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의마을제5집 무장면옥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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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농업으로 부를 이룬 마을, 옥산리 정민영

무장면 옥산리 송현리 송계리

도곡리 교흥리 월림리

만화리

성내리

원촌리

중산리

1. 마을의 위치와 유래

무장리 고라리 백양리

목우리

신촌리

옥산리는 무장면의 남동부에 있다. 2013년 3월 현재 면적은 6.13km²로 밭 2.08km², 논

1.28km²이며, 총 137가구에 275명(남 136명, 여 139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옥산리는 마을의 산세가 구슬처럼 생겼으므로 옥산(玉山)이라 하였다.

옥산리 덕림리

1918년 1:5만 고창지형도

옥산리 지도

무장면 옥산리 ― 123


1) 신월마을

2) 월봉마을

원래는 반월이었는데 신월로 바뀌었다.

면소재지에서 동남방향 794지방도 따라

면소재지의 동남방향 734 지방도 따라

왼쪽으로 5km 지점에 위치한다.

5km 지점의 오른쪽 마을이다.

1700여 년경 밀양박씨들이 입향 설기한

1500여 년경 영양(潁陽)천씨, 해주오씨, 신

마을이다. 현재 박씨들은 마을을 다 떠났고

다양한 성씨들이 살고 있다. 반월(半月)등이

안주씨, 울산김씨 등이 설기한 마을이다. 동으로 월봉산, 남으로 토성산(土城山) 또는

라는 마을 뒤에 동산이 있는데 달이 뜨면

신성산(新城山)이 있고 중간에 반달모양의 터에 자리를 잡았다 하여 반월이라고 부르

밝게 비친다 하여 ‘달 월(月)’자와 마을 뒤의

신월마을 정자

다가 이후 신성산의 ‘신(新)’자와 월봉산의

봉우리를 의미하는 ‘봉우리 봉(峰)’자를 합

월봉마을 정자

하여 월봉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유래가 있다. 또 월봉은 원래 전 터였다고 한다. 그래서 한

‘월(月)’자를 합하여 신월이라 개칭하였다는

때는 아이가 많이 생산이 되지 않아 독자가 많았다는 설도 있다. 옥산리에서는 가장 규모가

유래가 있다.

작은 마을이지만 현재는 젊은 층들이 중심이 되어 수박, 참깨, 호박 등 하우스 특작물 해서

전해오는 마을의 지명은 통으로 학교를

부농으로 거듭나고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성씨로는 진주정씨, 수원백씨, 낭주최씨, 김해김

세우려 했다는 “문골(文谷)”, 남쪽은 숯을

씨, 광산김씨 등이 거주하고 있다. 그 옆 죽림마을은 2가구가 남아 있다. 서남쪽 산 중턱에

구웠던 “숯덩이”, 작대기로 파서 방죽을 만

200여 평 정도의 넓은 바위가 있는데 “치마바위”라고 부르는 유래도 있다.

들었다는 “짝대방죽”, 선녀가 내려와 춤을

신월마을 마을회관

3) 대산마을

추었다는 “무등골”, 땅을 파면 모래만 나

면소재지에서 동남방향 734 지방도 4km 거리에 있는 마을이다. 토산(兎山), 대산(大山)으로

왔다는 “모래골”, 사방이 밭으로 둘러싸여

불리며, 풍수형국은 토끼형국이다.

가운데 둥근 달처럼 놓여 있어 물을 담으

1600여 년경 양씨가 입향 설기한 마을이다. 그 후 경주김씨가 입거하자 양씨 등은 이거하

면 물이 새는 곳이 없는 논으로, 이곳은 추 수를 하고 비가 와서 물이 차면 저수지인

였고 경주김씨가 번창하여 집성촌이 되었다. 풍수상 뒷산이 토산(兎山) 형국이라서 토산이라

줄 알고 낚시꾼들이 모인다는 곳이기도 한

고 불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대산이라 개편하여 지금에 이른다.

“달뱀이”, 묘자리 명당이 많은 “명당골”이

옥산리 장승백이

있고 북쪽으로 과거에 장승이 서 있었다는

“장승백이”, 신원마을과 대산마을을 이어주는 안산(태뫼산) 골짜기 마을 “태목골” 등의 옛 지 명이 주위를 이루고 있다. 주요 성씨로는 영양천씨, 해주오씨, 신안주씨가 있다.

대산마을 마을회관

124 ― 고창의 마을 제5집

대산마을 정자

무장면 옥산리 ― 125


2. 마을의 자연환경

6·25전쟁 이전에는 무장면에서 최고 부촌이었는데 전쟁 피해가 가장 심해 쇠락했다고 한다.

1)자연부락

대산마을 사람들은 경주김가로 구성되어 있고 다른 성씨 들은 살지 못하고 나간다고 한다. 현재도 타성바지로 차씨

대산 옥산동 남쪽에 있는 마을

와 장씨가 있는데 마을 안으로 들어와 살지 못하고 마을에

가라 옥산동 동북쪽에 있는 마을

서 멀리 떨어진 외딴집들에서 살고 있다.

신월 월봉 서남쪽에 있는 마을 월봉 월봉산 밑에 있는 마을

주요성씨는 경주김씨와 인동손씨이다. 대산마을 밀양박씨 열녀비

옥산동 옥산리

4) 가라(加羅)마을

백암 신월과 죽림 사이에 있는 마을. 절터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면소재지의 동남방향 734지방도에서 3km 거리에 있는 가라마을은, 원래 마을 이름은 가

죽림 월봉 남쪽에 있는 마을. 대숲이 무성하다.

라실이었는데 가라로 바뀌었다. 풍수형국은 나성체로 개형국으로 전해오고 있다.

반월등 반월등 아래에 있는 마을

1500여 년경 “낡은 터”라는 지역에 살던 밀양박씨가 입향 설기한 마을이다. 선조의 묘소 등은 남아 있으나 그 후손들은 이거하고 없다. 1653년경 김해김씨가 입거하였고 1753년경

2) 마을의 산과 골짜기

은 심원 지방에서 청주한씨가 입거하였다. 같은 무렵 고씨, 최씨 등도 입거하였으나 다 이거

월봉산 옥산동 동쪽에 있는 산으로, 높이

하고 없다. 현재는 김해김씨, 청주한씨, 광 산김씨, 무송유씨, 제주고씨, 낭주최씨, 진

구댕잇불 고양이(괭이) 귀처럼 생겼다 해서 구

주정씨 등이 새로 입거해 살고 있다. 마을

댕잇불이라는 명칭이 나왔다고 한다. 월봉 북

이 성처럼 둘러싸여 나성체(羅城體)라 하였 고 행정구역개편 때 가라실을 가라리로 부 르고 있다. 가구 수는 농업 34가구 비농 가구는 없 가라마을 전경

126 ― 고창의 마을 제5집

쪽에 있던 산등성이를 말하는데 현재는 덕림 저수지로 침수되었다. 반월등 죽림과 월봉 사이에 있는 등성이 지

형이 반월 형국으로 되어 있다.

고 총 34가구이다. 인구는 남자 45명, 여자

참시암뫼 죽림 남쪽에 있는 산.

41명으로, 총 86명이 살고 있다. 주요 성씨

안산 대산마을 앞산

는 김해김씨와 청주한씨이다.

비산등 가라마을에 있는 작은 산등성이. 큰

회관 앞에 가라마을 사람들이 만든 가라

나무들이 많이 있어 동네사람들의 휴식처이

마을의 역사에 대한 비문인 가라마을 헌성

다. 득남을 한 사람들이 모여 동네 사람들을

비가 세워져 있다.

모아놓고 칠석날이나 유두날 득남주를 내고

고적, 유지로는 고인돌 2기가 있다. 고인 가라마을 마을회관과 헌성비

112.3m이고 지형이 반월 형국이라 한다.

돌로 추정되는 바위 2개가 마을 뒤에 있다.

월봉 반월등

동네 잔치를 하였던 곳이라고 한다. 대산마을 안산

무장면 옥산리 ― 127


3) 방죽과 샘

4) 마을의 들

참시암 참시암뫼 아래에 있는 샘이었는데 덕림 저수지로 침수되었다. 물이 빠지면 샘이 보

솔논 솔대배미 옆에 있는 논. 솔대배미 월봉 동쪽에 있는 논 면적 3마지기인데 박씨네의 솟대가 서 있었음.

인다고 한다. 두렁시암 월봉 서쪽에 있는 샘. 전에는 물이 잘 안 나와 노름꾼이 들어가서 노름을 하는

소리가 두런두런 들렸다 함. 지금은 물이 잘 나고 맛이 좋다.

큰매 월봉 남쪽에 있는 논. 가라마을에 넷건네, 소래동, 고재기, 한사동골, 낡은태, 뒷제, 건

덩굴 등의 많은 논이 분포하고 있다.

큰샘 가라마을에 있는 샘. 현재 보존되어 있음.

대산마을 방아들, 파랑들, 평상들, 부목골,

개샘 가라 마을에 있는 샘. 물이 많이 나오고 물맛도 좋았으나 새마을 사업으로

묻힘.

옥산저수지 옥산동 동북쪽(가라실)에 있는 저수지. 1942년 만들었다. 몽리1 면적은

396,694.22m²(40정보)이다.

절앞논. 당산나무 가라마을에 있는 나무인데 나무

아래 달걀모양의 큰 돌이 있어 일명 ‘들독’이 라 하였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이 일을 하다

신월 전제 신월마을 앞 방죽.

쉬는 휴식처인데 이곳에서 들독을 서로 들어

신월 후제 신월마을 뒤 방죽.

보면서 힘자랑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신월마을 큰논

신월교 신월과 대산, 가라를 이어주는 다리. 돌다리(독다리) 새마을 사업으로 묻힘. 묻히기 전까지는 가라마을 사람들이 독다리를 건너

야 만이 큰샘의 물을 길어다 먹었다고 한다.

5) 치마바위[馳馬岩] 월봉산 남쪽 중턱에 있는, 200여 평 정도 의 넓은 바위이다. 희게 보여 백암이라고도 한다. 바위 위에 말 발자국이 나 있는데 예 전에 장군이 말을 달렸다고 한다. 이 바위는 옥산리 월봉산과 장성에 있는 고산 중간에 있었는데 이 바위를 놓고 두 지 역 간에 싸움이 벌어졌는데 장성의 고산 장

월봉 두렁시암

가라마을 큰 샘

군이 패배하여 월봉산으로 옮겨졌다고 한

월봉마을 치마바위

다. 바람이 불면 비단치마가 나부끼는 형태 로 영광의 북문에서 보였다고 한다. 영광의 부인네들이 이 바위를 보면 실성해 나가니 영광군에서 흙을 메꾸고 뒤에 나무 를 심었다는 설도 있다. 동네 어르신들의 초 옥산저수지

1) 몽리구역 - 저수지나 보 따위의 수리시설에 의하여 물이 들어와 농사에 혜택을 입는 구역을 말한다.

128 ― 고창의 마을 제5집

신월마을 후제

등학교 시절 소풍 장소였다고 한다. 바위로 들어가는 입구에 ‘장군의 문’이라

월봉마을 치마바위 장군의 문

무장면 옥산리 ― 129


는 작은 바위가 있다. 현재는 우거져 있는 나무들로 엉켜서 방치되어 있고 오랜 시간이 지

(2)세거 성씨

나면서 말발굽도 마멸되어 보이지 않는다. 마을의 역사 흔적으로 고창군이나 문화원 등에

경주김씨

서 표지판을 세워 보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시조는 명종(鳴鐘)이고 파조는 양보(良輔)이

다. 입향조인 정업(鼎業)이 1663년 무장면 대

3. 마을의 인문환경

산리로 입향하였다.

파주 소녕원(昭寧園)에서 영조의 생모인 숙

1) 시대별 특징

빈 최씨 표를 쓰기 위해 기존의 경주김씨 일

옥산리는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에 속하는 법정리로 무장면 남동부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말기에는 무장군 백석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가라(加羅)·대산(垈山)·죽림(竹林)·신월(新月)·송정·덕림 각 일부와 대제면 성동 일부를 병합하여 옥산리라 하고 고창군 석곡면에 편입하였고, 1935년 3월 1일 도령 제1호에 따라

가의 선대표 5기를 파기함에 후손인 정업(鼎 業),

정난(鼎蘭) 형제가 화를 피하여 무장면

입향세손으로는 정업(鼎業)-자태(自兌)-만경(萬慶)-한택(漢澤)-성주(成柱)-노종(魯宗)-팔희(八

喜)-상준(商俊)-권제(權濟)-동섭(東燮)-방환(方煥)-기봉(基封)-만호(萬鎬)가

무장면에 편입하였다.

경주김씨 입향조 묘비

대산리에 정착하여 13대를 세거하고 있다.

있다.

현재 신월리·가라리·대산리·월봉리 4개의 행정리와 신월·월봉·죽림·대산·가라실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다. 죽림은 월봉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는 대숲이 무성해 죽림이

울산김씨

라 불렀다. 신월은 월봉 서남쪽에, 월봉은 월봉산 밑에 있는 마을이다.

시조는 덕지(德摯), 파조는 달원(達源)이다. 입향조 질(耋)이 중종대에 무장면 신월리로 입향 하였다. 시조 20대손으로 중종 초에 장성군 황룡면 맥동리에서 은거지를 찾아 무장면 신월

2) 마을의 인구와 성씨

리로 입향하여 15대를 세거하고 있다.

입향세손으로는 질(耋)-인혼(麟渾)-종칠(從七)-남훈(南勳)-형만(亨萬)-세하(世夏)-운서(運瑞)-혼

(1) 마을의 성씨

옥산리 마을의 입향조는 다음과 같다. 신월의 영양천씨, 해주오씨, 신안주씨, 울산김씨, 대 산의 경주김씨와 인동손씨 ,월봉의 진주정씨, 수원백씨, 낭주최씨, 김해김씨, 광산김씨, 가라 의 김해김씨와 청주한씨 등이 있다.

현(渾賢)-수조(守祖)-방식(邦植)-중휴(仲休)-일환(日煥)-요철(堯哲)-영중(領中)-방수(昉洙)가 있다.

울산김씨(蔚山金氏) 시조 김덕지(金德摯)는 신라 경순왕의 아홉째 아들로 고려 태조에게 신

라를 양위할 때 힘을 다하여 말리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행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14세

손인 김환(金環)은 고려 시대에 벼슬이 삼중대광 영도첨의사에 이르렀고 울산(蔚山) 학성군에

성씨별 분포 마을별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울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울산 김씨

대산 신월

경주 김씨

김해 김씨

광산 김씨

나주 오씨

진주 정씨

청주 한씨

30

낭주 최씨

신안 주씨

영양 천씨

1

12

5

가라

9

월봉

4

1

5

5 1

5

6 1 1

2

기타

3

13 9 3

입향 경위를 보면 김덕지의 20대손이자 김달원(金達源)의 증손인 신월파(新月派) 파조 김길

(金耋, 1484~?)이

조용한 곳을 찾아 무장면 옥산리 신월에 정착하였다. 손암공파(孫庵公派) 파

조 김달근(金達根)의 7대손인 김형하(金亨夏, 1632~1698)가 흥덕 사람들의 초빙으로 훈장으로

와서 흥덕면 오호리(五湖里)에 정착하였다.

계파(季派) 파조 김달기(金達技)의 9대손이자 오천공(鰲川公) 김경수(金景壽)의 5대손인 김수

륜(金守倫, 1729~1789)이 처가인 성내면 양계리 내토(內兎) 전주이씨 이시열(李時說)의 집으로 이

130 ― 고창의 마을 제5집

무장면 옥산리 ― 131


년(철종8) 흥덕면 후포리 대촌(大村)에서 태어나 심원면 두어리(斗於里)로 이거하였다. 고창군

거하면서 정착하였다. 중조 학성군 김환의

17대손이자 문정공파 파조 김인후(金麟厚)의

청주한씨의 현황은 현재 한팽로의 후손들이 성송면 암치리에 세거하고 있다. 한동악의 후손

기에 좋은 땅을 찾아 흥덕면 동사리에 입향

다. 한형리의 후손들이 공음면 장곡리 원동(院洞), 신평(新坪) 등지에 살고 있다. 한형리의 후

6대손인 김택휴(金宅休, 1797~1844)가 농사짓

들이 성내면 산림리에, 한동악의 형 한동로(韓東老)의 후손들이 성내면 낙산에 세거하고 있

하였고, 아들 김순환(金舜煥)·김상환(金商煥)·

손들이 심원면 두어리에 세거하고 있다.

김창환(金昌煥) 삼형제가 금반옥호(金盤玉壺) 의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아산면 반암리(盤岩 里)로

옮겨 왔다. 현황은 2009년 현재 문정

(3) 마을의 인구 신월마을 울산김씨 재각

공파 김택휴의 후손들이 아산면 반암리에. 계파 김수륜의 후손들이 성내면 양계리 내토에 9

옥산리 세대와 인구 마을명

대째, 손암공파 김형하의 후손들이 흥덕면 오호리에 11대째, 신월파 김질의 후손들이 무장면 옥산리 신월과 심원면 각시산 자락에 15대째 세거하고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군내(郡內)에 120가구에 280명이 거주하고 있다.

신월 대산 가라

청주한씨 청주한씨는 고려 개국벽상공신(高麗開國上功臣) 한란(韓蘭)을 시조로 하고 한팽로·한의철·

월봉

년도

세대

총인구

2003년

34

72

30

42

2013년

38

81

36

45

2003년

39

103

46

57

2013년

50

97

49

48

2003년

34

86

45

41

2013년

36

62

31

31

2003년

15

25

27

52

2013년

13

35

20

15

한동악·한광후·한형리를 입향조로 하는 전라북도 고창군 세거 성씨이다.

청주한씨 입향경위를 보면 고창군 입향조 한팽로(韓彭老)는 고부군수를 지낸 중시조 한계

복(韓季復) 6대손이자 파조 청주부원군(淸州府院君) 한창(韓昌)의 5대손으로 전라남도 영광에 서 태어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난을 피하여 성송면 암치리로 옮겨와 정착하였다. 한의철(韓

義哲)은

중시조 청성군(淸城君) 한승순(韓承舜)의 10대손이자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파조 한

장손(韓長孫)의 8대손으로 1670년(현종11) 부안면 용현(龍峴)에서 태어났다. 1700년(숙종26)후

학을 가르치고자 심원면 연화리(蓮花里)와 무장면 목우리(牧牛里), 무장면 옥산리 가라(加羅) 를 내왕하다가 무장면 옥산리 가라에 정착하였다.

한동악은 중시조 한승순의 14대손이자 파조 한계희(韓繼禧)의 11대손으로 1727년(영조3) 전

라남도 담양에서 태어났다. 가세가 기울어지가 아버지 한진유(韓晉有)를 모시고 성내면 낙산

(洛山)으로 郞)과

들어와 주경야독하여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벼슬길에 나아가 예조정랑(禮曹正

대정현감(大靜縣監)을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한광후(韓光侯)는 파조 한명회(韓明會)의 13대손으로 1774년(영조50)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

면(大田面)에서 태어나 공음면 장곡리(壯谷里)에 정착하였다. 사옥(士玉) 한형리(韓亨履)는 1857

132 ― 고창의 마을 제5집

옥산리 마을의 인구와 세대는 2003년에 비해 세대수가 증가하였는데 이는 귀농자가 증가 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가라마을은 인구수가 가장 많이 줄어들었는데 원인은 자연감소가 아닌 이농으로 인한 것이다. 60세 이상의 노년층 인구가 80% 이상을 차지하고 청장년층 및 유소년층은 10%도 안 되는 실정이다. 신월마을의 경우 고등학생 1명, 초등학생 1명, 유치원 생 2명이 있고 다른 마을들은 아이들이 거의 없는 상태이다. 장수하신 분은 대산마을의 94세 이양금 어르신과 신월마을의 92세 박형우, 김요봉 어르 신으로, 아직도 정정하게 살아계신다. 그리고 옥산리 마을에는 다문화 가정이 2세대가 있다. 하나는 신월마을의 김병채 씨와 베 트남에서 온 찬 씨 부부이다. 찬 씨는 한국에 온 지 10여 년이 지나 한국말도 능숙하게 하 고 농촌생활에 적응하면서 3남매를 잘 키우고 있다. 또 한 가구는 대산마을의 김해진 씨와 중국에서 온 송성애 씨 부부로, 이들은 수도권에서 귀농하여 딸 하나를 낳고 시설재배를 하 면서 많은 수익을 올리며 살아가고 있다. 옥산리는 월봉마을의 축산업 1가구를 제외하고는 논과 밭이 많아 거의 농업에 종사하고

무장면 옥산리 ― 133


있다. 특히 옥산리 농업의 특징은 하우스를 이용한 시설농업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무슨 인연인지 김인석 대표의 아버님 속명이

는 점이다. 노년인구가 많아 기존의 전통적인 방법의 농사는 지을 수가 없어 소수지만 장년

옥산이어서 더욱 이곳에 애착이 간다고 한다.

층이 중심이 되어 수박, 메론 그리고 채소류 등의 시설농작물을 재배하여 농가의 소득을 올

김인석 대표이사는 1999년 10월부터는 죽염 분야 최초 무형문화재(죽염제조장 제23호)인 효

리고 있다. 특히 월봉마을은 옥산리에서는 가장 작은 마을이지만 농가 소득에 있어서는 무

산 스님의 기술 전수 지도로 황토가마에서 토종 소나무만을 이용해서 전통 방식 그대로 자

장면에서 최고 높은 마을이라고 한다. 그리고 청정지역인 옥산리에는 노동집약형 산업인 죽

죽염(紫竹鹽)을 생산하고 있다. 효산 스님과의 인연은 우연이 아닌 좌절과 실패 끝에 만나 김

염을 만드는 산업시설이 있어 마을 사람들 일자리 창출에 한몫을 하고 있다.

대표가 무형문화재 전수자로 지정되게 되었다. 이후 2002년에는 유명 브랜드상 수상, 2003 년에는 전라북도 최고 명품 지정, 2006년에는 자죽염 제조방법 및 장치 발명특허등록을 받 아 명실상부한 죽염의 최고봉에 오르게 된다. 또한 2009년에는 대한민국 신 성장 동력 우

(4) 마을의 조직 마을

수기업에 선정되었고, 2010년에는 “자죽염 약침이 항암제 시스프라틴에 의해 발병되는 청각

마을조직체 이장

부녀회장

신월마을

김상훈

박현숙

대산마을

김기주

김정녀

조방법 특허 등록(특허 제 10-1079852호)을 하였다. 2012년 5월에는 진피추출물 및 죽염을 포

가라마을

김영종

한정순

함하는 알러지 비염의 예방 또는 치료용 의약조성물, 의약부외품 및 건강기능식품으로 특허

월봉마을

최행수

정정순

출원했다.

장애를 개선한다”는 논문이 SCI국제 논문에 게재되었다. 그리고 2011년 복분자 자죽염의 제

<<<죽염 만드는 과정>>>

죽염은 우리 민족의 전통 민방요법의 하나로, 역사적 전통과 독창성에 있어 그 예를 찾아

(5) 마을의 기타 시설

삼보죽염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 문화재적 가치로 볼 때 매우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아울러 천혜

‘진실만을 추구하는 깨끗한 마음, 전통의 맥

의 입지조건을 두루 갖춘 고창 무장면 옥산리에서 세계 최고의 명품 자죽염을 생산하는 데

을 이어가는 혼이 깃든 장인정신’을 슬로건으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자연과 하나 되기 위해 모든 임직원이 노력하고 있다. 특히 2004년

로 올바른 식품문화를 위해 제품 하나하나에

자죽염의 약리학적 효과에 대해, SCI에 등재된 권위 있는 국제 의학학술지에 2편의 논문이

최선을 다하며 자신들이 곧 깨끗하고 투명한

게재되면서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었다. 우리 전통식품인 죽염의 기능에 대해 세계가 관심을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삼보죽염 김인석 대표

갖게 된 것이다. 쉴 새 없이 연구하고 노력하는 김인석 대표는 대한자죽염연구회와 한국능률협회경영인증

이사를 만났다.

원의 환경경영시스템 규격 인증을 통하여 죽염의 과학적 검증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에 박차

황토가마에서 아홉 차례 구워야 탄생되는

삼보죽염은, 지난 1993년 태성식품(삼보죽염)

가라마을 삼보죽염

를 가하고 있다. 자죽염이란, 글자 뜻이 말하듯 보랏빛에 가까우면서 약간의 붉은 색깔을

주식회사로 법인을 설립하여 1996년 고창군 무장면 옥산리에 새 공장을 세웠다. 원래 부안

띠는 죽염을 말하며, 1천500도 이상의 높은 고온에서 탄생되는 고 순도의 죽염으로, 그 맛

군 출신인 김인석 대표이사는 개암사 효산 스님으로부터 기술을 전수받고 자연과 사람을

과 향이 깊고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황토가마에서 구워낸 덩어리로 된 죽염을 가루로 만

생각하면서 죽염을 생산하려는 마음을 굳히고 공장설립 부지를 보러 다니던 중 부안 인근

들어 다시 대나무에 넣어 굽게 되는데, 이런 단계를 8번 반복하고 나서 맨 나중 아홉 번째

지역인 고창 지역을 다니다 해리에 공장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그곳이 마땅치 않아 다시 부

고온에서 용융된 죽염이 바로 자죽염이다. 아홉 번 굽게 되면 붉은 죽염이 용암처럼 흘러내

지를 물색하던 중 주변이 깨끗하고 무 밭만 있는 청정지역인 현 옥산리 마을에서 제조업을

려 결정체가 되는데, 이 죽염을 잘게 부수면 비로소 공정이 마무리되어 환상적인 자죽염을

134 ― 고창의 마을 제5집

무장면 옥산리 ― 135


얻게 된다. 이는 산성화된 현대인들의 체질을

(2) 옥산리 유물분포지 2(무장면 옥산리 산33)

강알칼리인 자죽염으로써 약알칼리 건강 체질

옥산리 옥산 저수지의 서측을 끼고 남-북으로 흐르는 구릉에 위치한다. 구릉은 해발

로 만들어주는 기능성 식품이라고 한다. 그리

51m의 저평한 능선으로 하단부는 곡간의 논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사면은 목초지와 일부

고 9번의 과정 속에 한번이라도 빠뜨리면 자

송림으로 되어 있다. 정상부에는 민가 1채와 이어지는 소로가 나 있다. 대체로 삭평이 심하

죽염을 얻지 못한다고 한다. 우리 조상들의

게 이루어진 상태로 교란이 심한 편이다. 광범위하게 산재해 있는 경질토기편과 경질타날문

숨은 지혜도 신비롭고 과학적이라 할 수 있

토기편 등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다. 현재 중국 등 세계 시장에 납품되고 있으 며, 국내의 LG 생활건강, 롯데백화점 명품관,

삼보죽염 굽는 과정

노원백화점, 하이리빙, 그리고 신세계 백화점 SSG푸드마켓 청담점, 마린시티점에 입점하였고

(3) 월봉 마을 고인돌

고인돌로 추정되는 바위2개가 마을 뒤에 있다.

현대홈쇼핑에 김인석 대표가 직접 출연하여 고객 대만족으로 이어지고 있다. 1989년에 죽염 과 인연을 맺어온 그는 죽염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하여 그 효능에 푹 빠지게 되었으며 ‘바

이(BUY) 전북’ 상품에 선정되는 쾌거를 올리게 된다. 바이(BUY) 전북 상품선정위원회는 작년 하반기에 접수된 75개 상품을 7차례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정했다. 바이 전북 상품이란, 품질이 우수하고 성장 가능성이 높은 상품을 선정하여 세계 최고로 성장할 수 이도록 홍보 및 판촉 등을 체계적으로 지원하며 일류 브랜드로 만들어가는 사업이다. 성공한 사람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하나같이 투철한 직업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서운 집념과 근성이 성공의 길로 이끈다고 한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

월봉마을 고인돌

세로 기다림과 어울림, 그리고 정성까지 담는 김인석 대표는 모든 인류에게 소금의 역할과

(4) 신월마을 고인돌

죽염사랑이 넘치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지속적인 연구를 통

신안주씨 선산 뒤에 대형 고인돌 1기가 있다

신월마을 고인돌

하여 전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하기 위해 다져 넣기, 가마 쌓기를 반복하고 있다. 4) 마을의 풍습 3) 마을의 유적지

가라마을에는 지금도 촌중계(위친계)가 60여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1) 옥산리 유물분포지 1(무장면 옥산리 1228-9)

위친계는 부모의 초상 따위를 당했을 때 서로 도움을 주기 위하여 조직한 계를 말한다.

시대는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 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모임은 친목도 있지만 주목적은 초상을 당했을 때 서로 도와서 장례를 치루는 것이 주

송림 마을을 지나 200m 정도 가면 조사 지역이 나온다. 동서로 넓게 흐르는 능선에서 남

목적이었다. 지금이야 장례식장에서 초상을 치루니까 필요를 느끼지 못하지만 예전에는 초

측을 뻗어 내린 가지능선으로 해발 41m의 저평한 지형을 이룬다. 구릉의 남측으로 옥산 저

상을 치루는 일이 아주 중요하고 큰일이었다. 마을에 사는 이웃끼리 서로 협조하고 서로 위

수지가 위치하며 동서측은 상전리들이라 불리는 곡간이 형성되어 있다. 정상부에는 소로가

로하자는 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장례식장에서 다 하기 때문에 필요가 없다는

나있으며 사면부는 개간이 되어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수습된 유물은 옹관편, 경질토기편

주장도 있었으나 그래도 이제까지 이웃으로 살아온 정이 있는데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같

등이다.

이 가야한다는 주장에 힘이 쏠려 지금까지 유지를 해오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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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면 옥산리 ― 137


유사를 정해놓고 동짓날 마을회관에 모여 계를 하고 있다.

안성맞춤이었다. 폭 넓은 학식과 필력 그리고 침착한 그의 성품과 민첩하고 힘이 장사인 그 의 몸매는 천부적인 비서감이었다.

그해 3월 25일 백산봉기에서 동도창의대장소(東徒倡義大將所)의 창의 조직 때 송희옥(宋喜玉)

5) 마을의 인물 정백현(鄭伯賢, 1869~1920)

과 함께 동도대장의 비서로 발탁된다. 더욱이 송희옥은 녹두장군과의 척분 비서로 발탁되어

그의 자는 백현이고 호는 약봉(藥峰)이다. 동학의 법호는 진암(眞菴)이고 휘는 근영(根永)이

대내적인 수행임무에 그치지만 그는 상시 수행과 대외적인 총비서의 막중한 역할을 갖게 되

며 관향은 진주이다. 고종6년(己已) 10월 23일 고창군 와공면(瓦孔面) 예전리 상례(上禮)마을

(현 고창군 공음면 예전리)에서

월재(月齋) 정만원(鄭萬源)과 순천(順天)박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

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기질이 명민하여 집안의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

어 이때부터 창의문(倡義文) 격문(激文) 등 각종 대외문서의 작성과 통문(通文)의 수발과 회신 을 챙기는 일을 전담하고 주요 전략회의에도 꼭 참석하였다.

그는 농민군 지휘부의 유일한 문사로서 전봉준 장군을 밀착 수행하면서 전투상황을 점

으며 특히 부친 월재가 생부 종우(鍾佑)의 계하를 벗어나 아들 없는 당숙 종현(鍾顯)의 양자

검, 보고하는 한편 일진일퇴가 거듭되는 와중에서도 극비업무를 잘 수행하고 보좌역을 성실

로 정해져 있던 터라 성장하기까지 백현은 주변의 세심한 배려 하에 건장하게 자랄 수 있

히 수행하였다.

었다. 여덟 살 때인 1876년 4월부터 와공면 군유리(群儒里)에 사는 집안 숙부 죽사(竹史) 정

그해 11월 동학농민군의 결전장이었던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처절하게 참패를 당한 후, 농

학원(鄭學源)의 문하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때 그 유명한 「오랑

민군은 전주, 남원으로 빠지는 동부 퇴로와 태인, 순창, 광주로 집결하는 중부 퇴로 그리고

캐」 시를 거침없이 읊었으니 벌써 상당한 수준의 학식과 분별력을 갖춘 것으로 여겨지며 이

만경, 부안, 고창, 영광에 이르는 서부 퇴로의 세 갈래 방향으로 퇴각로를 정하여 패주하였

후 청년기에 이를 때까지 과거 준비에 희망을 두고 몰두하였다. 영특한 재기와 재빠른 동작

는데 그는 큰 실의를 안고 중부 퇴로를 택한 녹두장군과 헤어져 서부 퇴로를 따라 황급히

으로 항상 무리 중에 중심자리를 지켜 장차 선비가 행해야 할 도리를 스스로 찾아 깨닫고

고향으로 찾아 들어 피신의 길로 들어선다,

제반 일을 챙겨냈다고 한다.

스무 살이 되던 1888년(고종25) 고창군 대아면(大雅面) 남촌(南村, 현 아산면 목동리)에 사는 야

헌(野軒) 나길순(羅吉淳)의 넷째 딸 성녀(姓女)와 결혼하였는데 신부의 나이가 세 살 위인 스 물세 살이었다. 그해 섣달에 장남 시묵(始黙)이 태어나 가문의 번영과 화평을 누리며 부족함

그는 역적으로 몰릴 것을 대비하여 가족의 안전을 위해 양조부(養祖父)가 살던 무장면 옥

산리 가라실로 이사하고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홀로 고창 신촌(莘村)에 사는 친구 봉정범(奉

正範)의

집 골방에서 은신하며 바깥 동정을 살폈다. 전봉준 장군이 원평・태인 전투에서까지

패배하게 되자 몇 남지 않은 휘하 장졸에게 명한 대로 그는 바로 상경을 준비하게 된다. 이

이 없는 삶이었다. 시묵은 갑오년에 태어난 동생과 함께 어린 나이에 전쟁의 와중에 휩싸였

로부터 3개월만인 1895년(고종32) 1월 극비리에 가까스로 한성 땅에 잠입하게 된다.

고 한다. 그는 25세 때인 1893년(고종30) 8월부터 손화중(孫華仲) 접주의 연계로 은밀하게 동

가 모진 고문 끝에 처형당했다. 그의 아버지는 무장 집강(執綱)을 지낸 양부 정종현(鄭鍾顯)의

학농민혁명 모의에 가담하게 된다. 봉기 이전부터 핵심세력과 내통하였고 그가 이주해 와서

영향을 받아 동학에 입도하여 손화중 대접주와 연을 맺었으며 농민전쟁과 아들 백현의 뒷

지만 연좌제(緣坐制) 그물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배경의 연줄이 있었기에 멸문의 화를 면했다

살았던 굴정동(屈井洞, 현 공음면 신대리 구정마을)이 천안전씨 백헌공(柏軒公, 文孝公)파 후손들의

세거지가 되고 있어 이곳을 자주 찾는 전봉준 장군과는 일찍이 의기가 투합되었고, 손화중 접주와 이 마을 전씨 문중의 천거로 농민군 지도부의 핵심요원으로 떠오르게 된다.

한편 집에서는 2월 10일 그의 부친 정만원(鄭萬源)이 연좌제로 인해 고부(古阜)관아에 끌려

바라지만 하다 47세를 일기로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의 나이 27세에 한성에서 지난날의 벗들을 찾아다니며 급변하는 시국에 대처할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시와 술로 정분을 두텁게 하였다. 그때 그는 동학농민군으로서의 행적을 숨

26세에 갑오동학농민혁명을 맞게 된 그는 1894년 새해 벽두에 둘째 아들 연묵(淵黙)을 얻

겼고 이름을 바꾸어 신분을 철저히 위장하였다. 그때 한성은 동학농민군 잔당들의 잠입설

게 되면서 기상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혁명의 준비 기간에도 주변의 천거로 녹두장군을 수

로 인해 일본군과 관헌들이 민가를 들쑤시고 다니는 판국이라 여간한 형편이 아니면 피신

행해 왔지만 주로 밤길을 이용해 이동하던 전 장군을 호위하는 데는 그의 건장한 체구가

이 거의 불가능했다. 다행히도 그는 귀향을 극력 만류할 정도로 이전부터 깊은 관계의 우정

138 ― 고창의 마을 제5집

무장면 옥산리 ― 139


들이 있어서 재기를 도모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의 항야 체류 견문록에 의하면 피신하면서 고락을 함께 한 선비들로 신길휴(申吉休)・기

휴(箕休) 형제(해등방 도당리 거주)와 임홍제(任弘帝, 호는 난파, 유동 거주) 그리고 금사(錦史)라는 아

호로 통하고 있는 극진한 벗들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가 당시 세도가의 자제들로서 그를 비 호하는 데 큰 몫을 해낸 친구들이었다. 그는 연줄을 찾아 서울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도 글 잘하는 덕분으로 당대의 젊은 명

사들과도 어울릴 수 있었다. 판서를 지낸 신헌구(申軒求), 참판을 지낸 이근용(李根容), 이중하

(李重夏)

등과 어울렸다. 이들은 왕래하는 서찰이나 시문 등 격조 있는 글발에 대한 능통한

해석과 회신을 해야 할 때 그에게 자문을 구하고 자기네의 단문을 보충하는 데 그를 유효

하게 활용하곤 하였다. 또한 이들은 주석이나 야유회를 활용하여 시문과 시작(詩作)을 배우 는 것이었다. 이때 그는 이름을 바꾸고 시문의 솜씨를 발휘해 이들과 아무런 의심 없이 문사

(文士)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러는 동안 그의 고향 집에서는 1896년(建陽元年) 12월 14일

에 모친인 순천박씨마저 부친의 뒤를 따라 숨을 거두었으나, 영문을 모르는 그는 서울에서 고향 소식만을 애타게 귀 기울일 뿐이었다.

1897년(건양2) 29세가 되면서 숙부 명원(明源)의 천거로 순천 송광사(松廣寺)에 세워질 성수

도움 주신 분 주형규 김범용 김영환 김요봉 김용남 참고문헌 『무장읍지(茂長邑誌)』 『송사문헌(松沙文獻)』 『한국 지명 총람』 『전북 전래지명 총람』 『모바일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고창군 구비문학대계』 『고창의 마을 유래』, 고창문화원, 2003.

전(聖壽殿)의 별유사(別有司)가 되어 공사를 지휘하는 감독 일을 맡아 현장을 내왕하기도 하

였다. 그 후 해주(海州)관찰부 주사(主事)에 임명되었으나 한 달도 채우지 못하고 사직하였 다. 왜냐하면 서울 친구 이은용(李垠鎔, 시종으로 있었는데 그의 조부는 전령상 흥인군 이승응이요, 부친 은 판서를 지낸 이재긍이다)의

아버지 이희하(李凞夏)가 1897년 5월에 때마침 무장군수로 부임하

게 되어 약봉에게는 고향을 찾아갈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기 때문이었다. 그의 나이 29세 때 이렇게 해서 고향집을 찾아올 수 있었던 그는 군수의 비호를 받아 별 탈 없이 지낼 수는 있었지만 부모님의 타계와 아내의 위중한 병세를 보고 비통한 심사로 이웃과 어울리 기를 꺼려 종일토록 침묵하다가도 멀리서 찾아오는 옛 동지들과는 곧잘 밀담을 나누었다.

1901년(광무5)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고 가세가 기울자 6월에는 아산면 주진(舟津)마을

로 이사했다. 그가 35세가 되던 1903년 10월에는 지금 후손들이 살고 있는 오정동(梧亭洞)

집으로 다시 옮기고 팔연정(八然亭)을 짓고 그곳에 칩거하면서 여생토록 은둔생활로 일관하 였다.

1909년 2월 17일 아내 안정나씨(安定羅氏)까지 47세로 하직하자 감당하기 어려운 슬픈 세월

을 보내다가 1920년 1월 3일 동학농민봉기 26년만인 향년 52세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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