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고창의마을사(오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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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블리주의 고향 -

오산리 후상

1. 오산리의 개요 풍수지리상 자라형국이다. 마을의 유래나 지명은 모두 자라와 관련이 있다. 평탄지인 듯 하나, 옛날 터잡기 이전의 지형에는 이목구비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현재 오산 마을의 중핵은 하오 산의 금구영감댁이다. 금구영감댁을 중심으로 마을이 확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림 1 하오산마을 입구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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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상오마을 입구 표지석

개황

부안면의 동남부에 위치한 오산리는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에 속하는 14개 법정리 가운데 하나이 다. 자라형국인 까닭에 오산(鰲山)이라 하였다. 부안면사무소에서 지방도 734호(복분자로. 이하 지방 도라 함)를 따라 용산 방면 5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오산리는 남으로 상등리 동으로 중흥리 서로 용산리 북으로 수남리 등이 인접한다. 전근대의 부안(富安)은 고부군에 속하였다. 조선시대 문헌이나 고지도에 부안은 대체로 ‘고부지(高 阜地)’로 표기돼 있다. 1906년에는 고부군의 부내면(富內面)과 부외면(富外面)을 합하여 부안면이라 칭하고 흥덕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4월에 따라 상오산(上鰲山)·하오산(下鰲山)·우수점(雨水店)·구 정리(九井里) 등과 이서면의 동성리 일부를 병합하여 ‘오산리’라 하고 고창군 부안면에 편입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호구총수』등) 자연 마을 단위로는 상오산·하오산․우수골·구정동 등이 있다. 상오산․하오산은 전근대에 발생한 지명 이며, 지방도를 기준으로 상오와 하오로 구분한 것은 근래의 일이다. 2012년 현재 오산리는 오산 1 구의 상오리와 오산 2구의 하오리 등 2개의 행정리로 이루어져 있다. 구정동과 우수동 일부는 오산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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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한다.(장인구 구술)

전근대에는 오산리를 흔히 ‘하오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하오의 어느 마을길을 기준으로 상오와 하 오로 나뉘어졌다는 전언도 있다.(이희서 구술) 앞의 전언과 풍수상으로 볼 때 대체로 하오 2길(동서 로 나 있는 마을길) 위쪽 골목을 기준으로 남쪽을 하오, 북쪽과 부안초등학교를 상오라 하였던 것 같다. 물론 이러한 기준도 시대에 따라 몇 차례 바뀌었을 것이다. 2010년 3월 현재 오산리의 총면적은 약 690,000㎡. 이 가운데 밭이 95,275㎡이고 논이 261,960 ㎡이다. 오산에는 전주이씨 양도공파 일족 외에도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김해김씨 등 여러 성씨들이 살고 있다. 2012년 10월 31일 현재 상오리는 67세대 128명(남 58명, 여 70명), 하오리는 44세대 91명(남48명, 여 43명)이 살고 있다.(부안면사무소 자료)

그림 3 오룡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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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 유래

오산이라는 지명은 전주이씨 양도공파 일족이 일명 자라명당에 터를 잡고 이거한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전주이씨 일족이 이거한 뒤의 마을 이름이 ‘오산(鰲山)’이었기 때문이다. 뒤에 ‘오산(吾山)’ 으로 표기되기도 했으나 ‘오산(鰲山)’이 정확한 표현이다. 오산은 자라형국이라는 데서 오산이다. 자라형국에서 반드시 있어야 할 요소가 있으니 바로 물이 다. 오산에서의 물은 오룡천이다. 자라는 쇠 즉 금(金)으로, 자라가 물에 들어가는 형상을 금생수(金 生水)라 한다. 쇠와 물이 만나니 상생(相生)이다. 예부터 오산은 상생을 중시해 ‘나’보다는 ‘우리’를 중시했다고 한다. 후술하겠지만, 오산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바로 이 상생의 정신과 다르지 않다. 자라형국은 풍수지리 물형론에서 오항혈(鰲亢穴)이다. 그 혈은 자라등짝과 자라목이다. 또한 명당의 여러 유형 가운데 오산은 돌혈(突穴)에 해당한다. 즉 평탄면에 돌출형이라는 것인데, 돌출된 부분이 바로 자라등짝이다. 그렇다면 오산에서의 혈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이철환은 금구영감댁(현재 이 철환이 사는 집)이 자라등짝에 해당한다고 한다. 자라등짝인 까닭에 금구영감댁은 근래에까지 초가 를 고집하였다는 것이다. 자라목은 금구영감댁과 오룡천 사이가 아닌가 한다. 자라등짝과 자라목이 라는 혈 앞에는 반드시 물과 문전옥답이 있어야 하는데, 물은 오룡천이요 문전옥답은 상등들이다. - 2 -


맞닿은 오룡천변이 ‘자래등’이다. 그곳 바닥에는 바위가 깔려 있는데 이를 ‘자래바우’라 한다. 오산의 북쪽 들을 ‘장구시암들’이라고 하는데, 이는 지금의 상오다. 장구시암들 한 가운데 있 는 샘을 ‘장구시암’이라고 한다. 모양이 장구와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장구시암은 사라지고 없 다. 지방도와 오산정미소 앞 인근을 ‘저잣거리’라고 하는데, 이곳에도 우물이 하나 있었다. 이름하여 ‘저잣거리시암’ 또는 ‘저잣걸시암’인데, 하오에 있다. 1970년대에만 하여도 마을사람들이 사용한 샘 이었다고 한다. ‘구정동(九井洞)’은 오산의 서쪽 끝에 있는 마을로, 상오에 속한다. 지방도를 따라 용산 방향의 모 퉁이에 현재 한 가구가 자리하고 있는데, 그곳이 바로 구정동이다. 구정동에 집을 지으면 정승 아홉 이 난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렇다면 구정동의 정은 정(井)이 아닌 정(政)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구정 동의 기운을 끊기 위해서 창내골에서 구정동 쪽으로 넘어오는 ‘구룡목’이라는 고개를 일제가 절단했 다고도 한다. ‘우수(雨水)’는 ‘우수점(雨水店)’ 또는 ‘우수골’이라고도 하는데, 부안초등학교와 지방도 건너편 마을 까지를 말한다. 지금의 우수마을 일부는 30여 년 전에 고창군의 지원으로 형성된 신촌(新村)이다. 근래에 지방도를 사이에 두고서 북쪽을 오산 1구 남쪽을 오산 2구로 구분하였다. 우수점 서북쪽에 있는 등성이를 ‘챗등’이라고 하는데, 채씨(蔡氏)의 선대 무덤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

환경과 부안초등학교

오산리의 자연 환경은 풍수지리와 관련이 깊다. 평탄면과 오룡천을 자라형국으로 해석해 오산이라 하였던 점이 잘 말해준다. 오산리는 오래된 초등학교가 있으며, 마스토미가 세운 오산학당과 하오산 교회가 있었던 곳이다. 천석지기 금구영감댁은 도도히 흐르는 세월을 감내하면서 그 후덕함을 간직 하고 있기도 하다.

그림 4 오산의 문전옥답 상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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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환경 대체로 평탄지로, 군데군데 작은 민둥산이 있다. 지방도 북쪽 홍해농장에는 ‘동산’이라 불리

는 민둥산이 있고 우수골 서북쪽으로 ‘챗등’이라는 수강산 자락이 자리하고 있다. 지방도 남쪽 평탄 면은 우측 평탄면보다 약간 낮은 지대로, 이 지역은 대체로 하오에 속한다. 하오의 남쪽 개울을 오룡천이라고 한다. 오산저수지에서 발원한 오룡천은 서출동류로, 갈곡천으로 합수된다. 오룡천 건너는 상등리 상굴인데, 이를 ‘상등들’, ‘상등평’, ‘탑들’ 등으로 불린다. 상등들은 행정구역상 상등리에 속하지만 오산과 밀접한 곳이다. 즉 오산의 문전옥답이 상등들이요, 오산의 천 석지기들이 오룡천 건너의 상등들을 문전옥답으로 삼았던 것이다. 상등들에는 둥글고 작은 산인 똥뫼가 있다. ‘큰똥뫼’와 ‘작은똥뫼’가 있는데, 최근에 작은똥뫼 하나 가 개간으로 사라져버렸다. 똥뫼는 자라똥을 의미하며 이는 부를 상징한다고 한다. 오룡천은 한국전쟁 전에는 상굴 쪽 20여 미터 쯤에 위치했었다고 한다. 전쟁 당시에 오산저수지 둑이 무너져 수몰되는 바람에 하천 지형이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다.(이철환 구술) 충분히 일리 있는 얘기다. 왜냐하면 수몰될 당시의 희생자들이 살았던 곳이 오산천변이었다는 증언(김인봉 구술)은 하 천의 폭이 지금보다 훨씬 넓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금구영감댁이 자라등짝이라면 자라꼬리 부분에 해당하는 곳은 ‘오미동’이다. 오미동의 옛 지역은 지 금의 지방도 즈음이었을 개연성이 크다. 장구시암들은 오산 사람들의 또 다른 문전옥답이었다. 현재 상오길 16번지 옆이 장구시암이 있던 곳이며, 상오와 홍해농장이 장구시암들인 것이다. 장구시암은 그 모양이 장구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외에도 지방도 근처에 하오의 우물을 ‘저잣걸시 암’이라고 하였다. 말 그대로 저잣거리에 있는 샘이다. 부안초등학교와 맞닿는 오룡천에는 ‘자래바우’ 가 있는데, 이름 하여 ‘자랫등’이라 불렀다. 구정동 북쪽의 산등성이를 ‘챗등’이라고 한다. 수강산 자락으로, 챗등 근처에는 채씨(蔡氏)의 선대 무덤이 있다. ‘탑들’ 또는 ‘탑돌’로도 불리는 상등들에 석탑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상등들에는 옛날 절터가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외, 하오의 마을회관 앞에는 당산나무인 팽나무가 있다. 수령이 약 300년쯤은 돼 보인다.

그림 5 하오산의 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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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환경 남쪽 상등들에는 동서 방향으로 정읍-영광 간 국도 22호선이 지난다. 지방도 734호선은 오

산리를 동서로 관통한다. 지방도는 대산, 해리, 심원, 흥덕 등을 연결하는 도로로, 한때 전라도 중서 부 해안 지역과 내륙을 연결하는 몇 안 되는 요로였다. 지방도 옆 모정 앞에는 ‘정영손(鄭永孫)의 처 김씨의 열녀비(烈女碑)’가 있다. 나무하러 갔다가 나뭇 짐 지는 것을 도와주는 어느 남정네의 손길이 김 여인의 젖가슴에 닿았다고 하여 그만 자결하였다 는데, 이를 기린 비가 ‘김씨 열녀비’다. 후술하겠지만, 하오산의 하오길 7-2번지에는 한말의 살롱 금구영감댁이 자리하고 있다. 홍해농장 (洪海農場)은 상오산 복분자로 821-7번지로, 현재 오산농장과 병립해 있다. 홍해농장은 일제 강점기 에 일본인 마스토미가 과수원을 경영하던 곳이기도 하다. 어느 때부터 홍종철이 농장을 경영하면서 ‘홍해농장’이라 하였다. 홍해농장 서북쪽 동산에는 농장주 홍종철이 살던 집이 있었는데, 화재로 소실되었다. 현재 그 집터 에는 새 집이 들어서 있는데, 새집의 소유자는 홍종철의 아들 홍순범이라고 한다.(장인구 구술) 동산 바로 아래는 옛 홍해농장의 관리사가 있다. 관리사는 옛 일본식 가옥 구조로 돼 있으며, 현재는 폐 가 상태이다. 부안면 용산리에 속한 오산저수지는 수강산과 소요산에서 발원한 물이 흘러드는 계곡형으로, 오룡 천과 서해천, 그 상류인 소요천과 창내천 등을 막아서 만든 저수지다. 고창군 부안면 일대에 농업용 수를 공급하는 오산저수지는 1940년에 착공하여 1945년에 준공되었다. 제방 형식은 필댐(죤형)이 다. 필댐(fill dam)은 토석 재료를 완만한 기울기로 쌓아올려 만든 댐으로, 그 재료에 따라 록필댐 (rock-fill dam)과 흙댐(earth dam) 등으로 나누며, 설계 형식에 따라 균일형(homogeneous type), 코어형(core type), 죤형(zoned embankment type), 표면차수벽형 등으로 나눈다. 저수지의 취수 형식은 사통형이다. 오산저수지의 제방 체적은 2만㎥, 제방 길이는 140m, 제방 높이는 14m이다. 총 저수량은 51만 6,000t, 저수지 유역 면적은 450만㎡, 홍수 면적은 10만 7,000㎡, 만수 면적은 10만㎡, 수혜 면적 은 211만㎡이다. 한발 빈도는 5년이고 홍수 빈도는 100년 정도이다. 하오산에서 오룡천을 건너 상등들로 가기 위한 다리는 2개다. 2003년 12월 1일에 공사를 시작해 2005년 11월 29일에 완공한 ‘오산교’와 하오산 회관 바로 앞의 이름 없는 작은 콘크리트 다리가 그 것이다. 하오산 회관은 2003년 9월 26일에, 상오산 회관은 2003년 3월 28일에 건립되었다. 모정을 개조한 우수동 여성회관은 2010년 9월 25일에 건립되었다. 상오산 모정은 2005년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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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부안초등학교

3) 고창군 부안면 복분자로 806번지에 있는 공립 초등학교이다. 부안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이 초등학교 안에 있다. 부안초등학교는 ‘건강하고 개성 있는 어린이, 능력 있고 자주적인 어 린이, 탐구하고 개척하는 어린이, 예술을 사랑하고 창조하는 어린이, 도덕적이고 애국·애족하는 어린 이 육성’을 교육 목표로 한다. 교훈은 ‘즐겁게 배우고 올바르게 행하며 씩씩하게 자라자’이다. 부안 어린이 상은 ‘창의적인 생각으로 푸른 꿈을 키우는 부안 어린이’이다. 부안초등학교는 1919년 4월 1일 일본인 마스토미에 의해 설립된 사립 오산보통학교가 그 모태다. 1922년에 마스토미는 오산보통학교를 공립학교로 전환시켰고, 1923년 6월 1일에 부안공립보통학교 로 인가돼 개교하였다.(「부안공립하교인가」,『동아일보』, 1923.6.5.) 1981년 3월에는 부안국민학교 병설유치원 인가가 났다. 부안국민학교는 1993년에 동남분교와, 1994년에는 수강분교와 통폐합하였다. 1996년 3월 1일에 교명이 ‘부안초등학교’로 변경되었다. 2012년 11월 20일 현재 7학급 58명이며, 2010년 2월 10일 현재 제86회 졸업식을 포함하여 총 6,212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2012년 3월 1일 현재 제28대 한동진 교장이 부임하는 등 교장과 교감, 교사 등 모두 17명이 근무하고 있다. 부안초등학교 교가(작사 이진일 / 작곡 조기일)는 “장엄한 방장이 흰 구름이고 / 햇빛도 찬란타 자 라뫼 기슭 / 종소리 울려온 지 구십여 성상 / 이 땅의 어린 싹을 키워온 글밭 / 장하다 우리의 배움 의 동산 / 샛별 자리 빛난 요람 부안초등교”이다. 학교마크는 초록 나뭇잎의 푸름을 닮아 늘 푸르고 맑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과 늘 책을 읽는 지 혜로운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교목은 아카시아로, 아카시아는 끈기 있는 생명력과 정신력을 구현하는 인재가 되길 소망하는 마음을 나타낸다고 한다. 제1회 졸업생들이 1924년에 심었다는 아카시아 세 그루는 고목이 되어 학교의 역사를 묵묵히 간직하고 있다. 교화는 철쭉이고 교조는 까치다. 현재 부안초등학교는 다목적교실을 포함한 15,882㎡의 교지에 보통교실8, 특별교실3, 관리실2, 창 고2, 화장실2, 숙직실, 보건실, 급식소, 전산실, 사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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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부안초등학교의 전신인 부안공립보통학교와 관련한『동아일보』(1925.4.6.) 기사를 소개

하면 다음과 같다. <

求生難으로 廢校 /

이 넘어도 지원자 단 5명 / 대책을 강구하나 결국은 無策 /

고창군 부안면 오산리 부안공립보통학교는 今般 1학년 신입학생 모집이 남 30인, 여 10인 계 40인인 바 去月 31일까지 입학을 지원한 자가 僅히 5명에 불과하였음으로, 당지 면사무소에 유지대회를 개최하고 富安公普校 신입생이 없음으로 同校 존폐 문제에 대하여 토의하였으나 결국은 대책이 없다는 바, 현재 부안면 총 1,016호에 5,918 인구 중 現 今在 學 生 男 40인 女 10인이었는데, 去月 中에 7세로 15세까지의 學齡兒童 未入學者를 조사한 바에 의하면 남 471인, 여 414인, 남녀 계 884인이 전부 생활난으로, 그 중 貧難者 3할을 除하고도 620명 중 단 5명이 입학한 것이라고.(고창)>

1925년 당시 부안공립보통학교에 지원하는 신입생이 없는 이유는 부안면 주민들의 생활이 매우 어 렵기 때문이라는 분석 기사다. 주민들의 생활이 매우 어려워 취학을 꺼리기에 보통학교의 존폐까지 거론되었다는 것이다. 당시에 마스토미가 설립한 오산보통학교가 공립으로 전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입생이 적어, 학교의 존폐 문제가 거론될 정도였다.

부안공립보통학교 관련『조선중앙일

보』(1936.5.13.) 기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富安公普에 寄附金 遝至 / (고창)전북 고창군 부안공립보통학교의 다년간 숙제이든 학년 연장 문제가 동 지방 유지들의 열렬한 운동으로 해결 되어 4월 1일부터 실시됨에 ○○교사 증축과 제반 설비에 대하여 동 면 내 유자 제씨의 희사가 답지한다는데, 지 난 8일까지 희사된 금액과 씨명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李鉉昇 700원, ▲李○淵 200원, ▲崔南烈 200원, ▲金年 洙 100원, ▲安咸平 50원.”>

위 기사는 지역 사회의 숙원인 학년 연장 문제가 해결되면서 교사(校舍)를 필요로 하게 되었는데, 교사 증축 및 학교의 제반 설비 구입을 위한 지역 유지들의 기부금이 답지되었다는 내용이다. 후술 하겠지만, 위의 기부자 가운데 700원을 기부한 이현승(李鉉昇)은 바로 오산리의 금구영감이다. 이○ 연(李○淵)은 오산의 전주이씨 일족인 이종연(李棕淵)으로 추정된다. 이종연은 이철환의 조부다. 삼 양사 김연수는 100원을 기부하였다고 돼 있다.

3.

역사와 문화

상등들에는 탑들이라는 이름 하나가 더 붙는다. 오래 전부터 석탑이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한 국전쟁 당시 오산저수지의 둑이 터지면서 상등들에 있는 석탑의 원형이 일그러졌을 것이며, 어느 누 군가가 일그러진 석탑을 부안초등학교에 옮겨놓았을 것이다. 사료에는 기해농민봉기 때 농민군이 오산리 이진사댁에서 하룻밤 묵었다는 사실을 기록하였다. 이 를 두고서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이진사는 누구인지에 대한 생각이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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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부안초등학교 내 석탑

1)

내 석탑 오산리의 부안초등학교 정문 옆 개교 60주년 기념비 옆에 석탑이 하나 있다. 석탑은 원래

상등리 상굴(또는 상등들, 상등평, 탑들 등이라고 함)에 있던 것으로, 한국전쟁 당시에 현재의 위치 로 옮겨진 것이라 한다. 혹자는 광복 직후에 옮겼다고도 한다.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오산저수지의 둑이 터지면서 상등들은 수몰되었고, 수몰로 인하여 지형이 바뀔 정도로 폐허가 되면서 석탑의 일부 가 변형되었을 것이다. 변형된 석탑은 어느 누군가에 의해서 부안초등학교로 옮겨졌을 것이다. 석탑은 그 양식이 통일신라의 석탑에 비해 정교하지 못한 까닭에 고려 후기나 조선 전기의 양식으 로 보고 있다. 석탑은 기단 부분의 석재 세 개 위에 갑석과 1층 탑신, 그리고 1층 옥개석과 시멘트 로 보완한 2층 탑신 및 2층 옥개석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2층 옥개석 위에는 상륜부의 보개가 올 려져 있다. 석탑의 총 높이는 약 220㎝이다. 1층 갑석의 길이는 약 135㎝, 1층 탑신의 높이는 약 65㎝, 탑신의 한 변의 길이는 약 63㎝, 그리 고 1층 옥개석의 한 변의 길이는 100㎝ 등이다. 2층 탑신의 높이는 약 44cm, 3층 탑신(콘크리트) 의 높이는 약 33cm 등으로 추정한다. 상륜부의 옥개석은 지름이 약 42㎝이고 높이가 약 25㎝이다. 탑의 원래 층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3층 석탑으로 추정된다.

그림 8 하오산의 당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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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산나무와 당산제 당산나무는 하오 마을회관 앞에 있다. 팽나무로, 높이가 약 10m 둘레가 1.5m이다. 원래

는 더 큰 나무였으나 나무의 일부가 괴사된 상태다. 하오산은 1970년대만 하여도 100여 호에 이르는 큰 마을이었다. 마을사람들은 매년 음력 2월 초 하루에 마을의 무사 안녕을 비는 당산제(堂山祭)를 지냈다. 제를 지내지 않으면 마을에 질병이 나돈 다고, 제를 지낸 사람들이 음복을 하게 되면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였다. 당산제를 앞두고 열린 마을회의에서 부정이 없는 어른 한 사람을 제관으로 선출한다. 제관은 냇물 에 목욕재개하고 부정한 것을 일체 보지 않았다. 만약에 초상이 난다든지 해서 마을에 부정이 있을 때에는 당산제를 미루었다. 음력 2월 1일 진시(辰時)에 술과 과일, 포, 밥, 떡 등을 차려놓고 제를 지냈는데, 제에는 마을의 남자들만이 참석하였다. 제가 끝나면 굿을 치면서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 었다. 1972년경까지만 하여도 당산제는 상오와 하오 간의 줄다리기, 인근의 농악대까지 합쳐 놓은 대규 모의 합굿이 펼쳐지기도 했다. 굿을 치면서 줄을 메고서 당산나무에 줄을 감은 이들은 당산나무 앞 에 모여 고사를 지냈다. 3) 무술․기해 농민봉기와 이진사 『전라남도고창군취착난당구초동류성명거주병록성책(全羅南道高敞郡就捉亂黨口招同類姓名居住竝錄成 冊)』에 의하면, 1898년(무술년) 음력 12월 16일 새벽 이화삼(李化三), 송민수(宋敏洙) 등이 흥덕의 북면과 동면의 농민 약 3백여 명을 이끌고 흥덕군아로 들어가 인부(印符)를 빼앗고 군수를 경계 밖 으로 내쫒았다. 이름하여 ‘흥덕민란’ 또는 ‘영학당 사건’이라고 한다. 이틀 만에 주동자 이화삼은 스스로 체포돼 고창의 모양성에 갇히게 되었는데, 당시 고부에서 시작 된 영학계가 이화삼을 구출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동학농민전쟁(1894)에 가담한 이들이나 전쟁 중에 희생한 자의 후예들이 당시 고부 이평의 임시교회인 영학교회(英學敎會. 영국의 성공회로 추정됨)에 의탁하면서, 비밀결사체와 유사한 계(契)가 만들어졌다. 일명 ‘영학계(英學契)’다. 영학계는 전라도 중서부 일대로 확산되었고, 흥덕민란은 영학계가 주동이 되어 일으킨 최초의 민란이었다. 참 고로, 이화삼은 만민공동회와 관련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영학계가 주도한 두 번째 민란은 1899년(기해년) 음력 4월 18일 정읍 입암에서였다. 최익서(崔益 瑞), 송문여(宋文汝), 차경석(車京石) 등은 동학농민전쟁 때처럼 벌왜벌양(伐倭伐洋) 보국안민(輔國安 民)의 기치를 내걸고서 고부군아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어 정읍 입암의 왕심리에 대기하 고 있던 3백여 명의 농민들과 함께 흥덕군아를 습격하였다. 농민군은 음력 4월 20일 사포의 유첨사 집에서 돈 백냥을 거두어들이고 하오산리 이진사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농민군은 4월 21일에 무장으로 진격하였고, 다음날인 22일에는 고창성으로 진격하였다. 이때 고창 성을 지키는 수성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때마침 비가 내려 실패하고 말았다. 비로 인해 농민군의 주 무기인 화승총이 무용지물이 되었던 탓이다. 4월 23일, 패퇴한 농민군은 부안면 난산장터(알뫼장터) 에 재집결해 관군과 맞서 싸웠으나 다시금 패퇴하고 말았다. 당시 관군에게 붙잡힌 농민군은 17개 - 9 -


2백여 명, 이들 중 고창옥에서 옥사한 농민은 박창운(朴昌云) 외 17명이나 되었다. 1899년 4월에 농민군이 하오산리의 이진사댁에서 하룻밤을 묵었다함은 아마도 하오의 금구군수를 지낸 이현승의 집 ‘금구영감댁’이 분명하다. 금구영감댁은 당시 천석지기이자 왕실 종친이었다. 특히 흥선대원군의 장남 이재면과의 친분을 유지한 집안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농민군이 하룻밤 묵었던 것을 두고서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4)

오산저수지

한국전쟁 당시에 오산저수지의 둑이 터져, 하오산은 순식간에 물바다가 되었다. 당시 오룡천 부근 의 집 50여 채가 수몰되었으며, 주로 오룡천 변에 살던 주민 70여 명이 익사했다고 한다. 하오산의 김인봉은 경찰지서 보초를 서다가 당시 둑이 터진 것을 알고서 고지대로 피신해 안전했다고 한다. 1951년 정월에 좌익들이 저수지의 둑을 트면서 저수지의 물이 일시에 오룡천을 덮쳤다고 한다. 당 시에 희생된 이들은 주로 피난민들로, 이들은 오룡천 변에 얼기설기 지은 움막에서 잠을 자다가 변 을 당했다고 한다.(김인봉 구술) 오룡천에서의 물난리는 한국전쟁 당시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1934년 8월 12일에 큰비로 인하여 오룡천이 범람해 50여 가옥이 침수되고 2명이 익사한 적이 있었다.(「고창군 수재 사망자 2명」, 『동아일보』1934.8.17)

4.

살롱 ‘금구영감댁’

금구영감댁의 주인장들은 마을에 굶는 자가 있으면 자신들의 큰 수치로 여겼으며, 나누고 베풀면서 마을사람들의 존경받았다. 한편 금구영감댁은 한말에 문학을 논하고 예술을 향유했던 살롱이었다. 금구영감댁은 금구군수를 지낸 이현승이 태어나 자란 집이란 데서 불려졌다. 이현승이 분가해 금구 영감댁 바로 앞에서 살았으므로, 금구영감댁이란 하오2길 7-2번지와 이현승이 살았던 하오2길 7-3 번지를 일컫는다. 1) 전주이씨 양도공파 일족의 이거 하오산의 천석지기는 전주이씨 양도공파(襄度公派) 가문의 봉섭, 경섭 형제와 그의 후예들이다. 경 섭의 손자 이현승(李鉉昇)은 1902년에 금구군수(金溝郡守)를 지낸 이로, ‘금구영감’으로 통한다. 전 주이씨 양도공파 일족이 오산에 이거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이현승의 고조 이문술(李 文述) 때부터였다고 한다. 이문술은 원래 영광 묘량 사람인데, 당시 교유하던 종친 흥선대원군의 장 남 이재면(李載冕 ; 1845~1912)의 추천으로 이곳 오산에 터를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이철환 구술) 이문술의 아들 봉섭이 당대 문우 기정진(奇正鎭) 외 다수의 문사들과 주유하면서 오산을 염두에 두 었고, 먼저 봉섭이, 이어 경섭이 이곳 오산으로 이거하였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전주이씨 양도공파 일족이 오산을 명당으로 인식, 이거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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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이씨양도공파보 권지일(全州李氏襄度公派譜卷之一』(1985)에 의하면, 이문술에게는 봉섭(鳳燮. 호가 淸齋)과 경섭(京燮. 호가 雲遊居士) 두 아들이 있었다. 봉섭의 손자는 현정(鉉鼎. 호가 禁石)이 고 종연(棕淵. 자가 春和) 동규(東奎. 호가 濟石) 철환(哲煥)이 뒤를 잇는다. 1880년 8월에 생원시에 합격한 경섭의 손자는 금구영감 이현승(李鉉昇. 자가 鼎三)이다. 현승은 1873년에 태어나 1898년에 참봉이 되었고, 외부참서관(外部參書官. 외교 문제를 실무적으로 처리하 는 한말의 관직)을 지내다가 금구군수(정3품 통정대부)가 되었다. 현승에 이어 봉연(鳳淵) 동준(東 俊) 종환(宗煥) 등이 뒤를 잇는다. 동준의 처 송점오는 68여 년 전에 시집 와 시조부인 금구영감 이 현승을 직접 보았다고 하였다.(송점오 구술)

그림 9 금구영감댁

그림 10 금구영감댁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글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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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1 금구영감댁의 한말 문사들이 남긴 그림 과 글씨

그림 12 금구영감댁의 글씨들

2)

살롱 ‘금구영감댁’ 6대 손 이철환(李哲煥)이 사는 집이 바로 당대 명당 ‘금구영감댁’이다. 유년의 이철환은

금구영감댁의 큰 감나무 주변에서 나는 북소리를 들으면서 자랐다고 한다. 자라등짝에 집이 얹혀있 기에 나는 북소리라는 게 당시 집안 어른들의 설명이었단다. 금구영감댁은 당시에 기와를 올리지 않 고 초가를 유지하다가 근래에 와서 함석에 이어 기와를 올렸는데, 자라등짝이라서 무거운 기와를 피 했다는 게 이철환의 설명이다. 현재의 금구영감댁은 약 300년 된 8칸 접집(현재 7칸으로 줄어듦)으 로, 청재 이봉섭이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봉섭은 1814년생으로, 1868년 한때 고종에게 ‘상언(上言)’을 올린 적이 있다고 한다. 상언은 조 선시대 국왕에게 올리는 문서로, 관원이나 유생, 사림 등이 올리는 상소와는 달리 일반 사인(私人)이 효자나 열녀, 학행자 등을 추천하고 증직을 청원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금구영감댁에는 흥선대원군이 친 난 그림과 이재면의 편지, 그리고 당대 문사들의 시나 그림 등이 남아 있다. 대청마루에 걸려 있는 서간문은 매산의 글씨라고 하는데, 어쩌면 매산(梅山) 홍직필(洪直 弼. 1776∼1852)의 글씨인 듯하다. 매산은 서울 출신으로, 조선후기 학자로 알려져 있다. 매산과 교 - 12 -


이는 다름 아닌 이봉섭이었다.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서화가였던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도 금구영감댁에서 여러 날 머 무른 적이 있다고 한다.(이철환 구술) 추사가 금구영감댁에 머물렀다는 것은 어쩌면 당대 선승 백파 긍선(白坡亘璇. 1767~1852)을 만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고창 무장(茂長) 출신의 백파는 추사와의 서한 선논쟁(禪論爭)으로 유명하다. 추사는 금구영감댁에 머물면서 백파를 만나려다가 끝내 만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을 것이다. 후에 추사는 백파의 비문을 짓고 썼다. 부모의 비문조차 쓰지 않았다던 추사의 비문에는 ‘백파는 화엄종 주이자 율사이며 대기대용(大機大用)의 격외선사(格外禪師)’라고 한껏 추켜세웠다. 금구영감댁에 추 사의 글씨도 남아 있다고 한다. 금구영감댁에는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7)의 글씨도 있다. 창암은 정읍 출신으로, 조 선 후기 서예가이다. 어린 시절에 당대의 명필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를 배웠다는 창암은 초서를 잘 썼으며, 그의 서체를 ‘창암체’라고 불었다 한다. 이처럼 금구영감댁의 이봉섭과 경섭 형제, 그리고 그 손인 이현승의 주변은 항상 문사들로 가득했 으며, 노년의 한때 ‘기로회(耆老會)’라는 모임을 만들어 전국의 문사들과 교유하면서 남긴 글들을 모 아 ‘기로회집’을 편찬하기도 하였다고 한다.(이철환 구술) 금구영감댁은 당시의 살롱이었던 셈이다.

그림 13 금구영감댁의 곳간

3)

설립한 이동규의 덕행

앞에서 언급했듯이, 1936년에 운영난에 봉착한 부안공립보통학교의 교사 증축과 제반 설비 구입을 위해 금구영감 이승현이 700원을, 이종연으로 추정되는 이가 200원을 내놓았다. 삼양사 김연수는 당시 100원을 기부하였다. 이승연과 이종연은 오산리의 전주이씨 일족이다. 이종연은 이철환의 조부이며, 이철환의 부친 이동규(李東奎)는 일족이자 부안군 사람 이승연(李昇 淵)을 중학원 서무(뒤에 중학원 교장이 됨)로 초빙하여, 1947년 12월 15일에 현 고창북중학교(2012 년 11월 현재 교장은 김은식)의 모태인 부안중학원을 오산에다 설립하였다. 이동규는 상등들 똥뫼에 서 나무를 베어다가 1948년(1949년이라도 함) 3월에 현 고창북중학교 교지에다 목조와가 2동을 건 립하고 부안중학원을 이전하였다.(이철환 구술) - 13 -


우수골 뒤 문중산 20정보를 ‘학교산’이라 이름하고 부안중학원에 귀속시켰다. 이승연이 도 의원을 하면서 부안중학원은 정식 학교로 인가를 받았다.(이철환 구술) 이것이 뒤에 흥민원예기술학 교(1953.12)로 학교법인 은광학원(1961.4)으로, 고창북중학교(1961.12)로 이어졌다. 이동규의 덕행은 위의 선대들 못지않았다. 농지개혁(1950년)이 단행되기 이전에 이미 소작인들에 게 농지를 나누어주었고, 흉년으로 마을이 굶주릴 때면 곳간의 양식을 함께 나누었다고 한다. 한국 전쟁 당시 좌익들에 의해 지역의 지주 28명이 인민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가 이동규였다. 이동규의 덕행과 그의 진정성을 증언하는 이들이 너무 많았기에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철환, 김순자 구술)

5.

오산학당

오산리는 일본인 마스토미의 청교도 정신이 깃든 곳이다. 마스토미는 일본이 한국에 가한 폭압적 행동을 양심 있는 한 사람의 일본인으로 진심어린 사과와 회개를 하였다고 한다. 더불어 한국인들에 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일들을 하고자 하였는데, 그 첫 번째가 학교를 설립하는 것이었 다. 깊은 신앙심이 있었던 마스토미는 삶터와 교육이 일체되는 농학공동체(農學共同體)를 꿈꾸었다. 그의 청교도 정신과 ‘사랑’은 당시 한국인들을 울리고도 남는 것이었다.

그림 14 하오산교회가 모태인 오산교회

1)

100주년의 오산교회

올해 100주년인 오산교회(현재 부안면 중흥리에 위치)는 1912년 10월 5일 일본인 마스토미 야스 자에몬( 富安左衛門. 이하 마스토미라 함)이 고창군 부안면 오산리 196번지에 마련한 예배당이 그 모태다. 마스토미의 사과농장에 예배당을 마련하고서 농장에서 일하는 한국인 22명과 함께 예배를 보면서 시작된 교회의 이름은 ‘하오산교회’. 오산리 196번지는 지방도에서 홍해농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근처로, 현재 상오에 속하지만 설립 당시는 하오산인 까닭에 하오산교회라 하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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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설립과 함께 부안초등학교의 전신인 흥덕학당을 설립해, 선교와 교육을 아울러 실 시하였다. 또한 호남 지방 최초의 사립 중등교육기관인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오산고등보 통학교는 1922년에 고창군민에게 기증됐고, 고창군청 소재지인 고창읍으로 옮겨져 고창고등보통학 교(현 고창고등학교의 전신)로 이어졌다. 하오산교회는 1982년에 고창군 부안면 중흥리 504번지에 교회 건물을 신축해 이전하였다. 이전한 교회 이름 역시 ‘오산교회’다. 현재 오산교회는 장로교 합동으로 300여 명의 신도가 있다.(전홍엽 구 술) 목사 전홍엽은 1992년 4월에 부임하였다. 마스토미가 토지를 교회에 기부했다는『동아일보』(1927.3.30.) 기사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

/

(

) 富 氏 교회에 기부 / 고창군 부안면 오산리에 10여 년 간 거주하든 승부안좌위문 씨는 同里 貧民 又는 고창 교육계를

위하여 많은 공헌이 있던 바 今般에 자기 소유이든 현재 교회건물 대지 200여 평 전부를 그 교회에 기부하였다더라. (고창)>

위 기사는 마스토미가 교육계를 위해 많은 공헌을 했으며, 교회 건물이 있는 대지 200여 평을 모 두 교회에 기부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교회가 하오산교회이며, 하오산교회는 훗날 오산교회가 되었 다. 2)

고창고등보통학교

1918년 4월에 보통교육을 마친 학생들의 진학을 위해 마스토미는 흥덕학당(1912년에 설립) 부지 에다가 오산고등학당을 설립하였다. 1919년 2월에는 흥덕학당을 폐하고 오산보통학교를 설립하였 다. 오산보통학교는 오늘날의 부안초등학교의 모태다. 마스토미가 세운 학교의 모든 학생들은 무료 로 수업을 받았다. 당시만 하여도 고창군 각 지역에서 보통학교 3학년을 마치면 흥덕학당에 진학하 여 소학교 과정을 마쳤으므로, 시골마을 오산리는 다른 지역에 비해 교육열만큼은 높았다고 한다. 1919년 4월에는 오산고등학당을 폐하고 오산학교를 설립하였다. 당시에는 오산학교를 ‘오산학당’이 라고 불렀다. 1920년 1월에 오산학교를 오산고등보통학교(이하 오산고보라 함)라 변경하였다. 아울 러 부지 4천여 평을 매입하고 100여 평의 교사를 마련하였다. 오산고보는 당시 호남지방 최초의 사립 중등교육기관이면서, 영재교육을 담당하는 지역의 명문학교 였다.(「순회탐방」,『동아일보』1927.9.11.) 오산고보는 그 희소성으로 보아 오늘날의 종합대학 정 도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오산고보는 1920년 3월에 관의 인가를 받았고, 1921년 5월에는 65명 의 학생을 보유한 어엿한 고등보통학교가 되었다. 오산고보를 마스토미 한 개인의 힘으로는 더 이상 경영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때가 1922년 1월이 다. 마스토미는 오산고보 운영을 포기하기에 이르렀고, 고창의 유지들은 1922년 2월에 오산고보 유 지를 위한 군민대회를 개최해, 오산고보의 존치를 위한 ‘존치집행위원회’를 만들었다. 1922년 4월에 존치집행위원회는 오산고보 인수를 결의하고, 동시에 마스토미에게 교장을 맏아줄 것을 간청하였다. 마스토미는 군민들의 요청이 워낙 간곡했기에 양태승을 교장대리로 한다는 전제에 - 15 -


교장을 맡았다. 1922년 6월에 존치집행위원회가 ‘재단법인 고창고등보통학교 설립준비위원회’로 변경하고, 오산고보를 오산리에서 고창읍내로 이전하여 고창고등보통학교라 하였다. 이때 마스토미 의 적잖은 재산도 고창고보에 조건 없이 기부되었다. 마스토미의 기부에 감동한 고창군민들도 십시일반 쌀과 돈을 모아 고창고보 설립에 일조하였다. 1925년에 현 고창고등학교 자리에 교사를 마련하고 고등보통학교의 이전을 마무리하였다. 1938년 사립 고창중학교로 명칭을 변경하였다가 1944년에 학교법인을 전라북도에 이관하여, 공립 고창중학 교가 되었다. 1951년 학제 개편으로 고창고등학교로 승격되었다. 다음은 당시 오산고등보통학교 관련『동아일보』(1921.5.11.) 기사 내용이다. <

新星 /

승부 씨의 교육열로 / 신설된 오산고등보통학교 /

근래 일반의 교육열과 배우고자 하는 생각이 늘어감은 실로 반가운 현상인 동시에 교육기관이 부족한 것은 매우 유감되 는 일이다. 따라서 일반 사회의 유지들은 교육 기관을 확장하기에 매우 노력하는 중임은 일반이 다 아는 바이어니와 이 에 한 가지 가상하고 반가운 소식이 있다.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오산리 사립 오산고등보통학교는 작년 3월에 고등학 교의 인가를 맡아가지고 지금 65명의 학생을 수용하여 가르치는 중인데, 이 학교는 조선 사람이 설립한 것도 아니오 또 한 관립은 물론 아니다. 이 학교의 설립자는 일본인

富安左衛門 씨이니 씨는 기독교 신자로서 오랫동안 당지에 와서

농장을 경영하고 지나든 중 씨는 일찍이 조선 사람의 교육기관이 부족한 것을 유감으로 여기어 去今 십년 전에 오산리 에 서당과 같은 학교를 설립하고 이름을 흥덕학당이라 하여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기를 비록 하였는데, 이것을 기초로 삼아 차차 확장하여 지금은 약 100여 평의 건물과 약 4,000평의 지대를 사서 훌륭한 증등교육기관을 만들게 되었는데, 이래 십년 동안에 10여만 원의 경비는 전부 설립자 되는 승부 씨가 자담을 하였고, 금년도에는 약 7만원의 예산으로 학 교집과 기숙사를 신축하려 하였으나 근래의 경제 공황으로 사업이 여의하게 진행되지 못하여 그 일부만 착수할 예산이 라 하며, 아직까지 학생에게는 월사금 같은 것도 한 푼도 받지 아니함으로 모든 경비는 설립자가 부담하여왔는데, 장래 의 유지 방침은 설립자가 근본 취지를 다하기 위하여 미구에 재단법인을 조직할 계획이 있는데, 그 학교에는 보통부까 지 부속하여 있고, 방금 교원으로 조선인 3명 일본인 1명을 일본에 유학시키는 중이니 장래 전라북도의 교육을 위하여 매우 경하할 일이라 하겠더라.(고창)>

위 기사는 마스토미가 오산고보를 설립한 이래 거금 17만여 원을 들여서 교사와 기숙사를 신축하 려고 하였으나 경제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내용이다. 특히 ‘학생들에게 돈 한 푼 받지 않고 모든 경비는 설립자인 마스토미가 부담하였다’는 내용은 마스토미의 교육 사업에 대한 진정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앞의 7만여 원은 오산고보가 고창읍으로 이전하여 고창고보로 전환할 때 고창고 보에 기부되었다고 한다.

6.

인물

오산리에는 덕망 있는 인물들이 많다. 그들의 공통점은 ‘가진 자의 도덕적 책무’ 즉 노블레스 오블 리주 정신이다. 금구현감 이현승의 ‘덕행’과 청교도 정신으로 일관한 마스토미의 ‘사랑’, 그리고 근래 의 홍종철, 홍순희, 이동규 등의 ‘봉사’는 오산리의 역사이자 자긍심이다. 금구현감 이현승과 마스토 미의 덕행은 그 어떤 목적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의 진정성이 오늘날 오산을 노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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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블리주의 고향으로 부르게 하는데 한 치의 주저함도 없게 할 것이다. 1)

이현승

1873년에 부안면 오산리에서 태어난 이현승(李鉉昇)은 운유거사 이경섭의 손자로, 참봉이 되었다 가 외부참서관(外部叅書官), 금구군수 등을 지낸 인물이다. 1902년 금구군수에 임명된 이현승은 현 지에서 덕행을 많이 베풀었던 모양이다. 이현승의 덕행을 기리는 비가 지금도 금구(金溝)에 남아있 다고 한다. 당시에 흉년이 들자 이현승은 나락 100석을 궁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는 전언도 있다. 이현승이 외부참서관으로 재직(1902)하면서 작성한 서류「원사부래거안(元師府來去案)」이 남아 있 다. 금구군수와 관련한 기록으로는『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광무6년 음력 4월 3일)와 1902년 전 라도 관찰사 조한국(趙翰國 또는 趙漢國. 1900년에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함)이 금구군수 이현승에 게 보낸「훈령(訓令)」(‘전라감영특별전-선화당 회화나무’, 전주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 특별전, 2008) 외 다수의 ‘훈령’이 남아 있다. 오늘날에도 이현승을 ‘금구염감’으로 부르는 까닭은 그가 금구 군수를 지냈기 때문이다. 그가 살던, 대대로 내려온 큰집과 작은집을 ‘금구영감댁’이라고 부른다. 금구영감 이현승은 관직에서 물러나 부안면 오산리에 살면서도 덕행을 멈추지 않았다. 마을에 굶주 린 이가 있다면 그것은 곧 자신의 큰 수치라 여겼던 이현승은 흉년으로 마을이 굶주릴 때마다 자신 의 곳간문을 열어 굶주린 이들을 도왔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나누고 베푼 금구영감을 항상 존경해 마지 않았다. 1899년 농민봉기가 일어났을 때, 농민군이 금구영감댁에서 해 준 밥을 먹고 하룻밤을 묵었다는 사실은 당시 이현승의 덕행과 결부지어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참고로, 부안초등학교 전신인 부안공립보통학교의 교사 증축을 위해서도 이현승은 7백 원을 기부하 였다.(『조선중알일보』1936.5.13.) 또한 이현승은 재단법인 고창고등보통학교 이사로 활동하면서 적지 않은 재산을 학교에 기부하였다. 당시 고창고보 이사는 고창의 천석지기들로 구성됐으며, 홍종 철도 이사진에 포함돼 있었다. 이현승의 덕행은 부를 바탕으로 하는데, 그 부의 배경은 오룡천 건너의 상등들이다. 금구영감댁이 자라등짝이라고 한다면 자라꼬리는 오미동이다. 자라는 오룡천을 향해 있는 형국이니 물 건너 상등 들은 부를 상징한다. 오산의 천석지기 이현승의 덕행의 물질적 토대는 바로 오룡천 건너의 문전옥답 상등들이었던 것이다. 2) 마스토미 야스자에몬 일제 강점기에 고창 지역에서 활동했던 일본인 사업가이자 교육자인 마스토미는 마스토미 야스자 에몬, 또는 승부장로( 富長老)라고 불렀다. 1880년 일본 후쿠오까에서 태어난 마스토미는 1904년 러․일전쟁 때 군에 징집되어 한국에 오게 된 게 한국과의 인연이었다. 이때 마스토미는 한국의 어려 운 사정과 한국인의 무지를 몹시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한국에서 사업할 것을 결심하고 1906년에 다시 건너온 마스토미는 농장 경영을 구상하였다. 1907 년에는 마스토미 데르코(枡富照子)와 결혼하였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데르코로부터 감화 받은 마스토미는 세례를 받고 장로가 되었다. 마스토미는 1909년 9월에 전라북도 김제군 월촌면 월봉리 에 땅 700정보를 매입하여 본격적으로 농장을 경영하였다. - 17 -


1911

12월에 마스토미는 자신이 살고 있는 김제와는 떨어진 고창군 부안면 오산리에 11정보의

땅을 개간하여, 사과나무를 심었다. 이듬해에는 농장에 교회를 설립했으니 그 이름이 하오산교회다. 더불어 흥덕학당을 설립하여 교육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때가 1912년이다. 마스토미 장로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마스토미는 “…조선이 독립하기 위해서는 조선인이 뜻 을 따라 살 것, 열심히 배울 것, 예수님을 믿을 것 이 세 가지가 필요하다”라고 설파하였다고 한다. 마스토미는 기호학당에서 공부하던 윤치병·양태승·김영구 등을 일본의 고베신학교(神戶神學校)에 유 학시켰다. 배워야 조선이 독립이 된다, 는 그의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마스토미 자신도 고베신학교 에서 공부하였는데, 이때 세 학생의 학비를 마스토미가 담당하였다. 앞의 세 학생이 졸업하자 마스 토미는 윤치병을 하오산교회 목회자로, 양태승을 흥덕학당 책임자로, 그리고 김영구를 흥덕학당 사 감 및 교회의 주일학교 담당자로 일하게 하였다. 마스토미는 1918년에 흥덕학당 부지에 오산고등학당을, 1919년 2월에는 흥덕학당을 폐하고 오산 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에 다시 오산고등학당을 폐하고 오산학교(당시에 오산학당이라고도 함)를 설립하였다. 1920년에는 오산학교를 모토로 중등교육기관인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마스토미는 사과농장의 이익금 모두를 오산고보 학생들의 무상 교육에, 실력 있는 교사를 초빙하는 데 썼다. 당시에 오산고보 학생들이 마스토미를 두 번째 아버지로 여길 정도였으니, 오늘날에도 보 기 힘든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일본은 큰 불황을 겪게 되었고, 오산에서 수확된 사과는 더 이상 일본 으로 수출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수익이 없는 가운데 학생 전원의 무상 교육 원칙은 오산고보의 운영을 어렵게 하였다. 1922년에 마스토미는 오산고보의 운영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고창의 유지들은 오산고보 인수를 결의하고, 동시에 마스토미에게 교장을 맏아줄 것을 간청하였다. 마스토미는 양태승을 교장대리로 한다는 전제에서 교장을 맡았다. 고창고등보통학교로 명칭을 변경 한 오산고보는 오산리에서 고창읍내로 이전하였다. 이때 마스토미의 적잖은 재산이 고창고보에 조건 없이 기부되었다. 마스토미는 초대 교장으로 부임하여 고통고등보통학교를 전국 최고의 학교로 이끌었다. 그러던 중 1934년 11월 6일에 55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는데, 일본인이면서 한국인 이상으로 한국을 사랑하 다 간 마스토미의 장례식이 있던 고창고보 운동장은 그의 덕행을 기리는 학생과 군민의 오열로 가 득 찼다고 한다. 다음은 마스토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알 수 있는『동아일보』(1927.3.30.) 기사 내용이다. <

富氏餞別宴 / 고창군 부안면 오산리에 임시 거주를 하는

富安左衛門 氏는 기독교인으로서 조선인 무산 청년 수십여 명을 일본

각지 전문대학에 유학시킨 功績 뿐 아니라 오산리에 高等普通 程度와 普通學校 程度 兩科를 단독 설치하고 수백 명 학 생을 모집하여 10여 년 간 경영하던 中 經濟 關係로 大正 11년 3월 중에 高敞郡 經營으로 고등보통과는 인도하는 동시 에 기본 재산으로 토지 100여 斗落을 기부하고, 고창고보 교장 및 이사의 중임까지 當任되고 동년 秋期에 보통학교도 역시 공립으로 인도하는 동시에 同 校舍와 대지 및 其 校 전부를 기부하였든 바, 今般 김제로 移去케 됨으로 去 19일 동면 유지 발기로 승부 씨의 성대한 송별연회를 하였다더라.(고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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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는 마스토미가 가난한 한국 청년 수십여 명을 일본에 유학시켰을 뿐만 아니라 오산리에 학 교를 세워 수백 명의 인재를 배출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윤치병, 양태승, 김영구 외 조정만, 김옥성, 제승용 등 많은 이들의 학업을 도왔다. 1922년 오산고보가 고창고보로 전환하는 과정에서도 마스토 미는 토지 100여 두락을 기부하였고, 같은 해에 오산보통학교를 아무 조건 없이 공립으로 전환하였 다는 것이다. 마스토미는 일본이 한국에 가한 폭압적 행동을 양심 있는 한 사람의 일본인으로 진심어린 사과와 회개를 하였다고 한다. 더불어 한국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일들을 해보고자 교육 사업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마스토미는 삶터와 교육이 일체되는 농학공동체(農學共同體)를 꿈꾸었으 며, 그의 청교도 정신과 ‘사랑’은 당시 한국인들을 울리고도 남았던 것이다. 마스토미의 한국에서의 선의(善意)와 덕행을 뒤늦게 인정한 한국 정부가 1995년에 마스토미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 하였다. 이러한 마스토미의 선의를 비관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마스토미는 한국인의 은인으로 보기 힘들 며, 복음전도자로 위장한 식민지의 지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한국으로부터 받은 훈장 은 지나치다는 견해다.(이규수의 논저)

그림 15 옛 홍해농장의 모습

3)

그림 16 홍해농장의 관리사. 일본식 가옥이다.

홍순희 부자

고창군 아산면에서 태어난 홍종철(洪鍾轍. 1890∼1973)은 기업가이자 사회 활동가이다. 본관은 남 양(南陽)이며, 일본식 이름인 홍해종철(洪海鍾轍)에서 딴 이름 ‘홍해농장’의 주인으로 잘 알려져 있 다. 홍종철은 마스토미의 농장을 1924년부터 ‘홍해농장’이라 하고 경영을 해왔다고 하는데, 어떤 연 유로 마스토미의 농장을 경영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홍종철은 동아일보사 설립 발기인(1920)을 시작으로『동아일보』고창지국장(1923년), 사립 고창고 등보통학교 이사(1923), 고창번영회 회장(1927년), 소방조 설립 발기인(1935년) 등을 역임하였다. 1937년경에 370여 정보의 땅을 소유한 고창의 거부 홍종철은 이후에도 정읍국자(井邑麴子) 이사, 고창요업주식회사 대표, 홍해제염공사 사장, 고창연해어업조합 사장 등 사업가로서 그 명성을 날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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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전북 민선 도평의회원(1924, 1927), 1930년 조선총독부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 (1930-1933), 전북 관선 도회의원(1937), 조선임전보국단 전라북도 발기인(1941), 부안면장 (1944-1945) 등을 지냈다. 이러한 연유로 세인들은 그를 친일반민족자로 분류하였다. 대한민국 수립 직후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1949.8.6)된 홍종철은 같은 해 8월 31일 에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2009년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 족행위 704인’의 명단에 홍종철이 포함되었다. 이처럼 홍종철은 친일반민족행위자임과 동시에 지역 사회를 위해 재산을 적잖이 기부했던 덕행자 임에도 덕행 쪽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홍종철은 고창고보 설립을 위해 16,000원을 기부하 였으며, 고창고보 이사로 있으면서 적잖은 전답을 학교에 기부하기도 하였다. 또한 전주여자고등보 통학교 설립에 3백 원을 기부하였고, 광복 직후의 한성여자중학교 재단 설립에 약 5천 평의 땅을 기부하였다. 더불어 학비가 없는 어려운 학생들의 학비를 전부 또는 일부를 보조하기도 하였다. (「반민특위조사기록-진정서」.『조선총독부시정25주년기념표창자명감, 조선의 인물과 사업-호남편 1』) 덕행자이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였던 홍종철은 상오의 홍해농장 안의 동산 자택에서 살다가 타계하 였다. 다음은 홍종철이 고창의 지역 사회에 적지 않은 돈을 기증했다는『동아일보』(1929.10.5.) 기 사다. <

에 四百圓寄附 /

에 四百圓 寄附 고창홍씨가 /

고창군 부안면 오산리 洪鍾轍(37) 씨는 현재 고창고등보통학교 이사로 사회 공인 사업에 공훈이 많은 바 일생 양친을 회갑이 지내도록 모시지 못하고 회갑 전 별세함을 무한 유감히 생각하여 지난 1일(음 8월 9일)은 육년 전에 작고한 자 기 자친의 육십일세 회갑 생일임으로 이 날을 영구 기념키 위하여 씨의 원적지인 동군 雅山面 大東里에 현금 사십 원과 중간 거주지인 高敞 邑內里와 자기 현주소지인 동군 富安面에는 현금 300원을 기증하였다더라.>

위 기사 내용은 1929년 홍종철이 양친이 태어난 아산면 대동마을과 한때 살았던 고창읍 읍내리, 그리고 당시 살고 있는 부안면에 적지 않은 돈을 희사했다는 내용이다. 1913년생인 홍종철의 아들 홍순희(洪淳熙)는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를 졸업하고 고창산업 조합 상무이사, 고창면협의회 의원, 고창산업조합장, 민주당 중앙위원 등을 지낸 인물이다. 1958년 5월에 실시된 제4대 국회의원(1958∼1960) 선거에서 민주당 공천을 받아 고창 을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되기도 하였다. 당선 이후의 홍순희는 민주당을 탈당해 자유당으로 입당하는 바람에 세인의 비 난을 받기도 하였다. 홍순희의 동생 순범(淳範)은 고창북중학교 교장을 역임한 교육자였다. 그의 아들 영표(1957년생)는 18대와 19대 국회의원(인천 부평 을구)으로, 2011년 민주당 원내 대변인, 2012년 민주통합당 한명 숙 대표 비서실장 등을 역임하였다. 홍영표는 부안초등학교와 고창중학교, 고창북고등학교를 다니다 가 전학한 이리고등학교 등을 졸업하였다.(장인구 구술) 동국대학교를 졸업한 홍영표는 1983년 부 평의 대우자동차 용접공으로 위장 취업하여 노조의 민주화 및 임금 인상 투쟁을 벌였으며, 1985년 에는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농성 사건을 주도하다가 구속되기도 하였다.(『오마이뉴스』20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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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리 출신으로 부안면장을 지낸 이는 홍종철(1944∼1945)과 이봉섭의 증손 이최연(李最淵. 1946∼1947), 그리고 농어촌공사 고창지사장 이강환의 부친 이기동(李起東. 1980∼1982) 등이다.

7.

조직과 산업

오산리는 전통적인 농업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최근에 시설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긴 하지 만, 아직은 타 지역에 비해 미약하다. 수십 년 전까지만 하여도 사람들이 북적거렸던 오산리는 산업 화의 물결과 도시화의 바람으로 공동화돼 가고 있다.

1)

조직

2012년 11월 현재 오산리의 상오(오산 1구) 이장은 장인구, 하오(오산 2구)의 이장은 김재국이다. 상오의 새마을지도자는 정만석, 하오의 새마을지도자는 최희수다. 상오의 부녀회장은 박말례, 하오의 부녀회장은 김순자이다. 상오의 노인회장은 이길동, 하오의 노인회장은 이희서이다. 2) 오산리의 산업 오산리의 대부분은 농업에 전념하며, 근래 복분자 농사를 짓는 농가가 늘고 있다. 하오산에는 기와 전문 업체인 효광기와가 있다. 효광기와는 1999년 김완덕에 의해 설립,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외 상오산에는 오산가든과 오산정미소가 있다. 오리 요리로 유명한 오산가든과 70여 년 전에 설립되어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뀐 오산정미소는 현재 폐쇄된 상태다. 상오산에는 노인 들이 즐길 수 있는 게이트볼장이 있다. 일제 강점기부터 명성을 날렸던 홍해농장은 현재 동산(공원부지)만이 남아 있으며, 홍해농장 자리 에는 오산농장(서환재)이 자리하고 있다. 오산농장은 약 18,000평으로, 8천 평의 부지에 고구마를 2 천 평의 부지에는 고추를 재배한다. 나머지 부지에는 나무가 심어져 있다. 2012년 11월 현재 오산리는 빈집이 늘고 고령화 추세도 역력하다. 이런 추세라면 마을은 공동화될 것이 자명하다. 오산의 자긍심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소재로 한 마을 공동체 사업을 구상하는 것도 마을의 공동화를 막을 한 계제(階梯)일 수가 있다.

<

주신 분> (83세, 하오산)

은춘기(82세, 하오산)

최영렬(71세, 상오산)

최재수(76세, 상오산)

송점오(86세, 하오산)

이희서(87세, 하오산)

이철환(77세, 하오산)

전홍엽(66세, 오산교회 목사)

김순자(75세, 하오산)

장인구(59세, 상오이장) 김재국(43세, 하오이장)

<참고한 자료> •『동아일보』 - 21 -


조선중앙일보』 •『오마이뉴스』 •『전주이씨양도공파보 권지일(全州李氏襄度公派譜卷之一』(1985) •『전라남도고창군취착난당구초동류성명거주병록성책(全羅南道高敞郡就捉亂黨口招同類姓名居住竝錄成冊)』 •『속음청사(續陰晴史)』 •『매천야록(梅泉野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Ⅳ-19』 •『한국지명총람-전북편』11(한글학회, 1981) •『모양성의 얼』(고창군, 1982) •『전북전래지명총람』(유재영, 민음사, 1993) •『고창의 마을유래』(고창문화원, 2003) •『문화유적분포지도-고창군』(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고창군, 2005) •『고창군지』(고창군지편찬위원회, 1992) •『고창군지』(고창군지편찬위원회, 2009) •『고창지방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전북대학교 박물관, 1984) •『선운사-흥덕간 도로확포장공사구간내 문화유적 지표조사보고서』(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00) •『한국의 마을제당』5 전라북도 편(국립민속박물관, 2001) •『전북의 기독교 전래』(주명준, 전주대학교출판부, 1998) •『고창고보 60년사』(60년사편찬위원회, 1982) •『식민지 조선과 일본, 일본인-호남지역 일본인의 사회사』(이규수, 다할미디어, 2007) •『성혼(聖魂)』(고창중·고등학교동창회, 2007) •『최현식과 동학농민혁명사 연구』(사단법인 정읍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도서출판 갈채, 2006) • 성혼(聖魂)-항일 민족교육』(고창중․고등학교 동창회, 효성사, 2007) •『호남기독교 100년사-전북편』(김수진, 쿰란출판사, 1998) •『마스토미 장로 이야기』(김충렬․백영훈․최종설, 한국장로교출판사, 2009.12) •『조선총독부시정25주년기념표창자명감, 조선의 인물과 사업-호남편1』(조선총독부) •『知られぎる懸け橋 - 富安左衛門と韓國とその時代』(黑瀨悅成, 株式會社朝日ソノラマ, 東京, 1996) •「반민특위조사기록-진정서」(백관수 외) •「

보천교운동-교주 차경석을 중심으로」(상) (안후상,『남민』4, 서해문집, 1992)

•「일본인 지주 마스토미 야스자에몬과 ‘善意의 일본인’론 재고」(이규수,『아시아문화연구』19, 경원대아시아문 화연구소, 2010.9) •「갑오동학혁명 이후 민중의 동향」(최현식,『갑오농민혁명 106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갑오농민혁명의 민중사적 조명』, 2000.5.21.) •「홍종철을 통해본 일제시대 지역유지의 성격」(임숙정, 전주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8)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http://e-kyujanggak.snu.ac.kr/) • 고창군(http://www.gochang.go.kr/) • 농촌용수종합정보시스템(http://rawris.ekr.or.kr/) • 디지털고창문화대전(http://gochang.grandculture.net/) • 고창북중학교(www.gochangbuk.ms.kr) - 22 -


(www.gochang.hs.kr)

• 고창부안초등학교(www.g-buan.es.kr) • 대한민국 국회(http://www.assembly.go.kr/) • 국회의원 홍영표 홈페이지(http://dreamyp.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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