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전후의 고창사(고창청년단을 중심으로) 11월 27일(토) 17:00 ~ 19:50 이기화 이봉춘씨는 고창 남정리 박여옥씨의 사위이고, 이원장님 외숙의 둘도 없는 친구였다. 이봉 춘씨(1906년생)는 동호에서 해왕사는 어판회사를 하였다. 이원장님의 막내 외숙이 이무홍 (1908년생)보다 2살이 위였다. 이무홍씨는 말을 잘하였고, 이봉춘씨는 힘이 셌다. 1946년 이 두 사람은 흥남으로 갔는데, 이봉춘씨는 흥남질소회사의 노가대 대장을 하였는 데, 그는 산수정(山水町)의 대장으로 흥남의 중앙동 대장을 하였다. 그는 질소공장의 경비도 하고 노가대를 관장하였다. 그는 함흥에서 양복점을 하기도 하였 다. 외숙은 수산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이봉춘은 양복점을 하다가 노가대로 들어간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한 달 전인 7월에 일본의 관동사령부는 1차로 소개령을 내렸다. 이때 이 봉춘은 재산을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왔으나, 외숙은 돈을 더 벌 욕심으로 일을 더하다가 다 털리고 빈털터리로 내려오게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이봉춘을 잘 안다. 이봉춘은 함평이씨 함성군파의 교수공의 24세손이다. 이버지는 이유석으로 5녀 1남 중 1남 으로 귀한 아들이었고, 부자집 아들로서 귀염둥이었다. 그래서 그는 통이 매우 컸다. 그가 9살이 될 때 아버지는 갑작스럽게 돌아가셨고, 그 집의 재산인 가재도구와 임야(약 1 만여 평)는 문중사람들이 팔아먹어 버렸다. 이봉춘은 해리초등학교의 전신인 육성학교를 다녔는데, 육성학교는 보통학교 수준으로 사립 학교였다. 그는 4년을 수려하고 같이 다니던 김재규라는 사람이 이 집의 나머지 재산을 탕 진하고 말았다. 15세에 학교를 졸업 한 후, 집안이 망하기 직전 고창의 주곡리 고흥유씨의 규수와 결혼을 하였다. 집안이 망하자 그는 좌절하지 않고 1922년(18세)에 일본으로 밀항을 하였다. 히로시마에 상륙하여 일을 하다가 말이 안통하자 막노동을 하였다. 막노동을 하다가 도저히 안되자 야마구치현의 삼권역에 하차하여 양복점가계에 들어가 보니 너무 옷이 근사하여 양 복만드는 기술을 배우고자 하였다. 주인은 기술과 먹을 것과 잠잘 것만 해결해주면 무보수 로 일을 하겠다하여 그를 3년간 데리고 있었다. 3년간 연수공이 되어 기술을 배우자 그는 일을 마치고 고국으로 가고자 하였다. 주인이 그에게 양복 한 벌을 선물해주자 이봉춘은 그 옷을 입고 고창읍내를 활보하자 아주 근사하였다. 그때부터 외숙과 알게 되어 친구가 되었다. 큰외숙인 이기정씨는 고창경찰서 경무과장을 하 였는데, 신기업씨랑 친구였다. 외숙은 경찰관을 그만두자 고창에 금릉상회라는 마차조합을 만들어 운영을 하였다. 막내 외숙이 큰 외숙 밑에 있었다. 고창에는 고삐리(유씨로 유진씨 집안)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축구를 매우 잘했다. 이들 덕분에 고창고보가 축구를 잘해 남선축구대회에서 우승을 한 것이다. 이태홍과 이무홍은 술을 좋아했는데, 이들은 술만 먹으면 축구경기에서 날라 다녔다. 이들 세 사람 때문에 이봉춘씨가 고창축구단을 만들어 후원을 하였다. 당시 곽종식씨는 고창의 깡패로 건달태수(김태수)를 비서로 데리고 다니면서 축구 출전비용을 각출하러 고창읍내를 다녔다. 곽종식씨와 이봉춘이 붙었는데 이봉춘이 곽종식을 한 손으로 들어 멀리 던져버렸다. 곽종식 이 힘으로 안 되자 이봉춘 밑으로 들어 간 것이다. 1941년도 이봉춘은 양복점을 하고, 외숙 은 수산업을 하였다. 외숙은 판매회사를 차려 배에서 고기를 잡으면 소금과 어름을 가지고 사거 싸게 고기를 산 뒤 이를 파는 일을 하였다.
이봉춘이 함흥에 있을 때, 일본인들이 밀어주어 함흥질소공장의 노가대 대장을 한 것이다. 일본인들은 이봉춘에게 공장의 안전자구대책을 마련하도록 하고, 그에게 공장의 하청회사인 토건회사를 만들어 줘 하청업자가 되어 돈을 벌게 해주었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서 많은 돈 을 벌었다. 고창에 있던 박여옥이 딸을 데리고 오자 그는 장인에게 많은 돈을 주어 고창으 로 돌려 보냈다. 15세에 결혼을 한 고흥유씨는 그가 멀리 떠나자 개가하였다. 그는 일본에 서 고창으로 돌아와 양복점을 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 그때 외숙이 그를 꼬셔 함흥으로 간 것이다. 두 번째 부인인 박여옥씨의 딸을 함흥에 놓고 가려고 하자 이봉춘은 돈을 주어 성송면 괴치 리일대의 땅 50두럭을 샀다. 그래서 일제시대 때 박여옥씨가 괴치리일대의 땅을 매입하게 된 것이다. 장인이 고창에서 농사를 짓게 되었고, 이봉춘은 소개령으로 내려와 보니 장인이 돈을 불려 놓으니 고마웠다. 장인이 이봉춘을 다독거리고, 자산조성을 잘해 놓으니 장인에게 고마웠다. 45년 7월 일제는 패전이 짙어지자 소개령을 내리고 이 명령에 따라 이봉춘은 증명서를 가 지고 있어 징병가지 않았다. 해방이 되자 코삐리, 이태홍(황금여관 아들)과 이무홍이 이봉춘을 따라 다녔다. 코삐리의 말 을 듣고 이봉춘은 방호단(방장산호랑이)축구단을 창단하였다. 이봉춘은 방호단의 축구화를 만들고 수선하기 위해 양화점을 만들었다. 그래서 이봉춘이가 이끄는 고창청년단이 고창을 석권하게 된 것이다. 45년 8월 17일 여운형이 건달의 오야봉인 이봉춘을 건준위원회 고창 지부장으로 세웠다. 곽종식을 감찰부장으로 세우고 코삐리와 이태홍도 참여를 하였다. 그러나 곽종식이 건준이 좌익이라는 사실을 알고 스트라이크를 해서 이봉춘을 중심으로 우 익단체인 고창청년단을 조직하였다. 즉 곽종식은 깡패출신으로 원래 공산주의를 싫어해서 이봉춘을 꼬드겨 공산주의 앞잡이 하지 말자고 하여 데리고 나온 것이다. 해방이 되자 고창군수인 도리야마와 일본인 고창서장, 가와사끼 재향군인회장(양조장사장으 로 모양성 앞의 염광교회 자리) 등 세 사람이 이봉춘을 찾아왔다. 곽종식의 창안으로 1945년 9월에 고창청년단을 만들었다. 9월 15일 일본이 철수를 하자 세 사람이 이봉춘을 찾아와 일본의 주요한 창고의 열쇠를 주자 이것을 가지고 단체를 만들 고 군수품을 주었다. 고창은 해안의 요새라 수많은 굴과 군수창고가 있었다. 이들은 자기들 을 부산까지 안전하게 데려달라고 하자 이봉춘은 친구에게 연락을 하여 목포에서 배를 가져 와 동호에서 부산으로 돌려 보내주었다. 그래서 고창의 일본인들이 안전하게 일본으로 건너 가게 된 것이다. 먼저는 정읍역으로 가서 열차를 태워 보내고자 하였는데, 정읍청년단이 쳐부수고 난리가 나 니 어쩔 수 없이 다시 고창으로 돌아와 동호에서 배를 타고 간 것이다. 한국인인 도리야마 군수도 일본으로 가고자 하였으나 일본인들이 그를 데리고 가지는 않았다. 도리야마는 얼른 짐을 챙겨 군청의 차로 도망을 가다가 고창청년단원들에게 걸려 이삿짐차를 세워 놓고 도리 야마군수를 죽도록 패고 몸만 가도록 하였다. 도리야마군수가 한국인이었지만 인심을 얻지 를 못했다. 도리야마는 다른 곳에서 차를 빼서 겨우 몸만 도망가고 말았다. 도리야마군수는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시킬 때 한국인 한 사람이 방귀를 뀌었다고 그를 죽도록 팼고, 그는 고막이 터져버린 사건이 있었다. 고창의 좌익본부가 교촌리였으며, 이곳을 고창의 모스크바라 불렀다. 고창은 이봉춘이의 고 창청년단 때문에 좌익이 힘을 못 썼다. 이봉춘과 곽종식이 고창의 치안을 유지하였다. 고창 청년단이 고창의 치안을 담당하자 고창은 치안이 안정이 되었다. 이봉춘이 의리를 지켜 일
본인들은 무사히 일본에 잘 도착했다는 편지가 왔었다. 이기화 원장댁에 곡물검사소장이 살 았다. 그는 일본으로 떠나기 전 모든 가재도구를 원장댁에 남겨두고 떠났다. 45년 10월 이 후는 조선과 일본은 연락이 끊어졌다. 10월 중순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배가 침몰하 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단절되게 된 것이다. 함흥에서 일하고 있던 외숙은 겨우 몸만 살아 피난민으로 고창에 내려왔다. 해방이 되자 축 구단원이 되어 활동을 하였는데, 이것이 모체가 되어 고창고보 축구단이 남선축구대회에서 우승을 하게 된 것이다. 고창에는 고창고보축구단과 방호축구단이 있었다. 고창에는 축구가 부흥되어 청년들이 서로 가입을 하려고 하여 고창청년단이 고창의 핵심단 체가 되었다. 이봉춘은 1945년 9월부터 48년 8월까지 대한청년단 고창단장을 하였다. 이승 만박사는 해방이 되자 전국에 대한청년단을 조직하였는데, 고창의 핵심으로 이봉춘을 내세 웠다. 이봉춘은 지금의 고창교육청 도서관자리에 110평이나 되는 고창 공회당을 건립하였다. 당 시에는 상당히 큰 건물로 관중석이 500석 이었다. 돈이 부족해서 벽돌사이의 뒷마무리를 하지 못했다. 하어간 건물은 사용할 수 있어서 고창의 극장 문화가 발달하게 된 것이다. 김 순한씨가 활동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 주게 되었고, 신파극은 매일 공연을 하고, 날씨가 좋으면 외곽으로 돌며 공연을 하였다. 고창청년단 명으로 각 면 신파극 순회공연을 하였다. 해리에 가서 공연을 했는데, 이봉춘의 땅을 싸게 산 성하봉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이봉춘이 공연 끝나고 성하봉을 불렀다. 무대 뒤로 오라고 하여 가니까 무조건 잡아 좋은 말 할 때 내놓아라. 땅에 대한 원금은 주마. 그 곳에서 각서까지 쓰게 하여 땅을 내놓았고, 함평이씨 문중의 땅을 모두 찾았다. 해리에서 무장의 연예단이 밴드공연을 해 주었다. 고창은 줄포사람이 해주었다. 당시 고창이 고창고보 때문에 음악수준이 높았다. 1941년10월부터 1947년까지 계속 공연을 해주었다. 1949년도 정치바람이 불어 제헌국회 에 나왔다 떨어져서 끝이 났다. 당시에는 작은 마누라를 들이는 것이 유행이었다. 이봉춘도 좌익 계열의 딸을 첩으로 데리고 살았다. 부인은 남매를 낳았다. 아들은 목포로 갔다. 해방이 되자 그는 정치 문화 사회활동의 거목이 되었다. 먼저 고창청년단장을 하고 있을 때 이승만박사가 전국의 청년단들을 규합하여 대한청년단을 조직하고, 이봉춘은 고창 군지부장을 맡았다. 이승만박사는 정치활동을 하고자 1946년도에 전국적으로 대한국민회 조직하였고, 고창지부장에 이봉춘이 맡았다. 그는 이승만의 우익계열로 들어갔고, 그의 수하 였던 곽종식은 좌익계열을 타도하자는 구호와 활동을 하다가 한국정쟁시에 학살을 당했다. 이봉춘은 1945년에 성송 괴치의 땅을 팔아 46년 12월에 고창공회당을 준공하였다. 47년 2 월에 이박사가 주도하는 한민족회를 발족하였는데, 한민족회 고창군 대의원에 이봉춘이 당 선 되었다. 당시 김상만, 신용재 (독일유학시 독일여자와 난 아들이 신서재), 이봉춘이 출마를 하였는 데, 이봉춘이 당선된 것이다. 신용재의 아내인 독일인은 6.25때 외국인이라 못 죽이고 고국 으로 보냈다. 신용재의 아들 신서재는 월북하거나 독일로 갔다는 설이 있다. 이봉춘은 1946 년 6월23일 대한국민회 지부장이 되고, 47년 2월에 한민족회의 대의원 선거에 이봉춘이 당 선되었다.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 신탁통치반대 궐기대회 고창대회장이 되어 궐기사와 개회사를 하였 다. 1947년부터 정치에 욕심이 있어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3등으로 떨 어졌다. 좌익의 지하조직이 움직여서 김영동이 당선되었다. (무장 광산김씨 金永東)
백남운씨가 근로인민당수를 하였는데, 후에 여운홍(사회주의), 박헌영(공산주의) 등과 함께 좌익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백남운은 중도사회주의) 백남운은 고창출신인 이재남을 남로당 중앙위원으로 밀었다. 전라남북도를 대표해서 이재남 이 남노당 중앙위원이 되었다. 남노당 푸략치사건에 관련된 인물이 이재남이다. 임방욱이 나영균과 동서간인데, 임방욱이 한민당 고창지부장 동생이다. (임창욱이 경방단장) 임방욱과 이봉춘이 안되고 좌익에서 밀었던 김영동이 당선되었다. 좌익의 하부 조직이 움직 였다. 김영동은 순 건달모양으로 서울에서 좌익활동을 하였다. 그런 그가 무소속으로 나가 당선되었다. 백관수씨가 고창을구에서 한민당으로 당선되었다. 이것이 고창의 3년간의 정치사의 대강이 다. 고창갑구는 좌익과 광산김씨가 밀어 이봉춘이 떨어졌다. 고창은 남한의 모스크바이고, 그 중심이 고창읍 교촌리였다. 후에 백남운은 월북하였다. 고창의 좌익활동은 백남운의 영 향이 컸다. 유영상과 이재남은 이북을 오갔다. 유영상이 이북에서 발령장을 가지고 진주시장(진영군) 직무대행을 하였다. 유재필의 아들 유영상이 좌익의 조직책이고, 오희균군수의 아들 오인탁이 고창 좌익의 우두머리역을 하였 다. 아버지는 우익, 아들은 좌익의 우두머리였다. 이봉춘은 1947년 9월 고창수리조합설립 (고창노동저수지) 준비위원장을 맡았다. 고창청년 단장으로 한민족회의 중앙을 오가며 교섭을 하여 만든 것이 노동저수지다. 그는 1950년에 목포로 도망을 갔고 53년도에 준공식을 하였다. 이봉춘이 기금조성의 시동을 걸고, 목포로 떠났다. 1950년 2월 2일 이승만이 한국전쟁을 앞두고, 전국청년단장을 소집하였다. 이승만은 전국의 청년단장들을 국민방위군 고급간부교육반(충남아산)을 만들어 몇 개월 교 육하였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육군대위로 발령 내었다. 고수자기의 박창현이 고창 방위군 배속장교(중위)였고, 대대장은 이봉춘이었다. 이봉춘은 50년 7월 20일 후퇴명령이 내리자 목포로 빠졌다. 정읍경찰서장이 고창금융조합 것을 털고, 대산금융조합 것을 이봉춘이 털어 목포로 도망을 갔다. 배속장교인 박창현은 고창으로 왔다가 공산군에게 학살당하였다. 고창에 유일하게 고 급간부가 이봉춘이었다.(육군대위) 청년단을 방위군 체제로 개편 하다가 한국전쟁이 터졌다. 이봉춘은 대산금융조합을 털었다가 목포경찰서에 걸렸다. 그는 진도에 가서 인민군과 교전 도 하다가 포기하고 목포에서 숨어 살다가 목포에서 국회의원으로 나왔다가 떨어졌다. 1976년 12월 19일 향년 72세로 죽었다. 그리고 고향으로 치상하였다. 고창금융조합 것을 정읍경찰서장이 가지고 도망갔다. 이봉춘은 목포에서 활동무대가 넓혀 대사회 활동을 하였는데, 목포 번영회와 수산계열에 관 여해서 시민단체의 대표도 하였다. 그는 객지라 표를 못 얻었다. 목포수협조합장도 하였다. 이봉춘이 문제점도 있지만 고창의 정치적 안정을 시킨 사람이었고, 한민족회의 대의원으로 이박사와 김구선생 등과 함께 찍은 사진이 문화원에 있다. 고급간부교육생 시절의 수료식 사진도 있다. 일제시대 일본인도 고창에서 악질적인 짓은 하지 않았다. 니시이고마 히데끼라는 사람은 일 본인 건달이다. 그는 고창에서 사진관을 하였다. 양조장 바로 앞 무도관에서 하였다. 큰 외숙은 스모무라(李村, 원장님 외숙)라는 이름으로 창씨 개명하였다. 강무라는 독립운동가도 무소속으로 두 번 나와 떨어졌다. 고창청년단에 고창의 리더들이 모였다. 일제시대 소화철도학교에 한국인이 3명만 합격하였 다. 당시 큰 외숙의 아들이 합격을 하고 졸업 후 심양역 조역을 하였다.
해방이 되자 형님은 고창경찰서 내무서장을 하였는데, 한국전쟁이 터지자 형님이 방장산에 숨었다가 7월 20일 후퇴를 못하고 말았다. 인공시 고창의 새로운 내무서장으로 평양역 조 역의 직원이었던 사람이 왔다. 자수하라는 삐리가 와서 월곡 이장이 형님에게 주었고, 내무 서장이 일제감정기 때 부하여서 살려주었다. 소화철도학교에서 한국인 3명을 뽑았다. 이기 정(이채홍씨의 아들)씨는 새로운 내무서장 덕에 살았고, 내무서장이 평양역내서 근무하던 사람이라서 반가워하며 살려주었다. 후에 이기정씨는 내무서장의 고문역할을 하였다. 후퇴하면서 이기정시에게 알아서 잘 하라 고 하고 그는 떠났다. 이후부터 이기정씨는 숨어서 박은기(박남용의 아들)씨의 도움으로 자 전거 페달을 활용한 라디오를 통해 뉴스를 가만가만 들었다. 50년 10월 11사단이 와서 환영회를 하였는데, 화랑부대는 고창에서 하루자고 바로 정읍쪽 으로 가버렸다. 곡물검사소에서 일한 이기봉씨는 안 따라가서 학살당하였다. 이원장님은 성 두 잔등까지 가니 군복을 입지 않았다고 못 오게 하여 못 따라 갔다. 권정달이라는 고창여학교 배속장교(육군중위)로 있었던 사람은 원래 남노당에 가입하여 활 동을 하였다. 그가 차에 올라 타자 누군가가 그는 빨갱이라 하자 한 장교가 그를 내리게 한 후 바로 총살시켜 버렸고, 그는 길가에서 쓰러져 죽었다. 아마 사찰계 형사가 탔었던 것 같다. 그는 원래 남노당이었다가 전환하여 배속장교가 되었 는데 학살되었다. 권정달씨는 누님의 친구 남편이었다. 권정달씨를 치워 가매장을 해주었다. 이원장님은 환영회를 갔기 때문에 빨치산들에게 알려져 얼른 문수사로 도망을 갔다. 다행히 도 주지스님이 집안사람이라 밥은 남겨두었다가 주었다. 50년 8월14일 집에 옷을 갈아입으 러 왔다가 잡혀갔다. 좌익의 신고로 서부리 빨치산 사무소에서 갔더니만 원장님댁의 식모 남편이 있었다. 그는 채정병이라는 사람으로 원장님의 귀에 대고 내가 총을 빵 쏘면 굴러 떨어져라 해서 살았다. 강호상고의 맹주령을 넘어서 막 갈 때, 식모남편(매형이라 불렀던 채정병씨로 수복 후 총살 당함 )이 내가 총을 꼴 터이니 죽는시늉을 해라하여 겨우 살았다. 강호상고 앞의 공동묘지 에 도착을 하자 서부리 빨치산 대장이 어떡할까 하더니만 공동묘지 위에 5명씩 무릎 끓게 하고는 총을 쏴 죽였다. 식모 남편이 까막까막 해서, 총쏘면 뒹굴어라. 총을 쏘자 죽는시늉 을 하니 총구를 목에 대어 발로 차서 이원장님만 살게 되었다. 20명이 끌려갔는데, 원장님 만 혼자 살았다. 생사의 갈림길을 갔다. 그 식모 남편이 작전에서 잡혀왔는데, 살릴 수가 없었다. 빨치산 포위작전에 생포되어 왔는 데 죽임을 당했다. 해리에서 백한기가 빨치산에 가라고 하자 빨칙산이 뒤에서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백한기는 논두렁을 굴러가며 도망을 하여 살았다. 강석동씨 아들로 극적으로 살았다. 백한기은 그날 날이 조금 어두워지자 도망가서 산 것이다. 그는 고려대를 나와 전북대에 근 무하고 정년퇴임하여 대전에 살고 있다. 고등학교 복학 할 때 이야기 해 주었다. 강석동은 삼양사 마름생활을 해서 부자가 되었다. 송희중씨 딸과 강경구씨와 연애를 하였다. 강경구 애인이 고창초 선생님이었다. 이 원장님 댁에서 연애를 하였다. 둘이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 박한기도 여러 번 죽었다 살았다. 치안 부재로 정읍은 난리였는데, 고창은 치안이 잘 되었다. 이것은 이봉춘의 역이 컸다. 추가 오류 수정
공무원이 고창으로 발령 받으면 울고 왔다가 울고 간다. 고창은 오지라서 울고 왔다가 고창청년단이 지켜주어 잘 놀다가서 갈 때는 기뻐 울고 간곳 이다. 고창에는 국일만, 홍성주, 은락관, 백운장, 조양관 등 많은 요정이 있었다. 민선군수 전 까지 고창이 살기가 좋은 곳 이라 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고창청년단은 백한기와 유동열 이 중심이 되고, 참모는 이기화가 하였다. 이기화전고창문화원장이 1960년 민주당 정권시 고창청년단의 지원으로 고창읍의원에 당선 하였다. 고창 성내의 이동현은 고창고보 좌익의 오야붕이었다. 이봉춘씨가 목포에서 건해산물상회와 목우공사라는 곡물도매상을 하여 목포곡물상 도매상 조합장을 오랫동안 하였다. 앞에서 말한 금융조합사건을 수정하겠다. 고창경찰서장이 고창 금융조합 것을 가지고 미리 도망가고, 정읍방위대로 온 20명이 대산으로 이봉춘을 데리고 가서 30만원 차용증을 써서 20만원을 정읍사람이 가지고 가고, 10만원을 이봉춘씨가 가져 갔다. 고창금융조합은 90만원 이였다. 이봉춘씨가 너무 늦었고, 박창현이 꼬득여 대산에 갔는데. 정읍방위로 사람들이 먼저 있었 다. 1953년 5월 고창금융조합에서 고발조치하여 정읍방위대장 김세길대위와 이봉춘이 끌려 갔으나 이봉춘은 무혐의로 풀려났다. 이봉춘이 고창에서 도망을 가다가 무안검문소에서 걸렸는데, 현역도 아닌데 무기가 있다하 여 무기를 회수당하였다. 그들은 군복만 입힌 채로 방면해주었고, 통행증을 써주어 목포당 숙네 집에 있다가 다음날 인민군이 와서 진도로 들어갔다. 그런데 진도까지 인민군이 들어 왔다. 어찌 되었건 그는 살아서 완도로 도망갔다가 다시 제주도로 가서 방위군 제주사령관 을 찾아가니 그곳에서 일거리를 주었다. 이봉춘과 함께 간 이성옥 소위는 현지 입대시키고, 조종철은 끝까지 데리고 있었다. 이봉춘은 50년 9월 28일 수복 후 고창으로 들어왔다. 그가 무안검문소에서 검문 당한 것이 수사과정에 나왔다. 10만원은 후퇴자금이라 하여 무혐의로 풀려났고, 무안경찰서 수사과장 이 전후사정을 알려주어 입증이 된 것이다. 정읍 법원에서 혐의 없음을 인정하였다. 소문은 이봉춘이 고창 것을 훔친 것으로 되었으나, 대산 것을 10만원 가져갔다. 그는 1965년도 해리 안산 종달산에 1만평의 땅에 과수원을 만들어 그곳에서 보냈다. 1976년도에 향년 72세에 생을 마감하였다. 아들은 광주에 있다. 정읍 방위로 정읍대장은 김세길대위, 조종철, 이성옥은 소위이고, 이봉춘씨는 방위고 고창대 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