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의 마을 제5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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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의 마을 제5집 명사십리 해당화, 바다가 호수 같은 마을 장호리 이

1.장호리의 개요 상하면 소재지에서 서북 방향으로 장호선 도로를 따라 5km 정도에 장호리가 나온다. 장호리는 상하면에 속한 지역이다. 상하면은 삼한시대에는 마한(馬韓)에 속하였으며, 백제 시대에는 현 해리 심원 아산 일부와 무장 일부 공음일부와 상하를 합친 상노(上老)현이라 하였다. 따라서 지금의 고창군 상하면 장호리의 약사(略史)는 백제시대 상로현(上老縣) 또는 좌로현(佐魯縣)이라 하였다. 통일신라 경덕왕(757) 때 장사현(長沙縣)으로 무령군(武靈郡:영광)의 영현(領縣:고창 포함) 이었다. 고려 현종 9년(1018)까지도 영광군의 속현이었으나 뒤에 감무를 두어 무송현(武松縣)을 함 께 다스리게 했다. 조선조 태종 17년(1417) 무송과 장사를 합쳐 그 중간지점에 무장현(茂長縣)을 두었다. 무 장현은 나주목의 관활로서 영광군의 속현이었다. 조선조 경종4년(1723)에 무장현에 상용복면(上龍伏面)과 하용복면(下龍伏面)을 두었는데, 장호리는 상용복면에 속하였다. 그후 고종32년 상용복면은 상리면(上里面) 하용복면은 하리면(下里面)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광무10년(1914)에 부군(府郡) 폐합령에 따라 상리면과 하리면이 합쳐져 상 하면(上下面)이 되었고, 고창군에 편입되었다. 따라서 고창은 마한시대 54개 부족국가 중 고창지방의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에 속한 땅 이었다는 것이 짐작되고 있다. 상하면 장호리 장사(長沙)는 그 전에는 상노(上老) 당도독부(唐都督府) 때엔 좌노(佐魯)라 했는데, 그 치소 는 공음면 두암리 장사산(상하면 하장리와 경계에 있는 산) 아래 장사골이고, 산 너머 아래 쪽은 하장사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장호리가 속해있는 옛 지명을 보면, 무장(茂長)은 무송(茂松)의 무(茂)자와 장사(長沙)의 장 (長)자를 따서 합쳐진 고을 이름이고, 송사(松沙)라 쓰기도 했는데, 지금도 옛 무장현의 터 에 남아 있는 객사(客舍)가 송사지관(松沙之館)이다. 객사는 중앙에서 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건물을 말한다. 무송의 옛 이름은 송미지(松彌知)이고 치소(治所)는 한 때 성송면 하고리 고현(古縣)마을 (초기)이었고, 그 뒤 무송마을(후기)로 옮겨진 것으로 본다. 이를 요약하면, 백제시대 상로현(上老縣)-또는 좌로현(佐魯縣)→통일신라 경덕왕(757) 장사 현(長沙縣)→고려 현종 9년(1018)까지도 영광군의 속현→조선조 태종 17년(1417) 무송과 장사를 합쳐 그 중간지점에 무장현→조선조 경종4년(1723)에 무장현에 상용복면(上龍伏面)


과 하용복면(下龍伏面)→고종32년 상용복면은 상리면(上里面) 하용복면은 하리면(下里面)→ 일제강점기인 광무10년(1914)에 부군(府郡) 폐합령에 따라 상리면과 하리면이 합쳐져 상하 면(上下面)이 되었고, 고창군에 편입되었다.

장호리는 본래 무장군(茂長郡) 상리면(上里面)의 지역으로서 긴 벌이 있어서 장불 또는 장 호라 하였는데, 1914년

4월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한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평곡

리(平谷里), 장룡리(長龍里), 광촌리(光村里), 복구리(伏龜里)의 각 일부와 오리동면五里洞面) 의

중구리(中九里) 일부를 병합하여 장호리라 해서 고창군 상하면에 편입되었다.

옛 지명의 표기에

취락(聚落)이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란 말로 옛 문헌에 나오는 읍락(邑落)ㆍ촌락(村 落)ㆍ부락(部落)이란 말과 같은 뜻으로 쓰인 말이다.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

모량부리(毛良夫里), 송미지(松彌知) 등에 쓰인 비리(卑離), 부리

(夫里), 미지(彌知) 등의 말이 우리 순수국어의 옛말을 한자로 취음해서 기록했을 것으로 보 면 이 말들이 고을이나 마을을 뜻하는 말이었음이 짐작된다. ‘양서(梁書)’나 ‘남사(南史)’의 동이전(東夷傳)에 보이는 백제의 고마(固痲(저릴 마), 담로(擔魯) 나 신라의 탁평(啄評), 읍륵(邑勒)도 또한 우리의 옛말을 취음(取音) 표기한 것임을 밝힌 것 이다. 고창의 땅 이름 모양(牟陽)은 모량부리(毛良夫里)에서 모량(毛良)의 다른 표기이거나 어음 변천이고, 부리(夫里)는 벌(伐) 불(火) 불(弗) 등과 같이 고을 또는 마을을 뜻하는 옛말로, 지금 전래 지명에 나오는 갈울(蘆(갈대 노)洞), 가라울(雙川里) 등에서 쓰인 접미어(接尾語)~ 울과 같은 유형으로 본다. 장사의 치소는 공음면 두암리 장사골이고 그 너머 상하면에도 하장사라 하여 그 이름이 남 아있다.

장호리는 장호(長湖)ㆍ용두(龍頭)ㆍ복구(伏龜) 등 3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장호ㆍ 용두마을 뒤편에는 모래 백사장이 십리가 되어 명사십리라고 부른다.

장호리 경위도좌표 : N35

28

‫ﹸ‬

51.2‫ﹲ‬, E 126

29‫ ﹸ‬44.8

‫ﹲ‬

지도색인 : 법성 031-8[102]

장호리는 상하면 북서부에 있다. 장호리 전체 면적은 2,67km² 이며, 경지면적은 1,42km²로 밭 0,321km², 논 1,091km², 임야 0,871km² 등으로 되어 있다.


장호리의 인구

년도별 2003년 2010년 2013년

세 대 138 136 135

합 계 349 290 272

남 157 141 124

여 192 149 148

비 고 위 년도대비 59명 감소 18명 감소

마을별 인구현황(2013년 6월)

마 을 별 장 호(5통) 용 두(6통) 복 구(7통) 총 계

세 대 수 73 30 32 135

계 154 58 60 272

남 자 수 72 25 27 124

여 자 수 82 33 33 148

다문화가족(1)

위의 통계로 보아 농촌 인구는 점차 감소 추세이며, 고창군에서 귀농귀촌의 정책을 펴고 있는데, 전북에서 고창군이 귀농귀촌이 가장 잘되고 있다고 한다. 장호리도 귀농귀촌 인구가 많았으면 하는 희망을 걸어본다. 현제의 귀농귀촌은 상하면 전체 12가구 중 장호마을에

단 1가구뿐이다.

장호리의 교통 상하면의 교통은 고창에서 30.5km지점, 해리에서 10.4km지점, 공음에서 9.7km지점, 심원에 서 12.8km지점에 위치해 있다. 상하면의 도로는 일반국도 77호가 동호에서 상하까지, 국지도 733호가 구시포에서 아산까 지 연결되어 있다. 군도는 4개 노선에 해당하는데, 1호. 구시포-동호, 2호. 용두-대산, 3호. 장산-장호 5호. 장산-방축이다.

1) 장호(長湖) 마을의 유래

장호마을 전경(2013년 5월22)


장호마을 표지석과(2013년 5월 22)

장호어촌 체험마을 표지석(2013.5.22)

장호마을은 1636년경 병자호란 당시 철원주씨가 입향하여 설기한 마을이다. 1720년 신창 표씨가 입거하여 대를 이어 살아왔으나 지금은 각 성씨가 살고 있다. 원래 마을 이름은 장 불로 불리다 국촌으로 변경되었으며, 그 후 용사를 거쳐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시 평곡 리, 장룡리, 광촌리, 복구리의 각 일부와 오리동면 중구리 일부와 병합하여 장호리라 해서 상하면에 편입하여 오늘에 이른다. 장호는 본래 무장군 상리의 지역으로서 간척 전에 장호, 복구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마을에서 바라보면 호수같이 보여 장호라 불렀다. 마을 뒤편으로는 금빛모래가 끝없이 펼쳐진 명사십리가 있는데, 백사장 길이가 십리나 되 어 그 금빛 모래갯벌을 명사십리라 하며, 방풍림과 사구(砂丘)가 균형을 이루어 사시사철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여름철에 해당화가 피면 그 아름다움은 그야말로 선경(仙境) 을 이루며, 최근에 명사십리 해수욕장에 1번 군도가 완공되어 어촌 체험마을로 관광객이 몰 려오고 있다.

장호마을의 한 중간에서 바다 쪽을 바라보고, 왼쪽이 장호상회이고, 바다 쪽으로 가는 마 을안길 장호상회 맞은편이 방앗간이다. 방앗간에서는 떡방아, 고추방아, 기름도 짜고, 정기 화물도 취급한다.

장호상회와 방앗간 맞은편에 마을회관이 있다. 마을회관 양 옆에는 창고와 주차장 등이 있


어 여기가 장호마을의 중심이며, 마을사람들의 편리한 생활공간임을 말해주고 있다.

마을 앞에는 4-5백년 된 당산나무 14그루가 있었는데, 지금은 7-8주 만이 남아 있고, 이 곳에서 칠산바다의 풍어를 비는 당산제가 해마다 열리고 있다. 또한 간음포라는 포구가 있 었는데, 마을 주민들이 칠산바다의 조기를 잡아 생활했었던 포구이다. 장호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월 15일이 되면 짚을 걷어서 12가닥 줄을 다리고, 줄을 잡 고 마을을 돈 후 줄다리기를 했다. 그리고 배치기 소리를 하면서 줄을 감았는데, 줄을 감기 전에 한 번 당산굿을 치고, 줄을 감은 후에 당산굿을 또 한 번 쳤다. 당산제를 지낼 때 당 산은 하나인데 상은 할아버지, 할머니 2벌로 차렸다고 한다. 죽은 나무에 할아버지 장승과 할머니 장승을 만들어 당산나무 옆에 그대로 서있게 했다. 마을 사람들의 지혜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당산제가 끝나면 집을 정해놓고 저녁내 판굿을 치고 놀았다 한다. 동네에서도 굿을 치기도 했는데 오채질굿을 치면 징이 잘 맞지 않아서 징을 빼놓고 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오방진, 호호굿 등 개인놀이 위주의 굿이었다. 이외에도 풍장굿, 걸립굿이 있었으나 풍장굿 은 기억하지 못하고 건립굿은 당골들 중심의 패가 와서 굿이나 성주풀이 등을 해주고 쌀이 나 돈을 걷어갔다고 한다.

2) 용두(龍頭)마을의 유래

용두마을 전경(2013.5.22)


용두마을은 상하면 소재지에서 북쪽 방향으로 5km 정도에 위치한 장호선 도로 끝 마을이 다. 해리면과 경계를 이룬다. 원래 마을의 명칭은 평곡이었다. 그 후 마을의 형국(形局)이 용의 머리 같다 하여 갈머리 로 불리다 용두로 변경되었다. 용두마을에는 1720년경 신창표씨 도흥의 11대 후손이 입향 하여 설기한 마을이다. 이후 밀양박씨 등 각 성씨가 입거하였고 마을 형국이 풍수상 용의 머리 같다 하여 용두라 부른다. 용두마을에는 칠산바다의 풍성한 어장이 펼쳐져 있다. 어민들은 나룻배를 타고 조기잡이를 하러 출항하면 보름씩이나 집을 비우고 일을 했다고 한다. 실그물로 잡는 조기잡이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며칠씩이나 머물며 일을 하다 보면 실그물이 약해서 만선의 기쁨보다는 수심에 가득 차 들어올 때가 많았다. 어획량의 감소로 주민들은 배를 마련하기 위해 빌린 빛의 원금은 고사하고 이자도 갚지 못 할 정도로 힘이 들자 하나둘씩 어업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용두마을 노인당 건립 개념비 상하면 소재지에서 서북방향 5킬로 지점에 위치한 이곳 용두마을은 서기 1914년 부군 폐 합령에 따라 상용복 하용복을 합하여 상하면으로 개칭될 때 법정리인 장호리 관내에 행정리 와 자연부락은 용두 마을이다. 돌이켜보면 30여호가 고작인 가난한 본 마을은 타 마을에 비 해 상부상조의 협동정신과 의를 굳게 다져온 마을 주민 모두가 그 동안 수많은 고난에도 이 를 홀연히 극복하고 우리 고유의 전통적 윤리 도덕의 계승 발전은 물론 농경사회 건설에 있 는 힘을 다하여 후세들의 복된 세거지로 그 터전을 마련코자 총 매진하고 있노라. 오늘날 경노효친 정신은 물론 도덕상실의 혼란 속에서 노년 층의 고독함을 잊은 채 무관심 속에서 화호동락할 안식처를 마련치 못하다가 뜻하지 안았던 지난 2천 1년 2월 노인당 건립기금 3 천만원을 투자하여 총 6천여 만원으로 현대식 벽돌 슬라브를 마련하고 주민 부담 3천만 원 을 투자하여 총 6천여 만원으로 현대식 벽돌 슬라브 단층 30평 규모로 아담하게 노인당을 건립하니 면모가 일신하였도다. 시종일관 본 노인당 건립에 원근을 막론하고 손재 협력해 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와 더불어 그 방명(芳名)을 후면정민(後面貞珉)에 각명하니 오늘의 기 적이 영세(永世)에 전할 것이며, 앞으로 원근원노(遠近元老)는 물론 전 주민이 만당(滿堂)하 여 청담가락(淸談歌樂)과 희안담소(喜顔談笑)로 여생(餘生)을 동락(同樂)하시기를 바라노라 서기 2002년 7월 14일 낙성식에 용두마을 노인회장

이 수 복

추진위원 이

표 명 곤

지 도 자

표 영 선

부녀회장

김 순 선

죽산후인


바다쪽을 바라보며 멀리서 바라본 용두마을 갑문

가까이서 바라본 용두마을 갑문

갑문 설치로 어획량이 줄어든 이유도 있다. 본래 갑문은 논농사를 짓기 위해 저수 목적으로 설치했었다. 농사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기 도 하고 바닷물의 유입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갑문 바다쪽 수로

갑문을 통과하는 도로

갑문 안쪽 수로

그러나 갑문의 유용함도 있지만 물이 나가는 수로에 모래 등 침전물이 쌓여 배가 정박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려 바다를 눈앞에 두고도 출항을 못하는 지경이 된 것이다. 퇴적물을 걷어내는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아 주민들의 능력만으로는 감당을 하지 못해 포기 한 상태다. 한때는 많은 배들이 머물며 물이 차면 출항을 하던 포구였는데 쓸쓸한 흔적만이 남아 안타깝기만 하다.

바다 쪽 수로 바로 서해바다와 연결된다.

내륙쪽 수로에서 갈메기들이 쉬고 있다.

몇 해 전인가. 고창에서 와서 장어 잡이를 하던 일가족 3명이 갑자기 몰아친 해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건이 있었다. 바로 그 현장이 갑문 바다 쪽 수로였다. 조기 때가 춤을 추던 칠산바다! 바다는 용두마을의 생활 터전이고 희망이었다. 한때는 황금어장 덕분에 잘 살 수 있다는 부푼 꿈도 꾸었지만 주민들은 어업을 포기하고 대부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장호리 용두 갑문 등


갑문은 장호리 일대와 해리면 나성과 사반리 일대의 영농의 젖줄이다. 문을 닫으면 호수 요, 열면 바닷물과 만나는 풍천(風川)이 되는 것이다. 갑문 옆에 도로를 개설하여 동호로 가 는 길을 열었다. 물길이나 육지의 길이나 무엇이 다르랴. 저 물로 근방의 홍수를 조절하고 가뭄을 막는다.

저 물은 수로 또는 작은 갑문을 통하여 논과 연결되며, 논보다 높은 지역의 밭에는 양수기 로 품어 밭작물을 재배한다.

나가는 물은 갑문 앞에서 대기하고, 들어오는 물은 갑문 앞에서 멈췄다가 물이 빠질 때 민 물과 섞여 나간다. 그래서 갑문 전 후의 물에서는 많은 물고기들이 서식한다.

갑문을 빠져나온 물이 바다로 들어가는 저 멀리 위도가 보인다. 저 바다가 풍어의 상징인 칠산바다다.


멀리 보이는 작은 건물이 예전에 군경이 해변을 경계하던 초소다. 때로는 전투경찰대가 때 로는 군인이 저 초소에 근무하며, 초소와 초소 간에 교통호를 연결하고 통신망을 구축하여 해안 경계를 하였다. 지금은 초소를 비워놓았다. 지금은 교통호가 매워지고, 경계를 하지 않 고 있다.

용두마을 앞 해변의 방풍림이다. 물론 방풍림 뒤에는 밭도 있지만 밭작물도 방풍림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으며, 저와 같은 방풍림이 해변에 길게 들어서 있어 방풍림 자체도 장관을 이룬다.



지금도 주민들은 썰물 때가 되면 갯벌에 나가 노랑조개를 채취하여 팔아가며 바다와의 인 연을 계속하고 있다. 바다를 보면 한숨도 나오지만 희망도 보인다.

3) 복구(伏龜)마을의 유래


복구마을 전경(2013년 5월 22일)

복구마을은 상하면 소재지에서 서북 방향 쪽으로 장호선 도로를 따라 4km 정도에 위치한 마을이다. 마을 동쪽으로는 장군산과 봉화대가 있으며 북으로 해리면과 인접해 있으며, 남 쪽은 장산리 춘봉산이 위치하고 있다. 마을 서쪽으로는 서해가 있어 아늑하고 평화로움을 주는 것 같은 마을이다. 예전에는 복구마을 앞쪽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복구마을에서 바라보면 장호 전체가 호수 같 이 보여 장호라 불리었다. 장군산 아래에 있는 복구마을은 풍수상 군대가 매복하여 엎드리고 있는 형국 또는 거북이 엎드린 형국이라 하여 복군촌(伏軍村) 복구촌(伏龜村)이라고 하였다. 그 후 엎드릴 복(伏) 거북 구(龜)자를 써서 복구라 하였다. 장군산에는 속칭 빈대골이 있는데 그곳에 사찰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흔적이 없다. 신창표씨의 본관은 신창(新昌) 단본이다. 조선시대에 배출한 5명의 문과급제자 가운데 대 표적 인물은 표계(表繼)의 아들 연말(沿沫)이다. 그는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연산군 원 년에 응교(應敎)오 있으면서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밖에 선조 때의 헌(憲)과 그의 아들 정로(廷老)는 당대의 명역관(名譯官)ㆍ명문장으로 이름을 날 리고, 인조 때의 무관 정준(廷俊)은 척화신(斥和臣)으로 청(淸)나라에 잡혀가는 김상헌(金尙 憲)을 끝까지 수행하여 칭송을 들었다. 표씨는 현재 경남 의령ㆍ거창ㆍ함양ㆍ합천 등지에 많이 살고 있다. 상하면의 입향조는 먼저 표인여(表仁呂:解官)의 지후(祗候)의 10대손인 표도여(表道輿)의 자 는 여서(輿瑞) 호는 영무(靈武[贈嘉善大夫議政府贊政)는 서기 1655년(효종 乙未)에 입향하 였다는 기록은 있으나 그 연유는 세구연심(歲久年深)하여 미상이지만 일설에 의하면 인조 때 난을 피하여 경상도 거창에서 상하면 장구촌(仗龜村)에 은거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마을의 설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659년 경 신창표씨(新昌表氏) 11대조 도여영무(道輿靈 茂)가 경남 거창에서 입향하여 그 후손이 세거 중이이다. 이후 낭주최씨(郎州崔氏), 창원황씨(昌原黃氏), 함평이씨(咸平李氏) 등도 입거 세거 중이다.


복구마을 가운데에는 표씨 문중의 재각 망화당(望華堂)이 자리잡고 있다. 마을 앞에는 90 년 전 마을 어른들이 심어 놓은 소나무가 있다. 지금은 거목이 된 노송 앞에서 매년 정월 보름이 되면 당산제가 열린다. 한 해의 액운을 씻고 풍년 농사를 기원하는 제가 끝나면 하 루 종일 쉬면서 마을의 화합을 기리며 정담을 꽃피운다.

당산은 가장 원초적인 민간신앙의 하나로, 옛날 사람들은 자기가 사는 마을 근처의 산과 언덕에 대해 외경심(畏敬心)을 가지고 있었다. 자연현상은 나 자신은 물론 마을사람들의 평 안을 지켜주는 힘을 가진 존재라고 믿었으므로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생긴 것이다. 복구마을은 주로 논농사와 밭농사가 주업이고 복분자를 재배하는 농가도 최근 들어 늘었 다. 옛날 마을에 사람이 많을 때는 당산에 줄을 감으며 당산굿도 쳤는데, 지금은 당산굿은 치 지 않고 줄만 감는다는 것이다.

복구마을 입구에 세워진 효열각

효열각(孝烈却) 광산김씨효열기적비(光山金氏孝烈紀績碑) 오른쪽 비문에 본비

근수

시공일 2008년 4월 일 준공일 2008년 5월 5일


시공자 상하면 장호리 복구 표태희, 표동균, 표정자 오른쪽 비문에 신창표씨 통정공 남학파 가계도 20세 남학, 배 광산김씨 21세 재준, 배 진주정씨

재관, 배 김해김씨, 김길수, 표복례

22세 태희, 배 경주이씨,

찬종, 배 신안주씨, 대종, 배 하동정씨, 경종, 배 연일정씨, 태선, 배 경

주배씨, 정임, 정숙, 순애, 양금, 영종, 배 안동김씨, 상종, 배 담양오씨, 병수, 배 함평이씨, 영옥, 연화. 23세 현자, 원봉, 영수, 영준, 옥희, 창석, 복희, 향자, 윤자, 정란, 창균, 경창, 영래, 영광, 명숙, 영민, 승민, 소연, 소정, 수영, 소희, 영주, 형균. 24세 진희, 혜경, 현, 채연, 기현, 승현, 지원, 재영, 재훈. 원서, 이현술, 이창옥, 한진근, 이재현, 유희영, 소병윤, 조광백, 최경득, 반선모, 맹규순, 최 영호, 이상원.

효열각 비의 양 옆면과 뒷면에 다음과 같이 한글로 새겨져 있었다. 광산김씨 효열기적비 명병서 부인은 대대로 굴지가는 충효세가의 후손인 거사 김공 기철의 따님으로 서기 一八八三년 고 종 계미 九월 초七일에 출생하니 천품이 온순하고 정숙하여 법도 있는 가훈 아래 엄히 삼종 지의와 四덕을 읽혀 효사부모에 능갈기력하고 자매간에 우애하여 인근에서 칭찬을 받으며 곱게 자랐다 의관 나이 십칠세에 전통 유문의 언사인 신창표씨 휘가 종채 행원참봉의 三남 중 휘 남학은 중추원에서 통정대부에 승진한 송정공과 결혼하여 시부모를 동동촉촉 지성껏


섬기시며 열성어린 혼정신성과 감지지공을 게을리 하지 아니하고 열복하면서 빈한한 일문의 중흥을 위하여 밤이면 밤마다 침선방직과 정구지역은 물론이요 낮에는 농사일에 전념하였고 부군의 내조에도 남달리 심혈을 경주하였다. 결과는 본가에서 분가 十유 이년만에 풍요로운 일가를 적수성가한 이 같은 천식의 소유자로 숭조상문과 종당에 진성한 여장부이 장불이 칙 하며 백방을 구약시탕에 정성을 다하였으나 병환이 악화되어 대소변을 가리지 모함에 이처 럼 목욕과 실내외의 세척에 탄갈심력 하였고 그후 시부에게 못다한 효성을 시모에게도 쏟았 으며 상장범절을 정중하게 엄수하고 불행이도 부근에서 고황지질로 위석 오년 동안 일편간 심으로 백방구호 하였으나 천수를 다하지 못하시고 애석하게도 서기 一九一二년 임자 2월 二十三일에 나이어린 두 형제를 두시고 서거하였으니 장왈 휘는 재준이요 차왈 휘는 재관 등을 이승가업에 몰두케 하니 향리 다사들의 만구일성으로 이열상천하여 오남 각지 및 삼강 록에 상재되었으니 역세의 표상이로다. 장하도다 부인은 현모양처로서 이같은 미적은 희금 지사로 이 고을 온 누리에 한 알의 밀알이 되었으니 오직 부인의 정절은 인부의 규범이라 명예로운 본천을 받으셨으니 효열지문의 자손들이 합의하여 어버이의 업적을 천추에 길이 보존코자 본비 근수를 종중대표인 장손 태희과 차손 영종 등이 불녕을 찾아와 청문키에 우 의분사하고 미사여구를 피하여 삼가 명에 부쳐 이르노니 오호라 명문대가 표공의 가문은 세 세로 충효열이 독실하였네 아버지가 전하고 앋르이 이어 받으니 이것이 계승이요 계술이로 다 더구나 부인의 효열은 우뚝 솟았네 이 정신 길이 간직하면 온 집안의 전통이라네 아름다 운 이 행적을 비에 새겨 어천만세 알리리라. 남양 방금혁 근찬 효열각을 둘러보고 있던 중 한 부인을 만났다. 그 부인은 복구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백판 례(白判禮) 당 74세였다. "이 효열각에 새겨진 분을 아십니까?"라고 물어보았다. "이 분이 저의 집안 할머니 입니다." "살아생전에 뵈온 일이 있습니까?" "예, 할머니께서는 비교적 잘 사셨어요. 할머니께서는 후덕하셔서 우리가 없이 살면서 잡곡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지낼 때, 가끔 불러 '젖이 나와야 한다'며 보리와 쌀이 섞인 밥을 주시 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배고플 때 밥을 주는 것 이상 적선이 어디에 있겠는가! 효열각의 주인 광산김씨의 살아생 전의 후덕한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다.


마을로 들어가는 첫집 벽에 풍요와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2. 장호리의 자연환경 1) 자연환경 장호는 마을 이름이 뜻하는 바와 같이

논과 밭의 들이 넓은 지역이다. 긴 벌이 있어 장불

또는 장호(長湖)라 하였는데, 자연마을 또한 긴 벌과 같은 뜻인 평(平)과 물의 상징인 용 (龍)자가 들어간 가남포, 복구, 새터, 용두, 평곡마을 등의 지명이 있었다. 가남포마을은 예전 에 포구였다. 하여 가남포라 이름 붙였다. 복구(伏龜)마을의 거북이나 용두 마을의 용의 머 리 등은 전답에 필요한 물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들이다. 장호리는 분리(分里)로는 장호 용두 복구, 자연마을은 장불(長湖) 용사[龍沙:菊村) 용머리 (갈머리, 龍頭) 복구(伏龜, 伏狗) 가남포(可南浦) 새터 평곡(坪谷) 등이며, 기타 지명으로는 넘언들 목냉깃벌 진쟁이(들) 쪽재(들)가 있다. 장호 마을 뒤편에 '명사십리(明沙十里)'가 있어 여름이면 해당화 곱게 피어 그 아름다움을 자랑했던 마을, 마을 앞쪽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마을에서 보면 호수처럼 보여 '장호(長湖)' 라고 불렀다. 그 호수처럼 보였던 곳이 지금은 농지가 되어 장호는 농촌과 어촌을 겸한 살 기 좋은 마을이 되었다. 약 30년 전만 해도 긴 개울이 있어 '장호'라 칭하였으나 지금은 간 척사업으로 좋은 농토가 되어 개울의 흔적은 없다.

장호마을의

문 유 화

1월 15일에 당산제

를 낸 유입 막 지

용두마을에는 바닷물의

다. 을

고, 농사용

각각

지나고 있다.

장호리 명사십리(明沙十里) 장호의 명사십리는 고창의 명사십리다.

당산나

수 목적으로

복구마을 북동쪽에 지방도 3호선이 남북 방 으로

적으로는 마을 앞에 4-5백년

14그

치한

가 있는데, 이곳에서 음

갑문

이 있다.

으로, 남동쪽에는 지방도 5호선이 동서 방


장호리 명사십리는 구시포와 동호해수

구로 이

의 해

어진

직 형 룬 욕 선

선을 이

다.

蝟島

장이나 명사십리, 동호해수

장 어

서나

동호해수

장까지 약 10km

핀란 펜션

가 있다. 여기에는

선이 사

바다

바라보면 고

도치의

)가 보인다.

장호리에서 바다로 500m 해

으로 십리거리의 해

양테 파크

구에 해

도 있다.

구시포해수 위도(

장 쪽 명사십리

변 를 쳐

장 사이에 있는 해

백사장이며, 구시포에서 명사십리

구시포에서 동호해수

숙박 설

은 장호리뿐만 아

나가면 바로

라 고창의 관

확트

안 펼쳐 맨손

인 명사십리 해

근 주민

자원이며

들의

가가

진다. 명사십리

어업의 터전이기도 하

다.

안 니 길

이곳 명사십리 해

수한

곳곳에는 과거 해

그들이 다

방산책로

진다.

로는 바위에

가는 거

다. 명사십리에서 만나는 들은

항 넉넉 상

에는

경 하나하나가 다 소

한 마음으로

풍 를 느끼 요

는 방

지는 아름다

마나 아름다

하고 평

며 살아

풍 막 주 풍림 멋 펼쳐 운광 운 알

진 바위들과 해

물들이 있는데, 군ㆍ경이

었다.

아 명사십리 백사장에

바라보노라면 장호리가

소가 있었던 시

방산책로로 바

다보면 명사십리 해

라이

경비

들이 이제는

탐 를걷 풍광 펼쳐 때 스 떠 룻배를 이

안 초 탐

경과 아

고장인지 잘

것도 같

한 일상인 것 같아도 장호리 사

고, 살아갈

복의 터전이며

의 현장인

것이다.

풍림 풍림

. 장호리 방 장호리 방

(長湖里

防風林

)

은 상하면 장호리 산41

지에 있다.

시대는 조선시대에 심은 것으로 추정되며, 장호리의 자연

장호마을 서

에는 거의 200년 이상

소나

12그

산이다.

~

가 남 북방

으로

지어 있는데, 이


는 서해에서 불어

풍 막 주 풍림 무 높 떨 져 안

는 해

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나

서해

과는 500m 정도

다. 경위도좌표 : N35

28

‫ﹸ‬

는 방

이는 10m 이상이며

있으나 과거에는 해

51.2‫ﹲ‬, E 126

더 둘레

이다. 과거에는

많은 소나

는 2m

선이 마을 앞에

내외 형

가 마을을 감

이다. 현재 마을은

성되어 있었다고 한

29‫ ﹸ‬44.8‫ﹲ‬

지도색인 : 법성 031-8[102]

2)장호리의 지명 약사(略史) 장호리의 지명을 말하기 전에 먼저 상하면 전체의 특이한 지형부터 살펴본 후 그 특이한 지형들이 장호리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살피기로 하자. 상하면은 이름 그대로 높고 낮음이 분명한 곳이다. 장사산(長沙山)을 비롯하여 기산(旣山), 봉대산(峰臺山) 등의 높은 지형과 명사십리(明沙十 里), 구시포해수욕장(九市浦海水浴場), 고리포, 염전, 양식장 등이 있는 자룡, 용정 장호 일 대는 낮은 지형이다. 상하면의 지명(地名)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형과 지세에 따라 땅 이름이 지어졌으며, 어쩌 면 미래에 그 땅에서 전개될 일까지 예측하여 지명을 붙인 것 같은 예감마저 든다. 장군산을 보라! 상하의 한 가운데 우뚝 솟아, 장군이 갑옷과 투구를 쓰고 묵묵히 서있는 것 같지 않은가! 장군산 주변으로 장군에게 있어야할 필수품이나, 장군과 군대에 필요한 것들이 지형과 지 세에 따라 적나라하게 이름이 붙여지거나, 땅의 모양 그대로

이름이 붙여지거나 하여, 지

명에 깊은 뜻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된다. 장군산(將軍山)은 산의 모형이 장군이 갑옷을 입고, 위풍도 당당하게 묵묵히 서 있는 것 같다. 그 장군산의 전. 후. 좌. 우로 다음과 같이 재미있는 이름들이 붙어 있는 것이다. 검산(劍山)은 장군산의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장군의 칼을 뜻한다. 마을을 감싸고 큰 칼 처럼 능선이 길게 드리워져 있으며, 칼끝부분의 논 가운데에 ‘섬벰이’라는 사람머리 모형의 섬이 칼날 아래 떨어진 머리 같이, 논 가운데 있다. 모암(帽岩)은 장군산의 동남쪽으로 22번 국도 건너편에 장군의 투구를 뜻하는 마을이며 장군의 투구처럼 생긴 큰 바위가 마을 옆에 있다. 라대(羅帶)는 비단으로 된 장군의 혁대를 뜻한다. 검산마을에서 ‘막정이고개’ 쪽으로 상라 대와 하라대가 있는데 상라대는 혁대의 고리부분이며 하라대는 혁대의 끝 부분이다. 라대 전체를 높은 곳에서 보면 혁대모양의 둥그런 능선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있다. 막정이 고개: 막정이란 군사들이 잠시 쉬어 가는 곳을 뜻한다. 막정이 고개는 현재 22번 국도의 통과지점이며, 이 고개를 넘어오면 상하에 온 것이 되고, 이 고개를 넘어가면 상하 를 떠난 것이 된다. 군사들은 쉴 때 쉬어야 한다. 고산(鼓山): 장군과 군대가 있는 곳에는 북이 필수적이다. 고산은 장군산의 서남쪽에 위치 한 장군산 줄기에 있는 마을이며 북처럼 능선으로 둥그렇게 감 쌓여진 마을이다. 복군촌(伏軍村):군대가 매복함을 뜻하는 마을이다. 지금은 복구(伏)로 불리어 지고 있는 데 세월이 지나면서 변형된 것이리라. 장군산 서쪽 장호리에 속한 마을로서 서해바다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주변이 움푹움푹 분지(盆地)의 형식으로


둘러 쌓여있어 군사들이 매복(埋伏)하기에 알맞은 지형이다. 기산(旗山):군대의 상징은 기(旗)다. 기산은 기를 꼽아둔 마을이란 뜻이다. 장군산 서남쪽에 위치한 장산리에 속한 마을이다. 여산(礪山)은 장군의 칼을 가는 곳이란 뜻이다. 礪(숫돌 여)자이기 때문이다. 고산 앞에 길 게 누워있는 듯한 능선이 바로 여산이다. 진터(陳터)는 군사들이 진을 치는 곳. 현재는 변형되어 진털밭이라 부른다. 여산 앞에 있 다. 봉대산(峰臺山)은 봉화(烽火)를 올려 신호를 하는 곳. 봉수대(封守臺)의 준말로써 장군산의 동쪽 검산마을 뒷산이 바로 그 산이다. 미산(米山)은 군량미(軍糧米)를 쌓아둔 곳이란 뜻이다. 해리면 사반리에 위치한 산이나, 장 군산의 줄기임에는 틀림이 없다. 말매등은 말을 매어두는 곳. 상하초등학교에서 기산으로 넘어가는 능선이 바로 말매등이 다. 이 말매등에 임자 없는 장군의 묘 두 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 중 1기를 6.25 때 지방 빨치산들이 파 보았더니 명주 배로 쌓은 큰칼이 나왔었다 한다. 그 칼의 길이가 장정의 발

로 한 발이 넘었는데, 녹슬어 부슬부슬 떨어져 못쓰는 칼인 줄 알고 버렸다 한다.(장

병 씨 증 연

마을

언)

그 외에도 군사들이 흘린 찌꺼기를 먹고사는 쥐들이 많다는 서(鼠)밭등, 검산리 막정고개 넘어 상수마을 뒷산에 군사들이 밥지을 때 사용하는 함박등, 도매골(도마골), 주걱등(밥주 걱) 등의 지명이 있는데, 모두 상징물과 비슷한 모형을 하고 있다. 장군산에 따른 전설도 여러 가지가 있으나, 상하면 자율방범대장 김민환씨의 이야기를 들

으면, “동학혁명 때 장군산 밑

스스 학혁 발

군을 모아

산이 동

명의

마을에 살았던

김 접두(김대장)이라

암근

상지라고 장

방 사

하고 들은

김규일이란

분이 장군산

김접 를 알 ”고 말한다. 두

선두로 전쟁터로

밑 갔

에 수

명의

다하여 장군

고있다.

장군산과는 관계없으나 그외 ‘스무재(卄齊 )’는 “옛날 스무 명 이상이 모여야 고개를 넘어 갈 수 있다”는 전설이 있고, 바로 그 ‘스무재’에서 ‘김 삿갓’선생이 쉰 밥을 얻어먹고 숫자풀 이 시를 썼다는 설화도 있다. 가뭄 등 자연재해에 대하여도 이를 극복하고 슬기롭게 대처하려는 옛 사람들의 의지(意志) 를 다음과 같은 지명에서도 엿볼 수 있다. 까막샘(烏井)은 석남리 갈산마을 앞에 있는 샘 이름이다. “극심한 가뭄이 들어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이며 수목까지 목이 타들어 가는 때, 까마귀들이 날아와 ‘까막샘’ 부근에서 발로 땅을 허적이며 물을 마시는 것을 보고, 그 자리를 파보니, ‘동이물’로 쏟아져 나와 그 근방 일대의 전답에 물을 다 대고 남았다. 까마귀들이 암시하여 판 샘이라 하여 ‘까막샘’이라 부 르게 되었다. 흔들샘은 용정리 섬포마을 앞에 있다.“어느 도승(道僧)이 복구 제에서 잠을 자다 땅속에서 물 흐르는 소리를 듣고, 그 물소리를 따라가다 물이 솟구치는 곳에 판 샘이 ‘흔들샘’인데, 물소리 바람소리가 도승을 흔들어 깨웠다하여 ‘흔들샘’ 또는 ‘바람샘’이라 하였다” 한다. 옛날 사람들은 마을 이름, 샘이나 산 , 강등의 이름을 붙이는데도 그 이름에 합당한 뜻을


두고 있었다. “화합하며 잘 살아라”는 뜻에서 마을 이름을 붙인 곳도 있다. 갈산(褐山)마을이 바로 그 곳이다. 褐(목마를 갈) 자와 烏(까마귀 오)자를 써 갈오지라 할 때는, 물이 귀한 때였고, 그 뒤 갈산(葛山) 즉, 葛(칡 갈)자를 쓸 때는, ‘갈산(葛山) 마을에서 주로 많이 살고있는 朴씨와 漁씨가 싸우지 말고 칡넝쿨처럼 얽혀 살아라’는 뜻으로 부른 마을 이름이라 한다. 장군산 줄기이며 갈산 앞에 있는 배들이는 ‘옛날에 그곳까지 배가 들어왔다’하여 붙인 이 름인데, “배들이 마을이 번창했던 시절 양(梁)씨들이 배들이 앞에 뚝을 쌓아 까마귀에게 물 을 못 먹게 하여 그 일로 양씨들이 망하게 되었고, 지금은 한 집도 살지 않고 있다”는 설화 도

있다.

구시포(九市浦)는 그 지명이 뜻하듯 아홉 시장이 들어설 곳이다. 그 첫 시장은 해수욕장이요, 두 번째는 횟집단지가 이미 들어섰고, 세 번째는 1종항의 미래라 생각된다. 좌측에는 해수욕장 우측에는 횟집단지며 명사십리(明沙十里) 백사장이 칠산바다를 보듬고 아름답게 펼쳐지며, 가막섬을 향하여 연육교는 이어지고 있으니, 이 항구가 완성되는 날 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 왜 옛 사람들이 많고 많은 이름 중에서 이곳을 ‘구시포’라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1) 장호(長湖)의 지명

를합 덕왕 때

상하면은 공음 일부와 해리, 아산 일부

때엔 암

佐魯

좌노(

)라 했고,

라 경

무송

에 장사현과

무 설

현, 두 현을

무송 兵馬使

장(茂長)이라 하고, 치하였으며,

마사(

) 겸 위

후 상리면은 송림 松林 송 羅 검 劍山 山 광 판 板井 하리면은 : 택 宅 오룡 龍 下 32년) 이

:

상라리(上

里) 용산리(龍 (平谷里)

里)

산리(

里)

정리(

정리(

형 설

계시

로는 용정리

)

水 元斗

里)

얕 판

태종

다가, 조선

장에 치소

이름

17년(1417)

를설

를따 鎭

치하고, 진(

있었으

里) 월곡리(

월리(

)

)을

두었다.

壯基 궁 弓月

,

水 蟾

谷里) 상수리(上

里) 구시포(九

浦)

포리(

里) 浦

龍里) 장호리(長湖里) 복구리(伏狗里) 평곡리

垈 회 回亭 石 오 渴烏

里) 용대리(龍

長里) 원두리(

머 아래쪽은 하장사

뉘 져

里) 장기리(

洞里 ) 장수리(長

있었는데.

은 전체적으로

松亭 旗山

里) 기산리(

浦) 이상 11개리이다. 그리고 인

있었다.

무 爲僉節制使 를

里) 이상 18개 里이고,

里) 하장리(

吾里洞面이

제사(

촌리(光村里) 장용리(

동리(

리(五

첨절

唐都督府

(茂)자와 장사(長沙)의 장(長)자

상하면은 상리면과 하리면으로 나

리(

里)

)의

과 장사의 중간 지점인 지금의

1895년(고

(茂

) 당도독부(

는데, 그 치소는 공음면 두

이고 산

까지도 그대로 이어

하여

쳤 너 져오

)으로 고

려때 합 무송 送 무

장사현은 고

는 상노(上

縣 골

장사현(長沙

리 장사산(상하면 하장리와 경계에 있는 산) 아래 장사

으로 남아 있다. 그

하여 백제

里)

남리(

里)

정리(

南里) 갈

리(

亭 니 古尼

里) 평정리(平 里) 고

里)

포(

에는

지금 해리의 서북부 왕촌 금평 동호 나산 월봉 중구 매남 등 21리가

를 루 판

은 평지

정마을 동쪽에 '

고 있으나, 동남쪽 일부에는 산지가

성되어 있다. 관

정제'가 있고 복구마을 남쪽에는 장군제가 있다.

그리하여 장호리는 무장군 상리면 평곡리 장호리 장룡리 광촌리 복구리 오리동면 중구리 (中九里) 각 1부가 합쳐져 장호리가 되었다.


상하면(上下面) (9)개리. 용정리 자룡리 석남리 장산리 검산리 송곡리 하장리 용대리. 장호리는

논과 들이 넓은 지역이다. 장호

지명은 긴 벌이 있고, 약 30년 전만 해도 긴 개

울이 있어 장불 또는 장호'라 칭하였으나 지금은 간척으로 인해 개울의 흔적은 없다. 또는 마을 앞쪽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마을에서 보면 호수처럼 보여 '장호(長湖)' 라고 불렀다 한 다. 자연마을로는 가남포, 복구, 새터, 용두, 평곡마을이 있었으나, 현재는 장호, 용두, 복구의 세 마을이 있다. 가남포마을은 예전에 포구였다 하여 가남포라 하였는데, 지금은 자연마을이

고 이름만 있을 뿐이다.

복구(伏龜)마을은

군촌(伏 지

마을 지

형 엎드려

, 또는 군사가

용두마을, 용사(龍沙)마을은

있는 거북

하여 붙인 이름이며, 부

명사십리(明沙十里)는

전이

룬 주민 행

양식

이 용의

라 인

마을

어업을 하지

용사(龍沙)[국촌(菊村)]은

들의

맨손

양식

하였으며,

하고 있는

.

어업의 터전이 되기도 하였다. 또

어업도 성

영광

하였으나,

정이다.

장호 북쪽에 있는 마을. 마을

이 용의

에 모래가 많음.

리와 같다

패류

장호(長湖)ㆍ장불(長弗)은 바다가 호수 같은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용두(龍頭)는

다. 또한 명사십리의 모래사장에서는 어

에 대나리 그물을 처 어업이 성

긴 뒤부터

이라 하여 복

장호마을 뒤편에 있다. 백사장의 거리가 십리나 되어 명사십리라 하

많이 나와 장호리 뿐만 아 에는 연

에 모래가 많아 용사라 이름 붙였다.

고, 여름이면 해당화가 곱게 피어 장관을 이

복하는

村) 또는 복구라 붙여진 이름이다.

이 용의 머리와 같다 하여 붙인

용-머리(용두 갈머리)) 평곡 북쪽에 있는 마을. 마을

리와 같은

국이며 부

이 용의 머리와 같다

마을 형국이 용의 머리 같다 하여 갈머리 또는 용두라 하였다.

복구촌(伏龜村) 또는 복군촌(伏軍村)은 거북이 엎드려 있는 모습, 또는 군사가 매복하는 곳 이란 뜻을 가진 지명이다. 가남-포(可南浦)는 장호 서쪽에 있는 마을. 전에는 포구였다

.

평곡(坪谷)은 용사 동북쪽들에 있는 마을

새터는

평곡 아래에 있는 마을

기(其) 넘언들 : 목냉깃벌[들] 쪽재(들) :

넘언-들[들] 용머리 서쪽

뚝너 염막 鹽幕

머에 있는 들.

목냉기 앞 벌에 있는 논. 전에는

(

)이 있었음.

가남포 앞에 있는 들.

진쟁이(들) :

쪽제 남쪽에 있는 긴 들.

갈-머리(마을)➝용머리. 국-촌(菊-村) (마을)➝용사

3. 마을의 입향조(入鄕祖)와 내력 1)장호 장호마을에는 1636년(인조 14)

루 졌

하면서 마을이 이

란 때 철 주씨 철原 周氏 러 각 씨

자호

다고 한다. 그

나 지금은

(

를잡 씨

)가 터

가 살고 있으며, 노

아 살기 시

와 표

가 많


이 살고 있다. 1720년경

씨 新昌表氏 입 入居 후

창표

(

)가

거(

)한

2)용두

향 신 씨 新昌表氏 흥 道興 후 밀양박씨 각 씨 입 入居

면소재지에서 북쪽방 1720년경

창표

8km정도 장호선도로

(

) 도

(

거(

지금은

각 씨 성

가 살고 있다.

마을에 위치한다.

후손 입향 入鄕 형 풍

)의 11대

)하였고, 마을

)하여

(

기한 마을이다.

국이

수상 용머리와 같다하여 용두

라 부른다.

3)복구(伏龜) 면소재지에서 서북방

쯤 신

4km정도 장호선도로 중간

에 위치마을이다.

알 씨 新昌表氏 흥영무 道興 靈 居昌 입향 후손 世居 후 낭주최씨 郎州崔 氏 씨 昌原黃氏 함 씨 咸 李氏 입 入居 世居 뒷 將軍山 풍 엎드 형 엎드린 형 軍 르 마을의

기연대는 예부터

茂)가 경남 거창( ), 창원황

산(

(

수 없으나 1659년경

)에서

),

평이

) 아래에 있는 마을은

국이라 하여 복군촌(伏

하여 그

(

창표

이 세거(

) 등도

수상 군대가

거(

(

) 11대 도

(

) 중이며, 이

(

), 세거(

산 장군

리고 있는

) 중이다.

국 또는 거북이가

村)-복구촌(伏龜村)이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복구(伏龜) 마을로 부

고 있다.

4. 마을의 인물과 행적 표종길 1)이재헌(李栽憲) : 1873(癸酉) 9.29~1944 갑신(甲申) 3.1 1982년 3월 18일 노병선(魯炳善 당시 83세. 해리면 용반리 신흥 거주). 이재형(李載馨 당 시 78세. 해리면 용반리 거주). 이환범(李煥範 당시 73세. 장손(長孫) 심원면 고전리 진주 거주)씨 등이 고창문화원에 내방하여 증언한 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재헌의 자는 인배(仁培) 호는 하전(下田) 그의 선대는 함평이씨(咸平李氏)로 시조 언(彦) 의 6대손 인문(仁問)의 둘째 손자인 삼언(三言)의 손자 현령공(縣令公) 조(稠)의 14대손 돈 복(敦福)의 장남으로 고창군 해리면 왕촌리 신흥마을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생활이 풍족하였고 강직한 기질로서 호걸풍의 선비상으로 성장하여 경학 (經學)을 익혀 관년에 이르러서는 사림류(士林流)의 몽학(蒙學)훈장 노릇을 하기에 이르렀 다. 13세 때 상하면 장호리(長湖里)에 사는 5살이나 많은 부호(富豪) 동학접주 표종길(表宗吉) 의 딸(18세)과 혼인을 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동학에 입도하는 계기를 얻어 접주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1891년 초봄 이후 청해면(靑海面)의 15개 마을(安子, 松山, 古星, 平地, 下連, 平章, 水洛, 新興, 七星, 杏 山, 臨海, 龍溪, 松岩, 二相)과 오리동면의 21개마을(旺村, 大興, 金平, 鳴鼓, 冬湖, 外景, 光 升, 米洞, 巳盤, 方築, 萬化, 魚龍, 羅山, 月峰, 中九, 梅南, 星山, 良谷, 新興, 上阜, 芝老)을 순방하면서 접인들과 화합 맹약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였다. 1894.3.20 무장 고을 당뫼(현 고창군 공음면 구수마을)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의 제1차 봉기 때 21살의 건장한 성년이 된 그는 장인 표종길이 중위장(中衛將)으로 나설 때 부장(部 將)으로 활약하게 되어 정읍, 태인, 금구, 진안, 장수, 남원 등지에 사는 표종길의 동학 접인 들의 연락을 도맡아 순회 모병활동을 전개 하였으며, 4월 28일 전주 입성 전투 시에는 표


종길의 지휘를 받아 특수 공격의 역할을 맡아 크게 활약하였다. 전주화약 이후 집강소 정치기를 고향에 돌아와 무난하게 집강정치에 치중하였는데, 일본군 의 개입으로 사태가 여의치 않게 되자 1894년 9월 2차봉기가 심화되자 장인과 함께 농민 군에 가담하여 적극적인 활동으로 대처하였다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집에 돌 아왔으나 관군의 지명수배에 밀려 검거 대상자로 지목됨에 부안군 변산의 깊은 오지에 숨어 들어 모막(茅幕)을 짓고 감자와 잡곡을 경작하여 은신하다가 1895년 7월에 일본군의 토벌 작전에 밀려 도주하다가 옆구리에 상처를 입고 고향으로 숨어들어 오리동면 난정(蘭亭)의 친척집에 은신하였는데, 관군에게 발각되어 뒷문으로 도망쳤는데 이때 쏜 적탄에 집주인이 맞아 목숨을 잃고 그는 가까스로 빠져나와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도주하여 또 다시 피신 생활로 일관하여 교묘히 은신하였는데, 부친의 권유로 부흥산<富興山(大成山)> 골짜기에 있 는 영모제(永모齊)에서 변신하여 후학을 가르치는 등 연명하다가 은밀하게 심원면 고전리 진주마을 그의 집으로 옮겨 지내다가 1944년 3월 1일 향년 72세로 생을 마감했다. 2)임천서(林天瑞:1864~1894.12.27) 그의 본명은 종문(鍾文)이고 천서는 자이며 초명은 문수(文洙)이다. 고창군 고수면 인성리(仁城里) 석우촌(石隅村:돌무랭이)에서 아버지 임석황(林錫璜)과 어머니 울산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조양(兆陽)이다. 조양군(世味) 후손이 고창 땅에 들어온 분은 조양군으로부터 7세 되는 사복(士福)으로 서울에서 태어나(1445~세종 27) 문과 급제한 후 서천(舒川)군수 를 지냈는데, 관직을 떠난 뒤 집에서 학문을 즐기며 자적하던 차에 마침 아버지가 흥덕현감 을 사는 터라 흥덕에 들렸다가 조양군의 묘가 있는 보성(寶城)을 찾게 되었다. 이때 고창 방등산(方等山) 아래 지금의 외정(外汀)마을 터를 발견하고 유사시에 피란지로 점찍어 두었 다가 연산군 때에 시절이 하수상함에 이곳으로 낙향하여 가솔을 거느리고 정착한 이래 15 세에 이르러 천서가 태어났다. 그러니까 천서는 조양군으로부터 22세가 되는 것이다. 그는 장성에 사는 황주변씨(黃州邊氏)를 내자로 맞아들였는데 전봉준과는 유년 시절에 동 문수학을 한 처지린 것을 후손들이 증언해주고 있다.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全彰赫, 본명 基昶)이 서당을 차렸던 서당촌은 당촌(堂村) 바로 서 남쪽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어 그가 사는 석우촌과는 약 3.5km쯤의 거리로서 수긍이 간다. 이런 인연으로 해서 전봉준은 농민혁명의 준비단계에 고창에 올 때면 으레 그의 짐에 와서 살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오지영의 「동학사」에 보면 손화중(孫華仲) 포(包)에 속한 임천서는 고창에서 대접주로 활 약하면서 오하영(吳河泳), 오시영(吳時泳), 임형노(林亨老) 등과 함께 1,500명의 농민군을 거 느리고 고부 백산(현 부안군 백산면)에 3월 25일 본진을 설치할 때 당당하게 참여한 두령 이었다. 이때 고창지역에서 출병한 농민군의 인원과 백산 본진에 총 집결된 8천명의 내력을 「동 학사」에서 옮겨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임천서는 동학농민전쟁에 가담하면서 가족들을 고창군 상하면 장호리에 사는 사돈댁(그의 며느리 함평노씨(咸平魯氏)의 친정집) 옆으로 옮겨 놓고 떠났다고 한다. 만약을 위한 대비책 이었다. 그는 전쟁 중에 장호리 집에 몇 차례 들렸다는데, 올 때마다 2,300명씩 농민군을 데리고


와서 쉬었다 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하룻밤 자고도 가곤 했다 한다. 이와 같이 그의 활동 영역은 대단해서 동학교단 쪽에서도 『천도교서』와 『천도교 백년 사』에 비중 있게 실려 난 것을 보면 대단한 인물인 듯싶다. 1894년 9월, 2차 봉기 때에도 「동학사」의 기록을 보면 임형로와 함께 고창에서 5천군을 거느리고 일어난 것을 볼 수 있다. 농민군은 서울로 진격하기 위해 논산에서 공주를 공략하고자 11월 9일 우금고개(牛禁峙) 에서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려 처절한 전투 끝에 공주를 눈앞에 두고 퇴각하고야 말았 다. 논산 황화대에서 정부군과 일본군의 연합세력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황산벌의 매서운 바 람과 함께 밀려나고 말았다. 농민군은 전주성으로 퇴각했다가 11월 23일 금구 원평(院坪)으로 후퇴하여 원평과 태인(泰 仁)에서 안간힘을 다해 전투를 벌였으나 전세를 역전시킬 수는 없었다. 병사들은 모두 분산되고 임천서는 단신으로 장호리 사돈댁으로 피신해 들었다. 그러나 그 는 끝내 붙잡혀 법성포 수비대에 끌려가다 홍농면 지한리 다리에서 사지를 찢기는 죽음을 당하였다. 가족들이 시신을 거두어 고향 땅 석우촌 양지바른 곳에 묘를 쓰니 향년 31세였다. 3)노병렬(제2대 고창군의회 의원) 노병렬은 1943년생으로 상하면 장호리 505번지에 살고 있다. 그는 19

년~19

년까지 면단위 각 1명씩 군의원을 선출할 당시 투표에 의해 제2대 고창

군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어 4년간 많은 활동을 하였다. 제2대 군의원

찬종·주숭

노 병 렬

찾 향 켜

월 부부 -선진농업인을

업 군인인 아들

영 후 주 신문

2010년 02월 23일 [(

계자로 전

)고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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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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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

는 35년 전에 중

다. 장남인 머

와 시부모

의지

월(54)

사하

년간 시부모

일은 도

또한 많았으리라. 시 가한 부부는 가

을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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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방울토마토며 복분자, 울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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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 5

을 고

하며 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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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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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한해

나이가 들기

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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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했다. 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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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을 보고 자라

공부하고 있다. 또한 상

은 상

라고 하

게 한다. 앞으로 표

면서 터

수 있는 농촌 리며 하

잘 사는 농촌,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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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부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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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고 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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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이에 표

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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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며 그 결과 부부 모두

계자가 되었고 부모

계자로

개가면서 정보

임없는 노

들이 수십 년 간

걸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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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물

을 아들들이 잘 걸어갈 수 있도

아 기다리고 있다. 이제야 부부는 남은

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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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으

을 수 있었다. 표

나은 농촌에서의

아들도 고창에

는 부모

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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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라는 명언을 남기며

을 정리하며

의 면적만 약

성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농업을

해나가고 있다. 부모

의 기대에 부

의 기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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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에게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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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7년간의 군 차

았다.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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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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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농촌의 희망을

은 농토

살아가는 것도 국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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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상당수다.

이 되는 부분이다. 이제 어

하여

로지

했고 지금에 와서는 자수성가했다고 해도 과언

3개나 가지고 있을 정도다. 그

고 그

는 농산물에는 일체 농약을 사용하지

으로 까다로

, 그리고 시동

는 100세까지 장수하

움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고 3년 전부터 고창군농촌개 수

하에 두었

곡 등을 지으며 부부가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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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지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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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했고 차남인 표

에 없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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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만나 보름 만에 결

을 모시며

는 부부이다. 장호마을

지에 나가서

곳이라고는 남편

에 이장으로 선

한 기반을

한 농업 방

과 아들

만을

을 보게

나는 농촌을 만들기 위한 희망


표철식 연구원(복구마을) 표철식 경력사항 한국전자통신 연구원 융합기술연구부문 USN, IOT 융합연구 부장 한국전자통신 연구원 다중위성수신안테나 연구팀장 한국전자통신연구원 텔레매틱스 USN 연구단 RFID, USN연구그룹 그룹장

철식박 락 태 식 주최 술 K IT 주 ‘ 뜸 술 ’ TRI 융합 술 문 US /IoT융합 철식 난 코엑스 우 식 융합 천 술 발 ‘u City 센 네트워크 스템’ 술 발 케 술 US AMI 력 급 양 향 신 능 스템 술 된 품 실 너 량 능 따 너 능케 절 된 술 스 트 드 주 실증 KD 술 를준 빌딩 너 효율 높 후속 할 밝 혔 표

사는 전북 고창군 상하면 장호리 복구부

경제부가

하고 한국산업기

상에 E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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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정보제공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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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다. 본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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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로로 수상

평가관리원(

어나 성장했다.

) 등이 공동

관하는

연구부 표

2012년 상반기

부장이 지

28일, 서울

수상을 수상했다.

표 부장은 지 개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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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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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에 연구결과물을 적용했으며 한전

비 중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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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에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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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이라고

다.

· 발 R&D

경제부가 지원한 연구 개

포상하기 위해 제정

눠 근무 유 뜸 술 학 술 를높 난 술 · 영 으로 나 관 으

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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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한다. 표 부장은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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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을 수상했으며 공동 수상자중

적 관심을

해 4월, 제정한 명

자 모임인 한국공

하며

· 발 R&D

이고 연구 개

(

연 연구기

문 내최 권

) 분야 전

상이다. 수상자 선정은 국

,

가의 사기

위의 과

는다.

5. 장호리의 문화유물과 유적 1)

문 유 화

장호리 방풍림(長湖里 防風林) 장호리 방

풍림

번 풍림 몇 겹

은 상하면 장호리 산41

명사십리(明沙十里) 해

에 방

지에 있다.

으로 심어

바닷바

람 막 주 을

고 있다. 아

직햇


얼 안

수는

자랑거리가

(

장호마을 서

)의 제

수 목적으로

각 齊閣 (

)인

풍 막 주

가 있다. 또한

는 방

12그

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나

무 풍림

소나

이다. 현재 마을은 서해

는 해

가 마을을 감

이 있다.

년 정월보름

으로, 남동쪽에는 지방도 5

지나고 있다.

에는 거의 200년 이상

오 싸

불어 고창의

갑문

치한

고 있다. 북동쪽에 지방도 3호선이 남북 방

으로

라 해당화와

산으로 남을 것이다.

는 서해에서 불어

뿐만 아

있고, 마을 앞에는 90년 전 심은 소나

를 내 향 각각

호선이 동서 방

고, 농사용

씨 新昌表氏

창표

망학당(望學堂)이 당산제

유입 막

용두마을에는 바닷물의

복구마을에는

것이며, 또한 좋은 자연

갑문

에는

햇 를 듭할 록 풍림 유

되지만 앞으로

과는 500m 정도

~

가 남 북방

으로

지어 있는데, 이

더 둘레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는

무 높 떨 져 의

이는 10m 이상이며

있으나 과거에는 해

많은 소

내외 형

는 2m

선이 마을 앞에

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장호리 보건진료소는 용두, 복구,

장호리 528-1

건 료 람 료를 건 료 를

지에 위치하고 있다. 장호리 보

정, 동촌, 고아촌, 용산, 서당,

을에 노인들이 많은 농촌 다.(전화

정을 감

포 등의 마을 사

하여 어지간한 진

는 보

소에서는 장호,

들의 진

하고 있다. 마

많이 이용하고 있

호: 063-560-2668)

장호보건진료소

상하면 장호리 528-1

(560-2668)

장호리-장호,용두,복구,광촌 용정리-판정,동촌,고아촌,용산,서당,섬포

보건진료소의 설치 운영은 농어촌 등 보건의료를

위한 특별조치법 제15조에 의거 의료

취약지역의 주민에 대한 보건의료를 행하게 하기 위하여 설치 운영할 수 있도록 명시하고 있다. 주요 업무는 일차 진료(내소환자 진료 및 검사), 보건 사업(입욕사업 외 주민건강걷기, 에 어로빅), 방문건강관리(만성질환 관리 외 6가지)이다. 장호리 보건 진료소는 코리안 메디(Korean Medi)와 병원 연동을 할 수 있도록 인터넷으 로 연결되어있고, 면 소재지에 있는 상하약국과도 연동시켜 놓았다. 4-13-062

법장천

장호천

내곡천

해리

6. 마을의 전설과 풍속 1)장호마을

당산나무

상하면 용정리1142답

라성리123번지선

상하면 장호리1387답

상하

1270

장호리 해리면 해안

상하면 내곡천

3.00


마을에 4-5백년

당산나

14그

가 있는데, 이곳에서 음

를 내

1월 15일에 당산제

을 감는다.

장호마을의 당산은 다음과 같은

‘ 설 ’ ‘먼 날 를 오 당 산 옛

재수재

화가 있다.

를 생 를 양 우글 맹 생 날 무렵 키 신

장호마을에 소금장수

넘어

던 중 그 곳에

하는 고

거리던

다해 도망하여 장호 당산을 지 이 그 다.

죽 말 후매 고

년 정월 보름이면 당산에 제사

들은 당산에

마을사

성대

하여 이어

들의 구전을 통하여

향 길 려 달려 죽 힘 눌려 맹

하고자 귀

원을 해치

던 수호

하는

에 장군산

들자

인 당산의 기세에

수들

모시며 마을의 단결을 도모하고 있다고 한

얽힌 설 를 실 속 질 란 좀더

았다. 당산제는 앞으로 계

위 이야기

수들이 고

마을을 지

았다.

장호 마을 사

원이 노모

감나게 하기 위하여 것이

마을 사

구체적으로

람 알

죽 석 石獸 를 은

수(

)

당산

들의 이야기다. 아본다.

장호마을 당산 장호마을 당산은 호랑이, 사자 등 맹수들이 죽어 누워있는 조형물과 당산제 제단에 기러기 한쌍의 조형물을 설치하여 이야기가 있는 당산공원을 마을 대표 이미지로 부각시킨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설화가 있아. 설화 1 먼 옛날 장호마을에 소금장사를 하는 표생원이 살고 있었다. 소금을 팔아 고기 근이나 사 서 부모님을 봉양하고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장군산 재수재를 넘어 오던 중에 그곳에 우 글거리던 맹수들이 표생원을 해하려고 달려들자 죽을 힘을 다해 도망하여 장호당산을 지날 무렵 마음을 지키던 수호신인 당산의 그 기세에 둘려 맹수들이 죽고 말더란다. 그 후 정월


보름이면 당산에 제사를 성대히 모시며 마을의 단결을 도모하고 있다고 한다.(노명상) 설화2 3년 가뭄과 기근으로 마을 주민 모두가 굶주림으로 살고 있던 어느 해 당산제 제사장의 발의로 당산 제사를 성대히 모셔야 한다고 하니 마을 아낙들의 불만은 하늘을 찌를 듯 하였 다. 당산제를 모시던 중 어느 아낙이 말하기를 그렇게 당산의 효력이 영험하다면 저기 날아 가는 기러기라도 제사상에 앉게 해보시오 라고 하자 제사장은 기러기에게 손짓하며 소원을 빌자 날아가던 기러기 한 쌍이 제사상에 앉아있다 가더라 한다. 그 후 마을은 흉년도 질병 도 사라지고 오늘날까지 당산제를 모시며, 그를 모태로 마을의 단합과 화합을 이루며 화목 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서천댁) 당산나무 두 그루 오랜 옛날에 장호리에 당산나무 네그루가 있었다. 그런데 두 그루는 큰데 나머지 두 그루 는 이상하게 작았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큰 두 그루는 아빠 엄마이고 나머지 두 그루는 아기 당산나무라고 행각했다. 그런데 마을사람들은 큰 당산나무 두 그루에서 아빠용과 엄마 용 두 마리가 살고 있다는 전설을 진실로 믿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당산나무를 잘 모시면 그 해에 농사가 아주 잘되어 풍년이 든다는 전설도 마을 사람들은 믿었다. 그래서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이면 마음의 젊은 아가씨나 총각들이 당산나무에 들일 줄을 짚으로 길고 두껍게 들 였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두껍고 긴 줄이 매우 무겁기 때문에 어깨에 줄을 둘러메고 마 을을 한 바퀴 빙 돌면서 한 집 한 집 들어가서 돈이나 쌀을 거두어 가지고 술과 떡을 빚어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여 즐겁게 농악을 치며 먹고 놀다가 정월 대보름날에는 줄을 가지고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나서는 줄다리기를 하는데 남자와 여자 두 패로 나누어 두 번을 하였 다. 그런데 줄다리기에서 여자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설이 있었고, 줄다리기를 하면 언제 나 여자들이 이겼다. 그리고는 당산나무에 음식을 차려놓고 풍년이 들기를 빌기도 한다. 출처 : 노명상(남 고창군 상하면 장호리 97번지) 장군산 전설 이 전설은 장사현(長沙縣: 지금의 상하지방)으로부터 시작한다. 하늘에서 죄를 짓고 쫓겨난 천귀(天鬼)들과 서해바다 용왕에게 죄를 짓고 쫓겨난 이무기들이 떼를 지어 평화로운 장군 산 일원을 넘보게 되었다. 이들이 장사현에 출몰하여 갖은 만행을 서슴없이 저지르자 하느 님은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장사현에 하늘나라 장군을 내려보냈다. 장군산에 내려온 하늘나라 장군은 멀리 서해바다를 굽어보면서 천군들에게 지령을 내려 악 귀들의 동정을 살피도록 하고 지형에 따라 군사들을 매복 배치하였다. 쫓겨난 천귀와 이무기들은 밤이 되자 몰래 장사현에 침투하였다. 이때 복군촌에 매복하고 있던 천군들이 벌 때처럼 일어나며, 봉대산(烽臺山)에서는 봉화가 올라가고, 고산(鼓山)에서 는 북이 울리며, 기산(旗山)에서 기가 펄럭였다. 혼비백산(魂飛魄散)한 악귀들이 쥐구멍을 찾고 있을 때, 검산(劍山)의 칼이 번득이더니, 검산 앞 논에는 악귀들의 머리가 섬배미처럼 나뒹굴었다. 어쩌다 살아남은 악귀들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떨고 있을 때, 장군은 모암(帽 岩)에 벗어놓은 투구를 쓴 후, 말메등에 말을 타고 여산(礪山)으로 달려가 칼을 갈며 악귀들 을 노려보았다. 천군들은 이들이 도망하지 못하도록 악귀들을 물셀 틈 없이 에워싸고 경계 를 펼쳤다. 장군은 진털밭(진터)에 진을 치고, 막정고개에 군사들 쉬게하고 미산(米山)에서


군량미를 내오게 하여 스무재에 솥을 걸고 밥을 지어 주걱뫼로 밥을 퍼서 함박등에 담아 군 사들에게 배불리 먹이고, 장군 자신도 혁대를 풀어 라대(羅帶)에 놓고 군사들과 같이 행동 하니, 숨은 악귀들은 장군 앞에 엎드려 목숨만 살려달고 빌었다. '비는 장수 목 못 벤다'고 장군은 이들의 목숨은 살려주기로 하고 옥황상제께 품신하여 그 들을 모두 쥐로 변하게 해 다시는 나쁜 짓을 못하게 하였다. 쫓겨난 천귀와 이무기들의 출 몰을 평정한 장군은 백성들을 위하여 갈산(葛山: 지금의 갈오) 앞에 까마귀들이 허적여 물 을 먹는 곳에 오정(烏井)이란 샘을 파서 가막샘이라 부르게 하고, 이 지방 백성들에게 가뭄 걱정을 하지 않게 한 후, 하늘나라 장군은 장군산에 머물러 장군산의 산신이 되어 지금도, 아니 먼 미래까지 상하지방을 돌봐주고 계신다는 전설이다. 서낭당 이야기(재숫재) 상하면 바닷가의 장호리로 넘어오는 용정리와 장산리 경계선에 위치하고 있는 재숫재에 서 낭당에 얽인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아주 오랜 옛날 장호마을에 가난하지만 마음씨 착하고 효성이 지극한 소금장수가 살고 있 었다. 그러나 그는 소금을 팔아 겨우 끼니를 이어가는 가난한 생활을 면치 못하였다. 그 소 금장수는 거의 매일 소금을 팔기 위하여 무거운 소금 짐을 짊어지고 재숫재를 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루는 이 길을 가다가 피곤하여 바위에 누워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신령님이 나타나, "발이 닳도록 다녀도 끼니를 이어가기 어려울 텐데 잠을 자고 있느냐?"며 호통을 쳤다. 소금장수는 놀라 깨어나 잠을 잘 때 베고 잔 돌을 가져다가 고개 위의 바위 옆에 놓고 절 을 하며, "재수 좀 좋게 해 주십시오."라고 빌었다. 그 뒤부터 소금장수는 고개를 넘을 때마다 돌을 놓고 빌기를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어느덧 돌이 많이 모아지게 되었다. 그 돌이 모아진 곳을 서낭당이라 하고, 소금장수는 잘 살게 되 었다. 이러한 소문이 퍼져 이 고개를 지나는 사람들은 돌을 던지며 '오늘 재수 좋게 해달'라고 빌 며 지나게 되었으며, 서낭당에 빌면 과연 재수가 좋았다는 전설이다. 서낭당은 성황당(城隍堂) 성황사라고도 하는데, ‘조선시대는 개가금지법이 있어 한번 시집 간 여자는 다시는 개가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두 가지 방법으로 개가를 허용한 것이 있었 다. 하나는 보쌈이요, 하나는 새벽에 보따리를 쌓아서 서낭당에 가 쪼그리고 앉아있으면 제 일 먼저 지나가는 남자가(그 남자가 기혼일 경우에는 그 다음 남자) 그 여자를 취하는 제도였다. 그 런데, 아침에 나가 쪼그리고 앉아있는 여자는 자기의 저고리 섶으로 나비 모양의 리본을 만 들어 차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리본이 그 여자가 과부거나 소박맞은 여자임을 표시하 는 증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리본을 차고 있는 여자를 나비부인이라 부른다.' 그 뒤 이 고개를 재숫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바위와 바위 위에 놓인 돌은 치워졌으며 그 자리에는 도로가 나서 차량들이 다니고 있을 뿐이다. 전설이지만 우리 의 옛 풍습이 없어져 가는 현실이 아쉬울 뿐이다. 1)마을굿 굿이란 원래 무당이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노래와 춤으로 길흉화복 등의 인간의 운명을 조 절해 달라고 비는 원시적인 종교 의식이며, 여러 사람이 모여 떠들썩하거나 신명나는 구경


거리다. 예로부터 마을에는 농악과 무당의 굿이 있었다. 농악이나 무당굿은 굿을 하는 방법에 따라 여러 종류의 굿이 있었는데, 장호마을 굿에는 다음과 같은 종류가 있었다. 매굿: 음력 정월 2일부터 15일 사이에 농악대가 농악을 하면서 부락을 한 바퀴 돈 다음, 집 집마다 들어가 지신(地神)을 달래고 복을 비는 농촌의 민속 행사다. 마을에 따라서는 농악대나 무당이 있는 마을도 있고 없는 마을도 있다. 없는 마을에서는 다른 마을 등에서 불러올 수도 있었다. 불러오는 굿패를 비나리패 또는 건립패 등이라 하였 는데 그 뜻은 다음과 같다. 비나리패: 유랑 예인집단인 걸립패(乞粒牌)의 일종이다. 걸립패의 주로하는 종목이 비나리이기 때문에 '비나리패'라는 별칭이 붙었다. 비나리패가 마 을에 들어가면 우선 집주인의 허락을 얻어서 풍물놀이를 시작한다. 토지 귀신을 밟아주는 터굿부터 시작하여 집안 웃어른을 모시는 성주굿, 부엌의 조왕굿, 맑은 물이 솟기를 비는 우물굿, 장맛이 나게 부탁드리는 철륭굿, 우마(牛馬)가 별고 없이 건강하게 해달라는 우마 굿, 고방에 재복이 많이 들어와달라는 곳간굿 등을 고루 벌인다. 이때 덕담으로 기원하는 고사문서를 비나리라 부르는데 매우 구성지고 신명난다. 고사문서를 잘해야 관중들의 인기 를 차지할 수 있었다. 비나리패는 반드시 어느 사찰과 관계를 맺었다는 신표(信標)를 갖고 마을을 떠돌며 각 가정을 찾아 사찰의 보수나 창건을 위하여 기금을 걷는다는 명목으로 곡 식과 돈을 얻었다. 이 걸립패 역시 남색(男色) 조직이었다.

1930년대 이후로는 남사당패에

합류됨으로써 사라지게 되었다. 이들의 주요종목은 풍물놀이와 줄타기·비나리를 들 수 있다. 오늘날의 남사당패는 엄격히 말하여 이들 비나리패와 남사당패·솟대장이패들이 혼합된 집단 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따라서 비나리패의 잔재된 모습들을 남사당패를 통하여 유추할 수 있다.

걸립굿 [乞粒 ―] 마을의 풍물패가 치는 굿. 그 발생은 집집을 돌며 고사를 지내주고 쌀이나 돈을 걷는 것을 '걸립한다' 또는 '걸궁한다' 고 표현한 데서 유래한다. 순수한 노작농악이 차츰 기량을 자랑하는 연예농악으로 발전하는 가운데 걸립굿이 탄생했 다. 걸립굿은 마을에서 출발하는 소략한 것도 있으나 절에서 보내는 절 걸립굿도 있다. 걸립굿은 규모도 크고 의식절차도 복잡하며 기예도 뛰어나다. 구성은 영기·서낭기·태평소·나 발·쇠잡이·징수·장고수·고수·대포수·조리중·창부·양반·각시·무동 등 여러 굿패로 이루어진다. 마을 걸립굿은 마을에서 당산굿·문굿·샘굿·날당산굿을 울리며, 집안에서는 문굿·마당굿·조왕 굿·철륭굿·고방굿·외양간굿·도둑잽이굿 등을 친다. 집안 고사에는 따로 집안이 잘되라는 비 나리(주로 집안의 한가운데 있는 큰 마루인 대청에서 벽사진경[辟邪進慶]을 기리며 외어 내리는 노래로 덕담이라 고도 함)나

성주풀이를 부르기도 한다.

치배(치-輩) : 농악에서, 앞치배와 뒤치배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며, 농악을 치는 사람을 이 르기도 한다.


뒷치배 : 민속 농악에서 앞에 선 상쇠 가락을 뒤에서 받아치는 사람. 또는 그 받아치는 가 락. 춤을 추며 재담을 하는 대포수, 조리중, 창부, 할미 광대, 비리쇠, 각시 광대, 무동 등이 이에 속한다. 앞치배: 농악에서, 앞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꽹과리, 징, 장구, 북, 소고재비와 같은 악 기 연주자들이 앞에 서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농악에서, 상쇠가 연주하는 가락. 잡색 잡색은 허두잽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판 안에서 자유롭게 다니며 재담, 몸짓, 춤 등으로 판 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고, 연희자들과 관객사이를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 이다. 이들은 굿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해야 하며, 끼가 있어야 한다. 잡색에는 ‘대포수’, ‘창부’, ‘조리중’, ‘양반’, ‘각시’, ‘화동’, ‘무동’, ‘농구’ 등이 있다. ‘대포수’는 잡색들의 수장으 로서 풍물굿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굿 머리를 잘 알고 굿판의 흐름을 잘 파악하여 치배 나 구경꾼의 잘못을 지적한다거나 바로잡는 역할을 수행한다. 대포수: 전북 지방의 농악에서, 나무총을 들고 배낭과 꿩 털을 지고 나오는 사람을 이르는 말. 군중(軍中)이나 농악 따위에서, 나팔 부는 일을 맡은 사람. 풍물놀이 ①. 개요 농악이라고도 하며 농업 사회에서 특별한 날이 있을 때 흥을 돋구기 위해 연주하는 음악으 로 알려져 있으나 21세기 현재에는 무형문화재 보존회 등의 공연을 제외하면 일반인은 자 주 접하기 힘들다. ②. 용어 * 굿판 - 풍물놀이를 하며 노는 판을 말하며 무당이 하는 굿판과는 다른 의미이다. * 치배 - 악기를 치거나 분장 등을 하여 농악대에서 연주를 하는 사람을 말하며 각 악기를 앞에 붙여서 말하기도 한다. (예 : 장구치배, 북치배) * 상쇠 - 치배의 맨앞에 서서 꽹과리를 치는 사람으로 전체 굿판을 이끌어 나가는 중요한 역할이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정도로 보면 된다. * 상치배 - 각 치배의 맨 앞에서 연주를 하는 사람으로서 농악대에서 해당 악기를 가장 잘 다루거나 가장 연륜이 있는 사람이 보통 맡는다. 악기 이름을 붙여 상쇠(꽹과리), 상장구 등 으로 부르며 북이나 징은 수북, 수징 이라고 한다. *잡색 - 악기를 다루지 않는 치배로서 대포수, 양반, 각시 등 다양한 분장을 하고 악기 치 배와 사람들 사이에서 흥을 돋구는 역할을 한다. 또한 잡색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농악 대가 진을 짤 때 치배 간의 간격을 조절하고 치배와 관객들을 각 진을 짤 때 마다 이어줬다 분리했다하는 것이 있으며, 도중 치배의 채가 부러지면 예비채를 건네주고 지친 치배들에게 막걸리 등 먹고 마실 것을 제공해주는 것도 있다. * 치복 - 풍물놀이를 할 때 입는 옷으로서 바지 저고리에 색색의 조끼, 삼색띠 등을 두르고 지역에 따라 고깔, 전립, 상모등을 쓴다. * 상모 - 벙거지 모자에 길게 자른 종이를 붙여 돌리는 그것. 88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가 쓰고 있는 것이 상모이며 지역에 따라 채상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또한 쇠치배들은 '전립'


이라고 부르는 상모를 쓰는 데 이는 다른 상모와는 달리 긴 종이를 붙이지 않고 짧은 지지 대에 부포 등을 달아 돌린다. ③.분류 풍물놀이는 크게 웃다리, 호남농악, 영남농악 등으로 나뉘며 웃다리는 경기, 충청도 지방을 아우르는 말이다. 또한 지역별로 세분화 하여 호남좌도, 호남우도 등으로 더 세부화 시킬 수 있다. 여기서 좌 도/우도의 개념은 임금님이 계신 한양을 중심으로 임금님이 봤을 때 왼쪽이 좌도, 오른쪽이 우도이다. (따라서 지도상에서 봤을 땐 오른쪽이 좌도, 왼쪽이 우도이다) ④. 특징 한국 전통 음악은 삼분박을 기본으로 한다. 아리랑을 부르면서 3/4박자로 맞춰보면 그 느낌 을 알 수 있다. 웃다리 농악은 모든 치배가 상모를 돌리는 것이 특징이며 쇠치배가 쓰는 전립이 긴 빗자루 형태이다. 기본적으로 웃다리 농악의 파생분야가 남사당 농악이기에 비나리, 상모놀음, 쇠놀 음이 매우 발달 했다. 대표적인 가락으로는 자진가락(사물놀이의 마지막 가락), 웃다리 칠채, 육 채, 자진삼채, 덩덕궁이 있다.

영남 농악은 군사적인 느낌이 나는 것이 특징이며 장구보다 북이 위주가 되어 힘차고 전투 적인 느낌의 연주를 하고 진을 많이 짠다. 실제로 영남농악은 농악중에서도 진법과 강렬한 채상동작들이 주가 된다. 고대의 예비군훈련 같은 면모가 강하며 이른바 농군악적인 요소가 많다. 대표적인 가락으로는 별달걸이, 반길군악 등이 있다.

호남 좌도 농악은 척박한 산간 지방에 살던 사람들이 치던 것이라 빠르고 투박하다. 또한 다른 지방의 농악에 비해 '보여주기'보다 '같이 놀기' 위주의 굿판을 짜는 경향이 있다. 대체 적으로 힘과 강약조절이 뚜렷하며 개인놀음보다는 단체놀음이 발달한 편이다. 임실필

농악의 경우 도둑잽이 굿이나 수박치기, 등지기, 춤굿등이 살아있어 사실상 공동체적인 요 소로서의 농악이 살아있는 최후의 농악이라 할 수 있다. 쇠와 소고놀음이 강한편이며 잡색 놀음이 중심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웃다리의 정교한 쇳가락 및 마당밟이, 우도농악의 세밀 함과 장구 및 부포놀음, 영남농악의 웅장한 진법과 강한 동작등이 골고루 섞여있어 농악을 처음 접했을 때 그 기초로써 공부하기에 적합한 농악이다. 대표적인 가락으로는 반풍류, 갠 지갱, 영산굿, 짝드름(짝쇠놀음의 일종으로 좌도쪽이 원조라는게 국악계의 정설)이다.

호남 우도 농악은 비옥한 호남 평야에서 발생하여 돈 많은 지역 유지들이 요구에 맞추어 굉장히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쇠치배는 크고 아름다운 부포를 매단 전립을 쓰며 상대적으 로 다른 농악대에 비해 개인놀음(설장구의 본좌지방이며 뻣상모놀음의 원조이다.) 발달했고 좌도에 비해 느리고(좌도 농악에 비해 느리다는 거지 농악이기때문에 느린게 절대 아니다!) 가락이 세밀하다. 또 한 여러가지 가락들이 발달했고 한번쯤 들어봤다 싶은 농악장단들은 거의 우도장단들이다. 월드컵 장단이 오방진의 빠른 장단형인 진오방진이니 알게모르게 인지도가 제일 높은 장단. 맺고푸는 수법이 매우치밀하여 사물놀이에서 가장 많이 채용된 장단이다. 삼도사물놀이에서


별달걸이와 마지막 휘모리를 제외하면 전부 우도농악에서 쓰는 장단이다. 대표적인 장단으 로는 오채질굿, 오방진, 세마치(양산도), 삼채, 굿거리(풍류굿)이 있다. 질굿: 첫째 마당 : 질굿(인사굿) 행진가락으로 쇠(메구)에 맞추어 덩실덩실 춤을 추며 행진한다. 상쇠가 입장할 때 또는 대 문 앞에서 「주인 나그네 들어가요」하며 외친다. 입장한 뒤 놀이 과정 준비로 원을 그리며 정렬하여 쇠에 따라 주위에 인사한다. 당산굿: 당산에서 마을을 위하여 제사를 지낼 때에, 마을 사람들이 농악을 연주하며 노는 굿. 날당산굿: 호남 농악에서, 걸립패들이 마을에 들어가서 걸립을 끝마치고 나오면서 당산(堂 山)에 축원하는 인사굿. 들당산굿: 호남 농악에서, 농악대가 마을에 들어서기 전에 준비로 벌이는 굿. 역진당산굿: 소고가 앞에 서서 거꾸로 나아가는 굿을 일컫는 것으로, 농악꾼들이 문굿을 하 려고 동리에 들어갈 때 뒷걸음으로 들어가는 동작이다. ❶ 장호마을의 민속놀이와 농악 장호마을의 민속놀이와 농악에 대하여는 1차, 1999년 1월 17일과 2차, 2004년 7월 6일 이명훈, 송기태 등이 장호마을 거주 노명상(1933년생), 정화순(1942년생. 노명상의 처) 등 과 면담을 실시하고, 2013년 7월 일 이명철, 이대건 등이 3차면담을 실시하여 장호마을의 마을굿 등이 전승되어온 내력을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장호마을은 해안가에 접해있는 마을인데 일제 강점기 시절에 간척사업을 하면서 농토가 확 장되었다. 따라서 농촌으로서의 면모가 강하지만 어촌이었던 시절과 명사십리(明沙十里)의 갯벌과 그 바다에서 나오는 해산물은 농토의 수확과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호미 나 거랭이로 조개류를 잡고, 그물을 끌어 작은 새우를 잡는 등의 맨손어업과 대나리 그물을 치고 소형어선으로 고기를 잡는 등의 어업활동도 활발하였다. 이에 따라 행해지던 뱃노래와 농악, 무당굿 등이 영역을 뛰어넘어 전승되어왔다. 마을공동체의 큰 행사를 치를 때면 항상 뱃소리를 한다. 특히 줄감기와 줄다리기 과정에서 뱃소리를 가창하는 점이나, 마을풍물굿이 억셌던 점, 세습 무게집단의 걸궁활동이 행해지던 점 등은 오늘날까지 이 마을이나 주위사람들의 가슴에 남아있는 원인이 된 것이다. 현재의 고창농악보존회가 자리를 잡기까지는 이 마을 노명상 옹의 역할이 컸다. 2차면담 때까지만 해도 노명상 옹을 상쇠로 하여 마을 풍물굿이 행하여져 왔으며, 당산에 줄도 감았다. ★마을 풍물굿 전승자들 0.정월의 공동체의례와 풍물굿 • 당산제 당산제의 당산굿은 동네마다 따로쳤다. 정월 보름날(15일) 제를 모시면서 굿을 치는데, 동 네에서 어린 애를 낳거나 개라도 새끼를 낳으면 제를 안 지내고 깨끗한 날, 이월초하루날 지낸다. 이때 제관은 찬물로 목욕하고, 제기(祭器)도 집에서 쓰던 그릇을 쓰지 않고 새로 사 왔으며, 제관도 생기를 맞춰서, 생기복덕이 맞는 사람이 제관이 되었다. • 마을 풍물굿의 치배 구성과 연행자들


상쇠는 노연종, 노현종(두 분은 2004년도에 81~82세 가량) 설장구는 황규언(85세가량)과 동윤씨 아버지(100세가 넘음). 노명상씨는 장구, 주봉열, 주양근씨는 꽹과리. 징은 노해상, 통북도 치 고, 대포수 박용하 선생님. 김양술 선생의 제자. 용연씨 아저씨는 장고(?) 등이었다. 잡색은 망구, 순사, 양반, 각시, 대포수 등이며, 상자로 탈을 그려 억지로 시키기도 했음. 각시는 박삼차, 흥덕이, 팽선이(이중선), 박삼차는 양춤도 잘 추고, 영감행세 잘하기는 노은 섭씨 등이었다. • 마을의 보물 뱃징 장호마을에는 '뱃징'이 두 개 있다. 그 징은 장호와 용사마을에 각각 하나씩 있었는데, 용 사가 장호로 합쳐지면서 지금은 장호 마을회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 두 개의 징은 일정 때 만들어진 것이고, 진도에서 배를 사올 때 배에 따라온 징이다. 그 징은 방짜 (썩 좋은 놋쇠로 만든 유기그릇)였다. 구임한지는 50년이 넘었는데 소리가 크고 잘 나며, '징은 굿의 눈이다'고 할만큼 중요한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옛날 왠만큼 큰 배는 꽹 과리‧징‧장구 등은 기본으로 갖추어져 있었다. 그외 장호에는 죽은 개가죽을 소토(백회)를 발라서 기름때를 빼고 털을 제하고 공동변소 소 매통(오줌통)에 담가 놓았다가 장구를 만들면 찧어지지도 않고 소리도 잘 나는 장구가 있었 다. • 정월의 공동체 의례와 풍물굿 마을의 큰일과 뱃소리 장호마을에서는 마을에 큰 일이 나면 항상 벳소리를 먼져 했다. 여기서 큰 일이란 당산제 외에 일년에 구세 번씩 쉬는 날을 의미한다. 즉 단오나 백중 등이다. 그런 때 날을 받아 술 과 음식을 해놓고 한 잔씩 먹고 굿도 치고 씨름도 하곤 했었다. • 마을의 당산과 우물 장호마을에는 할머니, 할아버지 당산이 있는데, 합쳐서 그냥 당산이라고 하며, 제사상은 따 로따로 차려놓는다. 아람들이 소나무를 당산나무라고 하지만 줄 감을 때는 소나무에 감지 않고 아카시아 나무 에 감고, 지금은 돌 당산에만 감고 있다. 정월보름날 당산제를 지내는 것은 일정 때 쫒겨다니면서까지도 당제를 지내고, 마을에 큰 일이 나면, 2월 초하루, 미뤄가면서도 꼭 줄은 감았다. • 샘굿 지금은 공동 우물이 다 없어졌지만(2004년 기준 10여년 전) 옛날에는 2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지금도 남아 있긴 하나 그 물을 농사짓는 관정으로 쓰고 있다. 이 우물은 박정희 대통령 시 절 노명상씨가 이스라엘에 가서 교육을 받고 와서 판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샘굿을 쳤었 다. • 매굿(마당밟이) 매굿은 정월 열 낳트날 많이 쳤다. 매굿 칠 때가 열 나흩날, 매굿을 지신밟기라고도 하는 데, 그때만 해도 마을이 90여가구가 넘었다. 집집마다 다 돌아야 하기 때문에 오후 4시경부 터 치기 시작해서 그 이튼날 새벽 세시, 네시까지 쳤다.


이때 굿치는 집에서는 술과 밥도 주고 성의껏 대접하는 것이 상례이며 가난하다 해서 안 쳐 주는 집은 없었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 모두 고주망태가 되어 추림새도 못하고 늘어져 버린다. 처음에는 마당 에서 돌다가, 부인들이 따라다니며 상에다 물 떠놓고, 쌀 함박그릇 갖다 놓고, 불도 켜고, 한바탕 치고는 정지(부엌)으로 들어가 치는데, 이때 사설은 이렇다. "정지구석도 니구석 방구석도 니구석 삼사십이 열두구석, 달리자 달리자 성주조상을 달리 자(달래자)"라고 사설을 하고 난 후 굿을 쳤었다. 또 정지굿을 조왕굿이라고도 하는데, 처음 조왕에 들어가서 "백구여~"라고 부르면, 구경꾼이나 농악을 하는 사람 모두 "예이~"하고 답하면 "니 집 조상은 특별한 손님이 많이 찾아오니, 밥에 뉘도 안 들어 가고 머리카락도 안 들어 가고 한 되 밥 허면 두 되 밥으로 늘어나고...하면서 사설을 하면 "네에~"하고 철륭으로 간 다. • 철륭굿(철륭은 장독대(장꽝)를 말한다) "공산아 명월아 새칠팔(4,7,8의 합은 19,9는 갑오)로만 놀아라." "솔개 떴다. 장꽝 밑에 쥐들어간다."하면서 굿을 치고 나와 다른 집으로 이동한다. 이동하면서 치는 굿이 질굿이다. • 당산제와 당산굿, 뱃소리 하면서 줄다리기 당산제는 주가포(마른 건어물 술안주), 곶감, 대추, 사과 몇 개 등을 사서 주(酒)∙포(鮑) 등을 진설하고, "질병이 있어도 우리 동네는 오지 말고 딴데로 가라."고 동네의 안녕을 빌었다. 당산굿은 줄 감기 전에도 치고 감아놓고도 치며, 할아버지 당산 할머니 당산께 술 따라 놓 고도 쳤다. 뱃소리는 줄 다리기 할 때(여기 말로는 줄 댈 적에) 한다. "어여 디야" "어기여 어~ 고기 어(魚)자 일어날 기(起)자" "고기야 일어나거라. 내가 잡을란다." 장호마을은 배 형국이기 때문에 언제나 뱃소리를 하면서 줄을 감았다. 줄을 감으면서 마을 사람들의 단합도 도모하였다. 줄을 감을 때 막걸리를 약 30동이 해야 하는데, 한 집에서 다 못 하니까 7~8집 나서서 술 도가니에 술을 빚는다. 줄을 꼬아 줄굿 치고, 줄을 매고 동네를 한 바퀴 돈 다음, 잡색들이 춤을 추며 당산으로 해서 들당산으로, 한 바탕 친 후 제사를 지낸다. (소리 주고 받기) 어기야~ 하~

/어기야~하~

세월아 니월아 가지를 말어라~하~

/어기야~하~


아까운 청춘이 다 늙는다~하~ 어기야~하~

/어기야~하~

/어기야~하~

오동추야 달도 밝다

/어기야~하~

이 줄 한 장을 비어 가지고서 우리 동네 안녕을 헌다. 어가 디야 어기야

/어기야~하~

/어기야~하~

/어기야~하~

*소리 메김은 메기는 사람이 자기 좋은 소리만 변형하여 메겼다 한다. 이렇게 부르는 노래 를 배치기 소리라고 한다. • 샘굿 샘굿은 당산제부터 지내고 친다. 오방돌기(동서남북 중앙) 전에 친다. 샘굿을 칠 때 사설이 있는데, 굿치는 사람들을 부르면 "예~이"(이때는 박구여!라고 부르지 안음) "칠 년 대한 가뭄이 들어도 좋은 물 내주시고, 구 년 홍수가 들어도 맑은 물만 주시쇼. 용왕 님께 빕니다."라고 사설을 하면서, 절도 하면서, "푹푹 솟아라 하늘까지 솟아라." "푹푹 솟아라 하늘까지 솟아라." 가락에 맞추어 친다. • 판굿 판굿은 돈을 모아가지고 보름 당산제 지내고 친다. 매굿은 한푼이라도 거두기 위하여 집집 마다 돌아야 한다. 안 주는 집도 다 돌아야 하기 때문에 판굿보다 먼저 친다. 판굿을 칠 때 는 전기불이 들어오기 전에는 솜을 뭉쳐 철사에 감아 기름에 찍어 횃불을 만들고, 모닥불 놓고 쳤다. 벅구놀이(소고)도 하며 "얼씨구" 하면서 춤을 추고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줄겼다. • 여름 농사철 만두레 풍장굿 7월 만두레, 나락모개가 나올 무렵 장화 만들어 쓰고, 논을 매는 철에 풍장굿을 쳤다. • 당골들의 건립굿과 문굿 -당골들의 건립굿 당골들이 정∙이월에 돈 있는 집만 돌아다니면서 굿을 쳐 주고 돈을 받아 갔는데, 특히 만 식이패와 성근이 패가 유명했다. 이때의 굿을 사람들은 건립굿이라 했다. 그러면서도 다리 를 세운다거나 하는 건립굿은 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장호마을에서 굿을 치면 근동 상하∙공음∙해리 사람들이 와서 진을 쳐버려 먹을 것이 없는 시절이라 마을 사람들이 피해를 많이 봤다고 한다. 건립굿을 칠 때 가야금 하는 사람도 따 라와 성주풀이도 하고, 피리도 불고하였다. • 걸궁패의 문굿 문잽이 굿은 상쇠외 대포수가 겨루는 것 같이 굿을 치며 총을 쏘고 하는 굿인데, 가끔 한 번씩 쳤다. • 마을 풍물굿 성쇠


장호마을 풍물굿은 이승만 정권 때, 3.15부정선거를 하기 위하여 농악을 키워 성행하였으 나, 박정희 정권 유신 때 완전히 사그라졌는데, 유신 때는 당산도 파버리는 마을이 많았다. 그러나 장호마을은 더 잘 하거나 못할려고 하지 않고, 계속 유지하여 왔으며, 인공 때도 피 난 갔다 와서 당산에 줄을 감았다. 장호마을에서 풍물굿이 가장 성행할 때는 해방된 다음 해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은 농촌 마을의 고령화로 농악을 하는 사람이 없고, 증언해준 사람 몇 분만 옛 일을 회고할 뿐이다.

7.장호리의 현재 1) 마을의 조직ㆍ시설ㆍ종교ㆍ산업

①장호리 이장, 지도자, 부녀회장(2013년

/

~

마을

구분 년도

12

장호

이장

노창

지도자

용두

이장

지도자

녀회

13

10

8월)

~

11

10

7

~

8

5

~

6

3

~

4

노만수

노만수

노만수

노만수

노연

김 엽

복구

이장

표호

표연수

표호

표연수

표연수

표연수

지도자

광종

녀회

②장호리 산업시설

표명

박 철 정

표명

표명

표명

표명

녀회

찬종

~

9


✦장호어촌체험마을(063-562-9390)

장호어촌체

마을은 명사십리

처음 2011년도에 있다.

험 급 를받

장호어촌체 정의

인을

를 할 관

하는 장호ㆍ동촌 어촌계원들이

았고, 2012년 7월

마을에는 어촌계장과 사

준 허 를받 공

장이 상

루 무

현제 어촌계장은 표재

(당51세, 010-3679-0875), 사

하였다.

운영

아 현제까지 1년여

하며, 어촌계장은

고 있다. 현재 어촌계원은 31명이고, 하

설립

3명

씩번 안종

갈아가며

장은 표

보수이고, 사

근무

하고

장만 소

한다.

(당50세, 010-8626-7795)

이며, 어촌계원은 남27명 여4명 모두 31명이다.

⦁장호어촌체

천혜 안 험 건 건 층 층 객실 ~ 의 해

촌체 본

사구(

마을

)와 4km의 긴 백사장이

물이 들어서 있다.

물은 2

설 海岸砂丘

마을 시

으로 되어있고, 1

3개, 약30명 정도

펼쳐

무실 샤워실 객실

은 사

,

수용하며,

진 명사십리 바로

, 화장

, 보일

러실

쪽으로 장호어

등으로 사용하고, 2

은 성수기와 비수기로 나

누 객실 어

하나에

70,000원 120,000원이다.

속건

물로는 창고 1동, 야

울 수 있는 장치

⦁현장체

海岸砂丘 칠 갯 맛 죽 합 우잡 잡 험 찰 양문 험 능 험 능 근 찾

명사십리 4km의 해 의 대명사

하고, 새

, 해

등 농업체 또한, 인

사구(

조개, 동

이 전통고기 화 체

도 가

벌까지 체

벌과

, 백

이 체

등이 가

자 등을

풍림 함께 청 양

)에 방

산바다의 한 중간에

벌에서 노랑조개,

물 관

하여 명사십리

등 다

형 트렉

과 소

타에

손님

들을

풍 펼쳐 청 갯 식 험 능 배 족 레 츠및 식 오디 캐

정바다가

한 조개가 서

과 백사장에서는 축구, 하며, 농가에서

는 구시포해수

진다. 그

구 등

장과 구시포해수

이 가

사구 동

, 고구마, 감자

정바다의 모래

하고 있어 언제나 체

산되는 복분자,

어 나른다.

과 해당화가 아름답게 피어있고, 예부터

하다.

에는 연간 20만명이

형 실

정자 2동이 있고, 2대의 대

, 구시포

항 매 유 ,


상하치

, 한전시

험센

터, 용대리

수지 가시연

등 다

한 관

자원과

거리와 연계되어있

다.

-조개

채취 험 체

채취 험

은 3,000원이다.

-전통 어

망그물체

-대나리그물체

우잡

-

마체

이(장

그물을

:

말뚝 박

(바다에

(그물을

험말 섯

식 설 갖

⦁기타:

은 8,000원이며,

초 학생 져

g

한 조개는 나이 상관없이 개인당 5k 까지 가

20만원

-새

: 1인당 성인은 10,000원, 중고

고 다

으로

고 그물을

면서

를잡

서 고기

를잡 잡

면서 고기

고 다

는 방법):

는 방법):

식):

는 방

은 4,000원,

치원

갈 수 있다.

인원과 시간제한 없이 1

인원ㆍ시간제한 없이 1

10만원

시간제한 없이 개인당 3만원.

(6)필이며 10분에 10,000원이다.

접식 민박

사는 인

추게 하여

주 숙박 설 극활 록

당을 소개해 을 적

며,

용토

장호체험장을 운영하는 어촌계원(2013.

이 부

족할 우

모색하고 있다.

8월 현재)

장호 동촌마을 등에

민박


성 표 재 표 안 노 명 박 현 김 정 이 희 표 재 노 창 조 남 김 상 노 연 표 덕 표 재 주 숭 노 만 김 병 정 매 표 선 김 영 표 명 표 진 노 연 노 귀 주 태 김 영 이 이 김 경 표 덕 노 연 노 병 김 안

장호리의

명 옥 종 환 호 자 근 춘 득 연 집 백 종 금 월 수 태 자 종 학 곤 남 훼 상 식 용 례 선 종 홍 철 순

주 동촌 동촌 동촌 동촌 장호 용두 동촌 장호 판정 장호 장호 동촌 동촌 장호 장호 판정 동촌 동촌 구시포 용두 장호 동촌 동촌 장호 동촌 장호 동촌 장호 동촌 동촌 동촌

종 종 활

비 고 어촌계장 사무장 운영위원 운영위원

운영위원

운영위원 운영위원

재무

매우 양 형태 난 우 외형 회 회 속 규 님 ‘ 회’ ‘풍 회’ 회 주 근 출석

장호리의

동은

가 있다. 장호리의 교 용 교

목사

로 인

번호 1

교회명 장호

교역자 김용주

나 장호리

먼저

불교

신앙 찰

대표적인 사

장호교

주민

들은

근 운

은 인

인 선

재적으로는 불교,

근무 종운

사 등이 있으며, 심원면의 조계

습 립

적인 모

성한교

은 기독교의 교

하였다. 1984년

로 명칭이 바

었다.

회 김

선한

하고 있다. (전화563-0092)

우펀번호 585-914

무속신앙 찰

고창군 일대에 있는 사

사, 인

에서

교회전화 563-0092

다.

이며 1974년 4월에 창

장호, 동촌, 복구 등지에서

다.

로 나타

는 대한예수교장로

이 부임한 이래, 2006년

주 소 상하면 장호리

등 다

로 와래하는

장면의 관음사ㆍ

미륵

양 종 생활 유 한

지하고 있

형태

로 이어지고 있다. 고창의

사ㆍ연화사 등이 있고, 해리면의

선사 등이 대표적이다. 상하면에 사

은 없다.

미륵


무속신앙 신앙 무속신앙 합 습 풍습 은

등의

과, 정월 보름의

하여 세

왕 를 낸 질굿 오 오 칠 오

이라기보다 당산제 용

으로 이어

,

월단

,

다거나, 당산

괄 육 알 봐 확 된 특히 무 향 를 적인 교

상하의 교

다.

은 조선시대

유학

과 상하면 일대의

고, 인재의

내려

체성을

통해서

부터

)

무 향 장

활 무 향 를

기관인

유림

들은

교는 1420년(세

통한 인

2년)에 창

되었으며, 그

지역 사

모재(

)

기의

재서당은

어진 곳에 중

재(

도의가

도의(

서당)을

(

과자 8명을

한 교

초 학

장호리의

설립

의 산

되어 8년 뒤인 1600

했다.

상하면

대적인

을 거

론 근 영광 인

교가

구이다.

교, 1962년 11월 28일 상하

교는 상하면 장산리 133-1

후 후 줄

장호리는 상하중

교가

1912년 고창

치원이 1

학급

회졸 생 ,

군이다.

학급 회졸 식 ). 이 업

개원하였다.

근 강초

교되었고 인

수는 1959명이다. 장호리는 용

지에 소재한다. 1971년 1월 11일

학급

교 용정분교장

교 용정분교장으로 개교하였다(1

수는 34

김영

설립

학급 취

인가(9

수 교장이

)되

임하였

이 인가되었다.

하였다. 2012년 현재 총

까지 등

편성)되었고, 1969년 2월 6일 제1

이농현상으로 인하여 1996년 119명의

교로 개교하였다. 그해 4월 1일 토대

1978년 12월 5일에는 15

어들기 시

초 학

교로 교명이 개칭되었고, 2002년 2월 28일

되었다.

에까지 이름이

되었다. 이

다.

(8

강초 학 폐합 졸 횟

교에 통

등으로

교로

하였고, 1984년 3월 2일에는 용

어 1971년 3월 1일에 상하중

등하교부터 시

교 등이 이어

강 민학

상하중

인가되어, 1963년 3월 2일에 상하

초 학 학 학

이며,

폐 될때

었다가 일제에 의해

무 초 졌 초 학 초 학 승격 학급 강초 학 병설유

구, 상하면은 1931년 상하

1996년 3월1일에는 용

산리에 감

도의의 5대조의 재

하였고, 고창은 물

은 1909년

교, 고창고등

1963년 3월 1일에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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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다.

교, 고창중

고, 이

왜란 때 실 건

했다. 감모재는

대성황을 이

학 설립 근 학 설립 학 학

대의 고창의

고창지역의

)을 진

들과의 소통과 지역의 정

, 1720 1783)가 52세

장이 되어 교

제서당은 1910년까지 1반세기 동

상하

교 교

유풍 儒風

정도였다.

유 작 키 져

중심으로 하는

임진

후 유학 김 金道誼 ~ 感慕齋 를 워 스무 卄齊 설 무 김 초 훈 육 날릴 입 안 루 배출 육 실 상하면에는 조선

으로

등 불교와

동을 하였다. 이 전통은 지금까지 상하면 지역에 전해

년(선조 33년)에 원래의 자리에서 서쪽으로

지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당시의 교

, 지

야 한다.

적 전통이 잘 어울리면서 조선시대 지방의

성을 목적으로 많은

와 현재도 상하지역

,

월 백중, 구월구일(중

장호리는 상하의 1개리이다. 고로 상하의 개 연

, 성

고 있는 것이다.

장호리의 교

육 혁

굿 주굿 철륭굿 신밟 양절 날 융

졸 생 졸 생 업

을 기점으로 1997년 69명, 2009년 21명

은 5170여명이다.


영광 실 영광 문 채취 강 생 를유 왔 박 안 행 영광 후 안 회 직 각 온배 급 회 주민 생 문 큼민 후 받 맨손 않 말 8.

원전과 장호리와의 관계

원전과의 관계는 장호리와의

제만은 아

제다. 다만 장호리는 명사십리라는 해

등을

하고 전통 어

등으로

어업도 성

도 조

들의

지금도

들을 중심으로 반

그물 어업,

어업도 성

제인 만

위가 조

로 인한 피해

장호리의 전

감한 사

일 수

맨손

어업

하였으며, 소

되었고, 어

예상하다가

은 이

에 없어

기는 하였으나 그 보상이 원만

어업 등은 하고 있으나,

다고

이 장

민 핵투 직 민 능 누출 를 입증 려 히 주민 러 회 항 밖 각종 참석 히 루 않 밀려오 껍질 주민

가 어

하였고, 당연

피해보상을

우잡 양식

벌에서 조개

하였었다.

되었다. 처음에는 방사

수로

제며, 상하면 전체

고 있고, 예부터 그 해

었다. 또한 원전이 들어서기 전에는

원전이 들어선

문 안갯 태 행

고창군 전체의

망그물 어업과 대나리그물 어업, 새

지해

에 의한 연

변 끼

의 어

한 위원

시위 등에

는 조개

피해대책위 움으로 냉

에 들어가게 되었고, 도 하였다.

어진 것이라고는 여기지

등을 보면서

았다.

들의 마음은 편치

한다.

▣ 료 자

조사에 도움을

주신

노명상

주태식 판례 안종 백 표

▣ 참 문헌 『 高敞 誌』 『 下 誌』 『무 읍 邑誌一 』 『송 松 誌一 』 『무 신람 輿地新覽 』 『 환 승람 朝鮮寰輿勝覽』 『송 문헌 松 文獻績』 『 문 유 高敞 文化遺蹟 布圖』 광 학 『 양 牟陽城 얼』 『 유 』 문 『 씨 입향유 』 문 『ㅇ씨』 『ㄴ씨』ㅇ파 『ㅍ씨』 고

고창군지(

상하면지(上

)

(2009)

지일(茂長

사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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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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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

(1935)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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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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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 2005)

(2009)

고창 래

화원. 2007

고창

화원, 2007

대동보

대동보

대동보 등

※ 坊 『 읍 邑誌』『읍 邑誌』 全羅道編 「 행 람 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신 對照朝鮮全道府 名稱一覽」「 유칠 越智唯七編」 방리(

호남

里)의 이름

지(湖南

정구역명칭일

지(

전라도편(

(

郡面里洞

)

구대조조선전

월지

편(

戶口總數」「 주 람 新舊 참

호구총수(

등에서

구한국지방

부군면동명칭일

(

고하여 전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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