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면 송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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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산리 형성

1.

위치와 지명유래

해리면(海里面) 송산리(松山里)는 고창읍에서 지방도 703호선을 따라 무장면(茂 長面)을 거쳐 해리면에 이르기 직전 왼쪽에 있다. 송산리는 자연마을 상송(上松)․하 송(下松)․행산(杏山)․임해(臨海)로 구성된 리명(里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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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성산

상송과 하송마을 뒤쪽에는 산성산(山城山)․산성메[山城山]․솔메[松山]라 불리는 산 이 있다. ‘산성산’ 또는 ‘산성메’라 불리는 것은 상송마을 뒤쪽에 봉홧불을 높 이 올린 터가 있기 때문이고, ‘솔메’라 불리는 것은 마을 뒤쪽 산에 소나무가 많 기 때문이다. 지금의 마을이름은 후자에 연유한 것이다. 그러나 본래 마을이름은 뒷 산에 푸른 소나무가 우거져서 ‘청산리’였다고 한다. 솔메의 소나무 풍경이 매우 아름다워 시인 묵객이 그 풍경을 시로 읊기도 하였다. 1894년(고종 31년) 동학혁명 (東學革命)이 일어나자, 위험에 처하게 된 많은 사람들이 부득이하게 한창 자라고 있는 방장(方長) 소나무 숲으로 피신하여 모두 안전하였다고 한다. 그 뒤부터 ‘청 산리’란 이름 대신에 ‘송산’이란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상송과 하송은 산성산 또는 솔메 기슭에 위치한 한 마을로 송산이라 불리나, 언덕 을 경계로 윗마을을 ‘상송’, 아랫마을을 ‘하송’이라 한다. 상송과 하송을 법정리


행정구획으로 보면, 법정분리로는 송산리이며, 행정분리로는 상송과 하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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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송산마을

상송과 하송마을 뒷산 솔메[松山]는 지리적 풍수형국으로 호랑이형국이라 하기도 하고, 와우형국(臥牛形局)이라 하기도 한다. 호랑이형국은 솔메에 범호(虎)굴이 있어 서 그렇게 부르는 듯한데, 이는 아마도 창녕성씨(昌寧成氏) 시조묘설화에서 호랑이 발자국이 등장하기 때문에 그것과 연관시켜 나온 것일 것이다. 와우형국은 송산 앞 쪽 홍송(紅松) 터에 소가 많이 모여서 송림산을 그렇게 부르지 않나 생각한다.

2.

인구현황

송산마을은 조선 제19대 숙종 7년(1681년)에 창녕성씨가 마을터를 마련하여 세 거하면서 ‘청산리’라 불렸다. 1894년(고종 31년), 동학혁명이 일어났을 때 마을 사람들이 송림(松林)이 우거진 솔메[松山]로 피신하여 모두 안전하게 되자 ‘송림’ 덕으로 마을사람이 무사했고 해서 ‘송산’이라 개칭하고, 마을 언덕을 경계로 ‘상 송’과 ‘하송’으로 구분하였다. 상송마을은 창녕성씨가 세거한 이후, 안씨, 이씨, 정씨, 김씨, 박씨, 윤씨, 한씨, 허씨, 황씨, 권씨, 송씨, 유씨, 나씨, 최씨, 강씨, 임씨 등이 거주하고 있다. 하송마을 역시 창녕성씨가 세거한 이후, 이씨, 김씨, 오씨, 최 씨, 정씨, 진씨, 남궁씨, 소씨, 정씨, 문씨 등이 거주하고 있다. 송산마을의 인구는 어려운 농촌 경기로 사람들이 많이 떠나면서, 2010년 9월 해 리면사무소 기록에 의하면, 상송은 53명이고, 하송은 54명이다. 남녀 성별로는 상송 마을은 남자 27명, 여자 26명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한 명 더 많고, 하송마을은 남자


31 , 여자 23명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여덟 명 더 많다. 연령별로는 상송마을은 10 대 미만 2명, 10대가 5명, 20대가 7명, 30대가 3명, 40대가 5명, 50대가 7명, 60 대가 9명, 70대가 11명, 80대가 4명이 거주하고, 하송마을은 10대 미만 4명, 10대 가 4명, 20대가 5명, 30대가 5명, 40대가 7명, 50대가 13명, 60대가 8명, 70대가 6명, 80대가 2명이 거주하고 있다. 현재 상송마을에는 17세대 45명, 하송마을에는 14세대 37명이 살고 있다. 성씨별 로는 상송마을에 송씨 19명, 안씨 6명, 이씨 3명, 정씨 3명, 김씨 2명, 박씨 2명, 윤 씨 2명, 한씨 1명, 허씨 1명, 황씨 1명, 권씨 1명, 송씨 1명, 유씨 1명, 나씨 1명, 최씨 1명, 강씨 1명, 임씨 1명이 살고 있다. 하송마을에는 성씨 15명, 이씨 6명, 김 씨 4명, 오씨 3명, 최씨 2명, 정씨 2명, 박씨 1명, 진씨 1명, 남궁씨 1명, 소씨 1명, 문씨 1명이 살고 있다.

3.

자연환경

송산마을 북쪽에는 청룡산(靑龍山)이 위엄을 자랑하고 남쪽에는 소나무가 우거진 송림산(松林山)이 있다. 청룡산은 아산면․해리면․심원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가 312m이고, 송림산은 무장면․해리면․상하면․공음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가 205.3m이다. 청룡산과 송림산 사이에 있는 나지막한 산성산(산성메, 솔메)이 송산 마을을 감싸고 있다. 마을 앞쪽에는 드넓은 들판이 있고, 들판을 지나 국도 703호선 에 이르려고 하면 해리천이 있다. 해리천은 송산을 거쳐 안산 쪽으로 흘러간다. 송산마을 입구는 두 곳이 있다. 첫 번째 입구는 국도 703호선 무장에서 해리 방향 으로 5km 가면 마을명이 새겨져 있는 자연석이 있고 조금 지나면 송산교가 있고 그 길을 따라가면 상송마을이 나온다. 두 번째 입구는 해리면에서 파출소를 약간 지나 버스터미널 왼쪽 길목에 소나무와 학이 그려져 있는 대리석 마을표석이 있고 그 길 을 따라 약간 더 가면 사거리에 마을명이 새겨져 있는 자연석이 있으며 그 길을 향 하여 약간 가면 송산교1이 있고 그 길을 따라가면 하송마을이 나온다. 각 마을을 들 어가는 입구에는 해리천이 있다. 상송마을 앞 쪽에는 상송제가 있는데 주민들은 ‘방아들저수지’라 하기도 한다. 송산마을의 길은 콘크리트로 포장하였는데 새로운 도로명은 ‘해리송산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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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해리면에서 들어가는 표지석(1)

<사진 4> 해리면에서 들어가는 표지석(2)

<사진 5> 송산교(1) 앞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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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송산교(1)

<사진 7> 송산교(1)에서 송산으로 가는 길

<사진 8> 무장면을 지나 해리면에 이를 때 송산 입구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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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송산교

<사진 10> 송산교를 지나 송산으로 가는 길

<사진 11> 상송제(방아들저수지)

4.

인물과 행의(行誼)

1) (1)

(成震哲)


(成三問, 1418~1456년)의 후손인 창녕성씨 성진철이 처음 들어와 살았다. 성진철은 자가 사현(士賢), 호가 청류재(聽流齋)로 박학돈행(博學敦行)하였다. 그는 성여원(成汝源, 1576년~?)의 넷째 아들이다. 성여원은 양주(楊朱) 장흥면(長興面) 일영리(日迎里)에서 출생하였으나, 광해군의 실정(失政)과 당쟁의 격화로 벼슬을 버리고 안분낙도(安分樂道)하기 위해 오지인 고 창군 대산면(大山面) 회룡리(回龍里)에 은거하며 아들 5형제를 두었다. 맏이 성진영 (成震英)의 후손은 회룡리에, 둘째 성진웅(成震雄)의 후손은 김제(金堤)에, 셋째 성 진명(成震明)의 후손은 영광(靈光)에, 다섯째 성진기(成震起)의 후손은 장성(長城) 에, 넷째 성진철은 해리면 송산에 거주하면서 후손들이 세거하였다. (2) 안경수(安慶壽) 죽산안씨(竹山安氏)의 후손 안경수(1848~1908년)가 처음 들어와 살았다. 안경수 는 창녕성씨 외손이다. 그의 모친(1827~1891년)이 인근 칠곡(七谷)으로 출가하였 으나 남편과 사별하고 외아들 안경수와 함께 친정으로 들어와 살게 되면서 세거하였 다. (3) 송산의 다양한 성씨 송산마을에는 입향조를 고증할 수 없는 여러 성씨가 있다. 상송마을에는 이씨, 정 씨, 김씨, 박씨, 윤씨, 한씨, 허씨, 황씨, 권씨, 송씨, 유씨, 나씨, 최씨, 강씨, 임씨 등 이 있고, 하송마을에는 이씨, 김씨, 오씨, 최씨, 정씨, 진씨, 남궁씨, 소씨, 정씨, 문씨 등이 있다. 2)

인물과 행의

(1) 성영덕(成永悳): 1843년(헌종 12년)∼1906년(광무 10년) 성영덕은 조선 말기 유학자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윤경(潤卿), 호는 송계(松 溪)이다. 문효공(文孝公) 성사달(成士達, ?~1380년)의 후인으로 송산에서 태어났다. 1894년(고종 31년) 갑오(甲午) 사마(司馬)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갔다. 1900년 중 종대왕비(中宗大王妃)의 능인 희릉(禧陵) 참봉(參奉)이 되었다가, 감조(監造, 임금 신주 받드는 데 감독) 공로가 있어 6품 벼슬에 올랐고, 수륜원(水輪院) 기사(技師) 로서 호남의 검쇄(檢刷)의 책임자인 호서쇄관(湖西刷官)을 지냈다. 국운이 점점 기 울어지고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이후 나라에 대한 근심이 바로 병이 되어 몰하였다. 항일투사 성기운(成璣運, 1877년~1956년)


성균진사송계공영덕묘갈명(成均進仕松溪公永悳墓碣銘)」을 지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국량은 크되 벼슬은 낮으므로 그 포부를 펴지 못했으니 애 석하다’ 하나, 이것은 공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벼슬은 비록 낮으나 식록(食祿) 이 있고 할 일이 있었으니, 그래도 가난하게 사는 것보다 낫지 않는가? 군자가 마땅 히 의리를 지키면서 행동할 뿐이니 그렇지 않으면 배 채우기만 계획하는 것이다”고 하여 성영덕의 의리를 칭송하였다. (2) 성영일(成永鎰): 1855년(철종 6년)∼? 성영일은 근대의 학자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치규(致奎), 호는 송호(松湖)이 다. 문효공(文孝公) 성사달(成士達, ?~1380년)의 후인이자 성택진(成澤鎭)의 아들 로 해리면 송산에서 출생하였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하며 여력(餘力) 으로 학문하여 경리(經理)에 밝았다. 근면 검소하여 가정을 잘 다스리고, 선조를 위 하면서도 백성 구휼에 힘썼다. 재사(齋舍)를 짓고 많은 책을 소장하여 자손을 가르 치니 온 마을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1902년(광무 6년)에 한성랑(漢城郞)에 서 혜민원(惠民院) 참서관(參書官)에 서임(敍任)되었으나 시사가 어지러워 나아가지 않았다. 이준서(李俊緖)가 편저한 송호실기(松湖實記)가 있는데,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송양사 앞에는 「송호성공영일혜휼비(松湖成公永鎰惠恤碑)」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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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송호 성영일의 비석

(3) 성인수(成寅修): 1879년(고종년 15)∼? 성인수는 근대의 인물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덕윤(德潤), 호는 학산(鶴山)이 다. 성사달(成士達)의 후인이자 송하(松下) 성영수(成永修)의 아들로 송산에서 태어 났다. 죽사(竹史) 정학원(鄭學源)과 수남(秀南) 고석진(高石鎭, 1856년~1924년)에


학문을 닦고 뒤에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년~1916년)에게 취정(就 正)하여 경학(經學)에 깊었다. 생업에 근검절약하고 부모봉양에 지극하였으며, 상사 (喪事)에는 슬픔이 지극하였고, 제삿날이 되면 항상 열흘에 앞서 재계(齊戒)하며 소 식(素食)하고 반드시 부모님이 옆에 계시는 것처럼 정성을 다하였다. 1910년 경술 국치 후에 세간의 영리를 멀리하고 학산재(鶴山齋)를 일으켜 아손(兒孫)을 가르치며 우유자정(優遊自靖)했다. 그의 유집으로는 학산유고(鶴山遺稿)가 있는데, 국립중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4) 성하정(成夏鼎): 1894년(고종 31년)∼? 성하정은 근대의 인물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동훈(東薰), 호는 송운(松雲)이 다. 성사달(成士達)의 후인이자 만취(晩翠) 성경수(成卿修)의 아들로 송산에서 태어 났다. 현완(弦窩) 고광선(高光善, 1855년~1934년)에게 배워 문망이 있었다. 어버이 섬김에 효를 다하고 어버이의 뜻을 조금도 어기지 않고 봉양에 진력하였다. 송림산 자락 솔메 기슭에 정사(精舍)를 짓고 그 정사 위에 세 칸의 영당(影堂)을 지어 아버 지 영정을 봉안하였다. 만취당(晩翠堂) 앞에 문루(門樓)를 지어 담락재(湛樂齋)라 하여 형제가 그곳에 담락하게 지냈다. 만취영당(晩翠影堂)에 미산(眉山) 성부(成溥, ?~1380년) 와탄(臥灘) 성여원(成汝源, 1576년~?), 송재(松齋) 성무조(成武祚, 1778년~1834년)의 위패를 모시어 봄가을로 천향하였다. 이 영당이 모태가 되어 훗 날 송양사(松陽祠)를 건립하게 된다. 송양사 앞에는 「송사사인성하정청심존애비(松 沙士人成夏鼎淸心存愛碑)」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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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송사 성하정의 비석


3) (1)

및 열부 (成魯修): 1871년(고종 8년)∼?

성노수는 근대의 인물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주백(周伯), 호는 취송(翠松)이 다. 성사달(成士達)의 후인이자 성영권(成永權)의 아들로, 송산에서 태어났다. 부모 봉양의 도리가 지극하고 감지(甘旨)로서 성경(誠敬)을 다하고 마음을 즐겁게 하였으 며, 남은 힘으로 학문에 힘썼다. 부친이 학슬증(鶴膝症, 무릎이 학의 무릎과 같은 증상)으로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 자 손수 부축하여 남을 시키지 아니하였고, 영지(靈芝)가 당제(當劑)라 하자 보랏빛 기운이 있는 영지를 바라보고 직접 가서 두 뿌리를 얻어 신효(神效)를 보았다. 모친 이 환저(患疽)로 고생하자 입으로 빨아내어 완쾌시켰다. 양친의 상사(喪事)에 슬픔 이 넘치고 조석으로 배묘(拜墓)하여 무릎 닿은 곳에 구덩이가 파였다 한다. 묘지 앞 에 석물(石物)을 올리고 재실도 세워 조상 받드는 일에 성력을 다하였다. 그의 부인 청도김씨(淸道金氏) 역시 남편을 도와 치가(治家)에 노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부모 봉양하기를 극진히 하였다. 하송마을 모종 옆에 비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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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성노수와 부인 청도김씨의 행적비

(2) 성한수(成漢修): 1884년(고종 21년)∼1956년 성한수는 근대의 인물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홍(汝洪), 호는 후송(後松)이 다. 성사달(成士達)의 후인이자 성영덕(成永悳)의 계자(系子, 양아들)로, 송산에서 태어났다. 어버이의 뜻을 받들고 봉양을 잘하였다. 아버지 병환에 상분(嘗糞)하고 상 사(喪事)에 너무 슬퍼하여 몸이 여윌 정도로 정(情)과 예(禮)를 극진히 하니, 전주


관찰사 이도재(李道宰, 1848년~1909년)가 조문 와서 보고 감탄하여 “양자가 이러할진대 자식 없는 것이 무슨 한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어머니 병환에 의원의 말이 노루피가 당제(當劑)라 하자, 꿈에 어느 노인의 지시 를 얻어 8년 연수(延壽)하도록 하였다. 생부(生父, 成永琦)가 기삼연(奇參衍, 1851 년~1908년)의 의병소(義兵所)에 의곡(義穀)을 보냈다가 줄포(茁浦)에서 구금되자, 강력히 항변하여 풀어내고, 병환에 상혈(霜穴, 서리구덩이)에서 화사(花蛇, 산무애 뱀)를 구하고 도수(屠手)에게서 우황을 얻었으며, 활고열지(割股裂指)하여 7일 연명 시키니 모두가 지극한 효성이 이룬 것이라 하였다. (3) 성하룡(成夏龍): 1898년~? 성하룡은 근대의 인물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운경(雲卿), 호는 해은(海隱)이 다. 성사달(成士達)의 후인이자 성인수(成寅修)의 아들로, 송산에서 태어났다. 천성 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버이의 뜻을 어기지 않고 봉양에 극진하였다. 부친 병환에 수개월 동안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간호하고 분상(糞嘗)을 했으며, 숨이 끊어지려는 순간에 열지(裂指)하여 6일을 연명하게 하고, 운명하자 곡읍(哭泣)이 사람들을 감루 (感淚)하도록 하였다. 조석으로 성묘(省墓)하여 무릎 닿은 곳에 풀이 마르니 반포지 효(反哺之孝)를 연상케 하였다. 묘 앞에 밤이 떨어져 근처에 심으니 눈 속에서 움이 돋았다 한다. 인근 사림들이 효행을 천양(薦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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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성하룡의 기행비

(4) 하동정씨(河東鄭氏) 하경현(河景賢)의 딸로, 창녕성씨 성근수(成近修)의 처이다. 시부모를 지극한 효도 로 섬기고 남편을 예(禮)로 받들었다. 남편이 기질(奇疾)을 얻어 백약을 써도 효험 이 전혀 없었다. 부인이 단(壇)을 쌓아 하늘에 빌어 대신하기를 원했으나 마침내 운


때에 부인의 나이 26세였다. 6세 여아(女兒)를 끌어안고 호읍(號泣)하며 “네가 남아였으면 내 무슨 근심이겠는가”라 하고 음식을 끊고 따라 죽으려 하다가 시부모의 깨우침으로 억지로 일어나 3년상을 마치고 조카 성하택(成夏澤)을 양자로 삼아 계후(繼後)하여 힘써 가르쳐 가문을 이었다. 시부모 상사에는 예제(禮制)를 극 진히 하니, 향천(鄕薦)이 있어 효열각(孝烈閣)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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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하동정씨의 행적비

(5) 낭주최씨(郎州崔氏) 송산에 두 명의 낭주최씨가 있어 효열(孝烈)이 극진하였다. 첫 번째 낭주최씨는 최종찬(崔鍾燦)의 딸로, 죽산안씨 안남연(安南淵)의 처이다. 성품이 효순(孝順)하여 시부모의 뜻을 받들고 봉양에 지극하였다. 남편을 공경으로 섬겨 가정이 옹목(雍睦) 하였다. 유인(孺人)의 나이 27세 때, 남편이 병을 얻어 약을 써도 효험이 없자, 하늘 에 빌기를 지성으로 하였고, 더욱이 남편을 위해 열지(裂指)하고 할고(割股)까지 하 였으나, 끝내 운명하였다. 남편이 죽은 이후에는 남편의 유촉(遺囑)을 받들어 늙은 시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고, 유고(幼孤)를 의방(義方)으로 가르쳤다. 각고 (刻苦)의 생활로 치가(治家)하여 가문을 일으키니, 향천(鄕薦)이 있었다. 두 번째 낭주최씨는 최종환(崔鍾煥)의 딸로, 성하길(成夏吉)의 처이다. 남편이 병 을 얻어 자리에 눕자 정성을 다해 간호하고 상사(喪事)를 당해서는 예제(禮制)에 따 라 극진히 모셨다. 시어머니가 안폐(眼廢)하여 전혀 앞을 보지 못하자, 항상 옆에서 시중들고 길쌈을 하면서도 극진히 봉양하니 향촌의 사림(士林)들이 그 효열을 천양 (薦揚)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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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7> 낭주최씨의 기행비

(江陵劉氏)

문희공(文僖公) 유창(劉敞, ?~1421년)의 후손, 유치열(劉致烈)의 딸로, 성난수(成 蘭修)의 처이다. 성난수는 성영덕(成永悳)의 아들이다. 유인(孺人)의 나이 20세 때, 남편이 원기가 허약하여 병을 얻어 위태롭자 열지(裂指)하고 할고(割股)까지 하였으 며 정화수(井華水)를 길러 북두칠성에 빌어 대신할 것을 원하였다. 남편을 여의는 성붕지통(城崩之痛)을 당해서는 음독(飮毒)하여 남편을 따라 죽으려 하다가 가인(家 人)의 구원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평생을 미망인으로 살고 화려한 것을 멀리하 고 고절(苦節)을 지키며 조카를 양자로 삼아 가문을 일으키니 군도(郡道)의 사림들 이 천양(薦揚)하였다.

5. 1)

종교시설 (松陽祠)

송양사는 고창군 해리면 송산리 산26에 있는 창녕성씨(昌寧成氏)의 사우로 1930 년에 창건되었다. 배향인물은 고려시대의 성사달(成士達)과 성부(成溥), 조선시대의 성여원(成汝源), 성무조(成武祚), 성경수(成卿修) 등이다. 1946년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구조는 앞면 3칸과 옆면 2판이고 맞배지붕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앞뒤의 기둥은 둥근기둥이고 중간에는 네모기둥이 있는데 화강암 위에 세워 놓았다. 기타 건물로는 풍욕루(風浴樓) 3칸, 강당(講堂)인 경현당(景賢堂) 3칸, 명성재(明聖 齋) 2칸, 수직사(守直舍) 4칸, 고사(庫舍) 4칸이 있다. 경현당은 14단의 계단 위에 3단의 자연석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지어진 건물로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무익 공(無翼工)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경현당 오른쪽에는 산성산에서 나오는 물을 끌어


만든 우물이 있고, 그 우물은 아래 작은 연못에 고인다. 연못에는 거북바위가 있고 거북바위는 유상곡수(流觴曲水)할 수 있도록 조성되어 술잔을 띄어 놓고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 하나, 현재는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경현당 앞쪽에는 큰 소 나무가 두 그루가 있었는데, 연못가에 있던 소나무는 없어지고 그 반대쪽에만 한 그 루가 우람하게 서 있다. 명성재는 기와를 얹은 팔작지붕 집으로, 자연석으로 된 주춧 돌 위에 네모기둥을 얹었다. 내삼문은 정명 3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자연석 주춧돌에 네모기둥을 세웠다. 외삼문인 풍욕루는 2층 누각집인데 화강암으로 된 호 박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2층에는 계자(鷄子) 난간을 둘렀다. 송양사는 현재 문화재자료 제163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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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송양사 풍욕루 건물(입구)

<사진 19> 송양사 내에서 본 풍욕루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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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풍욕루 편액

<사진 21> 경현당 건물

<사진 22> 경현당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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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경현당기 편액

<사진 24> 송양사 건물

<사진 25> 송양사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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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송양사 앞 벚나무

<사진 27> 송양사 내 소나무

<사진 28> 송양사 내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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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송양사 내 우물

<사진 30> 송양사 풍욕루 앞 송영일․성경수․성하옥의 비석

(1)

-성사달(成士達): ?∼1380년(우왕 6년)

성사달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역암(易菴)이다. 군수를 지낸 언신(彦臣)의 아들이다. 1341년(충혜왕 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사성(翰 林司成)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1352년(공민왕 1년)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 1362년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서 왕을 호종(扈從)하였다. 다음 해 왕이 흥왕사(興王寺)에서 논공행상을 할 때 그 공으로 추충협익공신(推忠協 翊功臣)이 되었다. 같은 해에 김용(金鏞)의 반란을 평정하여 1등공신이 되었다. 1364년 교주도병마사(交州道兵馬使)로 여진(女眞)의 삼선(三善)․삼개(三介) 등이 홀면(忽面, 지금의 洪原), 삼철(三撤, 지금의 北靑)에 침입하므로 정병 500인을 거 느리고 나아가 막았다. 그 뒤 삼중대광대제학(三重大匡大提學)에 이르렀으며, 창산부 원군(昌山府院君)에 봉해졌다. 1371년(공민왕 20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명나라 임금으로부터 천출기재(천


)의 칭송과 더불어 역암(易菴)이란 호를 받았다.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 년~1396년)은 송사달에 대한 가송을 지었으니 원문과 번역은 다음과 같다. , 歌不易兮奈吾何? 一年吟仰見靑天高, 星斗歷歷不可雙手摩. 二年吟 俯見東海深, 精衛影底無窮波. 三年吟聖人之道大無外, 向來所見却是蜂房與水渦. 瞠乎 莫知下手處, 心煩力竭其蹉跎, 收聲屛氣又數載. 一旦快馬馳平坡, 怳然若有得. 把玩以 自多, 靈臺方寸耳. 天地萬物昭森羅, 尊之使我配上帝. 褻之使我同驢騾, 分明萬化所根 底. 一有主宰無偏頗, 應用不竭如懸河. 精神調暢不知老, 强而名之安樂窩. 嗚呼乾道易 而已, 老人以居知無他. 應憐牧隱眼孔小, 撲撲有似投燈蛾, 長年燥吻論中和. 역암노인이 나에게 노래하길 요구하나 노래가 쉽지 않으니 내가 어찌하리오 일 년을 읊으면 높은 하늘을 쳐다볼 뿐 벌여 있는 별들은 두 손으로 만질 수 없듯 이 년을 읊으면 깊은 동해를 굽어볼 제 정위의 그림자 밑은 물결이 끝없는 듯 삼 년을 읊으면 성인의 도가 밖이 없이 커서 이전의 소견은 문득 벌집이나 소용돌이 같아 크게 놀라며 손쓸 곳을 모르게 되고 번민에다 힘도 다하여 실패를 느끼리라 소리 감추고 숨죽여 또 수년을 지내면 어느 날 갑자기 날랜 말이 평지를 달리듯 황홀하게 얻음이 있는 것 같아서 가지고 놀며 스스로 만족해지리 마음은 사방 한 치에 불과하지만 천지 만물이 소연히 나열되어 있으니 이를 높이면 나를 상제에 짝 지을 수 있고 이를 설만히 하면 나를 나귀와 같게도 만들리니 분명 오만 변화의 근원이 되는 것으로서 한 가지로 주재함이 있고 치우침이 없어 강하가 쏟아져 내리듯 응용이 무궁하고 정신이 화창하여 늙는 줄도 모르나니 그래서 억지로 안락와라 이름하였다네 아 하늘의 도는 참으로 주역일 뿐이니 노인이 이에 처함은 다른 뜻이 없으리 응당 불쌍히 여기리 목은은 안목이 좁아 등불에 날아드는 불나방과 같이 노년에 입이 마르도록 중화를 논하는 걸

문장에 뛰어났고, 글씨 또한 정예(精銳)하여 그 유적(遺跡)이 개성의 남대문종명 (南大門鐘銘)과 연복사종명(演福寺鐘銘)에 남아 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경륜지지(經綸之志) 충효지학(忠孝之學) 백세고풍(百世高風) 제우삼악 (齊于山岳)”이다. (2) 배향인물-성부(成溥): ?∼1380년(우왕 6년) 성부는 고려의 문신으로 호는 미산(眉山), 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 성사달(成士 達)의 아들이다. 1383년(우왕 9년) 문과에 이방원(李芳遠, 조선 태종)과 함께 급제 하고 여러 내외직을 거쳐 형부총랑(刑部摠郞)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 門洞)에 살면서 조선 태조가 대사간에 임명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태종이 동방 급제(同榜及第)한 정의(情意)로 예우를 극진히 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자신 은 고려의 신하이기 때문에 나아갈 수 없다면서 자제들에게는 조선의 땅에 사는 신 하로서의 직분을 다하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후 양주(楊州) 서산(西山)에 은거, 송산(松山)의 조견(趙 ), 사천(沙川)의 남을진(南乙珍)과 함께 ‘유양삼은(維楊三 隱)’이라 불리었다. (3) 배향인물-성여원(成汝源): 1576년(선조 9년)~? 성여원은 조선 중기의 의사(義士)로, 본관은 창녕, 자는 유인(由仁), 호는 와탄(臥 灘)이다. 고창 해리 출신으로, 성부의 6대손이다. 성리학자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년~1598년)의 제자로서, 학식과 품행이 뛰 어났으나 그의 문헌들이 유실되어 고증할 수 없게 되었다. 성혼이 일찍이 그에 대해 말하기를 “마음 갖기를 충효로서 하고, 순실하며 돈독하다”고 하였다. 1624년(인조 2년) 이괄(李适)의 변란이 일어나 왕이 공주로 파천(播遷)하자, 석 저(石渚) 신유일(辛惟一), 고봉(孤峯) 강시매(姜時邁) 등 여러 의사(義士)들과 함께 격문(檄文)을 띄워 군사를 모집하고 군량미를 모아 왕을 호위하러 갔다. 가는 중에, 적이 토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관서에 모았던 군량미를 모두 헌납하고 돌아왔다. 축문은 “학유연원(學有淵源) 이효위충(移孝爲忠) 윤문윤무(允文允武) 조두시풍 (俎豆是豊)”이다. (4) 배향인물-성무조(成武祚): 1778년(정조2년)∼1834년(순조 34년) 성무조는 조선 후기의 효자로, 자는 군경(君敬), 호는 송재(松齋)이다. 성여원(成 汝源)의 6대손이다. 천성이 순효(純孝)하고 독서를 즐겨 학문이 성취한 바가 있었다. 갑자기 부친이 병환(病患)에 들자 하늘에 기원하고 사당(祠堂)에 빌며 지혈(指血)로 회생시켰으나 끝내 운명하시니, 집상(執喪)을 예(禮)에 따라 슬픔을 다하고, 모상(母


)에는 늘 죽을 먹으며 여묘(廬墓)하였다. 청류재(聽流齋)에 은거하며 고을의 자제 를 가르쳐 문하에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1892년(고종 29년) 효천(孝薦)을 받아 조봉대부(朝奉大夫)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고 이듬해 정려(旌閭)되었다. 축문은 “백행만선(百行萬善) 시어사친(始於事親) 국전보려(國典褒旌) 사림정인 (士林精 )”이다. (5) 배향인물-성경수(成卿修): 1875(고종 12)∼1922 성경수는 조선 말기의 효자로, 초명은 철수(喆修)이고, 자는 보현(輔賢), 호는 만 취(晩翠)이다. 성무조의 증손이고, 성재(省齋) 기삼연(奇參衍, 1851년~1908년)의 문인이다. 의용이 단아하고 본래 받은 성품이 혼후(渾厚)하고 정직했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년~1916년)에게 종유하고 연경강례(硏經講禮)하여 학문이 깊 고 조행이 순독했다. 평소 문달(聞達)을 구하지 아니하고 정사(精舍)를 지어 후진양 성에 진력하니 사림이 추축(追逐)했다. 효성이 지극하여 사친(事親)에 지체(志體)를 함께 받들며 봉양하였다. 친병(親病) 수년에 몸소 수발하여 더러움을 남에게 보이지 않았고, 거상(居喪)에는 병중(病中)인데도 조석으로 전곡(奠哭)하고 삭망(朔望)으로 성묘(省墓)하여 슬픔을 다하였다. 한말에 기삼연이 거의(擧義)하자 그가 분연히 참 여했는데, 나이가 어리고 부모봉양을 해야 한다는 주위의 권고로 돌아와 학문에 매 진하면서도 의금(義金)과 의곡(義穀)을 의병청(義兵廳)에 보냈다. 축문은 “학구천인(學究天人) 의병춘추(義秉春秋) 가혜후학(嘉惠後學) 영세불휴 (永世不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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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성경수의 시혜불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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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2> 성경수의 적선비

(孝子增朝奉大夫童蒙敎官成武祚之閭)

효자각인 이 정려는 성무조(成武祚)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892년(고종 29년) 조정으로부터 효천(孝薦)의 명을 받아 세운 것이다. 성무조는 조봉대부 동몽교관을 증직받았다.

<사진 33> 성무조의 정려


<사진 34> 성무조의 정려

3)

(松溪亭) 창녕성씨인 진사 성영덕(成永悳, 1846년~1906년)이 귀향하여 지은 정

자이다. 조선 말기 국운이 쇠약하여 이욕을 탐하는 신하들은 기회를 엿보면서 저자 에나 산에나 들에 온갖 명목을 붙여서 세금을 받았다. 당시 성영덕은 수륜원(水輪 院) 기사(技師)로서 호남의 검쇄(檢刷)의 책임을 겸하고 있었는데 신하들의 세태(世 態)를 차마 볼 수 없어 서책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와 은거하며 정자 하나를 지어 놓 고 송계정이라 하였다. 송계정은 문주자오(文酒自娛)하고 또한 담소를 나누는 장으 로 이용되면서도 은밀히 독립자금을 조달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한다. 1919년 수 리 보수하였고, 그의 아들 성한수(成漢修, 1884년~1956년)가 1921년 그리고 1933년 중건하였다. 동강(東江) 김영한(金寗漢)은 성영 덕을 기려 “기국(器局)과 의기(義氣)가 있어서 청세(淸世)의 책임을 졌다”고 하 면서, 송계정에 대하여 “이 건물로서 당일의 전형을 볼 수 있으니 이를 일러 어버 이를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잊지 않는다면 어버이의 전형을 바꾸지 않을 것이고 바 꾸지 않는다면 효가 되니 근본을 튼튼히 하고 근원을 맑게 함은 공에게 있고, 근본 을 북돋아 시들지 않게 하고 물줄기를 인도하여 마르지 않게 함은 자손에게 있다” 고 하였다. 성영덕은 송계정에 관해 칠언율시를 썼다. 松靑溪白洞霞紅 就 成欄眼界通 曾往奔忙如夢裏 晩來消遣可詩中 高節疎癯經幾雪 眞源淸淨動廉風 香社蘭亭千載下 后人敢望趣能同

솔 푸르고 시냇물 희니 고을의 안개 붉었더라 고요한 자리에 난간 이루니 안계가 통하네 과거의 분망함 꿈속 같은데 만년의 소일거리 시 속에 묻히는 것 가하더라 높은 절개 성글고 야위었으니 몇 번이나 풍설을 견디었는가 참된 근원 맑고 맑으니 청렴한 바람이 움직이더라 향사와 난정 천년 아래에 뒷사람 감히 취미가 같기를 바라네


의친왕(懿親王)이 쓴 액자와 당시 명사(名士)였던 윤용구(尹寗求)․민병 승(閔丙承)의 시문이 소장되어 있었다. 사람들에 의하면, 송계정 주변을 소나무와 대 나무가 감싸고 있어 여름 경치가 아주 좋았고, 특히 가야금 연주하는 소리는 매우 뛰어났다 한다. 송계정은 애석하게도 다른 주인을 만나 2003년 임실군 운암면 옥정호가로 옮겨져 ‘송하정(松下亭)’이라 명명되었다. 현재는 송계정 흔적만 알 수 있는 터가 있고, 그 터 주위에 교회가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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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5> 옛 송계정 터

에덴교회

본 교회는 윤도울 목사가 2006년부터 개척하기 시작하여 2008년 2월 5일, 송림 산 기슭 송산리 170번지에 설립하여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기독교 사랑의 실 천 일환으로 에덴의 마을 노인복지관을 지어 노인봉양에 힘쓰고 있다.

<사진 36> 아름다운 에덴교회


6.

미풍양속

1) 하송 주민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정월대보름이 되면 줄을 만들어 당산에 줄 을 돌리고 당산제를 올렸다. 마을주민은 대보름이 되기 하루 전부터 당산나무 주위 에서 풍악을 울리며 간단한 제를 올리는데, 당산나무는 상송과 하송마을을 나누는 언덕에 있었다고 한다. 현재 나무는 없고 그 흔적으로 콘크리트 길만이 남아 있다. 그 당산나무가 없어진 후 방아들저수지로 불리는 상송제 주변 당산나무에서 먼저 풍 악을 올리고 그 다음 상송마을 정자나무에 풍악을 올린다. 마을의 당산제 기원은 알 수 없으나, 현재 옛날과 같은 거창한 당산제는 거행하지 못하고 간략하게 당산에 줄 을 돌린 다음 짚으로 이엉을 만들어 감싸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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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당산나무가 있던 자리

<사진 38> 상송제에 있는 당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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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상송마을의 정자나무

<사진 40> 당산

2)

성인식 성인식이 있었다. 마을주민의 자제가 성인이 되면, 송양사(松陽祠)에서

제(祭)를 지낼 때 성인의례를 함께 거행하였다 한다. 이 때 성인이 된 자제의 집안 에서는 약간의 음식과 술을 장만하여 웃어른에 대한 공경의식을 표하였다. 현재는 마을의 청소년이 적고 고령화로 인하여 사라지고 없다.

7.

시설과 휴식공간

1) 마을의 시설 마을에는 초가와 한옥이 있었다. 초가지붕은 새마을운동 이후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량되었다가, 현재는 양옥, 플라스틱 기와지붕이 많다. 상송에는 우물 터가 있다. 우물은 상송과 하송마을 주민들 모두 공동으로 사용하


. 그 위치가 상송에 있기에 하송 주민들은 멀리 우물을 길러다가 식수로 사용하 였다. 현재 우물 터는 송산리 상송 168-1번지 개인집 안에 있으나, 우물이 아니라 늪지처럼 되어 있다. 송산마을 길은 콘크리트로 확포장되어 있고 하수구도 잘 정비되어 있다. 상송마을 은 산성산 기슭에 있는 송양사까지 콘크리트로 포장하고 하송은 골목골목 확포장되 어 있다. 하송마을에는 무장향교 전교 및 해리면 노인당 회장을 역임한 성하윤(成夏 潤)의 송적비(頌蹟碑)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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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송산마을 우물 터

<사진 42> 성하윤의 송적비

2) 상송․하송마을에는 각각 회관이 있고, 하송에는 모정도 있다. 상송마을의 휴식공간


해리송산길 114번지에 상송 경로당이 있다. 그리고 마을 어귀의 정자나무가 있다. 상송마을 경로당은 2001년 무렵 완공되었고, 마을회관으로도 쓰이고 있다. 하 송마을의 휴식공간으로는 해리송산길 71번지에 하송마을회관이 있다. 그리고 마을로 들어가는 어귀에 모정이 있으나 이름은 없다. 마을회관은 2008년 무렵 완공되었고, 경로당으로도 사용하고 있다. 경로당은 노인들이 모여 담소도 나누는 장소로 쓰이고, 정자나무와 모정은 농사일에 더위를 피하거나 담소를 나누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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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상송마을 경로당

<사진 44> 하송마을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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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숨은 이야기

1)

효행

45> 하송의 모정

효행이 지극하였다. 부모의 장례 후, 매일 호곡(號哭)하며 슬픔을 다하였 다. 그 호곡하는 곳에 혹설(酷雪)이 내리는데도 성무조의 자리에는 눈이 녹아 쌓이 지 않았다. 호곡하고 돌아오며 눈 속에 막대를 꽂았는데 이듬해 봄철 그 막대에서 움이 돋았다 한다. 2) 장군을 보호한 방장 소나무 마을 뒷산 솔메에는 우람한 아름드리 방장 소나무가 있었다. 주민들은 난이 일어 날 때마다 소나무가 많은 솔메로 가서 피신하였다. 적군에게 쫓기던 어느 장군이 송 산마을 뒷산 솔메로 피신하는데 적군들이 화살을 마구 쏘았으나, 날아오는 화살들은 모두 아름드리 방장 소나무에 꽂히고 장군을 맞추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사람들 은 방장 소나무가 장군의 생명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3) 마을 송학(松鶴) 이야기 마을 뒷산 송림산에는 백로(白鷺)가 둥지를 틀고 살았는데, 그 수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1960년경 송림산의 소나무를 벌목한 이후에는 백 로가 더 이상 서식하지 않아, 융성한 마을의 기세도 예전 같지 않다고 한다. 4) 상송마을 앞 송림 터 상송마을 앞 송림 터는 우람한 홍송(紅松)이 가득하여 그 모습이 매우 미려(美麗)


, 마을주민뿐만 아니라 인근 주민들도 저자에 가면서 쉼터로 많이 이용하였다. 특히 해리 5일장이 되면 군민들이 송산마을을 지나며 이 송림 터에서 휴식을 취하기 도 하고, 또한 소를 끌고 온 사람들은 이곳 언저리에 소를 매어놓고 잠시 쉬다가 해 리 우시장으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이 터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 군인들이 양마장(養 馬場)으로 사용하면서 사람들의 쉼터는 사라졌다. 1960년 농지조성으로 인한 벌목 작업으로 홍송은 거의 사라지고 현재 몇 그루만 남아 있고 당산나무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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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46> 상송마을 송림 터의 소나무

태극무늬 난간

송양사 외삼문 풍욕루를 지나 14단의 계단 위를 올라가면 경현당이 있다. 이 경현 당의 여섯 개 기둥 앞에는 철제 난간이 있다. 이 철제 난간 한 가운데에는 태극무늬 가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쇠붙이란 쇠붙이를 강제적으로 모조리 일본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태극무늬 철제 난간은 선비들이 강력한 반대로 가져가지 못하였다. 이 철제 난간에는 선비들의 강한 항일의지가 서 려 있는데 보수처리가 되지 않아 녹이 슨 채 세워져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9.

소득

1) 농경생활 송산 주민들은 산성산 기슭을 따라 밭을 일구고, 나지막한 야산을 개간하여 논을 만들기도 하였다. 절기에 따라 가을철 수확이 마쳐도, 논에서는 아낙들이 부업으로 짚을 묶으며 생업을 도모하기도 하고, 비닐하우스에서는 말라버린 콩을 타작하여 수 확하는가 하면 또는 상추를 심거나 무나 배추 등의 채소를 수확하며 시장에 판매하


생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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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겨울 아낙들의 농사 모습

<사진 48> 비닐하우스에서의 콩 타작준비

<사진 49> 비닐하우스에서 무 출하 후 모습


3)

변천과 축산 소득작물은 주로 고구마, 고추, 콩, 채소, 벼 등이었다.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으나 복분자를 많이 심어 소득을 올리고 있다. 특히 상송, 하송 두 마을에는 비닐 하우스 시설을 통해 무, 배추, 상추 등을 재배하여 고소득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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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복분자 재배

<사진 51> 고추 재배

<사진 52> 배추 재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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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무 재배

<사진 54> 비닐하우스 상추 재배

<사진 55> 비닐하우스 무 재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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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비닐하우스 외관

10. 1)

이장 이장은 65년 4월 5일 이전에는 송산 1․2 등으로 구분하여 두었다가, 이후에

는 이장과 리참사를 두었다. 72년 1월 1일부터 송산리에 포함한 상송․하송․행산․임해 에 각각 이장을 두었다. 송산 1리 이장 성하율(成夏律)은 1965년 4월 5일에 그만두고, 송산 2리 이장 성 하갑(成夏甲)은 1964년 9월 1일에 시작하여 1965년 4월 5일에 그만두었다. 그 다 음 송산리에는 이장으로 소재학(蘇在學), 리참사로 안병기(安秉奇)․성영기(成榮基)․소 원옥(蘇源玉)․김성태․소원업․김용택․소성호 등이 있었다. 그 기간은 다음과 같다. 이장 리참사 리참사 리참사 리참사 리참사 리참사 리참사

소재학: 안병기: 성영기: 소원옥: 김성태: 소원업: 김용택: 소성호:

1965년 1965년 1965년 1966년 1970년 1970년 1971년 1971년

4월 5일~1971년 3월 10일 4월 5일~1965년 5월 1일 5월 1일~1970년 5월 15일 11월 1일~1969년 1월 31일 6월 1일~1970년 9월 1일 9월 15일~1971년 1월 31일 2월 1일~1971년 2월 28일 3월 1일~1971년 12월 31일

1972년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상송마을 이장을 보면 아래와 같다. 성동기: 1972년 1월 1일~1973년 12월 1일 성하식: 1973년 12월 1일~1975년 3월 31일


: 성윤기: 성하조: 성남기: 안영환: 성하승: 성영종: 성재기: 성정열: 안영환: 성영종:

1972

3월 31일~1988년 12월 30일 1월 1일~1990년 12월 1일 1월 9일~1991년 11월 4일 11월 4일~1992년 1월 3일 1월 3일~1995년 2월 9일 2월 9일~1998년 5월 21일 5월 22일~2000년 9월 1일 9월 1일~2005년 12월 31일 1월 1일~2007년 12월 31일 1월 2일~2009년 12월 1일 1월 1일~현재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하송마을 이장을 보면 아래와 같다. 성하갑: 성종순: 성하갑: 성종순: 김재권: 성종순: 성남기: 성봉업: 김정선: 성종호: 이재종: 문명옥: 김재권: 성남기: 김정선:

2)

1975년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1995년 1998년 2000년 2006년 2008년 2010년

1972년 1973년 1975년 1982년 1988년 1988년 1991년 1994년 1996년 1998년 2001년 2004년 2006년 2010년 2010년

1월 1일~1973년 5월 1일 5월 1일~1975년 7월 10일 7월 11일~1982년 1월 1일 2월 1일~1988년 4월 10일 4월 11일~1988년 5월 30일 6월 1일~1991년 11월 4일 11월 4일~1993년 12월 31일 1월 3일~1995년 12월 31일 1월 9일~1998년 1월 3일 1월 6일~2000년 12월 31일 1월 1일~2003년 12월 31일 1월 6일~2005년 12월 1일 1월 1일~2007년 12월 31일 1월 1일~2009년 12월 31일 1월 1일~현재

및 부녀회

상송마을의 새마을지도자는 안영환이고 부녀회장은 임동순이다. 하송마을 새마을 지도자는 이재종이고, 부녀회장은 진봉순이다.

주신 분

성동기(成東基), (남 74세, 송산마을) 안병영(安秉永), (남 72세, 송산마을)


 

자료 얼, 고창군, 2009년 재판.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2003년. 한국지명총람(11-12, 한글학회 지음) 전북편(상․하), 한글학회, 1981년. 고창군지, 고창군, 2008년. 高敞三鄕誌, 호남문화사, 1991년. 茂長鄕校誌, 호남문화사, 2004년. 昌寧成氏大觀, 미화출판사, 1994년. 昌山遺香錄, 미화출판사, 19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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