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덕현의 역사가 흐르는 흥덕리 조용호
흥덕면 흥덕리 용반리 신덕리
1. 흥덕리 개관
석우리 후포리
신송리
흥덕면의 경제·문화·상업의 중심지인 흥덕리는 면사무소가 있는 문화마을과 인접하여 있 다. 동쪽은 동사리, 서쪽은 교운리와 오호리, 남쪽으로는 사천리, 북쪽으로는 치룡리와 접하
사포리
여 있다. 또한 옛 흥덕현의 역사와 문화가 면면히 이어오는 지역이기도 하다.
치룡리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50여 소국의 하나인 모로비리국에 속했던 흥덕리는, 백제시대에 와
교운리
서는 상칠현(上漆縣)으로 오태동에 현의 치소가 있었다.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상질현(尙質
오호리 흥덕리 석교리 사천리
동사리 제하리 송암리
懸)으로
개칭하면서 흥덕리로 치소를 옮겼다. 고려시대에는 장덕현(章德縣)으로 바뀌어 감무가
다스렸다. 1308년, 고려 26대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자 왕의 이름인 ‘장(璋)’과 장덕현의 ‘장 (章)’이
동음이 되어, 왕의 이름을 피하여 창덕현(昌德縣)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389년, 고려의
제33대 창왕(昌王)이 왕위에 오르자 다시 왕의 이름을 피하여 흥덕현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 다. 조선시대에도 흥덕현으로 유지되어 오다가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거 흥덕현, 고창현, 무장현이 군으로 승격되면서 고창과 무장이 전라북도 전주부에 소속되었고,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에 의거 흥덕군과 무장군이 전라남도에 편입되었다. 이후 1897년 9월 12 일 다시 전라북도 땅이 되었다. 흥덕현은 현내, 일동, 이동, 일남, 이남, 일서, 이서, 북면 등 8 면을 관할하였다. 1906년 고부의 부안면이 흥덕에 편입되고 일부를 병합해 부안군으로 개칭하였다. 일제강점 기 때인 1914년 3월 1일 부군통합령에 따라 흥덕군과 무장군이 고창군에 병합되면서 현내면
296
고창의 마을 제4집…297
부마을에 있는 들샘골은 흥덕리를 형성하는 큰 지형이다.
과 북면을 폐합하여 12개 법정리를 두는 흥 덕면이 되었다. 이때 면소재지는 동사리에 두었었다. 그 뒤 1935년 3월 1일 고창군 행
(1) 배풍산
정구역 개편에 따라 오산면이 고창과 고수
배풍산은 선인등주형(仙人登舟形, 선인이 배에 오르는 형국)으로 757년 상칠현을 상질현으로 하
면으로, 석곡면이 아산과 무장면으로, 벽사
고 치소를 배풍산 주변으로 옮긴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변산지맥의 배풍산(109.2m)은 흥덕
면이 신림·부안면으로 폐합 및 구역변경으
의 역사와 문화를 함께하는 호국의 영산이다. 정유재란 때에는 야수(野叟) 채홍국(蔡弘國)을
로 고창군은 17개 면에서 현재와 같은 14
비롯한 의병들이 왜적과 싸워 승리한 배풍현전투의 격전지였고, 민족상잔의 한국전쟁 때에
개 면으로 개편되었다. 이때 벽사면의 사천
는 방어진지였다. 현재는 안보교육장을 비롯하여 지역주민의 근린생활시설로 자리 잡아가
리, 석교리가 편입되어 흥덕면은 14개 법정
고 있다.
리가 되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 1973
주민의 숙원사업이었던 배풍산 근린공원 조성사업은 1996년부터 1999년까지, 4년간에 걸
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로 신림면 제
쳐 이루어졌다. 보조금 2억 4천만원과 지역주민이 뜻을 모은 1천 5백만원을 포함하여 총 2억
하리가 편입되고, 1987년 1월 1일 대통령령
6천만원 예산으로 진입로와 등산로를 만들고 가로등을 설치하는 등 기반시설을 하였다. 단
제12007호로 신림면 송암리가 흥덕면에 편
풍나무, 벗나무, 동백, 철쭉, 쥐똥나무 등을 심고, 자연학습장, 팔각정 등 위락시설을 갖추어
입되면서 흥덕면은 지금과 같은 16개 법정
쾌적한 공간을 만들어냈다. 녹차가 자생하며 남쪽 능선에 흥덕사, 옛 흥덕현 터 주변에는 흥
리에 41개 행정분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덕중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흥덕면 흥덕리는, 영산기맥의 한 자락 방
흥덕현 지도
장산 소갈재에서 분기한 변산지맥이 만든
(2) 산과 골
배풍산을 배산으로 터를 잡았다. 흥덕리에는, 흥덕초등학교, 흥덕중학교, 고창북고등학교, 흥
배풍산 : 방장산 수산내맥으로 흥덕 뒤에 있는 산.
덕파출소, 흥덕농협, 흥덕우체국 등 대부분의 관공소가 있다. 흥덕리의 분리는 흥동, 흥남, 죽
작은배풍산 : 흥덕리에 걸쳐 있는 흥덕 배산의 서남쪽 낮은 봉우리.
일, 죽이, 서일, 서이, 서삼마을이 있고 자연부락으로는 흥동의 정동, 흥남의 동부리, 죽일의
들샘골 : 흥덕리 동부마을에 있는 골짜기.
솔아물, 서일의 솔청, 서이의 대산모퉁이(죽현), 서삼의 목화정이(목화정), 서부리가 있다.
옥거재 : 서일에서 배풍산과 작은배풍산 사잇길을 넘어 가는 재 .
흥덕면사무소 청사는 흥덕리 일대에서 세 차례나 옮겼다. 1973년 흥덕리 63번지에 건축하여 사용하여 왔으나 사회적 여건이 달라짐에 따라 1998년 조성한 흥덕문화마을에, 2001년 7월 9
(3) 호남팔대지 흥덕
일 동사리 437-57번지(문화2길 27)에 청사를 준공하고 준공기념비와 노송원을 조성하였다.
<정통풍수 전을선생과 함께>라는 개인 블로그에는 ‘도산비기의 호남팔대지’로 고창의 흥덕 이 소개되어 있다. 풍수기행을 다녀온 뒤 쓴 글로서 여기 옮겨본다.
2. 자연환경과 지명 도선국사 옥룡자가 지은 『유산록(遊山錄)』이 책으로도 출판되고 인터넷에도 필사본들이 많이 유포되고
1) 자연환경
있다……(중략) 풍수는 어디까지나 미용(未用)으로 남아 있는 명당자리를 찾아야만 개안(開眼)이 될 수 있다는
배풍산의 산줄기는 영산기맥이 입암산을 지나 방장산을 가기 전 북쪽으로 나뉜 변산지맥
점에서 이번에는『유산록』에 소개된 명당을 직접 답사한 것을 소개하려 한다.
이 뿌리다. 영산기맥의 방장산 소갈재에서 분기한 변산지맥은 흥덕리를 이루는 배풍산을 만 들고, 흥덕리 배산 서남쪽 낮은 봉우리에 작은배풍산이 자리한다. 호국의 영산 배풍산과 동 298
『유산록』 고창 흥덕편을 보면 68대가 두 번 가는 호남의 대지(大地)가 흥덕에 숨어 있다고 고창의 마을 제4집…299
한다. 『유산록』에 따르면 “흥덕으로 가니 호암(壺岩)이 여기로다. 반등산(半嶝山) 일지맥(一枝脈) 이 절절(節節)이 기복하여 십리맥(十里脈)이 호위(護衛)하여 혈락 평지(平地)하였으니 굴중(窟中) 에 있는 혈(穴)을 어느 명안(明眼)이 알아 볼꼬”라고 하였다. 반등산은 현재 방장산을 말하며 방장산의 한 산자락이 혹은 솟았다가 혹은 내려앉으며 십
지자면 옥녀면경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옥녀가 거울을 대하고 있는 형국이다. 옥녀면경형은 배풍산과 면소재지를 지나 그 아래로 뻗은 작은 야산이 밭으로 개조된 다음 비교적 뒤가 두둑한 밭의 끝머리에 맺혔는데 이미 이(李)씨 성을 가진 사람이 묘를 쓴 상태 다. 이 자리에서 보면 묘자리 뒤로 솟은 두개의 봉우리가 보인다.
리를 오다가 평지에 혈이 맺혔다는 것이다. 또 “갑묘십절(甲卯十節) 간십절(艮十節)에 감계(坎癸)
건좌손향의 남동향에 손파(巽破)다. 자리가 법에 맞게 잘 됐다. 하지만 너무 아래에다 썼다
로 성봉(星峯) 놓고 쌍귀추성(雙鬼樞星) 특립(特立)하여 재결태극(再結太極) 했구나. 선운(禪雲) 백
는 느낌이 든다. 이 자리가 68대가 두 번 간다는 호남팔대지다. 이곳은 가히 고창의 명산들이
운(白雲) 양산간(兩山間)에 호남대지(湖南大地) 숨었으니 좌우선인(左右仙人) 춤을 추고 옥호(玉壺)
좌우 앞뒤를 감싸주고 있어 자연경관적으로도 좋을 뿐 아니라 명산들이 옹호하고 있는 한
가 뛰는구나. 그릇 가서 재혈(裁穴)하면 대대(代代) 역신(逆臣) 나리로다”라고 했다.
가운데다. 그 위 선인등주형(선인이 배에 오르는 형국)은 팔대지 왼쪽 뒤에 있다. 이 자리 역시 묘
‘갑묘십절 간십절’이라는 말은 갑묘 방향으로 열 번 기복했고 간방으로 열 번 기복했다는
가 있다. 원래는 야산이었는데 밭으로 사용되다 보니 마을 사람이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말이다. 그리고 ‘감계로 성봉을 놓았다’는 말은 감방으로 맥이 흘러와 최종적으로 봉우리를
다. 이 자리는 자좌오향의 정남향인데 물은 손파다. 분명히 선인등주형 명당이 맞지만 물 흐
만들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핵심은 성봉을 찾고 그 맥이 머문 자리를 보는 것이다. ‘쌍귀추
르는 법과 맞지 않는다. 비석에는 계좌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 확인해보니 자좌를 놓았다.
성 특립했다’는 것은 두개의 봉우리가 묘 자리 뒤에서 응하고 있다는 것이며, ‘선운 백운 양산
좀 더 세밀히 살펴 고쳐야 한다. 하지만 호남팔대지나 선인등주나 발복이 오래가지 않을 것
간에 호남대지 숨었다’는 것은 선운산과 백운산이 좌우에서 묘 자리를 옹호한다는 뜻이다.
으로 보인다.
‘옥호가 뛴다’는 것은 명당 앞산을 일컬음이고 ‘그릇 가서 재혈하면 대대 역신이 난다’는 것
유산록에는 68대 간다고 했으나 주위에 도로가 많이 나고 맥이 내려온 자리에 면소재지가
은 물과 방향을 잘 맞추지 못하면 해가 막심하고 정확한 혈 자리를 짚어내기가 어렵다는 말
입주해 집터에 기운을 너무 뺏긴다. 따라서 방장산에서 길게 온 용맥의 기운은 받을 수 없겠
이다. 『유산록』은 이어 “혈성(穴星)이 원후(圓厚)하여 천재체(天載體)로 생겼으니 사대왕비(四代王
고 좌우에서 호응하는 큰 산들의 운은 매우 약할 것이다. 따라서 약 5~6대 정도 밖에는 가지
칠대장상(七代將相) 부족할 것 없겠구나. 산진수회(山盡水回)하였으니 명현재사(名賢才士) 간
않는다. 야산에 혈이 생겼으니 누군들 쓰지 않았겠는가. 따라서 지금은 명당은 많이 남아 있
妃)
출(間出)하고 시대연조(時代年兆) 헤아리니 육십팔대(六十八代) 두 번 가리”라고 했다. ‘혈성이 원
기는 하지만 매우 보기 어려운 자리만 남아 있다.1)
후하다’는 것은 묘 자리로 흘러온 맥이 두텁다는 것이고 나머지는 발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를 설명한 것이다. 옥룡자는 또 “용장혈졸(龍長穴拙)하여 말없이 묻힌 혈(穴)을 적선수덕(積善修德) 아니하고 예 사(例事)로 얻을소냐. 호남의 팔대혈(八大穴)에 기중(其中) 보기 어려워라”라고 강조했다. 이 말
2) 의병활동과 배풍산 (1) 임진왜란과 흥덕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의 격문을 보고 채홍국(蔡
은 용은 길게 왔으나 혈은 분간할 수 없이 애매하게 맺혔다는 것이고 나지막한 곳에 묘 자리
弘國),
고덕붕 등이 고경명의 진영이 있는 금산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고경명이 이미 순절하
가 생겨 호남 팔대지 중에 가장 보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그 위의 선인등주(仙人登舟) 무흠(無
고 부대가 패하자 흩어진 병사를 모아 고향에 돌아와 채홍국의 세 아들과 종족 33명을 규합
欠)
장구(長久)할 것이오”라고 했으니 흥덕면에 호남팔대지 1개와 선인등주형(선인이 배에 오른
하고 동지 고덕붕, 조익령, 김영년 등 92명의 의사와 360여 병사로 흥덕 남당에서 의병창의의
다)
등 큰 묘 자리가 두 개가 있다는 의미다. 이 말만 듣고는 능숙한 풍수사라도 자리가 어디
혈맹을 맺었다. 채홍국은 의병장, 고덕붕은 맹주장, 조익령, 김영년, 조익수, 채명달, 채경달,
인지 쉽게 알기 어렵다. 강조하지만 옥룡자 유산록은 개안(開眼)이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필요
채영달, 한계상이 참모관이 되어서 해안을 사수했다. 또한 군량 400석을 모아 300석은 의주
가 없다. 하지만 개안이 된 사람은 어디인지 금방 알아차린다. 위에서 성봉이라고 하는 것은
행조(義州行朝)로, 100석은 곽재우 진에 보내기도 했다. 적이 순천에 침략하자 급히 출군하여
흥덕면 소재지에 평지에 솟아오른 배풍산이다. 갑묘십절 간십절이라는 것은 배풍산을 만들어 오는 맥이 열십자로 교차한 것에서 비롯된 말이다. 방장산의 한 맥이 흘러와 끊겼다가 다시 기복해 배풍산을 만들고 배풍산과 명당자리가 방장산을 바라보는 회룡고조혈이다. 굳이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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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정통풍수 전을 김화중 선생과 함께 - 도산비기의 호남팔대지 고창 흥덕을 다녀와서> http://blog.daum. net/differ8899/8289950
고창의 마을 제4집…301
추격하였다. 선조가 그 사실을 듣고 가상히 여겨 채홍국에게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제수하고
이’로 불리다가 1960년대에 ‘죽현’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는 죽일과 죽이마을로 분리되어
그 후 가선동추(嘉善同樞)로 승진하였다.
있다. 주요시설로는, 죽일에 흥덕우체국, 흥덕파출소, 각화사, 흥덕경로당, 죽이에는 흥덕농 협, 흥덕초등학교, 흥덕제일교회, 광명교회가 있다.
2) 정유재란과 배풍산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작성하여 전국에 돌리고 채홍국은 의병장, 고덕붕은
(4) 서일(西一), 서이(西二), 서삼(西三)
맹주장, 조익령, 김영년, 조익수, 한계상은 참모가 되어 500여 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흥덕 배
1800년대에 담양국씨(潭陽鞠氏)가 터를 잡아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서부로 불리다
풍산 흥덕읍성에서 왜적을 맞아 이틀간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왜병 일곱 명을 참살하고
가 인구가 늘어나 1960년대 서일과 서이로 분리되었다. 흥성 동헌은 조선시대 고을수령이 정
부안군 상서면 상량치까지 격퇴하였으나 상량치에 많은 왜적이 대기 잠복하고 있었다. 40여
무를 보던 관청으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7호로 등록되었으며 흥덕읍성 서문지가 있었던
일간의 전투 끝에 수백의 적을 사살하고 의병 119명이 순국·전사하였다. 그 때의 일기와 동
지역이다. 서삼은 조선조 순조 때 밀양박씨가 설기한 마을이다. 목화나무가 잘 자라 정자나
맹록이 김영년의 집안에 간직되어 있는데 모두 참모관 조공의 기록이다. 후인들이 그곳을 일
무 같이 크다 하여 ‘목화정’으로 부르다가 흥덕리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부’라고 부르다가
러 ‘호벌치’라고 한다. 고종 9년 채홍국 의병장에게 병조판서를 증직하고 고덕붕 맹주장에게
1950년경부터 분리되어 서삼이라 하였다.
는 고종 30년 1893년 나라에서 승정원 좌승지를 증직하였다.
주요시설은 서일에는 원불교 흥덕교당, 할머니 경로당, 서이에는 흥덕시장, 열녀 진정주의 처 임씨정려각, 효자 진간 정려각, 서삼에는 고창북고등학교, 보건지소, 예비군면대, 복지회
3) 명칭과 유래
관, 버스터미널, 서삼회관(경로당)이 있다.
흥덕리의 분리는 흥동, 흥남, 죽일, 죽이, 서일, 서이, 서삼마을이 있고 자연부락으로는 흥동 의 정동, 흥남의 동부리, 죽일의 솔아물, 서일의 솔청, 서이의 대산모퉁이(죽현) 서삼의 목화정 이(목화정), 서부리가 있다.
(1) 흥동(興東) 조선후기 밀양박씨가 설기한 마을로 백제 때 이후 흥덕현의 배풍산에 고을의 성이 있어 동 쪽 성문을 동문이라 하였다. 조선조 후기에 동부로 부르다가 1945년경부터 흥덕리의 동쪽마
홍동회관
서이회관
을이라 하여 흥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주요시설로는 흥덕중학교, 흥덕노인정, 흥동회관(경로 당)이 있다.
3. 인문환경
(2) 흥남(興南)
1) 유물과 유적
흥덕현의 배풍산에 고을의 성이 있어 성의 남쪽 마을 동부에서 흥동과 흥남으로 분리되어
흥덕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관아 건물인 흥성 동헌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집강소를 운영하
흥남이라 부른다. 구 면사무소는 <흥덕 청소년문화의 집>으로 쓰고 있고, 마을회관(경로당)
였던 곳이다. 그리고 배풍산에는 흥덕읍성 터, 선운사 흥덕간 국도변에는 죽현 유적이 있다.
이 있다.
(1) 흥덕현 읍성 (3) 죽일, 죽이[죽현, 竹峴] 1550년대 여양진씨 진간(陳侃)이 들어와 살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대나무가 많아 ‘대삽모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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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이란 성과 성의 둘레를 의미하여 적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흙이나 돌로 높이 쌓아 올 린 큰 담으로 거주 주체에 따라 도성과 읍성으로 구분된다. 지형에 따라서는 평지성, 평산성, 고창의 마을 제4집…303
산성으로 구분된다. 흥덕읍성은 거주 주체에 따라 분류하면 읍성이고, 지형에 따라 분류하면
면에 의하면 의정부에서 전라도 각 고을의 성이 규격에 맞지 않게 쌓여져 있다고 아뢰었다.
배풍산을 의지하여 쌓은 산성이다.
이때 흥덕현 읍성은 그 주위가 1천 7백 47척이고, 높이가 6척 8촌이며, 여장의 높이는 1척 8
고창군 흥덕면 산 22-2번지 일대에 위치한 흥덕읍성은 조선 전기에 축조된 성으로 추정된
촌에 적대가 없고, 문 2개소에도 옹성이 없으며, 궁가가 3백 30호이고, 해자는 성터가 높고
다. 1450년(문종 즉위년)에 전라도 지역의 읍성 정비 차원에서 실태를 조사한 결과 개축 대상으
험하여 파기 힘들다 보고되어 있다. 또한 성종 85권 1477년 10월 29일, 영인본 9책 523면에
로 분류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흥덕현의 읍성은 석성으로, 규모
는 흥덕의 읍성은 북면을 뒤로 물려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5백 81척이고 높이가 7척 7촌이
는 295보”라 하며 1477년(성종8)완공하였다 한다.
라고 쓰여 있다.
배풍산 7부 능선을 따라 토루(土壘)가 둘러져 있는데, 읍성의 평면 형태는 말각(抹角) 장방형 이며, 성의 둘레는 약 950m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표기된 규모를 포백척(46.66㎝)으로 환산 하면 826m이며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영조척(30.8㎝)으로 환산하면 974m이다.
『호남읍지』에는 배풍현에 석축으로 축성한 읍성이 있는데 주위가 3천 1척 높이가 9척이다. 축성년대는 알 수 없다 하였다. 또 『동국여지승람』에는, ‘읍성석축 주삼천일척 내유삼천(邑城石築 周三千一尺 內有三泉)’,『세종
그런데 『조선보물고적자료』에 의하면 규모는 1,440m인데, 외벽의 기저부를 기준으로 둘레
실록지리지』에는 ‘읍성 주위 이백구십오보(邑城 周圍 二百九十五步)’, 『대동지지』에는 ‘읍성 배풍
를 측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 상단부의 토루는 전체적으로 제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지
치상 주삼척임진왜란후이치성외(邑城 陪風峙上 周三尺壬辰倭亂後移治城外)’, 『여지도서』에는 ‘고읍
만, 남동쪽의 토루는 배수지(당시 정수장)가 생기면서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토루의 폭은 약
성 재현북 배풍치상 석축 주삼천일척(古邑城 在縣北 培風峙上 石築 周三千一尺)’이란 기록이 있다.
7m 정도이다. 토루의 연결 상태에서 끊어진 부분과 곡부를 이루는 지형을 고려하여 문지를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의하면 토성지로, 타원상 이중으로 둘러싸여 있고 외벽 둘레는
추정할 수 있는데, 현재 교운리 서문 밖 마을과 이어지는 서문지와 북문지가 관찰된다. 차량
약 800간(1,440m), 높이 10척, 조사 당시 토축지가 남아 있는데 둘레 1,440m, 높이 4m라고
이 진입할수 있는 도로와 두개의 등산로가 있다.
한다.
산의 정상부는 평탄한 대지가 동서 방향으로 길이 100m, 폭 30m 정도 길게 조성되어 있 다. 정상부 서쪽에 배풍정이 세워져 있고, 동쪽 평탄지에는 잔디, 좌우 측면에는 벚나무를 비
우리 선현들이 배풍산을 노래한 전해오는 몇 편의 시를 소개한다.
롯한 수화목이 식재되어 운치를 더해준다. 성 안에는 우물이 3개소 있었다고 하나 1개소는 근린공원을 조성하면서 없어지고 현재는 1개소만 있다. 읍성 내부 곳곳에서 기와. 자기조각
— 정창손(鄭昌孫)의 시
들이 눈에 띈다. 배수지, 안보교육장, 체력시설, 휴게시설이 토루의 일부분을 훼손한 채 조성
바다 곁한 큰 고을[웅번, 雄藩]은 푸른 산봉우리 대해 있고,
되어 있고, 정상부의 평탄 지역에도 배풍정과 기념비 등 근린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구름 찌를 듯한 누대는 우뚝하게 바람을 임하네.
흥덕읍성의 명확한 규명을 위하여 흥덕현 역사와 문헌학술조사와 병행하여 읍성 지표조사,
외로운 배는 사양(斜陽) 밖에 보였다 안보였다 하고,
문화학술 조사를 통해 읍성의 일부를 부분적으로 복원하여 역사문화유산으로 보전이 필요
먼 산구멍은 구름 속에 아물아물한다.
하다. 1450년대에 개축 대상으로 분류되어 1477년(성종8)에 완성되었고, 이후 임진왜란 후 치
한밤에 나팔소리 달 그림자 흔들고,
소가 성 밖으로 옮겨져, 조선 전기 읍성의 구조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한 난간의 꽃 빛은 봄경치 곱게 하네.
엣 문헌에 나타난 흥덕읍성에 대해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바다는 큰 물결 몰아가서 고요한데,
『신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흥덕읍성은 석성으로 주위가 3천 1척이고 높이가 9척이며 성
물 넓고 하늘 길어 보는 눈이 통한다.
안에는 3개소의 샘이 있었으나 축성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한다. 1872년 흥덕현에서 제 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채색지도」에는 배풍현 정상에 성황당이 있고 남쪽 하단부에 관아 건 물인 내아, 동헌과 동문과 서문이 있다고 되어 있다. 흥덕읍성은 시대에 따라 다른 기록을 보인다. 문종 9권 1451년 8월 21일, 영인본 6책 423
304
— 김종직(金宗直)의 시 : 흥성 동헌에서 백치(百雉)의 높은 성 천 길의 봉우리라,
올라보니 몸은 마치 영풍(泠風)을 탄 듯하네. 고창의 마을 제4집…305
노는 사람 웃음소리는 성루 밖에 들려오고,
난간에 기댄 몸 다시 일으켜 초연(超然)히 생각하니,
갯가의 돛단배는 저녁노을 가운데 떠 있다.
온 세상 어느 누가 개결하고 통달함을 알아줄 건가.
한 길은 동서쪽으로 어찌 그리 아득히 먼가. 두 세상 높낮음 저절로 흐릿하네.
높은 쌍 깃발 걷고 푸른 봉에 머무르니,
오사모(烏紗帽) 반쯤 벗고 깊은 생각 잠겼다가,
여덞 창엔 공중 바람 모두 들어온다.
묻노라 황혼(黃昏)아, 북소리 몇 번 울렸나.
연기와 묏부리는 난간 밖에 점점(點點)이 보이는데, 구름 바다는 손가락질하여 돌아보는 가운데 가물가물한다.
능가산(楞伽山) 몇 만 봉우리 구름에 덮였는데,
아침 해 오를 때는 맑고 시원한 것 더하더니,
매실(梅實) 익는 보슬비 동풍을 쫓아온다.
저녁 안개 잠긴 후엔 가장 침침하여진다.
처마의 낙수 소리 자주자주 드문드문 속에 들려오고,
올라 보니 난새[鸞]를 타고 가는 공상에 스스로 만족하여,
들 빛은 가깝고 아스라한 가운데 푸르르다.
봉래(蓬萊)ㆍ영주(瀛州) 가는 길 통한 듯하다.
이미 문서처리 거두고 쓸쓸한 데 돌아갔으니, 고깃배 따라 허무한 곳 들어가고 싶다.
피로한 행색, 포인(庖人, 음식 맡은 사람)의 괴로움을 살피지 못하고, 다시 석 잔 술에 대도통(大道通)만 생각한다.
— 남곤(南袞)의 시 깎아 세운 듯 잇닿은 천만 봉인데, 아지랑이 하루살이는 큰 바람에 막혀 있구나. 한 지역 좋은 풍경은 난간 밖 아침이고,
점필재 김종직(1431년, 세종13~1492년, 성종23)은 대과에 급제하고 조정의 요직을 거쳐 유학자
두어 점(點)의 제주(齊州, 중국을 말함)는 눈에 보이네.
로서 명성이 높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조10년(1464) 갑신년 8월 6일 세조가 판종부
별포(別浦)의 조수 소리 어지럽게 떠들고,
시사 남윤과 함께 감찰 김종직을 만날 때 김종직이 전하께서 문신들에게 천문, 지리, 음양, 율
석양의 산 기운은 멀리 부옇구나.
여, 의학, 복서, 시사 등 7학을 나누어 닦게 하셨는데 시사는 유자의 일이지만 나머지 잡학은
채색 붓 없는 내가 그림으로 그릴 수 없어,
유학자가 배울 일은 아니라고 건의한 사건으로 세조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었다. 그 후 4년
앞의 글제 주워 모아 회통(會通, 모아서 하나로 합친 책)을 만든다.
뒤 1468년(세조14) 흥덕현감에 부임하였다가, 무오사화로 부관참시되고 이후 복권되어 문묘 에 모셔졌다.
— 박휘겸(朴撝謙)의 시 정정(亭亭)하게 우뚝 솟은 만길 봉우리,
— 유순(柳洵)의 시
306
봉 꼭대기 높은 누각 먼 바람에 임하였네.
호남의 천만 봉우리 다 밟고,
땅은 봉도(蓬島) 삼청(三淸) 경계에 연하였고,
문득 이 땅에 와서 또 바람을 타는구나.
사람은 소상(潚湘) 팔경(八景) 가운데 있다.
파도치는 큰 바다에 조수가 처음 오르고,
구름은 산허리를 두르고 아득하게 비꼈고,
구름 개인 긴 공중엔 달이 중천에 떴다.
물은 하늘 그림자 머금고 뿌연 하늘에 닿았네.
북궐(北闕)로 마음 향하나 하늘이 깊고 멀어,
홀연히 먼 포구 바라보니 돌아오는 돛단배 빠르고,
동산(東山)에 머무니, 빗발이 자욱하다.
뱃길[水道]은 멀리 이어져 한수(漢水)로 통한다.
고창의 마을 제4집…307
(2) 흥성동헌
2) 동학농민혁명과 흥덕
동헌은 고을 수령이 정무를 보던 청사를
1894년 3월 20일(양력 4월 25일) 무장기포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사
말한다. 흥덕면 흥덕리 428~3번지(동헌길 4)
람답게 사는 세상을 열기 위해 일어난 농민항쟁이었다.
에 소재한 흥성동헌은 흥덕현의 객사로 알
무장의 부민들에게 군량을 징수한 뒤 ‘보국안민창의’라고 쓴 깃발을 앞세우고 고부로 향
려져 있었으나 1983년 보수할 때 상량문(상
하였다. 고부관아를 점령하고 황토현전투에서 감영군을 격파, 승리한 동학농민혁명군은 홍
량식을 할 때에 상량을 축복하는 글)이
계훈 부대가 군산항으로 상륙하여 들어온다는 첩보를 접하자 정읍, 흥덕에서 4월 8일(음력)
발견되어
흥성동헌이라 하였다. 1894년 일어난 동학
홍성동헌
10시경 고부군 신점 쪽에서 흥덕 쪽으로 진격했다. 민가에서 점심을 제공받아 먹은 다음 농
농민혁명 당시 전주화약에 따라 집강소를
민군은 군기고(병기고)를 부수고 화약과 창검, 조총 등을 탈취한 후 오후 2시경 고창으로 향
설치·운영하던 곳이다. 1976년 4월 3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7호로 지정되었다.
했다.
동헌은 일반적으로 정당과 동·서익실로 되어 있다. 정당은 국왕의 위패를 안치한 곳으로,
흥덕에서는 접주 차치구가 활동하였던 곳으로 사회개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차치구는
망시 대소관원들이 여기에 모여 대궐을 향하여 배례를 하였다. 동·서익실은 조정에서 파견
고부봉기에 참여하고 전주입성에 참가 하였다. 그러나 순창 피노리에서 전봉준이 체포되자
된 사신의 숙소로 쓰이던 곳인데, 조선시대에는 각도의 주요한 읍성에 동헌이 건립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소성면 광조골 뒷산인 국사봉 토굴에서 은신했다. 그 후 흥덕관아에 잡혀
흥성동헌은 흥덕현의 동헌으로 선조 30년 정유재란(1597)때 병화로 소실된 것을 영조 11년
가 동학농민군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의 아들 차경석(보천교 창시자)은 평상시 부친이 옆구리에
현감 김승연이 중건하였다. 이 동헌은 익실이 없는 특이한 유형의 것으로 그 구조와
칼을 차고 다닌다는 모친의 말이 생각나 어두운 밤에 흥덕현 동학농민군 처형장으로 찾아가
수법이 매우 소박하게 되어 있다. 당시의 대문은 선운사로 이축되어 사천왕문으로 사용하였
여러 구의 시신 중에서 허리춤에 칼을 차고 있는 부친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한다. 차치구의
다. 이 건물은 보수작업을 하기 전까지 한때 고창보건소 흥덕보건지소로 사용하였다.
묘소는 정읍시 입암면에 있다.
(1735)
그후 1899년 영학당사건 때에도 이화삼을 비롯한 흥덕인이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3) 죽현리 주거유적 2002년 호남문화재연구원의 선운사와 흥덕간 도로확포장공사구간내 문화유적 시굴조사
3) 한국전쟁과 흥덕리
보고서에 의하면 흥덕면 소재지 남쪽을 둘러싸고 있는 구릉의 동쪽 줄기로 해발 30m 나지막
동존상잔의 비극, 한국전쟁은 대한민국 전체는 물론 흥덕지역에도 많은 인적·물적 피해를
한 남사면과 북사면을 조사한 결과 구릉정상부에서 구 1기가 조사되었다. 동편에서 기와조
남겼다. 고창지역은 북한군이 1950년 7월 20일 밤에 쳐들어왔다. 그 후 배풍산에 고창 빨치
각, 자기조각 등과 함께 분비 주공석이 노출되어 조선시대 건물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산부대가 주둔하였는데, 고창수복대가 서너 차례나 수복작전을 시도했지만 미군에게 뺏은 중장비로 완강하게 저항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4) 열녀 진정주 처 임씨정려각, 효자 진간 정려각 흥덕리 서이마을 서부주유소 뒤에 위치한 열녀 진정주의 처 임씨정려각, 효자 진간 정려각 은 1633년 건립하고, 1902년 중건하였다. 정려는 담장으로 막혀 진입이 불가능한 상태로 방
고창지역 6·25전쟁 피살자 중에서 흥덕리 출신 희생자는 1950년 10월 20일 국동수(남 68, 농업),
10월 25일 국성수(남 26, 교사), 국수호(남 33, 농업), 11월 2일 국재남(남 30, 의사), 국재희(남
28, 농업),
국진엽(남 32, 농업), 국기현(남 27, 의사)이다.
치되어 있다. 정려각 내에는 정려 현판이 걸려 있었으나 현재는 훼손되어 보이지 않는다. 효 자 학생 진간 정려는 종중 때인 1536년에 내려졌으며 열녀 학생 진정주의 처 보안임씨 정려
4. 흥덕리의 기관
는 인조 때인 1633년에 내려졌다. 이 정려각은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구조는 낮은 기단위 에 화강암 주초를 놓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운 다음 보, 창방과 결구하고 있다. 사방이 주 변 집의 담장으로 막혀 진입이 불가능하며 관리를 하지 않아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308
흥덕리에 흥덕파출소, 흥덕우체국, 고창군 예비군 흥덕면대, 흥덕보건지소, 흥덕농협, 고창 부안축협 흥덕지소가 있다. 고창의 마을 제4집…309
1) 흥덕파출소
면소재지에 치과가 개원됨에 따라 현재는 내과와 한방을 진료하고 있다. 전염병관리사업으로
흥덕면 흥덕리 326-2번지(선운대로 3759)에 있다. 1919년 1월 경찰관 주재소가 설치되고, 일
매년 정기적으로 예방접종을 실시하고 마을을 순회하면서 진료하기도 한다.
본인 수석(파출소장)과 직원 2~3명이 배치되어 치안확보에 임하였다. 1995년 12월 20일 현 위 치에 개축하였다. 흥덕파출소는 신림면과 성내면을 관할한다.
5) 흥덕농협 흥덕면 흥덕리 249-8번지(흥덕초등길 3)에 위치하며 2005년 12월 9일 흥덕, 성내, 신림농협이
2) 흥덕우체국
합병되었다. 조합원의 농업생산성을 높이고 조합원이 생산한 농산물의 판로확대 및 원활한
흥덕면 흥덕리 282번지(선운대로 3755)에 위치한다. 고객만족과 신뢰성 향상을 최상의 가치
유통을 도모하며 조합원이 필요한 기술보급, 자금 및 정보 등을 제공함으로써 조합원의 경제
로 깊이 인식하고 고품질의 우편,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선진우체국을 이룩하여 국민의 삶
적, 사회적, 문화적 지위향상을 도모하는 데 설립목적을 두고 경제사업, 경영지원, 교육지원,
의 질 향상과 지역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신용사업을 하고 있다.
3) 고창군 예비군 흥덕면대
6) 고창부안축협 흥덕지소
흥덕면 흥덕리 566번지(서삼길 12-5)에 위치하며 향토예비군을 관리한다. 전시 또는 비상 사
흥덕면 흥덕리 237-10번지(선운대로 3730)에 위치하며 농업인을 대상으로 금융여수신, 유통
태가 일어났을 때 본인이 소속된 직장이나 지역을 지키는 것을 주임무로 하는 향토방위업무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를 수행하고 있다.
5. 교육기관 4) 고창보건소 흥덕지소 흥덕리 590번지(서삼길 21)에 위치한 흥덕보건지소는 내과, 치과, 한방을 진료하였으나 흥덕
1) 흥덕초등학교 고창군 흥덕면 흥덕리 273-1번지(흥덕로47-12)에 위치한 흥덕초등학교는 1915년 5월 1일 개 교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학교로서 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넓게는 국가와 민족, 좁 게는 지역사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여 왔다. 특히, 고창의 관문이며 교통의 요지인 흥덕면 소재지에 위치, 고창의 문화와 교육의 중심지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단위학교 중심의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교육활동을 전개하여 2003학년도에는 국가와 지역 사회가 요구하는 교육을 실현하기 위해 학교교육과정과 학급교육과정을 합리적으로 편성,
흥덕파출소
흥덕우체국
그 운영을 전라북도에 공개 발표하기도 했다. 흥덕초등학교의 연혁은 다음과 같다. 1909년 4월 1일 흥덕학원 4년제 설립인가 5월 1일 개교식 거행 1915년 4 월 1일 흥덕공립보통학교 4년제로 교 명 개칭
고창보건소 흥덕지소
310
흥덕농협
1922년 4월 1일 학제 변경에 따라 6학년제로
흥덕초등학교
고창의 마을 제4집…311
고한 정신, 순결, 겨울의 모진 바람을 묵묵히 견디어 이른 봄 순백의 꽃을 피우는 강한 생명
연장 1937년 4월 1일 흥덕공립 제일심상소학교로 개칭
력을 상징한다. 캐릭터는 흥이와 덕이로, 흥덕중학교의 교화인 목련을 형상화, 본교생의 깨끗
1941년 4월 1일 흥덕북공립국민학교로 개칭
하고 순결한 모습과 희망찬 미래를 상징하고 있다.
1965년 10월 21일 교사 2, 교실 50평 준공
흥덕중학교의 연학은 다음과 같다.
1973년 1월 31일 본관 14 교실 개축, 체육관 신축 10월 28일 전라북도 지정 체육과 연구발표회 개최
1948년 4월 10일 흥덕학원 인가(1학급)
1975년 3월 20일 야구부 및 배드민턴부 창설
1952년 4월 3일 흥덕중학교로 개교(3학급)
1976년 10월 29일 교육감기 쟁탈 및 전북 배드민턴 연맹전 우승
2000년 9월 25일 후관 교실 13실 증·개축
1978년 10월 27일 제8회 전북 소년체전 배드민턴 남자부 우승, 여자부 준우승
2006년 2월 9일 제55회 졸업식(졸업생 총 7,837명)
1981년 3월 1일 국민학교 병설유치원 개원(1학급 40명)
2009년 2월 28일 1학급 감축(4학급)
1992년 12월 19일 교육부장관 표창(학교경영우수교)
2009년 9월 24일 강당 신축
1993년 3월 1일 하남초등학교 통합(남 28명, 여 48명), 급식소 설치(전교생 454명)
2010년 9월 1일 윤재중 교장 취임
1996년 3월 1일 흥덕초등학교로 개명
2012년 2월 13일 제60회 38명 졸업식(총 8,053명)
흥덕중학교
1998년 7월 2일 체육관(흥학관) 준공 2002년 12월 .25일 2002학년도 학교경영 우수학교 수상(전라북도 교육감)
3) 고창북고등학교
2004년 8월 6일 도서관 공사
고창군 흥덕면 흥덕리 157번지(선운대로 3714-32)에 위치한 고창북고등학교는 학교법인 중앙
2005년 8월 20일 방송실(멀티실) 방송장비 설치
학원이 운영하는 학교이다. 세계화시대, 정보화시대, 인간화시대에 알맞은 미래의 인재를 육
2007년 3월 1일 ~ 2009년 2월 28일 전라북도교육청 지정 연구학교(체육교육과, 2년)
성하고자 자아실현의 신념으로 각자의 개성을 성실하게 발휘하는 사람, 근검과 노작의 정신
2010년 2월 10일 제 87회 졸업식 거행(남 15명, 여 18명)
으로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사람, 창조와 개척의 의지로 사회에 주체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2010년 3월 1일 9학급 편성(남 73명, 여 66명, 계 139명)
사람을 길러내고 있다.
2010년 9월 1일 제34대 임은규 교장 취임
고창북고등학교는 늘 변화를 주도하는 새롭고 건강한 명문사학으로 ‘1등 학교 1등 교육’
2011년 2월 9일 제88회 졸업식 29명(총 9,984명)
을 실현하기 위해 전 교직원이 어려운 농어촌의 교육여건 속에서 피나는 노력과 헌신적인 열
2012년 2월 10일 제89회 졸업식 29명(총 10,013명)
정을 쏟고 있다. 고창북고등학교의 연학은 다음과 같다.
2) 흥덕중학교 고창군 흥덕면 흥덕리 436번지(잿말길 21)에 위치한 흥덕중학교는 1952년 개교 이래 학생들
1947년 12월 15일 부안중앙학원 설립
의 전인교육에 헌신하고 있으며 ‘신바람 나는 학교 공동체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혼신의 노
1972년 3월 2일 고창종합고등학교로 개교
력을 경주하고 있다.
1980년 4월 15일 고창북고등학교로 개교
교목은 은행나무로 오랜 전통, 줄기찬 발전, 굳센 의지를 상징한다. 교조 까치는 사람에게
1986년 12월 3일 현 위치로 신축 이전
희소식을 전달하는 아름답고 정겨움이 넘치는 길조로서, 우아하며 순박함을 표상하고 청정,
1987년 10월 17일 학급 증설 인가(18학급)
순결, 평화 그리고 무언의 포용으로 봉사와 협동의 정신을 상징한다. 교화는 백목련으로 숭
1988년 3 월 9일 학교법인 이사장 이강수
312
고창북고등학교
고창의 마을 제4집…313
박사 취임
내용을 달리하는 응병시약적(應病施藥的, 병에 따라 각각 약을 달리 지어 줌)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
1988년 5월 31일 학교법인 중앙학원으로 명의 변경
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획일적이고 일방적인 길보다는 다양한 길을 택하였다. 불교
2000년 11월 1일 고창북고등학교 축구부 창단
의 교리가 너무 다양하게 전개되어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2001년 10월 25일 학급 변경 인가(보통과 4학급, 정보처리과 1학급, 관광경영과 1학급)
반면, 사람마다 지닌 사회적 조건을 충분히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불교의 관용성을 찾아볼 수
2002년 8월 23일 학교법인 중앙학원 이사장 이흥수 박사 취임
있다.
2005년 8월 25일 학칙변경 인가(7차 일반 5학급, 정보처리과 1학급) 2006년 1월 10일 제11대 김용성 교장 취임
2) 흥덕사
2006년 2월 10일 제32회 졸업식(졸업생 총 4천9백15명)
흥성 동헌을 지나 배풍산 가는 안내표지
2008년 8월 13일 학교법인 중앙학원 이사장 김길남 취임
판 길을 따라 200여m 거리에 배풍산을 배
2009년 8월 3일 고창 북부권 체육관 신축 2,253.57㎡(1층 991.28㎡, 2층 1,262.29㎡)
산으로 흥덕리 464번지(흥덕사 16-7)에 흥
2010년 7월 1일 제12대 서정우 교장 취임
덕사가 자리한다. 전면으로는 흥덕초등학
2012년 2월 8일 제38회 졸업식(총 5,589명)
교가 있고, 흥덕면소재지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좌측에 있는 왕대나무는 흥덕인
6. 종교시설
의 높은 기상을 상징하는 듯하며 사찰 주 변 배풍산에는 작설차가 자생한다.
1) 각화사
흥덕사
각화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24교구 본사 선운사의 말사로 흥덕파출소를 지나 흥덕노인정 과 게이트장 좌측 흥덕리 332번지(흥동 1길 7-6)에 위치한다. 각화사는 1995년 5월 15일 건축 한 대웅전 108㎡, 요사채 64.8㎡를 갖추고 있으며 법회는 매월 음력 초하룻날 열린다.
3) 원불교 흥덕교당 원불교는 1916년 영광 출신 소태산(少太山) 박중빈이 창시한 종교이다. 원불교 총부는 익산 시에 있으며 고창지구는 6개의 교당과 5개의 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불교는 석가모니(釋迦牟尼)를 교조(敎祖)로 부처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종교로 교리는 부처
원불교의 주요 교리는 법신불 일원상(法身佛一圓相)을 최고의 종지(宗旨)로 삼는데, 일원상의
가 깨친 진리는 형이상학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존재하는 구체적 양식, 즉 연
신앙은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을 목표로 한다. 어느 곳 어느 때나 신앙심을 지
기(緣起)로 설명된다. 이 세계는 신이나 브라만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의존관계
키어 천지(天地)·부모·동포·법률의 4은(四恩)에 보답하는 것을 불공으로 삼고, 자력양성(自
속에서 인연에 따라 생멸(生滅)한다는 것이
力養成)·지자본위(智者本位)·타자녀교육(他
다. 인간생활의 실제문제와 부딪쳤을 때 그
子女敎育)·공도자
문제의 해결에 주력하는 것이 부처의 가르
要)를
침이고 곧 불교이다. 불교의 교리나 이론은
것이다. 일원상의 수행이념은 무시선(無時
자연히 인생문제의 해결이라는 실제적 목적
禪)·무처선(無處禪)을
이 앞서기 때문에 이론을 위한 이론이나 형
어디서나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정신수
이상학적 이론은 배제되었던 것이다. 부처
양·사리연구(事理硏究)·작업취사(作業取捨)
는 사람마다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사회
의 3학(三學)을 수행하는 것이다. 신(信)·분
적 조건과 개인적 차이에 따라서 가르침의
314
각화사
숭배(公導者崇拜)의 4요(四
실천함으로써 복락의 길을 닦자는
(忿)·의(疑)·성(誠)의
표준으로 하여, 언제
‘진행 4조(進行四條, 추
원불교 흥덕교당
고창의 마을 제4집…315
진할 네 가지)’와
불신(不信)·탐욕·나(懶)·우(愚)의 ‘사연 4조(捨捐四條, 버려야 할 네 가지)’의 8조를
(2) 흥덕제일교회
실행하여 원만한 인격을 양성한다는 것이다. 이를 요약하면, 법신불 일원상을 대상으로 신앙
흥덕면 흥덕리 261번지(흥덕로 39)에 위치
하고, 수행하는 데서는 정각정행(正覺正行)·지은보은(知恩報恩)·불법활용(佛法活用)·무아봉공
한 흥덕제일교회는 1988년 5월 15일에 창립
(無我奉公)을
4대 강령으로 삼고 있다. 원불교 흥덕교당은 흥덕면 흥덕리 400-1번지(서일길 23)
되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소속으로 ‘예수님
에 있다. 1974년 건축한 교당은 120.26㎡이다. 2011년 부임한 이진관 교무 주관으로 법회는
사랑을 실천하며 지역민과 함께 성장하는 교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 30부터 11시 30분까지 1시간, 초하루 기도는 매월 초하루 10시 30분
회’를 표어로 한다. 2002년 교육관 및 사택
부터 11시 30분까지 1시간 열리며, 교리공부는 매주 수요일 8시부터 9시 30분까지 있다.
을 준공하고 2007년 교육관 옆에 문화공간 으로 벧엘교육관을 지었다. 벧엘교육관에서
흥덕제일교회
4) 기독교
는, 활기차고 건강한 노년기를 위해 노인 스스로 노년기에 대한 자긍심과 자신감을 불어 넣
흥덕면 흥덕리에는 흥덕교회, 흥덕제일교회, 광명교회가 있다. 이 세 곳은 고창군 기독교연
어주기 위한 ‘건강백세 흥덕 기쁨노인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합회에 참여하고 있는데, 고창군 기독교연합회는 1980년대부터 고창읍 새마을공원에서 부활
노인대학은 2008년부터 매년 3월부터 11월 말 졸업식까지 흥덕제일교회 ‘기쁨노인대학’에
절 연합 새벽예배를 드려왔다. 고창중앙교회와 고창성북교회가 격년제로 시설 및 봉사를 맡
재학 중인 100여 명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매주 수요일 주 1회씩 총 32회에 걸쳐 노인들의 건
아서 연합으로 예배를 드렸다. 2002년부터 고창군 기독교교회연합회를 구성하였다.
강증진을 위한 강좌와 체조 등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마련했다. 또한 매주 교육주제에 적 합한 대학교수 및 전문강사를 초빙해 다양한 건강강좌를 열고 건강생활 실천을 위한 운동,
(1) 흥덕교회
영양, 절주, 금연교육을 비롯해 정신건강을 위한 노래교실, 웃음치료 등을 곁들여 노인들에게
흥덕면 흥덕리 390번지(서일길 12)에 위치한
활기찬 생활을 실천할 수 있도록 진행하고 있다.
흥덕교회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소속으로 ‘성
흥덕제일교회는 담임목사 김선우, 장로 3명, 전도사 1명, 안수집사 4명, 권사 8명, 신도수는
령과 사랑으로 이 지역을 구원하는 교회’를
350여 명이다.
표어로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그 사랑을
(3) 광명교회
지역에 전파하기 위하여 설립된 교회이다.
흥덕면 흥덕리 594번지(서삼길 11-21)에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 30분에 주일 낮 예
위치한 광명교회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소속
배, 오후 3시에 주일 찬양예배를 드린다. 매
으로 ‘새 일을 향하실 주님만 바라보자’를 표
주 수요일 오후 7시에 수요일 밤 예배, 매일
어로 한다. 1980년 12월 30일 박난순 전도
새벽 오전 5시에 새벽기도를 진행한다. 고창
흥덕교회
군 소재 작은 교회들의 자립을 돕고 있다.
사가 중학교 주변에 교회를 설립하여 예배를 드려왔다.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 30분에 주
흥덕교회는 고창군 부안면 중흥리에 위치한 오산교회의 몇몇 교인들이 현 면사무소 자리
일 낮 예배, 오후 7시에 주일 찬양예배를 드
의 한 가정집에서 개척예배를 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문헌상 정확한 설립연대를 알 수
린다. 매주 수요일 오후 7시에 수요일 밤 예
없으나 흥덕교회 주보를 검토하여 볼 때 1934년경으로 추정된다. 1995년 현재의 위치에 신
배, 매일 새벽 오전 5시에 새벽기도를 진행한다. 한차례 이사 후, 1990년 현 위치로 신축·이
축·이전하였다. 2012년 현재 담임목사 강진호, 장로 4명, 전도사 1명, 권사 20여 명, 신도수
전하였다. 송길용 담임목사는 2003년 1월 7일 제3대 목사로 부임하여 전도사 1명, 권사 9여
는 180여 명이다.
명, 신도수는 120여 명이다.
316
광명교회
고창의 마을 제4집…317
7. 주민의 삶
5) 창녕조씨(昌寧曺氏) 재실 흥덕 버스터미널을 지나 삼거리에서 산 업단지 방향으로 100여m 거리 흥덕리
1) 풍류와 풍습
495-15번지(선운대로 3705-4)에 창녕조씨 재실 흥덕사가 자리한다. 2011년 1월 16
(1) 아양율계
일 건축한 시멘트 한옥식 재실(97.55㎡)로
흥덕면 흥덕리에서는 1935년경에 흥덕 풍류객들이 ‘아양율계’라는 풍류계를 조직하여 크게
출입문인 충모문(忠慕門) 좌측에는 세로로
풍류놀음을 했다고 한다. 흥덕에 아양율계가 생기게 된 것은 인근 성내면의 삼구회(三九會)라
창녕조씨 상호공파(昌寧曹氏上護公波), 우측
는 율계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에는 현령호인문중재실(縣令好人門中齋室)
창녕조씨 재실
1935년경에 흥덕 출신으로 관청에 나가 일하다가 고향에서 휴양하며 풍류를 배우던 박태
현판이 있다. 이 재실은 임진왜란과 정유
술이 주동이 되어 아양율계를 조직했고 실무를 맡아 운영했다 한다. 아양율계의 풍류회는 일
재란이 일어나자 구국의 선봉에 선 의사 참봉 조익령, 의사 참봉 조익수 등 선현을 배향하고
회(日會), 삭회(朔會), 춘추회(春秋會)로 나뉘어 운영되었다. 일회는 매일 시간이 있는 흥덕 거주
매년 음력 10월 14일 시제를 모신다.
회원들이 석양쯤에 옥봉정에 모여서 회원들의 전공대로 악기를 임시 편성하여 풍류 한바탕을 타고 헤어지는 것이다. 본중령에서 시작하든지 잔도드리 또는 염불도드리에서 시작하든지 그
의사 참봉 조익령(曺益齡) 조익령의 호는 화암(花巖)이요, 장릉참봉이다. 왜적이 침략하자 동생
때그때 회원의 의견에 따라 시작하여 뒷풍류까지 탔다고 한다. 삭회 때는 매월 초순 흥덕 회
익수, 증손자 수문장 윤흠과 가산을 털어 군비를 마련하고 남당에서 의사 90여 명을 규합하
원들이 옥봉정에 모여 회비를 거두어서 음식을 장만하고 10시쯤 풍류를 타며 음식을 나누어
여 피를 나누어 마시며 같이 싸울 것을 맹세하고 부안 호벌치전투에서 많은 적을 섬멸한 전
먹고 즐겼다 한다. 춘추회는 4월과 9월에 마땅한 날을 받아서 열리는 대회로, 흥덕 풍류계원
과를 거두어 참모관으로 추천되었다. 순천에 침입한 적군을 석보에서 대파하고 개선하여 적
들 뿐만 아니라 창평 박석기, 태인 김용근, 정읍 박홍규 등 전라남·북도의 유명한 풍류인들
성강에 이르러 동료들과 유식하였다. “천지에 달 밝으니 계절은 가을 같구나. 들판에 피비린
과 유명한 기생, 광대, 공인들을 불러들여 옥봉정에서 사흘간 떠들썩하게 풍류놀음을 벌렸다
내 갰으니 이때야말로 우리병사 위로하자”라는 한편의 시가 배풍산 자락 그의 묘비에 새겨져
고 한다. 대회 첫날은 옥봉정에서 풍류인들이 모여 풍류 한바탕을 타고 가객들의 가곡, 광대
있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진위로 달려가 왜적을 격멸하였으나 다시 흥덕에 왜적이
들의 소리, 기생들의 춤이 이어지고 술상이 들어오면 삼현육각 거상악을 길게 치는 연향에 들
침입하니 영광과 해남의 의병과 합류하여 배풍령에서 왜적을 괴멸시키고 장흥전투에 참가하
어갔다 한다. 둘째 날은 첫날과 같이 놀음을 벌리고 취흥이 오르면 회원들이 흥덕 읍내를 한
여 4월 20일 순절하였다는 기록이 『호남절의록』과 일기, 동맹록에 남아 있다. 조익령의 위패
바퀴 돌며 길놀이를 벌였다고 한다. 앞에서는 삼현육각이 길군악을 치고 계원들과 기생들이
는 동생 익수와 함께 남당 추모사에 모셔져 있다.
사이사이 섞여 흥겹게 길놀이를 했다고 한다. 셋째 날은 첫날과 같이 놀음을 벌이고 헤어졌 다 한다.
의사 참봉 조익수(曺益壽) 조익수의 휘는 순령, 자는 자일이며 호는 오곡이다. 사섬시봉사(司 贍寺奉事)로
아양율계는 10여 년 간 계속되다가 해산했는데, 뒤에 정읍 초산율계를 조직하게 된 원인이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윤현동 골짜기에 오막살이집을 짓고 살았다. 집
되었다 한다. 아양율계 회원은 진명섭, 박태식, 국승원, 국휘영, 박태술, 박영근, 박주석, 김상
주위에 오동나무를 심어 오동처사라 불렸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큰형, 참봉공 손자 윤
호, 박태용, 국일주, 박태선, 진태풍, 편재준 등이었다 한다. 아양율계는 한국전쟁 때 보유자
흠과 더불어 가족을 데리고 군량미를 마련하며 활과 화살 3백여 통을 가지고 야수 채홍국을
가 많이 사망하고 나서 해산되었다. 회원 가운데 오직 박주석 한 분이 살아 있으나 고령으로
비롯한 의사 100여 명과 함께 남당에서 출전할 것을 피로써 맹세하였다. 호벌치전투를 시작
연주를 그만둔 지 오래라고 한다.2)
으로 순천 석보땅에 이르기까지 활약하다 1595년 사망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호남절의록』 과 일지에 기록되어 있으며 배풍산 남쪽 기슭에 있는 그의 묘비에도 기록되어 있다..
318
2)출처 :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http://portal.nricp.go.kr/)
고창의 마을 제4집…319
(2) 기우제
제2선거구에서 출마하여 5,945표를 득표하여 당선되었다. 제2대 도의원의 임기는 1956년 9
여름철 한해(旱害)가 계속될 때 흥덕시장 상인들이 장옥에서 나와 흥덕양조장에서 흥동 정
월 5일부터 1960년 8월 13일까지였다.
미소 주변 사이 난장을 열거나 배풍산에 올라 기우제를 지냈다. 기우제는 비가 내리는 효험 이 있을 때까지 지내기도 했는데, 제주(祭主)를 바꾸거나 제장(祭場)을 옮기고 주법(呪法)을 바
김용원 흥덕면 흥덕리 357-2번지에 살았던 정치가 김용원은, 1932년 9월 19일 생으로 전북
꿔가며 지냈다. 기우제에 참여하는 주민이 많으면 많을수록, 함께 비는 효력이 강한 효험으로
대학교 수의학과를 졸업하였다. 1991년 6월 20일 실시된 광역의원 선거 결과 평민당이 전원
나타난다고 믿었다.
승리를 거두었다. 고창군의 경우 3명의 도의원을 선출하였는데 제1선거구는 고창읍, 고수면,
흥덕리의 기우제는 배풍산에 제사를 지내고 배풍산 정상에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놓으며
성송면, 대산면, 제2선거구는 무장면, 공음면, 상하면, 해리면, 심원면, 제3선거구는 아산면,
재액을 쫓아내는 형식으로, 비가 내리는 것을 모방한 주술형으로 진행되었다. 산 위에서 불을
흥덕면, 신림면, 부안면이었다. 김용원은 제3선거구에 평민당으로 출마하여 9,140표를 얻어
놓아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는 가장 널리 행해진 유형으로 산 위에서 태울 나무나 짚은 각 호
당선되었다. 이어 1995년 6월 27일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으로 출마하여 6,859
(戶)마다
모아 산으로 운반하거나 산에서 모으는데, 상당한 노동력이 필요하다. 산에서 불을
표를 얻어 당선되어 예산·결산위원장, 전라북도의회 산업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선운산토산품
놓으면 타는 소리가 천둥치는 소리같이 난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하며, 연기를 통해
판매장건립, 배풍산근린공원조성 등 고창군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98년 6월 4일 실
천신에게 기원을 전한 것이라고도 한다.
시된 제2회 전국지방선거의 경우 고창군 선거구는 3개 선거구에서 2개의 선거구로 조정되었
신에게 의례를 통해 기원하거나 춤 또는 농악으로 위로를 하기도 하였다. 가뭄이라는 재앙
다. 제1선거구는 고창읍, 아산면, 심원면, 흥덕면, 성내면, 신림면, 부안면이고 제2선거구는 고
의 원인이 신의 노여움 때문이라고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배풍산 정상에 묘를 써 비가 내리지
수면, 무장면, 공음면, 상하면, 해리면, 성송면, 대산면이었다. 김용원은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않는다 하여 묘를 파고 뼈를 지금의 안보교육장 주변에 놓아두기도 하였다. 이같은 기우제의
6,396표를 얻었으나 새정치국민회의 이상복 후보가 10,698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풍습은 1970년대 중반 이후 단절되었다.
8. 산업 3) 마을의 인물 1) 흥덕시장 (1) 효자 국사엽 본관은 담양이고 효행으로써 무인년에 명정되었다. 그의 정려가 흥덕리에 세워져 있 었다.
흥덕리는 흥덕면은 물론 인근의 부안면, 신림면, 성내면 경제활동의 중심지로서, 요식, 숙박 업이 성업 중에 있으며 5일시장이 있다. 고창군에는 고창시장, 안자시장, 사가리시장, 난산시 장 등 4개의 시장이 8·15해방 당시 존재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향시로부터 이어온 전통적 인 재래시장으로 고창장은 3일과 8일, 안자시장은 해리면에서 4일과 9일, 사가리 시장은 대
국양섭 흥덕면 흥덕리에 정려가 세워져 있다. 본관은 담양이고 사간경례(司諫經禮)의 후손이 다. 18세 때 아버지가 병이 걸려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수혈했고 그 후 계속하여 아버님을 극진히 봉양하였다. 1905년(광무9년)에 통정대부에 증직된 효자이다.
산면에서 2일과 7일, 난산시장은 부안면에서 5일과 10일 개장되었다. 해방이후 시장기능이 상실되어 오다가 1956년 해리시장이 다시 개설되고 1957년 고창시 장, 1965년 2월 1일 흥덕시장과 무장시장, 1967년 대산시장, 1974년 3월 12일 상하시장이 개 설되어 5일마다 열리는 정기시장이 되었다.
(2) 정치인
2일과 7일은 대산시장과 상하시장, 3일과 8일은 고창시장, 5일과 10일은 무장시장과 부
국훈엽 흥덕면 출신의 정치가인 국훈엽은, 1913년 5월 14일 고창군 흥덕면 흥덕리에서 태어
안시장, 그리고 4일과 9일 열리는 흥덕시장은 25개의 점포와 2010년 신축한 화장실을 갖추
났다. 1952년 5월 10일 실시된 제1대 도의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차점으로 낙
고 있으며 전형적인 시골장터로, 인근 주민들이 농산물, 수산물, 잡화류 및 생활용품을 판매
선하였다. 이후 1956년 8월 13일에 실시된 제2대 도의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고창군
한다.
320
고창의 마을 제4집…321
2) 농업
고 있다. 흥덕경로당(회장 진종호)은 흥덕리 320번지(흥동1길 8)에, 대지 230㎡에 조석조 슬라브
흥덕리의 면적은 96.4ha로 전 25.4ha, 답 22.1ha, 목장용지 6.7ha, 임야 24.2ha, 대지 18.0ha
건물 56.1㎡로 2002년 9월 12일 건축하였다. 할머니경로당(회장 정연순)은 흥덕리 401-19번지
이다. 전은 고추, 복분자, 채소류를, 답은 벼를 재배하며, 목장용지는 한우와 돼지를 사육하고
(서일길 25-5)에
있다. 흥덕리의 소재지로 상업 등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관계로 농경지의 규모가 영세하다.
였다. 흥동경로당(회장 이봉선)은 흥동길 13에 위치하며 건물 면적은 78.75㎡로 2009년 2월 9
있다. 대지 394㎡, 조석조 슬라브 건물로 1999년 12월 24일 건축하여 등록하
일 등록하였다. 흥남경로당(회장 김방욱)은 흥남2길 12에 있다. 건축 면적 65.33㎡로 2011년 10
9. 주민편익시설
월 16일 등록하였다. 서이경로당은(회장 전용환) 흥덕리 384-6번지(서일길 3-4)에 위치하며 대지 103㎡, 조석조 슬라브 건물 56.64㎡로 2003년 2월 15일 건축 같은 해 3월 10일 등록하였다.
1) 흥성정 죽현에 있는 팔각정 흥성정은 4천여만원을
10. 흥덕리의 현황
투자하여 2011년 6월 건립하였다. 상량문은 죽강 남대희 선생이, 현판은 해리 추억사진관
1) 성씨
정현 이창수가 썼다. 이 정자는 인근 지역주민
흥덕리에는 밀양박씨, 전주이씨, 김해김씨, 광산김씨, 여양진씨, 경주김씨, 경주최씨, 거창신
의 쉼터이며 대화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씨 등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을 설기한 성씨를 보면, 흥동마을과 서삼마을은 밀양박씨, 죽현
흥성은 고창군 흥덕면의 옛 이름으로 흥덕
마을은 여양진씨, 서일마을은 담양국씨가 터를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 고을에 읍성이 있는 지역이라 하여 별칭으 로 흥성(興城)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홍성정
흥덕을 본으로 한 흥성장씨 시조 장유(張 儒)는
밀양박씨 박승수(朴承秀) 1623년, 밀양박씨 박승수(1566~1629)가 인조반정을 피하여 은둔을 하고자 흥덕으로 왔다가
상질현(尙質縣) 사람으로 신라말에 난을 피하여 중국에 들어가 중국어를 배웠으며 고려
반정이 끝난 후에도 귀향하지 못하고 흥덕리에 입향하게 되어 후손이 17대를 세거하고 있다.
가 개국한 뒤에 귀국하여 고려 광종 때 예빈성(禮賓省)에 있으면서 중국 사신 접대를 맡았다고
입향세계는 4세(世) 승수 - 자태 - 몽도 - 만동 - 종일 - 찬영 - 중혁 - 태겸 - 사신 - 대유
한다. 그의 6세손 장기(張基)가 흥산군(興山君)에 봉해져서 본관을 흥성(興城)으로 하였다고 한
- 후민 - 창구 - 제홍 - 연근 - 희봉 - 두기 - 용일이다.
다. 그래서 흥성장씨를 흥덕장씨라고도 부른다. 여양진씨(驪陽陳氏) 진간(陳侃)
2) 흥덕 청소년문화의 집
여양진씨 진간은 조선 후기 명천현감 매(邁)의 자손으로 학문이 뛰어나고 명망이 높았다.
농어촌 청소년에게 쉼터가 되면서 바람직한 여가문화를 활성화할 수 있도록, 구 흥덕면사
이런 연유로 흥덕 훈도(訓導)로 부임한 것이 인연이 되어 그 후손이 세거하고 있다. 입향세계
무소 청사를 양여금 2억원과 군비 1억원 등 총사업비 3억원을 투자, 리모델링하여 2002년 11
는 14세(世) 간 - 처우 - 천수 - 세붕 - 정주 - 철남 - 효온 - 계우 - 의성 - 한적 - 석제 -
월 15일 개관하였다. 부지면적 3,590㎡에 건물 539.46㎡ 규모로, 정보인터넷실, AV감상실, 비
치복 - 영준 - 용근 - 우학 - 창익 - 하종 - 안수 - 윤식 - 경열이다.
디오 감상실, 동아리방, 문화사랑방, 무용연습실, 당구연습장, 다목적 홀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2) 인구 흥덕면에는 1799세대에 3,620명이 거주하고 있다. 흥덕리는 흥덕면 인구의 29.14%인 450
3) 마을회관(경로당)
세대 1055명(남 526, 여 529)이 거주하고 있다. 흥동마을에는 50세대 111명(남 56, 여 55), 흥남은
마을회관은 경로당으로도 쓰이고 있어, 주방기구, 운동기구 등 기본적인 편익시설을 갖추
47세대 97명(남 49, 여 48), 죽일마을은 39세대 81명(남 36, 여 45), 죽이마을 81세대 196명(남 105,
322
고창의 마을 제4집…323
여 91),
서일마을 70세대 154명(남 75, 여 79), 서이마을 85세대 207명(남 98, 여 109), 서삼마을 78 도움 주신 분
세대 209명(남 107, 여 102)이 살고 있다.
김권종(65세, 서일 이장)
3) 마을조직(2012.1.1. 현재)
진종호(89세, 흥덕 노인회 회장)
고창군은 리의 하부조직운영에 관한 조례에 의거해 면단위 분리에 이장과 반장을 두고 일
이춘식(67세, 죽이 이장)
선행정에 주민의 의사를 반영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향토발전을 꾀하고자 분리에 새마을개
송광선(55세, 서이 이장)
발위원회를 두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장의 임기는 2년으로, 지역주민의 의견을 수렴하여 행정 기관에 전달하고 리의 발전을 위한 자주적, 자율적 업무추진과 지역주민간 화합과 단결을 위
참고문헌
한 이해조정에 관한 일을 도맡아 한다. 또한 새마을지도자, 부녀회장, 노인회장 등이 마을의
『고창군지』, 고창군지편찬위원회, 고창군, 2009.
기반조직으로 활동하고 있다.
『모양성의 얼』, 고창군 2009 재판. 『고창군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도서출판 청동, 2003.
기반 행정조직
『전북지명총람 5』, 유재영, 민음사, 1999. 비고
『고창지역동학농민혁명사』,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신아출판사, 조용호외 2, 2010.
마을명
이장
새마을지도자
부녀회장
개발위원장
흥동
이재정
김영주
권금수
배대자
『흥성지』, 흥덕향교, 홍인문화사 2004.
흥남
김완 수
이사윤
박복순
권재원
『고창군 비지정 건물문화재』, (재)전주문화유산연구원 2009.
죽일
이윤호
배만기
전순복
마선희
죽이
이춘식
유인기
양지원
신복중
서일
김권종
남궁철
전선자
정금봉
서이
송광선
장형종
여예남
박동은
서삼
최종배
백원삼
최부덕
박현주
『고창군문헌자료집』, 고창학술문화연구회, 청동기획 2009. 『디지털고창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10. 『고창의 문화유산』, 고창문화원, 도서출판 청동, 2008. 『제5대 고창군의회 의정백서』, 고창군의회, 고창보성인쇄소, 2010. 『행정구역사무편람』, 전라북도, 도서출판 문정사, 1998. 『바르게살기운동』, 바르게살기운동 흥덕면위원회, 정미문화사, 2008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http://portal.nricp.go.kr/) 『정통풍수 전을 김화중선생과 함께 도산비기의 호남팔대지 고창 흥덕을 다녀와서』 http://blog.daum.net/differ8899/8289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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