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리 원고교정1 1

Page 1

효와 열, 예향이 서려있는 예전리 1. 예전리의 역사와 위치 공음면 예전리는 삼한시대에는 마한 땅으로 모로비리국에 속하였으며 삼국 시대에는 백제국의 상로현에 속하였고, 통일신라때인 경덕왕 16년(757)에 개명된 장사현의 속지였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조 태종 16년(1416)에 이 르기까지에는 그대로 이어왔으나 태종 17년에 서해 연변의 방위체제 구축을 위해 무송현과 장사현을 무장현으로 통합할 때에 이곳은 와공면(瓦孔面)과 동음치면(冬音峙面)으로 분면되어 구한말인 건양원년(1896년)에 칙령 제36 호에 의해 고창, 무장, 흥덕군이 전라북도에 편입될 때에도 변동이 없었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3월 1일 부군 통폐합령에 의해 무장군과 흥덕군이 고창군으로 통합될 때 와공면과 동음치면이 합병되어 공음면이 되었다. 이 때 공음면에 12개 법정리가 형성되었다. 공음면에 속한 예전리는 뚜렷한 명 칭 유래가 확인 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예지”라고 불렀다가 “예전(禮田)”으 로 불렀다. 1300년대 초 남양홍씨(南 陽洪氏)가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이 루어졌다고 한다. 본래 무장군(茂長郡) 와공면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호에 따라 시묘리(侍廟里), 응암리(鷹岩里)가 병합되어 예 전리(禮田里)가 되었고 공음면에 편입되었다. 예전리 중앙에 있는 지방도 796호선이 동서방향으로 공음면 소재지와 대산면 소재지로 연결되어 있으며 현재는 자연 마을로 평산, 상예, 중예, 응암, 수원, 금정, 호동, 시묘(안골) 등 8개 마을이 법정리인 예전리(禮田里)를 구성하고 있다. 예전리는 공음면 남 서부에 있다. 2010년 3월 현재 면적은 4.15km²이며 총 149가구에 315명 (남 156명, 여 159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경지 면적은 2.21km²로 밭 0.87km² 와 논 1.34km², 임야 0.88km² 등으로 되어 있다. (출처: blog. naver.com/sungbo. sungbo. 성보의 풍수여행) 2. 예전리 마을의 유래와 자연환경 1) 상예(上禮)마을 상예 마을의 지명 유래는 알기가 어렵다. 상예 마을은 터를 잡을 당시에는 “예지”라고 불렀다고 한다(두산백과사전).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는 “禮田”

- 1 -


으로 불러오다가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뒤에는 “上余”로 부르다가 지금은 “상예(上禮)”로 부르고 있다. 상예마을은 지방도로 796호선이 지나는 공음면 소재지와 대산면 소재지 사이의 중간 지점에 자리잡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 도로가 나 있어 중예마을과 상예마을 주민들이 외출하기에 편리하도록 간이 버스 정류소를 설치하여 놓았다. 마을 앞 쪽으로 예부터 황천강이라고 불리 는 냇물이 흐르고 있는데 이것은 북쪽에 있는 선동리에서 내려오는 선동천 의 일부로 농업용수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상예(上禮) 마을은 남평 문씨(文氏)가 설기 연대로 추정해 볼때 1400년대 초에 2가구가 터를 잡고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하였으며 주로 많이 살고 있 는 성씨는 “남평문씨”와 “금성라씨”가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번창하였다 고 한다.(고창의 마을 유래, 고창문화원,2007)

2) 중예(中禮)마을 중예마을은 공음면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3.4km 지점에 위치하고 있 으며 마을의 유래는 자세히 확인된 바는 없지만 고창 문화원의 마을 유래 조사(고창문화원, 2007)에 의하면 1300년대 초에 남양 홍씨(南陽 洪氏)가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루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마을 이름의 명칭은 그 당시에 는 “예지”라고 불러 오다가 “禮田”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 후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는 “中余”로 불러 왔다가 다시 마을의 뜻있는 분들의 의견을 모아

- 2 -


예절을 잘 지키고 어른을 공경하는 미풍양속을 후손들에게 전하여 주자는 뜻을 생각하여 중예(中禮)로 정하였다고 하며 지금은 중예로 부르고 있으며 마을 표지석도 中禮로 되어 있다. 애초에는 남양홍씨가 터를 일구었지만 주 姓氏로는 함풍 李氏가 지금부터 370여년 전에 입향하여 (이종인씨증언, 이 종인씨10대조) 살게 되었으며 마을의 제각도 함풍 이씨 집안에서 짓고 한 때는 함풍 이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번창하였다(고창문화원,마을의 유래, 2007)

3) 평산 마을 평산 마을은 공음면 면소재지에서 지방도 796번선을 따라 대산 방면으로 약 3.4km 정도 가다보면 동쪽으로 예전 저수지가 있다. 이 저수지 밑에 있 는 마을이다. 설기 연대로 보면 고창문화원 발행 마을의 유래에 나와 있는 것으로 보면 1700년대 초 忠州朴氏가 터를 잡았다고 하며 이 마을의 박인철 씨의 말에 의하면 박인철씨의 8대조 할아버지인 박유성이 마을을 이루고 충 주 박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 왔으며 지금도 주 성씨는 충주 박씨 집안 이며 선조 중에 효자와 열녀가 생겨서 마을 북쪽에 정문을 짓고 마을 공동 체를 이루어 평화롭고 안정된 생활을 하며 살아왔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 전 해오는 이야기로는 마을 앞 서쪽에 황산이 보이는데 산모양이 석양이면 아 주 아름답게 서산에 넘어가는 태양과 함께 보이며 언젠가 마을 앞을 지나가

- 3 -


는 노스님이 말하기를 장차 이 마을에 인재들이 많이 출생할 것이라고 예언 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마을에는 교육열이 예전리 마을 전체에서 가장 높으며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교직에 근무하며 제 2세 교육에 봉직한 사람이 많았다(박봉규교장, 박인철교장, 박용범교장, 정재윤교장, 박종익교장, 박호철선생, 박정수선생, 박용백교수)

4) 응암(鷹岩)마을 예전리 응암 마을은 공음면사무소에서 대산 방면으로 약 4km 정도 가다가 상예 마을에서 우측 들녘으로 1km 정도 가면 동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설기 년대는 대략 1800년대 초로 추정하고 (향토문화연구위원 신계원 조사, 고창 의 마을 유래) 주 성씨로는 영양 천씨가 마을에 터를 잡으면서 마을이 형성 되었다고 하며 현재도 천씨 일가가 살고 있다. 응암 마을에는 마을의 유래가 있다. 마을 뒤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가 땅위로 솟아 오르면 마을에 괴질과 흉년이 든다는 구전된 전설이 있어서 그 바위가 보이지 않아야

을에 길한 일이 생긴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이 마을 동제를 지내며 바위를 흙으로 덮어주어 보호해 왔다고 한다.

- 4 -


5) 수원 마을 수원마을은 평산마을과 공동으로 두 마을을 한 행정단위로 구성하여 이장 한사람이 행정관리하며 주민들이 아주 평화롭게 마을 회관을 잘 이용하며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단합과 협동이 잘되어 가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의 위 치는 예전리 평산 마을과 마주 보며 공음 대산간의 도로를 경계로 나뉘어져 있다. 마을 입구 표지석도 없이 응암 마을로 가다가 중간 지점에서 우측으로 우회전하여 300m쯤 농로를 따라 걸어가면 마을 회관 앞에 도착한다.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어른을 잘 공경하는 모습이 아름다우며 저녁이면 마을 회관 에 모여 공동 식사를 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6) 금정, 호동, 시묘(안골) 공음면 소재지에서 칠암 마을 앞을 지나 대산방면으로 약1.5km정도 가다 보면 우측으로 금정 마을과 안골(시묘) 회관과 마을 표지판이 도로가에 세워 져 있다. 이 세 개 마을을 여자 이장이 행정 관리하며 주민들이 살고 있는 가옥들이 몇 채 되지 않아서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데 마을 가구 수를 보면 금정 마을이 4집, 호동마을이 2집, 안골(시묘)이 8집으로 가장 많이 살고 있 으며 모두 14가구가 마을 행사나 애경사를 상부상조하며 알뜰하게 살고 있 다. 마을의 설기 연대를 추정해 볼 때 1600년대 초에 김대창이라는 사람이

- 5 -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고 마을 앞에 사금(砂金)이 많이 채취되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금정이라고 했다는 전설이 있다(고창의 마을 유래, 향토문화연 구위원, 신계원조사)

2. 마을의 모정과 경로당

- 6 -


1) 평산 마을 모정 평산 마을에는 동네에 들어서면 서쪽으로 마을 모정이 있다. 옛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즐겨 찾는 곳으로 여름철이면 들에 나가 김매기를 하고 몸이 피곤할 때면 모정에 와서 잠시 잠을 자며 쉬었다가 일터에 가곤 했었 다. 시골에서는 아주 편리하게 이용한 시설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이 마을에 서 태어나 자라면서 성공한 사람들이 여러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박인 철 교장선생님이 마을 후손들을 위해 애향정을 수리하고

평산 마을의 모정

을 건립한후에 마을 사람들이 애향정 건립 취지문을 만들어 그 뜻을 기리고 자 비(碑)를 세웠다. 비에 새겨진 애향정 건립 취지문은 다음과 같이 소개 한다. 성암 박인철 교장선생은 구도자의 자세로 삶을 값지게 살아가시면서 고향을 사랑하는 정성이 지극하여 어른을 섬기고 살기좋은 마을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항상 고심하였으며 삶의 모두를 제2세 교육에 헌신하였기에 서로 서로의 크신 길을 만세의 세월에도 퇴색하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마을에 주민들의 휴식처가 노후되었음을 안타깝게 여기시어 사재를 쾌척하여 애향 정을 건립하는데 공이 크므로 그 뜻을 오래도록 기리고자 이 비를 세웁니 다.(1999년 11월 일. 협찬자 : 박봉필, 박문규, 박종근, 박근호, 박무웅, 박종 환, 박종길, 박용구, 박종갑, 박경수, 박종욱. 추진자 : 박동규, 박용회) 2) 예전리 경로당 예전리에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활용하는 경로당이 있다. 현재 경로당 회 장으로 문오섭씨가 맡고 있으며 평산과 중예 그리고 상예마을의 중간위치에 자리잡고 있어 마을 어른들이 이용하기에 아주 편리하다. 옆에 운동할 수 있 는 게이트 볼 경기장까지 설치하여 주민들의 건강관리에 매우 편리하다. 경 로당의 경로헌장을 방에 비치하여 노인들의 상부상조의 미덕과 예절을 잘 지키고 있다. 경로당에 있는 경로 헌장과 노인 강령 역대 노인회장 경로당 운영지침, 경로당 비품 목록, 경로회원 명단을 기록해 본다. (1) 경로헌장 노은은 나라의 어른이다. 노인은 우리를 낳아 기르고 문화를 창조 계승하며 국가와 사회를 수호하고 발전시키는데 공헌하여 온 어른으로서 국민의 존경 을 받으며 노후를 안락하게 지내야 할 분들이다. 그러나 인구의 고령화와 사 회구조 및 가치관의 변화는 점차 노후생활을 어렵게 하고 있다. 우리는 고유의 가족제도아래 경로효친과 인보상조의 미풍양속을 가진 국민 으로서 이를 발전시켜 노인을 경애하고 봉양하여 노후를 즐길수 있도록 노 인 복지 증진에 정성을 다 하여야한다.

- 7 -


우리는 아래와 같은 사항을 구현하기 위하여 다 함께 노력한다. ⓵ 노인은 가정에서 전통의 미덕을 살려 자손의 극진한 봉양을 받아야하며 지역사회와 국가는 이를 적극 도와야한다. ② 노인은 의식주에 있어서 충족되고 안락한 생활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③ 노인은 심신의 안전과 건강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④ 노인은 취미 오락을 비롯한 문화생활과 노후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얻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1982년 5월 8일) (2) 노인 강령(老人 綱領) 우리사회의 노인으로서 항상 젊은이들에게 솔선 수범하는 자세를 지니는 동시에 지난 날 우리가 체험한 고귀한 경험 실적 그리고 민족의 얼을 후손 에게 계승할 전수자로서의 사명을 지각하며 아래 사항의 실천을 위하여 다 함께 노력한다. ⓵ 우리는 가정이나 사회에서 존경받는 노인이 되도록 노력한다. ② 우리는 경로효진의 윤리관과 전통적 가족제도가 유지 발전되도록 힘쓴다. ③ 우리는 청소년을 선도하고 젊은 세대에 봉사하며 정의사회구현에 앞장 선다. (3) 역대 노인 회장 명단 초대회장 : 문국환, 2대회장 : 박동규, 3대회장 : 박문규, 4대회장 : 공연필, 5대회장 : 문오섭 (현재) (4)경로당 운영 지침 (가) 조직강화

(나) 사회봉사

(다) 권익 신장

(라) 자립 자활

(5)경로당 비품 목록 TV 1대, 선풍기 2대, 냉장고 2대, 김치냉장고 1대, 에어콘 1대 (6) 경로회원 명단 문국환, 문규섭, 문남섭, 문재근, 이몽환, 김재응, 이맹범, 이우범, 이재칠, 이은범, 공연필, 박경회, 박상철, 박용해, 이병술, 문하섭, 김동관, 박용관, 심 상준

- 8 -


(예전리 경로당 사진)

4. 예전리 마을의 문화 유산 1) 상예 마을의 남평 문씨 제각 상예마을에서 펑산마을 쪽으로 가다 보면 마을의 제일 높은 곳에 남평문씨 제각이 있다. 비교적 관리를 잘하고 있으며 마을의 원로인 문국환씨가 주축 이 되어 마을 제각을 만들었다고 한다. (1)사모제 낙성 기념비(思慕齊 落成 記念碑) 아 ! 자랑스럽도다. 우리 남평 文氏 楓菴 公派 예전 문중 일족이여! 무성공 휘 다성을 시조로 忠帚公諱 克謙祖, 忠宣公諱益잠漸祖와 禮曺泰議敬 帚公諱尙行祖 寧海府使公諱落祖行坡州牧贈兵忝楓庵公諱緯世祖 등을 위로 모 셨으며 200여년 전에 楓庵公五代孫 諱永完祖께서 장흥에서 무장현 와공면 예전리로 이거하시어 10여세대가 흘러 남평문씨 풍암공파예전문중을 이루었 도다. 그 사이 후예가 번성하여 손이 기백을 헤아리게 되었으나 列先祖를 모 시는 제각을 마련치 못하다가 근년에 창환, 국환 등 유지 문장들의 발의에 의하여 후손들이 각기 앞 다투어 헌성하여 여기 예전리의 선영하에 죽산공 휘 덕주조와

誠堂公諱

영완조 송당공휘 춘무조 통훈 한성판관 송원공휘

성희조 생천공휘 명희조 통정대부후당공 휘기실조 통정동지추밀원사초계공 휘 기복조를 모시는 思慕齊를 신축하여 이제 낙성을 보게 되었도다. 이는 오

- 9 -


로지 예전 문중일가분들의 숭조지심의 結晶이로다. 여기 모이는 일족들이여! 사모제의 지붕을 바라보며 친족간의 돈목을 다짐하고 위선경자에 힘써 문중 의 일익창성을 기약해 주기바라며 아울러 후손들에게 경조의 뜻을 길이 전 하고자 여기에 몇 자를 적노라. 단기 4329년 병자 양 4월 풍암공 십이대 손 거창후인

문학박사 愼 鏞

在球

謹撰

謹書

고창군 공음면 예전리 1754의 1번지 有司 : 성당공 7대손 창 환, 성당공 7대손

국 환

都編首 : 김영곤 ● 뒷 면에 사모제 건립 성금기(記)가 기록되어 있음(단기 4328년 을해 일

현손 局煥 書로 되었음.

- 10 -


(남평 문씨 제각 사진)

- 11 -


(사모제 낙성 기념비) 2) 충주 박씨 효열 정려(忠州 朴氏 孝烈 旌閭) 평산 마을에 충주 박씨 집안에 효자와 열녀를 모시는 정려가 있다. 마을의 북쪽 마을 공동 우물이 있는 쪽으로 자리잡고 있다. 충주 박씨 효열 정려에 대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효자 박병(朴炳)은 忠州人으로 자(字)는 華汝(화여)이고 號는 蔡軒 이며 文 簡公 祥의 后(후) 영조 20년에 출생하였으며 天性이 至孝하여 事親에 志體 를 兼養하고 病患에 百藥으로 求療하고 危急함에 祝天 裂指하고 喪事에 禮 制를 다하여 三年 奠哭을 하니 鄕道에서 薦하여 命旌되었다(송사문헌, 792 쪽, 공음면 평산 박문규제공) 효자 박병의 현판은 다음과 같다.

孝子 通訓 大夫 司憲府 監察 上 之

朴炳 之閭

二 十 四 年 丁亥 四月 日

命旌

효자 朴炳의 처는 海州 崔씨이며 烈婦로 부부간에 孝子와 烈夫로 나라에서 命旌되었으며 평산 박씨 문중에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남편이 먼저 죽었는데 3년상을 다 마치고 밤에 남편 곁에 가야한다며 자결하였다고 한다(평산 박 상철씨 증언)

- 12 -


烈女 贈 通訓大夫 司憲府 監察 朴 炳 之 妻 贈 淑人 海州 崔氏 之閭 上 之

二 十 四 年

丁亥 四 月

日 命 旌

(1) 忠州 朴氏 孝烈 旌閭記(충주박씨 효열정려기) 公之孝遠有來歷 訥齊文簡公扶綱 於斁倫之世其遠祖也 終慕公致孝於養親之日 其大交也 擩染家風 靈芝有根 宜其有公 而以公之 孝又宜有 夫人之烈 孝與烈 盖殊塗而 一致也 公生而 至孝幼如 成人愉色 婉容晨昏定省不敎 而能親濟 不 解衣帶晝 宵祝天竟致 回天鄕里 感歎丁憂哀慕逾禮 葬祭無憾古所謂 孝子公 實 無愧而

三年暇弼 不近鹽菜 求古罕壽潛 心經籍隱德 無求不但 以一孝成 名者

也 夫人籍海州 定憲公冲 其顯祖在家孝 於父母歸公事舅姑如 公事父母

事夫

子以 禮人稱克配 而其居止 之常織之 勤在夫人 爲疎郞耳 及夫子場 將下從 不忍子與婦 强食忍待大期之夕 遂隕生焉 鳴呼 以夫死從子之義 或遜於中行 而 非貞操素奮於平日者 乃爾乎聽卑之 天無幽不聞竟 以今上丁亥旌贈 幷降公私 哀榮足矣 玄孫廷柱以懸楣之文屬于余 歲戊戌 陽月 下休 幸州 寄宇萬 謹書 (충주 박씨 효열 정려기) 공(朴炳)의 효도는 멀리 조상 때부터 내력이 있다. 눌재(訥齋) 문간공(文簡 公윤)이 윤리가 깨트러지는 세상에서 강상(綱常)을 부식하니 그 분이 원조가 되며, 시종일관하여 어버이의 제사를 지내는 날에 공(公을) 본받아 효행을 다 하니, 그 분이 조부(祖父)이시다. 대대로 이어져 오는 가풍에 물들임이 있 는 것이고, 영지(靈芝)도 뿌리가 있는 것이니 마땅히 공(公)같은 사람이 있게 되며, 또한 공(公)의 효행과 동시에 부인의 정열(貞烈)이 있게 된다. 효행과 정렬은 대개 길은 달리 하더라도 하나로 일치(一致)한다. 공(公)은 자라면서 지성(至誠)스러운 효자였으니 어려서부터 화열(和悅)하는 안색(顔色)과 마음이 유순하고 항상 온화한 몸가짐으로 혼정신성(昏定晨省) 함이 성인과 같았으니, 가르치지 아니 했는데도 매사를 능숙하게 잘 하였다. 부모님이 병으로 앓게 되면 밤낮으로 옷과 허리띠를 풀지 않고 지극정성으 로 간호해 드렸고, 병환(病患)이 완치되도록 하늘을 우러러 지성으로 빌며 간구(懇求)하니 마침내 병이 쾌차(快差)함에 이르러서 주변의 마을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부모님 상(喪)을 당하자 예의범절을 위반할 정도로 슬퍼하며 부모님을 사모 함이 깊었고 장례(葬禮)나 제례(祭禮)에도 유감없이 봉행(奉行)하니 옛날에 운위(云謂)되었던 효자들에 비교해도 공(公)은 실로 부끄럽지 아니했다. 공

- 13 -


(公)은 3년간이나 된밥을 먹지 않고 죽을 먹었으며 소금에 절인 채소를 가까 이 하지 안 했으며, 경적(經籍)에 잠심(潛心)하여 옛날을 돌아보아도 짝하여 견줄만한 사람이 많지 않았고 남 몰래 숨어서 행하는 덕(德)을 찾아보니 다 만 한 가지 효행으로도 명성을 이룬 자 이었다. 부인의 관향은 해주(海州崔氏)이고 문헌공(文憲公) 충(崔冲)이 그 현조(顯祖) 이시다. 출가하기 전 집에 있어서는 부모에 효도하고 공(公)에게 시집을 와 서는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섬기기를 남편이 부모를 섬기는 것 같이 하였고, 부자(夫子) 섬기기를 예(禮)로서 하니 사람들이 좋은 배필이라고 하였다. 그 행동거지(行動擧止)는 변함이 없이 행하였으며 베를 짜는 일은 부지런함이 알려졌고 이 모든 일은 부인의 간략한 예절을 말한 것 뿐 이다. 남편이 사망하여 시체를 땅에 묻으려 하자 자기도 남편을 따라 가고자 하였 으나 아들과 며느리의 만류 때문에 차마 행동하지 못하였고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음식을 억지로 먹으며 살다가 마침내 남편의 3년상을 마치고 그 날 밤 저녁까지 참고 기다렸다가 드디어 남편의 곁으로 간다며 생(生)을 마감하 였다. 아! 슬프도다. 지아비가 죽으면 아들의 뜻을 따랐던 의리를 행하였으며 또한 바른 행실을 따르고, 여성의 정조(貞操)가 평소의 날에 축적(蓄積)됨이 아닌 가! 이에 겸허하고 공손하게 들음이 이와 같이 하였고, 하늘은 유현(幽玄)한 것을 드러내지 아니함이 없으니 마침내 임금님께서 정해(丁亥)년에 정문(旌 門)을 하사하시고 아울러 공(公)에게 내리니 사(私)적으로는 슬프더라도 영예 (榮譽)가 족(足)하도다. 이글은 현손(玄孫) 정주(廷柱)가 문미(門楣)에 걸어두는 글을 나에게 부탁함 으로 쓰다. 갑술(甲戌)년 10월 하휴(下休) 행주(幸州) 기우만(奇宇萬)이 삼가 쓰다. (2) 贈通訓大夫 司憲府監察 葵軒 朴公墓碣銘 夫孝子妻烈婦同日 命旌雙封於 光州之芳荷洞艮原者郞 贈監察朴公諱炳 字華汝 號蔡軒 贈淑人崔氏籍海州 父大奎字萬以玄孫廷柱之 請記旌閭旣又以 顯刻申命 曰 高祖及 妣孝烈之寶 莫子爲詳願卒惠焉 謹肯辭曰 旌孝旌烈可謂國人知之立 言 家孰不欲文 於是而必重命於不接 也 不蕧辭則謹 序次其源流 事行而爲之銘曰 朴系中原副正以 興積慶累仁 啓後 炳靈傳至文簡 疏復 昭陵三卯有壹爕燮 厥聲大夫肯 昌以孝著名考曰 啓東庭訓 以 承金籍光山公 寶自生生以 甲子幼如 老成晨昏定省 不敎而能 山樵水漁 甘

- 14 -


旨上堂 親濟祝天 天感其誠 愼終追遠感慕彌增 實有諸身于妻 以刑孝奉舅姑 配 德有稱禮事君子 同著靜貞 夫子云逝壬戌 何忙忍以待死 再朞徑情從子有地 或遜中行舍命 不愉貞心 則明聽卑之 天均於命旌一男孝 益不載孫曾 歲戊戌 陽復月 下休 幸州 奇宇萬 撰

額號

忠州朴氏孝烈旌閭

(증통훈대부 사헌부감찰 규헌 박공 묘갈명) 대저 효자(孝子)와 그의 아내 열부(烈婦)를 같은 날에 광주(光州) 방하동 간 원(艮原)에 쌍봉으로 정려(旌閭)할 것을 내리시니, 곧 감찰(監察) 박공(朴公) 이다. 휘는 병(炳)이요 자(字)는 화여(華汝)요, 호는 규헌(葵軒)이다. 증숙부인 해주최씨의 아버지는 대규(大奎)이다. 우만(宇萬)은 현손 정주(廷柱)의 요청 으로 정려를 기록하고 이미 또한 현각(顯刻)함에 있어서 거듭 당부하기를 “고조(高祖)의 효행과 고조비(高祖妣)의 열행의 실상이 밝혀짐이 없으니 그 대가 고종명(考終命)한 은혜를 상세히 하기를 원한다.” 라고 하여서 삼가며 거듭사양하면서 내가 말하였다. “효행으로 정려되고 열행으로 정려되는 것은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이 다 알고 있으니, 가문(家門)을 입언(立言)함에 이에 누구인들 글로 나타내고 싶 지 않겠는가? 중대한 조칙(詔勅)을 불녕(不佞)에게 반드시 하게 하여야 하는 가?” 사양했으나 허락받지 못하여 차례대로 그 원류(源流)의 사적과 행실을 삼가 서(序)하며 이에 명문(銘文)으로 기록한다. 박씨(朴氏)는 중원(中原) 부정(副正)을 이어서 덕(德)을 베풀고 선행을 많이 쌓아서 이로 인해 흥(興)하였으며 계발(啓 發)한 후에는 병(炳)에게 정신이 전해졌다. 문간공(文間公)에 이르러서 소릉(昭陵)을 복위시키는 상소(上疏)가 있었고, 삼인(三印)의 대(臺)가 아름다운 모양으로 그 소리가 크게 울림이 있 었으며, 대부(大夫)가 효행을 거듭 드러내니 명성이 높아졌다. 고찰하여 말한 다면 동방(東邦)의 조정(朝廷)을 계도함이고 가르침을 온전히 계승(繼承)함이 다. 광산(光山)이 본적인 공(公)은 실로 스스로 타고난 성명(性命)을 그대로 지키 고 안주(安住)하였으며, 나이로서 늙은이 같은 행동을 하지 말라고 경계(警 戒)시켰고, 또한 혼정신성(昏定晨省)하기를 가르치지 아니 했는데도 능히 잘 하였을 뿐만 아니라 산에서 나무를 하고 물에서 고기를 잡아 맛있는 음식을 어버이에게 올렸으며, 어버이께서 아프시면 하늘에 병이 나아지길 빌고 그리 하여 하늘도 그 정성에 감동하였다. 종신토록 신독(愼 獨 )하였고 제사를 모 실 때는 온갖 정성을 다 하여 추모하고 감동(感動)하며 사모(思慕)함이 더욱 깊어졌다. 실로 이 품행이 아내에게 미치어서 아내가 본 받고 살았으며 이에 효도를 본받아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정성으로 받들었고, 덕행이 있는 배필

- 15 -


자로서 군자(君子)를 예의로 섬겼다는 칭예(稱譽)가 있게 되었다. 일찍부터 고요하게 정숙(貞淑)함을 드러내더니 부자(夫子)가 임술(壬戌)년에 운명하자 어찌 황망(慌忙)한 가운데에서 남편을 그리워하며 참고 살다가 죽을 것을 기 다렸겠는가? 거듭되는 기년(朞年)에 정들었던 남편을 따라 저승의 땅으로 건 너가고 말았음이여! 또한 순종(順從)하는 삶속에서 목숨을 버리는 것을 행동 으로 보였으니 정심(貞心)은 달라지지 아니 하였으리라, 이에 공손하게 밝게 듣고 하늘은 한 남자의 효행의 정려(旌閭)를 명(命)하심에 공평(公平)하기도 하다. 덧붙여서 손자(孫子)와 증손자(曾孫子)는 기록에 실리지 아니 했다. 무술년 양복월(陽復月) 하휴(下休) 행주(幸州) 기우만(寄宇萬) 찬(撰)하다. 액호(額號) 충주박씨 효열정려(忠州朴氏孝烈旌閭) ※ 밑줄 그은곳 해설 : 삼인(三印)의 대(臺) : 1506년(연산군12) 중종반정이 성공한 후 중종반정을 주도하고 성공한 박원종 등 반정공신들은 신수근(愼守 勤)일파가 반정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숙청하고, 이어 신수근의 딸 신씨를 패 비시키고 윤여필의 딸인 숙의 윤씨를 새 왕비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새 왕비 장경왕후는 왕후가 된 지 10년 만에 사망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순창군수 김정(金淨), 담양부사 박상(朴祥), 무안현감 유옥(柳沃) 등 세 사람 이 비밀리에 이 곳 강천산 계곡에 모여 과거 억울하게 폐위된 신씨를 복위 시킴이 옳다고 믿어서 각자의 관인을 나뭇가지에 걸어 맹세하고 상소를 올 리기로 결의하였다. 이때 이들이 소나무 가지에 관인을 걸어놓고 맹세한 곳 이 이곳이라 하여 삼인대(三印臺)라 부르게 된 것이다. (다) 정려 관리 충주 박씨 효열 정려의 제사는 매년 음력 3월 10일에 지내고 있으며 제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마련해 놓은 전답이 있다. 논이 1000평정도이고, 밭 이 5000평 정도 되며 매년 선자를 120만원 정도 받아서 세 번 모실 수있는 제물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정려 관리는 박무웅(현재 전주거주)이 하다가 현재는 마을에 살고 있는 박상철과 장성에 살고 있는 박근호가 관리 하고 있다고 한다.

(충주 박씨 정려 정문사진)

- 16 -


- 17 -


(효자 박병의 현판)

(효자 박병의 처 열녀 현판) 3) 함풍 李氏 문중 祭閣

- 18 -


이씨 문중에서 조상을 섬기고 제사를 모시는 제각이 중예마을에서 좀 떨 어진 거리인 학원 농장부근의 이강수(2013년 현재 고창군수)집 옆에 자리잡 고 있다. 제각 주위에 숲으로 조성되어 아늑한 느낌을 주어 마당에 들어서면 방문객들로 하여금 편안한 마음을 느끼게 하고 있다. 현재 제각을 관리하고 있는 사람은 원래 흥덕이 고향인 최용문(54세)씨가 이강수 군수의 집을 관 리하면서 돌보고 있다(최용문씨와 대담함). 제각은 마련했어도 조상을 모시 는 제사용 토지가 없어서 이강수(현재 고창군 군수)씨가 사비를 들여서 약 1000평정도의 제토를 마련해 주어서 매년 토지에서 나오는 소득으로 매년 음력 10월20일 문중 제사를 이각수씨 집에서 문중 종원들이 함께 모여서 제 사를 모시고 제사용 토지는 현재 이각수씨가 관리해 오고 있다(이종인씨 대 담).

(함풍 이씨 제각 사진) 5. 예전리 마을 경로 회관과 시설 1) 상예 경로 회관 상예마을의 경로회관은 동네 중앙에 자리잡고 있어 마을 사람들이 이용하 기에 참 편리하다. 남자들은 주로 예전리 노인 경로당에 가서 화투 놀이를 하거나 게이트볼 운동으로 건강관리를 하고 있어 시골 생활하기에 아주 좋 은 편이다. 마을 경로당은 국가에서 난방용 유류비가 나오기 때문에 겨울철

- 19 -


에는 어른들이 맛있는 음식을 가지고 마을 경로당에 나와서 나누어 먹는 아 름다운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곳이 바로 마을 경로회관이다.

(상예마을 경로회관사진) 2) 중예 경로 회관 중예 마을의 경로회관은 마을 중앙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층 건물로 건축되 었다. 회관 정면이 멀리 들녘을 바라보고 있어 경치가 비교적 좋으며 마을 에 들어오는 입구를 항하고 있어 차량이 들어오는 것도 바라볼 수 있으며 마을 부녀자들이 겨울에는 주로 활용하고 있다. 중예 마을은 함풍 이씨 집안 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으며 학원 농장과 인접하고 있어 봄철이면 청보 리 축제를 보러 오는 관광객이 마을 회관 옆으로 많이 드나들고 있다.

- 20 -


(중예마을 경로회관 사진) 3) 평산 마을 경로 회관 평산 마을 회관은 회관을 지을 부지가 마땅치 않아서 마을 사람들이 불편 을 겪어 왔다. 그런데 박종택씨가 새 집을 마련해서 이사를 하는 바람에 그 집터를 마을 회관용으로 구입해 회관을 지었다. 평산 마을은 충주 박씨 집안 사람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어 단합이 비교적 잘 되고 회관 안에 식 사를 해 먹을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져 겨울에나 비오는 날이면 부녀자들이 모여서 공동 식사를 자주 하고 있어 농촌에서는 정말로 유용하게 활용한다.

(평산 마을 회관 사진) 4) 응암 마을 경로 회관 응암 마을 회관은 2004년 12월 15일에 준공되어 마을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회관의 위치는 남쪽으로 넓은 들녘을 향하고 있어 여름철에 회관에서 창문을 열고 바라보면 푸른 벼들이 자라고 있는 모습만 바라보아도 농촌의 넉넉함을 느끼게 된다. 응암 마을은 마을 회관 옆에 모정이 세워져 있어 더 운 여름철에는 농민들이 일하고 오수를 즐기기에는 안성맞춤이다.

- 21 -


- 22 -


(응암 마을 경로회관사진) 5) 수원 마을 회관 수원 마을 경로 회관은 다른 마을회관에 비하여 좀 늦게 건립되었다. 건립 년대는 2008년 11월 21일에 마을 회관 건물 앞에 헌성비를 세웠다. 수원 마을은 15가구가 살고 있는 평화스럽고 마을 젊은이들이 어른을 잘 공경하 고 친화력이 좋은 마을 이장 김대진과 김동관씨 강화석씨 또한 고창군의회 임정호 군의원 등이 주축이 되어 마을 회관을 중심으로 밤이면 모여서 좌담 회도 하고 마을 애경사며 중요한 문제는 저녁을 함께 먹으면서 공동으로 잘 해결해 나간다고 한다. 이러한 것을 보면 농촌에는 마을회관이 절대로 필요 하며 정부 정책이 농촌을 살기 좋은 마을로 만들어가고 있어 귀농과 귀촌의 인구가 고창군에 늘어 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수원마을 경로회관 사진)

- 23 -


6) 금정 마을 경로회관 금정 마을 경로당은 안골과 호동 금정 세 마을이 함께 사용하도록 안골 마 을에 건립하였다. 건립 년대는 2005년 12월 4일에 지은 헌성비가 있으며 호동 마을 주민과 금정 마을 민들은 거리상으로 좀 떨어져 있어 사용이 불 편한 편이다. 이 마을에서는 마을 회관과 경로당으로 겸하여 사용하고 있으 며 출향민들의 도움과 마을 주민들의 후원금으로 회관 건립하는데 근 도움 이 되었다. 회관 앞에 헌성비와 공로비를 세워 도와 주신 분들의 고마움을 잊지 않도록 하고 있다.

(금정마을 경로회관 사진) ◯ 헌성비 :2005년 12월 4일 준공

- 24 -


비석내용 : 우리마을 금정회관은 농촌 정주권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으 며 예산 출원은 정부지원금 삼천만원과 출향인사 및 마을 주민들의 후원금 으로 건립하였으며 그 고마운 뜻을 이 비에 새긴다. 마을 회관 신축 추진위원장 : 변우섭마을 이장 : 김성규 추진위원 : 김수천, 이재칠 새마을 지도자 : 박정근 부녀회장 : 황서운

(금정마을 헌성비) ◯ 공로비 91새마을 사업에 즈음하여 정부의 지원과 출향인사 분의 고향을 사랑하는

- 25 -


마음에 힘입어 마을 진입로 포장을 완공하였기에 그 공로에 감사하는 뜻으 로 이 공로비를 세웠습니다. 공로비에 다음과 같이 후원자 이름을 새겨 놓았 다. 후원자 명단 : 변균관 모친 김태아

백십만원, 탁형춘 백만원, 변재형 오십만

원, 변재금 오십만원, 탁경수 삼십만원, 변재환 이십만원, 김성진 이십만원, 탁가상 이십만원, 변재광 이십만원, 변재성 이십만원, 변종석 이십만원, 나영 주부인 변행자 십만원, 양정회부인 변신자 십만원, 변재홍 십만원, 정동명부 인 변경순 십만원, 유성호부인 탁선한 십만원, 변영섭 십만원, 변재일 십만 원, 이동정 부인 탁순애 십만원, 변씨 문중 십만원, 이양신 십만원 새마을 지도자 : 변재철

기금위원 : 변우섭, 이재칠, 준비위원 : 김영근 ( 1981년 5월

(안골마을의 공로비 사진) (7) 대한예수교 장로회 예전교회

- 26 -

)


예전교회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소속으로 담임 교역자는 김일수 목사이다. 교회의 주소는 공음면 예전리 315번지(교회전화 063-562-7428)에 자리 잡 고 있으며 교회의 슬로건인 생명의 원칙을 “비움과 나눔과 그리고 섬김”으 로 정하고 주일 낮에 예배 참여자가 20여명 내외로 알뜰하게 신도들이 성경 에 나오는 초대 교회의 모습처럼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특히 김일수 목사는 교회의 표어를 “노동은 봉사와 순종으로 교회의 권위이다”로 설정하고 농촌 생활에 맞는 신앙생활을 인도하고 있으며 교회는 사랑, 노동, 지식은 우리 생활의 원천이며 이것들이 우리의 생활을 지배해야 한다고 하며 누가복음 22장 26절에서부터 27절까지의 말씀인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 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 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하는 말씀을 중요시 하고 있다. 예전교회의 예배시간은 하루에 네 차례를 운 영하는데 주일 낮, 주일찬양예배, 수요밤예배, 새벽기도회를 한다. (교회 전화 : 063-562-7428, 담임교역자 김일수 : 010-8601-0960)

(예전 교회 사진) (에전교회 실내 사진) (8)

실로암 기도원 “한나의 집”

중예 마을에 대한 예수교 장로회 실로암 기도원 “한나의 집”이 있다. 이

- 27 -


기도원은 노인 주거 복지 시설로 인가를 받아 설립하여 현재는 운영하지 않 고 있으며 84세 되는 오현순씨 한 분 만이 이 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다.

( 실로암 노인복지 시설 안내판) (

- 28 -


(노인 복지시설 한나의 집 사진) 9) 예전리 게이트볼(gate ball)장 예전리 마을 주민들이 건강한 운동을 할 수 있도록 중예마을과 상예마을 그리고 평산 마을의 중간지점에 게이트 볼장을 새로 건축하였다. 이 게이트 볼장은 2002년에 비가림 하우스 형태의 지붕 및 마사토 바닥으로 지어져 사 용하다가 노후화된 가운데 2012년 태풍 덴빈으로 반파되어 시설관리에 어려 움이 많았다.이에 고창군은 총 사업비 2억원을 투입하여 부지 1,175m²에 건 물 463m²규모의 인조 잔디 게이트볼 장을 전천후 게이트볼 장으로 조성하 였다. 5. 마을의 전설과 이야기 1) 평산 마을의 우물(샘) 평산 마을에 공동으로 사용하는 우물(샘)이 하나 있다. 이 우물은 마을의 윗 동네 충주 박씨 정려가 있는 정문 앞 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한 때는 평 산 마을 주민 30여세대가 이 공동 우물 하나를 가지고 전체 주민이 사용하 고 있었다. 아침이면 부잣집 머슴이나 젊은이들이 물 지개를 지고 물을 길러 날라다 주어야 아침 식사를 준비하곤 했다. 생활이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물 항아리를 부엌에 땅에 묻어 놓고 우물에서 물을 길러다 이 물항아리에 가득

- 29 -


가득 채워 놓고 밥이며 아침 세수도 이 물로 하곤 했다. 얼마 후 정부에서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새마을 사업을 하여 각 가정 마다 우물을 파서 작 두 샘을 이용하게 되었지만 이 마을에서는 민간에서 전해 오는 이야기가 있 다. 옛날부터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이 우물은 하루에 한 번씩 밤 子時에 물 이 아래 바닥물과 윗물이 서로 뒤바뀌어 새로운 물이 위로 올라오곤 하는데 이 때 물이 뒤집일 때를 기다려 이 물을 떠다 먹으면 위장병이나 제반 속병 이 낫는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래서 이 소식을 들은 효성이 지극한 박한순 (담양으로 시집가서 현재 담양군 수북면 살고 있음)씨가 처녀 때 어머니(유 동댁)가 위장병으로 오래 동안 고생하시고 있었기에 이 물을 떠다가 주곤하 여 어머니의 위장병이 다 나았다고 한다. 그런데 일화가 있다. 박한순씨가 물을 뜨러 우물에 갔는데 돌아올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아서 식구들이 밤중 에 등불을 들고 찾으러 나섰는데 우물에 가보니 물이 뒤집히는 것을 우물가 에 앉아서 기다리다가 그만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집에 있는 식구들은 귀 신이 데려갔다느니 집승에게 물려 갔다느니 하는 추측이 난무했다고 한다. 지금은 평산 마을에 각자 집에 우물을 파서 자체적으로 해결하고 있어서 이 우물을 사용하지 않고 마을 사람들이 빨래하러 와서 이 우물을 사용하고 있 다.

(전설의 평산 마을 우물사진)

- 30 -


2) 마을의 수호신 할매와 할아버지 당산 이야기 예전리 중예마을에 예부터 전해 오는 할매당산 이야기가 있다. 중예 마을은 옛날에는 위 아래 동네로 불릴 만큼 큰 마을이었으며 윗 동네에 할아비 당 산과 할매당산이 있고 아랫 동네에도 두 개의 당산이 있어 모두 네 개의 당 산을 모시는 마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새마을 사업과 오랜 시간이 지나는 관계로 하나는 땅속에 묻히고 세 개만 남아 있는데 중예 마을에 들어가면 마을 입구 오른쪽 밭에 할아버지 당산은 약 1m정도 땅속에 깊이 뭍혀 있고 마을 진입로 왼쪽에 할매당산은

약 1m정도의 높이를 가지고 있다. 지금은

나이 든 사람들만이 이 수호신이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의 역할을 당산이 한다는 것을 믿고 있다. 옛날에는 마을의 당산은 풍년을 기원하고 마을의 평 화를 지키며 괴질 등의 돌림병이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고 믿어 왔기에 마을 주민들이 정성을 다해 당산제를 지냈었던 것이다. 마을 당산제는 함풍 이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 오면서 매년 음력 정월 마지막 날인 1월 31일 날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어느 한 해라도 당산제 를 지내지 않고 넘어가면 그 해는 농사가 잘 되지않고 질병으로 사람이 죽 는 다거나 마을에 악귀가 들어와서 해를 끼친다고 믿어서 매년 당산제를 정 성껏 지냈다고 한다. 당산제를 지낼때는 제사상은 몸과 마음이 청결하고 일 년동안 부정한 행동을 하지않고 음식도 정갈스럽게 가려먹고 궂은 일을 하 지않는 자를 선정하는데 대개 마을의 처녀중에서 선정하여 제사를 지내왔다 고 한다. 당산제의 제물이나 제반 비용은 마을 주민들이 출렴하여 술과 음식 을 장만하고 그날만은 마을의 잔칫 날이되어 축제분위기에서 하루를 즐겁게 농악놀이를 함께 즐기며 하루를 온마을 사람들이 단결하는 기회를 삼기도 한다.

또한 당산제를 지내고 남은 음식은 제사장이 가져가는 풍습이 있어서

가난한 시절의 우리 조상들의 삶의 모습을 추측해 볼 수도 있다. 할매당산에 관한 전해 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옛날에는 가정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 는 것이 철기시대부터 사용되어 왔다고 추정하는 밥을 짓는 가마솥이 고가 의 물건이며 부엌에는 부엌신이 있어서 이를 지켜주고 있다고 믿어 왔다. 그 래서 도둑놈들이 남의 집에 있는 솥을 훔쳐다가 팔아 먹는 것이 종종 있었 다고 한다. 한 번은 여름철 밤에 이 마을에 솥을 훔치러 도둑이 들어와 이씨 할머님 댁 부엌에 있는 솥 두 개를 훔쳐가지고 지게에 짊어지고 아랫 마을 입구에 있는 할매당산 앞을 지나가다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고 밤새도록 할 매 당산 주위를 빙빙 돌다가 새벽이 되어 마을 사람들에게 들킬까봐 할매당 산 앞에 솥을 두고 도둑은 도망을 갔다고 한다. 이처럼 할매당산은 마을의 수호신처럼 마을 을 잘 지켜주고 안녕과 평화를 기원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 31 -


또 하나의 당산 이야기로는 땅 바닥에 누워있는 할아버지 당산에 관한 이야 기가 있다. 칠월 칠석날 밤에 이씨 할머니 꿈에 할아버지 당산이 하얀 옷을 입고 신선처럼 나타나서 내가 몸이 불편하여 오랫동안 서서 있을 수가 없으 니 땅에 누워 있게 해 달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이씨 할머니는 잠에서 깨어 보니 그 때가 첫 닭이 울기 시작하는 한 밤 중이었다는 것이다. 이 씨 할머 니는 옆에서 잠을 자고 있는 할아버지를 깨워 방금 꿈속에 나타난 할아버지 당산 이야기를 했더니 남편이 하는 말이 사람이 항상 서서 일을 하다보면 다리도 아프고 몸이 피곤할 때가 있는 법이니 마을 사람들에게 상의하여 세 워져 있는 할아버지 당산을 땅에 눕혀 놓게 하여야 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뒤에 이씨 할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할아버지 당산을 누워 있 게하여 지금까지 할아버지 당산은 땅에 누워 있다는 전설이다. 지금 이 할아 버지 당산은 손부옥 할머니(82세) 가 살고 있는 집 모퉁이에 한 이백년 이 상 자란 팽나무 밑에 눕혀져 있다. 손부옥 할머니의 이야기로는 마을 사람들 이 가끔 찾아와서 이 할아버지 당산은 절대로 손상하지 않도록 잘 보존하도 록 부탁을 하며 소원을 빌면 소원하는 바가 이루어진다고 믿어 왔다. 지금 이 손부옥 할머니는 매월 초 하룻날이면 밥 한 그릇씩 준비하여 할아버지 당산에 차려 주고 하니까 큰 비바람이 불어와도 할머니 집에는 궂은 일이 생기지 않으며 자기도 건강하게 살고 있으며 정성껏 밥을 차려 주고 있다고 한다. (중예, 이종인 70세, 자료 제공함)

- 32 -


(예전리 밭에 있는 할아버지 당산)

(마을 입구 길가에 있는 할매당산)

- 33 -


(손부옥씨 집안 팽나무 밑에 누워있는 할아버지 당산) 6. 마을의 인문환경과 산업 1) 마을의 성씨별 현황(세대주 기준) (1) 상예마을 성씨

구씨

김씨

나씨

문씨

박씨

오씨

이씨

정씨

황씨

1

5

2

8

2

2

5

2

1

28

(2) 중예마을 성씨

김씨

문씨

서씨

손씨

양씨

엄씨

오씨

이씨

한씨

5

1

1

1

1

1

2

15

1

28

(3) 평산마을 성씨

공씨

김씨

박씨

심씨

유씨

이씨

정씨

1

1

10

1

1

1

1

16

(4) 수원마을

- 34 -


성씨

강씨

김씨

문씨

박씨

엄씨

이씨

임씨

홍씨

1

3

3

3

1

2

1

1

15

(5) 금정,호동,안골마을 성씨

김씨

문씨

박씨

변씨

안씨

양씨

이씨

최씨

탁씨

5

1

6

3

1

1

2

1

1

21

(6) 암마을 성씨

김씨

문씨

오씨

유씨

정씨

천씨

최씨

황씨

5

1

2

2

1

9

1

1

22

2) 마을의 회관과 전화번호 마을이름

회관 명

전화 번호

예전 노인당

564-9022

마을 회관

562-7588

예전 교회

562-7428

예전 가계

564-6844

노인 회관

562-9022

실로암 교회

562-5523

평 산

마을 회관

562-7566

수 원

마을 회관

562-6606

금 정,호동,안골

마을 회관

562-1516

응 암

마을 회관

563-7789

상 예

중 예

3) 마을 이장과 부녀회장

- 35 -

금정노인당


마을 명

이장 이름

부녀회장 이름

상 예

나 종 운 562-7581

김 말 례 562-7431

중 예

011-9642-9938 010-4120-7431 오 상 열 김 미 옥 562-4741 562-4057

평 산, 수 원

010-7303-7741 010-6484-4057 김 대 진 유 명 미 562-7443 562-7326

금정.호동.안골

010-4377-7345 010-7186-8311 이 정 임 이 정 임 563-9789 563-9789

응 암

011-652-9789 천 병 일 562-7423 010-4730-7423

부녀회장겸함

011-652-9789 오 찬 영 010-2058-7029

4) 예전 목장(일명 처녀목장) 평산 마을에서 공음 면소재지를 향해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진 잔등이라고 하는 긴 경사진 도로 우측에 젖소를 기르는 목장이 있다. 도로 변에 위치하 여 한가로이 파란 풀 밭에서 풀을 뜯어 먹고 있는 젖소들의 모습을 보면 평 화로운 마음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멈추게 한다. 이 목장은 예전목장인데 목장 주인이 처녀로서 잘 운영한다고 소문이 나서 일명 처녀 목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예전리 평산 마을에 사는 유명미씨가 운 영하는 젖소를 기르는 목장이다. 유명미씨는 여자로서 성격이 남성답게 대담 하며 명랑하고 쾌활하며 대장부가 하기도 힘이 드는 일을 결혼도 하지 않고 젊은 처녀의 몸으로 전라북도 내에서는 처음으로 목장을 젖소 11마리로 시 작하였다.

젖소 목장은 1981년부터 시작하여 약 30년동안 목장을 경영하였

으며 전성기에는 70여 마리까지 길러서 연간 수입이 2억 5천만원에 이르기 도 했으나 외국과의 FTA 결성으로 비싼 사료비며 수입의 영향으로 지금은 목장을 폐장한 상태로 2년여 세월이 흘렀다. 처음에는 젖을 짜서 전북 고창 축협과 연결된 매일우유에 납품하다가 나중에는 김제 동진강 축협에 양질의 젖을 공급하였다. 지금도 목장 허가는 취소하지 않고 있으며 기회가 온다면 현대식 시설로 개조하여 젖소 목장을 경영하면 좋을 것이다.

- 36 -


(목장 사진) 5) 신영 목장 예전리에서 공음면 소재지로 가다보면 진잔등을 지나서 우측에 자리잡고 있 는 상하 신영 목장이 있다. 이 목장은 일반 젖소를 기르는 목장과는 달리 친 환경 농업 육성법 제17조의 규정에 의한 유기 축산물을 생산하는 목장으로 전남대학교의 연구지원을 받아 우유를 생산하며 HACCP SYSTEM(위해요소 중점관리제도)을 적용하고 있다.

■ 인증푸목 : 젖소(우유)

■ 인증번호 : 제20-2-10호

■ 원유생산량 : 940kl / 년

■ 생산 책임자 : 신종식(011-647-1919)

■ 인증 유효기간 : 2012, 03, 30 ∼ 2013, 03, 29

- 37 -


(사진) O 도움 주신 분 김재응(중예, 전 공음면장) 문하섭(중예, 마을 유지) 문대수(상예, 전 초등학교교장) 박동규(평산, 전 예전노인회 회장) 박상철(평산, 전 이장) 박인철(평산, 전 초등학교교장) 신계원(고창문화원 대의원) 유명미(평산, 예전 목장 경영) 이종인(중예, 고창문화원 대의원) 참고문헌 고창군지, 고창군지편찬회, 2009. 고창의 마을 유래, 고창문화원, 2003 모양의 얼, 고창학술문화연구회, 2009 고창군고읍지영인본(高敞郡古邑誌影印本), 고창문화원, 1991 충주박씨 박병 효열정려기, 충주박씨족보

- 38 -


고창문화 21집, 고창문화원, 2008 고창성씨의 입향유래, 고창문화제제20집, 도서출판, 청동,2007

- 39 -


Turn static files into dynamic content formats.

Create a flipbook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