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와 열, 예향이 서려 있는 예전리 정재윤
공음면 예전리 두암리
구암리
신대리
1. 예전리의 역사와 위치
석교리 용수리 장곡리
선동리
칠암리
건동리
공음면 예전리는 삼한시대에는 마한 땅으로 모로비리국에 속하였으며 삼국시대에는 백제
국의 상로현에 속하였고, 통일신라 때인 경덕왕16년(757년)에 개명된 장사현의 속지였다. 고
예전리 군유리 덕암리
려시대를 거쳐 조선조 태종16년(1416년)에 이르기까지에는 그대로 이어왔으나 태종 17년에 서해 연변의 방위체제 구축을 위해 무송현과 장사현을 무장현으로 통합할 때에 이곳은 와
공면(瓦孔面)과 동음치면(冬音峙面)으로 분면되어 구한말인 건양원년(1896년)에 칙령 제36호에 의해 고창, 무장, 흥덕군이 전라북도에 편입될 때에도 변동이 없었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3월 1일 부군통폐합령에 의해 무장군과 흥덕군이 고창군으로 통합될 때 와공면과 동음치면 이 합병되어 공음면이 되었다. 이 때 공음면에 12개 법정리가 형성되었다. 공음면에 속한 예 전리는 뚜렷한 명칭 유래가 확인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예지”라고 불렀다가 “예전(禮田)”으 로 고쳐 불렀다.
1300년대 초 남양홍씨(南陽洪氏)가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한
다. 본래 무장군(茂長郡) 와공면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호에 따라 시 묘리(侍廟里), 응암리(鷹岩里)가 병합되어 예전리(禮田里)가 되었고 공음면에 편입되었다. 예전리
중앙에 있는 지방도 796호선이 동서방향으로 공음면 면소재지와 대산면 소재지로 연결되어
공음면 예전리 ― 77
있으며 현재는 자연 마을로 평산, 상예, 중예, 응암, 수원, 금정, 호동, 시묘(안골) 등 8개 마
을이 법정리인 예전리(禮田里)를 구성하고 있다. 예전리는 공음면 남서부에 있다. 2010년 3월
현재 면적은 4.15km²이며 총 149가구에 315명(남 156명, 여 159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경지 면 적은 2.21km²로 밭 0.87km² 와 논 1.34km², 임야 0.88km² 등으로 되어 있다.
름의 명칭은 그 당시에는 “예지”라고 불
러오다가 “예전(禮田)”으로 부르기도 했 다. 그 후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는 “중
여(中余)”로 부르다가 다시 마을의 뜻있 는 분들의 의견을 모아 예절을 잘 지키 고 어른을 공경하는 미풍양속을 후손들
2. 예전리 마을의 유래와 자연환경
에게 전하여 주자는 뜻을 생각하여 중예
(中禮)로
중예마을 표지석
도 중예(中禮)로 되어 있다. 애초에는 남양홍씨가 터를 일구었지만 주 성씨로는 함풍이씨가
1) 상예(上禮)마을 상예 마을의 지명 유래는 알기가 어렵다. 상예 마을은 터를 잡을 당시에는 “예지”라고 불
렀다고 한다(두산백과사전).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는 “예전(禮田)”으로 불러오다가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뒤에는 “상여(上余)”로 부르다가 지금은 “상예(上禮)”로 부르고 있다. 상예마을
상예마을 표지석
정하였다고 한다. 마을 표지석
지금부터 370여 년 전에 입향하여(이종인 씨 증언, 이종인 씨 10대조) 살게 되었으며 마을의 재각
도 함풍이씨 집안에서 짓고 한 때는 함풍이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번창하였다고 한다.
은 지방도로 796호선이 지나는 공음면
3) 평산마을
면소재지와 대산면 면소재지 사이의 중
공음면 면소재지에서 지방도 796번을 따라 대산 방면으로 약 3.4km 정도 가다보면 동쪽
간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앞으로
으로 예전 저수지가 있다. 이 저수지 밑에 있는 마을이 평산마을이다. 설기 연대로 보면 고
도로가 나 있어 중예마을과 상예마을 주
창문화원에서 발행한 『마을의 유래』에
민들이 외출하기에 편리하도록 간이 버
나와 있는 것으로 보면 1700년대 초 충
스 정류소가 있다. 마을 앞 쪽으로 예부
주박씨가 터를 잡았다고 하며 이 마을의
터 황천강이라고 불리는 냇물이 흐르고
박인철 씨의 말에 의하면 박인철 씨의 8
있는데 이것은 북쪽에 있는 선동리에서
대조 할아버지인 박유성이 마을을 이루
내려오는 선동천의 일부로 농업용수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고 충주박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 왔
상예마을은 남평문씨(文氏)가 설기 연대로 추정해 볼 때 1400년대 초에 2가구가 터를 잡
다고 한다. 지금도 주 성씨는 충주박씨
고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하였으며 주로 많이 살고 있는 성씨는 남평문씨와 금성라씨이다.
집안이며 선조 중에 효자와 열녀가 생겨
이 두 성씨가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번창하였다고 한다.
서 마을 북쪽에 정문을 짓고 마을 공동체를 이루어 평화롭고 안정된 생활을 하며 살아왔다
평산마을 표지석
고 한다. 2) 중예(中禮)마을 중예마을은 공음면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3.4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의 유
래는 자세히 확인된 바는 없지만 고창문화원의 마을 유래 조사(고창문화원, 2007)에 의하면
1300년대 초에 남양홍씨(南陽洪氏)가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루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마을 이
78 ― 고창의 마을 제5집
이 마을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마을 앞 서쪽에 황산이 있는데, 석양이면서산에 넘어가 는 태양과 함께 아주 아름답게 산의 모양새가 드러난다고 한다. 언젠가 마을 앞을 지나가 던 노스님이 말하기를, 장차 이 마을에 인재들이 많이 출생할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마을에는 교육열이 예전리 마을 전체에서 가장 높으며 사범대학을 졸업하
공음면 예전리 ― 79
고 교직에 근무하며 제 2세 교육에 봉직한 사람이 많았다(박봉규 교장, 박인철 교장, 박용범 교장,
정재윤 교장, 박종익 교장, 박호철 선생, 박정수 선생, 박용백 교수).
마을 가구 수를 보면 금정마을이 4집, 호동 마을이 2집, 안골이 8집으로 가장 많이 살 고 있으며 모두 14가구가 마을 행사나 애경
4) 응암(鷹岩)마을
사를 상부상조하며 알뜰하게 살고 있다.
예전리 응암마을은 공음면사무소에서 대산 방면으로 약 4km 정도 가다가 상예마을에서
마을의 설기 연대를 추정해 볼 때 1600년
우측 들녘으로 1km 정도 가면 동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설기 연대는 대략 1800년대 초로
대 초에 김대창이라는 사람이 터를 잡아 마
추정된다. 주 성씨로는 영양천씨가 마을
을을 이루고 마을 앞에 사금(砂金)이 많이 채
에 터를 잡으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취되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금정이라고
하며 현재도 천씨 일가가 살고 있다.
했다는 전설이 있다.
금정마을 표지석
응암마을에는 마을의 유래가 있다. 마 을 뒤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가
2. 마을의 모정과 경로당
땅위로 솟아오르면 마을에 괴질과 흉년 이 든다는 전설이 내려왔다고 한다. 그
1) 평산마을 모정
래서 그 바위가 보이지 않아야 마을에
평산 마을에는 동네에 들어서면 서쪽으로 마을 모정이 있다. 옛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공
길한 일이 생긴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이 마을 동제를 지내며 바위를 흙으로 덮어주어 보호
동으로 즐겨 찾는 곳으로 여름철이면 들에 나가 김매기를 하고 몸이 피곤할 때면 모정에 와
해 왔다고 한다.
서 잠시 잠을 자며 쉬었다가 일터에 가곤 했었다. 시골에서는 아주 편리하게 이용하는 시설
응암마을 표지석
이었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성공한 사람들이 여러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 5) 수원마을 수원마을은 평산마을과 한 행정단위로 구성되어 같은 이장 한 사람이 행정을 관리하며 주 민들이 마을회관을 같이 쓰면서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서로 단합하고 협동하며 지내는 마을
에서 박인철 교장 선생님이 마을 후손들을 위해 애향정을 수리하고 평산마을의 모정을 건
립한 후에 마을 사람들이 애향정 건립 취지문을 만들어 그 뜻을 기리고자 비(碑)를 세웠다. 비에 새겨진 애향정 건립 취지문은 다음과 같다.
이다. 마을의 위치는 예전리 평산마을과 마주보며 공음 대산간의 도로를 경계로 나뉘어져 있 다. 마을 입구 표지석도 없이 응암마을로 가다가 중간 지점에서 우측으로 우회전하여 300m
성암 박인철 교장선생은 구도자의 자세로 삶을 값지게 살아가시면서 고향을 사랑하는
쯤 농로를 따라 걸어가면 마을회관 앞에 도착한다.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어른을 잘 공경하
정성이 지극하여 어른을 섬기고 살기 좋은 마을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항상 고심하였
는 모습이 아름다우며 저녁이면 마을회관에 모여 공동 식사를 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으며 삶의 모두를 제2세 교육에 헌신하였기에 서로서로의 크신 길을 만세의 세월에도 퇴색하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마을에 주민들의 휴식처가 노후되었음을 안타깝게 여
6) 금정, 호동, 시묘(안골)
기시어 사재를 쾌척하여 애향정을 건립하는데 공이 크므로 그 뜻을 오래도록 기리고
공음면 면소재지에서 칠암마을 앞을 지나 대산방면으로 약1.5km 정도 가다 보면 우측으
자 이 비를 세웁니다.
로 금정마을과 안골(시묘) 마을회관과 마을 표지판이 도로가에 세워져 있다. 이 세 개 마을
-1999년 11월 일(협찬자 : 박봉필, 박문규, 박종근, 박근호, 박무웅, 박종환, 박종길, 박용구,
을 여자 이장이 행정을 관리하고 있다. 가옥들이 몇 채 되지 않아서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데,
박종갑, 박경수, 박종욱. 추진자 : 박동규, 박용회)
80 ― 고창의 마을 제5집
공음면 예전리 ― 81
2) 예전리 경로당
우리가 체험한 고귀한 경험 실적 그리고 민족의 얼을 후손에게 계승할 전수자로서의 사명을
예전리에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활용하는 경로당이 있다. 현재 경로당 회장은 문오섭
지각하며 아래 사항의 실천을 위하여 다 함께 노력한다.
씨가 맡고 있으며 평산과 중예 그리고 상예마을의 중간위치에 자리 잡고 있어 마을 어른들
① 우리는 가정이나 사회에서 존경받는 노인이 되도록 노력한다.
이 이용하기에 아주 편리하다. 옆에 운동할 수 있는 게이트볼 경기장까지 있어 주민들의 건
② 우리는 경로효친의 윤리관과 전통적 가족제도가 유지 발전되도록 힘쓴다.
강관리에 매우 좋다. 경로당의 경로헌장을
③ 우리는 청소년을 선도하고 젊은 세대에 봉사하며 정의사회구현에 앞장선다.
방에 비치하여 노인들이 상부상조의 미덕과 예절을 잘 지키도록 하고 있다. 경로당에
(3) 역대 노인회장 명단
있는 경로헌장과 노인강령, 역대 노인회장,
초대회장 : 문국환, 2대회장 : 박동규, 3대회장 : 박문규, 4대회장 : 공연필,
경로당 운영지침, 경로당 비품 목록, 경로회
5대회장 : 문오섭 (현재)
원 명단을 기록해 본다. (4) 경로당 운영지침 (1) 경로헌장
예전리 경로당
(가) 조직강화 (나) 사회봉사 (다) 권익신장 (라) 자립자활
노인은 나라의 어른이다. 노인은 우리를 낳아 기르고 문화를 창조 계승하며 국가와 사회 를 수호하고 발전시키는 데 공헌하여 온 어른으로서 국민의 존경을 받으며 노후를 안락하
(5) 경로회원 명단
게 지내야 할 분들이다. 그러나 인구의 고령화와 사회구조 및 가치관의 변화는 점차 노후생
문국환, 문규섭, 문남섭, 문재근, 이몽환, 김재응, 이맹범, 이우범, 이재칠, 이은범, 공연필,
활을 어렵게 하고 있다.
박경회, 박상철, 박용해, 이병술, 문하섭, 김동관, 박용관, 심상준
우리는 고유의 가족제도 아래 경로효친과 인보상조의 미풍양속을 가진 국민으로서 이를 발전시켜 노인을 경애하고 봉양하여 노후를 즐길 수 있도록 노인 복지 증진에 정성을 다
3. 예전리 마을의 문화 유산
하여야 한다. 우리는 아래와 같은 사항을 구현하기 위하여 다 함께 노력한다.
1) 상예마을의 남평문씨 재각
①노 인은 가정에서 전통의 미덕을 살려 자손의 극진한 봉양을 받아야하며 지역사회와
상예마을에서 펑산마을 쪽으로 가다 보면 마을의 제일 높은 곳에 남평문씨 재각이 있다.
국가는 이를 적극 도와야한다. ② 노인은 의식주에 있어서 충족되고 안락한 생활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비교적 관리를 잘하고 있으며 마을의 원로인 문국환 씨가 주축이 되어 문중 재각을 만들었 다고 한다.
③ 노인은 심신의 안전과 건강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④노 인은 취미 오락을 비롯한 문화생활과 노후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얻는 기회를 가져 야 한다.(1982년 5월 8일)
(1) 사모제 낙성 기념비(思慕齊 落成 記念碑)
아! 자랑스럽도다. 우리 남평 文氏 楓菴 公派 예전 문중 일족이여!
무성공 휘 다성을 시조로 忠帚公諱 克謙祖, 忠宣公諱益잠漸祖와 禮曺泰議敬帚公諱尙行
(2) 노인강령(老人綱領)
祖 寧海府使公諱落祖行坡州牧贈兵忝楓庵公諱緯世祖 등을 위로 모셨으며 200여 년 전에
우리사회의 노인으로서 항상 젊은이들에게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지니는 동시에 지난날
楓庵公五代孫 諱永完祖께서 장흥에서 무장현 와공면 예전리로 이거하시어 10여 세대가 흘
82 ― 고창의 마을 제5집
공음면 예전리 ― 83
2) 충주박씨 효열 정려(忠州朴氏 孝烈 旌閭)
러 남평문씨 풍암공파 예전문중을 이루 었도다. 그 사이 후예가 번성하여 손이
평산마을에 충주박씨 집안에 효자와 열녀를 모시는 정려가 있다. 마을의 북쪽 마을 공동
기백을 헤아리게 되었으나 列先祖를 모
우물이 있는 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충주박씨 효열 정려에 대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시는 재각을 마련치 못하다가 근년에 창
효자 박병(朴炳)은 忠州人으로 자(字)는 華汝(화여)이고 號는 蔡軒이며 文簡公 祥의 后(후)
환, 국환 등 유지 문장들의 발의에 의하
영조 20년에 출생하였으며 天性이 至孝하여 事親에 志體를 兼養하고 病患에 百藥으로 求
여 후손들이 각기 앞 다투어 헌성하여
療하고 危急함에 祝天 裂指하고 喪事에 禮制를 다하여 三年 奠哭을 하니 鄕道에서 薦하여
여기 예전리의 선영하에 죽산공휘 덕주
命旌되었다(『송사문헌』, 792쪽, 공음면 평산 박문규 제공).
조와 誠堂公諱 영완조 송당공휘 춘무조 통훈 한성판관 송원공휘 성희조 생천공
효자 박병의 현판은 다음과 같다.
휘 명희조 통정대부후당공 휘기실조 통 정동지추밀원사초계공휘 기복조를 모시
孝子 通訓 大夫 司憲府 監察 朴炳 之閭
는 思慕齊를 신축하여 이제 낙성을 보게 되었도다. 이는 오로지 예전 문중일가분
上 之 二 十 四 年 丁亥 四月 日 命旌 남평문씨 재각
들의 숭조지심의 結晶이로다. 여기 모이 효자 박병의 처는 해주최씨이며 열부로 부부간에 효자와 열부로 나라에서 명정되었으며
는 일족들이여!
평산박씨 문중에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남편이 먼저 죽었는데 3년상을 다 마치고 밤에 남편
사모제의 지붕을 바라보며 친족간의
곁에 가야한다며 자결하였다고 한다(평산 박상철 씨 증언).
돈목을 다짐하고 위선경자에 힘써 문중 의 일익창성을 기약해 주기바라며 아울
烈女 贈 通訓大夫 司憲府 監察 朴 炳 之 妻
러 후손들에게 경조의 뜻을 길이 전하고 자 여기에 몇 자를 적노라.
贈 淑人 海州 崔氏 之閭 사모제 낙성 기념비
上 之 二 十 四 年 丁亥 四 月 日 命 旌
단기 4329년 병자 양 4월 일 (1) 충주박씨 효열정려기
풍암공 십이대 손 문학박사 在球 謹撰 거창후인 愼 鏞 采 謹書 고창군 공음면 예전리 1754의 1번지 有司 : 성당공 7대손 창 환, 성당공 7대손 국 환 都編首 : 김영곤 뒷면에 사모제 건립 성금기(記)가 기록되어 있음(단기 4328년 을해 월 일 현손 局煥 書로 되었음).
84 ― 고창의 마을 제5집
공(朴炳)의 효도는 멀리 조상 때부터 내력이 있다. 눌재(訥齋) 문간공(文簡公)이 윤리가 깨트
러지는 세상에서 강상(綱常)을 부식하니 그 분이 원조가 되며, 시종일관하여 어버이의 제사
를 지내는 날에 공(公)을 본받아 효행을 다 하니, 그 분이 조부(祖父)이시다. 대대로 이어져
오는 가풍에 물들임이 있는 것이고, 영지(靈芝)도 뿌리가 있는 것이니 마땅히 공같은 사람이
있게 되며, 또한 공의 효행과 동시에 부인의 정열(貞烈)이 있게 된다. 효행과 정렬은 대개 길 은 달리 하더라도 하나로 일치(一致)한다.
공은 자라면서 지성스러운 효자였으니 어려서부터 화열(和悅)하는 안색과 마음이 유순하
공음면 예전리 ― 85
고 항상 온화한 몸가짐으로 혼정신성(昏定晨省)함이 성인과 같았으니, 가르치지 아니 했는데 도 매사를 능숙하게 잘 하였다. 부모님이 병으로 앓게 되면 밤낮으로 옷과 허리띠를 풀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간호해 드렸고, 병환이 완치되도록 하늘을 우러러 지성으로 빌며 간구 하니 마침내 병이 쾌차함에 이르러서 주변의 마을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부모님 상(喪)을 당하자 예의범절을
위반할 정도로 슬퍼하며 부모님을 사모
함이 깊었고 장례(葬禮)나 제례(祭禮)에
더라도 영예(榮譽)가 족(足)하도다.
이글은 현손(玄孫) 정주(廷柱)가 문미(門楣)에 걸어두는 글을 나에게 부탁함으로 쓰다. 갑술(甲戌)년 10월 하휴(下休) 행주(幸州) 기우만(奇宇萬)이 삼가 쓰다. (2) 증통훈대부 사헌부감찰 규헌 박공 묘갈명
대저 효자(孝子)와 그의 아내 열부(烈婦)를 같은 날에 광주 방하동 간원(艮原)에 쌍봉으로
도 유감없이 봉행(奉行)하니 옛날에 운위
정려(旌閭)할 것을 내리시니, 곧 감찰(監察) 박공(朴公)이다. 휘는 병(炳)이요, 자(字)는 화여(華
실로 부끄럽지 아니했다. 공(公)은 3년간
정주(廷柱)의 요청으로 정려를 기록하고 이미 또한 현각(顯刻)함에 있어서 거듭 당부하기를
(云謂)되었던
효자들에 비교해도 공(公)은
이나 된밥을 먹지 않고 죽을 먹었으며 소금에 절인 채소를 가까이 하지 안 했 으며, 경적(經籍)에 잠심(潛心)하여 옛날을 돌아보아도 짝하여 견줄만한 사람이 많 지 않았고 남 몰래 숨어서 행하는 덕(德) 을 찾아보니 다만 한 가지 효행으로도 충주박씨 정려정문
께서 정해(丁亥)년에 정문(旌門)을 하사하시고 아울러 공(公)에게 내리니 사(私)적으로는 슬프
명성을 이룬 자이었다.
부인의 관향은 해주(海州崔氏)이고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이 그 현조(顯祖)이시다. 출가하 기 전 집에 있어서는 부모에 효도하고 공에게 시집을 와서는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섬기기를 남편이 부모를 섬기는 것 같이 하였고, 부자(夫子) 섬기기를 예(禮)로서 하니 사람들이 좋은
배필이라고 하였다. 그 행동거지는 변함이 없이 행하였으며 베를 짜는 일은 부지런함이 알 려졌고 이 모든 일은 부인의 간략한 예절을 말한 것 뿐이다.
汝)요,
호는 규헌(葵軒)이다. 증숙부인 해주최씨의 아버지는 대규(大奎)이다. 우만(宇萬)은 현손
“고조(高祖)의 효행과 고조비(高祖妣)의 열행의 실상이 밝혀짐이 없으니 그대가 고종명(考終
命)한
은혜를 상세히 하기를 원한다”라고 하여서 삼가며 거듭 사양하면서 내가 말하였다.
“효행으로 정려되고 열행으로 정려되는 것은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이 다 알고 있으니, 가
문(家門)을 입언(立言)함에 이에 누구인들 글로 나타내고 싶지 않겠는가? 중대한 조칙(詔勅)을
불녕(不佞)에게 반드시 하게 하여야 하는가?” 사양했으나 허락받지 못하여 차례대로 그 원
류(源流)의 사적과 행실을 삼가 서(序)하며 이에 명문(銘文)으로 기록한다.
박씨(朴氏)는 중원(中原) 부정(副正)을 이어서 덕(德)을 베풀고 선행을 많이 쌓아서 이로 인해
흥(興)하였으며 계발(啓發)한 후에는 병(炳)에게 정신이 전해졌다. 문간공에 이르러서 소릉(昭
陵)을
복위시키는 상소(上疏)가 있었고, 삼인(三印)의 대(臺)1가 아름다운 모양으로 그 소리가
크게 울림이 있었으며, 대부(大夫)가 효행을 거듭 드러내니 명성이 높아졌다. 고찰하여 말한
다면 동방(東邦)의 조정(朝廷)을 계도함이고 가르침을 온전히 계승함이다.
광산(光山)이 본적인 공은 실로 스스로 타고난 성명(性命)을 그대로 지키고 안주하였으며,
남편이 사망하여 시체를 땅에 묻으려 하자 자기도 남편을 따라 가고자 하였으나 아들과
나이로서 늙은이 같은 행동을 하지 말라고 경계시켰고, 또한 혼정신성하기를 가르치지 아니
며느리의 만류 때문에 차마 행동하지 못하였고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음식을 억지로 먹으
했는데도 능히 잘 하였을 뿐만 아니라 산에서 나무를 하고 물에서 고기를 잡아 맛있는 음
며 살다가 마침내 남편의 3년상을 마치고 그 날 밤 저녁까지 참고 기다렸다가 드디어 남편
의 곁으로 간다며 생(生)을 마감하였다.
아! 슬프도다. 지아비가 죽으면 아들의 뜻을 따랐던 의리를 행하였으며 또한 바른 행실을
따르고, 여성의 정조(貞操)가 평소의 날에 축적(蓄積)됨이 아닌가! 이에 겸허하고 공손하게 들
음이 이와 같이 하였고, 하늘은 유현(幽玄)한 것을 드러내지 아니함이 없으니 마침내 임금님
86 ― 고창의 마을 제5집
1) 삼 인(三印)의 대(臺) : 1506년(연산군 12) 중종반정이 성공한 후 중종반정을 주도하고 성공한 박원종 등 반정공신들은 신수근(愼守勤) 일 파가 반정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숙청하고, 이어 신수근의 딸 신씨를 패비시키고 윤여필의 딸인 숙의 윤씨를 새 왕비로 맞아들였다. 그 러나 새 왕비 장경왕후는 왕후가 된 지 10년 만에 사망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순창군수 김정(金淨), 담양부사 박상(朴祥), 무 안현감 유옥(柳沃) 등 세 사람이 비밀리에 이 곳 강천산 계곡에 모여 과거 억울하게 폐위된 신씨를 복위시킴이 옳다고 믿어서 각자의 관인을 나뭇가지에 걸어 맹세하고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하였다. 이때 이들이 소나무 가지에 관인을 걸어놓고 맹세한 곳이 이곳이라 하 여 삼인대(三印臺)라 부르게 된 것이다.
공음면 예전리 ― 87
식을 어버이에게 올렸으며, 어버이께서 아프시면 하늘에 병이 나아지길 빌고 그리하여 하늘 도 그 정성에 감동하였다. 종신토록 신독(愼獨)하였고 제사를 모실 때는 온갖 정성을 다 하
되어 아늑한 느낌을 준다. 마당에 들어서면 절 로 편안한 마음이 든다. 현재 재각을 관리하
여 추모하고 감동하며 사모함이 더욱 깊어졌다. 실로 이 품행이 아내에게 미치어서 아내가
고 있는 사람은 원래 흥덕이 고향인 최용문(54
본받고 살았으며 이에 효도를 본받아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정성으로 받들었고, 덕행이 있
씨가 이강수 군수의 집을 관리하면서 돌보
는 배필자로서 군자(君子)를 예의로 섬겼다는
칭예(稱譽)가 있게 되었다. 일찍부터 고요하게
세)
고 있다(최용문 씨와 대담함). 재각은 마련했어도 조상을 모시는 제사용 토지가 없어서 이강수
정숙함을 드러내더니 부자(夫子)가 임술(壬戌)
씨가 사비를 들여서 약 1000평 정도의 제토를
년에 운명하자 어찌 황망한 가운데에서 남편
마련해 주어서 매년 토지에서 나오는 소득으로 매년 음력 10월 20일 문중 제사를 이각수
을 그리워하며 참고 살다가 죽을 것을 기다렸
씨 집에서 문중 종원들이 함께 모여서 제사를 모시고 제사용 토지는 현재 이각수 씨가 관리
겠는가? 거듭되는 기년(朞年)에 정들었던 남편
함풍이씨 재각
하고 있다(이종인 씨 대담).
을 따라 저승의 땅으로 건너가고 말았음이여! 또한 순종하는 삶속에서 목숨을 버리는 것을
5. 예전리 마을 경로 회관과 시설
니 하였으리라, 이에 공손하게 밝게 듣고 하
1) 상예경로회관
행동으로 보였으니 정심(貞心)은 달라지지 아 효자 박병의 현판(위)과 효자 박병의 처 열녀 현판
늘은 한 남자의 효행의 정려(旌閭)를 명(命)하심에 공평하기도 하다. 덧붙여서 손자와 증손자 는 기록에 실리지 아니 했다.
무술년 양복월(陽復月) 하휴(下休) 행주(幸州) 기우만(寄宇萬) 찬(撰)하다. 액호(額號) 충주박씨 효열정려(忠州朴氏孝烈旌閭)
상예마을의 경로회관은 동네 중앙에 자리 잡고 있어 마을 사람들이 이용하기에 참 편 리하다. 남자들은 주로 예전리 노인 경로당에 가서 화투 놀이를 하거나 게이트볼 운동으로 건강관리를 하고 있어 시골 생활하기에 아주
(다) 정려 관리
좋은 편이다. 마을 경로당은 국가에서 난방용
충주 박씨 효열 정려의 제사는 매년 음력 3월 10일에 지내고 있으며 제수 비용을 충당하
유류비가 나오기 때문에 겨울철에는 어른들이
기 위해 마련해 놓은 전답이 있다. 논이 1000평 정도이고, 밭이 5000평 정도 되며 매년 선자
맛있는 음식을 가지고 마을 경로당에 나와서
를 120만 원 정도 받아서 세 번 모실 수 있는 제물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정려 관
나누어 먹는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리는 박무웅(현재 전주 거주)이 하다가 현재는 마을에 살고 있는 박상철과 장성에 살고 있는
상예마을 경로회관
곳이 바로 마을 경로당이다.
박근호가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2) 중예 경로회관 3) 함풍이씨 문중 재각 이씨 문중에서 조상을 섬기고 제사를 모시는 재각이 중예마을에서 좀 떨어진 거리인 학원
농장 부근의 이강수(2013년 현재 고창군수) 집 옆에 자리 잡고 있다. 재각 주위가 숲으로 조성
88 ― 고창의 마을 제5집
중예마을의 경로회관은 마을 중앙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층 건물로 건축되었다. 회관 정면이 멀리 들녘을 바라보고 있어 경치가 비
중예마을 경로회관
공음면 예전리 ― 89
교적 좋으며 마을 에 들어오는 입구를 항하고 있어 차량이 들어오는 것도 바라볼 수 있다.
로운 마을이다. 마을 젊은이들이 어른을 잘
겨울이면 마을 부녀자들이 주로 활용하고 있다. 중예마을은 함풍이씨 집안이 집성촌을 이루
공경하고, 친화력이 좋은 마을 이장 김대진과
고 살고 있으며 학원 농장과 인접하고 있어 봄철이면 청보리 축제를 보러 오는 관광객이 마
김동관 씨 강화석 씨, 또한 고창군의회 임정호
을회관 옆으로 많이 드나들고 있다.
군의원 등이 주축이 되어 마을회관을 중심으 로 밤이면 모여서 좌담회도 하고 마을 애경사
3) 평산마을 경로 회관
며 중요한 문제는 저녁을 함께 먹으면서 공동
평산마을 마을회관은 회관을 지을 부지가
으로 잘 해결해 나간다고 한다. 이러한 것을
수원마을 경로회관
마땅치 않아서 마을 사람들이 불편을 겪어 왔
보면 농촌에는 마을회관이 절대로 필요해 보인다. 정부 정책이 농촌을 살기 좋은 마을로 만
다. 그런데 박종택 씨가 새 집을 마련해서 이
들어가고 있어 귀농과 귀촌의 인구가 고창군에 늘어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닌가
사를 하는 바람에 그 집터를 마을 회관용으로
생각된다.
구입해 회관을 지었다. 평산마을은 충주박씨 집안 사람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어 단
평산마을 경로회관
합이 비교적 잘 된다. 회관 안에 식사를 해 먹
6) 금정마을 경로회관 금정마을 경로당은 안골과 호동, 금정, 세
을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져 겨울에나 비오는 날이면 부녀자들이 모여서 공동 식사를 자주
마을이 함께 사용하도록 안골 마을에 건립하
하는데, 마을회관은 농촌에서는 정말로 유용한 공간이다.
였다. 건립 년대는 2005년 12월 4일에 지은 헌성비가 있으며 호동마을 주민과 금정마을
4) 응암마을 경로회관
사람들은 거리상으로 좀 떨어져 있어 사용이
응암마을 마을회관은 마을 입구에 자리 잡
불편한 편이다. 이 마을에서는 마을회관과 경
고 있다. 회관의 위치는 남쪽으로 넓은 들녘을
로당으로 겸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출향민들
향하고 있어 여름철에 회관에서 창문을 열고
의 도움과 마을 주민들의 후원금으로 회관 건립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회관 앞에 헌성비
바라보면 푸른 벼들이 자라고 있는 모습만 바
와 공로비를 세워 도와 주신 분들의 고마움을 잊지 않도록 하고 있다.
금정마을 경로회관
라보아도 농촌의 넉넉함을 느끼게 된다. 2004 년 12월 15일에 준공되었다. 응암마을은 마을 회관 옆에 모정이 세워져 있어 더운 여름철에
금정마을 경로회관 헌성비 응암마을 경로회관
는 농민들이 일하고 오수를 즐기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우리 마을 금정회관은 농촌 정주권 사업의 일환으로 추 진되었으며 예산 출원은 정부지원금 삼천만원과 출향인 사 및 마을 주민들의 후원금으로 건립하였으며 그 고마운
5) 수원마을 마을회관 수원마을 경로회관은 다른 마을회관에 비하여 좀 늦게 건립되었다. 건립 년대는 2008년 11월 21일에 마을 회관 건물 앞에 헌성비를 세웠다. 수원 마을은 15가구가 살고 있는 평화
90 ― 고창의 마을 제5집
뜻을 이 비에 새긴다. 마을 회관 신축 추진위원장 : 변우섭 마을 이장 : 김성규
금정마을 경로회관
공음면 예전리 ― 91
추진위원 : 김수천, 이재칠 새마을 지도자 : 박정근
을 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섬 부녀회장 : 황서운
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하는 말씀을 중요시하고 있다. 예전교회의 예배시간은 하루에
2005년 12월 4일
네 차례를 운영하는데 주일 낮, 주일찬양예배, 수요밤예배, 새벽기도회를 한다.
공로비
새마을 사업에 즈음하여 정부의 지원과 출향인사 분의
8) 실로암 기도원 -한나의 집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에 힘입어 마을 진입로 포장을 완공
중예마을에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실로암
하였기에 그 공로에 감사하는 뜻으로 이 공로비를 세웠습
기도원 ‘한나의 집’이 있다. 이 기도원은 노인
니다. 공로비에 다음과 같이 후원자 이름을 새겨 놓았다.
주거 복지 시설로 인가를 받아 설립하여 현재
후원자 명단 : 변균관 모친 김태아 백십만원, 탁형춘 백
는 운영하지 않고 있으며 84세 되는 오현순
만원, 변재형 오십만원, 변재금 오십만원, 탁경수 삼십만 원, 변재환 이십만원, 김성진 이십만원, 탁가상 이십만원,
씨 한 분만이 이 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다. 안골마을의 공로비
노인 복지시설 한나의 집
변재광 이십만원, 변재성 이십만원, 변종석 이십만원, 나영주부인 변행자 십만원, 양정회부인
9) 예전리 게이트볼(gate ball) 장
변신자 십만원, 변재홍 십만원, 정동명부인 변경순 십만원, 유성호부인 탁선한 십만원, 변영
예전리 마을 주민들이 운동을 할 수 있도록 중예마을과 상예마을 그리고 평산마을의 중
섭 십만원, 변재일 십만원, 이동정 부인 탁순애 십만원, 변씨 문중 십만원, 이양신 십만원
간 지점에 게이트볼 장을 새로 건축하였다. 이 게이트볼 장은 2002년에 비가림 하우스 형
새마을 지도자 : 변재철 기금위원 : 변우섭, 이재칠, 준비위원 : 김영근
태의 지붕 및 마사토 바닥으로 지어져 사용하다가 노후화된 가운데 2012년 태풍 덴빈으
1981년 5월 일
로 반파되어 시설관리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고창군은 총 사업비 2억 원을 투입하여 부지 1,175m²에 건물 463m²규모의 인조 잔디 전천후 게이트볼 장으로 조성하였다.
7) 대한예수교 장로회 예전교회 예전교회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소속으로 담임 교역자는 김일수 목사이다. 교회는 공음면
5. 마을의 전설과 이야기
예전리 315번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교회의 슬로건을 생명의 원칙인 “비움과 나눔과 그리고 섬김”으로 정하고 주일 낮에 예배 참여자가 20여 명 내외로 알뜰하게 신도들이 성경에 나오
1) 평산마을의 우물(샘)
는 초대 교회의 모습처럼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특히 김일수 목사는 교회의 표어를 “노동
평산마을에 공동으로 사용하는 우물(샘)이 하나 있다. 이 우물은 마을의 윗동네 충주박
은 봉사와 순종으로 교회의 권위이다.”로 설
씨 정려가 있는 정문 앞 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한 때는 평산 마을 주민 30여 세대가 이 공
정하고 농촌 생활에 맞는 신앙생활을 인도하
동 우물 하나를 가지고 전체 주민이 사용하고 있었다. 아침이면 부잣집 머슴이나 젊은이들
고 있으며 교회는 사랑, 노동, 지식은 우리 생
이 지게를 지고 물을 길러 날라다 주어야 아침 식사를 준비하곤 했다. 생활이 여유가 있는
활의 원천이며 이것들이 우리의 생활을 지배
집에서는 물 항아리를 부엌 땅에 묻어 놓고 우물에서 물을 길러다 이 물 항아리에 가득가득
해야 한다고 하며 누가복음 22장 26절에서부
채워 놓고 밥이며 아침 세수도 이 물로 하곤 했다. 얼마 후 정부에서 새마을사업을 하여 각
터 27절까지의 말씀인 “너희 중에 큰 자는 젊
가정마다 우물을 파서 작두 샘을 이용하게 되었다.
예전교회
92 ― 고창의 마을 제5집
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
이 마을에서는 민간에서 전해 오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부터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이 우
공음면 예전리 ― 93
물은 하루에 한 번씩 밤 자시(子時)에 물이 아래 바닥물과 윗물이 서로 뒤바뀌어 새로운 물
당산제를 지낼 때 제사상은 몸과 마음이 청결하고 일 년 동안 부정한 행동을 하지 않고
이 위로 올라오곤 하는데 이 때 물이 뒤집힐 때를 기다려 이 물을 떠다 먹으면 위장병이나
음식도 정갈스럽게 가려먹고 궂은 일을 하지 않는 자를 선정하는데 대개 마을의 처녀 중에
제반 속병이 낫는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래서 이 소식을 들은 효성이 지극한 박한순(담양으로 시집가서 현재 담양군 수북면 살고 있음)
예전교회
서 선정하여 제사를 지내왔다고 한다. 당산제의 제물이나 제반 비용은 마을 주민들이 추렴
씨가 처녀 때 어
하였다. 그날만은 마을의 잔칫날이 되어 축제 분위기에
머니(유동댁)가 위장병으로 오랫동안 고생하시고 있
서 술과 음식을 장만하고 농악놀이를 함께 즐기며 온 마
었기에 이 물을 떠다가 주곤 하여 어머니의 위장병
을 사람이 단결하는 기회를 삼기도 한다. 또한 당산제를
이 다 나았다고 한다. 한 번은 박한순 씨가 물을
지내고 남은 음식은 제사장이 가져가는 풍습이 있어서
뜨러 우물에 갔는데 돌아올 시간이 되어도 오지
가난한 시절의 우리 조상들의 삶의 모습을 추측해 볼 수
않아서 식구들이 밤중에 등불을 들고 찾으러 나섰
도 있다.
는데 우물에 가보니 물이 뒤집히는 것을 우물가에
할매 당산에 관한 전해 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옛
앉아서 기다리다가 그만 잠이 들어버린 것이었다. 집에 있는 식구들은 귀신이 데려갔다느니,
날에는 가정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밥을
집승에게 물려 갔다느니 하는 추측이 난무했다고 한다. 지금은 평산마을에 각자 집에 우물
짓는 솥이었다. 철기시대부터 사용되어 왔다고 추정되는
을 파서 자체적으로 해결하고 있어서 이 우물을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에 이 우물가에서 빨
가마솥은, 고가의 물건으로 부엌 있는 부엌신이 이를 지
래를 한다고 한다.
켜주고 있다고 믿어 왔다. 그래서 도둑놈들이 남의 집에
예전리 밭에 있는 할아버지당산
있는 솥을 훔쳐다가 팔아먹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2) 마을의 수호신 할매와 할아버지 당산 이야기
한 번은 여름날 밤에 이 마을에 도둑이 들어 이씨 할머님
예전리 중예마을에 예부터 전해 오는 할매 당산 이야기가 있다. 중예마을은 옛날에는 위
댁 부엌에 있는 솥 두 개를 지게에 짊어지고 갔단다. 그
아래 동네로 불릴 만큼 큰 마을이었으며, 윗동네에 할아비 당산과 할매 당산이 있고 아랫동
런데아랫마을 입구에 있는 할매 당산 앞에서 이곳을 벗
네에도 두 개의 당산이 있어 모두 네 개의 당산을 모시는 마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새마
어나지 못하고 밤새도록 할매 당산 주위를 빙빙 돌다가
을사업과 오랜 시간이 지나는 관계로 하나는 땅속에 묻히고 세 개만 남아 있다. 중예마을에
새벽이 되어 마을 사람들에게 들킬까봐 할매당산 앞에
들어가면 마을 입구 오른쪽 밭에 할아버지 당산이 있는데, 약 1m 정도 땅속에 깊이 묻혀 있
솥을 두고 도망을 갔다고 한다. 이처럼 할매 당산은 마
다. 그리고 마을 진입로 왼쪽에 있는 할매 당산은 약 1m 정도이다.
을의 수호신처럼 마을을 잘 지켜주고 안녕과 평화를 기
지금은 나이 든 사람들만이 당산이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역할을 한다고 믿고 있다. 옛 날에 마을의 당산은 풍년을 기원하고 마을의 평화를 지키며 괴질 등의 돌림병이 마을에 들
원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당산 이야기로는 땅바닥에 누워 있는 할아
마을 입구 길가에 있는 할매 당산
손부옥 씨 집 안 팽나무 밑에 누워 있는 할아버지 당산
어오지 못하게 막아준다고 믿었다. 그래서 온 마을 사람이 정성을 다해 당산제를 지냈었던
버지 당산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칠월 칠석날 밤에 이씨 할머니 꿈에 할아버지 당산이 하얀
것이다. 마을 당산제는 함풍이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오면서 매년 음력 정월 마지막
옷을 입고 신선처럼 나타나서 내가 몸이 불편하여 오랫동안 서서 있을 수가 없으니 땅에 누
날인 1월 31일에 지냈다고 한다. 어느 한 해라도 당산제를 지내지 않고 넘어가면 그 해는
워 있게 해 달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이씨 할머니는 잠에서 깨어 보니 그 때가 첫 닭이 울기
농사가 잘 되지 않고 질병으로 사람이 죽는다거나 마을에 악귀가 들어와서 해를 끼친다고
시작하는 때였다. 이씨 할머니는 옆에서 잠을 자고 있는 할아버지를 깨워 방금 꿈속에 나타
믿어서 매년 당산제를 정성껏 지냈다고 한다.
난 할아버지 당산 이야기를 했더니 남편이 하는 말이 사람이 항상 서서 일을 하다 보면 다
94 ― 고창의 마을 제5집
공음면 예전리 ― 95
리도 아프고 몸이 피곤할 때가 있는 법이니 마을 사람들에게 상의하여 세워져 있는 할아버
(5) 금정, 호동, 안골마을
지 당산을 땅에 눕게 해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뒤에 이씨 할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을
성씨
김씨
문씨
박씨
변씨
안씨
양씨
이씨
최씨
탁씨
계
동원하여 할아버지 당산을 누워 있게 하여 지금까지 할아버지 당산은 땅에 누워 있다는 전
명
5
1
6
3
1
1
2
1
1
21
설이다. 지금 이 할아버지 당산은 손부옥 할머니(82세)가 살고 있는 집 모퉁이에 한 이백 년 이상 자란 팽나무 밑에 눕혀져 있다. 손부옥 할머니의 이야기로는 마을 사람들이 가끔 찾아
(6) 응암마을
와서 이 할아버지 당산은 절대로 손상되지 않도록, 잘 보존하도록 부탁을 한다고 한다. 또
성씨
김씨
문씨
오씨
유씨
정씨
천씨
최씨
황씨
계
한 할아버지 당산에 소원을 빌면 소원하는 바가 이루어진다고 믿어 왔다. 지금도 손부옥
명
5
1
2
2
1
9
1
1
22
할머니는 매월 초하룻날이면 밥 한 그릇씩 준비하여 할아버지 당산에 차려 주고 하니까 큰 비바람이 불어와도 할머니 집에는 궂은 일이 생기지 않으며 자기도 건강하게 살고 있다며 늘 정성껏 밥을 차려 주고 있다고 한다(중예, 이종인 70세, 자료 제공함).
2) 마을회관 전화번호 마을이름
회관 명
전화 번호
예전 노인당
564-9022
마을 회관
562-7588
중예
노인 회관
562-9022
평산
마을 회관
562-7566
수원
마을 회관
562-6606
금정, 호동, 안골
마을 회관
562-1516
응암
마을 회관
563-7789
상예
6. 마을의 인문환경과 산업 1) 마을의 성씨별 현황(세대주 기준) (1) 상예마을 성씨
구씨
김씨
나씨
문씨
박씨
오씨
이씨
정씨
황씨
계
명
1
5
2
8
2
2
5
2
1
28
비 고
금정노인당
3) 마을이장과 부녀회장 (2) 중예마을
마을 명
성씨
김씨
문씨
서씨
손씨
양씨
엄씨
오씨
이씨
한씨
계
명
5
1
1
1
1
1
2
15
1
28
상예
중예
(3) 평산마을 성씨
공씨
김씨
박씨
심씨
유씨
이씨
정씨
계
명
1
1
10
1
1
1
1
16
(4) 수원마을
평산, 수원
금정. 호동. 안골
응암
성씨
강씨
김씨
문씨
박씨
엄씨
이씨
임씨
홍씨
계
명
1
3
3
3
1
2
1
1
15
96 ― 고창의 마을 제5집
이장 이름
부녀회장 이름
나종운
김말 례
562-7581/ 011-9642-9938
562-7431/ 010-4120-7431
오상열
김미옥
562-4741/ 010-7303-7741
562-4057/ 010-6484-4057
김대 진
유명미
562-7443/ 010-4377-7345
562-7326/ 010-7186-8311
이정임
이정임
563-9789/ 011-652-9789
563-9789/ 011-652-9789
천병일
오찬영
562-7423/ 010-4730-7423
010-2058-7029
비 고
부녀회장겸함
공음면 예전리 ― 97
4) 예전 목장(일명 처녀 목장) 평산마을에서 공음 면소재지를 향해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진잔등이라고 하는 긴 경사진
도움 주신 분
도로 우측에 젖소를 기르는 목장이 있다. 도로 변에 위치하여 한가로이 파란 풀 밭에서 풀
김재응(중예, 전 공음면장)
을 뜯어 먹고 있는 젖소들의 모습을 보면 평화로운 마음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멈추
문하섭(중예, 마을 유지) 문대수(상예, 전 초등학교 교장)
게 한다. 이 목장이 예전 목장인데 목장 주인이 처 녀로서 잘 운영한다고 소문이 나서 일명 처녀 목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예전리 평산마을에 사는 유명미 씨가 운영하고 있다. 유명미 씨
박동규(평산, 전 예전노인회 회장) 박상철(평산, 전 이장) 박인철(평산, 전 초등학교 교장) 유명미(평산, 예전 목장 경영) 이종인(중예, 고창문화원 대의원)
는 여자로서 성격이 남성처럼 대담하고 명랑· 예전 목장 전경
쾌활하여 대장부가 하기 힘든 일을 결혼도 하
참고문헌
지 않은 젊은 처녀의 몸으로 전라북도 내에서는 처음으로 목장을 젖소 11마리로 시작하였
『고창군지』, 고창군지편찬회, 2009.
다. 1981년부터 시작하여 약 30년 동안 목장을 경영하였으며 전성기에는 70여 마리까지 길
『고창의 마을 유래』, 고창문화원, 2003.
러서 연간 수입이 2억 5천만 원에 이르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외국과의 FTA 결성으로 비 싼 사료비며 수입의 영향으로 지금은 목장을 폐장한 상태로 2년여 세월이 흘렀다. 처음에는 젖을 짜서 전북 고창 축협과 연결된 매일우유에 납품하다가 나중에는 김제 동진강 축협으 로 공급하였다. 지금도 목장 허가는 취소하지 않고 있으며 기회가 온다면 현대식 시설로 개 조하여 젖소 목장을 경영하면 좋을 것이다.
『모양의 얼』, 고창학술문화연구회, 2009. 『고창군고읍지영인본(高敞郡古邑誌影印本)』, 고창문화원, 1991. 『충주박씨 박병 효열정려기』, 충주박씨족보 『고창문화 21집』, 고창문화원, 2008. 『고창성씨의 입향유래』, 고창문화제제20집, 도서출판 청동, 2007. blog. naver.com/sungbo. sungbo. 성보의 풍수여행
5) 신영 목장 예전리에서 공음면 소재지로 가다보면 진잔등을 지 나서 우측에 자리 잡고 있는 상하 신영 목장이 있다. 이 목장은 일반 젖소를 기르는 목장과는 달리 친환경 농업 육성법 제17조의 규정에 의한 유기 축산물을 생산하는 목장으로 전남대학교의 연구지원을 받아 우유를 생산
하며 HACCP SYSTEM(위해요소 중점관리제도)을 적용하고 있다.
98 ― 고창의 마을 제5집
신영목장 안내문
공음면 예전리 ― 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