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의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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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의 시장 2010년 10월 18일 16:00 – 17:30 이기화 고창지역의 전래 장타령 뒷풀이 속에는 고창인근의 장에 대한 풍자를 한 대목이 있다. 고창 지역과 거래를 하던 시장은 장성의 화룡장이고, 정읍장과는 거래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 읍장을 소개하지 않았다. 법성장의 수산물이 고창으로 들어와 거래가 이루어졌다. 장타령 장성화룡장은 뜨거워서 못보고 코풀이 흥덕장은 더러워서 못보고 사흘여드레 법성장은 조금장이라 못보고 안진머리장은 굴죽으로 속풀이 하고 알미장은 곱트림이 나오고 대산 네거리장은 늘 낙져서 못보고 무장읍장은 억세어서 못보고 이장저장 다 둘러보다가 고창읍장에서 종지었네 화룡장은 고창에서 남도를 갈 때 반드시 지나야 하는 곳이다. 시장의 열기가 뜨거워 무역거 래가 활발하였다. 고창과는 가까워 활발하게 거래되었던 곳이다. 흥덕장은 사람들이 까실까실 했고, 봉을 씌워서 더러워서 못했다는 말이다. 특히 아전들 때 문에 시장이 활성화 되지 못한 면이 있다. 법성장은 조수만간의 차로 배가 못 들어 올 때면 수산물이 끊겨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사올 것이 없어서 조금장이라 하였다. 안진머리장은 해리의 안산에 있던 장으로 굴이 많이 나와 굴죽이 유명하였다. 알뫼장 또는 알미장으로 불리는 부안면의 장은 장이 후하고 인심이 좋아 알짜배기 장이었 다. 그래서 곱트림이 나온다고 하였던 것이다. 대산 네거리장은 물이 없어 시장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물을 질러가려면 너 무 멀어 사람들이 점점 게을러져서 늘 늦게 열렸다고 한다. 무장읍장이 얼마나 억세었냐면, 1945년에 축구를 하였다. 가방 하나에 축구화 한 켤레를 가 지고 무장으로 시합을 하러간다. 대회를 마치면 늘 무장과 고창은 싸움을 하였다. 백상기라 는 사람이 있다. 그는 고창의 단거리 선수로 50m 기록보유자이다. 백동기가 그의 형제인데 백동기는 고창방어축구단원으로 헤딩을 잘했다. 이들은 고창의 유명한 깡패들이었다. 무장사람들이 억세긴 하여도 기술의 고창 축구 앞에서는 잘 하지 못했다. 백동기와 백상기 형제가 가면 늘 싸움이 벌어졌다. 무장으로 장가를 가면 죽을 각오를 해야 했다. 무장 사람들을 영모장놈들이라 했다. 흥덕양반, 장성양반, 고창사람, 무장영모장놈이라 불렀다. 흥덕사람들이 양반이 많아 점잖았 다. 해방 후까지 그러한 기풍이 있었다. 고창사람들이 장성으로 장가를 많이 갔다. 고창현에는 두 곳의 시장이 있었다. 서부시장과 동부시장이 있었다. 동부시장은 읍성 밖의


북변 지금의 문화의 전당 바로 옆의 특산물 판매장과 주차장으로 쓰고 있는 지역부터 고창 천에 이르는 곳이다. 세계2차대전 말경에 동부시장은 다시 지금의 교육청 뒤의 교육청도서 관 일대로 자리를 옮겼다. 동부시장은 재래시장으로 별 볼일 없는 시장이었다. 고창의 진짜 시장 맛이 나는 곳은 서부시장이었다. 지금의 상설시장 부근에 있었다. 서부시 장은 우시장으로 쇠전이라 불렀다. 우시장이라 돈도 있어서 그런지 먹거리가 발달하였다. 당시 유명한 서부시장의 음식으로 선지국 비빔밥이 유명하였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사라지 고 말았다. 선지국 비빔밥은 손으로 주물럭주물럭 하여 비벼주었다. 웃으면서 이야기하면서 만들어진 선지국 비빔밥은 정말로 맛이 좋았다. 점심으로 이것을 먹기 위해 쇠전으로 갔다. 동부시장의 점심은 별 볼일이 없었다. 선지국 비빔밥의 재료는 선지, 콩나물, 시금치, 녹두 채 등등이었다. 그곳에 육회를 넣어서 주무럭주물럭 하고 그것에 선지국을 떠먹었다. 한국전쟁이후 쇠전과 동부시장이 합쳐졌다. 지금은 서부시장(쇠전)의 위다. 선지국 비빔밥을 고창의 특색 있는 음 식으로 살려야 한다. 고창의 시장에 대한 기록은 1793년 계축읍지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계축지 호남읍지에 들 어있는 고창읍지에 나온다. 관찬도 1793년에 나온다. 시장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 는 장시로 해서 고창읍장이 나온다. 조선시대에는 시장이라 안했다. 동부시장은 8, 18, 28 일이 장으로 한 달에 3번장이 섰다. 1899년 고창읍지에 있다. 서부시장은 3, 13, 23일이 장날이었다. 동부와 서부 시장을 합쳐 3.8장으로 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고창장은 3.8장이 다. 고창읍의 양쪽 시장이 1895년 고창사계집에 나온다. 흥덕장은 코풀었던 더러운 시장이다. 아전이 억세어 장이 잘 안되었다. 흥덕도 동부와 서부 시장이 있었다. 동부시장은 성내면 와석(소성과 경계)에 있었다. 서부는 석교마을로 현재 부 안면과 경계지점이다. 원래는 오호리 마을에 서부시장이 있었다. 지금의 흥덕면 소재지에는 시장이 없었다. 아전들 때문에 안 되었다. 대표적인 아전집안이 박씨, 국씨, 진씨 등으로 이 들은 물건을 시켜놓고 떼먹기 일쑤여서 유명하였다. 첫 기록이 고창읍장과 같이 1793년 계축읍지에 나온다. 흥덕장은 1793년부터 시작된다. 호 남읍지 흥성읍지에 나온다. 석교장은 2일과 7일로 석교촌의 앞에 있었다. 민찬의 흥성읍지 에 1786년 정조 10년에 기록되어 있다. 와석장은 4.9장으로 일동면 외동촌 뒤에 있었다. 지금의 와석마을이다. 외동은 정읍에 들어간다. 1914년 이후 삼군이 합군이 되면서 생긴 것 이 알뫼(알미)장이다. 5일과 10일장으로 부안면 난산등(알뫼골)에 있었다. 1919년 흥덕읍지 에 나왔다. 무장장은 시끄럽다. 무장읍내장의 위치는 읍성의 동쪽 성안에 있었다. 즉 고창방면으로 시 장이 있었다. 기록에 재성동성내라 하였다. 1973년 무장읍지에 飛川장(날내장)이라는 장이 기록되어 있다. 비천장은 지금 정균환전국회의원의 출생지이다. 공읍과 대산 경계로 흘러내 리는 하천이다. 시장은 물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비천은 물이 자주 말랐다. 물을 뜨려면 고 생을 많이 했다. 그래서 비천장은 늘 늦게 섰다. 그래서 늘 낙지장이라 했다. 안자산장(해리)을 안진머리장이라고도 했다. 무장읍에서 북쪽으로 30리에 있다. 이 시장도 계축읍지에 나온다. 지금의 해리면 안산리에 있었다. 안자(安子)시는 4일과 9일장이다. 개갑은 1793년에 기록이 나온다. 개갑재현서십오리라는 기록이다. 갑천이라는 곳에 장이 섰 다. 개갑장이라 하였다. 개갑을 갑천이라 하였다.


남창장은 재현남삼십리에 있다. 대산면 칠거리에서 성송 쪽으로 와서 성송의 남창과 칠거리 사이에 있었다. 계축읍지에 처음 등장한다. 후에 대산면 사거리장이 생겼다. 대산면 면소재 지인 매산에 장이 섰다. 사거리장은 2일과 7일장에 장이 섰다. 1904년 갑진지에 개갑장이 나온다. 처음에는 낄개(介)자였다가 이후 열개(開)로 바뀌었다. 무장에는 5군데의 장이 있었다. 무장소재지에 왜 장이 안 섰나? 무장사람들이 억센 것도 있지만 무장의 풍수학적인 문제가 있다. 무장은 풍수적으로 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형국으로 이를 사뫼등이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서워했다. 풍수학 적으로 장이 안 되었다. 뱀이 뙤리를 트는 형국은 장사꾼들이 돈을 빼 올 수가 없기 때문에 장이 안 되었다고 한다. 사뫼등은 사람은 살기 좋은데 돈을 못 가져간다는 루머 때문이다. 안진머리장이 바다도 가까워 잘 되었다. 한국전쟁 후 와서야 무장에 장이 섰다. 무장장은 무장 사람들만 했기 때문에 장이 잘 안되 었다. 무장에 장을 만드니 상하사람들이 장을 만들었다. 오히려 상하장이 무장장보다 훨씬 활기가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상하장이 무장장보다 더 낫다. 해방 후 60년대 말 생긴 상하장이 70년대 초에 정식으로 시장의 허가를 받았다. 심원에도 장이 안 선다. 심원은 안 만들려고 한다. 장을 만들면 외부사람들이 들어와 수산 물의 가격이 낮아지고, 객지사람들만 좋은 일 시킨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심원 사람들은 심원의 수산물을 멀리 가지고 가서 좋은 가격을 받고 팔았다. 심원에 장이 서면 심원이 실속이 없다는 것이다. 멀리가야 실속이 있었다. 심원의 전통은 지명이 바뀌지 않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들은 뭔가 잘 바뀌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사람들이 고루하다. 성송은 장을 세워보려고 하였으나 안 되었다. 고창 주변의 아산, 고수, 신림, 성송이 모두 고창장으로 몰려든다. 그래서 고창장이 종장이었다. 그리고 고창장이 물건 값을 제대로 받 았다.

무장토성 진을주(陳乙洲) 선생시비제막기념 1996. 12.17 이따금 하마등 말발굽소리에 귀가 밝아 벌떡 일어서는 토성 철따라 굿거리 열두거리 질퍽한 성문 초립등이 드나들던 성 밖 솟대거리 당산에 달밤 부엉이가 울면 풍년이었고


백여시가 울면 꽃상여가 나갔다. 시방은 살막에선 짭짤한 미역내음 갯바람이 활등 같은 신화의 등허리 부딪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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