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의마을제5집 신림면벽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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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심과 애경의 마을, 벽송리 서동진

신림면 벽송리

외화리 법지리

무림리

도림리 덕화리

1. 마을의 위치와 유래

송용리 가평리 자포리

벽송리

연부락으로 용교동과 사실터마을이 있다. 서월리의 자연부락은 평월리, 대포리, 세터, 서당 신평리

부송리 세곡리

법정리인 신림면 벽송리는 행정리인 벽송리와 서월리로 이루어져 있고, 이 중 벽송리의 자

반룡리

촌이다. 본래 흥덕군 일서면의 지역으로서, 벽송, 오월리, 또는 오동촌이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산직동, 세월리, 평월리, 서당촌, 덕림촌, 용교동의 각 일부와 이서면 의 신림촌, 마산리의 각 일부 지역이 벽송리로 병합되었다. 이후 고창군 벽사면에 편입되었 다가, 1935년 벽사면이 없어지면서 고창군 신림면에 편입되었다. 1) 벽송리 신림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약 3㎞ 지점에 1650년경 천안전씨가 터를 잡아 입촌하였다. 이후 흥덕군 일서면의 지역으로서, 벽송, 오월 리 또는 오동촌이라 불렸다.

조선조 제21대 영조 때 효자 송와(松窩) 전덕

수(全德秀 또는 전배수全培秀)의 8대조(代祖)가 마 을 뒷산에서 시묘살이를 하고 있을 때 묘 근

벽송마을 전경

신림면 벽송리 ― 237


처의 소나무들이 송충이로 인하여 죽어가므로 애통하여 울었더니, 갑자기 까치와 까마귀가

날아와 벌레들을 잡아먹었다. 서기 1764년경 이곳을 지나던 흥덕현졸(興德縣倅) 안집이 이 소

리를 듣고 마을 이름을 벽송(碧松)으로 고치게 하였다. 마을에는 천안전씨, 창녕조씨, 여산송 씨 등이 살고 있다. 서월마을 전경

2) 용교동

서월마을 표지석

벽송리에 두 번째쯤 생긴 마을로, 벽송리

부락에서 한 자씩을 따서 서월리로 개칭(改稱)하였을 뿐 아니라 대포리와 세터도 통합되었다.

에서 동북쪽으로 약 100m 떨어진 곳에 15

주민으로는 여산송씨, 신평송씨, 평산신씨, 전주이씨, 동복오씨, 주씨, 한씨 등이 살았다.

호 정도의 작은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마

마을 유적으로는 철원주씨 주대현의 처 밀양손씨의 효열 정려각이 있다.

을 앞에 수랑 논과 샘물이 솟아 마을과 마 을을 건널 때 불편하여 다리를 설치한 것이

5) 서당촌

유래가 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수랑 논

용교동 동쪽에 있는 마을로, 큰 서당이 있었다.

은 끊임없이 샘물이 솟아서 주민들은 이 샘

용교마을 전경

물을 이용했다. 주민으로는 여산송씨, 려양진씨, 남원양씨, 함평노씨, 수원백씨, 청주한씨 등이 살았는데,

이후 천안전씨도 정착하였다. 이 용교동의 지형은 구룡농주(九龍弄珠)의 형국이다.

서당촌 표지석

6) 평월리

세터를 지나 대포리 북쪽 길가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운중반월(雲中半月) 형국이다.

3) 사실터 일명 대강리(대흥리)라고도 한다. 벽송리에서 약 3㎞쯤 서쪽으로 두엄바위 밑과 원치산 아 래 형성된 부락이다. 일제 강점기 때 원치산 한천동에 김두연 씨가 임야를 개간하여 과실수 를 심고 주거지를 옮긴 것을 시작으로, 8·15해방 후 유석준 씨가 두엄바위 아래 장인 되는 평월마을 전경

신기엽 씨가 조성한 감나무 과수원을 인수하고 관리사를 건축하여 이주하였다. 이후 일제

평월마을 표지석

말기에는 보천교의 신도들이 10여 호 넘게 살았다. 사실터는 서해안고속도로개발과 인구감 소로, 지금은 상행선과 하행선 휴게소와 농축산업이 번창하고 있다. 4) 서월리 벽송리에서 동북쪽 500m 지점에 있는 서월리는 1077년경 은진송씨, 전주이씨, 양천허씨가

2. 벽송마을의 입향성씨와 유래 천안전씨의 시조는 섭(聶)이고, 입향조는 철명(哲命)이며 생몰년대는 미상이다. 그리고 입향

년대는 조선 중기(1650년경)이고, 입향지는 벽송리이다. 입향유래는 충남 천안시 풍세면 삼태

터를 잡아서 입촌하였으며 아산면 운곡 10리 운양 10리 점이 되었다. 그러다가 마을이 커지

리에서 중해(仲海)가 신림면 유점으로 낙향하였고, 그 후손 철명이 신림면 벽송리에 이거 14

면서 1900년경 평월리와 서당촌으로 불리다가 다시 1945년 광복 후 서당촌과 평월리의 자연

세를 세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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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림면 벽송리 ― 239


입향세계

제 45세 철명·극신·성공·창석·덕수·치흥·명순·필찬·병숙·영봉·의식·용우·철중·종

지 정성을 다해 대소변을 받아냈다. 이후 병세가 깊어지자 손가락을 단지해 연명하게 하였

다. 그리고 시묘살이까지 정성껏 하였다(현손-전제헌). -『흥성지』효자 편

복이다.

전씨의 본관은 시조 전섭(全聶)이 백제 건국에 동참하여 백제 개국 십제공신에 녹적되었고,

환성군(환성은 천안의 고호임)을 수봉한 것이 천안전씨의 득관에 유래가 되어 전해오고 있다.

전씨의 기원은 백제 개국 원년인 단기 2316년(계묘, 기원전 18년)에 시조 환성군 전섭의 창기

한 이후 2000여 년 동안 동족동성동본으로 우리나라 성씨 순위 21위에 해당한다.

3. 벽송마을의 인물과 행적 1) 효자 전덕수(全德秀, 1724~1784) 본관은 천안이고 자는 윤옥(潤玉)이며 호는 송와(松窩)이다. 송와는 아버지의 상을 당하고 장지물색을 골몰하던 중 꿈속에 한 노파가 가리키는 곳이 집 뒤 온남정이었다. 이곳은 오좌

5) 효자 전용채(全容彩, 1921~1998) 본관은 천안이고 호는 효벽(孝碧)이다. 효자 전용채는 효와 애로 부모님을 섬겼다. 그러나 가세 불운하여 셋째로 부모상을 당했다. 그리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효행비가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후손-전기홍). -『흥성지』효행 편 6) 효열부 탐진안씨(耽津安氏, 1853~1914)

천안인 전인호(全仁鎬)의 처로, 시부모를 모시고 시집온 지 10년도 안 되어 남편 상을 당했 다. 탐진안씨는 남편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시어머니께서 어린 새끼를 어찌 양육할까 하 였다. 그 후로 앞 못 보시는 시어머니와 자식들을 지극으로 키우고 효도하니 참으로 고금 에 드문 효부라 감탄했다(6세손-전기홍). -『선국삼강록』,『향삼강록』,『흥성지』효부 편

로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형상의 곳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소나무를 심어 3년 시묘살이를

하였다(『전북도지』,『향삼강록』에 상세하게 기록됨) 이후 마을 이름을 오월(梧月)리에서 벽송(碧松) 으로 고치게 되었으며 효행비가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후손 9세손-전배수).

7) 열부 여양진씨(驪陽陳氏, 1903~?) 천안인 전영열(全泳烈)의 처로, 여양진씨는 청상으로 수절하며 타인과 동기 앞에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을뿐더러, 오리려 친척들을 위로하니 절개와 정절의 미열은 고금에 드물었

2) 효자 전기원(全基源, 1856~1930) 본관은 천안이고 자는 인숙(仁淑)이며 호는 취송(翠松)이다. 취송은 부모님 섬김이 지성이었

을 뿐 아니라, 충효의 뜻과 함께 형제끼리 우애가 돈독하였다(현손-전병오). -『전북도지』 3) 효자 전영봉(全泳鳳, 1859~1924)

본관은 천안이고 자는 대홍(大洪)이다. 대홍은 정성과 효도로 부친병환을 날이면 날마다

봉양하는 절차에 따라 예를 다 했다(현손-전종복). -『전북도지』,『흥성지』효행 편

다(손-전용택). -『흥덕향지』열부 편

8) 효열부 하동정씨(河東鄭氏, 1866~1814) 천안인 전영유(全泳維)의 처로, 하동정씨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의 병이 깊었다. 이 에 백방으로 약을 구해 극진하게 간병을 하였다. 부인은 온갖 정성으로 뱀탕과 자기 몸의 일부를 떼어 약으로 대신하였다. 이후 미음 죽으로 2년여를 지내다가 졸하였다. 소생 없는

청상으로 종자 전성식(全星植)을 사자로 드리고 시부모 섬김에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이에 향리에서는 효부와 열부라 칭찬하였다(현손-전종명). -『흥성지』효부 편

4) 효자 전영좌(全泳佐, 1861~?) 본관은 천안이고 초휘가 종학(鍾學)이며 자는 선범(善範)이다. 선범은 어려서부터 부모님께

9) 열부 의령남씨(宜寧南氏, 1902~1988)

효성이 지극하였다. 선범은 집안이 가난했지만 아버지의 병환을 백방으로 알리어 치료를 하

천안인 전래식(全來植)의 처로, 의령남씨는 성혼 후 얼마 안 되어 남편 상을 당하니 나이 젊

였으나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이에 슬픔이 크지만 분가한 몸으로 노모에게까

고 소생이 없었다. 이에 남편을 따라 죽기를 결심하고 목도 메고 물에도 빠졌으나 집안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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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구출하여 예를 다하였다. 그 후 상장을 치르고 50여 년

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근촌은 벽송리에서 공부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이제는 한

후, 상위에 조카(전용술)를 입후하여 가도를 일으켜 세웠다. 이

문만을 배워서는 외세를 이길 수 없다고 설득하기를 반복하였다. 그리고 여러 날 마을을 떠

에 향리에서는 효부와 열부라 칭탄하였다. 이후 사적을 기린

났다가 다시 돌아와 머리를 깎자, 신학문을 배우자, 마을 사람들에게 설득하였으나, 정작

열녀 행적비가 벽송리 뒤에 있다(증손-전종관). -『흥덕향지』열부 편에

따르는 사람이 없자 한탄하며 마을을 떠나갔다.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 선거 때는 유세차 마을을 찾아와 하는 말이, “이곳은 내 꿈이

상세하게 기록됨.

잉태한 자리요, 내가 글을 읽고 뛰놀던 곳이요, 내 처가가 있는 곳입니다. 내가 떠난 후 항상 10) 열부 안동권씨(安東權氏, 1930~2010)

잊지 못했으나 이제야 찾아오니 죄송하고 감회가 새롭습니다”라고 하면서, 마을 분들의 이

천안인 전용판(全容判)의 처로, 안동권씨는 6·25전쟁 때 혈

름과 택호를 한 사람 한 사람 부르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육 한 점 없이 청상으로 수절하였을 뿐 아니라, 조카(전극중)를

벽송리 사람들은 이런 오지에서 공부한 백관수 선생을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하

입양하여 집안을 일으키니 동기와 조상 앞에 절개를 지킨 삶 이었다. 이후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되어 효열기적비가 마을 입

고 있다. 이런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이곳 출신들이 국가공무원이나 일반회사에 근무하는 의령남씨 열녀비

구에 세워져 있다(손-전지용). -『흥덕향지』열부 편

분들이 많은 편이다(이용술 님).

4. 마을의 문화유적과 유물 11) 전종식(全宗植, 1893~1950) 본관은 천안이고 자는 태화(泰化)이며 호는 담광(澹光)이다.

1) 벽송리의 지석묘

담광은 성품이 자상하여 자녀교육을 위해 1937년 서기봉(徐基

벽송리의 587-1에 청동기시대 지석묘는 서해안고속도로 상행선 고인돌 휴게소에서 남쪽

선생을 모셔다가 공부방을 만들었다. 이후 주위의 권고를

으로 약 100m 전방의 논둑에 지석묘의 크기는441×417×153㎝로서, 평면형태는 방형, 단면

奉)

받고, 1942년 독학당에 해암리 주태엽(周泰燁) 씨와 간이학교를

은 장방형을 띠고 있다. 장축은 북동-남서방향이며 5개의 지석이 확인된다. 이미 도굴이 이

공동으로 설립하였다. 그 이후 1947년 신림보통학교에 이관 후, ‘신림보통학교벽송분교’로 운영하였으나 1950년 6·25전쟁

루어져 하부가 움푹 파헤쳐진 상태이다. 현재 이 주변에서는 몇몇 석재들이 눈에 띄지만 논 안동권씨 열녀비

에 묻혀 있어 정확한 상태는 알 수 없다.

으로 인하여 폐교가 됐다. 문중재각 축조과정에서 부지를 물색하는데 어려움을 당하자, 벽송리 산42번지의 임야

(16,868㎡)를

종산과 재각건축부지로 쾌척하였다(현손-전승민).

2) 밀양손씨 정려각 벽송리의42-1에 밀양손씨 정려각은 서당촌 마을 진입로 우측에 위치한다. ‘광무8년 6월

12) 근촌 백관수(1889~1951)

(1904년)’에

서당이 두 곳이나 있는 벽송마을에서 공부한 사람으로, 근촌 백관수가 있다. 성내에서 이

양 손씨의 정려각으로, 정면 1칸의 팔작지붕

곳까지 유학을 온 근촌은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교육자, 정치가로, 이 마을의 김해김씨 규

을 하고 있으며 4개의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수를 맞아 결혼하였다.

있다. 정려각 안에는 밀양 손씨의 효열을 기리

근촌은 생각과 행동이 대범할뿐더러, 확실한 국가관으로 보는 사람에 맞추어 계몽(啓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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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워진 호조참판 주대현의 처 밀

는 비가 세워져 있고, 3개의 정려각 현판이 결

밀양손씨 정려각

신림면 벽송리 ― 243


려있다. 현재는 담장이 무너지고 외문만 남아 있다.

논들을 말한다. 뒷들논 서당마을 밭쪽에서 사실터 쪽으로 이어지는 100여 마지기의 논을 말한다.

3) 유물산포지

드렁잇-골 둔터 동쪽에 있는 들로서 지형이 드렁이와 같은 형국이다.

벽송리의 1049번지에 원삼국 유물산포지는 서당촌마을 북쪽 해발 48m의 저평한 구릉지

물방앗-뜸[수침] 새터 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마을 앞 내에 물레방앗간이 있었다.

대에 위치하는데, 구릉의 동쪽과 서쪽은 각각 몽사와 인삼밭, 묘목밭, 대규모의 수박밭 등

방죽밑 논 동월랑재 밑에 200여 마지기의 논을 말한다.

이 조성되어 있어서 전체적으로 삭평이 심한 상태다. 이곳에서 수습된 유물은 연질타날문토

산직-뜸[산직촌] 새터 옆 산 밑에 있는 마을로서 산지기가 살았다고 한다.

기편, 경질타날문토기편 등으로 고른 분포를 보이고 있다.

산직-촌 산직 뜸. 삼일-치¹ 사실터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5. 벽송리의 지명과 유래

삼일-치² 사실터 마을이다. 새터 평월의 북쪽 길가에 새로 된 마을이다.

한세정 드렁잇골의 구렁진 곳에 있는 샘으로 크고 깊은데 물이 대단히 차서 여름에는 목욕

서울 서당촌과 평월리 사이에 있는 벽송리에 있는 마을이다. 수침 물레방앗 뜸.

터로 유명하다. 광산김씨 묘소 평월리에서 서쪽으로 200m

신평 벽송 서쪽에 새로 된 들이다.

지점에, 다른 지역의 광산김씨 묘소를 최근에

신평굴 벽송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고 신평 위가 된다.

옮겨 조성되었다.

신평굴-잔등 신평굴에 있는 작은 산등성이고 높이가 55m 쯤이다.

당산-보 벽송 서쪽에 있는 보.

오동촌 벽송리.

동을랑-제(서전제) 서당촌 앞에 있는 못으로,

오월리 벽송리.

임진왜란 때 공사를 맡아 하던 이의 이름을

전씨 재각 계당령에서 서쪽으로 자라머리나 반달 같은 산등이 있는데, 좌측으로 한조등이

붙여 ‘동을랑’이라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서

고 우측으로는 고작등이다. 동쪽으로 두 산맥이 뻗는데 한쪽은 고작등이고, 한쪽은 용교동

당촌 앞이 되므로 서전제라고도 한다.

김주항과 김대의 묘 전경

둔터 벽송 남쪽에 있는 들로서 임진왜란 때

을 두른 백일홍등이다. 자라머리터에 자리한 전씨 재각은 서쪽으로 들이 있고, 이 들은 남북 으로 길게 뻗어 고창읍과 부안면을 경계하고 있다.

이곳에 진을 치고 싸웠다고 하고, 큰 장수 골과 작은 장수 골의 논 밑에 있는 약 50마지기 의 논을 말한다. 큰장수 골 큰 장수 골에 있는 20여 마지기의 논을 말한다. 본래 이곳의 논들은 약 80마지

기였으나 지금의 장수제를 막아 위의 논을 큰장수 골 논, 장수제 밑 40여 마지기의 논을 방 죽밑 논이라고 한다. 두룡골 논 황새 골과 나들이의 사이에 200마지기의 논으로 드렁이처럼 길게 뻗은 들을 말

한다. 당산리들 당산나무가 있어서 마을 이름을 당산리라고 하고, 그 앞에 있는 100여 마지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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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씨 재각에서 전씨 문중 사람들.

전안전씨 위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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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각에는 천안 전씨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 곳의 지명은 승판곡이었으나, 1900년경에 승 판등으로 변경되었다.

과 흡사하여 이름 지어졌다. 전씨 문중의 선산으로 재각이 있 고 그 산 끝자락에는 마을회관이 있다.

전씨 묘소 벽송마을 마을회관에서 북쪽 100m 지점과 용교 앞에 천안전씨 묘소가 있다. 전씨 비 벽송마을에서 동쪽 130m 마을 입구에 천안전씨 세천비와 효열비, 열녀비가 있다.

보동계 유적비 부송리와 벽송리의 마을 입구에 있는 유적비

이다. 인근 마을 사람들이 두레를 조직하여 모심기 두레, 김매 기 두레, 길쌈 두레, 풀베기 두레를 하여 농사를 짓는다.

6. 마을의 유래와 이야기들 보동계 유적비

1) 벽송마을 당산제

인간이 살면서 토테미즘 사상에 의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벽송마을에서는 먼 옛날부 천안전씨 묘소 전경

용교 앞 천안전씨 묘소

터 마을 사람들의 삶과 안전을 당산 할머니에게 의지하여 선한 자는 복을 받고 악 한 자는 벌을 받는다는 마을 제전 행사로 당산제를 모셔 왔다.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을 당산 할머니 제일로 정하고 행사를 준비했다. 마을 전 주민이 7 일 전부터 일체 고기를 먹지 않고 채식 위주로 식사를 하고 나쁜 일은 듣지도 보지도 않았 다. 주민 모두가 몸가짐을 청결하게 다스렸다. 이때가 되면 제수를 마련하기 위하여 농악을 울리고 제수 물품을 모으고 보통사람들이 사용하지 않는 지정된 우물을 정하여 청결하게 하였다. 그곳에서 떠온 물로 밥과 제물로 장만하였다. 당일 제주는 그 해 신기복덕을 가려서 꼭 운세에 맞는 사람을 골라 시켰다. 당산 전날 밤은 마을 전 주민이 집집마다 불을 켜고 참여하여 새해를 맞이하는 뜻에서 농

송와천안전공휘덕수효행적비

천안전씨세천빈

효부천안전공음채행적비

악을 쳤다. 그리고 마을 주변을 초경, 중경, 야경에 걸쳐 전 주민이 세 바퀴를 돌았다. 지금 도 제물을 올리고 행사를 마무리하는 습관이 연례행사로 내려오고 있다(전선례 님).

자라바위 화등산보 아래쪽에 있는 바위로서 모양이 자라와 흡사하다. 장석지보 벽송리에서 800m 남서쪽으로 장석굴 쪽에 있다.

2) 서기봉 선생(무안 출신)을 모시고

자라보 자라바위 위에 있는 보.

1937년 여름 어느 날, 마을 모정에 길손이 찾아와 좀 쉬어가자고 청했다. 마을 주민들이

자라골 벽송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황새골논 황새등 밑에 100여 마지기의 논을 말한다.

허락하고 그 손님을 모셨는데, 길손의 해박한 이야기에 해가 지는 줄을 몰랐다. 이때 전경중 씨 조부 전종식 어른이 우리 집에서 유숙하고자 청하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화등산 벽송 남쪽에 있는 산으로, 진사 김씨의 묘가 있는데 화등과 같은 명당이다.

신학문과 애국정신이 넉넉하여 연유를 묻고, 우리 마을에서 어린아이들을 공부시켜 줄 것을

화등산-보 화등산 아래에 있는 보.

청했다. 이에 쾌히 승낙하여 바로 공부방을 마련하였다. 어린이뿐만 아니라, 생활이 어려운

필봉등 승판곡과 벽송동의 사이에 서남간에서 동북간으로 뻗은 산등으로 마치 붓의 모양

사람까지 공부를 시키다 보니 인근 사람들까지 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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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공부방 확충을 위해 뜻을 같이 하는 분들과 상의한 끝에, 서당촌 주태엽 씨 소유 의 산에 간이학교를 1942년에 세웠다. 교육 내용은 신학문과 민족교육을 목표로 해 오다가 1947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신림보통학교에 이관됐다. 이에 신림보통학교벽송분교로 운

있다. 그곳에는 벽송리를 길지로 여겨 정착한 천안전씨 후손인 운자 록자로부터 그 후손 창

자 향렬까지 10여 내외 분의 묘소가 모셔져 있었으나, 서기 1900년경 지금의 학조동(鶴鳥洞,

한조등鷴鳥嶝-황새골)과

승판등(承判嶝)으로 모두 이장(移葬)이 되었다. -『향토소고』전경중

영하다가 1950년 6월 25일 전쟁으로 폐교되었다. 그 이후 학교 건물을 뜯어다가 평월리 물래방앗간을 지었다. 서기봉 선생을 두고 벽송리

사람들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벽송리까지 온 분이 아닌가 하고 지금도 이야기하고 있다(이

용술 님).

6) 백일홍등(嶝) 용교동의 뒷산을 말한다. 옛날 그 곳에는 백일홍 나무들이 군락을 이루어서 붙여진 이름 이라고 하고, 작은 마을도 있었다고 하나 근거는 없다. 이 근처에 방죽이 있었는데, 샘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또한 근거는 없으나 다만, 동으로 뻗은 산등성에는 큰 고분

3) 4부자가 6·25때 학살당하다

이 여러 기가 있었음을 볼 때 호족들이나 부호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일홍등 서쪽

이재풍, 이강철, 이호철, 이인철 씨가 6·25때 학살을 당했다. 이재풍은 신림면 초대면장이

용교동 뒷산에는 천안전씨 소문중의 산소가 있다. -『향토소고』전경중

었고 이강철은 이재풍의 큰 아들로서 경찰이었다. 6·25때 인민군은 남한 정부 공직자들을 인민재판 내지는 즉결처분하였다. 그 당시 숨어있던 이재풍 가족은 자수하면 살려주겠다는

회유를 믿었으나 결국 그 가족들 모두가 학살됐다. 그러나 영철(79) 씨와 융철(73) 씨는 나

이가 어려서 살았다(송한섭 님).

7) 서산 호남산맥의 방장산이 서쪽 관은정을 지나 원치산과 사실터를 지나는 2㎞의 산맥이다. 그 리고 서산 아래로 서해안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서산에는 6·25 전쟁까지만 해도 새 절이 있었으며 이 절은 빈대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터만 남았다. 그 밖에 두엄바위, 큰 골, 작은골, 대우게, 넉덜, 배운재(백운재), 화실봉(동학란의 전적지)이 있다.

4) 두엄바위(범바위)

당산리에서 서산 넉덜로 좌우 경계를 따라 신림면 벽송리와 부안면 운양리로 나뉜다. 그

신림면 벽송리와 아산면 운곡리를 경계로,

리고 서산의 정상을 경계로 아산면과 경계를 이룬다.

서산 중심 봉우리에 있는 이 큰 암석은 멀리 서 보면 달리는 버스 같기도 하고, 가까이서 보면 투구를 쓴 장군 같기도 하다. 그리고 밤

8) 온남정

에 보면 호랑이 같기도 하여 범바위라고 불

벽송 뒤 서쪽 산 밑에 있는 샘으로, 조선조 영조 때 효자 전덕수가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린다. 바위엔 솔개와 부엉이를 비롯한 새들의 둥지가 있고, 바위 아랜 살쾡이, 너구리, 호랑

묘자리를 찾고 있던 중 노인의 현몽에 따라 이 샘을 발견하고 샘 위쪽에 묘를 썼다. 그리고 두엄바위 전경

이 굴도 있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달래, 칡, 산나물을 캐러 갔다가 호랑이가 먹다 남은 고기를 가져다 먹었다고 한다(전극중 님).

바위 틈에서 물이 새어 나왔다. 이 온남정은 옻나무가 자생하고 촌락이 생기면서 칠목정이라 불리던 것이 전씨들의 묘역 으로 단장되어 있다. 서산에서 온남정을 보면 호롱불처럼 보여 화등산이라고도 부른다.

5) 빈대절 터

9) 양조장 터

서산에 자리한 부안면 백운리 쪽의 절터로, 그 모양이 빈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평월리 경로당에서 남쪽으로 70m 지점에 이기춘 씨가 1970년대에 운영하던 양조장이 있

고 하나, 절에 빈대가 많아 스님들이 시달림을 받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는 구전(口傳)이

248 ― 고창의 마을 제5집

었으나 지금은 터만 남았다. 이 양조장은 2000년경에 임리로 이사를 하였으나 지금은 그마

신림면 벽송리 ― 249


저도 중단된 상태다. 이기춘 씨는 양조장에서 번 돈을 마을

2) 마을 환경과 성씨별 거주현황

과 신림중학교에 장학금과 땅으로 기증했다. 그래서 평월리

(1) 마을 환경

와 신림중학교에 이기춘의 공적비가 있다(송기홍 님).

벽송리의 크기는 총면적 389.7㏊이며, 그 가운데 답 97㏊, 전 53.4㏊, 임야 162.8㏊, 대지 8.2㏊, 기타가 68.3㏊이다.

10) 칠성바위

벽송리는 서산 사실터에서 동쪽으로 평월리까지 약 5㎞ 안에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산맥

승판등에서 벽송리로 내려오는 산등성이에 큰 바위가 있

은 곧 높아 방장산과 서산으로 이어져 있고, 그 산봉우리 위로 하늘이 지붕을 이루고 있다.

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이 마을의 천륭(天隆)에 있는 큰 바

마을의 길마다 굽이굽이 들고 난 옛길을 유지하고 있으나, 서해안고속도로와 23번국도 옆

위가 바로 칠성바위라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영험하

으로 상가들이 계속 늘고 있다.

게 믿고, 그 곳에 가서 기도를 올리거나 제(祭)를 지내며 소 원을 빌었다. 그리하여 득남을 하면 그 이름에 쇠바위 또는

(2) 성씨별 거주현황

‘바위 석(石)’자를 넣어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기춘 공적비

7. 마을 현황과 생활상

강 고 김 노 남 박 서 손 송 유 이 안 임 전 조 진 허 벽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송 리 2 1 5 1 1 2 1 2 2 3 3 1 1 18 3 2 1 강 공 기 김 나 문 박 백 송 신 안 양 오 유 안 이 장 전 정 조 주 한 허 홍 황 서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월 리 1 1 1 12 1 1 2 1 4 5 1 1 3 6 1 4 1 2 2 7 2 2 1 1 1

1) 백송리의 인구와 마을조직 (1) 벽송리 인구현황(2013. 5) 마을명

세대

총인구

벽송

49

87

46

41

서월

62

121

57

64

(3) 벽송리 거주자

전종주(농업,49세) 손관문(농업,41세) 박금순(가사,78세) 전효진(학생,18세) 전혜정(학생,16세) 전재

영(학생,12세) 박계순(가사,73세) 진년수(농업,86세) 전극중(교감,59세) 전지용(학생,19세) 전용일(농

(2) 백송리 마을조직(2013. 5)

이장

지도자

부녀회장

벽송

진백규

김락봉

안효남

이용술

서월

송한섭

김신철

김삼순

송기홍

개발위원장

치원,3세)

전용학(농업,78세) 이영숙(가사,68세) 이정순(가사,70세) 김옥순(가사,78세) 전용백(가사,92세)

이경숙(가사,80세) 강덕순(가사,80세) 유재열(농업,74세) 박영희(가사,70세) 이용술(농업,74세) 전선례 (농업,72세) 세)

(3) 벽송리 역대이장 현황(2013. 5) 2000~2001

2002~2003

2004~2005

벽송리

조희문

조희문

조희문

진백규

전일중

진백규

진백규

서월리

송한섭

김석순

김석순

송한섭

송한섭

송한섭

송한섭

250 ― 고창의 마을 제5집

조연임(가사,80세) 전석중(농업,73세) 김남임(가사,76세) 고임순(가사,78세) 서금성(농업,49세)

박문숙(농업,46세) 서성원(유치원,3세) 조인녀(가사,78세) 전치중(농업,46세) 원리화(27세) 전현우(유

마을 조직체

마을별

업,84세)

2006~20077

2008~2009

2010~2011

2012~현재

전용윤(농업,73세) 김순자(가사,69세) 전중선(농업,42세) 전종열(농업,72세) 박순복(농업,62

전용규(농업,85세) 김금순(가사,80세) 전용훈(농업,78세) 유순례(가사,75세) 노순녀(가사,85세) 전

용필(농업,80세) 이종이(가사,77세) 송금순(가사,78세) 김하연(농업,84세) 김귀남(가사,78세) 김락봉(49

세,농업)

윤혜정(41세) 김은섭(유치원,7세) 임종연(농업,70세) 송기수(농업,76세) 양양례(농업,65세) 김

업,67세)

전상용(농업,54세) 안효남(농업,48세) 전아람(회사원,25세) 전다영(회사원,23세) 전은주(대학

송자(농업,70세) 유우순(가사,76세) 진백규(농업,64세) 변봉순(농업,60세) 조희문(농업,73세) 주정님(농

신림면 벽송리 ― 251


생,21살) 세)

전다은(고등학생,19세) 김홍술(농업,64세) 지영애(농업,60세) 강영대(농업,60세) 김영애(농업,57

조기동(농업,86세) 심일순(가사,76세) 조상호(고등학생,19세) 조형호(고등학생,17세)

(8) 벽송리 출향인사

진년수는 1927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의무대위와 예비군중대장을 지냈다. 전용익은 1928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초등학교교장을 지냈다.

(4) 대포리 거주자

전권중은 1933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전매서장을 지냈다.

정운수(농업,78세) 백행기(농업,72세) 나정순(농업,67세) 조맹년(가사,91세) 김신례(가사,85세) 조선

전경중은 1932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중등학교교장을 지냈다.

순(농업,77세) 송기홍(농업,68세) 김삼순(농업,64세) 오창용(농업,72세) 손분례(농업,67세) 조한근(농

업,80세)

문막내(농업,74세) 김석순(농업,70세) 신영자(농업,64세) 조덕행(가사,59세) 조권행(가사,52세)

전용국은 1934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육군대령으로 제대했다. 이용술은 1936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초등학교교감을 지냈다. 유홍종은 1937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육군대령으로 제대했다.

(5) 서당촌 거주자

전일행은 1938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군청과장과 면장을 지냈다.

송한섭(농업,70세) 유용숙(농업,67세) 강춘례(가사,81세) 봉순임(농업,93세) 유삼순(노업,79세) 신동

전용기는 1944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육군중령으로 제대했다.

하(농업,73세) 윤옥자(농업,73세) 이후옥(가사,78세) 유채순(가사,91세) 정난순(가사,77세) 김동균(건설

업, 59세) 세)

공정학(건설업,48세) 김재봉(농업,80세) 김송월(농업,65세) 나복례(가사,81세) 이재호(가사,79

한범석(농업,65세) 김공순(농업,62세) 김문식(농업,53세) 전순례(농업,50세) 김옥순(가사,85세) 오

향택(농업,72세) 김순복(농업,73세) 신동곤(음악,45세) 김용옥(농업,79세) 전점례(농업,76세) 황정순(농

업,80세)

장재엽(농업,81세) 안옥주(귀농,55세) 김경애(귀농,51세) 김문식(농업,54세) 전순례(농업,52세)

이재호(농업,79세) 김옥순(가사,84세)

전흥중은 1945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부면장을 지냈다. 전용조는 1948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육군중령으로 제대했다. 전극중은 1954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중등교감을 지냈다. 전풍중은 1954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초등학교 교감으로 근무하고 있다. 전민식은 1954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경찰서에서 경위로 근무하고 있다. 전성룡은 1954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중등교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전용배는 1955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근로복지공단에서 근무하고 있다.

(6) 세터 거주자

전선식은 1955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관세청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박태순(농업,75세) 김옥순(농업,68세) 송재운(농업,81세) 김금자(농업,75세) 송진열(농업,65세) 신경

전관중은 1955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해병원사로 제대했다.

순(농업,64세) 유재길(농업,57세) 강해경(농업,55세) 양성만(농업,74세) 최순자(농업,70세) 조영환(건설

업,73세)

조희만(건설업,50세) 변미자(세무서,45세) 허명석(가사,80세)

전선일은 1955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행정학박사로 선거관리위원회에서 근무하고 있다. 전대중은 1955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농협지부장을 지냈다. 전종석은 1956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육군대령과 교수로 근무했다.

(7) 평월리 거주자

전현식은 1956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사무관으로 공정거래위원회에서 근무하고 있다.

김성환(농업,76세) 박순자(농업,73세) 이길순(농업,75세) 김수용(농업,65세) 김순애(농업,44세) 김기

전종봉은 1956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대학교에서 영문학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수(농업,72세) 강상례(농업,44세) 정정수(농업,77세) 김복덕(농업,80세) 한문현(농업,86세) 공정님(농

업,78세) 세)

오문상(도자기,58세) 이영숙(도자기,53세) 기도금(농업,75세) 김신철(농업,44세) 신영복(농업,86

문순례(농업,80세) 유이순(농업,76세) 김순덕(농업,84세) 유금순(농업,76세) 주보영(농업,53세) 조

해군(임업,72세) 조순앵(임업,72세) 조상자(농업,70세) 김영준(농업,50세) 유병록(농업,38세) 정신애(농

업,32세)

주관영(농업,60세) 김분진(농업, 57세) 주보영(농업, 54세)

252 ― 고창의 마을 제5집

양윤선은 1956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국무총리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전달중은 1956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울산미원주식회사에서 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전금중은 1958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한전군지점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전용빈은 1958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법원사무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전관중은 1958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준위로 근무하고 있다.

신림면 벽송리 ― 253


서영환은 1958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의류회사에서 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신동창은 1957년 서당촌에서 출생하여 육군소령으로 제대했다.

전진중은 1960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삼성전자에서 근무하고 있다.

김주수은 1958년 서당촌에서 출생하여 국민은행본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전안중은 1959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은행지점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곽준영은 1963년 서당촌에서 출생하여 한국전력거래소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전범중은 1959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크라운베이커리(주)에서 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송창수는 1972년 서당촌에서 출생하여 경찰서에서 경사로 근무하고 있다.

전요중은 1960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삼익악기회사에서 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이윤주는 1972년 서당촌에서 출생하여 학교에서 음악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김구태는 1962년 벽송리에서 출생하여 육군소령으로 제대했다.

김형관은 1984년 서당촌에서 출생하여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전재현은 1962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사법고시에 합격해 변호사를 하고 있다.

김용운은 1956년 평월리에서 출생하여 면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전윤중은 1963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육군중령으로 근무하고 있다.

조재운은 1973년 평월리에서 출생하여 은행에서 근무하고 있다.

전요찬은 1963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육군원사로 근무하고 있다. 전성중은 1963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은행지점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3) 벽송마을의 기관과 시설

전생중은 1963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포항제철에서 근무하고 있다.

(1) 벽송마을 마을회관

전모중은 1964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대성전기(주)에서 차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벽송리회관은 공사비 3,200만 원과 부지 기

전재정은 1964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농촌진흥청 국립종자원연구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증으로 2001년 4월19일 기공식을 갖고, 동년

전재완은 1965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공학박사이다.

7월17일 준공식을 가졌다. 회관관리자는 진백

이형주는 1968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철도청 청량리 부역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규 이장이다.

전요성은 1968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삼성전자 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전재근은 1971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영등포경찰서에서 근무하고 있다. 박미경은 1973년 출생하여 영등포경찰서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전재근의 부인이다. 송봉근은 1971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육군소령으로 근무하고 있다. 송명근은 1975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해병대중령으로 근무하고 있다. 조준범은 1963년 대포리에서 출생하여 농협중앙회차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송만용은 1974년 대포리에서 출생하여 회계사에 합격했다. 오승진은 1974년 대포리에서 출생하여 원자력발전소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백송리회관 건립 기념비 방장산(方丈山)너머 옛 된 해넘이 복가(福家)

벽송리 마을회관과 모정

란 손님햇살에 모셔다 앉힌 터 육당령(陸堂嶺)용트림이 치닫다 머무는 끝자락 포유형(苞 乳形)터는

지세(地勢)가 겹겹이 껴안아 수려(秀麗)하고 주변일터는 옥터(沃攄)로 인심마저

좋은 벽송마을이 자리하니 천추만대(千秋萬代)의 삶의 터라 예로부터 충효(忠孝)와 석학

(碩學)의 인걸이 많이

배출하는 이 터에 효심(孝心)과 애경(愛敬) 그리고 두레의 마음이 어

우러질 회관(會館)이 준공되었도다. 온갖 어려움 이겨내고 숙원(宿願)을 이룩한 이 의지는

승화(昇華)된 화심으로 영원하기를 기원하며 유관인사(有關人士)들의 업적을 선양후세(宣

신동하는 1940년 서당물에서 출생하여 고창새마을지회장을 지냈다.

揚後世)에 귀감(龜鑑)이 되도록 이 글을

신동훈은 1943년 서당촌에서 출생하여 육군중령으로 제대했다.

2001. 7. 글. 우재 전경중

남긴다.

신창섭은 신동훈의 자(子)로서, 육군중령으로 근무하고 있다. 주수환은 1948년 평월리에서 출생하여 교장을 지냈다.

(2) 벽송마을 모정과 당산나무

김연상은 1955년 서당촌에서 출생하여 건설업을 하고 있다.

벽송마을 모정은 마을회관에서 서쪽으로 100m 지점에 있다. 아마 1900년에 지어진 것으

장준영은 1956년 서당촌에서 출생하여 삼성화재기획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254 ― 고창의 마을 제5집

로, 110년을 현존하는 모정이다. 기둥과 서까래가 구부러진 채로 세워지고 올려졌을 뿐 아

신림면 벽송리 ― 255


니라 세월의 흔적이 어

(6) 평월마을 경로당

우러져 있다 벽송 모

1978년도에 평월마을 마을회관으로 건축

정 남쪽에 당산나무가

되었으나, 지금은 경로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있다. 옛날의 당산나무

경로당 입구에는 그 당시에 세운 ‘평월마을

는 세월의 흔적만 남았

헌장비’가 있다.

고, 지금의 당산나무는 1985년에 전용술 씨와 서현옥 씨가 식수하여

평월경로당

(7) 평월마을 헌장비 벽송마을 당산나무

벽송마을 옛 모정

마을 주민들에게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들은 정성과 노력을 다하여 살기 좋은 평월리의 복지 농촌을 건설하고자 합니다. 이 는 오늘을 사는 우리자신들의 행복의 터전을 개척할 뿐만 아니라 천만대 후손들이 한결같 이 제 고장을 기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낙원의 바탕을 만들어 주기 위한 것으로 이에 긍지 를 가지고 여기 헌장을 제정합니다.

(3) 용교마을 모정

용교마을 북동쪽 잔등에 있다. 용교 모정에

①온 리민이 한 가족처럼 온 마을이 한집안처럼 서로 도

서 보면 서해안고속도로와 북쪽의 변산반도,

와 즐겁게 살아갑시다.

줄포만, 갈곡천, 사실천이 보인다. 가깝게는

②노 인들을 지성스리 받들고 청소년들을 슬기롭게 길러서

법지리와 벽송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밝은 앞날을 창조합시다. ③부 지런히 일하고 꾸준히 노력하여 너나없이 알차게 살

용교마을 모정

아갑시다.

(4) 서월마을 마을회관

서월 마을회관은 1982년 5월 8일에 군비

④맑 은 마음으로 깨끗한 거리 튼튼한 몸으로 착실한 활

2,000만 원과 주민 모금 2,000만 원으로 준

동 오붓하게 행복을 가꾸어 갑시다.

공하였다. 마을회관 안팍은 마을 지도자들의

⑤아 름다운 우리 마을 산천을 더욱 더 곱게 푸르고 기름

경로사상의 모습이 또렷하다. 회관 관리자는 송한섭 이장이다.

지게 가꾸어서 복된 고향을 만들어 갑시다. 평월마을 헌장비 서월마을 마을회관

평월마을 일동. 1978년 8월

(5) 서월 모정

(8) 평월 모정

서월마을 동쪽 잔등에 있다. 서월 모정에서

평월마을 경로당에서 남쪽으로 100m 지점

보면 서해안고속도로와 북쪽의 변산반도, 줄

에 ‘평월정’이 있다. 2002년 10월 19일에 군비

포만, 갈곡천, 사실천이 보인다. 가깝게는 법

1,000만 원과 주민의 성금으로 지어졌다.

지리와 평월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서월마을 모정과 송한섭 님

256 ― 고창의 마을 제5집

평월 모정

신림면 벽송리 ― 257


(9) 세곡 사기관

(13) 평월리 참정미소

흥덕에서 고창으로 가는 우측 국도 23번 80m 지점에 있는 세곡 사기관은 오문상 씨가

유택진 씨 부자가 정미소를 운영하고 있다.

각종 도자기와 사기그릇을 취급하고 있다. (14) 김낙봉

김낙봉과 윤혜경은 부모님을 모시고 1남을 둔 복합영농인이다. 80,000여 평의 논밭에 벼·

(10) 삼성자원

신림면 벽송리 산10번지에 있다. 고철, 비철 매입·철거 등 각종 중고자재를 이건정 씨가 취급하고 있다.

포도·배·복분자·감나무·나무·고추 등을 경작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마을의 소농가와 노인 농가를 챙기고 있다.

(11) 핸드 메이지 미용실

(15) 전종주

삼정자원에서 23번국도 70m 지점에 있는 미용실로, 홍성술 씨와 변순애 씨가 운영하고

전종주와 손관문은 어머니를 모시고 1남 2녀를 둔 복합영농인이다. 40,000여 평의 논밭에

있다.

벼·포도·배·복분자·감나무 등을 경작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마을의 대소사를 챙기고 있다

(12) 대동카 공업사

(16) 벽송양돈장

핸드 메이지 미용실에서 고창 쪽으로 70m쯤에 있다. 조희철 씨가 각종 농기계와 차량을

김홍술 씨가 벽송회관에서 남동쪽으로 900m 지점에 4,000여 마리의 돼지를 사육하고 있다.

수리하고 있으며, 겨레공인중개사도 겸하고 있다. (17) 성일농장

호암마을에서 부안면 쪽으로 100m 지점에 있다. 조영권 씨가 개를 키우고 있다.

(18) 대림환경

성일농장에서 부안면 쪽으로 200m 지점에 삼성자원 전경

핸드메이지 전경

있다. 대림산업은 폐기물을 취급하고 있다.

대림환경 전경

(19) 고인돌 수목원

대림환경에서 길 건너 쪽에 있다. 소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을 취급하고 있다.

(20) 고창서해안복분자주 대동카공업사 전경

258 ― 고창의 마을 제5집

평월리 참정미소 전경

고인돌 휴게소에서 북쪽으로 50m 지점에

고창서해안복분자주 광고판

신림면 벽송리 ― 259


있다. 영농조합법인으로서, 송지희 씨가 대표로 있다. 고창 복분자&블루베리와인 ‘선운’은

21세기 첨병의 나팔소리

원적외선이 방출되는 ‘황토와 천연옥으로 만든 토굴’ 속에서 전통옹기항아리로 발효와 숙

또 하나의 힘찬 국토의 대동맥 뛰는 소리

성을 시킨 최고급 와인이다.

우리 모두의 가슴마다에 파도쳐 출렁이네

(21) 고인돌 휴게소 2001년 12월 21일

서산 자락에 자리 잡은 고인돌 휴게소는 상 행선과 하행선 있다. 상행선과 하행선의 땅 면 적은 벽송리의 땅 78%이다. 그러나 상행선은 고창읍 신월리이고, 하행선은 벽송리로 되어

도움 주신 분

있다.

진백규(벽송리 이장)

송한섭(서월리 이장)

이용술(벽송리 개발위원장)

김락봉(벽송리 지도자)

송기홍(평월리 개발위원장)

전극중(중등교감)

전흥중(전 부면장)

서금성(벽송리)

서해안 하행 휴게소 전경

미래창조의 길 시/이가림

참고문헌 넓고 따스한 맨가슴의 남녘 땅

『고창군지』고창군지편찬위원회, 고창군, 2009.

여기 잠시 머물다 가는 그대여

『고창군 마을유래』고창문화원, 도서출판 청동 2003.

푸르른 벌판에서 풍겨오는 흙내음과

『고창의 마을1·2·3·4』, 고창문화연구회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살 한 아름

『고창성씨유래』, 고창문화원

그대 품안에 넉넉히 담아 가시라

『전북도지』 『한국지명총람』전북편(상)

어찌 동트는 새벽만 찬란하다 하랴

『문화유적분파지도』, 고창군

타는 서해의 황금노을 또한

『향토소고』, 전경중

줄기찬 미래 창조의 내일을 약속하는

『고창지방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 원광대학교 마한백제연구소, 2000.

찬연함으로 빛나지 않은가

『2000 가을착수 경지정리사업 예정지구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서』전북대학교 박물관, 1984.

새 천년 역사의 길이 뚫려

『흥덕향지』

우리 겨레 다시금 대약진의 발걸음이

『흥성지』

시작되었나니

http://blog.daum.net/differ8899/8289950

남북 끊어진 모든 길들 한 핏줄로 이은 더불어 노래하는 평화세상 열리리라 바야흐로 황해를 넘어 세계로 울려 퍼지는

260 ― 고창의 마을 제5집

서해안 하행 휴게소 조형물

신림면 벽송리 ―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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