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면의 행정중심지, 하련리 이병열
해리면 하련리 동호리
광숭리
금평리
1. 마을의 위치와 유래
방축리 사반리
라성리
고창군 해리면 동부의 하련리는 선운산지와 접해 있다. 하련리의 남쪽과 북쪽은 높은 산 지들로 둘러싸여 있고, 동쪽과 서쪽은 해리천이 만들어 놓은 충적지가 넓게 분포하여 이를
왕촌리 안산리
이용한 논농사가 발달해 있다. 하련리는 동으로 평지리, 서로 안산리와 왕촌리, 남으로 송
하련리
산리, 북으로는 심원면 도천리와 선운산도립공원 등이 인접한다. 해리는 역사의 기록상으로
평지리
는 삼한시대 모로비리국으로 추정되며, 백제시대 상로현(上老縣, 공음 두암 저수지), 당나라의 웅
진도독부 좌로(佐魯, 나주목 영광군), 남북국시대 장사
송산리 고성리
현(長沙縣), 고려시대 장사현(長沙縣), 조선시대 무장현
(茂長縣)에 속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해리와 심원 일대에 넓게 분포하고 있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을 본다면, 이 지역은 이미 선 사시대부터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청룡산 아래 하련리·평지리와 심원 도천 리의 고인돌들로만 보아도 이 일대에 얼마나 선사 문화가 발달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하련리는 선사 시대에는 뱃길이 닿아 수산물이 풍부하였을 것이고,
일제 강점기인 1918년 해리면 하련리 일대 지도
해리면 하련리 ― 313
고성천 주변은 이른 시기에 도작문화가 발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련은 궁산 저수지
경계)-하련1길-청해2길-청해2길-동시길-하련2길로
축조 후 해리면소재지가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시마을의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곳은 하련리의 중심지로 상업지구보다는 일반 주거지
하련리는 행정구역상 구한말에는 무장군 청해면(靑海面)에 속한 리였다. 그러다 1914년 3
월 1일 부군통합령에 의해 청해면과 오리동면(五里洞面) 및 상리면(上里面)의 복구(伏拘), 상수
(上水),
월곡(月谷)이 통폐합하여 해리면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 하련리는 평장리를 병합하여
의 특징이 잘 나타나는 곳이다. 하련마을에는 해리우체국, 효도한의원, 해리신협, 해리약국, 해리제재소, 성심의원, 해리중앙교회, 현대의원 등의 주요기관이 있다. 2) 동시(東市)
하련리라 해서 고창군 해리면에 편입되었다. 법
정리인 하련(下蓮)리에는 행정리로 하련(下蓮), 남
동시마을은 해리시장인 남시마을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의 위치는 서쪽인데, 마을
시(南市), 신대(新垈), 평장(平章) 등이 있고, 자연취
이름은 동쪽의 시장이라는 뜻의 동시이다. 이는 아마도 서쪽은 지는 해를 의미하는 경우가
락으로는 하련, 신대(新垈), 계선동(係船洞), 성덕
(聖德),
연결되는 곳이다. 하련은 시장이 있는 남
많아 의도적으로 동쪽을 의미하는 동시로 부른 것 같다. 동시마을은 남시마을에서 1991년
평장(平章) 등이 있다. 하련리에는 해리면
에 분리되었다.
의 주요한 공공기관과 각종 시설들이 있다. 하
동시는 하련리에서 가장 늦게 행정 분리가 된 마을로 하련리를 구획정리하면서 생긴 마
련리의 이상산(198.8m)과 청룡산(314m) 사이에 하
을이다. 동시마을은 하련2길-해리중앙로-해리교-고성천-행산교-논소로길-하련2길로 연결
련 저수지가 있고, 저수지 아래로 배맨바위를 경
되는 곳이다. 동시마을에는 동시마을 경로당을 비롯, 해리상노회, 해리파출소, 해리어린이집,
계로 동쪽이 평장마을이고, 서쪽이 신대마을이
전주치과, 해리119구급대, 고창새마을금고 해리지점 등의 기관과 의료시설이 있다.
다. 그리고 해리외곽도로인 해리청룡길의 남쪽 이 청해마을이다. 하련마을은 청룡마을과 바로
1830년대 조선 후기『무장읍지』로 청해면의 평지 옆에 시 장이 들어선 것을 볼 수 있다.
접하고 있으며, 하련마을의 남서쪽 해리시장을 중심으로 남시마을이 있고, 남시마을의 서쪽 이 동시마을이다.
3) 남시(南市) 남시마을은 해리시장이 발달하면서 생긴 마을이다. 마을의 경계는 해리지구대-남시길-고 습재길-남시길-남시길-해리중앙주차장-해리중앙로로 연결된다. 남시마을은 해리시장이 들
하련리의 행정리는 구도로와 하련 저수지의 수로를 따라 경계를 나누었는데, 하련리에 우 회도로와 새로운 도로들이 개설되면서 행정리의 분리조정이 필요하다.
어서면서 인구가 급증하여 마을의 규모가 커지자 1990년 서쪽 일부를 떼어냈다. 이렇게 떼 어낸 행정리가 동시마을이다. 남시마을은 마을의 대부분을 해리시장이 차지하고 있어 상업 지구에 해당한다. 남시마을은 하천의 충적지에 형성된 마을이기 때문에 식수는 하상의 높이
1) 하련(下蓮)
와 동일하기 때문에 평장이나 신대보다는 용수를 구하기가 쉬웠던 마을이다. 이렇게 용수를
하련은 1790년경 해리면의 안진머리장터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해리시장이 입지할 수 있었다. 남시마을의 해리중앙로상에 하
이곳으로 옮기면서 인구가 증가
련리 마을 당산이 있으며, 주요 시설로는 해리농협, 해리시장, 해리농협 하나로마트, 남시마
[安子市]가
하자 남시, 하련, 동시, 청해 등으로 행정구
을 경로당 등이 있다.
역을 분리하였다. 하련은 연꽃이 만발한 연 못의 아래쪽 마을이라 하여 그렇게 불린다
4) 청해(靑海)
고 전하고 있다. 하련마을은 하련2길-해리
청해마을은 하련마을의 서북쪽에 있다. 청해마을은 하련의 북서쪽의 외곽에 넓게 분포하
중앙로-남시길-고습재길(서쪽의 하련제 수로가
314 ― 고창의 마을 제5집
해리중앙로 전경
는 지역이다. 최근 해리면의 주요 기관과 시설들이 청해마을 지역으로 이전하고 있다. 청해
해리면 하련리 ― 315
마을은 하련리의 변두리에 해당하는 곳이었으나 하련리 우회도로와 같은 도로들이 마을 주
하였다. 평장마을의 곡저에는 밭농사가 발달하고, 평장마을의 선상지 끝부분인 하련마을
위로 새로 개설되면서 성장한 마을이다. 마을의 경계는 하련2길-동시길-청해2길-청해2길-
부근에는 논농사가 발달하였다.
시설로는 해리면사무소, 원불교 해리교당, 해리농협 사료판매장, 청해 마을회관, 해리면 복
2. 하련리의 자연환경과 지명
하련1길-신대경계(평지청룡길의 위)-해리중학교-해리종합복지관으로 이어진다. 마을의 주요 지회관, 해리119지역대, 해리교회, 고창교육지원청 해리면 교직원 사택 등이 있다.
하련리의 산계(山系)는 호남정맥(노령산맥)의 구황산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가 북서쪽으로
5) 신대(新垈)
발달하여 성송면 하고리의 삼태봉을 이루고, 다시 북서쪽으로 발달하여 무장면 신촌리 왕
신대마을은 하련리의 북쪽에 있으며, 하련 저수지 아래 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신대마을
제산에서 멈추었다. 이 산계는 다시 북쪽으로 발달하여 무장읍내 사두봉을 만들고, 계속 북
은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서쪽이 신대, 동쪽이 상암, 하련 저수지 아래 마을이 계선동(지성동)
쪽으로 발달하여 한제산·비학산·청룡산·개이빨산·경수산을 이루고 곰소만에서 멈춘다.
이 있다. 그러나 현재는 위 세 자연마을을 하나의
하련리는 청룡산의 남서쪽에 입지한 마을들이
행정리로 묶어 신대리라 부른다. 신대마을에도 바
다. 위 산계가 하련리의 동쪽에서 낮은 구릉의
우독이라 불리는 언덕에 청동기시대의 유적인 고인
재를 만들어 서쪽으로 발달하다가 멈춘 산이
돌이 있었는데, 지금은 흙 속에 파묻어 버렸다고 한
청룡산이다. 하련리는 북쪽이 높고, 서쪽과 남
다. 이러한 고인돌을 통해 하련리의 마을들 중 신대
쪽은 넓은 들이 발달하였다. 동쪽으로는 평지
와 평장이 가장 이른 시기인 청동기시대 이전에 마
리가 있는데, 이곳 산록완사면에는 밭농사가
을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을은 이상산 사
이루어지고 있고, 골 사이에서 논농사가 이루
면에 있으며, 주요 시설로는 신대 마을회관, 해리고
해리중앙로 전경
등학교, GS해리주유소 등이 있다.
어지고 있다.
하련리 일대 항공사진
하련리의 하계는 고성천이 한제산에서 발원 하여 동에서 서로 흐르다가 행산교 앞에서 임해천과 만난다. 임해천은 무장 월림리에서 발
6) 평장(平章)
원하여 남에서 북으로 흐르다가 궁산 저수지에서 해리천에 합수된다. 하련리 주위로 이러한
평장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300m 거리에 있다. 마을은 1800년경 인동장씨가
하천의 발달은 넓은 충적지를 만들었고, 충적지를 개간하여 일찍부터 농경이 발달하게 되었
설기하여 세거하였다. 이후 장수황씨, 상주주씨 등도 입거하여 세거 중이다. 성덕마을은 90
다. 마을의 고로들에 의하면, 하련은 일제 강점기에 궁산 저수지를 축조하면서 뱃길이 끊어
년 전부터 청도김씨가 설기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다.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이곳에는 서당
져 더 이상 조수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이 두 곳이나 있어 글 장(章)을 썼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마을 곳곳에 고인돌이 있었으
하련 저수지 밑으로 산간의 곡저에 나타나는 충적지인 선상지가 평장과 신대 사이에 그
나 대부분 파괴되고 일부만이 남아 있다. 평장마을은 하련리의 행정구역상 가장 넓은 면적
형태가 일부 남아 있다. 이러한 선상지성 지형에 입지한 마을들은 물을 구하기가 어려워 논
을 차지하고 있으며, 청룡산 아래로 일제 강점기의 동굴들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배맨바우
농사보다는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진다. 특히 지하수는 충적지 밑의 기반암을 따라 흐르기
밑의 골들 사이에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도 그곳에 그 흔적과 동굴을 찾을
때문에 우물의 깊이가 깊다는 것이 특징이다.
수 있다고 한다.
마을은 배맨바위 아래의 곡저(谷底)에 입지하였기 때문에 충적지인 선상지(扇狀地)가 발달
316 ― 고창의 마을 제5집
계선동(係船洞) 하련 서북쪽에 있는 마을. 옆 산의 바위에 배를 매었다고 함. 그러나 이는
해리면 하련리 ― 317
풍수적으로 해석해야 함. 하련리가 행주형(行舟形)의 풍수적 형국이기 때문에 배를 매 놓아야 할 비보개념의 지명이 필요함에 따라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됨. 고십재 해리면 하련과 심원면 도천리 경계의 고개. 계선암(繫船岩) 배맨바우.
노구암(老嫗岩) 배맨바우. 깐치네(까치네) 현재 장원주유소 자리라고 함. 옛날에 도살장이 있었다고 함.
동냥치 고성저수지 아래의 논으로 땅이 메마
르고 곡식도 안 되어 그렇게 불렀다고 함. 임해천(臨海川) 무장면 월림리에서 발원하여
해리면 하련리의 서쪽으로 흐르는 소하천으로 궁산 저수지에서 해리천에 합수됨. 임해천은 안산리와 하련리의 자연경계임.
삼챙이(삼천) 해리교회 바로 뒤의 일대의 지명.
하련제(下蓮堤) 해리면 하련리 북쪽에 있는 못.
두꺼비바우 하련 뒷산 밑에 있는 바위로 모양이 두꺼비와 흡사함.
해리교(海里橋) 해리면 하련리 신대 남쪽에 있
배맨바우(계선암, 노구암) 계선동 뒷산 위에 있는 큰 바위. 그 모양이 배를 매 놓은 것 같으므
로 배맨바우라 하며, 또 그 모양이 늙은 할머니가 애기를 업은 것과 흡사하다 하여 노구암 이라고도 함. 한편 이를 거북바우라고 부르기도 함.
하련제 전경
는 다리. 해리시장(안진머리장, 안자시, 안산장) 해리면 하련리에 서는 시장. 전에는 안산리 ‘구장터’에
있었으므로 그때의 이름을 따서 안진머리장 또는 안자시라고도 함. 4일과 9일에 장이 섬.
진골 하련제 위의 배맨바우 아래 첫 번째 골의 이름. 퇴앗골 하련제 위의 배맨바우 아래 햇빛이 잘 들어간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함. 진골
3. 배맨바우를 통해 본 해리의 선사시대
바로 옆의 골. 배맨골 배맨바우 밑의 세 번째 골. 도둑골 맨바우 밑의 네 번째 골로 골이 매우 깊음. 골에 도둑들이 많이 있어 그렇게 불렀다
고 함. 남산편 하련리 평장마을 앞에서 하련까지의 넓은 들. 바우독 바우독은 원래 신대마을 뒤로 이곳에 고인돌이 몇 기가 있었기 때문에 바우독이라
불렀다고 함. 해리면 하련리 546번지 일대.
고창 아산과 해리 간 지방도와 심원면 도천에는 규모와 양에서 결코 타 지역에 뒤지지 않 는 많은 고인돌들이 있다. 이 지역의 고인돌은 어느 특정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것 이 아니라 분산되어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특히 왕촌리 토성 동쪽 안산리의 이성산 기슭에 는 약 55기의 지석묘가 존재하고 있다. 이 지역의 고인돌은 해리천과 담암천의 하계망을 중심으로 넓게 분포하고 있으며, 현재의 행정구역은 해리면과 심원면 전부이다. 특히 해리면과 심원면은 대부분의 법정리에 청동기시
지름박골 이상골의 서쪽에 있는 골.
대의 고인돌이 존재하고 있다. 이 지역은 칠성어장이라 하여 과거로부터 서해안의 3대 조기
이상골 하련리 신대마을 뒤에 있는 가장 깊은 골. 이곳에 예전에 샘이 있어 이 물을 먹고
어장으로 불릴 정도로 어업이 성하였고, 해리천과 담암천 주위의 충적지를 개간하여 농업이
살았다고 함. 안장골 하련리 이상골의 동쪽에 있는 작은 골.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해리면 왕촌리에는 시대 미상의 왕촌리 토성이 있다. 이 성터는 왕촌리 조지산(225.4m) 정
성덕(聖德) 하련리 평장 동쪽에 있는 마을.
상에 있다. 이 성에 대한 문헌기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고분자료에 “土城延長約
장평(長坪) 하련리 평장 뒤에 있는 들.
二百間”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성이 토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토성의
쟁팽이골 해리 정수장 바로 위에 있는 골로 소나무가 많았다고 함.
흔적을 쉽게 확인할 수 없다. 왕촌리 토성에는 유물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아 시대를 확인
고성천(古星川) 왕제산에서 발원하여 해리면 하련리를 동에서 서로 흐르는 소하천으로 행
할 방법은 없다. 다만 왕촌리 토성 아래와 주위에 많은 고인돌이 남아 있어 이른 시기에 인
산교에서 임해천과 합수함. 고성천은 하련리·평지리와 고성리의 경계를 이룸.
318 ― 고창의 마을 제5집
간이 거주하였고, 이곳이 아주 중요한 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해리면 하련리 ― 319
그러나 이 토성은 시대적으로 백제시대 이전의 토성으로 추측된다. 백제의 지방통치 개념 은 산성이 기본이고, 산성 아래 현 치소를 두기 때문이다. 왕촌리 토성은 백제가 이 지역을
바로 뒤의 안산리 이상동에는 조선후기까지 안진머리시장이 존재하였던 것만 보아도 이곳 이 상업적으로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관리하기 위하여 장자산에 상로현을 설치하고 장사산성을 축성하였기 때문에, 바로 인근에
한편 선사인들의 신앙유적지로 추정되는 배맨바위가 해리면 하련리 뒤에 있다. 이 바위는
성을 축성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주로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
「계선암 배맨바위」로 불리며, 배를 정박하여 밧줄로 묶은 바위라는 암석 유래담이 전한다.
해 서남해안에 읍성을 축성하고, 각 읍성 축성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왕촌리 토성에 대한
이 바위는 높이 20m, 둘레 100m 정도의 퇴적암 무더기로 민둥한 산등성이에 위치하여 멀리
기록은 없다. 다만 왜구가 창궐한 고려후기의 성으로는 그 가능성이 있다.
서도 쉽게 시야에 들어온다.
왕촌리 토성은 이 일대가 모로비리국에 흡수되기 전부터 어업과 소금생산이 활발했기 때
지금은 이곳에서 십여 리 떨어진 곳에 서해와 해안선이 접해 있으나 예년에는 이 산 정상
문에 이로 이한 경제적 이득을 보호하고
까지 바닷물이 들어와서 배를 이 바위에 매어 달았다고 하는 데서 ‘배맨바위’라고 부르기도
해안을 통해 침입하는 적을 방비하기 위해
한다. 이곳까지 배가 들어왔다는 것은 주변 산의 계곡에서 가끔 조개껍질이 발견되고 바위
지어졌을 것이다. 이 지역은 주변이 대부
가 모두 퇴적암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증명이 된다. 그동안 지각의 변화가 수억 년을 변화
분 바다였지만 해안습지와 해안사구의 발
했다는 일면을 보여주는 증거의 바위이기도 하다. 해리사람들은 이 바위를 거북바위라고 불
달로 어로활동과 소금생산이 많았다. 많은
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선사인들의 신앙 대상이라 할 수 있다. 거북신앙의 유물로 가장 오
수산물과 소금은 산 넘어 모로비리국으로
래된 것은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지에서 나온 돌거북이다. 석장리 구석기 유적지는 돌거
활발하게 유통이 되었을 것이다. 이 지역의
북 외에는 다른 동물의 조각품이 발굴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이 돌거북은 이미 2만 년 전
경제권이 모로비리국이었기 때문에 자연스 배맨바우 원경
럽게 모로비리국에 흡수되어, 읍락으로 모 로비리국의 부족연맹체였을 것이다.
모로비리국은 주진천을 따라 아산의 구암을 넘어 원평 부근까지 배로 침입이 가능하나 수로가 좁고 산으로 둘러싸여 결코 침입이 쉽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서해안은 배를 타고
부터 구석기인들의 신앙물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거북은 풍수지리에서 북현무(北玄
武, 龜象)로
불리는 실재하는 동물로 오랜 역사를 통하여 영험하고 신령스러운 동물로 여겨
왔다. 옛사람들은 거북이 주술적(呪術的) 효능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 껍질을 불에 구워 트는 모양을 보고 미래의 길흉을 점치기도 했다, 다른 동물보다 수명이 긴데 기인하여 영년불가 의 상징으로 인식된다.
해리 하련까지 입항하여 약 8km 정도 가면 바로 모로비리국의 중심지이다. 모로비리국에
물론 백제시대에는 반드시 산성이나 중요한 곳에 바위신앙유적을 배치시켰다. 특히 바위
있어 해리지역의 해안방어는 1차 방어선의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곳이 뚫리면 바로 아산
신앙은 거북바위가 가장 많으며 방위로는 북쪽에 두었다. 이는 북현무를 거북이라 하여 수
학천을 넘어 태봉으로 가는 직선교통로이기 때문이다. 해안은 주민들의 안정된 취락생활을
호신으로 여겼던 것과 연관된다. 이 지역의 해리면과 심원면 어느 곳이나 분포하고 있는 고
영위할 수 없었다. 고려시대의 경우, 왜구가 내륙 깊숙한 곳까지 창궐한 것만 보아도 해안의
인돌이 그 규모와 수에서 결코 적지 않으며, 고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이 존재한다. 또한
방어는 매우 중요하였다.
하련리에는 신앙유적으로 추정되는 배맨바위가 있다. 해리와 심원지역의 농경지는 그리 넓
조지산은 정상에서 북쪽 궁산 저수지 너머로 줄포만이, 동쪽은 선운산과 해리, 그리고 신
지 않다. 그러나 연안에서 잡히는 수산물과 소금을 모로비리국과 교역을 통해 경제적 이득
앙유적인 거북바위가 보인다. 조지산의 서쪽에는 봉수대가 있던 봉화산이 있다. 조지산은
을 취하면서 자연스럽게 모로비리국의 읍락이 되었을 것이다. 모로비리국을 합병한 백제는
당시 서해안을 한 눈에 조망해볼 수 있으며, 모로비리국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군
모로비리국의 공동체 의식과 경제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해안 경제권의 중심인 해리·심원 지
사적 요충지이다. 근래에도 조지산 정상에는 군부대가 주둔하는 서해안 해안경비초소가 있
역과 상하·공음의 일리국 일부를 떼어 두 지역의 중간지점이자 뱃길이 닿는 장자산 아래에
었다. 물론 상업적으로도 농수산물이 집중할 수밖에 없는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다. 조지산
320 ― 고창의 마을 제5집
상로현(上老縣)을 건치하였다.
해리면 하련리 ― 321
3. 마을의 인물과 행적
였을 때 갑자기 도지사에게 질문하여 현장시찰을 유도한 후 제방보강의 긍정적인 답변을 얻을 수 있었다. 그 후 유종근 도지사는 도청 직원에게 실태를 파악하도록 하여 지원 약속
김정문(金鉦文, 1867~1932)
을 받았다. 그는 이 사업의 추진위원장이 되어 땅과 도로개설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제방을
그의 자는 경수[敬(暻)洙] 호는 남곡(南谷)으로 고종 4년 무장현 청해면 신대리(현 고창군 해리
높이는 과정에서 일부의 땅이 수몰되기 때문에 땅을 매입해야 하는데, 서울에 사는 땅 주인
김해김씨 시중공파 15세손인 삼만의 차남으로 태어나 백부 이만에게
이 땅을 내 놓지 않았다. 그는 땅 주인을 겨우 설득하여 땅을 매입하려 했으나 군이 지원하
면 하련리 신대마을)에서
출계하여 그 계대를 이었다. 27세 되던 1894년 3월에 동학농민혁명의 제1차 봉기가 무장땅 동음치면 당산골 구수내에 서 일어날 때 인근의 사미동 출신으로 청해면의 선군장이던 조성원의 휘하에 들어가 종횡으
여 매입하려는 가격과 소유주의 가격차로 매입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자 신의 사재 삼천만원을 내어 군비와 합쳐 토지를 겨우 매입하였다. 그의 이러한 노력으로 지 금은 해리 주민들 간에 물 때문에 싸움을 하는 일은 사라지게 되었다.
로 활동하던 중 5월 말에 전주성의 서문 밖 용머리고개 근처에서 관군들과 10여 일 동안 격 돌하다가 다리에 부상을 입어 귀향하였다.
4. 마을의 문화유적과 이야기
동학농민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폐퇴하여 역적의 누명을 쓰게 됨에 그는 고향을 버리고 사
위 서판암(徐判岩)이 세거하고 있는 사돈지가에 숨어들어 은신하고 있다가 경술합방 이후에
하련리는 고성천과 임해천이 만나는 곳에 발달한 면행정중심지이다. 이러한 지형은 근세
사돈가의 주선으로 고창읍 신월리에 거처를 마련하여 옮겨 살다가 1932년에 한 맺힌 생을
에 들어서야 도시발달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전통적인 인간 거주의 공간은 주로 산과 들이
마감하였다.
만나는 점이지대이다. 뒤에는 산이 있어 북서계절풍을 막아 주고, 마을 앞에는 물이 있어 식 수와 농업용수가 부족하지 않은 곳이다. 하련리의 경우 청룡산과 이상산 아래의 평장과 신
최창묵(1955~현재)
대마을만이 이러한 조건에 부합하고 하련·동시·남시·청해는 근세에 형성된 마을임을 알
최창묵 명장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시계 수리 분야 명장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해리면의 각종 기관과 시설이 있는 위 네 개 마을은 선사시대의 유
다. 1955년 전북 고창군 해리면에서 태어났고 열다섯 살에 상경해 서울 남창동 한미시계학
적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원에서 시계 수리를 처음 배웠다. 기술을 배운 지 3년만인 1973년 경인지방기능경기대회에 서, 이듬해에는 전국기능경기대회 시계 부문에서 금메달을 딸 만큼 일찍이 실력을 인정받
1) 하련리 지석묘군 1
았다. 1975년에는 아시아인 최초로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시계 부문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다.
고창군 해리면 하련리 산43-1번지에 있는 청
1984~1995년과 2001년 전국기능경기대회 심사장을 지냈다. 1992년 한국시계기술협회장 등
동기시대의 유적이다. 이 지석묘군은 하련제
을 지낸 뒤 2009년 명장이 됐다. 2013년 2월 23일, 대한민국명장회 정기총회에서 임기 2년의
하단부 밭 가운데 2기가 50m 간격으로 위치
제11대 회장으로 뽑혔다.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이곳은 고창서부지역의 국궁장이다. 이들 고인돌은 몇 기는 산 아래로
황기환(1935~현재)
밀쳐져 있으며, 한 기는 땅에 거의 묻혀 있다.
황기환은 해리 일대가 농사철이면 매년 용수가 부족하여 마을 주민들 간 분쟁이 끊이지
대표적인 지석묘의 크기는 370×255×120cm
않고 일어나자 하련 저수지의 제방보강을 수차례 국회의원과 군청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많
로 장축은 남-북 방향이며, 상석의 평면·단면
은 건설비용에 따른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자 1996년 유종근 전북도지사가 고창을 방문하
형태는 방형이다. 지석은 묻혀 있어 보이지 않는다.
322 ― 고창의 마을 제5집
하련리 지석묘군 1
해리면 하련리 ― 323
5) 남시마을 당산나무(하련보호수) 고창군 해리면 하련리 674-6번지의 남시 마 을회관 앞에 있는 노거수이다. 이 노거수는 해 리면소재지 파출소 맞은편에 위치하며, 1999 년 9월 15일 보호수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 다. 수종은 느티나무이며 수령은 350년이고, 하련리 지석묘 2-1
하련리 지석묘 2
하련리 지석묘 2-2
수고는 15m, 나무둘레는 3.6m이다. 상태는
2) 하련리 지석묘군 2
양호하며 주변으로 시멘트로 보호대를 설치
고창군 해리면 하련리 평장마을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이다. 지석묘는 평장마을 내의
하였다.
남시마을 당산나무
김금례 씨 집에 2기가 자리 잡고 있으며, 이 집의 바로 뒷집 마당에 1기, 담장 밑에 1기가 있
남시마을의 당산제는 원래 해리의 4개 마을이 따로 지냈으나 지금은 동시와 남시마을, 청
다. 또한 장영환 씨 집 앞마당에 2기가 자리한다. 지석묘의 형식은 대부분이 개석식으로 보
해와 하련 마을이 하나 되어 매년 번갈아 가면 지내고 있다. 당산제는 음력 2월 초하루에
이나 김금례 씨 집의 지석묘는 상석이 장타원형의 판석이며, 주형지석을 세워 상석의 양쪽에
지낸다. 원래 당산은 두 군데 있었으나 한 군데는 죽고, 현재 남시의 당산나무만 살아 있다.
받쳐 놓은 형태로 보아 바둑판식일 가능성이 높다. 6) 신대와 계선동 당산 3) 하련리 지석묘군 3
신대마을 당산은 마을 입구에 평지청룡길 116번지의 도로변에 있다. 현재는 당산은 지내
고창군 해리면 하련리 청해마을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이다. 청해마을에서 하련 저수 지 방향으로 이어진 마을길을 따라 200m 가량 가다보면 서쪽에 7가구 내외의 민가가 모여
지는 않고 있으며, 수종은 느티나무이다. 또한 신대리의 자연마을인 계선동(지성동)에도 마 을 당산이 한 주 있으나 이 또한 당산은 지내고 있지 않다.
있다. 지석묘는 이 마을의 김도태 씨 집 마당에 8기, 담장너머에 1기 등 모두 9기가 자리하 고 있다. 지석묘의 형식은 옮겨진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기반식이다.
하련리 지석묘군 3
하련리 지석묘군 4
4) 하련리 지석묘군 4 고창군 해리면 하련리 신대마을 동쪽 하련 저수지 아래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이다. 이 지석묘는 펌프장 바로 옆에 2기가 있으나 아직 보고되지 않은 개석식 지석묘이다.
324 ― 고창의 마을 제5집
신대마을 당산나무
계선동 당산나무
해리면 하련리 ― 325
7) 철륭제와 철륭집
남시마을
철륭을 모시는 집은 님시길 9-17(하련리 173-1)번지의 집이다. 철륭은 원래 지신(地神)의 성
세대
인 계
동시마을 구
남
여
세대
인 계
하련마을 구
남
여
세대
인 계
구 남
여
격을 포함한다. 흔히 철륭하면 집 뒤꼍을 이르는데, 대체로 산 밑에 집터를 잡은 집이나 마
2006
50
134
66
68
46
120
61
59
80
233
109
124
을에서 철륭을 모신다. 마을 터가 세면 그 기운을 이기고 살아야 하는데, 이기지 못하면 마
2007
53
143
73
70
43
107
56
51
81
221
103
118
2008
51
143
71
72
48
113
59
54
84
227
107
120
2009
51
134
66
68
49
111
54
57
80
199
96
103
2010
67
153
79
74
52
113
54
59
74
187
95
92
을에 우환이 생긴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을 지을 때 좋은 날을 받아 지신굿을 하여 집터의 센 기운을 없애고 집을 짓기도 한다.
2011
51
125
63
62
51
119
60
59
79
190
90
100
2012
50
125
65
60
52
114
56
58
72
168
80
88
간혹 철륭을 모시는 집에서는 ‘철륭단지’, ‘제
2013
51
120
61
59
44
99
52
47
74
161
76
85
수독’이라 하여 쌀이나 나락을 담은 단지를
계
636
1,723
844
879
604
1,495
738
757
973
2,652
1,262
1,390
집 뒤꼍의 땅에 묻어놓고 모시기도 했다. 철륭집 전경
청해마을
그래서 철륭단지는 매년 새 나락이 나오면
세대
인
깨끗한 날을 받아 찧어서 갈아 넣으며, 그 전의 쌀은 밥을 해서 먹는다. 그리고 명절이 되면
2002
55
계 145
철륭단지 앞에 간단히 음식을 차려놓고 비손하기도 하였다. 단지를 놓은 곳에는 사람들이
2003
57
156
함부로 출입하지 않으며, 철륭을 향해 침을 뱉지 않는다. 하련의 철륭은 먼저 남시에서 당산제를 지내고 나면 마을 주민들이 다시 우물에서 철륭제 를 지낸다. 우물에서 지낸 후 다시 철륭집으로 가서 그곳에서 지내게 된다. 하련의 마을 주
신대마을 구
남 67
여 78
70
세대
인
평장마을 구
45
계 116
남 54
여 62
86
45
114
54
60
세대
인
구
32
계 81
남 40
여 41
32
79
39
40
2004
61
157
71
86
44
114
51
63
35
75
38
37
2005
62
153
68
85
46
111
51
60
34
76
38
38
2006
68
166
78
88
45
101
45
56
37
75
39
36
2007
69
166
70
96
44
103
44
59
36
74
38
36
2008
69
152
63
89
44
105
46
59
35
72
37
35
민들은 정성스럽게 곡식을 준비하고 철륭제를 지내는 우물의 물로 쌀을 씻고 그것으로 밥
2009
71
145
64
81
48
113
52
61
38
70
35
35
을 해서 제를 지낸다. 마을의 철륭샘은 2012년 덮어버려 그 흔적만 남아 있다. 마을 고로들
2010
108
184
72
112
46
109
47
62
37
72
38
34
은 철륭우물을 덮은 것에 너무 마음 아파했다.
2011
106
176
68
108
44
106
50
56
36
69
37
32
2012
114
191
81
110
45
105
50
55
35
65
36
29
5. 마을의 현황과 생활상
2013
111
193
79
114
43
100
47
53
34
61
33
28
계
951
1,984
851
1,133
539
1,297
591
706
421
869
448
421
2) 하련리의 주요기관 및 시설
1) 세대수와 호구(인구) 하련리의 각 행정리별 2002부터 2013년 12월 현재까지의 마을별 인구변화는 다음과 같다.
2002
54
남시마을 인 구 계 남 174 80
2003
54
171
79
92
59
155
72
2004
54
157
73
84
48
135
2005
50
144
68
76
51
142
세대
326 ― 고창의 마을 제5집
여 94
61
동시마을 인 구 계 남 167 78
여 89
세대
(1) 해리고등학교
89
하련마을 인 구 계 남 여 276 128 148
83
93
288
138
150
되어 참다운 인간상 정립과 창의성 있는 교육을 내실 있게 추진하고 있다. 교목은 느티나
65
70
83
252
120
132
무, 교화는 동백이다. 느티나무는 풍요로운 소양과 창조적 전통으로 이상을 개척하려는 믿
71
71
84
250
120
130
세대
해리고등학교(공립, 고창군 해리면 하련리 570번지)는 지난 1972년 개교하여 신의, 근면, 창조라 는 교훈을 바탕으로 학생은 배움에, 교사는 정열과 사랑으로 교사와 학생이 모두 하나가
해리면 하련리 ― 327
음직스러운 힘을, 동백은 외유내강의 정신과
하여 면사무소를 개설하였다. 당시 면사무소
미래지향의 실천 의지로 삶을 개척하려는 용
는 이상동에 있다가 안자시가 성장하면서 면
기와 품위를 상징하고 있다.
사무소를 지금의 하련리로 옮긴 것으로 추정
1972년 1월 14일 해리종합고등학교 설립 인 가 3월 8일 개교, 초대 김대기 교장 취임
된다. 2013년 12월 현재 면사무소의 공무원 해리고등학교 전경
1974년 3월 1일 해리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수는 18명이다. 면사무소는 고창군 해리면 하
련리 222(청해2길 38)번지에 있다.
해리면사무소 전경
7월 10일 해리중학교에서 현 위치로 이전
2013년 2월 14일 제39회 졸업식(졸업생 총 4천4백3명)
(4) 해리지구대
해리면 해리중앙로 49번지(하련리 93-1) 있는 공공기관으로, 시민의 생명·신체·재산의 보
(2) 해리중학교
해리중학교(공립, 고창군해리면 하련리 245번지)는
호, 범죄의 예방과 수사 및 범인 체포 등과 같
해풍(海風)을 견디어 더욱 붉게 타오르는 동
은 사법 경찰 사무의 담당을 통하여 지역 사
백꽃으로 유명한 선운사 가까이에 자리한 한
회의 공공질서와 안녕을 보장하고 시민의 안
적하고 아담한 학교다. ‘성실(誠實), 협동(協洞),
자립(自立)’을 생활 목표로, ‘지식 기반 사회의
창의적 인재 육성’을 위해 전 교직원이 노력하
해리지구대 전경
전과 재산을 보호하는 특수 행정 업무를 수행한다. 해리지구대는 일제 강점기인 1914년 3월 5일 주재소가 설치되었고, 1994년 12월 27일 현 위치에 개축하였다. 해리중학교 전경
고 있다. 학생들을 자녀처럼 사랑하며, 교직에 대한 자긍심을 바탕으로 ‘질 높은 수업’을 위
(5) 해리우체국
해 연구하는 교사, 심신(心身)이 건강하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로 꿈을 키우는 학생, 교
미래창조과학부에 딸린 공공기관으로 우편,
사와 학생이 서로 신뢰하고 행복한 교육의 요람을 기치로, 참교육의 길을 향하여 매진하고
우편환, 우편 대체, 체신 예금, 체신 보험, 전
있다.
신 전화 수탁 업무 따위를 맡아본다. 해리우체
1952년 9월 5일 해리고등국민학교 개교
국은 해리면 해리중앙로 96-1(하련리 261번지)에
1955년 10월 13일 초대 고갑술 교장 취임
있으며, 1953년 5월 1일 개국하여 지금에 이르
1978년 12월 5일 학급증설 인가(21 학급) 1986년 3월 1일 특수학급 인가(1 학급)
2013년 2월 15일 제59회 졸업식(졸업생 총 9천4백7명)
고 있다.
해리우체국 전경
(6) 해리농협
농협은 농업인의 자주적인 협동조직을 통하 (3) 해리면사무소
여 농업생활력의 증진과 농민의 경제적·사회
해리면의 행정사무를 맡아보는 해리면사무소는 12개의 법정리, 46개의 행정리, 102개의 반
적 지위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해
을 관할하고 있다. 해리면사무소는 1914년 청해면과 오리동을 통합하면서 해리면으로 개칭
리농협은 1969년 11월 19일 설립되어 초대 조
328 ― 고창의 마을 제5집
해리농협 전경
해리면 하련리 ― 329
합장으로 김승곤이 취임하였다. 이후 2006년 7월 18일 상하농협과 통합하고 김재찬이 통합
2011년 10월 27일 개관한 해리면 복지회관
조합장으로 선출되었다. 2007년 4월 2일에는 심원농협과 통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
은 부지 면적 2169㎡에 건축 면적 396㎡ 규모
리농협은 본점이 하련에 있고, 심원과 상하에 지점이 있으며, 천일염 산지종합처리장이 해리
이고, 지붕은 전통적인 건축물 모습에 가깝도
면 동호리에 있다.
록 기와구조로 되어 있다. 이번 복지회관 건
해리면 복지회관 전경
설은 2010년에 농촌환경개발정비사업 선정으 (7) 고창신협 해리지점
로 국비(70%) 및 군비(30%)를 확보하여 총사업비 5억8700만원을 투입, 건립 부지 매입 후 작
신용협동조합은 지역·직업·종교 등 상호유
년 9월에 착공 금년 5월에 준공했다. 복지회관은 면민들의 공동체 의식 함양과 건강한 지역 사회 육성에 기여할 수 있도록 문화, 복지, 건강분야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대를 가진 개인이나 단체 간의 협동조직을 기 반으로 하여 자금의 조성과 이용을 도모하는 비영리 금융기관이다. 고창신협 해리지점은 해
(10) 해리시장
리신용협동조합으로 출발하였다. 해리신협은
해리시장은 해리면 하련리 162번지에 있는
1977년 8월 31일 자연설립하고, 1977년 12월
정기시장이다. 시장은 4일과 9일의 5일시장이
27일 설립인가를 받았다. 1998년 9월 11일에 해리면 라성리에 있던 라성신용협동조합과 합
고창신협 해리지점
다. 해리시장의 전신은 안자(安子)장으로, 안
진머리장이라고도 했는데, 무장에서 북쪽으
병하여 운영되다가 이것마저 2001년 3월 16일에 파산하였다. 이후 다시 고창신협에 새로 개
로 20리에 있으며, 4일과 9일 장이었다. 이 시
설하였다.
장은 조선 후기 굴이 많이 나와 굴죽이 유명
해리시장
하였다고 한다. 1790년 해리 하련으로 시장을 옮기면서 안자시장은 폐쇄되었다(全鮮茂長邑誌, 茂長市 鞍子市 在海里面). 안진머리시장은
(8) 고창군농업기술센터 해리면 농업인상담소
해리면 안산에 있었다. 해방과 더불어 물가상승 등 경
해리면 청해1길 13(하련리 627-1번지)에 있는
제의 혼란이 발생하자 정부의 주요 소비재에 대한 통제정책으로 인하여 이들 시장이 제대로
농업인상담, 우량품종보급, 현지순회 및 작물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은 6·25전쟁 이후까지도 지속되었다. 그러다
기술지도, 면학습단체, 품목별연구모임 육성
가 1956년 11월 30일에 해리시장이 가장 먼저 다시 개설되었다. 해리장은 한국전쟁 이후 급
등의 업무를 하고 있다. 농업인상담소는 농촌
속하게 성장하였고, 한때는 우시장으로 번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교통이 발달
에서 농민과 가장 긴밀한 관계성을 가지고 있
고창군농업기술센터 해리면 농업인상담소
는 공공기관이다.
(9) 해리면 복지회관
하면서 우시장은 급속하게 쇠퇴되었고, 이와 함께 점점 해리장은 쇠퇴하여 지금은 해리시장 점포의 3분의 1일 닫혀 있다고 한다. 해리장은 돼지국밥으로 유명하였다.
(11) 원불교 해리교당
해리면 복지회관은 해리면 청해1길 23(하련리 162번지)에 있는 지역사회보호사업과 자활사업
고창군 해리면 하련리 221-1(청해2길 44)번지에 있는 원불교 교당이다. 1967년 당시 고창군
등을 하는 공공기관이다. 해리면종합복지관은 가족복지사업, 노인복지사업, 아동복지사업
해리면의 윤심월명 교도의 주선으로 원불교 고창교당 최유권 교무가 직접 해리에서 보게
등 여러 부류의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된 법회가 계기가 되어, 같은 해 7월 26일 원불교 해리교당이 설립되었다. 초대 교무는 1969
330 ― 고창의 마을 제5집
해리면 하련리 ― 331
년 5월 16일에 온 김화경 교무이다. 2013년 현
(15) 고창새마을금고 해리지점
재 교역자는 이안성 교무이며 교도 조직으로
고창군 해리면 하련리 108-1에 있는 은행이
봉공회, 여성회, 어린이법회 등이 있다. 교도는
다. 새마을금고는 우리나라 고유의 주민협동
200여 명에 이르며, 매주 일요일에 정기 법회
수단인 두레, 품앗이, 향약, 계 등에 뿌리를 두
가 열리고 매월 기도와 매일 마음공부를 위해
고 있으며 주민협동조직, 주민생활은행, 주민
자선 및 기도가 열린다.
원불교 해리교당
평생교육의 3대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고창새마을금고 해리지점
3) 하련리 마을시설
(12) 해리교회
해리교회는 해리면 하련리 289번지에 있는 (1) 하련 여자경로당
기독교 대한예수교장회 소속이다. 현재 담임 목사는 서종완 목사이다. 해리교회는 2005년
고창군 해리면 하련1길 7(하련리 196번지) 해
부터 매년 어려운 이웃과 시설을 위해 써달라
리중앙교회 앞에 있는 하련마을 여자경로당이
며 총 1,800만 원 상당의 물품 기탁을 통해
다. 하련 여자경로당은 해리면소재지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해리교회
유일한 여자경로당이다.
(2) 남시 마을회관
(13) 해리중앙교회
하련 여자경로당
고창군 해리면 해리중앙로 58(하련리 674-4번
해리중앙교회는 해리면 하련리 199번지에
지)에
있는 기독교 대한예수교장회 소속이다. 현재
있는 남시마을의 모정이다. 남시마을 모
정은 해리장터가 있는 곳의 바로 옆에 있어 해
담임목사는 최정규 목사이다. 해리중앙교회
리당산제의 중심적 공간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14) 해리어린이집
지금은 해리장이 쇠퇴하면서 경로당으로 활용
어린이집은 6세 미만의 어린이를 돌보고 기
되고 있다.
남시마을회관 전경
르는 시설이다. 어린이의 보호자가 근로, 질 병, 기타의 사유로 돌볼 수 없을 때 국공립 단
(3) 동시 마을회관
체나 민간단체 또는 직장 따위에서 보호자
고창군 해리면 하련리 동시길 18에 있는 동시
의 위탁을 받아 보육하는 시설이다. 해리어린
마을회관이다. 동시 마을회관은 2010년에 건립
이집은 고창군 해리면 해리중앙로 67(하련리 115-11)에 있다.
332 ― 고창의 마을 제5집
되었으며, 부지는 해리양조장 안주인이었던 윤 석례 씨가 기증하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마 해리어린이집
을 주민들이 마을회관 앞에 비석을 세웠다.
동시마을회관 전경
해리면 하련리 ― 333
다. 모정은 앞면과 측면 각 2칸의 팔작지붕 건축물이다. 모정의 북동쪽에는 입암산성(가매
(4) 청해 마을회관
산)이 보인다.
고창군 해리면 청해2길 16(하련리 278-1번지) 에 있는 청해 마을회관이다. 마을회관은 고창
(9) 하련 우물
교육지원청 해리면 교직원 사옥 옆에 있다. 청해마을회관
하련 우물은 하련1길 18-6번지 앞에 있으
(5) 평장 마을회관
며, 철륭제를 지내는 신성한 우물이었다. 2011
고창군 해리면 평장길 21-4(하련리 426-2번지)
년 전까지 우물이 있다가 2012년에 콘크리트
에 있는 평장 마을회관이다. 평장 마을회관 뒤
로 막아 버렸다. 우물을 막아버리자 일부 주
로 배맨바우와 해리궁도장이 있다.
민은 철륭제를 지내는 신성한 우물을 막아버 렸다며 화를 내기도 하였다. 그만큼 하련 우
(6) 신대 마을회관
평장마을회관
고창군 해리면 하련신대길 33(하련리 311-4번
지)에
물은 지역주민의 식수원이자 가장 친숙한 공 동체 삶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하련 우물 터를 알려주고 계시는 주민
있는 신대마을의 마을회관이다. 신대 마
을회관은 세 곳의 자연취락 중간에 건립되었
(10) 신대 우물
다. 마을회관 앞에는 신대마을 모정이 있다.
신대 우물은 두 개소가 있었다. 한 곳은 신 신대마을회관
대마을 입구에 있는데, 그 우물의 깊이가 깊어
(7) 해리정
지금은 철제 뚜껑으로 덮어 놓았다. 다른 하
해리면 하련리에 있는 육각형의 정자이다.
나는 하련신대길 26-3번지의 마당에 있는데, 지금은 농업용수로만 사용되고 있다.
이 정자는 과거 해리파출소가 있었던 자리에 세웠다. 파출소가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자 이
신대 우물
곳에 있던 느티나무를 그대로 두고 그 옆에
(11) 평장 우물
해리정을 지은 것이다. 해리정 옆에는 해리면
평장 우물은 물이 아주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평장 우물도 수도가 집집마다 들어오면서
연혁비와 해리면연혁와비가 있다. 글은 이기화
해리정
없애버려 그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전 고창문화원장이 지었다. (12) 해리면 노성사(老成社)
해리면 노성사는 해리면 하련리 해리중앙로
(8) 신대 모정
53-4번지에 있는 노인단체이다. 노성사 안에
해리면 하련리 신대에 있는 모정으로, 4325
년(임신년, 1992)에 새로 건립된 석양의 모정이 다. 모정은 마을 앞 건는들의 용교천 변에 있
334 ― 고창의 마을 제5집
는 2003년에 건립된 2층의 벽돌건축물인 노 신대 모정
성사 본관이 있다. 본관의 1층은 양안재(養安
노성사 전경
해리면 하련리 ― 335
齋)이고,
2층은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노성사의 마당에는 단기 4343년(서기 2010년) 12월
2일에 건립된 육각형의 경로정(敬老亭)이 있다. 경로정 옆에는 송은청도김공요철공덕비(松隱靑 道金公堯鐵功德碑)와
노성사중건비(老成社重建碑)가 있다.
(16) 국궁장 초파정(超波亭)
이 시설은 원래 고창군 해리면 해리면 사반 리 각동 808에 있었으나 현재는 해리면 하련 리 448번지 일대로 이전했다. 초파정은 1983
(13) 해리 게이트볼 장
년 1월 15일 고 박종남 초대 사두를 비롯한 8
해리 게이트볼 장은 해리면 하련리 317-1번
명의 사원이 모여 사반리 각동에 과녁 1개를 설치하고 습시를 시작하면서 창립되었다.
지에 있다. 게이트볼 장은 기상에 영향을 받지
국궁장 초파정 전경
이후 86년, 인근 각동 산34번지로 이전하였
않는 실내건축물이다.
고 89년에 각동 해변가로 옮겼으며, 사원은 18명이 되었다. 91년에 다시 해리면 사반리 각 (14) 해리 건강목욕탕
해리 게이트볼장
동 1008번지에 자리하였다가 현재의 하련리 하련제 아래에 자리하게 되었다.
해리 건강목욕탕은 2013년 9월 해리면 하련 4) 하련리의 의료기관
리에 옛 해리면 종합복지관 건물을 리모델링해 서 만든 작은 목욕탕이다. 해리 작은목욕탕은
(1) 현대의원: 고창군 해리면 남시길5(하련리 170)에 있는 의원.
실, 탈의실, 화장실, 별도 샤워장 등 최적의 목
(3) 성심의원: 고창군 해리면 해리중앙로 88-1(하련리 194-1)에 있는 의원.
(2) 전주치과: 고창군 해리면 하련2길 38(하련리 212-4)번지에 있는 치과의원.
170㎡(약 50평) 내외 규모로 온탕, 냉탕, 사우나
(4) 효도한의원: 고창군 해리면 해리중앙로 94(하련리 206-1)에 있는 한의원.
욕시설을 갖췄다. 특히, 운영비 절감을 위해 남탕ㆍ여탕 구분 없이 하나의 탕을 남녀 격일
해리 건강목욕탕
(5) 해리약국: 고창군 해리면 하련리 209-1에 있는 약국.
제로 운영하고, 경유보일러 대신 에너지 절감형 보일러를 설치했으며, 해당 면의 자활근로자
(6) 우리약국: 고창군 해리면 하련리 해리중앙로 74번지에 있는 약국.
인력을 배치해 인건비를 대폭 절감하고 있다.
(7) 소망약국: 고창군 해리면 하련리 하련1길 10-12번지에 있는 약국.
(15) 고창교육지원청 해리면 교직원 사택
5) 하련리의 전설과 설화
이 시설은 고창군 해리면 청해1길 42(하련리
(1) 도둑골과 활빈당
278-2)에
있으며, 2007년 11월에 건립된 고창
하련 저수지 위에 있는 도둑골은, 많은 도둑들이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교육지원청의 교직원 사택이다. 이 사택은 고
이 도둑들은 자신을 보통의 도둑이 아닌 ‘활빈당’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부자의 가족 중 누
창 서부지역 학교에 근무하는 교직원들을 위
군가가 죽으면 도둑골의 도둑들은 그 부잣집의 대문에 크게 돈을 몇 월 며칠까지 가져다
한 것으로 지상 3층 규모로 지어졌다. 이 사택
놓지 않으면 묘를 파헤쳐 시신을 거둔다는 글을 써 놓았다고 한다. 그러면 부자는 하는 수
에는 고창읍에서 멀리 떨어진 상하, 해리면 등
없이 도둑들이 원하는 날짜에 돈을 가지고 도둑골에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도둑들은 매봉
고창 서부지역 학교에 근무하는 교사 40여 명
재에서 부자가 가져오는 돈을 보고 빙긋이 웃었다고 한다. 부자가 가져온 돈을 도둑들은
이 입주해 있다.
336 ― 고창의 마을 제5집
고창교육지원청 해리면 교직원 사택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자칭 활빈당이라
해리면 하련리 ― 337
칭하였다고 한다.
(5) 퇴앗골과 일제 강점기의 굴
일제 강점기 일본 군인들이 이곳 해리에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다. 일본 군인들은 배맨바 (2) 깐치네와 도깨비불
우 아래의 골짜기 곳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일제가 패망할 무렵 이들은
깐치네는 지금 평장마을 아래 주유소가 있는 곳으로 원래 이곳에는 소나무가 많았다고
이곳 청룡산 인근에 많은 굴들을 팠다고 한다. 이는 미군이 이곳에 상륙장전을 할 것으로
한다. 이곳에는 비가 오거나 밤이 깊으면 도깨비불이 항상 보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예상하고 전투태세를 갖춘 것이라 한다. 공음과 해리 일대 산 곳곳에 일제가 파 놓은 굴들
한다. 안산양반(이경춘)이 한 번은 해리에서 술을 잔뜩 먹고 취해 비틀거리며 걷고 있는데, 도
이 많다고 하는데, 이곳 평장마을 뒷산에도 아직도 많은 굴들이 남아 있다고 한다.
깨비가 안산양반을 끌고 다녔다고 한다. 안산양반은 안되겠다 싶어 도깨비를 줄로 소나무 에 꽁꽁 묶어 놓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다음날 날이 새어 그 자리에 가보았더니 그곳
(6) 배반바위 이야기
에는 빗자루만 묶여 있었다고 한다.
배맨바우 밑에는 두꺼비바우와 애기바우가 있다. 해리의 청룡산 인근의 바위들은 대부분
평장주민들에 의하면, 이곳에 도깨비가 많은 것은 많은 아이들이 병에 죽었다고 한다. 그
남쪽을 바라고 있다. 옛날 고창읍성을 축성할 때 일이다. 많은 돌들이 필요한 축성에서 축
러면 주민들은 죽은 아이를 보자기로 감싸 밧줄로 깐치네 소나무에 매달아 놓았다. 이렇게
지법은 필수였다고 한다. 축지법을 써서 많은 인부들이 이곳 청룡산에서 많은 돌들을 날랐
소나무에 매달아 묶어두면서 다른 동네 아이들이 다시는 죽지 말게 해달라는 기원이었다고
다. 사람들은 모든 바위들이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애기바우와 두꺼비바우만 북쪽을 바
한다. 그래서 그곳에 도깨비불이 늘 많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라본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은 이 바위를 배반한다는 뜻에서 배반바위라 불렀다고 한다. 지 금도 이 인근에서 묘를 쓸 때는 이 두 바위가 보이지 않도록 묘를 쓴다고 한다. 그래서 거
(3) 쟁팽이와 꺼적이
의 모든 묘들이 이 바위를 바라보지 않는다.
쟁팽이에는 소나무가 많았고, 이곳은 아이들이 죽으면, 아이를 보자기로 감싸 묶어 소나 무에 매달아 놓았다고 한다. 황기환 씨의 아버지가 젊은 시절 집을 지을 때 서까래보다 작
(7) 전국 최고로 고소한 평장기름
은 처마를 만드는 꺼적이를 이곳의 소나무로 쓴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소나무를 쓰고 얼
평장마을에는 전국에서 유명한, 고소한 기름을 짜는 집이 있었다. 그 집에서 참기름이나
마 후 갑자기 병이 들었다. 그래서 마을의 무당을 불러 굿을 하였더니, 그 무당이 지붕에서
들기름을 짜려면 하루씩은 묵어 가야했다고 한다. 평장기름집은 먼저 참깨나 들깨를 볶은
꺼적이를 쓱 뽑더라는 것이었다. 그 꺼적이를 뽑은 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고 한다. 무
다음, 이를 디딜방아로 찧는다. 찧은 깨를 어마어마하게 큰 괴목(느티나무)으로 눌러 짰다고
당은 꺼적이에 사람의 영혼이 있어 그 영혼이 아버지를 병들게 하였다고 말하였으며, 고인의
한다. 이때 짠 기름이 얼마나 고소하고 향이 좋았던지 인근에서 이곳으로 기름을 짜려고 몰
자녀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려 왔다는 것이다. 이 기름집에는 사람들이 묵어 갈 수 있도록 사랑방을 숙소로 꾸몄다고 한다. 평장기름은
(4) 배맨바우와 영광 사람
기름을 짜는 신기계가 들어오자 그만두고 서울로 이사를 하였다고 한다. 평장기름집은 40
배맨바우는 영광의 북문에서도 보이는데, 이 배맨바우가 영광에서 보면 꼭 상여가 나가는
년 전인 1970년대까지 있었다고 한다.
모습처럼 보인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영광 사람들이 이것이 보기 싫다고 해리 배맨바우에 와서 이 바위에 구멍을 뚫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영광 사람들이 배맨바우에 구멍을 뚫자
(8) 하련의 배형국과 배맨바우
그곳에서 피가 나왔고, 이를 보자마자 겁을 먹고 도망간 후에는 절대로 파괴하려 하지 않았
하련리는 풍수적으로 배 형국으로 짐이 많이 실려 있으면 배가 전복된다는 속설이다. 이
다고 한다.
338 ― 고창의 마을 제5집
러한 속설 때문에 돈을 벌면 하련마을을 떠나야 한다는 설이 있다. 하련리 자체의 지형이
해리면 하련리 ― 339
남북으로 높은 산들이 발달함에 따라 수계는 동서로 발달하게 되었다. 하련리는 동서로 발 달한 고성천의 수계가 만든 퇴적지형에 입지한 지역이다. 이러한 지역은 풍수적으로 수계가
짧아 물이 적을 때는 행주형(行舟形)의 풍수적 형국으로 불리기도 하고, 골이 깊어 하상계수
(河狀係數)가
크거나(유량변동) 하천의 유로가 자주 바뀌는 곳을 파주형(波舟形)이라 부르기도
한다. 고성천의 주위의 지형이 배의 형국이기 때문에 이러한 속설이 있는 듯하다. 배맨바위 는 배 모양의 하련리가 어떠한 홍수와 풍랑에도 표류하지 않게,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도록 정박해두는 관념상의 개념이다.
도움 주신 분 김성재(고창군청 민원봉사과) 오성동(고창군농업기술센터) 황기환(1935년 생, 평장) 이복안(1929년 생, 신대) 장봉심(1952년 생, 평장) 정팔봉(75세, 평장) 주용술(1938년 생, 동시)
6) 하련리 역대 이장
김지연(해리파출소)
남시 성명
동시
하련
제직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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