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오씨이야기 2010년 10월 14일(목) 17:00 국립박물관 수장실에서 새로운 지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눈으로 확인을 하였 다. 고창문화에 있는 글을 읽어보면 된다. 오씨의 연원은 중국(서기 222-252년) 오 나라를 세운 태백이라는 사람이 강소성 전능도 단면출생이다. 태백이 오나라를 세 움으로써 오씨가 내려오고 있다. 오씨는 해주, 동북, 나주, 보성, 고창 등 20여 개가 있다. 중국의 오태백의 후예인 오첨은 지증왕 원년(500) 경남 함양 땅에 왔다가 잠 시 정착하였다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 사람이다. 이 오첨이 바로 오씨의 시조가 된다. 오학림이 오첨의 17세손이다. 고창오씨의 관향지가 중국의 복양이다. 중국 하남성 청풍현의 남쪽으로 이 땅은 고조선과 발해의 강역 속에 들어가 있는 순수한 조선의 땅이다. 고창오씨(高敞吳氏)는 고려 10대 정종조(靖宗朝) 한림학사(翰林學士)와 행정관으로 많은 공(功)을 세워, 고창(高敞)을 식읍(食邑) 으로 하사받은 오학린(吳學麟)이 시조 이다. 시조 오학린)은 1009년 목종(穆宗) 12년에 탄생하여, 문헌공(文憲公) 최충(崔 冲) 선생의 문헌고도(文憲公徒) 로 26歲가되던 정종(靖宗) 12년에 지공거전시(知貢 擧典試)에 급제(及第)하였다. 당시 학자들이 가장 선망하던 청요직(淸要職)인 한림학사에 등용 되었으며, 문교(文 敎) 진흥에도 많은 공이 있었다. 그는 많은 시와 저술이 있었다고, 동인문집(東人文 集) 삼한귀감(三澣龜鑑)등에 기록이 전해진다. 그러나 현재는 평양 대동강 선유(船遊)와 흥복사(興福寺) 분향행사(焚香行事)에 왕 (王)의 행행(幸行)을 수행하면서 읊었다는 중유흥복사시(重遊興福寺詩)와 중국에 사 신으로 가서 상비묘(湘妃廟)를 보고 순임금 의 아내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의 고 사를 회상하며 읊은 상비묘시(湘妃廟詩)가 있다. 거란(契丹)의 재침이 시작되어 국경인 압록강을 넘어왔기 때문에 국경은 거의 피폐 해졌다. 고려는 압록강 지역의 민심이 극도로 소란해지자, 오학림을 그 지방을 수습 할 도병마사(都兵馬使)로 이차에 걸쳐 파견하였다. 그는 걸추훼압강성궁구장(乞推 毁鴨江城弓口狀) 과 재걸추훼압강성궁구장(再乞推毁鴨江城弓口狀)이라는 글을 두 번 에 걸쳐 보내 충심을 보냈다. 그 상주문 압강성궁구장(鴨江城弓口狀)은 왕의 명을 받고 도임한 도병마사 오학린이 정세를 판단한 수습방안을, 치밀하고 절실하면서도 정중한 문장으로 거란 왕을 나무라면서도 선처를 구하는 글을 지어 올린 것이다. 그것이 주효하여 거란(契丹)이 철수하므로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공으로 고창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게 된 것이다. 오학린은 출세하기 전까지 문헌공 최충의 14문도로 들어갔다. 고시 전 추천으로 들
어가 구제학당으로 오른 것이다. 1035년 형부상서 최충의 지공구전시회에 급제하 여 26세의 약관의 나이에 한림학사가 되었다. 한림학사의 선발기준은 급제한 사람 들 중 배수를 선발하여 예문관과 홍문관의 당상관들이 선발을 한다. 3차는 선발된 사람들을 삼정승들이 면접하여 선발하는 것이다. 여기에 합격한 사람이 문헌공으로 12인 속에 들어갔다. 후에 추가로 2명을 더 뽑아 14명이 되었다. 구제학당은 문도 들이 많아서 일제부터 구제까지 반을 편성하여 교육을 시켰다. 그는 구제학당에서 상당기간을 후진양성에 주력하였다. 사패지지는 고창현 산내면 경방동(신월리)이다. 이곳에는 아직도 그 터가 남았다. 그는 고창에서 후진양성을 위한 교육에 종사를 하였다. 모양군으로 봉군된 사람이 오학림의 6대손 계유가 충숙왕 때 수충보절좌리안사공신 삼증대광도처민 참성사의 직급에 오른다. 그는 모양군에 봉해져 사패지지의 근간이 되었다. 종래의 기록에는 오학린의 아들이 질이고, 질의 아들이 오세공, 오세문, 오세재로 되어 있다. 한국금석문전서 제4권 금석문추보집이 있다. 일제시대 총독부에서 일본인 천지무태랑이라는 도굴꾼을 시켜 한국의 문화유적을 도굴하게 하였다. 1939년 5월 9일 개성에 들어가 산에 올라 도굴을 하였는데, 그곳 에서 나온 것이 오인정의 묘지석이다. 묘지석을 찾은 것이다. 그것은 총독부에서 30원을 주고 샀다고 한다. 묘지석의 연도가 시대금 정원3년(을해년) 8월일자로 되 어 있다. 그때가 1156년 의종 9년이다. 묘지석을 국립박물관 수장고에서 보고만 왔다. 그런데 오씨들이 어떻게 입수를 했 는지 사진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해서 종래의 오학린 후손의 가계도를 정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오인정이 오질의 다음에 나와야 한다. 학린의 손자가 오인정이다. 오인정은 고려사 와 인물대사전에 나온다. 그는 1100년 숙종 5년에 태어나 1155년 의종 9년에 죽 었다. 김부식문하에서 1123년 인종 2년에 예부시에 합격을 하였다. 그는 원흥진 (원산) 판관으로 초임을 맡게 되었다. 그는 정사에 유능하다는 평을 들었고, 임기가 다 되자 개경에 돌아와 지조를 지켜 세속부침(世俗浮沈)에 관계하지 않고 조용히 살았다. 10년 동안 임관 받지 못하여 성동작동(城東鵲洞)에 살면서 몸소 농사를 지 어 처자를 부양하였다. 많은 선비들이 그를 스승으로 존경하였다. 과거의 지공거였 던 김부식(金富軾)이 그의 지절(志節)을 높이 사 김부식이 추천하여 탁라도구당사 (乇羅島勾當使)에 임명되었다. 익양군(광주)의 녹사가 되었다. 그 뒤 진(鎭)의 판관 을 역임하던 중 병을 얻어 개경에 돌아와 중병을 앓다가 55세에 죽었다. 고창오씨는 5대에 걸쳐 글 잘하는 집안이 되었다. 즉 고창오씨 문중에 오학린-오질 -오인정 등으로 이어지는 명문가가 된 것이다. 질은 한림학사로 취임을 하였다. 정사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문장으로 많은 선을 쌓았다. 4세 세공은 1153년 청주목에 장서기로 임명되었다. 1177년 경상도 안찰사
를 지냈다. 무후로 손이 없다. 오세문은 고려 명종 때의 학자이다. 1151년 의종 5년 승보시에 합격하고, 명종 때 낭중을 거쳐 동각시학(세자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다. 문장에 능해 고려의 역대가 를 지은 사람이다. 고려 때 역대가를 지은 사람이 바로 오세문이고, 그는 고려사와 동국이상국집에 나온다. 오세재는 명종 때의 대학자로 1133(인종 11)년에 태어났으나 졸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자는 덕전(德全)이며, 호가 복양 또는 통문이다. 명종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친구인 이인로(李仁老)가 세 번이나 추천하였으나 끝내 벼슬에 오르지 못하였다. 성 품이 단정하지 못하고 개성이 뚜렷했다. 그는 당시 18세였던 이규보(李奎報)에게 53세의 나이로 망년지교(忘年之交)를 허락하였고, 이른바 해좌칠현(海左七賢:江左七 賢)의 한 사람으로 이인로 등과 시주(詩酒)로 즐겼다. 중국에는 죽림7현이 있듯이 해동조선에도 강좌7현이 있다하여 그를 포함한 7명을 해좌칠현이라 하였다. 초두에 그가 나온다. 그는 명종시대 문신수난기를 통하여 현실에 타협하지 못하고 문학과 시주에 탐닉함으로써 자신의 고민을 해소하려 한 것이다. 이규보는 나이를 떠난 진 정한 벗이었으며, 〈오선생덕전애사 吳先生德全哀詞〉를 지어 추모하였다. 이규보는 그를 복양선생(濮陽先生)이라 부르고, 친구 아닌 문하생의 입장에서 사사로이 현정 선생(玄靜先生)이라 시호하여 영전에 바쳤다. 오세재는 1500편에 이르는 시문이 있 는데 현재 전하는 작품으로는 《동문선》에 오언율시 2편, 칠언율시 1편이 있다. 그는 고려의 대문장가로 알려진 사람이다. 고려가 망하고 고창오씨들의 맥이 흐려졌다. 고성김씨인 김빈길은 낙안사람으로 공이 있어 하상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뒤 말년에 고창에 왔다. 그는 고창오씨의 사패지지를 먹으려고 왔다. 김빈길이 태조에 고하여 고창의 사패지지를 달라고 하자 태조는 그에게 고창을 주었다. 그 후손들이 고창오 씨의 묘까지 파헤쳤다. 일설에 의하면 그들은 고창오씨의 시조인 오학린의 묘비들을 방죽에 버렸다고 한 다. 또 다른 제보로 묘비가 율계에 있다는 것이다. 고창에서 우체국의 집배장을 하였던 사람이 제보를 전해주었다. 고창오씨의 묘비가 서동현씨의 장형집 부엌에 묻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전에 고창오씨들과 함께 가 서 그 집을 사서 찾아보자고 하였으나 고창오씨들이 하지를 못했다. 김빈길의 후손 들이 유야무야 한 사이에 이천서씨들이 오학린의 묘 바로 옆에 집을 지었다. 묘를 밀고 지었다. 묘가 너무 바짝 붙었다. 고창오씨들에게 시조묘를 찾았으니 먼저 제각 부터 지으라고 했으나 말을 안들었다. 고창오씨들이 제각각으로 갈라졌다. 분파가 너무 많다. 오세문의 본파인 동각공파가 사정공파, 의령공파, 봉사공장파, 봉사공이 파, 봉사공삼파, 봉사공사파로 나누었다. 오세재의 파인 현정공파도 진의공파, 진시
공파, 감정공파로 갈라졌다. 단결을 못한다. 그러니 자신의 시조묘를 찾아도 제각하 나 못 만든다. 하여간 오학림의 경방동에는 현재 그 집터가 남아 있다. 그 밖의 고창오씨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던 운(澐)은 정유재 란 때도 커다란 공을 세워 통정대부에 올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거쳐 공 조참판(工曹參判)에 이르렀다. 근대 인물로는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사람으로 독립운동에 앞장 선 화 영(華英)이 가문을 빛냈는데, 특히 그는 목사로서 신앙부흥운동과 민족정신함양에 노력하였으며 조선민족당 당수와 한중협회장 등을 지냈다.
추후 조사 흥덕장씨들 시조묘를 칠성골의 전주이씨들이 방죽에 버렸다. 죽강이 제보를 했다. 고창오씨의 시조묘비를 찾아야 한다.(고려시대의 중요한 묘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