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혈동맹의 호국성지 용반리
1. 용반리 위치와 유래 고창군 흥덕면에 속하는 법정리의 하나로 마을의 지형이 용이서려 있는 형국이므로 용반(龍 盤)이라 하였다. 리의 형성 및 변천과정을 보면 조선조가 말기 용반리는 흥덕군의 북면에 속 했던 지역으로 1914년 3월 1일 조선통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내남당(內南塘) 대양(大陽) 용 반.관동(冠洞). 동신기(東新基). 회화정(回化亭). 외남당(外南塘). 중남당(中南塘). 오정(五丁) 각 일부, 부안군 건선면의 신흥, 신정 각 일부를 병합하여 용반리라하고 흥덕면에 편입하였다. 용반리는 흥덕면의 북서부에 있다. 2013년 6월 현재 면적은 2.75㎢로 밭 1.25㎢, 논 0.61㎢ 이며, 총 87가구에 169명[용반 57세대 113명, 남당 30세대 56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용반 리ㆍ남당리 2개의 행정리와 남당ㆍ대양ㆍ시게배미[일명 시기배미ㆍ동림나드리]ㆍ용반ㆍ재내ㆍ 참샘골 등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졌다. 남당은 대양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대양은 용반 북쪽 에 있는 마을로 뒤에 옥녀봉이 있고, 앞으로 옥녀의 세숫대야가 있어 붙인 이름이다. 시게배미는 용반 남동쪽 큰길가에 있는 마을로 석우리 동림으로 드나드는 어귀이므로 동림나 드리라고도 한다. 남당은 대양 서쪽, 재내는 용반 서쪽 방죽 안, 참샘골은 용반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남당 뒤에는 임진왜란때 채홍국(蔡弘國)ㆍ고덕붕(高德鵬) 등 92명의 의사가 혈맹했 다는 혈맹단(血盟壇)[일명 술무덤, 술무덩, 숫무덩, 맹무덤]이 있다. 문화유적으로 남당 회맹단과 모충사 유물산포지가 있고, 용반리는 부안군 줄포면과 경계하고 있으며 국도 23호선, 오른쪽으로는 군도 7호선, 왼쪽으로 서해안고속도로가 지난다.
1) 용
반(龍盤)
흥덕면 소재지에서 23번 국도를 따라 줄포방향으로 4Km쯤 거리에서 우측 농어촌도로 1Km거 리에 용반마을이 있다. 1600년대에 이무기가 용이 되려고 바위에 오랫동안 앉아 있다가 승천 했다는 바위가 전해오는데 이 때문에 처음에는 『용바위섬』으로 부르다가 1940년경 용의 형국 을 하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804년 경 조선 순조초에 청도김씨가 들어와 살면서 형 성된 마을이다. 이후 동래정씨, 연안이씨가 들어와 살았으나 인근 석우리로 일부가 이사하면 서 지금은 각 성씨가 살고 있다. 문경송씨가 들어와 살 때에는 15호 정도였으나 그 뒤로 번창 하여 숙종 23년 입촌한 연안이씨와 문경송씨가 주호를 이루고 있다. 자연부락으로는 용반, 재 내가 있다. 마을에는 용반보건진료소, 천주교 용반공소, 고창산립조합조경수 유통센터, 고창부안축협에서 운영하는 최첨단 한우가축시장이 있다.
용반마을 2) 재
내
용반 재(도로)넘어 북편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의 북쪽에는 대양제,
용봉석골이 위치하고 남서방향에는 강첩골이 있다.
재내마을
3) 남
당(南塘)
흥덕면소재지에서 23번 국도를 라 부안군방향으로 8Km 지점에서 동쪽으로 1Km거리에 남 당마을이 있다. 1504년경 조선조 중종 때 죽산안씨가 처음으로 들어왔으며 이어 평강채씨가 들어와 살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남당마을 명칭의 변천과정은 열두남댕이로 불렀으나 1900년대에는 남댕이로 이후 1945년부터 남당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은 풍수적으로 칼의 형국이며 남향을 하고 있다. 자연부락으로는 남당과 대양마을이 있다. 대양은 남당의 남쪽에 위치하여 마을 뒤에는 옥녀봉이 있고 마을 앞에는 옥녀가 세수할 때 사
용하였다는 대양(대야)이 있다 하여 붙여진 대양마을과 줄포면 신정마을과 접한 남당의 작은 마을 뜸에는 4가구 6명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 뒷편에 위치한 남당회맹단은 1992년 (선조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 지방출신인 야 수 채홍국 등 92인이 같은 해 9월 18일 남당마을에 모여 단을 쌓고 삽혈동맹을 한 회맹단이 잘 보존된 호국이 성지이다. 남당회맹 호남창의의 의려장이었던 야수 채홍국 의사의 충정을 기리어 새워진 모충사는 호국의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친 호남창의열사들의 넋을 위로하 고 못다한 한을 영원히 기억하고 있다. 회맹단 기적비 건립시 이곳에서 출토된 장검 5자루, 투구구슬, 화살촉, 관옥 등이 발견되었으 며 1933년 실시된 간이조사에서 고분으로 규명되었다. 신리의 남원골과 남당의 논골을 남-북 으로 두고 작은 구릉이 형성되어 있는데 고분은 능선의 끝부분에 해당된다.
남당마을 4) 대
양(大陽)
남당마을 남쪽에 있는 대양마을은 옥녀가 머리를 풀고 있는 형국을 하고 있는 옥녀봉(41.5m) 이 있다. 그 아래 용추가 있어 다른 곳보다 물이 맑고 시원하여 옥녀봉의 옥녀는 매일 내려와 목욕을 하고 용반서쪽에 있는 과객이 쉬었다가는 주막에 들러 과객과 어울어져 술을 마시곤 했다. 어느 날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이 주막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옥녀는 주막으로 달려가 신선의 술시중을 들었다. 신선의 고고함과 외모에 반한 옥녀는 신선을 꾀어 용추에서 만나자고 한다. 한여름 무더위가 한창인 칠월 칠석 한나절 두 사람은 옥녀봉아래 용추에서 만 나 목욕을 하고 사랑을 하게 되었다. 이때 하늘에서 옥황상제가 신기한 것을 발견했지. 신선 이 정도의 길을 가지 않고 속세미인과 만나 사랑을 하다니, 하늘이 노하여 심한 바람과 번개 가 치더니 청둥소리와 함께 벼락을 내려 옥녀봉이 불타면서 두 사람이 벌거 벗은 채로 죽어 농바위가 되었단다.
민둥산이 되어버린 옥녀봉 나무한그루, 풀 한포기가 자라지 않는 민둥산
이 되었다. 세월은 흘러 옥녀봉일부는 농경지로 경작되었으나 구릉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마을은 맑고 시원한 물을 간직하고 있어 옥녀가 세수할 때 사용하던 대양이 있다하여 대양이 라 부르다가 대양(大陽)이 되었다 한다.
대양마을
옥녀봉
2.자연환경과 지명 1) 자연환경 대양마을 뒤쪽에 옥녀가 머리를 풀어헤친 모양의 옥녀봉(玉女峯)이 솟아 있고 대양 서쪽 옥녀 봉 아래에 용춧골, 용반 동남쪽에 계덕골 등의 골짜기가 있다. 예전 과객들이 쉬어가던 술집 이 있었던 과갯등, 과갯등 북쪽 구석에서 구석등 등의 산등성이가있고, 참샘골에는 찬새암(일 명 찬시암)이 있는데 물이 썩 차고 맛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지
명
개
덕
골 : 용반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과
갯
등 : 용반 서쪽에 있는 등성이. 전에 과객들이 쉬어가는 과객집(술집)이 있었다 함
구
석
등 : 과객등 북쪽 구석에 있는 등성이
동림나드리 : 시계배미 맹 맹
단 : 술무덤 무
바우배기 술
무
덤 : 술무덤 : 하남리의 바우배기 덤 : 숫무덤, 맹단, 맹무덤 남당 뒤에 흙으로 쌓은 당 임진란 때 채홍국, 고덕봉 등 92인의 의사가 혈맹했다 함
시계배미
: 시기배미, 동림나드리 용반 동남쪽 큰길 가에 있는 작은마을, 옆 길 건너에 후포리의 시계배미가 있으며 석우리 동림으로 나가는 어귀가 됨
시기배미 옥
녀
: 시계배미 봉 : 대양리뒤에있는 산 모양이 옥녀가 머리를 풀고 있는 것 같이 되었다 함
용
추
골 : 대양서쪽 옥녀봉 아래에 있는 골짜기, 용추가 있었으며 다름 곳보다
물이 좋음 찬
새
암 : 참샘골에 있는 샘, 물이 썩 차고 맛이 좋음
용
반
제 : 용반마을과 혜화정사이에 있는 소류지
대
양
제 : 대양마을 앞들 제내마을 아래에 있는 소류지
3.마을의 인문환경 1) 남당회맹단 o 종
목
:
고창군향토문화유산 제4호
o 지정일
:
2004년 6월 8일
o 소재지
:
고창군 흥덕면 용반리 460
o 시
:
조선시대
대
남당 회맹단은 혈맹단이라고도 하며, 채홍국(蔡弘國) 등 고창 지역 300여 명의 선비들이 구국 의 기치로 호남 의병을 창의하고자 삽혈 동맹을 하고 쌓은 맹단이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 왜란이 일어나자 채홍국, 고덕붕(高德鵬), 조익령(曺益齡), 김영년(金永年) 등이 격문을 돌려 창의(倡義)하여 92명의 의사(義士)와 500여 명의 의병이 모여, 단(壇)을 쌓은 뒤 백마(白馬)의 피를 마시며 다섯 가지의 맹약을 내걸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할 것 을 천지신명에게 혈맹(血盟)을 하였다. 이들은 혈맹단 앞에서 훈련도 하고 군량을 모집하여 출병을 하였으며, 순천까지 적을 추격하 여 큰 전과(戰果)를 올렸고,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다시 창의한 뒤 출전(出戰)을 하여 배풍령(培風嶺), 장등원(長嶝原)을 거쳐 부안 호벌치(胡伐峙)에서 23일간의 격전 끝에 장렬하 게 순국하였다. 혈맹단은 전국 유일의 충혈(忠血)이 깃든 곳으로, 유림과 유족들이 뜻을 모아 이곳에 기적비를 세워 기리고 있다. 채홍국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자는 광보(光輔), 호는 야수(野叟)이고, 본관은 평강으로, 채충경(蔡忠敬)의 현손이며 채치의(蔡致義)의 아들이다. 1534년(중종 29)에 부안에서 출생하였 고, 흥덕 남당마을에 이거(移居)하였다. 채홍국은 키가 컸으며, 힘이 출중하였고, 말타기와 활 쏘기에 능숙하여 충의대절(忠義大節)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의에 격분(激憤)하여 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과 더불어 창의하 였고, 금산(錦山)에서 싸우던 고경명이 전사하자 흩어진 군사들을 다시 모아 8월 1일에 흥덕 남당마을에서 다시 창의하여 고덕붕, 조익령, 김영년 등과 함께 혈맹을 하고 서해안으로 출병 하여 사수함으로써 이웃 고을을 안전하게 지켰다. 이에 권율이 위로의 서신을 보내 칭송하였 다. 또한 군량 400석을 모아 200석은 기효증(奇孝曾)을 시켜 행재소(行在所)에 보내고 100석은 경 상도의 곽재우(郭再祐) 군중에 보냈다. 적이 순천에 침입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추격하여 석보 (石堡)에서 대파하여 이 공적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에 제수되었다. 또 정유재란에 창의하여 적을 흥덕 배풍령에서 맞아 싸워 큰 공을 세웠으나 부안 호벌치 싸움에서 23일간 전투 끝에 아들 채명달, 채경달과 함께 분전하였음에도 세 부자 모두가 순국하였다. 이에 셋 째 아들 채영달이 부형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르고 3년간 여묘살이를 하였다. 1872년(고
종 9)에 자헌대부 병조판서(資憲大夫兵曹判書)의 증직과 함께 정려(旌閭), 복호(復戶)가 내려졌 다. 고덕붕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초명은 덕봉(德鳳), 자는 남익(南翊), 호는 여곡(麗谷), 본관 은 장흥으로 고응진(高應軫)의 아들이다. 1552년(명종 7)에 고창군 신림면[현 흥덕면 제하리] 고려곡(高麗谷)에서 출생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금산에 달려가니 족형(族兄) 고경명이 이미 순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의병장 채홍국 등과 함께 흥덕 남당에서 혈맹을 맺고, 맹주장(盟主將)에 추대되어 군기(軍紀)를 정돈하자 많은 의병이 모여들었다. 의병을 인솔하여 왜적을 격퇴하고 적을 잡아 죽이지 않고 석방을 유인하는 책략을 역이용하여 크게 이겨 순천까지 적을 추격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 왜적이 다시 침범하자 맹주장으로 적을 맞아 싸우다가 부안 호벌치 싸움에서 순절하였다. 1893년(고종 30)에 승정원좌승지에 증 직되었다. 남당 회맹단은 남당마을 오른쪽에 높이 10m, 직경 20m의 왕릉 모양 구릉으로, 그 앞에 기적 비가 서 있고, 앞쪽에 채홍국 등 의병을 모신 모충사가 자리 잡고 있다. 모충사는 재실과 강 당, 정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1924년 4월에 흥덕마을 선비들이 흥덕면 행정마을에 모충사를 건립하여 순절한 의병들의 넋 을 위로하였으며, ‘호남흥성창의비(湖南興城倡義碑)’를 세워 의병들을 추념하였다. 남당 회맹 단 앞에는 1964년에 고창 군민들이 뜻을 모아 세운 ‘임진창의남당회맹단기적비(壬辰倡義南塘 會盟壇紀績碑)’라는 기적비가 있다. 현재 남당마을에 있는 모충사는 1986년 고창군에서 건립 하였다. 남당 회맹단은 2004년 6월 8일 고창군 향토문화유산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회맹단.기적비
삽혈동맹 (揷血同盟)으로 의병 창의 (倡儀) 1592년 (宣祖 25년) 4월 13일 소서행장(小西行長)을 선봉대장(先鋒大將)으로 하여 우리나라를 침략했던 임진왜란이 시작되어 조국이 왜병의 발굽아래 짓밟히는 치욕스런 수모를 당하게 되 자 전국 각지에서는 의병들이 속속 들고 일어나 구국의 대열은 줄을 잇기 시작했다. 호남지방 에서도 고경명(高儆命)과 유창로(柳彰老)등이 담양(潭陽)에서 봉기하여 동년 7월 9일에 금산 전투인 칠백의사 (七百儀士)의 장렬한 전투에 참가 했다가 모두 전사하였으며 나주에서 창의 한 김천일(金千鎰) 송제민(宋濟民), 장성 남문(南門)에 의병청을 설치한 김경수(金景壽) 김제민 (金齊閔)등 의병봉기의 기치가 곳곳에서 나붓낄때 이 고장에서도 1592년 9월 18일 흥덕 고을 북면(北面) 남당에서 채홍국(蔡弘國)을 비롯 92명의 선비들이 삽혈동맹(揷血同盟)으로 의병소 (義兵所)를 설치하여 구국전선에 나섰다. 이때의 동맹편제 (同盟編制)는 다음과 같다. 의병소 제임록 (義兵所 諸任錄) 의병장
(義兵將)
채홍국(蔡弘國)
(副
將)
이대준(李大俊)
△ 맹주장
(盟主將)
고덕붕(高德鵬)
이대영(李大榮)
△ 참모관
(參謀官)
조익령(曺益齡)
채우령(蔡禹齡)
△ 군기도감
(軍器都監)
김경덕(金景德)
△ 부
(部
채홍조(金弘祖)
△ 부
장
장
將)
(懸令)
△ 전량도감
(典糧都監)
이민복(李敏復) 이번(李蕃)
△ 금
(禁
김수인(金守仁)
장
將)
(懸監)
△ 조군향사도감 (調軍餉士都監)
김영년(金永年)
△ 부감군
(副監軍)
임기(林機)-(奉事) 채명달(蔡命達)-(主簿)
△ 점정도감
(點丁都監)
김영무(金英武)
△ 부
(副
임대수(林大樹) 오몽서(吳夢瑞) 이시화(李始華)
점
點)
△ 돌격장
(突擊將)
채경달(蔡慶達)-(判事) 윤흥은(尹興殷)
△ 부격장
(副擊將)
최언심(崔彦深)
(參奉)
△ 선
봉
(先
鋒)
오봉수(吳封壽)
(奉事) 주번길(朱蕃吉)
△ 부
봉
(副
鋒)
김경장(金景章)
(進士)
(生員) (懸監)
△ 쟁고관
(錚鼓官)
박영동(朴榮東) 채대향(蔡大享) 채중달(蔡仲達)
△ 서사도감
(書寫都監)
채상(蔡瑺)
△ 부
(副
이민덕(李敏德)
사
△ 수화관
寫)
(水火官)
(生員)
채대임(蔡大臨) 나기인(羅起寅) 최유청(崔有靑) 김응태 (金應兌)
△ 조련도감
(操鍊都監)
△ 부
(副
감
監)
채봉(蔡鳳)
(直長)
오송수(吳松壽) 이민부 (李敏敷)
△ 습사도감
(習射都監)
배수의(裵守儀)
(進士) 임추(林樞) 김상추(金尙秋) (參奉)
△ 부
사
(副
射)
윤전수(尹典壽) 채영달(蔡榮達) 이작(李綽) (奉事) 이성춘(李成春)
(參奉) 조익수(曺益壽)
탁상 (卓祥) △ 종사관
(從士官)
채덕량(蔡德良) 김방필(金邦弼) 임세무(林世茂) 임대일(林大一) 나기종(羅起宗) 최치원(崔致元) 전시춘(田始春)
△ 시포도감
(矢炮都監)
김헌(金攇) 임계원(林啓元) 김이진(金以振) 박치덕(朴致德) 오필수(吳弼壽) 강재팔(姜載八)
△ 좌대관
(左隊官)
채구(蔡球) 채대원(蔡大元) 황득중(黃得中) 허섭(許燮) 김상동(金尙同) 채홍업(蔡弘業) 전시추(田始秋) 채홍우(蔡弘宇) 이인영(李寅榮) 채영달(蔡永達)
△ 우대관
(佑隊官)
이번아(李蕃衙) 채영(蔡英) 채인달(蔡寅達) 임세장(林世章) 채곤(蔡琨) 채이달(蔡利達) 김이명(金以鳴) 채장(蔡璋) 채홍무(蔡弘武) 이인발(李寅發)
△ 전초장
(前哨將)
박경덕(朴慶德) 채심(蔡堔) 김대진(金大振) 이득춘(李得春) 허득천(許得天)
△ 후초장
(後哨將)
채인달(蔡仁達) 김홍영(金弘寧) 정대열(丁大悅) 채홍서(蔡弘緖) 최명동(崔鳴東)
△ 감포관
(監浦官)
이익성(李益盛)
△ 부
(副
김영(金榮)
감
監)
이들은 임진 8월 11일 열읍 (列邑)의 사람들에게 흥의토적(興義討賊)의 격문을 발송하고 활 동을 개시하여 동년 10월 6일 법성진(法聖鎭)에 병량(兵糧) 4백석을 내게 하여 3백석은 의곡 장(義穀將) 기효증(奇孝曾)과 향사부감(餉士副監) 채명달로 하여금 용만(龍灣)의 행재소 (行在 所)에 보내고 100석은 영남의 곽재우(郭再佑)의 병장에게 보내고 각종 병기(兵器)를 공급하여 그들의 혈전을 도왔다. 그리고 창의 의병대는 정읍의 천원(川原), 장성의 사거리 (四街里), 담양(潭陽) 곡성(谷城)의 목사동(木寺洞), 순천(順天)의 쌍암(双岩) 주암(侏岩), 남원 순창의 적성강(赤城江) 적치(賊峙) 등을 전전(轉戰)하여 크게 전과를 올리고 11월 18일 귀환 하였다. 이듬해인 1593년 (宣祖 26년) 1월 명군(明軍)의 지원으로 왜병이 물러감에 따라 이들 3백여 의열들은 다시 향리로 돌아와 각기 생업에 종사 하였다. 그러나 왜군은 4년 후인 1597년 (宣祖 30년) 1월 15일에 15만 대군을 이끌고 재침 해옴으 로써 정유재란(丁酉再亂)을 일으켜 한반도를 또다시 불바다로 몰아 넣었다. 정유재란때 재규합 용전(勇戰) 1월 27일 채홍국 등 옛 의병 동지들은 다시 남당 회맹단에 모여 창의의 횃불을 밝혀들고 재동맹 하였다. 이때 재동맹에 가담한 의열들은 다음과 같다. △ 통덕랑
(通德郞)
박이점(朴爾點)
△ 사복시정
(司僕寺正)
한계상(韓繼常)
△ 진
사
(進
士)
송수익(宋受益)
△ 진
사
(進
士)
송수명(宋受命)
△ 사
과
(司
果)
정만(鄭慢) 채홍주(蔡弘周) 김안국(金安國) 강혹성(姜或成) 채치정(蔡致貞) 곽방욱(郭邦郁) 장돈(張潡) 채이달(蔡以達) 문익빈(文益斌) 박경득(朴慶得) 이세번(李世蕃) 이영발(李英發) 이무(李琳) 성래길(成來吉) 최봉언(崔鳳彦) 안지환(安知煥) 남유진(南有津) 배종의(裵從義) 곽재상(郭載祥) 채성장(蔡成章) 경시우(景時禹) 엄능간(嚴能幹) 승만세(承萬世) 채충량(蔡忠良) 민우적(閔佑適)
△ 만일사
(萬日寺) 주지 승(僧) 각심(覺心)
△ 각수암
(覺羞庵)
승(僧) 보규(普規)
△ 선불암
(仙佛庵)
세존(世尊) 승(僧) 관심(觀心)
△ 대
(大
승(僧) 윤심(允心)
암
菴)
임진왜란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들이닥친 왜군을 맞이한 채홍국의 흥성 의병들은 그러 나 쓰라렸던 임란의 기억을 상기하여 의기는 더욱 충천 하였고 구국의 일념에 불타 있었다. 정유년 3얼 23일에 왜적이 흥덕에 쳐들어와 살육을 심히 한다는 황득중(黃得中)의 급보를 듣고 먼저 와 있는 영암(靈岩)과 해남(海南)의 의병들과 합세하여 싸우니 이때 배풍령(排風嶺) 에서 부장 채홍조 등이 전사하고 계속된 다음날(24일) 전투에서도 부사 이 작과 승만세 부감 김영등이 분사 하였다. 25일에는 왜적이 일단 퇴각 하였는데 4월 4일에 왜적이 부안(扶安)을 침략하여 온다는 정보 를 듣고 부안에 이동하여 위번동(蝟蟠洞)에서 진을 치고 9일 동안이나 탐색전을 벌이다가 마 침내 4월 14일에 적이 돌격하여 왔다. 전투중에 김필선(金弼善)이 왜장에게 붙들이어 가슴을 찔리고 코를 베이어 죽음을 당하자 조익단(曺益斷) 최언심 등이 이를 추격 하다가 전사하고 채홍국과 참모관 채우령이 다시 추격 하여 적진을 교란하고 시포도감 김헌은 칼을 빼어 왜군 두놈을 베어다가 분에 못이겨 그 간을 내어 씹었다. 동시에 맹주장 고덕붕, 조련부감 오송수, 전량도감 이 번 등도 이에 합세 하였는 데 수화관 나기인 등 16명의 의열들이 전사했다. 4월 15일에는 왜군들이 흥덕 남당의 장등에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에 의해 채홍국이 직접 나서 이들을 급습하였다. 이곳의 지세가 장등을 에워싸고 넓은 들판이어서 피아간에 밀치고 닥치는 이전구투(泥田狗鬪)속에 이튿날인 16일에는 채우령과 부점 이시화가 전사하고 17일에 는 감포관 이익성이 전사하여 그의 아들 이 무가 왜적을 베어 이를 복수 하였다. 18일에는 조련부감 임추가 적에게 잡혀 무참히 죽고 19일에는 오몽서 김귀복이 전사하고 20일에는 참모관 조익령이 적에게 잡혔는데 채홍국이 이를 구출하려고 추격 하다가 적의 칼 에 찔려 조익령과 함께 분사하고 말았다. 21일에는 채홍국의 아들 돌격장 채경달과 부감군 임 기, 사고 정 만이 전사하였으며 22일 에는 쟁고관 박영동, 좌대관 채구, 수화관 최유청, 김정립(金廷立)등이 전사하고 23일에는 최 후의 보루인 부감군 채명달, 종사관 전시춘, 임세무 등이 전사하였다. 이와같이 배풍령에서 장등원 그리고 호벌치에 이르는 남당회맹의열은 초전엔 적으로 하여금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연전연승을 기록했으나, 워낙 중과부적인데다 병기마저 달려 피비린 내 나는 혈전과 일진일퇴의 격전 끝에 3백여명의 의열들이 모두 처절하게 순절(殉節)하고 말 았다. 채홍국 의려장도 경달 등 그의 아들 3형제와 조카들까지도 이 혈투에서 운명을 달리하는 비극을 맞았었다. 이충무공의 명량대첩(鳴梁大捷)을 고비로 1598년 (宣祖 31년) 11월에 왜적 의 철수가 끝남으로써 임진왜란의 막은 내리게 되었다. 모충사(慕忠祠) 건립 넋을 위로 이후 조정에서는 이들 3백여 흥성창의 의열들의 공훈(功勳)을 인정하여 채홍국 의려장에게 병조판서를 증직하고 그의 아들 경달에게는 훈련원정(訓練院正)을 맹주장 고덕붕에게는 참의 (參議)를 추증(追贈)하였고 흥덕면 남당 회맹단에는 모충사(慕忠祠)를 건립하여 호벌치 싸움에 서 기일(忌日)도 알 수 없이 가버린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또한 1924년 4월 20일에는 일제 치하를 무릅쓰고 흥덕, 고부, 부안 등 향리의 뜻있는 유림(儒林)들이 이들을 추념 하고자 흥덕읍에「호남흥성창의비」(湖南興城倡義碑)를 건립하였으며 1964년 8월 15일에는 고창군민이 추모의 뜻을 새겨 회맹단에 「임진창의남당회맹단기적비」(壬辰倡義南塘會盟壇紀蹟碑)를 세워 흥성창의 의열들의 호국 충정(護國忠正)과 구국의 귀감(龜鑑)을 길이 전승하고 있다. 한편 이 곳 회맹단기적비 건립 때 맹단에서 장검 5자루와 투구구슬, 화살촉, 관옥 등이 발굴되어 현재 전주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다.
2) 모충사(慕忠祠) 사우란 선조 혹은 선현의 신주(神主)나 영정을 모셔두고 연 수차에 걸쳐 제향을 행하는 장소. 명칭은 곳에 따라 향현사ㆍ향사ㆍ이사ㆍ영당ㆍ별묘ㆍ세덕사ㆍ유애사ㆍ생사당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사우의 발생은 인간의 보편적 의지인 선조와 선현의 숭배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되며, 특히 우리 나라에서 본격적으로 발생하게 된 것은 고려 말 주자학 전래 이후의 일이다. 우리 나라에서 사우가 광범위하게 확산된 것은 여말에 전래된 ≪주자가례 朱子家鱧≫에서 비롯되었 다. 즉 여말 주자학을 수용한 정몽주 등의 제창으로 인하여 가묘(家廟)의 제도가 성립하게 되었으 며, 기타 생사영당(生飼影當)과 일반 사우 등 여러 가지 사묘(飼廟)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물 론 삼국시대에 있어서도 유교적 색채를 농후하게 지닌 선조봉사(先祖奉祀)의 관습이 있었다. 즉 삼국시대부터 이미 왕실에서는 선왕의 유령을 봉사하는 종묘제도가 있었고, 그중 가장 조 직적으로 발달된 것으로 신라의 칠묘제를 들 수 있다. 또한 일반 사우의 경우에도 이미 신라 시대에 다수 존재하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던 충청도 진천에는 김유신의 사우가 신라시대에 건립되어 춘추로 제향 되었으며,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 초에 소재관으로 하여 치제케 할 때 까지 국가적으로 봉사되 었음을 볼 수 있다.
고창군 흥덕면 용반리 남당마을에 있는 모충사는 평강채씨 야수 채홍국, 장흥고씨 여곡 고덕 붕, 청주한씨 사복시정 한계상, 야수의 장자 훈련원주부 채명달, 차남 이자훈련원정 채경달을 모신 사우이다. 1924년에 설단으로 야수를 항사해 오다가 1988년 국도비와 사림의 성으로 맹단의 옆 신실 강 당을 건립하였다. 야수 및 4위와 동의사 121위를 동서로 종향하였다. 형태는 3칸 건물로 맞배지붕이고, 겹처마이고 앞에 묘정비가 있다. 평강채씨 야수공 종중에서 관리하며 제사일은 음력 10월10일이다.
모충사
의사를 모신 명위현판 3) 유물산포지
용반리 유물산포지 1 흥덕면 용반리 774-3번지에 위치한 원삼국시대 유물산포지는 남당마을 남측에 위치한다. 북 측은 부안군과 경계를 이루며 남측은 용추골로 불리는 곳에 위치하며 동측은 남당마을과 덧논 골이 위치한다. 구릉은 해발 41.5m로 저평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수습된 유물은 용관편, 경 질타날문토기편, 경질토기편 등이다. 용반리 유물산포지 2 흥덕면 용반리 1010번지에 위치한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는 유물산포지는 예촌에서 남당으로 가는 312번 지방도에 연접한 구릉으로 수원백씨 세장비, 하남교회, 삼오노인정이 위 치하고 서측으로는 대양마을로 이어지는 소로가 개설되어 있다. 대양마을 동측으로는 덧골논 이 남-북으로 펼처져 있는데 유물산포지는 덧논골 동측의 구릉사이와 남당마을의 구릉에 위치 한다. 수습된 유물은 경질토기편, 연질토기편, 타날문토기편 등이다. 용반리 유물산포지 3 흥덕면 용반리 18번지에 위치한 삼국시대-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유물산포지는 행정마을 시측 구릉으로 남당마을과 덧논골이 남측은 예촌마을과 용반제가 위치한다. 구릉은 해발 25m의 지 평한 지역으로 흥덕에서 북측으로 뻗어올라간 능선의 말단구릉이다. 수습된 유물은 경질토기 편, 연질토기편, 청자편 등이다. 용반리 유물산포지4 흥덕면 용반리 1076번지에 위치한 삼국시대 유물산포지는 예촌마을 구릉으로 동측으로는 말 등들, 서측으로 대양마을과 남당마을, 남서측으로 용반마을과 용반제가 있다. 예촌마을, 남서 측에 해당되며 동측으로 돌출된 구릉사이에 형성되었다. 수습된 유물은 경질토기편, 경질타날 문토기편 등이다. 용반리 유물산포지5 흥덕면 용반리 806-1번지에 위치한 삼국시대 유물산포지는 용반마을의 남측 구릉으로 동측은 동림저수지가 서측은 23번 국도가 지나가고 있다. 해발 32.4m의 저평한 지역으로 흥덕에서 뻗어내린 가지능선의 일부이다. 수습된 유물은 경질타날문토기편,옹관편 등이다.
4) 마을의 시설 (1) 용반보건진료소 용반산보건진료소는‘농어촌 등 보건의료를 위한 특별조치법(농특법)’ 제 1조에 의하면 이법의 목적은 농어촌 등 보건의료 취약지역의 주민들에게 보건의료를 효율적으로 제공함으로써 국민 의 의료균점과 보건향상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흥덕면 용반리 천주교 용반공소 앞에 터를 잡 아 1980년 개소하였으나 시설이 노후화되어 용반안길 63에 1,404㎡부지에 건축물 156㎡를 신축하여 건강증진을 위한 물리치료 및 의료장비를 갖추고 2007년7월10일에 신축 이전하였
다. 우리나라에서 보건진료소를 설치하기에 이르렀고, 보건진료소의 운영을 위하여 보건진료원이 라는 명칭으로 일차보건의료를 담당하는 전문인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이라는 명칭으로 일차보건의료를 담당하는 전문인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2000년에게 모든 인류에게 건강을” 목표로 내세우고 이에 접근 방안은 일차 의료가 열쇠라는 것에 의견을 보았다. “농어촌보건의료를 위한 특별조치법 ”(이하농특법)을 공포하고 이를 근거 로 1981년부터 전국 농어촌의료 취약지역에 보건소를 설치하여 보건진료원으로 하여금 근무 하게 하였다. 보건진료원은 지역사회 주민과 함께 그 마을에 거주하면서 주민들의 건강문제를 해결하기 위 하여 일차보건의료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고, 자율성과 독립성을 가지고 그 지역사회의 지역진단을 통해 보건진료소 사업을 계획,수행, 평가할 수 있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 결과 지난 20여 년 간 보건진료원의 활동은 농어촌 벽지주민의 의료 이용의 접근성을 높 임으로 보건의료 요구 충족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으며, 질병예방과 건강증진을 위한 지역사회 주민의 보건교육, 응급환자의 신속처리 및 후송, 추후관리, 노인건강관리, 성인병관리, 환경위 생관리, 가족의 건강문제, 지역내 학교 아동의 건강관리 등 질병예방 및 1차적 치료 서비스 제공을 총해 지역사회 주민의 건강수준 향상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용반보건진료소는 흥덕면의 신덕, 주항, 대촌, 상연, 신송, 노통, 석우, 용반, 예촌, 행정, 남당 동 11개 마을을 관할지역으로 마을 건강원 11명과
운영협의회 이종회
회장, 김옥진 진료소장이 협심하여 인근지역주민의 보건의료 증진에 기여하고 있다.
용반보건진료소 (2) 마을회관(경로당) 마을회관은 경로당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이웃집 소식과 세상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곳이다. 마을 주민들이 본인에게 크고 작은 일에 대한 의견을 나누거나 마을의 관심사에 대하 여 회의.토론을 하여 의사를 결정하는 장소이기도하다. 경노당의 운영은
정부의 지원금과 자
체자금으로 난방비 등 운영비를 지출하고 있다. 경로당은 친목을 도모하고, 취미생활을 누리는 데 필요한 넓고 쾌적한 공간이 마련하였으며, 경제적인 생활에의 제사회화 또한 경로당이 수행해야 할 역할임을 감안했을 때 소일거리를 할
수 있을만한 경로당을 확보하였다. 경로당 이용에 있어서의 주가 되는 활동이 화투나 TV시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화교류의 장으로서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여러 대중매체를 구비하고, 치매예방에 효과가 있는 놀 이들을 마련하고 있다. 아울러, 특히 혼자가 된 노인이나 신체적 활동이 부자유스러운 노인들의 영양섭취를 위해 경 로식당을 운영하기도 한다. 경로당에의 참여를 확대시키는 것이다. 무엇보다 노인 스스로의 참여의지 및 의욕과 왕성한 활동이 필요하고, 경로당 역시 저소득계층의 노인들이 따분히 소일하거나 한담하는 장소로서 거의 유명무실한 시설에 가깝다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접근성이 용이한 노인여가시설로서 복지 센터의 역할까지 수행할 수 있는 양질의 여가시설로 활용이 요구된다. 또한, 생활정보에 둔감한 농촌 지역의 노인들이 경로당을 이용하면서 자연스럽게 삶에 필요한 지식을 서로 공유할 수 있고, 비치된 서적이나 그 외 매체 등을 통해 시사나 경제에 대한 부 분까지도 제공받을 수 있는 생활정보센터로의 역할도 수행한다. 경로당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그 외 따른 전문 인력을 양성하며 적절히 배치해야 한다. 경제 경로당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그에 따른 전문 인력을 양성하며 적절히 배치해야 한다. 경제활동과 관련된 소득프로그램을 실시함으로써 노인들이 겪는 또 다른 고충인 빈곤에서 벗어 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실버맞 춤형 건강 체조 프로그램 등 건강관리 프로그램과 지도자를 제공하여 노인으로서 보내는 여생 이 보다 건강하고 활기찬 하루들이 될 수 있도록 건강증진센터로 활용하고 있으며 농악 등 다 양한 취미 프로그램과 교육 프로그램 등을 통해 경로당 본래의 기능에 부합한 역할을 수행하 고 있다. 용반경로당은 2001년 10월 11일 건축(73.2㎡)하여 회원수는 41명이며 회장은 이칠영이다. 남 당경로당은 2002년 10월 5일 건축(69.69㎡)하여 회원수는 24명이며 회장은 노희영이다.
용반회관
남당회관
(3) 모정 여름철에 마을주민이 더위를 피하여 휴식하기 위하여 세운 마을의 공유ㆍ공용건물로 여름에만 사용하기 때문에 방어 없이 마루로만 구성된, 작은 규모의 건물이다. 모정은 지역에 따라 분 포의 정도가 다르며, 명칭도 모정ㆍ시정ㆍ우신각ㆍ농정ㆍ농청ㆍ양정(凉亭)등 여러 가지로 불리 고 있다. 여름철 마을주민의 휴식처로 마을의 공유재산이고, 남자만이 사용하는 남성집단의 전유물이 며, 남성 중에서도 일하는 일꾼이 주로 이용하는 정자이다. 논농사 위주의 농업을 하며 마을의 촌락공동체적 성격을 갖고있는 모정은 여름철 주민의 휴식
공간이며 대화의 장이기도 하다. 2008년 건립한 용반모정 주변에 수령 200여년 노거수 감나무가 마을의 역사를 간직한 채 가 을이면 주렁주렁 탐스럽게 열린 주황색으로 잘익은 감이 마을의 운치를 더하고 있다. 마을을 수호하는 나무라하여 1992년 2월 입석『수호비』를 세웠다.
용반모정. 수호신보호수 (4) 고창군 산립조합 조경수 유통센터 흥덕면 용반리 739-1번지에 위치한 산립조합 조경수 유통센터는 2009년 4월20일 착공하여 2010년 11월 30일 완공하였다. 조경수 생산포지 기반조성사업은 면적 120,698㎡에 국비 500 백만원, 지방비 200백만원, 자부담 503백만원 등 1,203백만원을 투자하여 기반조성 사업, 판 매센터 건립, 비닐하우스, 대형관정, 자제창고 등 시설을 하였다. 우량하고 건실한 묘목을 직접생산하여 조경수 농가에게 공급하고 외국산 및 불량묘목 공급으 로 인한 생산농가 피해예방에 사업의 목적을 두고 있다. 조림수종을 선정할 때는 그 지방의 특색과 환경에 맞고 종실, 수액, 용제 등 앞으로의 경영목 적에 맞는 수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조경수는 수목의 형태나 특성을 잘 알아서 수형, 성질, 용도, 관상적인 특징 등을 고려하여 선택해야 한다. 한편 노동력이 적게 들고 식재후 제초관 리에 손쉬운 방법을 택하려면 1년생 묘를 식재하지말고 활엽수는 2~3년생 묘목으로 키가 1~2m, 침엽수는 2~3년생 묘목으로 30~50cm이상의 묘목을 식재하는 것이 유리하다. 특용수 는 열매도 따먹으면서 특산품(향토술)을 개발하는 데 좋은 원료가 될 수 있는 수종을 선택하 는 것이 좋다.
조경수유통센터
(5) 최첨단 한우가축시장 고창부안축협에서는 흥덕면 용반리 산15번지에 최첨단 전자경매 시스템을 갖춘 한우가축시장 을 2012년 7월18일 개장하고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 갔다. 한우가축시장은 총사업비 10억 1600만원으로 대지 7,95㎡, 건물 1,020㎡ 규모이며, 소독시설 과 식당 및 후게시설등 편익 시설을 갖추고 있다. 송아지, 임신우, 비육우를 포함하여 일일 최 대 거래 두수는 240두이다. 최첨단 전자경매시스템 도입으로 출하주, 성별, 정액번호, 내정가격, 소의 종류 등 관련정보를 한 눈에 볼 수 있어 축산농가들이 편리하게 거래할 수 있다. 가축시장은 매월 18일과 28일 2회 열리는 최첨단 한우가축시장은 최근 FTA 체결 및 사료 값 상승으로 어려움을 격고 있는 축산농가에 전자경매가축시장 개장을 계기로 거래질서가 투명하 게 확립되고 고창군의 우수한 혈통한우의 혈통보전 및 우수품질의 개량을 촉진하여 농가소득 증대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한우가축시장
5) 종교시설 (1) 천주교용반공소(公所) 공소란 신부가 상주하지 않기 때문에 미사가 집전되지 못하며, 공소 교우들의 본당신부를 대 리하는 공소회장(公所會長)을 중심으로 성찬의 전례가 빠진 미사형식의 공소예절(公所禮節)이 행하여진다. 공소교우들은 공소들 유지하기 위하여 현금을 내는데 공소전(公所錢)으로 불렀으나 현재는 교 무금제도로 대체되었다. 본당신부의 공소방문은 1년에 두 번 봄ㆍ가을에 있는데, 신부방문때 집행되는 성사가 주로 판공성사(判功聖事)이었기 때문에 각각‘봄판공’ㆍ‘가을판공’이라고 불렀 다.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공소는 1799년(정조23) 이전에 설립되었다. 이승훈(李承薰)이 평택 현감 재직 때 설립된 평택본당의 대추리공소가 그것이다. 우리 나라 천주교회의 첫 모습은 공 소였으며, 한국천주교회 200년의 반 이상이 공소시대였으므로 천주교회의 모태가 바로 공소라 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소신자수ㆍ공소전례ㆍ공소사목활동ㆍ공소재정 등의 여러 측면에서 볼 때, 현재의 공소는 옛날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지 못하고 있다. 흥덕면 용반길 65에 위치한 천주교 용반공소는 대지 149㎡, 건축면적 93.72㎡, 붉은벽돌조 1 층 주택 93.72㎡이다. 1992년 12월9일 재단법인전주구천주교회유지재단으로 소유권이 이전되 었다. 처음에는 고창성당에서 운영하다가 줄포성당으로 이관하였으나 정확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종교활동을 하지 않은 건물로 용반마을에서 체조교실등 여가 시설로 활용하고 있다.
천주교 용반공소 (2) 하남성결교회 흥덕면
용반길 149에 있는 기독교 대한성결교회소속의 기독교회이다.
1979년 5월 4일 창립한 교회로 고창군 기독교연합회 참여하는『기성』교단이다. 『행복하여 서로섬기는 교회』를 표어로 주일 낮 예배는 오전 11시, 오후 찬양예배는 오후 1시 30분, 수요기도회는 오후 8시에 있다.
담임목사는 김대성이다.
하남성결교회 (3) 연봉재(蓮峯齋) 흥덕면 용반리 815-4번지에 위치한 연봉재는 경주김씨세환공종중 재실로 1985년 4월 건물을 짓고 건립기념비를 세웠다. 제사는 금부도사공 김곤(金鯤)부터 5대조이며 제사일은 매년 4월 2째주 일요일이다.
연봉재 4.마을의 인물과 행적
표지석
1) 인
물
(1) 채홍국(蔡弘國) 고창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채홍국의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광보(光輔), 호는 야수(野叟). 고려시대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경평공(景平公) 채송년의 후손으로, 예조판서을 역임한
채충
경(蔡忠敬)의 현손(玄孫)이다. 아버지는 채치의(蔡致義)이다.
채홍국은 1534년(중종 29) 부안에서 태어나 장성한 후에 흥덕 남당촌으로 이주했 다. 천성이 너그럽고 강직했으며 정성을 다해 어버이를 섬기니 고을에서 칭찬이 자자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의 대가(大駕)가 용만(龍灣) 으로 피난을 하자, 채홍국은 김천일(金千鎰)과 고경명(高敬命)과 함께 의병을 모집 하여 금산으로 갔다. 이후 고경명이 패전하자 흩어진 군사들을 다시 모아 끝까지 싸울 것을 다짐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20여 명의 가동(家僮)과 세 아들 채명달(蔡命達)·채경달(蔡慶達) 채영달(蔡英 達)을 거느리고 군량미 13석, 병철(兵鐵) 115근을 가지고 채우령(蔡禹齡)을 비롯 한 종족 30여 명 및 마을사람 60여 명 등과 함께 흥덕 남당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적과 싸울 것을 맹세하며 각자 피를 나누어 마시는 이른바『삽혈동맹(歃血同盟)』 을 맺고 의려장이 되었다. 이에 본관 수령 나척(羅惕)이 이들에게 군량미를 조달해 주었으며, 수원에 있던 도원수 권율도 그에게 글을 보내 격려하였다. 왜적이 순천을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채홍국은 급히 의병을 거느리고 순천 석보 (石堡)에 이르러
적을 대파하여 적병 수십 명을 참살했다. 당시 사람들이 적전지
였던 이 고개를 둔월치라 불렀다. 순찰사가 이 사실을 조정에 알리자 선조가 특별 히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하고 다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로 승격시켰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또 다시 동지들에게 격문을 보내 뜻을 같이 할 것을 호소하 였다. 이에 전일에 숙맹(宿盟)을 했던 92명의 동지 외에도 30명이 합세했고 의승 (義僧) 5명도 가담했으며, 멀리 영암과 해남 등지에서도 달려와 가세하였다. 그리 하여 부안 호벌치에서 치열한 전투를 하여 수차례 승리를 거두었으나 적들이 개미 떼같이 달려들자, 이른 아침부터 해질 무렵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활을 계속 쏘았 다. 화살이 다 떨어졌는데 적병이 단검을 가지고 돌진해 오자, 채홍국은 맨손으로 대적하여 적병을 뒤에서 부둥켜 안았으나 적의 칼날이 그의 가슴에 꽃혔다. 아들 채경달이 이 위급한 사항을 보고 달려와 지원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결굴 채명 달, 채경달, 채영달까지 모두 전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유발이 행장을 짓고 정범조가 비문을 지었다. 1872년(고종 9) 병조판서에 증직되 었으며, 사제(賜祭)하고 복호(충신.효자.열부 등에게 노역과 전세 이외의 잡부금을
면제하던 일)되었다.
(2) 채우령(蔡禹齡) 채우령의 자는 숙원(叔元)이며 평강채씨 강평공 송년(松年)의 후손으로 참의를 지낸 경(卿)의 손자이다. 지조가 곧고 용력이 뛰어나 1582년(선조 15) 무과에 급제하였다. 훈련정(訓練正)으로서 활솜 씨를 시험할 때 화살이 백보거리의 황귤을 적중시킴에 상감이 탄복하여 말1필을 하사하고 무 안현감을 제수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함평에 우거하였는데, 창의사 김천일의 격서를 받아 보고 곧장 의병 을 창솔하여 제봉 고경명장군을 좇아 금산전투에서 온힘을 다하여 적을 치더니 고경명이 패하 여 산화함에 흩어진 의병을 거두어 귀환하였다. 9월 족숙 채홍국과 그를 믿고 따르던 92의사와 더불어 남당리에 모여 축단하고 삽혈동맹하니 집에 있는 가동25명을 인솔하여 이에 합병하고 흥덕싸움과 호벌치전투에서 싸웠으나 무수하 게 참살만 당하였다. 처음 진격하여 순천 석보창에 이르러 접전을 하였으나 종일도록 살상을 입은 수만 늘었었다. 정유년(1597)에 또다시 회맹한 창의 의병들은 흥덕북쪽에 있는 장등원싸움에서 참혹함이 너무 많고 기세가 꺽이어 힘이다 빠지게되어 마침내 적탄에 순절하고 말았다. 뒷날 선무원종훈으로 녹훈되고 병조참판을 증하였다. 동맹록의 서문은 승지 유광천(柳匡天)과 사간 고정헌(高廷憲)이 지었다. 흥덕출신이나 무안현감을 지낸 연유로 호남절의록 작성시에는 무안으로 수록되었다. 2) 마을의 입향조 (1) 용반리 연안이씨 연안이씨의
시조는
무(茂)이며
파조는
원발(元發)이며
용반리에
입향조는
이여재(汝材
1594-1629)이다. 서울 명륜동에서 승석(承奭)의 아들이 11형제를 데리고 부인 의령남씨가 노란을 예견하고 남 하하고 남하하여 고수면 평지리에 살았는데 그 후손의 일부가 흥덕면 용반리에 입향하여 10 세를 세거하고 있다.
입향세계를 보면 16세 여재 - 만춘 - 익후 - 세근- 광훈- 강- 우현- 풍구- 병하 - 상령이 다. (2) 남당 평강채씨 평강채씨의
시조는
송년(松年)이며
파조는
충경(忠敬)이며
남당에
입향조는
채준(蔡准
1471-1530)이다. 부안군 부안읍에 거주하였는데 중종때 흥덕면 용반에 이주하여 그 후손이 17대를 세거하고 있다. 입향세계를 보면 9세 준 - 치의 - 홍국 - 명달 - 응시 - 항 - 세구 - 시문- 득윤 - 응찬 순공 - 홍권 - 유영 - 동윤 - 일묵 - 규준 - 연석이다.
5. 용반리의 현황 1) 마을의 인구 용반리에는 85세대 169명이 살고 있는데, 용반 55세대 113명,
남당 30세대 56명이 거주하
고 있다. 최근 10년간 인구 추이를 보면 용반은 2010년 62세대 118명으로 가장 많고 현재는 57세대 113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남당은 2005년 32세대 59명으로 가장 많고
현재는 30세대 56명
이 거주하고 있다. 2) 년도별 인구수 (세대수 / 상단 남, 하단 여) 마 을 용 반 남 당
2004
2005
55 47
55
59 52
31 30
30
2006
55
56 52
30 32
29
2007
57
58 53
25 29
25
2008
56
60 57
25 26
24
2009
59
60 55
25 28
28
2010
58
63 62
26 28
28
2011
65
55 59
26 28
27
2012
60
28
07.11
52 54
27 29
2013
63
55 57
28 32
31
27 30
3) 마을의 구심체 고창군 리의 하부조직운영에 관한 조례에 의거 분리에 이장과 반장을 두고 일선행정에 주민의 의사를 반영하고 주민을 참여시켜 향토발전을 촉진하기 위하여 분리에 새마을개발위원회를 두 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한 새마을 지도자, 부녀회장, 노인회장원이 마을의 기반조직으로 활동 하고 있다. 이장은 리를 대표하며 지역주민의 의견을 수렴 행정기관에 반영, 마을 발전을 위 한 자주적이고 자율적업무를 처리, 지역주민 간 화합단결과 이해 조정에 관한 사항, 지역주민 의 편익증진과 봉사를 임무로 하고 있다. 2013. 1. 1현재
58
29
마 을 명
이
장
용
반
송준선
남
당
남선옥
새마을지도자
부녀회장
노인회장
이채영
김영자
이칠영
송재숙
이방우
한영례
노희영
노희영
도움을 주신분 송기선 (오디연구소장) 송재숙 (고추연구회장) 김옥진 (용반보건진료소장) 노희영 (남당노인회장) 송준선 (용반이장) 남선옥 (남당이장) 채명목 (재내주민) 참고문헌 『고창군지』 고창군지편찬위원회,
2009
『한국지명총람』Ⅱ 전북판 한글학회, 1981 『모양성의 얼』고창학술문화연구회,
2009
『고창의 마을유래』고창문화원,
2003
『전북전래지명총람』유재영,민음사
1993
『문화유적분포지도』 고창군
2005
『고창충의사』고창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2001 『고창성씨의 입향유래』 고창문화원
2007
『고창전자문화대전』고창군, 한국학중앙연구원, 2010
개발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