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덕현의 역사가 흐르는 흥덕리 조 용 호
1. 흥덕리 개관 흥덕면의 경제문화 상업의 중심지 흥덕리는 면사무소가 있는 문화마을과 인접하여 있다. 동쪽은 동사리, 서쪽은 교운리, 오호리, 남쪽으로는 사천리
북쪽으로는 치룡리와 접하여 있
다. 또한 옛 흥덕현의 역사와 문화가 면면히 이어오는 지역이다. 영산기맥의 한자락 방장산 소갈재에서 분기한 변산지맥 배풍산을 배산으로 자리한다. 흥덕 리에는 흥덕초등학교, 흥덕중학교, 고창북고등학교, 흥덕파출소, 흥덕농협, 흥덕우체국 등 대 부분의 관공소가 자리하고 있다. 흥덕리의 분리는 흥동, 흥남, 죽일, 죽이, 서일, 서이, 서삼 마을이 있고 자연부락으로는 흥동의 정동, 흥남의 동부리,
죽일의 솔아물, 서일의 솔청, 서
이의 대산모퉁이(죽현)서삼의 목화정이(목화정),서부리가 있다.
<흥덕현 지도>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50여 소국의 하나인 모로비리국에 속하였으며 백제시대에는 상칠현 (上漆縣)으로 오태동에 현의 치소가 있었다.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상질현(尙質懸)으로 개칭하면서 흥덕리로 치소를 옮겼다. 고려시대에는 장덕현(章德縣)으로 바뀌어 감무가 다스렸다. 1308년 고려 26대 충선왕(忠宣 王)이 즉위하자 왕의 이름인 장(璋)과 장덕현의 章이 동음으로 왕의 이름을 피하여 창덕현 (昌德縣)으로 바꾸고, 고려의 제33대 창왕(昌王)이 왕위에 오르자 1389년 다시 왕의 이름을 피하여 흥덕현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흥덕현으로 유지되어 오다가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거 흥덕현, 고창현, 무장현이 군으로 승격되면서 고창과 무장이 전라북도 전주부에 소속되었다가 1896 년 8월 4일 칙령 제36호에 의거 흥덕군과 무장군이 전라남도에 편입되었다. 이후 1897년 9월 12일 다시 전라북도 땅이 되었다. 흥덕현은 현내, 일동, 이동, 일남, 이남, 일서, 이서, 북면 등
8면을 관할하였다.
안군으로 개칭하였다.
1906년 고부의 부안면이 흥덕에 편입되고 일부를 병합해 부
일제강점기 때인 1914년 3월 1일 부군통합령에 따라 흥덕군과
무장군이 고창군에 병합
되면서 현내면과 북면을 폐합하여 12개 법정리를 두는 흥덕면이 되었다. 이때 면소재지는 동사리에 있었다.
그후 1935년 3월 1일 고창군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오산면이 고창과 고
수면으로, 석곡면이 아산과 무장면으로, 벽사면이 신림, 부안면으로 면폐합 및 구역변경으로 고창군은 17개면에서 현재와 같은 14개면으로 개편되었다.
이때 벽사면의 사천리, 석교리
가 편입되어 흥덕면은 14개법정리가 되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로 신림면 제하리가 편입되고, 1987년 1월 1일 대통령령 제12007호로 신림면
송암리가 흥덕면에 편입되면서 흥덕면은
현재와 같은 16개 법정리에 41개 행정분리를 관할하고 있다. 흥덕면사무소 청사는 흥덕리 일대에서 3차례 이동이 있었다. 1973년 흥덕리 63번지에 건 축하여 사용하여 왔으나 사회적 여건의 변동에 따라 1998년 조성한 흥덕문화마을에 2001 년 7월 9일 동사리 437-57번지(문화2길 27)에 청사를 준공하고 준공기념비와 노송원을 조 성하였다.
2. 자연환경과 지명 1) 자연환경 영산기맥의 방장산 소갈재에서 분기한 변산지맥은 흥덕면 흥덕리를 이루는 배풍산을 만들 고 흥덕리 배산 서남쪽 낮은 봉우리 작은 배풍산이 자리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 나라 가 어려울 때 우리의 선현들은 호국의
선봉에 서서 이 땅을 지켜왔다. 호국의 영산 배풍산
과 동부마을에 있는 들샘골은 흥덕리를 형성한 지형이다. (1) 배풍산 변산지맥의 배풍산(△109.2m)은 흥덕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함께하는 호국의 영산이다. 정 유재란 때에는 야수 채홍국을 비롯한 의병들이 왜적과 싸워 승리를 이끈 배풍현전투의 격전 지였으며 민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 때 방어진지로써 현재는 안보교육장을 비롯하여 지역주 민의 근린생활시설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배풍산은 선인등주형(선인이 배에 오르는 형국)으 로 757년 상칠현을 상질현으로 하고 치소를 배풍산주변으로 옮긴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민의 오랜 숙원사업인 배풍산근린공원조성사업은 1996년부터 1999년까지 4년간에 걸쳐 조성되었다. 보조금 2억 4천만원과 지역주민이 뜻을 모은 1천 5백만원을 포함하여 총 2억 6천만원 예산으로 진입로와 등산로를 개설하고 가로등을 설치하는 등 기반시설을 하였다. 단풍나무, 벗나무, 동백, 철쭉, 쥐똥나무 등 조경식재, 자연학습장, 팔각정 건립 등 위락시설 을 갖추고 있으며 쾌적한 공간을 만들어 냈다. 녹차가 자생하며 남쪽 능선에 흥덕사, 옛 현 터 주변에는 흥덕중학교가
자리한다.
(2) 산. 골 배풍산 : 방장산 수산내맥으로 흥덕 뒤에 있는 산 작은배풍산 : 흥덕리에 걸쳐 있는 흥덕 배산의 서남쪽 낮은 봉우리 들샘골 : 흥덕리 동부마을에 있는 골짜기 옥거재 : 서일에서 배풍산과 작은 배풍산 사잇길을 넘어 가는 재
(3) 호남팔대지 흥덕 『정통풍수 전을선생과 함께 도산비기의 호남팔대지 고창 흥덕을 다녀와서』 풍수기행을 소 개한다. 도선국사 옥룡자가 지은 유산록(遊山錄)이 책으로도 출판되고 인터넷에도 필사본들이 많이 유포되고 있다. 풍수는 어디까지나 미용(未用)으로 남아 있는 명당자리를 찾아야만 개안(開 眼)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산록에 소개된 흥덕과 관련된 명당이다. 유산록 고창 흥덕편을 보면 68대가 두번 가는 호남의 대지(大地)가 흥덕에 숨어 있다고 한 다. 유산록에 따르면 "흥덕으로 가니 호암(壺岩)이 여기로다. 반등산(半嶝山) 일지맥(一枝脈) 이 절절(節節)이 기복하여 십리맥(十里脈)이 호위(護衛)하여 혈락평지(혈락平地)하였으니 굴 중(窟中)에 있는 혈(穴)을 어느 명안(明眼)이 알아 볼꼬"라고 하였다. 반등산은 현재 방장산을 말하며 방장산의 한 산자락이 혹은 솟았다가 혹은 내려앉으며 십리 를 오다가 평지에 혈이 맺혔다는 것이다. 유산록에는 또 "갑묘십절(甲卯十節) 간십절(艮十節)에 감계(坎癸)로 성봉(星峯)놓고 쌍귀추성 (雙鬼樞星) 특립(特立)하여 재결태극(再結太極) 했구나. 선운(禪雲) 백운(白雲) 양산간(兩山 間)에 호남대지(湖南大地) 숨었으니 좌우선인(左右仙人) 춤을 추고 옥호(玉壺)가 뛰는구나. 그릇 가서 재혈(裁穴)하면 대대(代代) 역신(逆臣) 나리로다"고 했다. 갑묘십절 간십절 이라는 말은 갑묘 방향으로 열번 기복했고 간방으로 열번 기복했다는 말이 다. 그리고 감계로 성봉을 놓았다는 말은 감방으로 맥이 흘러와 최종적으로 봉우리를 만들 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핵심은 성봉을 찾고 그 맥이 머문 자리를 보는 것이다. 쌍귀추성 특립했다는 것은 두개의 봉우리가 묘 자리 뒤에서 응하고 있다는 것이며, 선운 백 운 양산 간에 호남대지 숨었다는 것은 선운산과 백운산이 좌우에서 묘 자리를 옹호한다는 뜻이다. 옥호가 뛴다는 것은 명당 앞산을 일컬음이고 그릇 가서 재혈하면 대대 역신이 난다 는 것은 물과 방향을 잘 맞추지 못하면 해가 막심하고 정확한 혈자리를 짚어내기가 어렵다 는 말이다. 유산록은 이어 "혈성(穴星)이 원후(圓厚)하여 천재체(天載體)로 생겼으니 사대왕비(四代王妃) 칠대장상(七代將相) 부족 할 것 없겠구나. 산진수회(山盡水回)하였으니 명현재사(名賢才士) 간출(間出)하고 시대연조(時代年兆) 헤아리니 육십팔대(六十八代) 두 번 가리"라고 했다. 혈 성이 원후하다는 것은 묘 자리로 흘러온 맥이 두텁다는 것이고 나머지는 발복이 어떻게 이 루어지는가를 설명한 것이다. 옥룡자는 또 "용장혈졸(龍長穴拙)하여 말없이 묻힌 혈(穴)을 적선수덕(積善修德) 아니하고 예사(例事)로 얻을소냐. 호남의 팔대혈(八大穴)에 기중(其中) 보기 어려워라"고 강조했다. 이 말은 용은 길게 왔으나 혈은 분간할 수 없이 애매하게 맺혔다는 것이고 나지막한 곳에 묘 자리가 생겨 호남 팔대지 중에 가장 보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그 위의 선인등주(仙人登舟) 무흠(無欠) 장구(長久)할 것이오"라고 했으니 흥덕면에 호남팔 대지 1개와 선인등주형(선인이 배에 오른다) 등 큰 묘 자리가 두개가 있다는 의미다. 이 말만 듣고는 능숙한 풍수사라도 자리가 어디인지 쉽게 알기 어렵다. 강조하지만 옥룡자 유산록은 개안(開眼)이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필요가 없다. 하지만 개안이 된 사람은 어디 인지 금방 알아차린다. 위에서 성봉이라고 하는 것은 흥덕면 소재지에 평지에 솟아오른 배 풍산이다. 갑묘십절 간십절이라는 것은 배풍산을 만들어 오는 맥이 열십자로 교차한 것에서 비롯된 말이다. 방장산의 한 맥이 흘러와 끊겼다가 다시 기복해 배풍산을 만들고 배풍산과 명당자리가 방장 산을 바라보는 회룡고조혈이다. 굳이 따지자면 옥녀면경 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옥녀가 거 울을 대하고 있는 형국이다. 옥녀면경형은 배풍산과 면소재지를 지나 그 아래로 뻗은 작은 야산이 밭으로 개조된 다음 비교적 뒤가 두둑한 밭의 끝머리에 맺혔는데 이미 이(李)씨 성을 가진 사람이 묘를 쓴 상태 다. 이 자리에서 보면 묘자리 뒤로 솟은 두개의 봉우리가 보인다. 건좌손향의 남동향에 손파(巽破)다. 자리가 법에 맞게 잘 됐다. 하지만 너무 아래에다 썼다 는 느낌이 든다. 이 자리가 68대가 두 번 간다는 호남팔대지다. 이곳은 가히 고창의 명산들 이 좌우 앞 뒤를 감싸주고 있어 자연경관적으로도 좋을 뿐 아니라 명산들이 옹호하고 있는 한 가운데다. 그 위 선인등주형(선인이 배에 오르는 형국)은 팔대지 왼쪽 뒤에 있다. 이 자 리 역시 묘가 있다. 원래는 야산이었는데 밭으로 사용되다 보니 마을 사람이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이 자리는 자좌오향의 정남향인데 물은 손파다. 분명히 선인등주 형 명당이 맞지만 물 흐르 는 법과 맞지 않는다. 비석에는 계좌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 확인해보니 자좌를 놓았다. 좀 더 세밀히 살펴 고쳐야 한다. 하지만 호남팔대지나 선인등주나 발복이 오래가지 않을 것 으로 보인다. 유산록에는 68대 간다고 했으나 주위에 도로가 많이 나고 맥이 내려온 자리에 면소재지가 입주해 집터에 기운을 너무 뺏긴다. 따라서 방장산에서 길게 온 용맥의 기운은 받을 수 없 겠고 좌우에서 호응하는 큰 산들의 운은 매우 약할 것이다. 따라서 약 5~6대 정도 밖에는 가지 않는다.
야산에 혈이 생겼으니 누군들 쓰지 않았겠는가. 따라서 지금은 명당은 많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매우 보기 어려운 자리만 남아 있다. 출처 『정통풍수 전을 김화중선생과 함께 도산비기의 호남팔대지 고창 흥덕을 다녀와서』 http://blog.daum.net/differ8899/8289950 2) 의병활동과 배풍산 1) 임진왜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일어나자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의 격문을 보고 채홍국(蔡 弘國) 고덕붕 등이 고경명의 진영이 있는 금산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고경명이 이미 순절하
고 부대가 패하자 흩어진 병사를 모아 고향에 돌아와 채홍국의 세 아들과 종족 33명을 규 합하고 동지 고덕붕, 조익령, 김영년 등 92 의사와 360여 병사로 흥덕 남당에서 의병창의 의 혈맹을 맺었다. 채홍국은 의병장이, 고덕붕은 맹주장이, 조익령, 김영년, 지익수, 채명달, 채경달, 채영달, 한계상이 참모관이 되어서 해안을 사수했다. 또한 군량 400석을 모아 300 석은 의주행조로 100석은 곽재우 진에 보내기도 했다. 적이 순천에 침략하자 급히 출군하 여 추격하였다. 선조가 그 사실을 듣고 가상히 여겨 채홍국에게 중추부사를 재수하고 그 후 가선동추로 승진하였다. 2) 정유재란과 배풍산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작성하여 전국에 돌리고 야수의병장 채홍국 제봉맹주 장 고덕붕 조익령, 김영년, 조익수, 한계상 참모 등 500여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흥덕배풍산 흥덕읍성에서 왜적을 맞아 2일간 치열한 전투끝에 왜병 7명을 참살하고 부안군 상서면 상 량치까지 격퇴하였으나 상량치에 많은 왜적이 대기 잠복하고 있었다. 40여일간의 전투끝에 수백의 적을 사살하고 의병 119명이 순국전사하였다. 그 때의 일기와 동맹록이 김영년의 집안에 간직되어 있는데 모두 참모관 조공의 기록이다. 후인들이 그곳을 일러 호벌치라고 한다. 고종 9년 채홍국 의병장에게 병조판서를 증직하고 고덕붕 맹주장에게는 고종 30년 1893년 나라에서 승정원좌승지를 증직하였다. 3) 명칭과 유래 흥덕리의 분리는 흥동, 흥남, 죽일, 죽이, 서일, 서이, 서삼마을이 있고 자연부락으로는 흥동 의 정동, 흥남의 동부리,
죽일의 솔아물, 서일의 솔청, 서이의 대산모퉁이(죽현) 서삼의 목
화정이(목화정),서부리가 있다. (1) 흥동(興東) 조선후기 밀양박씨가 설기한 마을로 백제 때 이후 흥덕현의 배풍산에 고을의 성이 있어 동 쪽성문을 동문이라 하였다. 조선조 후기에 동부로 부르다가 1945년 경부터 흥덕리의 동쪽 마을이라하여 흥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주요시설로는 흥덕중학교, 흥덕노인정, 흥동회관(경 로당)이 있다. (2) 흥남(興南) 흥덕현의 배풍산에 고을의 성이 있어 성의 남쪽 마을 동부에서 흥동과 흥남으로 분리되어 흥남이라 부른다. 구 면사무소는 흥덕청소년문화의 집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마을회관(경로 당)이 있다.
(3) 죽일, 죽이 (죽현 竹峴) 1550년대 여진진씨 진간(陳侃)이 들어와 살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대나무가 많아 “대삽모퉁 이”로 부르다가 1960년대에 죽현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는 죽일과 죽이 마을로 분리하였 다. 주요시설은
죽일에는 흥덕우체국, 흥덕파출소, 각화사, 흥덕경로당, 죽이에는 흥덕농협,
흥덕초등학교, 흥덕제일교회, 광명교회가 있다.
(4) 서일.서이.서삼
(西一. 西二. 西三)
1800년대에 담양국씨가 터를 잡아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면서 서부로 부르다가 인구가 늘어나 1960년대 서일과 서이로 분리하였다. 흥성동헌은 조선시대 고을수령이 정무를 보던 관청으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7호로 등록되었으며 흥덕읍성 서문지가 있었던 지역이다. 서삼은 조선조 순조 때 밀양박씨가 설기한 마을이다. 목화나무가 잘 자라 정자나무 같이 크다하여 「목화정」으로 부르다가 흥덕리의 서쪽에 있 다하여 서부라부르다 1950년경부터 분리되어 서삼이라 하였다. 주요시설은 서일에는 원불교흥덕교당, 할머니 경로당, 서이에는 흥덕시장, 열녀 진정주의 처 임씨정려각, 효자 진간 정려각, 서삼에는 고창북고등학교, 보건지소, 예비군면대, 복지회관, 버스터미널, 서삼회관(경로당)이 있다.
<흥동회관>
<서이회관>
3. 인문환경 1) 유물 유적 흥덕리에는 조선시대의 관아건물인 흥성동헌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집강소를 운영하였던 곳 이며
배풍산에는 흥덕읍성터, 선운사 흥덕간 국도변에는 죽현유적이 있다.
(1) 흥덕현 읍성 성곽이란 성과 성의 둘레를 의미하여 적군의 침임을 막기 위하여 흙이나 돌로 높이 쌓아 올 린 큰 담으로 거주 주체에 따라 도성과 읍성으로 구분하고 지형에 따라 평지성, 평산성, 산 성으로 구분한다. 흥덕읍성은 거주주체에 따라 분류하면 읍성이며, 지형에 따라 분류하면 배풍산을 의지하여 쌓은 산성으로 분류된다. 고창군 흥덕면 산22-2번지 일대에 위치한 흥덕읍성은 조선 전기에 축조된 성으로 추정된 다.
1450년 (문종 즉위년)에 전라도 지역의 읍성 정비차원에서 실태를 조사한 결과 개축
대상으로 분류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의하면 『흥덕현의 읍성은 석성으로 규모는 295보』라 하며 1477년(성종 8)완공하였다 한다. 배풍산 7부 능선을 따라 토루(土壘)가 둘러져있는데, 읍성의 평면 형태는 밀각 장방형이며, 성의 둘레는 약 950m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표기된 규모를 포백척(46.66㎝)으로 환산 하면 826m이며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영조척(30.8㎝)으로 환산하면 974m이다. 『조선보물고적자료』에 의한면 규모는 1,440m인데, 외벽의 기저부를 기준으로 둘레를 측
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 상단부의 토루는 전체적으로 제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지만, 남동쪽의 토루는 배수지(당시 정수장)가 생기면서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토루의 폭은 약 7m 정도이다. 토루의 연결 상태에서 끊어진 부분과 곡부를 이루는 지형을 고려하여 문지를 추정할 수 있 는데, 현재 교운리 서문밖 마을과 이어지는 서문지와 북문지가 관찰된다.
차량이 진입 할
수 있는 도로와 두개의 등산로가 있다. 산의 정상부는 평탄한 대지가 동서 방향으로 길이 100m, 폭 30m 정도 길게 조성되어 있다 정상부 서쪽에 배풍정이 세워져 있고, 동쪽 평탄지에는 잔디, 좌우측면에는
벚나무를 비롯
한 수화목이 식재되어 운치를 더해준다. 성안에는 우물이 3개소 있었다고 하나 1개소는 근 린공원을 조성하면서 없어지고 현재는 1개소만 찾아 볼 수 있다. 와.자기조각들이 눈에 띈다.
읍성 내부 곳곳에서 기
배수지, 안보교육장, 체련시설, 휴게시설이 토루의 일부분이 훼
손한 채 조성되어 있으며, 정상부의 평탄 지역에도 배풍정과 기념비 등 근린공원이 조성되 었다. 흥덕읍성의 명확한 규명을 위하여 흥덕현 역사와 문헌학술조사와 병행하여 읍성 지표조사, 문화학술 조사를 통해 읍성의 일부를 부분적으로 복원하여 역사문화유산으로 보전이 필요하 다.
또한 1450년대에 개축 대상으로 분류되어 1477년(성종 8)에 완성되었고, 이후 임진왜
란 후 치소가 성 밖으로 이주하였다. 조선 전기 읍성의 구조가 잘 남아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라 한다. o 문헌을 통해서 본 흥덕읍성 신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흥덕읍성은 석성으로 주위가 3천 1척이고 높이가 9척이며 성안에 는 3개소의 샘이 있었으나 축성연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1872년 흥덕현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채색지도에는 배풍현 정상에 성황당이 있고 남 쪽 하단부에
관아건물인 내아, 동헌과 동문과 서문이 있다.
흥덕읍성은 시대에 따라 변화된 기록을 볼 수 있다. 문종 9권 1451.8.21 영인본 6책 423 면에 의하면 의정부에서 전라도 각 고을의 성이 규격에 맞지 않게 쌓여져 있다고 아뢰다. 이때 흥덕현읍성은 그 주위가 1천 7백 47척이고, 높이가 6척 8촌이며, 여장의 높이는 1척 8촌에 적대가 없고, 문 2개소에도 옹성이 없으며, 궁가가 3백 30호이고 ,해자는 성터가 높 고 험하여 파기 힘들다 보고하였다. 또한 성종 85권 1477. 10. 29 영인본 9책 523면에는 흥덕의 읍성은 북면을 뒤로 물려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5백 81척이고 높이가 7척 7촌이 었다고 전하고 있다. 호남읍지에는 배풍현에 석축으로 축성한 읍성이 있는데 주위가 3천 1척 높이가 9척이다. 축성년대는 알 수 없다 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읍성석축 주삼천일척 내유삼천(邑城石築 周三千一尺 內有三泉),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읍성주위이백구십오보 (邑城周圍二百九十五步), 대동지지에는 읍성 배
풍치상 주삼척임진왜란후이치성외(邑城 陪風峙上 周三尺壬辰倭亂後移治城外), 여지도서에는 고읍성 재현북 배풍치상 석축 주삼천일척(古邑城 在縣北 培風峙上 石築 周三千一尺)이란 기 록을 볼 수 있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의하면 토성지로써 타원상 이중으로 둘러 쌓여 있고 외벽 둘레는 약 800간(1,440m) 높이 10척, 조사당시 토축지가 남아 있는데 둘레 1,440m, 높이 4m이 다. 우리 선현들이 배풍산을 노래한 전해오는 몇 편의 시를 소개한다 o 정창손(鄭昌孫)의 시 “바다 곁한 큰 고을[雄藩]은 푸른 산봉우리 대해 있고, 구름 찌를 듯한 누대는 우뚝하게 바람을 임하네. 외로운 배는 사양(斜陽) 밖에 보였다 안보였다 하고,
먼 산구멍은 구름 속
에 아물아물한다. 한밤에 나팔소리 달 그림자 흔들고, 한 난간의 꽃 빛은 봄경치 곱게 하네. 바다는 큰 물결 몰아가서 고요한데, 물 넓고 하늘 길어 보는 눈이 통한다.” 하였다. o 김종직(金宗直)의 시 : 흥성 동헌에서 “백치(百雉)의 높은 성 천 길의 봉우리라, 올라보니 몸은 마치 영풍(泠風)을 탄 듯하네. 노 는 사람 웃음소리는 성누 밖에 들려오고, 갯가의 돛단배는 저녁노을 가운데 떠 있다. 한 길 은 동서쪽으로 어찌 그리 아득히 먼가. 두 세상 높낮음 저절로 흐릿하네. 오사모(烏紗帽) 반 쯤 벗고 깊은 생각 잠겼다가, 묻노라 황혼(黃昏)아, 북소리 몇 번 울렸나.” 하였다. “능가산(楞伽山) 몇 만 봉우리 구름에 덮였는데 매실(梅實) 익는 보슬비 동풍을 쫓아온다. 처마의 낙수 소리 자주자주 드문드문 속에 들려오고, 들 빛은 가깝고 아스라한 가운데 푸르 르다. 이미 문서처리 거두고 쓸쓸한데 돌아갔으니, 고깃배 따라 허무한 곳 들어가고 싶다. 피로한 행색, 포인(庖人 음식 맡은 사람)의 괴로움을 살피지 못하고, 다시 석잔술에 대도통 (大道通)만 생 각한다.” 하였다. 점필재 김종직(1431세종 13년 - 1492) 성종 23)은 대과에 급제하고 조정의 요직을 거쳐 유학자로서 명성이 높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조 10년 1464년 갑신년 8월 6일 세조 가 판종부시사 남윤과 함께 감찰 김종직을 만날 때 김종직이 전하께서 문신들에게 천문, 지 리, 음양,
율여, 의학, 복서 시사 등 7학 나누어 닦게 하셨는데 시사는 유자의 일이지만
나머지 잡학은 유학자가 배울 일은 아니라고 건의한 사건으로 세조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었 다.
그 후 4년 뒤 1468년(세조14년) 흥덕현감에 부임하였다.
무오사화로 인해 김종직은
부관 참시되고 이후 복권되어 문묘에 모셔졌다. o 유순(柳洵)의 시 “호남의 천만 봉우리 다 밟고, 문득 이 땅에 와서 또 바람을 타는구나. 파도치는 큰 바다 에 조수가 처음 오르고, 구름 개인 긴 공중엔 달이 중천에 떴다. 북궐 (北闕)로 마음 향하나 하늘이 깊고 멀어, 동산(東山)에 머무니, 빗발이 자욱하다. 난간에 기댄 몸 다시 일으켜 초 연(超然)히 생각하니, 온 세상 어느 누가 개 결하고 통달함을 알아줄 건가.” o “높은 쌍 깃발 걷고 푸른 봉에 머무르니, 여덞 창엔 공중 바람 모두 들어온다. 연기와
묏부리는 난간 밖에 점점(點點)이 보이는데, 구름 바다는 손가락질하여 돌아보는 가운데 가 물가물한다. 아침 해 오를 때는 맑고 시원한 것 더하더니, 저녁 안개 잠긴 후엔 가장 침침 하여진다. 올라 보니 난새[鸞]를 타고 가는 공상에 스스로 만족하여, 봉래(蓬萊)ㆍ영주(瀛 州) 가는 길 통한 듯하다.” 하였다. o 남곤(南袞)의 시 “깎아 세운 듯 잇닿은 천 만 봉인데, 아지랑이 하루살이는 큰 바람에 막혀 있구나. 한 지 역 좋은 풍경은 난간 밖 아침이고, 두어 점(點)의 제주(齊州 중국(中國)을 말하는 것)는 눈 에 보이네. 별포(別浦)의 조수 소리 어지럽게 떠들고, 석양의 산 기운은 멀리 부옇구나. 채 색 붓 없는 내가 그림으로 그릴 수 없어, 앞의 글제 주워 모아 회통(會通 모아서 하나로 합 친 책)을 만든다.” 하였다. o 박휘겸(朴撝謙)의 시 “정정(亭亭)하게 우뚝 솟은 만길 봉우리, 봉 꼭대기 높은 누각 먼 바람에 임하였네. 땅은 봉도(蓬島) 삼청(三淸) 경계에 연하였고, 사람은 소상(潚湘) 팔경(八景) 가운데 있다. 구름은 산허리를 두르고 아득하게 비꼈고, 물은 하늘 그림자 머금고 뿌연 하늘에 닿았네. 홀연히 먼 포구 바라보니 돌아오는 돛단배 빠르고, 뱃길[水道]은 멀리 이어져 한수(漢水)로 통한 다.” 하였다. (2) 흥성동헌 동헌은 고을 수령이 정무를 보던 청사로써 흥덕면 흥덕리 428~3번지(동헌길 4)에 소재한 흥성동헌은 흥덕현의 객사로 알려져 있었으나 1983년 보수 할 때 상냥문이 발견되어 흥성 동헌이라 하였다. 1894년 일어난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주화약에 따라 집강소를 설치 운영 하던 곳이다. 1976년 4월 3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7호로 지정되었다. 흥성동헌은 일반적으로 정당과 동·서익실로 되어 있다. 정당은 국왕의 위패를 안치한 곳이 며 삭망시 대소관원들이 여기에 모여 대궐을 향하여 배례를 하던 곳이었다. 동·서익실은 조정에서 파견된 사신의 숙소로 사용하던 곳으로 이에 조선시대에는 각도의 주 요한 읍성에는 동헌이 건립되었다. 이 건물은 흥덕현의 동현으로 선조 30년 정유재란 (1597)때 병화로 소실된 것을 영조 11년(1735) 현감김승연이 동헌과 함께 중건하였다. 이 동헌은 익실이 없는 특이한 유형의 것으로 그 구조와 수법이 매우 단소 소박하게 되어 있 다. 당시의 대문은 선운사로 이축되어 사천왕문으로 사용하였다. 이 건물은 보수작업을 하 기전 까지 한때 고창보건소 흥덕보건지소로 사용하였다.
<흥성동헌>
(3) 죽현리 주거유적 2002년 호남문화재연구연의 선운사와 흥덕간 도로확포장공사구간내 문화유적 시굴조사 보 고서에 의하면 흥덕면 소재지 남쪽을 둘러싸고 있는 구릉의 동쪽 줄기로 해발 30m 나지막 한 남사면과 북사면을 조사한 결과 구릉정상부에서 구 1기가 조사되었다. 동편에서 기와조 각, 자기조각등과 함께 분비 주공석이 노출되어 조선시대 건물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 다. (4) 열녀 진정주 처 임씨정려각, 효자 진간 정려각 흥덕리 서이마을 서부주유소 뒤에 위치한 일녀 진정주의 처 임씨정려, 효자 진간는 1633년 건립하여 1902년 중건하였다. 정려는 담장으로 막혀 진입이 불가능한 상태로 방치되어 있 다. 정려각 내에는 정려현판이 걸려있었으나 현제는 훼손되어 보이지 않는다. 효자 학생 진 간정려(陳侃 旌閭)는 종중때인 1536년 내려졌으며 열녀학생 진정주의 처 보안임씨정려는 인조때인 1633년 내려졌다. 이 정려각은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구조는 낮은 기단위에 화강암 주초를 놓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운다음 보, 창방과 결구하고 있다. 사방이 주변 집의 담장으로 막혀 진입이 불가능하며 유지관리를 하지 않아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2) 동학농민혁명과 흥덕 1894년 3월 20일(양 4월 25일) 무장기포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열기 위해 일어난 농민항쟁이었다. 무장의 부민들에게 군량을 징수한 뒤 보국안민창의라고 쓴 깃발을 앞세우고 고부로 향하였다. 고부관아를 점령하고 향토현전 투에서 감영군을 격파, 승리한 동학농민혁명군은 홍계훈부대가 군산항으로 상륙하여 들어온 다는 첨보를 접하자 정읍, 흥덕, 에서 4월8일(음력) 10시경 고부군 신점쪽에서 흥덕쪽으로 진격하여 민가에서 점심을 제공받아 먹은 다음 군기고를 부수고 화약과 창검, 조총등을 탈 취한 후 오후 2시경 고창으로 향했다. 흥덕에서는 접주 차치구가 활동하였던 곳으로 사회개 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차치구는 고부봉기에 참여하고 전주입성에 참가 하였다. 그러나 순창 피노리에서 전봉준이 체포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소성면 광조골 뒷산인 국사봉 토굴에 서 은신해 지냈다. 그 후 흥덕관아에 잡혀가 동학농민군과 함께 살해되었다. 그의 아들 차 경석(보천교 창시자)은 평상시 부친이 옆구리에 칼을 차고 다닌 다는 모친의 말이 생각나 어두운밤에 흥덕현 동학농민군처형장으로 찾아가 여러 구의 시체중에서 허리춤에 칼을 차고 있는 부친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한다. 차치구의 묘소는 정읍시 입암면에 있다. 그후 1899년 영학당사건에도 이희삼을 비롯한 흥덕인이 적극적으로 가담한 지역이었다.
3) 한국전쟁과 흥덕리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 전쟁으로 1950년 6 월 25일 새벽 4시에 38도선을 넘어 대한민국을 남침함으로써 발발한 전쟁으로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으로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국지적으로 분쟁이 발생하고 있다. 동존상잔의 비극 한국전쟁은 대한민국 전체는 물론 흥덕지역에도 많은 인적물적 피해를입었 다.
고창지역은 북한군이 1950년 7월 20일 밤에 쳐들어왔다. 그 후 배풍산에도 고창 빨치
산부대가 주둔하여 고창수복대가 3-4차례 수복작전을 시도하였으나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고창중학교 교정을 점령하여 획득한 중장비로 환강하게 저항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고창
지역 6.25전쟁 피살자 중에서 흥덕리 출신 희생자는 1950년 10월 20일 농업 국동수(남 68), 10월 25일 교사 국성수(남26), 농업 국수호(남 33), 11월 2일 의사 국재남(남 30), 농 업 국재희(남 28) , 농업 국진엽(남 32),의사 국기현(남 27)이 피살되었다.
4. 흥덕리의 기관 흥덕리에 흥덕파출소, 흥덕우체국. 고창군 예비군 흥덕면대, 흥덕보건지소, 흥덕농협, 고창부 안축협 흥덕지소가 있다. 1) 흥덕파출소 흥덕면 흥덕리 326-2번지(선운대로 3759)에 위치하며 1919년 1월 경찰관 주재소를 설치 하여 일본인 수석(지금의 파출소장)과 직원 2,3명을 배치하여 치안확보에 임하였다. 1995년 12월 20일 현 위치에 개축하였다. 흥덕파출소는 신림면과 성내면을 관할하고 있다.
<흥덕파출소> 2) 흥덕우체국 흥덕면 흥덕리 282번지(선운대로 3755)에 위치한다. 고객만족과 신뢰성 향상이 우리가 지 향하는 최상의 가치임을 깊이 인식하고 고품질의 우편,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선진우체국 을 이룩하여 국민의 삶의 질 향상과 지역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흥덕우체국> 3) 고창군 예비군 흥덕면대 흥덕면 흥덕리 566번지(서삼길 12-5)에 위치하며 향토예비군을 관리한다.전시 또는 비상 사태가 일어났을 때 본인이 소속된 직장이나 지역을 지키는 것을 주임무로 하는 향토방위업 무를 수행하고 있다.
4) 고창보건소 흥덕지소 흥덕리 590번지(서삼길 21)에 위치한 흥덕보건지소는 내과, 치과, 한방을 진료하였으나
흥
덕면소재지에 치과가 개원됨에 따라 현재는 내과와 한방을 진료하고 있다. 전염병관리사업 으로 매년 정기적으로 예방접종을 실시하고 마을을 순회하면서 진료하기도 한다.
<고창보건소 흥덕지소> 5) 흥덕농협 흥덕면 흥덕리 249-8번지(흥덕초등길 3)에 위치하며 2005년 12월 9일 흥덕,성내,신림농협 을 합병하여 조합원의 농업생산성을 높이고 조합원이 생산한 농산물의 판로확대 및 원활한 유통을 도모하며 조합원이 필요한 기술보급, 자금 및 정보등을 제공함으로써 조합원의 경제 적, 사회적, 문화적지위향상을 도모하는데 설립목적을 두고 경제사업, 경영지원, 교육지원, 신용사업을 하고 있다.
<흥덕농협> 6) 고창부안축협 흥덕지소 흥덕면 흥덕리 237-10번지(선운대로 3730)에 위치하며 농업인을 대상으로 금융여수신, 유 통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5.교육기관 1) 흥덕초등학교 고창군 흥덕면 흥덕리 273-1번지(흥덕로47-12))에 위치한 흥덕초등학교는 1915년 5월 1 일 개교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학교로서 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넓게는 국가와 민 족, 좁게는 지역사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여 왔다. 특히 고창의 관문이며 교통의 요지인 흥덕면 소재지에 위치, 고창의 문화와 교육의 중심지
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단위학교 중심의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교육활동을 전개하여 2003학년도에는 국가와 지역사 회가 요구하는 교육을 실현하기위해 학교교육과정과 학급교육과정을 합리적으로 편성, 그 운영을 전도에 공개 발표를 하기도 했다. 교직원 일동은 본교 교육의 기본 방향인 ‘학생 모두가 다 성공하는 교육’에 초점을 두고 첫째 창의성을 기르는 다양한 교육 과정을 운영하여, 다양한 능력을 개발하고 자기 주도적 학습능력 신장을 위해 창의와 자율에 바탕을 두고 있다. 둘째, 인성교육에 역점을 두어, 효를 바탕으로 한 인간의 존엄성인식과 다양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민주시민 육성에 기반을 두며 셋째, 지식 기반사회에 부응하는 학력신장에 힘써, 무한 경쟁시대에 생존과 번영을 위한 유 능한 인간을 육성하고 있다. 이를 위해 기본 기초교육의 충실한 이행에 최선을 다해 장차 ‘미래사회를 이끌어갈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건강한 어린이’를 목표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1909년 4월 1일 흥덕학원 4년제 설립인가 5월 1일 개교식 거행 1915년 4월 1일 흥덕공립보통학교 4년제로 교명개칭 1922년 4월 1일 학제 병경레 따라 6학년제로 연장 1937년 4월 1일 흥덕공립 제일심상소학교로 개칭 1941년 4월 1일 흥덕북공립국민학교로 개칭 1965년 10월 21일 교사 2 교실 50평 준공 1973년 1월 31일 본관 14 교실 개축 , 체육관 신축 10월 28일 전라북도 지정 체육과 연구 발표회 개최 1975년 3월 20일 야구부 및 배드민턴부 창설 1976년 10월 29일 교육감기 쟁탈 및 전북 배드민턴 연맹전 우승 1978년 10월 27일 제8 회 전북 소년체전 배드민턴 남 : 우승, 여 : 준우승 1981년 3월 1일 국민 학교 병설유치원 개원(1학급 40명) 1992년
12월 19일 교육부 장관 표창(학교경영 우수교)
1993년
3월
1일 하남초등학교 통합(남 28명, 여 48명), 급식소 설치 (전교생 4백54명)
1996년
3월
1일 흥덕초등학교로 개명
1998년
7월
2일 체육관(흥학관) 준공
2000년 11월. 17일 새즈믄 해 종합학습 발표회 2000년 11월
20일 학습부진아 운영보고(군)
2001년 10월
26일 도지정 병설유치원 공개 보고회
2002년 11월 16일 교육과정 실적전시회 및 종합학습 발표회 2002년 12월 .25일 2002학년도 학교경영 우수학교 수상 (전라북도 교육감) 2003년 10월 10일 전라북도교육청지정 교육과정 연구학교 공개보고회 2004년
8월
6일 도서관 공사
2005년
8월 20일 방송실(멀티실) 방송장비 설치
2007년
3월
1일 ~ 2009년 2월 28일 전라북도교육청 지정 연구학교(체육교육과, 2년)
2010년
2월 10일 제 87회 졸업식 거행(남 15명, 여 18명, 계 33명)
2010년
3월
1일 9학급 편성(남 73명, 여 66명, 계 139명)
2010년
9월
1일
제34대 임은규 교장
2011년
2월
9일
제88회 졸업식
29명(총 9,984명)
2012년
2월 10일
제89회 졸업식
29명 (총 10,013명)
취임
<흥덕초등학교> 2) 흥덕중학교 고창군 흥덕면 흥덕리 436번지(잿말길 21)에 위치한 흥덕중학교는 1952년 개교한 이래 학 생들의 전인교육에 헌신하고 있으며 신바람나는 학교 공동체 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중점 교육 활동으로, 첫째 교육과정 운영 충실로 기초 학력 정착, 둘째 바른 품성 도야로 올바른 가치관 형성, 셋째, 창의적 사고로 미래 사회를 개척해 나갈 수 있는 능력 배양으로 정하고 21세기 세계화시대를 주도할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인간 육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또 미래의 정보화시대에 발맞추어 학생 및 교사 모두가 정보 능력 향상을 위해 연구 노력하고 있다. 교목은 은행나무로 오랜 전통, 줄기찬 발전, 굳센 의지를 상징하며, 교조는 까치로 사람에게 희소식을 전달하는 아름답고 정겨움이 넘치는 길조로서 우아하며 순박함을 표상하고 청정, 순결, 평화 그리고 무언의 포용으로 봉사와 협동의 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교화는 백목련으로 숭고한 정신, 순결, 겨울의 모진 바람을 묵묵히 견디어 이른봄 순백의 꽃을 피우는 강한 생명력을 상징하며, 캐릭터는 흥이와 덕이로, 흥덕중학교의 교화인 목련 을 형상화, 본교생의 깨끗하고 순결한 모습과 희망찬 미래를 상징하고 있다. 1948년 4월 10일 흥덕학원 인가(1학급) 1952년 4월 3일 흥덕중학교로 개교(3학급) 2000년 9월 25일 후관 교실 13실 증 • 개축 2006년 2월 9일 제55회 졸업식(졸업생 총 7천8백 37명) 3월 1일 제24대 이재민 교장 취임 2009년 2월 28일 1학급 감축 (4학급) 2009년 9월 24일 강당신축 2010년 9월
1일 윤재중 교장 취임
2011년 2월 11일 제59회 22명 졸업식 (총 졸업생
8,015명)
2012년 2월 13일 제60회 38명 졸업식 (총 졸업생
8,053명)
<흥덕중학교> 3) 고창북고등학교 고창군 흥덕면 흥덕리 157번지(선운대로 3714-32)에 위치한 고창북고등학교는 학교법인 중앙학원이 운영, 세계화 시대, 정보화 시대, 인간화 시대에 알맞은 미래의 인재를 육성하고 자 자아실현의 신념으로 각자의 개성을 성실하게 발휘하는 사람, 근검 노작의 정신으로 사 회에 봉사할 수 있는 사람, 창조와 개척의 의지로 사회의 주체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사람 을 길러내고 있다. 고창북고등학교는 늘 변화를 주도하는 새롭고 건강한 명문 사학으로 ‘1등 학교 1등 교육’을 실현하기 위해 전 교직원이 가장 어려운 농어촌 지역의 교육여건 속에서 가장 피나는 노력 과 변신과 열정을 쏟고 있다. 그동안 국제화시대, 외국어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생활외국어 교육과정을 중심적으로 운영해 왓으며, ‘영어 캠프’와 정규교과 시간에 영어 중국어 원어민 교사를 초빙하여 직접 회화를 지도해오고 있다. 특히, 학교 역점사업으로, 농촌체험 중심의 ‘영어체험마을’ 및 주5일제 수 업에 맟춰 ‘그린스쿨 프로젝트’를 동시에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교원평가제와 학급경영평가를 실시하고 있으며, 학부모 수업공개의 날을 운영하여 수업의 질과 교사의 전문성을 높여 가는 건강한 학교문화 정착과 학부모와 지역사회가 만족 하고 신뢰하는 학교를 위해 ‘교사 10계명’과 학교교육서비스 헌장’을 제정하는 등 교육혁신 을 주도 하고 있다. 학생지도는 과거 단속 위주의 생활지도에서 탈피하여, 학생들이 올바른 가치관을 갖도록 감 화와 선도 위주의 인성교육을 통하여 준법정신을 키우고 있으며, 학생의 인권을 존중하고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면서 즐거운 학교생활을 누리도록 하고 있다. 특히 고마움을 알고 효를 실천할 수 있는 따뜻한 품성을 지닌 참사람을 길러내는 일이 도한 이 학교가 추구하는 길이기도 하다. 1947년 12월 15일 부안중앙학원 설립 1972년 3월 2일 고창종합고등학교로 개교 1980년 4월 15일 고창북고등학교로 개교 1986년 12월 3일 현 위치로 신축 이전 1987년 10월 17일 학급 증설 인가(18학급) 1988년
3월 9일 학교법인 이사장 이강수박사 취임
1988년
5월 31일 학교법인 중앙학원으로 명의 변경
2000년 11월 1일 고창북고등학교 축구부 창단 2001년 10월 25일 학급 변경 인가 (보통과 4학급, 정보처리과 1학급, 관광경영과 1학급) 2002년
8월 23일 학교법인 중앙학원 이사장 이흥수 박사 취임
2005년
8월 25일 학칙병경 인가(7차일반 5학급, 정보처리과 1학급)
2006년
1월 10일 제11대 김용성 교장 취임
2006년
2월 10일 제32회 졸업식 (졸업생 총 4천9백15명)
2005년
8월 25일 학칙변경 인가(보통과 5학급, 정보처리과 1학급)
2008년
8월 13일 학교법인 중앙학원 이사장 김길남 취임
2009년
8월
3일 고창 북부권 체육관 신축 2,253.57㎡(1층 991.28㎡, 2층 1,262.29㎡)
2010년
7월
1일 제12대 서정우 교장 취임
2011년
2월
9일 제37회 졸업식 (졸업생 총 5,469명)
2012년
2월 8일 제38회 졸업식
(총 5,589명)
<고창북고등학교>
6. 종교시설 1) 각화사 각화사는 대한불교 조계중 24교구본사 선운사의 말사로 흥덕파출소를 지나 흥덕노인정과 게이트장 좌측
흥덕리 332번지(흥동 1길 7-6)에 위치한다. 각화사는 1995년 5월 15일 건
축한 대웅전 108㎡, 요사채 64.8㎡를 갖추고 있으며
법회는 매월 음력 초하루 날 열린다.
불교는 석가모니(釋迦牟尼)를 교조(敎祖)로 부처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종교로 교리는 부처가 깨친 진리는 형이상학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존재하는 구체적 양식, 즉 연 기(緣起)로 설명된다. 이 세계는 신이나 브라만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의존 관계 속에서 인연에 따라 생멸(生滅)한다는 것이다. 인간생활의 실제문제와 부딪쳤을 때 그 문제의 해결에 주력하는 것이 부처의 가르침이고 곧 불교이다. 불교의 교리나 이론은 자연 히 인생문제의 해결이라는 실제적 목적이 앞서기 때문에 이론을 위한 이론이나 형이상학적 이론은 배제되었던 것이다. 부처는 사람마다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조건과 개인적 차이에 따라서
가르침의 내용을 달리하는 응병시약적(應病施藥的:병에 따라 각각 약을 지
어 줌)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획일적이고 일방적인 길보다 는 다양한 길을 택하였다. 불교의 교리가 너무 다양하게 전개되어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것 처럼 보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반면, 사람마다 지닌 사회적 조건을 충분히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불교의 관용성을 찾아 볼 수 있다.
<각화사> 2) 흥덕사 흥성동헌을 지나 배풍산가는 안내표지판 길을 따라 200여m 거리
배풍산을 배산으로 흥
덕리 464번지(흥덕사 16-7)에 흥덕사가 자리한다. 전면으로는 흥덕초등학교 위치하며 흥덕 면소재지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좌측으로는 왕 대나무는 흥덕인의 높은 기상을 상징하는 듯하며 사찰주변 배풍산에는 작설차가 자생한다.
<흥덕사> 3) 원불교 흥덕교당 원불교는 불교계의 신흥종교로 1916년 영광출신 소태산 박중빈이 창교한 종교이다. 원불교 총부는 익산시에 두고 있으며 고창지구에는 6개의 교당과 5개의 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주요교리는 법신불 일원상을 최고의 종지(宗旨)로 삼는데, 일원상의 신앙은 처처불상(處處佛 像) 사사불공(事事佛供)을 목표로한다. 어느 곳 어느 때나 신앙심을 지키어 천지(天地)·부모· 동포·법률의 4은(四恩)에 보답하는것을 불공으로 삼고, 자력양성(自力養成)·지자본위(智者本 位)·타자녀교육(他子女敎育)·공도자 숭배(公導者崇拜)의 4요(四要)를 실천함으로써 복락의 길 을 닦자는 것이다. 일원상의 수행이념은 무시선(無時禪)·무처선(無處禪)을 표준으로 하여, 언 제 어디서나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정신수양·사리연구(事理硏究)·작업취사(作業取捨)의3학 (學)을 수행하여 신(信)·분(忿)·의(疑)·성(誠)의 ‘진행 4조(進行四條:추진할 4가지)’로써 불신 (不信)·탐욕·나(懶)·우(愚)의 ‘사연 4조(捨捐四條:버려야 할 4가지)’를 제거하는 8조의 실행에 의하여 원만한 인격을 양성한다는 것이다. 이를 요약하면, 법신불 일원상을 대상으로 신앙 하고 수행하는 정각정행(正覺正行) 지은보은(知恩報恩)·불법활용(佛法活用)·무아봉공(無我奉 公)을 4대 강령으로 삼고 있다. 원불교 흥덕교당은 흥덕면 흥덕리 400-1번지(서일길 23)에 소재하고 있다. 1974년 건축한 교당은 120.26㎡로 2011년 부임한 이진관교무 주관으로 법 회는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 30부터 11시 30분까지 1시간, 시 30분부터 11시 30분까지 1시간
초하루 기도는 매월초하루 10
열리며, 교리공부는 매주 수요일 8시부터 9시 30분까
지 있다.
<원불교 흥덕교당> 4) 기 독 교 흥덕면 흥덕리에는 흥덕교회, 흥덕제일교회, 광명교회가 있으며 고창군 기독교연합회에 참 여하고 있다. 고창군 지역의 기독교 연합회는 1980년대부터 고창읍 새마을공원에서 부활절 연합 새벽예배를 드려왔다. 고창중앙교회와 고창성북교회가 격년제로 시설 및 봉사를 담당 하면서 연합으로 예배를 드렸다. 2002년부터 고창군 기독교 교회 연합회를 구성하였다. 고 창군 기독교 연합회에 참여하는 흥덕리에 소재한 교회이다. (1) 흥덕교회 흥덕면 흥덕리 390번지(서일길 12)에 위치한 흥덕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으로 『성 령과 사랑으로 이 지역을 구원하는 교회』를 표어로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 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그 사랑을 지역에 전파하기 위하여 설립된 교회이다.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 30분 주일 낮 예배, 오후 3시에 주일 찬양예배를 드린다. 매주 수 요일 오후 7시에 수요일 밤 예배, 매일 새벽 오전 5시에 새벽기도를 진행한다. 고창군 소재 작은 교회들의 자립을 돕고 있다. 변천과정을 보면 흥덕교회는 고창군 부안면 중흥리에 위 치한 오산교회의 몇몇 교인들이 현 면사무소 자리가 위치한 한 가정집에서 개척예배를 하면 서 시작되었다 한다. 문헌상 정확한 설립 년대를 알 수 없으나 흥덕교회 주보를 검토하여 볼 때 1934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흥덕교회는 1995년 현재의 위치에 신축 이전하였다. 2012년 현재 담임목사 강진호, 장로 4명, 전도사 1명, 권사 20여명, 신도수는 180여 명이 다.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 30분 주일 낮 예배, 오후 3시에 주일 찬양예배를 드린다. 매주 수요일 오후 7시 30분에 수요일 밤 예배, 매일 새벽 오전 4시 40분에 새벽기도를 진행한 다.
<흥덕교회>
(2) 흥덕제일교회 흥덕면 흥덕리 261번지(흥덕로 39)에 위치한 흥덕제일교회는 1988년 5월 15일 창립하였 다. 대한예수장로회 소속으로『예수님 사랑을 실천하며 지역민과 함께 성장하는 교회』를 표어로 한다. 2002년 교육관 및 사택을 준공하고 2007년 교육관옆에 문화공간을 시설한 벧엘교육관에서는 활기차고 건강한 노년기를 위해 노인 스스로 노년기에 대한 자긍심과 자 신감을 불어 넣어주기 위한 '건강백세 흥덕기쁨노인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노인대학은 2008년부터 매년 3월부터 11월 말 졸업식까지 흥덕제일교회 ‘기쁨노인대학’에 재학 중인 100여명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매주 수요일 주 1회씩 총 32회에 걸쳐 노인들의 건강증진을 위한 강좌와 체조 등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마련했다. 또한 매주 교육주제에 적합한 대학교수 및 전문강사를 초빙해 다양한 건강 강좌를 열고 건 강생활 실천을 위한 운동, 영양, 절주, 금연교육을 비롯해 정신건강을 위한 노래교실, 웃음 치료 등을 곁들여 노인들에게 활기찬 생활을 실천할 수 있도록 진행하고 있다. 흥덕제일교회는 담임목사 김선우, 장로 3명, 전도사 1명, 안수집사 4명,권사 8명, 신도수는 350여명이다.
<흥덕제일교회> (3) 광명교회 흥덕면 흥덕리 594번지(서삼길 11-21)에 위치한 광명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으로 『 새 일을 향하 실 주님만 바라보자 』를 표어로 한다. 1980년 12월 30일 박난순 전도사 가 중학교 주변에 교회를 설립하여 예비를 드려왔다.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 30분 주일 낮 예배, 오후 7시에 주일 찬양예배를 드린다. 매주 수요일 오후 7시에 수요일 밤 예배, 매일 새벽 오전 5시에 새벽기도를 진행한다. 한차례 이사 후
1990년 현 위치로 신축 이전하였
다. 송길용 담임목사는 2003년 1월 7일 제3대 목사로 부임하여 전도사 1명, 권사 9여명, 신도수는 120여 명이다.
<광명교회>
(5) 창령조씨 재실 흥덕 버스터미널을 지나 삼거리에서 산업단지방향으로 100여m 거리 흥덕리 495-15번지에 (선운대로 3705-4)창녕조씨 재실 흥덕사가 자리한다. 2011년 1월 16일 건축한 시멘트 한 옥식 재실(97.55㎡)로 출입문인 충모문(忠慕門) 좌측에는 세로로 창령조씨 상호공파(昌寧 曹氏上護 公波), 우측에는 현령호인문중재실(縣令好人門中齋室) 현판이 있다. 이 재실은 임 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어나가 구국의 선봉에 선 의사 참봉 조익령, 의사 참봉 조익수 등 선현을 배향하고
매년 음력 10월 14일 시제를 모신다.
의사 참봉 조익령 조익령의 호는 화엄이요 잠릉 참봉이다. 왜적이 침략하자 동생 순령 증손자 수문장 윤흠과 가산을 털어 군비를 마련하고 남당에서 의사 90여명을 규합하여 피를 나누어 마시며 같이 싸을 것을 명세하고 부안 호벌치 전투에서 많은 적을 섬멸한 전과를 거두어 참모관으로 추 천되었다. 순천에
침입한 적군을 석보에서 대파하고 개선하여 적성강에 이르러
동료들과
유식을 하면서 『천지에 달 밝으니 계절은 가을 같구나. 들판에 피비린내 갰으니 이때야말 로 우리병사 위로하자.』읊은 한편의 시가 배풍산 자락 그의 묘비에 새겨져 있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진위에 달려가 왜적을 격멸하였으나 다시 흥덕에 왜적이 침입하니 영 광과 해남의 의병과 합류하여 배풍령에서 왜적을 파멸시키고 장흥전투에 참가 4월 20일 순 절하였다는 기록을
호남절의록과 일기, 동맹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조익령은 위패는 동
생 익수와 함께 남당 추모사에 모셔져있다. 의사 참봉 조익수 조익수(曺益壽)는 휘는 순령, 자는 자일이며 호는 오곡이다. 사섬시봉사를 제수 받았으나 나 아가지 아니하고 윤현동 골짜기에 오막살이 집을 짓고 오동나무를 집주위에 심고 살아 오동 처사라 불렀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큰형 참봉공 손자 윤흠과 더불어 가족을 데리고 군량미를 마련하며 활과 화살 3백여 통을 가지고 야수 채홍국을 비롯한 의사 100여명과 함 께 남당에서 출전 할 것을 피로써 맹세하였다. 호벌치전투를 시작으로 순천 석보땅에 이르 기 까지 활약하다 1595년 사망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절의록과 일지에 기록되어 있으며 배풍산 남쪽 기슭에 있는 그의 묘비에 기록되어 있다..
<창령조씨 재실>
7. 주민의 삶 1) 풍류.풍습 (1) 아양율계 흥덕면 흥덕리에서는 흥덕 풍류객들이 1935년 경에 아양율계라는 풍류계를 조직하여 크게 풍류놀음을 했다 한다. 흥덕에 아양율계가 생기게 된 것은 인근 성내면의 三․九회(會)라는 율계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1935년경에 흥덕 출신으로 관청에 나가 일하다가 고향에서 휴양하며 풍류를 배우던 박태술이 주동이 되어 아양율계를 조직했고 실무를 맡아 운영했다 한다. 아양율계의 풍류회은 일회, 삭회, 춘추회로 나눌 수 있었다 한다. 일회(日會)는 매일 시간이 있는 흥덕에 거주하는 회원들이 석양쯤에 옥봉정에 모여서 회원들의 전공대로 악기 를 임시 편성하여 풍류 한바탕을 타고 헤어지는 것이다. 본중령에서 시작하던지 잔도드리 또는 염불도드리에서 시작하던지 그때 회원의 의견에 따라 시작하여 뒷풍류까지 탔다 한다. 삭회(朔會)는 매월 초순 흥덕회원들이 옥봉정에 모여 회비를 거두어서 음식을 장만하고 10 시쯤 풍류를 타며 음식을 나누어 먹고 즐겼다 한다. 춘추회(春秋會)는 4월과 9월에 마땅한 날을 받아서 하는 대회로 흥덕 풍류계원들 뿐만 아니라 창평 박석기, 태인 김용근, 정읍 박 홍규 등 전라남․북도의 유명한 풍류인들과 유명한 기생, 광대, 공인들을 불러들여 옥봉정에 서 3일간 떠들썩하게 풍류놀음을 벌리었다고 한다.대회 첫날은 옥봉정에서 풍류인들이 모여 풍류 한바탕을 타고 가객들의 가곡, 광대들의 소리, 기생들의 춤을 벌리고 술상이 들어오면 삼현육각 거상악을 길게 치는 연향에 들어 갔다 한다. 둘째 날은 첫날과 같이 놀음을 벌리 고 취흥이 오르면 회원들이 흥덕읍내를 한 바퀴 돌며 길놀이를 벌리었다고 한다. 앞에서는 삼현육각이 길군악을 치고 계원들과 기생들이 사이 사이 섞여 흥겹게 길놀이를 벌리었다고 한다. 셋째 날은 첫날과 같이 놀음을 벌리고 헤어졌다 한다. 아양율계는 10여년 간 계속되 다가 해산되었다 한다. 아양율계의 영향은 뒤에 정읍 초산율계를 조직하게 된 원인이 되었 다 한다. 아양율계 회원은 진명섭, 박태식, 국승원, 국휘영, 박태술, 박영근, 박주석, 김상호, 박태용, 국일주, 박태선, 진태풍, 편재준 등이었다 한다. 아양율계는 한국전쟁 때 보유자가 많이 사망하고 나서 해산되었다. 회원 가운데 오직 박주석 한분이 살아있으나 고령으로 연 주를 그만둔지 오래라고 한다. 출처 :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http://portal.nricp.go.kr/) (2) 기우제 여름철 한해가 계속 될 때 흥덕시장 상인들이 장옥에서 나와 흥덕양조장에서 흥동 정미소주 변사이 난장을 열거나 배풍산에 올라 기우제를 지냈다. 기우제는 비가 내리는 효험이 있을 때까지 의례를 지내기도 하였다. 제주(祭主)를 바꾸거나 제장(祭場)을 옮기고 주법(呪法)을 바꿔가며 반복하여 지냈다. 기우제에 참여하는 주민이 많으면 많을수록 공동 기원의 효력이 강한 효험을 발휘할 수 있다 믿고 있었다. 흥덕리에서 행한 기우제는 배풍산에
제사를 지내고 배풍산 정상에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놓으며 재액을 쫓아내는 형식으로 비가 내리는 것을 모방한 주술형으로 진행하여 왔다. 산 위에서 불을 놓아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는 가장 널리 행해진 유형으로 산 위에서 태울
나무나 짚은 각 호(戶)마다 모아 산으로 운반하거나 산에서 채취하는데 상당한 노동력이 필 요하다. 산에서 불을 놓으면 타는 소리가 천둥치는 소리같이 난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도 하며, 연기를 통해 천신에게 기원을 전한다고 생각했다. 신에게 의례를 통해 기원하거나 춤 또는 농악으로 위로를 하기도 하였다. 가뭄이라는 재앙 의 원인이 신의 노여움 때문이라고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배풍산 정산에 묘를 써 비가내리 지 않는다 하여 묘를 파 뼈를 지금의 안보교육장 주변에 놓아 두기도 하였다. 이처럼 기우 제를 지내는 풍습은 1970년대 중반 이후 단절되었다.
3) 마을의 인물 (1) 효 자 o 국사엽 본관은 담양이고 효행으로써 무인년에 명정되었다. 그의 정려가 흥덕리에 세워져 있었다. o 국양섭 흥덕면 흥덕리에 정려가 세워져 있다. 본관은 담양이고 사간경례(司諫經禮)의 후손이다. 18 세때 아버지가 병이 걸려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수혈했고 그후 계속하여 아버님을 극진히 봉양하였다. 1905년(광무 9년)에 통정대부에 증직된 효자이다.
(3) 정치인 o 국훈엽 흥덕면 출신의 정치가인 국훈엽은 1913년 5월 14일
고창군 흥덕면 흥덕리에서 태어났다.
1952년 5월 10일 실시된 제1대 도의회 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차점으로 낙선하 였다. 이후 1956년 8월 13일에 실시된 제2대 도의회 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고창군 제2선거구에서 출마하여 5,945표를 득표하여 당선되었다. 제2대 도의원의 임기는 1956년 9월 5일부터 1960년 8월 13일까지였다. o 김용원 흥덕면 흥덕리 357-2번지 거주 정치가인 김용원은 1932년 9월 19일 생으로 전북대학교 수의학과를 졸업하였다. 1991년 6월 20일 실시된 광역의원선거 결과 평민당이 전원 승리를 거두었다.
고창군의 경우 3명의 도의원을 선출하였는데 제1선거구는 고창읍, 고수면, 성송
면, 대산면, 제2선거구는 무장면, 공음면, 상하면, 해리면, 심원면, 제3선거구는 아산면, 흥 덕면, 신림면, 부안면이다. 김용원은 제3선거구에 평민당으로 출마하여
9,140표를 얻어 당
선되었다. 이어 1995년 6월 27일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으로 출마하여 6,859 표를 얻어 당선되어 예산결산위원장, 전라북도의회산업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선운산토산품판 매장건립, 배풍산근린공원조성 등 고창군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98년 6월 4일 실 시된 제2회 전국지방선거의 경우 고창군 선거구는 3개선거구에서 2개의 선거구로 조정되었 다. 제1선거구는 고창읍, 아산면, 심원면 흥덕면, 성내면, 심림면, 부안면이고 제2선거구는
고수면, 무장면, 공음면, 상하면, 해리면, 성송면, 대산면이다. 김용원은 무소속으로 출마하 여 6,396표를 얻었으나 새정치국민회의 이상복후보가 10,698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8. 산
업
(1) 흥덕시장 흥덕리는 흥덕면은 물론 인근의 부안면, 신림면, 성내면의 경제활동중심로써 요식.숙박업이 성업중에 있으며 5일시장이 있다. 고창군에는 고창시장, 사거리시장, 난산시장 등 4개의 시 장이 8.15해방당시 존재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향시로부터 이어온 전통적인 재래시장으로 고창장은 3일과 8일, 안산시장은 해리면에서 4일과 9일 , 대산시장은 2일과 7일, 산장은 5 일과 10일 개장되었다. 해방이후 시장기능이 상실되어 오다가 1956년 해리시장이 다시 개 설되고 1957년 고창시장, 1965년 2월 1일 흥덕시장과 무장시장, 1967년 대산시장, 1974 년 3월 12일 상하시장이 개설되어 5일마다 열리는 정기시장이 되었다. 2일과 7일은 대산시 장과 상하시장, 3일과 8일은 고창시장, 5일과 10일은 무장시장과 부안시장, 그리고 흥덕시 장은 4일과 9일 열리는 흥덕시장은 25개의 점포와 2010년 신축한 화장실을 갖추고 있으며 전형적인 시골장터로써 인근 주민들이 농산물, 수산물, 잡화류 및 생활용품을 판매한다.
(2) 농 업 흥덕리의 면적은 96.4ha로 전 25.4ha, 답 22.1ha, 목장용지 6.7ha, 임야 24.2ha, 대지 18.0ha이다. 전은 고추, 복분자, 채소류를, 답은 벼를 재배하며, 목장용지는 한우와 돼지를 사육하고 있다. 흥덕리의 소재지로 상업 등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관계로 농경지의 규모가 영세하다.
9. 주민편익시설 1) 흥성정 죽현에 있는 팔각정 흥성정은 4천여 만원을 투자하여 2011년 6월 건립하였다. 상냥문은 죽강 남대희선생이, 현판은 해리 추억사진관 정현 이창수가 썻다. 이 정자는 인근 지역주민 의 쉼터이며 대화의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흥성은 고창군 흥덕면의 옛 지명으로 흥덕현 고을에 읍성이 있는 지역이라 하여 별칭으로 흥성(興城)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흥성과 관련된 흥덕을 본으로 한 흥성장씨 시조 張儒(장유)는 尙質縣(상질현) 사람으로 신라 말에 란을 피하여 중국에 들어가 중국어를 배웠으며 고려가 개국한 뒤에 귀국하여 고려 광 종때 禮賓省
(예빈성)에 있으면서 중국의 사신의 접대를 맡아 하였다고 한다. 그의 6세
손 張基(장기)가 興山君(흥산군)(興城)에 봉해져서 본관)을 興城(흥성)으로 하였다. 씨는 흥덕장씨라 부른다
흥성장
<흥성정> 2) 흥덕청소년 문화의 집 농어촌청소년의 건전한 육성을 위하여 쉼터를 조성하고 청소년의 여가 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하여 구 흥덕면사무소 청사를 양여금 2억원과 군비 1억원등 총사업비 3억원을 투자, 리모델링하여 2002년 11월 15일 개관하였다. 부지면적 3,590㎡에 건물 539.46㎡ 규모로 정보인테넷실, AV감상실, 비디오 감상실, 동아리방, 문화사랑방, 무용연습실, 당구연습장, 다목적 홀 등 시설을 갖추고 있다.
3) 마을회관(경로당) 마을회관은 경노당과 병행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주방기구, 운동기구 등 편익시설을 갖추고 있어 여가 선용으로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흥덕경로당(회장 진종호)은 흥덕리 320번지(흥동1길 8)에 위치하며 대지 230㎡에 건축물 은 조석조 슬라브 건물로 56.1㎡로 2002년 9월 12일 건축하였다 할머니경로당(회장 정연순)은 흥덕리 401-19번지(서일길 25-5)에 위치하며 대지 394㎡, 조석조 슬라브건물로 1999년 12월 24일 건축하여 등록하였다. 흥동경로당(회장 이봉선)은 흥동길 13에 위치하며 건물면적은 78.75㎡로 2009년 2월 9일 등록하였다. 흥남경로당(회장 김방욱)은 흥남2길 12에 위치하며 건축면적 65.33㎡로 2011년 10월 16 일 등록하였다. 서이경로당은(회장 전용환) 흥덕리 384-6번지(서일길 3-4)에 위치하며 대지 103㎡, 조적 조 슬라브 건물 56.64㎡로 2003년 2월 15일 건축 같은 해 3월 10일 등록하였다.
10. 흥덕리의 현황 1) 성 씨 흥덕리에는 밀양박씨, 전주이씨, 김해김씨, 광산김씨, 여양진씨, 경주김씨, 경주최씨, 거창신 씨 등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을 설기한 성씨를 보면 흥동마을과 서삼마을 밀양박씨, 죽현마 을 여영진씨 서일마을은 담양국씨가 터를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o 밀양박씨 박승수(朴承秀)
박혁거세를 시조로하는 밀양박씨 박승수(1566-1629)가 인조반정을 피하여 1623년 은둔을 하고자 흥덕으로 왔으나 반정이 끝난 후에도 귀향하지 못하고 흥덕리에 입향하게 되어 후손 이 17대를 세거하고 있다. 입향세계는 4세(世)승수 - 자태 - 몽도 - 만동 - 종일 - 찬영 - 중혁 - 태겸 - 사신 - 대 유 - 후민 - 창구 - 제홍 - 연근 - 희봉 - 두기 - 용일이다. o 여양(驪陽)진씨 진간(陳侃) 청후(寵厚)를 시조로하는 여양진씨 진간이 조선후기 명천현감 매의(邁)의 자손으로 학문이 뛰어나 명망이 높아서 흥덕 훈도(訓導)로 부임한 것이 인연이 되어 그 후손이 세거하고 있 다. 입향세계는 14세(世 )간 - 처우 - 천수 - 세붕 - 정주 - 철남 - 효온 - 계우 - 의성 한적 - 석제 - 치복 - 영준 - 용근 - 우학 - 창익 - 하종 - 안수 - 윤식 - 경열이다.
2) 인
구
흥덕면의 인구는 1799세대에 3,620명이 거주하고 있다. 흥덕리는 흥덕면인구의 29.14%인 450세대 1055명( 남 526, 여 529)이 거주하며 흥동마을 50세대 111명(남 56, 여 55), 흥 남 47세대 97명(남 49,여 48),죽일마을 39세대 81명(남 36, 여 45), 죽이마을 81세대 196 명(남 105, 여 91), 서일마을 70세대 174명 (남 75, 여 79), 서이마을 85세대 207명(남 98, 여 109), 서삼마을 78세대 209명(남 107, 여 102)이다. 3) 마을 조직 (2012.1.1현재) 고창군은 리의 하부조직운영에 관한 조례에 의거 면단위 분리에 이장과 반장을 두고 일선 행정에 주민의 의사를 반영하고 주민을 참여시켜 향토발전을 촉진하기 위하여 분리에 새마 을개발위원회를 두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장의 임기는 2년으로 하고 지역주민의 의견을 수 렴하여 행정기관에 전달하고 리의 발전을 위한 자주적.자율적 업무추진과 지역주민간 화합 과 단결을 통한 이해조정에 관한 사항을 임무로 한다. 또한 새마을 지도자, 부녀회장, 노인 회장원이 마을의 기반조직으로 활동하고 있다. o 기반행정조직 마을명
이
장
새마을지도자
부녀회장
개발위원장
흥 동
이 재 정
김 영 주
권 금 수
배 대 자
흥 남
김 완 수
이 사 윤
박 복 순
권 재 원
죽 일
이 윤 호
배 만 기
전 순 복
마 선 희
죽 이
이 춘 식
유 인 기
양 지 원
신 복 중
서 일
김 권 종
남 궁 철
전 선 자
정 금 봉
서 이
송 광 선
장 형 종
여 예 남
박 동 은
서 삼
최 종 배
백 원 삼
최 부 덕
박 현 주
비
고
도움을 주신분 김권종 (65세
서일이장)
진종호 (89세 흥덕노인정 원장) 이춘식 (67세 죽이이장) 송광선 (55세 서이이장)
참고문헌 『고창군지』 고창군지편찬위원회, 고창군 2009 『모양성의 얼』 고창군 2009 재판 『고창군마을 유래』 고창문화원, 도서출판 청동, 2003 『전북지명총람 5』유재영, 민음사, 1999 『고창지역동학농민혁명사』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신아출판사, 조용호외 2, 2010 『흥성지』흥덕향교, 홍인문화사 2004 『고창군 비지정 건물문화재』(재)전주문화유산연구원 2009 『고창군문헌자료집』 고창학술문화연구회 , 청동기획 2009 『디지털고창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10 『고창의 문화유산』고창문화원
도서출판 청동, 2008
『제5대 고창군의회 의정백서』고창군의회, 고창보성인쇄소 2010 『행정구역사무편람』전라북도, 도서출판 문정사, 1998 『바르게살기운동』 바르게살기운동 흥덕면위원회, 정미문화사, 2008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http://portal.nricp.go.kr/) 『정통풍수 전을 김화중선생과 함께 도산비기의 호남팔대지 고창 흥덕을 다녀와서』 http://blog.daum.net/differ8899/82899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