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지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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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곡천의 범람이 가져다 준 풍요로운 땅, 법지리 - 신림면 법지리서동진(고창문화연구회)

법지리는 자연마을로는 강변, 관동, 법동, 새터, 서법, 정촌, 통정마을이 있다. 서법마을은 법지 동쪽마을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명명되었다. 방장산과 서 산(소요산, 선운산, 구황봉, 비학산에서 화시봉까지)이 바라보는 가운데에 자리 잡 은 법지리는 넓은 들과 야산이 많아 농경시대의 풍요로움을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으나, 관동마을은 야산으로 둘러싸여있어 전혀 다른 정서를 나타내고 있다.

1. 법지리의 역사와 개관 신림면(新林面)은 삼한시대에는 마한 땅으로 모로비리국에 속(屬)하였으며 삼국 시대에는 백제국의 상칠현(上漆縣)에 속하였고, 통일신라 때인 경덕왕 16년(서기 757년)에 개명(改名)된 상칠현의 속지였다. 고려시대 초기에 고을이름이 장덕(章德)으로 바뀌면서 이곳은 면남(面南)의 땅이 었고, 충선왕 원년(서기1308년)에 창덕(昌德)으로 고을 이름이 다시 고쳐지면서 남 면에 해당 되었다. 창왕이 즉위(서기1389년)하면서 고을 이름이 지금의 흥덕(興德) 으로 또 다시 바뀌면서 역시 남면으로 그대로 이어졌다. 조선조 세조 원년(서기 1455년) 지방방위조직 개편 이후에도 중기에 이르도록 남 면에 그대로 속하였다.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 남면의 땅은 인구의 증가로 인하여 일남면(一南面)과 이남면(二南面)으로 분면 되었다. 일남면은 29리, 이남면은 38리 로 구한말까지 이어졌는데 일남면의 소재지는 임리(林里)에, 이남면의 소재지는 신 평리(新平里)에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3월 1일 부군통폐합령(府郡統廢合令)에 의하여 무장군과 흥 덕군이 고창군에 병합되면서 일남면과 이남면이 폐합하여 신림면, 이남면의 소재지 인 신평리와 일남면의 소재지인 임리의 글자를 따서 신림이라 하고 면을 설치하였 다. 이후 1935년 행정구역의 변경에 의해 벽사면의 부송리, 벽송리, 법지리의 3개 리가 편입되었다.

2. 법지리의 자연 환경과 지명 백두산 장군봉에서 출발한 백두대간은 호남정맥을 이루고 호남정맥 세제에서 분기 한 영산기맥은 고창군의 진산 방장산을 기봉한다. 방장산 소갈재에서 분기한 변산 지맥에 자리한 신림면 법지리는 북동쪽으로 흥덕면의 송암리, 서쪽은 갈곡천을 사 이에 두고 부안면 상등리, 남서쪽은 벽송리, 남쪽은 부송리, 자포리 북쪽은 사천 리, 동쪽은 무림리와 접하고 있다. 북쪽과 동쪽은 낮은 언덕 지형으로 높은 산이 없는 구릉지대이고, 서쪽은 갈곡천 안으로는 넓은 평야지대이며 넘어 로는 이곳 사 - 1 -


람들이 서산이라고 부르는 소요산과 선운산, 구황봉, 비학산에서 화시봉까지가 있 다.

법지리는 동쪽과 남쪽은 높은 산지가, 북서쪽은 낮은 구릉이 발달해 있다. 방

장산(734m)과 방문산(630m) 일대에서 발원한 갈곡천, 고부천 등이 북동류한다. 법지리는 마을 뒤에는 변산지맥의 야산과 마을 앞에는 갈곡천의 범람으로 만든 넓은 들녘이 발달해 있고, 인근에는 서해안 고속도로와 국도 23호가 인접해 있어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각호교(却虎橋) : 경리 전 법지리 앞 동출서류하는 냇가에는 각호교, 중다리목, 방 아다리가 있었다. 특히 각호교는 호랑이를 물리치는 다리로 지어진 이름. 강변-동(江邊洞) : 서법지 끝자락에 있는 갱변-뜸 또는 강변-뜸(江邊- 뜸). 개-방죽 : 법지동 동북쪽에 있는 비가 와야 물이 고이는 방죽. 갱변-뜸 : 법지동 서남쪽 냇가에 있는 강변 뜸 또는 강변동. 갱상-굴 : 관동과 법지동 사이에 있는 논과 밭을 가리킴. 게살등 : 경리 전에는 법지리 앞쪽으로 동출서류하는 냇가가 있었다. 여기에는 시 냇보, 독보, 구랫보가 있었다. 늦가을쯤에는 참게가 칠산 바다에서 올라왔다. 이때 마을에서는 대나무로 울타리모양의 살을 만들어 참게를 잡곤 했다. 냇가 곳곳에 게 가 많이 잡히는 게살 등이 있었음. 관-동(冠洞) : 대추-동 북서쪽에 있는 마을. 대추-동 : 상뜸 또는 대추 - 정이를 가리킴. 돌무랭이-시암 : 동법지 앞들 자락에 있는 ‘새터시암’은 마을 주민들의 식수였으 나 경지정리 때 마을 앞길 확장공사로 법지리길로 변했음. 동-법(東法) : 서법지 동쪽에 있는 마을. 딧-골 : 법지동 뒤에 있는 들로 경지 면적 약 6,000평정도 똥뫼 : 동법지에서 보면 서남쪽으로 약 500m거리에 있는 돌산을 가리킨다. 이 돌산 을 다른 마을 사람들은 ‘독뫼’라고 부른다고 하나, 법지리 사람들은 이‘돌산’ 을‘똥뫼’라고 부른다고 한다. 아마도 법지의 풍수적 형국이 와우(臥牛)형상을 하 고 있어서 이렇게 부르는 듯함. 법-동(法洞) : 서법지 동쪽에 있는 마을로 법지(法止), 법지-동(法止洞)을 가리킴. 상-뜸(대추정이, 상촌, 대추등) : 법지동에서 가장 위쪽에 있는 마을. 대추나무 정 자가 있었음. 삼부락재 : 장승백이에서 서쪽으로 100m 지점에 사거리가 나온다. 이 길이 바로 여 러 마을로 통하는 길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 같음. 서-법(西法) : 동법지 서쪽에 있는 마을로 강변뜸과 관동에 걸쳐 있음. 새-터[돌무랭이] : 점촌 서쪽에 새로 된 마을로 모롱이에 돌이 많았음. 생사초(生蛇礎) : 서법지 끝자락에서 서남쪽으로 100m지점에 작은 소나무 숲을 가 리킨다. 경리정리 이전에는 생사초를 따라 흐르는 수로 양옆에 나무가 심어져 있었 다. 이 풍경을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소의 꼬리 같기도 하고, 뱀이 힘차게 움직이 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뱀이 똥뫼를 바라보고 막 쫓아가는 형국이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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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등(점촌) : 법지 어귀에 있는 마을로 옹기점이 있었음. 정나무-배기 : 정남-정이 또는 하뜸. 중-뜸(동법, 중촌) : 법지 동쪽에 있는 마을 또는 상뜸과 하뜸의 중간이 됨. 찰방-못 : 법지동 서쪽에 있는 들. 경지 면적 약 6마지기 되는데, 찰방이 살았다고 하며 기와 조각이 많이 나왔다고 함. 참샘 : 삼부락재에서 북쪽으로 300m 지점에 참샘이 있었다. 이 샘은 동법지에 있었 던 돌무랭이 시암과 서법지의 통시암에 원류(源流)였다. 이 참샘은 법지리의 모든 행사에 앞서 마음을 모아 굿과 제사를 지냈다. 그 다음 마을훈과 함께 [상경하애 (上敬下愛)·상부상조(相扶相助)·전통문화계승(傳統 文化의 繼承發展)] 정신으로 주민전체가 마을행사를 이어갔음. 통-시암(우물): 법지동 안에 있는 우물로 바닥에 깔린 바위가 마치 둥그렇게 갈라 진 나무통 밑바닥 같은 그 틈에서 물이 새어나와 맛이 좋았으나 지금은 상수도 공 급으로 사용하지 않고 방치되어 있음. 통시암-거리(통정리) : 법지동 가운데에 있는 마을. 하-뜸(정나무배기, 하촌, 정남정이) : 법지동 가장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전에 큰 정자나무가 있었다고 함.

3. 법지마을의 설기(設基)와 입향(入鄕) 신림면 소재지에서 서북간으로 약 1.5㎞거리에 있는 법지리는 설기연대기 1600년 경에 최초로 고령李씨가 정착한 것으로 전해 오고 있으나, 흥덕현의 토족(土族)인 고흥유씨, 동복오씨, 장흥고씨의 사우(祠宇)가 유지(遺址)로 전해지고 있다. 예전에는 광산김씨(光山金氏)와 고부이씨(古阜李氏)가 주 성받이로 동법지와 서 법지에 살아 왔으나, 지금은 다양한 성씨들이 들어와 세거하고 있다. 사람이 처음 으로 살기 시작한 지역은 관동마을회관에서 서남쪽으로 100m 지점에 범(虎)형국 혹 은 와우형국(臥牛形局)이라 불리는 지형(地形)에서 기와장과 집터자리가 지속적으 로 발견되고 있다. 이를 통해 이곳에서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고 주민들은 주장하 고 있다. 뿐만 아니라 관동마을회관에서 서북쪽으로 500m 지점에 기와막이라는 주 막집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서도 많은 기와장과 집터가 발견되고 있다. 기와막 주막집에서 서북쪽으로 부안면 얄미장터가 있고, 남동쪽으로 휘어 돌아가 면 법지리 마을 3개의 당산과 삼부락재를 지나 장승백이 쪽에 당도한다. 지금도 장 승백이에서 보면 고창, 흥덕, 신림 방향으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다. 이곳에서 서쪽 으로는 삼부락재를 지나 관동마을로 가는 길과 남동쪽으로는 돌무랭이와 돌무랭이 - 시암이 있고, 그릇을 굽는 점-등(점촌, 정촌)이 상뜸, 중뜸, 하뜸으로 마을을 형 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 법지의 광산김씨 입향과 유래 광산김씨 삼회공은 29세인 김대(金濧, 1661 ~ 1732)를 일컬으며 최초로 신림 법지리에 이주 한 인물이다. 본 삼회공파는 여말선초에 고창에 입향한 전리판서공파와 계보를 달리한다. 곧 11세인 金位를 중시조로 하는 바, 그 선계를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 3 -


11세

12세

13세

14세

15세

16세

17세

光世

鏡亮

周鼎

石堅

(門下平章事)

(文肅公)

墓開豊

墓開豊

(尙書令)

18세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祖衎

師武

自庸

仲謙

(판도판서)

(전한)

(성균좨주)

<墓宝城>

<墓寶城>

<墓寶城>

<墓長興>

(승지)

(현감)

(참봉)

(참봉)

25세

26세

澤南

<墓寶城>

<참봉>

(진사) (장흥거주)

式南

호 남계

27세

28세

29세

30세

31세

華佑

<墓海南> (진사)

華俊

冑萬

(해남거주)

(棠溪公)

<墓扶安>

호 추포

<墓長城> (현감)

冑恒

震雄

延壽

<墓大山>

(三悔堂)

<墓新林>

<墓新林>

華伯

冑錫

<墓興德>

夏雄

생원

<墓長城>

九雄

冑寬

濟雄

<墓長城>

위 삼해공의 선세조(先世祖)는 11세 위(位)로부터 17세 수(粹)까지는 고려 왕조에서 벼 슬하였다. 18세 조간(祖衎)부터는 조선 왕조의 벼슬에 나아가 27세 당계공 화준(1602-1644) 까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묘소의 경우에도 고려조에 벼슬한 경우는 개성, 개풍 등 왕도 주변에 위치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말선초의 시기에 걸쳐 생존하였던 17세 수(粹)로부터 20세 사무(師武)까지는 묘 소의 위치가 족보에 기록되지 않은 채, 21세 호(瑚, 1390~1452)에 이르러 보성(寶城)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여말의 어지러운 정국에 어떤 연유로 남하(南下)한 것으로 추정되는 바, 이 이후를 밝혀주는 기록이 있다. 곧 21세 호(瑚)에 이르러서 조선왕조에서 문과급제하고 승지에 올랐는데, 뒤에 벼슬을 내놓 고 장흥의 괴정(槐亭)으로 이사하였다고 한다.1) 이어 25세 정(珽, 1527~1613)까지 장흥에 거주하였음이 확인된다. 그리고 26세 식남(式南)의 묘소는 해남에, 27세 화준(華俊)은 장성 에 있음을 족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28세 주항(冑恒 1635~1669)에 이르러는 무장 장사산면(현 고창군 대산면) 갈마곡에 있음이 확인된다. 공의 배위(配位)가 이곳 갈마리의 나주 오씨임을 감안하면, 아마도 공이 결혼으로 인하여 해남에서 이곳 갈마리에 입향한 것 이라 보인다. 따라서 광산김씨 삼회공파의 고창 입향은 삼회공의 부친인 28세 주항에서 비 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1)

28세 구이공(久而公) 주항(1635~1669)은 결혼하여 무장 갈마리 처

법산재 [南溪遺稿] 南溪公 家狀 : “高祖諱瑚 入我朝 文科承旨 解官遂家于長興之槐亭” 승지공의 남하 는 계유정난(1453: 세조의 왕위찬탈)의 조짐이 있자, 이를 피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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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서 아들을 낳으니 곧 29세 삼회공 대(濧)이다. 삼회공은 외가에서 성장하여 청년기가 되었을 때, 외가를 떠나 신림면 법지리에 이주하였다. 이후 후손이 지금까지 대를 이어 거 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삼회공의 생몰연대(1661~1732)를 고려하면, 대략 10대 300년 이상 집성촌을 이루며 거주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2) 법지의 고부이씨 입향과 유래 시조 이경조(李敬祖)은 고려 문종 때의 인물로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고 시호는 문헌공(文憲公)이다. 이경조는 고려(高麗) 문종(文宗) 때 최충(崔沖)이 설립한 사 학(私學)의 효시인 구제학당(九齊學堂)에서 공부하였고,1065년(문종 19년) 문과에 급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올랐다. 1071년(문종 25년) 김제(金悌)와 함께 서장관(書狀官)으로 송나라에 다녀왔고 문종~숙종에 이르 기까지 5왕을 섬긴 공으로 추충보정공신(推忠輔靖功臣)이 되어 여산군(礪山君)에 봉해지고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에 이르렀다. 후손들이 시조의 고향인 고부를 본관으로 하였다. 그러나 1928년 무진보를 만들 때 고부의 옛 이름인 영주(瀛州)를 본관으로 하여 영주이씨로 한적이 있었으나, 1968년 무신보에서는 다시 고부이씨로 통일하였다. 법지리의 고부이씨의 입향은 영조 때 유용(생몰미상)이다. 입향 유래 는 소성면 흑암리에서 세거하다가 비옥한 농토가 있는 법지리에 입향 10世를 세거 하고 있다. 입향 세조계는 26世 유룡 -덕린 - 성복 - 기문 - 철신 - 영모 -병도 시훈 - 종하 - 만수 - 상엽이다.

4. 법지의 풍습과 이야기 1) 마을의 유래이야기 강변마을은 법지동 서남쪽 냇가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명명되었고, 강변마을은 법지동 서남쪽 냇가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명명되었다. 정촌마을은 옹기정이 있었 던 것에서 연유하여 명명되었고, 서법마을은 법지동마을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 명 명되었다. 법지마을 지명과 유래는 400년전 홍덕면계에 법줄마을로 되어 있었다. 이 마을은 무성한 숲으로 둘러 있어서 호랑이의 피해가 심하여 마을을 떠나는 사람 이 늘어갔다. 마침 이곳을 지나는 도사가 (法)字는 佛家에서 호랑이라는 뜻이고, (茁)字는 숲이 무성하다는 뜻이니 茁(줄)字를 止(지)字로 고쳐 부르면 피해를 면한 다고 하여 [村名]을 개칭한 후부터 피해가 없어졌다고 한다. 2) 법지의 당산제 당산(堂山)은 신역(神域)에 설치한 마을의 수호신을 형상화한 것으로 여기에 제 사를 올려 부락의 재앙을 물리치고 풍년과 복을 비는 동제신앙(洞祭信仰)의 유적 (遺蹟)이다. 또한 당산은 이정표와 경계표시 몫까지 하였으며 성역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마한시대에도 당산이 있어 죄지은 자가 이곳에 들어가면 잡지 못했다는 기 록이 있다. 선사시대 주거지에서 출토된 청동제기에 그려진 당산과 솟대 그림은 이 런 사실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러니까 당산은 자그만치 2천 5백년 이상의 전통 - 5 -


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산은 일반적으로 당산나무(堂山樹)와 당산석으로 당산석을 쌓아 올리고 그 위 에 신주를 세워두는 누석단(屢石壇)과 당집(宇)으로 이루어지나 고창 지방에는 당 산나무와 당산석간(竿)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법지리에는 장승백이와 할아버지 할 머니 그리고 그 자녀에 해당하는 당산이 3개가 있다. 장승백이 자리에는 신림초등학교와 신림교회, 동법지의 동쪽마을 그리고 마을길 과 국도 23번이 확장되면서 구전으로만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할아버지당산은 상 뜸에 있고, 그 자녀에 해당하는 당산은 서법지 서쪽끝자락에 위치해 있으나, 할머 니당산은 마을 앞 동법지길 밖에 있던 것을 마을 안 법지마을회관 옆으로 옮겨져 있다. 그 이유는 법지리에 살았던 주민들의 유서 깊은 관습과 신앙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농경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환경과 인간의 삶 밖에서 존재하는 생사화 복(生死禍福)이 당산으로 시작되고 귀결된다고 하는 민속신앙인 것이다. 당산(堂 山)은 신역(神域)에 설치한 마을의 수호신을 형상화한 것으로 여기에 제사를 올려 부락의 재앙을 물리치고 풍년과 복을 비는 동제신앙(洞祭信仰)의 유적(遺蹟)이기 때문이다. 법지리의 당산제는 정월 보름날과 또는 마을 자치위원회에서 결정한 날에 마을훈 과 함께 [상경하애(上敬下愛) · 상부상조(相扶相助) · 전통문화계승(傳統 文化의 繼承發展)] 정신으로 주민전체가 마음을 모아 당산제와 앵막이 굿 행사가 있다. 당산제와 앵막이 굿 행사가 결정되면 동네마다 굿 칠 준비를 하기위해 악기를 수 리하고 종이에 물을 들여서 정성스럽게 나팔꽃 모양으로 종이를 접어 고깔을 만들 고 막걸리 한 동이를 놓고 굿을 어르는 소리들이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법지마을 무사와 풍년을 기원하는 촌제 행사로 법지 농악단원이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액막이 굿이 열린다. 3) 법지리의 들독 : 법지리의 들독은 마을 앞 드넓은 들녘과 함께 모정 앞 정자나 무 옆에 잘 보존되어 있다. 이 들독은 120년전 이 마을에 사는 천산 댁이 치마폭으 로 살짝 안아 다가 지금의 자리에 갖다 놓았다고 한다. 특히 법지리 사람들은 이 들독의 무게에 따라 같은 무게끼리 맞추어 품앗이와 품삯을 정했던 것으로 전해진 다. 다른 지역의 유래를 살펴보면, 들독은 농경시대에의 논농사와 깊은 관련을 맺 는 놀이로 지금도 마을마다 들독이 남아 있는 곳이 많다. 들독이란 무거운 돌을 말 하며, 마을의 청장년들이 가끔 힘자랑을 하기 위해 들어보는 관습에서 유래했다. 정자나무 옆에 들독을 두어 힘자랑을 하면서 마을두레패의 총각대장을 뽑거나 신입 례(新入禮:두레패에 들어가는 입회식)를 행하기도 했다. 충청남도 대전지방의 경 우 마을마다 2~3개의 다양한 무게의 들독이 준비되어 있다. 전라남도 보성군에 전 승되는 사례를 보면 매년 정월 보름을 기해 여러 마을이 윤번제로 정성껏 제수를 장만하여 온 마을 사람이 모인 가운데 제주·축관(祝官)·헌관(獻官) 등이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당제를 지낸다. 당제가 끝나면 들독 놀이를 하는데, 청장 년들이 참가하여 들독을 안아 들어 어깨 너머로 넘기는 놀이이다. 이때 넘기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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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은 1~2명에 불과하며 1명 이상일 때는 2~3회 계속 들어 승부를 가름한다. 장원이 선발되면 황소를 타고 농악을 곁들여 온 마을 사람이 함께 당산을 돌며 가무가 한 바탕 벌어진다. 이러한 풍습은 전통시대에 마을 청장년들이 건강한 신체를 자랑하 고자 했던 소박한 뜻에서 발전해온 것으로 보인다. 4) 일부(一婦)에 이서(二婿), 중매비 협잡으로 혼인날 대소동 : 고창군 고창면 내 동리 일백이십번디 윤상팔은 그녀 동생 윤족간(15세)을 그 이종되는 동군 신림면 반룡리에 사는 뎡운채(鄭雲彩)의 중매로 동면 가평리에 사는 전운경의 둘째 아들 전복길(25세)과 혼수비 륙십원을 밧고 혼인을 뎡하엿섯는데 중매를 한 뎡운채는 중 매비 못얻어 먹는 것을 한으로 생각하야 한 수단을 생각하고 벽사면 법지리에서 남 의 고용사리하는 김백술(25세)을 꾀여 현금 칠십팔원을 밧기로하고 뎡운채는 윤상 팔을 차저가 이왕 뎡한 혼인은 파하고 김백술과 혼인을 하라고 권하엿스나 윤상팔 은 듯지 안코 지난달 십륙일에 혼인연을 하려 하얏는데 이 일을 안 김백술은 자긔 가 약혼한 여자니 자긔도 장가를 든다고 신부집에를 자저와 먼저 온 신랑편과 싸홈 이 이러낫스나 강약이 부동하야 김백술의 일행은 그날밤으로 쫒겨나서 즉시 뎡운채 집으로 차저가니 뎡운채는 어듸로 다러낫슴으로 뎡운채 어머니를 위협한 결과 열다 섯살된 뎡운채의 누의를 대신주기로 하엿다더라.(동아일보, 1925년 3월 16일) 5) 리효부의 단지 : 전북 고창군 벽사면 법지리 김영구(金永久)는 수년간 병으로 신고하든 중 지난 십이일 절명 상태 중 씨의 당 자부 리이경(李以卿)이는 애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단지(斷指)까지 하여 선혈을 시부에게 올인 결과 회생하여 유언까지 하고 세 시간 후에 별세하엿다는데 일반인사는 리효부의 칭송을 마지아니 한담니다.(동아일보, 1925년 5월 15일) 6) 고창 신설교 양면 중앙지(中央地)에 : 고창군 본년도 신설공립보통학교위치에 대하여 문제 중이든바 벽사․신림 양면에서 건축비 3천원을 담당하고 운동을 맹렬히 함으로 군당국에서도 우양면에 결정하고 위치는 양면 중앙인 벽사면 법지리에 정할 리하더라.(동아일보, 1925년 5월 9일) 7) 신군향토방문, 고창후원회조직 : 누보와 여히 이등비행사신용인(愼鏞寅)씨의 고 국방문 중 향토인 고창방문은 십사일경인데 착륙장은 동군 벽사면 법지리(구평월 리)로 확정하고 착륙에 대한 환영준비를 구체적으로 하기 위하여 거삼일하오삼시에 동군청회의실에서 군내유지회를 개최하고 장시간 토의한 결과 경비는 이천원으로 정하고 입장권 십전권 이만일천매와 우대권삼백매를 발부하되 학생은 무료관람케하 고 착륙장소인 평월리와 고창읍내특별직행자동차임금은 이십전에서 삼십전까지 각 영업소와 교섭키로 하엿다더라. 8) 오종상과 고해진의 쌍둥이네 이야기 : 오종상(51)과 고해진(41)(슈마고 마리페 인)은 한국과 필리핀의 국제가정이다. 결혼당시 어머니를 모시고 신혼살림을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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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지금은 쌍둥이 오민정(12)과 오미정(12), 그리고 오현정(11)의 세 딸을 키우 고 있다. 오종상은 관동마을 리장과 중장비사업을 하고 있고, 고해진은 고창군청에 서 영어 통역사로 근무하고 있다. 지난 2012년 오민정과 오미정은 [2012 전국다문화가족 어울림콘테스트]에서‘한 국문화와 필리핀문화 대화’의 주제로‘대상’을 수상하였으며, [2012 고창선운사 꽃무릇] 백일장대회에서 오민정은‘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오민정과 오미정 그 리고 오현정은 판소리와 가야금을 배우고 있다. 9) 유택진씨와 손순자여사의 이야기 : 유택진(62)씨와

손순자(62)여사는 31년 전

3남 1녀를 데리고 서법지마을에 정착했다. 그 이후 명록(40), 병록(37), 상록(35) 3형제는‘농고’를 졸업하고 법지리에 정착하여 논농사, 밭농사, 축산업, 정미소까 지 글로벌농촌을 만들어가고 있다. 3형제는 결혼하여 명록은 아들2 딸2, 병록은 아 들1 딸1, 상록은 딸2 아들1을 두고 있고. 이웃집에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이 사를 와서 살고 있다.

5. 마을의 문화유적과 인물 1) 문화유적 법산재 : 30여 년 전에 삼부락재에서 남쪽으로 50m 지점에 광산김씨들이 제실을 지 었다. 법지리에 최초로 입향한 광산김씨 시조는 흥광, 파조는 석견이다. 입향유래 는 장성군 북이면에서 성내로 래거(來居)하였다가 광활한 평야지를 찾아 법지리에 입향하여 13世를 세거하고 있다. 입향세조계는 28세 위항 - 대 - 진웅 - 연수 - 석 명 - 찬원 - 채모 - 윤환 - 대현 -영채 - 천채 - 용덕 -도중이다. 이 후손들이 각 양 각지에서 성금을 모아 매년 한가위에 모여 법산제(法山祭)를 지내고 있다. 벽사면 면사무소터 : 서법지의 김은주(용호)집자리에 벽사면 면사무소자리였다고 함. 벽사면 지소 : 동법지의 신용채의 방앗간자리에 벽사면 지소자리였다고 함. 창효사-터(彰孝祠-): 중뜸과 하뜸 사이에 있는 창효사의 터로 성종 25년(1493)에 사당을 세웠는데, 고종 5년(1868)에 철폐되었다가 1928년 3월에 신림면 외화리로 옮기고, 그 터에 흥덕현의 토족(土族)인 고흥유씨, 동복오씨, 장흥고씨의 사자(祠 字)와 함께 유허비만 세움. 창효사는 성종 때 효행으로 이름이 알려진 감천 오준(1444~1494)과 오시정을 제향 하는 사우이다. 오준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는데, 그의 효정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오준의 효성에 감동한 하늘이 시묘살이 하던 자리 옆에 갑자기 벼락을 쳐서 청수가 솟으니 이를 효감천이라 하고, 벌레가 댓잎에 창효라 새기니, 사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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름을 창효사라 했다고 한다. 창효사는 1494년에 처음 세워졌다. 원래 이 사우는 정문과 효감천이 있는 고창군 신림면 외화리에 세워져 유혜원, 유필원 등과 함께 배향되었다. 1748년(영조 24)에 는 고창군 신림면 법지리로 옮겨져 1868년(고종 5) 사우가 철폐될 때까지 이곳에서 모셔졌다. 이후 창효사는 1894년 오준의 묘, 정문, 효감천이 있는 현재 위치로 다 시 이건하였다. 오랜 세월에 건물이 퇴락하여 2008년 동복오씨 문중에서 재건하고 동년 11월 12일에 준공하였다. 2) 마을의 인물 김영춘(金永春) : 동법지 출신으로 3대 신림면장(1951. 4. 14 ~ 1955. 9. 14)을 지 냈다. 김정수(金正洙) : 동법지 출신으로 9대 신림면장(1970. 10. 26 ~ 1976. 3. 5)을 지 냈다. 이이영 : 1979년 2월생으로 현 부산지방법원 판사로 고창초, 고창여중․고,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49회 사법시험 합격하였다. 이이영 판사는 이종길씨와 왕강희 여사의 3녀 1남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김백수(金百洙) : 서법지 출신으로 1대 신림면장(1946. 11. 3 ~ 1948. 5. 5)을 지 냈다. 이석구(李錫九) : 서법지 출신으로 6대(1965.6. 29 ~ 8. 16)와 8대 신림면장(1965. 5. 11 ~ 1970. 10. 25)을 지냈다. 김용원 : 1대~ 2대 고창도의원(1991. 3. 26 ~ 1998. 6. 1)를 지냈으며, 직업은 수 의사로 신민당 고창지구당부위원장을 역임했다.

6. 법지마을의 기관과 시설 신림면 서북부에 위치한 법지리는 신림면 면 소재지에서 서북간으로 약 1.5㎞ 지 점에 위치한다. 법지리는 원래 특별한 구분 없이 상뜸, 중뜸, 하뜸으로 부르며 지 내오다가 1995년경에 동법지와 서법지마을로 행정구역이 나누어 졌다. 이 마을들은 지평선을 이룬 들녘을 바라보고 있으나 관동마을은 서쪽을 향해 놓여 있는 소쿠리 모양의 산자락 안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마을 주변으로는 과수원과 양계장, 축 산, 각종 수목원과 밭작물이 한가로운 전원마을 같다. 법지리의 크기는 2.56㎢, 그 가운데 답이 2.23㎢이고, 그 나머지가 과수원, 임야 기타이다. 법지리의 가구수는 102세대이며 남자 99명, 여자 111명이 살고 있다. 법 지리의 공동이용시설로는 마을회관 2곳, 목욕탕 1곳, 경로당 2곳, 모정 3곳, 창고 2곳, 농기계보관소, 1곳, 체력 단련실 및 법지장수촌수련관 1곳이 있다. 북으로는 흥덕면과 남으로는 고창을 잇는 국도23번과 지금의 서해안고속도로의 선 운 IC가 3㎞ 지점에 리(里)도와 농(農)도가 사방으로 함께 있어 법지리가 옛날부터 신림면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다고 본다. 즉, 신림초등학교, 신림교회, 휴게소, 방앗간 2개, 부홍양만장, 축산농장, 양계장 등이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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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법지 마을회관 : 서법지 마을모정 : 동법지 마을회관 : 동법지 마을모정 : 관동마을회관 : 관동마을모정 : 법지목욕탕 : 농기계보관소 : 체력 단련실 및 법지장수촌수련관 : 고창농원 : 신림면 법지리에 있는 양계장(011-676-3541)으로 김욱태가 대표이다. 관동마을 북서쪽 700m 거리에, 건평 5,000평에 50,000마리의 닭들을 기르고 있었 다. 인상적인 것은 외지인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이 농장으로 가는 길을 따로 만들어서 이용하고 있었다. 이 농장은 몇 번 주인이 갈리기도 했으나 30년의 전통 을 가지고 있다. 축산농장 : 관동과 법지마을사이 구릉진 골에는 홍성대와 유명록씨의 축산 2농가가 소 400여 마리를 사육하고 있고, 유병록씨도 다소 떨어진 곳에 축산업을 하고 있었 다. 부홍양만장 : 법지리 92번지에 있는 민물장어 양식장(561-2555~6)이다. 신림휴게소와 신림기공사 : 신림휴게소와 신림기공사는 법지리에서 남쪽으로 국도 23번을 따라 1㎞지점에, 평월리 다리옆에서 주관영사장이 운영하는 영업장이다. 국 도 23번이 확장되기 이전에는 번성하였으나 지금은 폐업상태라고 한다. 방앗간 : 장승백이 쪽에 ‘신흥정미소’와 동법지에 ‘법지정미소’가 있다. 옛날 에는 법지마을에 2개의 물레방앗간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경지정리 이전에 일이 다. 법지리에서 남쪽으로 자포리 다리가 있다. 그쪽에 물레방앗간이 있었다고 하 고, 서법지 끝자락쯤에 물레방앗간이 있었다고 한다.(오종상) 신림교회 :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의 기독교이며, 신림면 법지리 산22-1에 있다. 본 교회는 천길영목사가 목회를 하고 있으며, 교육관과 교회 및 사택이 있다. 연락처는 교육관 070-7762-7591, 목사 010-7551-7591, 사택 063-562-4193 등이 있 다. 교회 카페는 http://caje.daum.net/gcsrchurch이다. 신림초등학교 : 고창군 신림면 법지리에 있는 공립초등학교이다. 1928년 5월 28일 벽신보통학교로 개교하였으며 1950년 4월 10일 신림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 1955년 4월 1일 가평분교장을 설치하였으며 1981년 3월 1일 병설유치원을 개원하였다. - 10 -


1988년 3월 1일 특수학급을 설치, 2003년 12월 5일 디지털 도서관을 개관하였다. 교목은 향나무, 교화는 백일홍이다. 유치원 1학급과 초등 7학급(특수학급 1학급)으 로 편성되어있으며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법지리 산31번지에 있다.

7. 법지리의 세대주 1)동법지의 세대주 세대주 김기남1 김순덕1 김영희2 남해자1 신중재1 이종남2 이효순1 정남진2 천길영4 황미순2

세대주 김건진1 김순임1 강대삼2 박현효1 송복임1 이종욱4 오재남2 정민규2 최석구4 허경순2

세대주 김수완2 김용섭3 고광애1 박경록2 이종길2 이유정1 임종분2 정종철2 최효열1

세대주 김삼차2 김익중1 고순례1 박영선2 이동연1 이연이1 유귀례1 조봉순1 최필순1

세대주 김성복3 김완식2 곽혜진2 송근숙1 이동남3 이춘심2 윤상조1 정태옥2 한창교3

세대주 김병옥2 김영일3 김진휴2 라승호2 박명자1 이승철3 이종훈3 조윤호1 황연님1

세대주 김봉님1 김영섭1 김진숙1 문덕열3 신길순1 이순동1 이삼녀1 전영자3

세대주 김수남2 김영호1 김정숙1 박익빈1 유택진3 이운선3 정남석2 채연식2

2) 서법지의 세대주 세대주 김근호2 김시원3 김재수2 김태규2 박영철3 유희열5 이종갑3 진성수2 채금순1

세대주 김병용2 김영규2 김종희8 노희일2 박태수1 이강희2 이종역6 조용태2 황영종2

3)관동마을의 세대주 세대주

세대주

세대주

세대주

세대주

김봉순2

김양수2

김재호1

박귀례2

박막래1

박윤철1

송소덕1

신홍종2

오종상5

오원봉2

이경식3

이재현2

이숙자1

유인순1

전순금1

정성진1

천찬옥3

천서영1

채재선2

홍성대4

4) 법지리 인구 현황 - 11 -


마을명 동법지 서법지 관

연도 2003년

세대 43

총인구 100

남 51

여 49

2011년 2003년

48 60

83 163

42 84

41 79

2011년 2003년

51 19

116 53

56 23

60 30

2011년

17

37

17

20

5) 법지리 연령별 인구 현황 마을별 동법지 서법지 관 동

10세

20세

30세

연령별(2011년) 40세 50세 60세

70세

70세

이하

이하 3 9 4

이하 9 7 4

이하 6 6 4

이하 13 11 3

이상 24 54 7

2

이하 6 8 5

이하 21 19 10

계 83 116 37

6) 법지리 조직 현황 마을별 동법지 서법지 관 동

마을 조직체(2011년) 새마을 지도자 한창교 노희일 홍성대

이장 이종남 채연식 오종상

부녀회장 유성례 전만순 유점례

7) 법지마을 역대이장 현황 법지마을 역대이장 2000~2001 2002~2003 2004~2005 2006~2007 2008~2009 2010~2011 2012~현재 동법지 채연식 채연식 채연식 이종남 이종남 이종남 이종남 서법지 김병옥 김병옥 김병옥 채연식 채연식 채연식 채연식 관 동 신상호 신상호 오종상 오종상 오종상 오종상 오종상 마을별

도움을 주신 분 이종길(법지리 자치위원장) 왕강희(법지리 자치위원장) 김병용(서법지개발위원장) 이종남(동법지이장) 채연식(서법지이장) 오종상(관동이장) 진성수(전 법지이장) 유영묵(신림면장) 이기화(전 고창문화원장) 김용원(전 도의원) 이동남(?? 마을) 김시원(?? 마을) 오재남(?? 마을) - 12 -


김수환(?? 마을) 김진휴(?? 마을) 노희일(?? 마을)

참고문헌 『고창군의 지석묘』, 군산대학교, 2009. 『광산김씨 고창세거와 문헌․유적』, 고창문화연구회, 2012. 『고창군지』, 고창군지편찬위원회, 2009. 『고창군문화유적분포도』, 원광대학교, 2005. 『고창농악을 지켜온 사람들의 삶과 예술세계』, 고창농악보존회, 나무한그루, 2010.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2003. 『고창 성씨의 입향유래』, 고창문화원, 2007. 『통계연보』,고창군, 2008. 『牟陽城의 얼』, 고창군, 2009. 전북전래지명총람』유재영, 민음사, 1993. 『행정구역 일람표』,고창군 기획관리실, 2008. 『한국지명총람11 전북편』, 한글학회, 1981. 동아일보, 1927년 5월 9일. 동아일보, 1927년 5월 15일.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 http://www.gochang.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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