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의 마을(무장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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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과 효의 정신을 이어받은 무장면의 소재지 무장리 1. 마을의 위치와 유래 1) 마을의 위치 무장면 무장리는 지방도 796호를 이용, 고창읍에서 서남쪽으로 아산면을 거쳐 공음면, 법 성포 방향으로 약 14km를 도로 표지판에 표기된 ‘무장현 관아와 읍성’을 보면서 가노라면 면소재지에 이르며, 군도 20호선과 군도 11호선이 지난다. 2) 마을의 유래 무장리는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에 속하는 법정리로 무장현의 소재지였으므로 무장이라 하였다. 조선 말기 무장군 이동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중거(中巨) ․ 정거(井巨) ․ 하거(下巨) ․ 사죽(射竹) ․ 덕림 ․ 고라 ․ 고라 ․ 이동 ․ 상성 각 일부를 병합하여 무장리라 하고 무장면에 편입하였다. 무장리는 무장면의 중심부에 있다( 2010년 3월 현재 면적은 1.04㎢로 밭 0.44㎢, 논 0.22 ㎢이며, 총 299가구에 632명(남 318명, 여 314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정거리 ․ 시거리 ․ 하거리 ․ 금정리 4개의 행정리와 시거 ․ 정거 ․ 중거 ․ 하거 ․ 솔때거리(사죽리) 등 자연부락 으로 이루어졌다. 시거는 정거 아래 큰 길가에 있는 마을로 무장장이 서기 전에는 길가에 상점이 늘어서 있었다고 한다. 정거는 시거 서쪽에 있는 마을로 큰 샘이 있었고 이 샘은 무 장의 만석군 김영곤씨가 마을주민들을 위해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금정리는 금정샘이 있었 는데 이샘은 무장현감들이 길어다 먹을 만큼 물맛이 좋았다고 한다. 중거는 무장리의 중간 에 있는 마을이고, 하거는 무장리의 가장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다. 정거리 아래 무장리와 만화리의 경계에 있는 솔때거리는 풍수지리학상으로 불이 많은 곳이라 하여 이를 막이 하기 위해 오리모양의 솟대를 만들어 세웠다고 한다. 또는 작지만 야멸차고 단단하여 활을 만들 때 사용한 시누대가 많다 하여 사죽리 라고도 불리운다.

2. 마을의 자연환경 무장리는 노령의 줄기인 고산에서 시작하여 왕제산, 옥녀봉, 한제산 줄기로 이어지는 산들 로 둘러 쌓여 있는 형국이다. 들로는 정거리와 사죽리 사이에 있는 무장들, 원안들 그리고 하거리에 있는 뒷들이 있고, 남산넘어골, 된재골 등이 있다. 그리고 무장면 백양리 기슭에서 발원하여 강남리에서 주진천(인천강)에 합류하는 하천으로 무장천이 있다. 무장천은 무장면에서 발원하기 때문에 무장천으로 불리고 있다. 高敞郡誌의 하천 현황에 보면 무장천은 주변 하천을 합류한 전체의 명칭이다. 대체로 무장천의 유역이 옛 무장 관내 이기에 그렇게 불렀다. 무장천은 선동천, 월계천, 학천천, 정동천, 대산천과 궁동천, 송현천, 강남천, 고라천, 죽산 천, 죽청천, 등의 지류가 있다. 최종 강남리에서 주진천에서 합류한다. 주변에는 고라저수지 가 있고 논을 관류하면서 망치산을 끼고 돈다. 무장천은 유로 연장이 8km이다. 무장천 주변에는 지방도 15호선이 지나고 있으며 주변의 농경지는 논과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3. 마을의 입향조 - 무장리의 무장 김씨 무장 김씨들은 충의가 빛난 성씨이다. 장사 김씨들은 공신록에 당내지간에 17명이 올라있 다. 두 명은 호정공신에 올라있다. 무장 김씨의 시조가 김선(金璇)이다. 그는 원래 김해김씨 장사군파였다. 고려 공민왕때 공 민왕의 시종 노릇을 하면서 홍건적의 난 때 큰 공헌을 하였다. 그래서 그 공적으로 장사군 에 봉해졌다. 김선의 후손들이 장사 김씨로 바꾸어 분가를 하였다. 그래서 장사김씨의 시조 가 된 것이다. 1417년 무송과 장사가 통합이 되면서 무장김씨로 바뀌게 되었다. 김선의 장 손이 김좌진(대사헌을 지냄)이다. 김좌진은 좋은 땅을 찾아 관향지인 장사를 떠나 땅이 좋 은 금강하구 부근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 후손들이 옥구, 김제, 만경, 고창, 부안, 영암, 함 평까지 서해안을 따라 넓게 분포한다. 무장 김씨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9촌까지 창의 에 참여하여 거의 전멸하였다고 한다. 지금 현재 무장리에는 무장 김씨의 후손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그 흔적을 찾을 수 가 없다. 4. 마을의 인물과 행적 1) 김방수(金芳洙 : 1916-1974) 김방수는 일제 강점기 무장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광산이다. 1916년 6월 7일 지 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무장리 349번지에서 김영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김방수는 고창고등보통학교를 다닐 때 잠시 연극을 했다가. 1942년 6월부터 다음해 8월경 까지 연극배우로 활동하였다. 당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민족극을 준비하였으며 전라도의 고창과 장성일대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할 동지를 규합하였다. 만주의 항일 운동 상황과 일본 의 태평양전쟁 패전을 예상하는 말을 여러 사람에게 전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징역 2년형을 언도 받았다. 외삼촌은 고창 3․1운동의 주역인 김승옥이 며, 그가 독립운동 활동을 할 당시 밀사 역할도 했다고 한다. 2009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김상묵( 金尙默 : 1884-?) 김상묵은 일제 강점기 무장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김상묵은 1884년 지금의 전라북도 고 창군 무장면 무장리에서 태어났다. 1908년 12월부터 이대국이 이끄는 의병진에 가담하였 다. 같은 해 12월 10일 경 50여 명의 군사들과 함께 전라북도 무장군 장자산면 해롱리에 이르러 이장 강춘일을 다른 민가에 불러내어 총을 제시하면서 “우리는 의병인 바 군수금을 내라”고 협박하여 짚신 10켤레, 백목 2필을 탈취하였다. 또한 1909년 1월 10일경에도 앞 의 경우와 동일한 인원과 함께 동일한 총기를 휴대하고 영광군 홍농면 월평리 이장 집에 침 입하여 싶신 20켤레, 백목 3필을 탈취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언도 받 았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3) 김영동(金永東 : 1907-?) 김영동은 무장 출신의 정치가이다. 김영동은 1907년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무장리에서 태어났다. 고창고등보통학교 를 졸업하고 조선전업 사원으로 근무했다고 전한다. 1948년 고창군이 국회의원 선거는 갑 구와 을구로 나누어져 지러졌는데 당시 김영동은 무소속으로 고창면, 고수면, 성송면, 무장


면, 대산면, 공음면, 상하면이 소속되어 있는 갑구에서 총 유효 투표의 27.3%를 얻어 국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김영동이 태어난 무장면은 당시 고창군 인민위원장이 나올 만큼 사회주 의 성향이 강했던 지역이다. 1948년 제 125차 국회 본회의에서 여수 순천 반란지구 선무대 구성원을 확정할 때 전라남 도 고흥의 유서갑, 송진백, 오석주

전라남도 목포 무안의 장홍염, 신상학, 전라남도 나주의

이항발, 김상호 전라남도 광양의 김옥주, 이종린, 전라남도 광주의 정광호, 연병호와 더불어 고창 지역에서는 김교현과 김영동 등이 선정되었다. 1950년 6.25 전쟁 때 납북되었다. 4) 김영완(金永玩 : 1896-1919) 일제 강점기 무장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고아산이다. 1896년 7월 4일 지금의 전 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무장리 219번지에서 김양현의 2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김영완은 1919년 고종의 국장일을 앞두고 인산에 참여하고자 서울에 올라갔다가 3.1운동에 참여한 후 귀향하였다. 이후 뜻을 같이한 이용욱, 김용표, 김상수, 이준구, 김진호, 박흥선, 오태근 박승수, 등과 암께 자택에 모여 무장면의 독립만세 운동을 준비하였다. 1919년 3월 15일 무장 장터에 모인 수많은 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배부하 면서 남문을 지나 면사무소와 주재소 앞으로 나가며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며 시위하 였다. 이때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된 뒤, 같은 해 5월 21일 광주지방법원 전주 지청에서「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그해 11월 5일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1977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정거리?에 충열비가 세워져 있다. 5) 박성렬(朴聖烈 : 1916 ~?) 무장 출신의 정치가이다. 박성렬은 1916년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무장리에서 태 어났다. 면장 출신으로 1952년 5월 20일부터 1956년 8월 15일까지 도의원을 역임하였다. 1956년 8월 13일에 실시된 제 2대 도의회 의원 선거에 현역 의원으로 고창군 제3선거구에 출마하여 재선에 성공하였다. 제2대 도의원의 임기는 1956년 9월 5일부터 1960년 8월 13 일까지였다. 6) 신동수(申東洙 : 1917-?) 무장 정거리 현 원불교 교당 옆자리에 있는 집에서 살았음 1917년 생으로 어려서(12세)부터 가야금 병창을 잘하여 후일에 진규홍(陳奎洪), 김재연씨 등 한량들의 교습에 열중하였다. 당시 예인에 대한 차별이 심하여 많은 천대를 받았다고 한 다.

결국 생계를 위해 만주 목단강 등으로 유랑하다. 고아복과 함께 고향에 돌아와 활동하

다 작고하였다. 7) 이용욱(李用郁 : 1894-1960) 무장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용욱은 1894년 10월 4일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무장리에서 태어났다. 이용욱은 1919년 3월 고종의 국장 참관 차 상경하여 서울의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하고 귀향한 김영 완을 만나 서울의 정황을 듣고, 김용표, 김상수, 이준구, 김진호, 박흥선, 오태근, 박흥수 등


마을 유지들과 상의하여 3월 15일 무장읍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 하였다. 3월 15일에 계획대로 장터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자 미리 제작하여 등사해 둔 태극기와 옥 립선언문을 나누어주고 이들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남문을 지 나 면사무소와 경찰 주재소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때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이해 6월 4일 광주지방법원 정읍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 월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지렀다. 1982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8) 진환(陳瓛 : 1913-1951) 일제 강점기와 현대 무장 출신의 서양화가 본관은 어양이고 본명은 진기용이다. 1913년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무장리에서 진우곤의 1남 5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진환은 무장공립보통학교와 고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31년 보성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했으나 곧 중퇴한 뒤 미술공부를 시작했다. 1934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 일본미술학교 3학년 때인 1936년 동경에서 열린 제1신자연합(협?)회전에 「설 창」외 1점을 출품하여 장려상을 수상하고 같은해 서독 베를린에서 열린 제11회 국제올림 픽 예술경기전에서 「군상」을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이후 일본 도교에서 독립미술전․조선신미술가협회전․재동경미술협회전 등에 참가하고 1940 년 동경미술공예학원 수료와 동시에 강사로 발탁되었다. 1941년에는 동경에서 서양화를 공 부하는 조선 유학생들 중 김학준․이중섭․최재덕 등 유망한 학우들과 함께 조선신미술협회를 결성하고 창립전을 가져 호평을 받기도 하였다. 1943년 후반에 귀국한 뒤 1945년 8․15 광복 후 조선미술건설본부 회원이 되고, 아버지가 설립한 무장중학교(현 영선중고)교장을 역임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서울의 홍익대학교 양화과 교수로 활동하였다. 1951년 1․4후퇴 때 고향 마을에서 유탄에 맞아 사망했다. 이중섭 등 당시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던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소를 즐 겨 그렸으며, 황색 계열의 색채를 많이 사용, 화면에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직선적이고 날 카로운 윤곽선으로 화면에 긴장감을 불러일으켰으나, 중간 색조로 그것을 부드럽게 완화시 켜 준 것이 또한 그의 그림이 지닌 특징이기도 하다. 9) 진의종(陳懿鍾 : 1921-1995) 호는 백민(白民).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정거리에서 출생. 1943년 경성대 법문학부를 졸 업하고, 같은 해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1948년 상공부 전정과장을 거쳐, 1952년 상공 부 광무국장 등의 공직을 역임한 뒤 1954년에는 변호사로 등록하였다. 이듬해 주택영단 이사가 되고, 1958년에는 호남비료 전무이사가 되었으며, 1960년에는 상 공부 사무차관을 거쳐, 이듬해 대한교육보험 부사장을 역임하였다. 그 뒤 1962년에는 울산비료 전무이사가 되고, 1964년 한전부사장 등 관·경제계에서 활동 하다가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공천으로 고창에서 당선되어 정계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1973년 제 9대 국회의원(고창·부안, 신민당)에 당선되고, 1979년에는 보사부장관을 역임하였으며, 이듬해 입법회의의원이 되었다.


이후 1981년에는 제11대 국회의원(정읍·고창, 민주정의당)에 당선된 뒤 이듬해 민주정의당 정책위의장이 되고, 1983년에는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이 되었다. 1983년에서 1985년까지는 국무총리로 국가 행정을 총책임졌으며, 1985년에 국무총리에서 물러나면서 민주정의당 상 임고문을 맡았다. 이 해 제12대 국회의원(전국구, 민주정의당)이 되었고, 1988년에는 다시 민주정의당 고문 을 맡는 등 화려한 공직생활을 보냈다. 상훈으로 청조근정훈장(靑條勤政勳章)을 받았다. 저 서로는 『백민논집(白民論集)』이 있다. 4. 마을의 문화유적과 유물 1) 무장리 보호수(무장면 무장리 694, 조선시대, 노거수) 무장읍성의 서측 성벽 인근에 위치한다. 품격은 군나무이며 수종은 느티나무이다. 수령은 200년 정도이며 수고는 20m, 나무둘레는 4.2m이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2) 무장리 유물분포지(무장면 무장리 661) 성내리 지석묘가 위치하고 있는 해발 69m 저평한 구릉이다. 구릉은 남북으로 흐르는 능 선으로, 동측은 무장읍성의 서축 성벽이 위치하며, 남측은 된재골이 서측은 정동마을이, 북 층은 정동제가 위치한다. 현재 고추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기와편, 자기편, 도기편 등의 유 물이 다량 수습되었다. 이 지역은 무장읍성과 인접하고 있기에 수습유물들은 이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3) 염규윤 고가(무장면 무장리 380-2, 고택) 무장면 서북쪽 국도가 지나가는 길목에 있는데, OK슈퍼 옆 골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염 규윤 고가가 있다. 대문이 동향으로 나 있다. 원래 이 고가는 무장의 만석꾼으로 알려진 부호 김용곤씨의 집으로 무장의 대부분의 땅은 물론 선운사 일대의 땅들까지 소유했다고 한다. 일제시대 호남선 경로를 정읍을 지나 장성 으로 가게 되면 굴도 뚫어야하고 비용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고창을 경유하려고 했지만 이때 무장 만석꾼 김용곤씨의 땅이 많이 들어가게 되자 이를 반대하고 그의 많은 재산으로 철로를 설치하지 못하도록 막았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 아들 대에서 그 많던 재산을 탕진하여 결국 정거리의 한 오두막에서 살다 무장을 떠났다고 한다. ‘부자 3대 못간 다’는 말이 실감난다. 현재 이 집은 고창 강호학원(강호항공고등학교)를 창립한 염규윤이 살던 곳이다. 그는 1976년 이 집을 만석꾼의 후손으로부터 구입하여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다. 또한 안채의 오 른쪽에 사랑채를 새로 들였는데 이 사랑채는 무장 덕림에 있던 고가를 옮겨 놓은 것이다.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주초는 화강암을 북 형태로 다음은 것이 며 기둥은 방형이다. (전북대학교 박물관, 1984, 고창지방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 그 밖에 정 원 연못 가운데 육각 정자가 있다.


4) 무장읍성 철비 <명문> 前參判金永坤善德不忘碑 疎材好德 浹髓已咸 急難生風 頌口維豊

壬子九月

이 철비는 「전참판김영곤선덕불망비(前參判金永坤善德不忘碑)」는 고창읍 성내리 155번 지 무장읍성내 비석군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는 무장 하거리 장터에 있었던 것을 1970년대 무장읍성 주변에서 널려있던 금석을 수집하여 집단으로 옮겨 놓은 곳이다. 전참판김영곤선덕불망비는 내용을 보면 주민들에게 ‘재물을 덜어 덕 베풀기를 좋아하니 어 려움 속에서도 생기가 돋았네 모두들 뼛속까지 사무치니 칭송하는 소리가 풍서하도다.’라고 새겨져 있다. 철비는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공출로 인하여 거의 대부분이 소멸되었으나 고창 군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전참판김영곤선덕불망비이다. 비석의 좌대는 화강암으로 되어 있지만 비신과 개석은 재질이 주절로 한 번에 주물을 부어 만들었다. 개석의 모양은 지붕의 형태로 구성하였으며 중앙에는 연꽃 5잎을 조각하여 선비의 상징을 표현한 듯하다. 전면과 후면 글씨는 모두 양각의 기법을 취하였고 서체는 해서로 썼다. 글씨의 품격은 아 주 정직하고 단아하게 필획을 구사하였고 조선후기의 동국진풍이 잘 나타나고 있다. 후면에는 임자 9월이라 새겨놓았는데 연호가 없어 시대를 추정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철비 의 제작수법과 서체의 흐름으로 보아 조선 후기로 볼 수 있다. 좀 더 추정해본다면 1912년 임자년은 일제제시대로 접어들기 때문에 제작이 어려울 듯하고 또 1792년 경에는 철비가 많이 유행되지 않았기에 가장 유력한 시기는 1852년으로 가늠해 볼 수 있다. 주로 전북지 방에는 철비가 많이 남아있지 않는데 임피향교, 정읍소성, 전주국립박물관 전북대박물관 등 에 보관되어 있다.

5. 마을의 전설과 풍속, 민요 1) 하거리 당산제(堂山祭) 무장면 하거리에서 당산제를 지내지만 면 소재지 성내리, 시거리, 정거리, 중거리 모두 함 께 참여한다. 주로 당제를 하거리에서 맡아 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당산은 3거리에 있었고 당산나무와 입석 2기의 할머니 당산과 할아버지 당산이 있었다. 근래 영선중고등학교 앞으 로 옮겨졌으나 집이 들어서고 하여 그 맥락이 묘연하다. 제일(祭日)은 옛날에는 정월 15일이었는데, 음식을 장만할 때 깨끗이 지내기 위하여 차일을 쳤다. 또 음식 맛을 보면 안 된다고 하여 간을 보지 않고 가남으로 집어넣고 인줄을 쳐서 잡인의 접근을 금했다. 음식에 침이 튀지 않게 입마개를 하였으며, 제를 지내는 제주는 목 욕재계를 정히 하였다. 떡은 시루채, 돼지머리도 통째로 괴어 놓고, 제관이 술잔을 올리고 독촉을 하였다. 소지를 하여 일촌이 화목하고 농사가 잘 되게 해달라고 기원하였다. 정월 초부터 당산제를 지내기 위하여 농악을 치고 제물을 모았는데, 어려운 사람들도 모두 성금과 성미를 잘 냈 다. 또 볏짚을 호호마다 거두어서 아름드리 넘는 거대한 줄을 꼬는 역사를 하였는데, 풍물 을 치며 당산제까지 즐겁게 놀았다. 당산제를 지내고 저녁에는 거대한 줄을 남문부터 중거리까지 늘어놓고 남자와 여자의 줄다 리기가 시작된다. 소재지의 남녀노소 없이 전 부락민이 참여하는 축제 분위기가 조성되며, 여자편이 이겨야만 풍년이 든다고 한다.


대개 처음에는 남자 쪽이 이기는데, 중년 부녀자들이 남자 쪽으로 쳐들어가 때리고 꼬집고 하여 결국은 여자 쪽이 승리를 하게끔 된다. 줄은 바로 당산나무에 감아 올려 옷을 입힌다. 줄다리가 끝나면 음식과 술을 나누어 먹고, 저녁내 농악으로 즐거운 한판이 벌어진다. 현재 당산제는 중단이 되었는데

고창보다 세가 강했던 무장이 쇠락해가고 있는 것은 당산

제를 소홀이 한데에 있는 것 같다고 마을 어르신은 말하고 있다. 2013년 5월 고창문화원이 중심이 되어 무장의 당산제와 용당기놀이를 복원 및 재현하기 위해 지역 유지들 그리고 영선고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조사 연구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으 로 1회성에 그치지 않고 계속되는 지역의 축제로 자리매김하고 계승이 이루어져 무장민들 의 화합을 이끌고 지역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성내리 당산 성내리 당산은 아버지 당산으로 무장읍성 주봉인 사두봉의 입에 해당되어 현재의 못 위의 밭에 해당한다. (과거 교회 입구이다) 신체는 솟대와 노거수 형태였다. - 하거리 당산 하거리 당산은 어머니 당산이다. 현재 육거리인 강남농약사와 떡방앗간 사이 사진 상으로 보면 횡단보도위에 당산목과 석주의 형태가 있었다고 한다. 신작로가 생기면서 당산나무는 베어 없어지고 당산석은 영선중학교 입구로 옮겨 세워 유지 되다가 이후 학교 내 트랙타연 습장으로 옮겨졌으나 현재는 행방이 묘연한 상태이다. - 상거리 당산 상거리 당산은 큰 아들 당산이다. 읍성의 북편 현재 무장 버스정류장 건너편 사진으로 보면 파란 건물 뒤에 솟대와 노거수가 있었는데 당신신체로 모셨다 한다. -정거리 당산 정거리당산은 무장 읍성 남문에서 남쪽으로 골목을 따라가면 둔치에 있다. 아들 당산으로 당산석과 커다란 당산나무가 있다. 새해를 맞아 동네의 안녕과 풍요를 그리고 재해를 막기 위해 정월보름에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특이사항으로는 줄을 만들어 줄다리기를 하지만 당산에 감지는 않고 제사만 올렸다고 한다. -시거리당산 시거리 당산은 아들 당산이며 무장읍의 동남면 진을주기념시비가 있는곳에 위치한다. 당산 석과 당산나무인 자연신체가 있다. -중거리당산 중거리 당산 또한 아들당산이다. 무장 읍내의 중앙 언덕에 커다란 노거수의 위용으로 존재 한다. 당제는 6.25 사변의 해 정월까지 모셨으나 현재는 중단된 상태이다. -사죽리 당산 사죽리 당산은 아들 당산에 해당하며 무장중의 북편에 위치한다. 옛날 시누대가 많아서 사죽거리이고 당산 또한 사죽리당산이며 솟대가 있다하여 솟대 당산 이라 부르고 거리를 솔대거리라 부르고 있다. 2) 용당기놀이 무장고을의 당산은 그 수도 많거니와 성 안 당산과 성 밖 당산으로 구분하여 고을을 지키 고 있다. 그러나 가족당산들은 좀처럼 일당의 만남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정월보름날 당산 제를 모시고 혈기방장한 아들 당산들의 권유를 받아드려 한해의 중간이며 농사의 마무리를 끝내고 견우직녀가 만나는 7월 7일날 아버지와 어머니의 봉접을 의미하며 용당기로 상견례


를 갖추었다. 이에 무장고을사람들은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수호해준 칠거리 당산의 봉접을 기리기 위해 모두 나서 풍물놀이와 거리굿을 곁들여 성 안 당산인 아버지 당산을 위주로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가족당산들을 기쁘게 모셨다. 마을 주민들은 칠석날이 되기 보름 전부터 준비모임을 갖고 당산 주위 청소는 물론 놀이준 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당일 아침 각 당산의 보존의원과 주민들은 당산을 정비하고 순서에 따라 거리굿과 가족당산 의 만남, 마당놀이를 이끌어 간다. 무장 용당기놀이는 풍물을 연중 두 번 쳐주는 행사의 특징이 있는데 한번은 정월의 당제이 고 두 번째는 칠석날 고을의 7거리 당산 가족 상봉과 지역축제의 거리굿과 마당놀이인 것 이다. 일제 강점기 이후 놀이가 중단되었으나 고창문화원의 후원으로 영선고등학교 학생 30 여명과 마을 주민들의 참여로 2012년 11월 19일 용당기 놀이가 100여년 만에 재현이 되 었다. 이를 계기로 무장의 민속놀이로 전승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3) 전해 내려오고 있는 민요 ① 진주난봉가 무장면 무장리에서 시집 살이의 고통을 노래한 대표적인 서사민요 「진주난봉가」는 고창군 무장면 시거리에 전해 내려오는 시집살이의 고달픔을 노래한 부녀 요이다. 일반적으로 시집살이요는 시집 식구나 시어머니가 직접적인 갈등의 대상이 되나 「진주난봉가」는 남편의 외도가 직접적인 갈등의 원인이 된다. 진주 남강 빨래가니/흰빨래는 희게나 빨고/거멍빨레 검게나 빨고/진주 낭군 하늘과 같은 말 을 타고/절컥절컥 들려오네/집이라고 돌아가니/사랑방이 분주하네/기상첩을 옆에 끼고/어영 구영 하는구나/명지수건 석자 세치/ 목 매달아 죽었다네/ 진주 낭군 그 말 듣고/ 버선발로 뛰어나와/ 여기저기 내사랑아/ 본댁의 정은 백년이라/기상첩은 석달인데/그리그리 죽었는가 ② 화투타령 무장면 시거리 최기부 할머니가 구송했다고 한다. 정월 솔에 송성 그리고 /이월 메조에 맺은 사랑/삼월 사구라에 산란한 마음/사월 흑사리에 허사로다/오월 난초 날랐던 나비는/ 유월 목단에 앉아 볼까/칠월 홍싸리 홀로 앉어/팔월 공 산에 달도 밝고/구월 국화 묻었던 절개는/시월 단풍에 다 떨어지고/동지섣달 서남풍에 백설 만 날려도 임 오신다/누웠으니 잠이 올까/ 앉었으니 임이 올까/얼씨구나 좋네/저절씨구/ 아 니아니 놀지를 못하리라 ③ 새타령 무장면 시거리 최기루 할머니가 구송했다고 한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녹두밭에 앚지 마라/녹두꽃이 떨어지면/창포장사가 울고 간다/얼씨구 절 씨구/차차차/기화자 좋구나 차차차/만화방천 아나 풍선 호시절에/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차차 차 ④거미타령 무장면 시거리 최기루 할머니가 구송했다고 한다.


거무야 거무야 왕거무야/아정게 저정게 동네 방아거무/산에로 들어 꿩탕/집이로 들어 앵기 탕/돌아간다 물레너머/들로 들어 우렁탕 ⑤ 아리랑 무장면 시거리 최기루 할머니가 구송했다고 한다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아라리가 났네/아리랑 으으으응/아라리가 났네/아라린가 지랄인가/ 용천인가/얼마나 좋으먼은/요지랄이 났던가/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아라리가 났네/아리랑 응응응/아라리가 났네/물레아 가라 가/네 빙빙 돌아라/남의집이 귀동자/밤이슬 맞는다/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아라리가 났네/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문전세전이 웬 고개냐/구브 야 구브구브/눈물이로다/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아라리가 났네/아리랑 응응응/아라리가 났네 ⑥ 비타령 무장면 시거리 최기루 할머니가 구송했다고 한다. 비야 비야 오지마라/서방 각시 시집 가는디/가매꼭지 물 들어가면/나 죽는다 ⑦ 단오노래 무장면 시거리 최기루 할머니가 구송했다고 한다. 새청도 새무절알이는/ 둘다 타믄 좋잖아요/네가 타믄 내가 타고/내가나 타믄 니가 밀고/얼씨 구나 잘도 탄다/단옷날의 아가씨야

4) 무장상자 무장면 성내리에서 전승되어 온 공예품인 무장상자는 전통적인 색지 공예를 고장의 토산품 으로 만든 대표적인 가내 수공업이다. 조선 말 고종 연간의 무장읍 내에 살았던 김영운, 김 영휘, 김영보, 김영려 등의 형제들에 의해 전승되었다. 후손들의 말에 따르면 김영운의 고조 인 김세홍은 어린 시절 부터 손재주가 뛰어나 무엇이든 잘 만들었다고 한다. 총각 시절에 이웃의 가난한 집 규수가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어 딱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솜씨를 발휘해 삼합 상자를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혼인날에 삼합 상자를 본 사람들이 김세홍의 손재주를 인근에 알렸고, 그것을 계기로 부업 이 되어 가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로 미루어 보면 18세기 말 조선 종조 연간에 비롯된 가내 수공업이 첫 발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세홍에서 시작하여 집안의 매제가 되는

김해김씨 김삼경이 마지막 계보를 이어왔다. 이것이 고창의 토산품이 되어 전라도 각지로 팔려 나가게 되었다. 채죽상자는 무겁고 공이 너무 들어가 점점 쇠퇴하게 되었다. 그 자리 를 무장상자가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무장상자도 60년대 이후 플라스틱혁명이 일어나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 대를 잇지 못하다가 오늘날 고창읍에 사는 한지공예가 김혜옥이 무장

상자를 재현하여 전통의 맥을 다시 잇게 되었다. 김세홍이 무장상자를 개발한 이후 그 장인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김세홍(金世泓, 1766-1810) 김신하(金信河, 1795-1875) 김재려(金在麗, 1814-1874) 김행현(金幸鉉, 1837-1907)


김영운(金永運, 1885-1923) - 김민수(金敏洙, 1885-1940) 김영휘(金永徽, 1859-1921) - 김충수(金忠洙, 1891-1954) 김영보(金永保, 1862-1933) - 김허수(金許洙, 1890-1969) 김영려(金永麗, 1866-1946) - 김성수(金誠洙, 1900-1971) 무장 상자를 만드는 방법은 정해진 골격대로 갓테를 조릿대(신우대)로 규모에 맞게 얽어 짜 거나 또는 미송이나 오동나무의 판자로 갓테의 골격을 짠 뒤 피지나 파지를 여러 겹으로 덧 붙여 발라 이를 곱게 말린 다음 오려 놓은 문양지를 균형 있게 붙이면 완성이 된다. 삼합 상자의 경우 규격이 가장 큰 상자는 길이 60cm, 폭 45cm. 높이 15cm로 하고 가운데 상자는 길이 50cm, 폭 45c, 높이 12cm, 작은 상자는 길이 40cm, 폭 35cm, 높이 9cm 정 도로 골격을 짜고 위짝과 밑짝의 크기가 딱 맞게 짜낸다. 이를 기준으로 오합상자의 경우는 크기가 커지거나 줄여진다. 색상은 음양오행설에서 유래된 오방색을 기준으로 청색, 백색, 적색, 흑색, 황색으로 기하 학적 문양을 기본적으로 살려 균형 있게 오린 직삼각형의 문양을 전후좌우로 보기 좋게 배 치한 후 중앙 부위에 길상문의 상징인 태극 문양이나 문자 문양을 배치하고 네 귀에는 박쥐 문양 등을 오려 붙인다. 그리고 뚜껑 상장의 네 귀에는 무장 상자 특유의 흑색 삼각형을 엇 각으로 배치한다. 오합상자는 가장 큰 것을 ‘대자’라 하고 차례로 거스름, 보통, 되자, 가장 작은 것은 해웅이 라 한다. 대자에는 옷 또는 옷감을 넣고, 거스름에는 간단한 속옷이나 버선을 넣었으며, 해 웅에는 각종 재봉 도구를 비롯하여 색실과 겹 조각 기타 귀중품들까지도 보관하는 일상적인 함의 기능으로 사용한다. 무장 상자는 부잣집 규수에서부터 어려운 여염집 규수까지 필수적 인 혼수용품으로 애용되었다. 5) 무장시장 고창지역의 전래 장타령 뒷 풀이 속에는 고창 인근의 장에 대한 풍자를 한 대목이 있다. 고창지역과 거래를 하던 시장은 장성의 화룡장이고, 정읍장과는 거래를 하지 않았다. 그래 서 정읍장을 소개하지 않았다. 법성장의 수산물이 고창으로 들어와 거래가 이루어졌다. - 장타령 장성 화룡 장은 뜨거워서 못보고/코풀이 흥덕 장은 더러워서 못보고/사흘여드레 법성 장은 조금장이라 못보고/안진머리 장은 굴죽으로 속풀이 하고/알미 장은 곱트림이 나오고/대산 네거리 장은 늘 낙져서 못보고/무장읍 장은 억세어서 못보고/이장저장 다 둘러보다가 고창읍 장에서 종지었네 무장 장은 시끄럽다. 무장읍내 장의 위치는 동쪽 성안에 있었다. 즉 고창방면으로 시장이 있었다. 기록에 성내라 하였다. 무장에는 5군데의 장이 있었는데 무장소재지에는 장이 서지 않았다. 이유는 무장 사람들이 억센 것도 있지만 무장의 풍수학적인 문제가 있었다. 무장은 풍수적으로 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형국으로 이를 사뫼등이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 서워했다. 풍수학적으로 장이 안되는 것이다. 뱀이 또아리를 트는 형국은 장사꾼들이 돈을 빼 올 수가 없기 때문에 장이 안되었다고 한다. 사뫼등은 사람은 살기 좋은데 돈을 못 가져 간다는 소문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 와서야 무장에 장이 섰다.

무장 장은 무장리에 있는

정기 시장으로 5일과 10일에 개장되고 있는 규모가 작은 면단위 5일 시장이다. 1965년 2 월에 개설되었으며 1995년 시장 건물이 신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7년에 화장실


신축공사를 진행하였다. 대지 면적은 6,268㎡에 건물 연면적(매장면적)은 1,393㎡이며 건물 구조는 경량 철골구조 샌드위치 판넬로 되어있다. 부대시설로 화장실 1개가 있다. 2009년 현재 건어물, 수산물, 의류, 잡화 등의 업종이 영위되고 있다. 점포수는 노점을 포 함하여 총 33개이며 종사자수는 모두 27명이다. 시장의 관리는 조합과 번영회에서 담당하 고 있다. 6) 무장의 3.1 운동 무장 만세운동은 인맥이 있다. 고창청년회는 은규선, 김승옥, 신기업이 혈맹을 한 형제와 같이 활동하였다. 은규선은 1883년(호적은 1890년)생으로 1889년생인 김승옥보다 더 많았 다. 그래서 은규선을 형으로 하고, 고창청년운동의 총주동자로 막후 조종을 은규선이 하였 다. 김승옥은 행동으로 하였으며, 은규선에게 뒷수습을 부탁하였다. 김승옥은 잡히면 석방운 동을 은규선씨에게 부탁을 하였다. 무장의 독립만세운동은 은규선의 처남인 김영완(金永玩, 당시 24세)이 하였다. 김영완의 딸은 벙어리로 현재 상하에 살고 있다. 김영완의 자형이 은규선이다. 은규선은 처남에게 24 살이 되도록 무엇을 했냐며 만세운동을 부추겼다. 김영완을 충동한 은규선은 여비를 마련하 여 김영완에게 주어 고종 국장(國葬)을 앞두고 인산에 참여시키고자 서울로 올려 보냈다. 그리고 서울에서 정보를 얻어오라고 하였다. 그는 상경을 하였다가 파고다공원에서 3.1운동 독립만세운동에 참여를 하였다. 그곳에서 3.1운동 선언문을 가지고 무장으로 내려왔다. 김영완이 은규선에게 보고를 하였더니, 은규선이 흥덕에서 실패를 하였으니 무장에서 하라 고 하였다. 김영완은 무장으로 돌아와 친족인 김용표, 김상수와 친우인 이용욱, 이준구, 김 진호, 박흥선, 오태근, 박흥수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결행하기로 모의하였다. 그리고 준비를 서둘러 3월 15일 무장 장날을 이용하여 거사를 단행하기로 하였다. 장이 서고 사람들이 모 인 10시경 이용욱과 김용표 등은 마련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주고, 김 영완은 군중들 앞에 나아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대열을 인솔하여 남산(현 영선중)으로 올라가 그곳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외치니 군중들이 모두 환호성을 올리며 따라 나 섰다. 수백 명의 군중이 행진을 하자 놀란 무장주재소 순사는 고창경찰서로 전화를 해 증원된 수 십 명의 경찰병력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다. 그리고 주동자인 김영완, 김용우, 김두남, 김 영해 등은 현장에서 검거되고 다른 주동자들은 뒷날 모두 검거되었다. 김영완은 서대문감옥 으로 이감되어 복역하다가 혹독한 고문으로 11월 5일 옥사를 하였다. 7)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기념제와 무장읍성 축제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동학농민혁명의 무장기포를 기념하기 위하여 매년 열고 있는 축제이 다. 고창지역은 1894년 3월 20일 동학농민혁명의 전국적 전개를 알리는 무장기포가 일어난 곳으로 동학 농민 혁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히고 있다. 또한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 내부에서 가장 강력하고 중심적인 활동을 하였던 전봉준의 태생지이며, 동학 대접주 손화중 의 근거지였다. 2008년 2월 21일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무장현 관아와 읍성복원추진위원회 및 지 역 사회 단체장이 모여 무장기포 동학농민혁명 제114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기념제와 무장읍성축제위원회’를 공식 출범하였다. 초대 축제위원장으로는 고창동 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부회장인 봉필운이 선출되었으며 부위원장에 진평.진윤식, 사무국장


에 조차영이 내정되었다. 축제 기간은 무장기포일인 음력 3월 20일을 기점으로 4월 25일-4월 27일 3일간 무장현 관아와 읍성 그리고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지인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에서 동시에 개최한다. 동학농민혁명 무장 기포기념제와 무장읍성축제는 명확한 주제 전달로 무장기포의 역사적 사실을 부각시키고 동학농민혁명 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콘텐츠로 구성하며, 무 장현 관아와 읍성을 체험 행사장으로 하여 시가지 축제로 만들고 이를 통해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 및 무장읍성의 성지화를 꾀할 목적으로 계획되었다. 이에 2008년 4월 제1회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기념제와 무장읍성축제가 무장현 관아와 읍성, 공음면 구수마을 일원에서 열리게 되었다. 이 축제를 통해 고창군의 동학농민혁명 기 념사업은 물론 고창군의 동학농민혁명 관련 5대 중점 핵심 과제의 하나인 동학농민 기념행 사의 전국화 추진을 위한 초석을 다지게 되었다. - 행사내용 축제는 ‘동학농민혁명은 무장기포지로부터, 3월 20일의 함성은 전국적인 봉기로’라는 주제 로 개최된다. 공식 행사로는 출정식과 개막식, 주제 행사로는 무장현 관아와 읍성 무혈입성 재현, 동학혁명군 훈련 시연, 동학농민혁명 자료전시회, 체험 행사로는 동학농민군 진격로 걷기, 관아 및 집강소 운영, 옥중 생활, 전봉준 장군되어 군을 선포하기 등으로 구성된다. 문화 공연 행사로는 타악공연, 국악공연, 이광수민족음악원 공연, 동학농민혁명 주제 공연 등이 열리며 부대 행사로는 동학농민혁명군 비기 탈취 릴레이 마라톤, 관군.농민군 대항 줄 다리기, 소원지 쓰기, 동학길 산악자전거 타기 등 다양한 행사가 진행된다. 2009년에는 4월 25-26일 무장현 기포지 및 무장현 관아와 읍성 일원에서 ;동학농민혁명 은 무장 기포지로부터 4월 25일의 함성은 전국적인 봉기로‘라는 주제로 열렸다. 봉건적인 제도 개혁과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 수호와 보국안민을 위한 희생된 동학농민혁명 참여 자의 애국애족의 정신과 무장기포일의 참다운 의미를 전국에 알리는 한편, 전국적인 축제로 승화하기 위하여 동학농민혁명 관련 자치단체와의 연계를 강화하여 나아가기로 하였으며, 관광객들이 참여할 수 있는 체험형 축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2010년에는 11월 5일 에 열렸다. 예년과 달리 2010년 축제에서는 무혈입성에 대한 축제의 재미를 보강하여 다양 한 퍼포먼스를 통해 기념제의 의미를 전했다.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기념제와 무장읍성 축제는 고창동학농민혁명을 이해하고 무장기포의 역사적 사실성을 강조하며 특색있는 테마형 축제로 축제의 전국화 기반을 마련하여 동학농 민혁명 국가 기념일을 무장기포일로 제정하는데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7) 효자 진씨 이야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진규인(陳奎寅 1902-1966)이다. 진규인은 전북 고창군 무장면 무장리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 애가 깊은 것으로 이름이 났다. 15세쯤에 어머니가 난치병으로 고통 받는 것을 보고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어머니께 드렸다. 이로써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여 효도소년으로 온 고을에 칭찬이 자자하였다. 20세에 아버지가 등창을 앓아 온갖 약을 써 보아도 효험이 없자 진규인은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등창에 붙이는 할고(割股)를 하여 아버님을 살려 내었다. 이러한 효행이 일대에 알려지자 주민들과 고창 유림들이 그의 효행을 포상해야 한 다고 추천하여 1937년 당시 유림의 총본산이라 할 수 있는 대성문학원으로부터 포창(襃彰) 을 받았다.


2008년 5월 5일-6월 1일 까지 진규인의 효행관련 자료를 소개하는 작은 전시회를 전주 국립박물관에서 개최하였다. 이 전시에는 진규인이 대성문학원으로부터 받은 포창문을 비롯하여 무장리 주민들이 진규 인의 효행을 포창해줄 것을 요청하는 글, 고창향교에서 효자 표창을 추천하는 글, 진규인의 효행에 대한 지인들의 기록 등 총 11건이 선보였다. 또한 1932년 9월 4일과 5일, 동아일보 와 매일신보에 각각 실린 그에 관련한 기사도 함께 소개하였다. 전시되는 유물은 진규인 선 생의 아들 진원종씨가 국립전주박물관에 기증한 부친의 유품이다.

6. 마을의 현황과 생활상 1) 무장초등학교 무장면 무장리에 있는 공립 초등학교. 기초기본 학습을 토대로 창의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어린이, 자신의 적성과 소질을 알고 계발하는 어린이, 기본 생활 습관과 바른 인성을 토대 로 더불어 사는 어린이, 건강한 정신과 튼튼한 몸을 지닌 어린이 강한 어린이, 100년의 꿈 을 키워가는 창의적인 어린이 육성을 교육목표로 하고 있다. 1909년 8월 23일 사립 무창학교와 동명학교의 설립을 인가 받았으며, 1910년 12월 1일 사립 무창학교와 동명학교를 병합하여 사립무장학교를 개교하였다. 1911년 9월 15일 무장 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여 초대 교장으로 김묭순이 부임하였다. 1913년 8월 2일 부설 무장공립간이농업학교를 개교하였다가 1920년 3월 31폐교하고 1925년 수업연한 6년제 인가를 받아 1926년 3월 21일 6년제 제 1회 졸업이 이루어졌다. 1936년 5월 15일 부설 덕림 간이 학교를 개교하였으며, 1938년 교육령 개정으로 무장제일 공립심상소학교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941년 무장중앙공립국민학교로 개칭하였고, 1951년 수복되어 무장국민학교로 다시 개교하였다. 1975년 신왕분교장이 인가되어 개교하였고, 1976년 송현분교장이 개교하였다. 1978년 신왕분교가 신왕국민학교로 승격하였고, 1980년 송현분교가 송현국민학교로 승격하였다. 1994년 송현국민학교, 1995년 덕림국민학교가 학 생 수 감소로 통폐합되었다. 1996년 3월 1일 무장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이후 무장읍성 복원 계획에 의하여 학교를 이전하기에 이르러 2002년 11월 12일 학교 신 축 기공식을 열고 2004년 3월 신축 건물로 이전하였다. 2006년 신왕초등학교가 통폐합되 어 현재 무장면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초등학교가 되었다. 무장초등학교에 통폐합된 신왕 초등학교는 신왕분교장 설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1974년 3월 14일 리 주민들의 노력 봉 사로 학교 터전을 일구어 1975년 9월 1일 무장초등학교 신왕분교를 개교하였다. 1978년 3 월 1일 8학급에 재학생 303명의 신왕국민학교로 승격되었으나, 1980년 학생 수 387명을 최고로 이후 점차 감소하여 2006년 2월 제26회 졸업으로 총 졸업생 638명을 배출하고 2006년 3월 1일 무장초등학교에 통폐합되었다. 2012년 2월 제 101회 졸업식을 통해 27명이 졸업하여 총 1만 794명의 졸업생을 배출하 였고 현재 초등학교 7학급 유치원 1학급이 편성되어 있다. 2012년 3.1 제 30대 강성주 교장이 취임하였다. 2) 영선중학교 무장면 무장리에 있는 사립 중학교 나라 사랑의 마음과 효를 근본으로 하여 공익을 앞세우며 정직하고 실력 있는 건전한 심성


을 지닌 자아실현인 육성을 교육목표로 하고 있다. 1945년 11월 11일 무장농업중학교로 개교하였으며, 1946년 10월 무장초급중학교 설립 인 가를 받아 초대 교장으로 진환이 부임하였다. 1967년 임영신 이사장이 학교법인 중앙문화 학원을 설립하였고, 1979년 학교법인 강호학원을 설립하였으며, 1987년 학교 법인 무송학 원을 설립하였다.

2008년 3월 기숙형 자율학교 인가를 받아 현재 자율중학교로 운영하고

있다. 2011년 제17대 김정애 교장이 부임하였다. 2012년 2월 제65회 47명 졸업생을 포함 하여 총 9,0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2012년 현재 총 7학급에 154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다. 이 중 1학년은 60명(남36, 여 24), 2학년은 57명(남20, 여37), 3학년은 37명(남20,여17)이 재학하고 있다. 교직원은 교장 1명 교감1명, 교사 13명, 외래강사 18명, 행정담당 일반직과 등 5명 총 38명이 근무하고 있다. 교지는 12㎢, 운동장은 12㎢이고 보통교실 6실과 과학실, 컴퓨터실, 피아노실, 음악 실, 어학실, 가사실 등의 특별교실을 갖추고 있다. 3) 영선고등학교 무장면 무장리에 있는 종합 사립고등학교 ‘나라 사랑의 마음과 효를 근본으로 하여 공익을 앞세우며 정직하고 실력 있는 건전한 심성 을 지닌 자아실현인 육성’이라는 건학 이념을 토대로 창의, 성실, 협동의 교육 목표를 갖고 있다. 현대의 지식 정보화 사회에 부응하는 무송인 육성을 위해 가르쳐 주는 모든 분들게 고마워하며 자신에게 부족한 점은 능동적으로 깨쳐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배움에 성실한 사 람, 자신의 장단점을 정확히 할고 자기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며 올바른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는 올바른 사람,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가족과 친구와 이웃을 사랑하며 꽃과 나무는 물론 흙과 물, 벌과 나비 등과 같은 자연물과도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의 육성을 교육지표로 하고 있다. 1967년 11월 29일 영선종합고등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아 보통과 1학급, 농업과 1학급으 로 개교하였다. 1978년 3월 1일 농업토목과 1학급을 신설하였고, 1979년 3월 1일 축산과 1학급을 신설하였다. 1979년 3월 21일 중앙문화학원과 분리하여 학교 법인 강호학원을 설 립하였다. 1982년 3월 1일 보통과 2학급을 신설하였으며, 1987년 3월 1일 보통과를 4학급 으로 늘리고 농업과 1학급으로 하여 인문과정을 확대하였다. 1987년 8월 27일 학교법인 무송학원을 설립하여 이사장에 고용림이 취임하였다. 1990년 9 월 19일 상업과 2학급을 신설하였다, 1994년 9월 29일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사무자동화 과 1학급, 자동차과 2학급, 관상원예과 1학급을 신설하였다. 또한 2001년 보통과를 1학급 으로 줄이고 인터넷비지니스과 1학급, 자동차과 1학급, 건설기계과 1학급, 관상원예과 1학 급으로 개편하였다. 2008년 9월 2일 학칙을 변경하여 보통과 2학급, 자동차과 1학급, 건설기계과 1학급 관상 원예과 1학급으로 재편하였다. 2011년 2월 5일 자율학교로 지정되었다. 2011년 3월 제 14대 김영목 교장이 부임하였다. 2012년 제 42회 졸업생을 포함하여 6609명이 배출되었다. 2012년 현재 인문계열의 보통과와 실업계열의 자동차과, 건설기계과, 관상원예과 등 총 4 개과에 303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다. 이중 1학년은 보통과 41명, 자동차과 25명, 관상원 예과 26명 총 92명이 재학하고 있다. 2학년은 보통과 38명, 자동차과 27명, 건설기계과 15 명, 관상원예과 22명 총 102명이 재학하고 있다. 3학년은 보통과 41명, 자동차과 22명, 건


설기계과 22명, 관상원예과 24명으로 총 109명이 재학하고 있다. 교직원은 교장 1명, 교감 1명 교사 31명 행정실 직원 7명 등 총 40명이 근무하고 있다.

4) 원불교 무장 교당 무장면 무장리에 있는 원불교 교당 1969년에 원불교 고창교당의 최유권 교무가 직접 해리에 나가 법회를 보면서 해리와 고창 의 중간 지점인 무장에 교당 건립의 뜻을 두었다. 출장 법회가 중단되자 해리의 윤심월명 교도와 무장의 김관유화 교도 등은 원불교 고창교당을 내왕하면서 법회를 보았다. 1970년 12월부터 다시 원불교 고창교당 심창덕 교무가 매월 두 차례에 걸쳐서 무장에 나 가 법회를 보았다. 1971년 7월에는 김관유화 교도의 방 한 칸을 얻어서 법회를 보았고, 원 불교 총부에서는 무장의 법회를 선교소로 인정하였다. 1978년 이종건 교도의 도움으로 교 당이 신축되었으며, 이후 2005년 10월 유성신 교무의 주도로 현 교당을 신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무장초등학교, 영선중학교, 영선고등학교 학생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다도 예절 교육 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어려운 학생들에게 매년 졸업식을 통해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초대 교무는 박인숙 교무였으며 2012년 현재 교역자는 황명신 교무다 교도 수는 150여 명에 이르며 매주 일요일에 정기 법회가 열린다. 5) 무장교회 무장면 무장리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의 교회 무장교회는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확신을 갖고 인간의 고난을 인내하며 소망 중에 살게 하고, 복음 안에서 우상과 미신적인 풍습을 벗어나기를 목표로 하는 교회이다. 1919년 3월 2일 도대선 선교사와 남대리 선교사가 고창군 무장면 정거리에 마련한 초가삼 간에서 개척 예배를 보면서 시작되었고, 이후 고창군 고창읍 성내리 무장성 안에 179㎡ 규 모로 교회 건물을 신축해 이전하였다. 1989년 고창군 무장리 원촌리에 원촌교회를 1992년 고창군 무장면 송현리에 송도중앙교회를 각각 개척했으며 1995년 현 위치에 826㎡ 규모의 교회 건물을 신축해 입당하였다. 지역 선교 사업 관련 활동과 더불어 추석과 성탄절에 불우 이웃과 독거노인들을 위해 소정 의 액수를 지원하고 있으며 초등학교, 중학교, 졸업식에 각 한 명씩 추천해서 장학금을 지 원해 주고 있다. 특히 성탄절에는 무장면 기관 근무자들, 택시 운전기사 및 노인들에게 떡 국을 대접하고 있다. 2012년 현재 이경환 담임목사와 시무 장로 1명, 은퇴 장로 1명, 안수 집사 4명, 시무권사 5명, 은퇴권사 4명 등이 사역자로 함께하고 있으며 전체 신도 수는 110여명이다. 6) 무장제일교회 무장면 무장리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의 교회 무장제일교회는 ‘희년을 준비하는 교회’를 표어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이다. 1960년 5월 8일 진규선 장로 집에서 김강수, 김선례, 조옥기, 박금성 등의 교인이 예배를 보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1988년 6월 6일 현 위치에 교회 건물을 신축하고 이전하였다. 1995년 고창군의 지원을 받아 무장여자노인당을 운영했으며 1998년 무장어린이집을 개원


하였다. 2012년 현재 주요 사역자로는 김찬구 담임 목사를 비롯하여 시무 장로 1명, 협동 장로 1명 이 있으며 전체 신도 수는 100여 명이다.

7. 마을의 인구와 성씨 (1) 마을의 성씨 무장리 마을의 성씨는 김해김씨와 광산김씨가 들어와 마을이 번성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김씨가 아닌 여러 성씨들이 들어와 살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성씨 분포를 보면 金氏 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 성씨별 분포(가구) 김해

광산

진주

여양

밀양

전주

함평

김씨

김씨

정씨

진씨

박씨

이씨

박씨

정거리

16

10

2

2

5

시거리

8

13

5

1

하거리

11

9

금정리

16

20

마을별

기타

8

20

63

5

5

29

66

4

4

6

3

33

70

4

3

7

2

34

86

(2) 마을의 인구 무장리의 세대수는 285세대이고 인구는 총 619명(남자 311명, 여자 308명)이다. 무장면 법정리 가운데 면소재지로 마을의 규모가 가장 크다. 연령별 인구 분포를 조사해 본 결과 유아, 청장년층의 수는 적고 50대부터 7~80대까지 노장년층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90이 넘는 어르신이 하거리 두분, 금정리 한분 계시다 산업별 가구수를 보면 무장리는 무장면의 소재지로 시장상가를 비롯하여 일반상가 150여 가구로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외 벼농사 밭농사 그리고 고창 황토 멜론 특작 농가가 있고 한우, 돼지, 젖소, 양계, 돼지, 염소 등의 축산농가가 분포 하고 있다. 그리고 무장리에는 필리핀, 일본, 베트남, 중국 등 다문화 가정 5가구가 있다. 이들은 고창 다문화센터 및 선운산농협의 다문화 관련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한글, 그리고 한국의 역사, 문화를 배우고 익히는데 매우 열심이다. * 무장리

세대와 인구

마을명

세대

총인구

정거리

63

110

51

59

시거리

66

161

81

80

하거리

70

167

89

78

금정리

86

175

91

84


* 무장리 연령별 인구 연령별(2012년) 마을별

1 0 세

2 0 세

3 0 세

4 0 세

5 0 세

6 0 세

7 0 세

7 0 세

이하

이하

이하

이하

이하

이하

이하

이상

정거리

2

17

10

4

13

10

19

35

110

시거리

8

21

9

19

25

26

24

29

161

하거리

14

17

23

19

15

31

23

25

167

금정리

10

22

18

17

22

36

32

18

175

(3) 무장리 마을조직 마을별

마을 조직체 이장

새마을지도자

부녀회장

정거리

김인규

이운재

김정옥

시거리

김선진

장형석

이정임

하거리

류창현

김선영

이복자

금정리

김오종

박석희

최순자

8. 관공서 및 기관단체 (1) 무장면사무소 무장면 성내리 75번지 1914년 4월 1일 三郡 통합으로 무장군수 천장욱은 고창군수가 되고 일동면 이동면을 합하 여 무장면이 됨. 초대 면장은 김순채 1948년 11월 17일 지방행정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공포되고 18일 지방행정 직제를 공포하 였다. 1952년 4월 6.25 전쟁으로 유보되었던 면의원 선거 5월 면의회에서 간선제로 정길수 씨가 면장이 되었다. 1956년 2월 지방자치법 개정으로 면장 직선제가 되었다. 1956년 8월 2대 면의회의원 및 면장 김대겸이 선출되었다. 1958년 12월 자치법 개정 면장 임명제로 바 뀌고 면의원 임기도 3년에서 4년으로 바뀌었다. 1960년 11월 자치법 개정으로 다시 면장 직선제로 되고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지방의회가 해산되었다. 1961년 9월 지방자치 에 관한 임시조치법 공포로 자치제가 폐지되었다. 면사무소 청사는 성안의 객사를 사용하다 1987년 11월 11일 현 청사를 신축하여 옮겼다. (2) 무장파출소 무장면 성내리 158번지 1894년의 갑오경장 후 우리 경찰제도는 한때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고문을 초빙한 일도


있었으나, 주로 일본을 통하여 서구 특히 독일의 경찰제도를 본 딴 것이 많았다. 그 대요를 살펴보면 신종부 관제가 제정됨에 따라 조선왕조 시대의 좌.우 포도청을 폐지하 고 서울에 경무청을 설치하여 내무아문의 관할하에 속하게 했다. 동시에 경무사, 부관, 경무 관, 서기관 등을 두었으며, 한성부 5부 내에 일체의 경찰행정을 장악하게 하였다. 지방에는 그 다음해부터 각도 관찰사 및에 경무관 1인, 경무관보 1인, 총순 2인 이하를 두 었으며, 이는 지방 관찰사에게 예속시켰다. 1905년 2월 26일 칙령 제 15호로써 내부관제를 공포하여 내부에서 지방경찰을 장악하게 하고 경무사를 감독하게 하여 내부(의정부 내부대신)에 경무국을 두었다. 1906년 10월 1일 (광무 10년) 각도 경찰서 아래 분서 및 분파소 개설을 내부령 제 10호로 반호하였다. 1909 년 5월 8일(융희 3년)에 내부령 제 4호로 무장에도 순사 주재소를 두게 되었던 것이다. 1919년 3.1 운동으로 소위 문화정치를 내세워 조선통독부의 일부 관제를 개정하여 경무국 을 설치하고 경찰서 관제를 개정하여 지방 경찰권을 도지사에게 예속시켰다. 1919년 11월 4일 도에는 제3부(뒤에 경찰부로 고침)를 두고 (제1부는 내무부, 제2부는 재 무부로 고침) 각 부군에 경찰서를 설치하였으며 경시, 경부, 겅부보, 순사부장, 순사로 하고 순사보의 계급은 폐지하였다. 1919년 이후 고창경찰서 무장경찰관주재소라 칭하고 책임자를 수석이라 하였다. 이 제도는 1945년 일제가 폐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은 되었으나 일시적인 혼란에 빠지고 있으므로 한국인 경찰들은 대 책을 세워 1945년 9월 10일 일인으로부터 경찰권을 인수하고 미 군정청의 지시에 따라 경 찰서를 보안서로 개칭하여 일제 침략경찰의 잔재를 씻어버렸다. 1945년 12월 21일 미 군정청에 경무국을 두고, 지방에는 도지사 밑에 경무부를 두었다. 1946년 1월 16일 경찰관 주재소를 지서로 개칭, 고창경찰서 무장지서라 하고 책임자를 지 서장이라 하였다. 1946년 4월 1일 각 도 경찰부를 관구 경찰청이라 하여 본도는 제6관구 경찰청이라 하였다. 1946년 11월 2일 지서장을 지서 주임으로 개칭하였다. 1948년 9월 2일 군정하의 경찰은 국립경찰로 발족하여 경무부는 내무장관 산하로 되고, 각 관구 경찰청은 각 도지사 산하로 예속되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공산군 남침으로 치안 유린됨 1962년 6월 15일 지서 주임을 지서장으로 개칭 1990년 1월 10일 현 청사 개축, 1995년 3월 1일 무장파출소로 개칭함. (3) 무장우체국 무장면 무장리 조선 말엽에 郵遞司라는 관청이 있어 체신사무를 맡았었는데 1895년에 농상공부가 이를 관 할했다가 1900년에 통신원에 이관하였다. 1906년에는 통신원이 폐지되어 통감부통신관리 국으로 업무가 이관되었고 1910년 한일합방으로 다시 조선총독부 통신국으로 인계되었다. 1911년 6월 1일 무장우편소라 칭하였다. 1946년 무장면 성내리 시내전화 개설 무장우편국 으로 개칭 1949년 무장우체국으로 개칭 1953년 진무루 안에서 사창재로 이전 1971년 성 내리 140번지 동성의원 북쪽으로 이전 1984년 全面內 전화(각리에 전화취급소 설치) 1985 년 전화 자동화로 교환업무 폐지 1995년 12월 무장리 309번지에 건평 99평 지하 1층 지 상 2층의 청사 신축


(4) 선운산농업협동조합 무장면 무장리 330번지 1927년 무장 금융조합으로 개설, 1947년 8월 고창 금융조합 관하로 편입 무장지소로 됨 1951년 10월 청사 소실 1957년 4월 무장지소로 개칭, 1961년 8월 농업협동조합 무장지소 로 개칭 1971년 6월 무장 제1리 농업협동조합 발족 1973년 12월 현 청사로 이사, 1973년 12월 16개 里洞組合 합병 무장단위 농업협동조합으로 신발족 비료업무 인수, 1987년 현위 치 종합사무실을 신축하였다. 1998년 삼인리 400-2 선운사 간이지소를 설치하고 신용업무 를 개시하였다. 2005년 아산농협에서 선운산농협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2006년 선운산(안 산), 무장, 공음 농협을 합병하여 현재의 선운산 농협이 탄생되었다. 본점을 무장으로 하고 아산지점, 공음지점, 선운사지소, 선운산복분자가공사업소 등을 두고 있다. 2009년 제 13대 오양환 조합장이 취임 현재까지 선운산농협을 이끌어 가고 있다.

(5) 무장신협 무장면 무장리 374-2 1980년 11월 창립, 1981년 9월 재무부장관 인가. 81년 11월 특별법인 등기 필 되었고 81 년 12월 신용협동조합 연합에 가입하였다. 81년 12월 정읍세무서에 사업 등록하고 84년 5 월 안전기금 관리위원회 가입하고 92년 2월 사무실을 신축하여 현재 자리로 이사하였다. (6) 무장면 애향운동본부 무장면 무장리 116-6 사회공동생활을 영위함에 있어서 파생되는 일부 주민의 사사로운 감정에 의한 모함, 중상, 파벌조성 내지는 병리적인 불신 사조 등 퇴폐적이고 저속한 사회풍조를 바로 잡고, 반사회 적이며 도덕적인 요인을 예방 내지 삼제함으로써, 주민 상호간의 굳건한 협동단결로 명랑하 고 건전한 밝은 지역사회를 건설하는 애향운동이 1977년 9월 13일 전라북도 전체에서 발 족한. 우리 무장에서도 젊은 분들이 합심하게 되었다. (7) 무장면 의용소방대 무장면 무장리 116-1 1930년 면내 유지들의 협조로 소방소 창설 1939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 104로 발표된 경방단 규칙에 의하여 경방단으로 이름 변경되고 경방단장에 노상국 취임 1945년 광복 후 자치적으로 의용소방대 편성 1976년 고창군 조례 398호로 ‘의용 소방대’설치 조례 제정되고 대원 30명 편성 1993년 11월 청사신축(소방차 차고 포함) 소방파출소로 승격되고 소방공무원 2명(소방교, 소방사)근무 하게됨 그 외 무장보건지소, 무장의원, 황의원 등의 보건시설들을 갖추고 있다


참고문헌 무장읍지(茂長 邑誌) 송사문헌(松沙 文獻) 독립운동사 제3권-3.1운동사(하) 한국지명총람 전북전래지명총람 모바일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고창군 구비문학대계 고창의 마을유래(고창문화원, 2003) 무장현의 사적고찰과 城魂의 정통(2007) - 김종수 도움주신분 박영원, 김용기, 김종수

<원불교 교당>

<무장리 벽화거리>

<무장초등학교>

<정거리 당산>


<시거리 진을주 시비>

<정거리 마을회관>

<하거리 재래시장>

<금정리 마을회관>

<사죽리 돌당산>

<사죽리 당산>


<무장우체국>

<무장교회>

<정거리 돌당산>

<선운산 농협>

<무장제일교회>


<영선중학교>

<영선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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