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같은 바다가 품은 마을, 장호리 이명철
상하면 장호리 장호리
용정리
1. 마을의 위치와 유래
검산리
장산리
송곡리 자룡리
1) 장호리의 개요 석남리
하장리
상하면 소재지에서 서북 방향으로 장호선 도로를 따라 5km 정도 가다 보면 장호리가 나
온다. 장호리는 상하면에 속한 지역이다. 상하면은 삼한시대 마한(馬韓)의 일리국에 속하였
다는 설이 있으며, 백제시대에는 상노현(上老縣)에 속하였다. 따라서 지금의 고창군 상하면 용대리
장호리의 약사(略史)는 마한시대 일리국, 백제시대 상로현 또는 좌로현(佐魯縣)이다. 통일신라
경덕왕(757) 때 장사현(長沙縣)으로 무령군(武靈郡, 영광)의 영현(領縣,고창 포함)이었다. 조선조 경 종4년(1723)에 무장현에 상용복면(上龍伏面)과 하용복면(下龍伏面)을 두었는데, 장호리는 상용
무장군의 옛지도, 원무장군도(1922)
무장군의 옛지도
상하면 장호리 ― 159
복면에 속하였다. 그 후 고종 32년 상용복면은 상리면(上里面), 하용복면은 하리면(下里面)이 되었다.
(1) 장호리의 인문환경
장호리는 행정구역으로는 장호, 용두, 복구이며 자연부락으로는 장불(長湖), 용사[龍沙, 菊
村],
용머리(갈머리, 龍頭), 복구(伏龜, 伏狗), 가남포(可南浦), 새터, 평곡(坪谷)이다. 기타 지명으로
는 넘언들, 목냉깃벌, 진쟁이들, 쪽재들이 있다. 장호마을 표지석
장호마을 전경
(2) 장호리의 자연환경
불로 불리다 국촌으로 변경되었으며, 그 후 용사를 거쳐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평곡리,
장호마을은 이름이 뜻하는 바와 같이 논과 밭이 넓은 지역이다. 긴 벌이 있어 장불 또는
장룡리, 광촌리, 복구리의 각 일부와 오리동면 중구리 일부와 병합하여 장호리라 해서 상하
장호(長湖)라고 불렀다. 또는 긴 벌의 뜻인 평(平)자와 물의 상징인 용(龍)자가 들어간 가남
포, 복구, 새터, 용두, 평곡마을이 있다. 가남포마을은 예전에는 포구였다. 복구(伏龜)마을은
면에 편입하여 오늘에 이른다. 최근에 명사십리 해수욕장에 1번 군도가 완공되어 어촌 체험 마을로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지형이 거북을 닮았다. 용두마을은 용의 머리를 닮았을 뿐 아니라 전답에 필요한 물과 깊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장호마을 뒤편에는 명사십리를 따라 여름이면 해당화가 곱게 핀다. 그
(2) 용두(龍頭)마을의 유래
아름다움을 자랑했던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마을에서 보면 호수처럼 보여 '장호(長
용두마을은 상하면 소재지에서 북쪽 방향으로 5km 정도에 위치한, 장호리 장호의 서쪽
湖)' 라고 불렀다. 약 30년 전만 해도 긴 개울이 있어 장호라 불린 것인데, 지금은 간척사업
도로 끝 마을이다. 해리면과 경계를 이루는데, 전에는 포구여서 가남포로 불리기도 했다. 원
으로 농토가 되었다. 호수처럼 보였던 곳이 지금은 농지가 되어 장호는 농촌과 어촌을 겸한
래 마을의 명칭은 평곡이었다. 그 후 마을의 형국(形局)이 용의 머리 같다 하여 갈머리로 불
마을이 되었다.
리다 용두로 변경되었다. 용두마을 앞에는 칠산 바다의 풍성한 어장이 펼쳐져 있다. 이곳은 1960년대까지 배가 입출항을 했다고 전한다. 가남포가 있었던 용두마을 앞들의 해수면의 높이는 2.3m이다. 1986년대 이후 개간사업으로 포구로서의 기능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용두마을은 1720년경 신창표씨 도흥의 11대 후손이 입향하여 설기한 마을이다. 이후 밀양 박씨 등 각 성씨가 입거하였다.
장호리 해안
장호리 방풍림 명사십리
2) 마을의 유래 (1) 장호마을의 유래
장호마을은 1636년경 병자호란 당시 철원주씨가 입향하여 설기한 마을이다. 1720년 신창 표씨가 입거하여 대를 이어 살아왔으나 지금은 각 성씨가 살고 있다. 원래 마을 이름은 장
160 ― 고창의 마을 제5집
장호리 해안
용두마을 전경
상하면 장호리 ― 161
3. 장호리의 인물과 행적
(3) 복구(伏龜)마을의 유래
복구마을은 상하면 소재지에서 서북 방 향 쪽으로 장호선 도로를 따라 4km 정도
1) 장호리의 인물
에 위치한 마을이다. 마을 동쪽으로는 장군
노병렬 1943년생으로 상하면 장호리 505번지에 출생했다. 그는 면단위에서 각 1명씩 군의
원을 선출할 당시 제2대 고창군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산과 봉화대가 있으며 북으로 해리면과 인 접해 있다. 남쪽은 장산리 춘봉산이 위치하
표철식 상하면 장호리 복구에서 출생하였다. 표철식은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융합기술연구
고 있다. 마을 서쪽으로는 서해가 있어 아 복구마을 전경
부문 USN, IOT 융합연구 부장, 한국전자통신연구원 다중위성수신안테나 연구팀장을 지냈
전에는 복구마을 앞쪽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복구마을에서 바라보면 장호 전체가 호수 같
다. 현재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 텔레매틱스 USN 연구단 RFID, USN연구그룹 그룹장을 맡
늑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주는 마을이다. 예
이 보였다고 한다. 장군산 아래에 있는 복구마을은 풍수상 군대가 매복하여 엎드리고 있는 형국 또는 거북이 엎드린 형국이라 하여 복군촌(伏軍村), 복구촌(伏龜村)이라고 하였다. 그 후
‘엎드릴 복(伏)’자에, ‘거북 구(龜)’자를 써서 복구라 하였다.
2. 장호리의 입향성씨와 유래
고 있다. 포상으로는 지식경제부가 주최하고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KEIT) 등이 공동 주
관하는 ‘2012년 상반기 으뜸기술상’인 ETRI 융합기술연구부문 USN/IOT융합상을 서울 코 엑스에서 수상했다. 2) 장호리에서 지냈던 분들 이재헌(李栽憲, 1873~1944)
1) 마을의 입향조(入鄕祖) 내력 (1) 장호
장호마을은 1636년(인조14) 병자호란 때 철원주씨(鐵原周氏)가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각 성씨가 살고 있으며, 특히 노씨와 표씨가 많
이 살고 있다. 1720년경 신창표씨(新昌表氏)가 입거(入居)했다고 한다. (2) 용두
1720년경 신창표씨 도흥(道興)의 11대 후손이 입향(入鄕)하여 설기한 마을이다. 이후 밀양 박씨 등 각 성씨가 입거하였다.
1982년 3월 18일 노병선(魯炳善, 당시 83세, 해리면 용반리 신흥 거주), 이재형(李載馨, 당시 78세, 해리
면 용반리 거주),
이환범(李煥範, 당시 73세, 장손, 심원면 고전리 진주 거주) 씨 등이 고창문화원에 내방
하여 증언한 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재헌의 자는 인배(仁培) 호는 하전(下田)이다. 그의 선대는 함평이씨(咸平李氏)로 시조 언
(彦)의
6대손 인문(仁問)의 둘째 손자인 삼언(三言)의 손자 현령공(縣令公) 조(稠)의 14대손 돈
복(敦福)의 장남으로 고창군 해리면 왕촌리 신흥마을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생활
이 풍족하였고 강직한 기질로서 호걸풍의 선비상으로 성장하여 경학(經學)을 익혀 관년에 이 르러서는 사림류(士林流)의 몽학(蒙學)훈장 노릇을 하기에 이르렀다. 13세 때 상하면 장호리
(長湖里)에
사는 부호(富豪)이자 동학접주였던 표종길(表宗吉)의 딸(18세)과 혼인을 하였다. 이
로 인해 그는 동학에 입도하게 되고, 접주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1891년 초봄 이후 청
(3) 복구
1659년경 신창표씨 11대 도흥영무(道興靈茂)가 경남 거창에서 입향하여 그 후손이 세거(世
居)
중이다. 이후 낭주최씨(郎州崔氏), 창원황씨(昌原黃氏), 함평이씨(咸平李氏) 등도 세거중이다.
162 ― 고창의 마을 제5집
해면(靑海面)의 15개 마을(안자, 송산, 고성, 평지, 하련, 평장, 수락, 신흥, 칠성, 행산, 임해, 용계, 송암, 이상) 과 오리동면의 21개 마을(왕촌, 대흥, 금평, 명고, 동호, 외경, 광승, 미동, 사반, 방축, 만화, 어룡, 라산, 월봉, 중구, 매남, 성산, 양곡, 신흥, 상부, 지로)을
순방하면서 접인들과 화합 맹약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였다. 1894년 3월 20일, 무장 고을 당뫼(현 고창군 공음면 구수마을)에서 일어난 동학농민
상하면 장호리 ― 163
혁명의 제1차 봉기 때 21살의 건장한 성년이 된 그는 장인 표종길이 중위장(中衛將)으로 나
것을 보면 대단한 인물인 듯싶다. 1894년 9월, 2차 봉기 때에도 『동학사』의 기록을 보면 임
설 때 부장(部將)으로 활약하게 되어 정읍, 태인, 금구, 진안, 장수, 남원 등지에 사는 표종길
형로와 함께 고창에서 5천군을 거느리고 일어난 것을 볼 수 있다. 농민군은 서울로 진격하
의 동학 접인들의 연락을 도맡아 순회 모병활동을 전개 하였으며, 4월 28일 전주 입성 전투
기 위해 논산에서 공주를 공략하고자 11월 9일 우금치에서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려 처
시에는 표종길의 지휘를 받아 특수 공격의 역할을 맡아 크게 활약하였다.
절한 전투 끝에 공주를 눈앞에 두고 퇴각하고야 말았다. 논산 황화대에서 정부군과 일본군 의 연합세력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황산벌의 매서운 바람과 함께 밀려나고 말았다. 농민군은
임천서(林天瑞, 1864~1894)
그의 본명은 종문(鍾文)이고 천서는 자이며 초명은 문수(文洙)이다. 고창군 고수면 인성리
(仁城里)
석우촌(石隅村, 돌무랭이)에서 아버지 임석황(林錫璜)과 어머니 울산김씨 사이에서 둘
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조양(兆陽)이다. 조양군 세미(世味) 후손이 고창 땅에 들어 온 분은 조양군으로부터 7세 되는 사복(士福)이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1445~세종27) 문과
전주성으로 퇴각했다가 11월 23일 금구 원평으로 후퇴하여 원평과 태인에서 안간힘을 다해 전투를 벌였으나 전세를 역전시킬 수는 없었다. 병사들은 모두 분산되고 임천서는 단신으 로 장호리 사돈댁으로 피신해 들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붙잡혀 법성포 수비대에 끌려가다 홍농면 지한리 다리에서 사지를 찢기는 죽음을 당하였다. 가족들이 시신을 거두어 고향 땅 석우촌 양지바른 곳에 묘를 쓰니 향년 31세였다.
급제한 후 서천군수를 지냈는데, 관직을 떠난 뒤 집에서 학문을 즐기며 자적하던 차에 마 침 아버지가 흥덕현감을 하는 터라 흥덕에 들렀다가 조양군의 묘가 있는 보성을 찾게 되었
4. 마을의 문화유적과 유물
다. 이때 고창 방등산 아래 지금의 외정마을 터를 발견하고 유사시에 피란지로 점찍어 두었 다가 연산군 때에 시절이 하수상함에 이곳으로 낙향하여 가솔을 거느리고 정착한 이래 15
1) 문화유적과 환경
세에 이르러 천서가 태어났다. 그러니까 천서는 조양군으로부터 22세가 되는 것이다. 그는
(1) 입제서당
장성에 사는 황주변씨(黃州邊氏)를 내자로 맞아들였는데 전봉준과는 유년 시절에 동문수학
당시의 교육기관인 입제서당은 1910년까지 1반세기 동안 대성황을 이루었다가 일제에 의
을 한 처자란 것을 후손들이 증언해주고 있다.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全彰赫, 본명 기창基昶)
해 폐지될 때까지 등과자 8명을 배출한 교육의 산실이었다. 상하면에는 조선 후기의 유학
이 서당을 차렸던 서당촌은 당촌 바로 서남쪽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어 그가 사는 석우촌과
자 김도의(金道誼, 1720~1783)가 52세 때 상하면 검산리에 감모재(感慕齋)를 세워 스무재
는 약 3.5km쯤의 거리로서 수긍이 간다. 이런 인연으로 해서 전봉준은 농민혁명의 준비단
(卄齊 서당)을 개설했다. 감모재는 김도의의 5대조의 재실이며, 스무재서당은 김도의가 초대
계에 고창에 올 때면 으레 그의 집에 와서 살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오지영의 『동학사』에 보
훈장이 되어 교육하였고, 고창은 물론 인근 영광에까지 이름을 날렸다.
면 손화중(孫華仲) 포(包)에 속한 임천서는 고창에서 대접주로 활약하면서 오하영(吳河泳), 오
시영(吳時泳), 임형로(林亨老) 등과 함께 1,500명의 농민군을 거느리고 고부 백산(현 부안군 백
(2) 신창표씨(新昌表氏)의 제각(齊閣)
산면)에 3월 25일 본진을 설치할 때 당당하게 참여한 두령이었다. 이때 고창지역에서 출병
망학당(望學堂)이 있고, 마을 앞에는 90년 전 심은 소나무가 있다. 또한 매년 정월 보름날
한 농민군의 인원과 백산 본진에 총 집결된 8천명의 내력을 『동학사』에서 옮겨 정리해 보면
에는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북동쪽에 지방도 3호선이 남북 방향으로, 남동쪽에는 지방도 5
다음과 같다. 임천서는 동학농민전쟁에 가담하면서 가족들을 고창군 상하면 장호리에 사는
호선이 동서 방향으로 각각 지나고 있다.
사돈댁[그의 며느리 함평노씨(咸平魯氏)의 친정집] 옆으로 옮겨 놓고 떠났다고 한다. 만약을 위한
대비책이었다. 그는 전쟁 중에 장호리 집에 몇 차례 들렀다는데, 올 때마다 200~300명씩 농
(3) 망화당
민군을 데리고 와서 쉬었다 갔다. 어떤 때는 하룻밤 묵어가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그의 활
장군산에는 속칭 빈대골이 있는데 그곳에 사찰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흔적이 없다. 복구
동 영역은 대단해서 동학교단 쪽에서도 『천도교서』와 『천도교 백년사』에 비중 있게 실려 난
164 ― 고창의 마을 제5집
마을 가운데에는 표씨 문중의 재각 망화당(望華堂)이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앞에는 90년 전
상하면 장호리 ― 165
천수를 다하지 못하시고 애석하게도 서기 一九一二년 임자 2월 二十三일에 나이 어린 두 형제 를 두시고 서거하였으니 장왈 휘는 재준이요 차왈 휘는 재관 등을 이승가업에 몰두케 하니 향 리 다사들의 만구일성으로 이열상천하여 오남 각지 및 삼강록에 상재되었으니 역세의 표상이로 다. 장하도다 부인은 현모양처로서 이같은 미적은 희금지사로 이 고을 온 누리에 한 알의 밀알 이 되었으니 오직 부인의 정절은 인부의 규범이라 명예로운 본천을 받으셨으니 효열지문의 자 손들이 합의하여 어버이의 업적을 천추에 길이 보존코자 본비 근수를 종중대표인 장손 태희과 망화당 현판
망화당 전경
차손 영종 등이 불녕을 찾아와 청문키에 우의분사하고 미사여구를 피하여 삼가 명에 부쳐 이르
마을 어른들이 심어 놓은 소나무가 있다. 지금은 거목이 된 노송 앞에서 매년 정월 보름날
노니 오호라 명문대가 표공의 가문은 세세로 충효열이 독실하였네 아버지가 전하고 아들이 이
이 되면 당산제가 열린다. 한 해의 액운을 씻고 풍년 농사를 기원하는 제가 끝나면 하루 종
어 받으니 이것이 계승이요 계술이로다 더구나 부인의 효열은 우뚝 솟았네 이 정신 길이 간직하
일 쉬면서 마을의 화합을 기리며 정담을 꽃피운다.
면 온 집안의 전통이라네 아름다운 이 행적을 비에 새겨 어천만세 알리리라. (남양 방금혁 근찬) 최영호, 이상원.
(4) 광산김씨효열기적비(光山金氏孝烈紀績碑)
2008년 5월 5일에 준공한 광산김씨효열기적
(5) 갑문
비이다. 비석의 오른쪽에는 신창표씨 통정공
용두마을에는 바닷물의 유입을 막고, 농사용 저수 목적으로 설치한 갑문이 있다.
남학파 가계도가 있다. <<<광산김씨 효열기적비 명병서>>> 부인은 대대로 굴지가는 충효세가의 후손인 거사 김공 기철의 따님으로 서기 一八八三년
효열각
고종 계미 九월 초七일에 출생하니 천품이 온순하고 정숙하여 법도 있는 가훈 아래 엄히 삼종 지의와 四덕을 읽혀 효사부모에 능갈기력하고 자매간에 우애하여 인근에서 칭찬을 받으며 곱
갑문 안쪽 수로
갑문을 통과하는 도로
게 자랐다. 의관 나이 십 칠세에 전통 유문의 언사인 신창표씨 휘가 종채 행원참봉의 三남 중 휘 남학은 중추원에서 통정대부에 승진한 송정공과 결혼하여 시부모를 동동촉촉 지성껏 섬기시
(6) 장호마을 방풍림
며 열성어린 혼정신성과 감지지공을 게을리하지 아니하고 열복하면서 빈한한 일문의 중흥을 위
장호마을 서측에는 거의 200년 이상 된 소
하여 밤이면 밤마다 침선방직과 정구지역은 물론이요 낮에는 농사일에 전념하였고 부군의 내조
나무 12그루가 남북방향으로 숲을 이루고 있
에도 남달리 심혈을 경주하였다. 결과는 본가에서 분가 十유 이년만에 풍요로운 일가를 적수성
는데, 이는 서해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막아주
가한 이 같은 천식의 소유자로 숭조상문과 종당에 진성한 여장부이 장불이 칙하며 백방을 구약
는 방풍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는 더
시탕에 정성을 다하였으나 병환이 악화되어 대소변을 가리지 모함에 이처럼 목욕과 실내외의 세
많은 소나무가 마을을 감싸고 있었던 것으로
척에 탄갈심력 하였고 그후 시부에게 못다한 효성을 시모에게도 쏟았으며 상장범절을 정중하
보인다. 나무의 높이는 10m 이상이며 둘레는
게 엄수하고 불행이도 부근에서 고황지질로 위석 오년 동안 일편간심으로 백방구호 하였으나
2m 내외이다. 현재 마을은 서해안과는 500m
166 ― 고창의 마을 제5집
해안 경비초소가 있던 시설물
상하면 장호리 ― 167
정도 떨어져 있으나 과거에는 해안선이 마을 앞까지 형성되어 있었다.
갈-머리(마을) → 용머리. 국-촌(菊-村) (마을) → 용사
(7) 영광원전과 장호리
장호리 사람들은 영광원전이 들어서기 전에는 명사십리 해변과 그 해안 갯벌에서 조개류 등을 채취하며 전통 어강망그물 어업과 대나리그물 어업, 새우잡이 장태그물 어업, 맨손어업
명사십리 구시포와 동호해수욕장 사이에 있는 해변으로 약 10km의 해안선을 이룬다.
장사산(長沙山) 기산(旣山), 봉대산(峰臺山) 등의 높은 지형과 명사십리(明沙十里), 구시포 해수
욕장과 고리포, 자룡, 용정 장호 일대가 보인다.
으로 생계를 유지해왔다. 그리고 양식어업과 소형선박에 의한 연안어업도 성행하였으나 지
장군산(將軍山) 산의 모형이 장군이 갑옷을 입고 당당하게 서 있는 것 같다. 동학혁명 때 장
금은 어렵다. 영광원전이 들어선 후 해안가 어민들을 중심으로 반핵투위가 조직되었고, 어
암마을에 살았던 김규일이란 분이 장군산 밑에 수천 명의 농민군을 모아 스스로 김접두라
민피해대책위원회도 조직되었다. 처음에는 방사능 누출로 인한 피해를 입었으나 입증이 어
하고 선봉에 서서 전쟁터로 갔다고 하여 장군산이 동학혁명의 발상지라고 장암 근방 사람
려워 냉각수 온배수문제로 급선회하였다. 당연히 장호리의 전 주민은 이러한 반핵특위원회
들은 알고 있다.
에 들어가게 되었고 각종 시위에 참석하였다. 그 후 피해보상을 받기는 하였으나 그 보상이 원만히 이루어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도 맨손어업으로 생활하고 있으나, 바다 에서 밀려오는 빈 조개껍질을 바라보면서 주민들 마음은 편치 않다고 말한다.
검산(劍山) 장군산의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장군의 칼을 뜻한다. 마을을 감싸고 큰 칼처
럼 능선이 칼날 아래 떨어진 머리 같다. 모암(帽岩) 장군산의 동남쪽으로 22번국도 건너편에 장군의 투구를 뜻하는 마을이며 장군
의 투구처럼 생긴 큰 바위가 마을 옆에 있다.
5. 자연지명과 전래지명
라대(羅帶) 비단으로 된 장군의 혁대를 뜻한다. 검산마을에서 ‘막정이 고개’ 쪽으로 라대 전
체를 높은 곳에서 보면 혁대 모양의 둥그런 능선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장호(長湖)・장불(長弗) 바다가 호수 같은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막정이 고개 막정이란 군사들이 잠시 쉬어 가는 곳을 뜻한다.
용사[龍沙, 국촌(菊村)] 장호 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마을 형이 용의 꼬리와 같은 형국이며 부
고산(鼓山) 고산은 장군산의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며 북처럼 둥글게 보인다.
근에 모래가 많다. 용두(龍頭)는 용-머리(용두-갈머리) 평곡 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마을 형국이 용의 머리와 같다
하여 갈머리 또는 용두라 하였다. 복구촌(伏龜村) 또는 복군촌(伏軍村) 거북이 엎드려 있는 모습으로 또는 군사가 매복하는 곳
이란 뜻을 가진 지명이다. 가남-포(可南浦) 장호 서쪽에 있는 마을로서 전에는 포구였다 한다. 평곡(坪谷) 용사 동북쪽들에 있는 마을이다.
복군촌(伏軍村) 군대가 매복함을 뜻하는 마을이다. 마을 주변이 움푹움푹 분지(盆地)의 형식
으로 둘러싸여 있어 군사들이 매복(埋伏)하기에 알맞은 지형이다.
기산(旗山) 군대의 상징은 기(旗)다. 기산은 기를 꼽아둔 마을이란 뜻이다. 장군산 서남쪽에
위치한 장산리에 속한 마을이다.
여산(礪山) 장군이 칼을 가는 곳을 뜻하는 산이다. 여(礖)자이기 때문이다. 고산 앞에 길게
누워 있는 능선이 바로 여산이다. 진터(陳터) 군사들이 진을 치는 곳이란 뜻인데, 현재는 변형되어 ‘진털 밭’이라 부른다.
새터 평곡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봉대산(峰臺山) 봉화(烽火)를 올려 신호를 하는 곳이며 장군산의 동쪽 검산마을 뒷산이다.
기(其) 넘언들·넘언-들[들] 용머리 서쪽 뚝 너머에 있는 들이다.
미산(米山) 군량미를 쌓아둔 곳이며 해리면 사반리에 위치한 산이다.
목냉깃벌[들] 목냉기 앞 벌에 있는 논으로 전에는 염막(鹽幕)이 있었다.
말매등 말을 매어두는 곳이며 상하초등학교에서 기산으로 넘어가는 능선이 바로 말매등
쪽재(들) 가남포 앞에 있는 들이다.
이다. 이 말매등에는 임자 없는 장군의 묘가 두 기 있었다고 한다. 그 중 1기를 6·25 때 지
진쟁이(들) 쪽제 남쪽에 있는 긴 들이다.
방 빨치산들이 파 보았더니 명주 배로 감은 큰 칼이 나왔다고 한다. 그 칼의 길이가 장정
168 ― 고창의 마을 제5집
상하면 장호리 ― 169
의 발로 한 발이 넘었는데, 녹슬어 부슬부슬 떨어져 못 쓰는 칼인 줄 알고 버렸다 한다(김
병연 님).
스무재(卄齊) 옛날에 스무 명 이상이 모여야 이 고개를 넘어갈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 김삿
갓이 쉰 밥을 얻어먹고 숫자풀이 시를 썼다는 설화도 있다. 까막샘(烏井) 석남리 갈산마을 앞에 있는 샘 이름이다. 극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까마귀들
이 날아와 ‘까막샘’ 부근을 발로 허적이며 물을 마시는 것을 보았다. 그 자리를 파보니 동이 물이 솟아 나왔다. 까마귀들이 암시하여 판 샘이라 하여 ‘까막샘’이라 불렀다.
당산설화 표지석
흔들샘 용정리 섬포마을 앞에 있다. 어느 도승(道僧)이 복구 제에서 잠을 자다가 땅속에서
4백~5백년 된 당산나무
물 흐르는 소리를 듣고 판 샘이 흔들샘이다. 물소리, 바람소리가 도승을 흔들어 깨웠다 하
마을을 지키던 수호신인 당산의 기세에 눌
여 ‘흔들샘’ 또는 ‘바람샘’이라고 하였다.
려 맹수들이 죽고 말았다. 그 후 매년 정월 보름이면 당산 제사를 성대히 모시며 마을의 단
갈산마을 ‘褐(목마를 갈)’ 자와 ‘烏(까마귀 오)’자를 써서 갈오지라 할 때는, 물이 귀한 때였고,
결을 도모하고 있다.
그 뒤 갈산(葛山) 즉, 葛(칡 갈)자를 쓸 때는, ‘갈산(葛山)마을에서 주로 많이 살고 있는 박씨와
어씨(漁氏)가 싸우지 말고 칡넝쿨처럼 얽혀 살아라’는 뜻으로 부른 마을 이름이다.
배들이 갈산 앞에 있는 배들이는 장군산의 줄기로, ‘옛날에 그곳까지 배가 들어왔다’ 하여
(2) 당산설화 2
먼 옛날 장호마을에 소금장사를 하는 표생원이 살고 있었다. 소금을 팔아 고기 근이나
붙여진 이름이다. 배들이마을이 번창했던 시절에는 양(梁)씨들이 배들이 앞에 둑을 쌓아서
사서 부모님을 봉양하고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장군산 재수재를 넘을 때였다. 그곳에 우
까마귀에게 물을 못 먹게 하였다. 그 일로 양씨들이 차차 어렵게 되어 지금은 한 집도 살지
글거리던 맹수들이 표생원을 해하려고 달려들자 죽을 힘을 다해 도망하여 장호 당산을 지
않는다.
날 무렵 마을을 지키던 수호신인 당산의 기세에 눌려 맹수들이 죽고 말았다. 그 후 정월 보
간음포 마을 주민들이 칠산 바다의 조기를 잡아서 생활했던 포구이다.
6. 마을의 전설과 풍속
름이면 당산에 제사를 모시며 마을의 단결을 도모하고 있다(노명상 님). (3) 당산설화 3
3년 가뭄과 기근으로 마을 주민 모두가 굶주릴 때였다. 어느 해 당산제 제사장의 발의로 1) 장호마을 당산나무
당산제를 모셔야 한다고 하니 마을 아낙들의 불만이 높았다. 당산제를 모시던 중 어느 아
장호마을 당산은 호랑이, 사자 등 맹수들이 죽어 누워 있는 조형물과 당산제 제단에 기러
낙이 말하기를, “그렇게 당산의 효력이 크다면 저기 날아가는 기러기라도 제사상에 앉게 해
기 한 쌍의 조형물을 설치하여 이야기가 있는 당산공원을 마을 대표 이미지로 부각시킨다.
보시오”라고 하자. 제사장은 기러기에게 손짓하며 소원을 빌자 날아가던 기러기 한 쌍이 제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설화가 있다.
사상에 앉아 있다 날아갔다. 그 후 마을은 흉년도 질병도 사라지고 오늘날까지 당산제를
모시며 마을의 단합과 화합을 이루며 화목하게 살아가고 있다(서천댁).
(1) 당산설화 1
먼 옛날 장호마을에 소금장수를 하는 고생원이 노모를 봉양하고자 돌아오는 길에 장군 산 재수재에서 사나운 맹수를 만나 도망쳤다. 고생원이 도망가다가 장호 당산을 지날 무렵
170 ― 고창의 마을 제5집
(4) 당산나무 두 그루
오랜 옛날에 장호리에 당산나무 네 그루가 있었다. 그런데 두 그루는 큰데 나머지 두 그루
상하면 장호리 ― 171
는 이상하게 작았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큰 두 그루는 아빠와 엄마이고, 나머지 두 그루
하는 증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리본을 차고 있는 여자를 나비부인이라 부른다. 그 뒤
는 아기 당산나무라고 불렀고, 큰 당산나무 두 그루에서 아빠 용과 엄마 용 두 마리가 살고
이 고개를 재수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바위와 바위 위에 놓인 돌은
있다는 전설을 믿었다. 또 당산나무를 잘 모시면 그 해 농사가 아주 잘되어 풍년이 든다는
치워졌으며 그 자리에는 도로가 나서 차량들이 다니고 있을 뿐이다. 전설이지만 우리의 옛
전설도 믿었다. 그래서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이면 젊은 아가씨나 총각들이 당산나무에 들일
풍습이 없어져 가는 현실이 아쉬울 뿐이다.
줄을 짚으로 길고 두껍게 꼬았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두껍고 긴 줄을 어깨에 둘러메고 마 을을 한 바퀴 빙 돌면서 농악을 치며 먹고 놀았다. 정월 대보름날에는 그 줄을 가지고 마을
2) 장호마을의 굿
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줄다리기를 하는데 남자와 여자 두 패로 나눠 두 번을 하였다. 그런데
굿이란 원래 무당이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노래와 춤으로 인간의 소망을 비는 원시적인
줄다리기에서 여자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설이 있어 줄다리기를 하면 언제나 여자들이 이
종교 의식이다. 예로부터 마을에는 농악과 무당의 굿이 있었다. 농악이나 무당굿은 굿을 하
겼다. 그리고는 당산나무에 음식을 차려놓고 풍년이 들기를 기원했다(노명상 님).
는 방법에 따라 여러 종류의 굿이 있었는데, 장호마을 굿에는 다음과 같은 종류가 있었다.
(5) 서낭당(재수재) 이야기
(1) 당산제와 당산굿
상하면 바닷가의 장호리로 넘어오는 용정리와 장산리 경계선에 위치한 서낭당에 얽힌 전
당산제는 주가포(마른 건어물 술안주), 곶감, 대추, 사과 몇 개 등을 사서 주(酒)·포(鮑) 등을
설이 있다. 옛날 장호마을에 가난하지만 효성이 지극한 소금장수가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진설하고, “질병이 있어도 우리 동네는 오지 말고 딴 데로 가라”라고 동네의 안녕을 빌었다.
는 소금을 팔아 끼니를 이어가는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그 소금장수는 거의 매일 소금을
당산굿은 줄 감기 전에도 치고 감아놓고도 치고, 할아버지 당산 할머니 당산께 술 따라 놓
팔기 위해 무거운 소금 짐을 짊어지고 재수재를 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루는 이 길을 가
고도 쳤다. 뱃소리는 줄다리기 할 때(여기 말로는 ‘줄 댈 적’에) 한다.
다가 피곤하여 바위에 누워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신령님이 나타나, “발이 닳도록 다녀도 끼니를 이어가기 어려운데 잠을 자느냐?”며 호통을 쳤다. 소금장수는 깨어나 잠을 잘 때 베
“어여 디야”
고 잔 돌을 가져다가 고개 위 바위 옆에 놓고 절을 하며, "재수 좀 좋게 해 주십시오."라고
“어기여 어~ 고기 어(魚)자 일어날 기(起)자”
빌었다. 그 뒤부터 소금장수는 고개를 넘을 때마다 돌을 놓고 빌기를 계속하였다. 그리하
“고기야 일어나거라. 내가 잡을란다.”
여 어느덧 돌이 많이 모아지게 되었는데, 소금장수도 잘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돌이 모 아진 곳을 서낭당이라 하였다. 이러한 소문이 퍼져 이 고개를 지나는 사람들은 돌을 던지며
장호마을은 배 형국이기 때문에 언제나 뱃소리를 하면서 줄을 감았다. 줄을 감으면서 마
‘오늘 재수 좋게 해달라’고 빌며 지나게 되었으며, 서낭당에 빌면 과연 재수가 좋았다는 전
을 사람들의 단합을 도모하였다. 줄을 감을 때 막걸리를 약 30동을 준비해야 하는데, 한 집
설이다.
에서 준비를 못 하니까 7~8집에서 술 도가니에 술을 빚는다. 줄을 꼬아 줄 굿을 치고, 줄을
서낭당은 성황당(城隍堂) 성황사라고도 하는데, ‘조선시대는 개가금지법이 있어 한번 시집
간 여자는 다시는 개가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두 가지 방법으로 개가를 허용한 것이 있었
매고 동네를 한 바퀴 돈 다음, 잡색들이 춤을 추며 당산으로 해서 들 당산으로, 한 바탕 친 후 제사를 지낸다.
다. 하나는 보쌈이요, 하나는 새벽에 보따리를 싸서 서낭당에 가 쪼그리고 앉아 있으면 제
일 먼저 지나가는 남자가(그 남자가 기혼일 경우에는 그 다음 남자) 그 여자를 취하는 제도였다. 그
(소리 주고받기)
런데, 아침에 나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여자는 자기의 저고리 섶으로 나비 모양의 리본을
어기야~ 하~
만들어 차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리본이 그 여자가 과부거나 소박맞은 여자임을 표시
세월아 니월아 가지를 말어라~하~
172 ― 고창의 마을 제5집
어기야~하~ 어기야~하~
상하면 장호리 ― 173
아까운 청춘이 다 늙는다~하~ 어기야~하~
어기야~하~
는 노래로 덕담이라고도 함]나
성주풀이를 부르기도 한다.
어기야~하~
오동추야 달도 밝다
어기야~하~
이 줄 한 장을 비어 가지고서 우리 동네 안녕을 헌다. 어가 디야 어기야
어기야~하~
어기야~하~
어기야~하~
소리 메김은 메기는 사람이 자기 좋은 소리만 변형하여 메겼다 한다. 이렇게 부르는 노래
(4) 정월의 풍물굿
장호마을에서는 마을에 큰 일이 생기면 항상 뱃소리를 먼저 했다. 여기서 큰일이란 당산 제 외에 일년에 두세 번씩 쉬는 날을 의미한다. 즉 단오나 백중날이다. 이런 날에는 술과 음 식을 장만해서 한 잔씩 먹고 굿도 치고 씨름도 하였다.
(5) 당골들의 건립굿과 문굿
를 배치기 소리라고 한다. 당산제의 당산굿은 동네마다 따로 쳤다. 정월 보름날마다 제를
당골들이 정월과 이월에 돈 있는 집만 돌아다니면서 굿을 쳐 주고 돈을 받아 갔는데, 특
모시면서 굿을 치는데, 동네에서는 어린 애를 낳거나 개라도 새끼를 낳으면 제를 안 지내고
히 만식이패와 성근이패가 유명했다. 이때의 굿을 사람들은 건립굿이라 했다. 그러면서도 다
이월 초하룻날에 지냈다. 이때 제관은 냉수로 목욕을 하고, 제기(祭器)도 집에서 쓰던 그릇을
리를 세운다거나 하는 건립 은 치지 않았다. 장호마을에서 굿을 치면 근동 상하, 공음, 해리
쓰지 않고 새로 사왔으며, 제관도 생기를 맞춰서, 생기복덕이 맞는 사람이 제관이 되었다.
사람들이 와서 굿을 쳐버려 먹을 것이 없는 시절 마을 사람들이 피해를 봤다고 한다. 건립 굿을 칠 때에는 가야금과 피리 연주를 하는 사람도 와서 성주풀이를 같이 했다.
(2) 매굿
음력 정월 2일부터 15일 사이에 농악대가 농악을 하면서 부락을 한 바퀴 돈 다음, 집집마
다 들어가 지신(地神)을 달래고 복을 비는 마을의 민속 행사다. 마을에 따라서는 농악대나
(6) 샘굿
샘굿은 당산제부터 지내고 친다. 오방돌기(동서남북 중앙) 전에 친다. 샘굿을 칠 때 사설이
무당이 있는 마을도 있고 없는 마을도 있다. 없는 마을에서는 다른 마을 등에서 불러올 수
있는데, 굿치는 사람들을 부르면 “예~이”(이때는 박구여!라고 부르지 않음) "칠 년 대한 가뭄이 들
도 있었다. 불러오는 굿패를 비나리패 또는 건립패 등이라 하였다.
어도 좋은 물 내주시고, 구 년 홍수가 들어도 맑은 물만 주시쇼. 용왕님께 빕니다”라고 사 설을 하면서, 절도 하면서, “푹푹 솟아라 하늘까지 솟아라, 푹푹 솟아라 하늘까지 솟아라”
(3) 걸립굿
가락에 맞추어 친다.
걸립굿은 집집을 돌며 고사를 지내주고 쌀이나 돈을 걷는 것을 ‘걸립한다’ 또는 ‘걸궁한 다’고 하는 데서 유래한 굿이다. 순수한 노작농악이 차츰 기량을 자랑하는 연예농악으로 발 전하는 가운데 걸립굿이 탄생했다. 걸립굿은 마을에서 출발하는 소략한 것도 있으나 절에서 보내는 절 걸립굿도 있다. 걸립
(7) 철륭굿
“공산아 명월아 새칠팔(4,7,8의 합은 19,9는 갑오)로만 놀아라”, “솔개 떴다. 장꽝 밑에 쥐들어 간다”하면서 굿을 치고 나와 다른 집으로 이동한다. 이동하면서 치는 굿이 질굿이다.
굿은 규모도 크고 의식절차도 복잡하며 기예도 뛰어나다. 구성은 영기·서낭기·태평소·나 발·쇠잡이·징수·장고수·고수·대포수·조리중·창부·양반·각시·무동 등 여러 굿패로 이
(8) 판굿
루어진다. 마을 걸립굿은 마을에서 당산굿·문굿·샘굿·날당산굿으로 집안에서는 문굿·마
판굿은 돈을 모아가지고 보름 당산제를 지내고 친다. 매굿은 한 푼이라도 거두기 위하여
당굿·조왕굿·철륭굿·고방굿·외양간굿·도둑잽이굿 등을 친다. 집안 고사에는 따로 집안
집집마다 돌아야 한다. 안 주는 집도 다 돌아야 하기 때문에 판굿보다 먼저 친다. 판굿을
이 잘되라는 비나리[주로 집안의 한가운데 있는 큰 마루인 대청에서 벽사진경(辟邪進慶)을 기리며 외어 내리
174 ― 고창의 마을 제5집
칠 때는 전기불이 들어오기 전에는 솜을 뭉쳐 철사에 감아 기름에 찍어 횃불을 만들고, 벅구
상하면 장호리 ― 175
놀이(소고)도 하며 “얼씨구”하면서 온 마을 사람들이 춤을 추었다.
3) 장호마을의 민속놀이와 농악 유래 장호마을의 민속놀이와 농악에 대하여 1999년 1월 17일과 2004년 7월 6일에 이명훈, 송
(9) 매굿
기태 등이 장호마을 거주 노명상(1933년생), 정화순(1942년생. 노명상의 처) 등과 면담을 실시하
매굿은 정월 열 나흗날에 많이 쳤다. 매굿을 칠 때, 매굿과 지신밟기를 하는데, 그때만 해
였다. 이후 2013년 7월 1일 이명철, 이대건 등이 3차면담을 실시하여 장호마을의 마을굿 등
도 마을이 90여 가구가 넘었다. 집집마다 다 돌아야 하기 때문에 오후 4시경부터 치기 시작
이 전승되어온 내력을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해서 그 다음날 새벽 3시나 4시까지 쳤다. 이때 굿치는 집에서는 술과 밥도 준비하였으나
장호마을은 해안가에 접해 있는 마을로 일제 강점기 시절에는 간척사업을 하면서 농토가
가난하다 하여 굿을 안 치는 집은 없었다. 굿을 칠 때는 마당에서 부엌으로 쳤다. 이때에는
확장되었다. 따라서 농촌으로서의 농산물은 해산물 수확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이
부인들이 따라다니며 상에다 물과 쌀을 재물로 드렸다. 이때 사설은 이렇다.
때의 어업방법은 그물을 끌어 작은 새우를 잡는 맨손어업과 대나리 그물을 치고 소형어선
“정지구석도 니구석 방구석도 니구석 삼사십이 열두구석, 달리자 달리자 성주조상을 달리
자(달래자)”라고 사설을 하고 난 후 굿을 쳤었다.
으로 고기를 잡는 어업활동이 활발하였다. 이에 따라 행해지던 뱃노래와 농악, 무당굿 등이 영역을 뛰어넘어 전승되어왔다.
또 정지굿을 조왕굿이라고도 하는데, 처음 조왕에 들어가서 “백구여~”라고 부르면, 구경
마을공동체에 큰 행사가 있을 때면, 항상 뱃소리로 시작한다. 특히 줄 감기와 줄다리기
꾼이나 농악을 하는 사람 모두 “예이~”하고 답하면 “니 집 조상은 특별한 손님이 많이 찾
과정에서 뱃소리를 하는 점이나, 마을 풍물굿이 억셌던 점, 세습 무계 집단의 걸궁활동이 행
아오니, 밥에 뉘도 안 들어가고 머리카락도 안 들어가고 한 되 밥 허면 두 되 밥으로 늘어
해지던 점은 오늘날까지 이 마을이나 주위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있는 원인이 된 것 같다.
나고……, 하면서 사설을 하면 “네에~”하고 철륭으로 간다.
현재의 고창농악보존회가 자리를 잡기까지는 이 마을 노명상 옹의 역할이 컸다. 2차면담 때 까지만 해도 노명상 옹을 상쇠로 하여 마을 풍물굿이 있어 왔으며 당산에 줄도 감았다.
(10) 여름 농사철 만두레 풍장굿
7월 나락모개가 나올 무렵 장화를 만들어 쓰고 논을 매는 철에 풍장굿을 쳤다.
4) 마을 풍물굿과 전승자들 상쇠는 노연종, 노현종(두 분은 2004년도에 81~82세 가량), 설장구는 황규언(85세 가량)과 동윤씨
(11) 걸궁패의 문굿
아버지(100세가 넘음), 노명상 씨는 장구, 주봉열과 주양근 씨는 꽹과리, 징과 통북은 노해상,
문잽이 굿은 상쇠와 대포수가 겨루는 것 같이 굿을 치며 총을 쏘고 하는 굿인데, 가끔 한
대포수와 장고는 박용하 선생님, 김양술 선생의 제자 용연 씨가 있었다. 잡색은 망구, 순사,
번씩 쳤다.
양반, 각시, 대포수 등이며, 상자로 탈을 그려 억지로 시키기도 했다. 각시는 박삼차, 흥덕이, 팽선이(이중선), 박삼차는 양춤도 잘 추고, 영감행세 잘하기로 노은섭이 있었다.
(12) 마을 풍물굿 성쇠
장호마을 풍물굿은 이승만 정권 때, 3·15부정선거를 하기 위하여 농악을 키워 성행하였
(1) 마을의 보물 뱃징
으나, 박정희 정권 때 완전히 사라졌다. 유신 때는 당산나무도 베어버리는 마을이 많았다.
장호마을에는 ‘뱃징’이 두 개가 있었다. 그 징은 장호와 용사마을에 각각 하나씩 가지
그러나 장호마을은 더 잘 하거나 못하지 않고 계속 유지하여 왔다. 그리고 인공 때도 피난
고 있었는데, 용사가 장호로 합쳐지면서 지금은 장호 마을회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 두 개
갔다 와서 당산나무에 줄을 감았다. 장호마을에서 풍물굿이 가장 성행할 때는 해방된 다음
의 징은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것이고, 진도에서 배를 사올 때 배에 따라온 징이다. 그 징
해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은 농촌 마을의 고령화로 농악을 치는 사람이 없고, 증언해
은 방짜(좋은 놋쇠로 만든 유기그릇)였다. 구입한 지는 50년이 넘었는데도 소리가 크고 잘났다. '
준 몇 사람만 회고할 뿐이다.
징은 굿의 눈이다'라고 할 만큼 중요하다. 옛날에는 웬 만큼 큰 배는 꽹과리・징・장구 등은
176 ― 고창의 마을 제5집
상하면 장호리 ― 177
기본으로 갖추고 있었다. 그 외에도 장호에는 죽은 개가죽을 소토(백회)에다 발라서 기름때
7. 마을현황과 생활상
않고 소리도 잘 나는 장구가 되었다.
장호리 전체 면적은 2,67km² 이며, 경지면적은 1,42km²로 밭 0,321km², 논 1,091km², 임
를 빼고 털을 제하고 공동변소 소매통(오줌통)에 담가 놓았다가 장구를 만들면 찧어지지도
야 0,871km² 등으로 되어 있다. 상하면은 고창에서 30.5km 지점, 해리에서 10.4km 지점, 공 (2) 치배(치-輩)
음에서 9.7km 지점, 심원에서 12.8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상하면의 도로는 일반국도 77호
농악에서 앞치배와 뒤치배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며, 농악을 치는 사람을 이르기도 한다.
가 동호에서 상하까지, 국지도 733호가 구시포에서 아산까지 연결되어 있다. 군도는 4개 노 선에 해당하는데, 1호는 구시포-동호, 2호는 용두-대산, 3호는 장산-장호, 5호는 장산-방
(3) 뒷치배
축이다.
민속 농악에서 앞에 선 상쇠 가락을 뒤에서 받아치는 사람, 또는 그 받아치는 가락을 가 리킨다. 춤을 추며 재담을 하는 대포수, 조리중, 창부, 할미 광대, 비리쇠, 각시 광대, 무동 등 이 이에 속한다.
(4) 앞치배
농악에서, 앞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꽹과리, 징, 장구, 북, 소고재비와 같은 악기 연주
1) 장호리의 인구 마을별
세대수
장 호(5통)
73
용 두(6통)
30
계
남자수
여자수
비 고
154
72
82
다문화가족(1)
58
25
33
복 구(7통)
32
60
27
33
총 계
135
272
124
148
자들이 앞에 서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농악에서는 상쇠가 연주하는 가락을 의미한다. 2) 마을의 인구현황(2013년 6월 현재) (5) 잡색
년도별
세대
합계
남
여
비고
잡색은 허두잽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판 안에서 자유롭게 다니며 재담, 몸짓, 춤 등으로
2003년
138
349
157
192
위 년도대비
판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고, 연희자들과 관객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사람
2010년
136
290
141
149
59명 감소
2013년
135
272
124
148
18명 감소
들이다. 이들은 굿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잡색에는 ‘대포수’, ‘창부’, ‘조리중’, ‘양반’, ‘각시’, ‘화동’, ‘무동’, ‘농구’ 등이 있다. ‘대포수’
위의 통계로 알 수 있듯이, 장호리의 인구는 점차 감소 추세이다. 고창군에서 귀농·귀촌의
는 잡색들의 수장으로서 풍물굿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굿 머리를 잘 알고 굿판의 흐름
정책을 펴고 있는데, 전북에서 고창군이 귀농·귀촌이 가장 잘되고 있다고 한다. 장호리도
을 잘 파악하여 치배나 구경꾼의 잘못을 지적한다거나 바로잡는 역할을 수행한다.
귀농·귀촌 인구가 많았으면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현재 귀농·귀촌은 상하면 전체 12가구 중 장호마을에 단 한 가구뿐이다.
(6) 대포수
전북 지방의 농악에서, 나무총을 들고 배낭과 꿩 털을 지고 나오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군중(軍中)이나 농악에서 나팔 부는 일을 맡은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3) 장호마을 중심지 장호마을의 중간에서 바다 쪽으로 가는 마을안길 장호상회 맞은편이 방앗간이다. 방앗간 에서는 떡방아, 고추방아, 기름도 짠다. 장호상회와 방앗간 맞은편에 마을회관이 있다. 마을 회관 양 옆에는 창고와 주차장 등이 있는데, 여기가 장호마을의 중심이다
178 ― 고창의 마을 제5집
상하면 장호리 ― 179
6) 장호리의 기관과 시설
(1) 장호리 마을회관
마을벽화
장호마을 중심지 전경
4) 장호리의 역대 이장(2013년 8월) 마을 장호
용두
복구
장호마을 마을회관
장호마을 모정
구분/년도
2012 ~ 2013
2010 ~ 2011
2009 ~ 2010
2007 ~ 2008 2005 ~ 2006 2003 ~ 2004
이장
노창득
표찬종
노만수
노만수
노만수
노만수
지도자
노연옥
부녀회장
정숙희
이장
표영선
표명곤
표명곤
표명곤
표명곤
표명곤
지도자
박동철
부녀회장
김정엽
보면 30여 호가 고작인 가난한 이 마을은 다른 마을에 비해 상부상조의 협동정신과 의를 굳게 다져온 마을이다. 우리 고유의 전통적 윤리 도덕의 계승 발전은 물론 농경사회 건설에
이장
표호종
표연수
표호종
표연수
표연수
표연수
지도자
표광종
부녀회장
정애자
(2) 용두마을 노인당 건립 기념비
상하면 소재지에서 서북방향 5킬로 지점에 위치한 용두마을은, 1914년 부군폐합령에 따 라 상용복과 하용복이 상하면으로 개칭될 때 법정리인 장호리의 자연부락이 되었다. 돌이켜
있는 힘을 다하여 후세들의 복된 세거지로 그 터전을 마련코자 총 매진하고 있노라. 오늘날 경노효친 정신은 물론 도덕상실의 혼란 속에서 노년층의 고독함을 잊은 채 무관심 속에서 동고동락할 안식처를 마련치 못하다가 지난 2000년 2월 노인당 건립기금 3,000만원과 주
5) 장호체험장을 운영하는 어촌계원(2013. 8월 현재) 성명 표 재옥 표안종 노명환 박현호 김정자 이희근 표 재춘 노창득 조남연 김상 집 노연백 표덕종 표 재금 주숭월 노연훼 김병태
180 ― 고창의 마을 제5집
주거 동촌 동촌 동촌 동촌 장호 용두 동촌 장호 판정 장호 장호 동촌 동촌 장호 동촌 판정
직위 어촌계장 사무장 운영위원 운영위원
운영위원
성명 표선종 김영학 김영용 주태식 표 진남 이이례 표덕종 노만수 김경선 정매자 표명곤 노귀상 노연홍 노병철 김안 순
주거 동촌 구시포 동촌 장호 장호 장호 장호 장호 동촌 동촌 용두 동촌 동촌 동촌 동촌
직위 운영위원 운영위원 재무
민모금 3,000만원을 투자하여 총 6,000만원으로 현대식 벽돌 슬라브 단층 30평 규모로 노 인당을 건립하니 면모가 일신하였도다. 시종일관 본 노인당 건립에 원근을 막론하고 손수
협력해 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와 더불어 그 방명(芳名)을 후면정민(後面貞珉)에 각명하니 오늘
의 기적이 영세(永世)에 전할 것이며, 앞으로 원근원노(遠近元老)는 물론 전 주민이 만당(滿堂) 하여 청담가락(淸談歌樂)과 희안담소(喜顔談笑)로 여생(餘生)을 동락(同樂)하시기를 바라노라
용두마을 마을회관
용두마을 노안당 건립 기념비
상하면 장호리 ― 181
서기 2002년 7월 14일 낙성식에 용두마을 노인회장 이 수 복 추진위원 이
죽산후인 안 병 홍
장 표명곤
지도자 표영선 부녀회장 김 순 선
(3) 복구마을 마을회관과 모정 장호어촌체험마을 갯벌체험
체험객들에게 연안습지 갯벌에 대해 설명해 주는 장호어촌계원
장호어촌체험마을에는 어촌계장과 사무장이 상주하며, 어촌계장은 무보수이고, 사무장만 소정의 급여를 받고 있다. 현재 어촌계원은 31명이고, 하루 3명씩 번갈아가며 근무한다. 현
재 어촌계장은 표재옥(51세), 사무장은 표안종(50세)이며, 어촌계원은 남 27명, 여 4명 모두 31명이다. 복구마을 마을회관
복구마을 모정과 당산나무
(6) 장호리의 교회 (4)장호마을 보건진료소
장호리의 종교 활동은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우선 외형적인 모습은 기독교의 교
장호리 보건진료소는 장호리 528-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장호리 보건진료소에서는 장호,
회가 있다. 장호리의 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이며 1974년 4월에 창립하였다. 1984년
용두, 복구, 판정, 동촌, 고아촌, 용산, 서당, 섬포 마을 사람들이 진료를 하고 있다. 마을에 노
김용규 목사님이 부임한 이래, 2006년 ‘장호교회’에서 ‘풍성한교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풍선
인들이 많은 농촌 실정을 감안하여 어지간한 진료는 보건진료소를 많이 이용하고 있다.
한 교회는 주로 인근 장호, 동촌, 복구 등지에서 출석하고 있다.
(5) 장호어촌체험마을
(7) 표찬종·주숭월 부부 이야기
장호어촌체험마을은 명사십리를 관할하는 장호ㆍ동촌 어촌계원들이 설립하였다. 처음
표찬종(59) 씨와 주숭월(54) 씨는 부부이다. 표찬종의 큰형은 객지에 나가서 직장생활을
2011년도에 승인을 받았고, 2012년 7월 준공 허가를 받아 현재까지 1년여 운영하고 있다.
했고 차남인 표찬종 씨와 주숭월 씨는 시할머니와 시부모님을 모시며 11명의 동생들을 뒷 바라지했다. 표찬종 씨 부부는 열심히 일을 하면서 꾸준히 기반을 닦았다. 지금은 자수성 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방울토마토, 복분자, 울금, 잡곡 등을 농사지으며 부 부가 소유한 땅의 면적만 약 10606㎡(3만 5천평)이다. 자신들의 농산물에는 일체 농약을 살
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친환경농법으로 도농간의 신뢰를 쌓고 있다. 어느 정도 생활의 기반 을 잡게 된 부부는 배움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고 3년 전부터 고창군 농촌개발대학에 다녔 으며 그 결과 부부 모두 교육인증제 수료증을 3개나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 장호어촌체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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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벌체험에 사용되는 트랙터 택시
고 부부는 계속 개발대학에 입학하여 배움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표찬종 씨는 더 나이가
상하면 장호리 ― 183
들기 전에 피땀 흘려 갈아놓은 농토를 자식들 도움 주신 분
에게 물려주고 싶었다. 이에 표찬종 씨는 직업
군인인 둘째 아들 표상규(30) 씨에게 “국가에
노명상 주태식
충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농업을 천직으로
백판례
여기며 살아가는 것도 국가에 충성하는 길이
표안종
다.”라는 명언을 남기며 직업의 전향을 유도했 다. 이에 둘째 아들은 7년간의 군 생활을 정리
참고문헌
하며 영농후계자가 되었다.
『고창군지(高敞郡誌』, 2009. 『상하면지(上下面誌)』, 2009. 주숭월・표찬종 씨 부부
『무장읍지일(茂長邑誌一)』, 1904. 『송사지일(松沙誌一)』, 1915. 『무장여지신람(茂長輿地新覽)』, 1921.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1935. 『송사문헌적(松沙文獻績』, 2007. 『고창군문화유적분포도(高敞郡文化遺蹟分布圖』, 원광대학교, 2005. 『모양성(牟陽城)의 얼』, 2009. 『고창의 마을 유래』, 고창문화원, 2007. 『고창 성씨의 입향유래』, 고창문화원, 2007. 『ㅇ씨』대동보 『ㄴ씨』ㅇ파 대동보 『ㅍ씨』대동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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