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염(魚鹽)이 풍부했던 금빛 들녘, 금평리 이형성
해리면 금평리 동호리
1. 마을의 위치와 지명유래 광승리
금평리
해리면(海里面) 금평리(金坪里)는 고창읍에서 지방도 703호선을 따라 해리면 소재지를 지나 방축리
15번도로를 따라 심원면(心元面) 방향으로 가면 팔형치(八兄峙) 앞 삼거리 분리점 22번도로 아
사반리
래 마을에서부터 시작된다. 마을 동쪽에는 해리면과 심원면에 걸쳐 있는 궁산저수지가 있다. 22번도로를 따라 팔형치사거리 분기점 동호(冬湖)와 심원 방면에서 동호방면 77번도로를 따
왕촌리 라성리
안산리
라 약 300m 가면 금평리 전경이 보인다.
하련리 평지리
송산리 고성리
팔형치(八兄峙) 사거리 분기점에서 왼쪽 산 방향으로 가는 도로는 목동(木洞)을 거쳐 월산(月
山)・원목(元木)・사거리로
가는 옛 길인데, 목동 마을 입구 분기점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77번
도와도 연결된다. 또한 팔형치사거리에서 직진하면 77번도로인데, 이 도로에서 목동 입구로 들어가는 길까지는 최근 조성된 것이다. 77번도로는 1936년 삼양사 간척공사 때 조성된 도로이다. 간척공사 때 만들어진 이 도로 는 처음 목동 마을 앞에서 명고(鳴鼓)와 용호동(龍虎洞)을 지나 광승(光升)과 동호(冬湖) 방면의 분기점까지였다. 1936년 삼양사 간척공사 착공 이후 금평리는 전체가 크게 번창하였다. 명고를 중심으로 각 자연마을의 위치를 보면, 명고의 개모퉁이를 돌아가면 용호동이 보이 고, 명고 마을 정면에서 오른쪽에는 원목이 있고, 원목에서 금평길을 따라 동쪽으로 조금 지 나면 월산이 있으며, 월산을 지나면 목동이 있다. 용호동 사거리는 명고 마을 오른쪽에서 광 승・외경(外景)・가재지 분기점까지의 영역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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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의 마을 제4집…267
이서구(李書九: 1754~1825)가 전라도 관찰사가 된 이후 전라도의 여러 곳을 유람하였는데 이 마을 지나다가 잠시 쉬며 명고 마을 앞 갯벌에서 소금을 굽는 염막을 보면서 “이 넓은 들판 에 황금같이 귀한 소금이 생산되는 곳이니 ‘금평(金坪)’2)이라 하면 좋겠다”고 하자, 여러 사람 들이 금평이란 이름으로 많이 부르게 되었다 한다.3) 이제는 과거 풍부했던 어염(魚鹽)의 자취 는 사라지고 가을 수확철 누런 볏잎으로 변하는 금빛이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마을로 변모하 였다. 용호동은 마을의 지형이 좌청룡우백호형(左靑龍右白虎形), 즉 왼쪽은 푸른 용이고 오른쪽은 흰 호랑이의 형국이라 하여 마을명이 붙여졌고, 목동은 마을 주변에 오리목 나무가 무성하고 많았기에 붙여졌다 한다.4) 월산은 나무와 숲으로 우거진 산이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것이 마 치 월형(月形) 즉 달의 형국과 같다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원목은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금평마을 표지석
월산・원목 마을 표지석
드나드는데 마을에 나들목이 있기에 원목이라 불린 듯하고, ‘사거리’라는 명칭은 명고・광승 ・외경・가재지 분기점이 있기에 붙여졌다.
2. 마을연혁과 인구현황 법정리 금평 마을의 연혁은 행정분리명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조성된 마을 순서에 따라 살 펴보자. 명고마을은 17세기에 흥성장씨(興城張氏)가 터를 잡고 살다가, 18세기에 한양조씨(漢陽趙氏) 가 들어오고 기타의 성씨도 정착하여 살았다. 용호동은 미상의 진주강씨(晉州姜氏) 한 세대가 살다가 명고의 흥성장씨가 이거(移居)하였으며 뒷날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정착하였는데 김해 김씨 자손들이 크게 번성하였다. 특히 자손이 번성한 김해김씨는 용호동 뒷산 서쪽 사거리가 있는 근처로 옮겨 마을을 이루니 그 마을 이름은 ‘사거리’라는 명칭을 따서 사거리 마을이라 용호동마을 표지석
금평리명고마을연혁비
하였다.
금평리는 예부터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고, 앞 바다에는 어염(魚鹽)이 매우 풍부하 였다. 때문에 금평리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농사도 짓고 바닷고기도 잡고 염막(鹽幕)을 만들 어 소금을 굽는 농어촌의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어염이 풍부하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금평리
1) 일 설에는 마을 앞 들이 바다였는데 바다에서 북소리가 울려야 주민의 생활이 해결되었음에 근거하여 ‘명고’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로 이주하여 터를 마련하고 그 이름을 붙였는데, 명명하는 과정에서 자연의 형세를 보며 붙이
2)‘금평(金坪)’은 금평(金平)으로 쓰는 경우가 있으나, 들의 의미가 있는‘평(坪)’자가 맞을 듯하다.
기도 하였다. 마을의 유래를 살펴보자.
3) 일 설에는 삼양사 간척공사로 마을 앞 바다가 농토로 바뀌면서 가을이면 황금빛으로 변하는 들판이라 하여
명고 마을 터는 풍수지리상 면구형(眠狗形) 즉 잠자는 개의 형국이라 하여 삼국시대로부터 유명하였고, 마을 뒷산은 풍수지리상 명고형(鳴鼓形) 즉 ‘북을 울리는 형국’이라 한다. 마을 이 름은 뒷산의 형국을 본따서 ‘명고’라 하였다 한다.1) 마을 고로(古老)들의 말에 의하면, 18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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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평’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4) 일 설에는 앞산 조시산(造矢山)의 정상에 떠있는 달의 풍광을 쫓아가는 형국이라 하여‘월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고창의 마을 제4집…269
자가 남자보다 21명이 더 많다. 현재 거 주하고 있는 주민현황을 보면, 금평은 47 가구에 81명(남자 35, 여자 46), 월산은 13가 구에 25명(남자 9, 여자 16), 목동은 21가구 에 24명(남자 14, 여자 10), 용호동은 27가구
에 49명(남자 24, 여자 25) 등으로 총 179명 금평마을 전경
이고, 연령별 총 주민수를 살펴보면, 10대
월산마을 전경 용호동 전경
이하는 3, 10대는 12명, 20대는 2명, 30대
는 1명, 40대는 16명, 50대는 37명, 60대는 57명, 70대는 38명, 80대는 16명 등이다.8)
3. 마을의 자연환경 금평 마을 뒤쪽의 작은 산은 봉대산(峰臺山)9)의 줄기인데, 용호동 마을을 안으며 장군다리 원목마을 전경
목동 전경
월산마을은 정읍(井邑)의 김해김씨가 미상(未詳)의 시기에 정착하였고5) 그리고 장성(長城)의 밀양박씨(密陽朴氏)가 이주하여 마을이 번성하였으나 정착한 시기는 자료 미확인으로 정확히
쪽으로 쭉 뻗어있다.10) 이 작은 능선의 이름은 마을 이름 따서 명고산 또는 용호동 뒷산이라 고 부른다.11) 명고 마을에서 왼쪽 그리고 용호 마을 정면으로는 간척지 농지가 있다. 간척지 농지에는 폭이 20m나 되는 해리천이 흐른다. 이 해리천은 궁산저수지의 물이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알 수 없다. 목동은 진주강씨(晉州姜氏)가 마을에 세거하다가6) 뒤에 진주정씨(晉州鄭氏)와 김해
명고 마을 정면 동쪽에 궁산(弓山: 활뫼)이 있고, 용호 마을 정면으로부터 멀리 부안(扶安)
김씨가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었고, 원목은 18세기 무렵 파평윤씨(坡平尹氏)가 이주하였으나,
의 높은 변산(邊山)이 보인다. 원목과 사거리 뒤쪽의 산은 봉대산이다. 이 산은 조시산(造矢山:
모두 그 연대를 알 수 없다. 현재는 각 마을에 다양한 성씨가 거주하고 있다.
225m)12)
줄기로, 금평리를 전체적으로 감싸주고 있다. 조시산은 목동과 월산 마을 옆으로 뻗
해리면 금평리는 법정리 명칭으로, 동북쪽으로는 해리천, 동남쪽으로 왕촌리와 방축리, 서
어있는데 풍수학상 계형(鷄形) 즉 닭의 형국이라 한다. 봉대산에는 옛날 전시에 통신수단인
쪽으로는 동호리를 경계로 하고 있다. 과거 금평리의 행정리 기준에 의한 마을을 살펴보면,
봉화대가 있었다 한다. 비가 오지 않으면 이 봉화대에 불을 놓고 단(壇)을 쌓아 기우제를 지
명고・용호・사거리・목동・팔형치(아래쪽 일부 마을)・월산・원목 등으로 이루어졌다. 현재 행정
내기도 하였다.
리 기준에 의한 자연마을은 명고가 금평마을으로, 용호동과 사거리는 용호동으로, 월산과 원 목은 월산으로, 목동과 팔형치 일부는 목동 등으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다. 현재 금평리 각 마을에는 여러 성씨가 거주하고 있다. 해리면사무소 2013년 1월 10일 자료 에 의거한 인구수를 보면, 총 116세대에 221명으로, 남자는 100명이고 여자는 121명이다.7) 여 5) 『 고창의 마을유래』에 의하면, 1567년 무렵에 입거하였다 한다. 6) 『 고창의 마을유래』에 의하면, 1568년 무렵에 입거하였다 한다. 7) 2 012년 12월 1일 기준 각 마을 별 인구통계를 보면, 34통(금평)은 48세대에 95명(남자 41, 여자 54), 35통(월 산)은 17세대에 26명(남자 11, 여자 15), 36통(목동)은 21세대에 38명(남자 20, 여자 18), 37통(용호)은 30세대 에 62명(남자 28, 여자 34)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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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012년 12월 1일 기준 각 마을의 연령별 주민 현황을 보면, 금평은 10대 4명(남), 30대 3명(남 2, 여 1), 40대 3명(여), 50대 16명(남 6, 여 10), 60대 24명(남 9, 여 15), 70대 21명(남 10, 여 11) 80대 10명(남 4, 여 6) 등이고, 월산은 10대 2명(남 1, 여 1), 50대 3명(남 2, 여 1), 60대 14명(남 4, 여 10), 70대 5명(남 1, 여 4), 80대 1명(남) 등이고, 목동은 10대 4명(남 3, 여 1), 20대 1명(여), 40대 6명(남 4, 여 2), 50대 5명(남 3, 여 2), 60대 6명(남 4, 여 2), 80대 2명(여) 등이고, 용호동은 10대 이하 3명(여), 10대 2명(남), 20대 1명(여), 30대 1명(남), 40대 7명(남 4, 여 3), 50대 13명(남 7, 여 6), 60대 7명(남 4, 여 3), 70대 12명(남 6, 여 6), 80대 3명(여) 등이다. 9) 봉대산(峰臺山)은 산봉우리에 봉화를 올린 자리가 있기에 이렇게 불리는데, 다른 한자명으로 봉대산(鳳臺山․ 鳳台山)이라 쓰기도 한다. 10) 장군다리 근처는 능선의 끌자락이었는데 삼양사가 들어오며 77번도로를 만들 때 잘려나갔다. 11) 명고 뒷산 또는 금평 뒷산이라고도 부른다. 12) 해리면 주민들은 조시산(造矢山)을 ‘조짐산’이라고도 부르고 또 한자로는 조시산(鳥矢山)라고도 쓴다.
고창의 마을 제4집…271
원목에서 금평길을 따라 200m 정도 가면 길 위쪽에는 저수지가 있으니 그 이름은 ‘명지저 수지’이다. 그리고 명지저수지에서 다시 사거리 마을 쪽으로 가다 보면 마을 중간 아래 쪽에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은 연못 하나가 있다.
(3) 목동 입향조 목동에 입향한 성씨로는 진주강씨(晉州姜氏)와 진주정씨(晉州鄭氏), 그리고 기타의 성씨가 있 었다 한다. 마을 각 성씨의 입향은 족보 불비(不備)로 상고(詳考)하지 못하였으나, 1568년 무렵 진주강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설기되었다 한다.
4. 마을의 인물과 행의 (4) 월산 입향조 월산에 입향한 성씨로는 밀양박씨(密陽
1) 입향조와 성씨 (1) 명고 입향조
朴氏)와
명고에 입향한 성씨로는 흥성장씨(興城張氏)와 한양조씨(漢陽張氏), 그리고 기타의 성씨가 있
성씨가 있었다.
었다 한다.
김해김씨(金海金氏), 그리고 기타의
월산의 밀양박씨는 ‘밀성박씨(密城朴氏)’
흥성장씨로 명고에 처음 입향한 인물은 장안의(張安義: 1602~1658, 선조35~효종9)이다. 장안의
로 불리는데, 처음 입향한 인물은 박성순
의 자는 중세(重世), 호는 묘정(杳亭)이다. 장안의가 명고에 정착하여 살았으나, 후손들 일부
(朴聖順: 1711~1788, 숙종37~정조12)이다.
가 영광군 월계 마을로 이거하였다. 장안의 증손 장연한(張延漢)의 막내 아들 장남팔(張南八:
순은 함평(咸平)에서 무장현(茂長縣) 월산
후손들이 명고에 오래동안 세거하였다. 장안의는 뒷날 가
으로 우거(寓居)한 이후 후손이 번성하여
1714~1792, 숙종40~정조16, 자는 善根)
선대부(嘉善大夫)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증직되었다. 한양조씨로 명고에 처음 입향한 인물은 조성유(趙聖裕: 1744~1807, 영조20~순조7)이다. 조성유 는 자가 문화(文化)로 현주공(玄洲公) 조찬한(趙纘韓: 1572~1631, 선조5~인조9)의 후예이다. 1790년 무렵 전남 영광군(長城郡) 포말(浦末)에서 어염식초(魚鹽食草)가 넉넉한 금평리 명고에 터를 잡 았다. 그의 후손들은 줄곧 이곳에서 세거하다가 타지역으로도 이주하였다.
박성
월산의 토반(土班)이 되었다. 뒷날 가선대 부(嘉善大夫)와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증직 되었다.
밀성박씨 세천비
김해김씨는 정읍에서 이주하였다 하나 상고할 수 없고, 기타의 성씨도 마찬가지이다.
마을의 다른 성씨의 입향은 족보 불비(不備)로 상고(詳考)하지 못하였다.
(5) 원목 입향조 (2) 용호동 입향조 용호동에 입향한 성씨로는 진주강씨(晉州姜氏)・흥성장씨(興城張氏)・김해김씨(金海金氏) 등 있 었다. 진주강씨와 흥성장씨의 입향조는 자료가 불비(不備)할 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이 떠난
원목에 입향한 성씨로는 파평윤씨(坡平尹氏)와 기타의 성씨들이 있었다. 파평윤씨는 윤필진 (尹弼鎭: 1794~?)이다.
윤필진의 자는 몽열(夢悅)인데, 사복시(司僕寺)에 증직되었다.
기타의 성씨들은 마을을 떠난지 오래되어 상고할 길이 없었다.
지 오래되어 상고할 수 없었다. 김해김씨로 용호동에 처음 입향한 인물은 김근식(金謹植: 1798~1859, 영조22~철종10)이다. 김근
(6) 현재의 성씨
식의 고조 김윤희(金倫熙: 1685~1766, 숙종11~영조42)는 강원도 원주에서 살다가 서울로 이주하
현재 금평리에는 다양한 성씨가 마을에 살고 있으니, 흥성장씨(興城張氏), 한양조씨(漢陽趙氏),
였고, 그후 다시 남하여 무장현 왕촌리(旺村里) 송암(松巖)에 정착하여 살았다. 그의 후손들은
김해김씨(金海金氏), 파평윤씨(坡平尹氏), 밀양박씨(密陽朴氏), 진주강씨(晉州姜氏), 진주정씨(晉州鄭
무장현에서 김해김씨의 한 파조로 삼았다. 김근식은 자가 시량(時亮)인데, 송암에서 금평리 용
氏),
호동으로 이주하여 터를 마련하여 세거하였다. 김근식은 뒷날 통정대부(通政大夫) 돈령부도정
州李氏),
(敦寧府都正)에 증직되었다.
(礪山宋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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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한씨(淸州韓氏), 수원백씨(水原白氏), 능성구씨(綾城具氏), 연주현씨(延州玄氏), 전주이씨(全 함풍이씨(咸豊李氏), 경주이씨(慶州李氏), 신창표씨(新昌表氏), 달성서씨(達成徐氏), 여산송씨 조양임씨(兆陽林氏), 안동권씨(安東權氏) 등이 있다. 고창의 마을 제4집…273
무를 잘 수행하여 해리면 농업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2) 역사적 인물과 행의(行誼)
1960년 중반 가뭄으로 인해, 금평리 일대의 한재가 매우 심
(1) 김영엽(金永燁) 김영엽 자세한 인적사항은 없는데 김영엽의 행의를 말해주는
하였다. 김승곤은 한재를 극복하기 위해 주민들과 협력하여 원
작그마한 비석 하나가 목동 마을 들어가는 입구 건널목에 서
목에서 사거리로 가는 길목 위에 명지저수지를 만들어 물의 원
있다. 비석 전면 큰 글자는 ‘호은김영엽혜휼불망비(湖隱金公永燁
할한 공급으로 주민들의 농사가 잘 이루어지도록 노력하였다.
惠恤不忘碑)’이고
큰 글자 좌우에는 작은 서른 두 글자가 있다.
가산을 돌보면서도 1981년부터 봉선(奉先) 사업을 위해 숙부
이 비석은 계축년 1973년에 세워진 듯하다.
김용태(金湧泰: 1919~ )와 협력하여 묘소를 정리하고 재실 양양
전면 큰 글씨의 호은(湖隱)은 김영엽의 호인듯 하다. ‘혜휼(惠 恤)’이란
재(洋洋齋)를 건축하는 등 가문을 이끄는데 솔선수범의 노력을
말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어루만져 돌본다’는 뜻이다.
다하였다. 특히 그는 해리면 무진년(1928)에 태어난 7명의 벗들
즉 먹을 것이 없어 참으로 어렵게 하는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
과 계(契)를 맺어 많은 활동을 펼쳤는데 그에 관한 비석이 복동
겨 돌보아 주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불망(不忘)’은 잊지 않는
에 세워졌는데 비명은 ‘무진동경안우계기념비(戊辰同庚鴈友契紀念
다는 뜻이다. 큰 글자의 내용은 호은 김영엽의 혜휼을 평생 잊
碑)’이다.
지 않는다는 비석이다. 좌우의 작은 글자는 연미약관(年未弱冠: 나이 아직 약관도 안되었
호은김영엽혜휼불망비
무진동경안우계기념비
(3) 김계섭(金啓燮): 1954~2008
을 적에),
재이성기(材已成器: 재주가 이미 그릇을 이루었네), 문치빙혜(門致馮惠: 집안은 풍혜라는 사람처럼
김계섭의 본관은 김해, 호는 성재(誠齋)이다. 김영승의 둘째 아들로 1954년에 용호동에 태어
이루고),
장설범의(莊設范義: 별장은 범의라는 사람처럼 마련하였네), 일방비진(一坊備賑: 온 동네 구휼해주
났다.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마치고, 서울 경신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고등학교 교육은 검정고
니),
천가균피(千家均被: 모든 집들 균등하게 입었네), 심각구미(心刻口碑: 말로 전하는 것을 마음으로 새기
시로 이수한 다음, 경기대학교에 입학, 1982년 졸업 후,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니),
석면금기(石面金紀: 비석에서 김공의 실마리 대면하도다) 등이다. 이 서른 두 글자가 그의 모든 행
에 입학하여 학문을 탐구하고, ‘도시 및 지역계획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다가, 1984년
의를 말하고 있다.
‘오대산 스키장 개발기본계획’으로 석사학위를 마쳤다. 석사학위를 마친 후에는 한국관광학 회・한국조경학회・한국경영학회 회원 그리고 한국산업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으로 활약하다
(2) 김영승(金榮勝): 1928~2000
가 1985년 12월에 동아대학교 경영대학 전임강사로 부임하였다. 부임 이후에도 한국여가및
김영승의 본관은 김해, 자는 승곤(勝昆), 호는 용호재(龍湖齋)로, 효자 김종환(金鍾煥)의 손자
레크레이션학회・한국관광학회 회원, 그리고 대한관광경영학회 부회장으로 활약하였다. 동아
이다. 세간에서는 자명인 ‘김승곤’으로 많이 불린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어 조부에게 훈도를
대학교 조교수 및 부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면서, 1992년 경기대학교 대학원 관광개발학과 박
받으며 자라면서 한문을 석우(石愚) 이사헌(李士憲: 1865~1948)에 배우다가, 신학문을 접한 이후
사과정에 입학, 관광계획이론을 전공하여 「관광지 개발의 목표계층화에 관한 연구」로 1998
에는 줄곧 신학문을 익혀 정읍농립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1951년부터 경찰직 공무원으
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로 국가에 봉사하다가, 1959년 조부의 상(喪)을 당하자 1960년 경찰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가산(家産)을 돌보면서 친족간에는 화목을 우선으로 여기며 잘 이끌었다.
김계섭은 연구원 및 교수로 활약하면서 1983년부터 1990년까지 문교부 고등학교 교과과 정 심의위원, 1990년부터 1991년까지 문교부 실업게 고교 교과과정 연구위원, 1992년에서
김영승은 제2공화국 윤보선(尹潽善) 정권 시절 초대민의원을 지내다가 1961년 5・16쿠데타
1994년까지 교육부 가사실업게 교과과정 심의위원으로 활동하였고, 또한 부산 해운대구 관
로 그만두었다. 제3공화국 시절인 1963년에 민주공화당 당책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농촌의
광특구추진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활약하면서도 지역사회의 올바른 개발이 되도록 하기 위해
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민주공화당 당책 활동을 그만두고, 1969년 해리농협장에 취임하였
16회의 프로젝트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특히 김계섭은 오랫동안 경남 김해시 도시개발 자
다. 조합장직이 간접선거로 바뀌자, 그는 3차례 당선되어 조합장직을 그만둘 때까지 모든 업
문위원으로 활약하였는데, 그 인연으로 김해시와 고향 고창군이 서로 자매결연이 되도록 하
274
고창의 마을 제4집…275
김용태는 신학문(新學問)을 배우고자 상경하여 명륜전문학교에서 1년 정도 수학하였다. 그
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김계섭은 많은 논문과 저서를 남겼으
런데 그의 부친은 아들의 신학문 공부를 극력 반대하였다. 김용태는 부친의 명을 거역할 수
니, 저서로는 『관광사업』, 『지방화 시대의 도시
없어 뜻을 접고 향리로 돌아와서 풍암 덕림정사로 가서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
관리와 정책』, 『(김교수의) 교육관광 길눈이 5
의 문인에게 『납량사의(納凉私議)』와 『외필(猥筆)』 등을 배우고, 뒤에 석우(石愚) 이사헌(李士憲:
학년』, 『(김교수의) 교육관광 길눈이 6-1』 등
1865~1948)에
이 있고, 대표적 논문으로는 2005년 국제학술
루 읽었고, 특히 의학서를 읽으면서 가학으로 전하는 의술 가운데 문진(問診處方)을 가내(家內)
지에 기고한 「The Emprirical Study of Gunn’
에서 행하였다.
s Tourism System」 외 많은 논문이 있다. 특
김계섭의 표창장과 훈장1. 호은김영엽혜휼불망비
시문(詩文) 등을 배웠다. 김용태는 만년에 도가서(道家書)와 의학서(醫學書)까지 두
구학문을 익힌 그는 가산을 돌보기 위해 부득이 부안 변산을 중심으로 벌목 사업을 하기
히 두 권의 『교육관광 길눈이』는 초등학생들
도 하였으나 크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60대 이후에는 유산으로 소유한 논밭에서 벼와
의 관광 체험과 열린학습을 위해 저술되었는데 이는 어린이들의 올바른 관광의 정신을 심어
잎담배 농사를 하면서 가산을 돌보았다. 특히 노년에 이르러 많은 시문을 지으며 국토를 순
준 것이라 하겠다.
례하거나 중국을 유람하며 마음을 달랬다. 중국 공림(孔林)에서 지은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김계섭은 학계에서 왕성하게 활약할 즈음에 뜻하지 않은 병으로 2008년 55세의 젊은 나이
같다.
로 생을 마감하였다. 사후, 그에 대한 학술적 공로 그리고 국민 교육발전에 크게 이바지함을 인정하여 2009년 국무총리 표창창과 훈장을 받았다.
參孔林夫子陵墓
공림의 부자 묘지를 참배하며
夫子沒而夫子生 부자 살아 계실 적이나 돌아가신 뒤나 普仁遺愛被含生 넓은 인과 끼친 사랑으로 살 뜻을 머금었으니
(4) 김용태(金湧泰): 1919~현재
使宗正脉遵成法 정맥을 으뜸으로 여겨 부자의 성법을 쫒아간다면
김용태의 본관은 김해, 자는 덕겸(德謙), 호는
率土蒸民再造生 온 세계의 억조 만민들이 다시 살아나는 은덕 입으리라
동강(東岡)으로, 효자 김종환의 다섯째 아들이 다. 일찍이 서당에서 동몽서(童蒙書)를 배운 뒤, 『통감절요(通鑑節要)』을 익혔다. 서당의 교육은
아들 김영춘(金榮春)은 부친의 산수(傘壽: 80세)를 기념하기 위해 『동강시문집(東岡詩文選)』에서
그 날 배운 것을 다음 날 모조리 암송한다. 김
주요 글을 선별・번역하여 책을 출간하였는데, 원광대학교 박금규 교수는 그 책의 발문에서
용태는 『통감절요』 30여 장을 배우고 그 다음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날 모조리 암송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마을 사람들과 인근 사람들은 그의 송재(誦才)
김용태 시문집
를 매우 칭송하였다 한다. 10대 중반에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재독까지 하였다 한다. 그 이후 역사서(歷史書)를 두
문향인 고창의 한 해곡에서 호올로 의로운 촛불을 밝히고 능히 옛것을 지키며 선인(先人)의 도(道)를 이어 일촌(一寸)의 마음으로 천고(千古)의 득실(得失)을 짐작하는 이 있으니 호(號) 동강(東岡) 김해(金海) 김용태(金 湧泰) 옹이다. 구경(九經)을 섭렵하고 노장학(老莊學)까지 두루 융회(融會)하시어 서심담박(栖心淡泊)으로 이
루 읽었고, 20대 초반 최송렬(崔松烈)과 성가한 이후에도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김용태는
성위생(怡性衛生)하며 알인욕존천리(遏人欲存天理)로 고금(古今)을 회통(會通)하셨다. (……) 시권(詩卷)을 펼
능문(能文)에 뛰어났으니 글씨가 졸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전라남도 영광군 홍농읍(弘農邑)
치자 환연히 눈이 밝아옴을 깨달았다. 이윽고 먼 하늘 한 점에 두 눈을 머무른 채 천고의 역사를 훑어내렸다.
풍암(豊巖) 덕림정사(德林精舍)에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의 제자 이해산(李海山)이
거기엔 천인성명(天人性命)의 오묘가 있었고 일용이륜(日用彛倫)의 의범(懿範)과 식음실처(食飮室處)의 적의이
후학을 가르친다는 소문을 듣고, 그 선생에게 나아가 지수(止修) 이학용(李學庸) 그리고 이계
연(適意利緣)도 언급했으며 인정물태(人情物態)의 변쇠(變衰)와 춘추산천(春秋山川)의 대사(代謝)도 음영하였
봉(李啓奉)과 함께 다양한 서체(書體)를 배웠다.
다. 때로는 설월화조(雪月花鳥)의 자연에 귀의하였고 우인시주(友人詩酒)에 사해고금(四海古今)을 논했으며
276
고창의 마을 제4집…277
혹은 중원산천(中原山川)을 유람하고 공묘(孔廟)에 봉심(奉心)하고 또는 관동팔경(關東八景) 호서풍경(湖西風
(2) 효자 김종환(金鍾煥): 1889(고종 26)~1959
景) 등 국토를 순례하며 감정에 겨워 왕연(汪然)히 체읍(涕泣)도 훔치는 이 흥비(興比)의 거작(巨作)이 다못 억
김종환의 본관은 김해, 자는 정국(正國),
지(抑之) 양지(揚之) 전지(顚之) 도지(倒之)의 술(術)이 모두 곡창섬실(曲暢纖悉)하였다. 구(句)마다 구의 법을
호는 수오재(守吾齋)로, 충간공(忠簡公) 김
다하고 편(篇)마다 편의 법이 곡진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격절탄상(擊節嘆賞)케 하니 옹의 재고학수(才
보(金普)의 후예이다. 일찍이 글을 배우면
高學邃)가 아니면 어찌 이런 의경(意境)에 이를 수 있으리오. 두씨(杜氏)의 지음(知音)인가, 공씨(孔氏)의 선학
서 효(孝)와 우애(友愛)의 실천을 중요한
(善學)인가, 그 순순(諄諄)한 선유(善誘)가 용의용공(用意用工)의 정치(精緻) 아님이 없었다.
덕목으로 여기며 자손을 훈도하였다. 부 모의 병환에 두 아우 종규(鍾圭)・종진(鍾
(「시가 사람을 놀라게 하지 못했네-동강 한시집」, 208쪽)
振)과
김용태는 향리에서 친족들의 어린 자제들을 훈몽하였으나 그리 많지 않다. 제자로는 아들 이자 교사이며 시인인 김영춘(金榮春), 그리고 철학박사 이형성(李炯性)이 있다. 저서로는 『동강시문선(東岡詩文選)』, 『동강속고(東岡續稿)』, 『시가 사람을 놀라게 하지 못했네동강한시집』(김영춘 옮김) 등이 있고, 편서로는 『수오재실기(守吾齋實記)』가 있다.
함께 단지(斷指)하여 피를 입에 흘려
넣고 하늘에 기원하여 부모의 연수(延壽) 를 수일이나 늘렸다. 부모의 상(喪)을 당 하였을 때 슬픔을 이기지 못해 새벽 닭
수오재비석(왼쪽)과 수오재실기
이 울면, 곡묘(哭墓)하기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6년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만년에는 한의 학(韓醫學)에 많은 관심과 탐구로 일가를 이루어, 인근의 병든 환자를 많이 치료해주니 세인들
3) 효행 및 효열
은 그가 거처한 집을 가리켜 용호동약방이라 불렀다. 사후(死後) 문학(文學)과 효우돈목(孝友敦
(1) 효자 박만국(朴萬國) : 1862(철종 13)∼?
睦)으로
박만국은 자는 호는 조은(造隱)이다. 스승의 가르침이 없는데
며, 마을 입구에는 효비(孝碑)가 있다. 그의 다섯째 아들 용태(湧泰)는 부친에 관한 실기를 모
도 돈후호학(敦厚好學)하여 사친(事親)의 절차, 지체(志軆)의 봉
고을 선비들의 추중을 받았고 또한 성균관으로부터 효자포양문(孝子襃揚文)을 받았으
아 『수오재실기(守吾齋實記)』를 편찬하였다.
양, 온청(溫淸)의 보살핌을 실천하면서도 항상 어버이를 애경하 (3) 효자 김관태(金官泰): 1914~1987
였다.
어머니가 병을 앓자 의약(醫藥)의 받듦과 측유(廁瘉)의 제거를
김관태의 본관은 김해, 자는 덕례(德禮),
가인들에게 맡기지 않고 몸소 간호하였는데 거의 의대(衣帶)를
호는 신재(愼齋)로, 김종환의 셋째 아들이
풀지 않았다. 밤이면 눈을 붙이지 않고 북두(北斗) 별에 빌면서
다. 천품이 온량화수(溫良和粹)하면서도 어
대신 병들기를 원하였고, 어머니 병이 위급하자 손가락을 깨물
버이 섬김에 효를 다하였다. 특히 어버이
어 입에 필을 떨어뜨리는 모든 행실이 옛 효자와 같이 하였다.
의 지체(志體)를 받드는데 성(誠)과 경(敬)
상을 당해서는 가례(家禮)에 의거하면서도 성경(誠敬)을 다하였
을 다하였다. 특히 그는 어버이가 위중한
다. 시묘하기는 어려웠으나 새벽마다 성곡(省哭)하여 저녁 때까
조은거사박공효모비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속광(屬纊: 목숨이
지 슬픔을 다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도 빠짐없이 하는 그
끊어짐)에
의 효행을 본 마을 주민들은 ‘박효자(朴孝子)’라 칭송하였다. 또한 봉선(奉先)에 돈독하여 삭망
적다리 살을 도려내어 불에 구워 약이라
(朔望)이면
반드시 묘(墓)에 참배하고 선기(先忌)를 당하면 목욕제계(沐浴齊戒)하고 제사를 받들
고 하고 드시게 하여 여러 날을 연명시켰다. 어버이의 거상(居喪) 기간에는 매일 닭이 울면 곡
기를 선조가 살아 계시는 것과 같이 정성을 다하였다. 목동 들어가는 입구 건너편에는 ‘조은
묘(哭墓)하기를 6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고을 유림들의 포찬(褒贊)으로 성균관으로부터 효자
거사박공효모비(造隱居士朴公孝慕碑)’가 세워졌다.
278
이르자, 할고(割股) 즉 자신의 넓 김관태 효자포양문 답통
포양문(孝子襃揚文)을 받았다. 사적이 『송사윤강록(松沙倫綱錄)』에 수록되었다.
고창의 마을 제4집…279
烈婦兆陽林氏行蹟碑)’가
(4) 효열부 수원백씨(水原白氏: 1872~1950)
세워졌다.
효열부 수원백씨는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의 후손, 백세진 (白世鎭)의 딸로, 밀성(密城)
박만규(朴萬奎: 1865~1890)의 처이다.
(6) 열부 제주고씨(濟州高氏): 1907~1993
유인(孺人)의 나이 19세 때 시집왔는데, 시집온지 10년도 못
열부 제주고씨는 참봉(參奉) 고순석(高舜
되어 남편이 병들었다. 남편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자 어찌
錫)의 딸로,
할 줄을 몰라 밤마다 북두(北斗) 별에 빌고 해가 뜨면 약과 미
연태(金秊泰: 1909~1945)의 부인이다. 제주
음으로 간호하였으나 애석하게도 남편을 여의는 성붕(城崩)의
고씨는 남편이 일찍 세상을 뜨자, 시부모
애통을 당하였다. 남편이 죽자 살고 싶지 않다고 곡성하다가
를 친부모처럼 받들고 5남매를 의로운 마
혼절하여 죽음에 이르렀다. 백씨가 깨어나자, 부형(夫兄) 박만
음으로 행동이 방정하도록[義方] 가르치면
국(朴萬國: 1862~?)은 죽는 것이 열(烈)이기는 하나 불효가 된다
서도 선조의 제사(祭祀)를 잘 받들어 가문
고 깨우쳐 주니, 장사를 성신껏 유감이 없게 치루었다.
을 일으켰다. 고을 유림들의 칭송이 있어
유인은 아들의 실학(失學)을 염려하여 친가(親家)로 가서 서
유인수원백씨효열비
숙(書塾)에 보내 글을 깨치도록 하니 아들은 독서에 문리(文理)
효자 김종환(金鍾煥)의 아들 김
성균관으로부터 효열부포양문(孝烈婦襃揚 文)을
효열부포양문 답통
받았다. 사적이 『송사윤강록(松沙倫綱錄)』에 수록되었다.
가 났다. 유인은 아들과 함께 본가로 와서 가산(家産)을 잘 이끌고, 아들로 하여금 주경야독 (晝耕夜讀)케 하면서 가도(家道)를
이루도록 하였고, 임종(臨終)에 이르자 봉선(奉先)에 정성을 다
할 것을 유언하기도 하였다.
(7) 효열부 광산김씨(光山金氏): 1926~현재 효열부 광산김씨는 문숙공(文肅公) 김주승(金周昇)의 후예, 김
유인의 효열은 삼강록(三綱錄)과 읍지(邑誌)에 보인다. 목동 들어가는 입구 건너편에 ‘유인수 원백씨효열비(孺人水原白氏孝烈碑)’가 세워졌다.
명현(金明鉉)의 딸로, 박균상(朴均祥: 1925~1951)의 처이다. 김씨 는 1926년에 태어나 10대 후반에 결혼하여 시부모를 잘 모시 고 살았다. 1950년 6・25가 일어나자, 남편은 군(軍)에 입대하
(5) 효열부 조양임씨(兆陽林氏)
여 싸우다가 1951년에 전사하였다. 남편을 잃은 후, 홀로 시
효열부 조양임씨는 임경석(林慶錫)의 딸로, 진주(晉州) 정백균
부모와 두 아들을 키우고 또 올갈데 없는 여자 아이를 수양딸
(鄭百均)의 처이다.
유인(孺人)의 나이 13세 때 정씨 집안으로 시
로 삼아 출가까지 시켰다. 마을 주민들은 김씨가 집안 살림을
집왔다. 시집온지 얼마 안되어 남편이 병들었으나 남편을 극
잘 꾸리고 평생을 미망인으로 살며 고절(苦節)을 지켰다고 한
진히 보살피면서도 시부모를 친부모처럼 모셨다. 남편의 병에
다. 현재 살아있는데, 마을 앞 건너편 보호수 팽나무 옆에 ‘효
온갖 정성을 다하다가 위태롭자 열지(裂指)로 연명시켰으나 애
열부광산김씨기적비(孝烈婦光山金氏紀蹟碑)’가 세워졌다.
석하게도 남편을 여의는 성붕지통(城崩之痛)을 당하였다.
효열부광산김씨기적비
남편의 죽음에 음독(飮毒)하여 남편을 따라 죽으려 하다가
5. 문화유산과 종교시설
가인(家人)의 구원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유인의 나이 23 세에 청상과부가 되었으나 시부모를 지극한 효도로 잘 모시
1) 치경재(致敬齋)
고, 본인은 평생 수절하면서 가문을 일으켰다.
치경재는 금평마을 한양조씨의 재실(齋室)이다. 후손들은 이 재실에서 열한 분의 선조 신위
목동 마을 들어가는 입구 근처에 ‘효열부조양임씨행적비(孝
280
효열부조양임씨행적비
(神位)를
모시고 제사지낸다. 현주공파(玄洲公派)에 속한 열한 분은 시조로부터 17세손 성유(聖 고창의 마을 제4집…281
萬年幽宅, 而繼而葬, 祖考松雲處士府君, 合兆祔焉. 先君曾奉外先祀 後移安外祖考妣於同原, 恪修歲事, 其爲永 世久遠之慮, 深且切矣. 將營丙舍, 而未遑. 嗚呼! 先君圽而前於此, 先伯隱圃公早卒. 主鬯孫勝坤, 營始斯齋倂直舍
於戊午春, 凉軒燠室, 不逾年, 而告訖. 於是面勢改觀, 林巒增光, 瞻彼鳳臺. 先考幽宅, 旣濡於雨露之下, 前後眺望,
先仲三塋, 永安於指呼之間, 其後之南, 可指處, 義齋公月溪公在斯, 其前之東, 可呼地, 愼齋公在斯, 行 原野, 而松
梓猶敬, 上邱壟, 而墟墓興哀, 地何忍荒? 水何忍廢? 履玆霜露盥獻, 趨蹌焄蒿悽愴, 至於誠之不可揜, 而庶格思之 精靈, 洋洋乎在其上, 在左右矣. 念玆在玆, 謹揭洋洋齋扁於楣, 顔拱而祝曰: 惟願後承永言孝思, 善繼善述焉; 旣而
思之, 孝思云孝思云, 籩豆云乎! 繼述云繼述云, 臺榭云乎哉! 使無誠敬之實, 以承先世懿德, 雖廣廈崇齋邱壟成行, 치경재솟을삼문
치경재
籩豆列陳, 淸酌三獻, 安能致如在之享而成繼之述之之事垂裕後昆乎? 所以南澗之蘋藻, 于以用之, 公侯之事, 貴
其明潔而誠敬也. 苟本乎誠敬, 以之事祖, 則祖無不格; 以之修己, 則爲孝子仁孫矣. 惟其由是, 永世繼述, 千孫和同, 孝不在玆乎? 詩云:“毋念爾祖, 聿修厥德.”聿修如之何? 亶在乎誠敬. 通政公玄孫湧泰謹記.
【번역문】 치경재 현판
치경재기문
묘가 있음에 재실이 있는 것은 오랜 옛날부터이다. 춘추로 분필(芬苾: 분향)을 올리니 재결(齋潔)의 곳이 없 을 수 없고, 시월(時月)로 성소(省掃)의 행의가 있으니 거숙(居宿)의 곳이 없을 수 없다. 이는 선조의 척강(陟降)
裕),
18세손 산필(山弼), 19세손 현익(玄益)・군평(君平), 20세손 상흥(尙興)・세엽(世曄), 21세손 정
문(廷文)・정원(廷源), 22세손 종성(鍾成)・종옥(鍾玉), 23세손 화원(華元) 등이다.
하는 바이고 후손이 우모(寓慕)하는 곳이다. 장사(長沙) 고현(古縣) 오리방(五里坊)의 옛터에 조시산(鳥矢山, 造 矢山)의 여세가 감아도는 곤원(坤原)은 우리 고조고(高祖考) 증(贈) 통정공(通政公)과 함께 배위(配位)된 만년
치경재에 걸려 있는 『치경재기(致敬齋記)』는 18세손 산필(山弼)로부터 6대손인 정원(正元)이 지
의 유택이고, 계속해서 조고(祖考) 송운처사(松雲處士) 부군(府君)을 합조(合兆)하여 부장(祔葬)하였다. 선군
었다. 이 기문에 의하면, 재실은 1913년에 건축되었으니 올해로 100년이 된다. 위치는 해리면
(先君)이 일찍이 외선사(外先祀)를 받들다가 뒤에 외조고(外祖考)를 같은 자리에 옮겨 안장하고 삼가 세사(歲
금평길 257-28번지이다.
事)를 모셨으니 영세구원(永世久遠)의 배려(配慮)가 깊고도 또 간절했다. 장차 재사(齋舍: 재실)를 조성하려다 가 겨를 하지 못하였다. 오호라! 선군이 돌아가시고 이에 앞서 선백씨(先伯氏: 장형) 은포공(隱圃公)이 일찍 돌
2) 양양재(洋洋齋)
아가시자, 주창손(主鬯孫: 祀孫) 승곤(勝昆)이 재사(齋舍)와 수직사(守直舍)를 무오년(戊午年: 1978) 봄에 세워
양양재는 용호동 김해김씨의 재실이다. 후손들은 이 재실에서 열두 분의 선조 신위(神位)를
양헌(涼軒)과 우실(燠室)이 해를 넘기지 아니하고 일을 마쳤다. 이에 <재실>의 형세가 달리 보이고 숲우거진 산
모시고 춘추로 제사지낸다. 안경공파(安敬公派)에 속한 열두 분은 시조로부터 65세손 윤희(倫
들이 빛을 더하는도다. 저 봉대산(鳳臺山)을 바라봄에 선고(先考)의 유택이 이미 우로(雨露)로 젖어 있고, 앞뒤
熙), 66세손 상조(相祚), 67세손 봉현(奉鉉), 68세손 건양(健亮)・제양(濟亮), 69세손 근식(謹植),
로 바람봄에 선중씨(先仲氏) 세 무덤이 지척 거리에서 영원히 안장되었으며, 그 뒤 남쪽을 가리키는 곳에 의재
70세손 현윤(顯潤)・현용(顯龍)・현삼(顯三), 71세손 기배(琦培), 72세손 종환(鍾煥) 등이다. 65세
공(義齋公)・월계공(月溪公)이 이 곳에 있고, 그 앞 동쪽을 가리키는 곳에 신재공(愼齋公)이 이 곳에 있다. 원야
손에서 68세손까지의 4대는 가을에 제사지내고, 69세손에서 72세손까지는 봄에 제사지낸다.
(原野)를 지나자 송재(松梓: 재실)가 오히려 경건하고, 산등을 오르자 무덤이 슬픔을 자아내니, 땅과 물이 어찌
현손 김용태(金湧泰)가 지은 『양양재기(洋洋齋記)』이 있는데 이 기문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차마 황폐케 할 것인가? 이 이슬과 서리를 밝으며 가서 관수헌작(盥手獻爵)하고 허리 굽혀 종종걸음으로 나아
가면 향기 서려 구슬퍼져 정성을 감추지 못하게 되니, 아마도 정령(精靈)이 이르러 양양(洋洋)히 위에 계신 듯하 【원문】
고 좌우(左右)에 계시듯는 하는지라. 생각이 이에 미치면 삼가 양양재(洋洋齋) 편액을 문미(門楣)에 걸고 손모
有墓有齋, 古也尙也. 春秋而有芬苾之薦焉, 不可無齊潔之所; 時月而有省掃之行焉, 不可無居宿之處, 寔祖先之
아 축원하노라. 원컨대, 후손은 길이 효를 말하고 생각하여 계술(繼述: 선조의 뜻과 일을 계승하고 전술함)을
所陟降, 乃雲仍之爲寓慕地也. 長沙古縣五里坊之墟, 鳥矢山餘勢逶迤, 轉而爲坤之原, 卽我高祖考贈通政公, 同配
282
잘해야 할 것이요, 이미 생각하였으니 효를 생각한다 효를 생각한다 함은 변두(籩豆)를 말하는 것이겠으며, 계 고창의 마을 제4집…283
술한다 계술한다 함은 대사(臺榭)를 말하는 것이겠
친부모처럼 모셨다. 특히 양부모의 뜻을 잘 받들면서도 애경(愛敬)으로 봉양하였다. 김종규는
는가? 성(誠)과 경(敬)의 진실이 없어 선대의 의덕(懿
특별히 배운 것이 없었지만 늙도록 독실하게 생활하였고, 고생스러운 삶이 있을 적에도 항상
德)을 잇는다면 비록 광하(廣厦)・숭재(崇齋)・구롱
은혜를 중시하고 잊지도 않았다.
(邱壟)이 나란히 있고 변두(籩豆)를 진설하여 청작
후손들은 두 선조의 충효와 애경의 정신을 기리고자 춘원영당을 마련하여, 제사를 올리고
(淸酌)으로 삼헌(三獻)을 한다 해도 어찌 <신이> 있
있다. 위치는 해리면 동호로 241-14번지이다.
는듯 제향을 이루고 <선조의 뜻을> 계승하고 <일을 > 전술하는 사업을 이루어 후손들에게 유복(裕福)
양양재
을 전할 것인가? 남쪽 시냇가의 마름나물, 이것으로
4) 보호수 팽나무 월산 마을 앞의 논 건너편에 우람한
공후(公侯)의 제사에 쓰이는 소이는 그 명결(明潔)하면서 성경(誠敬)함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니라. 진실로 성
팽나무 한 그루가 외로이 서 있다. 이
(誠)과 경(敬)에 근본하여 조상을 섬기면 조상이 이르지 않음이 없고 몸을 닦으면 효자(孝子)나 인손(仁孫)이
팽나무는 월산마을 박씨(朴氏)의 선조
될 것이다. 오직 이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선조의 뜻을> 계승하고 <일을> 전술하여 천손(千孫)이 화동(和同)하
들이 심었는데 수령이 250년 정도 된
면, 효가 여기에 있다 하지 않겠는가? 『시경(詩經)』에 이르기를,“너의 조상을 잊지 말고 그 덕을 닦으라”라
다고 한다. 수령이 말해주듯 이 팽나
했으니, 닦는 데는 어떻게 할 것인가? 진실로 성(誠)과 경(敬)에 있는 것이다. 통정공(通政公) 현손(玄孫) 용태(湧
무는 마을을 수호하듯 예사롭지 않은
泰)는 삼가 기록한다.
분위기를 주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무더운 여름 농사철
이 기문에 의하면, 재실은 1978년에 건축되었다. 올해로 36년이 된다. 위치는 해리면 금평 길 223번지이다.
벼농사를 지으며 나무 그늘 밑에서
보호수
잠시 휴식을 취하며 찬거리도 함께 하며 담소를 나누었을 것이다. 팽나무의 정확한 위치는 금평리 산 68-6번지에 있다. 수령은 2011년을 기준으로 250년이
3) 춘원영당(春園影堂)
된다 한다. 팽나무의 크기는 직경 150~100㎝, 수고 20m 이상이며, 특히 흉고둘레 3.8m 이상
춘원영당은 김해김씨 충간공(忠簡公) 김보(金普)의 후예인 김목배(金穆培: 1859~1935)와 김종규
m에 이른다. 보호수 고유번호 9-14-58는 2011년 12월 13일자에 지정되었다.
(金鍾圭: 1893~1973)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곳이다. 김목배의 자는 순목(順穆), 호는 송봉
(松峯)이고, 김종규의 자는
평국(平國), 호는 춘원(春園)이다.
6. 마을의 풍속과 숨은 이야기
김목배는 후사가 없자, 형 김기배(金琦培: 1857~1931, 자는 應道, 호는 松雲)는 둘째 아들 김종규 를 양자로 보냈다. 양자 김종규는 본래의 가정에서 훈도받은 충효(忠孝)의 정신으로 양부모를
1) 당산제 당산제는 마을의 안녕과 풍요 등을 위해 마을의 조상신이나 수호신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대개 음력 정월대보름과 정초에 지내나 10월 보름에 치르기도 한다. 금평리의 당산제는 명고(금평)마을에서만 정월 초삼일날 당산제를 모신다. 당산제를 모시고 난 이후, 정월 14일날에는 풍물패가 마을 가가호호를 돌며 풍물을 치며 액운을 막아주는 의 식을 행하고 있다. 목동이나 월산은 언제부터인가 당산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 금평 주민들은 당산제를 준비할 때, 제주로 뽑힌 사람과 풍물패는 섣달부터 목욕재계한 후
춘원영당과 춘원영당 현판
284
육류를 먹지 않고 상가(喪家)나 산가(産家) 출입 등을 금하며 매사 행동거지를 조심하도록 하 고창의 마을 제4집…285
였고, 제단 주변과 마을 여러 곳에서 풍물
성(至誠)이면 귀신(鬼神)도 감동한다 함은 진실로 이치가 있거니와 지효(至孝)로 미물(微物)을
을 치는 곳을 깨끗하게 하고 부정을 막기
감동시켜 이에 이르게 했다 한다.
위해 황토를 펴고 새끼 금(禁)줄을 쳤으며, 마을 입구에 외부인 출입을 금하는 표시를
3) 용호동 약방 이야기
하였다. 특히 풍물을 치는 사람은 섣달그
용호동 약방 이야기는 효자로 이름난 김
믐부터 당산제를 지낼 때까지 명고산에 있
종환(金鍾煥: 1889~1959)에 관한 내용이다. 일
는 할머니당산에서 낮부터 밤까지 줄곧 풍
찍이 가학(家學)으로 이어지는 한학(漢學)을
물굿을 쳤다 한다.
익혔고, 그리고 한학에 기초하여 한의학(韓
할머니당산에서 당산제를 지내고 돌며
명고산 할머니 당산나무
醫學)에
많은 관심과 탐구가 있었다 한다.
풍물을 치는 곳은 여섯 장소라 하나 현재
이러한 관심과 탐구는 그가 일제강점기와
는 네 곳이다. 여섯 장소라 함은 첫째 독수리 모양의 깃대를 세운 곳, 둘째 마을 가운데 있는
6・25사변을 겪으며 많은 사람들이 병들어
당산나무, 셋째 우물터, 넷째 명고 마을 들어가는 산자락에 있는 당산나무, 다섯째 마을 입구
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것을 목도하면
의 우물터, 여섯째 마을회관 근처에 있는 깃대 등이다. 초삼일 할머니당산에 제를 지낼 적에
서 시작한 듯하다.
김관태 소장 『동의보감』
뫼밥 일곱 그릇을 묻고, 풍물치는 곳과 당산나무에도 뫼밥을 묻었다 한다. 현재 풍물을 치는
김종환은 집 아래채에 조그마한 약방을 마련하고 먼저 일가친척 가운데 병든 사람을 한약
곳은 첫째, 둘째, 다섯째, 여섯째이다. 이 곳에서 풍물을 치며 마을의 안녕과 주민들에게 풍요
으로 처방하기 시작하였는데, 약을 복용한 사람들이 적지 않은 효험을 보았다. 이러한 효험
롭고 행복한 삶을 가져다 주도록 기원하였다.
이야기가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지자 병든 사람들이 조금씩 찾아왔으나, 가내(家內)에서 하는
독수리 모양의 깃대를 세운 곳에 풍물을 치는 것은 마을의 풍수적 측면 때문이라 한다. 동
일이라 하며 물리쳤다. 병든 사람들의 간곡한 부탁과 위급한 환자를 보고 그냥 보아넘길 수
쪽에 있는 죽곡(竹谷) 마을 뒷산은 호랑이 형국인 호형(虎形)이고, 금평 마을은 잠자는 개의 형
없는 상황이 되자, 부득이 약을 처방해 주었다. 약을 복용한 사람들이 효험을 보고 성의(誠意)
국인 면구형(眠狗形)이다. 동쪽 호랑이가 잠자는 개를 호시탐탐하고 있기에, 긴 장대 위에 독
를 표하자 만류하였다 한다. 이러한 소문이 오리동(五里洞)과 심원(心元), 그리고 고을에 알려
수리 모양의 솟대를 세워 호랑이의 침범을 방어하기 위해 세웠는데 이곳에서 풍물굿을 하여
지면서 차츰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었고, 찾아드는 사람들마다 적지 않은 효험을 보면서 고
새해 안녕을 빌었다.
을 사람들은 그가 사는 집을 가리켜 ‘용호동 약방’이라 일컬었다.
특히 당산제의 부정을 막기 위해, 당산제를 준비하는 동안 산달이 점점 다가오는 여인들은
그의 의료정신은 셋째 관태(官泰)와 다섯째 용태(湧泰) 두 아들에게 이어졌으나, 아들들은 대
처가에 가서 아이를 낳았다 한다. 만약 아이를 낳았을 경우 당산제는 정월 초삼일에 지내지
외적으로 하지 않고 가내(家內)에서만 약처방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증손자 인섭(仁燮)은 한의
못하고, 2월 초하루에 지냈다. 또한 동네에서 싸움으로 인한 피를 볼 경우에도 2월 초하루에
학박사가 되어 대외적으로 많은 사람을 치료해주고 있으니, ‘용호동 약방’의 의료정신이 면면
지냈다.
히 이어지는 듯하다.
2) 목동 박만국(朴萬國)의 효행 이야기
4) 명지저수지 축조 이야기
목동의 박만국은 혹한(酷寒)과 폭우(暴雨)에도 성묘행(省墓行)을 그만두지 않았다. 기르는 개
명지저수지는 본래 이름이 없는 작은 연못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이 연못이 명지저수지로
가 앞에서 인도하고 뒤에서 따라와 영역(塋域)을 배회방황했는데, 깊은 숲속에 호랑이 한 마
이름이 바뀐 것은 다음의 일화에서 연유한다. 연못 주위의 논들은 자연강수로 벼농사를 지으
리가 있어 절하고 꿇어앉는 곳을 이슬 털고 눈 쓸어 매양 효자가 전곡(奠哭)할 때면 범이 호위
며 간간히 연못물을 이용하였다. 그러나 비가 오지 않아 한재(旱災)가 들면 연못 주위의 많은
하고 개가 지켜 좌우에 쭈꾸리고 앉아 묘 앞 무릎 닿은 곳에 세 구덩이가 도장 찍혔으니 지
논들이 천수답(天水沓)으로 변해 전혀 벼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농민들은 시름에 젖지 않을
286
고창의 마을 제4집…287
7. 마을의 시설과 휴식 공간 1) 우물터 우물은 생명의 근원이며 정화와 풍요의 상징이기에, 우물터는 예로부터 신성시되었다. 하지 만 농촌에서 농가소득을 올리기 위한 경지정리(耕地整理), 그리고 주민들이 지하수를 식수로 사용하면서, 우물터는 자연 땅속에 묻이게 되었다. 금평리 각 마을의 우물터 역시 모두 땅속 에 묻혔다. 각 마을의 우물터 위치를 살펴보자. 금평의 우물터는 들어가는 입구에 있었고, 월산과 목동 명지저수지
해리천
의 우물터는 마을 앞 논에 있었으며, 원목의 우물터는 마을로 들어가는 도로 아래 쪽에 있었 고, 용호동의 우물터는 마을 가운데 길 모퉁이 아래에 있었다. 우물 가운데 용호동의 우물은 다산(多産)의 상징이 있다 하여, 인근 마을 사람들까지 애용 하였다 한다.
2) 회관과 경로당 고창군은 마을종합 사회복지관으로 사용하고 주민들 대화의 장으로 활용토록 하기 위해 각 마을에 마을회관과 경로당을 갖추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금평양수장
양수장취보
금평리에도 각 마을에 마을회관과 경로당 시설이 있는데 건물은 하나이다. 금평은 마을 입
수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용호동 출신 김승곤은 주민들과 함께 마을공동의 부지를 마련하기 위 해 협의하였으나 성사가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직접 부지를 마련하여 희사하였으나, 작은 연못을 크게 조성하는 데 드는 노무비가 문제였다. 그는 노무비를 충당할 수 없자, 국 가에서 주민들에게 한재대책으로 지원하는 밀가루를 노무비로 대신하여 연못을 크게 조성하 였다. 이렇게 조성되자 작은 연못은 벼농사를 짓기에 알맞은 저수지로 변모하였고, 행정상 저
금평회관과 경로당
월산회관과 경로당
목동회관관과 경로당
경로당에 모인 어르신들
수지의 이름을 명지저수지라 하였다. 이 저수지가 잘 조성되자, 저수지 아래 논들은 벼농사 짓기에 알맞은 옥토로 변하였고, 가 을철이 되면 그 논들에서 풍성하게 수확한 수확을 얻게 되었다. 궁산저수지에서 내려오는 해리천의 물은 장군다리 서쪽에 있는 금평양수장에 모인다. 금평 양수장에 모인 물은 현재 명지저수지로 펌프하여 보내고 있어 명지저수지는 항상 물이 마르 지 않고 있다. 현재 저수지 물은 농사철에 주위 여러 논이나 밭에 활용되어 풍작을 가져다 주 고 있다. 288
고창의 마을 제4집…289
구에서 약간 들어가면 왼쪽에 자리하였고, 월산과 원목은 월산 마을로 조금 들어가면 오른 쪽 있으며, 목동도 마을 입구에서 약간 들어가면 오른쪽에 있다. 용호동은 마을 길을 따라 안쪽으로 가면 길이 꺽어지는 위치에 있다. 나이 많은 어른신들은 경로당이나 회관에서 자주
들의 건강과 행복한 삶의 활력소로 거듭나도록 하고 있다. 보건진료소장 이인순은 제1대로 부임받아 마을에 거주하면서 지역주민들의 건강향상에 많 은 보탬을 주고 있다.
모여 담소를 나누며 하루하루를 즐겁고 재미있게 보내고 있다.
5) 천일염 산지 종합처리장 금평리 용호동 자락 갯벌논에 있는 천일염
3) 모정(茅亭) 짚이나 새(마른 풀) 따위로 지붕을 덮은 모정은 마을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는 공유물이었
산지 종합처리장은 2011년 12월 착공하고
다. 금평리의 모정은 과거와 다른 새 양식을 하고 있다. ‘새 양식’이란 지붕의 기와장, 그리고
2012년 11월 완공되었다. 종합처리장의 건축
기둥과 기둥 사이에 유리창을 달아 바람을 막아주는 것이다.
면적은 1,524㎡ 규모의 지상 1층 건물로, 저
금평리의 모정은 세 개가 있으니, 금평은 마을회관 앞쪽에 있고, 월산은 마을 앞 산자락에
장동・가공동・사무동을 갖춰 천일염을 세척
있으며, 목동은 마을 위쪽의 길가에 있다. 각 마을의 모정은 여름 철 시원한 바람을 쇠는 휴
・탈수・건조 후 분쇄・가공・포장할 수 있는
식공간으로, 가을철 수확한 농작물을 다듬는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시설 등을 구비하고 있다.
천일염 산지 종합처리장
고창군 해리면 금평리의 천일염은 ‘고창천일염’으로 약칭되는데, 이 천일염은 세계 5대 갯벌 가운데 하나이며 ‘람사르 습지’로 등록된 청정한 갯벌에서 생산되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천일염과 비교했을 때, 미네랄 함량이 높고 품질이 우수하다. 종합처리장에서는 4명의 직원 그리고 지원 인력이 심원면 고전리 염전마을에서 생산한 소 금을 세척・탈수・건조, 그리고 분쇄・가공하여 우수한 품질의 명품 천일염을 만들고 있다. 앞 으로 이 천일염을 세계적으로 명품화하면서 지역관광과 연계시켜 나간다면 금평리와 인근 금평모정
월산모정
각동모정
주민들의 소득도 증대할 것으로 보인다.
8. 농경생활과 소득
4) 금평보건진료소 보건진료소는 농어촌 보건의료의 취약지역 주민 들의 질병예방과 건강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
1) 농경생활
차보건의료를 담당하고 있다.
금평리 금평・용호동・목동・월산마을의 주민들은 마을 주변 야산 등을 개간하여 밭을 만 들어 여러 곡물과 채소 등을 재배하고, 넓은 평야의 농지에서는 벼농사를 경작하고 있다. 특
금평보건진료소는 해리면 금평리 1502-1번지에 2008년 신축해서 2009년 1월 2일에 개소하였다.
금평보건지소
그 관할 구역은 해리면 서남부 지역 금평리・동호리・광승리에 속한 13개 자연마을이다. 현재 금평보건진료소는 내소자 건강상담, 진료, 투약관리, 혈압・혈당・콜레스테롤 검사, 예 방접종 등의 1차적 진료서비스를 제공하면서도 13개 마을 노약자의 건강증진을 위해 매주 월・수・금 방문관리, 그리고 건강교육 월 1회, 건강검진 연 2회 실시하고 있다. 진료소의 다 양한 건강관리는 동호진료소의 폐소로 인한 불편과 애로를 씻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민
290
무명연못과 농지
인삼밭
고창의 마을 제4집…291
히 밭을 임대한 농지는 외지인들이 인삼재배를 통해 수익을 올리고 있다.
2) 소득작물의 변천과 축산 금평리의 소득작물은 주로 쌀, 보리, 고구마, 감자, 콩, 배추, 무 등이었으나, 현재는 고추, 복분자, 인삼 등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월산과 원목 사이의 한 농가와 용호동 뒤쪽 한 농가 는 낙농업으로 한우를 길러 소득을 올리고 있다. 각동의 오성양만, 용호동의 해송양만
장어를 기른다’는 의미의 양만(養鰻)이다. 금평리 장어양식장, 즉 ‘양만’은 처음 하우스시설을 마련하여 장어를 양식하다가, 현재 목동의 오성양만(대표 김정일)과 용호동의 해송양만(대표 김 축산농가
3) 태인농장의 농작물재배
정훈)은
시설양식장을 마련하여 사계절 내내 양식하면서 소득을 올리고 있다.
9. 마을 조직
태인농장은 겨울철 피망과 풋고추, 그리고 블루벨리를 비롯한 여러 농작물을 재배하고 있 는데 지금은 겨울철 피망과 풋고추 농사에 집중하고 있다. 농장주 정찬웅은 본래 전라남도
1) 역대 이장
나주에서 70년 대 하우스 고사리, 80년대 바나나・오이・방울토마토 등을 재배하다가 영산강
『해리면 사령부』에 의거하면, 법정리 마을의 이장은 1리장, 2리장, 3리장, 또는 리참사 등으
범람으로 인해 나주에서 농사를 그만두고, 1997년 해리면 금평리 용호동 사거리 276번지 위
로 임명되다가, 1980년대에 들어서 각 마을의 이장으로 불려졌다. 금평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쪽으로 이주하였다. 농장주는 이곳에 하우스서 초기에는 수박・고추・석류 등을 주로 재배하
행정단위로 임명되기 이전의 금평리 리장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였다. 처음에는 수익을 올리다가 수박과 고추에 대한 재배가 많아지자, 현재는 겨울철 피망
금평1리장
기간
금평2리장
기간
금평3리장
조천형
?~1963년 1월 31일
김영돈
1965년 4월 5일~?
김연수
이재연
1965년 4월 5일~?
김기곤
소원옥
1965년 5월 1일~?
과 풋고추를 주로 재배하여 그 농작물을 서울 가락시장에 공급하여 수익을 올리고 있다.
김성문 김성문 김성문
태안농장
4) 장어양식 고창은 예로부터 풍천장어가 유명하다. 풍천장어란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서 서식하 는 장어를 말한다. 과거 고창 선운사로 들어가는 앞 강줄기에는 많은 장어들이 서식하였으나
1963년 1월 31일 ~1963년 9월 1일 1963년 9월 1일~? 1964년 9월 1일 ~1965년 4월 5일
1963년 2월 28일 ~1965년 4월 5일
1966년 11월 1일
이재연
~1966년 12월 15일
정태남
?~1964년 3월 1일
문정식
1964년 3월 1일~1965년 4월 5일
금평리장
기간
김영돈
1965년 4월 5일~?
이재연
1965년 4월 5일~?
소원옥
1965년 5월 1일~?
김성문
1966년 12월 16일~1968년 1월 31일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그리하여 고창군에는 여러 곳에서 장어를 양식하고 있다. 장어양식은
장재권
1968년 1월 1일~1971년 10월 1일
논에 시설양식장을 마련하고 장어를 양식하는 것을 말한다. 장어양식을 한자어로는 보면 ‘뱀
현대영
?~1971년 12월 31일
292
?~1963년 2월 28일
고창의 마을 제4집…293
1972년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행정분리명에 의한 각 마을의 리장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도움 주신 분 명고(금평)리장
기간
김성문
1972년 1월 1일~?
김기수
?~1988년 3월 14일
김광중 조용운 구본철 장한권 조인성 조휴철 김영종
비고
박균섭 재임
박균화
1988년 3월 21일
박균섭
~1989년 4월 18일 1989년 4월 19일
박균화
~1992년 2월 1일 1992년 2월 10일
박래옥
~1994년 2월 7일 1994년 2월 8일 ~1999년 3월 3일 1999년 3월 3일 ~2005년 12월 31일 2006년 1월 4일~2011년 12월 31일(두 차례 연임)
유맹순 2회 연임
박배구
기간
비고
김영동(金榮東, 남, 77세): 2012년 11월 21일 오후 4시, 장소: 용호동
1972년 1월 1일 ~1974년 4월 1일 1974년 4월 1일 ~1977년 12월 1일 1977년 12월 1일 ~1978년 2월 1일 1978년 2월 1일 ~1979년 1월 1일 1979년 1월 1일 ~2005년 6월 3일 2005년 6월 9일 ~2011년 12월 31일
김광섭(金侊燮, 남, 61세): 2012년 11월 20일 오전 10시, 장소: 전주 조권행(趙權行, 남, 77세): 2012년 11월 22일 오후 3시, 장소: 금평
재임
장한권(張漢權, 남. 74세): 2012년 11월 22일 오후 5시, 장소: 금평 박균섭(朴均燮, 남, 72세): 2012년 11월 25일 오후 4시, 장소: 월산 윤판남(尹判南, 남, 67세): 2012년 11월 26일 오후 5시, 장소: 원목
재임 5회 연임 3회 연임
참고 문헌 『茂長邑誌』(1958년), 『湖南三綱錄』, 『湖南節義錄』 『松沙儒林淵源錄』, 무장향교, 1967년
2012년 1월 3일~현재
『高敞郡古邑誌影印本』, 고창문화원, 1991년. 2회 연임
『모양성의 얼』, 고창군, 2009년 재판.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2003년.
2012년 1월 3일~현재
목동리장
기간
강성읍
1972년 1월 1일~1972년 10월 1일
정현옥
1972년 10월 1일~1974년 3월 31일
신병준
1974년 4월 1일~1975년 3월 31일
임종인
1975년 4월 1일~1975년 7월 10일
정현옥
1975년 7월 10일~1981년 1월 22일
박균봉
1981년 1월 22일~1983년 1월 1일
김경중
월산리장
비고
재임
재임
용호리장
기간
비고
김기곤
1972년 1월 1일~1990년 4월 24일 4회 연임
정모진
1990년 5월 1일~1997년 2월 4일 2회 연임
김창호
1974년 4월 1일~2003년 12월 31일
재임
조운기
2004년 1월 6일~현재
4회 연임
『고창문화-고창 성씨의 입향 유래』, 고창문화원, 2007년. 『한국지명총람』(11-12, 한글학회 지음) 전북편(상・하), 한글학회, 1981년. 『고창군지』, 고창군, 2008년. 『茂長鄕校誌』, 무장향교, 1978년 『茂長鄕校誌續輯』, 무장향교, 1982년 『高敞三鄕誌』, 호남문화사, 1991년. 『茂長鄕校誌』, 호남문화사, 2004년.
1983년 1월 1일~2001년 3월 9일 3회 연임
정동진
2001년 3월 3일~2005년 12월 31일
재임
김준환
2006년 1월 4일~2007년 12월 31일 2회 연임
김주환
2008년 1월 2일~2009년 12월 31일
문제정
2010년 1월 2일~현재
유맹순 박배구
2005년 6월 9일 ~2011년 12월 31일
3회 연임
2012년 1월 3일~현재
『金海金氏安敬公派松庵公後孫家乘譜全』, 삼성인쇄사, 1999년. 『守吾齋實記』, 호남문화사, 1993년. 『해리면 사령부』, 해리면사무소.
재임
2) 남녀지도자 및 부녀회 금평리의 새마을 지도자는 금평의 권영환, 월산의 박민구, 목동의 정동진, 용호동의 강창구 등 이 있고, 부녀회장은 금평의 차순리, 월산의 김명순, 목동의 김금순, 용호의 백이숙 등이 있다. 294
고창의 마을 제4집…2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