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의 고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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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선사시대의 고창1) 고창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단어를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지금은 거의 모두가 고인돌이라고 대답을 한다. 물론 고창의 고인돌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기 때문이라 고 본다. 그러나 고인돌이라고 하는 것은 선사시대의 정치 사회상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 한 요소라는 것을 알아야 된다. 고창의 고인돌은 석관묘와 더불어 청동기시대 동북아시아 지역의 특색 있는 묘제이다. 또 한 고창의 고인돌은 그 유형상으로 볼 때 남방식과 북방식이 함께 존재한다는 데 큰 의미 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고창지역에 들어오기 시작한 문화의 경로가 어느 한곳만이 아니라 적어도 두 군데 이상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고창의 문화가 일찍부터 독자성을 유 지할 수 있었던 것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북방식의 남쪽 한계를 이루고 있는 도 산리의 고인돌은 금강 이남지역에서는 유일한 전형적인 북방식에 속한다. 다음으로 고창의 고인돌은 서남해안 지역에서 가장 많은 고인돌이 분포해 있고, 특히 죽림 리 일대에는 1.8Km 범위 내에 442기, 도산리 5기 447 기가 조밀하게 분포하는 집단군락 지라고 하는 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오랫동안 농경의 정착생활이 이곳에 서 이루어졌고, 지배계급의 계승이 이루어져 지배와 피지배로 나뉘어지고, 정치체제로 발 전할 수 있는 세력집단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고인돌을 통하여 청동기시대에 고창지역에 사람들이 농경과 어로문화를 가지고 살았던 것 을 살펴보았는데 그 뒤를 이은 철기시대에도 고창 지역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이 농경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고창지방 출토 옹관(甕棺)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초기 철 기시대에 들어서게 되면 묘제는 고인돌 무덤인 지석묘에서 옹관묘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문화의 변화는 묘제 뿐 만 아니라 옹관이나 단지 등에 있어서도 무문토기로부터 이른바 와 질토기로 기술의 발전을 보여주게 되는데 1973년도에 고창읍 신월리와 1975년도에 신림면 송룡리의 옹관이 보고된 바 있다. 이러한 사실은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까지 계속적으로 집단적인 삶이 고창에서 이어져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1) 고창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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