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화중 대접주의 무장도소가 있었던 괴치리
<사진 1> 조선 말기 무장읍지도 괴치 인근
이병열
2. 자연지명과 전래지명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는 호남정맥에서 갈라져 나와 목포 유달산으로 뻗는 영
1. 괴치리의 역사와 위치
산기맥이 구황산(500m)의 남쪽의 성송면 암치리에서 갈라져 나와 서쪽의 하고 괴치리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인 고인돌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삼국 시대의 고분을 비롯하여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이렇게 이른 시기부터 괴치리에 사람들이 거주하여 지역문화를 꽃 피울 수 있었던 것은, 이 일대가 구릉성 산지가 널리 발달해 있다는 점, 마을 앞으로는 덕림천이 만들어 놓은 넓은 충적지를 개간한 넓은 벌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러한 자 연환경 탓에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괴치리에 밀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괴치리는 한반도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된다. 1894년(고종 31년) 고 창농민들의 항거이자 구국의 동학농민혁명 발발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이다. 당 시 조선사회에 있어 농민경제는 안과 밖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었다. 더욱 이 지배층의 분열과 부패한 관리들의 횡포는 농민들의 살림살이를 막다른 위 기 속으로 몰아넣었다. 여기에 ‘인시천(人是天)’,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의 교 리를 내건 동학의 가르침은 학정과 가난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널리 받아들 여져 커다란 종교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리 삼태봉을 이루는 능선이 경수산과 장자산을 이룬다. 구황산에서 갈라져 나 온 산줄기는 서쪽의 성송면 계당리와 학천리를 지나 괴치리의 주산을 이루고 잿등을 낙양리 관동에서 덕림천을 만나 멈추었다. 경수산과 장자산을 이루는 산계와 잿등으로 발달한 산계 사이의 구릉성 산지에 괴치리가 입지해 있다. 즉, 괴치리는 덕림천의 넓은 충적지를 사이에 두고 마을들이 입지해 있는 셈이 다. 괴치리는 덕림천의 남쪽과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덕림천의 북쪽에는 사천과 양실이 있고, 남쪽에는 주산과 괴치마을이 있다. 괴치리는 주변의 구릉성 산지 와 덕림천의 충적지의 영향으로 논과 밭의 비율이 비슷하다. 괴치리의 지형은 대체적으로 괴치리 중앙의 덕림천변으로는 낮고, 북쪽은 구릉 성산지가 발달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하고리의 미륵봉이 그나마 높은 산지를 이루고 있다. 괴치리는 구릉성 산지가 둘러싸고 있는 분지지역이다. 괴치리의 중앙으로는 덕림천이 관통하고 있다.
당시 동학의 대접주 손화중은 이곳 괴치리에서 전국적으로 무장기포의 출발을 <사진 2> 괴치리 항공사진(다음지도)
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고 있었다. 괴치리는 당시 호남과 서해안으로 연결되 는 교통로상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이러한 지리적 요건으로 괴치리는, 구한말 뜨거운 한국사의 현장이 되었던 것이다. 괴치리는 동쪽으로 향산리와 사내리, 서쪽으로 무장면 덕림리, 남쪽으로 판정 리, 북쪽으로 낙양리와 접하고 있다. 괴치리의 동쪽의 주진천을 마주보는 능선 상으로 바둑판식 고인돌이 마주보고 있다. 괴치리의 자연마을은 괴치, 사천, 새터, 양실, 주산 마을이 있다. 본래 무장군 성동면(星洞面) 고치(古峙)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면서 괴치 리는 괴치리(槐峙里), 무장군의 복룡리(伏龍里), 덕전리(德典里), 청송리(靑松 里) 각 일부를 통합하여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로 조정되었다. 법정리인 괴치리 (槐峙里)에는 괴치와 양실의 두 개의 행정리가 있으며, 자연취락으로는 괴치 (槐峙)·사천(沙川)·새텃골·양실(良實)·주산(舟山) 등이 있다.
가래댓들 : 모랭이 서쪽에 있는 들 가자골 : 괴치리 159번지에서 174번지 일대로 괴치리 산102번지를 감싸고 있 는 골의 논. 갈마음숫등 : 괴치 서쪽에 있는 등성이. 갈마음수(渴馬飮水)의 풍수형국이라 함. 건지매(乾芝山) : 양실 남서쪽에 있는 산. 건지메골 : 주산마을 남쪽에 있는 골로 서당골의 서쪽에 있음. 괴봉(괴앵이) : 양실 남쪽에 있는 작은 산. 모양이 고양이와 같다고 함. 이 봉 우리가 삼국시대의 고분이 있는 봉으로 북쪽 사면에 전의이씨 분묘가 있음. 괴치제(槐峙堤) : 괴치마을의 동쪽에 있는 저수지. 괴칫재(槐峙, 서낭당) : 괴치 서쪽에 있는 고개. 무장면 덕림리로 가는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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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양이 고양이 형국으로 되었다 함. 서낭당 나무가 있었음.
지.
굄바우 : 참시암골에 있는 고인돌.
잿등장터 : 잿등 북쪽에 있는 장터. 조선조 중엽에 장이 섰다고 함.
구래골 : 괴치제의 바로 위의 남서쪽에 있는 골로 미륵봉의 북서쪽에 있으며,
주겅골 : 쇠바탕 북쪽에 있는 골.
큰 골의 서쪽에 있음.
주산(舟山) : 괴치 북쪽에 있는 마을. 들 한가운데의 산등성이가 바다에 떠 있
만산정 터(晩山亭-) : 괴치 남쪽 산 아래에 있는 강당 터. 조선조 말엽 정휴선
는 배 같이 보인다고 함.
(鄭休鮮)이 글을 가르쳤다고 함.
죽통배미 : 양실 동쪽에 있는 논. 논의 모양이 쇠바탕의 와우 구유처럼 되었다
모랭이 : 양실 남쪽 사천으로 가는 모롱이에 있는 논.
고 함.
바쿠리봉 : 쥐봉 서쪽에 있는 산. 모양이 바구리 같이 되었다고 함.
중논골 : 괴치제의 남쪽에 있는 골로 미륵봉의 북사면.
불못골 : 모랭이 위에 있는 골짜기. 지형이 불무(풀무의 방언)와 같이 되었다고
쥐봉 : 괴봉의 동쪽 줄기로서 괴봉의 고양이가 노리는 쥐와 같이 되었다 함.
함.
괴봉의 동북쪽에 있는 들판의 작은 봉.
사천(沙川) : 괴치 동북쪽에 있는 마을. 냇가의 모래사장에 마을을 이루었음.
큰골 : 괴치제의 남서쪽에 있는 골로 미륵봉의 북서쪽에 있음.
새텃골 : 불뭇골 남쪽에 새로 된 마을.
참시암 : 참시암골에 있는 샘. 암반에서 솟아나는데 물맛이 좋다고 함.
서낭재(성황재) : 괴칫재에 서낭당과 나무가 있어서 성황당 또는 서낭재라고도
참시암골 : 건지매 남쪽에 있는 골짜기. 참시암이 있음.
불림. 마을 주민들은 이곳을 지날 때 기도를 하고 돌을 올려놓는 행위를 하면
촛태봉(燭台峰) : 주산마을의 주산으로 해발고도 68.4m의 야산. 괴치리 산14
서 소원을 빌었다고 함. 바로 옆에서 철륭제를 지냈다고 함.
번지에서 16번지와 무장면 덕림리와 경계를 이루는 봉우리.
서당골 : 주산의 정남쪽에 있는 골. 괴치리 947번지 일대의 골. 서방등골 : 괴치리 121번지에서 124번지의 골.
<사진 4> 촛태봉 전경 덕림천 : 주진천의 지류로 괴치리를 관통하는 하천.
선남내골 : 괴치마을 바로 앞의 남쪽 골로 선남내재로 넘어가는 길이 있음. 선남내재 : 괴치리 산62-1번지가 정상으로 무장 덕림과 대산 성남리로 넘어가 는 고개. 섬들 : 괴치마을의 동쪽에 있는 들.
3. 괴치리의 자연취락
송정(松亭) : 괴치에 있는 정자. 조선 후기 정종용(鄭鍾龍)이 동지들과 더불어 시를 읊고 놀았다고 함. 쇠바탕 : 양실 북쪽에 있는 골짜기. 와우(臥牛)형국이라 함.
1) 괴치(槐峙)
양실제(良實堤) : 양실에 있는 저수지. 역보(驛洑) : 양실 남쪽에 있는 보. 조선조 때 보의 남쪽에 청송역이 있었음.
성송면 괴치리 괴치마을은 성송면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약 3.5km 거리에 있다.
역보들 : 주산과 양실 사이에 있는 넓은 들.
마을은 조선 중기 진주정씨가 1548년 명종사화가 격화되자 이를 피해 이 마을에
역봇들(驛洑坪) : 양실 앞에 있는 들. 역보의 물로 농사를 지었다고 함.
터를 잡으면서 형성되었다. 진주정씨는 처음 건지산(乾支山) 아래 서당골이라는 곳
용머리산 : 괴치리 산116번지의 낮은 야산으로 청송마을 남쪽에 있음.
에 터를 잡고 살다가 석밭터로 옮겨 갔다가 다시 지금의 괴치리로 옮겨 마을을 이
<사진 3> 용머리산 전경
루었다. 이곳에 정착한 진주정씨들은 고창·영광·함평 등으로 퍼져 약 1만여 명의 후 손들로 번성하게 되었다. 마을이 형성되기 이전에는 괴목숲이 우거진 산으로 느티
윤사리들 : 괴치와 사천 사이의 넓은 들.
나무[槐]가 많은 고개[峙]라 하여 괴치라 부르게 되었다. 진주정씨가 터를 잡고 형
정골 : 괴치마을의 북서쪽에 있는 골.
성한 후 전의이씨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크게 번창하였다. 조선조 말기 동학은
잿등 : 양실과 재동 사이에 있는 등성이로 청송역이 있었던 곳으로 교통의 요
이곳 괴치를 중심으로 크게 성하였고, 동학의 손화중 대접주는 이곳에 무장도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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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어 동학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서 보호하고 있다. 마을 주변에는 덕림천이 만들어 놓은 충적지로 논농사가 발달하
괴치마을의 수계는 남쪽의 미륵봉(187m)에서 발원하여 괴치마을을 좌우로 감싸며
였다.
북동쪽으로 발달하다가 덕림천에서 합수한다. 괴치마을의 수계(水系)는 짧으나 골이
마을의 산계는 괴치마을의 북서쪽의 봉우리(110m)에서 북쪽으로 발달한 능선이 추
깊어 마을 주변에는 논농사가 발달하였다. 또한 괴치마을 앞의 덕림천은 그 발원이
태봉(68.4m)를 이루고 덕림천에서 멈추었다.
고성산으로 산이 높고 물이 많아 넓은 충적지를 이루어 일찍부터 논농사가 발달하
주산마을은 추태봉을 주산(主山)으로 하며, 이 봉우리의 동사면(東斜面)에 마을이
였으며, 이는 다시 주진천과 합수하여 줄포만으로 흐른다.
입지해 있다. 마을을 중심으로 한 좌청룡과 우백호가 허한 약점이 있다. 이러한 지
마을의 산계는 북쪽으로 여러 갈래로 발달하였다. 영산기맥의 방장산지의 구황산에
형적 요인으로 주산마을의 당산은 마을의 중앙에 있으며, 가옥은 대부분 동향으로
서 두 갈래로 산계가 발달하는데, 괴치마을로 발달하는 산계는 남쪽에서 발달하여
배치되어 있다.
고창의 연안의 큰 산들을 만들어 내었다. 이 산계는 무장을 지나 비학산·청룡산·개
<사진 5> 주산마을 전경
이빨산·경수산을 이루는 한 줄기와, 서쪽으로 송림산·장자산·장군산을 이루고 상하 고리포에서 멈추는 산계이다. 즉, 구황산에서 무장까지 연결되는 산계의 능선의 북 동사면에 괴치마을이 입지해 있다. 미륵봉에서 발달한 산계가 북서쪽으로 발달하다
3) 양실(良實)
가 다시 동쪽으로 뻗어 나온 산줄기가 있다. 이 산줄기는 괴치마을의 후위를 감싸 고돌다가 마을 앞 섬들에서 멈추었다.
양실(良實)마을은 윗골과 아랫골이 있어서 처음에는 양곡(兩谷)이라고 불러 오
괴치마을을 중심으로 좌청룡과 우백호가 잘 발달해 있으며, 수구(水口)는 마을의 좌
다가 토지가 비옥하여 곡식이 잘 여문다 하여 양실(良實)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청룡 끝인 동쪽에 있다. 이러한 지형적 요인으로 괴치마을의 당산은 좌청룡 끝자락
한다. 한편 한말에 무장현감이 이 고을을 지나다가 지형을 살피고는 용이 엎드
에 있으며, 가옥도 대부분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한편 괴치에는 필리핀에서 이
려 있는 형태와 같다고 하며 복용(伏龍)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양실은 조선
주해온 다문화가정이 1가구 있다. 괴치마을에는 원래 아흔 아홉 골이 있었다고 한
중기 경주손씨가 터를 잡고 이어서 함양오씨와 김해김씨가 들어와 마을을 이
다.
루었다고 한다. 처음 터를 잡은 경주손씨는 모두 떠나고 지금은 거주하고 있지 않다.
<사진 4> 괴치마을 전경
양실마을의 수계는 마을의 남쪽으로 흐르는 덕림천이 마을 앞을 통과하고 있다. 덕 림천은 양실마을을 감싸고도는 형국이다. 또한 동쪽의 야산이 마을의 수기를 보호 하고 있어 풍수적으로 좋은 입지에 있는 마을이다. 다만 마을 가까이로 큰 하천이
2) 주산(舟山)
통과함으로 좌청룡의 끝자락이나 마을의 동쪽에 당산이나 비보숲을 조성하는 것이 바람직한 풍수형국이다.
성송면 괴치리 주산마을은 성송면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약 5km 거리에 있다. 이
마을의 산계는 영산기맥의 방장산지 구황산에서 두 갈래로 산계가 발달하는데, 양
마을은 덕림천의 들 한가운데에 있어, 마치 산등성이가 바다에 떠있는 배와 같
실마을로 발달하는 산계는 구황산에서 바로 북서쪽으로 발달한 산계로 추산봉을 만
이 보인다고 하여 ‘주산’이라 명명하였다.
들고 학천리와 사내리를 지나 낙양리 관동마을에서 주진천을 만나 멈춘다. 양실마
주산마을의 수계는 크게는 마을의 북쪽으로 흐르는 덕림천이 있고, 마을의 동쪽으
을의 산계는 잿등에서 남서쪽으로 발달한 구릉성 산지가 덕림천에서 멈추는데, 이
로는 실계천이 남에서 북으로 마을 앞을 통과하고 있다. 특히 덕림천은 주산마을을
구릉성 산지의 말단부의 남사면에 양실마을이 입지해 있다. 양실마을의 주산(主山)
치는 형국으로 마을 전면에는 이를 보호하기 위해 당산이나 비보숲을 조성하는 경
은 51.9m의 나지막한 구릉이기 때문에 북쪽이 매우 취약하다는 약점이 있다. 그렇
우가 많다. 따라서 괴치마을이나 주산마을은 동쪽에서 내려오는 강한 수기(水氣)를
기 때문에 마을에서는 북쪽에 숲을 조성하여 보호하고 있다.
막기 위해 동쪽의 낮은 야산인 용머리산의 숲을 보호하였던 것이다. 또한 주산마을
원래는 양실마을을 중심으로 좌청룡과 우백호가 발달되어 있었으나, 낮은 구릉들을
앞에도 강하게 치는 수기를 막기 위해 마을 앞에 당산나무를 심고 집집마다 나무로
개발하면서 숲을 파괴하여 지금은 그 형국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북쪽의 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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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은 조금이나마 숲을 조성하여 남아 있고, 가옥들도 지형지세에 맞게 숲을 조성
1) 진주정씨(晉州鄭氏)의 괴치리 입향
한 경우가 많다. 양실의 이러한 지형적 요인으로 가옥은 대부분 남향과 남서향으로
괴치리에 진주정씨가 입향하게 된 것은, 수군절제사 종순(宗舜, 1515~1582)이
배치되어 있다.
1545년(명종 즉위년) 중종화옥이 격화되자 벼슬을 버리고(致仕) 장자인 극일(克一, 후에
<사진 6> 양실마을 전경
병절교위)을 데리고 극일의 처가(함양오씨 진사 오세영) 근동인 성송면 괴치리에 오게 되었다. 그 후손이 16대를 세거하고 있으며, 고창·영광·함평 등지에 약 1만여 명의 후 손이 번성하여 진주정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괴치리의 진주정씨 시조는 예(藝)이고,
4) 사천(沙川)
파조는 황(璜)이다.
사천마을은 냇가의 모래사장에 마을을 이루었다 하여 사천이란 지명이 붙었다.
20世
한편 이 마을에는 먼 옛날 달래라는 소녀의 효와 뱀과 관련이 깊은 지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덕림천의 상류에서 내려오는 모래가
(종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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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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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世
25世
26世
克一
惲
期夏
緯周
斗相
思泰
27世 仁壽
(극일)
(운)
(기하)
(위주)
(두상)
(사태)
(인수)
많아 사천이라 부르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산마을의 수계는 크게 동북쪽에서 흘러 들어오는 덕림천과 마을을 북에서 남으로 가로지르는 두 개의 수계가 마을을 통과하고 있다. 덕림천은 용머리산과 청송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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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世
30世
31世
32世
33世
34世
35世
36世
의 좌청룡의 좁은 협곡을 통과하는 형국이다. 이 협곡을 통과해서 처음 맞닿는 마
亨宅
文賢
鍾陽
孝源
休官
廷燾
章均
海鎭
榮蹲
을이 사천마을이다. 작은 수계는 마을의 서쪽에 있으며 이 수계는 북에서 남으로
(형택)
(문현)
(종양)
(효원)
(휴관)
(정도)
(장균)
(해진)
(영준
흐르고 있다. 이 수계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한편 사 천마을은 서쪽의 흉한 기운을 보호하기 위하여 서쪽 들에 숲정이를 조성하였을 것 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마을의 서쪽 들에는 숲이 조성되어 있다.
2) 전의이씨(全義李氏)의 괴치 입향
마을의 산계는 영산기맥의 방장산지 구황산에서 두 갈래로 산계가 발달하는데, 양
성송면 괴치의 전의이씨는 1700년경 경우(慶雨, 1649~?)가 정읍시 고부에서 세거하다
실마을로 발달하는 산계는 구황산에서 바로 북서쪽으로 발달한 산계로 추산봉을 만
가 농토를 취하여 괴치에 정착하기 위하여 입향하였다. 현재까지 그 후손이 11세를 세
들고 학천리와 사내리를 지나 낙양리 관동마을에서 주진천을 만나 멈춘다. 주산마
거하고 있다. 괴치의 전의이씨 시조는 도(棹)이고, 파조는 수남(壽男)이다.
을의 산계는 잿등에서 남쪽으로 발달한 구릉성 산지가 덕림천에서 멈추는데, 이 구 릉성 산지를 중심으로 서사면에 사천마을이, 동사면에 청송마을이 입지해 있다. 사
22世
천마을을 중심으로 한 좌청룡과 우백호는 발달되어 있다. 그러나 북쪽의 주산이 낮 고, 골이 깊은 형국이다. 사천의 이러한 지형적 요인으로 좌청룡의 능선 상에 있는
(경우)
23世
24世
25世
26世
継孝
弼聖
命會
玄觀
27世 根佑
(계효)
(필성)
(명회)
(현관)
(근우)
가옥은 남향으로, 우백호의 능선 사면에 있는 가옥은 남과 동향으로 각각 배치되어 있다. <사진 7> 사천마을 전경
28世
29世
30世
31世
聲魯
鳳世
鍾九
良浩
相赫
(성노)
(봉세)
(종구)
(양호)
(상혁)
4. 성씨들의 괴치리 입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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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世
堂晦燦)의 증손이고 종은(鍾殷)의 아들로 백부 학와(學窩) 종하(鍾夏)에게 출계 5. 괴치리의 인물
했다. 1827년(순조 27)에 성송면 괴치(槐峙)에서 출생하여 1902년에 세상을 떴 다. 학문하는 집안에 태어나 가학(家學)을 이어받았고 노사(蘆沙) 기정진(奇正
1) 계당 정회찬(溪堂 鄭悔燦, 1759~1831)
鎭)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고제(高弟)가 되었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지
정회찬은 초명이 형기(亨基)이고 자는 회숙(晦叔)이며 호는 계당(溪堂)이고 본
은 행장을 보면 그는 50년 동안 노사를 스승으로 아버지처럼 섬기면서 학문에
관은 진주(晋州)이니 충장공 황(璜)의 후손이고 어초(漁樵) 달수(達壽)의 아들이
전념하여 경사자집(經史子集)과 정주성리서(程朱性理書)를 두루 섭렵했는데 언
다. 영조 35년(1759)에 성송면 괴치(槐峙)에서 출생하였고 영조 47년(1771)인
제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의복과 일용기물에 일절 왜제(倭製)를 쓰지 않
13세 때부터 족숙 이재(頤齋) 인수(仁壽)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회천의 행
았고 예(禮)에 어긋나는 일은 듣지도 말하지도 행하지도 않았다.
장이나 비명이 없어 그의 행적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그는 대대로 이어온
임오군란 이후 나라에 변괴가 잦자 개연히 상소(壬午擬疏)를 올렸으니 첫째 세
문벌에서 출생하여 자라면서 안으로는 부친 어초공의 권면이 있었고 밖으로는
도 부리는 관료를 몰아내고 조정을 바르게 할 것, 둘째 대원군을 환국시켜 효
이재공의 교훈을 받아 학문에 전념하여 성취했다.
도를 행할 것, 셋째 외국 군대를 돌려보내고 궁성을 깨끗이 할 것, 넷째 사무
장성하자 몇 차례 과거시험에 응시했으나 여의치 않자 서재를 짓고 임천(林泉)
를 잘 처리하고 병기를 수리할 것, 다섯째 어진 정사를 하여 백성을 안정시킬
에 소영하며 종일토록 경전에 침잠하여 경학의 오묘한 경지와 성리설의 근본
것 등 조목조목 간곡한 진언(進言)이었다. 문인에 강인선(姜仁善), 정진원(鄭晋
을 밝혔다. 그리고 문도를 가르치고 때로는 산수를 즐기며 시문을 읊으니 송나
源), 정관원(鄭官源), 이동무(李東武), 서병모(徐炳模), 서병환(徐炳煥), 이용우
라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와 하남의 정부자(程夫子)와 같았다. 공은 가세가
(李容宇), 김수인(金秀仁) 등이 있고 저서로 소두집(小蠹集) 10권 4책이 간행
넉넉하지 못하면서도 흉년이 들면 종족과 향민을 구휼했고 길을 가다가 주린
되었다.
자를 만나면 집으로 데리고 와서 음식을 먹여 보냈다. 또 향음주례를 실시하여 향리의 풍속을 바로잡았고 문헌을 널리 채집하여 향
3) 정길진(1941~ 2013년 12월 현재)
약을 만들어 실행케 했다. 그는 임진란 이후 보첩이 산락(散落)된 것을 수보하
성송면 괴치리에 출생한 정길진은 고창중고를 졸업하고, 고려대 법학과와 원광
는 일이 자신의 평생 과업으로 여기고 경향의 각지를 다니며 각 왕조의 역사
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그는 고창남중 교장과 연변대 객원교수, 진주정씨 전국
와 각 종파의 보첩 등을 살피고 각 읍의 읍지 등의 문헌을 참고하여 8년 동안
중앙회 부회장, 민주당 전북도당 고문, 고창중고 구창군 동창회장, 고창중고
에 보첩을 완성했으니 그의 숭조 돈종의 정성을 짐작할 수 있다.
장학재단 이사장, 전라북도의회 의원과 전라북도의회 의장을 역임하였으며, 현
그는 학문의 업적도 대단하여 그의 유고집에 591수의 시와 50여 편의 문장이
재는 고창신용협동조합 이사장를 맡고 활동하고 있다.
있는데 특히 「노화설(爐火說)」에서는 ‘이기호발론’을 증명하였고 「답존양성찰 (答存養省察)」에서는 지(知)의 용공의 선후를 밝혔다. 그의 학행이 드러나 여러 차례 향천과 도천을 받았으나 모두 사양하였고 만년 에 동갑인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奎)의 문하에 나아가 종학하며 학문이 대진
6. 마을현황
했다. 강재는 과제(過齋) 김정묵(金正黙)의 문인이고 과재는 미암(迷菴) 김위재 (金偉材)의 문이며 미암은 우암 송시열의 문인 장암(丈菴) 정호(鄭澔)의 문인이 니 우암의 연원이라 본다. 순조 31년(1831)에 졸하니 향년 73이고 저서로 계
1) 괴치리의 기관과 시설
당집(溪堂集) 7권 3책이 있다. 괴치마을 마을회관 : 괴치 마을회관은 마을사람들의 공동공간으로 이용되고 있 2) 정하원(鄭河源, 1827~1902)
다. 마을회관은 군 지원으로 건축되었다.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 괴치3길 18번
자는 희청(希淸)이고 호는 소두(小蠹)이며 본관은 진주(晋州)이니 계당 회찬(溪
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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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8> 괴치 마을회관
3) 괴치마을의 성씨별 거주 현황
양실마을회관 : 양실 마을회관은 마을사람들의 공동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우는 사망한 남편의 성씨나 자녀들의 성씨를 중심으로 조사되었다. 그리고 조사는
마을회관은 군의 지원으로 건축되었다.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 양실길1번지에
2013년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의 전화번호부를 보고 마을 주민들에게 확인하여 진행하
있다.
였다. 따라서 성송면사무소의 인구현황과 실제 거주자와는 차이가 있다.
성씨는 문중의 성을 따라 조사를 하였기 때문에 홀로 된 독거여성노인인 경
<사진 9> 양실 마을회관
괴치마을의 2013년 6월 현재 성씨분포는 다음과 같다. 성씨별 분포는 진주정씨 24가 구, 전의이씨 10가구, 창녕조씨 1가구, 울산김씨 1가구 등이다. 괴치마을은 진주정씨가
양실마을 모정[延豊亭] : 양실마을 모정인 연풍정은 서기 2013년 1월 5일 건
66.6%가 거주하는 것으로 보아 전형적인 진주정씨 집성촌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전의
립되었으며, 양실마을 입구에 있다. 연풍정은 성송면 괴치리 483-20번지에 있
이씨는 27.7%로 진주정씨 다음으로 많은 성씨이다.
다. <사진 10> 양실마을 모정 4) 괴치리의 문화유산 양실 신안교회 : 성송면 괴치리 양실 649-1번지에 있는 기독교 교회로, 강대숙 목 사가 시무하고 있다.
(1) 괴치리 고분(古墳)
<사진 11> 양실 신안교회 전경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 산41-1번지에 있는 삼국시대의 고분이다. 괴치리 용머 리산에서 괴치마을로 가는 면도 우측 해발 47m의 야산 정상부에 고분이 위치
사천 마을회관 : 사천 마을회관은 마을사람들의 공동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한다. 분구의 잔존 높이는 약 3m 정도이다. 현재 야산의 정상부는 송림이고,
마을회관은 군의 지원으로 건축되었다.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 괴치사천길
분구의 남측 자락은 민묘에 의해 일부 잘려나간 상태이다. 분구의 서측 중단부
14-3번지에 있다.
에 석실이 노출되어 있는데 도굴되어 개석과 벽석 일부가 밖으로 드러난 상태
<사진 12> 사천 마을회관
이다. 석실의 구조는 판석 1~2매를 세워 쌓아 장·단벽을 형성하였고 개석은 1~2매의 대형 판석을 이용하였다. 부석은 현재 확인되지 않으며 석실의 장축 은 동서방향이다. 분구 자락의 삭평으로 인하여 정확한 분형은 알 수 없으나
2) 괴치리의 인구변화 마 2002. 을 괴 치 양 실
1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1.
과거의 판축(版築)했던 흔적이 있다고 한다.
12.
12.
12.
12.
12.
12.
12.
12.
12.
12.
10.
경위도좌표 : N 35°22′50.4″, E126°37′38.1″
39 43
47
39 42
48 36
31
대체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주민들에 의하면 이 고분에는
46
34 41
46 33
33
44
33 40
48 36
32
41
30 41
46 33
27
43
31 43
44 37
28
41
28 43
48 39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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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44
42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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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29 42
42 38
35
39
30 41
43 39
32
38
28 40
44 35
30
45
28 41
45 35
31
48 40
<사진 13> 괴치리 고분
37
35
(2) 괴치리유물산포지 1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 595번지에서 발견되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괴치리의 2002년 이후 인구는 대체로 조금씩 줄어드는 추세이다. 행정리인 괴
유물산포지이다. 양실마을 뒤편, 해발 50m의 나지막한 야산으로, 현재 야산은
치리의 인구감소율은 2013년 10월 현재 2002년보다 약 24%이며, 양실리는
저평한 대지를 형성하고 있는데 정상부와 북사면이 무밭과 인삼밭으로 경작되
2013년 10월 현재 2002년보다 약 5%의 인구가 증가하였다.
고 있으며, 통훈대부정공묘와 비닐하우스 3동이 위치한다. 수습된 유물은 경질 토기편, 타날문토기편, 기와편 등으로 전사면에 걸쳐 고루 분포하고 있다.
- 11 -
- 12 -
경위도좌표 : N 35°23′19.6″, E126°37′48.9″ (6) 괴치리 지석묘 3 (3) 괴치리유물산포지 2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 산48-2번지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지석묘군이다. 괴치마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 42019번지에서 발견되고 있는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
을 북동측 야산의 정상부에 약 10여 기의 지석묘가 남북 방향으로 열을 지어
대까지의 유물산포지이다. 잿등마을로 이어지는 도로 북동측으로, 광범위한 지
있다. 야산의 중단부에는 밭 경작에 의해 파괴된 지석묘의 상석들이 쌓여 있
역에 걸쳐 유물이 수습되었다. 이 지역은 해발 58m 내외의 저평한 구릉지대
다. 그 중 대표적인 지석묘의 크기는 180×102×62cm이며 상석의 평면형태는
를 이루며 정상부는 송림과 민묘군이 형성되어 있으며, 사면부는 장기간에 걸
방형, 단면은 장방형을 띠고 있다. 장축은 남북 방향이며, 지석은 땅에 묻혀
친 경작으로 인해 형질 변경이 심한 편이다. 원평마을 뒤편 구릉의 경우, 일부
잘 보이지 않는다. 야산은 진주정씨 선산으로 현재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절개된 부분에서 옹관편이 산재하고 있으며 잿등마을과 청송마을 주변은 무문
경위도좌표 : N 35°22′41.6″, E126°37′29.5″
토기저부편, 옹관편 그리고 경질토기편이 수습되었다. 또한 성송 서부교회 남 측 구릉에는 민묘의 조성 과정에서 파괴된 화강암재의 고분 석재들이 중장비
(7) 괴치리 지석묘 4
에 의해 쌓여 있는 상태로 방치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경질토기편과 연질토기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 3-1번지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지석묘군이다. 이 지석묘
편 등이 수습되어 다양한 형식의 고분이 부존할 것으로 여겨진다.
는 양실마을로 가는 진입로에 인접하여 우측으로 지석묘가 2기가 확인되었다.
경위도좌표 : N 35°23′07.4″, E126°38′08.2″
그 중 대표적인 지석묘의 크기는 305×137×58cm이며 상석의 평면형태는 장방 형, 단면은 장타원형을 띠고 있다. 지석은 땅에 묻혀 잘 보이지 않는다. 1기의
(4) 괴치리 지석묘 1
지석묘는 상석이 이동한 것으로 보이며 주변 쓰레기와 뒤섞여 있는 상태이다.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 470-7번지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지석묘 1기이다. 이 지
경위도좌표 : N 35°23′16.2″, E126°38′02.8″
석묘는 괴치리로 가는 도로변에 연접하여 지석묘 1기가 확인된다. 현재 지석 묘를 제외한 주변은 1m 이상 삭평되어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지석묘의 규모
(8) 괴치리 지석묘 5
는 223×210×147cm이며 상석의 평면형태는 방형, 단면은 장타원형을 띠고 있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 407번지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지석묘군이다. 이 지석묘
다. 장축은 남북 방향이며, 모서리에는 80cm 정도 높이의 주형지석을 각각 1
는 사천마을 맞은편 해발 50m 내외의 야트막한 야산 정상부에 3기의 지석묘
개씩 받치고 있다. 하부에는 도굴 흔적으로 판단되는 할석이 노출되어 있다.
가 1~2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분포하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지석묘의 크기
경위도좌표 : N 35°22′39.7″, E126°37′53.6″
는 256×214×150cm이며 상석의 평면형태는 방형, 단면은 타원형을 띠고 있 다. 장축은 동서 방향이며, 각 모서리에 63cm 높이의 주형지석 1개씩 받치고
(5) 괴치리 지석묘 2
있다.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 산116번지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지석묘군이다. 괴치마
경위도좌표 : N 35°23′04.0″, E126°38′00.0″
을로 가는 도로 남측으로 용머리산이라 불리는 야산이 보이는데 정상부에 3기 의 지석묘가 위치한다. 지석묘는 야산의 평탄한 부분에 일직선으로 열 지어 있
(9) 손화중 도소 터
다. 그 중 대표적인 지석묘의 크기는 302×295×210cm이며 상석의 평면형태는
손화중 도소는 성송면 괴치리 276-1에 있었다고 전한다. 손화중은 1861년에
방형, 단면은 장방형을 띠고 있다. 각 모서리에는 86cm 정도 높이의 주형지석
태어났다. 그는 1881년 처남 유용수(柳龍洙)를 따라 지리산 청학동에 갔다가
(바둑판식)이 떠받치고 있다. 상석의 상면에는 성혈흔이 나타나 있으며, 측면에
동학에 입도하여 수도하였다. 수도를 마치고 1883년 고향 정읍으로 돌아와 동
는 ‘무송유씨선산(茂松柳氏先山)’이라는 명문이 각자되어 있다.
학을 포교하였다. 정읍군 내 농소리, 입암리, 신면리, 음성리 등지를 돌아다니
경위도좌표 : N 35°22′53.7″, E126°37′54.3″
며 포교하다가, 인근 무장군 성동면 괴치리에 들어가 김모 씨의 집에 포교소
<사진 14> 괴치리 지석묘 2 <사진 15> 고인돌에 새겨진 무송유씨선산
(布敎所)를 설치하여 동학포교를 본격화하였다. 손화중이 성송 괴치리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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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게 된 것은 그의 나이 24세 때인 1883년이었다. 그는 1894년까지 12년 간
난 태풍에 가지가 부러졌다.
괴치에서 지내면서 동학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송화중은 괴치의 만석지기 부
<사진 17> 괴치 당산나무
자인 전의이씨 이근풍을 만나 도소를 마련하였다. 왜 손화중은 동학포교의 근거지로 성송면 괴치리를 택했을까? 1892년 8월 선
(12) 괴강재(槐崗齋)
운사 도솔암 미륵비기 탈취사건은 당시 조선왕조 내내 정감록(鄭鑑錄)의 유령
괴치마을 입구에 있는 진주정씨 재실이다. 이 재실은 진주정씨 괴강공파(槐岡
에 휩쓸려, 무엇인가 또는 누군가가 이 세상을 뒤집어 보기를 갈망하던 때에
公派)의 재실이다. 괴강재는 4칸 겹집의 팔작지붕이다.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
터진 사건이다. 이는 가히 혁명의 시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손
괴치1길 57번지에 있으며, 주변에는 진주정씨의 묘소들이 있다.
화중의 도소(道所)에는 동학의 도(道)를 구하고자 하는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
<사진 18> 괴강재 전경
들었다. 그는 출생 가문도 좋았을 뿐더러 외모도 준수한데다 일찍이 지리산 청 학동에서 동학의 도를 전수받은 후 고향인 정읍과 부안 등을 거처 무장의 사
(13) 육송재(六松齋)
천․양실로 들어 왔다고 하였다. 사천과 양실의 중간에는 불무골 즉, 솥을 만드
괴치마을 마을회관 앞에 있는 진주정씨 재실이다. 이 재실은 괴치에서 태어난
는 주물공장과 보부상들을 위한 숙소 등이 있었다. 또한 사천과 양실 모두에서
육송공(휘는 민주, 자는 주경) 내외를 모시는 재실이다. 육송재는 4칸 겹집의
는 손화중 접주가 거처했다는 구거지 터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거리가 조
팔작지붕이며, 고창 출신의 대목장인 정모씨가 건축하였다. 고창군 성송면 괴
금 떨어진 곳의 잿등에는 객주집, 대장간, 마방, 필방, 유기소 등이 있어 이곳
치리 괴치3길 17번지에 있다. 시제일은 원래 3월 27일(음)이었으나 후손들의
에 드나드는 보부상을 비롯한 장꾼들과 지역민들을 상대로 포교를 했던 것으
편의를 봐주기 위해 4월 첫째 일요일에 지낸다고 한다.
로 생각된다. 즉, 손화중의 괴치 도소는 성송면 괴치리 276-1에 있었고, 주물
<사진 19> 육송재 전경
공장은 괴치리 528번지, 보부상들의 숙소는 괴치리 542와 543번지에 있었다. 손화중의 양실 구거지는 괴치리 559-1와 사천의 괴치리 17-4에 있었다. 객주
(14)
집은 성송면 향산리 362-2, 대장간은 향산리 367-1와 353-11에 있었다. 마방
晉州鄭公南下紀蹟碑)
어모장군전라도수군절제사진주정공남하기적비(禦侮將軍全羅道水軍節制使
은 향산리 368-1, 필방은 향산리 365-1에 있었다(진윤식).
괴치마을 뒤의 육송정 옆에 있는 절제사 정종순(鄭宗舜)의 남하기적비이다. 진
<사진 15> 손화중 도소 터
주정씨 고창군 입향조 정종순은 충장공 정황(鄭璜)의 7대손으로 1515년(중종 10) 전라남도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에서 태어났다. 1548년(명종 3) 사화가 격
(10) 육송정(六松亭)
화되자 벼슬을 버리고 성송면 괴치리(槐峙里)로 옮겨 와 정착하였다. 2009년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에 있는 정자이다. 육송정은 괴치마을 뒤에 있는 진주정
현재 정종순의 큰아들 정극일(鄭克一)의 후손들이 성송면·무장면·대산면·공음
씨(晋州鄭氏) 건산(乾山) 위주(緯周), 괴강(槐岡) 흥주(興周), 첨추(僉樞) 선주(宣
면·아산면 등지에, 셋째 아들 정덕일(鄭德一)의 후손들이 무장면 등지에, 넷째
周), 헌주(獻周), 부호군(副護軍) 유주(維周), 육송(六松) 민주(敏周) 육형제의
아들 정득일(鄭得一)의 후손들이 대산면·고수면 등지에 살고 있다.
정자이다. 다 같이 문학이 넉넉하고 우애가 돈독했는데 마을 뒤에 소나무 한
<사진 20> 어모장군전라도수군절제사진주정공남하기적비 전경
그루씩 심어 소요(逍遙)하면서 시를 읊고 학문을 논했다. 덕헌(德軒) 정익환(鄭 益煥), 산암(汕菴) 변시연(邊時淵)의 기(記)와 선비들의 운(韻)이 걸려 있고 『육
(15) 건산초당유허비(乾山草堂遺墟碑)
송정지(六松亭誌)』가 간행되었다.
괴치마을 뒤의 육송정 옆에 있으며, 유허비 옆에는 ‘과건산초당유허(過乾山草堂
<사진 16> 육송정(六松亭)
遺墟)’라는 글이 음각된 비가 있다. <사진 21> 건산초당유허비 전경
(11) 괴치마을 당산나무 괴치마을 당산은 마을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노송(老松)이다. 이 노송은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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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괴치리의 설화와 이야기
알을 바구니에 주워 담았다. 달래는 그 길로 달려와 뱀 알을 끓여서 아버지께 드렸다. 아니나 다를까 신통하게도 아버지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1) 뱀내골 달래의 효심 설화
달래의 갸륵한 효심에 감동한 신령이 나타나 달래의 아버지를 살린 것이 분명
고창군 성송면(星松面) 괴치리 사천마을 뱀내(사천, 蛇川)골에는 먼 옛날부터
했다. 그러나 이를 어찌하랴, 날이 새자 그날부터 냇가에는 온통 뱀으로 가득
이러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마을에는 늙고 병든 아버지와 이제
찼다. 달래가 파 놓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온 뱀들이 냇물을 휘젓고 다니는 것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달래라는 딸이 살고 있었다. 소녀의 늙은 아버지는 원
이었다. 그날 저녁 달래는 꿈을 꾸었다. 아버지를 모시고 절에 가고 있었는데
인 모를 무서운 병에 걸려 앓고 있었다. 어린 소녀 달래는 병든 아버지를 봉양
뜻밖에 커다란 구렁이가 길을 가로 았다. “아가씨 고맙습니다. 우리 식구들이
하기 위해 마을을 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했다. 하지
굶어서 죽을 뻔했는데 아가씨 덕분에 살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꾸벅 절
만 아버지는 좀체 낫지 않았다. 억척스런 달래의 효심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
을 하며 구렁이가 고마워했다. 꿈을 깬 달래는 아버지께 꿈 이야기를 해 드렸
은 가여워하며 함께 걱정을 해 주었다. 그럼에도 달래의 아버지는 음식도 제대
더니 아버지도 같은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그 뒤로 달래와 아버지는 행복하게
로 넘기지 못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안타까운 신세가 되었다.
살았다고 한다.
달래는 이른 새벽마다 마을 위에 있는 절에 가서 “부처님, 우리 아버지의 병을
이때부터 이 냇물을 ‘뱀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 냇물을 마시면 병
낫게 해 주세요.” 하고 두 손을 모아 불공을 드렸다. 이러한 달래를 보고 마을
이 낫는다 하여 요즈음도 이 냇물을 마시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이 있단다. 지
사람들은 보기 드문 효녀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금은 그 버드나무 자리가 자그만 뜰로 변해 버렸고 새마을사업으로 그 옛날의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아버지의 땀을 식혀 드리려고 부채질을 하고 있었는
뱀내 물길은 이제 겨우 실개천의 자취만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데 갑자기 수염이 하얀 노인이 나타났다. 기다란 지팡이를 짚고 선 그 노인은 조용히 말했다. “얘 달래야! 너의 아버지 병은 좋은 약을 써도 소용이 없느니
(2) 쥐봉과 괴봉의 풍수이야기
라.” 그러자 달래는 “아니, 그런데 할아버지께서는 누구세요?” 하고 물었다.
괴봉의 동쪽 줄기로서 괴봉의 고양이가 노리는 쥐와 같이 되었다고 한다. 고
할아버지는 달래의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엷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만일
양이와 쥐는 천적관계이므로 이런 상대적 지세는 풍수상 나쁠 것 같지만 그렇
내가 알려 준 대로 하지 않으면 너의 아버지는 영영 살지 못할 것이니라, 지금
지만도 않은 것에 풍수의 묘미이다. 쥐는 부지런하고 저축도 잘하는 상징성을
당장 윗마을 냇가 버드나무 밑을 파고 그곳에 있는 뱀 알을 주어다 아버지께
갖기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만에 빠질 염려도 없지 않다. 그런 자만을 눌
끓여 먹이도록 하거라.” 그러고는 그 하얀 노인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달래는
러주는 구실을 하는 것이 고양이이므로 이런 경우 괴봉은 풍수상 좋은 역할을
부채질을 하다가 그만 깜빡 졸았던 것이다.
하는 것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달래의 아버지는 계속 땀을 흘리며 마치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달 래는 정신을 가다듬고 방금 알려 준 할아버지의 말대로 어둠을 헤치고 괭이와
(3) 괴치의 철륭제
바구니를 들고 윗마을 냇가를 찾아갔다. 냇가에는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올듯한
철륭제는 집과 마을의 터를 눌러주고 지켜 주는 수호신인 철륭에게 지내는
상여 집이 있었다. 그리고 그 둘레에는 도깨비 불 같은 것이 무수히 날아다니
제의로 전라도 지역에서 불리는 터주의 명칭이다. 터주는 터에 집을 짓고 사는
고 있었다. 달래는 몸이 떨리고 오금이 저렸지만 무서움을 참고 조심스럽게 그
사람들을 관장하는 지신(地神)이다. 터주신은 마을의 생성과 함께 시작한다. 처
곳을 지나갔다. 냇가에는 여름 밤바람에 버드나무 잎들이 곱게 한들거리고 있
음 집을 짓기 전에 터를 닦고 지신제(地神祭)를 지내면서 터주신을 모시게 된
었다. 달래는 버드나무 밑을 조심스럽게 파기 시작했다.
다. 각 집이 모여서 마을을 이루듯이 집 터주가 모이면 마을 터주가 된다. 마
“과연 이곳에 뱀 알이 있을까?” 하면서도 달래는 아버지를 살리겠다는 일념으
을 터주는 마을 전체의 터를 관장하면서 평안하게 보호해 주는 마을수호신이
로 괭이를 움직였다. 얼마나 팠을까, 난데없이 뱀들이 꿈틀거리더니 마구 쏟아
요, 집 터주는 집안의 터를 관장하면서 집안을 평온하게 보호해 주는 가정수호
져 나왔다. 달래는 그만 무서움에 깜박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 후에 정신을
신이다. 마을 터주는 풍수적으로 마을의 터를 품고 있는 주산에 위치하고, 집
차려보니 달래의 발밑에는 새하얀 뱀 알들이 놓여 있었다. 달래는 조심스레 뱀
터주는 집의 뒤 안 담 안쪽에 각각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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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룡제(天龍祭)는 동제(洞祭)로서의 천룡제와 가정신앙으로서의 천룡제가 있다.
2013년 11월 현재 괴치의 이장은 정채진, 양실의 이장은 김백중이다. 역대 이
마을에서 행하는 천룡제는 마을의 뒤쪽 주산(主山)에 위치한 천룡당에서 지내
장은 다음과 같다.
는 정월대보름의 동제를 말한다. 마을의 천룡당은 천룡이 강림한 곳으로 마을
괴치
양실
의 터주가 된다. 집의 천룡단은 마을의 천룡당에서 지맥이 집으로 내려온 곳에
1975
김판중
조성한 터주, 당산을 일컫는다. 이 때문에 천룡은 산 밑에 집터를 잡은 집이나
1976
정재묵
집터가 센 집에서 모신다. 그러나 전통마을의 집터가 주산 아래 남향을 향한
1977
오세환
경사진 면에 조성되는 경향이어서 대체로 집집마다 천룡을 모신 것으로 보아
1978
오세환
야 한다. 마을 주산의 천룡이 집터에 내용(來龍)하여 집의 당산에 천룡단을 조
1979
오세환
1980
정재진
오세환
성하였다는 풍수 관념이다.
1981
이상복
오세환
괴치리의 철륭제는 집집마다 금줄을 치고, 마을길을 청소하며 길에는 붉은 황
1982
이정호
오세환
토를 뿌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철륭단은 육송정에서 지냈다. 육송정은 원
1984
박조앙
1986
이정호
이성우
1988
이종숙
정희수
한다. 마을주민들은 철륭단을 만들기 위해 소나무 아래 시멘트로 표토를 피복
1990
정기옥
정기모
하면서 2주가 죽어 현재는 2주의 소나무만 남아 있다. 괴치의 철륭제는 2000
1991
정기옥
년대 초반까지 지내다가 현재는 지내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인근에는 성황당이
1992
정기옥
김영동
있어 마을주민들이 지나갈 때 돌을 쌓아 놓고 소원을 빌기도 하였다고 한다.
1994
정동환
오세환
1996
정동환
오세환
1998
정용균
오세환
2000
정채진
오세환
동학농민군이 이곳 괴치를 중심으로 한창 기세를 올릴 때의 이야기이다. 동학
2002
정채진
오세환
농민군들은 인근의 부자들을 괴치로 데리고 와서 이들에게 돈과 쌀을 내어 놓
2003
정채진
오세환
2004
정균구
오세환
2005
정균구
오세환
따르지 않기도 하였다. 그러면 동학농민군들이 말을 안 듣는 부자를 손화중 도
2006
정균섭
김백중
소로 데려와서는 곤장을 때렸다고 한다. 그러면 대부분의 부자들은 쌀을 내어
2007
정균섭
김백중
놓으면 법성포를 통해 동학농민군들의 군량미로 보내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괴
2008
정균섭
김백중
2009
정균섭
김백중
2010
정균섭
김백중
2011
정균섭
김백중
2012
정채진
김백중
2013
정채진
김백중
래 6주의 소나무가 있었는데,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는 4주가 살아 있었다고
(4) 괴치의 동학이야기 : 전라도의 한양 괴치
으라고 하였다. 어떤 부자는 순순히 쌀을 내놓기도 하고, 어떤 부자는 순순히
치에서 국세를 받았기 때문에 이곳을 조선의 한양이라도 불렀다고 한다.
5) 괴치리의 산업 괴치리는 덕림천의 넓은 충적지가 발달해 있고, 사천과 양실마을 뒤로는 구릉 성 산지들이 발달해 있어 논농사와 밭농사가 발달해 있다. 마을의 대표적인 농 업은 쌀농사와 밭농사인 복분자, 고추, 깨 등의 농작물이다.
도움 주신 분 정재진(44세, 성송면사무소) 정균섭(76세, 괴치 토박이) 이종복(63세, 괴치 토박이)
7) 괴치리의 역대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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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자(71세, 괴치) 정길진(41년생, 괴치 출생)
참고문헌 『고창군지』, 고창군지편찬위원회, 2009. 『고창군의 지석묘』, 군산대학교 박물관, 2009.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2003. 『고창 성씨의 입향유래』, 고창문화원, 2007. 高敞의 儒學 고창군, 1996.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문화유적분포지도 고창군』,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05. 『한국의 자생풍수2』, 민음사, 최창조, 1997. 『한국지명총람11 전북편』, 한글학회, 1981. 『19세기 사상의 거처』, 백원철 외3, 도서출판 기역, 2013. http://visionary.co.kr/bbs/board.php?bo_table http://cafe.daum.net/s1128/RBqY/536?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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