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孝)가 살아 있는 황산리 (고창군 고수면 황산리)
고창문화연구회 유점동
1. 황산리 마을의 유래 1). 마을의 개황 황산리는 마한시대 모로비리국 모이부곡에 속해 있다가 백 제 때 모양부리현 관하였으며, 통일신라 경덕왕16년에 나라 내 고을의 이름을 당나라 식으로 바꾸게 되어 '모양부리'가 ' 고창'으로 개명됨에 따라 황산리도 고창현 소속이 되었고, 고 려시대에 이르러 국가에 대한 특정한 역을 부담하는
행정구
역인 남조향과 대량평부곡 중 남조향 지역에 속했다가, 조선 초기에 남조향은 고사면으로, 대량평부곡은 수곡면이 되어 황 산은 고사면에 속한 마을이 되었다. 일제에 의해 1914년 3월1일 부군폐합령이 발령되어 고창현 과 무장현, 흥덕현을 합해 고창군으로 개편되었고, 고사면과 수곡면이 통합되어 고수면이 되었으며 8개 법정리가 생겼는 바, 고사면(古沙面)에 속해 있던 황산은 예지, 평촌을 포함, 고수면의 법정리가 된 뒤 오늘에 이른다. 자연취락으로는 황 산, 평촌, 예촌, 공판동이 있고, 황산치 뒤에 서당이 있어 서 당동이라 부르고 있었지만 마을이 형성되지는 않았다. 주위에 상평리, 부곡리, 와촌리, 봉산리를 인접하고 있다. 2). 자연환경 고창의 주산(主山)이면서 노령산맥의 맹주(盟主)인 방장산 (方丈山)은 지리산, 무등산과 함께 호남의 삼신산(三神山)이라 불려온 신산(神山)이다. 옛 이름은 반등산 또는 방등산 이였
으나 중국의 영향을 받아 방장산으로 개명되었다. 방장산에서 시작된 산줄기는 지기(地氣)를 안고 북쪽으로는 고부 두승산 까지, 남쪽으로는 해남 두륜산까지 이어진다. 남쪽으로 흐르던 산줄기는 중간 중간 작은 산줄기들을 뱉어 내고, 그 가운데 문수산(옛 이름 鷲嶺山)에서 갈라진 산줄기 하나가 서북쪽으로 움찔움찔 기복을 계속하면서 십 여리를 달려 아담하게 뭉친 곳이 황산(황산등, 황산치)이다. 노령산맥의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줄기는 고수천으로 모이고 고수천은 또다시 농사를 위해서, 물레방아를 위해서 젖줄처럼 나누어주는 가운데, 평촌 앞을 거쳐 내려오는 물줄기와 또 한 줄기 사동 쪽 여러 골짜기에서 모인 물은 이합집산을 거듭하 면서 작은 내를 이루니, 이것이 예지천이다. 예지천은 예지터 앞으로 흘러 고수천과 합류하고, 일부는 다시 갈라져 탑거리 를 지나 황산 앞들을 적시며 흐르다가 주진천에 합수한다. 2. 황산리의 자연취락 1). 황산 방장산에서 뻗은 산줄기는 기(氣)를 실ㅎ고 남쪽으로 향하 면서 여러 산줄기를 만들어낸다. 이곳에서 여러 갈래 나누어 진 작은 산줄기들이 다시 기(氣)를 타고 흐르고, 그 중 하나 의 줄기가 황산(黃山峙 또는 黃山등)을 이룬다. 마을이름이 황산인 이유는 산에 나무를 심어도 병충해 등으로 잘 살지 않아 민둥산인 독산(禿山)으로 변해버려 황산(黃山)이라 했다 는 유래가 있으나, 산에 있는 큰 바위 풍암(豊巖)의 이름을 지은 안처사(安處士) 무송(撫松)에 대한 조선고종조의 기록에 의하면, 부모의 산소를 산등어리 동서에 모시고 소나무 씨를 구해 심어서 정성으로 잘 가꾸어 청산(靑山)이 되었다는 기록
이 있다. 황산에 처음 거주를 시작한 사람들은 남평 문씨였으나 마을 이 형성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죽산인 안초(安招)가 전 라관찰사 시절, 참관으로 있던 고창윤씨(모양윤씨) 윤호(尹瑚) 를 찾아 고창을 방문하여 친분을 맺게 되고, 이를 계기로 윤 씨의 딸을 자부로 맞게 된다. 관련 기록이 서로 달라 정확한 입향 년도는 알 수 없으나, 죽산 안씨 기록에 의하면 1481년 (성종12), 안초의 아들 자전(子詮)이 처가의 연고를 찾아 처 음 예지터에 자리 잡고 살다가, 고수 연동과 무장으로, 해리 칠곡으로, 고수 황산으로 자리를 옮김 것으로 되어 있다. 죽 산 안씨(竹山安氏)가 입촌 하면서 안씨(安氏)문중이 융성하여 자손이 많이 늘어나 죽산 안씨 집성촌 화 된 황산은, 원래 50~60호의 제법 큰 마을 이였으나, 산업화의 물결에 휩쓸린 대다수 농촌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도회지로 떠나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이곳 또한 노인들만 남은 40 여 호의 작은 마을 이 되어 버렸다. 황산은 면사무소에서 북쪽으로 300M에 위 치한다. 2). 예촌 예촌의 본래 이름은 예지터(禮智)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할 당시 예지의 지혜지(智)자가 가지지(支)자로 바뀐 것은 일 제의 한민족 문화말살정책의 일환이라 짐작된다. 그 후 1990 년에, 고수면 내에 있는 행정리 명 '예지리'와 중복 된다는 이 유로 예촌(禮村)으로 개정되었다. 이는 담장자의 무성의한 단 순함이, 주민의 의사를 무시한 채
마을이름까지 바뀌 버리게
되는 결과로 나타난 듯하다. 예촌 이라는 마을이름은 행정기 관에서나 사용할 뿐, 마을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타지인들
까지 지금도 '예지터'라 부른다. 예(禮)는 유교의 중심사상으로서 항상 몸을 닦아(修身) 완성 된 인격을 이뤄내는 자아실현(自我實現)의 행동강령이며, 통 치와 종교, 사회질서확립의 중심수단이고, 반드시 필요한 인 간관계의 규범으로 지켜져 내려왔다. 지(智) 또한 오상(五常, 仁義禮智信) 중의 한 가지 덕목으로 사상가마다 해석이 분분 하지만 슬기와 지혜를 상징하는 선비의식의 바탕이다. 이와 같이 마을이름에까지 예(禮)와 지(智)를 붙인 예지터 사람들은 예절 속에 사회규범을 잘 지키고 슬기롭고 지혜로 운 행동을 바랐던, 선비정신의 이상향으로 마을을 만들고자 했고, 이러한 의식이 까려있는 마을자체도 유교를 숭상하는 가운데 예를 기리고 행하는 전통의 터였음을 말해준다. 예지터는 성종 조에 죽산 안씨(竹山安氏)가 설기한 마을이라 전해지고는 있어도, 고인돌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선사시 대부터 사람들이 살아온 곳임은 확실하다. 마을의 위치는 면 사무소에서 동북쪽으로 300M거리에 있다. 3). 평촌 평촌이란 마을이름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언제부터 마을이 형성 되었는지도 밝혀진바 없다. 평평한 들 가운데 조성되었고, 이름 그대로 평안한 마을이라는 뜻이 담 겨있다 하겠다. 구 면사무소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주막집 마당에 수령이 수 백 년인 팽나무가 서있었 던 것으로 미루어,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 음을 짐작 할 수 있다. 마을의 위치는 면사무소에서 동남쪽으 로 500M거리에 있다.
4). 문화마을 농어촌 생활환경개선사업은 정부의 농촌근대화정책과 새마 을운동 환경개선사업 등으로 이미 60년대부터 시작 되었다. 1980년대 후반 한국농업은 국내외적으로 큰 도전을 받게 되었는데, 도농 간의 발전 격차에 의한 농촌인구의 과도한 도 시이동 내지는 농촌지역의 과소화, 노령화가 심화되어 농촌경 제의 쇠퇴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더구나 UR협상은 농사물 시장의 개방을 불가피하게 만들었으며,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농업의 생산성재고는 발등의 불처럼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 농어촌의 개선을 서두르게 되고 다양 한 아이디어를 동원하여 시행하고 있다. 문화마을은 이러한 농어촌지역 생활환경개선사업의 한 방편 으로 조성되기 시작 했고, 고수의 문화마을도 1996년6월에 평촌과 예지터 사이 들(野)을 개발하여 33000m2의 주택지를 마련, 56가구의 대지와 도로, 상하수도, 마을회관, 놀이터 등 의 편의시설을 18억 원의 사업비를 투입하여 완성했고, 지금 은 대부분 고수면 내 오지의 농민들이 이주해 살고 있다. 문 화마을 조성은 어찌된 일인지 1회성으로 그치고 말아 아쉬움 이 남는다. 마을의 위치는 예지터와 평촌의 사이에 있고 면사 무소에서 동남쪽으로 500M거리에 있다. 5). 공판동 선사시대 농경이 시작되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마을은 그 후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으나, 농지소유의 격차가 심하 여 가난한 농민들의 애환은 한이 없었고, 특히 일제치하에서 의 농촌은 지옥의 암흑기라해도 좋았다. 일제가 자행한 수탈 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마는, 급격한 공업화에 따른 이농현상
으로 조선의 농산물에 의지 할 수밖에 없었던 일본이 시행한 농업정책은, 가뜩이나 힘들던 우리 농민들을 더욱 어렵게 하 였다. 농산물의 자유로운 유통을 방해하고자 '농산물검사제도' 를 두었고 '농산물공동판매제도'까지, 수탈의 행태들을 열거하 자면 끝이 없다. '농산물공동판매제도'(共賣制)란 조선농민들 이 생산한 농산물 가운데 소작료(당시의 호남지방 대지주는 일본인이 많았다)이외의 나머지 모두를 지정된 장소에서만 팔 것을 강요한 제도로써, 일본인 자본가들이 싸게 사 갈 수 있도록 하는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공매제는 수매, 관리, 도 정을 위한 공판장(共販場)을 필요로 하게 되고 운영을 위한 관리인도 있어야 했다. 원래 공판동은 몇 가구가 살고 있었을 뿐 마을이 형성되지 않았으나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기를 '이곳은 만석꾼이 나 는 자리다'라 했고, 그 말을 증명하듯 많은 벼 가마니와 곡물 들이 쌓이는 공판장이 들어섰다. 일제치하에서 관리를 맡은 이면우(李冕雨)씨가 관리를 위한 집을 지으려 기초를 닦고 골 재를 올린 뒤 상량을 올리려고 하면, 밤마다 도깨비가 나타나 상량을 들어서 내팽개치는 통에 완성할 수가 없어서, 소피도 뿌리고 매물죽도 끓여 대접하는 등 지극정성으로 도깨비를 달랜 뒤 완공하였다고 한다. 일제와 민족상잔의 전쟁을 거치는 격변 속에서 공판제도는 지속되었고, 공판장도 더불어 존속되어 오다가 1969년 고수 농업협동조합이 만들어지면서 관리가 넘겨지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 이였다. 다만 변화라면 공동판매기능이 정부에서 수매한 농산물을 저장하는 기능으로 바뀐 것이다. 공판동이란 마을은 공판장에서 품삯 일을 하러 모여든 사람 들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농협과 우체국이 들어서고 다른
행정기관들이 이전되는 등, 명실공이 만석꾼의 터가 되었음은 물론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고, 현재는 예지터에 속한 마을이 다. 3. 입향조(入鄕祖)와 마을을 빛낸 사람들 1) 안자전(安子詮 1461~1489) 호조참판 안초(安초)의 아들 육형제 중 막내이고 휘는 자전 (子詮)이며 시조 방준(邦俊)의 18세손으로 고수에 터를 잡은 입향조(入鄕祖)다. 아버지 안초가 전라관찰사를 지낼 때 인연 을 맺은, 판관과 지평의 관직을 지낸 고창윤씨(모양윤씨) 윤 호(尹瑚)의 사위(壻郞)가 되어 성종 조에 고수면 예지터로 입 향, 아들 삼형제를 두었다. 그는 지조가 굳고 청렴결백하며 학문이 깊었지만,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고 향리에 은거 유유 자적하던 중, 조정에서 그의 학문을 인정하고 행실을 높이 평 가하여 사과(司果)의 직을 내렸다. 예지터에서 면학(勉學)에 몰두하던 그는 1489년(성종20) 29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해, 후손들의 애석해함은 무한했다. 큰아들 열(悅)은 예지터와 황 산에, 둘째아들 회(恢)는 해리 칠곡 등지에, 셋째아들 성(性) 은 고수연동과 무장에 각각 세거하여 오늘에 이른다. 2) 안정(安貞) 안초(安招)의 후손으로 고창의 입향조(入鄕祖) 자전(子詮)의 증손인 황산 출신이다. 용모가 크고 용기가 뛰어난 그는, 뜻 한바 있어 붓을 던지고 무예와 병서에 심취하여 무과에 급제 하게 되고, 선전관과 의금부도사를 거쳐 여러 곳에서 왜적을 물리치는 전공을 새움으로서 품계(品階)가 선략장군(宣略將
軍)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하인 십 여 명을 데리 고 먼저 의병을 일으킨 제봉 고경명(霽峯 高敬命)을 찾아가 함께 싸우게 되었다. 병법에 능한 그는 고경명부대의 제반군 무를 맡아보면서 일진일퇴, 열심히 적과 접전을 벌였으나 중 과부적(衆寡不敵)으로 칠백의사(七百義士)와 함께 장렬히 전 사하였다. 왜적이 물러간 뒤 전사한 시신을 거두어 하나의 무 덤을 만드니 이를 금산칠백의총(錦山七百義塚)이라 하며, 그 의 아들이 혼령을 불러 황산등에 장례하고 위폐는 벽산사에 모셔져 있다. 울산인 경암 김노수(蔚山人 敬菴 金魯洙)가 그의 절개와 의 리를 담은 글이 있어 기록한다. 저 금산 골짜기를 우러러보니 순절한 금산 칠백의총이 높이 솟아있구나 살았을 때 이미 의리가 같았으니 죽은 뒤 같은 한 무덤 속에 서로 같이 있는 것이 마땅하도다 공은 이미 영혼을 불러서 옛날 고향 산으로 돌아가 장례 모시였네 늠름한 의(義)와 열(烈)은 해와 별같이 선명하고 비석에 이 사실을 새김은 앞으로 천만년의 긴 세월에 아름답게 그 이름을 전하고자 함이라.
3) 안진(安晋 1586~1637) 의사 안진(義士 安晋)은 죽산 안씨 시조 방준(邦俊)의 23세
손이고 고창에 터를 잡은 사과 공 자전의 5세손인 황산인이 다. 취령처사 복(鷲嶺處士 福)의 손자이고 자는 퇴보(退甫)이 며 호는 송강(松崗)인데, 1586년(선조19)에 태어나 1637년 52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일찍이 대대로 내려오는 가문 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효성이 지극하고 동기간의 우애가 깊 었으며 기개가 높고 절개가 굳음은 물론 의분을 참지 못하는 대장부였다. 1799년에 기록된 고정헌(高廷憲)의 [호남절의록]에 따르면, 안진은 1624년(인조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성제 신응순(省 齋 辛應純) 등과 함께, 각 마을에 격문을 보내 동지들을 모으 고 군량미를 운반 하는 등 의거에 적극 참여 하였다. 1627년 (인조5) 이괄 잔당들의 꼬드김과 명(明)과의 전쟁 관계 등을 고려한 후금이 조선을 침략했던 '정묘호란'에서는, 사계 김장 생(沙溪 金長生)에게 발탁되어 유철견, 김여성 등과 힘을 합 해 싸웠으나, 전황이 바뀌어 '강화 화의'가 성립되자 왕세자를 호종하다 여산에서 돌아 왔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에 서 조정이 굴욕적으로 항복 하는 것을 본 안진은 세상을 떠 날 때까지 두문불출하며 울분을 삼켰다. 그의 지조와 절개를 숭모(崇慕)한 고을 유림들이 뜻을 모아 '벽산사'에 위폐를 모 시고 매년 향사를 시행하고 있다. 4) 김노수(金魯洙 1878~1956)) 김노수는 일제강점기 한학자요 역사학자로서 자는 광언(光 彦), 호는 경암(敬菴)이며 본관은 울산이다. 전남 장성군 황룡 면 필암에서 태어나 7세 때 고창 고수로 이사하였고 만년에 는 부안(扶安)으로 옮겨 살았다. 고수 평촌으로 이사 온 경암 의 아버지는 평천정사(平川精舍)를 지어 아들이 공부하는데
불편이 없도록 배려하였고, 처음 계서 유락연(溪西 柳樂淵)에 게 사사받은 뒤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瑄)의 문인이 되어 일 년에 3개월씩 7년간 옥천 스승에게 가서 유숙하면서 수학 하 였다. 그런 다음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도서관에서 성리 학(性理學)을 주 전공으로 하는 한국사(韓國史)를 연구하였다. 경암은 시문에 능하고 배일사상이 투철하여 을사조약과 경 술국치에 망국의 시(亡國之詩)로 통분을 달래었고, 이와 같은 배일사상은 일제에 의하여 8개월간의 옥고를 치루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경암은 평촌에서 예지터로 옮겨 대부분의 생애 를 살면서 비석, 건물의 현판, 정(亭)과 누각(樓閣)의 게시물 등에 글을 지어 써주었다. 지금도 각 문중의 중요기록에 경암 의 글이 많이 남아 있으며, 예지터 옛 거주지에 경암의 일대 를 담은 비석이 서있다. 저서로는 경암집(敬菴集) 등 10여 책 42 여권에 이른다. 5. 마을의 문화유산 1). 효자각과 정려비(孝子閣과 旌閭碑) 죽산인 안건(竹山人 安建)의 효행을 기리는 정자다, 본시 효 도는 인륜의 근본으로 특히 유교문화권인 우리나라에서의 효 에 대한 인식은 높아서, 멀리 삼국시대부터 대를 이어 장려하 고 실행해 왔으며, 충효가 높아 임금의 인정을 받으면 가문의 영광을 넘어 마을과 고을의 영광일 수밖에 없었다. 안건은 1747년 영조임금 때, 효행으로 이름 높았던 무송(撫 松) 안방성(安邦成)의 아들로 태어나 부친의 엄한 훈도아래 평소 부모에 극진히 효도하고 형제간의 우애도 각별 했다. 모 친이 득병하여 위독한 상태에 놓임에, 동생들과 함께 돌아가
면서 손가락을 베어 피를 먹여드림으로서 생명을 회생 시켰 다. 그 뒤 자식들의 간절한 염원도 보람 없이 결국 돌아가시 자, 고수면 말치에 묘소를 모시고 십리 먼 곳임을 아랑곳 하 지 않고 삭망(朔望)으로 산소를 찾아 제례를 다 하였다. 먼 길이라서 묘소 가는 길옆에 느티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고 항상 쉬어가곤 했는데, 이를 본 현지사람들이 그가 쉬어가는 그 곳을 성휴(省休,살피고 쉬는 곳)라 불렀다고 한다. 들리는 말로는 호랑이와 표범이 매일 번갈아서 묘소를 지키고 있었 다하니 그의 효행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고, 부친에 대한 효 행도 모친의 경우와 같이 지극정성을 다 하였다고 전한다. 안 건은 나라에 충성심도 높아서 1800년(경신) 정조임금의 국상 이 나자 동산에 단(壇)을 설치하고 북쪽을 바라보며 슬피 곡 을 한 뒤 삭망(朔望) 3년제(祭)를 지냈다. 사람들은 그가 설 치한 단(壇)을 일러 망곡단(望哭壇)이라 불렀고, 지금도 황산 등의 최고 봉우리에 단(壇)의 유적과 내용을 새긴 비가 서있 다. 안건은 1830년에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서 거(逝去)후 57년이 지나, 전라도 유생들이 임금에게 안건의 효행을 알리고 예조에서 확인 하였으며 전라관찰사도 상소로 서 알린바, 고종이 효자, 충신, 열녀, 의사를 배출한 가문에 성은을 내리는 정려(旌閭)를 명하고 통훈대부 호조좌랑(通訓 大夫 戶曹佐郞)을 추서 하였다. 안건의 충효는 일시적으로 이행된 것이 아니라 여러 선조들 의 효행을 이어 가르침 받은 바 크고, 어진 품성과 충성심이 어우러져 이루어진 본보기로, 그의 후손들도 이에 따라 효성 을 실천하는 가문이 되었음은 '뿌리가 깊으면 멀리 흐른다'는 근심유원(根深流遠)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안건를 기리는 효자각은 황산마을 입구에 세워져, 지금도 후손들의 충효를
기대하는 듯 고요히 서있다. 2). 오괴정(五槐亭) 오괴정은 예지터 앞을 흐르는 예지천(禮智川)반석위에 세워 진 정자다. 노령산맥 골짜기마다에서 시작된 물이 모여 고수 천(古水川)을 만들고 사동 앞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과 고수천 의 지류가 합하여 예지천을 이룬다. 냇가에 큰 반석(盤石)이 있고 주변의 경관이 수려하여 죽산안씨 선조들이 유람하던 곳 이였으며, 지리가(地理家)들이 '인걸이 사는 영험한 지형' 이라 인정한 장소다. 사과공 안자전(司果公 安子詮)이 터를 잡고 처사(處士) 형제 흥(興)과 식(植)이 느티나무 다섯 그루 를 심었다. 느티나무를 심은 까닭은, 은행나무와 더불어 오래 사는 나무이고 빨리 자라며 뿌리가 무성하고 줄기와 잎이 밀 집되어, 그늘은 시원하고 바람이 맑아 마을 어귀에 많이 심는 정자나무로써, 억센 줄기는 강한 의지를, 고루 퍼진 가지는 조화된 질서를, 단정한 잎들은 예의를 나타내는 나무이기 때 문이다. 옛사람 왕진(王晉)이 느티나무 세 그루를 심어놓고 후손 중에 삼정승이 날 것이라고 말했다는 고사도 있음으로, 후손들이 재.관(財.官)의 덕을 입기를 바라고, 나무가 의미하 는 의지, 질서, 예의, 의리 등을 잘 지키며 살기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할 것이다. 모양현지(牟陽縣誌)에 의하면 나 무가 심어진 100년 뒤 후손 국태(國台)형제가 정자를 지었는 데 선조의 뜻을 받들어 이름을 오괴정(五槐亭)이라 하였다. 방장산과 문수산(취령산) 등의 첩첩된 산봉우리와 앞으로 보 이는 증산봉은 수려한 산세를 자랑하고, 예지천의 맑은 물이 뜰에 이르러 작은 못이 되어 잠깐 멈췄다 다시 흐른다. 울창 한 숲 사이에 서있는 늠름한 느티나무는 원래 다섯 그루였으
나 세월의 부침에 따라 두 그루는 죽고 세 그루만 남아있어 도 여전히 사철 내내 아름다운 경관은 퇴색되지 않고 청량한 기운까지 가득하니 가히 선경이라 해도 좋은 곳이다. 오괴정에 팔경(八景)이 있다 방장제월(方丈霽月); 비 갠 뒤 방장산의 달은 밝은데 취령숙운(鷲嶺宿雲); 푸른 취령산(문수산)에 구름이 잔다 증봉청람(甑峰晴嵐); 증산 봉우리에 산바람 맑고 고성낙조(古城落照); 고성산 줄기위에 노을이 진다 평교목적(平郊牧笛); 넓은 들판에 목동의 피리소리 한사원종(寒寺遠鐘); 외로운 절간에서 쇠종이 운다 사야도화(四野稻花); 앞 들 가득히 나락 꽃 피는구나 천가취인(天家炊絪); 집집마다 밥 짓는 연기 피어오른다. 본래 세워진 정자는 풍화에 무너지고 1571년(선조4)에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고즈 넉이 서있는 오괴정은 선비들의 시연장소로, 마을의 모임장소 로, 또는 풍류와 휴식을 위한 장소로, 오백년 풍상을 이고 여 기에 자리 잡았다. 이곳에서 놀다보면 세월의 흐름도 나이를 먹어감도 잊은 채, 세사의 시름을 떨칠 수 있다. 가는 세월을 누가 잡을 수 있겠는가. 지금은 하천정비로 인해 예지천의 물 길이 바뀌어, 연못의 물은 마르고 연(蓮)도 죽었으며 못 가운 데 만들어진 작은 섬에 백일홍만 홀로남아 꽃을 피운다. 광산인(光山人) 춘강 김영태(春岡 金永台)가 오괴정의 풍광 을 노래한 시가 있어 소개한다. 오괴정 운(五槐亭 韻)
小樓獨持立天基 좁은 땅에 작은 누각 뛰어나게 지었네 石上靑槐栽幾時 돌 위에 느티나무 심은 지 몇 해나 되는고 三伏盛炎誰說酷 삼복더위 혹심하다 누가 말 했던가 五株蕃樹己多枝 다섯 느티나무가지 많이 늘어졌네 半畝淸潭一鑑水 반묘의 맑은 못 거울같이 물이 맑고 千年明月又長期 천년의 밝은 달은 더욱 오래 비치네 世世相傳后孫事 대대로 서로전함은 후손의 일이려니 誠心守重莫爲遲 정성으로 지켜서 오래오래 유지하세 (* 백원철 교수 시 해석 다시 부탁!!) 3). 풍암정(豊巖亭) 황산은 노령산맥에서 뻗어 온 산줄기가 끊어졌다가 다시 일 어나 용(龍)이 머리를 쳐드는 것 같은 지세다. 용의 이마 부 위에 해당하는 위치에 3~4명이 함께 앉을 수 있는 큰 바위 가 용의 관처럼 이마부분에 존재한다. 서남쪽으로 여러 산봉 우리가 보이고 앞으로 고수천과 예지천이 흐르며, 지금은 없 어졌지만 들 가운데 작은 언덕은 섬처럼 보이는데 목 백일홍 이 심어져 있어 풍광과 전망이 아름답다. 이 바위의 이름을 지은 분은 안처사 무송(安處士 撫松)으로, 평소 부모에 효심이 정심하였던 안처사는 부모님이 돌아가시 자 뒷산에 묘소를 마련한 뒤 묘소관리에 힘을 쏟았다. 그는 묘소주변 산에 소나무 씨를 뿌리고 정성으로 가꾸어 푸르게 하였으나, 고종17년 병진(丙辰) 봄에 가뭄이 극심하고 송충이 까지 극성을 부려서 소나무가 죽어가므로, 안처사가 안타까움 에 나무를 보듬고 울고 있자, 갈 까마귀 떼가 나타나 송충이 를 잡아먹어 소나무를 살렸다는 설화는 안처사의 효심에 하
늘이 감동 했다 할 것이다. 안처사는 자주 성묘하면서 길목에 있는 큰 바위에 앉아 휴식하고 사색하는 경우가 많았다. 바위 에 앉아, 앞에 넓은 들이 있고 멀리 산봉우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으며 맑은 시내가 흐르는 풍경을 보면서 풍년을 기원 하게 되었고, 들의 풍요로 집안을 살찌우고 산의 정기를 받아 문장을 창성케 함을 염원하게 되어, 바위의 이름을 풍암(豊 巖)이라 이름 하였다. 바위의 생성이 언제였는지는 알 수 없 어도 불변성과 영원성을 봐서 이 바위도 아주 먼 옛적에 생 긴 것이라 추정해 볼 수 있는바, 수 천 만년을 지나도록 이름 이 없다가 안처사에 의하여 이름이 지여진 것은 뜻 깊은 일 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증손 홍수(弘壽)와 고손 석필(錫馝)이 철종13년 임술(壬戌), 바위 동쪽 편에 정자를 지어 풍암정(豊 巖亭)이라 이름 하고 기문(記文)을 새겨 세상에 알려지게 되 였으니, 안처사의 효심은 대를 이어 내려와 아들과 손자, 증 손, 고손 모두 효심이 깊었다 한다. 정자를 짓고 뿌듯한 마음 과 선조를 추모 하는 마음을 표현한 시(詩)가 있었지만, 세월 이 지나면서 망실 되었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고손 석필이 자작한 글이 있다 뫼 뿌리는 층층이 높으나 그 그친 곳은 저 바라보이는 남쪽이로세 바위마다 전해오는 발자취를 우러러 여러 가지로 상상하여 보는구나 소나무에 무송(撫松)이라 걸고 남겨보려고 그 소나무 자꾸만 어루만져보네 풍암(豊巖)이라는 높은 이름과 함께 야담(野談)으로 지금까지 전해오네
8월에 피는 벼꽃은 가을비 내릴 때 노랗게 익고 마을의 노적가리는 저녁노을을 머금었네 풍년가의 한 곡조는 강호에서 멀리 신나게 들려오는데 나라를 근심하는 평생의 뜻을 기억하리라
4). 만회당(晩悔堂) 만회당은 죽산인 안영선(安영善 1824~1903)과 관련이 있 다. 안영선의 자는 명서(明瑞) 호는 만회(晩悔)다. 학문과 휴식을 위하고 만년(晩年)을 자연과 벗하고자 그의 황산가옥 오리감나무 옆에 공부방과 대청을 초가로 마련하였 다. 세월이 흐르며 원래의 초가가 쓰러져 집은 헐어내고 목재 만 추려 감나무 밑에 보관하였다. 그 후 1950년 후손들이 뜻 을 모아 그 목재를 이용, 망북단(望北壇)이 있는 봉우리 아래, 되도록 옛 모습을 살려 기와로 다시 지었지만, 건물이 들어선 자리가 인가와 떨어져 있어 찾는 사람들이 없이 한산하자, 1989년 다시 모금하여 마을 입구 풍암정 아래에 대청마루 2 칸과 기와지붕을 얹어 이전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만회당 아 래 길가에 시정을 짓고, 만회당은 양반들의 휴식장소로, 아래 시정은 일꾼들의 휴식장소로 이용했다고 한다. 동 건물에 망 북단기(望北壇記)가 게시되어 있다. 망북단 또는 망곡단(望北 壇 望哭壇)은 효자 안건(安建)의 충심을 나타내는 장소로서 황산의 최고봉에 유적이 남아 있다.
5). 추원재(追遠齋) 입향조 사과공 안자전(安子詮)의 제례를 위해, 입향 한지 500여년이 흐른 다음 1941년(계미) 그의 묘소 아래 지어졌 다. 세월의 부침에 따라 비바람에 제실의 일부가 부서지고 무 너져, 대종중의 결의를 거쳐 2000년 재실을 중수하고 돌담장 을 설치하였으며 추모비를 세우는 등 7000여 만 원의 예산 을 들여 대대적인 공사를 시행함으로서 면모가 일신 되었다. 이곳에서 매년 음 10월5일 시제행사를 치른다. 6). 고인돌 유적 예지터의 고인돌은 원래 12기였던 것이 문화재 관리소홀로 지금은 마을 뒤쪽에 1기, 오괴정 뒤 구릉의 정상 대나무 숲 속에 2기가 남아 있다. 이처럼 고인돌이 10기가 넘도록 있었 다는 것은 이곳이 선사시대 삶의 터전 이였음을 증명한다. 7). 탑 거리 탑 거리는 황산마을과 옛 공판장 사이에 있는 곳으로 탑이 있고 느티나무 두 그루와 소나무 한그루가 있었지만, 탑은 없 어지고 느티나무와 죽어가는 자귀나무, 예지천에서 갈라져 흐 르는 맑은 시냇물이 남아 있다. 풍수학에서 기(氣)의 흐름이 약하거나 액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비보(裨輔)를 설치 하는 경우가 있다. 비보는 주로 탑이나 거북과 해태 등의 석 조물을 만들어 새우기도 하고 나무를 심기도 하며 숲을 만들 기도 한다. 예를 든다면 좌청룡 우백호(左靑龍 右白虎) 중 어 느 한곳이 약하면 비보를 새워 보충하는 것으로, 황산 앞들의 탑과 나무도 그런 비보(裨輔)의 역할일 것으로 믿어진다. 정 월 보름 마을 굿을 칠 때, 탑 거리에서 성근지게 액막이 굿판
을 벌였다는 이야기는 이를 뒷받침 한다. 황산은 마을 앞에 시내를 끼고 있지 않아 대부분을 우물에 의존함에 따라, 옛 시절 탑 거리의 맑은 물은 아낙네들의 빨래터와 김장용 채소 를 씻는 곳으로 사용 하였다. 8). 공동우물 황산마을의 공동우물은 죽산 안씨가 고수에 터를 잡은 시기 와 거의 같다고 한다. 5백 여 년의 오랜 세월을 마을 사람들 의 얘기 터로, 식수원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마을의 역사라 할 만 하다. 우물 옆에 사과공의 17세손, 시인 안재운이 고향 을 사랑하고 그리며 세운 애향시비가 서있다. 황산마을 안재운 오백년된 우리마을 살기좋은 황산마을 뒷산은
병풍이요 앞개울은 놀이터라
뒷산에
올라가서 병정놀이 진돌이등
탁그레
감풍정은 아낙네의 빠래터라
봄이오면 풍암정에 느티나무 새싹나고 여름이면 동네주민 모두나와 피서하고 장자보들 배바위들 바라보니 시원하네 가을이면 벼이삭들 황금빛이 아름답다 무넘등을 넘어가면 고수초등 학교가고 무넘등
무넘등
물이넘어 온다네
고수다리 맑은물에 빨가벗고 수영하고
솔솔부는 바람등은 언제든지 시원해라 지나가는 길손이여 피곤하면 쉬어가고 목마르면 물을먹고 편안하게 쉬어가소 살고있는 형제들아 제할일을 열심하여 대대손손 우리마을 영원토록 지켜가세
9). 구 면사무소 일제에 의해 1914년 3월1일 부군폐합령이 발령됨에, 고사 면과 수곡면이 통합되고 8개 법정리를 둔 고수면이 탄생했 다. 평촌은 많은 행정구역의 변천 속에서 개소된, 고수면사무 소가 들어섬으로서 일약 행정의 중심지, 면소재지가 되는 영 광을 누렸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면사무소 부근의 상업은 활성화 되지 않아 발전되지 않았고, 그 흔한 행정서사하나 없 이 예전그대로의 농촌마을이었으며, 면사무소가 떠난 지금은 더욱 쓸쓸한 마을로 남아 있다. 옛 면사무소건물은 2대에 걸 친 도예가 나희술의 공방을 겸한 작품전시실이 자리 잡았다. 10). 물레방앗간 물레방아는 생활의 편리함을 떠나서 모양이 아름답고 물의 낙차 등이 환상적이라서, 나도향의 소설 '물레방아'와 같이 문 학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낭만의 장소다. 물레방아는 당시 재래의 원시적 방아 찧기에서 물이란 자연을 이용하여 획기 적인 노동력 절감을 가져온, 가히 혁명이라 할 만 한 일이였 다. 도구통(절구)으로 곡식을 찧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디딜 방아로 찧어도 벼 한가마를 찧으려면 하루 온종일 걸리던 시
절에, 물레방아는 3~40분 정도로 시간을 절약 할 수 있고 인 력이 거의 필요가 없음으로, 방아를 돌려놓고 옆 사람과 잠깐 수다를 떨고 나면 하얀 쌀이 되어 나오는
놀라운 성과였다.
평촌의 물레방아는 고수천을 막아서 자귀보(짜구보)를 만들어 수로를 건설하고, 농사철에는 농사에도 이용 했으나, 이 물은 대부분 물레방아를 돌리는데 사용하였다. 인근의 몇 마을이 곡식을 찧는데 이용하였고, 밤이면 청춘남녀의 데이트장소로 유명했다. 물레방앗간에서 키운 사랑이 결실을 맺어 행복해진 경우가 많았지만 비극으로 끝나 이별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11). 빨래터와 느티나무 평촌 마을 앞, 항상 물이 흐르는 물레방아 수로 변에 반석을 여러 장 깔아서 공동 빨래터로 사용하였다. 빨래터 옆에 느티 나무가 할머니의 등처럼 구부러져 있었고 아낙들의 즐거운 얘기소리는 끊이지 않고 들렸었다. 장날이면 아이들이 장에 가신 아버지 어머니가 사들고 오실 군것질감과 좀처럼 맛볼 수 없었던 생선 몇 마리를 상상하면서,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기대의 장소이기도 했다. 지금은 느티나무도 죽어버리고 고창 시장 쪽을 향해 기다리는 아이들도, 아낙들의 자식자랑, 남편 자랑, 세상 돌아가는 얘기, 칭찬과 흉보기, 어느 것 한 가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느티나무는 1982년 9월 20일 보 호수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4월 20일 나무가 없어지면서 해제되었는데, 고수면 황산리 115번지에 소재했고 수령은 250여년 이였다고 한다. 12). 보리마당 (들 마당) 예전의 봄 농사는 보리를 베고 난 뒤 근 한 달여에 걸쳐서
모내기를 하고, 벤 보리는 쌓아 놓았다가 모내기가 끝나면 타 작을 시작했다. 집안이 넓은 집은 안마당에 보관 할 수 있었 지만, 집이 좁고 여유가 없었던 사람들은 마을의 공터에 보리 마당(들 마당)을 만들어 놓고, 공동으로 보리와 콩도 타작하 고
밭곡식을 햇볕에 말리는데도 사용했다. 황산과 예지터의
보리마당은 마을 공터에 만들어졌었고 평촌의 보리마당은 시 냇가 모정 옆에 만들어져, 수 백 년 수령의 느티나무 사이사 이에 보리노적가리가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각 마을의 보리 타작은 모내기를 끝낸 뒤, 타작 날짜를 의논하여 품앗이로 공 동 작업을 하였다. 힘든 작업이라 그에 맞는 노동요 하나 쯤 있을 법 한데도 아는 사람이 없다. 예지터의 보리마당은 집이 들어섰고 평촌의 보리마당은 느 티나무도 다 베어지고 겨우 두 그루만 남아있으며, 사람들의 노래와 웃음소리도 사라지고 잡초만 무성한 버려진 땅이 되 어 버렸다. 13). 지정여관 지정여관은 국가기관에서 지정하여 주로 손님접대용으로 사 용하는, 조선의 객사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숙식을 같이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주막을 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 다. 구 면사무소 옆에 있었던 지정여관은 마당에 수 백 년 수 령의 팽나무가 서있었고, 주막을 이용하던 사람들의 숱한 애 환이 서려 있던 곳이기도 하다.
특이하게도 일제시대에는 일
본군 1개 소대가 주둔하여 숙식을 제공받았고, 6.25사변 중 에도 인민군소대가 주둔했었다. 지정여관에 주둔했던 일본 군 인들이 공출(供出)을 받았는지 돈을 주고 샀는지 알 수 없으 나, 닭을 한 마리 구해서 죽이지 않고 산채로 털을 다 뽑았다
가 놓쳤다. 닭은 털이 뽑힌 채 한사코 도망을 치고 한국말이 서툴러서 당황한 일본 군인들이 마을사람에게 "꼬꼬가 우와 개(윗옷)를 벗고 도망갔는데 보았느냐?"고 물어서 주민들의 폭소를 터뜨리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7. 마을의 전설과 이야기 1). 연꽃방죽(쟁침재) '연꽃 방죽'은 효심에서 만들어진 연못이다. 안씨의 입향조 사과공(司果公)의 묘지에 물이 비치면 좋겠다는 지관의 말을 듣고, 후손들이 일제의 어두운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인공으로 연못을 만들고 연(蓮)을 심었다. 연(蓮)은 우리의 조상들이 선 비의 품성을 지니고 있다하여 좋아하던 꽃인바, 연이 심어지 지 않은 작은 못까지 '연못'이라 부르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황산의 연꽃 방죽은 경관 좋은 곳에 자리하고, 꽃이 피 기시작하면 그 아름다운 자태와 그윽한 향기를 맡으러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며, 길옆을 지나면서도 향기를 맡을 수 있고 꽃을 볼 수 있어 유명한 곳이다. 2). 주막 술과 여자, 잡기와 소음이 함께 존재하는 주막은 낭만의 장 소임에 틀림없다. 유행가 가사에서 시인의 노래에서 주막집의 정겨운 풍경들이 소재로 많이 쓰여 진 것을 보면 그런 것 같 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낭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마누라 반지를 팔아서 투전과 넉동치기(윷놀이)에 빠져 들기도 하고, 가족은 굶거나 말거나 뒤주 밑바닥 까지 긁어 팔아 화사한
주모의 미소에 빠져서, 또는 술과 고기 안주에 넋이 나가서 주막집에 눌러앉아 날밤을 새기도 한다. 지금은 없어져 옛 명성만 남은, 물레방앗간 옆에 있었던 평 촌의 주막은 인근 주민들의 웃음과 한숨이 있었고, 솔솔 풍기 는 국밥냄새는 배고픈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3). 물냉기 등(무름 등 또는 무넘 등) 물냉기 등은 고수 초등학교로 등교하는 학생들의 지름길에 있다. 황산자락에서 뻗은 산줄기가 예지터로 향하는 중간 언 덕배기다. 어른들의 말에 의하면 옛 이름도 '물냉기 등'(무름 등)이라 하였고 실재로 물이 넘었는지는 알 길 없어도, 물이 넘는 것과는 상관없이 이름으로 내려오다가, 조산저수지가 생 기고 저수지의 물길이 물냉기 등을 거치므로 하여, 명실공이 제 이름을 찾은 것으로 옛 이름이 사실화 되었다. 풍수지리학 에 '물이 재를 넘으면 맥이 끊기고 도로가 재를 넘으면 맥이 끊기지 않는다'했다. 그런데 조산저수지 수로가 평촌과 예지 터 옆을 통과하여 황산 앞을 가로질러 매바우들로 흘러가니, 이 수로로 인하여 각 마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자못 궁 금하다. 4). 섬백섬 '섬백 섬'은 황산 옆 들 가운데 섬처럼 보이는 둔덕인데, 지 금은 농지정리 여파로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도, 예전에는 그 곳에 목 백일홍이 심어져 있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고수 의 낮은 지역은 옛날에 바다였다고 하며, 몇 가지 그럴듯한 이야기도 있다. 물넘기 등의 저수지 수로를 파다가 조개껍질 과 정치망용 말뚝을 발견 했고, 광산김씨(光山金氏) 제각이
있는 전불 뒷산 중턱의 '빌 바위'(별 바위), 일명 '배 바위'는 배 정박을 위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구멍 흔적이 남아 있다. 문수산 정상부근 장성과의 경계지점에 '청어 바위'가 있 고, 연동 뒤편의 '대추나무골'은 항로를 지나던 대추를 실은 배가 이곳에서 전복되는 바람에, 그 씨앗이 발아되어 많은 대 추나무를 자라게 했고, 그 이유로 동네 이름을 지었다는 등이 바다와 관련된 이야기 들이다. 그 외에도 고창의 낮은 지역이 바다였다는 설을 뒷받침하는 것들은, 아산 반암 뒷산 중턱에 '선(船)바위'가 있고 해리 경수산 정상 부근에 '배맨바위'가 있 다. 방장산의 '벽오봉'도 오동나무를 실고 가던 배가 뒤집히면 서 오동씨가 떨어져 이름 하였다고 한다. '섬백 섬'도 바다와 연관 지어진 환상의 섬으로서 조선 예종 임금 때 귀양살이용 섬으로 지정 되었다는 설이 '작전도본'에 기록 되었었다고 전해진다. 5). 솔대거리 예지터의 솔대거리는 마을 앞 천변을 따라 나있는 길을 말 한다. 솔대는 솟대 또는 당간지주의 잘못된 표기인지 알 수 없으나,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는 것을 축하하기 위 해 깃발을 세운 곳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마을 사람들은 전한다. 8. 민간신앙과 민속및 마을조직 1). 당산 마을마다 당산은 있어 정월 보름날 옷을 입히고 성근지게 농악을 친 것은 분명한데, 특별한 제례의식이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황산의 당산은 마을 서쪽 입구에 선돌로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주민들의 기억에 의하면 당산 굿을 치면서 남녀 간의 줄다리기와 당산 줄 감기는 하였어도 제례는 시행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예지터는 오괴정 옆 큰 나무를 당산으로 하고 깨끗한 사람을 골라 제주로 삼아 당산제를 모셨다고 마 을주민이 희미하게 기억하는데 확실치는 않다. 2). 향약 마을의 상부상조를 위하고 위친과 침목을 위한 마을계가 각 마을마다 있었지만 기록도 전해오는 얘기도 없다. 다만 황산 에 '상부(相扶)계와 황산약(黃山約)이 있었다. 황산약의 계칙 과 회원명단 등이 6.25사변 전까지 당시의 동계장(洞契長) 안 남연(安南淵)씨에 의하여 관리되고 있었으나 전쟁의 와중에 소실되었다. 3). 민속 황산, 예지터, 평촌 모두 특별한 민속은 없었다. 다만 정월 열나흘부터 시작되는 농악, 백중날 세벌메기가 끝나고 '들 독 들기' '술맥이' 또는 황소를 탈 '상일꾼'을 뽑는 행사, 추석의 행사와 세시풍속 등, 대게 남쪽에서 행하는 민속놀이가 여기 에서도 비슷하게 행해졌다. 그중 황산에서 마을 굿을 정월 14일부터 말일까지 계속 쳤다는 말이 전해지는 것이 특이하 다. 9. 마을의 기관과 시설 1) 고수초등학교 고수면 황산리 215번지(고수로93)에 세워진 고수초등학교는
1934년6월1일 개교한 뒤 72회에 걸쳐 6031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80여년 역사의 유서 깊은 학교다. 한때는 학생 수가 수 백 명이 있었을 정도로 제법 큰 교세를 자랑하였으나, 농 촌지역을 휩쓴 산업화의 물결에 학생 수는 해가 갈수록 줄어 들어, 지금은 전교생이 60여 명 뿐 인 소규모 학교가 되었다. 이렇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교사와 학생, 학부모가 삼위일 체가 되어 알찬 교육을 이루어 내고 있고 2010년 9월 1일자, 공모교장출신인 이강한교장이 부임하여 "창의와 사랑으로 꿈 을 키우는 교육"을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브랜드사업으 로는 저작권보호의식함양교육과 한자지도에 힘을 쏟고 있으 며, 밑다짐사업으로 탄탄한 학력다지기와 생활영어교육강화에 앞장서고 있다. 학생 개개인의 잠재력 계발을 위해 플롯, 배 드민턴, 판소리, 무용, 축구, 사물놀이, 영어 등 다양한 방과 후 교육을 실시하여, '고 한상신교사 추모 예술제' 사물놀이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교내에 병 설유치원이 설치되어 12명의 어린이를 돌보고 있는데, 농촌 지역의 사정을 감안하여 오후 5시30분까지 운영한다. 2) 고창단위농협고수지소 1969년 9월13일 '고수단위농업협동조합'이 창설되어, 역대 조합장과 조합원들이 힘을 합쳐 역동적으로 운영한 결과, 2000년도에 총자산이 300억 원에 이르렀으나, 2006년 8월 21일 '고창농협'과 합병됨에 따라 '고수농협'은 사라지고 '고 창농협고수지소'로 다시 태어났다. 산하에 하나로마트, 양곡저 장창고, 냉동창고, 농약자재창고 등을 관리하고 있다. 3) 고수우체국
고수면 황산리 264-4번지의 '고수우체국'은 1965년 12월 20일 민간자본으로 세워진 별정우체국이다. 지역경제의 소규 모 내지는 침체에 따라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예금고 70억 원을 보유하고 있다. 주변에 산업단지가 들어설 예정으로 농 지보상이 진행 중에 있지만, 과거 농공단지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예금고의 상승 등 우체국 업무에 보탬이 될 것이라 기대하기보다, 별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회의적 시각이 지 배적이다. 4) 농업기술센터 고수농어민상담소 원래 고창군농촌지도소 고수지소였다가 기관이 축소되어 고 수농어민상담소가 되었다. 농민들의 농법지도와 상담을 겸하 여 시행하고 있다. 5) 고창군보건소 고수지소 고수면 황산리 269-4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예방접종과 치료 및 순회 진료를 실시함으로서, 심각한 고수지역의 노령 화에 따른 노인들의 건강관리에 한몫 단단히 하고 있다. 6) 고수주민자치센터 주민들의 휴식과 생활강좌를 실시하고 있는 이곳은, 경로당 이 자리하고 작은 도서관이 있으며 노래, 스포츠양춤, 요가, 국악 강좌를, 강사를 초빙하여 실시하는 고수주민들의 문화공 간이다. 7) 고수교회 고수천가 모래둥치에 누가 심은 줄도 모르는 이태리포플러
여러 그루가, 하늘을 찌를 듯 서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 었다. 이탈리아가 원산인 포플러는 미국산 미루나무와 유럽 양버들의 잡종으로,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심어지기 시작했는 지는 모르겠으나, 평촌강변의 포플러도 큰 키에 멋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베어져 없어지고 1965년부터 십자가를 머리에 인 '고수교회'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고수교회는 주민의 정신문화 향상과 교리전도에 힘쓰는 한편, 김성수 담 임목사와 200여명의 신도들은, 겨울철 연탄과 쌀을 분배하고 김장해주기와 70세가 넘은 노인들의 목욕봉사를 실행하며, 일 년에 한번씩 600여명을 대상으로 경노잔치를 벌이는 등 ' 사랑나누기'를 성심으로 행하고 있다. 8) 경로당 농어촌지역 생활환경 개선사업의 일환으로 황산, 예지터, 평 촌, 문화마을에 경로회관이 설치되어, 대부분 독거세대 및 부 부 2인세대인 지역주민들의 휴식장소요 생활터전이 되어준 다. 여기에서 공동으로 식사도 하고 휴식을 겸한 놀이를 하는 등, 취식을 함께하며 외로움을 달랜다. 농한기에는 옛 기술을 살려 작은 돈벌이를 하기도 한다. 9) 모정 황산은 풍암정과 만회당을, 예지터는 오괴정을 여름철 모정 으로 쓰고 있다. 문화마을은 마을 조성당시 모정도 함께 세워 졌고, 고수천변에 있었던 평촌모정은 늙은 느티나무와 냇물이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자랑했으나 퇴락하여, 관의 지원과 주 민들의 협조로 전통양식으로 신축하고 '평락정(平樂亭)이라 이름 하였다. 현판글씨는 고은 안병홍 (古隱 安병홍)의 작품
이다.
10. 마을의 인구현황과 성씨별 분포 1) 인구의 변천 황 산
평 촌
문 화
예 촌
합 계
구분 세대수 인 남 구 녀 계 세대수 인 남 구 녀 계 세대수 인 남 구 녀 계 세대수 인 남 구 녀 계 세대수 인 남 구 녀 계
2006 46 59 57 116 26 29 33 62 59 98 94 192 45 59 55 114 176 245 239 484
2007 43 56 51 107 23 28 31 59 58 88 86 174 49 64 50 114 174 236 218 454
2008 45 58 56 114 23 28 30 58 57 85 80 165 47 60 44 104 172 231 210 441
2009 45 57 53 110 21 25 28 53 58 83 78 161 54 68 54 122 178 233 213 446
2010 46 57 53 110 23 28 26 54 55 70 68 138 52 63 53 116 176 218 200 418
인구와 세대수의 변천이 크지 않은듯하나 기왕에 갈 사람은 모두 떠나고, 어쩔 수 없이 집을 지키는 노인인구들이 대부분 이다. 심각한 것은 65세 이상 노인이 114명으로 27.2%에 달 하여, UN이 정한 노인인구 구분에 따른 '초고령사회(20%이 상)'가 이미 몇 년 전에 넘어섰다는 점이다. 농촌의 결혼상대 도 국내에서는 찾기 힘들어 중국, 태국, 필리핀, 베트남 등지 에서 신부 깜을 구하는 관계로, 다문화가정이 4가구에 이른 다.
2) 성씨별 분포 (기타; 기관, 창고, 시설물, 비거주자 등) (1) 황산 죽 산
나 주
창 원
해 주
광 산
한 양
심 해
황 해
인 동
전 주
안씨 28
정씨 1
황씨 1
오씨 1
김씨 3
조씨 1
김씨 2
황씨 1
장씨 1
이씨 1
기타 6
(2) 평촌 연
광
함
죽
영
나
김
밀
금
장
이
순
여
연
제
안
산
평
산
광
주
해
양
성
수
천
흥
양
안
주
이
김
이
안
정
정
김
박
라
황
서
안
진
차
고
씨 2
씨 2
씨 1
씨 4
씨 1
씨 1
씨 2
씨 3
씨 1
씨 1
씨 1
씨 1
씨 1
씨 1
씨 1
(3) 문화마을 죽
순
함
밀
평
전
연
광
김
영
안
교
강
남
신
산
흥
양
양
산
주
안
산
해
광
동
환
릉
양
안
안
안
박
박
신
이
이
김
김
김
김
노
유
홍
주
씨 1 옥
씨 1 여
씨 1 경
씨 3 행
씨 1 문
씨 5 여
씨 1 나
씨 2 이
씨 6 영
씨 1 전
씨 1 수
씨 1
씨 1
씨 3
씨 1
천
양
주
주
경
산
주
천
성
주
원
기
조
진
최
기
송
송
임
서
정
정
백
타
씨 1
씨 3
씨 2
씨 2
씨 1
씨 1
씨 1
씨 3
씨 1
씨 1
씨 1
9
(4) 예촌 남양
전주
죽산
광산
고흥
나주
함풍
경주
창영
울산
강릉
광주
홍씨 3
최씨 1
안씨 7
김씨 1
류씨 2
나씨 1
이씨 1
김씨 1
조씨 1
김씨 1
유씨 3
이씨 1
기타 29
11. 마을의 전망 농촌지역의 황폐화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보다 낳은 삶을 위해. 문화생활의 만끽을 위해 젊은이들이 떠나버린 농
촌은 늙고 병든 사람들의 요람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절망적 제상황의 황산리에 희망의 무지개가 떠올랐 다. 농촌지역의 활력과 일자리창출,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위 해 역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이강수군수의 [일반산업단지 조성사업]이 그것이다. 고수면 봉산리와 황산리 일대 85만여 m2에 2013년 12월 준공을 목표로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문 제는 산업단지의 활성화에 있다 하겠는데, 얼마나 유수한 기 업이 유치되어 고용창출과 지역경제에 큰 효과가 있을 것인 지, 또는 베드타운조성 등 차후조치들이 황산리에 얼마만한 프러스 요인으로 작용할 것인지는 단지조성 후 펼쳐질 파급 효과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도로건너 입접에 대단위 산업단지가 생기는 것은 고무적인 일로 황산리의 장래에 도 움이 될 것이라는 희망적 기대를 가져본다. 끝
0. 도움주신분 이기화(전 고창문화원장) 안균환(공판동) 안두환(황산) 안재운(매산장학회장) 안주태(공판동) 이상용(전 고수농협장) 최병일(공판동) 안병홍(고은서실) 안재연(황산리장)
이창범(평촌리장) 송기수(문화마을리장) 라종남(예촌리장) 고수면사무소 직원들 0. 관련자료 [고창 정자문화] 고창문화원 2010년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2003년 [고창의 맥] 이기화 저 1991년 [고창의 숨결] 이기화 저 1998년 [고창 충의사] 이기화 저 2001년 [고창군지] 고창군 2009년 [부안군지] 부안군 2009년 [죽산안씨 대동보] [벽산사지] [한국농경50년사] 미상(농림관계보고서) [전라문화의 맥과 전라북도 인물] 미상 [두산백과사전] [네이버 인물정보] [국가지식포럼] 0. 참고 - 사과; 五衛의 정6품 軍職. 공신과 공신의 嫡長子孫을 후대 하고, 待機文官에게 봉록만 지급하기 위하여 임명하는 직무 없는 관직. - 판관; 신라, 고려 조선시대 벼슬, 조선시대 중간에 없어졌 다가 중요지역 또는 직책에 다시 종5품의 판관을 둠.
- 지평; 사헌부 정5품 관직, 사헌부 淸宦職으로 문과 급제자 중 강직한 선비를 임명, 吏曹의 銓郞과 함께 조선시대 士族社 會의 틀을 지탱하는 역할. -시정; 여름 휴식을 위한 건물, 전라도 사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