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마을제1집(한글원본)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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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사

와서는 한 나라나 민족에 있어 문화가 곧 국력이고 역량이라는 말을 흔히 듣는다. 지금과 같은 세계화시대에서는 어느 국가나 민족이 지니는 고유의 문화야 말로 그 나라나 민족을 차별화하는 준거가 되고, 나아가 그 정체성을 담보할 수 있게 한다는 말이거니와, 이는 한 지역이나 고장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금년(2009)후반기에 접어들어 ‘고창학술문화연구회’에서는 우리 고장의 전통문화 를 발굴・조사하고 정리하여 이를 기록으로 남기려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 첫 번째 활동으로서 고창군 관내의 읍・면에서 1개 마을씩을 선정하여, 그 마을의 유래・풍 습・전설・유물・유적・인물・산업 등에 걸쳐 전반적으로 조사・연구하고 정리하여 한 권의 책자로 발간코자 한 것인데, 이는 물론 급속도로 민멸(泯滅)되어 가는 자료들 을 수집・기록하여 후대에까지 전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하여 먼저 지역사정에 밝은 자문위원 및 행정담당자들과의 협의를 거쳐 적 절한 마을을 선정하였다. 다음으로 이렇게 선정된 마을에 대하여 본 회의 위원들이 각각 마을을 분담하여 조사와 연구를 수행하고 그 결과를 정리・기록하도록 하였는 바, 이 모든 절차와 활동은 모두 우리 고장사람들에 의하여 기획되고 수행되었다.

따라서 처음 착수하는 작업이며, 또 조사・연구자 역시 이 분야의 전문적인 향토


아니기에, 미진한 부분이 적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 고장에 태어 났거나 아니면 터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고향에 대한 남다른 애착심을 바탕으로 진력하였음을 감히 말할 수 있거니와, 앞으로 본 학술지의 지면을 개방하여 다양하 고 수준 있는 논고들을 함께 싣게 된다면, 내용상에 질적 보완을 갖추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무릇 옛것을 조사・발굴하는 일은 문화의 뿌리를 찾는 일이며, 한편으로는 우리의 긍지를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아가 이를 기초로 하여 가치 있는 전통문화와 정신을 계승・발전시킨다면, 이는 또한 미래의 삶을 더욱 향기롭고 풍부하게 할 터 이다. 아무쪼록 금번 발간되는 본 학술지가, 우리 고창이 명예로운 역사문화고장으 로서 한층 더 높은 품격을 갖추는 데 이바지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며, 그동안 조사・연구 활동에 참여하신 위원님들과 본 연구수행에 행・재정적 지원을 베풀어 주신 군청에도 깊이 감사드린다.

2009. 12.

고창학술문화연구회장


마을 위치

마을 제 1집


차 1부 ······························································································ 1 ‣ 옥등괘벽의 마을 / 공음면 선동리 선산마을 ······························· 5 ‣ 명사십리의 마을 / 상하면 용정리 동촌마을 ····························· 17 ‣ 효자와 열부의 마을 / 해리면 사반리 사반마을 ······················· 33 ‣ 삼정승을 배출한 마을 / 성송면 하고리 삼태마을 ··················· 57 ‣ 옛 정취를 간직한 전원마을 / 심원면 궁산리 궁산마을 ········· 91 ‣ 충의(忠義)가 살아 있는 풍요의 땅 / 흥덕면 송암리 ············· 115 ‣ 항일독립투사를 길러낸 마을 / 성내면 덕산리 ······················· 139 ‣ 당산제 풍물굿으로 이름났던 마을 / 신림면 무림리 임리・대강마을······ 159 ‣ 되살려 낸 용산팔경(龍山八景) / 부안면 용산리 용산마을 ··· 191

2부 ·························································································· 217 ‣ 아산면 계산리 마을 조사보고서 ················································· 219 ‣ 검단선사와 보은염의 사등마을 ··················································· 249 ‣ 동호마을의 수륙재 ········································································· 264 ‣ 고창군 취락과 산 이름 ································································· 290

부록 부록1. 고창의 마을 연구・집필, 조사, 자문 ···························· 305 부록2. 고창학술문화연구회 ·························································· 306


고창의 마을 제 1집


1 간지 1.

선동리 선산마을

2. 상하면 용정리 동촌마을 3. 해리면 사반리 사반마을 4. 성송면 하고리 삼태마을 5. 심원면 궁산리 궁산마을 6. 흥덕면 송암리 7. 성내면 덕산리 8. 신림면 무림리 임리・대강마을 9. 부안면 용산리 용산마을



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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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

선동리 선산마을

1. 연혁 (仙山里)는 공음면 소재지로부터 5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신선이 춤을 추고 있는 형국이라고 하여 선인무수(仙人舞手), 즉 선산마을로 불리우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어르신들에 따르면, 옥등괘벽(玉灯卦壁)의 형국, 신선이 춤을 추는데 등 을 벽에 달아 비추게 하고 그 빛이 외부로 흘러 나가지 않도록 뒷산 선인봉이 둘러 싸고 있는 모양새라고 전해 온다. 마을 아래 마을회관 건너편 논두락 사이에 약 300 평 가량의 자연 연못이 지금도 자리하고 있는데, 이 연못이 등잔 불을 타게 하는 기 름의 형국이라고 한다. 선산마을은 원래 정확한 연대는 미상이나 마한시대 이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여 마을을 이루었고, 조선 중엽 어림잡아 1500년대 초 금성라씨 와 제주고씨가 터를 이루었으며 그후 장흥고씨, 해풍김씨, 밀양박씨, 함평이씨, 경주 최씨, 창원황씨 등이 들어와 살고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1910년 무장면 와공현에 속하다가 1914년 공음면 선동리로 개편되었고 1964년 주민조직법에 의해 선산리로 분리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선산리는 원래 선동리에 속해 있는 작은 부락으로 전통적으로 밭농사 위주의 가난 한 마을이었으며, 동학운동 당시 인근 용수마을과는 달리 뚜렷한 행적은 없었고 임 진왜란 당시 의병(義兵)이 있었다는 구전이 있다(황긍선 씨의 증언). 선산리에는 6・25 당시 많은 양민희생자가 발생하였는데 고창지역 희생자 2,300여 명 가운데 약 400여 명이 선산리에서 희생되었다. 그 이유는 9・28 수복 당시 퇴로가 막힌 적 군의 잔여 병력이 지리산 및 함평 전투로부터 유입되어 서해 바다를 통하여 월북하 고자 선산리에 집결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선산리는 지리적으로나 전통적으로 서해바다의 염전으로부터 내륙 각지로 소금을 - 5 -


동서 교역의 요충지로, 북으로부터 보급이 막힌 공산군 잔여 병력이 선산마 을에 잠입하였고, 이를 토벌하기 위한 국군 11연대(원래 남원 주둔)가 낮에는 마을 을 점령하고 식량 등을 탈취하기 위하여 밤에는 적군이 마을을 점령하여 국공 양측 이 강제부역을 구실삼아 무차별 양민을 학살한, 처참한 동족 상잔의 비극이 자행되 었던 곳이다. 최근에는 6・25 양민 희생자 제전위원회에서 선산리 어귀에 희생자 위 령탑을 건립하여 무고한 양민과 어린이들의 희생을 기리며 이 땅에 다시는 이념갈등 으로 인한 무고한 양민의 희생이 없기를 바라고 있다. 황긍선 씨의 증언을 들어 보자면, 그때 인민군 낙오병 중에는 소련제 AK 소총으 로 무장한 인민군 소년병도 상당수 있었다고 하니 오늘날 아프리카 등지에서 자행되 고 있는 소년병의 강제 징집이나 다를 것이 없다. 그들이 이념이나 동서간의 힘의 대결에 대해서 무엇을 알겠는가. 다만 어른들의 싸움의 물결에 휩쓸려 아까운 목숨 이 희생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선산마을의 비극이 오늘날 우리와 대대로 이어지 는 후세대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곰곰이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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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 25 양민 희생자 위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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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변의 지명과 유래

1) 뒷켠에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는 해발 210m 정도 낮은 산이나, 산 정 상에 오르면 영광, 대마, 백수, 장성 등 전라남북도의 9개 면이 시원스럽게 바라다 보이는 봉우리이다. 이곳은 이씨 조선 때 무장현의 원(현감)이 선인봉을 불선자(仏 仙子)라고 불렀다고 하며 상하, 해리 등으로 소금을 구하러 가는 식염상들의 이정표 (里程票)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2) 노루골 일명 논농골이라고도 하며 인근 마을 해정 넘어가는 데에 위치하고 있다. 요즈음 은 전답이 개간되어 경작되고 있으나 6・25 이전에는 소나무와 잡목이 우거진 능성 이가 전답 위쪽에 있어 노루가 서식하는 자연생태계의 보고였다. 노루는 개와 같은 종류이나 노란 털이 나 있고 앞다리가 뒷다리보다 짧은 것이 특징이다. 겨울철 하얀 눈이 야산을 뒤덮었을 때 한가한 틈을 타서 동네청년들이 볏짚으로 만드는 덕석(멍석) 을 짜다 말고 노루 몰이(사냥)를 나가는데, 일종의 겨울 스포츠에 해당한다. 노루는 앞발이 짧기 때문에 언덕을 오르는 것은 누구도 따를 수가 없다. 그러나 언덕에서 아래로 내려올 때에는 제대로 속력을 낼 수 없기 때문에 언덕을 내려갈 때에 쫓아가 서 뒷다리를 낚아채서 잡는다. 겨울철에 걸쭉한 막걸리 한잔에 갓 사냥해서 잡아온 노루고기 요리로 영양 보충 겸 식도락을 즐기던 것이 당시 시골마을의 풍경이었다. 3) 황새골 일명 한사골이라고 하는데 6・25 전에는 다리가 길고 부리가 긴 황새들이 북녘 에서 날아와 먹이를 찾던 곳이다. 황새들은 추수를 한 뒤 논두렁이나 연못을 자주 찾는 습성을 갖고 있다. 지금은 농약의 살포로 사라져버린 안타까운 자연의 생태계 이지만 황새들은 그곳에서 우렁이와 미꾸라지 송사리 등을 잡아먹고 배를 채운다. 황새들은 자태도 아름다워 동양화가들이 즐겨찾는 동양화의 소재이기도 하며 시골 - 7 -


병의원 처방을 받기 어려운 고질병 환자들의 영양 보충용 식재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황새골은 선동리에서 선산으로 넘어가는 논 가운데 잡초가 우거진 웅덩이만한 연 못을 가리킨다. 황새들이 떼를 지어 날아와서 이 웅덩이에서 우렁이들을 잡아먹다 가곤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가시 돋힌 연꽃들만이 군락을 이루어, 연꽃이 필 무렵이 면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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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산마을 황새골

4) 일명 빠꾸말이라고도 하며 국악 시작할 때 나는 북소리 비슷한 박 소리가 바람불 때에 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서 백색의 점토가 출토되어 도자기 재료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도요는 아산의 인천강 도요, 부안면 도요 등 고창지역에 산 재하고 있는데 선산마을에서 백색 점토를 가져다 구웠으리라는 추정은 어렵지 않다. - 8 -


3.

유물과 유적 동쪽과 서쪽 마을 입구에 오래된 당산나무가 각각 한그루씩 정자와

함께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대보름날 당산제를 지내는데 이 곳 당산제는 고창읍의 오거리 당산제, 성송면 사내리의 당산제와 더불어 풍악이 매 우 흥겹고 여유로운 것으로 유명하다. 마을 사람들은 정월 초사흘이면 당산제를 지 내기 위해 회의를 소집하며 제관(祭官)과 축관(祝官)을 선발한다. 선발된 제관이나 축관은 1년 내내 초상집 등 궂은 곳에는 가지 못하며 육류(肉類)를 먹어서도 안 되고, 이러한 짐승을 도살하는 것을 보아서도 안 된다. 특히 제관은 정월 대보름날까지 부 부가 동침을 할 수 없으며, 집 밖에 함부로 나가서도 안 된다. 제물(祭物)을 장만하 는 사람들도 엄격한 금기(禁忌)를 지켜야만 한다. 또한 제물을 구입하기 위해 장에 가는 사람은 오고가면서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제물은 돼지머리, 흰떡 과 술인데 선산마을의 특징은 삼색과실(三色果実)을 사용하지 않고 이 모든 음식들 을 여자들이 만들지 않고 남자들이 만든다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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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할아버지 당산과 쉼터 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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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보름날 아침에 각 집에서 볏짚 한 단씩을 내면 동네 청년들이 줄을 드린 다. 줄을 드리는 동안 마을 한쪽에서는 흥겹게 농악놀이를 한다. 줄이 다 꼬아 지면 마을 사람들은 줄을 손에 들고 한 줄로 서서 마을 동남쪽에 있는 할아버지 당산을 돌아 마을 서남쪽에 있는 할머니 당산으로 간다. 이렇게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 산을 다섯 바퀴 돌아 오방(五方)돌기를 한다. 오방돌기를 할 때 농악은 길굿으로 친 다. 오방돌기가 끝나면 남정네와 부녀자들로 패를 나누어 줄다리기를 한다. 이 줄다 리기에서 남자 패가 이기면 그 해 논농사가 잘 되고, 부녀자 패가 이기면 밭농사가 잘 되어 집안에 재앙이 없다고 한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줄을 할아버지 당산으로 가지고 가서 그곳 당산수(堂山樹)에 감는다. 이때 농악은 중중모리로 친다. 줄을 다 감은 후에는 당산제를 지내고 다음에 할머니 당산으로 가서 제사를 지내고 당산제를 마무리한다.

4.

전통과 생활환경

선산마을은 전통적으로 밭농사와 논농사가 주를 이루었으나 최근 들어 인삼과 복분자 재배 등을 통해서 농가 소득을 올리고 있다. 마을 중앙에는 청메골 농촌 체험 마을회관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 특산물인 복분자, 고추, 콩, 감자, 배, 쌀, 흑미, 잡곡류, 두부, 청국장 등을 판매하고 있다. 특히, 복분자 열매를 따다가 복분자 엑기 스 공장에서 일차 가공하여 도시 및 농어촌 지역으로 판매하고 있으며 유기농 콩을 이용한 메주 공장을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다. 또한 청보리밭 축제가 한창인 4~5월에는 회관에서 농어촌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개인 및 단체의 민박 도 가능하다. 선산마을은 타지역보다 부녀회가 활성화되어 있으며 부녀회 회원은 약 45명 정도라고 한다. 월 1회 마을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친목 겸 마을 공동 관심사를 논의한다. 선산마을 부녀회에서는 봄가을로 마을 단위 나들이를 실시하고 있으며 마 을 이장 주관으로 년 1회 효도 관광도 실시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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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 마을회관과 유기농 메주 공장

(學苑農場) 무장출신 전 국무총리 진의종(陳陳懿) 씨와 부인 이학(李鶴) 여사가

1960년대 초 당시 함평이씨 문중 땅과 인근 야산 30만여 평을 매입하여 일군 것이다. 이 일대는 탁 트인 조망과 함께 경관이 매우 아름답고 황산 산이 서쪽으로 저수지와 더불어 대조적으로 어우러지면서, 찾는 이에게 어머니 품 같은 포근한 여운을 선사 한다. 이 농장은 장남 진영호 씨가 1992년부터 인수하여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였 다. 처음에는 화훼농원, 감자, 고구마, 수박, 콩 농사 등 여러 가지를 시도하였으나 경험 부족으로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어려움을 겪었었다. 농장이 본 궤도에 오 르기 시작한 것은 1994년 정부로부터 관광 농원 지정을 받고부터서이다. 처음에 어 려움을 많이 겪은 농장은 2004년부터 고창 청보리밭 축제의 개최지로 자리매김하면 서부터 전국적인 관광명소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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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추수가 끝난 학원농장 전경

일원에는 초겨울 나고 이른 봄부터 파릇파릇한 보리가 장관을 이룬다. 특히 4~5월이면 도시생활에 지친 방문객들이 전국 각지로부터 찾아온다. 청보리 축제가 끝나면 가을에는 메밀꽃 축제가 열린다. 농장 뒷켠에는 울창한 왕대숲과 이 고장이 낳은 정치가 백민(白民) 진의종(陳懿鍾) 전 총리의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어 방문자 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사진 6> 백민 진의종 전 총리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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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 무렵이면 이곳은 또 한번 장관을 이루어 영화 촬영 장소로도 활용 되고 있다고 한다. 농장 뒤쪽으로 황토 민박이 자리하고 있고 선산마을에도 크고 작 은 민박집이 세 곳이나 있어 가족 단위 방문객들의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그 밖에 도 농장에는 군데군데 왕대밭이 자리하고 있고 저수지쪽으로 연 방죽과 오두막이 있 어 찾는 이들에게 자연의 하모니로 즐거움을 더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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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학원농장 내 대나무 숲

이 일대는 2005년부터 5개년 계획으로 농장 주변 마을과 함께 농촌마을종합개발 사업이 추진되고 있어 학원농장과 주변 마을은 더욱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으로 변 모해 가고 있다.

<사진 8> 학원농장 내 민박숙소 들어가는 길 - 13 -


2)

이장단 명단

순 위 1 2 3 4 5 6 7 8 9 10 11

성 이 이 박 황 이 박 이 박 박 이 박

종 종 명 택 종 광 종 광 종 종 광

명 팔 용 선 순 용 식 봉 식 환 봉 식

임명 (년월일) 1982.1.1 1984.3.2 1985.1.1 1990.1.1 1991.3.25 1992.3.1 1996.1.1 1998.1.1 2002.1.1 2004.1.1 2006.1.1

사임 (년월일) 1984.3.2 1984.12.31 1989.12.31 1991.3.16 1992.2.28 1995.12.31 1997.12.31 2001.12.31 2003.12.31 2005.12.31 2009.11.23

○ 도움 주신 분 •

(79, 선산마을, 6・25 양민희생자 제전위원장)

• 박종한 (52, 선산마을 전 이장)

○ 참고문헌 • 모양성의 얼 고창군, 1982 • 무장현 지역 조사보고서 전북역사문화학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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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고

현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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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리 동촌마을 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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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

용정리 동촌마을

1. 마을 개관 1)

지명유래

창읍 소재지에서 733번 지방도로를 따라 서남쪽 34㎞ 거리에 위치한 상하면 용정리 동촌(東村)마을은, 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장호선도로(군도 3호선)를 따라 4㎞에 위치하고 있다. 이전에는 광포(光浦)라 불리다 1500년경 농・어업에 종사하던 주민 400여 세대가 점차 사방으로 흩어져 포구 서쪽에 위치한다 하여 서촌(西村)이라 하였다. 그 후 마 을이 점차 포구(현재의 신언 평야) 동쪽으로 형성되어 지금의 동촌으로 불리게 되 었다.

2) 연혁 고창읍에서 서남단에 위치한 상하면은, 삼한시대에는 마한(馬韓) 땅으로 모로비 리국(牟蘆卑離国)에 속하였으며 삼국시대에는 백제(百済)의 땅으로 상노현(上老 県)이라 불렸다.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장사현(長沙県)으로 개칭하고, 행정 체제는 무령현(武霊県, 현 영광군) 영현(領県)에 속하였다가 후에 장사감무(長沙監 務)가 무송현(茂松県)을 다스렸다. 1417년 조선 태종 때 무송(茂松)과 장사(長沙) 두 현을 합병하여 무장현(茂長県)을 이루었고, 1723년 경종(景宗) 때 상용복(上龍 伏), 하용복(下龍伏) 2개 면을 두었다. 고종 32년(1895년)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상용복은 상리면(上里面)으로 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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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면(下里面)으로, 동촌마을은 상리면 장용리(壮龍里)에 속하였다. 그러다 가 일제강점기인 1914년 군면(郡面) 통폐합에 따라 상하면 지역은 고창군에 편입 되었는데 상리면과 하리면을 합하여 상하면(上下面)으로 개칭하여 현재 9개 법정 리의 행정구역으로 바뀌었으며 동촌마을은 용정리에 속한다.

3)

성씨와 현재

함평노씨의 시조는 고려말 공민왕 때 정윤(正尹) 벼슬을 한 노석(魯晳)이다. 함 평노씨로는 임진왜란 때 권율(権慄) 장군 휘하에서 행주, 의령 싸움에 참전하였고, 학자로서 금계집(錦渓集)을 남긴 인(認)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상하면의 입향조 는 노희안(魯希顔, 成均生員)의 7대손 노논상(魯論尚)의 아들인 노공술(魯孔術, 司僕寺正)의 후손이다. 그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관직에서 물러나 최억첨(崔億 瞻)과 함께 창의(倡義)하였으나, 조정에서의 강화소식을 접하고는 인조 15년 (1637)에 초야에 은둔하여 전남 함평에서 이곳 상하면 용정리 광촌에 입향하였으 며, 1740년경 이웃마을인 광촌에서 동촌마을로 분거함으로써 설기한 마을이다. 표씨 본관은 신창(新昌)으로 단본이다. 조선시대에 배출한 5명의 문과 급제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표계(表継)의 아들 연말(沿沫)이다. 그는 김종직(金宗直) 의 문인으로 연산군 원년에 응교(応教, 조선시대 관직으로 정4품)로 있으면서 춘 추관 편수관이 되어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밖에 선조 때의 헌(憲)과 그의 아들 정로(廷老)는 당대의 명역관(名訳官), 명문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인조 때의 무관 정준(廷俊)은 척화신(斥和臣)으로 청(清)나라에 잡혀가는 김상헌(金尚 憲)을 끝까지 수행하여 칭송을 들었다. 표씨는 현재 경남 의령, 거창, 함양, 합천 등지에 많이 살고 있다. 상하면의 입향조는 표인여(解官 表仁呂) 기후(祇侯)의 10 대손인 표도흥(表道興)으로, 자는 흥단(興瑞) 호는 영무(靈武, 贈嘉善大夫議政府賛 政)인데 효종 때인 1655년에 입향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연유는 세구연신 (歳久年深)하여 미상이다. 일설에 의하면 인조 때 난을 피하여 경상도 거창에서 상 하면 복구촌(伏亀村)에 은거하게 되었다고 하며, 그 후 복구마을에서 장호, 동촌마 을로 분거하여 살고 있다. - 18 -


전주이씨, 광산김씨, 청도김씨, 밀양손씨, 경주최씨, 창녕조씨, 밀양박 씨, 철원주씨 등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

4)

분포

1963년에 최대 인구를 기록하였는데, 57세대 285명이었다. 하지만 2009년 8월말 현재 51세대 116명이 거주하고 있다. 남자가 54명, 여자가 62명으로 여자가 8명이 많다. 연령별로는 10대 이하 6명, 20대 15명, 30대 2명, 30대 이상 83명이다. 성씨는 함평노씨, 신창표씨, 전주이씨, 창녕조씨, 광산김씨, 청도김씨, 경주최씨, 철 원주씨, 밀양박씨, 밀양손씨 등이 현재 거주하고 있다. 성씨별 분포로는 함평노씨 29 명, 신창표씨 11명, 광산김씨 2명, 밀양박씨 2명, 철원주씨 2명, 전주이씨 1명, 청도 김씨 1명, 창녕조씨 1명, 밀양손씨 1명, 경주최씨 1명이다.

2.

자연환경

1) 마을 형국 풍수로 본 마을 형국은 초승달 형태여서 월성국(月星局)이라 하고, 예로부터 섬포 산이 금당망월(金堂望月)이라 동촌 월성국을 향하여 명당이 된다는 말이 있다. 동촌 마을을 일러 광포라 부르기도 한다. 광포는 조선시대 때 목포, 법성포에 버금가는 조 곡을 납세하는 세금집합장소 가운데 하나로 500~600여 호에 가까운 집단촌이었다 고 한다. 그러나 그후 세금집합장소로서 역할을 상실하면서 광포는 동촌과 서촌으로 나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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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촌마을 전경

2) 동쪽은 산지이고, 남쪽에 들판이 있으며, 북서쪽으로는 해안 모래밭이다. 큰 산은 동쪽 송림산(295m)이 최고봉이며, 그 서편 장사산(270m)이 그 다음으로 동쪽 울타리가 되고 있다. 북쪽의 배산은 장군산(171m)과 봉백산(158m)이며, 돌팍 재로 내려 서쪽으로 2km 해안에는 해안사구가 발달해 있다. 구시포를 중심으로 북 쪽으로 용두까지 4km에 걸쳐 모래밭과 모래언덕이 형성되어 있다. 사구등을 따라 조성된 해당화와 곰솔밭은 방사림과 방풍림 역할을 하고 있으며 동촌마을에는 곰솔 숲을 상징하는 불뜽(부등, 浮登) 안쪽으로 해안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상하면 소재지에서 지방도 733호선(구시포선)을 따라 서쪽으로 1km지점에서 군도 3호선(장호선)과 연결되어 3km의 도로를 따라가면 동촌마을 표석이 있다. 마을 앞 해안평야는 옛날에는 포구였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포구의 기능이 상 실되어 지금은 신언 평야가 되었으며, 마을 앞 넓은 농경지는 용정리(판정, 동촌, 광 촌, 용산, 서당, 섬포)주민들의 삶의 원천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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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언 평야 (들녘)

평야를 가로질러 굴포(포강)가 있으며, 마을 뒤 명사십리 해안도로(군도1호 선)가 동호 해수욕장에서 구시포 해수욕장까지 연결되어 바다를 찾는 관광객에게 끝 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과 아름다운 낙조를 보여 준다. 명사십리 바닷가에는 사시사철 조개를 캘 수 있어 상하면을 비롯하여 정읍, 고창, 광주 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조개를 캐며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군도3호선과 해안도로(군도1호선)경계로 장호마을과 인접하고 있으며, 소나무 방 풍림으로 둘러싸인 전원적인 농촌마을이다.

<사진 3> 동촌마을 앞 굴포 (길이 1.9㎞, 넓이 20m, 깊이 3m, 구조 T형) - 21 -


을 앞 신언 평야지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굴포(포강)물을 이용하여 농사를 짓고 있으며, 굴포는 포구로서 자격이 상실되면서 동촌마을 앞에서 섬포마을 뒤까지 1,300m가 만들어져 농업용수로 활용하였다. 신굴포 600m는 1967년 극심한 한해(旱害)를 극복하 기 위하여 사람의 노동력으로 굴착하여 지금의 굴포가 되었으며, 당시 고 박정희 대통령 이 한해지역을 시찰하던 중 이곳에 들러 굴착작업을 지시하여 사업이 시작되었다. 여기 에 인력은 상하면 전 지역 사람들이 동원되었으며, 특히 1966년부터 가뭄으로 인하 여 먹고살기 힘든 시절에 일한 대가로 보리쌀과 밀가루를 받아 허기를 해결하던 시 절에 만들어져 지금은 농작물 재배의 젖줄이 되고 있다.

3.

인문환경

1)

특성

조선시대에는 서해바다 포구로 목포, 법성포와 함께 조곡을 납세하는 세금집합장 소여서 500~600여 호에 가까운 집단촌으로 호황을 이루었으며, 일제시대와 해방 후 에는 간척사업이 이루어져 벼농사를 주로 하는 농촌마을이었다. 70년대 새마을사업 이 시작되어 진입로와 안길이 뚫리고, 지붕개량이 되면서 깨끗한 주거환경이 조성되 고, 소득이 향상되어 잘사는 마을로 탈바꿈하였다. 2000년 새천년을 맞이하여 벼농 사를 주로 하면서 원예작물과 고소득 경제작물을 재배하여 부자마을이 되기를 기대 하고 있다.

2) 마을 수호신(당산) 동촌마을에는 당산이 있는데, 포구가 풍성할 당시에는 12당이었는데 풍파에 훼손 되고 땅 끝이 무너져 현재는 3개 당산과 4군데의 철륭을 함께 모시고 있다. 마을에 는 3개의 당산을 모시는데 총각 당산, 할미 당산, 영감 당산이 있다. 이전에는 당산 의 위치가 총각 당산은 용정리 산 12번지에, 영감 당산은 용정리 1122번지에 위치 하고 있었는데, 30여 년 전에 할미 당산이 위치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 22 -


있는 곳은 마을 뒤쪽으로 한쪽으로는 바다와 접해 있고, 다른 한쪽으로는 농지와 접해 있는 모래밭이다. 당산은 3개가 함께 모셔져 있는데 왼쪽에서부터 할아 버지 당산, 할머니 당산, 총각 당산이 나란히 서 있으며 모두 바다쪽을 향하고 있다. 할아버지 당산과 총각 당산은 부지정리를 하던 중 모래밭에서 원래의 모습을 찾아 복원하였다. 그러나 할아버지 당산은 원래 서쪽인 논 가운데 자리하고 있었고, 총각 당산은 서촌마을에 있었던 것을 5년 전에 지금의 자리로 합쳐 놓았다. 할아버지 당 산에서 총각 당산까지의 거리는 1,000m 정도 되었다고 한다. 당산은 500년의 역사 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바닷가라 바람이 불면 당산이 모래에 묻힐 때가 여러 번 있었으나 그때마다 다시 찾아 보존하였다. 현재 모시고 있는 할머니 당산은 높이가 사람보다 작다. 그리고 머리 형태로 조그 마한 돌이 몸 위에 불안하게 얹혀 있으며 돌 앞면에는 사람모습으로 이목구비를 그 려놓았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 원래의 모습은 아니라고 한다. 한국전쟁 무렵까지 할 머니 당산은 사람보다 훨씬 큰 10~11자 정도로 사람이 아니라 꽃봉오리 모양으로 할아버지 당산과 비슷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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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할아버지 할머니・총각 당산

<사진 6> 할머니 당산

<사진 5> 할아버지 당산

<사진 7> 총각 당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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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무렵 당산제를 모시면서, 머리를 만들어 젊은 사람들이 눈코입을 그 려 넣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노인들은 그대로 놓아두면 점차 검어져 자연스러울 것 인데 억지로 그려 넣은 것을 못내 아쉬워하였다. 동촌마을에서 철륭이라 부르는 철륭은 동네 수호신으로 지혜를 철륭에서 얻는다고 인식한다. 철륭은 동촌의 소나무, 동촌의 샘, 서촌의 서너 군데를 말한다. 동촌마을에 서는 샘도 용으로 하여 철륭으로 모신다고 한다.

3) 동촌마을의 당산제는 음력 정월 열나흗날 밤 10시경에 지내는데, 격년제로 당산제 를 모신다. 그러나 줄다리기는 해마다 하며, 줄다리기가 끝나면 줄을 당산에 감아놓 는다. 예전에는 자정이 넘어서 당산제를 모셨으나, 지금은 젊은 사람들의 목소리에 밀려 밤 10시에 제를 모시며, 새벽 1시에서 2시경에 제가 끝난다. 제의를 주관하는 사람은 ‘화주, 부화주’라 불리는데, 정월 초이렛날에 생기복덕한 사람으로 각각 1명씩 선출한다. 화주로 선정되면 그날부터 2년간 근신하는데, 더러 운 곳에 가는 것을 금하며 먹을 것도 가려서 먹는다. 제사모시기 전 화주와 부화주 는 우물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 한편, 화주를 뽑는 마을회의에서 제사비용을 어떻게 걷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함께 논의한다. 예전에는 굿(농악)치고 마을을 돌면서 걸립(乞粒, 돈이나 곡식을 구하는 일)하였으나, 지금은 걸립할 때도 있고 하지 않을 때도 있으며, 주로 돈으로 할당하 는 데 ‘인구전’이라 한다. 열나흗날 화주와 부화주가 함께 장에 가서 제물을 마련한다, 대체로 가까운 상하 장을 보러가는데 상하장은 1일, 6일에 열린다. 장을 보러갈 때 화주가 부화주 아닌 마을 사람 가운데 깨끗한 사람과 함께 가는 경우가 있다. 이때 깨끗한 사람은 심부 름만 하며 제물이나 다른 것에 절대 손을 대지 않는다. 제물이나 제기를 살 때 절대 깎는 법이 없다. 그리고 장을 보고 오다가 사람을 만나면 외면한다. 제물을 사면서 제기도 새로 장만한다. 제수는 열나흗날부터 할머니 당산 앞에 천막을 쳐놓고 장만한다. 물은 철륭샘에서 - 24 -


쓰거나 화주집의 물을 길어다 놓는다. 제수를 장만하면서 화주와 부화주는 마스크를 착용하는데, 이는 침이 음식에 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맛을 절 대 보지 않고 말도 하지 않는다. 음식장만하면서 간을 보면, 음식을 입에 대는 순간 입이 부어오른다고 한다. 그리고 제수를 만들 때 아무 곳에서나 나무를 주워 불을 때지 않는다. 나무 값을 주더라도 화주집에서 나무를 가져와서 불을 땐다. 술은 직접 만드는데 시중에 파는 술이 그만큼 성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리용 장도 ‘제 장’이라 하여 제의 때 쓰는 장을 따로 담았다가 쓴다. 금줄은 왼새끼에 한지를 꽂는 것으로 열나흗날 새벽에 동서남북 마을 들어오는 입 구에 모두 친다. 화주집, 부화주집, 3개 당산과 4군데 철륭에도 금줄을 친다. 또한 황토를 ‘금토’라 부르는데 화주집 앞에 조금씩 뿌린다. 제의를 모시기 전에 마을 사람 가운데 어린애를 낳거나 부정한 일이 생기면 당산 제는 이월 초하룻날로 미룬다. 마을 사람 가운데, 제 모시는 날인 열나흗날 갑자기 산기가 있으면 어린애를 낳기 위해 다른 마을로 간다. 이는 마을에서 어린애를 출산 하면, 준비한 제물을 출산하는 사람이 물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를 모시는 순서는 동촌의 철륭에서 제일 먼저 모신다. 철륭 위치는 동촌마을 뒤 에 자리하며 큰 소나무 아래에서 모신다. 제물로는 흰 시루떡, 나물, 과실, 쇠고기, 제주(조래술)를 준비한다. 쇠고기를 대신하여 돼지고기를 올리는 법은 없다고 하며, 쇠고기를 살 형편이 못되면 명태를 대신 올리기도 한다. 제는 단배→ 축문→소지→ 헌식 순서로 하며, 축문은 소지와 함께 태워버린다. 철륭에서 제가 끝나면 할아버지 당산, 할머니 당산, 총각 당산 순으로 제를 모신다. 제를 모시는 동안 여자는 제의에 참여하지 못한다. 총각 당산에서 제가 끝나면 서촌 철륭으로 가서 제를 모신다, 서촌 철륭에서 제가 끝나면 그 다음으로 서촌샘에 가서 제를 모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촌샘으로 가서 제를 모신다. 마지막 동촌샘에서 제를 모실 때는 남은 제물을 모두 차려놓고 모신다. 제가 끝나면 제의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화주집으로 가서 장만한 음식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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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용줄 만들기

<사진 9> 용줄 감기

4) 당산제를 한 해 걸러 모시지만 줄다리기는 해마다 한다. 줄다리기를 ‘줄들인다’ 라고 한다. 당산제를 모신 그 다음날인 보름날 아침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짚을 들고 마을회관으로 모인다. 예전에는 농사를 많이 짓는 집의 경우, 짚을 열에서 열다섯 묶음을 들고 나오기도 한다. 즉, 농사를 많이 짓는 집일수록 짚을 많이 들고 나온다. 암줄과 숫줄의 구별은 외형상으로 구분하지 않고 북쪽에 있는 것이 암줄이요, 남 쪽에 있는 것이 숫줄이 된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줄은 ‘성(聖)줄’, ‘용줄’이라 하여 땅에 닿지 않고 귀하게 다루었다. 줄다리기는 마을 앞길이 난 곳에서 하는데, 밖에서 마을 안으로 들어오는 쪽에 남 자들이 서고, 그 아래쪽 길로 여자들이 선다. 남녀노소할 것 없이 마을 사람들 모두 참여하여 줄을 당기는데, 총각은 여자 편으로 선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은 묶여 있는 암줄과 숫줄을 풀어서 어깨에 멘다. 그리고 농악을 치면서 자기영역을 표시하듯 오방(五方) 마을을 한바퀴 돈다. 그러나 지금은 줄을 멜 사람이 부족하여 마을을 돌지 못한다. 줄은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에만 감는다. 이를 ‘당산 옷 입힌다’고 한다. 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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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에는 감지 않는데, 이는 총각이기 때문에 옷을 입히지 않는다고 한다. 할아버 지 당산에는 숫줄을, 할머니 당산에는 암줄을 감는다. 줄을 감을 때는 꼬리부터 감으 며 머리는 맨 위로 가게 한다. 감을 때 화주가 꼬리를 당산에 대주고 있다. 작년에 감은 줄이 그대로 썩어 있는데, 그 위에 화주가 줄을 대면 그때부터 사람 들은 줄을 잡고 돈다. 이때 사람들은 넘어지기도 하고 줄에 걸리기도 하는 등 서로 장난을 치기도 한다. 이를 ‘줄쌈’이라 한다. 예전에는 남자들만 메고 다니므로 지금처 럼 장난을 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여자들도 참여하므로 장난이 심해졌다고 한다. 줄을 모두 감고 나면 마을회관에 다시 모여 잔치를 벌이는데 그 자리에서 당산제 에 대한 결산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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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 줄다리기 모습

5) 1972년부터 불어닥친 새마을운동으로 마을 진입로 700m와 마을 안길 3,700m를 개설하였으며, 60여 채에 달하는 초가지붕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량하였다. 농사에 서 생산된 부산물은 부족한 연료로 대체하고, 마을회관과 창고를 마련하여 공동으로 사용하였으며, 흙담을 헐고 블럭으로 담장을 쌓고 부엌 등을 개량하였다. 주택은 적 벽돌 슬래브 5동, 일반주택 38동을 개량하고, 회관 1동(28평), 모정 1동(6평)을 건 립하여 깨끗하고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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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

인물 (魯秉敏) : 1857년(철종 9년) ~ ? 1857년 동촌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본(本)은 함평노씨이고, 자(字)는 순

명(順明)이며 호(号)는 사은(沙隠)이다. 무열공(武烈公) 신후(慎后)의 22세손 승지 공(承旨公 )익수(翼洙)의 자(子)로서 성품이 온순하고 청렴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총 명하고 영특하여 책읽기를 좋아하여 노상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버이께서 병 환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생명이 위급해지자 지혈주구(指血注口)하여 연명토록 하였 으며, 엄동설한에 마을 앞 방죽에서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 보양하여 천수(天寿) 다할 때까지 지극정성으로 봉양하였다. 무장향교에서 천장(薦狀)과 삼강록(三綱録) 간소(刊所)의 천장(薦狀)을 보유하고 하고 있다.

2) 노연업(魯淵業) : 1935년 ~ 1991년 노연업은 1935년 동촌마을에서 출생하였으며 함평노씨 시조(始祖) 목(穆)의 25 대손으로 향토예비군 창설 예비군 중대장과 통일주체 대의원 1~2대를 역임하였으 며, 상하농협조합장을 역임하여 농업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으며, 영광원자력발전소 핵폐기물 설치반대 고창군 위원장으로 반핵에 앞장섰다.

5. 마을의 현재 1) 산업 마을의 경지면적은 전 1.7ha, 답 6.7ha이며 임야는 2.1ha이고, 주요 경제작물로는 벼와 보리, 고추, 복분자, 오디 등이 있다. 농산물 작목의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동촌 마을은 포구에서 간척지로 바뀌면서 벼농사 위주로 재배하였으며, 벼를 베고난 후에 는 이모작으로 보리와 콩을 갈아 소득을 올렸다. 점차적으로 밭에는 특작으로 고추, - 28 -


등을 재배하였으며, 지금에 이르러 복분자, 오디 등 건강식품을 재배하여 고소 득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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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동촌마을 표석

<사진 13> 동촌마을 진입로

<사진 14> 마을회관

<사진 15> 마을 모정

2) 마을조직으로는 매년 2회 마을총회를 개최(정월 대보름, 당산제 준비)하여 정월 대보름(음력 1월15일) 준비 총회 때 예산 및 결산을 하며, 당산제 개최시기는 일정 하지 않다. 현재 이장 표덕종, 부녀회장 홍성금과 회원 16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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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세시풍속으로는 백중인 음력 7월 15일이 마을 쉬는 날이며, 부녀회는 매년 1회, 노인회는 2년마다 1회씩 단체관광을 한다.

○ 도움 주신 분

노연희 (함평노씨, 81세)

표재춘 (신창표씨, 6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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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덕종 (신창표씨, 50세,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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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반리 사반마을 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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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부의 마을 -

사반리 사반마을

1. 마을의 위치와 지명유래 전라북도 고창군 서부 서해안에 접해 있는 면이다. 삼한시대에는 마한 (馬韓) 54부족 국가 가운데 모로비리국(牟盧卑離国)의 땅으로 일컬어졌다. 삼국시대 에는 백제의 상노현(上老県)에 속하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757년(경덕왕 16년)에 지역 명칭이 장사현(長沙県)으로 변경되었다. 장사고을은 무령군(武霊君)의 영현(領県)이었다. 고려시대 초기에는 영광군(靈光郡)에 속하였다. 뒤에 장사감무(長沙監務)가 무송 현(茂松県)을 겸해서 다스렸다. 조선시대 1417년(태종 17년)에는 무송(茂松)과 장 사(長沙) 두 고을을 합하여 무장현(茂長県)으로 개칭되었다. 무장현에 진(鎮)을 두 어 병마사(兵馬使)로서 고을의 직무를 겸하도록 하다가 1423년(세종 5년)에 첨절제 사(僉節制使)로 고쳤다. 사반리는 고창읍에서 지방도 703호선을 따라 해리면을 거쳐 상하면 방향으로 진 행하다 사반분기점에서 우회전하여, 농어촌도로 사반선을 따라 2.5km쯤 가면 어룡마 을을 거쳐 사반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서 서쪽으로 2km쯤 가면 서해바다가 보이기 도 한다. 법정리 및 행정구획으로 보면, 법정분리로는 사반리이며, 행정분리는 사반마을이 고, 자연마을은 사반과 어룡마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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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반마을 전경

본래 마을 일대가 바다였다고 한다. 사반은 사반과 어룡을 합한 행정 마을을 가리킨다. 풍수지리학상으로 사반은 지형이 뱀이 소반처럼 똬리 틀고 있는 형국이라고 하여 사반(巳盤)이라고 불렀다. 어룡은 ‘붕어’ 물고기와 같다 하여 ‘어룡 (魚竜)’이라 하였다. 사반마을 앞 들에는 두 개의 개구리 섬이 있다. 하나의 섬은 천연(天然)의 섬으로 어룡 쪽에 있고 그 섬에는 소나무 여러 그루가 있다가 고사하였고, 현재는 세 그루 가 남아 있다. 다른 하나는 사반 주민들이 비보풍수(裨補風水)를 이용하여 서쪽 들 에 인공의 섬을 만들고 소나무를 심었는데 그 위치는 나성 저수지 상단 쪽에 있다. 현재 이 섬은 흙이 많이 사라지고 잡풀만 있는 늪지로 변모하고 있다.

2.

연혁과 인구현황

사반마을은 고려 28대 충혜왕 무렵 청주한씨(清州韓氏) 시조 란(蘭)의 18세손 한 흡(韓洽, 1570∼1609년)이 마을터를 마련하여 세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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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1 (중종 26년) 무렵 광주이씨(広州李氏) 이약수(李若水)의 아들 이부(李斧) 가 남하하여 아산면(雅山面) 남산(南山)으로 정착했고, 1600년경 그의 작은아들 이 사온(李士温)이 방축으로 입거(入居)한 후, 그의 6세손 이두칠(李斗七, 1677∼1740 년)이 입향(入郷)하여 광주이씨 집성촌으로 번창하였다. 본래 사반은 사동(巳洞)・사촌(巳村)・대한・반계(盤渓) 네 개의 마을로 구분되어 오다가 조선시대에는 무장현(茂長県) 오리동면(五里洞面)에 속하였으며, 근대의 행 정구역 개편에 따라 인근 자연마을 어룡을 합하여 ‘사반’ 마을로 개칭되었다. 어룡(魚竜)마을은 1500년 말에 나주나씨(羅州羅氏)가 들어와 마을터를 잡고 세거 하면서 나씨촌을 이루었으나, 흥성하지 못하였다. 후에 함양박씨(咸陽朴氏) 박상연 (朴尚淵)이 반계에 들어와 집성촌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떠나고 2가구만이 거 주하고 있다. 현재는 타성(他姓)이 함께 거주하고 있다. 1966년에는 68세대 340명이 거주하였다. 1980년 이후 농촌 경기의 침체로 많은 사람이 떠나고, 2009년 9월말 기준 43세대 78명이 거주하고 있다. 남녀 성별로는 남자 36명, 여자 42명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6명이 더 많다. 연령별 로는 10대 미만 1명, 10대가 5명, 20대가 2명, 30대가 2명, 40대가 7명, 50대가 10 명, 60대가 23명, 70대가 23명, 80대가 4명, 100세 이상도 1명이 거주하고 있다. 성씨별로는 광주이씨 54명, 함양박씨 3명, 기타 21명으로, 광주이씨 집성촌으로 구 성되어 있다.

3.

자연환경

사반은 해리면 서남부에 위치한 자연마을 사반과 어룡을 합한 마을이다. 산세를 보면, 동쪽으로는 조시산(造矢山)이 있고, 서쪽으로는 배암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원당산(元堂山)이 있다. 그리고 사반마을을 병풍처럼 싸고 있는 북쪽에는 천룡산(天 竜山)이 있으며 샘뫼도 있다. 들녘을 보면 앞 들녘과 서쪽 들녘이 있다. 사반 서쪽의 들녘에는 사반제가 있다. 사반제에서 북쪽 야산을 보면 배암산이 사반리 쪽으로 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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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룡산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천은 방축에서 사반마을을 가로지르는 실개천인 사반천이 있고, 그 사반천을 가로지르는 사반교가 있다. 사반천의 물은 나 성 저수지로 유입된다. 이 저수지는 사반과 미산(米山)마을 사이에 있는데, 나성리 (羅星里) 나산(羅山) 뒤쪽에 있기 때문에 나성 저수지라 한다. 어룡은 사반에서 용반마을로 넘어가는 남서쪽에 위치한다. 마을 앞에는 바로 들녘 이 있고 그 바로 앞산이 원당산이다. 마을 뒤에는 도로가 있고 도로 너머로 산밭이 있다. 어룡마을 앞 들에 어룡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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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 나성 저수지

인물과 행의(行誼)

1) (1) 청주한씨(淸州韓氏) 사반마을에 처음으로 들어온 청주한씨는 한흡(韓洽, 1570∼1609년, 선조 3년∼광 해군 1년)이다. 그는 청주한씨 시조 란(蘭)의 18세손이다. - 36 -


(2)

(羅州羅氏) 1500년경에 어룡마을에 입향하였다. 금호(錦浩) 사침(士沈, 1526∼

1596년, 중종 21∼선조 29년)의 아들 충열공(忠烈公)의 5세손 응천(応天)이 반남 (潘南)에서 사반으로 입향하였다.

(3) 광주이씨(廣州李氏) 사반과 인근 마을에 처음 입향한 광주이씨는 이사온(李思温)이다. 이사온은 해리 면 방축리로 이거하고, 그의 6세손 이두칠(李斗七, 1677∼1740년, 숙종 3년∼영조 16년)이 사반으로 입향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다. 그의 자는 경백(経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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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광주이씨 세거비

(4) 함양박씨(咸陽朴氏) 어룡마을에 입향한 함양박씨는 박상연(朴尚淵, 1631∼1696년, 인조 9년∼숙종 22년) 이다. 그의 자는 여우(汝愚)이고 호는 금곡(金谷)이며 벼슬은 초계현감(草渓県監)을 지냈다. 그는 함양박씨 중시조 선(善)의 20세 손이고, 구당(九堂) 박세영(朴世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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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안성 양성면(陽城面) 금곡(金谷)에서 출생하였다. 남인(南人)에 속하여

숙종 5년(1679) 서인(西人) 송시열(宋時烈)을 탄핵하고 이어 시폐십조(時弊十条)를 들어 극간하는 소를 올렸다. 다음해(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 각하여 허적(許積)과 윤휴(尹鑴)가 죽음을 당하고 송시열이 등용되자, 박상연은 아 우 박상환(朴尚煥, 자는 仲愚, 호는 退辞亭, 벼슬은 副護軍)과 함께 남하하다가, 자신 은 해리면 어룡리 반계(盤渓)에 터를 잡았다. 아우 박상환은 영광군 백수면 대신리 에 은거하였다.

2)

인물과 행의(行誼)

(1) 이기윤(李基潤) : 1762년(영조 27년)∼1823년(순조 3년) 이기윤은 1762년 사반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이고, 자는 덕여(徳汝), 호는 사촌거사(沙村居士)이다. 재예가 뛰어나 약관(弱冠) 전후에 경사자집(経史子集)을 섭렵하고, 행배(行輩)들을 다스려 문호(門戸)를 만들고 공령(功令)에 일삼을 것을 도모하여 향시에 자주 합격시켰다. 뒷날 귀향하여 후학을 교수하다가, 부모의 상을 당하자 오로지 죽만 먹었고 시묘살이에 애훼(哀毀)하며 송종(送終)의 예를 극진히 하였다. 1800년 정조대왕 승하시에 북망 통곡하고 매월 초하루에 분향을 하였으며, 순조 11년(1811년) 토적(土賊) 홍경래(洪景来)가 무리를 모아 난(亂)을 일으키자 스스로 참여하여 난을 토벌하고 향리로 무사히 돌아왔다.

(2) 이병규(李秉奎 ): 1819년(순조 19년)∼1892년(고종 29년) 이병규는 1819년 사반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 자는 춘명(春明), 호는 연 사(蓮沙)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鎮, 1798∼1879년)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 다. 천품이 온후하고 재예가 남달라 행의가 고상하고 학문이 해박하여 사우들이 추 중하였다. 1888년(고종 25년)에 진사에 합격하여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을 지내다 가, 벼슬을 버리고 향촌으로 돌아와 후진양성에 진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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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朴英錫) : 1832년(순조 32년)∼1878년(고종 15년) 1832년 어룡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함양, 자는 여화(汝華), 호는 우

당(愚堂)이다. 농와(農窩) 박재덕(朴載徳)의 아들이다. 백부 만휴정(晩休亭) 박재희 (朴載煕)에게 학문을 닦았다. 성품이 순후(純厚)하여 어버이를 섬김에 양지양체(養 志養体)하였고 경학(経学)에 잠심하여 문명(文名)을 얻었다. 선조의 업을 소술(紹 述)하여 후손을 복되게 하였다.

3) 효행 및 열부 (1) 이필래(李弼來) : 1832년(순조 32년)∼1886년(고종 23년) 이필래는 1832년 사반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 자는 도원(道元), 호는 요아당 (蓼莪堂)이다. 어려서 어버이를 지효(至孝)로 섬기고 지체(志体)를 아울러 봉양하였 으며, 혼정신성(昏定晨省)의 도리를 다하였다. 모친이 갑자기 기질(奇疾)을 얻자 후 원에 단(壇)을 세우고 정화수(井華水)를 올리고 북두성에 기원하기를 5년을 하루같 이 하였다. 병이 위급하자 단지(断指)하여 연명하도록 하였으나 상(喪)을 당함에 송 종(送終)의 예를 지극히 하고 선운산(禅雲山)에 장사를 지냈다. 집과 거리가 멀고 팔순 노구의 부친이 있기에 시묘살이를 할 수 없자, 매월 삭망(朔望)에 제수를 준비 하여 통곡하니 그 소리가 온 산을 움직였다. 산 밖의 사람이 그의 고등(孤灯)이 높 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이효자(李孝子)가 왔다고 하였다. 묘 옆에는 호표(虎豹)의 굴만 있고 근처에는 척개(滌漑)의 물이 하나도 없었다. 호표가 스스로 멀리 떠나자 그곳에서 영천(靈泉)이 솟아나오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기면서 이것은 지극한 효도가 하늘과 신을 감동시켜 이러한 일이 있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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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4> 이필래 효자비

<사진 5> 이용관 효자비

(李容官) : 1859년(철종 10년)∼1941년 1859년 사반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 자는 치삼(致三), 호는 술암(述

菴)이다. 난와(蘭窩) 김이수(金以洙)에게 학문을 닦았다. 어려서 어버이를 섬길 적에 항상 출필고반필면(出必告反必面)하고 혼정신성(昏定晨省)하여 사람들의 칭송이 자 자하였다. 아버지가 병을 얻어 오랫동안 시탕(侍湯)하고 수년 동안 하늘에 빌고 정 성을 다했는데, 위급하자 지혈(指血)로 수일을 연명하도록 하였다. 아버지의 거상(居 喪)에 정문(情文)을 갖추었고, 모상에도 부상과 같이 슬픔이 지나쳐 몸이 몹시 야위 어 보는 이가 감복하여 이효자(李孝子)라 칭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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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朴東煥) : 1880년(고종 17년)∼1940년 1880년 어룡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함양, 자는 경찬(敬賛), 호는 반

계(磻渓)이다. 남당(南堂) 박용순(朴龍淳)의 아들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편 모를 성경(誠敬)으로 받들었다. 집이 가난하여 어머니를 따라 외가로 이거했다가 17 세 때 모친의 상(喪)을 당하여 복(服)을 마치고 돌아왔다. 조실부모한 것을 통한으 로 여겨 추복삼년(追服三年)을 하고 수진(晬辰)을 당하여 수연(寿宴)을 허락하지 아 니하고 종일토록 애통하니 주위의 사람이 감루(感涙)하자 향리의 모든 사람들이 그 의 효를 칭송하였다.

(4) 함평이씨(咸平李氏) 이계온(李啓温)의 딸이다. 함양박씨 박동환(朴東煥)의 처로, 품성이 정숙하여 친가 에서 효녀의 칭송이 있었다. 16세에 시집오니 마침 시아버지의 기일이 5일 앞인지 라, 시어머니 돌아가신 이후 남편이 어리어 숙부가 대신 제사를 행하였다. 유인(孺 人)이 들어와 제사를 정성으로 받들고 친족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교자(教子)에 엄 하여 아들 기용이 전교(典校)를 하자 유인이 경계하여 정심(正心)하고 결신(潔身)하 여 위로 선성(先聖)에 누를 끼치지 아니하도록 하고, 아래로 향당(郷党)에 죄를 짓 지 말 것을 신칙하도록 하니 향리에서 여사로 칭송했다.

(5) 안동김씨(安東金氏) 김영순(金永純)의 딸이다. 함양박씨 박용순(朴龍純)의 처이다. 19세에 시집와서 시 부모에게 지효(至孝)로 봉양하고 남편을 공대(恭待)하였다. 남편이 병들어 자리에 누우니 부인이 의원을 맞아 약을 쓰고 하늘에 항상 빌어 대신하기를 원하였다. 남편 이 위급하자 작지(斫指)하여 여러 날을 회생하도록 하였다. 남편이 임종에 부인에게 유촉하여 노친을 지효로 받들고 복중아(腹中児)가 행여 남아이면 잘 무육(撫育)하여 봉선(奉先)에 힘쓸 것을 당부하고 운명하였다. 시부모를 효로 섬기고, 다행히 남아를 얻어 의방(義方)으로 가르쳐 문호가 창대(昌大)하니 향리에서 효열부로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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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全州李氏) (李春明)의 딸로 1905년에 태어났다. 광주이씨 이재영(李縡泳)의 처이다.

품성이 단숙(端淑)하여 여사의 행의가 있었다. 시부모를 지효(至孝)로 섬기고 남편 을 공대(恭待)하다가, 남편이 갑자기 기질(奇疾)을 얻자 백방으로 구호(救護)하였다. 남편이 죽자 따라 죽으려 하다가 시부모가 계시고 어린 아이들이 있기에 차마 죽지 못하고 상장(喪葬)을 예(禮)로 다하였다. 시부모에게 성경(誠敬)을 다하며 자제들을 의방(義方)으로 가르쳐 문호를 수립하니 향촌 사림(士林)이 유인(孺人)의 열행(烈 行)을 주군(州郡)에 천양(薦揚)하였다.

(7) 밀양박씨(密陽朴氏) 박후림(朴厚林)의 딸이다. 광주이씨 이용귀(李容貴)의 처이다. 20세 때 성혼(成婚) 하여 시부모에게 효성을 하고 남편을 공대하였다. 남편이 갑자기 기질(奇疾)을 얻자 할고(割股)를 하고 백방으로 구호(救護)하였으나 효험이 없자 매일 새벽마다 정화수 (井華水)를 길러다가 하늘에 빌었으나 하늘의 명임을 어찌하겠는가? 마침내 남편의 상(喪)을 당하여 통곡하며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시부모의 읍유(泣喩)로 그 마음을 돌이켜 초종범절(初終凡節)을 예에 따라 하였으며 길쌈으로 가산을 일으키고 두 자 식을 무육(撫育)하여 문호를 부식(扶植)하니 대성문학원(大成文学院)의 천양(薦揚) 이 있었다.

(8) 함양오씨(咸陽吳氏) 오한익(呉漢翊)의 딸이다. 광주이씨 이병식(李秉植)의 처이다. 시부모를 지효(至 孝)로 섬기고 유색완용(愉色婉容)으로 뜻을 승순(承順)하였다. 갑자기 남편이 병을 얻자, 구료(求療)에 정성을 다하였으나 그만 상을 당하였다. 시부모에게 슬픈 얼굴을 띄지 않고 송종(送終)을 예제(禮制)에 따라 마치고, 삼우(三虞) 날에 밀실에 들어가 남편의 허리띠로 목을 매고 남편을 따라 죽으니 부인의 나이 21세였다. 문의(門議) 로 조카를 후사(後嗣)로 삼고, 열읍(列邑)에 천양(薦揚)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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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

종교시설 (仁山祠) 고창군 해리면 사반마을에 소재하고 있다. 이 사우는 광주이씨의 사우로,

숙종조(粛宗朝)에 예산(禮山) 대흥(大興)의 이약수(李若水)의 묘하(墓下)에 사우(祠 宇)를 세우고 춘추향사(春秋享祀)하다가 대원군 때 훼철(毀撤)되었다. 후손이 1950년 이 곳으로 모셔와 본 건물을 세우고 이약수(李若水)를 향사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축문은 “지윤학안(志尹学顔) 성인취의(成仁取義) 일소대절(一疏大節) 유광백세(遺 光百世)”이다. 건물 구조는 사당 3간이고, 강당은 3간이며, 내외삼문은 각 3간이다. 향사일은 음력 3월 5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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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인산사 전경

(1) 배향인물 - 이약수(李若水) : 1486년(성종 17년)∼1531년(중종 26년) 이약수는 광주군(広州郡) 귀천면(龜川面) 암사리(巌寺里)에서 출생하였다.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광주(広州), 자는 지원(止源), 호는 우천(牛泉)이다. 아버지는 현감 자(滋)이며, 어머니는 광주안씨(広州安氏)로 사간(司諫) 팽명(彭命)의 딸이다. - 43 -


정직하고 의리가 고명하였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 년)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후, 청송(聴松) 성수침(成守琛, 1493∼1564년)・화담 (花潭) 서경덕(徐敬徳, 1489∼1546년) 등과 도의(道義)로 교유하였다. 그는 학문에 독실하고 효우가 지극했다. 1510년(중종 5년) 사마시에 급제하여 생원이 되고, 1518년 성수침・서경덕 등과 현량과(賢良科)에 별천(別薦)되었으나 응하지 않고 성균관에서 학업에 전념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가 유배되자 소두(疏頭)로서 성균관의 유생 150여명과 함께 궁궐에 나아가 항소하였다. 그가 조광조의 무죄를 호소하여 대궐 밖 에서 호곡(号哭)하니 천지가 진동하는지라 임금이 진노하여 “유생들이 부궐호곡(赴 闕号哭)하는 것은 천고에 없는 일이다” 하고 하옥을 명하니 이약수가 “옛적에 양진 이 투옥되자 태학생 3천 명이 궁궐에 나아가 호곡한 일은 있으나 전하의 오늘의 일 은 천고에 없는 일이로소이다” 하고 옥에 나아가니 유생들이 앞을 다투어 옥에 들어 가 조야(朝野)가 경동하였다. 임금은 윤언직(尹彦直)・홍순복(洪舜福) 등도 함께 투 옥하도록 명하였다. 1521년 평해(平海)로 유배되었다가 10년만인 1531년에 예산으로 이배, 같은 해 8 월 유배지 대흥(大興)에서 죽었다. 1605년(선조 38)에 설원(雪寃)되었다. 1708년 (숙종 34년) 대흥현(大興県) 우정사(牛井祠)에 봉향되고, 고창군 해리면 사반 인산 사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우천유고(牛泉遺稿) 1책이 있다.

2)

(咸陽朴氏三綱門)

함양박씨삼강문은 어룡마을에 있다. 이 삼강문은 함양박씨의 일가족의 충(忠)・효 (孝)・열(烈)을 기려 세웠다. 함양박씨 구당(九堂) 박세영(朴世栄)의 증손 박유정 (朴由精)이 임진왜란 때 ‘충신’으로 순절하고, 그의 아들 박효형(朴孝亨)은 ‘효’가 지 극하였다. 박효영의 9세손 박동일(朴東鎰)의 처 창령성씨(昌寧成氏)는 절개가 뛰어 나 ‘열’로 정려(旌閭)되었다. 그리하여 이 세 사람의 ‘충・효・열’의 정신을 기려 “삼 강문(三綱門)”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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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7> 삼강문 전경

- 박유정(朴由精) : 1569년(선조 2년)∼1592년(선조 25년) 1569년에 태어났다. 자는 집중(執中), 호는 절재(節斎)이다. 지기가 탁월

하고 문한이 정예하여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 장군의 종사관이 되어 의주목사 김여 물(金汝岉: 1548∼1592)과 더불어 방략을 주획하다가 달천싸움에서 순절하였다. ‘충’이 뛰어나 뒷날 증 병조참의로 추서되었다.

(2) 배향인물 - 박효형(朴孝亨) : 1593년(선조 26년)∼1642년(인조 20년) 박효형은 1593년에 태어났다. 자는 행원(行源), 호는 모재(慕斎)이다. 박유정의 아 들로 유복자로 태어나, 6세에 어머니에게 물어 아버지의 전몰하심을 알고 초혼(招 魂)하여 장사를 지내고 3년을 추상하였다. 8세 때 모친병환을 당하여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다가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읍혈(泣血)하였다. 장사랑(将仕郎)을 지내고 동몽 교관(童蒙教官)에 증하였다. - 45 -


(3)

- 창녕성씨 : 1884년(고종 19년)∼1959년 9세손 박동일(朴東鎰)의 처로 1884년에 태어났다. 성품이 온량(温良)하

고 정숙하여 시부모를 정성으로 모셨으며, 성혼한 후 남편이 갑자기 병환을 얻자 단 (壇)을 세워 항상 하늘에 기도하며 정성으로 간호하였다. 상(喪)을 당함에 상례대로 상을 치루고 조카를 양자로 입양하여 가도(家道)를 수립하였다. 고을에서 서로 추천 하니 정려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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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삼강문 현판

3) 관덕재(觀德齋) 관덕재는 묘각(墓閣)으로 해리면 사반마을 선영 아래에 있다. 이 재실은 방축마을 에 터를 잡은 광주이씨 파조(派祖) 이사온(李士温)의 재각이다. 본 재실은 5칸이고 4칸은 대청이다. 동쪽에는 오실(奥室)이 있다. 2003년 종친들이 성금을 모아 중수 (重修)하고 마을 입구에 세거비(世居碑)를 세웠다.

<사진 9> 관덕재 모습 - 46 -


4) 1965

원당산 자락에 개척교회를 설립, 1989년 사반리 204번지 현 위치로 이전

활발한 종교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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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0> 사반교회 전경

미풍양속

1) 당산제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에 마을주민 전체가 참여하여 줄을 만들어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에 줄을 돌리고 당산제를 지내 왔다. 그러나 197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당산이 철거되고, 미신타파 정책으로 중단되어 당산제는 거행되지 않고 있다. 현재 당산은 마을 앞에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이 함께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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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사반리 당산

2) (음 6월 15일)와 칠석(음 7월 7일)은 연례행사로 마을 주민들이 음식과 술을 장만하여 농악을 치고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으며 풍년농사를 기원하면서 하루를 즐 겼으나 농사가 기계화되면서 사라지고 없다. 다만 촌중계(村中契) 조직이 아직까지 남아 있어 마을의 애경사를 담당하고 있다.

7.

편의시설

1) 새마을사업 마을안길을 약 700m를 확・포장하고, 1,200m의 담장을 개량하였으며, 65동의 지 붕을 개량하였다. 하수구 450m를 정비하였다. 2) 모정 - 초인정(招仁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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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정은 사반리 212-1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이 모정은 옛날에는 정각(亭閣) 터 자리라 한다. 2003년도 새로이 신축하여, 마을 주민들이 모여 늦은 봄부터 가을 까지 농사일에 더위를 피하고 담소의 장소로 긴요하게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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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모정 전경

<사진 13> 마을회관 전경

3) 사반 마을회관은 1980년 새마을사업으로 사반리 226-1번지에 20평 규모로 건축 하여 마을 주민들의 사랑방으로 사용하여 왔으나, 건물이 낡고 비좁아 1983년 본 건 물을 철거하고 25평으로 신축하였다. 현재는 농촌인구 고령화로 경로당으로 사용하 고 있다.

4) 사반 보건진료소 사반 보건진료소는 1981년 사반리 229-3번지에 30평 규모로 개소하였으나, 진 료환자의 증가로 2008년에 사반리 1214-1번지에 45평 규모로 신축하여 나성 리・방축리・사반・미산・각동・용반 등의 마을주민을 진료하여, 주민 건강증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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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4> 사반 보건진료소 전경

및 마을유통 1995년까지는 오지마을로 도로가 발달하지 못해서 여러 가지로 불편

하였으나, 농어촌도로 103호선(왕촌~용두)과 군도 7호선(금평~자룡)의 확・포장 공사로 사반마을 앞을 지나고 있어, 현재는 교통의 요지로 변하고 있다.

8.

숨은 이야기

1) 마을 야화 옛날 사반리에는 정각(亭閣)이 있었는데, 그 정각에서는 팔재사(八才士)가 모여 학문을 탐구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솔안터에 있는 이희언(李希彦, 1695~1740년) 의 묘를 남모르게 파묘(破墓)하여 버렸다. 이 일이 있는 이후로 정각에서 공부하던 팔재사는 하나 둘 죽어가고, 그 가운데 한 분이신 이병규(李秉奎)만이 살아 진사에 합격하였다 한다. - 50 -


2)

이야기 어룡의 지형적 형세로 인해, 두 마을은 자주 송사(訟事)가 있었다. 송사가

있을 때마다 사반마을은 송사를 이길 수 없었다 한다. 그것은 사반의 지형이 뱀이 소반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형국이고, 어룡은 큰 물고기 형세이다. 그런데 사반 앞의 야산 원당산은 황새의 형국이다. 이 황새가 큰 물고기를 잡지 못하고 항상 뱀만을 노리고 있었다. 때문에 송사가 있을 때마다 그 송사를 이길 수 없었다 한다. 마을 주 민들은 비보풍수(裨補風水)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주민들은 사반의 자연적 형국(形局)의 결처(欠処)를 인위적인 길국(吉 局)으로 만들기 위하여 사반마을 앞에는 천연의 개구리 섬이 있기는 하지만 마을 옆 에 인공의 섬을 만들어, 황새가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을 잡아 먹으려는 것을 피하도 록 하였다. 이러한 비보풍수는 어룡과 송사가 있으면 사반이 매번 이기지 못하였기에 인공의 섬을 만들어 황새를 유인하는 것이었다. 그 이후 두 마을의 송사는 일어나지 않고, 마을 주민들은 각각의 마을 터를 유지하면서 서로 유대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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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개구리 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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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

및 소득산업 전답 30호이고 비농가는 13호이다. 전(田)은 30ha이고, 답(畓)은 55ha이다. 임

야는 20ha이다.

2) 농사이야기 1960년 이전에는 벼농사가 농가의 주소득원으로 1965년도 이전까지는 흐트림 모 내기를 하여 평당 주수확보가 되지 않아 수확량이 극히 저조하였다. 관(官)에서 줄 모내기를 강압적으로 실시하도록 지도하여 벼농사의 수확량을 높여 왔다. 1970년 초 부터 미질(米質)은 떨어지지만 수확량이 많은 통일벼 재배를 권장하여 이때부터 농촌 에 보릿고개가 해소되었다. 1980년 대에 들어 트랙터 경운과 기계이앙을 통한 모내 기를 실시하여 농촌의 부족한 일손을 대체하는 계기가 되어 농촌 소득이 높아졌다.

3) 소득작목의 변천과 축산 1960년 이전에는 주로 보리・밀・콩 등을 재배하였다. 1961년 이후에는 잎담배 경작으로 획기적으로 소득이 증대하였다. 1983년 이후에는 비닐을 이용한 고추재배 기술향상으로 밭농사의 65%가 고추재배로 확대되며, 농촌경제의 성장기가 되었다. 2003년 이후에는 밭 3ha에 복분자를 재배하여 농가소득이 향상되었다. 축산은 한 농가가 한우를 사육하고, 다른 한 농가가 사슴을 사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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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복분자 재배 모습

10. 1)

및 역대 이장 매년 음력 정월 14일이다. 역대 이장은 이봉재, 박한용, 이권용, 이종

해, 이종수, 이종만, 이방택, 이종욱(1965∼1971), 이길수(1974∼1975), 이대영 (1976), 이길원(1977∼1979), 이주찬(1980), 이대영(1981∼1984), 이종식(1985∼ 1988), 이성수(1989∼1990), 이동영(1991), 이종주(1992∼1994), 이공수(1995), 이기수(1996∼1999), 이은영(2000∼2002), 이주만(2003∼2007) 등이다. 현재는 이주찬이다.

2) 남녀지도자 및 부녀회 새마을 지도자는 이길원이고, 부녀회장은 이희선이다. 부녀회원수는 28명이다. - 53 -


○ 도움 주신 분 •

(李大泳, 광주이씨, 남, 69세)

• 이주찬(광주이씨, 남, 59세 ,이장)

○ 참고문헌 • 한국지명총람 전북편(상・하), 한글학회, 1981. • 高敞三郷誌 호남문화사, 1991. •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2003. • 茂長郷校誌 호남문화사, 2004. • 고창군지 고창군, 2008. • 모양성의 얼 고창군, 1982,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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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반리 사반마을 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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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출한 마을 -

하고리 삼태마을

1. 지명유래와 풍수형국 전라북도 고창군 서남부에 있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조정에 의하여 성동면(星洞面)과 원송면(元松面)을 합하고 성동면의 ‘성(星)’과 원송면의 ‘송(松)’을 따서 성송면으로 고쳐 12개 법정리가 되면서 고창군에 합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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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태마을 입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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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태는 고창읍에서 지방도 893번 도로(국도 23번)를 따라 성송면을 거 쳐 대산면 방면 서남쪽으로 4km로쯤 가면 자리하고 있다. 법정리 및 행정구획으로 보면, 법정분리로는 하고리이며, 행정분리는 삼태마을이고, 자연마을은 삼태와 고현 이 있다. 마을 입구에는 마을을 표시하는 ‘삼태마을’ 비석이 있고 30m 걸어 들어가 면 왼쪽에 세 개의 비석이 나란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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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을 입석비

<사진 3> 마을 입구 비석

삼태는 삼태(三台)와 고현(古県)을 합한 자연마을을 가리킨다. 마을 뒷산이 천 문 별자리로 삼태성(三台星)과 같다 하여 산이름도 삼태봉(三台峯)이라 하고 마을 도 ‘삼태’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삼태성의 형국을 지닌 명당이라는 전설이 유래하 고 있다. 고려시대 무송(茂松)의 3정승인 윤(尹)・유(庾)・하(河)씨가 살았다 하여 삼태라 고 하고, 마을 뒷산 삼태봉은 3정승의 명기지(名基址)라 한다. 삼태마을은 풍수지리학상으로 떠 있는 배의 부선형국(浮船形局) 또는 행주형국 (行舟形局)이라 한다. 삼태천을 중심으로 삼태마을은 두 곳으로 나뉜다. 이는 주역 의 8괘(卦) 가운데 리괘(離卦

)에 해당한다. ‘리괘’는 배의 형국이다. 즉, 리괘의

초효가 삼태 마을, 이효는 삼태천, 상효는 고산쪽의 삼태마을을 말한다. 그리하여 삼태마을은 ‘배의 형국’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행주형국은 개인의 집터뿐만이 아니 - 58 -


읍이나 도읍지와도 관련이 깊다. 고현은 풍수지리학상으로 황새 또는 학(鶴)이라 한다. 이것은 삼태봉 바로 아래의 산이자 고현마을 뒷산을 초새봉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2.

연혁과 인구현황

삼태는 통일신라시대 삼태봉을 배산으로 터를 잡은 무송현(茂松県)에서 남방으로 500m 지점에 위치한 행정분리 마을이다. 고려시대에는 윤씨(尹氏)・유씨(庾氏)・하 씨(河氏) 등이 입향하여, 윤씨와 유씨는 무송을 관향으로 삼았다. 유씨와 윤씨 집안 에서는 명인(名人)이 많이 배출되었다. 하씨는 자세하지 않다. 무송현이 위치한 고현 마을에는 남창지(南倉址)가 있다 한다. 조선 태종 17년(1417)년에는 무송현과 장사현을 통합하여 무장현에 소속시켰다. 전남 영광에서 진주강씨(晉州姜氏)와 진주정씨(晉州鄭氏)들이 입향하였다. 진주강씨 는 영광으로 유배온 사평(司評) 강학손(姜鶴孫)의 현손 강계오(姜継呉)가 무송현 갈 산(葛山)으로 입향하였다. 강학손은 문량공(文良公) 강희맹(姜希孟)의 후손이다. 강 계오의 일족(一族)이 삼태마을로 입향, 번창하여 약 150가구가 거주하다가 남창으로 옮기고 다시 갈산마을로 옮겨갔다. 삼태천과 지방도 893번도를 건너서 형성된 삼태마을에는 기와막과 시묘청이 있었 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고 몇 가호만이 있다. 1980년 이후 농촌 경기의 침체로 많은 사람이 떠나고, 2009년 9월말 기준 39세대 72명이 거주하고 있다. 남녀 성별로는 남자 38명, 여자 34명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4명이 더 많다. 연령별 로는 10대 미만 4명, 10대가 6명, 20대가 9명, 30대가 2명, 40대가 11명, 50대가 5 명, 60대가 8명, 70대가 21명, 80대가 5명, 90세 이상도 1명이 거주하고 있다. 성씨별로는 진주정씨 10명 외 기타 성씨가 모여 살고 있어, 집성촌이라는 말은 옛 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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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연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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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삼태마을 전경

(三台)는 성송면 서남부에 위치한 자연마을 삼태와 고현을 합한 마을이다. 삼 태는 하삼태와 중삼태로 구분되기도 하고, 고현은 상고와 하고로 구분되기도 한다. 산세를 보면, 동쪽에는 구황산이 있고, 남쪽에는 고산이 있고, 북쪽에는 삼태봉(三 台峯)과 골짜기 고무송(古茂松)이 있다. 삼태봉은 구황산의 한 지맥이 흐른 것이다. 삼태봉의 첫봉우리 189m 매봉산 정상에 서면 23번 국도 추산봉, 고산을 비롯하여 경수지맥의 모태산인 구황산의 조망이 뛰어나다. 삼태봉과 매봉산 사이 연치재는 하 고리와 판정리를 오가던 고갯길로, 방언으로 ‘저브랑재’라 한다. 현재 나무들이 무성해서 왕래하기 힘들지만 고갯길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삼태마을 바로 입구의 오른쪽 야산은 안산(安山)이다. 하천은 삼태마을을 감고 도는 삼태천이 있다. 교량은 삼태천을 가로지는 삼태1교 삼태2교가 있으며, 목교도 있다. 삼태천 둑에는 수백년 된 왕버들나무가 나란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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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삼태교 전경

<사진 6> 삼태교에서 바라본 삼태천 모습

동쪽의 들을 관들이라 하는데 옛날 무송현의 관청에 딸렸기 때문이다. 관들 위쪽에 고현제가 있다. 삼태마을과 고현마을 중간의 땅은 삼태터이다. 하고현에는 ‘고욤독’이라는 고인돌이 있다. 마을 앞에 입석 당산(堂山) 1기가 있다. 삼태마을에 는 3정승인 윤(尹)・유(庾)・하(河)씨 등의 옛 유지(遺趾)와 무송유씨(茂松庾氏) 시 조묘가 있다. 삼태와 고현에 인접한 자연마을은 서쪽으로 남창이 있고 동쪽으로 내원과 외원이 있으며, 서쪽으로 중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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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7> 고현마을

인물과 행의(行誼)

1) (1) 유녹숭(庾祿崇) : ? ∼ 1114년 (예종 9년) 고려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귀수(龜寿)이다. 고려 문종 때 학행(学行)으로 천거되어 벼슬을 역임하면서, 강직한 성품으로 한 번도 몸 을 굽혀 남을 따르는 일이 없었다. 벼슬자리에 있어 부귀하고 현달하였지만 의복과 가택(家宅)이 벼슬하지 않은 때와 같았다. 1099년(숙종 4년) 우산기상시(右散騎常 侍), 1102년(숙종 7년)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로서 지서북면병마사(知西北面兵馬 使)를 지내고 바로 은청광녹대부추밀원부사(銀青光祿大夫枢密院副使) 겸 검교태자소 보(検校太子少保)가 되었다. 태자소보에 재직시 평주(平州)에서 무송부원군(茂松府 院君)으로 이봉(移封)하여 자손이 무송현에 살았다. 1103년 상서좌복야(尚書左僕射参知政事)에 올랐다. 숙종 때 남경(南京: 지금의 서 울)으로 천도하고자 할 때 반대하였다. 예종 때 참지정사로 치사(致仕)하니, 나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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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동안 조회를 열지 않았다 한다. 시호는 안정(安貞)이다. 유녹숭의 묘가 무송 삼태마을 동막산(東幕山) 답동(塔洞)에 있으니 후인이 유정승동(庾政丞洞)이라 칭하 였다. 2)

인물

(1) 유응규(庾應圭) : 1131년(인종 9년)∼1175년(명종 5년) 유응규는 1131년에 태어났다. 고려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무송, 초명은 원규(元 規), 자는 빈옥(賓玉)이다. 판이부사(判吏部事) 필(弼)의 아들이다. 타고난 재주가 총명하고 풍채가 아름다워 사람들이 옥인(玉人)이라 하였다고 한다. 글을 매우 잘 지었으나 두 번 과거에 낙방하여 음보(蔭補)로 내시가 된 뒤 참관(參官=參上官)이 되었다. 뒷날 지방관으로 남경(南京)으로 나가 청렴하게 정사를 다스려 합문지후(閤 門祗候)가 되었다가, 고공원외랑(考功員外郎)이 되었다. 1170년(의종 24년) 정중부(鄭仲夫) 등이 반란을 일으켜 의종을 폐하고 명종을 왕 으로 옹립하자, 내시로 기용되었다가 공부낭중(工部郎中)이 되었다. 그는 그 표문(表 文)을 받들고 금(金)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선위(禅位)의 사실을 알리자 금나라가 묵 묵부답이었다. 이에 7일을 입정불식(立庭不食)하여 회조(回詔)를 받아 돌아왔다. 그 공훈으로 군기감 겸 태자중사인(太子中舎人)이 되었다. 금나라에 보여준 그의 고매 한 인격은 뒷날 금나라의 사신들이 모두 안부를 묻게 하였다 한다. 동북면병마사 김보당(金甫当)이 1173년(명종 3년) 무신정권에 반기를 들다가 잡 혀 죽을 때, “모든 문신과 함께 도모하였다”라고 무고하였다. 이 때 화를 입을 뻔하 였으나, 무고한 사람을 죽이면 재앙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설득하여 무사하였다. 다 음해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무신정권에 반기를 들자, 왕명으로 서경의 여러 성 (城)을 선유(宣諭)하며 점차로 귀순케 하여 공부시랑(工部侍郎)이 되었다. 1175년(명종 5년) 전중감으로서 급사중(給事中) 사정유(史正儒)와 함께 왕명으로 서경에 가서 조위총을 군신의 대의로 설유하여 그로 하여금 표문(表文)을 올려 항복 을 청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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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庾資諒) : 1150년(의종 4년)∼1229년(고종 16년) 1150년에 태어났다.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무송, 자는 담연(湛

然)이다.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필(弼)의 손자이며, 공부시랑 응규(応圭) 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장중하고 말이 없었다고 한다. 16세 때부터 유가(儒家)의 자제 들과 교우하였으나 무인(武人)들과도 교제를 하여,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화를 면 하였다. 그와 교우하던 유가의 자제들도 모두 화를 면하였다. 음보(蔭補)로 수궁서승(守宮署丞)이 되고, 이어 대악서승(大樂署丞)을 거쳐 용강 현령(竜岡県令)이 되었다. 정사를 분명하게 처리하여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213년(강종 2년) 상서좌복야(尚書左僕射)를 지내다가 치사(致仕)하였다. 치사 후 에는 은퇴한 재상들과 기로회(耆老会)를 만들어 술을 즐기며 우유양성(優遊養性)하 면서도 부처를 독실히 신봉하였다. 70세 때 하루는 문득 팔계문(八戒文)을 읽고 밤 에 목욕재계한 뒤에 시간을 묻고는 바로 취침에 들어 졸하였다.

(3) 윤택(尹澤) : 1289년(충렬왕 15년)~1370년(공민왕 19년) 윤택은 1289년에 태어났다.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중덕 (仲徳), 호는 율정(栗亭)이다. 국학대사성 문한사학을 역임한 해(諧)의 손자로, 3세 때 부친을 여의고 고모부 윤선좌(尹宣佐)와 익재(益斎) 이제현(斉賢)의 문하에서 수 학하여 경서에 두루 통하였다. 특히 춘추좌씨전(春秋左氏伝)에 능통했다. 충선왕 4 년(1317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경산부사록(京山府司録) 교감(校勘), 검열(検閲) 서 경참군(西京参軍), 권응교(権応教), 서경부윤(西京府尹), 우부대언(右副代言) 등을 역임했다. 충목왕 즉위 초에 나주목사가 되었고, 연경에 머물던 충숙왕(忠粛王)의 신 임이 두터워 그로부터 강릉대군을 후계자로 추대하라는 부탁을 받고, 이승로(李承 老)와 함께 중서성에 글을 올려 강릉대군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다가 실패하였다. 충 정왕이 즉위하자 광양감무로 좌천되었다. 공민왕(恭愍王) 때는 밀직제학(密直提学)을 역임하고 개성부윤(開城府尹)으로 치 사하였다. 왕에게 서경(書経)의 무일편(無逸篇)과 진덕수(真徳秀)의 대학연의(大 - 64 -


) 등을 강설(講説)하는 한편, 최승로(崔承老)의 상서문(上書文)을 강의하여 유학을 고취시켰다. 공민왕이 1357년(공민왕 6년) 중 보우(普愚)의 건의대로 한양 으로 천도할 것을 결심하고 이제현(李斉賢)에게 궁궐 터를 축조하도록 명했으나, 직 언(直言)을 통해 이를 저지시켰다. 1361년 정당문학(政堂文学), 1363년 첨의찬성사 (僉議賛成事)를 지냈다. 윤택은 효성이 지극하고 항상 정직하며 검소하여, 공민왕이 손수 그의 초상을 그 리고 ‘율정(栗亭)’이란 호 두 글자를 크게 써서 하사하였다. 관직을 치사하고 만년에 는 선영이 있는 금산(錦山)에 우거하다가 공민왕 19년(1370년)에 졸하니 향년 82세 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저서로 율정집(栗亭集)이 있다.

(4)

(尹紹宗) : 1345년(충목왕 1년)~1393년(태조 2년)

윤소종은 고려 말기 1345년 무송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헌숙 (憲叔), 호는 동정(桐亭)이다. 찬성사 택(沢)의 손자로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이 다. 일찍이 가학(家学)을 계승하였지만, 목은(牧隠)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20세 전에 시문에 능하였다. 그는 경사(経史)에 해박하였고, 성리학(性理学)에 도 조예가 깊었다. 익재(益斎) 이제현(李斉賢)은 그의 재주를 특이하다고 하였다. 1360년(공민왕 9년)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1365년(공민왕 14년) 예부시 을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춘추관수찬(春秋館修撰)을 제수받았다. 좌정언(左正 言), 전교시승(典校寺丞), 성균관사예(成均館司芸), 전교령(典校令), 우사의대부(右司 議大夫),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좌상시(左尚侍), 1390년(공양왕 2년) 정월 경연이 부활되자 경연강독관(経筵講読官)이 되었다. 진독수(真独秀)의 대학연의(大 学衍義)를 강론하여 제왕의 치도를 밝힐 것을 건의하였다. 특히 군주수신론(君主修 身論)을 전개하여 군주의 덕을 손상시키는 것을 멀리하도록 하였다. 변안열(邊安烈) 이 우왕을 임금으로 맞이하려고 하자 그 역모죄를 극론해 살해하고, 공양왕이 승려 찬영(粲英)을 왕사로 맞이하려는 계획을 직언(直言)하여 중지시켰다. 그는 가학(家学)을 이어받아 청백(清白)하였으므로 집이 몹시 가난하여 지신사(知 申事) 이존성(李存性)이 우왕에게 말하여 쌀 10석을 나라에서 하사받기도 하였다. - 65 -


또 중용(中庸)과 대학(大学), 논어(論語), 주역(周易) 등의 구절을 인 용하여 시사(時事)에 대한 「만언소(万言疏)」를 올렸다가 파직되기도 하였고 모친의 상을 당하여 금산(錦山)에 머무는 동안 많은 지방 학자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고려의 부패정치를 청산하려고 정도전 등과 역성혁명을 도모하려다 실패하여 유배되었다. 이성계의 역성혁명이 성공하여 조선이 개창되면서 병조전서(兵曹典書), 수문관대제학(修文館大提学) 등을 역임하면서 고려사(高麗史) 수찬에 참여하였다. 원종공신(原従功臣) 3등에 올랐으며 1393년(태조 2년)에 졸하니 향년 49세이다. 저 서로는 동정집(桐亭集)이 있다.

(5)

(鄭冕奎) : 1804년(순조 4년)~1868년(고종 5년)

정면규는 1804년 삼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 자는 가헌(可軒), 호는 무남(茂 南)・노포(老圃)이다. 진양군(晋陽君) 정황(鄭璜)의 후손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 正鎮)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닦아 학행이 뛰어났다. 그는 흥선대원군이 서울에 대보단(大報壇)을 짓고 만동묘를 헐어 부수자 그 부당 함을 상소하고, 영조 때 상주의 이만부(李万敷) 등이 만동묘의 훼철을 주장한 것에 대하여 그 설치의 의의와 과정 그리고 제향(祭享)의 의미를 담은 성토의 상소문을 올렸다. 저서로 노포유고(老圃遺稿)(4권 1책)가 있다.

(6) 정영원(鄭榮源) : 1853년(철종 4년)∼1940년 정영원은 1853년 삼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대서(大舒), 호는 태호(台湖)이다. 충장공(忠荘公) 정황(鄭璜)의 후예이다. 일찍이 가훈을 이었고, 노 사(蘆沙) 기정진(奇正鎮)과 송사(松沙) 기우만(奇宇万)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경 전에 해박하였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유릉참봉(裕陵参奉)을 지냈다. 부모를 지극한 효도로 섬기고 봉선(奉先)에 성경(誠敬)으로 받들었으며 모현(慕賢)에 공경을 다하 였다. 만년에는 선인(先人)을 이어 자손 이업(肄業)에 진력하고, 또한 태호정(台湖 亭)을 세워 후학 양성하는 일로 소임을 다하였다. 저서로는 태호유고(台湖遺稿)가 있다. - 66 -


(7)

(鄭休鐸) : 1872년(고종 9년)∼1915년 1872년 삼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 자는 자경(子警), 호는 농산(農

山)이다. 충장공(忠荘公) 정황(鄭璜)의 후예이자, 유릉참봉(裕陵参奉)을 역임한 정영 원(鄭栄源)의 아들이다. 모친의 태몽에 대호(大虎)를 보았는데 태어나자 기골이 헌 헌(軒軒)하고 목 줄기에서 등까지 호문(虎紋)이 있었다. 자라면서 담력이 있고 심히 강직하고 몸가짐이 검약하여 사람을 압도하는 기상이 있었으나, 언소(言笑)에는 화 기애애(和気靄靄)하였다. 1903년 주사(主事)로 서임(敍任)되어 중추원의관(中枢院議 官)을 거쳐 정 3품에 올라 1905년 장수현감을 지냈다. 성품이 본래 청렴결백하여 권귀(権貴)를 가까이 하지 않고 서책을 애독하여 식견이 해박하였으며 베풀기를 좋 아해 궁족(窮族)을 돕고 향인(郷隣)을 구제하는 데 노력하였다. 위선(為先)에 성의 를 다하여 선조의 석의(石儀)를 갖추고 제전(祭田)을 마련하였다. 저서로는 농산유 고(農山遺稿)가 있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万)의 묘갈명이 있다.

(8) 정태환(鄭泰煥): 1900∼? 정태환은 1900년 삼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 자는 문명(文明), 호는 석재(石 斎)이다. 충장공(忠荘公) 정황(鄭璜)의 후예이다. 경암(敬菴) 김한희(金漢禧)에게 학 문을 닦았다. 학문은 넓고 필법이 활달하였다. 극기극가(克己克家)에 법도가 있었고, 또한 행동거지에도 절도가 있었다. 어버이를 지성(至誠)으로 섬기고 선조 받들기를 지경(至敬)으로 하였다. 경재(経財)에도 베풀기를 좋아하여 고창고보(高敞高普) 설 립에 거금을 희사하고 흉년에는 창고를 열어 많은 기민(饑民)을 구휼(救恤)하였다. 향인이 그 덕을 송모(頌慕)하여 삼태마을 삼태교 앞에 진휼비(賑恤碑)를 세웠다.

3) 충효 및 열부 (1) 윤구생(尹龜生) 윤구생은 고려 후기에 태어났다. 찬성사 택(沢)의 아들이고 개혁론자인 윤소종(尹 紹宗)의 아버지이다. 생몰 연대는 자세하지 않다. 고려사의 효우열전(孝友列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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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벼슬을 거쳐 고려 말에 판 전농시사(判典農寺事)에 이르고 만년에 부친 의 별장이 있는 금주(錦州=錦山)로 내려가 우거하였다. 그는 사묘(祀廟)를 세워 삭 망(朔望)과 사중(四仲=仲春 2월, 仲夏 4월, 仲秋 8월, 仲冬 11월), 그리고 풍속의 명절인 속절(俗節)에는 삼대(三代=父・祖・曾)를 제사지냈다. 조상의 비석에 기일 (忌日)을 새겨 후손들로 하여금 잊지 않게 하였다. 당시 나라에서 사대부(士大夫)들 은 가묘(家廟)를 세우라는 명을 내렸으나 시행되지 않던 시기에 주자가례(朱子家 礼)에 따라 동지에는 시조에게, 입춘에는 선조에게 제사하였다. 주자가례에 따라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절차가 여러 사람의 모범이 된다 하여, 1391년(공양왕 3년)에 전라도관감찰사 노숭(盧嵩)이 그의 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정려(旌閭)를 내리고 효자 비를 세웠다. 특히 그 집안의 조세와 부역을 면제하도록 하였다.

(2)

(鄭時海) : 1874년(고종 11년)∼1906년

정시해는 1874년 삼태에서 태어났다. 조선 말기의 의병으로, 본관은 진주, 자는 낙 언(樂彦), 호는 일광(一狂)이다. 아버지는 정종택(鄭鍾沢)이며, 어머니는 거창신씨 (居昌慎氏)이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万)과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문하에 서 학문을 닦았다. 그는 자호기(自号記)에서 “눈보라 속에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동 분서주하는 자신의 행색이 흡사 미친 사람 같기도 하려니와 나라를 잃은 신하가 되 었으니 온전한 정신으로 살 수가 없다. 나 역시 미친 사람이기에 일광(一狂)이라 자 호한다”고 술회하였다. 1893년(고종 30년) 20세 때 부친의 명으로 보성에 유배된 영재(甯斎) 이건창(李 建昌)을 찾아뵈었다. 1894년(고종 31년) 21세 때 동학란이 일어나자 부친을 모시고 부안(扶安)의 구개(旧浦)로 이사했다가 고종 33년(1896년) 23세 때 다시 고향집에 돌아왔다. 정시해는 학문적으로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鎮)의 성리학을 계승하여 당 시 논쟁되었던 사단칠정에 대하여 정확한 논지를 전개하였고, 기정진의 성리설이 율 곡(栗谷) 이이(李珥)의 학문에 어긋난다고 피력한 권봉희(権鳳煕)와 최동민(崔東敏) 의 설을 재비판하였다. 1901년 28세, 10월 최익현의 명을 받고 기우만을 방문한 습재(習斎) 최재학崔在 - 68 -


)을 만나 노성(魯城) 궐리사 강회에 참석했다. 1904년, 31세 때부터 다음해까지 고산서실(高山書室)에서 지내면서 단을 만들어 놓고 대명(大明)과 선고를 위하여 6 년을 삭망으로 분향하며 시묘하였다. 이 무렵 「후대명문(後大明文)」, 「심학도설(心学 図説)」, 「삼현앙모기(三賢仰慕記)」를 지었다. 1905년 을사늑약을 접하고 국권이 일본에 넘어간 것을 개탄하고서 최익현을 찾아 갔다. 당시 최익현은 토적소(討賊疏)를 올리며 의병봉기를 준비하였다. 최익현이 영 남의 민심 동향과 지사들을 규합하라고 하명하자 정시해는 영남의 지사들에게 최익 현의 뜻을 전하고 격문을 배포하여 의병창의를 호소하고 돌아왔다. 영호남의 의병이 동시에 봉기할 것을 통고하기 위해 재차 영남으로 떠났다가 19일만에 임무를 마치 고 돌아왔다. 이듬해 대명단(大明壇)에 고하고 4월 11일 태인으로 최익현을 찾아가 무성서원(茂城書院) 강회에 참석하고 또 바로 담양 용추사(龍湫寺)의 집회에서 최익 현을 모시고 참석하여 기우만을 만났다. 13일 최익현은 무성서원에서 창의하여 일본 을 성토하자, 지사와 포수(砲手)가 대거 참여하고 또 날로 늘어나 지방 관아의 무기 를 접수하고 군량을 확보해 의병대의 병력은 800여 명에 이르렀다. 4월 5일 최익현 의병대의 소모장(召募将) 겸 중군장(中軍将)으로 태인을 출발하여 정읍을 거처 순창 으로 향하여, 4월 6일에는 순창 구암사(亀巌寺)에 진을 치고, 이튿날 순창성 밖에서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고 전열을 정비한 다음, 4월 8일에는 곡성으로 옮겼다. 4월 19일 순창으로 회군해 진을 치다가, 4월 20일 일본군과 합세한 전주와 남원의 진위 대(鎮衛隊)에게 포위당하자, 정시해는 최익현을 보호하다가 왜경의 총탄을 맞았다. 정시해는 절명하면서 최익현에게 “시해(時海)가 왜적 한 놈도 죽이지 못하고 죽게 되니 분해서 눈을 감지 못하겠나이다. 마땅히 사나운 여귀(厲鬼)가 되어 선생을 도 와 적을 섬멸하겠습니다”라며 숨을 거두었다. 최익현은 그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통곡 하니, 군중도 모두 비분하며 통곡하였다. 최익현은 그의 관 위에 ‘대한의사정시해지 구(大韓義士鄭時海之柩)’라 썼다. 정시해는 짧은 생애에도 학문에 전념하여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고, 경전을 통해 충효사상을 배양하여 실천을 중시했으며 망국에 즈음하여 민족혼이 투철한 살신성인 의 거룩하고 의로운 선비였다. 저서로 일광집(一狂集) 4권 1책이 있다. 1945년 광 - 69 -


후, 1963년 대통령표창, 그리고 무장에 오장환, 유경구, 김재화 등과 함께 ‘사의사 비(四義士碑)’가 건립되고 1977년 정부에서 건국포장(建国襃章)을 추서했고, 1990년 에는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3)

(鄭休碩) : 1893년(고종 30년)∼?

정휴석은 1893년 삼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 자는 윤집(尹集), 호는 오천(鰲 川)이다. 정시해(鄭時海)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삼태마을 동쪽의 고산(孤山) 중턱에 서 시묘를 하자, 6세 때부터 식량과 반찬을 나르면서도 한번도 빠지지 않고 6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국권을 강탈하였다. 아버지 정시해가 스승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을 따라 창의(倡義)하여 항일운동 (抗日運動)을 전개하자, 어머니를 지성(至誠)으로 섬겼다. 어머니가 갑자기 병환을 얻자 5년 동안 주야로 시측(侍側)하고 거상(居喪)에 정(情)과 문(文)으로 다하고 종 신토록 유모(孺慕)하니, 사우들이 세효(世孝)라 하였다.

(4) 정휴선(鄭休璿) : 1906년∼? 정휴선은 1906년 삼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 자는 현경(賢卿), 호는 송은(松 隠)이다. 충장공(忠荘公)의 정황(鄭璜)의 후예이자, 유릉참봉(裕陵参奉)을 역임한 정 영원(鄭栄源)의 아들이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万)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특 히 문(文)에 능하였으나 행의도 남달랐다. 형제 11인 중에서 둘째로 형 정휴탁(鄭休 鐸)이 출사로 인해 오래 동안 집에 있지 않아, 이가(理家)에 힘썼다. 부모를 섬김에 지체(志体)의 봉양을 다하였다. 모환(母患)에 도천열지(祷天裂指)하고 거상(居喪)에 조석으로 묘(墓)에 나아가 곡하였다. 분가할 적에 옥토를 형과 아우에게 사양하였다. 치가(治家)에 여력이 있어 궁한 사람을 돕는 데 주급(周急)하였으며 교자(教子)에는 의방(義方)으로 훈도하였다. 학문과 행의가 훌륭하여 사우(師友)들이 추중(推重)하 고, 향도천(郷道薦)이 있어 사림이 효행비를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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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晉州鄭氏) (鄭鋒黙)의 딸이다. 무송유씨(茂松庾氏) 유동훈(庾東焄)의 처이다. 남편이

갑자기 기질(奇疾)로 앓자, 의약(医薬)을 백방으로 구하고 치료에 정성을 다했다. 불 행하게도 상을 당하자 곡벽(哭擗)하며 따라 죽으려 하다가 갑자기 마음에 깨달음이 있어 시부모를 지극한 효도로 섬기며 자제를 잘 보살피고 길쌈에 힘써 근검치가(勤 倹治家)하니 향인의 칭송이 자자하여 천장(薦章)이 있다.

5.

종교시설

1) 정휴탁(鄭休鐸)의 고택 및 노포당(老圃堂) 정휴탁의 고택은 성송면 하고리 삼태마을 453-1에 소재하고 있다. 정휴탁은 관직에서 물러나 치가(治家)하여 부(富)를 이루었고, 정영원은 대대로 내려오는 선조의 집을 중건 하였으니 현 고택이 그 자리이다. 정영원은 만석꾼으로 불릴 만큼 큰 부자였다 한다. 고 택은 왕버들나무숲이 삼태천을 따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는 삼태천 오른쪽에 있다. 안채는 정면 8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건물로, 주추는 자연석을 이용한 범벙주추 이고, 기둥은 두리기둥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안채의 왼쪽에 있는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기본양식은 안채와 비슷하다. 전선원무장읍지(全 鮮元茂長邑誌)에 의하면, 노포당은 조부 정면규(鄭冕奎)의 아호를 딴 것으로 고택 입구 정문 위에 편액(編額)한 것이라고 하였다. 본래 ‘노포(老圃)’ 두 글자는 논어 에서 따온 것이다. 논어 「자로(子路)」편에 공자의 제자 번지(樊遅)가 스승에게 ‘채 마밭’ 가꾸는 것을 묻자, 공자는 “오불여노포(吾不如老圃 : 나는 경험이 많은 노련한 농사일 하는 사람만 못하다)”고 하였는데, 정면규는 이 논어 구절에서 ‘노포’ 두 글자를 당호로 삼았으니, 출사에 대한 꿈을 포기하고 채마밭을 가꾼다는 겸손의 뜻 을 표현한 것이다. 편액의 서체는 행서인데 누가 쓴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낙관에 ‘남(南)’ 글자만이 있을 뿐이다. 아마도 정면규가 자신의 또다른 호 무남(茂南)에서 ‘남’ 글자만을 낙관하지 않았나 싶다. - 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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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정휴탁의 고택 편액

<사진 9> 정휴탁의 노포당 전경

2)

(麗松齋) 성송면 하고리 고현마을 탑동(搭洞)에 있는 무송유씨(茂松庾氏) 중시조

인 안정공(安貞公) 녹숭(祿崇)의 재실이다. 탑동이란 옛 갈산사(葛山寺)에 탑이 있 었기에 부르는 말이고, 현재 이곳에는 기와 파편이 발견되곤 한다. 1972년에 중건하 여 ‘여송재’라 편액하니, 여송은 고려(高麗)의 ‘여(麗)’와 무송군(茂松君)의 ‘송(松)’ 글자를 따서 이름한 것이다. 고려 예종 때 태자소보(太子少保) 참지정사(参知政事) - 72 -


지내고 무송에 봉해져 이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 그의 많은 자손들은 이 곳에 대 대로 살며 집성촌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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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여송재 전경

<사진 11> 여송재 전경2

여송재 글씨는 고창 출신 명필 보정(普亭) 김정회(金正会, 1903~1970년)가 썼고, 문 앞에는 고려은청광록대부무송군유공신도비(高麗銀青光禄大夫茂松君庾公神道碑)가 있다. 신도비는 이범석(李範錫)이 찬하고 김황진(金璜鎮)이 글을 썼다. 여송재 주춧 돌은 석탑의 재료였다고 한다. 6칸 겹집에 5칸 문루가 소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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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여송재 편액

<사진 13> 여송재 주춧돌

<사진 14> 여송재 비석

3)

(鄭休璿孝行碑) 비석은 송은정공휘휴선효행비(松隠鄭公諱休璿孝行碑)로, 성송면 하고리 472-1

삼태마을에 소재하고 있다. 정휴선은 1906년 삼태에서 태어나 부모를 섬김에 지체(志 体)의 봉양을 다하였다. 어머니의 병환이 위급하자 하늘에 기도하고 손가락을 잘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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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친의 생명을 연장시켰다. 거상(居喪)에는 조석으로 묘(墓)에 나아가 곡하였다. 향도(郷道)의 천(薦)이 있어 사림(士林)이 효행비를 건립했다. 비는 호패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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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5> 정휴선 효행비

(鄭榮源施恩碑)

이 비석은 황년시혜비(荒年施恵碑)라고도 하는데, 성송면 하고리 472-1 삼태마을 에 소재하고 있다. 정영원은 진주정씨로 가학을 계승하여 후학을 양성하며 빈농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었다. 주민들이 그의 덕을 추모하여 이 비석을 세웠는데, 본래 단독 으로 세워져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삼태마을로 들어가는 입 구, 삼태교 앞에 있는 3기의 비석 가운데 하나이다. 비는 호패형으로, 전면에는 ‘전 참봉정공영원유년시은비(前参奉鄭公栄源流年施恩碑)’라는 비명이 있다. 건립연대는 ‘을축년(乙丑年)’이라 새겨져 있는 바, 이를 환산하면 1865년이다. 비 의 크기는 155×40×17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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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鄭時海忠孝碑) 비석은 성송면 하고리 486-3 삼태마을에 소재하고 있는 바, 대산으로 가는 23

번 국도 남동측에 위치하고 있다. 정시해(鄭時海)는 정태항(鄭泰恒)의 6대손으로 가 학을 계승하여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국난에 절의를 다 바치는 충성이 극진하였다. 부친의 병환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깨물어 부친에게 수혈하여 3년간을 연명케 하였 다. 양친 부모상에 6년간의 시묘생활을 하였으며, 일본이 조선의 국권을 뺏기 위해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이에 통분하여 스승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과 함 께 의거하여 의병중군장으로 활동하다가 순창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정시해 는 충(忠)과 효(孝)를 몸소 실천하며 살아갔다. 정시해는 “충신은 효도하는 집안에서 난다”는 진리를 심어 주었다. 때문에 현대인은 “효는 백행지본(百行之本)이다”라는 격언에 조금이라도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비석은 옥개형(屋蓋形)의 비수(碑首)를 가지고 있으며 비신(碑身)은 흑요석재이다. 비석 전면에는 ‘의사정시해공충효비(義士鄭時海公忠孝碑)’라는 비명(碑銘)이 있다. 건립연대는 ‘계묘사월십일(癸卯四月十日)’이라 새겨져 있는 바, 이를 환산하면 1963 년 4월 10일이다. 비석의 크기는 240×57×28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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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정시해 충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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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鄭泰煥施惠紀念碑) 비석은 시혜기념비(施恵紀念碑)라고도 하는데, 성송면 하고리 472-1 삼태마을

에 소재하고 있다. 정태환은 선대의 정신을 이어, 고창고보(高敞高普) 설립에 거금을 희사하는가 하면, 흉년에는 창고를 열어 많은 기민을 구휼하였다. 향인들이 그의 덕 을 추모하기 위해 진휼비를 세웠다. 당초에는 판정리(板井里) 국도변에 세웠다가 1970년 삼태마을 앞으로 옮겨 보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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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정태환시혜기념비

7) 시묘총(侍墓塚) 시묘총은 삼태마을 앞 산에 있는 묘소로서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어 행인들이 발길 을 멈추고 눈여겨보는 곳이다. 본 시묘총은 삼태마을에 거주하는 진주정씨(晉州鄭 氏) 가문의 대대로 이어온 시묘가풍의 표본으로 고창읍 교촌리에 거주하는 정상열 씨의 8대 조모 진주강씨의 묘소이다. 삼태마을의 진주정씨 가문은 대대로 시묘의 가 풍이 있었다. 현재 정상열 씨의 8대 조부 정태항(鄭泰恒) 씨도 부친상에 3년 동안 신혼(晨昏)으로 곡묘(哭墓)하였다. 진주강씨는 남편이 3년 시묘를 하는 동안 충실한 내조를 한 분이다. 정태항의 처 진주강씨는 네 명의 아들을 두었으며 큰 아들은 갑 - 77 -


(甲臣), 둘째 아들은 용관(龍観), 셋째 아들은 양신(暘臣), 넷째 아들은 경신(景 臣)이라고 불렀다. 진주강씨께서 노환으로 돌아가시자 네 분의 아들 가운데 세 아들 이 시묘를 하였다. 시묘한 아들은 큰 아들 갑신, 셋째 아들 창신, 넷째 아들 경신이 다. 둘째 아들 용관은 시묘하고자 하였으나, 형제가 모두 시묘하였을 경우 가사를 돌 보는 데 매우 어려움이 뒤따르기에, 둘째 아들 용관은 그 책임을 모두 도맡았다. 이 러한 연유로 형과 두 동생은 가사를 걱정하지 않고 시묘하였으니, 뒷날 3형제의 이 름이 거론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장자 갑신은 부모 병에 4년 동안 의약(医薬)에 정성을 다하고 메추리와 자라를 비 시지절(非時之節)에 얻어 봉양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세 분의 시묘하는 정성이 어찌 나 지극하였는지 범이 와서 보호하기도 하고 또 매월 삭망일 아침이면 수꿩 한 마리 가 묘 앞에 와서 죽어 있었는데, 생활이 어려운 처지인지라 그 꿩고기로 삭망일 제 사 음식을 만들어 올렸다 한다. 3년 동안 모은 꿩목털로 큰 방석을 만들어 가보(家 宝)로 전해 내려오던 중 갑오동학란에 불타버렸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나이 많으신 마을 어른들은 방석의 실물(実物)을 보았다 한다. 시묘총은 그리 흔한 것이 아니고 그 지방 그 시대상을 나타내는 표본이기에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 충과 효의 도량이 될 수 있도록 가꾸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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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시묘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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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안디옥교회

1988

8월 15일 하고리 삼태 145번지에 삼태교회를 설립, 1994년 삼태 480번지

로 옮겨 가건물을 지어 선교활동을 하다가, 2000년 3월 18일 현 건물을 완공한 다 음 교회명도 안디옥교회로 바꿔 활발한 종교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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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삼태 안디옥교회

9) 왕버들나무숲 왕버들나무숲은 전북도기념물 117호로, 성송면 하고리 삼태마을 앞 삼태천 양옆 둑에 줄지어 서 있다. 오래된 나무의 수령은 2~3백년이 됨직하다. 이 숲은 버드나무 뿐 아니라 귀목나무와 은행나무, 소나무, 벚나무 등 12종에 90여 그루의 나무가 숲 을 이루고 있다. 이 나무들은 삼태마을을 지키는 수호신과도 같다. 삼태마을은 배의 형국이기에 주민들은 우물을 파지 않고 삼태천을 식수로 사용하기 위해 물을 기르며 잠시 쉬기도 하고, 여름 농사철에는 우거진 나무숲에서 쉬기도 하는 등 마을공동체 의 구심점이었다. - 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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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20> 왕버들나무숲

삼태 논바닥의 느티나무 있는 느티나무와 삼태 논바닥에 있는 느티나무는 무더운 여름날 농부

에게 쉼터가 되고, 평소에는 외로이 서서 마을을 수호하듯 하여 예사롭지 않은 분위 기를 자아낸다. 고현의 느티나무는 성송면 하고리 752번지에 있다. 이 나무는 고현의 초새봉 아래 자락에 자리한 유종관(柳鍾琯) 씨의 집 앞에 있다. 수령이 300년에서 400년으로 추 정되는 나무이다. 이 느티나무는 직경 80~100㎝, 높이 15m 이상이며, 특히 흉고둘 레 1.5m 이상에 이른다. 고유번호 9-14-43는 2001년 6월 22일자에 지정되었다. 이 느티나무 위쪽에 고현 샘이 있다. 마을 주민들은 물을 기르며 잠시 쉬기도 하고, 여름 농사철에는 그늘 밑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는 등 마을공동체의 구심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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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느티나무

<사진 22> 고현 샘

삼태에서 남창으로 가는 길목 왼쪽 논에 또 하나의 거목 느티나무가 있지 만, 애석하게도 그 나무에 대한 푯말 하나 없다. 이 예사롭지 않은 나무는 수령이 300년 남짓되어 보이는데도 전혀 관리를 하지 않는 듯하다. 현재 이 나무는 벼락을 맞아 큰 가지가 부러져 있어 지나는 객의 마음이 그저 허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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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3> 느티나무

편의시설

1) 안길 약 1.5km를 확포장하고, 1000m의 담장을 개량하였으며, 60동의 지붕을 개량하였다. 또 하수구 100m를 정비하였다. 2) 모정 현 모정은 하고리 삼태 111-1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2003년도 현 모정을 신축하 여, 마을 주민들이 모여 앞 삼태천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는 한편, 농사일에 더위를 피하며 담소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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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4> 모정

: 삼태회관과 경로당 경로당은 2003년 하고리 111-1번지에 30평 규모로 신축하였다. 삼태

회관은 마을 주민들의 회의장 및 사랑방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경로당은 노인들이 담소의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사진 25> 회관

4) 도로 삼태마을은 국도 23번(지방도 893번) 도로가 일찍이 개통되어 교통이 불편하지 않았다. 현재 삼태와 고현의 농어촌도로도 확포장되었다. - 83 -


7. 1)

숨은 이야기 야화 의하면, 삼태마을의 형국은 부주(浮舟) 또는 행주(行舟)처럼 생겼다는 것

이다. 아주 옛날 대산천에는 배가 다녔는데, 이 배가 삼태마을까지 들어와 정박하였 다. 정박한 배가 거센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배를 매둘 요량으로 나무들을 심었 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이 마을에는 우물이 없는데도 착정(鑿井)하지 않았다. 이 마 을이 바다로 저어나가는 배의 형국인데, 만약 착정하였을 경우 배가 가라앉아 마을 의 운세가 다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물을 파지 않고 흐르는 삼태천의 물을 식수로 사용하였다 한다.

2) 숨은 이야기 삼태마을은 배의 형국이기도 하지만, 어떤 이는 학(鶴)의 형국이라고도 한다. 진주 정씨 정영원(鄭栄源)은 많은 부를 이루고 고택을 중건하고 마을 오른쪽 안산에 태호 정(台湖亭)을 건립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의 사후, 어느 도인이 그의 집을 지나 며 이 집터는 학의 형국에 자리하였고, 학의 날개에 태호정을 세웠으니 학이 날아가 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정씨 일가는 노포당 당집도 팔고, 그리고 당집 일 부 건물과 태호정을 보천교(普天教) 신도들에게 주었다. 그 신도들은 당집 일부 건 물과 태호정을 해체, 가져다가 건물을 세웠다고 한다.

3) 왕버들과 버드나무 이야기 마을 앞의 삼태천 양 둑의 나무들은 예사롭지 않다. 본래 삼태천은 대산천(大山 川)으로 흐르는데, 제방이 무너질 위험이 많았다. 그리하여 조상들은 그 둑이 무너지 지 않도록 삼태천 양 둑에 수령 2~3백년 정도 되는 괴목나무와 은행나무, 왕버들 나무 및 소나무, 벚나무 등을 심은 것이라고 한다. 또는 이러한 나무들이 배의 형국 인 삼태를 보호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심었다고 한다. 영혼의 샘터에서는 버드나무의 지혜와 용이 변신한 버드나무를 소개한다. 버드 - 84 -


지혜가 드러나는 이야기를 옮겨본다.

버드나무와 참나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참나무가 버드나무에게 말했습니다. “버 드나무야 너는 왜 그렇게 약하니? 약한 바람에도 가지가 휘어지고 쓰러질 것 같으니 그런 몸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니?” 그러자 버드나무가 대답했습니다. “힘 이란 자랑하는 것이 아니야. 뽐내지 말고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고 우리 조상들은 가 르쳐 왔단다.” 마침 거친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버드나무는 바람따라 이리저리 휘어지면서 견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참나무는 버드나무를 비웃으며 보란 듯이 뻣 뻣하게 몸을 세웠습니다. “버드나무야 나를 보아라!” 그때였습니다. 세찬 바람이 불 어와서 꼿꼿한 참나무를 두 동강 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버드나무는 모진 바람에 도 순종하면서 잘 견디었습니다.

용이 변신한 버드나무 이야기는 수달이 죽은 후 그 명복을 빌기 위해 스님이 된 소년이야기로 유명하다. 신라 혜통(恵通) 스님은 당나라 고종의 딸이 용의 형상을 가진 귀신에 혼을 빼앗겼을 때 당나라로 건너가 용을 쫓아내고 병을 고쳐준다. 그 후 혜통스님은 당나라에 남아 있었는데 혜통스님이 쫓아낸 용은 몹시 화가 나서 혜 통의 고향인 신라에 들어와 사람을 해치기 시작한다. 정공이라는 사신에 의하여 그 사실을 알게 된 혜통스님이 신라에 들어와 용을 쫓아 버리자 화가 난 용은 복수를 결심하고 사신인 정공의 집 앞 버드나무로 환생한다. 이러한 사실도 모른 채 정공은 버드나무를 애지중지한다. 세월이 흘러 신문왕이 죽자 효소왕이 다음 왕이 되어 장 례를 지낸다. 장례행열이 정공의 집 앞에 이를 무렵 버드나무 가지가 “천안삼거리 흥 축 늘어졌구나. 흥--”하며 장례행렬을 막았다. 효소왕이 화가 나서 버드나무를 베려 하자 정공이 버드나무를 벨 바에 자신을 죽이라고 한다. 이에 화가 난 효소왕은 정 공을 죽이게 된다. 용이 버드나무로 환생하여 복수를 한 것이다. 복수에 성공한 용은 의기양양하여 백성을 다시 괴롭힌다. 이러한 소식을 듣고 혜통스님은 용을 쫓아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닫고 용을 찾아가 용의 마음을 진심으로 달래고 불가에 귀 의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에서 버드나무를 복수의 화신이라 한다. - 85 -


8.

및 소득산업

1)

전답 30호이고 비농가는 9호이다. 전(田)은 25ha이고, 답(畓)은 45ha이다. 임야

는 18ha이다.

2) 농사이야기 1950년대 삼태마을 주민들은 보릿고개가 되면 식량이 매우 부족하여 청맥죽으로 겨우 연명하였다. 1960년 후반기에 들어 줄모내기 실시하였지만 여전히 농가소득은 부족하였다. 1970년도에 들어 줄모내기와 통일벼 재배를 통해 수확량이 나아졌지만 농가소득을 더 올리기 위하여 담배나 고추 등의 밭농사를 시작하기도 하였다. 1990 년 기계농업이 실시되어 논밭농사의 수확량이 급격히 높아졌고, 또한 수박재배를 통 해 농가소득을 올렸다. 특히 기계농업은 매우 부족한 농촌의 인력을 대체하여 많은 수확량을 가능하게 한다.

3) 소득작목의 변천과 축산 1960년 이전에는 쌀과 보리, 콩을 재배하였다. 1961년 이후에는 잎담배, 1983년 이후에는 비닐을 이용한 고추재배가 실시되었고, 1990년 이후에 수박재배가 실시되 어 경제력이 매우 성장하였다. 2003년 이후에는 복분자 재배를 통해 농가소득을 올 리고 있다. 축산은 한 농가만이 한우를 사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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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

및 역대 이장 매년 양력 정월 14일이다. 역대 이장은 정원도(1980∼1982), 유종관

(1983∼1984), 정재원(1985∼1986), 유종관(1986∼1996), 정병환(1997∼2000) 등이다. 현재는 김재창(2000∼)이다. 1980년 이전 역대 이장에 대한 기록은 없기에 명시하지 않았다.

2) 남녀지도자 및 부녀회 새마을 지도자는 정준태이고, 부녀회장은 김순옥이다. 부녀회 회원수는 30명이다.

○ 도움 주신 분 • 정상열(鄭相烈, 진주정씨, 남, 85세) • 정재은(鄭載銀, 진주정씨, 남, 78세) • 유종관(柳鍾琯, 고흥유씨, 남, 65세) • 김재창(울산김씨, 남, 56세, 이장)

○ 참고문헌 • 한국지명총람 전북편(상・하), 한글학회, 1981 • 高敞三郷誌 호남문화사 1991 •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2003 • 茂長郷校誌 호남문화사, 2004 • 고창군지 고창군, 2008 • 모양성의 얼 고창군, 2009 • 우리나라 나무 이야기 박영하, 이비컴,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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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의 마을 제 1집


궁산리 궁산마을 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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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취를 간직한 전원마을 -

궁산리 궁산마을

1`. 마을의 위치와 유래 1)

개관 서쪽으로 국가지원 지방도 15호선을 따라 아산면 소재지(다른 도로,

고창 나들목 교차로 4차선 좌측 방향으로 아산면 중앙선을 이용 해리면 팔형치 경 유)에서 선운사 쪽 국도 22호선으로 심원 면사무소를 지나 법성포 방향으로 6㎞ 정 도 가게 되면, 궁산 저수지를 앞마당으로 둔 심원면 궁산마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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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도 22호선에 위치한 궁산마을 표지석

고창읍에서 약 29㎞ 거리이고 선(禅)바위산이 병풍처럼 마을 전체를 품고 있다. 이 산봉우리에서 전라남도 영광군 흥농읍의 높고 낮은 산과, 전북 부안군에 소재한 곰소만과 위도까지 보이는 변산반도, 그리고 고창군 관내 상하면・해리면・대산면 등 이 한눈에 들어온다. 또 도립공원 선운산의 배맨바위, 서해 칠산바다를 앞에 둔 동호 - 91 -


고창 컨트리클럽, 천일염을 생산하는 삼양염업사의 소금밭도 바라다보이 는 그림 같은 농산촌(農山村)으로, 마을 뒤쪽과 동쪽・남쪽의 3면이 산으로 둘러싸 여 있으며, 서쪽만이 광활한 들녘이다. 마을은 국도 22호선에서 궁산마을 입구에 세워진 마을 표지석에서 100여m 정도 안쪽 에 위치하고 있다. 심원 면사무소쪽에서 법성포 방향으로 가는 길에서는 마을이 보이지 않으나, 반대편인 해리면 팔형치(八兄峙)마을에서는 궁산 저수지 너머로 마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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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해리면 팔형치에서 바라본 마을

지금도 60년대 이전의 전형적인 농산촌(農山村) 마을같이, 인심 좋고 평화로운 느 낌으로 옛날 향수(郷愁)를 느낄 수 있는 전원(田園)마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정취(情趣)는 오리와 닭, 소 등을 집 울타리 안에서 기르는 가정이 있고, 그 규모 또한 오리와 닭은 2~9마리, 소는 1마리에서 20마리까지 사육하고 있어 어 렵게 지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사진 3> 외양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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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뇨로 생활의 불편을 느낄 수도 있으련만, 서로 이해하면서 옹기종기 사는 모습이 옛날 옛적 농산촌을 보는 것 같고 이렇게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는 이웃간의 정은 다른 마을에서는 볼 수 없을 것 같아, 이 마을에서 살고 싶은 충동(衝動)이 생 기기도 한다.

2)

(法定里)와 행정리(行政里)

궁산마을은 심원면의 10개 법정리 중 네 번째로, 중간 크기의 마을(심원면 면적 40.067㎢, 궁산리는 2.669㎢)이고 행정리 또한 궁산마을 1개 분리(分里)뿐이고, 자 연부락은 궁산 저수지가 축조되기 전인 1930년대에는 내궁(内弓), 외궁(外弓), 개매 기[狗項], 궁산(弓山) 등으로 조성되었다. 지금은 내궁마을과 외궁마을은 저수지 축 조로 수몰되어 사라졌고 개매기[狗項]마을은 6・25 동란시 밤에는 괴뢰군이 출현하 여 선량한 주민들을 괴롭히고 약탈하자, 마을 사람들의 일부는 다른 지역으로, 일부 는 현재의 궁산마을로 옮겨와 사라지게 되었다. 이로써 궁산마을은 법정리와 행정분리상 또는 자연부락으로도 1개 마을뿐인 흔치 않은 특이한 지역이 되었다.

3) 인구 분포 마을의 최대 인구는 1966년경으로 82세대 400명이 넘게 살았는데 2009년 8월 현재 42세대 80명으로, 그 중 남자는 38명이고 여자는 42명으로 60년대에 비하여 4분의 1정도로 인구가 많이 줄었다. 이는 비록 궁산마을만의 현상이 아니고 70년대 이후 우리 사회가 산업화하면서 나 타난 일반적인 이농현상(離農現状)에 따른 결과라 할 수 있겠으며, 전국적으로 수도 권과 공장이 밀집된 지역으로 인구(人口) 쏠리면서 상대적으로 농산어촌(農山漁村) 의 인구가 감소했다고 할 수 있겠다. 궁산마을에 살고 있는 성씨(姓氏)는 금성라씨(錦城羅氏), 전주이씨(全州李氏), 김 해김씨(金海金氏), 여흥민씨(驪興閔氏), 함열남궁씨(咸悦南宮氏), 청주한씨(清州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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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양김씨(彦陽金氏), 무안박씨(務安朴氏), 탐진최씨(耽津崔氏) 등으로 비교적 작은 마을이 각성바지인 편이다. 그 중 김해김씨(金海金氏)인 아무개는 5명의 식구로 3대가 한 집에 살고 있으며, 며느리로 인해 다문화 가정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연령별로는 10세 이하가 김씨네 가족으로 1명이 있고, 60세 이하는 31명에 불과하며, 70세 이상의 노년층이 대부분 이다.

4)

및 지명유래

삼한시대에는 마한(馬韓)땅으로, 삼국시대에는 백제(百済), 고려 때에는 장사현(長 沙県)의 속지(属地)였다. 1417년에 무송현(茂松県)에 포함되었고, 1914년 3월 1일 부군통폐합령(府郡統廃合令)에 의해 고창군(高敞郡)에 편입되어, 주민조직개편으로 10개 법정리(法定里) 중 하나로 궁산리(弓山里)라 칭(称)하게 되었다. 궁산마을은 심원면 내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600여년 전 평강채씨(平康蔡氏) 한 분이 마을을 지나다가 산세와 지형이 좋아 정착한 후 평강채씨(平康蔡氏), 영성 정씨(靈城丁氏), 금성라씨(錦城羅氏), 전주이씨(全州李氏), 평산신씨(平山申氏), 여흥 민씨(驪興閔氏) 등이 입향(入郷)하여 지금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형이 활 형국이라고 생각하여, 뒷산은 활대처럼 생겼다고 하고 마을 앞 도로가 활줄처럼 생겼다 하여 활 궁(弓) 뫼 산(山)자를 써서 궁산(弓山, 활뫼)이라 이름 붙 였다.

2.

자연환경

궁산마을 앞 저수지 중앙을 경계로 해리면 왕촌리와 안산리로 구분되고, 서쪽의 광활한 삼양사 간척지 들판의 중심 부분으로 해리면 금평리, 동호리, 그리고 심원면 주산리의 경계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마을 앞에는 1930년대 초반부터 5년여의 기간에 축조된 저수지가 있어, 선(禅)바 - 94 -


밑에 위치한 마을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고, 마을 경치가 산자수명(山紫水明)하 며, 저수지의 규모는 80ha이상으로 비교적 큰 편이다. 저수지 중앙 부분에는 내궁산(内弓山), 외궁산(外弓山)으로 불리는 마을과 문전옥 답(門前沃畓)이 있었으나 수몰되었고, 마을에 살던 주민들 중 일부는 지금의 궁산마 을에, 나머지는 타지방으로 이주하였다. 수몰된 마을에 살던 여흥민씨(驪興閔氏) 중 벼슬과 재력을 갖춘 사람이 살던 가옥을 추후 삼양염업사에서 매수, 지금의 염업사 사무실 뒤쪽으로 이축하였으나 2년 전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어 집 규모나 구조는 볼 수 없게 되었다. 궁산 저수지는 농업용수로 활용되고 있으며, 만수기(満水期)에는 지금은 사라진 개매기 마을 언덕을 넘겨 인근 도천(道川) 저수지로 양수시켜 도천리, 연화리, 월산 리 등지의 농경지에 공급되기도 한다. 이러한 양수작업에 대하여 일부 동네 사람은 혹시나 본인들의 경작농지에 이용해야 하는 농업용수의 부족현상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며 걱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걱정은 만수기에 바다 쪽으로 흘러넘치는 물 을 양수하는 관계로 기우(杞憂)가 아닐까 한다. 이는 저수지 유역이 해리면, 상하면, 무장면, 아산면 일부로써 비교적 수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할 것이다. 저수지는 농업용수 이외에도 붕어, 잉어, 가물치 등 물고기 자원이 풍부하여 자망 (刺網) 또는 삼각망(三角網)으로 내수면 면허를 얻어 생업에 보태는 전업가정도 있 다. 매일매일 적게는 20명에서 많게는 300여 명까지의 사람들이 낚시를 즐기러 대 도시에서 찾아오고 있고 이들이 주변에 있는 주요 관광지도 둘러보기도 하는 바, 우 리 고장의 관광지 소개에도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또한 낚시 꾼들의 편익을 위하여 마을 한복판에 구멍가게가 있어 담배와 물을 팔고 있으나 가 게 주인은 품삯도 나오지 않는다며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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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600

4> 해리면 복동마을에서 바라본 궁산 저수지

전통과 전해오는 이야기 양자, 민영채 이야기 년 전 조성된 이 마을은 이조 말엽에 민영채(閔泳彩)가 나주목사(羅州牧使)

의 벼슬을 지냈고, 동생인 영직(泳直)이 승지(承旨)1) 벼슬도 했으며, 정좌랑(正左 郎)의 집은 12대문이었을 정도로, 천석꾼 부자였다. 이렇게 벼슬한 사람과 갑부가 태어난 마을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동네 사 람들은, 스스로 양반 마을로 자처하는 의식이 점차 강해졌다고 한다. 이 무렵이 궁산 마을로서는 가장 번창한 시기라고 하는데, 천석꾼 집에는 머슴살이 하는 사람만도 100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뒷날 나주목사가 된 민영채에 대한 일화(逸話)도 있다. 민영채는 글도 잘했고 글 씨도 잘 썼지만 집안이 워낙 가난하였으므로, 서울에 가서 과거라도 응시하고자 했 지만 노자(路資)가 없어 고심하던 중, 이웃 대실마을에 사는 이씨네 집에 가서 전후 사정을 이야기한 후 서울 갈 여비를 보태 달라고 간청하자, 이씨는 마을 사람 누구 한테도 이러한 이야기를 절대 하지 말라고 당부한 후, 돌아가 집에 있으면 자정쯤에 1) 承旨 : 조선시대 때 승정원(承政院) 소속의 왕명을 출납하는 관리로 정3품, 왕의 비서관 - 96 -


갖다 주겠노라고 했다 한다. 이에 민씨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노라니 약속대로 서울에 다녀올 왕복(往复) 여비 를 후하게 주고 가자 다음날 서울에 올라간 후 이거리저거리를 방황하고 다닐 때, “여흥민씨 대동보소(驪興閔氏 大同譜所)”라 쓰인 간판을 보자 안으로 들어가 이곳까 지 오게 된 연유를 고백하자 안에 있던 사람이 글을 할 줄 아느냐고 물으니 자신있 게 할 줄 안다고 대답하고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하겠으니 먹고 재워만 달라고 통사 정했다 한다. 이렇게 되어 당분간 그 곳에서 지내게 되었던 바, 지내는 중 글도 잘하고 글씨도 잘 쓰는 것을 보소(譜所)2)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고종황제의 비(妃) 민비(閔妃)에게 양자(養子)로 들게 소개하여 주었다 한다. 민비왕후(閔妃王后)의 양자가 된 민영채가 비록 양모(養母)였지만 생모 이상으로 극진히 민비를 모시자, 기특하고 고맙게 여긴 궁중에서 나주목사3)로 봉직(奉織)하게 하였다 한다.

2)

있는 전설 - 팥 장군 이야기

이 마을의 묻혀진 전설로, 유명한 팥 장군 이야기가 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개매기 마을에서 일어난 이야기이다. 한 살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를 방 안에 재운 뒤, 부모가 들녘에 나가 농사일을 하 다 아기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중간중간에 집에 들르곤 하였다. 그런데 집에 도착하면 아이는 배가 고파 울고 있으리라는 조바심으로, 숨 가쁘게 달려온 부부의 근심과는 달리 방 안에는 울음소리 하나 없이 너무나 조용하였다. 웬 일일까하고 문 틈으로 방안을 들여다 보니, 아기가 천정에 붙었다, 벽에 붙었다 하면 서 혼자서 전쟁놀이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놀란 부부가 인기척을 한 후 방문을 열고 방에 들어가면 아이는 조용히 누워 잠자는 척 하고 있었다. 2)

만드는 일을 하기 위해 만든 임시 사무소

3) 목사(牧使) : 조선시대 때 각 목(牧)의 으뜸 벼슬로 정3품의 외관직 - 97 -


장차 아기가 크면 큰일을 저지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훗날 분명 집안 에 화(禍)를 불러 올 것이라 판단하여, 부부간에 며칠간 숙의한 끝에 동네 사람들 몰래 아이를 키우지 말자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밭에서 거둔 팥 자루로 아이를 눌러 죽였다 하여 죽은 아이를 두고 팥 장군이라 하여 전해오고 있다.

3)

농악을 하지 않는 양반 마을

지금 살고 있는 주민들은 자기 마을에서 여흥민씨(驪興閔氏) 가문에서 나주목사와 승지(承旨), 정좌랑(正左郎) 등의 벼슬을 한 사람과 천석꾼 부자가 있게 된 것을 본 인들의 영예인 듯 매우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게 여긴다 한다. 마을이 최고로 융성(隆盛)하던 이조 말엽에는 주변 마을 사람들 중 혼례식을 마친 신랑 신부가 가마 또는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궁산마을 앞을 지나갈 때면 반드시 가마나 말위에서 내려 걸어가는 풍습이 있었다 한다. 이런 모습만 봐도 다른 마을 사람들이 이 마을을 양반마을로 인정했던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된다. 또한 마을 주민 스스로도 양반마을에 산다고 자부하면서 명절 때나, 농사지을 때 에 농악놀이를 해야 하는 일이 생길 때면, 양반 마을에서 어찌 손수 굿놀이를 할 수 있느냐면서 인근 마을에서 농악단을 초청하여 즐겼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지금도 마을에는 농악놀이가 없다고 한다.

4) 숨겨진 이야기 - 여흥민씨 이야기 선(禅)바위산 중턱에 아주 가난하면서도 인품이 평범해 보이는 부부가, 2칸 오두 막집에서 농토도 없이 겨우 끼니를 연명하면서 살고 있었다. 하루는 풀을 베어 지게에 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중간에서 잠시 쉬고 있었 는데 자기 집안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급히 발길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불을 먼저 발견한 동네 사람들은 불을 끄기 위하여 집 마당에 몰려왔지만 그 누구도 앞장서 나서지 않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집주인이 헐레벌떡 뛰어와 위험을 무릅쓰고 집안 살림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집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모여든 동네 사람들이 생명이 위험하니, 들어가지 말 것을 권 - 98 -


. 그러나 그는 막무가내로 “내가 보관해야 할 귀중한 자료가 있다”면서 안으 로 뛰어들어 갔다 한다. 방 안에 들어간 민씨는 모든 것이 화염에 휩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궤짝같은 상자를 가슴에 안고 나왔다. 이때 주민들이 그 상자를 열어본 즉 여흥민씨 족보인 것을 보고, 상민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어 추후 결혼 상대의 집안으로 정했다 한다. 이것을 계기로 여흥민씨 가문을 더욱 양반으로 인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4.

자랑거리

1)

새긴 친목비

국도 22호선에서 궁산 저수지의 제방이 시작되는 지점에 궁산마을 표지석을 우측 으로 마을 안쪽으로 20여m 들어오게 되면 좌측 바위 중턱에 병오생(丙午生, 1906년 생) 동갑계(同甲契) 기념비(記念碑)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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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병오생 동갑계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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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되신 분들이지만 동갑내기끼리의 우정을 기리고자 세워진 비로, 비석 전면에는 ‘병오생 갑계 기념비(丙午生 甲契 紀念碑)’라 새겨져 있고, 좌측면과 후면 에 12명의 계원 생일순으로 호(号)와 성함(姓銜), 본관(本貫), 아들(子)의 이름이 세로로 새겨져 있으며, 단기 4303년(서기 1970년) 경술(庚戌) 4월에 건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간직되어 온 족보(族譜)와 교지(敎旨)

금성라씨(錦城羅氏) 후손인 라기옥(羅基玉) 옹은 국내에서 매우 보기 드문 족보 (族譜) 3질을 고이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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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족보와 교지를 펼쳐 보이면서 설명하는 라기옥 옹

340년에서 400여 년 전으로 추정되는 족보로, 3권, 5권 7권이 각각 한 질로 정교 히 인쇄된 소중한 자료로, 소장자는 아주 귀중한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으며 족보를 보관하게 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 중 임자보(壬子譜)는 서문 에 340년 전(戊戌 2月 崇貞 165年 壬子十月)의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전국에서 세 번째로 족보를 발행한 집안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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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잘 보존 관리되어 온 금성라씨 족보

교지(教旨) 1점(点)은 증 이조판서(贈 吏曹判書) 벼슬을 하사(下賜)받은 것 으로, 이조판서는 조선조 때 6조(曹)의 하나로 인사(人事)나 훈봉(勳封)에 관한 사 무를 집행하는 기관으로, 지금의 행정자치부에 해당된다 하겠다.

<사진 8> 교지(敎旨) 좌측 상단 하얀 부분은 임금님의 옥새가 찍힌 곳으로 아무나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여 별도 종이로 덮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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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낸 분은 소장자의 17대조인 라세찬(羅世纉)이시고, 5대조(代祖)께서 도 지금의 면장에 해당하는 직장(直長)에 봉직하였으며, 당질되는 이도 1990년대에 심원면장을 역임하기도 하여 벼슬집안이 아닌가 싶다. 이외에도 이 마을 출신으로 제3대 국회의원선거 때 고창을구(심원면, 부안면, 흥덕 면, 성내면, 신림면, 고창읍, 해리면)에서 후보로 나선 민정식(閔晶植, 동양맥주감사 역) 씨도 있다.

3)

정신을 계승한 농지양도운동

삼양사는 당시 국내에서 굴지의 기업으로 서해바다 공유수면을 매립하여 지금의 해리면 금평리 동호리를 비롯 심원면, 궁산리, 주산리, 고전리, 만돌리 등에 위치한 간척지를 조성하였다. 공사기간은 1930년 초부터 1937년경까지로 어려운 역경을 이 겨내면서 간척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룩하였다. 이러한 노력 끝에 농지 296ha를 포함 염전조림지 등 총 600ha 이상의 광활한 국토를 넓혔으며, 그 중 농지에서는 소작료 를 징수하는 임대농지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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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지금은 옥토로 변한 삼양사 간척지, 농경지 끝 멀리 보이는 곳이 서해바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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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이 마을에 거주하는 김재만(金在万) 씨가 주축이 되어 삼양사 소작농지

무상양도대책위원회(三養社 小作農地 無償譲渡対策委員会, 이하 대책위)를 구성하여, 오랜 투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오늘날처럼 농사기술이 발달하지 아니하 고 간척지인지라 척박한 토지였으므로 수확량이 그리 많지도 않았다. 하지만 삼양염업사(삼양사의 자회사)에서는 매년 경작자에게 일정액의 소작료를 징수했다. 경작자 입장에서는 소작료 이외에 궁산 저수지의 농업용수를 이용한다 하 여 수세까지도 부담하고 있어서, 이러한 공공성 이용료를 제외하면 인건비조차도 건 질 수 없는 어려운 상황으로, 농사일을 열심히 했건만 소득이 거의 없다시피한 궁핍 한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이에 김 위원장 등 대책위 임원들은, 전남 신안군 압해도에서 일제시대 때 일본인 들이 비슷한 방법으로 간척지를 조성하여, 일제강점기 때 소작료 명목으로 수탈하다 가 경작자에게 양도한 사실을 알게 되어, 의로운 투쟁을 외롭게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 대책위는 경작인(소작인)들의 어려운 실상을 담은 진정서와 탄원서를 청와대 와 정부 관련 부처에 수십 차례 제출하였다. 그 내용은 ‘삼양사 간척답은 농지개혁 당시 미완공된 간척지로 정부가 매수하는 대상에서 제외되어 매년 고율(高率)의 임 차료를 지불하고 있어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작인들의 영농의 욕이 상실되어 실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므로 기숙화(既熟化, 이미 농지처 럼 되어버린)된 농지를 개인별로 분배하여 주심이 마땅하다’라고 주장하였다. 대책위는 무상양도를 주장하면서 소작인들이 모인 대중집회를 열기도 하고, 대책 위의 임원진이 삼양사 본사 임원진과의 끈질긴 대화를 하기도 하였다(수차례의 집회 와 12차례에 걸친 삼양사 임원진과의 대화를 실시). 마침내 1987년 9월 11일 삼양 사 본사에서 삼양사 측 고문변호사가 입회한 가운데, 지주(4인 공동명의)와 대책위 핵심 임원진간에 무상양도는 제반여건상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고, 공시지가로 양도하는 조건으로 각서를 체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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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무상양도를 주장한 대책위 위원장 김재만 씨

공시지가는 평당 1,881원으로 농지 한 필지당(600평) 130여만원으로, 소작 자끼리 경작권을 사고팔고 하던 가격이, 벼 50~60석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가격 혜택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대책위 관계자는 “당시 어려운 투쟁이었다”라며, 동학농민혁명운동의 봉기 사유와 비교해 본다면서 지금도 그 투쟁과정을 생각하면 눈물겹다고 말한다. 본 양도농지는 해리면과 심원면의 17개 마을 600여 농가에서 수혜받게 되었다. 오늘날도 수혜농가들은 대책위 김재만(金在万) 위원장의 노고에 대하여, 우리 농 민사에 길이 남겨져야 할 사적(史蹟)이라며 그 분에 대한 공덕비나 공적비를 세워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 입을 모은다. 이와 같은 김 위원장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있는 흔적은 국도 22호선 길 옆에 궁산마을 표지석 [궁산(활뫼)]에 새겨진(사진 맨 앞장) 밑 부분에 ‘삼양간척답 양도 일 1987년 9월 11일 양도 위원장 김재만’이라 새겨져 있으며, 옆면에는 ‘서울 향우 회 증’이라고 쓰여진 것을 봐도 김 위원장에 대한 노고를 위로・격려하는 주민들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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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사랑방 같은 궁산교회 여느 교회와는 다른 여러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전통 건축물인

기와건축물에 친환경적 자재를 최대한 활용하면서도 서양의 실용적인 공간을 최대로 도입한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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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마을 한복판에 위치한, 사랑방 같은 궁산교회

궁산교회는 인근 왕촌교회를 세운 고(故) 김설하 전도사가 궁산에 와서 지금의 노 인당 자리에 터를 잡고 간판을 걸었다. 그 후 1993년도에 현재의 궁산교회 자리인 빈 집을 구매하는 조건으로 후임자를 구하던 중, 대산이 고향인 박종훈(朴種焄) 전 도사가 성남에서 이사와서 새롭게 교회를 시작하게 되어 현재까지 이르렀다. 그 후 4년이 지난 1996년도에 참서관4)이 살았던 옛 가옥을 철거하고 교회당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건축비를 절약하기 위하여 손수 주위의 흙과 통나무, 잡석을 이 용하여 시작과 중단을 반복하며 1999년도에 입주하였지만 조금씩 보강하며 건축하 여 지금까지도 진행 중에 있다.내부는 오래된 건축목재를 재활용한 모습이 인상적이 다. 일제강점기에 지은 관공서를 허물면서 나온 자재를 다듬고 손질하여 은은한 나 무 무늬를 드러낸 모습으로 다락방을 만들고 강단을 장식하도록 했다. 강단의 강대상(講台床)5)은 태풍에 쓰러진 적송(赤松)을 구입하여 통강대상6)과 의 4) 구한말 벼슬의 이름 - 105 -


수작업으로 제작하여 자연미와 시골의 투박한 정서를 담은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성구(聖具)가 되었다. 시골의 노인들이 많은 관계로 심야온돌보일러를 설치했고 마을 주민들을 위해 작 은 도서관을 이층에 설치하여 2000여권의 도서를 비치했다. 특히 성탄절에는 마을 주민들이 스스럼없이 와서 점심을 들며, 같이 축하하고 때 로는 작은 음악회와 한방침술을 비롯하여 이・미용 봉사팀이 와서 봉사하는 장소로 사용하기도 한다. 교회정원에는 기존의 여러 블록 건물과 담을 철거한 뒤, 상록수를 심고 꽃을 심어 생울타리를 만들었고, 옆 골목길은 전통 돌과 흙으로 쌓은 담이 잘 보존되어 그 옛 멋을 그대로 살렸다. 교회당 외부에 흙과 돌을 적당히 섞어 벽돌처럼 쌓을 수 있겠 다는 생각도 기존의 흙돌담에서 구상(構想)을 얻은 것이다. 마당에는 천연 잔디를 깔아 오는 이에게 전원의 풍성한 맛을 누리게 했고, 이 영향을 받아 주위의 집들도 마당에다 잔디를 입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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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생울타리와 전통 흙돌담의 궁산교회

또한 어느 사업가의 도움과 궁산교회 성도들의 십시일반(十匙一飯) 헌금으로 종탑 5) 교회에서 설교를 하는 대 6) 통나무로 만든 강대상 - 106 -


청동종을 당시 시가 600만 원으로 설치했다. 한때 새마을운동의 주제곡에 나오는 ‘새벽종이 울렸네……’ 그 종소리가 사라져 가던 중에 다시 옛 시골의 교회당에서 울 려 퍼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렇게 독특한 교회당 풍경으로 인해 도시의 신자는 물론 소문을 듣고 일반 사람 들도 찾아와서 견학하는 장소가 되었다. 별장 같기도 하고 카페 같기도 한 아담한 교회당의 전경은 한국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정원에는 4.6m나 되는 보기 드문 무궁화나무가 심어져 있어 장마중에도 그 우아 한 꽃을 피우고 있다. 이 무궁화나무를 많이 심어 더 아름다운 마을을 가꾸고자 하 던 차에 행정안전부에서 추진한 마을가꾸기 사업에 응모하여 군지원과 자부담으로 여러 사업을 하게 되었다. 마을 중앙 뒷산에는 20여년 전 산불로 잡초만 뒤덮인 넓은 산에 무궁화나무 400 그루와 자생하는 꽃무릇을 심었고, 마을 입구에서 끝으로 이어지는 뒷산에 산책길을 내었다. 아울러 그 길에 산벗꽃 나무를 150그루 심어서 마을과 호수를 바라보며 산 책하는 명소가 되도록 했다. 궁산 호수 앞에서 마을을 바라보면 활처럼 굽어진 형태에서 그 중앙에 나라꽃인 무궁화동산이 들어서, 한층 아름다운 마을이 기대되고 관광객들과 사진작가들의 관 심을 사기에 충분하리라 여겨진다. 동네 들어오는 도로에는, 꽃패랭이를 심어 마을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환한 미소 를 머금게 꽃길을 조성했다. 카네이션의 원조격인 이 꽃은 겨울에도 푸르름을 간직 하여 오월에 연분홍꽃을 수수하게 피우는 다년생의 식물이다. 궁산마을은 여느 마을과 달리 천연의 풍경 좋은 조건을 갖추어진 곳이기에, 마을 사람들이 단합하여 더 나은 환경과 살고 싶은 동네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궁산교회 가 앞장서서 실천하고 있다.

6.

민속과 마을 현황 - 107 -


1)

현황 의식개혁과 함께 주민소득도 크게 향상되었다. 마을회관과 모정,

경로당은 평소 주민들의 휴식장소와 환담을 나누는 장소로, 마을총회, 애경사가 있을 경우 공동의 협의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최근에 생긴 궁산교회는 개척교회로서 동네 사람들의 정신적 의지처가 되어가고 있다. 주변의 교육기관은 해리초등학교, 동호초등학교, 주산초등학교가 있었다. 지금 거 주하는 사람은 마을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주산초등학교(1965년 3월 2일 개교, 1994년 2월 28일 폐교)에 다닌 사람은 살고 있지 아니하고, 심원면에 속해 있으면 서도 이 마을 학구(学区)인 해리초등학교 출신이 대부분이다. 한편 주민들은 해리면에 있는 5일장을 이용하였고, 차편이 없던 옛날에는 5㎞, 십 리가 넘는 거리를 도보로 이용하였으 나 새마을사업 이후 포장된 농로와 지방 도를 이용하고 있다. 또한 전통적 마을 풍습으로 정월 대보 름 전야에 당산제(堂山祭)를 모시고 있 다. 옛날 궁산 저수지가 축조되기 전에는 내궁산・외궁산마을에서 할머니 당산, 할 아버지 당산, 마을 당산의 3대 수호신(守 護神)을 모셔왔으나, 저수지속으로 수몰 되었다. 이후 지금 마을 뒷산 중턱에 330여년 된 둘레가 5.3m, 높이 13m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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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아기 당산나무인 규목, 나무

팽나무에서 당산제를 모셨으나, 태풍에 뒤편에 쓰러진 옛 당산나무의 자취가 있음. 쓰러지게 되자 아기당산나무로 규목 나무 를 심고 제를 지내고 있으나 옛날에 비하여 마을 규모도 작아지고 거주하는 사람도 고령화되어 참여하는 주민이 갈수록 적어지는 행사가 되었다. 이외에 잘 가꾸어진 동네 샘(우물)이 있다. 산업화 사회로 발전하면서 마을 공동 - 108 -


샘이, 간이 상수도와 광역 상수도의 보급으로 인하여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 었다. 그러나 궁산마을은 지금도 샘(우물) 두 곳이 식수로 사용할 수도 있게끔 잘 보존・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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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두레박이 있는 동네 샘

우물에 빗물이나 오・물질이 들어가지 않도록 지붕을 설치하였음은 물론 지붕 중 간에 매어 놓은 두레박이 남아 있어, 보기 드물게 옛 시골마을의 정취를 느끼게 하 고 있다. 궁산 저수지를 찾는 낚시꾼들에게는 또 하나의 볼거리가 되고 있고, 이렇게 잘 보존되고 있는 샘(우물)은 뒷산 선(禅)바위산의 중턱에 산책로를 만들 때, 마을 주민이 총동원되어 공동작업으로 보수하였다 한다.

2)

발달과정

1960대와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우리 농촌의 경제상황은 보잘것없는 소득으로 궁핍(窮乏)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마을도 70년대 중반까지, 소위 통일벼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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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되기 전까지는 쌀밥이라곤 구경하기 힘들었으나, 새마을사업이 활발히 전개되고 수리시설도 개선되어 논과 밭에 재배하는 각종 농작물의 새로운 품종이 개 발됨에 따라서 초근목피(草根木皮)의 생활도 개선되었다. 따라서 수확하는 벼, 보리, 콩, 고구마 등의 농작물도 자급자족(自給自足)하게 되 었고 소, 돼지, 닭, 오리, 토끼, 염소 등의 가축도 길러 조금은 윤택해졌다. 이후 최 근에 와서는 복분자 같은 새로운 소득 작물 재배와 더불어 유실수, 오가피 등의 건 강식품 재배로 소득이 향상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때 면내에서 가장 잘사는 마을이라고 자타가 인정했지만, 지금은 산간오지 마을로 전락하여 가난을 면치 못하는 마을이 되었다는 자조 섞인 말도 오가고 있다.

3)

되는 마을조직

어느 마을이나 이장과 남・여 지도자, 청년회, 부녀회가 조직되어 마을의 구심이 되고, 동네에서 일어나는 애경사(哀慶事)나 큰 사업(事業)이 있을 때 회관에 모여 서로서로 머리를 마주하고 돕는 방법을 찾기도 하고 정담(情談)을 나누기도 한다. 이 마을도 1년 중 설날과 대보름, 칠석, 추석 등 3~4차례 전체 동네 사람들이 마 을회관에 모여 공동작업으로 마을 대청소도 하고, 칠석날에는 전 주민이 일손을 놓 고 쉬는 날로 지정하여, 관광버스를 빌려 당일 관광을 즐기거나 가까운 동호 해수욕 장, 선운사 계곡 등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주민화합과 단합을 다지고, 우의(友誼)를 돈독히 하고 있다. 이때마다 마을 공동기금으로 돼지도 잡고 술도 마시면서 한 해의 쌓인 피로(疲労)를 씻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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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궁산마을 경로당

수시로 모정이나 회관, 경로당에 모여 윷놀이나 장기, 바둑놀이 등으로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화투놀이는 금지되었다 한다. 이와 같이 주민들이 모여 단 합을 과시하는 날이면, 으레 재경(在京) 궁산마을회에서 협찬도 해 주고, 마을의 크 고 작은 일이 있을 때에도 직접 참여하여 한 마을 주민으로 뭉쳐 여흥(余興)을 즐기 기도 하면서, 서로가 한 가족처럼 사랑을 쌓는 주민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한다.

○ 도움 주신 분 • 심제 라기옥(心斉 羅基玉, 1934년생. 향토사학자, 무장향교 장의(掌議), 심원면 유도회장, 이장 역임) • 명헌 라량호(明軒 羅亮浩, 1941년생. 심원면장 역임) • 김재만(金在万, 삼양사 토지 무상양도대책위 위원장 역임) • 전종열(全鍾列, 1946년생. 고창군의회의원 초대・2대 역임, 현 고창군 산림조합 장, 고창문화원 부원장) • 김인주(金仁柱, 1946년생. 현 이장) • 박종훈(朴種焄, 1949년생. 궁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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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의 마을 제 1집


송암리 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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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義)가 살아 있는 풍요의 땅 - 흥덕면 송암리

1. 1)

유래와 역사 송암을 굽어보다 방장에서 흩뿌려진 듯한 작은 맥들이 서해로 끊기는 듯 이어오다가 곰소만

을 앞두고서 멈춰버린 곳, 성봉 배풍(培風). 배풍에서 오던 길을 따라서 굽어다보니 군데군데 나지막한 산들이 기름진 평야를 머금고서 풍성함을 자랑하고 흥성함을 예 감한다. 흥성(興城)이라는 흥덕(興徳)은 갑오・을미개혁 이후에는 흥덕군이었다. 식민지 시대인 1914년에는 무장군과 흥덕군이 고창군으로 병합되었다. 그러면서 현내면(県 内面)과 북면(北面)이 합해져 흥덕면이 되었다. 당시 흥덕면은 동사리(東沙里), 흥덕 리(興徳里), 교운리(校雲里), 오호리(五湖里), 치룡리(峙竜里), 사포리(沙浦里), 후포 리(後浦里), 신덕리(新徳里), 신송리(新松里), 석우리(石隅里), 하남리(下南里), 용반 리(龍盤里) 등 12개의 법정리였다. 그리고 면의 중심지는 동사리였다. 1935년에 사 천리(沙川里)와 석교리(石橋里)가 편입되고, 1973년에는 제하리(堤下里)가, 1986년 에는 송암리(松岩里)가 편입되면서 현재 16개 법정리로 이루어져 있다. 배풍에서 다시 방장을 바라다보니, 흩뿌려진 작은 맥들은 배풍에 와 닿기도 전에 매봉[鷹峰]에서 머무른다. 매봉은 주변의 낮은 구릉과 기름진 평야를 아우르니, 그곳 이 바로 송암(松岩)이다. 송암은 매봉과 그 아래의 빈월산에서 나는 물이 배풍을 향 해 동출서류하는 형국이다. 송암의 중심지 종송리를 향하다가 송암교 못미처 오른편으로 약 1km 지점에 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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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있다. 송암교를 건너면 곧바로 종송리 동구다. 동구에는 두 갈래 길이 있

다. 왼편은 송암의 뒷산인 송산(松山)으로 오르는 언덕길이다. 송산의 등치 왼편은 여곡, 등치를 따라 곧바로 가다보면 매봉과 아래 빈월산리가 나온다. 다시 송암의 동 구 오른편 갈래 길은 종송리와 용암리를 거쳐서 임리로 향하는 길이다. 이렇듯 현재 송암은 종송리를 중심으로 야동과 용암에서 빈월산까지, 그 획이 자못 크다. 제법 울창한 소나무숲인 송산(松山)은 종송리의 배산이다. 종송리의 좌향은 동남 향 또는 남향으로, 병풍처럼 펼쳐진 방장산을 앞에 둔다. 마을의 임수는 송암제(松岩 堤)다. 송암제를 중심으로 오른편의 안산(案山)과 둥글재(등구치), 왼편의 매봉이 마 을의 균형을 다잡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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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송암리 앞들. 멀리 매봉이 보인다.

유래와 지명

송암의 주요 자연부락은 종송리다. 원종송리라고도 하는 종송리에 사람이 살기 시 작한 것은 1400년쯤. 조선 건국 초기에 장흥고씨(長興高氏) 장령공(掌令公) 고직(高 直)이 입향해, 큰아들 철산(哲山)은 지금의 여곡에, 작은아들 철성(哲成)은 지금의 종송에 각각 들어가 살았다. 마을 앞의 큰 바위에 새겨진 ‘고려곡(高麗谷)’은 조선 건국 초기에 고려를 잊지 못 - 116 -


장흥고씨 일가가 새긴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들어와 살 당시에 지금의 종송리와 여곡 모두를 ‘고려곡’이라 하였다. 세월이 흘러 고려곡(高麗谷)이라는 글자가 마모돼, 1892년에 후손 고순진(高舜鎮)・고예진(高禮鎮) 형제가 ‘고려곡선적(高麗谷先蹟)’이 라는 글자를 다시 새겨 넣었다. 고순진・고예진 형제가 바람을 막기 위해서 마을 주변에다 소나무를 심으면서 ‘고 려곡’을 ‘종송(種松)’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언제부턴가 송암교를 건너기 전의 오른편 야동까지를 모두 일컬어 ‘종송리’라 하였다. 종송리 잿등 너머는 여곡 또는 고려실이다. 속동이라는 곳과 함께 여곡이라 하고, 행정구역상 ‘제하리’에 속한다. 참 고로, 여곡은 고려곡을 줄여서 여곡이라 했다는 설도 있고, 깊고 한적한 곳이라는 의 미인 ‘고라실’이 ‘고려실’로, 그리고 ‘려실’이 ‘려곡’으로 변칭됐다는 설도 있다. 마을의 안산과 안산과 맞닿아 있는 둥글재[또는 登亀峙]가 품은 마을이 용암(龍 岩)이다. 용암을 월암이라고도 하는데, 매봉 아래의 빈월산리(賓月山里)와 용암리가 통합돼, 월암리(月岩里)가 되었다. 따라서 월암리는 종송리와 함께 송암의 한 축을 이룬다. 현재 송암의 행정구역은 송일(松一)과 송이(松二)로 나누어진 종송리와 월 암리로 대별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송암은 흥덕현 일남면(一南面)이었고, 갑오・을미개혁 이후에도 흥덕 군 일남면이었다. 한때 일남면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종송(種松)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제내(堤内), 빈월(賓月), 칠현(七玄), 용암(龍岩), 야동(冶洞) 등의 자연촌과 병합하였다. 그때 중심 마을인 종송의 송과 용암의 암자를 취해 ‘송암’이라 하고, 신 림면에 편입되었다가 1987년에 다시 흥덕면으로 편입되었다.

2.

촌락과 자연 인문 환경

송암의 주요 촌락인 종송리(種松里)는 제내촌(堤内村)・부귀촌(富貴村)・불무골 [冶洞]・서냥당[城隍堂]등으로 구성된다. 월암리는 용암리(龍岩里)와 산직골[山直 洞], 그리고 빈월산(賓月山, 손들메 또는 손달메) 등으로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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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는 뒷산인 송산과 안산 및 둥글재가 자리한다. 인근 산 중에 가장 높다는 매봉산은 빈월산리를 품고 있다. 빈월산의 안산인 꽃봉[花峰] 바로 옆이 매 봉산이다. 매봉을 추령(鶖嶺)이라고도 한다. 송암리의 인구는 2008년 11월, 120세대 242명으로, 흥덕면 전체 인구의 약 6%를 차지한다. 한때 종송리에는 초등학교(당시 신림관립학교) 분교가 있었으나, 광복 직 후에 폐교되었다. 송암의 ‘가택신 신앙’과 ‘성주고사 제물상’은 학계에서도 관심을 갖는 중요 민속자 료다. 성주상 아래에다 지푸라기를 놓고 상 위는 쌀을 담은 밥그릇에 촛불을 밝히고, 촛불 뒤에 떡시루와 청수를 올려 놓는 제물상이다.

1)

중심지 종송

종송리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장흥고씨가 1400년대에 들어와 살았던 세거지다. 여기에 광주반씨(光州潘氏)와 함평이씨(咸平李氏), 이외에도 전주최씨(全州崔氏), 상 산김씨(商山金氏) 등이 거주하고 있다. 종송리에서 여곡으로 가는 잿등 왼편 송산의 소나무숲 언저리가 장흥고씨가 처음 살았던 곳이다. 흥덕면 소재지에서 동남쪽 약 2.5km 지점에 위치한 종송은 남서향에 동출서류 형이며, 원종송리에는 현재 약 57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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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송암마을(원종송) 모습 - 118 -


입구에는 송암 경로당이 있다. 입구에 있던 큰 규모의 미곡방앗간은 사라 지고, 고추를 빻거나 떡을 만드는 작은 방앗간만이 남아 있다. 산업화에 따른 전통적 농업이 쇠퇴한 데 따른 것이다. 송암제 둑에는 마을의 당산나무인 버드나무와 소나 무가 있다. 송암제 옆에는 1885년에 건립한 만취정(晩翠亭)이, 1946년에 관립학교 건물을 뜯 어다가 지은 모정과 나란히 서 있다. 만취정과 모정 바로 옆에는 수령이 150여 년 된 소나무 8그루가 있다. 종송리 입구에는 ‘고려곡바위’와 ‘애국지사 고순진(高舜鎮)・고예진(高禮鎮) 선생 추모비’와 관련한 현충시설이 있다. 고려곡바위에 나오는 송석정(松石亭)은 파정되었 다. 송석정 터는 원래 고려곡바위가 있던 송산 언저리로 추정된다. 송암의 들머리를 기름지게 하는 마을 앞 송암제를 장태제(蔵台堤 또는 丈太堤)라고도 한다. 이외, 지명으로는 웃골과 고르메골이 있다. 웃골은 송암제 위의 골짜기 논을 말하 며, 고르메골은 종송리 앞들 너머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쪽조골은 매봉 가는 쪽의 공동묘지 골짜기를 말하며, 부귀촌골 역시 송암 동구에서 송산으로 오르는 뒷골을 말한다. 벌이들은 안산 너머의 들이고, 마다리들은 송암교(마박교)에서 종송리 앞들 사이의 들이다. 만취 고순진과 송천 고예진이 태어났던 곳은 송암리 379번지다. 남도식 일(一)자 형 목조의 정면 7칸 모퇴인 고시청(高時清)의 집은 증손 고석상(高錫相)이 현재 거 주하고 있다. 고시청의 가옥에는 면암 최익현의 문집 면암선생문집(勉菴先生文集) 수십 권과 면암연보(勉菴年譜), 그리고 송천 고예진의 문집 송천집(松川集)등이 소장돼 있다. 종송리 한 중심부에는 1947년에 세워진「문절공해여재반선생 문장공석암반선생 추모비(文節公海旅斎潘先生 文壮公石菴潘先生 追慕碑)」가 있다. 광주반씨(光州潘 氏) 입향조와 관련된 비로 보인다. 앞의 비문은 송천 고예진이 지었다. 광주반씨 입향조 관련 비 바로 아래에는 최근에 건립한 모정과 그 옆의 돌로 된 정자(井字) 우물이 있다. 우물의 정자석에「유사 고언국 임술 오월 일(有司 高彦国 壬戌 五月 日)」이라 새겨져 있다. 고언국이라는 사람이 유사(有司)가 되어 임술년 - 119 -


(1862) 5

이 우물을 만들었거나, 또는 정비했다는 표식으로 보인다. 마을 뒤의 부

귀촌은 옛날 부자가 살았던 터로 알려져 있다. 터에는 기왓장과 주춧돌 등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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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 마을 중심의 정자(井字)우물

서냥당의 야동

마을 뒷산이 불무(풀무의 방언으로, 쇠를 달구거나 쇳물을 녹여 땜질할 때 사용하 는 도구)와 같다 하여 ‘불무골’인 원래 야동(冶洞)은 1790년대에 여양진씨(驪陽陳 氏)가 들어와 살았다. 흥덕면 소재지로부터 동남쪽 2km 지점인 야동은 남향에 서출 동류 형이다. 야동 마을회관이 있는 곳을 서냥당[성황당]이라 불렀다. 서냥당에 1910년경 전주 이씨가 처음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원야동과 서냥당을 ‘야동’이라고 불렀 다. 서냥당은 한때 개화지[開花地, 또는 개지터]라고도 불렀다. 주변에 항상 꽃이 피 어 있다고 하여, 개화지라 했다고 한다. 고창에서 흥덕면 소재지에 이르기 직전에 오 른편 도로가의 마을이 서냥당이자 개화지다. 전주이씨 외 상산김씨(商山金氏)가 살 고 있다. 마을 노인들은 전주이씨가 들어오기 전부터 서냥당에는 솥쟁이(冶匠. 솥을 때우 - 120 -


야장쟁이를 말함)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노인들의 유년기에 많이 나왔다 는 솥 조각들을 가지고서 추정한 것이다. 마을회관에서 남서쪽 약 150m 떨어진 도 로가가 옛날 성황당 자리였다고 한다면, 마을회관이 있는 곳이야말로 솥쟁이들이 살았던 ‘야동(冶洞)’이 아니었을까. 다른 고장의 지명 야동(冶洞) 역시 솥쟁이들의 거주지였다. 서냥당 앞은 망골이다. 망골 남쪽 등치를 방구등(소고와 비슷하게 생긴 북을 말 함)이라 한다. 방구등 서쪽 끄트머리 도로가에 성황당의 흔적인 돌무더기가 있었 다. 서냥당 북쪽 골은 텃골이다. 텃골에서 기왓장이 나왔다는 전언으로 보아, 사람 이 살던 곳으로 추정된다. 텃골 북쪽 등치는 불무산이다. 불무산 언저리가 바로 원 야동이다. 야동에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고총지(古塚址)와 고대 유물의 산포지가 있다. 옛 이름이 서냥당인 야동에는 현재 약 14가구가, 원야동에는 1가구가 거주한다. 주변에 는 소와 돼지를 키우는 축사가 늘고 있고, 소규모 공장도 들어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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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야동마을 전경. 원래 마을이름은 ‘서냥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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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914

빈월산의 월암 행정구역개편 당시에 용암리의 암자와 빈월산리의 월자를 따서 ‘월암리’라

하였다. 용암리는 흥덕면 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2.5km, 빈월산리는 약 3.5km 지점 에 위치해 있다. 남북향에 남출북류 형인 용암리는 1730년대에 전주이씨 완풍대군(完豊大君) 후손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낸 원방(元芳)이 말년에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앞은 용처럼 생긴 바위 2개가 있었는데, 이를 ‘용바우등’이라 했다. 용바우등 과 관련한 전설이 있다. 1998년 군도 확・포장 공사 때 용바우등은 땅에 묻혀져 버 렸다. 용암마을을 에워싼 둥글재 등치에는 9개의 바위가 나란히 박혀 있다. 이를 구 암(亀岩 또는 九岩)이라 부르는데, 구암은 구룡(九竜)을 의미한다. 용암은 용과 관련 이 깊은 마을임이 분명하다. 용암 뒷등인 둥글재의 원래 이름은 등구치(登亀峙)였다는 설이 있다. 거북이가 오 르는 형국이라 해서 등구치라 했다는 곳은 장흥고씨의 문묘 자리. 그러나 둥글재의 뒷등이 둥글다 하여 둥글재 또는 둥글치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산직동은 장흥고씨 문묘의 ‘산직’이가 살던 곳이라 해서 그렇게 불렀다. 용암의 서쪽에는 벌이등[蜂嶝] 과 똥뫼(또는 뚝뫼)가 있다. 현재 용암리에는 20가구 정도가 거주하는데, 주로 전주이씨와 행주기씨(幸州奇氏) 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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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용암마을 뒤 둥글재의 ‘구암’. 너머에는 귀암리가 있다. - 122 -


[鷹峰山]을 추령산(鶖嶺山)이라고도 한다. 매봉산 옆은 빈월산리의 안산인 꽃봉[花峰]이다. 매봉산에는 절터골이 있고, 절터골 바로 아래에 장흥고씨 제실이 있 다. 매봉산이 굽어보는 마을이 바로 빈월산리다. 빈월산리는 1689년에 형성된 마을이다. 남향에 동출서류 형이다. 동복오씨(同福呉 氏)와 경주이씨, 창녕조씨 등 10여 가구가 현재 살고 있다. 주변은 인삼밭과 고들빼 기 농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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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6> 빈월산리 마을회관

전설과 역사 용바우등 전설

용암마을에서 전해지는 용바우등에 관한 전설이다. 마을 장골에 병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나무꾼이 있었다. 어느 날, 젊고 아름다 운 여자가 나타나 나무꾼에게 대뜸 아내로 받아달라는 간청을 하는 게 아닌가. 당황 해 하던 나무꾼은 여자의 간청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여자의 청은 너무도 간곡하였 다. 나무꾼은 마지못해 여자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날로 여자는 병든 시어머니를 지 극정성으로 보살폈다. 그 때문인지, 나무꾼 어머니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 123 -


날 밤에 나무꾼의 어머니가 변소를 갔다 오던 길에 방문에 비친 아들과 도란 도란 얘기하는 며느리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해괴한 일인가. 며느리 는 사람이 아니라 한 마리의 작은 용(龍)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정신을 바짝 차렸 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왔다. 며느리의 마음씨가 너무도 착하고, 며 느리의 정성으로 병도 나았기에, 며느리가 용이라는 사실을 아들에게 얘기하지 않았 던 것이다. 시어머니의 속 깊은 마음을 안 며느리는 감동하였다. 나무꾼과 사람이 된 용과 시어머니는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 다. 하늘에서 올라오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며느리인 용을 향해 하늘이 명한 것이다. 며느리는 남편과 속 깊은 시어머니를 두고서 하늘로 올라가기가 싫었다. 며느리가 하늘의 명을 계속해서 거역하자, 하늘은 나무꾼과 시어머니를 바위로 만들어 버리기 로 하였다. 결국은 나무꾼과 시어머니는 마을을 지키는 바위가 되었고, 며느리는 하 늘로 올라가게 되었다. 나무꾼과 시어머니가 바위로 변하면서부터 마을의 이름은 ‘용 암(龍岩)’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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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용바우등’이 묻힌 곳은 조립식 건물 측면 도로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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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징, 고려곡바위 395번지에 고려곡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원래 마을 뒷산인 송산 자락에

있던 것인데, 근래에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장흥고씨 고직(高直)이 1365년에 조선 태종의 부름을 피하여 영광에서 이곳 송산으로 은거하였다. 그리고 고려를 잊 지 말자는 뜻에서 이곳을 고려곡(高麗谷)이라 하였다. 현 송암리와 제하리의 여곡이 모두 고려곡(또는 고려실)으로 불렸다. 더불어, 송산 등치의 큰 바위에다가 ‘고려곡 (高麗谷)’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다. 500여 년의 세월이 지남에 자획이 희미한 것을 15세 손 고순진・고예진 형제가 이 바위에다「고려곡선적 만취정 고순진 송석정 고예진(高麗谷先蹟 晩翠亭 高舜鎮 松石亭 高禮鎮)」이라고 다시 새겨 넣었다. 고려곡바위에 나오는 송석정(松石亭)은 바위 바로 옆에 건립되었으나 파정되었고, 만취정(晩翠亭)은 송암제 옆에 마을 모정 과 나란히 서 있다. 전에는 만취정의 현판과 시판에 제영(題詠)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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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고려곡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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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당산제 309번지의 송암제 제방의 버드나무에는 현재도 짚으로 꼰 줄이 감겨져

있다. 제방 위의 나무는 두 종류로, 버드나무와 소나무다. 1982년에 보호수로 지정 된 버드나무의 수령은 217년(2009년 현재), 높이 16m, 둘레 6.5m다. 전해오는 얘 기로는 버드나무(할머니) 당산은 임진왜란 직후인 1600년대에 마을 주민들이 심었 다고 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버드나무 수령은 약 400년은 되어야 한다. 송암제를 축조하면서 당산나무를 보존하기 위해 당산나무가 있는 곳에 일부러 둑을 쌓았다고 도 한다. 당산제(堂山祭)를 동제(洞祭)라고도 한다. 일종의 마을 공동체 행사다. 제를 지내 는 장소는 대개 마을 입구에 있는 제단이나 별도로 마련된 사당, 또는 입석이나 당 산나무다. 제사 중에는 일종의 오락행사인 굿을 하며, 제사 음식과 술을 마을 구성원 들이 함께 나눠 먹는다. 송암리의 당산제도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마을 공동체 행사였다. 20년 전만 하여도 마을 주민들은 풍물을 하면서 집집으로 다니며 마당굿・정지(부 엌)굿・장광(장독대)굿 등을 했다. 이때 집주인은 나락이나 쌀, 돈 등을 내놓았고, 이렇게 걸립(乞粒)한 재물로 정월 대보름 행사를 준비하였다. 정월 대보름이 되면 집집의 남자들은 볏짚 한 다발씩을 마을 앞 광장으로 가지고 나와 줄을 꼬았다. 이 때 여자들이 준비해온 음식으로 마을 주민 모두는 잔치를 벌였다. 신이 난 남녀노소 모두는 농악을 치며 줄을 메고 마을을 한 바퀴씩을 돌았다. 줄을 메고 마을을 도는 행사는 8년 전부터 중단되었다. 마을에 사람이 없기 때문 이다. 단지 남녀가 줄다리기 삼세판을 하였다. 여자가 이겨야 마을이 태평하고 우순 풍조(雨順風調)하다 하여, 줄다리기는 남자가 한 번 이기고, 두 번은 여자가 이긴다. 할아버지 당산나무(소나무)에 감을 줄은 멘 남자들과 할머니 당산나무(버드나무) 에 감을 줄은 멘 여자들이 당산나무 앞에서 술상을 차려놓고 굿을 친다. 굿을 치면 서 마을 사람들은 재난을 물리치고, 마을의 안녕과 무사태평과 풍년을 기원한다. 이 어, 줄을 당산나무에 감는다. 이러한 당산제는 마을 축제로 승화되어 매년 성대히 치 러지고 있다. - 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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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9> 송암의 당산나무. 버드나무로 할머니를 상징한다.

유물의 산포지 야동 구릉지는 고대 유물이 산포돼 있는 곳이다. 학계의 조사 결과, 고대 유물이

산포된 지역은 세 군데. 그 첫 번째는 야동 마을(서냥당) 남측에 위치한 구릉(방구 등)이다. 마을 진입로 하단부와 방구등은 ‘경질타날문토기편(硬質打捺文土器片)’과 ‘경질토기편(硬質土器片)’ 등의 유물이 나온 곳이다. 두 번째 지역은 야동 마을(서냥당) 북측, 즉 동서로 뻗은 나지막한 능선이다. 현재 구릉 정상부는 송림이 조성되어 있고 하단부(텃골)는 개간되어 밭과 축사로 이용되 고 있다. 이곳에서는 ‘옹관편’과 ‘연질토기편’, 그리고 ‘경질타날문토기편’ 등이 수습 되었다. 이외,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고총지(古塚址)가 있다. 세 번째는 용암리 서측 구릉 해발 31m의 동서로 뻗은 저평한 능선이다. 구릉 정 상부의 남사면과 북사면에서 수습된 유물로는 ‘경질타날문토기편’과 ‘경질토기편’, ‘연 질토기편’ 등이 있다.

4.

시대정신과 위인들 - 127 -


1)

고덕붕의 충절과 고여흥의 학문 (高徳鵬, 1552~1626년)의 자는 남익(南翊), 호가 여곡(麗谷)이다. 장흥고

씨로, 고려곡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 창의격문을 작성하고 동지를 규합하였다.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진영에 합류해 왜군과 맞섰다. 고경명이 순국하자 채홍국 (蔡弘国) 등 92명의 동지와 삽혈동맹(歃血同盟)을 맺고 그 맹주가 되어 왜군과 싸웠 다. 부안의 호벌치(胡伐峙)에서 순절하였다. 1893년에 조정은 여곡을 승정원좌승지 (承政院左承旨)로 증직하였다. 1988년에는 혈맹단 옆에 모충사(慕忠祠)를 건립하고, 여곡을 배향하였다. 여곡 고덕붕의 손자 고여흥(高汝興, 1617~1678년)의 자는 빈거(賓挙), 호가 요은 (閙隠)이다. 요은은 어려서부터 비범해 내장사의 승려 계묵(戒黙)을 찾아가 글을 익 혔다. 어려서 모친을 여읜 요은은 계모에게도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논산의 미 촌(美村) 윤선거(尹宣挙)를 찾아가 공부했고, 명재(明斎) 윤증(尹拯)과도 교우하였 다. 저서로는 요은집(閙隠集)4권이 있다. 처음에는 창효사(彰孝祠)에 배향되었다 가 지금은 옥제사(玉堤祠)에 배향돼 있다.

2) 고순진의 위국 충정 고순진(高舜鎮, 1863~1938년)의 자는 의경(義卿)이요, 호가 만취(晩翠)다. 송암 리 379번지에서 가선대부 고시청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면암 최익현의 문인(門人)으 로, 1906년 면암 의거 당시에 항일 투쟁을 호소하는 격문을 인쇄하여 팔도에 포고하 기도 하였다. 1914년에는 논 80두락 값을 내어 무기와 군량미 및 거액의 군자금을 대한독립의군부에 헌납하기도 하였다. 1919년에는 일명 ‘파리장서’에 서명하였으며, 이로 인해 경찰로부터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1973년에는 전국의 유림들이 국가 및 각계의 지원을 받아서 서울 장충단 공 원에 ‘한국 유림의 독립운동 파리장서비’를 건립하였다. 이 비에는 만취를 비롯한 137인의 위국 지사 이름이 새겨져 있다.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제567호)이 추서 되었다. 송천은 만취의 아우이자, 나라가 위태하자 위국 충절을 행동으로 옮긴 동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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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10> 현충시설인 ‘만취’와 ‘송천’의 추모비

실천과 후학 양성에 진력한 고예진

(1) 면암 최익현의 문하에 들다 고예진(高禮鎮, 1875~1952년) 역시 송암리 379번지에서 고시청(高時清)의 4남으로 태어났다. 족형 수남(秀南) 고석진(高石鎮)의 문하에서 경서와 주역을 독파 하였고, 수남의 인도로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문하에서 학문의 깊이를 더하 였다. 송천과 수남, 그리고 고제만 등은 1905년 을사늑약 당시에 죽기로 결심하고 단식하던 충청도 청양의 면암을 찾았다. 여기서 송천은 호남에서 거의할 것을 말하 니 면암이 이에 동의하였다. 곧바로 호남의 돈헌(遯軒) 임병찬(林炳瓚)을 찾아가 거 의에 동참할 것을 권하니, 돈헌도 쾌히 찬동하였다. 1906년 2월에는 임병찬, 고석진 등과 함께 태인 무성서원에서 면암을 옹립, 호남의병 창의소를 설치했다. 송천은 거의(挙義) 연락 동원책으로 활동했는가 하면, 거의를 위해 장형인 만취 고순진에게 부탁해 조총 10여 정을 구입하여 면암에게 전달하기도 하였다. 1906년 윤 4월 18일 면암이 이끈 의병 부대가 순창으로 진격할 때 진위대(鎮衛 隊)에 막혀, 면암 이하 12명의 간부들이 서울로 압송되었다. 송천도 전주 감옥에 투 옥되었다가, 그 해 12월에 방면되었다. (2) 대한독립의군부의 실무를 맡다 1914년 임병찬(林炳瓚)과 고석진 등이 고종의 밀명을 받고서 대한독립의군부(大 - 129 -


)를 결성하였다. 대한독립의군부에 가담한 송천은 ‘종3품 통훈대부 독립 의군부 총무국 서기관’이라는 칙명을 받았다. 송천은 김제구, 김진기, 김건, 강종호 등과 함께 흥덕군 대표로, 그리고 총무국 실무진으로서 독립의군부 조직을 확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대한독립의군부란, 1914년 고종의 밀명을 받은 임병찬이 비밀리에 조직한 독립운 동 단체다. 1914년 5월에 전국 조직이 일본 경찰에 발각돼, 대한독립의군부는 해체 되고야 말았다. 이때 송천은 독립의군부 참모관으로 맹활약을 하다 붙잡혀 심한 고 초를 겪었다.

(3) ‘

’에 서명하다

1919년 3월 만세 시위가 일어나자 송천은 대한 독립 운동의 취지를 담은 독립 청 원서를 지어, 전국의 유림 동지들에게 배포하였다. 같은 해 3월 23일에 한국 유림 대표 137인이 서명한 일명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에 족형 고석진, 장형 고순 진 및 족질(族姪) 고제만과 함께 연루돼, 혹독한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파리장서사건이란, 1919년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등이 주동이 되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 평화 회의에 한국의 독립탄원서를 보냈다가 발각된 사건이다. 관련자들은 국외로 망명하거나 감옥에서 순사한 자가 많았다. 그 137명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송천이다.

(4) 도동사 건립과 후진 양성에 진력하다 1928년 8월에는 만취 고순진의 도움과 고창 유림들의 협찬을 얻어서 신림면 가평 리에 도동사(道東祠)를 건립하고, 면암과 수남을 배향하였다. 송천은 도동사에서 독 서와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1952년 음력 10월 12일 향년 77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1962년에는 송천의 학풍과 위국 충절을 기리기 위해 도동사에 면암, 수남과 함께 배향하였다. 1963년에는 제자들과 지방 유림들이 송천의 유고를 정리해 송천집 (松川集)4권을 발간하였다. 1973년에는 전국의 유림들이 국가 및 각계의 지원을 받아서 서울 장충단 공원에 - 130 -


유림의 독립운동 파리장서비’를 건립하였다. 이 비에는 송천을 비롯한 137인의

위국 지사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정부는 송천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제123 호)을 추서했다. 1986년 5월 5일에는 송암의 두 선생(만취와 송천)의 숭고한 도학 과 위국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도내의 기관 및 전국의 유지들이 송암의 동구에다 7척 의 두 비를 세웠다. 1987년 8월 15일에는 독립기념관 개관식에 송천에게 내린 고종 황제의 칙명장이 전시되었다. 송천의 문하에는 고제언(高済彦), 신의성(慎義晟), 유종성(柳鍾声), 원용하(元容夏), 반동식(潘東植), 김기택(金基沢), 유종태(柳鍾泰), 신사범(慎思範), 남대희(南大煕), 고광철(高光哲) 등 수백 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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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오늘

1)

조직

11> 고석상이 소장하고 있는 면암선생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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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을 보조하는 이장(송일의 반인곤, 송이의 박명자, 월암의 기준서 등) 과 새마을 지도자(송일의 정병종, 송이의 이종은, 월암의 이성섭 등), 부녀회장(송일 의 최선임, 송이의 이동순, 월암의 유금자 등) 외 개발위원장이 있다. 이처럼 공적인 조직은 행정과 마을 공동체 간의 가교 역할을 한다. 이외 노인회는 행정의 간접 지 원을 받아서 마을 공동체를 활성화시킨다. 노인회와 함께 경로당으로는 송일경로당 (최규형), 송이경로당(이종은), 월암경로당(이광섭), 빈월산경로당(오달상) 등이 있 다.

2)

성균관 부관장의 도덕성 회복 운동

송천 고예진의 손 고석상(高錫相)은 최근 성균관(成均館) 부관장에 선임되었다. 2009년 4월 7일, 서울 명륜동 성균관의 대성전에서 열린 신임 부관장 선임 고유례 (告由礼)에서 도내에서는 유일하게 송암의 고석상이 선정, 선임패를 전달받았다. 고 유례는 성균관이 임원을 임명하거나 중요한 일을 시작할 때 대성전에서 거행하는 유 교의 중요 의식이다. 고석상은 흥덕향교 전교를 역임하는 등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国)으로서의 자부 심 회복과 현대 사회 및 미래 사회에 적용 가능한 윤리 도덕의 확립을 위해 노력해 왔다. 인륜오상(人倫五常)이 위태한 오늘날에 군자의 도리를 다할 수 있는 질서를 바로잡는 게 최우선 과제라는 고석상은, 선대의 충의 정신을 본받는 일과 이를 확산 시키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고석상은 25년 간 공직에 있으면서 끊임없이 불우이웃을 돕거나 노인들을 위로하 였다. 더불어, 청소년들의 학업을 돕는가 하면 이들의 선・효행 및 생활 예절을 장려 하였다. 한때 ‘경로애향화합축제’를 열어서 송암의 출향인들과 함께 노인 위안 잔치 및 장수 노인과 효부, 선행자 등을 발굴하여 기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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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고석상 성균관 부관장.

면암집과 면암연보, 송천집 등을 들어 보이고 있다.

3)

안식처, 낮은울타리의 집 동구에서 여곡과 빈월산으로 가는 송산 등치에 1986년에 세워진 대한예수

교 장로회 송암교회(목사 임철재)가 있다. 바로 옆은 ‘낮은울타리의 집’이다. 장애우 의 안식처라는 푯말이 보인다. 뜻하지 않은 질병으로 장애우가 된 성직자 임준택, 박 재생 부부가 설립한 교회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오히려 소외된 장애우들 을 ‘작은 예수’로 섬기겠다는 임준택, 박재생. 장애우들의 공동체 ‘낮은울타리의 집’은 45평의 아담한 벽돌집이다.

4) 친환경 농법과 고들빼기, 그리고 축산 송암에는 벼농사 외 복분자와 고들빼기, 인삼 등이 재배되고 있다. 최근에는 재배 작 물 품목별 모임인 ‘작목반’이나 ‘연구회’, 그리고 ‘영농법인’ 등이 속속 만들어지고 있다. 고들빼기 연구회와 고들빼기 작목반은 이 지역 특산인 양질의 고들빼기를 생산한 다. 송암의 고들빼기는 잎이 짧은 반면 뿌리가 길고 곧을 뿐 아니라 향이 진한 게 특징이다. 비옥한 황토에서 생장하며, 아울러 농약이나 화학 비료를 전혀 사용하지 - 133 -


송암 고들빼기는 전국 최고의 가격을 받기도 한다. 고들빼기 연구회는 고들빼기를 한 철 일시적 공급을 지양하고, 소비자가 원하는 시기에 출하를 맞추는 재배 방식을 궁구한다. 더불어 가공과 포장을 해, 소비자가 찾 을 때마다 신선한 상태로 공급할 수 있는 시스템 개발도 강구 중이다. 이외, 오디 연 구회는 무공해 친환경 농법을 이용해 고품질의 오디를 생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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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송암의 고들빼기

(사진은 ‘농민신문’에서 빌려옴)

선진수도 연구회를 중심으로 친환경 고품질 쌀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다. 제하리 여곡에는 친환경 유기농 단지가 있는데, 송암의 37호(38ha) 농가가 여기에 참여하고 있다. 벼베기 전에 자운영을 갈아 지력을 높이고 벼가 성장할 즈음에는 우렁이를 방 사한다. 이른바 우렁이농법이다. 이외, 오리농법, 쌀겨농법 등 친환경 재배 기법을 채 택한 농가가 점점 늘고 있다. 이들 농가를 중심으로 무농약・무비료 농업, 라이젠농 법, 스테비아농법 등 다양한 농법으로 생산한 쌀을 소포장 단위로 시판도 하고, 학교 급식으로도 납품한다. 원종송과 야동에 축산업 하는 농가가 늘고 있다. 송암의 한우 농가는 모두 7호 정 도, 약 150두를 사육한다. 이들 축사에서는 양질의 육우를 생산하고 있다. 최근에 야 동에 대규모 축사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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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 주신 분 •

(高錫相, 72세, 성균관 부관장)

• 이재남(李在南, 70세) • 이문영(李文英, 86세) • 이성섭(李成燮, 72세) • 이영선(李永先, 76세) • 김기주(金基柱, 75세)

○ 참고문헌 • 戸口総数 高敞郡古邑誌影印本 興城誌 興城文献録 松川集 湖南誌 全国邑誌 越智唯七 編, 新旧対照 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称一覧(上) 越智唯七 編, 新旧対照 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称一覧(下) 朝鮮総督府 編, 地方行政区域名称一覧

• 저서 전북전래지명총람 유재영, 민음사, 1993. 바르게살기운동 고석상, 바르게살기운동 흥덕면위원회, 2008. 牟陽城의 얼 고창학술문화연구회 편, 고창군, 2009(고창군이 1982년 발행한 것 을 재발행). 高敞文化 21집 고창문화원 편, 고창문화원, 2008. 2001 가을착수 경지정리사업예정지구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서 원광대학교 마한 · 백제문화연구소 편, 2001. 高敞의 얼 고창교육청 편, 고창교육청, 1983. 고창의 숨결 이기화 편저, 고창문화원, 1998. 高敞의 脉 이기화 편저, 고창문화원, 1991. - 135 -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편, 고창문화원, 2003.

高敞郡誌 고창군지 편찬위원회, 1992, 2009.

• 고창군청(www.gochang.go.kr/) 고창관광(www.gochang-tour.com)

• 신문 농민신문(2009.11.18), 국민일보(2006. 3. 6) 고창신문(2009. 4.14), 고창코리아(2009.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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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리 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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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러낸 마을 -

덕산리

1. 덕산리 백련마을 1) 북쪽으로 국도 23호선을 따라 가다가 흥덕에서 동북방향으로 국도 22 호선으로 바꾸어 타고 약 4.5㎞쯤 가다보면 성내면 소재지에 당도한다. 성내면 소재 지에서 서북방향으로 지방도 747호선을 따라 3.5㎞쯤 올라가면 덕산리(徳山里) 백 련(白蓮)마을에 당도하게 된다. 이 마을은 성내면 16개소의 법정리 중 하나인 덕산리에 속하는 행정분리로, 자연 부락으로 감동(甘洞)마을과 도덕(道徳)마을이 있다. 1970년대만 하여도 35가구에 110여 명(남48/여62)이 살았는데, 지금은 젊은이들이 다들 도시로 떠나고 노인들만 남아 13가구에 25명(남12/여13)만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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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꽃이 새하얗게 피어나던 백련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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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앞 연못에 흰연꽃(白蓮)이 많이 피어 있어서 백련마을이라고 불렸 다고 하는데, 지금은 연못이 있었던 자리는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고 백련 또한 구경할 길이 없다. 그뿐만이 아니라 옛날에 있었다던 마을 공동우물터와 당산나무가 서있던 자리도 사라져 버려,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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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 백련마을 마을 전경

자연환경

성내면 서북방향 떵미등이라 부르는 언덕 아래에 위치한 덕산리 백련마을은, 도덕 리 뒷산에 있는 백암산 자락이 감동마을을 거쳐 내려와 마을 주위를 감싸고 있는데, 이 산을 마을 뒷산 혹은 고암산이라고 부른다. 이 마을은 비산비야지대로 1970년대에 야산을 개발하여 지금은 조경수를 재배하 고 밭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높은 산, 계곡, 시내도 없다. 농사와 축산이 주업인 이 마을에는 논농사를 위하여 위동제라는 작은 저수지가 있고, 그리 넓지 않은 들판이 지만 이 들판을 백련들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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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문환경 마을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이곳에서 살고 있다는 이오열(81세) 옹의 증언에 의

하면, 옛날 할아버지들께서 들려주시던 이야기로 백련마을에는 문경송씨(聞慶宋氏), 광산김씨(光山金氏), 전주이씨(全州李氏), 문화유씨(文化柳氏)가 터를 이루어 거주해 왔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문경 송경률(宋京律) 선생과 광산 김 선생(성명미상)은 전라도, 경상도는 물론 한양에까지 알려진 유명하신 학자로 이름이 나 있었으며, 그 분들이 운영하던 서당은 각지에서 글을 배우기 위해 찾아드는 서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서당마저도 없어지고 송 선생이 운영하였다는 서당자리는 그의 손자가 살고 있는데, 초가지붕을 벗기고 기와와 슬레이트로 지붕을 개량하여 살고 있어 옛날 서당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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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송경률 선생의 옛날 서당

<사진 4> 증언하는 이오열 님 모습

이 마을의 중간 지점에 자리하고 있는 모정은, 1900년경에 지어져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여름 한철에는 마을 사람들의 쉼터로, 봄가을에는 산나물과 고 추를 말리는 건조장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으며, 모정 인근에는 듸엄나무라고 부르 는 고목이 있어, 여름 한철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 준다. 그 옆에 20여 평 되는 마을 회관은 1996년 3월에 정부의 지원을 받아 지었는데, 2005년 1월 마을총회에서 경로 당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하여 지금은 백련마을 경로당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 141 -


4)

전통과 생활환경 이 마을은 논 800여 두락(마지기)과 밭 300여 두락으로, 농사를 생업으로

살아왔는데, 지금은 농사는 부업이 되고 13가구 중에 4집은 한우를 110여 두나 기 르고 있으며 또 한 집은 관상수 재배로 농사보다 몇 배나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 고 이재우 백련마을 이장님이 귀띔해 준다. 옛날에는 칠월 칠석날이 되면,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농 악을 치고 춤과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하루를 보내곤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농악을 하시든 분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없어서, 칠석날 음식을 준비하여 경로당에 모여 앉 아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하루를 보내고 있으며, 농사가 끝난 겨울철 농한기에는 음 식을 준비하여 단체관광을 하는 것이 연중행사가 되어버렸다. 마을총회는 1년에 1번, 12월말이나 1월초에 진행하고, 2개월에 한 번씩 마을회의 를 개최하고 있다. 마을조직으로는 노인회(회장 이오열), 부녀회(회장 한경민), 청년 회(회장 이충종) 등이 있고, 회원은 대략 20명 정도이다.

2.

감동마을

1) 개관 백련마을에서 동쪽으로 약 200여m쯤 거리에 있는 이 마을은, 백련마을에 속하는 자 연부락으로 옛날에는 이 마을의 샘물이 달다고 하여 단 샘물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감 동(甘洞)골이라고 불러오다가, 강동으로도 불리웠으며 지금은 감동마을이라고 불린다.

- 142 -


<

2)

5> 감동마을 전경

자연환경 서북쪽 백련마을 뒤쪽 고암산 아래에 위치한 감동마을은, 도덕리 뒷산에

있는 백암산 자락이 도덕마을을 지나 마을 뒤에 떵미등 언덕을 이루고, 떵미등 맨 위쪽에 성내면 보건진료소가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은 비산비야지대로 높은 산, 계곡, 시내도 없다. 농사가 주업인 이 마을에 는 논농사를 위하여 마을 앞에 생근제라는 작은 저수지가 있고, 그리 넓지 않은 들 판이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 들판을 생근제 밑들이라고 부른다.

3) 마을의 인문환경 이 마을은 백련마을에 속하는 자연부락으로 마을회관이나 경로당은 백련마을 시설 을 사용하고, 마을행사나 단체관광 등 모든 단체행사를 백련마을과 함께하고 있다.

4) 마을 전통과 생활환경 전주이씨가 거주하고 있는 이 마을 역시, 새마을사업 때 지붕개량을 해 옛날 모습 은 온데간데 없고,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 8가구에 주민 18명(남자 8명, 여자10명)

- 143 -


농사를 생업으로 살고 있다. 지금은 마을 앞 논밭에 비닐하우스를 설치하고 수박 농사로 톡톡한 재미를 보고 있다고 한다. 이 마을은 백련마을에 속하는 자연부락이라, 마을행사 중 칠석날은 마을 전체가 백련마을에 가서 잔치를 같이하며, 농한기의 관광, 마을총회, 다른 행사 등도 백련마 을과 함께하고 있다.

<

3.

6> 감로수가 철철 넘치던 감동마을

도덕마을

1) 백련마을에서 동북쪽으로 1㎞쯤 떨어져 있는 이 마을은, 수원백씨(水原白氏)가 설 기하고 입주하면서 마을 이름을 도덕(道徳)마을이라고 칭(称)하였다고 한다.

- 144 -


<

2)

7> 항일독립투사를 길러낸 도덕마을 전경

자연환경 서북쪽 감동마을 맞은편에 위치한 이 마을은, 마을 뒤쪽에 백갑산이라는

낮은 산이 있고, 마을 앞에는 생근제라는 저수지가 있으며, 마을에서 서쪽으로 100m 쯤 떨어진 곳에 흥덕면 하남리에서 부안군 줄포만으로 흐르는 동림천이 흐른다. 농 사가 주업인 이 마을 앞에는 작은 들판인 생근들이 있고, 이 들판에서 7가구 11명이 먹을거리 농사를 짓고 있다.

3) 마을의 인문환경 근촌 백관수(芹村 白寛洙)가 5살 때에 이 마을로 이주하여 성장했다는 이 마을도, 젊은 사람들은 도시로 떠나고 현재는 7가구에 11명(남자 4명, 여자 7명)만이 남아 서 농사를 생업으로 살아가고 있다. 또한 이 마을 한가운데에는 근촌 백관수 고택이 전라북도 기념물 제90호(97년 7 월 18일)로 지정되어 보존・관리되고 있다. 이 건물은 안채와 문간채, 곳간채 등으 로 구성되어 있으며 새마을사업 때 시멘트 기와로 지붕이 개량된 것을 문화재 지정 이후인 2002년도에 고증을 거쳐 다시 초가지붕으로 개량하였다.

- 145 -


<

8> 백관수 고택 전경

<사진 9> 백관수 고택 안채

입구에는 백관수 선생 고택임을 알리는 문화재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집은 항일 운동의 선구자인 백관수가 태어난 곳이다. 백관 수는 조선말의 유학자 전우(田愚, 1841~1922)에게 한학을 배운 뒤, 일본에 건너가 공부하던 중 조선청년독립단을 구성하고 2・8독립선언문을 발표하다가 일본 경찰에 채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 뒤 동아일보 사장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한국민 주당을 창당하고 제헌국회 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우리나라 헌법을 제정하는데 공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호는 근촌(芹村)이다.”

<사진 10> 백관수 고택 안내판

- 146 -


<

11> 구 덕산사 사진

이 마을 동북쪽에는 독립투사인 갑운 백인수(甲雲 白麟洙)선생의 위패를 모 시던 사우(祠宇)가 있는데, 6・25전쟁으로 설향(設享)을 못하다가 1995년에 흥덕면 유림들이 뜻을 모아 국가보조금과 자비 등을 마련하여 마을 입구 쪽에 사당을 다시 건립하였다. 이곳에 갑운 선생과 구파 백정기 선생, 근촌 백관수 선생 등 세 분 항일 독립투사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9월 15일에 향사(亨祀)를 하여 오던 중, 2003 년 5월 30일에 덕산사로 가고 국가보훈처에서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사진 12> 백관수 사당 덕산사 사우 - 1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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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근촌 백관수 사당인 덕산사

<사진 14> 덕산사 안내판

선생의 자(字)는 사순(泗淳), 호(号)는 갑운(甲雲)이며 철종7년(1856년)에 이 마을에서 출생하여 벼슬은 중추원의관(中枢院議官)에 이르렀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철회(撤回)의 소(疏)를 올렸으나 받아들 여지지 않자, 자결하려 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경술국치(庚戌国恥)의 소식을 듣고

- 148 -


끝에 순절하였다. 운명할 당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고 무지개가 3일간이나 옥상을 덮었다고 한다. 광복 후 건국훈장 애족장(建国勳章 愛族章)이 추서되었다. 백관수 선생의 호(号)는 근촌(芹村)이며 고종 26년(1889년)에 고창군 성내면 덕 산리 생근마을에서 출생하였다.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김성수, 송진우와 더불 어 일본에 건너가 명치대학 법과에 입학하고 1919년 2월 동경에서 조선청년독립단 (朝鮮青年独立団)을 조직하여 2・8독립선언문을 선포하다가 체포되어 복역하였다. 1927년 하와이에서 열린 만국기독교청년회 주최 제2차 태평양회의와 1929년 교 토(京都)에서 열린 제3차 태평양회의에 조선대표로 참석했으며, 동아일보 사장 재임 시 독립사상(独立思想)을 고취하다가 강압(強圧)으로 폐간(廃刊)되고 구금(拘禁)당 했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韓国民主党)을 창당하고 초대 민의원에 당선되어 입법의 원, 제헌국회의원, 법사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백정기 선생의 자는 용선(溶善), 호는 구파(鴎波)이며 건양(建陽) 1년(1896년) 부 안군 동진면 하장리에서 태어나 정읍군 영원면 은선리에서 성장하였다. 경술국치 후 척왜(斥倭)할 것을 결심하고 동지를 규합하고 자금을 염출하다가 누설(漏泄)되어 봉 천(奉天)으로 피신한 후 국내로 잠입 활동하다가 북경으로 망명하였다. 1922년에 동경으로 건너가 일황(日皇)암살을 계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 시 천진(天津)으로 들어가 일군수송선(日軍輸送船)을 폭파하고, 일군병영(日軍兵営) 및 일총영사관(日総領事館)에 투탄(投弾)하고 주중(駐中) 일대사(日大使)를 살해하 려다가 체포되어 나가사끼 형무소(長崎務所)에서 사형을 언도(言渡)받고 순국하였 다. 1963년 건국훈장독립장(建国勳章独立章)이 추서되었다.

4)

생활환경

마을 앞 당산나무 아래에는 1987년에 건립하였다는 모정이 있고, 여름 한철 이 모 정에서 농사에 지친 몸을 쉬고, 농사일이 없는 날에는 음식을 장만하여 이웃끼리 나 누어 먹고 덕담을 주고받는 마을의 쉼터라고 한다.

- 149 -


<

15> 마을모정과 당산나무

마을은 백련마을에 속하는 자연부락으로, 마을행사 중 칠석날은 마을 전체가 백련마을에 가서 잔치를 같이하며, 농한기의 관광, 마을총회, 다른 행사 등도 백련마 을과 함께하고 있다. 마을총회도 1년에 1번 백련마을과 함께하고, 노인회나 부녀회 같은 조직도 이 마을에는 사람이 11명밖에 살지 않아 역시 백련마을과 함께하고 있다.

4.

생근마을

1) 백련마을에서 북쪽으로 300여m쯤 떨어져 있는 이 마을은, 1980년까지만 해도 57 가구에 남녀 100여 명이 농사를 생업으로 삼고 살았는데, 지금은 24가구 31명(남자 7명, 여자 24명)만이 남아 논 230여 두락과 밭 250여 두락을 경작하고 있다. 그나 마 남자는 7명에 불과하여 주로 60살이 넘은 여자들이 힘든 농사일을 하며 살고 있 으며 그중에 3가구는 한우 150여 두를 길러 농가소득에 보탬이 되고 있다고 한다.

- 150 -


<

2)

16> 당산나무의 전설이 전해오는 생근마을

자연환경 서북쪽에 위치한 덕산리 생근마을은 도덕리 뒷산에 있는 백암산 자락이 등

선을 타고 내려와 떵미등의 잔등이 마을 앞에 길게 늘어져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등성이를 앞산이라고 부른다. 서쪽으로는 흥덕면 하남리에서 부안군 줄포만으로 흐르는 동림천이 지나고 있다. 이 마을은 비산비야지대로 농사와 축산이 주업이며, 논농사를 위하여 마을 동쪽에 생근제라는 저수지가 있고, 줄포만 쪽으로 확 트인 드 넓은 들판을 생근들이라고 부른다.

<사진 17> 생근마을 전경

- 151 -


3)

인문환경 마을은 항일독립투사와 제헌국회의원이던 근촌 백관수가 태어난 마을로 마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백관수가 이곳에서 태어나 5세가 되던 해에 인근 도덕마을로 이사를 갔다고 하며 지금은 이재옥 씨가 살고 있으며 3년 전 쯤에 초가를 강판 기와 로 지붕을 개량하여 살고 있다고 한다.

<

18> 근촌 백관수 생가

이 마을에는 7~8년 전까지만 해도 정월 대보름날 당산제, 칠석날에는 동네 어른 들이 농악을 치고 노래를 하며 음식을 장만하여 나누어 먹고 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풍속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분들이 다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는 이런 풍습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고 한다.

4) 마을 전통과 생활환경 이 마을 역시 새마을사업의 여파로 옛날의 흔적들은 거의 사라지고 없으나 마을 서북편에 수령 500여 년은 됨직한 당산나무 두 그루가 남아 있어 옛 정취를 느끼게 한다. 당산(堂山)은 신역(神域)에 설치한 마을의 수호신을 형상화한 것으로 여기에 제 사를 올려 부락의 재앙을 물리치고 풍년과 복을 비는 동제신앙유적(洞祭信仰遺跡)이다. - 152 -


<

19> 당산나무

당산은 이정표와 경계표시 몫까지 하고 있었으며 성역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마한시대에도 당산이 있어 죄지은 자가 이곳에 들어가면 잡지 못했다는 기록이나, 선사주거지에서 출토된 청동제기에 당산과 솟대의 그림이 있는 것은 이런 사실들을 뒷받침해 준다. 그러니까 당산의 역사는 자그마치 2천 5백 년 이상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진 20> 당산나무

- 153 -


마을 사람들이 정월달에 겨울 한철 농한기에 쉬었던 이완된 생활을 걷어 젖히고 이제 입춘(立春)이 머지않았으니 한해의 농사를 시작한다는 결심의 뜻으로, 또 한편으로는 마을의 질병과 재앙이 없으라고, 그리고 의병으로 전사한 남정네의 영혼을 위로하고 자손을 점지해 달라는 염원까지도 곁들여 제를 올렸다. 그리고 줄 다리기 후 당산에 줄을 감아올려 그날의 축제와 기원을 일년 내내 기억하였다. 민속(民俗)이란, 끊임없이 계승된다는 점에 그 힘과 뜻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 러나 민속의 또 다른 특징은 변한다는 데 있다. 전승되지만 그대로 전승되는 것이 아니라 변하면서 전승된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토템(Totem)의 형식으로서 당산은 고대국가의 등장과 함께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은 불교에, 나중에는 유교에 자리 를 양보하고 한낱 민속으로서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어느 때 이 당산나무가 심어 졌는지 기록은 찾을 길이 없지만, 500여 년의 세월을 지켜온 이 고목은 우리나라 향 촌사회에 뿌리 깊게 내려오는 동제복합문화(洞祭複合文化)의 한 이정표가 되는 기념 비적 유물이라 할 수 있다. 마을행사 중 칠석날에는 마을 전체가 잔치를 하며 쉬는 날이고, 겨울철 농한기에 는 마을에서 음식을 준비하여 단체관광을 가기도 한다. 마을총회는 1년에 한번 연말 이나 연초에 하고 있으며, 마을의 조직으로는 생근노인회(회장 이정범)와 생근부녀 회(회장 조현주) 등이 있고, 회원은 대략 30명 정도이다.

- 154 -


○ 도움 주신 분 •

(81세)

• 백남수(59세) • 유상기(64세)

○ 참고문헌 •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2003 • 牟陽城의 얼 고창군, 1982 • 고창군지 고창군지편찬위원회, 1992 • 고창삼향지(高敞三郷誌) • 흥성지(興城誌) • 고창원우지(高敞院宇誌) • 근촌 백관수(芹村 白寛洙)

- 155 -


고창의 마을 제 1집


무림리 임리 대강마을 간지

- 157 -



풍물굿으로 이름났던 마을 -

무림리 임리 대강마을

1. 마을의 위치와 유래 (林里)와 대강리(大江里)는 한 마을처럼 형성되어 있어 실제로 오래전부터 합 쳐서 임리로 불러 왔는데, 현재 군도가 마을을 동서로 가로질러 개설되어 있으며, 이 에 따라 도로의 북쪽이 임리가 되고, 도로 남쪽이 대강리가 된다. 신림면 면 소재지의 마을이며 지방도 708호선(송촌)에서는 약 1.6㎞, 일반 국도 23호선(신림초등학교)에서는 약 1.4㎞쯤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행정구역상으로 보면, 법정리인 무림리(茂林里)에 속한다. 무림리는 행정리 3개 마 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곧 만화리(万化里)와 임리와 대강리인데, 이 중 만화리만은 별도로 떨어져 거리를 두고 위치하고 있으므로 임리나 대강리와는 동질감이 희박하 다고 볼 수 있다.

<

1> 임리(도로 좌측)와 대강리(도로 우측) - 159 -


처음엔 ‘숲마을’이라 불렀으며 후대에 오면서 한자어인 임리(林里)로 부르 게 되었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또 그 내력이 전해오고 있다. 전언에 의하면, 이 마을은 1700년대 초에 파평윤씨(坡平尹氏)인 윤치중(尹致中)이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었는데, 마을 형국이 화형(火形)으로서 불이 나면 지신(地神) 이 승천(昇天)하는 지형이라고 한다. 마을이 형성된 이래 두 번이나 불이 났으므로, 이를 수기(水気)로써 막고자, 마을 이름을 임리(林里, 숲마을)로 부르게 되었으며, 이에 당산(堂山)을 만들고 액막이로 솟대를 세워 오리를 만들어 올려놓고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7).

<

2>마을 입구에 세운 솟대

마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임리는 조선시대 흥덕현의 일남면(一南面)에 7)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2003 참조 - 160 -


마을이었으며, 대강리는 이남면(二南面)에 속한 마을이었다. 실제로는 한 마을 처럼 이웃해 있고 주민들조차 동성의 성씨들이 서로 섞여 살고 있으며, 마을행사와 풍속들이 함께 행하여지고, 또 마을이름조차 ‘임리’로 대표되어 불려지고 있는데도 오래전부터 행정구역상 2개 마을로 구분되어 온 점이 의아스럽다. 이에 대하여 분명한 이유를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마을의 규모가 컸기 때문에 분 할할 필요가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대 어느 때쯤에 와서는 다시 통합된 마을 형태로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현재 생존하 는 주민들에 의하여 확인된다. 곧 이 마을의 연로한 주민들에 의하면, 근래까지 임리로 통합되어 내려왔는데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 각 마을마다 100만 원씩의 생활개선자금이 배분 되자, 마을을 나누어 대강리의 몫을 따로 받았다는 것이다. 그 때부터 마을이 다시 임리와 대강리로서 각각 행정리가 되었고 이장도 따로 두게 되었다고 한다.

<

3> 마을의 유래에 대하여 조언하신 분들.

고일규 옹(81), 채연식 옹(73,법지리), 유춘영 옹(76,이장), 유종철 옹(83), 허인환 씨(조사위원), 이영노 옹(81)

2.

현황 - 161 -


대강리는 면 소재지 마을이면서, 마을이 형성된 시기(1700년대)도 비교적 오래된 점 등에서 타 마을과 비교되는데, 주거세대수와 주민 수 등에서 비교적 규모 가 큰 마을로 인정된다. 마을의 이장은 70년대 중반 행정리로 나뉘면서 임리와 대강리 각각 이장을 두었는 데, 초기의 명단은 파악되지 않고 1980년대 초부터는 다음과 같이 확인된다.

1)

역대 이장 명단 순위

순위

1

이 문 식

1983.1.1~

8

유 춘 영

1997.1.10~

2

김 현 수

1984.1.1~

9

김 현 수

2002.1.1~

3

구 자 복

1987.1.1~

10

유 춘 영

2004.1.1~

4

김 덕 수

1989.1.1~

11

이 일 섭

2006.1.1~

5

김 용 관

1991.1.3~

12

김 양 중

2008.1.1~

6

오 현 상

1992.2.19~

13

유 춘 영

2009.3.14~현재

7

김 현 수

1996.1.1~

순위

2) 대강리 역대 이장 명단 순위

1

오 재 필

1983.1.1~

5

이 태 섭

2002.1.1~

2

윤 한 권

1989.1.1~

6

이 현 대

2004.1.1~

3

구 자 술

1991.1.3~

7

구 자 인

2006.1.1~현재

4

이 현 대

1997.1.1~

3) 마을별 호구(戶口) 현황(2009. 9월 현재)

- 162 -


인구(명) 반수 세대수

연 령 별(명) 10

계 남 여

비고

20세 30세 40세 50세 60세 60세

미만 미만 미만 미만 미만 미만 이상

임 리

3

41

72 29 43

.

.

1

3

6

9

53

대강리

2

34

69 30 39

.

7

6

3

2

12

39

표를 보면 60세 이상 노령자가 다수임을 알 수 있는데, 임리는 73%, 대강리는 57%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여성이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데서는 여성이 남성 에 비해 더 장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4> 면사무소 쪽에서 바라본 마을 전경

4) 마을명

생업 현황(2009. 9월 현재) 주 소 득 원 <가구> 계

수도작

복분자

임 리

41

24

7

대강리

34

16

3

과 수

비 고 축 산

기 타

1

9 15

5) 마을별 성씨 분포 현황(2009. 9월 현재)

- 163 -


마 합 고 흥 을 류 명 계 씨

광 선 동 전 능 밀 파 강 김 금 함 산 산 복 주 주 양 평 릉 해 녕 평

기타성씨

김 김 오 이 구 박 윤 유 김 김 유

(각 1가구)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장흥고씨, 부안김씨,

임 리

41 10

5

5

3

3

2

2

1

1

1

1

1

무안박씨, 행정성씨, 평산신씨, 전주정씨 각1 행주기씨, 의성김씨,

대 강 34

보성김씨, 경주김씨, 3

1

3

.

6

3

.

5

2

1

1

1

남궁씨, 나주라씨, 천안전씨, 전주최씨 각 1

<

5> 2002년에 건축된 모정, 반듯하고 장중한 느낌을 준다.

- 164 -


<

6> 마을 모정의 천장, 공량이 두 개인 독특한 구조로 정성스럽게 지어졌음이 느껴진다.

6)

위치한 관공서 대강리는 신림면 면 소재지의 마을이기에, 이곳에 면단위 관공서와 학교

등이 자리잡고 있다. 파출소・면사무소・복지회관・농촌상담소・중학교 등은 대강리에, 보건소・우체국 등은 임리에 위치하고 있다.

<사진 7> 신림면사무소

- 165 -


3.

깃든 전설과 풍속

1)

, 와우형(臥牛形)에 관련된 설화 예로부터 마을지형이 ‘누운 소’의 형태라고 전해온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이 한창일 때 임리에서도 마을 주민들에게 먹는 물을 편리하게 공급하고자 마을 뒤 천룡(당산나무) 부근의 모정 북편(현재 감나무 서 있는 곳)에 물탱크를 설치하였는 데, 그 해에 마을 소 9마리가 폐사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모두가 놀라워하며 근심하 게 되었는데, 어느 날 지나가던 지사(地師)가 말하기를, 이 마을은 와우형인데 물탱 크가 놓인 곳이 소의 등에 해당되므로, 소들이 눌려 죽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에 마 을에서는 즉시 물탱크를 제거하였다고 한다(그 뒤 곧 상수도 시설이 되어서 현재까 지 불편이 없다고 함).

<

8> 임리 뒤편 모정. 1930년대 건축물이며 공량이 2개로 넉넉하고 반듯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뒤편 좌측 감나무 아래가 물탱크를 설치했던 곳이다.

2) 솟대와 관련된 설화 임리의 서편 입구에는 솟대가 세워져 있다. 옛날 전통사회에서 흔히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장대나 돌기둥 위에 앉힌 마을의 신앙 대상물의 하나인데, 대체로 마을의 - 166 -


수호, 그리고 풍농을 위하여 마을에서 공동으로 세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임리의 경우, 솟대를 세우게 된 계기가 남달라서 흥미를 끈다. 임리는 마을 에 자주 불이 났었다고 한다. 이에 화재를 막기 위해서는 마을에 수기(水気)를 끌어 들여야 할 필요가 있어 마을 입구에 솟대를 높이 세우고 그 위에 오리를 조각하여 앉혔다는 것이다. 오리는 물 위에 떠 있는 존재이므로, 오리가 앉은 곳까지 물이 찬 다면 마을에 물이 가득 차 있는 형상이 되므로 자연히 화기(火気)를 차단할 수 있다 고 본 것이다. 어느 해인가는 당산제를 지내고서 동아줄을 솟대에 감지 않은 적이 있었는데, 이 마을 명동양반의 꿈에 하얀 노인(신령)이 나타나, ‘옷이 없어서 춥다’고 현몽하므로 급히 짚을 엮어서 솟대를 감싼 일이 있었다고 김원덕 할머니(93세)는 증언한다8).

<

9> 높이 세운 솟대 위에 오리를 앉혔다.

8) 한편 마을이장은 꿈을 꾼 사람이 명동양반이 아니라 부동양반(유만규, 30여 년 전쯤 작 고)이었다고 증언한다. - 167 -


3)

굿과 당산제 예로부터 풍물 굿이 유명하였다고 한다. 흔히 ‘임리 굿’이라 불려질 정도

로 이름이 났었는데, 주변 마을들에 비해 훨씬 규모가 크고 성대하게 베풀어졌기 때 문이었다. 이 굿은 이 마을의 당산제와 연관이 있는데, 곧 당산제가 성대한 만큼 풍 물 굿도 그에 따라 성대하게 행해졌고, 다른 고장으로 초청되어 가기도 하였다. 대체로 1970년대까지는 그 규모가 유지되었으며, 당시에는 인근 부락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임리 굿’을 보기 위하여 모였으므로 마을 전체가 흥겨운 분위기에 휩싸였으 며, 이 틈에 도둑들이 마을 전체를 돌며 물품을 훔쳐가는 불상사도 일어났다고 한다. 지금은 농촌마을이 고령화되는 추세에 따라 인구도 줄고 젊은 세대가 없으므로 풍 물의 규모를 제대로 갖출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러나 당산제에 굿이 필수적이므로 그 저 명맥을 이어 가는 수준에서 행해지고 있다고 하는데, 대개 꽹과리 2~3인, 장구 2 인, 징 2인, 북 1인으로서 모두 10인 정도의 규모에 불과한 형편이라고 한다. 이 마을에서 오랜 전통으로 지켜오는 당산제는 그 절차와 대상에서 매우 독특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 절차는 ①솟대 세우기→②천룡제→③앞 당산제(할아버지 당산제)→④할머니 당산제→⑤우물 굿→⑥줄다리기→⑦솟대에 줄감기의 순서이다. 당산제의 시작은 매년 1개씩 새로 세우는 솟대를 만들기 위해서 높이 자란 소나무 를 베어 오는 데서부터이다. 정월 13일 나무를 베어 와서 앞 당산(솟대) 앞에 놓아 두었다가 14일 공동작업으로 우물을 청소하면서 동시에 깎아 세운다. 당일(14일) 밤에 마을 뒤 천룡(당산나무)에 제를 지내는데, 제수는 쇠고기(생고 기), 떡, 술(지금은 정종 1병), 밥과 국, 과일, 포 등이다. 예전에는 걸궁굿을 치며 동네를 돌아 집집에서 거둔 곡식으로 제수를 마련하였으나, 지금은 전답 5마지기의 소출로 제수 일체의 경비를 마련하고 있다. 제관 1인을 선발하는데, 예전에는 궤를 짚어 선정하였으며, 요즘도 지난 한 해 동안 궂은 일이 없었던 사람으로서 정한다. 축관 역시 궂은 일이 없고 생기 복덕한 사람을 택하는데, 이들은 제를 지낸 뒤 1년 간을 상가 등 궂은 곳은 갈 수 없으므로, 지금은 서로 맡지 않으려 한다고 한다. 천 룡제 등 당산제는 남자만이 참석하고, 줄다리기는 남녀 모두 참여하는 점이 다르다.

- 168 -


<

10> 임리천룡(林里天龍). 소나무 4주의 당산나무

(소나무)은 원래 5그루였으나, 어느 해 보리 짚을 주위에 쌓아 둔 것 때문에 1그루가 고사하여 현재 4그루가 남아 있으며, 서쪽에서 바라보면 마치 1그루처럼 보 이는 것이 특이하다. 고창군 보호수로 지정(번호 9-14-39)되었으며 2006년 기준 207년 수령으로 기록되어 있다(사진 10). 천룡제를 지낸 뒤에는 남은 제수를 준비하여 솟대 밑에 있는 앞 당산(할아버지 당 산)에서 축문을 읽고 재배하며 음복한다. 이때 소지(焼紙)는 올리지 않고 음복 시에 도 제주(祭酒)와 실과만을 먹는다고 한다.

<사진 11> 앞 당산(일명 할아버지 당산). 우측에 솟대에 감은 짚줄이 보인다. - 169 -


할머니 당산제인데, 형식은 천룡제 및 앞 당산제와 같다. 할머니 당산은 임 리 서쪽 우체국 건물 옆에 있는 작은 선돌(입석)인데 높이는 1m가 채 못된다. 또 큰 나무 밑에 있어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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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뒤에 세워져 있는 선돌에 금줄(새끼줄)이 둘러쳐져 있다.

다음으로는 우물에 와서 굿을 하는데 제물(祭物)은 없이 풍물만 치는 형식이다. 당산제에는 모두 4곳에 촛불로 등불을 만들어 거는데, 곧 천룡・앞 당산・할머니 당 산・우물에 걸어 놓는다. 특히 동네 복판에 있는 우물은 예로부터 매우 소중한 존재 로 인식하여 왔으며, 매년 정월 14일에 마을주민 공동작업으로 청소한다. 이 우물에 는 또 특별히 금하는 것이 있으니, 곧 청소 뒤에 제일 먼저 물을 길러 천룡제의 제 물을 만든 다음이라야 주민도 물을 길러 갈 수 있다고 한다.

<사진 13> 우물, 임리 여성 경로당 앞에 있다.

- 170 -


4)

솟대에 옷 입히기 (대강리 포함)에서 가장 흥겹고 신명나는 민속놀이 중에 줄다리기가 있다. 이곳

줄다리기의 전통은 퍽 오래전부터 행해져 온 것이라고 한다. 대체로 줄다리기는 한 해 의 길흉을 점치고 풍년・풍어 등을 기원하는 뜻에서 행해지는 마을행사이다. 주로 명 절에 행해졌으며, 마을 단위로 편을 갈라 장정들만 또는 남녀노소가 함께 줄을 잡아당 겨 승부를 겨루는 것이다. 대개 정월 대보름날 행하며 2월 초하루에 행하기도 한다. 흔히 당산 굿에서도 줄다리기가 행해지며, 이를 ‘줄다리기 굿’이라고 하는데, 승부 가 나면 당목에 줄을 감아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빈다. 줄 만드는 것부터 놀이까지, 전 과정이 완전한 협동심으로 이루어지므로 주민들은 이를 통해 마을의 화합과 단결 력, 그리고 향토애를 키워왔다. 이렇게 임리의 줄다리기 역시 우리나라 중남부에서 행해지는 줄다리기와 크게 다 르지 않으나 약간 다른 점이 있어 흥미롭다. 이 마을에서는 대개 정월 보름날 다음인 16일 아침부터 주민들이 합심하여 줄을 메기기(꼬기) 시작한다. 점심에는 간단한 음식(국수 등)을 만들어 함께 먹고 다시 꼬는 작업을 하여 마치면, 남녀가 모두 줄을 어깨에 메고 동네 고샅을 한 바퀴 돈다. 옛적에는 동네 외곽으로 돌았으나 지금은 주민 수가 많이 줄어 힘이 들므로 그 거리 를 단축하기 위해서 마을 안 고샅을 한 바퀴 도는 것으로 간소화한 것이다. 이때 10 여명의 농악대가 앞을 인도하게 된다. 마을을 돈 다음 이 줄을 지금의 여성회관(여성 경로당) 뒤편 옛길에 동서로 하여 길게 늘어놓은 다음 오후 3시쯤 되면 이 길을 기준으로 동・서편 거주 주민들이 편 을 갈라 줄다리기를 한다. 본래는 서편에 여자, 동편에 남자로 하여 왔으나 근래에는 남녀가 모두 섞여서 당기되, 혹 한쪽이 수가 너무 차이가 나면 결혼・미혼자를 구분 하여 한 쪽에 보태어 준다. 행정리인 임리와 대강리의 구분이 아니라 옛길을 중심으 로 나누기 때문에 두 마을이 서로 섞이게 되어, 예로부터 한 마을처럼 지내오는 전 통을 지켜가며 우의를 다져가려는 아름다운 뜻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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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줄다리기 하는 옛길(여성회관 뒤편)

마친 줄은 앞 당산 옆에 있는 솟대의 몸에 감는데, 이를 입힌다고 말 하기도 한다. 솟대에 칭칭 감긴 줄은 마치 용이 몸을 두른 모습으로 보이는데, 용은 비를 가져오는 신령한 존재이고 또 물에 잠겨 있다 승천하는 존재이므로 솟대를 세 워 수기(水気)를 막으려는 이 마을의 염원과 잘 부합되는 상징적인 대상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사진 15> 솟대를 감은 줄다리기 줄(아래쪽에 앞 당산이 있다)

- 172 -


줄다리기 줄의 굵기가 지금보다 훨씬 굵고 길이도 길었다고 하는데, 대 개 직경은 30㎝, 길이는 80m가 넘어, 4톤 트럭 1대에 가득 찼다고 한다. 현재는 굵 기나 길이가 예전의 10분의 1에 불과하나, 동네의 주민들이 모두 참여하여 단결과 협동을 다지는 흥겨운 축제의 모습을 이어가고 있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솟대는 생목을 심을 생각에서 여러 차례 미루나무를 심기도 하였는데 나무가 곧 고사하여 버리므로, 그대로 소나무를 깎아 세우고 있다고 한다.

5)

(天龍祝文)과 당산축문(堂山祝文)

이 마을에는 천룡제와 당산제를 지낼 때 읽는 축문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천룡축문 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 173 -


( )正月( )朔十五日( )幼学( ) 敢昭告于 天竜至霊之下 天地之間 神為最霊 人物之内 村為最重 村頼於神 神依於村 水患疾疫 一無所傷 早9)荒虫食 亦無所害 終世太平 雖有人過 勿愆勿咎 謹以清酌 庶羞酒果 祇薦于神 尚饗

이 내용은 곧 “유세차( )정월( )삭15일 유학(모인)은 천룡으로서 지극히 신령하신 분께 감히 밝게 아룁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신이 가장 신령스러우며, 인간 안에서는 마을이 가장 귀중하나이다. 마을은 신에게서 힘입으며 신은 마을에게 의지합니다. 수 해나 질병에서 한 가지라도 손상받지 않으며, 가뭄과 병충해로도 해(害) 받지 않고 해[年]를 마치도록 태평하게 하소서. 비록 사람들이 허물이 있더라도 나무라지 마소 서. 삼가 제주와 제수와 과실로써 신령님께 공경스럽게 올리오니 흠향하소서.”로 풀 이할 수 있다.

9)

는 旱의 오자로 보인다. - 174 -


당산축문은 앞 당산(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에 모두 읽는 축문인데, 이를 옮기고 풀이해 보면 다음과 같다.

維歳次( )正月( )朔十五日( ) 幼学( )敢昭告于 堂山至霊之下 人神雖殊 礼軆猶同 神之所依 惟在於村 村之所頼 惟在於神 護佑村人 随処安保 或有天禍 呵襟不祥 或有疾病 特降霊威 使此民人 終世太平 謹以清酌庶羞 祇薦于神 尚饗

“유세차( )정월( )삭15일( ) 유학(모인)은 당산으로서 지극히 신령하신 분께 감히 밝게 고합니다. 인간과 신은 비록 다르지만 예를 갖추어야 할 대상으로서 보면 오히 려 같습니다. 신이 의지할 곳은 오직 마을에 있고 마을이 힘입을 곳은 오직 신에게 있으니, 마을 사람들을 지키고 도우셔서 곳에 따라 편안하게 보호하여 주소서. 혹 하 늘의 재앙이 있게 되면 상서롭지 못한 것을 막아 주시고, 혹 질병이 있게 되면 특별 히 영험한 위엄을 내려 주시어 이 백성들로 하여금 해를 마치도록 태평케 하소서. 삼가 제주와 제수로써 공경스럽게 신에게 올리오니 흠향하소서.” 두 축문에서 흥미로운 것은 신과 인간이 서로 의지해야 할 존재임을 밝히고 있는 점이다. 한편 은연중 신이 평안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이 평안해야 함을 신에게 각 인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이기도 한다.

- 175 -


4.

민요(노랫가락) 민요로는 일찍이 1992년 발간된 고창군지에 채록된 것이 있어 다행히도

그 내용이 전해온다. 당시에 이 마을 주민 3인(조석권, 최길례, 신준례)에게서 채록 한 것인데, 다음과 같다.

<

>

(남, 작고)

얼널널 상사뒤요

가찬사람은 보기나 좋게

저그저그 잘도 찧는다

얼널널 상사뒤야

얼널널 상사뒤요

높은 디는 쾅쾅 놓고

들었다 놓았다

낮은 디는 가망가망 놓소

쾅쾅 찧소

얼널널 상사뒤야

얼널널 상사뒤요

높은 디는 힘 들어놓고

먼디 사람은 듣기나 좋게

낮은 디는 가만히 놓고

얼널널 상사뒤야

얼널널 상사뒤야

<베틀노래>

최길례(여, 작고)

옥난간이 베틀놓고

뒤돌아 나던 양은

가르쇠장 쇠 맞추고

오뉴월이 소내기냐 비내기냐

먼 산을 짜여 앉고

원산소리 나는 양은

앉을 노를 노딜이고

장성갈제 버석잃고

그 우그 앉었으니

버석잃어 속이 쓰려

한 꽃이 피었도다

끌을세라 잡아대리는 양은

주리주리 거닌게는

칠월 칠석 오작교를

삼형제고 독신이고

견우직녀 만났다가

늙을세라

헤어지고 건너는 듯

사냥개 두린 양은

도토마리라 허는 양은

북두칠성 둘렀는디

정절쿵 도토마리

- 176 -


<

> 저 할머니

부지땅 짚고 쑥 나서서

반달 같은 딸 있으면

기는 작아도 구녁을 뚫고

원달 같은 사우를 삼소

참새는 작어도 알을 낳는디

원달 같은 딸은 있거마는

내가 뭐 작으야고

나이가 어려 못 여우것네

어머니는 동갑으 손자보고

헌게 가시내는

야 다시 동갑으 아들낳소

<화투타령> 정월 송악의 백학이 울고

누떠올랐네 누떠올랐네

이월 매전의 꾀꼬리 울고

팔월 공산 달 떠올랐네

삼월 사구라 북치는 소리

구월 국진 국화주에

천지 백만이 다 날아드네

오동진 복판에 거문고는

사월 흑싸리 비둘기 울고

줄만 골라도 소리가 잘 나

오월 난초 또 만발했네

다 놀았네 다 놀았네

유월 목단에 나비를 청하여

240일 다 놀았네

칠월 홍싸리 멧다리 뚜들제

일백이십이 본이라네

<연정요>

신준례(여, 81세)

임도 나를 생각을 허면

너 그럴줄 내 몰랐네

나도 임을 생각하지

얼씨구나 좋네 정말로 좋네

임아 임아 무정한 임아

이런 재미가 어데 있어

- 177 -


<

> 아리랑 쓰리 쓰리랑

노다가 가세

아라리가 났네 꼬리 울고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리랑 얼씨구 아라리가 났네

아라리가 났네

노다 가세 노다가 가세

아리랑 응 얼씨구

저달이 떳다 지도록

아라리가 났구나

<닐리리 타령> 닐리리야 닐리리야

닐리리야 닐리리야

니나노 날실로

청사초롱 불 밝혀라

내가 돌아간다

잊었던 낭군이

닐리리야 닐리리야

다시 돌아온다

왜 왔든고 왜 왔든고

닐리리야 닐리리야

울고나 갈길을 왜 왔든고

<사진 16> 노래 솜씨가 뛰어난 신준례(여, 81세)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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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요를 불렀던 분들 중에 신준례 할머니는 아직 생존하여 있으며 다시 추가로 민요를 들을 수 있는데,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군밤타령>

신준례(여, 81세)

(1절) 뒷동산에 밤 까는 처녀

(2절) 임은 가고 봄이나 오는데

밤 한송이만 주라마세

꽃만 하나 피어도 임의 생각

외통베기를 드릴까요

강물만 푸르러도 임의 생각

뒷통베기를 드릴까요

누워 생각 앉아 생각

이밤 저밤 다 버리고

생각 생각이 임뿐이요

하룻밤만 유람하세

구시월 시단풍에

얼씨구나 좋네

낙엽만 날려도 임의 생각

정말로 좋네

누워 생각 앉아 생각

이런 경사가 어데 있오

생각 생각이 임뿐이요

<

>

<한탄가>

오동추야

신고명산 만전에 풍에

달이 동동 밝은데

바람이 분들 쓰러지리

임의 동동 생각이 좋다

바람이 분들 쓰러지리

달이 동동 나노라

송죽같이 굳은 절개

임보고 싶으면 사진을 보고요

매맞는다고 허라하리

말하고 싶으면 전화를 하세요

몸은 비록 입생일망정

(2009)

절개조차 없을소냐 얼씨구나 좋네 정말로 좋아 이런 경사가 어디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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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 81세)

울타리 밑에서 깔비는 낭군아 옆눈질 사리살짝에 이내 간장 녹는구나

<사진 17> 임리 여성 경로당의 마을 할머니들

5.

후원조직 일심계와 유희준 선생 침략시기 고창지역의 지사들이 중심이 되어 1925년에 조직한 일심회(一心

会)가 있었다. 일심계의 계장(契長)인 유희준 선생이 쓴 계의 서문에는 “마음이 같은 사람끼리 계를 맺고 일심계라 제목을 붙인 것은 곧 마음이 같은 사람끼리 서로 함께 하자는 뜻이다(合同心而契焉 目之以一心者 即同心相与之意也)”고 하였다. 또 “그러나 보편적으로 일심을 말로만 하는 데에 그치고, 중요한 할 일을 제안・실천하지 않는 다면 그것은 치수 없는 자와 같고, 눈금 없는 저울과 같아서 표준할 바가 없으니 어 떻게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然汎曰 一心而已 不以主要而提焉 則如無寸之尺 如無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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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可準的 何能済事)”라고도 하였다. 언뜻 보아도 친목을 도모하자는 일반적인 계와는 달리 한 마음이 되어 뜻있는 일 을 해 보자는 의지가 드러나고 있다. 비록 계 제 2조에서 “본 계는 계원 간에 형제 의 의를 맺어 애경상문(哀慶相問)하고 환난상구(患難相救)하며 과실상규(過失相規) 를 목적으로 한다”고 하였으나 이때가 일제시기였음을 감안하면 역시 목적에 제시된 내용은 그저 상투적인 표현에 불과하며, 따라서 비중은 여전히 위의 서문에 실려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일심계 계책이 독항아리에 넣어져 땅 밑에 묻혀 있던 것이 조국광복 후에야 완전한 모습으로 발견된 점도 위에서 말한 바 예사 계 조직이 아니었음을 반증해 준다고 하 겠다.

<

18> 일심계의 서문 (계장인 유희준 선생이 짓고 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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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언에 의하면, 일심계는 독립지사인 일우(一愚) 김승옥(金承玉, 1889~ 1962년)선생의 독립운동을 후원하였으며, 대개 자금을 조성하여 일우 선생을 통해 임시정부로 보냈다고 한다. 또 일제가 수탈하여 쌓아둔 공출미(성송・상하면 야적) 를 불질러 태운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때 일우 선생이 체포되어 일경에 의해 3일간 갖은 고문을 당하게 되었으나, 손톱을 잡아 빼는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자백하지 않 고 끝까지 단독 행동이라고 주장하여 계원들이 모두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일우 김승옥 선생은 고창 출신이며 평생을 조국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선생은 1919년 기미독립운동 주도인물로 체포되어 1년 6개월 형을 받았으며, 그 후로도 고창청년회, 고창노동회, 고창고보 후원회 등의 대표를 맡으며 항일민족정 신을 고취시키고, 광복 후에는 신탁통치반대고창위원장과 고창군선거관리위원장 등 을 맡아 정부수립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조국이 분단된 상태에 머물자 이를 깊이 탄 식하고, 이후부터는 사회정치활동을 일체 중단하였으며, 오직 육영사업에 뜻을 두어 1945년 고창고등여학교(현 고창여자중・고등학교)의 설립을 주도하였다. 1962년 선 생이 작고하자, 고창군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고, 1991년에 대전국립묘지에 안장 되었다. 한편 일심계는 계칙에 의해 최연장자인 남하(南霞) 유희준(柳煕駿)선생을 계장(契 長)으로 하고, 부계장 김창한(金昌翰), 총무 박용순(朴龍淳), 서무간사 오의균(呉毅 均), 재무간사 이횡욱(李宖郁)을 포함 모두 22인으로 구성되었다. 계장인 남하 유희준(1865~1948년)선생은 신림면 임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젊은 시 절 과거를 준비하여 한 차례 응시하였으나 실패한 뒤로는 성현의 학문에 전념하였 다. 일찍이 과거를 보러 상경할 때에 충청도에서 한 선비를 만나 동행하게 되었는데, 세월이 흐른 뒤 그 선비가 무장현감으로 부임하였다. 이리하여 남하 선생은 무장현 의 책방(冊房)으로서 근무하게 되었다 하는데, 아마도 구한말 1900년대 초쯤의 시기 로 추정된다10).

10) 항목의 내용은 남하 선생의 손자인 유종원(柳宗元, 69세) 씨와 일우 선생의 삼남(三 男)인 김종학(金鍾學, 81세, 서울 거주) 씨의 증언을 참고하여 작성한 것임. - 182 -


<

19> 일심계원의 명단

(관향, 생년월일, 부모의 생존여부, 본적, 주소의 순으로 기록하였다)

6.

효자정려와 비석 대강리에는 효자와 효부의 정려와 비석 등이 세워져 있는데, 그 중에서도

조선시대 나라에서 표창한 3효자가 있어서 마을 입구에「3효자 정려(三孝子 旌閭)」 가 서 있다. 원래는 건너편 면사무소 부근에 위치하였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한 나머지, 근래(2003년)에 마을 가까이 현 위치에 옮기면서 새롭게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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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 3효자 정려각(건물 안에 3효자의 정려 현판이 안치되어 있다)

중 고종 24년에 정려된 분은 유덕휴(柳徳庥) 공과 유빈현(柳彬賢) 공이며,

31년에 정려된 분은 유병욱(柳秉郁) 공이다. 마침 정려각 좌측에 고흥유씨 정려이건 사적비(高興柳氏 旌閭移建事蹟碑)가 세워져 있는데, 후면과 측면에 3효자의 약력을 소개하고 있어 그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11).

<사진 21> 삼애 유덕휴 공의 정려

유덕휴(1667~1739년) 공은 신림면 환산에서 출생하였으며, 호는 삼애(三涯)이다. 백부 일평공[柳必愿, 1625~1684년]과 중부(仲父) 허재공[柳恵愿, 1632~1695년] 11) 동 비문은 일가 후손이며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던 유풍연 선생이 지었다. - 184 -


효행을 본받아 양친을 지성으로 봉양했다. 친병(親病)이 위태롭자 손가락을 베어 주혈하여 80장수를 누리게 하였으며, 친상(親喪)에 6년간 죽만 마시며 시묘하였다. 향리 사림의 천거로 경종 2년(1722년)에 급복(級复)12)되고, 일평공, 허재공과 함께 ‘일문 3효(一門 三孝)’라고 일컬어졌다. 고종 24년(1887년)에 정려되고, 1922년 용 강사(龍岡祠)에 배향되었다.

<

22> 일사 유빈현 공의 정려

유빈현(1762~1835년) 공은 신림면 임리에서 출생하였으며, 호는 일사(一沙)이다. 삼애공의 증손으로서 부친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깨물어 주혈하였으며 모친의 병에는 북두성에 쾌유를 빌었다. 상을 당하여 6년간 시묘하였으며, 가정이 빈곤한 처지였으 나 강학에 힘썼다. 고종 24년에 효행으로 정려받았다.

<사진 23> 경봉 유병욱 공의 정려 12) 부역이나 조세를 면제해 주는 특권. - 185 -


(1817~1874년) 공은 일사공의 혈손이며, 임리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경봉 이다. 모친 병환에 백방으로 구약 시탕하였으며 부친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깨물어 주혈하였다. 상을 당하여 6년간 시묘하였으며, 고종 20년에 효행으로 정려 받고 이 어 조봉대부동몽교관에 증직(贈職)되었으며, 다시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을 가자 받았다13). 또한 임리, 대강리에는 근래에 세워진 공적비와 훈열비 등이 있는데, 대강리 마을 뒤에 조성된 영모원(永慕苑)에는 일심계(一心契)를 이끌었던 유희준(柳煕駿)선생의 공적비와 일심계 계안(契安)의 문안 전체를 새겨 세운 비석이 있고, 마을 안 큰 길 의 좌우에는 효열부 평택임씨 기적비(孝烈婦 平沢林氏 紀績碑)등이 세워져 있다. 이 는 이 마을이 예로부터 인륜도덕을 숭상하여 효행을 실천하여 왔음을 말해 주거니와, 이에서 비롯된 기풍과 정신이 곧 오늘날에도 이 마을과 주민들로 하여금 서로 화합하 고 협동하는 아름다운 전통을 지켜나가게 하는 근본적인 배경임을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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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일심계의 계칙 전문을 새긴 비(우측)와 남하 유희준 선생의 공적을 새긴 비(좌측)가 세워진 영모원(대강리 뒤편)

13) 정려 현판에는 고종 31년에 정려받은 것으로 새겨져 있는데, 어느 것이 맞는지 확인이 필요하다. - 186 -


○ 도움 주신 분 •

(조사위원 : 임리・대강리 마을 현황 자료 조사)

• 고일규(81, 만화리) • 구좌인(대강리 이장) • 김종원(조사위원, 사진촬영) • 김종학(81, 서울, 김승옥 선생의 3남) • 봉필광(신림면장) • 신준례(여, 81) • 유종원(69, 유희준 선생의 손자) • 유종철(83) • 유춘영(76, 임리이장) • 유풍연(79, 전 전주대학교 교수) • 이기화(전 고창문화원장) • 이영노(81, 신림 복지회관 노인회장) • 조용구(자문위원) • 채연식(73, 법지리)

○ 참고문헌 • 고창군지 고창군지편찬위원회, 1992, 2009 •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2003 • 고창의 교육 김경식, 1995 • 고창의 유학 고창군, 1996 • 허제집 원광대학교 향토문화연구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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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의 마을 제 1집


용산리 용산마을 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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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 용산팔경(龍山八景) -

용산리 용산마을

1. 마을 개관과 유래 부안면(富安面) 용산리(龍山里)는 역사적으로 흥덕군(興徳郡) 이서면(二西 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용산, 신덕(新徳), 반정(盤亭)을 병합해 용산리가 될 때 벽사면(碧沙面)에 편입되었다가, 1935년 다시 부안면으로 편입되는 행정구역의 변천 을 겪어왔다. 용산리에는 연기(煙起), 용산(龍山), 용흥(龍興) 3개의 자연부락 및 행정리가 있 고, 용산리 서쪽에 연기마을, 중앙에 용산마을, 동쪽에 용흥마을이 있다. 이 중 용산 마을은 부안면 소재지로부터 22번 국도를 따라 서쪽(약간 남서쪽) 방향으로 약 5㎞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 산들의 형국이 용(龍) 모양과 닮았다고 용산이라 하였다고 하며, 용뫼골, 용 골, 용산동(龍山洞) 등으로도 불려왔다. 하지만 1960~70년대에 도로 건설, 저수지 조성 등의 개발사업으로 인해 이전 용 모양의 형국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특히 2000년대 초반 국도 22호선(흥덕-선운사)을 새롭게 조성하는 과정에서, 용산 용산 마을 남쪽 계명산(아산면 경계)에 굴을 뚫을 때, 용산마을의 상징인 용두암이 있는 용머리 부분을 자르고 지나가게 되자, 마을 주민들은 강력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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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용산마을 남서쪽에서 바라본 용머리 부분, 국도 22호선 조성으로 용머리 부분이 잘려나갔다. 용머리 앞쪽(입쪽)에 용두암(龍頭岩)이 있다.

마을유래에 따르면, “용산마을은 1600년대경 조선 선조말 관향을 알 수

없는 안씨(安氏)가 마을을 조성하고, 안씨가 떠난 이후 1800년대에 김해김씨(金海金 氏)와 전주이씨(全州李氏) 효령대군 후손이 입거했고, 그 후 경주최씨(慶州崔氏)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더욱 번창했다고 한다”라고 되어 있다. 현재 노인회 총무인 이 기영(李起英, 72세) 님은 “5대 위의 할아버지가 이 마을로 들어와, 토박이였던 김씨 할머니에게 장가를 들었다. 지금 나를 비롯해 손주들까지 7대가 살고 있다. 밀양박씨 (密陽朴氏)도 7~8대째가 된다. 하지만, 경주최씨는 5대째이니 시간적으로 약간의 간 격은 있다고 봐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참고했을 때, 적어도 1800년대 전 후로 용산마을에 김해김씨가 먼저 살았고, 이후 전주이씨, 밀양박씨가 비슷한 시기에 들어왔으며, 두 세대(몇 십 년) 뒤 경주최씨가 들어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창의 마을유래에서는, “마을 서북간 뒤로 강청동, 동북간 뒤로 새안동이 있었 으나 중년에 없어졌다”라고 한다. 용산마을 노인회 회장인 김근일(金謹一, 74세) 님 은 “어렸을 때 어르신들로부터 마을 뒤 서북쪽 골에 강청동(한자명칭 岡清洞으로, 김 근일 회장 추정), 동북쪽 골에 새양동(한자 확인 안 됨)이 있었다고 들었다”라고 한 다. 강청동의 경우 저수지인 용산제가 조성되어 몇 십 년 전에 이미 수몰되어 버렸 - 192 -


, 수몰 이전에는 7~8군데의 집터가 남아 있었고, 새양동은 아직까지 3~4군데 집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두 마을이 없어진 시기는 뚜렷하지 않다. 다만, 김근일, 이기영 님은 마을 연혁을 구술하던 중 “두 마을 모두 수월사 절터와 가까운 곳이니 수월사 일을 거들면서 먹고살다 수월사가 없어지면서 함께 없어진 것 은 아닐까”라는 추측만 하셨다. 1600년대 안씨(安氏)가 마을을 조성하였다는 기록과 관련하여, 김근일, 이기영 님 은 “지금 마을에 안씨가 없어, 1600년대에 안씨가 살았다는 기록은 안씨 족보를 봐 야 알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새양동 마을터 인근에 7~8기의 안씨 묫자리, 마을 근 처 3~4기의 안씨 묫자리, 근처 산의 소유주가 외지인 안씨 것이니, 안씨가 용산마을 에 살았고, 새양동, 강청동과 관련이 있지 않았을까”라고 추측하였다. 이외에도 마을 앞 남쪽 방면 욧골에 외동(外洞)마을도 있었다고 한다. 1930년대까 지 마지막으로 2가구 정도가 있었지만, 1940년 전후로 마지막 남은 박운재 씨가 지 금의 용산마을로 이주하면서 없어졌다고 한다. 용산마을 동쪽에 위치한 용흥마을은 용산마을에서 분구됐다고 하는데, 고인돌, 성황당, 굴재 등으로 불렸으나 1965년 행 정구역 개편 때 용흥으로 개명하였다.

2.

자연환경과 명칭

부안면 용산리의 절반 서쪽은 선운산 도립공원 지역이며, 용산마을은 도립공원 바 깥 동쪽에 인접해 있다. 마을 터는 북쪽으로 수월산, 동쪽으로 건기봉, 서쪽으로 뒷 산이 에워싸고 있고, 남쪽으로 들을 건너 계명산과 채일봉이 둘러싸고 있다. 북쪽 수월산 자락에서 내려오는 물들이 합쳐져 마을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관통하 는 천(용산천)이 있고, 이 천은 용산마을 동남쪽 먹방제에서 시작한 먹방천이 용산 마을 남쪽 들판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로질러 합류하면서부터는 용산천이라 부르 고, 인천강으로 나아간다. 마을 남쪽 계명산과 채일봉 사이, 용산천 주변에 주요 경작지가 있고, 마을 북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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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 동쪽 건기봉 넘어, 서쪽 뒷산 주변에도 일부 경작지가 있다. 용산마을 주요 지명은 다음과 같다.

(水月山), 수월골, 수월사 터 : 용산마을 북쪽으로 펼쳐지는 300~400m 내 외의 산들을 총칭하여 수월산 혹은 수월봉이라 하고, 그 골짜기를 수월골이라 한다. 수월산 중턱에 수월사(水月寺) 터가 있다. 상터(위 절터), 하터(아래 절터), 방앗간 터, 우물(중샘), 돌담 등은 지금도 선명하게 흔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한국지명총람 11 전북편에는, “수월골(절골)은 용산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수월사가 있었음. 주 춧돌과 기와조각들이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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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용산마을 입구(남쪽)에서 바라본 마을 전경.

오른쪽 마을 입구 비석 뒤의 산이 건기봉이며, 교회와 왼쪽 전봇대 뒤로 수월산이 보인다.

수월폭포 : 수월사 윗 절터 서북쪽 위에 있는 높이 약 10m 내외의 폭포로, 바위에서 떨어지면서 날리는 물방울의 모습이 절경이라, 용산팔경(龍山八景)의 첫 번째로 수월비폭 (水月飛瀑)을 꼽았다고 한다. 폭포 옆에는 흔적만 남은 세심정(洗心亭)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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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절터 위에 마치 기차모양처럼 3~4칸이 토막토막 연결된 약

길이 30m 내외의 바위들로, 학생들의 소풍장소, 관광지 등으로 이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방앗간(방앗굴, 수월사지 인근에 12m 정도의 굴처럼 생긴 곳)쪽으로 곡식을 실러 가는 모습을 떠올리게도 한다. 방앗간과 기차바우 주변은 6・25 전쟁 때, 용산 마을 사람들의 피난처이기도 했다고 한다. 기생바우 : 수월사 위 절터와 아래 절터 사이 기차바우 아래쪽에 위치한 바위로, 놀이 장소로 적당하고 한때 기생들이 가야금을 켜며 놀았다고 한다. 바위 밑으로 물 이 흘러가고, 근처에 용산마을 9명의 노인들이 세운 구로회(九老会) 비석이 있다. 수박(水 )다리 : 수월사 입구로 들어가는 다리로, 물 차는 소리가 크게 들려 수박 다리라 불렀다고 한다. 상판 돌다리가 2~5m 정도의 크기인데, “‘옛날 사람들이 어떻 게 갖다 두었을까’라고 의문이 들 정도로 큰 돌이었다”고 하는데, 근래 들어 누군가 가 방독(구들) 한다고 가져갔다고 한다. 건기봉(建旗峰) : 용산마을 동북쪽에 인접해 있는 높이 200m의 산으로, 건지봉, 노적봉(露積峰)이라고도 한다. 명칭유래는 뚜렷하지 않지만, 한국지명총람11 전북 편에 의하면, “굴치 북쪽 장군봉(고창북중학교 뒤편의 200m 내외 산들)의 장군이 이곳에 기를 꽂을 것”이라고 하여 건기봉이라고 했다고 한다. 뒷산 : 용산마을 서북쪽에 위치한 100~200m의 산들이다. 마을 뒤편에 있어 뒷산 이라 불린다. 계명산(鷄鳴山) : 한국지명총람11 전북편에, “산의 모양이 닭이 우는 형국”이라 하여 계명산이라고 한다. 마을 남쪽에 185m의 봉우리를 비롯해 150~200m 내외의 봉우리들이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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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을회관 앞에서 바라본 남쪽의 계명산 모습. 정자는 세심정이다.

: 

11 전북편에, “계명산 중턱에 솟아있는 바위로 모양이

탕건과 흡사하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마을 어르신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사진 4> 마을 남서쪽에서 바라본 계명산 탕건바우(눈 덮인 묘지 위쪽 바위)

채일봉 : 용산마을 남동쪽에 차일(遮日, 볕을 가리기 위해 치는 포장)처럼 펼쳐지 는 150m 내외의 봉우리를 총칭하여 채일봉이라 한다. - 1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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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을회관 앞에서 바라본 채일봉

서남쪽에 있는 산 끝자락으로, 용산마을 남쪽에 연속된 산들의

모습을 용의 형국이라 했을 때, 용머리[龍頭]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용머리 끝에 용 두암(龍頭岩)이라 불리는 큰 바위가 붙어 있다. 국도 22호(흥덕-선운사)선을 조성 할 때, 용산마을의 상징이라 마을주민들이 강력하게 반대했으나, 용머리 부분은 잘려 나가고 터널이 생기고 말았다. 굴재 : 용산마을 동쪽에 위치(지금의 용흥마을 동쪽)한 고개로, 왼쪽(북동쪽 방향) 은 검산리 방향으로 넘어가는 큰재, 오른쪽(남동쪽)은 상등 방향으로 넘어가는 작은 재가 있다. 부안면 소재지의 초・중등학교를 다녔던 당시 학생들의 주요 통행길이 었다고 한다. 한국지명총람11 전북편에는, “굴치(窟峙), 구을치(九乙峙), 구을현 (九乙峴)이라고도 불리며, 상등리 상굴로 가는 고개”로 기록되어 있다. 굴치 : 용산마을 남동쪽에 위치하고, 아산면 용계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당시 십 리 가량 민가(民家)가 전혀 없었고, 해리장과 부안장으로 소를 팔러 넘나들던 이들 이 간혹 산적질도 당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이 주변을 굴치골, 십리골, 무선길(무서 운 길) 등으로도 불렀다 술냉기(수레넹기) : 오산저수지에서 용산마을로 넘어오는(현재 ‘고창군 추모의 집’ 인근까지) 고갯길로 술냉기, 수레넹기라고 불렀다. 마을 분들에 의하면, 옛날 수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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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이라는 예언이 있었고, 그것이 실현되어 현재 차가 다니는 국도 22호선 도로가 생겼다고 한다. : 용산마을 북서쪽에 위치한 저수지로, 최근에 만들어졌다. 이 인근 골짜기 를 백무간이라 하고, 폐촌된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강청동(김근일 회장 의견, 岡清 洞)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저수지로 수몰되기 이전에는 7~8가구의 집터가 남아 있 었다고 한다. 인근에 종처럼 생긴 인경바위가 있다. 욧골(요골) : 용산마을 남쪽, 계명산 밑자락에 위치한 골짜기로, 1930~40년대에 폐촌된 외동(外洞, 혹은 호동이라고도 불림)마을이 있었다. 가막골, 가막제 : 용산마을 서쪽, 뒷산 사이의 골짜기와 저수지로 점토 자리와 그 릇 깨진 것 등이 있어 가마터였다고 여겨진다. 가막골, 가막제라 부른다. 가막제, 먹 방제(용산마을 동남쪽 먹방골에 위치), 용산제 순서로 저수지가 조성되었다고 한다. 용산천 : 용산마을 동남쪽의 먹방골에서 시작한 천(먹방천)이, 수월산 자락의 강청 동, 수월골, 새안동 세 골짜기에서 내려와 용산마을을 관통하는 천(용산천)과 마을 남쪽에서 합류하여 서쪽의 인천강으로 나아가는 천을 용산천이라고 부른다. 용산마을 을 관통하는 천(용산천)은 상수도가 없던 시절, 큰 마을이었음에도 공동우물이 3개 밖에 없었던 주민들에게, 빨래, 김장 등을 하는 생활 하천이었다고 한다. 앞들 : 용산마을 바로 남쪽에 위치한 지금의 논자리로, 마을 앞에 있어 앞들이라 불린다. 앞갱변 : 용산마을 바로 남쪽에 위치한 지금의 논자리로, 앞 강변에서 유래되었다. 이전에는 용산천 인근의 황무지로 일제 말기에 들로 개간되었다고 한다. 굴번들 : 용산마을 동쪽에 위치한 현재의 굴치(용흥마을) 주변 쪽의 논자리를 말 한다. 솔안밑(설안밑) : 용산마을 서쪽, 가막골 밑에 위치한 현재의 논자리로, 이전에 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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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한 아래쪽이라 하여 솔안밑으로 부른다는 의견(한국지명총람11 전북편) 과 솔암(率庵)이라는 암자가 있어 솔암밑, 혹은 설안밑이라 부른다(김근일 노인회장) 는 의견이 있다. 김근일 회장은 수월사에서 밀려난 스님들과 신자들이, 새로 암자를 지은 것이 솔암이지 않을까 하고 추정과 더불어 근처 저수지를 조성할 무렵 점토와 도자기 깨진 것 등이 많이 나온 것으로 봐 가마터도 운영하지 않았을까, 추측했다. 지금의 마을 사람들은 설안밑이라고 부르고 있다. 더불어 김근일 회장에 의하면, 이 인근에 길죽한 형태의 고인돌 1기가 있었는데, 가막제를 조성할 무렵(1950년대) 웃돌이 없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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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마을 남서쪽에 위치한 솔안밑(논자리)과 법당배미. 설명하고 있는 김근일 노인회장의 뒷모습

: 한국지명총람11 전북편에 의하면, 용산마을 남서쪽 200m 쯤에 있는 논으로 넓이 약 150평 정도가 되며, 옛절 법당이 있었다고 한다. 김근일 노인회장은, “주변사람들과 이야기해 보았을 때, 여기서 옛절의 법당이 아마도 솔암이라는 암자이 지 않을까”라고 추정했다. 덧붙여 전설 같은 이야기겠지만, 수월사의 철관도사가 명 당 터 때문에 임 감사에게 쫓겨, 이곳에 신자들과 암자를 세우고 가마를 지어 그릇 등을 만들며 살았다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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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雲岩) 터 : 

11 전북편에, “바우배기 서쪽 골짜기에 있는

백운암의 터”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의 마을 어르신들은 들어보지 못한 지명이라고 한다. 법당배미의 옛절이 솔암인지, 백운암인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빈대절터 : 용산마을 서쪽편 흥강쪽에 지방도 22호가 지나가는 터널 북쪽산에 있는 옛 절터를 마을 사람들은 빈대절터라고 호칭한다. 전북전래지명총람에는 백운암 터 와는 별도로, ‘삼석암(三石庵) 터’라는 기록이 있지만, 마을 사람들은 처음 듣는 지명이 라고 한다. 삼석암 터가 어디인지, 빈대절터가 삼석암 터인지는 뚜렷하지 않아 보인다. 건넌들 : 용산마을 서남쪽, 용머리 동쪽에 위치한 현재의 논자리로, 용산천을 건너 서 있는 들이라 하여 건넌들이라 불린다. 중보들 : 용산마을 남쪽에 위치한 현재의 논자리로, 용산천 중간에 보를 댄 곳 인 근에 있어, 중보들이라 불린다. 바우배기 : 용산마을 서쪽에 위치한 큰 바위로, 고인돌이다. 지금도 남아있는 ‘바우 배기 시정(옛날 모정 자리)’ 앞에 큰 바위가 배겨(박혀)있어 ‘바우배기’라 불렀다. 일 제시대 때, 길을 내기 위해 바위를 들어내려 했으나, 주민들이 마을의 수호매기(풍수 상 백호자리)라 반대하여 보존되었다고 한다. 배바웃골, 배바우 : 용산마을 동북쪽에 위치한, 현재의 용산주유소 뒤편 골짜기와 인근에 배[船] 모양으로 생긴 바위를 말한다.

3.

인문환경

1) 마을의 유물・유적 문화유적분포지도 고창군에서는, 용산리 유물・유적으로 연기사지(烟起寺址), 수 월사지(水月寺址), 지석묘(支石墓, 고인돌) 6기, 용산리 요지(窯址, 전라북도 기념물 제115호, 2002. 8. 2 지정), 용산리 토기요지(土器窯址), 경주최씨 세효각(慶州崔氏 - 200 -


) 등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용산리의 연기, 용산, 용흥 세 마을 중 용산마을 로 국한시킨다면, 수월사지, 고인돌 1기, 경주최씨 세효각이 해당되고, 용산리 토기 요지는 용산, 용흥마을에 걸쳐져 있다. 이 밖에 비록 유형의 유물・유적은 아니지만, 용산마을 주변 자연을 노래한 근대 한시(漢詩) 용산팔경(龍山八景)이 무형의 유산으로 전해진다. 기타로 아산면 부정마 을에서 옮겨온 열부 상산김씨 기적비(烈婦 商山金氏 記績碑) 등이 있고, 김근일 노 인회장에 의하면 솔안밑 인근에 웃돌(상석)이 길쭉한 형태의 고인돌 1기가 있었지 만, 1950년대 가막제를 조성할 무렵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

(1)

(水月寺址)

용산마을 북쪽 산기슭을 따라 올라가면, 수월사 터가 있다. 문화유적분포지도 고창 군에 의하면, “부안면 용산리 188-1에 소재한 조선시대 절터로 5척 높이의 자연석 석축 기단이 군데군데 허물어진 채 약 30m 길이로 늘어서 있고(수월사 아래 절터), 500m 북측 계곡 기슭을 더 올라가면 기차바위라고 불리는 동서로 수십 미터 연결된 바위가 나오는데, 이곳에도 4자 높이의 길이 21cm쯤의 자연석 축대가 동서로 늘어서 있다(수월사 위 절터). 그 면적이 동서로 54m, 남북으로 45m되는 넓은 유지가 드러 난다. 동국여지승람(東国輿地勝覧) 권(巻) 34「흥덕현조(興徳県条)」 불우편(仏宇 編)을 보면 ‘水月寺在逍遥山(수월사재소요산)’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여지도서(輿志 図書) 흥덕현조(興徳県条)에는 ‘水月寺 県西十五里 在逍遥山下(수월사 현서십오리 재소요산하)’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1760년경까지는 수월사가 유지되었 음을 알 수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근일 회장은 “옛날부터 연기마을 쪽의 소요산 과 별도로 용산마을 뒤쪽에 있는 산을 수월산이라고 불러왔다. 수월사지는 수월산 기 슭에 있는데, 옛 문헌에서 소요산으로 기록한 것은 별개의 명칭인 수월산을 몰랐거나, 제일 높은 봉우리가 소요산이라 통칭하여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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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효각(慶州崔氏 世孝閣) 내에 위치하는 만오(晩悟) 최후경(崔侯慶)의 아들 오월(梧月) 최봉의(崔

鳳儀)의 효행을 기린 정려각(旌閭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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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마을 중앙에 있는 경주최씨 세효각 전경

문화유적분포지도 고창군에서는 전북향교원우대관(전라북도향교재단, 1994)을 인용하여, “경주최씨 후경과 봉의의 효를 기려, 고종 23년(1886년)에 정려가 내려졌 고, 고종 26년(1889년)에 정려각이 건립되었다고 한다. 정려각 내에 비석 2기가 있 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창군지에서는 “최봉의는 부친의 효행을 본받아 실천했는데, 일찍 아버지를 여 의고 편모를 모시면서 정성(定省)14)의 절차와 어초(漁樵)15)의 공양을 극진히 하였 다. 그의 모친이 별세하자 3년의 시묘를 마치고 부친을 추모하는 3년 상을 다시 이 행하니 어려서 못다한 도리를 이행한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나라에서 1885년 (고종 22년)에 부친과 함께 명정(命旌)16)되고 좌승지(左承旨)의 증직(贈職)17)이 14) 昏定晨省의 의미로 밤에는 부모의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이른 아침에는 부모의 밤새 안 부를 묻는다는 뜻. 부모를 잘 섬기고 효성을 다한다는 말. 15) 물고기를 잡는 일과 땔나무를 하는 일. 16) 정려를 명(命) 받았다는 의미. - 202 -


”라고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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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세효각 안에 새겨진 최후경 정려

<사진 9> 세효각 안에 새겨진 최봉의 정려

제각 안의 정려에는 고종 22년 을유(乙酉, 1885년)로 기록하고 있다. 김근일 회장 에 의하면, 용산마을 계모임에서 경주최씨의 효행과 덕을 기리는 비석을 지금의 용 산마을 입구 입석비 부근에 세워 두었다가, 마을 입구 도로 확장시 최씨정각 앞으로 옮겼다고 한다(사진 10). 비석 뒷면에는 59명의 계원 명단이 적혀 있고, 비석 옆면 17) 죽은 뒤에 벼슬을 주거나 높여 주던 일. - 203 -


기미(己未)년 7월 경주최씨 최경모 서(慶州崔氏 崔璟模 書)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1919년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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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0> 세효각 좌측 비석

<사진 11> 세효각 우측 비석

고인돌

용산마을 서쪽 입구 옛 모정(현재 ‘바우배기 시정’) 앞에 박혀 있는 고인돌이다. 문화유적분포지도 고창군에는 고창지방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전북대학교 박물관, 1984)를 인용하여, “부안면 용산리 308-2에 소재하는 청동기 시대의 지석묘로, 크 기는 590×290×60cm, 장축은 동서 방향이며 상석의 평면・단면형태는 장방형을 띤 다. 지석은 4개가 확인된다”라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현재 바우배기 고인돌 일부가 없어져, 상석이 우측으로 기울어져 있다.

- 204 -


<

12> 바우배기 고인돌과 모정. 바우배기 고인돌 지석이 없어져,

상석이 우측으로 기울어져 있다. 뒤편에 보이는 비석이 창령조씨 효열비이다.

(4) 

토기요지(土器窯址) 고창군에는 “용산리 산 18-8에 소재하며, 삼국시대~고려시

대에 걸쳐 청자가마터는 용흥마을과 굴치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를 따라 100m 정도 가면 도로의 북측으로 해발 141m의 야산에 위치한다. 이곳은 문화유적총람에서 청자가마터 3기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추정되는 곳이다. 마을주민에 의하면 밭의 개 간 당시 많은 토기편이 퇴적된 상태로 노출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최근 확장된 마 을 진입로에 의해 기존의 사면부가 2m이상 깎이게 되어 도로변에 토기편이 산재하 고 있다. 경질토기편, 개배, 고배, 삼족토기, 연질토기편과 청자편 등의 유물이 상당 수 수습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5) 열부 상산김씨 기적비(烈婦 商山金氏 記績碑) 창령조씨(昌寧曺氏) 조병인(曺秉寅)의 부인으로, 부친은 이중(以中)으로 참봉(参 奉)을 지냈다고 한다. 이 비석은 상산김씨 부인의 사위 등이 아산면 부정마을에 세 워둔 것으로, 자손들이 마을을 떠나 돌볼 사람이 없자 용산마을 창령조씨 선산 아래 - 205 -


1990년대에 조영도 씨가 옮겨둔 것이라고 한다.

2)

(龍山八景)

용산마을 어르신들끼리는 용산팔경이 있다는 이야기를 대부분 알고 있었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을 기억하는 분은 한 분도 없었다. 그러나 1990년대 말경, 용산마을 노인회 모임에서 재차 거론되던 것이 계기가 되어, 당시 조석도(趙錫道, 86세) 님이 집 에 보관중인 자료들 속에서 용산팔경 한문 단구(漢文 短句)가 기록된 1장의 메모지를 찾아낸다. 이어 김근일 노인회장이 문구 메모를 한글로 번역한 뒤, 그 내용을 마을회관 에 게시함으로써 용산마을 주민 모두가 용산팔경의 의미를 쉽게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용산팔경은 이 마을 출신의 학자이자 이웃 마을의 훈장 역할까지 하였던 고(故) 최봉규(崔鳳圭, ? ~1940년 전후) 님이, 용산마을 주변 아름다운 자연환경 8가지를 기 록한 것이다. 근래 김근일 노인회장이 이 문구를 해석해 마을회관 액자에 기록해 두고 있었고(사진 13), 구술 과정에서 미처 수정하지 못한 부분을 다음과 같이 보완하였다.

<

13> 마을회관 액자에 걸려 있는 용산팔경과 그 번역문

- 206 -


(용산팔경) 水月飛瀑(수월비폭) - 수월산 폭포수 물방울 날려 建旗清風(건기청풍) - 건기산에 맑은 바람 이루고 火矢落照(화시낙조) - 화시봉 석양 햇빛은 甑峯晴嵐(증봉청람) - 시루봉에 맑은 아지랑이 이루네 鶏山夜月(계산야월) - 계산에 달 밝아 닭 울음 소리에 龍頭帰雲(용두귀운) - 용을 감싼 구름이 흩어져 돌아가고 仁江漁笛(인강어적) - 인천강 물고기와 피리소리 흥에 취하다 逍遥暮鐘(소요모종) - 소요사 종소리에 날 저문 줄 알았네

조석도 님에 의하면, 최근 새로 지어진 바우배기 시정 자리는 옛날 모정이 있던 자 리였고, 그 모정 상량에 용산팔경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몇 십 년 전 어느 날, 조석도 님에게 친구(이름을 기억 못함)가 용산팔경을 메모해 주었고, 조석도 님은 그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 마을 노인회에서 용산팔경에 대한 이야기가 나돌던 차 에, 자료정리를 하던 어느 날 조석도 님은 새삼 그 메모를 발견한 것이다. 이렇게 발 견된 용산팔경은 김근일 회장이 한글 해석을 덧붙이고, 또 붓글씨로 마을회관 액자에 게시하게 된다. 나아가 마을입구 입석비 옆 작은 비석으로까지 새겨지게 된다. 조석도 님은 “북과 노래를 잘하던 이 마을 출신 고(故) 황근익(黄建翼, 1936년생) 씨가 용산팔경에 스스로 곡을 붙여 단가18)(短歌)도 만들었다고 하나, 그 근거와 흔 적은 뚜렷하지 않다”라고 전했다.

18)

부르기 전에 목을 풀기 위해 부르는 짧은 노래 - 207 -


<

14> 입석비와 용산팔경 비석

<사진 15> 비석에 새겨진 용산팔경

<사진 16> 지금의 용산팔경을 있게 한, 당시 메모지

3)

<사진 17> 당시를 설명하는 조석도(사진 왼쪽), 김근일 님

이야기 법명은 알지 못하는 쇠로 된 관을 쓴 철관도사가 수월사를 창건했다. 평양

감사까지 역임한 나주임씨(羅州林氏) 임감사가 절 부근 묏자리가 명당이라 하여 묘 를 만들면서 수월사가 없어지고 말았다. 연기동 쪽의 연기사도 임감사가 묘를 만들 면서 없애버렸다. 명당자리에 묘를 쓰기 위해 임감사가 상여를 8~9개 짊어지고 와서 세도를 부렸다 고 한다. 하지만 동네사람들이 상여를 막아서자, 뒷산으로 몰래 넘어와 묘를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 208 -


쫓겨나 스님들은 연기사로 가고, 연기사에서도 쫓겨나 소요사로 옮겨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연기사에 있던 사천왕상이 전남 영광군 불갑사로 옮겨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렇게 조성된 묏자리는 최근 20년 전까지도 임씨 문중에서 시사를 지냈고, 지금 도 수월사 절터에는 선명하게 상터, 하터, 방앗간, 우물(중샘), 돌담 등이 남아 있다.

4.

풍속과 현재

1)

풍속

농악놀이는 주요 절기인 정월 대보름, 단오, 유두, 칠석, 백중, 동지 등에 했다고 한다. 정월 대보름날 전날은 당산제를, 정월 대보름날은 농악과 줄다리기 등을 하는 마을의 풍속이 있었다. 마을 당산으로는 어른 3~4명이 그 둘레를 보듬어야 될 정도로 오래된 팽나무 당 산이, 용산마을 입석비 길 건너편 버스 정류장 부근에 있었다. 가난하게 살아도, 6・ 25 전쟁과 같은 상황에서도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 되면 볏짚으로 줄을 만들고 당산 나무에 감았다. 팽나무 당산을 감는 두 줄을 청룡, 황룡이라 불렀고, 남자(청룡), 여 자(황룡)로 나눠 줄다리기도 했다. 하지만 농촌 인구가 점점 줄어든 70~80년대에 당산나무와 당산제, 정월 대보름의 줄다리기 등이 없어지거나 중단되었고, 농악은 2000년 전후까지 진행하다 중단되었 다고 한다.

2) 성씨와 인구 주요 성씨로는 김해김씨(17가구), 전주이씨(15가구), 경주최씨 등이 있고, 근래 들어 성씨들이 다양해졌다고 한다. 인구는 1960년대 후반 130여 세대 600여 명 가량이 거주했던 적이 있다고도 한다. 70년대 중반 이후 산업화로 인해 농촌의 인구가 감소하여 2009년 12월 말 현재 - 209 -


76

165명(남 79, 여 86명)이다. 연령대별로는 10대 미만이 5명, 10대 15명, 20

대 25명, 30대 8명, 40대 23명, 50대 25명, 60대 18명, 70대 36명, 80대 이상이 10 명이다.

3)

생활환경

김근일 회장에 의하면, 용산마을은 논이 많지 않아, 옛날에는 5마지기만 지어도 부자였다고 한다. 어릴 적(1930~40년대)부터 부모들의 생업이 한지(韓紙)를 생산 하는 일이었다. 지금의 앞 논은 닥나무 밭이었고, 많은 일손이 필요한 일이라 당시 몇몇 주요 생산업자들이 마을 사람들을 고용하여 일했다. 먹고살기 어렵던 시절에, 일거리를 갖고 일을 하면 먹고살 수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용산마을로 찾아들었 다. 한때 대부분의 집들은, 방만 있으면 가족을 데리고 들어와 살다보니, 한집에 몇 가구씩 살았다. 한지도 소금, 담배처럼 정부의 통제 품목이었고, 생산물품은 산업조 합에 납품하였다. 1960~70년대가 되어서야 통제 품목에서 해제되어 자유로운 거 래가 가능했다. 한지공장은 마을 앞에 있었고, 1960~70년대 주요 소득원이었다. 하지만, 한지 수요가 줄어들면서 공장이 없어지자, 개별 가정에서 한지를 생산했 는데, 가정에서도 점점 생산이 줄어들어 추상복(秋相福) 님이 돌아가시는 1990년 대가 한지 생산의 마지막이 되었다. 근래 새마을사업을 통해 관정개발 등이 이루어지면서 논농사로 전환하였고, 1980년대 저수지 축조, 지하관정개발 등을 통해 다양한 작목 재배가 가능해졌다. 1990년대 경지정리사업, 농기계 보급 등을 통해 논농사 위주로 되고, 2000년 이후 논농사와 복분자, 고추가 주요 소득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일부 세대가 감나무 등 과수 재배, 소・돼지 등 축산, 버섯 재배 등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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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18> 마을회관 옆 용산마을 종합개발안내도. 마을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2000년까지 3년간 산림청 산촌종합개발사업마을로 지정받아 국비 14

억 9천 7백만원, 지방비 3억 8천 5백만원, 융자 2억 1백만원, 총 20억 8천 3백만원 이 투입되었다. 마을 확포장 2.2㎞, 상하수도 100% 보급, 산촌 종합회관 1동, 모정 (세심정) 등을 통해 생활환경이 개선되었다. 2009년 6월 현재, 용산리 전체 면적은 약 12.362㎢이며, 논은 0.643㎢(약 5.2%), 밭은 0.5㎢(약 4.0%), 임야는 10.404㎢(약 84.2%)로 대부분 산지이다. 용산마을의 주요 산업은 농업이며, 주요 생산물은 벼, 복분자, 고추 등이다. 교통은 1990년대 이후 22번 국도가 정비되고, 2000년대 흥덕-선운사간 4차선 도 로가 개설되어 편리해진 부분이 있다. 개별 가정용도(특히 부잣집)로 사용한 우물 3~4개가 있었지만, 오래전부터 마을 공동우물은 3개였다. 마을 북쪽에 1곳, 중앙에 1곳, 용산가게 앞에 큰 우물 1곳이 있었는데, 현재는 전부 폐쇄되고 가게 앞은 원형 이 남아 있는데 사용하지는 않고, 보존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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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마을 가게 앞 우물

<사진 20> 우물 안 모습

4)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에 소속된 교회로서, 1927년 4월 1일경19) 이 아각 선교사(미국인, 미국 남장로교회 파견선교사)와 박성채(朴成彩) 전도사 등의 노력으로 설립되었다고 한다. 현재 조동문 목사(2006년부터), 정기환, 김정수(金正 洙) 장로(2000년부터)가 사역하고 있으며, 교구(教区)는 용산리 연기, 용산, 용흥마 을과 아산면(雅山面) 삼인동(三仁洞), 심원면(心元面) 수다동(水多洞)이다. 용산교회 는 종교활동과 더불어 어려운 분들께 격주로 김치, 밑반찬 등을 전달하는 구제활동 등과 필리핀에서의 선교활동도 하고 있다고 한다.

19) 6 25 한국전쟁 등으로 인해 기록 자료가 소실되어, 설립시기는 분명하지 않다고 한다. 교회연혁에 따르면, 1925년 송황룡(宋黃龍) 집사가 아산면 탑정리에서 개척(6년 가량)하 였고, 이후 1930년 10월에 이아각 선교사와 박성채 전도사의 활동으로 현 위치인 부안면 용산리로 옮겨왔다고 한다. 하지만 조동문 목사는 현재 남아 있는 자료 등을 통해, 창립 일시를 유추해 보았을 때 1927년 4월 1일경 것이라고 하였다. - 212 -


<

21> 용산교회 전경

<사진 22> 최용만 집사 송덕비

앞에는 고(故) 최용만(崔鎔満) 집사 송덕비가 있다. 송덕비에는 최용만 집사의 시(詩) ‘망향(望郷, 1990년)’과 그를 기리는 글귀가 아래와 같이 새겨져 있다.

참 사람이 있다. 1929년 7월 3일에 와서 1993년 7월 17일까지 이 땅을 누비며 참 사랑을 실천했던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삶을 살았던 사람. 필요로 하는 일이면 두려움 없이 늘 열정적이던 교사, 의사, 음악가, 시인, 화가, 영농전문가. 테레사처럼 이웃의 질고를 함께 나누었던 사람. 누구에게나 반가운 친구가 되어 따뜻했던 사람. 자신은 외로웠지만 늘 행복을 건네주던 사람. (중략)

<사진 23> 고 최용만 집사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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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선숙 씨 - 고 최용 씨의 부인)


씨(60세)는 최용만 집사에 대해, “3남(최용만, 최용, 최용일) 3녀(최국봉, 최효봉, 최인봉) 중 장남으로, 위로 누님 한 분이 있었다. 전주고등학교를 나와 일본 어, 중국어, 영어를 잘했고, 의료에도 능했다. 나무 삽목, 수박 접목 등의 기술도 알 려주고, 배추 신품종을 도입하여 재배에 성공한 후 마을 젊은이들에게 전파하는 등 영농에도 밝으셨고, 시(詩)도 쓰고, 음악, 미술 등에도 재능이 있었다”라고 소개했다. 덧붙여 “그 분은 결혼도 하지 않았고, 교사나 의사자격증이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동네 중・고등학생들에게 영어, 젊은 여성들에겐 오르간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이 뱀에 물렸다거나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을 때, 주사를 놓는다거나 간단한 외과적 시술을 통해 웬만한 병은 다 돌봐주셨다. 어렵던 시절, 병원비도 없고, 병원 가기가 쉽지 않던 상황에서 사비를 들여가며 약, 주사 등을 조치하셨다. 책을 즐겨 보셨고, 인물화, 풍경화도 잘 그리신 보기 드문 양반이셨다”라고 설명했다. 이 송덕비는 재경용산향우회와 용산마을 주민모임에서, 최용만 집사가 살아온 삶 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2000년에 세웠다고 한다.

5) 옛날부터 모정(시정)은 세 곳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 북쪽에 있는 모정으로, 산에 서 내려오는 바람을 맞이한다 하여 영풍정(迎風亭), 지금의 용산교회 앞에 용산천을 바라보는 관수정(観水亭), 바우배기 옆의 ○○정20)(정자 이름이 있었으나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이 있었지만, 옛 모습이 남아 있는 곳은 영풍정 한 곳 뿐이라고 한다. 2000년 지금의 마을회관을 지을 때, 회관 옆 모정도 새로 건립했는데, 수월폭포 옆에 터만 남은 세심정(洗心亭)의 이름을 빌려,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지금의 바우 배기 시정은 옛 모정 자리에 마을 젊은이들이 새로 지었다고 한다.

20)

바우배기 고인돌 옆의 모정이라 ‘바우배기 시정’이라 부른다. - 214 -


<

24> 영풍정, 겨울이라 천막으로 막아두었다.

<사진 25> 영풍정 상량에 새겨진 기록

6) 통상 년 2회 개최하며, 12월 말경 임원개편 등 결산 총회, 칠석날 중 간보고 및 단합대회 성격의 잔치행사를 갖는다. 이장 1명에 반장 3명이 있고, 노인 회는 60명 내외, 부녀회 20명 내외, 청년회(‘용산마을 번영회’로 호칭) 50명 내외이 다. 현재 박행수 이장, 김근일 노인회장, 이기영 노인회 총무, 하선자 부녀회장, 이강 인 용산마을번영회 회장이 있고, 매년 3~4월경에 대형버스 1대를 빌려 당일 단체관 광을 다녀온다고 한다.

7) 역대 이장21) 이 장 김범욱 김치범 이강용 김복원 이강삼 김복원 송근학 이강삼

재임기간 ? ~ 1983. 12. 31 1984. 1. 4 ~ ? ? ~ 1987. 12. 31 1988. 1. 1 ~ 1989. 12. 1990. 1. 1 ~ 1990. 12. 1991. 1. 1 ~ 1991. 12. 1992. 1. 1 ~ 1993. 12. 1994. 1. 1 ~ 1995. 12.

31 31 31 31 31

이 장 김범옥 황치관 이강묵 송태용 이강묵 이강삼 박행수

재임기간 1996. 1. 1 ~ 1997. 12. 1998. 1. 1 ~ 1999. 12. 2000. 1. 1 ~ 2001. 12. 2002. 1. 1 ~ 2003. 12. 2004. 1. 1 ~ 2005. 12. 2006. 1. 1 ~ 2007. 12. 2008. 1. 1 ~ 현재

31 31 31 31 31 31

21) 부안면 사무소에서는 이장 명단이 기록되기 시작한 해가 1983년부터라고 한다. 초창기 라 기록이 명확하지 않은 분들이 몇 분 있다. - 215 -


○ 도움 주신 분 •

(金謹一, 74세, 노인회장)

• 이기영(李起英, 72세, 노인회 총무) • 이기열(李起烈, 77세) • 송근학(宋根学, 73세) • 조석도(趙錫道, 85세) • 김정수(金正洙, 59세) • 조동문 목사(용산교회) • 박행수(이장)

○ 참고문헌, 자료 • 용산마을 개관 정만수, 2009 • 한국지명총람11 전북편 한글학회, 1981 • 牟陽城의 얼 고창군, 1982 • 고창군지 고창군지편찬위원회, 1992 • 전북전래지명총람 유재영, 민음사, 1993 •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2003 • 문화유적분포지도 고창군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05

구술 중인 이기영, 김근일 님 모습

- 216 -


2 계산리 심원면 사등 검단선사 해리면 동호 수륙재 고창군 취락과 산지명 고창학술문화연구회 회칙 고창학술문화연구회 명단



계산리 마을 조사보고서22)

전북 고창군 아산면 계산리의 한 부분이다. 계산리는 법정리인데 편 의상 1구와 2구로 나뉜다. 1구는 부정(부정ㆍ지산ㆍ새터ㆍ병암)이고, 2구는 사신원 ㆍ계산ㆍ비석촌이다. 이 중에서 원래 가장 큰 마을이었던 사신원마을부터 살펴보도 록 하겠다. 이 마을에 대한 관련 사료는 매우 간단하여 실상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지만 이에 대한 부족한 점을 현지 조사를 통해서 해결하고자 한다. 현지 조사 시 관련 유적과 유물조사는 물론이고, 지형적 특징도 살피면서 토박이들의 구술도 적극 참조하였다. 본 조사에서 토박이라 함은 해당 마을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살고 있는 주민을 뜻한다.

1. 1)

위치

이 마을은 행정구역상 아산면 계산리에 속하며 사신원마을이라 불리고 있다. 고창 군청으로부터 지도상 서편으로 직선거리 약 9.25km의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 마 을에서 제일 가까운 마을은 동쪽에 있는 계산마을이다. 사신원마을은 북편과 남편에 작은 산이 자리 잡고 있어서, 동서로 골이 형성되어 있는 듯한 형상이다. 사신원 서 쪽에 있는 산이 배바우이고, 북쪽은 뒷산(조씨 선산)이고, 남쪽은 앞산이라 부른다. 따라서 이 마을은 사철 골바람이 세게 부는 곳이다. 특히 계산제(최근에 조성된 저 수지)가 있는 곳에서 불어오는 골바람이 강하였다. 여름은 시원하여 그 덕을 보지만 겨울은 차갑게 느껴진다. 최근 마을 앞에 시정(정자)을 만들어 놓았는데 항시 시원

22)  물길과 사신원의 옛길조사 (고창군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소, 2009. 8)에서 발췌한 것임. - 219 -


바람이 불어 잠깐만 앉아 있어도 더위를 잊을 수 있다. 이 시정에서 여름이라도 밤에는 오래 누워 있지를 못한다. 그만큼 시원한 바람이 계속 분다는 것이다. 다만 계산제가 들어선 뒤로 바람이 약간 약해졌다. 계산제 둑이 골바람을 일정 부분 차단 하기 때문이다. 사신원마을의 시원한 골바람은 여름철 관광자원으로도 활용할 수 있 을 것이다. 마을의 서쪽에서 내려오는 물과 북서쪽 계산제에서 내려오는 물이 만나 서 형성되는 사신원천은, 동쪽으로 더 내려가서 인천강(仁川江)23)으로 흘러간다. 농 사환경은 좋지 못하였다. 지금은 1970년대 이후의 경지정리로 논들이 평지에 들어서 있지만 예전에는 야산처럼 잡목이 들어서 있거나 풀이 무성한 곳이 많았다. 주로 밭 농사를 위주로 생활하였다.

2)

역사

사신원마을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부근에 있는 고인돌이 말해준 다. 고인돌은 대개 가까이에 물이 넉넉하고 농경지가 자리하고 있는 곳에서 그 모습 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신원마을 주변에 있는 고인돌도 예외는 아니다. 또한 이곳은 앞뒤로 산이 자리잡고 있어서 마치 동서로 긴 회랑 같은 자연지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자연지형으로 인하여 일찍부터 사람들이 왕래하기 쉬운 교통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아마도 원시시대부터 사람들이 드나들던 교통의 흐름과 같이하며 이곳에 누 군가에 의해서 정착이 시작되었던 모양이다. 이는 이곳의 자연지형과 고인돌의 존재 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고인돌의 존재로 인하여 적어도 이곳에는 청동기시대부 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을 것이다. 현재 표에 열거한 고인돌 중 하나가 계산제로 오르는 길 오른편에 옮겨져 복원되 어 있다. 4개의 받침돌이 상석을 받들고 있는 바둑판형이다. 원래 위치는 마을 주민 들 말에 의하면 계산제 둑 있는 곳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고인돌의 장축이 동서 23) 가까운 곳인 아산면 영모정 마을에 변성진(卞成振, 1540~1614년)이 살았다. 그의 호가 인천(仁川)이므로 인천강이라는 이름의 연원은 적어도 16세기 이전까지 소급해 서 생각할 수 있다. 아마도 초계 변씨 성진은 인천강이라는 이름에서 그의 호를 따온 것 이 아닌가 한다. 변성진에 대해서는 아산의 역사와 문화, 고창군 아산면, 2004, 175~176쪽 참조. - 220 -


향하고 있다는 것은 사신원천의 방향, 그리고 회랑같은 이곳 지형의 방향과 같은 것이어서 흥미롭다. 고인돌을 만든 사신원의 먼 원주민들이 자신들이 살던 곳의 자 연지형을 의식하며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고인돌을 사신원마을 사람들은 그냥 ‘바우’(바위)라고 불렀다.

유적명

소재지

시대

유적종류

유적개요

참고문헌

사신원에서 계산제로 향하는

계산리 지석묘 유적

아산면

농로 등에 4기가 위치한다.

문화유적분포지

지석묘는 1기를 제외하고 모

도 고창군, 원

계산리

청동

지석묘

두 상석이 이동된 상태로 장

광대학교 마한백

1293-

(고인돌)

축은 동서방향이다. 현재 자

제문화연구소ㆍ

리를 옮겨 복원해 놓았다.

고창군,

경위도좌표 : N 35°27′45.

238쪽 참조.

1

2005,

4″, E 126° 36′ 05.2″

<

1> 사신원마을 주변 고인돌

문자로 기록되어진 사신원의 흔적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사 신원(四信院)은 무장현의 북쪽 18리 지점에 있다”24)는 내용이 그것이다. 신증동국 여지승람은 조선 중종 25년인 1530년에 편찬되었다. 따라서 사신원마을은 이 책이 편찬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그 상한시기를 정확 히 알 수는 없다. 현재 사신원의 행정상 주소는 ‘전북 고창군 아산면 계산리 사신원’이지만 조선 전 기에는 전라도 무장현 관할이었다. 원(院)은 국가 교통로의 주요한 지점에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그 원이 있던 자리가 어느 곳인지 궁금하다. 토박이들은 김영 임의 집과 옛 시정 사이가 ‘원터’ 또는 가마가 자고 가던 ‘원집’이라고 말한다. 일제 말기에 누가 묘를 쓰기 위해 명당이라고 하던 곳을 팠더니 집터가 나왔다. 바로 그 집터가 원터라는 것이다. 또한 방재춘의 집 바로 동편을 ‘몰방죽’이라고 부르고 있다. 몰방죽은 원터에 드나들던 말이 물을 마시던 방죽이라고 한다. 이 방죽의 크기는 현 24) 신증동국여지승람권36, 전라도 무장현 역원. - 221 -


새 시정의 절반 크기였으며,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가 않았다. 현재는 메워져 사 라지고 없다. 사신원 본래 터가 어디인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지만 토박이들의 구술이 참고된다. 그런데 현재 이 마을에 살고 있는 토박이들은 사신원의 한자 표기를 ‘使臣院’이라 쓰고 있고, 옥천조씨(玉川 趙氏) 족보에도 ‘使臣院’이라 쓰여 있다. ‘四信院’이라는 한 자 표기를 이구동성으로 처음 본다고 말한다. 아무튼 현재 거주하고 있는 이들의 조 상들을 조사하면 이 마을의 역사에 대해서 좀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마을은 원래 옥천조씨가 제일 먼저 터를 잡고 살았다. 현재 확인 가능한 사신원마을 의 첫 입주 성씨는 옥천조씨이다. 또한 옥천조씨로서 고창군에 제일 먼저 들어온 이 가 처음 둥지를 튼 곳도 사신원마을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옥천조씨를 일명 사신원 조씨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신원에 맨 처음 정착한 이는 조덕린(趙徳隣)이다. 조덕린 이 1595년 임진왜란 시에 사신원에 와서 터를 잡았다고 한다.25) 현재 사신원에 거 주하는 사람들 중 조씨는 생존해 있지 않고 조씨들의 미망인들은 여러 명 생존해 있 다. 최근까지도 조씨들이 많이 살았다하므로 옥천조씨 덕린 이후에 계속해서 사신원 에 사람들이 거주하였다고 단정된다. 사신원마을의 입향조(入郷祖)인 옥천조씨에 대 해서는 뒤에서 좀더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다.

3)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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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신원마을 전경

25) 아산의 역사와 문화, 고창군 아산면, 2004, 76쪽. - 222 -


원래 25호가 살았으나 여느 농촌처럼 젊은이들이 도회지로 떠나가고 현재는 10호가 남아 있다. 그런데 이나마도 두 집이 비어 있어서 실제는 8호가 이 마을의 전체이다. 나머지 8호의 성씨 구성은 각성바지이다. 하지만 원래 이 마을은 옥천조씨가 제일 많이 살았었다. 8호에 실제 거주하고 있는 사람은 모두 11명이다. 남자는 3명이고 여자는 8명인데, 이들의 나이는 대부분 70대 이상이다. 사회학적으 로 총인구 중에서 65세 이상의 노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20% 이상이면 초고령사회 라고 한다. 이 마을은 이미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것이다.

(

조원훈의 처)

(방재춘 부부) <

> (김영임) <원터> <옛 시정> <재실> <당산>

(김복순)

(김정자)

(전홍균 부부)

(김정자)

(빈집1)

(빈집2)

(이병연 부부)

<새 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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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신원마을의 구성과 배치

위의 표는 현재 사신원에 거주하고 있는 구성원과 그들의 집을 평면에 배치해서 표시해 본 것이다. 아울러 마을 시설물의 위치도 적어 보았다. 정밀하지는 않지만 대 략적인 이해는 가능하리라 본다. 그 구성에 대해 설명을 해 보면, 남자는 방재춘, 전 홍균, 이병연 등 3인이다. 여자는 고 조원훈의 처, 방재춘의 처, 김영임, 김복순, 김 정자, 전홍균의 처, 김정자(동명이인), 이병연의 처 등 8인이다. 이렇게 해서 사신원 의 총구성은 11인이 된다. 본 조사 초기에는 12인이었는데 지난달인 6월에 조원훈 이 사망하여 11인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이중에서 방재춘 부부는 고창읍내에 집이 있어서 양쪽으로 왕래하면서 거 - 223 -


있다. 따라서 항상 거주하고 있는 이는 9인이 되는 셈이다. 혼자 살고 있는 미망인들의 남편들 성씨는 대부분 조씨이다. (빈집1)에 살던 고부순은 남편 조씨가 사망한 뒤로 서울의 자녀 집에 거주하고 있다. (빈집2)는 박연팔의 집인데 역시 서 울의 자녀 집으로 거주를 옮겼다고 한다. 전홍균은 할아버지 때에 장성에서 사신원으로 이주하였다. 전홍균의 처는 해리면 에서 시집왔다. 고 조원훈의 처가 살고 있는 집과 방재춘 부부가 살고 있는 집 사이 에 공터가 있는데 이곳은 원래 조명률이 살던 집 자리이다. 조명률은 사신원에서 제 일 잘 살던 사람이었다. 그는 인물도 좋았으며 전리(돈놀이)로 많은 돈을 벌었으나 6・25때 파산하였다. 자손들은 타지에 있다고 한다. 마을의 맨 동쪽에 있는 기와집이 옥천조씨 재실이고, 그 왼쪽에 옛 시정(모정, 정 자)이 있다. 옛 시정은 70여 년 전에 만들었다 하며,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그 상 량에 검은 먹으로 정축(丁丑) 4월 8일에 세웠다고 쓰여 있다. 70여 년 전에 만들었 으며 그것이 정축년이므로 1937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1937년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에 시정을 조성했다고 이해된다. 재실과 옛 시정 사이에 있는 것이 사신원의 당산이다. 새로운 시정은 최근 마을입구에 조성하여 주민들의 쉼터로 이용 되고 있다. 아무리 더운 날씨에도 새 시정에 앉아 있으면 이내 땀이 가신다. 항시 시 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다. 한편, 지금은 없지만 계산제 안에 두 집이 살았는데 행정구역상으로는 학전리에 속했으나 사신원마을 사람들과 생활을 같이 하였다. 이상과 같이, 사신원마을의 현황을 살펴보았다. 작은 마을이라 현황 또한 소박하 다. 다음에서는 이 마을 생활의 이모저모를 기술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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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시정에서 쉬고 있는 마을 사람들

4) 광복 후에 25가구가 살았었다. 그때는 젊은이들도 많아서 편을 갈라 서 축구를 할 정도였다. 축구는 주로 현 시정 앞에 있는 들에서 했다. 젊은이들의 떠 드는 소리로 요란했을 들녘은 현재 논으로 변해 있다. 그때 공을 차던 젊은이 중 한 명이었을 방재춘에게 시집을 온 강복금은 가마를 타고 왔다. 그녀는 아산면 목동리 당산에서 19살에 사신원으로 시집을 왔다. 가마는 눈 오는 날에 인천강 징검다리를 건너 왔다. 원래 가마꾼은 8명이었는데 강을 건널 때만 여건 상 4명이 가마를 멨다. 그런데 징검다리 위에서 가마가 흔들려 물에 빠질까봐 혼이 났다고 한다. 당시 사신 원 사람들은 혼인 시에 가마를 이용했다. 그 가마는 이장집에 보관하였으나 지금은 옛날이야기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사신원천 냇물을 물이 맑아서 식수로 사용하였다. 지금은 상수 도를 사용하고 있다. 냇가에 빨래터도 있었다. 현 마을 시정에 가까운 남쪽으로 흘렀 던 시냇물이 지금은 경지정리하면서 산 아래로 물줄기가 이동하였다. 다슬기, 가재, 깔대기(검은 점이 있는 물고기), 은어, 참게, 장어, 자라 등이 있었다. 장어는 걸쾡이 - 225 -


잡았다. 걸쾡이는 세 가닥으로 되어 있었다. 그때는 장어를 먹을 때 비린내 난다고 껍질을 벗겨서 고추장에 발라서 구워 먹었다. 마을 냇물을 식수로 이용하고, 그곳에서 천렵하던 것은 이제 추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마을의 경제생활은 원래 밭농사 위주였으나 경지정리를 한 후에는 논농사를 주 로 하고 있다. 이 곳 사람들이 제일 많이 이용하던 장은 해리장이었다. 장터까지는 흔히 십리길이라고 말한다. 실제는 그보다 더 먼 거리이다. 해리장보다 무장장이 약 간 험하고 더 멀었다. 무장장까지 걸어가는데 빨리 가면 1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해리장은 소전이 유명하였고 제일 크게 열렸으며, 걸어서 접근하기에 편하여 제일 많이 이용하였다. 해리장을 갈 때는, 깨진바위 → 월성동 → 평지 → 수락을 거쳐서 갔다. 그 다음으로 이용하던 장은 무장장이었다. 무장장은 끄렁재를 통해서 넘어 간 다. 읍내에 있는 고창장은 가끔 이용하였다. 사신원 사람들은 장에 가서 쌀, 보리, 고구마종자, 깨 등을 가져다가 팔았다. 그리 고 반찬거리를 사온다. 계산마을에 복숭아밭이 있어서 사신원 사람들은 보리를 가져 가서 복숭아와 바꿔먹기도 하였다. 이 마을은 현재 특별한 공동제사는 없다. 다만 당산(堂山)을 숭배하는 민속이 있 다. 원래 당산은 나무인데 동서에 각 한 그루씩 두 그루가 있었다. 둘 다 팽나무인데 동쪽에 있는 것을 앞당산이라 했고, 서쪽에 있는 것을 뒷당산이라 했다. 정월 보름 저녁에 농악을 하면서 줄을 감아 놓는다. 만약 정월 보름날이 좋지 않으면 2월 초하 루에 했다. 짚으로 만든 줄의 굵기는 집 기둥 정도 되고, 길이는 50m 정도 되었다. 그 줄을 당산나무에다 감아 놓았던 것이다. 나무보다 더 컸던 앞 당산나무는 익산에 거주하는 조우철 소유의 논에 있었으나 경지정리하면서 베어졌다. 뒷당산도 나중에 없어졌다. 조사자 생각에 양 당산나무 사 이에 마을이 있으므로, 두 당산은 마을을 양쪽에서 보호하는 형세였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앞 당산나무가 베어지고 난 뒤에 젊은 사람들이 아프기도 하고 또는 죽기 도 하는 등 안 좋은 일들이 생겨서 다시 당산을 모시기로 하였다. 그래서 조씨 재실 과 옛 시정 사이에 있는 현 위치에 팽나무 당산대신 돌 당산을 세운 것이다. 앞 당 산나무의 북쪽 가까운 곳이다. 높이는 어른 가슴팍 정도 된다. 아무튼 그 뒤로 질쌈 - 226 -


당산제를 올리게 됐다. 원래는 당산제만 올리던 것을 질쌈제까지 올리게 되었 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효험을 보았다고 한다. 얼마 전부터는 줄 대신에 짚으로 작 은 움막 지붕처럼 만들어 덮어 놓았다. 따라서 육안으로는 돌 당산을 확인할 수 없 다. 그런데 그마저도 올해부터는 아무것도 안 했다고 한다. 젊은이들이 없는 것이 주 된 이유가 된다. 그리고 장례를 치를 때 사용하던 상여틀은 상여집에다 보관하였으 나 지금은 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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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신원마을 당산

뒷당산 남북에 산이 있는 사신원마을에서 서쪽으로 통하던 길은 앞에서 설명한 무 장장과 해리장으로 가던 길이다. 동쪽으로 통하던 길은 세 갈래가 있었다. 세 갈래 중 맨 북쪽에 있는 길은 몰방죽 → 원터 → 조씨 재실 → 덕철뫼 밑으로 통해서 부 정마을로 가는 길인데 제일 오래되었다고 한다. 조사자 생각에 이 길은 가장 빠르게 바다로 연결될 수 있는 길이다. 다음은 가운데 길인데 지금은 논으로 변해버렸다. 주 로 계산마을로 연결되는 길이었다. 맨 남쪽에 있는 길도 계산마을과 연결되는 도로 - 227 -


현재 주 통로로 사용하는 길과 비슷하지만 경지정리로 인하여 약간 변동되고 자동차가 다닐 수 있도록 확장되었다. 사신원마을에는 주변 마을 사람들도 잘 아는 전설이 하나 있다. 가까운 인천강에 보가 두 개가 있었다. 웃보와 아랫보가 그것이다. 아랫보(또는 웃 보)가 밤낮 터져서 애기를 사서 넣고 보를 막으면 튼튼해진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리했는데 그 뒤로 보가 터지지 않았다. 애기의 어머니가 사신원마을 서쪽에 있는 바 위 밑에서 애기를 팔아서 받은 돈을 세고 있는데 벼락이 쳤다. 벼락이 바위를 치자 바위가 깨지면서 애기의 아버지가 죽었다. 그 바위를 깨진바위라고 한다. 위 전설은 구술하는 사람에 따라 내용이 다소 차이가 있다. 아무튼 깨진바위는 전 설처럼 깨진 채로 사신원마을의 서편에 있으며 예전에 해리장을 갈 때는 이 바위 앞 을 지나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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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깨진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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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入鄕祖)와 옥천조씨 사신원마을의 입향조인 옥천조씨 덕린(徳隣)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하였다.

조덕린이 임진왜란중인 1595년에 사신원마을로 들어 온 것은 피난과 관련된 듯하다. 현재 사신원마을의 입향조에 대해서는 조덕린(趙徳隣)이라는 설(조세훈)과 그의 아 들인 조숙(趙淑)이라는 설(조택훈)이 있다. 여하간 그 시기는 임진왜란 발발이후임 은 확실할 것이다. 조덕린의 아들이 조숙이므로 설명은 덕린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이해하는 데 좋을 듯하다. 이에 대한 설명은 주로 옥천조씨 대동보ㆍ지평공파세보 (持平公派世譜)와 후손인 조세훈ㆍ조택훈의 구술에 상당 부분 의존하였다. 옥천조씨의 관향인 옥천은 현재의 전북 순창군이다.26) 시조는 조장(趙璋)인데 고 려 말 때 인물로 추정된다. 장의 8세손인 지평공(持平公) 부(溥)로부터 갈라져 나왔 기에 고창의 옥천조씨들은 지평공파로 불린다. 또한 구술자인 조세훈의 16대조가 지 평공이고 11대조가 덕린이다. 또한 덕린은 시조로부터 13세손이며 1564년생(명종) 이었다. 1595년에 덕린이 고창 사신원마을로 들어왔다. 덕린은 아들 둘을 두었다. 큰 아들이 함(涵)인데 손이 귀하였다. 둘째가 숙(淑)인데 후손이 번창하여 고창 후 손의 대부분이 바로 숙의 자손이다. 아산면 용계리 덕천사 뒷산에 덕린의 묘가 있고, 사신원 북쪽(뒷산)이 조씨 문중 산인데 그곳에 숙이 묻혀 있다. 족보에는 숙이 서당동(書堂洞) 왼쪽기슭 임좌(壬坐) 에 부인인 전주이씨와 함께 묻혀 있다고 적혀 있다. 숙은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 는데 고창의 옥천조씨들은 대부분 셋째인 상열(相說)의 후손이다. 첫째와 둘째는 손 이 귀하였다. 즉 고창의 옥천조씨들은 덕린의 둘째인 숙의 자손 중에서도 셋째 상열 의 후손들이 가장 많다고 이해된다. 고창에 거주하는 옥천조씨들은 모두 77호인데 그중 계산리 부정마을에 제일 많이 산다. 숙의 자손 중에서 제일로 꼽을 수 있는 인물은 삼호(三湖)였다. 시조 장의 17세손 인 첫째 인호 현동(仁湖 顕東, 1701년생), 둘째 덕호 후동(徳湖 垕東), 셋째 석호 석동(石湖 錫東)27) 이렇게 세 자손이 삼호이다. 이 세 형제 대에 조씨네는 최고 번 26) 

권39, 전라도 순창군 군명 참조.

27) 석호는 경암(敬菴)이라는 호도 가지고 있었다. - 229 -


. 아산면 용계리의 19번 군도 동편에 있는 삼호정(三湖亭)이란 이름은 바로 이 삼호에서 따온 것이다. 삼호정은 19번 군도를 사이에 두고 부정마을과 약간 대각 선으로 마주보고 있다. 지금은 정자 가까이 4차선 국도가 지나가서 풍광의 기가 꺾이었지만, 건립 당시에 는 동쪽으로 산을 바라보고 서쪽으로 인천강을 바라볼 수 있는 좋은 자리였다고 생 각된다. 또한 이 정자는 앉아서 바라보는 이의 눈높이를 생각하여 설계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앉아 있을 때 마루의 턱은 팔걸이 높이이다. 또한 앉은 이의 눈높이는 일대를 관망하기 편하게 되어 있다. 덕천사쪽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의 마루는 한단 올라있어서 세심하게 배려한 흔적이 역력하다. 한옥의 과학적 우수성을 느낄 수 있 는 정자가 바로 삼호정이라 하겠다. 시조의 20세손인 진혁(進爀)이 사신원에서 학전리로 이주하여 학전리에 조씨들이 살게 되었다. 따라서 아산면에서 사신원마을과 학전마을 그리고 부정마을 사람들이 교류를 하는 것은 관향이 같은 성씨이기 때문이다. 사신원마을을 중심으로 하여 동 서의 교통로를 따라 퍼진 것이다. 삼호정의 뒤편에 덕천사(徳川祠)가 있다. 1826년에 건립하였으며 아산면 용계리 43번지에 위치한다. 이곳에는 귀래정 신말주, 돈세암 조윤옥, 돈암 장조평을 모시고 있다.28) 사우인 덕천사에는 지역 유림들이 와서 음력 9월 8일 아침 9시에 제사를 지낸다. 옥천조씨 시향은 일 년에 한번, 음력 10월 7일에 지낸다. 날씨가 좋으면 덕천사 뒷산에 있는 숙(淑)의 5대조 묘 앞에서부터 지낸다. 순창에 있는 묘를 현재의 장소 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조상 순서대로 지낸 다음, 사신원의 선산에 있는 숙의 묘에서 지내면 끝난다. 사신원마을의 동편에 있는 조씨 재실이 바로 이 제사와 관련이 있는 곳이다. 아침 9시부터 시작하여 오후 3시경에 모두 끝난다. 만일 비가 와서 날씨가 안 좋으면 덕천사의 숭절당 가운데 대청마루에서 지낸다.

28)

대해서는 아산의 역사와 문화, 고창군 아산면, 2004, 326~327쪽 참고. - 230 -


<

5> 덕천사

6) (田洪均)(담양 전씨, 남 78세, 사신원 토박이). 방재춘(남 1945년생, 사신원 토박이). 강복금(여 61세). 김영임(여 67세). 김정자(여 67세). 김선철(광산김씨, 남 1941년생, 계산마을 토박이, 현 계산이장). ※ 옥천조씨에 대해서는 다음 두 사람이 구술해 주었다. (趙沢勳, 남 66세, 옥천조씨 유사) 조세훈(趙世勳, 남 71세, 2008년까지 부정마을 이장을 역임, 조세훈의 16대조가 지평공이고 11대조가 덕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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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마을생활사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 계산마을이다. 본래 고창군 산내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산리, 부정리, 비석리, 사신리, 병암리, 내독리 일부를 병합하여 계산리라 해서 아산면에 편입되었다.29) 계산마을의 동쪽에 는 비석촌이 있다. 남북으로는 산이 자리잡고 있어서 이 마을도 역시 사신원마을처 럼 동서 방향으로만 통행이 가능한 곳이다. 이 마을은 남쪽에 있는 산을 뒷산이라고 부르는데 그 산이 바로 계산(鶏山)이다. 계산은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고 한 다. 계산마을의 이름은 바로 이 산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곳은 명당으로 꼽는다. 뒷산(계산)은 고흥유씨들 선산이다. 관계되는 고흥유씨들은 와룡마을에 거주한다. 계산마을은 겨울에 북풍이 심하게 분다. 바다의 영향인 듯 겨울바람은 사신원보다 강하다. 그러나 다른 계절에는 바람이 괜찮다. 이 러한 점이 사신원마을의 바람과 다르다. 계산은 한때 열댓 집이 살았는데 그중 7~8호가 광산김씨였다. 현재는 10호가 살 고 있으며, 주민들 성씨의 구성은 각성이다. 이 마을의 광산김씨는 인천강 건너 용계 리 원평에서 이주해온 성씨이다. 충청도 연산에서 원평으로 이주한 광산김씨는 김선 철의 5대조가 계산마을로 이주하여 그 자손들이 현재까지 살고 있다. 광산김씨도 옥 천조씨 못지않게 이 일대에 널리 알려진 성씨이지만, 본 보고서의 주 조사지역이 사 신원마을과 비석촌의 비석이 있는 곳이므로 광산김씨에 대한 자세한 조사는 하지 않 았음을 밝혀둔다. 계산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사신원마을의 역사를 미루어 볼 때 역시 청 동기시대부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신원마을이 바로 이웃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추정이 허락된다. 그러나 확실히 알 수 있는 시기는 고려시대이다. 그것은 아래에서 설명할 청자 유물 산포지가 이 마을에 있기 때문이다. 계산마을은 사신원마을과 같이 계산리에 속해 있지만 문상이나 다니지 별로 교류가 29) 

11(전북편)상, 한글학회, 1981, 97쪽. - 232 -


. 그 이유는 사신원 조씨들은 학전리에 사는 같은 조씨들과 교류하고, 계산마을 광산김씨들은 원평의 같은 김씨들과 교류하기 때문이다. 즉 조씨들과 김씨들은 같은 계산리보다는 다른 마을의 같은 관향 성씨끼리 교류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사신원 마을, 계산마을, 비석촌을 통틀어 마을회관은 가운데 마을인 계산마을에 있다. 계산마을의 경제생활은 밭농사와 논농사이다. 예전에 보릿고개 시절에 생활이 곤 란하여 고생이 심하였다. 그 밖에 마을에서 참외와 복숭아를 재배했는데 이를 주변 장날에 내다 팔기도 하였다. 마을계가 있지만 연말에 결산하기 위해 모여서 식사를 하는 정도이다. 정월 보름에 농악을 하고 놀기도 하였는데 지금은 그만두었다고 한다.

2)

청자 유물 산포지

소재지

용계리 청자요 지 (사적 제345 호, 1991.2 .21)

아산면 용계리 206

시 대

고 려

유적 종류

유적개요

참고문헌

자기 요지

아산면 운곡저수지 북측에 위치한 이 가마터 는 10세기부터 11세기 전반까지 청자를 굽던 곳으로 전북지방에서는 가장 오래된 청자가마 터이다. 지금까지 조사된 3곳의 가마는 길이가 38m, 31m, 14m로 서로 다르지만 그 폭은 1.1m~1.3m로 비슷하다. 가마바닥의 경사면 은 갑발을 이용하여 수평을 이루었으며 벽과 천장은 돌과 점토를 섞어 쌓아 올렸다. 이 가 마에서는 대접, 접시, 병, 호, 합, 탁잔 등을 구웠으며 대부분이 무늬가 없는 것들이다. 태 토는 양질의 회백색을 사용하였으며 비교적 세련된 제품을 생산하였다. 이 가마터는 인근 의 부안군 유천리와 진서리보다 먼저 조성된 것으로 고려청자의 발달과정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경위도좌표 : N 35° 28′ 36.4″, E 126° 38′ 00.3″

 문화유적 분포지도 고창군 ,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 화연구소ㆍ 고 창 군 , 2005, 245 쪽 참조.

<표 2> 용계리 청자요지

- 233 -


조사에서 새롭게 알려진 것은 계산마을에 청자편들이 다수 보이는 유물산포 지가 있다는 것이다. 계산마을의 시정에서 동쪽의 비석촌에 닿기 전에 오른쪽으로 꺾이는 오르막 시멘트길이 있다. 바로 뒷산(계산)에 오르는 길인데 약 200m쯤 걸으 면 시멘트길이 끝난다. 바로 그 시멘트길이 끝나는 지점에 청자편들이 다수 보인다. 이 근처에서 1970년대에 묘를 쓰려고 했는데 그 속에서 청자편들이 많이 나왔다. 또 한 정읍의 진사묘라고 하는 큰 묘도 근처에 있었는데 거기에서는 온전한 청자가 나 와서 민아무개가 다른 곳으로 팔아 넘겼다 한다. 그 묘의 관은 보통 묘의 관 뚜껑이 한 치(3cm)인데 반하여 두 치 정도로 두꺼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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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계산에서 발견된 청자편 내면

<사진 7> 계산에서 발견된 청자편 뒷굽

여기에서 보이는 것은 작은 편들이 대부분이라서 정확한 해석이 어렵다. 그중 굽 이 온전한 청자편(사진 8에서 볼펜 가까이에 있는 것)을 토대로 살펴볼 수 있다. 안 쪽에 태토비짐 세 개가 있는 것으로 보아 포개구이로 만든 것이다. 굽에 모래흔이 있으므로 이 청자편은 포개구이 시 맨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굽은 죽절굽(대마디 굽)의 형태가 보인다. 따라서 해석을 해보면 그 시대가 고려 말(14세기 말)로 추정 되고 있다.30) 한편 가까운 곳에 초기 청자요지가 있어서 참고된다.

30) 2009년 8월 4일, 고려 후기 청자 전공자인 한성욱 박사의 도움을 받아 정리하였다. - 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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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계산에서 발견된 청자편

표에 제시한 용계리 청자요지는 계산마을에서 인천강을 건너 부안쪽으로 걸어 가던 길목에 있다. 향후 계산마을 청자 유물산포지는 용계리 청자요지와 함께 보다 자세한 조사가 요구된다. 초기 청자 생산지였던 용계리 청자요지와 말기 청자편들이 보이는 계산마을의 청자 유물산포지는 인천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 인천강을 빠져나 가면 곰소만에서 부안군의 유천리ㆍ진서리 청자요지와 뱃길로 연결된다. 또한 계산마을의 청자 유물산포지는 고려시대 묘지들이 모여 있는 상황에서 발견 된 것인지 아니면 근처에 요지가 있는 것인지 두 가지 상황을 설정하고서 살펴보아 야 할 것이다. 물론 두 가지 상황이 함께 존재할 수도 있다.

3) 김선철(광산김씨, 남 1941년생, 계산마을 토박이, 현 계산이장). 김낙중(광산김씨, 남 68세, 계산마을 토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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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마을생활사 비석(고비古碑)이 있다고 해서 그리 불린다. 비석은 마을의 동남쪽 밭에

서 있다. 앞뒤로 산이 있고, 서쪽에는 계산마을이 있으며, 동쪽에는 인천강 건너에 용계리 원평마을이 있다. 이곳은 사신원마을, 계산마을과 함께 계산리 2구에 속한 마 을이다. 남쪽에 있는 산은 ‘목청나무갓’인데 그곳에서 땔감을 채취하였다. 북쪽에 있 는 뒷산이 덕철뫼이다. 밖에서 이 마을로 접근할 때에는 원평마을 쪽에서 인천강을 건너거나, 서쪽에서 사신원마을과 계산마을을 거쳐서 와야 된다. 주 통로는 인천강을 건너서 들어오는 길인데 1972년에 완공한 계산교(또는 인천강 다리)를 이용해야 된다. 비석촌에서 고 창읍내로 다닐 적에는 오벵이골을 통해서 걸어갔다. 비석촌의 동편을 흐르는 인천강에는 예전에 보가 두 개 있었다. 웃보와 아랫보가 그것이다. 아랫보는 일명 애들보라고도 하는데 지금은 흔적만 U자형으로 남아 있다. 아랫보는 삼호정 앞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예전에 다리가 없을 적에는 아 랫보를 징검다리 삼아 건너거나 물이 많으면 나룻배를 이용했다. 나룻터는 웃보와 아랫보의 중간쯤인데 바로 비석이 있는 곳의 동편 강가이다. 나룻배는 간두깨(삿대) 를 이용하여 이동하였다. 이 나룻배 일은 김익두(동생)와 김영태(형) 형제가 했다. 형제는 물고기를 잡으며 생활하면서 나룻터 뱃일을 했던 것이다. 사신원, 계산, 비석 촌 3개 마을에서 모두가 일 년에 보리 한 말과 나락 한 말씩을 거두어서 그 형제에 게 배삯으로 주었다. 뱃일은 김익두가 주로 많이 했다고 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사 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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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비석촌의 옛 나루터 자리

비석촌은 11호가 살고 있다. 이 마을은 계산교를 건너 계산마을과 사신원마 을 쪽으로 연결된 도로변에 자리 잡고 있다. 작은 마을이지만 다시 둘로 나뉘어 불 린다. 길가에 팽나무가 있는데 팽나무의 서쪽(계산마을 쪽)을 아랫똠이라 하며 5호 가 산다. 그 동쪽이 윗똠인데 6호가 산다. 윗똠의 가까운 곳에 비석이 있다. 주민들 의 성씨는 각성바지이다. 그중 광산김씨가 오래된 성씨이다. 아랫똠 안쪽에 있는 나무가 당산나무(느티나무)이다. 마을 사람들이 적어서 마을 제사, 위하는 것, 마을계 같은 것은 없다. 다만 칠월 칠석에 당산나무 밑에다 술 한 잔을 따르기는 했다. 그리고 윷놀이 등을 하며 놀았다 한다. 비석촌에는 둠벙이 몇 개 있었다. 덕철뫼 앞 100m쯤 되는 곳에 자라둠벙이 있었 는데 크기는 200평 가량 되었다. 그 둠벙에서 볼 수 있었던 것들은 자라, 붕어, 잉어 였다. 특히 자라가 많아서 자라둠벙이라고 했다. 이 둠벙을 홍순옥이 메워서 자신의 논으로 만든 것은 30년 전의 일이었다. 계산마을 앞에도 둠벙이 있었다. 마을회관 앞에 100평 정도 크기의 둠벙이 있었으나 이 역시 지금은 논으로 변했다. 인천강에 가까운 마을이어서 물이 풍부했음을 알 수 있다. - 237 -


식수는 도내기샘이라고 불리는 샘물이었다. 샘의 위치는 덕철뫼 앞에 있 는 인천강의 강둑 안쪽이다. 현재 까치집이 있는 곳 앞쪽에 있는 전봇대 자리가 예 전에 도내기샘이 있던 곳이다. 바가지로 떠서 먹거나 길러다 먹었다. 마을 사람들 전 체가 식수로 사용하였다. 샘물이 지표면과 비슷한 높이여서 입을 대고 마셔도 될 정 도였다. 샘의 깊이는 약 40cm이고 넓이는 반 평 정도였으며 돌로 쌓았다. 마을 사람 들이 도내기샘물을 길러다 먹다가 나중에는 각자 작두샘을 박아서 사용하였다. 그러 다가 2007년도부터 부안댐에서 상수도가 들어와서 사용이 중단되자 도내기샘 자리 는 논으로 바뀌었다. 식수는 도내기샘물을 이용했지만 빨래는 인천강에서 했다. 그런 데 이 도내기샘은 군산시 옥도면 신시도에 있는 ‘되내기샘’과 그 이름과 형태 및 용 도 등이 비슷하여 흥미롭다. 차후에 이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31) 비석촌 사람들의 경제생활은 자급자족이고 논농사와 밭농사가 주이다. 예전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웠다고 한다.

2)

비석(계산리 고비)

아산면 계산리 비석촌이라는 마을에는 오래된 비석(고비古碑)이 하나 있다. 이 비 석은 마을의 동남쪽 가까운 곳에 있는 밭의 한쪽에 서있다. 비석 가까운 곳에 있는 인천강가에 예전에 나룻터가 있었다. 서있는 모양새는 튼튼해 보이지만 비문은 대부 분 훼손되어 있다. 비석의 크기는 지표면 위로 드러난 높이는 146cm이고 폭 49cm, 두께 32cm이다 (2009년 3월 7일 측정). 표면이 정교하게 다듬은 것은 아니기에 위치에 따라 치수 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 위치는 경위도 N35° 27′ 39.5″ E126° 37′ 33.4″이며, 해 발고도는 18m이다.32) 전면에만 글씨가 몇 글자 보이는데 이에 대한 판독 시도는 뒤 에서 설명할 것이다.

31) 되내기샘은 최근에 복원을 하였는데 주변이 논으로 변해서 옛 모습과는 다르다 고 한다. 하지만 이름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상황이 비석촌의 도내기샘과 비슷하다(2009 년 7월 7일 ~ 7월 8일, 김명진 신시도 답사). 32) 비석이 자리하고 있는 경위도와 해발고도는 변남주가 측정하였다. - 2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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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비석촌 전경

이름이 비석촌인 것을 보더라도 이 비석은 이 마을의 상징이라 하겠다. 일대 에서는 이 비석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다. 특정한 이름도 없이 그냥 ‘비석’이라고 불 리고 있다. 먼저 이 비석의 이름부터 지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문화재를 작명할 적에는 소재하고 있는 행정 지명을 따서 붙인다. 그렇다면 ‘계산리 비석’, ‘계 산리 석비(石碑)’ 또는 ‘계산리 고비(古碑)’라고 해야 된다. 문화재의 명칭은 대체로 행정지명을 따서 그 이름을 짓는 보편성이 있으므로 ‘계산리 고비’가 무난할 듯싶다. 석비는 그 모양새에 따라 머리 부분에 이수(螭首)같은 장식이 얹어진 것을 비(碑) 라 하고, 머리 부분에 장식이 없는 원형의 형태를 갖춘 것을 갈(碣)이라고 한다.33) 따라서 비석촌의 비석은 굳이 그 모양새를 가지고 분류한다면 갈이라 하겠다. 석비 는 어떤 사적이나 글을 새겨 후세에 오래 전하기 위해 세운 것을 말하는데 비문의 내용에 따라 탑비ㆍ묘비ㆍ신도비ㆍ사적비ㆍ송덕비 등 여러 종류가 있다. 이것은 미 술사의 중요한 연구 대상이며 비문은 역사학ㆍ서지학 등에서 중요한 자료이다.34) 그 33) 문화유적조사요람제1집 유형편, 사단법인 향토문화개발협의회, 1989, 138~139쪽. 34) 그림과 명칭으로 보는 한국의 문화유산1, (주)시공테크, 2002, 177쪽. - 239 -


비석촌의 비석의 글씨는 마멸이 심하여 판독이 몇 글자 외에는 불가하여 내용 에 따른 분류가 어렵다. 하지만 추정이 허락된다면 아마도 무언가 기념하기 위해 세 워둔 것이 아닐까 한다. 비석의 80m 가량 뒤편에 불 먹은 흙과 옹기편들이 보인다. 옹기가마터로 추정되 는데 이것이 비문의 훼손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 또한 바닷바람의 영향을 받는 곳이므로 자연현상의 영향으로 인하여 비문이 훼손되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상당히 정성을 기울인 비석임은 틀림없다. 언뜻 보면 충주에 있는 고구려비와 분위기가 비 슷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비석이 바라보는 방향이 동동남인데 바로 앞의 인천강 건 너에 있는 산꼭대기를 바라보고 있다. 그 산의 이름은 없으나 갈마음수형(渇馬飲水 形)이라고만 부른다. 그런데 비석촌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곳은 바로 갈마음수형의 산이다. 이 비석이 바라보는 방향은 아침에 뜨는 태양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3) 홍순옥(남양홍씨, 남 69세, 비석촌 토박이). 김선철(광산김씨, 남 1941년생, 계산마을 토박이, 현 계산이장). 강신교(남 1948년생, 고창읍 도산에서 출생하여 아산면 독곡에서 53년째 살고 있다.)

4. 1) 자연환경과 마을생활사 이상에서 계산리 2구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1구인 부정에 대해서 조사한 바 를 적고자 한다. 19번 군도에서 부정교를 건너면 바로 맞닿는 마을이 부정마을이다. 마을의 남서쪽에 덕철뫼라는 작은 산이 있고 앞에는 인천강이 있다. 전통시대에 풍 수적으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터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마을은 겨울에 따뜻하다 고 한다.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동북쪽에 병풍바위(병암)가 있고, 병암의 서쪽에 할 - 240 -


있다. 용계리 삼호정은 대각선 건너에 자리한다. 부정마을은 부정, 병암, 지산, 새터 등 네 마을로 이루어졌다. 이중 새터마을 자리 인 현재 19번 군도 건너에 복분자주 공장이 들어서 있다. ‘고인돌 복분자주 시음전 시관’이라는 간판이 들어선 자리가 그곳인데 사실상 도로확장과 술 공장이 들어서면 서 새터는 사라진 셈이다. 이 네 마을 중 대표마을이 부정이어서 통칭 부정이라 부 른다. 본 보고서에서는 대표 마을인 부정만 조사하였다. 부정의 한자이름은 부정(釜鼎)으로 쓰고 있다. 그런데 조선총독부가 1918년에 발 행한 지도에는 부정(夫丁)이라고 적혀 있다. 마을 이름이 부정(釜鼎)인 것은 마을 터가 가마솥과 같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마을에서 내려오는 유래에 의한다면 한자표기는 부정(夫丁)보다는 부정(釜鼎)이 합당할 듯 싶다. 이곳은 샘을 파도 물이 안 나온다는 말이 있다. 솥에서는 물이 안 나기 때문이란다. 또는 터가 가마솥 같아 서 일부러 우물을 안 팠는지도 모른다. 우물을 파면 솥에 구멍이 나는 꼴이니 터를 망치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이 마을 사람들은 원래 샘을 파지 않고 인천강 물을 먹 고 살았으며 그곳에서 빨래도 하였다. 조세훈의 처가 말하기를 자신은 정읍에서 1958년도에 시집을 왔는데 그때도 또랑물(인천강)을 썼다고 한다. 1990년대쯤에 지 하수를 개발해서 남쪽에 있는 오공등에 올려서 저장하여 다시 마을로 내려 보내 식 수로 사용하였다. 2003년도부터 상수도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의 구성은 한참 때는 60호였는데 지금은 50호이다. 마을 앞 19번 군도가 확 장되면서 마을이 줄어들었다. 예전에는 전체 주민의 60%가 옥천조씨였으나 지금은 절반이 조씨이다. 조씨 집성촌이라 할 만한 곳이다. 고창군에 있는 옥천조씨들 중 가 장 많은 수가 이 마을에 살고 있다. 나머지 주민들의 성씨는 각성바지이다. 밀양손 씨, 신천강씨, 광산김씨 등의 각성들이 옥천조씨들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도 당산나무가 있고 당산제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설명하겠다. 마을에 촌계가 있었다. 그리고 마을 재산으로 마을산이 있었으나 팔았다고 한다. 부정 앞 인 천강에는 민물장어가 있었다. 특히 선운사 입구에서 강정 사이에 서식하는 장어를 풍천장어라 불렀다. 장어를 잡을 때는 물을 막고 퍼내는 방법을 사용하여 많이 잡았 다. 장어를 먹는 방법은 껍질을 벗겨서 소금 또는 고추장에 발라서 화로에 구워먹었 - 241 -


. 또한 중복 무렵에는 선운사 주변에서 자연산 복분자를 딸 수 있다. 양식 복분자 는 이 마을의 수입원 중의 하나이다. 양식 복분자는 6월 12일부터 수확을 시작하며 10일 간이면 끝난다. 복분자주는 100일간 숙성시켜서 만든다.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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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부정마을 전경

2) 부정마을회관 옆에 흥미로운 돌 들이 있다. 마을회관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에 있 는 석재들이 그것이다. 예전에 연자방앗간에서 사용하던 것들이다. 연자방아는 둥근 큰 돌판을 밑판 삼아 아래에 놓고, 그 위에 밑판보다는 작지만 두께가 굵은 윗판 돌 을 얹어 놓는다. 윗판을 소나 말이 원을 그리며 돌리면 곡식을 빻게 되는 방아가 바 로 연자방아이다. 하지만 이 마을에서 실제 연자방아를 찧는 모습을 본 사람은 없다. 윗대의 어른들한테 이곳 부정마을에 연자방앗간이 있었다는 말만 들었다 한다. 윗판은 왼쪽에 완전한 상태로 있고, 오른쪽에 밑판은 두 동강 난 상태로 있다. 윗 35) 고창군은 복분자를 1,300ha 심어서 1300억 원의 수입을 올린다. 공장은 전부 9개이다. 타 지역의 복분자보다 가격을 더 받는다. 그만큼 오리지날이라는 인식을 소비자들이 가지 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쌀은 13,000ha에서 1300억 원의 수입을 올린다. 복분자가 쌀보 다 10배의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 이에 대해서는 고창군청 조용호 계장 이 구술해 주었다(2009년 3월 7일). - 242 -


최대지름은 107cm, 두께는 40cm이고 밑판은 최대지름이 150cm, 두께 25cm 정도로 추정된다. 연자방앗간자리는 조세훈의 집과 마을회관 사이였다. 현재는 서울 에서 온 외지인인 유재욱이 살고 있는 집자리에 연자방앗간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 토박이들의 기억에 연자방아는 없고 지산에 있는 조아무개가 운영하던 물레방아에서 근처 마을 사람들이 방아를 찧었다. 조아무개는 많은 돈을 벌었으나 익산에서 성냥 공장을 운영하다가 실패했다는 말도 있다.

3) 본 조사에서 한 가지 특기할 것은 고창군에 당산나무가 많다는 것이다. 충남지역 에서 마을조사를 해보면 당집들이 많이 보인다. 이에 비해 고창군에 당산나무가 많 다는 점은 이 지역의 특징 중 하나로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창사람들은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당산나무를 신령시하고 이를 통해서 마음의 위안을 삼고 있었 다. 조사한 것 중에서는 나무의 수종은 팽나무가 많았으며, 그 다음은 느티나무가 있 었다. 지금은 사라진 사신원마을의 것은 팽나무였고 부정마을도 팽나무인데 비석촌 은 느티나무이다. 이외의 마을에서도 당산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나무의 크기는 아름 드리인데, 어른들 팔로 한 사람이 감싸지 못할 정도에서 두 사람이 감싸지 못할 정 도까지 대체로 오래되고 큰 나무들이다. 문화유적분포지도 고창군에는 노거수(老 巨水) 또는 보호수로 표기하고 있다.36) 아산의 역사와 문화에는 아산면 관내인 50여 개의 노거수가 소재해 있는 마을이름이 열거되어 있다.37) 여기에 소개되어 있 는 노거수는 대부분 당산나무일 것이다. 주민들 기억 속에 자리잡은 나무의 이름은 하나같이 당산나무이다. 따라서 그 명칭은 노거수보다는 당산나무로 부르고 적는 것 이 옳을 듯하다. 고창군민의 마음 속에 오랜 시간 신앙처럼 자리잡고 있었던 나무는 당산나무였다.

36) 

고창군,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ㆍ고창군, 2005.

37) 아산의 역사와 문화, 고창군 아산면, 2004, 앞부분에 있는 김상휘의 ‘아산의 평설’ 중 ‘노거수가 있는 마을’ 참조. - 2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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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부정마을의 당산나무

정월 보름에 당산제가 있었다. 정월 14일 저녁에 집집마다 다니면서 농악을 치며 매굿을 했다. 보름 이후에는 날을 잡아서 당산나무에 줄을 감았다. 그런 데 1990년대 후반부터 농악 전수자가 없어서 중단되었다. 본 조사 중 첫 방문했을 때인 5월 2일에는 비가 많이 와서 부정마을의 당산나무를 촬영할 수 없었다. 두 번 째 방문 조사일인 7월 30일에 촬영을 했다. 그러나 7월 중에 있었던 비바람에 그만 가지 하나가 부러져서 아쉬움을 남겼다. 원래는 3가닥이었는데 동쪽가지가 부러져 있다. 고창군의 당산나무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더 자세한 조사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한 편 고창군의 군목은 은행나무였다. 그러다가 작년인 2008년부터 소나무로 바꾸어서 현재 고창군의 상징 나무는 소나무이다. 고창군에 소나무가 많고 그 상징적인 절개 를 높이 사 그리했다고 한다.38)

4) 조세훈(趙世勳, 남 71세, 2008년까지 부정마을 이장을 역임, 조세훈의 16대조가 지평공이고 11대조가 덕린이다). 김선철(광산김씨, 남 1941년생, 계산마을 토박이, 현 계산이장). 38) 2009년 8월 5일, 고창군청 조용호 계장 설명. - 244 -


5.

고비 입구의 속칭 비석촌에는 성격을 알 수 없는 고비(古碑) 1기(基)가 서 있

다. 비석촌이라는 마을 이름도 이 비석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비석의 유래 나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마을에서도 이 비석에 관련한 특별한 전승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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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갈마음수형의 산을 바라보고 있는 비석촌 비석(계산리 고비)

비석은 화강암 재질로서, 크기는 높이 146cm, 폭 49cm, 두께 32cm, 둘레 163cm 이며, 앞면만을 약간 다듬어 글씨를 새겼고, 옆면과 뒷면은 다듬지 않은 원래의 상태 이며 글씨도 본래부터 새겨지지 않았다. 글씨가 새겨진 앞면의 경우 오른쪽은 완전 히 마멸되어 글씨를 확인할 수 없고 왼쪽에서만 글씨를 확인할 수 있는데, 왼쪽 윗 부분 일부가 깨져 나가 중간부 이하의 글씨 일부만 확인 가능한 형편이다. 2009년 3월 사신원마을 1차 조사 때에 이 비석의 현황과 새겨진 글씨에 대한 간 략한 조사를 하였는데, 이때는 비석의 훼손 상태를 확인하는 한편 왼쪽 아랫부분에 ‘代王’으로 읽을 수 있는 글씨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그쳤고 그 이상의 자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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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할 수 없었다. 당시의 조사를 토대로 더 정확한 내용 확인을 위하여 전 문적인 탁본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2009년 4월 12일에 탁본 전문가인 홍영의 (국민대 박물관 연구위원) 선생과 서예가인 이대성(국전 초대작가) 선생 등과 함께 탁본을 실시한 결과 글씨가 남아 있는 부분에 대해 더욱 구체적인 판독이 가능한 탁 본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의 탁본을 토대로 판독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처음 ‘代王’으로 판독한 부분은 탁본 결과 ‘代主’로 확인되었고, 그 밖에도 여러 행의 글씨 를 확인할 수 있었다.

(

)

△ 上

升(?)鄭 朴 泰 夜(?)△ 失(?)△ △

代 主

金(?) 글 ■

마 멸

<

2> 비석에 새겨진 글씨

현재 글씨가 남아 있는 부분은 사람들의 명단으로 보이는데, 큰 글씨로 쓰여진 ‘△上’과 ‘代主’는 직책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되고 그 아래의 작은 글씨 부분은 그 - 246 -


맡은 사람들의 人名으로 생각된다. 큰 글씨의 경우 ‘△上’은 글자의 폭과 길 이 각기 8cm 정도이며, ‘代主’는 글자의 폭과 길이가 10cm 정도이다. 한편 人名 부 분은 글자의 폭과 길이가 5cm 정도씩이다. ‘△上’의 경우 아래에 세 사람의 인명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데, 朴, 金, 升(?) 등 의 성씨는 확인되고 있지만 그 아래의 이름 부분은 정확하게 판독되지 않고 있다. ‘代主’의 경우에도 세 사람의 인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가장 왼쪽에서만 글씨 가 확인되고 나머지 부분은 마멸되어 글씨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확인되는 부분의 경우에도 성에 해당하는 金(?)만 볼 수 있고 이름 부분은 마멸되어 판독되지 않고 있다. ‘△上’과 ‘代主’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직책을 나타내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기존 의 역사 기록은 물론 금석문이나 고문서 등에도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上’의 경우에는 윗 글자가 판독되지 않아서 그 성격을 알기 어렵다. 다만 통일신 라 시대에 만들어진 中初寺 幢竿(827년 완성)의 제작 참여한 인물의 직책 중에 徒 上, 作上이 보이고 있고, 최근에 공개된 고려시대 불국사 석탑의 중수(1038년)에 참 여한 인물의 직책에 絃上이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그와 비슷한 성격이 아닌가 생각된다. 徒上과 作上은 당간을 제작하는 데 참여한 일꾼과 장인의 책임자로 생각 되고, 絃上 역시 석탑의 중수에 관여한 기술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로 볼 때 ‘△上’ 역시 이 비석을 만드는 일과 관련된 어떠한 공사에 참여한 일꾼 혹 은 장인 중의 책임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代主’라는 용어는 고문서 등에서는 노비가 주인을 대신할 때에 ‘주인[主]을 대신 한다[代]’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만, 문맥이나 문장 형식 등으로 볼 때 이 비석의 내용을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代’의 주인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이 다. ‘代’의 의미에 대해서는 고려시대 문서인 浄兜寺形止記 중에 보이는 ‘寺代’ ‘文 達代’ 등의 용례가 주목된다. 이들은 ‘사찰의 代’ 혹은 ‘文達이라는 사람의 代’라는 의 미로서 사찰이나 특정 개인이 소유한 땅을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代도 땅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때의 代는 땅 중에서도 농사를 짓는 농지인 전답(田畓)이 아닌 집터 혹은 건물을 지을 수 있는 비어 있는 토지 등의 의미로 이 - 247 -


. ‘垈’의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비석에 기록된 ‘代主’는 땅 [터]의 주인이라는 의미로 해석되는데, 아마도 이 비석과 관련된 어떠한 공사에 필 요한 땅[터]을 제공한 사람들을 기록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 비석이 건립된 시기는 현재 판독한 내용만으로는 파악하기 힘들다. 다만 비석 의 형태 및 쓰여진 글씨의 서체 등으로 볼 때 조선시대 중기 이전에 건립된 것이 아 닌가 추정된다. 탁본에 참여한 서예가인 이대성 선생은 하나의 비문에 크기가 서로 다른 글씨를 적는 것은 조선 중기 이전의 비석에 보이는 현상이라고 하였고, 특히 ‘代主’의 代의 서체는 상당히 古式의 글자라고 평가하였다. 한편 이 비석에 등장하는 인명들의 성씨는 金, 朴, 鄭, 升(?) 등이 확인되고 있는 데, 이중 이 비석이 위치한 지역인 조선전기의 茂長県의 성씨로 확인되는 것은 金과 朴 뿐이다. 茂松과 長沙의 土姓으로 金이 있고, 長沙의 來姓으로 朴이 보이고 있다. 다만 鄭과 升(?)은 茂長의 성씨로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웃한 고창에서도 金과 朴은 확인되지만 鄭과 升(?)은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웃한 興徳県의 성씨 중 에 土姓으로 鄭이 보이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비석에 보이는 金, 朴, 鄭 등은 이들 무장 및 고창, 흥덕 등의 성씨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升(?)에 해당하는 무장 및 주변 지역의 성씨에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비석은 본래 사신원과 관련되는 비석일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판독된 내용만으 로는 사신원과의 관련성을 확인하기 힘들다. 향후 더 면밀한 검토를 통하여 그 성격 을 추정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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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염의 사등마을39)

1.

특성

1)

형성 북서부에 위치한 심원면 사등마을은 조선시대 무장군에 속했다가 일제강

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고창군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월산리는 1914 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사등리와 화산리, 그리고 도천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심 원면에 편입되었다. 따라서 심원면은 현재 고전, 주산, 도천, 월산, 연화, 하전, 용기 등의 10개 리를 관할하고 있다. 월산리는 마산, 월산, 사등 등의 3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사등마을 은 바다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사등’이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는 모래가 많 아서 붙여진 이름이므로, 다른 이름으로 ‘모랫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2) 마을의 유래 삼국시대 선운사를 창건한 검단선사가 당시 선운사 계곡의 산적 무리를 교화하고 생계수단으로 소금 굽는 방법을 전수해 준 것을 계기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 다. 그 시기에 소금을 굽던 포구라는 이름을 따서 ‘검단포’라는 명칭이 생겼는데, 이 후 현재와 같이 ‘검당’으로 부르게 되었다. 소금의 생산과 판매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마을이 부유해지자 검단선사의 은공을 기리기 위해 선운사에 보은염을 시주하게 되 었다고 전해진다. 사등이라는 마을의 이름은 검당에 거주하였던 사람들이 이동한 마 을로 바다모래가 쌓여 등성이를 이룬다고 하여 붙여졌다.

39) 자료는 「선운사 검단선사와 보은염 학술조사 연구보고서」(한양대학교 미래문화연 구소 고창군, 2009. 8)에서 발췌한 것임. - 249 -


3)

지형 평탄한 지형으로서, 사등마을 남쪽 선운산 방향으로 ‘당산뫼’라 불리는

해발 36m 정도의 낮은 산이 있다. 마을의 남쪽은 선운산이 둘러싸고 있고 북쪽은 서해바다와 면하고 있는 배산임수형 입지구조라고 볼 수 있다. 토지는 대부분 벼, 복 분자 등을 재배하는 논밭 등으로 이용되고 있고 새우와 장어 등을 양식하는 양식장 이 마을 곳곳에 산발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서쪽으로 선운산에서 발원한 월산천이 서해 곰소만으로 흐르고 있으며, 동쪽으로 는 풍천이 곰소만으로 유입되고 있는데, 이는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는 독특한 서 식환경을 형성하여 고창군의 대표 특산물이자 향토음식인 풍천장어의 유래가 된 하 천이다. 1936년 간척공사를 착수하여 천일염을 만들어 왔고, 과거 국내에서 두 번째로 큰 해리염전(심원면 만돌리와 해리면 동호리를 잇는 간척지에 위치)이 있었다. 고창의 소금은 심원면에서 96% 이상이 생산되고 있으며 고창의 특산물인 심원소금은 희고 깨끗한 것이 특징이다. 월산리 사등마을은 염전에서의 화염생산이 중단된 채로 화염과 관련된 우수한 역 사문화자원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인 반면, 인근 갯벌을 활용한 하전리는 2003년 해양수산부 어촌체험마을 조성사업지로 선정되어 ‘갯벌체험안내센터’를 신축 하고 현재 활발히 운영 중이며, 만돌리 역시 천일염소금체험과 고기잡이, 조개잡이 체험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4) 지형의 변화 마을 이동 전에는 검당에 300호 정도가 거주하였으나 1898년 해일 이후 지금의 사등으로 마을이 이동하였다. 현재 농지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벌막으로 사용되었으 나 검당과 사등 사이를 성토하여 현재는 벼를 재배하는 논으로 이용되고 있다.

- 250 -


5) (1) 농업 생업은 논농사와 복분자 재배이다. 1960년 말부터 간척사업이 시작되어 마을 주민들에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으며, 주민 대부분이 지속적으로 논과 밭의 경작면적을 늘려가고 있다. 마을 안쪽은 주로 쌀이 재배되며, 해안가의 밭 에서는 여러 종류의 밭작물이 경작된다. 재배 작물로는 보리, 고추, 복분자 등이다.

(2) 어업과 물때 과거 일시적으로 꼬막이나 동죽 등을 채취했으나 지속적인 생계방식이 되지 못하 였다. 1960년대 이후 사등마을 앞 바다에서 잡히던 어종들이 거의 사라졌고 마을 뒤 의 갯벌은 양식업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어업이 주요 생계방식이 되지 못하고 있 는 점이 특징이다. 소금은 경제적 부가가치가 높게 인식되어 있는 반면 어업은 비중 을 적게 두고 있다. 마을의 생활과 생업에 큰 영향을 미치는 물때는 조류의 세기를 숫자로 등급화한 것으로 조석현상을 반달로 파악하여 음력으로만 표현한다. 사등마 을의 물때 명칭은 인천 등 일부 지역에서 사용되는 7물때 식이다. 01일, 02일, 03일, 04일, 05일, 06일, 07일, 08일, 09일, 10일, 11일, 12일, 13일, 14일, 15일,

16일 17일 18일 19일 20일 21일 22일 23일 24일 25일 26일 27일 28일 29일 30일

일반적 명칭 턱사리 한사리 목사리 어깨사리 허리사리 한꺽기 두꺽기 선조금 앉은조금 한조금 한매 두매 무릎사리 배꼽사리 가슴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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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등의 7물때식 일곱마 여덟마 아홉마 열마 한개끼 두개끼 아조 조금 무심 한마 두마 서마 너마 다섯마 여섯마


(3)

재배

1960

고창군 선운산 주변에서 야생 복분자를 채취하여 술을 빚어 관광객에

게 장어와 함께 시음・판매하기 시작했다. 1990년도에 고창군 농업기술센터 실증시 범소에서 식재하여 실증하였으며, 1993년도에 심원면 일대에 복분자 식재 비용을 보 조하여 식재하였다. 이후 복분자 공장이 설립되어 관련 상품을 판매하기 시작했으며, 2004년 농림부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에 등록되었다.

6) 생활권 전통적으로 심원면에 5일장이 서지 않아, 인근의 해리장과 무장장을 주로 이용한 다. 전체 주민의 대부분이 사등 인근의 고창읍이나 무장・공음・해리 지역과 통혼을 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그 범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는데, 이는 도시로 나가서 결 혼하는 예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 마을 출신 중 네 명의 여성노인이 친정동 네에 정착해 살고 있어 주목된다. 심원면 연화리 및 월산리에 있는 시설로는 심원초등학교・심원중학교・심원파출 소・심원농협・심원우체국・심원수협지소・심원보건지소・심원종합복지관이 있으며, 그 외 의료시설 및 각종 여가문화생활은 대부분 고창읍내에서 이루어진다. 여가문화 생활권으로 크게 해안권역(하전・사등・만돌리 등)과 내륙권역(고창읍・선운산도립 공원 등)으로 나눠진다. 사등마을 주민의 생활권역은 약 30분 거리의 고창읍까지 포함하고 있고, 일대 선 운산도립공원을 비롯한 주변 관광지가 여가 문화권에 속한다. 사등마을의 마을 활성 화 계획에 있어 적극적으로 주변의 자원과 생활권내 전문가 및 주요기관과 연계방안 을 수립하여 이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

7) 민속의례 (1) 당산제 사등마을에서 지속적으로 행해지는 마을 공동 제사로서 전북지방 당산제의 3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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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식 제의형, 줄다리기형, 혼합형) 중 혼합형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정월 초 이튿날 모셨으나 한국전쟁 후 할아버지 당산의 당집이 허물어지면서 중단되었다가 1986년 갯벌에 나간 마을 주민들이 사망하는 사고로 인해 다시 모시게 되었고, 이 때 제의 날짜를 정월 보름으로 옮겼다. 당산 신으로는 할아버지 당산(마을 은행나무)과 할머니 당산(마을 느티나무)이 있 다. 제를 모시는 제관은 생기복덕을 봐서 깨끗한 사람이 섣달에 선정되는데, 제관으로 선정되면 제사를 모시기 3일 전부터 근신하게 되는데 금기 사항이 매우 까다로웠다. 제물은 특별히 정해진 것은 없고 정성껏 차리는데, 보통 돼지머리, 시루떡, 삼실과 (대추, 밤, 감), 과일(사과, 배), 나물 등을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으로 나눠 따로 장만한다. 제물은 제를 모시기 전날 해리장과 고창장을 이용하였으며, 제주가 제물을 사러가면서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 제관집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 렸으나 현재는 금줄만 친다. 제사 비용은 예전엔 마을 공동으로 충당했으나 현재는 희사받은 금액으로 충당하고 있다. 샘제를 마친 후 새벽닭이 울면 모셨는데, 현재는 정월 보름으로 옮겨서 정월 보름 오전에 모시고 있다. 제의는 유교식으로 모시며 제관이 삼헌관을 겸하며 아헌이 끝 난 후 원하는 사람이 절을 올린다. 당산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함께 드시라는 의미로 멧밥 두 그릇을 올린다.

(2) 마당밟기는 한 해 동안의 액을 막고 복을 기원하는 의례로서 당산제와 함께 진행 된다. 날짜는 음력 정월 14일부터 15일까지 행해진다. 예전에는 마을의 모든 집에 다 들어가 굿을 쳤으나 현재는 장어음식점을 중심으로 행해지고 있다. 굿을 청하면 당산제 전에 마당밟이를 해주고 희사금을 받는다. 포수가 거둬들인 쌀과 돈은 마을 공동 기금으로 사용되는데, 보통 악기를 새로 구입하거나 마을 공동사업에 사용된다. 구성은 영기2, 꽹과리2, 북1, 징2, 장구3, 소고1, 포수1이다. 포수는 가면을 쓰고 걸립을 위한 가방을 메고, 끈이 달린 대나무를 든다. 예전에는 종이로 만든 가면을 사용하였으나, 현재는 종이탈 가면을 구입하여 사용하고 있다. - 253 -


상 위에 쌀을 담을 함지박을 올려놓고 돈을 꽂아두면 포수가 함지박의 쌀을 가방에 담고 돈은 대나무 끈에 매달아 두는 것으로 대신한다. 걷어 들인 쌀과 돈은 마을 공동 기금으로 사용된다.

(3) 사등마을에서는 샘제를 음력 정월 초이튿날 저녁에 모셨으나, 지금은 상수도 개발 로 인해 모시지 않고 있다. 샘제를 ‘물끗기’, ‘물때끗기’라 부르기도 한다. 샘제는 마 을의 우물물로는 사람들의 식수가 부족하여 매년 큰 산의 옹달샘에 가서 제를 모심 으로써 한 해 동안 먹는 좋은 식수가 부족함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샘제는 마을 인근에서 가장 큰 산속 옹달샘에서 제를 모시기 때문에 주변 마을끼 리 서로 먼저 하려고 했다. 그래서 사등마을도 하전마을과 서로 먼저 하려고 실갱이 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는 샘제를 모실 때 샘 안에 밥이 떨어져 있으면 제 모실 때 좋지 않기 때문이다. 샘제를 모시는 사람을 ‘화주’라 한다. 정월 초이튿날 저녁이 되면 화주는 먼저 목 욕재계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데, 두루마기에 갓망구를 쓴다. 그리고 화주는 제물을 들고 물이 좋다고 하는 ‘양산제’ 옹달샘에 올라가 샘 앞에서 간단하게 제물을 차려놓 고 제를 모신다. 그리하여 제를 모시고 나면 밥을 샘물에다 던지고 그 물을 옹기에 담아 긴 막대기에 걸치고 양쪽에서 둘이 메고 내려온다. 옹기는 몸통은 크고 주둥이 가 작은 것으로 한다. 옹기를 막대기에 거꾸로 매달며 물이 옹기에서 질질 세어 나 오도록 솔잎으로 주둥이를 막는다. 이는 산 속의 샘물이 마을의 샘물에 연결되도록 일부러 흘리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마을로 들어와 마을 샘 가운데에 옹기를 걸쳐놓 으면 거꾸로 있는 상태여서 자연스럽게 물이 빠진다. 그리고 화주는 옹기를 샘에 걸 쳐놓은 상태에서 간단하게 술잔을 올린다. 그리고 나서 당산나무에 가서 제를 모신 다. 사등마을에서는 여느 마을과는 달리 당산제와 함께 샘제를 모시고 있다. 특히 샘 제를 모시는 것은 식수가 귀하기 때문에 그 중요성을 종교적 형태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현재는 상수도 개발로 인해 식수가 예전에 비해 쉽게 이용할 수 있기 때문 - 254 -


자연 모시지 않게 되었다. 과거 샘제를 모실 때는 당산제보다 더 크게 생각했으 나, 지금 샘제를 모시지 않기 때문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산제에 대한 제의적 비중이 높아졌다 할 것이다.

(4) 줄다리기는 보통 정월 보름에 행하나 7월 백중에 행하기도 한다. 줄다리기는 ‘줄 쌈’, ‘줄땡기기’ 등으로 불리며, 당산제와 함께 연행된다. 줄 두 개를 연결하여 쌍줄 을 만들었으며 남녀로 편을 나눠 경기를 하였는데, 여자편이 이기면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당산제가 중단된 후에도 줄다리기는 일정 기간 지속되었다. 마을에서 걷은 짚으로 만든 줄을 이용하여 줄다리기를 하는데, 마을 사람들이 전 부 한 곳으로 모여 참가한다. 줄은 아침에 마을 청년들과 아이들이 각 집을 돌면서 걷은 짚으로 엮는데, 수확의 정도에 따라서 걷는 짚의 양도 각기 달랐다. 예전에는 줄의 끝부분에 젖줄을 달았으나 주민들이 줄어들면서 점차 원줄만 만들게 되었다. 또한 동네에서는 쌀과 나물 등을 각출하여 먹을거리를 장만한다. 줄다리기의 순서는 줄드리기 → 줄당기기 → 출 처리로 진행된다. 줄다리기는 보 통 3판으로 진행되는데, 여자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이유로 남자편이 이기지 못 하도록 노인들이 회초리로 때리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8) 여류명창 진채선의 고향 진채선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명창으로 이후 수많은 여성명창이 등장하는 전례가 되었던 인물이다. 진채선은 조선후기 판소리 명창이었던 신재효의 가르침을 받아 음 률과 가무에서뿐만 아니라 판소리에도 뛰어났다. 진채선의 고향이 바로 사등마을이다. 진채선의 할아버지가 검당포에 들어와 단골 과 혼인하여 살았다고 전해진다. 단골무당이었던 어머니를 따라 소리를 익혔으며 당 시 집안이나 무계(巫界)의 선생으로부터 뛰어난 소리 실력을 쌓았다고 한다. 그 후 신재효의 문하에서 당대 명창이었던 김세종으로부터 소리를 사사받고, 1867년에는 경복궁 경회루 낙성연 때 대원군의 눈에 들어 운현궁에 기거하여 명성과 영화를 누 - 255 -


인물이다. 진채선의 생가터가 고창군 심원면 월산리 630번지로 사등마을 내에 있다. 군청을 통해 현재 사등마을 내에 진채선 생가터가 정비되어 있으나, 실제 진채선의 생가는 왼쪽 옆의 주택 자리였다고 한다. 생가터에 대한 자료나 문헌이 남아있지 않아 생가 복원 자체에 한계가 있는 점으로 미루어, 방치되어 있는 생가터 주변을 정비한 것으 로 추정된다. 현재 군청 소유의 토지로 나무와 잔디, 벤치 등으로 정비되어 소공원화 가 되어 있다.

9)

가꾸기

화염과 당산제를 비롯한 세시풍속 및 소리와 무속문화 보존・계승을 목적으로 문 화역사마을가꾸기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사등 문화역사마을가꾸기 추진위원회(고창 문화원)와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 건축공간계획연구실을 중심으로 고창 사등문화역 사마을가꾸기 사업에 대한 학술조사가 끝났고, 그것을 바탕으로 설계 및 사업이 계 속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2.

보은염

1) 화염법의 전래 검단선사는 선운사에 와서 이곳 주민들에게 화염(火塩, 煮塩-구운 소금)법을 처음 가르쳐준 은인으로 전해온다. 검단선사가 일러준 제염법은 전통적인 소금 제조법인 화염(火塩, 煮塩)방식이다. 우리나라의 전통 소금은 주로 해안지방에서 바닷물을 달 이고 볶아서 생산했다. 소금생산 방식에는 화염방식과 천일염 방식이 있다. 화염은 바닷물의 염도를 높인 뒤 끓여서 얻는 소금이며, 화염(煮塩), 전오염(煎熬塩), 육염 (陸塩), 토염(土塩)이라고도 부른다. 천일염은 1907년 이후 일본 사람들이 주안에서 처음 시작했으며 태양염(太陽塩), 청염(清塩), 천염(天塩)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소금을 생산하는 방식은 나라마다 조금씩 달랐다. 중국은 기원전 6000년 - 256 -


산시성(山西城)에서 소금 호수인 윈칭호(運成湖)를 통해 소금을 생산하였다. 소 금 생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800년경이며, 해염(海塩)의 생산과 무역에 대 한 기록은 기원전 1000년 전 하(夏)나라 때부터다. 바닷물을 오지항아리에 담아서 그것을 끓이고 졸여서 소금 결정으로 만든다고 적혀 있다. 이러한 방법은 로마제국 이 남유럽 전역에 퍼뜨린 기술이다.40) 조선시대 제염법은 바닷물을 직접 끓이는 방법(함경도 강원도)과 염밭을 만들고 함수(鹹水)를 모아 솥에 끓이는 방법을 썼다. 대부분의 해안지방에서 행해졌던 제염 법은 ‘염밭조성 채함과정-전오과정’을 거친다. 소금의 주 생산지였던 서남해안에서는 염분 함량이 높은 함사(鹹砂, 鹹土)를 얻기 위해, 조금 때 써레를 이용하여 갯벌을 몇 차례 갈아엎어, 갯흙을 햇볕에 노출시켜 염분이 높은 함사를 만든다. 이 흙을 섯 등으로 운반하여 함수(간수)를 모은 뒤 솥에 끓이는 화염법(煮塩法)을 썼다. 고창지방은 곰소(줄포)만을 사이에 두고 무안현, 무장현, 흥덕현 지역에서 소금생 산이 활발했다. 이곳은 넓은 갯벌이 펼쳐 있고, 밀물과 썰물의 간만 차이가 크며, 산 지가 발달하여 연료의 공급이 원활해서 소금 만드는 3박자를 고루 잘 갖춘 천혜의 적지였다.41) 이 지방 전래의 소금 만드는 법은 전통 화염의 생산방식으로 일본의 천일염 제조 법이 들어온 1907년 이후 1960년대까지도 지속되었다. 그 당시 이 고을 사람들이 모르는 화염 생산방법을 검단선사는 어떻게 알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설화 속에서 그가 처음 이 마을에 나타난 행색은 스님이 아니라 다소 허름하고 낯선 노인으로 묘 사되고 있다. 그는 이 고장 출신이 아니고 떠돌이 사람이므로, 이곳 사람들이 아직 알지 못하는 선진 소금 기술을 어디선가 배워서 알고 있거나 스스로 터득했다는 말이 된다. 그는 소금기술뿐 아니라 종이와 숯 도자기 굽는 기술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이곳에 화염업이 발달하게 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연지형의 조건이 소금 굽기에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소금을 생산한 기록은 검단선사의 40) 

 마크쿨란스키, 이창식 역, 세종서적, 2003, 29쪽.

41) 조선시대소금생산방식, 조선시대화염생산방식」김일기, 신서원, 2006, 11-56쪽. - 257 -


(塩井)에서 비롯된다. 염정(塩井)은 속칭 약수(薬水)라고 하며, 검당포(黔堂浦)에서 바다를 향해 약 2리 되는 지점에 있다. 그 물이 희고 짜서 현지인들이 조수가 물러나기를 기다렸다가 길 고(桔橰, 두레박틀)로 길어다 소금을 굽는다. 햇볕에 쪼이고 여과하는 노력을 들이지 않고 이득을 누릴 수 있는 곳은 검당(黔堂)이 유일하다.42)(신증동국여지승람 권 36 무장현 산천) 다른 곳은 염밭을 갈고 섯구덩이를 만들어 함수를 길어다 구워서 소금을 만들었으 나, 검당포의 염정 바닷물은 천연적으로 염도가 높아 바로 길어다 가마에 구워 소금 을 얻었다는 말이다. 이른바 해수 직자법(直煮法)인데, 갯벌이 발달하지 못한 동해안 (이원, 경흥, 부령, 회령, 종성, 경성)에서는 연료・시간・노력이 많이 소요되더라도 대부분 이 방법으로 소금을 생산했다. 수다사(水多寺)는 검단선사(黔丹禅師)가 머물던 곳이다. 또 그 아래의 검단포(黔 丹浦)에 있는 염정(塩井)은 검단선사가 판 것이라고 전해지니, 이름이 있는 땅에는 반드시 그 유래가 있다.(도솔산선운사지「도솔산대참사고사」) 소금생산에 사원과 승려가 관련된 기록은 중세 유럽과 일본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사원이 지역의 문화 경제의 중심이었던 시기에는 사원에서 소금을 생산하 던 사례를 찾아볼 수 있는데 검당 마을도 선운사 검단선사와 관련이 있다.43) 선운사 는 인근의 사찰을 관리하는 총섭(総摂)이 주재하고 있어서 조선시대까지도 사찰에서 소용되는 소금을 지속적으로 공급하였다. 절에 소금을 바친 기록은 삼국유사에도 나온다. 검단선사가 염정을 만들어 소금을 처음 생산했다는 마을은 검단선사의 이름 을 따서 검당마을(사등마을)이라 불렀다.

42) 조선시대소금생산방식,「호남지역의 화염업」홍금수, 신서원, 2006, 165쪽. 43) 스코트랜드 Aldhamer라는 이름의 소어촌에 수도승이 찾아와 소금 생산법을 도입하였 고, 이를 계기로 마을 이름을 Salt Priestone/Saltpreston/prestonpans 등 소금과 관련지 어 불렀다고 한다(위의 책, 144쪽). 일본 시오가마시(鹽竈市)에는 소금 만드는 법을 처음 가르쳐준 노옹신(老翁神)을 모시는 시오가마진자(鹽竈神社)가 있고 이 신사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이 지어졌다(鹽竈神社 東北歷史博物館, 2007, 5-6쪽). - 258 -


지어야 하는데 거기가 산적들 소굴이죠. 그래서 그 산적들을 그냥 나가 라고 하면 안 되니까 소금 만드는 그 일을 가르쳤던 거예요. 그런 식으로라도 먹고 살아라. 그래서 산적들을 저기 안쪽에 바위 있는 데다가 검우바위라고 있어요. 고 부 분에 뭐가 있냐면, 고 부분에 샘을 하나 가르쳐 준 거예요. 그게 짠물이 나는 샘이었 던 거여. 그 물을 길러다가 끓이기만 하면 되았어, 소금이. 그런데 그러다 보니까 공 평하지 못하단 말이야. 그래서 그 샘물을 없애 버렸다고. 그래 가지고 여기다 인자 힘없는 사람 먹고 살게끔 딱 그 지점을 만들어 준 거야. 저 섯구덩이 파가지고 이렇 게 해가지고 가까운데 길러다 해라. 그래 나와 가지고 부지런하면 먹고 사는 거지. (주길선, 남, 65, 사등마을문화역사마을추진위원장)

검단선사가 소금 굽는 방법을 일러준 동기는 이 고을에 횡행하는 산적 또는 해적 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교화시키기 위함이었다. 설화에서 검단선사는 선운산을 중 심으로 기거하던 산적들에게 소금 제조법을 가르쳐 생활의 안정을 가져온 것으로 전 승되고 있는데, 한편에서는 이들이 산적이 아니라 유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44) 이 지방은 삼한 시대의 마한지역이며 온조가 백제를 세우고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 서 저항하던 토착 세력이 밀려서 이곳 선운산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주민들 과 충돌을 빚었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그러므로 산적으로 표현된 이들은 실상 생계 의 터전을 잃은 양민일 뿐 도적떼는 아니라는 주장이다. 어쨌든 검단선사는 생활의 터전을 잃고 떠돌던 유민들의 생활안정을 가져오게 하고 이들을 불법으로 바르게 이 끌어 선량한 백성들로 교화시킨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마을 사람들의 구술을 종합하면 갯벌에 마치 분화구처럼 된 우물을 만들고 소금 물을 가두어 염도가 높게 되면 이 짠물을 길어다 솥에 굽게 했다는데 힘센 사람들 이 독차지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밀려나 불만이 높아져서 검단선사가 염정을 없애버 렸다. 대신 염밭을 갈아서 섯등에서 함수를 모아 소금을 굽는 방법을 다시 일러 주 었다. 갯벌은 넓게 펼쳐 있으므로 부지런한 사람은 염밭을 많이 갈아 많은 소금을 생산할 수 있었으므로 근면성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였다. 44)

, 남, 75, 전 고창문화원장. - 259 -


만들었다는 염정(塩井)은 대동여지도(1861, 철종12년)에도 표기되 어 있다.

[

1] 대동여지도에 염정(鹽井)으로 표시된 사등마을

검당에는 옛날 300여 호가 살았으나, 1898년(戊辰年) 해일로 피해를 입어 해안에 서 더 안쪽으로 퇴각하여 현재의 사등(모랫등)마을로 이주했다고 한다. 뻘의 퇴적으 로 수심이 얕아지고 있어서 시간이 갈수록 해안선이 바다 쪽으로 멀어지고 있는 실 정이다. 검당은 현재 80여 가구로 화염생산이 중단되면서 쇠퇴현상을 보여주고 있 다. 제방이 축조되고 간척으로 인해 해안선이 바뀌면서 벌막이 있던 자리는 농지로 바뀌었으나, 예전에 바닷물이 들어왔던 곳이다. 이 지역에 벌막은 6개, 솥은 8개가 있었다고 한다.45) 염정은 월산리 사등 앞 갯벌에 있었으며, 지금은 메워져서 형태는 남아있지 않다. 검단선사는 이들 도적들에게 소금 굽는 법을 일러주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열어주어 생활의 안정을 가져오게 했다. 마을 사람들은 검단선사에게 보은하는 뜻으로 봄・가 을에 ‘보은염’을 바치는 풍속이 이어졌다. 45) 군산대 박물관 진채선 생가 조사 및 검당마을 염정지 지표조사 결과 보고서 1996. - 260 -


화염생산은 한국전쟁 후 해리 천일염전이 조성된 이후 쇠퇴하다가 1950 년대 말까지도 명맥을 이어왔으나, 1997년 소금 수입 자유화로 외국의 값싼 소금이 대량으로 수입되면서 생산비가 많이 드는 전통 화염업은 단절되고 말았다.

2)

이운의식

검단선사가 소금을 생산하는 방법을 일러줌으로써 이곳 사람들은 생활의 안정을 가져오게 되고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되었다. 소금 생산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 마 을 사람들은 선사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해마다 봄・가을로 절에 소금을 갖다 바 쳤는데 이를 보은염(報恩塩)이라 불렀다. 검단선사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마을 이름 도 ‘검단리’라고 하였다.

이 아래 개태사가 있으니 검단선승이 마음을 연마하며 수도하던 도량이요, 그 아 래 바닷가에는 검단리가 있으니 선승이 처음 염정(塩井)을 만들고 여기에서 소금을 구워 사중에 돌아가며 바치게 하였다. 그 법이 이어져 내려와서 아직도 소금을 직접 갖다 바치는 규례(規例)가 전해오고 있다.46)

그런데 3년 뒤에 씌어진 약재산인(樂斎山人)이라는 사람이 쓴「호남 송사현 도솔 산 선운사 승적 발문」에는 스님들로 하여금 소금을 사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오늘의 해구에 있는 검단리의 염인들은 이 절에 소금을 가져와서 승도들로 하여금 스스로 말질하여 사도록 한다. 그 연고를 물으니 옛날에 검단이라는 선사가 처음 염 정을 만들어 굽는 것을 가르쳐 주었기에 소금을 이 절에 보내는 것이 전해오는 관습 이 되었다고 하였다. 18세기에 와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관습이 사라져 소금 값을 받고 소금을 절에 팔았다는 의미가 된다. 다만 한 가지 스스로 말질을 하여 가져가게 했다고 한 것은 무상으로 제공했다고 해석할지 야박하게 팔지 않았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지 불분 명하다. 선운사가 창건 이래 임진란 등으로 황폐하여 가시덩굴을 걷어내고 오두막집 46) 

 도솔산선운사창수승적기」 선운사, 20쪽. 2003.2. - 261 -


채를 엮어 겨우 풍우를 면하였다 하니 보은염 풍속이 단절되었을 가능성이 있 으며, 뒤에 무상으로 소금을 제공하지는 않았으나 옛 풍속을 회상하여 후한 값으로 소금을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다.47) 아무래도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산문을 닫고 열 기를 반복하고 소금 굽는 후손들도 바뀌다 보면 처음처럼 보은염을 공양하는 풍속도 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조선조의 억불숭유 정책으로 승려들이 대접받지 못하고 천시되던 시절에 보은염을 드리는 풍속이 이어졌다고 보기 어렵다.

지금 행해지고 있는 보은염 의식은 옛 문헌에 보은염을 바쳤다는 기록을 통해서 ‘역사마을 가꾸기’ 사업의 일환으로 2005년에 복원한 사업이다. 이 의식에서는 단절 된 화염생산 방식을 재현하고 그 소금을 선운사에 공양하는 의식을 전통문화 가꾸기 사업의 하나로 복원하여 진행하고 있다. 최근 지방자치제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지방 마다 고유한 전통문화를 발굴하고 축제화함으로써 문화 경제 관광의 진흥을 꾀하는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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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은염 이운의식 행렬 모습

47) 是寺也已經桑滄之變 累歷星霜之換 凋廢殘觖之餘 再三中興(위의 책, 24쪽). 哀哉 自倭人 捲還之後 戊申己酉年之間 衲子數十輩 稍稍而進 傷感名刹之焚破 因與合謀 剪 棘誅茅 構禪廬一二所 僅蔽風雨(위의 책, 25쪽). - 262 -


<

2> 선운사에 도착한 행렬을 맞이하는 스님

전통 화염생산 방식은 다른 지방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소금 창시 신화를 가지고 있다는 측면에서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해외의 사례에서도 전통문화와 연계 한 축제를 가지고 있으므로 선운사 보은염이야 말로 문화적으로 충분한 의의를 갖는 다. 한 예로 일본의 경우 미야기현 시오가마시(宮城県 塩竃市)는 소금 만드는 방법 을 처음 가르쳐준 신을 모시는 시오가마진자(塩竃神社)에서 해마다 7월 4~6일을 전 후로 성대한 축제를 거행하고 있다. 이곳은 해조류를 뜯어다가 소금물을 걸러서 소 금을 굽는 신사(神事)를 재연하고 있다. 이 ‘조염소신사(藻塩焼神事)’와 ‘어부신사예 제(御釜神事龋祭)’는 현(県)의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따라서 고창의 보은염 행사도 소금생산의 기원을 말해 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므로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함이 마땅하다고 하겠다.

- 263 -


수륙재48)

1. 1)

개요 과거에 고리포, 고전포, 검당포, 선운포, 경포, 백사포 등 9개의 포구가

있었던 지역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포구는 고리포였고, 가장 화려하고 큰 항 구는 고창군 심원면의 고전포였다. 고려 초기에서 고려 중기까지만 해도 고창의 포 구는 매우 발달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당시에는 고창 포구의 수심이 변산 일대 포 구보다 깊었으나, 150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변산 일대의 뻘이 고창으로 옮아와 쌓이 면서 고창 포구는 뻘밭으로 변해 버렸고 수심도 점차 얕아졌다. 그런 까닭에 고창 포 구에서의 무역은 점차 불가능해졌고, 포구의 중심은 점차 부안 변산 쪽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고창군 해리와 상하 쪽의 포구가 먼저 없어져 버렸고, 고리포와 구 시포만 남고 다른 포구들도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고리포와 구시포의 경우도 명맥 만 유지할 뿐 포구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이처럼 해류 의 흐름이 바뀌어 버리면서 고창의 칠산 바다 어업은 점점 쇠락해갈 수밖에 없었다. 조기잡이가 한창 성행할 시기에는 동호리의 조기 걸대가 법성포의 조기 걸대보다 더 컸었다고 한다. 고창문화원장이었던 이기화의 외숙이 동호리에서 해왕사(오케이 사) 사장으로 활동한 적이 있었는데, 그가 1956년 5월 19일에 찍은 조기 걸대의 사 진은 동호리에서의 조기어업이 얼마나 성황을 이루었는지 짐작케 해준다.49) 48) 글의 출처는, 동호풍어제 원형 전승 학술용역 결과보고서 동호마을의 공동체신앙과 문화유산(전남대학교 산학협력단 지역문화교육연구개발센터, 2009. 11. 16)이며, 보고서 내용 중 「수륙재와 영험담」(이영금, 전북대학교) 내용을 발췌한 것임. 49) 박연봉이 제시한 사진에는 해왕사 사장과 어민들이 11층 조기 걸대 앞에서 찍은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사진은 원래 전 고창문화원장인 이기화가 소장하고 있었다. 해왕사 사장은 이기화의 외숙인데, 그는 두만강 하류에서 어업으로 크게 돈을 벌어 동호리로 돌아와 해 - 264 -


<

1> 동호리 해왕사의 어민들과 11층 조기걸대

칠산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자락에 당집을 지어 해신(海神)을 모셔 놓고 매년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며 어업활동을 해왔다. 조기어업이 성행할 당시에 는, 무당패를 불러 성대하게 영신굿/수륙재를 연행하기도 했다. 당집이 들어선 바로 그 산자락 밑에는 물살이 세게 돌아 익사 사고가 빈번히 발생한다는 ‘유왕개미’가 있 다. 유왕개미는 배가 들락거리는 포구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데, 마을 주민들은 익사/ 수사 사고의 재난을 미리 막기 위해 매년 음력 정월 초하룻날 ‘영신굿/수륙재’를 연 행해 왔다고 한다. 영신굿/수륙재는 영신당에서 연행하는 영신당제/영신굿과 바닷가 나 바다에서 행하는 용왕제로 구성되는데, 과거에는 이 영신굿/수륙재 때에 무당패들 을 초빙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단골의 맥이 끊긴 지 오래이고 또 어업마저 쇠 퇴한 지금에는 제의의 주체자가 제관과 풍물패 중심으로 위축되었지만, 여러 제보자 들의 증언에 따르면 음력 정월 초하룻날의 마을 공동체굿은 여러 명의 무당과 삼현 육각잽이들이 가담하여 치러낸 화려한 마을 제의였다고 한다. 이처럼 화려한 무당 중심의 영신굿/수륙재의 전승은 이미 끊긴 지 오래지만, 고창 군 해리면 동호리에서는 아직도 현지 주민들 중심으로 그 전통의 맥을 이어가고 있 왕사를 차렸다고 한다. 해왕사 사장은 동력선의 시발자이기도 하다(제보자: 이기화) - 265 -


. 과거 영신굿/수륙재를 담당하던 무당패들이 사라지고 없어서, 그 연행의 핵심이 되는 무당굿과 연희 문화들은 부재하지만, 거기에 담긴 소망과 문화적 취향들은 수 륙재/풍어제라는 이름으로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 보고서에서는 이러한 점에 주 목하여 현재의 수륙재/풍어제의 모습과 과거의 영신굿/수륙재에 관한 정보들을 현지 조사를 통해 기록하고자 한다. 조사자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준 제보자들을 제시 하면 다음과 같다.

조사 장소

박연봉(1935년생, 75세, 남)

(2009년) 8.17

김위용(1954년생, 남)

8.18

김영무(1946년생, 남)

8.18

장연규(1939년생, 남)

8.18

초소 군인(20세 가량) 이귀녀(1926년생, 84세, 여)

8.18 8.18. 11.7.

에서 당집 앞에서 자택 : 동호리 556번지 자택 : 고창군 고창읍

11.11.

전화로 조사

이기화(1935년생, 75세, 남)

2)

자택 : 동호리 532번지 구동호 정류장 근처 바닷 가 평상에서 자택 : 동호리 675번지 구동호 ‘바다마을’ 장어집

비고

마을이장

‘바다마을’ 장어집 사장 당집을 안내해준 군인 최대식(상쇠)의 부인 전 동호초등학교 교사 전 고창문화원 원장

행하는 마을 공동체굿

구동호 마을 제의는 정월과 이월에 집중되어 있다. 과거에는 어민들이 3월부터 본 격적으로 조기잡이를 수행하였는데, 그들은 정월과 이월을 준비 기간으로 삼고 풍어 와 안전을 기원하기 위한 마을 제의를 연행해 왔다. 정월과 이월에 연행된 마을 공 동체굿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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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제의 시기

현재 연행 여부

당산제/철륭제

음력 1.3.

걸립굿/마당밟이

음력 1.15.

×

수륙재/영신제

음력 2.1.

당할머니 생신 제사/연신굿

음력 2.20.

×

연행되는 마을 제의는 당산제/철륭제, 걸립굿/마당밟이, 수륙재/영신제, 당할머니 생신 제사/연신굿 등이다. 당산제는 매년 음력 정월 초사흗날에 연행되며, 걸립굿은 음력 정월 대보름에, 수륙재는 음력 이월 초하룻날에, 당할머니 생신 제사 는 음력 이월 스무날에 연행된다. 이 가운데 현재 전승되고 있는 것은 당산제와 수 륙재/영신제뿐이다. 매년 연행되던 정월 대보름날의 걸립굿은 현재 중단 상태에 있지 만, 과거에는 마을 주민들이 풍물패를 구성하여 마을 개개인의 집과 선주의 배를 오 가며 이틀간 마당밟이를 했다고 한다.

옛날에는 정월 보름굿을 쳤거든요. 저는 어렸을 때 몇날 며칠을 따라다녔어요. 집 집마다 걸립굿을 치고 배마다 걸립굿을 쳤어요. 정월 초사흗날 철륭제를 지내고 보 름날부터 한 이틀 간 허드라고요? 옛날에는 보름굿을 쳤는데, 인제는 그것도 안하고 있어요. 과거에는 구동호와 신동호가 분리되지 않은 한 마을이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시간도 많이 걸렸지요. 인제는 동네가 두 개 쪼개지다 보니까 사람도 잘 모 이지 않고 그래서 중단되었어요(제보자: 김위용)

과거에는 당할머니 생신 때 지내는 제사도 매우 성대하게 연행되었다고 한다. 음 력 이월 스무날에 마을에 변고가 있어 수륙재/영신제를 못 지냈을 경우에 당할머니 생신날에 무당을 초빙하여 선주 중심의 연신굿을 크게 벌였다는데, 지금은 조기 어 업의 쇠퇴와 무당의 부재로 인해 전승이 중단된 상태이다. 서해숙의 조사(1998. 1.11)자료에 의하면, 당할머니 생신 때에는 간단하게 당집에서 제사를 드리고 나서 당집 아래 넓은 곳에서 소리꾼을 비롯한 사당패를 불러들여 마을 사람들과 한데 어 - 267 -


놀았다고 한다. 해리 일대에서 가장 큰잔치로 인근 마을에서까지 구경을 왔을 만큼 대단하였다고 한다. 음력 정월 초사흗날 모시는 당산제/철륭제는 마을 이장의 책임 하에 진행된다. 당 산제 때에는 마을 주민들로 구성된 풍물패들이 할아버지 당산, 큰 당산, 작은 당산 등 세 곳을 돌며 당산제를 지낸다. 고창군 해리면 동호리에서는 당산나무가 네 곳이 어서 정월 초사흗날에는 네 곳을 돌며 당산제를 지내왔으나, 할머니 당산이 없어진 현재에는 세 곳에서만 당산제를 모시고 있다. 음력 이월 초하룻날 모시는 수륙재/영신제는 어촌 계장의 책임 하에 진행된다. 제 관과 풍물패로 구성된 제의 주체자들은 먼저 ‘영신당’에서 영신제를 지낸 다음 바다 가로 내려와 용왕제를 지내게 된다. 용왕제 때에는 비교적 깨끗한 사람으로 선정된 사람과 풍물패들이 배를 타고 바다로 이동하여 수중고혼이 된 영혼을 위한 헌식을 행한다.

3)

당화(堂畵)

<

2> 고창지역의 유일한 당집인 영신당 - 268 -


현재 남아 있는 고창지역의 유일한 당집이다. 고창의 가장 오래된 포구 였던 고리포에도 매우 큰 당집이 있었으나 200년 전에 해체되었다고 한다. 영신당은 칠산바다를 껴안은 모습으로 배가 드나드는 포구 쪽 높은 산자락에 위치해 있다. 당 집 앞에는 해안 초소가 있고, 당집 뒤편으로는 제를 지낼 때 사람들이 모여 놀았던 공터가 있다. 과거에는 당집이 산의 아래쪽 잔등에 위치해 있었다. 과거에는 당집으 로 가는 길목인 동호 해수욕장 근처에 ‘동백정’이 있었는데, 원님을 비롯한 많은 유 림들이 이 동백정에 드나들며 시를 짓고 놀곤 했었다. 유림들이 오고가는 길목에 당 집을 그대로 두는 것이 눈치가 보여 마을 주민들은 당집을 높은 산 쪽(현재의 당집 위치)으로 옮겼다고 한다(이기화 제보).

영신당 내부에는 당화가 1폭 모셔져 있는데, 당화는 마을 주신인 당할머니가 가운 데에 앉아 있고, 당할머니의 딸이 좌측에 1명 우측에 2명이 서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당화는 여러 번의 교체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고창문화원장 이었던 이기화와 마을 주민들이 제보한 내용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 6・25사변 직후에 나는 20살 때부터 동호국민학교 교사로 3년간 재직했다. 그 당시부터 민속에 관심이 있어 동호리 당집을 많이 조사했다. 사람들은 동호의 당집을 ‘당각시(堂角氏)집’이라고 불렀다. 그 당시의 당화에는 당할머니 한 분이 가운데에 앉아 있고 양쪽에 딸 두 명이 서 있었다. 당할머니는 낭자머리를 해서 비녀를 꽂은 형상이었다. 그 전에는 동호의 당집에 순수하게 당할머니 한 분만 모 셔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당할머니집’이라고 불렀는데, 한일합방 직후에 당할머니 의 딸들까지 모셔놓게 되면서 당집은 당각시집 또는 각시집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내가 동호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을 당시의 당화에는 당할머니와 딸 두 명이 그려져 있었다. 당할머니집이 당각시집으로 변형된 것에 대한 의문을 품고 나는 1952년도에 동호의 중선배 선장인 김 씨에게 그 이유를 물어본 적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당할머니 혼자 계실 때에는 바다가 한산하고 외로웠는데, 세상 이 발전되니까 자꾸 당집을 번성시키기 위해 젊은 새댁들인 각시들을 들어앉힌 것이라 했다. 조기어업이 성행하다 보니 당할머니의 가족이 많이 생겨났고, 당집 - 269 -


에 모신 신격이 가족화되어 당각시집으로 불리게 된 것이라고 했다. 현재까지 동 호에서는 이 당집을 당각시집으로 부르는 사람이 많지만, 나이든 노인네들은 여전 히 당할머니집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그 당시의 당화는 6・25사변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없어져 버렸다. 지금의 당화는 모두 다 엉터리이다(제보자 : 이기 화).

* 옛날에 하동, 남해, 통영 사람들이 배타고 올 적에, 바람이 많이 부는 4월 달 에 여기를 오는데, 인제 바람으로 완전히 죽게 생긴 거라. 근디 불이 하나가 거기 써졌더라 이거여. 등대불 모양으로. 근게 그놈을 보고 온 거야. 여그 와서 본 게 불은 아니고 당할머니거든? 영신할머니, 그 양반이 불을 붙인 거야. 그거 유명해. 그래서 여기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고 그래요. 통영 사람들이 그때 당신도를 띠어 갔다고 해요. 하도 영험해서 그 사람들이 가져가 버렸대요. 그래서 그 형식대로 그린 것이 지금 그림이지요(제보자 : 박연봉).

* 우리가 쪼그만 헐 때 거기(영신당) 벽에가 장군도 몇 상 그려져 있었고 안에 가 할머니를 호위하는 호위병처럼 칼 차고 험상궂게 생겨가지고 무서워서 못 들 어가게 생겨가지고…시녀처럼 여자분도 한 서너 명 뒤에가 있고 그랬는데, 도난당 했다. 그때 우리가 볼 때는 남자들이 장군처럼 험상궂게 칼차고 양쪽 벽에가 무섭 게 있고, 할머니 뒤에 여자들이 시녀들처럼 서너 명 있고 그러더라고(제보자 : 김 영무).

* 당화에 그려진 분은 모두 4명의 여자다. 구전에 의하면, 당집에 불을 밝혀 주 었다고 해서 당집을 짓고 제를 지냈다고 한다. 어머니 같은 분이 한 분 계시고 옆 에 딸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림을 도난을 당했다. 내가 어렸을 때 본 옛날 그림이 아니다(제보자 : 김위용).

* 그림 잘 그리는 동생이 하나가 있는디, 당할머니 그림을 다시 그리려고 허다 가 죽어버렸어. 이름은 이귀열인디, 죽은 지 몇 년 되었어. 당할머니는 참 영험혔 어. 옛날이 여기에 군인들이 많이 있었지. 정순경이라는 경찰이 욱에서 살았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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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할아버지하고 할머니하고 나타나드래. 군인대장이 왜 꿈에 나타나냐고 물었 대. 그니까 당(堂) 고칠라고 시주받으러 다닌다고 그러더랴. 당이 인공 때 부서져 버렸거든. 그 사람들이 문짝을 뜯어서 불 때서 밥히 먹고 그랬어. 그런게 인자 나 중으는 군인대장이 정순경 그 사람 보고 저 집이 뭔 집이냐 물었대. 옛날에 당할 매 당할아버지 있는디, 인공 때 없어졌다고 그랬대. 근게 빨리 집이라도 고쳐서 밥이라도 해놓고 그러라고 군인대장이 말을 했대. 자꾸 꿈에 나타난게. 당을 고치 고 돈 모다 시주히갖고, 우리 동생되는 사람도 저 서울가갖고 거기서도 오만원 보 탰어. 지화(기와)도 새로 입혔지. 내가 지금 야든 네 살이여. 내 나이 한 7,8살에 당집이 거그가 있었어. 그랬는디 거기서 정순경이 밥이랑 해왔어. 초상화가 없어 졌는디, 그림에 할아버지는 없고 할머니만 그려서 가져왔대? 소포로 어디서 보내 왔어. 그때 우리 어머니가 우체부한티 소포로 받았당게. 우리 어머니 이름은 이옥 녀여. 황산이씨. 어머니가 화상을 받았어. 장 속에 놨는디, 꿈자리가 사납더만. 그 래서 내가 엄마 보고 그것을 친정집에 갖다 두라고 혔어. 그 뒤로는 꿈자리가 안 사납더만. 나중에 화상을 가져오라고 혀서 가져다가 당에다 붙였어. 남동생이 이 장을 헐 땐디, 화상이 소포로 왔었당게(제보자 : 이귀녀).

4)

/당각시의 기능

<

3> 현재 영신당에 모셔져 있는 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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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셔진 당각시/당할머니는 여성신으로 해신(海神)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 나고 있다. 칠산바다를 끼고 있는 해안가나 섬 지역은 조기잡이가 성행했던 시절만 하더라도 해신 신앙권이라 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이들 지역에서는 바다의 뱃길이 나 어장을 조망할 수 있는 산자락 높은 곳에 당집을 지어놓고 해신/서낭신을 모시고 어업에 종사해 왔다. 칠산어장의 주신(主神)은 개양할미와 8명의 딸(부안 변산 수성 당), 당각시(고창 동호리 영신당), 원당본당 마누라, 옥저부인, 애기씨 서낭(부안 위 도 지역) 등의 여성신이 대부분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임경업 장군(위도면 치도리 당집), 해상왕 장보고(전남 완도 장좌리 당집) 등의 남신이 주신으로 섬겨지기도 하 나 이러한 현상은 일반적이지 않다. 따라서 칠산어장의 텃밭의 신격은 여성신이 대 부분이고 이 여성신은 칠산바다의 해신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어민들의 풍어와 뱃길 안전을 도와주는 역할을 오랫동안 수행해 왔다고 하겠다. 서해안 지역에서는 용왕을 주신으로 섬기기보다는 어업신이라 할 수 있는 해신을 주신으로 섬기는 경향이 강하다. 서해지역에서 해신이나 해왕이라는 말이 널리 퍼져 있고 또 해상왕이라 칭했던 장보고를 해신으로 좌정시켰다(완도군 장좌리 당집)는 점을 감안한다면, 조기어업권인 칠산어장이 해신 신앙권이라 할 수 있겠다. 이와 같 은 사실은 이기화의 증언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 옛날 사람들은 서해안을 발해만으로 인식했다. 중국 사람들은 이곳 서해지역 을 서해만이라고 하지 않고 발해만이라고 했다. 내 동창 아버지한테 들은 이야기 인데, 옛날에는 용왕이 동해안과 남해안까지만 점령하고 서해안은 좁다고 오지 않 았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 이르러서야 용왕이 서해까지 손을 뻗치게 되었 다는 것이다. 과거의 고창지역은 해신인 당할머니 한분의 영향권이었는데, 지금은 용왕이 서해안까지 그 세력을 뻗쳤기 때문에 용왕까지 섬기게 되었다. 그러나 지 금도 여전히 주신은 용왕이 아니다. 영신제 끝나고 용왕굿을 할 때도 해신을 먼저 섬기지 용왕부터 섬기지 않는다. 해신을 먼저 청해 대접하고 나중에 용왕을 대접 하는 정도다(제보자: 이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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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영신당 당화 옆에 걸려 있는 한복

같은 제보는 고창 동호리 영신당의 주요 신격이 용왕이 아닌 해신임을 짐작 케 해준다. 해신은 어민의 풍어와 안전을 위한 기능을 하는데, 매년 음력 이월 초하 룻날 연행되는 고창 동호리의 수륙재/영신제 때 ‘당맞이’를 하여 선주의 배에 모셔 놓으면 그것이 선주의 배서낭이 된다. 따라서 고창 동호리 영신당은 해신을 모셔 놓 은 해신당/서낭당이라 할 수 있다. 선주들은 각자의 배서낭을 배에 모시고 바다에서 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며 어업활동을 해온 것으로 보인다. 선주들이 배서낭을 배 에 모시고 어업활동을 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인자 거기 배 헌 사람들이 화장품 같은 거 옷감 같은 거 상자에 싸서 거기다 채려놓고 빌고 갖고 다니드만? 배에다 싣고 다니드만? 당에서 굿을 하고 내려와 갖고, 밥 채려놓고 화장품 같은 거 놓고… 당할머니의 며느리라고 지어 놨대. 밥히 놓고 배 헌 사람들이 거기 가서 인자 갖고 가서 채려놓고 빌드만. 상자 안으다 여 자들인게 옷감 담어가지고 상자에다 깨끗이 해갖고 갖고 다녔어(제보자 : 이귀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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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및 당신화

* 영험헌 것은 어부들이 (길을) 못 찾을 적에, 안개 낄 적에 (당할머니가) 바다 에 불빛을 비춰줘. 그러면 아 여기가 동호구나 하고 선원들이 찾아와. 그만큼 할 머니가 용하다는 거여. 그때는 나침반도 아무것도 없을 때, 그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불을 켜놓고 있었다는 거여. 그래서 지었는가 몰라도 그런 애기가 전해오는 거여(제보자 : 장연규).

* 300년 전 당할머니가 바다에 안개가 자욱하게 끼면 불을 밝혀 동호라는 곳을 알려주어 어부들의 무사귀환을 도왔다. 그래서 당집을 지어놓고 할머니를 위한 제 사를 지낸다(제보자 : 이귀녀).

* 200~300년 전에 동호리 지역에 해무(海霧)가 많아 선박이 암초에 부딪쳐 좌 초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징, 북소리를 울려서 이러한 위험을 예방하고 자 당집을 지었다고 한다. 징, 북소리는 이곳에 암초가 있으니 조심하라는 신호였 다고 한다(제보자 : 동호리 해안 초소 군인).

* 마을에 할아버지 당산, 할머니 당산이 있는데, 할머니 당산 쪽에는 나무가 없 고 바위가 있는데, 나무가 하나 생겨났다. 담쟁이 넝쿨이 있는데, 너무 신성시하다 보니까 누가 손을 못 댄다. 당산나무를 건드려서 탈 붙었다는 말을 들었다. 과거 에 당산나무 가지를 친 사람이 있었다. 괜히 시름시름 아팠다. 그래서 지금도 가 지를 못 친다. 죽지는 않고 시름시름 아프기만 했다. 공교롭게도 나무를 만지고 아프면, 당산나무 만져서 저렇게 생겼다고 인식했다(제보자 : 김위용).

* 우리 아버지가 어장을 크게 했거든. 우리 아버지하고 작은 아버지하고 닻배를 했는데, 6명 타고 나갔는데, 우리 아버지만 유일하게 살아왔어. 구시포쪽으로 떠밀 려갔는데… 누가 소매를 메고 가다가, 소매통 짊어지고 보리밭에가 줄라고 가서 본 게, 뭐가 꾸무럭거리드랴.

가본게 우리 아버지더랴. 그래서 살았어. 영신당의

영험함은 지금 아그들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유명혀. 옛날에 하동, 남해, 통영 사람 들이 배타고 올 적에, 바람이 많이 부는 4월 달에 여기를 오는데, 인제 바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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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죽게 생긴 거라. 근디 불이 하나가 거기 써졌더라 이거여. 등대불 모양으 로. 근게 그놈을 보고 온 거야. 여그 와서 본 게 불은 아니고 당할머니거든? 영신 할머니, 그 양반이 불을 붙인 거야. 그거 유명해. 그래서 여기 사람들이 제사를 지 내. 통영 사람들이 그때 당신도를 띠어 갔다고 헌다. 하도 영험해서 그 사람들이 가져가 버렸댜(제보자 : 박연봉).

* 여기가 전깃불 없는 시대에, 등대도 없는데, 어업해 갖고 배가 들어오는데 캄 캄해서 들어오도 못 허는데 할머니가 불을 켜줬다. 불 없던 시절에 할머니가 여기 서 불을 켜 주고, 우리 바다 어민들을 사랑했고 파도도 못 치게 막어주었고 사람 사고도 덜나게 해주고 그랬다. 그래서 제를 계속 지내준다는 말을 어르신들한테 들었다. 할머니가 많이 도와줬기 때문에 계속 그런 말들이 전설처럼 내려온 것이 라고 생각한다(제보자 : 김영무).

* 동호 중선배 선장이었던 김씨한테 들었던 이야기다. 그 사람의 말에 의하면, 당할머니가 밤이 되면 높은 산에서 등대처럼 서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배의 선로 를 비춰주었다고 한다. 당할머니가 손가락으로 불빛을 환하게 비춰주니까 선원들 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제보자 : 이기화).

6) (1) 수륙재의 성격 물이나 뭍에 떠도는 원혼들을 달래서 천도시키는 마을 공동체굿이다. 원 혼들은 저승질서에 편입되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도는 죽은 영혼을 말한다. 다시 말하 면, 원혼들은 수사(水死)한 자, 객사한 자, 질병으로 죽은 자, 해산하다 죽은 자 등 비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한 영혼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혼들은 인간들에게 무서 운 재앙을 가져다 주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수륙재는 물과 뭍 즉 마을 곳곳에 있을 이러한 모든 원혼을 해원시켜 마을의 재앙을 물리치고자 하는 의 식이라 할 수 있다. 수륙재는 물이 있는 곳, 즉 강이나 바다가 있는 지역이라면 어느 곳에서나 연행이 - 275 -


. 그러나 수륙재가 가장 많이 연행되고 또 큰 규모로 연행되는 곳은 역시 바다를 끼고 있는 해안지역이라 할 수 있다. 해안지역은 생업 공간이 바다이기 때문 에 어민들은 항상 자연재해의 위험 속에 노출되어 있고 불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 다. 이러한 불안 요소를 해소하기 위해 어민들은 어업이 본격화되기 전에 수륙재를 벌여 나쁜 액운을 사전에 물리치고자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고창 동호리에서 매년 음력 이월 초하룻날 수륙재/영신제를 모시는 이유에 대해 고창문화원장이었던 이기 화는 “동호는 칠산바다에 머무르고 계시는 해왕신을 모신 곳이다. 동호에서 그 주신 을 안 모시면 바다가 늘 노해서 수산업에 큰 지장을 준다. 그래서 동호는 해왕신을 주신으로 모시고, 그 신을 위로해 주려고 그랬다”라는 말을 전해 주었다. 고창 동호리 당집 앞에는 군부대가 있고 군부대 아래의 배가 드나드는 길목에 ‘유 왕개미’라고 불리는 바위 하나가 있다. 이 유왕개미 쪽으로 물길이 도는 까닭에 물살 이 아주 세서 위험한 사고가 자주 발생했었다고 한다. 이 부근에서 사람들이 해수욕 을 즐기다가 익사하는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했는데, 대체로 일반인들 보다는 경찰이 죽는 사고가 많았다고 한다. 따라서 마을 사람들은 유왕개미에 용왕님 먹이를 바쳐 야 사고를 면할 수 있다고 인식해 왔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보면, 고창 동호리에 서 연행되는 수륙재는 칠산바다의 주신인 해신을 위로하고 마을의 모든 재앙을 물리 치는 마을 공동체굿이라 정리할 수 있겠다.

(2)

명칭

고창군 해리면 동호리에서 음력 정월 초하룻날 연행되는 마을굿은 영신굿, 영신제, 당할머니제사, 수륙재, 풍어제 등의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이기화의 제보에 의하면, 과거의 음력 정월 초하룻날의 제사는 영신당의 당제를 더 중시하여 영신굿이나 영신 제라는 명칭을 사용했다고 한다. 영신굿, 영신제, 당할머니제사라는 명칭은 마을 공 동체굿의 전 과정 중에 영신당에서의 당제를 가장 중요한 의식으로 보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라 추정된다. 후에 마을 주민들은 액막이 의식을 강조한 수륙재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하였고, 풍어 기원 의식을 강조한 풍어제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지금의 현지 주민들은 이러한 다양한 명칭들을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다. - 276 -


(3)

연행되는 수륙재 영신당에서 지내는 영신제와 바닷가나 바다에서 지내는 용왕제와 결합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영신당제는 마을 대표자격인 제관과 풍물패들이 참여하여 엄숙한 분위기 속에 제사를 지내며, 용왕제는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참여한 가운데 바닷가 에서 비교적 활달한 축제 분위기 속에 제사를 지내게 된다. 수륙재의 제비(祭費)는 마 을 어촌계에서 충당한다. 예전에는 배를 가지고 있는 선주들이 갹출하였다고 한다.

① 제관 선정 및 금기 * 영신제의 제관 선정은 이월 초하루 전날 행하는데, 제관은 매년 바뀐다. 기준 은 특별하게 두진 않지만, 통상적인 예로 본다면 한 해를 깨끗이 보내고 마을 안 녕, 건강, 액운 같은 것을 다 담아내는 그런 풍습이 있다 보니까 깨끗하고 아무래 도 걸림돌이 없는 분들, 그리고 한가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뽑는다. 제관은 각각 정한다. 철륭제/당산제를 지내는 제관도 따로 정하고, 수륙재를 지내는 제관도 따 로 정한다. 그런데 어떤 때는 같이 하기도 한다. 제관으로 선정된 분들은 제사 지 내기 전에 깨끗이 하고 목욕재계한다. 불결한 사람은 그 집에 못 오게 하고 금줄 쳐 놓고, 황토를 뿌려놓는다. 부부관계도 안 하고 그런다. 지금도 그런다. 전에는 초하룻날 허면 초하룻날 새벽부터 금줄 쳐 놓고 못 들어오게 한 것 같다. 근데 마 을에서 사람이 죽거나 임산부가 애기를 낳거나 하면 제사를 안 지낸다. 연기도 안 허고 아예 지내지 않는다. 지금도 금기는 지킨다(제보자 : 김위용)

② 제일과 제일 변경 논란 * 옛날에는 아기가 우리 마을에 못 들어오게 마을 입구에다 임줄을 쳤어요. 애 기 나는 사람들은 바깥에 가서 낳아야 했어요. 바깥에 가서 낳으라고 내 보냈거든 요. 그랬는데, 초상이 난 것은 어쩔 수 없잖아요. 갑자기 죽어버리니까. 예고 없이 죽어버리는 사람이 많잖아요. 근게 음식 장만해놓고 죽었을 때는 그 달을 넘겨야 돼요. 그 달에는 깨끗한 음식이 되지 않겠다 해가지고 달을 넘겨요. 그러면 이월 달에 지내야 되는 제사가 3월 달까지 갈 수 있고, 4월 달 갈 수도 있어요. 왜냐면 좋은날을 받아갖고 헐라고. 그리서 날짜가 변동되는 수는 있어도 이태까지 날짜가 - 277 -


이월 초하루, 정월 초사흗날 그렇게 했어요(제보자 : 김영무)

* 수륙재라고 해서 당제하고 당에다 제사 모시는 것 바다에 가서 제사지내는 것 두 가지 형식으로 그날 이루어지는데, 이월 초하룻날 했었어요. 이월 초하룻날 허다 보니까, 이월 초하룻날 당일에 음식 장만을 못하잖아요? 그래서 작년에는 이 월 초사흗날로 미뤄서 했어요. 지금은 사람 숫자도 무장 적어지고 책임자 아니면 안 나오고 괜히 하루 종일 잠 못자고 술 먹고 몸도 피곤허지 사람도 안 나오지 허다 보니 형식적으로 헐라면 차라리 없애버리자는 얘기도 나왔어요. 사람들이 안 나오고 폭폭허니까. 그런디 역사적으로 전설처럼 여태까지

계속 내려온 것을 우

리 시대에 가서 없애버리면 우리 자식들이 뭐라고 허것냐? 그래도 이어는 가야 되는데… 뭐 저어 요새 젊은 친구들, 이장들, 책임자들 여남은 명 나와서 헌다는 것이 지금 너무 형식적이지 않냐? 우리 마을이 120~130세대 되거든요? 그러면 굉장히 큰 마을인데, 사람 여남은 명이 나와 헌다는 게 부끄러운 일이더라고요. 굿 치러 간 사람들은 헐 사람이 없응게 계속 그 사람들만 고생을 해야 돼요. 그날 은 어디 못 가게 혀요. 돈도 벌러 못 가요. 그니까 차라리 없애버리면 어쩌긋냐 그랬어요. 그러다가 내년에는 잘 하자 잘 하자 그래요. 옛날에 지내는 데로 잘 지 내고 있구나 느껴지게 할려면, 의복도 갖추고 돈도 많이 들어야 하는데…(제보자 : 김위용).

* 당산제는 초사흗날 새벽부터 하는데, 초이튿날 밤 12시 넘으면 초사흗날 되 잖아요. 특히 여자분들이나 애기들이 우리 마을에 들어와서 안 보이고, 여자들이 안 돌아다닐 시각, 새벽에 아무도 안 댕길 때 새벽에 깨끗한 사람들만 당산제를 지냈거든요. 그렇게 계속 내려왔어요. 어르신들 때부터. 그걸 허고 보면은 사람 불 과 10명 이짝저짝 밖에 안 모여요. 그러니까 잠 못 잔 사람은 10여명 밖에 못 자. 다른 사람들 다 자는데. 그러니까 작년에 우리가 얘기를 했어요. 수륙재도 마을 축제고 당산제도 마을 축젠데, 우리 열 명만 건강헐라고 당산제 지내는 것은 아니 다. 마을 전체 잘 되라고 지내는데, 왜 어떤 사람은 고생허고 어떤 사람은 편안히 잠을 자야 되느냐 혔어요. 그래가지고 당산제 날짜를 초사흗날 낮이로 해보자, 밤 에 허지 말고 낮에 해가지고 마을 전체 축제로 만들어버리면 어떠냐. 작년에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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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가 나왔어요. 낮에 허면은 사람들이 많이 모일 거 아니냐. 그래갖고 이장들한 테 건의를 했죠. 이제 총회 때 그것이 서로 의견이 나와요. 수륙재도 작년엔가? 이월 초하룻날 제사를 지내야 되는데, 이월 초사흗날에 제를 지낼려고 날을 받아 놓았잖아요. 작년에 그렇게 이월 초사흗날 했어요. 근데 어르신들한테 욕을 많이 얻어먹었어요. 근게 인자 너네들이 옛날 전통 방법을 니네들이 뭐간 니네들 맘대 로 허냐 해가지고 내년부터 다시 이월 초하룻날 혀라 그렇게 된 거요. 무슨 궂은 날 있어가지고 변경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너그 마음대로 마을 전체 전통 방 법을 몇이 바꾸는 것은 안 된다 혀서 이월 초하룻날로 하게 된 거지요. 어르신들 이 그렇게 하라고 허드라고요(제보자 : 김영무).

절차

* 수륙재는 육지와 바다에서 지내는 제사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영신당에서 지내는 것은 육제라 하고, 용왕제는 수제라는 명칭을 붙인 것 같아요. 용왕제에서 는 용왕밥을 놓는다고 그래요. 이월 초하룻날 제사 때마다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봐요. 그날은 바다가 거셉니다. 갯목 어귀에서 밥을 놓는데, 어쩔 때는 물 속으로 쏘옥 들어가 버려요. 바다에 던지는데, 밥이고 막걸리고 쭈욱 따라 들어가는 것을 봤어요(제보자 : 김위용).

* 영신당을 지낼 때는 아침 10시에 올라간다. 회관에서 출발해서 당산나무 거치 지 않고, 바로 영신당으로 풍물을 치면서 올라간다. 10시까지 영신당에 간다. 영신 당까지 한 20분 걸린다. 제물을 앞세워서 간다. 제물 뒤에 영기가 따라간다. 제사 는 10시가 될 수도 있고 11시가 될 수도 있다. 제를 지낼 때 우리 마을 잔치로만 하는 것은 아니고, 요즘 들어서 외부인사들이 많이 온다. 여기 군수나 서장이 참 석한다고 그러니까 시간을 맞출 필요가 있다. 요즘은 물때하고는 상관없이 보통 11시쯤에 제사를 지낸다. 제상을 차릴 때까지 풍물패는 풍물을 치며 당 주변을 계속 돈다. 축문이 있는데, 그때그때 따라 달라진다. 올해는 축문은 만들지 않았 다. 예전에는 아무나 당집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지만 지금은 당집 안으로 다 들 어가서 구경한다. 못 들어가는 것은 없다.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참석하는데 전체 가 참여할 수는 없다. 불결한 사람은 스스로 안 온다. 특별히 금하는 것은 없다. - 279 -


그 곳은 신성시되는 곳이라 조심한다. 제사는 한 시간 정도 드린다. 제가 끝나면 철상하고 제관집에 가서 모두 점심을 먹는다. 만조시간은 3시쯤 된다. 그때 용왕 제를 지낸다. 배에 농악패가 탄다. 용왕제 때 사용할 제물을 별도로 준비해 놓는 다. 제관은 용왕제 때 별도로 참석하지 않고, 깨끗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한 사 람이 제물을 담당해서 바다에 빠뜨린다. 그릇에 음식을 담아서 바다에 붓고 막걸 리도 한 말 붓는다. 음식으로는 삼실과, 밥, 나물이 들어간다. 은박지 세 개 정도 만들어서 붓는다. 따로따로 만들어서 백지로 싸서 이렇게 새끼를 반대로 꼬아서 묶는다. 그리고 백지를 벗기고 붓는다. 아까 배 들어오는 항로 입구에다가 붓는다. 바다 근처에서는 하지 않고 바다 가운데 가서 한다. 노래는 하지 않고 풍물만 친 다. 제사는 지내지 않고 바다에 음식물을 붓는 것만 한다. 그리고 제물을 뿌린 곳 을 배가 몇 번 돌고 돌아온다. 집안에 수사자 있는 자들은 배에 타지 않는다. 과 거에도 타지 않았다. 그 사람들은 배를 안 타고 갯가에서 개별적으로 수사자를 위 한 밥을 뿌린다. 항로 입구에 밥을 묻어 준다. 지금도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밥, 삼실과, 막걸리 등을 따로따로 담아가지고 간다. 막걸리는 한 말 정도이다. 밥, 삼실과, 술 순서대로 묻는다(제보자 : 김위용).

* 용왕제는 이름 없는 사람들이 바다에서 죽었잖아. 지인이 없는 사람들, 그 사 람들 통틀어서 위하는 제사야. 풍어제가 그날이야. 배를 띄워가서 밥 해가지고 넣 어주는 거야. 바다 속에다. 용왕님 아녀. 이름없는 선원들, 바다에서 돌아가신 분 들이 영을 빌어 밥을 주지. 용왕밥은 풍어제 거기다 차려놓고, 인자 다시 거기다 해놓고 언제나 초하룻날은 7마여. 그믐이 6만게. 물이 딱 들어오면 그거 해놓고. 밥 먹고 있으면 물이 들어와. 그믄 배타고 나서 몰아 넣고. 용왕상은 영신당에다 차려놓아. 영신당에서는 앞에다 차려놓고 그 안에다 차려놓고. 바깥에다 차려놓는 디, 바깥에 차려놓는 것은 잡신과 용왕상이여. 3시쯤 되면 바닷물이 이빠이 들어 와. 배 타고 가서 술도 한동이 바다에 몰아넣어. 그릇마다 음식물을 여럿 준비해가 지고 바다에 뿌려. 음식물 싹 준비한 거 다 거기다 버리고 오는 거여. 섞어서 뿌리 는 것이 아니라 따로따로 가지고 가서 한꺼번에 붓어. 술도 동이채 붓어버려. 굿쟁 이들, 마을에 풍악하는 사람들이 배를 타고 가지. 집집마다 여그 인자 가족 있는 사 람은 바닷가에서 개별적으로 음식물을 바다에 넣어. 개인적으로 밥을 해와서 유왕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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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그쪽에다 갖다놓고 붓어. 그 전부터 거기를 유왕개미라고 혔어(제보자 : 장연규)

* 이월 초하룻날 허는 것은 수륙재인데, 그때는 음식물을 바다에 싣고 가서 용 왕님에게 바친다. 배 한 대가 바다로 나간다. 형식이나마 지금도 지내고 있다. 나 도 수협조합장 할 때는 옷도 갖춰 입고 목욕재계도 허고 그랬다. 이월 초하룻날에 영신제를 하고 나서 바닷가로 가 용왕님에게 음식을 바친다. 우리 같은 경우는 우 리 작은 아버지가 물에서 돌아가셨으니까, 먼저 가서 밥을 해가지고 따로 가져가 서 용왕님 밥을 넣는다. 김으로 흰밥을 싸고 김치도 차리고 제사를 모신다. 제사 는 8월 달이지만, 그날 용왕님한테 고사를 지내며 작은아버지를 잘 돌봐달라고 기 원한다. 물이 많이 들어왔을 때 배가 나가야 하니까, 소나무 있는 데 가서 배 나 가기 전에 고사를 지낸다. 마을 사람 가운데 바다에서 돌아가신 분이 많다. 그래 서 그때 고사를 지내는 사람이 많다. 상을 차려 와서 고사를 지낸다. 용왕님 밥 김 두 장을 해가지고 거기다가 싸가지고 겉에는 백지/창호지로 감아가지고 묶어 갖고 던지면 거기에 공기가 들어가 있으니까 바로 가라앉지 않는다. 떠 댕기다가 팍 가라앉으면 용왕님이 가져가신다고 믿는다. 우리 작은 아버지와 같이 죽은 사 람 4명도 같이 제사를 지내준다. 작년까지는 우리 누님이 있을 때 했는데, 지금은 집에 서만 한다(제보자 : 박연봉)

* 수륙재는 10시부터 시작해서 점심 때까지 당할머니 있는 데서 놀고, 점심 때 되면은 내려와서 기관장들 점심 대접해요. 점심 허고 두 시간 정도 기다리면 물이 여그까지 들어와요. 이월 초하루면 물이 일곱마니까 점심 때 지나면 물이 거의 차 기 시작해요. 그러고도 우리가 한두 시간 기다려요. 한 시간 내지 두 시간 기다리 는 것이 뭐냐면은, 조류가 너무 빠르면 음식물이 물에 다 떠밀려가 버리잖아요? 그러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잠겨 있을 시간을 맞춰서 우리가 나가는 거지요. 수륙재 헐 때 막걸리를 많이 사용허는데, 막걸리를 기냥 20리터짜리 한 말을 통째로 부 어버려요. 다 음식을 따로 갖고 가서 용왕님네한테 수상에서 제사를 지내는 거 아 닙니까? 잡귀신한테요. 우리가 그것이 왜 생겼냐고 어르신들한테 물어보면은 우리 마을 들어오는 당 할머니 계신 곳 바로 그 부근이 파도가 굉장히 세대요. 사고가 거기서 많이 나니까 당할머니한테 먼저 제사 지내고 음식 가지고 가서 바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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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낸대요. 용왕님네한테 우리 마을 안녕을 비는 거지요. 사고 나지 않게 해 주십 시요하고 음식을 가져다 주는 거지요. 그래가지고 허는데, 그것도 우리가 보믄은 무슨 형식 같지만, 무조건 뭐 밤, 대추를 사다가 뿌려요. 그것이 개벼우니까 떠갖 고 있을 거 아녀요? 근데 인자 배가 이케 가라앉나 안 가라앉나 보지요. 후딱 가 라앉으면 빨리 먹는 것이고 그렇게 인식을 허는 거 같애요. 없어지면은 용왕님네 가 다 빨리빨리 먹어서 우리를 기분 좋게 해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갈 거잖아 요? 배를 몇 바퀴 돌고 오면 그것이 다 없어지잖아요? 떠밀려가든 어쩌든 없어지 거든요. 그걸 확인허고 와요. 어느 정도 가다가 이정도면 되얏다 허고 오는데, 제 를 지낼 때는 비린내 나는 음식은 절대 안 먹어요. 배 타는 사람도 비린내 나는 음식은 안 먹고 가야 돼요. 제가 끝나면 먹지요. 돼지고기, 바다고기 먹고 싶어도 안 먹어요. 음식은 장 보고 그날 이케 마을 전체가 음식 장만허는 것은 아니고, 제일 깨끗허신 분헌티 맽기거든요. 그러면 그분이 음식을 장만허다가 깨까시 해가 지고 그날 가지고 오지요. 삼실과 같은 거 많이 가지고 옵니다. 상도 몇 군데 채 려요. 할머니상이 있고, 상주상도 채리더라고요. 바닷가에서도 인자 절도 허고 그 렸어요. 우리가 어느 장소를 지정허고 이 정도면 쓰것다 하면 거그다 돼지머리 놓 고 삼실과 허고 시루떡, 술 놓고 나물도 놓아요. 다 들어가는데, 갈라놓는 법은 없 드라고요? 무조건 통짜예요. 예를 들어서 떡도 시루 채 갖다 엎으고 술도 한말 그 대로 갖다가 쏟고, 과일도 그냥 다 던집니다. 하여튼 간에 제사 지낼라고 장만했 기 때문에 많이 가져가요. 바다에서는 구체적으로 축문 읽고 허는 것은 못 봤어 요. 형식적으로 우리가 거기서 인사하고 풍물을 멋지게 쳐주고 음식을 바다에다 던지는 거지요. 그리고 가라앉는 것을 확인하고 굿 다시 치고 옵니다. 육지에 도 착하면 마을 주민들이 반겨주지요. 주민들 100여 명이 바닷가에 맞이해 주어요. 상 차려놓고 욕봤다고 먹고 어울려 놀지요(제보자 : 김영무).

(4)

연행한 무속 수륙재

① 무당이 수륙재를 행했다는 제보들 * 수륙재는 역사가 있는 거다. 어촌계장이 대행을 해서 한다. 군청에서 다 온 다. 어렸을 때 무당을 데려와 굿을 하는 것을 봤다. 마을에는 무당이 없었고 외지 - 282 -


에서 데려왔다. 그때는 무당을 보고 단골이라 했는데, 하인 취급을 했다. 그 전에 무당도 있고 굿치는 사람도 있었는데, 굿치는 사람은 풍물치는 사람이고 기능보유 자나 마찬가지다. 피리불고 징 치고 다 그랬다. 우리 아주 어려서 무당이 하는 굿 을 봤다. 옷 입고 불도화 쓰고 줄을 꼬아 갖고 줄도 타고 그랬다. 어장 형성이 되 고 잘 될 때 그랬다. 내가 열 몇 살 때니까 한 60여 년 전쯤 된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다닐 때도 굿을 봤다. 해방되기 전이다. 무당이 헐 때는 줄을 타고 놀기 도 한다. 줄타는 사람은 따로 온다. 하인들, 즉 여자 무당들이 와서 하고 밥도 가 지고 간다. 고창군 해리면에 단골네가 살았던 적이 있는데 죽은 지 오래되었다. 백정이랄지 그런 하인/단골들은 역사를 없애 버리려고, 자취를 감춘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하대를 받았기 때문에 고향을 하직하고 가기 때문에 전혀 알 수가 없 다. 그 사람들 자식들을 알지만 알려 줬다가 그 사람들이 알면 큰일 난다.

그 사

람의 어머니가 단골네였는데 어머니 돌아가시고 자식들은 전부 70대가 되었다. 그 집안 후손들은 다 이사가 버렸다(제보자 : 박연봉).

* 옛날에는 영신제할 때, 무당들이 했다. 우리 어렸을 적에, 선주들이 무당들을 사와서 굿을 했다. 이름 있는 사람들 즉 상쇠들이랑 굿쟁이들 전부 데려다가 했 다. 이월 초하룻날은 대단했다. 바람이 세니까 텐트 쳐 놓고 했다. 3일 전에 굿패 를 데려다 놓고 연습하고 그랬다. 굿은 초하룻날 하루만 했다. 고창군의 이름 있 는 상쇠들은 다 모였다. 어렸을 적의 일이라 이름은 잘 모른다. 굿을 칠라면 10명 이상 있어야 치는 거다. 굿패들이 상모도 쓰고… 남사당패 같은 그런 식이다. 거창 했다. 한두 명의 무당이 와서 춤추고 그랬다. 선주들이 돈을 많이 버니까 다 사왔 다. 큰 배 타고 바다에 나가서 굿치고 들어왔다. 그런디 그것이 없어져 버렸다. 일 제 전 후에도 한 60년 전까지는 무당을 데려다 굿을 했다. 내가 71살이니까 60년 전 쯤 될 거다. 그때도 수륙재라고 했다. 수륙재를 풍어제라는 명칭으로 고쳐진 지가 얼마 안 됐다. 한 30년 전쯤 되었을 것이다. 내가 20년 전인 1972년부터 이 장을 10년간 했으니까 한 30년 전쯤 된다고 본다(제보자 : 장연규).

* 이 마을 터가 300터가 넘었다. 신동호에 단골이 있었는데, 우리 마을에서 수 륙재할 때 그 단골을 안 썼다. 신동호 단골은 굿을 크게 한다거나 하지 않고 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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쳤다. 동호 단골 아들이 초등학교 동창인데, 이름이 기억이 안 난다. 우리 마을에 서 다른 무당을 부르면 무당패들이 많이 온다. 이놈 부르면 딴 패도 오고, 저놈 부르면 저 패가 오고 그랬다. 무당들은 영신당에서 굿하고, 바닷가에 내려와서 천 막 쳐 놓고 했다. 배 타고 나가지는 않았다. 소나무 밑에서 진을 쳐 놓고 굿을 했 다. 무당들이 하루 종일 굿을 했다. 용왕밥도 어민들이 해놓고, 무당이 빌 적에도 선주 개인들이 용왕님네를 찾는다. 선주들 개인 개인마다 만선하도록 속으로 빈 다. 원혼을 위한 밥도 뿌린다. 무당들한테 선주들이 돈을 줬으니까 자기네들이 할 것은 다 잘 했을 것이다(제보자 : 김위용).

* 무당들이 옛날에는 헌디, 옛날에 무당들이 수륙재 지내고 그랬다. 물 들면 밥 해갖고 유왕밥 한 봉지, 고인 죽은 사람 한 봉지, 또 한 봉 더 는다. 세 봉 갖고 간다. 한 봉은 잡신밥. 김에다 싸고 백지에다 싸고 거기다 넣어줬는데, 그것은 수 사자를 위한 고사이다. 지금은 잘 안 한다(제보자 : 이귀녀).

* 예전에 무당에 의해 제를 모실 때에는 선착장에서 먼저 제를 올리고 당집으 로 갔으나, 지금은 무당 없이 화주와 마을 사람들이 참여하는 가운데 당집에서 제 사를 모시고 오후 2시경에 물이 들어오면 바다로 배를 타고 나가서 제를 모시고 돌아온다. 무당은 마을에서 돈을 주고 위도나 고창에서 불러들였다고 한다. …… 예전에는 바닷가에서 무당이 개인별로 굿을 주재하기도 했다. 용왕제를 모신 뒤에 집집마다 간단한 음식을 차린 상을 들고 바닷가로 나오면 무당이 굿을 해주었다 (1998. 1.11. 서해숙 조사자료 참고).

* 고창군 해리에는 법성김씨 단골이 산 적 있다. 법성포의 김씨 단골가와 친인 척간이 아닌가 한다. 법성김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단골인 경우가 많다. 법성김씨 들은 단골 신분을 감추기 위해 김해김씨로 성씨를 변경하는 경우가 많았다. 동호 리 영신굿 때에는 해리면 단골을 안 썼다. 고창군 해리면 동호리 영신굿/수륙재 때 고창군 공음면 군유리에 사는 배성녀가 두 번 참가하여 연행했다는 소리를 들 었다. 배성녀한테 직접 들었다. 1965년 1월에 미국 하버드 대학에 다니는 사람들 이 와서 배성녀의 영신굿/수륙재 재연을 촬영해간 일이 있었다. 하버드 대학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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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에 가면 그때 찍은 영상 자료가 있을 것이다. 나는 무당이 동호에서 굿을 하는 것을 1965년도 이후는 보지 못했다. 6・25 때까지는 무당이 굿을 많이 했다. 그러 나 중선배 중심의 배 운영이 해체되면서 굿을 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배성 녀도 동호리에서 두 번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 그 원인일 것이다. 중선배가 사라 진 이후에는 자금줄이었던 중선집이 쇠락하여 영신굿도 많이 시들해진 것이다. 무 당을 불러 행하는 영신굿을 매년 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배성녀도 두 번 밖에 초 빙되지 않았다고 본다. 그러나 미국 하버드 대학 주관의 영신굿/수륙재 재연 촬영 이 있은 이후로, 배성녀는 자신이 매년 동호리 영신굿을 해왔노라고 얘기하고 돌 아다녔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다. 고창문화원에서 영신굿/수륙재 재연 촬영하 기 전에 내가 배성녀한테 물어보았을 때 분명 자신은 고창 동호리에서 영신굿을 딱 2번 했다는 소리를 했기 때문이다(제보자 : 이기화).

수륙재의 연행자 심원면 고전리 단골이었던 배성녀는 고창군 해리면 동호리의 영신굿/수륙

재에 참여하여 무당굿을 연행한 바 있었다. 이기화는 배성녀로부터 자신이 동호리 마을 공동체굿에 두 번 참여하여 영신굿을 연행했다는 소리를 직접 들었다고 한다. 또한 미국 하버드 대학팀 주관으로 배성녀는 고창문화원 2층에서 영신굿을 재연한 바 있었다.

* 1965년 1월에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굿을 촬영하기 위해 고창을 방문한 적 이 있었다. 그 당시 문예진흥원장이었던 강한영 선생이 그 사람들을 내게로 보내 서 영신굿 재연을 부탁해 왔다. 나는 고창군

공음면 군유리에 사는 배성녀를 찾

아가 고창군 동호리 당각시집에서 굿을 해 봤냐고 물었다. 그러자 배성녀는 해방 전에 중선 선장집에서 영신굿을 두 번 해보았노라고 대답했다. 나는 배성녀를 데 려다가 하버드 대학 사람들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배성녀는 며칠 간 여관에 머물 면서 고창문화원 2층에서 영신굿 촬영에 임하였다. 이때 소요된 굿 비용은 100만 원 정도였다(제보자 : 이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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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성녀 단골은 고창군 심원면 고전리에서 살다가 단골가 출신인 정태임에게 시집을 가서 고창군 공음면 군유리에서 무업 활동을 하였다. 배성녀의 친정인 고 창군 심원면 고전리에는 배씨들이 많이 살았고, 배성녀가 무업 활동을 했던 고창 군 공음면 군유리에는 진주정씨들이 많이 살았다. 군유리(群儒里)는 유림들이 군 락을 이루고 산 지역이었다. 일명 선비촌이라 명명되었다. 군유리는 상군과 하군 으로 나뉘었는데, 상군은 유림들이 사는 양반촌이었고 하군은 민촌이 사는 하급촌 이었다. 상군은 유생들만 사는 데라서 별 것이 없고 호수도 민촌에 비해 적었다. 하군은 상군에 비해 호수가 많고 번성한 지역이었다. 배성녀의 시댁 일가는 이러 한 군유리의 하군/민촌에서 살면서 무업 활동을 하였다. 배씨들이 많이 사는 배성 녀의 친정인 고창군 심원면 고전리는 고창군 해리면 동호리와 아주 인접한 지역 이다. 동호리의 골프장에서 해변가를 1킬로 정도 걸어가면 바로 고전리가 나온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한다면, 배씨 단골집단이 고창군 동호리 마을 공동체굿에 어느 정도 관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1965년도에 고창문화원에서 재연한 영신굿/수륙재는 배성녀 단골 이외에 삼현육각잽이들이 참여하였다. 삼현육각잽이 는 영광에서 데려왔다. 전경환의 부친과 평소 알고 지내던 이기화는 전경환의 부 친에게 악사 섭외를 부탁했다. 전경환의 부친은 고인이었고, 전경환의 모친은 단 골 활동을 하였다. 영광에 사는 전경환의 부친은 피리, 대금, 징, 장구 등을 잘 치 는 악사들을 데려왔다(제보자 : 이기화).

선장의 역할 모시는 해안 쪽 마을에는 항상 부유하게 사는 중선집이 있었다. 중선집이

란 중선배를 부리는 선장집을 일컫는 말이다. 어느 포구든지 주낙배와 중선배가 있 었는데, 그 중에서도 중선배가 핵심 역할을 했다. 중선배 선장은 부를 축적한 자이기 때문에 가난한 선주・선원들이나 어민들은 중선배 선장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중선배 선장은 그들에게 미리 돈도 빌려주면서 그들을 관리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선주・선원들이나 어민들은 중선배 선장의 예속 하에 있었다고 하겠다. 선주/선원 중 심의 영신굿/수륙재 같은 마을 공동체굿에서도 중선배 선장이 앞장서 주어야 일이 성사될 수 있었다. 중선배 선장이 자금줄이고 또 중선배 선장의 지시에 의해서 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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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선주・선원 중심의 영신굿/수륙재가 성사되기 위해서는 중선배 선장의 역할이 매우 막중했다 하겠다. 중선배 선장이 주도가 되면 영신굿/수륙재는 마을 전 체의 굿이 된다. 중선배가 마을의 핵심적인 배이기 때문에 선주・선원・어민들이 전 부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동력선이 등장하면서 중선배 중심의 배 운영 체제는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중선배 선장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무당을 초빙하여 연행하던 영신굿도 점차 쇠락의 길을 걸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배성녀가 해방 전에 동호에서 영신굿을 딱 두 번밖에 해보지 않았다고 증언한 것도 이 같은 현실을 반영한 결과였을 것이다.

연신굿의 관계

김태곤의 한국무속연구50)에서는 배성녀가 맡아서 하던 동호리의 연신굿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굿 절차를 소개해 놓고 있다. 조사자는 연신굿과 영신굿이 서로 밀접하 게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보고 고창문화원장을 지낸 이기화를 찾아가 면담하였다.

* 정월 초하룻날 제사는 영신굿 또는 영신제이다. (조사자 : 그렇다면 영신굿과 연신굿은 어떻게 다른가요?) 연신굿이나 영신굿은 같은 굿이다. 영신이라는 명칭 이 구전되는 과정에서 연신으로 발음된 것이다. 영신굿은 당집에 모신 해신을 맞 이하는 굿이다. 해신을 맞이한 후 바닷가나 바다로 가서 본격적으로 풍어를 기원 하거나 액을 막는 의식을 행한다. (조사자 : 김태곤의 조사보고서에서는 동호리에 서 배성녀가 음력 2월 20일에 연신굿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던데요. 음력 2월 20 일이면 당할머니 생신날이잖아요?) 마을 사람 중에 누가 사망했거나 마을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정월 초하룻날 제사를 못 지낼 경우에는, 당할머니 생신날 즉 음력 이월 스무날에 날을 잡아 영신제를 지냈다. 정월 초하룻날의 제사는 매년 지 내는 의식이지만, 당할머니 생신날 지내는 제사는 매년 지내는 것이 아니다. 정월 초하룻날 제사를 못 지냈을 경우 당할머니 생신 때 선주들을 중심으로 영신제를 지냈다(제보자 : 이기화).

위에 제시한 바처럼, 이기화는 ‘영신굿’과 ‘연신굿’을 같은 굿으로 보고 있다. 그의 50)

, 한국무속연구, 집문당, 1981, 86-87쪽. - 287 -


영신굿이라는 명칭이 와전되어 연신굿으로 되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또 한 마을 주민들은 당할머니 생신날인 음력 스무날에 당할머니 제사를 지낸 적이 있 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당할머니 생신날이 김태곤이 조사한 연신굿의 날짜와 일치한 다. 그렇다면 당할머니 생신날에 연신굿을 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에 대해 이기화는 음력 정월 초하룻날 영신굿을 못했을 경우에 당할머니 생신 때 날을 잡아 영신굿을 했노라고 답변하고 있다. 결국 영신굿은 연신굿과 같은 굿이고, 당할머니 생신 때 행 하였던 굿도 영신굿이 된다는 소리다. 무당의 맥이 끊긴 현 상황에서는 이와 같은 사실의 진위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지만, 어쨌거나 영신굿과 연신굿은 매우 밀접하 게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륙재 절차

<

제보한 영신굿 절차> * 무녀는 당집에서 굿을 하지 않는다. 영신굿을 할 때는 중선집 부부가 목욕재

개하고 당집에 올라간다. 마을 대표자와 어촌계장들도 올라가지만 무녀는 당집에 올라가지 않는다. 중선집 선장 부인이 당집에서 됫박쌀을 놓고 빌면서 영신(迎神) 을 해도 되겠냐고 당할머니에게 묻는다. 영신당에서의 제사는 당할머니에게 영신 을 허가 맞으러 가는 의식이다. 단골은 맨 먼저 중선 선장집 마당에서 준비굿을 한다. 단골은 돼지 움막이나 우물에 가서 삼현육각 잽혀놓고 풍물도 친다. 중선배 선장 부부가 당제를 마치고 내려오면 중선집 마당에서 신맞이굿을 한다. 신맞이굿 은 당제에 모셔놓은 해신을 맞이하는 굿이다. 신맞이굿은 해신맞이굿, 당맞이굿, 영신(迎神)굿이라고도 한다. 단골은 당집에서 신맞이굿을 하는 것이 아니라 중선 배 선장집에서 한다. 당집에는 무당이 함부로 올라가서 당굿을 할 수가 없다. 신 맞이굿이 끝나면, 바다에서 본굿을 한다. 단골은 바다에 중선배를 띄워놓고 배에 올라가서 용왕굿을 한다.

<김태곤이 조사한 연신굿 절차51)> * 연신굿은 선주가 해상의 안전과 풍어, 재운 등의 행운을 위해 단골을 초빙하 51) 

 김태곤, 집문당, 1981, 86-87쪽. - 288 -


여 바다로 나가 배에서 하는 굿이다. 이런 관계로 연신굿을 ‘배연신’ 또는 ‘뱃굿’이 라고 한다. 배씨가 맡아서 하던 해리면 동호리 연신굿의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음력 2월 20일로 날을 잡아 선주와 선원들이 합동으로 제비를 추렴하여 단골을 초빙해서 당굿을 한 다음 바다에 나가 용왕상을 차려놓고 ‘간대’를 잡힌다. ‘간대’ 는 약 10미터 길이의 생대(生竹)를 잎이 달린 채 베어온 것이다. 간대를 잡히고 단골이 축원하면 물에 빠져 죽은 혼이 이 간대로 내려 진동이 오면서 대잡이를 통해 익사자의 시체가 있는 곳을 알려주고, 또 앞으로 다가올 일을 알려준다. 이렇게 합동으로 해상에 관한 굿을 ‘모듬굿(공동굿)’이라 한다. 이 과정이 끝나면 ‘제금굿(개 인굿)’이라 하여 익사자의 혼을 건지는 굿을 할 사람은 다시 개별적인 혼굿을 하고, 선주는 배로 나가 개별적인 배연신굿을 하는데, 그 진행순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 안당석 ⓑ 당산석 ⓒ 성주석까지 한 다음 바닷가에 있는 신당(神堂)으로 가 서 당(堂)맞이를 한다. ⓓ 당맞이 당에 제물을 올리고 그 앞에 당할머니의 반지 하나, 비녀 하나, 청홍색 인조견 각 1척(尺), 면포(綿布) 한필을 바치고 단골이 당신(당할머니)에게 축원한다. 이때 배의 도사공은 신당 바깥 댓돌 밑에 엎드려 있다. 축원이 끝나면 단골이 당할머니 에게 바쳤던 반지, 비녀 등의 예물 일체를 바쳤던 홍색 인조견에 싸서 당 밖에 엎 드려 있는 도사공의 목 뒷덜미의 옷 동정 밑으로 찔러서 넣어주면, 도사공은 이 예물이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등을 구부린 채 배로 가서 상(上)돛대 밑에다 이 예 물을 놓고 굿 순서도 들어간다. ⓔ 배서낭(船王) ⓕ 용왕제 용왕제에서는 제가 끝나면 밥 세 덩이를 백지에 싸서 손으로 뭉쳐 바다 속에 던지고, 간대를 잡힌다. 물에 빠져 죽은 익사자가 있을 경우에는 ⓖ 해원 ⓗ 길닦음을 하고 익사자가 없으면 곧바로 ⓘ 중천매기를 하여 연신굿이 끝난다.

- 289 -


취락과 산 이름52)

1.

변천 사람들의 생활터전이 되는 지형, 지물의 구분을 짓기 위하여 붙여진다. 지

명은 처음에 붙여진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문자의 변화, 음운의 변천에 따라 개 칭되기도 한다. 통일신라 제35대 경덕왕 16년(757년) 한자가 본격적으로 사용되면서 향찰식, 이 두식으로 부르던 지명을 한자로 바꾸게 되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삼국이 각기 다른 형태의 지명을 일률적인 형식으로 개편하여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할 필요가 있 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3월 1일 일제는 우리나라 고유의 민족혼이 깃든 지명을 토 지수탈을 목적으로 행정구역 개편과 병행하여 지명을 개칭하였다. 예를들어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면서 일제강점기 때 바뀐 지명에 대한 개편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지명은 지역의 지형이나 위치, 지리, 교통과 같은 자연적인 생태와 더불어 인물・역사・종교 등 인위적인 사항을 포괄하여 지명이 붙여지고 개칭되어 왔다.

2. 고창군 지명의 특징과 변천사 고창군의 지명을 살펴보면 위치, 지형, 건축물, 도덕・신앙, 산업경제, 동・식물, 기 구, 하늘・땅・달・별・구름, 대소(大小), 신구(新旧), 숫자, 형용・색채, 풍수설에 의하여 붙여진 지명이 주류를 이룬다. 52)

(고창학술문화연구회 연구위원, 흥덕면장) - 290 -


역사는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 유적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부 터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한시대에는 마한,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했 다. 통일신라 때 757년(경덕왕 16년) 모량부리(毛良夫里)가 고창현으로, 송미지현이 무송현(茂松県)으로, 상로현이 장사현(長沙県)으로, 상칠현이 상질현(尚質県)으로 두 글자의 한자로 개칭하게 되었다. 고려시대 초기에는 고창현이 고부군에, 장사현과 무 송현은 영광군에 속했다. 조선시대에는 1455년(세조 1년)에 고창현이 나주의 속읍이 되었고 무송현과 장사 현은 1417년 무장현으로 통합되었다가 1836년(헌종 2년)에 군으로 승격되었다. 1895년 지방 행정구역의 개편에 따라 고창현이 군으로 승격되면서 전라북도에 편 입되었다. 무장군은 전주부에 소속되었다가 1896년 전라남도에 편입되었다가 1906 년 다시 전라북도에 편입되었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고창군과 무장군 그리고 흥 덕군이 고창군으로 병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3.

관련된 취락지명

고창군 취락의 지명 중 산(메・뫼), 봉(峰), 치(峙), 현(峴), 등(嶝)에 붙여진 이름 을 살펴본다. 산이 붙은 이름을 살펴보면 읍면 지명은 아산면과 대산면이 있고, 법정 리는 고창읍 덕산리를 비롯하여 11개 읍면 30개 법정리, 자연마을은 고창읍 매산 등 14개 읍면 99개 취락이 있다. 봉(峰), 치(峙), 현(峴), 등(嶝)이 붙은 이름은 무장면 월봉마을을 비롯하여 8개면 17개 마을이 있다.

1)

(메・뫼)에 따라 붙여진 이름

(1) 읍・면(2곳) : 아산면, 대산면 (2) 법정리(30곳)

- 291 -


-

(4곳) : 덕산리, 월산리, 화산리, 도산리

- 고수면(3곳) : 남산리, 봉산리, 황산리 - 아산면(3곳) : 계산리, 남산리, 성산리 - 무장면(1곳) : 옥산리 - 상하면(2곳) : 검산리, 장산리 - 해리면(2곳) : 송산리, 안산리 - 성송면(2곳) : 산수리, 향산리 - 대산면(4곳) : 매산리, 산정리, 중산리, 춘산리 - 심원면(3곳) : 궁산리, 주산리, 월산리 - 성내면(3곳) : 덕산리, 산림리, 월산리 - 부안면(3곳) : 검산리, 오산리, 용산리

(3)

(99곳)

- 고창읍(9곳) : 매산, 월산, 화산, 덕산, 신덕산, 도산, 동산, 산정, 성산 - 고수면(10곳) : 남산, 황산, 봉산, 오산, 학산, 증산, 조산, 당산, 성산 - 아산면(7곳) : 당산, 남산, 계산, 죽산, 봉산, 기산, 노적매 - 무장면(8곳) : 덕산, 도산, 대산, 내산, 송산, 내산, 화산, 산정 - 공음면(6곳) : 남산, 평산, 선산, 용산, 산정, 옥산 - 상하면(6곳) : 고산, 기산, 검산, 갈산, 용산, 옥산 - 해리면(9곳) : 미산, 안산, 월산, 행산, 송산, 우산, 나산, 성산, 구산촌 - 성송면(8곳) : 향산, 산수, 갈산, 송산, 중산, 주산, 추산, 산지촌 - 대산면(9곳) : 매산, 산정, 발산, 약산, 용산, 중산, 지산, 남산, 신산 - 심원면(8곳) : 궁산, 마산, 월산, 주산, 화산, 기산, 동산, 우러산 - 흥덕면(2곳) : 반월산, 신지뫼 - 성내면(6곳) : 낙산, 동산, 월산, 운산, 입산, 성산 - 신림면(6곳) : 구산, 도산, 마산, 작산, 환산, 아산리 - 부안면(4곳) : 난산, 용산, 중산, 종산 - 292 -


2)

(峰), 치(峙), 현(峴), 등(嶝)이 붙여진 이름 -

: 월봉, 조치

- 해리면 : 월봉 - 성송면 : 암치, 괴치 - 대산면 : 석현 - 심원면 : 사등 - 흥덕면 : 죽현, 치일, 치이 - 성내면 : 월봉 - 부안면 : 구현, 상등, 송현, 안현, 용현, 중등

4.

산 산 이름은 다음과 같다.

- 개이빨산 : 아산면 삼인리와 심원면 도천리 경계에 있는 산. 높이 335.7m, 모양이 개 이빨처럼 생겼음 - 경수산 : 심원면 월산리와 아산면 삼인리 경계에 있는 산. 높이 444m - 박매산 : 무장면 만화리와 공음면 두암리, 신대리 경계에 있는 산. 높이 200.3m - 봉백산 : 해리면 나성리와 상하면 검산리 경계에 있는 산. 높이 167m - 성틀봉 : 아산면 상갑리, 하갑리와 고창읍 죽림리 경계에 있는 산. 높이 160m - 송림산 : 무장면, 상하면, 공음면 경계에 있는 산. 높이 205.3m - 왕제산 : 무장면 신촌리와 공음면 용수리, 신대리 경계에 있는 산. 높이 151.5m - 장군산 : 해리면 나성리와 상하면 장산리 경계에 있는 산. 높이 160m - 청룡산 : 아산면, 해리면, 심원면 경계에 있는 산. 높이 312m - 293 -


-

: 성송면 괴치리와 무장면 덕림리 경계에 있는 산. 높이 108m, 모양이 촛대처럼 생겼음

- 추산봉 : 고수면 평지리, 초내리와 성송면 계당리, 학천리 경계에 있는 산. 높이 242m - 태봉 : 고수면 예지리, 우평리와 아산면 중월리, 봉덕리 경계에 있는 산. 높이 110.8m - 토성산 : 대산면 성남리와 무장면 옥산리 경계에 있는 낮은 산. 흙으로 쌓은 성이 있음 - 한제산 : 해리면 고성리와 무장면 송현리, 도산리 경계에 있는 산. 높이 200.9m - 화시봉 : 부안면 사창리와 아산면 운곡리 경계에 있는 산. 높이 400.2m

1) - 문수산 : 취령산이라 부르다 문수사가 건립되면서 문수산이라 부름 - 당산 : 온수동 곁에 있는 산 당산제를 지냄 - 벌메(버르메, 봉산) : 봉산 동쪽에 있는 낮은 산, 모양이 벌 모양으로 되어 있음 - 시리메(증산봉) : 징새이 뒤에 있는 산. 모양이 시리(시루)를 엎어 놓 은 것처럼 생겼음. - 고성봉 : 고성촌 뒤에 있는 산. 옛 토성이 있었음 - 소반바우 : 예동 뒤에 있는 바위. 모양이 소반처럼 납작함 - 서우치 : 가섭(가협) 남쪽에 있는 고개.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통안리로 넘어 감 - 초치산 : 신기 동북쪽에 있는 산. 문수산 북쪽 줄기가 됨 - 칠봉 : 칠성 앞에 있는 일곱 봉우리 산 - 학산 : 인동 남쪽에 있는 산. 학 형국으로 되었다 함 - 가막산(오산) : 오산 뒤에 있는 산. 모양이 까마귀처럼 되었다고 함 - 294 -


-

(황산) : 황산리에 있는 산

2) - 방장산 : 반등산(방등산)을 방장산이라 개칭하여 부름. 전라남도 장성군과 전 라북도 고창군, 정읍시와 경계를 이룸 - 성산 : 고창향교 뒤에 있는 산 - 보도산 : 도산 뒤에 있는 산. 이 산에서 도산마을 유래. 보정 김정회 - 양고실재(양고령) : 석정 동쪽에서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백암리로 넘어가는 고개. 큰재와 작은재가 있음 - 간은쟁이 : 성두 북쪽에 있는 고개. 신림면 자포리 관은정으로 넘어감 - 사실터고개(사실재) : 사실에서 신림면 벽송리 사실이 있었음 - 옥녀봉 : 월산 서남쪽에 있는 산.‘옥녀탄금혈이’있다 함 - 필봉 : 월산동 남쪽에 있는 산. 봉우리의 모양이 붓 끝처럼 되었다 함 -

: 주곡 북쪽에 있는 산. 아래에 용암사와 현곡정사가 있음. 높이 44m

- 호암산 : 호암마을 뒷산

3) 공음면 - 다옥산 : 용흥 서쪽에 있는 산 - 왕방울 : 마래 서쪽에 있는 산. 산봉우리가 큰 방울처럼 생겼음 - 도른봉 : 군유 앞들 가운데 외따로 솟아 있는 작은 산 - 공동산 : 평촌 앞에 있는 낮은 산. 공동묘지가 있음 - 대리미(옥녀봉, 큰애기봉) : 원덕암 뒤에 있는 산 - 삼각산 : 지름기 북쪽에 있는 산. 측량표준기가 서 있었음. 높이 32m - 외댓메 : 두암 저수지 동쪽에 있는 작은 산 - 독산(자갈산) : 외댓메 옆에 있는 산. 돌이 많아서 두암 저수지 공사를 할 때 이 산에서 돌을 가져다 썼음 - 외얏등 : 두암 남쪽에 있는 산등성이 - 295 -


-

: 두암 저수지 앞에 있는 산등성이. 용의 수염과 같이 되었다 함

- 잣고개(작치) : 형제동에서 상하면 송림동으로 가는 고개 - 선인봉 : 해정 동북쪽에 있는 산 - 고동메 : 쑥굴 위에 있는 산. 모양이 고등(고둥)과 같다 함 - 단지산 : 내대 앞에 있는 산. 모양이 단지처럼 생겼다 함 - 제청산 : 장곡 동남쪽에 있는 산. 조선시대 때 효자 영모당 김질이 시 묘살이를 하였음 - 산보래기 : 참나무쟁이 앞에 있는 솔이 많은 산 - 신대월 : 원칠암 앞에 있는 산 - 중봉 : 원칠암 남쪽에 있는 산 - 효포산 : 원칠암 앞에 있는 산 - 함박산 : 중여 앞에 있는 산. 모양이 함박을 엎어 놓은 것 같다고 함 - 여시메 : 서당골 북쪽에 있는 산. 여우가 많았다 함

4) - 당산메 : 광대리 계양 동쪽에 있는 산. 당산이 있음 - 용산 : 대장리 시목 동쪽에 있는 산. 용의 형국으로 되었다 함 - 발산 : 산정 서쪽에 있는 산. 바랑처럼 생겼다 함 - 가마메(부산등) : 성남 서남쪽에 있는 산등성이. 모양이 가마솥을 엎어 놓은 것 같다 함 - 중산 : 중매 뒤에 있는 산 - 작약봉 : 춘산리 입암(무지동) 동남쪽에 있는 산. 작약나무가 많음 - 거북등 : 구동 뒤에 있는 산등성이. 모양이 거북이 같다 함 - 용머리봉 : 곡다우 동쪽에 있는 산. 높이 92.6m - 장자산 : 대산면 대장리, 회룡리, 연동리 경계에 있는 산. 높이 101m - 옥퇴끼봉(옥토봉) : 입암 동쪽에 있는 산 - 296 -


5) -

(석산) : 석수 뒤에 있는 산. 돌이 많음. 높이 91m

- 떡매(덕산) : 새치 북쪽에 있는 산. 둥그렇게 되었음 - 당산 : 향교 뒤에 있는 산. 해마다 음력 정월 초이튿날에 당산제를 지 냄 - 신당매 : 하맛등 북쪽 길가에 있는 낮은 산. 신당이 있었음 - 닭매(계산) : 덕림 뒤에 있는 산. 모양이 금계포란형이라 함. 산 아래에 덕림국민학교가 폐교되고, 고창효자노인병원이 있음 - 매봉(응봉) : 덕림 서쪽에 있는 산. 이 산의 모양이 매를 닮았다 하여 매봉 재라 부르고 있음 - 소드랑봉(정산) : 정동 앞에 있는 산. 모양이 큰 솥을 엎어 놓은 것 같다 함 - 쭉매 : 오소리 남쪽에 있는 산 - 화산 : 방고개 남쪽에 있는 산. 영험하다 하여 산신제를 지냈다 함 - 백여산 : 송현 서북쪽에 있는 산 - 구댕잇불 : 월봉 북쪽에 있던 산등성이. 덕림 저수지로 침수됨 - 월봉산 : 옥산동 동쪽에 있는 산. 지형이 만월형국이라 함. 옛날 어떤 풍수 가 동반월, 서반월 산봉에서 양류하고 있으나 산봉은 만월된 월형이라 하여 월봉산이라 부르고 있다. 높이 112.3m - 가마봉 : 원촌 서남쪽에 있는 산. 지형이 가마솥처럼 생겼다 함 - 장재메(장자산) : 장재 뒤에 있는 산. 산 밑에서 장자가 살았다 함 - 참시암미 : 죽림 남쪽에 있는 산. 산 아래에 참시암이 있었는데 덕림 저 수지로 침수됨

6) 부안면 - 할미당(고당산) : 봉오 동쪽에 있는 산. 할미당이 있었음 - 똥메 : 텃골과 하동 사이에 외따로 솟아 있는 둥글고 작은 산 - 2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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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산) : 용정 서쪽에 있는 산. 모양이 북과 같이 되었다 함

- 장대봉 : 텃골, 대동, 북산 서쪽에 있는 산. 수강산의 동쪽 줄기로서 산 모양이 장군과 같이 되었다 함 - 계명산 : 용산 서남쪽에 있는 산. 산의 모양이 닭이 우는 형국으로 되어다 함 - 삼태산 : 조양 서남쪽에 있는 산. 봉우리 셋이 솟아 있는데 별이 셋 있 는 것 같다 함 - 알미(난산) : 서당촌 뒤에 있는 산. 오산리의 오산이 자라의 형국으로 되 었다 하는데 그 자라가 까놓은 알과 같다 함 - 떡봉(덕봉) : 부안면 봉암리, 상암리 경계에 있는 산 - 소요산 : 부안면 선운리와 용산리 경계에 있는 산. 높이 444m - 수강산 : 부안면 검산리, 수동리 경계에 있는 산. 높이 328m - 똥뫼 : 하오산 앞 들 가운데 있는 둥글고 작은 산 - 건지봉(건기봉, 노적봉) : 용산 동쪽에 있는 산. 굴치 북쪽 장군봉의 장군 이 이곳에 기를 꽂을 것이라 함

7) - 구슬메(옥산) : 모암 동쪽에 있는 산. 구슬처럼 생겼음 - 옥녀봉 : 연동 동쪽에 있는 산.옥녀직금혈이 있다 함 - 왕제산(왕자산) : 왕제 서쪽에 있는 산. 왕의 혈이 있다 함. 산봉우리에 선인봉과 옥녀봉이 있는데 선인과 옥녀 사이에 있다고 하여 왕제산이라 부르며 또 산혈이 여우꼬리를 물고 있는 형체라 하여 여시메봉이라고도 부르고 있음 - 두께비산(섬산) : 용산 서쪽에 있는 낮은 산. 모양이 두꺼비처럼 생겼다 함 - 용산 : 섬포 동쪽에 있는 산 - 봉수대 : 고리포 동북쪽에 있는 산. 조선시대 때 봉수대가 있어서 남쪽으로 영광군 홍농산, 북쪽으로 소응포 봉수에 응하였음. 높이 115m - 2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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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 석수 남서쪽에 있는 산. 북동쪽에 있는 장군산의 장군이 출 전할 때 북에 해당 된다 함. 높이 74m

- 닭매(계산) : 하장사 뒤에 있는 산. 금계포란형이라고 함 - 복치메 : 용덕 뒤에 있는 산. 복치혈이 있다 함

8) - 기산 : 산양리 동쪽에 있는 산 - 백갑산(퇴미봉, 태산) : 도덕리 뒤에 있는 산. 갑산부사를 지낸 백현민의 묘 가 있음. - 재챙잇산(제성산) : 낙산 앞에 있는 산 - 유왕봉 : 해평 뒤에 이는 산. 산이 영험하다 함 - 고암산 : 칠성굴 뒤에 있는 산. 둥둥바우가 있음 - 구름등(구름산, 운산) : 운산 뒤에 있는 산 - 당산 : 월봉촌 뒤에 있는 산. 당산제를 지냈음 - 게등재 : 내안촌 뒤, 죽림 앞에 있는 산. 모양이 게의 등과 같이 되었다 함. 높이 46m - 똥메 : 높은 등 아래쪽에 외따로 있는 둥글고 작은 산

9) 성송면 - 건지메(건지산) : 양실 서남쪽에 있는 산 - 괴봉 : 양실 남쪽에 있는 작은 산. 모양이 고양이와 같이 생겼다 함 - 바쿠리봉 : 쥐봉 서쪽에 있는 산. 모양이 바구리 같이 생겼다고 함 - 쥐봉 : 괴봉의 동쪽 줄기로서 괴봉의 고양이가 노리는 쥐와 같이 생겼다 함 - 계림산 : 계촌과 호동 사이에 있는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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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산) : 송산 서북쪽에 있는 산. 봉우리가 갓 모양처럼 생겼음

- 똥메 : 효곡 뒤 들에 있는 둥그렇고 작은 산 - 사슴봉(녹봉) : 주을 앞에 있는 산. 모양이 사슴과 같이 생겼다함 - 남산 : 상금 남쪽에 있는 작은 산 - 옥녀봉 : 차동 뒤에 있는 산. 모양이 옥녀산발 형국으로 생겼다함 - 자래재 : 상금 동쪽에서 전남 장성군 삼계면 추동으로 가는 고개. 지형이 자라와 같이 되었다 함 - 남산 : 운암 남쪽에 있는 산 - 옥녀봉 : 백토 앞에 있는 산. 옥녀가 베를 짜는 형국으로 되었다 함 - 삼태봉 : 삼태 뒤에 있는 산. 고려시대 삼태마을에서 삼정승이 나왔다고 하여 삼태봉이라 부름. 서옹면 하고리와 판정리 경계에 있는 산. 높이 197m - 계란봉 : 계양 앞에 있는 산. 모양이 계란처럼 동그스름 함 - 박산 : 박산마을 뒤에 있는 산. 산의 모양이 매어 놓은 배의 형국이라 함

10) - 고봉재(육백고지) : 가평 동쪽에 있는 산. 높이 600m의 고지로서 6・ 25동란 때 국군이 주둔했음 - 까막재(가막재, 오치) : 가평 북쪽에서 도림리 도산으로 가는 고개. 풍 수설에서 까마귀가 시체를 쪼아먹는 혈이 있다 함 - 쇠종산 : 왕림 어귀에 있는 작은 산. 산의 모양이 쇠종 같이 생겼음 - 뺌산(수산) : 제하촌 서남쪽에 있는 산 - 둥그봉 : 반룡 서북쪽에 있는 산. 산봉우리가 둥그렇게 되었음. 높이 113m - 배우재(백호재) : 벽오봉에 있는 고개. 신라 때 배우(백희)라는 도둑만 이 다니던 길이라 함. 지금도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으나, 길 흔적이 있 음 - 화동산(화등산) : 벽송 남쪽에 있는 산. 진사 김씨의 묘가 있는데 화등과 - 300 -


명당이라 함 - 깐치매(작산) : 부흥 남쪽에 있는 산. 산의 모양이 까치 형국으로 되었다 함 - 당산 : 오정자 위에 있는 산. 당산제를 지냈다 함 - 똥메 : 세곡 앞 들 가운데 외따로 솟아 있는 둥그렇게 생긴 산 - 망때봉(무잿봉) : 송촌 동쪽 앞에 있는 산. 달을 바라보기가 좋다함. 영 험하다 하여 무제(기우제)를 지냄 - 똥메 : 바우배기 남쪽에 외따로 솟아 있는 둥그렇게 생긴 작은 산 - 버래등 : 용암 서쪽에 있는 산. 두 줄기로 벌려져 있음 - 고리메 : 구암 서북쪽에 있는 산. 산의 모양이 문고리와 같다 함 - 꽃봉재 : 정문등 북쪽에 있는 산 - 서당재 : 꽃봉재 서쪽에 있는 산. 산 아래 서당이 있었다 함 - 안깟등 : 용골산 남쪽 들 건너에 있는 산등성이. 바깥등의 안쪽이 됨 - 용골산 : 고리매 남쪽에 있는 낮은 산. 산이 모양이 용골과 같다 함

11) - 소산 : 고전 남쪽에 있는 작은 산 - 알미(난산) : 송현 앞에 있는 산. 알과 같이 둥그렇게 생겼음 - 대통재(대통산) : 두어물 남서쪽에 있는 산. 산의 모양이 긴담뱃대의 대통을 엎어 놓은 것 같다 함 - 부체

: 고전 동남쪽, 부채바우가 있는 산등성이

- 황학산 : 상두어 남쪽에 있는 산. 옛날 산에 나무가 없어 노란 학과 같았다 함. 심원면 두어리, 고전리, 주산리 경계에 있는 산. 높이 109m - 달구지(계명산) : 난물 서쪽에 있는 작은 산. 산 모양이 닭이 울고 있 는 형국이라 함 - 작은달구지 : 신월리에 있는 작은 산. 달구지보다 작음 - 각시메(씨산) : 금산 남쪽에 있는 산. 산세가 순하고 아름다워 각시와 같다 함. - 301 -


’이 있다 함

- 똥메 : 마리재 옆에 외따로 있는 동그란 산 - 연화봉 : 연화동 동쪽에 있는 산. 연화도수혈이 있다 함. 높이 224m - 조리봉 : 화산 뒤쪽에 있는 산. 모양이 조리같이 되었다 함 - 삼보래기(삼망산) : 웃뜸 남쪽에 있는 산. 산 위에 오르면 삼신산이라 는 정읍군의 영주산, 부안군의 봉래산(내소사 뒤 관음봉에서 세봉에 이 르는 산), 고창군의 방장산을 바라볼 수 있다 함 - 종조리봉(종조리산) : 수대동 동쪽에 있는 산. 모양이 종달새 형국이라 함 - 경수산 : 월산 동쪽에 있는 산. 물이 거울과 같이 맑다 함 - 당산메(뒷동산) : 월산 뒤에 있는 작은 산. 해마다 정월에 당산제를 지냈다 함 - 똥메(동산) : 월산 앞 논 가운데 외따로 솟아 있는 둥그런 산 - 마산 : 월산 서남쪽에 있는 산. 산의 형국이 말의 형국이라 함 - 사정목(사정, 솔치배기) : 검당 동북쪽에 있는 긴 등성이의 산. 큰 소나무가 울창했으며, 해마다 팔월 보름날에 활쏘기를 하고 놀았다 함 - 당산 : 살마기 남쪽에 있는 산. 높이 13m. 당산제를 지냈었음 - 활뫼 : 심원면 궁산리, 주산리, 도천리에 걸쳐 있는 산. 모양이 활처럼 생겼음. 높이 275.9m

12) - 계산 : 계산 뒤쪽에 있는 산. 모양이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함 - 광대봉 : 광대평 남쪽에 있는 산. 모양이 광대가 춤을 추는 것처럼 생겼다 함. 높이 152.2m - 삼천굴 : 구암 서남쪽에 천연적으로 된 큰 굴. 길이 15m, 높이 7m, 직경 7m 로, 임진왜란 때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피란을 하였다 함 - 선바우 : 반곡 서북쪽에 우뚝 서 있는 선바위. 높이 약 30m, 직경10m - 3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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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 : 흥룡 앞에 있는 산. 고지를 이루고, 수목이 울창하여 경치가 좋 음

- 남산 : 죽청 남쪽에 있는 산 - 당메(닷매, 당산) : 당산 동쪽에 있는 산. 당산리가 배의 형국으로 생겼으며, 이 산은 그 배의 닻과 같다 하여 닷매라 하던 것이 변하였음 - 마명산 : 반암 동남쪽에 있는 산. 말이 하늘을 보고 우는 형국이라 함 - 선인봉 : 고심원 뒤에 있는 산.선인취와의 혈이 있다 함 - 선운산 : 석상 남쪽에 있는 산. 개이빨산과 경수산 사이가 됨. 선운사가 있고, 석상 암이 있음. 고려가사로서선운별곡이 전해오고 있음. 높이 325m - 돌째산(석치) : 지리냉기 위에 있는 산 - 대메(죽산) : 죽산 뒤(남)쪽에 있는 산 - 봉재(봉매, 봉산) : 봉산 뒤에 있는 산. 비봉귀소혈이이 있다 함 - 월산 : 월산 뒤에 있는 산. 달처럼 생겼다 함 - 히여재(백계치) : 월성에서 삼인리로 넘어가는 고개. 옛날 고개 아래에 사기 점이 있었다 함 - 왕자굴 : 소굴치의 북쪽, 화시봉(군 산천) 중턱에 있는 굴 - 월 산 : 중복 남쪽에 있는 산 - 성틀봉 : 독골 동쪽에 있는 산. 산봉에 고려 때 성터가 있음 - 끄렁재(장화) : 학전에서 성산리 월성으로 가는 고개. 큰 매화나무 끄렁(뿌 리)이 있었다 함 - 구황산 : 아산면 삼인리와 구암리 경계에 있는산. 높이 280m - 비학산 : 아산면 삼인리, 고암리, 성산리 경계에 있는 산. 높이 307.4m

13) - 나산 : 나산 앞에 있는 낮은 산 - 소배(우봉) : 우봉 동쪽에 있는 산. 소의 형국이라 함 - 꼿지산(콧지산) : 신동호 서남쪽에 곶이를 이루고 있는 산 - 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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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호 북쪽에 있는 산. 영신당이 있음

- 망째 : 동호 서쪽에 있는 산. 높이 27m이지만 이 위에 오르면 서해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며 사방이 잘 보임 - 뱀산 : 사반리에 있는 산 78.2m 삼각정이 있음 - 양반메 : 망째 서쪽에 있는 낮은 산. 양반 묘가 있다 함 - 영산째 : 당째 아래 갯가에 있는 낮은 산 - 봉화재(봉대산) : 방죽 안 서쪽에 있는 산. 조선시대 봉수대가 있었다 함 - 쇠뿔산 : 각동 뒤에 있는 산. 산봉우리가 뿔처럼 뾰족함 - 솔메(송산) : 하송 북쪽에 있는 산. 소나무가 울창하였음 - 재땅산 : 행산 서쪽에 있는 산. 산신제를 지냈음. 높이 114m - 안지머리(안산, 안자산) : 안산 동북쪽에 있는 산. 모양이 말과 같으며 안장 바우가 있음 - 이상산 : 이상동 뒤쪽에 있는 산. 정승 둘이 난다 함. 높이 198.8m - 나분재(화산) : 동면 뒤에 있는 산. 모양이 나비의 형국으로 되었다 함 - 원당내 : 용반 서쪽에 있는 산. 산제당이 있었다 함. 높이 107m - 조시산 : 해리면 왕촌리, 방축리, 금평리, 궁산리 경계에 있는 산. 높이 312m

14) - 갈그메 : 향교 앞에 있는 산 - 옥봉 : 생교 서남쪽과 오호리에 걸쳐 있는 산 - 삿갓봉(입봉) : 원덕 서남쪽에 있는 산. 모양이 삿갓과 같이 되었다 함 - 송산 : 구송 북쪽에 있는 산. 소나무가 많고 기슭에 신송, 구송이 있음 - 옥녀봉 : 대양리 뒤에 있는 산. 모양이 옥녀가 머리를 풀고 있는 것 같이 되었다 함 - 모총재 : 고리실 뒤에 있는 산. 묘가 많았다 함 - 복칫등 : 고리실 앞에 있는 산. 동남쪽에 매봉재가 있어 이곳을 꿩이 엎드 린 형국이라 함 - 3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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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리제 북쪽에 있는 산. 예전에 서당이 있었다 함

- 무잿등 : 북룡 뒤, 흥덕리의 배풍산 동쪽 줄기에 있는 높은 산. 흥덕향교에 서 기우제를 지냈다 함 - 대성봉재(죽봉정이) : 고말 북쪽에 있는 산.‘비봉귀소혈’이 있다 함 - 배풍산 : 흥덕 북쪽에 있는 산. 산의 형상이 배가 복주한 형이라 하여 배풍산 이라 부르고 있음. 높이 108.5m

○ 출처 • 

 11 전북편 상, 한글학회, 1981.

• 고창군지 고창군지편찬위원회, 1992. • 국토정보지리원 지명서비스 • 전통사찰총서 9 전북의 사찰 Ⅱ 불교문화연구원, 1997

고창의 마을』

집필, 조사, 자문

선동리 선산마을 -

・집필자 이경수, 조사 김용윤, 자문 신계원

‣ 상하면 용정리 동촌마을 - 연구・집필자 김용윤, 조사 이경수, 자문 손동환 ‣ 해리면 사반리 사반마을 - 연구・집필자 이현국, 조사 이형성, 자문 진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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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리 삼태마을 -

・집필자 이형성, 조사 조용호, 자문 하관수

‣ 심원면 궁산리 궁산마을 - 연구・집필자 박채주, 조사 김원식, 자문 전종열 ‣ 흥덕면 송암리 - 연구・집필자 안후상, 조사 정만수, 자문 고석상 ‣ 성내면 덕산리 - 연구・집필자 김원식, 조사 박채주, 자문 이맹근 ‣ 신림면 무림리 임리・대강마을 -

・집필자 백원철, 조사 허인환, 자문 조용구

‣ 부안면 용산리 용산마을 - 연구・집필자 윤종호, 조사 정만수, 자문 이상호

고창학술문화연구회』

장 백원철

• 부회장 조창환, 김용관 • 감 사 안후상, 정병갑

• 연구위원 고중영 문인, 우리겨레숨고르기 추진위원장 - 306 -


문인, 전 한국예총 고창군지부장 백원철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공주향토문화연구소장 안후상 고창북고등학교 교사, 전남대 박사과정 이경수 전 외교통상부국제협력단 해외사업본부장 이형성 전주대학교 연구교수 조용호 고창군 문화관광과 문화예술담당 조창환 고창신문사 대표, 우석대학교 교수

• 조사위원 김용관, 김용윤, 김원식, 김종원, 박채주, 이현국, 정만수, 정병갑, 허인환

• 자문위원 전종열(위원장), 강형렬, 고석상, 김종수, 손동환, 신계원, 신휘관, 이맹근, 이상호, 이정범, 정현도, 조용구, 진윤식, 하관수


고창의 마을 제 1집 2010년 2월 18일 인쇄 2010년 2월 18일 발행 발행처 : 고창학술문화연구회 인 쇄 : 청동기획(223-8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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