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상자의 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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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상자의 어원 2010년 11월 5일(금) 16;00 옛날 결혼할 때 부자들은 많은 것을 신부들에게 주었고, 그것을 가지고 가기 위해 함이 필 요했다. 당시 함은 고가로 채죽(彩竹)으로 만든 것을 오합이나 칠합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이를 살 수가 없었다. 채죽은 세공비가 많이 들어 비쌌다. 함은 일합, 삼합, 오합, 칠합 등 홀수로 만들었다. 시집을 가는 신부들 본인이 필요한 장신구나 침선류 및 귀 중품 등을 함에 넣어 가지고 갔던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채죽을 살 수가 없었다. 고창의 광산김씨 양감공파의 선조는 약500년 전 김인후라는 인물이 내려오면서 세거하기 시작을 하였다. 이들이 고창에서 세거를 하면서 자손들이 많이 번성하였다. 광산김씨들 중 에서도 부자는 돈이 있어 채죽을 가지고 갈 수 있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가지고 갈 수가 없었다. 광산김씨 문중에서 한 아가씨가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너무 가난하여 함을 가지고 갈 수가 없었다. 어찌 광산김씨 문중에서 이런 것 하나 못 만드냐 하였다. 무장에 사는 김 영운이라는 사람의 고조되는 김세홍이라는 분이 무장상자를 만들어낸 장인이었다. 김영운의 매제 되는 사람이 김해 김씨인 김삼경(金三慶, 1884-1974)이다. 김삼경이 무장상 자를 만들어 판 마지막 갓바치이다. 고인이 된 김은수씨(전 영선중고등학교장)라는 분이 김 삼경씨에 대해 알려주었다. 18세기말 정조 때 김세홍이라는 분이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는 매우 가난은 하였으나 손재 주가 있어 광산김씨의 혼수품을 만든 것이다. 그가 만들기 시작한 동기는 총각 때 이웃집 딸이 시집을 가려고 하였다. 그녀는 너무 가난하여 함을 가지고 갈 수가 없었다. 당시 이 마을은 인보상조의 향약에 있었다. 그래서 이 총각도 신부에게 무엇인가를 해주고 싶은데 해줄 것이 없었다. 그는 총각이라 부담이 없어서 채죽상자의 본을 따라 시누대로 상자의 틀 을 짰다. 그 크기는 가로 60센티미터이고 세로는 40센티미터로 만들었다. 백지를 여러 겹 붙여 두꺼운 종이판을 만들어 시누대의 틀에 끼워 만들었다. 시누대를 잘라 다가 홈을 파서 그 홈에 종이를 끼워 넣은 방식으로 해서 무장상자를 만든 것이다. 바닥과 뚜껑은 두껍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뚜껑에도 여러 문양을 오려 붙여 모양을 만들었 다. 그리고 그 주변을 모두 빨강색으로 하였다. 이렇게 만들어 결혼하는 귀수에게 주자 그녀가 감격하고 감사하여 여러 번 절을 하였다고 한다. 혼사 날이 되어 동네에 상자가 왔는데 너무 근사하고 멋있었다. 그래서 수공업으로 집에서 만들기 시작을 하였다. 주변사람들의 권유로 만기 시작한 무장상자는 광산김씨들과 무장사람들에게 팔리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고창의 토산품이 되어 전라도 각지로 팔려 나가 게 되었다. 채죽상자는 무겁고 공이 너무 들어가 점점 쇠퇴하게 되었다. 그 자리를 무장상 자가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무장상자도 60년대 이후 플라스틱혁명이 일어나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김세홍이 무장상자를 개발한 이후 그 장인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김세홍(金世泓, 1766 ~ 1810년) 김신하(金信河, 1795 ~ 1875년) 김재려(金在麗, 1814 ~ 1874년) 김행현(金幸鉉, 1837 ~ 1907년) 김영운(金永運, 1885 ~ 1923년) - 김민수(金敏洙, 1885 ~ 1940년)


김영휘(金永徽, 1859 ~ 1921년) - 김충수(金忠洙, 1891 ~ 1954년) 김영보(金永保, 1862 ~ 1933년) - 김허수(金許洙, 1890 ~ 1969년) 김영려(金永麗, 1866 ~ 1946년) - 김성수(金誠洙, 1900 ~ 1971년) 영운의 네 형제들이 덤벼들어 가내 수공업을 함께 하였다. 김삼경 이후 아무도 하지 않아 전해지지 않았다. 그 후 고창에서 색지공예를 하는 김혜옥(金惠玉)씨에 의해 재현이 되었다. 지금은 김혜옥씨를 중심으로 무장상자를 재현하고 있다. 현재는 주문이 들어오면 만들고 있 으나 양이 너무 없다. 모양성제에 색지공예를 하되 그 맥을 무장상자로 해서 행사를 참여해 야 한다. 색지공예는 전국 어느 행사에도 있다. 그러나 무장상자 라는 고유의 고창 공예품 은 전국 어디에도 없다. 고창생활문화의 핵심으로 무장상자를 키워야 한다. 김혜옥씨를 중심으로 20여 명이 만들고 있다. 제대로 활용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고창에서 토산공방을 만들어 활용을 하면 된다. 무장상자는 처음에만 지원하면 된다. 잘 만들어 보석함이나 장식품 함으로 만들어 팔면 된다. 호남지방에서 무장상자하면 중하품 으로 알려주었다. 이것이 고창의 맥이다. 시누대는 성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있다. 화살을 만들 때 시누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살막이는 화살을 만들던 곳이다. 고창 심원의 살막도 화살을 만들던 곳이다. 무장상자의 어원을 밝히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김은수가 고창 화포청의 건물들의 서까래를 가지고 있다. 이것만 사가지고 오면 화포청을 복원할 수 있다. 고창군에서 이를 조용히 입 수해서 복원을 해야 한다. 화포청에서 국궁을 하면 이것도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 화포청 이 동향으로 되어 있다. 방 한 칸, 대청 두 칸으로 되어 있다. 모양성 쪽으로 활을 쏘게 되 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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