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
고창의 인물
n 강기종(康起宗) 자는 자술(子述), 호는 호은(湖隱), 본관은 신천(信川)이니 신원부원군(信遠府院君) 원(遠)의 후 손으로 이괄(李适)의 난에 창의한 흔(訢)의 아들이다. 1616년(光海 2년) 대산면 갈마(渴馬)에서 출 생하여 경사(經史)를 두루 읽고 학문에 깊어 여러 번 향시(鄕試)에 오르고 병학(兵學)에도 밝았는 데, 병자호란에 옥과현감(玉果縣監) 이흥발(李興浡)의 격문(檄文)에 따라 의병과 의곡(義穀)을 모아 청주(淸州)에 이르렀다가 화의가 이루어짐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왔다. 「早識辨熊魚 忍看拜犬猪 未蹈三尺刃 虛負十年書」 일찍 문자를 알고서 차마 되놈에게 절하는 걸 볼 줄이야 3척 칼을 밟고 죽지 못하니 헛되이 10년 공부 저버렸구나. 일전(一戰)을 벌이지 못하고 돌아옴을 통한(痛恨)하여 지은 시이다. 상하면 송림산(松林山)에 초막을 지어 은거하며 산 위에 단을 쌓아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했고, 충분(忠憤)에 겨워 지은 시 가 많으니 존주음(尊周吟), 자규편(子規篇), 망미사(望美詞), 북정의(北征義), 애강남(哀江南) 등이 다. 호암 변성온(壺巖卞成溫)과 도의로 사귀고 성리(性理)를 강구했으며, 행의로 추천되어 병절교 위(秉節校尉)에 제수되고 뒤에 병자호란의 의적(義蹟)으로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 대산면 남계(南 溪)에 기노장(奇老章)이 찬한 기적비(紀蹟碑)가 서 있고, 신산사(新山祠)에 배향되었다. 湖南節義 錄 湖南人物志 茂長校誌
n 강논덕(姜論德) 김묵매(金墨梅, 모양지에는 黑梅)의 아내이다. 남편이 죽자 머리를 자르고 수절하기를 맹세하여 밤낮으로 우니, 그때 고을 관원(官員) 박종순(朴鍾醇)이 논덕이 고운 걸 알고 차지하려 하였다. 그 때 논덕은 목욕하고 남편의 영전에 고하고서 목매어 죽으니 뒤에 정려(旌閭)되었다. 東國續新三 綱行實圖 牟陽誌 高敞校誌
n 강대직(姜大直) 자는 응현(應賢), 호는 이온재(而溫齋), 본관은 진주(晋州)이니 문량공(文良公) 희맹(希孟)의 후 손으로 물기재(勿欺齋) 응환(膺煥)의 5대손이다. 1889년(高宗 26년) 성송면 암치(岩峙)에서 출생 했다. 인품이 뛰어나고 힘이 장사였으며 기국(器局)이 커서 소절(小節)에 얽매이지 않았고 일의 주 선에는 아무도 따르지 못하는 역량을 지녔다. 제릉참봉(齊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 하고 광무 8년 독립의군부 종사관(獨立義軍府從事官)에 서임되어 군자금을 모금하여 의군(義軍)을 도왔고, 뒤에 상해 임시정부에 자금을 여러 차례 보낸 것으로 전한다. 사종형 대식(大湜)과 함께 암 치학교를 설립하고 고창고보(高敞高普) 설립에 공이 많았으며, 당시 고창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는데 나랏 일이 그릇되매 세상사를 멀리하고 열운정(悅雲亭)을 지어 지기우(知己友)와 자연을 즐기다가 45세에 조졸 (早卒)하니 사림(士林)이 개탄했다. 유고(遺稿)가 있다. 茂長誌
n 강민저(姜敏著) 자는 내숙(來叔), 호는 모산(茅山), 본관은 진주(晋州)이니 문량공(文良公) 희맹(希孟)의 후손으
로 군수(郡守) 필주(弼周)의 아들이다. 1651년(孝宗 5년) 성송면 암치(岩峙)에서 출생하였다. 문곡 김수항(文谷金壽恒)의 문인으로 1694년(肅宗 20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복위를 상소하고 이듬해 다시 영신(佞臣)의 목을 벨 것을 상소하면서 언사가 몹시 강경하여 진도로 유배되었다. 3년 뒤 죄 가 풀려 돌아와서는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삼연 김창흡(三淵金昌翕) 등과 시주(詩酒)로 여생을 보냈 다.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고 문집(茅山集)이 전하며 포암 윤봉조(圃菴尹鳳朝)가 묘지(墓誌) 를 지었다. 茂長誌 湖南人物志
n 강 순(姜 恂) 자는 신백(信伯), 호는 청계(淸溪), 본관은 진주(晋州)이니, 참판 징(澂)의 현손으로 1607년(宣 祖 40년)에 출생했다. 인조 병자호란에 거의(擧義)했다가 화의가 이루어지자 통곡하고 돌아와서는 고창으로 내려와 살며 운곡(雲谷)에 집을 지어 주자(朱子)의 초상을 받들고 일생 동안 사모했고 자손들에게 경계하여 오랑캐의 연호가 바뀌지 않으면 과거에 응시하지 말라 하였다. 갑평(甲坪)에 청계정사(淸溪精舍)와 남하비(南下碑)가 세워졌다. 淸溪先生南下略錄 牟陽誌
n 강시언(姜時彦) 자는 백영(伯英), 호는 하월당(荷月堂), 본관은 진주(晋州)이니 문량공(文良公) 희맹(希孟)의 6 세손이요 강계판관(江界判官) 계오(繼吾)의 아들로 1589년(宣祖 22년) 출생하였다. 천성이 효우 (孝友)하여 행의가 독실했으며 문장과 기절(氣節)로 세상의 추앙을 받았다. 이괄(李适)의 난에 창 의하여 군량을 모았다가 난이 평정되매 군량을 관아에 바쳤다. 정묘호란에 의병과 군량을 모아 전 주에 이르러 화의가 이루어짐을 듣고 돌아왔으며 병자호란에 또 운암 이흥발(雲巖李興浡)의 격문 에 따라 의병과 군량을 모았다가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와 호를 호은 (湖隱)이라 고치고 은거했다.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 湖南節義錄 湖南擧義錄 湖南人物志
n 강응환(姜膺煥) 자는 명서(名瑞), 호는 물기재(勿欺齋), 본관은 진주(晋州)이니 문량공(文良公) 희맹(希孟)의 후 손으로 모산 민저(茅山敏著)의 증손이다. 1735년(英祖 11년) 성송면 암치(岩峙) 에서 출생했다. 천품이 비범하고 재예가 절인(絶人)하여 경국제세(經國濟世)의 포부를 안고 병술(兵術), 천문, 지리, 음양, 산수에 이르기까지 정통했다. 일찍이 무호가(武豪歌)를 지어 “대장부 천지간(天地間) 에 태어나서 장부사(丈夫事)를 하려 하고 인간 만사 헤아리니 글읽기, 글쓰기는 부유(腐儒)들이 할 일이고 밭갈이 논매기는 농부들이 할 일이라 …. 남병사(南兵使) 북병사(北兵使)를 차례로 역임하 고 통어사(統御使) 통제사(統制使)를 계제에 지낸 뒤에…. 왕명(王命)을 받들어 삼군(三軍)을 호령 하리” 하여 대장부의 포부를 피력하고는 무과(武科)에 급제했으나 때는 평시라 무인의 기개를 펼 기회가 없었다. 내직으로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외직으로 칠원현감(漆原縣監), 대구영장(大丘營將), 고령진 병마첨절제사(高嶺鎭兵馬僉節制使), 창성 도호부사(昌城都護府使), 동 래수사(東萊水使) 등을 지냈는데, 대구영장으로 있을 때는 육지 요승(六指妖僧)을 붙잡아 정조(正 祖)의 칭찬을 받고, 창성부사로 있을 때는 강변(江邊) 7읍(邑)의 형세를 그려 조정에 올려 요새지 를 수비할 것을 말하고 연노궁(連弩弓)을 만들어 연읍(沿邑)에 비치했으며, 동래수사로 있을 때는 영남 해안 일대의 군략지도를 만들어 만약의 사태에 대비케 했다. 저서로 물기재집勿欺齋集, 칠원정적漆原政績, 내영정적萊營政績이 있고 정조가 하사한 영정(影幀)과 함께 「청북변성도淸 北邊城圖」, 「고려중요처도高麗重要處圖」라 제(題)한 2폭의 대형 지도가 본가(本家)에 보존되어 있 다. 규장각 직학사(奎章閣直學士) 송규헌(宋奎憲)이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다. 全北의 뿌리
湖南人物志
n 강인회(姜寅會) 자는 태화(太和)이고 호는 춘파(春坡)이며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사평(司評) 학손(鶴孫)의 후 손이고 재형(在衡)의 아들이다. 1807년(純祖 7년)에 성송면 암치(岩峙)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총명이 과인하여 한번 배우면 잊지 않았고 15세에 경전(經典)과 사서(史書)를 두루 읽었다. 노사 기정진(蘆沙奇正鎭)이 학덕으로 이름나자 18세에 문하에 나아가 수업하고 26세 때 스승 곁으로 이사하여 30여년을 조석으로 스승 모시고 학문에 정진하여 대유(大儒)가 되었다. 1862년(哲宗 13년) 삼남지방에 민란이 일어나 왕이 좋은 의견을 구하자 삼정책문(三政策問)을 지어 올렸으니 전부(田賦)․군적(軍籍)․환곡(還穀)이다. 이 밖에 나라의 기강을 세우고 인재를 등용 하여 언로(言路)를 열고 예의염치를 장려해야 한다는 것을 구구절절 토로했다. 효가 지극하여 3년 을 시묘하고 계모를 친모처럼 섬겨 계모인 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평생 동안 벼슬이나 명리 (名利)를 구하지 아니하고 산림처사로 지내면서 많은 후진을 길러냈으니 박용태(朴容泰), 기용연 (奇容衍)이 대표적인 문제자이다. 1880년에 졸하고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되었으며 문집으로 춘파유고春坡遺稿 1책이 간행되었다. 高敞의 儒學 茂長校誌
n 강천수(姜天秀) 자는 중민(仲民), 호는 거산(巨山), 본관은 진주(晋州)이니 문량공(文良公) 희맹(希孟)의 후손으 로 춘파 인회(春坡寅會)의 손자이다. 1863년(哲宗 14년) 장성에서 출생하여 송사 기우만(松沙寄宇 萬) 문하에서 경전을 습득하고 백가서(百家書)를 섭렵(涉獵)하여 학문이 깊고 문장이 유려했다. 35세 때 종숙 백천(柏川) 해영(海永)이 공을 맞이하여 성송면 암치(岩峙)에 서숙(書塾)을 개설 하여 문자제(門子弟)를 가르치게 함으로써 눌러 살게 되었다. 한일합방(韓日合邦)의 소식을 듣고는 산에 올라 통곡하기 여러 날에 마침내 세상사에 뜻을 끊고 오로지 후진 양성을 소임으로 하니 배 우는 이로 서숙(書塾)은 언제나 가득했고, 만년에는 문제자들이 공의 학덕(學德)을 사모하여 암치 서쪽 계곡 위에 정자를 지어 거산정사(巨山精舍)라 편액(扁額)하고 노년유휴(老年遊休)의 곳으로 하였다. 인품이 괴걸(魁傑)하여 학처럼 우뚝했고 붓을 들면 물 흐르듯 하여 윤색하는 법이 없었다. 평소에 말하기를 노사선생(蘆沙先生)의 외필(猥筆)과 납양사의(納凉私議)는 학술의 대문자(大文字) 라 여기에 더할 말이 없다 하였고, 송사문집松沙文集을 비롯 강문(姜門)의 은휴집恩休潗, 치 재집癡齋潗, 모산집茅山集, 물기재집勿欺齋集 등을 교감(校勘) 간행하였다. 유고(遺稿) 3권이 간행되었다. 茂長校誌 「裵聖洙撰 行狀」
n 강필주(姜弼周) 자는 대로(大老), 호는 송암(松菴), 본관은 진주(晋州)이니 문량공(文良公)
희맹(希孟)의 후손으
로 호란 창의(胡亂倡義) 시언(詩彦)의 아들이다. 1621년(光海 13년) 영광에서 출생하여 7세에 글 을 짓고 29세에 진사를 하고 37세에 문과 급제하여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 시강원 필선(侍講院 弼善), 공조좌랑(工曹佐郞)을 거쳐 보령군수(保寧郡守)로 나가 치적을 올려 현종(顯宗)으로부터 표 리(表裏 ; 안안팎 옷감)를 하사받았는데, 권간(權奸)의 작용으로 벼슬을 그만두자 성송면 암치(岩 峙)로 옮겨와 살았고, 동호(冬湖)에 정자를 지어 유지(遺趾)가 전한다. 뒤에 조정에서 함양군수(咸 陽郡守)로 불렀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사부(詞賦)와 시율(詩律)로 세상에 알려졌다. 심 석 송병순(心石宋秉珣)이 서(序)하여 문집(松菴集)이 간행되고 농암 김창협(農巖金昌協)이 묘지(墓 誌)를 지었다. 茂長誌 湖南人物志
n 강 흔(康 訢) 자는 구부(懼夫), 호는 장봉(莊峰), 본관은 신천(信川)이니 신원부원군(信遠府院君) 원(遠)의 후 손으로 통덕랑(通德郞) 응성(應星)의 아들이다. 1568(宣祖 1년) 대산면 갈마(渴馬)에서 출생하여 4세에 아버지를, 16세에 어머니를 여의어 뒤에 추상(追喪)을 하고 여묘(廬墓)를 했으며, 수은 강 항(睡隱姜沆)을 종유하여 널리 배우고 독실한 행의로 인근의 추앙을 받았다. 이괄(李适)의 난에 영광 진사 신유일(辛惟一) 등과 함께 군량을 모아 근왕(勤王)하려 하다가 난 이 평정되매 양곡을 관아에 바쳤고, 병자호란에 아들 기종(起宗)을 운암 이흥발(雲巖李興浡)의 의 병소로 보냈는데 청주에 이르러 화의가 이루어져 돌아오매 통분을 참지 못해 상하면 송림산(松林 山)으로 들어가 은거했다. 장령(掌令)에 증직되고 신산사(新山祠)에 배향되었다. 湖南節義錄 湖 南人物志茂長校誌
n 고덕붕(高德鵬) 자는 남익(南翊)이고 호는 여곡(麗谷)이며 관향은 장흥(長興)이다. 1552년(明宗 7년)에 신림면 종송리 여곡에서 태어나 1626년(仁祖 4년) 졸하였다. 그는 1592년(宣祖 25년) 41세에 임진왜란 (壬辰倭亂)을 당하자 창의격문(倡義檄文)을 작성하여 동지를 규합했고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진 영이 있는 금산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때 고경명이 순절한 뒤 채홍국(蔡弘國) 등 92명의 동지와 삽혈동맹(歃血同盟)하고 그 맹주가 되어 의병을 거느리고 왜적과 여러 번 싸워 공을 세웠다. 또 1597년(宣祖 30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다시 의병의 주장이 되어 왜적과 수차 싸웠으 며 부안(扶安)의 호벌치(胡伐峙)에서 싸울 때는 큰 전과를 올리고 그곳에서 순절했다. 1893년(高 宗 30년) 나라에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를 증직하였고 유림의 추천으로 모충사(慕忠祠)에 향사되었다. 興城誌 興城文獻錄 全國邑誌 湖南誌
n 고복환(高福煥) 자는 영숙(永叔)이고 호는 근성재(勤成齋)이며 본관은 장흥(長興)이니 장령(掌令) 직(直)의 후손 이다. 1779년(正祖 3년)에 신림면 왕림(旺林)에서 출생하여 1860년(哲宗 11년)에 졸하였다. 그는 천성이 순박하고 부지런했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14세의 나이에 부친이 병이 나자 백방으 로 구약 시탕하였고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입에 주혈하여 수일을 연명하였으며 상을 당하자 송종(送 終)의 절차를 예법대로 행하고 3년의 시묘를 지성으로 하였다. 한번은 제수(祭需)가 없어 걱정하고 있는 데 꿩 한 마리가 여막 안으로 들어와 그것을 이용했고 밤마다 큰 호랑이가 여막 근처에 나타나 새벽에 돌아가니 그의 효성에 감동한 호랑이가 그를 호위하여 준 것이라 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1819년(高宗 28년)에 명정(命旌)되었고 그 정려(旌閭)가 왕림에 세워 졌다. 그는 학문을 좋아하여 여유가 있으면 경전을 읽었고 시문을 지어 근성재유고勤成齋遺稿를 남겼다. 興城文獻錄 牟陽城의 얼 長興高氏先世遺稿集
n 고석진(高石鎭) 자는 정여(貞汝)이고 호는 수남(秀南)이며 관향은 장흥(長興)이니 여흥(汝興)의 후손이다. 1856 년(哲宗 7년) 1월 11일 흥덕현 일남면인 현재의 신림면 가평리에서 출생하여 1924년 12월 26일 졸하였다. 그는 용모가 단정하고 총명이 과인하여 5, 6세에 글을 읽고 20세에는 경서(經書)를 통 달했다. 그는 충남 청양(靑陽)에 나가 면암 최익현(勉庵崔益鉉)에 집지(執贄)하니 면암은 공의 학 문이 심오함을 알고 남중명사(南中名士)라 극찬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통분하고 절식자진(絶食自盡)하려는 면암을 찾아 창의(倡
義) 투쟁할 것을 권하고 포고문을 전국 8도에 돌리며 태인(泰仁)에 있던 임병찬(林炳瓚)의 협력을 얻는 등 면암 막하에서 참모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불리하여 순창(淳昌)에서 잡혀 대마도(對馬 島)에 압송되어 4개월 동안의 옥고를 치렀다. 면암이 순국한 뒤 시정(時政)의 폐를 논한 상소문을 여러 번 올렸고 만국평화회의에 장서를 보내어 우리의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저서로 방호 집方壺集 4책이 있고 면암과 함께 도동사(道東祠)에 향사되었으며 1977년 정부에서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며 고창 유림들이 교촌에 일광기념관을 건립하여 주모한다. 興城文獻錄 高敞의 얼 湖南誌
n 고수겸(高守謙) 호는 은곡(隱谷)이며 관향은 장흥(長興)이니 여곡 덕붕(麗谷德鵬)의 아들이다. 1636년(世祖 14 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당하자 아우 처겸(處謙)과 동지를 모으고 양곡을 거두어 한성(漢城)으로 직행하던 중 수원에 이르러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왔다. 興城誌
n 고순진(高舜鎭) 초명은 낙진(洛鎭)이고 자는 의경(義卿)이며 호는 만취(晩翠)이고 본관은 장흥(長興)이니 송곡 억수(松谷億壽)의 후손 참봉(參奉) 시청(時淸)의 아들이다. 1863년(哲宗 14년) 신림면 종송리에서 출생하여 1938년에 졸했다. 그는 기상이 헌앙하고 의협심이 많았으며 면암 최익현(勉庵崔益鉉)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나라가 망하자 스승 면암을 따라 창의에 가담하였고 동지를 규합하였으며 1907년 파리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보낸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한 전국 유림 137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스승 면암의 유덕을 추모하여 사재를 털어 도동사(道東祠) 건립에 힘을 썼 고 평생을 항일운동으로 일관했다. 1983독립유공자로 대통령표창에 서훈되었고, 1986년 그의 추 모비가 건립되었다. 晩翠高舜鎭先生追慕碑除幕記念誌 全北文化의 脈과 全北人物
n 고여홍(高汝興) 자는 빈거(賓擧)이고 호는 요은(閙隱)이며 관향은 장흥(長興)이니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흥덕 에서 창의(倡義)한 덕붕(德鵬)의 손자이다. 1617년(光海君 9년)에 흥덕현 일남면(一南面)인 지금의 흥덕면 여곡리에서 출생하여 1678년(肅宗 4년)에 졸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비범하여 산사(山寺)에 들어가 계묵(戒黙)이란 중에게 글을 배웠고, 12세 때 모친이 별세하니 애훼(哀毁)하기를 어른같이 하였으며, 그 뒤 외조모의 양육을 받으면서 별거하는 부친과 계모에게 효성을 다하였다. 그는 글 읽기를 좋아하여 항상 손에 책을 갖고 있었으며 충청 도 논산에서 은거하는 미촌 윤선거(美村尹宣擧)에 나아가 사사하였고 명재 윤증(明齋尹拯)과는 도 의로 교우했다. 그는 학문이란 실천하는 것이 목적이라 하여 남에게 말하기 전에 모든 것을 실행 하는 무실역행(務實力行)의 근실한 학자였으며, 저서로 요은집閙隱集 4권을 남겼고 옥제사(玉堤 祠)에 향사되었다. 興城誌 興城文獻錄
n 고예진(高禮鎭) 자는 계문(季文)이고 호는 송천(松川)이며 본관은 장흥(長興)이니 송곡(松谷) 억수(億壽)의 후손 시청(時淸)의 아들이다. 1875년(高宗 12년)에 신림면 종송리(種松里)에서 출생하여 1952년에 졸 했다. 그는 족형인 수남 석진(秀南石鎭)과 면암 최익현(勉庵崔益鉉)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행이 드러났다.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면암선생을 도와 항일의거하였는데 고종으로부터 종삼 품 통훈대부의 밀칙(密勅)을 받고 형 순진(舜鎭)과 군자금을 조달했으며, 일경에 체포되어 전주 감
옥에서 수 개월의 옥고를 치루었다. 또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장서(長書)를 보내는 일에도 앞장섰 다. 그러나 국권 회복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향리에서 후학 강론과 저술로 여생을 보냈는데 저서로 송천집松川集 4책을 남겼고, 도동사(道東祠)에 향사되었다. 1977년 정부에서 건국포상이 추서되었고 고종의 칙령장이 독립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興城文獻錄 松川先生行狀 高敞의 얼
n 고제남(高濟南) 자는 복경(復京)이고 호는 인산(仁山)이며 관향은 장흥(長興)이니 1887년(高宗 24년) 성내면 옥제리(玉堤里)에서 출생하여 1909년(隆熙 3년)에 순국했다. 그는 족숙인 수남 고석진(秀南高石 鎭)의 문하에서 수학했는데 동료들과 놀이를 할 때는 항상 대장이 되었다. 그가 19세 되던 1905년 5조약이 체결되자 공부를 그만두고 창의할 것을 결심하고 1906년 면 암 최익현(勉庵崔益鉉)의 의병에 합류하려 했으나 모친의 사망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다음 해에 상복을 입은 채 200명의 동지를 거느리고 입암성(笠岩城)과 흥덕 용정암(龍井庵), 소갈재(小葛嶺) 등에서 왜적과 싸워 크게 격파했으며, 1909년 소성면 두암리(斗岩里)에서 동지들과 전투 모의를 하다가 왜병에게 체포되어 전남 장성(長城)의 왜군 헌병에게 총살되었으니 그의 나이 23세였다. 광복 후 1953 년 전남 광산군 대촌면 원산리에 건립된 호남순국열사비(湖南殉國烈士碑)에 그의 공적이 실려 있 고 1963년 흥덕에 유한의사인산고공추모비(有韓義士仁山高公追慕碑)가 세워졌다. 興城文獻錄 高敞의 얼
n 고제만(高濟萬) 자는 치범(致範)이고 호는 죽계(竹溪)이며 본관은 장흥(長興)이니 요은 여흥(閙隱汝興)의 후손 성진(成鎭)의 아들이다. 1849년(憲宗 15년) 고창군 성내면에서 출생하여 1914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면암 최익현(勉庵崔益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순종(純宗) 때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제수되 었으며, 1906년 면암이 창의하자 팔도사민창의포고문(八道士民倡義布告文)을 작성하여 전국에 살 포했고, 그 뒤 의병 30명을 거느리고 순창 싸움에 참가했다. 1914년 독립의군부 총무국 종사관 (獨立義軍府總務局從事官)의 직을 칙명 하사받았으며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쳤다. 그 뒤 면암이 일경에 체포되어 대마도(對馬島)에 끌려가자 통곡하고 돌아와 계속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다가 일 경에 체포되어 수감 중 발병하여 세상을 떠났다. 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고 그의 유집이 후손에게 전하고 있다. 興城誌 牟陽城의 얼 全北文化의 脈과 全北人物
n 고 직(高 直) 본관은 장흥(長興)이니 장흥부원군(長興府院君) 복림(福林)의 후손으로 호조참의(戶曹參議) 신 부(臣傅)의 아들이다. 신부는 태종(太宗)과 동갑계원이었기 때문에 벼슬을 받고도 나아가지 않고 영광 고성산(古城山) 아래로 낙향하여 은거하였으며 그는 흥덕 일남면 즉 지금의 신림면 종송리 고려실(高麗谷)에 이거하였으니 장흥고씨의 입향조(入鄕祖)가 된다. 또 나라에서 사헌부 장령(司憲 府掌令)을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興城誌 興城文獻錄
n 김경규(金慶奎) 자는 덕흥(德興)이고 호는 우졸재(愚拙齋)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1807년(純祖 7년)에 흥 덕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있어 8세에 시를 지어 어른들을 놀라게 했고, 11세 때 고 부군수가 백일장을 열었는데 시 한 편을 지어 특상을 받아 신동의 칭호를 받았다. 19세 때 집에
서 마련한 혼수 돈으로 칠서(七書)를 구입하여 내장사에 들어가 독서하고 28세 때 향시에 응하여 책방 옆을 지나다가 근사록近思錄을 보고 응시할 돈으로 책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31세 때 옥천의 창북 심의복(滄北沈宜復)의 문하에 나아가 수업하고 49세에 진사(進士)에 뽑 혔으며 건릉참봉(健陵參奉)에 제수되고 여러 번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초야에 묻혀 살다가 1876년에 세상을 떴다. 그는 학문을 하되 과거공부는 마음에 두지 아니하고 경전 탐구에 전념했 는데 특히 근사록近思錄과 성리대전性理大典, 논어論語 등을 독실하게 연구했고, 경전의 내 용을 실천에 옮겨 언행을 삼가고 수신을 하는 군자였다. 그리고 그의 학문과 행실을 당시 사람들 의 평한 말에서 살필 수 있으니 “우졸이 토해 낸 글은 이학 아닌 데가 없다(愚拙吐詞 無處非理 學).”고 했다. 또한 “몸가짐은 구슬을 붙잡듯 하고 마음가짐은 소반 물을 받들 듯했다.”고 했다. 우졸재집愚拙齋集 7권 3책이 간행되었다. 高敞의 儒學
n 김경중(金暻中) 자는 사인(仕仁)이고 호는 지산(芝山)이며 본관은 울산(蔚山)이다. 하서 인후(河西麟厚)의 12대 손이고 시종원부경(侍從院副卿) 요협(堯莢)의 아들이다. 1863년(哲宗 14년)에 부안면 인촌(仁村) 에서 출생하여 1945년에 세상 떴다. 36세 때 경릉참봉(敬陵參奉)을 제수받고 42세에 비서승(秘書丞)에 올랐으며 봉상사 부제조(奉 常司副提調)를 거쳐 진산군수(珍山郡守)가 되었는데, 시국이 날로 그릇되매 사직하고 돌아왔다. 어 지러운 세상에는 후일을 위해 인재양성이 급선무임을 깨닫고 기호중학을 인수하여 중앙학교로 이 름을 바꾸고 중앙학원을 설립하여 보성(普成)전문학교를 만들어 중앙대학으로 발전했다. 또 우리 나라 국사가 없는 것을 염려하여 김노수(金魯洙)를 비롯한 학자를 초청하여 경비를 전담하여 조 선사朝鮮史 17권을 편찬하여 각 학교와 서원에 배포했다. 그는 개화기 선각(先覺)으로 교육에 큰 업적을 남겼고 아들 인촌 성수(仁村 性洙), 수당 연수 (秀堂 秊洙)를 의로 길러 사회에 공헌하게 했다. 시문에도 일가를 이루어 지산유고芝山遺稿 4권 1책이 간행되었다. 일석 이희성(一石李熙昇)은 유고 서문에 “전편이 모두 가작인데 그 중 오도 입문(吾道入門) 1편은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경지를 개척하여 후학의 사표가 될 만한다.”라고 평 하였다. 高敞의 儒學 興城誌
n 김경희(金景熹) 자는 용회(用晦), 호는 노계(蘆溪), 관향은 광산(光山)이니, 돈목재(敦睦齋) 기서(麒瑞)의 아들이 다. 중종 갑오(1534년)에 생원(生員)하고 동년 문과(文科)에 올랐으나 권귀배(權貴輩)의 미워함을 입어 삭과(削科)되니 중종은 두시(杜詩) 1질을 주어 위안하였다. 그 뒤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 나자 은거했는데 필법이 뛰어나 동국필원(東國筆苑)에 들고 고창 노산사(蘆山祠)에 향사되었다. 유 저로 노계집蘆溪集 1책이 전한다. 「李以鏶撰 行狀」 「趙鍾永撰 墓誌銘」 蘆溪集 牟陽誌
n 김공립(金公立) 자는 세용(世用), 호는 송파(松坡), 본관은 청도(淸道)이니 군수(郡守) 희방(希邦)의 손자요 통덕 랑(通德郞) 연(演)의 아들이다. 기품이 괴위(魁偉)하고 효성이 지극했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옥과현감 이흥발(李興浡)의 창의에 따라 병졸을 거느리고 여산에 이르렀다가 화의가 이루어짐을 듣고 비분을 참지 못해 통곡을 하고 돌아와 두문하고 은거하니 사림(士林)이 여러 번 공의 충효를 천양(薦揚)했다. 손재 박광일(遜齋朴光一)이 행장을, 거산 강천수(巨山姜天秀)가 충효비문(忠孝碑 文)을 지었다. 湖南節義錄 湖南人物志
n 김공망(金公望) 자는 응백(應伯), 본관은 경주(慶州)이니 판서(判書) 충한(沖漢)의 후손으로 참봉(參奉) 구수(龜 壽)의 아들이다. 1601년(宣祖 34년) 출생.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고 문무(文武)를 갖추어 1620년 (光海君 12년) 무과에 올라 좌부장(左部將)을 거쳐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는데 이괄(李适)이 평안 도병사(平安道兵使)가 되어 종사관(從事官)으로 부르매 이괄의 흉측함을 아는지라 병을 핑계로 고 향으로 돌아왔다. 얼마 뒤 이괄이 과연 반란을 일으키매 분연히 일어나 가동(家僮)과 향병(鄕兵)을 거느리고 달려가던 중 난이 평정되어 이미 수합한 양곡 150석을 관가에 납입하고 돌아왔다.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운암 이흥발(雲巖李興浡)을 따라 소모유사(召募有司)로서 의병을 모아 근 왕(勤王)하다가 중도에 화의가 성립됨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와 나라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 지 않았다. 뒤에 이괄난(李适亂)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올랐다. 湖南節義錄 湖南人物志
n 김공삼(金公三) 본명은 봉규(奉圭)이고 자가 공삼이며 관향은 김해(金海)이니 1866년(高宗 3년)에 출생했다. 귀가 크고 수염이 더부룩했으며 성품이 강개하여 기절(氣節)이 있었다. 중년에 어머님 모시고 고 수로 들어와 살았는데 효성이 지극하고 상사(喪事)에 3년을 질대(絰帶)를 풀지 않았다. 1990년 의 병장 기삼연(奇三衍)의 휘하에서 중군장(中軍將)으로 고창, 무장, 부안, 담양 등지에서 활약했고 1908년 기삼연이 체포된 뒤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장성, 무장, 변산 등지에서 전적을 올렸는데 적 의 공세가 날로 치열하여 중과부적으로 1909년 9월 체포되었다. 광주로 호송되고 이송되는 동안 주육(酒肉)으로 회유했으나 물리치면서 “국가의 위난(危難)에 거의(擧義)하는 것은 신민의 도리이다. 내가 너희들의 고기를 씹으려 했는데 어찌 견양배(犬羊輩) 에게 목숨을 구걸하겠는가? 내가 죽어 여귀(厲鬼)가 되어 적을 섬멸하리라.” 하니 적들도 혀를 차 면서 의사(義士)라 칭하고 교수형에 처했다. 고창의 유지들이 반장(返葬)하여 어머니가 묻힌 고수 경찰림(古水警察林)에 장례 모셨다가 군비로 아산면 주진공설묘지에 이장하고 비를 세웠다. 1991 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獨立運動者功勳錄 奇宇萬撰 傳
n 김기수(金麒壽) 자는 인부(人夫), 호는 만옹(晩翁), 본관은 광산(光山)이니, 도사(都事) 구(球)의 아들이다. 선조 4년(1570년)에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에는 오봉 김제민(鰲峰金齊閔) 등과 더불어 의병도청(義兵都廳)을 장성 남문 밖에 창설하여 의곡유사(義穀有司)로 활약하여 공을 세우 니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제수하고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참여했으며, 장성 오산사(鰲山祠)에 향사했다. 「黃基協撰 墓碣銘」 湖南節義錄 湖南節義史 牟陽誌
n 김기중(金祺中) 자는 도숙(道淑), 호는 원파(圓坡), 본관은 울산(蔚山)이니 낙재 요협(樂齋堯莢)의 아들이다. 1859년(哲宗 10년) 출생하였다. 그는 진사(進士)를 하고 의릉참봉(懿陵參奉)을 거쳐 평택(平澤), 용담(龍潭), 동복(同福)의 원을 지내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는데 고을살이를 할 때 가는 곳 마다 선정(善政)을 베풀어 떠날 때는 백성들이 눈물로 전송했다. 1908년 줄포(茁浦)에 영신학교(永新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에 힘쓰고 위선사업에 정성을 쏟았 으며 계자(系子) 성수(性洙)의 공공사업을 적극 지원하여 민족의 선도자가 되게 하였다. 興城誌
n 김남식(金南式) 자는 군언(君彦), 호는 의촌(義邨), 정묘호란(丁卯胡亂)에 거의한 여성(汝聲)의 아들로 1617년 (光海 19년)에 출생했다. 세상에서 숭정처사(崇禎處士)라 일컬었는데 학문이 굉원(宏遠)했다. 병자 호란에 창의했다가 강화소식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와 고부 계령산(桂嶺山) 아래로 옮겨 만년을 보 냈다. 「黃胤錫撰 崇禎處士義邨金公墓表」 牟陽誌 高敞校誌
n 김노수(金魯洙) 일명 명수(明洙)이고 자는 광언(光彦)이며 호는 경암(敬菴)이니 울산인(蔚山人)으로 하서 김인후(河西金 麟厚)의 후손이고 전중(田中)의 아들이다. 1878년(高宗 15년)에 장성 황룡면 필암(筆巖)에서 출생하여 7세 때 아버지를 따라 고수면 평촌(平村)으로 들어왔다. 45세 때 고수 예지(禮智)로 이거하고 74세 때 부안 동 중리(東中里)로 옮겨 1950년 그곳 백인당(百忍堂)에서 세상 뜨니 향년 79세였다. 약관에 연재 송병선(淵 齋宋秉璇) 문하에서 수학하고 고창으로 와서는 계은 유낙연(溪隱 柳樂淵)을 스승처럼 모시며 학문 을 강구했다. 일제하에 정사(正史) 편찬이 시급했으나 사업이 워낙 방대하여 혼자 힘으로는 불가 능하여 종숙인 지산 김경중(芝山金暻中)을 찾아가 협조를 얻고 사학에 밝은 해석 김영선(海石金永 善) 건암 김유(健菴金鍒) 등과 함께 집필에 착수한 지 10여 년에 무려 20책의 조선사朝鮮史를 완성했으나 일제의 간섭으로 고종 순종편은 대부분 삭제되고 17권이 김경중의 이름으로 간행되었 다. 뒤에 다시 속편 한감강목韓鑑綱目을 편찬하여 광복 후에 간행하니 고종 순종편의 보유라 하 겠다. 광복 후 한문을 폐지하는 정책이 진행되자 「시무십칠조時務十七條」를 지어 정부에 제출하고 만년에는 두문불출하고 저술에 몰두하여 자학고字學考, 운휘촬요韻彙撮要, 한소학
韓小學,
낙민언경록洛閩言敬錄 등 13책의 경암집敬菴集을 남겼다. 高敞의 儒學
n 김대암(金大巖) 자는 여첨(汝瞻) 본관은 김해이니 고려 시중(侍中) 탁(琢)의 후손으로 산호(珊瑚)의 아들이다. 기절(氣節)이 강개하고 담략(膽略)이 있어 불의(不義)를 용남하지 않았는데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창의(倡義)하여 아들 순하(順河)와 함께 병사(兵使) 김준룡(金俊龍)을 따라 용인(龍仁)의 광교산(光 敎山)에서 접전(接戰)하여 많은 참획(斬獲)의 공을 세우고 부호군(副護軍)에 제수되었다. 湖南節 義錄 湖南人物志
n 김덕우(金德宇) 자는 언용(彦容), 호는 양촌(良村), 본관은 광산(光山)이니 판서(判書) 인우(仁雨)의 후손으로 생 원 경희(景熹)의 아들이다. 1548년(明宗 3년) 고창 노동(蘆洞)에서 출생하여 송천 양응정(松川梁 應鼎) 문하에서 학문이 깊었다. 정유재란(丁酉再亂)에 김제민(金齊閔), 이응종(李應鍾), 김경수(金 景壽) 등과 함께 장성 남문 밖에 의병청(義兵廳)을 설치하여 무장도유사(茂長都有司)로서 군량을 모아 의곡장(義穀將) 기효증(奇孝曾)에게 법성포(法聖浦)로 운반하고, 이괄(李适)의 난에는 노병(老 病)으로 활약하지 못하자 아들 여강(汝剛)에게 명하여 도내(道內) 동지들과 함께 창의하여 군량을 모으게 했으며, 정묘호란(丁卯胡亂)에는 호소사(號召使) 사계 김인후(沙溪金麟厚)의 계청으로 호우 의곡장(湖右義穀將)이 되어 오익창(吳益昌)과 함께 의곡을 모아 강화도 행재(行在)로 운송하고 안 방준(安邦俊) 등과 함께 의병을 이끌고 근왕(勤王)하다가 여산(礪山)에 이르러 강화가 성립되어 돌 아오니 나이 80이었다. 인조가 듣고 장하게 여겨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 樞府事)을 제수했다. 효종 때 우암 송시열(尤庵宋時烈)이 경연(經筵)에서 “동지중추부사 김덕우는 호남의 의사로서 정유, 정묘 양란에 의병을 모으고 의곡을 보내어 충의가 탁이(卓異)하니 포창(褒
彰)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상주했으나 효종이 승하하여 이루어지지 못했다. 호성원종공신(扈聖原 從功臣 ) 녹권이 있다. 「司諫院正言 尹濟弘撰 墓碣文」 湖南節義錄 湖南人物志
n 김도일(金燾一) 자는 치겸(致謙), 호는 송서(松西), 본관은 청도(淸道)이니 좌찬성(左贊成) 점(漸)의 후손으로 지 재 이규(志齋以奎)의 아들이다. 1841년(純祖 14년) 상하면 검산(劍山) 출생. 천품이 순후하여 효 우(孝友)가 지극하고 혜휼(惠恤)로 알려졌으며, 학문이 깊고 행의가 독독하여 도백(道伯) 이호준 (李鎬俊)이 천리독실(踐履篤實) 조수아정(操守雅正)으로 추천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산수(山水) 를 즐기며 시 짓고 행도(行道)에 힘썼다. 고종 때 아들 수형(秀馨)이 문과 급제하여 사헌부장령(司 憲府掌令)이 됨으로서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의 교지가 내렸다. 茂長誌 湖南人物志
n 김두남(金斗南) 자는 이헌(以憲), 호는 청계(淸溪), 본관은 김해(金海)이니 절효공(節孝公) 극일(克一)의 6세손, 임란 의사(壬亂義士) 헌(軒)의 아들이다. 1554년(明宗 9년)에 출생하여 무과(武科)에 급제했다. 임 진왜란에 백부 축(軸)이 창의(倡義)하고 아버지 헌(軒)이 근왕(勤王)하고 돌아오다가 직산(稷山)에 서 적을 만나 싸우다 부상하여 불구의 몸이 되자 아우 지남(志南)과 함께 분연히 일어나 백부를 따라 참전하였다. 웅치(熊峙)와 이치(梨峙)의 싸움에서 용전분투하여 크게 승리를 거두어 광주목사 (光州牧使) 권율(權慄)에게 발탁되어 참좌(參佐)로서 행주(幸州)의 격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이어 영남으로 전전하다가 진주성(晋州城)이 위험하다는 전갈을 받고 창의사(倡義使) 김천일 (金千鎰)과 함께 입성(入城)하여 부장(部將)으로서 성을 사수(死守)하기로 맹세하고 백전불굴의 투 지로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 백부 축, 아우 지남과 함께 최후를 마쳤다. 선무원종(宣武原從) 2등 공신에 단서철권(丹書鐵券)이 내리고 영조 때 가선대부 호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백부 축, 아우 지남과 함께 3충부조묘(三忠不祧廟)의 은전이 내렸다. 부조묘는 고창읍 백양(白羊)에 있고, 단서철 권은 고창읍 교촌(校村) 어사각(御賜閣)에 모시어 있다. 湖南節義錄 全北文化의 脈과 全北人物 牟陽城의 얼
n 김몽룡(金夢龍) 자는 여신(汝神), 호는 식암(息巖), 본관은 청도(淸道)이니 호강공(胡剛公) 점(漸)의 후손으로 참 봉 홍(洪)의 손자이다. 1558년(明宗 13년) 공음면 두암(斗岩) 출생. 효우(孝友)와 행의로 한 고을 의 본받음이 되었고, 나이 35에 임진왜란을 만나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의 격문에 따라 가동(家僮)과 읍민(邑民) 천여명을 인솔하고 가재(家財)를 군량으로 마련하여 현성(縣城)을 지켰다. 정유재란(丁酉再亂)에 도원수 권율(權慄)을 따라 이현(梨峴)과 행주(幸州)싸움에 많은 공을 세워 권율의 장계로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에 제수되고 뒤에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책록되었다. 노사 기정진(蘆沙奇正鎭)이 묘표(墓表)를 짓고 금산(錦山)의 금곡사(錦谷祠)와 상하면 검산(劍山) 계산서원(溪山書院)에 배향되었다. 湖南節義錄 湖南人物志
n 김봉문(金鳳文) 이름은 진명(振明), 봉문(鳳文)은 자인데 자로 행세하고 호는 담재(澹齋)이니 강릉인(江陵人)이 다. 1906년 아산면 성기(性基)에서 출생하니 중종 때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봉해진 지산군(支山 君) 경의(敬義)의 14대손이고 무장땅으로 입향한 전(佺;吏曹參議)의 11대손이다. 수산 오병수(壽山吳秉壽) 문하에서 경학을 전수받고 서울 명륜학원에서 신구학을 익히고 돌아
와 한때 지방공무원으로 취임했다가 광복 후 전주북중학교, 사변중에는 고창고등학교, 뒤에 이리 여자고등학교에 재직하고 만년에는 원광대학교에서 한학을 강의했다. 저술로는 대학교재로 쓴 대학한문교본大學漢文敎本과 가례요해家禮要解, 매천시집전주梅 泉詩集箋註, 한국의렬록韓國義烈錄, 호남인물지湖南人物志와 담재유고澹齋遺稿 등이 있는 데 한국의렬록은 한말 전후 의사 열사의 전기로서 민족정기를 정립하기 위한 역작(力作)이고, 호남인물지는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에 대응하여 호남 인물 5천여명을 수록한 야심작이다. 전 전북대학교 총장 정인승(鄭寅承)박사는 공의 비문에 ‘향년 73세를 전후 2기로 대별하여 전 기 40년은 학불염(學不厭)의 시기이고 후기 33년은 교불권(敎不倦)의 시기’(學不厭 敎不倦은 孔子 의 故事)라 하여 ‘군자 삼락(君子三樂)을 향유한’분이라 했다. 아산면 남산 마을 뒤 대로변에 융모 비(隆慕碑)가 섰다. 「鄭寅承撰 墓表」 澹齋遺稿
n 김빈길(金贇吉) 자는 대건(大健), 호는 죽강(竹崗), 낙안(樂安)의 낙생동(樂生洞)에서 출생했다. 조선 태조 6년 에 왜구(倭寇)가 낙안에 침입하자 백의(白衣)로 창의(倡義)하여 앞장서서 만여 명을 참살하니 태조 가 갑주(甲冑) 절월(節鉞) 옥대(玉帶) 금은(金銀)을 내리고 삼도수군절제사(三道水軍節制使)에 임명 했다. 이듬해 왜구가 또 침입하자 낙안의 멸악산(滅惡山)에서 싸워 천여 명을 참살하고 남해(南海) 에까지 추격하여 대첩을 거두니 병조판서 검교정승(檢校政丞)에 오르고
정난좌명훈(靖難佐命勳)
에 참여하고 철성군(鐵城君)에 봉했다. 벼슬에서 물러나 낙안의 백이산(伯夷山) 아래 옥산(玉山) 위에 망해당(望海堂)을 짓고 지내다가 만년에 고창으로 이거했는데 또 왜구를 만나 흥덕 사진포(沙津浦)에서 수천 명을 참살하고 마침내 순절 (殉節)했다. 우의정을 추증하고 시호는 양혜(襄惠)이다. 묘는 고수면 부곡(芙谷) 뒤에 있다. 玄谷集 樂 安誌 牟陽誌 湖南人物志
n 김상흠(金相欽) 본관은 울산(蔚山), 인촌 성수(仁村 性洙)의 3자로 1919년 출생.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 조선학 생동지회를 조직하여 1942년 3월 1일을 기해 만세운동을 전개하려다가 일경(日警)에 피체되어 3 년형을 언도받고 함흥(咸興)형무소에서 옥고(獄苦)를 치루었다. 광복 후 경력으로는 1948년 동아 일보 편집국장, 50년 민주일보(民主日報) 편집국장, 53년 부산방적(釜山紡績) 상무를 지내고, 5․6대 국회 의원에 당선되었으며, 동성합판(同盛合板) 사장, 신민당 정무위원, 연아항공(聯亞航空) 사장․회장, 계산실 업(桂山實業) 사장을 역임했다.
n 김석원(金錫元) 호는 매산(梅山), 본관은 광산(光山)이니 판서(判書) 인우(仁雨)의 증손이고 매은 오행(梅隱五 行)의 아들로서 대산면 매산(梅山)에서 출생했다. 1469년(睿宗 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로는 승문원(承文院)의 부정자(副正字), 저작(著作), 박사(博士), 교리(校理), 사헌부(司憲府)의 지평(持 平), 성균관(成均館)의 직강(直講)을 지내고, 훈공으로는 성종조에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고, 업적으로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찬술에 참여했다. 문장이 섬부(贍富)하고 효우(孝友)가 지극하여 연재 송병선(淵齋宋秉璿)이 유덕비문을 찬하고 노산사(蘆山祠)에 배향되었다. 茂長誌 湖南人物志
n 김성수(金性洙)
호는 인촌(仁村), 관향은 울산(蔚山)이니 1891년(高宗 28년) 부안면 봉암리(鳳岩里) 인촌(仁村) 에서 출생하여 1955년 서울에서 별세했다. 그는 어려서 한문을 배웠고, 16세가 되던 1906년 신 학문에 뜻을 두고 군산의 금호학교(金湖學校)를 거쳐 일본에 유학하여 1914년에 와세다(早稻田) 대학을 졸업했다. 귀국 후 1917년 중앙학교를 인수하여 육영사업에 착수했고, 1919년에 경성방직(京城紡織)을 창설했으며, 1920년에는 동아일보를 창간하였으니 민족교육과 민족산업 민족언론의 선구자가 된 것이다. 1932년에 현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인수하여 이 나라 사학 의 요람으로 키웠고 광복이 되자 미군정청의 수석고문이 되었으며, 1946년에는 한국민주당의 수 석총무로 정계에 진출했고, 1949년 한국민주당 최고위원으로 취임했으며, 1950년 대한민국 제2 대 부통령이 되었다. 그는 성품이 어질고 원만하였으며 겸손과 신의가 투철하였다. 또 공을 앞세 우고 사적인 일을 뒤로 하는 생활신조를 지켰으니 위대한 교육가요 경제가이며 정치가로서 국가 를 건지고 민족을 살린 희대의 인물이었다. 새마을공원에 동상이 섰다. 全北의 뿌리 牟陽城의 얼
n 김성진(金聲振) 자는 원지(遠之), 호는 국재(菊齋), 광산인(光山人)이니 전리판서 인우(仁雨)의 6대손으로 1564 년(明宗 19년) 대산면 중산(中山) 출생. 어려서부터 강개한 뜻이 있고 효가 지극하여 아버지의 병 환에 손가락을 깨물어 단지수혈을 했고 상사에 시묘살이를 했다. 임진왜란에 삼종형 홍우(弘宇), 좌랑 김경수(金景壽)가 장성 남문 밖에 의병청(義兵廳)을 설치 하매 향병(鄕兵)을 모으고 가동을 거느려 의병청으로 나아가 의병장 김제민(金齊閔)과 함께 직산 (稷山)에서 적을 물리치고, 화의가 이루어져 돌아와 노모를 지성으로 받들으매 효(孝)로 알려져 문 소전참봉(文昭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정유재란에 다시 의병을 일으켜 군량을 모아 의주 행재(行在)로 보내고 김신남(金信男)과 함께 왜적을 추격하여 안성을 거쳐 소사(素沙)에 이르러 중과부족으로 전사하니 이때 나이 34세였다. 출생지 중산에 유허비각(遺墟碑閣)이 서고 장 성 오산사(鰲山祠)에 향사되었다. 松沙文獻錄 「崔益鉉撰 傳記」 湖南人物志
n 김소희(金素熙) 본명은 순옥(順玉)이고 호는 만정(晩汀)이니 1917년에 흥덕면 흥덕리에서 출생했다. 선천적으 로 독특한 음색을 타고나 13세 때 남원 명창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고 흥덕 국민학교를 마친 뒤 송만갑(宋萬甲)에게 심청가․흥보가를, 정정렬(丁貞烈)에게 춘향가․수궁가를 배웠다. 1937년 창극좌 (唱劇座)에 입단하여 박녹주(朴綠珠), 이화중선(李花中仙) 등과 명성을 겨루었고 이듬해 ‘빅타 레코 드’ 전속으로 정정렬, 임방울(林芳蔚), 이화중선과 「춘향가」 전편을 완창하여 여류명창의 지휘를 굳혔다. 1945년 박초월(朴初月), 박귀희(朴貴姬) 등과 한국민족예술학교를 설립하여 원장이 되어 국악 진흥에 기여하고 구미 각국을 순방하여 국제공연을 통해 국위를 선양했다. 「춘향가」, 「심청 가」, 「흥보가」를 잘하고 「춘향가」 서편제 예능보유자로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이다. 1995년 4월 17일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으며 묘는 화산계곡에 안치되어 있고 새마을공원에 비가 있다. 興 城誌
n 김수동(金壽東) 자는 양여(養汝)이고 호는 원암(源菴)이며 본관은 경주(慶州)로 정숙공(貞肅公) 인종(仁鍾)의 후 손이다. 1785년(正祖 9년)에 출생하여 1837년(憲宗 3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가난한 살림을 꾸려가면서도 양친 봉양을 지성으로 하였고 부친이 병이 나자 3년 동안을 정성으
로 구약 시탕하였으며 상을 당하자 시묘살이를 극진히 하여 1892년(高宗 29년)에 명정(命旌)되고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증직하였다. 그의 정려(旌閭)가 성내면 양계리 내퇴 마을에 있다. 興城文獻 錄 牟陽城의 얼
n 김수학(金秀學) 자는 형로(亨魯) 호는 나곡(羅谷), 본관은 청도(淸道)이니 호강공(胡剛公) 점(漸)의 후손이다. 1907년(高宗 33년) 상하면 하나대(下羅帶) 출생, 일본 경도(京都)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은행장을 두루 지냈고, 1948년 초대 상공부차관에 발탁되고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재정분과위원장을 지 내면서 건국초기의 경제질서 확립에 공헌하였다.
n 김수형(金秀馨) 자는 경덕(敬德), 호는 하곡(霞谷), 본관은 청도(淸道)이니 호강공(胡剛公) 점(漸)의 후손이다. 1840년(憲宗 6년) 상하면 검산(劍山) 출생. 1877년(高宗 14년) 문과(文科)에 올라 승문원 부정자 (承文院副正字)를 시작으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헌납(獻納)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지평(持平)을 지내고는 어머니 상사를 당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내려와 집상(執 喪)을 하고, 이후 정국이 어지러우매 노친(老親) 받들며 친척과 정화(情話)를 나누고 벗을 맞아 시 주(詩酒)로 한가한 생애를 보냈다. 계산서원(溪山書院)에 배향되었다. 茂長誌
n 김승길(金承吉) 호는 사은(沙隱), 본관은 광산(光山)이니 전리판서(典理判書) 인우(仁雨)의 아들이다. 개성(開城) 에서 출생하여 고려 말에 통훈대부(通訓大夫) 함종현령(咸從縣令)을 지내고는 국운이 다함을 알고 아버지의 임지(任地)인 장사(長沙)고을로 내려와 은거했는데, 포은 정몽주(圃隱鄭夢周)가 선죽교 (善竹橋)에서 참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망연히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를 “나라가 위태로와도 구원하지 못하니 불충(不忠)이요, 친구가 의리를 지키다가 비명(非命)에 죽어도 조상(弔喪)하지 못 하니 무신(無信)이라, 불충하고 무신한 사람이 무슨 면목으로 천지간에 서겠는가.” 하고 이내 아들 에게 경계하기를 “너희들은 아비의 마음을 가슴속에 깊이 간직하라.” 이르고는 집을 떠나 간 곳을 알지 못했는데, 두문동(杜門洞) 제현(諸賢)과 함께 순절(殉節)한 것으로 전한다. 개성의 표절사(表 節祠), 장성의 경현사(景賢祠), 함평의 유덕사(遺德祠)와 대산면 교동(橋洞)의 화동서원(華東書院) 에 배향되었다. 松京實記 華東書院誌 牟陽城의 얼
n 김승옥(金升玉) 호는 일우(一愚), 본관은 김해(金海)이니 준희(俊禧)의 장손으로 1889년(高宗 26년) 고창 읍내 에서 출생했다. 한문서숙에서 배웠고 삼일 만세사건의 지휘자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뤘고 민족정신 이 투철하였으며 사회 교육 문화 활동을 통하여 후진들에게 지표를 제시하여 공헌한바 많아 뒤에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一愚 金升玉先生紀蹟碑」高敞의 얼 一愚金升玉先生抗日獨 立鬪爭略記
n 김 씨(金 氏) 교생(校生) 최이성(崔爾誠)의 아내이다. 임진왜란에 피난하여 거창의 고교(高橋)에서 적에게 잡 혔는데 무례함을 꾸짖고 유아를 업고 물에 빠지니 적이 목을 베었다. 광해군 때 정려(旌閭)했다. 湖南新續三綱行實 湖南人物志
n 김안절(金安節) 자는 의신(義臣), 호는 사헌(沙軒), 본관은 상산(商山)이니 1514년(中宗 9년) 출생. 28세에 양 성현감(陽城縣監)이 되고 2년 뒤 중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등극하여 고부승습사(告訃承襲使) 서장 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갔는데 명나라 세종(世宗)은 그의 문장에 탄복하여 “동사(東使) 김안 절은 문장이 아상(雅尙)하여 당세에 견줄 사람이 없다”고 찬탄했고 책 천 질과 보연(寶硯) 옥배 (玉杯)를 하사했다. 송사 기우만(松沙奇宇萬)의 묘갈명에 의하면 공이 사신갔다 와서 양성현감을 지내고 향년이 76이었으니 그러한 재능으로 그러한 수를 누리고도 지위가 높지 못함은 아마 공이 일찍 벼슬을 그만두고 서책을 즐겨 생을 마친 것으로 그 지절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문헌은 병란 에 소실되고 보연과 옥배는 지금도 보존되어 후손 문덕(文德)이 경향(京鄕) 선비의 찬사(讚詞)를 모아 보연시집寶硯詩集을 간행했다.「奇宇萬撰 墓碣銘」 牟陽城의 얼
n 김언춘(金彦春) 자는 형여(馨汝), 본관은 경주(慶州)이니 판서(判書) 충한(冲漢)의 후손으로 통덕랑(通德郞) 석 (碩)의 아들이다. 재주가 뛰어나고 힘이 장사였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아들 화주(華住)와 정응 (鄭鷹), 정홍(鄭鴻), 정충량(鄭忠良) 등과 함께 수사(水使) 이억기(李億祺)를 따라 견내량(見乃梁)에 서 전공을 세우고 안골포(安骨浦)에서 적 수십 명을 사살하고 노량(露粱)에서 전사하니 참의(參議) 를 추증하였다. 湖南節義錄 湖南人物志
n 김여강(金汝剛) 자는 희극(希克), 호는 송암(松菴), 본관은 광산(光山)이니 참봉 기서(麒瑞)의 중손이고 동지중 추부사 덕우(德宇)의 아들이다. 1570년(宣宗 3년)에 출생하여 학문이 깊고 효행이 지극했으니 친 상(親喪)에 여묘(廬墓)하여 죽으로 연명하여 슬픔이 예(禮)에 넘치매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전지 (田地)를 하사받았다. 이괄(李适)의 난에 신유일(辛惟一), 오전(吳晪), 등과 함께 군량을 모아 근왕 (勤王)하려 하다가 난이 평정되어 중지했다. 병자호란에는 신병으로 출전하지 못하자 아들 남일 (南鎰), 종질 남식(南式)으로 하여금 군량을 모아 근왕하게 하려다가 화의가 이루어져 중지하고는 두문(杜門)하고 후진 계도(後進啓導)를 사명으로 했다. 湖南節義錄 湖南人物志
n 김여귀(金黎貴) 선군(船軍) 주안도(朱安道)의 아내이다. 남편이 병들자 정성껏 약을 다려 구원했고 남편이 죽자 포태(抱胎)한 몸으로 시체를 끌어안고 호곡하다가 기절하니 친정어머니가 말리면서 잉부(孕婦)는 임상과애(臨喪過哀)해서는 안 된다고 데리고 그의 집으로 가니 그날 저녁에 목매어 남편을 따랐 다. 그때 나이 26세, 뒤에 전라감사 박습(朴習)의 추천으로 정려(旌閭)되었다. 東國續新三綱行實 圖 牟陽誌 高敞校誌
n 김여성(金汝聲) 자는 원이(遠而), 관향은 광산(光山), 부사 홍우(弘宇)의 아들로 1564년(明宗 19년)에 출생했다. 효심이 독실했으니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유철견(柳鐵堅)과 함께 모의(募義) 납곡(納穀)한 공이 크다.
「洪彦謀撰
墓碣銘」 牟陽誌 高敞校誌
n 김연수(金秊洙) 호는 수당(秀堂), 관향은 울산(蔚山)이니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의 아우이다. 1896년(建陽
元년) 부안면 봉암리(鳳岩里) 인촌(仁村)부락에서 출생하여 1979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소년 시 절에 집에서 한학(漢學)을 배웠고 송진우(宋鎭禹)를 따라 일본에 건너가 명문 제3고등학교와 경도 제대(京都帝大)를 졸업했다. 귀국 후 그는 20대 청년으로 경성방직(京城紡織)과 경성직뉴(京城織 紐)를 운영하였고, 1929년에는 경성방직의 운영을 전담하였다. 그는 또 1924년에는 장성농장(長城農場)을 설립하여 농업경영의 근대화를 꾀했고 이어서 줄포 (茁浦), 고창(高敞), 신태인(新泰仁), 법성(法聖), 영광(靈光) 등에 농장을 설립하여 이를 통괄하는 기관을 삼수사(三水社)라 했고, 뒤에 삼양사(三養社)라 개명했다. 그는 또 조선총독부의 권유로 전 남 함평군 손불면(孫佛面)과 고창군 심원면, 해리면에 간척지를 막아 농토를 만들었고 광복 후에 간척지 380정보에 염전을 조성하였으며 민족사업체로서의 주식회사 삼양사는 울산, 전주, 여수, 목포 등의 현대화된 공장과 전주에 있는 삼양모방(三養毛紡) 등은 우리나라 근대화 공업에 선구적 존재이니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해야겠다. 全北의 뿌리 牟陽城의 얼
n 김연옥(金鍊玉) 자는 유정(維精)이고 본관은 김해(金海)이니 도사(都事) 종필(終弼)의 아들이다. 그는 효성이 지 극했고, 담력이 컸으며, 1594(宣祖 27년)에 무과에 올랐다. 1597년(宣祖 30년) 정유난을 당하자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을 따라 남해의 노량(露梁)싸움에 참여하여 많은 왜적을 참살하고 적의 탄환에 맞아 순절했다. 충무공이 그의 시신을 어루만지며 슬퍼했고 그의 처 남원양씨(南原梁 氏)가 남편의 순국한 소식을 듣고 강물에 몸을 던져 남편의 뒤를 따르니 나라 사람들이 그들 부 부의 충절을 감탄하여 그 강물을 금강소(金剛沼)라 불려온다. 興德邑誌 牟陽城의 얼
n 김영년(金永年) 초명은 필선(弼善), 자는 경로(敬老), 호는 겁암(㤼巖), 본관은 금녕(金寧)이니 충의공(忠毅公) 문기(文基)의 5세손이요 현감(縣監) 현석(玄錫)의 증손이다. 1546년(明宗 원년) 옥천(沃川)에서 출 생하여 7세에 ‘월색(月色)은 미신상(微臣像)이요 일광(日光)은 성주심(聖主心)이라.’ 시를 지어 스 승을 놀라게 했다. 14세에 사육신(死六臣)의 여화(餘禍)를 피해 부안 변산(邊山) 낙수동(落水洞)에 은거했다가 임 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채홍국(蔡弘國), 고덕붕(高德鵬) 등과 함께 창의하여 흥덕 남당(南塘) 에서 회맹(會盟)하고 장등(長嶝)에 유진(留鎭)하니 적이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 이때 공은 조군향 사도감(調軍餉士都監)으로 의곡(義穀)을 모아 의곡장(義穀將) 기효증(奇孝曾)을 통하여 3백석은 의 주행재(義州行在)로 보내고 1백 석은 영남 곽재우(郭在佑) 의병소(義兵所)로 보냈으며, 전남․북의 적을 토벌하여 순천 석보(石堡)에서 승첩(勝捷)을 거두었는데 화의가 성립되어 통곡하고 돌아왔다. 정유재란(丁酉再亂)에 다시 창의하여 흩어진 군사를 모아 흥덕 배풍령(培風嶺)에서 적을 맞아 격전 끝에 순절하니 아들 헌( )이 왜적을 생포하여 배를 갈라 간을 내어 씹었고, 종 옥천금(沃川 金)은 공의 시체를 안고 절사하여 세상에서 삼의문(三義門)으로 칭한다. 선무원종(宣武原從) 3등공 신에 책록되고 왕산사(旺山祠)에 향사한다. 「湖南興城倡義碑」 湖南節義錄
n 김영철(金榮喆) 자는 성규(聖圭)이고 호는 만수(晩睡)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니 영모당 질(永慕堂質)의 후손 이고 진사(進士) 양대(養大)의 아들이다. 1842년(獻宗 8년)에 공음면 선동(扇洞)에서 출생하여 20 세 때 고창 도산(道山)으로 이사했다. 자질이 수명하여 일찍 문리가 통했고 효심이 깊어 부모 섬 겨 정성을 다했다. 또한 부모의 상사(喪事)에 시묘살이를 하고 형제에 우애가 남다르며 선영에 묘 비를 세우고 제전을 갖추었다.
1895년 명성황후(明星皇后)가 시해되고 송사 기우만(松沙奇宇萬)이 의병을 일으킬 때 그를 고 창의 책임자로 추대하여 소임을 다하였고 흉년에 기민(饑民)이 생기면 구휼에 재산을 아끼지 않았 다. 53세에 진사가 되고 만년에 만수당(晩睡堂)을 일으켜 향자제를 가르쳤으니 도산서당(道山書 堂)은 한 고을의 대표 서당으로 후대에까지 많은 선비가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1911년(光武 10 년)에 세상을 뜨니 향년 70세이고 만수유고晩睡遺稿 1책이 간행되었다. 高敞의 儒學
n 김요협(金堯莢) 자는 원중(元仲), 호는 낙재(樂齋), 본관은 울산(蔚山)이니 문정공(文正公) 인후(麟厚)의 후손이 다. 1833년(純祖 33년) 출생. 풍채가 뛰어나고 성품이 호탕했다. 부안면 인촌(仁村) 영일정씨(迎日 鄭氏) 진사(進士) 계량(季良)의 사위가 되어 장성에서 부안면으로 들어왔다. 1870년(高宗 9년) 선 공감역(繕工監役)을 시작으로 영릉참봉(寧陵參奉)과 진안(鎭安) 화순(和順) 군위(軍威)의 수령을 두 루 지내고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비서원승(秘書院丞)을 거쳐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올랐 다. 興城誌
n 김응룡(金應龍) 자는 인서(麟瑞), 본관은 청도(淸道)이니 영헌공(英憲公) 지대(之岱)의 후손으로 1547년(明宗 2 년) 상하면 검산(劍山)에서 출생했다. 자질이 수명(粹明)하고 기절이 강개(慷慨)하여 집이 가난했 으나 의식을 개의치 않았고, 사종조 병산(甁山) 난상(鸞祥)에게 배우고 퇴계 이황(退溪李滉)에게 나아가 성리(性理)의 요결(要訣)을 얻어들었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분연히 일어나 아우 응귀(應龜), 응봉(應鳳)과 재종제 몽룡(夢龍)과 사위 김진(金璡)과 함께 원수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전공을 세 우고 조운(漕運)을 맡아 동호(冬湖)에 들어왔다가 아버지 상사를 당하여 겨우 염습(斂襲)을 하고는 행주(幸州)로 달려가 힘써 싸우다가 순국(殉國)하니 선무이등훈(宣武二等勳)에 책록되고 호조참판 에 증직되었다. 석전 이종택(石田李鍾宅)이 묘갈명을 짓고 계산서원(溪山書院)에 향사한다. 湖南 節義錄 茂長誌
김익려(金益勵) 초명은 익중(益重), 자는 중화(重華), 호는 해봉(海峯), 본관은 청도(淸道)이니 군수(郡守) 희방 (希邦)의 현손, 병자창의(丙子倡義) 공립(公立)의 손자이다. 1667년(顯宗 6년) 해리면 임해(臨海)에 서 출생하여 1728년(英祖 4년) 정희량(鄭希亮)의 난에 대장 오명황(吳命恒)을 따라 안음 죽산(竹 山)의 싸움에 선봉이 되어 많은 공을 세웠기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양무원종훈(揚武原從 勳)에 책록되었다. 湖南節義錄 湖南人物志
n 김익수(金益壽) 자는 인숙(仁叔), 호는 동계(東溪), 본관은 경주(慶州)이니 판서(判書) 충한(沖漢)의 후손으로 주 부(主簿) 영(泳)의 아들이다. 자질이 뛰어나고 여력(膂力)이 과인(過人)하여 1584년(宣宗 17년) 무 과(武科)에 급제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왕이 몽진(蒙塵)하매 종형 좌랑(佐郞) 팽수(彭壽), 삼종제 봉사(奉 事) 진(璡)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도원수 권율(權慄)의 막하에 들어가 맹세하기를 “몸에 실오라기 를 걸치고 배에 곡기를 채움은 군부(君父)의 은혜인데 위태로워도 붙들지 않는다면 무엇하겠는 가?”하고는 이치(梨峙)싸움․행주전역(幸州戰役)에 분연히 싸워 적을 많이 참획함으로써 권율의 장 계로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난 후(亂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선조가 승하하매 집 뒤 봉우리에 단을 설치하여 망곡(望哭) 3년을 하니 지금에도 그곳을 제봉(祭 峰)이라 부른다.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책록되고 금산의단(錦山義壇)에 배향되었다. 湖南節義 錄 湖南人物志
n 김익철(金益哲) 자는 우보(友輔), 호는 현무재(賢武齋), 본관은 안돈(安東)이니 진사 질(質)의 증손이고 은송당 경철(隱松堂景哲)의 아우이다. 1595(宣宗 28년) 공음면 개가리(凱歌里) 출생. 나이
18세에 무과
(武科)에 올라 봉사(奉事)가 되었는데 임진왜란에 어가(御駕)가 의주(義州)로 파천할 때 지존(至尊) 을 모시고 80리를 달려 신이 벗겨져 피가 흐르는 줄도 몰랐고, 정유재란에도 창의하여 공적이 많 았으므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고 주부(主簿)를 제수했으나 부모 봉양을 위해 귀 향했다. 도암사(道巖祠)에 배향되었고 사우 옆에 어사각(御賜閣)이 건립되었다. 輿地圖書 湖南 節義錄 湖南人物志
n 김인우(金仁雨) 광산김씨(光山金氏) 양간공(良簡公) 연(璉)의 현손으로 전리판서(典理判書) 영삼사사(領三司事) 광리(光利)의 아들이다. 벼슬로는 봉익대부(奉翊大夫) 전리판서(典理判書)와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고, 1361년(恭愍王 10년)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호종일등공신(扈從一等功臣) 에 오르니 일등공신은 벽상(壁上)에 얼굴을 그리고 부모와 아내에게는 3등급을 올려 작위(爵位)를 봉하고 아들 한 사람에게 7품벼슬을 주고 아들이 없으면 생질이나 사위 중 한 사람에게 8품 벼슬 을 주고 구사(驅使) 5인에 파수병 7인을 거느리게 하고 초입사(初入仕)한 자손을 음직(蔭職)으로 서용하고 밭 백결(百結)과 노비(奴婢) 십 인을 하사받는다. 뒤에 아우 갑우(甲雨)가 명(明)나라에 사신가면서 탐라(耽羅) 말을 공납(供納)하는 일로 화를 입자 공에게까지 연좌되어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니 1374년(恭愍王 23년)공의 나이 45세 때였다. 치적을 쌓아 백성들이 공덕에 감복했고 인(因)해 눌러 사니 이 고장 광산김씨는 공에서 비롯된다. 갑우의 피화사건에 대해 일설에는 갑우를 시기하는 자가 있어 오십(五十)필을 오천(五千)필로 고쳐 명나라 황제의 노여움을 샀다 하여 공의 종질 약항(若恒)은 “貢馬五千何日到 桃花影外草芊芊(貢馬 오천 필이 언제 올려는가? 복숭아꽃 그림자 밖에 풀만 무성하다.” 이라 개탄했는가 하면, 고려사에는 말 50필을 몰고 가다가 2필을 잃어 다른 말로 채웠다가 뒤에 밝혀져 공민왕을 책망하매 갑우와 역관 오극 충(吳克忠)을 주살(誅殺)한 것으로 실려 있다. 화동서원(華東書院)에 배향되었다. 高麗史 湖南人物志 華東書院誌
n 김재구(金在龜) 자는 준서(準瑞)이고 호는 만회(晩悔)이며 본관은 의성(義城)이니 이성(以成)의 아들이다. 1866 년(高宗 6년)에 흥덕면 대천리(大川里)에서 출생하여 1916년 진안(鎭安)에서 졸했다. 그는 면암 최익현(勉庵崔益鉉)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906년(高宗 10년) 스승 최면암의 무성창의(武城倡義 : 泰仁) 에 동향의 강종회(姜鍾會)와 함께 의병 수십명을 이끌고 동참했으나 순창에서 패하고 말았다. 1910년 나라가 합병되자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왜경에 체포되어 고창경찰서에서 옥고를 치 루었고 1913년 4월 고종의 밀칙으로 특승 정삼품 통정대부 명전라도 독립의군부 소모사(特陞正 三品通政大夫命全羅道獨立義軍府召募使)를 임명받아 흥덕군 대표가 되었으나 거의가 좌절되자 진 안으로 들어가 우거했다. 全北文化의 脈과 全北人物
n 김재종(金在鍾) 자는 백응(伯應)이고 호는 회천(晦泉)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니 영모당 질(永慕堂質)의 후손 이고 만수당 영철(晩睡堂榮喆)의 아들이다. 1880년(高宗 17년)에 고창 도산(道山)에서 출생하여 1938년에 세상떴다. 선비 가문에서 숙부 항재 순묵(恒齋純黙)에게 글을 배우고 20세 때 송사 기우만(松沙奇宇萬)의 문하에서 경사(經史)를 섭렵하여 시문이 유려했다. 고창에 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할 때 설립위원이 되어 기금을 희사하고 도산초등학교를 설립할 때는 임야 2천여 평을 대지로
내놓았으며 위선에 정성스럽고 이웃에 은
혜로우며 흉년에 구휼하여 마을 앞에 진휼비(賑恤碑)가 섰다. 그는 수명한 자질로 독공을 하여 일 찍 학문을 성취했으나 어지러운 세상에 벼슬할 뜻을 접고 부모 모시면서 후생 교육을 사명으로 하여 도산서숙(道山書塾)에서 강학을 하니 원근에서 서생(書生)이 모여들어 문풍(文風)을 크게 진 작했다. 저서로 회천집晦泉集 4권 1책이 간행되었다. 高敞의 儒學 高敞校誌
n 김재휘(金再輝) 자는 윤보(潤甫), 본관은 언양(彦陽)이니 위열공(威烈公) 취려(就礪)의 후손으로 성록(成錄)의 손자이다. 1728년(英祖 4년) 정희량(鄭希亮)의 난에 무장수성장(茂長守城將)으로 성을 지키다가 김인하(金仁夏) 최언당(崔彦曭)과 관기(官妓) 애룡(愛龍) 등과 함께 적을 동호(冬湖) 동백정(冬柏 亭)으로 추격하여 적당 성징(成徵)을 포획하고 또 죽도(竹島) 갈밭에 숨어 있는 적괴(賊魁) 필몽 (弼夢) 부자를 생포한 공으로 어영청(御營廳)에 이름이 올랐다. 湖南節義錄 湖南人物志
n 김정회(金正會) 자는 중립(中立)이고 호는 보정(普亭) 또는 연연당(淵淵堂)이며 관향은 안동(安東)이니 익원공 (翼元公) 사형(士衡)의 후손이고 회천 재종(晦泉在鍾)의 아들이다. 광무(光武) 6년 고창 도산(道山) 에서 출생하여 종조 항재 김순묵(恒齋金純黙)에게 경사(經史)를 배우고 명륜전문학원(明倫專門學 院)에서 실학(實學)을 익혔으며 해강 김규진(海岡金圭鎭)에게 서화(書畵)를 연마하여 시서화 삼절 (詩書畵三絶)로 일컬었다. 아버님의 뜻을 받들어 경선재(敬先齋), 양지재(養志齋)를 세우고 또 회천정사(晦泉精舍)를 지었으며, 후생 교육을 사명으로 만수당(晩睡堂)에 서숙(書塾)을 열어 강학하면서 당대의 석학인 고당 김규태(顧堂 金圭泰), 효당 김문옥(曉堂金文鈺), 석농 이동범(石儂李東範) 등과 시문으로 교유했다. 혜휼(惠恤)로도 알려져 흉년에 진휼하여 송덕비(頌德碑)가 섰고 68세로 1970년 세상 뜨니 모양문화인장(牟陽文化 人葬)으로 장례를 모셨으며 경모비(景慕碑)가 마을 앞에 섰다. 저서로 연연당문고淵淵堂文稿 10 권 1책이 간행되었다. 淵淵堂文稿 湖南人物志 高敞의 儒學
n 김주만(金冑萬) 자는 태초(太初), 호는 청헌(聽軒), 관향은 광상(光山)이니 충숙공(忠肅公) 심(深)의 9세손이다. 효행과 학문으로 알려졌고 해남(海南) 출생인데 장성(長城)에 이거했다가 만년을 부안(富安)에서 보냈으며 뒤에 효행으로 좌승지(左承旨)가 주어졌다. 유저(遺著)에는 청헌집聽軒集 2권 2책이 간행되어 전한다. 「梁得中撰 行狀」 「趙得林撰 墓碣銘」 聽軒集
n 김지남(金志南) 초명은 지남(志男), 자는 광운(光運), 호는 월재(月齋), 본관은 김해(金海)이니 절효공(節孝公) 극일(克一)의 6세손이고 임란의사(壬亂義士) 헌(軒)의 아들이다. 1557년(明宗 12년)에 출생하여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에 아버지가 근왕(勤王)하고 돌아오다가 적을 만나 크게 부상하 고 백부 축(軸)이 창의(倡義)하매 형 두남(斗南)과 함께 분연히 일어나 참전하여 웅치(熊峙) 이치 (梨峙)의 싸움에서 전공을 세우고, 진주성(晋州城)이 위태롭자 좌부장(左部將)으로서 백부, 형과 함 께 입성(入城)하여 혈전을 벌이다가 마침내 성이 함락되어 백부와 형 그리고 많은 장병(將兵)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선무원종(宣武原從) 2등공신에 책록되어 단서철권(丹書鐵券)이 고창 읍 교촌(校村) 어사각(御賜閣)에 모셔 있고, 백부 축, 형 두남과 함께 3충부조묘(三忠不祧廟)가 고 창 백양(白羊)에 있다. 湖南節義錄 牟陽城의 얼
n 김 진(金 璡) 자는 여중(汝仲), 호는 사천(沙川), 본관은 경주(慶州)이니 판서(判書) 충한(冲漢)의 후손으로 참 봉(參奉) 창수(昌售)의 아들이다. 기절이 강개하여 불의를 용납하지 아니하고 효(孝)가 지극하여 부모의 상사에 여묘(廬墓)했으며 행의로 1579년(宣祖 12년) 봉사(奉事)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에 뜻 이 없어 바로 사은(謝恩)하고 돌아왔다. 임진왜란에 삼종형 좌랑(佐郞) 팽수(彭壽) 주부(主簿) 익수 (益壽)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도원수 권율(權慄)의 막하에 들어가 행주(幸州)에서 대첩을 거두고 수원(水原) 한산(韓山)에서 전공을 세워 권율의 장계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으 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 從功臣)에 책록되었다. 湖南節義錄 湖南人物志
n 김 질(金 質) 자는 문소(文素), 호는 영모당(永慕堂), 본관은 안동(安東)이니 상락백(上洛伯) 사형(士衡)의 5 대손이요 통례원통찬(通禮院通贊) 복중(福重)의 아들이다. 1496년(燕山 2년) 공음면 개가리(凱歌 里) 출생.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의 등창을 빨아 낫게 하고, 아버지의 상사에 흙을 져다가 성분 (成墳)하고 여묘(廬墓)했는데 어느날 제사 지내는 간장독에 쥐가 빠지매 공이 그 그릇을 안고 통 곡하니 근처의 쥐가 모두 와서 그릇 밑에서 죽었고, 아버지가 꿩고기를 좋아하여 젯상에 반드시 꿩고기를 올리는데 한번은 눈이 많이 내려 저자(安山巿場)에 갈 수 없으매 불효를 한탄하니 꿩이 부엌으로 날아 들었다. 어머니의 상사에 여묘와 집의 거리가 들 하나 사이임에도 한번도 집에 온 일이 없었고 부인과 여비(女婢)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는데 부인 김씨가 긴히 알릴 일이 있어 여비를 보내매 공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부인이 직접 나아갔으나 더욱 깊이 숨어 만나지 못했다. 어느 날 밤 눈이 많 이 내렸는데 그 묘 주위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으므로 지방 사람들이 그 산을 제청산(祭廳山)이라 이름하였 다. 하서 김인후(河西金麟厚)가 그 집에 영모당(永慕堂)이라 현판하고 미암 유희춘(眉巖柳希春)이 평소 공의 효를 사모하던 중 무장현감으로 오게 되어 자주 상종하며 글을 지어 벽에 걸어 주었고, 고봉 기대승(高峯奇大升), 송천 양응정(松川梁應鼎)이 모두 공의 효에 감복했다. 이때 명나라에서 우리나라 제일의 행의를 알리라 하여 전라도 안찰사 민성휘(閔聖徽) 에 의해 공의 효가 추천되어 1546년 명나라로부터 정려가 내려 공음면 칠암(七岩)에 「孝子 進士 金質之閭」가 서고, 1613년 그 곳에 도암사(道巖祠)를 일으켜 주벽으로 향사한다. 저술로는 영모록永慕錄과 육사자책설六事自 責說이 전한다. 輿地圖書 湖南人物志
n 김 축(金 軸) 자는 고언(高彦)이고 호는 남계(南溪)이며 본관은 김해(金海)이니 이조판서(吏曹判書) 용(勇)의 현손이다. 그는 선조(宣祖) 때 승지(承旨)를 지냈는데 1593년(宣祖 25년) 임진란을 당하자 집에 있는 쌀 40석을 권율(權慄) 장군의 진중에 나르고 그 막하에서 왜적과 싸워 큰 공훈을 세웠다. 그 는 진주(晋州)싸움에 참가하여 왜적과 분전하다가 장렬하게 순절하니 선조가 그 소식을 듣고 일등
공훈(一等功勳)에 책록하고 단서철권(丹書鐵券)을 내렸으며 부조정(不祧旌)을 명했다. 무장 유림이 충현사(忠賢祠) 옆에 의적비(義蹟碑)를 세웠다. 興城誌 茂長誌
n 김팽수(金彭壽) 자는 명숙(明淑), 호는 남계(南溪), 본관은 경주(慶州)이니 판서(判書) 충한(沖漢)의 후손으로 참 봉(參奉) 형(泂)의 아들이다.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였으며 임란(壬亂) 전에 수문장(守門將)을 지냈는데 난이 일어나자 종제 주부(主簿) 익수(益壽), 삼종제 봉사(奉事) 진(璡)과 함께 의병을 일 으켜 도원수 권율(權慄)의 막하에 들어가 이치(梨峙)싸움과 행주전역(幸州戰役)에서 많은 전공을 세움으로서 권율의 장계로 좌랑(佐郞)에 제수되었으나 난후(亂後)에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책록되고 금산의단(錦山義壇)에 배향되었다. 湖南節義錄 湖南人物志
n 김 헌(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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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헌옥(王憲 玉), 호는 은암(隱巖), 본관은 금녕(金寧)이니 충의공(忠毅公) 문기(文起)의 6세 손이고 겁암 영년(㤼巖永年)의 아들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시포도감(矢砲都監)으로 아버지를 도와 힘써 싸우고, 정유재란(丁酉再亂)에 흥덕 배풍령(培風嶺)에서 아버지가 왜장 아이대(阿伊大) 에게 화를 입는 것을 보고는 칼을 빼어들고 분전(憤戰)하여 적 2명을 붙잡아 배를 갈라 간을 내어 씹고, 잔병(殘兵)을 인솔하여 용감히 싸우다가 죽으니 왕산사(旺山祠)에 배향되었다. 湖南節義錄 湖南興城倡義碑
n 김형진(金亨進) 자는 점숙(漸淑)이요 호는 석천(石泉)이며 관향은 상산(商山)이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운보 (云寶)의 6세손 직장(直長) 대류(大鏐)의 아들이다. 그는 체구가 석대하고 용맹이 뛰어났으며, 참 봉(參奉)을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592년(宣祖 25년) 임진왜란을 당하자 분연히 일어나 격문을 써 붙이고 의병을 모집하여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과 합세하여 청주(淸州)에서 대첩하 였고 금산(錦山)싸움에서 분전하다가 700의사와 함께 순절했다. 정조(正祖) 때 지평(持平)을 증직 했고 뒤에 금산의 종용사(從容祠)에 추배되었다. 興城誌
n 김홍우(金弘宇) 자는 백용(伯容), 호는 백곡(伯谷), 관향은 광산(光山)이니 노계 경희(蘆溪景熹)의 아들로 1539 년(中宗 34년)에 출생했다. 오음 윤두수(梧陰尹斗壽)의 문인으로 1593년에 문과(文科)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예조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에 창의(倡義)하였고 정유에는 명장 (明將)을 접반(接伴)하였으며 뒤에 남원부사(南原府使)가 되고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증직했으며 장성 오산사(鰲山祠)에 향사되었다. 「金箕性撰 墓碣銘」湖南節義錄 牟陽誌
n 김희방(金希邦) 자는 성보(聖輔), 호는 모헌(慕軒), 본관은 청도(淸道)이니 호강공(胡剛公) 점(漸)의 후손으로 참 지(參知) 국정(國鼎)의 손자이다. 1568년(宣祖 1년) 해리면 임해(臨海) 출생. 성효(誠孝)가 출천(出 天)하여 주부(主簿)에 천거되고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유팽로(柳彭老), 김덕홍(金德弘), 김세근(金世 斤) 등과 함께 삽혈동맹(歃血同盟)하여 제봉 고경명(霽峰高敬命)을 맹주(盟主)로 진산 금산 등지에 서 싸우고 의주에서 왕을 호위했기에 벽동군수(碧潼郡守)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선무
원종 일등훈(宣武原從一等勳)에 책록되고 불수 윤영구(弗須尹寗求)가 유사(遺事)를 지었다. 湖南節義錄 湖南人物志
n 나상일(羅相一) 초명은 영구(榮龜)이고 자는 치구(致九)이며 호는 성암(惺菴)이고 본관은 안정(安定)이니 장음 정 식(長吟亭湜)의 후손이고 야헌 길순(野軒吉順)의 아들이다. 1871년(高宗 8년)에 아산면 남촌 (南村)에서 출생했다. 용모가 준수하고 재질이 영명하여 문리가 숙성하매 족대부 찬판 감(鑑)이 칭 찬하여 “이 아이가 우리 가문을 들칠 것이다.” 하였다. 심석 송병순(心石宋秉珣)을 스승으로 섬겨 경학의 깊은 뜻을 얻어듣고 심석이 순절한 뒤 송사 기우만(松沙奇宇萬)을 종유하여 의리를 강명했는데 송사는 칭찬하여 “포부와 경륜이 속사(俗士)에 비길 바 아니다.” 하였다. 위선에 특성을 보여 지리서를 탐독하여 불리한 선영을 길지(吉地) 가려 이장하고 석물과 제전을 갖추었다. 또한 선세의 사적을 발굴하여 문헌록을 간행하고 장음정집 長 吟亭集을 중간하고 족보를 편수했다. 하당 조종필(荷塘趙鍾弼)이 전라감사로 오매 세의가 있어 찾아가 담론했는데 “영호(英豪)하고 고매함이 현세에 보기 드물다.” 하고 벼슬할 것을 권했으나 동학란 후로 세상이 어지러워 사양했다. 만년에는 남강정사(南岡精舍)를 지어 후생을 가르치면서 세상을 잊고 살다가 1940년 세상 뜨니 향년 70세이고 저서로 성암유고 惺菴遺稿 5권 1책이 간 행되었다. 高敞의 儒學
n 노병희(魯炳熹) 자는 명중(明中)이고 호는 호정(壺亭)이며 관향은 함평(咸平)이다. 1850년(哲宗 元년) 성내면 대흥리(大興里) 신월(新月)부락에서 출생하여 1918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숙성하여 어른스러웠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노모가 실명하자 곁을 떠나지 않고 시봉하였다. 1888년 그이 나이 30세 때 충남 정산(定山)에 이거하여 면암 최익현(勉庵崔益鉉)에게 사사(師事)하였고, 1882 년 나라에서 혜민원주사(惠民院主事)를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901년 임피(臨陂) 낙영 당강회(樂英堂講會)에 참여했다. 1903년 다시 불리어 정3품 태의원전의(太醫院典醫)로 있다가 이듬해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 왔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통곡하고 여러 날 음식을 폐하였으며, 1906년 면암 선생의 의거에 참 여했다. 면암이 대마도에 구금되자 그곳으로 달려가 시탕하였고 면암이 세상을 떠나자 시신을 수 습하여 귀장(歸葬)하였다. 그는 백건(白巾)과 소복(素服)으로 심상 3년을 하였으며, 1907년 여러 동문과 함께 면암집(勉庵集)을 간행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폐인으로 자처하고 여생을 보냈다. 유고집에 호정유고壺亭遺稿가 있다. 興城文獻錄 全北의 뿌리
n 노진룡(魯鎭龍) 자는 경의(景義)이고 호는 성재(誠齋)이며 본관은 함평(咸平)이니 금계 인(錦溪認)의 후손 호정 노병희(壺亭魯炳憙)의 손자다. 1894년(高宗 31년)에 성내면 대흥리 신월(新月)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26세의 젊은 나이에 대한독립운동 전북감독부(大韓獨立運動 全北監督府)라는 지하조직을 설 치하고 감독이 되었으며, 고하 송진우(古下宋鎭禹)의 참모가 되어 고창지방의 독립만세운동을 지 휘하였다. 그는 또 자금을 모아 통신원(通信員) 박기동(朴基東) 편에 상해 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 로 보냈고, 1920년 9월 중순에 본국으로 돌아가는 프랑스 선교사편에 자금을 보냈다. 1923년 3 월에는 동지 이석택(李錫澤), 이석렬(李錫烈) 등과 함께 성내면사무소의 등사기로 독립정신을 고취 하는 글을 찍어 호남 각지에 살포하고 한국인 공무원을 사퇴시키는 운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검 거되어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1916년 3월 1일 고창군내 유지들이 성내면 운산리(雲山里)에 대한독립
사적비(大韓獨立事勣碑)를 새워 그의 애국운동의 행적을 기록하였다. 興城誌 牟陽城의 얼 全北文 化의 脈과 全北人物
n 만암 송종헌(曼庵 宋宗憲) 여산송씨(礪山宋氏) 의환(義煥)의 아들로 1867년(高宗 13년) 고창읍 중거리(中巨里)에서 출생 했다. 11세에 도진선사(道珍禪師)에게 나아가 스님이 되어 교리를 탐구하기 10년, 1901년부터 10 년을 참선(參禪)하고 1914년 백양사 주지가 되어 이후 26년에 백양사를 중창했다. 1928년 중앙 불교전문학교 교장, 1946년 정광중학교(淨光中學校)를 광주에 설립하고 다음해 호남고불회(湖南古 佛會)를 결성하고 1952년 불교조계종 제3세 대종정(大宗正)으로 추대되어 불교 진흥에 기여하다 가 1956년 입적(入寂)하니 수(壽)는 81세, 법랍(法臘)은 71세였다. 퇴경 권상로(退耕勸相老)의 비 명(碑銘)에 의하면 스님은 뜻이 굳고 몸가짐이 바르며 사리를 밝게 보고 처사에 주밀하여 백양사 에서는 퇴락된 사찰을 7년에 걸쳐 옛 모습으로 바꾸고 교장이 되어서는 교육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고 이사(理事)가 되어서는 재단을 튼튼하게 했으며, 아무리 피로하고 자리에 눕는 아픔이 있어 도 밤중에 일어나 발개고 앉아서 날을 새우고 운명하는 그날에도 조계종의 종무를 고명(顧命)했다 고 적었다. 「權相老贊 佛敎曹溪宗第三世大宗正 曼庵宗師塔碑銘」
n 문몽규(文夢奎)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성품이 순실하고 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했다. 정유왜란(丁酉倭亂)에 왜 병이 침노해 오자 무장 문묘(茂長文廟)의 오성위판(五聖位板)을 정결한 곳에 매안(埋安)하여 화를 면했고, 난이 평정된 뒤에 향교를 중건하는데 도보로 상경하여 태학(太學)의 제도를 모방하여 친 히 감역(監役)을 하여 성묘(聖廟)를 이룩하고, 또 친히 해도(海島)로 들어가 정결한 곳에서 밤나무 를 구하여 위판을 만들어 모시고 후진 교육에 힘써 향교에 큰 공이 있었으므로 한 고을 사림(士 林)이 완의문(完議文)을 만들어 그 자손을 보호했다. 아우 몽정(夢禎)도 향교에 공이 있어 함께 완 의문에 들었다. 茂長誌 湖南人物志
n 민대승(閔大升) 자는 정여(鼎汝), 본관은 여흥(驪興)이니 여산부원군(驪山府院君) 근(瑾)의 후손으로 현감 회삼 (懷參)의 현손이다. 천성이 효우(孝友)하고 기절(氣節)과 용략(勇略)이 있었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를 지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우산 안방준(牛山安邦俊)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부장(副將)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여산(礪山)에 이르러 화의가 이루어짐을 듣고 돌아왔다. 湖南節義錄 湖南人物志
n 박기봉(朴箕鳳) 호는 과헌(果軒)이며 본관은 태인(泰仁)이니 감역(監役) 윤수(尹秀)의 아들이다. 그는 철종조(哲 宗朝)에 전남 장성(長城)에서 출생하여 흥덕으로 옮아 살았는데 면암 최익현(勉庵崔益鉉)의 문하 에 출입하면서 학문을 닦았다. 1910년(隆熙 4년)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자 아들 병하(秉夏)와 병은(秉殷)을 데리고 산속에 들어가 초의목식(草衣木食)하며 자정(自靖)하였다. 全北文化의 脈과 全北人物 湖南誌
n 박기호(朴奇琥) 자는 화숙(和叔), 호는 매월헌(梅月軒), 본관은 밀양(密陽)이니 대호군(大護軍) 연생(衍生)의 후
손으로 1598년(宣相 31년)에 출생했다. 병자호란에 모의 부원(募義赴援)했으나 청주에서 화의가 성립되 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정자를 지어 숭정일월(崇禎日月)이라 편액하고서 만년을 보냈다. 「朴秉夏撰 墓碣銘」湖南丙子倡義錄蘆洞朴氏世蹟牟陽誌
n 박도경(朴道京) 일명 경래(慶來), 관향은 밀양(密陽)이니 그 조부 때 호서(湖西)에서 고창으로 이거하였다. 1907년 성재 기삼연(省齋奇三衍)의 항일의거(抗日義擧)에 참가하여 포사대장(砲射隊長)이 되어 의 병을 거느리고 고창 우평리(牛坪里) 은사리(隱士里)와 무장 군유리(群儒里), 고창 방장산(方丈山), 담양 한재 둥지에서 20여 회의 전투를 통하여 큰 전과를 거두고 성재가 죽은 뒤엔 의장(義將)으 로 추대되어 많은 활약을 하니 왜적은 노부(老父)까지 동원하여 그를 잡으려고 하였다. 도경은 부모를 학대하지 않고 수감된 의병을 석방한다는 조건으로 자진 출두하여 대구 감옥에 갇혔다가 차입된 독약을 먹고 세상을 떠나니 호남창의대장 박도경구(湖南倡義大將朴道京柩)라는 명정(銘旌)을 갖추어 반장(返葬)했다. 연로에는 만사(挽詞)와 제전(祭奠)이 줄을 이었고 광복 후 기 적비(紀蹟碑)가 세워졌다. 韓國義烈錄 湖南三綱錄
n 박심문(朴審問)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세종(世宗) 때 음직으로 직장(直長)이 되었고 뒤에 문과에 오르니 김종 서(金宗瑞)가 육진을 개척할 때 종사관으로 삼았다. 1443년에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 승진하고 세조(世祖)가 왕위를 찬탈하자 육신(六臣)들과 단종(端宗) 복위를 도모하던 중 중국에 사신으로 보 내졌다. 귀국 도중 의주에서 육신들이 참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밤에 남몰래 유서를 써서 본가에 보내고 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다. 1804년(순조 4년)에 정충고절(貞忠苦節)로 이조참판(吏曹參 判)을 중직하고 1828년 영월 창절사(彰節祠)에 추배되었으며, 1856년(哲宗 7년)에 이조판서(吏曹 判書) 대제학(大提學)에 증직되고 1871(高宗 8년)에 충정(忠貞)의 시호가 내렸다. 진도(珍島)에 그 의 서원(書院)이 있다. 興城誌
n 박안동(朴安東) 자는 필원(弼元), 본관은 밀양(密陽)이니 부제학(副提學) 강생(剛生)의 후손이고 첨정(僉正) 승 검(承儉)의 아들이다. 음사로 봉사(奉事)를 지내고 임진왜란에 의병청(義兵廳)이 장성 남문 밖에 설치되니 의곡(義穀) 700석을 모아 기효증(奇孝曾)에게 보내어 진주(晋州)로 가게 하고, 또 100여 인을 모아 남원으로 향했는데 도중에 남원이 함락되었다. 湖南節義錄 湖南人物志
n 박유정(朴由精) 자는 집중(執中), 호는 절재(節齋), 함양인(咸陽人)이니 구당 세영(九堂世榮)의 증손으로 1565 년(明宗 20년) 출생하였다. 학봉 김성일(鶴峰金誠一)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에 김성일이 초유사(招 諭使)가 되어 순변사(巡邊使) 신입(申砬)에게 추천하여 참모로 종사했다. 그리고 달천(㺚川)싸움에 신입이 배수진을 치매 김여물(金汝岉)과 함께 불리함을 말했으나 신입이 듣지 아니하고 마침내 패 하게 되자 서찰 두 통을 마련하여, 충(忠)과 효(孝)는 둘 다 오롯이 하기 어려운 것으로 어머니에 게 하직하고, 노모(老母)를 받들고 유복자를 길러 가문을 계승케 할 것을 부인에게 부탁하고는 적 진에 뛰어들어 적 수십 급을 베고 전사하니, 병조참의에 추증하고 충으로 정려(旌閭)하여 해리면 사반리 어룡(魚龍)과 영광 백수(白岫面) 대신(大新)에 정문이 섰다. 「奇宇萬撰 旌閭記」 湖南節義 錄 湖南人物志
n 박 의(朴 義) 자는 충국(忠國), 관향은 밀양(密陽)이다. 매우 용맹할 뿐 아니라 말을 잘 타고 총을 잘 쏘아 박포사(朴砲士)라고 일컬었다. 조선조 인조 때 무과(武科)하여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전라병사(全 羅兵使) 김준룡(金俊龍)을 따라 용안 광교산(光敎山)싸움에서 적장 양고리(楊古利)를 사살한 큰 전 과를 거두었다. 배연(裵然)이 포사전(砲士傳)을 지어 말하기를 “원통하게 우리나라 조정이 혼돈하 여 오랑캐가 국토를 탐하기 달포만에 드디어 성하지맹(城下之盟)을 맺어 백 년 사직이 수모를 당 하니 눈물을 금치 못할 노릇이다. 국가가 위급한 이때에 한번 죽어서 적 한 놈을 쓰러뜨려도 국가 를 위한 충성이라 하겠거늘 하물며 그 괴수를 죽이고, 그 부하들을 무찌른 박포사의 공로야말로 병자호란에서 으뜸이 아니냐.” 하였다. 공로로 직동권관(直洞權官)에 제수되었다.「金履五撰 行狀」 牟陽誌
n 배성수(裵聖洙) 자는 학로(學魯)이고 호는 입헌(立軒)이며 관향은 달성(達城)이니 청정공(淸靖公) 을서(乙瑞)의 후손으로 송파 종풍(松坡鍾豊)의 아들이다. 1910년 공음면 청천(淸川)에서 출생하여 1996년에 세 상을 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약관에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했는데 영광의 육봉 이종택(六峰 李鍾澤)의 문하에서 독공을 하여 문장의 진수를 터득하고 전주의 흠재 최병심(欽齋崔秉心)에게 나 아가 이기(理氣)의 깊은 뜻을 깨쳤다. 무장향교 전교와 유도회장을 역임하면서 교지(校誌)와 문헌록을 편찬하고 향중 선비를 모아 송 미아계(松彌雅契)를 조직하여 친목을 도모하면서 향중사를 논의했다. 아버지의 엄한 가르침이 몸 에 배어 언제나 자세가 반듯하여 앉으면 기대는 법이 없고 걸으면 옆을 보지 않았으며 평생토록 글씨를 쓰되 자획 하나 빠뜨리지 안하고 정자로 바르게 썼다. 다작(多作)을 하여 천편도 넘는 글이 유려하기가 주옥 같은데 특히, 무게가 있는 서원 사우의 묘정비문(廟庭碑文)이나 축문 그리고 상량문(上樑文)에 이르러서는 호남의 독보(獨步)라 이른다. 저서로 입헌집立軒集 7권이 생전에 간행되고 미간행 유고(遺稿)가 전한다. 高敞의 儒學
n 배인기(裵仁基) 자는 처인(處仁), 호는 야은(野隱), 본관은 달성(達城)이니 청정공(淸靖公) 을서(乙瑞)의 후손으 로 증공조참판(贈工曹參判) 환영(煥榮)의 아들이다. 1876년(高宗 4년) 공음면 청천(淸川) 출생. 태 어난지 7개월 만에 부모를 여의고 조부모 밑에서 자라 조부모께 효도하고 학문에 힘써 일찍 문명 (文名)을 떨쳤다. 1890년 판서 송세헌(宋世憲)의 추천으로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에 제수받아 1891년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로 옮기고 호조정랑(戶曹正郞)을 거쳐 좌승지(左承旨)에 올랐다. 조부상을 당하여 향리로 돌아와 예법(禮法)에 따라 삼년상을 치루고 조상의 묘에 석물을 올리고 조부의 효(孝)와 어머니의 열(烈)을 조정에 알려 정문(旌門)을 세우고 송사 기우만(松沙奇宇萬)의 글을 빌어 조부와 어머니의 행적을 들추었다. 1908년 보호조약(保護條約)이 체결되자 참봉(參奉) 최전구(崔銓九) 등과 함께 항의하는 소(疏)를 올렸다가 군흉(群凶)의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통곡하고 돌아와 집 뒤에 띠집(茅屋)을 얽어 왼편에 망북헌(望北軒), 바른편에 망극헌(罔極軒)이라 편액(扁額)하고는 임금 우러르고 어버이 사모하는 지극한 뜻을 지녔다. 고종이 승하하자 집 뒤 바위 위에 단을 만들어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하니 사람들이 읍궁암(泣 弓巖)이라 했고, 일제치하(日帝治下)에 머리 깎고 창씨(創氏)할 것을 강요했으나 의연히 굴하지 않 았다. 학통은 간재(艮齋;田愚) 연원으로 성경(誠敬) 공부에 깊어 성경론(誠敬論)은 유명하고 유고 (遺稿)가 있으며, 흠재 최병심(欽齋崔秉心)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湖南節義錄 全北文化의 脈과 全北人物
n 백관수(白寬洙) 호는 근촌(芹村)이고 관향은 수원(水原)이며 1889년(高宗 26년) 성내면 생근리(生芹里)에서 출 생하여 1950년 6․25동란 때 납북되었다. 그는 소년기에 가정에서 한학(漢學)을 공부하다가 인촌 김성수(仁村金性洙)와 함께 군산에 있는 금호(金湖)학교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웠고 졸업한 뒤 서 울에 올라가 경성법전(京城法專)에서 공부했다. 1917년 일본에 건너가 명치대학(明治大學)에서 공부하던 중 1919년 김도연(金度演), 이광수 (李光洙) 등과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그 대표가 되어 2․8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가 체포되어 1년의 옥고를 치루었다. 1920년 귀국하여 독립청년회, 조선일보사 등에 몸담아 조선사연구회를 조직했고 1927년 하와 이에서 열리는 제2회 태평양회의에 유억겸(兪億兼), 김활란(金活蘭) 등과 함께 대표로 참석했고, 1937년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김성수 송진우와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 고 1946년에는 민주입법위원이 되었으며 1948년 5월 10일 고향인 고창에서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법사위원장과 헌법기초위원으로 건국 초기의 각종 법률 제정에 참여하였다. 그는 정치적 으로 이승만과 대립하여 오다가 1950년 6․25동란을 당하여 서울 자택에서 납북되고 말았다. 시집 으로 동유록東幽錄이 있고 새마을공원에 동상이 섰다. 興城文獻錄 全北의 뿌리
n 백광호(白光瑚) 자는 여기(汝器)이고 호는 가소당(可笑堂)이며 본관은 수원(水原)이니 사담 홍원(沙潭弘源)의 아들이다. 1644년(仁祖 22년)에 성내면 부덕리(富德里)에서 출생하여 1722년(景宗 2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부모 에게 효성이 지극했고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했다. 또 그는 가학(家學)을 이어받고 명재 윤중(明齋 尹拯)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으며, 행실이 엄정하여 종족과 향민의 존경을 받았다. 이 사실이 나 라에 알려져 1713년(肅宗 39년)에 복호(復戶)를 명하였다. 유고집 가소당집可笑堂集 3권 1책이 전한다. 興城文獻錄
n 백남운(白南雲) 호는 동암(東岩)이고 본관은 수원(水原)이니 휴암 인걸(休菴仁傑)의 후예로 수당 낙규(修堂樂 奎)의 아들이다. 1894년(高宗 31년) 아산면 반암(盤岩) 출생. 동경 상과대학을 졸업하고 연희전문 학교 교수로 한국사회경제사의 대가이다. 경성대학법문학부장․학술원초대원장․신민당 당수를 지내 고 저서로 조선사회경제사朝鮮社會經濟史 조선민족의 진로 등이 있다. 興城誌
n 백남혁(白南赫) 본관은 수원(水原)이며 1905년(光武 9년)에 성내면 부덕리 엄동(奄洞)에서 출생하여 1982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빈농(貧農)에서 태어났지만 신학문에 뜻을 두어 고창고등보통학교(高敞高等 普通學校)를 거쳐 일본 동경농업대학(東京農業大學)을 마쳤다. 근촌 백관수(芹村白寬洙)의 권유로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 취직했다가 그만두고 황해도 신천농고(信川農高)에 재직했다가 광복이 되자 농정으로 복귀하여 미군정청 농물과장(美軍政廳農物課長)과 전북농무국장(全北農務局長)을 역임했고 현 전북대학교 농과대학의 전신인 이리농대(裡里農大)가 설립되자 그곳으로 직장을 옮겨 농대학장을 맡으면서 이리농고교장을 겸임하여 심혈을 기울여 후진 육성에 힘을 썼다. 그는 정년퇴임 후에도 향리 이리에 노인대학(老人大學)을 설립하여 경로사상을 고취하였고 시 민사회의 질서 확립에 헌신하여 향민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그가 세상을 떠나자 이리시에서는 최 초로 사은비(謝恩碑)를 세웠다. 全北文化의 脈과 全北人物
n 백인수(白麟洙) 자는 사순(泗淳)이고 호는 갑운(甲雲)이며 관향은 수원(水原)이니 사담(沙潭) 홍원(弘源)의 후손 이다. 1856년(哲宗 7년) 성내면 덕산리(德山里)에서 출생하여 1910년(隆熙 4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통정대부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이 되었으나 선묘(先墓)사건으로 흥덕에 유배되었다. 1905 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백성기(白性基)와 함께 을사조약 반대운동을 전개하였고, 1910년 합방조 약이 체결되자 분통을 이기지 못하여 단식으로 자결을 시도했으며 끝내 유서를 남기고 칼로 목을 찔러 자결 순국하였다. 1977년 정부에서 건국표창을 추서했다. 興城誌 全北文化의 脈과 全北 人物
n 백파 이긍선(白坡 李亘璇) 전주이씨(全州李氏)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10대손으로 풍래군(豊萊君) 번(瀿)의 7대손이다. 1767년(英祖 43년) 공음면 예전리(禮田里) 시묘동(侍墓洞)에서 출생하니 아버지 송계 종환(松溪宗 煥)은 효자로 유명하다. 18세에 선운사(禪雲寺)에 들어가 맹자(孟子)를 읽으면서 불전(佛典)을 탐독하다 가 생각하기를 한 사람이 출가(出家)하여 한 가족이 왕생(往生)한다면 이보다 큰 효(孝)가 없으리라 하고 는 부모를 설득하여 선운사 시헌(詩憲)을 스승으로 받들고 연곡(蓮谷)에게서 계(戒)를 받아 스님이 되었 다. 1790년(正祖 14년) 지리산 영원암(靈源庵)의 설파(雪坡)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순창 영귀산(靈龜山) 귀암사(龜巖寺)의 설봉(雪峰)에게서 법통을 계승하니 서산대사(西山大師)의 8대 법 손(法孫)이 된다. 26세에 벌써 학도를 가르치기 시작하고, 45세에 문듯법(法)의 진체(眞諦)는 문자 밖에 있음을 깨달아 지난 날을 뉘우치고는 강(講)을 철회하고 초산(楚山) 용문동(龍門洞)에 초막을 얽어 정혜 (定慧)를 닦기 5년, 다시 청도(淸道)의 운문사(雲門寺)에 법당(法幢)을 세우고 선지(禪旨)를 강론하 니 청중이 언제나 백여명에 이르렀다. 1830년 귀암사로 옮아 법우(法宇)를 중창하고 법회를 여니 적국에서 승도가 모여 청강하므로 선문(禪門) 중홍의 종주(宗主)가 되었다. 출가한 뒤에도 부모 사모하는 정성은 쇠하지 아니하여 생전에는 공궤(供饋)를 게을리 아니하고 사후에는 정성들여 공양했으며 명당을 찾아 여러 번 이장하고 당대의 명사인 정조 부마(正祖駙馬) 홍현주(洪顯周), 좌의정 홍석주(洪錫周), 판서(判書) 김이양(金履陽), 그리고 노사 기정진(蘆沙奇正 鎭) 등에게 부탁하여 송계효행록(松溪孝行錄)을 꾸며 아버지의 효를 들추었는데, 공음면 황산(黃 山) 아래 시묘동은 백파의 아버지 송계가 시묘함으로써 붙여진 이름이다. 문장에도 뛰어나 유학자(儒學者)와 서신 왕래가 많았는데 특히 추사 김정희(秋史金正喜)와 논 쟁했던 서한은 유명하다. 추사는 백파가 달마(達磨)를 닮았다 하여 자신이 숭봉해 오던 달마상(達 磨像)을 백파에게 보내면서 찬(贊)을 지어 “기연(機緣)도 기이하다. 달마는 서쪽으로 갔는데 그 보 신(報身)이 동방에 나타났는가.” 하였고, 또 백파 비문을 지으면서 전면 글씨를 “대기대용(大機大 用)으로 대서특서(大書特書) 않으면 백파비가 될 수 없다.”하고 찬(贊)을 하여 “가난해서 송곳 꽂 을 곳도 없으나 기(氣)는 수미산(須彌山)을 제압했고, 어버이 섬기기를 부처님 섬기듯이 하여 가풍 (家風)이 아주 진실했으니 그 이름 긍선하여, 더 할 말이 없구나.” 하였다. 저서로 선문수경禪門手鏡, 귀감龜鑑을 비롯하여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 법보단경요해法 寶壇經要解, 오종강요기五宗綱要記, 금강팔해경金剛八解鏡, 선요기禪要記, 선문염송기禪門 拈頌記 등이 전한다. 탑(塔)을 문인들이 선운사 부도전(浮屠殿)에 세우고, 영정을 장단(長湍)의 화 장사(華藏寺)에 봉안했으며, 추사가 짓고 쓴 비(선운사 부도전)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湖南人物 志 道德淵源 禪雲寺白坡碑로 본 白坡와 秋史
n 현민(白賢民) 자는 경산(景山)이고 관향은 수원(水原)으로 충숙공(忠肅公) 인걸(仁傑)의 손자이며, 승지(承旨) 유함(惟咸)의 아들이다. 1583년(宣祖 16년)에 출생하여 1654년(孝宗 5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1624년(仁祖 2년)에 무과(武科)에 올라 벼슬이 부사(府使)에 이르렀고,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 亂)을 당하자 안주수장(安州守將)으로 있다가 호군의 포위망을 뚫고 강화도의 행재소(幸在所)에 복명하니 왕이 그 용맹을 가상히 여겨 포상으로 비단 두 필을 내리고 양호주사(兩湖舟師)를 삼으 니 가리진(加里鎭)에 있는 전함과 군기를 수리하여 잘 대비했다. 그 뒤 갑산(甲山)군수가 되어 그 곳 장정들에게 글을 배우게 하여 문치(文治)의 공을 이루었고, 서천(舒川)군수를 마지막으로 고향 에 돌아왔다. 興城文獻錄 全國邑誌
n 백홍원(白弘源) 자는 이중(伊重)이요 호는 사담(沙潭)이며 관향은 수원(水原)이니 휴암 인걸(休庵仁傑)의 증손 이요 부사(府使) 현민(賢民)의 셋째 아들이다. 1620년(光海君 12년)에 성내면 부덕리(富德里)에서 출생하여 1674년(顯宗 15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남달랐으며 15세 때 학문에 뜻을 두고 경사자집(經史子集)을 숙독했는데 모두 율곡(栗谷)의 독서법을 따랐다. 또 심 경心經을 비롯하여 근사록近思錄 이정전서二程全書 주자대전朱子大全을 탐구한 뒤 손수 역학도易 學圖를 만들어 설명을 붙였다. 그는 김집(金集) 유형원(柳馨遠) 권극중(權克中) 등과 교유했는데 그 들은 모두 그의 수양된 행실과 학문의 조예가 독실한 점에 경복(敬服)했다. 1660년(顯宗 元년) 41세의 늦은 나이에 사마시(司馬試)에 오르고 문집 사담선생유고沙潭先生遺稿 3권 1책이 1912 년에 간행되었다. 興城文獻錄 全北文化의 脈과 全北人物
n 변성온(卞成溫) 자는 여윤(汝潤), 호는 호암(壺巖), 관향은 초계(草溪)이니 직제학(直提學) 효문(孝文)의 후손이 다. 1540년(中宗 35년) 고창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남다른 점이 있었고 부모에게 효성하며 동기 간에 우애했다. 집이 가난했으나 학문을 좋아하여 장성에 있는 하서 김인후(河西金麟厚)를 찾아가 배웠는데 소학을 배우고는 성현의 모범이 모두 이 글에 있다고 잠심역행(潛心力行)하였다. 또 성품이 검박하여 항상 폐양자를 쓰고 걸어서 장성을 왕래했다고 한다. 항상 구용(九容)에 벗어난 행동을 하지 않았고, 천리지행(踐履之行)은 하서 문하에 단연 제일이었다. 또 퇴계(退溪)에게 나아 가 배웠고 사암(思庵),우계(牛溪), 송강(松江)과도 도의로 사귀었다. 문달(聞達)을 구하지 않고 호 암(壺巖) 밑에 초당(草堂)을 짓고 만년을 유유히 보내다가 1612년에 세상을 뜨니 월계사(月溪祠) 에 향사했다. 「奇挺翼撰 行狀」 「黃胤錫撰 傳」 「奇宇萬撰 墓碣銘」 壺巖實記 牟陽誌 高敞絞誌
n 변성진(卞成振) 자는 여옥(汝玉), 호는 인천(仁川), 호암 성온(壺巖成溫)의 아우로 1549년(明宗 4년)에 출생했 다. 형을 따라 하서(河西) 퇴계(退溪)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학행이 높아 참봉을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형과 함께 호암(壺巖) 밑에 은거(隱居)하였다. 집 앞에 산이 있는데 이름은 덕산 (德山)이고 집 아래 내가 있는데 이름은 인천(仁川)이다. 대지팡이 짚신으로 주변을 소요하여 가난 한 것을 편안히 여기고 도를 즐겨하였는데 성품은 형과 달라 호암은 온후원각(溫厚愿慤)해서 불구 문달(不求聞達)하였고 인천은 강의강개(剛毅慷慨)했기 때문에 집에 있으면서도 항상 나라를 근심 하고 가끔 시폐(時弊)를 개진하기도 했다. 1623년에 세상을 떴고 월계사(月溪祠)에 향사되었다. 仁川遺稿 牟陽誌 高敞校誌
n 서경춘(徐景春) 초명은 연(渷)이고 자는 호원(浩源)이고 호는 충효재(忠孝齋)이며 관향은 달성(達成)이니 증공 조판서(贈工曹判書) 호(浩)의 아들이다. 1592년(宣祖 25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장성(長城)의 남문 에서 창의하고 군량미를 무려 3만섬이나 임금이 있는 행재소로 운반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양친과 아내가 순절한 소식을 듣고 고향에 돌아와 3년의 시묘를 살면서 지성을 다하니 나라에서 호조판서(戶曹判書)가 증직되고 유림들이 장성에 창의비각을 건립했다. 興城誌
n 서일남(徐馹男) 자는 치원(致遠), 호는 모의재(慕義齋), 본관은 이천(利川)이니 진사 초당 응성(草堂膺星)의 손 자이다. 정묘호란(丁卯胡亂)에 모의(募義)하였으나 화의가 성립되니 돌아와 두문사적(杜門謝跡)했 고 병자호란에 늙고 병들어 의거에 참여 못하고 통탄하다가 세상을 떠나니 뒤에 벽산사(碧山祠)에 향사했다.「閔耆顯撰 行狀」 「縣監 金重泰撰 墓誌銘」 全北院字誌 高敞文獻通覽 牟陽誌 湖南人物志
n 서영상(徐永詳) 자는 덕보(德甫), 본관은 이천(利川)이니 증판서(贈判書) 효당(孝堂)의 후손으로 진사 경순(景 恂)의 손자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강개한 기질을 타고나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 다.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초토사(招討使) 고경명(高敬命)이 금산(錦山)에서 패전하여 전몰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의병과 가동(家僮) 20여 명과 장정 10여 명을 인솔하고 진주로 달려가다가 도중에서 적을 만나 많은 참획을 했으나 진주성이 함락됨을 듣고 돌아왔다. 湖南節義錄 牟陽城 의 얼
n 서정주(徐廷柱) 호는 미당(未堂), 본관은 달성(達城), 1915년 부안면 선운리(仙雲里) 질마재에서 출생했다. 중앙불교전 문학교를 나와 동아일보 문화부장, 문교부 예술과장을 거쳐 서라벌예술대학과 동국대학 교수, 한국문인협 회 부이사장, 예술원 회원 등을 역임하고 한국어대사전韓國語大辭典 편찬에 참여했다. 시인부락 동인으 로 문단생활을 시작하여 화사집花蛇集에서는 원인 모를 죄의식으로 스스로를 종의 아들인 죄인 으로 규정하고 귀촉도歸蜀道에서는 불교적 인연설과 전통적 한국정신을 결합시켰고, 신라초新 羅抄에서는 불교사상을 한층 심화시켰으며, 동천(冬天)에 이르러 더욱 승화시켰는데 시선(詩仙) 이라고까지 일렀고 국화옆에서는 명작으로 애송되고 있다. 1955년에 자유문학상을, 1962년에 5․16 문학상을 받았고 저서로 서정주시선, 시문학개론, 서정주시문학전집 등이 있으며, 선운 사에 시비(詩碑)가 서고 고향 질마재에 생가(生家)를 보존하고 그 옆에 미당시문학관(未堂詩文學 館)을 세웠다. 韓國語大辭典
n 서 호(徐 浩) 일명 우(祐)이며 자는 덕기(德器)이고 호는 죽림(竹林)이며 본관은 달성(達城)이니 대제학(大提 學) 후(厚)의 손자이다. 현릉참봉(顯陵參奉)을 지냈으며, 성품이 강개(慷慨)하고 대절(大節)을 지녔 다. 1592년(宣祖 25년) 임진왜란을 당하자 아들 연(渷)이 창의하여 공훈을 세웠으며 그는 부인과 함께 왜병의 예봉을 피하여 흥성으로 내려왔는데 사진교(沙津橋)에 이르자 왜적 수십명과 만나게 되어 분연(奮然)히 싸우다가 순절했고 부인 동래정씨(東萊鄭氏)와 자부 제천김씨(堤川金氏)도 함께 세상을 떠났다. 나라에서 이 사실을 듣고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증직했으며 후인들이 이 다리를 맹간교(盲看橋)라 불렀으니 그러한 분들을 죽인 것은 눈 먼 놈들의 짓이란 뜻이다. 興城誌 牟
陽城의 얼
n 서홍도(徐弘渡) 자는 여즙(汝楫) 또는 대제(大濟), 본관은 이천(利川)이니 진사 응성(應星)의 아들로 1543년(中 宗 38년)에 출생했다. 효성이 지극하여 친상(親喪)에 여묘하고 임진왜란에 오봉 김제민(鰲峰金齊 閔) 등 동지 수백인과 같이 장성 남문 밖에서 창의(倡義)하여 싸우다가 함께 순절(殉節)하니 첨정 (僉正)에 제수하고 뒤에 장성 오산사(鰲山祠)와 고창 벽산사(碧山祠)에 향사되었다. 「朴光玉撰 行 狀」「徐鳳翎撰 墓誌」 「吳駿善撰 墓碣銘」 湖南節義錄 牟陽誌 湖南人物志
n 석전 박한영(石顚 朴漢永) 불법명은 정호(鼎鎬), 한영은 자이고 당호는 영호(映湖)와 석전(石顚), 본관은 밀양(密陽)이니 1870년(高宗 7년) 완주군 초포면(草浦面) 조사리(鳥沙里)에서 출생했다. 일찍 유교 경전을 배우고 19세에 완주 위봉사(威鳳寺) 김금산(金錦山)에게 나아가 스님이 되어 21세에 백양사 운문암(雲門 庵) 환응(幻應)에게서 사교(四敎)를 받았다. 23세에 순천 선암사(仙巖寺) 경운(擎雲)에게서 대교(大敎)를 받고, 26세에 순창 귀암사(龜巖寺) 설유(雪乳)의 법통을 이으니 설파(雪坡)의 7세법손, 백파(白坡)의 4세법손이 된다. 백양사, 해인사, 법주사, 화암사, 범어사, 석왕사 주지를 지내고 불교전문학교 교장, 태고 조계종(太古曹溪宗) 교정 (敎正)으로 추대되어 17년간 서울 개운사(開雲寺)에 거처하면서 많은 불교도를 제도적으로 육성했 다. 만년에는 내장사에 들어가 선(禪)과 저술에 몰두하다가 1948년 입적(入寂)하니 수(壽)는 79 세, 법랍(法臘)은 67이었다. 스님의 호 석전(石顚)은 추사 김정희(秋史金正喜)가 석전(石顚) 만암(曼庵) 등 네 폭의 글씨를 백파에게 써 주면서 후일 법손 중에 득도(得道)한 이가 나오거든 이를 주라 하여 설유에게 전해져 얻어진 것이다. 선운사 부도전에 사리탑(舍利塔)이 서고 부도비(浮屠碑)가 성균관대학교 교수 성낙훈(成樂薰) 찬으로 건립 되었다. 당시 제1학승(學僧)으로 시와 글을 잘하여 석전시초石顚詩炒, 석전수필石顚隨筆, 석 림초石林草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全北의 뿌리 成樂薰撰 華巖宗主映湖堂大宗師浮屠碑銘
n 설파 이상언(雪坡李尙彦) 전주이씨(全州李氏) 효령대군(孝寧大君) 11대손으로 태영(泰英)의 아들이다. 1707년(肅宗 33 년) 무장 고을에서 출생하여 19세에 선운사에서 희섬(希暹)에게 득도(得度)하여 스님이 되니 선계 (禪系)로는 서산대사(西山大師)의 7대 법손(法孫)이 된다. 삼승 오교(三乘 五敎)에 통달하고 화엄경(華嚴經)에 더욱 정통하여 청량찬초(淸涼撰抄) 중에 소 과(疏科)가 드러나지 않은 것을 찾아 해석하여 그림으로 표시하고, 또 해인사(海印寺)에 있으면서 대경(大經)을 초(抄)한 가운데 인용된 것이 서로 틀린 곳을 교정하여 간행했다. 금강산(金剛山), 묘향산(妙香山), 두류산(頭流山)에서 연수하고, 1770년 징광사(澄光寺)가 불타 화엄경(華嚴經) 판본 80권이 소실되어 다시 새기는데 애매한 곳을 구송(口誦)으로 보충했고, 영각 사(靈覺寺)에 우거하다가 하루는 사주(寺主)에게 “절을 옮기지 않으면 수재(水災)로 무너지리라.” 하더니 얼마 뒤에 홍수가 나서 절이 무너지니 사람들이 그의 지견에 감탄했다. 만년에 지리산 영 원사(靈源寺)에서 십년 동안 염불로 수도하다가 85세에 졸하니 저서로 구현기鉤玄記가 있다. 道德淵源湖南人物志
n 성경수(成卿修)
자는 보현(輔賢), 호는 만취(晩翠), 본관은 창녕(昌寧)이니 송재 무조(松齋武祚)의 증송이고 참 서관(參書官) 영일(永鎰)의 아들이다. 1875년(高宗 12년) 해리면 송산(松山)에서 출생했다.
성재
기삼연(省齋奇參衍)에게 배우고 송사 기우만(松沙奇宇萬)을 종유(從遊)하여 학문이 깊고 행의가 돈 독했는데 명리(名利)를 구하지 아니하고 정사(精舍)를 지어 학문을 강론하니 사림(士林)이 추축(追 逐)했다. 효(孝)가 지극하여 부모 섬김에 몸과 뜻을 함께 받들었고, 수 년을 시탕(侍湯)하면서 오물(汚 物)까지도 손수 치워 더러움을 남에게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상사에는 연로(年老)하고 와병 중 임에도 삭망을 당하면 궤연 받들고 성묘 드리는 일을 부액(扶腋)을 받으면서도 힘써 행했고, 선대 의 묘에 재실을 짓고 비를 세우고 제전(祭田)을 마련했으며, 갑자년(甲子年) 큰 흉년에 곡식을 풀 어 구휼(救恤)을 하여 송덕비(頌德碑)가 성송면 학천(鶴天), 해리면 하련(下連)에 섰다. 스승 성재가 의병을 일으키매 공이 나아가려 했으나 성재가 노친(老親)이 계시는 것으로 해서 만류하매 의금(義金)과 의곡(義穀)을 많이 내어 의병청(義兵廳)에 보냈다. 만취유고晩翠遺稿 4권 이 간행되고 송림영당(松林影堂)에 초상을 받들다가 송양사(松陽詞)에 배향했다. 茂長校誌 湖南 人物志
n 성무조(成武祚) 자는 군경(君敬), 호는 송재(松齋), 본관은 창녕(昌寧)이니 문효공(文孝公) 사달(士達)의 후손으 로 만회당 윤철(晩悔堂胤轍)의 아들이다. 1778년(正祖 2년) 해리면 송산(松山)에서 출생했다. 천성 이 효성스러워 어려서 맛있는 음식을 보면 입에 넣지 않고 부모에게 바쳤고, 아버지의 병환에 하 늘에 빌고 단지(斷指)를 했으며, 어머니의 상사에 여묘(廬墓) 3년을 하여 무덤 앞 곡읍(哭泣)하는 곳에 혹한(酷寒)에도 눈이 먼저 녹았다. 제삿날에는 노년(老年)에도 반드시 소(素)를 하여 음주(飮 酒)를 아니하고 꿇어 앉아 웃지를 않았다. 학문은 아버지에게 배워 일찍 성취했고, 조용한 곳에 정자를 지어 후생(後生)을 계도하며 일향 (一鄕)의 선비와 시를 짓고 도의(道義)를 강마(講磨)했으니, 참판(參判) 민병승(閔丙承)은 기(記)를 하여 “산업에 종사 아니하고 청류정(聽流亭)에 은거(隱居)하여 책이 손에서 떠나지 않았으며, 문자 질(門子姪)과 향자제(鄕子弟)로 배우는 이가 방에 가득했는데 순순히 타일러 가르쳐 성취한 이가 많았다.”고 했다. 고종(高宗) 때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이 공의 효(孝)를 조정에 품계(稟啓)하여 정려(旌閭)가 내리고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되었다. 유고(遺稿)가 전하고 송양사(松陽祠)에 배 향되었다. 高敞院宇誌 茂長校誌 湖南人物志
n 성이심(成以心) 자는 덕성(德盛), 호는 반곡(盤谷) 또는 청화재(淸和齋), 관향은 창녕(昌寧)이니 제학(提學) 대용 (大庸)의 후손이다. 1682년(肅宗 8년) 나주에서 출생하여 고부땅 부안에 이거하여 만년을 보냈는 데 후진들을 많이 가르쳤고 특히 주역(周易)에 조예가 깊었으며, 유저(遺著)에는 인역人易 천인편天 人篇 등 6권 3책이 세상에 전한다. 「李磊撰 盤谷成先生行狀」 「金章煥撰 盤谷成先生墓碣銘」
n 소 부(蘇 溥) 자는 여흡(汝洽), 호는 절재(節齋), 본관은 진주(晋州)이니 진사(進士) 희철(希轍)의 손자이다. 1603년(宣祖 36년) 무과에 급제하여 좌부장(左部將)이 되었는데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 나 적을 토벌하다가 평양 저탄(瀦灘)에서 순절(殉節)하니 진무원종훈(振武原從勳)에 책록되어 녹권 (錄券)이 내리고 영모(影貌)를 하사받았다. 茂長誌 湖南節義錄 湖南人物志
n 손기락(孫基洛) 초명은 광인(光仁) 또는 기영(基榮)이고 자는 도진(道振)이며 호는 월호(月湖)이고 본관은 밀양 (密陽)이니 대사간 세옹(世雍)의 후손이고 중추부사 장우(章友)의 아들이다. 1858년(哲宗 9년) 심 원면 월산에서 출생하여 1916년 세상을 떴다. 면암 최익현(勉菴崔益鉉)과 간재 전우(艮齋田愚)를 스승으로 섬겨 학문이 깊었고 맹자삼락(孟子三樂)의 뜻을 취하여 서재에 삼락당이라 편액하고 그 곳에서 학문을 하고 제자를 가르쳤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제수되고 다시 비서원승(秘書院丞)을 내렸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나라 걱정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면암의 옥천의거(玉川義擧)에 참여하고 을사늑약(乙巳勒約)에 통곡을 했으며 경술국치(庚戌國恥)에 두문자정(杜門自靖)했고, 고종(高宗)이 승하하자 월산(月山) 정상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을 하니 사람들이 그곳을 망곡대(望哭臺) 라 했다. 월호집月湖集 9권 4책이 간행되었다. 高敞의 儒學 茂長校誌
n 손익도(孫益道) 자는 덕수(德叟), 호는 야은(野隱), 본관은 밀양(密陽)이니 광리군(廣理君) 긍훈(兢訓)의 후손으 로 문과(文科) 봉(琫)의 손자이고 1687년(肅宗 13년)에 출생하였다. 노봉 민정중(老峰閔鼎重)에게 수학하고 충용(忠勇)으로 알려졌는데 1728년(英祖 4년) 정희량(鄭希亮)의 난에 김재휘(金再輝)․김 인하(金仁夏)․최언당(崔彦曭)과 관기(官妓) 애룡(愛龍) 등으로 더불어 적괴(賊魁) 몽필(夢弼)을 해리 면 동백정(冬栢亭)으로 추격하여 적당(敵黨) 성징(成徵)을 포획하고, 적의 정세를 탐지하여 죽도 (竹島) 갈대밭에 숨어 있는 몽필과 아들 수관(帥寬)을 생포한 공으로 상훈(賞勳)을 받았다.
절충
장군(折衝將軍)에 올라 순장(巡將) 겸 오위도총부총관(五衛都摠府摠管)을 지냈다. 湖南節義錄 湖南人物志
n 송 곤(宋 鵾) 자는 충운(沖運)이고 호는 이락당(二樂堂)이며 관향은 문경(聞慶)이니 참봉(參奉) 언박(彦博)의 아들이다. 1544년(中宗 39년)에 흥덕에서 출생하여 1620년(光海君 12년)에 졸하였다. 그는 어려 서부터 호협한 기상이 있어서 남에게 굽히지 않았고 원대한 뜻을 갖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1592 년(宣祖 25년) 그가 49세 때 임진란이 일어나자 분연히 일어나 근왕병이 되어 어가(御鴐)를 의주 에서 호위하였다. 왜군과 여러 번 싸워 공을 세웠으므로 왕이 그에게 공조좌랑(工曹佐郞)과 정랑 (正郞) 그리고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 등을 특별히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흥덕 사호(沙湖) 에 정자를 짓고 이락당(二樂堂)이다 이름했다. 그 뒤 수직(壽職)으로 가선(嘉善)에 오르고 정묘난 때도 옷과 양곡을 모아 임금에게 보냈다. 興城文獻錄
n 송수중(宋守中) 본관은 문경(聞慶)이며 세종 때 흥덕현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품이 호매하고 기골이 장대하였 으며, 어려서부터 큰 포부를 가졌고 효우가 돈독하였다. 학문에 진력하여 1441년(世宗 23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통훈대부 흥위위 부호군(興威衛副護軍), 병조좌랑(兵曹佐郞) 등을 역임했고, 1455년 세조(世祖)의 등극에 조력하여 수충위사 동덕좌익 원종공신(輸忠衛社同德佐翼原 從功臣)에 책록되었다. 그는 당시의 석학 이석형(李石亨), 양성지(梁誠之), 이예(李芮), 김수온(金守 溫),. 김국광(金國光) 등 동년방(同年榜)과 도의로 교유하였다. 興城誌 韓國故事大典 全北文化 의 脈과 全北人物
n 신 씨(申 氏) 장사(長沙;茂長) 사람 김희상(金熙常)의 아내이다. 어버이를 지성으로 섬겨 출가한 뒤에도 사모 해 마지 않았는데 어머니가 병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유아를 업고 가서 주야로 간호하는 중에 어 느 날 불이 나 집이 타는데 어머니와 유아가 다 방안에 있었다. 신씨가 불 속에 뛰어들어 유아를 버리고 어머니를 업고 나왔으나 신씨도 불에 타 어머니가 먼 저 죽고 신씨도 따라 죽었는데, 절명하기에 앞서 어머니를 구하지 못한 것으로 하늘을 부르짖고 통곡했다. 이 일이 알려지매 나라에서 정려(旌閭)했다. 興城圖書 湖南人物志
n 송태회(宋泰會) 자는 평숙(平叔)이고 호는 염재(念齋)이며 본관은 여산(礪山)이니 부원군 서(瑞)의 후손으로 긍면(兢 勉)의 아들이다. 1872년(高宗 9년) 전남 화순에서 출생하여 1918년 47세 때 부안면 오산학교에 재직했 고 1922년 51세 때 당시 교장 양태승(梁泰承)과 함께 지역 유지들을 설득하여 고창교보를 설립하여 역 사․한문․서화 등을 가르쳤으며 1940년 고창읍 교촌에서 세상을 뜨니 향년 69세였다.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써서 6세 때 쓴 「녹괴서실綠槐書室」이란 글씨를 중국 원세개(袁世凱)가 보고 천동(天童)이라 칭찬했고 10세 때 한산 민종묵(翰山閔鍾黙)이 중국에 사신갈 때 따라갔는데 연경(燕京)의 서예가 석범 진연서(石梵陳衍庶)가 그의 글씨 끝에 “송(宋)나라 4대가의 필력을 얻어 진인(晉人)의 풍치가 있다”고 써 주었다. 숙부 수면(修勉)에게 서화를 익히고 조소아(趙小雅)에게 서법과 문장을 습득하여 16세에 동몽진사가 되고 29세에 박사(博士) 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시문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시를 지으면 언제나 장원을 하여 당시에 시서화 삼절(詩書畵 三絶)로 칭했다. 원세개가 귀국할 때 성균진사 3인이 전송사로 배행했는데 연경에 들어가 그곳 명 사와 문묵(文墨)을 연마하고 돌와왔다. 저서로는 염재유고念齋遺稿가 있다. 高敞의 儒學
n 송현도(宋顯道) 자는 양좌(良佐)이고 호는 근촌(芹村)이며 본관은 문경(聞慶)이니 이요당 곤(二樂堂鵾)의 후손 이고 구(球)의 아들이다. 1662년(顯宗 3년)에 성내면 조동(槽洞)에서 출생하여 1714년에 세상을 떴다. 할아버지 밑에서 독공을 하여 통감과 사서삼경을 통독하여 신동으로 이름났고 17세 때 비 로소 강령 신찬(康翎申纘)의 문하에 나아가 수업했는데 박학다식한 관곡 최서림(寬谷崔瑞林)과 교 유하여 학문의 폭을 넓혔다. 18세 때 현의 백일장과 향시(鄕試)에 장원을 하고 19세 때 한성의 육백시(六百試)에 뽑혔으며 20세 때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유폐되자 생원 조명선(趙明善)과 함께 돈령부(敦寧府)에 봉장(封章)을 올려 항의했고 21세에 생원시에 합격했다. 세상 사람들이 과거에 연연할 때 그는 위기(爲己)에 힘써 대학과 주자서朱子書를 탐독했고 선현들이 인심(人心) 도심 (道心)을 중시하여 심(心)을 일신상의 주인으로 여겨 감히 심(心)자에다 한 마디도 더한 이가 없었 는데 그는 처음으로 심신(心腎) 두 가지를 내세워 도학의 근본을 삼았으니 콩팥(腎)은 몸의 주인 이고 염통(心)을 만화(萬化)의 근원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의 당실명서(堂室銘序)에 “당(堂)이라 이 른 것은 심(心)이요 실(室)이라 이른 것은 신(腎)이다.” 하였고 태극명서(太極銘序)에서도 신과 심 을 시종 언급하였다. 간재 전우(艮齋田愚)가 서문을 하여 근촌집芹村集 4권 1책이 간행되었다. 高敞의 儒學
n 신용욱(愼鏞頊) 호는 청하당(晴廈堂)이고 관향은 거창(居昌)이니 1901년(光武 5년)에 흥덕면 사천리(沙川里)에 서 태어나 1962년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휘문고보(徽文高普)를 졸업한 뒤 일본 소율 비
행학교(小栗飛行學校)를 22세 때인 1922년에 졸업하고 한국 최초의 일등 비행사가 되었다. 그는 다시 일 본의 동아항공전문학교(東亞航空專門學校)를 거쳐 미국 실라 헤리콥터 학교를 졸업하여 국제적 조종사가 되었다. 그 뒤 여의도(汝矣島)에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학교를 설립하였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아 대한국민항공사(K.W.Y)를 설립하여 민간 항공을 개척하였고 정계에 투신하여 제2, 제3대 민의원으로 고창 지구에서 당선되었다. 그는 의원 당시 고창 지방의 많은 사업을 이루었는데 특히 도로 개설과 저수지 축 조 등의 공적을 남겨 신림저수지 제방 중앙에 그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全北의 뿌리 牟陽城의 얼
n 신재효(申在孝) 자는 백원(百源), 호는 동리(桐里), 본관은 평산(平山)이니 광흡(光洽)의 아들로 1812년(純祖 12년)에 출생했다. 재질이 비범했고 처세에도 능란했다. 초년엔 가사에 힘썼고 중년 이후에 국악 에 뜻을 두어 그때 행해지던 판소리 열두 마당을 개작하여 여섯 마당으로 사실성과 해학성을
곁
들이어 법에 맞도록 하고 수많은 광대 명창을 길러내니 창극 발전에 그 공로란 지대한 것이다. 오 위장(五衛將)이라 부르는 건 그가 받은 관직명이다. 효성이 있었고 신의로 벗을 사귀었으며 흉년 에는 기민(飢民)을 구휼하고 또 사재를 털어 명창을 길러냈다. 판소리의 이론 수립을 위해 광대가를 지어 인물․사설․득음(得音)․너름새라는 4대 법례를 마련 하였으며, 만년에는 춘향가․심청가․박타령․토별가․적벽가․변강쇠가의 판소리 여섯 마당 을 골라서 그 사설을 개작하고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구성을 갖추게 하였다. 판소리 사설 외에도 30여 편의 단가 혹은 허두가(虛頭歌)라고 하는 노래도 지었다. 자신의 경 험에서 우러난 재산을 모으는 방법을 다룬 치산가(治産歌), 서양의 침입이라는 시대적 시련을 걱정하는 십보가(十步歌), 괫심한 서양(西洋) 되놈, 경복궁 낙성공연을 위해 마련한 방아타령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판소리 광대를 모아 생활을 돌보아 주면서 판소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명창이 진채선(陳彩仙)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명창을 등장시켰다. 1884년에 세상을 뜨니 고창에 그의 유적비가 서고 그를 기념하는 국악당이 세워졌으며 동리대상(桐里大賞)을 제정 했다. 고창읍 읍내리에는 신재효 생가가 중요민속자료 제39호로 지정되었으며 동리국악당이 설립 되어 운영되고 있다. 全北의 뿌리 湖南人物志 高敞郡의 歷史文物
n 신현중(申絃中) 자는 경일(景一), 호는 율봉(栗峰), 미산자(薇山子)라고도 하며 본관은 평산(平山)이니 사간공 (思簡公) 호(浩)의 후손으로 오정 한균(梧汀漢均)의 아들이다. 1877년(高宗 14년) 아산면 동촌(東村) 출생. 범 얼굴에 용 눈을 하여 힘이 장사였고 기개가 강개(慷慨)했다. 선운사 내원암(內院庵)에서 공부하고 송사 기우만(松沙奇宇萬)에게 수학하여 문장과 글씨 가 뛰어났다. 한말 어지러운 때를 만나 성균박사시(成均博士試)에 합격하고도 당시에 60세 이상만 서용하 고 제외되었으며, 뒤에 대성문학원(大成文學院) 강사에 추천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친환(親患)에 열지(裂指)하고 상사를 당해서는 여묘(廬墓)했으며 복을 벗은 뒤에는 제자들과 함 께 경전(經傳)의 깊은 뜻을 강구하고 의례(儀禮)의 의심나는 곳을 고정(考訂)했다. 1918년 융희황 제(隆熙皇帝)와 영친왕(榮親王)에게 상소하여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개진하고 통고문(慟告文)을 지 어 동포에게 고했으며, 고종황제(高宗皇帝)가 승하하자 덕산(德山 : 箕山祠 뒷산)에 단을 쌓아 통 곡하고 도내 유림에게 윤고문(輪告文)을 돌려 복수를 도모하다가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평량자(平 凉子 : 패랭이)를 쓰고 상인(喪人)의 모습으로 평생을 지냈다. 영광(永光)과 서산(西山)의 두 단을 쌓아 단군(壇君) 기자(箕子)와 백이(伯夷) 숙제(叔齊)를 제 사지내고 기산사(箕山祠)를 일으켜 충효 제현(忠孝諸賢)을 받들며 기동강당(箕東講堂)을 세워 강학
(講學)을 하고 선비들과 회동했는데, 백이 숙제 단비(壇碑) 전면에 태극도(太極圖)를 새기고 강당 문 밖에 돌기둥을 세워 「단기강산(檀箕江山)」 「한선일월(韓鮮日月)」이라 크게 써서 각한 것으로 왜경(倭警)의 제재가 심했으나 의리로 항변하여 끝내 굴하지 않았다. 문집 5권이 간행되고 기산사 (箕山祠)에 배향되었다. 「栗峰先生講學碑」 茂長校誌
n 신후삼(愼後三) 자는 이선(而先)이며 관향은 거창(居昌)이니 감역(監役) 원만(元萬)의 계자(系子)이다. 1683년 (肅宗 9년)에 출생하여 1735년(英祖 11년)에 졸했다. 그는 1717년(肅宗 43년)에 문과(文科)에 급 제하여 장령(掌令)이 되었고 조금 지나 진주목사(晋州牧使)로 승진되었는데 그때 그 지방에서 도 적이 일어 민심이 흉흉하였다. 그는 병사와 군량미를 조달하여 평정했으나 도리어 그를 무함하여 7년의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는 의표(儀表)가 영특하고 지조(志操)가 청고했으며 명절(名節)을 스스로 숭상했으 므로 벼슬이 높고 학문이 깊은 사람들도 그를 존경하였다. 1725년과 1723년의 흉년을 당하자 그는 가산 을 기울여 향민을 구제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활천인군자(活千人君子)라 불렀다. 全北文化의 脈과 全 北人物
n 안순서(安順瑞) 일명(一名)은 중부(重富), 자는 천여(天與), 호는 취암(就庵), 본관은 죽산(竹山)이니 호조참판 (戶曹參判) 초(迢)의 6세손으로 1511년(中宗 6년) 출생하였다. 위인이 영매(英邁)하고 기절(氣節) 이 강개했으며, 일찍이 퇴계 이황(退溪李滉) 문하에서 문명(文名)이 있었다. 뒤에 무장면 덕산(德 山)에 우거하여 정사(精舍)를 지어 사림(士林)과 도학을 강론하고 후진(後進)을 가르치니 학행(學 行)으로 추천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영달(榮達)에 뜻이 없어 나아가지 않았다. 1556년(明宗 11년) 조정에서 직언(直言)을 널리 구하므로 상소하여 시폐(時弊)를 말하고 끝으 로 “유관(柳灌) 등 3인이 원사(寃死)한 것과 송인수(宋麟壽), 임형수(林亨秀)가 모두 죄 없이 죽고 또 그 가산(家産)을 박탈했으니 하느님이 아신다면 뒷날에 잘못한 자는 반드시 천벌을 받을 것이 요 근래에 돌연한 변고가 일어나는 것도 이 때문이라” 하였다. 감사(監司)가 공을 가두고 그 상소 를 조정에 올리매 왕명으로 공을 나포(拿捕)하여 형육(刑戮)을 가하니 이 때는 2흉(二凶;尹元衡․李 芑)과 3간(三奸;鄭順鵬․林百齡․鄭彦慤)이 용사(用事)하던 시절이었다. 선조(宣祖) 때 영의정 이준경 (李浚慶)의 계청으로 유관이 복관(復官)되면서 따라서 신원되었다. 茂長誌 湖南人物志
n 안 정(安 貞) 본관은 죽산(竹山), 참판(參判) 초(迢)의 후손이다. 무과하여 선전관(宣傳官) 의금부도사(義禁府 都事)를 역임하고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에서 전사하니 초혼 반장(招魂返葬)했으며 뒤에 벽산사 (碧山祠)에 향사했다. 牟陽誌 湖南人物志
n 안중섭(安重燮) 자는 순화(舜華), 호는 연상(蓮上), 본관은 죽산(竹山)이니 참판 초(迢)의 후손이다. 1812년(純祖 17 년)에 출생하여 1880년에 사마(司馬)하였고, 문학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유고 연상집蓮上集 6권 2책 이 간행되어 전한다. 「尹柤甲撰 行狀」 蓮上集 牟陽誌
n 안 진(安 晋) 자는 퇴보(退甫), 본관은 죽산(竹山)이니 참판 초(迢)의 6세손이다. 천자(天姿)가 괴위(魁偉)하 고 강개(慷慨)하여 지절(志節)이 높았다. 갑자(甲子) 정묘(丁卯)의 난에 사계 김장생(沙溪金長生)을 도와 본현(本縣)의 동지들과 협심하여 모의(募義) 운량(運糧)했고, 병자호란에 화의가 이루어지니 두문 사세(杜門謝世)하고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湖南丙子倡義錄 牟陽誌
n 오도원(吳道源) 초명은 태원(泰源), 자는 성원(性元), 호는 호산(壺山), 본관은 함양(咸陽)이니 사호 익창(沙湖益 昌)의 후손이다. 1835년(憲宗 17년) 아산면 죽산(竹山)에서 태어나 성재 허전(性齋許傳)의 문하에 서 성리학(性理學)을 탐구하고 예학(禮學)을 강구하여 문장과 학술로 명망을 얻고 1880년(高宗 17년) 생원(生員)에 뽑혔다. 용모가 단결(端潔)하기 옥(玉)과 같았고 성품이 엄직(嚴直)하기 가을 서리 같아 태학(太學)에 있을 때는 사우(士友)가 공의 곧고 굳음을 흠모했고, 고향에 내려와서는 흥덕의 이진사(李進士;可豊), 무안의 박진사(朴進士)와 함께 호남삼걸(湖南三傑)로 일컬었다. 茂長 誌 湖南人物志
n 오동균(吳東均) 본관은 동복(同福), 연문(然汶)의 아들로 1896년(高宗 33년) 고창 성남(城南)에서 출생하여 종 형 의균(毅均)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삼일 만세를 지휘하다가 옥고를 치렀고, 임실청년회관에서 열 린 전북기자대회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받았다. 해방 후 독립촉성회 한민당에서 활약하였다 하여 6․25동란 때 적도(赤徒)들에게 학살당했고, 뒤에 독립유공자로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高敞의 얼
n 오병수(吳秉壽) 자는 극경(極卿), 호는 수산(壽山), 본관은 함양(咸陽)이니 사호 익창(沙湖益昌)의 후손으로 흥 원(興源)의 아들이다. 1883년(高宗 20년) 아산면 죽산(竹山)에서 태어나 일찍이 종숙 호산 도원 (壺山道源)에게서 배우고 스스로 독학(篤學)하여 경전(經傳)의 깊은 뜻을 깨쳤다. 특히 심성 이기 (心性理氣)와 태극 음양 오행(太極陰陽五行)의 논설에 이르러서는 털끝만한 데까지 변석하여 앞 사람들이 발견 못한 곳을 발명함으로서 석전 이병수(石田李炳壽), 육봉 이종택(六峯李鍾宅) 같은 당시 석학들이 호남독보(湖南獨步)로 추켜올렸다. 성품이 염결(廉潔)하여 화려한 것을 싫어하고 권세를 멀리했으며, 학문은 경학(經學)을 위주로 문장은 여기(餘技)로 여겼다. 만년에 마을 남쪽 정벽(靜僻)한 곳에 재실을 지어 야귀재(夜歸齋)라 현판을 하고는 밤낮으로 강학(講學)을 하고 저술을 하니 저술로는 야귀재강학록夜歸齋講學錄이 유명하고 죽산사(竹山祠)에 배향되었으며, 사우(祠宇) 앞에 강학비(講學碑)가 섰다. 공의 야귀재소 명(夜歸齋小銘)은 도학(道學)이 깃든 작품으로 사회에 회자되었다. 胸海何時非霽月
胸海는 어느 땐들 개인달 아니던가
眼山無處不春風
眼山은 곳곳마다 봄바람 아니던가
孔肱顔巷程花柳
孔子는 팔굽베고 顔子는 陋巷에서 정자는 꽃을 찾아 버들길 걷는 중에
同樂天機活潑中
天機와 한가지로 活潑히 움직인다. 湖南人物志 壽山文集
n 오상옥(吳相玉) 자는 옥여(玉汝), 호는 송파(松坡), 본관은 함양(咸陽)이니 절암 전(節庵晪)의 손자, 진사(進士) 첨선(添 善)의 아들이다. 1634년(仁祖 12년) 상하면 송촌(松村)에서 출생했다. 미수
허목(眉叟許穆)의 문인으로
1660년(顯宗 1년)에 사마(司馬)하고 유일(遺逸)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이 되어 인현황후(仁顯王后)의 복위를 소청(疏請)하고 용담현령(龍潭縣令)으로 나가 청정(淸政)을 베풀었는데 시배(時輩)와 뜻이 맞지 않 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후진 양성으로 만년의 즐거움을 삼았다. 문인 진사 신선부(申善溥)와 좌랑 정여중(丁呂重)이 유고를 수집하여 7권의 문집을 간행했다. 茂長誌 湖南人物志
n 오세재(吳世才) 1133(인종 11)∼? 고려 중기 명종 때의 학자․문인. 자는 덕전(德全). 본관은 고창(高敞) 한림 (翰林) 학린(學麟)의 손자이며, 세공(世功)․세문(世文)의 아우이다. 명종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성격이 소루(疎漏), 준철(俊哲)하여 검속(檢束)함이 적어 세상에 용납되 지 못하였고, 친우 이인로(李仁老)가 세 번이나 추천하였으나 끝내 벼슬에 오르지 못하였다. 그는 당시 18세였던 이규보(李奎報)에게 53세의 나이로 망년지교(忘年之交)를 허락하였고, 이른바 해좌칠현 (海左七賢:江左七賢)의 한 사람으로 이인로 등과 시주(詩酒)로 즐겼다. 만년에는 외할아버지의 출생지인 동경(東京:지금의 慶州)으로 제고사(祭告使)의 축사(祝使)가 되어 역마 를 타고 가 이내 그곳에 살면서 서울로 돌아오지 않았고, 마침내 가난에 시달리다 죽고 말았다. 주역을 암송하고 다른 육경 서적을 박통할 정도로 유학 경전에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으며, 시작품도 당시에 상당한 평가를 받았으니, 이규보는 그의 시를 ‘준매경준(遵邁勁俊)’이라 하였고, 최자(崔滋)는 ‘풍섬혼후 (豊贍渾厚)’라고 평한 바 있다. 또한 글씨에도 뛰어났으니, 경기체가 한림별곡 翰林別曲 제3장에서 말 한 바, “오생․유생 양선생 위 주필경하여(吳生劉生 兩先生 偉走筆景何如)”에서 오생은 바로 오세재를 가 리킨다. 결론적으로 그는 명종시대 문신수난기를 통하여 현실에 타협 내지는 조화하지 못하고 문학과 시주에 탐닉하므로써 자신의 고민을 해소하려 한 것이다. 그러한 그에게 이규보는 나이를 떠난 진정한 벗이었으며, 이규보 역시 그의 재주를 아끼고 삶 을 애석히 여겨 「오선생덕전애사 吳先生德全哀詞」를 지어 추모하였다. 여기에서 이규보는 그를 복 양선생(濮陽先生)이라 부르고, 친구 아닌 문하생의 입장에서 사사로이 현정선생(玄靜先生)이라 시 호하여 영전에 바쳤다. 현재 전하는 작품으로는 동문선에 오언율시 2편, 칠언율시 1편이 있다. 그의 형 세문(世文)도 문학으로 이름 있고 벼슬은 동각시학(東閣侍學)에 이르렀다. 高麗史 東國 李相國集 破閑集 白雲小說 新增東國輿地勝覽
n 오의균(吳毅均) 호는 만운(晩運), 본관은 동복(同福)이니 첨절제사(僉節制使) 연기(然麒)의 아들로 1883년(高宗 20년)에 출생했다. 문행(文行)과 서예(書藝)로 이름이 있고, 왜정(倭政) 때에는 임시정부 전남북 부책(全南北副責)으로 상해 임시정부에 자금을 조달했으며, 을유 광복 후에 고창군수를 지냈다. 牟陽誌 湖南人物志
n 오익창(吳益昌) 자는 유원(裕遠), 호는 사호(沙湖), 본관은 함양(咸陽)이니 참판 치선(致善)의 후손으로 진사 인 (寅)의 아들이다. 1557년(明宗 12년) 대산면 장동(墻洞)에서 태어나 15세에 벌써 대유(大儒)의 풍 모를 갖추고 23세에 사마시(司馬試)에 뽑혔다. 성리학(性理學)에 밝고 육예(六藝)에 통했으며, 특 히 산수(算數)에 깊고 재략(才略)이 있었다.
정유재란(丁酉再亂)에 충무공 이순신(忠武公李舜臣)이 한산섬에서 싸우는데 공이 피난선 천여 척을 인솔하여 전선(戰船) 뒤에 배열하여 충무공의 외로운 군세(軍勢)를 성원(聲援)하고, 충무공의 군사들이 추위를 못 견딜 때 피난선에 타고 있는 뱃사람들을 설득하여 옷을 벗어주었으며, 솜이불 백여 채를 보내어 물에 적셔 배 위에 걸어 적의 탄환이 뚫지 못하게 했다. 군사들이 싸우다가 갈 증에 허덕이어 충무공이 어쩔 줄 모르던 차에 공이 동아(冬苽)를 배에 싣고 가서 구원하니 공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사람들이 놀랐고, 충무공은 찬탄하여 “이번 싸움에 성공한다면 그 공은 오 로지 오상사(吳上舍)의 힘이오.” 하였다. 이듬해 제원도 찰방(濟原道察訪)에 제수되고 종부시 직장(宗簿寺直長), 의금부 도사(義禁府都 事),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공조 형조의 좌랑(佐郞), 정랑(正郞)을 역임했으며 광해혼조 (光海昏朝)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심원면 월산(月山)에 정자를 지어 노년지계(老年之 計)를 세웠다. 이괄(李适)의 난에 아들 전(晪)으로 하여금 군량을
모아 근왕(勤王)하게 하고 정묘
호란(丁卯胡亂)에 또 군량을 모아 강화로 보냈다. 공이 젊었을 때 백호 임제(白湖林悌)가 공의 문 명(文名)을 듣고 더불어 선운사(禪雲寺)에서 여러 날을 놀고는 “내가 일찍이 호남에서 독보(獨步) 로 자처했는데 오늘에 그대에게 양보하노라.” 했고,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공이 거북선 제작에 참획(參劃)한 것으로 나오며 선무 원종 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 녹권이 소장되어 있다. 병조참 판 이태화(李泰和)가 서문을 한 문집이 전하고 죽산사(竹山祠)에 향사한다. 湖南節義錄 湖南人 物志 樊巖集
n 오자환(吳滋換) 자는 경안(敬安), 호는 남사(南沙) 본관은 함양(咸陽)이니 사호 익창(沙湖益昌)의 14대손으로 1895년 아산면 흥룡(興龍)에서 출생했다. 개화기 선각자로 남들이 한문이나 읽고 있을 때 공은 신학(新學)을 했고, 남들이 적치하(敵治下)에 무슨 사업을 하겠는가 하고 몸을 숨기는 때에 공은 지금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것은 교육사업이라 하여 석곡학교(石谷學校 : 당시 南興學校)를 창설하 고 고창고보 설립에 동참했다. 영광 군남면 옥슬리(玉瑟里) 해안 수백 정보를 간척하여 아미농장 (娥眉農場)이라 이름하고 경작민을 이주시켜 신흥 농촌을 건설하니 동민들이 공덕비를 세워 송모 하고 마을 이름을 남사농촌(南沙農村)이라 불렀다. 부(富)와 덕(德)을 갖추어 지역사회 빈민을 위 해 수시로 구휼하고 수차 호세를 대납했으며, 고창고보에서 학생운동을 전개하다가 투옥되어 죽음 으로 일제에 항거한 유금동(柳今童)의사는 공이 길러낸 인물이다. 석곡학교 옆 동산 묘전(墓前)에 남사오 공자환기념비(南沙吳公滋煥記念碑)와 공덕비(功德碑)가 섰다. 「南沙吳滋煥先生行錄」 석곡의 빛
n 오장환(吳壯煥) 자는 응천(應天), 호는 강재(剛齋), 본관은 함양(咸陽)이니 사호 익창(沙湖益昌)의 후손으로 1863년(哲宗 14년) 아산면 남산(南山)에서 출생하였다. 위인이 괴걸(魁傑)하여 신장이 7척이 넘고 늠 름하게 무사(武士)의 풍을 지녔는데,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되자 성경수(成卿修), 김치곤(金致 坤)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호남의병 창의대장(湖南義兵倡義隊長) 기삼연(奇參衍) 휘하 도통(都統)으로 참여하여 1907년 고창․영광․장성․부안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다음 해 기삼연이 체포되어 죽은 뒤 전해산 (全海山) 휘하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중 1909년 사무 처리를 위해 잠시 귀가했다가 왜병(倭兵) 27명 에게 포위되었다. 앞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왜병에게 목침을 집어 던지고 뒷문을 통해 길 넘는 담장 을 뛰어넘었으나 마침내 붙잡힌 몸이 되었다. 왜장은 공에게 항복하면 목숨을 살려준다고 회유했 다. 그러나 공은 “내가 너희들의 항복을 받아내려 했는데 나에게 항복하란 말이냐? 일이 실패하면 살신(殺身)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바이니 내 몸은 앗을지언정 내 뜻은 앗아가지 못하리라.” 하고는 벌떡 일어나 묶인 손으로 적장의 목을 감고 무릎으로 가슴을 걷어차자 옆에 있던 왜병이
발포하여 선혈을 뿌리고 쓰러지니 때에 나이 36세였다. 광복 후 무장에 사의사비(四義士碑;鄭時 海, 金在華, 庾敬求, 吳壯煥)가 서고 건국포장(建國褒章)이 추서되었다.
韓國義烈錄 湖南人物志
高敞의 얼
n 오 전(吳 晪) 자는 군회(君晦), 호는 절암(節庵), 본관은 함양(咸陽)이니 사호 익창(沙湖益昌)의 아들이다. 1581년(宣祖 14년) 아산면 죽산(竹山)에서 태어나 1603년 생원(生員)을 하고 1615년 문과에 올 랐다. 광해혼조(光海昏朝)에 아버지를 모시고 귀향(歸鄕)했다가 광양현감에 제수되자 무장과 거리 가 멀지 않아 봉양하기 편한 것으로 부임하였다. 이괄(李适)의 난에 친환으로 고향에 있다가 본현 (本縣)의 도유사로 의곡(義穀)을 모아 근왕(勤王)하다가 난이 평정되매 의곡을 관아에 납부하였고, 정묘호란(丁卯胡亂)에 김덕우(金德宇)와 함께 의곡을 모아 강화도로 보냈다. 뒤에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함길도 평사(咸吉道評事),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를 지내고 1632년(正祖 10년) 어버이를 위해 지방관을 자청하여 용담(龍潭)원으로 내려왔다. 다음 해 계모 의 병환으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했고, 계모의 상사 후에 아버지가 풍증을 얻어 전신이 자유롭지 못하매 공이 주야로 곁을 떠나지 아니하여 약수발과 오물 제거에 이르기까지 남에게 시키지 않았 다. 자질이 공의 노쇠함을 걱정하여 대신할 것을 청하면 눈물지으면서 “친환이 이러하니 얼마나 더 모시겠느냐? 하루 더 계시면 하루의 정성을 더할 뿐이라.” 하였다. 13개월 뒤 마침내 상을 당 하매 애훼(哀毁)하기 남다르고 날로 곡묘(哭墓)하여 병이 더쳐 상기(喪期)를 마치지 못하고 세상을 뜨니 사림(士林)이 공의 효를 기리어 죽산사(竹山祠)에 배향했다. 湖南節義錄 茂長誌 湖南人 物志
n 오 준(吳 浚) 본관은 동복(同福)이니 한림(翰林) 자귀(自貴)의 증손이다. 1444년(世宗 26년)에 신림면 외화 리에서 출생하였고, 1494년(成宗 25년)에 졸하였다. 그는 효성이 지극했는데 모친이 병으로 위독 하자 손가락을 베어 입에 주혈하여 연명하였고, 부친이 종기로 신음하자 입으로 빨아내어 낫게 하 였으며 다시 병으로 위독하게 되자 변을 맛보고 다리 살을 베어 삶아 드렸다. 상을 당하자 취령산 (鷲嶺山) 아래에 장사지내고 여막을 지어 시묘하였는데 삭망(朔望) 때면 호랑이가 사슴을 물어와 제전(祭奠)을 도왔고 근처에 샘이 없어 들을 건너 수산(秀山)에서 물을 길러왔는데 어느 날 갑자 기 천둥과 벼락이 치더니 여막 아래에 샘을 이루어 물이 솟아났다. 그 물이 맑고 깨끗하여 길러 쓰니 고을 원이 와 보고 샘 가에 돌을 쌓고 비를 세워 효감천(孝感泉)이라 각하니 그 뒤 세상 사 람들이 공을 감천 선생이라 불렀다. 그리고 감사와 어사가 와서 확인하고 장계를 올려 군자감직장 (軍資監直長)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494년(성종 25년)에 복호(復戶)와 명정(命旌)이 내리고 창효사(彰孝祠)를 세워 향사한다. 感泉集
n 오학린(吳學麟) 1009년(고려 목종 12)∼미상. 본관은 고창(高敞). 고창오씨(高敞吳氏)의 시조이다. 고려 정종 (靖宗) 때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의 문헌공도(文憲公徒)로 지공거전시(知貢擧典試)에서 급제하 여 당시 학자들이 선망하던 청요직(淸要職)인 한림태학사(翰林太學士)를 지냈다. 1057년(문종 11) 북방 국경인 압록강(鴨綠江) 일대에서 거란족의 침노가 심해 소란할 때 그 곳 사목(司牧)으로 발 탁되어 그 지방을 평정(平定)하고 민심과 생업(生業)을 안정시키는 큰 공을 세워 고창을 식읍(食 邑)으로 하사받으니, 후손들이 고창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아들 오질(吳質) 또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고, 손자 복양공(濮陽公) 오세문(吳世文)은 승
보시(陞補試)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동각시학(東閣侍學)을 지냈으며, 오세문의 형 오세공(吳世 功)과 동생 오세재(吳世才)도 당대에 이름난 학자였는데 특히 오세재는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이인로(李仁老) 등과 교우관계를 돈독히 하며 학문의 깊이를 더하였다. 오학린(吳學麟)은 문교부흥에 전력하였으며 문장이 전아(典雅)한 많은 시(詩)와 저술이 있다고 《동인문집(東人文 集)》, 《삼한귀감(三韓龜鑑)》 등에 기록이 있으나 모두 산일(散逸)되고, 《동문선(東文選)》에 장 (狀) 〈재걸 추훼 압강성교 궁구장(再乞抽毁鴨江城橋弓口狀)〉과 오언율시(五言律詩) 〈구룡산 흥 복사에 거듭 놀면서[重遊九龍山興福寺]〉가 전해질 뿐이다. 고창의 향현사(鄕賢祠), 황해도 평산 (坪山)의 죽림사(竹林祠)에 제향(祭享)되었다. 고창 사람인데 고려 중엽의 명유(名儒)이다. 진사(進 士)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고 손자 세 사람(世功, 世文, 世才)이 있었는데 다 문학으로 이 름이 널리 알려졌다. 補閑集 高麗史 新增東國輿地勝覽
n 오희길(吳希吉) 자는 길지(吉之), 호는 도암(韜庵), 본관은 나주(羅州), 1556년(明宗 11년) 출생했고, 그의 아버 지 언기(彦麒) 때 나주에서 고창으로 이거했다. 금강 기효간(錦江奇孝諫)의 문인으로 정여립(鄭汝立)과 교유하다가 여립이 율곡(栗谷)과 우계 (牛溪)를 배척함을 보고는 교의(交誼)를 끊어 버렸다.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으로 있다가 임진왜 란을 만나 태조 어용(太祖御容)과 왕조실록(王朝實錄)을 안의(安義) 손홍록(孫弘祿) 등과 함께 내 장산 은적암(隱寂庵) 용굴대(龍窟臺)로 옮기고 다시 아산(牙山), 강화(江華), 해주(海州)를 거쳐 영 변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에 보관하여 병화를 면케 하였다. 1604년(宣祖 37년)에 상소하여 시폐(時弊)를 말하니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으로 임명되고, 1610년(宣祖 2년)에 또 상소하여 치체(治體)와 진학(進學)의 요령을 말하니 평릉도(平陵道)로 옮 겨졌다. 1618년 7월에 위성공신(衛聖功臣) 종1등(從一等)에 참여하고 1619년에 허균(許筠) 등의 미움을 받아 거제도(巨濟島)로 귀양가서 1623년에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고로 도암선생문집 韜庵先生文集 3권 1책과 도동연원록道東淵源錄 8권 4책이 간행되어 전하고 금암사(琴巖祠)에 향사한다. 살던 집터를 고창향교 터로 제공하여 향교 앞에 공덕비(功德碑)가 섰다. 「黃胤錫撰 傳」 鞱庵先生文集 湖南節義錄 牟陽誌
n 오희량(吳希亮) 자는 숙명(叔明), 본관은 나주(羅州)이니 양평공(襄平公) 자치(自治)의 현손으로 증공조참의(贈 工曹參義) 언린(彦麟)의 아들이다. 임진왜란에 제봉 고경명(霽峰高敬命)이 창의한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켰다가 제봉이 금산에서 순절함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왔고, 정유재란에 가산을 기울여 군량을 모으매 조정에서 특별히 호군(護軍)을 제수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우애가 돈독하여 백씨 동지(同知) 희철(希哲)과 한 상에서 밥먹고 한 이불에서 잠 잤으며, 자질 가르치는데 법도가 있어 손수 옛 경서(經書)의 요의(要義)를 베껴 읽혔다. 병조참의 (兵曹參議)에 증직되고 대제학 송상기(宋相琦)가 행장을 짓고 이조참의 송달수(宋達洙)가 묘표(墓 表)를 지었다. 湖南倡義錄 湖南人物志
n 유경구(庾敬求) 자는 의백(義伯), 호는 입신재(立身齋), 무송인(茂松人)이니 이조판서 순도(順道)의 14세손으로 1873년(高宗 10년) 공음면 송산리에서 출생했다. 간재 전우(艮齋田愚)의 문인으로 충(忠)과 효 (孝)와 학행이 높았다. 부모를 성심으로 받들어 혼정신성을 궐한 적이 없었고 상(喪)을 당해서는 6년의 시묘살이를 했다.
충(忠)으로는 경술국치(庚戌國恥) 후 가족을 거느리고 영광 백수산(白岫山)으로 들어가 숨어 살 면서 왜경(倭警)이 호적 아니한 것으로 위협했으나 “너희들이 나라를 빼앗아 임금이 없고 백성이 없는데 어디다 호적을 하겠느냐.”하고 죽음으로 항거했다. 고종(高宗)이 승하하자 영위를 모시고 곡기를 끊은 채 통곡하기 7일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학문으로는 간재(艮齋)의 성리학을 전수받고 예(禮)에 밝았으며 대의(大義)로 사람들을 가르치매 백수산 궁벽한 데 있었어도 배우는 이가 끊이지 않았다. 광복 후 무장에 사의사비(四義士碑;鄭時 海, 金在華, 庾敬求, 吳壯煥)가 섰다. 韓國義烈錄 松沙文獻錄 湖南人物志
n 유경원(柳慶元) 자는 선장(善長), 석탄(石灘) 운(澐)의 둘째아들로 1574년(宣祖 7년)에 출생했다. 무과하여 주 부(主簿)를 지내고 1624년(仁祖 2년) 이괄(李适)의 난에 주장(主將)이 말을 듣지 않으므로 은퇴 (隱退)하였다. 뒤에 벽산사(碧山祠)에 향사했다. 全北院宇誌 高興柳氏文獻 高敞文獻通覽
n 유경현(庾敬玄) 본관은 무송(茂松),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자량(資諒)의 아들이다. 일찍이 문과에 올라 여러 벼슬을 거 쳐 1227년(高宗 14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서 국자감시(國子監試)를 관장했고, 상서좌승 지어사대사 (尙書左丞 知御史臺事)를 거쳐 우승선(右承宣)을 지냈는데, 국자감시 때 일화가 전한다. 그때 시제(詩題)가 「相如一奮其氣 威信敵國;司馬相如가 한번 기운을 떨치매 威信이 敵國에 미 쳤다」이었다. 그런데
「威信」을 「誠信」으로 잘못 썼다. 응시(應試)한 사람 가운데 그 뜻을 아는 이
가 있어 공에게 대들므로 그를 퇴장시킨 일이 있어 당시 사람들이 공의 덕에 흠으로 여겼다. 高 麗史 湖南人物志
n 유광적(柳光迪) 자는 여실(汝實), 호는 성은(城隱), 본관은 고흥(高興)이니 합간정 익하(合澗亭翊夏)의 손자이고 해종(海宗)의 아들로 1735년(英祖 41년)에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근묵(謹黙)하며 덕막이 있었고 친척에 귀현(貴顯)이 많았으나 그 문에 드나들지 않고 독서 칙행(飭行)하니 역천 송명흠(櫟泉宋明 欽)이 극찬했으며 이재 황윤석(頤齋黃胤錫)도 만시(輓詩)를 지어 찬양했다. 頤齋遺稿 牟陽誌 高敞校誌
n 유녹숭(庾祿崇) 자는 구수(龜壽), 무송유씨(茂松庾氏) 중시조이다. 고려 태사(太師) 유검필(庾黔弼)이 태조를 도와 개국 공신에 봉해지고 평산(平山)을 식읍(食邑)으로 받아 본관을 평산으로 했고, 현손 녹숭이 예종(睿宗) 때 무 송부원군에 봉해지므로서 자손이 무송에 세거(世居)하여 무송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유학(儒學)으로 벼 슬에 나아가 1099년(肅宗 4년)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고 1102년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로 옮아 지서북면병마사(知西北面兵馬使)를 거쳐 추밀원사(樞密院使) 겸 태자빈객(太子賓客), 상서좌 복야(尙書左僕射)를 역임하고 예종 때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올라 치사(致仕)했다. 동국여지승람 東國輿地勝覽에는 공을 말하여 “강직으로 칭송받아 일찍이 몸을 굽혀 남을 따른 적이 없고 비록 귀현(貴顯)함에도 의복과 제택(第宅)이 벼슬 안할 때와 같았다.”고 했고, 여사제강麗史提綱에는 “성품이 정직하여 벼슬에 있기 40년에 공정하고 충성스러움으로 스스로를 간직했다.”고 하였다. 1114년(睿宗 9년)에 졸하니 철조(輟朝 : 대신의 죽음을 애도하여 朝會를 폐하는 일) 3일을 하고 시호를 안정(安貞)이라 하였다. 高麗史 湖南人物志
n 유덕휴(柳德庥) 자는 자윤(子潤)이고 호는 삼애(三涯)이며 본관은 고흥(高興)이니 만원(萬源)의 아들이다. 1667 년(顯宗 8년)에 신림면 외화리 환산(環山)에서 출생하여 1739년(英祖 15년)에 졸했다. 그는 어려 서부터 백부 일평 필원(一萍必源)과 중부 허재 혜원(虛齋惠源)의 효행을 본받아 부모를 지성으로 섬겼고 부친이 병이 나자 백방으로 구약 시탕했으며, 북두성에 빌어 몸으로 대신하기를 기원했고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입에 주혈하여 소생케 하여 연명했으며 상을 당하자 예법대로 상을 치루 고 3년 동안 죽만 먹고 시묘하였다. 또 70세 고령에 계모의 상을 당하자 친모에 못다한 효성으로 송종지례(送終之禮)와 3년의 시묘를 행하니 사림의 공론이 일어 1722년(景宗 2년)에 효행으로 급 복(給復)의 은전이 내렸고, 1887년(高宗 24년)에 명정(命旌)되었다. 그 뒤 용강사(龍岡祠)에 향사 되며, 정려가 신림면 외화리 환산 마을에 있다. 全國邑誌興城誌 牟陽城의 얼
n 유동립(柳東立) 자는 사정(士綎), 관향은 고흥(高興)이니 군수(郡守) 춘발(春發)의 아들이다. 1577년(宣祖 10 년) 정축별시(丁丑別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부정(副正) 정랑(正郞)을 거쳐 임진왜란
때에
호성(扈聖)의 공이 있어 1등훈(一等勳)에 참여하였다. 國朝文科榜目 牟陽誌 高敞校誌
n 유동영(柳東榮) 관향은 고흥(高興), 정랑(正郞) 동립(東立)의 아우인데 일찍이 무과(武科)하여 임진왜란 때에 변 장(邊將)으로 영남(嶺南)에서 순절(殉節)하니 훈련원정(訓鍊院正)에 중직되었다. 牟陽誌 高敞校 誌
n 유동인(柳東仁) 자는 선영(善榮), 석탄 운(石灘澐)의 셋째아들로 1576년(宣祖 9년)에 출생했다. 1603년에 무과 하고 1618년에 선전관(宣傳官)을 했으며, 그 다음 해에 발포만호(鉢浦萬戶)를 지냈다. 이괄(李适)의 난에 안현(鞍峴)에세 전공을 세워 선무훈(宣武勳)에 참여하였다. 뒤에 벽산사(碧山祠)에 향사했다. 全北院宇誌 高敞校誌 湖南丙子倡義錄 湖南慕義錄
n 유동휘(柳東輝) 자는 사명(士明), 본관은 고흥(高興)이니 군수 춘발(春發)의 아들이고 정랑(正郞) 동립(東立)의 아우이다. 사계(沙溪) 김선생 문하에서 배워 경사(經史)를 섭렵하고 시례(詩禮)를 잘 알았다. 사마 (司馬)에 올라 금부도사(禁府都事)가 되었고,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정사(靖社) 일등훈에 참여했고, 병자호란에 모의(募義)했다가 강화하니 벼슬을 그만두었다. 뒤에 좌승지(左承旨)가 주어졌다. 湖 南丙子倡義錄 牟陽誌
n 유병욱(柳秉郁) 자는 내근(乃根)이고 호는 경봉(警峯)이며 본관은 고흥(高興)이니 효자 삼애 덕휴(三涯德庥)의 후손이며 빈현(彬賢)의 손자이다. 1817년(純祖 17년)에 신림면 무림리에서 출생하여 1874년(高宗 11년)에 졸했다. 그는 효행의 가통을 계승하여 효성이 지극했는데 모친이 병이 나자 하늘에 빌어 3년을 연명시켰고 부친이 병으로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입에 주혈하여 8개월을 연명시켰으며 상을 당하자 가례(家禮)대로 행하고 6년의 시묘를 지성으로 행하니 나라에서 효행으로 조봉대부 동몽교관(朝奉大夫童蒙敎官)에서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를 가증(加贈)하고
명정(命旌)하였다. 그 정려가 신림면 무림리에 있다. 全國邑誌 牟陽城의 얼
n 유빈현(柳彬賢) 자는 군성(君聖)이고 호는 일사(一沙)이며 본관은 고흥(高興)이니 효자 삼애 덕휴(三涯德庥)의 후손이고 증통훈(贈通訓) 수일(壽一)의 아들이다. 1762년(英祖 38년)에 신림면 무림리에서 출생하 여 1835년(純祖 38년)에 졸했다. 그는 가훈을 계승하여 부모를 효성으로 섬겼는데 부친이 병으로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입에 주혈하여 수 년을 연명했고 상을 당하자 송종(送終)의 절차를 주자 가례(朱子家禮)대로 행하였으며, 3년의 시묘를 지성으로 행했다. 그는 여가가 있으면 경서를 통독 하고 인격을 수양하면서 자녀 교육에도 힘썼다. 1887년(高宗 24년) 효행으로 명정(命旌)되어 그 정려가 신림면 무림리에 있다. 全國邑誌 興城誌
n 유상준(柳相浚) 자는 백명(伯明), 호는 경당(敬堂), 관향은 고흥(高興)이니 상조(上祖)는 영밀공(英密公)청신(淸 臣), 중조(中祖)는 침류정 익겸(枕流亭益謙)이며 계은 낙연(溪隱樂淵)의 아들로 1853년(哲宗 4년) 에 출생했다. 일찍부터 문의(文義)에 통했고 전재 임헌회(全齋任憲晦)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전재 가 세상을 떠나니 심상삼년(心喪三年)을 했고, 그 문집을 봉산(蜂山)에서 간행했다. 43세로 세상을 떠나 사림(士林)이 애석하게 여겼다. 유고에 경당유고敬堂遺稿 2권 1책이 간행되어 전한다. 「申 得求撰 行狀」 敬堂遺槁 牟陽誌
n 유세기(柳世箕) 자는 양수(陽叟)이고 호는 수한(睡漢)이며 본관은 고흥(高興)아니 허재 혜원(虛齋惠源)의 5대손 이다. 1768년(英祖 44년)에 신림면 외화리에서 출생하였고 1821년(純祖 21년)에 졸했다. 그는 효 행의 가풍을 계승하여 부모를 지성으로 모셨고 상을 당하자 송종지례(送終之禮)를 법대로 행하고 시묘를 극진히 하였다. 모친의 산소 때문에 소송을 당하여 정읍현(井邑縣)에 감금되어 혹독한 형 장(刑杖)을 맞고 피가 흐르매 움켜 마시고 구더기가 나매 주워 먹으면서 ‘부모의 유체에서 화생 (化生)한 것을 남의 발에 밟힐 수 없다.’고 하니 관장이 그의 효성에 탄복하여 방면하였다. 그는 시간이 있으면 경전을 읽었으며 자녀 교육에도 힘을 썼다. 1952년 유림의 공론으로 용강사(龍岡 祠)에 향사되고 유고집을 남겼다. 興城文獻錄
n 유순도(庾順道) 호는 학봉(學峰), 본관은 무송(茂松)이니 무송군(茂松君) 녹숭(祿崇)의 후손으로 산원(散員) 공 예(公裔)의 아들이다. 1371년(恭愍王 20년)에 태어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1405년(太宗 5 년) 문과에 올라 지안주군사(知安州郡事), 사재소감(司宰少監), 선공감정(繕工監正)을 지내고 1419 년(世宗 元年) 내자윤(內資尹)으로 진하사 서장관(進賀使書狀官)이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와서 보 문각 제학(寶文閣提學)에 오르고 병조ㆍ이조판서(兵曹 吏曹判書)를 거쳐 1439년(世宗 21년) 좌참 찬(左參贊)에 이르렀다. 춘정 변계량(春亭卞季良)과 교우가 깊었고, 태종이 천문(天文)을 익힐 것을 명하여 음양(陰陽) 술수(術數) 의술(醫術) 등을 탐구하여 경연(經筵)에서 왕의 각별한 칭찬을 받았다. 만년에 귀향하 여 무장 학봉산(學峰山;月峰山) 아래 은거하여 후진 계도(後進啓濤)를 사명으로 문하에 많은 문사 (文士)를 배출하니 세상에서 학봉선생이라 일렀다. 「神道碑文」 茂長誌 湖南節義錄
n 유여회(柳汝檜) 자는 취직(就直), 관향은 고흥(高興), 석탄 운(石灘澐)의 손자이고 경홍(慶弘)의 아들로 1589년 (宣宗 22년)에 출생했다. 첨추(僉樞)를 역임하고 1624년(仁祖 2년) 이괄(李适)의 난에 공을 세웠 고 뒤에 벽산사(碧山祠)에 향사되었다. 「族後孫 永善撰 墓表」 高敞文獻錄 全北院宇誌 高敞校 誌 湖南募義錄
n 유영선(柳永善) 자는 희경(禧卿), 호는 현곡(玄谷) 또는 화산(華山), 백운산인(白雲山人)이라 했으며 관향은 고 흥(高興)이니 석탄 운(石灘澐)의 후손이고 기춘(基春)의 아들로 1893년(高宗 30년)에 고창읍 주곡 (蛛谷)에서 출생하여 69세를 일기로 이 세상을 떠났다. 어려서는 조부 수당(遂堂) 밑에서 글을 배 웠고, 12세 때 간재 전우(艮齋田愚)에게 집지(執贄)했다. 국운(國運)이 기울어 을사늑약(乙巳勒約) 이 체결되자 간재를 따라 왕등도(旺嶝島), 고군산도(古群山島), 계화도(界火島) 등지를 옮아다니며 학문에 전념했다. 현곡은 일제의 학정과 갖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세도(世道)를 만회하는 길은 오 직 후진의 육성에 있다고 보고 고향 백운산 밑에 서재를 짓고 육영에 힘쓰는 한편 저술에 전념하 니 수구당괴(守舊黨魁)라 지목받기도 했다. 현곡은 대대로 물려온 만권장서 속에 파묻혀 일생을 보냈기에 저술도 많으니 현곡집玄谷集 담화연원록潭華淵源錄 성리유찬性理類撰 등 50여권 이 간행되어 세상에 전한다. 玄谷集 玄谷先生年譜 牟陽誌 全北의 뿌리
n 유 운(柳 澐) 자는 심부(深夫), 호는 석탄(石灘), 관향은 고흥(高興)이니 충정공(忠正公) 탁(濯)의 후손이고 죽 계 춘영(竹溪春英)의 아들로 1547년(明宗 2년)에 출생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18세 때에 고창으로 이거했으며, 청암도찰방(靑巖道察訪)을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고 석탄정(石灘亭)을 짓고 유유자적 (悠悠自適)하며 만년을 보냈다. 석탄실기石灘實記 4권 1책이 전한다. 「宋文徵撰 墓碣銘」 「金鎭 謹撰 墓碣銘」 「十世孫 永善撰 墓表」 石灘實記 牟陽誌
n 유응규(庾應圭) 초명은 원규(元規), 자는 보옥(寶玉), 본관은 무송(茂松)이니 공숙공(恭肅公) 필(弼)의 아들로 1131년(仁祖 9년) 출생했다. 천성이 영리하고 풍채가 아름다와 사람들이 옥인(玉人)이라 일렀으며 글을 잘했으나 과거에 실패하고 음보(蔭補)로 등용되어 내시(內侍)를 거쳐 참관(參官)으로 있었으 며 의론이 바르고 처사에 민첩하여 동료들이 나이 젊다고 함부로 못하였다. 남경(南京 : 지금의 서울)의 태수(太守)가 되어 청백한 정치를 하여 그 부인이 병중에 나물국만 먹고 있으매 아전이 몰래 꿩 한 마리를 보내니 부인이 물리치면서 “남편이 평생에 남의 물건을 받은 일이 없는데 내 어찌 먹는 것으로 남편의 맑은 덕을 더럽히겠는가.”하였다. 정중부(鄭仲夫)가 의종(毅宗)을 폐하고 명종(明宗)을 세운 뒤 공부낭중(工部郎中)이 되어 금(金) 나라에 사신가서 선위(禪位)한 사실을 알리는데 금나라 왕이 명종의 표(表)에 회답을 않는지라, 음 식을 거절하고 궁궐 밖에서 밤낮으로 서 있기 5일에 서지도 못하고 자주 쓰러지매 금나라 왕이 대신을 보내어 회유하여 생명을 보전할 것을 권했으나 “회신을 받지 않고는 음식이 넘어가지 않 겠습니다.” 하고 7일을 먹지 아니하여 마침내 후한 대접과 함께 회신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그 공으로 군기감(軍器監)에 올라 태자중사인(太子中舍人)을 겸하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품계를 받 았으며 뒤에 금나라 사신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공의 안부를 꼭 물었다고 한다. 어느 날 궁궐에 불이 났는데 공이 먼저 경령전(景靈殿)으로 달려가 선왕의 영정을 안고 나오고
또 중서성(中書省)으로 달려가 국인(國印)을 가지고 나와 그 공으로 시랑(侍郞)이 되었고, 김보당 (金甫當)이 정중부를 제거하려다가 정중부가 문신들을 모조리 잡아 죽일 때 재상 윤인첨(尹鱗瞻) 을 결박해 놓은 것을 보고 국법과 예의로 무관들을 설복시켜 재상을 구해내고 문인들의 참화를 면하게 했다. 명종 4년 전중감(殿中監)으로 있을 때, 조위총(趙位寵)이 서경(西京)에서 반란을 일 으키자 왕명으로 선유(宣諭)에 힘써서 여러 성을 귀순시켰고, 조위총에게 군신(君臣)의 대의(大義) 로 깨우쳐 항복의 표(表)를 받아 내기는 했으나 조위총이 바로 변심하여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高麗史 湖南人物志
n 유익상(柳翊相) 자는 상경(商卿)이고 호는 삼소당(三笑堂)이며 본관은 고흥(高興)이니 관란 춘발(觀瀾春發)의 현손이다. 1659년(孝宗 10년)에 고창 양곡(暘谷)에서 출생하여 4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백부 춘 수당 만령(春睡堂萬齡)에게 출계했다. 시례 가문에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학문이 일찍 성숙하고 예문에도 밝았다. 생가 양가 부모를 한결같이 지성으로 섬기고 상사를 당해서는 주자가례朱子家 禮대로 행하고 시묘살이를 했다. 만년에 방장산 아래 예천동(醴泉洞)에 집 몇 칸을 마련하여 삼 소당(三笑堂)이라 편액(扁額)하고 그곳에서 시례(詩禮)를 강마했는데 문생(門生)들에게 반드시 소 학(小學)과 효경(孝經)을 먼저 가르치고 경전을 지도했다. 평생 동안 산수 사이에 은거하면서 예문 (禮文)을 정하여 모두들 그를 지키도록 권장했으니 당시 사람들이 향선생(鄕先生)이라 불러 존경 했다. 1729년(英祖 5년)에 졸하고 삼소당유고三笑堂遺稿가 간행되었다. 高敞의 儒學
n 유익서(庾益瑞) 본명은 진현(晋鉉)이고 초명은 창현(暢鉉)이며 익서(益瑞)는 자이고. 관향은 무송이니 희충(喜 充)의 아들로 1882년(고종 19년) 성송면 낙양리에서 출생했다. 외종숙 남궁연에게서 목공의 기예 를 배워 대목(大木)이 되어 1924년 42세 때 문수사(文殊寺) 해체복원에 부편수를 맡고, 덕림사(德 林祠) 용오정사(龍塢精舍) 건축에 10개 기둥을 굽은 원목으로 조화있게 구축하여 문화재 지정에 일조를 했다. 호남을 대표하는 명장(名匠)으로 구한말에서 일제치하에 걸쳐 한식 주택이나 공청 (公廳)․ 사찰 등의 고건축 등 큰 건축 일을 잘하는 도편수였다. 고창의 숨결
n 유자량(庾資諒) 초명은 원의(元儀), 자는 담연(湛然), 본관은 무송(茂松)이니 공숙공(恭肅公) 필(弼)의 아들, 금 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응규(應圭)의 아우이다. 1150년(毅宗 4년)에 태어나 16세 때부터 유가 (儒家)의 제자들과 계(契)를 조직하면서 무인(武人) 오광척(吳光陟), 문장필(文章弼)을 입계시키려 하니 모 두들 좋아하지 않는지라, 공이 말하기를 “우리가 교유하는 데는 문무(文武)가 서로 어울리는 것이 마땅하 니 만일 거절하면 뒤에 반드시 후회가 있으리라.” 하더니 얼마 안 되어 정중부(鄭仲夫)의 난이 일어나 문 신들이 박해를 당했으나 이 계원들은 오광척과 문장필의 구원으로 무사하였다. 음사(蔭仕)로 수궁서승(守宮署丞)이 되고 대악서승(大樂署丞)을 거쳐 용강군(龍岡郡)의 원이 되 어 행정에 익숙하여 잘못을 적발하기 신과 같았으며, 대각(臺閣)에서 현직(顯職)을 역임하면서 성 망(聲望)이 높았고, 동북지방을 다스리고 동남지방에 안찰사로 나가 두려워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은(恩)과 신(信)을 베풀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편안했다. 상의봉어(常衣奉御), 호부낭중(戶 部郎中), 어사잡단(御史雜端), 대부소경(大府少卿) 등을 역임하고 지삼사사 판대부사재사 태자첨사 판각문지다방사(知三司事 判大府司宰事 太子詹事 判閣門知茶房事)가 되고 고종 초에 상서좌복야 (尙書左僕射)로 치사(致仕)했다. 은퇴한 후 고향에 내려와 치사한 여러 재상들과 기로회(耆老會)를 조직하고 불법(佛法)을 독신했는데, 어느 날 밤 팔계문(八戒文)을 읽고 목욕하고 취침하고서 아침
에 시간을 묻고는 홀연히 숨을 거두었다.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가 묘지명(墓誌銘)을 지었다.
高麗史 李相國集 湖南人物志
n 유준철(柳浚喆) 자는 선명(善明), 호는 금서(錦西), 관향은 고흥(高興)이니 주부(主簿) 경원(慶元)의 후손이고 지 기(志冀)의 아들로 1857년(哲宗 2년)에 출생했다. 연상 안중섭(蓮上安重燮), 전재 임헌회(全齋任憲 晦)의 문하에서 배우고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으며, 과문(科文)도 잘하였고 유저(遺著)로 금서유고 錦西遺稿 6권 3책이 간행되어 전한다. 「族侄 永善撰 行狀」 牟陽誌 錦西遺稿
n 유지태(柳之泰) 자는 내보(來甫), 호는 반죽재(伴竹齋), 관향은 고흥(高興)이니 죽계 춘영(竹溪春英)의 증손이고 통정(通政) 몽란(夢鸞)의 아들이다. 학행(學行)으로 이름 있고, 인조 병자호란에 창의(倡義)했으나 화의가 이루어지자 반등산(半登山) 아래 은거하였으며, 뒤에 벽산사(碧山祠)에 향사되었다. 湖南 丙子倡義錄 全北院宇誌 高敞校誌 牟陽誌
n 유 진(柳 津) 본관은 고흥(高興), 석탄 운(石灘澐)의 후손이며, 동천 흥선(東川興善)의 아들이다. 1906년 고 창 월곡(月谷)에서 출생하여 고창고보, 연전(延專) 문과를 거쳐 일본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學)에서 수학했다. 일본 천리대(天理大)교수, 정읍농고 교장,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 일급 번역관, 서울대 교수, 미시간대 교환교수 등을 역임했고 4ㆍ19혁명 이후 정계(政界)에 투신하여 제5, 제6 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활약하였다, 특히 영어에 조예가 깊어 영어구문론英語構文論 상하 2책 은 명저로 한때 낙양(洛陽)의 지가(紙價)를 올리기도 했다.「履歷書 依據」
n 유철견(柳鐵堅) 자는 여수(汝壽), 호는 양곡(暘谷), 관향은 고흥(高興)이니 충정공(忠正公) 탁(濯)의 후손이고 통 덕랑(通德郞) 동신(東信)의 아들로 1583년(宣宗 16년)에 출생했다. 광해 을묘(1615년)에 사마(司 馬)하여 창릉참봉(昌陵參奉)을 지내고 이괄(李适)의 난에 영광군수(靈光郡守) 원두표(元斗杓)와 더 불어 병량(兵粮)을 모취(募聚)하였으며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사계 김장생(沙溪金長生)을 따라 병 량을 모취하였고 병자호란에 창의(倡義)하여 청주(淸州)에 이르러 화의가 이루어짐을 듣고 통곡하 고 돌아왔다. 도원도찰방(桃源道察訪)에 제수되고 뒤에 벽산사(碧山祠)에 향사되었다. 「黃胤錫撰 行狀」 頤齋遺稿 牟陽誌 高敞校誌 湖南丙子倡義錄 湖南募義錄
n 유춘발(柳春發) 자는 중화(仲華), 호는 관란(觀瀾), 관향은 고흥(高興)이니 충정공(忠正公) 탁(濯)의 후손이고 수 사(水使) 의함(宜諴)의 아들이다. 무과에 뽑히어 광양(光陽), 교동(喬洞), 흥덕현감(興德縣監), 홍주 판관(洪州判官), 보성군수(寶城郡守)를 역임하고 임진왜란 때엔 호군(護軍)으로 명장(明將)을 반접 (伴接)했으며, 그 뒤 고창으로 내려와 관란정(觀瀾亭) 임간당(臨澗堂)을 지어 만년 퇴휴(退休)하는 곳으로 삼았다. 관란유고觀瀾遺稿가 전한다. 「愼天翊撰 墓碣銘」 「權龍鉉撰 墓碑銘」 柳氏世稿 牟陽誌
n 유춘영(柳春英)
자는 자화(子華), 호는 죽계(竹溪), 본관은 고흥(高興)이니 충정공(忠正公) 탁(濯)의 후손이고 의 심(宜諶)의 아들로 1507년(中宗 2년)에 출생했다. 벼슬은 음직으로 사직(司直)을 했고 만년에 고 창에 퇴거하여 지분당(知分堂)을 짓고 고향 선비들과 더불어 진솔회(眞率會)를 만들어 수창(酬唱) 하며 보냈다. 「朴民獻撰 墓碣銘」 牟陽誌 高敞校誌 高興柳氏文獻
n 유 필(庾 弼) 초명은 고성(告成), 자는 언경(彦卿), 본관은 무송(茂松)이니 무송부원군(茂松府院君) 녹숭(祿崇) 의 아들이다. 고려 의종(毅宗) 때 문신으로서 학행(學行)으로 등용되어 1143년(仁祖 21년) 금(金) 나라에 사신가서 만수절(萬壽節)을 축하하고 이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비서감(秘書監)을 거쳐 1147년(毅宗 1년) 추밀원지주사 이부시랑(樞密院知奏事 吏部侍郞)이 되고 1151년 지문하성사(知 門下省事)에 이어 참지정사 판병부사(參知政事 判兵部事), 보문각제거(寶文閣提擧), 중서시랑평장 사 수국사 태자태사(中書侍郞平章事 修國史 太子太師)를 거쳐 문하시랑평장사 수문전대학사 판이 부사(門下侍郞平章事 修文殿大學士 判吏部事)에 이르렀다. 문행(文行)으로 이름이 높았고 천성이 강직하고 정대하여 남에게 굽힘이 없었으니, 지문하성사 로 있을 때 의종이 환관(宦官) 정함(鄭諴)을 지후(祗候)로 삼으려 함에 공이 극력 반대하여 사령 (辭令)에 서명(署名)을 아니하고, 의종이 재삼 권유했으나 끝내 따르지 아니하여 그로 인해 공이 죽은 뒤에야 정함이 사령을 받을 수 있었다. 의종 9년에 죽으니 공숙공(恭肅公)의 시호가 내리고 의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高麗史 湖南人物志
n 유필원(柳必源) 자는 원백(源伯)이요 호는 일평(一萍)이며 본관은 고흥(高興)이니 왕자사부(王子師傅) 여(洳)의 후손 장사랑(將仕郞) 봉(鳳)의 증손이고 영달(永達)의 아들이다. 1625년(仁祖 3년)에 신림면 외화 리에서 출생했고 1684년(肅宗10년)에 졸했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가 병이 나자 의대를 풀 지 않고 간병했고 부친의 병이 위독하자 왼손 무명지를 끊어 입에 주혈하여 연명하였고 상을 당 하자 초종 상절(初終喪節)을 주자가례대로 행하였으며 6년의 시묘를 지성으로 행하였다. 숙종(肅宗) 때 효행으로 복호(復戶)되고 1722년(景宗 2년)에 명정(命㫌)되었으며. 그가 사는 마 을을 효평리(孝坪里)라 불렀다. 1829년(純祖 29년) 창효사(彰孝祠)에 배향되었다가 뒤에 용강사 (龍岡祠)에 향사했다. 1889년(高宗 26년)에 가선대부 호조참판(嘉善大夫戶曹參判)에 증직되었다.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제질(弟姪)과 후진 강학에 힘을 썼다. 유고집으로 일평실기一萍實記 가 간행되었고 정려(旌閭)는 신림면 외화리에 있다. 興城誌 全國邑誌 牟陽城의 얼
n 유한량(劉漢良) 자는 충겸(忠謙), 호는 은재(隱齋), 관향은 강릉(江陵)이니 개국공신 문희공(文僖公) 창(敞)의 후 손이다. 1548년(明宗 3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천자가 준수하고 용모가 괴위하며 강개한 기질이 있었다. 일찍이 덕망으로 알려져 당시의 진신장보(縉紳章甫)들이 모두 존경했다. 효행으로 천거되 어 선조 23년 돈령도정(敦寧都正)으로서 무장현감(茂長縣監)에 제수되니 정무가 간이해서 아전이 나 백성들이 안도하고 살 수 있었으며, 공은 특히 청백으로 조야에 알려졌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창의사 김천일(金千鎰)이 진주성을 지킨다는 말을 듣고 거제현령(巨濟縣令) 김준민(金俊民)과 같이 좌의부장(左義副將) 장윤(張潤)의 진으로 들어가 적 수십급을 베고, 성이 함락되자 천일과 함께 남 강에 몸을 던져 최후를 마쳤다. 뒤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표창되고 조산사(造山祠)에 향사되었다. 湖南募義錄 牟陽誌 全北의 뿌리
n 유혜원(柳惠源) 자는 원중(源仲)이고 호는 허재(虛齋)이며 본관은 고흥(高興)이니 장사랑(將仕郞) 봉(鳳)의 후손 영달(永達)의 아들이고 영휘(永輝)의 계자이다. 1632년(仁祖 10년)에 신림면 외화리에서 출생하여 1695년(肅宗 21년)에 졸했다. 그는 어려서 형 일평(一萍)에게서 공부하고 그 뒤 미촌 윤선거(美村 尹宣擧), 명재 윤증(明齋尹拯), 청하 권극중(靑霞權克中) 등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행이 뛰어났고 형과 함께 효행이 돈독했다. 모친이 81세의 고령으로 병이 나자 좌수 엄지를 잘라 입에 주혈하여 90장수를 누리게 했고 상을 당하자 송종지례(送終之禮)와 3년 시묘를 극진히 하여 숙종 때 형과 함께 복호(復戶)되고, 1722년(景宗 2년)에 조카 삼애(三涯)와 함께 일문삼효(一門三孝)로 명정(命 㫌)되었다. 1829년(純祖 29년) 창효사(彰孝祠)에 배향되었고 1890년(高宗 27년)에 통정대부 좌승 지(通政大夫左承旨)를 증직받고 용강사(龍岡祠)에 향사되었으며 유고집 허재집虛齋集 3권을 남 겼고 정려(㫌閭)가 신림면 외화리 환산(環山)에 있다. 全國邑誌 興城誌 牟陽城의 얼 全北의 뿌리
n 유호석(柳浩錫) 자는 자강(子剛)이고 호는 춘계(春溪)이며 본관은 고흥(高興)이니 석탄 운(石灘澐)의 후손이고 현곡 영선(玄谷永善)의 아들이다. 1912년에 고창 주곡(蛛谷)에서 출생하여 1984년에 세상을 떴 다. 큰 선비의 아들로 가학(家學)을 익히고 석농 오진영(石儂吳震泳)에게 배워 경전의 깊은 뜻을 깨쳤다. 전북대학의 전신인 명륜학원을 설립할 때 기성회장이 되고 고창향교 전교와 전북향교재단 이 사장과 성균관 부관장을 지내면서 유교 진흥에 기여했다. 아버님을 위해 판경당(瓣敬堂)을 지어 강학(講學)의 자리를 넓혔고 영귀정(詠歸亭)을 지어 풍영(風詠)의 곳이 되게 하고 팔체당(八棣堂) 을 지어 8남매 돈목(敦睦)의 장이 되게 했으며 용암사(龍巖祠)를 세워 아버님의 스승인 간재 전우 (艮齋田愚)를 향사하고 뒤에 아버님을 배향했는데 문화재로 지정받았다. 유고로 춘계집春溪集이 간행되었다. 高敞의 儒學
n 윤귀생(尹龜生) 무송윤씨(茂松尹氏) 찬성사(贊成事) 택(澤)의 아들이다. 여러 벼슬을 거쳐 고려 말 판전농시사 (判典農寺事)에 이르러 관직을 물러나 금주(錦州 : 錦山)에 살고 있으면서 사묘(祠廟)를 세워 삭망 (朔望)과 사중(四仲;仲春 仲夏 仲秋 仲冬)에 삼대(三代)를 제사 지내고, 조상의 비석에 기일(忌日) 을 새겨 후손들로 하여금 잊지 않게 했다. 국가에서 사대부(士大夫)들은 가묘(家廟)를 세우라는 명 을 내렸으나 시행되지 않던 시기에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조상을 제사지낸 것은 뭇 사람의 모범이 된다 하여 효자의 정문(旌門)과 비(碑)가 세워졌다. 高麗史
n 윤소종(尹紹宗) 자는 헌숙(憲叔), 호는 동정(桐亭), 본관은 무송(茂松)이니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귀생(龜生)의 아들로 1345년(忠穆王 1년)에 출생하였다. 목은 이색(牧隱李穡)의 문인으로 1365년(恭愍王 15년) 에 문과에 장원하고 춘추관수찬(春秋館修撰)을 거쳐 정언(正言)에 올라 시사(時事)를 논하는 만언 소(萬言疏)를 올렸다가 파직되었다. 우왕 초에 전교시(典校寺)의 승(丞), 부령(副令) 등을 지내고 모친상으로 금산에 머물러 복상(服喪)하면서 많은 지방 학자들을 가르쳤다. 1836년 성균사예(成均司藝)로 기용되고,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자 동문 (東門) 밖에 나가 영접하면서 군전(軍前)에서 곽광전(霍光傳)을 바쳤는데 그 까닭은 우왕을 폐하고 다른 왕씨(王氏)를 왕으로 추대할 것을 암시한 것이다.
창왕 때 전교령(典校令),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대사성(大司成)에 이르고, 공양왕 즉위 초에 대사헌 조준(趙浚)의 천거로 좌상시 경연강독관(左常侍 經筵講讀官)이 되었다. 이숭인(李崇仁)의 뛰어난 재주를 시기하여 그를 무고하여 죽이려 했고, 공민왕이 중 채영(蔡英)을 왕사(王師)로 맞이 하려 하자 반대하여 중지시켰으며, 그 뒤 남을 헐뜯는 것으로 왕의 미움을 받아 금주로 유배되었 다가 풀려났으나 다시 정몽주(鄭夢周) 일파의 간관(諫官)에게 탄핵을 받아 유배되고, 1392년(恭讓 王 4년) 정몽주가 살해된 뒤 귀양에서 풀려났다. 이태조(李太祖)가 등극하자 병조전서(兵曹典書)로 서 고려사(高麗史) 편수에 참여하고 회군공신(回軍功臣) 3등에 올라 수문전 학사(修文殿學士), 동 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겸임했다. 성리학(性理學)에 밝고 경사(經史)에 깊어 문명(文名)이 높 았다. 저서로 동정집桐亭集이 있다. 高麗史 太祖實綠 韓國人名大事典
n 윤자운(尹子雲) 자는 망지(望之), 호는 낙한재(樂閒齋), 본관은 무송(茂松)이니 대제학(大提學) 회(淮)의 아들이 다. 1416년(太宗 16년)에 출생하여 진자를 거쳐 1444년(世宗 26년) 문과에 올라 검열(檢閱)이 되 고, 문종이 즉위하여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으로 수사관(修史官)이 되어 정인지(鄭麟趾) 등 과 고려사(高麗史) 편찬에 참여했다. 이어 이조좌랑(吏曹佐郞)을 거쳐 1456년(世宗 2년) 대호군 (大護軍),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가 되고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올라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으며, 1460년 도승지(都承旨)에 승진하여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야인(野人) 토벌에 나섰다. 다음 해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명(明)나라에 사신갔는데 주달(奏達)함이 명쾌했고 여진(女眞) 에 잡혀 있던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돌아오니 임금이 탄복하여 “윤공(尹公)이야말로 정말 사자(使 者)로다.” 하였다. 이어 인수부윤(仁壽府尹), 경기 충청 전라 경상도 도순찰사(都巡察使), 병조 형 조판서를 역임하고 1467년 좌참찬(左參贊)으로 평안도 제언목장 급전사(堤堰牧場給田使)가 되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임했으며, 다시 경상좌도 군용체찰사(慶尙左道軍容體察使)로 나갔다. 이 해 우찬성(右贊成)으로 함길도 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 도총관(都摠管)을 겸임하여 이시 애(李施愛)의 난을 토벌하고 다음 해 무송군(茂松君)에 봉해져 팔도군적사(八道軍籍使)가 되었다. 1469년(睿宗 1년) 우의정(右議政)에 올라 좌의정(左議政)을 지내고 1470년(成宗 1년) 영의정(領議 政)에 올라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에 무송부원군(茂松府院君)에 진봉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 다. 朝鮮王朝實錄 韓國人名大事典
n 윤 택(尹 澤) 자는 중덕(仲德), 호는 율정(栗亭), 본관은 무송(茂松)이니 국학대사성(國學大司成) 문한사학(文 翰司學) 해(諧)의 손자로 1257년(忠烈王 15년)에 출생하여 3세에 아버지를 잃고 고모부 윤선좌 (尹宣佐)를 따라 공부하여 1317년(忠肅王 4년) 문과에 급제했다. 경산부 사록(京山府司錄), 교감 (校勘) 등을 거쳐 45세에 검열(檢閱)이 되니 직위가 9품에 지나지 않았으나 스스로 만족했고, 연 경(燕京)에 머물러 있던 충숙왕을 찾아보고 그 기량을 인정받아 왕자 강릉대군(江陵大君) 기(祺;恭 愍王)를 뒷날 후계왕으로 밀도록 하라는 부탁을 받았다. 서경판관(西京判官), 우부대언(右副代言) 을 역임하고 충목왕 초에 나주목사(羅州牧使)가 되었으며 충목왕이 죽자 전 밀직(密直) 이승로(李 承老)와 함께 중서성(中書省)에 글을 올려 강릉대군을 후계왕으로 세우려 했으나 충정왕이 즉위하 게 되자 광양감무(光陽監務)로 좌천되었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여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고, 이듬해 상소하여 건의한 바가 받아들 여지지 않자 개성부윤(開城府尹)으로 치사(致仕)했으나 충숙왕의 고명(顧命)을 상기하여 항상 치국 (治國)의 길을 왕에게 건의했다. 1361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다시 기용되고 2년 뒤 첨의찬성 사(僉議贊成事)로 치사했는데 아버지를 일찍 여읜 것이 한이 되어 어머니에게 효가 지극했고 청백
과 충직으로 일생을 살았다. 문집으로 율정집栗亭集이 전하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高麗史 全北의 뿌리
n 윤 해(尹 諧) 자는 강재(康哉), 무송윤씨(茂松尹氏) 시조 보승낭장(保勝郎將) 양비(良庇)의 아들이다. 1231년 (高宗 18년)에 출생하였다. 무송의 현리(縣吏)로 있으면서 문과에 올라 상주의 사록(司錄)이 되고, 뒤에 내시(內侍)로 들어가 충렬왕을 모시고 원(元)나라에 갔다가 돌아와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 를 거쳐 지장흥부사(知長興府事)가 되어 동정(東征)에 쓸 전함(戰艦)의 건조를 감독하였다. 뒤에 순찰사 홍자번(洪子藩)의 추천으로 흥위위 장사(興威衛長史)가 되고 전중시사(殿中侍史)로 옮아 청 백한 생활을 했으니 집이 가난하여 팥을 끓여 굶주림을 면했다. 동계(東界)의 초군사(招軍使)로 옮 았다가 영월현감을 죽인 강윤명(康允明)을 체포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파면되었고, 뒤에 판비서시 사(判秘書寺事)에 등용되었다가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충선왕이 즉위하여 전민변정도감사 (田民辨正都監使)에 기용되고 충렬왕이 복위하여 국학대사성(國學大司成), 문한사학(文翰司學)을 지내고 치사(致仕)하여 졸하니 나이 77세였다. 공은 성품이 정직하여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일을 처리하는데 과감하여 사람들이 감히 속이지 못했다. 젊었을 때 공의 누이를 난행하고 옥에 수감한 자가 있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이 자를 죽이면 비가 내릴 것입니다.” 하였으나 장관(長官) 이 들어주지 않는지라, 어느 날 장관과 술을 마시고 돌아와 난행자를 끌어내어 죄를 추궁하고 돌 로 눌러 죽이니 과연 큰 비가 내렸다. 高麗史 湖南人物志
n 윤 회(尹 淮) 자는 청경(淸卿), 호는 청향당(淸香堂), 본관은 무송(茂松)이니 병조전서(兵曹典書) 소종(紹宗)의 아들이다. 1380년(禑王 6년)에 출생하여 진사를 하고 1401년(太宗 元년) 문과에 올라 좌정언(左 正言), 이조좌랑(吏曹佐郞), 예조정랑(禮曹正郞)을 거쳐 1409년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고 1414 년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로 노비변정도감(奴婢辨定都監)이 설치되자 제십방(第十房)의 담당자로 서 공정히 판결했다. 그 뒤 좌부대언(左副代言), 병조참의(兵曹參議), 동지우군총제(同知右軍摠制), 동지경연사(同知 經筵事) 등을 여임하고 1423년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으로서 유관(柳觀) 등과 함께 정도전 (鄭道傳)의 고려사(高麗史)를 수교(讎校)하고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이 되었으며, 1432년 왕명으 로 신색(申穡)과 함께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편찬했다. 그 뒤 중추원사(中樞院使) 겸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지내고 1434년 집현전에서 왕명으로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의 편찬 을 맡고 병조판서,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이르렀다. 공이 젊었을 때 길을 걷다가 날이 저물어 여관에 들었는데 주인이 유숙하기를 허락하지 않아 뜰에 앉아 있었다. 주인의 아이가 진주를 가지고 놀다가 떨어뜨려 마침 곁에 있던 거위가 삼켜버 렸다. 주인이 구슬을 찾다가 공을 의심하여 결박하고는 날 새기를 기다려 관아에 고발하려 하였 다. 공은 변명을 아니하고 다만 “저 거위를 내 곁에 매어 놓아 다오.” 하였다. 이튿날 아침 구슬 이 거위 뒷구멍에서 나왔다. 주인이 사과하며 “어제 왜 말하지 않았소”하니 공은 “어제 말했으면 거위는 죽었을 것이오.” 하였다. 태종이 수렵을 나가 세종이 문무 백관을 거느리고 녹양평(綠楊坪)에서 맞아들이는데 태종이 공에게 술을 권하며 고금에 드문 재사(才士)라 격찬했고, 또 공이 당대 문장의 최고봉으로 술이 지나쳐 세종이 그 재주를 아끼어 술을 마셔도 석 잔을 넘지 않도록 경계하자 그 뒤부터는 연회에 반드시 큰 그릇을 가 져오게 하여 석 잔을 마시니 이금이 웃으면서 “술을 많이 마시지 말라고 한 말이 도리어 더 마시기를 권한 것이 되었구려.” 하였다. 어느 날 집에서 술이 만취했는데 임금이 내시를 시켜 급히 불렀다. 좌우
에서 붙들어 일으켜 말에 태우는데 술이 깨지 않아 모두들 두려워하였더니 임금 앞에 이르러서는 조용 히 대답하여 조금도 취한 빛이 없었고, 임금이 명하여 교서(敎書)를 쓰게 하니 붓을 나는 듯이 휘둘렀으 나 모두 임금의 뜻에 맞아 “과연 천재로다.”라고 칭찬하였다. 朝鮮王朝實錄 全北의 뿌리
n 윤회종(尹會宗) 무송윤씨(茂松尹氏)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귀생(龜生)의 아들이고 병조전서(兵曹典書) 소종 (紹宗)의 아우이다. 우왕 때 문과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사재부령(司宰副令)에 오르고 세자시 학(世子侍學)을 겸임했다가, 앞서 우왕 창왕의 주살(誅殺)을 청하는 상소를 올린 것으로 형조총랑 (刑曹摠郞)에 전임되고, 이태조(李太祖)의 조선 건국을 도왔으나 1395년(太宗 4년) 의랑(議郞)으로 서 급전(給田)을 잘못하여 외지(外地)로 유배되었다. 1409년(太宗 7년) 사예(司藝)로서 문과중시 (文科重試)에 급제하여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이 되고 1414년 사간원 우사간(司諫院右司諫), 도 감사(都監使)를 지냈다. 高麗史 太祖實錄 韓國人名大事典
n 이규채(李圭彩) 자는 성백(性白), 호는 묵와(黙窩), 본관은 경주(慶州)이니 익재 제현(益齋齊賢)의 후손이고 도 영(道榮)의 아들이다. 1845년(憲宗 11년) 무장 땅 나산(羅山)에서 출생하여 고창으로 이거했다. 1907년(純宗 1년)에 문과하여 1909년에 성균박사(成均博士)가 되었다가 국운이 기울자 고향으로 돌아와 만년을 보냈다. 묵와유고黙窩遺稿 5권 2책이 간행되어 전한다. 「李孔雨撰 行狀」 「曺眞承 撰 墓碣銘」 「卞鍾爀撰 墓誌銘」 牟陽誌 黙窩遺稿
n 이만희(李晩熙) 자는 태중(泰仲), 본관은 연안(延安)이니 연성군(延城君) 곤(坤)의 후손이고 사우당 여상(四友堂 汝相)의 아들이다.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고 거상(居喪)을 잘했으며 정성이 촌로(村老)에까지 미쳤 고 학문이 높았으니 홍석보(洪碩輔)가 감사로 와 있을 때 효로 천거하여 1714년(肅宗 40년)에 호 조좌랑(戶曹佐郞)을 증직했다. 牟陽誌 高敞校誌
n 이명천(李命天) 자는 성여(聖與)이고 호는 덕성(德星) 또는 만회당(晩悔堂)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니 장천군 (長川君) 보생(普生)의 후손인 집의(執義) 뇌(磊)의 증손이다. 1652년(孝宗 3년)에 고창군 성내면 에서 출생하여 1726년(英祖 2년)에 졸하였다. 그는 나이 겨우 열네 살 때 부친이 병이 나자 손가 락을 잘라 주혈하여 소생시켰고 연달아 다섯 번의 상을 당함에 죽만 먹고 예법대로 거행하였다. 1713년(肅宗 39년)에 순무사(巡撫使) 권상유(權尙遊)가 나라에 천거하여 복호(復戶)되고 명정(命 旌)되었다. 그의 정려(旌閭)가 성내면 신성리 칠성부락에 있다. 興城誌 全國邑誌 牟陽城의 얼 全北文化의 脈과 全北人物
n 이문형(李文衡) 자는 사평(士平)이고 호는 모호(茅湖) 또는 이요재(二樂齋)이며 본관은 전주이니 장천군 보생 (長川君普生)의 후손이다. 1724년(景宗 4년) 성내면 칠성동(七星洞)에서 출생하여 1775년 세상을 떴다.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한 번 배우면 잊지 않았는데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여 학문이 깊었 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31세 때 도곡 이양원(陶谷李養源)의 문하에 나아가 대학 (大學)으로부터 경서 공부를 다시 시작하여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는데 특히 심경(心經)과 근사록
(近思錄), 주자서(朱子書)에 조예가 깊었다. 40세 이후에는 부안 변산 모호(茅湖) 근처로 이사하여 거처할 곳을 마련하여 이요재(二樂齋)라 편액(扁額)하고 오직 학문에 정진하니 원근에서 선비들이 모여들어 강학을 청하여 언제나 서실이 비좁았다. 이계 홍양호(耳溪洪良浩)가 서문을 하여 모호 유고茅湖遺稿 5권 2책이 간행되었다. 高敞의 儒學
n 이사각(李師恪) 자는 경지(敬之)이고 호는 월산(月山)이며 본관은 함풍(咸豊)이니 효자 이혁(李䓇)의 아들이다. 1726년(英祖 2년)에 성내면 옥제리(玉堤里)에서 출생하여 1792년(正祖 16년)에 졸하였다. 그는 8 세 때 부친을 여의고 모친 송씨(宋氏)를 지성으로 섬겨 효행의 가통(家統)을 계승 실천하였다. 그 는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힘썼으며,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학문과 효행은 유림의 추천으로 1893년(高宗 30년)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고 명정되니 조부 이익방(李益芳)과 백부 이필(李苾), 아버지 이혁(李䓇), 그리고 계부 이적(李菂)과 함께 3세 6효가 되며 육효정려(六 孝旌閭)가 성내면 옥제리에 있다.興城文獻錄 興城誌 湖南誌
n 이사주(李師朱)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후손이다. 그는 충효를 겸한 인재로 현감 을 지냈으며, 1624년(仁祖 2년)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병사를 거느리고 저탄(瀦灘)싸움에 서 적병 수십 명을 참수하고 크게 공을 세웠다. 그 때 대장이었던 정발(鄭撥)이 왕에게 주문(奏聞) 하여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되고 그의 시호(諡號)를 충민(忠敏)이라 했으며 금천(金川)의 충민 사(忠愍祠)에 배향되고 정려(旌閭)되었다. 이 정려가 신림면 법지리에 세워졌다가 지금은 아산면 계산리(鷄山里)에 옮겨졌다. 興城誌 牟陽城의 얼
n 이성범(李成範, 1916~1998) 본관은 함평(咸平), 호는 금곡(琴谷), 현령(縣令) 이주(李稠)의 후손이자, 이경헌(李卿憲)의 손자 이다. 그는 해리면 왕촌리(旺村里) 용반(龍盤)생. 줄포공립보통학교를 서정주(徐廷柱)와 함께 졸업. 1934년 이성범은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34년 보성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하였다. 1935 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다시 입학하였다가, 그 이듬해 영문과로 재입학하였다. 1936년 가을, 이 성범은 당대의 여러 시인들 함께 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하여 시(詩)를 지으며 작품활동을 하기 도 하였다. 1939년 연희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후, 1939년 경성방직에 입사, 해방과 동시에 퇴사하였다. 1947년 대한방직협회 사무국장으로 선임되어 3년 동안 재직하였으며, 1950년 3월부 터는 정부 이사관으로 임명된 후, 전쟁 중에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그것은 미국정부가 지원하는 원조자금으로 물자를 구입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이성범은 구매사절단 부단장이었다. 그 후 5 년간 주미대사관 상무관이었으나 재무담당관의 임무까지 겸직하였다. 1955년 귀국한 이후, 대한 방직협회 고문으로 취임하였다. 1958년 이성범은 (주)범양사를 설립하여 무역상사 업무를 시작하 였다. 1963년 미국의 세라니즈 코퍼레이션사와 합작으로 국내 최초의 민간 외국 합작법인인 범양 공업을 설립. 1970년 미국의 IMTT사와 합작으로 국제탱크터미날을 설립하였다. 그 후 국제상공 회의소 한국위원회 부회장, 한국․멕시코 경제협력위원회, 한국․인도 경제협력위원회 한국측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이성범은 범양사 내에 출판부를 두어 1978년 9월 카프라의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을 시작 으로 신과학총서 등 80여권과 문화예술도서를 50여권 출판하였다. 이성범이 말년에 20세기 물리 학의 새로운 세계관에 대한 관심을 가진 것도 과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위하는 것이었다. 그가
번역한 프리초프 카프라의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The Tao of Physics)(1979년, 김용정 공역)․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The Turning Point)(1985년, 구윤서 공역), 데이비드 아텐보로의 지구 위의 생물(Life on Earth)(1982년), 다니엘 부어스틴의 발견자들(Discovers)(1987년) 등 의 책들도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이성범은 1982년 범양그룹 명예회장에 추대된 이후, 1985년부 터는 동인지 회귀(回歸)를 창간하여 잠시 중단했던 문학 활동을 재개하기도 하였다. 이성범은 기금을 출연하여 1991년 1월 향산재단(사후 금곡재단 변경)을 설립하였다. 1992년 3월부터 인문 학과 자연과학의 연결고리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간지 과학사상을 창간하여 과학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진작되도록 크게 후원하였다. 그의 저서로 시와 과학의 길목에서(1986년)가 있고, 유집 으로 금곡 이성범 문집(2002년)이 있다. 고창의 마을 제3집
n 이우락(李愚洛) 호는 해산옹(海山翁)이고 본관은 연안(延安)이니 좌의정(左議政) 원발(元發)의 후손이고오창 문 유(梧窓文猷)의 아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부모를 일찍 여의었으므 로 장성하자 3년상을 거행했는데 그가 꿇어앉은 자리에 구덩이가 파이고 슬픈 곡소리는 행인의 걸음을 멈추게 하였으며 산새나 송충이가 묘지 근처를 범하지 못했다. 또 계모를 친모처럼 모셨고 상을 당하자 고기를 먹지 않고 죽만 먹으면서 3년상을 지성으로 마치니 이 사실이 나라에 알려져 고종조(高宗 朝)에 명정(命旌)되고 동몽교관에 증직되었다. 그의 정려가 부안면 수왕리(水旺里)에 있다. 興城誌 興 城文獻錄 牟陽城의 얼
n 이원남(李元男) 본관은 전주이며 경녕군(敬寧君) 비(裶)의 7세손이다. 1588년(宣祖 21년)에 성내면에서 출생하 여 1655년(孝宗 6년)에 졸했다. 1627년(仁祖 5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을 당하자 사계 김장생(沙 溪金長生)이 의병을 모집할 때 자원하여 함께 의병을 모으고 군량미를 거두어 바치니 그 공으로 사옹원 참봉(司甕院參奉)에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636년 창의(倡義)를 도모하다가 다음 해 정월에 왕이 화해에 굴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탄하고 임천(林泉)에 은거하여 시문으로 일생을 보냈다. 全國邑誌 興 城誌 全北文化의 脈과 全北人物
n 이 유(李 瑜) 호는 도곡(桃谷)이고 관향은 함풍(咸豊)이며 대사간(大司諫) 죽곡 장영(竹谷長榮)의 아들이다. 그는 1597년(宣祖 30년) 정유재란을 당했을 때 왜구가 청등야(淸嶝野)에 침입하자 창의(倡義)하여 3일 동안 왜적과 싸워 30리를 물리쳤고 부안의 호벌치 싸움에 출전하여 역전하다가 순절했다. 興城誌 湖南誌
n 이익방(李益芳) 자는 무경(茂卿)이고 호는 월촌(月村)이며 관향은 함평(咸平)이니 죽곡 장영(竹谷長榮)의 현손이다. 1651 년(孝宗 2년)에 성내면 편월리(片月里)에서 출생하여 1699년(肅宗 25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효행이 지극하였는데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식음을 전폐하고 호곡하고 시묘를 정성껏 하였다. 어느날 꿈속 에서 모친이 나타나 약 세 알을 주며 ‘이 약을 먹으면 아들 셋을 둘 것이다.’ 하였는데 그 뒤 필(苾)과 적 (菂)과 혁(䓇)의 3형제를 두었으며 모두 효행이 뛰어나 명정(命旌)되었다. 1893년(고종 30년)에 동몽교관 (童蒙敎官)을 증직받고 명정되었으며 그 정려가 성내면 옥제리(玉堤里)에 있다. 興城文獻錄 牟陽城의 얼 湖南誌
n 이 작(李 綽) 본관은 합천(陜川)이며 현령(縣令) 간(簡)의 현손이다. 그는 효행과 우애로 이름이 드러나 참봉 (參奉)을 제수했다. 1592년(宣祖 25년) 임진왜란을 당하자 세 아들과 가동들을 거느리고 흥덕 남 당리에서 채홍국(蔡弘國), 고덕붕(高德鵬) 등과 삽혈동맹(歃血同盟)하고 왜적과 싸웠으며 1597년 정유재란을 당하여 부안 호벌치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두 아들과 함께 순절했다. 興城誌
n 이 적(李 菂) 자는 형보(馨甫)이고 호는 효우당(孝友堂)이며 관향은 함평(咸平)이니 월촌 익방(月村益芳)의 아들이다. 1693년(肅宗 19년)에 성내면 편월리에서 출생하여 1773년(英祖 49년)에 졸하였다. 그 는 7세 때 부친을 여의고 편모를 극진히 모셨으며 67세에 부친 사망 61주년을 맞아 복제(服制)를 다시 행하니 그 고을 현감 이홍제(李弘濟)가 천거하여 81세의 고령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의 중직이 내렸고 1893년(高宗 30년)에 명정(命旌)되니 함풍이씨 6효의 한 사람이다. 정려가 성 내면 옥제리에 있다. 興城誌 牟陽城의 얼 湖南誌
n 이 제(李 濟) 본관은 전주(全州)이니 장천군(長川君) 보생(普生)의 후손이요 참봉(參奉) 기문(起文)의 5대손 이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모친이 병이 나자 손가락을 베어 주혈하여 회생시켰다. 그의 아들 응하(應厦)도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모친의 병에 손가락을 잘라 주혈했고 응하의 딸 이 시집가기 전에 응하가 병이 나자 손가락을 베어 주혈하였다. 이와 같이 일가 3대가 효행으로 이름이 나자 이 사실이 나라에 알려져 1758년(英祖 34년)에 3세가 복호(復戶)되고 명정(命旌)되 었으며 그 정려(旌閭)가 성내면 신성리 칠성동에 있다. 全國邑誌 興城誌 牟陽城의 얼
n 이종택(李鍾澤) 자는 윤덕(潤德)이고 호는 운강(雲岡)이며 관향은 전주(全州)이니 경녕군(敬寧君) 비(裶)의 후손 희면(喜冕)의 아들이다. 자품이 순수하고 덕행이 과인하여 선대의 유풍을 이어받고 문학을 박섭 (博涉)했다. 그는 흥덕향교의 전교(典校) 등의 중책을 역임하면서 향교를 중수하여 유도를 진흥하 고 강상을 진작하여 풍속을 교화했다. 또 일제의 치하에서 동지를 규합하고 자금을 모집하여 중국 상해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했다. 이 사실이 독립사적비(獨立事勣碑)에 기록되어 있다. 興城誌
n 이진문(李振文) 자는 사욱(士郁)이고 호는 침명(枕溟)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니 장천군(長川君) 보생(普生)의 5세손이다. 1565년(明宗 20년)에 서울에서 출생하였는데 중년에 흥덕으로 내려와 살다가 1635년 (仁祖 13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군기시 주부(軍器寺主簿)를 지냈으며 1592년(宣祖 25년) 임진 왜란을 당하자 군사를 모집하고 군량미를 모아 바다를 거쳐 의주의 행재소에 운반하여 바쳤고 1627년의 정묘호란 때도 의거하였다. 그는 사포(沙浦)에 침명정(枕溟亭)을 짓고 이홍주(李弘冑), 김지수(金地粹), 권극중(權克中) 등과 교유하였다.興城誌 全北文化의 脈과 全北人物
n 이 필(李 苾) 자는 덕형(德馨)이고 호는 경재(敬齋)이며 관향은 함평(咸平)이니 월촌 익방(月村益芳)의 아들 이다. 1682년(肅宗 8년)에 성내면 편월리에서 출생하여 1746년(英祖 22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
는 효성이 지극했는데 18세 때 부친의 상을 당하여 곡성이 끊이지 않았으며 장사를 예법대로 치 루었다. 그 뒤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간 뒤에는 평생 동안 고기를 입에 넣지 않았다. 형제간에 우 애가 돈독하여 두 아우가 일찍 죽자 그의 조카들을 데려다가 모두 친자식처럼 길렀다. 그는 동산 서원(東山書院)을 건립하여 백강 이경여(白江李敬輿)와 서하 이민(西河李敏)을 배향하고 사액(賜 額)을 상소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효행과 문장으로 능참봉(陵參奉)에 제수되었고, 1893년(高宗 30 년)에 명정되어 정려(旌閭)는 성내면 옥제리에 있다. 興城文獻錄 牟陽城의 얼 湖南誌
n 이 혁(李 䓇) 자는 형징(馨徵)이고 호는 월서(月西)이며 관향은 함평(咸平)이니 월촌 익방(月村益芳)의 아들 이다. 1697년(肅宗 23년)에 성내면 편원리에서 출생하여 1733년(英祖 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 는 세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를 극진히 섬겼으며, 18세 때 모친이 병으로 위독하자 손가락을 째어 입에 주혈하여 수일의 연명을 하였고 상을 당하자 몸을 돌보지 않고 애통하였으며 장사를 마치고 묘지에 머물면서 시묘 3년을 지성으로 하였다. 그는 우암 송시열(尤庵宋時烈)의 제자인 손재 박광일(遜齋朴光一)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근사록近思錄과 심경心經을 탐독하였고 자성편(自省篇)을 지어 자질(子姪)에게 강논하였다. 그 는 효행과 학문으로 1893년(高宗 30년)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고 명정(命旌)되었다. 이 정려(旌閭)가 성내면 옥제리에 있다. 興城文獻錄 牟陽城의 얼 湖南誌
n 임소사(任召史) 정병(正兵) 임정국(任定國)의 딸로 현감 현덕룡(玄德龍)의 첩이다. 남편의 죽음을 듣고 천리 길 을 분상(奔喪)하여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3년 동안 죽만 먹었으며 제사에 정성을 다했다. 어 머니의 상사에 장제(葬祭)를 예문에 의하여 하고 아버지의 상사를 당하여 6년 동안 추복(追服)하 였다. 광해군 때 정려(旌閭)했다. 東國新續三綱行實 湖南人物志
n 임신번(林信蕃) 호는 송은(松隱), 본관은 조양(兆陽), 판서 난봉(鸞鳳)의 후손이고 정암 조광조(靜庵趙光祖)의 문인이다. 중종 기묘사화에 우천 이약수(牛泉李若水)와 함께 항의소를 올리고 고창에 퇴거하여 후 진들을 가르쳤고 뒤에 월암서원(月巖書院)에 향사되었다. 牟陽誌 全北院宇誌 湖南人物志
n 장연우(張延祐) 흥덕장씨(興德張氏)의 시조이며 고려 광종(光宗) 때 객성(客省) 벼슬을 한 장유(張儒)의 아들이 다. 그는 현종(顯宗)이 남쪽으로 행행(幸行)할 때 호종의 공이 있어 채충순(蔡忠順)과 같이 중추사 (中樞使)에 제수되었고 현종 5년 상장군(上將軍) 김훈(金訓)과 박성(朴成), 그리고 이협(李協) 등이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자 황보유의(皇甫兪義)와 같이 유배되었다가 그 뒤에 다시 등용되어 호부상 서(戶部尙書)에 올랐고 죽은 뒤에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증직되었다. 그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고려사 열전高麗史列傳에 ‘행정 능력이 뛰어나 벼슬이 호부상서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고 또 대동시선(大東詩選)에 그가 지은 오언사구(五言四句)로 된 한송정곡寒松亭曲 1수가 실려 있으며 그의 성명 아래 진산군(晋山君)이라 기록되어 있는 것 으로 보아 시문에도 능하였고 진산군의 봉군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高麗史列傳 興城 誌 牟陽城의 얼
n 전봉준(全琫準) 본명은 영준(永準) 자는 명숙(明淑) 호는 해몽(海夢), 본관은 천안(天安)이니 1855년(哲宗 6년) 고창읍 당촌(堂村)에서 출생했다. 일찍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접주(接主)가 되었는데 고부군수 조 병갑(趙秉甲)의 학정에 항거하여 농민 봉기(農民蜂起)를 주도했다. 1894년(高宗 31년) 손화중(孫 華仲) 접주와 함께 도내 동학교 세력을 동원하여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내걸 고 무장 호산봉(狐山峯 : 여시뫼)에 진을 치고 창의포고문(倡義布告文)을 반포했다. 정읍 황토현 (黃土峴)에서 홍계훈(洪啓薰)의 경군(京軍)을 격파하고는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일거에 전주성을 함락했으나 청군(淸軍)에 이어 일군(日軍)이 들어와 공주에서 관군과 일군에게 패하여 순창에서 붙잡혔다. 담양의 일군에 인계되어 서울로 압송되고 이듬해 3월 손화중 등과 함께 사형당했다. 임 종유시(臨終遺詩)가 전한다. 「時來天地皆同力 運去英雄不自謀 愛民正義我無失
爲國丹心誰有知
(때가 오니 天地가 다 協力하더니 運이 가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백성 사랑하는 정의(正義)일 뿐 내 잘못이 없거든
나라 위한 붉은 마음을 누구 있어 알리오)」 全北文化의 맥과 全北人物
n 정관원(鄭官源) 자는 명현(明賢), 호는 용오(龍塢), 본관은 진주(晋州)이니 충장공(忠莊公) 황(璜)의 후손으로 중군(中 軍) 명원(明源)의 아우이다. 1857년(哲宗 8년) 대산면 매산(梅山)에서 출생하였다. 천품이 괴걸(魁傑)하 고 효우(孝友)가 지극했으며, 족형 소두 정하원(小蠹鄭河源)에게 배워 성리(性理)에 밝고 문학으로 알려 져 1894년 진사에 올랐는데 갑오동학(甲午東學)으로 시요(時擾)가 일자 한 고을 선비와 함께 향약(鄕約) 을 정하여 예(禮)를 강하고 정의를 위주(爲主)하니 사(邪)가 범하지 못했다. 1896년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과 함께 거의(擧義)하고 1899년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 며 고종이 승하하자 뒷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했고 인산(因山)에 부곡(赴哭)한 뒤 분에 겨워 병이 되어 이듬해 졸하니 사림(士林)이 망곡단(望哭壇)에 비를 세우고 덕림사(德林祠)에 향사 한다. 용오집龍塢集 5권이 간행되었다. 湖南人物志 高敞院宇誌
n 정규삼(鄭奎三) 자는 백경(伯卿), 호는 초산(蕉山), 본관은 진주(晋州)이니 참판(參判) 택신(宅臣)의 5세손이고 성일(誠一) 의 손으로 1859년(哲宗 10년)에 출생했다. 연상 안중섭(蓮上安重燮)의 문생으로 1888년에 문과하여 벼슬은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지냈다. 사직이 기우는 것을 보고 벼슬을 그만두고 내려왔다. 「柳永善撰 墓碣 銘」 高敞文獻通鑒 牟陽誌
n 정극온(鄭克溫)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대장군(大將軍) 원녕(元寧)의 아들이다. 그는 고려 중기에 상질현(尙質 縣) 즉 지금의 고창군 흥덕에서 출생하였다.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올라 명종(明宗) 신종(神宗) 희종(熙宗) 강종(康宗)의 네 왕조를 섬기면서 양온령 동정(良醞令同正), 금오위 산원(金吾衛散員), 대장군(大將軍),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金紫光祿大夫 參知政事) 등을 지내고 1215년(高宗 2년)에 세상을 떠났다. 나라에서 익렬(翼烈)의 시호가 내리고 강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全國邑誌 東國輿地勝覽 高麗史列傳
n 정대수(丁大秀) 자는 사중(士中)이고 호는 양천(陽泉)이며 본관은 영광(靈光)이니 감찰(監察) 극명(克明)의 후손 이고 송계 영희(松溪永熙)의 아들이다. 1882년(高宗 19년) 대산면 해룡리(海龍里)에서 출생하여
1959년에 세상을 떴다. 재능이 뛰어나 20세 전후에 경사(經史)를 섭렵했고 한때 과거를 준비하여 박사 초시(博士 初試)에 합격했으나 회시(會試)에는 응하지 않고 학문에 힘썼으며 간재 전우(艮齋 田愚)를 스승으로 섬겨 경전의 깊은 뜻을 묻고 성리학의 의문점을 질정했다. 효심이 남달라 부모 를 지성으로 시봉하고 상을 당해서는 시묘살이를 했으며 스승의 상사에도 심상(心喪) 기년복을 입 었다. 그는 한말의 다난한 때에 태어나 일제의 암흑기를 살았으나 오직 유학의 기풍을 고집했고 후진 교육에 전념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했다. 저서로 양천유고陽泉遺稿 7권 4책이 있다. 高敞 의 儒學
n 정명원(鄭明源) 자는 자중(子仲), 호는 송남(松南), 본관은 진주(晋州)이니 충장공(忠莊公) 황(璜)의 후손으로 증 호조참판 종익(鍾翊)의 아들이다. 1852년(哲宗 3년) 대산면 매산(梅山)에서 출생하였다. 1874년에 무과에 올라 선전관(宣傳官),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거쳐 원주중군(原州中軍)에 이르렀는데 효 우(孝友)가 지극하여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이 공의 행의를 찬하여 교의가 깊었다. 송남 유고松南遺稿 1권이 간행되었다. 湖南人物志 茂長校誌
n 정방규(鄭枋珪) 자는 영치(瑛埴), 호는 극재(克齋), 본관은 진주(晋州)이니 충장공(忠莊公) 황(璜)의 후손으로 용 오 관원(龍塢官源)의 아들이다. 1883년(高宗 20년)에 무장면 덕림(德林)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아버지에게서 경사(經史)를 익히고 수남 고석진(秀南高石鎭)에게 나아가 성명(性命)의 깊은 뜻을 강구했다. 1907년 의정(議政) 민영규(閔泳奎)의 추천으로 홍릉참봉(洪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국사 가 날로 그릇되매 나아가지 아니하고 부모 받들어 성경(誠敬)을 다하여 상사에 아침 저녁으로 눈비를 가 리지 아니하고 성묘 드리매 주민이 다리를 놓아주고 흉년에 구휼하여 송덕비가 섰다. 인품이 호준(豪俊)하고 기절이 강개(慷慨)하여 비의(非義)를 용납하지 아니하고 교임(校任)을 맡아 일향의 선비와 함께 향약(鄕約)을 제정하여 풍속의 순화에 힘썼으며 문헌을 수집하여 송사 의적松沙懿蹟을 간행했다. 덕림사(德林祠)에 추배되고 문집 4권이 있다.高敞院宇誌 茂長誌
n 정성일(鄭誠一) 자는 내실(乃實), 호는 동강(東岡), 본관은 진주(晋州)이니 참판 택신(宅臣)의 증손으로 1789년 (正宗 13년)에 출생했다. 1816년에 문과하여 양사(兩司)의 청질(淸秩)을 거쳐 종성부사(鍾城府使) 를 역임하고 병조참판 겸동의금(兵曹參判兼同義禁)에 이르렀다. 「宋秉璿撰 墓碣銘」 高敞文獻通鑒 牟陽誌
n 정시해(鄭時海) 자는 낙언(樂彦), 호는 일광(一狂), 본관은 진주(晋州)이니 충장공(忠莊公) 황(璜)의 후손으로 종 택(鍾澤)의 아들이다. 1874년(高宗 11년) 성송면 삼태(三台)에서 출생했다. 송사 기우만(松沙奇宇 萬)에게 배우고 면암 최익현(勉庵崔益鉉)에게 강마(講磨)하여 학문이 깊고 효성이 지극했다. 부친 병환에 손가락을 깨어 피를 입에 넣어 드리고 양친상사에 전후 6년을 여묘(廬墓)했다.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에 분개하여 스승 최면암과 창의에 뜻을 모으고 영남의 지사 규합 에 나섰다. 이때 나라를 빼앗긴 비통한 심정과 엄동설한의 피로에 지친 자신의 행색이 흡사 미친 사람이기에 일광(一狂)이라 호(號)를 했다. 면암 휘하 의군부 중군장(義軍府中軍將)으로 태인(泰仁) 에서 기병(起兵)하여 정읍, 순창, 곡성 등지에서 왜병을 물리치고 순창에 다시 진입했다가 전주,
남원 진위대(鎭衛隊)의 기습 포위로 전세가 흐트러져 마지막까지 죽음을 맹세한 이 겨우 14인이 남았다. 면암이 말하기를 “사세 이에 이름에 오직 바른 죽음이 있을 뿐이라” 하고 의관을 정제(整 齊)하는 사이 총성이 진동하여 스승을 몸으로 감싸다가 유탄을 맞았는데 그는 ‘죽은 뒤 여귀(厲 鬼)가 되어 왜적을 섬멸할 것’을 맹세하고 스승의 품 안에서 이때(1906) 33세였다. 면암은 그는 위에 조선의사정공지구(朝鮮義士鄭公之柩)라 쓰고 만장에 “해 떨어진 순창관(落日淳昌館)에 죽음 을 맹세한 이 14인뿐(誓死纔二七) 오직 그대 먼저 목숨 바쳐(惟君先致命) 우리들 힘입어 빛이 나 도다(吾輩賴生色)”하였다. 광복 후 무장에 사의사비(四義士碑 ; 鄭時海, 金在華, 庾敬求, 吳壯煥)와 태생지에 충효비가 세워지고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며 대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고창초등학교 앞에 일광기념관(一狂紀念館)이 건립되어 매년 4월 20일(忌日)에 추모 행사를 거행한다. 湖南節義錄韓國義烈錄高敞의 얼湖南人物志
n 정익환(鄭益煥) 자는 사겸(士謙)이고 호는 덕헌(德軒)이며 관향은 진주(晋州)이니 충장공 황(忠莊公璜)의 후손 으로 극재 방규(克齋枋珪)의 아들이다. 1920년 무장면 덕림(德林)에서 출생하여 2000년에 세상을 떴다. 선비 가문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학에 전심했고 명륜학원(성균관대학 전신)을 졸업하여 일 찍 시문(時文)으로 알려졌으며 서화에도 조예가 깊어 조선미술전람회에 여러 번 입선했다. 37세에 무장향교 전교를 맡아 교궁(校宮)을 보수하고 향지(鄕誌)를 간행하는데 공헌하여 향교 앞에 송적비(頌蹟碑)가 섰고 유도회 전라북도 본부장, 고창향토문화연구소장 예총 고창지부장 등 을 맡아 유교진흥과 문화창달에 기여했다. 특히 효심이 깊어 부모 섬겨 정성을 다하고 위선에 힘 써 선세문헌(先世文獻)을 간행했으며 덕림사(德林祠)를 받들어 문화재로 지정받았다. 저서로 덕헌 집德軒集 2책이 간행되었다.
「門人 朴鎭泰撰 行狀」 茂長校誌
n 정재감(鄭在鑑) 자는 선숙(璇叔), 호는 예호(禮湖), 본관은 진주(晋州)이니 참판 택신(宅臣)의 손이고 중현(重賢) 의 아들로 1782년(正祖 6년)에 출생했다. 1822년에 문과하여 사과(司果) 별검(別檢) 전적(典籍) 병조좌랑(兵曹佐郞) 개성판관(開城判官) 정언(正言) 헌납(獻納)을 지냈는데 인물이 고결하고 행의 가 높았으며 문장으로 알려졌다. 「柳永善撰 墓表」 高敞文獻通覽 牟陽誌
n 정재룡(丁載龍) 초명은 재욱(載旭), 자는 운서(雲瑞), 호는 학고(鶴皐), 본관은 영성(靈城)이니 영성군(靈城君) 찬(贊)의 후손이고 참의(參議) 정중록(鄭重祿)의 문인으로 1795년(正祖 19년)에 출생했다. 1866년 에 문과하여 벼슬이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이르고 유집(遺集)이 전한다. 「柳永善撰 墓碣銘」 高敞 文獻通覽 牟陽誌 湖南人物志
n 정중록(鄭重祿) 자는 환백(歡伯), 호는 도천(道川), 본관은 진주(晋州)이니 참판 택신(宅臣)의 아들로 1740년(英 祖 16년)에 출생했다. 1765년에 문과하여 예조정랑(禮曹正郞)을 거쳐 두 고을 수령(守令)을 지내 며 정적(政績)이 있었고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이르렀다. 「宋基冕撰 墓碣銘」 高敞文獻通覽 牟陽 誌 湖南人物志
n 정택신(鄭宅臣)
자는 용빈(用賓), 본관은 진주(晋州)이니 문량공(文良公) 을보(乙輔)의 후손이고 어모장군(禦侮 將軍) 우손(友遜)의 8세손으로 1717년(肅宗 44년)에 출생했다. 1741년에 문과하여 병조좌랑(兵曹 佐郞), 강원도사(江原都事), 남포현감(藍浦縣監),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이르 렀다. 「閔丙承撰 墓碣銘」 高敞文獻通覽 牟陽誌 湖南人物志
n 정하원(鄭河源) 자는 희청(希淸)이고 호는 소두(小蠹)이며 본관은 진주(晋州)이니 계당 회찬(溪堂晦燦)의 증손 이고 종은(鍾殷)의 아들로 백부 학와 종하(學窩鍾夏)에게 출계했다. 1827년(純祖 27년)에 성송면 괴치(槐峙)에서 출생하여 1902년에 세상을 떴다. 학문하는 집안에 태어나 가학(家學)을 이어받았 고 노사 기정진(蘆沙奇正鎭)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고제(高弟)가 되었다. 송사 기우만(松沙奇宇萬) 이 지은 행장을 보면 그는 50년 동안 노사를 스승으로 아버지처럼 섬기면서 학문에 전념하여 경 사자집(經史子集)과 정주성리서(程朱性理書)를 두루 섭렵했는데 언제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의복과 일용기물을 왜제(倭製)를 일체 쓰지 않았고 예(禮)에 어긋나는 일은 듣지도 말하지도 행하 지도 않았다. 임오군란 이후 나라에 변괴가 잦자 개연히 상소(壬午擬疏)를 올렸으니 첫째 세도부 리는 관료를 몰아내고 조정을 바르게 할 것, 둘째 대원군을 환국시켜 효도를 행할 것, 셋째 외국 군대를 돌려보내고 궁성을 깨끗이 할 것, 넷째 사무를 잘 처리하고 병기를 수리할 것, 다섯째 어 진 정사를 하여 백성을 안정시킬 것 등 조목조목 간곡한 진언(進言)이었다. 문인에 강인선(姜仁 善), 정진원(鄭晋源), 정관원(鄭官源), 이동무(李東武), 서병모(徐炳模), 서병환(徐炳煥), 이용우(李容 宇), 김수인(金秀仁) 등이 있고 저서로 소두집小蠹集 10권 4책이 간행되었다. 高敞의 儒學
n 정호례(鄭好禮) 호는 운곡(雲谷)이고 본관은 진주(晋州)이며 양성현감(陽城縣監)을 지냈다. 1597년(宣祖 29년) 임진난 때 장성 북문(長城北門)의 싸움에서 부친 절(㦢)이 순절함을 보고 그도 왜병에게 달려가 싸우다가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는 거기서 망경단(望京壇)과 망향단(望鄕壇)을 쌓고 밤이 되면 먼저 망경단에 올라 북향사배하고 통곡한 뒤 다시 망향단에 올라 재배하고 통곡하니 온 국중이 그의 충효심에 탄복하여 귀국시켰다. 1598년 정유재란을 당하자 이 고을 참봉 이기문 (李起文)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양곡을 모아 금강(錦江)에 이르자 강화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 하고 돌아왔다. 全國邑誌 興城誌
n 정홍채(鄭弘寀) 자는 용부(容夫)이고 호는 일재(逸齋)이며 관향은 하동(河東)이니 하곡 운룡(霞谷雲龍)의 후손 이고 노수 순영(蘆叟淳榮)의 아들이다. 광무(光武) 5년에 장성 광암리(光巖里)에서 출생하여 아버 님 따라 외가가 있는 고창 석정(石汀)으로 이사와 외숙 흠재 조덕승(欽齋曺德承)에게 수학했다. 송재(誦才)가 뛰어나 배운 것을 모두 암송하고 기억하여 약관에 경전을 섭렵하여 큰 선비가 되 었는데 어지러운 세상에 두문불출하고 제자를 가르치면서 경전의 깊은 뜻을 강구했으니 그의 저 술 중에 경의강설經義講說은 선현(先賢)의 이기설(理氣說)에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역작이다. 1982년에 세상을 뜨니 향년 82세이고 저서로 일재유고逸齋遺稿 3권 3책이 전한다. 高敞의 儒 學
n 정회찬(鄭悔燦) 초명은 형기(亨基)이고 자는 회숙(悔叔)이며 호는 계당(溪堂)이니 진주인(晋州人)으로 충장공
황(忠莊公璜)의 후손이고 어초 달수(漁樵達壽)의 아들이다. 1759년(영조 35년) 성송면 괴치(槐峙) 에서 출생하여 1831년에 세상을 떴다. 문벌 집안에서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족숙 이재 인수(頤 齋仁壽)의 문하에서 독공을 하여 일찍 학문을 성취하여 한때 과거에도 응했으나 학문을 그르치는 일이라 생각하고 초야(草野)에 숨어 서실(書室)을 지어 후배를 가르치는 일로 사명을 삼았다. 또한 효가 지극하여 부모 섬겨 정성을 다하고 상사에 3년 여묘(廬墓)를 했으며 임진란 이후 보첩이 산 락(散落)된 것을 개탄하여 경향 각지를 다니며 각종 문헌을 참고하여 8년에 걸쳐 보첩을 완성했으 니 숭조(崇祖), 돈종(敦宗)의 성력은 남들이 따르지 못했다. 학문의 업적도 대단하여 유고집에 600수의 시와 50여 편의 문장이 실렸는데 특히 노화설(爐火說)에서는 이기호발론(理氣好發論)을 증명하였고 죽선자(竹扇子)에서는 천도가 옮아가는 오묘한 이치를 밝혔다. 노사 기정진(蘆沙奇正 鎭)의 발문을 붙여 계당집溪堂集 7권 3책이 간행되었다. 高敞의 儒學
n 정휴탁(鄭休鐸) 자는 자경(子警), 호는 농산(農山), 본관은 진주(晋州)이니 충장공(忠莊公) 황(璜)의 후손으로 참 봉(參奉) 영원(榮源)의 아들로 1872년(高宗 9년) 성송면 삼태(三台)에서 출생하였다. 어머니의 태 몽(胎夢)에 범을 보았는데 나면서부터 목줄기에서 등까지 호문(虎紋)이 있어 아명(兒名)으로 불렀 고 자라면서 담력(膽力)이 뛰어났다. 1903년 벼슬하여 주사(主事)가 되고 중추원 의관(中樞院議 官)을 거쳐 정3품에 올라 1905년 장수군수(長水郡守)로 나갔다가 이듬해 어머니 상사를 당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와 집상(執喪)했다. 송사 기우만(松沙奇宇萬)은 공의 묘갈명에 공의 인품을 말하여 “기골이 헌헌(軒軒)하고 몸가짐이 검약했으며 항장(骯髒)하여 가까이하기 어려웠으나 대하 면 언소(言笑)에 화기가 있었다. 인끈을 풀은 뒤에는 서적을 가까이 하여 학문이 깊었고 재물을 가벼이하고 의(義)를 중히 여겨 앞으로 크게 기망(期望)함이 있었는데 나이 겨우 44세로 졸하니 하늘은 어찌하여 수(壽)에 인색했던가?” 하였다. 茂長誌 湖南人物志
n 정 홀(鄭 忔) 자는 자적(子迪), 호는 망북헌(望北軒), 본관은 진주(晋州)이니 충장공(忠莊公) 황(璜)의 후손으 로 판관(判官) 억(億)의 증손이다.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에게 효(孝)를 다하며 형제 5인이 우애(友愛)가 지극하매 조정에서 복호(復戶;세금과 부역 면제)를 내렸으나 천성이 결백하여 사양하 고 받지 않았다. 임진왜란에 창의(倡義)하여 의병과 의곡(義穀)을 모아 아들 기현(期顯), 기봉(期 封)으로 하여금 근왕(勤王)하게 하고, 이 때 본현 현감이 공석이어서 명망이 있는 인사를 택하여 수성(守城)케 하라는 도백(道伯)의 명에 따라 사림(士林)이 공을 추대하여 수성장(守城將)이 되어 현성(縣城)을 지켰다.
湖南節義錄 湖南人物志
n 정희주(鄭熙周) 호는 종모재(終慕齋), 본관은 진주(晋州)이니 절제사(節制使) 종순(宗舜)의 현손, 기현(期顯)의 아들로 1633년(仁祖 11년) 공음면 군유(群儒)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소학(小學)과 효경(孝經)을 읽고 종신토록 행했으니, 어버이를 지성으로 모시어 뜻을 받들어 봉양을 다하고, 병환이 위중하매 변을 맛보고 하늘에 빌어 대신하기를 원했으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입에 떨어뜨려 아버지는 16년을, 어머니는 6일을 더 연명(延命)했다. 상사를 당해서 3년을 죽만 먹고 시묘살이를 했는데, 아버지의 병환에는 꿩이 날아들었고 시묘살이할 때는 범이 호위하고 샘물이 솟아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정문(旌門)이 내리고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었다. 일찍이 애통사(哀痛詞) 한 편을 지 어 종신토록 사모하는 뜻을 나타내어 종모(終慕)로 호를 했다. 도봉사(道峰祠)에 주벽(主壁)으로 향사(享祀)한다. 茂長校誌 湖南人物志
n 조덕승(曺悳承) 자는 백거(伯據), 호는 흠재(欽齋), 본관은 창녕(昌寧)이니 동오 의곤(東塢毅坤)의 손자로 1873 년(高宗 10년)에 출생했다. 송사 기우만(松沙奇宇萬), 면암 최익현(勉庵崔益鉉)의 문인이다. 자품이 영명(英明)하고 경학(經學)에 조예가 깊었으며 동오정(東塢亭)에서 후진을 교회(敎誨)했다. 유저로 흠재문고欽齋文稿 3책이 간행되어 전한다. 「曺錫日撰 行狀」 「鄭泓寀撰 墓碣銘」 牟陽誌 欽齋 文稿
n 조언징(曺彦徵) 자는 휴백(休伯), 호는 삼오당(三吾堂), 본관은 창녕(昌寧)이니 청간 서(淸澗庶)의 후손이고 한 빈(漢賓)의 아들로 1714년(肅宗 40년)에 출생했다. 효우가 특출하여 당세의 사표가 되었으며 뒤 에 정산사(鼎山祠)에 배향되었다. 「金益休撰 行狀」 鼎山祠誌 牟陽誌 高敞校誌
n 조의곤(曺毅坤) 자는 사홍(士弘), 호는 동오(東塢), 관향은 창녕(昌寧)이니 청간 서(淸澗庶)의 후손이고 삼오당 언징(三吾堂彦徵)의 5세손으로 1832년(純祖 32년)에 출생했다. 노사 기정진(蘆沙奇正鎭)의 문인으 로 덕행(德行)이 높았다. 고창읍 석정(石汀)에 동오정(東塢亭)을 짓고 은거했으며 유저로 강목집 요綱目輯要 10권과 문집 4권 2책이 있고 장성 고산서원(高山書院)에 배향되었다. 「奇正鎭撰 行 狀」 「崔益鉉撰 墓碣銘」 牟陽誌 松沙集 勉庵集
n 조익령(曺益齡) 호는 화암(花岩)이고 본관은 창녕(昌寧)이니 우승지(右承旨) 후(厚)의 6대손이요 현령(縣令) 호 인(好仁)의 아들이다. 그는 지략이 과인하고 충의를 자임하는 인물로 참봉(參奉)을 지냈다. 1592 년(宣祖 25년) 임진왜란을 당하자 아우 봉사(奉事) 익수(益壽)와 함께 가동(家僮)을 거느리고 군량 미를 갖추어 흥덕 남당리(南塘里)에서 의병장 채홍국(蔡弘國) 등과 삽혈동맹(歃血同盟)하고 의병을 일으켜 참모관(參謀官)이 되었으며 하루에 왜병 7명을 참살하였다. 또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김영년(金永年)에게 서찰을 보내어 다시 창의(倡義)하고 부안 호벌치와 흥덕 배풍재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때의 일기와 동맹록이 김영년의 후손 집안에 간직되어 있는데 모두 참모 관 조공의 기록이다. 興城誌 牟陽城의 얼
n 조 첨(曺 添) 자는 은원(恩源), 호는 만회(晩悔), 관향은 창녕(昌寧)이니 직제학(直提學) 서(庶)의 후손이고 참 봉(參奉) 인준(仁俊)의 증손이다. 성품이 강의(剛毅)하여 지절(志節)이 있었고 효성이 지극했다. 병자호란에 동지들과 함께 거의(擧義)했다가 화의가 성립됨을 듣고 통분하여 두문사세(杜門謝世)했다. 湖南丙子倡義 錄
n 조 홉(曺 潝) 자는 혼부(混夫), 호는 계암(溪庵), 본관은 창녕(昌寧)이니 직제학(直提學) 서(庶)의 후손이고 참 봉 인숙(仁淑)의 증손이다. 1624년(仁祖 2년) 이괄(李适)의 난에 절암 오전(節菴吳晪), 참봉(參奉) 유철견(柳鐵堅)과 같이 의병을 모으고 병량(兵粮)을 거두었다. 「後孫 悳承撰 行狀」 「奇宇萬撰 墓碣 銘」 湖南募義錄
n 진 간(陳 侃) 관향은 여양(驪陽)이고 고려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창양군(昌陽君)에 봉해진 진사문 (陳斯文)의 12대손이다. 그는 고을 아전이었는데 14세 때 아버지가 신장결석증(腎臟結石症)으로 병이 나 신음하자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치료하였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입으로 환부를 빨아 마침내 결석이 나오게 하여 치유되었다. 이 사실이 나라에 알려져 1536년(中宗 31 년) 효행으로 명정(命旌)되었으며, 그 정려(旌閭)가 흥덕면 흥덕리에 있다. 全國邑誌
n 진사문(陳斯文) 고려 때의 문신이며 흥덕 출신이나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 다만 조선호남지(朝鮮湖南誌)의 상신편(相臣篇)과 전국읍지(全國邑誌) 흥덕편의 사환조(仕宦絛), 그리고 흥성지(興城誌) 사환조에 관직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이며 창양군(昌陽君)에 봉해졌다는 간단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 興城誌 全國邑誌 朝鮮湖南誌
n 진채선(陳彩仙) 본관은 여양(驪陽), 1847년(憲宗 13년) 심원면 검당(檢堂)에서 출생한 여자 광대(廣大)이다. 얼굴이 예쁘고 목소리가 고우며 성량(聲量)이 풍부했다. 어려서부터 동리 신재효(桐里申在孝)의 문하에서 잔뼈가 굵도록 음률과 판소리를 배워, 1869년(高宗 6년) 경복궁 낙성연(落成宴)에 성조가(成造歌)와 방아타령을 불러 대원군의 인정을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국창(國唱)이 되었다. 그는 또 동리가(桐里歌)를 불러 스승을 소개함으로써 오위장(五衛將)의 직첩을 받게 한 것으로 전하며, 신재효는 그가 서울에 올라간 뒤 내려오지 않자 그를 그리워 지은 것이 도리화가(桃李花歌)라 한다. 全北의 뿌리 牟陽城의 얼
n 진 환(陳 瓛) 우리 고장 개화기 미술가로 관향은 여양(驪陽)이고 1914년 무장면 무장에서 출생하니 이 고장 부호 우곤(宇坤)의 아들이다. 고창고등보통학교를 나와 보성전문학교 상과를 다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 수업을 하여 1930년 일본미술학교 3학년 때 동경에서 열린 제1회 신자연협회전에 설청(雪晴)을 출품하여 장려상을 받고 그해 베를린에서 열린 제11회 국제올림픽 예술경연전에 군 상(群像)을 출품하여 입선했다. 1940년 동경미술공예학원 강사가 되고 이중섭(李重燮), 이쾌대(李 快大) 등과 함께 조선미술가협회를 창립했다. 1943년 귀국하여 아버지가 설립한 무장초급학교 교 장을 맡고 뒤에 홍익대학 양화과 교수로 초빙되었는데 한국동란으로 귀향하여 1951년 갑자기 세 상을 뜨니 나이가 겨우 38세였다. 그는 10여 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에 독자적 화풍으로 작품을 남겼다. 주로 가벼운 스케치와 소품의 유화가 남아 있으나 그의 표현은 신감각의 표현주의적 성격이 강한 작품들을 남겼다. 그는 특히 소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당시에 가장 흔히 볼 수 있었던 소를 단순히 바라보지 않고, 소를 통하여 자연과 우주 그리고 생명체의 웅장함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실제 ‘소의 일기’라는 글에 서 “소의 생명은 지구와 함께 있을 듯이 강하다.”라고 했고, 소의 목덜미를 통해 인동(忍冬)의 세 월을 읽어 내고 있다. 高敞郡의 역사문물 高敞의 脈
n 차경석(車京石) 본명은 윤홍(輪洪)이고 자는 경석(京石)이며 호는 월곡(月谷)이다. 갑오농민전쟁 때 정읍(井邑) 근방의 농민군을 이끈 동학의 접주(接主) 차치구(車致九)의 장남으로, 1880년 부안면 용산리(富安 面龍山里) 연기동(煙起洞)에서 태어나 1936년에 세상을 떴다.
1907년 강증산(姜甑山)을 만나 그의 수제자가 되면서 교통을 이어받았는데 1909년 증산이 사 망하자 신도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 역시 당시 훔치교라고 불리고 있던 증산교에 대하여 회의를 품고 금산사 등 여러 곳을 다니며 수도에 전념하였다. 1911년 증산의 부인인 고씨가 증산탄신기념치성을 드리던 중 졸도하였다. 그 뒤부터 고씨부인 이 증산의 평소 언동과 비슷한 행동을 하게 되자, 증산의 영이 감응되었다면서 많은 사람들이 모 여들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차경석은 고씨부인을 앞세워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에서 선도교(仙道 敎, 太乙敎)라는 이름으로 포교를 시작하였다. 교단이 커짐에 따라 실권을 장악한 그는 1918년 고 씨부인이 이곳을 떠나자 교주가 되었다. 1920년에는 천지운도(天地運度)에 따라 자기가 동방연맹(東邦聯盟)의 맹주(盟主)가 되고, 조선 은 세계 통일의 종주국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제도를 혁신하여 전국의 신도를 60방주로 나누 어 묶고 이를 통솔하기 위하여 많은 간부를 임명하였다. 1921년 일본 경찰의 체포령과 비상망을 뚫고 경상남도 덕유산 기슭의 황석산(黃石山)에서 대규모 천제를 지내고 국호를 시국(時國), 교명 을 보화교(普化敎)라고 선포하였다. 그 뒤 신도들간에는 그가 천자(天子)로 등극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나갔고 그를 차천자로 부르게 되었다. 1922년 정읍 본부에 대규모 교당을 신축하였 는데 백두산에서 목재를 운반하여 사용할 만큼 교세가 확장되었다. 甑山敎槪說
n 채경달(蔡慶達) 관향은 평강(平康)이니 의병장(義兵將) 홍국(弘國)의 둘째아들이며, 훈련운 주부(訓鍊院主簿) 명 달(命達)의 아우이다. 그도 무과(武科)에 올라 훈련원정(訓鍊院正)이 되었는데 1592년(宣祖 25년) 임진왜란을 당하자 아버지 홍국을 따라 의병의 돌격장(突擊將)이 되어 적과 싸웠고 동년 9월 흥덕 남당리 회명에 참가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에 부안 호벌치에서 적과 싸우다가 부친과 장형과 함 께 순절했다. 興城誌
n 채덕량(蔡德良) 관향은 평강(平康)이며 생원(生員) 상(瑺)의 손자이다. 1592년(宣祖 25년)에 임진왜란을 당하 자 아우 충량(忠良)과 함께 할아버지를 모시고 창의(倡義)에 가담하였으며, 1597년 정유재란이 일 어나자 다시 창의하여 부안 호벌치(胡伐峙)싸움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3조손이 함께 순절하였다. 興城誌
n 채명달(蔡命達) 관향은 평강(平康)이며 의병장 증병조판서(贈兵曹判書) 홍국(弘國)의 큰아들이다. 그는 힘이 세 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뛰어났으며 무과(武科)에 올라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가 되었다. 1592년 (宣祖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홍국을 따라 의병의 향사도감(嚮士都監)이 되어 금산 (錦山)싸움에 참가했고 1597년(宣祖 30년) 정유재란이 다시 일어나자 부안 호벌치에서 부친과 함 께 싸우다가 부친이 순절함을 보고 아우 경달(景達)과 함께 적진에 돌진하여 아버지 원수를 갚으 려다 순절하였다. 興城誌 牟陽城의 얼
n 채 삼(蔡 蔘) 관향은 평강(平康)이며 예조판서(禮曹判書) 충경(忠敬)의 현손인데 참봉(參奉)을 지냈다. 1592 년(宣祖 25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아들 대림(大臨)과 사위 고덕붕(高德鵬)과 함께 의병장 채홍국 (蔡弘國)과 흥덕 남당리(南塘里)에서 삽혈동맹(歃血同盟)하였고 정유재란 때 부안 호벌치(胡伐峙)
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했다. 興城誌 牟陽城의 얼
n 채영달(蔡英澾) 관향은 평강(平康)이며 의병장(義兵將) 홍국(弘國)의 셋째아들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충효 심이 강하였고 1592년(宣祖 25년) 임진왜란 때 부친과 두 형을 따라 의병에 가담하였다. 그는 부 사도감(副射都監)이 되어 순천(順天)싸움에 참가했고 1597년의 정유재란 때도 장등(長嶝)에서 왜 병과 싸웠고 부안 호벌치에서 부형이 순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적군을 무찌르고 다음날 부 형의 시체를 모셔다 안장하였다. 1636년(仁祖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야(李埜), 고수겸(高 守謙), 고처겸(高處謙), 조운(曺雲) 등과 창의병을 일으켰다. 興城誌
n 채홍국(蔡弘國) 자는 광보(光補)이고 호는 야수(野叟)이며 관향은 평강(平康)이니 1534년(中宗 29년)에 출생하 여 1597년(宣祖 3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효성으로 부모를 섬겨 향리와 종족의 칭송을 받았고 충용(忠勇)이 과인하여 주위 사람들의 촉망을 받았다. 1592년(宣祖 25년) 공의 나이 58세 때 임진란을 당하여 고경명(高 敬命)의 진영이 있는 금산(錦山)으로 달려갔으나 고경명이 이미 순절한 뒤이므로 고향에 돌아와 그의 세 아들과 종족 33명을 규합하고 동지 고덕붕(高德鵬), 조익령(曺益齡), 김영년(金永年) 등 59인과 흥덕 남당리에서 의병 창의의 혈맹을 하고 대장이 되어 왜적과 여러번 싸워 이겼다. 선조 가 그 사실을 듣고 가상히 여겨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제수하고 다시 가선 동추(嘉善同樞)로 승진 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전국에 격문을 돌리고 동지를 규합하여 흥덕 배풍재(培風 嶺)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부안까지 추격하여 호벌치(胡伐峙)에서 싸우다가 적의 탄환을 맞고 장렬 한 최후를 마쳤다. 1872년(高宗 9년)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되고 사제(賜祭)하고 명정(命旌) 했으며 복호(復戶)되었다. 興城誌 全國邑誌
n 최봉의(崔鳳儀) 호는 오월(梧月)이고 관향은 경주(慶州)이니 만오 후경(晩悟侯慶)의 아들이다. 그는 부친의 효 행을 본받아 실천했는데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편모를 모시는데 정성(定省)의 절차와 어초(漁樵) 의 공양을 극진히 하였다. 그의 모친이 별세하자 3년의 시묘를 마치고 부친을 추모하는 3년상을 다시 이행하니 어려서 못다한 도리를 이행한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나라에서 1885년(高宗 22년)에 부친과 함께 명정(命旌)되고 좌승지(左承旨)의 증직이 있었다. 그의 정려(旌閭)가 부안면 용산리에 있으며 송사 기우만(松沙奇宇萬)의 양세정려기(兩世旌閭記)가 있다. 全國邑誌 牟陽城 의 얼
n 최순모(崔純模) 자는 백효(伯效), 호는 후운(後雲), 본관은 경주(慶州)이니 1886년(高宗 23년) 공음면 칠암(七 岩)에서 출생하였다. 기상이 괴오(魁梧)하고 재질이 총명하여 일찍이 송사 기우만(松沙奇宇萬) 문 하에서 경학(經學)의 깊은 뜻을 터득하고 또한 소남 이희수(少南李喜秀)에게 서화(書畵)를 배워 글 씨가 정묘하고 그림에 일가(一家)를 이루었는데 산수화(山水畵)와 화훼(花卉)를 잘하고 특히 일지 송(一枝松), 일지매(一枝梅)로 그린 병풍 그림은 사람들이 보배로 여겼다. 인품이 개결(介潔)하여 세간 영리(榮利)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오직 시문(詩文)과 서화로 노년 의 즐거움을 삼아 추산봉(秋山峰; 성송면 鶴山) 아래 일로당(逸老堂)을 지어 사림(士林)을 맞이하
고 후진(後進)을 가르치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茂長誌
n 최여겸(崔汝謙) 천주교명은 마티아, 1762년(英祖 38년)에 공음면 석교리(石橋里)에서 출생했다. 충청도의 사도 인 이존창(李存昌)에게서 복음의 진리와 서양의 신학문을 배우고 돌아와 여러 사람에게 알리고 다 녔는데 그의 열성과 신앙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감명을 받아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러나 1791년 (正祖 15년) 천주교의 박해가 일어나자 무장까지도 그 여파가 미쳐오자 한산(韓山)의 처가로 피신 했는데 그곳에서도 그가 입교시킨 사람 중에 28명이나 체포되면서 그 중 몇 사람이 그를 고변하 여 1801년(純祖 1년) 4월 13일에 붙잡혔다. 한산 관아에서 무장으로 압송되고 전라감영(全羅監 營)을 거쳐 형조(刑曹)로 이송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고향인 석교리 개갑(介甲)장터에서 주민이 지 켜보는 가운데 참수되니 그의 나이 39세되는 1801년 7월 19일이었다. 2004년에 그의 순교지가 고창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2007년 교황청으로부터 성인으로 추서되었다. 高敞郡鄕土文化 遺産審議資料
n 최전구(崔銓九) 자는 우서(禹瑞), 호는 지은(智隱), 본관은 전주(全州)이니 1851년 성송면 조동(釣洞)에서 출생 하였다. 면암 최익현(勉庵崔益鉉)의 문인으로 1900년 소경원참봉(昭慶院參奉)에 제수되고, 을사보 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되자 스승 면암을 모시고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 호남의병창의소 를 설치하여 의병을 모아 정읍, 곡성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순창에서 패하여 해산했다. 1910년 합방조약(合邦條約)이 체결되자 일황(日皇)을 성토하는 십대죄목(日本君長 十大罪目 通 吿文)을 열거하여 보내려다가 검거되어 6일 동안 단식 끝에 석방되었다. 1912년 왜놈의 복제(服 制)를 우리 민족에게 입힐 수 없음을 역설한 장서(長書)를 써서 각지에 선포하다가 욕지도(欲智 島)로 귀양가서 1년간 유폐되고, 1914년 경향 동지를 규합하여 조국광복단(祖國光復團)을 조직하 여 의군부 순찰사(義軍府巡察使)로 활약하다가 1917년 영종도(永宗島)에 1년간 유폐되었다. 1918년 고종이 승하하자 의분을 참지 못해 동지들과 함께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다가 9일의 단식 끝에 석방되고 그 일로 3일 후 다시 검거되었으나 죽음을 각오한 단식에는 왜경(倭警)도 어 쩔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 성송면 추산봉(秋山峯)에 망오대(望梧臺)를 쌓고 국상(國喪)을 부모의 상사처럼 조석으로 서울을 향해 통곡을 하고, 석굴(石窟)에 숨어 살면서 상소하여 국권을 회복하 고 국통을 이어받을 것을 논하다가 또 검거되었으며,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황후에게 상소하여 순종이 아들이 없으니 마땅히 사자(嗣子)를 정하여 국맥을 이어야 함을 논하다가 또 검거되었는데 사색(辭色)이 엄정하여 조금도 굽힘이 없었다. 생활이 가난하여 밭 세 마지기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호 적도 없고 세금도 안 냈으며, “삼천리 강토가 모두 왜놈에게 빼앗겼으나 오직 나의 한 뙤기 밭만이 조선 을 보전하고 있다.”고 하였다. 유고 4권이 전하고 성송면 추산(秋山) 마을 앞에 추모비(追慕碑)가 서고 건 국포장(建國褒章)이 추서되었다. 韓國義烈錄 高敞의 얼 湖南人物志
n 환응당 김탄영(幻應堂 金坦泳) 김해김씨(金海金氏) 기우(基愚)의 아들로 1847년(憲宗 13년) 심원면 두어(斗於)에서 출생했다. 14세에 선운사 성감장로(性鑑長老)에게 나아가 머리 깎고 스님이 되어 보월선사(寶月禪師)에게서 사미계(沙彌戒)를 받고 5년 뒤 경담율사(鏡潭律師)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이후 제산(諸 山)의 고승을 찾아 수도하기 8년에 교선(敎禪)에 통달했다. 고종 10년 27세에 경담장로(鏡潭長老)의 법통을 이어, 이후 백양사 운문암(雲門庵)에서 강(講) 을 하기 10여 년에 학인(學人)이 언제나 암자에 가득했다. 그 뒤 암자 곁에 따로 우은난야(愚隱蘭
若)를 지어 선(禪)공부를 하다가 1912년 여망에 따라 백양사 주지가 되고 3년 뒤 다시 선운사로 돌아와 불법을 강하였다. 1927년 조선불교 중앙총회에서 대사(大師)로 추대되어 교정(敎正)이 되 고 2년 뒤 83세로 입적(入寂)하니 법랍(法臘)은 70세였다. 석전 박한영(石顚朴漢永)은 스님의 사리탑명(舍利塔銘)에서 “대사(大師)는 스님이 된 뒤 70년 에 그림자도 속루(俗累)에 물들지 아니하고, 강을 하기 수십 년에 위엄이 있어 가까이 가지 못할 것 같으나 대하면 언제나 온화하고 순순히 가르쳐 게으르지 않았으며, 아침 저녁으로 남해대사(南 海大士)와 영산십륙불(靈山十六佛)을 받들어 노년토록 더욱 경건하매 업루(業累)가 탈락하여 가풍 (家風)이 영정(寧靜)했다.”고 기술했다. 兜率山幻應堂大師舍利塔銘
n 황 욱(黃 旭) 호는 석전(石田)이고 관향은 평해(平海)이니 1898년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0년 망국의 한을 달래기 위해 금강산에 들어가 10년 이상을 왕희지(王羲之)와 조맹부(趙孟頫) 의 글씨를 공부하기도 하였으나, 그 후로는 신위(申緯)의 시서(詩書)의 세계에 탐닉하게 된다. 악 필(握筆)로 쓰기 전에는 일반적인 서법에 맞는 운필(運筆)로 해서․행서․초서 등을 즐겼으나 수전증 이 찾아온 70대부터 악필로 전환하게 된다. 특히 85세 이후에는 오른손 악필도 곤란할 정도의 신 체적 불운을 왼손 악필로 극복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또한 왼손 악필을 구사했던 기간 중 93 세를 기점으로 그 이후의 작품들은 이전까지의 자형이 오른쪽 어깨가 내려가면서 자간의 흐름이 달라진다. 이는 오른쪽 어깨가 처지는 불균형을 좌우로 움직이는 흐름으로 그 단점을 보완하여 전 체의 통일감과 안정감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高敞郡의 역사문물
n 황윤석(黃胤錫) 자는 영수(永叟), 호는 이재(頤齋), 관향은 평해(平海)이니 만은 전(晩隱㙻)의 아들이다. 1729년 (英祖 5년) 성내면 조동리(槽東里)에서 출생하여 1791년(正祖 15년)에 졸하였다. 그는 대대로 학문과 행의가 뛰어난 집안에서 태어났으므로 가풍을 이어받아 당대의 석학인 백 시명(白時明), 백시덕(白時德), 박필주(朴弼周), 김원행(金元行) 등에게 배웠고 정후(丁垕) 윤봉구 (尹鳳九), 양응수(楊應秀), 김시찬(金時粲), 김수(金璲), 안형옥(安衡玉), 서명응(徐命膺), 정경순(鄭 景淳), 조정(趙王政), 윤창정(尹昌鼎), 이간(李湅), 김용겸(金用謙), 김성범(金聖範), 김이신(金履信), 심유진(沈有鎭), 김광한(金光漢) 등과 교유하면서 경서를 비롯하여 시무책에 이르기까지 백방으로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역(易), 수(數), 성(性), 리(理)를 비롯하여 율려(律呂), 성음(聲音), 방언(方 言), 가요(歌謠), 여지(輿地), 복식(服飾), 형척(衡尺), 보계(譜系), 제도(制度), 병진(兵陣), 필화(筆 畵), 의약(醫藥), 풍수(風水), 농형(農刑), 선불(仙佛), 초목(草木), 금석(金石) 등에 이르기까지 통달 하였다. 관직으로는 참봉(參奉), 직장(直長), 별제(別提), 익위사익찬(翊衛司翊贊), 동부도사(東部都 事), 목천현감(木川縣監), 전의현감(全義縣監) 등을 지냈다. 그의 학문은 실학시대의 학풍을 이어받아 발전시키고, 북경을 거쳐서 전래된 서구의 지식을 받 아 이를 소개한 공이 크고 또 종래의 이학(理學)과 서구의 새 지식과의 조화를 시도한 점이 특색 이다. 저서에는 이재난고頤齋亂藁 , 이수신편理藪新編 , 자지록資知錄, 집강안執綱案 등이 있다. 이 중 이재난고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발췌한 이재유고에 「자모변字母辨」․「화음방언자의 해華音方言字義解」 등이 있어 국어학사의 연구대상이 되며, 운학(韻學)에 대한 연구는 이수신편 에 실려 있다. 高敞郡의 역사문물 興城文獻錄 全北의 뿌리
n 황이후(黃以厚) 자는 구이(久而), 호는 안촌(安邨), 본관은 평해(平海)이니 첨정(僉正) 처중(處中)의 아들이다. 1589년
(宣祖 22년)에 성내면 구수동(龜壽洞)에서 출생하여 1642년(仁祖 20년)에 졸하였다. 그는 16세 때 선계 (先系)의 발문(跋文)을 지으면서 선대의 빛나는 가업을 계승할 것을 다짐할 만큼 문장에 숙성했고, 특히 시․서․화에도 솜씨가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난정을 당하자 과거의 뜻을 버리고 선산이 있는 왕륜산(王 輪山) 아래 보안리(保安里)에 은거하였고 광해군 7년에 장성에 사는 주부(主簿) 박상의(朴尙義)를 불러다 가 함께 생활했다. 인조 2년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어 임금이 공주로 몽진하자 영광군수 원두표(元斗 杓)의 토적 창의(討賊倡義)에 호응하여 협력했고 인조 5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임금은 강화도로 들어 가고 사계 김장생(沙溪金長生)이 세자를 따라 전주에 이르러 창의하자 아우 극후(克厚)와 함께 동지를 규 합하여 의병을 모집하고 양곡을 거두어 바쳤다. 興城文獻錄 全國邑誌 全北의 뿌리
n 황재중(黃載重) 자는 원숙(元叔), 호는 구암(龜巖), 관향은 평해(平海)이니 1664년(顯宗 5년)에 성내면에서 출 생하여 1718년(肅宗 4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안촌 이후(安邨以厚)의 증손자로 시례지풍(詩禮 之風)을 이어받고 농암 김창협(農巖金昌協) 문하에서 성리학을 전공하였으며 함양진학(涵養進學) 이란 4자를 써서 붙이고 좌우명으로 삼았다. 또 그는 집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였고 소요산(逍遙 山) 옛 집터에 서당을 세워 많은 후학을 지도하였다. 그는 뒤에 행의로 추천되어 고을 읍지(邑誌) 에 기록되었으며 당시 학문이 높은 금천 나중기(金川羅重器) 등과 교유하면서 농암의 기대가 자못 컸으나 45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고을 사람이 그의 사당을 세웠으나 갑오년에 훼철되 었고, 문집 구암유고龜巖遺稿 2권이 전한다. 興城文獻錄
n 황 전(黃 㙻) 자는 사후(士垕), 호는 만은(晩隱)이고 관향은 평해(平海)이니 안촌 이후(安邨以厚)의 현손이다. 1704년(肅宗 30년) 성내면 구수동(龜壽洞)에서 출생하여 1771년(英祖 47년)에 졸하였다. 그는 어 려서 부친을 여의고 숙부인 구암 재중(龜巖載重)에게 글을 배워 경전에 통달하고 당세의 유종(儒 宗) 병계 윤봉구(屛溪尹鳳九), 미호 김원행(渼湖金元行) 등과 도의로 교유했다. 1764년 판서(判書) 이익보(李益輔)가 주관하는 전형에 발탁되어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미처 나아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아들에 이재 윤석(頤齋胤錫)과 주석(冑錫)이 있고 문집 만은유고(晩隱遺 稿) 4권 2책이 전한다. 興城文獻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