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산리 1. 마을의 위치와 유래 옥산리는 무장면의 남동부에 있다. 2014년 3월 현재 면적은 6.13km²로 밭 2.08km², 논 1.28km²이며, 총 137가구에 275명[남 136명, 여 139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옥산리는 마을의 산세가 구슬처럼 생겼으므로 옥산(玉山)이라 하였다. ◎ 마을의 지도
1918년 1:5만 고창지형도
(1)신월마을 원래는 반월이었는데 신월로 바뀜 면소재지의 동남방향 734 지방도 따라 5km 우(右)츳 마을 1500여년경 영양(潁陽)千氏, 海州吳氏, 新安朱氏, 蔚山金氏등이 설기한 마을이다. 동으로 月峰山 남으로 土城山또는 新城山 있고 중간에 반달모양의 터에 자리를 잡 았다하여 마을이름이 반월이라고 부르다가 이후 신성산의 “新”자와 월봉산의 “月” 자를 합하여 신월이라 개칭하였다는 유래가 있다. 전해오는 마을의 지명은 통으로 학교를 세우려 했다는 “문골”(文谷). 남쪽은 숯을 구웠던 “숯덩이”, 작대기로 파서 방죽을 만들었다는 “짝대방죽”,
선녀가 내려와 춤을 추었다는 “무등골”, 땅을 파면
모래만 나왔다는 “모래골”, 사방이 밭으로 둘러싸여 가운데 둥근 달처럼 놓여 있어 물을 담으면 물이 새는 곳이 없는 논으로, 이곳은 추수를 하고 비가 와서 물이 차 면 저수지인줄 알고 낚시꾼들이 모인다는 곳이기도 한 “달뱀이”, 묘자리 명당이 많 은 “명당골”이 있고 북쪽으로 과거에 장승이 서 있었다는 “장승백이”, 신원마을과 대산마을을 이어주는 안산(태뫼산) 골짜기 마을 “태목골” 등의 옛 지명이 주위를 이루고 있다. 주성씨는 영양 천씨, 해주 오씨, 신안 주씨이다. (2) 월봉마을 면 소재지에서 동남방향 794지방도 따라 左측으로 5km 위치 1700여년경 密陽朴氏들이 입향 설기한 마을이다. 현재는 박씨들은 마을을 다 떠 났고 다양한 타성 박이들이 살고 있다. 半月등이라는 마을 뒤에 동산이 있는데 달 이 뜨면 밝게 비친다하여 달“月”자와 마을 뒤의 봉우리 “峰”자를 합하여 월봉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유래가 있다. 또 월봉은 원래 전터였다고 한다. 그래서 한때는 아 이가 많이 생산이 되지 않아 독자가 많았다는 설도 있다. 옥산리에서는 가장 규모 가 작은 마을이지만 현재는 젊은 층들이 중심이 되어 수박, 참깨, 호박등 하우스 특 작물 해서 부농으로 거듭나고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성씨로는 진주정씨 수원백씨 낭주최씨 김해김씨 광산김씨등이 거주하고 있다. 그 옆 죽림마을은 2가구가 남아있 다. 서남쪽 산중턱에 200여평 정도의 넓은 바위가 있는데 “치마바위”라고 부르는 유래도 있다 (3)대산마을 면소재지에서 동남방향 734 지방도 4km 위치 토산(兎山). 대산(大山)으로 풍수형국은 토끼형국이다. 1600여년경 梁氏가 입향 설기한 마을이다. 그 후 경주김씨가 입거하자 양씨등은 이거하였고 慶州金氏가 번창하여 成村이 되었다. 풍수상 뒷산을 兎山形局으로 토산 이라 불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대산이라 개편하여 지금에 이른다. 6.25이전에는 무장면에서 최고 부촌이었는데 6.25 피해가 가장 심해 쇠락했다고
한다. 대산마을 사람들은 경주 김가로 구성이 되어있고 타성받이들은 살지 못하고 나간 다고 한다. 현재도 타성받이로 차씨와 장씨가 있는데 마을안으로 들어와 살지 못하 고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집들에서 살고 있다. 주성씨는 慶州金氏와 仁東孫氏이다. (4)가라(加羅)마을 면소재지의 동남방향 734지방도에서 3km위치 원래 마을명칭은 가라실이었는데 가라로 바뀌었다. 풍수형국은 나성체로 개형국으로 전해오고 있다. 1500여년경 “낡은 터”라는 지역에 살던 密陽朴氏가 입향 설기한 마을이다. 선조 의 묘소등은 남아 있으나 그 후손들은 이거하고 없다. 1653년경 金海金氏가 입거 하였고 1753년경은 심원지방에서 淸州韓氏가 입거하였다. 같은 무렵 高氏, 崔氏등 도 입거하였으나 다 이거하고 없다. 현재는 김해김씨. 청주한씨. 光山金氏, 茂松庾 氏, 濟州高氏, 郎州崔氏, 晋州鄭氏 등이 새로 입거 살고 있다. 마을이 성처럼 둘러싸 여 羅城體라 하였고 행정구역개편에 가라실을 가라리로 부르고 있다. 가구수는 농업34가구 비농가구는 없고 총34가구이고 인구는 남자45명 여자41명 총 86명이 살고 있다. 주성씨는 김해김씨와 청주한씨이다. 회관앞에 가라마을 사람들이 만든 가라마을의 역사에 대한 비문인 가라마을 헌성비 가 세워져 있다. 고적, 유지는 고인돌 2기가 있다. 고인돌로 추정되는 바위 2개가 마을 뒤에 있다. 2. 마을의 자연환경 (1)자연부락 대산 - 옥산동 남쪽에 있는 마을 가라 - 옥산동 동북쪽에 있는 마을 신월 - 월봉 서남쪽에 있는 마을 월봉 - 월봉산 밑에 있는 마을 옥산동 - 옥산리 백암 - 신월과 죽림 사이에 있는 마을. 절터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죽림 - 월봉 남쪽에 있는 마을. 대숲이 무성하다. 반월등 - 반월등 아래에 있는 마을 (2) 마을의 산과 골짜기 월봉산 - 옥산동 동쪽에 있는 산. 높이 112.3m 지형이 반월 형국이라 한다 구댕잇불 - 고양이(괭이) 귀처럼 생겼다해서 구댕잇불이라는 명칭이 나왔다고 한
다. 월봉 북쪽에 있던 산등성이를 말하는데 현재는 덕림 저수지로 침수되었다. 반월등 - 죽림과 월봉 사이에 있는 등성이 지형이 반월 형국으로 되어 있다. 참시암뫼 - 죽림 남쪽에 있는 산. 안산 - 대산마을 앞산 비산등 - 가라마을에 있는 작은 산등성이 큰 나무들이 많이 있어 동네사람들의 휴식처이다. 득남을 한 사람들이 모여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칠석날이나 유두날 득남주를 내고 동네 잔치를 하였던 곳이라 고 한다. (3) 방죽과 샘 참시암 - 참시암뫼 아래에 있는 샘이었는데 덕림저수지로 침수되었다. 물이 빠지 면 샘이 보인다고 한다. 두렁시암 - 월봉 서쪽에 있는 샘. 전에는 물이 잘 안 나와 노름꾼이 들어가서 노 름을 하는 소리가 두런두런 들렸다 함. 지금은 물이 잘나고 맛이 좋다. 큰샘 - 가라마을에 있는 샘. 현재 보존되어 있음 개샘 - 가라 마을에 있는 샘. 물이 많이 나오고 물맛도 좋았으나 새마을 사업으로 묻힘 옥산저수지 - 옥산동 동북쪽(가라실)에 있는 저수지. 1942년 만들었다. 몽리 면적은 396,694.22m²(40정보)이다. ※몽리구역 - 저수지. 보 따위의 수리 시설에 의하여 물이 들어와 농사에 혜택을 입는 구역을 말한다. 신월전제 - 신월마을 앞 방죽 신월후제 - 신월마을 뒷 방죽 신월교 - 신월과 대산. 가라를 이어주는 다리 돌다리(독다리)- 새마을 사업으로 묻힘. 묻히기 전까지는 가라마을 사람들이 독다 리를 건너야 만이 큰샘의 물을 길어다 먹었다고 한다. (4) 마을의 들 솔논 - 솔대배미 옆에 있는 논 솔대 배미 - 월봉 동쪽에 있는 논 면적 3마지기인데 박씨네의 솟대가 서 있었음 큰매 - 월봉 남쪽에 있는 논 가라 마을에 넷건네, 소래동, 고재기, 한사동골, 낡은태. 뒷제, 건덩굴 등의 많은 논이 분포하고 있다. 대산마을- 방아들, 파랑들, 평상들, 부목골, 절앞논 당산나무 - 가라마을에 있는 나무인데 나무 아래 달걀모양의 큰 돌이 있어 일명 ‘들독’이라 하였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이 일을 하다 쉬는 휴식처인데 이곳에서 들 독을 서로 들어보면서 힘자랑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5) 치마바위(馳馬岩) 월봉산 남쪽 중턱에 있는 큰 바위. 200여평 정도의 넓은 바위 이다. 희게 보여 백암이라고도 한다. 바위 위에 말 발자국이 나 있는데 예전에 장군이 말을 달렸다고 한다. 이 바위는 옥산리 월봉산과 장성에 있는 고산 중간에 있었는데 이 바위를 놓고 두 지역 간에 싸움이 벌어졌는데 장성의 고산 장군이 패배하여 월봉산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바람이 불면 비단치마가 나부끼는 형태로 영광의 북문에서 보였다고 한다. 영광의 부인네들이 이 바위를 보면 실성해 나가니 영광군에서 흙을 메꾸고 뒤에 나 무를 심었다는 설도 있다. 동네 어르신들의 초등학교 시절 소풍 장소였다고 한다. 바위로 들어가는 입구에 ‘장군의 문’이라는 작은 바위가 있다. 현재는 산에 우거져 있는 나무들로 엉켜서 방치되어 있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말 발굽도 마멸되어 보이지 않는다. 마을의 역사 흔적으로 고창군이나 문화원 등에서 표지판이라도 세워놓고 보존을 했으면 한다.
3. 마을의 인문환경 1) 시대별 특징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에 속하는 법정리로 무장면 남동부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말기 무장군 백석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 111호에 따라 가라(加羅)·대산(垈山)·죽림(竹林)·신월(新月)·송정·덕림 각 일부. 대제 면 성동 일부를 병합하여 옥산리라 하고 고창군 석곡면에 편입하였고. 1935년 3월 1일 도령 제1호에 따라 무장면에 편입하였다. 현재 신월리·가라리·대산리·월봉리 4개의 행정리와 신월·월봉·죽림·대산·가라실 등 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졌다. 죽림은 월봉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 대숲이 무성하 여 붙인 이름이다. 신월은 월봉 서남쪽에, 월봉은 월봉산 밑에 있는 마을이다. 2) 마을의 인구와 성씨 (1) 마을의 성씨 옥산리 마을의 입향조는 다음과 같다. 신월의 潁陽千氏 海州吳氏 新安朱氏, 蔚山金 氏 대산의 慶州金氏와 仁東孫氏 ,월봉의 晋州鄭氏 水原白氏 郎州崔氏 金海金氏 光 山金氏, 가라의 金海金氏와 淸州韓씨 등이 있다.
성씨별 분포 마을별
울산
경주
김해
광산
나주
진주
청주
낭주
신안
영양
기
김씨
김씨
김씨
김씨
오씨
정씨
한씨
최씨
주씨
천씨
타
대산 신월
30
1
12
5
가라
9
월봉
4
1
5
5 1
5
6 1
3
1 2
13 9 3
◎ 세거성씨 ○ 경주김씨 시조는 명종(鳴鐘)이고 파조는 良輔 입향조인 鼎業이 1663년 무장면 대산리로 입 향하였다. 파주 昭寧園에서 영조 생모 숙빈 최씨 표를 쓰기 위해 기존의 경주김씨 일가의 선 대표 5기를 破棄함에 후손인 鼎業, 鼎蘭 형제가 피하여 무장면 대산리에 정착하여 13대를 세거하고 있다. 입향세손으로는 정업(鼎業)-자태(自兌)-만경(萬慶)-한택(漢澤)-성주(成柱)-노종(魯 宗)-팔희(八喜)-상준(商俊)-권제(權濟)-동섭(東燮)-방환(方煥)-기봉(基封)-만호(萬 鎬)가 있다. ○ 울산김씨 시조는 德摯, 파조는 達源 입향조 질(耋)이 중종대에 무장면 신월리로 입향하였다. 시조 20대손으로 중종초에 장성군 황룡면 맥동리에서 은거지를 찾아 무장면 신월 리로 입향하여 15대를 세거하고 있다. 입향세손으로는 질(耋)-인혼(麟渾)-종칠(從七)-남훈(南勳)-형만(亨萬)-세하(世夏)운서(運瑞)-혼현(渾賢)-수조(守祖)-방식(邦植)-중휴(仲休)-일환(日煥)-요철(堯哲)영중(領中)-방수(昉洙) 가 있다. 울산김씨(蔚山金氏) 시조 김덕지(金德摯)는 신라 경순왕의 아홉째 아들로 고려 태 조에게 신라를 양위할 때 힘을 다하여 말리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행적을 감추었 다고 한다. 14세손인 김환(金環)은 고려 시대에 벼슬이 삼중대광 영도첨의사에 이 르렀고 울산(蔚山) 학성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울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입향경위를 보면 김덕지의 20대손이자 김달원(金達源)의 증손인 신월파(新月派) 파 조 김길(金耋)[1484~?]이 조용한 곳을 찾아 무장면 옥산리 신월에 정착하였다. 손 암공파(孫庵公派) 파조 김달근(金達根)의 7대손인 김형하(金亨夏)[1632~1698]가 흥덕 사람들의 초빙으로 훈장으로 와서 흥덕면 오호리(五湖里)에 정착하였다.
계파(季派) 파조 김달기(金達技)의 9대손이자 오천공(鰲川公) 김경수(金景壽)의 5 대손인 김수륜(金守倫([1729~1789]이 처가인 성내면 양계리 내토(內兎) 전주이씨 이시열(李時說)의 집으로 이거하면서 정착하였다. 중조 학성군 김환의 17대손이자 문정공파 파조 김인후(金麟厚)의 6대손인 김택휴(金宅休)[1797~1844]가 농사짓기 에 좋은 땅을 찾아 흥덕면 동사리에 입향하였고, 아들 김순환(金舜煥)·김상환(金商 煥)·김창환(金昌煥) 삼형제가 금반옥호(金盤玉壺)의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아산면 반암리(盤岩里)로 옮겨 왔다. 현황은 2009년 현재 문정공파 김택휴의 후손들이 아 산면 반암리에. 계파 김수륜의 후손들이 성내면 양계리 내토에 9대째, 손암공파 김 형하의 후손들이 흥덕면 오호리에 11대째, 신월파 김질의 후손들이 무장면 옥산리 신월과 심원면 각시산 자락에 15대째 세거하고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 면 군내(郡內)에 120가구에 280명이 거주하고 있다. ○ 청주한씨 청주한씨는 고려 개국벽상공신(高麗開國上功臣) 한란(韓蘭)을 시조로 하고 한팽 로·한의철·한동악·한광후·한형리를 입향조로 하는 전라북도 고창군 세거 성씨이다. 청주한씨 입향경위를 보면 고창군 입향조 한팽로(韓彭老)는 고부군수를 지낸 중 시조 한계복(韓季復) 6대손이자 파조 청주부원군(淸州府院君) 한창(韓昌)의 5대손으 로 전라남도 영광에서 태어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난을 피하여 성송면 암치리로 옮겨와 정착하였다. 한의철(韓義哲)은 중시조 청성군(淸城君) 한승순(韓承舜)의 10 대손이자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파조 한 장손(韓長孫)의 8대손으로 1670년(현종 11) 부안면 용현(龍峴)에서 태어났다. 1700년(숙종26)후학을 가르치고자 심원면 연 화리(蓮花里)와 무장면 목우리(牧牛里), 무장면 옥산리 가라(加羅)를 내왕하다가 무 장면 옥산리 가라에 정착하였다. 한동악(한동악)은 중시조 한승순의 14대손이자 파조 한계희(韓繼禧)의 11대손으로 1727년(영조3) 전라남도 담양에서 태어났다. 가세가 기울어지가 아버지 한진유(韓 晉有)를 모시고 성내면 낙산(洛山)으로 들어와 주경야독하여 문과(文科)에 급제하였 다. 벼슬길에 나아가 예조정랑(禮曹正郞)과 대정현감(大靜縣監)을 지내고 청백리(淸 白吏)에 뽑혔다. 한광후(韓光侯)는 파조 한명회(韓明會)의 13대손으로 1774년(영조50) 전라남도 담 양군 대전면(大田面)에서 태어나 공음면 장곡리(壯谷里)에 정착하였다. 사옥(士玉) 한형리(韓亨履)는 1857년(철종8) 흥덕면 후포리 대촌(大村)에서 태어나 심원면 두 어리(斗於里)로 이거하였다. 고창군 청주한씨의 현황은 현재 한팽로의 후손들이 성 송면 암치리에 세거하고 있다. 한동악의 후손들이 성내면 산림리에. 한동악의 형 한 동로(韓東老)의 후손들이 성내면 낙산에 세거하고 있다. 한형리의 후손들이 공음면 장곡리 원동(院洞), 신평(新坪) 등지에 살고 있다. 한형리의 후손들이 심원면 두어리 에 세거하고 있다.
(2) 마을의 인구 옥산리 세대와 인구 마을명
년도
세대
총인구
남
여
2003년
34
72
30
42
2013년
38
81
36
45
2003년
39
103
46
57
2013년
50
97
49
48
2003년
34
86
45
41
2013년
36
62
31
31
2003년
15
25
27
52
2013년
13
35
20
15
신월
대산
가라
월봉
옥산리 마을의 인구와 세대는 2003년에 비해 세대수가 증가하였는데 이는 귀농 자가 증가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가라마을은 인구수가 가장 많이 줄어들었는데 원인은 자연감소가 아닌 이농으로 감소가 되었다. 60세 이상의 노년층 인구가 80% 이상을 차지하고 청장년층 및 유소년층은 10%도 안되는 실정이다. 신월마을의 경 우 고등학생 1명 초등학생 1명 유치원생 2명이 있고 다른 마을들은 아이들이 거의 없는 상태이다. 장수하신 분은 대산마을의 94세 이양금 어르신과 신월마을의 92세 박형우, 김요 봉 어르신이 살아계신다. 그리고 옥산리 마을에는 다문화 가정이 2세대가 있다. 하나는 신월마을의 김병채 와 베트남에서 온 찬씨 부부이다. 찬씨는 한국에 온지 10여년이 지나 한국말도 능 숙하게 하고 농촌생활에 적응하면서 3남매를 잘 키우고 있다. 또 하나는 대산마을 의 김해진과 중국에서 온 송성애 부부가 살고 있다. 이들은 수도권에서 귀농하여 딸 하나를 낳고 시설재배를 하면서 많은 수익을 올리며 살아가고 있다. 옥산리는 월봉마을의 축산업 1가구를 제외하고는 논과 밭이 많아 거의 농업에 종 사하고 있다. 특히 옥산리 농업의 특징은 하우스를 이용한 시설농업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노년인구가 많아 기존의 전통적인 방법의 농사는 지을 수가 없어 소수지만 장년층이 중심이 되어 수박, 메론 그리고 채소류 등의 시설농작물을 재배 하여 농가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특히 월봉마을은 옥산리에서는 가장 작은 마을이 지만 농가 소득에 있어서는 무장면에서 최고 높은 마을이라고 한다. 그리고 청정지 역인 옥산리에는 노동집약형 산업인 죽염을 만드는 산업시설이 있어 마을 사람들 일자리 창출에 한 몫을 하고 있다.
◎ 삼보죽염 ‘진실만을 추구하는 깨끗한 마음, 전통의 맥을 이어가는 혼이 깃든 장인정신’의 슬 로건으로 올바른 식품문화를 위해 제품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하며 자신들이 곧 깨 끗하고 투명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삼보죽염 김인석 대표이사를 만났다. 황토가마에서 9차례 구워야 탄생되는 삼보죽염은 지난 1993년 태성식품(삼보죽 염) 주식회사로 법인을 설립하여 1996년 고창군 무장면 옥산리에 새 공장을 세웠 다. 원래 부안군 출신인 김인석 대표이사님은 개암사 효산 스님으로부터 기술을 전 수 받고 자연과 사람을 생각하면서 죽염을 생산하려는 마음을 굳히고 공장설립 부 지를 보러 다니던 중 부안 인근 지역인 고창지역을 다니다 해리에 공장을 설립하였 다. 그러나 그곳이 마땅치 않아 다시 부지를 물색하던 중 주변이 깨끗하고 무 밭만 있는 청정지역인 현 옥산리 마을에서 제조업을 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무슨 인연인지 김인석 대표의 아버님 속명이 옥산이어서 더욱 이곳이 애착이 간다고 한다. 김인석 대표 이사는 1999년 10월부터는 죽염 분야 최초 무형문화재(죽염제조장 제23호)인 효산 스님의 기술 전수 지도로 황토가마에서 토종 소나무만을 이용해서 전통 방식 그대로 자죽염(紫竹鹽)을 생산하고 있다. 효산 스님과의 인연은 우연이 아닌 좌절과 실패 끝에 만나 김 대표가 무형문화재 전수자로 지정되게 되었다. 이 후 2002년에는 유명 브랜드상 수상, 2003년에는 전라북도 최고 명품 지정, 2006 년에는 자죽염 제조방법 및 장치 발명특허등록을 받아 명실상부한 죽염의 최고봉에 오르게 된다. 또한 2009년에는 대한민국 신 성장 동력 우수기업에 선정되었고, 2010년에는 “자죽염 약침이 항암제 시스프라틴에 의해 발병되는 청각장애를 개선 한다”는 논문을 SCI국제 논문에 게재되었다. 그리고 2011년 복분자자죽염의 제조 방법 특허 등록(특허 제 10-1079852호)을 하였다. 2012년 5월에는 진피추출물 및 죽염을 포함하는 알러지 비염의 예방 또는 치료용 의약조성물, 의약부외품 및 건강 기능식품으로 특허출원했다. <죽염 만드는 과정> 죽염은 우리 민족의 전통 민방요법의 하나로, 역사적 전통과 독창성에 있어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 문화재적 가치로 볼 때 매우 귀중한 문화유산 이다. 아울러 천혜의 입지조건을 두루 갖춘 고창 무장면 옥산리에서 세계 최고의 명품 자죽염을 생산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자연과 하나 되기 위해 모든 임 직원이 노력하고 있다. 특히 2004년 자죽염의 약리학적 효과에 대해 SCI에 등재된 권위 있는 국제 의학학술지에 2편의 논문이 게재되면서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었다. 우리 전통식품인 죽염의 기능에 대해 세계가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쉴 새 없이 연구하고 노력하는 김인석 대표는 대한자죽염연구회와 한국능률협회 경영인증원의 환경경영시스템 규격 인증을 통하여 죽염의 과학적 검증을 위한 지속 적인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자죽염이란, 글자 뜻이 말하듯 보랏빛에 가까우면
서 약간의 붉은 색깔을 띠는 죽염을 말하며, 1천 500℃ 이상의 높은 고온에서 탄생 되는 고 순도의 죽염으로, 그 맛과 향이 깊고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황토가마에 서 구워낸 덩어리로 된 죽염을 가루로 만들어 다시 대나무에 넣어 굽게 되는데, 이 런 단계를 8번 반복하고 나서 맨 나중 아홉 번째 고온에서 용융된 죽염이 바로 자 죽염이다. 아홉 번 굽게 되면 붉은 죽염이 용암처럼 흘러내려 결정체가 되는데, 이 죽염을 잘게 부수면 비로소 공정이 마무리되어 환상적인 자죽염을 얻게 된다. 이는 산성화된 현대인들의 체질을 강알칼리인 자죽염을 섭취해 약알칼리 건강체질로 만 들어주는 기능성 식품이라고 한다. 그리고 9번의 과정 속에 한번이라도 빠뜨리면 자죽염을 얻지 못한다고 한. 우리 조상들의 숨은 지혜도 신비롭고 과학적이라 할 수 잇다. 현재 중국 등 세계 시장에 납품되고 있으며, 국내의 LG 생활건강, 롯데백 화점 명품관, 노원백화점, 하이리빙, 그리고 신세계 백화점 SSG푸드마켓 청담점, 마 린시티점 입점하였고 현대홈쇼핑에 김인석 대표가 직접 출연하여 고객 대만족으로 이어지고 있다. 1989년에 죽염과 인연을 맺어온 그는 죽염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 하여 그 효능에 푹 빠지게 되었으며 ‘바이(BUY) 전북’ 상품에 선정되는 쾌거를 올 리게 된다. BUY 전북 상품선정위원회는 작년 하반기에 접수된 75개 상품을 7차례 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정했다. 바이전북상품이란, 품질이 우수하고 성장 가능성 이 높은 상품을 선정하여 세계 최고로 성장할 수 이도록 홍보 및 판축 등을 체계적 으로 지원하며 일류 브랜드로 만들어가는 사업이다. 성공한 사람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하나같이 투철한 직업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다. 그리고 무서운 집념과 근성이 성공의 길로 이끈다고 한다. 진인사대천명(盡人 事待天命)의 자세로 기다림과 어울림, 그리고 정성까지 담는 김인석 대표는 모든 인 류에게 소금의 역할과 죽염사랑이 넘치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지속적인 연구를 통하여 전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하기 위해 다져 넣기, 가마 쌓기를 반복하고 있다. (3) 마을의 조직 마을
마을조직체 이장
부녀회장
신월마을
김상훈
박현숙
대산마을
김기주
김정녀
가라마을
김영종
한정순
월봉마을
최행수
정정순
3) 마을의 유적지 (1) 옥산리 유물 분포지 1(무장면 옥산리 1228-9) 시대는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 시대의 것으로 추정됨 송림 마을을 지나 200m정도가면 조사 지역이 나온다. 동서로 넓게 흐르는 능선에 서 남측을 뻗어내린 가지능선으로 해발 41m의 저평한 지형을 이룬다. 구릉의 남측 은 옥산저수지가 위치하며 동,서측은 상전리 들이라 불리는 곡간이 형성되어 있다. 정상부에는 소로가 나있으며 사면부는 개간이 되어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수습된 유물은 옹관편, 경질 포기편등이다. (2) 옥산리 유물 분포지 2(무장면 옥산리 산 33) 옥산리 옥산저수지의 서측을 끼고 남-북으로 흐르는 구릉에 위치한다. 구릉은 해 발 51m의 저평한 능선으로 하단부는 곡간의 논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사면은 목초 지와 일부 송림으로 되어 있다. 정상부에는 민가1채와 이어지는 소로가 나 있다. 대체로 삭평이 심하게 이루어진 상태로 교란이 심한 편이다. 광범위하게 산재해 있 는 경질토기편과 경질타날문토기편 등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3) 월봉 마을에 고인돌2기가 있다. 고인돌로 추정되는 바위2개가 마을 뒤에 있다. (4) 신월마을 신안 주씨 선산 뒤에 대형 고인돌 1기가 있다 4) 마을의 풍습 가라마을에는 지금도 촌중계(위친계)가 60 여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위친계는 부모의 초상 따위를 당했을 때 서로 도움을 주기 위하여 조직한 계를 말 한다. 이 모임은 친목도 있지만 주목적은 초상을 당했을 때 서로 도와서 장례를 치루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지금이야 장례식장에서 초상을 치루니까 필요를 느끼지 못하지 만 예전에는 초상을 치루는 일이 아주 중요하고 큰일이었다. 마을에 사는 이웃끼리 서로 협조하고 서로 위로 하자는 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장례식장에 서 다 하기 때문에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그래도 이제까지 이웃으로 살아 온 정이 있는데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같이 가야한다는 주장에 힘이 쏠려 지금까지 유지를 해오고 있다고 한다. 유사를 정해놓고 동짓날 마을회관에 모여 계를 하고 있다. 5) 마을의 인물 ◎ 정백현(鄭伯賢 1869~1920) 그의 자는 백현이고 호는 약봉(藥峰)이다. 동학의 법호는 진암(眞菴)이고 휘는 근영(根永)이며 관향은 진주이다. 고종 6년(己已) 10월 23일 고창군 와공면(瓦孔面) 예전리 상례(上禮)마을(현 高
敞郡 孔音面 禮田里)에서 월재(月齋) 정만원(鄭萬源)과 순천(順天)박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기질이 명민하여 집안의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며 특히 부친 월재가 생부 종우(鍾佑)의 계하를 벗어나 아들 없는 당숙 종 현(鍾顯)의 양자로 정해져 있던 터라 성장하기까지 백현은 주변의 세심한 배려 하에 건장하게 자랄 수 있었다. 여덟 살 때인 1876년 4월부터 와공면 군유리(群儒里)에 사는 집안 숙부 죽사 (竹史) 정학원(鄭學源)의 문하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때 그 유명한 「오랑캐」 시를 거침없이 읊었으니 벌써 상당한 수준의 학식과 분별력을 갖춘 것으로 여겨지며 이후 청년기에 이를 때까지 과거 준비에 희망을 두고 몰두하였다. 영특한 재기와 재빠른 동작으로 항상 무리 중에 중심자리를 지켜 장차 선비가 행해야 할 도리를 스스로 찾아 깨닫고 제반 일을 챙겨냈다고 한다. 스무 살이 되던 1888년(고종 25) 고창군 대아면(大雅面) 남촌(南村 : 현 雅山面 木洞里)에 사는 야헌(野軒) 나길순(羅吉淳)의 넷째 딸 성녀(姓女)와 결혼하였는데 신부의 나이가 세 살 위인 스물세 살이었다. 그해 섣달에 장남 시묵(始黙)이 태어나 가문의 번영과 화평을 누리며 부족함이 없는 삶이었다. 시묵은 갑오년에 태어난 동생과 함께 어린 나이에 전쟁의 와중에 휩싸였지만 연좌제(緣坐制) 그 물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배경의 연줄이 있었기에 멸문의 화를 면했다고 한다. 그는 25세 때인 1893년(고종 30) 8월부터 손화중(孫華仲) 접주의 연계로 은밀 하게 동학농민혁명 모의에 가담이 된다. 봉기 이전부터 핵심세력과 내통하였고 그가 이주해 와서 살았던 굴정동(屈井洞 : 현 孔音面 新垈里 九井마을)이 천안전 씨 백헌공(柏軒公=文孝公)파 후손들의 세거지가 되고 있어 이곳을 자주 찾는 전 봉준 장군과는 일찍이 의기가 투합되었고, 손화중 접주와 이 마을 전씨 문중의 천거로 농민군 지도부의 핵심요원으로 떠오르게 된다. 26세에 갑오동학농민혁명을 맞게 된 그는 1894년 새해벽두에 둘째 아들 연묵(淵黙) 을 얻게 되면서 기상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혁명의 준비기간에도 주변의 천거로 녹두 장군을 수행해 왔지만 주로 밤길을 이용 이동하던 전장군을 호위하는 데는 그의 건장 한 체구는 안성맞춤이었다. 폭 넓은 학식과 필력 그리고 침착한 그의 성품과 민첩하고 힘이 장사인 그의 몸매는 천부적인 비서감이었다. 그해 3월 25일 백산봉기에서 동도창의대장소(東徒倡義大將所)의 창의 조직 때 송희옥(宋喜玉)과 함께 동도대장의 비서로 발탁된다. 더욱이 송희옥은 녹두 장군 과의 척분 비서로 발탁되어 대내적인 수행임무에 그치지만 그는 상시 수행과 대 외적인 총비서의 막중한 역할을 갖게 되어 이때부터 창의문(倡義文) 격문(激文) 등 각종 대외문서의 작성과 통문(通文)의 수발과 회신을 챙기는 일을 전담하고 주요 전략회의에도 꼭 참석하였다.
그는 농민군 지휘부의 유일한 문사로서 전봉준 장군을 밀착 수행하면서 전투상황을 점검, 보고하는 한편 일진일퇴가 거듭되는 와중에서도 극비업무를 잘 수행하고 보좌 역을 성실히 수행하였다. 그해 11월 동학농민군의 결전장이었던 공주(公州) 우금치(于今峙)전투에서 처절 하게 참패를 당한 후, 농민군은 전주, 남원으로 빠지는 동부 퇴로와 태인, 순창, 광주로 집결하는 중부 퇴로 그리고 만경, 부안, 고창, 영광에 이르는 서부 퇴로 의 세 갈래 방향으로 퇴각로를 정하여 패주하였는데 그는 큰 실의를 안고 중부 퇴로를 택한 녹두장군과 헤어져 서부퇴로를 따라 황급히 고향으로 찾아 들어 피 신의 길로 들어선다, 그는 역적으로 몰릴 것을 대비하여 가족의 안전을 위해 양조부(養祖父)가 살던 무장면(茂長面) 옥산리(玉山里) 가라실로 이사하고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홀로 고 창 신촌(莘村)에 사는 친구 봉정범(奉正範)의 집 골방에서 은신하며 바깥 동정을 살폈다. 전봉준장군이 원평․태인 전투에서까지 패배하게 되자 몇 남지 않은 휘하 장졸 에게 명한 대로 그는 바로 상경을 준비하게 된다. 이로부터 3개월 만인 1895년 (고종 32) 1월 극비리에 가까스로 한성 땅에 잠입하게 된다. 한편 집에서는 2월 10일 그의 부친(鄭萬源)이 연좌제로 인해 고부(古阜)관아에 끌려가 모진 고문 끝에 처형당했다. 그의 아버지는 무장 집강(執綱)을 지낸 양부 (鄭鍾顯)의 영향을 받아 동학에 입도하여 손화중 대접주와 연을 맺었으며 농민전 쟁과 아들 백현의 뒷바라지만 하다 47세를 일기로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의 나이 27세에 한성에서 지난날의 벗들을 찾아다니며 급변하는 시국에 대처 할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시와 술로서 정분을 두텁게 하였다. 그때 그는 동학농 민군으로서의 행적을 숨겼고 이름을 바꾸어 신분을 철저히 위장하였다. 그때 한성은 동학농민군 잔당들의 잠입설로 인해 일본군과 관헌들이 민가를 들 쑤시고 다니는 판국이라 여간한 형편이 아니면 피신을 거의 불가능했다는 것이 다. 다행히도 그는 귀향을 극력 만류할 정도로 이전부터 깊은 관계의 우정들이 있어서 재기를 도모하는 데 큰 힘을 얻고 있었다. 그의 항야 체류 견문록에 의하면 피신하면서 고락을 함께 한 선비들로 신길휴 (申吉休)․기휴(箕休) 형제(海等坊 도唐里 거주)와 임홍제(任弘帝 : 호는 蘭坡, 鍮 洞 거주) 그리고 금사(錦史)라는 아호로 통하고 있는 극진한 벗들이 있는데 이들 은 모두가 당시 세도가의 자제들로서 그를 비호하는 데 큰 몫을 해낸 친구들이 었다. 그는 연줄을 찾아 서울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도 글 잘하는 덕분으로 당대 의 젊은 명사들과도 어울릴 수 있었다. 판서를 지낸 신헌구(申軒求), 참판을 지 낸 이근용(李根容), 이중하(李重夏) 등과 어울렸다. 이들은 왕래하는 서찰이나 시 문 등 격조 있는 글발에 대한 능통한 해석과 회신을 해야 할 때 그에게 자문을 구하고 자기네의 단문을 보충하는 데 그를 유효하게 활용하곤 하였다. 또한 이들
은 주석이나 야유회를 활용하여 시문과 시작(詩作)을 배우는 것이었다. 이때 그 는 이름을 바꾸고 시문의 솜씨를 발휘해 이들과 아무런 의심 없이 문사(文士)대 접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러는 동안 그의 고향 집에서는 1896년(建陽元年) 12월 14일에 모친인 순천박씨 마저 부친의 뒤를 따라 숨을 거두었으나, 영문을 모르는 그는 서울에서 고향소식만을 애타게 귀 기울일 뿐이었다. 1897년(건양 2) 29세가 되면서 숙부 명원(明源)의 천거로 순천 송광사(松廣寺) 에 세워질 성수전(聖壽殿)의 별유사(別有司)가되어 공사를 지휘하는 감독 일을 맡아 현장을 내왕하기도 하였다. 그 후(海州)관찰부 주사(主事)에 임명되었으나 한 달도 채우지 못하고 사직하였다. 왜냐하면 서울 친구 이은용(李垠鎔 : 侍從으로 있었는데 그의 祖父는 前領相 興 仁君 李升應이요 父親은 判書를 지낸 李在兢이다)의 아버지 이희하(李凞夏)가 1897년 5월에 때마침 무장군수로 부임하게 되어 약봉에게는 고향을 찾아갈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기 때문이었다. 그의 나이 29세 때 이렇게 해서 고향집을 찾아올 수 있었던 그는 군수의 비호 를 받아 별 탈 없이 지낼 수는 있었지만 부모님의 타계와 아내의 위중한 병세를 보고 비통한 심사로 이웃과 어울리기를 꺼려 종일토록 침묵하다가도 멀리서 찾 아오는 옛 동지들과는 곧잘 밀담을 나누었다. 1901년(光武 5)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고 가세가 기울자 6월에는 아산면 주 진(雅山面 舟津)마을로 이사했다. 그가 35세가 되던 1903년 10월에는 지금 후손들이 살고 있는 오정동(梧亭洞) 집으로 다시 옮기고 팔연정(八然亭)을 짓고 그곳에 칩거하면서 여생토록 은둔생 활로 일관하였다. 1909년 2월 17일 아내 안정나씨(安定羅氏)까지 47세로 하직하자 감당하기 어 려운 슬픈 세월을 보내다가 1920년 1월 3일 동학농민봉기 26년만 인 향년 52 세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신월마을 정자>
<신월마을회관>
<신월마을 고인돌>
<신월마을 큰논>
<신월마을 울산김씨 제각>
<월봉 두렁시암>
<신월마을 후제>
<월봉 반월등>
<월봉마을 정자>
<월봉마을 치마바위 장군의 문>
<월봉마을 치마바위>
<옥산리 장승백이>
<가라마을 회관>
<가라마을 전경>
<가라마을회관 헌성비>
<가라마을 큰샘>
<가라마을 고인돌>
<가라마을 삼보죽염>
<옥산 저수지>
<삼보죽염 굽는 과정>
<대산마을 회관>
<대산마을 정자>
<경주김씨 입향조 묘비>
<대산마을 밀양박씨 열녀비>
<대산마을 안산>
<참고문헌> 무장읍지(茂長 邑誌) 송사문헌(松沙 文獻) 한국지명총람 전북전래지명총람 모바일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고창군 구비문학대계 고창의 마을유래(고창문화원, 2003)
<도움주신 분> 주형규, 김범용, 김영환, 김요봉, 김용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