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의 백제가요 2010년 10월 24일(일) 16:00 이기화 삼신산이라는 개념은 일제시대에 발행 된 신국어독본에 있다. 이 책에 의하면 한국의 삼신 산은 백두산, 금강산, 지리산이라 하였다. 호남의 삼신산은 방장산, 무등산, 지리산이다. 전 북은 일봉래로 변산, 이방장으로 방장산, 삼영주로 두승산을 삼신산이라 하였다. 한국은 먼 저 일봉래로 금강산을 내세웠다. 중국 명나라의 삼신산은 일방장, 이봉래, 삼영주의 순서로 불렀다. 지리산이 영주산에 간주되고, 금강산이 봉래산, 백두산이 방장에 해당한다. 명나라 와 한국은 다르다. 명나라는 산의 신령도에 따라 신령한 방장을 제일로 하였다. 중국에서는 방장이 제일 신령스러워 제일로 친다. 봉래는 아기자기한 멋이 있고 선녀들이 노는 곳이다. 그러나 영험한 기는 약하다. 풍수상으로는 제일 방장이 맞다. 그래서 나도 방장을 제일로 내세운다. 고려사악지에 백제가요가 5개가 있다. 선운산곡, 방등산가, 지리산가, 무등산가, 정읍사 등 다섯 곡이 기록되어 있다. 고창이 그 중 2개가 있다. 백제가요의 비중이 가장 크다. 방등산 가로 장성문화원장과 충돌을 하였다. 전남매일신문의 논설위원이 장성 것이라 주장을 하였 다. 그래서 어째서 장성 것이냐고 따졌다. 그랬더니 장성이 장일현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서를 뒤져보았다. 그런데 기록에 장일현이 보이지 않는다. 방등산 아래 마을에 갓받등이 보인다. 갓바치가 수용된 곳이다. 그곳이 장일현으로 추측이 된다. 장성에 장일현이 어디인지 제시를 하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제시를 못하고 있다. 반등산은 고창에 있다. 반등산 앞에 노적봉(벽오동)의 600고지가 있다. 테머리형 백제산성 이 있다. 전 원광대 전영래교수랑 확인을 하였다. 반등산은 고창진이 있을 때 그곳이 진성 이다. 조선조 초기에는 반등산, 백제시대에는 벽오봉이 진성이었을 것이다. 진성은 앞에 있 지 배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벽오봉은 고창 땅에 있다. 장성은 배후다. 그런데 어떻게 장성 이라 주장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러한 이유로 장성에서 주장을 하였다가 그만 두었다. 노령산맥이 뻗어 오다가 벽오봉에서 멈추었다가 다시 간다. 벽오봉 서북간이 용추골이 있는 데, 입점(갓받등)동이 바로 그 지점이다. 백제 이후 많은 생산품을 납품을 하였다. 그곳이 아마 백제의 현이었을 것이다. 장일현은 백제의 별도의 현으로 봐야 한다. 정현채 편집국장 이 와서 장성을 주장했는데 왜 아니냐고 물었다. 신림면 갓받등이라 불리는 곳이다 라고 하 였다. 고려시대까지 내려왔다. 다만 확증이 없을 뿐이다. 고창의 문화발전의 비중이 높았다. 정읍사와 고창에 2개가 몰려있다. 향토사와 향토문화를 지킬 곳이 문화원이다. 고창문화원이 비를 가장 많이 세웠다. 삼성에서 돈을 내놓아야 한다. 삼성에서 반등산에 반등산가비를 세워주워야 한다. 그 주변이 모두 삼성의 땅이다. 선운산곡은 있으나 배경만 전하고 있다. 정읍사는 정읍에 사는 장사꾼의 아내가 전주로 장 사하러 떠나는 남편을 걱정한 노래다. 그러나 고창의 선운산곡은 국방의 의무를 하러 가는 남편에 대한 망부의 노래다. 가치의식면에서 남편이 장사하러 떠나 간 것보다는 국방을 위 해 간 것이 높다. 해설문을 가지고 서정주시인이 썼다. 미당이 발문을 지어주어 시비를 선 운사 입구에 세운 것이다. 정읍사는 가사는 있으나 가치관이 뒤 떨어진다. 안돌아오니 망부 가를 부르며 수절을 하였다.
반등산가는 장일현 사람이 부른 노래다. 장성사람들은 장성에서 벽오동은 뒷산 해당하니 위 치비정에 문제가 된다. 장성은 벽오봉에서 몇 십리를 가야 사람이 사는 곳이 나온다. 산의 허리는 길어도 사람이 안 살고 도적들이 많이 살았다. 반등산의 성은 백제
때 성으로 당시
에는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별 쓸모가 없게 되자 사용을 안했을 것이다. 안하니 도적들 이 이 성을 소굴로 하여 도적질을 했을 것이다. 장성에서 도적들의 성까지는 40-50리가 된 다. 그러나 고창은 바로 앞이다. 그러니 도적들이 밤이면 아녀자들을 푸대쌈을 해갔을 것이 다. 장일현으로 추정되는 갓받등이 있어 그곳에서 아녀자들을 밤이면 훔쳐갔을 것이다. 하층민들의 아녀자들을 훔쳐가는 것이 쉽다. 이곳에서 아녀자들을 납치해서 데리고 살았다. 바로 밑이니 도둑질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금방 산으로 올라가면 되었다. 장성에는 양반층 이 많이 살았다. 장일현의 아녀자들을 수없이 데리고 갔고 질리면 다시 보내고 그런 식이었 을 것이다. 오랫동안 납치당해 있어도 찾아오지 않은 남편을 원망하는 노래가 바로 반등산 가다. 양반가는 보복이 두려워 안했다. 하층민들은 보복을 하기가 어려웠다. 갓받등에 가면 그릇을 굽던 곳도 있다. 한국의 자료는 일본에 가야 찾을 수 있다. 한국에는 이러한 기록이 하나도 없다. 무주문화원에 갑오동학관련 자료가 있다. 이곳은 무주부사가 있던 곳으로 동학관련 보고 자 료를 한양으로 올린 무주부사수록이 있었다. 이 자료가 교토의 가와이문고에 있었다. 무주부사가 중앙에 보고한 자료가 무주수록이다. 무주부사가 친 수록 속에 있었다. 무주군 에 알려주자 일본에 출장을 가서 자료를 복사해와 한국어판으로 내 놓았다. 이렇게 작은 무 주군도 한다. 그런데 고창이 못할 리가 없다. 의지가 없는 것이다. 일본에 가서 고창관련 자 료를 수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