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봉 고성 아래 집성촌의 마을, 중월리 이병열
아산면 중월리
반암리
신평리
용계리
1. 중월리의 역사와 위치
구암리 운곡리
중월리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인 고인돌이 발견되며, 삼한시대의 대표적인 유적과 유물
계산리 학전리
인 고분이 중월리 입구의 봉덕리에서 발견되었다. 또한 삼한시대 마한의 모로비리국 토성
하갑리
으로 추정되는 예지리 토성이 마을 뒤에 있다. 중월리 270-2번지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
대동리 상갑리
성산리 남산리 주진리 목동리
중월리
봉덕리
시대까지의 유물인 분청사기편과 기와편, 경질토기편 등이 출토되었으며, 중월리 138번지에 있는 삼한시대의 옹관묘와 토광묘는 물론이고 백제시대의 석관묘 등이 발굴되었다. 이렇게 이른 시기부터 중월리에 사람들이 거주하여 지역문화를 꽃 피울 수 있었던 것은, 이 일대가 구릉성 산지가 널리 발달해 있고, 마을 앞으로는 조금 나아가면 주진천이 만들
어 놓은 넓은 충적지를 개간한 넓은 벌(부리, 비리)이 자리 잡고 있으며, 주진천을 따라 뱃길이 발달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마을 뒤에 예지리 토성이 있어 방어에 유리한 지역인 탓도 있었 다. 이러한 자연환경 덕분에 예지리 토성 주변으로 세계 최고의 밀집도를 보이는 고인돌을 축조할 수 있었으며, 봉덕리 일대에 마한의 분구묘가 발달할 수 있었다.
중월리는 본래 고창군(高敞郡) 대아면(大雅面)의 지역으로,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
111호에 따라 월산리(月山里)·월명리(月明里)·신월리(新月里)·상복리(上卜里)·중복리(中卜里)·신 사리(新巳里)·상당리(上堂里) 각 일부를 병합하여 중복과 월산의 앞 글자를 따서 중월리라 하
여 아산면에 편입시켰다. 중월리(中月里)에는 중복(中福)과 상복(上福)의 행정리가 있고, 자연취
아산면 중월리 ― 289
락으로 중복(中福)·상복(上福)·신월(新月)·월명(月明)·월산(月山)·후동(后洞) 등이 있다. 중월리는 동쪽으로 고수면 우평리, 서쪽으로 주진리, 북쪽으로 봉덕리와 상갑리, 남쪽으 로 고수면 예지리 등과 접하고 있다.
져나오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렁논은 가뭄이 들면 물이 늘 넘쳐 가뭄을 해결할 수 있다. 겨울엔 논에서 살던 미꾸라지나 드랭이의 서식지가 되기도 했다. 이런 지형은 농업용수가 원활하게 공급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살기가 좋은 자연조건이 었다. 그러나 기계화에 의한 농업의 발달은 수렁이 가지는 한계로 인해 농사에 많이 불리하
2. 자연지명과 전래지명
게 되기도 하였다. 현재 수렁배미는 경지정리하면서 거의 사라졌다. 중월리의 지형은 대체적으로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으며, 마을 주변으로 50m 내외의 구
릉성 산지가 발달되어 있다. 관개시설로는 북서쪽에 상갑소류지(중월리 222번지), 동쪽에 중복
고창군 아산면 중월리는 호남정맥에서 갈
소류지(중월리 143-1번지)가 있다.
라져 나와 목포 유달산으로 뻗는 영산기맥
이 구황산(500m)에서 갈라져 나와 고수면 평지리와 두평리의 경계를 이루며 남쪽으
귀인봉 아산면 중월리 산63-1번지로 아래는 시정등이라 부르고 있음.
로 발달하다가 부곡리 증산을 이루고 멈추
북등 아산면 중월리 산110번지의 구릉성 능선.
었다가 다시 남산리와 우평리를 지나 태봉
쌍고봉 아산면 중월리 전205-1번지 일대로 마한시대의 고분이 두 개 있음.
(110.8m)을
이룬다. 태봉에서 다시 여러 갈래
풍수골 아산면 후동 앞의 골을 말함. 참샘골 아산면 중복 앞의 골.
의 구릉성 산지를 이루며 주진천과 고창천 에서 멈추었다. 중월리는 태봉을 중심으로
중월리 항공사진(다음지도)
한 구릉성 산지의 중앙으로 깊은 골이 발달 했다. 주변이 대부분 구릉성 산지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를 개간한 밭농사가 발달했다. 중월리의 입지는 태봉을 중심으로 크게 서쪽과 남쪽으로 주진천, 동쪽으로 고수천, 북쪽
소금쟁이골 아산면 풍수골 옆에 있는 골로 전설에 의하면, 소금장수가 물을 마시려다가 빠
져 죽어 이를 소금쟁이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함. 큰요골 상갑소류지 부근의 답952-960 일대의 골. 작은요골 상갑소류지 부근의 답964-968 일대의 골.
으로 도산마을 앞에서 고수천과 합수한 고창천이 흐르고 있다. 그 주변으로 고창에서는 가
대추나무골 아산면 중월리 전4-1번지 일대의 골.
장 넓은 충적지가 발달해 있다. 그러나 중월리는 태봉의 깊은 구릉성 산지 내부에 있어 충
장골 아산면 중월리 전737-3번지 일대의 골.
적지를 개간한 논은 거의 없다.
만석골 아산면 중월리 답850번지 일대의 골.
중월리 전체가 구릉성 산지에 있기 때문에 옛날에는 골과 수렁을 이용한 논농사가 발달
만석등 아산면 중월리 산34-1번지 일대의 능선.
하였다. 1990년대 초 경지정리하기 전 상복과 중복의 골은 수렁이 발달해 있어 수랑배미라
모릉골(건등) 아산면 중월리 답882-883번지 일대의 골.
고도 불렸다. 수렁은 충적지의 들판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구릉성의 낮은 산지들 사
나모골 아산면 중월리 답867-893번지의 골.
이로 많이 나타나는 습지지형이다. 이 수렁은 지표면 가까이 흐르던 지하수가 땅위로 올라
대사골 아산면 중월리 산35번지 일대의 골.
오는 현상으로 깊이는 보통 어른 배꼽을 넘지 않아 늪보다는 훨씬 얕다. 천수답이 대부분
함정재 아산면 중월리 전40-2번지 일대의 능선.
일 때 수렁배미는 값이 비쌌으나 농업용수의 발달로 찬 지하수가 일 년 내내 솟아나는 수렁
와가리골 아산면 중월리 전715-1번지 일대의 골.
논은 싼 땅이 되었다. 수렁이 많은 이곳 주민들은 수렁 한 가운데에 나뭇가지 등을 꼽아 수
비석등 아산면 중월리 전708-1번지 일대의 능선.
렁이 있음을 표시해 빠지지 않게 하였고 한다. 수렁에 빠지면 여성들이나 아이들은 혼자 빠
비석골 아산면 중월리 답618번지 일대의 골.
290 ― 고창의 마을 제5집
아산면 중월리 ― 291
비석거리 중월리 중복 마을 입구 전356번지 상에 있는 밀양박씨 양오공추모비의 비석이 있
는 곳.
꿩방(뒷동) 중복마을 뒷동산 아산면 중월리 118번지 일대 짱짝골 아산면 중복에 있는 골의 이름.
송림동 아산면 중월리 산61번지 일대. 함박등 아산면 중월리 전710번지 일대의 능선. 어느 시대의 한정승의 부인 묘가 있었다고 함.
3. 중월리의 자연취락
육거리 아산면 중월리 산60-6번지 위의 길로 여섯 갈래의 길이 있었으나 지금은 오거리만
남아 있음. 이곳에는 주막이 있었다고 함. 도방골 육거리 옆의 아산면 중월리 502-1번지의 밭으로 고수면과 경계. 원석골 고수와 경계로 육거리에서 고수로 가는 곳에 있는 골. 고수 땅으로 고수면 예지리
산33-1번지. 짱째골 아산면 중월리 36-4번지의 일대의 골. 가재골 가재가 살고 있어서 불렀던 골로 아산면 중월리 답444-1번지. 월명 아산면 중월리 답466-1번지. 담안골 아산면 중월리 472-3번지 일대로 최부자가 담을 많이 쌓아서 그렇게 불렀다고 함. 원상복 아산면 중월리 495번지 일대. 정촌 아산면 중월리 452번지로 우물이 있어서 그렇게 불렀음. 나비등 아산면 중월리 217-1번지의 밭으로 용계리의 아산댐을 쌓을 때 나비등의 흙을 사
용하였음. 원풍정(願豊亭) 아산면 중월리 497번지 위에 있었던 정자로 풍년을 원한다는 현판이 있었
다는 정자임. 쌍은정 아산면 중월리 대지 487번지 뒤의 나무 사이에 있었다고 함.
1) 중복(中福) 아산면 중월리 중복마을은 아산면소재지에 서 동남쪽으로 약 2km 거리에 있다. 1779년
(정조3년)에
밀양박씨가 이 마을에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룬, 밀양박씨 집성촌이다. 중복은 처
음 화양동(華養洞)으로 부르다가 1890년 복죽
(卜竹)으로
(中伏)으로 福)으로
개명했다가 한일합방 초기에 중복
개칭했다가 다시 1940년경 중복(中
중복마을 전경
글자를 바꾸어 썼다.
마을의 남쪽으로는 동서대로와 녹두로가 지나가고 있고, 녹두로에서 중월1길을 따라 들 어오다 중복길을 따라 들어오면 중복이다. 마을의 남동쪽으로는 삼한시대의 예지리 토성과
태봉(110.8m)이 있다.
중복마을의 수계는 남쪽의 예지리 토성에서 북쪽으로 발달하다가 봉덕리와 상갑리를 지
나 주진천과 바로 합수한다. 또한 수계(水系) 자체가 워낙 짧고 물이 부족하여 충적지(沖積 地)의 발달은
미약하다.
양솔밭 소나무와 잡목을 키우던 곳으로 아산면 중월리 526번지의 밭.
마을의 산계는 예지리 토성(태봉의 옆 능선상에 있는 삼한시대의 토성)에서 발달해 북쪽으로 여러
수랑골 아산면 중월리 답818번지의 주위로 논에 수렁이 많았다고 함.
갈래로 발달하였다. 예지리 토성의 가운데 부근에서 발달한 능선은 남쪽과 북쪽으로 발달
양바리골 아산면 중월리 답580-3번지의 골.
하였는데, 남쪽으로 발달한 능선상의 서쪽으로 마을이 입지해 있다. 이 능선은 아산면 중월
발매낭갓 아산면 중월리 전712-2번지 주위의 임야.
리와 봉덕리의 수계가 만나는 곳에서 멈추었다.
약샘골 아산면 중월리 전712-1번지 옆에 물이 매우 차가웠다고 함.
중복마을을 중심으로 좌청룡과 우백호는 미약하나마 나타나고 있다. 즉, 예지리 토성의
북살매 아산면 중복마을 북동쪽 구릉 중월리 110번지 일대
가운데 부근에서 남쪽으로 발달한 능선의 서쪽으로 좌청룡과 우백호가 있으며, 이 사이에
뒤어마리 북살매 북쪽들 아산면 중월리 793 일대
중복마을이 위치해 있다. 이러한 지형적 요인으로 중복마을의 가옥은 대부분 서향과 남서
금동 뒤어마리 북쪽 구릉 아산면 봉덕리 213 일대 (봉덕리 경계)
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아산면 중복길 40번지대의 가옥들은 서향이 많으나 북향도
생밑(성밑) 태봉과 작은 태봉 아래 아산면 중월리 11번지 일대
많다. 이는 같은 마을이지만 주산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을 입구에는 양오공 추모비가 있다.
292 ― 고창의 마을 제5집
아산면 중월리 ― 293
2) 상복(上福)
주위로는 36개의 골이 존재하여 평생 농사를 지어도 골의 이름을 재대로 외우는 사람이 많
아산면 중월리 상복마을은 아산면소재지에
지 않다고 한다. 그 만큼 중월리 자체가 구릉성 산지이기 때문에 골이 발달한다.
서 동남쪽으로 약 2km 거리에 있다. 1303년 에 전주최씨가 이곳에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
3) 후동(后洞)
었다. 주변에 대나무가 많고 태봉산의 능선이
아산면 중월리 후동마을은 아산면소재
뻗어 내려 산세가 좋다. 상복은 아산면 마을
지에서 동남쪽으로 약 2km 거리에 있다.
중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
마을의 설기연대는 1303년 전주최씨가 설
다. 상복은 농사짓는 들이 좁지만 동서남북으 로 있는데, 농사를 지어 마을을 향하여 올라
기하였으며, 지금도 전주최씨들이 많이 살 상복마을 전경
가는 지형이라 하여 상복(上伏)으로 칭했다. 복죽(卜竹)이라는 명칭은, 1918년 일제 강점기 고
창지형도(1:5만지형도)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최소한 1918년까지는 복죽(卜竹)으로 부
르다가 그 이후 복을 짊어지고 위로 올라간다 하여 상복(上福)으로 개명하였을 것으로 추정
된다. 상복마을의 수계(水系)는 남쪽의 예지리 토성에서 북쪽으로 발달하다가 봉덕리와 상갑리 를 지나 고창천과 바로 합수한다. 예지리 토성의 능선은 북쪽으로 발달하였는데, 하나는 서 당촌과 봉덕리 고분군의 능선으로, 다른 하나는 상갑마을의 능선을 이룬다. 봉덕리 고분군 으로 발달한 능선과 중복으로 발달한 능선 사이의 예지
고 있는 집성촌이다. 후동마을은 풍수형국 으로 왕후가 나올 명당 터가 있다 하여 붙
여진 이름이라 한다. 후동마을의 수계(水系) 는 남쪽의 예지리 토성에서 북쪽으로 발달
하다가 봉덕리와 상갑리를 지나 고창천과 바로 합수한다. 예지리 토성의 산계(山系)은 북쪽 으로 발달하였는데, 하나는 서당촌과 봉덕리 고분군의 능선으로, 다른 하나는 상갑마을의 능선을 이룬다. 후동1길 마을은 우백호가 후동2길 마을 배후의 능선이고, 좌청룡은 마을의 북사면의 능
선이다. 후동2길 마을의 수구(水口)는 내청룡이 막아주어 직접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비보
(裨補)가
리 토성 바로 아래에 작은 구릉의 능선 사이에 상복마을
이 입지해 있다. 동쪽은 중복마을(중복길 40번지~50번지)이
후동마을 전경
필요한 마을이다. 후동2길 마을의 가옥배치는 산계의 영향으로 동향과 동남향 및
남향이 대부분이다. 후동1길 마을의 가옥배치는 대부분이 남향이나 일부는 동향도 있다.
다. 상복마을의 좌청룡은 후동마을 앞까지 발달한 능선
후동2길 마을은 봉덕리 고분군으로 발달하는 능선 중간의 동사면에 입지해 있으며, 후동
이고, 우백호는 중복마을로 발달한 능선이다. 대체적으
1길 마을은 위 능선의 동사면 골에 입지해 있다. 후동2길 마을의 좌청룡은 중복의 우백호에
로 상복마을의 수구(水口, 破口)가 열린 형국이며, 또한 수
해당하고, 좌청룡은 봉덕리 고분군으로 발달한 능선이다. 또한 내청룡이 마을의 북쪽으로
구가 북쪽에 있어 풍수적인 결함이 많은 마을이라 할 수
작게나마 발달해 있어 겨울철의 시베리아의 대륙성기후를 막아 주는 형국이다.
있다. 이러한 마을에는 수구에 해당되는 부분에 비보풍수 (裨補風水)가
4. 성씨들의 중월리 입향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상복1길의 마을은 향
이 동쪽으로 되어 있어 상복2길의 마을보다 가옥배치에 있어 유리하다. 즉, 가옥배치는 상복1길의 경우는 동향이 다. 그러나 상복2길의 가옥배치는 주산(主山)의 영향으로
대부분 서향과 서북향 및 북향이 대부분이다. 상복마을
294 ― 고창의 마을 제5집
복죽(卜竹)으로 기록된 1918년 지도(이 지도에 의하면, 卜竹이라는 지명이 1918년도까지 기 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산면의 면소재지 는 봉덕리에 있었으며, 봉덕리의 동그라미가 면소재지이다)
1)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중월리 상복 입향 중월리 상복의 전주최씨는 1400년대 중반인 성종조에 진(津, 1423~1491)이 입향하였다. 진 은 세종조에 원종공신에 훈하고 공조참의를 지냈다. 공은 아산 중월리 상복으로 입향하였
아산면 중월리 ― 295
다가 현재까지 그 후손이 세거하고 있다. 중월리에 가장 먼저 입향한 전주최씨는 입향의 역
54世
55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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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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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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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世
사는 깊으나 그 후손들이 이곳에 번성하지 못하고 대부분 고창이나 외지로 떠나버렸다. 그
師一
性興
致五
鳳鉉
永善
學根
炳珣
相基
鍾述
性昱
결과 현재 중월리 중복 7가구와 상복 4가구 등 11가구만 남아 그 명맥만 겨우 유지하고 있
(중복입향)
다. 중월리의 전주최씨 시조는 균(均)이고, 파조는 성지(誠之)이다.
4) 장택고씨(長澤高氏)의 중월리 중복 입향 2) 강릉유씨(江陵劉氏)의 중월리 상복 입향 중월리 상복의 강릉유씨는 1590년 유한량(劉漢良, 1567~1634)이 무장현감직을 인연으로 해
서 공의 셋째아들 세영(世瑛)이 아산 중월리 상복으로 입향하였다가 현재까지 그 후손이 18 세를 세거하고 있다. 중월리 강릉유씨는 상복에 30가구, 중복에 5가구가 세거하고 있다. 중
월리의 강릉유씨 시조는 전(筌)이고, 파조는 한량(漢良)이다. 15世
16世
17世
18世
19世
20世
21世
22世
23世
世瑛
遠
善道
在明
萬鎰
三儀
兌望
鑽光
翰成
24世
25世
26世
27世
28世
29世
30世
31世
32世
聖迪
賢芳
湘五
仁東
成默
眞時
鉉哲
元淳
柄熙
중월리 중복의 장택고씨는 1700년대 중반 경 한범(漢範, 1726~1777)이 영암군 목동에서 아 산면 중복으로 입향하였다가 가족이 역병으로 거의 몰살당하였다. 살아남은 가족은 오향곡
(午向谷)으로
피해 겨우 절사(絶嗣)는 면하고 현재까지 공의 후손이 10세를 세거하고 있다. 중
월리의 장택고씨 시조는 말노(末老)이다. 현재 장택고씨는 중월리에 세거하고 있지 않다. 15世
16世
17世
18世
19世
20世
21世
22世
23世
26世
漢範
克滿
宗煥
時雲
弼鎭
濟玉
仲柱
光俊
在圭
潤錫
5. 중월리의 인물 1) 유붕석(劉鵬錫, 1882~1952) 유붕석의 본명은 목여(穆汝)이고, 초년에는 일종(一鍾), 자는 문석(文錫), 호는 오정(梧亭)으로 3) 밀양박씨(密陽朴氏)의 중월리 중복 입향 밀양박씨 양오공(陽梧公) 서봉(瑞鳳)은 세조 계미년(1463년)에 경남 밀양에서 출생하여 경상
도 관찰사를 지냈다. 양오공은 무오사화에 노친(老親)의 사우(師友) 족숙이 대화를 입고, 화 가 그 일가에 미치게 되자 노친과 가족을 데리고 밀양을 떠나 전남 무안 등지를 표박(漂迫) 하다가 고수면 추산봉 아래 산양동에 정착하였다. 이후 후손들이 초내리와 장두리에서 17
대째 내려오고 있다. 중월리 중복의 밀양박씨는 정조3년(1779년대)에 사일(師一, 1734~1803)이 동생 사의(師義)와 함께 고수면 장두리에서 아산면 중복으로 입향하여 지금까지 세거하고
있다. 중월리 밀양박씨는 중복에만 32가구가 세거하고 있다. 중월리의 밀양박씨 시조는 혁 거세(赫居世)이고, 파조는 은산부원군 영균(永均)이다.
절기의 곡우(穀雨)에 해당하는 방주였다. 그가 보천교의 방주가 됨으로써 중월리 상복의 많
은 강릉유씨들이 보천교(普天敎)에 입교하였다. 보천교의 차경석은 조선이 독립하고 대시국
(大時國)
건립 시에는 자신이 왕위로 오를 것이라 말하였다. 교주가 천자(天子)로 등극한 다
음 각 교도는 모두 계급에 맞게 각각 부윤군수(府尹郡守) 등에 임명한다 하여 많은 헌금을
받았다. 1919년 차경석은 교도를 모두 관할하고 포교하기 위해 60방주제를 조직하고, 1920 년 말에 이르러 완성하게 되었다. 즉 교주 직 하에 방주 60명을 두고 방주 각 한 명 아래 6
임(六任)이라는 사람 여섯 명을 두고, 6임 각 한
46世
47世
48世
49世
50世
51世
52世
53世
允樞
瑞鳳
松南
挺林
仁純
起華
相國
慶漢
(고수입향)
(초내입향)
(내창입향)
중월리 상복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0년대 한국의 최대 민족종교인 보천교의 60방주 중 24
(초내입향)
명 아래 12임(十二任)이라는 사람 12명을 두고,
12임 각 한 명 아래 8임(八任)이라는 사람 여덟 명을 두는 조직이다. 그리하여 8임으로 있으려 면 40명의 신도를 모집한 사람에게 맡게 하
296 ― 고창의 마을 제5집
유봉석이 보천교의 방주로 기록된 일제 강점기의 일본 자료 .
아산면 중월리 ― 297
고, 그 40명 신도 가운데서 또 15임(十五任)이라는 사람 15명을 두었다. 이러한 방대한 보천
7급으로 공채되어 공직을 시작하여, 내무부 행정주사, 행정사무관, 서기관을 거쳐 현재 고충
교 조직에서 유붕석은 그 핵심인 60방주였다.
처리국 민원조사기획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2) 유주(劉柱, 1901~1972)
7) 강병원(姜炳遠, 1971~현재)
유주의 본명은 주(柱)이고, 초년에는 영주(永主), 자는 영만(永萬), 호는 정재(正齋)로 아산면
강병원은 1971년 아산면 중월리 상복에서 태어나 서울 대성중·고, 서울대 농경제학과를
중월리 상복에서 보천교의 60방주인 붕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전주의 풍남문의 단
졸업하였다. 그는 1994년 서울대 총학생회장, 민주당 노무현 대통령후보 수행비서, 참여정
청을 그린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부 대통령비서실 행정관 근무, 노무현재단 기획위원 등을 지냈다.
3) 최현식(崔玄植, 1923~2011)
8) 알리고 싶은 중복 사람들
1923년 고창군 아산면 중월리에서 태어난 최현식은, 1977년 정읍갑오동학혁명기념사업회
중복 사람들에서는 중복에서 태어나 각계각층의 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자랑스러운 중
장, 1991년 정읍문화원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갑오동학혁명사』, 『동학농민혁명 인물 사료 탐구』, 『최현식과 동학농민혁명사』 등이 있다. 최현식은 동학혁명사 자료발굴에서부터 역사 현장을 직접 발로 뛰며 동학사를 정리한 사학자이다. 그는 갑오동학혁명기념사업회장, 향토문화연구소장, 전라북도문화재전문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장한 전북인상(1981년), 전북
대상(1989년), 전북의 어른 상(2005년) 등을 수상했으며 지난 2011년 타계했다. 4) 박세근(朴世根, 1945~현재)
박세근은 고창중·고를 거쳐 군산교대를 졸업한 후 우석대 석사과정을 마쳤다. 박세근은 고창초 등에서 최연소 교장으로 재직한 후 고창교육청 장학사와 장학관 및 교육장, 폴리텍 대학 고창캠퍼스 평생교육연수원장 등을 지냈다.
복인을 올렸다. 조사는 마을 주민들의 협조로 이루어졌으며, 선정기준은 특별히 없다.
박영두(1864~1915, 전 아산면장), 박장근(1896~1950, 전 아산면장), 박윤근(1903~1974, 전 아산면부면
장),
박병천(1930~2010, 전 고창부군수), 박동기(1955~2013년 12월 현재, 이학박사, 익산보건소장), 박병원
(1915~2004, 전 아산면의회의장), 현재, 전 아산면장),
리),
박종오(1964~2013년 12월 현재, 광주 동구청 사무관), 박병엽(1918~2002, 전 아산면장서
박헌기(1944~2013년 12월 현재, 전 관세청 사무관), 박민기(1953~2013년 12월 현재, 광진구청 서기관),
박생기(고창군청), 박철기(1956~2013년 12월 현재, 김제폴리텍대학 교수), 박팽기(1958~2013년 12월 현재, 초등교장), 사),
박귀기(1960~2013년 12월 현재, 고창군청 사무관), 박상은(1975~2013년 12월 현재, 성형외과의
박연근(1980~2013년 12월 현재, 안과의사), 박병삼(1924~2013, 전 중등교장), 박연기(1961~2013년 12
월 현재, 공학박사, 연구원),
월 현재, 전 은행지점장),
5) 박천기(朴天基, 1950~현재) 박천기는 아산면 중월리 중복에서 태어나 고창중·고와 한국방송통신대학 행정학과를 졸 업하였다. 그는 서울지방검찰청에 초임으로 발령받은 후 대검찰청 수사사무관을 거쳐 춘천 지검 수사과장(검찰서기관), 부산고검 총무과장(검찰부이사관), 부산고검 사무국장(검찰이사관)
박종태(1953~2013년 12월 현재, 전 아산면장), 박춘기(1937~2013년 12월
서울대 성형외과의사),
박남기(1940~2013년 12월 현재, 전 한일은행 지점장), 박준기(1944~2013년 12
박재기(1973~2013년 12월 현재, 공학박사, 연구원), 박신기(1978~2013년 12월 현재,
박순재(1952~2013년 12월 현재, 초등교장), 박다래(1982~2013년 12월 현재, 변호사),
박진기(1975~ 2013년 12월 현재, 안면도 한의사), 박진성(1979~2013년 12월 현재, 변호사), 최태조(1972~ 2013년 12월 현재, 광주시청 사무관),
유세영(1929~졸, 전 아산면장), 박동기(박사), 김효례(군민의장 수상)
등등.
등을 역임하였다. 9) 알리고 싶은 상복 사람들 6) 박세기(朴世基, 1954~현재) 박세기는 아산면 중월리 중복에서 태어나 고창고와 경기대 행정학과를 중퇴하였다. 그는
298 ― 고창의 마을 제5집
상복 사람들에서는 상복에서 태어나 각계각층의 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자랑스러운 상 복인을 올렸다. 조사는 마을주민들의 협조로 이루어졌으며, 선정기준은 특별히 없다.
아산면 중월리 ― 299
유을종(전 고창향교 전교), 유차종(전 고창향교 전교, 부읍장), 유원영(1933~2013년 12월 현재, 중
등교장),
유현종(1922년생, 전 행정사무관), 유남주(1959~2013년 12월 현재, 전북은행지점장), 유자
연(1970~2013년 12월 현재, 서울도시철도공사 과장), 유동현(1977~2013년 12월 현재, 변호사), 유남
현(1981~2013년 12월 현재, 치과의사), 유택형(1969~2013년 12월 현재, 삼성전자 상무이사), 유영곤
(1953~2013년 12월 현재, 중등교장), 현재, 전 중등교감), 재),
유낙종(1933~2013년 12월 현재, 예비역대령), 유찬식(1938~2013년 12월 현재, 마을에 공적이 많음), 유
종식(1953~2013.12월 현재, 전 지적공사 고창지사장), 유철규(1975~2013년 12월 현재, 고창군청), 유규식
년 12월 현재, 경기도 초등교사), 월 현재, 고창농협 모양지점장),
재, 선운산농협),
청),
1999년 12월 12일에 건축되었다. 부지는 박병 국과 박갑기가 기증하였으며, 고창군 아산면 중월리 323-16번지에 있다.
유영우(1965~2013년 12월 현재, 공학박사), 유훈영(1941~2013년 12월
유연식(1956~2013년 12월 현재, 전 해양경찰청 총경), 유종환(세무서 사무관, 1968~현
(1959~2013년 12월 현재, 초등교감),
은 군의 지원과 주민 및 출향인의 헌성금으로
유창식(1963~2013년 12월 현재, 선거관리위원회), 유태환(1970~2013
중복마을 모 정 중복마을 모정은 단기
4322(1989)년 10월 11일 건립되었으며, 중복마
중복마을회관 전경
을 입구 마을화관 옆에 있다. 아산면 중월리 222-4에 있다.
유광진(1957~2013년 12월 현재, 선거관리위원회), 유환숙(1958~2013년 12
유진영(1973~2013년 12월 현재, 초등교사), 유정자(1972~2013년 12월 현
유근상(1970~2013년 12월 현재, 산업통상부), 최창식(1947~2013년 12월 현재, 전 전북도
최창석(1970~2013년 12월 현재, 전북도청), 유숙현(1967~2013년 12월 현재, 서울시 초등교사), 유창
규(1969~2013년 12월 현재, 공학박사 경희대교수), 유현미(1976~2013년 12월 현재, 경기도 초등교사), 유
중복마을 우물 중복마을의 공동우물은 암반
에서 솟아나는 용천수이다. 우물은 현재 마을
중복마을 모정
회관 건물 아래에 콘크리트 덮개로 덮여 있으 며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다.
창용(1978~2013년 12월 현재, 경기도 초등교사), 유맹화(1964~2013년 12월 현재, 전 초등교사), 유형선
(1961~2013년 12월 현재, 보험사 전무),
유철승(1967~2013년 12월 현재, 예비역소령, 대한체육진흥공단), 유
철상(1974~2013년 12월 현재, 전 중앙일보기자, 상상출판사대표), 유철주(1978~2013년 12월 현재, 전주불 교신문),
유중환(1963~2013년 12월 현재, 진선상사 대표), 유병호(1955~2013년 12월 현재, 서울맹아학교),
유일주(1950~2013년 12월 현재, 전 고창군청), 유희주(1966~2013년 12월 현재, 대한지적공사), 유준영
(1966~2013년 12월 현재, 수원시청), 월 현재, 전 초등교사),
엘지화학), 청),
유득식(1957~2013년 12월 현재, 서울소방서), 유영호(1933~2013년 12
의 공동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상복마을회 관은 군과 주민 및 출향인의 헌성금 4천 3백 만 원으로 2004년 5월 29일 준공하였다. 고창 군 아산면 중월리 354-1에 있다.
김양섭(~2013년 12월 현재, 성균관유도회 아산유도회장), 김영남(~2013년 12월 현재,
유준동(1970~2013년 12월 현재, 이학박사, 한국마사회), 유희숙(1971~2013년 12월 현재, 부산시
유두승(1980~2013년 12월 현재, 서울시청), 유창기(2013년 12월 현재, 전주시청), 최정아(1972~2013년
12월 현재, 중등교사)
상복 마을회관 상복 마을회관은 마을 사람들
등등
상복마을 우물 상복마을의 공동우물은 세 곳
상복마을회관 전경
이 있는데, 두 개는 열려 있고 하나는 덮개 로 덮여 있다고 한다. 마을의 우물은 중월리 426-1번지와 296번지 및 495번지에 있다.
6. 마을현황 상복마을 모정 상복마을 모정은 단기
1) 중월리의 기관과 시설
4322(1989)년 10월 11일 건립되었으며, 상복마
중복 마을회관 중복 마을회관은 마을 사람들의 공동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마을회관
을 입구에 있다. 아산면 중월리 355-2에 있다.
300 ― 고창의 마을 제5집
상복마을 모정
아산면 중월리 ― 301
후동 마을회관 후동 마을회관은 마을사람들
산면사무소의 인구현황과 실제 거주자와는 차이가 있다. 조사결과 중복의 가구 중 밀양박
의 공동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후동 마을회
씨가 전체의 52.4%, 상복은 강릉유씨가 전체가구의 68.1%로 전형적인 집성촌을 이루고 있
관은 군과 주민 및 출향인의 헌성금으로 건축
었다. 시기적으로 가장 먼저 중월리로 입향한 전주최씨는 중복과 상복에 나누어 분포하고
되었다. 고창군 아산면 중월리 후동1길 14-2
있는데, 입향한 역사로 볼 때 가구 수가 너무 적다.
번지에 있다. 후동마을회관 전경
후동마을 우물 후동마을의 공동우물은 후동1길과 후동2길 두 곳이 있었으나 지금은 폐쇄
하여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다.
(1) 중복마을의 성씨별 거주현황
중복마을의 2013년 8월 현재 성씨분포는 다음과 같다. 성씨별 분포는 밀양박씨 32가구, 전주최씨 7가구, 강릉유씨 5가구, 진주정씨 4가구, 평산신씨 2가구, 청송심씨 2가구, 나주오 씨 2가구, 울산김씨, 남원윤씨, 광산정씨, 장수황씨, 광산김씨, 고흥류씨, 행주기씨 등이 각각
2) 중월리의 인구변화
1가구씩 있다. 중복마을은 밀양박씨가 전체의 52.4%가 거주하는 것으로 보아 전형적인 밀
2003년 이후 중월리의 총 인구수와 세대수는 조금씩 줄어드는 추세이다. 2003년대 초기
양박씨 집성촌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전주최씨 11.8%, 강릉유씨 8.1%로 밀양박씨 다음으로
중월리의 인구변화는 다음의 표와 같다. 중월리는 2003년 240명을 정점으로 인구가 매년
많은 성씨들이다.
감소하고 있다. 중월리의 인구증가율을 보면, 2013년 12월 현재 2003년보다 약 26.3%의 감
소율을 보였는데, 이는 매년 2~3%의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다음의 표는 중
월리의 10년 간의 인구변화를 보여주는 표다).
◦ 밀양박씨 32가구
◦ 전주최씨 7가구
◦ 강릉유씨 5가구
◦ 진주정씨 4가구
◦ 평산신씨 2가구
◦ 청송심씨 2가구
◦ 나주오씨 2가구
◦ 울산김씨 1가구
◦ 남원윤씨 1가구
◦ 광산정씨 1가구
◦ 장수황씨 1가구
◦ 광산김씨 1가구
◦ 고흥류씨 1가구
◦ 행주기씨 1가구
년도
세대수
총 인구수
남자
여자
2003
103
240(6)
120
120
2004
103
229(6)
117
112
2005
102
232(7)
117
115
2006
100
205(6)
104
101
2007
99
200(6)
104
96
2008
100
196(6)
103
93
(2) 상복마을의 성씨별 거주현황
상복마을의 2013년 8월 현재 성씨분포는 다음과 같다. 성씨별 분포는 강릉유씨 30가구,
2009
97
187(6)
102
85
2010
99
198(6)
106
92
2011
96
180(6)
95
85
2012
95
171(6)
95
76
김해김씨, 파주염씨 등이 각각 1가구씩 있다. 상복마을은 강릉유씨가 전체의 68.1%가 거주
2013. 12월
99
177(6)
100
77
하는 것으로 보아 전형적인 강릉유씨 집성촌임을 알 수 있다. 전주최씨는 9%로 강릉유씨
전주최씨 4가구, 광산김씨 2가구, 경주김씨 2가구, 진주강씨, 전주이씨, 청도김씨, 원주변씨,
다음으로 많은 성씨이다. 3) 중월리의 성씨별 거주현황 집안의 성씨는 문중의 성을 따라 조사를 하였기 때문에 홀로 된 독거여성노인인 경우는
◦ 강릉유씨 30가구
◦ 전주최씨 4가구
◦ 광산김씨 2가구
사망한 남편의 성씨나 자녀들의 성씨를 중심으로 조사되었다. 그리고 조사는 2013년 고창
◦ 경주김씨 2가구
◦ 진주강씨 1가구
◦ 전주이씨 1가구
군 아산면 중월리의 전화번호부를 보고 마을 주민들에게 확인하여 진행하였다. 따라서 아
◦ 청도김씨 1가구
◦ 원주변씨 1가구
◦ 김해김씨 1가구
302 ― 고창의 마을 제5집
아산면 중월리 ― 303
남쪽으로 300m 가량 올라가면 능선 중단부에 민묘구역과 축사의 경계에 지석묘 1기가 자
◦ 파주염씨 1가구
리하고 있다. 지석묘 상석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이며, 장축은 남-북 방향이다. 규모는 328× 216×68cm 내외이며 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4) 중월리의 문화유산 중월리의 문화유산은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을 비롯하여, 삼한시대의 토성과 토기편 및 옹 관묘, 백제시대의 석관묘, 조선시대의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특히 중월리는 삼한시대의
(4) 예지리 토성
고성인 태봉 산성 아래 있어 역사적으로 이른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
중복마을의 남측 야산에 위치한다. 해발
정된다. 한편 조선시대 들어서면서 강릉유씨, 전주최씨, 밀양박씨 등이 입향하면서 이들 성
98m로 고수면 예지리와 아산면 중월리의 경
씨를 중심으로 유적과 유물이 분포하게 되었다.
계를 이룬다. 인근에서는 태봉산으로 불리고 있다. 현재 태봉산 정상부에는 소로가 나 있
(1) 중월리 유물산포지
으며 민묘군이 조성되어 있다. 정상부는 평탄
이 유물산포지는 고창군 아산면 중월리 270-2번지에 있는데,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 편으로 주변에 기와편과 토기편이 산재하
의 유물이 출토되며 후동마을 남측에 위치한다. 해발 45m의 단독구릉으로 평야 가운데 돌
고 있으며 서측에 중복마을 방향으로 능선이
출되어 있다. 구릉의 북사면은 강릉유씨 묘역으로 이용되어 삭평이 심하게 이루어졌다. 정
이어지고 있는데 이곳에서도 다량의 경질타날
예지리 토성 전경
상부는 평탄한 대지로 개간되어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수습된 유물은 다량의 분청사기편
문토기편과 기와편이 수습되었다. 또한 『문헌비고(文獻備考)』 산천조에 “古城峰 在西十五里
과 기와편, 경질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一峰特出大野中 土壘橫繞峰腰”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으로 보아 토성이 존재하고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경위도좌표 : N 35°25′51.3″, E 126°38′19.5″
(2) 중월리 유적
(5) 중복 이팝나무
중월리 유적지는 고창군 아산면 중월리 138번지에 있다. 삼한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의 유
아산면 중월리 49-1번지에 있는 중복마을
물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은 토취장 예정지역으로 1982년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조사결
의 이팝나무이다. 이 나무는 양오공의 7대 손
과 백제토기요지 1기, 판석으로 축조한 백제석관묘 1기, 옹관묘 1기, 파옹개토광묘(破甕蓋土 壙墓)
2기 등이 확인되었다. 마을 주민들은 유적이 위치한 이 야산을 죽은 나비등, 작은 요
골이라고 부른다.
인 사일(師一)이 정조3년(1779)에 고수면 장두 리에서 아산면 중복으로 이거하면서 박달(朴 達)이란
뜻으로 단목(檀木)인 이팝나무를 심고
단음이라는 호(號)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이팝
경위도좌표 : N 35°26′10.0″, E 126°38′
나무는 약 230여 년 전에 심은 것이 된다.
22.0″
중복 이팝나무
(3) 중월리 지석묘
(6) 중월리 당산나무
중월리 중복마을(중월리 39번지) 동쪽에 지석
중월리에는 두 개의 당산이 있다. 하나는 후동마을 입구에 있는 당산으로 신체가 자연석
묘 1기가 자리한다. 즉, 중복 마을회관에서 동
304 ― 고창의 마을 제5집
중월리 지석묘
인 할아버지와 느티나무인 할머니 당산 두 주가 있다. 다른 하나는 중복마을 모정 옆에 있
아산면 중월리 ― 305
(8) 영모재(永慕齋)
아산면 중월리 상복2길 7-3번지에 있는 전
주최씨 덕능참봉 광연(廣淵)의 재실이다. 공은 어머니상을 당하매 초당을 지어 이곳을 영모
당(永慕堂)이라 하였다. 삼년상을 마친 후 공 은 이곳에 평생을 지내며 조석과 삭망으로 제 를 지내니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 가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고 효행이 알려져 선
영모재 전경
조 7년 덕능참봉에 제수되었다. 그로부터 4백 년이 지나 후손들이 뜻을 모아 유허지에 영모 재를 세우고 선조의 유덕을 추모하고 있다. 영모당 앞에는 영모당최공유허비가 있다. 후동마을 당산
중복마을 당산
는 당산으로 신체가 자연석인 할아버지 당산과 신체가 버드나무인 할머니 당산이 있다.
(9) 죽림재(竹林齋)
중월리는 중월리 전체가 하나의 깊은 골로 마을 자체가 북동쪽으로 크게 열린 형국이다.
아산면 중월리 후동2길 14-1번지에 있는 강
그래서 중월리의 좌청룡과 우백호의 끝자락에 각각 마을 당산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중
릉유씨 죽림당공의 재실이다. 재실 앞에는 죽
월리의 좌청룡의 능선 우측 사면에 입지한 후동마을의 입구에 할아버지와 할머니 당산이 자
림당공유허비가 있으며, 강릉유씨 28세인 죽
리 잡고 있고, 우백호의 능선 좌측 사면에 입지한 중월마을의 입구이자 우백호의 끝자락에
림당공 성렬(成烈) 흥집(興集)의 세계도가 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당산을 세운 것이다. 과거에는 중복과 후동을 연결하는 숲정이가 있었
재실은 기와(양철) 전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
을 것으로 추정되나 확인은 안 되었다.
지붕이다. 시제일은 음력 3월 5일이다. 죽림재 전경
(7) 염수재(念修齋)
(10) 영사재(永思齋)
아산면 중월리 중복길 33-1번지에 있는
아산면 중월리 상복1길 16번지에 있는 강릉
밀양박공 경한(慶漢)과 배인 유인 함평노씨
유씨 낭천공(浪川公) 세영(世瑛)의 14대 손을 모
이하의 세천의 분묘를 모시는 재실이다. 이
시는 재실이다. 재실은 기와(양철) 전면 4칸, 측
곳에는 재숙소가 없어 손 성흥이 여러 해
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시제는 지내지 않고
노력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광무 8년 후
있다. 상복은 강릉유씨와 전주최씨 집성촌으
손들이 유지를 받들어 기와 전면 4칸, 측면
로 최초로 삼대종숭모비를 건립하여 오석산의
2칸의 재실을 건립하였다. 간재(艮齋) 전우
(田愚)가
삼대종비와 같은 뜻으로 세분 선조님을 추모
편액하고 현곡 류영선이 기(記)를
지었다. 시제일은 음력 3월 초열흘날이다.
306 ― 고창의 마을 제5집
하고 종파 자손들의 16위 위패를 모신 제각을 염수재 전경
영사재 전경
세웠다.
아산면 중월리 ― 307
중복은 일제 강점기에 홍종철 씨의 영향을 받은 신교육을 받아 많은 학자와 공직자를 배
(11) 백원재(百源齋)
아산면 중월리 상복1길 45-8번지에 있는
출한 반면, 상복은 보천교의 영향으로 한학과 유학을 배워 그 영향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
강릉유씨의 재실이다. 재실은 기와(양철) 전면
다고 한다. 1901년생인 유영만(유주령)은 이곳 상복 출신으로 채색화가로 유명하였다고 한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백원재는 총회
다. 그의 아버지는 유붕석으로 보천교의 방주로 알려져 있으며, 경상도 출신의 방주인 배모
회의실로 사용되고 있으며 시제는 지내지 않
씨의 딸을 자신의 아들과 혼인을 시켰다고 한다.
는다.
백원재 전경
(3) 유도근(劉道根, 1933~현재)의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자료들
5) 중월리의 이야기 중월리는 풍수적으로 명당 터로 알려져 있어 고창과 인근의 부자들이 마을 뒷산에 묘를 잡았다가 옮기곤 하였으며, 상복에는 보천교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전해오고 있다.
유도근 씨는 1933년 중월리 상복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는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의 생활
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자료를 다수 보관하고 있다. 특히 그의 증조부인 유재풍(劉
載豊)에
관한 자료까지 보관하고 있다. 1910년(융희4년) 7월 30일에 탁지부(度支部)의 공전영
수원(公錢領收員, 구한말 면의 세금 부과와 징수를 담당한 하급관리)
(1) 귀인출동의 명당터
중월리에는 풍수적으로 귀인출동(貴人出動) 명당이라 불리는 혈이 있다고 전한다. 마을에서
으로 선정한 공문서가 남아 있다. 유도근 씨는 일제 강점기에 도산공립국민학교를 다녔
는 귀인이 출동하니 북치고 쌍나발을 불며 쌍교목을 타고 봉덕에서 잔치했다는 말이 전한
다. 그는 해방되기 직전인 1944년(昭和19년)에서 1945년 8
다. 이명당의 혈은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그 효력이 떨어진다는 설이 있어 많은 부자들이 이
월 15일 해방 직전까지 도산공립국민학교의 부급장 임명
곳에 묘를 썼다가 오래지 않아 이전하곤 하였다고 한다.
장, 상장 등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1949년도의 졸업장,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부안군 줄포의 만석꾼으로 알려진 신세원이라는 사람이 1940년대
일본적십자사회원증, 적십자사비 영수증 등도 소유하고
에 중월리 전308 부근에 묘를 썼고, 대산의 정세환도 그의 증조모의 묘를 중월리 전407번
있다. 이들 자료는 우리 민족의 일제치하의 생활사를 조
지에 썼으며, 조선후기 강응환 선생 부인의 묘도 있었다. 또한 성송면 암치리의 강승기와 하
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해방 전까지의 기
오산의 전주이씨 등의 묘 등이 있었으나 이들의 묘는 세월이 흐른 뒤 모두 중월을 떠나 다
록은 모두 창씨개명이 이루어져 유도근 씨의 경우 성이
른 곳의 명당을 찾아 이전하였다고 한다.
탁지부 공전영수원증
유(劉)씨 아닌 문천(文川)으로 기록되어 있고, 해방 후에야
비로소 본래의 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한편 유도근 씨는 (2) 선도배미와 보천교
1949년도에 도산공립국민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졸업장
중월리 상복의 큰요골에는 선도배미라는 논이 있었다. 이 논은 보천교 신도인 유양세 씨
뒤에 일제 강점기의 욱일승천기가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의 부친이 보천교를 다니면서 논농사를 짓던 곳이다. 유양세씨의 부친은 봄부터 겨울까지
해방 후에도 일제 강점기의 물품을 그대로 사용한 것을
논을 깨끗하게 관리를 해야 한다면서 소가 논을 갈다가 똥을 싸면 삽으로 똥을 퍼 버리면
엿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도산공립초등학교 상장
서까지 관리를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정성 드려 재배한 쌀은 보천교의 본산인 정읍 입암에 보냈다고 한다. 특히 중월리 상복마을에는 보천교의 60방주인 유붕석이 있어 많은 사람들
6) 중월리의 산업
이 보천교를 믿고 따랐다고 한다.
중월리는 주변이 구릉성 산지이기 때문에 밭농사를 많이 하고 있다. 마을의 대표적인 농
308 ― 고창의 마을 제5집
아산면 중월리 ― 309
업은 밭농사인 복분자, 고추, 깨와 같은 작물이다. 중복에는 한우(박종환)를 사육하는 농가 도움 주신 분
와 양계장인 상복농장이 있다.
박상기(89세, 중복 토박이) 박춘기(37년 생, 전 아산 면장)
7) 중월리의 역대 이장 중월리의 상복과 중복의 역대 이장들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 명단은 아산면사무소의 협조 로 이루어졌으며, 누락된 기간과 명단은 아산면의 기록에서 확인하지 못하였다. 상복 이장명
중복 재임 기간
이장명
~ 1971. 12.31
박병훈
~ 1971. 12.31
유영원
1972. 1.1 ~ 1972. 9.30
박병직
1972. 1.1 ~ 1975. 6.10
유병환
1972. 10.1 ~ 1974. 6.6
박병직
1975. 6.10 ~ 1975. 12.31
최창식
1974. 6.6 ~ 1975. 6.10
박병직
1975. 6.10 ~
최창식
1975. 6.10 ~
박병직
~1979. 3.1
유영모(39년 생, 상복 토박이) 유도근(33년 생, 상복 토박이) 유요환(48년 생, 상복 토박이)
재임 기간
유영원
유영모
박종환(54년 생, 전 중복 이장)
~1979. 3.1
박병직
1979. 3.1 ~ 1980. 2.29
김양섭(38년 생, 상복 토박이) 유덕환(60년 생, 상복 토박이) 참고문헌 『고창군지』, 고창군지편찬위원회, 2009.
유영모
1979. 3.1 ~ 1980. 2.29
박병직
1980. 3.1 ~ 1980. 12.31
『고창군의 지석묘』, 군산대학교 박물관, 2009 .
유영모
1980. 3.1 ~ 1980. 12.31
박병직
1981. 1.1 ~ 1981. 12.31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2003.
유영모
1981. 1.1 ~ 1982. 12.31
박병직
1982. 1.1 ~ 1982. 12.31
유영모
1982. 1.1 ~ 1982. 12.31
박병직
1983. 1.1 ~ 1984. 12.31
『고창 성씨의 입향유래』, 고창문화원, 2007.
유영모
1983. 1.1 ~ 1984. 1.1
박병직
1985. 1.1 ~ 1986. 12.31
유환곤
1985. 1.1 ~ 1985. 10.30
박병직
1987. 1.1 ~ 1988. 12.31
『문화유적분포지도 고창군』,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05.
김양섭
1985. 10.30 ~ 1986. 12.31
박병직
1989. 1.1 ~ 1990. 12.31
『한국의 자생풍수2』, 민음사, 최창조, 1997.
유윤식
1987. 1.1 ~
박병직
1991. 1.1 ~ 1992. 12.31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한국지명총람11 전북편』, 한글학회, 1981.
유병준
~ 1988. 12.31
박병직
1993. 1.1 ~ 1994. 12.31
강대정
1989. 1.1 ~ 1990. 12.31
박종호
1995. 1.3 ~ 1996. 12.31
보천교 일반 秘전라북도 大正 18년(1929년) 6월 조선총독부 자료
강대정
1991. 1.1 ~ 1992. 12.31
박종호
1997. 1.8 ~ 1998. 12.31
http://terms.naver.com/entry.nhn?cid=200001491
유영모
1993. 1.1 ~ 1994. 12.31
박종호
1999. 1.4 ~ 2000. 12.31
http://www.namdotoday.com/detail.php?number
유영모
1995. 1.3 ~ 1996. 12.31
박왕기
2001. 1.3 ~ 2002. 12.31
유창식
1997. 1.8 ~ 1998. 12.31
박왕기
2003. 1.4 ~ 2004. 12.31
유창식
1999. 1.4 ~
유요환
~ 2002. 12.31
유요환
2003. 1.4 ~ 2004. 12.31
유요환
2005. 1.3 ~
김영표
2010.1.2 ~ 현재
310 ― 고창의 마을 제5집
박왕기
2005. 1.3 ~
박종환
2010.1.2 ~ 2013. 12.31
박왕기
2014.1.2. ~ 현재
아산면 중월리 ― 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