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의 농악 2010년 10월 31일(일) 농학전수관에서 구술을 받았다. 영무장의 계보를 다르게 하였다. 이명훈은 자기 계보에 맞 춰 글을 썼다. (구슬내용을 참조) 고창에서 꼭 해야 할 것이 있다. 보릿대춤과 주릿대춤을 복원해야 한다. 보릿대춤은 뻣뻣한 춤으로 리듬에 맞춰 손으로 춤을 추는 것이다. 주릿대춤은 주릿대를 튼 다는 말이다. 의자에 앉혀 주리에 틀림을 당하는 것을 묘사한 춤이다. 빨간봉 두개로 주리 를 트는 장면의 묘사다. 주릿대춤이 고창에 있었다. 주릿대춤을 재현해야 한다. 주릿대춤은 손을 무릎에 놀려 놓고 다리를 꼬며 추는 춤이다. 꼬는 시늉만 하는데 농학의 잡색들이 한 다. 고창의 김동석씨가 리더를 하였다. 오거리 당산처럼 연구하여 춤을 재현해야 한다. 주릿대춤은 고창풍물의 가락을 가지고 잡색 10명이 달려들어 추었다. 고창에서 이기화전원장님(이하 이원장님)의 어머니가 장구를 잘하였다. 강진이 친정으로 접 굿거리장단을 잘하였다. 일제시대 매년 봄이면 고창에서 화전놀이를 하였다. 원장 어머니(이 연지)가 꼭 참석을 해야 화전놀이가 되었다. 이연지여사는 접굿거리로 일곱가락이 들어갔다. 접굿거리 치는 사람이 없다. 고창에서 이명훈이가 새로 만들어야 한다. 강진이나 진도에서 소리를 녹음해서 고창에서 재현을 해야 한다. 한국의 장단이 거의 겉굿거리로 끝난다. 열채가 떠는 소리가 7가락이나 되었다. 이것을 배워야 주릿대춤을 재현할 수 있다. 풍물은 접굿거리로 해야 구색이 맞추어진다. 그래야 시늉이 들어간다. 명인이야 되어야 겹 굿거리를 할 수 있다. 고창의 화전놀이는 양력 4월로 한식을 전후해서 했다. 모양성 안에서 했다. 각 리별로 팀들 이 왔다. 화전놀이의 생명은 장구가락에 있다. 이원장님은 당골에 팔렸다. 홍낙관의 며느리인 홍당골에 팔린 것이다. 그래서 이원장님에게 는 두 분의 어머니가 계신다. 당골집에 가면 꼭 홍당골이 시루떡을 아꼈다 주셨다. 홍낙관 은 동학의 당골부대장을 맡았다. 고창에는 당시 당골이 100명이 넘게 있었다. 포구가 많아 서 고창에 당골에 많았다. 홍낙관의 며느리가 이원장님의 양어머니다. 오거리당산은 문화원에서 발굴했다. 이것도 어머니의 유언과 풍물에 대해 잘 아니까 가능했 던 것이다. 어머니는 당산제를 꼭 지키라는 유언을 주셨다. 그래서 발굴한 것이다. 고창에는 34집이나 되는 천석지기의 중부자가 많았다. 34집만 돌아도 몇 년은 걸린다. 그래서 고창의 풍물이 발달하게 된 것이다. 풍물패를 데려다가 소작농들이나 머슴들을 위로 하였다. 김동석씨는 1920년생으로 고창읍에서 설장고를 가장 잘쳤다. 서울 화신백화점 네거리에서 설장고를 쳤다. 하얀버선을 신고 발레모양으로 사뿐사뿐 리듬에 맞춰 장구를 치면 뒤금치가 닿을 시간이 없었다. 리듬과 발걸음이 잘 맞았다. 발이 앞서야 장구가 나온다. 그는 미국에 도 다녀왔다. 고창의 풍물패 장고가락이 유명하였다. 이원장님 어머니가 1912년생으로 김동 석씨가 8년 연하였다. 김동석씨는 누님누님하면서 찾아왔다. 아니면 매씨 저왔어요 하고 오 면 어머니는 그를 사랑방으로 안내를 하여 밥과 잠자리를 제공하였다. 박귀바우가 고창농악의 시조격이다. 그 제자가 강성욱이고, 강성욱의 제자가 박성근이었다. 박성근의 제자가 황규언이고, 이명훈이가 황규언으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이것이 고창농학 의 계보다. 박귀바우는 1860년생으로 성송 남창사람이다. 어디에서 장구를 배웠는지 장고쇠
가 능했다. 박성근이 해방 후에 날렸다. 한국전쟁 직전까지 날렸었다. 황규언이 그럭저럭 배 워 제자가 되었다. 황규언은 고집스러웠다. 성송 양사사람으로 팁을 주지 않으면 추지 않았 다. 인간적으로 우대를 하지 않으면 가지를 않았다. 고창농악의 장구는 다 죽고 황규언만 남아 전해졌다. 1991년 이명훈이 이원장님을 찾아왔 다. 그녀는 이덕우씨 외동딸로 서울의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고창의 농악을 전 수받고자 왔던 것이다. 고창가락이 그렇게 좋았는데 배울 곳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 북대학교 국악과에 편입하여 졸업 후에 찾아 오라하였다. 졸업이전에 황규언씨에게 묶어 주 어 배우도록 하였다. 이 무렵 김덕수가 나와 사물놀이의 본질을 흐려버렸다. 이원장님은 이 때 노령지라는 전주에서 나오는 학술지에 “전라좌우도의 농악의 비교분석”이라는 논문을 발 표하였다. 사물놀이는 한국전통의 농악이 아니고 없는 가락이다. 소위 용두질가락(자위행위 의 속어)이라 해서 풍물패들이 무대에서 개인기를 하다가 마지막 신들려서 미쳐서 돌아가는 것이 사물놀이다. 한국농악의 전통을 버렸다. 김덕수의 사물놀이는 이 마지막 부분만 떼어 다 공연을 한 것이다. 전주의 인간문화재 최승희가 김여랑의 유일한 제자다. 김여랑이 적벽가를 배워 인간문화재 가 되었다. 인간문화재는 출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계보가 중요하다. 그래서 이명훈이를 데리고 최승희에게 갔다. 전북대에 들어갈 때 최승희가 추천을 하고 개인교습을 해주었다. 당시 명인들만 이명훈이에게 소개를 해주었다. 그래서 전북대에 들어간 것이다. 황규언씨에게 명훈이를 가르쳐 보라고 추천을 하였다. 황규언씨가 명훈이를 보고 기본도 되 있고, 제법 장구를 잘하니 받아들였다. 제대로 사제지간이 된 것이다. 황규언씨 집에서 먹고 자면서 수업을 받았다. 진짜 가락이 나왔다. 이것이 진짜 고창농악이다. 황규언씨가 인간문화재가 되었으니 이명훈이는 이수자가 된 것이다. 명훈이가 전주 전국대 회에서 1등을 하였다. 명훈이가 승계를 하게 되었다. 아직은 나이가 어려 인간문화재는 안 되었지만 곧 될 것이다. 이덕우씨는 고수 여술사람으로 끼가 많았다. 고창농악단은 1986년도에 문화원에서 만들었다. 군수에게 말해 고창오거리당산제를 살려야 되는데 풍물가락이 없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군수의 도움을 받아 고창에서 농악을 하는 사람들을 모았다. 실기 테스트를 하여 선발하였다. 그 당시 흥덕사람들은 모두 빼버렸다. 편 재준의 생질도 있었지만 그 사람도 빼버렸다. 영무장 쪽에서 많이 선발하였다. 숙식을 어렵 게 문화원에서 제공하면서 연습을 하였다. 1995년 국악협회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을 하고 그 다음해인 1996년 지금의 송영래원장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고집스럽게 고창농악을 살렸다. 당시 황규언씨를 상쇠로 앉혔다. 상쇠를 선발하는데 한달이 걸렸다. 강대홍은 양반집 사람으로 성송면의 진주강씨다. 그는 수버꾸쟁이로 소고의 대장이었다. 유만종보다는 4살이 어렸다. 발리듬이 잘 맞았다. 소고가 더 멋졌다. 유만종은 소고는 잘했 는데 몸이 뻣뻣했다. 박성근패들이 집을 자주 방문하였다. 김동석이 길꾼으로 먼저 왔다. 박성근이 오면 김동석 을 데리고 들어왔다. 이들이 오면 구경꾼들이 많이왔다. 이들은 보통 15-20일씩 머물다 갔
다. 이원장님의 어머니가 장구를 잘하니 많이들 왔다. 다섯가락만 넣어도 명인이라 하였다. 신들린 용두질가락이라 하였다. 신들린 클라이막스 장면에 들어가는 가락이 사물놀이다. 사물놀이가 농악의 대명사가 아니다. 전라도의 웃녁인 군산과 익산이고, 아랫녁은 목포와 진도, 강진이다. 웃녁의 가락은 빠르고, 아랫녁의 가락은 느리고 섬세하였다. 고창은 지리적으로 위 두 지역의 중간으로 간이 맞았 다. 그래서 농악을 배운 사람들이 고창의 영무장 농악을 좋아한다. 이곳은 느리지도 바르지 도 않다. 황규언이 이를 지켰다. 김동석은 빨치산들에게 죽었다. 빨치산들이 노작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싫어했다. 1948년 이승만 대통령이 있을 때였다. 고창농악패들이 서울의 화신백화점 네거리에서 1등 을 하였다. 그래서 청와대에 가서 공연을 하였다. 군정청의 모대령이 고창농악을 보고 이를 미국에 소개하였다. 그 대령이 김동석의 춤사위를 보고 반하여 미 극동사령부에 연결하여 워싱턴에서 공연을 하고 그의 고향에서 공연을 하였다. 이승만이 미친 것은 김동우라는 사람의 새납이었다. 김동우는 이를 신기업에게 배웠다. 원 래 김동우는 읍내에 나와 엿장수를 하려고 배웠다. 그는 매일 연습하여 결국 두 개를 동시 에 따로 따로 각각의 음을 내는 쌍 새납을 불었다. 이 쌍 새납을 보고 이승만은 한국의 트 럼펫이라 하며 좋아했다. 미국의회에서 고창농악이 날렸다. 특히 김동우 쌍 새납을 보고 기인이 왔다고 하였다. 두 음악이 나왔다. 고창에서 양반춤이 있었다. 고창의 명인들을 체크해야한다. 김영길이 명인이 다. 김영길은 김동우의 셋째 아들이다. 국회의원 장세완씨의 사위다. 그는 활동비가 없어지 자 그 뒤로 쉬고 있다. 나이는 이제 회갑이나 되었을 것이다. 명인들의 기본 생활은 유지할 수 있도록 군에서 지원을 해야 한다. 일자리를 만들어 주면 된다. 고창농악은 신청(神聽)에서 노작(勞作)농악으로 구한말에 바뀌었다. 다른 곳은 애매모호하 다, 대부분이 신청농악이다. 고창은 노작농악이 맞다. 고창은 중부자들의 보이지 않은 경쟁 으로 노작농악으로 명확한 한계를 지었던 것이다. 그 매개역이 바로 34집의 중부자들이다. 이동원은 1922년생으로 성내 용교사람으로 김홍집의 제자이다. 김홍집과 김홍술은 장성태 생으로 김홍술은 상하에서 살았다. 김홍집은 흥덕에 와서 성내 풍물을 제대로 익혔다. 김홍 집의 제자가 이동원이다. 황규언보다 앞서 장구의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이동원은 부안에서 활동을 하였으나 고창 성내출신이다. 이동원의 제자가 나금추다. 나금추는 부포짓을 잘하였다. 부포짓을 이동원에게 배웠다. 나금 추는 고창의 전통가락은 아니다. 그래서 이명훈이가 외도를 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나금추 가 부포짓을 잘하였다. 쇠가락은 잡탕이다. 계보가 있는 가락은 아니다. 백남윤은 1922년생으로 성내면 부덕 출신이다. 그는 인간문화재로 처음 지정이 되었고 김 제에서 활동을 하였다. 12발 상모놀이를 김제에 파급시킨 인물이다. 그는 양반으로 성내에 서 못하게 하자 김제로 떠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그는 12발 상모놀이의 제일인자다. 이 부인이 지금 살아 있다. 버꾸놀이의 도안 노트가 있다. 한 권이 있는데, 그것이 고창가락이
다. 그는 메모를 잘하였다. 고창 버꾸놀이의 계보가 있다. 고창농악의 계보 쇠 박귀바우(남창, 1860년) 강성옥(姜成玉, 양사 법성에서 1886년생) 정호풍(대산) 박성근(朴成根, 고수 오산-강성옥, 신영찬, 신두억의 문인-1902년생) 김현재(무장) 성기만(송산) 임대은(흥덕 신덕) 쇠, 장고, 소고의 명인 김봉문(흥덕 읍내) 김홍술(金洪述, 1917, 상하 하장) 김홍집(장성생 상하, 김학준 문인-성내출신-법성활동) 나덕봉(羅德奉 1912, 해남생-고수) 박동만(1950, 박성근 문인, 공음 신대리) 신재근(申在根, 1892, 신두억의 부, 중복) 신재진(申在鎭, 1894, 신재근의 아우, 온수동) 신영찬(申永燦, 1914, 신재진의 아들) 신두억(申斗億, 1915, 강성옥의 문인) 김상구(金相九, 1911, 박성근 문인, 고수 대성) 김해식(金海植, 1914, 박성근 문인) 황규언(黃圭彦, 1920, 신영찬, 신두억, 박성근 문인) (장고 金萬植 문인) 장고 신봉섭(申奉燮, 1896, 신두억의 족숙) 김덕봉(1900, 고수 대성) 김홍술(金洪述, 1917 장성생-상하 하장) 김홍집(金洪集, 1920 장성) 김사섭(金四燮, 1912, 성내 서울국아계술학교사) 김만식(金万植, 1914, 양사 김학준의 문인) 김동석(金東錫, 1920, 수북, 김홍집 문인) 강대문(姜大文, 1920, 남창, 김학준 문인) 이동원(李東元, 1922, 용교리, 김홍집 이봉문 문인) 새납 신기업(申基業, 1905, 고창 도산) 김동우(金東宇, 1914, 고창 쌍새납, 신기업 문인)
버꾸 백남윤(白南潤, 1922, 성내부덕, 12발 상모) 황재기(黃在基, 1923, 공음, 버꾸명인) ??만동(刘万鐘, 1922, 성송 양사) 강대홍(姜大洪, 1926, 성송 양사) 박종남(朴鐘南, 아산 주진, 박성근 일행) 박길용(朴吉龍, 아산 용장, 박성근 일행) 김양술(金良述, 성송 양사 수버꾸명인 김만식의 아우) 쟁 이효도(李孝道, 아산 주진, 박성근 일행)
추후 사업 고창의 주릿대춤을 재현해야한다. 고창의 양반춤을 재현해야 한다. 명인들에 대한 조사와 이들의 생활실태 파악하여 고창의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 백남윤의 버꾸놀이의 도안 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