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송미지현(松彌知縣)의 치소(治所), 무송리 이병열
성송면 무송리 1. 무송리 개요
낙양리
무송리(茂松里)는 고창군 성송면에 있는 리(里)로, 송산(松山), 내원(內院), 갈산(葛山)의 3개 행
사내리
정리와 갈산(葛山), 금곡(金谷), 내원(內院), 새터(효곡孝谷), 송산(松山), 용두(龍頭) 등 6개의 자연마
괴치리 향산리
학천리
을로 이루어져 있다. 무송리는 본래 삼한시대 마한에 속하였으며,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송미지현(松彌知縣)에 속
하고리
판정리
계당리
하였다. 당시 송미지현(松彌知縣)은 지금의 성송면·대산면·무장면과 공음면 일부를 포함했던 지역이다. 송미지현의 치소(治所)는 초기 하고리 고현(古縣)마을에 있다가 후에 무송마을로 옮 겨진 것으로 본다(『고창군지』, 2010). 남북국시대(통일신라) 신라 경덕왕16년(757)에 송미지현은
산수리
무송리
암치리
무송현(茂松縣)으로 바뀌어 무령군(武靈郡, 지금의 영광군)의 영현이 되었다. 무송현은 고려시대까 지 존속하다가 조선 태종17년(1417) 때 장사현과 무송현을 통합하여 무장현(茂長縣)으로 이름 이 바뀌었는데, 무장현에 진(鎭)을 두어 병마사(兵馬使)가 현의 일을 겸임하게 하였다. 무송리 는 조선 말기까지 무장군 원송면(元松面)에 속하였다. 1914년 4월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의 거하여 무장군 원송면의 용두리(龍頭里)·금사리(金沙里)·무송리(茂松里)와 성동면(星洞面)의 내 원리(內院里) 각 일부를 병합하여 옛 신라시대의 현 이름이자 중심마을인 ‘무송’의 이름을 따 성송면 무송리라 하였다. 무송의 옛 이름이 송미지(松彌知)인데, 접미어 ‘-미지(彌知)’는 ‘밀지(蜜地)’나 ‘밀(密)’과 같이 옛 지명에 가끔 나온다. 미지는 ‘-부리(夫里)’ 계통의 말과 같이 고을이나 마을을 뜻했던 우리 의 옛말로 본다(『고창군지』, 2010). 무송의 치소는 지금 성송면의 무송리(茂松里)나 고현마을인데
186
고창의 마을 제4집…187
여기 이름에 그 자취가 남아 있다. 정인보 선생은 “彌知(미지)는 무티이고, 무티는 뭍이다. 따
래에 있었다고 한다. 이를 입증하는 것이 백제시대의 송미지현의 신앙유적지로 추정되는 용
라서 미지는 강가의 육지(陸, 뭍 륙)”라고 말하고 있으며, 단재 신채호는 “송미지(松彌知)·고마
천굴과 장군바우이다. 고산(526m)의 장군바우는 아마도 고인돌을 채석하고 난 후 남은 넓은
미지(古馬彌知)·무동미지(武冬彌知) 등 모든 ‘미지’의 동류를 찾아내면서 미지가 곧 ‘물굽이’”라
바위로 추정된다.
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백제어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일본어에도 미지와 발음이 유사한 미즈
한편 송산마을은 북서쪽이 훤하니 뚫린 지형으로 겨울에는 북서계절풍의 영향을 직접 받
물을 의미한다. 『삼국사기』의 지리지를 보면, “茂松縣(무송현)은 본시 백제의 松彌
는 곳이다. 또한 마을의 뒷산인 고산이 높게 자리를 잡고 있어 찬바람이 빠져나가지 못해
知縣(송미지현)으로, 경덕왕이 茂松(무송)으로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
겨울은 매우 추울 수밖에 없다. 이러한 송산마을의 지형(地形) 탓에 이 마을은 지속적으로
다. 즉, 송미지는 무송으로 개명될 때, 송(松)이 뒤로 가고, 고을이나 물을 의미하는 미지(彌知
당산제를 지내고, 풍수적으로도 허한 마을 입구에 비보(裨補)를 위해 당산을 세우는 계기가
를 무茂로 바꿈)를 앞으로
되었다.
(みず, 水)가
내어 무송(茂松)으로 개명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성송면 남부에 위치한 무송리는 동쪽으로 암치리, 서쪽으로 산수리, 남쪽으로 대산면 상금리, 북쪽으로 암치리와 하고리와 접하고 있다. 송산마을은 성송면사무소에서 약 3km 정
2) 내원마을의 유래
도 떨어져 있으며, 내원마을은 약 4.5km, 갈산마을은 약 2.5km 정도 떨어져 있다. 무송리에서
내원(內院)은 내창마을에서 광산김씨
가장 큰 자연마을이 ‘송산’이다. 송산은 국도 23호 옛길의 무송교의 동남쪽 송산길을 따라 약
세 가구가 이곳에 터를 잡았다가, 이후
1100m 지점에 위치한다. 내원은 삼태마을 앞의 옛 국도 23호의 내원1길을 따라 동남쪽으로
진주정씨, 진주강씨 등이 입향하면서
약 1100m 지점에 위치한다. 갈산마을은 무송교의 남쪽으로 약 70m 지점에 위치한다.
마을이 이루어졌다. 내원은, 무송현감의 내당 터가 있었다 하여 내원이라 부르 게 되었다고 한다.
1) 송산마을의 유래 조선 영조 때 영성정씨(靈城丁氏)가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
현재의 송산마을 위쪽 고산 아래에
하면, 이곳에 청계원(淸溪院)이라는 원
터를 잡은 마을이다. 그러나 얼마 후
(院)이
지관의 고산 아래보다는 좀 더 아래
二十五里)에
의 터가 훨씬 좋다는 말을 듣고 영성
원은 지금의 성송면(星松面) 산수리(山水
정씨는 지금의 용두에 터를 잡고 살
里)의
았다. 이후 진주정씨와 무송유씨(茂松
원(內院) 일대로 추정된다. 원은 조선조
庾氏)가
들어와 터를 잡고 살면서 이
당시 교통 사정이 원활하지 못한 곳에
마을은 송산과 금곡으로 불렸다. 마
두었던 국영시설로, 관원이 공무로 다
을이 산골짜기에 있고 소나무가 많
닐 때에 원에서 관원에게 숙식을 제공
기 때문에 ‘송산’이라 불렸던 것이다.
송산마을 표지석
있었는데 재현남이십오리(在縣南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청계
외원(外院)과 무송리(茂松里)의 내
내원마을 표지석
했다. 아울러 지방에서 기로연(耆老宴, 나이가 많은 정2품 이상의 문신을 예우하기 위해 베푼 연회) 실시
송산마을은 용두, 금곡, 성암 등으로
와 진제장(賑濟場)을 두어 굶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구실도 하였다. 원의 운영 경비를 충당하기
이루어졌다. 조선 말기 진주강씨, 광산김씨, 달성서씨 등이 잇따라 들어오면서 마을이 크게
위해 원위전(院位田)을 지급했다.
번창하였다. 송산마을 사람들의 전언에 따르면, 백제시대 송미지현의 치소가 지금의 송산마을 당산 아
188
내원마을 가장 위쪽은 내원의 큰 고을로 안사람터라고 불렸다. 안사람터에는 무송유씨들 이 세거하였다고 하는데, 지금도 많은 기와조각들이 출토되고 있다고 한다. 내원마을은 원래 고창의 마을 제4집…189
마을 중간에 있는 들녘에 마을이 자리 잡기 시작했고, 이곳을 중터라 불렀다. 지금의 내원마
2. 무송리의 환경
을은 중터의 마을이 잡힌 이후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고 한다. 아직도 마을 곳곳에서, 담장으 로 쌓은 돌들 사이로 디딜방아나 용당기로 사용한 것들이 발견된다. 한편 이곳 내원마을도
1) 마을의 자연환경
북서쪽이 뚫린 지형으로 마을 사람들은 내원마을 입구에 신체(神體)가 돌인 수구(水口)막이 당
무송리는 고산의 준령이 북서쪽
산을 허(虛)한 북서쪽에 일렬로 나열해 놓았다. 그러나 근대화의 물결인 새마을사업과 마을
으로 발달한 곳에 있는데, 고산의
입구의 도로를 확·포장하면서 당시의 수구막이 당산은 모두 없애버리고 겨우 한 기만이 한
능선은 크게 세 갈래로 발달하였다.
민가에 쓰러져 남아 있다. 마을 입구의 소나무 언덕은 오랫동안 찬바람으로부터 마을을 지켜
첫 번째는 금곡과 송산 및 효곡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던 수구막이 당산과 함께한 수구막이 언덕이었다.
마을로 뻗은 능선으로 암치리와 무송리의 경계를 이룬다. 이 능선
3) 갈산마을의 유래
은 북쪽으로 발달하다가 현재 채
조선 중기 영광과 삼태에서 살
석장이 있는 암치리의 284m의 고
던 진주강씨들이 들어와서 터를
봉에서 다시 두 갈래로 갈라지는
잡고 구한말까지 세거해 살았다.
데, 북쪽으로 발달한 능선 상에 엉
이후 진주정씨와 청도김씨 등이
골재가 있고, 더 내려가 능선의 서
들어와 살았으나 150년 전 홍수
쪽에 금곡마을이 있고, 마을 뒤로 금곡재가 있다. 이 능선은 유재발들 앞에서 멈춘다. 고봉의
로 인해 폐촌이 되었다. 그러나 다
다른 한 갈래는 북서쪽으로 뻗었는데, 그 능선 상에 용두마을이 있고, 아래로 더 내려가 송산
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마
마을이 있으며, 말단부에는 효곡마을이 있다. 이 능선 상의 효고마을 앞에는 54m의 잔구가
을을 이루게 되었다.
있는데, 이는 아마도 마을의 안산에 해당하는 비보풍수(裨補風水) 개념의 산으로 추정된다. 그
마을 앞에는 매봉산이 있는데,
무송리 항송사진
렇기 때문에 옛날의 마을 주민들은 이 능선에 나무를 심어 보호하고 가꾸었을 것이다.
산봉우리가 갓 위에 쓰는 ‘갈모’와
두 번째 능선은 북서쪽으로 발달하다가 갈매산을 이루고 대산천에서 멈춘다. 이 능선 위에
비슷하다 하여 갈모라 불렸다. 그
내원마을이 자리 잡고 있으며, 갈매산 동쪽 아래에는 갈산마을이 있다. 한편 내원마을의 잔
런데 그 소리의 음이 점차 변하여
갈산마을 표지석
‘갈매’또는 ‘갈뫼’라 부르다가 광 복 이후에는 갈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갈산마을은 갈매산을 뒤로 하는 북동향의 마을이지만,
구도 내원마을의 비보풍수의 개념으로 보호되고 있다. 세 번째 능선은 북서쪽으로 발달하여 성송면 무송리와 산수리의 경계를 이루는데, 능선의 말단부에 무송리에서 산수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산수치가 있다.
예전에는 대산천의 잦은 범람으로 수해를 많이 입었다. 마을 사람들은 수해를 막고자 대산천 주변에 버드나무와 같은 활엽수를 많이 심었다. 그래도 비가 조금만 많이 오면 늘 범람하는
2) 마을의 자연지명
대산천으로 인해 갈산마을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산과 성송에 대
가장골 : 무송리 877~885번지와 896~904번지 사이의 지명.
단위 야산개발이 시작되면서 마을 부녀자들이 주변지역에 가서 품팔이를 하여 가난하던 마
갈마두 : 무송리 867번지의 위쪽 지명.
을이 지금과 같은 넉넉한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대산천에 제방을 축조하면서 마을의
서선방죽 : 무송리 886번지의 소류지.
홍수는 사라졌다. 오히려 지금은 대산천이 범람하던 곳의 비옥한 땅을 개간하여 넓은 농토를
담디애 : 무송리 906~911번지 지명.
얻게 되었다.
갈매(葛山) : 갈매 밑에 있는 마을이자 송산 서북쪽에 있는 산으로, 산 모양이 갓모처럼 생겼
190
고창의 마을 제4집…191
음. 갈산이라고도 부름. 갈산들 : 갈산마을의 앞인 북동쪽에 있는 들.
새매골 : 팽바우의 위쪽 골짜기를 말함. 산수치 : 내원에서 산수리로 넘어가는 고개.
거문고들 : 송산과 내원 사이에 있는 작은 들. 추산제 앞에 있는 작은 들.
서당골 : 무송리 산 45~임 38-1번지 사이의 골짜기.
갈매들 : 갈매산의 남동쪽에 있는 들로 거문고 앞의 들.
추장골 : 서당골 위쪽의 골짜기.
갈매뒤골: 대산들의 서쪽에 있는 들.
송산들 : 금곡과 송산마을 사이에 있는 들.
고산(高山) :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 무송리, 산수리와 대산면 상금리,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
송이고개[松耳峙] : 송산에서 새터로 가는 고개.
면 생촌리에 위치한다. 그 북쪽에 구황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가래재를 넘어 고성산과 태청
숨바깔저수지 : 무송리 산 38-5번지의 저수지.
산으로 이어진다. 고산은 각시봉, 깃대봉, 띠꾸리봉, 촛대봉, 고상 정상으로 5봉을 이루며 전
양사무태 : 무송리 산 20번지의 옛 자연지명.
설이 있는 매바위, 용두암, 치마바위, 문바위 등 기암괴석, 울창한 소나무 숲, 고산산성, 상금
엉골 : 금곡과 용두 사이에 있는 골로 엉골재로 가는 길.
고인돌, 한국 불교 법륜종 법우선사가 있음.
엉골재 : 송산에서 암치저수지로 넘어가는 고개로 해발고도는 약 145m.
금곡골 : 금곡마을에서 금곡치로 가는 골짜기. 이곳에는 무송유씨의 큰 집이 있었다고 하
용두(龍頭) : 금곡 서남쪽에 있는 고개. 지형이 용의 머리 형국이라고 함.
고, 사금을 채취하기도 하였다고 함. 마을 사람 중에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의 금광에서 금
용두골 : 용두마을의 남동쪽에 있는 골짜기.
을 캤다는 사람도 있음.
용두제 : 추산제의 동남쪽의 고산성 아래에 있는 보(洑).
금곡치 : 금곡에서 암치리 생계로 넘어가는 고개로 해발 고도는 약 80m.
유재박들 : 갈산들의 동북쪽에 붙어 있는 들.
거뭉개등 : 무송리 산 469번지의 능선.
이문안 : 쌍대문으로 이씨가 살았다고 함. 무송리 89와 94번지의 터.
내원들 : 내원마을 앞에 있는 들.
진등 : 옛23번 국도에서 송산으로 들어오는 입구의 능선.
내원제 : 내원마을의 서쪽에 있는 보.
증골저수지 : 무송리 산 79-2번지의 저수지.
내원2제 : 내원제 남쪽의 고산 아래 있는 보.
효곡골 : 금곡의 북서쪽에 있는 골로 유재박들과 연접.
내정제 : 내원마을 앞에 있는 보.
추산제 : 송산마을의 남쪽에 있는 보(洑).
내정골 : 내원마을 남서쪽(뒤쪽)에 있는 골.
팽바우 : 무송리 113~127번지까지의 지명.
덕지매골 : 내원제의 서쪽에 있는 골.
토적골 : 무송리 213번지의 골짜기 이름.
동문치 : 고산 정상의 북쪽 능선상의 고개로 무송리에서 장성군 삼계면으로 넘어가는 고개. 똥매 : 효곡 뒤 들에 있는 둥그렇고 작은 산.
3. 무송리 본향의 성씨
대사골 : 무송리 유 188-1번지의 골인데, 지금은 작은 저수지가 있음. 대챙이재 : 무송리 산 12-8의 옆 고개.
무송을 본향으로 하는 성씨는 무송김씨(茂松金氏)·무송윤씨(茂松尹氏)·무송유씨(茂松庾氏)·무
대산들 : 갈매산의 서쪽에 있는 들.
송최씨(茂松崔氏)·무송이씨(茂松李氏)·무송차씨(茂松車氏)·무송전씨(茂松全氏) 등이 있다. 그러나
대산천 : 무송리와 하고리의 경계를 흐르는 하천.
현재 알려진 성씨로는 무송김씨, 무송윤씨, 무송유씨 등이다.
무송교(茂松橋) : 무송다리라고도 불리는 갈매 앞에 있는 다리. 무송리에 있던 옛 무송현의 이름을 따서 무송교라 함. 분탈골 : 내원제의 남쪽(위쪽)에 있는 골. 새터[孝谷] : 송산 서북쪽에 새로 설기된 마을.
192
1) 무송유씨 본관은 평산(平山)·무송(茂松)이다. 평산유씨의 시조는 검필(黔弼)이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 휘하의 명장으로서 개국 초기에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정남(征南)대장군·도통(都統)대장군 고창의 마을 제4집…193
등을 역임하면서 후삼국으로 분열된 한반도를 통일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검필의
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러나 무송유씨와 무송윤씨는 고창을 대표하는 성씨로 고려시대와
아들 방(方)은 성종 때 거란군의 침입을 격퇴하고 현종 때 문하시중을 지냈다. 숙종 때 명신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인물들을 낳았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인물소개는 고창
으로 상서우복야를 지낸 석(晳)도 뛰어난 인물이다. 무송유씨의 시조는 검필의 후손으로 고려
의 어느 마을에서는 해야 할 것으로 판단되어 무송리 마을사에 소개한다.
의종 때의 명신 필(弼)이다.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판리부사(判吏部事)를 지냈으며, 아 들 응규(應圭)·자량(資諒) 형제 또한 당대의 명신이었다. 응규는 신종 때 공부랑중(工部郞中)을
유녹숭(庾祿崇, 미상~1114) : 본관이 무송이다. 자는 구수(龜壽)이고, 시호는 안정(安貞)이다. 고
지냈는데 천성이 영리하고 풍채가 아름다워 사람들이 옥인(玉人)이라 불렀고, 자량은 정중부
려 전기의 문신이다.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좌산기상시 등을 거쳐 예종 때 참지정사로 치사
(鄭仲夫)의
(致仕)하였다.
난 때 화를 면하고, 고종 초 상서좌복야에 이르렀다. 필의 증손 석(碩)은 숙종 때의
숙종 때 도읍을 남경(南京)으로 옮기려 할 때 재상 및 모든 관리가 다 찬성하였
명신이다. 유씨는 고려시대에 명성을 떨쳤으나 조선에 와서는 두드러진 인물이 없었다. 다만
으나, 오직 유녹숭과 유신만이 반대하였다. 1099년(숙종4) 우산기상시를 거쳐 1102년 좌산기
필의 후손으로 태종 때 관찰사를 지낸 구산(龜山), 영조 때 가객(歌客) 세신(世信), 시인이며 바
상시로서 지서북면병마사에 임명되고, 다시 밀원사 겸 태자빈객에 올랐다. 1103년(숙종8) 상
둑의 국수로 유명한 사역원판관 찬홍(纘洪) 등이 있다. 1960년 국세조사에서 인구 4,412명으
서좌복야 참지정사에 오르고, 이후 좌산기상시 등 여러 벼슬을 거쳐 예종 때 참지정사로 치
로서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110위였고, 1985년 조사에서는 인구 1만 279명으로 274성 중
사하였다.
제103위였다. 2000년에는 총 3,869가구 12,464명이었다.
나이 80세로 생을 마감했는데, 공정하고 충직하여 40여 년 간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자신 의 의견을 굽혀 남을 따른 적이 없었다. 또한 높은 벼슬을 지냈지만, 의복과 집은 벼슬하기
2) 무송윤씨
무송윤씨의 시조 윤양비(尹良庇)는 고려 예종 때 현리(縣吏)로 등과하여, 보승낭장(保勝郎將)과
전과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호장동정(戶長同正)을 지냈다. 윤양비의 선계는 윤경(尹鏡)으로 후당(後唐) 시대에 오계(五季)의
유필(庾弼, 미상~1155) : 본관이 무송이다. 검교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 언경(彦卿)의 아들이다.
난을 피하여 중국에서 건너와 무송(현재 고창군 무장면) 지방에 정착하면서 본관을 무송으로 하
1143년(인종21) 금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만수절(萬壽節)을 축하하였다. 1147년(의종1) 추밀
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계대(繼代)가 실전되면서 윤양비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무송으로
원지주사이부시랑(樞密院知奏事吏部侍郎)에 올랐고, 이듬해 동지공거(同知貢擧)로 임명되어 진사
하면서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분파로는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와 장령공파(掌令公派)가 있다.
시를 주관하였으며, 이어서 곧 추밀원부사가 되었다. 1149년 비서감(秘書監), 1150년 지추밀원
인구는 2000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무송윤씨는 4,119가구 총 13,384명이 있는 것으로 되
사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151년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있으면서 내시낭중(內侍郎中) 정서
어 있다.
(鄭敍)를
탄핵하여 유배시켰는데, 정서는 당시 왕의 동생으로 여러 사람의 존경을 받아 경계시
되던 대령후(大寧侯)와 긴밀한 접촉을 가져 의심을 받던 인물이었다. 이 해 참지정사판병부사(參知政事判兵部事)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에 이르렀다. 1152년 수국
3) 무송김씨 무송김씨에 대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과거급제자는 다음과 같다. 김응관(金應寬, 1591, 辛卯生)과
김홍정(金弘鼎, 1605, 乙巳生)이 인조 때 무과 별시 병과(丙科)에 합격, 무송김씨가
에는 모두 2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무송김씨는 1985년에는 총 51가구 197명, 2000년에는 총 65가구 193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4. 무송을 본관으로 하는 인물
사(修國史)에 이어 태자태사(太子太師)에 제수되었는데, 이는 김존중(金存中)이 태자의 교육은 재 상이 담당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건의해서 임명된 것이다. 1155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수문전대학사(修文殿大學士) 판이부사(判吏部事)로 있 다가 별세하였다. 본래 학문이 뛰어나고, 소박하면서도 꾸밈이 없고 강직하여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일찍이 의종이 환관 정함(鄭諴)을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임명하려 하였는데, 이 를 끝까지 반대하여 임명장에 서명하지 않았다. 그 뒤 왕이 여러 차례 설득하였지만 뜻을 굽 히지 않아, 당시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뒤에 의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본고에서 논하는 인물들은 무송을 본관으로 하는 인물들로 이곳 무송 출신의 인물로 보기
194
공숙(恭肅)이다. 고창의 마을 제4집…195
유응규(庾應圭, 1131~1175) : 고려의 문신으로 본관은 무송이다. 초명은 원규(元規), 자는 빈옥 (賓玉)이다.
아버지는 판이부사(判吏部事) 필(弼)이다. 뛰어나게 총명하고 풍채가 아름다워 사람
들이 옥인(玉人)이라 하였다고 한다. 글을 잘 지었으나 두 번이나 과거에 실패하여 음보(蔭補)
이다. 1365년(공민왕14) 문과에 장원, 수찬(修撰)을 지냈다. 이어 정언(正言)이 되어, 환관이나 궁 녀 등의 잘못된 행실 등을 논한 소를 올렸다가 파직되었다. 우왕 초에 전교시(典校侍)의 승 (丞)·부령(副令)
등을 지내고, 1386년 성균관사예로 기용되었다. 1388년 이성계(李成桂)의 위화
로 내시가 된 뒤 참관(參官, 參上官)이 되었다. 뒤이어 지방관으로 남경(南京)에 나가 청렴하고
도회군 때 동문(東門) 밖에 나가 『곽광전(霍光傳)』을 바쳐서, 우왕을 폐하고 다른 왕(王)씨를 왕
정사를 잘 하여 합문지후(閤門祗候)가 되었다가, 뒤에 고공원외랑(考功員外郞)이 되었다.
으로 추대할 것을 암시하였다.
1170년(의종24) 정중부 등의 반란으로 명종이 즉위하자, 내시로 기용되었다가 공부낭중(工部 郞中)이
되어 금(金)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선위(禪位)의 사실을 알리고 돌아와 그 공으로 군기
창왕 때 전교령(典校令)을 거쳐 대사성에 이르렀고, 공양왕 초 좌상시(左常侍)·경연강독관(經 筵講讀官)이 되었다.
공양왕이 중 찬영(粲英)을 왕사(王師)로 맞으려는 것을 반대하였다. 남을 비
감 겸 태자중사인(太子中舍人)이 되었는데, 금나라에 가서 보여준 고매한 인격은 뒤에 금나라
방하는 것 때문에 왕의 미움을 사서 금주로 유배되었다가 풀렸으며, 다시 정몽주(鄭夢周) 일
의 사신들로 하여금 모두 반드시 안부를 묻게 하였다.
파의 간관(諫官)에게 탄핵·유배되었다. 1392년(태조1) 조선이 개국되자 병조전서(兵曹典書)로서
1173년(명종3) 동북면병마사 김보당(金甫當)이 무신정권에 반기를 들다가 잡혀 죽을 때, 모
『고려사』 수찬(修撰)에 참여하였다. 1393년 회군공신(回軍功臣) 3등에 책록되고, 수문전학사(修
든 문신과 함께 도모했다고 무고함으로써 화를 입을 뻔 했으나, 무고한 사람을 죽이면 재
文殿學士)·춘추관동지사
앙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설득하여 무사하였다. 이듬해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무신정
집』이 있다.
등을 지냈다. 성리학·경사(經史)에 밝고 문명이 높았다. 문집에 『동정
권에 반기를 들었을 때, 왕명으로 서경의 여러 성(城)을 선유(宣諭)하며 점차로 귀순하게 하여 공부시랑(工部侍郞)이 되었다. 이듬해 전중감으로서 급사중(給事中) 사정유(史正儒)와 함께 왕
윤자운(尹子雲, 1416~1478) : 본관 무송, 자는 망지(望之), 호는 낙한재(樂閒齋), 시호는 문헌(文
명으로 서경에 가서 조위총을 군신의 대의로 설유하여 그로 하여금 표문(表文)을 올려 항복
憲)이다.
을 청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위총이 곧 배반하여 귀로에서 죽이려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여
관(修史官)이 되어 정인지(鄭麟趾) 등과 『고려사』 편찬에 참여, 1460년(세조6) 도승지로서 신숙
화를 면하였다.
주(申叔舟)와 함께 야인(野人)을 토벌하고, 인수부윤, 경기·충청·전라·경상도 도순찰사(都巡
유자량(庾資諒, 1150~1220) : 본관은 무송이고, 자는 담연(湛然)이다.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 章事)
필(弼)의 손자이며, 공부시랑 응규(應圭)의 아들이다. 성품이 장중하고 말이 없었다고 한
1444년(세종26) 식년문과에 급제, 1450년(문종 즉위) 집현전 부수찬(副修撰)으로 수사
察使)를
지냈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벌하였으며,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470년
(성종1)
영의정에 오르고,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에 책록되고 무송부원군(茂松府院君)에
봉해졌다.
다. 16세 때부터 유가(儒家)의 자제들과 교우하였으나 무인(武人)들과도 교제를 하여, 정중부 의 난 때 화를 면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와 교우하던 사람들도 모두 화를 면하였다. 음보(蔭補)로 수궁서승(守宮署丞)이 되었으며, 이어 대악서승(大樂署丞)을 거쳐 용강현령(龍岡縣 令)이 되어서는
윤택(尹澤, 1289~1370) : 본관은 무송, 자는 중덕(仲德)이다. 호는 율정(栗亭), 시호는 문정(文貞) 이다. 1317년(충숙왕4) 문과에 급제, 경산부사록(京山府司錄)이 되고, 1334년 검열(檢閱)이 되었
행정을 밝게 잘 처리하였다고 한다.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밖에 상의봉
다. 연경(燕京)에 머물던 충숙왕으로부터 왕자 강릉대군(江陵大君) 기(祺)를 뒷날 왕으로 받들
어(尙衣奉御)・시어사(侍御史)・호부낭중・어사잡단(御史雜端)을 거쳐 대부소경(大府少卿)・병부시
라는 부탁을 받았다. 서경부윤·나주목사를 거쳐, 1348년 충목왕이 죽자 중서성에 글을 올려
랑・형부시랑・대부경(大府卿)・지삼사사(知三司事)・판대부사재사(判大府司宰事)・태자첨사(太子詹
강릉대군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 1349년 충정왕이 즉위하자 광양감무로 좌천, 1351년(공민
事)・판각문사(判閣門事)・지다방사(知茶房事)를
왕 원년)
射)가
역임하였다. 1213년(강종2년) 상서좌복야(尙書左僕
되어 치사(致仕)하였다. 치사 후에는 은퇴한 재상들과 기로회(耆老會)를 만들기도 하였으
밀직제학이 되고, 이듬해 상소가 허락되지 않자 개성부윤으로 치사(致仕), 1361년 정
당문학의 벼슬이 추가되었다. 저서에 『율정집』, 『율정일고』가 있다.
며, 또한 부처를 독실하게 신봉하였다. 윤형(尹泂, 1549~1614) : 본관 무송, 자는 이원(而遠), 호는 퇴촌(退村)이고, 시호는 충정(忠靖)이 윤소종(尹紹宗, 1345~1393) : 본관은 무송, 자는 헌숙(憲叔), 호는 동정(桐亭), 이색(李穡)의 문인
196
다. 1576년(선조9) 진사가 되고, 158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주서를 지냈다. 1589 고창의 마을 제4집…197
년 예조정랑 때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宗系辨誣)하고 돌
는 얕은 부조로 불상을 새기고 뒤에
아와서, 사섬시첨정이 되었다.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 뒤, 지평(持平)으로 논공행상의 불공
는 선각으로 또 한 구의 불상을 조
평을 논하다 파직되었다. 이듬해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匡國功臣) 2등에 책록, 무릉부원
각하였다. 앞면은 거신광(擧身光)의
군(茂陵府院君)에 봉해졌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세자를 성천(成川)으로 시종, 이듬해 사성(司成)
가장자리를 따라 안쪽에 얕게 2중
으로 선조를 호종하여 군기시정(軍器侍正)이 되었다. 1603년 공조판서, 1605년 호조판서·중
의 머리 광배와 몸 광배를 조각하고
추부판사를 지냈다. 1611년(광해군3)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에 올라 무송부원군(茂松府院君)
그 안에 불좌상 1구를 조각하였다.
으로 개봉되었다.
머리는 주위를 약간 파내어 얼굴 부 분이 도드라지게 조각하였는데, 정
윤회(尹淮, 1380~1436) : 본관 무송, 자는 청경(淸卿), 호는 청향당(淸香堂)·학천(鶴川)이고, 시호
수리에 상투 모양의 육계가 큼직하
는 문도(文度)이다. 춘추관동지사 소종(紹宗)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경사에 통달해 이름을 떨
게 표현되었고, 소라 모양의 머리칼
쳤고, 1393년(태조2) 진사가 되었다. 1401년(태종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재직장(司宰直長)
인 나발이 표현되었던 흔적이 있으
에 보직되었다. 1409년 이조정랑, 1414년 승문원지사로 노비변정도감이 설치되자 제십방(第十
나 거의 마멸되었다. 얼굴은 갸름한 편으로 눈 부분은 마멸되어 정확한 모습을 알 수 없으나
房)을
아래로 내려뜬 눈, 아담한 코와 꼭 다문 입 등이 균형 있게 표현되어 있다. 목에는 세 개의 주
담당, 신속 정확하게 판결하였다. 1424년(세종6) 집현전부제학으로 유관(柳觀) 등과 함께
정도전(鄭道傳)의 『고려사』를 다른 것과 대조하여 교정하였다. 1427년 예문관제학으로 척불(斥
무송리 석불좌상
름인 삼도(三道)가 가늘게 표현되었으며 귀는 아주 작게 표현되었다.
건의하고, 1432년 세종의 명으로 『팔도지리지』를 편찬하였다. 이어 중추원사 겸 성균관
광배 뒷면에는 가는 선각으로 석불좌상이 새겨져 있는데, 거신광의 가장자리를 따라 얕은
대사성을 역임하였다. 1434년 왕명으로 집현전에서 『자치통감훈의』를 찬집하고, 병조판서·
양각으로 광배를 표현하고 그 안에 불상을 새겼다. 얼굴은 마모되어 알 수 없으나 육계가 크
예문관대제학에 이르렀다.
고 분명하게 표현되었으며 신체 아래 부분 역시 묻혀서 잘 보이지 않는다. 오른손은 들어서
佛)을
가슴 안쪽으로 당겨 들고 있고, 왼쪽 어깨에만 걸친 옷의 유려한 옷 주름이 선각으로 조밀하
5. 무송리의 유물과 유적
게 새겨져 있다. 아래 부분이 손상되어 정확하지는 않으나 좌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송 리 석불좌상은 얼굴은 약간 도드라지게 새기고 신체는 굴곡이 거의 없이 조각한 것으로, 이
무송리는 백제 때 송미지현의 중심지로서, 아직도 많은 문화유적이 남아 있다. 특히 이곳을
러한 수법은 고려시대의 불상 및 마애불에 즐겨 사용되던 수법 중의 하나이다. 둥근 형태에
본향으로 하는 무송유씨들의 흔적이 유적과 지명으로 남아 있다. 무송유씨 이외에도 다른 성
균형 잡힌 이목구비와 양감 있는 얼굴 등으로 인하여 원만상(圓滿相)을 이루고 있는 얼굴은
씨들의 재실과 제각이 많이 남아 있어 무송리의 과거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무송의 마
남원 신계리 마애여래좌상(보물 제423호) 등 통일신라 말・고려 초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주지
을에 있는 담장에도 마을의 역사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돌들을 찾을 수
만, 어깨 높이로 들어 올린 오른팔이 너무 비대하게 표현된 점이라든지 상체에 비하여 왜소하
있다. 현재 남아 있지는 않지만 송산마을 증골(무송리 31번지)의 골짜기에 작은 저수지가 있는
게 표현된 하체, 거의 판과 같이 얕게 부조된 신체 등에서 고려시대 중・후기 불상의 특징을
데 이곳에 압해정씨의 재실이 있었다고 한다.
보여주고 있다.
무송리 석불좌상(石佛坐像)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97호로, 2002년 11월 15일에 지정되었
도각사 : 고창군 성송면 무송리 산 2번지에 있는 미륵자불 용상법상종의 절이다. 도각사의
다. 고창군 성송면 무송리 산 2번지에 있다. 석불좌상은 하나의 커다란 광배(光背)에 얕게 조
본사는 부산에 있으며, 이곳 무송리의 도각사는 부산 도각사의 말사이다. 도각사는 2001년
각된 불상으로, 불상의 왼쪽 몸 광배 부분에 약간 금이 간 것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보
문각스님이 인가를 받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회암스님이 주지로 있다. 이곳 도각사에
존 상태는 좋은 편이다. 불상을 조각한 석판은 두께 약 20㎝ 정도 되는 편평한 돌로서, 앞에
무송리 석불좌상이 있다.
198
고창의 마을 제4집…199
고산성(高山城) : 고산성은 고창군 대산면 상금리와 성송면 무송리 및 전남 장성군 삼계면 생 촌리에 접하고 있는, 백제시대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포곡식 산성이다. 고산성에 대한 문헌
레인 작업으로 일부가 삭평된 상태이며, 민묘군이 형성되는 과정에서도 복토와 삭평이 이루 어졌다. 유물은 남사면에서 주로 연질토기편, 경질토기편, 타날문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무장 고적조에 “고산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8천 1백 척이 고, 가운데에 세 샘물이 있다”와, 『대동지지』 12 무장조에 “고산성은 남쪽으로 20리에 있고, 둘레는 8천 1백 척이고 샘물이 3개 있다”라는 것 등이다.
무송리 유물산포지2 : 성송면 무송리 536번지에 있는 유물산포지로, 삼한시대의 유물이 수 습되었다. 갈산마을과 연접한 구릉으로 해발 59m의 정상부는 평탄한 대지를 형성하고 있다.
『문헌비고』 여지고 성곽 3에서는 “고산성은 남쪽 20리에 있고 돌로 쌓았고 둘레가 8천 1백
넓은 농경지에 단독으로 존재하는 구릉으로 남북으로 약 100m 정도 뻗어 있다. 현재 밭으로
척이고, 지금은 폐지된 3개의 샘물이 있다”라고 기록하였고, 『무장읍지』(1958) 성곽조에는 “고
경작되어 있으며, 마을과 경계 짓기 위한 송림이 일부 형성되어 있으며 장기간에 걸친 경작으
산성은 고산에 있고 돌로 만들었으며, 둘레는 8천 1백 척이고 그 안에 두 개의 샘이 있다”라
로 삭평이 심한 편이다. 유물은 남측 정상부와 북측 말단 일부에서 옹관편과 회흑색연질토기
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후 기록들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을 따르고 있다.
편이 수습되었다.
고산성의 축성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으나 『문헌비고』 성곽조에 “전해오기에 삼국 시 대 무송현 성이 남쪽 20리에 있고, 토성기지가 있다”라 하여 무송현은 삼국시대의 치소성으 로 전해지고 있다.
무송리 고인돌군1 : 고인돌군은 성송면 무송리 316번지에 위치한 청동기시대의 유적이다. 고 인돌은 효곡마을 진입로와 구휴봉 씨 집 주변에 5기가 분포한다. 고인돌은 대체로 원래의 형
고산성은 무송현 치소에서 남동쪽으로 불과 3㎞ 정도 떨어진 고산에 있다. 이는 평지성과
태를 갖추고 있으나 그 일부는 집의 담장이나 창고를 짓는데 사용되었다. 고인돌의 상석 형
인근의 산성을 구축하여 산성을 피난성으로 활용하는 데 목적을 두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태는 장방형, 방형으로 판석형과 괴석형이 보인다. 대표적인 고인돌의 크기는 230×210×
고산성은 고산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서북과 서남 방향으로 흐르는 능선을 따라 축조되어 있
110cm이다. 주형 고인돌 1기가 있으며, 나머지는 보이지 않는다.
으며, 서쪽 방향으로는 계곡이 흐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8,100 척인데, 영조척(30.8㎝)으로 환산하면 2,490m이고, 포백척(46.66㎝)으로 환산하면 3,780m이다. 현재까지 정확한 실측 자료는 없으나 성의 둘레는 4~5㎞ 정도로 알려져 있다. 고산성은 지형에 따라 석축을 하거나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으며, 계곡과 봉우리가 포함된 포곡식 산성이다. 석축 성벽의 경우 산 경사면을 ‘ㄴ’자로 깎아낸 후 바깥쪽에만 석축
무송리 고인돌군2 : 고인돌군은 성송면 무송리 83번지에 위치한 청동기시대의 유적이다. 고 인돌은 송산마을 뒤쪽 야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북측에 인접하여 고인돌 1기가 확인되었 다. 송산제의 서측이며, 현재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고인돌의 상석은 괴석형이며, 받침돌은 보이지 않는다. 상석은 원위치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을 하였고, 안쪽의 뒤채움은 흙과 잡석을 다져넣었다. 바깥쪽의 성돌은 아래서 위로 올라가 면서 물려쌓기를 하였다. 성문은 북문과 남문의 형태가 남아 있으나, 동문과 서문은 찾아볼 수 없다. 고산성은 고창 지역에서 규모가 큰 편인데, 성벽의 대부분은 무너져 있고, 약 600m 정도의 성벽만이 남아 있다. 고산성은 호남정맥의 동과 서를 잇는 고갯마루가 남쪽과 북쪽에 있는데, 이곳의 교통로를 감시하기에 유리한 곳에 축성되어 있다. 호남정맥의 이동 지역은 영 산강 유역으로 이어지는 경로이기에 고산성은 이 길목을 지키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을 것 으로 여겨진다. 무송리 유물산포지1 : 유물산포지는 성송면 무송리 220-1번지에 있는데, 삼국시대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산포지는 용두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변에 위치해 있다. 현재 대산 우회도로(국 도 23호)
200
건설로 구릉의 일부가 삭평된 상태이다. 유적은 현재 밭으로 경작되고 있는데, 포크
무송리 고인돌3
무송리 고인돌군4
고창의 마을 제4집…201
무송리 고인돌군3 : 고인돌군은 성송면 무송리 589-2번지에 위치한 청동기시대의 유적이다. 고인돌은 내원마을 서측 소로변에 위치해 있다. 동측 고산에서 뻗어 내린 야산 사이에 형성된
태를 하고 있으며, 비신은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전면에는 ‘통정대부 행강계부판관진주강공 계오지묘 배숙인진주정씨부 해좌’라 각자되어 있다.
인내정골 하단부에 고인돌이 위치한다. 이곳은 현재 논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상석은 이미 훼
건립연대는 ‘무진 이월(1868년)’이라 되어 있다. 묘 앞의 양쪽에는 문인석이 각각 1구씩 세
손되어 밀린 상태이다. 상석의 평면 형태는 장방형이며, 받침돌은 기둥형 받침을 갖추고 있다.
워져 있다. 비의 크기는 220×55×25cm이다. 강계오(姜繼吳)는 전남 영광에서 세거하다 처가
크기는 320×240×180cm이다.
진주정씨(晉州鄭氏)와 외가 무송유씨(茂松庾氏)가 있는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 에 정착하였다.
무송리 고인돌군4 : 본 고인돌은 성송면 무송리 606-4번지(내원1길 97-10)의 집 안에 있는 고 정시해충효비(鄭時海忠孝碑) : 충효비는 성송면 무송리 486-3번지에 위치한 대한제국시대의
인돌이다.
유물이다. 충효비는 대산으로 가는 구 23호 국도 남동쪽에 있다. 비는 옥개형의 비수를 가지 무송리사지(茂松里寺址, 內院寺) : 무송리사지는 성송면 무송리 산 52번지에 위치한 조선시대 의 절터이다. 무송리사지는 내원마을 남동쪽 야산의 말단부로 평탄한 대지를 형성하고 있다.
고 있으며, 비신은 화강암재로 전면에는 ‘義士鄭時海公忠孝碑’라는 비명이 있으며, 건립연대 는 ‘癸卯 四月十日’이라 각자되어 있다. 비의 크기는 240×57×28cm이다.
현재 주변은 밭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광산김씨의 묘 2기가 조성되어 있다. 마을 사람들의 전언에 의하면, 오래전에는 절터의 주춧돌과 탑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 다. 또한 주변에는 많은 기와조각이 널려 있었는데, 작물을 경작하면서 모두 하단부로 밀었다 고 한다. 지금도 경작지 주변에는 수파문과 어골문이 시문된 기와편이 산재해 있다.
정시해(鄭時海, 1872~1906) : 공의 본관은 진주, 자는 낙언(樂彦), 호는 일광(一狂)이다. 아버지 는 종택(鍾澤)이며, 어머니는 거창신씨(居昌愼氏)이다. 정시해는 기우만(奇宇萬)과 최익현(崔益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5년 말 시묘(侍墓)를
절의 이름은 내원사라고 전하고 있으며, 무송리의 내원사 불상은 선운사 도솔암 내원궁으
마치고 하산하고서,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일본에 넘어간 것을 개탄하고 최익현을 찾아갔다.
로 이전했다고 하나 도솔암 관계자는 근거 없는 이야기라 한다. 한편 이곳의 탑은 추산봉의
당시 토적소(討賊疏)를 올리다 지친 최익현은 그에게 영남지방의 지사를 규합하여 의병 봉기
절에서 사서 가져갔다고 한다.
를 준비하도록 하였다. 경상도 일대를 누비며 동지 규합을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나라를 잃은 미친 백성’이란 뜻으
강계오묘비(姜繼吳墓碑) : 묘비는 성송면 무송리 산 1-1번지에 위치한 조선시대(1868)의 유물
로 ‘실국광민(失國狂民)’이라 자칭하고, ‘일광(一狂)’이라 자호(自號)하였다. 1906년 봄 태인으로
이다. 묘비는 삼태봉 남측 중단부의 진주강씨 재실에 위치하고 있다. 비수는 옥개형의 지붕형
최익현을 찾아가 영남의 민심 동향과 지사들의 반응을 보고하고 거의모사(擧義謀事)에 참여하 였다. 영남과 호남의 의병이 함께 봉기할 것을 통고하기 위해 다시 영남으로 떠나 19일만에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최익현의 의거 소식을 듣고 모여든 지사와 포수(砲手)는 날로 늘어나, 지방관아의 무기를 접 수하고 군량을 확보해 의병대의 병력은 800여 명에 이르렀다. 6월 5일 최익현 의병대의 소모
장(召募將) 겸 중군장(中軍將)으로 태인을 출발하였다. 6월 6일에는 순창 구암사(龜巖寺)로 진을 옮기고, 이튿날 순창성 밖에서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고 전열을 정비하여 6월 8일에는 곡 성으로 진출하였다. 6월 19일 순창으로 회군해 포진 중, 6월 20일 일본군과 합세한 전주·남 원의 진위대(鎭衛隊)와 충돌해 전사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강계오묘와 묘비
202
정시해충효비
고창의 마을 제4집…203
무송재(茂松齋) : 갈산 앞에 있는 진주강씨 강계공 파(江界公派)의 재실로 1937년쯤에 지어졌다고 한 다. 무송재는 10월 20일(음)에 시제를 모시고 있으 며, 진주강씨 극명(克明)을 모시고 있는데, 영광에 있던 극명의 묘를 이곳 고창으로 모셔와 제를 지 낸다고 한다. 육모재(六慕齋) : 갈산 앞에 있는 진주정씨 절제공 (節制公)
무송재
창덕재
원모재(능성공 휘 연년(延年)의 재실)
휘 종순(宗舜, 1515~1582)과 첨추공(僉樞公)
휘 운(惲, 1573~1644)을 모신 재실이다.
공조전서공(工曹典書公) 남우(南雨)는 고려가 망하자 경남 합천에 은거를 하였고, 공의 증손 현 령공(縣令公) 태서(台瑞)가 밀양으로 이거하였다.
무송재(茂松齋) : 무송재는 성송면 무송리 183번지 (내원1길 97-40)에 있는
태서의 증손 통훈대부부사직공(通訓大夫副司直公) 구창(九昌)이 밀양에서 고창 성송 무송으로 이거한 이후 대대로 살아온 곳이다.
김정열의 재실로 송산마을의
창덕재는 증가선공(贈嘉善公) 춘걸(春傑)을 비롯하여, 그의 아들 증참의공(贈參議公) 봉석(奉
서쪽에 있다.
錫),
원모재(遠慕齋) : 내원마을(성송면 무송리 727번지) 안
육모재
증참의공의 아들 통정공(通政公) 명선(明善), 통정공 명선의 아들 가선공(嘉善公) 처광(處光),
가선공 처광의 아들 첨추공(僉樞公) 종옥(宗玉), 첨추공의 아들 통정공(通政公) 득서(得瑞), 통정
쪽에 있는 광산김씨의 재실이다. 원모재는 광산김
공 득서의 아들 진사공(進士公) 필언(弼彦)과 도사공(都事公) 국언(國彦)·참봉공(參奉公) 일언(鎰
씨 현령공파(縣令公) 영유현령(永柔縣令)인 태서(台瑞)
彦)·장언(章彦)과
와 그의 아들 통덕랑(通德郞) 수영(壽寧) 및 수영의
하는 곳이다.
재순부군(在淳府君)의 내외를 세일사(歲一祀) 재숙(齋宿)하고 형사(亨祀)를 봉행
아들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원귀(元龜)의 삼대를 원모재(遠慕齋) : 고창군 성송면 무송리 내원에 있는 광산김씨 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시정
모시는 재실이다.
공파·교리공파·능성공파의 재실이다. 세일사는 음 3월 15일이다.
사헌부장령의 아들인 통훈대부부사직(通訓大夫 副司直)
구창(九昌)이 무송리 내원으로 이거해온 지
가 470여 년이 되어 2006년 3월 후손들이 원모재
무송재(김정열 재실)
원모재는 22세(世) 능성공 휘 연년(延年)의 재실이다. 공은 교리공의 아들이며, 1479년생으 로 자는 가원(可遠), 호는 명암(明菴)이다. 자질이 순미하고 도학이 높았으며 효성이 있었다. 문
를 수리하고 담장을 쌓았다. 그리고 원모재 후원
소전 참봉을 거쳐 능성현령이 되어 치적이 많았으며, 병조좌랑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
에 위의 세 분을 모시는 제단을 만들었다.
았다. 아들은 참봉 영후(榮厚)와 참봉 영종(榮鍾)이다.
창덕재(彰德齋) : 내원마을(성송면 무송리 606-1번지)
내원의 은행나무(당산) : 내원마을 뒤쪽의 마을 정수장 옆(무송리 714번지)에는 수령이 50~60년
입구에 있는 광산김씨의 재실이다. 양간공(良簡公)
정도의 큰 은행나무가 있다. 마을 사람들이 당산이 없는 것을 아쉬워해서 당산나무가 있던
연(璉)은 초분파조(初分派祖)이고, 전리판서공(典理
자리에 심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은행나무가 심어져 있는 땅은 본래 무송리 소유로 되어 있
判書公)
204
광리(光利)는 중파(中派)파조이다. 공의 오대
원모재
던 것을 몇 해 전 고창군으로 이관해 갔다고 한다. 고창의 마을 제4집…205
내원의 수구막이 : 내원마을은 북서쪽이 지형적으로 개방되어 있다. 이를 풍수적으로 허(虛) 하다고 한다. 이렇게 풍수적으로 허한 곳을 보(補, 이를 비보풍수라 함)하기 위해 마을 주민들은 마을 앞에 숲을 조성한다거나 당산을 세운다. 더불어 허한 정도에 따라 입석(立石)을 여러 개 세우기도 한다. 이러한 입석을 우리는 선돌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내원마을에도 언제 세워졌 는지 알 수 없는 선돌들이 마을 앞에 일렬로 서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마을길을 넓히면서 땅 속에 묻어버렸다고 하는데, 다행스럽게도 현재 내원1길 97-4번지에 한 기가 남아 있다. 송산의 당산나무 : 송산마을 앞쪽에 있는 당산나무이다. 이 나무는 송산에 살다가 갈산으로 이사를 한 금산양반(이름은 알 수 없었음)이라는 분이 해방 후 심었다고 한다. 내원의 수구막이
송산의 당산나무
갈산의 당산나무 : 갈산마을 입구에 있는 느티나무로 대산천변에 있다. 수령은 100년 미만으 로 보인다. 지금은 이곳에서 당산제를 지내지 않는다. 마모된 비석 : 갈산마을의 도로변에 있는 마모된 비석이다. 비석 전면에는 ‘홍O복의 공적비’ 라고 쓰여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탁본을 떠봐야 할 것 같다. 후면에는 ‘癸酉年 十月 日’이 라고 음각되어 있다. 학선암 : 갈산마을의 길 건너 도로변 대성로 599번지에 있는 암자이다. 학선암은 태고종으 로 1960년대 이삼례 보살이 창건하였고, 현재는 월명심(강경아) 보살이 있다. 학선암에는 부처 를 모신 법당과 종각 및 미륵보살이 있다. 갈산의 당산나무
마모된 비석
여송재(麗松齋) : 여송재는 무송유씨의 시조인 녹숭을 모시는 재실로 성송면 하고리 226-1번 지에 있다. 세일사는 음력 3월 20일이다. 여송재 뒤에는 무송부원군인 녹숭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
6. 무송리 송산의 민속 무송리에서 민속행사로 전승되고 있는 것으로, 송산리의 마을굿이 있다. 갈산마을은 당산 나무는 있으나 당산에 굿을 하거나 옷을 입히지는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민속놀이를 하지 않은 이유는 굿을 하면 마을이 오히려 안 좋아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갈산의 이웃 마을인 송 학선암
206
유녹숭의 묘와 묘비
산마을은 현재까지도 줄을 꼬아 당산에 줄을 감고 있고, 풍물굿을 칠 줄 아는 어르신이 많이 고창의 마을 제4집…207
살아계신다. 2004년 전북민속예술축제에 ‘송산줄굿’으로 참가하여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고, 다음으로 정지(조왕굿, 부엌)굿을 쳤다. 그리고 뒤안에도 굿을 하였다. 조왕굿을 하고 나면
했다. 송산마을 어르신들은 전북무형문화재 5-6호인 고창농악강사들에게 직접 줄을 꼬는 방
철륭굿을 한 뒤에는 마당으로 나와 성주풀이를 하였다.
식을 전수하기도 했고, 그들과 함께 마을의 보름굿을 진행하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매굿인 마당밟이를 하고 나면, 정월 보름날 아침부터 집집마다 짚을 두서너 뭇씩 걷어 아침 10시부터 줄을 꼬기 시작한다. 줄을 다 꼬고 나면 줄굿을 친다.
1) 송산마을의 마을굿
줄굿을 한 후 석양 무렵에 마을 한 바퀴 도는 오방돌기를 하였는데, 오방돌기는 남자만 돌
송산마을의 풍물굿은 일제강점기 말기에 없어졌다가 지금의 고로들에 의해 재현된 것이다.
았다고 한다. 오방돌기가 끝나면 남녀로 나뉘어 줄다리기를 하였다. 줄다리기를 할 때는 반
풍물굿이 재현된 계기는, 새마을운동 기간에 당산제를 안 지내자 갑자기 마을에 군대나 밖에
드시 여자가 이겨야 했다. 줄다리기에서 여자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리
가서 부상을 입는 사람이 많아진 탓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당산제를 지내지 않아 생긴 일이
고 줄다리기에서 이긴 여성들은 매를 들고 다니면서 남자들을 사정없이 때렸다. 줄다리기가
라고 생각하여 다시 지내게 되었다. 원래 마을 사람들은 겨울이면 사랑방에 모여 놀고만 있
이후 줄은 당산으로 가져가서 먼저 할아버지당산에 제를 지내고, 그 뒤에 할머니당산에 줄을
었는데, 정월 보름굿을 치기 시작하자 옛 어르신들이 굿을 가르쳐주고 다른 이들도 나섰다고
감는다. 이를 두고 당산에 옷을 입힌다고 말한다.
한다. 이 당시 장구가 없어 자신의 집 염소를 잡아 그 가죽으로 장구를 만들기도 하고, 대야 로 징을 대신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장구를 가지고 동네의 오방을 돌자 처음에 쌀 열두 말
3) 여름 농사철 만두레 풍장굿
과 돈이 걷혔다고 한다. 이것으로 장구를 사와 굿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송산마을의 만두레 풍장굿은 만두레 할 때나 논을 세 번 맬 때 하고, 머슴을 부릴 때는 못 방구만 쳤다. 만두레 풍장굿은 전라도에서 세 벌 김매기를 마치고 벼가 가장 잘된 집의 머슴
2) 정월의 공동체의례와 풍물굿
을 소나 사다리 위에 태워 농악을 울리며 즐기는 놀이를 말한다. 이를 만두리라고도 한다. 만
송산마을은 정월 보름이 가까워지면 마을에서 임시회의를 개최하여 마을굿에 필요한 것을
두레 풍장굿은 백중(음력 7월 15일) 전에 이뤄지는 마지막 김매기(만두레)를 기뻐하면서 행하던
주민들이 함께 준비한다. 준비물은 살 수 있는 것은 사고, 부족한 기물들은 마을에서 직접 만
굿으로, 땅 주인이 일꾼에게 후한 밥상을 차려주고 위로하던 놀이에서 기원한다고 전해진다.
들어 준비한다. 이러한 준비가 마무리되면, 주민들은 매굿(마당밟이)을 쳐서 돈을 모아 일부는
굿은 풍물패가 마을에서 당산굿을 열고, 일꾼들은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 적힌 깃
죽은 사람의 영궤(靈几, 영위를 모셔 놓은 자리)와 그에 딸린 모든 것을 차려 놓은 곳인 정무청에
발과 장화(長花, 새 깃털을 흉내 낸 흰 천)를 앞세우고 풍물 장단에 맞춰 춤추며 논에 들어가면서
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마을 모정에서 새끼줄을 꼬아 줄을 만들었다. 또한 마을주민들 중 한
시작된다. 길이가 긴 장화 날개가 멋지게 너울거리는 현란한 장면이 되어야, 장화가 멋지게
분을 유사로 선정하여 금전을 책임지게 하였으며, 제관은 마을에서 나이가 많으신 어르신이
춤춰야 농사가 풍년이 든다는 속설이 있다.
하였다. 술은 경제적으로 넉넉한 집에서 1차를 하고, 아들을 낳았거나 뭔가 경사스러운 일이 있는 집에서 막걸리를 내놓았다.
4) 판굿
송산마을에는 당산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 온다. 마을에 도둑이 들었는데 당산을
판굿은 걸립패(乞粒牌)나 남사당패(男寺黨牌)들이 갖가지 놀이를 순서대로 짜서 판놀음에서
못 지나가고 날을 꼬박 새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미신이라 하여 몇 년간 당산제를 안
솜씨를 보여주기 위해 벌이는 농악을 말한다. 농악을 치는 굿패들은 당산(堂山)굿과 같은 마
지냈더니 생사람이 죽고 동네에 병이 드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사람이 죽고
을굿을 농악으로 친다. 그런데 서낭당에서 당굿을 칠 때는 당 앞에서 열을 지어 이리저리 판
3년 안에 있는 집은 굿이 안 들어간다고 믿고 있다. 이런 집의 사람은 줄도 못 손대고, 쌀도
을 벌이는 놀음이나, 집집마다 돌면서 고사를 지내는 마당밟이(地神밟기)와 걸립굿을 칠 때의
안 받는다. 애를 낳은 사람도 빠지고, 삼신도 빠지고, 개고기 먹은 사람도 손을 대지 못하게
마당놀음을 확대하여 걸립패들이 낮에 걸립을 하고, 밤에 구경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농악
하였다.
놀이로 판놀음을 벌이는 데에서 판굿이 생겨났다.
마을의 마당밟이는 정월 열나흗날 저녁부터 시작해서 날을 새가며 쳤다. 동네에 술이 남으
송산마을은 마을을 돌며 판굿을 치고 행하(行下, 놀이가 끝난 뒤에 주는 보수)를 받았다. 대개 마
면 그 다음날까지 쳤다. 마당밟이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그 집의 샘에 시암굿을 먼저 치
을의 누군가의 집에 아들을 낳았다거나 새로 이사를 왔을 때 자신의 집안을 좋게 해달라고
208
고창의 마을 제4집…209
풍물단을 초빙하여 판굿도 치고, 줄굿도 친다고 한다.
(1949년생),
새마을지도자는 김서중 씨이다.
처음에는 주로 길에서 이루어지는 길굿가락, 다음에는 상쇠의 인도에 의해 일렬종대로 서
송산마을은 노인회를 중심으로 일 년에 한 번 함께 여행을 간다. 이 때 객지에 나가 있는
서 오른쪽으로 도는데, 가락을 치는 채굿가락을 치면서 돈다. 그러고나서 굿패들이 열을 지
출향인사들이 돈을 내거나, 마을에서 상을 당했을 때 공동으로 도와주면 상주가 감사의 돈
어 갖가지 도형을 이루며, 여러 가지 진법놀이를 벌이는데, 농사짓는 시늉을 하는 농사풀이,
으로 낸 것 등을 모은 마을기금에서 여행 경비를 쓴다. 그리고 부족한 비용은 각자 조금씩
무동이 쇠꾼 어깨 위에 올라가서 춤추는 동고리, 상쇠놀이・설장구놀이・소고놀이, 열두발 상
내어 참여한다. 송산청년회는 마을의 대소사가 있을 때 서로 협조하여 마을 일을 해결하고
모돌리기와 같은 개인기를 보이는 벅구놀음, 굿패들이 민요를 합창하는 소리굿과 같은 놀음
있다. 그러나 내규는 없다. 현재 무송리 사람들은 대부분이 수도작인 논농사를 중심으로 하
들을 벌인다. 이때 마을에서는 잡색들이 재미있는 재담과 연극을 벌이는 놀이를 한다.
고 있으며 밭농사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마을 인근에는 축산농가가 있다. 갈산마을은 무송리의 마을 중 가장 가난한 곳이었다고 한다. 갈산마을 앞으로 대산천이
5) 걸립굿
흘러 해마다 홍수가 일어났다고 한다. 대산천의 잦는 범람은 갈산마을 빈곤의 원인 중 하나
송산마을은 마을의 공공기금이 필요할 때 동제(洞祭)와 같은 절차를 밟아 돈과 쌀을 거두
라고 말한다. 마을 여자들에 의하면, 갈산마을을 일으켜 세운 것은 바로 여자들이라고 말한
는 걸립굿을 하였다. 주로 걸립굿은 정월 대보름 전후, 추석 전후에 하며 농악대를 꾸며 농악
다. 어려운 시절 갈산으로 시집온 여인들은 이곳에서 가마니를 짜고, 명주로 베를 짜서 생계
을 치며 집집마다 방문하여 돈과 쌀을 거두었다. 걸립굿은 문굿·들당산굿·샘굿·집돌이·날
를 유지했다고 한다. 갈산의 많은 아주머니들이 1960~1970년대 시집와서 살기 시작하였다.
당산굿 순으로 짜여 있다. 문굿은 걸립패가 마을에 들어가기 전에 기예를 보여 주기 위해 치
이 당시 갈산에 누에단지가 조성이 되어 비단의 원료를 공급했다고 한다. 그리고 봄부터 초
는 농악이며, 들당산굿은 걸립패가 마을에 들어간 뒤 마을의 당산(堂山)에서 치는 농악이다.
겨울까지, 쉴 틈 없이 월산댁을 중심으로 이 근동의 개간지로 수박작업, 배추와 무 작업, 고
샘굿은 마을의 공동 우물에서 치는 농악이며, 집돌이는 집집을 돌며 집안 고사굿을 치는 농
추 따기 등 밭일을 하면서 마을을 가난한 마을에서 부자마을로 탈바꿈시켰다고 한다. 현재
악이다. 집돌이의 순서는 문굿·샘굿·마당굿·조왕굿·장독굿·고방굿·성주고사·인사굿의
갈산은 5가구의 축산농가가 있으며, 대부분은 논농사를 짓고, 적으나마 밭농사도 한다.
순으로 친다. 걸립패들이 집안에 들어가기 전 문간에서 문굿을 치고, 그 다음에는 집안의 샘가에서 샘굿 을 친다. 마당굿은 농악대가 마당에서 여러 가지 기예를 벌이는 농악이고, 조왕굿은 부엌에
마을의 시설로는 2001년 군비의 지원으로 세워진 송산 마을회관과 송산모정이 있다. 내원 에도 군의 지원으로 건립된 내원 마을회관과 모정이 있다. 갈산에도 2001년에 건축된 갈산 마을회관과 2002년에 만들어진 모정이 있다.
서, 장독굿은 장독에서, 고방굿은 광에서, 터주굿은 뒤꼍에서 치는 농악이다. 성주굿은 마루 에 차려 놓은 고사상 앞에서 소리꾼이 고사소리를 불러, 그 집안의 내복(來福)을 비는 의식이
2) 한국전쟁과 무송리
며, 인사굿은 농악을 마치고 떠나며 치는 농악이다. 이런 순으로 집돌이를 한다.
1950년 11월 19일 고창읍이 완전히 수복되어, 성내면, 흥덕면, 부안면, 아산면, 신림면 면소
걸립패가 집안에 들어오면 주인은 고사상에 쌀과 돈을 제물로 얹어 놓는데, 이 돈과 쌀은 걸
재지가 수복이 완료되었다. 하지만 소문에는 ‘낮에는 대한민국, 밤이면 인민공화국’이라고 빈
립패의 공금으로 쓰인다. 집집의 고사굿을 치다가 밤에는 마을사람들에게 걸립패 특유의 장기
정대는 소문이 파다할 만큼 아직도 민심은 흉흉했다. 그나마 생활의 여유가 있는 층들은 시
를 보여주는 판굿을 벌인다. 마을에서 고사굿을 끝내고 나올 때 날당산굿을 치고 떠난다.
골마을에서 면소재지 내지는 군소재지로 피란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고창읍 인근 지역, 즉 고수면과 성송면 그리고 무장면까지는 그런대로 면소재지까지 수복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
7. 무송리의 현재
지만 대산면을 위시해서 해안가 쪽의 공음면, 상하면, 해리면, 심원면 등은 아직도 미수복지 구로 남아 있었다. 특히 무송마을은 뒤에 고산이 있어 빨치산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무송
1) 마을의 조직·시설·종교·산업
마을은 고창에서도 서해안 지역인 심원, 해리, 상하와 더불어 가장 늦게 수복된 지역이었다.
여느 마을처럼 무송리도 이장과 부녀회장, 새마을지도자, 노인회장 등이 있다.
이로 말미암아 무송마을에서는 좌우익으로 나뉘어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죽임을 당해야 했
마을의 이장은 정재용(55세) 씨이다. 노인회 회장은 정정보(1937년생), 부녀회 회장은 이금순
다. 마을에는 한국전쟁으로 남편을 잃거나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210
고창의 마을 제4집…211
3) 무송리의 인구변화 무송리의 인구변화는 한국의 어느 시골과 다름없이 급격한 고령화와 인구감소현상을 보이
도움 주신 분
고 있다. 무송리의 인구감소는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드러났다. 2012년 12월 11일 현재, 10년
정준묵(40년생, 내원 전 이장 / 2012.10.16)
전인 2003년에 비해 송산 18%, 내원 30%, 갈산 32%나 인구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앞
소원채(54년생, 내원 전 이장 / 2012.10.16)
으로 무송리의 인구감소 현상은 더욱 두드러질 것으로 예측된다.
정재철(37년생, 송산 토박이 / 2012.10.16) 정재용(55세, 송산마을 이장 / 2012.11.12)
마을
2003
송산
73
내원
67
갈산
87
2004
38 35 71 35 36 31 24 51 36 27 40 37 78 47 41
2005 65 52 74
2006
33 66 32 24 52 28 37 71 37
33 33 25 27 34 37
2007 59 44 73
29 30 24 20 37 36
2008 58 43 70
29 29 23 20 37 33
2009
2010
25 25 49 28 24 28 26 49 47 21 21 36 38 67 72 31 34 53
2011 55 44 60
2012
25 60 30 25 47 19 31 59 29
26 34 25 22 27 32
※ 연말 기준
정재진(43세, 성송면사무소)
참고문헌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cha.go.kr/korea/heritage 『고창군지高敞郡誌』, 고창군지편찬위원회 편, 고창군지편찬위원회, 2010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편, 고창문화원, 2003
4) 무송리의 역대 이장
『도솔산선운사지』, 선운사, 성보문화재연구원, 2003
조사는 성송면사무소에 기록된 자료를 토대로 하였다. 송산의 경우는 1975년 정복동 이장
『전북전래지명총람』, 유재영, 민음사, 1993
이 처음 기록되어 있고, 내원과 갈산은 소원정과 강완식 이장이 1980년부터 마을의 대소사를
『조선사연구(초)』, 신채호, 범우문고, 2004 『고창의 마을굿』, 고창농악보존회, 나무한그루, 2010
맡아 왔다. 무송리의 역대 이장 명단은 다음과 같다.
http://terms.naver.com/entry.nhn 송산
내원
갈산
정복동 : 1975~
소원정 : 1980~1981
강완식 : 1980~1981
김병환 : 1980~1981
정휘성 : 1982~1983
강명수 : 1982~1989
정휴성 : 1982~1989
정휴백 : 1984~1987
강성윤 : 1990~1997
정병삼 : 1990~1993
정동은 : 1988~1989
강명수 : 1998~1999
김병환 : 1994~1999
강대풍 : 1990~1991
이상수 : 2000~2007
정복동 : 2000~2001
정휴백 : 1992~1999
임종웅 : 2008~ 현재
정재용 : 2002~2009
김용표 : 2000~2001
정복동 : 2010~2011
강대풍 : 2002~2003
정재용 : 2012~현재
소원채 : 2004~2005
http://www.rootsinfo.com/roots/view_roots.php http://blog.daum.net/yangi213/8668715
김용표 : 2006~2007 소원채 : 2010~2011 김용표 : 2012~현재
212
고창의 마을 제4집…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