호는 난은(蘭隱)으로, 현령(縣令) 이주(李稠)의 후 예이며,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 1759~1838)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벼 슬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증직되었다. 어버이가 병에 걸리자 3년 동안 의약 (醫藥)을 구하는데 지극 정성을 다하였다. 어느날 어버이가 생 꿩고기[生雉]를 먹고 싶다 하자, 구하기를 간절하니 꿩이 부엌으로 날아들었다 하고, 의원이 “사유(蛇油)가 병 치료에 합당하다”고 하자 추운 겨울날씨에 뱀 구하기를 들 과 진펄에서 간절히 하니 뱀이 집시랑에 대롱대롱 걸려 있어 그것을 약제로 만들어 바쳐 신묘(神妙)한 효엄을 보니, 사람들은 “효도에 하늘이 감동하여 이 루어진 것이다”고 하였다. 그의 기적비(紀蹟碑)는 해리면 왕촌리 용반과 반곡 마을 바로 입구 큰 길가에 있다.
효자통정대부함평이공기적비
(孝子通政大夫咸平李公紀蹟碑)
- 13 -
(2) 김해김씨(金海金氏) 효열부 김해김씨는 안경공(安敬公) 김영정(金永貞)의 후예 김사옥(金士玉)의 딸로, 함평이씨(咸平李氏) 이돈수(李敦秀: 1825~1852)의 아내이다. 본래 가정 에서 순효(純孝)를 익혀 시부모에게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면서 지극히 감지 (甘旨)를 제공하였다. 삼가 남편을 섬기다가, 남편이 병에 걸리자 인근의 의원 을 불러도 소용없고 백약을 써도 효험이 없었다. 부인이 단(壇)을 쌓아 하늘에 빌어 대신하기를 원하였다. 남편의 병환이 위급하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물 려드려 연명하였으나 마침내 운명하니 남편의 나이 28세였다. 부인도 남편을 따라 죽으려 하다가, 어린 자식이 품안에 있음을 생각하고 억지로 일어나서 상사(喪事)의 예(禮)를 지키고 송종(送終)의 도를 극진히 하여 서운함이 없게 하였고, 삼종(三從)의 예를 지키며 자식들을 의방(義方)으로 가르치니 집안이 창성하게 되었다. 부인의 효열은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에 기록되어 있다.
5. 문화유산과 종교시설 1) 영모재(永慕齋) 영모재는 용반으로 처음 이거한 함평이씨(咸平李氏) 이종신(李宗新)을 배향 한 재실이다. 현재 위치는 현재 왕촌리(旺村里) 신흥(新興)에 있다. 영모재는 본래 초가재실(草家齋室)로 관리하여 오다가, 후손들이 성금을 모아 1911년 중건하기 시작하여 4월 2일 상량하고 그 당년에 완공하였으니,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의 일이다. 그후 10여 년이 지나, 1921년 후손 이재헌(李栽憲: 1873~1944)은 영모재(永慕齋) 현판 글씨를 쓰고 각(刻)하였다. 1년 후 이경 헌(李卿憲: 1850~1936)은
영모재중건기(永慕齋重建記) 를 지어 배향인물과
그 위치의 배경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몽학교수(蒙學敎授)를 지낸 이경헌은 당 시 교육할 장소가 없자, 영모재를 서당(書堂)으로 활용하여 인근의 자제들에게 한학을 가르쳤고, 이재헌도 서당으로 활용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다. 1994년 6월 30일에는 영모재의 기와를 수선(修繕)하고 그 주위에 담과 대
- 14 -
문을 만들었다. 그리고 후손들은 1995년부터 본래 배향된 이종신과 그 앞뒤 의 선조들을 추가로 배향하여 매년 10월 14일 제사지내고 있다. 2010년 3월 에는 흙마당을 시멘트 마당으로 조성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영모재중건기
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齋以永慕, 名追遠也. 古人之先河後海, 尋其源也. 反古復始, 不忘本也. 維我八 代祖嘉善大夫同樞公墓, 在本郡大城山下亥坐,3) 立碑而舊有齋, 年久頹圯, 重建于 辛亥壬子年間, 可謂苟完矣. 靑陽所闕, 南有長沙山旺峙, 而方圓秀; 北有仙鍾山, 而尖秀特立; 東有芝山, 而隱映扶拱; 西有元堂山, 而磅礴照耀; 前有長川, 而縈廻 不絶. 永慕之義, 與山水連綿之勢, 同歸乎一理也. 維我子孫各自修德, 毋忝所生, 世世永慕, 而克繼克述, 則吾李之門, 安得不昌大乎? 先祖亦肯曰: 余有後也, 盍相 與勉之哉? 繼以韻: 先天種德後天春, 南北群蘭互作隣. 松柏悠榮王昶語, 象犀不 是李君珎. 山川蘊籍縈廻遠, 日月恒昇永慕新, 家典門謨如玉惜, 英靈在上晝宵巡. 壬戌秋七月旣望, 后孫 卿憲 謹記, 栽憲 謹銘. ( )를 영모(永慕)로 한 것은 먼 조상을 추모하는 것을 이름하는 것이다. 고인(古人)의 선 하(先河)와 후해(後海)는 그 근원을 찾는 것이다. 옛것을 반대하면서 처음만을 복원하는 것 은 근본을 잊는 것이다. 우리 팔대조(八代祖: 李宗新)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추공(同樞公)의 묘지는 본 고창군 대성산(大城山) 아래 해좌(亥坐)에 있다. 비석을 세우고 예전에 재실이 있 었다. 그런데 해가 오래되어 무너져 신해(辛亥: 1911년)와 임자(壬子: 1912년) 연간에 중건 하니 구비된 집이라 할 만하다. 청양(靑陽: 1월)에 집을 완공하니, 남쪽에는 장사산(長沙山) 의 왕치(旺峙: 왕재)가 있는데 방원(方圓)이 빼어나고, 북쪽에는 선종산(仙鍾山)이 있는데 뾰 족하고 빼어나 우뚝 솟아 있고, 동쪽에는 지산(芝山)이 있는데 은은하게 비치며 감싸고, 서 쪽에는 원당산(元堂山)이 있는데 광대하게 비치고, 앞에는 장천(長川)이 있는데 감돌아 끊임 없이 흐른다. 영모(永慕)의 뜻은 산수(山水)의 잇닿은 형세와 더불어 하나의 이치로 동귀(同 歸)하는 것이다. 우리 자손은 각자 덕(德)을 닦아 낳아 준 부모를 욕되게 하지 말도록 하였 다. 대대로 길이 사모하면서 계승하고 조술한다면 우리 이씨 가문이 어찌 창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선조 또한 기꺼이 “우리에게는 후손이 있다”고 하였으니 어찌 서로 더불어 힘쓰 지 않겠는가? 운(韻)으로 잇는도다. 선천 세계에서 덕(德)을 심으니 후천 세계의 봄이고, 남 북의 여러 난초 서로 이웃하리라. 소나무와 잣나무의 유유한 번영은 왕창(王昶)의 말이고 상 아(象牙)와 서각(犀角)은 이군(李君)의 보배가 아니로다. 산과 냇이 온화하면서도 멀리 감돌
城
成
咸平李氏縣令公派譜)에
3) ‘ ( )’ 글자는 현판에는 ‘성( )’으로 되어 있으나, 함평이씨현령공파보( 의하여 수정하였음을 밝힌다.
- 15 -
해와 달이 항상 떠 영모(
)가 새롭도다. 가문의 전모(典謨)를 옥처럼 아끼고 영령(英
靈)이 위에 있으면서 주야로 어루만지는도다. 임술(壬戌: 1922년) 가을 7월 기망(旣望)에 후손 경헌(卿憲)은 삼가 기록하고 재헌(栽憲)은 삼가 새기다
영모재건물
영모재현판
영모재중건기
- 16 -
(1) 배향인물-이종신(李宗新) 이종신은 조선 후기의 인물로, 자는 동환(東煥)이다. 그 생몰연대는 정해년 (丁亥年)에 태어나 정묘년(丁卯年) 생을 마감하였다고 함평이씨대종보에 기 록되었으나 그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가선대부(嘉善大夫)와 호조참판(戶 曹參判)에 증직되었다.
(2) 기타 배향인물 함평이씨 후손들은 1995년부터 19세손 이종신(李宗新)을 중심으로 전후 선 조, 14세손 이장구(李長龜), 15세손 이시(李蓍), 16세손 이언성(李言聖), 17세 손 이계효(李啓孝), 20세손 이진하(李震夏) 등과 그 배(配)들을 함께 제사를 지내고 있다.
2) 향산정(香山亭) 향산정은 이경헌(李卿憲: 1850~1936)이 만년에 학문을 연마하면서 인재양 성을 위해 1923년 고창군 해리면 왕촌리(旺村里) 용반(龍盤) 26번지에 세운 것이다. 이경헌은 무장현의 몽학교수(蒙學敎授)로 후학을 양성하면서 영모재 (永慕齋)에서도 용반 인근의 자제들을 가르쳤다. 향산정을 건립한 후, 해리면 소재의 학도(學徒)들을 훈도하며 시문을 지으며 학문을 연마하였다. 향산정에 는 ‘향산정(香山亭)’ 편액을 비롯하여 중국 송나라 때의 양양(襄陽) 미불(米芾: 1051~1108) 원장(元章)의 글씨를 모사(模寫)한 ‘청천제범(淸天霽帆)’, 명나라 때의 동기창(董其昌: 1555~1636)의 글씨를 모사한 ‘신선누대풍월산천(神仙樓 臺風月山川)’, 창암(蒼巖) 이산만(李三萬: 1770~1847)이 쓴 ‘계산청치(溪山淸 致)’ 등의 편액도 걸려 있다. 그리고 이경헌이 1927년 봄 어느날 향산정에 대 해 지은 원운(原韻) 칠언율시 한 수가 있다. 반석을 빌려 평상을 삼으니 山氣淸凉水勢長
산 기운이 맑고 시원하여 물의 형세가 길도다.
潚露三更和玉屑
삼경에 내리는 맑은 이슬은 옥가루와 조화되고
- 17 -
부는 그윽한 바람은 새로운 양식에 이바지하네. 松篁柯秀樓帶淨
소나무와 대숲의 가지 빼어나 누정을 에워 맑고
桃李花開地亦香
복숭아나 오얏 꽃 피니 땅도 향기롭네.
詩上芳綠何處得
시구의 곱고 푸르름을 어느 곳에서 얻겠는가?
雨家春色碧垂楊
벗님네의 봄빛은 푸르게 늘어진 버들이로다.
향산정 기둥에는 여러 주련글씨가 있다. 그 글씨를 살펴보자. 녹승마 두어 그루 잎에서 맑은 바람 불어
綠升數竿淸風
옥피리로 매화삼롱(梅花三弄) 악곡을 부노니 밝은 달이로다.
玉簫三弄明月 行行路轉峯廻處 一道淸泉天上來 若比人間凡艸木 芙蓉萬朶自珊珊 不是東風吹石裂 梭船短棹自何來 수 値會意時常獨坐 到無形處只心知
걷고 걸어 길 돌아서니 산봉우리 돌아드는 곳에 한 줄기 맑은 샘물 천상에서 흘러오네. 만약 인간을 저 초목에 비한다면 만 떨기 부용마냥 스스로 깨끗하다네. 동녘바람 돌을 불어 찢어논 게 아니라면 베틀의 북같은 배에 짧은 노가 어디에서 왔는고? 다만 뜻을 알아챘을 때 항상 홀로 앉아 형체 없는 곳이야 마음으로 알 뿐이라네.
博學篤行
널리 배우고 독실하게 행동하고
審問明辯
자세히 묻고 분명하게 분변하라.
唐詩宋學
당나라는 시이고, 송나라는 학문이네.
의 지은이는 무명씨(無名氏)이나 아마도 향산정의 주인 이경헌이 지은 듯 하다. ․․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시이자 적접 쓴 글씨로, 는 荀峯)
상선암(上仙巖)
시의 기승(起承) 부분이고, 은
두 수에서 첫째 시의 전결(轉結) 부분이고, 는
옥순봉(玉
은주암(隱舟巖)
시
의 전결(轉結) 부분이다. 수는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1534~1599)의 칠언 율시
정중유감(靜中有感) 의 제5구와 제6구인 경련(頸聯)이다. 는 중용(中
庸) 제20장 일부분이다. 는 일반적 구절 내용이다.
- 18 -
향산정 건물
향산정
미불끌씨
- 19 -
동기창글씨
이삼만글씨
이경헌 원운시
- 20 -
3) 석우당(石愚堂) 석우당은 이사헌(李士憲: 1865~1948)이 ‘석우당’이란 편액을 걸로 학문을 연마하면서 인재를 양성한 곳이다. 그 위치는 왕촌리(旺村里) 송암(松岩) 마을 이나 그 자리가 인멸되고 후손들이 마을을 떠나 건립시기를 알 수 없다. 석우 당에 대한 칠언율시 한 수가 있다. 시를 살펴보자. 도학은 연원이 있어 濂洛群賢尊所聞
염락(濂洛)의 어진이들의 들은 바를 존중하네.
度外能令魔鬼遠
마귀 멀리 하는 것 도외시하고
卷中常若聖師存
책 속에 늘 성인과 같은 스승 있듯이 하였네.
蕭蕭黃葉秋心雨
쓸쓸한 누런 잎 추심의 비처럼 떨어지고
黯黯靑山日暮雲
어두운 청산에 날 저물어가는 구름이라네.
如我拙愚人必笑
나처럼 졸렬하고 어리석다면 사람들이 비웃을 것이고
家無述事國無勳
집안에 술사의 효도도 없고 나라에 공도 없다네.
3) 나주오씨 재실 송암 원당뫼 주위에서 살았던 나주오씨의 옛 터가 있다. 나주오씨 후손들은 이 옛 터에 재실(齋室)을 세워 준공의 단계에 있다.
나주오씨 재실
- 21 -
6. 마을의 풍속과 숨은 이야기 1) 당산재 용반의 당산은 난정마을과 용반저수지 사이 산기슭 밭에 있었다. 현재는 당 산을 조금 옮겨 밭모퉁이 고랑 위에 있다. 당산재는 1972년까지는 주민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마을의 액운을 물리치고 한 해의 풍요와 주민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였다. 그후 한동안 거행하지 못하다가, 1986년부터 약 5년동안 거행하였으나 현재는 당산재를 지내지 못 하고 있다. 당산재는 먼저 당산에 금줄을 치고 당산나무 주변을 친 다음, 용반 마을 우물[井]로 이동하여 치고, 다시 송암마을로 가서 새터골 우물[井]을 친 다음 송암과 원당뫼를 돌고, 신흥으로 가서 함평이씨 재실 영모재(永慕齋)를 치고 마을을 돈 다음에 난정․반곡․용반 마을을 친다. 전통으로 내려오는 풍속들이 점점 사라지면서, 용반 당산재도 1990년 이후 부터는 당산재를 지내지 못하고 있다. 몇해 전 당산이 있는 옛 장소에 당산나 무를 심고 관리를 하였다. 하지만 당산나무가 죽고 당산도 옮겨지자 당산재는 주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제대로 보존되지 못하고 있다.
당산
- 22 -
2) 이돈행의 효행 이야기 이돈행은 효성이 극진하였다. 어버이가 3년 동안 병상에 있었는데, 어느날 어버이가 생 꿩고기[生雉] 먹기를 원하자, 그는 하늘을 우러러 목 놓아 큰 소 리로 부르짓고 눈물 흘리며 간절히 원하니 갑자기 꿩이 부엌으로 날아들었다 한다. 어느 겨울날 어느 의원이 “사유(蛇油)가 치료약에 가장 합당하다”고 하 자, 엄동설한이라 뱀을 구할 곳이 없었다. 이돈행은 들과 진펄에서 머뭇거리며 배회하기를 어려 날 동안 하였다. 어느 날 새벽에 나와보니, 흰 눈을 뚫고 나 온 뱀이 추녀 끝 집시랑에 대롱대롱 걸려 있었다 한다. 이 뱀으로 사유를 만 들어 어버이에게 드려 신묘한 효엄을 보니, 사람들은 “지극한 효도에 하늘이 감동하여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하였다.
3) 월천(越千)재 ‘월천(越千)재’는 장군산에서 뻗어 원당산으로 이어지는 고개 마루인데, 송암 마을에서 대정동마을로 넘어가는 ‘재’이다. ‘월천재’란 명칭은 오랜 옛날 송암 마을 주위로 강씨들이 ‘천가호(千家戶)’가 넘을 정도로 많이 거주하며 부(富) 를 이루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그 많은 가호(家 戶)들은 없어져 그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주민들에 의하면, 마을 주위에서 가끔 기와 조각과 도자기들이 발견된다 하 니, 사라진 옛 마을의 흔적임을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조선 후기 송암마을이 재차 조성되면서, 월천재 명칭은 ‘월청(月淸)’으로 부르게 되었고, 주민들은 재 의 명칭을 와전하여 ‘월채이’라고도 부른다.
4) 팔리(八里)안 이씨 ‘팔리(八里)’란 마을이 여덜 개를 말하고, ‘안’은 여덜 마을이 해리면소재지 에서 보면 안쪽에 위치하고 있기에 ‘안’이라 한다. 여덜 마을이란 행정분리상 용반의 일곱 개의 자연마을 ‘용반’․‘반곡’․‘난정’․‘대동’․‘송암’․‘양곡’․‘신
- 23 -
흥’과 나성리(羅星里)의 ‘성산(星山)’ 등을 포함한 것이다. 이 여덜 개 마을에는 주로 ‘함평이씨’들이 세거하고 있었기에, 세인들은 이 여덜 개 마을을 가리켜 ‘팔리안’이라 명명하면서 그 함평이씨들을 ‘팔리안이 씨’라고 일컬었다 한다.
5) 원생이 밭과 고라당 논 ‘원생이’이란 ‘원숭이’의 방언이다. ‘원생이 밭’은 용반마을 뒷쪽과 원당뫼 사 이 야트막한 언덕받이 밭을 말하는 데, 이곳이 풍수상 ‘원숭이’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생이 밭 아래쪽에는 원숭이의 젖무덤같이 도톰한 곳이 있 다. 이곳이 풍수상 길지(吉地)라고 하여, 예부터 이곳에 무덤을 많이 썼다 한 다. ‘고라당’이란 ‘고랑’과 ‘땅’을 합성하여 부르는 말인 듯하다. ‘고랑’은 두둑한 땅과 땅 사이에 길고 좁게 들어간 곳을 말하고, ‘땅’은 고랑 주위를 의미한다. 송암 새터골에 내려오는 물줄기가 용반마을과 안복 사이에 이르면 그 주위에 물이 고여 땅은 매우 질퍽하게 되었다. 질퍽한 땅에 사람들이 들어가면 발은 무릅까지 쑥쑥 빠져 발걸음을 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주민들은 땅을 황토 흙 으로 다지고 다져서 논을 만들었다. 그 이후로 주민들은 이곳의 논을 방언으 로 ‘고라당 논’이라 불렀다.
고라당논과 원생이 밭
- 24 -
원생이젖무덤 언덕
7. 마을의 시설과 휴식 공간 1) 우물터 용반과 반곡 마을 사이에 있었던 우물터[井]는 오랫동안 마을의 생명수로 사용하였으나, 현재는 그 터는 매워져 농지로 변해 매워져 그 생명수의 역할 을 할 수 없는 상태이다. 송암마을 우물터는 장군산 줄기에서 뻗어내려온 곳이다. 주민들은 이곳을 새태골이라 불렀다. 주민들에 의하면, 새태골의 샘물은 가물어서 농작물이 거 의 죽어가도 이 샘물은 마르지 않았다 한다. 우물터가 송암마을에서 상당히 위쪽에 있기에 샘물을 길어다 먹기가 불편하여, 주민들은 송암마을 입구 왼쪽 에 마을샘물을 마련, 그 새터골 샘물을 저장한 다음 생활용수로 사용하였다. 이 샘물은 흘러 작은 시냇물로 변하여 용반과 안복 마을 사이 논을 가로 질러 지로마을까지 이르고, 다시 안산마을 뒤 궁산저수지로 흘러 들어갔다.
새터골 우물
- 25 -
2) 회관과 경로당 용반에는 난곡마을 앞에 용반마을회관과 용반마을경로당이 있다. 그 자리는 해리면 용반길 72번지이다. 건물은 2005년 9월 12일에 완공되었으나, 한 건 물에 두 가지 용도로 쓰이고 있다. 회관은 주로 마을 주민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는 장소로 쓰이고 있으면서도, 주민들의 자치적 집회의 장소로서의 기능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경로당은 노 인들이 틈나는대로 모여 가정사 내지 세사에 대한 담소를 나누는 사랑방 개념 으로 활용되고 있다.
회관과 경로당
3) 모정(茅亭) 모정은 짚이나 새(마른 풀) 따위로 지붕을 덮은 작은 정자이다. 주로 마을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는 공유물이다. 용반의 모정은 나무 기둥 8개에 기왓장을 올렸다. 그 위치는 용반마을 뒤자락 언덕에 있다. 그 모정의 이름은 없으나 언 덕에 우뚝 솟아 있어, 모정에 오르면 마을 주위를 한 눈에 볼 수 있을 정도로 확트여 전망이 매우 좋다. 모정은 2002년 12월 28일에 상량하고 다음해 2003년 1월 30일에 완공되었다. 용반마을의 모정은 휴식공간으로 활용되면서 도 주민들이 서로 모여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또는 아낙들이 농작물을 이곳 으로 옮겨와 시원한 바람을 쇠며 그 농작물을 다듬으면서 즐거운 이야기를 하
- 26 -
기도 한다.
모정
8. 농경생활과 소득 1) 농경생활 용반 주민들은 앞산 기슭, 어룡재 기슭, 용반마을과 원당뫼 사이의 나지막한 야산, 송암 새터골 주위, 신흥마을 뒤쪽 야산을 개간하여 밭을 만들어 여러 곡 물과 채소 등을 재배하고, 장천(長川) 주위의 늪지 땅을 논으로 만들어 쌀과 보리 등을 경작하고 있다. 비닐하우스에서는 겨울철 농작물을 재배하기도 하 고, 또한 고추나 콩 등을 건조, 수확하여 시장에 판매하며 생활하고 있다.
고추 재배
- 27 -
복분자 재배
비닐하우스
고추 건조
- 28 -
2) 소득작목의 변천과 축산 과거 소득작물을 주로 쌀, 보리, 고구마, 감자, 콩, 배추, 무 등이었다. 현재 도 크게 다르지 않으나 농작물로 벼, 고추, 복분자 등을 주로 재배하고, 용반 과 반곡 마을에서는 원예사업으로 관목 회양목을 재배하여 정원수로 팔고 있 다. 특히 마을에는 비닐하우스를 시설하여 곡물 등을 건조하기도 하고 겨울철 채소를 재배하기도 하고, 또한 낙농업으로 한우를 길러 소득을 올리고 있다.
회양목 재배
한우낙농업
- 29 -
12. 마을 조직 1) 역대 이장 용반마을은 1971년까지는 왕촌리장이 관할하다가, 1972년 1월 1일부터 용 반리장이 선출되어 마을의 여러 행정일을 담당하였다. 1971년까지의 왕촌리 장을 소개하면 다름과 같다.
① 한석표: ?~1964년 3월 15일 ② 박풍용(1)․김광용(2)․김상회(3)․이유범(4)․김영원(5): 1965년 2월 1일~1965년 4월 5일
③ 김순철: 1965년 4월 5일~1970년 10월 30일 이상균: 1965년 4월 5일~동년 4월 30일 박풍용: 1965년 5월 1일~1969년 1월 31일 유희영: 1969년 3월 1일~1970년 11월 15일
④ 김재춘: 1970년 12월 15일~1971년 12월 31일 1972년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용반마을 리장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① 이재호: 1972년 1월 1일~1974년 3월 31일 ② 이성범: 1974년 4월 1일~1975년 3월 31일 ③ 이재권: 1975년 6월 13일~1978년 10월 1일 ④ 이동주: 1978년 11월 1일~2002년 11월 10일
※ 이동주 리장은 여섯
차례나 연임되어 마을 리장직을 수행하였다.
⑤ 이한성: 2002년 11월 11일~2005년 12월 31일
※ 이한성 리장은 재
임하였다.
⑥ 이동필: 2006년 1월 1일~2007년 12월 31일 ⑦ 이시정: 2008년 1월 2일~현재
※ 이시정 리장은 재임하며 마을의 행
정을 담당하고 있다.
2) 남녀지도자 및 부녀회 용반마을의 새마을 지도자는 이근행이고 부녀회장은 이덕순이다.
- 30 -
<제보자> o 제보자 1 성명: 이연범(李連範), 연령: 남 77세 일시: 2011년 8월 27일 오후 2시, 장소: 송암 o 제보자 2 성명: 이창수(李昌洙), 연령: 남 50세 일시: 2011년 8월 30일 오전 10시, 장소: 용반
□ 참고 자료 茂長邑誌(1958년), 湖南三綱錄, 湖南節義錄 松沙儒林淵源錄, 무장향교, 1967년 高敞郡古邑誌影印本, 고창문화원, 1991년. 모양성의 얼, 고창군, 2009년 재판.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2003년. 한국지명총람(11-12, 한글학회 지음) 전북편(상․하), 한글학회, 1981년. 고창군지, 고창군, 2008년. 茂長鄕校誌, 무장향교, 1978년 茂長鄕校誌續輯, 무장향교, 1982년 高敞三鄕誌, 호남문화사, 1991년. 茂長鄕校誌, 호남문화사, 2004년. 동학농민혁명의 성지 고창,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2009년. 咸平李氏縣令公奉事公派譜, 태성문화사, 2006년. 금곡 이성범 문집, 범양사출판부, 2002년 蘭谷遺稿, 기창족보사, 2007년. 해리면 사령부, 해리면사무소. 동아일보 1994년 3월 27일 17면 참조.
- 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