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과 호란의 고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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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임란·호란과 고창1) 고려 말기부터 심해진 왜구의 침입은 당시 국가의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였다. 왜구들의 약탈은 그들의 물질적, 경제적 욕구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이들의 침입을 막는 방법으로서 는 이들을 유화하여 그들의 경제적 욕구의 일부를 충족시켜주는 방법이다. 그러나 그들의 경제적 욕구를 무한정 충족시켜 줄 수는 없는 일이므로 때로는 강경하게 때로는 회유하며, 왜인의 왕래와 교역을 허락하기도 하고 단교하기도 하고 토벌하기도 하였다. 왜인들은 개항장의 설치를 희망하여 세종대에는 삼포를 개항하여 왜인들의 왕래를 허락하 였으며,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으로 폐쇄하였다가 일부 개항을 허락하는 등 강경과 회유 책을 섞어가면서 왜인을 대하였다. 개항장에는 도박처․무역처로서 왜관이 설치되었고 개항 장의 실정과 변경에 따라서 왜관도 치폐가 거듭되었다. 왜인의 왕래가 빈번해지고 이에 따 른 폐단이 많아짐에 따라 왜인의 왕래를 제한하기 위한 장치로서 도서(일종의 입국사증)․행 장․노인․문인 등의 제도를 두기도 하였고 1년에 입국할 수 있는 왜선의 수효와 사람 수를 제한하기도 하였다. 선초에는 1년에 입국한 왜인이 5000~6000여 명에 이르렀고, 입국한 왜인의 체류기간이 8개월씩이나 되고 있어 조선 정부로서는 매년 1만여 석에 달하는 과중 한 접대비를 부담스럽게 여겼다. 조선에서 간혹 일본에 사신을 보냈으나 그 횟수나 인원수 에 있어서 조선에 들어오는 일본 사행의 횟수나 인원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적은 것이었 다. 조선에서 명에 매년 6~7차례의 사행을 보내 명에 부담을 주었던 것과는 반대로 조선 은 일본으로부터 부담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경제적, 문화적 욕구의 현상으로 그처럼 조선은 일본에 대한 교린정책으로서 삼포를 개항해 주고 그들의 입국과 무역을 허락하여 그들의 물질적, 문화적 욕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 주면서 왜구형 태의 침략 행위는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대왜 관계는 16세기 사회로 접어들면서 국내외적 정세가 변화되기 시작했는데 국 내의 상황은 세조, 성종대부터 양반 관료문의 주의․사상․감정․이할․기타의 관계로 점차 파벌 이 형성되어 서로 반목하기에 이르렀고, 성종대에 김종직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의 유림들 이 대거 중앙의 정치무대에 등장함으로써 조선사회는 심한 진통을 겪게 되었다. 정인지, 최항, 신숙주 등의 공신과 그 자제들로 구성된 훈구파와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을 중심으 로 하는 사림파의 대립이 심화되어 이들 간의 대립은 4차례의 사화를 가져오게 되었고 선 조연간부터의 당파간에 벌인 정권쟁탈전은 파벌 간의 싸움뿐 아니라 지역 간의 대립으로 극심한 정치적 분열과 혼란을 초래하였다. 1575년(선조 8)에는 유성용, 김성일, 이산해 등 의 동인과 심의겸, 윤두수, 정철 등의 서인의 분당이 생겨 관료층이 양분되었고, 권력구조 의 쟁침이 심하였다. 여기에 동인은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북인은 대북․소북으로 가리는 어지러운 판국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편 일본은 오랜 세월 동안 군웅이 할거하는 전국시대가 16세기에 접어들면서 통일을 이 룩하고 있었다. 직전신장에 의하여 전국시대가 평정되어 갔으며, 그 뒤를 풍신수길이 계승 하여 국내통일이 이루어지자 국내를 통일한 풍신수길에게는 전국시대를 통하여 다듬어진 영주들의 군사력이 부담스러웠으므로 이것을 해외에서 소모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국내외의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선조 초에 왜가 조선과 명을 침공할 뜻을 품고 있 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이이는 외환을 예견하여 10만 양병을 주장한 바도 있었으나 제신들 의 안일무사한 자세는 국방에 관심을 기울일 수 없었다. 1) 고창군지


일본이 조선을 침공할 준비를 하는 가운데 1590년(선조 23)에 통신사 황윤길, 부사 김성 일, 서장관 허성, 종사관 황진 등을 일본에 보내어 실정을 살피게 한 일이 있었다. 일행이 돌아온 후 정사 황윤길은 ‘수길이 용모가 범상인이 아니므로 반드시 내침할 것’이라 보고 하였으나 부사 김성일은 ‘수길은 인물이 옹졸하여 주책이 없는 자로서 침범할 만한 자가 되지 못한다.’고 상주하여 정사와 부사의 살핀 보고가 다르게 나타났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에 관한 논쟁이 벌어지고 당색은 더욱 짙어만 갔다. 당시 조정은 문익하고 안일한 사고에 빠진 나머지 결국 김성일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방향 으로 기울었으며 이보다 앞서 각 도의 방비를 강화하라는 명령 또한 취소되고 말았다. 1) 임진왜란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왜군의 침략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은 그 초기에는 왜군의 일방 적인 북상이 계속되었다. 풍부한 전쟁의 경험과 조총으로 무장한 대규모의 왜군은 당일에 부산성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여 동년 5월 2일에는 한양을 함락시키기에 이르렀다. 침공 한 지 20여 일 만에 한양을 함락했다는 것은 왜군이 한양에 이르기까지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개전 초기의 조선군의 절대적 열세는 대체로 왜군 전력의 우수성 때문이었다. 유성용은  징비록에서 “우리나라와 왜국이 교전할 때 그 장단점을 비교해 보면 적의 장기는 세 가 지, 즉 탄도․검술․돌진에 있어 우수하다. 우리나라는 활과 화살에 장기가 있으나 그 궁시는 수십 보밖에 나가지 않는 데 비해 탄환은 수백 보까지 나아가 맞으면 꿰뚫는다.”고 설명하 여 왜군이 무기와 군사적인 면에서 앞서 있음을 전하고 있다. 전라도는 고려말 이래로 왜구의 침탈이 계속되었고, 또 당시의 전주 부근은 정여립의 모반 사건으로 한층 소란하였으니 김천일은 농민들이 기아의 고통에 견디지 못하여 이산되고, 각지의 유생들은 정여립 모반사건의 연좌인 색출로 원성이 자자하여 사회적 혼란이 거듭되 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왜군의 초기 공격 목표는 한성의 함락에 있었기 때문에 전라도 지역은 왜군의 일차적인 침 략에서 벗어났다. 따라서 아직 전쟁에 동원되지 않은 관군이 건재하고 또 왜군의 침입에 대응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당시 전라도순찰사 이광과 여러 읍의 수령들은 즉각 왜군에 대항할 준비를 세워야 했으나 아직 사태의 추이만을 관망하고 있었다. 이에 전 광주목사 정윤우는 “국사가 위급하고 백 성들이 믿을 곳이 없어 이산하는데 대의와 명분을 생각하지 않고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하고 이광에게 항의하기도 하였다. 이광은 조정으로부터 관군을 동원하여 급히 구원병을 보내라는 교지를 받은 후에 비로소 여러 읍에 동원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각 읍의 수령들 은 황급히 관군을 소집하니 그들은 기강도 서지 않고 또 훈련도 받지 않은 오합지졸에 불 과하였다. 이광이 이러한 관군 8천을 거느리고 북상하여 공주에 이르렀을 때 선조는 이미 평양으로 피난을 떠났으며 한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퇴군하고 말았다. 이 관군에게 크게 기 대를 걸었던 호남지방민은 관군이 뚜렷한 이유 없이 후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분개 하여 비난하였다. 조정에서도 전라도의 관군에게 크게 기대를 걸었으나 의외의 퇴군에 크게 당황하여 교리 심대를 파견하여 이광의 공주 퇴각을 문책하고 재기를 명하였다. 또한 이광의 조방장이었 던 백광언은 향병을 이끌고 기병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재차 각 읍에 모집령을 내리게 되니 한번 헛된 고역을 치룬 관군들은 모병에 응


하기를 꺼릴 뿐 아니라 일부 지방에서는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하였다. 이광은 가까스로 혼 란을 수습하고 약 2만의 군대를 이끌고 북으로 전진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충청도순찰사 윤선상도 8천여의 군대를 거느리고 온양에 유진하였고 경상도순찰사 김수도 휘하의 군대를 인솔하고 북상하였다. 1592년 5월 18일에 3도의 관군이 합류하였는데, 그 중 전라도군은 물자가 아주 많아서 병기․군자․등이 들에 가득 찼으며, 그 길이가 40~50리나 뻗쳤다는 것 이다. 이들의 북상에 호남민들은 물론 인근 사민들이 모두 기뻐하고 조정에서도 성공을 믿고 있 었다. 그러나 갑자기 동원된 병력이었으므로 행군대열이 정리되지 못하고 기장이 서지 않 았으며 앞뒤의 연결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6월 4일 전라도군이 용인현의 남쪽 10리 지점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용인 부근의 전투에서 관군은 크게 패하여 5만 병 력이 2천미만의 적에게 참패하였다. 이에 대해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군사 행동이 마치 봄놀이와 같으니 패배하지 않으리오.”라고 개탄하였다. 또 3도 순찰사가 모두 문신으로서 병무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군사의 수는 많아도 명령 계통이 서지 않았다고 분석하였 다. 이리하여 이광은 전주의 윤선명은 공주로 김수는 경상도로 각각 철수하였고 광주목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만이 군사를 온전하게 인솔하여 회군하였다. 왜군의 침략 이후 전세는 조선측에 완전히 불리한 상황 하에 놓여 있었다. 당시 왜장 小早 川隆景은 그의 특별부대를 안국사 혜경으로 하여금 지휘케 하였는데 그는 창원에 주둔하 고 있다가 분지계에 따라 전라도 침공을 맡게 되었다. 그는 전라감사라 자칭하여 먼저 남 원을 친 다음 전주로 침입하려 하였다. 그러나 의병장 곽재우에게 저지당하여 길을 바꾸어 성주로 되돌아갔다. 한양에 있던 왜장 소조천융경은 이 소식을 듣고 전라도에 침입하기 위해 남하하여 청주를 지나 한편으로는 지례와 거창을 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황간과 순양을 거쳐 무주를 친 다음 금산을 공격하니 수비하던 군수 권종은 적을 막다가 전사하였다. 이곳을 거점으로 하 여 왜군의 한 부대가 용담과 진안을 거쳐 웅치를 넘어 전주를 공격하려 하였고, 다른 한 부대는 진산을 거쳐 이치를 지나 전주로 들어가고자 하였다. 따라서 웅치와 이치전은 전주 의 수호뿐 아니라 전라도 전체의 안위에 직결되는 심각한 문제였다. 조정에서는 전라도절 제사 권율로 하여금 이치를 막게 하고, 김제군수 정담에게는 웅치를 방어케 하였다. 웅치 전투에서 적을 완전히 물리치지 못하고 분패하였지만 적군이 계속 전주성을 공격하여 점령 하려는 의도를 분쇄시켰다. 한편 이치전투에서는 전라도 도절제사로 임명된 권율이 독전관으로 참전하고 동복현감 황 진과 그의 부하인 위대기, 공시억, 소제 등과 1,500여의 병사가 참전하였다. 권율은 적의 병세가 강대하다는 보고를 듣고 이치의 방어시설을 강화하였다. 천험을 이용하여 목책을 쌓고 우거진 나무 사이와 인도의 통로 요소에 거마․함정 등을 마련하는 한편 화살과 수마 석을 쌓으며, 5색 깃발을 산 위에 높이 세우고 구부러진 곳에 연기를 올려 적이 아군 병력 의 많고 적음을 헤아리지 못하게 하여 여러 악기로서 신호를 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이치전투에서 왜군은 커다란 손실을 입고 퇴각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이치전투 에 대한 승리의 공으로 권율에게 나주특사를 제수하였다가 다시 전라도관찰사 겸 순찰사에 임명하였고, 황진에게는 익산군수에 이어 충청도조방장에 임명하고, 절충장군을 더하였다. 이 전투에서 적을 격퇴한 의의는 매우 큰 것인데 백사집 권 21을 보면 “적이 다시 호남 을 엿보지 못하게 하고, 여기에 근본으로 삼아서 나라를 위하여 수년간을 보장하게 하였 고, 군수물자가 한번도 부족됨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웅치와 이치의 전투로 왜군


의 전주 침입이 저지되고 전라도는 그 부원이 보존되었으며 후방 병참기지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2) 정유재란 5년간 계속된 명․일 간의 강화회의는 1596년(선조 29) 9월에 일본 오사카성 회담에서 결렬 되었다. 조선은 왜군의 재침략에 대비하여 경상도의 금오, 공산, 화왕산성을 비롯하여 각 도의 산 성을 수축하고, 수군으로 하여금 바다의 경계를 엄하게 하였다. 그리고 의병장 고경명의 예에 따라 부모․처자․형제가 왜군에게 피해를 입은 자로서 분의복수군을 편성케 하였다. 또 한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명에 고급사(告急使) 정기원을 보냈고, 가등청정군이 침공하자 명 에 사신을 보내어 파병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명에서는 강화회의가 심유경의 기만 에 놀아난 것을 알고 약 5만 5천의 군대를 파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같은 해 5월에 선 유도로 양원의 군 3천이 남원에, 6월에는 진우충의 군 2천이 전주로 남하하였다. 이때 조 선군의 총 병력은 확실치 않으나 전선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약 3만이었다. 당시 왜군의 총 병력은 14만 1천 5백으로 수군도 강화되었다. 왜군의 주력은 7월 초에 6 백여 척으로 부산에 다달았다. 결국 1597년 2월 왜군이 재침하여 오자 전라도 지방도 그 침략을 받게 되었다. 그 원인은 남해안을 지키던 이순신이 모함을 당하여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왜군에게 참패를 당하여 재해권을 왜군에게 빼앗긴 데 큰 원인이 있었다. 또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왜군은 경상, 전라, 충청도의 완전 점령을 전략으로 하여 전주를 점령한 후 북진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왜군은 군대를 나누어 소서행장은 남해․사천에서, 도진의홍은 고성․안동에서 흑전장정은 광 양․순천에서, 과도직무는 김해, 창원에서 진주를 경유하여 구례로 총진격하였다. 한편 가등 청정은 서생포에서 밀양을 침공하여 초계, 거창, 안의로 침공하여 황석산성 싸움 후 전주 로 향하였다. 구례를 점령한 왜군은 전 병력으로 남원을 공격하였다. 남원성에서는 전라병사 이복남, 광 양현감 이춘원, 조방장 김경노군과 명의 부총병 양원 휘하의 3천 병력이 수성하고 있었다. 수성장은 왜군의 공격을 받아 열세한 병력으로 군민이 결사항전을 하였으나 명장 양원이 도망치고, 병사 이복남 등 제장은 모두 전사하였다. 남원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전주에 총집결하였는데 당시 명의 제독 마귀는 처음 양원, 진우 충 등을 전라도에 파견하기에 앞서 이르기를 “남원이 급급하면 전주에 알리고, 전주는 공 주에 알리며 공주는 경성에 알리라.”고 하였다. 그런데 전주를 수비하던 명장 진우충은 남 원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부 군사를 거느리고 전주를 나서서 남원성과 연락을 하고자 슬치에 이르렀다. 그러나 도진의홍의 왜군 선봉대를 보자 황망히 성내로 돌아와 성 을 지키는 것으로 작전 계획을 바꾸었다. 남원성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자 전주성내는 크게 동요되었다. 그런데다 진우충이 영병을 살해하자 명군에 대한 성민의 분노가 대단히 커졌 다. 평소에 명군대와 차별 대우를 받아온 불만이 폭발한데다가 성내 창고방화의 변을 당하 다 진우충은 도주하여 버렸다. 그리하여 영병과 명병의 내부 분란으로 성내는 무방비 상태 에 빠져 화재가 발생하고, 그 피해가 늘어나며 도망자가 속출하니 전주성은 허무하게 함락 되고 말았다. 왜군들은 성내에 수일간 마물다가 일대는 전주를 출발하여 익산, 용안, 부여, 임천, 한산,


서천을 경유하고 다시 용안으로 나서서 함열, 익산, 금구, 태인을 휩쓸고, 정읍에 숙영하였 다가 9월 하순부터는 사천, 순천, 죽도 방면으로 향하였다. 다른 일대는 전주를 출발하여 공주, 청주, 천안, 직산방면으로 북상하였다가 상주로 우회하여 10월 중순 양산, 울산 방면 으로 퇴각하였다. 3) 임진·정유재란과 고창 본 임진․정유재란과 고창이라 한 것은 고창지역에서 벌였던 전투가 아니라 당시에 고창과 관계있는 인물들의 활동을 기술하고자 함을 밝힌다.

○ 유한량(劉漢良) 유한량은 임진왜란이 발발했던 당시에 무장현감으로 자는 충겸(忠謙), 호는 은재라 했으며, 본관은 강릉으로 조선왕조의 개국공신이고 대제학을 지낸 유창의 증손이요 이조좌랑 계주 (繼周)의 2자이다. 그는 중봉 조헌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돈령부도정을 거쳐 1590년(선조 23)에 무장현감에 제수되었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 아들을 불러놓고 “무릇 신하된 자가 상감께 몸을 바치매 임 금이 주신 옷과 녹을 받으니 내 육신과 모발이 모두 임금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의 환란이 있는 이때에 죽음을 무릅쓰고 왜변을 물리쳐 원수를 갚고야 말 것이니 너희 3형제 는 선훈을 더럽히지 말라.” 이르고 “마땅히 상감의 행재를 호위해야 할 일이나 정세가 위 급하니 병을 모집하여 적을 토벌하는 것이 급선무다.” 하고 금산에서 고경명의 의병이 패 했다는 비보를 듣고 군을 편제하여 왜군을 쫓아 성주 개령까지 나아갔다. 이때 의병대장 김천일이 진주성을 수비하던 중인데 왜군이 대군을 모아 공략할 것이란 급 보를 듣고 해미군수 정명세, 거제군수 김준민에게 곧장 진주성으로 행군하라는 급보를 띄 우고 좌의부장 장윤과 더불어 정병 3백을 인솔하여 진주성에 입성하였다. 이 진주성싸움에서 격전을 벌이다가 성이 함락되던 날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니 이때가 1593년(선조 26) 6월 29일이며 향년 46세였다.

○ 어사각(御賜閣)과 삼십의열(三十義烈) 이는 김해김씨 판도판서공파(判圖判書公派)의 절효공(節孝公) 김극일(金克一)의 직계근친 25의사와 5열부를 말한다. 1592년 5월에 호남민들이 크게 기대를 걸었던 전라도순찰사 이광이 이끈 근왕병이 공주에 서 선조가 서울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회군하여 공주로 돌아오게 되자 도내의 사민부노 (士民父老)들의 파군에 항쟁하는 사론이 크게 일어나 변사정은 남원에서, 고경명은 광주에 서, 김천일은 나주에서, 김경수는 장성에서 이광중은 영광에서, 양사형은 순창에서, 채홍국 은 흥덕에서, 김축은 무장에서 각각 의병을 일으켰다.

무장에서 의병을 일으킨 김축(金軸)을 중심으로 한 30의열은 다음과 같다. 명 축 김 헌 김사모

녹 훈 선무원종1등 선무원종3등

관 청 승지 선교랑 군기시첨정

출 사 진주성전투 직산전투 동래성전투


선무원종3등 김기경 김우남 김두남 김지남 김흥립 김영립 김덕립 김효립 김억명 명 김억룡 김억호 김대인 김치모 김세근 김나복 김인복 김신문 김극추 김응추 김국서

선무원종2등 선무원종2등 선무원종3등 선무원종 3등

녹 훈

선무원종1등 선무원종2등

사복시정 우부장 선전관 금부도사 좌부장 훈련주부 판관 통덕랑 통덕랑 군자첨정 관 청 부사정 후부장 첨사 영군장 훈련주부 훈련주부 군기시정 주부 주부

산음전투 진주성전투 노령전투 진주성전투 진주성전투 노령전투 진주성전투 산음전투 노령전투 남원성전투 출 사 남원성전투 남원성전투 노량해전 노량해전 금산전투 남원성전투 직산전투 금산전투 금산전투 금산전투 남문창의

이상의 25의열과 김축의 처 반남박씨, 김헌의 처 함안조씨, 김기남의 처 금성나씨, 김두남 의 처 영암박씨, 김세근의 처 청주한씨 등 5명의 순절한 부인을 포함하여 30의열이라 한 다. 조정에서는 1605년(선조 38) 4월 16일에 선무원종공신록에 서훈하여 단서철권(丹書鐵券)을 내리고 이를 봉안한 어사각을 세우도록 하였다.

○ 김홍우(金弘宇) 김홍우의 자는 백용(伯容)이고 호는 백곡(白谷)으로 본관은 광산이다. 그는 1539년(중종 34)에 고창에서 노계(蘆溪) 김경희(金景熹)의 장자로 태어났다. 어려서 오음 윤두수 문하에 서 수학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두 아우 광우 덕우와 더불어 고을 장정 수백 명을 거느 리고 김경수, 김재민 등과 창의하여 의병청을 설치하고 군량미 5백 석을 모아 의곡장 기효 증에게 의탁하여 행재소에 보내고 의병 8백 명을 규합, 김극후에게 부탁하여 진주성에 보 냈다. 이듬해인 1593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를 거쳐 예조정랑에 오르고 1597년 (선조 30) 정유재란 때에는 두 아우와 함께 행재소로 가서 군자감정이 되어 명나라 장수 해생(解生) 등과 함께 합세, 8월 25일 소사에서 왜군을 크게 섬멸하였다. 후에 그 공로로 남원부사를 제수받았다. 그의 아들 여성, 여진, 여중 4형제도 정유호란 때에 크게 거의하 였다.

○ 채홍국(蔡弘國)과 남당(南塘) 창의 채홍국의 자는 광보(光輔)이고, 호는 야수(野叟)로 본관은 평강이다. 문하시랑 경평공 송년(松年)


의 10대손이며 예조판서 충경의 현손이고 사정 치의(致義)의 자로 1534년(중종 29)에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채홍국은 동년 9월 창의를 부르짖으니 이에 호응한 90여 명의 의사 들이 흥덕현 북면의 남당에 모여 삽혈동맹, 즉 목숨을 바쳐 싸울 것을 피로써 맹세하여 채 홍국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의병소를 설치하였다. 현재 의병진의 명단인 「남당창의동맹록」과 의병진의 부서편제인 「의병소제임록」이 전하고 있다. 남당 의병은 동년 10월 6일 법성진 군량 4백 석을 내게 하여 3백 석을 의곡장 기효증과 향사별감 채명달로 하여금 행재소에 보내고, 100석은 영남의 곽재우에게 각종 병기와 함께 공급하였다. 이 의병진은 동년 10월 말경 왜적을 쫓아 정읍, 장성, 담양, 곡성, 순천, 남원, 순창 등을 전전하며 격전을 벌이던 중 평양에서 화의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남당으로 다시 돌아왔 다. 삽혈동맹의 편제는 다음과 같다. 의병장 : 채홍국(첨지중추사) 부장(副將) ; 김대준 맹주장 : 고덕붕, 이대영 참모관 : 조익령, 채우령(현감) 군기도감 : 김경덕(현령) 부장(部將): 채홍조 전량도감 : 이민부, 이번 금장(禁將): 김수인 조군향사도감: 김영년 부감군(副監軍): 임기(봉사), 채명달(주부) 점정도감(點丁都監) :김영무 부점(副點) : 임대수, 오몽서, 이시화 돌격장 : 채경달(판사), 윤흥은(생원) 부격장 : 최언심(참봉) 선봉 : 오봉수(봉사), 주번길(현감) 부봉 : 김경장(진사) 쟁고관(錚鼓官) :박영동, 채대형, 채중달 서사도감 : 채상(생원) 부사(副寫): 이민덕 수화관(水火官) : 채대림, 나기인, 최유청, 김응태 조련도감 : 채봉(직장) 부감: 오송수(진사), 임추, 김상추, 이민부(참봉) 습사도감(習射都監) : 배수의 부사 : 윤전수, 채영달, 이작(봉사), 이성춘(참봉), 조익수, 탁상 종사관 : 채덕량, 김방필, 임세무, 임대일, 나기종, 최치원, 전시춘 시포도감(矢砲都監) : 김헌, 임계원, 김이진, 박치덕, 오필수, 강재팔 좌대관(左隊官) : 채구, 채대원, 황득중, 허섭, 김상동, 채홍업, 전시추, 채홍수, 이인영, 채


영달 우대관 : 이번위, 채영, 채인달, 임세장, 채곤, 채이달, 김이명, 채장, 채홍무, 이인발 전초장(前哨將): 박경덕, 채침, 김대진, 이득춘, 허득천 후초장 : 채인달, 김홍녕, 정대열, 채홍서, 최명동 감포관(監砲官) : 이익성 부감 : 김영 이 삽혈동맹은 왜군이 물러감에 따라 각기 향리에서 생업에 종사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채홍국은 “우리 백성 된 자는 국난에 처하여 살신보국하는 것이 높은 대의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다 같이 한곳에 죽음의 무덤을 마련하자.”는 격문을 내었다. 이 격문을 받은 지난날의 동지들은 물론이고 근읍에서도 뜻있는 많은 의인들이 모여들었으 며 이들과 함께 정유갱창동맹을 맺었다. 3월 23일에 왜적이 흥덕에 쳐들어왔다는 급보를 듣고 영암․해남의병들과 합세하여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 채홍조, 이작, 승만세, 김영 등이 전사하였다. 흥덕전투에서 퇴각한 왜 군은 4월 초에 부안에 침략하였다. 이 정보를 들은 채홍국은 의진을 부안의 위반동(蝟蟠 洞)으로 나아가 왜군과 대치하였고, 4월 14일에 다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전투에서 결 국 채홍국과 그의 아들 그리고 300여 의병들이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이후 조정에서는 이들 300여 흥덕창의 의열들에게 공을 인정하여 의병장 채홍국을 병조판 서에 그의 아들 경달에게는 훈련원정, 고덕붕에게는 참의를 추증하고 남당 회맹단에 모충 사를 건립하여 호벌치전투에서 순절한 분들을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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