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학 3인을 배출한 무송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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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학 3인을 배출한 무송윤씨 2010년 10월 10일 16:00 무송윤씨(茂松尹氏)의 상계(上系)를 보면 고려 예종때 보승낭장(保勝郎將)으로 무장현 호장 (戶長)을 지내신 윤양비(良庇)를 시조로 하여 2세(世) 윤해(諧) → 3세 윤수평(守平) → 4세 (世) 윤택(澤) → 5세 윤귀생(龜生) → 6세 윤소종(紹宗) → 7세 윤회(淮) → 8세 윤경연(景 淵) → 9세 윤자운(子雲) → 10세 윤한(瀚) → 11세 윤화명(化溟) → 12세 윤심(沈)으로 이 어진다. 무송윤씨는 대제학이 3인이 나왔다. 달성서씨가 5명으로 한국에서는 가장 양반집이다. 무송 윤씨는 윤양비가 시조이다. 무송윤씨는 고창의 토성으로 무송유씨나 고창오씨들은 원래부터 반족이었다. 그러나 무송윤씨만은 아전출신으로 향족이었다. 호족축에도 끼지 못한 집안이 다. 즉 호족 밑에서 일을 하던 집안이다. 고창토성 중 유일하게 고창의 토성을 획득하였다. 고려조 보승낭장(保勝郞將)으로 호족 밑에서 무관직으로 출발하여 호장까지 올라갔다. 아전 의 우두머리가 호장이다. 아들은 윤해와 윤의가 있다. 윤해는 고창의 무송지방에 살았고, 윤의는 충북의 영동에 살고 있다. 영동에 살고 있는 집 이 작은 집이다. 하여간 호장이 되니 출세의 욕심이 있었다. 그래서 아들을 열심히 가르쳤 다. 윤해는 1231년 고종 18년에 태어나 1307년 향년 77세로 죽었다. 그는 고려후기 충렬왕의 명신으로 등장을 하였다. 그는 순 자수성가로 그렇게 된 것이다. 그의 자는 강재(康哉)로 향 리호장 출신의 아들이다. 그는 과거를 봐서 진사에 합격하였다. 초시를 합격하여 선대가 하 지 못한 일을 이루어 중앙으로 진출하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청백과 강직으로 하였다. 자신은 초라한 지방의 향리 집안이기 때문 에 스스로가 청백과 강직을 통해 자수성가를 하였던 것이다. 그를 표현하는 말로 충실, 공 명성실, 청렴결백한 공직자가 있다. 이러한 그의 인품과 인격에 충렬왕이 신임하였다. 그는 고려시대 최초의 청백리로 기록되고 있으며,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이것으로 그는 성공가도 를 달리게 된다. 1250년에 등과하여 상주의 사록으로 임명이 되었다. 그 뒤 내시(內侍)에 소속되어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 원에 가는 도중 물품, 음식의 공대 등을 맡아보았 는데 귀국하자마자 쓰다 남은 물품들을 국고에 반납했다. 그 뒤 그는 내시부의 통계문지후 가 되었다가 장흥부의 수령으로 파견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일본정벌을 위한 전함의 건조를 관리 감독하였다. 그 후 흥위위(興威衛)의 장사(長史)가 되었고, 그 뒤 전중시사(殿中侍史)로 전임되었다. 1286년(충렬왕 12) 동계1)초군사(東界抄軍使)로 재직 시 영월수령을 죽인 강윤 명(康允明)을 잡지 못해 파직 당했다. 그 후 다시 등용되어 여러 관직들을 거쳐 판비서시사 (判祕書寺事)가 되었다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충선왕이 즉위한 후 중앙으로 소환되어 전민 변정도감의 사(使)로 임명되었다가, 충렬왕이 복위하자 국학대사성문한사학(國學大司成文翰 司學)으로 임명되고 치사(致仕)했다. 청렴결백하기로 유명했으며, 성격이 강직하여 무슨 일 이든지 결단성 있게 처리했다고 한다. 윤해의 특징으로는 공명정대하고 강직함이었다. 국학대사성문한사학(國學大司成文翰司學)이 되었기 때문에 이를 대제학으로 친다. 1)

동계와 서계로 나눠 여진족을 막기 위해 병마사를 두었다.


아들 수평은 일찍 죽었다. 수평의 아들 윤택이 할아버지보다 더 성공을 하여 정식으로 대제 학이 되었다. 할아버지가 77세, 윤택이 82세를 살았다. 윤택은 자가 중덕(仲德), 호가 율정, 시호가 문정공이다. 윤해는 충렬왕의 명신이고, 윤택은 충숙왕 때의 명신이다. 1317년 29세때 문과장원급제를 하였다. 그의 고숙인 윤선좌는 당대의 대학자였다. 고려시 대는 근친혼을 많이 했다. 원래 그는 고숙이 안 된다. 친족결혼을 해서 고숙이 된 것이다. 윤택이 훌륭한 인재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이색과 교류를 시킨다. 윤택을 목은의 학파로 연결을 해준다. 윤택은 금산군(동국여지승람)에 나온다. 윤택의 아들 윤귀생이 고려를 대표 한 호자로 나온다. 왕이 이 사람의 정려를 내려 주었다. 윤택은 아들을 셋 두었다. 아들로는 귀생, 봉생, 동명이 있다. 윤택은 큰아들을 잘 두어 벼슬을 하다가 효를 다하였다. 주자가례 의 가묘를 설치한 사람이다. 이 집안은 유교를 숭상하였다. 고려조의 숭불정책과는 상반된 다. 윤택은 예문관 대제학의 벼슬에 오른다. 춘추관의 감사를 지냈다. 정1품으로 감추사로도 불렀다. 춘추관의 감사를 그렇게 불렀다. 조부를 능가하는 위치에 오른 것이다. 금상첨화로 효자아들이 나왔는데, 그가 바로 귀생이 다. 이 사람이 윤소종의 아버지이다. 귀생의 호는 동정이다. 목은 이색의 문인이 된다. 1360년 16세에 성균시에 들어간다. 그는 스승을 잘 만나 1365년에 장원급제를 하였다. 중 앙에서 무송윤씨가 명문가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학자로 명망이 높아 판전농시사까지 올랐지 만,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하여 벼슬을 버리고 금산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윤귀생은 자신이 배운 주자의 <가례>를 실천하였다. 사당을 세우고 철 따라 삼대를 제사지냈으며, 부모와 조부모의 무덤에 비석을 세웠다. 무덤 남쪽에 재실을 짓고, 기 일을 새겨서 후손들이 제삿날을 잊지 않게 하였다. 금산에서 유교식 제사를 정착시킨 사람 이 바로 윤귀생이다. 공양왕 3년(1391)에 조정에서 정려를 세우게 하고, 효자비도 세웠다. 남일면 초현리에 정려와 효자비가 있다. 윤택이 벼슬을 하고 있을 때 금주(금산)에 집터를 봐두었다. 귀향하고자 하여 금주로 내려 갔다. 금산의 작은 집이 인물이 없으니 윤택을 업어다가 모셔 놓은 것이다. 둘째 윤의의 자 손이 아닌데 인물이 없어 모셔간 것이다. 윤의라는 분이 먼저 옥천으로 갔다가 금산으로 뻗 었다. 아마 부는 갖추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작은 집에서 잘 모시겠다고 하여 간 것이다. 윤귀생부터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다. 윤소종과 윤회종은 상소꾼으로 유명하다. 바른 말을 잘했다. 고려의 왕이 불교에 근접한 생활을 하자 유교의 입장에서 바른 말을 하다가 안 되 니 내려왔다. 귀생이 소종 때문에 조선조의 원정공신이 된다. 윤소종이 태조 원년에 유명한 상소문을 올린다. 조선조 최초의 상소문을 올린 것이다. 귀생은 정치적인 의미를 안 두었으 나 아들이 그렇게 했다. 귀생은 춘추관 동지사가 되고 태조 2년에 죽었다. 윤소종이 태조의 눈에 들어 그를 아꼈다. 그 덕에 개국원정공신에 낀 것이다. 일생을 거의 상소로 살다시피 하였다. 소종의 상소는 개국정신과 이념에 대한 내용이었다. 묘소들은 있 어도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무송에 자손들이 없다. 윤소종까지 그런대로 무송유씨들이 관계로 진출한다. 윤소종은 유교사상과 불교사상의 차이 로 고려의 조정에 나가지 못하였다. 윤회정은 1407년(태종 7) 사예로서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 성균사성이 되고, 이해 처음으 로 시행된 중월부시법(仲月賦詩法)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1414년 사간원우사간·좌사간, 변 정도감사(辨正都監使)를 지냈다. 윤택의 아들이 귀생이고, 귀생의 아들이 윤소종이다. 윤소종의 아들이 윤회다. 윤회는 자연보호 1호로 정립을 하여야 한다. 거위를 살린 사람이다. 윤회는 이때부터 자연


친화적인 사상을 가졌다. 윤회가 과거를 보러가다가 거위를 살려내었다. 그는 후에 급제하 여 대제학까지 올랐다. 윤회는 순수한 학자로 남아 있다. 정쟁에 휘말리지 않았다. 후손들이 고창을 떠난 것은 아마도 너무 상소를 올리니 후환이 두려워 떠났을 것이다. 무송윤씨들 책이 문화원에 있다. 윤경연이 윤회의 아들이다. 윤경연이 참판을 지냈다. 아들 윤자운이 있다. 그 후손들이 못났 다. 윤자운은 고창사람이고, 누나가 훌륭하였다. 일정때 노산선생이 쓴 “윤씨부인의 주검”이라는 책이 있다. 노산선생은 일정 때 광주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해방이 되자 서울로 올라갔다. 노산선생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신숙주가 사육신으로 죽을 각오하고 있자 내자인 윤자운의 누나는 죽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집의 대 청마루에 목을 매달아 밤을 새며 기별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신숙주가 살아오니 윤씨 부인이 신숙주의 얼굴에 침을 뱉고 자결을 하였다. 윤자운 영의정의 누나였다. 남편의 얼굴에 침을 뱉은 여성이다. 처남 되는 윤자운을 한명회 와 더불어 키워준다. 신숙주가 예종 원년에 영의정으로 만들어 주었다. 성종 원녀까지 2년 간 영의정을 하였다. 노산선생이 전남일보를 집필하였다. 노산은 마산사람이다. 남노당의 박헌영씨와 친구지간이 었다. 노산은 신숙주에게 죄의식을 심어준 사람이 바로 윤자운의 누나였다고 한다. 신숙주 의 막내동생이 말주인데 그 후손들이 순창에 살고 있다. 구한말 이건창이라는 분이 고령탄 이라는 5언 100구의 장편고시을 지었다.〈고령탄〉은 세조에 의해 고령군(高靈君)에 봉해졌 던 신숙주(申叔舟)가 자신의 과거에 대한 후회와 한(恨)을 스스로 탄식하도록 구성한 작품이 다. 무송윤씨로 윤기선이라는 사람이 대산 칠거리 에 살았다. 죽은 후 부인이 아들에게 책들을 주어버렸다고 한다. 무송윤씨들의 책들을 복간 또는 가져와야 한다.

한국역대인물정보시스템 자료 윤소종은 1345년(충목왕 1)∼1393년(태조 2).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헌숙(憲叔), 호는 동정(桐亭). 찬성사 택(澤)의 손자이다. 총민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20 세 전에 시문에 능하여 이제현(李齊賢)에게 특이하다고 보였다. 1360년(공민왕 9) 성균시에 합격하였고, 이색(李穡)의 문인으로 1365년 예부시에 을과 제1 인으로 대책이 가장 뛰어나 춘추수찬(春秋修撰)을 배수받았으며, 이어 좌정언에 있을 때 행 신(幸臣) 김흥경(金興慶)과 내시 김사행(金師幸)을 병국해민(病國害民)한다고 극언하는 소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379년(우왕 5) 전교시승(典校寺丞)·전의부령(典儀副令)·예문응교 등을 지내고, 1381년 모 친상으로 금주(錦州: 錦山)에서 복상을 마치는 동안 남방의 학자들이 많이 와서 수학하였다. 1386년 성균사예로 기용되었으며, 1388년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에는 동 문 밖에 나가 영접하고 곽광전(霍光傳)을 바쳤다. 그것은 우왕을 폐하고 다른 왕씨를 왕으 로 추대할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였다. 그 뒤 전리총랑(典理摠郞)이 되었고 이어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승진되었다. 1389년(창왕 1) 이인임(李仁任)의 죄를 논하여 참관저택(斬棺瀦宅)을 청하였으며, 이어 성 균관대사성이 되었다. 이성계가 조준(趙浚) 등과 함께 사전(私田)을 혁파하고자 하였을 때,


정도전(鄭道傳)과 함께 힘써 협력하였다. 공양왕 때 대사헌 조준의 천거로 좌상시경연강독관(左常侍經筵講讀官)이 되어 변안렬(邊安 烈)의 우왕 영립의 죄를 극론하여 살해하고, 승려 찬영(粲英)을 왕사로 맞이하려는 공양왕의 계획을 반대하여 중지하게 하였다. 그 뒤 남을 비방하는 것으로 왕의 미움을 받아 금주로 유배되었다가 풀렸으며, 다시 정몽주 일파의 간관에게 탄핵을 당하여 유배되었다가 1392년(공양왕 4) 정몽주가 피살되자 비로소 유배에서 풀렸다. 조선왕조가 개창되자 병조전서(兵曹典書)로 부름을 받았고 원종공신이 되었으며, 수문관대 제학(修文館大提學)을 지냈다. 경사(經史)를 박람하였고, 성리학에 더욱 정밀하였다. 시문집으로 《동정집》 8권이 있다. 유회종은 생몰년 미상이며,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무송(茂松). 동지춘추관사 소 종(紹宗)의 아우이다. 우왕 때 문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1389년(공양왕 1) 사재부령 (司宰副令)으로 우왕·창왕의 주살(誅殺)을 상소, 실행에 옮기도록 하고, 1390년 세자시학(世 子侍學)·형조총랑을 역임하였다. 1392년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왕조 개창에 기여하였으나 1395년(태조 4) 의랑(議郞) 으로서 급전(給田)을 잘못하여 삭직, 유배되었다. 1407년(태종 7) 사예로서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 성균사성이 되고, 이해 처음으로 시행된 중월부시법(仲月賦詩法)에 2등으로 합격, 1414년 사간원우사간·좌사간, 변정도감사(辨正都 監使)를 지냈다. 윤귀생(http://www.chunghyo.net) 윤택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자, 할아버지가 그를 키웠다. 할아 버지 '해'는 국학 대사성을 지낸 큰 학자였는데, 그에게 집안의 앞날을 걸고 글을 가르쳤다. 택은 글자 하나를 배울 때마다, 교훈이 되는 구절을 따로 써서 지니고 다녔다. 할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고, 그를 안아 주면서 말했다. 「나와 내 아들은 이제 죽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구나!」 손자가 살아 있는 공부를 하는 것을 알고, 할아버지가 감격하여 칭찬한 것이다. 그는 열심히 공부하여 충숙왕 7년(1320) 과거에 급제하였다. 충숙왕이 원나라 연경 만권당 에 있을 때에 그가 단독으로 왕을 알현하자, 왕이 그에게 어린 아들(공민왕)의 앞날을 부탁 하였다. 공민왕 원년(1351)에 직제학(정4품)에 올랐으며, 그 뒤에도 벼슬길이 순탄하였다. 76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며 노년을 보냈는데, 그의 학덕을 흠모하여 찾아오 는 사람들이 태산 같았다고 한다. 그의 호는 율정인데, 남이면 성곡리 저수지 안쪽에 무덤과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는 목은 이색이 지었는데, 지금 남아 있는 비석은 선조 14년(1581)에 다시 세운 것이다. 그 뒤에 성 곡사원에 배향 되었으며, 남일면 초현리 면사무소 앞에 윤택 효자정문이 있다. 윤회(尹淮)에 대하여 1380년(우왕 6)∼1436년(세종 18).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청경(淸卿), 호는 청향당(淸香堂). 고려말 찬성사 택(澤)의 증손,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구생(龜生)의 손자이며, 동지춘추관사


(同知春秋館事) 소종(紹宗)의 아들이다. 특히, 그의 아버지 소종은 고려말에 조준(趙浚) 등과 더불어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왕 조를 창건하는 데 깊이 관여하였던 인물이었다. 그는 10세의 어린 나이에 벌써 《통감강목 通鑑綱目》을 외울 정도로 총명하였다. 그리하여 1401년(태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좌정언, 이조·병조 좌랑 등을 역임하고, 1417년에는 승정원의 대언(代言)이 되어 왕을 보좌하였다. 이때에 태종은 그의 학문과 재질을 높이 평가하여, 병조참의로 승진시켰다. 1420년(세종 2)에 집현전이 설치되자 1422년에 부제학으로 발탁되어 그곳의 학사들을 총 괄하였다. 그 뒤로 한때 동지우군총제(同知右軍摠制)에 임명된 적도 있었지만, 주로 예문관 제학·대제학과 같은 문한직(文翰職)을 역임하였다. 또한, 정도전(鄭道傳)이 편찬한 《고려사》를 다시 개정하는 일에도 깊이 관여하였고, 1432 년에는 《세종실록》 지리지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1434년에는 《자치통감훈의 資治 通鑑訓義》를 찬집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청경집》이 있다.

윤자운(尹子雲)에 대하여 1416년(태종 16)∼1478년(성종 9).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망지(望之), 호는 낙한재(樂閑齋). 소종(紹宗)의 증손이며, 집현전학사 회(淮)의 손자이고, 경연(景淵)의 아들이다. 1438년(세종 20)에 진사가 되고, 1444년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을 시작으로 집현전 부수찬·이조좌랑·사간원좌헌납, 응교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집현전부수찬으로 있을 때 수사관(修史官)이 되어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고려사》 편 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과 병권을 장악하자 그 의 요속(僚屬)으로 활약하였으며, 수양대군이 즉위하자 추충좌익공신(推忠佐翼功臣)이 되어 대호군으로서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를 겸하고, 이어 승정원동부승지·도승지에 올랐다가 1460년(세조 6)어머니상을 당하여 일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때 세조가 여진족의 모련위(毛憐衛)를 정벌하기 위하여 장재(將材)를 구하게 되었는데 단 연 그가 뽑혀 기복(起復)되어 이조참판이 되고 무송군(茂松君)에 봉하여져 군사를 지휘하게 되었다. 원정에서 돌아와 인수부윤(仁壽府尹)이 되었는데 3년상을 나게 해주기를 원하였으 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그 뒤 1462년에 병조판서, 1465년에 의정부우참찬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그의 매서(妹壻)였던 신숙주(申叔舟)가 영의정이었으므로 그를 의정부에 임명하 는 것은 상피관계(相避關係)에 저촉된다 하여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세조는 의정부에는 마땅한 사람이 아니면 임명할 수 없다 하여 1466년에 그를 의정부좌참찬으로 승진시키고, 이듬해에는 다시 의정부우찬성으로 승진시켰다. 이때 마침 함경도에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 그를 함길도체찰사(咸吉道體察使)에 임명 하여 난을 집압하도록 하였는데, 이시애가 이미 관찰사·절도사와 제진장(諸鎭將)을 죽이고, 또 그마저 죽이려고 칼을 빼들고 둘러싸 7일이나 지키고 있어서 하는 수 없이 적(賊)이 정 부를 속이는 위조문서에 서명하고 살아 돌아왔다. 그러나 세조는 그를 위로하고 1469년에는 우의정으로 승진시켰다. 그뒤 곧 좌의정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영의정으로 승진하고, 성종이 즉위하자 좌리공신(佐理 功臣) 등이 되어 무송부원군 겸 예조판서(茂松府院君兼禮曹判書)에 피봉(被封)되었다. 그리


고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1476년(성종 7)에 다시 우의정이 되었다. 사람됨이 단아(端雅)하고 상밀(詳密)하여 일생 동안 관부(官府)의 탄핵을 한번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여러 번 순찰사로 나아가 일을 처리하기도 하 였는데, 이것은 모두 좌리공신으로서 권세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명회(韓明澮)·신숙주·구치관(具致寬) 등과 함께 예종이 죽은 뒤에는 원상(院相)으로서 국정 을 좌우하였다. 그러나 사신(史臣)은 그를 성품이 편협하고 아무런 재능이 없으면서도 의정 부의 고관이 되어 별다른 정책을 건의한 것도 없으며 이시애의 난 때에는 협박을 받고 적이 조정을 속이려는 문서에 서명하고 적을 대할 때마다 대인(大人)이라 칭하였다고 혹평하였 다. 뿐만 아니라 조석으로 어머니가 사는 집 앞을 지나다니면서도 찾아보지 않는 일이 많아서 사람들이 이 노파는 자식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한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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