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곡천 범람이 가져다준 풍요로운 땅, 법지리 서동진
신림면 법지리
법지리의 자연마을로는 강변, 관동, 법동, 새터, 서법, 정촌, 통정마을이 있다. 서법마을은 법
법지리
지 동쪽마을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법’이라 불린다. 방장산과 서산(소요산, 선운산, 구황봉, 비학산
외화리 무림리
도림리 덕화리
가평리
자포리 부송리
보이는 곳 가운데에 자리 잡은 법지리는 넓은 들과 야산이 많아 농경시대의
풍요로움을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으나, 관동마을은 야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전혀 다른 정
송용리
벽송리
에서 화시봉까지)이
서를 나타내고 있다.
신평리 세곡리
반룡리
1. 법지리의 역사와 개관 신림면(新林面)은 삼한시대에는 마한 땅으로 모로비리국에 속하였고, 삼국시대에는 백제국 의 상칠현(上漆縣)에 속하였다가 통일신라 때인 경덕왕16년(757)에 개명(改名)된 상질현(尙質縣) 의 속지였다. 고려시대 초기에 고을 이름이 장덕(章德)으로 바뀌면서 이곳은 면남(面南)의 땅이되었다가, 충 선왕 원년(1308)에 창덕(昌德)으로 바뀌면서 남면(南面)에 해당되었다. 창왕이 즉위(1389)하면서 고을 이름이 지금의 흥덕(興德)으로 또 다시 바뀌면서 역시 남면으로 그대로 이어졌다. 조선조 세조 원년(1455) 지방방위조직 개편 이후, 중기에 이르도록 남면에 그대로 속하였다.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 남면의 땅은 인구 증가로 인하여 일남면(一南面)과 이남면(二南面)으로 분면되었다. 일남면은 29리, 이남면은 38리로 구한말까지 이어졌는데 일남면의 소재지는 임 리(林里)에, 이남면의 소재지는 신평리(新平里)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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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의 마을 제4집…215
은 평야지대가 펼쳐지고 그 너머 로는 이곳 사람들이 서산이라고 부르는 소요산과 선운산, 구황봉, 비학산에서 화시봉까지가 있다. 법지리는 동쪽과 남쪽은 높은 산지가, 북서쪽은 낮 은 구릉이 발달해 있다. 방장산(734m)과 방문산(630m) 일대에서 발원한 갈곡천, 고부천 등이 북동류한다. 법지리의 마을 뒤에는 변산지맥의 야산이, 마을 앞에는 갈곡천의 범람으로 만들어진 넓은 들녘이 발달해 있다. 인근에 서해안 고속도로와 국도 23호가 인접해 있어 교통이 매우 편리 하다. 법지마을 표지석
법지마을 전경
2) 지명 각호교(却虎橋) : 경지정리 전 법지리 앞 동출서류하는 냇가에는 각호교, 중다리목, 방아다리 가 있었다. 특히 각호교는 호랑이를 물리치는 다리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강변-동(江邊洞) : 서법지 끝자락에 있는 갱변-뜸 또는 강변-뜸(江邊-뜸). 개-방죽 : 법지동 동북쪽에 있는 방죽으로, 비가 와야 물이 고인다. 갱변-뜸 : 법지동 서남쪽 냇가에 있는 강변-뜸 또는 강변동. 갱상-굴 : 관동과 법지동 사이에 있는 논과 밭을 가리킴. 게살등 : 경지정리 전에는 법지리 앞쪽으로 동출서류하는 냇가가 있었고, 여기에 시냇보, 독
국도 23번 서쪽에서 바라본 관동마을
관동마을 표지석
보, 구랫보가 있었다. 늦가을쯤에는 참게가 칠산 바다에서 올라왔다. 이때 마을에서는 대나 무로 울타리 모양의 살을 만들어 참게를 잡곤 했다. 냇가 곳곳에 게가 많이 잡히는 게살등이
일제강점기인 1914년 3월 1일 부군통폐합령(府郡統廢合令)에 의하여 무장군과 흥덕군이 고
있었음.
창군에 병합되면서 일남면과 이남면은 폐합되어 신림면이 되었다. 이남면의 소재지인 ‘신평
관-동(冠洞) : 대추-동 북서쪽에 있는 마을.
리’와 일남면의 소재지인 ‘임리’의 앞 글자를 따서 ‘신림’이라 하였다. 이후 1935년 행정구역
대추-동 : 상뜸 또는 대추-정이를 가리킴.
변경에 의해 벽사면의 부송리, 벽송리, 법지리의 3개 리가 편입되었다.
돌무랭이-시암 : 동법지 앞 들 자락에 있는 ‘새터-시암’은 마을 주민들의 식수였으나 경지정 리 때 마을 앞길 확장공사로 법지리길로 변했음.
2. 법지리의 자연환경과 지명
동-법(東法) : 서법지 동쪽에 있는 마을. 딧-골 : 법지동 뒤에 있는 들로 경지면적 약 6,000평 정도.
1) 자연환경 백두산 장군봉에서 출발한 백두대간은 호남정맥을 이루고 호남정맥 새재에서 분기한 영산 기맥은 고창군의 진산 방장산을 기봉한다. 방장산 소갈재에서 분기한 변산지맥에 자리한 신
똥뫼 : 동법지에서 보면 서남쪽으로 약 500m 거리에 있는 돌산이다. 이 돌산을 다른 마을 사람들은 ‘독뫼’라고 부른다고 하나, 법지리 사람들은 ‘똥뫼’라고 부른다고 한다. 아마도 법 지의 풍수적 형국이 와우(臥牛)형상을 하고 있어서 이렇게 부르는 듯함.
림면 법지리는 북동쪽으로 흥덕면의 송암리, 서쪽은 갈곡천을 사이에 두고 부안면 상등리,
법-동(法洞) : 서법지 동쪽에 있는 마을로 법지(法止), 법지-동(法止洞)을 가리킴.
남서쪽은 벽송리, 남쪽은 부송리와 자포리 북쪽은 사천리, 동쪽은 무림리와 접하고 있다. 북
상-뜸(대추정이, 상촌, 대추등) : 법지동에서 가장 위쪽에 있는 마을. 대추나무 정자가 있었음.
쪽과 동쪽은 낮은 언덕 지형으로 높은 산이 없는 구릉지대이다. 서쪽은 갈곡천 안으로는 넓
삼부락제(三部洛堤) : 장승백이에서 서쪽으로 100m 지점에 사거리가 나온다. 이 길이 바로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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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의 마을 제4집…217
하-뜸(정나무배기, 하촌, 정남정이) : 법지동 가장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전에 큰 정자나무가 있 었다고 함.
3. 법지마을의 설기(設基)와 입향(入鄕) 신림면 면소재지에서 서북간으로 약 1.5㎞ 거리에 있는 법지리에 최초로 정착한 성씨는, 1600년경에 들어온 고령이씨(高靈李氏)라고 전해온다. 하지만 흥덕현의 토족(土族)인 고흥유씨, 동복오씨, 장흥고씨의 사우(祠宇)가 유지(遺址)로 전해지고 있다. 법지동 가운데 있는 통시암
서법마을 남서쪽에 있는 똥뫼와 생사초
예전에는 광산김씨(光山金氏)와 고부이씨(古阜李氏)가 주요 성바지로 동법지와 서법지에 살았 으나, 지금은 다양한 성씨들이 들어와 세거하고 있다. 주민들은 사람이 처음으로 살기 시작
러 마을로 통하는 길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삼부락제(三部樂堤) 또는 삼보락제(三寶 樂堤)로 읽히기도
한다.
한 지역은 관동 마을회관에서 서남쪽으로 100m 지점에 있는 범[虎]형국 혹은 와우형국(臥牛形 局)의
지형이라고들 말한다. 이곳에서 기왓장과 집터가 지속적으로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서-법(西法) : 동법지 서쪽에 있는 마을로 강변뜸과 관동에 걸쳐 있음.
그뿐만 아니라 관동 마을회관에서 서북쪽으로 500m 지점에 ‘기와막’이라는 주막집도 있었다
새-터[돌무랭이] : 점촌 서쪽에 새로 조성된 마을로 모롱이에 돌이 많았음.
고 한다. 여기에서도 많은 기와장과 집터가 발견되고 있다.
생사초(生蛇礎) : 서법지 끝자락에서 서남쪽으로 100m 지점에 있는 작은 소나무 숲을 가리킨
기와막 주막집에서 서북쪽으로 부안면 알뫼장터가 있고, 남동쪽으로 휘어 돌아가면 법지
다. 경리정리 이전에는 생사초를 따라 흐르는 수로 양 옆에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이 풍경을
리 마을 3개의 당산과 삼부락재를 지나 장승백이 쪽에 이른다. 지금도 장승백이에서 보면 법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소의 꼬리 같기도 하고, 뱀이 힘차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리
지마을은 고창, 흥덕, 신림 방향으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다. 이곳에서 서쪽으로는 삼부락재
고 이 뱀이 똥뫼를 바라보고 막 쫓아가는 형국이었다고 함.
를 지나 관동마을로 가는 길과 남동쪽으로는 돌무랭이와 돌무랭이-시암이 있고, 그릇을 굽
점-등(점촌) : 법지 어귀에 있는 마을로 옹기점이 있었음.
는 점-등(점촌, 정촌)이 상뜸, 중뜸, 하뜸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정나무-배기 : 정남-정이 또는 하뜸. 중-뜸(동법, 중촌) : 법지 동쪽에 있는 마을 또는 상뜸과 하뜸의 중간이 됨. 찰방-못 : 법지동 서쪽에 있는 들. 경지면적 약 6마지기 되는데, 찰방이 살았다고 하며 기와 조각이 많이 나왔다고 함. 랭이 시암과 서법지의 통시암에 원류(源流)였다. 법지리의 모든 행사에 앞서 이곳에서 마음을 모아 굿과 제사를 지냈다. 그 다음 마을 훈[里訓]과 함께 상경하애(上敬下愛)·상부상조(相扶相 주민전체가 마을행사를 이어갔음.
통-시암(우물): 법지동 안에 있는 우물로 바닥에 깔린 바위가 마치 둥그렇게 갈라진 나무통 밑바닥 같은데 그 틈에서 물이 새어나와 맛이 좋았으나 지금은 상수도 공급으로 사용하지 않고 방치되어 있음. 통시암-거리(통정리) : 법지동 가운데에 있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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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김씨 삼회공은 29세인 김대(金濧, 1661~1732)를 일컬으며 최초로 신림 법지리에 이주한
인물이다. 본 삼회공파는 여말선초에 고창에 입향한 전리판서공파와 계보를 달리한다. 곧 11
참샘 : 삼부락재에서 북쪽으로 300m 지점에 참샘이 있었다. 이 샘은 동법지에 있었던 돌무
助)·전통문화계승(傳統文化繼承) 정신으로
1) 법지의 광산김씨 입향과 유래
세인 김위(金位)를 중시조로 하는바, 그 선계를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11세
12세
13세
14세
15세
16세
17세
位
光世
鏡亮
酒政
深
石堅
粹
(門下平章事)
(文肅公)
墓開豊
墓開豊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質
師武
瑚
自庸
簡
仲謙
(전한)
(성균좨주)
<墓寶城>
<墓寶城>
<墓長興>
(현감)
(참봉)
(참봉)
(尙書令) 18세
祖衎 (판도판서)
<墓宝城> (승지)
고창의 마을 제4집…219
25세
26세
珽
澤南
<墓寶城>
<참봉>
27세
28세
29세
30세
31세
서 이곳 갈마리에 입향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광산김씨 삼회공파의 고창 입향은 삼회공의 부친인 28세 주항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28세 구이공(久而公) 주항은 결혼하여 무장 갈마리 처가에서 아들을 낳으니 곧 29세 삼회공
대(濧)이다. 삼회공은 외가에서 성장하여 청년기가 되었을 때, 외가를 떠나 신림면 법지리에
(진사) (장흥거주)
式南
(진사) 호 남계
<墓海南> (진사) (해남거주) 호 추포
이주하였다. 이후 후손이 지금까지 대를 이어 거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삼회공의 생몰
華佑 華俊 (棠溪公) <墓長城> (현감)
연대(1661~1732)를 고려하면, 대략 10대 300년 이상 집성촌을 이루며 거주하여 왔음을 알 수
冑萬
있다.
<墓扶安> 冑恒
濧
<墓大山>
(三悔堂) <墓興德>
華伯
冑錫
생원
<墓長城> 冑寬
震雄
延壽
<墓新林>
<墓新林>
夏雄 九雄 濟雄
<墓長城>
2) 법지의 고부이씨 입향과 유래 시조 이경조(李敬祖)는 고려 문종 때의 인물로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고 시호는 문헌공(文憲 公)이다.
이경조는 고려(高麗) 문종(文宗) 때 최충(崔沖)이 설립한 사학(私學)의 효시인 구제학당
(九齊學堂)에서
사(門下平章事)에 올랐다. 1071년(문종25년) 김제(金悌)와 함께 서장관(書狀官)으로 송나라에 다녀 왔고 문종~숙종에 이르기까지 5왕을 섬긴 공으로 추충보정공신(推忠輔靖功臣)이 되어 여산군 (礪山君)에
위 삼해공의 선세조(先世祖)는 11세 위(位)로부터 17세 수(粹)까지는 고려 왕조에서 벼슬하였
공부하였고, 1065년(문종19년) 문과에 급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문하평장
봉해지고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에 이르렀다. 후손들은 시조의 고향인 고부를
본관으로 하였다. 1928년 무진보를 만들 때 고부의 옛 이름인 영주(瀛州)를 본관으로 하여 영
다. 18세 조간(祖衎)부터는 조선 왕조의 벼슬에 나아가 27세 당계공 화준(1602~1644)까지 이어
주이씨로 한 적이 있었으나, 1968년 무신보에서는 다시 고부이씨로 통일하였다. 법지리의 고
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묘소의 경우에도 고려조에 벼슬한 경우는 개성, 개풍 등 왕도 주변
부이씨의 입향은 영조 때 유룡(생몰미상)이다. 입향 유래는 소성면 흑암리에서 세거하다가 비
에 위치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옥한 농토가 있는 법지리에 입향 10세(世)를 세거하고 있다. 입향 세조계는 26세(世) 유룡 –
그러나 여말선초의 시기에 걸쳐 생존하였던 17세 수(粹)로부터 20세 사무(師武)까지는 묘소
덕린 – 성복 – 기문 – 철신 – 영모 – 병도 – 시훈 – 종하 – 만수 - 상엽이다.
의 위치가 족보에 기록되지 않은 채, 21세 호(瑚, 1390~1452)에 이르러서야 보성(寶城)으로 기록 되어 있다. 이는 여말의 어지러운 정국에 어떤 연유로 남하(南下)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이
4. 법지의 풍습과 이야기
유를 밝혀주는 기록이 있다. 곧 21세 호(瑚)에 이르러서 조선왕조에서 문과급제하고 승지에 올랐는데, 뒤에 벼슬을 내놓고 장흥의 괴정(槐亭)으로 이사하였다고 한다.1)
1) 마을의 유래 이야기
이어 25세 정(珽, 1527~1613)까지 장흥에 거주하였음이 확인된다. 그리고 26세 식남(式南)의
강변마을은 법지동 서남쪽 냇가에 있는 마을이라서 ‘강변’마을로 불렸고, 정촌마을은 옹기
묘소는 해남에, 27세 화준(華俊)은 장성에 있음을 족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28세 주
정이 있었던 것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서법마을은 법지마을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 ‘서법’마을
항(冑恒, 1635~1669)에 이르러는 무장 장사산면(현 고창군 대산면) 갈마곡에 있음이 확인된다. 공
이라 이름 붙여졌다. 법지마을 지명과 유래는 400년 전 홍덕면계에 ‘법줄마을’로 되어 있었
의 배위(配位)가 이곳 갈마리의 나주오씨임을 감안하면, 아마도 공이 결혼으로 인하여 해남에
다. 그 때 당시 이 마을은 무성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호랑이의 피해가 심해 마을을 떠나는 사람이 늘어갔다. 마침 이곳을 지나는 도사가, 법(法) 자는 불가(佛家)에서 호랑이라는 뜻이고,
1) 광 산김씨 법산재 『남계유고南溪遺稿』 남계공(南溪公) 가장(家狀) : “高祖諱瑚 入我朝 文科承旨 解官遂家于長 興之槐亭”승지공의 남하는 계유정난(1453, 세조의 왕위찬탈)의 조짐이 있자, 이를 피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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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茁) 자는 숲이 무성하다는 뜻이니 줄(茁) 자를 지(止) 자로 고쳐 부르면 피해를 면한다고 일 러 주었다. 그 뒤 마을이름을 도사가 일러 준 대로 바꾸니,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고창의 마을 제4집…221
2) 법지의 당산제
삶 밖에서 존재하는 생사화복(生死禍福)이 당산으로 시작되고 귀결된다고 하는 민속신앙인 것
당산(堂山)은 신역(神域)에 설치한 마을의
이다. 당산(堂山)은 신역(神域)에 설치한 마을의 수호신을 형상화한 것으로 여기에 제사를 올려
수호신을 형상화한 것으로 여기에 제사를
부락의 재앙을 물리치고 풍년과 복을 비는 동제신앙(洞祭信仰)의 유적(遺蹟)이기 때문이다.
올려 부락의 재앙을 물리치고 풍년과 복을
법지리의 당산제는 정월 보름날과 또는 마을 자치위원회에서 결정한 날에 마을 훈과 함께
비는 동제신앙(洞祭信仰)의 유적(遺蹟)이다. 또
상경하애(上敬下愛)·상부상조(相扶相助)·전통문화계승(傳統文化繼承) 정신으로 주민 전체가 마
한 당산은 이정표와 경계표시 몫까지 하였
음을 모아 당산제와 액막이 굿을 한다.
으며 성역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마한시대에
당산제와 액막이 굿 행사가 결정되면 동네마다 굿 칠 준비를 하기 위해 악기를 수리하고
도 당산이 있어 죄지은 자가 이곳에 들어가
종이에 물을 들여서 정성스럽게 나팔꽃 모양으로 종이를 접어 고깔을 만든다. 또 막걸리 한
면 잡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선사시대 주
동이를 놓고 굿을 어르는 소리들이 끊이지 않는다. 액막이 굿은, 법지마을 무사와 풍년을 기
거지에서 출토된 청동제기에 그려진 당산과
원하는 촌제 행사로 법지 농악단원이 가가호호 방문하는 형태로 열린다.
솟대 그림은 이런 사실들을 뒷받침해주고 있
법지리 상뜸에 있는 할아버지당산
다. 그러니까 당산은 자그마치 2천 5백년 이
3) 법지리의 들독
상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법지리의 들독은 마을 앞 드
당산은 일반적으로 당산나무[堂山樹]와, 당
넓은 들녘과 함께 모정 앞 정자
산석을 쌓아 올려 그 위에 신주를 세워두는
나무 옆에 잘 보존되어 있다. 이
누석단(屢石壇), 당집[宇]으로 이루어지나 고창
들독은 120년 전 이 마을에 사
지방에는 당산나무와 당산석간(竿)이 주류를
는 천산댁이 치마폭으로 살짝
이루고 있다. 법지리에는 장승백이와 할아버
안아다가 지금의 자리에 갖다
지, 할머니 그리고 그 자녀에 해당하는 당산
놓았다고 한다. 특히 법지리 사
이 3개가 있다.
람들은 이 들독의 무게에 따라
장승백이 자리에는 신림초등학교와 신림
법지리회관 옆 할머니당산과 농기계보관창고
같은 무게끼리 맞추어 품앗이와
교회, 동법지의 동쪽마을 그리고 마을길과
품삯을 정했던 것으로 전해진
국도 23번이 확장되면서 구전으로만 전해져
다. 다른 지역의 유래를 살펴보
내려오고 있다. 할아버지 당산은 상뜸에 있
면, 들독은 농경시대 논농사와 깊은 관련을 맺는 놀이로 지금도 마을마다 들독이 남아 있는
고, 그 자녀에 해당하는 당산은 서법지 서쪽
곳이 많다. 들독이란 무거운 돌을 말하며, 마을의 청장년들이 가끔 힘자랑을 하기 위해 들어
끝자락에 위치해 있으나, 할머니 당산은 마
보는 관습에서 유래됐다. 정자나무 옆에 들독을 두어 힘자랑을 하면서 마을두레패의 총각대
을 앞 동법지 길 밖에 있던 것을 마을 안 법
장을 뽑거나 신입례(新入禮, 두레패에 들어가는 입회식)를 행하기도 했다. 충청남도 대전 지방의 경
지 마을회관 옆으로 옮겨 놓았다. 옮긴 이유
우 마을마다 2~3개 다양한 무게의 들독이 준비되어 있다. 전라남도 보성군에 전승되는 사례
는, 아마도 법지리에 살았던 주민들의 유서
를 보면 매년 정월 보름을 기해 여러 마을이 윤번제로 정성껏 제수를 장만하여 온 마을사람
깊은 관습과 신앙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농
이 모인 가운데 제주·축관(祝官)·헌관(獻官) 등이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당제를 지
경사회와 뗄 수 없는 자연의 조화나, 인간의
222
서법지 끝자락에 있는 자녀당산 표시석
법지경로당 사적비에서 남서쪽에 위치한 들독
낸다. 당제가 끝나면 들독 놀이를 하는데, 청장년들이 참가하여 들독을 안아 들어 어깨 너머 고창의 마을 제4집…223
로 넘기는 놀이이다. 이때 넘기는 사람은 1~2명에 불과하며 1명 이상일 때는 2~3회 계속 들
놀이를 하면 1년 동안 병에 걸리지 않고 액을 쫓는다고 믿었다. 불싸움이란 빈 깡통에 구멍
어 승부를 가른다. 장원이 선발되면 황소를 타고 농악을 곁들여 온 마을사람이 함께 당산을
을 뚫고 철사 줄로 손잡이를 만든 다음 통나무를 잘게 잘라 불을 붙여 머리 위로 돌리면 불
돌며 한바탕 노래하고 춤을 춘다. 이러한 풍습은 전통시대에 마을 청장년들이 건강한 신체를
길이 살아나면서 원이 그려지는데 이때 불 깡통 손잡이를 놓아 힘껏 던져 멀리 날려 보낸 사
자랑하고자 했던 소박한 뜻에서 발전해온 것으로 보인다.
람이 이기는 놀이다. 이 불 싸움의 과정에서 자주 인접마을 부안면 사창, 진목마을 등과의 마 을간 투석전(投石戰)으로 변하여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4)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법지리의 월별세시풍속(月別歲時風俗) (1) 1월
(2) 2월
설날 : 설날 아침에 새 옷을 입고 조상님께 차례를 지내고 웃어른께 세배를 드린다. 어른들은
초하룻날 : 머슴의 날과 풍신제를 위해 온 집안을 깨끗하게 쓸고 닦으면서 콩볶기 등도 했
아랫사람에게 복 많이 받고 건강하라고 덕담을 해주시는데, 신혼부부가 있는 집에서는 새벽녘
는데 콩을 볶을 때에는 “새 알 볶아라. 쥐 알 볶아라”라고 말하면 새와 쥐가 없어져 곡식을
에 일찍 일어나 떡국을 준비하여 문중의 집안 어른들를 찾아뵙고 세배를 올리기도 했다.
축내는 일이 없다고 한다. 이날 콩을 볶는 것으로 가을농사를 짐작하기도 했다.
복조리 : 섣달 그믐날 자정이 지나면 복조리장사가 “복조리 사”소리를 지르며 마을로 들어
머슴의 날 : 음력 2월 초하루를 중화절(中和節)이라 하는데 문헌을 보면 정조 병진년(1776)에
온다. 복조리는 정읍시 입암면 부근이 조릿대가 많이 자라는 곳이어서 그곳 조릿대로 복조리
중국 당나라의 중화절을 본떠서 농사일을 시작하는 날로 삼았다. 이달부터는 농사준비가 시
를 만들었다고 한다. 큰방 출입문 상단에 두 개를 한데 묶어 걸어 두면 1년 동안 집안에 복이
작되는 시기이므로 머슴에게 음식을 마련해 주고 쉬게 했다. 농가에서는 송편을 만들어 머
들어온다고 믿었다.
슴들에게 나이 수대로 나누어 먹였고 편히 쉬게 하였다. 머슴들은 농악을 울리며 노래와 춤
원일소발 : 지난 1년간 머리를 손질할 때 빠진 머리카락을 상자 안에 모아 넣어 두었다가
으로 하루를 즐기는데 주인들은 머슴들에게 용돈이나 세경의 정도를 미리 주어 쓰도록 한다.
설날 저녁에 문밖에서 태우는 풍습이다. 이때 머리카락을 태울 때 나는 냄새로 악귀를 물리친
이날은 콩을 볶아 짚 더미 속에 넣어 두기도 하고 콩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먹으면 노래
다고 했다.
기가 없어진다고 믿었다.
대보름날 : 달이 꽉 찬 날이라 하여 재앙과 액을 막는 제사를 지내는 날이다. 보름전날 오 곡밥을 지어 두부와 김, 묵, 나물을 먹는다. 또는 둥근달을 보면 운세와 복을 받는다고 한다.
(3) 3월
달이 뜰 무렵 뒷산이나 마을 앞 들녘에서 소나무를 중앙에 세우고 집집에서 가져온 짚단을
삼짇날 : 음력 3월 3일은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날인데 이날은 설날, 단오, 칠석, 중구
쌓으면 마치 큰 노적처럼 된다. 이때 둥근달이 방장산에 떠서 막 보일 때쯤 여기에다 불을 붙
와 더불어 중절(中節)의 하나이다. 새싹이 나고 꽃이 피면 진달래꽃으로 화전을 만들어 먹고
인다. 이것이 ‘달집태우기’로서 불길이 훨훨 잘 타야만 마을이 평안하고 그해 농사가 풍년이
꽃노래를 불렀으며 어린이들은 진달래를 꺾어 꽃방망이를 만들어 놀기도 했다.
든다고 한다. 달집을 태울 때 마을사람들은 농악놀이를 하면서 신명나게 논다. 또한 대보름날에는 어린아이가 봄을 타고 살이 여위는 것을 막기 위해 백 집의 밥을 얻어 다가 절구 위에 앉혀 먹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새벽에는 사람을 불러서 대답을 하면 “내 더
한식 : 한식은 동지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이다. 이날은 조상의 무덤에 잔디를 입히고(사초), 농가에서는 나무를 심거나 채소 씨앗을 파종하여 새해 농사준비를 하였다. 이날을 전후하여 쑥탕이나 쑥떡을 해먹었다.
위”라 하며 더위팔기를 하며 병이 없는 여름철이 되기를 기원했다. 대보름날 새벽에는 밤, 호
곡우절 : 24절기 중 여섯 번째로 농가에서는 못자리를 시작하고 실비가 내려 백곡을 기름지
두, 땅콩, 잣 등을 깨물면서 ‘일 년 열 두 달 동안 무사태평하고 종기나 부스럼이 나지 않게
게 할 때다. 이날을 전후하여 칠산 앞바다에서 잡히는 조기가 살이 찌고 맛이 좋다고 하여 이
해 주십시오’라고 축수하며 깨무는 “딱”소리에 잡귀가 물러간다고 했다.
생조기를 사다가 생 고사리와 갖은 채소를 곁들여 조깃국을 끓여 먹었는데 이것을 ‘조기십
대보름날에 쥐불놀이와 불 싸움이 있었는데 열 나흗날과 대보름날 밤에 들에 나가서 논둑
리’라고 하였다.
과 밭둑에 불을 놓아 태우는데 이를 쥐불놀이라 한다. 쥐불놀이는 잡귀를 쫓기 위해서이지만, 잡초를 태움으로써 해충의 알을 죽이고 타고남은 재는 봄에 새싹이 날 때 거름이 된다. 쥐불
224
(4) 4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이며 가까운 절이나 암자를 찾아 불공을 드리며 소원을 빌었다. 고창의 마을 제4집…225
(5) 5월 단오 음력 5월 5일을 단오절이라 하는데 옛날에는 차례를 지냈다. 여자들은 창포물
을 법지리 마을 주민의 날로 정하고 모범주민에 대한 표창과 함께 효도상을 제정하여 시상
에 머리를 감고 그네뛰기 하고 남자들은 씨름이나 들독 들어올리기를 하며 하루를 보냈다.
을 하고 있다. 더구나 모든 주민이 참여하여 대청소를 하고 출향인사가 고향을 찾아오게 하
그네는 모정의 오래된 당산나무의 나뭇가지에 새끼줄을 동여매어 그네를 뛰고 씨름은 모정
는 행사를 매년 개최하여 21회째를 맞이하고 있다.
한편에 모래를 부어 씨름판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또한 단옷날 중에서도 오시(午時)가 가장
백중절 : 음력 7월 15일을 백종일(百種日) 또는 망혼일(亡魂日)이라고 한다. 이날 에는 망혼을
양기가 왕성한 시각으로 생각하여 이 시각에 쑥이나 익모초 등을 채취하여 말려 두었다가 가
위하여 절에서 제를 올려 극락으로 인도한다. 7월 보름을 전후하여 마을 형편에 따라 택일하
정에서 1년 내내 약용으로 쓰기도 하고 횃불을 만들어 쓰기도 하였다.
여 초연(草宴) 또는 머슴날이라고 하여 호미씻기를 한다. 이때쯤엔 힘든 농사일도 거의 끝나 가 호미를 거둘 때가 되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이날은 농사가 잘된 집의 머슴을 선발하여 상
(6) 6월 유두절과 삼복 고려시대에 쓰여진 『동두유속집』에 음력 6월 15일을 유두일이라 하였
을 내리고 술로 노고를 위로했다.
는데, 이날은 맑은 개울에서 목욕을 하면서 궂은 것은 털어버리고 선비들은 유두 음식을 차 려 물가에서 풍월을 읊는 유두연(流頭宴)을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유두절 무렵이면 여름철
(8) 9월 중양절 음력 9월 9일을 중양(重陽) 또는 중구(重九)라고 하는데, 중구란 9라는 숫자가
마지막 세벌매기를 하는데, 이것을 ‘만두레’라고 하며 이때 풍장굿을 쳤다. 풍장굿패가 논두
겹쳤다는 뜻이고 중양이란 홀수인 숫자가 2개 겹쳤다는 뜻이다. 3월 삼짇날에 왔던 제비가
렁에서 신명나게 풍악을 울리면 김매기 하던 사람들은 덩달아 신이 나서 열심히 김매기를 하
중양절을 기해 강남으로 떠난다는 날이며 이날 농부들은 한자리에 모여 농악을 울리고 준비
였으며 김매기를 마친 사람들은 그날 음식을 준비한 마을의 부잣집 머슴을 소에다 태우고 학
한 음식과 술을 마시며 즐겁게 지냈다.
의 날개 모양을 2개 만들어 앞세우고 의기양양하게 행진하였다. 이들은 마을수호신인 당산나 무 주위를 돌며 인사를 드리고 부잣집으로 이동하여 굿을 치면서 함께 음식을 먹고 술을 마 시면서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며 놀았다. “삼복”은 초복, 중복, 말복을 말한다. 하지(夏至) 후 셋째 경일(庚日)을 초복, 넷째 경일을 중복,
(9) 10월 입동(立冬), 소설(小雪)의 절기가 있는 계절로 겨울 날씨에 접어들었으나 아직 햇볕이 따뜻하여 소춘(小春)이라고도 한다. 10월은 상달이라고 하여 1년 중 조상에 대한 시제 및 고 사, 또는 ‘성주제’를 올려 감사와 안녕을 기원했다.
입추(立秋) 후 첫 경일을 말복이라 하며 이를 삼경일 또는 삼복이라 한다. 이때는 장마가 오고 습기가 많고 더위가 극심할 때이다. 법지마을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강변뜸(갈곡천)에 나아가
(10) 11월 동지 양력으로 12월 22일~23일경으로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복다림을 하는데 이때는 집에서 키우던 닭이라든지 돼지를 잡고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아 매운
날이다. 이 날을 ‘아세(작은설)’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동지팥죽을 쑤어 먹어야 한 살 더
탕과 털내기를 끓여먹곤 하였다. 여기서 ‘털내기’음식이란 민물고기를 푹 삶아 내어 소쿠리에
먹는다는 뜻이다. 동지팥죽은, 반드시 찹쌀로 새알심을 만들어 넣어서 끓인다. 이 때 새알심
받혀 뼈를 발라 낸 다음 다시 솥에 담아 각종 야채로 양념을 하여 국수 또는 수제비를 넣어 얼
은 죽을 먹는 사람의 나이 수만큼씩 넣어서 먹는 풍습이 있으며 팥죽을 대문과 집주변에 뿌
큰하게 끓여 먹었던 음식으로 영양이 풍부하고 더위를 물리치는 데 아주 훌륭하였다.
림으로서 악귀(惡鬼)를 몰아 낸다고 믿었다.
(7)7월 칠석 : 음력 7월 7일을 칠석이라 한다. 칠석날에는 까치와 까마귀가 은하수에 오작교(烏鵲 橋)를
(11) 12월 섣달 섣달을 납월(臘月), 세 번째 미일(未日)을 납일(臘日)이라 하는데, 이때 지내는 제 사를 납향(臘享)이라 한다. 한 해를 정리하는 달로 그해 지은 농사형편과 그 밖의 여러 가지
놓아 동쪽의 견우성과 서쪽의 직녀성을 만나게 해 준다고 한다. 둘이 만나 흘리는 슬픔
일들을 신에게 고한다. 밤에는 참새를 잡아 구워 먹는데, 구운 참새를 먹은 아이들은 병에 걸
과 기쁨의 눈물 때문에 칠석날은 대체로 날이 흐르고 비가 내린다고 한다. 부녀자들은 마당
리지 않는다고 믿었다. 이날 내린 눈은 약이 된다고 하여 독에 받아 두었다가 눈에 바르면
에서 바느질 채비와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고 문인들은 술잔을 교환하면서 두 별을 제목으로
눈병이 낫고 책이나 옷에 바르면 좀이 슬지 않는다고 했다. 섣달 그믐날이 지나면 설인데 그
시를 지었다. 또는 볕이 좋을 때 옷과 책을 말리고 집집마다 우물물을 퍼내어 청결히 한 다음
믐날 잠을 자면 눈썹이 희게 된다고 하며 집 안팎에 불을 밝혀 놓고 밤을 지새우고 새해가
시루떡을 해서 우물에 놓고 칠성제를 지낸다. 1991년도에 마을 주민들의 의견을 모아 칠석날
되기를 기다렸다(이종길).
226
고창의 마을 제4집…227
4) 일부(一婦)에 이서(二婿), 중매비 협잡으로 혼인날 대소동
8) 오종상과 고해진의 쌍둥이네 이야기
고창군 고창면 내동리 일백이십번디 윤상팔은 그녀 동생 윤족간(15세)을 그 이종되는 동
오종상(51)과 고해진(41, 슈마고 마리페인)은 한국과 필
군 신림면 반룡리에 사는 뎡운채(鄭雲彩)의 중매로 동면 가평리에 사는 전운경의 둘째 아들
리핀의 국제가정이다. 결혼당시 어머니를 모시고 신
전복길(25세)과 혼수비 륙십원을 밧고 혼인을 뎡하엿섯는데 중매를 한 뎡운채는 중매비 못
혼살림을 시작했다. 지금은 쌍둥이 오민정(12)과 오미
얻어 먹는 것을 한으로 생각하야 한 수단을 생각하고 벽사면 법지리에서 남의 고용사리하
정(12), 그리고 오현정(11) 세 딸을 키우고 있다. 오종
는 김백술(25세)을 꾀여 현금 칠십팔원을 밧기로하고 뎡운채는 윤상팔을 차저가 이왕 뎡한
상은 관동마을 이장과 중장비사업을 하고 있고, 고해
혼인은 파하고 김백술과 혼인을 하라고 권하엿스나 윤상팔은 듯지 안코 지난달 십륙일에
진은 고창군청에서 영어 통역사로 근무하고 있다.
혼인연을 하려 하얏는데 이 일을 안 김백술은 자긔가 약혼한 여자니 자긔도 장가를 든다고
관동마을 오미정, 오민정 쌍둥이
지난 2012년 오민정과 오미정은 <2012 전국 다문
신부집에를 자저와 먼저 온 신랑편과 싸홈이 이러낫스나 강약이 부동하야 김백술의 일행
화가족 어울림 콘테스트>에서‘한국문화와 필리핀문화 대화’의 주제로 ‘대상’을 수상하였으며,
은 그날밤으로 쫓겨나서 즉시 뎡운채집으로 차저가니 뎡운채는 어듸로 다러낫슴으로 뎡운
<2012 고창선운사 꽃무릇> 백일장대회에서 오민정은 ‘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오민정과 오
채 어머니를 위협한 결과 열다섯살 된 뎡운채의 누의를 대신 주기로 하엿다더라(『동아일보』,
미정 그리고 오현정은 판소리와 가야금을 배우고 있다.
1925.3.16).
9) 유택진 씨와 손순자 여사의 이야기 5) 고창 신설교 양면 중앙지(中央地)에
유택진(62) 씨와 손순자(62) 여사는 31년 전 3남 1녀를 데리고 서법지마을에 정착했다. 그
고창군 본년도 신설공립보통학교위치에 대하여 문제 중이든바 벽사・신림 양면에서 건축
이후 명록(40), 병록(37), 상록(35) 3형제는 농고를 졸업하고 법지리에 정착하여 논농사, 밭농
비 3천원을 담당하고 운동을 맹렬히 함으로 군당국에서도 우양면에 결정하고 위치는 양면
사, 축산업, 정미소까지 글로벌농촌을 만들어가고 있다. 3형제는 결혼하여 명록은 아들 둘에
중앙인 벽사면 법지리에 정할리하더라(『동아일보』, 1927.5.9.).
딸 둘, 병록은 아들 하나 딸 하나, 상록은 딸 둘에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이웃집에는 외할 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이사를 와서 살고 있다.
6) 리효부의 단지 전북 고창군 벽사면 법지리 김영구(金永久)는 수년간 병으로 신고하든 중 지난 십이일 절명
5. 마을의 문화유적과 인물
상태 중 씨의 당 자부 리이경(李以卿)이는 애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단지(斷指)까지 하여 선혈을 시부에게 올인 결과 회생하여 유언까지 하고 세 시간 후에 별세하엿다는데 일반인사
1) 문화유적
는 리효부의 칭송을 마지아니한담니다(『동아일보』, 1927.5.15).
법산제 : 30여 년 전에 삼부락재에서 남 쪽으로 50m 지점에 광산김씨들이 제실을
7) 신군향토방문, 고창후원회조직
지었다. 법지리에 최초로 입향한 광산김씨
누보와 여히 이등비행사 신용인(愼鏞寅) 씨의 고국방문 중 향토인 고창방문은 십사일경인데
시조는 흥광, 파조는 석견이다. 입향유래는
착륙장은 동군 벽사면 법지리(구평월리)로 확정하고 착륙에 대한 환영준비를 구체적으로 하
장성군 북이면에서 성내로 래거(來居)하였
기 위하여 거삼일하오삼시에 동군청회의실에서 군내유지회를 개최하고 장시간 토의한 결과
다가 광활한 평야지를 찾아 법지리에 입향
경비는 이천원으로 정하고 입장권 십전권 이만일천매와 우대권삼백매를 발부하되 학생은 무
하여 13세(世)를 세거하고 있다. 입향세조
료관람케하고 착륙장소인 평월리와 고창읍내 특별직행자동차임금은 이십전에서 삼십전까지
계는 28세 위항 - 대 - 진웅 - 연수 - 석
각 영업소와 교섭키로 하엿다더라(『동아일보』, 1927.12.6).
명 - 찬원 - 채모 - 윤환 - 대현 -영채 -
228
광산김씨 제실, 법산제
고창의 마을 제4집…229
천채 - 용덕 - 도중이다. 이 후손들이 각양 각지에서 성금을 모아 매년 한가위에 모여 법산제 (法山祭)를
냈다. 김용원 : 1대~2대 고창도의원(1991.3.26~1998.6.1)을 지냈으며, 직업은 수의사로 신민당 고창지
지내고 있다.
벽사면 면사무소 터 : 서법지의 김은주(용호) 집자리에 벽사면 면사무소 자리였다고 함.
구당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벽사면 지소 : 동법지 신용채의 방앗간 자리가 벽사면 지소 자리였다고 함. 창효사-터(彰孝祠-) : 중뜸과 하뜸 사이에
6. 법지마을의 기관과 시설
있는 창효사의 터로 성종25년(1493)에 사 당을 세웠는데, 고종5년(1868)에 철폐되었
신림면 서북부에 위치한 법지리는 신림면 면소재지에서 서북간으로 약 1.5㎞ 지점에 위치한
다가 1928년 3월에 신림면 외화리로 옮기
다. 법지리는 원래 특별한 구분 없이 상뜸, 중뜸, 하뜸으로 부르며 지내오다가 1995년경에 동
고, 그 터에 흥덕현의 토족(土族)인 고흥유
법지와 서법지마을로 행정구역이 나뉘었다. 이 마을들은 지평선을 이룬 들녘을 바라보고 있
씨, 동복오씨, 장흥고씨의 사자(祠字)와 함
으나 관동마을은 서쪽을 향해 놓여 있는 소쿠리모양의 산자락 안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께 유허비만 세움.
마을 주변으로는 과수원과 양계장, 축산, 각종 수목원이 펼쳐져 한가로운 전원마을 같다.
창효사는 성종 때 효행으로 이름이 알려 진 감천 오준(吳浚, 1444~1494)과 오시정(吳 詩挺)을
법지리의 크기는 2.56㎢, 그 가운데 답이 2.23㎢이고, 그 나머지가 과수원, 임야 기타이다. 창효사유허비와고흥유씨동복오씨장흥고씨사자비
제향하는 사우이다. 오준은 어려서
부터 효성이 지극했는데, 그의 효정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오준의 효성에 감동한 하늘 이 시묘살이 하던 자리 옆에 갑자기 벼락을 쳐서 청수가 솟으니 이를 효감천(孝感泉)이라 하 고, 벌레가 댓잎에 창효(彰孝)라 새기니, 사우 이름을 창효사라 했다고 한다. 창효사는 1494년에 처음 세워졌다. 원래 이 사우는 정문과 효감천이 있는 고창군 신림면 외화리에 세워져 유혜원, 유필원 등과 함께 배향되었다. 1748년(영조24)에는 고창군 신림면 법
법지리의 가구수는 102세대이며 남자 99명, 여자 111명이 살고 있다. 법지리의 공동이용시설 로는 마을회관 2곳, 목욕탕 1곳, 경로당 2곳, 모정 3곳, 창고 2곳, 농기계보관소 1곳, 체력단 련실 및 법지장수촌수련관 1곳이 있다. 법지리는 북으로는 흥덕면과 남으로는 고창을 잇는 국도23번과 지금의 서해안고속도로의 선운IC가 3㎞ 지점에 리(里)도와 농(農)도가 사방으로 함께 있어 법지리가 옛날부터 신림면에 서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다고 본다. 즉, 신림초등학교, 신림교회, 휴게소, 방앗간 2 개, 부홍양만장, 축산농장, 양계장 등이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다.
지리로 옮겨져 1868년(고종5) 사우가 철폐될 때까지 이곳에서 모셔졌다. 이후 창효사는 1894 년 오준의 묘, 정문, 효감천이 있는 현재 위치로 다시 이건하였다. 오랜 세월에 건물이 퇴락하 여 2008년 동복오씨 문중에서 재건하고 동년 11월 12일에 준공하였다.
관동 마을회관 : 관동 마을회관은 1992년에 법지리 관동길 48번지에다가 군비로 건축 하 였으며, 노인회장 유인순이 관리하고 있다.
2) 마을의 인물
마을주민 남녀노소가 회원으로 이 곳을 사
김영춘(金永春) : 동법지 출신으로 3대 신림면장(1951.4.14~1955.9.14)을 지냈다.
용하고 있다.
김정수(金正洙) : 동법지 출신으로 9대 신림면장(1970.10.26~1976.3.5)을 지냈다. 이이영 : 1979년 2월생으로, 현 부산지방법원 판사로 고창초, 고창여중, 전주우석여고, 고려
관동마을 모정 : 지금의 관동마을 모정은 이
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49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이이영 판사는 이종길 씨와 왕강희 여사
전 모정 자리(법지리 관동길 48번지)에다가 2000
의 3녀 1남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년에 군비로 건축되었다. 관동마을 모정은
김백수(金百洙) : 서법지 출신으로 1대 신림면장(1946.11.3~1948.5.5)을 지냈다.
마을주민 남녀노소가 같이 사용하고 있으며
이석구(李錫九) : 서법지 출신으로 6대(1965.6.29~8.16)와 8대 신림면장(1965.5.11~1970.10.25)을 지
관리는 오종상 씨가 하고 있다.
230
관동마을회관과 회관 앞 칠판에 씌여진 메모들
고창의 마을 제4집…231
동법지 마을회관 : 원래 동법지와 서법지로 행정구역이 있기 이전부터 법지리의 마을회관으 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 마을회관은 동법지 모정과 법지 경로당 사적비, 들독이 동서남북으 로 한 공간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시설들은 마을 주민들이 연차적으로 기금을 만들어가면서 동법지 모정(1984년 2월 8일에 보수 준공)과 법지 경로당 사적비(1999년 1월 27일) 등을 세웠다고 한 다. 마을회관 안은 25평 정도이고, 일반 가정 살림집 같은 시설을 하고 있다. 지금 사용은 동 법지와 서법지의 여자회원들이 주로 사용하고 있으며 관리는 김정임 노인회장이 하고 있다. 서법지 마을회관 : 법지리 동법길 190번지 외 800여 평 면적은 동법과 서법마을의 공동소유
농기계보관소
법지장수촌수련관
의 땅으로, 동법길이 동서로 여기를 지나는 북쪽에 서법 마을회관이 있다. 뿐만 아니라, 서법 지와 동법지의 모든 시설이 이 면적 안에 있기도 하다. 이 회관은 군비 2,700만원과 마을모금
법지목욕탕 : 법지장수촌수련관 안에 남, 여 구분으로 목욕탕 2개가 있다.
2,393만원으로 2000년 8월 28일 착공하여 2000년 12월 25일에 준공했다. 서법지와 동법지의 남자회원들이 사용하고 있으며 관리는 채연식 서법지 이장이 하고 있다.
농기계보관소 : 농기계보관소는 군비로 건축되었으며, 서법지와 동법지의 주민들이 공동으 로 사용하고 있다. 관리는 이종남 씨와 채연식 씨가 같이 하고 있다.
동법지마을 모정 : 동법지 모정은 동법지와 서법지 주민이 같이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서법 지 모정은 낡고 오래되어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법지장수촌수련관 : 법지장수촌수련관은 군비와 마을 기금으로 건축되었으며, 체력 단련실 및 휴식을 위해 서법지와 동법지의 주민들이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다. 관리는 이종남 씨와
법지마을 여자 경로당 : 동법지와 서법지의 여자회원들이 사용하고 있다.
채연식 씨가 같이 하고 있다. 서법지마을 모정 : 서법지 모정은 경지정리 전에는 서법지의 자녀당산과 나란히 있었다고 한 다. 경지정리 하면서 당산에서 마을길 건너 남동쪽 10m 쪽에 새로 모정을 지었으나, 지금은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법지마을회관
법지마을회관 앞 칠판에 씌여진 메모들
고창농원 : 신림면 법지리에 있는 양계장으로 김욱태가 대표이다. 관동마을 북서쪽 700m 거리에, 건평 5,000평에 50,000마리의 닭을 기르고 있었다. 인상적인 것은 외지인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이 농장으로 가는 길을 따로 만들어 둔 점이다. 이 농장은 몇 번 주인이 갈리 기도 했으나 30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축산농장 : 관동과 법지마을 사이 구릉진 골에는 홍성대와 유명록 씨의 축산 2농가가 소 400여 마리를 사육하고 있고, 유병록 씨도 다소 떨어진 곳에 축산업을 하고 있었다.
법지마을 할머니 경로당
232
법지마을 경로당 사적비
부홍양만장 : 법지리 92번지에 있는 민물장어 양식장이다. 고창의 마을 제4집…233
설치, 2003년 12월 5일 디지털 도서관을 개관하였다. 교목은 향나무, 교화는 백일홍이다. 유 치원 1학급과 초등 7학급(특수학급 1학급)으로 편성되어 있으며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법지 리 산 31번지에 있다.
7. 법지리의 인구와 마을조직 1) 법지리 인구현황 신림휴게소와 신림기공사
방앗간
마을명 동법지 서법지 관동
신림초등학교
신림교회
연도
세대
총인구
남
여
2003년
43
100
51
49
2011년 2003년
48 60
83 163
42 84
41 79
2011년 2003년
51 19
116 53
56 23
60 30
2011년
17
37
17
20
2) 법지리 연령별 인구현황 연령별(2011년)
신림휴게소와 신림기공사 : 신림휴게소와 신림기공사는 법지리에서 남쪽으로 국도23번을 따
마을별
라 1㎞ 지점에, 평월리 다리 옆에서 주관영 사장이 운영하는 영업장이다. 국도 23번이 확장되 기 이전에는 번성하였으나 지금은 폐업상태라고 한다.
20세
30세
40세
50세
60세
70세
70세
이하
이하
이하
이하
이하
이하
이하
이상
3
9
6
6
2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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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법지 서법지
방앗간 : 장승백이 쪽에 ‘신흥정미소’와 동법지에 ‘법지정미소’가 있다. 옛날에는 법지마을에
10세
관동
2
계
2개의 물레방앗간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경지정리 이전 일이다. 법지리에서 남쪽으로 자포리 다리가 있다. 그쪽에 물레방앗간이 있었다고 하고, 서법지 끝자락쯤에 물레방앗간이 있었다 고 한다. 신림교회 :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의 기독교이며, 신림면 법지리 산22-1에 있다. 본 교회는 천길영 목사가 목회를 하고 있으며, 교육관과 교회 및 사택이 있다. 신림초등학교 : 고창군 신림면 법지리에 있는 공립초등학교이다. 1928년 5월 28일 벽신보통 학교로 개교하였으며 1950년 4월 10일 신림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 1955년 4월 1일 가평분 교장을 설치하였으며 1981년 3월 1일 병설유치원을 개원하였다. 1988년 3월 1일 특수학급을 234
관동마을 송소덕 씨 배추밭에서 마을울력
서법지 나승호・전문순 시집에 김장 마을울력
고창의 마을 제4집…235
3) 법지리 조직현황 도움 주신 분 마을조직체(2011년)
마을별
이종길(법지리 자치위원장)/ 왕강희(법지리 자치위원장)/ 김병용(서법지 개발위원장)
이장
새마을지도자
부녀회장
동법지
이종남
한창교
유성례
유영묵(신림면장)/ 이기화(전 고창문화원장)/ 김용원(전 도의원)/ 이동남(동법지)
서법지
채연식
노희일
전만순
김시원(서법지)/ 오재남(동법지)/ 김수환(동법지)/ 김진휴(서법지)/ 노희일(서법지)
관동
오종상
홍성대
유점례
손순자(서법지)
이종남(동법지 이장)/ 채연식(서법지 이장)/ 오종상(관동 이장)/ 진성수(전 법지 이장)
참고문헌
4) 법지마을 역대이장 현황
『고창군의 지석묘』, 군산대학교, 2009. 마을별
법지마을 역대이장
『광산김씨 고창세거와 문헌・유적』, 고창문화연구회, 2012.
2000~2001
2002~2003
2004~2005
2006~2007
2008~2009
2010~2011
2012~현재
동법지
채연식
채연식
채연식
이종남
이종남
이종남
이종남
『고창군문화유적분포도』, 원광대학교, 2005.
서법지
김병옥
김병옥
김병옥
채연식
채연식
채연식
채연식
『고창농악을 지켜온 사람들의 삶과 예술세계』, 고창농악보존회, 나무한그루, 2010.
관동
신상호
신상호
오종상
오종상
오종상
오종상
오종상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2003.
『고창군지』, 고창군지편찬위원회, 2009.
『고창 성씨의 입향유래』, 고창문화원, 2007. 『통계연보』, 고창군, 2008. 『모양성의 얼』, 고창군, 2009. 『전북전래지명총람』, 유재영, 민음사, 1993. 『행정구역 일람표』, 고창군 기획관리실, 2008. 『한국지명총람11 전북편』, 한글학회, 1981. 『동아일보』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 http://www.gochang.go.kr 법지리마을잔치 겸한 칠순잔치
236
고창의 마을 제4집…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