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最古)의 중기구석기유적의 마을, 부곡리 -
있다. 마을의 풍수형국은 연화도수(蓮花到水, 물에 이른 연꽃)형국이라 알려져 있다. 그 래서 마을의 북쪽의 연동제에 연을 가득 심었다.
부곡리-
연동마을은 동남쪽에서 발달한 산계의 한 줄기가 북쪽으로 발달하였다. 이 북쪽으 (고창문화연구회, 연동)
로 발달한 산계가 증산을 이루었다. 이 산계는 다시 증산에서 갈라져 나와 서쪽으
이병열(고창문화연구회 사무국장)
로 발달하여 부곡잔등을 서쪽으로 발달하였다. 연동마을은 증산의 서쪽 아래의 골 에 마을이 입지해 있다. 연동마을의 뒷산인 증산은 해발고도가 179.2m로 이 주변 에서는 매우 높은 산이다. 연동은 마을의 향이 서향이나 북쪽으로 증산의 산계가
1.
뻗어 북서계절풍의 찬바람을 막아주고, 서쪽은 부곡잔등의 나지막한 산계가 안산
유래와 자연환경
고수면 부곡리는 국도 23번를 따라 고창읍에서 고수면소재지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마
역할을 하면서 마을을 보호해주고 있는 형국이다. 또한 내청룡(內靑龍)과 내백호(內
을이다. 부곡리는 동쪽으로 와촌리, 서쪽으로 장두리와 남산리, 남쪽으로 평지리, 북쪽
白虎)가 각각 남과 북으로 뻗어 있어 마을을 감싸주고 있다. 증산과 부곡잔등에서
으로 황산리와 접하고 있다. 부곡리는 1895년(고종 32년) 이후, 수곡면(水谷面)의 연동
발달한 마을의 수계는 북에서 남으로 연동마을 앞을 지나다가 내창과 월계 경계에
(連洞)·신평리(新平里)·부곡리(夫谷里)·증산리(曾山里)로 분화되어 있었다. 그 후
서 평지천과 합류하여 동에서 서로 흐르고 있다. 마을의 수구(水口)는 부곡잔등에서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수곡면(水谷面)의 장암리(場岩里)․부
남쪽으로 발달한 산계와 연동마을의 외청룡이 만나는 곳이다. 연동마을 앞의 연동
곡리(芙谷里)․연동(連洞)․신평리(新平里)․증산리(曾山里)와 고사면(古沙面)의 신
들은 깊지 않으면서도 남향으로 발달하여 여름철은 시원하고 겨울철은 온화한 마을
곡리(新谷里) 및 산내면(山內面) 점촌(店村)의 각 일부가 병합되어 부곡리가 되었
이라 할 수 있다. 연동마을의 가옥배치는 우백호의 산계에 있는 가옥은 남향을, 증
고, 고수면에 편입되었다. 부곡리는 고수면 남부에 있다. 2010년 3월 현재 면적은 3.37
산을 뒤로 한 가옥은 서향이며 대체로 마을의 향인서향으로 가옥이 배치된 경우가
㎢이다. 경지 면적은 1.40㎢로 밭 0.39㎢, 논 1.01㎢, 임야 1.32㎢ 등으로 되어 있다.
대부분이다. 2013년 현재 연동은 45호가 거주하는데, 농가가 21호이고 비농가가
부곡리는 법정리이고, 연동리·부곡리·증산리 등은 행정리이며, 자연촌락으로는 가마골
24호이다. 다문화가정은 1가구가 있다.
[부곡(釜谷․芙谷)]·갱변촌[강촌(江村)]·연골[연동(蓮洞․連洞)·마당바우[장암(場巖)]·
<그림> 연동마을 전경
징새이[증산(甑山)]·묵점(墨店) 등이 있다. 부곡리는 동쪽으로 상평리와 와촌리, 서쪽으로 장두리와 남산리, 북쪽으로 고수천을 경계로 황산리, 남쪽으로 성송 2) 먹점(墨店)
면 초내리와 접하고 있다.
연동마을 관내에는 조선 초기 먹점(墨店)이라는 200여 호의 큰 마을이 있었다고 전한 1)
(蓮洞)
다. 먹점은 마을 사람들이 먹을 만들어 팔아 생활하였는데 돈을 벌면 집에 두지를 못 하고 앞 내창마을의 창고에 보관해오고 있었다. 그 이유는 먹점마을은 배의 형국이여서
연동마을은 법정리로는 부곡리에 속한 행정리이며, 고수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배에 짐을 많이 실렸을 때 가라앉기 때문이라는 풍수적 속설로 내려온 듯하다. 마을의
2.5km 떨어진 곳에 있다. 연동마을은 옛날 수곡면에 속해 있던 마을이었다. 이 마을의
풍수형국이 행주형(行舟形)이기 때문에 마을에는 샘이 없었다고 한다. 마을에 샘을 파
설기연대는 알 수 없으니 문헌상 1400년 연안이씨가 입향하여 설기한 마을로 그때는
면 배가 가라앉는다는 풍수적 사고 때문이었다.
고련(古連)이라 불렀다. 1500년대에는 죽산안씨가 입향하여 그 후손이 번창하고 장수하
1970년대까지도 돛대가 달린 배 모양과 긴 장대를 제작하여 마을 양쪽에 세워 놓았다
는 사람이 많아 장년동(長年洞)으로 개칭하였으며, 1800년경부터 연동마을이라 부르게
고 한다. 먹점마을은 본래 신평(莘平)이라 불렀는데, 그 마을에는 ‘들독’이 유명했다고
되었다. 한편으로는 고령(高齡)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고 하는데, 광복 후까지도 속칭
전한다. 마을 앞에는 수령이 500년 이상 된 당산나무가 있는 것으로 보면, 마을의 역
‘고랭이’로 불러오다가 행정리 단위로 분리되면서 연동마을로 본격적으로 불리게 되었
사가 아주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 연동마을은 옛 수곡면의 면소재지로 지금도 수곡면장이 집무하던 가옥도 보전되어
<그림> 먹점마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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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부곡의 안산은 원래 고창-담양 간 고속도로 상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고속도로가 지나감에 따라 안산의 의미는 없어졌다. 원부곡마을은 서에서 동으로 3)
(芙谷, 마당바우)
조금 뻗은 내청룡(內靑龍)과 남에서 서로 작게 발달한 내백호(內白虎)가 마을을 감 싸주고 있다. 원부곡의 수계는 남에서 북으로 부곡마을 앞을 지나다가 부곡들에서
고수면소재지인 황산리의 남서쪽으로 약 200m거리에 있다. 부곡리는
고수천과 합류하여 동에서 서로 흐르고 있다. 마을의 수구(水口)는 현재 고속도로이
1920년대 마을이 형성되어 마당바우(場岩)이라 불렀고, 1950년대 부곡(芙谷)으로 개칭
다. 부곡마을의 가옥배치는 주변의 산세가 낮은 구릉성 산지로 일정한 형태는 띠지
되었다. 부곡마을이 형성되기 오래 전부터 마당 크기 정도의 넓고 평평한 바위가 있어
않으나, 좌청룡 상의 가옥은 남향이며, 우백호 상의 가옥은 서향으로 배치된 경우
서 마당바우라 불렸다. 여름철 논농사에서 김을 매며 농악을 칠 때도, 명절에 농악을
가 대부분이다.
울리며 즐겁게 놀 때도 오직 마당바위에서에서 놀았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고창읍내에
<그림> 원부곡마을 전경
금융조합을 신축(현 동리국악당)하면서 마당바우의 바위를 깨어다가 신축했다. 이런 관 계로 지금은 그 터만 남고 돌은 사라지고 말았다. 부곡리의 자연취락은 원부곡과 강촌 마을이 있다. 마당바우에 고수경노당과 고수부녀경로당 및 고수게이트볼장이 있고, 조
5) 증산(甑山)
선말기에 세운 ‘겸순찰사이호준영세불망비’가 있다. 바당바우는 부곡리을 따라 형성된 마을이다. 국도 23호(고인돌대로)의 확포장으로 구도인 부곡길은 쇠퇴하였다. 마당바우
증산마을은 원래 수곡마을에 속해있던 마을이다. 이 마을은 하음봉씨 일가가 마을회관
는 고수천의 포인트바(퇴적지형) 지형으로 기반암이 있어 지형적으로 안정적인 지역이
앞 평지에 집을 지어 살다가 절에 농사지을 땅을 짚어 달라고 하자, 절에서 말뚝 박은
다. 마을의 산계는 원부곡에서 흘러내려 온 줄기가 고수천에서 멈추었다. 마당바우의
곳에 도랑을 내어 농사를 지으라고 했다고 한다. 선자동은 방죽이 있는 곳부터 송정
지세는 산계의 발달이 미약한 충적지라 청룡과 백호의 발달이 미약한 열려 있다. 마을
앞까지 도랑을 내 농사를 짓고 살다가 봉씨 일가는 망해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이후
의 가옥배치는 도로 상 마주보는 가촌(街村)의 형태를 띠고 있다. 수계는 고수천이 동
1600년대 말기 연안이씨가 입향해 살기 시작했으며, 이후 이천서씨도 입거하여 함께
에서 서로 마을 앞을 흐르고 있다.
살게 된 마을이다. 마을은 뒷산의 이름이 증산봉(甑山峰)으로 마을이름도 뒷산의 증산
<그림> 부곡마을 전경
으로 불리고 있다. 증산봉 중턱에는 농바위(籠岩)라는 4층으로 된 바위가 있는데, 가로 4m 정도에 그 높이가 약 10m 정도의 큰 바위가 있다. 또 부근에는 백제절터도 있었 는데, 이곳에는 10m 정도 되는 좌상의 석불이 있었다 한다. 그러데 구한말 전남 영광
4) 원부곡(原芙谷)
불갑사로 옮겼다고 한다. 절터 아래쪽에는 선자동(禪子洞)이라 부르는 큰 방죽이 있다. 현재 마을 뒤로 고창-담양 간 고속도로가 통과하고 있으며, 마을에는 고창향교가 있었
원부곡은 국도23호가 마을 중앙을 통과함에 따라 둘로 갈라졌고, 또 마을 앞으로 고창
다고 한다.
-담양 간 고속도로 건설로 집단취락지로서의 기능은 상실한 상태라 볼 수 있다. 원부
증산마을은 시루봉인 증산의 북쪽 아래에 입지한 마을이다. 시루봉에서 뻗어 나온
곡마을은 증산에서 갈라져 나와 서쪽으로 발달한 산계가 부곡잔등을 이루었다. 부
산줄기는 북쪽으로 발달하다가 신평 앞들의 고수천에서 멈추었다. 이 산줄기의 동
곡잔등에서 큰 줄기는 계속 서쪽으로 발달하였으나, 남쪽으로 두 개의 산줄기가 발
쪽에 증산마을이 입지해 있다. 즉, 증산마을은 증산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가 고
달하였는데 한 줄기는 월계교에 이르렀고, 다른 한 줄기는 월계마을의 서쪽에서 평
수천에서 멈추기 직전 작은 동산(해발고도 77m)을 이루었는데, 이 산 아래의 동쪽
지천을 만나 멈추었다. 부곡잔등과 회룡골 중간의 능선에서 발달한 한 산계가 부곡
에 마을이 있다. 증산마을의 좌청룡는 고수천으로 뻗은 능선이고, 우백호는 증산에
마을 뒤로 북북서로 발달하다가 고수천에서 멈추었다. 부곡마을은 부곡잔등의 동북
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가 북쪽으로 발달한 능선이다. 마을은 동쪽이 열려 있어 마
쪽에 마을이 입지해 있다. 원부곡마을의 주산인 부곡잔등은 해발고도가 75.4m의
을 입구에는 당산이 발달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릉성 산지이다. 원부곡은 마을의 향이 동북향이나 산계가 북북서로 발달하여 북
마을의 수계는 남에서 북으로 증산마을 앞을 지나다가 신평마을 앞에서 고수천과
서계절풍의 찬바람을 막아주고 있다.
합류하여 동에서 서로 흐르고 있다. 증산마을의 가옥배치는 좌청룡의 산계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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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있기 때문에 증산의 안동네 가옥은 동향과 남향이 많고, 바깥 동네는 남동향이
옴.
많다. 다문화가정은 4가구가 있는데, 베트남 3가구와 중국 1가구가 있다.
칠성잔등(七星) : 마을 남쪽 야산의 등으로 부곡리 738번지 부근. 옛날 잔등에 바위가
<그림> 증산마을 전경
7개가 한 줄로 놓여 있었다고 함. 재너머 : 마을 남쪽 잔등너머 부곡리 725-1번지 부근. 전답을 일구기 위해 야산 재를 넘어 왕래했기 때문에 생긴 이름.
5)
자연환경
청정모랭이 : 마을 앞 서난간 696번지 밭 부근. 옛날에는 내창으로 가려면 이곳 길을 돌아서 왕래했다고 전함.
지형은 대체적으로 시루봉 주변은 높은 산지가 발달해 있고, 시루봉 주변에는
속물(衰村) : 마을의 남쪽에 있는 240번지 부근에 있었다는 마을. 큰 마을이 형성된 후
구릉성 산들이 발달해 있다. 시루봉 주위로 남쪽에는 평지천이, 북쪽으로는 고수천이
새로 생긴 마을. 속마을이 와전 된 것 같은데 예전 용어라 알 수 없음.
부곡리를 감싸 안고 흐르고 있다. 부곡리로 발달한 산계(山系)는 호남정맥의 내장산에
목와쟁이 : 마을 동쪽 산 39번지의 남쪽. 확실한 내력은 미상이고 목화정(木花亭)의 와
서 갈라져 나온 영산기맥이다. 영산기맥은 입암산과 방장산을 이루고, 남남서로 발달하
전인 것 같으나 알 수 없음. 흥덕에 목화정이 있었다고 함.
다가 목포의 유달산에서 멈춘다. 부곡리의 산계는 영산기맥의 구황산(500m)에서 남쪽
왕샘골 ; 마을 동쪽 산 228번지로 박승길 댁 뒷골. 지금도 전답 위에 작은 샘이 있음.
으로 두평천의 왼쪽을 따라 발달하였다. 이 산계는 두평천을 따라 발달하다가 조산저수
각금재 : 마을 동쪽 산 37번지. 속물에서 동쪽으로 올라가는 재로 정상에 고인돌 2기
지를 지나 부곡리 증산에서 멈추었다. 증산에서 다시 서쪽으로 발달한 산계는 태봉
가 남아 있음.
(110.9m)을 이루고 상갑리와 주진리에서 멈춘다. 이 산계의 시루봉의 서쪽방면의 산계
사점골 : 마을 남쪽에 있는 골.
를 중심으로 남쪽에 연동과 부곡이 자리를 잡고 있으며, 북쪽으로 증산이 위치해 있다.
솟대백이 : 마을 동쪽 산 41번지 남쪽에 있는 지명. 성균관 진사 안중섭이 진사시에
부곡리의 수계는 증산의 산계인 부곡잔등에서 갈라져 연동은 북에서 남으로 흘러 평지
합격한 기념으로 솟대를 세웠던 곳.
천과 합류하고, 부곡의 수계는 부곡잔등에서 발원하여 남에서 북으로 흘러 고수천과 합
쇠바탕 : 마을 북쪽 산 56번지 부근 일대. 소를 방목했던 곳이라 추측됨.
류한다. 증산마을의 수계는 시루봉에서 발원하여 북으로 흘러 고수천과 합류하여 흐른
뒷골 : 마을 북쪽 2687번지 논 부근의 소류지의 골. 마을 뒤라 뒷골이라 부른 것으로
다. 이러한 산수계의 영향으로 부곡리는 임야가 약 39%를 차지하고 있으며, 밭은 약
추측됨.
11.6%, 논은 약 30%를 차지하고 있다. 논의 대부분은 부곡과 증산 마을의 고수천 주
회룡골 : 마을 북쪽 뒷골재이며 229번지 논 부근.
변이 차지하고 있으며, 연동마을은 상대적으로 논의 경작면적이 좁은 편이다. 부곡리의
부채백이 : 마을 동남쪽 산 105번지 서편. 약 60-70cm의 석불이 서 있는 곳. 소형동
하천으로는 연동천이 있는데, 연동천은 고수면 부곡리 1152번지 논에서 시작하여 부곡
자석 같은 불상인데 수십 년 전 초내마을 앞 추상봉 중턱 오재균이 지은 포상정 옆으
리 601번지 논에서 끝나 주진천으로 합류하는 900m 길이의 하천이다.
로 옮겨가 박혀 있음. 대문배미 : 마을 남쪽 672번지의 논으로 현재는 도로이며 모정에서 약 30m지점. 예전 에 부자가 기와집에서 살면서 지은 대문이 있었던 곳으로 논의 이름.
6) 부곡리의 자연지명
가재명당 : 마을 동쪽 산 93번지 내. 병절교위 안처중(安處中)의 묘지가 있는 곳. 가재 형국으로 지사 박주부의 소점이라 전함.
(1) 연동마을 자연지명
의충동(義忠洞) : 마을 동쪽 산 93번지 부근으로 가재명당이 있는 부근의 지명. 안처중
장생이골(長栍峙) : 연동마을 입구 버스승강장 앞의 골로, 장생은 장승(長丞)과 같은 말
의 충의 정신을 기리는 이름이라 함.
로 예부터 내려온 말에 의하면, 이곳에 장승이 있었기 때문에 장생이골로 불렀다고 함.
대추나무골 : 마을 동남쪽 산 96번지 부근으로 산 부근에 대추나무가 많이 있어서 불
지금은 재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으나 도로를 개설하면서 이곳을 4-5m나 깎아 내렸기
렀던 이름.
때문임.
횟기재 : 마을 동남쪽 산 95번지 부근으로 생석회를 원석이 있었던 곳의 지명. 길 언
서당메(書堂山) : 마을 앞 서쪽 부곡리 산 19번지 부근. 옛날에 서당이 있었다고 전해
덕에 지금도 석회석이 남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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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쪽 620-3번지 논 부근으로 논 귀퉁이에 당산 독이 서 있음.
으며, 주변으로 삼한시대(원삼국)에서 삼국시대에 이르는 주거유적을 비롯하여 분묘유
감나무골 : 마을 서북쪽 603번지 논 부근으로 내력은 알 수 없음.
적이 분포하고 있다. 또한 남고창IC 구간에서 확인된 유구 및 유물을 살펴보았을 때
묵점(墨店) : 연골 남쪽에 있는 마을. 먹을 만들던 점이 있었다고 함.
구석기시대 문화층을 비롯하여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 이르는 다양한 유구가
못시암 : 연골에 있는 우물. 옆에 못이 있었다고 함.
확인되었다. 이 유적은 통일신라시대의 수혈5기·기와 가마6기, 하단부에서 고려시대 건
연동제(뒷골방죽) : 1943년 일제강점기에 소류지를 축조하여 지금도 마을주민들이 쓰고
물지가 확인되어 증산을 중심으로 한 부곡리는 고창의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중심지
있음. 2008년 연동제 앞에 원두막과 석상장승(石像長丞)과 나무장승을 세웠음.
였음을 확인되었다. 사람이 언제부터 부곡리에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성과에 의하면,
(2) 부곡마을 자연지명
부곡리 주변 화분분석 결과, 약 5,500년(홀로세 중기 기후최적기) 이전의 고창천 일대
가마골 : 지형이 가마처럼 생겼으므로 가마골 또는 부곡(芙谷)으로 불렀음.
는 저습지가 부분적으로 형성되었으며, 당시 기후는 현재보다 다소 온난하였던 것으로
갱변촌 : 강촌(江村)으로 연동 동북쪽 냇가에 있는 마을.
추정된다. 부곡리는 대략 2,000년 전을 기점으로 인간에 의해서 경작지로 변하였으며
마당바우(場岩) : 부곡 북동쪽에 있는 마을. 마당바우 안에 있었던 큰 바위로 마당처럼
침엽수림으로 바뀌었다. 인위적 지층의 분포는 중립질 모래층과 사력층으로 홀로세 초
넓었다고 함.
기(약 9,000년)에 형성되었다.
부곡잔등(75.4m) : 부곡잔등은 한마음주유소에서 장암방면 옛 국도23호구도로로 부곡
부곡리는 호남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중기구석기 유적과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지
마을로 가는 낮은 고개로, 고개 주위에는 소나무 아카시아 등이 많아 인적이 없어 음
는 그 시기가 최소한 기원전(B․C) 5만 년 전이다. 따라서 부곡리에는 이미 5만2천 년
침함.
전에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할 수 있다. 부곡리에는 신석기 유적과 유물은 발견되 지 않아 신석기시대의 부곡리는 추정할 수 없다. 고창에 청동기 문화가 꽃을 피웠듯이
(3) 증산마을 자연지명
부곡리의 청동기시대도 다른 지역과 별반 다르지 않다. 즉, 부곡리에 청동기시대의 고
증산(甑山, 179.2m) : 일명 시루봉, 시리매라 부르며, 시루증자와 뫼산자를 써서 증산
인돌이 곳곳에 남아 있어 부곡리 일대에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였을 것이다. 특히 연동
이라 부름. 시루봉 아래에 고창향교가 있었다고 함.
마을의 북쪽에 있는 고인돌은 그 규모가 거대하여 당시 부곡리의 인구규모를 추정해볼
징새이(甑山) : 연골 동북쪽에 있는 마을.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있다.
안골 : 증산마을 뚝방길 1.5km정도 저수지 쪽에 있는 골.
특히 부곡리의 중심인 연동은 마을을 감싸고 있는 주변에 고인돌이 축조되어 있는데
승동절 : 승자동 방죽 위로 현재는 고속도로.
이는 당시 청동기인들의 삶의 범위를 표시한 표시석이 아닐까 추정된다. 선사시대의 부
승자동 : 옛날 사찰이 있었던 곳이라 함.
곡리는 다른 어느 곳보다 더 찬란한 문화를 이룩하였다.
청룡구댕이 : 마을 서쪽에 있는 골.
<그림 증산구석기유적>
승자동방죽 : 고속도로를 내면서 사라진 방죽. 부곡리에는 삼한시대(또는 원삼국시대)부터 삼국시대 분묘인 분구묘, 옹관묘, 석관묘 등 의 유적과 유물이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이는 고수천 하류의 만동·예지·봉덕·남산에 비 해 시기적으로 앞서고 규모는 작다. 분묘가 조성된 맞은편에는 원삼국시대의 주거지
2.
26기가 조사된 부곡리유적이 위치하고 있어 주거지와 분묘군이 공간분할이 이루어진
역사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는 원래 중심지가 부곡리의 증산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시루봉이 1) 구석기에서 조선시대까지의 부곡리
라 불리는 말 자체가 신앙과 성지의 개념의 용어이기 때문이다. 즉 시루봉이 바로 이
부곡리 역사는 증산유적발굴조사를 통해 호남에서 가장 오래된 삶의 공간이었음을 확
근처의 성산(聖山)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인되었다. 증산유적은 시루봉의 북쪽 서사면부에 위치하는 유적으로 유구는 해발
모로비리국의 강역이었던 부곡리는 369년 3월 근초고왕에 의해 백제의 영토로 편입되
640~690m에 분포하고 있다. 시루봉의 능선을 따라서는 부곡리지석묘군이 분포하고 있
었다. 당시 근초고왕에 의해 부곡리가 백제에 편입되었다 하더라도 마한의 모로비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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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장은 100여 년간 권력을 유지하면서 백제에 경제와 군사적으로 지원하는 구조로
도 시루라는 명칭을 가진 산은 신앙 유적지로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모로비리국과 백제의 관계는 고구려의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크게 수정된다.
2)
추정되는 부곡리
즉 백제가 고구려에 의해 한성(서울)에서 쫓겨나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기는 5세기 에 호남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그래서 무령왕은 호남을 대대적으로 개발하고 백제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고창현 고적조(古跡條)에 "대량평부곡(大良坪
22담로로 나뉘어 왕족들을 파견하여 직할 통치하였다. 무령왕의 중앙집권 통치는 도산
部曲)은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大良坪部曲在縣南十五里)"고 기록되어 있다. 부곡(部
을 중심으로 한 모로비리국의 몰락을 의미한다. 그 근거가 되는 묘제가 부곡리 연동의
曲)이란 특수 행정구역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주목(驪州牧) 고적 등신장조(登神莊)
연동저수지 옆 광산김씨 선산에서 조사되었다. 연동마을에 횡혈식 석실분(橫穴式石室
에 “이제 살펴보건대 신라가 주군현을 설치할 때 그 전정(田丁)이나 호구(戶口)가 현이
墳)이 출토 확인하였는데, 이 석실분은 5세기 웅진도읍기의 묘제 특징인 궁륭식(穹窿
될 수 없는 것은 향 또는 부곡으로 두어 그 소재하는 읍에 속하게 하였다.”라고 한 기
式, 천정이 둥근 모양의 돌방무덤)의 채용과 긴 연도 및 방형의 매장부로 구성되어 있
록으로 미루어 부곡이 삼국시대부터 존재했다는 사실과 인구나 토지가 군이나 현의 규
다. 이를 통해볼 때 연동의 횡혈식석실분은 고창지역에 처음으로 나타난 백제의 고마나
모에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향과 부곡은 신라가 만들었고 소,
루(熊津, 공주)도읍기의 분묘로 추정된다. 즉 웅진도읍기의 대표적인 묘제인 횡혈식석
장, 처는 고려가 설치했는데, 신라는 통일전쟁의 승리로 많은 노예를 확보하게 되자 고
실분이 마한지역에 출현한 시기는 웅진 천도 후 국가의 위기를 수습하여 정치적으로
구려와 백제 유민들을 신라의 노예로 삼을 목적으로 이들을 자국 영토로 끌고 와 격리
안정되어 강력한 중앙집권 통치가 이루어진 때이다.
하여 천민집단인 향과 부곡을 만들었다. 향과 부곡은 전라도에 25% 있다. 죄수 등 다
부곡마을 동편의 부곡리 347번지에 삼국시대의 주거유적지가 발굴되었다. 이 유적지에
른 천민도 살았겠으나 신라의 정복전쟁 과정에서 패배한 백제 유민 등의 집단 거주지
모두 26기의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연동마을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능선의 남쪽 아래와
가 바로 향, 부곡이었다는 설이 있다.
연동마을의 들을 건너 서쪽의 앞 산 및 증산마을의 북쪽의 구릉에 삼한시대부터 삼국
부곡의 수는 조선시대 들어 점차 줄어들어 1454년(단종 2)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
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고 있어 부곡리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地理志)』가 편찬되었을 당시 부곡은 68개소, 1530년(중종 25)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그림 연동 횡혈식석실분>
편찬되었을 당시에는 향소부곡을 통틀어 14개소로 줄어, 여말 선초의 사회 변동 과정 을 거치면서 점차 소멸되었다.
고려시대 부곡리가 속한 고창은 고부군(古阜郡)에 붙였다가 뒤에 상질 감무(尙
고창의 대량평부곡은 고창현에서 남쪽으로 15리(약 6㎞) 떨어진 곳에 있었다. 『고창현
質監務)가 와서 겸임하도록 하였다. 조선 태종 원년(1401년)에 고창현과 흥덕
읍지』 고적조에는 “대량평부곡은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지금 살펴보건대 고사동에
현에 각각 감무를 두었다가, 뒤에 준례에 따라 현감으로 고쳤다. 부곡리의 고려
폐현의 옛 터가 있는데 이곳이 옛날의 대량평이지 않을까 한다.”라고 기록하여 이곳을
시대와 조선시대의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부곡리의 남고창IC 발굴조사결과 이 주변에
고사동으로 추정하였는데, 고사동은 지금의 고창읍 내동리 고사마을로 고창읍성에서 직
서 절터가 발견되었다. 주변의 건물지에서는 기단석열과 건물지 1동, 집수정 등이 발굴
선거리로 약 3㎞ 떨어져 있어 15리라는 거리와는 차이가 많이 난다. 대량과 발음이 비
되었다. 이 유적은 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 중기까지의 것으로 추정되
슷한 곳으로 고창읍 노동리 대양마을이 있는데 이곳도 거리상으로 맞지 않는다.
었다. 지금도 이 유적은 남고창IC에 남아 있다.
한편, 고수면 부곡리(芙谷里) 부곡마을은 명칭이나 거리상으로 대량평부곡이 있던 곳이
2009년 호남문화재연구원의 발굴조사 결과, ‘聖山寺址’가 위치하는 곳으로 추정되
라 하기에 적절한 지역이다. 부곡리는 조선 말기 고창군 수곡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지
는 곳에서 석조불상편이 발견되었다. 또한 남고창IC구간에서‘ 大寺’명의 명문
형이 가마처럼 생겼으므로 가마골 또는 부곡이라 하였다. 하지만 이 같은 변천 과정은
와가 수습되는 등 구전에서 전해지던 ‘聖山寺址’로 추정되는 건물터도 확인되
『고창현읍지』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아 현재로서는 대량평부곡이 정확히 어느 곳에 있
었다. 이러한 출토유물을 통하여 건물의 연대는 통일신라에서 고려시대 중기가
었는지 알 수 없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대량평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오씨(吳氏)·박
그 중심인 것으로 판단된다고 한다. 부곡리의 고려시대는 성산사를 중심으로
씨(朴氏)·김씨(金氏)·윤씨(尹氏)·송씨(宋氏)로 기록되어 있으며, 『증보문헌비고』에는 박씨
한 불교문화가 발달했음을 알 수 있고, 이 절의 이름을 통해 최소한 고려시대
만 보인다.
까지 증산이 이 일대의 성스러운 성산이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지명학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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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증산마을과 경주이씨(慶州李氏) 입향 증산의 경주이씨는 1800년대 중반 래순(來淳, 1815~1854)이 본래 전남 영광군 묘량면
3.
이문리에서 고수면 부곡리 증산으로 입향하여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증산마을의 경
입향조(入鄕祖)와 내력
주이씨 시조는 익비(益庇)이며, 파조는 양중(養中)이다. 1)
죽산안씨(竹山安氏) 입향 죽산안씨는 1530년대 고수 예지에 살던 소(沼)의 손 성(惺)이 부곡리 연동
으로 입향하여 세거하고 있다. 연동마을의 죽산안씨 시조는 방준(邦俊)이며, 파조는 자
19世
20世
惺
方俊
1530대
21世
22世
23世
24世
25世
26世
暾
弘建
夢弼
國憲
㠎
守宅
입향
전(子詮)이다. 19世
20世
惺
方俊
21世
22世
23世
24世
25世
26世
暾
弘建
夢弼
國憲
㠎
守宅
1530대
5) 증산마을과 연안이씨(延安李氏) 입향 증산의 연안이씨는 승석(承奭)의 부인(여상과 여표의 모친)이 11 자제를 데리고 난세를 피해 외척이 있는 고수면 평지리 무실골을 찾았다가 연동에 정착하였다. 그 후 1670년
입향
27世
28世
29世
30世
31世
32世
33世
34世
邦宇
時유
基燮
蒙壽
允善
道淵
相喆
成燻
경 여표(汝標, 1583~1664)가 다시 이웃마을인 증산으로 입향하여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증산마을의 연안이씨 시조는 무(茂)이며, 파조는 공승(公升)이다.
16世
17世
18世
19世
20世
21世
22世
23世
汝標
晩弼
翼晟
世爗
光朝
墉
遇觀
英九
2) 연동마을과 금녕김씨(金寧金氏) 입향 연동의 금녕김씨는 1860년대 용숙(溶淑, 1836~)이 본래 전남 광산군 하남면 수남리에 서 은거지를 찾아 고수면 평지리 수곡으로 옮겨 왔다가 죽산안씨가의 사가록(査家綠)으 로 연동에 이어오고 있다. 연동마을의 금녕김씨 시조는 시흥(時興)이며, 파조는 문기(文 起)이다.
世
世
世
世
世
世
世
1836
鳳權
炯哲
東圭
鎭洙
長淵
楨雨
24世
25世
26世
27世
28世
29世
30世
炳祖
甲寧
成台
宗範
庸達
德新
聖哲
~
4. 마을의 인물과 행적 3) 연동마을과 이천서씨(利川徐氏) 입향 연동의 이천서씨는 1780년대 종상(宗相, 1746~)이 본래 전남 장성군 서삼면 용흥리 연 산에서 부곡리 연동으로 입향하여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연동마을의 이천서씨 시조 는 신일(神逸)이며, 파조는 능(稜)이다.
연상 안중섭(蓮上 安重燮 1812~1883) : 자가 순화(舜華)이고 호는 연상(蓮上)이며 본관 은 죽산(竹山)이니 참판공 초(迢)의 후손이고 만재 주욱(晩齋 周郁)의 아들이다. 순조 12년(1812)에 고수면 연동리(蓮洞里)에서 출생하여 가학으로 글을 배우고 순조 21년 (1821) 묵재 이가백(黙齋 李可白)의 문하에서 수업했으며 뒤에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
19世
20世
21世
22世
23世
24世
25世
26世
鎭)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경사자집을 모두 손수 필사하여 읽었다. 그는 특히 성리학에
宗相
致玉
在逕
相連
宗煥
基俊
寬泳
寅齊
잠심하여 스승 노사와 학문적인 논의를 하여 터득하였다. 당시 노사의 문하에는 덕행과 학문이 뛰어난 인재가 많았으나 스승 노사는 항상 연상의 독실한 덕행과 간오(簡奧)한 문장을 보고 참으로 당세의 통유라 칭찬했다. 그리고 참판 이윤수(李潤壽)가 노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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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하니 연상을 추천하여 짓게 하였다. 그는 집에 수천 권의 책을 모아 주야
작되던 구간으로 훼손이 심하여 정확한 규모 및 형태는 알 수 없으나 분포범위가 남고
로 학문연구와 저술을 하였고 모여드는 문도들에게 강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창IC구간까지 확장되며 내부에서 출토된 기와 및 청자편 치미편 등으로 보았을 때 비
항상 단정히 앉아 논어와 맹자와 서경 등을 읽었고 글을 지을 때는 뜻만 통달하
교적 대규모의 건물로 추정된다. 또한 이곳은 지표조사를 통하여 ‘聖山寺址’가 위치하
면 되지 미사여구를 즐기지 않았다. 그는 용강정사(龍岡精舍)를 수리하여 친구나 문인
는 곳으로 추정되던 지역이며 인접하여 석조불상편이 위치하고 있고, 남고창IC구간에서
들과 예학을 강론하고 문장을 익혔으며 평생 쌓은 학문으로 많은 문도를 배출하였으며
‘△大寺’명의 명문와가 수습되는 등이 건물지는 구전에서 전해지던 ‘聖山寺址’로 추정
덕행으로 향풍을 진작시켰다. 고종 17년(1880) 69세 3월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고종
된다. 또한 출토유물을 통하여 건물의 연대는 통일신라 고려시대 중기가 그 중심인 것
20년(1883) 6월에 졸하니 향년 72이다. 저서로 연상집(蓮上集) 6권 2책이 있고 문인
으로 판단된다. 이상으로 부곡리 지석묘군 이전 복원부지 내에서 확인된 증산유적을 통
에 유준철(柳浚喆), 김기풍(金箕豊), 정만원(鄭晩源), 안정수(安鼎壽), 이병학(李炳學),
하여 이지역의 청동기시대부터 확인되던 고대문화의 흐름을 통일신라 고려시대에 이르
유구현(庾九鉉) 등 수십 명이 있다.
는 단계까지 살펴볼 수 있었다. 2) 성산사지(聖山寺址) : 성산사지는 고수면 부곡리 288번지로 추정된다. 이 터는 증산 마을 뒤편 야산의 서측 하단부로 현재는 고속도로가 관통하고 있다. 사찰은 이미 소실
5.
되어 창건연대나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백제 때부터 성산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문화유적과 유물
조선 초기에 폐사된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이곳 주변에는 많은 석재와 유구들이 흩어 증산유적 : 고수면 부곡리 산75번지와 301번지 일대의 고창-담양 간 고속도
져 있어 고수초등학교에 이곳에서 수습된 암수의 막새들과 와편들이 소장되어 있다. 이
로 통과지역의 유적지이다. 이 유적지에는 지석묘 20기와 함께 둘레로 2중의 구가 부
들 막새는 그 양식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고수면 부곡리에 성산
가 되어 있어 지석묘군의 묘역을 표시한 의도적인 구획으로 고창지역의 지석묘 연구에
사의 옛 터가 쓸쓸하게 흔적만 남아 있다. 절터의 뒷마을 이름이 증산(甑山)인데 승려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조사결과 구릉의 사면을 따라 상부에서는 통일신라시대
들이 붐벼서 증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아주 오랜 옛날
수혈5기·기와 가마6기, 구릉하단부에서는 고려시대 건물지가 부분적으로 확인되었다.
증산마을에 봉씨(奉氏) 한 사람이 높은 벼슬을 지내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성산사의
이번조사가 이루어진 지역은 이전 복원만을 위한 지역으로 면적1,416㎡ 내외의 비교적
승려들이 문안을 올리지 않는다고 하나둘씩 절을 버리고 멀리 떠났다고 한다. 이것으로
협소한 구간에 해당한다. 유구는 조사지역 외부로도 이어지고 있으며 구릉 하단부 쪽으
미루어 보아 높은 벼슬을 했다는 봉씨는 조선시대의 세도가로서 당시 숭유척불사상으
로는 남고창IC구간에서 조사된 유적이 바로 인접해 있다.
로 승려들을 괴롭힌 것으로 추측된다. 절터 주변의 들판을 성산이라고 하며 절터에 있
이 유적에서도 동일한 시기의 수혈 가마 건물지가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이번조사구역
는 연못을 성산지라고 부르는 것으로 미루어 사찰 이름이 성산사로 생각되며, 이 절은
과 함께 구릉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의 건물지가 이어지는 것으로 여겨진
이름 높은 사찰이어서 고승들의 수도처였다고 한다.
다. 조사구역의 중앙부에서 등고선을 따라 확인된 5기의 수혈은 크기와 형태에 있어
예부터 고승들이 있는 곳에는 돌로 만든 말을 세워 절의 입구를 밝힌다고 하는데, 약
차이를 보이며 이중 2기 ‘L’자형 수혈로 유구의 정확한 성격은 알 수 없으나 기존에
40여 년 전 일본 사람이 이 석마를 가져가고 말고삐를 매는 돌로 만든 말뚝만 남아 있
확인되던 수혈들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다. 이 절터에는 상반신이 없는 석불이 있는데 상반신은 증산마을에서 학독을 만들었으
기와 가마는 6기가 조사되었는데 그중 일부는 남쪽 조사구역의 외곽으로 이어지고 있
며 이 학독을 만든 이는 눈이 멀었다고 한다.
으며 남고창IC구간에서도 유구가 확인되고 있어 가마의수는 더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
이 절을 처음 세운 분은 고구려의 고승으로서 고구려 장수왕의 오해를 사서 남으로 피
진다. 가마는 지하식과 반지하식의 등요로 내부에서 기와들이 확인되며, 일부 남고창IC
신해 왔다고 전하는데 그때 비둘기 한 마리가 이 고승을 안내하여 이 성산에 오게 되
구간에서는 기와 가마를 비롯하여 토기 가마도 확인되고 있어 건물지와 관련하여 건물
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렇기 때문에 절터만 남은 이곳은 우리 전통적인 불교유적의
지의 기와수급을 위하여 조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잔재가 남아 있는 곳으로 지금도 많은 기와 조각이 나오고 있다. 이 기와는 신라시대
건물지는 조사구역의 구릉하단부인 서쪽에서 확인되었는데, 구릉 하단부 쪽으로 연장되
의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상반신이 없는 석불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1)
며 이번에 확인된 부분은 전체건물의 가장 동쪽끝부분으로 추정된다. 계단식 밭으로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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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부곡리 산 63번지에 있는 삼국시대의 분묘이다. 연동마을의
8) 부곡리 지석묘군 상석채굴지 : 고수면 부곡리 산72번지에 있는 청동기시대 지석묘
맞은편 광산김씨 묘역과 연동마을 뒤편 야산에 6기의 고분이 분포한다. 광산김씨 선산
고분군 :
상석채굴지이다. 부곡리 지석묘군 유적의 뒤편 시루봉 중턱에 화강암으로 된 암벽이 나
내의 고분은 황혈식 석실분으로 분묘의 조성시 연도 일부와 장벽이 파괴되었다. 현재는
타난다. 연동에서는 범바위, 농바우, 장군바우 등의 명칭으로 불리고 있는 곳이다. 암벽
1매의 개석과 벽석 일부만이 남아 있다. 고분의 장벽은 하단부를 1매의 판석으로 세워
은 채석된 흔적이 군데군데 확인되는데 쇄기흔과 벌어진 틈으로 돌을 막아 넣은 흔적
쌓고 위에 2줄의 장대석을 눕혀쌓아 천정석과 연결되고 있다 단벽은 1매의 판석을 세
이 확인된다.
워 놓았으며 약간의 분구가 남아 있다. 연동마을 뒤편의 고분은 장단벽의 석재 1매씩 만 남아 있는데, 장축방향은 등고선과 직교하며 대표적인 고분의 크기는 277
9) 부곡리 지석묘군 : 고수면 부곡리 산72번지에 있는 청동기시대 지석묘군이다. 부곡
×94×40cm이다.
리 지석묘 유적은 시루봉 말단부의 능선상에 위치한다. 이곳의 지석묘는 상석이 남아 있는 것이 3기와 지석묘 주위와 능선을 따라 조성된 묘제 17기가 확인된다. 지석묘는
4) 부곡리 삼국시대 주거유적지 : 고수면 부곡리 347번지에 있는 유적으로 삼국시대의
석관형이며, 지석은 주형지석이 확인된다. 이 유적 주변에는 석관, 석곽, 토광 등 다양
주거유적지이다. 이 유적지는 동서로 길게 뻗은 능선상에 자리하며 북사면과 서사면 하
한 내부구조를 가진 묘제가 확인된다.
단에서 모두 26기의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조사된 주거지는 방형계로 내부시설로는 주 공, 벽구, 화덕시설 등이 확인되며, 장란형토기, 시루, 호형토기, 고베, 뚜껑, 파수, 옥
10) 부곡리 지석묘군1 : 고수면 부곡리 738-11번지에 있는 청동기시대 지석묘군이다.
등이 출토되었다.
부곡리 지석묘1 유적은 칠암산 정상부에 5기의 지석묘가 분포한다. 지석묘는 동-서 방 향으로 구릉 정상부를 따라 열 지어 있다. 그 중 가장 큰 지석묘의 크기는
5) 부곡리 유물산포지 1 : 고수면 부곡리 1177번지에서 발굴된 청동기시대에서 삼국시
265×175×91cm로 상석의 형면형태는 타원형에 가까우며 단면형태는 장방형이다. 지석
대가지의 유물산포지이다. 이 유물지는 연동마을 뒤편에 까끔재라 불리는 재에서 서측
은 보이지 않는다.
으로 뻗어 내린 해발 66m 야산의 하단부로 7개의 바위가 있어 칠암산이라 불린다. 현 재는 전사면이 개간되었으며, 구릉의 중단부는 연동마을에서 평지마을로 이어지는 도로
11) 부곡리 지석묘군2 : 고수면 부곡리 산37번지에 있는 청동기시대 지석묘군이다. 부
개설로 일부가 전단된 상태이다. 유물은 전사면에 걸쳐 무문토기, 경질토기편, 연질타
곡리 지석묘2 유적은 연동마을 뒤편 까끔재 정상부에 4기가 분포한다. 그 중 대표적인
날문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지석묘의 크기는 280×209×53cm로 상석의 평면형태는 원추형이며, 단면은 장타원형이 다. 장축은 대체로 동~서 방향을 이루며 지석은 묻혀 확인되지 않는다. 상석의 상면에
6) 부곡리 유물산포지 2 : 고수면 부곡리 905-3번지에서 수습된 원삼국시대부터 삼국
는 수많은 성혈이 확인되나 정형성은 파악할 수 없다.
시대의 유물산포지이다. 내천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에 인접하여 남측에 위치한다. 남북으로 흐르는 구릉성 산지로 남측에는 평지천이 흐르고 있다. 구릉은 현재 밭으로 경
12) 부곡리 지석묘군3 : 고수면 부곡리 산63번지에 있는 청동기시대 지석묘군이다. 부
작되고 있으며, 철탑이 세워져 있다. 구릉은 도로에 의해 일부가 절개된 상태이며, 유
곡리 지석묘3 유적은 연동마을 북측과 뒤편 야산으로 12기의 지석묘가 분포한다. 3기
물은 전산면에서 옹관편을 비롯한 연질토기편, 경질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는 연동마을 뒤편 야산의 대나무 숲에 있으며, 남~북 방향으로 열지어 있다. 4기는 30m정도 떨어진 시루봉의 사면을 따라 분포하며 맞은 편 광산김씨 분묘가 위치한 구
7) 부곡리 유물산포지 3 : 고수면 부곡리 산76-2번지에서 수습된 원삼국시대부터 삼국
릉 정상부에 5기의 지석묘가 군집을 이루고 있다.
시대의 유물산포지이다. 증산마을 뒤편 구릉으로 부곡리 지석묘군 유적의 하단부에 위
그 중 대표적인 지석묘의 크기는 448×223×120cm로 상석의 평면형태는 원추형이며,
치한다. 현재는 밭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정상부와 북사면은 공동묘지로 이용되고 있
단면은 장타원형이다. 이곳에는 지석 3기가 확인되며 지석의 높이는 68cm이다. 연동
다. 유물은 북사면의 단애면에서 옹관편이 상당수 수습되었으며, 민묘 이장으로 파헤쳐
마을의 북쪽 모정 옆에도 과거 지석묘의 상석은 비석 등을 만들면서 사라지고 지금은
진 부분에 옹관편과 연질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석곽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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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지석묘군4 :
부곡리 902-3번지에 있는 청동기시대 지석묘군이다.
국문(鞫問)을 당하였는데 이때 우정승 김사형(金士衡)과 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이
부곡리 지석묘4 유적지는 연동마을 서쪽의 구릉성 산지에 12기가 분포하고 있다. 이곳
그 죄를 감해 주기를 청하여 얼마 후 유배되고, 모두 수군(水軍)에 다시 편입되었다.
은 개간되어 밭으로 이용하고 있는데 이곳에 5기의 지석묘가 분포하고 있다. 또한 바
1405년(태종 5)에 전라도수군도절제사가 되었을 때에는 도내(道內)의 요해처(要害處)에
로 인근에 3기가 군집으로 분포하고 있다. 그 중 규모가 큰 것은 240×140×71cm로 상
다 만호(萬戶)를 두고, 병선(兵船)을 나누어 정박시켰고 또한 여러 섬에 둔전(屯田)을
석의 평면형태는 방형이며, 단면은 장타원형이다. 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설치하고 군비를 비축하게 하여 주는 것만을 바라는 폐단을 없애고. 평소 아랫사람을 대함에도 한 치도 소홀함이 없었다. 예로 그가 수군절제사로 있을 때에도 항상 사졸(士
14) 부곡리 지석묘군5 : 고수면 부곡리 429번지에 있는 청동기시대 지석묘이다. 부곡
卒)들과 더불어 감고(甘苦)를 같이하였고, 또한 도적을 쫓아 행선(行船)할 때에도 분연
리 지석묘5 유적지는 평촌마을 서쪽 고수천 건너편 논둑 위에 1기의 지석묘가 있다.
(奮然)히 몸을 돌보지 않아 군사들이 모두 사력(死力)을 다하였으므로 가는 곳마다 승
이 지석묘의 크기는 257×220×70cm로 상석의 평면형태는 방형이며, 단면은 장방형을
리하였다. 상을 받으면 항상 군사(軍士)의 공(功)이 있는 자에게 나누어 주었으므로 비
띤다. 장축은 남서~북동 방향이며 지석 2개가 확인된다.
록 외진 백성들이라도 그의 은혜을 입었다. 후에 양혜(襄惠)라는 시호를 받았다. 아들 이 하나 있으니 김원량(金原亮)이다.
15) 부곡리 중기구석기 유적 : 고창 부곡리 증산유적은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그림> 김빈길묘 전경
다양한 유구가 조성되었다. 지금까지 조사된 유구와 출토유물을 통해 발굴조사 성과는 다음과 같다. 유적에서 검출된 석기제작소의 존재가 여러 층에 걸쳐 확인되고 있다는
17) 백인당(百忍堂) : 용강정사 옆에 있는 정자로 안중섭(安重燮)의 아들 후석(後錫),
점으로 미루어 여러 시기에 걸쳐 석기 제작행위가 이루어졌다. 출토된 석기들은 주먹도
현석(玄錫), 태석(台錫), 길석(吉錫)의 4형제가 정자를 짓고 선비들과 더불어 시를 읊고
끼나 양날찍게, 긁개와 흠날석기 등이 있는데, 이는 호남지역의 구석기시대를 복원하는
놀았다고 한다.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데 중요한 유적이다. 원삼국시대부터 삼국시대 분묘는 분구묘, 옹관묘, 석관묘 등 다양 한데, 이는 고수천 하류의 만동·예지·봉덕·남산에 비해 시기적으로 앞서고 규모는 작다.
18) 생기터(鄕校터) : 증산 아래 서순성씨 댁이 옛 고창향교터였다고 전한다.
분묘가 조성된 맞은편에는 원삼국시대의 주거지 26기가 조사된 부곡리유적이 위치하고 있어 주거지와 분묘군이 공간분할이 이루어진 것으로 조사되었다. 주변의 건물지에서는
19) 수남정(水南亭) : 연동 뒤에 있는 정자로 본래 광주 어등산(魚登山) 아래 수남촌에
기단석열과 건물지 1동, 집수정 등 남북국시대부터 고려시대 중기까지의 것으로 추정
있던 것인데 백은선(白隱善)이 이곳으로 옮겨지었으나 현재는 파손되어 터만 남아 있
하였다. 중기 구석기 유구가 확인된 것은 “호남지역에서 처음이며, 호남지역에서 가장
다.
이른 시기에 형성된 유적일 가능성이 높다”고 조선대 이길수 교수는 밝혔다. 또한 “중 기구석기시대의 대표적 출토유물인 원초형 주먹도끼가 출토된 것은 매우 의미가 높은
20) 이석덕 묘비(李錫德 墓碑) : 고수면 부곡리 산27번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묘비이다.
것”이며 “예리한 날의 깎개가 늘고 홈날칼과 톱니날칼을 만들었던 석기제작소가 확인
연동마을의 동측에 있는 시루봉에서 뻗어 내린 나지막한 야산의 말단부에 이석덕의 묘
된 것은 호남고고학계의 경사”라고 정리하고 있다. 증산유적은 시기적으로 BC 5만 년
와 묘비 및 문인석이 있다. 비는 지붕형태의 옥개형 비수를 가지며 비신은 화강암제로
전에서 BC 12만년까지 추정되고 있다.
만들었다. 전면에는 “통정대부경주이공휘석덕지묘 숙부인경주김씨 부좌(通政大夫慶州李
<그림> 중기구석기유적 발굴전경
公諱錫德之墓 淑夫人慶州金氏 祔左)”라 각자되어 있다. 건립연대는 “숭정기원후오이년
16) 김빈길(金贇吉) 묘 : 고수면 부곡리 567-2번지에 있는 김빈길장군의 묘역이다, 김 빈길장군(미상∼1405년)의 본관은 고성(固城), 호는 죽강(竹岡)이다. 태조(太祖) 때의 무 인으로 낙안(落雁) 출신이다. 성품이 충직(忠直)하고 근검(勤儉)하였다. 1394년(태조3) 전라수군첨절제사(全羅水軍僉節制使)로 있을 때 만호(萬戶) 김윤검(金允劍) 김문발(金文 發) 등과 함께 왜적의 배 3척을 섬멸하는 등의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같은 해 투항해 온 왜인이 도망간 일로 인하여 최운해(崔雲海)‧이구철(李龜鐵)‧김영렬(金英烈) 등과 함께
- 17 -
팔월(崇禎紀元後五二年八月, 1679년)”이라 쓰여 있다. 비의 크기는 187×46×22cm이 다. <그림> 통정대부경주이공휘석덕지묘 21) 옛 수곡면사무소 터 : 연동마을은 고수면으로 통합하기 이전 수곡면의 면소재지였 으나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수곡면(水谷面)이 고사면과 통 합하여 고수면이 되었다. 통합된 고수면의 면사무소는 지금의 황산리로 이전되
- 18 -
었다. 옛 수곡면사무소터는 부곡리 연동 2길 19번지이다.
에 이르러서는 판의금부사·홍문관제학을 지내고 이듬 해 형조판서·판의금부사, 1893년
<그림> 옛 수곡면사무소 터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1896년에는 품계가 정1품에 오르고 규장원경 겸 왕태자궁일강관 (奎章院卿兼王太子宮日講官)이 되었으며, 칙임관3등에 올랐다. 이듬해 중추원의장에 칙
22)
당산 :
오랜 역사만큼 마을의 안녕과 수호를 위한 자연석 당
임관1등이 되었고, 1898년 궁내부특진관이 되었다. 같은 해 의정부참정(議政府參政)을
산이 5곳이 있다. 5기의 당산은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산을 건드리거나
지냈으며, 1899년에는 금보전문서(金寶篆文書) 서사관(書寫官)을 지냈다. 1901년 궁내
훼손하면 천벌이나 재앙을 받는다는 믿음이 전해오고 있어 지금까지 잘 보존하고 있다.
부특진관으로 재임하였다.
선돌인 마을당산은 연동 모정 옆, 연동교회 앞 부곡리 655번지 김영철씨댁 담장 지상
이호준은 을사오적의 한 명인 이완용의 양부이다. 이완용이 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
75cm의 자연석이다. 또한 마을 서쪽 부곡리 620-1번지 답에 있는데, 원래는 부곡리
주군 낙생면 백현리(지금의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에서 우봉이씨 집안의 가난한 선비
613-2의 논가 길옆 느티나무 밑에 있었다가 경지정리사업으로 현재 위치로 옮긴 것이
이호석의 장남으로 태어나 열 살 되던 1867년 4월 20일 당시 예방승지(청와대의전 비
다. 마을 주민들은 그곳을 독정자등이라 불러왔다. 1기는 마을 앞 서남쪽 부곡리 667
서관격)로 있던 32촌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갔다. 이 비는 이완용이 14세 되었을 당시
번지의 논둑에 있으며, 1기는 마을 어귀 626번지 주택 뒤 대밭에 서 있다. 마지막으로
세운 비석이다. 이호준(李鎬俊)은 이조참의, 승정원 동승부지, 한성부판윤 등 여러 고위
마을 중앙 모정 옆에는 원래 괴목을 당산으로 모셨는데, 당산이 죽자 이곳에 선돌의
직을 지닌 관료이자 흥선대원군과 친한 친구관계였다.
당산을 옮겨와 마을의 수호신으로 삼고 있다.
이 비가 이곳에 세워지게 된 시기는, 그가 1870년에서 1872년까지 전라도관찰사로 순
<그림> 연동마을 당산(수호신)
찰사를 겸하던 때이다. 순찰사는 각 도(道)의 군비 태세를 살피던 직책으로 지방의 병 권을 장악하였던 종2품의 관찰사(觀察使)가 이를 겸직하였다. 이 비가 세워지는 1871
23) 겸순찰사이공호준영세불망비(兼巡察使李公鎬俊永世不忘碑) : 이 비는 고수면 부곡
년은 미국이 1866년 8월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두 차례 탐문항행을 실시하면서
리 부곡길 129번지에 있는 조선후기 신미년(1871년) 6월에 세운 이호준(李鎬俊, 1821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응징과 조선과의 통상관계 수립을 목적으로 조선을 침략한
~ 1901년)의 영세불망비이다. 이호준의 본관은 우봉(牛峯), 자는 충백(忠伯), 시호 충익
해이다. 미국은 군함 5척, 함재대포 85문, 해군과 육전대원 총 1,230명을 이끌고 5월
(忠翼)으로 조선 말기의 문신이다. 그는 섭의 아들로 식(埴)에게 입양되었다. 1864년(고
19일 남양만에 도착하였다. 미군은 6월 10일 군함 2척을 앞세우고 전투대원 644명을
종 1) 경과증광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0월에 홍문관수찬이 되었다. 이어 승정
강화도의 초지진·덕진진·광성진 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6월 11일의 광성진전투에서
원의 동부승지로 특별 임명되었으며, 1865년 홍문관부제학을 거쳐 이조참의에 임명되
미군 역시 피해가 많아 이튿날 철수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전국 각지
었다. 이듬해에 다시 홍문관부제학이 되어 여러 차례 소(疏)를 올리며 소임을 다하였다.
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통상수교거부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당시 이호준은 순찰사
1867년에 예방승지(禮房承旨), 1870년에는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전라도지
를 겸하면서 신미양요로 인한 외세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군비 태세를 살피려고 전라
방의 행정에 진력해 외침에 대비한 성의 보수(補修)와 군사훈련에 주력하였다. 3년여의
도를 순찰하다가 이곳 고수에 들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뒤 1872년 11월 규장각직제학이 되었다. 1874년 형조판서에 올
<그림> 겸순찰사이공호준영세불망비
랐으며, 이듬해에는 시강원우빈객과 좌부빈객으로 세자의 교육을 맡았다. 1879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가 다시 형조판서를 거쳐, 이듬해에 예조와 이조판서를 역
24) 증산마을 당산 : 증산마을에는 두 그루의 당산이 남아 있다. 당산은 마을 아래쪽이
임하였다. 1883년 병조판서가 되고, 같은 해 9월 판의금부사로 특별 발탁되었다. 갑신
할머니당산이고, 위쪽 모정 옆이 할아버지당산이다. 당산은 느티나무로 임순례(신흥댁)
정변 직전인 1884년 6월에는 동지 겸 사은정사(冬至兼謝恩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오기
님이 정월보름날에 과일과 시루떡을 준비하여 지금도 제를 지내고 있다.
로 되어 있었으나, 청나라에 다녀와 복명(復命)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림> 증산마을 할머니당산
1885년 5월 예조판서를 거치고 이듬 해 2월에는 다시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그 해 6월 에 경상도관찰사로 다시 외직에 나갔다. 전라도에 이어 경상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여 당
25) 먹점마을 당산 : 먹점마을 당산은 묵향정 바로 옆에 있는 느티나무이다. 그 직경이
대의 관리 중에서 누구보다 지방 실정에 밝은 관리가 될 수 있었다.
나 크기로 보아 수백 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당산이다. 당산나무의 한 쪽은 썩어
1888년에는 공조판서·예문관제학·규장각제학·판의금부사 등을 다시 역임하였다. 1889년
있으나 건강상태는 대체로 양호하다. 이 당산은 먹점마을 앞으로 고수천이 흐름에 따라
- 19 -
- 20 -
허한 곳을 막아주는 비보개념의 당산이다. <그림> 묵향정과 먹점당산
의 한 사람이 그 바위를 팔아 넘겨 고창고교, 고창우체국 및 금융조합의 주춧돌이 되 었고, 고수 예지보(禮智洑) 장자보(長者洑) 구레보 등을 쌓았다. 그런데 그 바위가 없어 진 뒤 풍수지리에 밝은 한 도인(道人)이 지나가다가 청룡자락이 허물어져 요사(夭死)가 일어나겠다고 예언하였다. 그런데 그 예언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안씨 종중에서는 젊은
6.
나이에 요절하는 일이 많이 생겼는데 마당바위를 깨뜨리지 않았으면 요절하지 않고 수
전설과 풍속
(壽)를 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양민학살 :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들이 대량으로 학살된 지역으로 70년
바위 밑에는 도내기샘이라고 불리는 옹달샘이 있었으며 물이 차고 시원하여 널리 그
대 초까지도 인골이 다량으로 널 부러져 있었고, 옹기항아리로 된 일반 초분도 많이
이름을 떨쳤는데, 심지어는 평양기생들의 소원이 마당바위에 앉아 놀면서 도내기 샘물
있었던 곳이다. 즉 영광경찰서는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들이 정읍을 거쳐 고창관내로 진
을 마셔보는 것이라고 하였다니 가히 그 명성을 짐작할 만하다.
입한다는 소식을 듣고 영광군의 좌익의 사람들과 부역을 한 영광군민을 약 40~50명을
또한 호랑이 점쟁이라는 무녀는 도내기샘을 신령이 깃든 것으로 여기어 약수로 이용하
두 대의 트럭에 싣고 이곳에서 학살하였다. 그 후 부곡잔등을 저녁 늦게 지나 올 때는
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도내기샘이 묻혀 있지만 바위가 있던 자리를 찾아 샘을 파면 샘
귀신이 나올 것 같아 사람들이 무서워하던 곳이라 한다.
물이 솟을 것이라고 한다. 지금 바위는 없어지고 그곳에 마을이 생겨 마을 이름을 마
1)
당바위라고 부른다. 2) 일제강점기 퇴비증산 장려책과 가마니 짜기 : 1929년 일제강점기 연동마을은 퇴비 장려책 우수마을로 선정이 되었다. 마을 주민들이 모정 앞에서 모여 퇴비증산경진대회 를 실시하였다고 한다. 청장년들이 산에서 풀을 지게에 한 짐씩 베어 와서 무게를 잰 후 질 좋고 풀을 많이 베어 온 사람에게 1등상을 주었다고 한다. 당시 고창군 배석린
7. 마을의 현황과 생활상
군수와 일본인 도지사가 나와 경진대회를 성대하게 거행하였다고 한다. 퇴비증산정책으 로 마을의 쌀 생산량은 급격하게 늘었다고 한다. 다음해 봄부터는 가마니짜기 경진대회
1) 부곡리의 인구 변화(앞은 전체, 위는 남성, 아래는 여성, 단위 : 명)
를 마을 앞 논에서 개최하여 동일 시간에 가장 많은 가마니를 짠 팀에게 1등상을 주어
부곡리의 인구변화의 양상은 다음과 같다. 부곡마을의 2012년 12월 현재의 인구는 97
가마니자기를 적극 권장하였다. 이러한 연동마을의 사업은 이웃마을로 보급되어 농가소
명으로 2003년 12월 122명보다 25명이 감소하였다. 이는 10년 전보다 약 8%가 감소
득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고 한다. 이 가마니는 양곡출하용으로 근래까지 사용하다가 마
하여 연평균 0.8% 이상 인구가 줄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곡의 인구감소는 군단위
대가 나오면서 가마니사용이 폐지되어 농가소득이 많이 감소하였다.
의 농촌마을에서도 인구감소율이 거의 없는 것이다. 연동마을의 2012년 12월 현재의 인구는 88명으로 2003년 12월 97명보다 9명이 감소
3) 무성영화(활동사진)상영 : 연동마을은 가마니짜기 경진대회와 퇴비증산 경진대회가
하여 연평균 인구감소율이 0.9%이다. 증산마을의 2012년 12월 현재의 인구는 58명으
끝나면 밤에 활동사진(무성영화)을 상영하여 주민들이 모여 함께 보기도 하였다. 일제
로 10년 전인 2003년 12월 55명보다 3명이 증가하여 10년 전에 비해 인구가 5.45%가
강점기에 연동마을이 고수면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인구감소와 농
증가하였다. 이는 농촌지역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다. 부곡리는 전체적
토가 좁아 가장 가난한 마을이었다.
으로 2012년 12월 현재 10년 전에 비해 약 12%의 인구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4) 마당바우와 일제강점기 금융조합 : 노령산맥의 줄기인 고수면 부곡리(芙谷里) 증산 봉(甑山峰)에서 서쪽으로 이어져 내린 곳을 마당바위라고 한다. 이곳에는 먼 옛날부터
마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을
12.31
12.31
12.31
12.31
12.31
12.31
12.31
12.31
12.31
12.31
부
12 58 12 57 14 59 11 51 12 55 12 55 10 48 13 62 11 54
높이 3m, 넓이 20m 가량의 널찍한 바위가 있었는데 바위 모습이 마당과도 같이 넓어
곡
마당바위라고 불렀다.
연
안씨(安氏) 선대 선산의 좌청룡 가닥으로 마당바위가 있었는데 1920년도에 안씨 종중
동
- 21 -
2 97
64 42 55
1 97
64
0
81
6
6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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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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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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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11 55 11 56 10 54 11 57 10 50 5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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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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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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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53
2
52
4 87
72 48 39
8 89
64 48 41
97 88
47 54 49 39
증 산
55
30 25
60
3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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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22
56
32 24
53
3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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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23
56
3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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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26
61
37 24
58
34
장은 농림수산식품부의 후원을 받아 국ㆍ도비 40억을 포함해 165억원을 들여 2010년
24
10월까지 7천564㎡규모에 고추 건조기와 분쇄설비, 가공시설 등을 갖추었다. 고추종합 처리장은 고창산 고추를 건조ㆍ가공해 '올랜드(Alland)' 브랜드로 출시하고 있다. <그림> 고추종합처리장
2)
산업과 생활상 평지천과 고수천 사이에 두고, 부곡리의 대부분은 시루봉이 차지하고 있다.
고수면 게이트볼장 :
고창군 고수면 부곡리 부곡길 128번지에 있는 사계절 게이트볼
마을들은 시루봉 바로 아래 능선의 서쪽에 연동마을이 있고, 부곡은 시루봉의 능선인
장이다. 이 경기장은 2011년 11월 9일 완공되었으며, 부지 1,243㎡에 건물 447㎡의
부곡잔등 아래 동쪽에 있으며, 증산은 시루봉 바로 아래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이 지
규모로 총사업비 1억 4,400만원을 투입하였다.
역은 평지천과 고수천의 범람원지대에 있기 때문에 비옥한 농토 위에 농업이 발달해
<그림> 고수면 게이트볼장
있다. 부곡리의 대부분은 논농사가 발달했으며, 특히 증산은 새로운 소득 작물로 딸기 를 재배하고 있다.
남고창 IC : 고창군 고수면 부곡리 984번지에 있는 고창-담양 간 고속도로에 있는 톨 게이트로 광주로 통하는 통로이다. <그림> 남고창 IC
3) 성씨별 거주 현황(2013. 8월 현재) 성씨별 인구현황은 각 마을의 이장들이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정리하였기 때문에 면사
연동교회 : 고창군 고수면 부곡리 654번지에 있는 기독교 예수교 장로회 소속의 교회
무소의 통계와 다를 경우도 있다. 연동과 증산의 성씨 분포는 다음과 같다.
로 신영철목사가 시무하고 있다.
(1) 연동 (36가구) ◦ ◦ ◦ ◦ ◦ ◦ ◦
죽산안씨 금녕김씨 광산김씨 창녕조씨 평산신씨 행주기씨 강진김씨
6가구 4가구 7가구 1가구 1가구 1가구 3가구
연동마을회관 : 연동마을회관은 1938년 마을 중심지에 있는 김기만씨의 주택 ◦ ◦ ◦ ◦ ◦ ◦ ◦
이천서씨 김해김씨 밀양박씨 진주정씨 수원백씨 전주이씨 양성이씨
6가구 1가구 1가구 2가구 1가구 1가구 1가구
지를 매입하여 초가 4칸 집을 지어 연동회관이라 하여 이용하였다. 이곳에서 이동영선생을 모셔 서당을 개설하여 자녀들의 교육사업에 노력하다가 1948년 마을기금이 고갈되자 회관을 매각하여 폐지하였다. 1966년 마을 어귀에 4H클 럽 회원들이 황토벽돌을 만들어 슬레이트 3칸의 집을 지어 회관으로 사용하였 다. 그 후 1981년 회관을 매각하고, 지금의 회관자리에 마을기금으로 30평의 건물을 지어 회관으로 이용하였다. 다시 2007년 9월 군비 2,000만원과 115명 의 헌성금 2,745만원을 합하여 24평의 벽돌 조적으로 신축하여 마을회관과 경
(2) 증산 (21가구) ◦ ◦ ◦ ◦
연안이씨 이천서씨 강릉유씨 광주이씨
9가구 3가구 1가구 3가구
◦ ◦ ◦ ◦
밀양박씨 2가구 고령서씨 1가구 전주이씨 1가구 정씨 1가구
로당으로 이용하고 있으며, 11월말 모정 옆에 회관중건사적비를 세웠다. 연동경로당은 1985년 4월 12일 연동노인회 규약을 제정하고 노인회를 창설하 여 노인들의 휴식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2003년 4월 주민과 출향인사들 108명 이 헌성금 1280만원을 마련하여 모정 앞에 부지를 매입하여 주차장을 조성하 고, 주차장조성 방명비를 건립했다. 마을회관은 군의 지원과 출향민들의 후원 으로 건축되었다. 고창군 고수면 부곡리 653-4번지에 있다.
4) 부곡리 주요 기관과 시설
<그림> 연동마을회관
고추종합처리장 : 고창군 고수면 부곡리에 고창군 고추가공시설이 있다. 고추종합처리
- 23 -
연동마을우물 : 연동마을의 공동우물은 바로 앞에 있다. 현재는 농업농수로 가
- 24 -
끔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아직도 우물터에는 함석지붕과 콘크리트로 만든 덮
증산마을모정 : 증산마을 모정은 고수면 부곡리 67-4번지에 있으며, 바로 옆
개로 덮여있다.
에는 증산마을 할아버지 당산이 있다. <그림> 증산마을모정과 할아버지당산
연동마을모정 : 연동마을은 마을의 규모가 컸기 때문에 모정도 세 곳이나 있 다. 1930년대 건립된 마을 앞 모정과 마을 뒷동산에 건립하였다. 1958년에는
(墨香亭) :
모정터에 2001년 군비와 안동관이 사비를 투자하여 기와 8
부녀전용의 모정을 건립하여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으나 인구가 줄어 두 곳은
각정의 정자를 신축하여 묵향정이라 현액하고, 마을주민들의 휴식처로 보존관리하고 있
사용하지 않고 마을 앞의 큰 모정만 이용하고 있다. 이 모정은 일제강점기 말
다. 건축비는 일반벼 40-50석 값이 들었다고 한다.
기에 일본순사들이 주침금지(晝寢禁止)라고 쓴 표어를 기둥에 붙이고 마루판을 떼어 세워 놓고 비상시국에는 낮잠을 자면 안 된다고 모정을 폐지시켜버렸다.
우진농장 : 연동마을 앞 최경렬씨가 한우를 사육하는 농장이다.
큰 모정을 못 쓰니 삼복 전후에 더위를 피하여 마을 뒷동산에 있는 모정으로 모였다. 하루는 마을주민들이 모정 가득히 모여 잠을 자고 있는데, 김병구(귀
춘강목장 : 고창군 고수면 부곡리 802번지의 먹점마을에 있는 목장으로 재래식여물로
머거리였다고 함)라는 순사(巡査)가 모정에 나타나자 깜짝 놀라 일어나니 “괜
소를 키우는 목장이다. 이 목장은 한때 신세계백화점이 직접 운영하며 최고급 한우로
찮으니 자라”고 하여 잠을 잔일도 있었다고 한다. 큰 모정은 광복 후 다시 이
팔리기도 하였다.
용하다가 1971년 새마을사업의 일환으로 모정을 해체하여 재건축하려고 3년을
<그림> 춘강목장
보관한 후에 다시 본 건축자재를 사용하여 건축하였다. 마을 앞 모정은 1990년 회갑이 되어 너무 낡아 재경연동증산봉향촌회와 출향 인사들이 주관이 되어 총 53명이 733만원의 헌성금을 마련하여 건립하였고,
5) 부곡리 역대 이장
이곳에 연화정(蓮華亭)이라는 현액하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부곡리에 기록상 처음인 1952년 부곡마을 이장을 맡은 이는 오성근이장이었으며, 연동
<그림> 연동마을모정
은 1961년 서기준 이장, 증산은 1972년 신대환이장이 처음으로 마을의 이장직을 수행 하였다. 부곡리의 각 행정리의 연도별 이장 명단은 다음과 같다.
고수부녀경로당 : 고수부녀경로당은 부곡리 부곡길 129번지에 있는 여성전용 연동
경로당이다. <그림> 고수부녀경로당 고수경로당 : 고수경로당은 부곡리 부곡길 129번지에 있는 경로당이다. 경로당 입구에는 경로당 사적비 있으며, 바로 옆에는 고수부녀경로당이 있다. 또한 우 물 옆에는 조선말기 전라관찰사이자 순찰사이자 을사오적 이완용의 양부인 이 호준의 영세불망비가 있다. <그림> 고수경로당
부곡
증산
1952
오성근
1953
유춘종
1954
안병모
1955
서덕중
1956
정진암
1959
서덕중
1960
정진암
1961
서기준
1961
이막동
1963
김환근
1963
서대원
증산마을회관 : 증산마을회관은 마을사람들의 공동공간으로 군의 지원과 출향
1964
안도연
1964
서대원
민들의 후원으로 건축되었다. 고창군 고수면 부곡리 증산길 66번지에 있다.
1965
안도연
1965
서덕중
<그림> 증산마을회관
1967
안도연
1967
서동곤
1967
안도연
1967
안도연
- 25 -
- 26 -
1971
안도연
1972
1971
서기락
1975
1972
전재민
1977
서길학 서대성
1975
김영균
나종풍
1977
안영환
1982
안재종
남미대자
안상원
이순례
이윤범
김복순
신대환
1985
안영환
정보순
안상원
이순례
이용달
김복순
이재범,신대환
1987
안영환
정보순
김춘석
이순례
이용달
김복순
1988
신수영
정보순
김춘석
이순례
이용달
김복순
1989
신수영
정보순
김춘석
이순례
이용달
김복순
1990
신수영
문현숙
김춘석
정일순
이용달
정분순
1991
신수영
문현숙
김춘석
정일순
이용달
정분순
1972 1975 1977
신대환
1978
김환길
1978
서대성
1978
서사곤
1979
정재영
1979
홍성래
1979
서사곤
1981
안상원
1981
홍성래
1981
서사곤
1992
신수영
문현숙
김춘석
오수자
이윤범
김순님
1984
이병균
1984
홍성래
1984
서사곤
1994
기모연
고이순
김춘석
오수자
이윤범
김순님
1988
김진수
1988
홍성래
1988
서사곤
1996
기모연
최점숙
김춘석
오수자
이윤범
김순님
1990
서기술
1990
홍성래
1990
서사곤
1998
기모연
정선님
김춘석
오수자
이의남
김순님
1992
김영철
1992
안재운
1992
이용희
2002
기모연
정선님
김춘석
오수자
이용욱
김순님
1994
김영철
1994
안재운
1994
이용달
2003
기모연
정선님
김춘석
오수자
이용욱
김순님
2003
김영철
2003
안재운
2003
이윤범
2004
안재운
안순자
김춘석
정일순
이용욱
이순이
2004
김진수
2004
기묘연
2004
이윤범
2006
신수영
안순자
김춘석
오수자
이용욱
이순이
2006
김진수
2006
김동환
2006
이윤범
2008
신수영
안순자
김영철
정일순
이용욱
이순이
2008
서기술
2008
김동환
2008
이윤범
2009
신수영
안순자
김영철
전영순
이용욱
이순이
2010
김진수
2010
김동환
2010
이윤범
2010
안병회
김순임
김영철
오수자
서순성
이순이
2012
서기술
2012
이경희
2012
이강택
2011
안병회
김순임
김영철
오수자
서순성
이순이
2013
서기술
2013
이경희
2013
이강택
2012
안병회
김순임
김영기
정일순
서순성
이순이
2013
안병회
김순임
김영기
정일순
서순성
이순이
6)
▣ 자료조사에 도움주신 분
역대 새마을지도자와 부녀회장 역대 새마을지도자와 부녀회장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안도연(연동 토박이)
직책을 유지한 지도자는 연동마을의 김춘석 새마을지도자이다. 그는 1986년에 처음 맡
안상현(연동 토박이)
은 이후 2006까지 19년 동안 새마을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천양기(고수면 부면장) 정분순(증산 전부녀회장)
부곡
연동
증산
▣ 참고문헌
지도자
부녀회장
지도자
부녀회장
지도자
부녀회장
1974
안재종
김연순
서기종
김옥혜
이재범
김점숙
1975
안재종
김연순
서기종
김옥혜
이재범
김점숙
『고창군지』, 고창군지편찬위원회, 2009.
1976
안재종
김연순
서기종
김옥혜
이재범
감회숙
『고창군문화유적분포도』, 원광대학교, 2005.
1977
안재찬
김연순
안상문
안정님
이용달
김복순
『고창 부곡리 증산유적Ⅰ』, 호남문화재연구원, 2009.
1978
안재찬
김연순
안상문
안정님
이용달
김복순
『고창농악을 지켜온 사람들의 삶과 예술세계』, 고창농악보존회, 나무한그루, 2010.
1979
안재찬
남미대자
안상문
안정님
이용달
김복순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2003.
1981
안재종
남미대자
안상원
이순례
이용달
김복순
- 27 -
『고창군의 지석묘』, 군산대학교, 2009.
『고창 성씨의 입향유래』, 고창문화원, 2007.
- 28 -
牟陽城의 얼』, 고창군, 2009. 『전북전래지명총람』유재영, 민음사, 1993. 『한국지명총람11 전북편』, 한글학회, 1981. (<한국인의 지역감정>; 고흥화,1989년,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6권 전라도(全羅道) 고창현(高敞縣)
http://gochang.grandculture.net/Contents http://people.aks.ac.kr/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6587&cid=1593&categoryId=1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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