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제5집
길지 상암리
1.
개요와 풍수
고창군 부안면 북부의 상암리는 곰소만과 접해 있다. 나지막한 산등성이로 이루어진 상 암리는 남서로 봉암리, 남으로 검산리, 동남으로 수앙리 등이 인접한다. 북향의 상암저수 지를 중심으로 좌측의 농원과 반월, 우측의 석암, 그리고 북서쪽의 상포 등이 분포한다. 석암의 남쪽 수강산 자락의 골 끄트머리는 원당이니, 상암리는 자연 마을이 넓게 산재한 독특한 촌락임이 분명하다. 1)
개황
현재 상암리는 석암리(石岩里)·농원리(農園里)·신농원리(新農園里)·상포리(象浦里)·반월리 (半月里) 등 5개의 행정리로 돼 있다. 자연마을로는 상포(象浦)·석암(石岩)·신암(新岩)․주섬 뜸·원당(元堂)·농원(農園)·신농원(新農園)·반월(半月)·주섬․대섬뜸·갓뜸 등이 있다. 상암리는 원래 고부군 부안면(富安面)에 속하였다. 대부분의 고읍지에는 “수광산(水光山. 지금은 ‘수강산’이라 함)은 고부군아에서 서쪽 오십 리”라 돼 있는 등, 상암리를 고부군의 한 고을로 표기하였다. 조선 말기에는 부안면이 흥덕군에 포함되면서 상암리 역시 흥덕군 이었다. 그러다가 1914년 조선총독부령으로 석암·원당·상포·반월, 그리고 인촌(仁村)의 일 부를 병합하여 ‘상암리’라 하고 고창군 부안면에 편입되었다. 상암리의 면적은 5.32㎢로, 밭이 0.28㎢ 논이 1.02㎢ 등이며, 총 187가구 357명(남 173 명, 여 184명)이 살고 있다.(2010년 3월) 2) 상비음수형의 길지 상포 ***그림14 상포의 비퉁물 상암은 상포(象浦)와 석암(石岩)의 앞뒤 글자를 따 ‘상암(象岩)’이라 하였다. 풍수지리적으 로 상암은 코끼리다. 그러나 엄밀히 말한다면 코끼리는 ‘상포’에 국한한다. 상포라는 지명 에는 ‘코끼리 형국을 한 포구’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코끼리 형국의 제일 용력처(用力處), 즉 제일 명당은 코끼리의 코다. 그렇다면 상포에서의 코끼리의 코는 어디일까? 바로 상포 의 ‘비퉁물’이라 불리는 곳이다. 지금은 수문이지만, 제방(물막이) 공사 이전의 비퉁물은 - 1 -
쪽에서 흘러 내려오는 민물과 곰소만의 바닷물이 만나는 지점이었을 것이다. 비(鼻)는 코 비로,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형국이니, 비퉁물은 상비형(象鼻形) 또는 상비음 수형(常鼻飮水形)의 길지임이 틀림없다. 비퉁물 좌측 기암 위의 오래된 팽나무와 느티나무의 울창함은 그 옛날 번성했다던 상포 를 떠올리게 한다. 주막이 즐비하고, 수십 척의 배들이 정박했던 상포와 가장 가까운 곳은 줄포항이다. 줄포항의 부침에 따라 이곳 역시 그 부침을 다하였다. 1936년부터 시작된 제 방공사로 상포는 포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고, 주막은 하나 둘씩 사라지고 크고 작은 배들은 더 이상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상포의 동쪽과 서쪽의 두 작은 섬이 ‘주섬’이다. 주섬의 다른 이름은 지섬, 쥐섬 등이다. 섬이 바다 위의 버큼(거품의 방언)과 같다 하여 ‘버큼섬’이라 부르기도 하고, 뱀처럼 생겼 다 하여 ‘사섬’이라 부르기도 한다.(김용재) 어쨌든 상포의 동쪽과 서쪽의 작은 섬 주섬은 풍수지리상 ‘쥐’의 형국이나, 제방공사로 상포와 두 주섬이 연결되면서 주섬은 더 이상 섬 이 아니다. 간척으로 쥐 형국의 섬들이 코끼리인 상포와 연결되는 바람에 코끼리는 앞으로도 뒤로도,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는 게 마을 노인들의 생각이다. 즉 상비음수형(常鼻 飮水形)의 명당은 간척으로 그 운이 다했다는 것이다. 코끼리 앞뒤의 쥐들이 간척으로 만 들어진 땅으로 올라와서 코끼리를 괴롭히기 때문에 상포의 운은 다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다.(김용재) 어쨌든 상포는 그 옛날의 번성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쇠락한 촌락의 몰골만이 남게 되었다. ***그림5 상포의 주섬
2.
지명과 그 유래
1951년에 착공된 ‘상암지’라고도 하는 상암저수지를 중심으로 서쪽의 인접 마을이 ‘농원’ 이다. ‘반월’은 서쪽 등성이 너머 갯가 마을이다. 상포는 저수지 북서쪽의 해안가에 위치한 다. 저수지를 낀 동쪽 등성이가 ‘석암’이다. 석암마을 앞 논 가운데는 커다란 둥근 바위 하 나가 박혀 있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석암인 것이다. 1)
원당
***그림18 서암의 암바위 ***그림7 원당마을의 보호수 ‘석암신농원길’을 따라 가다보면 북쪽 초입이 신암이요, 그 다음이 석암이다. 석암(石岩 또는 石巖이라고도 함)에는 높이가 약 2.5m 가량 되는 암수의 둥근 바위가 나란히 있었다 고 한다. 그 가운데 남자 바위는 상암저수지 공사 때 매몰되었고, 여자 바위만이 남게 되 었는데, 그 바위로 인해 마을 이름이 석암이다. 자연마을로는 원당과 신암, 석암, 주섬뜸, - 2 -
(주섬뜸 너머 신농원 가기 전), 네갓듬(석암의 서쪽마을), 여시밧골(애장터라고도 하 는, 애기 무덤이 있던 곳. 신암 중간과 석암에서 저수지 쪽 등 두 곳에 있었음) 등이 있다. 할미당은 봉암리에 속하나 상암저수지와 맞닿는 북단이 상암리다. 간척사업이 시작되기 이전의 이곳은 작은 포구였고, 포구를 배경으로 재산을 모은 정남평의 큰 집이 있었다.(이 국환) 할미당 북단 에덴중앙기도원 부근의 등성이가 갓뜸 또는 네갓뜸이다. 1850년대 창녕조씨가 들어와 설기했다는 석암의 주요 성씨는 전주이씨, 이천서씨 등이 다. 석암에는 현재 54가구 107명이 살고 있다.(2013년 12월. 부안면사무소) 원당(元堂)은 석암의 남쪽 수강산 자락에 위치한다. 원당의 전방 우측 산이 ‘수강산’이고 전방의 좌측 산은 ‘안산’이다. 유랑민이 들어와 이룬 마을이라는 설, 부안면의 으뜸마을이 라는 데서 원당이라 하였다는 설, 맨 먼저 설기되었다는 뜻에서 원당이라 하였다는 설 등 이 있다. 그러나 경기도 고양 원당의 전주이씨들이 설기했다 하여 ‘원당’이라고 하였다는 전언은 설득력이 있다. 이영선의 10대조부터 경기도 원당에서 이곳 원당골에 정착을 하였 으니, 그 연대가 1,500년대다.(이영선) 2010년경부터 시작된 일명 원당저수지 공사(한국농어촌공사에서 주도하는 정식 공사명칭 은 ‘원당지구 다목적 농촌용수 개발사업’) 과정에서 저수지 안쪽 송씨 재실 부근의 650년 된 고성김씨 분묘를 파굴,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원당의 설기 연대가 적어도 650년 전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원당의 설기 연대를 1,500년대로 추정해 도 무리가 아닐 성싶다.
***그림6 석암결로당...
***그림8 원당마을 모정
원당은 수십 년 전만 하여도 30여 가구에 이르는 제법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검산과 질 마재 쪽 사람들이 넘나드는 ‘입점치(笠店峙)’ 또는 ‘갓짐재’라고도 하는 ‘까침재’는 원당의 우측(남측)이며, 까침재에는 장승이 있었다고 한다. 원당의 좌측(북측) 초입을 ‘진대백이’라 고 하는데, 최근에 진대백이로 추정되는 곳에서 돌무더기가 나왔다. 짐대, 진대라고도 하 는 진대백이에는 마을을 수호하는 솟대와 돌무더기가 있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짐대 백이 주변은 갯벌이었고, 이곳에서 염업(鹽業)이 성행했다.(이길재) 원당에는 현재 전주이 씨 나주임씨 등 6가구가 살고 있다. 2)
신농원
***그림1 농원경로당... ‘농원(農園)’은 상암저수지 서남단에 위치한 마을이다. 상포의 남쪽 마을이기도 한 농원은 한국전쟁 때 북한에서 내려온 피난민의 생활터전을 마련해주기 위해서 1954년 4월에 관 (官)에서 조성하였다. 당시에 50여 세대가 입주하여 주변의 황무지를 개간하였으니, 이를 ‘농원’이라 했다. 황무지를 개간하여 자립의 터전을 마련하라는 뜻에서 처음에는 ‘정착농 원’이라 하였다가 ‘농원’으로 바꿔 부른 것이다. 또는 은혜를 입어서 흥했다, 라는 뜻의 ‘은 흥촌’이라는 이름도 있다. 농원의 일부와 인근의 가난한 사람들이 상포의 동쪽 주섬 인근에서 간척을 하면서 새롭 게 정착하니, 이름하여 ‘신농원’이다. 주섬에 모인 사람들은 이곳을 새로 빛내자는 뜻에서 - 3 -
‘신광(新光)’이라 하였다가 1981년 8월에 ‘신농원’으로 개칭하였다. 처음 입주했 던 이들 일부는 신농원을 등졌고, 주변 사람들이 다시 들어와 정착하기도 하였다. 현재 농원에는 36가구 총 73명이 살고 있다. 신농원에는 14가구 총 29명이 살고 있 다.(2013년 12월. 부안면사무소) 3)
반월
***그림4 상포의 마을회관...
***그림2 반월마을회관...
상포(象浦)는 코끼리형국이라 하여 ‘코끼리 상’자와 ‘포구 포’자를 따 ‘상포’였을 것이다. 상포에는 대섬등, 황시암골, 방죽골, 서당목, 요파정(낙파정 또는 비석등), 장자골, 평풍석, 주섬 등의 지명이 있다. 상포에서의 ‘대섬등’은 황시암골 산등성이를 말한다. 상포를 향한 ‘상포길’ 좌측 사면부의 반월과 상포 사이가 ‘황시암골’이다. 이곳에 황시암이 있었다고 한다. ‘방죽골’은 상포길을 중심으로 황시암골 맞은 편 골짜기다. 상포길 우측 등성이에 방죽골이 있는 것이다. ‘서당 목’은 상포의 서쪽 등성이로, 옛날 서당이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요파정’은 낙파정(樂波亭) 터를 말하며, ‘비석등’이라고도 한다. ‘장자골’은 상포 서쪽 골 짜기로, 옛날에 장자(부자)가 살았다고 하여 장자동(長者洞. 일명 장재동, 외양갱번이 등이 라고도 함)이라 불렀다. ‘낙파정’이라 부르는 ‘평풍석’은 현 낙파정(정자) 동쪽의 높이 6m 가량 되는 벼랑이었다. 평풍석 옆에 있었다는 서너 개의 ‘요강바우’는 제방공사 과정에서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평풍석 역시 제방공사 때 사라졌다. 평풍석에 오르면 한눈에 곰소만의 아름다운 풍광이 들어왔다고 한다. 1740년대 광산김씨들이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된 상포에는 현재 총 57가구 96명이 살고 있다.(2013년 12월. 부안면사무소) 주요 성씨로는 광산김씨 외 김해김씨, 파평윤씨 등이 있다. 1890년대 죽산안씨들이 들어와 시작되었다는 ‘반월’은 상포의 남서쪽에 있다. 지형이 반 달과 같다하여 반월이다. ‘원반월’은 등성이 끝자락 갯가에 있었는데, 바닷물이 자주 들어 와 현 위치로 마을을 이전하였다고 한다. ‘새우낭개 고라실’이라고도 하는 ‘시암골’은 반월 동북쪽 갯가 골짜기를 말한다. 간척으로 인하여 시암골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다. 부령김 씨 열녀문이 있는 ‘정문등’은 상포와 반월의 중간 지점에 있다. 정문등 서쪽이 ‘황시암골’ 이다. 옛부터 반월사람들은 조개와 새우를 잡아 생계를 이었다. 현재는 바다를 막아 양식과 양 만업을 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반월의 주요 성씨로는 죽산안씨 외 전주이씨, 제주양씨 등 이 있으며, 모두 39가구 62명이 살고 있다.(2013년 12월. 부안면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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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환경 촌락은 대체로 낮은 산등성이에 형성돼 있다. 등성이를 따라 길이 만들어지고,
사면부에는 마을이 형성돼 있다. 상암뜰과 상암저수지는 원래 갯벌이었고, 깊은 갯골을 따 라 철선(鐵船)이 할미당까지 진입하였다고 한다. 1936년부터 시작된 제방공사, 1952년 상 암저수지 완공 등으로 갯벌은 농지로 변모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바뀌기 시작하였 다. 1)
자연환경
***그림13 상포의 당산나무
***그림 16 상포의 자전거길
상암리를 지나는 일반 지방도는 734호선, 일명 ‘인촌로’이다. 심원을 향한 상암리의 남단 초입을 가로지르는 인촌로 우측이 ‘석암신농원길’이고 좌측이 ‘원당길’이다. 인촌로가 봉암 초등학교를 만나 한 가닥의 길을 분급하니, 바로 ‘상포길’이다. 상포길 초입 좌측 능선길을 따라 해안으로 가다보면, 반월이다. 인촌로에서 석암을 지나 우측의 상암저수지를 향해 내 려가다 보면, 농원이 나온다. 이처럼 마을이 형성된 지형의 대부분은 야산이다. 야산을 깎 아서 논밭을 만들고 터전을 잡았던 곳이 상암리다. 상암리는 곰소만의 너른 간석지와 접해 있다. 제방공사 이전에는 할미당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1930년대 간척되기 이전의 상암뜰은 간석지였으며, 상포와 주섬 주변 역시 간석지였다. 상포의 북쪽 해안가는 기암절벽이다. 기암(奇巖) 위에는 오래된 팽나무와 느티나무가 서 식한다. 상포의 기암 위의 200년이 훨씬 넘는 팽나무와 느티나무 일곱 그루는 마을의 당 산나무다. 마을사람들은 지금도 당산나무를 함부로 자르면 안 좋은 일이 생긴다고 믿는다. 몇 해 전 태풍으로 나뭇가지가 끊어져 내려앉았는데, 마을에 전기 시설을 고치러 왔던 한 국전력 차가 걸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나뭇가지를 잘라내야만 했다. 이때 마을사람들 은 다른 마을사람을 불러다가 당산나뭇가지를 잘라냈다고 한다. 원당의 동쪽 등성이의 느티나무(보호수 9-14-35)는 2001년 9월 21일에 보호수로 지정 되었다. 느티나무의 수령은 362년(2013년 현재), 나무의 높이는 약 20미터, 둘레는 약 1.5미터이다. 상암리의 북쪽은 곰소만으로, 너른 갯벌이 펼쳐져 있다. 거리상 죽도, 줄포 등이 눈앞이 나, 바다와 갯벌이 가로 막고 있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갯길을 만들어 왕래하였다. 줄 포와 통하는 갯길이 근래에까지 있었다고 하니 바로 ‘수학개’다. 물이 들어오면 ‘여수해’, 물이 빠지면 수학개라 했던 갯길이 신농원 옆 수앙리 신촌(상암 리와 경계 지역임)에서 시작된다. 50여 년 전만 하여도 원당의 까침재를 넘은 사람들은 원당길과 석암길을 거쳐서 지금의 신촌 여수해에서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렸다. 줄포로 건 너가기 위해서다. 이들은 바닷물이 빠지기를 기다려 수학개를 향해 걸었다. 길은 굳은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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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푹 빠지지 않았고, 2,30여분 만에 당도한 곳은 줄포의 수학개였다. 수학개는 여수해에서 거리로는 십리가 채 안 되는 곳으로,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줄포장을 그렇게 봤던 것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수학개는 줄포 쪽에서 그렇게 불렀고 여수해는 부안면 쪽 에서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통상 이곳 사람들은 물이 들어오는 그곳을 여수해, 물이 빠진 개를 수학개라 하였던 것이다. 2)
인문환경
***그림9 원당의 전주이씨 효열비 원당의 모정 옆에는 “전주이씨지비(全州李氏之碑)”라는 효열비가 세워져 있다. 비의 주인 공은 조선후기의 자가 화근(化根)인 이홍우(李弘宇; 1876-1897)다. 통정대부를 수직한 이 홍우는 부모상을 당해서 지극정성 시묘살이를 하였다고 한다.(이영선) 상암리의 사지(절터)는 석암마을 북측 구릉에 있다. 구릉 위는 석암마을이며, 사면부는 밭이다. 이곳에서 다량의 기와편과 청자편이 수습되었다.(고창군 문화관광 홈페이지) 상암리에는 세 군데의 삼국시대 유물 산포지(散布地)가 있다. 첫째, 반월마을 남측 해발 18m의 나지막한 구릉이다. 현재 구릉의 정상부와 사면부는 밭이며, 수습된 유물로는 석착 이 있다. 둘째, 상암리와 수앙리의 경계인 반룡마을 서측 능선이다. 비교적 높은 지형으로, 정상부는 소나무 숲이다. 기지국이 설치된 하단 사면부의 밭에서 경질 타날문토기편, 개배 편 등의 유물이 다량 수습되었다. 이로 미루어 고분군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셋째, 역시 상암리와 수앙리 경계인 반룡골로, 정상부 북측 말단부는 소나무 숲이다. 출토된 유 물로는 경질 타날문토기편, 경질 토기편 등이 있다.(고창군 문화관광 홈페이지) 신농원의 천주교 신광공소는 간척사업과 관련해서 설립된 종교 시설이다. 간척을 통해 확보된 44만 6280㎡ 규모의 농지를 농토가 없는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1965년에 신 광공소가 세워졌다. 상포의 당산제는 상포의 안녕을 비는 마을의 제사이자 축제였다. 마을의 화액(禍厄)을 막 고 풍년 들기를 기원하는 당산제는 정월 보름날 오후 6시에서 12시 사이에 열린다. 마을 사람들은 당산나무 아래에다 술과 밥, 소고기, 돼지머리, 과실 등을 차려놓고 마을의 안녕 을 빌었다. 정성스레 제를 지내면 마을의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랄 거라고도 믿었다. 당 산제는 현재 마을 부녀회에서 주도하며, 제를 주관하는 이 역시 마을의 부녀회장이다. 변 화된 세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상포의 포구는 저수지 수로 끝인 현 비퉁물이 아닌, 당산나무 바로 아래다. 당산나무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돌계단이 있었으며, 돌계단 아래에는 주막과 어업조합(후포어업조합의 분 점 격)이 들어서 수산물이 활발하게 경매되었다. 당시 상포는 어업조합이 들어설 정도로 번성했던 것이다.(김용재, 박중렬) 상포의 낙파정(평풍석이 있던 자리)은 당산나무가 있는 기암 위에 있다. 낙파정에서 의성 김씨들이 시조를 읊고 놀았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김용재, 박중렬) 현재의 낙파정(정 자)은 낙파정이라고 알려진 자리의 부근으로, 2010년 9월 25일에 건립되었다. 1957년에 - 6 -
‘
’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비를 세웠는데, 비문에 ‘낙파정’이라는 지명이 나와, 이를 따
세운 정자가 ‘낙파정’이라는 것이다.(윤문규) 상암뜰을 있게 한 제방은 1936년부터 ‘할미당의 정남평’이 쌓기 시작했다고 한다.(김용 재, 박중렬) 상암저수지 또한 정남평이 축조했다는 전언이 있다. 평지형의 상암저수지는 상암뜰을 비롯하여 농원과 지섬뜸에 관개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1951년에 착공하여 1852년에 완공된 저수지의 유역 면적은 1.97㎢, 총 저수량 592.6천 ㎡, 만수면적 24㏊ 등이다. 저수지의 제방 형식은 필댐〔죤형〕이며, 취수 형식은 사통형 이다. 제방 체적은 2만 2000㎥ 길이 445m 높이 4m 등이다. 총 저수량은 592.56천t, 유 효 저수량은 591.96천t, 사수량(물리적으로 이용 불가한 저수량을 말함)은 0.6천t 등이다. 현재 한국농어촌공사 고창지사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물이 맑아 토종 붕어와 가물치 등이 서식하고 있다. ***그림12 상포의 낙파정
4. 1)
설기와 천주교 신광공소 광산김씨 입향
***그림15 상포의 상포정 상포에는 광산김씨 화평부원군(化平府院君(石堅)派 聽軒公)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광 산김씨 28세 청헌공 주만( 萬, 1632~1717)의 다섯째 아들 주(澍)의 후손들이 상포에 대 대로 거주하면서 집성촌을 이룬 것이다. 족보 등 문헌에 의하면, 27세 당계공(華後, 1602~1643)의 장남인 청헌공은 해남에서 태 어나 장성으로 이주하였으며, 만년에 고부(古阜) 부안(富安; 현 부안면 상암리)으로 옮겨 살았다. 산과 바다가 어울려 경치가 좋은 상포에서 유유자적하니 만년을 보내고자 한 것 이다. 이주 뒤에도 때때로 장성에 거주하면서 역시 자연을 벗 삼아 지냈으므로 장성사람 들은 청헌공을 일컬어 임계선생(林溪先生)이라 불렀다.(『광산김씨 고창세거와 문헌유적』) 청헌공은 갑신년(1714) 전후로 넷째아들 동호공(東湖公) 한(瀚, 1667~1743)의 부안 백 산의 거처에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때문에 동호정사에서 임종을 맞고 고부 거마리(巨 馬里; 현 부안군 백산면)에 묻히게 되었다. 따라서 청헌공의 상포 입향은 만년의 이주임을 감안할 때 대체로 17세기 후반,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 년 전이 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청헌공의 후손들 대부분의 묘소는 상암리 일대에 분포돼 있으며, 10대 이상 이곳 상포에 대대로 거주하고 있다. (『광산김씨 고창세거와 문헌유적』) 2) 할미당과 정남평, 그리고 석암의 부자들 ***그림17 할미당의 꿩터 - 7 -
농원 초입이 할미당이다. 지금은 남북으로 도로가 나, 할미당이 마치 남북으로 나누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도로 나기 이전의 할미당은 저수지 쪽까지 포함되었다. 할미당에는 정씨 형제들(정남평이라고도 함)이 터를 누르고 살았다. 참고로 할미당의 정씨 는 인근 봉암리 인촌마을의 정씨와 같은 일족이다. 인촌마을의 정씨들 가운데는 정운천(鄭 雲天) 전 농림부장관이 있다. 할미당의 정씨 형제들이 살았던 곳을 ‘원골’이라고 불렀는데, 원골은 원님골로, 벼슬을 한 정남평 때문에 연유했던 지명으로 보인다. 어쩌면 정남평의 ‘남평’이 부임지(윤문규는 전남 나주의 ‘남평’일 가능성을 제기함)일 가능성이 크다. 일제 강점기의 할미당의 원골에는 정 남평의 기와집 여섯 채가 있었고, 다수의 소작농과 머슴이 있었다고 한다. 1951년의 상암 저수지 공사도 정남평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정남평은 당대 거부였다. 뒤에 정 남평의 기와집 여섯 채는 군산의 어느 부자가 뜯어갔다고 한다. 할미당의 정남평이 살던 곳을 ‘꿩터’라고도 했는데, 꿩터 남쪽의 안산이 ‘매봉’이다. 따라 서 꿩이 알을 품을 때의 꿩터는 평온하지만 새끼가 부화된 뒤의 꿩터는 매에 의해서 풍파 가 일 수 밖에 없다, 는 속설이 있다.(김영태) 정남평의 가산이 기운 것은 한국전쟁 때라고 한다. 정씨 형제의 어느 누가 월북을 하면 서 가산이 급격히 기울었다고 한다. 즉 이념적인 이유 때문에 가산이 기울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방공사와 간척공사로 해상의 상권이 소멸됨으로써 가산이 기운 것으로 추정된다. 정남평의 소작농과 머슴들은 할미당의 꿩터를 한동안 떠나지 못하다가 정씨 성으로 변성 하여 살기도 했다고 한다. 정남평의 집에서 마름을 했던 조아무개 역시 석암에 살면서 큰 부자 행세를 하였다고 한다.(이국환, 김영태) 심원에서 석암으로 이주한 박지오는 당시 대학 나온 엘리트로, 유신 시절에 통일주체국 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인정 많기로 소문난 박지오는 한때 농사 80마지기를 짓는 부농 이었으나 정치에 뛰어들었다가 가산을 탕진해버렸다고 한다. 박지호의 아들 박주원은 안 산시장을 지낸 정치인으로, 봉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전주 영생중학교에 진학한 재원이었 다고 한다.(이국환, 김영태) 3)
신광공소
***그림11 천주교 신광공소
***그림10 천주교 신광공소 내부
‘공소’란 본당보다 작은 천주교의 단위 교회로, 주임신부가 상주하지 않은 지역 신자들의 신앙 공동체이다. 공소에서는 공소회장을 중심으로 성찬의 전례가 빠진 미사 형식의 공소 예절이 행해진다. 1961년 고창성당이 설립된 4년 뒤인 1965년에 신광공소가 설립되었다. 고창의 천주교회사에 있어서 신광공소는 역사적으로 그 의미가 크다. 주변의 안현공소 (1969년)나 심원공소(1970년), 해리공소(1985년), 용반공소(1987년) 등, 보다 앞선 시기 에 설립되었기 때문이다.(『고창성당50년사』) 석암의 신농원길 179번지에 위치한 신광공소의 설립 배경에는 1961년 부안본당 지정환 (池正煥, 디디에) 신부의 원조 사업과 관련이 있다. ‘가톨릭 원조회’의 주선으로 식량난을 - 8 -
진안의 농민 30여 세대가 상암리의 주섬 인근으로 이주하여 간척사업을 전개한 것이 그 시작이다. 간척사업을 주도한 지정환 신부가 과로로 얻은 지병으로 귀국한 이후에 후 임 김영구(베드로) 신부가 그 뒤를 이었다. 당시에 간척으로 30정보(99,000㎥)의 농지를 만들었으나 염해로 농사를 짓지 못했고, 이주했던 가구 대부분은 이곳 주섬을 등졌다. (『고창성당50년사』) 고창본당 2대 주임 배영근(요셉) 신부는 주섬 인근에서 당시 진안과 임실, 부안 등지의 식량난을 겪는 농민 50여 명과 함께 ‘가톨릭 구제회’의 원조 기금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간척사업을 시작하니, 당시에 간척된 토지는 45정보(445,000㎥)에 달하였다. 간척을 하면 서 정착촌이 형성되니 바로 ‘신농원’이다. 신농원은 천주교의 신앙 공동체나 마찬가지였다. 현 공소 건물 바로 아래의 ‘총무댁’을 중심으로 7가구가 신부를 모시고서 공소 예절을 바치는 등 신앙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다. 간척 농지를 분배하는 과정에서 인근 주민들과의 합의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천주교에 입 적한 신자들에게는 4필지(2,400평)의 땅을 무상으로 분배한다는 분양 원칙이 적용되면서, 주섬 일대는 천주교 신앙 공동체로 바뀌어갔던 것이다. 그러면서 간척지 분배 문제는 순 조롭게 해결되었다.(『고창성당50년사』) 신농원의 신앙 공동체는 1980년 2월에 현 공소 건물(신광공소)을 신축하였고, 신축한 공 소가 비좁을 정도로 당시에 많은 신자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공소 건물의 크기는 59.92㎥, 주변으로 임야가 6,059㎥ 정도 된다. 건물 벽은 벽돌이며 지붕은 슬레이트이다. 공소의 초대 회장은 소강섭, 이어 이종원, 김병섭, 이영자 등으로 이 어졌다. 근래에 이농으로 신자가 줄면서 공소는 폐쇄된 상태다. 최근에 공소 건물은 전주 교구청과 협의하여 보존한 뒤에 향후 용도에 대한 계획을 수립할 것이라고 한다.(『고창성 당50년사』, 김동환) ***그림19 일제 강점기...
5. 1)
***그림20 조선시대의 고부군...
종교와 조직 종교
상암리의 종교 시설은 대부분 개신교회로, 상암교회, 봉암교회, 에덴중앙기도원, 그리고 반월의 화목교회 등이다. 상포길 4번의 기독교 대한성결교회 ‘상암교회’는 1975년에 설립하였으나, 설립자에 대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1대 목사 임봉교를 시작으로 김진수, 김효선, 오정기에 이어 현재 차신호 목사가 목회를 주도하고 있다. 성도 수는 35명, 주일학교 6명, 청소년부 6명 등 소 규모이나, ‘지역 섬김’을 내세운다. 대도시의 큰 교회와 협력하여 농활을 비롯해서 한방, 양방, 이미용 등을 활용한 지역 봉사가 활발히 펼쳐지고 있다. 또한 성탄절 헌금 전액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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돕기에 쓰이는 것도 상암교회의 특징이다. 농원길 85번의 대한예수교 장로회(합동) ‘
’는 평양이 고향인 농원의 김명식 장로
(2013년 작고)가 1953년 7월 15일에 설립하였다. 한국전쟁 직후 피난민의 터전이었던 농 원의 원장 김명식이 북장로교 소속 선교단체로부터 받은 구호품으로 마을에서 선교 및 봉 사 활동을 벌였고, 한때 신도 3백여 명일 정도로 부흥했다. 부흥기의 봉암교회 영향으로 상암교회와 수앙교회 등이 설립되었고, 선운교회가 개척되었다.(백선기) 현 교회당은 1973 년 8월에 건립되었으며, 50여 명의 신도와 백선기 목사는 노인들의 입․퇴원 봉사활동을 벌 이면서 어린이주일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반월의 대한예수교 장로회(합동개혁) ‘화목교회’는 공직에서 은퇴한 박수진 목사가 설립 하였다. 반월의 농가에서 조용히 기도 생활을 하다가 우연찮게 종탑을 올리면서 사목하게 되었다는 화목교회는 현재 신도가 12명이다. 박목사는 주로 노인 신도들의 입․퇴원을 돕고 있다. 이 밖에도 석암의 대한예수교 장로회(대신) ‘에덴중앙기도원’은 정신지체장애우 10 명을 보살피고 있다. 논산에서 사목하던 김정자 목사가 이곳에 내려 온 지 17년 째. 현재 김정자 목사는 신도 20여 명과 함께 장애우들을 도우며 사목하고 있다. ***그림3 상암교회
***그림21 상암리의 역사에 해박한...
2) 상암리의 조직과 산업 상포마을은 1900년대 전반까지 어판장과 어업조합이 있을 정도로 수산업이 발달했으나, 지금은 조개 채취 또는 패류 양식을 하거나 농사를 짓고 있다. 복분자, 오디, 고추 등의 밭농사와 논농사, 그리고 축산 등에 종사한다. 상암리에는 대규모 축산농장이 두 군데 있 으며, 석암의 ‘고창황토배기 단호박 영농조합법인’은 단호박의 가공, 판매를 목적으로 한 영농조합이다. 고창 황토배기 단호박은 농협중앙회 공동브랜드인 ‘뜨라네’ 상표를 획득하 기도 하였으며, 비가림 하우스에서 재배된 까닭에 당도가 매우 높다. 반월마을 주민들은 조개와 새우잡이를 주 업으로 했으나, 지금은 양식업을 하는 사람들 이 늘고 있다. 상포에는 어촌계(어촌계장은 전 이장 윤문규)가 있어, 굴을 채취하고 바지 락과 모시조개 등의 어패류를 양식하고, 판매를 주도한다. 이외 5,6군데의 대하 양식장이 있다. 농원 사람들이 공동으로 1950년대에 설립한 봉암정미소(현재 주인은 주병만)는 당시의 시설 그대로를 간직한 채 지금도 미곡 처리를 하고 있다. ***그림22 농원의 봉암정미소...
***그림23 농원의 봉암정미소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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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름
이장
새마을지도자
노인회장
석암리
이일헌
김영태
엄규석
농원리
이경우
고광영
주병만
신농원리
손만순
홍순옥
상포리
김유수
서창운
윤송규
반월리
이막동
김성길
김광원
표 1. 2013년 12월 20일. 부안면사무소에서 제공.
<
주신 분> (70세, 석암)
이도연(51세, 석암)
김용소(77세, 상포)
윤문규(59세, 상포)
이길재(70세, 원당)
임동주(72세, 원당)
김용재(80세, 상포)
박중렬(80세, 상포)
이국환(63세, 석암)
김영태(73세, 석암)
이일헌(69세, 석암) 이경우(70세, 농원)
주병만(77세, 농원)
김동환(신촌)
이영선(80세, 흥덕 야동)
백선기(56세, 봉암교회)
김정자(62세, 에덴중앙기도원)
차신호(47세, 상암교회)
박수진(66세, 화목교회)
<참고 문헌> •『한국지명총람-전북편』11(한글학회, 1981) •『우리조상 뿌리찾기, 광산김씨 고창세거와 문헌유적』(백원철 외, 도서출판 기역, 2013) •『모양성의 얼』(고창군, 1982) • 유재영,『전북전래지명총람』(민음사, 1993) •『고창의 마을유래』(고창문화원, 2003) •『문화유적분포지도-고창군』(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고창군, 2005) •『고창군 행정지도』(고창군, 2007) •「행정구역 일람표」(고창군 기획관리실, 2008) •『한국의 마을제당』5 전라북도 편(국립민속박물관, 2001) •『고창군지』(고창군지편찬위원회, 1992) •『전주교구사』(천주교 전주교구청, 1998) •『고창성당50년사』(천주교 전주교구 고창성당, 2010) • 고창군(http://www.gochang.go.kr/) • 부안면사무소 • 농업기반시설관리(http://rims.ekr.or.kr/) • 농촌용수종합정보시스템(http://rawris.ek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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