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면오산리(130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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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고향, 오산리 안후상

부안면 오산리 상암리

1. 오산리의 개요 송현리

봉암리

수양리

오산리는 풍수지리상 자라형국이다. 마을의 유래나 지명은 모두 자라와 관련이 있다. 평탄 수동리

지인 듯하나, 옛날 터잡기 이전의 지형에는 이목구비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현재 오산마을의

선운리 검산리

수남리

중핵은 하오산의 금구영감댁이다. 금구영감댁을 중심으로 마을이 확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중흥리 용산리

상동리

오산리

1) 오산리 개황 부안면의 동남부에 위치한 오산리는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에 속하는 14개 법정리 가운

사창리

데 하나이다. 자라형국인 까닭에 오산(鰲山)이라 하였다. 부안면사무소에서 지방도 734호(복분

운양리

자로. 이하 지방도라 함)를

따라 용산 방면 5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오산리는 남으로 상

등리, 동으로 중흥리, 서로 용산리, 북으로 수남리 등이 인접한다. 근대 이전에 부안(富安)은 고부군에 속하였다. 조선시대 문헌이나 고지도에 부안은 대체로 ‘고부지(高阜地)’로 표기돼 있다. 1906년에는 고부군의 부내면(富內面)과 부외면(富外面)을 합하 여 부안면이라 칭하고 흥덕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4월에 상오산(上鰲山)·하오산(下鰲山)·우 수점(雨水店)·구정리(九井里) 등과 이서면의 동성리 일부를 병합하여 ‘오산리’라 하고 고창군 부안면에 편입되었다(『세종실록지리지』, 『호구총수』 등). 자연마을 단위로는 상오산·하오산·우수골·구정동 등이 있다. 상오산·하오산은 전근대 에 생겨난 지명으로, 지방도를 기준으로 상오와 하오로 구분한 것은 근래의 일이다.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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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의 마을 제4집…131


하오산마을 표지석

오산 표지석

오산마을 전경

현재 오산리는 오산 1구의 상오리와 오산 2구의 하오리 등 2개의 행정리로 이루어져 있다.

한 명당의 여러 유형 가운데 오산은 돌혈(突穴)에 해당한다. 즉, 평탄면에 돌출형이라는 것인

구정동과 우수동 일부는 오산 1구에 속한다(장인구 구술).

데, 돌출된 부분이 바로 자라등짝이다. 그렇다면 오산에서의 혈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이

전근대에는 오산리를 흔히 ‘하오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하오의 어느 마을길을 기준으로

철환은 금구영감댁(현재 이철환이 사는 집)이 자라등짝에 해당한다고 한다. 자라등짝인 까닭에

상오와 하오로 나뉘었다는 전언도 있다(이희서 구술). 앞의 전언과 풍수상으로 볼 때 대체로

금구영감댁은 근래에까지 초가를 고집하였다는 것이다. 자라목은 금구영감댁과 오룡천 사이

하오 2길(동서로 나 있는 마을길) 위쪽 골목을 기준으로 남쪽을 하오, 북쪽과 부안초등학교를

가 아닌가 한다. 자라등짝과 자라목이라는 혈 앞에는 반드시 물과 문전옥답이 있어야 하는

상오라 하였던 것 같다. 물론 이러한 기준도 시대에 따라 몇 차례 바뀌었을 것이다.

데, 물은 오룡천이요, 문전옥답은 상등들이다.

2010년 3월 현재 오산리의 총면적은 약 690,000㎡. 이 가운데 밭이 95,275㎡이고 논이

초등학교와 맞닿은 오룡천변이 ‘자래등’이다. 그곳 바닥에는 바위가 깔려 있는데 이를 ‘자

261,960㎡이다. 오산에는 전주이씨 양도공파 일족 외에도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김해김씨 등

래바우’라 한다. 오산의 북쪽 들을 ‘장구시암들’이라고 하는데, 이는 지금의 상오다. 장구시암

여러 성씨들이 살고 있다. 2012년 10월 31일 현재 상오리는 67세대 128명(남 58, 여 70), 하오리

들 한가운데 있는 샘을 ‘장구시암’이라고 했는데, 모양이 장구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는 44세대 91명(남48, 여 43)이 살고 있다(부안면사무소 자료).

장구시암은 사라지고 없다. 지방도와 오산정미소 앞 인근을 ‘저잣거리’라고 하는데, 이곳에도 우물이 하나 있었다. 이

2) 오산리의 지명 유래

름 하여 ‘저잣거리시암’또는 ‘저잣걸시암’인데, 하오에 있다. 1970년대에만 하여도 마을사람

오산이라는 지명은 전주이씨 양도공파 일족이 일명 자라명당에 터를 잡고 이거한 배경에

들이 사용한 샘이었다고 한다.

서 찾을 수 있다. 전주이씨 일족이 이거한 뒤 마을이름이 ‘오산(鰲山)’이 되었기 때문이다. 뒤

‘구정동(九井洞)’은 오산의 서쪽 끝에 있는 마을로, 상오에 속한다. 지방도를 따라 용산 방향

에 ‘오산(吾山)’으로 표기되기도 했으나 ‘자라 오(鰲)’를 쓰는 것이 맞다. 오산은 자라형국이라

의 모퉁이에 현재 한 가구가 자리하고 있는데, 그곳이 바로 구정동이다. 구정동에 집을 지으

서 지어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자라형국에서 반드시 있어야 할 요소가 있으니, 바로 물이다.

면 정승 아홉이 난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렇다면 구정동의 정은 ‘정(井)’이 아닌 ‘정(政)’이 되

오산에서의 물은 오룡천이다. 자라는 쇠, 즉 금(金)으로, 자라가 물에 들어가는 형상을 금생

어야 할 것이다. 구정동의 기운을 끊기 위해서 창내골에서 구정동 쪽으로 넘어오는 ‘구룡목’

수(金生水)라 한다. 쇠와 물이 만나니 상생(相生)이다. 예부터 오산은 상생을 중시해 ‘나’보다는

이라는 고개를 일제가 절단했다고도 한다.

‘우리’를 중시했다고 한다. 후술하겠지만, 오산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높은 사회 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함)

정신은 바로 이 상생의 정신과 다르지 않다.

자라형국은 풍수지리 물형론에서 오항혈(鰲亢穴)이다. 그 혈은 자라등짝과 자라목이다. 또 132

‘우수(雨水)’는 ‘우수점(雨水店)’또는 ‘우수골’이라고도 하는데, 부안초등학교와 지방도 건너 편 마을까지를 말한다. 지금의 우수마을 일부는 30여 년 전에 고창군의 지원으로 형성된 신 촌(新村)이다. 근래에 지방도를 사이에 두고서 북쪽을 오산 1구, 남쪽을 오산 2구로 구분하였 고창의 마을 제4집…133


다. 우수점 서북쪽에 있는 등성이를 ‘챗등’이라고 하는데, 채씨(蔡氏)의 선대 무덤이 있다 하여

저수지 둑이 무너져 수몰되는 바람에 하천 지형이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다(이철환 구술). 충분

붙여진 이름이다.

히 일리 있는 얘기다. 왜냐하면 수몰될 당시의 희생자들이 살았던 곳이 오산천변이었다는 증 언(김인봉 구술)은 하천의 폭이 지금보다 훨씬 넓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2. 오산리의 환경과 부안초등학교

금구영감댁이 자라등짝이라면 자라꼬리 부분에 해당하는 곳은 ‘오미동’이다. 오미동의 옛 지역은 지금의 지방도 즈음이었을 개연성이 크다. 장구시암들은 오산 사람들의 또 다른 문전

오산리의 자연환경은 풍수지리와 관련이 깊다. 평탄면과 오룡천을 자라형국으로 해석해 오

옥답이었다. 현재 상오길 16번지 옆이 장구시암이 있던 곳이며, 상오와 홍해농장이 장구시암

산이라 하였던 점이 잘 말해준다. 오산리에는 오래된 초등학교가 있고, 마스토미가 세운 오

들인 것이다. 장구시암은 그 모양이 장구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외에도 지방도

산학당과 하오산교회가 있었던 곳이다. 천석지기 금구영감댁은 도도히 흐르는 세월을 감내

근처에 하오의 우물을 ‘저잣걸시암’이라고 하였다. 말 그대로 저잣거리에 있는 샘이다. 부안

하면서 그 후덕함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초등학교와 맞닿는 오룡천에는 ‘자래바우’가 있는데, 이름 하여 ‘자랫등’이라 불렀다. 구정동 북쪽의 산등성이를 ‘챗등’이라고 한다. 수강산 자락으로, 챗등 근처에는 채씨(蔡氏)

1) 오산리의 자연환경

의 선대 무덤이 있다. ‘탑들’또는 ‘탑돌’로도 불리는 상등들에 석탑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상

오산은 대체로 평탄지로, 군데군데 작은 민둥산이 있다. 지방도 북쪽 홍해농장에는 ‘동산’

등들에는 옛날 절터가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라 불리는 민둥산이 있고 우수골 서북쪽으로 ‘챗등’이라는 수강산 자락이 자리하고 있다.

이외, 하오의 마을회관 앞에는 당산나무인 팽나무가 있다. 수령이 약 300년쯤은 돼 보인다.

지방도 남쪽 평탄면은 우측 평탄면보다 약간 낮은 지대로, 이 지역은 대체로 하오에 속한다. 하오의 남쪽 개울을 오룡천이라고 한다. 오산저수지에서 발원한 오룡천은 서출동류로, 갈

2) 오산리의 인문환경

곡천으로 합수된다. 오룡천 건너는 상등리 상굴인데, ‘상등들’, ‘상등평’, ‘탑들’ 등으로 불린

오산리 남쪽 상등들에는 동서 방향으로 정읍-영광 간 국도 22호선이 지난다. 지방도 734

다. 상등들은 행정구역상 상등리에 속하지만 오산과 밀접한 곳이다. 즉 오산의 문전옥답이

호선은 오산리를 동서로 관통한다. 지방도는 대산, 해리, 심원, 흥덕 등을 연결하는 도로로,

상등들이요, 오산의 천석지기들이 오룡천 건너의 상등들을 문전옥답으로 삼았던 것이다.

한때 전라도 중서부 해안 지역과 내륙을 연결하는 몇 안 되는 요로였다.

상등들에는 둥글고 작은 산인 ‘똥뫼’가 있다. ‘큰똥뫼’와 ‘작은똥뫼’가 있는데, 최근에 작은

지방도 옆 모정 앞에는 ‘정영손(鄭永孫)의 처 김씨의 열녀비(烈女碑)’가 있다. 나무하러 갔다가

똥뫼 하나가 개간으로 사라져버렸다. 똥뫼는 자라똥을 의미하며 이는 부를 상징한다고 한다.

나뭇짐 지는 것을 도와주는 어느 남정네의 손길이 김 여인의 젖가슴에 닿았다고 하여 그만

오룡천은 한국전쟁 전에는 상굴 쪽 20여 미터 쯤에 위치했었다고 한다. 전쟁 당시에 오산

오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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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결하였다는데, 이를 기린 비가 ‘김씨 열녀비’다.

오산마을 돌담길

고창의 마을 제4집…135


후술하겠지만, 하오산의 하오길 7-2번지에는 한말의 살롱 금구영감댁이 자리하고 있다. 홍

그 모태다. 1922년에 마스토미는 오산보통학

해농장(洪海農場)은 상오산 복분자로 821-7번지로, 현재 오산농장과 병립해 있다. 홍해농장은

교를 공립학교로 전환시켰고, 1923년 6월 1일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마스토미가 과수원을 경영하던 곳이기도 하다. 어느 때부터 홍종철이

에 부안공립보통학교로 인가돼 개교하였다(「부

농장을 경영하면서 ‘홍해농장’이라 하였다.

안공립학교인가」, 『동아일보』, 1923.6.5).

홍해농장 서북쪽 동산에는 농장주 홍종철이 살던 집이 있었는데, 화재로 소실되었다. 현재

1981년 3월에는 부안국민학교 병설유치원

그 집터에는 새 집이 들어서 있는데, 집의 소유자는 홍종철의 아들 홍순범이라고 한다(장인구

인가가 났다. 부안국민학교는 1993년에 동남

구술).

분교와, 1994년에는 수강분교와 통폐합하였

동산 바로 아래는 옛 홍해농장의 관리사가 있다. 관리사는 옛 일본식 가옥 구조로 돼

있으며, 현재는 폐가 상태이다.

부안초등학교

다. 1996년 3월 1일에 교명이 ‘부안초등학교’로 변경되었다. 2012년 11월 20일 현재 7학급

부안면 용산리에 속한 오산저수지는 수강산과 소요산에서 발원한 물이 흘러드는 계곡형으

58명이며, 2010년 2월 10일 현재 제86회 졸업식을 포함하여 총 6,212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

로, 오룡천과 서해천, 그 상류인 소요천과 창내천 등을 막아서 만든 저수지다. 고창군 부안면

다. 2012년 3월 1일 현재 제28대 한동진 교장이 부임하는 등 교장과 교감, 교사 등 모두 17

일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오산저수지는 1940년에 착공하여 1945년에 준공되었다. 제방

명이 근무하고 있다.

형식은 필댐(죤형)이다. 필댐(fill dam)은 토석 재료를 완만한 기울기로 쌓아올려 만든 댐으로,

부안초등학교 교가(작사 이진일/ 작곡 조기일)는 “장엄한 방장이 흰 구름이고/ 햇빛도 찬

그 재료에 따라 록필댐(rock-fill dam)과 흙댐(earth dam) 등으로 나누며, 설계 형식에 따라 균일

란타 자라뫼 기슭/ 종소리 울려온 지 구십여 성상/ 이 땅의 어린 싹을 키워온 글밭/ 장하다

형(homogeneous type), 코어형(core type), 죤형(zoned embankment type), 표면차수벽형 등으로

우리의 배움의 동산/ 샛별 자리 빛난 요람 부안초등교”이다.

나눈다. 저수지의 취수 형식은 사통형이다.

학교마크는 초록 나뭇잎의 푸름을 닮아 늘 푸르고 맑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과 늘 책을

오산저수지의 제방 체적은 2만㎥, 제방 길이는 140m, 제방 높이는 14m이다. 총 저수량은

읽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교목은 아카시아로,

51만 6,000톤, 저수지 유역 면적은 450만㎡, 홍수 면적은 10만 7,000㎡, 만수 면적은 10만㎡,

아카시아와 같은 끈질긴 생명력과 정신력을 구현하는 인재가 되길 소망하는 마음을 나타낸

수혜 면적은 211만㎡이다. 한발 빈도는 5년이고 홍수 빈도는 100년 정도이다.

다고 한다. 제1회 졸업생들이 1924년에 심었다는 아카시아 세 그루는 고목이 되어 학교의 역

하오산에서 오룡천을 건너 상등들로 가기 위한 다리는 2개다. 2003년 12월 1일에 공사를 시작해 2005년 11월 29일에 완공한 ‘오산교’와 하오산 회관 바로 앞의 이름 없는 작은 콘크 리트 다리가 그것이다. 하오산 회관은 2003년 9월 26일에, 상오산 회관은 2003년 3월 28일에 건립되었다. 모정을 개조한 우수동 여성회관은 2010년 9월 25일에 건립되었다. 상오산 모정은 2005년에 세워졌다.

사를 묵묵히 간직하고 있다. 교화는 철쭉이고, 교조는 까치다. 현재 부안초등학교는 15,882㎡의 교지에 다목적교실을 포함한 보통교실 8, 특별교실 3, 관 리실 2, 창고 2, 화장실 2, 숙직실, 보건실, 급식소, 전산실, 사택 등이 있다. 1920년대 부안초등학교의 전신인 부안공립보통학교와 관련한 『동아일보』(1925.4.6) 기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3) 부안초등학교

富安公普校 求生難으로 廢校 / 期日이 넘어도 지원자 단 5명 / 대책을 강구하나 결국은 無策 /

부안초등학교는 고창군 부안면 복분자로 806번지에 있는 공립초등학교이다. 부안초등학

고창군 부안면 오산리 부안공립보통학교는 今般 1학년 신입학생 모집이 남 30인, 여 10인 계 40인인 바 去月

교 병설 유치원이 초등학교 안에 있다. 부안초등학교는 ‘건강하고 개성 있는 어린이, 능력 있

31일까지 입학을 지원한 자가 僅히 5명에 불과하였음으로, 당지 면사무소에 유지대회를 개최하고 富安公普校

고 자주적인 어린이, 탐구하고 개척하는 어린이, 예술을 사랑하고 창조하는 어린이, 도덕적이

신입생이 없음으로 同校 존폐 문제에 대하여 토의하였으나 결국은 대책이 없다는 바, 현재 부안면 총 1,016호

고 애국·애족하는 어린이 육성’을 교육목표로 한다. 교훈은 ‘즐겁게 배우고 올바르게 행하며

에 5,918 인구 중 現 今在 學生 男 40인 女 10인이었는데, 去月 中에 7세로 15세까지의 學齡兒童 未入學者를 조

씩씩하게 자라자’이다. 부안 어린이 상은 ‘창의적인 생각으로 푸른 꿈을 키우는 부안 어린이’

사한 바에 의하면 남 471인, 여 414인, 남녀 계 884인이 전부 생활난으로, 그 중 貧難者 3할을 除하고도 620명

이다. 부안초등학교는 1919년 4월 1일 일본인 마스토미에 의해 설립된 사립 오산보통학교가

중 단 5명이 입학한 것이라고.(고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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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의 마을 제4집…137


1925년 당시 부안공립보통학교에 지원하는 신입생이 없는 이유가, 부안면 주민들의 생활

지형이 바뀔 정도로 폐허가 되면서 석탑의 일부가 변형

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라는 분석 기사다. 주민들의 생활이 매우 어려워 취학을 꺼리기에 보통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 변형된 석탑이 누군가에 의

학교의 존폐까지 거론되었다는 것이다. 당시에 마스토미가 설립한 오산보통학교가 공립으로

해 부안초등학교로 옮겨진 것이 아닐까.

전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입생이 적어, 학교의 존폐 문제가 거론될 정도였다. 이어 부안공 립보통학교 관련 『조선중앙일보』(1936.5.13) 기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석탑은 그 양식이 통일신라의 석탑에 비해 정교하지 못한 까닭에 고려 후기나 조선 전기의 것으로 보고 있 다. 석탑은 기단 부분의 석재 세 개 위에 갑석과 1층 탑

富安公普에 寄附金 遝至 /

신, 그리고 1층 옥개석과 시멘트로 보완한 2층 탑신

(고창)전북 고창군 부안공립보통학교의 다년간 숙제이든 학년 연장 문제가 동 지방 유지들의 열렬한 운동

및 2층 옥개석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2층 옥개석 위에

으로 해결되어 4월 1일부터 실시됨에 ○○교사 증축과 제반 설비에 대하여 동 면 내 유자 제씨의 희사가 답지

는 상륜부의 보개가 올려져 있다. 석탑의 총 높이는 약

한다는데, 지난 8일까지 희사된 금액과 씨명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李鉉昇 700원, ▲李○淵 200원, ▲崔南

220㎝이다.

烈 200원, ▲金年洙 100원, ▲安咸平 50원.”

부안초등학교 내 석탑

1층 갑석의 길이는 약 135㎝, 1층 탑신의 높이는 약 65㎝, 탑신의 한 변의 길이는 약 63㎝, 그리고 1층 옥개석의 한 변의 길이는 100㎝ 등이다. 2층 탑신의 높이는 약 44㎝, 3층 탑신(콘

위 기사는 지역 사회의 숙원인 학년 연장 문제가 해결되면서 교사(校舍)를 필요로 하게 되 었는데, 교사 증축 및 학교의 제반 설비 구입을 위한 지역 유지들의 기부금이 답지되었다는

크리트)의

높이는 약 33㎝ 등으로 추정한다. 상륜부의 옥개석은 지름이 약 42㎝이고 높이가

약 25㎝이다. 탑의 원래 층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3층 석탑으로 추정된다.

내용이다. 후술하겠지만, 위의 기부자 가운데 700원을 기부한 이현승(李鉉昇)은 바로 오산리 의 금구영감이다. 이○연(李○淵)은 오산의 전주이씨 일족인 이종연(李棕淵)으로 추정된다. 이종

2) 하오산의 당산나무와 당산제

연은 이철환의 조부다. 삼양사 김연수는 100원을 기부하였다고 돼 있다.

하오산의 당산나무는 하오마을 마을회관 앞에 있다. 팽나무로, 높이가 약 10m 둘레가 1.5m이다. 원래는 더 큰 나무였으나 나무의 일부가 괴사된 상태다.

3. 오산리의 역사와 문화

하오산은 1970년대만 하여도 100여 호에 이르는 큰 마을이었다. 마을사람들은 매년 음력 2월 초하루에 마을의 무사 안녕을 비는 당산제(堂山祭)를 지냈다. 제를 지내지 않으면 마을에

상등들에는 탑들이라는 이름 하나가 더 붙는다. 오래 전부터 석탑이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 이다. 한국전쟁 당시 오산저수지의 둑이 터지면서 상등들에 있는 이 석탑의 원형이 일그러졌 을 것이며, 어느 누군가가 일그러진 석탑을 부안초등학교에 옮겨놓았을 것이다. 사료에는 기해농민봉기 때 농민군이 오산리 이진사댁에서 하룻밤 묵었다는 사실을 기록하 였다. 이를 두고서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이진사는 누구인지에 대한 생각이 깊어진다.

질병이 나돈다고, 제를 지낸 사람들이 음복을 하게 되면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 였다. 당산제를 앞두고 열린 마을회의에서 부정이 없는 어른 한 사람을 제관으로 선출한다. 제관 은 냇물에 목욕재계하고 부정한 것을 일체 보 지 않았다. 만약에 초상이 난다든지 해서 마을

1) 부안초등학교 내 석탑

에 부정이 있을 때에는 당산제를 미루었다. 음

부안면 오산리의 부안초등학교 정문 옆 개교 60주년 기념비 옆에 석탑이 하나 있다. 석탑

력 2월 1일 진시(辰時)에 술과 과일, 포, 밥, 떡

은 원래 상등리 상굴(또는 상등들, 상등평, 탑들 등이라고 함)에 있던 것으로, 한국전쟁 당시에 현재

등을 차려놓고 제를 지냈는데, 제에는 마을의

의 위치로 옮겨진 것이라 한다. 혹자는 광복 직후에 옮겨졌다고도 한다.

남자들만이 참석하였다. 제가 끝나면 굿을 치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오산저수지의 둑이 터지면서 상등들은 수몰되었고, 수몰로 인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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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하오산 당산나무

고창의 마을 제4집…139


1972년경까지만 하여도 당산제는 상오와 하오 간의 줄다리기, 인근의 농악대까지 합쳐 놓은 대규모의 합굿이 펼쳐지기도 했다. 굿을 치면서 줄을 메고서 당산나무에 줄을 감은 이 들은 당산나무 앞에 모여 고사를 지냈다.

4) 한국전쟁과 오산저수지 한국전쟁 당시에 오산저수지의 둑이 터져, 하오산은 순식간에 물바다가 되었다. 당시 오룡 천 부근의 집 50여 채가 수몰되었으며, 주로 오룡천변에 살던 주민 70여 명이 익사했다고 한 다. 하오산의 김인봉은 경찰지서 보초를 서다가 당시 둑이 터진 것을 알고서 고지대로 피신

3) 무술・기해농민봉기와 이진사

해 안전했다고 한다. 1951년 정월에 좌익들이 저수지의 둑을 트면서 저수지의 물이 일시에

『전라남도고창군취착난당구초동류성명거주병록성책(全羅南道高敞郡就捉亂黨口招同類姓名居住竝

오룡천을 덮쳤다고 한다. 당시에 희생된 이들은 주로 피난민들로, 이들은 오룡천변에 얼기설

錄成冊)』에

의하면, 1898년(무술년) 음력 12월 16일 새벽 이화삼(李化三), 송민수(宋敏洙) 등이 흥

덕의 북면과 동면의 농민 약 3백여 명을 이끌고 흥덕군아로 들어가 인부(印符)를 빼앗고 군수 를 경계 밖으로 내쫓았다. 이름하여 ‘흥덕민란’ 또는 ‘영학당 사건’이라고 한다. 이틀 만에 주동자 이화삼은 체포돼 고창의 모양성에 갇히게 되었는데, 당시 고부에서 시작

기 지은 움막에서 잠을 자다가 변을 당했다고 한다(김인봉 구술). 오룡천에서의 물난리는 한국전쟁 당시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1934년 8월 12일에도 큰비로 인하여 오룡천이 범람해 50여 가옥이 침수되고 2명이 익사한 적이 있었다(「고창군 수재 사망자 2 명」, 『동아일보』 1934.8.17).

된 영학계가 이화삼을 구출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동학농민전쟁(1894년)에 가담한 이들이나 전쟁 중에 희생된 자의 후예들이 당시 고부 이평의 임시교회인 영학교회(英學敎會, 영 국의 성공회로 추정됨)에 學契)’다. 영학계는

4. 한말의 살롱‘금구영감댁’

의탁하면서, 비밀결사체와 유사한 계(契)가 만들어졌다. 일명 ‘영학계(英

전라도 중서부 일대로 확산되었고, 흥덕민란은 영학계가 주동이 되어 일으

킨 최초의 민란이었다. 참고로, 이화삼은 만민공동회와 관련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영학계가 주도한 두 번째 민란은 1899년(기해년) 음력 4월 18일 정읍 입암에서 일어났다. 최

금구영감댁의 주인장들은 마을에 굶는 자가 있으면 자신들의 큰 수치로 여겼으며, 나누고 베풀면서 마을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한편 금구영감댁은 한말에 문학을 논하고 예술을 향 유했던 살롱이기도 했다.

익서(崔益瑞), 송문여(宋文汝), 차경석(車京石) 등은 동학농민전쟁 때처럼 벌왜벌양(伐倭伐洋), 보

‘금구영감댁’이란 이름은, 금구군수를 지낸 이현승이 태어나 자란 집이라서 붙여진 것이다.

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내걸고서 고부군아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어 정읍 입암

이현승이 분가해 금구영감댁 바로 앞에서 살았으므로, 금구영감댁이란 하오2길 7-2번지와

의 왕심리에 대기하고 있던 3백여 명의 농민들과 함께 흥덕군아를 습격하였다. 농민군은 음

이현승이 살았던 하오2길 7-3번지를 일컫는다.

력 4월 20일 사포의 유첨사 집에서 돈 백냥을 거두어들이고 하오산리 이진사 집에서 하룻밤 을 묵었다.

1) 전주이씨 양도공파 일족의 이거

농민군은 4월 21일에 무장으로 진격하였고, 다음날인 22일에는 고창성으로 진격하였다. 이

하오산의 천석지기는 전주이씨 양도공파(襄度公派) 가문의 봉섭, 경섭 형제와 그의 후예들

때 고창성을 지키는 수성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때마침 비가 내려 실패하고 말았다. 비로 인

이다. 경섭의 손자 이현승(李鉉昇)은 1902년에 금구군수(金溝郡守)를 지낸 이로, ‘금구영감’으로

해 농민군의 주무기인 화승총이 무용지물이 되었던 탓이다. 4월 23일, 패퇴한 농민군은 부안

통한다. 전주이씨 양도공파 일족이 오산에 이거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이현승의

면 난산장터(알뫼장터)에 재집결해 관군과 맞서 싸웠으나 다시금 패퇴하고 말았다. 당시 관군

고조 이문술(李文述) 때부터였다고 한다. 이문술은 원래 영광 묘량 사람인데, 당시 교유하던

에게 붙잡힌 농민군은 17개 군의 2백여 명, 이들 중 고창옥에서 옥사한 농민은 박창운(朴昌云)

종친 흥선대원군의 장남 이재면(李載冕, 1845~1912)의 추천으로 이곳 오산에 터를 잡게 되었다

외 17명이나 되었다.

는 것이다(이철환 구술).

1899년 4월에 농민군이 하오산리의 이진사댁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함은 아마도 하오의 금

이문술의 아들 봉섭이 당대 문우 기정진(奇正鎭) 외 다수의 문사들과 주유하면서 오산을 염

구군수를 지낸 이현승의 집 ‘금구영감댁’이 분명하다. 금구영감댁은 당시 천석지기이자 왕실

두에 두었고, 먼저 봉섭이, 이어 경섭이 이곳 오산으로 이거하였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전주

종친이었다. 특히 흥선대원군의 장남 이재면과의 친분을 유지한 집안이었던 점을 감안한다

이씨 양도공파 일족이 오산을 명당으로 인식, 이거한 것으로 보인다.

면, 농민군이 하룻밤 묵었던 것을 두고서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40

『전주이씨양도공파보권지일(全州李氏襄度公派譜卷之一)』(1985년)에 의하면, 이문술에게는 봉섭 고창의 마을 제4집…141


(鳳燮, 호는 淸齋)과

경섭(京燮, 호는 雲遊居士) 두 아들이 있었다. 봉섭의 손자는 현정(鉉鼎, 호는 禁石)

이고 종연(棕淵, 자는 春和), 동규(東奎, 호는 濟石), 철환(哲煥)이 뒤를 잇는다. 1880년 8월에 생원시에 합격한 경섭의 손자는 금구영감 이현승(李鉉昇, 자는 鼎三)이다. 현승 은 1873년에 태어나 1898년에 참봉이 되었고, 외부참서관(外部參書官, 외교 문제를 실무적으로 처리 하는 한말의 관직)을 俊),

지내다가 금구군수(정3품 통정대부)가 되었다. 현승에 이어 봉연(鳳淵), 동준(東

종환(宗煥) 등이 뒤를 잇는다. 동준의 처 송점오는 68여 년 전에 시집 와 시조부인 금구영

감 이현승을 직접 보았다고 하였다(송점오 구술).

2) 한말의 살롱‘금구영감댁’ 이문술의 6대손 이철환(李哲煥)이 사는 집이 바로 당대 명당 ‘금구영감댁’이다. 유년의 이철 환은 금구영감댁의 큰 감나무 주변에서 나는 북소리를 들으면서 자랐다고 한다. 자라등짝에 집이 얹혀 있기에 나는 북소리라는 게 당시 집안 어른들의 설명이었단다. 금구영감댁은 당시 에 기와를 올리지 않고 초가를 유지하다가 근래에 와서 함석에 이어 기와를 올렸는데, 자라 등짝이라서 무거운 기와를 피했다는 게 이철환의 설명이다. 현재의 금구영감댁은 약 300년

된 8칸 겹집(현재 7칸으로 줄어듦)으로, 청재 이봉섭이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봉섭은 1814년생으로, 1868년 한때 고종에게 ‘상언(上言)’을 올린 적이 있다고 한다. 상언 은 조선시대 국왕에게 올리는 문서로, 관원이나 유생, 사림 등이 올리는 상소와는 달리 일반 사인(私人)이 효자나 열녀, 학행자 등을 추천하고 증직을 청원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금구영감댁에는 흥선대원군이 친 난 그림과 이재면의 편지, 그리고 당대 문사들의 시나 그 림 등이 남아 있다. 대청마루에 걸려 있는 서간문은 매산의 글씨라고 하는데, 어쩌면 매산(梅 山)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의 글씨인 듯하다. 매산은 서울 출신으로, 조선 후기 학자로 알려

져 있다. 매산과 교유한 이는 다름 아닌 이봉섭이었다.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서화가였던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도 금구영감댁에서 여러 날

머무른 적이 있다고 한다(이철환 구술). 추사가 금구영감댁에 머물렀다는 것은 어쩌면 당대 선 승 백파 긍선(白坡亘璇, 1767~1852)을 만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고창 무장(茂長) 출신의 백파는

추사와의 서한 선논쟁(禪論爭)으로 유명하다. 추사는 금구영감댁에 머물면서 백파를 만나려다가 끝내 만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을 것

이다. 후에 추사는 백파의 비문을 짓고 썼다. 부모의 비문조차 쓰지 않았다던 추사가 쓴 백

① 금구영감댁 ② 금구영감댁 곳간 ③ 금구영감댁 주인장 이철환 씨 ④⑤⑥ 금구영감댁 유품들

파의 비문에는 ‘백파는 화엄종주이자 율사이며 대기대용(大機大用)의 격외선사(格外禪師)’라고 한껏 추켜세웠다. 금구영감댁에 추사의 글씨도 남아 있다고 한다. 금구영감댁에는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7)의 글씨도 있다. 창암은 정읍 출신으로,

142

고창의 마을 제4집…143


조선 후기 서예가이다. 어린 시절에 당대의 명필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를 배웠다는 창암은 초

동체(農學共同體)를 꿈꾸었다. 그의 청교도 정신과 ‘사랑’은 당시 한국인들을 울리고도 남는 것

서를 잘 썼으며, 그의 서체를 ‘창암체’라고 불렀다 한다.

이었다.

이처럼 금구영감댁의 이봉섭과 경섭 형제, 그리고 그 손인 이현승의 주변은 항상 문사들로 가득했으며, 노년의 한때 ‘기로회(耆老會)’라는 모임을 만들어 전국의 문사들과 교유하면서 남

1) 올해 100주년의 오산교회

긴 글들을 모아 『기로회집』을 편찬하기도 하였다고 한다(이철환 구술). 금구영감댁은 당시의

올해 100주년이 되는 오산교회(현재 부안면

살롱이었던 셈이다.

중흥리에 위치)는,

1912년 10월 5일 일본인 마

스토미 야스자에몬(枡富安左衛門, 이하 마스토미라

3) 부안중학원을 설립한 이동규의 덕행

함)이

고창군 부안면 오산리 196번지에 마련

앞에서 언급했듯이, 1936년에 운영난에 봉착한 부안공립보통학교의 교사 증축과 제반 설

한 예배당이 그 모태다. 마스토미의 사과농장

비를 위해 금구영감 이승현이 700원을, 이종연으로 추정되는 이가 200원을 내놓았다. 삼양사

에 예배당을 마련하고서 농장에서 일하는 한

김연수는 당시 100원을 기부하였다. 이승연과 이종연은 오산리의 전주이씨 일족이다.

국인 22명과 함께 예배를 보면서 시작된 교회

이종연은 이철환의 조부이며, 이철환의 부친 이동규(李東奎)는 일족이자 부안군 사람 이승

의 이름은 ‘하오산교회’. 오산리 196번지는 지

연(李昇淵)을 중학원 서무(뒤에 중학원 교장이 됨)로 초빙하여, 1947년 12월 15일에 현 고창북중

방도에서 홍해농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근처

학교(2012년 11월 현재 교장은 김은식)의 모태인 부안중학원을 오산에다 설립하였다. 이동규는 상

로, 현재 상오에 속하지만 설립 당시는 하오

등들 똥뫼에서 나무를 베어다가 1948년(1949년이라도 함) 3월에 현 고창북중학교 교지에다 목

산인 까닭에 하오산교회라 하였던 것 같다.

조와가 2동을 건립하고 부안중학원을 이전하였다(이철환 구술). 더불어 우수골 뒤 문중산 20정보를 ‘학교산’이라 이름하고 부안중학원에 귀속시켰다. 이승

마스토미는 교회 설립과 함께 부안초등학

오산교회

교의 전신인 흥덕학당을 설립해, 선교와 교육

연이 도의원을 하면서 부안중학원은 정식 학교로 인가를 받았다(이철환 구술). 이것이 뒤에 흥

을 아울러 실시하였다. 또한 호남 지방 최초의 사립 중등교육기관인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설

민원예기술학교(1953.12)로 학교법인 은광학원(1961.4)으로, 고창북중학교(1961.12)로 이어졌다.

립하였다. 오산고등보통학교는 1922년에 고창군민에게 기증됐고, 고창군청 소재지인 고창읍

이동규의 덕행은 위의 선대들 못지않았다. 농지개혁(1950년)이 단행되기 이전에 이미 소작인

으로 옮겨져 고창고등보통학교(현 고창고등학교의 전신)로 이어졌다.

들에게 농지를 나누어 주었고, 흉년으로 마을이 굶주릴 때면 곳간의 양식을 함께 나누었다고

하오산교회는 1982년에 고창군 부안면 중흥리 504번지에 교회 건물을 신축해 이전하였다.

한다. 한국전쟁 당시 좌익들에 의해 지역의 지주 28명이 인민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유일하게

이전한 교회 이름 역시 ‘오산교회’다. 현재 오산교회는 장로교 합동으로 300여 명의 신도가

살아남은 이가 이동규였다. 이동규의 덕행과 그의 진정성을 증언하는 이들이 너무 많았기에

있다(전홍엽 구술). 목사 전홍엽은 1992년 4월에 부임하였다.

살 수 있었다고 한다(이철환, 김순자 구술).

5. 마스토미와 오산학당

마스토미가 토지를 교회에 기부했다는 『동아일보』(1927.3.30) 기사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湖南地方 / (전략)

오산리는 일본인 마스토미의 청교도 정신이 깃든 곳이다. 마스토미는 일본이 한국에 가한

桝富 氏 교회에 기부 / 고창군 부안면 오산리에 10여 년 간 거주하든 승부안좌위문 씨는 同里 貧民 又는 고

폭압적 행동을 양심 있는 한 사람의 일본인으로 진심어린 사과와 회개를 하였다고 한다. 더

창 교육계를 위하여 많은 공헌이 있던 바 今般에 자기 소유이든 현재 교회건물 대지 200여 평 전부를 그 교회

불어 한국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일들을 하고자 하였는데, 그 첫 번째가 학

에 기부하였다더라. (고창)

교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깊은 신앙심이 있었던 마스토미는 삶터와 교육이 일체되는 농학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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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사는 마스토미가 교육계를 위해 많은 공헌을 했으며, 교회 건물이 있는 대지 200여 고창의 마을 제4집…145


평을 모두 교회에 기부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교회가 하오산교회이며, 하오산교회는 훗날 오

다음은 당시 오산고등보통학교 관련 『동아일보』(1921.5.11) 기사 내용이다.

산교회가 되었다. 전북교육계의 新星 / 일본인 승부 씨의 교육열로 / 신설된 오산고등보통학교 /

2) 오산고등보통학교와 고창고등보통학교 1918년 4월에 보통교육을 마친 학생들의 진학을 위해 마스토미는 흥덕학당(1912년에 설립) 부지에다가 오산고등학당을 설립하였다. 1919년 2월에는 흥덕학당을 폐하고, 지금의 부안초

근래 일반의 교육열과 배우고자 하는 생각이 늘어감은 실로 반가운 현상인 동시에 교육기관이 부족한 것은 매우 유감되는 일이다. 따라서 일반 사회의 유지들은 교육 기관을 확장하기에 매우 노력하는 중임은 일반이 다 아는 바이어니와 이에 한 가지 가상하고 반가운 소식이 있다.

등학교의 모태인 오산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마스토미가 세운 학교의 모든 학생들은 무료 로 수업을 받았다. 당시만 하여도 고창군 각 지역에서 보통학교 3학년을 마치면 흥덕학당에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오산리 사립 오산고등보통학교는 작년 3월에 고등학교의 인가를 맡아가지고 지금

진학하여 소학교 과정을 마쳤으므로, 시골마을 오산리는 다른 지역에 비해 교육열만큼은 높

65명의 학생을 수용하여 가르치는 중인데, 이 학교는 조선 사람이 설립한 것도 아니오 또한 관립은 물론 아니

았다고 한다.

다. 이 학교의 설립자는 일본인 枡富安左衛門 씨이니 씨는 기독교 신자로서 오랫동안 당지에 와서 농장을 경

1919년 4월에는 오산고등학당을 폐하고 오산학교를 설립하였다. 당시에는 오산학교를 ‘오

영하고 지나든 중, 씨는 일찍이 조선 사람의 교육기관이 부족한 것을 유감으로 여기어 去今 십년 전에 오산리

산학당’이라고 불렀다. 1920년 1월에 오산학교를 오산고등보통학교(이하 오산고보라 함)라 변경

에 서당과 같은 학교를 설립하고 이름을 흥덕학당이라 하여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기를 비록 하였는데, 이것을

하였다. 아울러 부지 4천여 평을 매입하고 100여 평의 교사를 마련하였다.

기초로 삼아 차차 확장하여 지금은 약 100여 평의 건물과 약 4,000평의 지대를 사서 훌륭한 증등교육기관을

오산고보는 당시 호남지방 최초의 사립 중등교육기관이면서, 영재교육을 담당하는 지역

만들게 되었는데, 이래 십년 동안에 10여 만 원의 경비는 전부 설립자 되는 승부 씨가 자담을 하였고, 금년도에

의 명문학교였다(「순회탐방」, 『동아일보』 1927.9.11). 오산고보는 그 희소성으로 보아 오늘날의 종

는 약 7만원의 예산으로 학교집과 기숙사를 신축하려 하였으나 근래의 경제 공황으로 사업이 여의하게 진행

합대학 정도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오산고보는 1920년 3월에 관의 인가를 받았고,

되지 못하여 그 일부만 착수할 예산이라 하며, 아직까지 학생에게는 월사금 같은 것도 한 푼도 받지 아니함으

1921년 5월에는 65명의 학생을 보유한 어엿한 고등보통학교가 되었다.

로 모든 경비는 설립자가 부담하여 왔는데, 장래의 유지 방침은 설립자가 근본 취지를 다하기 위하여 미구에

오산고보를 마스토미 한 개인의 힘으로는 더 이상 경영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때가 1922 년 1월이다. 마스토미는 오산고보 운영을 포기하기에 이르렀고, 고창의 유지들은 1922년 2월

재단법인을 조직할 계획이 있는데, 그 학교에는 보통부까지 부속하여 있고, 방금 교원으로 조선인 3명 일본인 1명을 일본에 유학시키는 중이니 장래 전라북도의 교육을 위하여 매우 경하할 일이라 하겠더라.(고창)

에 오산고보 유지를 위한 군민대회를 개최해, 오산고보의 존치를 위한 ‘존치집행위원회’를 만 들었다.

위 기사는 마스토미가 오산고보를 설립한 이래 거금 17만여 원을 들여서 교사와 기숙사를

1922년 4월에 존치집행위원회는 오산고보 인수를 결의하고, 동시에 마스토미에게 교장을

신축하려고 하였으나 경제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내용이다. 특히 ‘학생들에게 돈 한

맡아줄 것을 간청하였다. 마스토미는 군민들의 요청이 워낙 간곡했기에 양태승을 교장대리

푼 받지 않고 모든 경비는 설립자인 마스토미가 부담하였다’는 내용은 마스토미의 교육 사

로 한다는 전제에서 교장을 맡았다. 1922년 6월에 존치집행위원회가 ‘재단법인 고창고등보

업에 대한 진정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앞의 7만여 원은 오산고보가 고창읍으로 이전하여

통학교 설립준비위원회’로 변경하고, 오산고보를 오산리에서 고창 읍내로 이전하여 고창고등

고창고보로 전환할 때 고창고보에 기부되었다고 한다.

보통학교라 하였다. 이때 마스토미의 적잖은 재산도 고창고보에 조건 없이 기부되었다. 마스토미의 기부에 감동한 고창군민들도 십시일반 쌀과 돈을 모아 고창고보 설립에 일조

6. 오산리의 인물

하였다. 1925년에 현 고창고등학교 자리에 교사를 마련하고 고등보통학교의 이전을 마무리 하였다. 1938년 사립 고창중학교로 명칭을 변경하였다가 1944년에 학교법인을 전라북도에 이관하 여, 공립고창중학교가 되었다. 1951년 학제 개편으로 고창고등학교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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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리에는 덕망 있는 인물들이 많다. 그들의 공통점은 ‘가진 자의 도덕적 책무’즉 노블레 스 오블리주 정신이다. 금구현감 이현승의 ‘덕행’과, 청교도 정신으로 일관한 마스토미의 ‘사 랑’, 그리고 근래의 홍종철, 홍순희, 이동규 등의 ‘봉사’는 오산리의 역사이자 자긍심이다. 금 고창의 마을 제4집…147


구현감 이현승과 마스토미의 덕행은 그 어떤 목적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이들의

2) 마스토미 야스자에몬

진정성이 오늘날 오산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고향’으로 부르게 하는 데 한 치의 주저함도

일제강점기에 고창 지역에서 활동했던 일본인 사업가이자 교육자인 마스토미는 마스토미

없게 한다.

야스자에몬, 또는 승부장로(枡富長老)라고 불렸다. 1880년 일본 후쿠오카에서 태어난 마스토

미는 1904년 러・일전쟁 때 군에 징집되어 한국에 오게 된 게 한국과의 인연이었다. 이때 마

1) 금구영감 이현승 1873년에 부안면 오산리에서 태어난 이현승(李鉉昇)은 운유거사 이경섭의 손자로, 참봉이

스토미는 한국의 어려운 사정과 한국인의 무지를 몹시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한국에서 사업할 것을 결심하고 1906년에 다시 건너온 마스토미는 농장 경영을 구상하였

되었다가 외부참서관(外部叅書官), 금구군수 등을 지낸 인물이다. 1902년 금구군수에 임명된

다. 1907년에는 마스토미 데르코(枡富照子)와 결혼했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데르코로부

이현승은 현지에서 덕행을 많이 베풀었던 모양이다. 이현승의 덕행을 기리는 비가 지금도 금

터 감화 받은 마스토미는 세례를 받고 장로가 되었다. 마스토미는 1909년 9월에 전라북도

구(金溝)에 남아 있다고 한다. 당시에 흉년이 들자 이현승은 나락 100석을 궁민들에게 나누어

김제군 월촌면 월봉리에 땅 700정보를 매입하여 본격적으로 농장을 경영하였다.

주었다는 전언도 있다. 이현승이 외부참서관으로 재직(1902)하면서 작성한 서류 「원사부래거안(元師府來去案)」이 남 아 있다. 금구군수와 관련한 기록으로는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광무6년 음력 4월 3일)와 1902

1911년 12월에 마스토미는 자신이 살고 있는 김제와는 떨어진 고창군 부안면 오산리에 11 정보의 땅을 개간하여, 사과나무를 심었다. 이듬해에는 농장에 교회를 설립했으니 그 이름이 하오산교회다. 더불어 흥덕학당을 설립하여 교육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때가 1912년이다.

년 전라도 관찰사 조한국(趙翰國 또는 趙漢國, 1900년에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함)이 금구군수 이현

『마스토미 장로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마스토미는 “… 조선이 독립하기 위해서는 조선인

승에게 보낸 「훈령(訓令)」(‘전라감영특별전-선화당 회화나무’, 전주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 특별전, 2008)

이 뜻을 따라 살 것, 열심히 배울 것, 예수님을 믿을 것 이 세 가지가 필요하다”라고 설파하였

외 다수의 훈령이 남아 있다. 오늘날에도 이현승을 ‘금구영감’으로 부르는 까닭은 그가 금

다고 한다. 마스토미는 기호학당에서 공부하던 윤치병·양태승·김영구 등을 일본의 고베신

구군수를 지냈기 때문이다. 그가 살던, 대대로 내려온 큰집과 작은집을 ‘금구영감댁’이라고

학교(神戶神學校)에 유학시켰다. 배워야 조선이 독립이 된다는 그의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마

부른다.

스토미 자신도 고베신학교에서 공부하였는데, 이때 세 학생의 학비를 마스토미가 담당하였

금구영감 이현승은 관직에서 물러나 부안면 오산리에 살면서도 덕행을 멈추지 않았다. 마 을에 굶주린 이가 있다면 그것은 곧 자신의 큰 수치라 여겼던 이현승은 흉년으로 마을사람

다. 앞의 세 학생이 졸업하자 마스토미는 윤치병을 하오산교회 목회자로, 양태승을 흥덕학당 책임자로, 그리고 김영구를 흥덕학당 사감 및 교회의 주일학교 담당자로 일하게 하였다.

들이 굶주릴 때마다 자신의 곳간 문을 열어 굶주린 이들을 도왔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나

마스토미는 1918년에 흥덕학당 부지에 오산고등학당을, 1919년 2월에는 흥덕학당을 폐하

누고 베푼 금구영감을 항상 존경해마지 않았다. 1899년 농민봉기가 일어났을 때, 농민군이

고 오산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에 다시 오산고등학당을 폐하고 오산학교(당시에 오산

금구영감댁에서 해 준 밥을 먹고 하룻밤을 묵었다는 사실은 당시 이현승의 덕행과 결부지어

학당이라고도 함)를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학교를 설립하였다.

설립하였다. 1920년에는 오산학교를 모토로 중등교육기관인 오산고등보통

참고로, 부안초등학교 전신인 부안공립보통학교의 교사 증축을 위해서도 이현승은 7백 원

마스토미는 사과농장의 이익금 모두를 오산고보 학생들의 무상교육에, 실력 있는 교사 초

을 기부하였다(『조선중앙일보』 1936.5.13). 또한 이현승은 재단법인 고창고등보통학교 이사로 활

빙에 썼다. 당시에 오산고보 학생들이 마스토미를 두 번째 아버지로 여길 정도였으니, 오늘날

동하면서 적지 않은 재산을 학교에 기부하였다. 당시 고창고보 이사는 고창의 천석지기들로

에도 보기 힘든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라 아니할 수 없다.

구성됐으며, 홍종철도 이사진에 포함돼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일본은 큰 불황을 겪게 되었고, 오산에서 수확된 사과는 더 이

이현승의 덕행은 부를 바탕으로 하는데, 그 부의 배경은 오룡천 건너의 상등들이다. 금구영

상 일본으로 수출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수익이 없는 가운데 학생 전원의 무상교육 원칙

감댁이 자라등짝이라고 한다면 자라꼬리는 오미동이다. 자라는 오룡천을 향해 있는 형국이

은 오산고보의 운영을 어렵게 하였다. 결국, 1922년 마스토미는 오산고보의 운영을 포기하기

니 물 건너 상등들은 부를 상징한다. 오산의 천석지기 이현승의 덕행의 물질적 토대는 바로

에 이르렀다.

오룡천 건너의 문전옥답 상등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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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의 유지들은 오산고보 인수를 결의하고, 동시에 마스토미에게 교장을 맡아줄 것을 간 고창의 마을 제4집…149


청하였다. 마스토미는 양태승을 교장대리로 한다는 전제로 교장을 맡았다. 고창고등보통학

3) 홍종철과 홍순희 부자

교로 명칭을 변경한 오산고보는 오산리에서 고창 읍내로 이전하였다. 이때 마스토미의 적잖

고창군 아산면에서 태어난 홍종철(洪鍾轍, 1890~1973)은 기업가이자 사회 활동가이다. 본관

은 재산이 고창고보에 조건 없이 기부되었다. 마스토미는 초대 교장으로 부임하여 고창고등

은 남양(南陽)이며, 일본식 이름인 홍해종철(洪海鍾轍)에서 딴 이름 ‘홍해농장’의 주인으로 잘

보통학교를 전국 최고의 학교로 이끌었다. 그러던 중 1934년 11월 6일에 55세의 짧은 생애를

알려져 있다. 홍종철은 마스토미의 농장을 1924년부터 ‘홍해농장’이라 하고 경영을 해왔다고

마감했는데, 일본인이면서 한국인 이상으로 한국을 사랑하다 간 마스토미의 장례식이 있던

하는데, 어떤 연유로 마스토미의 농장을 경영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고창고보 운동장은 그의 덕행을 기리는 학생과 군민의 오열로 가득 찼다고 한다. 다음은 마스토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알 수 있는 『동아일보』(1927.3.30) 기사 내용 이다.

홍종철은 동아일보사 설립 발기인(1920)을 시작으로 『동아일보』 고창지국장(1923), 사립 고창고등보통학교 이사(1923), 고창번영회 회장(1927), 소방조 설립 발기인(1935) 등을 역임하 였다.

敎育界功勞者 桝富氏餞別宴 /

전북 고창군 부안면 오산리에 임시 거주를 하는 桝富安左衛門 氏는 기독교인으로서 조선인 무산 청년 수십

1937년경에 370여 정보의 땅을 소유한 고창의 거부 홍종철은 이후에도 정읍국자(井邑麴 子)

이사, 고창요업주식회사 대표, 홍해제염공사 사장, 고창연해어업조합 사장 등 사업가로

서 그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전북 민선 도평의회원(1924, 1927), 1930년 조선총독부 자문기

여 명을 일본 각지 전문대학에 유학시킨 功績 뿐 아니라 오산리에 高等普通 程度와 普通學校 程度 兩科를 단독

구인 중추원 참의(1930~1933), 전북 관선 도회의원(1937), 조선임전보국단 전라북도 발기인

설치하고 수백 명 학생을 모집하여 10여 년 간 경영하던 中 經濟 關係로 大正 11년 3월 중에 高敞郡 經營으로 고

(1941),

등보통과는 인도하는 동시에 기본 재산으로 토지 100여 斗落을 기부하고, 고창고보 교장 및 이사의 중임까지 當

류하였다.

任되고 동년 秋期에 보통학교도 역시 공립으로 인도하는 동시에 同 校舍와 대지 및 其 校 전부를 기부하였든 바, 今般 김제로 移去케 됨으로 去 19일 동면 유지 발기로 승부 씨의 성대한 송별연회를 하였다더라.(고창)

부안면장(1944~1945) 등을 지냈다. 이러한 연유로 세인들은 그를 친일반민족자로 분

대한민국 수립 직후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1949.8.6)된 홍종철은 같은 해 8월 31일에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2009년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의 명단에 홍종철이 포함되었다.

위 기사는 마스토미가 가난한 한국 청년 수십여 명을 일본에 유학시켰을 뿐만 아니라 오산

이처럼 홍종철은 친일반민족행위자임과 동시에 지역사회를 위해 재산을 적잖이 기부했던

리에 학교를 세워 수백 명의 인재를 배출했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윤치병, 양태승, 김영구 외

덕행자이기도 한데, 덕행 쪽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홍종철은 고창고보 설립을 위해

조정만, 김옥성, 제승용 등 많은 이들의 학업을 도왔다. 1922년 오산고보가 고창고보로 전환

16,000원을 기부하였으며, 고창고보 이사로 있으면서 적잖은 전답을 학교에 기부하기도 하

하는 과정에서도 마스토미는 토지 100여 두락을 기부하였고, 같은 해에 오산보통학교를 아

였다. 또한 전주여자고등보통학교 설립에 3백 원을 기부하였고, 광복 직후의 한성여자중학교

무 조건 없이 공립으로 전환하였다는 것이다. 마스토미는 일본이 한국에 가한 폭압적 행동을 양심 있는 한 사람의 일본인으로 진심어린 사과와 회개를 하였다고 한다. 더불어 한국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일들을 해보고자 교육 사업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마스토미는 삶터와 교육이 일체되는 농학공동체 (農學共同體)를

꿈꾸었으며, 그의 청교도 정신과 사랑은 당시의 한국인에게도 큰 감동을 주는

것이었다. 마스토미의 한국에서의 선의(善意)와 덕행을 뒤늦게 인정한 한국 정부가 1995년에 마스토미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이러한 마스토미의 선의를 비판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마스토미는 한국인의 은인으로 보기 힘들며, 복음전도자로 위장한 식민지의 지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한국으 로부터 받은 훈장은 지나치다는 견해다(이규수의 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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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홍해농장의 모습

옛 홍해농장의 관리사. 일본식 가옥이다.

고창의 마을 제4집…151


재단 설립에 약 5천만 평의 땅을 기부하였다. 더불어 학비가 없는 어려운 학생들의 학비를 전

7. 오산리의 조직과 산업

부 또는 일부를 보조하기도 하였다(「반민특위조사기록-진정서」, 『조선총독부시정25주년기념표창자명감, 조선의 인물과 사업-호남편 1』).

덕행자이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였던 홍종철은 상오의 홍해농장 안의 동산 자택에서 살다 가 타계하였다. 다음은 홍종철이 고창의 지역 사회에 적지 않은 돈을 기증했다는 『동아일보』 (1929.10.5)

오산리는 전통적인 농업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최근에 시설농업이 이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아직은 타 지역에 비해 미약하다. 수십 년 전까지만 하여도 사람들이 북적거렸던 오 산리는 산업화의 물결과 도시화의 바람으로 공동화돼 가고 있다.

기사다.

1) 오산리의 조직 故親甲日에 四百圓寄附 고창홍씨가 /

2012년 11월 현재 오산리의 상오(오산 1구) 이장은 장인구, 하오(오산 2구)의 이장은 김재국이

고창군 부안면 오산리 洪鍾轍(37) 씨는 현재 고창고등보통학교 이사로 사회 공인 사업에 공훈이 많은 바 일

다. 상오의 새마을지도자는 정만석, 하오의 새마을지도자는 최희수다. 상오의 부녀회장은 박

생 양친을 회갑이 지내도록 모시지 못하고 회갑 전 별세함을 무한 유감히 생각하여 지난 1일(음 8월 9일)은 육

말례, 하오의 부녀회장은 김순자이다. 상오의 노인회장은 이길동, 하오의 노인회장은 이희서

년 전에 작고한 자기 자친의 육십일세 회갑 생일임으로 이 날을 영구 기념키 위하여 씨의 원적지인 동군 雅山

이다.

面 大東里에 현금 사십 원과 중간 거주지인 高敞 邑內里와 자기 현주소지인 동군 富安面에는 현금 300원을 기 증하였다더라.

2) 오산리의 산업 오산리의 대부분은 농업에 전념하며, 근래 복분자 농사를 짓는 농가가 늘고 있다.

위 기사 내용은 1929년 홍종철이 양친이 태어난 아산면 대동마을과 한때 살았던 고창읍 읍내리, 그리고 당시 살고 있는 부안면에 적지 않은 돈을 희사했다는 내용이다. 1913년생인 홍종철의 아들 홍순희(洪淳熙)는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를 졸업하고 고 창산업조합 상무이사, 고창면협의회 의원, 고창산업조합장, 민주당 중앙위원 등을 지낸 인물

하오산에는 기와 전문 업체인 효광기와가 있다. 효광기와는 1999년 김완덕에 의해 설립, 지 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외 상오산에는 오산가든과 오산정미소가 있다. 오리 요리로 유 명한 오산가든과 70여 년 전에 설립되어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뀐 오산정미소는 현재 폐쇄된 상태다. 상오산에는 노인들이 즐길 수 있는 게이트볼장이 있다.

이다. 1958년 5월에 실시된 제4대 국회의원(1958~1960) 선거에서 민주당 공천을 받아 고창 을

일제강점기부터 명성을 날렸던 홍해농장은 현재 동산(공원부지)만이 남아 있으며, 홍해농장

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당선 이후 민주당을 탈당해 자유당으로 입당하

자리에는 오산농장(서환재)이 자리하고 있다. 오산농장은 약 18,000평으로, 8천 평의 부지에는

는 바람에 세인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고구마를, 2천 평의 부지에는 고추를 재배한다. 나머지 부지에는 나무가 심어져 있다.

홍순희의 동생 순범(淳範)은 고창북중학교 교장을 역임한 교육자였다. 그의 아들 영표(1957 년생)는

18대와 19대 국회의원(인천 부평 을구)으로, 2011년 민주당 원내 대변인, 2012년 민주통

합당 한명숙 대표 비서실장 등을 역임하였다. 홍영표는 부안초등학교와 고창중학교, 고창북

2012년 11월 현재 오산리는 빈집이 늘고 고령화 추세도 역력하다. 이런 추세라면 마을은 공동화될 것이 자명하다. 오산의 자긍심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소재로 한 마을 공동체 사업 을 구상하는 것도 마을의 공동화를 막을 한 계제(階梯)일 수가 있다.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전학한 이리고등학교 등을 졸업하였다(장인구 구술). 동국대학교를 졸업 한 홍영표는 1983년 부평의 대우자동차 용접공으로 위장취업하여 노조의 민주화 및 임금인 상 투쟁을 벌였으며, 1985년에는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농성사건을 주도하다가 구속되기도 하였다(『오마이뉴스』 2012.4.7). 이외 오산리 출신으로 부안면장을 지낸 이는 홍종철(1944~1945)과 이봉섭의 증손 이최연(李 最淵, 1946~1947),

152

그리고 농어촌공사 고창지사장 이강환의 부친 이기동(李起東) 등이다.

고창의 마을 제4집…153


도움 주신 분

『성혼(聖魂)-항일 민족교육』, 고창중・고등학교 동창회, 효성사, 2007.

김인봉(83세, 하오산) 은춘기(82세, 하오산) 최영렬(71세, 상오산) 최재수(76세, 상오산)

『호남기독교 100년사-전북편』, 김수진, 쿰란출판사, 1998.

송점오(86세, 하오산) 이희서(87세, 하오산) 이철환(77세, 하오산) 전홍엽(66세, 오산교회 목사)

『마스토미 장로 이야기』, 김충렬・백영훈・최종설, 한국장로교출판사, 2009.12.

김순자(75세, 하오산) 장인구(59세, 상오 이장) 김재국(43세, 하오 이장)

『조선총독부시정25주년기념표창자명감, 조선의 인물과 사업-호남편1』, 조선총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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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고창의 마을 제4집…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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