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호마을의 수륙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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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륙재1)

1. 1)

개요 과거에 고리포, 고전포, 검당포, 선운포, 경포, 백사포 등 9개의 포구가

있었던 지역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포구는 고리포였고, 가장 화려하고 큰 항 구는 고창군 심원면의 고전포였다. 고려 초기에서 고려 중기까지만 해도 고창의 포 구는 매우 발달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당시에는 고창 포구의 수심이 변산 일대 포 구보다 깊었으나, 150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변산 일대의 뻘이 고창으로 옮아와 쌓이 면서 고창 포구는 뻘밭으로 변해 버렸고 수심도 점차 얕아졌다. 그런 까닭에 고창 포 구에서의 무역은 점차 불가능해졌고, 포구의 중심은 점차 부안 변산 쪽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고창군 해리와 상하 쪽의 포구가 먼저 없어져 버렸고, 고리포와 구 시포만 남고 다른 포구들도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고리포와 구시포의 경우도 명맥 만 유지할 뿐 포구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이처럼 해류 의 흐름이 바뀌어 버리면서 고창의 칠산 바다 어업은 점점 쇠락해갈 수밖에 없었다. 조기잡이가 한창 성행할 시기에는 동호리의 조기 걸대가 법성포의 조기 걸대보다 더 컸었다고 한다. 고창문화원장이었던 이기화의 외숙이 동호리에서 해왕사(오케이 사) 사장으로 활동한 적이 있었는데, 그가 1956년 5월 19일에 찍은 조기 걸대의 사 진은 동호리에서의 조기어업이 얼마나 성황을 이루었는지 짐작케 해준다.2)

1)

글의 출처는, 동호풍어제 원형 전승 학술용역 결과보고서 동호마을의 공동체신앙과 문화유산(전남대학교 산학협력단 지역문화교육연구개발센터, 2009. 11. 16)이며, 보고서 내용 중 「수륙재와 영험담」(이영금, 전북대학교) 내용을 발췌한 것임. 2) 박연봉이 제시한 사진에는 해왕사 사장과 어민들이 11층 조기 걸대 앞에서 찍은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사진은 원래 전 고창문화원장인 이기화가 소장하고 있었다. 해왕사 사장은 이기화의 외숙인데, 그는 두만강 하류에서 어업으로 크게 돈을 벌어 동호리로 돌아와 해 왕사를 차렸다고 한다. 해왕사 사장은 동력선의 시발자이기도 하다(제보자: 이기화)


<

1> 동호리 해왕사의 어민들과 11층 조기걸대

칠산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자락에 당집을 지어 해신(海神)을 모셔 놓고 매년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며 어업활동을 해왔다. 조기어업이 성행할 당시에 는, 무당패를 불러 성대하게 영신굿/수륙재를 연행하기도 했다. 당집이 들어선 바로 그 산자락 밑에는 물살이 세게 돌아 익사 사고가 빈번히 발생한다는 ‘유왕개미’가 있 다. 유왕개미는 배가 들락거리는 포구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데, 마을 주민들은 익사/ 수사 사고의 재난을 미리 막기 위해 매년 음력 정월 초하룻날 ‘영신굿/수륙재’를 연 행해 왔다고 한다. 영신굿/수륙재는 영신당에서 연행하는 영신당제/영신굿과 바닷가 나 바다에서 행하는 용왕제로 구성되는데, 과거에는 이 영신굿/수륙재 때에 무당패들 을 초빙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단골의 맥이 끊긴 지 오래이고 또 어업마저 쇠 퇴한 지금에는 제의의 주체자가 제관과 풍물패 중심으로 위축되었지만, 여러 제보자 들의 증언에 따르면 음력 정월 초하룻날의 마을 공동체굿은 여러 명의 무당과 삼현 육각잽이들이 가담하여 치러낸 화려한 마을 제의였다고 한다. 이처럼 화려한 무당 중심의 영신굿/수륙재의 전승은 이미 끊긴 지 오래지만, 고창 군 해리면 동호리에서는 아직도 현지 주민들 중심으로 그 전통의 맥을 이어가고 있 다. 과거 영신굿/수륙재를 담당하던 무당패들이 사라지고 없어서, 그 연행의 핵심이 되는 무당굿과 연희 문화들은 부재하지만, 거기에 담긴 소망과 문화적 취향들은 수 륙재/풍어제라는 이름으로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 보고서에서는 이러한 점에 주 목하여 현재의 수륙재/풍어제의 모습과 과거의 영신굿/수륙재에 관한 정보들을 현지


통해 기록하고자 한다. 조사자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준 제보자들을 제시 하면 다음과 같다.

조사 장소

박연봉(1935년생, 75세, 남)

(2009년) 8.17

김위용(1954년생, 남)

8.18

김영무(1946년생, 남)

8.18

장연규(1939년생, 남)

8.18

초소 군인(20세 가량) 이귀녀(1926년생, 84세, 여)

8.18 8.18. 11.7.

에서 당집 앞에서 자택 : 동호리 556번지 자택 : 고창군 고창읍

11.11.

전화로 조사

이기화(1935년생, 75세, 남)

2)

비고

자택 : 동호리 532번지 구동호 정류장 근처 바닷 가 평상에서 자택 : 동호리 675번지 구동호 ‘바다마을’ 장어집

마을이장

‘바다마을’ 장어집 사장 당집을 안내해준 군인 최대식(상쇠)의 부인 전 동호초등학교 교사 전 고창문화원 원장

행하는 마을 공동체굿

구동호 마을 제의는 정월과 이월에 집중되어 있다. 과거에는 어민들이 3월부터 본 격적으로 조기잡이를 수행하였는데, 그들은 정월과 이월을 준비 기간으로 삼고 풍어 와 안전을 기원하기 위한 마을 제의를 연행해 왔다. 정월과 이월에 연행된 마을 공 동체굿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명칭

제의 시기

현재 연행 여부

당산제/철륭제

음력 1.3.

걸립굿/마당밟이

음력 1.15.

×

수륙재/영신제

음력 2.1.

당할머니 생신 제사/연신굿

음력 2.20.

×

동호리에서 연행되는 마을 제의는 당산제/철륭제, 걸립굿/마당밟이, 수륙재/영신제, 당할머니 생신 제사/연신굿 등이다. 당산제는 매년 음력 정월 초사흗날에 연행되며, 걸립굿은 음력 정월 대보름에, 수륙재는 음력 이월 초하룻날에, 당할머니 생신 제사 는 음력 이월 스무날에 연행된다. 이 가운데 현재 전승되고 있는 것은 당산제와 수 륙재/영신제뿐이다. 매년 연행되던 정월 대보름날의 걸립굿은 현재 중단 상태에 있지


, 과거에는 마을 주민들이 풍물패를 구성하여 마을 개개인의 집과 선주의 배를 오 가며 이틀간 마당밟이를 했다고 한다.

옛날에는 정월 보름굿을 쳤거든요. 저는 어렸을 때 몇날 며칠을 따라다녔어요. 집 집마다 걸립굿을 치고 배마다 걸립굿을 쳤어요. 정월 초사흗날 철륭제를 지내고 보 름날부터 한 이틀 간 허드라고요? 옛날에는 보름굿을 쳤는데, 인제는 그것도 안하고 있어요. 과거에는 구동호와 신동호가 분리되지 않은 한 마을이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시간도 많이 걸렸지요. 인제는 동네가 두 개 쪼개지다 보니까 사람도 잘 모 이지 않고 그래서 중단되었어요(제보자: 김위용)

과거에는 당할머니 생신 때 지내는 제사도 매우 성대하게 연행되었다고 한다. 음 력 이월 스무날에 마을에 변고가 있어 수륙재/영신제를 못 지냈을 경우에 당할머니 생신날에 무당을 초빙하여 선주 중심의 연신굿을 크게 벌였다는데, 지금은 조기 어 업의 쇠퇴와 무당의 부재로 인해 전승이 중단된 상태이다. 서해숙의 조사(1998. 1.11)자료에 의하면, 당할머니 생신 때에는 간단하게 당집에서 제사를 드리고 나서 당집 아래 넓은 곳에서 소리꾼을 비롯한 사당패를 불러들여 마을 사람들과 한데 어 울려 놀았다고 한다. 해리 일대에서 가장 큰잔치로 인근 마을에서까지 구경을 왔을 만큼 대단하였다고 한다. 음력 정월 초사흗날 모시는 당산제/철륭제는 마을 이장의 책임 하에 진행된다. 당 산제 때에는 마을 주민들로 구성된 풍물패들이 할아버지 당산, 큰 당산, 작은 당산 등 세 곳을 돌며 당산제를 지낸다. 고창군 해리면 동호리에서는 당산나무가 네 곳이 어서 정월 초사흗날에는 네 곳을 돌며 당산제를 지내왔으나, 할머니 당산이 없어진 현재에는 세 곳에서만 당산제를 모시고 있다. 음력 이월 초하룻날 모시는 수륙재/영신제는 어촌 계장의 책임 하에 진행된다. 제 관과 풍물패로 구성된 제의 주체자들은 먼저 ‘영신당’에서 영신제를 지낸 다음 바다 가로 내려와 용왕제를 지내게 된다. 용왕제 때에는 비교적 깨끗한 사람으로 선정된 사람과 풍물패들이 배를 타고 바다로 이동하여 수중고혼이 된 영혼을 위한 헌식을 행한다.

3)

당화(堂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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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창지역의 유일한 당집인 영신당

현재 남아 있는 고창지역의 유일한 당집이다. 고창의 가장 오래된 포구 였던 고리포에도 매우 큰 당집이 있었으나 200년 전에 해체되었다고 한다. 영신당은 칠산바다를 껴안은 모습으로 배가 드나드는 포구 쪽 높은 산자락에 위치해 있다. 당 집 앞에는 해안 초소가 있고, 당집 뒤편으로는 제를 지낼 때 사람들이 모여 놀았던 공터가 있다. 과거에는 당집이 산의 아래쪽 잔등에 위치해 있었다. 과거에는 당집으 로 가는 길목인 동호 해수욕장 근처에 ‘동백정’이 있었는데, 원님을 비롯한 많은 유 림들이 이 동백정에 드나들며 시를 짓고 놀곤 했었다. 유림들이 오고가는 길목에 당 집을 그대로 두는 것이 눈치가 보여 마을 주민들은 당집을 높은 산 쪽(현재의 당집 위치)으로 옮겼다고 한다(이기화 제보).

영신당 내부에는 당화가 1폭 모셔져 있는데, 당화는 마을 주신인 당할머니가 가운 데에 앉아 있고, 당할머니의 딸이 좌측에 1명 우측에 2명이 서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당화는 여러 번의 교체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고창문화원장 이었던 이기화와 마을 주민들이 제보한 내용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 6・25사변 직후에 나는 20살 때부터 동호국민학교 교사로 3년간 재직했다. 그 당시부터 민속에 관심이 있어 동호리 당집을 많이 조사했다. 사람들은 동호의 당집을 ‘당각시(堂角氏)집’이라고 불렀다. 그 당시의 당화에는 당할머니 한 분이


가운데에 앉아 있고 양쪽에 딸 두 명이 서 있었다. 당할머니는 낭자머리를 해서 비녀를 꽂은 형상이었다. 그 전에는 동호의 당집에 순수하게 당할머니 한 분만 모셔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당할머니집’이라고 불렀는데, 한일합방 직후에 당할머 니의 딸들까지 모셔놓게 되면서 당집은 당각시집 또는 각시집으로 불려지게 되었 다. 내가 동호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을 당시의 당화에는 당할머니와 딸 두 명이 그려져 있었다. 당할머니집이 당각시집으로 변형된 것에 대한 의문을 품 고 나는 1952년도에 동호의 중선배 선장인 김 씨에게 그 이유를 물어본 적 있었 다. 그의 말에 의하면, 당할머니 혼자 계실 때에는 바다가 한산하고 외로웠는데, 세상이 발전되니까 자꾸 당집을 번성시키기 위해 젊은 새댁들인 각시들을 들어앉 힌 것이라 했다. 조기어업이 성행하다 보니 당할머니의 가족이 많이 생겨났고, 당 집에 모신 신격이 가족화되어 당각시집으로 불리게 된 것이라고 했다. 현재까지 동호에서는 이 당집을 당각시집으로 부르는 사람이 많지만, 나이든 노인네들은 여전히 당할머니집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그 당시의 당화는 6・25사변 지 나고 얼마 되지 않아 없어져 버렸다. 지금의 당화는 모두 다 엉터리이다(제보자 : 이기화).

* 옛날에 하동, 남해, 통영 사람들이 배타고 올 적에, 바람이 많이 부는 4월 달 에 여기를 오는데, 인제 바람으로 완전히 죽게 생긴 거라. 근디 불이 하나가 거기 써졌더라 이거여. 등대불 모양으로. 근게 그놈을 보고 온 거야. 여그 와서 본 게 불은 아니고 당할머니거든? 영신할머니, 그 양반이 불을 붙인 거야. 그거 유명해. 그래서 여기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고 그래요. 통영 사람들이 그때 당신도를 띠어 갔다고 해요. 하도 영험해서 그 사람들이 가져가 버렸대요. 그래서 그 형식대로 그린 것이 지금 그림이지요(제보자 : 박연봉).

* 우리가 쪼그만 헐 때 거기(영신당) 벽에가 장군도 몇 상 그려져 있었고 안에 가 할머니를 호위하는 호위병처럼 칼 차고 험상궂게 생겨가지고 무서워서 못 들 어가게 생겨가지고…시녀처럼 여자분도 한 서너 명 뒤에가 있고 그랬는데, 도난당 했다. 그때 우리가 볼 때는 남자들이 장군처럼 험상궂게 칼차고 양쪽 벽에가 무 섭게 있고, 할머니 뒤에 여자들이 시녀들처럼 서너 명 있고 그러더라고(제보자 : 김영무).

* 당화에 그려진 분은 모두 4명의 여자다. 구전에 의하면, 당집에 불을 밝혀 주 었다고 해서 당집을 짓고 제를 지냈다고 한다. 어머니 같은 분이 한 분 계시고


옆에 딸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림을 도난을 당했다. 내가 어렸을 때 본 옛날 그림 이 아니다(제보자 : 김위용).

* 그림 잘 그리는 동생이 하나가 있는디, 당할머니 그림을 다시 그리려고 허다 가 죽어버렸어. 이름은 이귀열인디, 죽은 지 몇 년 되었어. 당할머니는 참 영험혔 어. 옛날이 여기에 군인들이 많이 있었지. 정순경이라는 경찰이 욱에서 살았는디, 꿈에 할아버지하고 할머니하고 나타나드래. 군인대장이 왜 꿈에 나타나냐고 물었 대. 그니까 당(堂) 고칠라고 시주받으러 다닌다고 그러더랴. 당이 인공 때 부서져 버렸거든. 그 사람들이 문짝을 뜯어서 불 때서 밥히 먹고 그랬어. 그런게 인자 나 중으는 군인대장이 정순경 그 사람 보고 저 집이 뭔 집이냐 물었대. 옛날에 당할 매 당할아버지 있는디, 인공 때 없어졌다고 그랬대. 근게 빨리 집이라도 고쳐서 밥이라도 해놓고 그러라고 군인대장이 말을 했대. 자꾸 꿈에 나타난게. 당을 고치 고 돈 모다 시주히갖고, 우리 동생되는 사람도 저 서울가갖고 거기서도 오만원 보탰어. 지화(기와)도 새로 입혔지. 내가 지금 야든 네 살이여. 내 나이 한 7,8살 에 당집이 거그가 있었어. 그랬는디 거기서 정순경이 밥이랑 해왔어. 초상화가 없 어졌는디, 그림에 할아버지는 없고 할머니만 그려서 가져왔대? 소포로 어디서 보 내왔어. 그때 우리 어머니가 우체부한티 소포로 받았당게. 우리 어머니 이름은 이 옥녀여. 황산이씨. 어머니가 화상을 받았어. 장 속에 놨는디, 꿈자리가 사납더만. 그래서 내가 엄마 보고 그것을 친정집에 갖다 두라고 혔어. 그 뒤로는 꿈자리가 안 사납더만. 나중에 화상을 가져오라고 혀서 가져다가 당에다 붙였어. 남동생이 이장을 헐 땐디, 화상이 소포로 왔었당게(제보자 : 이귀녀).

4)

/당각시의 기능


<

3> 현재 영신당에 모셔져 있는 당화

모셔진 당각시/당할머니는 여성신으로 해신(海神)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 나고 있다. 칠산바다를 끼고 있는 해안가나 섬 지역은 조기잡이가 성행했던 시절만 하더라도 해신 신앙권이라 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이들 지역에서는 바다의 뱃길이 나 어장을 조망할 수 있는 산자락 높은 곳에 당집을 지어놓고 해신/서낭신을 모시고 어업에 종사해 왔다. 칠산어장의 주신(主神)은 개양할미와 8명의 딸(부안 변산 수성 당), 당각시(고창 동호리 영신당), 원당본당 마누라, 옥저부인, 애기씨 서낭(부안 위 도 지역) 등의 여성신이 대부분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임경업 장군(위도면 치도리 당집), 해상왕 장보고(전남 완도 장좌리 당집) 등의 남신이 주신으로 섬겨지기도 하 나 이러한 현상은 일반적이지 않다. 따라서 칠산어장의 텃밭의 신격은 여성신이 대 부분이고 이 여성신은 칠산바다의 해신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어민들의 풍어와 뱃길 안전을 도와주는 역할을 오랫동안 수행해 왔다고 하겠다. 서해안 지역에서는 용왕을 주신으로 섬기기보다는 어업신이라 할 수 있는 해신을 주신으로 섬기는 경향이 강하다. 서해지역에서 해신이나 해왕이라는 말이 널리 퍼져 있고 또 해상왕이라 칭했던 장보고를 해신으로 좌정시켰다(완도군 장좌리 당집)는 점을 감안한다면, 조기어업권인 칠산어장이 해신 신앙권이라 할 수 있겠다. 이와 같 은 사실은 이기화의 증언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 옛날 사람들은 서해안을 발해만으로 인식했다. 중국 사람들은 이곳 서해지역 을 서해만이라고 하지 않고 발해만이라고 했다. 내 동창 아버지한테 들은 이야기


인데, 옛날에는 용왕이 동해안과 남해안까지만 점령하고 서해안은 좁다고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 이르러서야 용왕이 서해까지 손을 뻗치게 되 었다는 것이다. 과거의 고창지역은 해신인 당할머니 한분의 영향권이었는데, 지금 은 용왕이 서해안까지 그 세력을 뻗쳤기 때문에 용왕까지 섬기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주신은 용왕이 아니다. 영신제 끝나고 용왕굿을 할 때도 해신을 먼저 섬기지 용왕부터 섬기지 않는다. 해신을 먼저 청해 대접하고 나중에 용왕을 대접하는 정도다(제보자: 이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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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영신당 당화 옆에 걸려 있는 한복

같은 제보는 고창 동호리 영신당의 주요 신격이 용왕이 아닌 해신임을 짐작 케 해준다. 해신은 어민의 풍어와 안전을 위한 기능을 하는데, 매년 음력 이월 초하 룻날 연행되는 고창 동호리의 수륙재/영신제 때 ‘당맞이’를 하여 선주의 배에 모셔 놓으면 그것이 선주의 배서낭이 된다. 따라서 고창 동호리 영신당은 해신을 모셔 놓 은 해신당/서낭당이라 할 수 있다. 선주들은 각자의 배서낭을 배에 모시고 바다에서 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며 어업활동을 해온 것으로 보인다. 선주들이 배서낭을 배 에 모시고 어업활동을 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인자 거기 배 헌 사람들이 화장품 같은 거 옷감 같은 거 상자에 싸서 거기다 채려놓고 빌고 갖고 다니드만? 배에다 싣고 다니드만? 당에서 굿을 하고 내려와


갖고, 밥 채려놓고 화장품 같은 거 놓고… 당할머니의 며느리라고 지어 놨대. 밥 히 놓고 배 헌 사람들이 거기 가서 인자 갖고 가서 채려놓고 빌드만. 상자 안으 다 여자들인게 옷감 담어가지고 상자에다 깨끗이 해갖고 갖고 다녔어(제보자 : 이귀녀).

5)

및 당신화

* 영험헌 것은 어부들이 (길을) 못 찾을 적에, 안개 낄 적에 (당할머니가) 바다 에 불빛을 비춰줘. 그러면 아 여기가 동호구나 하고 선원들이 찾아와. 그만큼 할 머니가 용하다는 거여. 그때는 나침반도 아무것도 없을 때, 그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불을 켜놓고 있었다는 거여. 그래서 지었는가 몰라도 그런 애기가 전해오는 거여(제보자 : 장연규).

* 300년 전 당할머니가 바다에 안개가 자욱하게 끼면 불을 밝혀 동호라는 곳을 알려주어 어부들의 무사귀환을 도왔다. 그래서 당집을 지어놓고 할머니를 위한 제사를 지낸다(제보자 : 이귀녀).

* 200~300년 전에 동호리 지역에 해무(海霧)가 많아 선박이 암초에 부딪쳐 좌 초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징, 북소리를 울려서 이러한 위험을 예방하고 자 당집을 지었다고 한다. 징, 북소리는 이곳에 암초가 있으니 조심하라는 신호였 다고 한다(제보자 : 동호리 해안 초소 군인).

* 마을에 할아버지 당산, 할머니 당산이 있는데, 할머니 당산 쪽에는 나무가 없 고 바위가 있는데, 나무가 하나 생겨났다. 담쟁이 넝쿨이 있는데, 너무 신성시하 다 보니까 누가 손을 못 댄다. 당산나무를 건드려서 탈 붙었다는 말을 들었다. 과 거에 당산나무 가지를 친 사람이 있었다. 괜히 시름시름 아팠다. 그래서 지금도 가지를 못 친다. 죽지는 않고 시름시름 아프기만 했다. 공교롭게도 나무를 만지고 아프면, 당산나무 만져서 저렇게 생겼다고 인식했다(제보자 : 김위용).

* 우리 아버지가 어장을 크게 했거든. 우리 아버지하고 작은 아버지하고 닻배를 했는데, 6명 타고 나갔는데, 우리 아버지만 유일하게 살아왔어. 구시포쪽으로 떠 밀려갔는데… 누가 소매를 메고 가다가, 소매통 짊어지고 보리밭에가 줄라고 가서 본 게, 뭐가 꾸무럭거리드랴.

가본게 우리 아버지더랴. 그래서 살았어. 영신당의

영험함은 지금 아그들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유명혀. 옛날에 하동, 남해, 통영 사


람들이 배타고 올 적에, 바람이 많이 부는 4월 달에 여기를 오는데, 인제 바람으 로 완전히 죽게 생긴 거라. 근디 불이 하나가 거기 써졌더라 이거여. 등대불 모양 으로. 근게 그놈을 보고 온 거야. 여그 와서 본 게 불은 아니고 당할머니거든? 영 신할머니, 그 양반이 불을 붙인 거야. 그거 유명해. 그래서 여기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 통영 사람들이 그때 당신도를 띠어 갔다고 헌다. 하도 영험해서 그 사람들 이 가져가 버렸댜(제보자 : 박연봉).

* 여기가 전깃불 없는 시대에, 등대도 없는데, 어업해 갖고 배가 들어오는데 캄 캄해서 들어오도 못 허는데 할머니가 불을 켜줬다. 불 없던 시절에 할머니가 여 기서 불을 켜 주고, 우리 바다 어민들을 사랑했고 파도도 못 치게 막어주었고 사 람 사고도 덜나게 해주고 그랬다. 그래서 제를 계속 지내준다는 말을 어르신들한 테 들었다. 할머니가 많이 도와줬기 때문에 계속 그런 말들이 전설처럼 내려온 것이라고 생각한다(제보자 : 김영무).

* 동호 중선배 선장이었던 김씨한테 들었던 이야기다. 그 사람의 말에 의하면, 당할머니가 밤이 되면 높은 산에서 등대처럼 서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배의 선로 를 비춰주었다고 한다. 당할머니가 손가락으로 불빛을 환하게 비춰주니까 선원들 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제보자 : 이기화).

6) (1) 수륙재의 성격 물이나 뭍에 떠도는 원혼들을 달래서 천도시키는 마을 공동체굿이다. 원 혼들은 저승질서에 편입되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도는 죽은 영혼을 말한다. 다시 말하 면, 원혼들은 수사(水死)한 자, 객사한 자, 질병으로 죽은 자, 해산하다 죽은 자 등 비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한 영혼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혼들은 인간들에게 무서 운 재앙을 가져다 주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수륙재는 물과 뭍 즉 마을 곳곳에 있을 이러한 모든 원혼을 해원시켜 마을의 재앙을 물리치고자 하는 의 식이라 할 수 있다. 수륙재는 물이 있는 곳, 즉 강이나 바다가 있는 지역이라면 어느 곳에서나 연행이 가능하다. 그러나 수륙재가 가장 많이 연행되고 또 큰 규모로 연행되는 곳은 역시 바다를 끼고 있는 해안지역이라 할 수 있다. 해안지역은 생업 공간이 바다이기 때문


어민들은 항상 자연재해의 위험 속에 노출되어 있고 불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 다. 이러한 불안 요소를 해소하기 위해 어민들은 어업이 본격화되기 전에 수륙재를 벌여 나쁜 액운을 사전에 물리치고자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고창 동호리에서 매년 음력 이월 초하룻날 수륙재/영신제를 모시는 이유에 대해 고창문화원장이었던 이기 화는 “동호는 칠산바다에 머무르고 계시는 해왕신을 모신 곳이다. 동호에서 그 주신 을 안 모시면 바다가 늘 노해서 수산업에 큰 지장을 준다. 그래서 동호는 해왕신을 주신으로 모시고, 그 신을 위로해 주려고 그랬다”라는 말을 전해 주었다. 고창 동호리 당집 앞에는 군부대가 있고 군부대 아래의 배가 드나드는 길목에 ‘유 왕개미’라고 불리는 바위 하나가 있다. 이 유왕개미 쪽으로 물길이 도는 까닭에 물살 이 아주 세서 위험한 사고가 자주 발생했었다고 한다. 이 부근에서 사람들이 해수욕 을 즐기다가 익사하는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했는데, 대체로 일반인들 보다는 경찰이 죽는 사고가 많았다고 한다. 따라서 마을 사람들은 유왕개미에 용왕님 먹이를 바쳐 야 사고를 면할 수 있다고 인식해 왔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보면, 고창 동호리에 서 연행되는 수륙재는 칠산바다의 주신인 해신을 위로하고 마을의 모든 재앙을 물리 치는 마을 공동체굿이라 정리할 수 있겠다.

(2)

명칭

고창군 해리면 동호리에서 음력 정월 초하룻날 연행되는 마을굿은 영신굿, 영신제, 당할머니제사, 수륙재, 풍어제 등의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이기화의 제보에 의하면, 과거의 음력 정월 초하룻날의 제사는 영신당의 당제를 더 중시하여 영신굿이나 영신 제라는 명칭을 사용했다고 한다. 영신굿, 영신제, 당할머니제사라는 명칭은 마을 공 동체굿의 전 과정 중에 영신당에서의 당제를 가장 중요한 의식으로 보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라 추정된다. 후에 마을 주민들은 액막이 의식을 강조한 수륙재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하였고, 풍어 기원 의식을 강조한 풍어제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지금의 현지 주민들은 이러한 다양한 명칭들을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다. (3) 최근에 연행되는 수륙재 수륙재는 영신당에서 지내는 영신제와 바닷가나 바다에서 지내는 용왕제와 결합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영신당제는 마을 대표자격인 제관과 풍물패들이 참여하여 엄숙한 분위기 속에 제사를 지내며, 용왕제는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참여한 가운데 바닷가 에서 비교적 활달한 축제 분위기 속에 제사를 지내게 된다. 수륙재의 제비(祭費)는 마


어촌계에서 충당한다. 예전에는 배를 가지고 있는 선주들이 갹출하였다고 한다.

선정 및 금기

* 영신제의 제관 선정은 이월 초하루 전날 행하는데, 제관은 매년 바뀐다. 기준 은 특별하게 두진 않지만, 통상적인 예로 본다면 한 해를 깨끗이 보내고 마을 안 녕, 건강, 액운 같은 것을 다 담아내는 그런 풍습이 있다 보니까 깨끗하고 아무래 도 걸림돌이 없는 분들, 그리고 한가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뽑는다. 제관은 각각 정한다. 철륭제/당산제를 지내는 제관도 따로 정하고, 수륙재를 지내는 제관도 따 로 정한다. 그런데 어떤 때는 같이 하기도 한다. 제관으로 선정된 분들은 제사 지 내기 전에 깨끗이 하고 목욕재계한다. 불결한 사람은 그 집에 못 오게 하고 금줄 쳐 놓고, 황토를 뿌려놓는다. 부부관계도 안 하고 그런다. 지금도 그런다. 전에는 초하룻날 허면 초하룻날 새벽부터 금줄 쳐 놓고 못 들어오게 한 것 같다. 근데 마을에서 사람이 죽거나 임산부가 애기를 낳거나 하면 제사를 안 지낸다. 연기도 안 허고 아예 지내지 않는다. 지금도 금기는 지킨다(제보자 : 김위용)

② 제일과 제일 변경 논란 * 옛날에는 아기가 우리 마을에 못 들어오게 마을 입구에다 임줄을 쳤어요. 애 기 나는 사람들은 바깥에 가서 낳아야 했어요. 바깥에 가서 낳으라고 내 보냈거 든요. 그랬는데, 초상이 난 것은 어쩔 수 없잖아요. 갑자기 죽어버리니까. 예고 없 이 죽어버리는 사람이 많잖아요. 근게 음식 장만해놓고 죽었을 때는 그 달을 넘 겨야 돼요. 그 달에는 깨끗한 음식이 되지 않겠다 해가지고 달을 넘겨요. 그러면 이월 달에 지내야 되는 제사가 3월 달까지 갈 수 있고, 4월 달 갈 수도 있어요. 왜냐면 좋은날을 받아갖고 헐라고. 그리서 날짜가 변동되는 수는 있어도 이태까 지 날짜가 이월 초하루, 정월 초사흗날 그렇게 했어요(제보자 : 김영무)

* 수륙재라고 해서 당제하고 당에다 제사 모시는 것 바다에 가서 제사지내는 것 두 가지 형식으로 그날 이루어지는데, 이월 초하룻날 했었어요. 이월 초하룻날 허다 보니까, 이월 초하룻날 당일에 음식 장만을 못하잖아요? 그래서 작년에는 이월 초사흗날로 미뤄서 했어요. 지금은 사람 숫자도 무장 적어지고 책임자 아니 면 안 나오고 괜히 하루 종일 잠 못자고 술 먹고 몸도 피곤허지 사람도 안 나오 지 허다 보니 형식적으로 헐라면 차라리 없애버리자는 얘기도 나왔어요. 사람들 이 안 나오고 폭폭허니까. 그런디 역사적으로 전설처럼 여태까지

계속 내려온


것을 우리 시대에 가서 없애버리면 우리 자식들이 뭐라고 허것냐? 그래도 이어는 가야 되는데… 뭐 저어 요새 젊은 친구들, 이장들, 책임자들 여남은 명 나와서 헌 다는 것이 지금 너무 형식적이지 않냐? 우리 마을이 120~130세대 되거든요? 그 러면 굉장히 큰 마을인데, 사람 여남은 명이 나와 헌다는 게 부끄러운 일이더라 고요. 굿 치러 간 사람들은 헐 사람이 없응게 계속 그 사람들만 고생을 해야 돼 요. 그날은 어디 못 가게 혀요. 돈도 벌러 못 가요. 그니까 차라리 없애버리면 어 쩌긋냐 그랬어요. 그러다가 내년에는 잘 하자 잘 하자 그래요. 옛날에 지내는 데 로 잘 지내고 있구나 느껴지게 할려면, 의복도 갖추고 돈도 많이 들어야 하는데… (제보자 : 김위용).

* 당산제는 초사흗날 새벽부터 하는데, 초이튿날 밤 12시 넘으면 초사흗날 되 잖아요. 특히 여자분들이나 애기들이 우리 마을에 들어와서 안 보이고, 여자들이 안 돌아다닐 시각, 새벽에 아무도 안 댕길 때 새벽에 깨끗한 사람들만 당산제를 지냈거든요. 그렇게 계속 내려왔어요. 어르신들 때부터. 그걸 허고 보면은 사람 불과 10명 이짝저짝 밖에 안 모여요. 그러니까 잠 못 잔 사람은 10여명 밖에 못 자. 다른 사람들 다 자는데. 그러니까 작년에 우리가 얘기를 했어요. 수륙재도 마 을 축제고 당산제도 마을 축젠데, 우리 열 명만 건강헐라고 당산제 지내는 것은 아니다. 마을 전체 잘 되라고 지내는데, 왜 어떤 사람은 고생허고 어떤 사람은 편 안히 잠을 자야 되느냐 혔어요. 그래가지고 당산제 날짜를 초사흗날 낮이로 해보 자, 밤에 허지 말고 낮에 해가지고 마을 전체 축제로 만들어버리면 어떠냐. 작년 에 그 얘기가 나왔어요. 낮에 허면은 사람들이 많이 모일 거 아니냐. 그래갖고 이 장들한테 건의를 했죠. 이제 총회 때 그것이 서로 의견이 나와요. 수륙재도 작년 엔가? 이월 초하룻날 제사를 지내야 되는데, 이월 초사흗날에 제를 지낼려고 날 을 받아놓았잖아요. 작년에 그렇게 이월 초사흗날 했어요. 근데 어르신들한테 욕 을 많이 얻어먹었어요. 근게 인자 너네들이 옛날 전통 방법을 니네들이 뭐간 니 네들 맘대로 허냐 해가지고 내년부터 다시 이월 초하룻날 혀라 그렇게 된 거요. 무슨 궂은 날 있어가지고 변경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너그 마음대로 마을 전 체 전통 방법을 몇이 바꾸는 것은 안 된다 혀서 이월 초하룻날로 하게 된 거지 요. 어르신들이 그렇게 하라고 허드라고요(제보자 : 김영무).

절차

* 수륙재는 육지와 바다에서 지내는 제사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영신당에서 지내는 것은 육제라 하고, 용왕제는 수제라는 명칭을 붙인 것 같아요. 용왕제에서


는 용왕밥을 놓는다고 그래요. 이월 초하룻날 제사 때마다 배를 타고 바다에 나 가봐요. 그날은 바다가 거셉니다. 갯목 어귀에서 밥을 놓는데, 어쩔 때는 물 속으 로 쏘옥 들어가 버려요. 바다에 던지는데, 밥이고 막걸리고 쭈욱 따라 들어가는 것을 봤어요(제보자 : 김위용).

* 영신당을 지낼 때는 아침 10시에 올라간다. 회관에서 출발해서 당산나무 거 치지 않고, 바로 영신당으로 풍물을 치면서 올라간다. 10시까지 영신당에 간다. 영신당까지 한 20분 걸린다. 제물을 앞세워서 간다. 제물 뒤에 영기가 따라간다. 제사는 10시가 될 수도 있고 11시가 될 수도 있다. 제를 지낼 때 우리 마을 잔치 로만 하는 것은 아니고, 요즘 들어서 외부인사들이 많이 온다. 여기 군수나 서장 이 참석한다고 그러니까 시간을 맞출 필요가 있다. 요즘은 물때하고는 상관없이 보통 11시쯤에 제사를 지낸다. 제상을 차릴 때까지 풍물패는 풍물을 치며 당 주 변을 계속 돈다. 축문이 있는데, 그때그때 따라 달라진다. 올해는 축문은 만들지 않았다. 예전에는 아무나 당집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지만 지금은 당집 안으로 다 들어가서 구경한다. 못 들어가는 것은 없다.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참석하는데 전체가 참여할 수는 없다. 불결한 사람은 스스로 안 온다. 특별히 금하는 것은 없 다. 그 곳은 신성시되는 곳이라 조심한다. 제사는 한 시간 정도 드린다. 제가 끝 나면 철상하고 제관집에 가서 모두 점심을 먹는다. 만조시간은 3시쯤 된다. 그때 용왕제를 지낸다. 배에 농악패가 탄다. 용왕제 때 사용할 제물을 별도로 준비해 놓는다. 제관은 용왕제 때 별도로 참석하지 않고, 깨끗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한 사람이 제물을 담당해서 바다에 빠뜨린다. 그릇에 음식을 담아서 바다에 붓고 막 걸리도 한 말 붓는다. 음식으로는 삼실과, 밥, 나물이 들어간다. 은박지 세 개 정 도 만들어서 붓는다. 따로따로 만들어서 백지로 싸서 이렇게 새끼를 반대로 꼬아 서 묶는다. 그리고 백지를 벗기고 붓는다. 아까 배 들어오는 항로 입구에다가 붓 는다. 바다 근처에서는 하지 않고 바다 가운데 가서 한다. 노래는 하지 않고 풍물 만 친다. 제사는 지내지 않고 바다에 음식물을 붓는 것만 한다. 그리고 제물을 뿌 린 곳을 배가 몇 번 돌고 돌아온다. 집안에 수사자 있는 자들은 배에 타지 않는 다. 과거에도 타지 않았다. 그 사람들은 배를 안 타고 갯가에서 개별적으로 수사 자를 위한 밥을 뿌린다. 항로 입구에 밥을 묻어 준다. 지금도 그렇게 하는 사람들 이 있다. 밥, 삼실과, 막걸리 등을 따로따로 담아가지고 간다. 막걸리는 한 말 정 도이다. 밥, 삼실과, 술 순서대로 묻는다(제보자 : 김위용).

* 용왕제는 이름 없는 사람들이 바다에서 죽었잖아. 지인이 없는 사람들, 그 사


람들 통틀어서 위하는 제사야. 풍어제가 그날이야. 배를 띄워가서 밥 해가지고 넣 어주는 거야. 바다 속에다. 용왕님 아녀. 이름없는 선원들, 바다에서 돌아가신 분 들이 영을 빌어 밥을 주지. 용왕밥은 풍어제 거기다 차려놓고, 인자 다시 거기다 해놓고 언제나 초하룻날은 7마여. 그믐이 6만게. 물이 딱 들어오면 그거 해놓고. 밥 먹고 있으면 물이 들어와. 그믄 배타고 나서 몰아 넣고. 용왕상은 영신당에다 차려놓아. 영신당에서는 앞에다 차려놓고 그 안에다 차려놓고. 바깥에다 차려놓는 디, 바깥에 차려놓는 것은 잡신과 용왕상이여. 3시쯤 되면 바닷물이 이빠이 들어 와. 배 타고 가서 술도 한동이 바다에 몰아넣어. 그릇마다 음식물을 여럿 준비해가 지고 바다에 뿌려. 음식물 싹 준비한 거 다 거기다 버리고 오는 거여. 섞어서 뿌리 는 것이 아니라 따로따로 가지고 가서 한꺼번에 붓어. 술도 동이채 붓어버려. 굿쟁 이들, 마을에 풍악하는 사람들이 배를 타고 가지. 집집마다 여그 인자 가족 있는 사 람은 바닷가에서 개별적으로 음식물을 바다에 넣어. 개인적으로 밥을 해와서 유왕개 미 그쪽에다 갖다놓고 붓어. 그 전부터 거기를 유왕개미라고 혔어(제보자 : 장연규)

* 이월 초하룻날 허는 것은 수륙재인데, 그때는 음식물을 바다에 싣고 가서 용 왕님에게 바친다. 배 한 대가 바다로 나간다. 형식이나마 지금도 지내고 있다. 나 도 수협조합장 할 때는 옷도 갖춰 입고 목욕재계도 허고 그랬다. 이월 초하룻날 에 영신제를 하고 나서 바닷가로 가 용왕님에게 음식을 바친다. 우리 같은 경우 는 우리 작은 아버지가 물에서 돌아가셨으니까, 먼저 가서 밥을 해가지고 따로 가져가서 용왕님 밥을 넣는다. 김으로 흰밥을 싸고 김치도 차리고 제사를 모신다. 제사는 8월 달이지만, 그날 용왕님한테 고사를 지내며 작은아버지를 잘 돌봐달라 고 기원한다. 물이 많이 들어왔을 때 배가 나가야 하니까, 소나무 있는 데 가서 배 나가기 전에 고사를 지낸다. 마을 사람 가운데 바다에서 돌아가신 분이 많다. 그래서 그때 고사를 지내는 사람이 많다. 상을 차려 와서 고사를 지낸다. 용왕님 밥 김 두 장을 해가지고 거기다가 싸가지고 겉에는 백지/창호지로 감아가지고 묶 어갖고 던지면 거기에 공기가 들어가 있으니까 바로 가라앉지 않는다. 떠 댕기다 가 팍 가라앉으면 용왕님이 가져가신다고 믿는다. 우리 작은 아버지와 같이 죽은 사람 4명도 같이 제사를 지내준다. 작년까지는 우리 누님이 있을 때 했는데, 지금은 집에서만 한다(제보자 : 박연봉)

* 수륙재는 10시부터 시작해서 점심 때까지 당할머니 있는 데서 놀고, 점심 때 되면은 내려와서 기관장들 점심 대접해요. 점심 허고 두 시간 정도 기다리면 물 이 여그까지 들어와요. 이월 초하루면 물이 일곱마니까 점심 때 지나면 물이 거


의 차기 시작해요. 그러고도 우리가 한두 시간 기다려요. 한 시간 내지 두 시간 기다리는 것이 뭐냐면은, 조류가 너무 빠르면 음식물이 물에 다 떠밀려가 버리잖 아요? 그러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잠겨 있을 시간을 맞춰서 우리가 나가는 거지요. 수륙재 헐 때 막걸리를 많이 사용허는데, 막걸리를 기냥 20리터짜리 한 말을 통 째로 부어버려요. 다 음식을 따로 갖고 가서 용왕님네한테 수상에서 제사를 지내 는 거 아닙니까? 잡귀신한테요. 우리가 그것이 왜 생겼냐고 어르신들한테 물어보 면은 우리 마을 들어오는 당 할머니 계신 곳 바로 그 부근이 파도가 굉장히 세대 요. 사고가 거기서 많이 나니까 당할머니한테 먼저 제사 지내고 음식 가지고 가 서 바다에서 지낸대요. 용왕님네한테 우리 마을 안녕을 비는 거지요. 사고 나지 않게 해 주십시요하고 음식을 가져다 주는 거지요. 그래가지고 허는데, 그것도 우 리가 보믄은 무슨 형식 같지만, 무조건 뭐 밤, 대추를 사다가 뿌려요. 그것이 개 벼우니까 떠갖고 있을 거 아녀요? 근데 인자 배가 이케 가라앉나 안 가라앉나 보 지요. 후딱 가라앉으면 빨리 먹는 것이고 그렇게 인식을 허는 거 같애요. 없어지 면은 용왕님네가 다 빨리빨리 먹어서 우리를 기분 좋게 해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어갈 거잖아요? 배를 몇 바퀴 돌고 오면 그것이 다 없어지잖아요? 떠밀려가든 어 쩌든 없어지거든요. 그걸 확인허고 와요. 어느 정도 가다가 이정도면 되얏다 허고 오는데, 제를 지낼 때는 비린내 나는 음식은 절대 안 먹어요. 배 타는 사람도 비 린내 나는 음식은 안 먹고 가야 돼요. 제가 끝나면 먹지요. 돼지고기, 바다고기 먹고 싶어도 안 먹어요. 음식은 장 보고 그날 이케 마을 전체가 음식 장만허는 것은 아니고, 제일 깨끗허신 분헌티 맽기거든요. 그러면 그분이 음식을 장만허다 가 깨까시 해가지고 그날 가지고 오지요. 삼실과 같은 거 많이 가지고 옵니다. 상 도 몇 군데 채려요. 할머니상이 있고, 상주상도 채리더라고요. 바닷가에서도 인자 절도 허고 그렸어요. 우리가 어느 장소를 지정허고 이 정도면 쓰것다 하면 거그 다 돼지머리 놓고 삼실과 허고 시루떡, 술 놓고 나물도 놓아요. 다 들어가는데, 갈라놓는 법은 없드라고요? 무조건 통짜예요. 예를 들어서 떡도 시루 채 갖다 엎 으고 술도 한말 그대로 갖다가 쏟고, 과일도 그냥 다 던집니다. 하여튼 간에 제사 지낼라고 장만했기 때문에 많이 가져가요. 바다에서는 구체적으로 축문 읽고 허 는 것은 못 봤어요. 형식적으로 우리가 거기서 인사하고 풍물을 멋지게 쳐주고 음식을 바다에다 던지는 거지요. 그리고 가라앉는 것을 확인하고 굿 다시 치고 옵니다. 육지에 도착하면 마을 주민들이 반겨주지요. 주민들 100여 명이 바닷가 에 맞이해 주어요. 상 차려놓고 욕봤다고 먹고 어울려 놀지요(제보자 : 김영무).

(4)

연행한 무속 수륙재


수륙재를 행했다는 제보들 * 수륙재는 역사가 있는 거다. 어촌계장이 대행을 해서 한다. 군청에서 다 온

다. 어렸을 때 무당을 데려와 굿을 하는 것을 봤다. 마을에는 무당이 없었고 외지 에서 데려왔다. 그때는 무당을 보고 단골이라 했는데, 하인 취급을 했다. 그 전에 무당도 있고 굿치는 사람도 있었는데, 굿치는 사람은 풍물치는 사람이고 기능보 유자나 마찬가지다. 피리불고 징 치고 다 그랬다. 우리 아주 어려서 무당이 하는 굿을 봤다. 옷 입고 불도화 쓰고 줄을 꼬아 갖고 줄도 타고 그랬다. 어장 형성이 되고 잘 될 때 그랬다. 내가 열 몇 살 때니까 한 60여 년 전쯤 된다. 내가 초등학 교 3학년 때 다닐 때도 굿을 봤다. 해방되기 전이다. 무당이 헐 때는 줄을 타고 놀기도 한다. 줄타는 사람은 따로 온다. 하인들, 즉 여자 무당들이 와서 하고 밥 도 가지고 간다. 고창군 해리면에 단골네가 살았던 적이 있는데 죽은 지 오래되 었다. 백정이랄지 그런 하인/단골들은 역사를 없애 버리려고, 자취를 감춘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하대를 받았기 때문에 고향을 하직하고 가기 때문에 전혀 알 수 가 없다. 그 사람들 자식들을 알지만 알려 줬다가 그 사람들이 알면 큰일 난다. 그 사람의 어머니가 단골네였는데 어머니 돌아가시고 자식들은 전부 70대가 되었 다. 그 집안 후손들은 다 이사가 버렸다(제보자 : 박연봉).

* 옛날에는 영신제할 때, 무당들이 했다. 우리 어렸을 적에, 선주들이 무당들 을 사와서 굿을 했다. 이름 있는 사람들 즉 상쇠들이랑 굿쟁이들 전부 데려다가 했다. 이월 초하룻날은 대단했다. 바람이 세니까 텐트 쳐 놓고 했다. 3일 전에 굿 패를 데려다 놓고 연습하고 그랬다. 굿은 초하룻날 하루만 했다. 고창군의 이름 있는 상쇠들은 다 모였다. 어렸을 적의 일이라 이름은 잘 모른다. 굿을 칠라면 10 명 이상 있어야 치는 거다. 굿패들이 상모도 쓰고… 남사당패 같은 그런 식이다. 거창했다. 한두 명의 무당이 와서 춤추고 그랬다. 선주들이 돈을 많이 버니까 다 사왔다. 큰 배 타고 바다에 나가서 굿치고 들어왔다. 그런디 그것이 없어져 버렸 다. 일제 전 후에도 한 60년 전까지는 무당을 데려다 굿을 했다. 내가 71살이니 까 60년 전 쯤 될 거다. 그때도 수륙재라고 했다. 수륙재를 풍어제라는 명칭으로 고쳐진 지가 얼마 안 됐다. 한 30년 전쯤 되었을 것이다. 내가 20년 전인 1972년 부터 이장을 10년간 했으니까 한 30년 전쯤 된다고 본다(제보자 : 장연규).

* 이 마을 터가 300터가 넘었다. 신동호에 단골이 있었는데, 우리 마을에서 수 륙재할 때 그 단골을 안 썼다. 신동호 단골은 굿을 크게 한다거나 하지 않고 점


만 쳤다. 동호 단골 아들이 초등학교 동창인데, 이름이 기억이 안 난다. 우리 마 을에서 다른 무당을 부르면 무당패들이 많이 온다. 이놈 부르면 딴 패도 오고, 저 놈 부르면 저 패가 오고 그랬다. 무당들은 영신당에서 굿하고, 바닷가에 내려와서 천막 쳐 놓고 했다. 배 타고 나가지는 않았다. 소나무 밑에서 진을 쳐 놓고 굿을 했다. 무당들이 하루 종일 굿을 했다. 용왕밥도 어민들이 해놓고, 무당이 빌 적에 도 선주 개인들이 용왕님네를 찾는다. 선주들 개인 개인마다 만선하도록 속으로 빈다. 원혼을 위한 밥도 뿌린다. 무당들한테 선주들이 돈을 줬으니까 자기네들이 할 것은 다 잘 했을 것이다(제보자 : 김위용).

* 무당들이 옛날에는 헌디, 옛날에 무당들이 수륙재 지내고 그랬다. 물 들면 밥 해갖고 유왕밥 한 봉지, 고인 죽은 사람 한 봉지, 또 한 봉 더 는다. 세 봉 갖고 간다. 한 봉은 잡신밥. 김에다 싸고 백지에다 싸고 거기다 넣어줬는데, 그것은 수 사자를 위한 고사이다. 지금은 잘 안 한다(제보자 : 이귀녀).

* 예전에 무당에 의해 제를 모실 때에는 선착장에서 먼저 제를 올리고 당집으 로 갔으나, 지금은 무당 없이 화주와 마을 사람들이 참여하는 가운데 당집에서 제사를 모시고 오후 2시경에 물이 들어오면 바다로 배를 타고 나가서 제를 모시 고 돌아온다. 무당은 마을에서 돈을 주고 위도나 고창에서 불러들였다고 한다. …… 예전에는 바닷가에서 무당이 개인별로 굿을 주재하기도 했다. 용왕제를 모신 뒤에 집집마다 간단한 음식을 차린 상을 들고 바닷가로 나오면 무당이 굿을 해주 었다(1998. 1.11. 서해숙 조사자료 참고).

* 고창군 해리에는 법성김씨 단골이 산 적 있다. 법성포의 김씨 단골가와 친인 척간이 아닌가 한다. 법성김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단골인 경우가 많다. 법성김씨 들은 단골 신분을 감추기 위해 김해김씨로 성씨를 변경하는 경우가 많았다. 동호 리 영신굿 때에는 해리면 단골을 안 썼다. 고창군 해리면 동호리 영신굿/수륙재 때 고창군 공음면 군유리에 사는 배성녀가 두 번 참가하여 연행했다는 소리를 들 었다. 배성녀한테 직접 들었다. 1965년 1월에 미국 하버드 대학에 다니는 사람들 이 와서 배성녀의 영신굿/수륙재 재연을 촬영해간 일이 있었다. 하버드 대학 자료 실에 가면 그때 찍은 영상 자료가 있을 것이다. 나는 무당이 동호에서 굿을 하는 것을 1965년도 이후는 보지 못했다. 6・25 때까지는 무당이 굿을 많이 했다. 그 러나 중선배 중심의 배 운영이 해체되면서 굿을 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배 성녀도 동호리에서 두 번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 그 원인일 것이다. 중선배가 사


라진 이후에는 자금줄이었던 중선집이 쇠락하여 영신굿도 많이 시들해진 것이다. 무당을 불러 행하는 영신굿을 매년 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배성녀도 두 번 밖에 초빙되지 않았다고 본다. 그러나 미국 하버드 대학 주관의 영신굿/수륙재 재연 촬 영이 있은 이후로, 배성녀는 자신이 매년 동호리 영신굿을 해왔노라고 얘기하고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다. 고창문화원에서 영신굿/수륙재 재연 촬영 하기 전에 내가 배성녀한테 물어보았을 때 분명 자신은 고창 동호리에서 영신굿 을 딱 2번 했다는 소리를 했기 때문이다(제보자 : 이기화).

수륙재의 연행자 심원면 고전리 단골이었던 배성녀는 고창군 해리면 동호리의 영신굿/수륙

재에 참여하여 무당굿을 연행한 바 있었다. 이기화는 배성녀로부터 자신이 동호리 마을 공동체굿에 두 번 참여하여 영신굿을 연행했다는 소리를 직접 들었다고 한다. 또한 미국 하버드 대학팀 주관으로 배성녀는 고창문화원 2층에서 영신굿을 재연한 바 있었다.

* 1965년 1월에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굿을 촬영하기 위해 고창을 방문한 적 이 있었다.

그 당시 문예진흥원장이었던 강한영 선생이 그 사람들을 내게로 보

내서 영신굿 재연을 부탁해 왔다. 나는 고창군

공음면 군유리에 사는 배성녀를

찾아가 고창군 동호리 당각시집에서 굿을 해 봤냐고 물었다. 그러자 배성녀는 해 방 전에 중선 선장집에서 영신굿을 두 번 해보았노라고 대답했다. 나는 배성녀를 데려다가 하버드 대학 사람들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배성녀는 며칠 간 여관에 머 물면서 고창문화원 2층에서 영신굿 촬영에 임하였다. 이때 소요된 굿 비용은 100 만원 정도였다(제보자 : 이기화).

* 배성녀 단골은 고창군 심원면 고전리에서 살다가 단골가 출신인 정태임에게 시집을 가서 고창군 공음면 군유리에서 무업 활동을 하였다. 배성녀의 친정인 고 창군 심원면 고전리에는 배씨들이 많이 살았고, 배성녀가 무업 활동을 했던 고창 군 공음면 군유리에는 진주정씨들이 많이 살았다. 군유리(群儒里)는 유림들이 군 락을 이루고 산 지역이었다. 일명 선비촌이라 명명되었다. 군유리는 상군과 하군 으로 나뉘었는데, 상군은 유림들이 사는 양반촌이었고 하군은 민촌이 사는 하급 촌이었다. 상군은 유생들만 사는 데라서 별 것이 없고 호수도 민촌에 비해 적었 다. 하군은 상군에 비해 호수가 많고 번성한 지역이었다. 배성녀의 시댁 일가는


이러한 군유리의 하군/민촌에서 살면서 무업 활동을 하였다. 배씨들이 많이 사는 배성녀의 친정인 고창군 심원면 고전리는 고창군 해리면 동호리와 아주 인접한 지역이다. 동호리의 골프장에서 해변가를 1킬로 정도 걸어가면 바로 고전리가 나 온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한다면, 배씨 단골집단이 고창군 동호리 마을 공동체굿 에 어느 정도 관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1965년도에 고창문화원에 서 재연한 영신굿/수륙재는 배성녀 단골 이외에 삼현육각잽이들이 참여하였다. 삼 현육각잽이는 영광에서 데려왔다. 전경환의 부친과 평소 알고 지내던 이기화는 전경환의 부친에게 악사 섭외를 부탁했다. 전경환의 부친은 고인이었고, 전경환의 모친은 단골 활동을 하였다. 영광에 사는 전경환의 부친은 피리, 대금, 징, 장구 등을 잘 치는 악사들을 데려왔다(제보자 : 이기화).

선장의 역할 모시는 해안 쪽 마을에는 항상 부유하게 사는 중선집이 있었다. 중선집이

란 중선배를 부리는 선장집을 일컫는 말이다. 어느 포구든지 주낙배와 중선배가 있 었는데, 그 중에서도 중선배가 핵심 역할을 했다. 중선배 선장은 부를 축적한 자이기 때문에 가난한 선주・선원들이나 어민들은 중선배 선장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중선배 선장은 그들에게 미리 돈도 빌려주면서 그들을 관리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선주・선원들이나 어민들은 중선배 선장의 예속 하에 있었다고 하겠다. 선주/선원 중 심의 영신굿/수륙재 같은 마을 공동체굿에서도 중선배 선장이 앞장서 주어야 일이 성사될 수 있었다. 중선배 선장이 자금줄이고 또 중선배 선장의 지시에 의해서 움직 이기 때문에, 선주・선원 중심의 영신굿/수륙재가 성사되기 위해서는 중선배 선장의 역할이 매우 막중했다 하겠다. 중선배 선장이 주도가 되면 영신굿/수륙재는 마을 전 체의 굿이 된다. 중선배가 마을의 핵심적인 배이기 때문에 선주・선원・어민들이 전 부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동력선이 등장하면서 중선배 중심의 배 운영 체제는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중선배 선장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무당을 초빙하여 연행하던 영신굿도 점차 쇠락의 길을 걸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배성녀가 해방 전에 동호에서 영신굿을 딱 두 번밖에 해보지 않았다고 증언한 것도 이 같은 현실을 반영한 결과였을 것이다.

④ 영신굿과 연신굿의 관계 김태곤의 한국무속연구3)에서는 배성녀가 맡아서 하던 동호리의 연신굿에 대한 3)

, 한국무속연구, 집문당, 1981, 86-87쪽.


설명과 굿 절차를 소개해 놓고 있다. 조사자는 연신굿과 영신굿이 서로 밀접 하게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보고 고창문화원장을 지낸 이기화를 찾아가 면담하였다.

* 정월 초하룻날 제사는 영신굿 또는 영신제이다. (조사자 : 그렇다면 영신굿 과 연신굿은 어떻게 다른가요?) 연신굿이나 영신굿은 같은 굿이다. 영신이라는 명칭이 구전되는 과정에서 연신으로 발음된 것이다. 영신굿은 당집에 모신 해신 을 맞이하는 굿이다. 해신을 맞이한 후 바닷가나 바다로 가서 본격적으로 풍어를 기원하거나 액을 막는 의식을 행한다. (조사자 : 김태곤의 조사보고서에서는 동호 리에서 배성녀가 음력 2월 20일에 연신굿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던데요. 음력 2월 20일이면 당할머니 생신날이잖아요?) 마을 사람 중에 누가 사망했거나 마을의 경 제 사정이 좋지 않아 정월 초하룻날 제사를 못 지낼 경우에는, 당할머니 생신날 즉 음력 이월 스무날에 날을 잡아 영신제를 지냈다. 정월 초하룻날의 제사는 매 년 지내는 의식이지만, 당할머니 생신날 지내는 제사는 매년 지내는 것이 아니다. 정월 초하룻날 제사를 못 지냈을 경우 당할머니 생신 때 선주들을 중심으로 영신 제를 지냈다(제보자 : 이기화).

위에 제시한 바처럼, 이기화는 ‘영신굿’과 ‘연신굿’을 같은 굿으로 보고 있다. 그의 말처럼 영신굿이라는 명칭이 와전되어 연신굿으로 되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또 한 마을 주민들은 당할머니 생신날인 음력 스무날에 당할머니 제사를 지낸 적이 있 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당할머니 생신날이 김태곤이 조사한 연신굿의 날짜와 일치한 다. 그렇다면 당할머니 생신날에 연신굿을 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에 대해 이기화는 음력 정월 초하룻날 영신굿을 못했을 경우에 당할머니 생신 때 날을 잡아 영신굿을 했노라고 답변하고 있다. 결국 영신굿은 연신굿과 같은 굿이고, 당할머니 생신 때 행 하였던 굿도 영신굿이 된다는 소리다. 무당의 맥이 끊긴 현 상황에서는 이와 같은 사실의 진위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지만, 어쨌거나 영신굿과 연신굿은 매우 밀접하 게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⑤ <

수륙재 절차 제보한 영신굿 절차> * 무녀는 당집에서 굿을 하지 않는다. 영신굿을 할 때는 중선집 부부가 목욕재

개하고 당집에 올라간다. 마을 대표자와 어촌계장들도 올라가지만 무녀는 당집에


올라가지 않는다. 중선집 선장 부인이 당집에서 됫박쌀을 놓고 빌면서 영신(迎 神)을 해도 되겠냐고 당할머니에게 묻는다. 영신당에서의 제사는 당할머니에게 영신을 허가 맞으러 가는 의식이다. 단골은 맨 먼저 중선 선장집 마당에서 준비 굿을 한다. 단골은 돼지 움막이나 우물에 가서 삼현육각 잽혀놓고 풍물도 친다. 중선배 선장 부부가 당제를 마치고 내려오면 중선집 마당에서 신맞이굿을 한다. 신맞이굿은 당제에 모셔놓은 해신을 맞이하는 굿이다. 신맞이굿은 해신맞이굿, 당 맞이굿, 영신(迎神)굿이라고도 한다. 단골은 당집에서 신맞이굿을 하는 것이 아니 라 중선배 선장집에서 한다. 당집에는 무당이 함부로 올라가서 당굿을 할 수가 없다. 신맞이굿이 끝나면, 바다에서 본굿을 한다. 단골은 바다에 중선배를 띄워놓 고 배에 올라가서 용왕굿을 한다.

<

조사한 연신굿 절차4)> * 연신굿은 선주가 해상의 안전과 풍어, 재운 등의 행운을 위해 단골을 초빙하

여 바다로 나가 배에서 하는 굿이다. 이런 관계로 연신굿을 ‘배연신’ 또는 ‘뱃굿’ 이라고 한다. 배씨가 맡아서 하던 해리면 동호리 연신굿의 예를 보면 다음과 같 다.

음력 2월 20일로 날을 잡아 선주와 선원들이 합동으로 제비를 추렴하여 단골을 초빙해서 당굿을 한 다음 바다에 나가 용왕상을 차려놓고 ‘간대’를 잡힌다. ‘간대’ 는 약 10미터 길이의 생대(生竹)를 잎이 달린 채 베어온 것이다. 간대를 잡히고 단골이 축원하면 물에 빠져 죽은 혼이 이 간대로 내려 진동이 오면서 대잡이를 통해 익사자의 시체가 있는 곳을 알려주고, 또 앞으로 다가올 일을 알려준다. 이렇게 합동으로 해상에 관한 굿을 ‘모듬굿(공동굿)’이라 한다. 이 과정이 끝나면 ‘제금굿(개 인굿)’이라 하여 익사자의 혼을 건지는 굿을 할 사람은 다시 개별적인 혼굿을 하고, 선주는 배로 나가 개별적인 배연신굿을 하는데, 그 진행순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 안당석 ⓑ 당산석 ⓒ 성주석까지 한 다음 바닷가에 있는 신당(神堂)으로 가 서 당(堂)맞이를 한다. ⓓ 당맞이 당에 제물을 올리고 그 앞에 당할머니의 반지 하나, 비녀 하나, 청홍색 인조견 각 1척(尺), 면포(綿布) 한필을 바치고 단골이 당신(당할머니)에게 축원한다. 이 때 배의 도사공은 신당 바깥 댓돌 밑에 엎드려 있다. 축원이 끝나면 단골이 당할 머니에게 바쳤던 반지, 비녀 등의 예물 일체를 바쳤던 홍색 인조견에 싸서 당 밖 4) 

 김태곤, 집문당, 1981, 86-87쪽.


에 엎드려 있는 도사공의 목 뒷덜미의 옷 동정 밑으로 찔러서 넣어주면, 도사공 은 이 예물이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등을 구부린 채 배로 가서 상(上)돛대 밑에 다 이 예물을 놓고 굿 순서도 들어간다. ⓔ 배서낭(船王) ⓕ 용왕제 용왕제에서는 제가 끝나면 밥 세 덩이를 백지에 싸서 손으로 뭉쳐 바다 속에 던지고, 간대를 잡힌다. 물에 빠져 죽은 익사자가 있을 경우에는 ⓖ 해원 ⓗ 길닦음을 하고 익사자가 없으면 곧바로 ⓘ 중천매기를 하여 연신굿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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